Prologue.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이제 몇 개는 잊어버렸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것은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살아남을 거란 사실이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完」

웹소설 플랫폼을 띄운 낡은 스마트폰이 힘겨운 듯 화면을 밀어냈다. 스크롤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가. 몇 번이나 그러고 있었을까.

“진짜야? 이게 끝이라고?”

다시 보고, 또 다시 봐도 틀림없는 완전할 완(完). 

소설이 끝났다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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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저자 : tls123

총 314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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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3149편에 달하는 장편 판타지 소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줄여서 ‘멸살법’.

나는 이 소설을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꾸준히 봐왔다.

일진들에게 찍혀 왕따를 당했을 때도. 

입시를 망쳐 지방 삼류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빌어먹을 난수 뽑기가 잘못되어 최전방 군부대에 배치됐을 때도. 

이직을 반복하며 대기업 계열사의 계약직으로 일하는 지금도...... 젠장, 이 얘긴 그만두자. 어쨌거나.

「작가의 말 : 지금까지 ‘멸살법’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필로그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아...... 아직 에필로그가 남았구나. 그럼 다음편이 진짜 마지막인건가.”

유년의 끝자락에서 부터 성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10년에 걸친 대장정.

한 세계가 끝나간다는 허탈한 마음과, 드디어 그 세계의 결말을 보게 되었다는 충만감이 뒤섞였다.

나는 마지막 회의 댓글창을 열어 몇 번이나 문장을 고쳐 썼다.

―김독자 : 작가님,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에필로그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진심을 다한 문장이었다.

멸살법은 제 인생 소설이었습니다, 라든가. 

비록 대중성은 없었지만 저에게는 최고의 소설이었습니다, 라든가.

여러 가지 쓰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좀처럼 쓸 수가 없었다.

내가 섣불리 건넨 말들이 작가에게 상처를 줄까봐 두려웠다.

―평균 조회수 1.9회

―평균 댓글수 1.08개

그것이 ‘멸살법’의 평균적인 인기지수였다.

그나마 1화의 조회수는 1200대였지만, 10화가 지나며 조회수는 120으로 급감했고, 다시 50화가 지나며 12가 되었다. 그리고 100화부터는 계속 1이었다.

조회수 1.

나는 게시글 목록에 표시되는 무수한 ‘1’들을 바라보며 새삼스런 감격에 젖었다.

간혹 중간에 ‘2’가 끼어있기도 했지만, 누군가 잘못 눌렀을 가능성이 컸다.

고마웠다.

조회수가 1인 소설을 3천 편이 넘도록 연재해 주다니, 그것도 무려 10년씩이나. 이건 그야말로 나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닌가.

―꿀잼 소설 추천합니다.

나는 [추천 게시판]을 눌러 무작정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무료로 완결까지 써 줬는데 추천글 하나 정도는 써 줘야지.

작성 완료 버튼을 누르자, 금세 댓글이 달렸다.

―이거 신종 안티인 듯. 이 분 아이디 검색해 보니 같은 소설만 몇 번이나 추천하셨는데.

―본인 추천 금지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작가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뒤늦게 몇 달 전에도 추천글을 썼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관종’이니 ‘븅’이니 하는 수사들로 덮인 댓글들이 수십 개나 달렸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 글, 작가도 분명 읽을 텐데. 

황급히 글을 지워보려 했지만 이미 신고 된 글이라 지울 수 없다는 메시지만 떴다.

“이런.......”

성의껏 쓴 추천글이 오히려 작품의 누가 되었다는 생각에 입속이 쓰라렸다.

조금만 참고 보면 재미있는 글을, 왜 아무도 읽어 주지 않는 것일까.

하다못해 작가한테 후원금이라도 주고 싶었지만, 혼자 벌어먹고 살기도 빠듯한 월급쟁이인 나한테 그런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쪽지가 도착했습니다’라는 알림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tls123 : 감사합니다.

난데없이 날아든 메시지. 상황을 파악한 것은 조금 후였다.

―김독자 : 작가님?

tls123. 

그는 ‘멸살법’의 작가였다. 

―tls123 : 덕분에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공모전 입상도 했고요.

믿어지지 않았다.

공모전이라니, 그 ‘멸살법’이?

―김독자 : 축하드립니다! 무슨 공모전인가요?

―tls123 : 알려지지 않은 공모전이라 잘 모르실거예요. 

창피해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진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여기서야 망했지만 다른 플랫폼에서는 대박이 날 수도 있고.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좋은 이야기가 널리 퍼지는 건 좋은 일이니까.

―tls123 : 독자님한텐 감사의 인사로 특별한 선물을 좀 보내드릴까 합니다.

―김독자 : 선물이요?

―tls123 : 이 이야기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독자님 덕분이니까요.

이메일 주소를 알려 달라는 작가의 말에 나는 내가 자주 쓰는 메일 주소를 알려 주었다.

―tls123 : 참, 유료화 일정도 잡혔습니다.

―김독자 : 와, 정말요? 언제부턴가요? 이런 명작은 저도 처음부터 돈 내고 봤어야 했는데.......

거짓말이었다. ‘멸살법’은 일일 연재니까 한 달 내내 보면 3천원을 쓰게 된다. 3천원이면 나한테는 편의점 도시락 하나다.

―tls123 : 유료화는 내일부터 입니다. 

―김독자 : 그럼 내일 올라오는 에필로그도 유료인가요?

―tls123 : 네, 죄송하지만 유료로 공개할까 해요.

―김독자 : 물론 유료로 하셔야죠! 마지막은 꼭 돈 주고 사보겠습니다! 

이후 작가에게서 답변은 없었다.

사이트에서 로그아웃한 모양이었다. 뒤늦게 허탈함이 밀려왔다. 

이제 성공했다고 답장도 안 하고 가버리나?

감탄은 졸렬한 질투심으로 바뀌었다.

뭘 그렇게 들떴던 걸까?

어차피 내가 쓴 소설도 아닌데.

“문화상품권이라도 주려나? 오만원 권이면 좋을 텐데.”

순진하게도, 그때의 나는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다음 날,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말이다.



Episode 1. 유료 서비스 시작 (1)

“저는 독자입니다.”

실제로 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하곤 하는데, 그러면 다음과 같은 오해를 받곤 한다.

“아, 외동이신가 봐요?”

“외동은 맞지만 그 독자가 아닙니다.”

“예? 그럼요?”

“이름이 독자입니다. 김독자.”

김독자(金獨子).

아버지는 혼자서도 강한 남자가 되라고 내게 그런 이름을 지어주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주신 이름 덕분에, 나는 그저 평범하게 외로운 독신 남성으로 살고 있을 뿐이다.

요컨대 이런 느낌이다.

김독자. 28세. 독신.

취미는 퇴근길 지하철에서 웹 소설 읽기.

“그러다 스마트폰 속으로 들어가겠어요.”

시끄러운 지하철.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잔뜩 호기심 어린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인사팀의 직원, 유상아였다.

“아, 안녕하세요.”

“퇴근하시나 봐요?”

“네. 유상아 씨도요?”

“운이 좋았죠. 오늘 부장님이 출장 가셨거든요.”

때마침 옆자리가 비어 유상아가 풀썩 주저앉았다. 바싹 붙은 어깨에서 은은한 향기가 풍겨서,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평소에도 지하철 타셨던가요?”

“그게 말이죠.......”

유상아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퇴근길 지하철에서 유상아를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게, 인사팀 강 대리부터 시작해서 재무팀 한 부장까지. 퇴근 시간마다 유상아를 집까지 태워주려고 남자들이 줄을 서 있다는 건 회사 사람이면 다 아는 소문이니까.

그런데 유상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누가 제 자전거를 훔쳐 가서요.”

자전거?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셨나요?”

“네! 요즘 야근도 많다 보니까 점점 운동량이 부족해지는 것 같아서요. 좀 귀찮은 일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아하, 그랬군.

생긋 웃는 유상아. 이렇게 가까이서 보고 있으니 마음 졸이는 남자들 심정도 조금 이해는 된다만,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였다.

무릇 사람이란 제각기 삶의 장르가 정해져 있는 법이고, 유상아는 나와는 다른 장르를 살아가는 인간이니까.

어색한 대화가 끝난 뒤 우리는 각자 자신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아까 읽던 소설 앱을 다시 켰고, 유상아는...... 저게 뭐지?

“뿌에데 쁘레스따르메 디네로.”

“예?”

“스페인어에요.”

“......그렇군요. 방금 그건 무슨 뜻이죠?”

“돈 좀 꿔 주세요, 라는 뜻이에요.”

유상아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까지 공부라.

역시 나랑은 장르가 다르다.

그런데 저런 말은 외워서 어디다 쓰려는 걸까. 

“열심히시네요.”

“그런데 독자 씨는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계세요?”

“아, 저는.......”

아차, 하는 사이 유상아의 눈이 내 스마트폰 액정에 꽂혔다.

“소설이에요?”

“네, 뭐...... 한국어 공부랄까.”

“와, 저도 소설 좋아해요. 시간이 없어서 못 본 지는 좀 됐지만......”

의외였다. 

유상아가 소설을 좋아한다고?

“무라카미 하루키라든가, 레이먼드 카버라든가, 한강이라든가.......”

그럼 그렇지 싶었다.

“독자 씨는 어떤 작가 좋아하세요?”

“말씀 드려도 잘 모르실 거예요.”

“저 이래봬도 소설 많이 읽었어요. 누구 소설인데요?”

이럴 때면 웹 소설 읽기가 취미라는 것이 정말 난감하다.

나는 앱에 떠오른 소설의 제목을 흘끗 살폈다. 

『멸망 이후의 세카이』. 

작가 : 싱샹숑

아무리 그래도 “싱샹숑 작가의 멸망 이후의 세카이를 읽고 있습니다” 라고는 말 못한다.

“그냥 판타지 소설이에요. 그...... 뭐냐. 그러니까 반지의 제왕 같은.......”

유상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하. 반지의 제왕. 저도 영화로 봤어요.”

“영화 좋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유상아는 여전히 내 쪽을 바라보며 내가 무언가 이야기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슬슬 거북한데.

나는 짐짓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회사 들어온 지도 벌써 1년이네요. 그게 작년 이맘땐데, 시간 참 빨라요.”

“그러게요. 그땐 우리 둘 다 아무것도 몰랐었는데. 그쵸?”

“그랬죠. 전부 어제 일 같은데, 벌써 계약 기간 끝날 때가 다 되었으니.” 

화제를 잘못 꺼냈다는 것은 유상아의 표정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아, 저는.......”

잊고 있었다. 

유상아는 지난달에 외국인 바이어 건으로 공로를 인정받아 이미 정직원으로 승진했다는 것을.

“그랬었죠, 참. 축하가 늦었네요. 죄송해요. 하하, 저도 외국어 공부 좀 열심히 해둘 걸 그랬어요.”

“아, 아니에요 독자 씨! 아직 인사고과도 남았고, 그리고.......”

이야기하는 유상아의 모습은, 인정하기 싫지만 멋있었다.

마치 세상의 스포트라이트가 단 한 사람에게만 쏘아지는 것처럼 환하게 빛나는 얼굴.

만약 이 세상이 소설이라면, 주인공은 저런 사람이겠지.

사실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유상아는 노력을 했다.

나는 웹 소설을 읽었고.

유상아는 공부를 했다.

그러니 유상아가 정직원이 되고, 내 계약이 해지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저...... 독자 씨.”

“네.”

“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쓰는 앱 알려 드릴까요?”

순간 유상아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세상과 한없이 멀어지는 기분.

나는 붕 떠오르려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눈에 힘을 주고, 똑바로 정면을 응시했다.

지하철의 맞은 편 좌석엔 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이제 막 열 살 남짓 되었을까. 

한 손에 곤충 채집망을 든 소년은 엄마의 곁에 앉아 해맑게 웃고 있었다.

“......독자 씨?”

만약 지금과는 다른 삶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니까, 내 삶의 장르가 달랐더라면.

“김독.......”

내 삶의 장르가 ‘리얼리즘’이 아니라 ‘판타지’였더라면....... 

나는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

모른다. 

그건 아마 영영 알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다만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괜찮습니다, 유상아 씨.”

“네?”

“그 앱 알려 주셔도, 소용없을 거예요.”

지금 내 삶의 장르가 명백한 ‘리얼리즘’이라는 것.

“독자에겐 독자의 삶이 있는 거니까요.”

“네? 그게 무슨.......”

“그냥 그런 사람도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 장르에서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독자’라는 것이었다.

“독자의 삶.......”

유상아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나는 정말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사람은 진심으로 내가 걱정되었던 거겠지. 아무래도 인사과고...... 내 실적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독자 씨는 정말 좋은 말씀을 하시네요.”

“네?” 

“그럼 저에게는 상아의 삶이 있는 거군요.”

유상아는 무언가 결심한 듯 다시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고, 나는 그런 유상아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웹 소설로 시선을 돌렸다.

모든 게 원상태로 돌아왔지만, 이상하게도 소설의 스크롤은 잘 내려가지 않았다.

어쩌면 새삼스레 깨달은 현실의 무게가, 이 스크롤 끝에 매달려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의 상단에 알림창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새 메일이 1통 있습니다.]

발신인은 ‘멸살법’의 작가. 

나는 바로 메일을 열어 보았다.

―독자님, 오늘 오후 일곱 시부터 유료 들어갑니다. 이게 도움이 될 겁니다. 건승을 빕니다.

[첨부 파일 1건]

그러고 보니 선물을 준다고 했었지. 

이게 그 선물일까?

......역시 나는 천성이 독자인 모양이다. 고작 메일 한통 받았다고 이렇게 들떠서야.

그래, 독자로 살아가는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니라니까.

나는 시계부터 확인했다.

오후 6시 55분.

일곱 시에 유료화에 돌입한다고 했으니, 이제 정확히 5분 남았다.

나는 소설 앱에서 선호작 목록을 열었다.

이래봬도 내가 유일한 독자인데, 첫 축하 댓글 정도는 남겨줘야 작가도 힘이 나겠지.

그런데.......

―작품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검색창에 몇 번이나 ‘멸망’을 입력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멸살법의 게시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상했다. 유료화가 진행된다고 해서 게시판이 공지도 없이 삭제되는 경우도 있나?

그 순간, 지하철의 전등이 픽 꺼지며 지하철 내부가 어두워졌다.

끼이이이이익!

지하철이 크게 흔들리며 쇳소리를 토했다. 유상아가 작은 비명을 지르며 내 팔을 붙잡았다.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상아가 어찌나 내 팔을 세게 쥐었는지, 급정거하는 관성보다 왼팔의 고통에 신경이 더 쏠릴 지경이었다.

열차가 완전히 멈춰선 것은 그로부터 십여 초가 지난 후의 일이었다. 곳곳에서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 뭐지?”

“뭐야, 왜 이래?

어둠 속에서 하나 둘씩 스마트폰 불빛이 켜졌다. 여전히 내 왼팔을 꽉 붙든 유상아가 물었다.

“무, 무슨 일일까요?”

나는 짐짓 태연한 척 말했다.

“걱정 마세요. 별 일 아닐 겁니다.”

“그럴까요?”

“네, 큰일이라고 해봤자 자살 소동이겠죠. 곧 기관사가 안내 방송을 할 겁니다.”

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관사의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열차 내 승객분들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열차 내 승객분들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시끌벅적했던 주변이 고요해졌다. 나는 한숨 돌리듯 입을 열었다.

“거봐요. 별 거 아니죠? 이제 사과 방송하고 다시 전원도.......”

―모, 모두 도망...... 모두......!

뭐?

뒤이어 삐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방송이 꺼졌다. 열차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도, 독자 씨? 이게 대체.......”

지하철의 앞쪽 칸에서 눈부신 빛이 번쩍였다. 이어서 뭔가가 터지는 소리와, 커다란 북을 찢는 듯한 소리도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뭔가가 이쪽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순간 내가 시계를 본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였다.

PM 7:00

틱, 하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멈추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8612 행성계의 무료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되었습니다.]

내 인생의 장르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Episode 1. 유료 서비스 시작 (2)

「도깨비다. 놈이 처음 나타난 순간,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왜 갑자기 그 문장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급정거한 지하철.

정전된 객실.

기시감을 느끼기엔 정황의 디테일이 부족했다. 지하철 급정거야 드물지만 종종 있는 일이니까.

그럼에도 왜일까. 

나는 익숙한 소설의 서두가 자꾸만 떠올랐다.

하지만 말도 안 된다.

그럴 리가 없잖아?

3807칸의 앞쪽 문이 벌컥 열리며 전기가 돌아온 것은 그때였다. 곁에 있던 유상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도깨비?”

머릿속이 지잉― 하고 울렸다. 내가 알던 소설과, 눈앞의 현실이 겹쳐지며 사위가 불안하게 떨렸다.

「두 개의 작은 뿔. 작은 거적을 걸치고, 보송한 솜털이 돋은 괴생명체가 허공에 두둥실 떠 있었다.」

「요정이라고 부르기엔 괴이하고, 천사라고 부르기엔 사악하며, 악마라고 칭하기에는 천진한 외형.」

「그래서 그 녀석은 ‘도깨비’라고 불리었다.」

그리고 나는, 그 ‘도깨비’가 처음으로 꺼낼 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아#@! ......」

[&아#@!&아#@!.......]

허구와 실재가, 정확하게 겹쳐진다.

“뭐라는 거야 저거?”

“증강 현실인가?”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나는 홀로 다른 세계에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저건 틀림없는 ‘도깨비’다. 

수천 편의 멸살법에서 줄곧 비극의 서두를 열었던, 바로 그 도깨비.

...상념을 깬 것은 유상아의 목소리였다.

“왠지 스페인어 같은데, 제가 한 번 말 걸어볼까요?”

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져서 물었다.

“......저게 뭔지 알고요? 돈이라도 꿔 달라고 하시게요?”

“그건 아니지만.......”

정확한 발음의 한국어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아. 아. 잘 들리시나요? 이것 참, 한글 패치가 안 돼서 고생했네. 여러분. 제 말 잘 들리시죠?]

익숙한 언어가 들려와서일까.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이 풀리는 것이 보였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정장을 차려 입은 덩치 큰 사내였다.

“이봐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예?]

“영화 촬영입니까? 저 오디션이라 빨리 가 봐야 하는데요.”

얼굴이 낯선 걸로 봐서 무명 배우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내가 캐스팅 디렉터였다면 단번에 뽑아줬을 만큼 패기 넘치는 목소리.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존재는 디렉터가 아니었다.

[아아, 오디션. 그렇구나. 이 시간에도 오디션을 보는 구나. 하하, 이거 자료 조사가 부족했네. 분명 오후 일곱 시 쯤에 유료화 들어가면 제일 많이 따라온다고 그랬는데.]

“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자자, 여러분들. 진정하시고 일단 자리에 앉아서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지금부터 중요한 말을 전해야 하니까!]

점점 가슴이 답답해져 간다. 

“뭡니까! 빨리 열차 출발시켜요!”

“누가 기장한테 연락해요!”

“지금 시민 협조도 없이 뭐하는 거야!”

“엄마, 저거 뭐야? 만화야?”

틀림없었다.

이건, 내가 아는 그 전개였다.

말려야 한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조그맣고 귀엽게 생긴 CG 덩어리의 말을 사람들이 들을 리가 없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멋모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유상아를 말리는 것 뿐.

“유상아 씨, 위험하니까 가만히 있어요.”

“네?”

놀란 유상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떨결에 말하기는 했지만, 나도 지금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정확히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하하, 시끄럽네 정말.]

왜냐하면 누구보다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 존재가 지금 눈앞에 있었으니까.

[내가 조용히 하라고 했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도깨비의 안광이 붉게 변했다.

뭔가가 퍼버벅, 깨지는 소리가 나고 지하철이 정적으로 물들었다.

“어, 어. 어.......”

오디션을 보러 가야 한다던 무명 배우의 이마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몇 번인가 입을 뻐끔거리던 사내는 동공이 풀린 채 자리에 쓰러졌다.

[이건 영화 촬영이 아닙니다.]

박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다시 한 번 이어졌다. 이번에는 기장 타령을 하던 아줌마였다.

[꿈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며.]

하나, 둘. 허공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오며 사람들의 머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도깨비에게 항의했던 사람들. 비명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 조금이라도 소란의 기색이 보이는 사람들의 머리에 죄다 바람구멍이 뚫리고 있었다. 삽시간에 지하철은 피바다가 되었다.

[당신들이 알던 ‘현실’도 아닙니다.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모두 닥치고 내 말을 들으세요.]

절반 이상의 사람이 죽었다. 

피와 시체 조각이 낭자한 퇴근길의 지하철.

이제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강력한 포식자를 앞둔 원시시대의 유인원처럼, 모두가 공포에 질려 도깨비를 보았다.

나는 놀라서 딸꾹질을 반복하는 유상아의 어깨를 꾹 누른 채 숨을 죽였다.

이건 진짜다.

이상한 메시지가 귓가에 들려왔을 때도, 도깨비가 내 눈앞에 나타났을 때도 실감 나지 않았던 감각이, 피바다가 된 객실을 보며 깨어나고 있었다.

[여러분, 지금까지 꽤나 살기 좋았을 겁니다. 그렇죠?]

노약자석. 도깨비와 눈이 마주친 할머니가 실금하고 있었다.

[당신들은 너무 오래 공짜로 살아왔어요. 인생이 너무 후했죠? 태어나서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잘도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제멋대로 번식을 해대고! 하! 여러분 정말 좆같이 좋은 세상에 살았네요!] 

공짜. 퇴근길 지하철 안에 공짜로 살아온 사람은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버는 사람들의 공간. 그곳이 바로 이 퇴근길 지하철이었다.

그럼에도 그 순간 누구도 도깨비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런데 좋은 시절은 이제 다 끝났어요. 언제까지 공짜를 누릴 수 있을 리 없잖아요? 행복을 누리고 싶으면 대가를 지불하는 게 상식이지. 안 그래요?]

헐떡거리는 사람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때. 누군가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호, 혹시 돈을 원하시는 겁니까?”

대체 이 와중에 어떤 인간이 그런 소릴 지껄일 수 있는가 싶었는데, 놀랍게도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유상아 씨. 저 사람 재무팀 한 부장 아닌가요?”

“......맞아요.”

틀림없었다. 회사의 대표적인 낙하산이자, 신입 사원들의 기피 1순위 상관. 재무팀의 한명오 부장.

대체 저 인간이 왜 지하철에 타고 있는 거지?

“돈이라면 얼마든지 주겠습니다. 받으시죠. 참고로 저,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명함까지 꺼내 보이는 한 부장의 패기에 사람들이 응원 섞인 시선을 보냈다. 테러범에 대항하는 구원자라도 보는 분위기였다.

“얼마면 됩니까? 큰 거 한 장? 아니면 두 장?”

일개 계열사의 부장이 함부로 부르기엔 지나치게 많은 액수였다. 

한때 한명오 부장이 계열사 총수의 막내아들이란 소문이 돌았는데,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부장급이 저렇게 많은 수표를 지갑에 넣어 다닐 수는 없을 테니까.

[흐음, 그러니까 당신네들 돈을 준단 말이죠?]

“그, 그렇습니다! 지금 가진 현금은 얼마 안 되지만...... 여기서 나가게 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돈, 좋죠. 많은 인간들의 상호 주관적 합의가 깃든 식물의 섬유.]

그 말에 한 부장의 안색이 밝아졌다. ‘역시, 돈이라면 다 된다니까’라는 표정이었다. 불쌍하게도.

“저, 지금 가진 건 이것뿐이니까 이거라도―”

[어디까지나, 당신네 시공간에서는 그렇다는 얘기에요.]

“예?”

다음 순간, 허공에서 불길이 일었다. 한 부장의 손에 쥐어져 있던 수표들이 모조리 불타올랐다. 기겁한 한 부장이 비명을 질렀다.

[그딴 종이는 거시 차원계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어요. 한 번 더 그딴 짓을 하면, 머리를 터뜨려버릴 거니까 명심하세요.]

“으, 으으.......”

사람들의 얼굴에 다시금 공포가 번져갔다. 다들 뒷내용이 빤한 소설책 같은 표정들이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기 쉬웠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지?」

그리고 오직 나만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알고 있었다.

[휴, 이렇게 떠드는 시간에도 당신들 부채는 쌓여가고 있다고요. 뭐, 그래요. 제가 백 번 설명하는 것보다, 여러분이 직접 돈을 벌어보는 게 빠르겠죠?]

도깨비의 뿔이 안테나라도 된 듯 길어지며, 몸체가 열차 천장 쪽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메시지가 들려왔다.

[#BI-7623 채널이 열렸습니다.]

[성좌(星座)들이 입장합니다.]

멍하니 눈을 끔뻑이는 사람들의 위쪽으로 제각기 작은 창이 떠올랐다.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메인 시나리오 # 1 ―가치 증명>

분류 : 메인

난이도 : F

클리어 조건 : 하나 이상의 생명체를 죽이시오.

제한시간 : 30분

보상 : 300코인

실패시 : 사망

+

몸체가 투명해진 도깨비가 다음 칸으로 사라지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여러분. 부디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여 주세요.]



Episode 1. 유료 서비스 시작 (3)

도깨비가 사라진 후,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몇몇 사람들은 열차 밖으로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몇몇 사람들은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유상아는 그들 중 후자였다.

“경찰, 경찰이 전활 안 받아요! 어떡해요, 어떡해.......”

“진정해요. 유상아 씨.”

나는 초점이 없는 유상아의 동공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유상아 씨. 개발팀에서 이번에 만든 게임 해본 적 있죠? 그 왜, 세계가 모조리 멸망하고 소수의 사람들만 살아남는 게임.”

“네? 갑자기 무슨.......”

“이렇게 생각하세요. 지금 그 게임 속에 들어왔다고.”

유상아가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게임.......”

“간단해요. 얼타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요. 알겠죠?”

“아, 알겠어요. 뭘 하면 되죠?”

“꼼짝 말고 가만히 있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 역시 천천히 호흡을 다스렸다.

내게도 이 모든 일을 제대로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소설 속에서만 존재했던 묘사들이 지금 내 눈앞에서 사생(寫生)되고 있었다.

「안테나를 뻗은 도깨비.」

「객실 내에 쓰레기처럼 널려 있는 시체들.」

「피투성이가 된 채 떨고 있는 직장인.」

「노약좌석에서 실금한 채 신음하는 할머니.」

나는 그 장면 하나하나를 유심히 보았다. 실재(實在)를 의심하는 매트릭스 속 네오라도 된 것처럼. 

관찰하고, 의심하고, 결국엔 납득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틀림없었다. 

‘멸살법’은 현실이 되었다.

생각하자.

이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자자, 여러분! 다들 진정하시고. 침착하게 심호흡부터 하세요.”

누군가가 앞으로 나선 것은 도깨비가 사라진 후 정확히 5분이 경과하던 시점이었다.

짧은 투블럭 컷으로 깎은 머리. 

평균키보다 머리 하나쯤은 더 큰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다.

“진정들 되셨습니까? 다들 하던 행동 멈춰 주시고, 잠시만 저한테 주목해 주십시오.”

흐느끼거나 통화를 하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죽였다. 모두의 시선이 충분히 모였을 즈음, 투블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국가 재난 상황에서는 작은 소란이 큰 인명 피해로 번질 수 있습니다. 때문에 현 상황은 지금부터 제가 통제하도록 하겠습니다.”

“뭐야, 당신 누군데!”

“국가 재난 상황? 뭔 개소리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몇몇 사람들이 ‘통제’라는 말에 강하게 저항하며 일어섰다. 그러자 청년이 지갑 속에서 공무원증을 꺼내 보였다.

“저는 현재 6502부대에서 근무 중인 육군 중위입니다.”

그 말에 몇몇 사람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군인, 군인이래.” 그러나 안도하기엔 일렀다.

“방금 전, 부대로부터 메시지가 날아왔습니다.”

군인의 스마트 폰 앞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마침 근처에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1급 국가 재난 상황 발생. 전 병력은 신속히 부대로 집결.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국가 재난 상황. 

이미 예상했던 일이기에 나는 놀라지 않았다. 사실 내가 놀란 것은 다른 쪽이었다.

육군 중위 이현성.

그 ‘이현성’이 바로 이 사람이었구나.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실제로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의 이름 하나는 머릿속에 또렷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멸살법의 주요 조연 중 하나였다.

「강철검제 이현성.」

결국 소설 속의 인물까지 등장했다. 이젠 정말 사태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군인 양반!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야?”

“저도 부대랑 연락을 취해보고는 있습니다만.......”

“청와대는! 청와대는 뭘 하는 거야! 대통령한테 빨리 연락해!”

“죄송합니다만 저는 말단 군인이라 청와대 핫라인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근데 무슨 통제를 한다는 거야!”

“모두 시민 여러분들의 안전을 위해서.......”

황당한 질문 세례 앞에서도 침착하게 응대하는 이현성을 보며, 나는 소설 속의 묘사들이 틀리지 않았음을 새삼 깨닫고 있었다.

그런데, 이현성이 원래 이런 식으로 등장하는 인물이었나?

퍼뜩 스쳐간 의문과 함께 꺼림칙한 예감이 들었다.

멸살법의 유일한 독자인 내가 장담하건대, 이현성의 첫 등장은 결코 이런 식이 아니었다.

그가 작중에 등장하는 시점은 적어도 첫 번째 시나리오가 끝난 후의 일인 것이다.

......그럼 이 상황은 뭐지?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다. 다시 한 번 ‘멸살법’을 읽을 수 있다면 보다 명확히 알 수 있을 텐데.

“국무총리 연설 떴어요! 진짜 1급 국가 재난 상황이래요!”

누군가의 외침에 너도나도 자신의 스마트 폰을 켰다. 유상아가 내 쪽으로 화면을 돌려주었다.

“......독자 씨, 이것 좀 봐요.”

딱히 검색어를 입력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포털 사이트의 실검 1위가 ‘국무총리 연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 영상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께 알립니다. 현재 서울을 비롯한 불특정 지역에서 정체불명의 테러리스트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연설의 내용은 간단했다.

현 정부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테러범들과 맞서 싸울 것이며, 협상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니 모든 국민들은 안심하고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기 바란다.......

소설로 읽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실제로 저 대사를 듣게 되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

테러라.......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긴 하겠지.

“근데 대통령은 어디가고 국무총리가 연설을 한대?”

“대통령이 이미 당했다는데요.”

“뭐? 진짜?”

“확실한 건 아니고, 네이버 댓글에―”

“씨발, 그럼 카더라잖아!”

물론 나는 그게 카더라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우와아악! 뭐야!”

곳곳에서 들려온 총성에 사람들이 폰을 떨어트렸다. 총성의 발원지는 스마트 폰 속이었다.

치지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핏빛으로 물든 화면. 사람들은 잠시 후에야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깨닫고 숨을 삼켰다.

“구, 국무총리가.......”

국무총리가 죽었다. 

그것도 실시간으로 머리가 터지면서. 

몇 번인가 총소리 같은 게 들리고 곧 화면 속은 잠잠해졌다. 뒤이어 화면에 등장한 것은 도깨비였다.

[여러분, 제가 말했잖아요. 이건 ‘테러’ 같은 장난이 아니라고.]

말을 잃은 사람들이 멍청한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아직도 못 알아들은 모양이죠? 안 되겠네. 지금도 이 상황이 게임처럼 느껴지나 봐요?]

너무나 여유로운 톤이라 오히려 불길하게 느껴지는 말투.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하하, 자료 조사에 의하면 이 나라 사람들은 게임에 능하다던데, 그럼 어디 난이도를 좀 올려 볼까?]

삐빅.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거대한 타이머가 떠올랐다. 동시에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하는 시간.

[잔여 시간이 10분 감소했습니다.]

[현재 남은 시간 10분.]

[앞으로 5분 안에 최초의 살해 행위가 발생하지 않을 시, 해당 칸의 모든 생명체는 절멸합니다.]

“이, 이게 무슨 소리야? 장난이죠?”

“방금 메시지 들었어요? 이봐, 당신들도 들었어?”

“군인 양반!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경찰은 왜 안 와!”

“여러분, 잠시만 진정해 주시고 제 말 좀―”

도깨비의 한 마디로 객실 상황은 이현성이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유상아가 내 옷깃을 꼭 그러쥐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이 상황의 위화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조연급인 이현성이 나왔다. 

그런데 왜 ‘그 녀석’은 나오지 않고 있는 걸까.

내가 아는 이야기대로라면, 지금쯤 녀석이 나타나야 하는데.

“뒤, 뒷칸에서 살인이 벌어졌어요!”

통로 쪽 창문으로 피바다가 된 3907 칸의 정경이 비치고 있었다. 해당 칸의 살인자들과 눈이 마주친 이들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못 들어오게 해야 돼! 아무도 못 넘어 오게 해요!”

사람들이 철문을 붙들고 늘어졌다. 그러나 불필요한 짓이었다. 애초에 적은 그쪽이 아니었으니까.

[해당 칸의 시나리오가 완료되기 전까지 모든 종류의 출입 행위가 제한됩니다.]

메시지와 함께, 사람들은 투명한 장벽에라도 부딪친 것처럼 철문에서 튕겨 나왔다.

“이, 이거 왜이래?”

그리고 다시 한 번,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꽤나 재밌어진 곳이 있는 반면, 아직도 시작하지 않은 곳도 있네요. 좋아요, 특별 서비스에요. 앞으로 5분 안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드릴게요.]

지하철의 허공에 거대한 스크린 같은 것이 나타났다.

이어서 화면에 나타난 장소는 어떤 교실이었다.

군청색 교복을 입은 채 떨고 있는 여고생들의 모습.

한 남고생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거렸다.

“...저거 태풍 여고 교복인데?”

삑삑삑삑― 하고 울려 퍼지는 불길한 신호음. 여고생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제한 시간이 경과했습니다.]

[유료 정산이 시작됩니다.]

안내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맨 앞줄에 앉은 여고생의 머리가 폭발했다.

하나씩, 다시 하나씩. 점점이 폭발해 흩어지는 머리들. 여고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교실 문과 창문을 향해 달려갔다.

“아아, 어, 어떻게 저런―”

청소 도구가 부서지고 손톱이 뜯겨져 나갔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누구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펑, 퍼어엉. 계속해서 여고생들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여고생 하나가 친구의 목을 조른 것은 그때였다.

끄윽거리는 신음과 함께 죽어가는 여고생.

그리고 잠시 후. 화면에 남은 것은 독기 어린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마지막 여고생뿐이었다.

[#Bay23515 채널. 태풍여고 2학년 B반 생존자 : 이지혜]

화면을 노려보던 여고생의 모습이 사라지고, 도깨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때요. 재미있죠?]

도깨비가 웃으며 말했지만, 사람들은 이미 화면을 보고 있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 사람들이 조금씩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씨발 뭐야! 이게 다 뭐냐고!”

심지어 유상아조차 나를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러나 아직 내게서 떨어지지는 않은 상태였다.

양손이 자유로워진 나는 스마트폰을 켰다.

왜 ‘그 녀석’이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거지?

내가 알고 있는 소설 속의 정보들과, 알지 못하는 정보들의 혼재.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다시 한 번 멸살법을 읽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대체 어디서 그 소설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너무 인기가 없어서 불법 공유조차 되지 않은 그 소설을...... 아니 잠깐만.

[첨부 파일 1개.]

스마트 폰에 떠오른 창을 보며, 나는 잠시 멍해지고 말았다.

설마...... 아니겠지?

잠시 후 메일의 첨부함을 연 순간 나는 당혹스런 기분에 젖었다.

작가가 보낸 첨부 파일의 이름은 다음과 같았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TXT]



Episode 1. 유료 서비스 시작 (4)

헛웃음이 나왔다.

거짓말이겠지 싶어 눈을 씻고 다시 봐도 틀림없었다. 

파일의 확장자는 TXT.

그러니까 이 사람 지금...... 선물이랍시고 나한테 자기 소설 텍본을 보낸 거야?

[전용 특성을 획득합니다.]

[전용 스킬 슬롯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파일을 실행하자 귓가에 들려오는 메시지.

세계가 ‘멸살법’의 그것으로 바뀌었다면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멸살법의 생존자들은 모두 전용 특성을 얻고, 전용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몸이 되니까.

나는 속으로 조용히 ‘특성창’을 되뇌어 보았다. 일단 특성을 얻었다면, 그게 뭔지 알 필요가 있었다.

[특성창을 활성화 할 수 없습니다.]

뭐야?

다시 한 번 ‘특성창’을 외쳐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황당했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특성창을 사용할 수 없다면 내가 가진 특성이나 스킬이 뭔지 알 수가 없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데, 이건 뭐 적을 알기 전에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잠시 허공을 노려보던 나는 일단 체념하고 작가가 보내준 텍본부터 읽기로 했다.

[전용 특성의 효과로 읽기 속도가 상승합니다.]

특성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특성의 효과 덕분인지 ‘멸살법’의 초반부를 읽는 데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찾았다.

내 손가락이 멈춘 곳은 작품 초반부, 주인공이 자신이 탄 열차칸에서 어떤 ‘행동’을 하려는 장면이었다. 

「그는 3707칸의 뒷문에 모여든 사람들을 보았다. 단단히 쥔 라이터의 줄날 바퀴가 차가웠다.

이번 생은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 목적을 위해서는 그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공포에 떠는 사람들의 표정.

죄책감은 없었다. 

모든 것은 한순간일테니까.

그는 냉혹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잠시 후, 그의 손끝에서 치익-하고 불이 솟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일순 등줄기가 스산해졌고, 때문에 나는 몇 번이고 그 대목을 다시 읽어야 했다. 위화감의 정체는 곧 밝혀졌다.

“......3707이었어.”

나는 반사적으로 내가 탄 열차 칸의 번호를 확인했다.

[3807].

내가 지금 타고 있는 칸은, 프롤로그의 주인공이 타고 있던 칸의 바로 ‘뒤 칸’이었다.

희미하게 손끝이 떨려왔다. 

......잠깐만. 

그러면 이 ‘칸’의 사람들은 원래 어떻게 될 운명이었지?

「그는 흐릿한 창문 너머로 아비규환이 된 3807칸을 바라보았다. 저쪽은 이미 늦었나.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저 칸에서 살아남는 것은 둘 뿐이니까.」

살아남는 것은 단 둘 뿐.

둘을 제외하고, 이 칸의 모두는 죽는다. 

그리고 나는 그 ‘두 명’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유상아를 보았다. 

아마 이 여자는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독자 씨, 저거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유상아가 가리키는 곳에서는 이미 뭔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흐윽거리는 신음. 몸을 웅크린 노인과 청년의 사나운 얼굴.

“씨발, 기분도 좆같은데 할망구가 자꾸 흐느끼고 지랄이야! 안 싸물어?”

청년은 입구 쪽에 기대어 있던 남고생이었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새하얗게 염색한 머리. 교복에 붙은 명찰에 그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김남운. 

역시나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저 칸에서 살아남는 건 이현성과 김남운 뿐이겠지. 상관없다. 어차피 내게 필요한 것도 그 둘 뿐이니까.」

“내가 닥치라고 했지?”

흥분한 김남운이 할머니의 멱살을 잡았다. 할머니의 힘 없는 다리가 버둥거렸다. 김남운의 손바닥이 허공에서 호를 그렸다.

짝, 짜악. 짜악. 

평소 같으면 누구라도 달려가서 말릴 법한 상황이었지만, 누구도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따귀는 주먹질로 바뀌었다.

“사, 살려. 살려줘어어......!”

단단한 주먹에 쇠약한 살가죽이 뭉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총에 못이긴 몇몇 사내들이 김남운의 주변에서 머뭇거렸지만, 좀처럼 나서려는 이는 없었다.

의외로 제일 먼저 팔을 걷어 부친 이는 한명오 부장이었다. 

“어린 노무 시키가 지금 어르신한테......!”

그러나 본보기를 보여 주겠다는 듯 대차게 나선 그에게 돌아온 것은, 비웃음 섞인 목소리였다.

“아저씨, 죽고 싶어?”

“......뭐?”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뭔 개소리야 이 막돼먹은 새끼가!”

한명오의 욕설에도 김남운은 피식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지하철의 천장을 가리켰다.

“저거 안 보여?”

천장에서는 도깨비가 켜 놓은 홀로그램 화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살려, 살려줘요!]

[으아아아악!]

[죽어! 죽으라고!]

이곳 열차칸이나 태풍여고 뿐만이 아니었다. 전국 각지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실시간 영상. 김남운이 말을 이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군대는 우릴 구하러 오지 않아. 그리고 누군가는 죽어야만 해.”

“무, 무슨 말을.......”

“우린 죽을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고.”

한명오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걷어 부친 그의 팔목에서 오소소 솜털이 일어서고 있었다.

“물론 아저씨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살기 위해 동족을 죽이다니. 그건 개새끼들이나 하는 짓이지. 하지만 말이야, 이건 불가항력이라고. 불가항력.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데, 누가 우릴 탓해? 아저씬 끝까지 도덕 타령하다가 죽을 거야?”

“그, 그야.......”

“잘 생각해. 지금까지 아저씨가 알던 세계는 방금 끝난 거라고.”

부르르 떨리는 한명오의 어깨. 

한명오 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눈빛을 타고 균열이 번져가고 있었다. 막연한 도덕의 세계가 붕괴하는 광경. 균열에 쐐기를 박아 넣은 것은, 역시나 김남운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는 새로운 법칙이 필요한 법이야.”

김남운. ‘멸살법’의 세계에 가장 빠르게 적응을 마친 청년.

돌아선 김남운이 할머니를 향해 주먹질을 재개했다. 

이번에는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한명오도, 다른 남자들도...... 심지어는 이현성까지. 

꽉 쥔 군인의 주먹이 허공에서 갈 곳을 잃은 채 떨리고 있었다. 

아마 그 역시, 방금 뭔가를 선택한 것일 터다.

“후...... 힘들어 죽겠네. 다들 언제까지 구경만 할 거야? 전부 뒤지고 싶어?”

이어진 김남운의 다그침에 사람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너무나 원색적인 그 표정들은 싸구려 통속 소설의 문장들처럼 읽기 쉬웠다.

「5분 안에 살해 행위가 벌어지지 않는다면, 이 칸의 모두가 죽는다.」

사람들의 눈빛이 변하고 있었다.

「만약 저 할머니가 죽지 않는다면, 5분 뒤 죽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눈빛들.

“그래...... 저 새끼 말이 맞아. 이대로면 다들 죽어.”

첫 번째 사내가 김남운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쓰러져 몸을 웅크린 할머니를 향해 발길질을 퍼부었다.

“다들 잊었어? 누군가는 죽어야 돼! 그래야 우리가 살아!”

“아 씨발...... 모르겠다.”

둘, 그리고 셋.

멍청히 서 있던 사람들이 할머니를 향해 접근했다.

비겁하게 주변을 서성거리던 남자들도. 

폰으로 동영상을 촬영 하고 있던 여대생도. 

아이를 내팽개친 엄마와, 뒤늦게 합류한 한명오 부장까지. 

모두가 할머니에게 린치를 가하며 그녀의 죽음을 거들고 있었다.

“죽어! 빨리 죽으라고!”

그들은 사형수의 죽음을 위해 협력하는 교도관들 같았다. 누가 사형수를 죽였는지 알 수 없게끔 동시에 레버를 당기는 교도관들처럼, 그들은 소극적인 발길질과 주먹질로 할머니를 조금씩 죽여 갔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다른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나는 그렇게 그 모든 일들을 방관했다.

저 이름 모를 할머니는 애초에 살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원래의 시나리오에서도 저 할머니는 죽었을 것이다. 

그러니...... 저 죽음을 방관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다. 

유상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저러다 죽겠어요.”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붙들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요.”

내 손에 붙들린 팔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떨림을 숨기려는 듯 주먹을 꼭 쥔 유상아가 말했다. 

“알아요, 알지만......!”

“지금 가면 유상아 씨가 죽습니다.”

유상아의 동공이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이야기의 장르가 바뀌어도, 여전히 환하게 빛나는 사람도 있다.

“유상아 씨. 앉아요.”

하지만 이 이야기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유상아가 아니다.

유상아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니까.

“네? 하지만―”

“이번 한 번만 내 말대로 해요. 그 뒤론 참견 안 할 테니까.”

억지로 유상아를 자리에 앉힌 후, 크게 숨을 들이쉬며 등을 돌렸다. 곧게 허리를 펴자 날숨이 가늘게 떨렸다. 천천히 발목을 풀고, 손목을 돌린다. 

사실 나서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본래 내 계획은 이게 아니었으니까.

“......독자 씨?”

나는 그녀의 부름에 답하지 않고 사람들을 보았다. 할머니를 폭행하는 데 여념이 없는 사람들.

내가 줄곧 가만히 있었던 것은 김남운이나 사람들이 무서워서도, 그들의 비인간성에 전적으로 동의해서도 아니었다.

나는 단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움직여야 할 순간을.

그러니까.

콰아아앙―!

바로 지금.

“와아악! 뭐야!”

폭발음에 귓가가 먹먹해지며 열차의 선체가 기우뚱 흔들렸다. 

사람들의 비명. 바로 앞 칸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이쪽 객실로 넘어오고 있었다.

시작됐다.

녀석이 움직였구나.

나는 오른발로 있는 힘껏 바닥을 박찼다.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 사람들을 지나쳐, 할머니가 있는 방향을 향해서.

“뭐야? 어어억!”

나와 정면에서 부딪친 김남운이 괴성을 지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얼핏 보면 내가 할머니를 구한 듯한 상황이었지만, 내가 노린 건 그게 아니었다.

어디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폭발 속에 넘어지면서도 할머니를 향해 발을 내뻗는 사람들. 그 지옥의 한가운데에서 한 아이가 울고 있었다.

아까 곤충 채집망을 들고 있던 그 아이였다.

“잠깐 실례 좀 할게.”

나는 아이에게서 채집망을 빼앗아 들었다.

망 속으로 손을 집어넣자 메뚜기의 기분 나쁜 키틴질이 손끝에 닿았다. 나는 한 마리를 꺼내어 꼬마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다들 멈추세요. 그 할머니를 죽여 봤자 당신들은 살 수 없으니까.”

폭발 후의 일시적인 정적 탓에 내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게 들렸다. 하나 둘, 사람들이 내 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할머니를 죽였다고 칩시다. 그 다음은 어쩔 겁니까?” 

흠칫, 놀라는 표정들이 보기 좋았다. 어디 조금 더 말해볼까.

“저 할머니가 죽으면 도깨비가 말한 ‘최초의 살해 행위’가 인정되니까 잠깐 시간은 벌 수 있겠죠. 하지만 그 다음은요?”

“아.......”

“도깨비의 말이 사실이라면 결국 여러분들은 각자 한 사람의 몫을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할머니 다음엔 누굴 죽일 겁니까?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을 죽일 겁니까?”

그제야 뭔가를 떠올린 사람들이 서로를 보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공포에 질린 눈빛들.

사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는 그저 시작일 뿐이라는 걸.

흔들리는 분위기를 붙잡은 것은 김남운이었다.

“하하, 다들 뭐가 걱정이야? 다음엔 저놈을 죽이면 되지! 겁쟁이들. 미리 자기 차례부터 걱정하지 말라고! 확률은 반반이니까!”

저 김남운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나는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런 도박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살인자가 되지 않더라도 당신들이 살아날 방법은 있어요.”

“뭐?”

“그, 그게 뭔데요?”

크게 술렁이는 사람들. 김남운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잊었습니까?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은 ‘사람을 죽여라’가 아니었을 텐데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뭔가 알아챘다는 얼굴이었다.

[하나 이상의 생명체를 죽이시오.]

그랬다. 시나리오의 내용에는, 처음부터 ‘사람’이라는 말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하나 이상의 생명체 살해. 

그 말은 곧,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이야기.

눈치 빠른 누군가가 내 손에 쥐어진 채집망을 향해 외쳤다.

“곤충! 곤충이다!”

채집망 안에서 펄쩍 펄쩍 뛰는 메뚜기와 귀뚜라미들. 사람들의 눈빛이 번뜩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곤충이죠.”

나는 채집망에 손을 집어넣어 메뚜기 한 마리를 꺼냈다. 미리 보아 둔 배가 통통한 녀석이었다.

“그, 그걸 내놔! 빨리!”

“한 마리만! 한 마리만 있으면 돼!”

손을 뻗으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며, 천천히 한 발짝 씩 물러선다. 

할머니를 죽이려던 폭발적인 광기들이 이제 나를 향하고 있었다.

설핏 웃음이 나온다.

왜일까. 이 아슬아슬한 긴장감 속에서도, 내 심장은 왜 이렇게 즐겁다는 듯 뛰고 있는 것일까.

“드릴까요?”

나는 맹수 무리를 도발하는 조련사처럼 채집망을 흔들어 보였다. 성질이 급한 몇몇이 몸을 일으켜 나를 향해 달려들려는 그 순간.

“그럼 가지세요!”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메뚜기를 박살냈다.

[‘최초의 살해’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추가 보상으로 100코인을 획득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 쥐고 있던 채집망을 힘껏 던졌다. 정확히는 할머니와 사람들이 몰려 있던 통로의 정 반대쪽을 향해서.

“저런 미친!”

허공에서 풀려난 곤충들이 자유를 향해 있는 힘껏 도약하고 있었다.



Episode 1. 유료 서비스 시작 (5)

객실 곳곳을 뛰어다니는 곤충들을 보며,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다.

“이, 이봐요! 왜 그런 짓을―”

사람들이 멍하니 경악만 하고 있는 사이, 판단이 빠른 몇몇은 나를 밀치고 지나갔다.

“두고보자 씨발놈아.”

“......빨리들 찾는 게 좋을 겁니다. 이제 3분밖에 안 남았으니까.”

그 말을 신호로 사람들은 이성을 상실한 짐승들처럼 지하철 좌석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잡았다! 아아악!”

운 좋게 곤충을 손에 넣은 사람들의 환희와, 다시 그 사람을 공격하는 악의가 어우러져 객실 안은 난장판이 되고 있었다.

“어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그냥 곤충을 내줘도 됐잖아?”

옆을 돌아보니 김남운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수상쩍게 목을 푸는 김남운을 경계하며 대답했다.

“객실에 남은 사람의 숫자는 열둘이야.”

“......응?”

“채집망에 남은 곤충은 세 마리고.”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짓던 김남운이 파안대소를 했다.

“12 대 3? 하하하핫! 그러네. 어차피 모두 살아남을 수는 없다 이거지? 그래서 저걸 던진 거다?”

“그래.”

“웃기지 마.” 

“......?”

“상식이 제대로 박힌 인간이라면 그딴 이유로 저런 짓을 벌이진 않아.”

김남운의 얼굴에 웃음기가 짙어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봐. 넌 그냥 저 광경을 보고 싶었던 것 아니야?”

나는 내가 알고 있던 ‘멸살법’의 김남운을 떠올렸다. 귓가에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이 발동합니다.]

이어서 눈앞에 멋대로 떠오르는 창.

내 특성이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눈앞의 일람창을 보고 있자니 대강 감이 올 것도 같았다.

<인물 정보>

이름 : 김남운

나이 : 19세

배후성(背後星) : 없음(현재 두 개의 성좌가 해당 인물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전용 특성 : 중2병 (일반)

전용 스킬 : [비정상적인 적응력 Lv.3], [나이프 파이팅(Knife fighting) Lv.1], [흑화(黑化) Lv.1]

종합 능력치 : [체력Lv.3], [근력Lv.4], [민첩Lv.6], [마력Lv.4]

종합 평가 : 특별한 계기를 맞아 흑화한 중2병입니다. 엮이지 않는 것을 추천합니다.

‘멸살법’에 등장하는 중2병들 중 대부분은 실재가 된 악몽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하지만 눈앞의 김남운만은 달랐다.

망상악귀(妄想惡鬼) 김남운. 

훗날 그런 별명으로 불리게 되는 이 청년은 평범한 중2병이 아니었다.

세계의 멸망만을 오래도록 기다려왔기에, ‘비정상적인 속도’로 이 세계에 적응해버린 청년. 

“나랑 같이 팀을 짜자. 어때?”

그 청년이, 지금 내게 제안하고 있었다.

[등장인물 ‘김남운’이 당신에게 호감을 표합니다.]

[등장인물 ‘김남운’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지금 김남운과 손을 잡는다면 당장의 생존은 보장되겠지. 

만약 내가 ‘멸살법’을 읽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 선택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미안하지만 난 혼자가 좋아서.”

“그래? 흠, 아쉽게 됐네.”

가볍게 입맛을 다신 김남운이 내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럼 이제 좀 비키지? 난 뒤쪽 할망구한테 볼일이 있으니까.”

할망구, 이라는 말에 뒤를 돌아봤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할머니가 가까스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무슨 볼일?”

“몰라서 묻는 거야?”

“곤충은 안 잡는 거냐?”

“곤충? 내가 그딴 걸 왜 잡아?”

김남운이 비릿하게 웃었다.

“눈앞에 이미 다 잡아 놓은 벌레가 있는데.”

김남운의 살기가 코앞에서 느껴졌다. 소설의 문장으로만 존재하던 캐릭터가 생생한 광기를 지닌 채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조금 감탄하고 말았다. 

김남운은 정말 내가 상상한 그대로의 인간이었구나.

[등장인물 ‘김남운’의 호감도가 미미하게 하락합니다.]

“뭘 봐? 빨리 비키라니까?”

“그건 힘들겠는데.”

“뭐?”

“비켜줄 수 없다고.”

“하하, 이제 와서 정의의 사도 흉내라도 내겠다는 거야? 이중인격이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남운의 얼굴에 서서히 드리워지는 어두운 그림자. 호감으로 빛나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아니 잠깐만. 혹시 처음부터 이러려고 채집망을 저쪽으로 던진 거였어? 진짜?”

“.......”

“그 할망구 살리려고? 하하하! 대박! 진짜 대박! 아니지? 응?”

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이 녀석을 보자니 새삼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이거, 알고 보니 내가 제일 싫어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네. 역시 나이든 새끼들은 다 똑같다니까.”

내가 멸살법을 읽는 내내 이 자식 때문에 얼마나 속이 터졌었는지.

[등장인물 ‘김남운’이 당신을 멸시합니다.]

“비키라고 했지?”

속으로 타이밍을 재고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날아드는 주먹.

“어쭈, 제법인데?”

명백히 알고 피했음에도 머리 위쪽으로 후끈, 하는 열감이 남았다. 평범한 주먹질이 아니었다.

[흑화(黑靴) Lv.1]

김남운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어두운 오오라.

‘중2병’ 특성의 전용 스킬이었다.

본래 첫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기 전에 스킬을 해방하는 경우는 드문데, 저 김남운은 벌써부터 스킬을 발현하고 있었다.

저 싸이코패스 같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이놈을 영입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퍼억!

녀석에게 맞은 어깨에 심한 경련이 왔다. 이대로 싸운다면 승산은 없다. 

......지금 ‘그걸’ 써야 하나?

속으로 시간을 계산하던 찰나, 메시지가 들려왔다.

[등장인물 ‘김남운’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1단계의 사용 조건에 근접했습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

이건 또 뭐야?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1단계의 사용 조건에 도달했습니다!]

꽈앙, 하는 소리와 함께 김남운의 주먹이 바닥을 내리쳤다.

“하하, 뭐야? 나 꽤 세잖아?”

객실 바닥에 희미하게 남은 주먹 자국. 이제 김남운도 조금씩 자신의 힘을 깨닫고 있었다.

꽈앙! 꽈앙! 꽈앙!

한방만 맞아도 뼈가 부러지기에 충분한 타격이 연속해서 바닥을 내리치고 있었다. 김남운이 답답한 듯 성질을 부렸다.

“아, 왜 이렇게 안 맞아!”

당연히 안 맞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 내 두 번째 스킬 덕분이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1단계가 발동합니다!]

스킬이 발동한 순간, 나는 김남운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양 그의 공격 방향을 훤히 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렇게.

「오른쪽 옆구리」

재빨리 몸을 뻗어 공격 방향의 사각으로 물러나고,

「오른쪽 눈」

빠르게 허리를 숙여 연달아 날아드는 주먹을 피해낸다.

“존나 안 쳐맞네 진짜!”

부실한 운동신경 때문에 반격까지는 무리였지만, 적어도 공격의 대부분을 회피할 수는 있었다.

「왼쪽 대퇴부」

이 정도면 버티기엔 충분했다.

중요한 건 시간을 버는 것.

나는 날아드는 김남운의 주먹을 피하며, 허공의 시계를 가리켰다.

“이제 2분 남았다, 꼬맹아.”

다급해진 김남운이 나와 할머니를 번갈아 보았다.

“이런 씨발!”

선택의 순간, 김남운의 눈이 할머니 쪽에 고정되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할머니를 안고 굴렀다.

할머니가 죽으면 김남운은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게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런 놈을 다음 시나리오로 보낼 수는 없다.

“하하, 그렇게 움직일 줄 알았다니까.”

어째 불길한 예감이 든다 싶더니, 그새 김남운이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하얀 형광등 빛을 머금은 칼날에 눈이 시렸다.

휴대용 맥가이버 칼. 

잊고 있었다. 이 녀석이 골수 밀리터리 오타쿠였다는 것을.

쉬이이익!

기술형 스킬인 [나이프 파이팅]과 강화형 스킬인 [흑화]의 연계. 

칼끝의 방향은 명백했다.

「심장」

방향을 알아도 피할 수 없는 공격. 빠르게 판단을 내린다. 피할 수 없는 공격이면 차라리 맞는 게 낫다. 가능하면, 최소한의 피해로.

찌이이이익!

가까스로 심장을 빗나간 칼날이 어깨를 깊이 긋고 지나갔다.

아프다. 정말 아프다.

피부가 타는 듯한 통증이라는 건 이런 것이었구나. 시야가 흔들리며, 죽음의 느낌이 성큼 다가왔다.

“하하, 이제 그만 죽어!”

시나리오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1분 30초. 나는 할머니 쪽을 흘끗 살폈다. 할머니한테는 미안하지만, 이젠 정말 ‘그걸’ 쓰는 수밖에 없다.

“청일고교 2학년 김남운. 너에게 질문이 하나 있다.”

“......뭐?”

“곤충의 알은 ‘생물’일까 아닐까?”

나는 아까 죽인 메뚜기의 시체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통통한 알집의 부피가 푸짐했다.

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터지는 진액. 

찝찝한 느낌이 손 안에 흥건히 퍼지며 메시지가 들려왔다.

.......

[생명체를 살해했습니다.]

[추가 보상 100코인을 획득합니다.]

[생명체를 살해했습니다.]

[추가 보상 100코인을 획득합니다.]

.......

귓가를 두드리는 무수한 메시지.

김남운이 인상을 썼다.

“곤충의 알?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시간 끄냐?”

“그런 셈이지.”

“내가 그딴 걸 어떻게 알아? 난 생물 시간에 항상 졸았다고.”

피에 젖은 내 어깨를 보며 김남운이 즐거운 듯 웃었다.

“하지만 내가 확실히 아는 게 하나 있어. 뭔지 알아?”

“뭔데.”

“바로 지금 네가 뒤질 거란 거야!”

대답하기도 전에 김남운의 맥가이버 칼이 움직였다. 역시나 피하기 힘든 공격이었다.

[대량의 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코인 사용 도움말을 확인하시겠습니까?]

나는 귓가로 들려오는 설명들을 생략했다. 어차피 아는 내용이라 들을 필요가 없었다.

“아니, 죽는 건 너야.”

나는 입으로 그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속으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2700코인을 ‘체력’에 투자합니다.]

[체력 Lv.1 -> 체력 Lv.10]

[체력 레벨이 크게 증가합니다!]

[육체의 내구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김남운의 맥가이버 칼이 내 심장 어림을 파고들었다. 

정확히는, 파고든 것처럼 보였다. 

마치 단단한 바위를 긁은 것처럼 생채기만 남은 피부. 김남운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아까 문제의 정답을 알려줄게. 답은 ‘알은 생물이다’야.”

“뭐, 뭐?”

“그리고 산란기의 메뚜기는, 한 번에 100개 이상의 알을 낳지.”

알. 생물. 100개. 

안타깝게도 머리 나쁜 남고생이 그 정보들의 의미를 이해하기엔 남은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뭔 개소리야!”

“이해하리라 생각하지도 않았어. 이제 1분 남았네.”

그제야 김남운의 얼굴에 공포가 어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죽어! 죽인다!”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맥가이버 칼의 궤적. 나는 일부러 공격을 방어하지 않았다. 

카가가각!

가슴 보다는 취약한 부위였던 까닭일까. 조금 전 보다는 깊은 생채기가 남았지만, 별로 아프지는 않았다.

“김남운.”

발악하는 김남운의 뒤쪽으로, 여전히 벌레들을 찾아 드잡이질을 벌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오직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서로를 해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

“아까 네 말이 맞아. 나는 너랑 똑같은 종류의 인간이야.”

어쩌면, 내가 구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씨발 뭐야! 왜 안 죽어! 왜 안 죽는 건데!”

55초. 50초. 45초. 

나이프는 계속해서 생채기만을 남겼다.

핏줄기는 흘렀지만, 칼날은 살가죽 아래를 헤집지 못했다.

김남운이 다시 입을 연 것은 30초를 남겨둔 시점이었다. 

칼을 떨어뜨린 김남운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사, 살려줘.”

25초.

“살려달라고! 제발! 살려주세요!”

“내가 왜?”

20초.

“사, 사람 목숨은 중요하잖아! 그게 당연한 거잖아!”

“그건 ‘예전 세계’의 법칙이겠지. 네가 말했잖아. 새로운 세계에는 새로운 법칙이 필요하다고.”

10초.

“싫어, 싫어! 죽기 싫어! 으아아아아!”

5초.

괴성을 지르며 달려든 김남운이 나이프로 내 눈을 노렸다.

날붙이가 내 망막을 파고들려는 바로 그 순간. 

[제한 시간이 경과하였습니다.]

퍼버버벅― 하는 소리와 함께, 김남운의 머리가 폭발했다.

[유료 정산이 시작됩니다.]

김남운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사람들의 머리가 터져 나가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폭죽처럼 터져나가는 머리들.

나는 약간의 환희와 약간의 죄책감, 그리고 알 수 없는 괴리감 속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왜일까.

어째서 저 광경을 보면서도, 나는 이토록 침착할 수 있는 것일까. 

마치 소설이라도 보고 있는 것처럼.

[당신은 총 124개체의 생명체를 학살하였습니다.]

[학살 내역 : 메뚜기 1마리, 메뚜기알 123개]

[저항력이 없는 생명체를 살해하였기에 획득 코인이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총 6200 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능력치 레벨업에 사용한 코인이 자동 감산됩니다.] 

[총 35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과도한 학살로 ‘대량 학살자’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지하철의 새카만 창문에 내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거울을 보면서도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표정.

나는 뺨 언저리에 묻은 핏자국을 문질러 닦았다. 핏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알고 보니 유리창에 묻은 피였다.

끼이익.

기우뚱, 하는 느낌이 들더니 열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덜덜, 소리를 내며 달리는 열차.

곧 빛이 들이치며 창문에서 어둠이 밀려났다. 압구정에서 옥수로 향하는 3호선의 지상철 구간. 

창밖으로 한강을 비롯한 서울의 정경이 드러나고 있었다. 

아아.

누군가가 벅차오르는 신음을 흘렸다. 살았다, 라는 깊은 안도가 느껴지는 신음이었다. 하지만 그 신음의 의미가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 아.......

창밖에 비치는 풍경은 더 이상 그들이 알던 서울이 아니었다.

포연과 먼지 속에서 폐허가 된 시내. 

무너진 한강의 대교들.

군인들의 시체로 붉게 물든 한강과, 쓰러진 빌딩 사이로 K1 탱크를 장난감처럼 짓밟는 괴물들.

[메인 시나리오 #1 – 가치 증명이 종료되었습니다.]

[기본 클리어 보상으로 3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채널 이용 수수료로 100코인이 감산되었습니다.]

[추가 보상 정산이 시작됩니다.]

하나의 세계가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세계의 결말을 알고 있는 유일한 독자였다.





Episode 2. 주인공 (1)

Episode2. 주인공

지하철은 동호대교 위를 반쯤 지났을 무렵 멈춰 섰다. 

“맙소사.......”

살아남은 몇몇 사람들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 광경을 내다보았다. 폐허가 된 서울 시내와 무너진 빌딩들. 

거대한 뱀을 연상시키는 괴수들이 한강에 불시착한 전투기의 잔해를 뜯어 먹고 있었다.

“저, 저게 대체......!”

나는 녀석들의 정체를 한 번에 알아보았다.

어룡(魚龍).

흔히 씨-써펜트라고 불리는 괴수. 훗날 ‘멸살법’의 세계에서 7급 괴수종으로 분류될 놈이었다.

어룡들 중 하나가 이쪽을 돌아봤다.

“으, 으아아아! 온다!”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외쳤다. 하지만 나는 다가오는 어룡을 보면서도 무감했다. 저 녀석들은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쿠르르르르.

울음을 토한 어룡은 동호대교 아래쪽을 맴돌더니 기포와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멸살법의 세계에서 ‘시나리오’는 모든 사안에 우선한다.

고로 시나리오의 보호를 받는 한, 당장 녀석들과 부딪칠 일은 없다. 적어도 당장은 그랬다.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 점검으로 보상 정산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본래 보상 정산이 시작되어야 할 타이밍임에도, 허공에 떠 있는 것은 오류 메시지뿐이었다.

이건 아마 나 때문이겠지. 

나는 몸통만 남은 김남운의 사체를 내려다보았다.

본래 ‘멸살법’의 진행대로였다면 김남운은 이 열차 칸의 대부분을 살해하고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갔어야 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막았다.

내 생각이 맞다면, 지금쯤 김남운의 죽음에 분노하는 이들이 나타날 것이다. 여기? 여기는 아니다. 정확히는 저 하늘 위에서.

[등장인물 ‘김남운’의 죽음으로 두 개의 성좌가 당신에게 희미한 적대감을 표합니다.]

성좌(星座).

‘멸살법’의 세계에서 가장 신비로운 존재들이자, 저 먼 성운(星雲)의 꼭대기에 앉아 이 모든 이야기를 관람하는 비극의 배후.

성좌들의 호오(好惡) 표시가 뜨는 것을 보니 지금부터가 본격적이라는 실감이 났다.

우스운 일이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놈들과 나의 입장은 정반대였는데, 이젠 놈들이 나를 구경하고 있으니.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시나리오에 감탄을 표합니다.]

[성좌들이 당신에게 500코인을 후원합니다.]

나를 싫어하는 놈들이 있다면, 좋아하는 녀석들도 있는 법.

어느 쪽이든 불편한 상황이긴 매한가지였지만 당장 놈들을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이제 광대가 된 것은 내 쪽이었으니까.

나는 바닥에 떨어진 김남운의 맥가이버 칼을 주우며 생각했다.

구경할 테면 얼마든지 구경해보라지. 네놈들이 낼 관람료는 결국 네놈들의 목숨이 될 테니까.

“......김독자 씨? 괜찮아요?”

고개를 들자 유상아의 얼굴이 보였다. 축 쳐진 어깨. 하얀 블라우스 곳곳에 남은 핏자국과 올이 나간 스타킹. 내가 알던 유상아는 이제 없었다. 나는 유상아의 손을 잡고 일어나며 말했다.

“미안해요. 할머니는 못 구했어요.”

나는 역시나 머리가 사라진 할머니의 사체를 내려다보았다. 이름도 모르는 할머니.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죽을 것이다.

유상아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독자 씨는 어떻게 그렇게.......”

“예?”

“아, 아니에요. 그보다...... 감사해요.”

“뭐가 말이죠?”

“그, 아까.......”

뒤늦게 한 장면이 떠올랐다.

때마침 내가 케이지를 던진 방향에 서 있던 유상아의 모습.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그냥 우연입니다. 그러니 두 번은 없을 겁니다.”

“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유상아.

속내는 알 수 없지만, 똑똑한 여자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 것이다.

내 선택으로 인해 누군가가 살고, 다른 누군가는 죽었다.

살아난 쪽이 누구든,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와, 대박.]

허공에서 치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도깨비가 나타났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잠깐 다른 칸 보고 온 사이.......]

도깨비의 표정에 환희와 경악이 뒤섞여 있었다. 

도깨비의 머리 위로 반짝이는 별 같은 것이 둥둥 떠다녔다. 

나는 속으로 별들의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스물, 스물 하나. 총 스물 한 개인가. 녀석이 기뻐할 만도 하다.

[무려 스물 한 분이나 제 채널에 접속하시다니...... 하하, 이거 일진이 잘 풀리려나? 어이쿠, 후원 감사합니다. 성좌님들. 하하, 여러분들! 밥값 제대로 하셨나 봐요?]

별들의 숫자는 곧 채널에 접속한 성좌들의 수를 의미한다. 

스물 하나면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초보 도깨비인 녀석에게는 낯선 숫자일 것이다.

[이거이거, 생존자 숫자도 상당하네요? 옆칸 그놈도 또라이였는데...... 오늘은 꽤 재밌는 일들을 벌여 주시는군요.]

히죽거리던 도깨비가 허공에 뭔가를 조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생존자 명단이 떠올랐다.

[불광행 3434열차 3807칸 생존자 : 김독자, 이현성, 유상아, 한명오, 이길영. 총 5명 생존.]

5명.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나는 생존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체격이 좋고 운동신경이 뛰어난 이현성의 생존은 예상했다. 역시나 유상아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그리고 이길영.

내 예상이 맞다면 ‘이길영’은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이 소년의 이름일 것이다.

소년의 손에는 으스러진 메뚜기의 진액이 묻어 있었다. 

내가 쥐어 주었던 메뚜기였다.

머리가 사라진 자신의 엄마를 말없이 바라보는 소년.

소년의 엄마는 그를 버리고 할머니를 죽이는 일에 동참했다. 그리고 이 소년은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지켜보았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소년의 어깨를 짚어주었다. 같잖은 동정은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것은.......

그렇다. 위선이다.

“꼬마야.”

천천히 고개를 든 소년의 눈동자에, 생전 처음 맞닥뜨린 죽음의 공포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본능.

지금 이 소년은 엄마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소년은, 그저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게 인간이니까.

“살고 싶니?”

소년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저항하듯 소년의 몸이 떨렸다. 그리고 미미하게, 소년의 고개가 움직였다.

“그럼 같이 가자.”

스르르 움직인 이길영이 내 다리 곁에 바짝 붙었다. 유상아가 감동이라도 한 듯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의도치 않게 또 오해를 사게 생겼다. 사실 보라고 한 일이긴 했다. 그 대상이 유상아는 아니었지만.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선행에 감동합니다.]

[성좌들이 당신에게 2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저열하다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나 역시 살고 싶은 건 마찬가지니까.

앞으로 있을 중요한 이벤트를 감안하면, 지금 성좌들의 시선을 끌어두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이, 이제 저흴 풀어 주시는 겁니까? 원하는 조건도 들어드렸지 않습니까?”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서 와이셔츠가 몇 갈래로 찢어진 한명오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한명오 부장.

억세게 운이 좋은 인간이다.

그런데 조금 의아했다. 저 돈 많은 한명오가 왜 퇴근길 지하철에 타고 있었을까.

얼마 전에도 벤츠S클래스를 새로 뽑았다며 부서마다 순회 돌던 인간이.

[흐음, 풀어달라뇨? 바깥 광경을 제대로 못 보셨나 보죠? 진짜로 내보내드려요?]

도깨비가 킬킬 웃었다.

[아무튼 감탄했습니다. 사실 이 칸은 별로 기대를 안 했는데, 용케도 첫 번째 시나리오를 통과하셨네요. 이로써 벌레도 살아남을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하셨군요.]

새삼스레 처지를 깨닫게 되는 말이었다. 아마 저놈 눈에는 우리가 메뚜기처럼 보이겠지.

[자자, 고난을 이겨낸 만큼 보상도 있어야겠죠? 이제 여러분은 첫 번째 시나리오의 보상으로 무려 ‘성좌’님들의 후원을 받을 자격을 갖췄어요. 와아아! 어때요, 기대되죠? 흠, 다들 시큰둥하네요. 이거 정말 대단한 일인데.]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성좌’나 ‘후원’이 뭔지를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성좌의 후원.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약관화했다. 드디어 멸살법의 핵심 이벤트 중 하나인 <배후 선택>이 시작되려는 것이다.

[흠,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들이시네. 쉽게 말씀드릴게요. 지금의 당신들은 아주, 형편없을 정도로 약해요. 당장 이어질 시나리오 속에 던져 놨다간, ‘크루크’는커녕, 약해 빠진 ‘땅강아쥐’만 만나도 살해당할 정도란 말입니다. 그런데 친절하게도, 이 우주에는 그런 당신들을 가엾게 여겨 후원하고자 하는 위대한 분들이 계시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결국 참지 못한 이현성이 입을 열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누가 누구를 후원한다는.......”

[흠, 말귀 더럽게 못 알아 처먹네. 한국 속담에 그런 게 있었죠. 백 번 듣느니 한 번 보는 게 낫다. 그러니 직접 겪어 보시죠. 뭐, 운이 없는 사람은 겪을 기회도 없겠지만 말입니다. 하하핫!]

나는 바짝 긴장했다. 

지금부터다.

여기서 좋은 선택지를 골라야만 앞으로의 생존이 더욱 수월해질 것이다.

“독자 씨? 갑자기 이상한 선택지 두 개가 떴는데, 대체.......”

“저한테 물어보셔도 모릅니다.”

물론 괜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그나저나 선택지가 두 개라.

유상아도 꽤나 운이 좋은 편이다.

“편하게 생각하죠. 적성 검사라도 한다고 생각하고.”

“적성 검사라니.......”

“어차피 이게 무슨 상황인진 아무도 모릅니다. 마음 편히 임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 알겠어요.”

유상아는 내 말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다물고 허공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기묘한 점괘라도 만난 듯 심오한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다들 자신의 눈앞에 뜬 선택지를 읽고 있는 것이겠지.

그리고 나 역시, 나의 선택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배후(背後) 선택>

―당신의 배후를 선택하세요.

―선택한 배후는 당신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줄 것입니다.

1. 심연의 흑염룡

2.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3. 은밀한 모략가

4. 긴고아의 죄수

수수께끼 같은 4개의 선택지. 

나를 화신(化身)으로 삼고자 하는 성좌가 총 네 개라는 뜻이었다.

‘멸살법’의 주인공이 처음 받았던 선택지가 5개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4개도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성좌들은 절대로 자신의 진명(眞名)을 밝히지 않는다. 

때문에 모든 계약자들은 ‘심연’이니 ‘악마’니 ‘정원’이니 하는 수수께끼 같은 은유의 의미를 열심히 곱씹어 성좌의 정체를 유추해야만 한다.

물론 ‘멸살법’의 유일한 독자인 내게 이 정도 수수께끼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디보자.

먼저 ‘심연의 흑염룡’.

내 기억에 따르면 이 성좌는 성좌들의 집단인 흑운(黑雲)을 이끄는 강력한 존재였다.

진명은 잊었는데, 굉장히 긴 이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 성좌의 장점은 계약과 함께 강력한 전투력 보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체력과 근력 보정이 절실한 초반에는 ‘심연의 흑염룡’만한 성좌가 없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초반에 국한된 이야기지만.

이 성좌의 힘은 사용 빈도가 잦아질수록 정신이 오염되고, 나중에는 광기에 젖은 살인마가 되어버린다.

보통 ‘중2병’ 특성을 가진 녀석들을 후원하는 성좌인데...... 이 성좌가 왜 날 고른 건지 모르겠다.

뭔가 기분이 찜찜하니까 일단 이 녀석은 제외다.

두 번째,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이 선택지를 실제로 보게 되다니. 어쩐지 감개가 무량하다.

언뜻 사악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이 성좌는 사실 ‘악마 같은’이라는 수식어가 함정이다. ‘악마 같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결코 악마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여기에 ‘불’과 ‘심판’이라는 단어가 결합한다.

악마가 아니면서, 불을 통해 심판을 행하는 자.

역설적이게도 이 성좌의 주인은 천사였다. 

내 기억으로는 아마 ‘대천사 우리엘’이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 작중에 이 성좌를 배후성으로 고른 인물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꽤 괜찮은 선택지이긴 하지만, 일단은 이것도 보류다.

절대선(絕對善) 계열의 성좌들은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만큼 말도 안 되는 제약들이 있는 까닭이다.

세 번째, ‘은밀한 모략가’.

멸살법의 애독자인 나도 이 선택지는 처음 보았다. 

언뜻 지나가면서 거론된 성좌들 중에 이 성좌가 있을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모르겠다. ‘멸살법’을 좀 더 꼼꼼히 읽다 보면 뭔지 감이 올 것도 같은데.

확실한 건, 이 성좌의 주인은 그다지 강력한 존재는 아닐 것이다.

진명을 대체하는 관형사의 빈약함은 둘째 치고서라도, 고유명사의 사용이 전혀 없었다.

은밀한 모략가라니, 성좌를 표상하는 수식언으로는 지나치게 소박했다. 고로 이것도 보류.

마지막, ‘긴고아의 죄수’.

네 번째 선택지를 본 순간 나는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이 성좌에게서 초반부터 푸쉬가 오다니. 

몇 번이나 내 눈을 의심했지만 틀림없었다. 

틀림없는 ‘긴고아의 죄수’였다.

언뜻 보기에는 ‘죄수’라는 말이 들어있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이 성좌는, 사실 ‘긴고아’라는 고유명사를 눈여겨 봐야했다.

긴고아(緊箍兒). 

세상에서 가장 작은 감옥. 

어릴 적 서유기를 즐겨 읽은 사람이라면 쉽게 알아챌 수 있는 힌트였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긴고아의 속박을 받는 죄수는 오직 단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머리를 죄는 족쇄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화과산의 주인. 화안금정(火眼金睛)의 미후왕.

제천대성(齊天大聖) 손오공.

작중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 중에도 이 제천대성의 후원을 받는 존재가 있었다.

여의를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수백의 화신체들을 휩쓸고, 단 한 번의 뇌전으로 수천의 마물을 해치우는 경이로운 힘. 

그 부분의 묘사에 작가가 힘을 잔뜩 줬었기에, 기억도 선명했다.

어째서 이 강력한 성좌가 내게 관심을 보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제천대성의 화신이 된다면 나는 그 누구보다도 수월하게 새로운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앞쪽 열차 칸과 연결된 문을 보았다.

저 문의 너머에서, 나와 같이 선택 화면을 보고 있을 ‘그 녀석’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만약 내가 ‘제천대성’을 택한다면...... 놈을 이길 수 있을까?

[배후성 선택 완료까지 1분 남았습니다.]

시간이 촉박하게 흐르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마지막으로 선택지를 훑어보았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Episode 2. 주인공 (2)

[배후 선택이 종료되었습니다.]

나는 허공을 떠도는 메시지들을 보며 심호흡을 했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 이제 시작이구만.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선택에 크게 진노하였습니다.]

[흑운(黑雲) 소속 성좌들이 ‘심연의 흑염룡’의 노여움에 동요합니다. 당신은 당분간 ‘흑운’ 소속 성좌들의 후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예상한 메시지였기에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자기가 거절 좀 당했다고 패거리들까지 죄다 등 돌리게 만드는 성정이라니······ 아마 원작에서 김남운의 배후성이 이 녀석이었던 것 같다. 역시 그 성좌에 그 화신인 거겠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에게 실망하였습니다.]

[그녀는 앞으로 당신의 정의를 집요하게 감시할 것입니다.]

대천사 우리엘의 경우는 실망 선에서 그쳤다. 애초에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은 엄청난 불의라도 저지르지 않는 한 누군가를 미워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선택에 흥미로워 합니다.]

[2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은밀한 모략가의 경우는 아예 예상 밖이었다. 관형사로 추측한 성좌의 특성상, 아마 내 신중함을 높이 산 게 아닐까 싶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선택에 재미있어 합니다.]

그리고 제천대성······.

마음이 착잡해진다.

과연 제대로 된 선택이었을까?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엄청난 기회를 눈앞에서 떠나보낸 것일 수도 있다. 

[당신은 배후성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성좌를 고른다는 것은 곧 그만큼의 가능성을 제약 받는 것이기도 했다.

배후성과의 계약은 결코 공평한 형태의 ‘거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남을 거다.

하지만, 네놈들의 노리개가 되면서까지 살아남지는 않겠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다면, 지금 배후성을 택하지 않아도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어쩌면 최강의 배후성을 가진 화신들보다도 더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

[하하, 이것 참······ 흥미로운 선택을 한 분이 계시네요? 뭐, 그래요. 기회는 또 있으니까요.]

초승달처럼 휘어진 도깨비의 눈이 잠깐 나에게 머물렀다.

[자자, 그럼 다들 선택도 끝나셨을 테고, 여기서 잠시 쉬고들 계세요. 저는 이만 다음 시나리오 준비하러 가봐야 해서. 10분 뒤에 뵙죠!]

<배후 선택>이 끝난 후, 도깨비는 그딴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말이야 쉬라고 했지만, 이 10분은 정말 중요한 10분이었다.

10분 안에,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다음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한다. 

나는 머릿속으로 내가 가진 능력들을 떠올려 보았다.

[등장인물 일람], 그리고 [전지적 독자 시점].

아직 정확한 쓰임새는 알 수 없지만 대강 어떤 스킬들인지는 감이 온다. 이거라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다들 모여주세요.”

내 말에 서로 눈치만 보고 서 있던 생존자들이 쭈뼛쭈뼛 모여들었다. 제일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이현성이었다.

“안녕하세요, 이현성입니다.”

“김독자입니다.”

“반갑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일지는 모르겠지만 반갑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군인이고······ 이젠 군인이었다고 말해야 할 판이지만요.”

“자대랑 연락이 안 되시는 모양이죠?”

“······예.”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악력이 상당했다. 과연 ‘멸살법’의 초반 탱커 답달까.

이현성은 반드시 데리고 가야 한다. 

비록 지금은 별 볼 일 없어 보이지만, 이현성은 멸살법의 후반부로 갈수록 중요한 인물이었다.

“아, 그리고 독자 씨.” 

“예?”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독자 씨가 아니었다면 저흰 모두 죽었을 겁니다.”

“아뇨, 그건.”

“혹은, 살았어도 사람으로 살 수는 없었을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끄럽습니다.”

허리까지 깍듯이 숙이는 이현성.

마음이 조금 착잡해졌다.

사실 이현성은 내가 뭘 어떻게 하지 않았어도 살아남았을 테니까.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았다.

“하하, 우리 계약직이 큰 건 하나 했네. 독자 씨, 내 이름은 알지?”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어깨에 붙은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압니다, 한명오 씨.”

“어허, 한명오 씨라니? 부장님이라고 해야지?”

이 상황에서도 직급을 내세우다니, 정말이지 한명오다웠다.

미노소프트 제일의 꼰대이자, 권위주의의 끝판왕인 인간.

“여긴 회사가 아닙니다만.”

“하, 이것 보게. 이제 출근 안 하려고? 그런 버르장머린 어디서 배웠어?”

으르렁대는 한명오의 모습에, 기이하게도 나는 내가 알던 세계가 끝났다는 것을 새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눈앞의 이 남자는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만 해도 이 세계의 ‘포식자’였던 존재였다.

그리고 나는, 그 포식자 앞의 먹잇감에 불과했다. 분명 그랬었다.

“그리고, 아깐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했어. 응? 벌레 같은 게 있었으면 나한테 귀띔이라도 해 줬어야지. 그렇게 함부로 내던지면 어떡해?”

“······.”

“김독자 씨 나한테 잘 해야 돼. 계약 얼마 안 남았지?”

갑자기 우스워진다.

내가 살아온 세계는 이렇게나 연약한 것이었구나.

“한명오 씨.”

“엉?”

“그만 닥치세요.”

“뭐, 뭐?”

“아직도 상황 파악 안 됩니까? 아까 그 애새끼한테 맞았어야 정신 차릴 겁니까? 미노 소프트? 이 사단이 났는데, 아직 그런 회사가 남아 있겠습니까?”

얼굴이 희게 질린 한명오가 입을 뻐끔거렸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기왕 말을 꺼낸 거,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었다.

“한명오 씨만 문제가 아닙니다. 모두 정신 차리세요. 도깨비 말대로 이건 장난이 아니니까.”

“······.”

“다들 말은 안 해도 대충 무슨 상황인지는 눈치 챘을 거라 믿습니다. 특성창에 전용 스킬. 게임 같은 인터페이스. 혹시 아직도 감 못 잡으신 분 있으십니까?”

역시,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한국은 이래서 편하다. 스마트폰 보급률이 높으니 RPG 게임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은 없다.

폰 게임을 안 해본 경우라면, 하다못해 판타지 소설이라도 읽었을 것이다. 

이현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직 서면서 몰래 읽던 소설에나 나오던 일인데, 아직도 실감이 안 나네요. 역시 꿈은 아니겠죠?”

“당연히 현실입니다.”

내 의연한 대답에 이현성의 눈빛이 조금 바뀌었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당신에게 희미한 신뢰감을 느낍니다.]

[등장인물 ‘이현성’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이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서 좋군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독자 씨는 뭔가 의견이 있으십니까?”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나, 나가다니. 지금 제정신이야?”

“독자 씨, 저도 그건 좀······.”

이번에는 유상아까지 거들었다.

아직도 다들 정신 못 차렸군.

“그럼 언제까지 여기 있을 겁니까?”

사실 이성적으로 판단하자면 지금 내 주장은 사리에 맞지 않는 데가 있었다. 밖은 괴수들의 천국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안다. 지금 우리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

“다들 부모님 생각은 안 하십니까? 이 사달이 났는데 부모님들은 무사하실까요?”

“아, 안 그래도 아까부터 전화가 계속 먹통이에요. 카톡도 안 되고······.”

유상아가 울상을 지었다. 

역시 아직까진 유교가 강성한 한국답다. 저 이현성과 한명오마저 ‘부모님’ 한 마디에 다들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면. 

나는 고개를 숙인 이길영의 어깨를 강하게 쥐어 주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유상아였다.

“나가요. 나가야겠어요.”

“아, 안 돼! 아까 그 새끼 말 못 들었어? 여기서 쉬라잖아! 함부로 움직이면 대가리 깨진다고!”

“다수결로 하죠.”

유상아가 먼저 손을 들었고, 나와 이길영이 이어서 손을 들었다. 그리고 거기까지였다.

“······저도 자대로 가보긴 해야 합니다만, 그래도 이 상황에서 함부로 움직이는 건 위험할 것 같습니다. 아까 경고도 들었고요.”

“씨발, 니들끼리 나가! 난 안 나가! 안 나간다고!”

한명오야 어차피 도움이 안 되는 놈이니까 상관없었지만, 문제는 이현성이었다. 이현성은 어떻게든 데리고 가야 하는데······.

쿠웅!

두꺼운 철판이 우그러지며 굉음을 냈다. 3707칸으로 통하는 철문이 조금씩 찌그러지고 있었다.

“뭐, 뭐야?”

한명오의 고함에도 아랑곳 않고, 철문은 다시 한 번 굉음을 냈다.

쿠웅!

누군가가 철문 너머에서 문을 부수려 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기에 나도 생각이 많아졌다.

설마 다음 시나리오인가?

아니야. 아직 도깨비가 돌아오지 않았잖아.

그렇다면······.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오소소 솜털이 일어서며, 짧은 전율이 전신을 스쳤다.

놈이다.

“뭐, 뭐해! 다들 막아!”

한명오가 고함을 지르며 문 쪽에서 멀어졌다. 철문 쪽으로 다가가려는 이현성을 제지한 것은 나였다.

“가 봤자 못 막습니다.”

“예?”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나는 무거운 눈으로 철문을 노려보며 말했다.

“예? 하지만.”

“지금 나가지 않으면―”

3707칸의 유일한 생존자. 철문의 너머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는 너무 빤한 일이었다.

“다음 시나리오가 도착하기도 전에, 우린 모두 죽게 될 겁니다.”

그래, 드디어 놈이 오는구나.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이.





Episode 2. 주인공 (3)

나는 망설이는 이현성과 한명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 저 철문 너머에 있는 녀석에게 죽든가, 아니면 열차 밖으로 나가서 운을 시험해 보든가. 어느 쪽을 고르실 겁니까?”

“으, 으으······.”

“독자 씨, 저 철문 너머에 있는 게 꼭 적이라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강철검제는 결정적인 순간에 유약하다. 이현성이 파티의 리더가 못 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른 칸에서 넘어온다면 생존자일 가능성이 높을 텐데요. 한 번 만나보는 것도······.”

나는 대답 대신 피투성이가 된 객실을 훑어보았다.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움직인 이현성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보죠.”

“나, 나가자! 빨리 나가자고!”

순간 두 사람도 자각한 것이다. 

다른 칸의 생존자들도 우리와 같은 일을 겪었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에겐, ‘곤충’이라는 행운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도.

“이쪽은 고장 났어요!”

“젠장, 이쪽도 안 돌아가!”

이현성과 한명오의 외침을 들으며, 나 역시 개폐구를 확인했다. 아까는 결계가 쳐져 있었던 개폐구에 이제는 손을 댈 수 있었다.

통로를 잇는 개폐구를 제외하면 지하철 한 량의 출입 개폐구는 총 8개. 그리고 아직 확인하지 않은 출구는 총 3개였다.

쿵!

철문은 이제 1분을 채 버티기 힘들어 보였다. 

아무리 주인공이라고 해도 초반이라 근력 레벨이 충분하지 않을 텐데, 저 두꺼운 철문을 부술 생각을 하다니 솔직히 경이로웠다.

“독자 씨! 여기―”

멀쩡한 수동 개폐 장치를 발견했다.

“엽니다!”

그러나 개폐 장치가 매끄럽게 돌아간 것과는 별개로, 문은 한 번에 열리지 않았다. 오분의 일쯤 열리던 문은 턱에 걸린 것처럼 도중에 멈춰 섰다.

“······여기도 고장 난 것 같군요.”

“다른 곳은 어때요?”

“그나마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는 곳은 이곳뿐입니다.”

아이라면 모를까. 성인 남녀가 빠져 나가기엔 좁은 틈이었다. 한명오와 이현성이 문 한 짝씩을 붙들고 기를 써댔으나, 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보유 코인 : 4700 C]

코인의 사용처 중 하나는 종합 능력치를 올리는 것이다.

체력 레벨을 10으로 만드는데 이미 2700 코인을 사용했다.

남은 코인으로 근력 레벨도 높인다면 어떻게든 해결은 되겠지만, 언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초반 코인은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결국, 기대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이현성 씨. 스킬을 쓰세요.”

“예? 스킬이라 하심은······.”

나는 조용히 [등장인물 일람]을 가동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이 발동합니다.]

<인물 정보>

이름 : 이현성

나이 : 28세

배후성(背後星) : 강철의 주인

전용 특성 : 불의를 외면한 군인 (일반)

전용 스킬 : [총검술 Lv.2], [위장 Lv.2], [인내심 Lv.2], 

성흔 : [태산 밀기 Lv.1]

종합 능력치 : [체력Lv.8], [근력Lv.8], [민첩Lv.7], [마력Lv.5]

종합 평가 : 전체적인 능력치가 매우 준수합니다. 불의를 놀랍도록 잘 참았음에도 불구하고 성좌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또 다른 계기가 될 것입니다.

아무런 제약 없이 눈앞에 떠오르는 이현성의 정보들. 선택한 배후성도 특성도 다행히 내가 책에서 읽었던 그대로였다.

“아까 특성창 여셨을 때 확인하셨을 텐데요. 이현성 씨는 군인이시니까 분명 이 상황에서 쓸 만한 스킬이 하나쯤 있을 겁니다.”

“그게··· 하나 있긴 합니다만, 어떻게 쓰는지―”

“속으로 그 스킬을 사용한다고 생각하세요.”

“······그걸로 되는 겁니까?”

“돼요. 저도 아까 해봤으니까요.”

이현성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짓더니 뭔가를 결심한 듯 숨을 몰아쉬었다.

“흐아아아아압!”

문을 붙잡은 이현성의 이두박근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무사히 [태산 밀기]가 발동한 모양이었다.

사실 [태산 밀기]는 엄밀히 따지면 스킬이 아니라 ‘성흔(星痕)’이었다. 그리고 성흔은 배후성으로부터 받는 힘이다. 

내가 굳이 ‘스킬’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의심을 피해서였다.

드드드드드. 

마치 거대한 태엽을 돌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야! 이 친구 완전 장사였잖아!”

“됐다! 정말 됐어요!”

[등장인물 ‘이현성’이 당신을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등장인물 ‘이현성’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의심은커녕 도리어 신뢰도가 올랐다. 이럴 때 보면 이현성은 생각보다 단순한 인물이다.

“내리죠, 어서!”

하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나는 이길영을 들어 이현성에게 건네주었다.

“이현성 씨. 아이를 업어요.”

“알겠습니다.”

이제 철문은 거의 다 부서져 있었다. 하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당장 문제는 저 철문이 아니다. 

[······이것 참.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아까 제가 말했죠? 아무데도 가지 말라고. 젠장! 아직 시나리오 준비가 안 끝났는데―]

화가 난 듯한 모습의 도깨비가 동호대교 상공에 떠 있었다.

“으아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나오지 말자고 했잖아!”

머리가 터질 거라고 생각했는지 한명오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휴······ 뭐 어쩔 수 없죠. 정말 운이 좋은 인간들이라니까.]

왜냐하면 바로 열차의 문을 여는 순간부터가 ‘두 번째 시나리오’의 시작이니까.

[두 번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서브 시나리오 - 탈출>

분류 : 서브

난이도 : E

클리어 조건 : 끊어진 다리를 건너 옥수역으로 진입하시오.

제한시간 : 20분

보상 : 200코인

실패시 : ???

+

“독자 씨, 뭔가 이상해요. ‘끊어진 다리’라고 되어 있는데, 아직 다리는······.”

“신경 쓰지 말고 달려요! 빨리!”

“아, 알겠어요!”

사실 유상아의 지적이 맞다.

다리는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

그건 바꿔 말하면, ‘다리는 반드시 끊어질 것’이라는 얘기였다.

“독자 씨도 어서 오세요!”

“갑니다.”

아직 다리가 끊어지지 않은 것은 우리가 ‘너무 빨리’ 열차에서 내린 까닭이었다. 

도깨비가 말한 준비 시간은 10분.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3분이나 일찍 탈출했다.

비겁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 시나리오는 그런 편법을 쓰지 않고는 클리어가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유상아나 이길영 같은 짐이 끼어있다면 더욱.

“헉, 헉. 역시 이현성 씨는 군인이라 그런지 체력이 좋네요.”

“입 열지 마세요. 힘 빠지니까.”

일행 중 가장 앞서 달려간 것은 아이를 업은 이현성이었다. 

코인 투자도 안 한 순정 상태의 몸으로 체력, 근력, 민첩의 총합이 23을 넘어서는 괴물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다음이 허겁지겁 뛰어가는 한명오였고, 마지막이 나와 유상아였다. 아슬아슬하긴 해도 시간을 맞출 수 있을 듯싶었다.

“으앗, 저게 뭐야!”

한명오의 비명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한강의 중심에서 뜬금없이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더니 물보라가 터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물보라의 중심에서 나타난 거대한 괴수.

어룡(魚龍)이었다.

문제는 그 어룡의 크기가 아까 유리창 너머로 본 녀석의 곱절은 되어 보인다는 것.

저 정도면 씨-써펜트가 아니라······ 씨-커맨더(Sea-Commander) 급은 되겠는데.

일반 어룡인 씨-써펜트만 해도 7급 괴수다. 9급 괴수인 땅강아쥐만 돼도 보통의 인간이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감안하면, 7급 쯤 되면 보통의 인간은 이빨만 스쳐도 찢겨 죽는다.

즉, 지금 오는 저 녀석은 초반의 화신체들이 절대로 잡을 수 없는 괴수였다. 

물론 잡을 필요는 없다. 잡으라고 만든 놈도 아니고.

쿠구구구구!

한강물이 해일처럼 밀려오며, 어룡의 아가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다리를 통째로 물어뜯어 붕괴시키려는 모양이었다.

“다리가 부서지겠어!”

“달려요! 달리면 건널 수 있으니까!”

이제 남은 거리는 200미터 남짓. 내 계산이 맞다면, 이 속도면 충분히 다리가 붕괴하기 전에 건널 수 있었다.

[게임이 너무 쉬우면 재미없죠?]

물론 어디까지나, 변수가 없을 때의 이야기였지만.

[시나리오 난이도가 조정되었습니다.]

[시나리오 난이도 : E -> D]

아차, 하는 순간 허공에서 도깨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도망가면 재미없잖아요? 분위기를 좀 연출해 보자구요!]

[죽은 자의 사념이 돌아옵니다.]

[주변의 대지가 검은 에테르로 차오릅니다.]

[마인(魔人)들이 깨어났습니다!]

그워어어, 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뒤쪽에서 뭔가가 쫓아오고 있었다. 유상아가 사색이 되어 중얼거렸다.

“조, 좀비?”

좀비를 닮은 시체들이 엄청난 인파를 이루며 몰려오고 있었다. 개중에는, 우리와 같은 칸에 탔던 사람들도 보였다.

“조금만 더 가면 돼요! 빨리!”

어룡과의 거리는 이제 백 미터도 남지 않았다. 다행히 이현성은 이길영을 업고 안전선을 돌파했다. 문제는 나를 비롯한 나머지 셋이었다. 한명오가 비명을 질렀다.

“이, 이 자식들!”

쫓아오는 마인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지하철 안에서 죽은 사람들만 있다면 충분히 도망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워어어!”

다리 위에서 죽은 운전수들까지 마인이 되어 나타났다는 것. 

이현성이 돌파한 길은 순식간에 시퍼런 안광을 빛내는 마인들로 뒤덮였다. 나는 길을 막은 마인들과, 다가오는 어룡을 번갈아보았다.

“······다들 엎드려요.”

이미 늦었다.

―콰아아아앙!

다리의 지축이 크게 흔들리며, 거대한 어룡의 입이 동호대교 전체를 흔들고 지나갔다. 

자욱한 먼지 사이로 언뜻 어룡의 비늘이 빛나는가 싶더니, 한강물이 허공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곳곳에서 피비린내와 물비린내가 진동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사위가 걷히자 주변의 정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잘려 나간 철골들과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어룡이 깨끗하게 먹어 치운 마인들의 사체가 육편이 되어 너부러져 있었다.

다리가 끊겼다.

“···독···씨! ······찮아요?”

약간 떨어진 곳에서 유상아가 한명오를 부축한 채 서 있었다. 

종전의 지진으로 한쪽 다리를 다친 것인지, 한명오는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

끊어진 다리의 건너편에서 이현성과 이길영이 뭐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안전지대를 넘어간 그들의 목소리는 결계에 가로막혀 들리지 않았다.

어떡한다.

다리가 끊어지는 경우를 가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명오와 유상아가 함께 있는 경우는 상정해 본 적이 없었다.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누군가가 성좌의 가호를 받았습니다.]

[성좌의 가호로 시나리오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발동합니다.]

목소리와 함께, 끊어진 동호 대교의 사이로 눈부신 빛의 다리가 생성되었다. 그리고 떠오른 메시지 창.

+

[데우스 엑스 마키나 – 짝수 다리]

설명 : 성좌의 가호로 만들어진 빛의 다리. 오직 ‘짝수’의 인원만이 다리를 건너갈 수 있다. 홀수의 인원이 다리를 건너려 할시, 다리는 즉시 소멸한다.

+

“독자 씨. 이거, 제 머릿속에서, 그러니까 갑자기―”

횡설수설하는 유상아와 눈이 마주쳤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성좌가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고 시나리오에 개입할 수 있는 권능.

“······유상아 씨의 후원자군요.”

어떤 성좌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유상아를 자신의 화신으로 선택했고, 그녀가 살기를 원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출현은 ‘멸살법’ 전체로 살펴봐도 드문 현상이었다.

그리고 유상아는 본래 죽었어야 할 인물이었다.

순간 의문이 들었다. 

유상아는 대체 어떤 성좌를 배후성으로 삼은 거지?

[해당 인물의 정보는 ‘등장인물 일람’으로 열람할 수 없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나는 조금 놀랐다.

내 스킬로 볼 수 없는 인물이라고? 대체 왜? 특별한 배후성을 가졌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신 방벽을 가지고 있나? 하지만 초반부터 그런 걸 가지고 있을 리가······ 아니, 잠깐만. 설마 이거.

“독자 씨, 이제 어떡해요?”

당황한 유상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쿠구구구. 

한강물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다리를 통째로 먹어 치운 어룡이 한강의 반대편에서 거대한 몸을 선회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입술을 깨문 채로 다리의 설명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오직 ‘짝수’의 인원만이 다리를 건널 수 있다.

결국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비극을 좋아하는 빌어먹을 성좌들이 만든 장난감인 것이다.

모두가 살아날 방법은 없다. 

눈이 마주친 한명오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결국, 누군가는 죽어야만 한다.





Episode 2. 주인공 (4)

그때, 유상아가 소리쳤다.

“독자 씨! 뒤!”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이자, 피 묻은 주먹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왔다. 거무튀튀한 기운이 휘감긴 익숙한 주먹이었다.

쓰러지며 반사적으로 내뻗은 발차기에 뭔가가 걸려 나가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어떤 놈일지 감이 왔다.

9등급 인외종, 마인(魔人).

검은 에테르에 감염된 인간의 변이종. 

마인은 9등급임에도 불구하고 고위험종으로 분류되는 괴물이었다. 보통의 인간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마인들은 좀비와 다를 바가 없지만, 지금처럼 숙주가 남다를 경우는 특히나 위험했다.

나는 머리가 터진 남고생의 명찰을 보았다.

“······김남운.”

몇 십분 전에 머리가 터졌던 녀석이, 이젠 마인이 되어 나를 노리고 있었다.

터져나간 김남운의 성대가 기괴한 형태로 꿈지럭 대고 있었다.

“그워어억.”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해당 인물은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의 발동이 취소됩니다.]

젠장, 역시 안 되나.

촤아악!

길게 자라난 김남운의 검은 손톱에 허벅지가 긁혔다. 

화상을 입은 듯한 통증이 다리 전체로 번졌다. 나이프로도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았던 피부가 겨우 손톱에 찢어졌다.

마인이 위험한 이유가 이것이다.

마인이 된 인간은 생전보다 몇 배나 강해진다.

“유상아 씨, 당장―”

그 말을 하는데 뭔가 기분이 싸아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무슨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것 놔요! 놓으라구요! 독자 씨! 독자 씨!”

분명 방금 전까지 다리를 절고 있었던 한명오가, 반항하는 유상아를 들쳐 멘 채 놀라운 속도로 다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호구력에 감탄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희생정신에 감동합니다.]

[1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그렇구만.

날 버리고 갔다 이거지?

그런데 달려가는 본새가 좀 이상했다.

외발로 달리는데도 올림픽 선수 못지않게 빠른 발놀림.

당연히 배 나온 한명오의 전용 스킬일 리는 없고, 배후성의 성흔일 것이었다.

[외발 준족]

그리고 나는 그 성흔을 제공하는 성좌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멀어지는 한명오를 향해 ‘등장인물 일람’을 사용했다.

[해당 인물의 정보는 ‘등장인물 일람’으로 열람할 수 없습니다.]

역시나 이번에도 ‘등장인물 일람’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외발 준족]의 성흔은 성좌 ‘절름발이 사기꾼’의 것이다.

그리고 절름발이 사기꾼은 정신 방벽계의 성흔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한명오가 원래부터 그런 스킬을 가지고 있을 리도 없다. 

즉, 내 스킬이 실패한 것은 한명오가 가진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바보였군.

나는 눈앞에 떠 있는 메시지 창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되는 걸 어렵게 생각했다. 

‘등장인물 일람’은 말 그대로 등장인물들의 정보를 읽어내는 스킬. 

유상아와 한명오는 본래의 ‘멸살법’에는 나오지 않았던 인물들이었다. 내가 살리지 않았더라면 죽었을 인물들. 그러니 ‘등장인물 일람’으로 정보를 확인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륵! 그륵! 그륵!”

한쪽에는 의미 모를 소릴 지껄이며 다가오는 김남운과 마인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다리를 반절 이상 건너간 한명오. 이현성과 이길영은 이미 다리 건너편 안전 지역으로 진입해버렸기에 도움을 구할 수도 없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나 혼자서는 다리를 건널 수 없다.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마인 하나를 제압해서 다리를 건넌다? 시도할 가치는 있겠지만 성공률이 너무 낮았다. 마인은 이름과 달리 분류상 인외종이었고 인외란 곧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아아악!”

달려들던 마인 몇 마리가 중심을 잃고 난간 아래로 떨어졌다.

콰지지직!

떨어진 마인들은 그대로 어룡들의 먹이가 되었다. 피라냐처럼 달려든 어룡들은 삽시간에 마인들을 수십 조각의 육편으로 으깼다.

스멀스멀 공포가 밀려왔다.

한순간이라도 다리 위의 인원이 ‘홀수’가 되면, 나는 저놈들과 같은 꼴이 될 것이다.

혼자서 건너는 것은 무리.

그렇다면?

“······천천히 하자.”

스스로를 다스리듯 중얼거렸다.

지금은 그런 침착함이 필요했다.

아직 몇 가지 쓸만한 방법은 남아있고, 중요한 것은 눈앞의 것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나는 호흡을 조절하며 달려드는 마인들의 다리를 잡아 걸었다.

“그워억?”

다행히 눈이 없는 놈들이어서 관성을 이용해 난간 아래로 추락시키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갸아아악― 콰지직!

착실하게 떨어트리면서 숫자를 줄인다. 허공에 떠 있는 도깨비의 초시계가 깜빡이고 있었다. 

이제 시나리오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15분. 

“후······.”

사각에서 날아든 손톱에 어깻죽지에 상처가 났다. 아무리 마음이 침착해도, 아무리 알고 있는 정보가 많아도, 훈련되지 않는 육체만큼은 어쩔 수가 없다.

“그워어어억!”

야성만 남은 김남운의 공격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왼쪽 어깨. 

오른쪽 허벅지. 

정수리.

흐름을 끊어야 했다. 나는 날아드는 손톱을 가까스로 피하며, 녀석의 다리를 발로 찍었다.

“갸아악?”

그러나 통각을 잃은 녀석은 조금도 타격을 받지 않았다. 

뒷걸음질을 치자 끊어진 다리의 철골이 밟혔다. 

먹이를 원하는 어룡들이 기둥 아래쪽에서 날뛰는 소리가 들렸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역경에 즐거워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200코인을 후원합니다.]

코인은 꾸준히 축적되었다. 이제 보유 코인은 5000코인. 초반 치고는 상당히 많은 코인을 모았다.

[와우, 제법 잘 버티네요. 자자! 저 불쌍한 친구를 위해 가호를 내려주실 성좌님들, 안 계신가요?]

장사꾼 같은 도깨비의 목소리.

찢어 죽이고 싶다.

[이런, 진짜 아무도 안 계신가요?]

당연히 없겠지.

<배후 선택>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나를 후원하는 성좌가 있는 게 이상하다.

[그러게 뭐랬어요. 있을 때 잘 해야지. 가엾게도.]

또 다시 이어진 김남운의 공격에 허리를 내주고 말았다. 

물론 나 역시 김남운의 왼쪽 옆구리와 어깻죽지를 칼로 헤집어 놓은 상태였다. 덕분에 녀석의 배에서는 내장이 줄넘기처럼 덜렁거리고 있었다.

마인을 해치우기 위해선 심장을 완전히 터뜨려야 한다.

하지만 마인의 피부는 심장 부근이 가장 단단해서, 맥가이버 칼의 예리함만으로 뚫는 것은 무리였다.

젠장, 전투 스킬 하나만 있어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전용 스킬, ‘책갈피’가 발동합니다.]

······책갈피?

[‘인물 책갈피’가 활성화 됩니다.]

[사용 가능한 책갈피 슬롯 : 3개]

[활성화 가능한 책갈피의 목록을 불러옵니다.]

<책갈피에 등재된 인물 목록>

1. 망상악귀 김남운 (이해도 25)

2. 강철검제 이현성 (이해도 35)

3. 빈슬롯

책갈피. 3천 편의 ‘멸살법’을 읽었지만 이런 이름의 스킬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본 적은 없어도 어떻게 쓰는지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1번 책갈피 활성화.”

샤라락, 하는 느낌과 함께 머릿속에서 책장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등장인물 김남운이 남긴 ‘멸살법’의 장면들이었다.

「하하하하핫! 힘이 넘친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새로운 세계에는 새로운 법칙이 필요한 법이야.」

김남운의 기억들이 밀려들어오며, 온몸의 근육 신경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타인의 힘이 내 안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1번 책갈피가 활성화 되었습니다.]

[책갈피 스킬의 레벨이 낮아 활성화 시간이 단축됩니다.]

[활성화 시간 : 1분]

1분. 그거면 충분하다.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등장인물이 가진 스킬의 일부만이 활성화됩니다.]

[「흑화 Lv.1」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거친 숨을 들이키며 나를 향해 돌진하는 김남운. 온몸에 휘감긴 검은 기운이 터질 듯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나는 뒤축에 있는 힘껏 힘을 싣고, 김남운을 향해 마주 달려 나갔다.

적어도 똑같은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절대로 지지 않는다.

그 순간 나는 정말로 김남운이었다. 주인공과 함께 ‘멸살법’의 세계를 호령하던 미친 살인마. 

흑화가 제대로 발동한 상황에서는 누구도 쉽게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던, 전장의 망상악귀(妄想惡鬼).

“갸아아아아악!”

맥가이버 칼이 꺼림칙한 감각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간다. 뚜둑거리며 부서지는 근육과 살점들.

왼쪽 어깻죽지부터 심장 어림까지. 인간의 육체가 통째로 잘려 나가는 소리와 함께 마인 김남운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아직 눈이 있었다면 그는 분명 나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으, 죽. 어어. 죽.으.어.”

세상을 비관하고, 오래도록 일탈을 꿈꿔온 청년. 그럼에도 ‘멸살법’이 시작되지 않았다면 평범하게 수능을 보고 대학에 가서, 캠퍼스 라이프를 누렸을지도 모르는 청년.

“···죽.고.싶.지···않···.”

나는 난간 아래로 추락하는 김남운을 말없이 배웅했다.

분명 증오했던 인물임에도, 그 순간만큼은 어쩐지 묘한 비감이 들었다.

[등장인물 ‘김남운’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1번 책갈피가 비활성화 되었습니다.]

무지막지한 탈력감과 함께 밀려드는 피로감.

힘들다.

정말로.

“그워어어어!”

이제 남은 시간은 10분.

아직도 많은 마인들이 주춤거리며 밀려들고 있었다.

레벨 10의 체력으로도 저 많은 숫자를 감당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혼자서 감당할 생각도 없었다.

조금 늦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콰직! 콰지지직!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는 파쇄음.

그럴 줄 알았다.

놈이라면 업적과 후원금을 통째로 챙기기 위해 저런 무모한 짓을 벌일 거라 생각했으니까.

콰지직! 뿌드득!

분명 사람의 육체끼리 부딪치는 광경임에도 꼭 거대한 철퇴가 살점을 으깨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사실, 코인을 이만큼 모았으면 아무리 주인공이라고 해도 한 판 붙어 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내가 얼마나 큰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겠다.

열차가 정지한 곳에서 정확히 일직선으로, 마치 전차가 돌격하는 것처럼 마인들이 마구잡이로 터져 나가고 있었다.

저게 정말 ‘인간’이 만드는 풍경이라 할 수 있을까.

“가아악?”

얼굴이 없는 마인들 조차 뭔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는지 하나 둘씩 등을 돌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콰지직!

사내는 순식간에 나를 위협하던 마인들을 모조리 찍어 터뜨린 후 내 앞에 당도했다. 어떤 무기도 없이, 오직 두 주먹만으로 마인들을 격살하는 압도적인 무력.

미리 마음을 다 잡고 있었음에도 등허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녀석을 상대한다고?

절대로 무리다.

지금보다 종합 능력치가 두 배 이상 상승해도, 이 녀석은 이길 수 없다.

“너, 뭐냐?”

사내의 서늘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그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반사적으로 ‘등장인물 일람’을 가동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이 발동합니다!]

[해당 인물의 관련 정보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이 ‘요약 일람’으로 변환됩니다.]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유중혁

특성 : 회귀자 <3회차> (신화), 프로게이머 (희귀)

전용 스킬 : [현자의 눈 Lv.8], [백병전 Lv.8], [무기 연마 Lv.8], [정신 방벽 Lv.5], [군중 제어 Lv.5], [추론 Lv.5], [거짓 간파 Lv.4]······.

끝도 없이 이어지는 전용 스킬의 목록들. 그 목록의 끝에서, 억센 남자의 손이 나타나 내 목을 틀어쥐었다.

“너,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첫 번째’ 방법. 그 방법을 살아 증명하는 이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회귀자 유중혁.

이 세계의 장대한 비극은, 바로 이 인물로부터 시작된다.





Episode 2. 주인공 (5)

누가 봤다면 꽤나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을 것이다. 

다 큰 성인 남성이 멱살을 잡혀 원숭이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라니.

짝수 다리 건너편에서 이쪽을 보는 이현성들이 보였다. 

애타는 얼굴들이었지만, 사실 이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안전 결계 때문이다. 이쪽에서는 저쪽을 볼 수 있지만, 저쪽에서는 이쪽을 볼 수가 없다.

“이름.”

“뭐?”

“이름 뭐냐고.”

누가 주인공 아니랄까봐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하지만 여기서 자극하는 것은 좋지 않다.

“김독자다.”

“이상한 이름이군.”

“그런 말을 많이 듣는 편이지.”

순간 배가 움푹 들어가며 속이 뒤집어진다 싶더니, 유중혁의 주먹이 내 복부에 박혀 있었다.

“······윽.”

나이프를 튕겨 내는 피부인데도 이 녀석의 공격은 상당히 아팠다.

“단단한 몸이군. 벌써 코인 사용법을 익힌 모양이지?”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퍼억, 하고 또 다시 출렁이는 뱃가죽. 흘러나오는 신음을 가까스로 삼켰다. 

이 녀석, 근력 레벨이 최소 15는 넘는다. 

이제 고작 메인 하나와 서브 하나가 지나갔는데 이 정도라니. 역시 타고난 괴물은 다르다.

“쓸데없는 대답은 삼가라. 네놈은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한다. 알겠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그러나 최악의 가정이었고, 결코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던 상황이었다.

초반부의 유중혁은 다른 어떤 인물보다도 위협적이다. 

무려 3회차의 회귀를 겪으며 닳아버린 인격. 비대해진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깎아낸 원칙들. 유중혁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결코 망설이거나 머뭇거리지 않는다.

“대답은?”

“······그러지.”

“존댓말 해라.”

“싫은데?”

이번에는 양 손을 들어 주먹을 막았다. 손뼈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지만, 충격은 감쇄되었다. 

조금 놀란 듯, 유중혁의 눈동자가 커졌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당신을 경계합니다.]

그러든지 말든지. 아무리 네놈이 주인공이라도, 이대로 맞아주기만 하는 건 나도 성에 안 차거든.

“미안하지만 그쪽이 나보다 어리거든, 프로게이머 유중혁 씨. 그러니 존댓말은 당신이 해야지.”

“······나를 알고 있나?”

“알지. 나 이래봬도 게임회사 직원이라고.”

거짓말이었다. 아무리 내가 아무리 게임 회사에 다닌다고 해도 프로게이머들의 이름까지 일일이 외우고 다니지는 않는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 ‘유중혁’은 내게 소설 속의 인물일 뿐이었다.

“그쪽 유명하잖아. 한때 팬이었다고.”

유명하다는 것도 그저 작중의 설정일 뿐이었고. 그렇다고 해서 ‘팬’이었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나는 유중혁을 좋아했고, 싫어했고, 원망했고, 응원했다.

그렇게 3천 편의 이야기를 유중혁과 함께했다.

“팬이라. 오랜만에 듣는 말이군.”

유중혁은 잠시 추억에 잠긴 듯한 눈빛을 지었다. 하지만 정말로 잠시 뿐이었다.

“건방진 건 용서해주지. 하지만 네 상황이 바뀌는 건 없다.”

“내 꼴을 보면 그런 것 같네.”

나는 텅 빈 허공 위에서 연 꼬리처럼 흔들리는 두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하나뿐이다.” 

“말해.”

“지하철에서 어떻게 살아난 거지?”

역시 그걸 묻는군.

“대답하면 살려줄 건가?”

“하는 거 봐서.”

거짓말이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내가 괜히 멸살법의 유일한 독자겠어.

머릿속에서 수많은 레퍼토리가 시뮬레이션 되었다. 

어떤 말을 해야, 이 빌어먹을 회귀자를 설득할 수 있을까.

[등장인물 ‘유중혁’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해당 인물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이미 대단히 높은 수준입니다.]

······응?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의 사용 조건에 도달했습니다!]

[전용 스킬을 발동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머릿속으로 폭포처럼 밀려드는 누군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칸에서 살아남아야 할 자는 이현성과 김남운 뿐이었다.」

「그런데 김남운이 죽었고, 다른 놈들이 살아남았다.」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이 놈은 대체 뭘까.」

「정보를 캐낸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방해 요소를 발견하면... 죽인다.」

스쳐가는 밀도 높은 생각들. 

분명 위기일발의 상황이었음에도 자꾸만 입 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제 시나리오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5분.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대한 간결하고, 짧고, 정확한 어휘로 전개된 이야기였다. 

지하철에서 처음 ‘도깨비’가 나타난 순간부터, 첫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기까지의 일. 

물론 내가 얻은 스킬이나 중요한 사안은 일절 배제한 말하기였다.

“······곤충을 죽여서 시나리오를 클리어 했다고?”

“운이 좋았지.”

유중혁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이 입을 벌리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은 듯했다.

「미래가 완전히 바뀌었다.」

충격을 받을 법도 했다.

본래 3807 칸의 인간들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배틀 로얄을 겪어야 했고, 살아남는 것은 이현성과 김남운 뿐이어야 했으니까.

“눈썰미가 대단하군. 칸 안에 곤충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지?”

유중혁의 눈빛에 살기가 어리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이 녀석도 회귀자인가?」

「만약 그렇다면, 지금 당장 죽여야 한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역시나 그런 오해를 먼저 하는군.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폭발이 있었어.”

“폭발?”

“곤충을 발견할 수 있었던 건 앞 칸에서 있었던 폭발 때문이란 얘기야.”

앞 칸, 이라는 말에 유중혁의 몸이 멈칫했다.

“무슨 소린지 쉽게 설명해.”

“폭발 때 아이 하나가 갑자기 넘어지면서 채집망을 떨어트렸어. 그래서 난 그걸 우연히 주웠고.”

“······수상한 우연이군.”

“우연은 늘 수상한 법이야. 못 믿겠으면 결계 너머에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봐. 저기 서 있는 애가 그때 채집망을 떨어트린 애니까.”

옥수역 쪽으로 가는 길에 놓인 결계 너머로,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직 시나리오가 끝나지 않았기에 저쪽의 사람들은 이쪽을 향해 다가올 수도, 말을 걸 수도 없었다.

유중혁은 그쪽을 흘끗 일별할 뿐,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일순 눈앞이 부옇게 변하며, 유중혁의 것으로 보이는 기억들이 눈앞을 스쳐갔다.

「그랬군.」

「폭발.」

「이 녀석은 회귀자가 아니야.」

「미래가 바뀐 것은 이 자 때문이 아니다. 미래가 바뀐 것은, 오히려...」

「나 때문인가.」

강력한 폭발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람들과,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보는 유중혁.

「지난 회차와는 다르게, 내가 그들을 죽이고 시작했기 때문에.」

[전지적 독자 시점]의 영향인지, 나는 유중혁이 겪는 정신적 고통을 고스란히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질문은 끝났어?”

“······그래.”

“그럼 이것 좀 놓지? 그리고 사이좋게 옥수로 가자고. 클리어 시간도 얼마 안 남았고.”

“그건 곤란해.”

그러나 주인공이 괜히 주인공이 아니다. 

“모든 것이 너무 딱 들어맞아.”

나는 지금까지 유중혁 만큼이나 신중한 주인공을 본 적이 없다.

「초보자가 이렇게 침착할 수 있을 리 없다.」

「변한 세계에 비정상적으로 잘 적응하고 있어.」

「김남운을 죽인 것은 아마 이놈이겠지.」

「쓸모를 넘어서서, 위험하다.」

유중혁의 오른 쪽 눈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녀석이 무슨 짓을 할지 깨달았다. 

사실 아직까지도 이 녀석이 내게 ‘그걸’ 쓰지 않았다는 게 조금 이상하긴 했다.

현자의 눈.

유중혁이 가진 최강의 탐지 스킬. 상대방의 특성창 뿐만 아니라 숨겨둔 히든 정보까지 엿볼 수 있는 SS급 스킬이 바로 저 [현자의 눈]이었다.

놈이 저걸 사용한 이상, 이제 내 정체가 밝혀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는 아직 내 ‘특성’과 ‘스킬 목록’을 모른다.

유중혁에게 내 정보를 들킨다 해도, 이 기회를 통해 나 역시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잘만 하면 알게 된 정보들을 통해 이 상황을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고.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발동합니다!]

[‘제 4의 벽’이 탐지 스킬 ‘현자의 눈’을 간파했습니다!]

허공에 스파크가 튀며, 유중혁의 몸이 비틀거린 것은 그때였다.

「······큿, 뭐야?」

유중혁이 자신의 오른쪽 눈을 감싸 쥔 채 당혹스런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네놈······ 정체가 뭐지?”

미안하지만 그게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현자의 눈’을 차단했습니다.]

설마, 저 ‘현자의 눈’을 방어할 수 있는 스킬을 내가 갖고 있을 줄은 몰랐다. ···[책갈피]에 이어서 이번엔 [제 4의 벽]이라.

이러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이제 유중혁은 나를 믿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죽여야 한다.」

그는 자신이 알 수 없는 것을 신뢰하는 인간이 아니니까.

“유중혁.”

그렇다면 나 역시, 작전을 바꿔야 했다.

“당신은 믿을 수 있는 동료가 필요해.”

“······무슨 소리지?”

“46번 시나리오는 혼자서 깰 수 없어. 알고 있을 텐데?”

유중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떻게 그걸 알고 있지? 역시 네놈은―”

“내가 누구냐가 중요한 게 아냐.”

나는 유중혁의 심유한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회귀자는 아니다. 이 세계의 회귀자라면, 내가 모를 리가 없어.」

「그러면 이놈은 뭐지?」

「······설마?」

내가 가진 패를 숨길 수도 없고, 최고의 패를 내놓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상대방이 오해할 패를 내놓는 것.

“유중혁, 나는 ‘네가 모르는 미래’를 알고 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거짓 간파’스킬을 발동합니다.]

[‘거짓 간파’가 당신의 말이 진실임을 확인했습니다.]

유중혁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어떻게?”

“어떻게겠어?”

「그럴 리가. 안나 크로프트 말고 예언자가 또 있었단 말인가? 그것도 한국에?」

예언자.

멸살법에서 유일하게 미래를 볼 수 있는 특성이자, 모든 특성들 중 유일하게 ‘탐지 스킬 무효화’를 패시브로 가지고 있는 특성. 

실제로 ‘멸살법’의 세계에는 ‘예언자’ 특성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 하나 있었다.

「오직 예언자만이 내 ‘현자의 눈’을 방어할 수 있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유중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미래시(未來視)’를 사용할 수 있는 건가?”

“비슷한 걸 할 수 있어.”

“내가 이곳으로 올 줄 알고 있었겠군.”

“그래.”

「그런가. 이 자가 예언자라면, 이 자의 모든 행동은 납득이 된다.」

흐름이 바뀌고 있었다. 

유중혁의 동요가 그대로 전해져 온다. 이제 기회는 지금 뿐이었다.

“유중혁 당신이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 당신 또한 미래의 일들을 알고 있을 거야. 그렇지?”

“······.”

“하지만 그 지식이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겠지.”

회귀자의 유일한 약점.

그것은 자신이 미래의 정보를 이용해 현재를 바꾸는 순간 ‘미래가 바뀐다’는 것. 즉, 모든 회귀자들은 언젠가 ‘자신이 모르는 세계’를 살아가야만 한다.

“나를 동료로 삼아. 난 당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어.”

그러니 지금의 유중혁에게, ‘예언자’만큼 매력적인 동료는 없다.

실제로 지금의 나라면, 예언자와 같은 형태는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이야기의 유일한 독자였으니까.

[시나리오 종료까지 1분 남았습니다.]

고개를 숙인 유중혁은 고민을 시작했다.

「‘예언자’라면 확실히 도움이 된다.」

[시나리오 종료까지 50초 남았습니다.]

「46번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훗날 ‘차라투스트라’ 놈들과 싸울 때에도. 하지만······ 믿을 수 있을까?」

[시나리오 종료까지 40초 남았습니다.]

「동료.」

마침내 유중혁이 고개를 든 것은, 내가 초조한 심경으로 시계를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결정했다. 너를 동료로 삼겠다.”

[과도한 몰입으로 정신력이 심각하게 소모되었습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이 해제됩니다.]

피로감 때문인지 안도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하필 이 시점에서 전용 스킬이 풀리고 말았다.

그러자 유중혁의 얼굴은 어떤 해설도 쓰여 있지 않은 철학서처럼 난해하게 느껴졌다.

유중혁은 나를 데리고 ‘짝수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멱살은 잡은 채였지만······ 그래도 이제 일이 잘 풀리려나 싶었다. 이 빌어먹을 회귀자를 내가 설득했다니, 스스로가 대견한 지경이다.

그런데 짝수 다리를 거의 다 건넜을 무렵, 안전지역을 코앞에 둔 유중혁이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췄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뭐지?”

“네가 정말 ‘예언자’라면 네 미래에 관한 것도 알 수 있을 거야. 그렇지?”

고요한 유중혁의 두 눈을 보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놈의 시험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목줄기를 쥔 손의 악력에 숨이 막혀 왔다.

“컥.”

나를 들어 올린 녀석의 손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이윽고 휑한 바람이 발끝을 훑고 지나갔다.

발밑은 완전한 허공.

피냄새가 섞인 한강의 물비린내 사이로, 어룡들이 입을 벌린 채 먹잇감을 향해 뛰어 오르고 있었다.

“지금 내가 이 손을 놓을까, 아니면 놓지 않을까?”

처음으로 등허리에 식은땀이 맺혔다.

생각하자.

해설 따위 없어도, 나는 누구보다 이 녀석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내가 아는 유중혁의 모습을 떠올렸다.

[시나리오 종료까지 20초 남았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유중혁.”

놈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하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아는 유중혁이라면 다른 결말은 없다.

나는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씨-커맨더를 보며 말을 이었다.

“먼저 두 가지만 말해두지.”

“······뭐?”

“하나, 나는 당신의 부하가 아니야. 그러니 이제부터 나를 공정히 대해주길 바란다.”

“······.”

“둘, 내가 당신에게 협력하듯, 당신 역시 내게 협력할 것을 약속해라.”

유중혁이 흥미롭다는 듯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래서 대답은?”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만 이 손 놓고 꺼져, 빌어먹을 새끼야.”

그리고 나를 지탱하던 힘이 사라졌다. 새삼 이게 중력의 힘이구나 싶을 정도로 가공할 인력이었다. 

추락하는 와중에도 언뜻 유중혁의 얼굴이 보였다. 유중혁은 무엇이 그리 기쁜지,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개자식.

“믿겠다. 확실히 너는 예언자가 맞군.”

추락하는 지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거대한 씨-커맨더의 입이었다.

차가운 한강의 수온과 함께 전신을 진탕시키는 충격이 나를 휘감았다. 흡, 하고 숨을 들이키는 것과 동시에 따뜻하고 거대한 어둠이 나를 집어 삼켰다.

[시나리오 클리어에 실패했습니다.]

...젠장, 결국 그 방법을 써야 하는군.









Episode 3. 계약 (1)

Episode 3. 계약

폐가 물을 먹는 느낌과 함께 몸이 급격하게 무거워진다. 어딘가로 꿀렁대며 빨려 들어가는 느낌. 타이밍을 보고 떨어졌으니 찢겨 먹히지는 않는다. 다만 여기서 의식을 잃으면 안 된다.

정신 차려야 돼.

잠깐만 버티면 된다.

나는 어떻게든 몸을 웅크린 채 호흡을 참았다. 10초, 20초, 30······ 간신히 호흡을 튼 것은 어둠 속에서 말랑한 벽이 손에 닿은 무렵이었다.

“우, 우웩.”

몇 번이나 강물을 게워내고 나서야 간신히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레벨 10에 달하는 체력 덕분에 수면과 부딪쳐 숨이 끊어지는 것만은 면했지만, 몸 곳곳의 크고 작은 타박상이 몹시 쓰라렸다.

패닉에 빠지지 않게 호흡을 다스리면서 품속을 더듬어 스마트폰을 켰다.

추락에 고장 났을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전원은 무사했다. 큰맘 먹고 방수 기능이 있는 스마트폰을 샀던 게 다행이었다.

파앗.

플래시가 들어오자 주변의 정경이 어슴푸레 눈에 들어왔다.

넉넉한 위벽의 크기와 둥둥 떠다니는 콘크리트 부산물들.

어룡의 위장은 짐작한 것보다 더 역겨웠다.

“빌어먹을.”

망설임 없이 손을 놓고 다리를 벗어나던 유중혁의 표정이 생생했다.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실제로 당하니까 예상보다 충격이 컸다.

······자신의 동료가 되고 싶다면, 이 정도는 살아나 보라는 거겠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동료. 다른 사람도 아닌 유중혁에게 그 단어가 가지는 무게는 그만큼 컸다. 1회차의 회귀가 실패한 이래로, 유중혁은 진짜 ‘동료’를 만든 적이 없었다.

회귀자인 그의 성장세를 쉽게 따라갈 수 있는 인간은 드물다. 때문에 그는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가며 구원자로 추앙 받았고, 자연히 외로워졌다.

유중혁에게 ‘인간’은 부하 아니면 적일 뿐.

그러니 이것은 시험이었다. 

동등한 위치에 서고 싶다면, 이 정도는 혼자 해결해 보라는 시험.

······어디까지나 유중혁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동료 좋아하네······ 미친 싸이코패스 새끼.”

나는 개헤엄을 쳐 둥둥 떠 있는 스티로폼 판넬 위로 간신히 몸을 끌어 올렸다.

뜨끈한 위장의 온기 덕에 추위는 한결 가셨지만, 지금부터가 문제였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떨어지며 들려왔던 메시지 로그를 재생해보았다.

[시나리오 클리어에 실패했습니다.]

[유료 정산이 시작됩니다.]

[채널 수수료로 100코인이 감산되었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호쾌한 발언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1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선택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1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경솔한 발언에 실망합니다.]

꽤나 많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게다가 내게 수식언을 노출한 성좌들의 후원이 눈에 띄었다. 

아마 유중혁과 나눴던 마지막 대화 때문이겠지.

하나하나 성좌들의 메시지를 읽으며 코인을 회수하고 있자니,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만약 첫 번째 <배후 선택>에서 이녀석들 중 하나를 골랐다면, 이런 상황은 안 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유중혁을 직접 상대해보고 나니 확실히 알겠다.

제천대성이 최상급의 배후성이기는 하지만, 역시 그 녀석 하나로는 무리다. 유중혁에게 맞서려면, 단순히 ‘배후성’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는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철벅.

위장벽이 꿀렁거리며 어룡의 내부에서 작은 파도가 일었다. 

씨-커맨더가 어딘가로 이동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켜서 시간을 계산했다. 

‘멸살법’에 따르면 어룡들은 먹이를 섭취한 후 3시간 전후로 위산을 분비하기 시작한다. 

즉, 내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하, 이거 아쉽게 됐네요. 아주 흥미진진했는데.]

허공에서 치지지직, 하는 효과음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깨비?”

[네, 맞습니다. 전혀 당황하시질 않네요?]

“올 줄 알고 있었어.”

[흐음. 마치 절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기다렸지, 당연히.”

허공에 팟, 하고 빛이 들어오며 도깨비가 나타났다. 표정만으로는 녀석의 속내를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흥미롭다는 티가 역력했다. 

나는 부러 태연히 말을 이었다. 여기서부터 기세에 밀리면, 죽도 밥도 안 된다.

“나한테 받아가야 할 코인이 있잖아?”

[······코인이라뇨?]

“내가 시나리오에 실패했으니까 대가로 코인을 받아 가야지.”

[흠, 목숨이 아니라요?]

“목숨을 가져가는 거였다면 실패 결과란에 ‘사망’이라고 표기하고 말지, 물음표 세 개를 써 놓지는 않았을 거야. 이건, 협상의 여지가 있단 얘기 아닌가?

[······하하하. 재밌네요.]

사실 내 말에는 허점이 있었다. 

시나리오 메시지의 ‘실패 시 : ???’라는 문구는 말 그대로 실패의 패널티를 알 수 없다는 뜻이니까. 

대가로 코인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저 억측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틀렸나?”

내가 시나리오에 관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잠깐 멈칫 하던 도깨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놀랍군요. 고작 그런 단서로 거기까지 추리하다니······ 과연 성좌님들의 관심을 받는 화신체 다워요.]

도깨비는 진심으로 감탄한 말투였다.

[당신 말대로, 서브 시나리오는 실패해도 코인만 지불할 수 있다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얼마지?”

[5100코인을 지불하세요. 그럼 목숨만은 부지하게 해 드리죠.]

나는 현재 보유 중인 코인을 확인했다.

[보유 코인 : 5100 C]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자식이 지금 난장을 까는군.

“그건 너무 많아.”

[하하, 그럼 뒈지시던지? 코인을 받겠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제 재량일 뿐입니다. 수틀리면 그냥 여기서 끝낼 수도 있습니다만?]

“그럼 죽여 보든가.”

[······예?]

“죽여 보라고.”

[······.]

“못 죽이겠지?”

도깨비는 움직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녀석은 나로 인해 꽤나 재미를 보고 있는 상황이니까. 게다가 죽일 생각이었다면 애초부터 나를 만나러 여기까지 내려왔을 리가 없다.

놈에겐 내가 여기서 살아나거나, 최소한 비참하게 죽어가야만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하. 이거 진짜 열 뻗치네. 이봐요, 지금 나랑······.]

도깨비의 일자형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슬슬 도발은 그만두고 본론에 들어가볼까.

“하급 도깨비 비형(鼻荊). 이야기꾼(Streamer) 활동은 할 만한가?”

표정에도 균열이 생긴다면 정확히 저런 모습일 것이다. 처음으로 도깨비 비형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어, 어떻게 내 이름을?]

“최근에 방송할 맛 안 나지 않아? 성좌들 씀씀이도 영 쪼잔하고 말야.”

[다, 당신 대체 뭡니까? 인간 따위가 어떻게 그 사실을······.]

바들바들 떨리는 비형의 뿔.

그럴 법도 하지.

평범한 인간이 스타 스트림(Star stream) 시스템에 관해 알고 있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존재에 의구심을 품습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계획에 눈을 반짝입니다.]

이제부터의 이야기는 성좌들이 들어서 좋을 게 없다. 나는 입모양으로 비형에게 말을 걸었다.

“일단 채널 잠깐 닫고 얘기하지?”

고민하던 비형이 채널을 닫았다.

[#BI-7623 채널이 닫혔습니다.]

성좌들이 채널에서 빠져나가자, 비형도 본색을 드러냈다.

[이제 말씀하시죠. 당신, 평범한 인간 주제에 어떻게 성류방송(星流放送)에 관해 알고 있는 겁니까?]

“그건 중요한 게 아냐.”

[예?]

“비형, ‘도깨비 왕’이 되고 싶지 않아?”

[지금 무슨―]

“독각(獨脚)이나 길달(吉達)을 뛰어넘는, 이매망량(魑魅魍魎) 최고의 이야기꾼이 되고 싶지 않냔 말이다.”

비형의 안색이 변하고 있었다.

“도깨비 비형, 나와 계약해라. 그럼 내가 너를 도깨비들의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





Episode 3. 계약 (2)

스타 스트림 시스템.

성류(星流) 방송이라고도 불리는 이 시스템은, 쉽게 말하면 전 우주를 상대로 한 중계 활동이었다.

구독자는 저 먼 은하의 꼭대기에 있는 성좌들.

배우는 나와 같은 인간들.

그리고 그 둘을 잇는 이야기꾼이 바로 내 눈앞에 있는 도깨비였다.

[하, 하하하하핫! 미쳤군! 미친 인간이야! 다른 성좌들의 후원을 거절했을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비형은 한참이나 그렇게 웃어대더니 재차 입을 열었다.

[당신이 어떻게 성류 방송에 대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는 성좌가 아닌 도깨비라, 당신의 배후성이 되어줄 수는 없거든요.]

“내 말을 오해한 모양이네. 나는 날 ‘후원’하라고 말한 적은 없어.”

[예?]

“네가 약해빠진 도깨비란 건 잘 알아. 나는 네 힘을 필요로 하는 게 아냐. 네 ‘채널’을 필요로 하는 거지.”

[내 채널?]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걸 보면 한글패치가 덜 된 모양이지?”

[아니, 이보세요.]

“쉽게 말해 주지. 나는 네 채널과 전속 계약을 맺고 싶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비형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잠깐만. 지금 나랑 <스트림 계약>을 맺잔 말입니까?]

“그래.”

스트림 계약은 본래 도깨비와 성좌들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이었다. 

성좌들은 자신의 화신을 특정 채널에 출연 시키고, 도깨비는 해당 성좌의 화신이 벌어들이는 코인의 일부를 수수료로 받는다.

그러니 본래라면 이 계약에서 화신 본인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말이 후원이지, 사실 계약한 화신은 배후성의 노예나 다름없으니까.

[하핫, 이거 골 때리는군.]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눈을 가린 비형이 웃었다. 주변의 공기가 변하고 있었다.

[어디서 뭘 들은 건진 모르겠지만, 인간이 감히 <스트림 계약>을 언급해? 그것도 배후성도 없는 하찮은 벌레 새끼가?]

말투가 변했을 뿐인데 주변이 살기로 가득 차올랐다. 역시, 하급 도깨비라도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하지만 고작 저런 것에 물러설 거였다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지.

“배후성이 없으니까 계약을 맺을 가치가 있는 거야.”

[······뭐?]

“넌 성좌들이 채널에 들어오는 목적이 뭐라고 생각해?”

갑작스런 질문에 비형은 머리 나쁜 학생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하급 도깨비를 위한 특강 시간이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너도 알고 있는 정보들이니까. 하지만 복습하는 의미에서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자고.”

어느새 내 페이스에 말려든 비형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타 스트림의 구독좌(購讀座)들은 크게 두 집단으로 구분할 수 있어. 하나는 채널들을 돌며 따분함을 해소하고 싶어 하는 ‘유희 찾기’ 집단.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과 계약할 화신을 찾고자 하는 ‘화신 찾기’ 집단. 그렇지?”

[그래. 맞아.]

“이 때문에 스타 스트림에서 유명한 채널이 되려면 두 집단 중 하나는 확실히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해. 쉽게 말해서 유희에 충실하든가, 싹수 있는 후원 대상을 찾아주든가. 둘 중 하나는 제대로 해야 한다는 거지.”

[제법 박식하군.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성좌들의 구독 목적이 이 계약과 무슨 상관인데?]

“이렇게 힌트를 줘도 모르네. 그러니까 아직도 구독좌 숫자가 세 자리를 못 넘는 거야.”

[······닥쳐. 빨리 말하지 못해?]

작은 뿔을 내게 들이대는 비형은 조금 전까지 사람 머리를 터트려 죽인 도깨비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깜찍한 데가 있었다. 

이제 놀리는 건 그만하고, 슬슬 운을 떼볼까.

“만약 ‘유희 찾기’와 ‘화신 찾기’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채널이 있다면 어떨까.”

[뭔 헛소리야? 그런 건 불가능해.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잠깐 뿐이라고.]

사실 비형의 말은 맞았다. 

모든 성좌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화신 찾기’ 집단의 특성 때문이었다.

‘화신 찾기’만을 목적으로 하는 성좌들은 아무리 흥미로운 화신이 있어도 <배후 선택>이 끝나면 금세 채널을 돌리고 만다. 

때문에 ‘화신 찾기’ 집단은 어디까지나 단발적이고 한시적인 고객인 것이다. 하지만.

“그건 <배후 선택>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때의 이야기지.”

[뭐?]

“만약 어떤 성좌와도 계약을 맺지 않는 화신이 있다면? 그리고 그 화신이, 배후성을 가진 다른 모든 화신들을 초월하는 능력을 보여준다면?”

강력한 화신은 존재 자체로 성좌들의 눈길을 끈다.

한데 그 화신이 계속해서 배후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화신 찾기’ 집단은 채널을 떠나지 않고 구독을 계속할 것이다.

[자, 잠깐! 너, 설마 배후 선택을 하지 않았던 것은 그래서······?]

“그래, 맞아.”

[하······ 이것 참 흥미롭군.]

비형은 기가 막히는 듯 웃어 젖혔다.

[배후성이 없는 최강의 화신이라······ 그런 게 있을 수만 있다면 확실히 스타 스트림 최고의 채널이 되는 것도 꿈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런 화신은 존재할 수 없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인정해. 초반부터 성좌들의 주목도 제법 끌었고, 덕분에 나도 재미를 쏠쏠하게 봤지. 하지만 망상을 해도 정도가 있는 거야. 방금 그런 일을 겪고도 정신을 못 차렸어? 평범한 인간은, 배후성을 가진 화신을 절대로 이길 수 없어. 그게 이 세계의 법칙이야.]

“그건 모르는 거야.”

[너는 이미 기회를 놓쳤어. 네 꼴을 봐라. 메인 시나리오도 아닌 고작 서브 시나리오를 실패하고, 이젠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이지. 그런 네놈을 눈독들일 성좌는 이제 어디에도―]

“정말로 없을까?”

[······?]

“지금쯤 성좌들이 난리가 났을 텐데. 아냐? 다들 빨리 채널 열라고 아우성이지 않아?”

비형은 말이 없었다.

“다들 지금쯤 궁금해서 미칠 지경일걸? 대체 저 ‘회귀자’에 대적하는 미친놈은 누구인가. 정말로 ‘예언자’인가? 진짜로 미래를 볼 수 있는 건가? 미래를 볼 수 있다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룡에게 잡아 먹혔는가?”

[그, 그만! 넌 대체······.]

“지금부터 내가 그걸 보여주려는 거야. 그러니까 너는 닥치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내가 도깨비 왕으로 만들어 준다니까?”

나를 보는 비형의 눈빛이 변하고 있었다. 꿀꺽, 하고 넘어가는 침소리가 내 귀에도 들릴 지경이었다.

비형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여기서 나를 믿어도 손해 볼 것은 없다. 그렇다면?

비형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이, 일단 시나리오 실패 정산부터 하지. 우선 5100 코인을 준다면······.]

“뭔 소리야? 난 실패하지 않았어.”

[······엉?]

“아마 지금쯤 조건 충족이 됐을 텐데······.”

몸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갑게 굳어가던 몸이 비명을 질렀다.

비형은 여전히 멍청한 얼굴이었다.

“채널이나 열어. 곧 시작될 거니까.”

[시작 되다니, 대체 뭐가―]

그리고 허공에서 메시지가 들려왔다.

[히든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히든 시나리오 ― 커맨더 슬레이어>

분류 : 히든

난이도 : A+

클리어 조건 : 어룡 ‘씨-커맨더’를 죽이고 어룡의 뱃속에서 탈출하시오.

제한시간 : 10일

보상 : 9000 코인

실패시 : 사망

+

“거 봐, 준비 하라고 했지?”

멸살법에는 총 세 종류의 시나리오가 있다.

메인 스토리의 진행을 담당하는 메인 시나리오.

자잘한 이벤트를 담당하는 서브 시나리오.

그리고 특별한 조건을 갖춰야만 개방되는 히든 시나리오.

[대체 어떻게······?]

경악으로 일그러진 비형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도깨비가 주관하는 메인 시나리오와 서브 시나리오와는 다르게, 히든 시나리오는 특정 조건이 충족될 시 자동으로 발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넌 몰랐을 법도 하지. 하급 도깨비니까.”

[너··· 대체 뭐야?]

“아무튼, 이걸 클리어 하면 나한테 계약할 능력이 있다는 건 충분히 입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

비형은 어쩐지 우울한 눈으로 시나리오 화면을 노려보았다. 그는 염려스런 눈빛으로 나를 살피더니 물었다.

[이 시나리오, 난이도가 A+라고. 정말 클리어할 수 있다고 믿는 거야?]

“그래.”

어룡의 위장벽에 한강물이 부딪치며 작은 파도가 일었다. 비형이 다시 입을 연 것은 파문이 잠잠해질 무렵이었다.

[······좋아. 만약 네가 이 시나리오의 클리어에 성공한다면, 계약에 응해주겠어.]

“계약 조건은 시나리오 클리어 후에 협의하도록 하지.”

[건방지긴······ 그럼 다시 채널 개방할 테니까, 어디 열심히 해 보라고.]

“아, 잠깐만.” 

벌써 가선 곤란하다. 꼭 확인해야 할 게 있으니까.

“네가 해 줘야 할 게 남았어.”

[······또 뭐야?]

비형은 어쩐지 귀찮은 듯한 음색이었다.

“나한테 발생한 시스템 오류를 좀 고쳐줘.”

[시스템 오류라고?]

“난 특성창이 안 열려.”

[그럴 리가? 시스템엔 오류가 있을 수 없어. 시나리오 시스템은 완벽 그 자체라고.]

“살펴보고 말하든가.”

비형은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보더니, 이내 허공에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도깨비 ‘비형’이 당신에게 ‘시스템 간섭’을 시도합니다.]

시스템 간섭. 

시나리오 간섭 권한을 가진 도깨비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절대적 간섭 스킬.

사실 내가 ‘특성창’을 볼 수 없는 이유가 오류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했다.

하지만 적어도 도깨비라면, 뭔가를 알아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알아낼 수 없더라도, 그것 또한 나름대로의 소득이겠지.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발동합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며 비형이 기함을 했다.





Episode 3. 계약 (3)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이번에도 대충 감이 왔다.

“왜, 뭐가 잘 안 돼?”

[이럴 리가 없어. 시스템 간섭을 막을 수 있는 방호벽이 있을 리가······?]

아무래도 ‘제 4의 벽’은 같은 화신뿐만 아니라 도깨비의 간섭까지 막는 모양이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나를 포함해 내 특성창을 볼 수 있는 존재는 ‘멸살법’ 내에 아무도 없다는 말이 된다.

재밌네.

사기꾼이 되기에 완벽한 조건이다.

“못 하면 됐어.”

[기, 기다려 봐! 내가 할 수 있다고. 으, 으으. 이걸, 그러니까 이렇게 하면?]

“못 하면 됐다니까.”

[끄와아아아아악!]

뭘 잘못 건드렸는지 비형은 감전이라도 된 듯 마구 비명을 질러댔다. 비형의 피부에 올라 있던 보송보송한 흰털이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 이게! 이게!]

“됐어. 안 되면 그만두고, 다른 부탁이나 들어 줘.”

[그럴 순 없어! 나는 도깨비 비형이다. 도깨비의 명예를 걸고 이 사태를 해결하지 않으면―]

나는 시계를 보았다. 어룡에게 먹히고 벌써 한 시간. 이런 식으로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도깨비 보따리.”

허공에 삽질을 하던 비형이 멈칫했다.

[뭐라고?]

“도깨비 보따리를 열어.”

[······그건 또 어떻게 아는 거야?]

“열거야 말 거야?”

[배후성이 없는 화신은 도깨비 보따리를 사용할 수가······.]

“도깨비 보따리를 이용하는 화신들은 모두 배후성이 있지. 하지만 배후성이 없는 화신이 도깨비 보따리를 이용할 수 없다는 규정은 없어.”

[···잠깐만 기다려 봐.]

품속에서 꺼낸 매뉴얼을 확인한 비형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이쯤 되면 네가 도깨비인지 내가 도깨비인지 모르겠다. 너 사실 도깨비 아냐?]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은 비형이 두 손을 들었다.

[···좋아, 사용에는 문제가 없어. 다만, 도깨비 보따리는 스트림 규정상 채널이 개방된 상황에서만 열 수 있어. 괜찮지?]

“괜찮아.”

[#BI-7623 채널이 열렸습니다.]

[성좌들이 입장합니다.]

뒤이어 허공에서 눈부신 전류가 몰아쳤다. 곧 투명한 스크린이 눈앞에 떠올랐다.

[코인 상점, ‘도깨비 보따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도깨비 보따리.

이 빌어먹을 세계의 ‘캐시 상점’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

‘멸살법’의 세계에서 코인의 쓰임새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체력이나 근력을 비롯한 종합 능력치의 레벨을 올리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도깨비 보따리’를 비롯한 각종 샵에서 쓸 수 있는 공용 화폐의 역할을 하는 것.

[지금 당장 구매하세요! 당신의 초보 화신을 위한 스타터 패키지가 2500 코인!]

[오늘만 특가! 300% 성장 패키지로 남들보다 빠르게!]

[실수로 특성이 구린 화신을 고르셨다구요? 걱정 마세요! 특성을 무작위로 바꿔주는 ‘랜덤 특성 박스’가 출시되었습니다!]

각종 패키지를 위시한 수많은 코인 아이템들. 

[도깨비 보따리]의 광고는 모두 화신을 키우는 성좌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당연하다. 원래 도깨비 보따리의 이용객은 성좌들이니까.

나는 팝업처럼 떠오르는 광고창들을 하나 둘씩 꺼 나갔다.

다섯 번째 메인 시나리오 이후에 등장하는 ‘재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씨 커맨더’급의 어룡이면 시나리오 초반의 화신들에게는 재앙이나 다를 바가 없다. 

어룡을 해치우기 위해서는 보따리에서 판매하는 일부 아이템들이 반드시 필요했다.

어디보자······.

한참이나 카탈로그를 넘기던 나는 비형 쪽을 흘끗 보았다.

“이봐, 지금 구매 가능한 상품들은 이것뿐이야? 검색 기능이 있을 텐데?”

[아, 그건······ 제길. 잠깐만. 성좌님들. 부탁입니다. 진정들 좀 해주세요.]

채널이 다시 개방된 순간부터 비형은 만화 같은 땀을 뻘뻘 흘리며 하소연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냥 서버 오류로 잠깐 방송이 꺼졌던 거예요! 제가 일부러 끈 거 아니라니까요?]

현재 비형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는 별의 숫자는 총 20여 개. 

이탈좌가 거의 없는 것을 보면 지금 내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성좌들이 제법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모든 성좌들이 그저 호의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소수의 성좌들이 방송의 공정성을 의심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특혜 제공의 의혹을 갖습니다!]

짐작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잠깐 방송이 꺼진 사이에 무려 히든 시나리오가 시작된 데다, [도깨비 보따리]까지 열려 있으니 성좌들이 놀라지 않은 게 더 이상하다.

[아니, 특혜라뇨? 이보세요, 성좌님들. 저 도깨빕니다. 그런 짓하면 바로 소멸되는 거 모르세요? 이야기꾼 서약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건 잘 알고 계실 텐데요?]

“나부터 좀 도와주지?”

[······상품 검색 버튼 저기 오른쪽 아래에 있어.]

“고맙다.”

쩔쩔매는 비형을 제쳐두고, 패키지창의 아래쪽에 숨어 있는 돋보기 모양의 아이콘을 눌렀다.

[상품 검색 기능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상품 검색은 하루에 5회로 제한되며, 추가 검색 이용 시 건당 100코인을 소모합니다.]

하여간 인간이나 도깨비나 상술은 매한가지다.

주어진 검색 횟수는 총 다섯 번. 

내게 필요한 재료를 구매하는 데는 두 번의 검색이면 충분하니, 세 번의 검색 횟수가 남는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계책을 궁금해 합니다.]

그래, 궁금하겠지.

궁금하면 잘 보고 있으라고.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모든 행동을 고깝게 쳐다봅니다.]

넌 꼬우면 보지 말고.

나는 검색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상품 ‘고대룡’ 검색.”

[검색 결과가 3건 있습니다.]

곧이어 작은 팝업창이 떠올랐다.

* 고대룡의 심장 - 재고 ?

* 고대룡의 뼈 - 재고 1

* 고대룡의 뿔 - 재고 1

나는 ‘고대룡의 심장’을 선택했다.

<아이템 정보>

이름 : 고대룡의 심장

등급 : SS

설명 : 고대룡 ‘이그니투스’의 마력을 품은 심장.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품고 있으며, 심장 이식에 성공할 시 속성 ‘지옥불’을 획득한다.

가격 : 1500000 C

재고 : 방금 품절되었습니다.

역시 이건 품절인가.

카탈로그 너머에서 성좌들을 상대하던 비형이 턱을 쭉 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미쳤어. 어떻게 ‘고대룡’의 정보를 알고 있는 거지?]

“그냥 멋있는 이름 아무거나 불러본 거야.”

[······거짓말 같은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본래의 ‘멸살법’에서도 ‘고대룡의 심장’은 주인이 정해져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저 심장의 주인은 지금 이탈리아에 있다. 

운도 좋은 놈이지. 그런 다이아 수저 배후성을 얻다니.

나는 그 외에도 몇 가지 상품명을 더 불러 보았다.

[관련 상품 검색이 완료되었습니다.]

* 대악마의 눈동자 - 재고 0

* 백청강기(白淸罡氣) - 재고 1

‘대악마의 눈동자’까지 품절이라니······ 역시 성좌들 손이 보통 빠른 게 아니다. 어차피 판매 가격이 100만 코인이라 있어도 못 사는 상품이었지만.

하여간 스폰서가 좋기는 좋다.

이제 ‘대악마의 눈동자’를 얻은 화신은 초반 시나리오를 죄다 박살내며 성장하게 될 것이다.

[너 진짜 뭐야? 무슨 치트 같은 거 쓰는 거 아니지? 검색으로만 찾을 수 있는 아이템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그럴듯한 이름 말해 본 거라니까.”

결국 처음 검색한 세 가지 아이템들 중 재고가 남은 것은 ‘백청강기’ 하나 뿐. 그나마도 가격이 1만 코인이라 지금은 살 수 없다. 일단 장바구니에 넣어 두고.

[뭐야, 안 살 거야?]

“어차피 지금은 못 사. 그냥 구경만 한 거야.”

[쳇, 그러면 괜히 열었잖아.]

“대신 다른 걸 살 거니까, 지금부터 내가 부르는 아이템들을 띄워줘.”

나는 몇 개의 아이템 명을 불렀다. 잠시 후, 내 눈앞에 아이템 목록이 떠올랐다.

* 망치 해마의 점액 - 재고 124

* 스톤호그의 뾰족한 가시 - 재고 17

기억 속의 목록과 대조를 마쳤다. 어룡의 피식(被食) 해수종인 망치 해마와, 해수종의 천적인 스톤호그... 틀림없다. 어룡 공략에 있어서는 최고의 가성비를 자랑하는 조합이다.

“점액 넷, 가시 넷. 800코인이면 되지?”

[그렇긴 한데······ 이거 잡템들인데 어디다 쓰려고?]

“네가 알 것 없어.”

[······참견하는 건 아니지만 다른 걸 사는 게 어때? 가령 <월영검법>이라든가. 원래 8천 코인짜리지만 지금 사면 4천 코인에 팔아줄게. 차라리 이걸 사는 편이 시나리오 클리어 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걸?]

“고맙지만 그냥 이걸로 살게.”

비형은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곧 결제를 해주었다.

[800코인을 소모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가루 같은 것이 뭉쳐지더니, 길쭉한 가시 네 개와 검은 점액을 담은 주머니 네 개가 나타났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환불은 안 돼. 알지?]

“알아.”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인 후 작업을 시작했다. 가시들은 상의를 벗어 묶은 틈새에 꽂아 넣고, 주머니들은 허리춤에 매달았다.

스톤 호그의 가시는 발생점은 뭉툭하지만 끝으로 갈수록 날카로워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길이는 대략 1미터 정도. 뭔가를 꿰뚫기엔 적당한 크기였다.

[흐음······ 그럼 난 가볼게. 너한테만 붙어 있을 수는 없거든. 저쪽에서도 꽤나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고 말야.]

“그렇게 해.”

[후후, 그럼 어디 힘내 보라고. 이야기의 가호가 있길 바라지.]

빛을 내뿜던 비형이 사라지자 주변은 다시 어둑해졌다. 스마트폰 불빛을 쓸 수도 있겠지만 가능하면 배터리를 아껴 두어야 했다.

어둠 속에서 스톤 호그의 가시들이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미약한 빛이지만, 당분간은 이 빛에 의존해 살아가야 한다.

나는 허리춤에서 가시 하나를 뽑아 이리 저리 휘둘러보았다.

아무래도 [무기 연마]나 [만병의 화신] 같은 숙련계 스킬이 하나도 없기 때문일까. 가시는 좀처럼 손에 익지 않았다.

[소수의 성좌들이 지루해합니다.]

성급한 성좌들은 슬슬 채널 밖으로 벗어날 시기였다. 여기선 보이지 않지만, 비형도 초조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 시간이 더 지났다.

우로, 좌로, 위로, 아래로.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가시를 다루는 것에는 이제 문제가 없었다. 표면의 마감이 거칠어서 손에서 쉽게 미끄러질 것 같지도 않았다. 

슬슬 시작해 볼까. 

나는 적당한 힘을 실어 어룡의 위장벽을 찔러 보았다.

티잉!

탄성이 강한 고무벽을 찌른 것처럼 가시는 그대로 튕겨져 나왔다. 역시 어룡의 위장은 내 근력 레벨로 찢을 만큼 만만하지 않다. 아마 스킬을 써도 마찬가지겠지.

쿠구구구.

위장벽 상단에 위치한 조그마한 구멍들이 일제히 벌어진 것은 그때였다.

울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토해져 나오는 메스꺼운 액체.

“꾸에엑!”

위장의 부유물에 둘러싸여 있던 마인 하나가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츠츠츠, 하는 소음과 함께 타들어가기 시작하는 마인의 피부.

어룡의 소화 작용이 시작된 것이다.

빠르게 강물 속에 용해된 어룡의 소화액은 콘크리트와 부산물들을 녹이고 내가 디딘 곳을 침식하기 시작했다.

츠츠츠츠!

이제 시간이 없다.

바로 계획대로 간다.

나는 부유물 위에서 크게 도약해 위장 벽의 돌기를 붙잡았다. 그리고 암벽타기를 하듯 한 칸 씩 위장벽을 타고 올라갔다. 

콸콸콸. 

소화액 사출구가 바로 위쪽에 있었다. 나는 입으로 가시를 깨문 채, 손으로 점액 주머니를 풀었다.

망치 해마의 점액.

미심쩍은 냄새가 나는 검푸른 액체를 손으로 찍어, 가시의 끝부분부터 망치 해마의 점액을 정성껏 도포했다. 

면도할 부위에 셰이빙 크림을 바르듯 꼼꼼하고 세심하게. 셰이빙 크림이 면도날로부터 피부를 보호한다면, 이 점액은 소화액으로부터 가시를 보호해 줄 것이다.

간다.

나는 소화액 사출구를 향해 가시를 휘둘렀다. 각도는 정확했고, 지금의 내가 낼 수 있는 근력의 최대치였다.

콰아악!

가시에 부딪친 소화액이 튀어 올라 팔뚝 피부를 녹였다.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실수하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전용 스킬, ‘제 4의 벽’의 영향으로 고통이 일부 완화 됩니다.]

콸콸, 콸, 주륵. 조르륵······.

이윽고, 가시가 사출구를 단단히 틀어막았다. 

“일단 하나.”

가까스로 한숨을 돌린 후, 허리춤에 있던 다른 가시를 뽑아 들었다. 역시나 망치 해마의 점액을 바른 후, 다른 사출구를 찾아 막았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침착함에 감탄합니다.]

[성좌들이 2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차근차근 세 개의 사출구를 틀어막았다. 남은 사출구 몇 개가 남아 있었지만, 입구가 작아 소화액 방출이 크지 않았다.

나는 숨을 고르며 입고 있던 윗도리를 박힌 가시에 단단히 감아 묶었다. 이제 남은 것은 가시 하나와 점액 두 주머니.

나는 남은 점액들을 피부와 옷 곳곳에 뿌리고, 그래도 남은 것은 목구멍 속에 모두 털어 넣었다.

“큽.”

짭짤하고 비린 맛이 혀끝에 감돌았지만, 죽는 것보단 나았다. 지금부터 있을 재앙에 비하면 이 정도 쓴맛은 아무것도 아니다.

위장 전체가 엄청난 진도로 떨리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5분 정도가 경과한 후의 일이었다.

······시작됐나.

끼에에에에에에―!

고통스러운 어룡의 비명. 꿈틀거리는 위장벽의 사이사이로 혈관이 불거지고 있었다. 그 혈관 사이를 파고들며 세를 넓혀가는 가시들.

사출구에 틀어박힌 가시가 공격적인 생장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스톤 호그의 가시는 해수종의 체액에 반응하여 성장한다.

꾸득, 꾸드득.

도포한 점액으로 인해 소화액에 면역이 된 가시들은 주변의 체액을 흡수하며 어룡의 몸에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어룡이 완전히 죽을 때까지, 스톤 호그의 가시는 확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끼에에에에―!

발밑에서 소용돌이치는 용해액을 보며 나는 가시를 꽉 움켜쥐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정신력 싸움이었다.

내가 죽든, 이 녀석이 죽든. 

살아남는 것은 하나뿐일 것이다.





Episode 3. 계약 (4)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자주 호흡이 끊어졌고, 온몸의 근육이 잔뜩 경직되어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생존력에 감탄합니다!]

[성좌들이 1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하지만 버텼다. 버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버텼다. 어둠 속에서 가시가 내뿜는 불빛을 보며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 받았고, 떨어지는 위장벽의 온도를 확인하며 놈이 죽어가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근성에 감탄합니다.]

[성좌가 1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배가 고플 때는 가시의 끝에 맺힌 농축액에 혀를 가져다 댔다. 

흘러나온 농축액에는 어룡의 전신에서 빨아들인 생명력이 담겨 있었다. 해마의 점액을 미리 먹어둔 것은, 탈 없이 이 농축액을 흡수하기 위함이었다.

[어룡의 힘을 흡수해 체력이 미미하게 상승합니다.]

당장 능력치 레벨이 오를만한 효과는 아니었지만, 아마 어룡을 탈출할 때쯤이면 적어도 체력 레벨이 2 정도는 상승해 있을 것이다. 

고 레벨로 가면 안 먹히지만 코인을 쓰지 않고 체력을 올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꼼수였다.

······역시, 꿈은 아니겠지.

이거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걸까.

난 평범한 독자일 뿐이잖아.

주인공이 아니라고.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며 이불 속에서 깨어날 것 같았지만, 아무리 눈을 깜빡여도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머닌 괜찮으실까.

괜찮으시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어머니’인데.

바닥에 고인 용해액이 빠져 나갈 때마다 깜빡 잠에 들었고, 차가운 강물이 구강을 통해 들어올 때마다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어룡의 소화 작용이 멈췄다. 등을 데우던 내장의 온기가 급격히 식었고, 탄성으로 가득하던 위장은 점점 굳어갔다. 그래서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놈이 죽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어둠 속에서 몰아치는 환한 전류. 비형이 흐릿한 형체를 유지한 채 허공에 떠 있었다.

[스톤 호그의 가시를 저런 식으로 사용하다니. 미처 생각도 못했어요. 성좌님들, 그렇지 않습니까?]

비형은 희미한 빛을 내뿜는 스톤 호그의 가시를 보며 말했다.

[스톤 호그는 주로 해안가에 서식하며 작은 해수종을 먹이로 삼는 녀석이에요. 먹잇감의 표피에 가시를 뿌리 내려 사냥감을 말려 죽이는데, 이걸 설마 소화액 사출구에 박아버릴 줄은······.]

형형한 눈동자를 빛내는 비형의 동공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저 말들 또한 나를 향한 설명은 아니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알고 있었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성좌들이 1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뒤늦게 당신의 판단을 이해합니다.]

[성좌들이 그런 건 다음부터 혼잣말로 알려달라며 불평합니다.]

나는 성좌들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마지막 농축액을 받아 마셨다.

[어룡의 힘을 흡수해 체력이 미미하게 상승합니다.]

[체력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체력 Lv.11 -> 체력 Lv.12]

이걸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내 곁으로 내려온 비형은, 새카맣게 탄 내 팔을 만지며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이 점액······ 어룡의 피식종인 망치 해마의 점액에 이런 효능이 있다는 건 나도 몰랐는데.]

본래였다면 어룡의 소화액과 함께 녹아버렸어야 할 피부였다. 나는 비형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망치 해마의 점액에는 소화액에 대한 면역이 있어. 아무래도 어룡에게 잡아먹히는 경우가 많다 보니 그런 식으로 진화한 거지.”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박식함에 감탄합니다.]

그러자 비형이 뒤통수를 맞은 듯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저기, 설명은 내 몫인데······.]

“네가 잘 모르니까 대신 해준 거잖아. 이제 설명은 다 끝났지?”

[······그래.]

“그럼 보상 줘.”

[망할 자식.]

비형의 투덜거림과 동시에, 보상 메시지가 눈앞을 덮었다.

[히든 시나리오가 종료되었습니다.]

[보상으로 9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최초로 7급 해수종 사냥에 성공하였습니다.]

[업적 보상으로 1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9000코인에 추가로 1000코인이라. 아주 짭짤한 소득이다.

[보유 코인 : 14800 C]

팔자에도 없던 생존물을 찍은 덕택에 추가로 얻은 500코인까지 합하면 총 소득은 10500코인. 목표치는 훌쩍 넘겼다.

[하하, 성좌님들. 잘들 보셨나요? 잠깐 광고 하나 보시고 바로 다음 시나리오 진행 들어가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어디선가 희미하게 광고 소리가 들려왔다. 

신규 시나리오 개방 특집 패키지가 8800코인······.

성좌들의 시선이 사라진 사이, 내 곁으로 내려선 비형이 친근한 듯 말을 걸어왔다.

[후······ 아주 대단한 생존물이었어. 성좌들 반응도 굉장했다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나흘. 보는 내내 조마조마 했어. 시간도 몰랐던 거야?]

“스마트폰이 방전됐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다. 본래 목표는 이틀이었는데······ 하긴, 4회차의 유중혁도 이걸 잡는데 나흘이 걸렸으니, 이정도면 그다지 느린 속도는 아니다.

어쨌거나 해냈다.

기분 좋은 충만감이 전신을 덮으며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고 평범한 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습네.”

기이한 일이었다. 28년 동안 단 한 번도 도움이 되지 않았던 허구가, 이토록 평범한 나를 비범하게 만들어 주다니.

[오, 벌써 혼잣말도 하는 거야?]

“······.”

[너 제법인데? 올바른 화신이라면 혼잣말은 필수지. 물론 작위적이라고 싫어하는 성좌들도 있지만 보통은······.]

“시끄럽고, 도깨비 보따리나 좀 열어 줘.”

[왜? 살 거 있어?]

“살 것도 팔 것도 있지.”

[젠장, 그럼 잠시 광고 줄여야 겠네. 성좌님들, 잠시만요. 볼륨 조정 좀 들어갈게요.]

비형이 도깨비 보따리를 여는 동안, 나는 벽에 박힌 가시들을 살폈다.

위장벽이 굳으면서 가시를 중심으로 깊은 균열이 만들어져 있었다. 연해진 위장벽은 이제 내 근력으로도 충분히 깨부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하나 남은 가시로 벽을 깨부수며 조금씩 전진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란색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어룡의 코어와 마주쳤다.

[어룡의 핵]

7급 이상의 괴수종에게서 발견되는 에테르 코어였다. 가공해서 섭취하면 코인 없이도 마력 레벨을 높일 수 있는 귀품.

씨-커맨더 급의 어룡이라 그런지 품질 상태도 양호했다. 

코어를 감싼 살점을 조심스레 잘라 밖으로 나오자, 비형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 봤다.

“이거 팔게.”

[넌 진짜······.]

“물론 너한테 판다는 뜻은 아냐. 도깨비 경매에 올려줘.”

비형은 내게 뭘 물어보기도 지쳤는지 그냥 납득하기로 한 듯했다.

[후······ 맘대로 해. 그래서 얼마에 올릴 건데?]

“코인으로 안 팔아. 물물 교환으로 팔 거니까.”

[젠장, 별 걸 다 아는군.]

비형은 투덜거리면서도 도깨비 경매에 물건을 업로드했다. 욕망이 단순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말을 잘 듣는 녀석이다.

“금방 산다는 녀석이 나타날 거야. 그리고 교환 물품은 반드시 ‘부러진 신념’으로 해 줘.”

[부러진 신념? 그걸 가진 녀석이 있으려나······ 아무튼 등록했다.]

“그래. 그리고 살 물건은······.”

나는 장바구니에 등록된 [백청강기]를 보았다. 역시, 아직 아무도 안 사간 상태다. 대부분의 성좌들은 코인 아이템의 가성비를 잘 모른다. 과금 유도가 심한 ‘도깨비 보따리’의 상품들은 비싸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닌데도.

[잠깐만, 그 전에 잠시 이야기 좀 하지?]

비형의 말과 함께 약해졌던 광고 볼륨이 다시 높아졌다. 

[길어지는 광고에 성좌들이 불평합니다.]

이미 나왔던 광고가 한 번 더 나오는 것을 보며, 나는 비형이 무슨 말을 할지 직감했다.

“계약 얘기인가?”

방송을 끄지 않고 성좌들의 눈과 귀를 가릴 방법은 광고뿐이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성좌들이 들어서 좋을 게 없으니까.

[그래. 긴가민가했는데, 이번 시나리오 보고 조금 확신이 생겼어. 뭐······ 한 번 해 보자고. 뭣하면 내가 조금씩 도와 줘도 되니까.]

“그건 이야기꾼 서약에 위배 될 텐데?”

[아, 물론 진짜로 도와줄 수는 없고,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보다 계약 할 거지?]

“조건은?”

[읽어 봐.]

꼴에 도깨비라고 계약서까지 화려하게 준비해 온 모양이다.

나는 허공에 투명한 창으로 떠오른 계약서를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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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림 계약 동의서>

1. 화신 김독자(갑)은 모든 시나리오가 종료되거나 본인이 사망할 때까지 도깨비 비형(을)과 전속 계약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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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갑이냐?”

[하하, 인간들은 그런 거 좋아하잖아? 어차피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말이지. 아무튼 계속 읽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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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화신 김독자(갑)은 모든 시나리오가 종료되거나 본인이 사망할 때까지 결코 배후성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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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예상했던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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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화신 김독자(갑)은 오직 도깨비 비형(을)의 채널에서만 활동해야 한다.

4. 화신 김독자(갑)과 도깨비 비형(을)은 스트림 계약을 통해 얻는 수익을 나눠 가지며, 그 비율은 상호 협의를 통해 정한다.

······.

10. 화신 김독자(갑)과 도깨비 비형(을)은 이 계약을 어길 시 <스타 스트림>의 율법에 따라 소멸형에 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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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지막 항목까지 꼼꼼하게 계약서를 읽었다. 내가 잘 모른다고 장난질을 칠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딱 한 가지만 빼면.

“그런데 중요한 부분이 없네.”

[날인 말이야? 그건 그냥 동의한다고 말로 하면 돼. 스트림 계약은 영혼 서약이라―]

“비율 얘길 하는 거다.”

[아, 아아. 하하. 그렇지.]

자식이 시치미 떼기는.

그게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5대 5 어때? 대신 네가 내야 할 채널 수수료는 빼줄게. 아, 산정 방식은 알지? 네가 앞으로 받을 후원금에서 정확히 비율대로 나누는 거야. 가령 100코인을 받으면 50코인은 네가 갖고, 50코인은 내가 갖는 거지.]

모든 <스트림 계약>은 이런 식이다. 성좌들은 도깨비의 채널에 화신을 출연 시키고, 다른 성좌들에게서 받은 후원금을 비율대로 나누게 된다. 보통이라면 그렇다.

“날 호구로 아냐? 안 해.”

[뭐? 하, 하지만 이게 이쪽 업계 기본 정산 비율······.]

“난 배후성이 없는 화신이야. 그리고 배후성이 없는 화신을 후원할 때, 성좌들은 도깨비에게 막대한 수수료를 지불해야 하지. 이미 내 덕분에 꽤나 재미 봤을 텐데?”

비형의 턱이 천천히 벌어졌다. 하지만 이제와 그런 표정을 지어 봤자다.

“10대 0. 넌 수수료만 받아도 되잖아. 난 한 푼도 안 내.”

[뭣?! 그런 말도 안 되는······ 7, 7대 3은 어때?]

단번에 비율이 확 늘어난다. 하지만 양보 따위는 없다.

“10대 0.”

[씨발 뭔 개 소리야! 그딴 말도 안 되는 비율은―]

“싫음 말든가. 그냥 다른 채널로 가지 뭐. ‘길달’ 녀석이 요즘 잘 나가니까, 그쪽에 한 번 부탁해 봐야겠군.”

[······8대 2. 나도 더 이상은 양보 못해.]

“10대 0.”

[······.]

비형의 표정이 위협적으로 변했다. 당장이라도 내 머리를 터뜨릴 듯한 중압감. 하지만 나는 안다. 놈은 절대 이 계약을 포기할 수 없다. 이놈에게 내 존재는 마지막 기회일 테니까.

“광고 끝나겠다. 성좌들 불평 하는 거 안 보여?”

결국 포기한 듯 비형이 두 손을 들었다.

[제기랄, 알겠어. 그럼 계약 할 거지?]

이거, 생각보다 쉽게 항복하는데.

사실은 9대 1 정도로 양보해 주려고 했건만.

······어쩌면 내가 아는 것보다 뒷돈을 더 많이 받아 처먹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왠지 괘씸한데.

“그래. 그리고 한 가지 더.”

[뭐? 또 있어?]

“계약금은 따로 줘야 할 거 아냐. 5천 코인 내놔.”

비형의 표정이 순간 멍해졌다.

[······너, 너 진짜.]

나는 씩 웃었다.

‘갑’이 왜 ‘갑’이라고 불리는지, 왜 인간들이 아무것도 아닌 그 자리에 그렇게나 연연하는지······ 친히 알려 주마 망할 도깨비야.

[스트림 계약이 성사되었습니다.]

[계약금으로 5000코인을 받았습니다.]

이윽고 광고가 끝나고 성좌들이 다시 돌아왔다. 나는 도깨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말했다.

“자, 그럼 밖으로 나가 볼까.”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Episode 4. 위선도 선이다 (1)

Episode 4. 위선도 선이다

새카만 밤하늘 위로 유성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누구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겠지만, 유중혁에게는 아니었다.

「슬슬 시작인가.」

왜냐하면 유성우는 세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될 것이라는 전조였으니까. 이제 서울은 시나리오의 절차에 따라 차례차례 멸망해 갈 것이다.

하늘을 쳐다보던 유중혁은 이내 고개를 숙여 한강의 하구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 어룡의 무리가 대거 하류로 이동한 까닭에 동호대교 인근 풍경은 제법 고적한 편이었다.

「역시 무리였나.」

김독자란 녀석이 한강 속에 들어간 것도 벌써 사흘 전의 얘기였다. 겨우 첫 번째 메인을 깬 수준으로 어룡을 잡는다니, 지나친 요구였을지도 모른다.

「하긴, 3일 만에 어룡을 잡는 건 나도 힘드니까.」

하지만 그 정도가 되지 않으면 데리고 가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도 못 해낸다면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니까.

「예언자라더니 별 것도 아니었군.」

유중혁은 실망스러운 기색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다시 혼자서 나아갈 것이다. 어떤 동료도 없이.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그는 지금까지 줄곧 혼자였으니까.

「이번에는 반드시 바꾼다.」

그렇게 유중혁은 돌아섰다.

그러나 어쩌면, 그는 너무 빨리 돌아섰는지도 모른다.

*

“잠깐만······!”

[뭐, 뭐야?]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지만 보이는 것은 회백색의 천장 뿐. 나는 여전히 어룡의 안에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화들짝 놀란 비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꿈을 꿨어.”

[오호, 복선을 깔아 궁금증을 유발하겠다 이거지? 아주 제법인데?]

그런 건 아니지만, 딱히 오해해도 상관없겠다 싶었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이 빨리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길 바랍니다.]

나는 비형에게 500코인을 지불하고 구입한 ‘엘라인 숲의 정기’를 막 사용하고 잠든 참이었다. 탈진한 채로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엘라인 숲의 정기는 2시간 동안 강제로 숙면을 취하게 만드는 대신 전신의 피로와 상처를 빠르게 회복시켜 준다.

한 마디로, 비싼 값은 하는 아이템이라 이거지.

“······슬슬 진짜로 나가볼까.”

적당한 혼잣말을 해주며 찌뿌드드한 몸으로 기지개를 켰다. 

방금 꾼 꿈이 아직 선명했다. 어쩌면 꿈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치지지직.

전류가 흩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비형이 말도 없이 사라졌다. 아마 녀석도 자기 할 일을 하러 간 거겠지.

뭔가 안도의 숨이 놓였다.

도깨비와의 스트림 계약.

‘멸살법’에서 비형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했더라면 결코 시도할 수 없었던 도박이었다.

하지만 신기할 정도로 침착하게, 제대로 해냈다.

진짜 ‘현실’에서는 변변찮은 계약 하나 못 따내던 내가.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가동 중입니다.]

······현실이라.

나는 가시를 쥔 오른손에 힘을 꾹 주었다.

정말로 나는 이 세계를 현실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소수의 성좌들은 당신이 어서 행동하기를 원합니다.]

하긴, 그런 고민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가시를 힘껏 휘둘러 탄성을 잃은 위벽을 까부쉈다.

꽈르르릉, 무너지는 소리와 동시에 물이 쏟아졌다. 나는 한강으로 뛰어들었다.

“푸하!”

다행히 다른 어룡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형 해수종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지만, 딱히 적의가 느껴지진 않았다. 모든 마물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

동호대교는 저쪽인가.

나는 둥둥 떠오른 어룡의 사체조각 하나를 튜브 삼아, 어설프게 발을 놀리며 뭍을 향해 나아갔다. 

차가운 수온에 피부가 따가웠지만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30분 쯤 헤엄을 치자, 뭍에 손이 닿았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을 보며 긴장합니다.]

보통 이런 메시지가 뜬 다음에는 곧바로 위험이 닥쳐온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음험한 미소를 짓습니다.]

나를 고깝게 보는 성좌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그리 되지는 않을 것이다.

찾아올 위험이 뭔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두 번째 메인 시나리오 지역에 진입하였습니다.]

[해당 시나리오 지역의 대지는 깊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호흡을 참고, 최대한 빠르게 지하로 이동하십시오.]

메시지야 저렇게 설명하지만, 사실 이 시나리오는 시작된 순간부터 지상에 있으면 안 된다.

왜냐고? 지금 내 피부를 보면 알 수 있다.

[맹독 안개에 노출되었습니다.]

보랏빛 안개가 닿은 피부가 검게 변색되어 가고 있었다.

갸아아아아!

안개의 근원지를 눈으로 따라가자 끔찍한 울음을 토하는 괴수가 보였다.

체고가 삼십 미터는 훌쩍 넘는 육중한 괴물.

이 안개는 7급 괴수종인 ‘시독 코뿔소’의 방귀였다. 

코뿔소는 콧김을 뿜으며 안개 너머의 괴수에게 대항하고 있었는데, 언뜻 비치는 그림자로 봐서는 충왕종(蟲王種)인 듯 했다.

그아아아······.

새로운 세계에서 투쟁을 벌이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괴수들 또한 자신의 터전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나는 최대한 숨을 참은 채로 움직였다. 

어룡과 같은 7급 괴수종이었지만 지금 당장 상대할 수 있는 놈들은 아니었다. 애초에 씨 커맨더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엘라인 원숭이의 허파’를 사용합니다.]

원숭이의 허파는 20분 동안 정화 장치의 대용품으로 쓸 수 있는 아이템으로, 비형에게서 미리 구입해두었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준비성에 감탄합니다!]

지상역인 옥수역은 이미 파괴되었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역’은 금호역.

아마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곳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나는 시체들을 뜯어 먹는 소형종들을 피해 갓길을 통해 빠르게 움직였다. 20분밖에 시간이 없으니 최대한 빠르게 생필품을 확보한 후 움직여야 했다.

먼저 필요한 것은 옷가지.

어룡의 용해액에 겉옷이 녹아 버렸기 때문에, 걸칠 것이 필요했다. 물론 주변에 걸칠 것은 널려 있었다. 찝찝해서 그렇지.

······아쉬운 대로 어쩔 수 없나.

나는 시체를 뒤져 대충 사이즈가 맞는 옷 몇 개를 주워 입은 후 곧장 근처의 편의점으로 향했다.

비닐봉투 몇 개를 챙겨서 부피가 작고 밀도가 높은 식품들을 마구잡이로 쓸어 담았다.

식품들은 지하로 내려간 후 요긴한 거래 품목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서너 봉지 쯤 담았을까. 입에 문 원숭이 허파의 색이 점점 까맣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사, 살려······ 살려줘요.”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이 있었나?

한쪽 구석에 젊은 여자가 몸을 웅크린 채 쓰러져 있었다.

피부 표면에서 오염이 진행되고 있었으나, 상비용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에 중독 상태가 심하지는 않았다. 

무슨 꼴을 당한 것인지 상의는 반쯤 벗겨져 있었고 치마의 실밥이 조금 뜯어져 있었다.

“괜찮습니까? 일어날 수 있겠어요?”

“으으으······.”

‘멸살법’에 이런 엑스트라가 있었던가?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나는 여자를 들쳐 업고 금호역으로 달렸다.

갓길을 돌자 곧장 대로변이 나왔다. 이제 금호역까지 거리는 직선으로 일백 미터. 

나는 숨을 흡, 들이킨 뒤 전력으로 대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이는 3번 출구 표지.

······닫혔군. 

그럼 반대쪽은? 

재난 상황 때문인지 출구마다 죄다 방화 셔터가 내려가 있었다. 가시로 셔터를 부수고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잘못하면 안쪽에 있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다.

“4번, 4번 출구······.”

뜻밖에도 업고 온 여자가 도움이 되었다. 나는 4번 출구 쪽으로 뛰었다. 그리고 때마침 내려가고 있는 방화 셔터를 발견했다. 나는 닫히려던 셔터의 틈새에 가시를 꽂아 넣었다.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씨발, 뭐야!”

“문 열어요.”

“아, 안 돼! 들어올 수 없어! 떨어져!”

“부상자가 있습니다.”

“이미 인원은 포화 상태야! 더 이상은 필요 없다고!”

인원이 포화라 받지 않는다고? 

이상하군. 그런 전개가 있었나?

“그런 건 내가 알바 아니고.”

나는 가시를 지렛대 삼아 끼운 후 있는 힘껏 셔터를 들어 올렸다. 벌어둔 코인으로 근력 레벨도 10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성인 남성 대여섯 명 이상의 괴력을 낼 수 있었다.

“우와아악!”

콰당, 하는 소리와 함께 반대편에서 셔터를 내리던 사람들이 나동그라졌다.

“도, 도망가!”

겁을 집어먹은 사내들이 지하도 안쪽의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무사히 역 안으로 진입한 나는 셔터를 내리고 여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안전 지역에 진입하였습니다.]

맹독 안개는 지하까지 내려오진 않는다. 딱히 과학적인 설명이 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그저 ‘시나리오’ 때문이니까.

“이걸 입에 무세요.”

나는 여자의 마스크를 벗기고 내가 물고 있던 원숭이 허파를 물려주었다. 이걸로 완전히 치료되는 건 무리겠지만, 그래도 중화 효과는 있을 것이다.

“우움······.”

여자의 입술에서 희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버려져 있던 여자.

나는 문득 여자의 정보가 궁금해졌다. 이 여자도, 원작의 전개대로였다면 거기서 죽었을 확률이 높을 텐데.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등장인물 일람’을 가동하려던 찰나였다.

“저기 저 놈입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손전등 불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자, 제각기 쇠파이프 같은 것을 하나씩 든 사내들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불청객의 등장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입을 연 것은 가운데의 덩치 큰 사내. 전신의 밸런스가 잘 잡혀 있는 걸로 봐서 힘깨나 쓰는 녀석이 분명했다.

“뭐냐, 네놈은?”

순간, 이상하게도 말문이 막혔다.

보통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유중혁처럼 말해 보았다.

“김독자.”

“······김독자? 네 이름이냐?”

“그래.”

“누가 그런 걸 물었어! 넌 뭐하는 새끼냐고!”

더 곤란한 물음이 돌아왔다.

“어, 엇! 저 여자는······.”

내 곁에 쓰러진 여자를 발견한 남자 하나가 손전등을 여자 쪽으로 비추었다.

“뭐야, 소외 그룹 여자잖아? 너희랑 같이 복귀한 거 아니었어?”

“그, 그게 저······.”

사내의 손전등이 여자의 허리 부근에서 희롱하듯 움직였다.

“···하, 그런 거였구만. 귀여운 놈들. 어디서 형님 허락도 없이 새끼를 쳐?”

“헤, 헷. 죄송합니다.”

“무, 물론 철수 형님 먼저······ 헤헤, 그러려고 하긴 했는데.”

철수? 철수라. 그런 이름의 등장인물이 있었나?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생긴 것과 달리 별 볼일 없는 놈이라는 거다.

“야, 그 여자 우리한테 넘기고······ 응? 그건 또 뭐야?”

손전등의 불빛이 바닥에 놓인 편의점 봉투에 고정되었다. 

위기를 벗어난 것은 괜찮은데, 이거 어쩐지 흐름이 좋지 않다. 

“그것도 두고 밖으로 꺼져. 그럼 살려는 드리지.”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저 사내들에게 좋지 않다는 뜻이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조무래기의 등장에 짜증을 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눈앞의 불의에 분노합니다.]

[성좌들의 요청으로 현상금 시나리오가 발생했습니다!]

+

<현상금 시나리오 – 방해꾼 제거>

분류 : 서브

난이도 : F

클리어 조건 : 성좌들이 빠른 전개를 방해하는 훼방꾼의 등장에 크게 분개하였습니다. 제한시간 내에 그들을 무력화시키십시오.

제한시간 : 5분

보상 : ???

실패시 : ???

+

내 이럴 줄 알았지. 불쌍한 자식들.

나는 가시를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좌들 중에 미성년자는 없겠지? 

그럴 거라 믿는다.

왜냐하면 지금부턴 성인 방송 시간이니까.





Episode 4. 위선도 선이다 (2)

나는 가끔 생각했다.

왜 수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는 ‘뻔한 악당’이 등장하는가?

그런 상황에서까지 강간이나 절도 같은 범죄가 무분별하게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작가들의 게으름이 아닐까.

어쩌면 진짜 ‘멸망’이 닥친다면, 인간들은 생각보다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않을까.

“안 나갈 모양이네. 야, 가서 죽여!”

그 대답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눈치를 보며 슬글슬금 다가오는 사내들과, 그 사내들의 뒤에서 감상이라도 하듯 이쪽을 보는 남자.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정당한 심판을 기대합니다.]

새삼 깨닫는다.

인간의 상상력은 진부하고, 실제의 인간은 그 상상보다도 더 진부하다는 것을.

휘이익!

쇠파이프의 궤적이 어설프게 허공을 스쳤다. 살의가 느껴지는 일격은 아니었다. 사실 맞아도 거의 아프지 않았겠지만.

“도, 도망가지 않으면 진짜로 죽는다. 꺼져!”

포위하듯 나를 둘러 싼 네 명의 사내. 떨고 있는 녀석도 있었지만, 다들 아까 보다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숫자가 많아졌기 때문이겠지.

“뭐해 자식들아!”

우와아아! 하는 고함과 함께 사내 하나가 달려들었다.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무방비한 자세였다. 나는 가시를 움직였다.

푸욱!

“아아아악! 내 다리! 내 다리!”

“이 개새끼가!”

“다 같이 쳐!”

흥분한 사내들이 연달아 달려들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녀석들의 근력 레벨은 5를 겨우 상회하는 수준이다. 나는 쏟아지는 공격을 죄다 두들겨 맞으며 묵묵히 가시를 찔렀다.

탕! 까앙!

푸욱! 푸욱!

연달아 허벅지가 꿰뚫린 사내들이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죽이진 않았다. 시나리오 클리어 조건은 어디까지나 ‘무력화’라고 했으니까.

[절대선(絕對善) 계통의 성좌들이 당신의 판단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인간성을 비웃습니다.]

[성좌들이 1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살인귀가 되면 잠깐 성좌들의 관심을 끌 수는 있겠지만, 그저 잠깐일 뿐이다. 자극의 역치를 한 번에 높이는 것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좋지 않다.

[서브 시나리오 종료까지 3분 남았습니다.]

일단 여기까지 2분.

타임어택은 시간 계산이 중요하지.

“이, 이 자식 뭐야 대체! 왜 안 죽어?”

그쯤 되자, 뒤쪽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리더가 나섰다.

“꽤 맷집이 있는 놈이었군. 다들 물러서. 내가 상대한다.”

“철수 형님! 저놈 아무래도 배후성이 있는 놈인 것 같습니다!”

“잘 됐지. 딱 봐도 코인깨나 가진 것 같은데.”

검은 광택으로 빛나는 너클. 평범한 아이언 너클이 아니었다.

배후성의 후원을 받은 녀석인가?

우드득.

너클을 낀 남자의 손에서 뼈마디가 이완되는 소리가 났다.

[등장인물 ‘방철수’가 ‘위협하기’를 사용하였습니다.]

[종합 능력치의 격차가 심해 ‘위협하기’가 듣지 않습니다.]

“호, 제법 강단 있는 놈이네? 전혀 쫄질 않잖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주먹이 움직였다. 정확히 내 턱을 노린 공격. 나는 빠르게 두어 걸음을 물러났다. 녀석이 히죽 미소를 지었다.

“제법인데? 운동 좀 했나봐?”

별다른 스텝 스킬이 없어도 민첩 레벨이 10을 넘으면 이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아이템을 사고 남은 코인을 대부분 능력치에 투자했기에, 지금 내 체근민 레벨합은 도합 33에 달했다. 

어디, 이 녀석은 얼마나 되나 볼까?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인물 정보>

이름 : 방철수

나이 : 34세

배후성(背後星) : 잡배의 군주

전용 특성 : 돌격대장 (일반)

전용 스킬 : [개싸움 Lv.2], [허세 Lv.2]

성흔 : [위협하기 Lv.1]

종합 능력치 : [체력Lv.6], [근력Lv.7], [민첩Lv.6], [마력Lv.2]

종합 평가 : 운 좋게 배후성을 손에 넣은 흔한 잡배입니다. 실제 전투력에 비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 그렇군. 이제야 기억이 났다.

“철두파의 방철수.”

“뭐야, 날 알고 있냐?”

“글쎄.”

작품 초반에 바람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진 놈들이라 기억이 희미했지만, 분명 ‘방철수’라는 등장인물이 있었다.

금호역 ‘그룹’의 인간들 중 제일 얼간이 같은 놈이었지.

내가 알기로 이놈들은 본래 유중혁에 의해 맞아 죽었어야 하는데, 어째서 아직도 살아있는 것일까.

“오호라, 혹시 네놈도 ‘그쪽’ 부류냐? 너도 사람깨나 죽였나봐. 그렇지? 네겐 왠지 동류의 느낌이 나.”

[등장인물 ‘방철수’가 ‘허세’를 발동하였습니다.]

허세. 한가락 하는 깡패 새끼들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스킬. 정신력이 약한 상대방의 전투력을 위축시킬 수 있는 좋은 디버프지만, 이 경우에는 얘기가 다르다.

[‘제 4의 벽’이 등장인물 ‘방철수’의 허세를 차단합니다.]

[등장인물 ‘방철수’의 자신감이 급감합니다.]

“무시하는 거냐? 진짜로 뒈지고 싶은가 보군.”

그레코로만 레슬링 자세를 취한 방철수가 당장이라도 내게 달려들 듯 위협적인 기세를 풍겼다. 하지만 저것도 다 허세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놈은 [레슬링] 스킬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주접 그만 떨고 덤벼.”

“개자식!”

녀석이 가진 핵심 스킬은 2레벨의 [개싸움]. 

난전으로만 가지 않으면 녀석의 전투력은 보잘 것 없는 수준이다.

“죽어!”

민첩 차이가 많이 나서 그런지, 놈의 공격은 좀처럼 적중하지 않았다.

나는 약간 동정하듯 놈을 바라보았다.

모든 성좌들이 자신의 화신을 시나리오의 ‘주인공’으로 키울 욕망을 가진 것은 아니다. 

가령, 녀석의 성좌인 ‘잡배의 군주’는 자신의 화신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냥 적당히 굴려서 놀만한 멍청이를 화신으로 삼아, 그 화신이 다른 화신들에게 작살나는 걸 즐기는 마조히스트. 

그게 바로 ‘잡배의 군주’였다.

[성좌, ‘잡배의 군주’가 즐거워합니다.]

[성좌, ‘잡배의 군주’가 당신에게 1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심지어 자기 화신이 박살나게 생겼는데 적을 응원하는 놈이다.

본래였다면 타임어택을 생각해 한 방에 보내줄 생각이었는데, 이러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서브 시나리오 종료까지 2분 남았습니다.]

그럼 남은 시간을 최대한 유용하게 활용해볼까.

“쥐새끼 같은 놈!”

말하는 대사까지 전부 ‘잡배의 군주’ 스타일이다. 불쌍하게도.

퍼억!

“하하! 맞았다!”

운 좋게 녀석의 공격이 적중했지만, 당연하게도 데미지는 거의 없었다. 그저 맞은 곳이 살짝 아릴 뿐.

“어떻게!”

어떻게긴. 지금 내 체력 레벨은 12다. 저놈의 근력 레벨은 고작 7이고. 종합 능력치에서 앞자리 숫자의 차이는 커다란 전투력 격차를 낳는다.

“이제 내 차례지?”

얼이 빠져 있는 방철수의 뺨을 착착 건드려 준 나는, 있는 힘껏 놈의 얼굴을 후려쳤다. 단번에 이빨 두어 개가 날아간 놈이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이어서 망설이지 않고, 가시를 들어 녀석의 팔을 정확히 꿰뚫었다.

“으아아악!”

나는 놈의 한쪽 팔을 가시로 찍어 벽에 고정한 후, 무차별적인 폭행을 시작했다. 등허리, 허벅지, 대퇴부와 옆구리를 비롯하여, 가장 고통스러우면서도 한 번에 기절하지 않을 부위만을 골라서.

[성좌, ‘잡배의 군주’가 즐거워합니다.]

[성좌, ‘잡배의 군주’가 서브 시나리오 시간 연장을 요청했습니다.]

[서브 시나리오가 1분 연장됩니다.]

여자가 다친 부위도 참고했다.

“커헉! 크헉! 크허헉!”

피가 튀고, 살점이 튀었다. 부서진 이빨이 바닥을 굴렀고, 부러진 뼈마디가 기형적으로 휘었다. 그래도 나는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 그만해! 제발! 형님을 놔줘!”

곁에 있던 사내들이 패닉에 빠져서 외쳤다. 나는 그런 사내들을 한 번씩 둘러보았다. 그리고 반쯤 옷이 벗겨진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자를 보았다.

인간은 약하다.

그처럼 약한 인간이, 어째서 이토록 잔혹한 일을 벌일 수 있는 걸까. 단지 세계가 멸망했다는 핑계 하나로. 다른 이들을 죽이고, 여자를 강간하고, 남의 것을 빼앗고. 

본능 때문에?

더 강한 폭력 앞에서 두려움으로 얼룩진 방철수의 눈을 보며, 나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왜 그랬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다. 

그렇기에 대답을 기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발길질을 가하려는 순간 방철수가 눈을 부릅떴다.

“씨바알······ 그냥 죽여 이 개새끼야.”

그 눈을 보는 순간, 나는 그가 자신의 방식으로 내 질문에 대답했다는 것을 알았다. 생에 대한 어떤 미련도 보이지 않는 눈빛. 그런가. 본능 때문이 아니었나.

잦아드는 목소리로, 방철수는 지껄였다.

“개 같은, 개 같은 세상······.”

이 녀석은 이 세계가 멸망하기 훨씬 전부터, 줄곧 절망해 있던 종류의 인간인 것이다. 마치 나처럼.

[서브 시나리오 종료까지 10초 남았습니다.]

나는 더 지체하지 않고 녀석의 목에 강한 발차기를 먹였다.

흐끅, 숨을 토해낸 방철수가 결국 기절했다.

[서브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3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이만하면 녀석도 만족했겠지.

[성좌, ‘잡배의 군주’가 만족하며 100코인을 추가로 후원하였습니다.]

바닥을 기듯 사내들이 하나 둘씩 다가왔다.

“어, 어떻게 이런 잔인한······.”

그들은 넝마 짝이 된 방철수를 살피더니, 입도 벙긋 못하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처분을 기다리는 도살장의 개들처럼.

나는 쓰러진 여자를 들쳐 업고, 편의점 봉투를 쥐었다.

어찌됐든 세상은 멸망했고, 나는 새로운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룹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

본래 금호역은 유중혁에 의해 정리가 된 후 지역 거점으로 성장하는 곳이었다.

회귀 1회차때만 해도 유중혁은 금호역 그룹과 함께 두 번째 메인 시나리오를 돌파했고, 덕분에 그룹의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에서 제각기 한 자리씩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1회차의 얘기고, 3회차 회귀의 유중혁은 다르다.

3회차의 유중혁은, 모든 것을 독식하는 괴물로 태어났다.

“······그렇다곤 해도 기본적인 정리는 하고 가는 녀석이었는데.”

“예?”

나를 안내하던 사내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혼잣말입니다. 버릇이거든요.”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혼잣말을 좋아합니다.]

“예에······ 아무튼, 이쪽입니다.”

서로를 부축하던 철두파의 사내들이 멈춰 섰다. 불이 꺼진 플랫폼 아래쪽으로 내려가자, 아직까지 전기가 들어오는 곳이 있었다.

계단참을 내려가자마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철두파다! 사람이 다쳤어!”

몇몇 사람들이 달려와 방철수 일행을 부축했다. 생각보다 체계가 잡혀 있는지,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맙소사. 독자 씨! 김독자 씨!”

다행히 별 일 없었던 모양이다.

“유상아 씨.”

“다행이에요.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의 유상아가 눈앞에 있었다. 놀란 유상아에게 나는 어색하게 악수를 청했다.

나흘 간 꽤나 고초를 겪었는지 유상아의 손등에는 자잘한 생채기들이 있었다. 

폭―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뭔가가 내 다리에 들러붙은 것은 그때였다.

“살아 있었구나.”

이길영. 나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 있었냐?”

이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를 얼마나 곯았는지 뺨이 홀쭉했다. 나는 봉지에서 초코바 하나를 꺼내 이길영의 손에 쥐어 주었다.

“역시 살아 계셨군요, 독자 씨. 하아······.”

마지막으로 나를 찾은 것은 이현성이었다. 그간 약간의 성장을 한 모양인지 상반신 근육이 더 탄탄해져 있었다. 아마 이현성이 이 둘을 지켜준 것이리라.

“정말 죄송합니다. 그때 독자 씨를 두고 가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휴, 유중혁 씨 말이 맞아서 천만 다행입니다.”

······유중혁? 그 이름이 왜 거기서 나오지?

이현성은 잠시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그게, 유중혁 씨가 김독자 씨는 아마 살아있을 거라고······.”

“······유중혁은 지금 어디 있죠?”

“그게, 지금은 여기에 없습니다.”

없다고?

“유중혁 씨는 어제 역을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이현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군. 

역시 그렇게 된 건가.

하여간 급한 녀석이다.

“그러고 보니 없는 사람이 하나 더 있군요.”

“아, 부장님은.”

유상아의 말은 갑작스레 난입한 사내들 때문에 이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잘 된 일이었다.

“다들 비켜!”

설명을 듣지 않아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으니까. 제각기 망치나 파이프 따위의 연장으로 무장한 서너 명의 사내들이 시위라도 하듯 나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익숙한 얼굴.

“너, 너는······!”

짝수 다리에서 나를 버리고 튀었던 한명오가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역시 한명오는 저 그룹에 붙은 모양이다.

“저, 저놈을 내보내. 저거 아주 악독한 놈이야! 여기 있으면 안 될 놈이라고!”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내가 복수라도 할 거라 생각했는지 한명오가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내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한명오를 중심에 두고 있는데, 한명오의 말은 듣지 않는다?

“하하, 한 형. 다들 사이좋게 지내야지 왜 그러십니까.”

“아, 그, 그게.”

“그쪽이 오늘 새로 오신 분이시군요.”

사내들이 양 옆으로 갈라지며 길이 생겼다.

무리 속에서 나타난 호리호리한 체형의 사내. 

눈빛만 봐도 느낌이 온다.

역시, 배후성을 가진 놈이다.

“반갑습니다. 성함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김독자입니다.”

“김독자 씨. 그렇군요. 저는 천인호라고 합니다.”

천인호? 뭔가 기억이 날 것 같은 이름인데. 

나는 가시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보아하니 철두파 녀석들은 이놈의 슬하에 있는 모양. 

놈들을 반쯤 조져놨으니 이 녀석이 내게 시비를 걸어올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같이 오신 분들께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괴물들과 싸워 저희 그룹원들을 구해 주셨다고요.”

······뭐?

“여러분, 다들 모여주세요! 여기 용감한 새 그룹원이 왔습니다!”

천인호의 말에 사람들이 하나둘 씩 이쪽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한명오의 카리스마로 이 정도 세력 규합이 가능할 리가 없다. 이 무리의 진짜 리더는 이 녀석이다.

“우왓! 먹을 거잖아!”

허기진 사람들의 시선이 편의점 봉투에 꽂혔다. 그러자 천인호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우릴 위해 직접 구해 오셨다는군요. 보기 드문 호인이십니다.”

그 말에 구원자라도 보는 듯한 시선들이 내게 꽂혔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도, 다리를 다친 노인도, 모두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천인호······ 기억날 것도 같다. 

그래, 금호역 그룹에는 이놈이 있었지.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흥분합니다.]

멸망한 세계에서 진짜 위험한 놈은 방철수 같은 자들이 아니다. 절망 속에서 날뛰는 인간들은 조금도 위험하지 않다.

진짜 위험한 놈들은 타인의 절망을 권력의 비료로 사용하는 놈들이다. 바로 이 녀석처럼. 

“금호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김독자 씨.”

시선이 마주친 천인호의 눈이 깊이 웃고 있었다. 녀석이 내미는 악수를 마주 받으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천인호는 모를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미래가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Episode 4. 위선도 선이다 (3)

천인호의 난장에도 불구하고 성좌들은 ‘현상금 시나리오’를 요청하지 않았다.

즉, 아직은 놈을 처리할 최적기가 아니라는 얘기.

그로부터 약 반나절 동안 나는 금호역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주로 정보를 준 것은 이현성이었다.

“현재 금호역에 모여 있는 인원은 총 86명입니다. 아, 독자 씨까지 합치면 이제 87명이겠군요.” 

“생각보단 적네요.”

“예. 시나리오가 터질 때 역 인근에 있었던 사람들이랑 열차에 타고 있었던 사람들만 살아남았습니다. 다들 말은 하지 않지만, 아마 모두 첫 번째 시나리오를······.”

그 뒤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만 봐도 안다. 누군가의 생명을 짓밟고 살아남은 자들. 이곳의 모든 인간들은 살인자들이다.

“현재 금호역은 크게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하나의 그룹과 나머지 사람들이지만요.”

이현성은 어두운 얼굴로 사람들 쪽을 보았다. 제각기 쇠파이프나 연장으로 무장한 사내들. 척 봐도 주류가 어느 쪽인지는 명확했다.

“나만 믿으라고! 그룹 회장님이 힘쓰고 있으니까 다들 곧 구출될 거야.”

한경 그룹의 막내아들인 한명오 부장.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여러분. 모두 희망을 잃지 마세요. 우린 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명오를 품에 안고 실질적으로 그룹을 이끌고 있는 실세 천인호. 그들이 바로 ‘주류 그룹’일 것이다.

“심심해 엄마······ 폰 게임 하면 안 돼?”

“조금만 참아. 곧 구조대가 올 거야.”

“정부가 움직일 거라니까. 국가라는 게 그리 쉽게 무너지는 게 아니야.”

그리고 그런 주류 그룹의 보호를 받으며, 어떻게든 삶을 꾸려가고 있는 것이 ‘소외 그룹’으로 통칭되는 나머지 사람들이었다. 

사람을 죽인 이들이라기엔 지나치게 의지박약한 모습들. 하지만 살인자도 백 명을 모아 놓으면 강자와 약자가 나뉜다. 어쩌면 저들은 자신들이 살인범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그렇게 믿는 것이다.

이현성은 사람들을 선동하는 주류 그룹 쪽을 보며 말했다.

“식량 배분은 주류 그룹에서 결정하고 있습니다. 역내 편의점이나 음식점들은 벌써 털었고······ 당장 먹을 수 있는 식량들은 거의 떨어져 가는 추셉니다.”

“그렇군요.”

“그 때문에 어제부터 주류 그룹에서 몇몇 인원을 차출해 지상으로 식량 탐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저희랑 같이 다니던 희원 씨도 차출 대상이었고요.”

“희원 씨라면······?”

“아, 낮에 독자 씨가 구해오신 여성분의 이름입니다.”

나는 지하철 벤치 위에 누워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밝은 곳에서 보니 그럭저럭 미인상의 얼굴이었다. 볼이 도톰하고 인상이 순해서, 평소에 귀염성 있다는 소리를 제법 들었으리라.

원숭이 허파 덕분인지 여자의 혈색은 아침보다 많이 밝아져 있었다.

“차출된 인원들 중 낙오된 건 희원 씨 하나 뿐입니까?”

“아닙니다. 사실 아침에 몇 명 더 나갔었는데, 소외 그룹 인원들만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돌아오지 못했다고요?”

“예.”

다시금 침통해지는 이현성의 얼굴. 대충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이현성의 어깨를 세게 잡았다. 실제로 만져 보니 확실히 알겠다. 과연 강철검제. 이 정도면 곧 근력 레벨 10을 넘을 것이다.

“왜, 왜 그러십니까······?”

“이현성 씨 정도면 저쪽에서 러브콜을 받았을 텐데, 용케 가지 않으셨네요.”

“아, 그건.”

이현성의 객관적인 전투력은 방철수 이상이다. 천인호가 노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잘 설명하진 못하겠습니다만,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저는 거창한 도덕이나 윤리 같은 건 잘 모릅니다만······.”

이현성은 민망한 듯 볼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그쪽은 뭔가 ‘옳지 않다’고 느꼈거든요.”

옳지 않다······.

별 것 아닌 대답이었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역시 이현성은 이현성이다.

“그 마음 잊지 마세요.”

그래야, 나도 당신을 계속 믿을 수 있을 테니까.

꼬르륵.

어디선가 귀여운 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뒤쪽에서 유상아와 이길영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미새를 기다리는 아기새 같은 얼굴들이라,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벌써 저녁 시간이네. 다들 배고프죠? 하나씩 들어요.”

나는 편의점에서 가져온 음식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앗. 정말요? 그래도 돼요?”

“이번에는 공짜지만, 다음부턴 돈 받을 거예요.”

“넷? 어, 얼마나······.”

“다들 코인 있죠? 한 개당 10코인 씩 받을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그, 그런······.”

유상아와 이현성의 얼굴이 일순 당황으로 물들었다. 내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는 표정들이다.

“당연한 거죠. 그냥 지금부터 낼게요. 공짜는 필요 없어요.”

놀랍게도 그 말을 한 것은, 여태껏 벤치에 누워 있었던 여자였다. 그새 정신이 든 모양이다.

“정희원이에요. 아침엔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아닙니다.”

그저 귀여운 마스크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편견이었다는 것을 알겠다. 

“유상아 씨, 이현성 씨. 다들 정신 차리세요. 그런 표정 짓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요. 이 식량들, 전부 저 사람이 목숨 걸고 구해온 거예요. 지금 그걸 공짜로 받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망설임 없이 자기 할 말을 내뱉는 얼굴엔 거의 표정이 없었다.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유상아가 볼을 붉혔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죄송해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건데······ 맞아요. 저도 공짜는 싫어요.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도 싫구요.”

“저도 유상아 씨와 같은 생각입니다. 코인은 지금부터 내겠습니다.”

뜻밖의 반응들이라 나는 조금 놀랐다. 과연, 아포칼립스가 왔다고 해서 모두 같은 종류의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다들 코인 거래법은 아시죠?”

“네. 며칠 전에 배웠어요. 서로 검지를 맞대고, 음, 그리고······.”

“주실 만큼의 코인을 속으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곧 정희원부터 시작해서 유상아와 이현성까지, 물건 하나씩을 집어가는 대가로 10코인을 지불했다.

생각보다 일행들의 저항이 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고작 몇십 코인을 벌겠다고 이런 일을 벌인 건 아니었다.

처음에야 이런 판단이 야속해 보일 수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들도 이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길영’이 당신에게 20코인을 지불하였습니다.]

“응? 넌 10코인을 더 냈는데?”

“낮에 먹은 초코바 값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이길영의 표정은 꽤 의연했다. 어쩌면 새로운 세계에 제일 빨리 적응하는 것은 어른이 아니라 아이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겐 자신이 가진 상식을 깨부수는 과정이 보다 수월할 테니까.

“그럼 독자 씨는 계속 저희와 함께하시는 겁니까?”

“아, 그건······.”

“김독자 씨.”

나를 부른 것은 이현성이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니, 천인호를 위시한 ‘주류 그룹’들이 서 있었다.

그래, 슬슬 올게 왔군.

“잠시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개중에는 이빨이 죄다 없어진 채 나를 노려보는 방철수도 끼어 있었다. 가늘게 마주 노려봐줬더니 금세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운다. 같잖은 녀석.

“좋죠, 이야기 해봅시다.”

내 말에 천인호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른 분들은 잠깐 자리를 비워 주시겠습니까? 김독자 씨와 단 둘이 이야기하고 싶거든요.”

“아, 그러시다면······.”

“아뇨, 다들 갈 필요 없습니다. 같이 들으세요.”

내 말에 천인호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물러서려던 이현성들이 엉거주춤 내 곁에 멈춰 섰다.

“흠, 그러신가요? 뭐······ 상관은 없습니다만.”

들을 테면 들으라는 듯한 여유. 

천인호는 벤치를 휘휘 닦더니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철두파의 사내들이 양쪽에서 나타나 담배를 건네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녀석이다.

“거추장스러운 건 싫어하는 성격이신 것 같으니,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러시죠.”

“우리 그룹에 들어오세요.”

역시나, 예상했던 제안이었다.

“김독자 씨 정도라면 우리 그룹에서도 높은 자리를 줄 수 있어요. 함께 그룹을 이끌어 주셨으면 합니다.”

“왜 하필 나죠?”

“이유는 잘 아실 텐데요?”

천인호는 상처투성이의 철두파들을 흘끗 보며 말했다.

“김독자 씨는 괴물들에게서 사람들을 구한 영웅입니다. 그런 영웅에겐 마땅한 자리가 필요한 법이죠.”

그것 참 흥미로운 발상의 전환이다. 내 존재를 그렇게 이용하겠다 이거지.

“거절한다면요?”

“거절? 재미있군요. 그런 경우는 생각해 보질 않았는데.”

천인호가 담배 연기를 내 쪽으로 훅 뿜으며 웃었다.

“김독자 씨, 이건 부탁이 아닙니다. 당신에겐 그럴 의무가 있어요. 저기 불쌍한 사람들이 안 보이십니까?”

꾀죄죄한 얼굴로 이쪽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 배를 곯으며 울먹이는 아이와 지친 노인들.

“달리 거창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저 모두의 생존을 위해 협력해 달라는 거죠. 김독자 씨는 그럴 힘이 있으시잖습니까?”

“정확히 뭘 바라는 겁니까?”

“히트맨이 될 사람이 필요합니다.”

히트맨?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역할을 해 주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혼자 식량을 조달하고, 약수 쪽 터널에서 사냥하는 법도 알려 주셨죠. 정확히는 저희가 일방적으로 훔쳐본 겁니다만.”

물어보지 않아도 알겠다.

이건 유중혁의 이야기다.

“그런데 어젯밤 그분이 갑자기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대신할 사람이 필요하다?”

“철수 씨를 저렇게 만들 정도면 충분히 증명도 된 것 같고요.”

그 말에 이현성과 정희원의 눈이 커지는 것이 보였다. 이제야 그들도 사태가 어떻게 된 것인지 눈치 챈 것이다.

“김독자 씨에게 나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은 사람들의 영웅이 되고, 우리와 함께 그룹의 지도자가 되는 겁니다. 모두가 당신을 좋아할 거고, 또······.”

“미안하지만 난 누굴 책임 질 그릇이 못됩니다. 당신네 그룹과 함께할 생각도 없고.”

“흐음. 그렇습니까?”

“무엇보다 당신이 그룹을 운영하는 방식은 내게 맞지 않습니다.”

나는 혈색이 건강한 철두파의 대원들과, 안색이 나쁜 소외 그룹의 일원들을 일별했다. 특히 정희원은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보듯 천인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별 수 없군요. 하지만 생각이 바뀌시면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하하, 그건 두고 봐야 알겠죠.”

천인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철두파의 인원들이 물러서자,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그룹원들이 몰려왔다. 소외 그룹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짜고짜 나를 붙들고 언성을 높였다.

“이봐요, 소문이 진짭니까?”

“식량을 독점한다는 게 정말이에요?”

“모두가 나눠도 모자랄 판에 지들만 먹고 살겠다고?”

“다 같이 구해온 거라며! 그걸 니들만 가지는 게 어디 있어!”

“인호 씨에게 식량을 맡겨라! 그리고 공평히 분배를 받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만했다. 사람들의 뒤쪽에서 빙긋 웃고 있는 천인호의 면상이 보였다. 그의 입술이 말하고 있었다.

‘선택하시죠.’

식량을 나눠 주고 영웅이 될 것이냐.

아니면 홀로 식량을 독점하고 악당이 될 것이냐.

영웅이 되길 선택한다면 나는 천인호의 계략대로 놀아나게 될 것이다. 식량을 나눠줬으니 그룹원들과 함께 식량 사냥에 나서야만 할 테고, 언젠가는 뒤통수를 맞게 될 것이다.

반면 식량을 독점한다면, 그룹 내에서 순식간에 고립되어 혼자가 되겠지.

[소수의 성좌들이 눈을 반짝입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콧김을 뿜습니다.]

사람들이 지나치게 과열되는 양상을 보이자, 천인호가 나섰다.

“아아, 여러분. 진정하세요.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김독자 씨는 그럴 분이 아니십니다.”

얼씨구. 바람잡이까지?

“김독자 씨는 저희와 같이 활동하기로 하셨습니다. 오늘 가져온 식량은 당연히 주류 그룹에 맡겨서 공평히 나눌 것이고, 앞으로도 여러분들을 위해 함께 일할 거라고 약속을―”

당연히 내가 그쪽을 택할 거라 믿는 말투. 더 이상은 들어주기가 힘들었다.

“그만.”

나는 잠시 골몰했다. 

유중혁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 그런가. 

지금 이 곳에 그 녀석이 없다는 것이 그에 대한 답이겠지.

하지만 나는 유중혁이 아니다.

“물론, 식량은 나눠줄 겁니다.”

내 말에 천인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보였다. 하지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아는 법이다.

“단, 공짜는 아닙니다.”

유중혁처럼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앞으로 나아가진 않지만, 그렇다고 내가 모두를 책임지지도 않을 것이다.

음식은 주되, 공짜는 아니다.

사람들은 잠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자, 잠깐! 공짜가 아니라니?”

“쉽게 말씀 드리죠. 저는 식량을 독점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천인호 씨네 그룹에 식량을 맡기지도 않을 겁니다. 저는 유니셰프도 아니고, 저 사람들을 믿지도 않거든요.”

나는 씩 웃으며 천인호 쪽을 바라보았다.

“저는 여러분과 거래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정당한 가격을 받고, 음식을 팔길 원합니다.”

“파, 판다고요?”

“그게 무슨······!”

“어, 얼마에······ 돈이면 됩니까?”

멀리서, 천인호의 안색이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를 향해 마주 웃어주며 말을 이었다.

“아뇨, 저는 코인만 받습니다.”

*

그리고 잠시 후, 주변에는 나와 인연이 있는 소외 그룹 사람들만이 남았다.

“저······ 독자 씨. 이거 괜찮은 선택이었을까요?”

“쳇,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독자 씨, 잘 말했어요. 내가 속이 다 시원하더라.”

이현성의 염려에 정희원이 대거리를 했다. 

내가 ‘거래 선언’을 한 후 많은 시민들은 내게서 등을 돌렸다. 아마 다들 실망감이 컸을 것이다.

“저도 희원 씨 말에 동의해요. 이곳 사람들은 ‘주류 그룹’에 너무 길들여져 있어요.”

“맞아. 개새끼들······ 지금 금호역은 전부 그놈들 손바닥 안에 있어요. 사람들은 무슨 가축이라도 된 것처럼 주는 대로 받아 처먹고, 가끔 도살장에라도 끌려가듯 정찰대에 동원된다고요. 오늘 아침에 내가 그랬듯이.”

정희원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실, 그동안 식량을 진짜로 독점해온 것은 내가 아니라 ‘주류 그룹’이었다. 

그들은 ‘정당한 배분’을 핑계로 식량을 독점해왔고, 그것을 먹이 삼아 사람들을 길들였다.

인간은 누군가가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믿을 때 가장 나약해진다.

일방적인 관계에서 세워진 권위에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의존하고 복종하기 시작한다.

“저도 동의합니다. 그래서 오늘 독자 씨 선언이 굉장히 의미 있었다고 믿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뭔가를 할 의지를 가져야 해요. 그렇지만······.”

이현성의 말에 모두가 식량 쪽을 바라보았다.

“하나도 팔리질 않았네요. 개당 50코인이라니, 가격을 너무 비싸게 매기신 건 아닐까요? 그냥 저희한테 파셨던 것처럼 10코인에 주시는 게 어떠실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흘끔흘끔 주류 그룹의 눈치만 볼 뿐, 이쪽으로 올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까. 사람들에겐 아직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차분히 대답했다.

“조금 더 기다려 보죠.” 

이윽고 밤이 찾아왔다. 

지상에서 거대 괴수들의 발걸음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고, 악몽을 꾸는 사람들이 종종 잠꼬대를 했다. 이길영과 유상아가 가장 먼저 잠에 들었고, 정희원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독자 씨도 잠시 주무시죠. 제가 불침번을 서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이현성 씨 먼저 주무세요.”

“하지만 피곤하실 텐데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이요?”

나는 이현성의 뒤편을 가리켰다. 놀랍게도 그곳에 사람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 둘이 아니었다.

“저······ 식량 아직 파십니까?”

마침내,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pisode 4. 위선도 선이다 (4)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내가 가진 식량은 거의 동났다. 정희원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편의점 봉투를 탈탈 털었다.

“맙소사, 그게 다 팔렸어요?”

“네.”

“하, 웃기네 진짜. 다들 눈치만 보더니 그걸 전부······.”

“아뇨, 소외 그룹만 사간 건 아닙니다.”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은 소외 그룹의 인원들뿐만이 아니었다.

“김독자 씨, 정말 최악의 선택을 하시는군요.”

그 중에는 천인호도 있었다.

“후회하실 겁니다.”

내가 가진 식량의 절반 이상은 주류 그룹이 가져갔다. 물론, 셈은 정확히 치렀다. 

이야기를 들은 정희원이 노발대발했다.

“잠깐만요. 그럼 결국 주류 그룹이 다시 식량을 독점하게 됐단 얘기잖아요?”

“그런 셈이죠.”

“아니, 그럼 어떡해요! 사람들 사이의 거래를 촉진시켜서 주류 그룹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거 아니었어요?”

예상 밖의 통찰력이군.

나는 조금 감탄하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런 의도였어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길 바랐죠.”

“그런 거면 주류 그룹한테 식량을 팔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상황이 변하는 게 없는데!”

“변했죠. 저한테 코인이 생겼잖아요.”

“네?”

그것도 무려 1450코인이 생겼다.

하룻밤 장사치고 아주 짭짤한 소득이다.

“아니······ 독자 씬 대체 뭔 생각인 거예요? 상아 씨, 우리 이 사람 믿어도 되는 거예요?”

갑자기 자신에게 타깃이 돌아오자 유상아는 잠시 움찔 하더니, 이내 밝게 웃었다.

“전 믿어요.”

부담스럽구만 그거.

“독자 씨, 그래도 본인 먹을 식량 정도는 남겨 놓으신 거죠?”

“아뇨, 다 팔았는데요.”

정희원이 어이없다는 듯이 입을 딱 벌렸다. 그때, 누군가가 내 뺨을 쿡 찔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막대 과자가 그곳에 있었다.

“응? 나 먹으라고?”

끄덕끄덕하고 귀엽게 움직이는 머리. 나는 웃으며 과자를 받아 이길영의 입속에 도로 넣어 주었다.

“됐어, 너 먹어. 아, 그리고 말 나온 김에 말씀 드리는 건데······ 여러분, 각자 어제 구입하신 식량들 남으셨죠?”

“예, 남았습니다.”

“저도 조금 남았어요.”

“왜요, 도로 사 가시게요? 난 비싸게 팔 건데.”

정희원이 장난 섞인 목소리로 비스킷을 흔들었다.

“아뇨, 그거 지금 다 먹어두시라고요.”

“네?”

“오늘이 지나기 전에 모두 먹어두세요. 꼭 그러셔야 합니다.”

나는 반복해서 강조했다.

“아니면 후회하게 될 거예요.”

“왜요? ······ 아니, 잠깐만. 상아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왜 저 사람 말을 듣는 건데?”

“독자 씨가 저렇게 말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니까요.”

벌써 하나 남은 비스킷 봉투를 뜯은 유상아가 생긋 웃었다.

이현성은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지만 일단 식량을 뜯었고, 이길영은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벌써 다 먹어치운 뒤였다. 말을 잘 듣는 아이다.

“아, 찝찝한데······ 난 이거 하나만 남겨둘래요.”

“말리진 않겠습니다.”

정희원의 말에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후회는 자기 몫이니까.

그리고 점심 무렵이 되어, 주류 그룹의 중대 발표가 있었다. 플랫폼의 중앙에 사람들을 모은 천인호가 말했다.

“오늘부턴 식량 배급량을 제한하겠습니다. 배분은 1인당 비스킷 세 조각입니다. 그리고―”

발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이 크게 술렁였다.

“뭐? 비스킷 세 조각? 그것만 먹고 어떻게 살라는 거야 지금!”

“맞아! 정찰대 새끼들은 배급량보다 더 많이 처먹잖아? 우리가 모를 줄 알아?”

튀어 나오는 욕설에도 천인호는 차분히 웃을 뿐이었다.

“말씀들 잘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정찰대는 더 많은 배급을 받습니다. 그러니 식량을 얻고 싶다면 정찰대에 지원하시기 바랍니다.”

“정찰대에 지원해서 돌아온 사람이 거의 없잖아! 늘 돌아오는 건 철두파 놈들뿐이고!”

“지금 우리보고 죽으란 말이야?”

과격한 시민들의 반응에도, 천인호는 그저 태연했다.

“그 사람들은 운이 없었을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바깥은 몹시 위험하거든요. 불만이시면 직접 식량을 구해 오시는 건 어떨까요?”

“그, 그건······.”

사람들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았다. 지금 밖으로 나가면 죽는다. 누구나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천인호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 물론 정찰대가 되지 않으셔도 식량을 얻을 방법은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거래입니다. 무엇이든 저희가 판단하기에 가치가 있는 거라면 식량과 교환해드리겠습니다. 사람마다 줄 수 있는 건 모두 다르니까요. 그렇죠?”

천인호의 차가운 시선을 받은 몇몇 사람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대개는 어제 우리에게 찾아와 식량을 사 간 사람들이었다.

[등장인물 ‘천인호’가 스킬 ‘선동 Lv.2’을 발동합니다.]

“원래는 이렇게 까진 안 하려고 했습니다만, 어제 저기 있는 김독자 씨가 좋은 걸 알려주셨죠. 맞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습니까? 식량을 가지고 싶으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죠. 그게 당연한 거니까요. 하하, 좋은 걸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독자 씨.”

······이것 봐라?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대개는 원망 섞인 눈빛이었다.

“저 자식 때문에······.”

사람들이 왜 이렇게 멍청이가 되었나 싶었더니, 역시나 천인호는 [선동]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하긴, 웬만한 그룹 리더면 다 가지고 있는 스킬이긴 하니까.

하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또 나한테 적의를 돌릴 줄이야······.

나는 방수포를 친 아지트로 돌아가는 천인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저 정도면 귀여운 수준이다. 충무로나, 서울역에 있을 그놈들에 비하면 말이지.

벌써부터 방수포 앞쪽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흥정을 시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코, 코인으로 사겠습니다. 얼마면 됩니까?”

“200코인.”

“예? 하지만 그렇게 많은 코인은 없는데요.”

“그럼 꺼지던가.”

200코인에 식량 하나라. 도깨비도 기절할 법한 폭리다.

아지트 앞에서 식량을 팔던 철두파 중 하나가 나를 보더니 흠칫 몸을 떨었다. 허벅지에 붕대를 감은 걸 보니 어제 나한테 당한 놈들 중 하나인 듯했다.

“어제 내가 고맙다고 말했던가요?”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정희원이 가까이 서 있었다.

“들었던 것 같네요.”

“그래도 한 번 더 고맙다고 해둘게요.”

뭔가 싶었는데, 정희원의 눈이 절름발이 철두파에게 꽂혀 있었다.

“저기 다리 저는 새끼, 어제 나 강간하려고 했던 놈이거든요.”

“······그랬군요.”

“저 새낀 직접 내가 죽여 버릴 거니까 건드리지 마요. 알겠죠?”

눈빛에 이글거리는 살기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 정도면 배후성의 선택을 받았을 법도 한데, 특성이 늦게 개화한 편인가?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스킬을 사용하고서 잠깐 걱정이 되었다. 

이 여자도 내가 살리지 않았으면 죽을 운명이었을 텐데, 등장인물 등록이 되어 있으려나?

<인물 정보>

이름 : 정희원

나이 : 27세

배후성(背後星) : 없음(현재 3개의 성좌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전용 특성 : 웅크린 자 (일반)

전용 스킬 : [귀살 Lv.1], [검도 Lv.1]

성흔 : 없음

종합 능력치 : [체력Lv.4], [근력Lv.4], [민첩Lv.7], [마력Lv.4]

종합 평가 : 막대한 잠재력을 가진 ‘웅크린 자’입니다. 아직 특성이 개화하지 않아 특성 정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행히 인물 정보는 떠올랐다.

유상아나 이길영, 한명오와는 다른 경우라 이거지.

원래 쓰임새가 있었는데 버려진 인물일까?

그나저나, 상당히 흥미로운 전용 특성이다.

‘웅크린 자.’

이름만 보면 별 것 아닌 거 같지만, 저 특성은 멸살법 안에서 몇 안 되는 ‘초진화형 특성’이다. ‘웅크린 자’는 일반 특성이지만 어떤 계기를 맞이하느냐에 따라 ‘희귀’는 물론이고 ‘전설’급 특성까지도 도달할 수 있다.

멸살법 최강의 100인중 하나인 ‘광기의 도살자’도 결국 ‘웅크린 자’에서 진화했다.

정희원.

그냥 지나가는 인물인 줄 알았는데, 동료로 삼는 걸 고려해봐야 할지도 모른다.

전용 스킬에 있는 [귀살]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이 여자는 잘만 키우면 강력한 히트맨이 될 테니까.

“근데 독자 씨는 굉장히 침착하시네요.”

침착하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평소에 소설에서 이런 상황을 많이 봐서 익숙하거든요.”

“네? 그게 말이 돼요? ······잠깐만요. 어디 가시는 거예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플랫폼 아래로 내려갔다. 정희원이 함께 내려오려는 눈치라, 나는 손을 뻗었다.

“괜찮아요.”

정희원은 가볍게 플랫폼 아래로 착지했다.

나는 철길을 걸어 약수역으로 향하는 터널 길목을 살폈다. 짙은 어둠으로 둘러 싸여 있어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독한 냄새가 났다. 피비린내였다.

“저기로 가려는 건 아니죠?”

정희원이 물었다.

“저쪽으로 간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깡패든 뭐든. 저 안으로 들어가면 무조건 죽어요.”

그녀의 말은 틀렸다.

모두가 죽은 건 아니다.

적어도 한 사람은, 이미 저 길을 뚫고 다음 역으로 나아갔을 테니까.

우리는 다시 플랫폼 위쪽으로 올라왔다.

꽤나 시간이 흘렀음에도 식량을 거래하기 위한 사람들의 줄은 여전히 길었다.

주류 그룹에게 항의하던 몇몇 사람들은 두들겨 맞았고, 일부는 비정상적인 가격을 지불하고 식량을 구매했다.

정희원이 분노를 터뜨린 것은 소외 그룹의 젊은 여자 몇 명이 몰래 방수포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직후였다.

“아, 짜증나네. 방금 봤어요?”

“봤습니다.”

천인호는 말했다. 식량 교환은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그런데 방금 들어간 여자들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이를 갈던 정희원이 벌떡 일어섰다.

“저런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

“어쩌시게요?”

“말려야죠.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라고 말해줘야죠!”

“그러면 저 여자들이 굶을 텐데요.”

“그럼 저 짓거리를 그냥 보고 있으란 얘기에요?”

“네, 이번에는 그냥 보고 계시는 게 좋을 듯한데요.”

“지금 그거 무슨 뜻이에요?”

나는 경멸적인 정희원의 시선을 묵묵히 받았다.

“정희원 씨, 당장 저 여자들을 말린다고 해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당신이 여자들을 말려도, 밤이 되면 비슷한 일은 또 벌어질 거예요.”

“······그러면 또 막아야죠. 또 막고, 또 막아야죠.”

“그럼 사람들의 식량은요? 방금 들어간 사람 중에는 아이의 어머니도 있습니다. 만약 아이가 굶어 죽게 된다면, 정희원 씨가 그 아이의 죽음까지 책임지실 겁니까?”

정희원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표정을 숨기려는 듯,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어쩌란 말이에요, 대체······.”

나는 고개를 떨어트리는 정희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걸로 정희원이 돌발 행동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귀살]을 가진 [웅크린 자]. 

지금의 정희원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무분별한 살인귀로 진화할 수도 있다.

“정희원 씨, 이 문제의 핵심은 결국 ‘식량’입니다. 그렇죠?”

“······그렇죠.”

“그럼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면 되겠군요.”

“네?······.”

나는 대답 대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치지지직!

그래, 나타났군.

허공이 갈라지며 익숙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 이 모든 비극을 개막한 인류의 악몽.

[저어······ 다, 다들 잘 지내셨어요? 그간들 많이 무료하셨죠?]

도깨비.

“으, 으와아악!”

아직 도깨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도깨비의 등장만으로 패닉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녀석들이 나타나고부터 좋은 일이 일어난 적이 없으니까.

저 강단 넘치는 정희원마저 순간적으로 움찔할 정도였으니 이만하면 말 다했지.

그건 그렇고, 비형이 아니군.

본래 이 근방의 채널을 담당하는 도깨비는 비형이었다. 그런데 저 녀석은 생긴 것부터가 다르다. 새하얀 솜털이 돋은 비형과는 다르게, 놈의 솜털은 시커먼 흑색이다.

[워, 원래 이 채널 담당하던 친구가 징계를 먹었거든요······. 그, 그래서 이번 시나리오는 제가 담당하게 됐어요.]

도깨비치고 소심한 말투가 무척 인상적이다.

[그, 그런데 여러분. 괴, 굉장히 평화로워 보이시네요? 비, 비형 녀석 나한텐 잘난 척 하더니 시나리오 난이도를 이 따위로······.]

“무, 무슨 말을 하려고 온 거야! 용건부터 말해!”

[히, 히익. 화내지 마세요. 여러분. 아, 아무튼 저는 여러분들 위해서 온 건데에······.]

“우릴 위해서?”

“그, 그럼 먹을 걸 줘!”

[머, 먹을 거요? 아하······ 먹을 거라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깨비의 손이 움직였다.

[시나리오 패널티가 추가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식량 비축이 제한됩니다.]

[기존에 존재하던 비축 식량이 사라집니다.]

“어, 어어! 뭐야!”

곳곳에서 비상식량을 꺼내 먹던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주류 그룹이고 소외 그룹이고 할 것 없이, 모든 장소에서 ‘식량’이라 부를 법한 것들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헤, 헤헤. 근데 여러분. 그럼 안돼요. 시, 시나리오를 시작했으면 시나리오를 깰 생각을 해야죠.]

파스슥!

통조림, 과자, 칼로리바 등등.

사람들이 모아 두었던 비상식량들이 도깨비의 손짓 한 번에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눈앞에서 음식들이 사라지는 것을 본 사람들이 황망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머, 먹을 거나 밝히고 있으면 되나요? 하여간 지, 지구 쓰레기들······.]

갑자기 변하는 녀석의 말투.

어쩐지 놈의 이름이 기억날 것 같았다.

원작 설정에 따르면 저런 도깨비가 하나 있었지. 말투는 소심하지만, 하는 짓은 그 누구보다도 잔혹한 도깨비가.

멀리서 천인호가 당혹스런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그럼 이제부터 재미있게 해 주세요, 여러분. 헤헤······.]

그리고 뒤이어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

[시나리오 패널티가 추가되었습니다.]

[‘생존비’ 항목이 추가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매일 밤 자정, 100코인씩의 ‘생존비’를 자동 수납합니다. ‘생존비’를 납부하지 못할 시, 당신은 사망합니다.]

[‘생존비’ 패널티는 두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클리어 될 때까지 유지됩니다.]

나는 떠오른 메시지들을 읽으며 피식 웃었다.

그래, 이제야 좀 ‘멸살법’ 답네.



Episode 5. 어둠 파수꾼 (1)

[그, 그럼 다들 잘들 해보라고요! 이히히힛.]

도깨비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식량 패널티에 생존 패널티.

전자는 이미 알고 있었던 패널티였다. 하지만 후자는 지극히 멸살법 답긴 해도 원작에는 없던 일이었다.

아마 내가 비형과 계약한 것이 전개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짐작만 할 뿐.

주머니에 있던 비스킷 조각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정희원이 망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독자 씨,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일이 이렇게 될 줄―”

“예상은 했습니다. 도깨비 놈들이 인간을 괴롭히기 위해 제일 먼저 뭘 할지 생각해 봤거든요.”

“······돗자리 까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나는 이현성을 비롯한 일행들을 불렀다. 상황은 만들어졌고, 이제는 움직여야 할 때였다.

“우리 식량을 돌려줘!”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소외 그룹의 사람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갑작스런 식량난에 천인호와 주류 그룹 역시 망연자실한 눈치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천인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알고 있었던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만약 속내를 읽을 수만 있다면 분명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등장인물 ‘천인호’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읽어냈습니다.]

[등장인물 ‘천인호’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이런 걸로 이해도가 오른다고?

나는 시험 삼아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속내를 짐작해 보았다. 하지만 종전과 같은 메시지는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천인호는 빠르게 혼란을 정리하며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다들 모여주십시오. 긴급 공지를 전하겠습니다.”

공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상황이 악화되었으니, 소외 그룹에서 더욱 많은 ‘정찰대’를 차출하겠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급하겠지. 이제 지하에는 먹을 것이 없어졌으니까.

“앞으로 ‘정찰대’에 참가하지 않는 인원들에게는 식량을 배분하지 않겠습니다.”

강경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딱히 반발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한 결과겠지.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정찰대에 자원했다.

때문에 식량이 사라졌음에도 천인호의 얼굴에는 희망이 남아 있었다. 상황이 급박할수록 통제권은 주류 그룹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다. 

그 모습을 불안하게 보던 이현성이 입을 열었다.

“독자 씨, 이제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물론 식량을 구하러 가야죠.”

그 말에 일행의 표정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식량을 구한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니까.

“역시 저희도 정찰대에 들어가야 할 까요? 지상에는 아직 먹을 것이 남아 있으니까요.”

“아뇨, 지상으로는 안 나갑니다. 그쪽으로 가면 무조건 죽어요.”

나는 바닥에 널린 상비용 방독면을 보았다. 저 너덜거리는 방독면으로 맹독 안개를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식량을 구하려면 지상에······.”

“이현성 씨. 세계가 바뀌었어요. 그럼 먹는 것도 바뀌어야죠.”

나는 약수역으로 가는 터널 길을 바라보았다.

“잠깐만요. 독자 씨······ 설마?”

“맞습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더 이상 최상위 포식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포식자가 아니라고 해서, 반드시 피식자가 되라는 법도 없다.

“우리는 괴물을 사냥할 겁니다.”

*

잠시 후, 나를 비롯한 소외 그룹의 몇몇 사람들은 약수역 쪽으로 가는 터널 앞에 서 있었다.

“그렇군요. 철길로 들어가시겠다고요?”

정찰대의 참가를 거부했으니 당연히 태클을 걸어올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천인호는 내가 그룹 밖으로 나도는 것에 안심하는 눈치였다. 내가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긴, 장기적으로 본다면 시나리오 공략을 전담할 팀이 필요하긴 하죠. 다녀오십시오.”

웃기는 놈. 

마치 자기가 대장이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군. 하지만 그 여유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등장인물 ‘천인호’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등장인물 ‘천인호’에 대한 이해도가 일정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그런가······ 이제야 알겠다.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오르는 것은 크게 두 케이스가 있다.

하나는 내가 등장인물의 호감이나 신뢰를 얻었을 때. 

둘은 내가 등장인물의 속내를 정확히 짐작했을 때. 

아마 지금은 후자라는 거겠지.

[등장인물 ‘천인호’가 당신의 저의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해도의 누적치에 따라, 인물의 막연한 생각이나 감정도 알 수 있게 되는 모양이다.

“아, 가시는 김에 저희 그룹원 하나를 좀 끼워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저희도 공략에 대한 정보를 좀 얻고 싶거든요.”

역시, 천인호가 그렇게 쉽게 우릴 놓아줄 리 없다. 

나는 쭈뼛거리며 뒤쪽에서 나온 사내를 보았다. 같이 간다는 게 하필 저 녀석이라니, 운도 지지리 없는 놈이다.

“꼬, 꼭 내가 같이 가야 돼?”

“에이, 이제 와서 왜 그러십니까, 한 형. 어젯밤부터 독자 씨와 화해하고 싶다고 매달리셨지 않습니까.”

“그, 그런······.”

우리와 합류하게 된 천인호 측의 일행은 다름 아닌 한명오 부장이었다.

“그, 그게 독자 씨. 괜찮다면 나도 같이······.”

“그러죠. 같이 갑시다.” 

내가 흔쾌히 대답하자 한명오는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당연히 내가 거절할 줄 알았겠지. 

곁에 있던 이현성이 염려스런 얼굴을 했지만, 나도 다 생각이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나와 이현성, 이길영과 유상아, 그리고 한명오까지 총 다섯 명― 즉 ‘3807’칸의 생존자 파티가 재결성되었다.

“나도 같이 가도 되죠?”

“···몸이 낫지 않았는데 괜찮겠습니까?”

“이 정도는 끄떡없어요.”

거기에 한 사람 더. 정확히는 정희원까지 총 여섯 명의 파티.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숫자였다.

그르르르······.

물론, 곧 다가올 위기 앞에서 인원의 많고 적음은 그다지 관계가 없겠지만.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서브 시나리오 ― 식량 획득>

분류 : 메인

난이도 : E

클리어 조건 : 식량으로 활용 가능한 괴수를 직접 사냥한 후 조리하시오.

제한시간 : 없음

보상 : 500코인

실패시 : ???

+

터널 안으로 발을 딛자마자 서브 시나리오가 날아왔다.

식량 획득. 두 번째 메인 시나리오에 돌입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할 서브 시나리오였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활약을 기대합니다.]

열 발자국을 채 딛기도 전에 터널의 어둠은 완연해졌다. 손전등으로 터널을 비췄음에도 주변의 윤곽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빛을 차단하는 장막이 눈앞에 있다는 증거다. 진짜는 저 장막 너머에 있을 것이다.

“독자 씨, 잠깐만요. 여기서부턴 진짜로 위험해요.”

곁에서 걷던 정희원이 먼저 걸음을 멈췄다.

“그냥 이대로 들어갈 건 아니죠? 아무리 봐도 자살 행위 같은데요. 길영이도 있고요.”

“사실 저도 아까부터 신경 쓰였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길영이는 두고 오는 게 어떻습니까? 그리고 가능하면 여자 분들도······.”

“이현성 씨, 당신만큼은 아니겠지만 저도 꽤 싸울 줄 알거든요? 예전에 검도도 했었고요.”

“하지만······.” 

불필요한 논쟁이 과열되려는 분위기라, 나는 적당히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이현성 씨. 제가 아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세계가 바뀌었다고요. 여자가 육체적으로 약하다는 건 편견이에요. 이젠 누구나 종합 능력치를 올려서 강해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정희원 씨, 희원 씨 말씀에도 어폐가 있어요.”

“······뭔데요?”

“여자라고 약하다는 법이 없듯, 아이라고 약하다는 법도 없습니다. 길영아, 보여드려.”

이길영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곤 주변을 잠시 쓸어보더니 터널의 바닥에 주저앉은 채 손을 내밀었다. 정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맙소사, 저게 뭐야?”

“시, 시발! 바퀴벌레잖아!”

한명오가 기겁하여 소리를 질렀다.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는 바퀴벌레가 이길영의 손끝과 희미한 실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바퀴벌레는 말 잘 듣는 강아지라도 되는 양 이길영의 말에 귀를 기울이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제 특성은 ‘곤충 수집가’에요.”

곤충 수집가. 이길영은 [다종 교감] 스킬을 통해 곤충들과 간단한 의사소통을 나눌 수 있는 희귀한 능력의 보유자였다.

“이 앞엔 아무것도 없대요. 앞으로 백 걸음까지는 안전할 거예요.”

이길영이 보여준 압도적인 정찰력에 일행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이길영은 맹랑한 얼굴로 사람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걱정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형 누나들한테 쩔 받으려고 따라온 건 아니에요.”

“아, 그래.”

정희원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금세 내 곁으로 붙어오는 이길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길영의 능력은 멸살법의 원작에서도 본 적이 없는 특성이었다. 초반에 이길영을 구한 것은 결코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는 투명한 결계를 지나 본격적인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위험 지역에 진입합니다.]

“유, 유상아 씨. 위험하니까 내 손을 잡고 걸어.”

“······저보다 부장님이 더 무서워하시는 것 같은데요?”

“아, 아냐!”

장막 안쪽의 공기는 습도로 끈적끈적했다.

“불빛을 줄여요.”

내 말에 유상아가 즉시 손전등을 가렸다. 불빛 조절 기능이 달려 있지 않은 모델이라 손으로 빛을 조절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욱. 아래쪽 비추지 마요.”

바닥을 확인한 정희원이 헛구역질을 했다. 뜯어 먹힌 시체들. 멋모르고 약수 쪽으로 이동하려 했던 사람들의 시신이 발에 채이도록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유상아는 눈을 질끈 감았고, 한명오는 벌벌 떨었으며, 저 담력 강한 이현성마저 침음을 흘렸다. 

의외로 태연한 것은 이길영이었는데, 아이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이 녀석, 혹시 이걸 다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사람이 아닌 것도 있네요.”

이길영의 말대로 바닥에는 사람 시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 자란 늑대 정도의 크기. 앞발이 발달한 두더지 같은 녀석들의 사체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9급 지하종, 땅강아쥐.

지구의 벌레를 연상시키는 이름이지만, 이름은 이름일 뿐이다. 지하의 피라냐 같은 놈들. 무리를 지어 굴을 파고 움직이며 먹잇감을 노리는 집요한 사냥꾼들이 바로 이 땅강아쥐들이었다.

그런데 그 땅강아쥐들이,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나자빠져 있다. 정희원이 탄식하듯 말했다.

“······대체 누가 이렇게 만든 걸까요?”

당연하게도, 이 근방에 땅강아쥐들을 이 꼴로 만들 수 있는 인간은 하나 밖에 없다.

유중혁.

놈이 혼자서 이 길을 뚫고 다음 역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런데 의아했다. 본래 3회차의 유중혁이 다음 역으로 움직이는 시점은 본래 오늘 저녁이나 내일이어야 했다. 

왜 그렇게 서두른 것일까. 

갑자기 조급해지기라도 했나? 

무엇 때문에?

“독자 씨, 이거 식량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시나리오에서 ‘직접’ 사냥해야 한다고 했으니, 아마 저건 안 될 것 같습니다.”

“······하긴, 좀 찝찝하긴 하네요. 조리는 어쩌죠? 불에 구우면 되려나?”

구우면 되긴 하지. 문제는 특별한 불이어야 한다는 것이지만.

“그보다 희원 씨, 검도 잘 한다고 하셨죠?”

“어, 그게 사실 잘 한다고 말하기는 좀······ 근데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나는 땅강아쥐의 시체를 가시로 찌른 후 나이프로 잘라내기 시작했다. 소설에서 읽을 때는 몰랐는데, 역시 생각만큼 잘 되진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질긴 가죽을 벗겨낸 후, 그 안의 척추 뼈를 도려내는데 성공했다. 처음이라 흠집이 많이 남긴 했지만 이 정도면 그럭저럭 쓸 수는 있겠지.

“그건 뭐에 쓰려구요?”

“검도를 하려면 무기가 있어야죠.”

스톤 호그의 가시만은 못하지만, 땅강아쥐의 척추는 하나의 통뼈로 이루어져 있어서 시나리오 초반에 꽤나 좋은 무기가 된다.

다리로 이어지는 연골을 마저 자른 후 모양새를 잡아주자, 실제로 뼈는 제법 칼의 형상을 띄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정희원에게 쥐어 주었다.

“고마워요. 갑자기 구석기 시대로 돌아간 기분이네요.”

“좀 더 갈아야 쓸모가 있을 거예요. 주변에 돌 같은 게 있으면 날 부분을 잘 살려 보세요.”

“후후, 알겠어요. 족장님.”

정희원은 약간 들뜬 듯한 목소리로 곧장 날을 갈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던 이현성이 부러웠는지 내 쪽을 보았다.

“하나 만들어 드릴까요?”

“엇, 제것도 만들어 주십니까?”

“다른 일행 분들도 가까이 오세요. 방법을 배워 두는 게 좋으니까. 다들 같이 만들어 보죠.”

사실 나도 이런 걸 처음 해보는 건 마찬가지였다. 멸살법에 괴수 도축에 관한 내용이 상세하게 실려 있지 않았더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 

멸살법이 인기 없었던 이유? 간단하다. 작가가 설정충이기 때문이다.

“······독자 씨, 손놀림은 초보 같은데도 묘하게 잘 하시네요.”

우리는 앉아서 함께 무기를 만들었다. 다만 이번에 만든 것은 검이 아니라 창이었다. 아무래도 다른 이들은 [검도] 스킬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때문에 리치가 긴 창을 다루는 편이 안정적이라고 판단했다. 

가장 큰 땅강아쥐의 척추로 만든 것은 이현성에게, 평균 크기의 척추로 만든 것은 유상아와 한명오에게 주었다. 마지막으로 이길영에겐 새끼 땅강아쥐의 머리뼈를 꽂은 둔기를 만들어 주었다.

[자력으로 무기를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인류의 원시성에 흥미를 갖습니다.]

[성좌들이 1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이번 메시지는 모두가 함께 받았다.

“이런 걸로도 코인을 주는군요.”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각자 가진 코인들 있으시죠?”

“예, 있습니다.”

“가능하면 코인은 생존비 정도만 남기고 근력, 체력, 민첩에 전부 투자하세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겁니다.”

“아, 참고하겠습니다.”

준비를 마치고 다시 전진을 시작했다. 이길영이 말한 백 걸음은 이제 코앞이었다.

[서브 시나리오― 식량 획득이 시작됩니다!]

바닥에서 속속들이 기어 나오는 땅강아쥐들. 빠르게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정확히 열세 마리. 생각보단 많은 숫자다.

그르르르······.

슬금슬금 선을 긋고 위협을 시작하는 땅강아쥐의 무리. 저 선을 넘는 순간, 싸움은 시작될 것이다.

“딱히 작전 같은 건 없습니다. 우리는 초행이고, 잔인하게 들리시겠지만 솔직히 여러분들이 살아남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그, 그런······.”

“그래도, 모두 살아남으세요. 부탁입니다.”

일행 중에 당황하는 것은 한명오 하나 뿐. 다들 긴장하곤 있어도 꽤나 결의에 찬 표정들이었다. 특히 정희원의 눈빛이 아주 볼만했다.

“좋아요, 한 번 해보죠. 다들 살아서 보자고요!”

유중혁이 내게 시험을 걸었듯, 나 역시 이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다. 아무리 훌륭한 조언자가 곁에 있어도, 결심이 굳지 않은 사람은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결국 스스로를 살리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모두, 이번 기회에 그것을 똑똑히 깨달아야 한다.

“그럼 갑시다.”

그리고 나 역시, 이들 중 누굴 데려가야 할지 알 수 있겠지.

한 발자국을 더 내딛자, 땅강아쥐들이 움직였다. 

싸움이 시작되었다.



Episode 5. 어둠 파수꾼 (2)

일행들은 잘 싸웠다.

사실 조금 놀랄 정도였다.

특히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나와 함께 전위로 나온 이현성과, 그에 보조를 맞춘 정희원의 판단이 아주 주효했다. 

전투는 자연스럽게 전방의 우리 셋, 그리고 후방을 담당하는 나머지 셋의 구도가 되었다.

투콱!

전투가 시작한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땅강아쥐 몇 마리가 목이 꿰뚫린 채 바닥에 늘어졌다. 

달려드는 또 한 마리의 땅강아쥐를 제압한 이현성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종합 능력치만 올려놓는다면, 인류는 그리 약하지 않다.

그렇다고 쳐도, 이현성의 정신력은 이 세계에서 굉장히 특별한 것이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괴물과의 조우에서 저렇듯 태연할 수 없다. 

괜히 그가 훗날 ‘강철검제’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정희원 쪽이었다.

“생각보다는 패턴이 단순한데요?”

깨갱!

과연 [검도] 스킬이 허투루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인지, 그녀의 칼끝이 닿을 때마다 땅강아쥐들은 다리든 꼬리든 하여간 어딘가가 잘려 나가고 있었다.

“하아압!”

정희원은 최근에 쌓은 코인을 모조리 근력에 투자한 케이스였다. 지속력은 떨어지지만, 한 방 한 방의 위력이 생각보다 쓸 만했다.

휘익!

생각하기가 무섭게 그녀의 칼이 허공을 그었다.

“젠장, 한 마리 흘렸어요! 부탁해요!”

숨이 벅찬지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래도 체력 레벨이 낮아 지구력이 떨어진다는 게 그녀의 유일한 약점일 것이다.

그르르르!

상처를 무릅쓰고 일행 사이로 난입한 땅강아쥐는 제법 영리했다. 대열을 흩트리는데 성공한 녀석은, 사냥꾼의 본능으로 가장 약해보이는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맡겨 두세요.”

그러나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것을, 땅강아쥐는 알지 못했다.

퍼억!

이길영의 작은 양손이 휘두른 둔기가 땅강아쥐의 머리를 흔들었다. 아이인 까닭에 타격력은 부족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마무리는 다른 이들이 도와줄 수 있었으니까.

푸욱!

날을 세운 유상아의 창극이 땅강아쥐의 몸통을 꿰뚫었다. 땅강아쥐가 몇 번인가 몸을 뒤틀었다. 유상아는 곤혹스런 얼굴이었지만 창을 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끼이잉······.

기력이 다한 땅강아쥐가 축 늘어졌다.

솔직히 유상아는 적응이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의외였다. 보통이라면 저기 서 있는 한명오처럼 패닉에 빠지는 게 정상이니까.

“으, 으으으······.”

일행들이 분투하는 중에도 한명오는 그저 뒤쪽으로 숨기 바빴다. 그나마 제대로 숨지도 못해 정강이 부근을 물려 피를 흘리고 있었다.

깨갱······ 찍!

내가 꽂은 가시에 마지막 땅강아쥐가 꿰뚫리며, 이내 주변은 잠잠해졌다. 나는 가시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일행들을 살폈다. 한명오를 제외하곤 다들 작은 찰과상을 입긴 했지만, 큰 상처는 없었다.

훌륭한 첫 승리였다.

긴장이 풀린 유상아와 이길영이 자리에 주저앉았고, 이현성도 창을 바닥에 꽂은 채 이마의 땀을 닦았다. 주변에 늘어진 땅강아쥐들의 숫자를 세던 정희원이 탄식했다.

“······독자 씨, 대체 혼자 몇 마릴 잡은 거예요?”

“네 마리요.”

“쳇, 난 두 마리인데.”

“저도 세 마리 잡았습니다.”

뿌듯하게 창극을 들어 보이는 이현성을 보며,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곤 해도 한 마리밖에 차이가 안 나다니.

나는 스킬을 발동해 이현성의 특성창을 훔쳐보았다.

+

<인물 정보>

이름 : 이현성

나이 : 28세

배후성(背後星) : 강철의 주인

전용 특성 : 불의를 외면한 군인(일반)

전용 스킬 : [총검술 Lv.2], [위장 Lv.1], [인내심 Lv.1], [정의감 Lv.1], [무기 연마 Lv.2]

성흔 : [태산 밀기 Lv.1]

종합 능력치 : [체력 Lv.12], [근력 Lv.9], [민첩 Lv.9], [마력 Lv.6]

종합 평가 : 특성 진화의 계기가 조금씩 다가오고 있습니다. 당신에 대한 해당 인물의 신뢰도가 상당합니다. 해당 인물의 배후성이 당신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 현재 ‘스타터팩’을 적용 중입니다.

+

허, ‘스타터 팩’이라니.

이러니까 강할 수밖에 없지. 

아무래도 강철의 주인은 이현성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스타터 팩은 화신의 평균 종합 능력치가 10레벨 미만일 때 사용할 수 있는 코인 패키지였다. 

사용 즉시 종합 능력치 레벨을 1씩 올려줌과 동시에, 초반에 유용한 숙련 스킬인 [무기 연마]를 배울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아이템 팩.

대부분의 화신들이 스타터팩은커녕 무과금으로 착취당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현성은 대단히 운이 좋은 편이라 할 수 있었다.

“독자 씨,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만······.”

“아, 아뇨. 잠깐 생각을 좀 하느라.”

조금 부럽기는 하다만······ 뭐, 나도 돈이 없어서 못 사는 건 아니다. 안 사는 거지. 종합 능력치 평균이 10을 훌쩍 넘긴 지금 사봤자 나만 손해니까. 

젠장, 도깨비 보따리를 조금만 일찍 열었어도.

“일단 잡은 땅강아쥐를 모아 보죠. 오늘 치 식량을 준비해야 하니까요.”

“으음······ 근데 이걸 어떻게 조리하죠? 이대론 못 먹을 텐데.”

“지금은 못 먹지만, 방법이 있을 겁니다.”

너무 태연하게 대꾸한 것일까.

일순 일행들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이현성이었다.

“저기, 실은 조금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네?”

“독자 씨는 혹시······ 이 상황에 대해 뭔가 알고 계신 겁니까?”

아차 싶었다.

“그게······.”

문득 지금껏 읽어온 소설 속의 회귀자들이 떠올랐고, 이어서 유중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거였구나. 회귀자들의 기분이라는 건.

보통 회귀자들은 이럴 때 어떻게 말했더라. 

몇 가지 레퍼토리가 떠오른다. 그냥 “감입니다”라고 뻔뻔하게 대답하는 경우가 있었고, 내가 유중혁에게 했던 것처럼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선택을 기대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대답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감히 독자 입장에서 말하건대, 가장 좋은 대답은.

“으, 으어어억!”

말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계속 만드는 것이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선택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직 한 마리가 남아 있었어요!”

정희원이 외쳤고, 이현성이 달렸다. 하지만 숨어 있던 땅강아쥐의 행동은 누구보다 빨랐다. 다른 녀석들보다도 월등히 덩치가 큰 녀석이었다.

텁―

“사, 살려줘어어······!”

한명오의 다리를 낚아 챈 땅강아쥐가 파고 나온 땅굴로 그를 끌었다. 제일 가까이 있던 유상아가 창을 휘둘렀지만, 공포에 질린 한명오가 그녀를 덥석 껴안는 바람에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거 잡아요!”

뒤늦게 이현성이 창의 손잡이를 뻗었지만, 그의 창은 애꿎은 바닥만을 헤집고 말았다.

이미 땅강아쥐와 두 사람은 바닥 속으로 사라진 뒤였던 것이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예정된 고구마에 분개합니다.]

정희원이 분통을 터뜨렸다.

“아··· 나 저 아저씨 때문에 암 걸릴 줄 알았다니까 진짜.”

“······죄송합니다. 제가 늦어 버려서.”

이현성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괜찮다는 표시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누구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쫓아가야 할까요?”

나는 놈이 사라진 굴을 살폈다. 평범한 굴이 아니었다. 만져지는 공기에 촉감이 있다. 마치, 어둠을 곱게 갈아 넣은 듯한 느낌.

나는 생각하는 척 뒤쪽으로 물러서며 슬며시 스마트폰을 켰다. 

남은 배터리는 5% 남짓. 새벽에 소외 그룹 사람들에게 식량 하나와 맞바꾼 충전량이었다.

[특성 효과로 읽기 속도가 상승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원하는 대목을 찾을 수 있었다.

「······땅강아쥐들이 서식하는 [어둠 자락]은 마계의 나무인 [어둠 뿌리]로부터 방출되는 일종의 아공간(亞空間)이다. 산소 대신 검은 에테르를 호흡하는 땅강아쥐들은 [어둠 자락]의 근처가 아니면 자생하지 못한다······」

대강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복습하는 의미가 있었다.

그렇군.

이곳이 [어둠 자락]의 입구다.

나는 그와 관련된 부분을 마저 읽은 후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독자 씨?”

이현성이 초조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갑니다.”

“아, 그러면······.”

“하지만 많은 인원이 들어가기엔 위험 부담이 큽니다. 이현성 씨와 정희원 씨는 이곳에서 사주경계를 서 주세요.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신호를 드리겠습니다.”

깜짝 놀란 정희원이 물었다.

“설마······ 길영이랑 둘이서 들어가시게요?”

“놈을 쫓는 데에 길영이의 능력이 도움이 될 겁니다.”

그녀가 강하게 반발하려는 찰나, 나는 손을 들어 이현성을 불렀다.

“그리고 이현성 씨. 정희원 씨 상태가 좋지 않으니, 부디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이현성도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알겠습니다.”

“잠깐만요. 난 괜찮다고요!”

“정희원 씨, 자신감은 좋지만 만용은 부리지 마세요.”

“······.”

숨을 고르지 못하는 정희원의 모습. 그녀는 아직 맹독 안개의 중독에서 완전히 치유되지 못했다.

나는 두 사람을 남겨둔 채 이길영을 데리고 굴속으로 들어섰다. 분명 수직에 가까운 경사로 파고 내려간 굴이었는데도, 굴속에 들어간 순간 중력이라도 발생한 것처럼 서서 걸을 수 있었다. 

[어둠 자락]이 방출하는 마력 때문이었다.

“이쪽이에요.”

한 치도 분간이 되지 않을 만큼 짙은 어둠 속이었기에, 나는 오직 이길영의 손끝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갔다. 검은 에테르는 빛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어서 손전등도 의미가 없었다. 이길영의 [다종 교감] 능력이 없었다면, 또 코인을 사용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저기, 형.”

이길영이 나를 불렀다.

“아까 일부러 그런 거죠?”

“······뭐가?”

“저 괴물이 누나랑 아저씨 잡아갈 때, 일부러 놔준 거잖아요.”

나는 순간 멈칫했다. 어둠 속에서 닿은 이길영의 손끝이 낯설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기도 전에 이길영의 부연이 이어졌다.

“그때 형 얼굴을 보고 있었거든요.”

그 짧은 사이에도 나를 보고 있었다는 건가. 정말 무서운 꼬마다. 이 정도로 눈치가 빠른 녀석에겐 애써 숨겨서 좋을 것이 없다.

“그래, 맞아.”

대답하기가 무섭게, 머릿속으로 메시지 폭탄이 날아들었다. 하긴, 성좌 놈들에겐 이것도 요긴한 구경거리겠지.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당신의 잔혹함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눈을 빛내며 당신을 채근합니다.]

“왜 그랬어요?”

“땅강아쥐의 습성 때문에.”

나는 솔직하게 답해주기로 했다. 

“땅강아쥐들은 자신들의 포획물을 한 곳에 비축해 두는 습성이 있어. 먹이뿐만 아니라, 진귀해 보이는 물건들도 꽤나 모으는 편이지. 가령 아이템이라든가. 그런데 녀석들의 비축 장소는 길이 매우 복잡해서, 놈들이 직접 뚫은 길을 따라가지 않고서는 찾아낼 수가 없어.”

이길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한명오를 데려갈 건 예상했어. 유상아 씨까지 딸려 간 건 예상 못했지만.”

“그럼 형의 목적은 누나랑 아저씰 구하는 게 아니라, 아이템인 거죠?”

“그래. 실망했니?”

“아뇨.”

이길영의 작은 손이 내 손가락을 꽉 쥐는 것이 느껴졌다.

“형은 거짓말을 잘 못해요.”

“······.”

“형이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면, 지하철에서도 날 구해주지 않았겠죠. 난 형을 믿어요.”

이길영은 아이 답지 않은 녀석이지만, 그럼에도 아이일 뿐이다. 

이길영은 모른다. 

어른스러운 것과 어른이 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걸.

[일부 성좌들이 감동하며 눈물을 글썽입니다.]

[2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는 그런 ‘어른스러움’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 비열한 어른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굴은 생각보다 길어서, 우리는 꽤나 오랫동안 아래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저, 형.”

“응.”

“형은 혹시 신인가요?”

“······뭐?”

“아니면 ‘주인공’인가요?”

아이들은 가끔 예리한 질문을 던진다. 비유와 실재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세계에 살기 때문일까. 이길영은 자신의 질문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난 신도 주인공도 아냐. 오히려 늘 주인공을 부러워했었지.”

“그래도 형은 이 세계에 대해 뭔가를 알고 계신 거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그건 맞아.”

“그럼 하나만 물어 볼게요.”

“대답해줄 수 있는 거라면.”

“이 모든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나요?”

“소원?”

나는 조금 당황했다.

“보통 이런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그런 보상이 있잖아요. 이 이야기의 끝에도, 그런 게 있는 거죠?”

어둠 속에서 이길영의 호흡이 떨리고 있었다.

문득 죽은 엄마를 보던 이길영의 표정이 떠오른다. 

이 세계에 적응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앓는다. 누군가는 광기로, 누군가는 광신으로, 또 누군가는 비합리적인 낙관으로.

“그래, 있어.”

나는 이곳이 짙은 어둠 속이라는 것에 감사했다. 

왜냐하면 이길영은 지금 내 표정을 절대로 볼 수 없을 테니까.

“거의 다 왔어요, 형.”

주변의 검은 에테르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어둠 뿌리]가 근처에 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긴장하며 가시를 뽑아 들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숨을 죽입니다.]

어디선가 바닥을 쑤시는 땅강아쥐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공간감은 급격하게 확장되었다. 어둠 사이로 누군가가 피워 놓은 듯한 불빛이 보였다.

그리고 그 불빛 너머에 놓여 있는 거무튀튀한 상자 하나.

제대로 왔다는 확신이 든 순간, 귓가에서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서브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땅강아쥐의 보물 창고’에 입장하였습니다.]





Episode 5. 어둠 파수꾼 (3)

“형! 저건······.”

보물 상자를 발견한 이길영이 말문을 떼기 직전, 나는 녀석의 작은 입을 막았다.

“쉿, 기다려.”

멸살법의 세계는 냉혹하다. 성좌들은 인물들의 역경을 즐기고, 시나리오의 장애물들은 인간들을 엿 먹이기 딱 좋은 것들뿐이다.

저렇듯 “날 잡아 잡수쇼”하고 있는 것들은 대개 함정이며, 심지어는 시스템 메시지조차도 믿어선 안 된다.

“보물 창고라고 해서 꼭 보물만 있는 건 아냐.”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아쉬워합니다.]

심연의 흑염룡······.

아무래도 저 자식은 얼마 전부터 내가 뒈지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

아무튼 나는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물창고 근처를 얼씬 거리는 그림자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르르······ 찍!

땅강아쥐들이었다. 터널을 통해 뭔가를 한가득 가져온 그들은, 알 수 없는 울음을 토해내며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화르륵.

일정한 숫자의 땅강아쥐들이 모이자 주변을 밝히는 불빛의 숫자도 많아졌다. 검은 에테르를 매개로 타오르는 불꽃, 암화(暗火)였다.

암화가 탈 정도로 검은 에테르가 많다는 것은 이곳이 [어둠 뿌리]의 중핵이라는 이야기. 그때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다 유상아 씨 때문이잖아!”

누구라고 말하지 않아도 단번에 알 수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흠칫 놀라는 이길영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저 때문이라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희미한 불빛 사이로, 땅강아쥐에게 제압된 두 사람이 보였다. 그들은 바닥에서 뻗어 나온 줄기에 온몸이 꽁꽁 묶여 있었다.

“유, 유상아 씨가 지하철만 안 탔어도, 상황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라고!”

“제가 지하철 탄 거랑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관인데요?”

저런 헛소리를 또 일일이 다 받아주고 있다니. 어쩌면 유상아는 부처가 아닐까. 아니면 배후성이 부처거나.

“그, 그건······ 그러니까, 유상아 씨가, 맨날 자전거만 타니까······.”

횡설수설하는 한명오의 목소리. 

유상아의 음색이 차가워졌다.

“잠깐만요. 제 자전거 훔쳐 가신 게 혹시 부장님이셨어요?”

“사, 사람이 말야! 내가 차 태워 준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호의를 베풀면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지!”

“대답하세요. 제 자전거 부장님이 훔쳐 가셨냐고요.”

갑자기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그런 거였나. 벤츠 S클래스를 타고 다니는 한명오가, 3호선 지하철에 타고 있었던 연유가.

하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회사뿐만 아니라 금호역에서도 유상아에게 눈독 들이는 남자들은 꽤 있었으니까. 

실제로 유상아는 그럴 만한 인물이다. 분위기도 온화하고 사람 비위도 잘 맞출 줄 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등장인물 ‘한명오’를 싫어합니다.]

암화 아래에서도 선명하게 보일만큼 한명오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저거 뭔가 위험해 보이는데.

“그래 씨발! 내가 그랬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왜 부장님께서 큰 소릴 내세요? 남의 물건에 손을 대다니, 그건 절도잖아요.”

“절도? 씨발, 개소리 하지마! 그러게 처음부터 고분고분 차 탔으면 됐잖아!”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시답잖은 말싸움을 싫어합니다.]

본래 이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젠 방법이 없다. 나는 조용히 가시를 뽑아 들었다. 

“내가 한 번 대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좋은 뜻에서 집까지 바래다주겠다 한 것뿐인데 계속 네가 좆같이 구니까 나도······.”

나는 있는 힘껏 가시를 던졌다.

찢어지는 파공성과 함께 가시가 한명오의 입가를 스쳤고, 가시는 푹, 소리를 내며 어둠의 안쪽에 틀어 박혔다.

“우와아악! 뭐야!”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기뻐합니다.]

[1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독자 씨!”

유상아가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고오오오······.

땅강아쥐들의 건너편, 가시가 꽂힌 부근에서 어둠이 갈라지고 있었다.

역시 저놈이 나오는군.

[어둠 뿌리]가 있는 곳에 놈이 없을 턱이 없지.

[‘어둠 파수꾼’이 나타났습니다!]

[서브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서브 시나리오 <파수꾼 퇴치>가 시작됩니다!]

왕에게 굴복한 노예들처럼 공포에 질린 땅강아쥐들이 바닥에 엎드렸다. 

어스름한 불빛 사이로 칠흑의 형체가 나타났다. 사신(死神)을 연상시키는 모습에 등허리에는 촉수 같은 것을 일렁이는 괴물.

이길영의 안색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우웁, 형, 저······.”

“괜찮으니까 해도 돼.”

급기야 바닥에 엎드린 이길영이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멀리서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중압감이 느껴질 정도니까. 

실제로 주변을 기어 다니던 바퀴벌레들은 오래 전에 배를 내놓고 터져버린 상태였다. 

아마 벌레들과 연결되어 있던 이길영도 상당한 정신적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길영아. [다종 교감]은 앞으로 몇 번 정도 더 할 수 있어?”

“···아직 한두 번은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알겠다. 그럼 잠시 여기서 쉬고 있어.”

나는 길영이를 기대어 놓고 유상아와 한명오 쪽을 향해 다가갔다. 패닉에 빠진 한명오가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으, 으헉! 저게 뭐야······!”

나는 맥가이버 칼을 들어 두 사람을 묶은 줄기를 잘라 주었다. 몇 번 칼을 움직였을 뿐인데, 줄기에 닿은 부분이 급격하게 부식하더니 날이 삭아 없어졌다. 과연, 이게 악마종의 힘이라는 거겠지.

“물러나 있어요.”

나는 한명오가 떨어트린 땅강아쥐 척추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7급 악마종, 어둠 파수꾼.

멸망이 시작된 이후 등장한 수많은 괴수종들 가운데서도, 저 악마종들은 유독 특별했다.

사실 땅강아쥐들의 ‘보물’은 악마종에게 바치는 ‘제물’에 가까웠다. 같은 급수라고 해도 악마종은 다른 괴수종과는 차원이 다르다.

[‘어둠파수꾼’이 자신이 따르는 마왕의 가호를 받습니다.]

“카뮨. 데르. 이투르.”

악마종들은 자기들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고, 제각기 다른 마왕을 숭배하며 [어둠 뿌리]를 통해 그 마왕의 권능을 일부 계승한다.

[‘어둠 파수꾼’이 ‘공포’를 발산합니다.]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공포’ 효과를 대부분 중화시킵니다.]

때문에 하나의 악마종을 살해한다는 것은 곧 마왕 하나와 척을 진다는 것을 뜻했다.

“이투르!”

뭐라고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상황이 안 좋게 됐다. 가능하면 싸우고 싶지 않았는데.

“어, 엄마?”

유상아였다.

아직도 안 가고 있었나?

“물러서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게 아니라 방금 저 괴물이 ‘엄마’라고······.”

나는 잠시 그게 무슨 말인가 생각했다. 아니, 잠깐만.

“으음, 그러니까······ 카, 카르드, 에미렌? 아, 이 발음이 아닌가? 아케두?”

순간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칼리두!”

놀랍게도 유상아의 말에 어둠 파수꾼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인물 '유상아'가 스킬 ‘통역 Lv.3’을 발동하였습니다.]

······맙소사, 스페인어만 잘하는 게 아니었다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일단 들어나 볼까.

“녀석이 뭐라고 하는 데요?”

“그게······ 아까부터 계속 ‘엄마가 되어라’ 라고······.”

······엄마가 되어라?

어둠 파수꾼이 유상아를 가리키며 다시 한 번 외쳤다.

“칼리두!”

유상아가 울상을 지었다.

“어, 엄마라니, 저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어둠 파수꾼은 이번에는 한명오를 가리켰다.

“칼리두!”

터져버린 입술을 닦던 한명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내, 내가 왜 엄마야! 아빠지!”

어둠 파수꾼의 등허리에서 촉수가 날아들었다.

푸슈슛!

“우우웁!”

입에 촉수가 꽂힌 한명오의 안색이 검게 물들고 있었다. 꿀렁꿀렁하는 소리와 함께, 한명오의 목젖을 통해 뭔가가 넘어갔다.

그렇군. 

엄마라는 건 저런 뜻이었나.

악마종은 다른 종의 체내에 새끼를 수태한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유상아 씨, 아직 2세 계획은 없으시죠?”

“당연하죠!”

유상아는 그 말을 바로 알아듣고 빠르게 뒤쪽으로 물러났다.

나는 땅강아쥐 창을 휘둘러 한명오에게 연결된 촉수를 찢었다.

놈이 분노한 목소리로 포효했다.

“칼리두우!”

푸슛! 터엉!

악마종의 촉수에 땅강아쥐 창의 모양이 조금씩 망가지고 있었다.

어룡의 위장에 상처를 냈던 스톤 호그의 가시조차 악마종의 몸에 박힌 순간부터 삭아 없어지는 중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어느새 한명오를 끌고서 저만치 멀어진 유상아가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승산은 있는 거죠?」

아마도 그렇게 묻는 듯한 눈빛.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승산은 전혀 없었다.

푸슛! 푸슈슛! 터엉!

고작 몇 방의 연타에 땅강아쥐 창은 거의 못 쓸 정도로 망가졌다. 창을 쥔 손이 아파 왔다.

보물 상자를 지키는 이 녀석은 동호대교의 어룡과 마찬가지로 잡으라고 데려다 놓은 괴물이 아니었다.

때문에 원래의 계획은 이 녀석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이 녀석이 사라지고 난 뒤 보물 상자를 까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획이라는 건 언제나 그렇듯 일이 그르칠 때를 대비해 존재하는 법이다.

“도깨비. 보고 있지?”

[우, 우웃. 알고 있었어?]

어둠 속에서 환한 전류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도깨비.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비형의 사촌뻘 정도 되어 보이는 녀석.

“지금쯤 나한테 온 우편물이 있을 텐데, 빨리 건네줬으면 좋겠어.”

[히힛. 그건 내, 내 소관이 아니야. 비, 비형의 일이지.]

“지금은 네가 비형의 일을 대신하고 있는 거잖아. 성좌들이 안달하는 거 안 보여?”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도깨비 ‘비류’를 닦달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도깨비 ‘비류’를 협박합니다.]

도깨비 비류가 히익, 하고 숨을 삼켰다.

[······조, 좋아. 대신 이, 이번 한 번만이야.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해, 해 주는 거라고!]

도깨비가 허공에 뭔가를 중얼거리더니, 곧바로 소환이 시작되었다.

[거래소에서 아이템이 도착하였습니다.]

[아이템, ‘부러진 신념’을 획득하였습니다.]

[계약 효과로 중개 수수료가 면제 되었습니다.]

부러진 신념. 

얼마 전 도깨비 보따리를 통해 거래소에 등록했던 ‘어룡의 핵’, 그 물물교환 아이템이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킷.”

허공에서 내려온 아이템을 본 어둠 파수꾼이 비웃음을 흘렸다. 비웃을 법도 하다. 내가 받은 것은 고작해야 D등급의 아이템. 그것도 반으로 뚝 부러진 칼이었으니까.

[해당 아이템은 사용하기엔 너무 낡았습니다. 내구도가 떨어져 제 성능을 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심지어 아이템을 준 도깨비조차 허공에서 킥킥거렸다.

[그, 그런데 그렇게 낡은 걸로 싸울 수나 있겠어? 그리고 그거, 되게 특수한 스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쓰, 쓸 수도 없는······.]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모르면 이걸 사지도 않았겠지.

“후우우······.”

나는 숨을 힘껏 빨아들인 뒤, 정신을 집중했다.

기이이잉.

가파르게 떨리는 칼자루. 비류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우웃? 어떻게?!]

고작 그 정도로 놀라서는 곤란하지. 왜냐하면 이건 네 친구한테 무려 1만 코인이나 주고 산 스킬이니까.

부러진 칼날의 겉면에 청백의 에테르가 서서히 감돌기 시작했다.

[백청강기(白淸罡氣)]

대(對) 어룡전이 끝난 후, 나는 곧장 비형에게서 이 스킬을 구입했다. 다른 최상급 강기공에 비하면 약간의 하자가 있기는 해도, 당분간 구할 수 있는 강기공(罡氣功) 중에서는 이만한 게 없다.

[‘부러진 신념’이 당신의 강기공에 반응합니다!]

[‘신념의 칼날’이 발동합니다!]

곧이어 칼자루가 광채를 뿜어내더니, 부러진 칼날의 끄트머리에서 새하얀 가상의 칼날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부러진 신념. 

이 칼의 진짜 성능은, 바로 강기공을 주입했을 때 드러난다.

푸슈슈슛!

수십 개로 늘어난 촉수가 시야를 뒤덮었다. 내 체력 레벨로도 무사할 수 없는 공격들. 두렵다. 하지만 이제 승산은 있다.

기이이잉!

왜냐하면 ‘신념의 칼날’은, 악마종에 한해서는 최고의 상성을 자랑하는 무기니까.

파츠츠츠츳!

칼날에 닿은 촉수들이 모조리 산화하며 잘려 나갔다. 어둠 파수꾼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촉수를 물렸다. 급격하게 마력이 빠져 나가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스가각!

침착하게 칼날을 움직인다.

[전투 감각]이 없기에 몇 번이나 눈 먼 촉수를 놓쳤고, [검술 연마]가 없었기에 휘두르는 칼날은 어설펐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검사가 아니라 독자니까. 

그리고 독자는 독자의 방식으로 싸운다.

[특성 효과로 이미 읽었던 페이지에 대한 기억력이 향상됩니다.]

머릿속에서 ‘멸살법’의 페이지가 넘어간다.

「······어둠파수꾼의 공격 패턴은 간단하다. 무조건 오른쪽 상단의 촉수가 먼저······」

「······한 번의 촉수 공격이 있고 난 뒤에는 반드시 일정한 텀이 있으며······」

「······녀석의 촉수는 재생되지만 재생까지 몇 분의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열심히 읽고, 또 읽은 것을 정직하게 활용하는 것.

“크아아아아!”

잘려 나간 촉수들이 튀어 올랐고, 어둠 파수꾼이 비명을 질렀다.

시야 너머에 이길영이 있었다. 

경외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보는 녀석. 안타깝게도 녀석의 소망과는 달리, 이 세계에서 나는 신도 주인공도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자신 있었다.

“카르. 미엔. 데로.”

간신히 몸을 추스른 어둠 파수꾼이 경악성을 토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뒤쪽에 있던 유상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내 약점, 전부······?”

그런 뜻이었군. 나는 별 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해 주었다.

“평소에 책을 많이 읽으면 돼.”

나는 이 세계의 누구보다도, 이 세계를 잘 알고 있다.





Episode 5. 어둠 파수꾼 (4)

어쩌면 길게 싸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전용 스킬, ‘책갈피’가 발동합니다.]

[2번 책갈피가 활성화 되었습니다.]

[책갈피 스킬의 레벨이 낮아 활성화 시간이 단축됩니다.]

[활성화 시간 : 1분]

왜, 그런 거 있잖은가. 살을 내주고 뼈를 깎는다거나, 피 튀기는 일생일대의 혈전을 벌인다거나.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등장인물이 가진 스킬의 일부만이 활성화됩니다.]

[「무기연마 Lv.1」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나는 전력을 다했고, 내가 가진 모든 역량을 총동원했다.

근력을 쥐어 짜내 질주했고, 이를 악문 채 날아드는 촉수를 감당했다.

스각!

모든 전경이 스쳐갔다. 남은 것은 예리한 백광이 남긴 잔상과, 무언가를 베었다는 확실한 감각 뿐.

[등장인물 ‘이현성’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2번 책갈피가 비활성화 되었습니다.]

힘이 쭉 빠지는 게 느껴진다. 그만큼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은 한 방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허공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 성좌님들. 다들 방금 보셨어요? 내, 내가 뭘 잘못 본 건가······?]

도깨비 비류는 자신의 본분조차 잊은 모양새였다. 사실,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소수의 성좌들이 자신의 눈을 의심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눈을 부릅뜹니다.]

그 강력하다는 7급 악마종이, 내 눈앞에 촉수를 뒤집고 누워 있었으니까.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만족한 듯 머리털을 뽑습니다.]

[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잘려나간 촉수들이 바닥을 나뒹굴었고, 주변의 땅강아쥐들은 싸움의 여파로 죽거나 달아난 지 오래였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어둠 파수꾼만이 땅을 기며 입술을 실룩이고 있었다.

“······키. 키이. 키.”

본래라면 7급 악마종은 지금의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상대할 수 없는 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준비했다.

나는 유중혁처럼 강하지도 않고, 이현성처럼 좋은 배후성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니까.

[강박증이 있는 한 성좌가 당신의 준비성을 칭찬합니다.]

[2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내가 다른 이들보다 유리한 것은 오직 ‘정보’ 뿐. 하지만 때로 ‘정보’라는 것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힘이다.

기이이잉.

바로 그 정보의 결과물이, 지금 내 손에 쥐어진 이 백광검(白光劍)이니까.

[시, 시나리오 초반부터 ‘에테르 블레이드’라니······ 서, 성좌님들. 이거 실환가요?]

다행히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설명충 도깨비 녀석이 한창 떠들어대는 중이었다.

에테르 블레이드.

최상급 배후성의 지원을 받는 화신들의 주력 기술이자, 무림계 귀환자들이 흔히 [검강]이라 지칭하는 기술.

“정확히 말하면 진짜 에테르 블레이드는 아니야. 진짜는 이것보다 훨씬 강하니까.”

[그, 그렇지! 엄밀히 따지면 마, 마력을 흡수해 칼날을 만드는 ‘부러진 신념’에 ‘백청강기’를 실은 거니까······.]

그래도 꼴에 도깨비라고, 완전히 멍청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대단해······. 비형 자식 채널엔 뭐 이딴 놈들만 있는 거야······.]

기다렸다는 듯 파밧, 하고 ‘신념의 칼날’이 꺼졌다.

[‘부러진 신념’의 내구도가 다했습니다. 이 아이템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쉽기는 했지만, 이만하면 녀석은 제 몫을 해냈다.

“서브 시나리오 끝냈으니 보상 줘.”

[으읏, 그랬지. 기, 기다려 봐!]

비류가 허겁지겁 허공에 뭔가를 입력하자, 곧 메시지가 떠올랐다.

[서브 시나리오 클리어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5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이 만든 시나리오에 감탄합니다.]

생각보다는 소소한 보상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어둠 파수꾼’을 죽이지 않았으니까.

[그, 그런데 저 녀석은 안 죽이는 거야?]

비류가 기대감 어린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지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어둠 파수꾼을 일별한 후,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난 불살주의(不殺主義)거든.”

[부, 불살······?]

“뭘 쉽게 죽이지 않는 성격이라.”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그럴 줄 알았다며 감탄합니다!]

[1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보며 음흉하게 웃습니다.]

[1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당황한 도깨비 비류가 말을 더듬었다.

[하, 하지만 이 녀석을 죽이면 보상이 엄청날 텐데? 지금 죽이면 7급 악마종 최초 살해자니까 부, 분명 7000코인 이상 줄 거라고! 너 7000코인이 어, 얼마나 큰돈인 줄 알아?]

“안 죽인다고. 그보다 보상 상자 열어야 되니까 좀 비켜 봐.”

나는 거슬리는 비류를 눈앞에서 치우며 말했다. 어차피 이곳에 온 진짜 이유는 저놈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푸욱!

[7급 악마종, ‘어둠 파수꾼’이 사망하였습니다.]

······뭐?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의 도깨비와, 땅강아쥐 칼을 맞고 소멸해가는 어둠 파수꾼의 모습. 그리고.

“하하, 하하하핫! 나, 나도 이제 강해질 수 있다고! 김독자 이 개자식아! 이건 몰랐지!”

문제의 칼을 쥔 채 히죽거리고 있는 한명오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대강 짐작이 갔다. 이어서 폭발적인 메시지가 귓가를 잠식했다.

[7급 악마종을 최초로 사냥하였습니다!]

[불가능한 업적을 완수 하였습니다.]

[8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공헌자 : 김독자, 한명오]

아마 이 메시지의 일부를, 한명오 역시 공유하고 있겠지. 막타만 쳤으니 코인은 얼마 못 받았겠지만······. 

메시지를 보며 행복해 죽으려고 하는 한명오가 보인다.

“불살주의? 멍청한 놈! 이런 세상에서 불살은 무슨 불살이야! 그러니까 너 같은 놈은 갑이 못 되는 거야! 알아 들었―”

그런데 한명오는 알까.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7급 악마종 ‘어둠 파수꾼’을 사살하여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살해자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마왕 ‘아스모데우스’는 권속 살해에 최종 타격을 가한 화신체를 죽을 때까지 쫓아다닐 것입니다.]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최종 타격자에게 끔찍한 저주를 내릴 것입니다!]

[최종 타격자 : 한명오]

“뭐, 뭐야? 이 메시지 뭐야!”

당황한 한명오가 소리를 질렀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사악함에 감탄합니다.]

“아······ 내가 말 안했나? 일부러 안 죽인 거라고.”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시나리오를 스타 스트림에 추천하였습니다.]

한명오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공을 보고 있었다.

마왕 ‘아스모데우스’의 저주는 살해자가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일’ 중 하나를 실현시킨다.

무슨 일일지는 몰라도, 분명 끔찍한 일을 겪게 되겠지.

돌아보니, 유상아와 이길영이 멍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싱긋 웃어 주었다.

“우린 같이 보상이나 열어 보죠.”

*

잠시 후, 우리는 보물 창고를 샅샅이 뒤져 각자 얻은 것을 꺼내 보였다.

“전 이거 찾았어요.”

“저는 이거예요······.”

유상아와 이길영이 찾아낸 것은 각각 작은 팔찌와 낡은 방패였다.

[마력 회복 팔찌]

[낡은 철제 방패]

둘 다 D급의 아이템이었지만, 없는 것 보다는 나았다. [마력 회복 팔찌]는 누구에게나 유용한 아이템이고, [낡은 철제 방패]는 이현성이 들기에 좋을 것이다. 

이름에 ‘철제’가 붙었다고 해서 무시해선 곤란하다. 이계의 철은 지구의 철보다 훨씬 단단하니까.

유상아는 조금 실망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보다 단출하네요.”

단출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이곳은 ‘보물 창고’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휑한 상태니까.

유중혁.

어제 약수 쪽으로 떠났다는 놈은, 아마 이곳을 거쳐 갔을 것이다. 악마종과 싸우면 피곤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적당히 기회를 봐서 보물만 훔쳐 갔겠지.

결국 우린 이미 도둑이 털어간 집을 또 터는 강도인 셈이다.

“아직 메인이 남았으니 괜찮습니다.”

나는 창고의 중심에 있던 검은 상자를 보며 말했다. 우리는 더 시간을 끌지 않고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의 물건은 화로(火爐)였다. 

너무 작아서 주머니에도 넣을 수 있을만한 크기의, 차마 ‘화로’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물건.

[마력 화로].

역시 남아있군. 이 아이템이야 말로, 사실 이번 서브 시나리오의 핵심이 되는 아이템이었다.

[마력 화로는 1인당 하나만 소지할 수 있습니다.]

분명 유중혁이 하나를 가져갔을 테니, 본래 마력화로는 총 두 개였을 것이다.

“······이게 대체 뭘까요?”

“음, 용도를 조금 알 것도 같군요.”

나는 짐짓 의뭉을 떨며, 마력 화로를 가동시킨 후 죽은 땅강아쥐의 다리 한 짝을 올려 보았다.

사이즈에 맞지 않는 음식을 올려놓은 접시마냥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였지만, 5초도 채 지나지 않아 땅강아쥐의 다리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와! 맛있는 냄새!”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가 싶더니, 어느덧 땅강아쥐 다리의 색깔이 노릇노릇하게 변해 있었다.

“고기다!”

이길영도 흥분했는지 소리를 질렀다. 유상아가 다급히 물었다.

“이, 이거 먹어도 되는 걸까요?”

“제가 먼저 먹어 볼게요.”

나는 적당한 기름기가 도는 뒷다리를 잡고, 통째로 살점을 뜯었다. 살점 사이로 은근하게 배어나오는 육즙······ 나는 씹는 것도 잊은 채 눈을 감았다. 역시 책으로 읽는 것과 실제로 맛보는 건 다르구나.

[소수의 성좌들이 군침을 흘립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100코인을 후원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침을 삼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손톱을 물어뜯습니다.]

······.

쉴 새 없이 들려오는 메시지.

역시 방송은 먹방이 최고다.

먹을 것 앞에서는 모두가 대동단결이니까.

“먹어 보세요. 괜찮을 것 같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은 고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흘 간 끼니가 일정하지 않았으니 어지간히들 배가 고팠을 것이다. 계속 넋이 나가 있던 한명오도 언제 다가왔는지 이쪽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도, 독자 씨······ 아, 아깐 내가 잠깐 미쳐서······.”

“먹어요. 눈치 보지 말고.”

“고, 고마워!”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잖아요.”

“뭐, 뭣······!”

한명오의 안색이 거무죽죽해졌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한명오는 정말로 죽게 될 것이다. 아스모데우스의 추격은 유중혁이라도 이겨내기 어려운 것이니까.

우리는 각자 다리 하나씩을 잡고 으적으적 뜯기 시작했다.

그런 일을 겪고도 배가 고파서 다 같이 고기를 뜯고 있는 꼴이라니. 역시 인간은 어쩔 수가 없다.

모두가 침묵 속에서 식사에 열중했다. 마력 화로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불빛 때문일까. 어쩐지 조금 감상적인 기분이 되었다. 

무언가를 죽이고, 그것을 잡아먹으며 살아간다. 그것이 인간의 삶이다. 

지금까지도 줄곧 그래왔는데, 왜 이제와 그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유상아와 눈이 마주쳤다. 핫, 하며 정신을 차린 유상아가 갑자기 울상을 지었다.

“전 한심해요.” 

“······예?”

“이렇게 독자 씨가 힘들게 잡아온 걸 돼지처럼 우걱우걱 먹기나 하고 있고······. 도움은 하나도 안 되고······.”

“아뇨, 유상아 씨. 그건.”

“근데 독자 씨는 어떻게 이런 걸 다 알고 계신 거예요? 생전 처음 보는 짐승을 요리하는 법도 아시고······.”

“아, 그건······.”

“역시! 평소에 판타지 소설을 열심히 보신 덕이겠죠? 정말, 저는 세상이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바보 같이 스페인어나 외우고 있었는데.”

그 유상아한테 이런 말을 듣고 있자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위로차원에서 입을 열었다.

“유상아 씨도 평소에 외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악마종의 언어를 알아들었는지도 모르잖아요.”

물론, 별 도움은 안 됐지만.

“그런가······. 고마워요, 독자 씨······.”

나는 글썽이는 유상아에게 살짝 웃어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행들은 다시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일행의 뒤쪽으로 향했다.

사실 [마력 화로]도 중요하지만, 내가 진짜 목적으로 삼았던 아이템은 따로 있었다.

나는 [마력 화로]를 담고 있던 ‘검은 상자’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거다. 틀림없어.

[마력 화로]를 가져간 유중혁도 아마 이건 몰랐을 것이다. 이 창고의 진짜 보물은 바로 이 ‘검은 상자’라는 것을.

원작에서 유중혁이 이 물건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무려 6회차의 회귀를 거친 뒤다. 

이걸 최초로 발견한 게 누구였더라. ‘비천호리’였나? 음, 간만에 떠올리니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정확하진 않은데, 아마 대충 이런 대사가 있었던 것 같다.

「“거기, 그러니까. 초반 지역들 돌다 보면 되게 이상한 상자가 있잖아요. 거기 물건을 넣었더니······.”」

유상아와 눈이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그 상자는 어디에 쓰시게요?” 

“네? 아, 이건······.”

유상아가 상자를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 잘 보니 상자에 알 수 없는 문자가 쓰여 있었다.

······설마 이것도 읽을 수 있는 건가?

“랜덤······ 아이템 박스?”

망할.

이래서 외국어 능력자는.

“어······ 저······ 음. 그러니까 이건 말이죠.”

나는 조금 당황하며 말했다. 그런데 유상아가 선수를 쳤다.

“어서 써 보세요, 독자 씨!”

“······그래도 되겠습니까?”

끄덕끄덕. 이길영의 고개도 힘차게 아래위로 흔들렸다. 

“우리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이곳에서 얻은 아이템들은 모두 독자 씨가 가지세요. 그게 당연한 거예요.”

그래, 어차피 들켜 버린 거, 그냥 빨리 써 버리자.

“그럼 제가 쓰겠습니다.”

[당신의 결정에 소수의 성좌들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나는 주머니에서 7급 악마종의 핵을 꺼냈다. 아까 죽은 어둠 파수꾼의 시체에서 도려낸 것이었다. 거기다가 아까 내구도가 다해 망가진 [부러진 신념]을 꺼내 들었다. 원작에 따르면, 이 상자의 사용법은 간단하다.

「“누가 알았겠어요. 그게 한정판 코인 아이템이었을 줄.”」

나는 악마종의 핵과, 부러진 신념을 상자에 넣었다.

「“하, 내 말 못 믿는 거예요? 진짜라니까요? 거기에 하위 아이템을 넣고, 상자를 닫으면!”」

사실 이 두 아이템을 넣으면 어떻게 되는지, 나도 결과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엄청난 것이 나올 거라는 거다.

「“무조건 상위 아이템이 나온다고요!”」

잠시 후, 닫힌 상자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Episode 6. 심판의 시간 (1)

Episode 6. 심판의 시간

한정판 랜덤 아이템 박스.

‘멸살법’의 설정에 따르면 이 아이템은 과거의 ‘시나리오’에서 한정판으로 판매했던 코인 아이템이었다.

[아, 아니 이,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야?]

뒤늦게 나타난 비류도 경악성을 내질렀다.

[그, 그, 금방 출시 금지 조치 됐을 텐데!]

‘멸살법’ 원작에 따르면, 이 아이템의 설정은 꽤나 복잡했다.

8612 행성계의 시나리오가 시작되기도 한참 전에 출시된 이 코인 아이템은, 스타 스트림의 관리국에 의해 강제로 회수 조치된 상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위 아이템’을 넣으면 무조건 ‘상위 아이템’을 뱉어낸다는 설정은 시나리오의 밸런스를 위협할 만큼 엄청난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템 박스 하나에 매겨진 가격은 무려 100만 코인.

성좌들은 이 말도 안 되는 과금 정책에 분노했고, 이 아이템을 고안한 멍청한 도깨비는 관리국에서 해고되었다.

[서, 성좌님들. 저게 그러니까아······. 왜 저게 저기 있는지 저도 잘 모르겠······ 이, 이히히힛! 방송 종료!]

[#BI-7623 채널이 일시적으로 종료됩니다.] 

혼자 헛소리를 떠들던 비류가 모습을 감추자, 들려오던 성좌들의 목소리도 사라져버렸다.

성좌들의 반응을 못 보게 된 건 아쉬웠지만, 뭐 어쩔 수 없나.

드드드드.

나는 스스로 진동하는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본격적인 랜덤 뽑기가 시작되려는 것이다.

[도검 계통의 아이템을 넣어 동일한 종류의 아이템이 보상으로 출현합니다!]

[랜덤 뽑기가 시작됩니다!]

한정판 랜덤 아이템 박스는 투입한 아이템과 관계된 상위 등급의 아이템을 랜덤하게 뱉어낸다. 

그러니 확률적으로는 C등급부터 SSS등급까지, 뭐든 나올 수 있다는 얘기였다. 

어디까지나, 확률적으로는 말이다.

[제물로 바친 아이템이 특정 성좌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해당 성좌와 관계된 아이템이 출현할 확률이 대폭 증가합니다.]

···어?

이건 예상치 못한 메시지였다. 하지만 나한테 불리할 것은 없어 보인다. 꾹 쥔 손에 땀이 고였다. 온라인 게임에서 뽑기 아이템을 살 때도 이만큼 긴장이 되진 않았는데. 제발, A등급 정도만 나와라.

[상위 등급의 아이템이 출현했습니다!]

[랜덤 아이템 박스의 사용 가능 횟수가 0이 되었습니다.]

이윽고 상자의 떨림이 멈추고, 황홀한 빛이 잦아들었다.

나는 눈을 반짝이는 유상아와 이길영을 한 번씩 돌아보았다.

“열어 볼까요?”

“네!”

우리는 상자를 열었다.

“우, 우와아!”

이길영이 너무 큰 비명을 질러서 내가 다 놀랐다. 그런데 그만큼 놀랄 만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고급스런 묵빛의 가드 위로 자란, 새하얀 백색의 검신(劍身)······ 그런데 뭔가 ‘부러진 신념’과 모양이 비슷한데?

나는 곧바로 아이템 정보를 확인했다.

+

<아이템 정보>

이름 : 부러지지 않는 신념

등급 : 성유물(星遺物)

설명 : 과거, 그룬시아드의 대마도시대(大魔道時代)를 이끌었던 영웅 ‘카이제닉스’의 검이다. 카이제닉스의 위대한 에테르 지배력이 깃들어 있어, 각각 불, 어둠, 신성(神聖)의 힘이 담긴 ‘신념의 칼날’을 생성할 수 있다.

부가 옵션으로 착용 시 체력과 근력 레벨을 각각 2씩 상승시켜준다.

+

나는 잠깐 말을 잊었다.

아니··· 이거 진짜야?

단순한 알파벳 등급이 아니라, 무려 성유물(星遺物)급의 아이템이 나왔다고? 

“도, 독자 씨! 한눈에 봐도 엄청난 아이템인 것 같은데요?”

엄청난 아이템이 맞다.

‘멸살법’의 세계에서 ‘성유물’은 유일하게 등급표에서 제외되는 아이템이다. 단순히 강력한 성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 아이템들이 매우 특별하기 때문이다.

모든 성유물에는 살아 있을 적 성좌의 힘이 깃들어 있다.

해당 성좌가 어떤 세계의 영웅인지에 따라, 또 얼마만큼의 인지도를 가졌는가에 따라 성능의 차이는 천차만별이지만, 성좌의 힘이 깃들었다는 것만으로 성유물엔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게다가 체력과 근력을 2씩 올려주다니. 

종합 능력치를 1만 올려 줘도 아이템 등급이 A급으로 상승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부가 옵션만 살펴도 최소 S등급에 준하는 아이템이다.

유중혁도 아직 이 정도의 아이템은 못 얻었을 것이다.

나는 예의상 유상아와 이길영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제가 가져도 되겠죠?”

“물론이죠. 당연히 독자 씨 거예요.”

미리 못을 박듯 신신당부하는 유상아. 이길영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힐끗 한명오 쪽을 보았지만, 한명오는 그저 멍청한 표정으로 땅강아쥐 다리를 뜯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알 수 없는 소릴 중얼거리면서. 분명 또 자기가 가지겠다는 둥 헛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이상한 일이군.

[성유물을 획득하였습니다.]

[성유물의 주인이 당신을 궁금해 합니다.]

메시지가 뜨는 걸로 봐서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는 성좌인 모양이다. 나중에 ‘멸살법’을 열어 한 번 찾아봐야겠다.

“그럼, 이제 돌아가 보죠. 땅강아쥐는 밖에도 많이 있으니까, 마력 화로만 가지고 돌아가도 될 겁니다.”

“근데 어떻게 돌아가죠?”

“길영이 능력으로 왔으니, 나가는 것도 문제없을 겁니다. [다종 교감]이라면······.”

그런데 이길영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형, 저······.”

“응?”

“근처에 곤충들이 하나도 없어요.”

생각해 보니 아까 어둠 파수꾼과 싸울 때 주변의 곤충들이 압력으로 죄다 터져 버렸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였다.

“정말 한 마리도 없어? 그래도 몇 마리는 살아 있을 텐데. 조금 이동하면서 능력을 쓰다 보면······.”

세상에 곤충들이 얼마나 많은데, 몇 마리 좀 죽였다고 교감할 곤충이 전혀 없을 리 없다. 하지만 이길영은 여전히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게, 사실 부를 수 있는 한 마리가 있긴 한데······.”

눈을 감은 이길영이 뭘 중얼거리더니, 집중하기 시작했다.

“독자 씨, 길영이가 좀 이상한데요?”

이길영의 눈이 조금씩 뒤집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흘러내리는 한 줄기 코피.

“길영아?”

갑자기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위쪽에서 진동이 울려 퍼졌다. 굴 곳곳에서 부스스 떨어지는 먼지들.

이건 지상 쪽에서 오는 진동인데······.

순간, 전신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쿠웅!

“길영아! 이길영! 정신 차려!”

“에······, 형?”

뒤집어졌던 이길영의 눈이 돌아왔다.

“길영아, 스킬 멈춰! 빨리!”

화들짝 놀란 이길영이 스킬을 멈춘 후에야 진동은 잠잠해졌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니 위쪽의 지상에는 엄청나게 위험한 놈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7급 괴수종인 시독 코뿔소를 비롯한 무수한 고등급 괴수들.

그리고 그 괴물들 중에는, 급수를 알 수 없는 충왕종(蟲王種)도 섞여 있다. 이름을 들으면 알겠지만, 충왕종은 곤충의 일종이다.

“넌 진짜······.”

나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이길영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지상에 있는 충왕종을 부를 정도라니······ 무슨 파브르냐? 하마터면 여기서 그대로 매장당할 뻔 했다.

“당분간 이 스킬은 봉인이야.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절대 쓰지 마. 알았지?”

“네에······.”

이길영이 시무룩해져서 대답했다. 이렇게 되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어둠 자락에 그대로 들어가면 길을 잃어요. 조금 더 기다렸다가, 주변에 작은 곤충이 나타나면 움직이는 게 좋겠습니다.”

들어올 때야 쉬웠지만, 사실 [어둠 자락]은 무척 위험한 곳이다. 길을 조금이라도 잘못 들면 하루 이틀은 금방 사라져버리는 곳이니까.

그런데 유상아가 손을 들었다.

“저, 단순히 돌아가는 것뿐이라면 제가 길영이를 대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떻게요?”

이번엔 [어둠 자락]이랑 대화라도 하시게요, 라고 말하려다가 어쩐지 비꼬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유상아는 조금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저도 비슷한 스킬이 있어요.”

생각해 보면 나는 아직 유상아의 특성과 배후성을 모른다.

“어떤 스킬인가요?”

“그게, 굳이 설명하자면 실타래로 길을 찾는 스킬인데요······.”

실타래?

“······실례지만 유상아 씨 특성이 뭔지 여쭤 봐도 될까요?”

유상아는 원작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속마음이 들리지 않는다. 이길영이나, 한명오의 마음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저, 그건······.”

유상아는 몹시 곤란한 표정이었다. 유상아에게 ‘등장인물 일람’만 쓸 수 있었더라도 이렇게 답답하진 않았을 텐데. 나는 시험 삼아 ‘등장인물 일람’을 한 번 더 발동해 보았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역시······. 그런데 메시지가 한 줄 더 있었다.

[해당 인물은 현재 정보를 수집 중입니다.]

······어?

예전에는 없었던 메시지였다.

그러고 보니 종전의 싸움에서 유상아가 ‘통역’ 스킬을 발동했을 때 얼핏 시스템 메시지가 들렸었다.

원래는 들리지 않던 거였는데.

혹시 ‘등장인물 일람’도 시간이 지나면 업데이트가 되는 걸까? 

설마······.

나는 속으로 이것저것 생각을 정리하다가, 곤란해 하는 유상아를 일단 놔주기로 했다.

“제가 괜한 걸 물었군요. 그건 그렇고, 잘 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자기 특성 정보는 남에게 함부로 알려주지 마세요.”

“그게 아니에요! 독자 씨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잘 보니, 유상아는 달리 할 말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순간, 어떤 생각이 스쳐갔다.

“혹시 유상아 씨의 배후성이 저에 대한 이야길 했습니까?”

유상아가 울상을 지은 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내뱉은 말. 이 정도면 배후성이 무슨 말을 한 수준이 아니라, 계약과 함께 모종의 서약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마 정보 발설과 관련해 목숨의 제약이 걸려 있는 거겠지.

어떤 성좌인지 몰라도 아주 본격적으로 유상아를 키우기로 작정한 모양인데.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꼭 입으로 들어야만 배후성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긴장감에 심장이 뛴다. 비어 있는 행간 사이를 메우고 싶은 독자의 욕구랄까.

“그럼 스킬 써 볼게요.”

곧 유상아의 손끝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실 같은 것이 자라나,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이렇게 될까봐 아까 납치될 때 ‘실’을 묶어 놓고 왔거든요.”

한 갈래의 실은 나를 향해 이어져 있었고, 다른 갈래는 바깥을 향해 이어져 있었다. 아마 이현성이나 정희원에게 묶여 있는 실일 것이다.

“출발하죠.”

유상아가 처음부터 이런 스킬을 가지고 있었을 리는 없고, 이건 분명 배후성이 제공한 성흔이다.

그런데 미로를 탈출하는 ‘실’이라.

이거······ 왠지 내가 아는 성좌인 것 같은데.

[#BI-7623 채널이 다시 열렸습니다.]

다시 성좌들이 입장하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소수의 성좌들이 채널 송수신 시스템에 클레임을 걸었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랜덤 박스에서 대체 무엇이 나왔는지 궁금해 합니다.]

아, 너는 못 봤지?

그것 참 아쉬워서 어쩌나.

[젠장! 이 빌어처먹을 새끼가 내 채널을······ 하하핫! 나 없는 동안 잘들 있었어요?]

그리고 반가운······ 아니, 익숙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비형이었다.

*

[······내가 없는 동안 또 엄청난 일들을 해치웠더라?]

‘그동안 못 돌아온 건 역시 나 때문이냐?’

[그건······ 그래, 뭐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지. 갑자기 방종한 거랑 광고 너무 오래 띄운 것 때문에 관리국에서 경고 먹고 왔거든.]

지금 비형의 목소리는 나한테만 들리는 상태였다. 도깨비들끼리만 사용한다는 소위 ‘도깨비 통신’이었다. 물론, 화신인 내게 허용하는 건 명백한 규정 위반이었다.

[이제 소소한 건 신경 안 쓰기로 했어. 또 관리국 몇 번 왔다갔다하면 되지. 그보다······ ‘랜덤 박스’는 또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야?]

‘그냥, 어쩌다 보니.’

[빌어먹을. 아직도 흑역사의 잔재가 남아 있었을 줄이야. 하필 그 박스가 왜 거기에······.]

‘흑역사?’

[······.]

‘······잠깐만. 설마 그 어처구니없는 코인 아이템을 기획한 게 너였냐?’

‘멸살법’의 애독자인 나도 몰랐던 사실이다.

[젠장! 그때 욕심만 안 부렸어도······.]

“와, 진짜 맛있네요. 이거.”

비형의 투덜거림은 정희원의 탄성에 의해 끊어졌다. 

10분 전, 우리는 유상아의 인도로 무사히 다른 일행과 조우를 끝냈다. 

다행히 정희원과 이현성은 우리가 올 때까지 경계지를 지키고 있었다.

“그걸 먹으면 기운이 좀 회복될 겁니다.”

“음, 정말로 몸이 괜찮아지는 것 같은데요.”

시험 삼아 어깨를 휘휘 돌리는 정희원의 안색은 겉보기에도 많이 좋아져 있었다. 실제로 익힌 지하종의 고기에는 해독 성분이 들어가 있다.

“거기 들어가서 여러 가지 많이 얻으셨나 봐요? 마력 화로 말고도······.”

“몇 개 얻었죠.”

나는 이현성을 보며 말했다. 

이현성은 아까부터 내게 받은 [낡은 강철 방패]를 몇 번이나 꼈다 뺐다 반복 하더니 지금은 겉면을 후후 불어 닦아대는 중이었다. 

누가 보면 새 차라도 뽑은 줄 알겠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당신에게 희미한 충성심을 보입니다.]

그 광경을 부럽다는 듯 바라보던 정희원이 물었다.

“혹시 제가 쓸 만한 건 없나요?”

“없는데요.”

“그 칼은요?”

“제 건데요.”

“······고기는 당연히 사람들한테 나눠 줄 거죠?”

“코인 받을 건데요.”

“그런데······ 정말 쪼잔하네요. 독자씨.”

“생존력이 강하다고 해두죠.”

익힌 땅강아쥐 한 마리씩을 짊어진 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어느새 터널이 끝났다. 

주변이 급격하게 밝아지며,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뭐지 이 급박하고 분주한 느낌은?

[유료 정산까지 20분 남았습니다.]

[생존비를 준비해 주십시오.]

뒤늦게 시계를 보고 알아챘다.

그렇군. 

벌써 그런 시간이 된 건가. 

‘유료’라는 말이 이렇게 무섭게 들릴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코인, 코인 좀 주세요!”

“우리 애한테 코인이 없어요! 제발 코인 좀······.”

성실하게 시나리오에 임했다면 100코인쯤은 문제가 아니겠지만, 본래 성실한 인간이란 드문 법이다.

“백만 원, 아니 천만 원 드리겠습니다! 누가 100코인만 파세요!”

코인의 가격이 급등하고 있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멸망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 가치도 없던 화폐에, 말도 안 되는 프리미엄이 붙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킬킬 웃는 놈들이 있었다. 이미 코인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녀석들.

천인호와 철두파 패거리였다.

몇몇 여자들이 패거리 쪽으로 몰려가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부, 분명 아까는 100코인 준다고 했잖아요!”

“흠, 그랬나? 기억이 안 나는데.”

“뭐······?”

“한 번 더 대주면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어때?”

칼을 뽑아든 정희원이 어느새 그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개새끼들이 기어이······.”

[등장인물 ‘정희원’의 특성이 개화를 준비합니다.]

슬슬 정희원도 때가 됐다. 지금 개화해도 나쁘진 않겠지만······ 아직이다. 그녀가 내가 생각하는 ‘특성’을 얻으려면 약간의 인내가 더 필요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그 때였다.

[잠시 후, 생존비 정산이 시작됩니다.]

“사, 살려 줘요! 살려 주세요!”

그 말에 일행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이현성은 비통한 듯 고개를 숙였고, 정희원은 칼을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유료 정산’의 대가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안다. 이곳에 그걸 겪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독자 씨.”

그리고 유상아가 나를 바라보았다.

“예.”

이 세계에서 코인은 곧 권력이었다.

코인을 가진 자가 좋은 아이템을 갖고, 코인을 가진 자가 좋은 능력치를 얻는다.

코인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

[시나리오 추천을 받은 몇몇 성좌들이 추가로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선택을 지켜봅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선택을 지켜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선택을 지켜봅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역에서 가장 많은 코인을 가진 인간이었다.





Episode 6. 심판의 시간 (2)

내가 입을 열려던 바로 그 찰나, 천인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독자 씨! 마침 잘 오셨습니다.”

우리를 발견한 천인호가 이쪽을 향해 웃고 있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싶더니 천인호가 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독자 씨가 코인을 많이 갖고 계셨죠! 얼마였더라? 아마 우리 중 가장 부자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등장인물 ‘천인호’가 스킬 ‘선동Lv.2’을 발동합니다!]

군중들이 허둥지둥 내 쪽을 돌아보았다. 

“코, 코인?”

“누가 코인이 많다고?”

모든 시선이 나를 향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천인호, 잔꾀 하나는 정말 대단한 놈이다.

“도, 독자 씨라고 하셨습니까?”

“살려주세요, 제발!”

숨을 헐떡이며 다가온 사람들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몰려든 사람들의 숫자는 어림잡아도 20명이 넘는다. 만약 이 사람들에게 모두 코인을 준다면 나는 무려 2천 코인을 손해 봐야 한다.

그렇다고 코인을 주지 않는다면 나는 한순간에 금호역의 대악당이 되겠지.

[등장인물 ‘천인호’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하하, 독자 씨. 저야 코인이 부족해서 이 불쌍한 분들을 돕지 못하지만······ 독자 씨는 다르지 않습니까? 그냥 두고 보실 셈입니까?”

나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이런 수작에 어울려 주는 것도 한 두 번이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등장인물 천인호를 ‘악인(惡人)’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조무래기 하나 데리고 이만하면 나도 많이 참았지.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표정을 한 채, 울며불며 달려드는 사람들.

[하하핫! 이야기가 재밌게 되어가네요. 참고로, 이제 10분 남았습니다!]

즐거워 죽겠다는 목소리로 떠들어대는 비형과,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일행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렇군요. 코인을 달라고요?”

그리고 웃었다.

“제가 왜요?”

나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곧 원죄(原罪)다. 그러니 이곳의 사람들 중 무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더 역겹다.

누군가를 짓밟고 자신의 생을 연명한 주제에, 연명한 생애 대해 책임조차 지지 못하는 자들. 

“왜, 왜라니!”

“코인이 많다며! 조금은 줄 수 있는 거 아냐!”

혼란 속에서 천인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독자 씨라면 그럴 줄 알았습니다.”

“······.”

“독자 씬 처음 이곳에 나타났을 때부터 그랬죠. 가져온 식량을 코인을 받고 팔질 않나. 그때 식량을 사지만 않았어도, 지금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옳소! 그 말이 맞다!”

“씨발! 내 코인 돌려줘!”

어느새 분위기는 나에 대한 심판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아마 이것이 천인호가 원했던 그림이겠지.

“잠깐만요, 여러분! 지금 여러분 행동은······!”

“독자 씨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뒤늦게 유상아와 이현성이 사태를 무마해보려 했지만, 이미 군중들은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그리고 거기에, 천인호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독자 씨. 마지막으로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에게 코인을 돌려주십시오.”

“싫다면?”

“그럼 최악의 일이 벌어지겠지요.”

물경 이십에 달하는 군중들이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이······ 어서! 어서 코인을 내놔!”

그럼에도 선뜻 먼저 달려드는 이는 없었다. 결국 보다 못한 철두파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병신 새끼들아! 뭐해? 죽여! 죽이고 코인을 빼앗으면 되지 뭘 망설이는 거야?”

호기롭게 외치며 나온 녀석은 꽤나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다. 나는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해 사내의 정보를 확인했다.

+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이름 : 한민상

전용 특성 : 깡패 (일반)

종합 능력치 : [체력Lv.8], [근력Lv.8], [민첩Lv.8], [마력Lv.2]

+

깡패 주제에 제법 준수한 능력치의 소유자였다. 원래부터 이런 수준이었을 리는 없으니······ 역시 이놈들은 ‘그걸’ 한 건가. 

그래, 종합 능력치를 믿고 까분다 이거지.

“죽어 이 새끼야!”

녀석의 손에 쥐어진 쇠파이프가 움직였다. 근력 8레벨의 전력이 담긴 쇠파이프. 예전의 ‘김독자’라면 무서워서 벌벌 떨 만한 위협이었겠지만······.

지금의 내겐,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스각!

쇠파이프와 함께 통째로 토막 난 사내의 팔이 바닥을 굴렀다.

“끄, 끄아아아악!”

사람의 피를 묻힌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하얀 백광을 토하며 울었다. 나는 고요히 사람들을 쓸어 보았다.

“으, 으으······.”

단 한 방에 철두파가 제압당하자, 주변 모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제 쇼맨십은 충분히 보여줬으니, 슬슬 시작할 때다. 

“한심하게도······ 당신들은 진짜 나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됐다고 믿는 거야?”

나는 좌에서 우로, 군중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건너편에서 당황한 천인호의 얼굴이 보였다.

“사실 나 때문이 아니라는 거, 너희들도 잘 알고 있잖아.” 

병든 금붕어처럼, 군중들의 입이 뻐끔거린다. 나는 먹이를 흩뿌리듯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그냥 쟤들이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사실 뭐가 잘못됐는지 알고 있는데도, 그래서 곧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도, 고작 쟤들이 무서워서 지금 벌벌 떨고 있는 거라고.”

“하하, 이보세요, 독자 씨! 지금 무슨 말을······.”

“왜냐하면 쟤들이 너희보다 강하니까! 너희보다 종합 능력치가 높고, 코인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 근데 당신들, 그거 알아?”

나는 군중을 향해 한 걸음 내딛으며 물었다. 그러자 군중 전체가 놀란 금붕어처럼 물러났다. 그러나, 이미 이들은 내 어항 속이었다.

“쟤들이 왜 너희보다 강할까?”

나는 한 걸음을 더 내딛었다.

“쟤들은 왜, 늘 너희보다 많은 코인을 가지고 있었을까? 쟤들이 깡패라서? 설마.”

[주변의 등장인물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공포 속에서도, 확실하게 전달되는 감정들이 있다. 표정에서 표정으로 옮겨가는 의문들.

“그, 그러고 보니 천인호 씨는 어떻게 그리 많은 코인을······.”

“하하,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그게, 여러가질 팔기도 하고, 또―”

“그것만으로 저 정도 능력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 진짜?”

천인호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다시 우에서 좌로, 군중들의 얼굴을 하나씩 돌아보며 말했다.

“며칠 전 내가 금호역에 왔을 때, 이곳의 인원은 총 87명이었어.”

“······.”

“그런데 지금 총 인원은 몇 명이지? 내가 보기엔, 아무리 많아도 50명이 안 되거든. 왜 그런 지 알아?”

“그, 그건 아침에 교대로 정찰을 나갔다가 괴수한테―”

“괴수? 아직도 그 말을 믿어?”

“그, 그럼 대체······.”

“멍청이들아. 머리가 있으면 잘 생각해. 그 사람들이 정말 괴수 때문에 죽었겠어? 그럼 왜 철두파 놈들은 하나도 안 죽었는데?”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왜 저놈들은, 더 강해져서 돌아온 건데?”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추리력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서, 설마―”

사람들이 하나 둘씩 천인호를 돌아보았다.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철두파들. 이제, 내가 쐐기를 박을 차례였다.

“아까 저놈들이 말했지. 나를 죽이면 ‘코인’이 나올 거라고.”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흥분하며 머리털을 뽑습니다.]

“그런데 저놈들은, ‘사람을 죽이면 코인이 나온다는 사실’을 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다, 당신들······ 인호 씨! 설마?”

“닥쳐라! 모함이다!”

천인호가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철두파의 인원들이 하나 둘씩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침음을 흘렸다.

[하하핫! 이제 7분 남았어요!]

나는 그런 사람들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당신들한테 마지막으로 자존심이 남아 있다면, 자기 손으로 싸워.”

신념의 칼날이 사납게 울었다. 시선이 마주친 사람들의 눈에 울분이 고이고 있었다.

“적어도 너희들이 빼앗긴 것은 너희들 손으로 되찾아.” 

기다렸다는 듯, 철두파의 인원들이 나를 향해 동시에 달려들었다. 나 역시, 놈들을 향해 달려갔다.

“이제 이 세계는 그런 곳이니까.”

하얀 섬광이 움직였고,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누군가가 외쳤다.

“그래, 씨발!”

“개새끼들아아아!”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 누군가를 죽인 사람들이었다.

“어, 엄마!”

“다영아 이리와! 이거 들어! 엄마랑 지하철에서 했던 것처럼 하는 거야!”

아이와 엄마도 있었고.

“이 쌍놈들아아!”

나이든 중년인도 있었다.

“이 새끼들이!”

하지만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철두파와 남은 사람들의 숫자는 비등했고, 인간 사냥을 통해 코인을 취한 철두파 놈들의 전투력은 압도적이었으니까.

어디까지나 내가 없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스가각!

내게 달려든 철두파 몇 명의 팔과 다리가 날아갔다. 사람의 몸을 베는 섬뜩한 감각이 손아귀를 타고 올라왔다. 전투불능이 된 철두파의 조직원들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사, 살려······.”

그 순간.

누군가가 나를 앞질러, 쓰러진 철두파의 입에 그대로 칼을 쑤셔 넣었다.

“내가 죽인다고 했죠.”

[특성 ‘웅크린 자’의 모든 진화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등장인물 ‘정희원’의 특성이 개화합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광채가, 그녀의 몸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때가 됐다.

[등장인물 ‘정희원’의 특성이 ‘멸악의 심판자(영웅)’으로 개화합니다.]

멸악(滅惡)의 심판자. 삼대 심판자 특성 중에서도 최강의 심판자가, 방금 웅크림 속에서 깨어났다.

[당신은 ‘웅크린 자’의 특성 개화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등장인물 ‘정희원’은 앞으로 당신의 칼이 되길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당신은 쉬어요.”

새파란 안광이 일렁이는 눈동자로, 정희원은 말했다.

“이놈들은 내 몫이니까.”

[등장인물 ‘정희원’이 전용 스킬 ‘심판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해당 스킬 사용에 동의합니다.]

[‘심판의 시간’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전신에 핏빛 오오라를 머금은 정희원의 칼이 섬뜩한 궤적을 그렸다. 가볍고도 정확하게 철두파 사이를 누비는 검도(劍道). 곳곳에서 피보라가 튀었다.

“크아아악!”

완전한 학살의 현장. 물론 싸우고 있는 것은 정희원만이 아니었다. 유상아도, 이현성도, 심지어는 이길영조차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정희원만큼 적극적이진 않았다.

마치 살인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정희원은 죽이고 또 죽였다.

내가 팔을 베면 정희원은 녀석의 심장을 꿰뚫었고, 내가 다리를 베면 정희원은 녀석의 목을 잘랐다.

정희원은 내가 남긴 뒤처리를 모두 대신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치 오래도록 그 순간만을 바라왔던 사람처럼.

“······.”

주변은 핏물로 가득해졌다.

어느새 철두파 중 남은 사람은 천인호 하나 뿐. 그나마도 시민들의 공격에 맞아 몸 곳곳이 꿰뚫린 상태였다. 정희원이 나를 보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인호가 나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후, 후후··· 네, 네놈······.”

녀석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뒤쪽에서 나타난 정희원이, 천인호의 얼굴을 정수리부터 아래로 꿰뚫어버렸기 때문이다.

[채널 내의 모든 성좌들이 강렬한 희열을 느낍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이가 행동을 멈췄다.

싸움은 끝났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체감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구운 고기를 나눠 먹고, 삶의 의미를 느끼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걸었던, 잠깐이마나 평화를 누렸던 그 모든 시간들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이 빌어먹을 시나리오 속에서.

유상아는 울고 있었고.

이길영은 눈을 감고 있었고.

이현성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었고.

체력을 다 소진해버린 정희원은 피 웅덩이 속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래, 이것이 이 세계의 진실이다.

[생존비가 정산됩니다.]

곳곳에서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코인을 얻은 자는 살아남았고.

코인을 얻지 못한 자는 죽었다.

그리고 누구도, 서로를 구원해주지 못했다.

나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일어나요, 다들.”

고개를 들어도, 이곳에서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어떤 거대한 운명에 항거하듯, 그 보이지 않는 하늘을 한참이고 노려보았다.

시끄럽던 성좌들조차 이번만큼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시나리오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니까.”

모두가 깊이 고양 되어 있는 가운데, 나는 홀로 다음 시나리오에 관해 생각했다. 하나의 페이지를 넘기고 또 하나의 챕터를 넘기듯이, 그저 고요한 마음이었다.

금호역에서 얻어야 할 것은 모두 얻었다. 

이제 다음 무대는 충무로다.





Episode 6. 심판의 시간 (3)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금호역에는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먼저, 한명오가 사라졌다.

싸움이 시작될 무렵부터 잘 안 보이기 시작하던 한명오는, 싸움이 끝난 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 다음 역으로 이동했는지, 아니면 지금도 역 어딘가에 숨어있는지는 나로서도 잘 알 수 없었다.

“이제 같이 안 다니려나 보죠. 난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요. 게다가 그 사람만 사라진 것도 아니고.”

정희원의 말대로였다. 어제의 싸움 이후 금호역에 남은 인원은 이제 거의 없었다.

생존 인원이 적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원작의 어떤 회차 보다도 많은 사람이 살아남았으니까. 

다만, 살아남은 이들 중 대부분이 어젯밤 사건 이후로 역을 떠났다. 아마 각자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남은 사람들은 괜찮을까요?”

유상아가 생존자들 쪽을 보며 물었다.

나와 유상아, 이현성과 이길영, 그리고 정희원. 이 다섯을 제외하면 아직도 이 역에 남은 사람은 고작 다섯 뿐.

정희원이 먼저 목소리를 냈다.

“이봐요, 당신들. 우리랑 같이 갈 거예요?”

무심히 던진 한 마디에, 사람들이 크게 술렁이는 게 보였다. 대표로 나선 것은 아이의 손을 쥔 젊은 여인이었다.

“···우리는 따로 갈게요. 코인도 좀 남았고요.”

모녀가 그 혈투에서 살아남다니, 솔직히 감탄했다. 저 정도 담력이면 우리와 함께 가지 않아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정희원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운이 좋길 바랄게요.”

정희원이 돌아서자, 사람들의 표정에 안도감이 돌았다.

사실 사람들 반응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어제의 일이 좀 충격적이긴 했으니까. 

이해한다. 하나는 적선을 거부했고, 다른 하나는 이유가 있다곤 해도 무참히 사람을 학살했다. 저들에게 나나 정희원은 철두파와 크게 다르지 않게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옆에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현성을 툭툭 건드렸다.

“이현성 씨?”

“아, 네!”

멍한 얼굴로 정희원을 쳐다보던 이현성이 내 말에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보나마나 저 여자가 어제 광기에 휩싸여 철두파를 쳐 죽이던 그 여자가 맞는지 의심하고 있었겠지.

“준비는 다 끝나셨습니까?”

“옙! 조금 미흡하긴 하지만 대충은 끝냈습니다. 수통으로 쓸 페트병도 챙겼고, 방한용품도 확실하게, 그리고 비상용 반합 대신 쓸만한······.”

역시 군인은 이럴 때 편리하다.

“······이상, 여기까지입니다.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필요한 게 더 있을 리가 없다······ 고 말하려 했는데,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 혹시 휴대용 보조 배터리가 있으면 좀 찾아주시겠습니까?”

“배터리 말씀이십니까? 그건 왜······.”

의아하기도 하겠지. 신호도 안 잡히는 판에 스마트폰 같은 게 있어봐야 무용한 일이니까. 나는 대충 둘러댔다.

“쓸 곳이 좀 있어서요.”

이현성은 찾아보겠다고 말하고는 철두파가 남긴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길영과 유상아도 돕겠다며 나섰다. 정희원이 나를 보며 물었다.

“이제 갈 거죠?”

“가야죠.”

당연하다는 듯, 같이 가도 되냐는 질문 따윈 없다. 그게 정희원이란 사람이겠지. 내 입장에서도 환영이다. ‘멸악의 심판자’는 유중혁조차 탐을 낼만한 인재니까.

“물어볼 게 많아요.”

“지금은 안 됩니다.”

“나 참, 철벽은.”

정희원이 주먹으로 나를 툭 치며 웃었다.

[등장인물 ‘정희원’에게 1500코인을 받았습니다.]

“이건······?”

“나눈 거예요. 혼자 먹기 미안해서. 다른 사람들한테도 줬어요.”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했다.

어제 정희원은 혼자서 철두파 대부분을 살해했다. 즉, 이 코인은 놈들이 갖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받기 좀 떨떠름했다. 

“저라면 안 줬을 겁니다.”

정희원은 모를 거다. 실은 내가 챙긴 코인이 더 많다는 것을.

“난 독자 씨가 아니잖아요?”

그녀는 주먹으로 내 팔을 몇 번 더 때리더니, 자기 배낭을 메고 터널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무리 하고 와요. 난 먼저 가서 정리 좀 해놓을 테니까.”

“너무 앞서 가진 마세요. 혼자서는 위험한 구간도 있습니다.”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휘휘 흔들며 멀어지는 정희원.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전우애를 좋아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음흉하게 웃습니다.] 

나는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를 무표정하게 지켜보다가 말했다.

‘어제 많이 벌었지? 좋겠네.’

답변이 없다.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시치미 떼지 말고 말해. 보고 있는 거 다 아니까.’

[아, 하하하······ 들켰어?]

비형의 목소리였다.

‘얼마나 벌었어?’

[······그, 그게. 음.]

나는 말없이 허공을 노려보았다.

[휴우, 참. 어떻게 또 알았는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구만. 받아.]

[도깨비 ‘비형’이 당신에게 4500코인을 주었습니다.]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

망할 도깨비 새끼.

[······성좌들이 후원 시스템을 안 쓰고 나한테 직접 보냈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전해 주래. 아, 그리고 이 메시지들도.]

뒤이어 폭발적으로 떠오르는 메시지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시나리오에 만족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판단을 애써 납득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계략에 흡족해합니다.]

······.

어쩐지, 이래서 어제 후원 메시지가 안 떴었군.

그런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생각보다 들어온 소득이 적어서 좀 의아하던 차였다.

[보유 코인 : 23050 C]

지난번에 벌어둔 코인 중 상당 량을 능력치에 투자했는데도 다시 제법 많은 코인이 모였다.

슬슬 또 능력치를 찍을 시간이 다가왔다는 얘기다.

그럼 어디 또 적당히 찍어 볼까.

나는 특성창이 안 열리기 때문에 내가 올린 레벨 값을 정확히 기억해야만 했다.

일단은······ 중요한 체력부터.

[체력에 1200코인을 투자했습니다.]

[체력 Lv.12 -> 체력 lv.15]

[육체의 내구도가 증가합니다!]

따로 공격 패시브 스킬이 없으니까, 근력도 튼실히 올리고.

[근력에 1600코인을 투자했습니다.]

[근력 Lv.11 -> 근력 Lv.15]

[근육에서 강력한 힘이 솟아납니다!]

민첩은 적당히 피할 만큼만.

[민첩에 400코인을 투자했습니다.]

[민첩 Lv.10 -> 민첩 Lv.11]

[이제 조금 더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백청강기를 유지해야 하니까 마력도 10은 돌파해야 한다.

[마력에 1200코인을 투자했습니다.]

[마력 Lv. 6 -> 마력 Lv.10]

[신묘한 기운이 당신의 영혼에 깃듭니다.]

이것 보다 더 과한 양을 찍을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충무로에 가면 또 다량의 코인을 쓸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찍은 것만 해도 벌써 4400코인이고······.

벌긴 어렵고 쓰긴 쉽다더니, 다 맞는 말이다. 태생 능력치가 좀 괜찮은 편이었다면 이렇게 까지 코인이 많이 들진 않았을 텐데.

태생 체력이 1이라니······ 멸살법의 조회수도, 아니 이길영의 체력도 그것보단 높았을 거다.

[참, 깜빡했는데······ 시나리오 추천도 두 개나 늘었어. 너 정말 대단하더라. 이대로면 조만간 채널 레벨업도 가능할 것 같아.]

‘그래야지.’

다른 화신들처럼 배후성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기에, 나는 더욱 많은 코인을 모을 필요가 있었다.

아직 내가 비형과 계약한 효과를 충분히 보지 못하는 것은 비형의 채널이 소규모인 까닭이었다.

‘소수’의 성좌로는 부족하다. 본격적으로 코인을 모으려면, 적어도 ‘상당수’의 성좌들이 들어올 만한 채널을 구성해야 했다.

충무로에 가게 되면 환경은 금방 갖추어질 것이다.

“다들 준비 끝났으면 출발하겠습니다. 빠뜨리신 거 없죠?”

어느새 모인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한 얼굴들을 보아하니, 모두 어제의 일로 하나씩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드디어, 충무로를 향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약수 쪽으로 가는 철로를 절반쯤 건넜을 무렵이었다.

[두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활성화 됩니다.]

+

<메인 시나리오 # 2 ― 조우>

분류 : 메인

난이도 : E

클리어 조건 : 터널을 주파해 첫 번째 거점 지역의 생존자와 만나시오.

제한시간 : 없음

보상 : 500코인

실패시 : ???

+

메시지를 보니 본격적이라는 실감이 난다. 첫 번째 메인과는 달리, 두 번째 메인부터는 ‘주요 거점 지역’이 존재한다. 정희원이 물었다.

“주요 거점 지역? 어딜 말하는 걸까요?”

대답은 필요 없었다. 허공에 추가 메시지가 곧바로 떠올랐으니까.

[다음 ‘주요 거점’은 ‘충무로’입니다.]

“충무로면 금방이네요? 세 정거장만 더 가면 되는 거······.”

원래라면 그렇겠지.

쿠구구구구!

땅강아쥐들이 굴을 파고 나타났다. 물경 30마리가 넘는 땅강아쥐 떼. 정희원의 안색이 굳어졌다.

“······이걸 세 정거장이나 가야 되네.”

말하지 않아도 앞으로 나선 것은 이현성이었다.

“제가 전위를 맡겠습니다.”

배후성의 지원을 받은 이현성의 체근민 합은 이제 37이나 되었다. 나보다 코인도 훨씬 적게 벌었는데, 이 정도로 나를 쫓아오다니······ 역시 태생 능력치가 높으면 유리한 게 많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팔굽혀펴기라도 해 놓는 건데.

“뒤는 제가 맡을게요, 형.”

이길영은 아직 종합 능력치는 낮았지만 꾸준한 스킬 훈련을 통해 [다종 교감]을 더욱 유연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

“저한테도 맡겨주세요.”

유상아는 마력으로 만든 실을 사용해 땅강아쥐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있었다. 공격성은 떨어지지만, 종합 능력치만 보면 정희원과 비슷한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콰직!

“······숫자만 많았지, 생각보다 별 거 아닌데요?”

마지막으로 정희원에 대해서는, 사실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이현성보다 종합 능력치는 낮지만, 전용 스킬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사기였으니까.

‘멸악의 심판자’의 전용 스킬인 ‘심판의 시간’.

눈앞의 상대가 성좌들의 판단에 명백한 불의(不義)를 저지르는 ‘악인’인 한, 정희원은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이다.

스각― 깨갱!

마지막 땅강아쥐가 바닥에 늘어졌다. 곁에서 방패를 들고 있던 이현성이 땀을 닦으며 말했다.

“후······ 이 정도면 할 만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렇게 쉽게 클리어 할 만한 난이도는 아니었다. 

땅강아쥐들의 패턴이 아무리 단순하다고 해도 30마리면 절대 만만한 숫자가 아니었으니까.

나조차 [책갈피]를 발동하지 않고서는 혼자 섬멸할 자신이 없었다. 일행들이 그만큼 강해진 것이다.

얼마간 더 터널을 전진했을까. 마침내 눈앞에 새로운 플랫폼이 나타났다.

“약수역이에요. 그런데······ 아무도 없는데요? 아니, 없는 건 아니네.”

약수역은 죽은 사람들과 땅강아쥐의 시체로 가득했다. 상흔으로 보아, 일부는 땅강아쥐가 아니라 유중혁에게 당한 듯했다.

“계속 갑니다. 이제 두 정거장 남았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어차피 약수에서 동대입구까지는 직선거리로 1km도 채 되지 않기 때문에, 갈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가두자는 심산이었다.

동대입구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우리는 또 한 번 땅강아쥐 무리와 조우했고, 녀석들을 격퇴했다.

단순 거리로는 총 2km남짓을 이동했을 뿐이지만, 싸움이 워낙 고단하다 보니 일행들의 체력은 빠르게 떨어졌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죠.”

“휴······ 어차피 한 정거장 남았는데 그냥 가서 쉬는 편이······.”

“가서 쉴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내 말에 일행들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이 세계에서 위험한 것은 괴수들만이 아니다.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보니까 이 역의 사람들은 급하게 이동한 듯하군요. 생필품 같은 게 남아있을지도 모릅니다.”

“아, 저. 그럼······.”

생필품, 이라는 말에 유상아가 살짝 손을 들었다. 유상아와 정희원의 눈이 마주쳤다. 어떤 말도 주고받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뚱하니 서있자 정희원이 물었다.

“왜요? 독자 씨도 알고 싶어요?”

유상아가 사색이 되었다.

“······희원 씨?”

“아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당연히 안 가르쳐 주지.”

···여자들만의 비밀이라 이거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무슨 얘긴지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세상이 이지경이라도, 인간의 생리현상은 멈추지 않는 것이다.

때마침 이현성도 입을 열었다.

“아, 그럼 잠시 휴식 겸 저도 화장실에 다녀오겠습니다.”

이 판국에 화장실을 가겠다니, 순간 저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멀쩡히 지어져 있는 화장실을 안 쓸 이유는 또 없었다.

이래서 지하철이 편하다니까.

“저도 같이 다녀올게요.”

거기에 이길영까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다정한 형제처럼 보였다.

유상아가 나를 보며 물었다.

“독자 씨는 혼자 계시게요?”

“전 잠시 지상에 올라갔다 올 겁니다.”

“네? 바깥으로 가면 독 안개가 있을 텐데······ 괜찮겠어요?”

“잠깐만 다녀올 거니까요.”

내 말에 정희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의심스러운데. 독자 씨 혼자 뭐 좋은 거 먹으러 가는 거 아니에요?”

나는 그런 정희원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해주었다.

“남자만의 비밀입니다.”

*

잠시 후, 나는 동대입구역의 6번 출구 앞에 서 있었다. 

미리 읽어둔 정보에 따르면, 이곳이 확실한데······.

[맹독 안개에 노출되었습니다.]

역시, 여기까지도 시독 코뿔소의 영향이 닿는 모양이다.

이번에는 [엘라인 원숭이의 허파]를 구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빠르게 일을 처리해야 했다.

나는 숨을 참은 채 동대로 이어진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올라갔다. 

그러자 얼마 안 가, 청회색빛 광택이 도는 동상 하나가 나타났다.

[거적을 걸친 한 성좌가 당신의 행동에 기대감을 표합니다.]

동상은 조선 중기를 살았던 한 스님의 모습을 본 딴 것이었다. 낡은 장포에 커다란 죽장을 든 스님의 얼굴에선, 동상임에도 알 수 없는 기품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는 동상 밑에 세로로 쓰인 이름을 확인했다.

惟政四溟大師像

유정사명대사상

좋아, 맞군. 아직 아무도 찾아온 흔적도 없고······.

나는 동상 앞에 서서, 그대로 합장을 했다.

[거적을 걸친 한 성좌가 당신의 행동에 기뻐합니다.]

[1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이어서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백청강기로 ‘신념의 칼날’을 발동했다.

[거적을 걸친 한 성좌가 당신의 행동에 의아해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사명대사 동상을 내리쳤다.

[거적을 걸친 한 성좌가 당신의 행동에 경악합니다.]





Episode 6. 심판의 시간 (4)

그로부터 몇 분 후, 나는 다시 동대입구역으로 내려와 땅강아쥐 고기를 으적으적 뜯고 있었다. 맹독 안개에 오염된 피부를 치유하기 위해서였다. 

시간은 좀 걸리지만, 이 정도 오염은 지하종의 고기를 먹는 것만으로도 회복이 된다.

[······야! 정신 나갔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그리고 지금 내 귓가엔 노발대발하며 나를 공격하는 비형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시끄러워.’

[아니, 시발 이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고. 성좌의 우상을 그런 식으로 파괴하다니! 채널 망하는 꼴 보고 싶어? 저 ‘대머리 의병장’이 악평이라도 떠들기 시작하면······!]

성좌의 우상(偶像). 어느 세계에나 성좌는 있고, 역시나 한국에도 있다.

그나저나 수식언이 ‘대머리 의병장(義兵將)’이라니. 그래도 한국의 위인인데 너무한다 싶었지만······.

사실 내가 그런 말을 할 계제는 아니지.

[거적을 걸친 한 성좌가 당신의 만행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낄낄 거립니다.]

모든 우상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성좌의 힘이 봉인되어 있다. 

만약 올바른 방법으로 우상의 봉인을 해제한다면, 화신체는 그 성좌가 생전 사용했던 힘― 즉 아이템이나 스킬을 일정 확률로 얻을 수 있게 된다.

다만 ‘봉인 해제’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그걸로 내가 원하는 스킬을 얻을 수 있을지 확신도 없었다.

나는 스마트폰에 띄워진 멸살법 텍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명대사 동상에는 봉인이 걸려 있었을 텐데, 어떻게 스킬을 얻은 거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라는 말이 있죠.”

“뭐? 너 설마······.”

“하하, 시험 삼아 해본 건데, 그게 되더라고요. ······사실 그렇잖아요. 동상이란 건 전부 우상 숭배라고요.”

“야! 다들 이 새끼 조심해. 성좌한테 저주 받았을 거야 분명.”」

충무로로 진입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에서 사명대사의 ‘스킬’은 꼭 필요하다.

그리고 ‘스킬’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상 자체를 파괴하는 것.

물론 ‘도깨비 보따리’로 비슷한 걸 사는 방법도 있겠지만······ 코인은 아낄수록 좋은 거니까.

“그래서, ‘남자의 비밀’은 잘 해결했어요?”

나는 재빨리 스마트폰 화면을 껐다. 어느새 정희원을 비롯한 일행들이 모여 있었다.

“네. 그리고 여러분께 드릴 게 있습니다.”

나는 가져온 아이템들을 주섬주섬 품속에서 꺼냈다. 정말 운 좋게도, 사명대사의 우상은 스킬뿐만 아니라 아이템도 토해냈다.

[사명대사의 염주]

[사명대사의 거적]

넝마 같은 장포와 낡은 염주. 일행들의 눈에 의문이 깃들었다.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알 법 하군. 

하지만 이걸 알아야 한다. 이 세계에서는 ‘낡은 것’ 일수록 ‘훌륭한 것’일 확률이 높다는 것을.

“보기엔 이래도 좋은 아이템들입니다. 위인의 유품이니까.”

“위인이요?”

“사명대사라고 아십니까?”

[거적을 걸친 한 성좌가 당신의 행동에 멈칫합니다.]

정희원이 멍청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누구에요?”

[거적을 걸친 한 성좌가 등장인물 ‘정희원’에게 기함합니다.]

“아! 저 알아요!”

다행히 아는 사람이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유상아였다.

“한국사 자격증 공부할 때 본 기억이 나요! 조선 중기의 승려죠?”

“네, 맞습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워 한반도를 지키셨다는······ 노원평 전투와 우관동 전투!”

과연 유상아다. 나도 한국사 공부는 했지만 저런 것까진 알지 못하는데.

[거적을 걸친 한 성좌가 인물 ‘유상아’에게 감동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튼 이 아이템들엔 그 분의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정말요?”

“뭐야, 진짜잖아!”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정희원과 이현성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독자 씨는 이건 또 어떻게 알고 얻어 오셨습니까?” 

“그냥, 혹시나 싶어서 사명대사 동상에다가 합장을 했더니······ 하늘에서 이런 게 떨어지더군요.”

“예? 그럴 리가······.”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개소리지만, 사람이 말도 안 되는 말을 지껄일 땐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나는 짐짓 엄숙한 투로, 일행들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제 생각엔······ 사명대사님이 한국을 위해 보내준 물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

일행들의 ‘아’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는 애써 무시하고 말을 이어갔다. 어차피 사람들 들으라고 하는 얘기도 아니다.

“임진왜란 때처럼 이번에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유품을 전해주신 건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지금의 한국도 국란(國亂)을 겪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거적을 걸친 한 성좌가 당신의 언변에 뭉클합니다.]

그리고 국란의 시기엔 언제나 사기꾼들이 득세하는 법이다.

“······이런 세상이니까 그런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진 않겠네요. 어쩌면 사명대사님도 ‘성좌’들 중 하나일지 모르겠어요. 그렇죠?”

놀랍게도 유상아가 제일 먼저 납득한 기색을 보였다. 어쩌면 내가 무안할까봐 선수를 친 건지도 모른다. 우스운 것은 유상아가 수긍하자, 단순한 이현성이 곧바로 납득해버렸다는 것이다.

“역시 사명대사님······.”

새삼스레 애국심이 돋았는지 이현성은 당장 육군 복무신조라도 읊을 듯한 표정이었다. 이길영도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말도 안 된다는 듯 나를 흘겨보고 있는 것은 정희원 뿐이었다.

[거적을 걸친 한 성좌가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

‘이제 됐지?’하는 표정으로 하늘을 보자, 비형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좌들의 힘과 재력은 곧 그들의 유명세와 직결된다. 때문에 모든 성좌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퍼뜨리는 걸 무척 좋아한다.

자길 대놓고 찬양하는데 싫어할 성좌가 어디 있겠어.

“염주는 사명대사를 알고 계셨던 유상아 씨에게 드리죠.” 

“정말요? 제가 받아도 돼요?”

“사명대사님도 유상아 씨가 쓰는 걸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사실 [사명대사의 염주]는 성좌가 쓰던 것 치고는 성능이 좋지 않았다. 성좌가 썼다고 다 성유물이 되는 것은 아닌데다, 아무래도 사명대사가 전 세계적으로 위명을 떨친 인물이 아닌 것도 영향을 미쳤겠지.

그래도 나름 B급 아이템이고, 마력 회복 증가에 항마력을 키워주는 보조 옵션도 붙어 있다.

옆에서 부럽다는 듯 유상아를 보던 정희원이 말했다.

“유상아 씬 아는 거 많아서 좋겠다. 난 학교 잘 안 나가서 그런 거 잘 모르는데.”

“아··· 그··· 저기.”

“농담이에요, 농담. 그런 표정 짓지 마요.”

나는 뾰로통해진 정희원을 향해 말했다.

“정희원 씨 것도 있습니다.”

“제 것도요? 그 거적 주려고요?”

“네.”

“됐어요. 아무리 급해도 그런 건 안 입을래요.”

“······그러지 말고 입어 보시죠. 분명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잠깐 망설이던 정희원이 거적을 조심스레 걸쳐 보았다. 나름 멋부리려 노력하는 모습이었으나, 사실 어떻게 봐도 그냥 거지발싸개였다.

[독식을 좋아하는 한 성좌가 당신의 행위를 비난합니다.]

[우애를 찬양하는 한 성좌가 당신의 행동을 좋아합니다.]

성유물인 [사명대사의 죽장]이 나왔다면 당연히 내가 가졌겠지만, 다른 두 아이템은 지금 당장의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하철의 스크린도어에 이리저리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던 정희원이, 조금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

“뭔가 잘 설명하긴 힘든데··· 갑자기 정의감이 마구 샘솟는데요.”

[사명대사의 거적]은 화신의 정의감과 의지력을 고양시키는 아이템이다. 나한테는 별 필요 없지만, 매사에 열혈인 정희원에겐 꽤나 쓸만한 아이템일 것이다.

“사명대사라고 했죠? 뭔가 죄송한 기분이네요. 나도 공부 좀 열심히 할걸.”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상황을 흐뭇하게 바라봅니다.]

[1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나는 농담 삼아 말해주었다.

“그럼 가서 합장이라도 하고 오시죠.”

*

농담이었는데, 정희원은 정말로 합장을 하고 왔다. 

[맹독 안개]에 노출되는 바람에 중독에 걸린 정희원은 곁에서 땅강아쥐를 열심히 뜯으며 말했다.

“······근데 그거 누가 다 부숴놨던데요? 설마 독자 씨가 한 건 아니죠?”

“······.”

“······독자 씨?”

“그보다 슬슬 준비하시죠. 곧 충무로니까요.”

나는 캄캄한 터널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길영의 [다종 교감]을 이용해 안전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옮겨온 것도 벌써 20여 분이 흘렀다.

동대입구에서 충무로까지의 직선거리가 1km가 안 되는 것을 감안하면, 슬슬 ‘그게’ 나타날 때가 됐다.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역시, 생각하기가 무섭구만.

“모두 뒤로 물러나세요.”

+

<서브 시나리오 ― 환영 감옥>

분류 : 서브

난이도 : D~F

클리어 조건 : 제한 시간 내에 환영 감옥에서 탈출하시오.

제한시간 : 1시간

보상 : 300코인

실패시 : ???

+

[서브 시나리오― ‘환영 감옥’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마 그 ‘유중혁’도 이 시나리오에서는 제법 고전했을 것이다.

이 시나리오는, 회귀자에게 가장 위험한 함정 중 하나니까.

유상아가 물었다.

“환영 감옥? 이게 뭘까요?”

묻지 않아도 알게 될 것이다.

“옵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희뿌연 안개 같은 것들이 잔뜩 몰려왔다. 터널을 점령한 안개는 주변의 시야를 순식간에 차단했다. 바로 가까이에 있는 일행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위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마치 마약이라도 한 듯 일그러진 풍경 뿐.

“으앗······ 기분 나빠!”

정희원이 비명을 질렀다. 아마 정희원은 지금 내가 보는 것과 다른 것을 보고 있을 것이다.

「독자야.」

듣기 싫은 목소리. 줄곧 잊고 있었던 이의 목소리가, 마약 같은 풍경 속에서 들려왔다. 내가 이 정도라면 다른 일행들은 더욱 심하겠지.

“······뭔가 기분이 이상합니다. 독자 씨! 거기 계십니까?”

“독자 씨! 독자 씨!”

일그러진 시야 속에서 일행들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환영 감옥].

사람의 트라우마를 건드려 광기로 이끄는 공간. 

「독자야, 너는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알겠지?」

풍경이 뭉개지며 어떤 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는 가만히 허공을 노려보다가, 씁쓸히 웃었다. 마치 이것이 현실임을 부정하듯이.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발동합니다!]

[스킬의 효과로 ‘환영 감옥’에 대한 면역이 발생합니다.]

마음이 편안해짐과 동시에 불편한 감각이 사그라졌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정신력에 감탄합니다.]

[1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호기심 가득한 한 성좌가 당신의 기억을 엿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합니다.]

환영 감옥의 힘이 약해지자, 주변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모두 진정하고, 천천히 심호흡을 하세요.”

환영 감옥에 빠진 존재들은 이지를 상실하고 주변을 향해 자신의 광기를 쏟아낸다. 때문에 환영감옥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바로 주변의 동료들이다. 유중혁이 혼자서 행동을 개시한 것에는 이 감옥을 우려한 것도 있을 것이다.

“이, 이병 이현성. 잘못 들었습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엄마!”

“이··· 이 개 같은 새끼들아!”

······벌써 늦었나. 광기에 휩싸인 일행들의 절규가 들려왔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독자 씨?”

순간, 환영 감옥 속에서 유상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손목에 낀 [사명대사의 염주]가 환하게 빛을 뿜고 있었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군.

나는 유상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주변을 엄호해 주십시오. 지금부터 이 공간을 파괴할 겁니다.”

유상아는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용 스킬, ‘파마(破魔) Lv.1’을 발동합니다.]

파마(破魔). 코인으로 구입할 수 있는 스킬인 퇴마(退魔)보다 한 단계 윗선의 스킬. 굳이 사명대사의 동상을 부순 것은 바로 이 스킬 때문이었다.

[전용 스킬, ‘파마 Lv.1’가 ‘환영감옥’을 해제합니다.]

과연, 사명대사가 쓰던 스킬이라 그런지 효과가 직방이다. 퇴마를 구입했다면 해제하는 데 1분은 걸렸을 텐데.

스르르.

안개가 물러가고 환영 감옥이 사라지자, 일행들의 모습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우, 우리의 결의! 우리는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는 대한민국 육군이다!”

“으······으······엄마.”

대체 무슨 트라우마들이 있는 것인지 한눈에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이현성은 머리를 바닥에 박은 채 엎드려 있었고, 이길영은 무릎에 머리를 박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유상아가 먼저 나섰다.

“현성 씨? 길영아! 다들 정신 차리세요!”

순간, 뒤쪽에서 눈먼 칼날이 날아들었다. 다행히 칼날은 빠르지 않아서 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 죽여 버릴 거야.”

정희원이 미친 사람처럼 허공을 노려보며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서서히 붉어져 가는 정희원의 눈동자를 보며 가슴이 철렁했다.

위험했다. [귀살]의 징조였다.

퍽!

나는 수도로 정희원의 뒷목을 강하게 쳐서 기절시켰다. 다행히 정희원은 그대로 뻗었다.

혹시나 이런 일이 있을까봐 [사명대사의 거적]까지 준 건데, 생각보다도 정희원의 정신상태가 허약한 모양이었다.

“유상아 씨, 정희원 씨를 좀 부탁드립니다.”

“······네, 네!”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서브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3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클리어 메시지가 떠오르자마자, 눈앞에 괴물들이 등장했다. 마치 엑토플라즘(Ectoplasm)을 연상시키는, 흐물흐물한 형태의 괴생물체들.

8급 유령종, 스펙터.

[환영 감옥]을 만들어 낸 범인은 바로 이 스펙터 무리였다. 나는 백청강기를 사용해 ‘신념의 칼날’을 발동했다.

스가각!

뀌이이익!

다행히 전투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스펙터는 ‘환영 감옥’만 파훼할 수 있다면 어렵지 않은 괴수였으니까.

소름끼치는 괴성과 함께, 스펙터 무리가 모두 소멸했다.

[스펙터의 영석].

나는 떨어진 영석들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것도 주워 둘 필요가 있다.

유상아의 덕택인지, 일행들은 빠르게 정신을 회복해가고 있었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가장 회복이 빨랐던 것은 역시 단순한 이현성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이현성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큰일을 치를 뻔 했군요. 또 독자 씨에게 신세를 졌습니다.”

“아닙니다.”

“머리가 아파요······.”

이길영은 자기 머리를 계속 통통 두들겼다. 나는 이길영의 머리를 가만히 감싸 주었다. 괜찮은 척 하고 있지만, 아마 이 자리에서 가장 끔찍한 트라우마는 이 아이의 것일 터다.

멀리서 어슴푸레한 빛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유상아가 말했다.

“독자 씨, 다 온 것 같아요.”

나는 잠시 고민했다. 정희원은 기절했고, 다른 이들도 전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대로 진입해도 괜찮을까?

그러나 내 고민은 다른 이에 의해 해결되었다.

어둠 속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칼날. 그러나 해하려는 의도가 없는, 순수한 위협용 움직임이었다.

“당신들 뭐야? 이 구역은 우리 사냥터인 거 몰라?”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입구에, 긴 장도(長刀)를 쥔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열일곱 쯤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에 눈에 익은 여고의 교복.

명찰을 감추려는 듯 후드 집업을 걸치고 있었지만 그것이 눈에 띄는 외모마저 가려주진 못했다.

“앗, 저 애는······!”

눈썰미 좋은 유상아가 제일 먼저 그녀를 알아보았다.

나 역시, 그녀를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 또한 소설 속의 주요 조연 중의 하나였으니까.

태풍여고의 유일한 생존자, 이지혜.

그녀는 유중혁이 무리해서 최단시간내 충무로까지 직행한 이유 중 하나였다.

“······당신들 혹시 스펙터를 처치하고 온 거야?”

내 손에 쥐어진 영석을 발견한 이지혜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떻게······ 그건 우리 사부 밖에 못 잡는 건데?”

나는 곧바로 스킬을 발동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이 발동합니다!]

<인물 정보>

이름 : 이지혜

나이 : 17세

배후성(背後星) : 해상전신(海上戰神)

전용 특성 : 상처 받은 검귀 (희귀)

전용 스킬 : [검술 연마 Lv.3], [귀살 Lv.1], [절대감각 Lv.2], [귀신 걸음걸이 Lv.1]

성흔 : [해상전투 Lv.1], [대군지휘 Lv.1]

종합 능력치 : [체력Lv.13], [근력Lv.12], [민첩Lv.13], [마력Lv.9]

종합 평가 :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를 죽여 ‘상처 받은 검귀’로 진화한 케이스입니다. 해당 인물의 배후성이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 현재 ‘스타터팩’을 적용 중입니다.

역시, 이변은 없었다.

해상전신(海上戰神).

예정대로 이지혜가 그 배후성을 가져갔다. 

훗날 있을 해상전쟁에서, 그녀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오랜 전우(戰友)와의 해후에 감동합니다.]

[이지혜의 배후성이 ‘대머리 의병장’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열차도 다니지 않는 지하철에서, 희미한 바람이 느껴졌다.

드문드문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이지혜의 머리카락을 보며, 나는 새삼 깨달았다.

[메인 시나리오 # 2 – 조우가 종료되었습니다.]

[보상을 정산합니다.]

그래, 마침내 도착했다.

이곳 충무로에.





Episode 7. 건물주 (1)

Episode 7. 건물주

우리는 이지혜를 따라 곧장 충무로로 진입했다. 스크린도어가 박살난 플랫폼을 본 유상아가 말했다.

“···뭔가 흉흉한 분위기인데요.”

3호선 철로를 따라 위쪽으로 올라서자, 두런두런 앉아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충무로에 진입 하였습니다.]

[현재 세 번째 시나리오가 진행 중입니다.]

[#GIR-8761 채널이 활성화 중입니다.]

[#BIR-3642 채널이 활성화 중입니다.]

충무로부터는 시나리오의 규모가 커져서 도깨비들의 채널도 늘어난다. 

이제부터 비형 녀석도 고생 좀 하겠군.

마침 우리를 발견한 몇몇 중년인들이 이쪽에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오, 꼬마 사무라이. 신입들 데려 온 거야?”

“어.”

사무라이라니. 이지혜의 배후성을 모르니 잘도 그런 소릴 지껄일 수 있는 거겠지. 조만간 천벌을 받을 거다 저놈들은. 이지혜가 중년인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또 술 처먹었어?”

“하하핫! 세상이 이 꼴이 됐는데 술 말고 할 게 뭐 있겠냐?”

복덕방 아저씨처럼 푸근한 몸집의 중년인들은 재난 사태를 겪고 있는 사람들답지 않게 여유로워보였다. 게다가 당연하다는 듯 하나씩 차고 있는 병장기들.

확실히 금호역과는 다르다.

이제부터가 진짜배기들이라는 거겠지.

“근데 그쪽 친구들은 동대 터널 뚫고 온 거야? 대단한데··· 코인 좀 만졌겠어?”

중년인들 중 하나의 시선이 유상아를 향한 것은 그때였다.

“거기 아가씬 이름이 뭐야? 싼 방 있는데 하나 빌려 줄까?”

“···방이요?”

“하하, 아가씬 아직 여기 시스템 잘 모르지? 여긴 말야―”

중년인의 말을 자른 것은 이지혜였다.

“아저씨들. 신입한테 헛수작 부리지 말고 그만 위로 올라가.”

“어허, 어차피 이 분들도 아셔야 돼. 다들 살려고 이러는 거······.”

“뒈지기 싫으면.”

새파란 장도를 뽑은 이지혜의 말에, 중년인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 어린 것이 벌써부터 못된 것만 배워먹어서는.”

“어이, 강 씨. 그만 하고 가세.”

중년인들은 아쉽다는 투로 이쪽을 돌아보며 멀어졌다. 그들이 4호선 환승길로 사라진 후에야, 이지혜는 칼을 집어넣었다.

“데려다 줬으니까 이제부턴 알아서 해. 보모 노릇은 사절이야.”

어린애가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충무로.

세 번째 시나리오의 무대가 되는 이곳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법칙이 통용되는 곳이다.

“씨, 씨발! 가까이 오면 다 죽여 버릴 거야······.”

3호선 플랫폼의 중앙에 나이프를 든 사내가 위협적으로 주변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대략 1평이 조금 넘을 법한 크기의 타일이 펼쳐져 있었는데, 타일 위에는 초록색의 불빛이 감돌고 있었다. 유상아가 물었다.

“···왜 저러는 거죠?”

“저도 모르죠.”

사실 뭔지 짐작은 가지만, 지금 당장 말해서 겁을 줄 필요는 없겠지. 

3호선 곳곳에는 나이프 사내와 비슷한 행색의 사람들이 주저앉아 있었다.

종전의 중년인들과는 달리, 하나 같이 절망에 젖은 얼굴들. 나는 그들을 일별하며 이지혜에게 물었다.

“유중혁이 여기 있지?”

‘유중혁’이라는 이름에 돌아서려던 이지혜가 홱 고개를 돌렸다. 경계심이 깃든 눈빛이었다.

“···너 뭐야?”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유중혁이 벌써 애를 망쳐놓았군.

이해는 간다. 해상전신 급의 성좌는 한국 전체를 뒤져도 찾기 어려우니까. 내가 유중혁 입장이었더라도 충무로에 오자마자 이 녀석부터 찾았을 것이다.

“난 살아 돌아온 유중혁의 동료다.”

“···동료? 그럴 리가 없는데?”

몹시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이지혜. 나는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녀석한테 그렇게 전하면 알아들을 거야. 유중혁 지금 어디 있어?”

“···사부는 지금 없어.”

“그래? 이거 곤란한데. 꼭 전해야 할 말이 있거든.”

표정을 일그러뜨린 이지혜는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뭔가 배신감에 가득 찬 표정을 했다.

그 참, 이 녀석이 유중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주 잘 알겠다. 게다가 벌써 ‘사부’라니······ 이런 식으로 장군님을 빼앗기는 건 곤란한데.

이지혜가 한쪽 구석에 쪼그려 잠을 청하던 소년을 불렀다.

“야, 거기!”

“엇? 네, 넵!”

“여기 이 사람들 잘 보고 있어! 나 사부한테 좀 갔다 올게.”

소년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우리를 보았다.

“······그 사람들이 누군데요?”

“몰라, 사부 친구래!”

이지혜의 말에 플랫폼 주변에 늘어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눈을 떴다. 그들은 절반은 신기하다는 듯, 또 절반은 경외심 어린 눈빛으로 우리를 보았다.

“······유중혁 씨 친구라고?”

헐레벌떡 뛰어온 소년이 우리 앞에 얼굴을 내밀었다. 대충 이지혜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정말 유중혁 씨 친구분 되시나요?”

말똥말똥. 소년의 해맑은 눈을 보고 있으려니,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보통 사람이라면 그랬을 거란 얘기다. 

“절친한 친굽니다.”

최근 생각하는데, 난 아무래도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여기에서 만큼은 말이다.

*

기절한 정희원을 유상아가 돌보는 동안, 나는 소년에게서 충무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녀석은 이지혜와 함께 유중혁을 따르는 소수 추종자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저희는 유중혁 씨를 따르고 있습니다. 저, 듣고 계신가요?”

“네.”

물론 제대로 안 듣고 있었다. 

싸이코패스 유중혁의 영웅담 따위 하나도 재미없었으니까.

그래도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다.

“3일 전 유중혁이 여기에 나타났고, 괴물 떼로부터 이지혜를 비롯해 당신들 몇 명을 구해줬다. 뭐 그런 이야기 아닙니까?”

자신의 경험담이 폭력적으로 요약 당하자, 소년은 완전히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어,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되나요······.”

아무래도 단단히 유중혁한테 홀린 표정이었다. 

하긴, 갑자기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존재가 나타나 자기들을 구원해줬는데, 그를 추종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하지만 소년은 모를 것이다.

소년이 살아난 것은 유중혁이 착한 놈이어서가 아니라, 운 좋게 이지혜와 같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저, 몇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공손히 질문을 시작한 것은 이현성이었다.

“예. 물어 보세요.”

“이곳에서 식량 보급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게, 보급이라 말하기는 좀 민망한데······ 저를 비롯한 몇몇은 주로 지혜한테 의존하고 있어요. 지혜가 사냥을 하고, 유중혁 씨한테 부탁해서 조리를 하는 식으로······.”

언제 또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는지, 주섬주섬 노트를 꺼낸 이현성이 뭔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누가 군인 아니랄까봐.

“그럼 식수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위층의 ‘건물주 연합’에게 식량이나 코인을 주고 조금씩 바꿔 오고 있어요.”

“···건물주 연합?”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야기가 이제 좀 재미있어지려는 모양인데. 소년은 살짝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원래 충무로 일대를 주름잡던 건물주 아저씨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위층을 차지하고 있는데, 우리는 건물주 연합이라 불러요.”

충무로 건물주 연합.

‘멸살법’에도 등장하는 이름이다.

“어떤 사람들이죠?”

“그게, 뭐라고 말씀 드려야 할지······.”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얘기였다.

아마 내 예상대로라면, 지금 충무로를 휘어잡고 있는 것은 ‘십악(十惡)’ 중 하나일 것이다.

“그냥 건물주들이에요.”

한숨을 쉬며 나온 대답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답이었다. 그들은 건물주들이다. 그저 정해진 세를 받을 뿐인 건물주들.

조용히 있던 이길영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저기, 형.”

“응?”

“화장실 가고 싶어요.”

“급해?”

“네.”

조금 뜬금없는 타이밍이었다. 애초에 이길영이 이런 걸로 말을 건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아했다. 그런데 이길영의 바로 옆에 유상아가 얼굴을 붉히며 서 있었다.

“···저기, 저도 같이 다녀와도 될까요?”

순간 약수역에서 비밀스런 생필품을 챙기던 유상아와 정희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이길영 이 자식, 어린애가 눈치도 빠르다.

대화를 엿듣던 소년이 말했다.

“화장실은 지하 2층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들어가기가 쉽지 않으실 거예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음. 직접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마침 저도 올라가 보려고 하니까, 같이 가시겠어요?”

“가보죠 한번.”

그 말을 한 것은 나였다.

물론 진짜로 화장실을 가기 위함은 아니고, 올라가서 몇 가지 확인해 봐야 할 게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유중혁의 행보는 내가 아는 ‘3회차’와는 묘하게 전개가 다르다. 그렇다면, 그 갭을 확실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정희원을 업고 일행들과 함께 지하 3층으로 올라갔다.

“오, 아까 그 뉴 페이스들이군. 혹시 ‘방’ 보러 오셨나?”

4호선 에스컬레이터 근처에 서 있던 중년인들이 휘파람을 불며 물었다. 소년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 죄송합니다. 저흰 잠깐 위층에 볼 일이······.”

“에잉, 아쉽구만 그래. 조심들 하라고.”

중년인은 미련 없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멀어지는 중년인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상아가 물었다.

“저, 그런데······ 아까부터 ‘방’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정확히 뭘 말하는 건가요? 제가 아는 그 방은 아닌 것 같은데.”

“쉽게 말하면 저겁니다.”

소년이 가리킨 곳에는 정사각형으로 된 타일이 깔려 있었다.

아까 3호선 플랫폼에도 있었던 타일이었다. 역시나 1평이 좀 넘을 법한 크기의 초록빛 타일.

자세히 보니 타일 위쪽의 허공에 뭐라고 적혀 있는 게 보였다.

[그린 존 0/1]

“시나리오상 명칭은 ‘그린 존’인데, 여기선 ‘방’이라고 불러요.”

타일의 바로 곁에는 두 남자가 서로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었다. 

마치 그 타일을 두고 싸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번에는 이현성이 물었다.

“저게 대체 뭡니까? 저 사람들은 왜 저걸 두고 싸우는 겁니까?”

소년은 살짝 꺼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우리에게 그걸 말하면 자신의 생존에 위협이라도 될 것처럼.

“지하 2층에 도착하면 모두 알게 되실 거예요.”

고층으로 올라 갈수록 ‘방’을 둘러싼 싸움은 심심찮게 보였다. 

방마다 붙어 있는 숫자는 제각각이었는데, 작은 방은 (0/1)에서부터, 큰 방은 (0/7)짜리도 있었다. 

아마 뒤의 숫자는 수용 가능 인원을 뜻하는 거겠지.

나는 주변을 꼼꼼히 살피며 물었다.

“지하 3층부터 지하 1층까진 모두 ‘건물주 연합’의 영역인가요?”

“······예. 소수 세력도 있긴 한데, 거의 건물주 연합이 먹고 있어요.”

충무로의 모든 기반 시설은 지하 2층과 1층에 몰려 있으니, 사실상 하나의 연합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셈이었다.

“유중혁은 아무 조치도 없습니까? 당신들을 구해 줬다면서요?”

“그게······.”

내 질문에 소년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한참이나 달싹이던 소년의 입술이 간신히 말을 토해냈다.

“스스로 일어나라고만······.”

알 만 하다. 내가 아는 유중혁이라면 당연히 그딴 식으로 말했겠지. 아마 유중혁은 자신을 따르라고 말한 적이 없을 것이다.

이들은 유중혁이 보여준 압도적인 무력에 매료되어 멋대로 실낱같은 희망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불쌍하게도.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 2층에 도착했다. 소년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다.

“여기서부턴 조심하셔야 해요.”

지하 2층은 아래층보다도 훨씬 더 많은 ‘방’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까처럼 호객을 하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았고, 대신 무서운 눈빛으로 그린 존 위를 지키는 사람들만 보였다.

[그린 존 7/7]

우리는 사람들을 그대로 지나쳐 화장실 방향으로 향했다.

“어······ 왜 여기서 멈춰 있는 걸까요?”

우리의 걸음이 멈춰선 것은 화장실로 가는 마지막 통로를 앞둔 무렵이었다. 병목이 발생하는 인근 길목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앞으로 가 보죠.”

나는 그렇게 말하고 사람들을 밀치며 나아갔다.

“필두 씨! 부디 다시 받아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발, 제발요! 오늘 하루만 더 묵게 해주세요. 코인은 빚을 내서라도 가져 오겠습니다!”

대열의 선두는 과잉된 사람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자자, 물러서세요. 물러서요.”

그들의 맞은편에는, ‘건물주 연합’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병장기를 들고 도열해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십악’이 여기 있겠군.

소설의 묘사를 통해 ‘십악’을 찾아보려 했지만, 다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그들 중 누가 ‘십악’인지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건물주가 되면 다들 인상이 비슷해지는 건가?

다리 쪽에서 뭔가가 꼼지락거리더니 고개를 내민 것은 그때였다. 

이길영이었다. 뭔가 위험해 보여서 어깨를 붙잡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이길영을 밀쳤다.

“앗.”

중심을 잃고 넘어진 이길영이 바닥을 짚었다.

[인물 ‘이길영’이 사유지를 침범하였습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지며, 앞줄에 있던 ‘건물주 연합’ 중 몇몇이 이길영을 보았다.

“넌 뭐냐 꼬맹아?”

그와 거의 동시에, 몰려 있던 인파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미친!”

“뒤, 뒤로 가! 빨리!”

뭔가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바짝 몰려 와 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사람들이 사라지자,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붉게 빛나는 한 줄의 경계선이 보였다.

한 남자가 경계선과 이길영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흐음. 길을 잃은 모양이구나.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니?”

“화장실 가는 길 아닌가요?”

“화장실? 하하, 한때는 그랬지. 그런데 너 이 새끼······ 부모는 어디 있어?”

“······네?”

“남의 땅에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된다고 배웠어, 안 배웠어?”

‘남의 땅’이라.

이거, 틀림없구만.

남자는 알 수 없는 눈길로 이길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짜식, 잘 모르나 보네. 그럼 아저씨가 지금부터 가르쳐 줄게.”

[등장인물 ‘공필두’의 성흔 「무장 지대 Lv.3」가 발동합니다!]

기이이잉,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닥 곳곳에서 개틀링 건을 닮은 미니 포탑들이 일제히 일어나고 있었다.

[등장인물 ‘공필두’가 사유지 침범으로 500코인을 지불할 것을 요구합니다.]

[권고에 따르지 않을 시, 주변의 모든 포탑이 즉각 사격을 실시할 것입니다.]

남자가 말했다.

“돈 내놔, 인마.”

총탄 장전을 마친 포탑들이 일제히 이길영을 겨누고 있었다. 

당황한 이길영이 주춤주춤 물러서다가 내 옆에 붙었다. 나를 발견한 남자가 웃었다.

“아, 보호자가 계셨구만. 그럼 보호자께서 대신 500코인 지불하셔야지?”

대뜸 내밀어진 사내의 손을 보며, 나는 빙긋 웃었다.

······재미있네, 유중혁. 

이런 새끼들을 그냥 놔뒀다 이거지?





Episode 7. 건물주 (2)

십악(十惡).

유중혁의 인생 회차에 따라 그 목록이나 순위가 종종 바뀌기는 하지만, 이 ‘멸살법’의 세계에서 주된 악역을 도맡고 있는 열 명.

충무로의 무장성주(武裝城主) 공필두는 그 십악 중의 하나였다.

그러니 멸살법을 끝까지 읽은 사람이라면(나뿐이지만), 공필두를 모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린 존 56/70]

역시, 가지고 있는 ‘방’ 크기부터 다르다. 평수를 쉽게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방. 

이 일대 전체가 공필두의 ‘그린 존’인 것이다.

일단은 정석대로 가볼까.

나는 이길영을 내 뒤로 숨기며 입을 열었다.

“왜 코인을 받습니까? 충무로역은 공공시설이잖습니까.”

“하하, 8일 전까진 그랬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평범한 인간에게 500코인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그런데 고작 자기네들 땅을 밟은 걸로 500코인을 달라······ 이건 뭐 도둑놈들이 따로 없다.

“좋아요, 드리죠. 대신 직접 드리겠습니다.”

“뭐?”

“당신은 공필두가 아니잖아?”

자기가 공필두라도 되는 것처럼 잘도 지껄이고 있지만, 눈앞의 이 녀석은 그냥 ‘건물주 연합’의 엑스트라1일 뿐이다.

어디냐, 공필두.

나는 빠르게 주변을 탐색했다. 저놈도 아니고, 저놈도······ 내가 공필두라면 어디에 있을까.

“하하, 이거 웃긴 놈일세. 야, 지금 나랑 장난······.”

“공필두 씨. 어디 계세요? 벌금 받아 가세요.”

나는 놈을 무시하고 걸어갔다.

[당신은 사유지를 침범하였습니다!]

솟아오른 포탑이 곧장 나를 겨눴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솔직히 저 포탑이 사격을 시작하면 나라고 무사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선 패기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공필두도 날 얕보지 않을 테니까.

“거기까지. 더 이상 다가오면 죽인다.”

그리고 마침내, 공필두가 움직였다.

각종 생필품들이 즐비하게 놓인 벤치. 그 위에 걸터앉아 잡지를 읽던 중년인이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과연, 소설 속 묘사 그대로다. 

살짝 나온 배에 반쯤 벗어진 머리. 이 녀석이 바로 ‘건물주 연합’의 대표인 공필두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패기가 대단하군 그래.”

“돈 내러 온 것도 억울한데 눈치까지 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등장인물 ‘공필두’가 당신에게 흥미를 느낍니다.]

하여간, 나는 악당들한테 인기가 많은 타입이다. 김남운도 그렇고.

“제법 말재간이 있는 녀석이군. 하지만 너무 건방지게 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달칵. 포탑에 마력탄이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망할 새끼.

평범한 동네 아저씨처럼 웃는 공필두. 하지만 나는 안다. 저 공필두는 절대로 ‘평범한 동네 아저씨’가 아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공필두

나이 : 48세

배후성(背後星) : 디펜스 마스터

전용 특성 : 건물주(희귀), 땅부자(희귀)

전용 스킬 : [사유지 Lv.3], [인내심 Lv.1], [손익계산 Lv.2], [리더십 Lv.2], [선동 Lv.1], [무기 연마 Lv.1]

성흔 : [무장지대 Lv.3]

종합 능력치 : [체력Lv.9], [근력Lv.11], [민첩Lv.10], [마력Lv.19]

종합 평가 : 충무로 건물주 연합의 대표인 공필두입니다. 그의 스킬인 ‘사유지’는 성흔인 ‘무장지대’와 호응해 일대 다수의 전투에서 최고의 효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가능한 적으로 만들지 않을 것을 권합니다.

* 현재 스타터팩을 적용 중입니다.

* 현재 성장 패키지를 적용 중입니다.

+

세상에는 수많은 ‘갑’들이 있지만, 개중에서도 건물주나 땅부자만큼 안정적인 ‘갑’은 드물다. 그런데 그 두 특성을 모두 가진 존재가 있었으니, 그게 훗날 ‘무장성주’라 불리는 눈앞의 공필두였다.

이렇게 설명을 보고 있으니 더욱 실감이 난다.

특성 더블로도 모자라, 벌써 마력 레벨이 19나 된다.

과연, 이 정도는 되어야 훗날 십악의 자리에 한 자리라도 걸칠 수 있다는 거겠지.

“그런데 무슨 용건으로 온 거지? 보아하니 벌금 상납만이 목적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역시 눈치가 보통이 아니다.

잠깐이었지만, 나는 고민했다.

여기서 협상을 하느냐, 아니면 바로 공필두를 제압하느냐.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다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공필두의 ‘무장 지대’는 결코 만만한 성흔이 아니었다. 제압을 시도한다면 나 역시도 포탑에 맞아 큰 부상을 각오해야 하리라.

어쩐다. 코인을 따로 쓸 곳이 있기 때문에 추가 능력치를 찍을 수도 없는 상황인데.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허튼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공필두가 웃으며 내 뒤쪽을 바라보았다. 무장한 연합의 병력들이 어느새 이현성 일행을 에워싸고 있었다. 과연 대가리 굴러가는 속도가 보통이 아니군.

나는 웃으며 양손을 들어 보였다.

“진정하시죠. 세입자가 건물주한테 찾아온 용건이야 빤하잖습니까?”

“방이냐?”

“예. 저와 제 일행을 필두 씨의 그린 존에 머무르게 해 주십시오.”

이건 꼭 필요한 일이었다. 

세 번째 시나리오를 무사히 클리어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필두의 ‘그린 존’에 머물러야만 한다. 

그러나 공필두의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안 돼. 연합에 외인은 받지 않아. 일인당 500코인씩 매일 상납한다면 생각해 보겠지만.”

매일 500코인? 무슨 코인 상품 팔듯이 말하는군. 이건 도깨비 보따리 보다 더한 놈이다.

“그건 좀 힘들고, 대신 정보를 주죠.”

“무슨 정보?”

“유중혁에 대한 정보.”

유중혁. 그 이름 하나에 건물주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유중혁? 유중혁이라면 얼마 전에 그 난동을 부린······.”

“너 이 새끼! 그놈이랑 무슨 관계야?”

“필두 씨! 이 자식 뭔가 수상한데요?”

역시 반응이 있구만.

유중혁이라면 이미 ‘건물주 연합’과 트러블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사실 그 점이 조금 찜찜했다.

원작대로라면 3회차 회귀의 유중혁은 지금쯤 ‘건물주 연합’과 치고받는 혈투를 벌이고 있어야 하는데, 이 자식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공필두가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유중혁과 무슨 관계지?”

“생사를 따로 한 동료입니다.”

“···같이 한 게 아니라?”

“아무튼 친하다는 거죠.”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못 믿으면 마시고. 어차피 손해 볼 건 없잖습니까?”

나는 툭 던지듯 말했다.

아마 공필두는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유중혁은 충무로에서 공필두의 권력을 위협하는 유일한 인물이니까.

[등장인물 ‘공필두’가 「손익계산 Lv.2」을 발동합니다.]

“손해 볼 게 왜 없어?”

······?

“네가 사기꾼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잖아. 연륜을 무시하지 마라. 내 경험 상, 꼭 너 같이 생긴 놈들이 마지막에 월세 떼먹고 도망가거든.”

너무 콕 집어서 정확한 느낌이라 억울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발에 밀려선 곤란했다.

“······안 믿으면 어쩔 수 없죠. 어차피 그쪽 손해니까.”

내 말에 공필두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돌아섰다. 전혀 미련을 보이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놈은 더욱 미련을 가질 테니까.

“잠깐만.”

역시나.

“사유지 벌금 내야지. 어딜 튀려고?”

다른 미련이었나. 빌어먹을 놈.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얼마였죠? 100코인이었나?”

“아니, 너랑 저 꼬마까지 합쳐서 1000코인이다.”

머리에 힘줄이 돋았다.

이 자식은 1000코인이 1000원짜리 한 장인 줄 아나······.

“그건 너무 많은데.”

도깨비한테도 그런 코인을 뜯긴 적은 없는데, 공필두 같은 새끼한테 1000코인을 줄 수는 없지.

공필두가 웃었다.

“그럼 세입자로선 실격이군. 죽어라.”

나는 본능적으로 주변의 사내들을 밀치고 일행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콰앙― 하는 첫 발포음이 들렸고, 철제방패를 든 이현성이 어느새 내 뒤를 막아서고 있었다. 

정말 든든하다.

“······독자 씨.”

하지만 근력과 체력 레벨이 모두 14에 육박하는 이현성조차 몹시 긴장한 음색이었다.

부르르 떨리는 팔근육을 보니 확실히 알겠다.

아직 두 번째 성흔이 개화하지 않은 이현성의 능력치론 저 포탑의 연사를 버틸 수 없다.

게다가 정희원도 없는 상황. 여기서 정면 승부를 벌인다면, 반드시 일행 중 누군가는 죽을 것이다.

“공필두 씨, 잠깐 기다려 보시죠.”

그렇다면 손해 보는 싸움을 할 수는 없지.

“또 뭐야?”

“지금 우리랑 싸우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왜?”

손해는 다른 놈이 봐야 한다. 

“지금 싸우면 당신은 여기서 죽을 테니까.”

공필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구태여 덧붙이지 않아도, 공필두도 막 눈치 챘을 것이다. 

지금 막 지하 1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고 있는 녀석의 존재를. 

저런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어대고 있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다.

“내 절친한 동료께서 오고 계시거든.”

유중혁.

저 빌어처먹을 회귀자 새끼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사부, 저놈이에요. 저놈이 사부 동료를 사칭했다니까요.”

새된 목소리의 이지혜가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을 뚜벅뚜벅 걸어오는, 혼자 드라마를 찍고 계신 우리의 주인공. 살벌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크게 동요합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가 발동합니다!]

일순 짧은 현기증이 돌더니, 이내 놈의 생각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벌써?」

나는 녀석을 향해 해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안녕, 중혁아.”

「······.」

“잘 있었니? 얼굴 좋아 보이네?”

「······.」

이지혜와 공필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유중혁과 나를 번갈아보았다. 절대로 나와 유중혁이 ‘동료’일 리가 없다는 듯이. 허공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너랑 내가 동료라는 걸 안 믿어 주는데, 네가 대신 말 좀 해 줄래?”

하지만 나는 유중혁을 안다.

이 새끼는 사람은 밥 먹듯이 죽여도, 자기가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놈이다.

[소수의 성좌들이 등장인물 ‘유중혁’의 대답에 주목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등장인물 ‘유중혁’의 신의를 지켜봅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성좌들이 주목하고 있을 때라면 더욱.

「······.」

고요한 눈길로 나를 보던 유중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내 말이 더 빨랐다.

“참, 화장실도 쓰게 해 주면 더 좋고!”

마침내 유중혁이 칼을 뽑아 들었다.

*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무사히 화장실을 이용한 뒤 3호선 플랫폼으로 내려와 있었다. 모두 회귀자 동료를 잘 둔 덕분이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반갑다, 새끼야.”

“······역시 살아있었군.”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중혁은 나를 동료라고 부르지 않았다. 다만 공필두를 향해 조용히 칼을 겨누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행히 충돌을 원하지 않았던 공필두는 이를 갈면서도 우리를 그냥 보내 주었다.

“혹시 죽길 바랐냐?”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지.”

동료는 개뿔.

간만에 건방진 면상을 보니까 화가 더 솟구친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턱주가리를 날려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해당 인물의 관련 정보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이 ‘요약 일람’으로 변환됩니다.]

풀 버전으로.

[등장인물 ‘유중혁’의 인물 정보를 ‘풀 버전’으로 변환합니다.]

+

<등장인물 일람>

인물 : 유중혁

나이 : 28세

배후성(背後星) : ???

전용 특성 : 회귀자 <3회차> (신화), 프로게이머 (희귀)

전용 스킬 : [현자의 눈 Lv.8], [백병전 Lv.8], [상급 무기연마 Lv.5], [호신강기 Lv.5], [정신 방벽 Lv.5], [군중 제어 Lv.5], [추론 Lv.5], [거짓 간파 Lv.4]······(중략)······.

성흔 : [회귀 Lv.3]

종합 능력치 : [체력 Lv.24], [근력 Lv.24], [민첩Lv.25], [마력Lv.23]

종합 평가 : (해당 인물의 종합 평가가 너무 길어 로드할 수 없습니다).

+

소설로 볼 때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직접 보니까 이 새끼가 얼마나 비범한 지 잘 알겠다.

이제 세 번째 시나리오에 막 돌입하는 상황인데 체근민 합이 70을 넘는다. 이거 완전 미친놈 아냐.

빌어먹을, 이래서 주인공 버프는.

“더 할 말이 남았나?”

그런데 본래의 3회차보다 성장 속도가 더 가파른 것이 어쩐지 신경 쓰인다.

성장이 빠르다는 것은 그만큼 큰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는 뜻인데··· 겨우 3회차 회귀한 놈이 무슨 헛짓거릴 꾸미고 다니는 거지? 

뭔가 불안해진다. 조만간 뒷조사를 들어가 봐야······.

“할 말이 있냐고 물었다.”

“아니, 그냥 띠꺼워서 쳐다봤어.”

「···역시 강단이 있는 놈이군.」

강단은 무슨. 

혼자 중2병에 쩔어가지고.

「그래도 건방진 건 좋지 않아. 그냥 지금 죽일까?」

“농담이야.”

나는 황급히 웃으며 말했다.

유중혁이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에게 실망합니다.]

어차피 지금 당장 유중혁을 족칠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 남은 무수한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기 위해, 유중혁은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다.

진짜 동료처럼 지내진 않더라도, 뼛속까지 철저히 이용할 가치가 있단 말이다.

······왜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도 구차한 변명처럼 들리지?

“동료를 꾸린 모양이군.”

유중혁은 무표정한 눈빛으로 나를, 그리고 내 뒤쪽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당신에게 조금 실망합니다.]

······뭐? 왜?

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현자의 눈 Lv.8’을 발동합니다!]

「기껏 이현성을 두고 왔는데, 고작 저 정도밖에 키우지 못한 건가.」

사실이라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확실히, 이현성은 유중혁과 움직였다면 지금보다 잘 성장했을 것이다.

그래도······ 자식아.

난 그냥 운 좋게 미래를 알게 된 평범한 독자라고.

「기대 이하야.」

이건 뭐 마음속이 들려 버리니 실제로 말을 듣는 것보다도 훨씬 깊이 비수가 박히는 것 같다.

그런데, 한참 일행을 둘러보던 유중혁의 시선이 멈칫했다. 

처음으로, 그의 눈빛에 당혹감이 어리고 있었다.

「······저건 뭐지?」



Episode 7. 건물주 (3)

유중혁은 이현성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 쪽을 보고 있었다. 하필 남은 세 사람이 뭉쳐 있어서, 나는 유중혁이 정확히 누굴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저런?」

대체 누굴 보고 있는 거야?

엄청나게 물어보고 싶었는데, 잘못하면 내 스킬이 들킬까봐 참았다. 아직 유중혁은 내가 자기 속을 다 안다는 걸 모르니까.

다만 ‘정희원’의 인물 정보를 본 게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짐작만 할 뿐.

때마침 깨어난 정희원이 유중혁과 눈을 마주쳤다.

“뭘 꼬라봐요?”

「······.」

잘한다, 정희원.

「죽일······.」

“유중혁.”

나는 재빨리 끼어들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녀석이 나를 돌아보았다.

어디 말해보시지, 하는 눈빛이다.

“왜 공필두를 내버려 두는 거냐?”

“예언자라면 알고 있을 텐데.”

“나라고 모든 걸 다 알진 못해.”

정확히는 모든 걸 다 ‘기억하지는 못하는’ 것이지만.

[등장인물 유중혁이 ‘거짓 간파’를 발동 중입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당신의 말이 진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하여간 꼼꼼한 새끼.

“······하긴, 그런가. 예언자라도 아직 ‘미래시’의 레벨이 낮겠지.”

멋대로 생각해라.

유중혁이 말을 이었다.

“공필두를 살려두는 건 필요가 있어서다.”

“앞으로 있을 시나리오 때문이지?”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가늠해보겠다는 듯이.

“이후의 시나리오에 공필두가 필요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공필두’가 필요할 뿐이지, 놈을 따르는 그룹 전체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

「······.」

“필요 없는 건 제거하는 게 네 스타일 아닌가? 왜 그냥 두고 보는 거지?”

「······귀찮군.」

뭐?

“나는 할 일이 많다.”

유중혁은 가만히 나를 노려보더니 말을 이었다.

“너는 결코 이해하지 못해.”

“잠깐만! 그렇게 말하고 지나갈 문제가 아니야. 네가 지금 움직이지 않는다면 충무로에 있는 인간들 중 대부분은······!”

유중혁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상관없어.”

나는 딱히 인본주의자는 아니다. 모든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화가 나는 건, 그냥 유중혁이 아니꼬워서다.

“유중혁. 한 대만 때려도 되냐?”

“그럴 자신이 있다면.”

분노에 차 주먹을 드는데, 메시지가 들려왔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호신강기 Lv.5」를 사용 중입니다.]

주먹을 내렸다.

비겁한 자식.

“볼 일은 끝났나?”

“······.”

“가자.”

유중혁의 부름에 이지혜가 움찔했다. 뒤늦게 유중혁을 따라 나서는 이지혜가, 나를 의외라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의 의협심에 감동합니다.]

[1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물론, 완전히 오해지만.

*

[세 번째 시나리오 활성화까지 1시간 30분 남았습니다.]

시간은 별로 없고, 머릿속은 복잡하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파탄난 민생에 분노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민중봉기를 원합니다.]

머릿속에서 사명대사가 시끄럽게 떠들어댔지만, 딱히 좋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세 번째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것은 정확히 일주일.

아마 유중혁은 세 번째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기간을 틈타 뭔가 다른 이득을 취할 계략을 꾸미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놔둘 수 없기는 한데······.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합니다.]

“유중혁 개새끼.”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만족합니다.]

[1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사실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는 유중혁이 아니라 공필두였다.

세 번째 시나리오를 무난히 돌파하려면 공필두의 도움은 꼭 필요했다. 하지만, 만약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문득 고개를 드니 정희원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아까 쫌 쫄았죠?”

“······네?”

“아까 그 남자 있잖아요. 유중혁인가랑 얘기할 때.”

나는 곧장 ‘공필두’ 이야기를 꺼냈다. 정희원은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공필두를 보지 못했으므로. 절대 화제를 돌리려던 건 아니다. 정희원은 곧바로 반응했다.

“······아니 뭐 그딴 새끼들이 다 있어요? 모두가 쓰는 공공시설을 차지하고 세를 받다뇨?”

“그딴 새끼들이 바로 위층에 있습니다.”

“내가 당장 가서 조져버릴게요.”

노발대발한 정희원이 땅강아쥐 칼을 뽑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슬슬 일행들 무기도 바꿔줘야 할 텐데. 할 일이 태산이다.

“무립니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이길 수 있어요. 금호역 때도 그랬잖아요?”

정희원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그럴 법도 하지. 정희원에겐 [심판의 시간]이라는 비장의 스킬이 있으니까. 센스가 좋고 적응이 빠른 그녀는 이미 자신의 특성과 스킬에 대해 파악을 끝냈을 것이다.

“미적거리지 마요! 당장 가서 처치하고 오자구요!”

그리고 상대가 ‘악인’인 한, 그녀의 [심판의 시간]은 최고의 상성을 자랑한다.

[등장인물 ‘정희원’이 ‘심판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정희원의 요청에 침묵합니다.]

[스킬 발동이 취소되었습니다.]

정희원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아니, 이런······ 뭐죠? 고장 난 건가?”

정희원은 몇 번이나 다시 스킬 발동을 시도했다. 그러나 스킬은 발동되지 않았다.

“아니······ 왜 발동이 안 되는 거죠? 그놈들도 분명 악인이잖아요?”

나는 정희원의 의문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우리 인간들의 생각이겠죠.”

“······무슨 소리에요 그건?”

“성좌들은 다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선악이, 그들이 아는 선악과 같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아······.”

“정의는 언제나 다수의 판결일 뿐이에요.”

그리고 지금, 그 판결을 결정할 수 있는 ‘다수’는 성좌들이었다. 인간에겐 더 이상 정의를 제창할 권리가 없다. 인간은 그저 배후성들의 꼭두각시일 뿐이니까.

“무슨 그딴······.”

나는 다른 일행들을 보았다.

다들 말은 없었지만, 생각하는 건 정희원과 비슷할 것이다. 이현성은 마력탄에 흠집이 난 철제 방패를 말없이 닦고 있었고, 유상아와 이길영은 나란히 바닥에 앉아 바퀴벌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절망감, 십분 이해가 된다.

금호역의 깡패들을 해치우고 자기들이 뭐라도 된 줄 알았겠지. 그러나 고작 역 세 개를 더 이동했을 뿐인데 그놈과 비교도 안 되는 괴물이 있다.

그럼 이쯤에서 슬슬 희망고문을 시작해 볼까.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네?”

“어렵겠지만, 놈들을 꺾을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일행들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이현성이 물었다.

“······정말 방법이 있습니까?”

“그게 뭔데요?”

나는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공필두가 ‘무장지대’ 밖으로 나오게 만드는 겁니다.”

“무장 지대가 뭔데요?”

“녀석의 성흔입니다. 지역 방어에 최적화된 기술이죠.”

무장지대.

공필두를 상대로 다수전이 까다로운 이유는 바로 이 성흔 때문이었다.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인근 지역에 [포탑]을 건설할 수 있는 사기적인 능력.

지금이야 [무장지대]니까 그나마 낫지, 훗날 성흔이 진화해 [무장요새]급이 된다면 놈을 잡기 위해 거의 공성전 규모의 준비를 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공필두에게도 분명 약점은 있었다.

“놈의 ‘무장지대’는 자신이 지정한 장소 밖으로 나오는 순간 해제됩니다. 그러면 녀석의 미니 포탑들도 쓸모 없게 되죠. 보통 그런 광역 방어 스킬은 제약이 많습니다.”

내 말에 이현성과 정희원이 동시에 감탄했다.

“아······ 그런 약점이.”

“한 번 보고 거기까지 알아낸 거예요? 혹시 독자 씨 특성이 ‘척척박사’ 아니에요?”

비슷한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일행들은 어느 정도 내게 적응해버린 눈치였다. 이번엔 유상아가 물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어떻게 움직이게 만들죠?”

“그걸 지금부터 같이 생각해 봐야죠.”

“아, 생각하는 게 제일 싫은데.”

정희원이 볼멘소리를 했다.

그리고 모두,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제일 먼저 아이디어를 낸 것은 이현성이었다.

“화장실에 간다거나 할 때 습격하면······.”

“아까 의자 옆의 잡동사니들을 못 보신 모양이군요.”

공필두는 절대로 자신의 무장지대 밖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안식처인 ‘벤치’ 곁에는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다.

침낭, 담요, 식량, 먹고 씻을 물을 담은 대야, 심지어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요강까지 있다. 물론 버리는 것은 세입자들이 한다.

“미쳤네. 완전 방구석 폐인이잖아. 아니, 그 자식은 그 땅에 뭐 좋은 걸 숨겨 놨다고 안 움직이는 거래요?”

“그곳이 충무로에서 가장 커다란 ‘방’이니까요.”

“······‘방’이요?”

그러고 보니 정희원은 아직 ‘방’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세 번째 메인 시나리오 활성화까지 1시간 남았습니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까.

“우리도 슬슬 ‘방’을 찾아야 합니다.”

일행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움찔 놀라는 게 보였다. 

“가, 가, 가까이 오지 마!”

특히 강한 경계심을 보인 것은 아까 3호선의 1인용 방을 지키던 나이프 사내였다. 그러나 우리가 다가가기도 전에, 다른 사내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꺼져, 새끼야!”

무차별로 쏟아지는 타격들. 사내가 밀려나자, 순간 그린 존의 표식이 바뀌었다. 주인이 바뀐 것이다.

[그린 존 1/1 -> 그린 존 0/1].

사내들이 하나의 ‘방’을 둘러싸고 피 튀기는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허벅지를 찔렸고, 또 누군가는 코뼈가 부러졌다.

정희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거 안 말려도 돼요?”

“우리가 개입해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결국 누군가는 죽어요.”

“아무도 안 죽을 수도 있잖아요?”

“이번 시나리오는 그게 불가능합니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허공에서 비형이 내려왔다.

[자자, 슬슬 삼일 차 메인 시나리오를 시작해 볼까요? 오늘은 뉴 페이스들도 제법 들어 왔으니까, 더욱 재미있겠죠? 하하하!]

비형이 이쪽을 흘끗대며 말했다. 

충무로 시나리오를 담당하는 도깨비는 총 셋인데 비형이 대표로 나온 걸 보면 아무래도 짬처리를 맡은 듯했다. 셋 중 비형의 채널이 제일 작으니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그리고 세 번째 시나리오가 눈앞에 도착했다.

+

<메인 시나리오 # 3 ― 그린 존 (3일차)>

분류 : 메인

난이도 : C

클리어 조건 : 역내의 ‘그린 존’을 차지하여 매일 밤 자정 몰려드는 괴물들로부터 살아남으시오. 이 시나리오는 총 7일간 지속됩니다.

지속시간 : 8시간

보상 : 1000코인

실패시 : ―

+

이현성이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건······!”

[규칙은 간단합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그린 존’을 차지하세요. 물론 다른 이들의 ‘그린 존’을 빼앗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서두르셔야 할 거예요. 시나리오가 시작한 이후에도 ‘그린 존’을 차지하지 못했다면, 정말 끔찍한 일을 겪게 될 테니까요. 하하, 그럼 다들 힘내보세요!]

비형의 말을 들은 일행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의 비명은 이어지고 있었다.

퍽! 퍽! 퍽!

“죽어! 죽으라고!”

“따, 딱히 원한이 있어서 이러는 건 아냐! 나도 살려고······!”

아마 이걸로 다들 깨달았을 것이다. 눈앞의 사투가, 더 이상 남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유상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우리끼리도 저 사람들처럼 싸워야 하는 건가요?”

“우리끼린 안 싸워도 됩니다. 수용 인원이 많은 ‘방’을 찾으면 되니까요.”

‘그린 존’의 크기는 종류별로 다양했다. 오직 1명만 거주할 수 있는 곳부터, 공필두의 땅처럼 무려 70명이 거주할 수 있는 곳까지.

“물론 그런 ‘방’이 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요.”

내 말에 정희원이 입술을 실룩였다.

“하여간 독자 씨는 사람 불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그럼 지금 당장 움직이죠. 혹시 남은 방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흩어져서 움직이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팀을 나누죠. 현성 씨가 상아 씨와 함께 움직이고, 희원 씨가 길영이를 데려가주세요.”

“독자 씨는요?”

“저는 혼자 움직이겠습니다.”

괜찮겠냐는 말은 없었다. 

다들 나를 꽤 신뢰하는 눈빛들이다. 마지막으로 입을 연 것은 이길영이었다.

“형, 저··· 혹시 못 찾게 되면 어쩌죠?”

“만약 시나리오 시작 전 20분까지도 ‘방’을 못 찾으면, 다시 이곳으로 모이는 걸로 하겠습니다.”

“알았어요. 그럼 출발할게요!”

일행들은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정희원과 이길영은 지하 2층으로, 유상아와 이현성은 지하 3층으로. 나는 멀어지는 일행들을 잠시 지켜보다가, 스마트폰을 켰다. ‘멸살법’을 열자마자 한 줄의 문장이 곧바로 떠올랐다.

「충무로에 남은 ‘방’은 없다.」

너무나 명료하게 기록되어 있는 사실. 아마 일행들은 남은 ‘방’을 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일행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살아남기 위해, ‘방’을 차지한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

그런데 이현성이나 정희원이 그럴 수 있을까?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악인’은 아니다. 공필두처럼 타인을 착취하는 자들도 있지만, 사실 대부분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빨을 드러낸 자들이었다. 

과연 그런 그들을 향해 유상아나 이길영이 마주 송곳니를 드러낼 수 있을까?

나는 곧 답을 알게 될 것이다.



Episode 7. 건물주 (4)

3호선 플랫폼에 사상자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비형이 사라지고 십여 분이 경과하던 무렵이었다.

현재 3호선 플랫폼에 있는 ‘방’은 단 하나 뿐. 

그나마 강자가 없는 3호선이기에, 약자들은 물러서지 않고 서로를 향해 살의를 내뿜었다.

“죽어! 죽으라고!”

[세 번째 메인 시나리오 시작까지 30분 남았습니다.]

주변이 아비규환으로 변해가는 와중에도, 나는 조용히 ‘멸살법’을 읽고 있었다.

아마 오늘 치 시나리오는 내가 생각한 대로 흘러 갈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 단어 한 단어 놓치지 않고 기억하는 수밖에 없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인마!]

비형의 도깨비 통신과 함께, 성좌들의 메시지도 들려왔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이 뭘 하고 있는 지 의아해합니다.]

순간 반사적으로 스마트폰을 껐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성좌들은 왜 내가 ‘멸살법’을 읽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실제로 ‘멸살법’ 원작을 보면 유중혁이 회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성좌들이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다면 내가 이 텍스트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진즉에 무슨 말이 나왔어야 정상이었다.

[지금 빈 메모장 켜놓고 뭐하는 건데? 너 때문에 성좌들 전부 답답해서 미치려고 한다고!]

···빈 메모장?

나는 다시 스마트폰을 켰다. ‘멸살법’ 텍본이 켜진 화면.

“이거 말하는 거야?”

[그래! 지금 메모장 켜놓고 무슨 작전 궁리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대로 있으면 뒈진다고! 하, 내가 저런 놈을 믿고 계약을······.]

일순 소름이 돋았다.

도깨비는 이 ‘텍스트’를 읽을 수 없는 것이다. 시스템의 최고 관리권을 가진 도깨비가 읽을 수 없다면, 성좌들도 마찬가지겠지.

그럼 이 텍스트를 내게 준 작가는······ 대체 어떤 존재지?

“크아악!”

마지막 비명이 울려 퍼졌다. 마침내 3호선 플랫폼의 ‘방’의 주인이 가려진 것이다.

[그린 존 1/1]

“···가까이 오지 마세요.”

나를 향해 어설프게 나이프를 겨누는 소년. 놀랍게도, 승자는 아까 우리를 안내해준 그 소년이었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소년.

“걱정 마, 네 자린 안 뺏어.”

나는 안심하라는 듯 일부러 녀석에게서 떨어졌다. 그러자 바로 뒤쪽에서 인기척이 일었다.

“그래? 꽤나 여유롭네, 아저씨. 죽고 싶은가 봐?”

싸가지 없는 말투를 보니, 누군진 돌아보지 않아도 알겠다.

“여유부리는 건 너도 마찬가지 같은데.”

“내 방은 아무도 안 건드려. 건드리면 뒈지는 걸 다들 아니까.”

이지혜가 새파란 장도를 휘휘 그으며 말했다. 하긴, 지금 스펙의 이지혜 정도면 유중혁이나 ‘건물주 연합’을 제외하고는 거의 상대할 화신이 없을 것이다. 나를 유심히 보던 이지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저씬 안 죽었으면 좋겠어. 아까 우리 사부한테 개기던 거 꽤 인상적이었거든.”

“안 죽을 테니까 걱정 마. 그리고 ‘방’을 못 찾는다고 해서 꼭 죽는 것도 아니야.”

내 말은 사실이었다.

‘방’을 못 찾는다고 해서,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니다.

이 역에는 그 불가능을 살아 증명하는 인간이 있었으니까. 그것도 고작 3일 전에. 

이지혜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저씨, 지금 자기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거야?”

“응.”

“아저씨 강해? 우리 사부만큼?”

말하기가 무섭게, 이지혜의 뒤쪽에서 유중혁이 나타났다.

“그만 방으로 돌아가라.”

“앗··· 넵. 사부.”

금세 고분고분해진 이지혜가 사라지고, 마찬가지로 돌아서려던 유중혁이 나를 일별했다.

“괴물들과 싸울 셈인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너는 죽을 거다. 그리고 네 일행들도.”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떠나며 나를 돌아보는 유중혁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알 수 없는 감정이 깃들었다. 나는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하지 않았다. 

꼭 모든 감정을 말로 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 메인 시나리오 시작까지 20분 남았습니다.]

환승길 계단 쪽에서 사람들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현성, 이길영, 그리고 유상아······ 하나 같이 어두운 표정을 보니 결과는 예상대로인 모양이었다. 유상아가 침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방······ 못 구했어요.”

“괜찮습니다. 그보다 희원 씨는요?”

“그게, 위층에서 협상해 본다고 하긴 했는데.”

말하기가 무섭게 정희원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뛰어 내려왔다.

“하룻밤에 2천 코인? 장난해 지금? 확 그냥 회쳐버릴까 보다 진짜.”

흥분한 듯 콧김을 씩씩 내뿜은 정희원이 말했다.

“독자 씨. 위층에서 뭐라는지 알아요? 아니 글쎄―”

“갑자기 세를 높였죠?”

“어······ 알고 있었어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다. 20분 뒤까지 방을 못 구하면 죽는 것은 세입자들 쪽이니까. 주도권이 건물주들한테 있으니 세를 높이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독자 씨는 뭔가 찾으셨나요?”

“아뇨, 저도 못 찾았습니다.”

“아······.”

나는 일행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결국, 선택의 시간이 왔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두 가지 방법, 이라는 말에 일행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내가 제시하는 방법들은, 아마 그들의 기대를 배신하게 될 것이다.

“첫 번째는 우리 모두가 살 수 있는 쉬운 방법입니다.”

정희원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보통 그럴 땐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하는 전개던데······ 다른 하나는 뭔데요?”

“두 번째는, 매우 어려운 방법입니다. 그리고 우리 중 누군가가 죽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어······ 그건 안 되는데. 첫 번째 방법으로 해요, 그럼.”

“다른 분들 생각은 어떠십니까?”

이현성이 먼저 반응했다.

“모두가 살 수 있다면 첫 번째가 좋을 것 같습니다.”

이길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인 것은 유상아 뿐이었다.

“···일단 그 방법이 뭔지 들어봐도 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4호선 환승길의 계단참으로 올라갔다.

“첫 번째 방법은 저겁니다.”

일행은 내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주변을 잔뜩 경계하며 떨고 있는 다섯 명의 남녀가 있었다.

[그린 존 5/5]

“저들이 차지하고 있는 ‘방’은 정확히 다섯 칸짜리입니다. 하지만 저들 개개인의 능력치는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솔직히 우리 다섯이 모두 나서지 않아도······.”

“잠깐만요, 독자 씨 지금―”

“네, 저들을 죽이고 방을 빼앗는 게 바로 첫 번째 방법입니다.”

내 차분한 목소리에 일행들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정희원은 깊은 상처를 받은 얼굴이었다.

“···누가 이런 방법을 몰라서 안 한 줄 알아요?”

“형이 그러자고 하신다면, 저는 할 수 있어요.”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이길영이었다.

“전 두렵지 않아요. 제가 할게요.”

“안 돼, 길영아!”

이길영의 어깨를 붙잡은 것은 유상아였다.

나는 그녀를 보며 일부러 무심한 투로 말했다.

“저들도 누군가를 죽이고 저 자리를 차지했을 겁니다. 솔직히 이런 식으로는 앞으로의 시나리오를 이겨낼 수 없습니다.”

“독자 씨.”

정희원이 내 말을 끊었다.

“난 금호역에서 살인을 했어요. 내가 원해서 죽였고, 죽인 걸 후회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정희원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살인자가 되었다고 해서, 살인이 좋아진 건 아니에요. 난 괴물이 되고 싶은 건 아니라고요.”

“······.”

“···독자 씨, 두 번째 방법에 관해 알고 싶습니다.”

이현성의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여러분 생각은 잘 알겠습니다.”

그래, 이만하면 됐다.

“두 번째 방법으로 가죠.”

내 말에 일행들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사실 처음부터 두 번째 방법을 쓸 생각이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생존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벌써부터 쉬운 방법만 고수해서는 결코 성좌들의 주목을 끌 수 없다.

다만, 두 번째 방법을 쓰기 위해서는 상당한 각오가 필요했다. 

나 뿐 만이 아니라, 일행 모두가. 

그래서 그 각오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이 사람들이, 정말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했다.

정희원이 허탈하게 웃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어차피 두 번째로 갈 거면서 왜 사람을 떠 봐요?”

“딱히 여러분을 시험하려한 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떤 선택을 하셨든, 저는 그 선택을 존중했을 테니까요.”

나는 약간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이길영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유상아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독자 씨는 정말 짓궂어요.”

“착한 사람이 아니라서 죄송하군요.”

“두 번째 방법은 뭔가요?”

“이 방법은 아무도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주 어려운 방법입니다.”

내 무거운 음색에, 일행들의 표정도 굳어졌다.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하신다면, 제 지시를 무조건 따라주세요. 도저히 말이 안 될 것 같아도, 믿고 따라 주세요. 만약 단 한 사람이라도 저를 믿지 못하신다면―”

“······.”

“우린 모두 죽을 겁니다.”

누군가가 꿀꺽 침을 삼켰다. 일행들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성이 대표로 말했다.

“독자 씨를 믿습니다. 사실 여기까지 살아온 것만 해도 독자 씨 덕분이고요.”

[세 번째 메인 시나리오 시작까지 5분 남았습니다.]

“그럼 따라오세요.”

나는 일행들과 함께 3호선 철길 쪽으로 이동했다. 

깨진 스크린 도어를 지나, 을지로 3가로 가는 터널의 입구에 섰다. 

캄캄한 터널 안쪽으로, 붉게 빛나는 ‘레드 존’이 보였다.

“아마 괴물들은 저쪽에서 생성되어 밀려올 겁니다. 그리고 3호선을 휩쓸고, 한 층씩 지상으로 올라가겠죠.”

이현성이 긴장한 투로 물었다.

“······그럼 우린 여기서 괴물들과 싸우는 건가요?”

“아뇨, 못 싸웁니다. 여기서 싸우면 우린 다 죽어요.”

그린 존 없이 저 무시무시한 괴물들과 싸워 새벽까지 버텨내는 것은, 유중혁이나 가능한 일이다.

이번엔 정희원이 물었다.

“···그럼 동대입구역 쪽으로 달아날까요?”

“그것도 안 됩니다. 시나리오가 활성화 되었을 때 충무로를 벗어나면 자동으로 사망해요.”

“그럼 대체······.”

“이 작전은 일행을 나눠야 합니다. 이현성 씨, 유상아 씨, 그리고 정희원 씨. 괴물들이 나타나면, 여러분은 곧장 놈들이 오는 방향으로 달리세요.”

“···네?”

“알겠죠? 꼭 놈들의 정면으로 달리세요. 그리고 놈들과 격돌하기 직전, 왼쪽 벽면을 꼭 살피세요. 그럼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게 될 겁니다.”

일행들은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눈치였지만, 길게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그냥 믿으세요, 안 그러면 다 죽을 겁니다. 왼쪽 벽면 살피시는 거 잊지 말고요.”

“알겠어요, 독자 씨.”

무슨 말인지 이해한 듯, 유상아가 제일 먼저 대답했다.

“그리고 노파심에 말씀 드리는 거지만. 꼭 괴물이 나타난 후에 달리셔야 합니다.”

나는 돌조각을 하나를 주워 터널 쪽으로 던졌다. 그러자 돌은 허공에서 스파크를 튀기며 나가 떨어졌다. 이현성과 정희원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독자 씨는 어쩌실 건가요?”

“저는 길영이와 함께 다른 방법을 찾겠습니다.”

이 방법은 일행이 나를 믿지 않으면 쓸 수 없다.

상식적으로 곧 나올 괴물들을 향해 자살 특공을 감행하라는 데 누가 그 말을 듣겠는가.

이제 남은 것은 그들의 의지에 달렸다.

[세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활성화 됩니다!]

스르르, 하는 느낌과 함께 을지로 3가 쪽의 터널을 막고 있던 결계가 사라졌다.

“달리세요!”

내 외침에 달리기 자세를 취하고 있던 세 사람이 동시에 스타트를 끊었다.

그르르르―!

그리고 레드 존에서 괴물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대열을 주로 채운 것은 9급 지하종인 땅강아쥐들. 그리고 중간 중간 대열을 메우고 있는 8급 지하종 [그롤]이 보였다.

그오오오!

검은 갈기에, 곰의 형상을 취한 괴물. 이마에 달린 뾰족한 뿔이 위협적인 녀석이었다.

한 마리 한 마리 놓고 보면 상대할 만한 녀석들이었지만, 문제는 그 숫자였다. 빼곡하게 몰려오는 대열은, 이미 ‘무리’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았다.

저 파도와 부딪치게 되면, 반드시 죽는다.

이현성이 최전선의 그롤과 격돌하려는 순간, 내가 외쳤다.

“지금입니다!”

유상아가 제일 먼저 벽면을 발견했다. 벽면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초록색 타일.

“아―!”

깨달음은 순식간이었다. 유상아의 손이 벽면에 닿자, 벽면이 환한 불빛을 뿜으며 활성화 되었다.

[그린 존 1/3]

민첩한 정희원이 곧바로 그녀의 뒤를 이어 벽에 달라붙었다.

[그린 존 2/3]

그러나 이현성은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땅강아쥐들이 이현성의 방패에 들러붙었기 때문이다.

“현성 씨! 잡아요!”

유상아가 장기인 [실 묶기]를 사용해 이현성을 붙잡았다. 두 여자의 힘으로, 일순 허공에 떠오른 이현성이 간신히 벽면에 도달했다.

[그린 존 3/3]

됐다.

그르르르르!

괴물들이 분한 듯 일행들을 노려보았지만, 이미 그린 존에 진입한 이상 놈들은 일행을 공격할 수 없었다.

“독자 씨!”

유상아가 나를 불렀지만 돌아볼 틈은 없었다. 나는 이미 이길영을 업고 뛰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메인 시나리오에는 몇 개의 숨겨진 ‘그린 존’이 있다. 이것은 매 회 특정 ‘벽면’에 활성화되며, 시나리오가 시작된 후에야 모습을 드러낸다. ‘그린 존’이 벽면에 붙어 있다니······ 생각해 보면 그것을 ‘방’의 개념으로 받아들인 것은 애초에 인간들뿐이었다.」

‘멸살법’의 유중혁은 수많은 회귀를 거치며 충무로의 비밀스런 ‘그린 존’을 몇 개 찾아냈다. 

그리고 이 3호선 플랫폼에, 그런 ‘그린 존’은 두 개 뿐이다.

키이이잇!

어느새 쫓아온 땅강아쥐 몇 마리가 내 허벅지를 물었다. 

체력 레벨이 높아 큰 타격은 없었지만, 이런 자잘한 것들이 쌓이면 나중에는 화가 된다.

콰악!

등에 업힌 이길영이 달려오는 몇 마리의 땅강아쥐를 둔기로 견제했다.

그러나 놈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속도가 빠른 그롤도 끼어 있었다.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예의 소년이 겁에 질려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린 존 1/1]

비겁하게도, 잠깐이지만 쉬운 길로 가고 싶다는 유혹이 일었다.

[하하하하! 이거 재밌게 돌아가네요. 그럼 오늘도 어제처럼 패널티가 있어야겠죠?]

허공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도깨비의 목소리와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이어졌다.

[시나리오 패널티가 발생합니다!]

[기존에 존재하던 일부 ‘그린 존’들이 비활성화 됩니다.]

“아, 안 돼! 으, 으아, 으아아아아!”

충무로 역 곳곳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가장 가까운 비명은, 근처의 소년의 것이었다.

콰지지직!

“아아아악!”

‘그린 존’ 이 사라지자마자, 소년의 작은 육체는 갈가리 찢겨 땅강아쥐들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소년의 시체가 시간을 버는 사이, 나는 이길영을 업은 채 통로를 내달렸다. 그러나 부서진 스크린 도어 너머에서 넘어온 괴물들로 가야할 길목은 이미 막혀 있었다.

나는 이길영을 뒤에 숨긴 채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아 들었다.

스가각!

백청강기의 칼날이 다가오는 괴물들을 빠르게 베어 넘겼다. 그러나 숫자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단 하루긴 해도 이 괴물들 속에서 해가 뜰 때까지 버텼다니, 유중혁이 괴물은 괴물이다. 

지금 내가 가진 코인을 전부 종합 능력치로 바꾸더라도, 그 일이 가능할지 확신이 없는데. 

그때, 이길영이 말했다.

“형, 있잖아요.”

“지금 말 걸지 마. 바쁘니까.”

“저 그냥 여기 두고 가셔도 돼요.”

“···뭐?”

스가각!

“전 사실 이해가 잘 안 가요. 왜 저나 다른 형, 누나들을 도와주시는 거예요? 혼자라면······ 형은 더 잘 살아남을 수 있을 텐데.”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도 태연하게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다니.

어쩌면 이 아이의 마음은 이미 죽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또 한 마리의 땅강아쥐가 목이 베인 채 바닥에 늘어졌다.

“혼자 다해처먹고, 혼자 살아남고, 혼자 떵떵거리면서 살면 편하기야 하겠지.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행동하느냐고?

누가 그렇게 묻는다면, 나도 정확히 설명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있다.

“그런 식으로 전개했다가 망해버린 소설을 하나 알거든.”

“네?”

매번 생각하는 것이지만, 나는 역시 주인공감은 아니다. 

영웅이 되지도 못하고, 구원자가 되지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흔들리는 이길영의 눈동자. 

나는 녀석을 다시 내 등에 업으며 말했다.

“형 꽉 잡아라.”

이길영은 죽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Episode 7. 건물주 (5)

밀려오는 괴물들의 파도를 보며, 나는 호흡을 고르고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레벨 15의 근력이 한꺼번에 응축되며, 내딛은 발에 강력한 추진력이 실렸다.

뚫는다.

파바바밧!

송곳니를 앞세운 땅강아쥐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고, 그롤의 단단한 뿔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아들었다. 찌이익. 레벨 15의 체력으로 단련된 피부도, 그롤의 뿔에 연타로 찔리자 멍이 들고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1번 책갈피가 활성화 되었습니다.]

[책갈피]가 발동되며, 망상악귀 김남운의 [흑화]가 전신을 감쌌다. 나는 달려드는 괴물들을 정면으로 밀어내며 달려갔다.

몸통 곳곳에 송곳니가 파고들었고, 땅강아쥐 몇 마리가 허벅지를 물어뜯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달리고, 또 달리고.

저기다.

그렇게 마침내, 원작에서 명시된 벽면이 보였다. 나는 달려드는 땅강아쥐의 머리를 힘껏 밟고 도약했다. 초록색으로 빛나는 2인용 그린 존. 

그런데······ 제기랄.

[그린 존 1/2]

이미 선객이 있었다.

“······.”

나는 뒤쪽에서 괴물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도 잊고, 잠시 놈을 바라보았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녀석이 그곳에 있었다.

“야.”

놈이 나를 보았다.

“비켜주면 안 되냐? 넌 여기 안 들어가도 살 수 있잖아.”

“곤란하군. 오늘은 피곤해서.”

재수 없는 낯짝을 세게 갈겨 주고 싶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설마 ‘3회차’의 유중혁이 여길 알고 있었을 줄이야.

‘멸살법’에서 유중혁이 최초로 숨겨진 그린 존을 이용하는 것은 4회차의 일이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젠장, 서술되지 않은 2회차부터 이곳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던 건가? 그럼 왜 원작의 3회차에선 안 썼던 건데?

크르르르!

뒤에서 쫓아오는 땅강아쥐의 울음소리. 작가를 원망하기엔 너무 늦었다. 파르르 떠는 이길영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나는 유중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말했다.

“아이는 받아 주지.”

“아이라도 받아 줘.”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다. 보나마나 성좌들을 의식한 발언이겠지만.

[그린 존 2/2]

이길영을 내려놓자, 그린 존의 표식이 바뀌었다. 이제 이길영은 안전할 것이다.

“형! 잠깐만요! 형!”

이길영이 다급히 내 쪽을 향했지만, 유중혁의 단단한 손이 이길영을 제지했다. 나는 달려드는 땅강아쥐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눈을 감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안쓰러운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마지막 순간, 유중혁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내가 죽을 거라고 했잖아.」

밀려드는 괴물들의 파도.

이제 남은 ‘그린 존’은 없다.

“안 죽는다니까.”

나는 괴물들을 무시하고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사실 이건 정말 쓰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후유증이 어떨지 장담할 수가 없으니까. 이젠 [제 4의 벽]을 믿는 수밖에.

「그건······?」

경악으로 물드는 유중혁의 눈빛.

자식, 알아봤냐? 하긴, 넌 알아도 절대 못 쓰는 방법일 테니까.

나는 손바닥 위에서 하얗게 빛나는 돌을 내려다보았다.

[스펙터의 영석].

충무로에 오는 길에 유령종 스펙터를 사냥하고 획득했던 아이템이었다.

콰직, 꽈지직!

수백의 땅강아쥐들이 내 전신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자잘한 상처에서 피가 터졌고, 그롤의 뿔에 찔린 어깨가 붉게 물들었다. 육체의 내구도가 빠르게 줄어가는 순간, 나는 손에 쥔 영석을 그대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러자 입속에서 수증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수증기는 이내 자욱한 안개가 되었고, 안개는 내 주변을 모두 덮었다.

[환영 감옥이 활성화됩니다.]

나를 물어뜯던 땅강아쥐와 그롤들이 일제히 공격을 멈추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하나 둘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플랫폼도, 유중혁도, 나를 애타게 부르는 이길영의 모습까지.

그렇게 나는 ‘유령종’이 되었다.

*

「독자야.」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바로 알아차렸다. 이게 꿈이라는 것을. 

말려들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지만, 이번만큼은 쉽지 않았다. 바닥이 수렁처럼 가라앉아 나를 삼켜버리는 기분이었다.

[지나친 몰입으로 인해 ‘제 4의 벽’의 영향력이 일시적으로 약해집니다.]

비대해진 의식이 멋대로 장면을 짜깁기하기 시작한다.

피가 낭자한 거실. 차갑게 식은 남자의 시신. 시신을 내려다보는 여자의 뒷모습. 안 된다. 이 기억은 곤란하다. 떠올려선 안 돼.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십여 분을 발악한 뒤에야, 장면은 눈앞에서 흩어졌다.

빌어먹을 트라우마······.

내게도 보고 싶지 않은 기억 정도는 있다.

[스펙터의 영석]을 먹는 걸 꺼려했던 건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스펙터의 영석]은 사용자를 일시적으로 ‘유령종’ 상태로 만들어 괴물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해주지만, 사용자의 트라우마를 최대치로 폭주시키는 부작용이 있다. 

그래서 다른 일행들에겐 주지 못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사용했더라면, 아마 그 자리에서 광인이 되어 버렸을 테니까.

······.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긴 해도, 아직 버틸 만 하다.

확실히 [제 4의 벽]이 사기는 사기다. 그나마 이 스킬이 있어서 영석을 먹고도 이정도로 끝나는 것이겠지. 최상급 ‘정신 방벽’으로도 이만한 효과는 보지 못할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내 예상이 맞다면, 이 스킬은······.

「유중혁? 당신, 유중혁인가요?」

또 트라우마가 시작된 건가 싶었는데, 이번엔 내가 아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내 기억이 만들어 낸 목소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뒤를 돌아보니 낯선 여자가 있었다. 

「······유중혁은 아니군요. 한국인인 것 같은데, 당신은 대체 누구죠?」

눈부신 금발의 외국인. 작은 키의 미소녀가 그곳에 있었다.

소녀는 한참이나 나를 들여다보더니 불가해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요. 몇 번이고 미래를 봤지만, 당신 같은 존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소녀의 왼쪽 홍채에서 불길한 적색이 소용돌이치는 것이 보였다. 머릿속에서 빠르게 페이지가 넘어간다. 나는 이 인물을 알고 있다. 아니, 절대로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다. 하필 이럴 때······.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이 발동합니다!]

[등장인물 ‘안나 크로프트’가 ‘정신 방벽 Lv.6’을 사용 중입니다.]

[‘등장인물 일람’이 ‘정신 방벽 Lv.6’을 무시합니다.]

[해당 인물의 관련 정보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이 ‘요약 일람’으로 변환됩니다.]

+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안나 크로프트

특성 : 예언자 (전설), 구원자 (전설)

전용 스킬 : [미래시(未來視) Lv.5], [과거시(過去視) Lv.4], [통찰력 Lv.8], [천리안 Lv.4], [상급 마법 연마 Lv.4], [정신 방벽 Lv.6], [거짓 간파 Lv.7], [대악마의 시선 Lv.1]······.

+

공간적 제약을 무시하고 멋대로 남의 의식 속에 들어올 수 있는 여자. 미래를 보고, 그 미래를 통해 세상을 설계하려 하는 여자.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여자’는, 멸살법에 단 한 사람뿐이다.

“안나 크로프트.”

「···어떻게 나를 알고 있죠?」

눈을 휘둥그레 뜬 그녀가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난 예언자거든.”

[등장인물 ‘안나 크로프트’가 ‘거짓 간파 Lv.7’를 발동합니다.]

[‘거짓 간파’가 당신의 말이 거짓임을 확인했습니다.]

역시, 진짜 예언자한테 거짓말은 안 먹히는구만.

「······순순히 정체를 밝히세요. 당신은 누군가요?」

그녀의 작은 입술이 곧게 다물어졌다. 마치 시위라도 하는 듯한 모습. 

대충 어떻게 된 상황인지 예상은 간다. 이 여자가 내 존재를 눈치 챈 것은, 아마 [제 4의 벽]의 영향력이 일시적으로 약해진 까닭이겠지. [제 4의 벽]이 정말 내가 생각하는 그런 스킬이 맞다면 말이다. 

그나저나······ 실망인데.

“정말 내가 누군지 몰라서 온 거야?”

「···네?」

“내가 보내 준 ‘어룡의 핵’, 잘 받아썼잖아?”

안나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핵의 마력으로 ‘대악마의 눈동자’를 눈에 심었을 텐데? 아니야?”

「서, 설마 당신? 거래소에 ‘부러진 신념’을 요청한······?」

[대악마의 눈동자]. 무려 100만 코인짜리 아이템을 후원 받았던 빌어먹을 다이아 수저가, 바로 눈앞의 이 여자였다. 거참 부럽구만.

「당신! 대체 이름이 뭐죠? 어떻게······.」

[전용 스킬, ‘제 4의 벽’의 영향력이 천천히 돌아옵니다.]

「어째서······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지······?」

그녀의 눈빛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타인의 의식에 간섭할 수 있는 [대악마의 시선]의 영향력이 감쇠하며, 그녀의 모습이 점차 희미해져 간다. 나는 배웅하듯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언젠가 만나게 될 거야. 대륙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완전히 복구 되었습니다.]

이윽고 안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기척이 사라지자, 가까스로 안도의 숨이 놓였다.

사실 아까부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중이었는데 하필 ‘안나 크로프트’라니. 별로 일진이 안 좋다.

[스킬의 효과로 ‘환영 감옥’에 대한 면역이 발생합니다.]

···빌어먹을, 너무 늦잖아.

쨍― 하는 느낌과 함께 의식이 맑게 개는 기분이 들었다. 

불쾌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기분이 나아졌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한다. 나는 명료한 사실들을 하나씩 되짚으며 조금씩 이성을 움직여 보았다.

나는 김독자다.

세계는 멸망했고.

‘멸살법’은 현실이 되었다.

이곳은······ [환영 감옥] 속이다.

나는 스펙터의 영석을 먹고 잠깐 유령종이 되었다.

유령종이 되면, 지하종의 공격을 받지 않으니까.

그래, 그랬었지.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보이는 거야.

마약이라도 먹은 듯한 풍경 속에서, 시간의 흐름은 좀처럼 가늠이 되질 않았다. 조금씩 불안해진다.

유상아와 이현성은, 정희원은 어떻게 됐을까.

유중혁 자식, 길영이를 죽이거나 하진 않았겠지?

설마 아직도 세 번째 시나리오가 진행 중인가?

아직도 땅강아쥐들이 있으면? 

그롤 놈들이 나를 잡아먹기 위해 주변을 배회하고 있으면?

만약 그러면······.

······형.

······제발.

······독자 씨!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용 스킬, ‘파마 Lv.1’을 발동합니다!]

그래,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

흡, 하는 소리와 함께 거친 숨이 토해져 나왔다. 뺨에 닿는 부드럽고 말랑한 감촉.

“독자 씨!”

희뿌연 안개가 개듯 시야가 맑아졌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유상아의 얼굴이었다. 그 뒤에 염려 가득한 얼굴을 한 이현성과 정희원도 보였다.

“······시나리오는?”

“끝났어요, 독자 씨. 해냈어요. 해냈다고요!”

···그런가. 해냈구나.

흥분한 일행들을 보며, 나는 몸을 움직이려 애썼다. 종일 굳은 자세로 있었는지, 근육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기뻐하기는··· 이릅니다.”

“네?” 

“이제 겨우 하루를 버텼을 뿐이니까요. 어제가 사흘 째였으니······.”

내가 일어나려는 기미가 보이자, 황급히 다가온 이현성이 나를 붙잡았다.

“독자 씨! 안 됩니다. 한숨도 못 주무셨지 않습니까?”

“지금이 몇 시죠?”

“오전 8시 30분입니다. 시나리오가 끝나고 30분 정도 지났습니다.”

8시 30분이라······ 다행히 아직 시간이 많이 지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보여야 할 얼굴이 하나 없다.

“길영이는 어디 있죠?”

“아, 길영이는······.”

정희원의 말을 잇기도 전에, 나는 이길영이 어디에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이지혜를 대동한 유중혁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이길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유중혁 저 자식이 왜?

순간, 내 일행을 보고 놀라던 유중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 그때 유중혁이 ‘현자의 눈’으로 본 건······?

“언제 ···를 마쳤지? 분명 전에는 없었던 ······인데.”

영석의 후유증 때문인지, 유중혁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뒤이어 이길영이 말하고 있었다.

“얼마 안 됐어요.”

“···정말 나와 같이 가지 않을 테냐?”

“네.”

“저놈보다, 나랑 같이 다니는 게 훨씬 빨리 강해질 수 있다. 그래도 안 갈 테냐?”

“네. 그래도 안 가요.”

“···바보 같은 꼬마로군.”

눈살을 찌푸린 유중혁이, 내 쪽을 흘끗 일별하고는 돌아섰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가 발동합니다!]

「······운 좋은 놈. 도움이 될 것 같으니 조금 더 살려두도록 하지.」

지지 않고 한마디 해 주고 싶었는데, 몸에 기력이 없었다.

“독자 형!”

깨어난 나를 발견한 이길영이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멀어지는 유중혁의 생각이 머릿속을 울렸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오늘 치 공략도 끝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공략? 무슨 공략을 말하는 거지?

생각을······ 해야 되는데.

젠장, 너무 피곤하다.

풀썩, 몸에 힘을 빼자 다시 섬유 너머로 허벅지의 포근한 감촉이 뺨에 닿았다.

“유상아 씨······.”

“네, 네!”

“죄송한데, 저 조금만 잘게요······.”

그리고 나는 잠에 빠져 들었다.

어떤 꿈도 없는, 간만의 달콤한 잠이었다.

*

내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 뒤의 일이었다.

[야, 언제까지 쳐 자고 있을 거야!]

시끄러운 목소리에 불쾌한 마음으로 눈을 떴더니, 아까보다는 훨씬 두툼하고 딱딱한 감촉이 뺨에서 느껴졌다.

“······아, 독자 씨 일어났네.”

생긋 웃는 입술. 정희원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상아 씨는 내가 잠시 쉬라고 했어요. 우리도 어제 잠 못 잤거든요.”

고개를 돌려 보니, 유상아가 벽에 기대어 새근새근 졸고 있었다. 정희원이 웃었다.

“근데, 이현성 씨 허벅지는 편해요?”

고개를 돌려 보니 바로 위쪽에서 이현성이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금일 아침 점호느은······ 당직 사관이 직접 실시한다아······.”

······뭔가 베개 높이가 안 맞는다 싶었더니 이현성 허벅지였나. 

군용 베개피 냄새가 나는군.

“독자 형······.”

묵직한 느낌에 배 쪽을 내려다보니, 이길영이 고양이처럼 웅크린 채 기대어 자고 있었다.

슬며시 고개를 빼 몸을 일으키는 순간, 비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하, 일어났네? 그럼 이거나 받으라고.]

그리고 귓가에 쏟아지는 메시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트라우마를 안타까워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과거를 흥미로워 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어머니를 궁금해합니다.]

[성좌들이 당신에게 1800 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개자식들. 그새 남의 과거를 잘도 훔쳐봤구만.

메시지는 끝이 아니었다.

[당신은 ‘그린 존’ 없이 충무로의 밤을 견뎌냈습니다.]

[당신은 충무로역에서 두 번째로 ‘끝나지 않는 새벽’ 업적을 완수하였습니다!]

[업적 보상으로 1000코인을 받았습니다.]

[보유 코인 : 22,650 C]

그래도 이 정도면 목표 금액은 달성했다.

괜히 하룻밤을 힘들게 버틴 게 아닌 것이다.

하품을 하던 정희원이 물었다.

“오늘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 어제처럼······.”

“아뇨, 오늘은 안 됩니다. 그건 하루 밖에 못 쓰는 방법이에요.”

물론 오늘도 운이 좋으면 랜덤하게 생성되는 ‘그린 존’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멸살법’에는 4일차의 그린 존 생성 위치가 상세히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럼······.”

정희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불필요한 걱정이었다.

“오늘 세 번째 시나리오를 완전히 끝낼 겁니다.”

“네?”

조심스레 이길영을 눕혀 두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었다. 

원래는 이럴 계획이 아니었지만, 유중혁 녀석이 딴 맘을 품고 있는 걸 안 이상 사태를 두고 볼 수는 없다. 어제야 남은 시간이 촉박해서 어쩔 수 없었다지만, 오늘부터는 얘기가 다르니까.

“땅부자를 끌어내러 가죠.”

“···어떻게요?”

정희원의 질문에, 나는 곤히 잠든 이현성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껴뒀던 비밀병기를 써야죠.”

이제, 충무로의 주인을 바꿀 때가 됐다.


< Episode 8. 긴급 방어전 (1) (여기서부터 유료 시작입니다) >
 
 
 
 
 
Episode 8. 긴급 방어전 
 
 
 
 
「이현성은 지통실의 당직사관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마 멸살법이었다면 그런 묘사가 있었겠지. 거기다 어쩌면, 이런 문장도 있었을지 모른다. 
 
「아마 이현성은 모를 것이다. 오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현성 씨?” 
“······아, 으흠, 잠깐 졸았군요. 독자 씨, 잘 쉬셨습니까?” 
“네, 저야 뭐. 그런데 잠꼬대하시던데요. 당직사관이 어쩌구······.” 
“엇, 정말입니까?” 
“이병 이현성이 어쩌구······.” 
 
이현성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그, 그게. 병사 생활할 때 트라우마가 좀 남아서 말입니다.” 
“병사 생활? 이현성 씨는 장교시지 않습니까?” 
“그게······, 저는 상병 때 3사로 편입했습니다.” 
“그런 경우는 드물다고 들었는데. 군대가 잘 맞으셨나 봅니다.” 
 
이현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웃음이었다. 군대가 잘 맞아서 남는 사람은 좀처럼 없다. 다른 일이 맞지 않아서 남는 사람은 있어도. 
그럼, 슬슬 돌을 좀 던져 볼까. 
 
“그래도 이현성 씨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예?” 
“이현성 씨가 앞에서 막아주고 있으면, 안심이 되거든요. 누군가가 지켜주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그렇습니까?” 
 
이현성이 미묘하게 웃었다. 힘없는 미소였지만, 분명 위안을 얻은 미소였다. 나는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이현성과 멀어졌다. 
본래 3회차의 전개대로라면, 이현성은 금호역에서 철두파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며 특성 진화 이벤트를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그 기회는 정희원이 가져갔다. 
어느새 내 쪽으로 다가온 정희원과 유상아, 그리고 이길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마주보며 소곤거렸다. 
 
“시범은 잘 보셨습니까? 제가 하신 것처럼 하시면 됩니다.” 
“네. 뭐··· 대충은요. 근데 왜 이런 걸 해야 되는 거예요?” 
 
왜긴, 저것 때문이지. 
 
[등장인물 ‘이현성’이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순진한 얼굴로 철제 방패를 벅벅 닦는 이현성을 보며, 새삼 깨닫게 된다. 
[전지적 독자 시점]이 사기는 사기다. 적어도 ‘등장인물’에 한해서는 말이다. 
 
“현성 씨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요즘 의기소침해 보이시고······. 주변에서 조금씩 북돋아 주면 빨리 기운을 차리시지 않을까요?” 
 
나는 정말로 이현성을 위한다는 듯이 말했다. 순진한 유상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같은 건가요?” 
“비슷하죠.” 
“알겠어요. 힘내볼게요!” 
 
그런 유상아와는 달리, 정희원은 살짝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독자 씨.” 
“네.” 
“독자 씨 배후성이 혹시 ‘외눈 점쟁이’ 같은 건 아니죠?” 
“···그게 뭡니까?” 
“궁예 몰라요?” 
 
잘도 수식언을 갖다 붙이는군. 잠깐 정희원이 멸살법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당연히 그럴 턱이 없었다. 왜냐하면 궁예의 수식언은 ‘외눈 미륵’이니까. 
 
“그런 건 아니고, 특별한 스킬이 있습니다. 사람을 잘 이해하는 스킬이라고 해둘게요.” 
“···뭔지 물어도 어차피 안 알려 줄 것 같으니까 그냥 안 물어볼게요.” 
“고맙습니다.” 
“근데 혹시 저한테도 비슷한 거 쓰신 건 아니죠?” 
 
하마터면 표정에 감정이 드러날 뻔했다. 정희원에게 [거짓 간파]가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는 이길영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전 남자한테만 씁니다.” 
“어머.”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직 정희원의 속마음을 읽은 적은 없으니까. 
아직까지는 말이다. 
 
“아무튼, 다들 신경 좀 써 주세요. 제일 먼저 정희원 씨, 그 다음은 유상아 씨, 마지막은 길영이.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시간 날 때마다 한 번씩 말해주세요.” 
“‘어머나, 저는 현성 씨를 믿어요!’ 그런 느낌이면 되는 거죠?” 
“그렇게 까진 아니고, 아무튼 요령껏 말해 주세요.” 
“어휴, 오글거려 죽겠네, 진짜.” 
 
오글거려도 해야 한다. 이번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이현성의 ‘특성 진화’는 반드시 필요하니까. 유중혁이 저렇게 나올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일찍 계획을 꾸렸을 텐데······ 그래도 열심히만 하면, 빠듯하긴 해도 오늘 안에 성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일행들은 그럭저럭 잘 해내는 듯했다. 
 
“현성 씨는 뭔가 한결 같은 부분이 듬직해요. 소나무 같다고나 할까.” 
“하하, 감사합니다, 희원 씨. 제가 좋아하는 군가도 마침 ‘푸른 소나무’입니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뿌듯함을 느낍니다.] 
 
“그런 건 안 물어봤는데요.” 
 
[등장인물 ‘이현성’이 조금 시무룩해합니다.] 
 
“현성 씨처럼 정의로운 사람은 좀처럼 못 본 것 같아요.” 
“아···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고맙습니다. 유상아 씨.” 
 
[등장인물 ‘이현성’이 정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현성이 형 근육 최고.” 
“고맙다, 녀석.” 
 
[등장인물 ‘이현성’의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저렇게 영혼 없는 칭찬들이 잘도 먹히다니, 이현성이 단순한 캐릭터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인가 비슷한 대화를 반복하고 나자, 슬슬 시스템 메시지가 바뀌기 시작했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특성 진화의 계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아. 순조롭구만. 
유상아가 조금 걱정스런 말투로 물었다. 
 
“근데 현성 씨가 좀 부담스러워 하시는 것 같아요······.” 
 
역시 유상아는 착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이 신경이 쓰이는 거겠지. 나는 갖고 있지 못한 능력이다. 
 
“조금 그렇기도 하겠죠. 하지만 필요한 일일 겁니다. 세상에는 더 많은 짐을 짊어질수록 더 강해지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아······.” 
“잘 될 테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 길영아, 내가 부탁한 건 알아봤어?” 
“네, 형.” 
 
바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길영이 대답했다. 작은 머리통 위에서 바퀴벌레 한 쌍이 더듬이를 곧추세우고 있었다. 
 
“그 누나, 지하 1층에 있대요.” 
“고맙다.” 
 
이현성은 이정도면 됐다. 이제 남의 전력을 훔치러 갈 때다. 
나는 홀로 환승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올라가자마자 나를 반긴 것은 ‘건물주 연합’의 연합원들이었다. 
 
“하하, 이게 누구야. 불법 세입자 아니신가.” 
“······.” 
“그런 일을 벌이고 잘도 위로 올라 오셨구만. 듣기론 어제 ‘방’ 없이 살아남았다던데, 진짜야? 유중혁이가 도와준 모양이지?” 
 
나는 무시하고 계속해서 걸어갔다. 내가 겁먹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연합원들이 계속해서 이죽거렸다. 
 
“유중혁이 따까리로 사는 거 힘들지 않아? 우리 연합에 들어와. 필두 씨가 생각해 본다고 했거든.” 
 
못 들은 척 지나가며 층마다 남은 ‘그린 존’을 센다. 하나, 둘, 셋······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하나라도 빠뜨려선 안 된다. 
 
“물론, 그 여자들도 모두 데리고 온다는 조건 하에 말이야.” 
 
이제 남은 그린 존은 총 열 한 개. 어제의 시나리오로 인해 숫자가 많이 줄어든 모양이었다. 계획을 실행하기엔 아슬아슬한 숫자다. 
 
“어이, 지금 우리 무시하는 거야?” 
“듣고 있어. 생각해 본다고 전해 줘.” 
 
내 말에 서로를 쳐다본 연합원들이 킬킬 웃었다. 
지금은 그렇게 웃겠지. 
멀어지는 놈들을 뒤로하고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올라가는데, 등 뒤에서 나타난 칼날이 어느새 내 목에 닿아 있었다. 기척이 거의 안 느껴졌는데······ 초반에 이 정도의 은밀 기동을 자랑할 수 있는 스킬은 하나뿐이다. 
 
[귀신 걸음걸이]. 
 
“실망이네, 아저씨.” 
 
이지혜. 싸가지가 없어서 그렇지 실력 하나는 출중한 여자애다. 괜히 충무공의 선택을 받은 게 아니다. 
 
“아저씨, 저 새끼들이랑 거래하면 그쪽 여자들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 아니지?” 
“물론 알지.” 
“아는 사람이 그래? 차라리 어제 죽어버리지 그랬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칼 치워. 얘기하러 왔으니까.” 
“얘기? 일부러 나 찾아 온 거야?” 
“그래.” 
 
그 말에 이지혜가 순순히 칼을 치웠다. 돌아보니 이미 이지혜는 뒤쪽에 없었다. 언제 저기까지 갔는지, 지하 1층 개찰구를 넘어가는 길목에 선 이지혜가 보인다. 그새 스텝을 밟아 저기까지 멀어진 모양이다. 
 
“할 얘기가 뭔데?” 
“근데 거긴 왜 서 있는 거냐?” 
“사부가 여기 지키랬어.” 
“···지켜?” 
“그러니까 아저씨도 못 넘어가.” 
 
이지혜가 개찰구를 툭툭 건드리며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나는 개찰구 너머로 이어지는 통로를 바라보았다. 지상으로 이어지는 출구 번호들. 하지만 모든 번호가 곧 지상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유중혁 이 새끼, 그 ‘루트’를 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유중혁이 여길 지키라고 했다면, 녀석의 목적은 하나뿐이다. 
놈은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틈을 타서, 몰래 충무로의 ‘히든 던전’을 공략하고 있는 것이다. 히든 던전 공략. 말은 좋다. 사실 주인공이 강해져서 내가 나쁠 것은 없으니까. 
문제는, 그 던전은 3회차의 유중혁이 끝까지 깰 수 없는 곳이라는 거다. 
이거 아무래도 일을 빨리 진행해야 할 것 같은데. 
 
“네 도움이 필요해서 왔어.” 
“내 도움?” 
“오늘 공필두 일행을 박살 낼 거야.” 
“···진심?” 
 
이지혜는 내 진심을 가늠해 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등장인물 ‘이지혜’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아저씨 힘으로는 안 될 걸. 그 떨거지 일행들이 다 덤벼도 무리고.” 
“네가 도와도?”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이지혜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럴 법도 했다. 이지혜는 이미 이 역에 처음 온 날, 공필두에게 도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도망쳤겠지. 때마침 유중혁이 그녀를 구하러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이지혜는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방법이 있어. 네가 도와준다면 실행할 수 있는 방법.” 
“···사부가 여길 지키라고 했어.” 
“네가 돕지 않으면 이곳 사람들 대부분은 죽어.” 
“어차피 죽을 사람들이야.” 
“유중혁이 그렇게 말하더냐?” 
 
이지혜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어제 우리랑 얘기하던 남자애가 죽었어. 알고 있지?” 
“······알아.” 
“어쩌면, 살 수도 있었어. 오늘도 우리한테 쪼르르 달려와서, 유중혁의 무용담들을 떠들 수도 있었지.” 
“그건······.” 
“유중혁이 그 애를 죽인 거야. 충분히 살릴 수 있었는 데도 죽인 거라고.” 
 
말을 하면서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잘도 번지르르 지껄이지만, 나는 유중혁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지하철에서도, 금호역에서도······ 나는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내 안전을 위협받는다는 이유로 외면했으니까. 
하지만 위선자일수록 그럴 듯한 말을 지껄일 수 있는 법이다. 
 “지하철에서 네가 나오는 시나리오 영상을 봤어.” 
 
이지혜의 작은 어깨가 흠칫 떨렸다. 
 
“반 친구를 죽이고 살아남는 영상이었지.” 
“······그만.” 
“사실 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을 거야.” 
 
[등장인물 ‘이지혜’가 크게 동요합니다.] 
 
“아저씨가 뭘 알아?” 
“알긴 뭘 알겠어. 당연히 모르지. 난 그냥 내 멋대로 지껄이는 거야.” 
“······.” 
“하지만 기왕 멋대로 지껄이는 거, 꼭 이 말을 해주고 싶다. 만약 오늘을 외면하면, 넌 평생 후회하게 될 거야. 반드시.” 
 
[등장인물 ‘이지혜’가 깊은 고뇌에 빠집니다.] 
 
나는 ‘인간’ 이지혜는 잘 모르지만, ‘등장인물’ 이지혜는 잘 알고 있다. 이 소녀는 이대로 두면 유중혁의 충성스런 부하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훗날의 이야기고, 아직은 아니었다. 유중혁의 강함을 동경하긴 해도, 그녀는 근본적으로 유중혁과는 다르니까. 
이지혜가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몇 분 뒤의 일이었다. 
 
“내가 도우면 사람들이 살 수 있어?” 
“모두는 아니겠지만, 꽤 많이 살아남을 거야.” 
“···내가 어떻게 하면 돼?” 
“오늘 오후 일곱 시에 일을 시작할 거야.” 
 
나는 계획을 들려주었다.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이지혜가 꼭 해야 할 일들만을 골라서. 
내 말을 잠자코 듣던 이지혜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제정신이야? 정말 그걸 하겠다고?” 
“그래.” 
“······솔직히 잘 될 것 같지 않은데. 미리 말해 두지만 난 아직 도운다고 말하진 않았어.” 
“선택은 네 자유야.” 
 
말은 저렇게 하지만, 이지혜는 반드시 움직일 것이다. 
저 싸가지가 괜히 충무공의 선택을 받은 건 아니니까.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뻔뻔함을 좋아합니다.] 
[1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이지혜의 배후성이 당신에게 호감을 갖습니다.] 
[100코인을 추가로 후원받았습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 Episode 8. 긴급 방어전 (1) (여기서부터 유료 시작입니다) > 끝

< Episode 8. 긴급 방어전 (2) >
 
 
 
 
 
마침내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나는 일행들과 함께 3호선 플랫폼에 모였다. 일행들은 제각기 자신의 병장기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현성이 제대로 일을 처리한 모양이었다. 
 
“독자 씨께서 부탁하신 대로 모두 나눠 줬습니다.” 
 
그동안 쓰던 무기가 많이 낡았기 때문에, 나는 이현성에게 부탁해 새로운 무기를 제작하도록 했다. 재료는 어젯밤 사투를 벌이던 중 잡았던 8급 지하종 [그롤]이었다. [그롤]의 뿔을 깎아 만든 칼과 창들. 이것도 오래 쓰기는 무리겠지만, 임시방편으로는 적당할 것이다. 
정희원이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훨씬 가볍고 튼튼한데요?” 
“아······ 독자 씨, 현성 씨. 고맙습니다 정말.” 
 
유상아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롤]의 뿔로는 둔기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이길영만이 여전히 땅강아쥐 무기를 들고 있었다. 이길영은 말없이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식이 시무룩해하기는······ 나는 이길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만만치 않을 겁니다. 어제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어요. 모두 준비는 되셨습니까?” 
 
일행의 고개가 무겁게 움직였다. 
 
“그럼, 작전대로 하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기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일을 처리해야 했다. ‘건물주 연합’이 사태를 눈치채기 전에 말이다. 정희원과 유상아, 이길영이 각자 맡은 임무를 위해 해당 층으로 사라지자, 나는 이현성과 함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현성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독자 씨,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이 작전의 핵심인데, 그딴 소릴 하면 안 되지. 나는 일부러 더 강고한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잘 돼야 합니다.” 
 
그러나 이현성은 여전히 주눅 든 얼굴이었다. 
 
“일행들이 생각보다 저를 의지하고 있는 것 같아서 부담이 됩니다.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현성 씨는 의지할 만한 사람이에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이런 경험은 처음입니다. 군대에 있을 때도 이렇게 누군가의 신뢰를 받아본 적은 없거든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이현성의 군생활에 대해 나는 정확히 아는 바가 없다. 멸살법에서도 간단히 언급되고 지나갈 뿐이고. 
 
“이번 일이 끝나면, 현성 씨의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무심코 지나가며 한 말이었는데, 이현성은 생각보다 더 동요하는 듯 했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당신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등장인물 ‘이현성’에 대한 이해도가 크게 증가합니다.] 
 
“독자 씨랑 이야기하고 있다 보면, 가끔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네? 어떤···?” 
“마치 오래 전부터 저를 알고 계셨던 것 같달지······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현성이 볼을 벅벅 긁으며 말을 흐렸다. 
 “아, 이상한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네, 무슨 뜻인지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얘기하다 보니 독자 씨 이야기도 궁금해지는군요.” 
“제 이야기요?” 
“예. 독자 씨처럼 신기한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이 사태가 터지기 전엔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 여러 가지가 궁금합니다.” 
 
어쩐지 기분이 조금 이상해진다. 내가 읽던 소설의 ‘조연’이 나에 대해 궁금해 하기 시작하다니. 조금 꺼림칙하면서도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래도 듣고 싶습니다.” 
 
문득 머릿속에 어떤 의문이 스쳤다. 
‘멸살법’이 현실이 되지 않았을 때에도, ‘이현성’은 나와 같은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었을까. 
아니면, 소설이 현실이 되면서 갑자기 ‘생겨난’ 인물인 걸까. 
답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어느 쪽이든 이현성은 이제 ‘살아있는 인물’이 되었고, 내 눈앞에 있다는 것······ 그 뿐이다. 
 
“오, 유중혁이 친구. 협상하러 오셨나?” 
 
전방에서 다수의 중년인들이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왔군, 건물주 연합. 
 
“흠······ 근데, 여자 분들은?” 
 
그 말을 하는 중년인의 손아귀에는, 한 여자의 머리채가 붙들려 있었다. 바로 어제까지 5칸짜리 ‘그린 존’을 가지고 있던 일행 중 하나였다.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남자가 피식 웃었다. 
 
“아아, 이 친구가 땅을 안 팔아서······. 그쪽은 신경 쓸 것 없어.”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여자의 눈이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으로 ‘절대선’ 계열의 성좌들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기다렸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나 대신 앞으로 나서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그 분을 놔 주시죠.” 
 
이현성이었다. 
 
“뭐야 넌?” 
 
중년인의 아니꼬운 물음에, 이현성이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허락을 구하는 듯한 눈빛.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스스로의 의지로 정의를 실천하길 원합니다.] 
[등장인물 ‘이현성’의 특성 진화가 임박하였습니다.] 
 
연합원들이 병장기를 빼들고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다.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나는 여분의 코인으로 능력치를 올렸다. 
 
[1200코인을 ‘체력’에 투자합니다.] 
[체력 Lv.15 -> 체력 Lv.18] 
[체력 레벨이 증가합니다!] 
 
[1200코인을 ‘근력’에 투자합니다.] 
[근력 Lv.15 -> 근력 Lv.18] 
[근력 레벨이 증가합니다!] 
 
여기서는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치의 효율을 봐야 한다. 
 
[보유 코인 : 20,350 C] 
 남은 코인은, 꼭 써야 할 곳이 있으니까. 
 
콰아아앙! 
 
지하철의 곳곳에서 작은 폭파음이 들려왔다. 이어서 들려오는 크고 작은 소란들. 일행들의 신호였다. 
 
“현성 씨!” 
 
이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대로 앞 열의 사내들을 향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당황한 연합원들이 외쳤다. 
 
“뭐야, 이 새끼들!” 
 
[전용 스킬, ‘백청강기’가 발동합니다!] 
 
스가각! 
 
“끄아아악!” 
 
여자의 머리채를 잡았던 중년인의 팔이 그대로 허공을 날았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피에 순간 중년인들이 얼어붙었다. 이현성과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달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중년인들이 우리를 쫓아 왔다. 
 
“저 미친놈들이! 막아!” 
 
지하 2층의 복도. 이제 곧 공필두의 ‘사유지’였다. 
 
[당신은 사유지를 침범하였습니다!] 
 
“포위해!” 
 
앞쪽에 대기하고 있던 건물주 연합원들이 우리를 발견했다. 연합원들 중 일부가 빠졌는지, 예상보다 인원이 적었다. 뒤쪽에 스물, 앞쪽에 열둘. 그래도 둘이서 감당하기엔 많은 숫자다. 
뭐, 감당하려는 생각도 없지만. 
선두의 연합원들과 충돌하려는 순간, 이현성이 철제 방패를 앞세우며 내 앞으로 나섰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성흔 ‘태산 밀기 Lv.1’를 사용합니다!] 
 
콰가가가각! 
 
엄청난 근력을 바탕으로 달려간 이현성이 사내들을 도미노처럼 넘어뜨리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등장인물 ‘공필두’의 성흔 「무장지대 Lv.4」가 발동합니다!] 
 
곧이어 사유지 곳곳에서 포탑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새빨간 마력탄을 충전한 포탑이 발포를 준비하고 있었다. 미니 포탑의 숫자는 총 다섯. 그새 또 무장지대의 레벨이 올라간 모양이었다. 
 
“독자 씨!” 
 
나는 이현성을 제치며, 동시에 이현성의 철제 방패를 넘겨받았다. 단단한 방패의 감촉이 손아귀에 감기자마자, 둔중한 충격이 나를 밀어냈다. 
 
쾅! 콰앙! 콰아앙! 
 
마치 대포라도 맞은 듯한 묵직함. 방패를 쥔 팔에 통증이 일었다. 역시 마력 레벨 19의 무장지대는 강력하다. 하지만, 이제는 버틸 만했다. 
 
[아이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보정 효과로 체력 레벨이 20을 돌파하였습니다.] 
[한 단계 높은 강인함이 당신의 육체를 보호합니다.] 
 
“건방진 세입자가 오셨군.” 
 
방패 너머로 공필두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강력한 마력탄의 견제 때문에 우리의 발이 묶이자, 연합원들의 표정에도 여유가 돌아오고 있었다. 철제 방패의 내구는 움푹움푹 깎여 나가고 있었다. 앞으로 막을 수 있는 탄환은 이제 열댓 발정도일 것이다. 
공필두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무장을 하고 온 걸 보면 벌금을 내러 온 것 같진 않은데. 무슨 일이지?” 
“이제 세입자는 그만두려고.” 
“재미있군. 내 땅을 탐내는 거냐?” 
“글쎄. 그렇다기보다는.” 
 
[등장인물 ‘공필두’의 ‘사유지’ 효과로 불법 침입자들의 능력치가 일부 감소합니다.] 
 
······시작됐군. 공필두의 능력이 무서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사유지’ 디버프에 이은 ‘무장지대’의 특수 수성(守城) 효과. 
발갛게 익은 포탑의 포신에서 붉은 마력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등장인물 ‘공필두’의 ‘미니 포탑’이 ‘강화 마력탄’을 준비합니다.] 
 
적어도 ‘사유지’와 ‘무장지대’의 콤보가 깨지지 않는 한, 초반에 한해서 공필두를 상대할 수 있는 화신은 거의 없다. 
 
“죽어라.” 
 
강화 마력탄이 발사되려는 바로 그 순간, 멀리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건물주 연합원들이 허겁지겁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피, 필두 씨! 땅이······!” 
 
날카로운 장도에 다친 흔적들. 이지혜가 움직인 것이다. 
이제 때가 되었다. 나는 이현성을 보았다. 
 
“현성 씨, 지금입니다.” 
 
이현성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다 부숴 버리세요.” 
 
기다렸다는 듯, 이현성이 주먹을 높게 치켜들었다. 불안함과 초조함이 깃든 눈빛이었지만, 동시에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로 확고한 표정. 
 
[등장인물, ‘이현성’의 특성이 진화합니다!] 
 
눈부신 빛살과 함께, 이현성의 몸에 은빛 아우라가 감돌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감동적인 심경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현성의 ‘특성 진화’는 ‘멸살법’ 안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였다. 
강철검제 ‘이현성’이 최강의 조연 중 하나일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특성 진화로 인해, 새로운 성흔이 개방됩니다.] 
 
적어도 이 ‘한 방’에 관한한, 이현성은 ‘멸살법’ 최강에 손꼽히는 까닭이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성흔 ‘태산 부수기 Lv.1’를 사용합니다!] 
 
이현성의 주먹에 모여든 마력이 새하얗게 응집되더니, 이내 이현성의 팔이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하아아아앗!” 
 
이현성의 주먹이 그대로 바닥을 내리 찍었다. 
 
콰아아아앙―! 
 귀를 찢는 폭음이 주변을 휩쓸며, 부서진 바닥이 허공으로 비산했다. 대경한 연합원들이 비명을 질렀다. 
 
“뭐, 뭐야!” 
 
쩌저저저적! 
 
위태로운 균열이 순식간에 바닥을 점령해 나가며, 포탑의 위치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잘못 발사된 마력탄이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폭발이 확산되며, 자욱한 먼지 구름이 사위를 장악했다. 그리고 잠시 후. 
 
쿠구구구구! 
 
거대한 진동과 함께 지하 2층의 지반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린 존’이 파괴되었습니다.] 
[등장인물 ‘공필두’의 ‘사유지’가 파괴되었습니다.] 
 
무너지는 바닥을 보며, 사색이 된 공필두를 향해 나는 씩 웃어주었다. 
 
“우리, 자기 땅이 없던 시절로 한번 돌아가 보자고.”
 
 
 
 
 
< Episode 8. 긴급 방어전 (2) > 끝

< Episode 8. 긴급 방어전 (3) >
 
 
 
 
 
시나리오상의 쓸모 때문에 공필두를 죽일 수는 없고, 그렇다고 공필두를 자기 땅에서 걸어 나오게 할 수도 없다. 
이런 곤란한 딜레마를 풀 때는, 차라리 딜레마의 전제에 집중하는 편이 해결에 도움이 된다. 
가령 놈이 자신의 ‘사유지’에 안에 있는 게 문제라면, 그 ‘사유지’ 자체를 부수면 되는 것이다. 
 
“으윽······ 꺼, 꺼내줘.” 
“이런 개 같은······.” 
 
다만, 이 방법을 쓰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력이 필요했다. 단 한 방에 거대한 ‘사유지’를 부술 수 있는 압도적인 무력. 이현성의 진화를 서두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어억······.” 
 
지하 3층으로 낙하하며 무너진 바닥재에 깔린 사람들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작전은 성공했다. 
‘그린 존’은 사라졌고, 건물주들은 ‘방’을 잃었다. 먼지 속에서 악에 받친 얼굴의 공필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녀석이 입을 열려는 순간, 비형의 목소리가 먼저 귓가로 날아들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거야! 으아아아!] 
 
‘조용히 해.’ 
 
[미친놈아! 너 때문에 충무로 도깨비들 난리났다고!] 
 
안 그래도 머릿속으로 왕왕 울려 퍼지는 성좌들의 메시지 때문에, 나는 두통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난장을 좋아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의 혁명을 좋아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파괴와 혼돈을 좋아합니다.] 
[3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저, 저 새끼 잡아!” 
“죽여 버려!” 
 
하나둘씩 일어난 연합원들이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나는 이현성과 함께 아래층 플랫폼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이현성
특성 : 정의를 되찾은 자 (희귀) 
성흔 : [태산 부수기 Lv.1], [태산 밀기 Lv.2] 
전용 스킬 : [총검술 Lv.2], [위장 Lv.2], [인내심 Lv.1], [정의감 Lv.2], [무기 연마 Lv.3] 
 
+ 
 
이현성의 진화는 무사히 성공했다. 엄밀히 따지면 이제 겨우 첫발일 뿐이지만, 이현성이 ‘태산 부수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행의 전력은 크게 강화될 것이다. 
 
“현성 씨,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쓸 수 있겠어요?” 
“······많아 봐야 한두 번이 고작일 것 같습니다.” 
 
숨을 헐떡이는 이현성은 상당히 지친 기색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태산 부수기’급의 성흔은 체력과 마력을 엄청나게 소모하는 일종의 궁극기니까. 단순한 물리력으로만 따졌을 때, 육체 강화형 스킬 중 ‘태산 부수기’를 능가하는 스킬은 그리 많지 않다. 
지하 곳곳에 흩어져 있던 일행들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선두에서 달려오는 유상아를 향해 물었다. 
 
“안 부순 곳 있어요?” 
“모두 부쉈어요!” 
“‘방’이 이런 식으로 부서지는 건진 몰랐네요. 다 같이 바닥 전체를 열심히 두들겨 줬더니 폭삭― 하고······ ” 
 
뒤따라온 정희원이 첨언했다. 
유상아와 정희원, 이길영은 제각기 소규모의 ‘그린 존’들을 맡았다. 공필두의 ‘그린 존’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그린 존들은 3인 미만의 것들이었다. 규모가 애매한 것들도 있었지만, 그것들을 처리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야! 내 말 안 들려? 이제 어쩔 거냐고!] 
 
한편, 비형은 여전히 ‘도깨비 통신’으로 유난을 떠는 중이었다. 
 
‘뭐가 걱정이야.’ 
 
[잊었어? 충무로엔 내 ‘채널’만 있는 게 아냐. 이런 짓 하면 무슨 일 벌어질지 진짜 몰라서 그래?] 
 
당연히 안다. 아마 ‘공필두’를 데리고 있는 채널에서는 지금 성좌들이 난리가 났을 것이다. 
 
‘공필두는 누구 채널이지?’ 
 
[···비류 녀석 채널이야. BIR-3642.] 
 
‘비류라면 얼마 전 너 대신에 왔었던 그 도깨비?’ 
 
[맞아. 그 새끼.] 
 
‘구독좌 구성이 어떻게 돼?’ 
 
[‘유희 찾기’ 집단이 주력인 채널이야.] 
 
‘유희 찾기’ 집단을 주력으로 삼는 도깨비라. 그래서 그때도 방송이 그렇게 과격했었군. 잘 됐다. 그렇다면 채널 내의 반응은 내 예상보다 훨씬 뜨거울 것이다. 다들 고구마를 제대로 먹었을 테니까. 
4호선의 환승 계단으로 내려가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건들거리는 장도가 허공을 휘휘 젓고 있었다. 
 
“다 부쉈냐?” 
“응. 쉽던데.” 
 
이지혜가 맡은 것은 5인에서 8인 규모의 ‘그린 존’들이었다. 정희원만으로는 제압하기 어려운 쪽들을 그녀에게 맡겼다. 과연 유중혁의 제자, 아니 성웅(聖雄)의 화신다운 저력이다. 이걸로 충무로에 남은 ‘그린 존’은 없다. 
 
“근데 이제 어쩔 거야? 그 새끼들 미친 듯이 달려올 텐데. 아, 저기 오네.” 
 
내 뒤쪽을 바라본 이지혜가 이죽거렸다. 
 
“참고로 이번엔 안 도와줄 거야.” 
“바라지도 않아.” 
 
훌쩍 물러나는 이지혜를 보며, 정희원이 눈을 흘겼다. 
 
“쟤는 뭐죠?” 
 그러고 보니 정희원은 이지혜에 관해 모르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알려줄 시간은 없었다. 
 
[하······ 너 이제 좆됐어, 인마.] 
 
비형의 말과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현상금 시나리오가 발생했습니다!] 
 
+ 
 
<현상금 시나리오 – 암살 의뢰> 
 
분류 : 서브
난이도 : C 
클리어 조건 : #BIR-3642 채널 소속의 성좌들이 특정 인물을 살해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충무로역의 ‘김독자’를 해치우십시오. 
제한시간 : 10분 
보상 : 2000코인 
실패시 : 없음 
 
+ 
 
역시 이런 상황이 펼쳐질 줄 알았다. 
아주 재밌게 돌아가는구만. 
이제 역내의 모든 화신들이 나를 잡으러 3호선 플랫폼으로 모일 것이다. 곁에 있던 정희원이 물었다. 
 
“지금 독자 씨 죽이면 2천 코인 받는 거예요?” 
“왜요, 죽이시려고요?” 
“에이, 설마요. 20만 코인쯤 준다면 모를까.” 
 
이 여자는 20만 코인이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 알고나 말하는 걸까. 
 
“독자 씨. 제 뒤로 오십시오.” 
 
이현성이 먼저 내 앞을 나섰다. 그 옆을 정희원이 지켰고, 유상아와 이길영도 내 양쪽으로 나서 길을 막았다. 마치 나를 중심으로 방어진이라도 형성한 듯한 광경. 정희원이 웃었다. 
 
“이제 신세 좀 갚겠네.” 
“독자 씨, 어떻게든 저희가 막아 볼게요.” 
 
적대감을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분노한 건물주 연합원들은 물론이거니와, 현상금 퀘스트에 눈이 먼 세입자들에 이르기까지. 무기를 꾹 눌러 쥐는 이길영을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긴장 안 해도 돼.” 
 
나는 가볍게 이길영의 어깨를 두드리며 철길 쪽을 일별했다. 
 
“쟤들이 싸워야 할 건 우리가 아니니까.” 
 
몇 회차였더라. 언젠가 분명 그런 장면을 읽은 적이 있다. 시간이 없어서 회차 확인까지는 못 했지만, 반복된 회귀로 미쳐버린 유중혁이 충무로에 오자마자 ‘그린 존’을 다 부숴버린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도, 지금과 같았다. 
 
[역내의 모든 ‘그린 존’이 파괴되어 메인 시나리오 시스템이 폭주합니다.] 
[남은 시나리오 일정에 맞춰 난이도가 자동 조정됩니다.] 
[시나리오 내용이 갱신됩니다!] 
 
+ 
 
<메인 시나리오 # 3 ― 긴급 방어전> 
 
분류 : 메인 
난이도 : B- 
클리어 조건 : 역내의 모든 ‘그린 존’이 파괴되어 남은 일수에 생성 예정이던 괴물들이 한꺼번에 폭주합니다. 남은 시간 동안 범람한 괴물들과 맞서 살아남으시오. 
지속시간 : 8시간 
보상 : 1000코인 
실패시 : ― 
 
+ 
 
본래 남은 시나리오 지속 기일은 사흘. 
‘그린 존’ 시나리오는 한 번 폭주하게 되면, 남은 시간 동안 생성될 예정이었던 괴물들을 한 번에 뱉어내게 된다. 즉, 쉽게 말하자면. 
 
[긴급 방어전이 시작됩니다!] 
 
디펜스 게임이 시작된다고 해야겠지. 
 
“뭐, 뭐야!” 
 
나를 향해 조금씩 다가오던 사람들이 당황하며 소리를 질렀다. 스크린도어 바깥쪽에서 들려오는 괴물들의 울음소리. 성난 파도처럼 꾸역꾸역 밀려오는 괴물들의 향연. 
 
“미친! 저것들 뭐야!” 
 
3호선 플랫폼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괴물들을 보며 사람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어느새 ‘현상금 시나리오’ 따윈 까맣게 잊은 모습들. 
 
크르르렁! 
 
몇 마리의 그롤들이 달려와 연합원 몇 명을 물어뜯었다. 당황한 사람들이 우왕좌왕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나는 일행들에게 외쳤다. 
 
“환승길로 달려요!” 
 
나는 일행들과 함께 환승 계단을 전력으로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위층에 거의 도달했을 즈음, 도주로가 막힌 사람들의 불만이 폭주했다. 
 
“뭐야! 빨리 비켜!” 
“뒤지고 싶어?” 
 
나는 뒤따르는 사람 몇을 발로 찬 후, 곧장 칼을 뽑아 들었다. [백청강기]가 휘감긴 칼날에 깜짝 놀란 사람들이 주춤 물러섰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네.” 
“뭐, 뭣?” 
“올라와도 당신들은 살아남을 수 없어.” 
 
사람들의 표정에 절망감이 일었다. ‘방’은 이제 없다. 이 충무로 어디에도, 이제 괴물들로부터 안전한 지대는 없는 것이다. 
 
“우리 보고 어쩌라는 거야!” 
“어쩌긴. 맞서 싸워야지.” 
“미친 소리 말고 꺼져! 모두 너 때문이잖아! 네가 우리 방을 다 부수지만 않았어도······!” 
 
나는 ‘신념의 칼날’을 전개해 환승 계단에 냅다 꽂았다. 
 
콰르르릉! 
 “우와아악!” 
 
계단의 중심이 굉음을 일으키며 무너졌고, 사람들은 추락했다. 잔인하긴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었다. 
 
“미친! 빨리 다른 계단 찾아! 빨리!” 
 
글쎄, 생각대론 안 될걸. 
나는 벌써 저만치 달려가는 이현성의 뒷모습을 보았다. 미리 부숴 놓은 환승 계단을 제하면, 이제 남은 계단은 하나뿐이다. 곧이어 반대쪽에서 콰르릉, 하고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씨발! 으아아아!” 
 
3호선 플랫폼에 갇힌 사람들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언제 같이 올라온 것인지, 표정을 굳힌 이지혜가 나를 향해 말했다. 
 
“아저씨. 이건 나한테 했던 얘기랑은 다르잖아? 저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나도 알고 있어.” 
 
나는 아비규환이 되어가는 아래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면, 저들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밀려든 괴물들은 서로의 몸을 발판 삼아 위층으로 올라오겠지. 
그건 내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다. 
 
[전용 스킬, ‘책갈피’가 발동합니다.] 
[‘인물 책갈피’가 활성화됩니다.] 
[사용 가능한 책갈피 슬롯 : 3개] 
[활성화 가능한 책갈피의 목록을 불러옵니다.] 
 
<책갈피에 등재된 인물 목록> 
 
1. 망상악귀 김남운 (이해도 35) 
2. 강철검제 이현성 (이해도 65) 
3. 선동가 천인호 (이해도 20) 
 
3번 책갈피 활성화. 
 
[3번 책갈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책갈피 스킬의 레벨이 낮아 활성화 시간이 단축됩니다.] 
[활성화 시간 : 5분]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등장인물이 가진 스킬의 일부만이 활성화됩니다.] 
[「선동 Lv.2」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갑자기 혀가 스스로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천인호의 기분이었군 그래. 
나는 아래층을 바라보았다. 아수라장의 가운데, 멀거니 서 있는 한 중년인의 뒤통수가 보인다. 
 
“어이, 공필두. 언제까지 멍청하게 있을 거야?” 
 
목소리를 들은 공필두가 나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이 개 같은 놈······!” 
“살려면 움직여야 할 거 아냐? 당신이 움직이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살 수 있다고.” 
 
공포에 젖은 사람들의 귓가에, 「선동」의 힘이 스며든다. 
 
“피, 필두 씨!” 
“필두 씨, 살려주십쇼!” 
 
공필두의 표정이 차츰 일그러지는 것이 보인다. 아주 기분이 좋다. 금호역의 천인호도 이런 느낌이었겠지. 
 
“세 번째 시나리오는 생각만큼 어렵지 않아. 모두가 ‘방’을 포기하고 방어전에 참가하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수의 괴물들이 나온다고.” 
 
내 말은 반 정도는 사실이었다. 만약 내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충무로가 하나로 단결하여 싸웠다면, 피해자는 지금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결국, 이 시나리오의 가장 큰 함정은 ‘그린 존’인 셈이었다. 
 
“거기에 공필두 당신이 사람들과 함께 싸운다면, 분명 모두 살아남을 수 있어.” 
 
함께 맞서 싸우는 자들은 살아남고, 살기 위해 달아나는 자들은 죽는다. 
 
[이지혜의 배후성이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제 당신들이 달아날 ‘방’은 없어. 건물주든 세입자든, 그런 건 잊어버리고 얼른 싸워. 안 그러면 모두 죽을 테니까.” 
 
지금처럼 긴급한 상황일수록 「선동」의 효과는 최고조에 이른다. 
 
“젠장, 저 망할 놈이······!” 
“필두 씨! 도와주십쇼!” 
 
연합원들이 공필두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여기서 혼자 살겠다고 달아나면, 공필두의 ‘건물주 연합’은 궤멸한다. 결국 공필두가 결심을 마쳤다. 
 
“빌어먹을······. 다들 모여!” 
 
아래층의 사람들이 공필두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무장지대」는 새로 설치하는 데 시간이 걸려. 다들 조금만 버텨라!” 
 
핵심은 공필두의 ‘무장지대’였다. 다만 ‘무장지대’는 한 번 자리를 옮길 때마다 설치하는 데 시간이 소요된다는 약점이 있었다. 
곳곳에서 피가 튀어 올랐고, 팔다리를 뜯긴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으, 으아악!” 
 
예상대로, 진형에서 가장 먼저 버려진 것은 연합원이 아닌 ‘세입자’ 들이었다. 
 
“유상아 씨.” 
“네. 맡겨 주세요.”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유상아는 이미 자기가 할 일을 이해하고 있었다. 
[실 묶기]를 통해 내뻗은 마력의 실이, 전투 불능이 된 사람들을 하나씩 구출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저 사람들의 임무는 공필두가 [무장지대]를 펼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뿐이다. 
 
“으, 으으······ 고맙, 고맙습니다.” 
 
대롱대롱 매달린 세입자들이 하나씩 위층으로 구조되었다. 
구출된 세입자들이 몸을 떨며 다친 부위를 감싸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나와 눈이 마주친 몇몇이 조심스레 병장기를 쥐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아, 현상금 노리시게요?” 
 
[‘현상금 시나리오’의 시간이 만료되었습니다.] 
[화신 ‘김독자’에게 걸려 있던 현상금이 소멸합니다.] 
 
“아쉽네, 조금 일찍 덤비지 그랬어요.” 
“죄, 죄송합니다.” 
 
세입자들이 부끄럽다는 듯 병장기를 놓았다. 
아래쪽에서 공필두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비켜!” 
 
[등장인물 ‘공필두’가 스킬 ‘사유지 Lv.3’를 사용합니다!] 
[등장인물 ‘공필두’의 성흔 ‘무장지대 Lv.4’가 발동합니다!] 
 
기계음과 함께, 바닥에서 다섯 개의 포탑이 고개를 들었다. 붉게 응축된 마력탄이 제각기 발포를 시작한 건 삽시간이었다. 
 
투두두두두두! 
쾅! 콰앙! 콰앙! 
 
무장지대의 포탄 세례를 받은 땅강아쥐들이 비명을 질러댔고, 그롤들의 기세가 주춤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여, 역시 필두 씨!” 
“우와아아아!” 
 
과연 공필두. 적어도 농성형 시나리오에서만큼은 저 녀석의 전투 효율을 능가할 화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십악이 괜히 십악이 아니다 이거지. 
 
“다 뒈져, 이 개새끼들아!” 
 
흥분한 공필두가 마구잡이로 포탄을 갈겨댔다. 
이현성이 감탄한 듯 말했다. 
 
“정말 엄청난 성흔이군요. 마력 소모가 커 보이는데 괜찮을까요?” 
“가성비가 좋은 성흔이라 당분간은 괜찮을 겁니다.” 
“저희가 돕지 않아도······.” 
“공필두 혼자로도 충분해요. 괜히 내려가 봐야 포 쏘는 데 방해만 됩니다.” 
 
공필두의 배후성인 ‘디펜스 마스터’는 이런 종류의 시나리오에 완전히 환장하는 녀석이다. 그러니, 놈이 공필두를 후원하는 한 공필두는 절대로 여기서 죽지 않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후원’이 계속되는 한은 말이다. 
나는 자리에 다리를 뻗고 앉으며 말했다. 
 
“우린 잠시 꿀이나 빨고 있죠.” 
“···벌써 개인 정비 시간입니까?” 
 
이현성이 나를 따라 자리에 앉자, 긴장이 풀린 일행들도 하나둘씩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정희원이 물었다. 
 
“고마워요. 안 그래도 수면이 부족했는데······ 한숨 자도 돼요?” 
“그러세요.” 
 
그대로 10분쯤 지나자 정희원은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코까지 골기 시작했다. 내가 그러라고 말하긴 했지만, 저건 대체 어떻게 된 신경인지 모르겠다. 
 
“우, 우리 이렇게 태평해도 괜찮은 걸까요?” 
 
유상아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하긴, 혼란스럽겠지. 지금까지 이렇게나 ‘편한’ 시나리오는 없었으니까. 실제로 우리가 하는 일은 간간이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하나씩 건져 올리는 것이 전부였다. 
 
“줄을 잘 섰다고 생각하세요.” 
“그럼 저쪽은······.” 
“줄을 잘못 선 거죠.” 
 
아래층의 공필두는 이제 거의 곤죽이 되어가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우으으으아아아!” 
 
그러게 사람이 평소에 착하게 살았어야지. 
 
“시발! 시바아아아알!” 
 
끝나지 않는 괴물들의 행렬 속에서 공필두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 Episode 8. 긴급 방어전 (3) > 끝

< Episode 8. 긴급 방어전 (4) >
 
 
 
 
 
전투가 시작된 지 한 시간이 지나도록 공필두는 싸우고 또 싸웠다. 괴물들의 숫자는 거의 줄지 않고 있었지만, 그래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다. 괜히 공필두가 십악 중 ‘최강의 방어’로 손꼽히는 게 아니다. 
 
“시벌 새끼들아!” 
 
[등장인물 ‘공필두’의 ‘무장지대’ 레벨이 올랐습니다!] 
[등장인물 ‘공필두’의 ‘사유지’ 레벨이 올랐습니다!] 
[등장인물 ‘공필두’가 ‘방호벽’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무장지대]를 풀로 돌리는 만큼 스킬 레벨업 속도도 빨랐다. 공필두의 배후성도 급했던 모양인지 녀석의 성장세에 맞춰 후원을 퍼붓고 있었다. 아마 저기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공필두는 엄청난 성장을 거듭할 수 있으리라. 
어디까지나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흐으어어어어어······!” 
 
시나리오에 따르면 공필두는 앞으로 7시간을 더 버텨야 한다. 
팝콘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 
바로 옆에서 이지혜가 낄낄대며 아래층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까는 사람 살려야 한다고 나한테 지랄을 하더니······ 과연 유중혁의 제자다운 태세 전환이었다. 
 
“근데 유중혁은 왜 안 오냐?” 
“내가 어떻게 알아? 사부는 늘 바빠.” 
 
바쁘다······ 그래, 바쁠 수도 있겠지. 
원래 혼자 다 처먹으려는 놈이 제일 바쁜 법이니까. 
나는 다 죽어가는 공필두를 내려다보며 넌지시 물었다. 
 
“유중혁이 ‘던전’에 들어간 게 몇 시야?” 
“대충 오늘 오전 9시쯤······.” 
 
이지혜가 말하다 말고 나를 쏘아보았다. 
 
“···잠깐만, 사부가 던전 들어간 거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 
 
나는 이지혜를 무시하고 속으로 시간을 계산했다. 지금 시각은 오후 8시. 단순 계산으로도 유중혁이 던전에 들어간 이후 벌써 11시간이 경과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젠장, 유중혁이 주인공인데 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잖아. 
어쩔 수 없이 움직여야 하나. 
나는 도깨비 통신을 걸었다. 
 
‘비형.’ 
 
허공에서 히죽거리던 비형이 내 쪽을 홱 돌아보았다. 
 
[왜? 갑자기.] 
 
‘도깨비 보따리 좀 열어봐.’ 
 
[뭐? 야, 안 돼! 지금 한창 구독좌 늘어나고 있는 중인데!] 
 
알 만하다. 방금 내 활약으로 공필두의 주가는 하한가를 갱신하고 있을 것이다. 고구마를 꾸역꾸역 먹는 것도 모자라, 내 함정에 빠져 신나게 호구짓까지 해대고 있으니, 그 성질 급한 ‘유희 찾기’ 집단의 성좌들이 아직도 공필두가 속한 채널에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채널을 떠난 성좌들은 어디로 가는가? 
 
[새로운 성좌들이 대거 채널에 입장합니다!] 
 
당연히, 내가 있는 비형의 채널로 오겠지. 
 
[#BI-7623 채널이 확장을 준비합니다.] 
 
[흐흐, 흐흐흣, 이것 봐, 이것 봐! 이제 내 채널도······!] 
 
그러니 비형이 저렇게 신이 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까지 희희낙락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채널 망하기 싫으면 빨리 열어. 채널 확장 준비로 잠시 광고 튼다고 하면 되잖아.’ 
 
[아, 시발······ 진짜······.] 
 
비형은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광고를 내보낸 후 [도깨비 보따리]를 열어 주었다. 
드디어 그동안 아껴 둔 코인을 풀 때가 왔다. 
 
‘5000코인 줄게. 골드 멤버로 승급시켜 줘.’ 
 
비형은 잠자코 나를 노려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뒤이어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들. 
 
[5000코인을 소모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도깨비 보따리’의 골드 멤버가 되었습니다!] 
 
멤버 등급이 바뀌자, ‘도깨비 보따리’의 배경 화면도 바뀌었다. 역시 코인이 좋긴 좋다. 새로 추가된 아이템 목록들이 보였다. 나는 그중에서 필요한 아이템을 장바구니에 집어넣었다. 
 
* 배후 계약서 ― 10000 C 
* 중급 마력 회복의 물약 X 10 ― 5000 C 
 
일단 계약서 한 장이랑, 중급 마력 물약 10개······ 이 정도면 되겠지. 
당장 지출이 좀 크긴 하지만, 곧 채널이 레벨업 될 테니 이 정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담은 물품을 확인한 비형이 신경질을 냈다. 
 
[···그 계약서는 왜 사는 건데? 벌써 계약 내용 잊었어? 너 배후성 계약 안 하기로 했잖아!] 
 
‘뭔 소리야? 내가 이제 와서 배후성 계약을 왜 해?’ 
 
그리고, 하더라도 내가 왜 내 코인 주고 계약서를 사겠냐. 
하여간 비형 녀석도 어지간히 쫄보다. 
 
[15,000코인을 소모하였습니다.] 
[‘배후 계약서’를 획득하였습니다.] 
[‘중급 마력 회복의 물약’ 10개를 획득하였습니다.] 
 
허공에서 물품들이 내려오자, 유상아가 호기심을 보였다. 
 
“그건 뭔가요?” 
“‘갑’을 ‘을’로 만드는 계약서요.” 
 
나는 꼼꼼히 계약서를 작성한 후, ‘갑’에 내 이름을 써넣고 조용히 기다렸다. 이제 슬슬 ‘을’께서 반응이 올 때가 됐는데. 
 
[등장인물, ‘공필두’의 배후성이 주변 성좌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드디어 한계에 달한 공필두의 배후성이 채널 바깥으로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애초에 놈의 배후성은 그렇게 많은 코인을 가진 성좌가 아니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성좌라고해서 모두가 부자인 것은 아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코웃음을 칩니다.] 
 
공필두가 자초한 고구마로 채널 내의 다른 성좌들도 후원을 끊었을 테고, 하나뿐인 화신은 말라 죽어가고 있고······ 모두 계획대로다. 
뭔가를 눈치챈 비형이 중얼거렸다. 
 
[잠깐만, 너 지금 설마······.] 
 
나는 거의 반죽음 상태에 이른 공필두를 향해 말을 걸었다. 
 
“어이, 거기.” 
 
두두두두! 미친 듯이 포를 쏘아 대던 공필두가 힘겹게 내 쪽을 올려다보았다. 
 
“이대로 죽을래, 아니면 나랑 계약할래?” 
“뭐, 뭐······?” 
“나는 성좌가 아니라서 ‘배후성(背後星)’은 못 되지만, 원한다면 ‘배후자(背後者)’는 되어줄 수 있는데, 어때?” 
“무슨 개소리냐 시발놈아······!” 
“아, 공필두 넌 찌그러져 있어. 너한테 말한 거 아니니까.” 
“뭐······?” 
 
나는 한 손에는 ‘계약서’를, 다른 한 손에는 ‘중급 마력 회복의 물약’을 흔들며 물었다. 
 
“빨리 대답해봐, 나랑 계약하면 이거 전부 지원해 줄게.” 
 
이윽고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등장인물 ‘공필두’의 배후성이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성좌, ‘디펜스 마스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렇구만. 아직 ‘을’이 되실 준비가 안 되셨다 이거지. 
안달하지 않는다. 어차피 시간이 지날수록 급해지는 건 저쪽이니까. 
비형이 나를 보며 말했다. 
 
[저기······ 혹시 미친놈이세요?] 
 
‘또 왜.’ 
 
[살다살다 성좌를 후원하겠다는 놈은 니가 처음이다.] 
 
‘못할 게 뭐 있어?’ 
 
[그래도 저쪽은 성좌야! 하찮은 인간과 계약할 리가 없잖아?] 
 
‘그건 네 생각이고.’ 
 
중급 성좌 디펜스 마스터. 
녀석은 능력에 반해 급수가 낮은 성좌였다. 
그의 월드는 오래전 ‘시나리오’를 겪으며 완전히 멸망해버렸고, 때문에 디펜스 마스터의 신화는 이제 회자되지 않는다. 신화가 사라진 성좌는 코인을 수급할 수 없고, 언젠가는 존재조차 사라지게 된다. 
디펜스 마스터를 비롯한 일부 성좌들이 ‘화신 찾기’에 집착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성좌들은 선택한 ‘화신’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기억시킨다. 
 ‘저 녀석, 이제 남은 코인이 없어.’ 
 
[뭐?] 
 
아까부터 공필두의 힘이 급격하게 빠지고 있었다. 디펜스 마스터는 ‘잡배의 왕’ 같은 놈이랑은 다르게 자신의 화신을 아끼는 녀석이다. 그런데 공필두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이제 코인이 바닥났다는 뜻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코인이 없으면 새로운 ‘배후 계약’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새로운 화신을 만들 수 없는 성좌는 어떻게 되는가? 
 
‘공필두가 죽으면, 녀석은 잊혀진다.’ 
 
그리고 성좌에게 잊혀짐은, 곧 죽음을 뜻한다. 
비형의 동공에 희미한 두려움이 깃들었다. 
 
[넌 대체······?] 
 
공필두는 수족으로 둘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카드다. 그 ‘유중혁’ 조차 무수한 회귀 속에서 몇 번이나 공필두를 수하로 거두려 시도했다. 물론,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었지만. 
유상아가 말했다. 
 
“독자 씨, 저 사람 저러다 죽겠어요.” 
 
공필두가 피가 흐르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이제 [무장지대]에 남은 미니 포탑은 이제 두 개뿐. 
슬슬 치킨런도 끝날 때가 됐다. 
 
[성좌, ‘디펜스 마스터’가 계약서의 내용을 궁금해합니다.] 
 
왔군. 곁에서 그 광경을 보던 비형이 눈을 껌뻑였다. 
 
[······진짜? 아니, 진짜로?] 
 
나는 곧바로 계약서를 보여주었다. 
 
[성좌, ‘디펜스 마스터’가 계약서를 읽기 시작합니다.] 
 
아래층에서 피를 철철 흘리던 공철두가 갑자기 소리쳤다. 
자기 배후성의 발언이니, 아마 놈도 메시지를 들었겠지. 
 
“뭐, 뭐야! 이 메시지 뭔데!” 
 
뭐긴, 네가 팔려 가는 소리지. 
 
“무, 무슨 일입니까 필두 씨?” 
 
[성좌, ‘디펜스 마스터’가 잠시 고민할 시간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성좌, ‘디펜스 마스터’가 계약 항목을 추가하였습니다.] 
[이 항목에 찬성할 경우, 성좌, ‘디펜스 마스터’는 당신과의 계약에 동의할 것입니다.] 
 
나는 곧바로 계약서를 읽었다. 
 
······. 
 
14. 화신 김독자(갑)은 성좌 디펜스 마스터(을)의 재산권을 인정하며, 을의 사유재산인 ‘공필두’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 
15. 화신 김독자(갑)은 성좌 디펜스 마스터(을)의 사유재산인 ‘공필두’가 잘 성장할 수 있게끔 곁에서 도와야 한다. 
 
······. 
 
생존권과 성장권의 보장. 사실, 기입하지 않아도 될 내용이었다. 공필두가 수족으로 들어오면 죽지 않을 정도로 막 굴려서 키워주는 건 당연한 거니까. 그러니 나한테 정말 중요한 항목은 3번뿐이다. 
 
3. 화신 김독자(갑)은 현 시간부로 성좌 디펜스 마스터(을)의 사유재산인 ‘공필두’에 대한 명령 권한을 가진다. (일일 최대 10회) 
 
계약 내용을 모두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한다.” 
 
이윽고 공필두와 나 사이에 희미한 실이 연결되더니,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당신은 계약에 따라 화신 ‘공필두’의 ‘공동 배후자’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계약에 따라 화신 ‘공필두’에 대한 명령권을 획득했습니다.] 
[해당 계약의 기한은 5년이며, 갱신하지 않을 시 자동 연장됩니다.] 
 
무장성주 공필두를 이렇게 쉽게 얻다니, 유중혁이 알았다면 기절할 일이다. 원작을 후반부까지 읽지 않았더라면 나도 <배후 계약서>를 이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했겠지. 
나는 유상아에게 회복 물약들을 건네주었다. 
 
“이거, 공필두한테 주세요. 한 40분마다 하나씩 주면 될 거예요.” 
“···줘도 괜찮을까요?” 
 
줘야 한다. 안 주면 녀석이 메인 시나리오를 못 깰 테니까. 유상아를 통해 물약을 건네받은 공필두가 이쪽을 보았다. 
 
“이건 뭐야?” 
“먹고 싸우라고.” 
 
순간 의심하던 공필두가 이내 물약 뚜껑을 땄다. 푸른색 연기가 녀석의 몸에서 피어오르며, 망가져 가던 포탑들이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등장인물 ‘공필두’의 마력이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물약이 묻은 입술을 닦은 공필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멍청한 놈. 이런다고 네놈을 용서해줄 것 같아? 내가 여기에서 나가면, 그날이 네놈 제삿날······.” 
“입 다물어, 공필두.” 
 
[계약 조항에 따라 ‘명령권’이 발동합니다!] 
 
“읍, 읍읍? 읍읍읍읍?” 
 
불쌍한 녀석, 자기가 어떤 처지인 줄도 모르고. 
 
“그럼 열심히 싸워라. 내 일행은 건드리지 말고.” 
“읍! 으읍읍······!” 
 
두두두두두! 
 
고분고분 내 말을 듣는 공필두를 보며 유상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도, 독자 씨? 저 사람 갑자기 왜 저러는 거죠······?” 
“‘갑’을 ‘을’로 만든 것뿐입니다.” 
“···뭔가 수를 쓰신 거예요?” 
“이제 공필두에 대해선 안심하셔도 됩니다.” 
 
성좌들의 폭탄 메시지가 쏟아진 것은 그때였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발상을 재미있어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전략에 여의봉을 떨어뜨립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을 건방지다고 생각합니다.] 
······. 
 
나름 비밀스레 계약을 진행했는데도 벌써 눈치챈 녀석들이 나타났다. 디펜스 마스터는 급수로 따지면 중급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성좌다. 
한낱 인간인 내가 무려 ‘성좌’와 ‘공동 배후자’가 되었으니, 성좌들이 받을 충격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개중에는 ‘심연의 흑염룡’처럼 내게 반발하는 녀석도 있겠지. 하지만.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배후성이 되길 원하고 있습니다.] 
 
내 가치를 깨달은 성좌들이 압도적으로 더 많았다. 내 배후성이 될 수만 있다면 ‘디펜스 마스터’의 전력까지 이용할 수 있게 되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공필두가 있던 채널의 주인, 도깨비 비류가 허공에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성좌님들! 왜, 왜······ 갑자기 다 가시는 건데요! 가, 가지 마세요!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졸지에 채널이 망하게 생긴 비류가 허공을 향해 호소하고 있었다. 금호역에서 ‘생존비’와 ‘식량 패널티’를 걸었던 망할 도깨비 자식. 
 
[히, 히이이익! 아, 안돼애······.] 
 
도깨비 비류의 모습이 서서히 흐릿해져 갔다. 
 
[채널 # BIR-3642가 구독좌 감소로 강제 종료되었습니다.] 
 
채널 하나가 허망하게 망해버리는 광경을 보며, 비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독자님?] 
 
‘왜.’ 
 
[너······ 설마 처음부터 공필두를 노리고 있었던 거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미친······ 어떻게 인간이······ 나 대체 뭐랑 계약한 거지?] 
 
비형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럼 이쪽은 정리가 됐고, 이제 다음 장소로 이동해 볼까. 
나는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하고 어리둥절해 있는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죄송한데 저는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지금요?” 
“급하게 가 봐야 할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현성 씨랑 유상아 씨가 남아 주세요. 딱히 하실 일은 없고,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필두 녀석한테 물약이나 던져 주면서 쉬시면 됩니다.” 
 
정희원이 물었다. 
 
“저랑 길영이는요?” 
“저랑 같이 가시죠.” 
“어디로요?” 
“음······ 잘 설명하긴 어렵지만, 나쁜 놈이 하나 있습니다.” 
“나쁜 놈이요?” 
“네. 사람들이 죽든 말든 혼자 아이템 처먹겠다고 사라진 나쁜 놈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놈 뒤통수를 때려주러 갈 겁니다.” 
 
그것도 아주 세게. 잠시 고민하던 정희원이 물었다. 
 
“···공필두보다 나쁜 놈이에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훨씬 나쁜 놈이죠.” 
“가요, 그럼.” 
“자세한 건 가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반색하는 정희원과 이길영을 데리고 움직였다. 그런데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이지혜였다. 
 
“잠깐, 아저씨 지금 어디 가려는 거야?” 
 
하여간 감은 좋아서. 
 
“잘 됐다. 너도 따라와.” 
“어딜?” 
“유중혁이 위험해.” 
 
이지혜는 그 말이 농담이라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피식 웃었다. 
 
“무슨 개소리야? 사부가 위험하다고?” 
 
내 표정이 여전히 심각하자, 이지혜의 얼굴에서도 곧 웃음기가 가셨다. 
 
“···진심? 아니, 아저씨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어떻게 알긴. 아마 네 사부에 대해선 내가 세계 제일, 아니, 제이(第二)의 권위자일거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그 자식, 1번 출구에 있는 히든 던전에 들어갔지?” 
“어, 어?” 
“그리고 이제 들어간지 11시간이 지난 참이고?” 
“어어······.” 
 
이지혜가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내가 기억하기로 유중혁이 충무로 ‘히든 던전’을 공략한 것은 총 여덟 번이다. 개중 두 번은 실패했고, 여섯 번은 성공했다. 문제는 실패한 두 번이 초반 회차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8회차와 11회차. 
그리고 8회차의 유중혁은, 충무로의 ‘히든 던전’에서 죽었다. 
 
“이대로 두면, 유중혁은 오늘 죽어.” 
 
내 예상이 맞다면, 우리의 망할 회귀자는 지금쯤 한창 ‘개복치 루트’를 타는 중일 것이다.
 
 
 
 
 
< Episode 8. 긴급 방어전 (4) > 끝

< Episode 9. 전지적 개복치 (1) >
 
 
 
 
 
Episode 9. 전지적 개복치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지하 1층에 있는 ‘히든 던전’의 입구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이지혜와 정희원을 앞세운 채, 이길영과 함께 일행의 후미에서 걸으며 스마트폰을 보는 중이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 속에서, 유중혁은 정신을 놓았다. 
‘이번 생은 포기다.’ 
그것이 유중혁의 여덟 번째 생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직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다. 
······제길, 3회차밖에 안 된 놈이 왜 이렇게 나대는 걸까. 2회차처럼 신중하게 움직였으면 중후반 시나리오까지는 어영부영 잘 지나갔을 텐데. 
고개를 드니 정희원이 나를 보고 있었다. 
 
“독자 씨, 뭘 그렇게 보세요?” 
“···아, 달력을 좀······. 상황이 이러니 날짜 감각이 없어져서요.” 
 
진짜로 달력을 보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다. 가끔은 내가 어떻게 이 소설을 다 읽었는지 신기할 지경이니까. 의심스럽다는 듯 나를 보던 정희원이 이지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근데······ 지혜라고 했나? 너도 칼 좀 쓰니?” 
“네. 칼이 좋아서요.” 
“그치? 역시 칼이 최고라니까. 베는 맛이 있달까.” 
“···언니도 그 맛을 아시는군요?” 
 
정희원이 싱긋 웃다가 이지혜의 장도를 가만히 보았다. 한눈에 봐도 광택이 절절 흐르는 게 고급스러운 칼이다. 아마 유중혁이 준 거겠지. 
 
“네 칼 좋아 보인다.” 
“아, 우리 사부가 준 거예요. 언니는······?” 
“내 건······ 내, 내 것도 좋아.”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자신의 뿔칼을 내려다보던 정희원이, 슬쩍 칼을 반대쪽 허리춤으로 숨겼다. 
딱히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스레 미안해지는군. 
나는 괜히 이지혜에게 딴죽을 걸었다. 
 
“야, 근데 넌 왜 희원 씨한텐 존대하고, 나한텐 반말하냐?” 
“어······ 그게, 난 멋있는 언니들한테 좀 약한 편이라.” 
 
이지혜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정희원이 귀엽다는 듯 그녀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귀살]을 가진 종자들끼린 서로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지. 간신히 헤드락에서 풀려난 이지혜가 물었다. 
 
“근데 아저씬 왜 우리 사부를 구해주려는 건데?” 
“동료잖아.” 
“헛소리하지 말고.” 
“쓸모 있는 놈이니까.” 
“······그거 왠지 우리 사부 말투 같은데.”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의중을 궁금해합니다.] 
 
생각해 보니, 이지혜뿐만 아니라 성좌들의 입장에서도 내 행동이 의아할 법했다. 지금도 틈만 나면 날 죽이겠다고 생각하는 놈인데, 구하겠다고 달려가는 게 이상하게 보이긴 하겠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타락한 친우를 갱생하고자 하는 당신의 마음을 기껍게 여깁니다.] 
[1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멋대로 오해하는 분도 한 분 계시고. 
하지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그러니까 대천사 우리엘의 기대와는 다르게, 내가 유중혁을 살리러 가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바로, 놈의 ‘사망 회귀’를 막기 위해서다. 
 
사망 회귀. 말은 좋다. 죽을 때마다 과거로 돌아가는 ‘회귀’ 성흔. 주인공 답게 가히 사기적인 능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능력이 놈을 제외한 주변의 조연들에게는 조금 복잡한 상념들을 불러일으킨다는 거다. 
 
「그런데, 네가 회귀한 후의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거야?」 
 
유중혁의 인생 회차가 두 자리를 돌파한 언젠가, 유중혁에게 그런 질문을 한 조연이 있었다. 이름은 까먹었지만, 그때 유중혁이 했던 대답만큼은 선명하다. 
 
「···나도 모르지. 난 언제나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세계를 택할 뿐이다.」 
 
말은 그럴듯했지만, 사실은 버려진 세계 따위 자기가 알 바 아니란 소리였다. 실제로 ‘멸살법’의 어디에도 놈이 회귀한 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확실한 이론적 언급이 없었다. 
과학이든, 마법이든, 뭐든. 
내가 불안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회귀자가 사라진 후의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회귀자와 함께 리셋되는가? 
아니면 또 다른 평행우주의 분기로 갈라지는가? 
후자라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만약 전자라면 내 존재는······. 
 
“형?” 
“아, 응?” 
 
곁에서 내 옷자락을 잡고 있던 이길영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 온 것 같은데요?” 
 
[권외 지역에 근접했습니다. 시나리오 지역을 이탈하지 않게 주의하십시오.] 
 
떠오르는 경고 메시지. 상관없다. 어차피 충무로의 ‘히든 던전’은 ‘권내’ 처리가 되는 지역이니까. 
모퉁이를 돌자 나타난 1번 출구. 그 옆으로 불길한 음영으로 일렁이는 던전 입구가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히든 던전’을 발견했습니다!] 
[이미 누군가에 의해 발견된 던전입니다. 최초 발견 업적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히든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히든 시나리오 ― 극장 던전> 
 
분류 : 히든 
난이도 : A- 
클리어 조건 : 극장 던전의 주인을 처치하시오. 
제한시간 : 없음 
보상 : 4000코인 
실패시 : ― 
 
+ 
 
놀란 이지혜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뭐야 이거? 극장 던전?” 
 
이길영도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하긴, 다들 ‘히든 시나리오’를 받아 본 건 생전 처음일 테니까. 정희원도 한 마디 했다. 
 
“영화관이 던전이라니······ 뭔가 로맨틱하네요.” 
 
로맨틱이라. 영화관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모르니 할 수 있는 소리다. 우리는 그대로 극장 내부로 진입했다. 그러자 낯익은 멀티플렉스의 지하 로비가 우리를 맞이했다. 
 
[‘극장 던전’에 입장하였습니다!] 
 
긴장하며 들어온 것과는 달리 던전의 내부는 황량했다. 지하 1층부터 8층까지, 총 아홉 층으로 이루어진 멀티플렉스. 
 
“형, 포스터들이 다 찢어져 있어요. 누가 그런 걸까요?” 
“글쎄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 ‘극장 던전’의 핵심은 벽에 붙은 ‘포스터’들에 있다. 아마 유중혁은 포스터마다 깃든 관문들을 죄다 격파하며 위층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보나 마나 관문 보상을 죄다 싹쓸이하려는 속셈이었겠지. 
찢어진 포스터를 제외하면 지하 1층에는 딱히 이상한 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아이템도, 괴물도 없는 광경. 한쪽 구석에 있는 엘리베이터가 문이 일그러진 채 박살나 있다는 것만이 유일한 특이점이었다. 
이지혜가 물었다. 
 
“여기 던전 맞아? 왜 아무것도 없지?” 
“올라가면 뭔가 나올 거야.” 
“···아저씬 뭔가 알고 있어?” 
“조금.” 
“어떻게? 아저씨 뭔가 수상한데. 혹시 인생 2회차 같은 거야?” 
 
그건 네 사부고. 
아니지, 그놈은 3회차지. 
그러자 정희원이 말했다. 
 
“독자 씨 배후성이 궁예라서 그래.” 
“···진짜에요?” 
 
시시덕대는 두 여자를 무시하고 지상 1층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갑자기 이길영이 나를 붙잡았다. 녀석의 머리 위에서 바퀴벌레가 더듬이를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지혜가 칼을 뽑은 것과, 내가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쉿, 우리 말고 누가 있어.” 
 
숨을 죽이자, 작은 인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로 위층. 그러니까······ 로비 쪽인가? 처음에는 유중혁인가 싶었지만, 유중혁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확실한 거지? 여기에······ 그게 잔뜩 있다는 게.” 
“그렇다니까. 그쪽에서 1000코인이나 주고 산 정보라고.” 
“<선지자들> 말이지?” 
“그래. 좀 음침하긴 해도 정보는 확실한 놈들이야.” 
 
두런두런 들려오는 이야기 소리. 우리는 에스컬레이터를 한 걸음씩 올라가 놈들의 근처까지 접근했다. 네 명의 사내가 1층 로비에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이지혜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저놈들 대체 누구지? 충무로에서 한 번도 못 본 얼굴들인데.” 
“아마 지상 쪽 입구로 들어온 놈들일 거야.” 
“지상 쪽으로? 거긴 맹독 안개가 깔려있잖아? 게다가 시나리오도―” 
“역마다 시나리오의 종류와 진행 속도가 달라. 우리 역보다 빨리 시나리오를 끝낸 놈들이겠지. 약한 중독이야 지하종의 고기를 먹으면 되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황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선지자들>? 
지금껏 있었던 유중혁의 어떤 인생 회차에서도, 그런 놈들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애초에 이 시점에서 히든 던전의 정보를 아는 것은 나와 유중혁밖에 없는 것이다. 
대체 무슨 변수가 발생한 거지? 
아무래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럼 들어가 보자고.” 
 
사내들의 말과 함께 허공에서 청색 스포트라이트가 켜졌다. 환한 불빛이 사내들을 감싸 안는가 싶더니, 이윽고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게 어떻게 된 거죠?” 
 
정희원이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한 일은 벽면에 붙은 포스터들을 살피는 것이었다. 이건 찢어졌고, 저것도······ 벽면의 마지막에 도달해서야, 유일하게 찢어지지 않은 포스터가 보였다. 나는 포스터에 적힌 문구를 읽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사무엘 L 잭슨, 제프 골드브럼······. 
 
유중혁 이 자식··· 하필 이것만 남겨 놓은 건가? 역시 3회차는. 
 
그 순간, 불빛이 다시 한번 찾아왔다. 
위이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스포트라이트가 우리를 겨눴다. 기겁한 이지혜와 이길영이 놀라서 물러섰으나, 피할 방도는 없었다. 원래 맞게 되어 있는 광선이니까. 
나는 마지막 순간 정희원에게 물었다. 
 
“희원 씨 영화 좋아해요?” 
“당연하죠. 보통은 다 좋아하지 않아요?” 
“그럼 이제부턴 싫어질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무슨―” 
 
[영사 광선을 맞았습니다.] 
[해당 층의 상영이 시작됩니다.] 
 
주변의 풍경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환영이 아니기 때문일까, 전처럼 [제4의 벽]은 듣지 않았다. 낡은 리놀륨 바닥은 초록빛 수풀로, 안내데스크와 팝콘을 튀기던 매점은 무성하게 우거진 우림으로 변했다. 천장은 구름 한 점 없는,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하늘로 뒤바뀌어 있었다. 당황한 이지혜가 중얼거렸다. 
 
“여기 대체 어디야?” 
 
이지혜가 소리를 지르며 주변의 나무와 수풀을 마구 베어 보았지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길영은 침착한 얼굴로 벌레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시험 삼아 근처의 나무를 만져 보았다. 딱딱하고 습한 질감. 중생대를 재현한 진짜 열대 우림이었다. 스펙터의 [환영 감옥]과는 차원이 다른 사실감이다. 역시, 이건 던전의 8층에 있을 극장 주인의 힘이겠지. 
 
“여긴 영화 속입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만 일어나네.” 
 
소설도 현실이 되었는데, 영화라고 현실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적응이 빠른 정희원은 금방 납득하는 기색이었다. 
 
“아저씨, 이거 무슨 영환데?” 
“곧 알게 될 거야.” 
“···그냥 알려주면 안돼? 잠깐만, 꼬맹이 너 뭐하는···” 
 
그 순간, 수풀이 움직거리더니 이길영 앞으로 뭔가가 튀어나왔다. 거대한 사마귀를 닮은 곤충이었다. 크기는 대략 40cm정도 될까. 기겁한 이지혜가 장도를 고쳐 잡으며 외쳤다. 
 
“야, 꼬맹이! 물러서 빨리!” 
 
그러나 이길영은 뭘 그렇게 호들갑이냐는 표정이었다. 
 
“얜 사마귀 아니거든요. 티타노프테라라는 트라이아스기의 곤충이라고요.” 
“뭐?” 

 이길영은 그대로 티타노뭐시기라는 곤충에게 손을 뻗었다. 곤충은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고, 잠시 후 이길영과 곤충의 몸이 푸른 빛에 감싸였다. 
이지혜가 멍청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쟤······ 뭐야?” 
“파브르.” 
 
역시 이길영을 데려오길 잘했다. 녀석의 능력이라면 생각보다 쉽게 관문들을 통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거대 사마귀가 커다란 입을 움찔거렸고, 이길영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잘 모르겠지만 뭔가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거겠지. 
그런데 잠시 후, 사마귀와 대화하던 이길영의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왜 저러지? 
이길영이 황급히 나를 돌아보았다. 
 
“형!”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야자나무들을 통째로 박살내며 뭔가가 이쪽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오오오오오! 
 
우림 사이로 등장한 거대 파충류의 주둥이가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앞에선 몇몇 사내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까 우리보다 먼저 들어온 사내들이었다. 
 
“끄아아아악!” 
“사, 살려줘!” 
 
주춤주춤 물러서던 이지혜가 정희원을 향해 말했다. 
 
“무슨 영환지 알겠어요.” 
“······응, 나도.” 
 
십여 미터는 훌쩍 넘는 체고에, 단단한 갑피. 전신을 장악하는 폭력적인 근육. 중생대 최강의 포식자가 눈앞에 있었다. 
얼핏 봐도 7급 괴수종에 준하는 녀석. 
아직 던전이 1층인 것을 감안하면 극악의 난이도지만, 오히려 가슴이 뛰었다. 
 
왜냐하면 ‘히든 던전’은 어려울수록 보상이 좋으니까. 
나는 칼을 뽑으며 말했다. 
 
“싸울 준비해.” 
 
아마 유중혁은 이 영화의 소재만 보고 이 영화를 건너뛰었을 것이다. 극장 던전의 주요 보상품은 해당 영화의 소재와 관련이 있으니까. 공룡만 잔뜩 나오는 영화에서 쓸 만한 보상이 나올 리 없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놈은 모를 거다. 
이 영화에도, 정말 중요한 보상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진심? 저런 거랑 싸우겠다고?” 
“출구를 만들려면 저놈을 잡아야 돼.” 
“출구?” 
“여긴 영화 속이야. 잊었어?” 
 
성큼성큼 다가오는 티렉스의 거구. 녀석의 뒤쪽으로 섬의 중앙 연구소가 보였다. 그리고 연구소의 옥상에 비치되어있는 탈출용 헬리콥터. 
이곳은 영화 속이다. ‘극장 던전’의 주인이 실체화한 영화 속. 
그러니, 이곳을 탈출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멋진 엔딩을 만들어 보자고.”
 
 
 
 
< Episode 9. 전지적 개복치 (1) > 끝

< Episode 9. 전지적 개복치 (2) >
 
 
 
 
 
샛노란 눈빛이 우리를 바라본 순간, 귀청을 찢는 포효가 울려 퍼졌다. 
 
그오오오오오! 
 
[7급 지룡종, ‘티라노사우르스 렉스’가 당신을 인식하였습니다.] 
[‘티라노사우르스 렉스’가 스킬 ‘포식 공포’를 발동하였습니다!]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포식 공포’의 효과를 차단합니다.] 
 
[제 4의 벽] 덕분에 마음은 평온했지만, 솜털이 오싹오싹 일어서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이게 피식종의 공포라는 거겠지. 
 
“다들 피해요!” 
 
일순 굳어 있던 정희원과 이지혜가 정신을 차렸다. 나는 바로 곁에 있는 이길영을 안고 뒤쪽으로 달렸다. 
 
콰콰콰콰! 
 
큼지막한 꼬리가 전방의 수림을 모조리 부수며 날아들었다. 
 
“쿠어어억!” 
 
달려오던 사내들이 등을 맞고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다행히 정희원과 이지혜는 아슬아슬하게 위험지대에서 벗어난 모양이었다. 
나는 이길영을 내려놓으며 외쳤다. 
 
“길영이는 뒤로 빠지고, 희원씨랑 지혜는 좌우로 흩어져요!” 
 
곁에서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인물 ‘이길영’이 스킬 ‘공룡 도감’을 발동합니다!] 
 
···응? 
 
“티라노 사우르스는 몸집에 비해 민첩한 편이지만, 시야가 좁아서 사각의 공격에 취약해요.” 
“···뭐?” 
“어릴 때 도감에서 봤어요.” 
“어릴 때?” 
“···지금보다 더 어릴 때요.” 
 
나는 멍하니 이길영을 바라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하긴 쓸데없는 태클을 걸 때가 아니지. 
 
그오오오오! 
 
[전용 스킬, ‘백청강기’를 발동합니다!] 
 
나는 휘황한 칼날을 이리저리 흔들며, 티렉스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이지혜도 정희원도 탱커형은 아니다. 이길영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 여기서 위험을 감수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내가 시선을 끌 동안, 녀석의 후방으로―”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이지혜와 정희원은 티렉스의 후방으로 내달리는 중이었다. 눈치가 빨라서 좋다. 
 
크오오오오! 
 
달려드는 녀석의 이빨을 간신히 피하자 놈의 뒷발이 날아들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휘두르기도 전에, 연이어 놈의 꼬리가 머리카락 위쪽을 스쳤다. 오싹한 전율이 전신을 훑었다. 체력 레벨이 20을 돌파했으니 저기에 맞는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아찔한 건 아찔한 거다. 
 
어쩌면 지금까지 운이 좋았던 건 나인지도 모른다. 
툭 스치면 죽는 ‘개복치’는 유중혁이 아니라 사실 나일지도. 
 
스각! 스파앗! 
 
그 사이에도 정희원과 이지혜는 놈의 후방에서 착실하게 데미지를 입히고 있었다. [검술 연마]와 [검도]의 콤보. 휘황한 검격이 티렉스의 굵직한 다리에 상처들을 늘려 가고 있었다. 
이대로 [귀살]까지 발동한다면,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티렉스는 무리 없이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형! 제가 시선을 끌게요!” 
 
이 자식이, 뒤쪽에 빠져 있으라니까 말을 안 듣고. 
 
“아냐, 길영이 넌―” 
“제가 할 수 있어요!” 
 
갑자기 이길영이 앞으로 나오며, 알 수 없는 수신호를 하기 시작했다. 저건 또 뭔가 싶었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거대 사마귀가 티렉스의 눈을 찌르고 달아났다. 아까 그 티타노 뭐시기 하는 곤충이었다. 
 
그오오오! 
 
시야를 교란시키는 사마귀의 움직임에 티렉스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움직였다. 현란한 손동작으로 보아, 이마 저 사마귀는 이길영이 조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이길영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도감도 그렇고, 이 녀석 사실 엄청난 사기 캐릭터 아냐? 
유중혁이 탐을 낼만도 하다. 
 
크우, 그워어어어! 
 
이길영의 맹활약 덕에 전황은 순식간에 유리해졌다. 티렉스의 움직임은 많이 둔해졌고, 어느새 정희원과 이지혜도 눈빛에는 붉은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귀살]. 
 
정신 공격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흥분도가 높아질수록 전투력이 강해지는 좋은 스킬이다. 눈동자를 불태우는 두 여자가 쾌속하게 우림을 누비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렇게 보니 이지혜를 유중혁한테 뺏긴 게 꽤 속이 쓰리다. 
그래도 잠재적 성장 가치로는 정희원 쪽이 압도적이다. ‘멸악의 심판자’는 그만큼 좋은 특성이고, 정희원은 아직 <배후 계약>도 하지 않았으니까. 
슬슬 티렉스의 체력도 꽤나 깎인 것 같고, 막타를 넣어 볼까. 
 
[‘신념의 칼날’을 발동합니다!] 
 
나는 남은 마력을 칼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배후성도 없고, 정희원이나 이지혜만큼 날렵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투력이 약한 것은 아니다. 내겐 그 모든 것을 극복하는 사기템이 있다. 
 
고오오오오! 
 
에테르 블레이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특수 옵션이 발동합니다.] 
[에테르 속성이 ‘불꽃’으로 변환됩니다.] 
 
엄청난 마력이 한꺼번에 빨려 나가며, 육체의 피로도가 극심해졌다. 하지만 나중에 보충할 방법이 있으니 신경 쓰지 않는다. 
순식간에 1미터 이상 늘어난 칼날에 불꽃이 휘감겼다. 
나는 티라노의 후방으로 달렸다. 
 
“다들 비켜요!” 
 
움직임이 둔화된 티라노가 멈칫하는 순간, 나는 녀석의 꼬리를 타고 올라갔다. [균형 감각] 스킬이 없어서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만, 놈의 표피에 칼날을 마구 박아 대는 것으로 어떻게든 떨어지는 것은 면했다. 
 
크오오오오! 
 
전신에서 피를 쏟는 티렉스가 바닥에 몸을 뒹굴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칼날을 박아 넣었다. 칼을 뽑은 상처에서 불길이 일었다. 
고통스럽게 숨을 헐떡이던 티렉스의 노란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그대로 뒤집혔다. 
 
[최초로 7급 지룡종 ‘티라노사우르스 렉스’를 사냥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보상으로 1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아······ 진짜 잡았네.” 
“내가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숨을 몰아쉬던 정희원이 내 말에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티렉스 정도면 7급 괴수종 중에서도 상위권이니,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뒤늦게 달려온 이지혜가 나를 향해 구시렁거렸다. 
 
“내가 다 잡아 놓은 건데!” 
“무슨. 한참 더 때려야 죽는 거였는데.” 
 
나는 괜히 생색을 내며 검을 닦았다. 정희원이 물었다. 
 
“근데 이 영화에 티라노 잡는 게 나왔어요?” 
“그건 아니지만, 이게 더 재미있지 않습니까?” 
“···네?” 
“장르가 판타지 액션 모험이면 이 정도는 해 줘야죠.” 
 
그 순간, 머릿속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극장 주인이 바뀐 영화의 엔딩에 만족합니다.] 
 
정희원이 황당하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엑?” 
 
그렇다. ‘극장 던전’의 공략법은 ‘진짜 엔딩’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랬더라면 유중혁도 이 던전을 못 깼겠지. 이 던전의 핵심은 ‘극장 주인’이 원하는 엔딩을 만드는 것이고, 참고로 이 극장 주인은 극도의 사이다패스다. 
 
“이제 알겠죠? 그냥 다 부수면 돼요.” 
 
즉, 엔딩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다 치워버리면, 영화는 자연스레 결말을 맺게 되는 것이다. 
 
[이제 다음 층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연구소 상층의 헬기장으로 이동하십시오.] 
 
“조금만 있다가 이동하죠. 보상도 좀 챙겨야 되고.” 
 
나는 그렇게 말하고 티렉스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보다 먼저 들어왔던 사내들 중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티렉스에게 먹히거나 찢겨 죽은 모양이었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으, 으어어······.” 
 
사내의 등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티렉스의 발톱에 당한 상처. 뼈가 통째로 드러난 것으로 보아, 이미 회생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천천히 숨을 내쉬세요.” 
“쿠, 쿨럭! ······살려······.” 
 
나는 가져온 식수를 사내에게 먹였다. 사내는 벌컥벌컥 물을 마시더니 다시금 피를 토했다. 어쩔 수 없이 급한 질문부터 하기로 했다. 
 
“어떻게 이곳을 안 겁니까?” 
“선, 선지······.” 
“<선지자들>이 대체 누구죠?” 
 
사내의 숨이 더욱 거칠어지고 있었다. 
 
“계, 계시를······ 받은, 자들······.” 
 
······계시? 
 
“살고······ 싶어······.” 
 
푸화학,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입에서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숨이 끊어진 사내는 그대로 축 늘어졌다. 정희원을 비롯한 일행이 뒤쪽에서 다가왔다. 
 
“그 사람은······?” 
 
나는 고개를 저으며 쓰러진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계시’라. 재미있는 헛소리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멸살법’에 그와 비슷한 능력은 ‘미래시’뿐이고, 그 능력을 가진 이는 예언자 ‘안나 크로프트’ 뿐이니까.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나 말고도 있었군. 
 
하지만 나만큼 잘 아는 놈들은 아니야. 
직접 오지 않고 이곳의 정보를 흘려 시험해봤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독자 씨?” 
“잠시 쉬었다 가죠.” 
 
우리는 사내의 시체를 커다란 나뭇잎으로 덮어 주고, 죽은 티렉스의 근처에 모였다. 유중혁을 쫓아가려면 서둘러야 했지만,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쫓아가면 놈을 만나기도 전에 일행이 전멸하는 수가 있었다. 
나는 티렉스의 사체를 뒤졌다. 
머리와 심장 안쪽을 찾아봤지만 아쉽게도 괴수종의 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소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불꽃으로 인해 푹 익어버린 티렉스를 보던 정희원이 침을 삼켰다. 
 
“···혹시 이것도 먹을 수 있을까요?” 
“마력 불꽃으로 익힌 거니까 먹어도 됩니다. 안 익은 부분은 마력 화로를 써서 익히면 되고요.” 
 
우리는 티렉스의 다리를 둘러싸고 나란히 앉았다. 자작하게 익은 티렉스 살점을 조금씩 도려내자,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이길영이 탄성을 질렀다. 
 
“새로운 고기!” 
 
성질 급한 이지혜가 먼저 달려들어 한점을 뜯었고, 나를 비롯한 나머지 일행도 큼지막한 살점 하나씩을 집었다. 이만한 크기의 고기라니. 회사원이던 시절에는 꿈도 못 꿀 사치다. 눈을 감은 채 맛을 음미하던 이지혜가 황홀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맛있긴 정말 맛있다. 
탱탱한 근육이 지방 사이사이로 적당히 휘감겨 있어서, 땅강아쥐와는 육질의 격이 다르다.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혀끝에 감겨드는 쫀득함이란······ 유상아가 있었더라면 분명 울면서 먹었을 텐데. 
그렇게 한참이나 말없이 고기를 뜯고 나니, 포만감과 함께 체력이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상급 괴수종의 고기는 이처럼 특별한 효능들이 있다. 간혹 못 먹는 것도 있으니 주의해야 하지만. 정희원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후우······ 잘 먹었다. 진짜 맛있는데 더 못 먹어서 눈물 날 것 같아요.” 
 
적당히 휴식을 취한 후, 우리는 섬 중앙에 있는 <연구소>로 곧장 향했다. 
가는 길에 랩터 몇 마리와 마주쳤지만, 티렉스도 잡은 마당에 랩터를 못 잡을 리가 없다. 
 
실험실 곳곳에는 플라스크들과 앰플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작은 인큐베이터에는 배아 중인 공룡들이 들어있었고, 혈액 샘플 채취를 위한 호박석들도 있었다. 없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었다. 
내부동으로 들어가자 눈길을 끄는 아이템들이 몇 개 있었다. 
 
[체력 강화 앰플] 
[마력 강화 앰플] 
[민첩 강화 앰플] 
[근력 강화 앰플] 
 
역시 있구만. 나는 일행들이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앰플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룡의 핵]과 마찬가지로, 이것들 역시 초반 시나리오에서만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종합 능력치 성장 아이템이었다.
심지어 앰플은 한두 병이 아니었다. 족히 스무 병에 가까운 양. 이거라면 폭발적으로 능력치 레벨업이 가능할 것이다. 종합 능력치에 투자할 코인을 계속 아꼈던 것은, 바로 이 히든 시나리오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이 앰플들은 해당 종합 능력치의 레벨이 30 미만일 때만 쓸 수 있었다.
 
“아저씨, 지금 뭐 챙겨?” 
 
······하여간 귀신 같은 계집애가. 
 
“뭐야, 체력 강화 앰플?” 
 
앰플 하나를 가로챈 이지혜의 눈이 크게 떠졌다. 
 
“혼자 다 먹으려는 건 아니지?” 
“다 먹긴. 당연히 나눠 주려고 했지.” 
“언니, 이것 좀 봐요! 이 아저씨가······!” 
 
소란에 다른 일행들도 가까이 다가왔다.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정희원도 깜짝 놀라 말했다. 
 
“맙소사······ 이런 아이템도 있어요?” 
“···히든 시나리오니까요.” 
 
나는 조금 못마땅한 투로 말했다. 
젠장, 이건 좀 곤란한데. 티렉스를 나 혼자 잡은 건 아니니까 혼자 먹는 것도 양심에 좀 찔리지만, 나눠주기도 아까운데······. 
 
[독식을 좋아하는 몇몇 성좌들이 상황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근력 강화 앰플을 뚫어지게 보던 이지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근력 강화 앰플은 나 주면 안 돼? 나 근력 엄청 모자라단 말야.”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사용합니다!] 
 
종합 능력치만 포함한 요약 버전으로.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이지혜 
전용 특성 : 상처 받은 검귀 (희귀) 
전용 스킬 : [검술 연마 Lv.4], [귀살 Lv.1], [절대감각 Lv.2], [귀신 걸음걸이 Lv.2] 
성흔 : [해상전투 Lv.1], [대군지휘 Lv.1] 
종합 능력치 : [체력Lv.13], [근력Lv.17], [민첩Lv.13], [마력Lv.10] 
 
이 요망한 계집애가 구라를······. 
 
“응? 희원 언니, 저거 제가 가지면 안 돼요?” 
“음, 독자 씨가 발견했으니까, 독자 씨가 결정하는 게······.” 
 
솔직히 다른 일행들한테 가는 건 상관없지만, 이지혜한테 주는 건 조금 아깝다. 얜 어차피 유중혁 라인인데.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공평함을 기대합니다.] 
 
공평함이라······ 그래, 내가 아는 가장 공평한 게임이 하나 있지.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가위바위보 어때?” 
“가위바위보?” 
“마지막에 이기는 사람이 하나씩 갖는 걸로.” 
 
순간 이지혜의 얼굴에 탐욕이 스쳤다. 
 
“좋아!” 
“뭐······ 독자 씨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요. 근데 괜찮겠어요? 잘못하면 몰아주기가 될 수도 있는데.” 
“그럼 그 사람 운이 좋은 거죠, 뭐.” 
 
이지혜가 방방 뛰었다. 
자기도 한 몫 챙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들떴나 본데, 그렇게는 안 될 거다. 
 
“일단 ‘근력 강화 앰플’부터 시작하죠.” 
 
나는 근력 강화 앰플을 내놓고, 이지혜를 향해 말했다. 
 
“넌 나랑 하자.” 
“나 가위바위보 잘하는데 괜찮겠어?” 
“아하, 그러셔?” 
 
나는 그런 이지혜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1단계가 발동합니다!] 
[등장인물, ‘이지혜’가 ‘가위’를 준비합니다.]
 
 
 
 
 
< Episode 9. 전지적 개복치 (2) > 끝

< Episode 9. 전지적 개복치 (3) >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사악함에 감탄합니다.] 
[독식을 좋아하는 성좌가 당신에게 200코인을 후원합니다.] 
 
가위바위보의 승자는 순식간에 가려졌다. 살짝 상기된 얼굴의 이길영과, 만족한 얼굴의 정희원. 그리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은 이지혜. 
 
“······이건 말도 안 돼!” 
 
아쉽게도 이길영의 속내는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앰플 중 두 개는 이길영에게 갔다. 
 
“저한텐 안 주셔도 되는데······.” 
“챙겨 둬.” 
 
넌 귀여우니까 봐준다. 
나는 이길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외에도 나는 체력 앰플 두 개를 정희원에게 주었다. 
정희원이 생긋 웃으며 받았다. 
 
“고마워요. 안 그래도 체력 때문에 힘들었는데.” 
 
앰플을 하나도 못 먹은 것은, 오직 이지혜뿐이었다. 
 
“어떻게 20판 중에 18판을 혼자 이길 수 있어? 사기 친 거지?” 
“난 원래 가위바위보 잘해.” 
“진짜 관심법 쓴 거 아냐? 그러지 말고 나도 딱 하나만 주라······.” 
“유중혁한테 달라고 하든가.” 
 
나는 애처롭게 눈물을 글썽이는 이지혜를 보며, 보란 듯이 앰플을 깠다. 
정희원이 시무룩한 이지혜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이지혜의 빛나는 장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동생, 세상은 줄을 잘 서야 되는 거야.” 
 
 
* 
 
 
두두두두, 돌아가는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 
멀어지는 공룡 섬을 보며 이길영이 물었다. 
 
“형, 혹시 얘는 다음 층으로 못 데려가요?” 
 
이길영의 무릎 위에는 아까 이길영과 대화하던 거대 사마귀가 앉아 있었다. 
그새 친해진 모양인지, 사마귀는 이길영의 턱에 더듬이를 비볐다. 
 
“아쉽게도 못 데려가.” 
 
시무룩한 얼굴의 이길영이 애써 정을 떼듯이 사마귀를 안아 들었다. 
 
“······잘 가, 티타노.” 
 
뀌이익. 
 
벌써 이름까지 붙여준 모양. 안타깝지만 ‘극장 던전’에서 만들어진 괴수들은 다른 층으로 이동할 수 없다. 
그러나 아이템은 다른 층으로 가지고 갈 수 있다. 예를 들면 아까 얻었던 능력치 상승 앰플이 그러했고, 지금 내가 쥐고 있는 아이템 또한 그러했다. 
 
[폭군 티렉스의 DNA 앰플] 
 
황금색으로 빛나는 이 작은 앰플은, 내가 이 영화를 선택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섭취 시 30분간 모든 능력치를 +10 상승시켜주는 아이템. ‘극장 던전’ 안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이 아이템이 없으면 절대로 이 던전의 마지막 층을 깰 수 없다. 
 
만약, 유중혁이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면 더욱. 
 
이길영이 놓아준 거대 사마귀가 허공을 날아 사라지고, 어두운 하늘의 정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Ending credit’에 도달했습니다.] 
[출연자 : 김독자, 정희원, 이지혜, 이길영] 
[출연료로 각각 5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는 지상 1층으로 돌아와 있었다. 우리가 탈출한 영화 포스터가 찢어진 채 벽에 붙어 있었다. 무사히 클리어했다는 증거다. 그새 이지혜가 불평했다. 
 
“이런 식으로 몇 층이나 더 가야 돼?” 
“유중혁이 깨 놓은 층도 있을 테니, 생각보단 금방일 거야.” 
 
우리는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곧장 2층으로 향했다. 2층부터는 본격적인 상영관이었기 때문에 잔여 공간이 협소한 편이었다. 정희원이 물었다. 
 
“여긴 변화가 없네요?” 
 
아무리 기다려도, 2층의 환경은 변하지 않았다. 카메라도 보이지 않았고 상영도 시작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2층의 포스터들은 모두 찢어져 있었다. 이지혜 또한 뭔가를 눈치챈 듯했다. 
 
“혹시 포스터가 멀쩡한 영화들만 상영되는 거야?” 
 
나는 찢어진 포스터들을 하나씩 확인해 보았다.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퍼시픽 림>······ 거대 로봇들이 싸우는 영화였던가? 아쉽다. 만약 이게 멀쩡했으면 클리어 보상으로 [강화 장갑(裝甲)]같은 걸 얻을 수도 있었을 텐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 이건 찢어져 있어서 다행이고. 
 
“와, 나 이거 보고 싶었는데.” 
 
나는 이지혜가 보던 포스터를 보았다. 
 
“히어로물 좋아해?” 
“응.” 
“다행이네, 저거 멀쩡했으면 이제부터 싫어졌을 테니까.” 
“···그건 그래.” 
 
찢어진 포스터 속에서, 초록색 괴물이 우리를 보며 포효하고 있었다. 
우리는 곧장 3층으로 올라갔다. 
 
“여기도 쓸렸네.” 
 
역시나 3층에도, 포스터들은 모두 찢어져 있었다. 유중혁이 제대로 휩쓸고 간 모양이었다. 3층에는 위험한 영화들이 많아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제임스 왕 감독의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유중혁 이 자식, 이건 대체 어떻게 깬 거지? 이거 몰살 영화인데. 
 
“생각보다 금방 올라가겠는데요?” 
 
밝은 목소리의 정희원과는 달리, 나는 층을 올라갈 때마다 조금씩 불안해지고 있었다. ‘극장 던전’의 클리어는 어느 정도의 운을 필요로 한다. 층마다 붙어 있는 포스터들중에는 ‘멸살법’에서 다루지 않은 것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유중혁도 모든 영화를 클리어하지는 않았으니까. 
4층에 진입한 순간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지상 4층에 진입했습니다.] 
 
포스터를 찾을 시간도 없이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정희원이 기도하듯 곱게 양손을 모았다. 
 
“제발 귀신 영화는 나오지 마라······.” 
 
뭔가 정희원 답지 않은 말이라 흘끗 봤더니, 정희원이 변명하듯 말했다. 
 
“귀신은 칼로 베어도 안 죽잖아요.” 
 
···그런 이유였나. 
 
[상영이 시작됩니다.] 
 
슈아아앗― 하는 느낌과 함께 배경이 바뀌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는 뱃머리에서 바닷바람을 맞고 있었다. 
 
“이건······?” 
 
짠 소금기가 입가에서 느껴졌고, 탁 트인 수평선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너무나 간만에 보는 바다의 풍경이라 일순 넋을 놓고 말았다. 매일매일 직장 일에 찌들어 살다 보니, 여행을 가본 것도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이건 무슨 영화일까요?” 
 
옆을 보니 정희원이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유람선의 안쪽에서 들려오는 악단의 바이올린 소리, 들뜬 사람들의 사담 소리. 단순히 영화를 재현한 광경이라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로맨틱한 분위기······. 
아, 알겠군, 이 영화가 뭔지. 
이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아, 갑자기 속이······.” 
 
뒤를 돌아보니 이지혜가 허공에 대고 토사물을 흩뿌리고 있었다. 정희원이 달려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한참이나 헛구역질을 한 뒤에야 이지혜가 울상을 지었다. 
 
“저, 뱃멀미가 있어서.” 
“괜찮아, 토해.” 
 
······조금 전부터 느끼는 건데, 왜 이지혜가 충무공의 선택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소설을 읽어서 알고는 있지만, 그냥 모르고 싶다. 
 
“언니 근데······ 이 영화 그거죠? 배 침몰하는.” 
“그런 것 같네.” 
“그런데······ 혹시 언니가 ‘케이트 윈슬렛’이에요?” 
 
이지혜가 부럽다는 듯 정희원의 드레스를 바라보다가 내 쪽을 일별했다. 
 
“그럼 저 아저씨가······ 디카프리오? 웨에에엑!” 
 
그런 말 하면서 토하는 녀석을 보자니 어쩐지 기분이 언짢다. 
뒤쪽에서 이길영이 튀어나온 것은 그때였다. 
 
“형!” 
 
후줄근한 복장을 입은 이길영이 그곳에 있었다. 뭔가 기시감이 드는 복장인데······. 
아무튼 일행은 모두 모였다. 
 
“시간이 없으니 엔딩을 구상해 보죠.” 
 
이 배는 이제 침몰할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멸살법’에 이 영화에 대한 해법은 나오지 않았다. 
<타이타닉>을 상대로 어떻게 ‘사이다’를 연출한단 말인가? 
바다와 싸우기라도 해야 하나? 
이지혜가 먼저 의견을 냈다. 
 
“어차피 침몰할 배니까, 그냥 우리가 침몰시켜 버릴까?” 
“그건 좀······.” 
 
난감하다. 차라리 때려 부수고 나아가는 영화였으면 시원하게 클리어했을 텐데. 
 
“악당을 해치워 봐요, 형.” 
 
이길영의 의견이었다. 
이 영화에 명백한 악당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기에 나는 일단 그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그럼 발암 악역들을 처리하죠.” 
 
우리는 일단 움직였다. 그런데 이 영화의 악역을 무슨 수로 찾지? 타이타닉을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그런데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악역이 스스로 우릴 찾아왔기 때문이다. 말끔한 정장을 걸친 올백머리의 사내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잭 도슨!” 
 
잠깐, 잭 도슨이라면······ 디카프리오의 배역명인데? 
그런데 사내는 내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저요?” 
 
···설마 네가 디카프리오였냐. 
나는 이길영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잠시 후, 우리는 영화의 발암 캐릭터라 생각되는 인물을 묶어 납치했다. 하지만 극장 주인은 반응이 없었다. 납치 정도로는 안 된다 이거지······.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죽여 보자.” 
 
이지혜가 선수를 치며 검을 뽑았다. 온몸이 꽁꽁 묶인 사내가 몸부림쳤다. 
 
“극장 주인이 사이다패스라며? 그럼 이런 녀석들은 빨리 죽여버리는 게 답일 거 아냐?” 
 
솔직히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니, 생각이 아니라 확신한다. 
‘멸살법’에서도 이와 비슷한 다른 영화에서 그게 엔딩의 해답이었으니까. 그런데 공포에 떠는 사내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정희원이 갑자기 의외의 말을 했다. 
 
“그런데······ 진짜 사람 같네요.” 
“···예?” 
“이거 영화인데, 꼭 진짜 사람 같아서요.” 
 
며칠 전까지 악인들을 깔끔하게 토벌하던 정희원이 그런 말을 하니, 의외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정희원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살인자가 되었다고 해서, 괴물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이지혜가 말했다. 
 
“언니, 지금 그런 감상적인 얘기할 때에요? 그래서 죽이지 말자고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사람 살리는 건 좋아요. 근데 이 사람 안 죽이면, 우리가 죽는다고요. 우린 확실히 살아있지만, 이 사람은 그냥 ‘등장인물’이라고요!” 
 
등장인물······. 
이지혜의 말에, 나는 잠깐 멍한 기분이 되었다. 
정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그런걸까?” 
“설령 이 남자가 ‘진짜 사람’이라도 어차피 나쁜 짓 할 놈들이잖아요! 그런 놈들 죽이는 게 뭐가 나빠?” 
 
이지혜의 말은 옳을지도 모른다. 이 남자는 분명 시나리오의 ‘악역’이고, 나쁜 짓을 할 것이다. 그러니 죽여도 괜찮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것은 ‘멸살법’에서 유중혁이 자주 펼치던 논리였다.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이지혜가 벌떡 일어나 칼을 뽑았다. 
 
“어휴, 뭔 궁상이에요? 사부 죽게 생겼는데 지금!” 
 
허공에서 내리꽂힌 칼날은 그대로 사내의 가슴을 관통했다. 울컥거리는 피가 쏟아졌다. 가짜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현실적인 피. 이윽고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극장 주인이 바뀐 엔딩에 만족합니다.] 
[배의 선미에 다음 층으로 이동하는 통로가 열렸습니다.] 
 
“거봐요, 제대로 했잖아요. 그쵸?” 
 
이지혜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분명 답은 틀리지 않았다. 
극장 주인은 이것을 ‘사이다’라고 인정했고, 성좌들은 우리의 행동에 대해 코인을 줄 것이다. 그 코인으로,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것이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다. 
 
[두 번째 ‘Ending credit’에 도달했습니다.] 
[출연자 : 김독자, 정희원, 이지혜, 이길영] 
[출연료로 각각 5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타이타닉>에서는 마땅한 보상 아이템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시스템 메시지의 안내에 따라 곧바로 다음 층으로 넘어갔다. 
 
[지상 5층, 보상의 방에 입장하였습니다.] 
 
에스컬레이터를 모두 올라가자, 마침내 [보상의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상의 방? 여긴 영화가 안 나오나 봐요?” 
“여긴 전시관인 것 같습니다. 원래 영화 소품들을 전시해 놓은 장소였나 보군요.” 
 
사실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의뭉을 떨어줬다. 
실제로 유리관 안에는 어디서 본 듯한 영화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각종 영화의 주인공이 사용했던 장비류와 의상, 무대 소품들······. 
재미있는 것은, 이것들이 더이상 ‘소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유리관을 향해 다가간 정희원이 탄성을 질렀다. 
 
“맙소사, 이 검 좀 봐!” 
 
[미카즈키 무네치카 ― 레플리카] : A급 도검 
 
반짝이는 눈빛으로 유리관을 보는 정희원을 향해,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제대로 된 검이 생겼네요, 희원 씨.” 
“우와······.” 
 
한눈에 봐도 대단한 수준의 도검이었다. 기존에 쓰던 뿔칼은 물론이고, 이지혜의 장도와 비교해도 앞서면 앞섰지 뒤처지지 않는 수준의 아이템. 
정희원은 검을 손에 들고 붕붕 휘둘러 보기 시작했다. 
 
“이거 대박인데요? 날도 제대로 서 있고, 가볍고!” 
 
저렇게 좋아하는 정희원의 모습은 처음 봤다. 
 
[등장인물 ‘정희원’이 당신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낍니다.] 
 
별말씀을. 
극장 던전을 공략하는 가장 큰 목적은 바로 이 5층의 ‘보상’ 때문이었다. 극장 던전은 일행의 초반 아이템을 파밍하기에 적절한 장소였다. 특히 무기가 없었던 정희원은 이걸로 확실히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보상 아이템은 1인당 2개로 제한됩니다.] 
 
비록 영화의 소품들이기에 진짜 ‘성유물’ 급의 성능은 아니었지만, 나름 레플리카, 그러니까 복제품 버전의 특색을 갖춘 아이템들이었다. 
이 정도 수준의 A급 아이템이면 초반에는 사기템에 가깝다. 
 
그나저나, 역시 유중혁은 여길 지나간 모양이다. 
벌써 아이템 두 개가 사라진 걸 보면. 
 
“아이템들 챙겨 가죠. 각자 두 개씩 챙길 수 있으니까, 신중히 고르세요.” 
 
정희원에게 유상아가 쓸만한 아이템 하나를 더 고르게 하고, 나는 이현성에게 줄 아이템을 챙기기로 했다. 마침 쓸만한 게 보였다. 
 
[헤라클레스의 방패 ― 레플리카] : A급 방패 
 
좋아··· 이거면 되겠지. [낡은 철제 방패]와는 비교도 안 되는 아이템이로군. 나를 향한 충성심으로 눈을 빛낼 이현성을 떠올리니, 벌써부터 뿌듯해지는 느낌이다. 
히어로물 팬을 자처하는 이지혜는 아까부터 구석에 있는 아이템을 꺼내기 위해 용을 쓰고 있었다. 
 
“아, 왜 이게 안 빠져!” 
 
뭔가해서 가까이 가 봤다. 이거였군. 
 
[묠니르 ― 레플리카] : A급 둔기 
 
뇌신 토르의 망치가 그곳에 있었다. 이거, 진짜 성유물이었으면 어마어마한 아이템이었을 텐데······ 그래도 원본 성능이 엄청난 만큼 복제품의 성능도 상당할 것 같았다. 
나는 미동도 않는 망치를 잡고 끙끙대는 이지혜를 보며 말했다. 
 
“그거 특별한 사람만 쓸 수 있는 거 아니냐?” 
“젠장, 나도 특별하거든?” 
 
그때, 뒤쪽에서 불쑥 나타난 이길영이 묠니르에 손을 뻗었다. 
 
“야, 꼬맹이! 이건 내······.” 
 
묠니르는 아주 가볍게 이길영의 손아귀에 감겼다. 이리저리 망치를 휘둘러 보던 이길영이 나를 보며 물었다. 
 
“형, 제가 가져도 될까요?” 
“그래, 잘 어울리네.” 
 
이지혜가 또다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나만 불행해······ 나만······.” 
 
나는 그녀를 무시하고 남은 아이템들을 살폈다. 
어디 보자, 남은 하나로 뭘 고르지. 
 
[외장 강화 수트― 레플리카] : A급 방호구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 일단 방호구를 보충하는 게 좋겠지. 
꾸역꾸역 수트를 착용하자, 팔다리의 접촉부가 착, 하고 감겨들었다.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입는 피해가 10% 감소합니다.] 
[적을 감지하는 능력이 향상됩니다.] 
[이전보다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조금 답답하긴 했지만, 그래도 안 입는 것보단 훨씬 낫다. 이 위에서 벌어질 싸움들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럼, 이제 준비는 끝났고. 
 
아직 던전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을 보면, 유중혁은 분명 살아있을 것이다. 빠르면 6층에, 늦으면 7층에 있겠지. 정말 최악의 경우 8층의 보스와 싸우고 있다 하더라도··· 일단 살아는 있다는 거니까. 
 
자, 이제 우리 회귀자님 뒤통수 구경 좀 가볼까?
 
 
 
 
 
< Episode 9. 전지적 개복치 (3) > 끝

< Episode 9. 전지적 개복치 (4) >
 
 
 
 
 
아쉽게도, 6층에 유중혁은 없었다. 
 
그나마 6층의 영화가 쉬운 편이었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대표적인 반전 스릴러 영화였는데, 애초에 범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놈을 죽이는 것으로 빠른 클리어가 가능했다. 
 
[극장 주인이 바뀐 영화의 엔딩에 만족합니다.] 
[출연료로 5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이지혜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진짜 그놈이 범인이었어?” 
“스포일러니까 말하지 마. 여기 안 본 사람 있을 수도 있잖아.”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스포일러를 싫어합니다.] 
 
아무튼, 영화의 특징 때문인지 보상으로 나온 아이템도 특이했다. 
 
[‘스킬북 : 냉철한 관찰력’을 얻었습니다.] 
 
냉철한 관찰력. 꽤 쓸만한 스킬이 나왔다. 
이 스킬은 대상의 움직임을 보고 해당 인물의 종합 능력치를 어림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등장인물 일람]을 쓸 수 있는 대상에게는 별 의미가 없지만, 유상아나 이길영처럼 [등장인물 일람]이 작동하지 않는 인물들에게는 꽤나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연기력이 좋은 범인을 단번에 특정해서 이런 스킬을 얻은 게 아닐까 싶었다. 
 
[전용 스킬, ‘냉철한 관찰력’을 획득합니다.] 
 
그래도 조금 아쉬운 마음은 있었다. 뭔가 검투사라든가, 하여간 그런 소재의 영화가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내겐 아직 마땅한 전투 패시브 스킬이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코인으로 [무기 연마] 같은 스킬을 구매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와 그 정도 등급의 스킬에 코인을 쓰기엔 아까웠다. 
 
“···이제 영화는 지긋지긋해요.” 
 
정희원의 말에 정확히 동감한다. 
나도 당분간 영화관은 쳐다도 보기 싫을 지경이니까. 
출연료라도 많이 받은 걸로 만족해야겠지. 
우리는 곧바로 일곱 번째 층으로 올라갔다. 이번에야말로 유중혁이 뒤통수를 볼 수 있겠거니 했는데······ 
젠장. 7층의 포스터도 대부분 찢어져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유중혁은 보스 방에 있다는 얘기.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면, 이제 정말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달리죠. 곧 마지막 층입니다.” 
 
우리는 뛰기 시작했다. 최대한 빠르게 녀석을 따라잡아야 한다. 
놈이 이성을 잃고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기 전에, 어서. 
상영관들을 지나쳐서 통로를 내달렸다. 7층의 포스터들은 역대 한국의 흥행 영화들을 일렬로 붙여 놓은 것이었다. 
 
제발, 제발 모두 다 찢어져 있어라······. 
 
그러나 이번에도 희망과는 달리, 마지막 포스터가 살아있었다. 
 
“망할······.” 

[해당 층의 상영이 시작됩니다.] 
 
청색 스포트라이트가 일행을 덮음과 동시에, 장면이 바뀌었다. 한바탕 화면이 어지럽게 변한다 싶더니, 코끝에 짠내가 불어왔다. 
다시 무대는 바다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람선이 아니었다. 
매캐한 포연의 냄새. 판옥선의 까칠한 감촉. 
흔들리는 뱃전에서 고개를 든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엎드려라―!” 
 
반사적으로 자리에 엎드린 순간, 총탄 세례가 주변을 헤집었다. 투탕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몇몇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함선을 물려라―!” 
 
옛 조선 수군의 복장을 한 병사들이 주변에서 황급히 포를 준비하고 있었다. 불안한 전란의 바람이 솜털을 일으켰다. 휘몰아치는 울돌목(鬱陶項)의 소용돌이와, 멀리서 다가오는 해전의 북소리. 
 
빌어먹을. 
이건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영화였다. 
왜냐하면, 현시점에서 이 영화는 한국인이 가장 많이 관람한 영화니까. 
어느새 다가온 정희원이 수평선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거······ 어떻게 이기죠?” 
 
‘극장 던전’의 엔딩은 ‘사이다’를 향해 나아가야만 열린다. 
 
쿠구구구구구! 
 
바다를 까맣게 메운, 330척의 왜선(倭船)들. 
나는 황급히 우리 쪽 전력을 확인했다. 그래도, 이건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만든 영화니까 희망은 있겠······지? 
 
“······뭐야 이거?” 
 
분명 열두 척이 남아 있어야 할 판옥선이, 한 대밖에 없었다. 나는 황급히 주변의 수군을 붙잡고 물었다. 
 
“통제공은 어디 계십니까?” 
“통···제공?” 
“이순신 장군님 말입니다!” 
 
수군은 전혀 모르겠다는 투였다. 
가슴이 서늘해진다. 
뭔가, 내가 아는 영화랑은 다르다. 
‘극장 주인’ 놈이 이야기를 바꾼 것이다. 
어느새 적군과의 거리는 빠르게 좁혀지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충무공의 도움 없이, ‘명량 해전’을 이기라고? 
 
나는 주변을 둘러 보며 다급히 외쳤다. 
 
“이지혜!” 
 
 
* 
 
 
혹시나 이런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다. 실제로 내가 이지혜를 데려온 것도, 단순히 전력으로 활용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만약의 만약’을 고려한 것이었으니까. 
 
[성좌, ‘해상전신’이 화신 ‘이지혜’를 딱하게 생각합니다.] 
 
이지혜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배는 한 척뿐이었고, 충무공의 메시지가 들려오는 곳은 한정적이었다. 
 
“으으, 으, 으으······.” 
 
그녀는 1층 갑판 구석에서 고개를 숙인 채 구역질을 반복하고 있었다. 
 
“야, 괜찮냐?” 
 
눈가가 흠뻑 젖은 이지혜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못해, 모, 못한다고!” 
 
그건 나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 
 
[성좌, ‘해상전신’이 화신 ‘이지혜’를 독려합니다.] 
 
“절대, 절대 안 나가! 우웁······!” 
 
다시 한 번 이어지는 헛구역질. 
나는 알고 있다. 바다를 싫어하고, 그다지 정의롭지도 않은 이 애가, 충무공의 선택을 받은 이유를. 
 
[전용 특성의 효과로 읽은 책에 대한 기억력이 상승합니다.] 
 
머릿속에서 ‘멸살법’의 페이지가 넘어갔다. ‘멸살법’의 40편쯤에, 그런 장면이 나온다. 
 
「“야, 근데 넌 바다도 무서워하는 애가 어떻게 충무공의 선택을 받았냐?” 

 “나도 잘 몰라. 음······ 내 선조 중에 장군님이 있으셨다는데, 그 때문인가?” 
 “······설마 너 충무공의 후손인거야?”」 
 
멸살법 40편까지는 나 말고도 몇몇 독자들이 있었고, 때문에 그 부분을 연재했을 당시 상당한 비난이 일었었다. 
아니, 우리 위대하신 충무공께서 고작 혈연에 연연하셨다는 게 말이 되냐? 
하지만 멸살법의 에필로그를 제외한 모든 편수를 다 읽은 나는 안다. 
이지혜는, 충무공의 핏줄이 아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화신 ‘이지혜’를 보며 오래된 전우를 그리워합니다.] 
 
「“그럼 너도 덕수 이씨겠네?” 
 “아니, 나 전주 이씨인데.”」 
 
[성좌, ‘해상전신’이 오래된 전우의 후손을 바라봅니다.] 
 
이지혜는 충무공의 전우였던,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의 후손이었다. 
의민공(毅愍公) 이억기(李億祺). 
충무공과 함께 당항포·한산도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충무공이 억울한 죄목으로 조정에 잡혀갔을 때 이순신을 변호해준 몇 안 되는 전우. 그러나 충분한 신화화가 이루어지지 못해, 위인급 성좌는 되지 못한 인물. 
 
[성좌, ‘해상전신’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이지혜를 바라봅니다.] 
 
그 때문에, 충무공은 이지혜에게 깃들었다. 
자신의 후손이 아니라, 자신을 지켜줬던 친우의 후손에게. 어쩌면 그야말로 충무공다운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충무공은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을 비호해준 친우의 후손이, 소중한 친구를 제 손으로 죽이며 악귀가 되어가는 모습을. 
뭐······ 어디까지나 멸살법의 설정에 따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현상금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현상금 시나리오 ― 생즉필사 사즉필생(生卽必死 死卽必生)> 
 
분류 : 서브 
난이도 : B+ 
클리어 조건 : ‘해상전신’이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충무공의 화신 ‘이지혜’를 독려하여 <명량 해전>을 승리로 이끄십시오. 
제한시간 : 2시간 
보상 : 충무공의 성흔 중 하나. 
실패시 : ― 
 
+ 
 
메시지를 읽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현상금 시나리오를 위인급 성좌가 혼자 요청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자세히 보니, 역시 걸려 있는 보상이 남달랐다. 
 
···충무공의 성흔? 
 
이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면, 나는 <배후 계약>을 하지 않고도 충무공의 성흔을 쓸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 나는 이지혜를 흔들었다. 
 
“이지혜, 그만 일어나. 얼른.” 
“싫어! 우욱······. 셋이 알아서 해결해!” 
“조금만 견디면 안 되겠냐?” 
“······견뎌? 아저씨는 몰라.” 
 
모른다······. 
그래, 그게 네 말버릇이지. 
하지만 어리광을 일일이 받아줄 시간은 없다. 
 
“아니, 알아. 너 뱃멀미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 
“······뭐?” 
“죽은 네 친구가 이 영화 좋아했잖아.” 
 
정통으로 턱을 얻어맞은 복서처럼, 이지혜의 턱이 덜덜 떨렸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스쳐갈 장면은 뻔했다. 
태풍여고의 첫 번째 시나리오. 
손으로 친구를 목 졸라 죽이는, 자신의 모습. 
 
“그, 그걸.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아는지는 묻지 마. 그딴 거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이지혜가 멍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살겠다고 자기 손으로 친구를 죽여놓고, 결국은 여기서 이렇게 죽을 거냐?” 
 
퍼거걱! 하는 소리와 함께 1층 갑판이 꿰뚫리며 갈고리가 들어왔다. 이지혜를 향해 쏘아진 그 갈고리를, 나는 맨손으로 잡아챘다. 부들부들 떠는 이지혜가 나를 보았다. 
 
“여기서 네가 도망치든, 도망치지 않든. 너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와아아― 하는 함성 소리. 바깥에서 왜구들이 넘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네가 일어나면, 적어도 몇몇 사람들은 살릴 수 있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지혜를 두고 2층 갑판으로 나왔다. 
이미 이길영과 정희원은 왜군 속에 포위되어 있었다. 
나는 무기를 빼 들었다. 
적은 평범한 왜군들이다. 그러니 일대일이라면 질 리가 만무했다. 
문제는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지만. 
 
“끄아아악!” 
 
달려드는 왜구를 베고, 또 베었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포화를 쏘아 올리는 적군의 함선들이 보였다. 
 
이 배가 침몰하면 우리는 끝장이다. 
이 영화의 엔딩은 비극으로 끝나고, 우리는 이곳에서 죽는다. 
 
“이지혜!” 
 
성웅의 위대함을 알겠다. 
어떻게, 그는 이런 전투를 승리로 이끈 걸까. 
 
“이제 그만 정신 차려!” 
 
이것은 저주받은 시나리오다. 
녹도만호 송여종도, 평산포대장 정응두도 없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충무공의 비호를 받는 나약한 소녀뿐이다. 
그 소녀가 비틀거리며 2층 갑판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난, 나는 역겨워. 나는······ 나는 살아있을 자격이······.” 
 
그래, 역겹다. 너는. 
그리고 그런 널 이용하는 나도. 
 
“자격 같은 건 아무한테도 없어.” 
“아, 아으아······.” 
 
이지혜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헤라클레스의 방패]로 포화를 받아내며, 그녀를 등지고 섰다. 
 
쾅! 콰앙! 콰아앙! 
 
“살아남았으면 책임을 져! 평생을 속죄하든, 아니면 쓰레기 같은 삶을 지속하든. 어떻게든 계속 살아남아!” 
 
무차별로 날아든 포탄 세례에 선체 곳곳이 부서졌다. 
나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 
 
“아니면 너, 정말로 여기서 죽고 싶은 거냐?” 
 
[등장인물 ‘이지혜’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상당합니다.] 
 
울음을 닦는 이지혜에게서 온갖 종류의 감정이 전해졌다. 울분, 자기멸시, 세상에 대한 환멸이 똘똘 뭉친 어두운 감정. 그럼에도 그 감정 속에서 자라난, 솔직한 한 마디가 있었다. 
 
「죽기 싫어.」 
 
성좌들은 제멋대로다. 화신이 청한다고 해서 반드시 후원을 주지도 않고, 화신이 죽어 나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놈들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그 어떤 성좌라도 자기 ‘신화’의 무대가 되는 장소에서만큼은, 화신을 외면하지 않는다. 
 
[성좌, ‘해상전신’이 화신 ‘이지혜’의 의지에 반응합니다.] 
 
눈부신 빛살과 함께, 이지혜의 몸에서 붉은 아우라가 터져 나왔다. 
유중혁 자식한테 좋은 꼴이 됐지만, 뭐 어쩔 수 없다. 
나도 얻는 건 있으니까. 
 
[등장인물 ‘이지혜’가 새로운 ‘성흔’을 획득하였습니다.] 
 
상처받은 검귀, 이지혜의 세 번째 ‘성흔’. 
훗날 그녀를 해상제독으로 만들, 최강의 성흔이 발현되고 있었다. 
 
“······신에게는.” 
 
칼자루를 쥔 이지혜는 바다를 보았다. 적은 많았고, 아군은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세상을 향해 검을 뽑았다.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았으니.” 
 
눈부신 빛살이, 그녀의 검 끝에서 갈라져 나왔다. 
 
[등장인물 ‘이지혜’가 성흔 ‘유령 함대 Lv.1’를 발동합니다!] 
 
고오오오, 하는 떨림과 함께 인근 해역 전체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해역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물줄기와 함께, 바다에서 모습을 드러낸 열두 척의 유령 함선들. 
 
“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당황한 왜선들이 북을 울렸다. 쏘아진 포탄들이 유령 함대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명징한 실체가 없는 유령 함대는, 적군의 공격에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이곳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으리라.” 
 
마침내 이지혜의 함대가 앞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무수한 포화의 격랑을 꿰뚫고,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열두 척의 배. 하얗게 타오른 포신이 발포를 개시하자, 앞길을 막고 있던 왜선들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콰콰콰콰콰! 
 
울지 않는 소녀가 전장을 지휘했다. 
무지막지한 유령 함대의 위세 앞에, 왜선들은 완전히 압도당했다. 나뿐만 아니라 정희원도, 이길영도 살짝 입을 벌린 채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것이 진짜 ‘성흔’의 힘이다. 
해상전에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충무공의 힘인 것이다. 
 
저무는 노을 속에서, 왜구들의 비명이 포연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울돌목의 소용돌이가 피로 물든 왜구들의 시신을 빨아들였다. 궤멸 된 적군의 마지막 배가 가라앉을 때까지는, 그로부터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극장 주인이 바뀐 엔딩에 만족하였습니다.] 
[네 번째 ‘Ending credit’에 도달했습니다.] 
[출연자 : 김독자, 정희원, 이지혜, 이길영] 
[출연료로 각각 5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엔딩 크레딧의 보상을 받자마자, 이어서 추가 메시지가 떠올랐다. 
 
[현상금 시나리오를 클리어 하였습니다.] 
[현상금 시나리오의 보상으로 ‘해상전신’의 성흔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조금 기대했다. 
어쩌면 ‘유령 함대’를 줄 수도 있는 거니까. 
그것만 얻을 수 있다면, 해상전이 벌어져도 이지혜가 부럽지 않다. 
 
[성흔, ‘칼의 노래’를 습득하였습니다.] 
 
들려온 메시지에, 나는 순간 뭔가를 잘못 들었나 싶었다. 
 
성흔 「칼의 노래」. 
 
이 성흔은 본래, 이지혜가 이야기의 중반부를 넘어서야 습득하게 되는 성흔이었다. 그런데 그런 성흔을 충무공은 내게 준 것이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유령 함대’ 보다도 당장의 내게 필요한 스킬. 
이 성흔이 있다면, 8층에서 정말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다 해도 해 볼 만 할지도 모른다. 
주변의 정경이 천천히 뒤바뀌며, 우리는 영화관의 내부로 돌아왔다. 탈진한 이지혜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아저씨.” 
“넌 여기서 조금 쉬다가 올라와. 유중혁은 우리가 구할 테니까.” 
“하지만...” 
“말 들어.” 
 
새로운 성흔을 얻었지만, 좋다고 헤벌쭉 웃을 여유가 없었다. 
아무리 좋은 성흔을 얻어도 이 ‘세계’가 끝나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그리고 그 ‘끝’을 막기 위해 나는 유중혁을 살려야만 한다. 
 
나는 아껴두었던 종합 능력치 앰플을 모두 들이켰다. 능력치 레벨을 올릴 때는 10레벨 단위로 코인 소모량이 올라가기 때문에, 일단 코인을 먼저 쓴 후 가성비를 고려해 앰플을 사용했다. 
 
[총 4000코인을 소모했습니다.] 
[종합 능력치 강화 앰플을 사용하였습니다.] 
 
[체력 Lv.18 -> 체력 Lv.24] 
[근력 Lv.18 -> 근력 Lv.24] 
[민첩 Lv.11 -> 민첩 Lv.20] 
[마력 Lv.10 -> 마력 Lv.15] 
[모든 종합 능력치가 크게 증가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계단을 올라갔다. 
 
“모두 준비하세요.” 
 
[지상 8층, ‘하늘 정원’에 진입했습니다.] 
 
극장의 8층은 옥상이었다. 불투명한 돔으로 둥글게 둘러싸인, 마치 오페라하우스를 연상시키는 작은 돔. 초록빛 잔디가 깔린 옥상에 발을 내딛자마자 보인 것은, 내가 그토록 찾아왔던 회귀자 녀석의 뒷모습이었다. 
 
아······. 
 
저놈 살리겠다고 지난 시간 동안 죽어라 고생했던 걸 생각하니, 갑자기 울컥 분노가 치솟았다. 
다행히, 놈의 뒤통수는 내가 때려줄 수 있을 정도로 멀쩡했다. 
 
“야, 유중혁!” 
 
나는 그대로 유중혁을 향해 달려가 놈의 뒤통수를 내갈겼다.
 
 
 
 
 
< Episode 9. 전지적 개복치 (4) > 끝

< Episode 9. 전지적 개복치 (5) >
 
 
 
 
 
 
찰진 감각이 손끝에 감기며 속이 다 시원해졌다. 
빌어먹을 놈, 얼마나 때려주고 싶었는지.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유중혁?” 
 
놈이, 돌아보질 않는다. 
 
유중혁의 몸에서 회백색의 아우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없이 불길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솜털이 오싹 일어서는 아우라. 
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자세히 보니 아우라는, 8층 안쪽의 의자에 앉아 있는 한 노인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노인을 보는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빌어먹을, 역시 이렇게 되어버린 건가. 
회백색 아우라를 발산하는 유중혁이 천천히 나를 향해 돌아섰다. 
최악의 상황이다.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이 등장인물 ‘유중혁’의 통제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이지(理智)를 상실한 녀석의 전신에서 가공할 살기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지금 이 녀석을 막을 수 있는 ‘등장인물’은, 세상에 없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발경(發勁) Lv.4’을 사용합니다.]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자, 잠깐만!” 
 
투콰아앙! 
 
배 쪽에 강력한 통증이 일어난다 싶더니, 의식이 가물해졌다. 사위가 쏜살같이 밀려나며 머릿속에서 멋대로 기억의 책장이 넘어갔다. 방심했다. 
 
「······8회차의 유중혁이 ‘극장 던전’에서 죽은 것은, 그가 약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면 유중혁은 운이 없었다. 
왜냐하면 ‘극장 던전’의 보스는 회귀자인 유중혁에게는 최악의 상성······.」 
 
숨이 돌아왔다. 
 
“크헙······ 허억.” 
 
[외장 강화 수트가 손상되었습니다.] 
[방어력이 일부 감소합니다.] 
 
나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배를 감싸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전투력이다. 
앰플을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 단 한 방에 이 꼴이 되었다고? 

한 방으로 얼마나 큰 타격을 입었는지, 나는 그대로 날아가 옥상의 측면에 처박힌 상태였다. 
 
[등장인물 ‘정희원’이 ‘귀살 Lv.2’을 사용합니다!] 
 
멀리서 정희원이 눈빛을 불태우며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말려야 했지만, 몸이 쉽게 말을 듣지 않았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백보신권 Lv.2’을 사용합니다.] 
 
지금의 정희원이 유중혁의 상대가 될 리 없다. 그나마 [귀살] 덕에 몇 합 버티는 듯했지만, 금세 내상을 입은 정희원의 입술에서 피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도, 지금의 유중혁은 훨씬 더 강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해당 인물의 관련 정보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이 ‘요약 일람’으로 변환됩니다.] 
[사용자의 편의에 따라 임의로 지정한 항목들만 표시됩니다.]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유중혁 
전용 특성 : 회귀자 <3회차> (신화), 프로게이머 (희귀) 
전용 스킬 : [현자의 눈 Lv.8], [백병전 Lv.8], [상급 무기연마 Lv.5], [정신 방벽 Lv.5], [백보신권 Lv.2], [주작신보 Lv.1], [파천강기 Lv.2]······(중략)······. 
성흔 : [회귀 Lv.3], [전승 Lv.1] 
종합 능력치 : [체력 Lv.28], [근력 Lv.27], [민첩Lv.26], [마력Lv.25] 
 
* 현재 해당 등장인물은 이성을 잃은 상태입니다. 
 
빌어먹을 자식. 역시나 새로운 성흔이 활성화되었다. 
<전승>. 과거 회차의 유중혁이 가졌던 스킬들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깨어나게 만드는 성흔. 이 성흔을 통해 유중혁은 본격적인 괴물이 되어갈 것이다. 
 
“사부!” 
 
아래층에서 이지혜가 올라온 것은 그때였다. 
정희원을 향해 날아들던 권격이, 이지혜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투콰콰콰! 
 
“꺄아악!” 
 
충무공의 가호 덕택인지, 아니면 상승한 [귀신 걸음걸이] 덕분인지, 이지혜는 운 좋게 일격을 피했다. 나는 이지혜를 향해 외쳤다. 
 
“놈은 조종당하고 있어! 극장 주인을 노려!” 
 
그러나 이지혜에게 그럴 여유는 없어 보였다. 결국, 유중혁을 넘지 않고서는 ‘극장 주인’에게 다가갈 수 없다. 
찰나, 정희원과 이지혜의 눈빛이 서로 교차했다. 두 사람의 칼이 동시에 유중혁을 향해 움직였다. 
[검도]와 [검술 연마]의 콤보. 
하지만 티렉스조차 쓰러뜨렸던 콤보도, 유중혁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퍼버버벅! 
 
“크헉!” 
 
유중혁이 퍼부은 백보신권에 얼굴을 얻어맞은 이지혜가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등장인물 ‘정희원’이 ‘심판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정희원의 요청에 침묵합니다.] 
[스킬 발동이 취소되었습니다.] 
 
정희원이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이놈도 안돼?” 
 
당연한 일이었다. 유중혁은 무자비한 녀석이지만, 그 본질에는 분명 대의(大義)가 있기 때문이다. 
붕권을 맞은 정희원도 칼을 놓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뒤쪽에 있던 이길영이 특수 스킬인 ‘묠니르의 천둥’을 사용했다. 
 
쿠구구궁! 
 
[등장인물 ‘유중혁’이 ‘전격 내성’으로 공격의 충격을 상쇄합니다.] 
 
유중혁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제기랄. 
 
강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라고? 
나는 이길영의 어깨를 짚으며 비틀비틀 앞으로 나섰다. 
 
“길영아. 부탁한다. 뭐 해야 할지 알지?” 
 
눈치 빠른 이길영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 
“미안하다.” 
“아니에요.” 
 
이길영은 곧바로 입으로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뒤집히는 이길영의 눈동자.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젠 모든 카드를 다 동원해야만 했다. 
 
[‘폭군 티렉스의 DNA앰플’을 사용하였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30분간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그래······ 한번 싸워보자고 이 개복치 새끼야. 
 
[체력 Lv.24 -> 체력 Lv.34] 
[근력 Lv.24 -> 근력 Lv.34] 
[민첩 Lv.20 -> 민첩 Lv.30] 
[마력 Lv.15 -> 마력 Lv.25] 
 
[전신에서 활력이 치솟습니다!] 
[근육의 잠재력이 폭발합니다!] 
[전보다 쾌속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심장에서 알 수 없는 에너지가 들끓습니다!] 
 
부족한 스킬은 압도적인 능력치의 격차로 메운다. 
유중혁에게 온전한 <전승>이 이루어진 상태였다면 택도 없는 도박이겠지만, 스킬 레벨이 낮은 지금이라면 가능했다. 
 
비록 잠시뿐이겠지만. 
그 한순간이라도 좋다. 
 
[전용 스킬, ‘백청강기 Lv.1’를 발동합니다!] 
[숙련치가 누적되어 백청강기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백청강기 Lv.1 -> 백청강기 Lv.2] 
 
손끝에 휘감기는 마력의 느낌이 달라졌다. 내가 달려가지 않아도, 놈이 먼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내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녀석도 등허리에서 처음으로 칼을 뽑아 들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파천강기 Lv.2’를 사용합니다.] 
 
카가가가각! 
 
서로의 칼날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유중혁도, 나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칼날을 쥔 손아귀에서 엄청난 압력이 느껴졌다. 놈의 칼날에서 타오르는 새파란 에테르. 
 
이쯤 되면 감탄을 넘어서 경이롭다. 
 
‘멸살법’의 세계에서 능력치의 앞자리는 절대적인 힘의 격차를 낳는다. 
그리고 지금 내 앞자리는 3이고, 유중혁은 2였다. 
그런데도 녀석은 내게 전혀 밀리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자칫하면 내가 밀릴 지경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가 발동합니다.] 
 
스킬이 발동하는 순간, 유중혁의 난립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괴롭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런 짓을 반복해야 하는 건가.」 
 
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 자식이, 벌써부터? 
 
“정신 차려 이 새끼야!” 
 
나는 온 힘을 다해 놈의 칼을 쳐낸 후 놈의 턱을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어중이떠중이 식의 공격이었지만, ‘전지적 독자 시점’ 덕분에 놈의 움직임이 읽혔다. 
 
스팟! 
 
간발의 차이로 주먹이 턱을 스쳤고, 처음으로 타격을 입은 놈이 비틀거렸다. 
 
「회귀가 시작되면, 또 모든 것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동료들은 모두 기억을 잃고, 내가 살았던 모든 역사는 지워진다.」 
 
“멍청이가!” 
 
「그리고 다시 모든 것은 반복된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사실 개복치는 무척 튼튼한 생물이다. 놈이 잘 죽는 것은 몸이 약해서가 아니라 스트레스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마치, 지금 눈앞의 이 녀석처럼. 
 
‘극장 주인’이 유중혁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유중혁의 불안한 정신상태 때문이었다. ‘극장 주인’은 신체 능력은 약하지만, 최상급의 정신 공격 스킬들을 가지고 있다. 만약 유중혁의 ‘정신 방벽’ 레벨이 8만 넘었더라도,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몽롱하게 눈이 풀린 유중혁. 개똥철학에 빠져버린 놈을 보고 있자니,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는다. 
 
“너 진짜 주인공 맞냐?” 
 
말하자면 이것은, 3149회의 멸살법을 읽은, 한 독자로서의 정당한 분노였다. 
 
“겨우 3회차 회귀하고 그 지경이야?” 
 
나는 한 번 더, 온 힘을 다해 놈의 머리를 갈겼다. 
기적일까. 턱을 맞은 놈의 움직임이 조금 둔해졌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녀석의 흉부를 걷어찼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처음으로 회귀했을 때의 각오, 벌써 다 잊어버린 거냐고.” 
 
「이 세계에서 살아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야.」 
 
쓸쓸한 목소리. 
 
“자식아······ 그딴 감상에 빠지지 않기로 했잖아.” 
 
나는 달려드는 놈의 칼을 떨쳐내며 외쳤다. 
 
“눈앞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대의를 위해서라도 살겠다고 결심했잖아?”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진동합니다.] 
 
누구를 향해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부딪치는 칼날에서 뜨거운 불꽃이 튀었다. 눈가가 따가웠고, 피부가 열에 익고 있었다. 숨 가쁘게 토해지는 말들 속에서, 어쩌면 나 역시 순간 이성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혼자야.」 
 
마치 내가 유중혁이 된 것처럼, 혹은, 내가 유중혁으로 살아보기라도 했던 것처럼. 가슴이 옥죄는 듯 답답했다. 
 
“혼자라고?” 
 
「나는······.」 
 
“내가 뭐 때문에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네가 혼자라고?” 
 
「나는······.」 
 
검격이 부딪치며 손아귀가 찢어졌다. 
피가 흐르고, 살점이 뜯겼다. 
나는 미친놈처럼 칼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으드득 이가 갈렸다. 
 
“네가 왜 혼자야? 네가 병신같이 ‘극장 던전’에서 죽었을 때도, 죽은 여동생 안고 징징거릴 때도, 예언자한테 뒤통수 맞고 뒤졌을 때도! 네가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를 낳았을 때도······!” 
 
그 이야기를 하면서, 기이하게도 나는 다른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 글자, 그리고 한 글자. ‘멸살법’을 읽으며 살아온 내 오랜 기억들. 
 
“아이가 죽은 후 네가 미쳐서 날뛸 때도!” 
 
복잡했던 가정사와, 일진들에게 두드려 맞던 10대의 기억. 
 
“마왕과 싸우고, 귀환자들과 대적하고!” 
 
선임들의 부조리에 치였던 군대의 악몽들. 
 
“이계인들을 돕고, 빌어먹을 환생자들과 맞서 싸우고! 마침내 성좌들 앞에 섰을 때도!” 
 
취업을 위해 몸부림치고, 상사들한테 비열한 아부를 하며 하루를 버티던 날들. 오로지 살기 위해서. 살기 위해 하루를 살아냈던.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너를 보면서!” 
 
그럼에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가 읽을 수 있는 한 편의 소설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던. 

“내가······.” 
 
칼을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쪽팔리게, 너무 흥분했다. 빌어먹을. 
그냥 시간만 끌면 되는 거였는데. 
거친 호흡을 다스리며 앞을 본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착각일까. 
잠깐이지만 유중혁의 동공에 희미한 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너는······.」 
 
어떤 일은, 마음을 읽을 수 있어도 이해하지 못한다. 
유중혁의 표정을 보는 순간, 가슴이 덜컥했다. 
 
[지나친 몰입으로 인해 ‘제4의 벽’이 흔들립니다.] 
 
유중혁의 두 눈이, 똑바로 나를 보고 있었다. 
 
「너는······ 대체 누구지?」
 
 
 
 
 
< Episode 9. 전지적 개복치 (5) > 끝

< Episode 9. 전지적 개복치 (6) >
 
 
 
 
 
 
“뭐?” 
 
「대체, 너는······?」 
 
갑자기 변한 녀석의 상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설마, 내 말을 듣고 이성이 돌아왔다고? 
그럴 수가 있나? 
나는 조금 당황했다. 
애초에 이 작전은, 이런 결과를 기대하고 시작한 게 아니었으니까.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이 당황합니다.]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이 등장인물 ‘유중혁’에 대한 통제를 강화합니다!] 
 
“크으으윽······!” 
 
유중혁의 눈빛이 다시 몽롱해졌다. 
역시. 혹시나 기대했지만 녀석이 자력으로 깨어나는 것은 무리였다. 개복치가 괜히 개복치인 게 아니지. 자살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한 심정이다. 유중혁의 검에 휘감긴 새파란 에테르가 파르르 떨렸다. 
 
[등장인물 ‘유중혁’의 ‘파천강기’가 성장합니다!] 
 
이 와중에도 전승된 스킬은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었다. 
망할 주인공의 재능 덕택이다. 
 
파츠츠츳! 
 
격돌한 백청강기가 조금씩 밀려난다. 스킬 자체가 가진 한계인지, 아니면 재능의 차이인지는 모른다. 
나는 이길영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흰자위를 드러낸 이길영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 슬슬 때가 왔다. 
 
“중혁아.” 
 
아마 오늘 이 순간이 지나면 유중혁은 놀라울 정도로 강해지겠지. 
나는 있는 힘껏 검을 밀어내며 말했다. 
 
“전에 내가 물었지? 너 한 대만 때려도 되냐고” 
 
타고난 재능의 차이가 있으니, 향후 몇 년간 유중혁은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강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분명 너, 그때 때려도 된다고 했다. 기억하지?” 
 
지금의 내가 전력을 다하면, 적어도 단 한순간 정도는 이 녀석을······. 
 
[‘신념의 칼날’이 발동합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특수 옵션이 발동합니다.] 
[에테르 속성이 ‘불꽃’으로 변환됩니다.] 
 
이 말도 안되는 녀석을, 압도할 수도 있다. 
 
기이이이잉! 

에테르 블레이드. 
허공에서 만개한 불꽃의 에테르가 놈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화르르르륵! 
 
갑작스런 공격 일변도에 당황한 유중혁이 순간적 몇 걸음을 물러났다. 녀석도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하지만 늦었다. 
 
[성흔, ‘칼의 노래’를 발동하였습니다.] 
 
칼의 노래. 
위인급 성좌인 충무공이 자랑하는, 최강의 전투 버프 중 하나. 
 
[충무공이 남긴 소절이 당신의 검에 깃듭니다.] 
 
무작위의 소절이 깃든다는 점에서 전투력 상승 편차가 크긴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더없이 기꺼운 스킬이었다. 
 
「화살을 비처럼 쏘아대고 각양의 총통을 쏘아대니」 
 
운이 좋게도, 내게 깃든 것은 난중일기의 한 구절. 
엄청난 마력이 빠져나가며, 검극에서 타오르는 에테르들이 일제히 뭉쳤다. 나는 그것을 그대로, 유중혁을 향해 휘둘렀다. 
 
「그 대란이 마치 우레 폭풍과 같았다.」 
 
불꽃의 에테르가 화살의 형상을 이루더니, 마치 수많은 화살비가 쏟아지듯 녀석에게 폭격을 시작했다. 부족한 마력 탓에 찰나 밖에 쓸 수 없는 공격이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투두두두두두두두! 
 
“크으으으읏!” 
 
유중혁의 온몸에 새빨간 상흔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코인만이 모든 가치를 대변하고, 성좌들이 모든 전개를 결정하는 이 빌어먹을 세상에는, 아직 유중혁이 필요하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내가 너를 지켜주마. 
 
화르르르륵······. 
 
전실을 태우는 불길 속에서 유중혁의 행동이 멈췄다. [불꽃 내성]이 있으니 심각한 타격을 받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행동불능의 상태에 빠지기엔 충분할 것이다. 나는 정원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극장 주인’을 바라보았다.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이 당신을 극도로 경계합니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나는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안색이 굳어진 ‘극장 주인’이 보인다. 
그런데. 
 
[등장인물 ‘유중혁’이 ‘기사회생 Lv.2’을 사용합니다!] 
 
빌어먹게도, 유중혁이 벌써 나를 뒤쫓아오고 있었다. 
[기사회생]. 극악의 타격을 받아도 하루에 한 번, 순식간에 기력을 회복할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사기 스킬. 
벌써 저 스킬까지 전승되었을 줄이야. 
 
파바바밧! 
 
내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주작신보]를 사용하는 유중혁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극장 주인을 코앞에 두고, 유중혁의 검과 마주쳤다. 이제 믿을 것은 마지막 카드뿐이다. 나는 온힘을 다해 외쳤다. 
 
“길영아!” 
 
쿠구구궁! 
 
내가 외친 순간, ‘하늘 정원’의 천장에 거대한 균열이 일었다. 
옥상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돔이 깨져 나가고 있었다. 나를 향해 달려들던 유중혁도, 유중혁을 조종하던 ‘극장 주인’도. 그 순간만큼은 놀라 천장을 보았다. 
 
쩌저저저저적! 
 
‘히든 시나리오’의 차폐 구역이 깨지다니, 일반적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곧 ‘일반적이지 않은’ 존재라면 가능하다는 뜻이다. 
멀리서 이길영이 코피를 쏟으며 울부짖고 있었다. 
 
“으, 으아······ 으아아아······!”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괴물을 부르는 수밖에 없다. 
 
그오오오오오! 
 
깨진 돔의 틈새로, 거대한 곤충의 앞발이 파고들었다. 
 
퍼걱! 퍼거거거걱! 
 
얇은 유리처럼 돔이 깨어져 나가며, 옥상이 갈라졌다. 경악한 ‘극장 주인’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무려 ‘히든 시나리오’의 차폐 구역을 파괴할 수 있는 괴물. 겉보기엔 사마귀를 닮은, 무지막지한 크기의 충왕종이었다. 
 
[6급 충왕종, 티타노프테라가 출현했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외양. 일전에 ‘시독 코뿔소’들을 상대하고 있던 괴물이었다. 그 녀석이, 이길영의 [다종 교감]에 반응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길영이 웃고 있었다. 
 
“헤, 헤헤······ 티타노오······.” 
 
티타노? 설마······ 닮긴 했지만, 아니겠지. 
 
그오오오오! 
 
사마귀의 무지막지한 앞발이 ‘극장 주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고 유중혁이 그 앞을 막았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호신강기 Lv.4’를 사용합니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폭음이 울려 퍼지며, 유중혁의 몸이 옥상 아래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유중혁은 버티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괴물이다. 
지금 능력치로 6급 충왕종을 상대한다고? 
심지어 유중혁은 반격을 개시했다. 
 
갸오오오오! 
 
힘껏 내지른 검격에 티타노프테라가 비명을 질렀다. 
 
투쾅! 스가각! 
 
놀랍게도 유중혁은 6급 충왕종과 대등한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어쩌면 나와 싸웠을 때 봐줬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극장 주인’의 표정에 여유가 돌아오고 있었다. 유중혁은 강하다. 갑작스런 상황이지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틀렸다. 
너는 나를 봤어야 했어. 
 
나는 다시 ‘극장 주인’을 향해 달렸다. [다종교감]의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이길영이 온힘을 다해 벌어준 시간을, 결코 헛되이 쓰면 안 된다. 
 
[‘신념의 칼날’이 발동합니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극장 주인’이 나를 향해 뭐라고 소리쳤다.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 
‘멸살법’의 설정에 따르면, 이 네임드 보스는 저래 봬도 한 성좌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마스터피스였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나 열화판의 형태가 되었고, 한낱 히든 시나리오의 보스를 맡고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아무나 유중혁의 ‘정신 방벽’을 뚫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성좌의 가호를 받는 녀석. 
결코, 만만한 녀석이 아니란 얘기였다.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이 ‘시뮬라크르’를 발동합니다!] 
 
스펙터의 [환영 감옥]보다 한 차원 높은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 스킬.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온갖 종류의 환영들이 나타났다. 환영을 넘어, 차라리 극실재에 가까워 보이는 괴물들. 
땅강아쥐, 그롤, 시독 코뿔소, 티렉스······. 지금껏 보아왔던 괴물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놈들의 흉폭한 이빨이 나를 찢고 할퀴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두렵지 않다. 이건 모두 가짜다. 존재하지 않는다. 저것들은 모두. 
 
소설 속의 허구일 뿐이다. 
 
일순 시간이 느려진 것은 놈의 목에 ‘신념의 칼날’이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이 ‘정신 침식’을 시도합니다!] 
 
[정신 침식]. 유중혁을 저 꼴로 만든 상급의 인지 조작 스킬. 
하지만 [제 4의 벽]이 있기에, 나는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놈이 내 머릿속에 침투한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이 당황합니다.] 
 
새카만 자아의 심연. 
온갖 잡념들이 몰려들며, 멸살법의 페이지들이 요동쳤다. 
 
―이, 이런? 이, 것, 은······! 
 
무수한 텍스트들이 희미한 빛을 내뿜으며 어둠 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내가 읽어온 ‘멸살법’의 이야기들이었다.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발동합니다!] 
 
내 머릿속을 파고들던 ‘극장 주인’의 안색이 실시간으로 변하는 것이 보였다. 녀석은 자신을 둘러싼 문자열들을 보더니, 얼굴이 희게 질렸다. 
 
―설, 마, 당, 신, 은······ 아아! 
 
그리고 그것이 놈의 마지막이었다. 
기이하게도, 경외에 젖은 듯한 표정. 
‘신념의 칼날’이 목을 치려는 순간, 녀석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신성한 빛에 닿은 유령처럼, 혹은 금기를 어긴 형벌을 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존재한 흔적도 없이, 놈은 소멸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손을 내려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최초로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을 처치하였습니다!] 
[보상으로 9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히든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보상으로 4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뒤이어 떠오르는 메시지들. 뒤를 돌아보니, ‘극장 주인’의 마수에서 풀려난 유중혁이 자리에 쓰러지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 죽지 않은 상태였다. 무리하게 [다종 교감]을 운용했던 이길영도 마찬가지였다. 
 
“형······.” 
 
나는 달려가 이길영을 끌어안았다. 힘이 빠진 이길영이 품속에서 색색거리는 소리를 냈다. 
 
[‘극장 던전’을 감싸던 결계가 사라집니다.] 
 
천장을 뒤덮고 있던 결계가 소멸하고, 나를 보는 충왕종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이라도 달아나야 할까 침을 삼키는데, 놀랍게도 녀석이 먼저 몸을 돌렸다. 마치, 이제는 흥미가 사라졌다는 것처럼. 그제야 안도의 숨과 함께 탈력감이 몰려왔다. 
 
끝났다. 
 
“······괜찮아요?” 
 
서로를 부축한 채, 정희원과 이지혜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괜찮습니다. 희원 씨는?” 
“괜찮아요. 지혜도 다행히 무사하고.” 
 
유중혁한테 어지간히 얻어맞은 모양인지, 이지혜는 입이 퉁퉁 부어서 말을 못하고 있었다. 
 
[세 번째 메인 시나리오의 종료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아마 아래쪽도 슬슬 끝날 시간이 된 모양이다. 
옥상에서 주변을 돌아보자, 멀찍이 날이 밝아오는 것이 보였다. 
이현성이 있었다면 ‘조국 기도문’이라도 읊을 법한 장관이었다. 
정희원이 신음을 흘렸다. 
 
“아······ 서울이.” 
 
희미한 새벽빛 아래에 폐허가 된 시가지가 보였다. 멀리서 간헐적인 폭음이 들려왔다. 이제 ‘맹독 안개’는 없었다. 무너진 건축물 아래에 깔려 죽은 시독 코뿔소들. 사람들끼리 싸우는 광경도 보였다. 아마 우리보다 먼저 ‘시나리오’를 끝낸 그룹이겠지.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은 하나의 전경이 되어, 거대한 돔(Dome) 안에 갇혀 있었다. 
 
하나의 결계를 부수자 보이는 더 커다란 결계. 
현재 서울은 투명한 돔 안에 고립된 상태였다. 
정희원이 탄식하듯 말했다. 
 
“진짜로······ 전부 끝장났구나.” 
 
새삼스러웠지만, 다시 한번 인정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무너진 빌딩들을 보며, 저기 어디엔가 내가 다니던 미노 소프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상아가 있었다면 아쉬워했을지도 모른다. 유상아는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니까. 내 품속에서 이길영이 꼼지락댔다. 
 
“정신이 들어?” 

이길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늘을 가리켰다. 
 
멀리서, 유성우가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유성우는 본래 메인 시나리오의 전조다. 
그런데 전보다 유성우의 개수가 많아졌다. 
그렇다는 것은, 곧 ‘홀’이 열린다는 뜻이겠지. 
저 유성우들은 아마 전 세계에 떨어지고 있을 것이다. 
정희원이 감탄하며 말했다. 
 
“빌어먹게도 예쁘네요······.” 
 
정희원은 모를 것이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저 유성들이, 낙하 장소에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악몽을 만들 것인지를. 
 
이제, 더 큰 재앙이 올 것이다. 
 
이길영이 작은 두 손을 모으고 뭔가를 중얼거렸다. 
정희원도 이지혜도 잠시 말이 없었다. 어쩌면 그들도 뭔가를 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스운 일이다. 악몽의 원흉이 될 존재들에게 소원을 비는 것은, 아마 전 우주를 다 뒤져봐도 인간밖에 없겠지. 
잠시 후, 이길영이 눈을 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형은 소원 안 빌어요?” 
 
나는 그런 이길영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대답했다. 
 
“나도 빌었어.” 
“뭔데요?” 
“길영아, 그런 거 물어보는 거 아냐.” 
 
정희원이 핀잔을 주었다. 
나는 그런 정희원을 한 번 보고, 유중혁을 보고, 다시 무너진 서울의 광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떤 소설의 에필로그를 보게 해달라고 빌었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이길영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울의 상공에, 희미한 균열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뜨면, 도깨비들은 새로운 지옥을 열기 시작할 것이다.
 
 
 
 
 
< Episode 9. 전지적 개복치 (6) > 끝

< Episode 10. 미래 전쟁 (1) >
 
 
 
 
 
Episode 10. 미래 전쟁 
 
 
 
 
[메인 시나리오 # 3 ― 긴급 방어전이 종료되었습니다.] 
[보상으로 1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해가 중천에 뜬 후에야 시작될 줄 알았던 메인 시나리오는, 빌어먹게도 세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끝난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네 번째 메인 시나리오 시작이 임박했습니다!] 
 
젠장, 세 번째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나는 곧장 이지혜에게 다가갔다. 
 
“너는 유중혁 데리고 여기에 있어.” 
“······그래도 돼?” 
“어차피 지금 내려가 봤자 도움도 안 돼. 그놈 깨어나면 깨어난 대로 문제고.” 
 
이지혜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유중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 깨어나면 알려만 줘. 뒤통수나 한 대 더 때려주게.” 
 
나는 그 길로 정희원을 데리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이길영은 유성우를 세다가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내가 업고 내려가기로 했다. 
던전이 사라진 자리는 평범한 극장으로 변해 있었고, 5층의 보상 던전의 아이템들도 일반 무대 소품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이 모두 꿈이었다는 것처럼. 
비형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내가 무슨 말 할지 알지?] 
 
‘그래.’ 
 
[휴······ 간 떨어질 뻔했네 진짜.] 
 
투덜대는 비형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조금 안심했다. 
성좌들은 강력한 힘과 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결코 전지(全知)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시나리오의 모든 소리와 영상은 무조건 도깨비의 ‘채널’을 통해 전해지기 때문이다. 즉,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필터링은 제대로 됐어? 흥분해서 쓸데없는 것까지 너무 많이 말했는데.’ 
 
[당연히 됐지. 내 채널 망할 일 있냐? 그런 수준의 정보는 자동으로 필터링이 된다고.] 
 
내 생각이 맞다면 아마 내가 유중혁에게 했던 말들은, 성좌들에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처음으로 ■■했을 때의 각오, 벌써 다 잊어버린 거냐고. 
―네가 왜 혼자야? 네가 병신같이■■■■■■■■을 때도, ■■■■안고 징징거릴 때도, ■■■■■■! 네가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을 때도! 
―■■■을 돕고, ■■■과 맞서 싸우고! 마침내 ■■■ ■■ 섰을 때도! 
 
실제로 얼마나 필터링이 심하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모르긴 몰라도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원작에서 유중혁이 ‘회귀자’라는 정보가 퍼질 때도, 초반엔 이런 식으로 정보가 차단되는 걸 본 기억이 있었다. 
 
[성좌들은 아무것도 못 들었을 테니까 걱정 마. 문제는 나도 별로 못 들었다는 거지만······.] 

‘······너도 못 들었다고?’ 
 
그건 조금 이상한데. 도깨비도 못 듣는 정보가 있나? 
 
[그래 인마. 대체 무슨 얘길 한 거야?] 
 
도깨비도 못 들은 정보. 짐작 가는 게 하나 있긴 했다. 
설마······ 벌써 ‘개연성’의 제약이 걸리기 시작한 건가? 
나는 ‘멸살법’의 내용 일부를 자연스레 떠올렸다. 
 
「<개연성>은 스타 스트림의 흐름을 통제하는 거대한 억제력이다.」 
 
······떠올리긴 했지만, 당장 별 도움은 안 됐다. 
멸살법이 망한 이유 중 하나는 작가 본인도 잘 모를 것 같은 설정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다른 성좌들 반응은 어때?’ 
 
[지랄났지. 지금도 너 무슨 얘기한 거냐고 한창 난리 치는 중이야.] 
 
그렇겠지. 필터링 당하는 성좌들 입장에서는 유성 영화가 갑자기 무성 영화로 바뀐 셈이니까. 
그래도 똑똑한 성좌들이라면 관리국에 따지는 대신 내가 가진 가능성에 주목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내 말이 필터링 되었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현시점에서 드러나면 안 되는 정보를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이니까. 
 
[비밀을 탐구하는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존재를 눈여겨봅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존재를 흥미로워합니다] 
[2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비형이 깜빡했다는 듯 첨언했다. 
 
[아까 간접 메시지 너무 많이 뜨는 바람에 너한테 따로 전송은 안 했다. 알지?] 
 
‘앞으로도 그렇게 해. 코인 많이 내겠다는 놈들 메시지만 띄우고.’ 
 
[······내가 무슨 네 매니저냐?] 
 
살짝 심통이 난 비형의 모습이 이내 허공에서 사라졌다. 
어째 저 녀석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귀여워지는 것 같은데. 
일단 하나는 끝났고, 다른 하나는······. 
 
“독자 씨, 힘들지 않아요? 길영이 제가 업을게요.” 
“아,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정희원에게 이길영을 건네주었다. 어딘가 심각해 보이는 얼굴.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희원 씨.” 
“네?” 
“무슨 고민 있죠?” 
“아뇨, 그냥······.” 
 
정희원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하······ 그래요. 내 성격상 담고 있으려니 도저히 안 되겠네요.” 
 
역시나. 
정희원은 돌아가지 않고 곧장 찔러왔다. 
 
“독자 씨 대체 정체가 뭐예요?” 
“···아까 뭔가 들으셨습니까?” 
“조금은요.” 
 
꽤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불행히도 뭔가가 들렸던 모양이다. 하긴, 정희원은 이지혜보다 가까이 있었고 인간끼리는 필터링도 안 되니까······. 
이길영이 고롱고롱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절반만 솔직해지기로 했다. 
 
“저는 미래의 일부를 알고 있습니다.” 
“정말인가요?” 
“네.” 
 
정희원은 잠시 뭔가를 고민하는 눈치였다.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생각해 보는 듯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결심이 섰는지, 정희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유상아 씨나 이현성 씨는 알고 있나요?” 
“아직 모릅니다.” 
 
내가 순순히 대답하자, 정희원이 이길영을 업은 채 내게서 주춤주춤 물러섰다. 
 
“······ 갑자기 우리 죽이거나 하진 않을 거죠?”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보통이라면 그런 전개잖아요. ‘넌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같은······.” 
 
대체 그 ‘보통의 전개’라는 건 어디서 온 것일까. 왠지 내가 엄청 나쁜 사람이 된 것 같다. 
 
“그 ‘보통의 전개’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식이라면 저는 벌써 희원 씨나 동료들을 죽였어야 할 것 같은데요.” 
“사실 그게 조금 이상하긴 해요.” 
“······나쁜 마음 먹고 꺼낸 말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반대라고요?” 
 
나는 정희원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앞으로 남은 시나리오들은 더 위험할 겁니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할 거고, 소중한 것들을 잃게 될지도 모르죠.” 
“···그래서요?” 
“그러니······.” 
 
점점 더 초조해지는 정희원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제 곁에 있어 주세요.” 
“······무슨 뜻이죠?” 
“제 ‘동료’가 되어 달라는 뜻입니다.” 
 
슬슬 나도 ‘내 사람’을 만들어야 할 시기였다. 
적어도 쉽게 배신하지 않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내가 각성시켰고, 마음도 읽을 수 있는 정희원은 그에 가장 적합한 인재였다. 잠깐 멍한 표정을 짓던 정희원이 입술을 실룩였다. 
 
“독자 씨는 지금까지 절 동료로 생각하신 적이 없나 봐요?” 
“정확히는 그 반대죠. 저만 동료라고 생각한다고 동료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정희원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나는 일부러 한 발짝을 물러섰다. 
 
“동료가 부담스럽다면, 거래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저는 희원 씨의 무력이 필요하고, 제 정보는 희원 씨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서로서로 주고받는 셈이죠. 중요한 건 앞으로도 우리 관계가 변하지 않는 겁니다.” 
“조금 갑작스러운데... 혹시 지금 답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정희원 같은 사람에겐 성급한 감성팔이보다 느긋하게 접근하는 편이 더 호감을 사기 쉽다. 
실제로 정희원은 그다지 나쁜 표정이 아니었다. 
 
[등장인물 ‘정희원’이 당신의 솔직함에 안도합니다.] 
[등장인물 ‘정희원’이 당신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아마 고뇌는 길지 않을 것이다. 정희원의 각성 이벤트에 큰 영향을 미친 만큼, 그녀의 무의식에는 내 존재가 깊이 각인되어 있을 테니까. 
아마 이번 시나리오가 끝나면, 두 번째 <배후 선택>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면 정희원도 비로소 배후성을 얻게 되겠지. 정희원의 진짜 저력은 그때부터 발현된다. 
 
“그럼, 나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요?” 
“네.” 
“독자 씨가 아는 ‘미래’에서 저는 뭘 하고 있어요?”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이거, 필터링 잘 되고 있겠지? 
 
“저도 모릅니다.” 
“···네?” 
“제가 알던 미래에 정희원 씨는 없었으니까요.” 
“그게 무슨······.” 
“그래서 이 거래가 희원 씨에게 꼭 필요한 겁니다.” 
 
정희원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정희원은 원작에서는 주목받지 못했던, 내가 직접 키워낸 변수다. 
특성은 충분하니, 이제 배후성만 제대로 얻으면 그녀는 앞으로의 시나리오를 바꾸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내가 모르는 ‘다른 변수’를 가진 놈들과 싸울 때라면 더욱더. 
아래층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잘 생각해 보시고, 조금 서두르죠.” 
 
거의 날 듯이 개찰구를 건너 플랫폼으로 내려가니, 다수의 사람들이 소수 인원을 둘러싼 채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는 금방 이해가 갔다. 
건물주 연합.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군. 
 
“김독자란 새끼 어디 갔어? 빨리 말 안 해?” 
 
자세히 보니, 연합원들 사이에서 곤란해하는 이현성이 보였다. 
나는 일부러 걸음 소리를 크게 하며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이현성 씨, 유상아 씨.” 
“놈이다!” 
 
내가 4호선 플랫폼으로 내려오자마자, 연합원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익숙한 얼굴의 건물주 아저씨가 보인다. 
밤새 벌인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놈의 몸 곳곳에 남아 있었다. 언뜻 봐도 전체적인 능력치가 크게 상승한 것이 느껴진다. 마음에 드는군. 
 
“공필두.” 
 
눈을 부라리는 공필두의 [무장지대]에서 무려 여덟 개나 되는 미니 포탑이 올라왔다. 공필두를 중심으로 다시금 의기양양해진 연합원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살려준 은혜도 모르고, 사람이란 게 참 간사하지 그래. 
 
“저 새끼를 당장······!” 
 
뭐라고 말하려던 공필두가 흠칫 몸을 떤 것은 그때였다. 
허공에 차르르, 전류가 번지고 있었다. 

[네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5분 뒤에 시작됩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도깨비 비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하, 여러분, 잘들 있었어요?] 
 
심술궂은 녀석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표정들을 보니 다들 평안하신 모양이네요!] 
 
“무, 무슨 일로 온 거야!” 
 
[당연히 네 번째 메인 시나리오 공지 때문에 왔죠.] 
 
“이런 시발······.” 
 
[자자, 그렇게 열불 내지 말고 들어요. 불평 많은 사람이 제일 빨리 뒤지는 거 알죠? 네 번째 메인 시나리오는 다른 역들과 함께해야 해요. 상당히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으니, 여러분들도 아주 만족하실 거예요!] 
 
다른 역들과 함께 한다는 말에, 사람들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충무로 하나만 해도 이 지경인데, 다른 역까지 끼어들면 얼마나 난장판이 될지는 뻔한 일이다. 비형이 킥킥 웃었다. 
 
[그런데 이 시나리오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결 과제를 수행해야만 해요. 단순히 사람이 많아지면 아수라장만 될 뿐이잖아요? 그러니 여러분들을 통솔해 줄 존재가 필요해요. 즉, 역의 <대표>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대표라. 드디어 시작이군. 
 
[그러니까, 지금부터 하는 게임은 ‘전초전’이에요. 몸풀기 게임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게임 규칙은······ 뭐, 보시면 알겠죠!] 
 
사이하게 웃는 비형이 사라지며, 모두의 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서브 시나리오 ― 대표 선출> 
 
분류 : 서브 
난이도 : C 
클리어 조건 : 플랫폼의 중앙에 설치된 ‘흰색 깃발’을 차지하시오. 
제한시간 : 30분 
보상 : 1000코인, 충무로의 대표. 
실패시 : ― 
 
* 해당 역의 대표는 소속원들에게 강력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 
 
메시지창이 온전히 떠오르기도 전에, 벌써 무장지대를 해제한 공필두가 플랫폼의 중심에 놓인 깃발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과연, 눈치 하나는 귀신 같은 놈이다. 
 
“모두 꺼져!” 
 
폭주기관차처럼 사람들을 밀쳐낸 공필두가, 어느새 흰색 깃발을 앞두고 있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두툼한 놈의 손끝에 깃발이 닿으려는 순간, 내가 입을 열었다. 
 
“공필두, 엎드려!” 
 
[계약 조항에 따라 ‘명령권’이 발동합니다!] 
 
“우와악!” 
 
나는 무너지는 공필두의 등짝을 사뿐히 밟고 뛰어올라 ‘흰색 깃발’을 손에 넣었다. 
 
[깃발꽂이에서 ‘흰색 깃발’을 뽑았습니다.] 
[당신은 충무로역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왕의 길’을 걸을 자격을 얻었습니다.]
 
 
 
 
 
< Episode 10. 미래 전쟁 (1) > 끝

< Episode 10. 미래 전쟁 (2) >
 
 
 
 
 
깃발이 손에 휘감기는 순간 몸속에서 강력한 에너지가 용솟음치는 게 느껴졌다. 원래는 3회차의 유중혁이 가져야 했던 거지만······ 별 상관없겠지. 
그놈이야 원래 세잖아? 
 
[‘김독자’가 ‘흰색 깃발’을 차지하였습니다.] 
[앞으로 5분간 흰색 깃발의 소유주가 변하지 않으면, 충무로역은 그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깃발을 빼앗으면 소유주는 바뀌며, 5분 타이머는 리셋됩니다.] 
 
뒤이어 허공에 타이머가 떠올랐다. 
 
[5:00] 
 
공필두의 안색이 허옇게 질리며 나를 가리켰다. 
 
“깃발을 빼앗아! 5분 안에만 빼앗으면 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연합원들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오호, 그러시겠다? 
이현성이 나를 보았다. 
 
“독자 씨!” 
“현성 씨!” 
 
우리는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내 손에서 날아간 [헤라클레스의 방패]가 이현성의 손에 착, 하고 감겼다. 
 
“이, 이건?” 
“깔쌈한 걸로 하나 뽑았습니다. 이전에 쓰던 건 버리세요.” 
 
이현성의 얼굴에 함지박 같은 웃음이 걸렸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특수 스킬 ‘광역 방어’를 발동합니다!] 
 
헤라클레스의 방패를 중심으로 펼쳐진 반투명한 방어막이, 우리 일행을 조그맣게 둘러쌌다. 
역시, A급 아이템쯤 되면 쓸만한 보조 스킬이 붙어 있단 말이지. 
 
“우왓, 이거 뭐야!” 
 
허공에 생겨난 방어막에 부딪친 사람들이 신음을 흘렸다. 낡은 병장기로 퉁탕퉁탕 방어막을 두드려 보았지만, 고작 E급이나 F급의 장비로 방어막을 부술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연합원들이 의지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필두 씨!” 
“모두 비켜!” 
 
그새 [무장 지대] 레벨이 제법 올라갔는지, 벌써 소규모 무장지대가 공필두의 발밑에 펼쳐지는 것이 보였다. 지대를 국지화해 쿨타임을 줄여 보려는 속셈인가 본데, 제법 머리를 쓰는군. 
이거, 아무래도 제대로 굴려줘야 정신을 차리겠는걸. 
 
“필두야, 내가 아직 일어나라고 안 했는데?” 
“으헉?” 
 
공필두가 바닥에 머리를 쾅, 박더니 다시 한번 납죽 엎드렸다. 
 
[계약 조항에 따라 ‘명령권’이 발동합니다!] 
 
“내가 일어나라고 할 때까지, 바닥에 머리 처박고 있어.” 
 
공필두의 비명에, 당황한 연합원들이 소리쳤다. 
 
“피, 필두 씨?!” 
“이, 이거 일으켜 줘! 빨리!” 
 
들러붙은 연합원들이 허겁지겁 공필두를 일으키기 위해 애썼지만, 워낙 덩치가 큰 공필두라 그런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그 포탑도 거슬리니까 좀 끄고.” 
 
[등장인물 ‘공필두’의 ‘무장지대 Lv.6’가 해제됩니다.] 
 
“이, 이 개새······!” 
“걸레 문 입도 좀 닥치고. 30분만 묵언수행 해라.” 
 
[계약 조항에 따라 ‘명령권’이 발동합니다!] 
 
“읍읍읍읍읍!” 
 
단지 몇 마디에 믿었던 공필두가 무력화되자, 건물주 연합원들은 완전히 패닉에 빠진 얼굴들이었다. 물론 놀란 것은 이현성이나 유상아, 정희원을 비롯한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자, 상황 파악은 다들 하신 것 같고, 이제 이야길 좀 해볼까 하는데······.” 
 
주춤주춤 물러나는 사람들이 보인다. 
대충 숫자를 세어보니 남은 인원은 총 스물 아홉. 
건물주 연합원이 스물, 나와 내 일행을 비롯한 소수 인원이 아홉이었다.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처음부터 인원이 너무 많으면 관리하기 까다롭다. 나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지금 여러분들에겐 두 가지 선택권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 편을 가를 시간이다. 
 
“하나는 충무로를 나가서 다른 역으로 가는 거고. 둘은 저와 같이 이곳에 남는 겁니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그냥 대답만 하세요. 여기에 남을 거냐,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갈 거냐.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에 결정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아니면 여러분들 모두, 목숨이 위험해질 테니까요.” 
 
사람들의 눈동자가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나를 보았고, 누군가는 공필두를 보았고, 또 누군가는 다른 역으로 가는 터널길을 보았다. 시선만으로도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을 때가 있다. 
 
“굳이 떠나겠다는 사람은 잡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남는다면, 여러분들 모두 제 통제에 따라 주셔야 합니다.” 
“통제······?” 
“‘건물주 연합’과 같은 행태는 더이상 용납하지 않습니다. 소수 그룹의 횡포도 허락할 수 없고요.” 
 
슬그머니 눈치를 보던 소수 인원들이 하나둘 내 쪽에 붙기 시작했다. 건물주 연합에 호되게 당했던 그들이야, 차라리 나한테 붙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좋은 판단이다. 연합원들 중 몇 명이 외쳤다. 
 
“결국 네가 왕 노릇 하겠다는 거 아냐!”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래도 누구처럼 세금이나 생존비를 걷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 그룹에 들어가면 우리 안전은 보장되는 겁니까?” 
 
연합원이었던 사내 중 하나가 물었다. 하긴, 세입자들을 그렇게나 괴롭혀 댔으니 그런 걱정을 할 법도 하지. 
 
“외부로부터의 안전은 어느 정도 보장하겠지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까지 간섭하진 않을 겁니다. 개인 간의 다툼은 알아서 해결하셔야 합니다.” 
“그, 그런······.” 
“1분 주겠습니다. 그때까지 모두 결정하세요.” 
 
1분을 모두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이미 사람들은 제각기 결심을 마친 얼굴들이었으니까. 연합원들 중 몇 명은 굳게 결심한 듯 내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비교적 젊은 축들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잘못한 과거가 있긴 하지만, 부디 너그러운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해요. 용서는 저한테 빌어야 할 건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그룹 내의 일부 인원이 당신에게 신뢰감을 보입니다.] 
 
하지만 다른 몇몇 인원들은, 결국 충무로를 떠나기로 결심한 듯했다. 
그들은 쓰러진 공필두를 일으켜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 애썼다. 
나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아, 공필두는 두고 가시죠. 그 녀석은 내 소유거든요.” 
“그게 무슨······!” 
“결정했으면 빨리 떠나시죠.” 
 
냉정한 선언에 다섯 명의 연합원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러섰다. 
 
“강 씨! 정말 같이 안 갈 거야? 그놈 밑에 있어 봐야 좋을 거 하나 없어!” 
“다들 얼른 가자고! 진짜 저놈 따까리로 살 거야? 어떤 놈인지 잘 봤잖아!” 
 
그러나 더 이상의 이탈자는 나오지 않았다. 
욕설을 내뱉은 다섯 명의 사내들이 미련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몇 번 돌아보더니, 이내 명동 쪽 터널길로 나아갔다. 다른 곳에 터전을 잡고 새로운 ‘건물주’가 되려는 속셈이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의 계획은 실패할 것이다. 네 번째 시나리오에서 저런 ‘방랑자’들은 포식자들의 좋은 먹잇감이니까. 
마침 5분이 경과했는지,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서브 시나리오가 종료되었습니다.] 
[1000코인을 보상으로 받았습니다.] 
[흰색 깃발의 효과로 충무로역의 진정한 ‘대표’가 되었습니다.] 
[현재 당신의 무리 : 24명] 
[왕의 칭호를 얻기에 아직 당신의 명성이 미약합니다.] 
 
왕의 칭호라······. 
하긴, 흰색 깃발로 ‘왕’의 칭호를 얻는 건 힘들겠지. 
제대로 된 ‘왕의 길’을 걸으려면 깃발의 색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물론 흰색도 나름대로의 ‘권한’은 있다. 
 
[흰색 깃발의 효과로 충무로 그룹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반발하는 그룹원에게 ‘징벌’을 내릴 수 있습니다.] 
[현재 5명의 탈주 인원이 발생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사내들에게 ‘징벌’의 효과를 조금 보여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공포 정치는 사람들을 다스리는데 유효하지만, 그런 폭정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이현성은 존경스런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고, 유상아와 정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직은 오합지졸의 인원들이지만, 이 정도면 첫 출발로서는 나쁘지 않다. 
잠시 후, 허공에서 비형이 나타났다. 
 
[오호라, 대표가 뽑혔군요. 그럼 이제 본 게임으로 들어가 보자고요!] 
 
[네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활성화되었습니다!] 
 
+ 
 
<메인 시나리오 # 4 ― 깃발 쟁탈전 > 
 
분류 : 메인 
난이도 : C 
클리어 조건 : (내용이 많아 창이 숨겨져 있습니다) 
제한시간 : 12일 
보상 : 2000코인 
실패시 : ??? 
 
+ 
 
나는 클리어 조건을 눌러 보았다. 
그러자 장문의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 
 
[클리어 조건] 
 
1. 모든 역은 ‘깃발 꽂이’를 점거할 수 있는 ‘깃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 깃발은 오직 역의 ‘대표’만이 소지할 수 있습니다. 
 
2. 다른 역의 그룹으로부터 ‘깃발 꽂이’을 지켜야 합니다. 역내의 ‘깃발 꽂이’에 다른 그룹의 깃발이 꽂힐 시 역을 빼앗기며, 역을 빼앗긴 그룹의 처우는 ‘깃발 꽂이’를 점거한 그룹에 의해 결정됩니다. 
 
3. 다른 역의 ‘깃발 꽂이’에 ‘깃발’을 꽂을 수 있습니다. 깃발 꽂기의 권한은 오직 각 역의 ‘대표’에게만 있으며, 도중 무력 충돌로 인해 대표가 사망할 경우 가장 먼저 깃발을 집는 사람에게 ‘대표’의 권한이 양도됩니다. 만약 다른 역의 그룹에게 ‘깃발’을 빼앗길 경우, 깃발을 빼앗긴 그룹의 처우는 깃발을 빼앗은 그룹에 의해 결정됩니다. 
 
4. 정해진 시일 내에 반드시 ‘표적 역’의 ‘깃발 꽂이’를 점거해야만 합니다. 이에 실패할 시, 당신의 그룹원은 전원 사망합니다. 
 
5. 당신의 그룹이 점거해야 할 ‘표적 역’은 [창신역]입니다. 
 
+ 
 
정희원이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깃발이랑 깃발 꽂이를 지키면서, 다른 역에 우리 깃발을 꽂아라, 뭐 그런 말 같은데. 제가 이해한 게 맞나요?” 
“저도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우리가 깃발을 꽂아야 하는 역은 창신역이고요.” 
 
이현성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이어서 내가 말했다. 
 
“그런 것 같네요. 다들 이해력들이 좋으시군요.” 
 
내 말에 정희원이 슬쩍 눈을 흘겼다. 
다 알면서 뭘 모른 척 하냐는 투다. 
하긴, 내가 미래를 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이제 내 모습이 얄미워 보이겠지. 나는 그런 정희원을 향해 씩 웃어주었다. 
유상아가 어깨를 감싸 쥐며 말했다. 
 
“또······ 사람들과 싸워야 하는 건가요?” 
 
잠시 생각하던 이현성이 답했다. 
 
“해당 역의 ‘깃발 꽂이’만 점거하면 그 역의 그룹원에 대한 처우를 결정할 수 있다고 했으니······ 잘만 하면 사상자를 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앗,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역을 빼앗긴다고 해서 바로 사망한다는 말은 없군요? 처우를 결정할 때 해당 역의 그룹원들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예, 누구도 죽지 않고 클리어가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이현성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지만, 그걸 보는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가끔 보면 유상아나 이현성은 무슨 천상의 논리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것 같다. 
 
아무도 죽지 않는 시나리오 같은 건 없다. 
 
네 번째 시나리오는, 지금껏 있었던 그 어떤 시나리오보다도 많은 사상자를 낼 것이다. 
내 마음을 아는 듯, 정희원이 살짝 인상을 쓰며 말을 끊었다. 
 
“창신역이 몇 호선이죠? 일단 그것부터 알아야 할 것 같은데요.” 
 
노선표를 확인한 이현성이 말했다. 
 
“6호선입니다. 터널로만 이동한다면 약수 쪽으로 돌아가서 환승길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럼 그룹을 나눠야겠네요. 몇 명은 이곳을 지키고, 몇 명은 그쪽을 정찰하러 떠나는 게 어떨까요?” 
 
내가 딱히 말하지도 않았는데 활발히 의견 교환을 하는 일행들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흐뭇한 심경이다. 
 
[시나리오 활성화로 인해 ‘충무로역’의 안전 결계가 해제됩니다.] 
[이제 다른 역과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집니다.] 
 
일행들이 제각기 의견을 나누는 동안, 나는 공필두를 향해 다가갔다. 
 
“공필두, 이제 말해도 돼.” 
 
그러나 명령이 해제되었음에도, 공필두는 나를 향해 으드득 이를 갈 뿐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나한테 악감정이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당신도 적응해야지. 건물주였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고.” 
“······.” 
“당신이 왜 그렇게까지 ‘땅’에 집착하는지는 알고 있어. 하지만 적당히 해. 앞으로도 살아남고 싶다면 말이야. 당신에겐 해야 할 일이 있잖아?” 
 
흔들리는 공필두의 눈빛.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은 이곳을 지키는 역할을 맡을 거야.” 
 
공필두는 세 번째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네 번째 시나리오에서도 매우 유용한 말이다. 적어도 공필두가 이곳을 지키는 한, 유중혁급의 미친놈이 오지 않는 이상 충무로는 안전할 테니까. 
 
“내가 왜 네놈 말을······.” 
“이번엔 억지로 명령하진 않겠어. 그리고 네가 내 부탁에 따라준다면, 그만한 보상도 있을 거야.” 
“······.” 
“잘 생각해 보라고. 떨어져 있을 가족 생각도 좀 하고.” 
 
내 마지막 말에 공필두의 눈이 커졌다. 
 
“너, 어떻게······!” 
 
터널 쪽에서 소음이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빠아앙―! 
 
시끄러운 경적 소리와 함께 동역사로 가는 4호선 철길에 헤드라이트가 비쳤다. 
바이크의 엔진 소리와, 매캐한 배기음. 
 
무언가가, 충무로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Episode 10. 미래 전쟁 (2) > 끝

< Episode 10. 미래 전쟁 (3) >
 
 
 
 
 
······시나리오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원작의 내용을 떠올려 보았지만, 이렇게 빨리 침탈이 시작되었던 기억은 없었다. 변수가 나타났다는 뜻이었다. 곧 어둠 속에서 헤드라이트가 꺼지며,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아, 드디어 충무로 뚫렸네.” 
“그 참, 겨우 그런 시나리오 깨는데 오래도 걸린다니까.” 
“야, 조용히 해. 다 들리겠다. 그리고 역마다 시나리오 차이 나는 거 몰라?” 
 
내가 눈짓을 보내자, 일행들이 병장기를 들고 일어났다. 
전투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자리를 선점하는 것이다. 
내가 제일 앞으로 나섰고, 이현성과 정희원이 그다음, 마지막으로 유상아가 따라왔다. 이길영은 아직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내버려 두었다.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둠 속에서 네 명의 남녀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내가 입을 열었다. 
 
“거기 멈추시죠.” 
“엇? 이런, 이런.” 
 
그는 내가 겨눈 칼날을 보고 깜짝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섰다. 하얗게 빛나는 바이크의 외견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병장기를 빼는 소리가 들렸지만, 사내의 목소리가 더 빨랐다. 
 
“잠깐만요. 진정들 하십시다. 이것 참, 무서워서 얘기도 못하겠구만.” 
“무기 내려놓고,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시죠.” 
 
사내는 순순히 자신의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두 손을 든 채 이쪽으로 다가왔다. 불빛이 비치는 곳에서 보니, 사내의 인상은 썩 나쁘지 않았다. 적당히 호감형의 인상. 얇은 눈매가 부드럽게 호를 그렸다. 
 
“너무 경계하지 마십시오. 저흰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그럼 뭐하러 온 겁니까?” 
“일단 제 소개부터 하죠. 저는 ‘동대문 그룹’에서 부대표를 맡고 있는 강일훈이라고 합니다.” 
 
강일훈? 역시 곧바로 떠오르는 인물은 아니다. 
게다가 동대문의 부대표라······ 이거, 뭔가 일이 이상하게 풀리는데.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스킬이 작동하는 걸 보면, 일단 소설 속의 등장인물은 확실한 것 같다. 
 
<인물 정보> 
 
이름 : 강일훈 
나이 : 31세 
배후성(背後星) : 넉살 좋은 잡담꾼 
전용 특성 : 소문 전문가 (일반) 
전용 스킬 : [무기연마 Lv.2], [화술 Lv.3], [소문 퍼뜨리기 Lv.1] 
성흔 : [소란 피우기 Lv.1] 
종합 능력치 : [체력Lv.12], [근력Lv.13], [민첩Lv.13], [마력Lv.10] 
종합 평가 : 불행히도 배후성을 잘못 만나 개화하지 못했지만, 적당한 병졸로 쓰이기엔 준수한 능력치를 가진 인물입니다. 진실과 거짓을 가리지 않고 소문을 퍼뜨리므로, 주의를 요합니다. 
 
소문 전문가라······. 
벌써 이런 놈들이 활개 칠 때가 왔나. 
강일훈이 살짝 초조한 기색으로 나를 보았다. 
 
“그쪽 분은 성함이······?” 
“김독자입니다.” 
“아, 김독자 씨······?” 
 
내 이름을 들은 강일훈의 표정에 일순 의아한 빛이 스쳐 갔다. 
그러나 정말 잠시뿐이었다. 
 
“반갑습니다, 김독자 씨. 깃발을 갖고 계신 걸 보니, 역 대표이신 모양이죠?” 
“그렇습니다.” 
 
그는 내 행색을 유심히 보더니, 이내 주변 일행들을 훑듯이 살펴보았다. 아마 우리 측의 전력을 확인하는 듯했다. 눈썰미가 제법인 녀석이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를 잘못 만났다. 
 
“다 구경하셨으면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하핫. 실례했습니다. 저희 쪽도 안전을 염려할 필요가 있어서 말입니다.” 
 
강일훈은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뭐랄까, ‘좋은 제안’을 드리러 왔다고 하면 어떨까요?” 
 
나는 강일훈 쪽 일행들의 행색을 살폈다. 
놈의 일행들 중 깃발을 가진 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을 어떻게 믿죠?” 
“흠, 규칙을 확인하셨다면 아실 텐데요? 저희가 싸우러 왔다면 대표와 함께 왔을 겁니다. ‘깃발 꽂이’가 가능한 건 각 역의 대표뿐이니까요.” 
 
사실이다. 분명 사실이긴 한데. 
 
“제안이 뭡니까?” 
“저희는 동맹을 요청하러 왔습니다.” 
 
동맹이라는 말에 충무로 쪽 그룹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강일훈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 충무로역은 방금 개방되었을 테니 잘 모르시겠군요. 사실 ‘네 번째 시나리오’는 이미 이틀 전부터 진행 중입니다.” 
“···이틀 전?” 
 
유상아가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강일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세 번째 시나리오는 역마다 내용과 기간이 조금씩 다른데······ 혹시 모르셨습니까?” 
“아······.” 
 
이제 막 세 번째 시나리오가 끝난 참인데, 그런 것까지 알 턱이 없었다. 원작에서도 충무로는 다른 역들에 비해 후발주자로 시나리오에 참가한다. 
즉, 정보 면에서 조금 손해를 보고 시작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일훈의 동맹 제안은 시기적절한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이쪽은 정보가 필요하고, 저쪽은 우리의 힘이 필요하다. 
문제는 저쪽의 흉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인데.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군요. 그쪽에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흐음, 확실히 독자 씨 말씀이 맞습니다. 대뜸 동맹하자는 말부터 꺼내면 믿지 않으실 테니, 먼저 저희 패부터 공개하는 게 좋겠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충무로역’은 저희의 표적 역이 아닙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죠?” 
“믿으셔도 좋고, 안 믿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충무로가 저희 표적이었다면, 본대를 전부 끌고 왔을 겁니다. 솔직히 ‘깃발 꽂이’가 제일 취약한 때는 역이 개방된 직후거든요.” 
 
설득력이 아주 없지는 않군. 
 
“만약 우리 쪽의 표적 역이 ‘동대문’이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하하, 그런 걱정은 없습니다. 저희 역을 표적으로 삼고 있는 역이 어딘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괜히 여러분을 찾아온 게 아닙니다.” 
“일리 있는 소리군요. 각자 노리는 표적 역이 다르니, 서로서로 도와가며 시나리오를 클리어하자······ 그런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럴 땐 서로 돕고 살면 좋지 않겠습니까?” 
 
강일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잠시 침묵하는 사이 입을 연 것은 유상아였다. 
 
“저,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강일훈이 유상아를 향해 씩 웃었다. 
 
“네, 뭐죠 예쁜 아가씨?” 
“왜 충무로로 오셨나요? 동대문에서 오셨다면 다른 역들과도 동맹을 맺을 수 있었을 텐데요.” 
 
뜻밖에도 예리한 지적이었다. 
실제로 강일훈은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 그건······ 말씀드렸다시피 충무로역이 ‘방금’ 개방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음, 다른 역들은 이미 동맹 관계가 형성되어 있거든요. 하지만 충무로는 아닐 거라 생각했고······ 하하,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만, 벌써 동맹을 맺은 역이 있으십니까?” 
 
흐음······. 
 
“아뇨, 없습니다.” 
 
내 말에 강일훈이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저희 동대문과 동맹을 맺으시죠. 분명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무엇보다도 저희에겐 이번 시나리오에 대한 ‘필승 해법’이 있거든요.” 
“필승 해법이요?” 
“예, 사실 저희 그룹은 이번 시나리오의 숨겨진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싱긋 웃어 보인 강일훈이 마지막 못을 박았다. 
 
“자세한 건 저희와의 동맹에 찬성하시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 
 
 
잠시 후, 나는 유상아와 이현성, 정희원을 한데 앉혀 놓고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유상아가 먼저 말했다. 
 
“어떻게 하죠? 일단 저 사람들과 동맹을 맺는 게 좋을까요?” 
“난 반대에요. 저 사람들 못 믿겠어요. ······뭔가 찜찜한 느낌도 들고요.” 
 
정희원이 말하자, 이현성이 곧장 토를 달았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면, 저들과 알아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확실히 희원 씨 말대로 신뢰는 안 가지만······.” 
 
마지막으로 일행들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일단은 말입니다······.” 
 
결정을 끝낸 우리는 충무로역 곳곳을 구경 중인 강일훈과 동대문 그룹을 불러들였다. 
 
“일단 그쪽 대표를 만나 보고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아, 그러시겠습니까?” 
“대표는 어디 있습니까?” 
“동대문 쪽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안내해드려도······.” 
“그렇게 하시죠.” 
 
우리는 그들이 타고 온 바이크의 뒷좌석에 탑승했다. 내가 데려가는 인원은 이현성과 유상아, 그리고 정희원이었다. 이길영은 일부러 공필두 곁에 두고 왔다. [다종 교감] 때문에 심력을 많이 쓴 터라,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길영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걸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부르르릉, 하는 시동 소리와 함께 바이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0초쯤 지났을까. 내가 입을 열었다. 
 
“근데 말입니다, 강일훈 씨.” 
“예?” 
“그 사람들이, 충무로에 대해 다른 말은 안 하던가요?” 
“예? 그게 무슨······.” 
“가령, 거기 가면 ‘유중혁’이란 이름을 가진 엄청 무서운 남자가 있을 거라든가······.” 
“하하, 무슨 말씀이신지 잘······.” 
 
내 말을 신호로, 우리 일행은 거의 동시에 바이크의 뒷좌석에서 점프했다. 
 
“유상아 씨!” 
 
뻗어 나간 유상아의 [실 묶기]가 바이크 네 대의 바퀴살을 한꺼번에 묶었다. 서로 노선이 엉킨 바이크가 굉음을 내며 서로 충돌했다. 
 
콰아아앙! 
 
“으아아악!” 
 
달려나가던 동대문 그룹원들은 그대로 비명을 흘리며 나가떨어졌다. 
다행히 우리 일행은 유상아가 천장에 묶어둔 실을 붙잡고 허공에 안전하게 매달린 상태였다. 일종의 안전벨트라고나 할까. 유상아의 배후성이 스파이더맨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묘기였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바닥을 뒹굴던 강일훈이 외쳤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나는 터널의 앞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습을 하려면 은신 레벨을 좀 더 높혔어야지.” 
 
이건 뭐, [절대 감각]이 없는 나한테도 걸릴 지경이니. 
뭔가 잘못된 것을 눈치챈 강일훈이 소리를 질렀다. 
 
“쳐라!” 
 
그와 거의 동시에, 터널의 사방에 은신하고 있던 인원들이 튀어나왔다. 
그럴 줄 알았지. 역시 내 깃발을 노리고 있었군. 
 
[등장인물 ‘정희원’이 전용 스킬 ‘심판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해당 스킬 사용에 동의합니다.] 
[‘심판의 시간’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어? 안 될 줄 알았는데······ 완전 지들 맘대로 잖아?” 
 
정희원이 의외라는 듯 씩 웃으며 말했다. 
 
“나쁜 놈 찾기 더럽게 힘드네.”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달려간 정희원의 검이 어두운 터널 속을 누볐다. 보이는 것은 [귀살]이 일렁이는 붉은 색 눈동자뿐. 어둠 속에서 핏빛 검광이 몰아치며 사람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뭐, 뭐야!” 
“저 미친년이... 으아아악!” 
 
서걱! 서거걱! 
 
열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숫자였지만, 정희원은 조금도 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베어 나갔다. ‘히든 던전’을 클리어한 후, 정희원의 능력치가 얼마나 상승했는지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나 역시 [백청강기]를 전개해 손쉽게 강일훈을 제압했다. 
몇 시간 전까지 무려 유중혁을 상대하던 몸인데, 이런 잔챙이 하나 제압하는 게 어려울 리 없다. 
 
“독자 씨, 충무로가······!” 
 
이현성의 외침에 뒤를 돌아보니, 충무로에서도 한창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떠나자마자 충무로를 기습한 놈들일 것이다. 나는 유상아에게 부탁해 강일훈을 포박한 후, 곧장 충무로로 달려갔다. 
플랫폼에서는 이미 난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잠깐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새끼들 뭐야!” 
 
명동 쪽에서 달려온 수십 명의 그룹원들이 충무로의 사람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놈들이 들고 있는 무기가 뭔가 익숙했다. 
 
“저, 저거 김 씨가 들고 있던 무기야!” 
 
아무래도 명동 쪽으로 향했던 ‘건물주 연합’은 이미 저 녀석들에게 당한 모양이었다. 하긴, 저놈들에게 그룹을 잃은 방랑자들은 살아 있는 코인 덩어리로 밖에는 안 보일 테니까. 
달려드는 적들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머리에 붉은색 깃발을 두건처럼 두른 녀석이었다. 
 
“제압은 나중에 해! 깃발만 꽂으면 끝난다!” 
 
그렇군. 저놈이 ‘대표’다.
 
 
 
 
 
< Episode 10. 미래 전쟁 (3) > 끝

< Episode 10. 미래 전쟁 (4) >
 
 
 
 
 
“깃발 꽂이 까지만 길을 뚫어!” 
 
달려온 방향으로 봐서, 놈은 ‘명동 그룹’의 대표인 듯했다. 
동대문 쪽과는 이미 손발을 맞추고 있었던 모양. 
 
[명동 대표 ‘김현태’가 ‘적색 깃발’의 부가 효과를 사용합니다!] 
 
벌써 깃발 색깔까지 바꾼 녀석이다. 
게다가 ‘적색’이라. 
 
사실 [깃발 쟁탈전]의 핵심은 바로 깃발의 ‘색깔’에 있었다. 
 
흰색부터 시작해 적색, 남색, 갈색, 보라색, 검은색에 이르기까지. 
깃발들은 색깔이 변할 때마다 점점 더 좋은 부가 효과를 제공한다. 
 
[명동 그룹이 ‘적색 깃발’의 버프 효과를 받습니다!] 
[공격력과 방어력이 각각 5%씩 증가합니다!] 
 
이미 깃발이 적색이라는 것은, 이미 하나 이상의 역을 점거했거나 다른 역의 대표를 죽여 깃발을 빼앗았다는 뜻이겠지. 
눈대중으로 봐도 꽤나 준수한 전투력을 가진 것 같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충무로를 노리다니, 어림도 없지. 
 
[등장인물 ‘공필두’가 성흔 ‘무장지대 Lv.6’를 활성화합니다!] 
[등장인물 ‘공필두’가 ‘사유지 Lv.6’을 활성화합니다!] 
 
공필두는 너무 늦지 않게 움직였다. 
 
“하찮은 새끼들이······!” 
 
혹시라도 굼뜬 기색이 보이면 ‘명령권’을 쓸 생각이었는데, 다행이었다. 
이대로라면 공필두에게 충무로의 수비를 맡겨도 좋을 것이다. 
깃발 꽂이를 향해 달려드는 명동 그룹을 향해, 여덟 개의 미니 포탑이 동시에 불을 뿜었다. 
 
“뭐, 뭐야!” 
“와아아악!” 
 
두두두두두두! 
 
허공에서 터져 나가는 살점들. 
과연, 공필두가 사기는 사기다. 
 
“크으윽! 모두 모여!” 
 
뒤늦게 ‘명동 그룹’의 인원들이 밀집 대형으로 뭉쳤으나, 무려 레벨 6을 돌파한 무장지대의 포탄들을 견디기엔 역부족이었다. 혼자 긴급 방어전을 클리어하도록 내버려 둔 보람이 있는 정경이었다. 
 
쾅! 콰앙! 콰아앙! 
 
얼마나 많은 탄을 퍼부었을까. 
강화 마력탄을 그대로 뒤집어 쓴 명동 그룹원들은 순식간에 벌집이 되어 나가떨어졌다. 
공필두가 적일 때는 무서워도, 아군일 때는 이렇게나 든든하다. 
 
“이, 이런 정보는 없었는데!” 
“후퇴해라!” 
 
그러나 놈들이 도망갈 곳은 없었다. 
 
“어딜 가시려고?”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특수 옵션이 발동합니다.] 
[에테르 속성이 ‘불꽃’으로 변환됩니다.] 
 
촤아아아악! 
 
칼날에서 뻗어 나온 불꽃의 에테르가 녀석들의 도주로에 불의 벽을 만들었다. 당황한 녀석들이 주춤거리는 순간, 공필두의 사격이 이어졌다. 
 
두두두두두! 
 
“뚜, 뚫어! 빨리······ 커헉!” 
 
마력 포탄에 직격당한 명동 대표의 머리 위에서 깃발이 풀어졌다. 
깃발을 발견한 공필두의 눈이 반짝였다. 
하여간 저 자식은. 
 
“또 등짝 밟힐래?” 
 
허겁지겁 달려오던 공필두가 석상처럼 굳어졌다. 
 
“망할놈······.” 
 
단숨에 철길을 달려간 나는 떨어진 명동 대표의 깃발을 주워들었다. 절망한 명동 대표의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져갔다. 
 
[당신은 ‘명동 그룹’의 깃발을 획득했습니다.] 
[당신의 ‘흰색 깃발’이 ‘적색 깃발’의 누적 공적치를 흡수합니다.] 
[당신의 ‘흰색 깃발’이 ‘적색 깃발’로 진화합니다.] 
 
더 강력한 힘이 몸 안에서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왕의 길’에 한 발짝 가까워졌습니다.] 
 
적색 깃발 이후의 깃발들은 대표뿐만 아니라 주변 그룹원들의 능력치까지 향상시켜준다. 
종합 능력치나 S급 이상의 아이템들을 제외하면, 기본 전투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이 바로 이 ‘깃발’이다. 이 때문에, 그룹들은 ‘표적 역’이 아닌 다른 역들까지 노리게 되는 것이다. 
다른 ‘왕 후보’들도 각자 깃발의 색을 바꾸기 위해 이미 본격적인 전쟁에 들어갔을 것이다. 
이 세계는 더 강해질수록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으니까. 
 
[‘명동 그룹’의 남은 그룹원들이 당신의 처우를 기다립니다.] 
 
나는 주변에 너부러져 있는 명동 그룹원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왜 충무로를 노렸지?” 
 
강일훈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뭔가 찜찜했다. 
충무로가 개방된 걸 알게 된 건 그렇다 쳐도, 그렇게 기다렸다는 듯 들이닥치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행들을 관찰하던 묘한 시선도, 게다가 대표가 나라는 걸 알았을 때 놈이 짓던 이상한 표정도······. 
 
이놈들은, 처음부터 이 역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목에 칼날을 가져다 댄 채 물었다. 
 
“말해, 누가 너희에게 ‘충무로’의 정보를 알려준 거냐?”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역시 <선지자들>일 거라 생각했다. 
극장 던전에서 만났던 사내들이 언급했던, 남들이 모르는 ‘히든 정보’를 알고 있는 녀석들. 
혹시나 해서 ‘멸살법’의 텍본을 꼼꼼히 검색해 보기도 했지만, 역시나 ‘선지자들’이란 이름이 등장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인가. 
 
가설은 둘이다. 
 
하나는 내가 모르는 어떤 변수로 인해, ‘안나 크로프트’를 제외한 새로운 예언자가 등장했다는 것. 
그리고 둘은······ 나 말고도, 또 다른 ‘독자’가 있다는 것. 
 
솔직히 나는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예언자’ 특성은 그렇게 쉽게 개화하는 게 아니니까. 더군다나 <선지자들>이라는 복수형의 이름도 그렇고······. 
뭐, 확실한 건 지금부터 알아보면 되는 거니까. 
나는 공필두를 보며 말했다. 
 
“근데······ 좀 적당히 하지 그랬냐?” 
“무턱대고 덤비는 놈들한테 무슨 자비를 베풀어?” 
 
공필두가 짜증을 냈다. 
아쉽게도, [명동 그룹]의 녀석들은 탄환을 너무 많이 맞은 탓인지 도저히 대답을 할 상태가 아니었다. 뭘 물어보기가 무섭게, 녀석들은 전부 피를 토하며 죽어 버렸던 것이다. 
결국 물어볼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이현성이 들쳐 메고 온 강일훈을 내려다보았다. [실 묶기]에 포박당한 녀석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유상아가 물었다. 
 
“처음부터 모든 게 계획이었을까요?” 
“높은 확률로 그럴 겁니다. 역이 개방되자마자 두 그룹이 연합해서 공격해왔어요. 사전 약속이 되어 있었다는 얘기죠.” 
“그렇게 선한 얼굴로 다가와서는······.” 
 
유상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쉬우십니까? 동맹을 못하게 되어서요.” 
“······조금은요.” 
“사람 너무 믿지 마세요. 앞으로도 상아 씨 생각처럼 일들이 쉽게 풀리진 않을 거예요.” 
“알아요. 그래도······ 가능하면 믿고 싶었어요. 사람을 믿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요.” 
 
유상아는 나를 보며 말했다. 
 
“저기, 두 사람 언제까지 떠들 거예요? 빨리빨리 정보부터 캐내자고요.” 
 
불쑥 정희원의 핀잔이 끼어들었다. 
하긴, 지금 인생 충고나 할 때가 아니지. 
나는 강일훈의 입을 막고 있던 실타래를 풀어주었다. 
강일훈은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이제 저를 어떻게 하실 거죠?” 
“그건 네가 얼마나 쓸 만한 정보를 뱉느냐에 달렸지.” 
“쓸 만함의 기준은 당신이 정하는 겁니까?” 
 
생각보다는 제법 강단이 있는 녀석인지, 이 상황에서도 말대답을 한다. 그렇다면 강경책을 쓰는 수밖에 없는데······. 
정희원이 말했다. 
 
“어차피 성좌들도 ‘악인’이라 규정한 놈인데, 고문이라도 해볼까요?” 
“뭘 귀찮게 고문까지 합니까. 말 안 하면 그냥 죽여버리면 되죠.” 
“네?” 
 
나는 망설임 없이 칼을 뽑아 들었다. 강일훈이 부들부들 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지금부터 셋을 센다. 셋 안에 입을 안 열면, 너는 죽어. 번복은 없다.” 
 
나는 일부러 [백청강기]를 발동해 지면에 칼을 푹 꽂아 넣었다. 
 
“하나.” 
 
까드드드득! 
 
[백청강기]의 힘으로 지면이 갈려 나가며, 녀석을 목을 향해 칼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닥의 파편이 녀석의 얼굴에 튀었다. 
 
“둘.”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칼날의 열기가 녀석의 얼굴을 데우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에테르 블레이드는 놈의 눈알을 자를 것이다. 
 
“세······.” 
“동묘앞!” 
 
나는 씩 웃었다. 
고문? 그런 건 필요 없다. 
숨을 헐떡이는 강일훈이 외쳤다. 
 
“···도, 동묘앞에 충무로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 자들이 있습니다.” 
 
동묘앞이라, 거기에 누가 있더라? 
 
“그게 누군데?” 
“자, 자기를 <선지자들>이라 부르는······.” 
 
그런데, 놈의 상태가 이상했다. 서서히 눈이 뒤집히기 시작한 녀석이 급기야 죽은 사람처럼 혀를 꺼내 물었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설마, [암시]가 걸려 있었나? 
 
“유상아 씨, 실타래로 이 녀석 입 막아요!” 
 
녀석의 턱이 닫히기 전에, 다행히 유상아가 소환한 실타래가 녀석의 입을 틀어 막았다. 살짝 소름이 끼쳤다. [암시]까지 사용해서 정보를 통제하고 있었을 줄이야······ 내 생각 이상으로 치밀한 녀석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리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암시]는 면대면으로 얼굴을 본 상대에게만 걸 수 있는 스킬. 
나는 강일훈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운이 좋은 녀석이군요.” 
 
적어도 이 녀석이 있으면, 놈들 중 하나는 확실히 특정할 수 있다. 
 
 
* 
 
 
본격적인 탐색에 나서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극장의 옥상에 들렸다. 
 
“아직 그 자식 안 깨어났어?” 

내가 오는 줄 몰랐는지, 이지혜가 흠칫 몸을 떠는 게 보였다. 유중혁은 여전히 기절한 채 이지혜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자식이, 주인공 주제에 팔자도 좋지. 
독자인 나도 지금 피곤해 뒤지겠는데. 
 
“아래층은?” 
“걱정하지 말고 쉬어.” 
“우리 사부······ 이제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트라우마가 좀 남을 수도 있지만.” 
“······트라우마?” 
“그 자식 보기보다 정신상태가 허약하거든. 푹 자면 좀 나아질 테니까 조금만 더 수고해줘.” 
“엄청 잘 아는 것처럼 말하네.” 
“세상에서 제일 잘 알지.” 
 
나는 건성으로 답하며 품속에서 메모지를 꺼내 볼펜으로 단어들을 써 나갔다. 나는 꽉 채운 메모지를 딱지 접어 이지혜에게 건넸다. 
 
“넌 읽지 말고, 있다가 유중혁 일어나면 줘라. 알겠지?” 
“···알겠어.”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지혜라면 읽어 볼 게 뻔하다. 
어차피 유중혁만 알아들을 단어들을 툭툭 던져 놓은 식이라 머리 나쁜 이지혜는 봐도 이해 못 하겠지만. 
그나저나, 이 메모지의 정보도 성좌들에겐 ■■■로 보이려나?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를 싫어합니다.] 
 
그렇구만. 
돌아서려는데, 이지혜가 입을 열었다. 
 
“근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뭐?” 
“저기, 아까 새벽에 말야. 우리 사부랑 아저씨랑······.” 
 
왠지 이지혜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젠장, 정희원도 모자라 이지혜까지 들었던 건가? 
나도 참 멍청하다. 성좌들만 고려하고 있다가 정작 옆에서 듣고 있던 인간들을 생각하지 못했으니. 저 유중혁도 멍청하다며 비웃을 일이다. 
뭐라고 변명하면 좋지? 
 
“그, 뭐냐. 둘이 있잖아.” 
“뭐.” 
 
일단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그러자 이지혜의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그러니까, 아까 막 그랬잖아 아저씨가.” 
“그니까 뭐.” 
“정신 차려 새끼야! 그딴 감상에 빠지지 않기로 했잖아!” 
 
이지혜가 짐짓 내 목소리를 흉내 내며 외쳤다. 
그 말을 갑자기 남의 입으로 들으니, 부끄러워 미칠 것 같다. 
 
“처음으로, 그······ 그, 했을 때의 각오! 벌써 다 잊어버렸냐?” 
“······?” 
 
뭔가 이상한데? 이 자식, 거의 필터링 된 수준으로 들었잖아? 
 
“내가 뭐 때문에 널 따라왔는데! 네가 왜 혼자야? 우린 함께라고!” 
“아니 잠깐만.” 
“네 곁엔 늘 내가 있잖아! 희망을 잃지 마! 우리 아이를 생각해!” 
“그런 이야기는 안했······.” 
“내가 왜 너 때문에 여기까지······!”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잠시 이지혜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걸 어떻게 들으면 그따위로 들리지? 
 
“여, 역시 그런 거지? 아저씨랑, 우리 사부랑, 그러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니 맘대로 생각해 인마.” 
“······역시. 걱정 마, 이 연애편지는 내가 꼭 전해줄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돌아섰다. 
등 뒤에서 이지혜의 헛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잠깐만! 근데 아이는 어떻게 낳은 거야?” 
“유중혁한테 물어봐라.” 
 
그래, 유중혁 모든 건 너에게 맡긴다. 
다음 순간, 머릿 속에서 간접 메시지들이 폭발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필터링의 정체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취향을 존중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들의 전우애를 좋아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어이없어합니다.] 
[6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젠장, 멍청이들이 또 있었군. 
 
어쨌든 이것으로 유중혁에게 전해야 할 것은 전했다. 
나는 극장을 내려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유중혁이 잠자는 숲속의 왕자님을 찍을 동안, 놈이 가져야 했던 이득을 대신 취하려면 시간이 부족했다.
 
 
 
 
 
< Episode 10. 미래 전쟁 (4) > 끝

< Episode 10. 미래 전쟁 (5) >
 
 
 
 
 
극장에서 내려온 후, 나는 이현성과 유상아를 데리고 곧장 명동역으로 향했다. 동묘역도 중요하지만,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명동 대표를 죽여 깃발을 빼앗았으니, 서둘러 빈 역을 점거해야 했다. 
이현성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이 인원으로 가도 괜찮겠습니까?”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처우를 결정하러 가는 겁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그 사람들은 금방 죽어요.” 
 
그룹을 잃은 ‘방랑자’는 어지간히 운이 좋지 않은 이상 다른 그룹의 먹잇감이 된다. 충무로역을 떠난 연합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명동역에 도착한 순간, 우리는 뜻밖의 광경을 보았다. 
 
명동역의 사람들은, 이미 누군가에게 당한 직후였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명동역의 [깃발 꽂이] 근처를 서성이던 특공복의 사내들이 나를 보았다. 
사내들은 화들짝 놀라며 회현 쪽으로 빠르게 달아났다. 역시나, 바이크를 가지고 있어서 쫓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마치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움직임.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현성이 물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죠? 어떻게 된 걸까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독자 씨도 모르는 일이라니······.” 
 
이현성이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그나마 다행히도, 명동역의 [깃발 꽂이]는 비어 있었다. 
 
[현재 ‘명동역’을 점거한 그룹이 없습니다.] 
[역을 점거하시겠습니까?] 
 
나는 ‘깃발 꽂이’에 등에 메고 있던 깃발을 꽂았다가 다시 뽑았다. 
그러자 그 자리에 내 깃발과 똑같은 형상의 깃발이 나타났다. 
 
[‘명동역’을 점거하였습니다.] 
[한 번 빼앗은 역은, ‘본진’을 빼앗기거나 깃발을 빼앗기기 전까지는 빼앗기지 않습니다.] 
[현재 점거지 : 충무로(본진), 명동] 
[‘적색 깃발’의 공적치가 상승합니다.] 
 
깃발의 적색이 더욱 진하게 변했다. 
 
[새로운 역을 점거하여 당신의 세력이 확장되었습니다.] 
[히든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왕의 길’이 시작됩니다!] 
 
+ 
 
<히든 시나리오 ― 왕의 길> 
 
분류 : 히든 
난이도 : A 
클리어 조건 : 기간 안에 최소 10개 이상의 역을 점거하시오. 
제한시간 : 10일 
보상 : ‘왕’의 특성 개화 
실패시 : 하루에 최소 1개 이상의 역을 점거하지 못할 시, 당신과 당신의 그룹원은 모두 사망합니다. 
 
+ 
 
드디어 끔찍한 히든 시나리오가 도착하셨다. 
한 번 이 퀘스트를 시작한 이상,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왕’의 운명은 어차피 둘 중 하나인 것이다. 
왕이 되거나, 죽거나. 
 
[새로운 ‘왕’ 후보가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깃발 쟁탈’의 시작이다. 
 
 
* 
 
 
충무로로 돌아온 뒤, 나는 일행들을 불러 모아 내가 받은 히든 시나리오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정희원은 흥미롭다는 표정이었고, 이현성은 착잡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유상아는 늘 그랬듯,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너무 어려운 시나리오 같은데······ 독자 씨,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습니다.” 
 
천사인 건지, 바보인 건지······. 이런 상황에서도 내가 히든 시나리오를 받은 걸 부러워하기는커녕,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 
이현성이 말했다. 
 
“그래도 독자 씨가 왕 후보라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앞으로 폐하라고 불러야 합니까?” 
 
진지한 이현성의 말에 내가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건 바라지 않습니다.” 
“어이구 폐하, 히든 시나리오 내용이 맞다면 지금 당장 새로운 역을 점거하러 가야 할 것 같은데요? 모쪼록, 신하들의 목숨을 생각하신다면.” 
 
정희원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우릴 공격한 놈들에 대해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곧바로 동묘앞까지 직행할 테니, 정희원 씨랑 이현성 씨가 함께 가 주시겠어요?” 
 
내 말에 유상아가 조그맣게 손을 들었다. 
 
“그럼 저는······.” 
“유상아 씨는 이곳에 남아주세요.” 
“아, 역시······ 그러는 편이, 더······.” 
 
유상아의 풀 죽은 목소리를 듣자니, 아차 싶었다. 
아마, 유상아는 자신의 쓸모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정희원처럼 공격력이 강하지도 않고, 이현성처럼 체력이 높지도 않으니까. 게다가 길영이처럼 강력한 한 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유상아 씨.” 
“······네?” 
 
그녀가 가졌던 모든 ‘스펙’은, 이제 새로운 세계에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누군가를 질투하기엔 너무 착했다. 그러니, 그녀의 열등감은 속에서 조용히 곪아가고 있을 것이다. 
 
“유상아 씨, 모두가 같은 일을 잘 할 수는 없습니다.” 
“네, 알고 있어요.” 
 
유상아가 힘없이 웃었다. 
나는 최대한 훈계하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조심스레 말했다. 
 
“지하철에서 했던 말 아직 기억하십니까? 독자에겐 독자의 삶이, 그리고 상아에겐······.” 
“상아의 삶이 있어요. 네, 기억해요. 스마트폰 메모장에도 적어뒀는 걸요.” 
 
그렇다고 그렇게 금세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면 어쩌자는 건지······. 
아무튼 미워할 수는 없는 인물이다. 나는 말을 이었다. 
 
“유상아 씨는 여기서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기절한 길영이를 저대로 방치해 둘 수는 없습니다. 혹시나 공필두가 딴짓을 할지 모르니 감시할 사람도 필요하고, 불안해하는 그룹원들을 통솔할 사람도 필요합니다.” 
 
유상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게다가 회현쪽 세력도 견제해야 합니다. 저희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놈들이 급습할 수가 있으니까요. 공필두가 있긴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유상아 씨의 [실 묶기]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제, 제가 그런 역할을 잘 할 수······.” 
 
유상아가 또 약한 말을 스스로 내뱉고 자괴감에 빠지기 전에, 내가 말을 끊었다. 
 
“저,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유상아 씨에게 직위를 하나 줄까 합니다만. 다른 분들 생각은 어떠십니까?” 
 
잠시 생각하던 이현성과 정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유상아 씨라면 믿을 수 있습니다.” 
“왕이시여······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소서······.” 
 
나는 정희원을 잠시 노려보았다. 
지금 저게 재밌다 이거지? 
 
[대표의 고유 권한을 사용합니다.] 
[충무로역 대표 ‘김독자’가 그룹원 ‘유상아’에게 권한의 일부를 양도하였습니다.] 
[그룹원 ‘유상아’가 충무로역의 ‘부대표’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그룹원 ‘유상아’는 대표를 대신해 그룹원에게 ‘징벌’을 내릴 수 있습니다.] 
 
얼떨떨한 눈으로 나를 보던 유상아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저, 제가 이, 이런 직위를 받아도······.” 
“유상아 씨니까 맡기는 겁니다.” 
 
내 말은 진심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모두가 같은 일을 잘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유상아라면, 분명 이 일에 적합할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인사과 최고의 인재였던 유상아니까. 
 
“아······ 최선을 다할게요.” 
 
고개를 숙였던 유상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슬쩍 눈물이 비친 모습이었다. 
 
 
* 
 
 
우리는 곧장 동역사 쪽 터널로 향했다. 
동묘앞까지는 앞으로 세 정거장. 우리는 기절한 강일훈을 데리고 움직이기로 했다. 솔직히 데리고 가는 것 자체가 짐이긴 하지만, 그래도 놈들의 얼굴을 특정하려면 이 녀석이 필요했다. 문득 멀어지는 충무로를 돌아보니, 유상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러분, 잠깐 모여 주세요!” 
 
역시, 유상아는 안 보이는 곳에서 더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다. 벌써 인원 편성을 끝냈는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지시를 하달받는 소리가 들렸다. 보초도 세우고, 각 분야의 담당도 꾸리고. 아무래도 건물주들이다 보니 유상아 말을 안 듣는 꼰대들도 있겠지만······. 
 
[충무로역 부대표 ‘유상아’가 ‘징벌’을 사용했습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누군가의 신음. 
······괜찮겠지? 그래, 괜찮을 거야. 
내 표정을 보던 정희원이 말했다. 
 
“잘 하셨어요. 안 그래도 유상아 씨 조금 침울해 보였는데.” 
“딱히 유상아 씨 기분을 고려한 선택은 아닙니다. 제가 아는 유상아 씨라면 정말 잘 해낼 거라 생각했을 뿐이죠.” 
“아, 그래요? 그럼 저도 나중에 뭐 하나 주세요. 어울릴 만한 걸로.” 
“망나니는 어떻습니까?” 
“······됐어요.” 
 
정희원이 투덜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계속 장난이나 치더니, 꼴 좋군. 
 
“근데 그 옥상에 있던 양아치, 그냥 두고 와도 괜찮아요?” 
“아, 유중혁 말입니까?” 
“그런 비슷한 이름이었던 것 같네요.” 
“아마 괜찮을 겁니다.” 
“엄청 잘 아는 것처럼 말하네요? 무슨 사이에요?” 
“그건······.”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희원 씨, 혹시 동생 있어요?” 
“······? 네. 왜요?” 
“남동생 아님, 여동생?” 
“남동생이요.” 
“몇 살인데요?” 
“올해로 중1이요.” 
“동생 있으면 어때요?” 
“짜증나죠. 귀찮고, 걸핏하면 대들고······ 학교에서 사고 치는 바람에 엄마 대신 간 적도 있고······.” 
 
한참이나 동생 욕을 하던 정희원의 말꼬리가 잦아들었다.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하는 정희원을 보며 내가 물었다. 
 
“그래도 지금은 걱정되죠?” 
“뭐······ 어쨌든 가족이니까요.” 
“저도 비슷해요.” 
“독자 씨도 동생이 있었어요?” 
“아뇨, 유중혁 얘깁니다.” 
“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정희원이 나를 보았다. 
 
“그래서 좋다는 거예요, 싫다는 거예요?” 
“싫어요. 그 자식 때문에 여러 사람이랑 싸웠거든요.” 
 
멸살법이 연재될 초반만 해도 멸살법의 독자가 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초반 10화까지는 호기심 때문인지 사람들이 꽤 따라왔었고, 50화까지도 12명이나 따라 왔었다. 
그땐 나도 김남운 못지않은 녀석이었는데······ 나도 참 사람 됐지. 
그때 나랑 댓글로 싸웠던 녀석들은 잘 있으려나 모르겠네. 
어쩌면 내가 지금 잡으러 가는 녀석이 그놈들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 
 
“두 분, 많이 친해지신 것 같습니다.” 
 
이현성의 말에, 문득 정희원과 너무 붙어서 걷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정희원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왜요, 군인 아저씨. 부러워요?” 
“흠. 딱히 그런 게 아니라······.” 
 
그러고 보면 이현성 설정이 남중 남고 공대 군대 테크였나? 새삼 설정값을 떠올리니 이현성이 불쌍해진다. 
 
“동역사에 도착한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멀리서 동역사의 플랫폼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긴장하며 터널 벽에 붙어 조금씩 안쪽을 정탐했다. 혹시나, 병력이 대기하고 있을 것을 대비해서였다. 하지만 우려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정희원이 말했다. 
 
“이상하네요. 보초 하나 없고.” 
 
[깃발 쟁탈전]이 진행 중인데 보초가 없다는 것은, 이미 이 역이 다른 그룹에게 먹혔다는 뜻이었다.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우리는 곧바로 동역사의 ‘깃발 꽂이’를 향해 다가갔다. 
 
[해당 역은 이미 ‘동묘앞역’에 의해 점거 중입니다.] 
[해당 역을 차지하고 싶다면, ‘동묘앞역’의 깃발을 빼앗거나 깃발 꽂이를 먼저 점거하십시오.] 
 
역시나. 
기절해 있던 강일훈의 몸이 꿈틀거린 것은 그때였다. 갑자기 몸을 부들부들 떨길래 또 발작이 시작된 건가 싶었는데,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입을 막고 있던 실타래를 풀어 줬더니, 강일훈이 소리쳤다. 
 
“아, 안 돼······!” 
“······갑자기 뭐야?” 
“도, 동대문······ 동대문역이······!” 
 
말을 더듬는 강일훈의 입에서 주룩주룩 침이 흘러내렸다. 
설마 하는 느낌에, 나는 무심코 그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등장인물 ‘강일훈’은 현재 ‘방랑자’ 상태입니다.] 
 
방금 전까지 분명 ‘동대문’ 소속이었던 강일훈의 소속이 달라져 있었다. 
정희원이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래도 동대문 역이 점거당한 것 같습니다.” 
“······에?” 
 
갑자기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그런가. 
정보를 흘린 놈들은, 처음으로 이럴 속셈이었구나. 
 
“······이중 트랩이었군.” 
 
명동 그룹과 동대문 그룹을 부추겨 충무로를 치게 만든 놈들은, 처음부터 이들이 ‘충무로’에서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전력이 빈 사이, 놈들은 명동과 동대문을 차지하려 했던 것이다. 아마 명동에서 만났던 정체불명의 특공복들도 그들 중 하나겠지.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이길 줄 알고 있었을까? 
내 존재를 알고 있었을 리가 없는데? 
본래의 3회차에서 ‘충무로역’의 대표였던 자는······. 
······아, 그렇군. 이 개자식들이. 
그걸 노린 거였나? 
 
이걸로 확실해졌다. 
이 계획을 짠 <선지자들>이란 녀석들은, 틀림없이······. 
이현성이 반응한 것은 그때였다. 
 
“사람들이 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동대문으로 향하는 터널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상당한 수준의 병장기를 갖춘 무리들이었다. 
평균 C급 이상은 되어 보이는 아이템들. 일반 업적 달성으로 벌써 저 정도 무장을 갖추기란 쉽지 않을 텐데······ 심상치 않은 전력이었다. 
우리를 향해 먼저 말을 건 것은 무리의 중심에 있던 사내였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팔과 목에 온갖 종류의 아이템들을 두른 사내. 
 
“엇, 강일훈 씨? 이런, 쓸데없는 걸 주렁주렁 달고 오셨군요.” 
 
부들부들 몸을 떨던 강일훈이, 그대로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그렇다는 건, 혹시 저 녀석이?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 놀라운 메시지가 들려왔다. 
 
[해당 인물의 정보는 ‘등장인물 일람’으로 열람할 수 없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이것 봐라? 
사내의 시선이 우리를 보았다. 
 
“그쪽 분들은 자기소개를 하실 건가? 아니면······.” 
 
사내의 말에 무리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꺼내들었다. 
내가 앞장서서 대답했다. 
 
“우린 충무로에서 왔다.” 
“충무로?” 
 
그 순간, 파지직― 하고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특성 탐색’을 사용합니다.]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특성 탐색’을 차단합니다.] 
 
정신적 충격을 받은 듯, 사내가 일순 몸을 휘청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남자가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향해 물었다. 
 
“······죄송하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정희원을 한 번 보고, 이현성을 한 번 보았다. 
그런 후, 씩 웃으며 사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가장 냉엄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나는 유중혁이다.”
 
 
 
 
< Episode 10. 미래 전쟁 (5) > 끝

< Episode 10. 미래 전쟁 (6) >
 
 
 
 
 
착각이 아니었다. 
내 이름을 들은 녀석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설마······?” 
 
놈이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멸살법’에 유중혁에 관한 묘사가 얼마나 나왔더라? 자세한 외양은 안 적혀 있지만, ‘잘 생겼다’라는 표현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 얼굴은······ 
그래도 이 정도면 소설적 허용으로 참작되는 거 아니냐? 
 
“왜 그러지?” 
“아, 아닙니다.” 
 
녀석의 말투가 한층 공손하게 변해 있었다. 모르긴 해도, 놈의 머릿속은 지금 한창 복잡한 상태일 거다. 
 
적어도 한 가지는 틀림없다. 
눈앞의 이 녀석은, 분명 ‘멸살법’을 읽은 놈이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지 않은 것도 그렇고, ‘유중혁’이라는 이름을 듣고 놀라는 것을 보면 더욱 확실하다. 
놈의 다급한 눈길이 내 곁의 이현성에게 돌아갔다. 
[특성 간파]······ 그렇군. 정보를 캐시겠다? 나는 일부러 놈이 이현성을 적당히 관찰할 시간을 준 후 입을 열었다. 
 
“건방진 놈. 눈알 조심해서 굴리는 게 좋을 거다.” 
“······헉?” 
 
이걸로 놈은 이현성의 이름을 확인했고, [특성 간파]로 내 특성창을 엿볼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멸살법’을 얼마나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중혁의 얼굴을 모르는 놈이 심증으로 쓸 수 있는 것은 몇 개 되지 않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만능 탐지 및 탐지 방어가 가능한 SS급 스킬, [현자의 눈]이다. 그리고 이제, 녀석은 내가 [현자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고작 B급 스킬로 엿보면 모를 줄 알았나?” 
 
녀석의 눈동자에서 시작된 경련이, 이내 얼굴 전체로 번져갔다. 
헤매던 녀석의 눈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내가 등에 짊어진 충무로의 ‘적색 깃발’. 그렇겠지. 정확히 거기까지가, 네놈이 찾을 수 있는 ‘유중혁 증거’의 한계치일 테니까. 
 
“근데 이 새끼가······!”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했는지, 전방에 있던 사내들 중 하나가 나를 향해 위협적으로 창을 겨누었다. 정희원과 이현성이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퍼억! 
 
창을 든 사내의 머리가 터지며,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순간 움츠러드는 무리들의 비명. 후두둑 떨어지는 피보라의 너머에서 표정을 심각하게 굳힌 녀석이 보였다. 
 
······이 자식 봐라? 
 
녀석은 무리를 헤치고 천천히 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죄송합니다. 귀인 앞에서 못난 광경을 보였군요.” 
“네놈은 뭐냐?” 
 
차가운 말투에, 녀석이 애써 표정을 관리하는 게 보인다. 제법 용쓴다. 하긴, 내가 너라도 지금 심장이 터질 것 같을 거다. 
 
“정식으로 소개 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이성국. 동묘앞역의 ‘부대표’를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녀석이, 내 앞에서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마음에 든다. 
그럼 어디 본격적인 유중혁 코스프레를 시작해 볼까. 
나는 놈을 한 번 쏘아 봐준 후, 냉혹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동묘앞? 그렇군. 그럼 이제 꺼져라.” 
“······예?” 
“여긴 지금부터 내 역이니까, 내놓고 꺼지란 말이다.” 
 
놈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게 무슨······.”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모양이지?” 
 
나는 동묘앞의 ‘깃발’이 꽂혀 있는 ‘깃발 꽂이’를 내려다보았다. 
뒤늦게 이성국이 내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 그건 불가능합니다. 이미 차지한 역은 양도할 수 없습······.” 
“내가 바본 줄 아나? 네놈 부대표잖아.” 
“예?” 
“부대표 이상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 역은 임의로 양도할 수 있다. 그것도 모르고 있었나?” 
“······!” 
“셋 셀 때까지 내놓지 않으면, 네놈들 목을 자르겠다. 하나.” 
 
이성국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사내들이 천천히 나를 둘러싸며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다. 
정희원과 이현성은 내가 왜 갑자기 이런 미친 짓을 벌이는지 몰라 초조한 기색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농담처럼 들리는 모양이지? 둘.” 
 
10년 전에 읽으셔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신가? 
유중혁이 어떤 놈인지 까먹은 모양이군. 
그럼 내가 친히 되살려 주마. 
 
[전용 스킬, ‘백청강기 Lv.2’를 발동합니다!] 
[‘신념의 칼날’을 발동합니다!] 
 
기이이이잉! 
 
칼날에서 새하얀 섬광이 타오르는 것을 보며, 이성국의 낯빛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이것은 치킨 게임이다. 
유중혁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놈이 어떤 녀석이었는지 조금은 알고 있다는 뜻. 
초반의 유중혁이 얼마나 무자비한 녀석인지 안다면, 놈은 절대로 이 승부를 계속할 수 없다. 
만약 놈이 유중혁을 제대로 모르는 놈이라면? 
그럼 그것대로 상관없다. 
뭣하면 한 판 붙으면 되고, 질 것 같으면 도망가면 된다. 
지금의 나라면, 그 정도 여력은 충분히 있다. 
그때, 이성국이 급하게 외쳤다. 
 
“자, 잠깐만요! 드, 드리겠습니다!” 
 
자식, ‘멸살법’을 읽긴 읽었네. 
그런데, 제대로 읽진 않았어. 
 
“필요 없어.” 
“······예?” 
“네놈은 너무 늦게 대답했다.” 
“예?” 
“여기 하나론 부족해. 동대문도 내놔라.” 
 
곁의 정희원이 경악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 막 나가도 되느냐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막 나가도 된다. 
아니, 막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유중혁이니까. 
내가 유중혁이라는 걸 믿게 만들기 위해서는, 더욱 말도 안 되는 깽판을 놓아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이성국을 향해 검을 겨누며 말했다. 
 
“내놓지 않으면, 거래는 없던 것으로 하겠다.” 
“하, 하지만······!” 
“다시 셋 센다. 하나.” 
 
이성국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변해갔다. 
내가 유중혁이라고 믿기 시작했으니, 아마 속이 타들어가는 심정일 것이다. 여기서 주인공이랑 적이 되면 어떤 꼴이 될지 빤한 이야기니까. 
과연 놈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여기서 임기응변이 어떠냐에 따라, 앞으로 나와 이 녀석들과의 관계도 정해질 것이다. 
 
“도, 동역사까지는 제 권한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동대문까지 넘기는 것은 제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 대표님을 만나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훌륭한 대처다. 
내가 딱 원하는 수준의 먹잇감이랄까. 
이성국은 계속해서 입을 나불거렸다. 
 
“유중혁 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대표님이라면, 유중혁 님을 만나시는 걸 크게 고대하고 계실 겁니다. 부디, 저희 그룹이 유중혁 님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나를 알고 있다고?” 
“어떻게 유중혁 님을 모르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던 이성국이 순간 핫, 하고 입을 가렸다. 자기도 뭔가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겠지. 아직 유중혁이 유명해지긴 이른 시기니까. 
 
“아, 아무튼 동행해주신다면, 일생의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나는 녀석을 지그시 노려봐주다가 대답했다. 
그래, 이 정도면 합격이다. 
 
“좋아, 안내해 봐.” 
 
이성국의 표정이 급격하게 밝아지더니, 쓸데없는 소리를 덧붙였다. 
 
“혹시라도 사소한 걱정은 마십시오. 제가 모시는 [왕의 명예]를 걸고, 유중혁 님께 일말의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동묘앞 역 부대표 ‘이성국’이 ‘왕의 명예’를 걸었습니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길 시, 이성국은 스스로 징벌형에 처해질 것입니다.] 
 
성급한 녀석이군. 하지만 내가 정말 유중혁이라고 생각했다면, 놈은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다. 내 예상보다 초반부 유중혁에 대한 이해도가 출중한데? 
그럼 그에 맞게 보답을 해줘야지. 
 
“내게 해를 끼쳐? 네놈들이?” 
“물론 저희가 다 덤벼도 유중혁 님의 손가락 하나 건드릴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하, 하하. 저, 그럼······ 이쪽으로.” 
“잠깐만.” 
“예?”

나는 동역사의 ‘깃발 꽂이’를 가리켰다. 
 
“이건 주고 가야지.” 
“······.” 
 
[‘동대문 역사문화 공원’을 양도 받았습니다.] 
[현재 점거지 : 충무로(본진), 명동, 동대문 역사문화 공원] 
[‘적색 깃발’의 공적치가 상승합니다.] 
 
눈앞에서 바뀌는 역의 깃발. 
시작이 아주 좋다. 
아니,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거야? 
 
“그럼 가자고.” 
 
부들부들 어깨를 떠는 이성국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진다. 
이대로 유중혁으로 계속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 
 
 
잠시 후, 우리는 이성국의 안내를 받아 동묘앞 역으로 진입했다. 
내 정체를 알지 못하는 동묘앞 그룹 녀석들은 수군거리는 눈치였지만, 이성국의 태도가 워낙 완강해 반발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일행들과 함께 무리의 꼬리 쪽에서 걷고 있었다. 
아까부터 망설이던 이현성이 나를 보며 기어코 입을 열었다. 
 
“저기, 독ㅈ······.” 
 
쿡! 
 
눈치 빠른 정희원이 이현성의 허리를 찔렀다.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이현성이 신음을 흘렸다. 
역시 정희원이다. 
상황은 정확히 몰라도 일단은 분위기를 맞출 줄 안다. 
나는 입 모양으로 말했다. 
 
‘말 안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대충 알겠죠?’ 
‘네, 대충은.’ 
 
나는 정희원을 한 번 보고, 이현성이 들쳐 메고 있는 강일훈을 바라보았다. 지금 제일 요주의 인물은 바로 저 녀석이다. 
 
‘저놈 입단속 잘 시켜요. 알겠죠?’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정희원이, 이어서 수상한 몸짓을 했다. 
그녀는 과장스럽게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넵, 중혁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누가 봤다면 중세의 기사라도 되는 줄 알았을 거다. 
우스운 것은 화들짝 놀란 이현성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짓을 벌였다는 것이다. 
 
“바, 받들겠습니다······!” 
 
둘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무리의 선두에 있던 이성국이 깜짝 놀라 이쪽을 돌아보았다. 민망한 상황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되었다. 이성국의 속내를 읽을 수는 없었지만, 읽을 수 있었다면 분명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역시 유중혁이 틀림없군.」 
 
나와 시선이 마주친 이성국이 재빨리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게 주인공의 기분이었군 그래.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동묘앞 역 플랫폼에 도착했다. 
 
꽤 세력을 이룬 그룹이라 그런지 플랫폼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성국의 부대처럼 병장기를 착용한 이들도 있었지만, 역시 대부분은 병장기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마 그룹을 잃은, 다른 역의 방랑자들일 것이다. 
 
“빨리빨리 움직여!” 
“아, 알겠습니다.” 
 
그들은 동묘앞 그룹의 감시 속에서 땅강아쥐의 고기를 도축하거나, 괴수들의 사체를 분해해 장비류를 만들고 있었다. 
이른바 ‘노예’ 계급. 
왕의 시대가 도래한 이후에는 흔히 있을 풍경이었다. 
정희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진짜 왕국도 아니고······.” 
 
나는 그런 정희원을 향해 말했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일단 여기서 대기하며 상황을 살피고 있어라.” 
“예에에······.” 
 
나는 정희원을 무시하고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내가 모를 추가적인 변수를 고려하기 위해서였다. 
‘동묘앞’은 원작에서도 꽤 중요한 터전이 되는 역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곳의 대표는 그 ‘폐인’ 녀석인데. 
하지만 <선지자들>이 개입했다면 이야기의 향방이 상당히 달라졌을 가능성이 컸다. 
나는 멀찍이 앞서가는 이성국의 뒤통수를 보며 생각했다. 
 
현시점에서 내가 궁금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저 이성국이란 놈에게도 내가 가진 ‘텍본’이 있느냐는 것. 
둘은, 저놈과 같은 <선지자들>이 몇 명이나 되느냐는 것. 
그리고 굳이 셋을 꼽자면, 저놈도 나와 같은 ‘스킬들’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인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랬다면 녀석은 처음부터 [특성 간파]가 아니라 나와 같은 [등장인물 일람]을 사용했겠지. 
게다가 내가 [등장인물 일람]을 쓸 때 따로 방어 메시지가 뜨지 않은 것을 보면, [제 4의 벽]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즉, 저놈은 유상아나 이길영과 같은 케이스라는 거다. 
 
하긴, 3천 편이 넘는 소설을 읽은 건 나뿐인데, 겨우 수십 편 읽고 만 녀석들한테까지 같은 특전이 간다면 그건 좀 불공평한 일이다. 
그렇게 따지면 놈들에게는 ‘텍본’이 없을 거라는 추측이 온당하긴 한데, 그래도 혹시 모르는······. 
근데 저 자식, 아까부터 뭘 저렇게 열심히 보는 거지? 
 
선두의 이성국이 아까부터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민첩에 5000코인을 투자했습니다.] 
[민첩 Lv.20 -> 민첩 Lv.30] 
[놀라운 기민함이 당신의 전신에 깃듭니다.] 
 
나는 거의 귀신같은 속도로 이성국을 향해 접근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는 거냐?” 
“허, 허엇? 아무것도 아닙니다!”

황급히 스마트폰을 끄며 뒤로 숨기는 녀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언뜻 보인 화면이 있었다. 
노란색 배경의, 익숙한 말풍선. 
순간 위화감이 들었다.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방금 내가 본 건 분명 ‘단톡방’의 화면이었다. 
 
···인터넷이 된다고? 지금 여기서?
 
 
 
 
 
< Episode 10. 미래 전쟁 (6) > 끝

< Episode 10. 미래 전쟁 (7) >
 
 
 
 
 
인터넷이라니, 그럴 리가 없었다. 
‘시나리오’가 시작된 이후 서울 전역은 도깨비들의 채널 활성화로 인해 인터넷이 차단되었으니까. 
 
아니지, 잠깐만. 여기 동묘앞역이었지. 
아······ 그렇군. 
그래서 인터넷이 가능한 건가? 
 
불안한 얼굴로 내 눈치를 살피던 이성국이 입을 열었다. 
 
“저, 유중혁 님?” 
“왜.” 
“도착했습니다. 대표님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플랫폼의 중앙에 조악하게 세워 놓은 중형 천막을 보았다. 꼴에 대표라고, 엉성하게나마 구색을 갖춰 놓았다. 
 
“가지.” 
 
이성국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나를 안내했다. 천막을 제치고 안쪽으로 들어서자, 제법 화려한 내부가 드러났다. 허름한 천막으로 만들었다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호화로운 실내였다. 
붉은 융단이 깔린 바닥과, 고급 호텔에서 훔쳐온 듯한 융숭한 침대. 회의용 원탁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컴퓨터가 설치된 작은 데스크도 있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 컴퓨터로 한창 인터넷 서핑에 몰두하고 있는 소년이었다. 길영이보다 두어 살쯤 많아 보이는 얼굴. 잠옷 바람으로 의자 위에 앉아 새카만 다크 서클을 드리운 소년. 
그리고 품속에 꼭 끼워져 있는 남색 깃발. 
 
대단하다. 
이 소년은 벌써 ‘왕의 길’을 반 이상 지나왔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이 발동합니다!] 
 
<인물 정보> 
 
이름 : 한동훈 
나이 : 17세 
배후성(背後星) : 장막 뒤의 그림자 
전용 특성 : 고귀한 은둔형 폐인 (영웅) 
전용 스킬 : [광역 인터넷 Lv.5], [댓글 조작 Lv.3], [키보드 어택 Lv.3], [소식(小食) Lv.6], [음파 차단 Lv.2]······. 
성흔 : [존재 부재 Lv.2] 
종합 능력치 : [체력Lv.10], [근력Lv.10], [민첩Lv.19], [마력Lv.26] 
종합 평가 : 은둔형 폐인의 정점인 ‘고귀한 은둔형 폐인’입니다. [광역 인터넷] 스킬을 통해 도깨비들의 채널망을 뚫고 특정 기기에 가상의 랜선을 설치할 수 있습니다. 
여론 선동에 놀라운 능력을 가졌지만, 아직 방어기제 충분히 형성되지 않아 멘탈이 취약한 상태입니다. 해당 인물의 배후성은 현재 자신의 화신이 처한 상황에 불만이 많습니다. 
 
* 현재 해당 인물은 강력한 최면에 걸려 있습니다. 
 
확실히 기억이 난다. 
동묘앞의 왕. 
아마 이 소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은둔한 그림자의 왕’이 될 것이다. 
가엾은 소년 왕은, 한창 인터넷 댓글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 서울만 고립되어있는 거 실화임? ㅋㅋ 강남 땅값 개폭락할 듯~~ 땅부자들 눈물나서 어쩔??
 ┗ㄴㄴ 서울뿐만 아니고 지금 세계 각국 수도가 다 그 꼴임. 도쿄랑 베이징이랑 전부 다 그 똥그란 돔 안에 갇혔음 
 ┗서울 탈환 작전은 어케 됨?? 어제부터 시작했다고 하지 않았음? 
―ㅋㅋㅋ 카더라긴 한데 지금 저 안에 있는 사람들 전부 무슨 초능력 각성했다함 ㅋㅋㅋ 미친 무슨 판타지도 아니고... 
 ┗괴물 새끼들 떴을 때부터 이미 판타지됨 
 
모처럼 보는 인터넷 화면이 낯설었다. 
새삼 실감이 난다. 
그랬지.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은 이런 상황이었지. 
바깥에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태의 진실을 모르고 있다. 
이윽고 소년 왕의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님들 근데 혹시 <선지자들>이라고 들어봄? 뭔지는 모르겠는데, 이 사태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놈들임 ㅎㅎ 
 
[등장인물 ‘한동훈’이 ‘댓글 조작 Lv.3’을 발동하였습니다.] 
 
발동 메시지가 뜨자마자, 마치 자석처럼 수십개의 댓글들이 소년이 쓴 댓글 아래로 들러붙었다. 
 
┗구라겠지 그걸 믿냐 ㅂㅅ 
┗ㄴㄴ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닌 듯... 얼마 전부터 무슨 계시인가 예언 시작했는데, 전부 그새끼들 말한대로 됐음 ㄹㅇ 
┗ㄹㅇ? 그새끼들 활동처가 어디? 주소좀쏴봐 
 
달린 댓글들은 엄청난 파급력을 가지고 넷상 곳곳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놀랍다. 설마 이 능력을 벌써 이런 식으로 활용하고 있을 줄이야. 
 
“한동훈 대표님?” 
 
이성국의 부름에, 그제야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귀한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인사하시지요.” 
 
소년, 한동훈의 퀭한 눈이 나를 향했다. 
 
“아, 아아, 안, 안녕······ 하세요.” 
 
한동훈은 정상이 아니었다. 
‘멸살법’에서는 무려 서울 7왕으로 꼽혔던 이 소년이, 이렇게나 초췌한 모습이라니. 본래도 대인기피증이 심한 성격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비틀비틀 일어난 한동훈이 원탁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더니, 이내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이성국이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자, 유중혁 님. 이제 슬슬 대표님과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볼까요.” 
 
나는 한동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이야기? 무슨 이야기?” 
“예?” 
“지금 나랑 장난치자는 거냐?” 
 
텅 빈 한동훈의 눈동자. 
 
“······이놈이 ‘대표’라고?” 
 
분명, 원작대로라면 이 소년이 이 역의 대표가 맞다. 
명목상으로도 그렇다. 
하지만······. 
‘대표’라는 말이, 곧 ‘실세’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까지 나를 놀릴 셈이지? 인형을 앉혀 놓고 나와 얘기하게 만들 셈인가?” 
 
옆을 돌아보자, 이성국이 손을 떨고 있었다. 
아마 [현자의 눈]이 그런 사실까지 알아낼 줄은 몰랐던 거겠지. 
녀석은 순간적으로 스마트폰을 열어 뭔가를 확인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유중혁 님, 역시 보통이 아니시군요. 제 불찰을 용서해주십시오.” 
“이 역의 실세는 네놈인 모양이군. 그렇지?”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나?” 
“간부 몇 명만 알고 있습니다.” 
 
강력한 능력을 가진 인물을 허수아비로 세워 놓고, 역을 장악한다. 
‘멸살법’에서도 자주 쓰이는 레퍼토리였지만, 막상 현실로 보니 기분이 묘했다. 
 
“어차피 네놈이 실세라면, 왜 굳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섭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 천막 주변에는 [음파 차단] 스킬이 걸려 있습니다.” 
 
예상은 했다. 
실제로 한동훈의 능력 중엔 그런 게 있으니까. 
 
“그 정도로 중요한 일인가 보군.” 
“그렇습니다. 유중혁 님께, 그리고 저희 모두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너희 모두?” 
 
숨을 흡, 하고 들이킨 이성국이 입을 열었다. 
 
“저는 <선지자들>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 중 하나지요.” 
 
드디어 원하는 정보가 나오려는 모양이다. 
나는 잠자코 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금 저희가 느끼는 엄청난 희열을, 유중혁 님은 결코 알지 못하실 겁니다. 왜냐하면 저와 제 동료들은, 오로지 유중혁 님의 위대한 승리를 위해 이날만을 기다려 왔기 때문입니다.” 
 
뭔가 잘못 들은 걸까. 
갑자기 놈이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저희는 유중혁 님의 특별한 능력을 알고 있습니다. 몇 번이고 죽어도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기적. 오직 이 세계에서, 유중혁 님만이 받은 특별한 힘!” 
 
성좌들의 필터링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일단은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아마, 유중혁 님께서는 이미 몇 번의 삶을 반복하셨을 겁니다. 끔찍한 적들과 맞서 싸우셨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이계의 존재들과 투쟁해오셨지요. 오직 홀로, 외로운 기억을 안은 채로······. 그 숭고한 정신을 저희는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 자식, 아부 잘 한다. 
유중혁이 들었으면 감동해서 눈물이라도 줄줄 흘렸겠는데. 
나중에 유중혁이 우울해지면 내가 생각한 것처럼 말해 줘야지. 
 
“하지만 유중혁 님도 지난 회차들을 통해 깨달으셨을겁니다. 설령 유중혁 님께서 뛰어난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라 하여도, 혼자만으로는 다가올 재앙에 결코 맞서 싸울 수 없다는 것을요.” 
 
게다가 제법 맞는 말도 하고. 
 
“그렇지만 유중혁 님, 이번 회차는 다를 겁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있으니까요. 저희 <선지자들>은 특별한 가호를 받아, 오직 유중혁 님을 돕기 위해 이번 회차에 파견되었습니다.” 
 
와, 이것 봐라? 
이성국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의아하시겠지요. 지난 회차까지는 없었던 녀석들이 어째서 갑자기 나타난 것인가. 무척 혼란스러우시겠지만, 부디 저희들을 믿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이미 10년 전부터 이날을 대비한 계시를 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계시?” 
“예. 이번 회차의 세계에는, 저희 <선지자들> 사이에 은밀히 전해오는 ‘계시록’이 있습니다. 유중혁님께서 살아오셨고, 또 살아가실 신화(神話). 그 모든 과거의 미래를 기록한, 단 하나의 계시록 말입니다.” 
 
잠깐만. 
설마 그 ‘계시록’이란 게? 
 
“아직 믿지 못하는 표정이시군요. 저희는 유중혁님께서 ‘강철검제 이현성’을 휘하에 거두실 것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같이 오진 않으셨지만, 아마 ‘망상악귀 김남운’과 ‘해상제독 이지혜’도 이미 거두셨겠지요.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적어도, ‘계시록’에 따르면······.” 
 
나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며 물었다. 
 
“그 ‘계시록’은 어디에 있지?” 
“안타깝게도 지금은 훼손되어 원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걱정 마십시오. 저희들은 각자 그 계시의 파편들을 기억하고 있고, 그 파편을 통해 유중혁 님께서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게끔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만약 줄곧 해오셨던 방식으로 또 이번 회차를 살아가신다면, 유중혁 님께서는······ 또다시 죽음을 맞게 되실 겁니다. 하지만 저희와 함께라면 다릅니다.” 
 
주절주절 나불대는 이성국.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그렇군.” 
 
이성국이 황급히 말을 멈췄다. 아마 놈은 긴장하고 있을 것이다. 
유중혁에게는 [거짓 간파]가 있으니까. 
물론 내게는 그 스킬이 없다. 
하지만 있었더라도, 놈의 이야기는 [거짓 간파]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거짓 간파]는 저런 은유적인 이야기의 허실(虛實)은 가릴 수 없으니까. 
그래서 더욱, 지금 내 심경은. 
 
“······놀랍군.” 
 
그러했다. 
진심이었다. 
이건 뭐, 놀라운 걸 넘어서서 경악할 정도로. 
 
대단한 ‘설정’이다. 
 
그 짧은 새 잘도 이딴 설정을 짜내다니. 
인간의 창의력이란 실로 대단하다. 
 
“성국이라고 했던가?” 
“예, 유중혁 님.” 
 
네가 멸살법 작가 해도 되겠다 인마. 
개복치처럼 죽어 나가는 주인공을 돕기 위해, 계시를 받고 소설 바깥에서 찾아온 독자들이라니? 
진짜 멸살법 보다 이쪽이 더 흥미진진하게 여겨질 지경이다. 
근데 그건 그거고. 
 
“빙빙 돌아가지 말고.” 
 
이건 이거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좋겠군.” 

설정 놀음은 실컷 들어줬으니, 이제 이쪽에서 말할 차례다. 
 
“네놈들이 미래의 계시를 받았다 치자. 그래서 정확히 뭘 어쩌자는 거냐?” 
 
이성국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저희는 유중혁 님과 동맹을 맺고 싶습니다. 그, 그러니까 명목상으로는 동맹이지만, 실제로는 휘하로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는······.” 
 
웃기는 놈이군. 
결국 그게 목적이었냐? 
주인공 밑에 들어와서 버스 타겠다는 말이잖아? 
 
“그렇군. 동맹이라. 원하는 게 그거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흥미로운 제안이군.” 
“그렇다는 말씀은······.” 
 
나는 손가락으로 데스크를 톡톡 두드렸다. 
 
“그런데 순서가 틀렸어.” 
“예?” 
“정체도 모르는 놈들과 어떻게 동맹을 맺으란 거냐? 나와 동맹을 맺고 싶다면, 일단 네놈 정체부터 까발리는 게 먼저 아닌가?” 
“저, 정체라 하심은······ 이미 저는 충분히······.”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방 안에 있는 호화 침대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리고 다리를 꼰 채, 입을 열었다. 
 
“꿇어라.” 
“예?” 
“꿇으라고.” 
 
잠깐 당황하던 이성국이, 애써 표정을 숨기며 의자에서 내려왔다. 
놈의 무릎이 천천히 바닥에 닿자, 내가 입을 열었다. 
 
“네놈 특성에 대해 읊어봐라.” 
 
무려 ‘왕 후보’에게 강력한 [최면]을 걸어 놓은 것을 보면, 이놈의 특성이 뭔지 짐작은 간다. 하지만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성국이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마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겠지. 
놈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유중혁은 [현자의 눈]으로 내 정보를 볼 수 있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구태여 물어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참이나 고민하던 이성국이 짓씹듯 입을 열었다. 
 
“제 특성은······ 최면술사입니다.” 
 
역시, [최면술사]였군.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에, 이성국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시험을 통과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게 다냐?” 
“······예?”

이성국의 시선이 불안하게 떨렸다. 
 
“······하, 하나가 더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봐.” 
“아, 아홉 번째······.” 
“아홉 번째?” 
 
이성국은 그 말을 하는 것이 몹시 치욕스럽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떨구며 말을 이었다. 
 
“아홉 번째······ 하차자(下車者)입니다.” 
 
그렇군. 
이 자식은 ‘아홉 번째’······. 
 
······아니, 잠깐만. 그럼 대체 몇 명이나 있는 거야?
 
 
 
 
 
< Episode 10. 미래 전쟁 (7) > 끝

< Episode 11. 선지자들의 밤 (1) >
 
 
 
 
 
“아홉 번째 하차자라······ 처음 듣는 특성이로군.” 
“아, 아마 그러실 겁니다. 저희 <선지자들>이 나타난 건 이번 회차가 처음이니까요.” 
 
자식이 변명은. 
나는 조금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한데 이상하군. 네놈들이 정말 ‘계시’를 얻었다면 왜 ‘계시자’가 아니라, ‘하차자’지? 그 이름은 대체 무슨 뜻이냐?” 
“그, 그건······ 아마 계시록이······ 아니, 계시록을······.” 
 
이성국이 말을 더듬었다. [거짓 간파]에 안 걸리려고 용을 쓰는 모양새가 기특했다. 과연, 얼마나 솔직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 이성국이 눈을 질끈 감은 채 말을 이었다. 
 
“계시록을 읽다가 만······ 순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읽다가 말았다고? 왜 읽다가 말았지?” 
“계시록 내용이 워낙 어렵고, 방대하고, 또 심오하다 보니······.” 
“그래서 넌 그중 아홉 번째로 읽기를 그만두었다, 이거냐?” 
“네에······.” 
“겨우 그런 정도면 나한테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아, 아닙니다! 확실히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당황한 이성국은 계속해서 횡설수설하더니, 스마트폰을 껐다 켰다하며 불안한 움직임을 보였다. 
 
“스마트폰은 왜 자꾸 만지작거리는 거냐?” 
“저, 죄, 죄송합니다. 제가 스마트폰 중독이라······.” 
 
보나마나 다른 하차자 녀석들에게 조언을 구할 셈이었겠지. 
하지만 그리 두지 않는다. 
 
“아까 보니까 인터넷이 되는 것 같던데?” 
“그, 그렇습니다. 저 은둔형 폐인의 능력을 이용해서······.” 
 
이성국의 말에 나는 한동훈 쪽을 일별했다. 
최면에 당한 소년은 무심한 눈으로 자신의 손톱을 뜯기 바빴다. 
강력한 정보 조작 능력을 가진 ‘은둔한 그림자의 왕’. 
이 소년을 계속 <선지자들> 밑에 둘 수는 없었다. 
만약 모든 <선지자들>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에 개입하고 있다면, 원작은 망쳐지고, 내가 세워둔 계획들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모든 게 잘못되기 전에 이놈들을 멈춰야만 한다. 
 
“다른 <선지자들>도 ‘하차자’라는 특성을 가진 거냐?” 
“······그렇습니다.” 
“총 몇 명이지?” 
“그건······.” 
 
이성국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대략 48명 정도입니다.” 
 
48명? 
생각보다는 적은 숫자다. 
멸살법 1편의 조회수가 1200대고, 10편의 조회수가 120대인걸 감안하면, 적어도 백여 명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성국은 그런 내 궁금증을 해결해주기라도 하듯 말을 이었다. 
 
“제가 알기로 본래는 더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첫 번째 시나리오를 넘기지 못하고 죽은 게 아닌가 예상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아는데 죽었다고?” 
“그게······ 계시를 받긴 했지만, 저희 모두 그게 ‘진짜’ 계시라는 것을 최근에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조금 납득이 된다. 
아마 시나리오가 시작된 순간, 10년 전에 연재되던 소설이 현실이 되었다고 생각한 독자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미 기억도 까마득할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니 이성국이 살아남은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아홉 번째 하차자’라고 했으니, 이놈은 말 그대로 극 초반에 하차한 독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저도 운 좋게 살아남은 케이스입니다. 마침 근처에 있던 또 다른 <선지자>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죽었을 테니까요.” 
 
같은 장소에 또 다른 <선지자>가 있었다? 
 
“그―” 
 
이성국이 말을 이으려는 순간, 바닥에서 작은 진동이 일었다. 
[음파 차단]을 했음에도 전해질 정도의 진동. 
나와 이성국은 동시에 천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쿵! 
 
갑자기 서브 시나리오라도 발생한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진앙의 중심지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서로를 마주보며 으르렁거리는 남녀. 하나는 내가 모르는 얼굴의 남자였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조연급도 아닌 게······ 감히 나한테 개겨?” 
“뭐라 씨부리는 거야 개 같은 새끼가.” 
 
······아니나 다를까, 정희원이다. 
 
“뭐? 개 같은······? 이 개 같은 년이?” 
 
사내가 등에서 거환도(巨環刀)를 뽑아들었다. 사내의 종합 능력치는 눈대중으로 봐도 준수한 수준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택도 없다. 
정희원의 몸놀림은, 이미 동급 능력치의 화신들을 한참 상회하는 수준이니까. 
사내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낸 정희원의 칼날이 움직였다. 
 
[정희원이 ‘미카즈키 무네치카’의 특수 옵션, ‘사신의 발자취’를 발동하였습······.] 
 
“정희원!” 
 
사내의 목이 잘리기 직전, 정희원의 칼날이 멈췄다. 눈을 부릅뜬 사내의 목에 솜털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의 차이. 내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사내는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깜짝 놀란 이성국이 달려나갔다. 
 
“정민섭! 지금 뭐 하는 거야!” 
 
당황한 이성국의 표정을 보고 나도 깨달았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그리고, 예상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해당 인물의 정보는 ‘등장인물 일람’으로 열람할 수 없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렇군. 
저놈도 <선지자>다. 
 
 * 
 
 
잠시 후, 또 다른 <선지자>는 이성국과 함께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 친구 녀석이 아무것도 모르고 그만······. 야, 너도 빨리 사과드려!” 
 
그제야 곁에 있던 거환도의 사내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꽤 자존심이 있는 녀석인지, 말과는 다르게 얼굴에서 노기를 완전히 거두지 않았다. 나는 정희원을 보며 말했다. 
 
“정희원,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라 했을 텐데.” 
“저 새끼가 먼저······!” 
“정희원!” 
 
처음으로 정희원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유중혁 님.” 
 
고개를 꾸벅 숙인 정희원이 돌아서자, 이현성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그녀를 쫓아갔다. 정희원이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칼을 겨눌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위험했다. 
거환도의 사내가 나를 보며 물었다. 
 
“유중혁 님이시라 하셨습니까?” 
“그래, 네놈도 <선지자>냐?” 
“······그렇습니다.” 
 
사내는 조금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는 나를 한 번 보고, 멀어지는 정희원과 이현성 쪽을 한 번 돌아본 후, 이성국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 유중혁 님. 죄송하지만 잠시 자리를 좀 비우겠습니다. 성국아,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놈이 천막 바깥으로 나가자, 이성국이 쩔쩔매며 나에게 허리를 굽혔다. 
 
“오래 기다리지 않겠다.” 
“옙!” 
 
본래의 유중혁이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놈들을 허락한 이유가 있었다. 
이성국이 밖으로 나가고, 기척이 멀어지자마자, 나는 곧바로 비형을 불렀다. 
 
‘야, 비형.’ 
 
[왜? 한참 재밌는데 또······.] 
 
‘청력 강화, 2000코인.’ 
 
[······.] 
 
이제 비형도 꽤 적응이 된 모양인지, 3초도 채 되지 않아 광고를 띄운 후 물건까지 내놓았다. 
 
[2000코인이 소모되었습니다.] 
[전용 스킬, ‘청력 강화’를 습득하였습니다.] 
 
비형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야, 네 번째 시나리오부터는 조심해. 이런 광역 시나리오부터는 슬슬 중급 도깨비의 관할······.] 
 
나는 비형의 말을 무시하고 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전용 스킬, ‘청력 강화 Lv.1’을 사용합니다.] 
 
나는 [음파 차단]이 걸려 있는 천막 바깥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숨기려 한 것 치고는 그다지 멀지 않은 위치였다. 
 
“야, 뭔가 좀 이상하지 않냐?” 
“뭐가?” 
“네가 보기엔 저게 잘생긴 얼굴이냐?” 
“갑자기 뭔 소리야······.” 
“작가가 유중혁 잘 생겼다고 그랬잖아.” 
 
저 새끼가? 
다행히 이성국이 비호했다. 
 
“작가마다 취향이 다를 수도 있지······. 유중혁 님이 확실해. 성격 더러운 것도 똑같잖아.” 
“넌 인마, 겨우 ‘아홉 번째’ 주제에 뭘 안다고······.” 
“이게······! 너도 읽은 지 오래돼서 정확히는 기억 못 한다며!” 
“그래도 ‘기억력 특전’을 받아서 몇몇 장면은 꽤 또렷하거든? 넌 시발 특전이 있어도 프롤로그 밖에 기억 못하잖아? 나 없으면 살아있지도 못할 놈이······.” 
 
한참을 투닥거리던 둘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아무리 봐도 이상해. 이현성은 그렇다 치고, 저 이상한 여자는 또 뭔데? 내 기억이 맞다면, 3회차에 저런 여자는 없었어.” 
“그럼 확인을 해 보든가. 진짜 유중혁인지 아닌지.” 
“······근데, 진짜면 또 어떡하냐?” 
“계획대로 가는 거지. 만약 여기서 유중혁을 손에 넣으면, 50편 이후까지 읽은 놈들한테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는 거야.” 
 
이거, 아주 쏠쏠한 정보들이 술술 들어오는구만. 
댓글로는 주인공이 호구니 덜떨어졌니 하면서 온갖 욕을 퍼부어대던 놈들이, 막상 자기 상황이 되니까 저렇듯 허술하다. 
이래서 인간이란. 
어느새 이성국과 거환도의 사내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오래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우리는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유중혁 님. 아까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정민섭이라고 합니다.” 
 
거환도 사내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다시 보니, 정희원에게 바로 제압당한 것 치고는 상당히 좋은 아이템들을 가진 녀석이다. 특히 녀석이 목에 걸고 있는 [도망자의 탈]은, 얼굴과 외형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유용한 아이템이었다.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네놈은 몇 번째 ‘하차자’냐?” 
 
순간 정민섭이 이성국을 노려보았다. 
뭐 그런 것까지 말했냐는 듯, 힐난하는 눈빛이었다. 
 
“······저는 1089번째 하차자입니다.” 
 
1089번째라. 1편의 조회수가 1200대이고, 10편의 조회수가 120대인 걸 감안하면 이 녀석도 초반 하차자이긴 마찬가지다. 
아마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이성국을 구해줬다는 놈이, 바로 이 녀석이겠지. 

“계시록을 읽은 선지자로서, 유중혁 님을 만나 뵙게 되어 일생일대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유중혁 님, ······죄송합니다만,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질문? 무슨 질문?” 
“그것이, 유중혁 님에 관한······.” 
“내가 진짜 유중혁인지 의심하는 거로군?” 
“······그, 그건 아닙니다만.” 
 
내 강렬한 시선에 녀석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해 봐.” 
“예?” 
“해 보라고.” 
 
당황하던 정민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럼, 송구스럽지만 실례하겠습니다.” 
 
이놈들을 제대로 속이려면, 나 역시 몇 가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제가 알기로 3회차의 유중혁 님은 ‘망상악귀 김남운’을 동료로 데리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김남운 대신 낯선 여자가 함께 있더군요.” 
“······.” 
“장도를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지혜인가 싶었지만, 암만 봐도 10대로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아까 다른 이름으로 그 여잘 부르는 것도 들었고요.” 
 
기억력도, 관찰력도 대단히 좋은 놈이다. 
정민섭의 말처럼 이미 이 세계는 내가 알던, 그리고 놈들이 알던 ‘3회차’와는 달라졌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달라진 세계를 최대한 ‘내 입맛에 맞게’ 바꾸는 일이었다. 
 
“왜 망상악귀를 데리고 다니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라면, 대답은 간단하다. 지금 이 회차에, 망상악귀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 어, 없다고요? 혹시······ 죽은 겁니까?” 
“그래.” 
 
놈들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정민섭이 물었다. 
 
“아니, 어떻게······. 대체 누가 김남운을 죽인 겁니까?” 
“망상악귀 김남운은······.” 
 
서서히 입을 벌리는 <선지자> 녀석들을 보며, 나는 슬슬 마지막 쐐기를 꽂기로 했다. 
 
“너희와 같은 <선지자>의 손에 죽었다.”
 
 
 
 
 
< Episode 11. 선지자들의 밤 (1) > 끝

< Episode 11. 선지자들의 밤 (2) >
 
 
 
 
 
“저, 저희와 같은 <선지자>라고요?” 
“그래. 처음에는 그놈이 <선지자>라는 것을 몰랐는데, 이제보니 그랬던 것 같군. 그놈도 너희처럼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런?” 
“게다가 너희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는 것 같더군. 놈은 망상악귀를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시나리오 초반부에 있던 히든 시나리오들을 독식했다. 덕분에 내 계획이 상당히 꼬였어. 
“그, 그런 놈이 있을 리가······?” 
 
물론 있다. 바로 네 눈앞에. 
 
“심지어는 내 이름을 사칭하고 다니는 것 같더군. 지난번에 마주쳤을 때 죽기 직전까지 패줬었는데, 아직도 충무로 인근에서 활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뻔뻔함에 감탄합니다.] 
 
“······충무로? 설마?” 
 
정민섭은 화들짝 놀라더니, 이성국처럼 스마트폰을 열어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마 다른 <선지자들>에게 정보를 알리고 있는 거겠지. 
그 외에도 정민섭은 내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나는 간단히 놈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랬구나! 아······, 그래서 3회차에 이런 변화가······. 진짜 유중혁 님이 맞으셨군요.” 
 
정민섭은 진심으로 감동한 얼굴이었다. 
 
“망상악귀 대신 저 여자를 얻으신 것도 이해가 갑니다. 김남운을 대신하기에도 충분해 보입니다. 저를 한 방에 제압할 정도라면······.” 
 
가장 주효했던 것은, 놈들의 오해였다. 
잠시 생각하던 정민섭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유중혁 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망상악귀를 죽였다는 그놈이 누구인지 알 것 같습니다.” 
“······알 것 같다고?” 
“예. 이 말씀을 드리기 전에······ 미리 한 가지를 알려드리자면, 저희 <선지자들>은 모두 같은 편이 아닙니다.” 
 
아까 대화를 듣고 예상은 했다. 미래를 아는 놈이 48명이나 있으면, 개중에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놈들이 있게 마련이니까. 
 
“자신을 12사도라 칭하는 놈들이 있습니다. 자신들만이 진짜 계시를 읽었고, 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놈들이에요.” 
 
12라. 
그것은 ‘멸살법’ 50편의 조회수와 정확히 일치하는 숫자였다. 
 
“그놈들은 너희들과 뭐가 다르지?” 
“그들은······ 저희보다 더 많은 ‘계시’를 읽은 자들입니다.” 
 
역시 그렇군. 
 
“지금까지 알려진 사도는 11명입니다. 그러니 추측컨대, 어쩌면 유중혁 님이 만났다는 문제의 <선지자>는 알려지지 않은 마지막 사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역시, 창의력이 뛰어난 놈들이라 하나를 던져주면 그걸 알아서 설정에 끼워 넣어준다. 
편리한 오해다. 
아니, 잠깐만······ 오해가 아닌가? 
생각해 보면 50편을 읽은 12명 중의 하나는 나일 텐데. 
 
“사도란 놈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모양이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그 녀석들은 저희와는 달리, 계시록을 이용해 이 세계를 찬탈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내 얘기도 아닌데 왜 양심이 찔리지? 
 
“그들은 유중혁 님을 도와 세계의 멸망을 막기보다는, 자신들의 이익과 영달만을 추구하는 놈들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십악’ 같은 놈들이지요.” 
“십악이라······.” 
“그래서 유중혁 님께 이렇게 부탁드리는 겁니다. 부디 저희를 거두어 주십시오. 그리고 그놈들을 막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런가. 이 녀석들의 진짜 목적은 이것이었군. 
솔직히 말하면 조금 의외였다. 
설마 같은 <선지자들>끼리의 내분 때문에 나를 필요로 할 줄이야.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좋다. 너희를 받아들이지. 동맹을 체결하겠다.” 
“저, 정말이십니까?” 
“단, 조건이 있다.” 
 
조건이라는 말에 이성국과 정민섭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먼저, 창신역을 내놔라.” 
“예? 창신역이라면······.” 
“동묘앞 바로 위에 있는 역이다. 이미 너희가 먹었을 텐데?” 
“아, 그러고 보니 ‘충무로역’의 표적 역이······.” 
 
정민섭은 뭔가를 눈치챈 듯했다. 
사실 이것이, 이번 동맹의 가장 주요한 부분이었다. 
[깃발 쟁탈전]에서 내가 차지해야 할 표적 역은 ‘창신역’. 
그곳을 점거하지 못한다면, ‘왕의 길’을 끝까지 걸어도 네 번째 시나리오는 완료할 수 없다. 
그리고 네 번째 시나리오를 완료하지 못하면, 나와 내 그룹은 모두 자동으로 사망하게 된다. 
그런데, 이성국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저, 유중혁 님. 정말 죄송합니다만······ 창신은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지?” 
“창신역의 주인은 저희 동묘앞 그룹이 아닙니다.” 
“너희가 아니라고?” 
 
이상한 소리였다. 
창신은 정말로 동묘앞의 코앞에 있는 역이었기 때문이다. 
이성국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곳은 ‘폭군왕’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폭군왕.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놈이 벌써 왕이 됐다고?” 
 
‘서울 7왕’중 하나인 ‘폭군왕’. 
녀석은 현시점에서 유중혁에 비견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놈이 왕으로 개화하는 것은 적어도 며칠 후의 일일 텐데? 
게다가 도봉구에서 시작했을 놈이, 벌써 여기까지 내려왔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내 시선을 받은 이성국이 눈을 조금 내리깔았다. 
 
“사실은······ <선지자들> 몇 명이 조금 실수를 하는 바람에, 녀석의 세력이 급격하게 커졌습니다. 그 와중에 일부 선지자들이 역으로 당해 죽어버렸고······ 그때까지만 해도 <선지자들>의 총원은 53명이었습니다.” 
 
갑자기 이놈들에 대한 신뢰도가 급격히 하락한다. 
생각해 보니 소설의 초반부도 제대로 모르는 놈들인데, 왜 이놈들이 잘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거지? 
 
“그, 그래도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마침 저희도 ‘폭군왕’을 제거하기 위해 강력한 병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폭군왕’ 뿐만 아니라, 12사도들을 상대하기 위한 병기를요.” 
 
정민섭도 맞장구를 쳤다. 
 
“아마 지금의 유중혁님은 잘 모르실 겁니다. 이건 저희도 정말 어렵게 알아낸 계시라······.” 
 
아니, 이제 확실히 알겠다. 
이놈들은 그냥 두면 안 된다. 
이 자식들이 이야기를 다 망치기 전에, 여기서 끝내야 한다. 
 
“아, 그러고 보니 마침 잘 됐군요. 조만간 그 병기를 확인할 기회가 있습니다.” 
“병기를 확인할 기회?” 
“내일, 12사도를 제외한 집회인 <선지자들의 밤>이 열릴 겁니다. 저, 괜찮으시다면······.” 
 
정민섭의 간절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유중혁 님께서, 그곳에 같이 가 주셨으면 합니다.” 
 
 
* 
 
 
회담이 끝난 후, 나와 정희원, 그리고 이현성은 이성국이 마련해 준 숙소 안에 모여 있었다. 나는 등에 멘 충무로역의 깃발을 바라보았다. 
오후 내내 주변의 점거 구역을 돌아다니며 ‘동대문역’과 ‘청구역’을 양도받은 덕에, 어느새 내 깃발 또한 ‘남색’으로 변해 있었다. 
 
[남색 깃발의 특전을 사용합니다.] 
[지금부터 당신은 그룹원들과 ‘그룹 채팅’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대화를 꺼릴 필요가 없다. 
그룹 채팅은 인근 지역의 같은 그룹원이 아니고서야 도청이 불가능하니까. 
나는 일행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정희원은 어렴풋이 예상한 눈치였지만, 이현성은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맙소사, 믿을 수 없는 일이군요. 미래의 일부를 아는 놈들이 있다니······ 그래서 독자 씨가 유중혁 씨 연기를 했던 겁니까? 
―그렇습니다. 
―후······ 그러면 당분간은 여기서 머무르게 되겠군요. 녀석들에 대한 정보를 더 알아내야 하니······. 
―아뇨. 
―예? 
―오늘, 놈들을 처리할 겁니다. 
 
나는 이어서 정희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정희원 씨. 
―괜찮아요. ······쬐끔 상처는 받았지만. 
―······. 
―농담이에요. 독자 씨는 지금 그 양아치 연기해야 하는 거잖아요? 정 미안하시면, 아까 그 자식 내가 처리하게 해줘요. 
 
정희원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오늘 밤은 모처럼 셋이서 뜨겁게 불태우는 건가요? 
―뜨, 뜨겁..? 
 
정희원의 농담에 이현성이 기겁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이요? 
―지금 치면, 놈들 전체가 움직입니다. 그건 곤란하죠. 
 
나는 말을 마치며 품속에서 작은 망토를 꺼내 뒤집어썼다. 
갑자기 내 모습이 사라지자, 당황한 이현성이 중얼거렸다. 
 
―엇? 독자 씨? 
―신호를 드리겠습니다. 그때 움직이십시오. 
 
아까 몰래 비형을 불러서 3000코인을 지불하고 구입한, 골드 멤버 특전 아이템인 [은둔자의 망토]. 
비록 5회짜리 소모성 옵션이긴 하지만, 능력을 한 번 발동하면 적어도 20분간 ‘절대적 은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좋은 아이템이었다. 
 
나는 스르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레벨 6이상의 [절대 감각]을 가진 상대에겐 별 쓸모가 없지만, 이곳에 그만한 스킬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보초들을 지나쳐, 한동훈이 있는 대표의 천막까지 이동한다. 
[음파 차단]이 걸려 있으니 일단 내부로 진입만 하면 오히려 도청 걱정은 없었다. 
조심스레 천막을 열어젖히자, 홀로 자판을 두들기는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낮에 봤던 것보다 더 짙어진 다크서클. 
 
여전히, 혼자 댓글을 쓰고 있는 소년의 앙상한 등. 
 
<선지자들>은 분명, 이 소년을 감정이 마모된 기계로 만들 속셈이겠지. 
허구와 진실을 뒤섞은 정보를 뿌려, 미래를 조작하는 선동 기계. 
지금 당장은 큰 효과가 없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이 소년의 가치는 커질 것이다. 
 
나는 조용히 녀석의 등 뒤로 접근해, 입을 막았다. 
 
숨이 막힌 한동훈이 내 품속에서 버둥거렸지만, 10레벨밖에 안 되는 근력으로 내게 저항하는 것은 무리였다. 
나는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어, [은둔자의 망토]와 함께 비형에게 구입했던 [정신 각성제]를 꺼냈다. 이것도 무려 3천 코인짜리였다.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3천 코인으로 ‘은둔한 그림자의 왕’을 얻을 수 있다면, 오히려 이득을 보는 거래였다. 
잠시 후, 강제로 각성제를 들이킨 한동훈의 눈빛이 변했다. 
[최면] 효과가 풀리며, 소년의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으, 으으, 다다당신······.” 
 
최면에 걸렸다고 해서 모든 일을 잊은 것은 아니다. 지금쯤 이 작은 소년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트라우마들이 폭주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최면]이 풀렸으니, 녀석의 배후성도 어느 정도 개입을 시작하겠지. 
 
[등장인물 ‘한동훈’의 성좌가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성좌, ‘장막 뒤의 그림자’가 당신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한동훈은 깃발을 손에 쥔 채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나는 그 깃발을 유심히 보다가, 일부러 한 걸음을 멀어졌다. 
 
“걱정마라. 난 깃발을 빼앗으러 온 게 아니야.” 
“으, 으아, 아······.” 
“너는 똑똑하니까 금방 이해하겠지. 해치러 왔다면, 네게 걸린 [최면]을 풀어줬을 리가 없잖아?” 
“그, 그그, 그, 그럼.” 
“형이랑 친구하자.” 
 
그 말에, 한동훈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나는 잠시 기다려 주었다. 
녀석의 머릿속에 몰아치는 의심의 파랑이 진정될 때까지. 
하지만 한동훈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대인기피증이었지. 

“직접 말로 하기 힘들지? 너만 괜찮다면, 이걸로 대화하고 싶은데.” 
 
한동훈은 잠시 내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을 바라보더니, 이내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등장인물 ‘한동훈’이 당신의 스마트폰에 ‘광역 인터넷 Lv.5’을 사용하였습니다.] 
[등장인물 ‘한동훈’의 의식이 끊기지 않는 한, 당신은 ‘서울 돔’의 어디에서든 인터넷의 사용이 가능합니다.] 
 
잠시 후, 스마트폰 메신저에 한동훈의 이름이 떠올랐다. 
 
―당신은 누구죠? 
―너를 찾고 있었어. 
―이성국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랬겠지. 
―나는... 
 
가엾게 떨리는 소년의 손가락은, 더 이상의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여기서 이 소년을 설득하는 것은 무리다. 
열흘 남짓한 기간동안, 이미 이 소년의 상처는 곪고 또 곪아서, 쉽게 회복될 수 없는 지경까지 와버렸기 때문이다. 
 
―너를 이해해. 무섭고, 혼란스럽겠지. 
 
[등장인물 ‘한동훈’이 크게 동요합니다.] 
 
―웃기지 말아요. 
―나는 놈들과 달라. 
―믿을 수 없어요. 
―<선지자들>을 증오하지? 
 
그 말에 한동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최면]에 걸린 채 인형이 되었던 소년의 동공 깊은 곳에, 뿌리 깊은 분노가 일렁였다. 
 
―너만 허락한다면, 내가 놈들을 없애 줄 수 있다. 
―...왜요? <선지자들>은 당신을... 
―그 녀석들은 존재해서는 안 돼. ‘에필로그’에 방해가 되거든. 
 
한동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입술을 꾹 깨문 채 자판을 두드렸다. 
 
―나한테... 바라는 게 뭐죠? 어차피 당신도 내 능력을 이용할 거잖아요. 
 
나는 고개를 들고, 한동훈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바라는 건 그 반대야. 
 
나는 한동훈의 눈을 바라보며, 일부러 소리내어 이야기했다. 
 
“너는, 지금부터 아무것도 하지 마라.” 
 
 
* 
 
 
“이제 이 좆같은 시간도 끝이야. 내일만 되면 다 끝난다고.” 
“후······ 이럴 때 소주 한 병 빨아야 되는데.” 
“그러니까. 아까 낮에 저 새끼 눈빛 봤냐? 현자의 눈 쓰고 나 노려보는데 개쫄아서 심장 터질 뻔했다.” 
“하핫, 프롤로그에서 하차한 새끼가 그게 현자의 눈인지 뭔지 어떻게 아냐?” 
 
화기애애한 목소리. 
너무 흥미진진해서 계속 들어주고 싶을 정도다. 
 
“야, 근데 다른 선지자 새끼들이 자꾸 의심 하는데······ 이 자식들 어떻게 설득하지? 아까부터 자기들이 충무로 가보겠다고 지랄들인데······.” 
“내가 말할 테니까 폰 줘봐. 하여간······ 응?” 
 
폰을 빼앗아 자판을 두들기던 정민섭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야, 갑자기 인터넷이 안 되는데?” 
“그 새끼 또 졸고 있는 거 아냐? 가서 한 번 확인해 봐.” 
 
천막 밖으로 나가려던 정민섭의 몸이 허공의 뭔가와 부딪쳤다. 
사색이 된 녀석이 거환도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여, 여기 뭐가······.” 
 
기이이이잉! 
 
“으아아악!” 
 
정민섭이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나는 가볍게 [은둔자의 망토]를 벗으며, ‘신념의 칼날’을 뽑아 들었다. 
 
“유, 유중혁님? 어째서?” 
 
당황한 이성국이 더듬거리는 사이, 천막 밖에서 정희원이 잠깐 고개를 내밀었다. 
 
“대충 몇 명은 처리했어요. 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아서······ 오래 버티진 못할 거예요.” 
 
정희원이 사라지고, 바깥에서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이제 보초들이 몰려들 것이다. 
 
“이, 이런 짓을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십니까? 아무리 유중혁 님이라도, 저희 모두를 감당하실 수는 없습니다!” 
“모두? 모두를 감당할 필요는 없지. 대표만 처리하면 되니까.” 
 
그 말에 이성국의 입술이 일순 실룩거렸다. 
 
“죄송한 얘기지만, 결코 유중혁 님의 뜻대로는―” 
 
까드드드득! 
 
가볍게 휘두른 에테르 블레이드가 쓰러진 정민섭이 입고 있던 갑옷을 그대로 반쪽 냈다. 정민섭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녀석의 갑피가 찢어지며, 품속에 들어있던 천조각이 떨어졌다. 놈의 얼이 빠진 사이, 나는 떨어진 천조각을 가볍게 주워들었다. 
 
[당신은 ‘동묘앞 그룹’의 깃발을 획득했습니다.] 
[당신의 ‘남색 깃발’이 ‘남색 깃발’의 누적 공적치를 흡수합니다.] 
[당신의 ‘남색 깃발’이 ‘갈색 깃발’로 진화합니다.] 
[강력한 깃발의 가호가 당신을 보호합니다.] 
 
“역시 동묘앞의 진짜 대표는 너였군.” 
“어, 어떻게······.” 
“너희들이 아무리 멍청이라도, 그렇게 대놓고 깃발을 전시할 리가 없잖아.” 
 
애초에 ‘한동훈’에게 대표를 줬다고 주장하던 것부터가 이상했다. 
어차피 미래를 아는 것은 자기들인데, 소설 속 등장인물에게 대표를 내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성국은 대표가 아니다. 
그러니 답은 하나뿐이었다. 
 
[‘동묘앞 그룹’의 남은 그룹원들이 당신의 처우를 기다립니다.] 
 
이제 보초들은 의미가 없어졌다. 
절망한 정민섭이 말을 더듬었다. 
 
“유중혁 님! 다, 다른 선지자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인터넷이 안 될 텐데, 어떻게 알리려고?” 
 
그제야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이성국이 빌빌 기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어째서······ 어째서 저희에게 이러시는 겁니까!” 
“글쎄. 이제 와 그런 질문이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군. ‘진짜 유중혁’이었더라도, 너희 같은 놈들이랑은 동맹을 안 맺었을걸?” 
“그, 그게 무슨······ 설마······?” 
 
안색이 창백해진 두 사람을 보며, 나는 씩 웃어주었다. 
 
“그러게, 끝까지 읽었어야지.”
 
 
 
 
 
< Episode 11. 선지자들의 밤 (2) > 끝

< Episode 11. 선지자들의 밤 (3) >
 
 
 
 
 
간만에 깊은 잠을 잤다. 
모처럼의 숙면이었다. 
 
[깊은 숙면의 효과로 정신력이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보유 중인 ‘전용 스킬’들이 일부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네 시였다. 
어젯밤 내내 동묘앞역이 점거 중이던 주변 지역을 돌며 깃발 꽂이를 마쳤더니, 피로가 단단히 쌓였던 모양이다. 
 
[현재 점거지 : 충무로(본진), 명동, 동대문 역사문화 공원, 동대문, 동묘앞, 신당, 청구, 약수, 신설동] 
 
동묘앞 그룹을 먹은 덕분에, 이제 내가 가진 역은 9개. 
이제 하나만 더 모으면, ‘왕의 길’ 시나리오는 끝이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초반 시나리오의 핵심 목표 중 하나인 ‘불살(不殺)의 왕’을 이룰 수 있다. 
밖으로 나오자, 정희원과 이현성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발 준비 끝났어요. 언제 갈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나는 잠시 일행들을 물린 후, 옆의 사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잘들 잤냐?” 
 
어젯밤, 나는 동묘앞 그룹에 소속된 모든 그룹원들의 처우를 결정했다. 
그리고 눈앞의 두 사내도, 그 ‘처우’의 결과였다. 
내 앞에 부복한 정민섭이 입을 열었다. 
 
“······부디 살려만 주십시오.” 
“저도, 저도. 흐흑!” 
 
본래라면 이성국도 정민섭도 그냥 쳐 죽여야 했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 둘은 <선지자들>을 완전히 쓸어 버리기 전까지는 나름의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놈들을 ‘충무로 그룹’에 넣었고, 깃발의 색도 ‘갈색’까지 진화시켰다. 
갈색 깃발부터는 ‘그룹원’에게 행동 제약을 거는 것이 가능해진다. 
 
[대표의 권리를 행사합니다.] 
[그룹원 ‘이성국’과 그룹원 ‘정민섭’에게 행동 제약을 강요합니다.]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에, 이성국과 정민섭의 표정이 변했다. 
 
“하나, 이제부터 너희는 다른 이에게 나의 정체에 대해 발설할 수 없다.” 
“네, 넵.” 
“둘, 너희는 내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하며, 내 허락 없이 개별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불허한다.” 
“······물론입니다.” 
 
[그룹원 ‘이성국’과 그룹원 ‘정민섭’이 자신의 제약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이 제약은 ‘목숨의 제약’입니다.] 
[만약 ‘제약’을 어길 시, 그룹원 ‘이성국’과 그룹원 ‘정민섭’은 사망할 것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좋아. 언제 내 마음이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열심히 해봐. 하는 거 봐서 결정할 테니까.” 

침을 삼키면서도, 두 녀석은 왠지 들뜬 얼굴들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놈들인지 모르겠군. 
어차피 유중혁한테 못 붙을 바에는, 나한테 붙는 게 더 나을 거라 생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표님. 그럼 앞으로 대표님을 뭐라고 불러야······.” 
“지금처럼 불러. 다른 <선지자들> 앞에선 유중혁이라고 부르고. 아, 그리고 정민섭.” 
“옙.” 
“네가 가진 [도망자의 탈] 내놔.” 
 
정민섭은 울상을 지었지만, 결국 내게 탈을 내주었다. 
어차피 <선지자들의 밤>에 가려면, 당분간은 계속 유중혁 행세를 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탈’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한 예방책이 되어줄 것이다. 
 
울룩불룩. 
 
잠시 후, 탈을 쓴 내 얼굴 근육이 기괴하게 변하더니, 조금씩 모양을 바꿔갔다. 조금 느낌이 이상하긴 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허, 그게 진짜 ‘유중혁’의 모습인가 보군요.” 
“잘 생겼다······. 역시 계시는 틀리지 않았어.” 
 
이 자식들이······. 
한 마디를 쏘아 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런 부분까지 쪼잔하게 굴 필요는 없지. 
그러고 보니, 만약을 대비해 이 녀석들의 자세한 정보도 알아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정민섭, 근데 넌 특성이 뭐······.” 
 
입을 여는 순간,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해당 인물들에 대한 업데이트 내역이 있습니다.] 
 
······뭐? 
나는 시험삼아 ‘등장인물 일람’을 가동해 보았다. 
 
<인물 정보> 
 
이름 : 정민섭 
나이 : 25세 
배후성(背後星) : 저주받은 검투사 
전용 특성 : 광투사 (희귀), 1089번째 하차자 (일반) 
전용 스킬 : [검술 연마 Lv.2], [강력한 일격 Lv.2], [광폭화 Lv.3], [기억력 강화 Lv.5]······. 
성흔 : [원한 갚기 Lv.1] 
종합 능력치 : [체력Lv.18], [근력Lv.16], [민첩Lv.12], [마력Lv.10] 
종합 평가 : 상당히 훌륭한 종합 능력치와 특성을 보유한 화신입니다. 배후성의 지원이 조금 아쉽지만, 전사로써 그의 능력은 상당한 수준입니다. 조금만 더 인내심이 깊었더라면 
12사도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몹시 아쉬운 노릇이군요. 
 
······‘등장인물 일람’이 업데이트 됐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어제까진 특성창이 안 보이던 녀석들이, 갑자기 ‘등장인물’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이들은 <선지자들>이었고, 따지면 소설 바깥의 인물들이다. 
왜 이들이 갑자기 ‘등장인물’로 바뀐 것이지? 
 
“아, 제 특성은······.” 
“필요 없어.” 
“넵.” 
 
나는 이성국의 특성도 마저 확인했다. 
다행히, 놈의 특성은 이실직고한 그대로였다. [최면술사]에 [9번째 하차자]······ 후자는 쓰레기라 쳐도, 전자는 꽤 쓸만한 특성이다. 

“너희, 스마트폰 좀 줘봐.” 
“옙! 여기 있습니다.” 
 
나는 녀석들에게서 스마트폰을 받아, 단톡방에 접속했다. 
아······ 그런데 이걸로는 인터넷이 안 되지 참. 어제 끊어버려서······. 
 
[등장인물 ‘한동훈’이 ‘광역 인터넷 Lv.5’를 사용하였습니다.] 
[해당 기기의 인터넷이 가능해졌습니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인터넷이 연결되었다. 
나는 한동훈이 있을 천막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위이잉, 하는 진동 소리가 들려서 내 스마트폰을 열었더니,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믿어 볼게요, 한 번만. 
 
어쩌면 한동훈에게도, 어젯밤 뭔가 변화가 있었던 거겠지. 
사실 좀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나는 한동훈에게 답장을 보냈다. 
 
―고맙다. 
 
조만간, 녀석과도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일단 이성국의 스마트폰으로 <선지자들>의 단톡방을 열어보았다. 
 
[대화방] 
[참가자 명단 : 9번하차자, 15번자살각, 124번하차자, 763번, 887번하차, 645번하차자······ 외 총 36명.] 
 
제각기 숫자가 붙은 아이디들을 보니 어떤 놈들인지 감이 온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하다. 
 
“······총 36명?” 
 
내 질문에 정민섭이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그 단톡방에 있는 <선지자들>은 전부 초기 하차자들입니다. 개중에 사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군. 
 
“저, 그런데 대표님. 어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끝까지 읽었어야지’라고······ 혹시 대표님도 계시록을 알고 계신 겁니까?” 
 
기대감 어린 정민섭의 눈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알다마다. 알기만 하겠냐? 
 
“유중혁이 아니라, 내 줄을 잡은 걸 후회하지 않게 될 거다.” 
 
 
* 
 
 
잠시 후, 우리는 주변의 분쟁 지역을 적당히 피해 안국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선지자들의 밤>이 개최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성국의 스마트폰을 통해 놈들의 단톡방을 염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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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번 : 진짜임?? 오늘 저녁에 유중혁 오는 거 맞음? 

67번째 : 틀림없음. 어제 9번째랑 1089번째가 장담했음. 
 
887번하차 : 9번째는 걍 병신인데, 1089번째가 말했으면 조금 믿을 수 있을지도.. 
 
124번하차자 : 이번에 조때면 우리 다 뒤지는 거여 
 
887번하차 : 124번 너새끼는 서울 아니잖아 ㅋㅋ 뒤지긴 뭘 뒤져 새끼야 아오 빡친다 진짜 
 
124번하차자 : 아물론 나는 빼고. 지방민의 승리 ^ ^v 
 
887번하차 : 나도 우리 중혀기처럼 회귀하고 싶다... 그때 그 소설만 다 읽었어도... 아니 50편까지만 읽었어도... 사도 새끼들 존나 부럽다... 
 
15번자살각 : 근데 솔까말 50편 넘게 읽은 놈들이 비정상 아니냐?? 아니 그걸 어떻게 50편 넘게 읽엌ㅋㅋㅋ 
 
124번하차자 : ㄹㅇ 정신병자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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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인간은 익명성 뒤에 숨어야 진짜가 드러나는 법이지. 
아마 저 닉네임 앞의 숫자는, 놈들의 하차 번호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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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8번 : ...근데 진짜 그 소설 텍본 하나도 없는 거 확실해? 
 
124번 : 며칠 전부터 계속 검색했는데 진짜 인터넷에 아무것도 안 남아 있음... 아아... 텍본조차 없는 비운의 소설... (눈물) 
 
763번 : 하긴, 지금 텍본 갖고 있으면 진짜 개사기짘ㅋ 나라면 있어도 공유 안 한다. 진짜 할 수만 있으면 영혼 팔아서라도 그 텍본 살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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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멸살법’을 읽던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 녀석들이, 그때 나와 같이 읽었던 그놈들이라 이거지.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정말 사람 앞일은 모르는 거다. 
 
“도착했습니다.” 
 
“뭐야, 벌써?”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바로 눈앞에 안국역 플랫폼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리 도착해 있는 <선지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여긴 아무도 점거를 안 한 모양이네?” 
“예. <선지자들> 사이의 약속입니다. 누군가가 점거한 역에서 만나게 되면 아무래도 위험할 수가 있으니까요. 일종의 DMZ같은 거죠.” 
 
그때, <선지자> 하나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어이, 1089번째!” 
“오, 763번 형씨.” 
 
정민섭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간 잘 지냈어? 얼굴 좋아 보이는데?” 
“좋긴 시발. ‘폭군왕’ 때문에 뒈질 맛인데.” 
“그러게 도봉구 쪽으론 진출하지 말랬잖아. 왜 사람 말을 안 듣고······.” 
 
시끄럽게 떠들던 763번이 내쪽을 흘끗 보더니, 갑자기 안색을 굳혔다. 
 
“호, 혹시······ 저 분이 그······?” 
 
정민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763번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마, 만나 뵙게 되어 정말로 영광입니다. 유중혁 님!” 
 
갑작스레 일어난 소란에, 흩어져 있던 <선지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설마 저분이?” 
 
일제히 달려온 <선지자들>이 하나둘씩 내 앞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극소수긴 했지만 여성 <선지자>들도 있었다.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잘생겼어요! 전 998번째에요!” 
“반가워요, 유중혁 님! 저는 1055번째입니다!” 
 
이 무슨······ 진짜 왕이라도 된 느낌이다. 
어떻게든 내 환심을 사 보려고 빛나는 눈동자들. 
내가 진짜 유중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다들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대부분은 눈대중으로만 봐도 별거 아닌 놈들이었다. 
아는 미래는 어설프고, 실력도 어설픈 놈들. 
그런데 개중, 눈에 띄는 녀석들도 있었다. 
 
“2회차에서 마왕 아스모데우스와 대적했던 모습,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호오? 
 
“계시록에서는 ‘회상’으로 언급되어서 아쉬웠지만······ 언젠가 유중혁 님을 만나면 꼭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확실히 ‘멸살법’의 시작은 유중혁의 ‘3회차’ 회귀부터니까, 2회차의 이야기는 전부 회상씬으로 처리될 뿐이다. 
아스모데우스까지 알 정도면, 꽤 아는데? 
근데 그렇게 인상 깊었단 놈이 왜 끝까지 안 읽었을까? 
 
“너는 몇 번째지?” 
“저는 1168번째입니다.” 
 
그럼 거의 50편 근처까지 읽은 놈이군. 
어쩌면 이들 중에선 가장 많이 읽은 녀석일 터다. 
1168번째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실례지만, 유중혁 님은 지금이 3회차가 맞으십니까?” 
“맞다.” 
“아아, 역시······.” 
 
몇몇 <선지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래, 알 만도 하다. 
‘멸살법’은 무한루프물인 만큼, 유중혁의 회차가 초반이라는 것을 알게 된 놈들은 상당히 실망스러울 것이다. 
자식들, 초반 회차는 초반 회차만의 귀여운 맛이 있는데······ 하여간 끝까지 읽지도 않은 놈들이 설쳐 댄다니까. 
뒤쪽에서 소란이 인 것은 그때였다. 
 
“이현성 님!” 
“강철검제 이현성 님 맞아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이현성이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왜, 왜들 이러십니까? 저는 강철······ 그런 게 아닙니다!” 
“헐, 진짜 계시 그대로야. 이 팔뚝 좀 봐!” 
“오오오! 탱탱해!” 
 
이현성도 제법 잘생긴 얼굴이라 그런지, 여성 <선지자>들에게 제법 인기가 많았다. 그때, 지나가던 <선지자> 하나가 정희원에게 관심을 보였다. 
 
“저기, 혹시······ ‘해상제독 이지혜’님이십니까?” 
“아닌데요.” 
“그럼 성함이······.” 
“정희원인데요. 왜요?” 
“아, 그렇습니까.” 
 
실망한 선지자는 그대로 정희원을 지나쳐 이현성을 구경하러 떠났다.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정희원이 내게 [그룹 채팅]을 걸었다. 
 
―왜······ 나한테는 별 관심이 없죠? 
―희원 씨는 미래에서 별로 안 유명하거든요. 
―칫. 
―그러니까 지금부터 잘 좀 해봐요. 
 
나는 처량한 눈빛의 정희원을 외면했다. 
<선지자들의 밤>이라더니, 이건 무슨 도떼기시장 수준이다. 
이런 식으로 떠들다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지. 
 
“<병기>는 어디에 있지?” 
“예?” 
“너희가 숨겨 놓은 <병기> 말이다. 일단 그것부터 확인하자.” 
“아, 그건 말입니다.” 
 
기쁨에 들떠 있던 763번째 <선지자>가 플랫폼의 중심으로 이동하더니, 천으로 가려져 있던 뭔가를 불쑥 들췄다. 그곳에는 커다란 돌이 있었다. 
순간, 얼마 전 극장의 옥상에서 유성우를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니, 잠깐만. 
 
“저거, 혹시 ‘운석’이냐?” 
“하하, 그렇습니다. 현 시점의 유중혁 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저희가 어렵게 입수한 ‘계시’에 따르면, 저 안에는 강력한 ‘무기’가 들어있습니다.” 
“무기?” 
“예! 그렇습니다. 아마 최상급 성유물 뺨치는 무기가 들어있을 걸로 예상됩니다.” 
“운석들은 부화 시간이 필요해서 지금 쓸 수 없을 텐데?” 
“하하, 저희가 돌아가며 마력을 공급해 두었습니다. 늦어도 오늘 밤 안에는 부화할 겁니다. 며칠 전부터 계속 준비해 왔기 때문에······.” 
 
자랑스레 떠드는 놈을 보며, 기분이 점점 서늘해진다. 
붉은 운석. 
말이 안 된다. 
저건 최소 4회차 이상 본 놈만 알 수 있는 건데? 
 
“그 정보 준 새끼 누구야?” 
“예?” 
“저 운석 가져온 놈 누구냐고.” 
“아, 그, 그건······ 1124번째였던가, 하는 녀석이······.” 
 
1124번째? 
그런 초반 하차자가 이런 정보를 안다고? 
 
“그놈 어디 있어?” 
 
때마침 주변을 둘러보던 정민섭이 중얼거렸다. 
 
“어······ 아직 안 온 것 같습니다만.” 
 
정보를 준 놈이 안 왔다. 
나는 잠시 황망히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나가야 해.” 
 
이건 함정이다. 
 
“예?” 
“지금 당장.” 
 
‘멸살법’이 현실이 되고, 유중혁을 처음으로 만났던 이후, 처음으로 등 뒤에 식은땀이 고이고 있었다. 
 
저걸 <병기>로 쓴다고? 
어떤 개 또라이 같은 놈이 그런 발상을······. 
 
나는 순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선지자들>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단상 위에서 진동이 시작되었다. 
 
쿠구구구······. 
 
나는 부르르 떨리는 ‘운석’을 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선지자들> 쓸어버리러 왔다가, 자칫 내가 쓸리게 생겼다. 
 
“뭐, 뭐지 갑자기?” 
 
정민섭이 멍청한 소리를 했다. 
빌어먹을. 네 번째 시나리오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섯 번째 시나리오의 ‘재앙’이 나타나려 하고 있었다. 
나는 다가오는 정희원과 이현성을 향해 외쳤다. 
 
“모두 도망쳐요!” 
 
이래서 끝까지 안 읽은 놈들 말은 믿는 게 아닌데. 
망할 초반 하차자 새끼들 때문에, 잘못하면 오늘 다 뒤지게 생겼다. 
 
 
 
 
 
 
< Episode 11. 선지자들의 밤 (3) > 끝

< Episode 11. 선지자들의 밤 (4) >
 
 
 
 
 
붉은 운석에서 적색 아우라가 일렁이더니, 이내 플랫폼 전역으로 눈부신 빛이 쏘아졌다. 
 
“오오! 드디어!” 
 
몇몇 <선지자들>이 좋다고 비명을 질렀다. 
정희원과 이현성이 급히 다가왔다. 
 
“도망치라뇨? 무슨······.” 
 
이미 늦었다. 
적색 아우라가 플랫폼 전역으로 퍼지며, 희미한 결계가 역을 둘러싸는 것이 보였다. 
 
이제 <선지자들>중 누구도, 안국역에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과도한 필터링에 항의하던 성좌들이 피켓을 내립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징조’에 눈을 반짝입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상황을 지켜봅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기발한 전략을 기대합니다.] 
 
심지어 성좌들마저 신나서 간접 메시지를 쏘고 있다. 
‘멸살법’의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상황은, 지금처럼 성좌들이 단체로 파티를 벌일 때다. 
나는 긴장한 정민섭을 향해 물었다. 
 
“혹시, 오늘 여기 모이자고 한 것도 그 1124번인가 하는 놈이냐?” 
“예? 거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다 같이 합의한 줄로만······.” 
 
누군가가 고구마를 열 개쯤 먹인 기분이다. 
설마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다들 제 뒤로 오세요. 
 
나는 운석의 동향에 주의하며 일행들을 보호했다. 
 
―도망 안 가요? 
―못 갑니다. 뒤쪽을 보시면 알겠지만, 결계가 생겼어요. 
―예? 무슨 결계죠? 
 
나는 대답하지 않고 플랫폼 중앙의 운석을 노려보았다. 
[운석]은 ‘다섯 번째 시나리오’의 메인 이벤트다. 
색깔과 밝기, 크기와 종류에 따라 보상 또는 위험이 잠들어 있는 운석. 
그런데 지금 보이는 운석은, 내가 알기로 절대 부화시키면 안 되는 운석이다. 
3회차에서 <성유물>이 나온 운석이 ‘밝은 적색’이었기 때문에 다들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성유물이 나오면 주인은 어떻게 가리지?” 
“그야······.” 
 
아직까지도 정신을 못 차린 몇몇 <선지자>들이 운석에 손을 댄 순간. 
 
[다섯 번째 메인 시나리오의 징조가 나타납니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엉? 뭐야, 이거?” 
“갑자기 메인 시나리오가 왜······.” 
 
쩌저저적― 
 
운석의 표면에 한 줄기 금이 가더니, 붉은빛이 쏟아져 나왔다. 제일 먼저 빛을 맞은 것은 의아하다는 듯 운석을 들여다보던 선지자였다. 
 
쉬익― 
 
머리를 잃은 선지자의 몸뚱이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천천히 바닥에 쓰러졌다. 
 
“이거 뭐야!” 
 
놀란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지만,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었다. 
나는 일행을 데리고 결계의 가장자리까지 물러선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멸살법’에서 저런 색깔의 운석을 본 기억은 나는데, 뭐가 나왔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제발, ‘대재앙’만 아니기를. 
 
꽈드드드득! 
 
운석이 갈라지며 붉은 용암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주변의 플랫폼이 타들어가며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공기의 온도가 급속도로 올라가며, 숨쉬기가 버거워졌다. 
주변의 환경이 바뀌고 있었다. 
이건······ 용암지대인가? 
그렇다는 것은······. 
 
[5급 화룡종(火龍種),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가 등장했습니다!] 
 
“시발? 뭐야! <성유물>은······?” 
 
당황한 선지자 몇 명이 뒤늦게 신법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나 운석 속에서 뻗어 나온 긴 꼬리가 달아나는 몇몇 선지자들을 잡아챘다. 
 
파스스스! 
 
“끄아아아악!” 
 
꼬리에 휘감긴 선지자의 몸이 순식간에 불타올라 스러졌다. 몇몇 선지자들이 스킬을 사용해 꼬리를 공격했으나, 역으로 그들의 무기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 이 괴물은······.” 
 
고작해야 가로세로 2미터 정도 크기의 운석이었는데, 그 틈으로 기어 나오는 괴수는 꼬리만 5미터를 훌쩍 넘는 괴물이었다. 
정희원이 물었다. 
 
―저게 대체 뭐예요? 
―재앙입니다. 
―재앙이요? 
 
쩌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운석의 나머지 부분이 갈라지며, 화룡종의 전체가 차원을 뚫고 등장했다. 
 
그오오오오―! 
 
드래곤으로 따지면 막 태어난 헤츨링 정도. 
심지어는 그 헤츨링의 열화판에 불과한 놈이지만, 괜히 드래곤이 모든 괴수종의 정점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6급 괴수종만 해도 여기 있는 <선지자들>쯤은 다 쓸어버릴 텐데, 무려 5급 화룡종이라니······. 

“유중혁 님!” 
 
몇몇 선지자들이 나를 부르자, 이쪽으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사고는 니들이 치고, 해결은 내가 하냐? 
 
“모두 가장자리로 물러나라.”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전원이 플랫폼의 귀퉁이로 움직였다. 발재간이 있는 녀석들은 벌써 플랫폼 위층으로 달아나는 중이었다. 하지만. 
 
투웅! 
 
“제기랄, 결계가 있어!” 
 
열화판 레서 드래곤은 ‘소재앙’이다. 
지금 상황에서야 소재앙이든 대재앙이든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절망의 크기가 달랐다. 
 
적어도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패턴이니까. 
 
유중혁의 무수한 ‘회귀행’ 중에는, 분명 이런 녀석을 상대한 적도 있었다. 
나는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곧 히든 시나리오가 시작될 겁니다. 
―히든 시나리오요? 
―네 번째 시나리오에서 나오면 안 되는 놈입니다. 지나치게 비정상적인 난이도가 설정되었으니, 곧 개입하는 존재가 있을 겁니다. 
 
기본적으로 재앙에 대응하려면 다섯 번째 시나리오에서 주어지는 각종 혜택들이 필요하다. 
가령 푸른 운석이라든가, 녹색 운석에서 나오는 것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 쪽에 균형을 맞출 뭔가가 주어질 거란 얘기다. 
 
[일부 성좌들이 비정상적인 시나리오 난이도에 항의합니다.] 
 
역시. 
 
다음 순간,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더니 작은 아이 크기의 존재가 나타났다. 
비형과 같은 하급 도깨비는 아니었다. 
단정한 정장을 갖춰 입고, 머리에는 작은 뿔 두 개를 단 녀석. 
볼 옆으로 툭 튀어나온 작은 혹주머니가 인상적인 녀석이었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어떤 존재인지는 알겠다. 
 
저놈은 ‘중급 도깨비’다. 
 
[흐음. 이거 곤란한데. 여러분 어쩌다가 이 ‘루트’로 들어오신 거죠? 최근 들어 지나치게 설치는 것 같긴 했는데······, 거참.] 
 
중후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레서 드래곤의 움직임이 일순 멈추었다. 
과연, 중급쯤 되면 저 정도 ‘시나리오 개입’도 가능하다. 
 
[네 번째 시나리오도 못 깬 판국에, ‘재앙’을 깨우면 어쩌자는 겁니까?] 
 
중급 도깨비가 나타났다는 것은, 이제 ‘초반 시나리오’가 거의 막바지에 도달했다는 뜻이었다. 
저놈이 이곳을 주목하는 한, 나는 비형과의 계약 혜택을 거의 볼 수 없을 것이다. 
 
[몇몇 성좌님들이 유독 아끼는 분들이 있어서 이대로 둘 수는 없고······, 그렇다고 난이도를 하향해 드릴 수도 없고······.] 
 
녀석의 시선이 스치듯 내게 머물렀다.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아직 우린 네 번째 메인도 못 깼다고!” 
 
사색이 된 선지자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극초반 하차자인 모양인지, 주변에 있던 선지자들이 재빨리 놈의 입을 틀어막는 것이 보였다. 
지금 도깨비한테 소리를 질러서 좋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방금 결정했습니다. 역시 난이도 하향 따위는 없습니다.] 
 
선지자들이 소리친 녀석을 노려보았다. 
히끅, 하고 넘어가는 숨 소리. 
녀석들도 ‘멸살법’을 읽었으니 알 것이다. 
도깨비는 말을 번복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이것도 알아야 한다. 
 
[그래도······ 이대로 여러분이 다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으니, 제 재량으로 시나리오 내용을 살짝 바꿔보죠.] 
 
도깨비 녀석들은, 생각보다 말이 많다. 
 
[히든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레서 드래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붉은 가죽으로 덮인 녀석의 앞발이 플랫폼 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 
 
꽈과과광! 
 
나는 튀어 오르는 파편을 피하며, 도착한 시나리오를 열었다. 
 
+ 
 
<히든 시나리오 ― 뭉쳐도 죽고 흩어져도 죽는다> 
 
분류 : 히든 
난이도 : A 
클리어 조건 : 제한시간 내에 소재앙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를 사냥하거나, 녀석의 공격 속에서 살아남으시오. 
제한시간 : 20분 
보상 : 3000코인 
실패시 : 사망 
 
* 해당 미션에는 히든 피스가 숨어 있습니다. 
 
+ 
 
20분 동안의 생존 미션. 
제목부터 내용까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내용이다. 
이현성이 물었다. 
 
―저놈을 잡아야 합니까? 
―아뇨, 꿈도 꾸지 마세요. 
 
재앙이 괜히 재앙인 게 아니다. 
5급 화룡종은 진짜 유중혁이 있어도 못 잡는다. 
지금 플랫폼의 상황만 봐도 알 수 있다. 
거대한 놈의 아가리에서 시뻘건 불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콰콰콰콰! 
 
“끄아아아악!” 
 
단지 불길에 스쳤을 뿐인데, 선지자들이 잿물이 되어버렸다. 
불길에 타들어간 벽면이 흉측하게 녹아 일그러졌다. 
놈의 아가리가 서서히 이쪽으로 돌아온다. 
 
“모두 반시계 방향으로 달려요!” 
 
후끈거리는 열기를 참으며, 놈의 입이 회전하는 방향을 앞서 달린다. 
다행히 정희원과 이현성은 잘 쫓아오고 있었다. 정민섭과 이성국이 조금 뒤처지긴 했지만, 녀석들도 아직은 괜찮아 보였다. 
이번에는 패턴을 알기에 피했다. 
문제는, 항상 이런 식의 공격만이 이루어지진 않는다는 것. 
 
[5급 화룡종,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가 ‘파멸의 불꽃’을 준비합니다.] 
 
······시작됐군. 
일반 공격은 어떻게든 피했지만, 위기는 지금부터다. 
 
“발판을 찾아요.” 
“예?” 
“숫자 5······ 아니면 2나 3! 어쨌든 총합 5를 맞춰봐요, 빨리!” 
 
[히든 피스가 발동합니다.] 
[숫자 발판들이 활성화됩니다.] 
[숫자에 알맞은 인원이 발판 안에 들어가면, 10초간 ‘앱솔루트 실드’를 발동할 수 있습니다.] 
[숫자 이상의 인원이 발판 위에 올라가면, ‘앱솔루트 실드’는 발동하지 않습니다.] 
 
들려온 시스템 메시지에 우왕좌왕하는 선지자들이 보였다. 
동시에 역 곳곳에서 등장한 2평 남짓 크기의 ‘발판’들. 
 
“발판? 아, 그렇군!” 
“히든 피스가 있다!” 
 
허둥지둥 움직이는 선지자들을 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낄낄거리는 성좌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연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의 난이도에 반발했던 이유? 
간단하다. 
 
‘이야기 없는 죽음’은 재미가 없으니까. 
 
놈들이 원하는 것은 거인의 발에 무력하게 짓밟히는 개미가 아니다. 
놈들이 보고 싶은 것은,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개미다. 
살기 위해서라면, 동족도 가족도 물어뜯는 개미. 
 
[상당수의 성좌들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봅니다.] 
 
빌어먹을 성좌 새끼들. 
 
“씨발, 꺼져!” 
“커허헉!” 
 
서로의 번호를 친근하게 부르던 <선지자들>은, ‘1’이란 숫자가 적힌 발판 위에서 서로를 향해 병장기를 휘둘렀다. 꽉 찬 발판 위로 다가오던 선지자들 몇몇이 피를 뿌리며 바닥에 늘어졌다. 
발빠른 선지자들은 벌써 무리를 이루고 발판 안으로 들어가,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놈들을 눈여겨보았다. 
 
분명, 이 사태는 누군가가 계획한 함정이다. 
아마 <사도>란 녀석들이겠지. 
 
그들은 하차자들이 이곳에 모일 것을 알았고, 이 기회에 초반 하차자들을 쓸어버리기로 한 것이다. 
현명한 생각이다. 
아무리 허접한 정보라 해도 미래를 아는 놈들은 적을 수록 좋다. 
평범하게 생각하자면 지금쯤 <사도>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죽어갈 하차자들을 생각하며 웃고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평범한’ 놈들이라면 그럴 거라는 뜻이다. 
 
그 지루한 소설을 50편 이상 읽었다는 것부터가 이미 정상이 아니다. 
스스로를 <사도>라 명명하고, 정보를 통제할 정도로 욕심 많은 녀석들. 
‘붉은 운석’을 함정카드로 쓸 정도의 정보력을 갖춘 놈들이라면, 그 운석이 불러온 재앙을 극복할 방법도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말하자면······. 
 
―대표님! 발판이 없습니다. 
―이쪽도 없어요! 
 
정민섭과 정희원이 다급하게 외쳤다. 
하필이면 우리 일행이 있던 위치에만 발판이 없었다. 
 
―엇, 여기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간신히 찾아낸 발판에는 불길한 숫자가 적혀 있었다. 
 
4. 
 
즉, 저 발판에 들어가서 살 수 있는 것은 네 명뿐. 
하지만 우리 일행은 다섯 명이었다. 
 
[5급 화룡종,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가 ‘파멸의 불꽃’을 사용합니다.] 
 
플랫폼 중심에서 터진 거대한 불꽃이 역 전체에 번져가기 시작했다. 
레서 드래곤의 전체 공격기술. 
이렇게나 떨어져 있는데도, 피부가 화상을 입을 정도의 열기. 
지금 실드를 가동하지 않으면 일행은 전멸한다. 
 
“대, 대표님?” 
 
내 시선을 받은 이성국과 정민섭이 몸을 떨었다.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때. 
 
“유중혁 님!” 
 
돌아본 곳에, 선지자 하나가 서 있었다. 
숫자 2가 적힌 발판. 
다급한 상황에도, 얼굴에 묘한 여유가 엿보이는 사내였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저놈은······? 
몇 가지 기억이 빠르게 스쳐 갔다. 
나는 놈을 향해 몸을 날리며, 뒤쪽의 일행들을 향해 외쳤다. 
 
“실드를 발동해요!” 
 
[앱솔루트 실드를 발동합니다!] 
 
고오오오오! 
뒤이어 모든 것을 불태우는 화염이 플랫폼을 가득 메웠다. 
조금이라도 닿았다면, 나라고 해도 그대로 녹아버렸을 온도였다. 
 
“후우······ 다행입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실드를 발동한 녀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놈을 향해 물었다. 
 
“넌 누구냐?” 
 
사내가 가볍게 웃었다. 
 
“섭섭합니다. 벌써 잊으셨습니까? 저, 1168번입니다. 아까 아스모데우스에 관한······.” 
 
물론 기억한다. 
나한테 ‘마왕 아스모데우스’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녀석. 
 
“그걸 물은 게 아니야.” 
 
나와 눈이 마주친 1168번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미처 생각지 못했다. 
마왕 아스모데우스와 유중혁의 대결 장면. 
정확히 말하면, 2회차의 유중혁이 일방적으로 마왕한테 얻어터지는 ‘회상씬’. 
나도 무척 좋아하는 장면이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회상은 50편 ‘이전’에 등장하지 않는다. 
‘멸살법’의 완독자로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칼을 뽑으며 입을 열었다. 
 
“다시 묻겠다. 네놈은 누구냐?” 
 
[특성 효과로 일부 장면에 대한 기억력이 상승합니다!] 
 
마왕 ‘아스모데우스’의 이야기는, 정확히 멸살법 57편에 등장한다. 
 
여유롭던 녀석의 표정에, 균열이 번지기 시작했다.
 
 
 
 
 
< Episode 11. 선지자들의 밤 (4) > 끝

< Episode 11. 선지자들의 밤 (5) >
 
 
 
 
 
자칭 1168번이 실드에 의해 갈라지는 불꽃의 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체라뇨?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잊었나? 나한테 [현자의 눈]이 있다는 걸.”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이 녀석의 정보는 내게 보이지 않았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해당 인물의 정보는 ‘등장인물 일람’으로 열람할 수 없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업데이트가 된 인물과, 업데이트가 되지 않은 인물의 차이는 뭘까? 
아직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하지만 이유야 뭐든, 놈을 속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쨌든 놈은 나를 ‘유중혁’이라 믿고 있으니까. 
 
“······유중혁 님 눈치는 못 당하겠군요.” 
“너는 <사도>다. 그렇지?” 
“그렇습니다. 벌써 거기까지 알고 계셨군요.” 
 
정체를 쉽게 밝혔다는 것은, 아직 남은 꿍꿍이가 있다는 것. 
 
“역시 이건 함정이었군. 나비 효과 때문이냐?” 
“하하, 맞습니다.” 
 
내 말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1168번이 웃으며 다른 하차자들을 바라보았다. 
 
“날아다니는 나비가 많으면, 불필요한 폭풍이 발생하는 법이니까요.” 
 
발판을 찾지 못한 하차자들이 ‘파멸의 불꽃’ 속에서 부나방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그들이 알고 있던 정보도 먼지로 사라졌다.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성유물을 탐한 대가였다. 
 
“나비가 아직 애벌레일 때 죽이겠다는 거군.” 
“번데기가 되기 직전의 애벌레들이 제일 죽이기 쉽거든요.” 
 
화르르르륵! 
 
후끈한 열기가 조금씩 잦아들더니, 주변의 염화가 차츰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앱솔루트 실드가 꺼졌다. 
 
[1분 뒤, 발판의 위치가 재생성됩니다.] 
 
이 히든 시나리오는 총 10번의 ‘발판’을 찾아내고 전체 공격기를 버텨야 비로소 끝이 난다. 
이제 겨우 한 번이 지나갔으니, 앞으로 무려 9번이 남은 셈이다. 
나는 시험 삼아 실드가 펼쳐지지 않은 자리를 발로 눌러 보았다. 
고열이 올라오긴 했지만, 이 정도면 버틸만한 수준의 열기였다. 
 
―대표님! 
 
나는 멀리서 달려오려는 일행들을 손짓으로 막았다. 
지금은 저들을 챙길 시간이 없었다. 

―대강 패턴은 익혔을 테니, 각자 알아서 피하세요. 지금부터는 일일이 챙겨 드리지 못합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일행들이 걸음을 멈췄다. 
<사도> 녀석들의 힘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일행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위험했다. 
1168번이 나를 보며 말했다. 
 
“계시에 나오는 모습이랑은 다르시군요. 정말 3회차가 맞습니까?” 
“시끄럽고, 네놈은 ‘몇 번째’냐?” 
“흐음? 직접 확인하셨다면 아실 텐데요.” 
“나는 겉과 속이 똑같은 놈을 좋아하거든. 양면이 다른 놈이랑은 거래를 틀 수 없으니까.” 
 
사도의 눈에 이채가 깃들었다. 
 
“재미있군요.” 
“네놈이 쉽게 정체를 밝힌 이유가 있을 테지.” 
 
휘이이익! 
 
허공을 가르며 날아든 레서 드래곤의 꼬리가 우리가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민첩이 30을 넘는 내게야 피하기 쉬운 공격이었지만, 1168번의 기민한 움직임이 놀라웠다. 
나는 극장 던전에서 얻었던 [냉철한 관찰력]을 발동했다. 
애초에 [등장인물 일람]이 안 먹히는 놈들을 위해 아껴둔 스킬. 
각력과 속력, 그리고 호흡의 간격······. 
체근민 합은, 대략 49에서 50 정도인가. 
지금껏 살펴본 선지자들 중에서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내가 놈의 뒤로 따라붙자, 녀석이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저는 1195번. <사도> 중에서는 ‘다섯 번째 사도’로 통하고 있습니다.” 
 
멸살법의 1화 조회수는 1200. 
1195번이면, 하차자들 중에서는 정보력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녀석일 터다. 
그러니 ‘붉은 운석’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군. 
 
“목적이 뭐지? 네놈도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거냐?” 
“후후, ‘유중혁 님’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떻습니까?” 
“송충이가 나비가 된다는 거짓말이 더 그럴듯하겠군, 그래.” 
“하긴, [거짓 간파]를 가지고 계셨죠, 참.” 
 
놈이 열기에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냥 지금 해치울까? 
······아니다. 
조금 더. 
조금 더 들어야 한다. 
 
“하지만 유중혁 님을 구하기 위해서란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여기서 당신이 죽으면 곤란하니까요. 그러면 계시가 크게 망가집니다.” 
“내가 올 것을 알았군.” 
“몇 시간 전에 알았습니다. 그래서 계획을 황급히 수정한 거죠.” 
 
타다닷, 불똥이 튀며 근처에 있던 선지자 몇이 더 죽어 나갔다. 
여전히 죽지 않고 버티는 녀석들도 있었다. 
마치 레서 드래곤의 패턴을 알고 있는 듯한 녀석들. 
나는 녀석들을 눈여겨 보였다. 
 
“본래 저희는 참전할 계획이 없었습니다. 유중혁 님이 안 계셨다면 말이지요.” 
“그래서?” 
“답은 이미 예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발판의 위치가 재생성되었습니다!] 
[5급 화룡종,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가 ‘파멸의 불꽃’을 준비합니다.] 
 
일행들은 이번에도 무사히 발판 위에 올라섰다. 
나와 사도도 2가 붙은 발판을 찾았다. 
정확히는, 이미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던 발판을 사도가 힘으로 빼앗은 것이었다. 잔인하게 튀어 오른 핏방울이 사도의 볼에 묻었다. 
볼을 문질러 닦으며 사도가 말을 이었다. 
 
“저희는, 레서 드래곤을 사냥할 겁니다.” 
 
쿠구구구구! 
 
[5급 화룡종,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가 ‘파멸의 불꽃’을 사용합니다.] 
 
발동한 앱솔루트 실드가 다시 한번 불꽃을 막아냈다. 
 
갸오오오오오―! 
 
고작 두 번의 발판이 지나갔을 뿐인데, 남은 <선지자들>의 숫자는 사분의 일도 채 되지 않았다. 일행들은 꾸역꾸역 버티고 있지만, 그것도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히든 피스에 패널티가 발생합니다.] 
[다음 턴부터 발판의 개수가 줄어들 것입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고작 너희 힘으로?” 
“가능합니다. 준비는 충분히 해 왔으니까요.” 
 
자신감 넘치는 놈의 목소리에, 꺼림칙한 느낌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놈은 이 열기 속에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놈의 피부 위를 감도는 푸르스름한 냉기. 
저건······ 그렇군. 
준비성이 탁월한 놈들이다. 
 
“청빙환(靑氷丸)인가.” 
“맞습니다.” 
 
강서지역에 나타나는 7급 원소종을 사냥하면 일정 확률로 얻을 수 있는 비약. 놈들은 벌써, 그 비약을 손에 넣은 것이다. 
저걸 먹으면 적어도 30분간은 강력한 냉기 속성을 방출할 수 있다. 
즉, ‘레서 드래곤’에게 타격을 줄 만한 기반은 갖출 수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공격력. 
 
“하지만 너 혼자론 무릴 텐데.” 
“혼자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만?” 
 
나는 살아남은 하차자들을 살폈다. 
아까 유독 눈여겨 봐두었던 몇 명의 하차자들. 
자세히 보니, 녀석들의 몸에도 푸르스름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후후, 혼자 올 리가 없지 않습니까?” 
 
눈대중으로 세어봐도 5명이나 되는 숫자. 
설마 이 작전을 위해 전력의 절반을 투입했을 줄이야. 
다섯 <사도>들이 모두 청빙환을 먹었다면 자신감을 가질 만도 하다. 
하지만. 
 
“몇 명 더 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그래서 도움을 구하는 겁니다. 저희를 도와주신다면, 유중혁 님께도 청빙환을 드리겠습니다.” 
“거절한다면?” 
“적어도 유중혁 님의 일행은 여기서 모두 죽겠죠.” 
“너희는 무사할 것 같으냐?” 
“레서 드래곤은 못 죽여도, 각자 자기 몸 하나 정도는 챙길 수 있습니다.” 
 
아주 넘치는 자신감이시군. 
내가 ‘진짜 유중혁’이었다면 벌써 목이 달아났을 놈들이. 
 
“내가 일행 따윌 걱정할 것 같나? 사람은 어차피 다 죽는다. 괜찮은 놈들은 다시 모으면 돼.”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아 놈의 목에 들이댔다. 
그러자 놈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후후, 과연 계시 그대로군요. 하지만 신중하게 생각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무슨 뜻이냐?” 
“지금쯤 유중혁님의 ‘본진’은 저희 손에 넘어왔을 테니까요.” 
“······뭐?” 
“해상제독 이지혜에, 이상한 능력을 쓰는 꼬마. 그리고 십악 중 하나. 본래의 ‘계시’와는 다르지만, 꽤 괜찮은 파티를 구성하셨더군요. 과연 그들이 다 죽어도, 유중혁 님이 다시 시작하시는 데 문제가 없을까요?” 
 
벌써 거기까지 조사를 마쳤던 건가. 
이 자식들이······.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충무로 역’까지 빼앗겨 버린다면? 지금은 그저 제안에서 그치고 있지만, 이게 언제까지나 ‘제안’으로 끝날 거라 생각하진 마십시오. 저희 그룹은 이미 열 개의 역을 장악해 ‘왕의 길’을 시나리오를 완료했습니다. ‘왕’을 가진 그룹과 아닌 그룹의 격차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알고 계시겠지요.” 
“······.” 
“아마 지금쯤 상황 정리는 끝났을 겁니다. 왕께서는 충무로의 깃발 꽂이 앞에서 유중혁 님의 선택을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랬군. 
놈들의 작전을 알겠다. 
이 녀석들은, 내가 <선지자들의 밤>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순간, 충무로를 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만약 ‘유중혁 님’이 저희와 함께하는 것을 ‘서약’해 주신다면, 일행의 안전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드립니다. ‘왕의 명예’를 걸고, 약속드리지요.” 
 
이렇게 치밀한 협박은 오랜만이라, 심장이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 유중혁을 상대로 이런 담대함이라니. 
‘멸살법’에서도 이만한 지략가는 드문 편인데. 
 
“네놈들의 ‘왕’은 누구냐? 그놈은 ‘몇 번째 하차자’지?” 
“흠······ 왕께서는 자신을 ‘하차자’라 부르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럼 뭐라고 불러?” 
“아무리 유중혁 님이라 해도, 그분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모든 <선지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모든 계시’를 읽은 분. 유중혁 님의 과거와 미래를 모두 알고 계신 분입니다.” 
 
······뭐? 
 
잠깐 놀라긴 했지만,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이거 흥미가 샘솟는다. 
 
나 말고 다른 소설을 다 읽은 독자가 있다고? 
웃음이 나온다. 
헛웃음이 아니라, 비웃음이. 
 
왜냐하면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으니까. 
 
쿠오오오오! 
 
마침내 화룡종의 세 번째 전체 공격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나는 사도 녀석을 일별한 후, 발판에서 조용히 내려왔다. 
태연히 앞으로 걸어가는 나를 보며 당황한 사도가 물었다. 
 
“유중혁님? 무슨 짓입니까?” 
 
놀란 것은 멀리 떨어진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짧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거기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알겠죠? 
 
나는 ‘레서 드래곤’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확실한 발걸음으로. 
‘파멸의 불꽃’을 충전하던 화룡종이 나를 보며 흉포한 살기를 드러냈다. 
 
“무슨 짓입니까! 돌아오십시오!” 
 
뒤쪽의 사도가 다급하게 외쳤다. 
나는 놈을 돌아보며 웃어주었다. 
 
“너희 ‘왕’이 이런 미래에 대해선 안 알려준 모양이지?” 
 
놈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계속 생각했다. 
이놈들은 절대로 살려둬서는 안 된다. 
하지만 놈들은 ‘공략법’을 알고 있고, 나 혼자 힘으로 놈들을 몰살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나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 잊었나 봐? 내 ‘성흔’이 무엇인지.” 
 
만약 내가 놈들이라면. 
지금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일까. 
 
“난 죽음이 두렵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답은 간단하다. 
놈들은 내가 유중혁이라 믿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데 궁금하네. 너희들은 어떨까? 이번 ‘회차’의 이례적인 존재들인, 너희들은.” 
 
놈들이 가장 ‘두려운 것’은 곧,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내가 여기서 죽어도, 과연 다음 회차에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 세계와 함께 이대로 소멸할까?” 
 
유중혁이, 절대로 하지 않기를 바라는 일. 
 
“정말 ‘계시’를 읽었다면, 네놈들도 답을 알고 있겠지?” 
 
사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머리를 쓰는 놈들은 오히려 다루기 쉬울 때가 있다. 
 
“유중혁을 잡아!” 
 
발판 위를 지키던 다섯 사도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럴 줄 알았다. 
 
아무리 태연한 척하고 있어도, 너희는 그저 이 ‘시나리오’에 말려든 일개 ‘하차자’일 뿐이다. 
 
주인공이 죽은 세계에서 너희가 어떻게 될지. 
너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빨리 잡으라고!” 
 
마치 나처럼. 
 
[5급 화룡종,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가 ‘파멸의 불꽃’을 사용합니다.] 
 
플랫폼의 중앙에서 불꽃이 터지는 순간, 나는 모든 근력을 폭발시켜 드래곤의 다리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 위치한, 안국역의 [깃발 꽂이]를 향해 힘차게 깃발을 꽂아 넣었다. 
 
[‘안국역’을 점거하였습니다.] 
[현재 점거지 : 충무로(본진), 명동, 동대문 역사문화 공원, 동대문, 동묘앞, 신당, 청구, 약수, 신설동, 안국] 
[‘갈색 깃발’의 공적치가 상승합니다.] 
[총 10개의 역을 점거하였습니다!] 
[히든 시나리오― ‘왕의 길’을 달성하였습니다.] 
[당신이 걸어온 길에 따라 새로운 ‘왕’의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1. 오만한 위선의 왕 
2. 고독한 취향의 왕 
3. 불살의 왕 
 
······. 
 
나는 떠오르는 선택지를 읽어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불살의 왕.” 
 
[새로운 특성, ‘불살(不殺)의 왕’을 획득합니다!] 
 
이 정도면 됐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여기서 놈들을 쓸어버리려면 이 수밖엔 없었다. 
터지는 불꽃을 발견하고 허겁지겁 발판 쪽으로 되돌아가는 사도들이 보였다. 
하지만, 이미 피하기엔 늦었다. 
 
“그러게 조심했어야지. 인생은 한 번뿐인데.” 
 
검붉은 홍염의 파도가 놈들을 덮쳤다. 
청빙환을 먹었다 해도 결코 버틸 수 없는 공격이었다. 
 
[외장 강화 수트의 내구가 급격하게 감소합니다.] 
[외장 강화 수트의 내구가 다했습니다.] 
 
곧 내 시야도 어둑해졌다. 
불길이 살점을 태우는 느낌과 함께, 나는 의식을 잃었다. 
 
[당신은 사망했습니다.] 
 
. 
. 
 
그리고 잠시 후,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불살의 왕’의 특전이 발동합니다.]
 
 
 
 
 
< Episode 11. 선지자들의 밤 (5) > 끝

< Episode 12. 1인칭 주인공 시점 (1) >
 
 
 
 
 
Episode 12. 1인칭 주인공 시점 
 
 
 
 
세상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죽음 중 하나가 ‘분신’이라는데, 방금 나는 그걸 겪었다. 
뇌세포 속 뉴런이 일제히 발광하는 것 같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정신적 고통을 감쇄합니다.] 
 
서서히 고통이 줄어든다. 
이번에도 [제4의 벽]인가. 
이 스킬의 도움으로 난관을 벗어날 때면, 언제나 이상한 기분이 든다. 
‘멸살법’은 분명히 현실이 되었고, 나는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매번 느껴지는 이 ‘벽’은, 대체 뭘까. 
 
······. 
 
아니, 쓸데없는 생각은 됐다. 
‘불살의 왕’ 특성은 무사히 얻었고, 나는 다시 움직여야 한다. 
동족불살(同族不殺)의 조건을 길의 끝까지 지켰을때에만 얻을 수 있는 특성, 불살의 왕. 이름과는 다르게, 사실 이 특성의 특전은 ‘불살’이 아니라 ‘불사(不死)’에 더 가깝다. 어디까지나 조건부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이제 곧 육신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정확히는 그렇게 생각했다. 
 
[전용 스킬 충돌 오류로 ‘불살의 왕’의 특전 활성이 지연됩니다.] 
 
..응? 
스킬 충돌 오류라고? 
 
[사망으로 인해 의식이 육체의 구속에서 완전히 해방됩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강제로 활성화됩니다.] 
 
어어, 하는 느낌과 함께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아니 잠깐만. 이럴 때가 아닌데? 
 
「“젠장, 그놈만 아니었더라도.”」 
 
일순, 현기증이 몰려들며 사위가 밝아졌다. 
그리고 나는, 어떤 ‘장면’을 보고 있었다. 
 
「십악 공필두는 플랫폼 안쪽을 서성이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입술을 비죽였다. 지금이라도 도망가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해보지만, 그걸 실천할 용기가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으음······ 독자 형.” 
 
무릎을 살포시 누르는 중량감에, 공필두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막 열 살 남짓이나 되었을까. 그의 허벅지를 베고 잠든 소년이 있었다. 
 
“내가 왜 이런 꼴이······.” 
 
잠든 이길영의 보얀 피부를 내려다보던 공필두가 살포시 인상을 썼다. 
간만에 예전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어린아이. 
분명, 그에게도 이길영 또래의 딸이 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쉰다. 
 
―필두 씨, 이제 우리 그만······. 
―아빠. 언제까지 땅 타령만 할 거야? 
 
그도, 분명 가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가정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벌고, 번 돈으로 땅을 사고, 그러다 투기에 손을 뻗고, 운이 좋아 건물주가 되고, 세입자를 들이고······. 
마침내 충무로의 ‘큰 손’이 되었지만, 그 ‘큰 손’이 실은 작은 가정하나 지킬 수 없는 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의외로 괜찮죠? 사람들이랑 사이좋게 지내는 거.” 
 
고개를 드니, 선이 고운 얼굴의 미인이 보인다. 
유상아. 
이틀 전, ‘충무로’의 부대표가 된 여자. 
 
“빨리 이 떨거지 데려가.” 
“조금 전까지 웃고 계셨으면서······.” 
 
공필두가 못마땅한 듯 입술을 실룩였다. 
읏차, 하는 소리와 함께 유상아가 공필두의 옆에 주저앉았다. 
 
“아저씨, 근데 ‘땅’을 얼마나 많이 갖고 계셨어요?” 
“뭐?” 
“따지고 보면 ‘건물주 연합’은 전부 땅을 가진 사람들인데, 유독 아저씨만 ‘땅부자’ 특성을 얻으셨잖아요.” 
“······땅이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야. 좋은 땅이어야지. 순진하기는.” 
“그럼 좋은 땅은 어떤 땅인데요?” 
“비싼 땅이 좋은 땅이야.” 
“어떤 땅이 비싸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땅.” 
“아저씨가 가진 땅이 그런 땅이었어요?” 
“그래.” 
 
내가 원한 땅은 아니었지만. 
공필두는 자신을 바라보는 유상아의 눈을 마주보았다. 
이 여자의 호기심은 묘하게 날카로운 구석이 있다.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뭐랄까. 알 수 없는 불편함을 품고 있달까. 
 
투둑. 툭. 툭. 
 
먼 곳에서 아주 얇은 실들이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유상아의 안색이 굳어졌고, 공필두의 무릎을 베고 자던 이길영이 번쩍 눈을 떴다. 
 
파르르. 
 
이길영의 손등에 붙어 있던 바퀴벌레가 더듬이를 떨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4호선, 회현 쪽 터널. 
뭔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유상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공필두가 스킬을 전개했다. 
 
[등장인물 ‘공필두’가 스킬 ‘무장지대 Lv.8’를 발동합니다!] 
 
위이이잉― 
 
공필두가 입술을 깨물었다. 
뭐랄까, 땅부자들만이 가지는 직감이랄까. 그런 게 있다. 
이것은. 
 
“어이! 모두 모여!” 
 
누군가가, 그의 땅을 빼앗으려 할 때의 느낌이다. 
 
두두두두두! 
 
공필두의 포탑들이 일제히 불을 뿜자, 어둠 속에서 피를 뿜으며 무언가가 쓰러졌다. 땅강아쥐들이었다. 
 
“적습이에요! 모두 공필두 씨를 중심으로 자리 잡으세요! 아침에 연습했던 대형으로 가겠습니다!” 
 
유상아의 외침과 동시에, 플랫폼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달려왔다. 
 
“A조는 전방 포탑의 근처로, B조는 포화의 사각으로, C조는 공필두 씨의 곁을 지키세요!”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사람들이 미리 연습한 대열을 이루었다. 
달려들던 땅강아쥐들은 사람들의 빠른 대처에 속절없이 쓰러졌다. ‘긴급 방어전’을 치렀을 때보다, 훨씬 더 수월한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수십의 땅강아쥐들이 바닥에 쓰러지자, 충무로 그룹원들의 머릿속에는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쉽다. 역시, 모두가 협력하면 할 만한 거구나. 
 
그리고, 터널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하멜른의 피리] 정도로는 안 되나?” 
“유중혁이가 먹은 곳인데 겨우 9급 지하종으로 비빌 수나 있겠냐?” 
 
어둠 속에서 한 무리의 남녀가 나타났다. 
네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공필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유는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저놈들은, 지금까지 상대했던 놈들과는 다른 놈들이다. 
 
“빌어먹을······ 빨리 사무라이 계집애 불러!” 
“벌써 왔거든?” 
 
서늘한 기척이 느껴진다 싶더니, 새파란 장도를 꺼내든 이지혜가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사무라이라고 하지 마. 천벌 받기 싫으면.” 
 
툴툴대는 대답에도 불구하고, 공필두는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이지혜는, 그만큼 커다란 전력이 되는 존재다. 
그럼에도 공필두는 불안했다. 
불안했기에, 겁먹은 짐승처럼 먼저 으르렁거렸다. 
 
“너흰 뭐냐? 어디서 왔어!” 
“정말이었군. 해상제독과 무장성주가 한 팀이 되다니.”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 
공필두가 물었다. 
 
“무슨 헛소리냐? 빨리 전열을 물려라.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쏴 죽여버릴 테니까!” 
 
그러나 다섯 남녀는 공필두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자기들끼리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용잡이’에 차출된 게 누구지?”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여덟 번째, 아홉 번째. 거기에 <사도>는 아니지만, 꽤 쓸만한 놈 하나.” 
“서울 바깥에 있는 놈들 빼면 남은 건 우리 다섯이군.” 
“우리 다섯이면 충분하죠. 빨리 쓸어버립시다.”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배가 불룩 나온 30대 사내였다. 
어깨에 ‘7’이라는 숫자가 적힌 사내. 눈썹이 짙고 얼굴에 피지가 번들번들한 그는, 이지혜의 새하얀 다리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내가 ‘해상제독’을 맡지. 바다만 없으면 저년은 별거 아니거든.” 
“뭐 이 새끼야?” 
 
이지혜가 뾰족한 소리를 지르며 먼저 달려들었다. 이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공필두가 포탑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젠장, 그냥 다 뒈져라!” 
 
두두두두두! 
 
케이프에 ‘4’라고 쓰여 있는 사내가 비릿하게 웃었다. 
 
“역시 십악은 십악이군. 조금만 늦게 왔으면 우리가 쓸렸겠어.” 
“세 번째와 네 번째. 너희들이 공필두를 맡아라. 절대 방심하지 말고, 가장자리의 포탑부터 하나씩 공략해.” 
 
이마에 ‘3’을 써 넣은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겠습니다. 십악쯤 되면 우리 둘은 가줘야죠.” 
“그리고 두 번째, 너는 나머지를 해치워.” 
 
그 말에 뺨에 ‘2’라고 적힌 여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손에 작은 피리를 쥐고 있는 여자였다. 
 
“난 왜 잔챙이죠?” 
“네가 맡는 게 가장 적절해.” 
“당신은 뭘 할 건데요?” 
 
그러자 어두운 케이프에 ‘1’이 쓰인 사내가 입을 열었다. 
 
“나는 ‘깃발 꽂이’를 점거하겠다.”」 
 
잠깐 몰입이 흐려지며, 의식이 되돌아왔다.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된다. 
전지적 독자 시점. 
지난 번 ‘어룡’의 뱃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땐 유중혁의 모습을 봤었지. 
 
그나저나 놀라웠다. 
 
<사도> 놈들이 준비를 많이 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가지고 온 아이템들만 봐도 놈들의 철저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공필두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마력탄 분해 실드]에, 땅강아쥐들을 부리는 [하멜른의 피리]까지. 
놈들은 정말로 충무로를 공략하여 유중혁을 손에 넣고, 이 세계를 집어삼킬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그리 쉽지는 않을 거다. 
 
「“뭐, 뭐야! 해상제독이 초반부터 이렇게 셌었나? 이봐, 뭔가 잘못된 거 아냐?” 
 
가장 먼저 앓는 소리를 낸 것은 일곱 번째 사도였다. 
이지혜의 날카로운 검술이 일곱 번째 사도를 조금씩 압박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시점의 이지혜는, 본래의 ‘3회차’에 나오는 이지혜보다 월등히 강했으니까. 

“젠장, 공필두 포탑이 이렇게 단단했어?” 
 
곤란에 처한 것은 세 번째와 네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하멜른의 피리]를 부는 두 번째 사도도, 유상아의 [실 묶기]와 이길영의 ‘묠니르의 천둥’ 때문에 고전하고 있었다. 
결국, 앞으로 나선 것은 ‘첫 번째 사도’였다. 
녀석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것을, 충무로의 일행들을 향해 던졌다. 
 
콰아아아앙―!」 
 
귀가 먹먹해지는 굉음과 함께, 충무로 플랫폼 일대가 폭발로 뒤덮였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 빌어먹을 자식이? 
 
[대량 살상 마력탄] 
 
상위 괴수종들에게는 큰 타격을 주기 힘들지만, 인간을 상대로 할 때는 더없이 강력한 대량 살상 무기. 
강서와 강남 지역에서 등장하는 일부 재료들과 [도깨비 보따리]로 구입할 수 있는 몇몇 아이템들이 있어야만 만들 수 있는 병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저놈이 바로, <사도>들의 ‘왕’. 
 
놈의 등 뒤에 꽂힌 ‘보라색 깃발’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희뿌연 먼지 속에 드러난 충무로의 플랫폼.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놈들이 저걸 가지고 있다면, 전세는 이제 이쪽이 불리했다. 
먼지가 가라앉은 곳에, 쓰러진 충무로의 그룹원들이 보였다. 
날카로운 파편에 맞아 피를 토하는 사람들. 
유상아와 이길영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방호벽]을 가진 공필두조차 기습을 온전히 피해내지 못했는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휴, 이제야 맘에 드는 모양새가 됐네. 그렇지?” 
 
‘일곱 번째 사도’가 교복이 찢어진 이지혜의 머리를 잡아 들었다. 전방에서 폭발을 맞은 그녀는, 일행 중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조연이면 조연답게 굴어, 응?” 
“개자식······ 커헉!” 
 
배에 주먹을 맞은 이지혜가 비명을 질렀다. 
 
“이 년은 내가 가져도 되지?” 
“그걸로 뭐하게? 시간도 없는데.” 
“뭐 하긴? 내가 뒤쪽까진 못 봐서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런 캐릭터는 주인공한테 존나 따먹히다가 비참하게 버려질 운명 아니야?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이지혜의 작은 몸이 인형처럼 허공에서 흔들렸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다. 
 
「도······와······줘.」 
 
충동적인 분노가 머릿속을 휘감았다.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분명 이지혜는 ‘등장인물’이다.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희미하게 진동합니다.] 
 
하지만, ‘등장인물’이라고 해서. 
 
[과도한 몰입으로 ‘제4의 벽’의 일부 기능이 제한됩니다.] 
 
너무 몰입한 것일까. 
일순 시야가 흔들리며 어지러운 구토감이 찾아왔다. 
 
[과도한 몰입으로 ‘전지적 독자 시점’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시점을 1인칭으로 변경합니다.] 
 
사위가 그대로 한 바퀴를 돌더니, 의식이 고무줄처럼 늘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을 떴을 때. 
 
나는, 정말로 충무로에 있었다. 
 
······어떻게? 
 
이지혜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 순간, 플랫폼의 모든 사람이 나를 보고 있었다. 
 
느릿하게 시야가 움직인다. 
 
나는 이지혜를 향해 걸어갔다. 
정확히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천천히, 그러나 착실하게. 
그녀와 내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곱 번째 사도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넌 뭐······?”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한 느낌. 
평소와 미묘하게 다른 시선의 높이와, 이질적인 오감(五感). 
 
그 순간, ‘나’는 내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헛웃음이 나온다. 
싫다. 진짜 싫은데. 
이지혜의 입술이 조그맣게 움직였다. 
 
“아······.” 
 
수백만 번도 더 반복해온 일을 하듯, 칼자루를 쥐는 나의 손. 
그립에 감긴 손가락의 감각이 낯설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심지어는 아름답기까지 한 발도(拔刀). 
나는 생전 처음 느끼는 환상적인 감각에 전율했다. 
 
소리 없는 칼날이 움직였고. 
누구도 그것을 볼 수 없었다. 
그저, 
 
뭔가가 스쳐갔고. 
뭔가가 잘려나갔으며. 
뭔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누군가는 경악했고, 누군가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지혜를 붙잡고 있던 ‘일곱 번째 사도’가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휑해진 놈의 목 위로, 울컥울컥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나의 손이 움직여 떨어지는 이지혜의 작은 몸을 받았다. 
 
“아, 아······.” 
 
꺽꺽거리는 이지혜를 가볍게 플랫폼 위에 내려놓는다. 
몸을 일으키자, 눈을 부릅 뜬 사도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세 번째 사도였다. 
 
“너는······ 대체 누구지?” 
 
우습다. 
그보다 더 멍청한 질문이 있을까. 
 
천천히 입이 움직였다. 
마치 내가 원래부터 이 사내였던 것처럼. 
 
“나는 유중혁이다.” 
 
세상에서 가장 냉혹하고, 가장 고독한 목소리. 
마침내, 잠자는 숲속의 왕자님이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너희는, 모두 여기서 죽을 것이다.” 
 
이제 충무로는 안전할 것이다. 
 
. 
. 
 
유중혁의 몸에서 빠져나온 의식이, 천천히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해제됩니다.] 
[스킬 충돌 오류가 정상화 되었습니다.] 
[지연되었던 ‘불살의 왕’의 특전이 재발동합니다.] 
[당신의 육신이 죽음 속에서 부활합니다.]
 
 
 
 
 
< Episode 12. 1인칭 주인공 시점 (1) > 끝

< Episode 12. 1인칭 주인공 시점 (2) >
 
 
 
 
 
[육체의 재생이 시작됩니다.] 
 
실수로 떨어트린 물감이 번져나가듯, 시야가 천천히 개어나간다. 주변의 명암과 채도가 불분명했다. 뼈와 모세혈관, 소화기와 호흡기, 안구가 통째로 재생되는 과정.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감각들이 혼란스럽게 엉켜들었다. 
 
어쨌든, 충무로는 유중혁이 나섰으니 안심이다. 
 
아무리 <사도>들이 강하다고 해도, 본래의 3회차보다도 더 강해진 유중혁을 이길 수는 없겠지. 
그나저나······ 정말 독특한 경험이었다. 
1인칭으로 유중혁이 되는 경험이라니. 
가능하면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죽음으로 인한 정신 충격을 상쇄합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의 사용 보상이 준비 중입니다.] 
 
······사용 보상? 
멀리서 소리치는 정희원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그녀를 붙잡고 있는 이현성의 경악한 얼굴. 그리고 이쪽을 바라보며 충격에 빠진 정민섭과 이성국. 
다행히, 일행들은 모두 무사하다. 
너무 늦지 않은 것이다. 
 
“독자 씨!” 
 
내 이름을 숨겨야 한다는 것도 잊었는지, 정희원이 외쳤다. 
 
갸오오오오! 
 
사실, 이젠 숨길 필요도 없겠지만. 
 
흐으으으읍. 
 
새롭게 만들어진 폐부에 공기가 차올랐다. 
근처에는 아직도 무자비한 살해를 이어가는 레서 드래곤이 있었다. 
 
“역시 유중혁님!” 
“기사회생을 사용하신 건가?” 
 
그 많은 선지자들 중 살아남은 것은 이제 극소수뿐. 
물론, 나는 ‘기사회생’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심각한 상처를 회복하는 것과 죽음에서 되살아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니까. 
 
[‘불살의 왕’의 특전이 완료되었습니다.] 
[카르마 포인트 100을 소진하였습니다.] 
[육체의 노폐물이 완전히 빠져나가며 육체의 성능이 상승합니다.] 
[체력과 마력 레벨이 각각 1씩 상승합니다.] 
 
거기에 부활 보너스까지. 
이래서 ‘불살의 왕’이 사기다. 
‘멸살법’ 전체에서도 이 특성을 얻은 사람은 미국의 셀레나 킴 뿐이었다. 
 
[현재 카르마 포인트 : 0/100] 
[다음 부활을 위해 포인트를 채우십시오.] 
[동족의 생명을 구해낼 때마다 1 카르마 포인트를 얻습니다.] 
 
‘불살의 왕’의 특전은 ‘부활’이다. 
물론 무조건 부활하는 것은 아니고, ‘카르마 포인트’라는 것이 필요하다. 
다행히, 첫 부활만큼은 100포인트를 제공하고 시작하기에 다행이었다. 
 
갸오오오오! 
 
[5급 화룡종,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가 ‘파멸의 불꽃’을 사용합니다.] 
 
살아나자마자 죽어줄 수는 없지. 
포인트가 0이 되었으니 부활 특전은 당분간 쓸 수 없다. 
마침 주변에 보이는 것은 숫자 ‘2’가 적힌 발판. 
다른 사람들은 벌써 각자 발판에 자리를 잡은 뒤였다. 
 
“현성 씨, 저쪽으로 가요! 우리가 옆 발판으로 갈 테니까!” 
 
정희원의 빠른 판단에 이현성이 내 쪽으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고열 속에 땀을 주룩주룩 흘리는 이현성이 입을 열었다. 
 
“독자 씨, 괜찮으십니까?” 
“보시는 대롭니다.” 
“······잠시 제 눈이 잘못된 줄 알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 라고 물어도 자세히 설명해 줄 시간은 없었다. 
 
[앱솔루트 실드를 발동합니다.] 
 
눈앞에서 화르르륵, 하고 갈라지는 파멸의 불꽃. 
예수님이라도 영접한 듯한 눈으로 나를 보는 이현성을 향해, 내가 물었다. 
 
“현성 씨, 뭔가 걸칠 거 없습니까? 판초 우의나······.” 
“제가 군인이긴 해도 그런 것까지는······ 아.”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이현성이 내 몸을 훑어보았다. 
부활을 한 건 좋은데, 하나를 생각 못했다. 
그나마 보호구 역할을 하던 [외장 강화 수트]는 녹아버렸고, 잡다하게 주워 놓은 아이템들도 대부분 소실되었다. 
 
즉, 나는 지금 알몸 상태다. 
 
“······아니, 그건 됐습니다.” 
 
슬그머니 자신의 허리춤으로 손을 올리던 이현성의 손이 원상복귀했다. 
사람이 아무리 희생정신이 강해도 정도가 있지. 
어차피 당장 필요한 건 옷이 아니라 떨어진 아이템들이었다. 
‘파멸의 불꽃’이라고 해도 [성유물]이나 시나리오의 핵심 아이템을 녹이지는 못한다. 
실제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은 레서 드래곤의 발치를 굴러다니고 있었고, 시나리오 아이템인 [갈색 깃발]도 그 주변을 나뒹굴고 있었다. 
하필 저기에 떨어져 있다니··· 다른 사람도 쉽게 못 줍는 위치라 망정이지. 
실드가 해제됨과 동시에 멀리서 일행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가장 앞서 달려온 것은 정희원이었다. 
 
“독자 씨!” 
 
나를 향해 달려오던 정희원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흑염룡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은근슬쩍 등을 돌려 그녀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순간, 살포시 어깨와 등을 덮는 촉감이 느껴졌다. 
 
“안 봤으니까 걱정마요. 지금 그딴 거 신경 쓸 때에요?” 
 
‘그딴 거’라는 말에 조건반사처럼 몸이 움찔했다. 
판초우의 같은 것이 내 몸을 덮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거적이었다. 
 
[사명대사의 거적]. 
 
그러고 보니 정희원이 이걸 갖고 있었지. 
 
“고맙습니다, 정희원 씨.” 
 
지금은 이거라도 감지덕지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조금 서운해합니다.] 
 
“움직이죠.” 
 
갸오오오오!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의 불뿜기 페이즈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이번에도 반시계 방향으로 돌며 공격을 피했다. 
정희원과 이현성이 먼저 나를 앞질러 달려갔다. 
달리는 내내 내 아랫도리쪽에서 덜렁거리는 ‘흑염룡’을 신경 써준 모양이었다. 
거적이 생각보다 누추해서, 앞을 다 가리질 못했다. 
눈치 없이 곁을 달리던 정민섭이 물었다. 
 
“이제 어쩌면 좋습니까 대표님? 다른 <사도>들도 모두 죽어버렸는데······.” 
 
정민섭의 말대로 남은 <사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 증거로 녀석들이 죽은 자리에 청빙환들이 남아 사리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소화 시간이 긴 아이템인데다, 열기에 강한 물질이라 불꽃에도 녹지 않은 모양이다. 
 
휘이이익! 
 
허공을 가르며 날아드는 레서 드래곤의 앞발. 
 
“끄아아악!” 
 
일행을 쫓아오던 두 명의 선지자가 고깃덩이처럼 으깨졌다. 
나는 곧장 플랫폼 중앙을 가로질러 깃발과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손에 넣었다. 
 
[‘갈색 깃발’을 되찾았습니다.] 
[깃발의 가호를 다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제 남은 것은 우리 일행뿐이다. 
이리저리 방법을 생각하는 사이, 벌써 발판 활성화 타임이 다가왔다. 
 
[숫자 발판들이 활성화됩니다!] 
 
“모여요!” 
 
운 좋게 숫자 ‘5’가 뜬 발판이 활성화되었다. 
문제는, 이번에 활성화된 발판이 하나뿐이라는 것. 
허공에서 중급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아직도 잘 버티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계속 그런 운이 따라줄까요?] 
 
다음번에는 이 발판 위에 뜬 숫자가 3이나 4일 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일행은 중 누군가는 반드시 죽는다. 
하물며 6이 뜨는 경우에는······. 
 
[5급 화룡종,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가 ‘파멸의 불꽃’을 사용합니다.] 
[앱솔루트 실드를 가동합니다.] 
 
간신히 10초를 또 벌었다.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후우······, 저 망할 자식. 독자 씨, 어떡하죠?” 
 
이현성과 정희원도 지친 모습이었다. 숨도 쉬기 힘든 고열 속에서 벌써 십여 분을 도망 다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싸워야 할 것 같습니다.” 
“아깐 못 잡는다면서요?” 
“저것만 있다면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나는 바닥을 굴러다니는 ‘청빙환’을 가리켰다. 
마침 청빙환의 숫자는 정확히 우리 일행과 같은 다섯 개. 
<사도>들이 준비해온 저 아이템을 먹는다면, 레서 드래곤에게 데미지를 주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문제는 다음 ‘전체 공격’이 시작될 때까지 놈을 죽일 수 있느냐인데. 
 
[앱솔루트 실드가 해제됩니다.] 
 
“달려요! 그리고 일단 바닥에 떨어진 거 하나씩 주우세요!” 
 
내 말과 동시에 일행들이 튀어나갔다. 
 
[마력에 4100코인을 투자하였습니다.] 
[마력 Lv.16 -> 마력 Lv.25] 
[당신의 영혼이 세계와 감응합니다!] 
 
남은 시간에 폭딜을 넣기 위해서는, 근력보다는 마력을 올려야 한다. 
나는 주워든 청빙환 하나를 꿀꺽 삼켰다. 
 
[냉기 속성이 일시적으로 개방되었습니다.] 
[40%의 냉기 속성 데미지가 추가됩니다.] 
 
이제, 남은 것은 데미지를 넣는 건데. 
어떻게 한다? 
무작정 달려드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현성은 [태산 부수기]가 있지만 민첩이 부족하고, 정희원은 민첩은 뛰어나지만 한 방이 부족하다. 
놈의 취약부위를 공격하면 좋을 텐데. 
혹시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그런 건 못 보나? 
아, 그러고 보니······.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이 이미 사용 중입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의 보상 획득이 가능합니다.] 
 
아까 ‘사용 보상’이 있다고 했지. 
 
[당신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을 경험하였습니다.] 
[당신이 몰입했던 주인공의 스킬 중 하나를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뭐? 
순간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날아드는 레서 드래곤의 앞발을 미처 보지 못했다. 날쌘 정희원의 몸이 나를 밀쳤고, 내가 있었던 자리가 폭삭 내려앉았다. 
 
콰아앙! 
 
“뭘 얼빠져 있어요!” 
 
정희원의 핀잔이 날아들었지만,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몰입했던 주인공의 스킬 중 하나를 물려받을 수 있다. 
이 말은 곧, ‘유중혁’ 녀석의 스킬 하나를 가져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 
 
[획득할 수 있는 스킬 선택지를 제시합니다.] 
 
오호라, 선택지까지? 
청빙환을 먹은 지금, 유중혁의 스킬 중 하나를 가져올 수만 있다면? 
하다못해 호신강기나, 파천검도 같은 것만 가져와도······! 
 
[획득할 스킬을 선택하십시오.] 
 
1. 냉기 저항 
2. 화염 저항 
3. 거짓 간파 
 
······제기랄, 그럼 그렇지.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 없다. 
주어진 선택지들 중 그나마 마음에 드는 것은 ‘거짓 간파’지만, 지금의 내겐 쓸모없는 스킬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제일 유용한 것은 2번의 ‘화염 저항’인데······. 
 
그오오오오오―! 
 
포효하는 레서 드래곤이 화염을 흩뿌리고 있었다. 저 행동이 끝나면, 이제 곧 ‘파멸의 불꽃’ 페이즈가 시작될 것이다. 
 
생각하자. 
나는 ‘독자’야. 
내가 읽어온 것에 답이 있다. 
 
[특성 효과로 이미 읽은 내용에 대한 기억력이 상승합니다!] 
 
머릿속에서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레서 드래곤의 공략법. 
12회차, 14회차, 17회차의 일부 정보들. 
 
그리고, 지금 내게 주어진 것들. 
 
“독자 씨, 빨리······!” 
 
서서히 눈을 감았다 뜬다. 
그리고. 
 
“냉기 저항을 획득한다.” 
 
결정을 내렸다. 
 
[스킬 ‘냉기 저항’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정희원 씨, 이현성 씨! 아직 청빙환 안 먹었죠? 나한테 전부 주세요.” 
“네?” 
“이성국, 정민섭! 너희도!” 
 
청빙환을 막 입에 넣으려던 정민섭의 입이 비죽 튀어나왔다. 
 
“빨리!” 
“아, 넷!” 
 
네 알의 청빙환이 금방 모였다. 
나는 쏟아지는 화염을 피하며, 그것을 동시에 입에 털어 넣었다. 
 
확신한다. 
이것이 최선이다. 
 
[청빙환을 복용하였습니다.] 
[속성 중첩 효과로 청빙환의 속성 데미지가 증가합니다!] 
[200%의 냉기 속성 데미지가 추가됩니다.] 
[심장이 얼어붙을 듯한 한기가 당신의 전신을 뒤덮습니다.] 
 
보통이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청빙환은 영약 같은 이름과 다르게, 사실은 독의 일종이다. 
한 알만 먹어도 한겨울에 알몸으로 있는 것처럼 오한이 깃드는 물건인데, 다섯 알을 먹으면 그 자리에서 동사하는 게 당연했다. 
어디까지나, 보통이라면 그래야 했다는 뜻이다. 
 
[전용 스킬, ‘냉기 저항 Lv.5’이 당신을 보호합니다.] 
 
유중혁의 숙련치를 일부 계승한 모양인지, 시작부터 스킬의 레벨이 5다. 
 
“모두 내 뒤쪽으로 와요!” 
 
나는 일행들을 향해 외치며 칼자루를 쥐었다. 
종전에 유중혁이 되었던 기억 때문일까. 
미묘하게 칼을 쥐는 감각이 달라졌다. 
 
[‘신념의 칼날’이 발동합니다!] 
 
기이이잉!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특수 옵션이 발동합니다.] 
[에테르 속성이 ‘어둠’으로 변환됩니다.] 
[청빙환의 효과로 에테르 속성에 ‘냉기’가 추가됩니다.] 
 
에테르 블레이드가 검푸른 빛을 띠었다. 냉기와 어둠의 중첩. 
 
촤아아아악! 
 
검푸른 에테르 블레이드가 불길을 가르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근력을 폭발시켜 레서 드래곤을 향해 달려갔다. 
이제부터는 총력전이다. 
 
[성흔, ‘칼의 노래’를 발동하였습니다.] 
[충무공이 남긴 소절이 당신의 검에 무작위로 깃듭니다.] 
 
나오는 구절에 따라 버프 능력이 달라지는 칼의 노래. 
제발, 이상한 구절만 나오지 마라. 
 
「야밤에 신인(神人)께서 꿈에 나타나 말씀하시길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길 것이요, 저렇게 하면 패할 것이니라"라고 하셨다.」 
 
이건 또 무슨 구절인가 싶었는데, 갑자기 ‘레서 드래곤’의 몸 곳곳이 다른 색깔로 보이기 시작했다. 몸피의 대부분은 초록색으로 보였지만, 유독 붉은색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있었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의 전투를 응원합니다.] 
 
그제야 충무공의 뜻을 알아챘다. 
그렇구나. 
저곳이 바로 놈의 약점이다. 
나는 타오르는 길을 달려, 레서 드래곤의 날갯죽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첫 번째는 엷은 적색. 
 
갸아아아아아! 
 
몸부림치는 놈의 날갯죽지 밑으로 들어가, 뒷발의 아킬레스 건을 끊는다. 
두 번째는 짙은 적색. 
 
캬아아아아아! 
 
꼬리를 피하며 뛰어오르자, 기다렸다는 듯 녀석의 앞발이 나를 노리고 날아왔다. 
 
퍼어억! 
 
[‘갈색 깃발’의 효과로 방어막이 활성화됩니다.] 
 
불꽃은 막을 수 없지만, 평범한 공격이라면 몇 대 정도는 버틸 수 있다. 
나는 포효하는 놈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그대로 칼을 꽂았다. 
 
푸욱! 
 
놈의 가슴은, 거의 핏빛에 가까운 적색이었다. 
 
캬아아아아악! 
 
레서 드래곤이 발악을 시작했다. 
갈색 깃발이 만든 방어막이 순식간에 파괴되었고, 놈의 입에서 불꽃이 집결되기 시작했다. 
 
[5급 화룡종, 레서-이그니르가 ‘파멸의 불꽃’을 준비합니다.] 
 
마침내 전체 공격 페이즈가 시작되었다. 
이제 실드는 없다. 
 
기이이이잉! 
 
마력 전부가 빠져나가며, 길쭉해진 에테르 블레이드가 녀석의 가슴팍을 난자했다. 
휘두르고, 또 휘두르고. 
폭발적인 냉기 데미지가 놈의 가슴에 작렬했다. 
 
퍼버벅, 퍼버버벅! 
 
하지만 놈은 여전히 쓰러지지 않았다. 
 
캬아아아아! 
 
조금만 더. 
 
캬아아아악! 
 
조금만... 
 
[5급 화룡종,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가 ‘파멸의 불꽃’을 사용합니다.] 
 
눈앞에서 끓어오르는 불꽃. 
맞으면 죽는다. 
멀리서 일행의 외침이 들렸다. 
그 외침을 들으면서도, 나는 물러서지 않고 검을 휘둘러 댔다. 
할 수 있다. 
내 계산이 틀릴 리 없다. 
말하자면 이건, ‘독자’의 오기다. 
 
만약, 내가 유중혁이었더라면. 
 
무아지경으로 휘두르는 검격에, 날카로운 감각이 깃들어 온다. 
 
기이이이잉! 
 
보이지 않고, 소리도 없었던 유중혁의 일검. 
그 마법 같았던 한 수가, 머릿속을 강하게 잠식한다. 
 
온 힘을 다해 움켜쥔 칼자루. 
 
모든 감각을 동원해 그 순간의 느낌을 떠올린다. 
적어도 단 한 번. 
그 ‘일검’의 티끌만이라도 흉내낼 수 있다면. 
 
갸오오오오오―! 
 
검이 움직였고,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살점이 폭발하는 소리. 
눈앞을 적시는 레서 드래곤의 핏물과, 놈의 일격을 맞아 허공을 날아가는 내 몸. 
고열의 먼지 바닥을 몇 바퀴나 구른 뒤, 참았던 울혈을 토해냈다. 
고개를 흔들어 시야를 되찾고, 
비틀거리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나를 내려다보는 레서 드래곤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흠칫, 몸을 떠는 순간. 
 
파스스슥. 
 
타오르던 ‘파멸의 불꽃’이 조용히 꺼져가는 게 보였다. 
거대한 녀석의 눈꺼풀이 한 번 꿈틀대더니, 육중한 거구가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쿠웅! 
 
놈의 심장에 꽂힌 신념의 칼날이 조용히 울고 있었다. 
 
[소재앙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를 최초로 퇴치하였습니다.] 
[최초로 다섯 번째 시나리오의 클리어에 기여하였습니다.] 
[불가능한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전신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 얼마나 진이 빠졌는지, 주먹을 움켜쥘 힘조차 없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모한 도전이었다. 
이번엔, 정말로 죽을 뻔했다. 
 
[불가능한 업적 달성으로 인해 보상 정산에 시간이 소요됩니다.] 
[일부 하급 도깨비들이 관리국에 「개연성 적합 판단」을 요청하였습니다.] 
 
허공에 나타난 중급 도깨비가 고요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쨌든, 이제 달콤한 보상의 시간이다.
 
 
 
 
 
< Episode 12. 1인칭 주인공 시점 (2) > 끝

< Episode 12. 1인칭 주인공 시점 (3) >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투지에 갈채를 보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용기를 격찬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전술에 호기심을 보입니다.] 
······.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활약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20,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거름망 없이 통째로 쏟아지는 간접 메시지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칭찬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지만, 그런 칭찬이 한 번에 수십 개씩 쏟아지면 그건 테러다. 
비형 이 자식은 메시지 관리도 안 하고 어디 간 거야? 
아······지금쯤 관리국에 불려 갔으려나. 
히든 시나리오 보상이 따로 안 들어 오고 있는데다, 중급 도깨비가 말없이 사라진 걸 보면 대강 상황이 예상은 된다. 
그나저나 후원 합산금이 2만 코인이라······. 
역시 ‘소수 채널’과 ‘상당수 채널’은 밥벌이가 다르다. 
나는 재빨리 화룡종의 몸을 뒤져 핵을 끄집어냈다. 
 
[5급 화룡종의 핵] 
 
은은한 붉은 빛으로 감싸인 핵. 
소재앙 급이라 그런지 나오는 핵의 품질도 심상치 않다. 
열화판이지만 용의 일종인 만큼 떼어서 팔 부분도 많다. 뼈라든가, 가죽이라든가. 좋은 대장장이에게 맡겨서 가공할 수도 있고, 거래소에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혹시 몰라 죽은 화룡종의 시체를 마저 뒤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소재앙을 잡았는데, 겨우 이것만 줄 리가······. 
그런데 난데없이 짜악― 하는 소리와 함께 등짝에 통증이 일었다. 
 
“독자 씨 무슨 게임 캐릭터에요?” 
 
언제 다가온 것인지, 등 뒤에 정희원이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쿨럭, 하고 기침이 나온다. 
 
“······저 지금 체력이 바닥이라 그렇게 때리시면 죽습니다.” 
“어차피 죽어도 살아나잖아요.” 
“항상 그런 건 아닙니다.” 
 
이쯤에서 한 번 더 대거리를 해줘야 정희원인데, 어쩐지 조용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내가 죽었을 때 상당한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지. 
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지, 그 정희원이 울긴 무슨. 
그녀는 다른 일행들을 의식한 것인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이번에도 다 알고 행동한 거예요?” 
“전부는 아니고요······.” 
“정말 죽었으면 어쩔뻔했어요!” 
“그치만 살아났잖습니까.” 
 
다시 한번 등짝에 매서운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뒤늦게 이현성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독자 씨!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멀리서 쭈뼛대며 다가온 정민섭과 이성국까지 모두 모였다. 
사실 저 녀석들은 여기서 죽었으면 했는데, 정말 운이 좋은 놈들이다. 
뭐, 어차피 놈들은 이제 내 그룹원이라, 언제든 통제가 가능하니까. 
 
그런데······. 
 
갑자기 침묵이 내려앉길래 뭔가 싶었는데, 다들 나를 보며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나씩 물어보세요. 궁금한 게 뭡니까?” 
 
그리고 갑작스런 청문회가 시작되었다. 
 
 
* 
 
 
“부활은 제가 새로 얻은 특전입니다. 배후성이 예수님이라든가 그런 건 절대 아니고요.” 
 
나는 곤란한 항목은 적당히 피해가며, 일행들이 알아야 할 정보만 알려 주었다. 정희원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람을 살릴 때마다 부활이라니······ 완전 사기 아니에요?” 
“대략 백 명당 부활 1회꼴이긴 하지만, 사기는 사기죠.” 
 
솔직히 인정했다. 
하지만 이 ‘불살의 왕’에도 치명적인 약점은 있었다. 
 
이 특성을 가지고 있는 한, 나는 사람의 목숨을 ‘직접’ 끊을 수 없다. 
 
상처를 입히거나, 제압하거나,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죽여서는 안 된다. ‘불살의 왕’은 동족을 직접 살해하는 순간 바로 왕위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사항들까지 구구절절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알려져서 좋을 것도 없고. 
 
“앞으로 사람 열심히 살려야겠네요.” 
“살리려고 노력해야죠. 곤란한 경우도 있겠지만······.” 
“걱정 마요. 그런 놈들은 내가 죽여 줄게요.” 
 
자신만만한 정희원의 목소리. 
사실 ‘불살의 왕’을 마음 놓고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정희원이 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멸악의 심판자’를 키운 이유가 이것 때문이기도 했고. 
솔로로 뛸 때는 답답한 순간도 있겠지만, ‘불살의 왕’을 중후반까지 유지할 것도 아니기에 장기적으로 보면 큰 문제는 아니었다. 
뒤로 갈수록 이보다 사기적인 특성은 많이 나온다. 초반에 좋은 특성 하나 얻었다고, 버스를 갈아탈 타이밍을 놓쳐서는 곤란한 것이다. 
 
“근데 진짜 무슨 판타지 소설 같습니다. 별의별 능력이 다 등장하니······.” 
 
이현성의 말에 이성국과 정민섭이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일부러 놈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허튼소리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이성국이 기어코 허튼소리를 했다. 
 
“죽으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끔찍했죠 당연히.” 
 
갑자기 그런 건 또 왜 묻는 건가 싶었는데, 이성국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다시 살아나시는 걸 보면서 조금 무서웠습니다.” 
“무서웠다고요?” 
“예. 엄밀히 따지면 육체 전체가 통째로 소멸했다가 복구되었다는 건데, 상식적으로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으니까요. 이 세계의 원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나 우리 존재가 통째로 복제될 수 있는 것이라면······ 대표님은 ‘부활’하신 게 아니라 ‘복제’되신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태연한 목소리로 소름 끼치는 이야길 한다. 
그건 생각도 못 해본 부분인데······. 
그러고 보니 이 녀석 특성이 [최면술사]였지. 
······이런 쪽에도 관심이 있는 녀석이었나? 
정희원이 핀잔을 주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에요?” 
“이건 중요한 문젭니다. 대표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연속성이 없다면, 죽음 이전의 대표님과 부활 이후의 대표님이 동일한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이젠 어려운 말까지. 
불현듯 어떤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이 자식, 혹시 프롤로그에 현학적인 악플을 달고 하차했던 그놈인가? 
 
“굉장히 기발한 발상으로 저를 살해하시는데······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죽은 뒤에도 계속 의식이 있었거든요. 그러니 엄밀히 따지면 진짜 죽음은 아닌 거죠.” 
“설마 영혼 상태를 경험하신 겁니까?” 
“그걸 영혼이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조금 찜찜한 느낌이 든다. 
‘멸살법’은 결국 작가가 만든 세계다. 
그리고 그 세계는 현실이 되었다. 
 
영혼이 입증되지 않던 세계는, 이제 영혼이 당연한 세계로 변했다. 
 
그런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는 대체 무엇일까. 
나라든가, 내 영혼이라든가. 
그런 건 원래부터 존재했던 걸까? 
아니면, 이런 ‘나’조차도 작가가 만든 이야기의 일부인 걸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아무튼, 이제 쓸데없는 질문은 끝났죠?” 
“아,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뭐죠?” 
“왜 갑자기 저랑 민섭이한테 존댓말을 쓰시는지······.” 
“유중혁 컨셉은 이제 끝났잖아요.” 
 
뒤늦게 뭔가를 눈치챘는지, 이성국이 ‘핫’하는 표정을 지었다. 
 
“엇, 그러고 보니 대표님 모습이······.” 
 
흐려진 말꼬리를 듣지 않아도 알겠다. 
물론 컨셉이 끝났다고, 대우가 엄청나게 달라지는 건 아니다. 
나는 이성국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스마트폰 좀 줘 봐요.” 
“예?” 
“폰 달라고요.” 
 
이성국은 쭈뼛쭈볏 자신의 폰을 내밀었다. 
좋은 기종이다. 내가 쓰던 것보다도 좋다. 
 
“이거 내가 가져도 되죠?” 
“······유중혁 컨셉은 끝나신 거 아니셨습니까?” 
“이게 원래 내 컨셉이에요.” 
 
이성국이 울상을 지었다. 
 
“다들 조금 쉬고 계세요. 전 잠깐 찾아볼 게 있어서. 10분만 있다가 이동하죠. 아이템 수거하고 계셔도 되고요.” 

일행들이 곳곳에 떨어진 아이템들을 수거하는 동안, 나는 정민섭의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접속을 시도했다. 
태연한 척하고는 있지만, 사실 조금 초조한 상태였다. 
 
[히든 시나리오 보상 정산이 지연됩니다.] 
[현재 관리국에서 「개연성 적합 판단」이 진행 중입니다.] 
 
바로 저 메시지 때문이었다. 
개연성 적합 판단. 
히든 시나리오의 보상 코인이 아직도 안 들어오고 있는 것도 아마 저 때문이겠지. 
‘멸살법’ 텍본에서 관련된 부분을 좀 확인하고 싶은데, 설상가상으로 내가 쓰던 스마트폰이 불에 타버렸다. 
정말이지 나답지 않은 실수였다. 
불길하다. 
 
만약, 작가가 보낸 메일이 지워져 있기라도 한다면······? 
 
그런데 그때, 스마트폰 화면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새로운 기기에 동기화가 가능합니다.] 
[동기화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뭐야 이거? 
확인을 누른 순간, 갑자기 파일의 다운로드가 진행되더니 배경화면에 새로운 파일 하나가 생성되어 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txt] 
 
그렇군. 이런 식인가. 
하긴, 도깨비나 성좌들도 못 읽는 파일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 리가 없지. 
아이템을 수거하며 시시덕대는 이성국과 정민섭의 모습이 보인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혹시 하차자 녀석들은 이걸 읽을 수 있을까? 
일단은······ 최대한 조심하는 편이 좋겠지. 
나는 텍본을 열어 ‘멸살법’을 읽기 시작했다. 
 
[특성 효과로 ‘읽기 속도’가 증가합니다.] 
 
내가 찾아낸 부분은 유중혁의 6회차에서 일어났던 「개연성 적합 판정회」에 관한 서술이었다. 
 
「서울 관리국의 중급 도깨비장 ‘바람’은 자신의 앞에 놓인 시나리오 자료를 읽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서류의 맨 위에는 <회귀자 유중혁>이라는 이름이 쓰인 파일이 올려져 있었다. 
 
‘회귀자라······ 젠장. 하여간 요즘은 도깨비고 성좌고 죄다 눈치가 빨라서······.’ 
 
바람이 입맛을 다시며 판정회의 도깨비들을 훑어보았다. 
상급 도깨비나 대 도깨비는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지역 돔 수준에서 발생한 ‘개연성 적합 판정’이니까. 지역구의 일은 지역구에서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다. 바람은 긴장한 표정의 도깨비들을 향해 물었다. 
 
“이거 어떤 놈이 청원 넣은 거야?” 
“일본의 아오오니입니다.” 
“그 놈은 자기 나라나 신경 쓰지, 왜 남의 나라 개연성을 물고 늘어져? 그 새끼들은 상도(商道)도 없대?” 
“아무래도 요즘 하급 도깨비들 사이에 신경전이 치열하다 보니······.” 
 
바람이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보고서에 따르면, 이 ‘유중혁’이라는 놈은 개연성 적합 판정 시비를 걸만한 건덕지가 있었다. 
시작부터 상급 숙련계 스킬들을 갖고 시작한 것도 모자라서, 자동 필터링이 되는 중요 정보들도 잔뜩 갖고 있다. 
게다가 이 [현자의 눈]인가 뭔가 하는 스킬때문에 시스템상 접근할 수 없는 항목이 있어서 자료 조사로 상급 관리국의 도움까지 받아야 했다. 
바람이 한숨을 쉬며 보고서를 덮었다. 
 
“됐어. 이놈은 윗대가리들이 허락한 놈이야. 그냥 내버려 둬.” 
“괜찮겠습니까? 그랬다간 후폭풍이······.” 
“그 정도 후폭풍은 감당할 수준의 배후성이 있다는 거겠지.” 
“하지만 성좌 하나가 그걸 감내할 수 있겠습니까? 개연성을 나눠 감당할 성좌 연합이 있지 않다면······.” 
 
바람이 피식 웃었다. 
 
“짬도 안 되는 게 어디서 훈계질이야? 네가 가서 이놈 배후성이 누군지 알아올래?” 
“그, 그건 아닙니다.” 
“슬슬 다섯 번째 시나리오 진행될 거니까, 거기에나 신경 써. 이 정도 개연성은 시나리오 진행되면서 차츰 상쇄되니까. 그리고.” 
 
갑자기 싸늘해진 분위기에 중급 도깨비들이 입을 다물었다. 
 
“요즘 너네 일 안 하냐?” 
“읏······!” 
“미국이랑 인도 지역은 왜 매출이 이 모양이야? 미국엔 예언자가 있고, 인도에는 성좌 연합이 있잖아? 호구들이 잔뜩 있는데 왜 매출이 그따위야? 상품 똑바로 안 만드냐?” 
“그, 그게······.” 
“시발, 개연성은 개나 주라고 해! 빨리 코인 상품이나 팔라고!”」 
 
피식 웃음이 나온다. 
어째 도깨비놈들 하는 짓을 보고 있으면 내가 일하던 미노 소프트가 생각난다. 
거기 기획부도 장난 아니었지. 
어쨌거나, 지금의 나도 멸살법의 유중혁과 비슷한 상황인 셈이다. 
언젠가 이런 상황이 찾아올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래서 눈에 띄면 안 좋은 법인데. 
이거······ 적합 판정 걸려서 손해 보는 거 아냐? 
그때,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때문에 관리국에 몇 번이나 불려가는지······.] 
 
비형이었다. 나는 재빨리 통신을 걸었다. 
 
‘어떻게 됐어?’
 
 
 
 
 
< Episode 12. 1인칭 주인공 시점 (3) > 끝

< Episode 12. 1인칭 주인공 시점 (4) >
 
 
 
 
 
[어떻게 되긴? 완전 뒤집어졌지 뭐. 너 대체 무슨 스킬을 가지고 있는 거야? 왜 상급 관리국에 의뢰해도 정보 열람이 안 되는 건데?] 
 
나도 궁금하다. 
내 특성창 좀 보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나한테 패널티 먹이래?’ 
 
[그딴 건 또 어디서 들어서······ 야, 내가 널 얼마나 열심히 변호했는지 알아? 관리자님들,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저 김독자란 놈, 절대 사기치거나 이상한 놈 아니에요! 그냥 엄청 열심히 하는 놈일 뿐이라고요!] 
 
그것참 설득력 있게도 이야기하셨군. 
 
[다행히 내 간곡한 호소가 먹혔는지, 여러 가지 참작이 됐어. 지금까지 쌓아온 시나리오 전체를 분석했는데, 네가 가진 스킬 숫자가 몇 개 안 되는데다 숙련치도 낮다는 결론이 나왔거든. 자료 화면으로 봐도 시나리오 생태를 파괴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고.] 
 
역시, 예상대로다. 
내가 괜히 숙련계 패시브 스킬들을 안 익히고 있었던 게 아니다. 
좋은 스킬을 많이 배울수록, 관리국의 주목을 끌기 쉽기 때문이다. 
 
[게다가 너 말고도 다른 지역에도 시끄러운 녀석들이 몇몇 있어서······ 지금 관리국 정신없어.] 
 
‘그러니까, 잘 해결됐다는 거지?’ 
 
[사실 태클 거는 놈들이 몇몇 있었는데······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어, ‘대 도깨비’가 그냥 넘기라고 했대.] 
 
뜻밖의 말에 놀랐다. 
‘대 도깨비’까지 나설만한 일이었다고? 
 
[후······ 자세한 건 중급 도깨비한테 들어. 나 사실 여기 있으면 안 돼. 갑자기 보는 눈이 많아졌거든. 그리고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이 지역 관할 중인 중급 도깨비 녀석, 너한테 단단히 앙심을 품었어.] 
 
‘앙심?’ 
 
[모르냐? 「개연성 적합 판정」은 너희로 치면 세무 조사 같은 거라고. 하여간······ 당분간 고생 좀 할 거다.] 
 
비형이 사라지고 난 뒤, 허공에 커다란 스파크가 튀더니 예의 정장을 입고 있던 중급 도깨비가 등장했다. 잠시 우리 일행을 둘러 본 녀석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조금 마찰이 있어서 보상 지급이 늦었습니다. 늦었지만, 지금부터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히든 시나리오 클리어 보상으로 3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5급 화룡종 최초 살해 보상으로 15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최초로 소재앙을 해치워 ‘이뮨타르 종족의 호부(護符)’를 받았습니다.] 
[앞으로 당신은 모든 이뮨타르 종족의 호의를 얻을 것입니다.] 
 
다행히 보상은 정상적으로 지급되었다. 
게다가 이뮨타르 종족의 호부. 
지금 이걸 얻었으니, 앞으로 다가올 ‘다섯 번째 시나리오’도 시작이 나쁘지 않다. 
나만큼은 아니겠지만, 다른 일행들도 클리어 보상을 받았는지 들뜬 얼굴들이었다. 
그건 그렇고······ 자식이 쪼잔하네. 
무려 소재앙급을 잡았는데, 겨우 이것 밖에 안 주냐? 
그때, 중급 도깨비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 너무 열심히 활약해 주신 덕에, 시나리오에 조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뭔가 비꼬는 게, 불길한 말투였다. 
 
[관리국에서 논의한 결과, 해당 지역 화신들의 평균 기량이 시나리오 난이도에 맞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때문에, 제 임의 판단으로 해당 지역의 난이도를 임의조정하게 되었음을 공지드립니다.] 
 
······뭐? 
임의 조정? 
 
[네 번째 시나리오의 제한시간이 대폭 감소합니다.] 
 
나를 보는 중급 도깨비의 입 꼬리가 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아니, 저 자식이? 
 
[네 번째 시나리오 종료까지 48시간 남았습니다.] 
[앞으로 48시간 안에 표적 역을 점거하지 않은 그룹 및 그룹원들은 모두 사망할 것입니다.] 
 
그래······ 그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희희낙락 아이템을 줍던 정민섭이 멍하니 나를 보고 있었다. 
아마, 다들 메시지를 들은 모양이다. 
 
“지금 창신역을 가지고 있는 놈이 누구랬지?” 
“포, 폭군왕입니다.” 
 
하필 서울 7왕인 폭군왕이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충무로로 돌아갑시다.” 
 
그나저나 유중혁 이 자식은 잘 하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슬슬 네 번째 시나리오를 마무리하러 가 봐야지. 
 
 
* 
 
 
안국역부터 충무로까진 생각보다 거리가 있어서, 가는 내내 우리 일행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희원과 이현성이 앞서 걸었고, 나와 이성국, 정민섭이 뒤쪽에서 걸었다. 
화룡종의 시체는 전부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에, 사체 중 절반 정도를 거래소에 올려놓았다. 나머지 절반도 역시 거래소에 올려놓았는데, 일부러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매겨 놓았다. 팔려고 올려놓은 것은 아니고, 거래소를 창고 대용으로 쓰기 위한 꼼수였다. 비형이 투덜거렸지만, 뭐 거기까진 내가 알 바 아니니까. 정민섭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대표님.” 
 
어째 저 ‘대표님’하는 소리를 아까부터 계속 듣다 보니 진짜 대기업 회장이라 된 느낌이라 기분이 묘하다. 
 
“성함이 ‘김독자’셨던 겁니까?” 
“네.” 
“그것 참······ 성함이······.” 
“특이하죠?” 
“······예. 솔직히 저희보다 더 선지자 같으시네요.” 
 
어쩐지 주눅 든 목소리였다. 
 
“후······ 그때 악플 달고 하차만 안 했어도······.” 
 
얼씨구, 뒤늦은 후회까지. 
그 순간,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계속 물어보려고 했는데 깜빡 잊고 있었다. 
 
“정민섭 씨, 하차 얘기가 나와서 말입니다만.” 
“예.” 
“당신들, 그러니까 <선지자들>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모일 수 있었던 거죠?” 
 
줄곧 이상하게 생각했던 지점이었다. 
아직 초기 시나리오가 시작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벌써부터 단톡방을 만들어 단체로 활동하고 있었다. 
게다가 <사도>들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심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본 게 확실하다면, 놈들은 강서지역의 역들을 상당수 점거한 것도 모자라 히든 시나리오 없이는 얻을 수 없는 상당한 수준의 무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성장세였다. 
 
“저희를 불러 모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불러 모아요?” 
“예. 첫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고 얼마 안 된 시점에, 갑자기 제가 있던 역으로 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흥미롭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그 시점에는 역들 사이에 결계가 쳐져 있었을 텐데. 
 
“그는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했고, 위대한 계시록을 읽은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를 <선지자들>을 모집하고 있다고요. 이상한 점은, 그런 일이 다른 역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는 겁니다. 도저히 한 사람이 행한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무튼, 그 <사도>를 통해 전부 모였다 이거군요. 그 자가 당신들을 단톡방으로 끌어들였고.” 
“예, 저희는 그 사도를 ‘첫 번째 사도’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 녀석이 선지자들의 왕이죠? 자길 ‘하차자’라고 부르면 싫어한다는?” 
“아······ 벌써 거기까지 알고 계셨군요. 맞습니다. 그 사람은 자길 다른 이름으로 부르길 좋아한다더군요.” 
 
다른 이름? 
 
“그자는, 스스로를 ‘참독자’라고 자칭합니다.” 
 
······뭐라고? 
 
“왜 스스로를 그런 호칭으로 부를까 이야기가 분분했습니다만. 저희들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계시를 다 읽었다고 주장하는 걸 보면 이야기의 텍본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만······.”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놈의 정체가 더욱 의심스럽다. 
놈이 이용했을 걸로 추정되는 정보를 생각해 보면 도저히 ‘완독자’ 같지는 않았는데······.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사이, 어느덧 충무로역이 가까워졌다. 
날수로 따지면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충무로역의 알싸한 공기를 맡으니 어쩐지 고향이라도 돌아온 기분이었다. 
나는 그대로 역으로 진입하려는 일행들을 제지했다. 
 
“잠깐만요.” 
 
생각해 보니까, 나 아직도 알몸이었잖아. 
왜 아무도 말을 안 해주는 거야? 
나는 이성국을 향해 말했다. 
 
“이성국 씨, 바지 좀 벗어봐요.” 
 
졸지에 팬티 바람으로 걷게 된 이성국을 뒤로하고, 나는 앞장서서 충무로역으로 진입했다. 
멀리서 화색이 되어 나를 맞이하는 유상아의 모습이 보였다. 글썽거리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그간 얼마나 고생했는지 가슴이 짠하다. 
뭔가가 도도도 달려와 폭, 부딪치는 느낌이 나더니, 어느새 이길영이 내 오른쪽 다리에 붙어 있었다. 
 
“잘 있었냐?” 

먼지투성이가 된 이길영이 대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가 심한 이지혜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듯했고, 공필두는 나를 보자마자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성좌, ‘디펜스 마스터’가 당신의 늦은 귀환을 질책합니다.] 
 
하마터면 자기 화신이 죽을 뻔했으니, 이해못할 반응은 아니다. 
 
“유상아 씨!” 
 
충무로역에서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는 이현성과 정희원이 깜짝 놀라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다. 플랫폼 곳곳에 늘어진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실제로 유상아도 한쪽 어깨에 천을 둘둘 감고 있는 채였다. 
철길 곳곳이 시체에서 흘러나온 혈흔으로 낭자했다. 치열했던 싸움을 보여주는 흔적들이었다. 정민섭이 더듬거렸다. 
 
“저, 저거 <사도>들 아닙니까?” 
 
제각기 2번, 3번, 4번, 7번의 표식을 단 남녀의 머리가 나란히 전시하듯이 플랫폼 철길 위에 놓여 있었다. 자신의 죽음조차 인지하지 못한 듯, 생전 그대로의 표정으로 박제된 얼굴들. 누구의 솜씨인지 알 만하다. 
나는 이길영에게 물었다. 
 
“유중혁은 어디 갔어?” 
 
말하기가 무섭게, 회현 쪽 터널에서 불길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멀리서 봐도 누군지 알겠다. 
오만하고 당당한, 걸음 그 자체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실천하고 있는 우리의 주인공. 
 
“유중혁?” 
 
녀석은 나를 보고도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극장 던전에서의 일이 있었으니 보자마자 뭔가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근데 저건 또 뭐지? 
녀석의 손아귀에서 덜렁거리는, 잘린 사람의 머리. 
누군가가 “히익”하는 비명을 질렀고, 그와 동시에 유중혁이 잘린 머리를 이쪽으로 던졌다. 
장난감처럼 데굴데굴 굴러온 머리에는 ‘1’이라는 표식이 새겨진 케이프가 씌워져 있었다. 
 
첫 번째 사도였다. 
 
유중혁이 대단하긴 대단하다. 
도망가는 이놈을 끝까지 쫓아가서 죽여버렸다 이거지. 
절반의 안도와 절반의 불안이 동시에 엄습했다. 
아직 물어볼 게 있었는데, 이렇게 죽어버리면······. 
그런데 다음 순간,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너였구나! 내 계획을 다 망쳐버린 놈! 그렇지?” 
 
잘려나간 머리가, 갑자기 내게 말을 시작했다. 
 
“우와악! 뭐야!” 
 
바로 곁에 있던 정민섭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흉측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눈동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머리가 잘려도 살 수 있는 스킬은, <멸살법> 내에서도 극히 드물다. 
[불사지체] 같은 스킬이 있다면 가능하긴 하지만, 그 스킬을 쓴다고 해도 저렇듯 목이 잘린 상태에서 멀쩡할 수는 없다. 
게다가 목이 잘린 부위에서 피도 흐르지 않는······. 
 
잠깐만. 설마? 
 
이성국과 정민섭을 통해 전해 들은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곁가지를 치기 시작했다. 
계시를 모두 읽었고, 자신을 ‘참독자’라 주장하는 녀석. 
시나리오가 시작되자마자 갑자기 서울 전역에 나타나 하차자들을 자신의 슬하에 끌어들인 녀석. 
거기다 결계를 마음대로 통과할 수 있고, 목이 잘려도 죽지 않으며, 피도 흘리지 않는다······. 
 
“아바타(Avatar) 스킬······.” 
 
확실했다. 눈앞의 이 녀석은 가짜였다. 
잘린 머리가 계속해서 말을 지껄였다. 
 
“와, 진짜 감탄했다. 유중혁을 사칭한 것도 모자라서, 사도들을 일거에 탕진하고, 용까지 빼앗다니······. 넌 정체가 뭐냐?” 
 
그렇군. 
이놈도 내 정체는 모른다 이거지? 
 
“넌 뭔데?” 
 
내가 알기로, ‘멸살법’ 전체에서 ‘아바타’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인물은 정말 극소수다. 
그리고, 그런 특성을 얻게 되는 직군은 대개 정해져 있다. 
주로 창작업에 종사하며,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아 해리성 인격장애나 자아분열이 자주 발생하는 직업.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놈에게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너, 혹시 ‘작가’냐?”
 
 
 
 
 
< Episode 12. 1인칭 주인공 시점 (4) > 끝

< Episode 12. 1인칭 주인공 시점 (5) >
 
 
 
 
 
작가. 멸살법 전체에서 아바타 능력을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군. 
만약 놈이 작가라면, 녀석이 행한 비정상적인 기적들도 일부 설명된다. 
그 말을 들은 첫 번째 사도의 입술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작가라······, 그렇군. ‘계시록’의 창조자를 뜻하는 거냐? 용케 알아냈구나. 맞다, 내가 바로 그 ‘계시록’을 썼다.” 
 
그런 뜻으로 물은 건 아니었는데, 이 자식이 갑자기 헛소릴 한다. 
나로서는 진위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이쪽을 보는 유중혁 쪽을 일별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현재 ‘거짓 간파 Lv.6’를 사용 중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꼼꼼한 자식.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네가 ‘계시록’을 썼다고?” 
“그래. 그리고 동시에, ‘계시록’의 유일한 소유주이기도 하지.” 
 
자신만만한 놈의 미소를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어디 한번 보자고. 
 
[등장인물 ‘유중혁’이 ‘거짓 간파 Lv.6’를 발동합니다.] 
[등장인물 유중혁은 해당 발언이 사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뭐? 진짜 텍본을 가진 놈이라고? 
일순 패닉이 와서 사고회로가 엉켜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당황을 숨기며 다시 물었다. 
 
“네가 말하는 ‘계시록’이라는 게 정확히 뭐냐?” 
“알면서 뭘 물어? 미래의 신화를 담은 위대한 서사시지.” 
 
[등장인물 유중혁은 해당 발언이 일부 사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상하군. 이건 ‘일부 사실’이라? 
 
“이젠 네가 물을 차례로군. 어떻게 나와 <사도>들의 작전을 알았지? 역시 너도 <사도>냐?” 
“네가 계시록을 직접 썼다며? 그런데 몰라?” 
“전지전능한 창조주는 재미없잖아?” 
 
놈은 여유 있는 악당처럼 낄낄 웃어넘겼지만, 덕분에 나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아무리 봐도 이놈은 ‘멸살법’의 작가가 아니다. 
정말 ‘멸살법’의 작가였다면, 직접 텍본을 준 나를 못 알아볼 리가 없다. 
 
“그건 그렇고 흥미롭군. 서대문 형무소에 있는 여자가 <마지막 사도>일 거라 생각했는데, 너 같은 놈이 숨어 있었다니······.” 
“······서대문 형무소?” 
“흐, 아직 모르는 모양이지? 거래를 하자. 네 정체를 밝혀라. 그러면 나도 몇 가지 정보를 알려 주마.” 
“글쎄. 너한테 내가 원하는 정보가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잠깐 나를 제압했다고 기고만장한 모양인데, 어차피 이건 내 본체가 아니다. 조금 운이 좋았던 정도로······.” 
“나는 미래의 정보를 알고 있다.” 

나는 일부러 놈의 말을 끊었다. 
아마 유중혁이라면 지금쯤 속으로 간을 보고 있을 테니, 슬슬 양념을 뿌려 둬야 한다. 
 
“그것도, 너보다 훨씬 많이.” 
 
[등장인물 ‘유중혁’이 당신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첫 번째 사도’의 표정이 굳어졌다. 
 
“개소리를 하는군. 나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을 리가······.” 
 
순간, 녀석의 눈빛에 뭔가가 스쳤다. 
 
“잠깐, 설마?” 
 
녀석이 뭔가를 깨달은 순간, 나 역시 뭔가를 깨달았다. 
이 자식, 설마 ‘그놈’인가? 
지금, 내가 아는 진실은 다섯 가지다. 
 
하나, 놈은 ‘멸살법’을 읽은 적이 있다. 
둘, 놈의 직업은 ‘작가’다. 
셋, 놈은 ‘멸살법을 쓴 작가’는 아니다. 
넷, 놈은 미래가 적힌 ‘텍본’을 가지고 있다. 
다섯, 놈이 가진 텍본의 내용은 ‘일부’ 사실이다. 
 
3149편의 ‘멸살법’을 읽는 내내 있었던 사건들. 
내가 알기로 ‘멸살법’은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불법 텍본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눈앞의 녀석이 내가 예상하는 ‘그놈’이라면······ 이 녀석이 ‘텍본’을 가지고 있는 것도, ‘멸살법’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나는 툭 던지듯 입을 열었다. 
 
“남의 것 베끼면서 살면 좋냐?” 
“뭐, 뭣?” 
 
동요하는 눈빛. 
틀림없다. 이놈은 그놈이다. 
 
“아직도 이러고 살 줄은 몰랐네. 계시록이라······. 그렇게 살면 좋냐? 너 때문에 진짜 ‘계시록의 창조주’가 당한 거 생각하면, 내 이가 다 갈리는데.” 
“무슨······!”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네가 이용하는 정보들, 어딘가 좀 빈약하더라고.” 
 
녀석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남한테 빨대 꽂아서 그만큼 이득 봤으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세계가 이 모양이 됐는데도 아직까지 그 짓거릴 하고 있어?” 
“유중혁!” 
 
놈의 눈이 급하게 유중혁을 찾았다. 
 
“유중혁! 내게 협력해라!” 
 
얼씨구.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모든 계시를 알고 있다. 이 세계에서 오직 나만이, 너를 이 길의 끝까지 데려다줄 수 있어!”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를 발동합니다!] 
[현재 피로도가 높아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를 발동할 수 없습니다.] 
 
젠장, 하필 지금? 
 
“잘 생각해라! 46번 시나리오는 혼자서 깰 수 없다. 안나 크로프트나 차라투스트라 놈들과 맞서려면 꼭 나와 손을 잡아야 해!” 
 
어디서 들어본 말이다 싶었는데, 이 자식 내가 했던 대사를 똑같이 지껄이고 있다. 
유중혁이 고개를 저었다. 
 
“계시라는 것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예언이랑 비슷한 거다! 내 특성을 보면 알겠지? 심지어 나는 ‘마지막’이란 말이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현자의 눈 Lv.8’을 사용합니다!] 
 
나도 질세라 스킬을 가동했다. 
 
[해당 인물의 정보는 ‘등장인물 일람’으로 열람할 수 없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젠장, 역시 안 되나. 
[현자의 눈]으로 뭔가를 확인한 유중혁이 내 쪽을 바라보았다. 
잘린 머리가 계속해서 말했다. 
 
“저놈을 죽여! 너도 알겠지만, 위험한 놈이다. 너를 사칭한 것도 모자라, 미래의 일부를 심각하게 훼손시켰어. 놈을 그대로 방치하게 되면 심각한 나비 효과가 발생해서 네 계획을 모두 망쳐 놓을 거다!” 
 
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이 자식이 지금 다 같이 죽자는 건가?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나는 다르다! 유중혁, 나와 손을 잡아라. 서약이든 뭐든 얼마든지 해주겠다! 나는 너를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이거 강하게 나오는데. 
사태를 지켜보던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그렇군. 손을 잡자 이거지.” 
 
나를 보는 유중혁의 눈빛에 서서히 살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속마음이 안 보이니 미쳐 버릴 것 같다. 칼을 뽑은 유중혁이 천천히 내 쪽을 향해 다가왔다. 기세등등해진 첫 번째 사도가 외쳐 댔다. 
 
“어서 죽여! 죽여 버려!” 
“한 놈은 예언자고, 한 놈은 계시자라······.” 
“죽이라니까!” 
 
퍽! 유중혁이 시끄럽게 떠드는 첫 번째 사도의 머리를 꾹 짓밟았다. 
 
“큭······ 뭐냐?” 
“네놈이 정말 미래를 안다면, 하나만 물어보지.” 
“뭐?” 
 
쥐도 새도 모르게 움직인 칼날이 내 목젖에 닿았다. 
내가 유중혁이 되어 겪었던 그 ‘일검’이 이제 나를 향하고 있었다. 
따끔한 느낌이 들더니 따뜻한 뭔가가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야! 지금 뭐하는 거야!” 
 
놀란 정희원이 소리치며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나는 손을 들어 일행을 제지했다. 
살 떨리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여기서 유중혁을 자극해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유중혁이 첫 번째 사도를 향해 물었다. 
 
“묻겠다. 내가 지금 이놈을 죽일까, 안 죽일까?” 
“뭐?” 
“네놈이 진짜 미래의 계시를 받았다면 내 선택도 알 수 있겠지.” 
 
······하여간 악취미인 새끼. 
또 그딴 식이냐? 
첫 번째 사도의 얼굴에 고뇌가 어렸다. 아마 내가 ‘짝수 다리’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의외로 대답은 빨리 나왔다. 
 
“당연히 죽여버리겠지! 너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 
 
강한 확신이 깃든 얼굴이었다. 
자신이 아는 유중혁이라면, 반드시 그리 행동할 거란 믿음이 담긴 오만한 표정. 
 
“어서 놈을 죽여라! 그리고······!” 
 
휘익, 하고 검광이 움직였다. 
그러나 이어서 들려온 것은 살점을 베는 소리가 아니었다. 
 
콰직! 
 
첫 번째 사도의 머리가 무참히 밟혀 터졌다. 
아바타니까 실제로 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저 정도면 상당한 정신적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유중혁의 검은 어느새 검집으로 돌아가 있었다. 
 
“역시 입만 산 놈이었군.”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유중혁이 나를 살리는 선택을 했다고? 
살짝 떨떠름한 기분이다. 
나도 확신이 있는 건 아니었는데······. 
유중혁은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이내 등을 휙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야! 어디 가?” 
 
이 자식, 분명 속으로 자기가 엄청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솔직히 조금 멋있긴 하다. 
 
“기다려! 이지혜는 두고 갈 거냐?” 
“미래가 바뀌었으니, 계획도 바꾼다.” 
“어차피 하는 거 같이하면 좋잖아? 내가 도와줄 수 있어.” 
 
그 말에 유중혁이 나를 돌아보았다. 
무시무시한 눈길에 반사적으로 심장이 쫄렸다. 
 
“빚은 갚았다. 네 깃발을 빼앗지 않는 것이 내 마지막 호의다.” 
 
이 자식이?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어차피 너, 내가 ‘그룹원’에서 제명시키지 않으면 역 밖으로 못 나가. [징벌] 당하고 싶냐?” 
 
유중혁의 손이 천천히 칼자루 쪽으로 움직였다. 나는 재빨리 첨언했다. 
 
“난 네 계획이 뭔지 알아. 중구 쪽으로 나가서 깃발 쟁탈전에 참가할 거지? ‘왕의 길’을 걸어서 [검은 깃발]을 완성하는 게 네 목표잖아. 내가 도와줄게.” 
“차라리 지금 네놈 걸 빼앗는 게 빠를 것 같은데.” 
“그럼 한 판 해보든가. 네 칼이 빠른지, 내 혀가 빠른지.” 

도박이었다. 유중혁이라면 진짜로 [징벌]의 효과가 나타나기도 전에 내 목을 찌를 수도 있을 테니까. 
 
“중구 쪽으로 갈 필요 없어. 북쪽으로 가자. ‘폭군왕’의 영토랑 깃발, 네 것이 되도록 도와줄게. 깃발도 얻고, 숙적도 제거하고 일석이조 아니냐?” 
“나 혼자도 할 수 있다.” 
“네 번째 시나리오 종료까지 48시간 남았어. 그때까지 네가 역 20개를 차지하고 [검은 깃발]을 완성할 수 있을까?” 
 
칼자루로 가던 유중혁의 손이 멈칫했다. 
걸렸구만. 
 
“게다가······ 너한텐 북쪽으로 가야만 할 이유도 있을 텐데? 설마, 이번 회차에서는 가족을 버릴 건가?” 
“······네놈.” 
“진정하고, 선의로 말하는 거니까 흥분하지 마. 진짜로 도와줄 거라고.” 
 
분노로 이글거리던 유중혁의 눈동자가 잠시간 나를 노려보았다. 
긴장된 공기가 얼마나 흘렀을까. 이윽고 살기가 사라졌다. 
 
“세상에 선의 같은 건 없다. 네놈 조건은 뭐냐?” 
 
역시, 우리 회귀자는 얘기가 빠르다니까.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간단해. 나한테 뭐 하나만 알려줘. 내 조건은 그게 다야.” 
“말해라.” 
“방금 네가 밟은 녀석, 특성명이 뭐야? 하나는 ‘마지막 하차자’였을 테고, 다른 하나는 뭐지?” 
 
잠시 후,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 
 
 
그로부터 십여분 뒤, 나는 정민섭과 이성국을 불렀다. 
이 두 사람에게 따로 시킬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정민섭이 먼저 물었다. 
 
“결국 그 녀석 정체는 뭐였습니까?” 
 
나는 얘기해줄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SSSSS급 무한 회귀자]란 소설, 혹시 알아요?” 
“엇, 저 읽어 봤습니다!” 
 
이성국이 손을 들었다. 
 
“그거 텍스트피아에서 플래티넘 1위 했던 소설 아닙니까? 엄청 재밌게 봤었는데······.” 
“아, 맞다.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나네. 그거 완결 어떻게 났더라?” 
 
모처럼 추억이 떠올랐는지 둘은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하긴, 이놈들도 ‘멸살법’을 읽을 정도면 제법 웹소설에 관심이 있는 축이었겠지. 
 
“온갖 요소 짬뽕 시켜 놓은 거였는데······ 그래도 재미는 있었지.” 
 
사실 나도 그 소설을 읽었다. ‘멸살법’을 한참 읽던 시절, 우연히 눌러본 투데이 베스트에 그 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을 읽은 나는, 소설의 전개와 설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한 회귀하는 사이코패스 회귀자. 
―초월적 존재인 성좌들의 후원. 
―스트리밍 인방 시스템. 
―부조리한 미션을 받아 헤쳐 나가는 생존 게임. 
 
사실 흔한 설정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흔한’ 설정들이 가진 디테일과, 조합된 전개 방식이었다. 그 글을 읽자마자, 나는 곧장 댓글을 남겼다. 
 
―이거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표절 아닌가요? 
 
생각난다. 
표절 논란은커녕, 어디서 그딴 노잼 소설을 비교하냐며 오히려 비난만 받았었지. 
심지어 나는 [SSSSS급 무한 회귀자]의 애독자들에게 쪽지 테러까지 당했다. 
 
―이 바닥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님? 고만 좀 해라 프로불편러야 ㅉㅉ 
 
분통이 터진 나는 ‘멸살법’ 작가한테 쪽지를 보내기도 했었다. 
그때 작가가 뭐랬더라. 
덕분에 조회수가 조금 늘어서 기분 좋다고 말했던가? 
생각하니까 작가가 불쌍해서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다. 
이성국이 물었다. 
 
“근데 그 소설 이야기는 왜 꺼내신 겁니까?” 
“첫 번째 사도가 바로 그 소설 작갑니다. [SSSSS급 무한 회귀자].” 
“예? 그럴 리가요.” 
 
‘멸살법’ 작가가 안다면 땅을 치며 곡할 노릇이다. 
심지어 세계가 자기가 만든 소설로 변했는데, 어디서 표절 작가가 나타나 이 세계의 저작권을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계시록’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설정까지 집어넣으면서. 
약간의 설명을 거친 뒤에야 이해한 정민섭이 황당한 목소릴 냈다. 
 
“그 소설이 표절작이었다고요?” 
“그렇습니다.” 
“엇, 가만 생각해 보니 진짜 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워낙 오래된 일이라 잘 떠오르진 않지만··· 근데 왜 그 소설이 먼저 안 떠올랐던 거지? 훨씬 유명했는데.” 
“하차자 특전 때문에 그런 거 아냐? 우린 읽은 원작 부분만 떠오르니까. 그리고 그 SS 어쩌고는 비슷한 게 너무 많아서 헷갈리잖아.” 
“그런가? 아무튼, 대표님 말씀은 그놈이 표절 작가라는 거죠? 그럼 그놈이 가졌다는 텍본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 녀석은 자기가 쓴 표절작의 텍본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원작의 전개를 베꼈으니, 자기 소설을 보고도 이 세계의 미래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거죠.” 
 
표절작으로 성공한 것도 배가 아픈 노릇인데, 심지어 바뀐 세계에서까지 표절 덕분에 승승장구하고 있다. 정의구현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 그럼 놈을 이기긴 불가능한 거 아닙니까? 만약 원작을 끝까지 다 베꼈으면······.” 
“끝까지는 아닙니다. 초반 일부만 베낀 거예요. 나중에 혹시라도 표절 논란이 생기면 빠져나가기 좋게요. 그러니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슬슬 놈이 아는 정보가 떨어질 겁니다.” 
“대표님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그냥 알아요.” 
 
당연한 일이다. 
멸살법은 100편 이후로 나밖에 독자가 없었으니까. 
 
“저, 실례지만 대표님은 대체 원작을 어디까지 읽으신······.” 
“그보다, 당신들이 해줘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정확히는 우리가 같이해야 할 일이지만요.” 
 
해줘야 할 일이라는 말에 두 사람의 어깨가 빳빳이 굳었다. 
 
“전에 나한테 그런 말을 했었죠? ‘폭군왕’한테 선지자들이 당했다고.” 
“아······ 아마 지금도 몇 명이 녀석에게 정보를 빨리며 이용당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요? 그럼 더 잘됐네.” 
“예?” 
 
앞으로 시나리오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48시간. 
그 안에 ‘폭군왕’을 해치우려면, 전면전만으로는 힘들다. 
 
“놈들의 정보를 교란할 겁니다.” 
 
폭군왕이 <선지자들>을 이용하고 있다면, 나는 그것을 역이용해주면 된다. 
 
“‘계시’의 일부를 뿌리는 거죠.” 
“예? 어떻게······.” 
 
아직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눈치라, 나는 친절하게 설명해주기로 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SSSSS급 무한 회귀자]의 텍본을 만들어 뿌릴 겁니다.” 
 
거슬리는 놈들이 여럿일 때는, 서로 싸우게 만드는 게 답이다.
 
 
 
 
 
< Episode 12. 1인칭 주인공 시점 (5) > 끝

< Episode 13. 왕들의 전쟁 (1) >
 
 
 
 
 
Episode 13. 왕들의 전쟁 
 
 
 
내 계획은 명료했다. 
첫 번째 사도, 그러니까 표절 작가 녀석은 멸살법의 초반부인 ‘3회차와 4회차 일부의 정보’를 가진 놈이다. 그리고 정보를 가진 녀석들이 늘 그렇듯, 놈은 같은 선지자들에게도 정보를 숨길 만큼 독점욕이 강하다. 
반면 서울 7왕인 ‘폭군왕’은 <선지자들>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계시’를 이용하고 있는 녀석이다. 
정보를 독점하려는 녀석과, 정보를 캐내려는 녀석. 
둘이 마주치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이성국이 물었다. 
 
“······그러니까 소설 텍본을 만드시겠다고요?” 
“그렇습니다.” 
 
작전은 자체는 간단하다. 
표절 작가의 소설 내용을 텍본으로 만든다. 
그리고 각 역의 사람들 사이에 퍼뜨린다. 
뭐, 대충 이런 느낌이면 될 것이다. 
 
―<선지자들>이 가지고 있던 ‘계시록’이 일부 유출되었다! 
 
마침 밑밥도 잘 깔아 놓은 상태였다. 
한동훈의 댓글 조작 덕에, 이미 인터넷에는 <선지자들>에 관한 정보가 제법 퍼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텍본 유출에 관한 이야기가 알려진다면, 넷상에서는 커다란 파문이 일 것이다. 
아직 소탕되지 않은 극소수의 초기 하차자들은 숨겨진 히든피스를 얻으려 할 것이고, 자연히 녀석들을 포섭한 폭군왕도 움직이겠지. 
 
“하지만······ 저희는 [SSSSS급 무한 회귀자] 내용을 거의 다 까먹었는데요. 어떻게 텍본을 만들죠?” 
“표절작 내용이 왜 필요합니까?” 
“네?” 
“우린 원작을 기억하고 있잖아요.” 
“아······!” 
 
짧은 감탄. 하지만 정민섭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엇······ 그래도 문제가 있습니다. 저희가 알고 있는 ‘멸살법’에 나오는 히든 피스들은 이미 대부분 써버린 거라서······.” 
“히든 피스 정보는 제가 드리겠습니다. 제가 말하는 몇 가지만, 대충 초반 내용에 버무려서 써 보죠. 적당한 수준의 아이템 정보만 푸는 겁니다.” 
 
무엇보다, 표절 작가나 폭군왕이 눈독을 들일 만한 것으로 말이다. 
이성국이 어색하게 웃었다. 
 
“뭔가 웃기네요. 제가 텍본을 만들다니. 평소엔 읽기만 했는데.” 
 
이 자식들······ 불법 다운로더였냐? 
정민섭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런데 이런 짓을 하면 우리도 그놈이랑 똑같아지는 거 아닐까요? 결국 원작을 표절해서 이야기를 만드는 건데······.”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런 말이 있어요. 표절은 원본을 몰랐으면 하는 거고, 패러디는 원본을 알면 더 재밌는 거고, 오마주는 원본을 알아줬으면 하는 거라고.” 
“아, 재미있는 말이군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우리가 하려는 건 오마주입니다.” 
 
사실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SSSSS급 무한 회귀자]를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놈이 빨리 망할 테니까. 
우리는 공필두가 사용했던 노트북을 빌려 타이핑을 시작했다. 다들 소설을 써본 경험은 거의 없는지라,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했다. 정민섭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했다. 
 
“글쓰기가 이렇게 어려운 거였구나······ 작가들 대단한 거였어······.” 
“대충 쓰죠. 어차피 내용이 다 필요한 것도 아니고, 놈들을 유인해낼 정보만 알리면 되니까. 오히려 불완전한 계시일수록 선지자들을 속이기 쉬울지도 모릅니다. 진실과 거짓을 적당히 잘 섞어야 해요.” 
 
나는 정민섭이 타이핑하는 내용을 보며, 거기에 내용을 조금씩 덧붙였다. 
 
“그리고 소설 속 인물명은 살짝 바꿉시다. 걱정되는 부분이 좀 있어서.” 
 
이현성이라든가, 이지혜 같은 등장인물들이 이 이야기를 알게 되면 충격을 받을 수 있었다. 좋든 싫든 언젠가는 이 세계가 ‘소설 속’이라는 걸 알게 될 테지만, 그게 지금 당장일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정민섭이 뜻밖의 말을 했다. 
 
“그게, 그 부분에 관해서는 특별히 걱정하실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예?” 
“사실 저랑 성국이랑, 몇몇 인물들한테 시험 삼아 ‘이곳이 소설 속’이라고 떠들고 다닌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들, 전혀 못 알아듣습니다. 마치 NPC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리 진지하게 얘기해도 그냥 농담으로만 받아들여요.” 
 
이건 또 뜻밖의 정보였다. 
그러고 보니 정민섭이나 다른 <사도>들이 등장인물들에게 몇 번인가 ‘조연 주제에’라는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때 등장인물들의 반응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뭔가 이상한 구석이 있긴 했다. 
정민섭이 계속해서 말했다. 
 
“첫 번째 사도가 <선지자들>을 쉽게 구분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곳의 ‘등장인물’들은,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말에 굉장히 거부감을 느끼거나 못 들은 척 굴더라고요. 아마 <사도>들이 굳이 ‘계시’라는 용어를 쓰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그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 
 
“······등장인물들과 우리의 차이가 뭘까요?” 
“예? 음······ 우리는 현실의 사람들이고 등장인물들은 소설 속의 사람들이라는 것? 그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요?” 
“그럼······ 언제부터 이 세계는 현실과 소설로 나뉘는 걸까요?” 
“흐음, 글쎄요······. 첫 번째 시나리오가 시작되면서부터?” 
 
정민섭의 대답에도, 내 의문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눈앞의 이성국과 정민섭은, 분명 나처럼 소설 바깥의 ‘외부인’들이었다. 
때문에 처음에는 나도 이들의 정보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업데이트 이후, 나는 [등장인물 일람]으로 이들의 정보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지금 이들은 ‘현실 인물’인 걸까, 아니면 ‘등장인물’인 걸까? 
 
만약,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결국 ‘등장인물’이 되어버리는 거라면······. 
나는 순간 멀찍이 떨어져 있는 유상아와 이길영을 돌아보았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해당 인물은 현재 정보를 수집 중입니다.] 
 
다행히, 둘의 정보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문득 이쪽을 돌아본 유상아가 미소를 지었다. 
이길영도 덩달아 나를 바라보았다. 
 
“왜요, 형?” 
“아무것도 아니야.” 
 
잘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는 느낌이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소설의 대략적인 얼개를 완성했다. 
텍스트피아에 연재했다면 분명 폭망했을 수준의 퀄리티였지만, 지금 그딴 건 상관없었다. 
 
“일단 계시록이 유출되었다는 정보부터 뿌립시다.” 
 
이성국이 물었다. 
 
“정보가 퍼질 시간이 충분할까요?” 
“동훈이한테 부탁해보겠습니다. [은둔형 폐인] 특성을 이용한다면, 단시간에 퍼뜨리는 건 문제 없을 겁니다.” 
“아, 동훈이라면······ 알겠습니다. 그런데 모든 역이 인터넷이 가능한 건 아닌데, 그런 역들은 어쩌죠?” 
“그쪽엔 보낼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강일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국이 수긍했다. 
 
“아, 그렇군요. 일훈 씨라면 확실히······ 거참, 잊고 있었는데.” 
“강일훈 씨, 준비됐죠?” 
 
동대문의 부대표였던 강일훈. 
역시 일부러 이 녀석을 살려둔 보람이 있었다. 
강일훈은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입 터는 거라면 자신 있으니까요. 소문만 내면 되는 거죠?” 
 
[등장인물 ‘강일훈’이 당신에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해당 인물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강일훈. 
드디어 [소문 전문가]의 특성이 발휘될 시기가 왔다. 
이제 시나리오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44시간. 
 
앞으로 하루 안에, 승부가 시작될 것이다. 
 
 
* 
 
 
―동훈아, 고맙다. 
―신세 갚는 것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요. 
 
[등장인물 ‘한동훈’이 당신을 미미하게 신뢰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의 일 이후로, ‘은둔한 그림자의 왕’ 한동훈은 내게 제법 마음을 열었다. 아무래도 녀석을 <선지자들>의 마수에서 구해준 게 생각보다 크게 작용한 모양이었다. 
 
―형한테는 이상하게 친근감이 느껴져요. 
―친근감? 
―오래전부터 알아온 사람 같달지······ 혹시 형도 ‘은둔형 폐인’ 아니에요? 
―음, 난 그건 아냐. 좀 소심한 편이긴 하지만. 
―그렇구나. 뭔가 형이랑 말하면 알 수 없는 벽 같은 게 느껴지거든요.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게 마음에 들어요. 
―보통은 그런 벽이 느껴지면 안 좋은 거 아니냐? 
―저는 벽을 가진 사람만 믿거든요.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벽을 먼저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겨우 열일곱 살밖에 안 된 녀석이 무슨 현자처럼 말한다. 
그나저나 벽이라. 확실히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떤 벽은, 넘을 수 없기에 더 간절한 법이니까. 
 
―아무튼 소문은 다 퍼뜨렸어요. 그런데 그 ‘계시’라는 건 어떻게 뿌리시게요? 또 인터넷으로? 
―아니, 인터넷으로 뿌리면 엉뚱한 녀석도 읽을 거 아냐. 이건 팔 거야. 
―판다고요? 어떻게요? 
 
나는 한동훈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 
 
 
시나리오 종료까지 40시간. 
나는 마침내 충무로의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이번 여정은 쉽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 40시간 안에 ‘창신역’을 빼앗지 못하면, 우리 그룹은 전멸하거든요. 그런데 현재 그 역을 가진 세력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뭐, 언젠 쉬웠나요? 이번 상대는 누군데요?” 
 
정희원의 질문에, 내가 대답했다. 
 
“폭군왕이라는 놈입니다. 현재 서울 7왕으로 손꼽히는 녀석인데, 북쪽 지역에서는 가장 큰 영토를 가진 왕이에요.” 
 
이번에는 이현성이 물었다. 
 
“어떤 사람입니까?” 
“도봉구 일대부터 시작해 남하하며 자신의 ‘왕국’을 만들고 있는 녀석입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예쁘고 잘생기면 첩으로 삼고, 못생기면 죽이거나 노예로 부린다고 하더군요.” 
 
정희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독자 씨는 잡히면 노예네요.” 
“······뭐, 희원 씨도 위험할 거라 생각합니다만.” 
“첩은 곤란한데... 바로 가서 죽여버리면 어때요?” 
“배후성이 꽤 강력한 녀석이라 어려울 겁니다. 일단 지금 방법은 둘입니다. 놈이 가진 깃발을 빼앗거나, 녀석의 본진인 ‘도봉역’을 빼앗거나.” 
 
어느 쪽도 쉬운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일행들은 모두 긴장한 눈치였다. 나는 슬슬 본론을 말하기로 했다. 
 
“일단 우리는 광화문으로 갈 겁니다.” 
“네? 그놈들이랑 싸운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놈들이 그쪽으로 올 거거든요.” 
“왜요?” 
“정보를 좀 흘려 두었습니다. 놈이 움직이는 시간을 감안해야 하니, 우리는 조금 있다가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미리미리 준비해 두시고······ 어?” 
“······갑자기 왜 그러세요?” 
 
유상아의 물음에, 나는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아뇨, 아무래도 제 예상보다 일이 빨리 진행되는 것 같아서요.” 
 
스마트폰으로 한동훈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거래소’에서 검색할 수 있다고 퍼뜨렸는데, 괜찮죠? 
―그래, 맞아. 잘 했어. 
 
그리고 연이어 귓가에 몰아치는 시스템 메시지. 
 
[거래소에 올려놓은 아이템이 팔렸습니다.] 
[거래소에 올려놓은 아이템이 팔렸습니다.] 
 
허공에서 비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특성 사기꾼이지?] 
 
‘성좌들 반응은 어때?’ 
 
[당빠 엄청 흥분했지. 필터링 제한도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고······ 자기 화신한테 직접 선물한 놈들도 생겼어. 근데 너 이런 짓하면 또 주목받을 텐데, 괜찮겠어? 그리고 네가 아는 정보들 풀면, 너한테도 불리한 거 아냐?] 
 
‘안 불리해.’ 
 
어차피 정보는 남아돈다. 
그리고 내가 푼 정보는, 내게 필요한 정보들도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손해가 될 정보지. 
 
‘물건 판 코인이나 내놔.’ 
 
[여깄다, 인마.] 
 
[거래소에서 ‘계시록─ SSSSS급 무한 회귀자’ 16권이 판매되었습니다.] 
[16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텍본을 무료로 풀지 않았다. 
어차피 이 정보가 필요한 놈들은 전부 배후성과 계약 중일 것이고, 그러니 인터넷을 통해 푸는 것보다는 ‘거래소’를 통해 판매하는 것이 낫다. 
중요한 정보가 들어있는 ‘계시록’을 무료로 푼다면, 그거야말로 더 의심스러운 행동이다. 
하지만 거기에 값을 매겨서 판매한다면? 
필요한 놈들은 당연히 사 본다. 
그 정보에 그만큼의 ‘가치’가 있을 거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정보의 질은, 때로 그 내용보다는 값에 의해 결정되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16000코인이라. 이거 아주 짭짤한데. 
나는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죄송한데, 저 잠깐 자고 올게요.” 
“······너무 태평한 거 아니에요?” 
“자야만 할 수 있는 일도 있습니다.” 
 
나는 그대로 자리를 잡고 드러누웠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유상아가 얇은 담요를 덮어 주었다. 정희원이 황당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리고 나는, 순식간에 잠들었다. 
 
잠시 후, 흐릿해진 의식 속에서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를 발동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알아낸 바에 따르면, [전지적 독자 시점]은 세 가지 단계로 구분된다. 
 
등장인물의 간단한 행동이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1단계. 
등장인물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2단계. 
등장인물들이 위치한 주변 전경을 보거나, 등장인물 본인에게 직접 몰입할 수 있는 3단계. 
 
지금까지 내가 3단계를 겪은 것은 총 두 번. 
한 번은 꿈속이었고, 또 한 번은 가사 상태였다. 
 
꿈속에서는 금호역을 떠나는 유중혁을 보았고. 
가사 상태에서는 충무로의 현장을 목격했다. 
 
이 두 가지 사례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내 의식의 상태가 흐릿하고 불안정했다는 것. 
하지만 그것만이 3단계 발동 조건의 전부는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조건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표님, 보고 계십니까? 젠장······ 이렇게 하는 거 맞나?’ 
 
혼자서 열심히 중얼거리던 강일훈이,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폭군왕 쪽에는 확실히 퍼뜨렸습니다. 곧, 놈들도 움직일 겁니다. 그런데 제 말 듣고 계신 거 맞죠?’」 
 
해당 등장인물과 내가 동시에 ‘서로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잠시 후, 시야가 꾸물거리더니 강일훈이 훔쳐보는 정경들이 나타났다. 
 
「새하얀 이빨을 드러낸 사내가 웃고 있었다. 휘황한 용포를 걸치고 기이한 금관을 쓴 사내는, 주변 여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자신의 왕좌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새로운 계시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코인으로 구매한 정보니까 틀림없습니다.” 
“정보를 푼 놈은 누구지?” 
“아마 <사도>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신뢰도는?” 
“계시록에 담겨 있는 몇몇 히든 피스들을 확인했는데, 모두 진짜였습니다.” 
 
사내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광화문으로 가자. 다른 놈들이 오기 전에, 먼저 그곳을 점거한다.”」 
 
좋다. 드디어 폭군왕이 움직이는군. 
이제 문제는 다른 쪽인데. 
나는 정민섭을 떠올렸다. 
 
「‘대표님. 놈이 도착했습니다.’」 
 
타이밍도 좋군. 
정민섭은 미리 광화문에 있는 세종대로 사거리에 나가 있었다. 
곧이어 정민섭이 있는 주변 정경이 보였다. 
 
「‘중2병 같은 후드 쓰고 온 거 보니까,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놈입니다.’」 
 
건축물 아래쪽에서 일렁이는 인영들. 역시, 표절 작가 녀석이 제일 빠를 줄 알았다. 광화문에는 3회차의 가장 유용한 히든 피스 중 하나가 숨어 있다. 슬슬 똥줄이 타고 있을 테니,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겠지. 
 
「‘문제는 그놈들 말고도 더 온 것 같습니다. 영등포랑 용산, 성동구 쪽에 있던 왕들도 움직인 것 같은데······ 이거 일이 너무 커지는 거 아닙니까?’」 
 
아니, 바라던 바다. 
슬슬 수면 밑에 숨어 있던 녀석들이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일이 찾아갈 필요가 없어졌으니 오히려 잘됐다. 
 
마침내 네 번째 시나리오의 최종막. 
‘왕들의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 Episode 13. 왕들의 전쟁 (1) > 끝

< Episode 13. 왕들의 전쟁 (2) >
 
 
 
 
 
의식이 조용히 융기하며, 서서히 감각이 현실로 돌아온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를 종료합니다.] 
 
3단계는 생각보다 피로도가 심해서 오래 유지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쉬운 사실 한 가지를 알아냈다. 
그것은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를 사용한다고 해서, 무조건 스킬 보상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아마 [1인칭 주인공 시점] 상태로 진입해야 얻을 수 있는 보상인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그 진입 요건은 알아내질 못했다. 
만약 잠들 때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을 통해 유중혁의 스킬들을 빼 올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눈을 뜨고 부스스 일어나자, 정희원이 나를 보고 있었다. 
 
“또 잠꼬대하시던데요.” 
 
잠꼬대? 그럴 리가. 
 
“뭐라고 했는데요?” 
“엄마······ 라고 하는 것 같던데.” 
“······엄마?” 
 
왜 그런 혼잣말을 했지?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니 곤란한 노릇이군. 
정희원은 그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대충 둘러댔다. 
 
“뭐, 저도 어머니가 걱정되긴 하니까요. 그보다 정희원 씨, 부탁이 있습니다.” 
“뭔데요?” 
“희원 씨는 이번 광화문 전투에 참가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왜요?” 
“따로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믿을 사람이 희원 씨뿐이에요.” 
 
믿을 사람이라는 말에 정희원이 못 이긴 척 입술을 비죽였다. 
 
“일단 들어볼게요. 뭔데요?” 
 
 
* 
 
 
정희원과 대화를 마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충무로에 남을 사람과 광화문으로 향할 사람을 정하는 것이었다. 
 
“정희원 씨는 임무가 있으니 제외하고, 일단 충무로에 남을 사람을 정하겠습니다.” 
 
몇몇 일행들이 침을 삼켰다. 
마치 왕의 간택이라도 받는 신하들 같은 얼굴들. 
 
“먼저, 남을 사람은 공필두 씨와 이현성 씨입니다.” 
“흥, 아예 노예로 부리시는구만.” 
 
공필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문제는 이현성 쪽이었다. 살짝 창백해진 얼굴이, 어쩐지 진급 누락이라도 당한 듯한 표정이었다. 
 
“현성 씨는 남아주셔야 합니다. 공필두 씨와 함께 이곳을 지킬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현성 씨라면 충무로가 습격당하더라도 유상아 씨 못지않게 사람들을 잘 이끄실 수 있을 겁니다.” 
“······옙. 알겠습니다.” 
 
어쩐지 서운한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 든든한 강철검제를 두고 가는 것은 다 이유가 있으니까. 
 
“현성 씨는 이미 충분히 좋은 스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스킬들의 레벨이 너무 낮다는 겁니다. 저희가 다녀올 동안 현성 씨는 ‘태산 부수기’의 숙련도를 높여 주세요. 이번 시나리오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현성 씨의 도움이 필요해질 테니까요.” 
 
그제야 이현성도 살짝 밝아졌다. 
 
“옙! 맡겨만 주십시오.” 
 
역시 군인은 매뉴얼이 있고 정해진 일과가 있을 때 가장 뛰어난 효율을 발휘하는 법이다. 
그렇게 우리는 광화문으로 향하는 여정에 나섰다. 
따로 움직이는 유중혁과 이지혜를 제외하면, 핵심 인원은 나와 유상아, 이길영, 그리고 이성국의 네 명이었다. 
멀어지는 우리를 보며 충무로의 그룹원들이 손을 흔들었다. 
 
“부대표님! 잘 다녀오십시오!” 
“부디 무사하셔야 합니다!” 
 
며칠이나 됐다고, 유상아의 인기가 벌써 하늘을 찌른다. 
짧은 시간 동안 유상아에게 정을 붙인 사람이 많았던지, 다들 염려하는 눈빛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떠나는 유상아의 표정은 불안해 보였다. 
 
“독자 씨, 제가 도움이 될까요?” 
 
또 자기비하의 시간이 돌아온 모양이다. 
이럴 땐 상처 받더라도, 확실히 말을 해줘야 한다. 
 
“유상아 씨. 자꾸 그런 식으로 굴면 민폐에요.” 
“네······.” 
“유상아 씨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라고요. 제가 아무 이유도 없이 누구 데려가는 거 봤어요?” 
“물론 독자 씨를 믿지만, 제가 현성 씨나 희원 씨만큼 도움이 될지······.” 
“그 두 사람은 못 하는 걸 유상아 씨는 할 수 있어요. 이번 계획에는 유상아 씨가 꼭 필요합니다.” 
 
거듭 강조해서 말하자, 유상아의 표정도 살짝 풀어졌다. 유상아는 실제로 뛰어난 인재다. 자신감만 있다면 말이지. 
 
“전에 한국사 자격증 있다고 했죠?” 
“앗, 네.” 
 
과거의 이야기가 나와서인지, 유상아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하지만 잠시 뿐, 그녀는 금방 시무룩해졌다. 
 
“······지금은 쓸모없지만요.” 
“쓸모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유상아 씨를 데려온 거거든요.” 
 
원래는 유상아에게 이 역할을 맡길 생각은 아니었다. 
광진구 쪽으로 내려가면 또 적합한 인재가 있으니까. 
하지만 녀석을 찾으러 갈 시간도 없고, 유상아 정도만 되어도 충분하다. 
내가 아는 유상아는, 고작 한국사 1급을 따기 위해 한국사 전체를 줄줄 외워버릴 만큼 머리가 좋은 여자니까. 
 
“지난번에 사명대사 동상 기억하시죠?” 
“네.” 
“광화문으로 가는 길에도 그와 비슷한 것들이 여럿 있을 겁니다. 그쪽엔 국립 박물관도 있고, 성상들도 제법 있거든요.” 
 
역시나 금방 알아들은 유상아가 탄성을 질렀다. 
 
“아!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다른 유품이나 유적에도 성좌의 힘이 깃들어 있겠군요.” 
“네, 유상아 씨의 이번 임무는 그런 유품이나 유적들을 찾아내는 겁니다.” 
“알겠어요! 머리 좀 굴려 볼게요.” 
“유명한 인물이 남겼는데 알려지지 않은 것들일수록 더 좋아요.” 
 
같은 위인급 성좌라 해도, 그 유명세에 따라 그 힘은 천차만별이다. 
사명대사와 충무공의 차이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명대사가 남긴 물품들은 B급이지만, 충무공이 남긴 쌍룡검 같은 경우는 실전용이 아닌 것도 S급을 넘나드는 품질을 가지니까. 
 
“광화문으로 가는 길에 최대한 아이템들을 많이 챙겨야 합니다. 우리 쪽은 상대적으로 소수 인원이니까요.” 
 
아마 폭군왕은 수백여 명의 화신들을 거느리고 왔을 것이다. 
표절 작가 녀석도 나름대로 세력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고. 
영등포와 용산, 성동구 쪽에서 올라오고 있는 왕들도 조심해야 한다. 
대충 어떤 녀석들일지 짐작은 가지만, 나비 효과 때문에 역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그때, 유상아가 손뼉을 쳤다.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곳이 있어요.” 
“네?” 
“제 기억이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이 근처에 아마 관성묘(關聖廟)가 하나 있을 거예요.” 
“관성묘?” 
“네, 영험한 위인의 힘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르니, 가는 길에 들려도 좋지 않을까요? 한국 위인은 아니지만······.” 
 
한국의 위인이 아니라고? 
관성묘라, ‘멸살법’의 애독자인 나도 그런 장소는 들어본 적이 없다. 
어쨌든 우리는 유상아의 의견을 따라 지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을까. 
가장 먼저 소리친 것은 이성국이었다. 
 
“엇, 저거 아닙니까?” 
 
정말로 낡은 신당이 근처에 있었다. 
관성묘 남묘. 
도시 한복판에 이런 신당이 있다고? 
신당 옆에 쓰여 있는 설명에 나는 더욱 깜짝 놀랐다. 
 
허, 이거 설마?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신당이었다. 
설마 이런 곳에 중국 최고의 무신(武神) 중 하나를 모신 사당이 있을 줄이야. 
유상아가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어쩌면 좋을까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상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예를 표해보죠.” 
 
사명대사 때와는 다르다. 무턱대고 깽판만 친다고 항상 좋은 보상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받아 온 물을 떠 놓은 후, 조용히 합장을 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이 사당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언월도를 즐겨 쓰는 한 성좌가 당신들의 방문에 기뻐합니다.] 
[언월도를 즐겨 쓰는 한 성좌가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성좌, ‘미염공 장목후’가 당신들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미염공(美 髯公) 장목후(壯繆侯). 
중국의 무신이지만, 한국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위인이다. 
왜냐하면 이 성좌는, 바로 삼국지연의의 관우(關羽) 운장(雲長)이었으니까. 

[성좌의 축복으로 앞으로 24시간 동안 근력과 체력 수치가 5씩 증가합니다.] 
 
이성국이 화색이 되어 말했다. 
 
“미친······ 대표님, 이거 완전 대박 아닙니까?” 
“괜찮은 시작이네요.” 
 
왜 서울에 관우의 신당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에도 충무공을 모시는 사당이 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관우 운장은 세계적 유명세로 봐도 충무공 이상이니 이만한 버프는 당연한 거겠지, 다만. 
 
“여기선 아이템을 얻기는 무리일 것 같군요.” 
“아쉽네요, 청룡언월도 같은 걸 얻으면 좋았을 텐데······.” 
 
사실 우상이 있었더라도 중국의 위인이니 한국에서 좋은 아이템이 나올 리는 없다. 
중국에서 관우를 얻은 화신이 누구였더라······. 
제천대성이나 우리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관우 정도를 얻었다면 중국에서도 한 지역의 패자가 되기엔 충분할 것이다. 
이길영이 내 옷깃을 붙잡았다. 
 
“형.” 
 
격렬하게 움직이는 바퀴벌레의 더듬이. 
예감이 좋지 않다 싶더니, 멀리서 열을 맞춰 걸어오는 군중들이 보였다. 
숫자는 대략 오십여 명 안팎. 
[냉철한 관찰력]에 잡힌 그들의 평균적인 체근민은 40내외. <사도>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준수한 정예군이라 불리기엔 충분하다. 
오십의 정예를 데리고 다니는 군벌이라. 
이성국이 중얼거렸다. 
 
“저 복장, 어디선가······.” 
 
마치 화랑을 연상시키는, 사극풍 복장의 사내들. 
하나 같이 얼굴에 분칠을 한 그들은 누가 봐도 대단한 미남자들이었다. 저 녀석들은 폭군왕을 만나도 절대 노예는 되지 않겠군. 
이성국이 소곤거렸다. 
 
“저기 저 앞줄에 남자, 황승민 아닙니까? 연예인들 같은데요?” 
 
누가 봤다면 사극 촬영 현장이라 생각했겠지만,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명백한 살기였다. 앞으로 나선 사내가 내 쪽으로 창을 겨누며 물었다. 
 
“왕의 길을 막는 자가 누구냐?” 
“그러는 너희는 누군데?” 
 
대강 짐작은 가지만, 그래도 물어보았다. 
이들과 마주치는 것은 조금 나중일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타이밍이 빨랐다. 
화랑의 무리 가운데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갈색 깃발······ 설마 당신도 ‘왕’인가요?” 
“···그렇습니다만?” 
“설마 중구에도 ‘왕’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놀랍군요.” 
 
마치 봄바람에 꽃잎이 스치우는 듯한 목소리였다. 
정확히는, 연출된 목소리겠지만. 
내가 대답했다. 
 
“왕 정도는 이제 흔한 세상이니까요.” 
“왕이 흔한 세상이라고 해서, 아무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모두 전열을 물려라!” 
 
화랑의 대열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지고, 대열의 중심에 왕족의 복식을 걸친 여인이 나타났다. 단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 삼단같은 머리카락. 어지간한 사극의 여주인공이라 해도 믿을 만큼 뛰어난 미모였다. 
 
“저, 저 사람 민지원 아닙니까?” 
 
이성국이 말을 더듬었다. 여인이 웃었다. 
 
“저를 알아보는 분이 계시나 봐요?” 
“패, 팬이었습니다!” 
 
몽롱하게 홀린 이성국이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멍청하긴. 
명색이 [최면술사]인 놈이 먼저 홀리면 어쩌자는 거야? 
 
[전용 스킬, ‘파마 Lv.2’를 발동합니다!] 
 
순간 동공이 풀리던 이성국이 정신을 차렸다. 
 
“핫, 죄, 죄송합니다.” 
 
여인의 눈가에 이채가 스쳤다. 
그나저나 흥미롭다. 
이성국이 알아봤다는 것은, 저 ‘민지원’이라는 여자는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서울 7왕 중 하나인 ‘미희왕(美戱王)’이 실존 인물이라고? 
 
좀 이상한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멸살법’의 등장인물인 ‘미희왕’의 본명도 ‘민지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우연의 일치인가? 
뭐, 확인해 보면 알겠지.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다행히, 스킬은 무사히 발동했다. 
 
<인물 정보> 
 
이름 : 민지원 
나이 : 26세 
배후성(背後星) : 매금지존(寐錦之尊) 
전용 특성 : 배우 (희귀), 비극의 여왕 (영웅) 
전용 스킬 : [무기 연마 Lv.5], [군세 지휘 Lv.2], [도화살 Lv.4], [피부 보정 Lv.1], [천의 얼굴 Lv.3], [연기 Lv.2]······. 
성흔 : [천인매혹(天人魅惑) Lv.4], [남다른 여장부 Lv.3] 
종합 능력치 : [체력Lv.18], [근력Lv.18], [민첩Lv.21], [마력Lv.23] 
종합 평가 : 뛰어난 배후성이 뛰어난 화신을 만났습니다. 그녀의 훌륭한 미색은 배후성의 가호를 받아 더욱 빛날 것입니다. 그녀의 미색이 바래지 않는 한, 그녀의 군대는 오직 그녀를 위해 충성할 것입니다. 
 
역시 이 여자는 ‘멸살법’의 원작에 나오는 그 미희왕이다. 
[등장인물 일람]이 바로 발동한 걸 보면, 실존 인물이 아닌 것 같은데······ 이성국은 어떻게 이 여자를 알아본 거지? 
혹시, 이성국이 등장인물 사전에 등록된 것과 뭔가 관련이 있는 건가? 
나는 일단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민지원 씨,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후후, 왕께서도 제 팬이신가요?” 
 
팬이라······. 
뛰어난 미모긴 하지만 내 스타일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유상아도 저 여자 못지 않은 미인이고. 이성국이 홀린 건 아무래도 저 여자가 가진 특유의 스킬 탓이겠지. 
나는 일부러 사극처럼 말해 보았다. 
 
“팬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어찌 모르겠습니까? 성동구의 왕이시여.” 
 
그 말에 민지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신은······?” 
 
이 여자는, ‘왕들의 전쟁’에서 매우 쓸모가 있다. 
매금지존(寐錦之尊). 
‘멸살법’ 전체에서 그런 별호를 가진 인물은 단 하나뿐이니까. 
 
“보아하니 배후성과의 동조율이 굉장히 높으신 것 같은데, 배후성께 전해 주십시오. 신라의 마지막 여왕을 직접 뵙게 되어, 몹시 영광이라고.” 
 
매금지존. 
그것은 신라의 마지막 여왕인 진성왕(眞聖王)의 수식언이다. 
 
[등장인물 ‘민지원’의 배후성이 크게 동요합니다.] 
 
“당황하실 것 없습니다. 신라의 숙원을 풀기 위해 오신 거 아닙니까?” 
 
가끔 이런 경우가 있다. 배후성과 화신 사이의 동조율이 지나쳐서, 배후성이 생전에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신의 화신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한을 품은 위인급 성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다. 
나중에 개연성 후폭풍을 후드려 맞고 소멸할 것도 모르고 말이지. 
민지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 
 
멸살법의 전개대로라면, 지금 서울의 세 지역― 성동구, 용산구, 영등포구는 제각기 면한 영토에서 치열한 세력전을 벌이고 있다. 
마치, 오래전 한반도의 후삼국 시대처럼. 
뜻밖의 메시지가 도착한 것은 그때였다. 
 
[현상금 시나리오가 도착하였습니다!] 
 
응? 현상금? 
 
+ 
 
<현상금 시나리오 ― 후삼국 통일> 
 
분류 : 현상금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매금지존을 비롯한 신라 출신의 위인급 성좌들이 화신 ‘민지원’을 세 지역의 왕으로 추대하기를 원합니다. 화신 ‘민지원’을 도와 후백제와 태봉 출신의 배후성을 가진 왕들을 격살하십시오. 만약 이 시나리오를 성공하면 성좌 매금지존의 호의를 얻게 될 것입니다. 
제한시간 : 38시간 
보상 : 2000코인 
실패시 : ― 
 
+ 
 
멍하니 시나리오 창을 바라보고 있는데, 요염하게 웃는 민지원이 보였다. 
 
“내 배후성께서 당신들의 성의를 보고 싶어 하시는군요. 당연히 수락하시겠죠?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내 아래로 들어오세요.” 
 
네깟 녀석이 어디서 2000코인이나 주는데 안 받고 뻐기겠느냐는 말투다.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성좌랍시고 존중해줬더니, 이 자식들이 나를 완전히 호구로 보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화신 ‘민지원’의 배후성을 싫어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위인급 성좌들의 재력을 비웃습니다.] 
[2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거래소에서 ‘계시록─ SSSSS급 무한 회귀자’ 5권이 판매되었습니다.] 
[5000코인을 추가로 획득하였습니다.] 
 
지금 나한테 들려오는 메시지들을 들으면, 저 여자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몹시 궁금하다. 
꼴랑 2000코인 주고 지금 나한테 뭘 해달라고?
 
 
 
 
 
< Episode 13. 왕들의 전쟁 (2) > 끝

< Episode 13. 왕들의 전쟁 (3) >
 
 
 
 
 
[성좌, ‘매금지존’이 당신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벌써 부하를 얻은 듯 자신만만한 눈빛의 민지원을 향해,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싫은데요.” 
 
순간 민지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화랑 몇 명이 입을 벌렸고, 배우인 민지원조차 표정 관리가 안 되고 있었다. 돌아온 것은 멍청한 목소리. 
 
“······네?” 
 
그녀는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의 청각을 의심하는 쪽을 택한 듯했다.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쪽 부하 안 한다고요.” 
 
2천 코인을 주고 자기 부하가 되라니, 이건 뭐 웃음만 나온다. 
나는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그만 갑시다. 갈 길이 급하니까.” 
 
우리가 망설임 없이 돌아서자, 민지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잠깐만요! 코인이 부족하면 더 줄 수도 있어요. 제 배후성과 잘 얘기하면―” 
“필요 없습니다.” 
“기다리라니까요!” 
 
다급했는지, 그녀는 직접 달려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민첩 수치에 비해 제법 빠른 몸놀림이었다. 
 
“설마 2000코인의 가치를 모르는 건 아니겠죠?” 
 
모를리가 있겠냐? 
사이다 몇 번 터뜨려 주면 들어오는 게 2000코인이지. 
민지원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런 잘난 척할 여유는 없을 텐데요?” 
“······잘난 척?” 
“곧 후삼국 간의 전쟁이 시작될 거예요. 그쪽이 어떤 성좌를 배후성으로 삼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근의 중소 그룹들은 모두 정리될 거라고요.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내가 2000코인을 받고 그쪽을 받아줘도 모자랄 상황인데, 혹시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가요? 나, 신라의 왕이에요. 곧 삼국을 통일할 왕이라고요!” 
 
본인 연기에 너무 심취해서 맛이 가버린 모양이다. 
하긴, 민지원은 원래 이런 설정이었지. 
본래 뛰어난 배우인 그녀는 ‘진성왕’과의 깊은 동조 때문에 한동안 자기가 정말 신라의 마지막 여왕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것이다. 
이래서 메소드 연기가 무섭다니까. 
 
“뭔가 시대를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지금은 후삼국 시대가 아닙니다.” 
“시대를 착각하는 건 그쪽이겠죠. 대한민국은 이제 끝났어요. 설마 아직도 구출을 기다리는 건 아니겠죠?” 
 
분명, 방금 전까지 헛소리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말을 잘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요. 그리고 그 시대의 시작은 바로 나, 민지원으로부터 시작될 거예요.” 

착각이었다. 
헛소리도 맥락을 잘 이으면 그럴듯해 보이는구만. 
이 여자를 어떻게 떼어 놓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고맙게도 유상아가 끼어들었다. 
 
“저, 여왕님?” 
“······뭐죠?” 
“제가 알기로 후삼국 중에 신라는 제일 약소국인데······ 역사대로라면 조금 힘들지 않을까요? 어떻게 삼국 통일을 하시려고······.” 
 
기습 공격을 당한 민지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그쪽이 뭘 안다고 잘난 척이에요!” 
“저······ 한국사 1급이요.” 
“하, 한국사 1급······.” 
 
당황한 민지원이 말을 더듬었다. 
 
“한국사 1급이 뭐 대단한 거라고!” 
“그만 갑시다 유상아 씨. 역사도 잘 모르시는 분 같은데.” 
 
내 말에 민지원의 얼굴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기다려요! 내 제안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삼천 코인이면 어때요?”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삼천 오백! 삼천 오백까지 줄게요!” 
 
단위가 오백으로 줄어들었다. 우리 여왕님의 자본 규모를 알겠구만. 
역시 위인급 성좌는 유명세에 따라 재력이 천차만별이라니까. 
나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삼천 육백, 아니 칠백······!” 
 
걸어가던 내 발걸음이 멈췄다. 
돌아보자, 민지원이 ‘그럼 그렇지’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참 나쁜 놈이다. 
그냥 가버릴 수도 있는데, 저걸 굳이 박살 내주고 싶은 걸 보면. 
나는 그녀를 향해 무뚝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히려 제가 제안하고 싶군요.” 
“무슨 소리죠?” 
“1만, 어떻습니까?” 
“······1만?” 
“아, 너무 낮게 잡았나요? 그래도 명색이 왕이니······ 그럼 2만으로 하죠.” 
 
민지원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졌다. 
팔짱을 낀 그녀가 나를 노려보았다. 
 
“지금 나랑 장난치자는 건가요? 2만 코인? 설마 그쪽에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 
“아뇨, 제가 그쪽을 2만 코인에 사겠다는 뜻입니다.” 
“네?” 
“정확히는, 그쪽이 가진 모든 병력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멍하니 입술을 벌리던 그녀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그, 그만한 코인이 당신한테 있을 리가 없잖아요?” 
“당신한테 없다고 해서, 남도 없을 거란 발상은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궁금하군요.” 
 
나는 검지와 엄지를 힘껏 튕겨 부딪쳤다. 그러자 검지의 끝에서, 광휘와 함께 내가 가진 코인의 일부가 형상화되었다. 
 
[20,000 코인] 
 
간신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민지원이 마침내 무너졌다. 
 
“마, 말도 안 돼!”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불신이 경악으로, 다시 경악이 탐욕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긴, 그럴 법도 하지. 
2만 코인이면 종합 능력치를 엄청나게 올릴 수 있는 금액이니까. 
후삼국 세력의 판도를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금액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탐욕은 안타깝게도 그녀의 자존심을 부수지는 못했다. 
 
“지금 당신! 나를 돈으로 사겠다는 말인가요?” 
“왜요, 안 됩니까? 제안을 먼저 꺼낸 건 그쪽인데요.” 
 
내 말에 기함하며 앞으로 나선 것은 화랑들의 대장이었다. 
 
“감히!” 
 
호리호리한 체구에, 선이 고운 미남. 
근육은 별로 없어 보였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기개가 있었다. 유상아가 말했다. 
 
“독자 씨, 저 남자······.” 
 
유상아의 말과 동시에, 나도 깨달았다. 
 
그랬지 참, 신라에는 이 성좌가 있었지. 
 
신라라고 해서 후삼국전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하지는 않다. 
시대를 가리지 않고 본다면 유능한 장수는 꽤 있으니까. 
가령, 김유신이라든가······ 문제는 이번 회차의 신라에는 김유신이 없다는 것이지만. 
 
“관창(官昌)은 좋은 성좌죠. 하지만 경솔하군요. 만약 제 성좌가 계백이라면 어쩌려고 그러시죠? 설마 황산벌을 재현하고 싶으신 건 아니실 테고.” 
 
당황한 사내가 눈을 크게 떴다. 
 
“네, 네놈······ 설마 백제의 끄나풀이냐?” 
 
[성좌, ‘임전무퇴의 화랑’이 당신의 발언에 노여워합니다.] 
 
역시 이 녀석 배후성이 관창이었군. 
임전무퇴의 화랑. 황산벌의 영웅, 관창. 가진 성흔은 별거 아니지만 몰락한 왕국에 대한 충성심 하나는 끝내주는 성좌다. 
 
“백제는 아니고, 평범한 한국 사람입니다만.” 
“이놈!” 
“그쪽 애국심은 존중하지만, 조금은 신중하게 구는 편이 좋을 겁니다. 저는 고작 2만 코인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거든요.” 
 
손가락을 한 번 더 튕기자, 형상화 된 코인의 숫자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사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설픈 재력은 욕망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압도적인 재력은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법이다. 
‘코인’의 힘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더욱. 
잠시 얼이 빠져 있던 민지원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빨리도 물어 보시는군. 
물론 대답해 줄 생각은 없었다. 
 
“민지원 씨, 세상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배우였던 당신이라면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망이군요.”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말로 돌아섰다. 
일행들이 뒤늦게 나를 따라왔고, 처량한 민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 기다려요!”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나를 쫓아오지 못했다. 
신라군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졌을 무렵, 유상아가 살짝 시무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독자 씨,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그러세요.” 
“방금 그분, 유명한 분인가요?” 
 
뜻밖의 질문이어서 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예? 음······ 아마 그럴걸요?” 
“역시 그렇구나. 독자 씨도 성국 씨도 저분을 알아보시길래······ 저도 사극 나름 열심히 챙겨 봤는데 왜 전혀 기억이 안 날까요?” 
 
왜 또 시무룩한가 했더니, 겨우 그런 이유였나? 
이길영이 끼어들었다. 
 
“저도 몰라요 누나.” 
“앗, 하하. 그러니? 다행이다.”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민지원’이 소설 속에만 나오는 등장인물이라면 유상아나 이길영이 그녀를 모르는 것은 당연한 얘기니까. 
문제는 이성국이었다. 
 
“이성국 씨.” 
“앗, 옙.” 
 
여전히 뒤쪽을 흘끔대던 이성국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민지원의 미모가 어지간히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아까 민지원 씨 팬이라고 하시던데······?” 
“예? 하하. 그렇습니다. 모르셨나요? 유명한 배우신데······ 어?” 
 
순간 이성국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어······ 팬이긴 한데······ 민지원······ 씨가 누구였······? 어라?” 
 
나는 곧장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이성국 
나이 : 25세 
배후성(背後星) : 늙은 시계추의 관리자 
전용 특성 : 최면술사 (희귀) 
전용 스킬 : [최면 Lv.3], [허세 Lv.4], [무기 연마 Lv.3]······. 
성흔 : [편안한 숙면 Lv.1] 
종합 능력치 : [체력Lv.13], [근력Lv.13], [민첩Lv.17], [마력Lv.18] 
종합 평가 : 현재 종합 평가가 진행 중입니다. 
 
+ 
 
이성국의 인물 정보를 보는 것은 이것으로 두 번째였다.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이성국의 특성, ‘아홉 번째 하차자’가 사라졌다. 
 
“······이성국 씨?” 
“으어······ 옙?”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괜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말을 아꼈다. 
‘멸살법’의 세계에서 특성이 소멸하는 경우는 오직 그 특성의 자격이 사라졌을 때뿐이다. 
 
모든 ‘하차자’는 이 세계의 ‘미래’를 알고 있다. 
 
하지만 이성국이 알고 있는 미래는 프롤로그에 가까운 초반뿐. 현재 시나리오의 전개는 그가 알고 있었던 정보를 넘어섰다. 
 
그러자 어떤 가설이 떠올랐다. 
 
어쩌면, 모든 ‘하차자’들은 자신이 알고 있던 ‘미래’를 따라잡는 순간 단순한 [등장인물]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비약 같지만 설득력 있는 가설이었다. 그런 거라면, 이성국과 정민섭의 인물 정보가 보이기 시작한 것도 납득이 된다. 
만약 그런 거라면······. 
혹시, 언젠가 나도······? 
 
[등장인물 ‘민지원’이 당신에게 미약한 호감을 보입니다.] 
 
······어이없는 메시지에, 쌓아 올린 상념들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덧 작아진 민지원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제스쳐로 봐서는 화가 난 것 같은데. 
그럼 이 메시지는··· 아니, 잠깐만. 
 
왜 그 에피소드를 잊고 있었지? 
 
갑자기 생각난다. 
11회차였나, 유중혁이 저 여자를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뺨을 때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회차 내내 민지원은······. 
 
젠장,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든다. 
 
설마······ 아니겠지? 
 
난 적어도 뺨은 안 때렸잖아. 
 
 
*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우리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지상을 주파해 광화문 근처의 빌딩 숲에 몸을 숨겼다. 인적은 보이지 않았지만, 내 텍본을 사간 왕들이 이 근처에 숨어 있을 것은 자명했다. 
 
―다들 눈치 보다가 움직이기 시작할 겁니다. 우리도 그때 맞춰 움직이죠. 
 
나는 일행들에게 주의를 주며 조금씩 이동했다. 
어차피 다른 왕들의 목표야 빤한 것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입구에 도달하는 순간, 그는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곳에 잠들어 있는 유물들은 대부분 쓰레기다. 하지만, 그 중 단 하나만큼은 진짜다. 
사인참사검(四寅斬邪劒). 
광화문 최강의 SSSSS급 아이템이, 바로 이곳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쓴 글이지만, 보고 있으려니 손발이 오글거린다. 
사인참사검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당연히 SSSSS급 아이템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그딴 급수는 없다. 
그래도 사인참사검은 훌륭한 성능을 자랑하는 검이었고, 실제로 3회차의 유중혁도 초반에는 그 검을 애용했다. 
 
―형, 그런 아이템이면 우리가 먼저 얻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없어도 돼. 
 
사인참사검은 좋은 검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아이템은 아니다. 
하지만 표절 작가나 다른 왕들의 생각은 다를 것이다. 
사인참사검 정도면 초반에는 최고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검. 
녀석들은 반드시 사인참사검을 노릴 것이다. 
그러니 우리 계획은 간단했다. 
놈들이 애먼 검을 노릴 동안, 다른 유물들을 차지한다. 
문제는 녀석들이 언제 움직이느냐인데······.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 빌어먹을 세계에는 시나리오가 정체되면 반드시 움직이는 녀석이 있으니까. 
 
[후후, 이것 참. 제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잘도 모여 계시군요.] 
 
역시나.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더니, 중급 도깨비가 나타났다. 
 
[착한 아이들에겐 상을 줘야겠죠?] 
 
쿠구구궁, 하는 소리와 함께 광화문의 중심에서 뭔가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고색창연한 황금색으로 빛나는, 단 하나의 왕좌(王座). 
광화문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어떤 가이드도 내려오지 않았지만, 그 순간 모든 왕들은 깨달았을 것이다. 
 
오직 단 한 명의 왕만이, 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메인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 # 4 ― ‘왕의 자격’이 시작됩니다.]
 
 
 
 
 
< Episode 13. 왕들의 전쟁 (3) > 끝

< Episode 13. 왕들의 전쟁 (4) >
 
 
 
 
 
시스템 메시지에 놀란 이성국이 중얼거렸다. 
 
“또 새로운 시나리오라니······.” 
 
확실히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다. 
기존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을 완료하기도 전에, 다른 시나리오가 떠 버렸으니까. 
나는 일단 새로 도착한 시나리오를 열어보았다. 
 
+ 
 
<메인 시나리오 # 4 ―‘왕의 자격’> 
 
분류 : 메인 
난이도 : A 
클리어 조건 : 광화문 사거리에 위치한 ‘절대 왕좌’를 차지하시오. 
제한시간 : 8시간 
보상 : 10,000코인 
실패시 : ― 
 
* 해당 시나리오는 히든 시나리오 ‘왕의 길’을 완수한 자만이 도전할 수 있습니다. 
* 절대 왕좌를 차지한 왕은 다른 모든 왕들에게 절대적인 명령권을 가집니다. 
* 해당 시나리오에는 특수한 클리어 조건이 추가로 존재합니다. 
 
+ 
 
상황이 좋지 않았다. 
우리 그룹은 아직 ‘깃발 쟁탈전’의 표적 역도 점거하지 못한 상황. 
부담이 두 배로 늘어난 형국이었다. 
폭군왕을 쓰러트리고 ‘창신역’을 점거하면서, 저 왕좌와 관련된 시나리오도 완수해야 한다. 
중급 도깨비가 말했다. 
 
[후후, 당황한 얼굴들이시군요. 너무 걱정 마시기 바랍니다. 이번 시나리오는 천천히 진행할 테니까요.] 
 
누구나 동요할 법한 상황이었음에도, 광화문은 잠잠했다. 
당연하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왕들이라면, 지금 도깨비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을 테니까. 
 
[네 번째 메인 시나리오는, 이미 예상하셨겠지만 저 ‘왕좌’에 앉을 단 하나의 왕을 선출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물론, 왕이라고 해서 모두가 저 왕좌에 앉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자격’을 증명한 사람만이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지요.] 
 
중급 도깨비가 기분 나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럼, ‘첫 번째 자격’을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 
 
<왕의 자격> 
 
1. 「왕좌의 주인은 그 누구보다 용맹할지니」 
― 절대 왕좌는 결코 ‘약한 왕’을 원하지 않습니다. 왕좌에 도전하기 위해, 당신은 최소 [검은 깃발]을 소유한 왕이어야 합니다. 
 
(추가 자격 조건이 잠시 후 공개됩니다.) 

+ 
 
검은 깃발이라. 
역시, 첫 조건부터 아주 지랄맞구만. 
 
[후후, 이제 동기는 주어졌으니,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보시길!] 
 
중급 도깨비가 사라지자, 유상아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검은 깃발이라면······ 역을 20개 이상 점거해야 얻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맞습니다.” 
 
우리 그룹의 깃발은 [갈색 깃발]. 
10개 이상의 역을 점거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깃발이다. 
 
“어쩌죠? 검은 깃발을 만들려면 아직 10개나 역을 더 점거해야 하는데, 근처에 빈 역이 있을 리가······.” 
“빈 역이 없으니까 생긴 조건인 겁니다.” 
“네?” 
 
내가 알기로, 현시점에서 [검은 깃발]을 달성한 왕은 없다. 
 
“잊으셨어요? 깃발 색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하나가 아닙니다.” 
 
역을 점거해도 깃발의 공적치는 오른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빠르게 공적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아······!” 
 
바로, 다른 그룹 대표의 ‘깃발’을 빼앗는 것. 
그리고 지금 광화문에는 깃발을 가진 왕들이 잔뜩 모여 있다. 
나는 일행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당황하지 마세요. 예상 못했던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계획대로 하면 돼요.” 
 
계획대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쉽지 않을 것이었다. 
광화문 전체에 은근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폭풍이 불어 닥치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긴장감. 병장기를 꺼내 드는 소리, 전열을 가다듬는 목소리가 살풍경한 빌딩 숲 사이사이로 들려오는 듯했다. 
이제 잠시 후면,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승진을 위해 경쟁하던 사람들은 이제 진짜 칼을 들고 서로를 죽일 것이고, 더 넓은 평수의 집을 원하던 사람들은 더 많은 역을 점거하기 위해 서로의 깃발을 빼앗을 것이다. 
 
서로를 죽이고, 더 좋은 아이템을 차지하고. 
살아남기 위해. 
 
펄라이트 보드로 마감된 차가운 도시의 건물들을 보던 이성국이, 비현실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무섭습니다. 여기가 정말 한국이 맞는지······.” 
“한국이었던 곳이죠. 여전히 한국이기도 하고.” 
“대표님은 무섭지 않으십니까?” 
“저도 무서워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분명 나도 무서울 때가 있다. 
솔직히 말하면 자주 그렇다. 
 
‘멸살법’을 읽었다곤 해도, 나 역시 엄밀히 따지면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사람이니까. 
 
내색은 안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물론, 고민은 오래가지 않는다. 
생각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세계든 마찬가지다. 
미노 소프트를 다니던 김독자에게도, ‘멸살법’의 세계를 살아가게 된 김독자에게도. 
죽음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찾아올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제대로 살아가는 기분이 듭니다.”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발동합니다!] 
 
문득 돌아보니, 이성국이 경외심어린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대표님은 이럴 때 보면 꼭······.” 
“쳐라!” 
 
이성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삼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북쪽으로 진군을 시작한 왕이 있었다. 
나와 같은 갈색 깃발을 가진 왕이었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작은 지역구의 왕이겠지. 
그와 거의 동시에 광화문의 곳곳에 숨어 있던 군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각기 뛰어난 병장기로 무장한 녀석들. 
 
“하하핫! 조무래기들이 왔구만!”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대군벌의 주인. 
화려한 용포에 괴이한 가마를 탄 사내. 
물어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우리의 목표, 도봉구와 성북구의 지배자인 「폭군왕」. 
 
“모두 죽여라!” 
 
실제로 보니 새삼 느낌이 새로웠다. 서울 7왕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세력을 지배하는 폭군왕. 저 녀석이 움직였으니, 이제 첫 번째 사도와 후삼국의 왕들도 움직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머지 왕들의 동향인데······. 
 
“아마 저들 대부분은 사인참사검을 노리고 움직일 겁니다.” 
 
실제로 왕들의 진군 방향은 사인참사검이 있는 북부 고궁박물관 쪽이었다. 시야엔 잡히지 않지만, 표절 작가 녀석도 이미 그쪽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심지어 몇몇 세력들은 아예 피해를 도외시하고 박물관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이해는 간다. 
 
아직 왕의 자격 요건들이 모두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니, 일단 좋은 아이템부터 선점하는 것이 유리할 거란 생각이겠지. 
실제로 사인참사검쯤 되는 아이템이면 깃발로 인한 공적치의 격차를 단번에 메워줄 수 있으니까. 
이성국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우린 안 가도 됩니까? 사인참사검이면 꽤 좋은 아이템인데요.” 
“가봐야 새우등만 터져요.” 
 
우리는 일행이 많지 않다. 
더욱이 저쪽에는 위인급 중에서 나름 네임드 성좌를 배후성으로 둔 녀석들도 있다. 
 
“우리는 서쪽으로 갑시다.” 
 
나는 일행을 이끌고 곧장 움직였다. 모든 왕들이 북쪽 고궁박물관으로 향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서쪽 대로는 상대적으로 휑한 상태였다. 
유서 깊은 광화문답게, 가는 길 곳곳에 박물관이 있었다. 신문 박물관, 한국금융사박물관, 경찰 박물관······. 
유상아가 물었다. 
 
“저런 곳엔 가도 소용없겠죠?” 
“근현대 전시물들이 많은 곳은 피해야 합니다.” 
 
유물은 오래된 것일수록 좋다. 
물론 단순히 ‘오래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철기 시대의 농부가 사용했던 괭이도 아이템이 되긴 하지만, 그런 아이템의 등급은 F급으로 책정되니까. 중요한 것은 유명한 위인이나 설화와 관계된 것, 혹은 그럴듯한 ‘이야기’가 얽혀있는 것이다. 
 
“저기로 가죠.” 
 
우리가 멈춘 곳은 경희궁에 면해 있는 ‘서울 역사 박물관’이었다. 
유상아의 눈동자에 빛이 감돌았다. 
 
“여기선 뭘 찾으면 될까요?” 
“간평의(簡平儀)라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원반을 닮은 조선시대의 유물인데, 몇 층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좋아요, 한번 찾아볼게요!” 
“빨리 찾아야 하니까, 흩어지죠. 길영이 너는 상아 누나랑 같이 움직이도록 해. 그리고 이성국 씨는―” 
 
피유웅― 파가각! 
 
거기까지 말하는 순간, 뒤쪽에서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일행들을 감싸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건물의 외벽을 꿰뚫은 화살. 화살대에 은은하게 실린 마력의 흔적이 보였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강마시(强魔矢)]. 
 
궁술 스킬을 제대로 배운 놈이다. 
대체 누구지? 
예상외의 습격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설마 우리 일행의 동선을 읽은 놈이 있다고? 
 
“모두 안으로 들어가요! 빨리!” 
 
화살 몇 대가 더 날아왔다. 
 
[‘신념의 칼날’을 발동합니다!] 
 
검의 면적을 넓게 휘둘러 날아오는 화살을 쳐냈다. 다행히 담긴 마력의 양이 많지 않아, 막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 숫자였다. 
 
피잇! 
 
사각에서 날아든 화살 한 발이 허벅지 바깥쪽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재빨리 물러서며 엄폐물 뒤로 숨었다. 
 
“하하하! 애송이 왕이 어딜 쏘다니느냐!” 
 
범을 닮은 우렁찬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사오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활과 검으로 무장한 무리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깃발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별동대를 내보냈다는 것. 
생각보다 머리가 좋은 왕들이 있는 모양이다. 
아이템은 아이템대로 먹고, 군소지역 왕들의 깃발도 뺏겠다는 건가.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이 발동합니다.] 
 
나는 전방에서 달려오는 거한에게 스킬을 사용했다. 
 
+ 
 
<인물 정보> 
 
이름 : 추왕인 
나이 : 33세 
배후성(背後星) : 황산벌의 마지막 영웅 
전용 특성 : 단역배우 (일반) 
전용 스킬 : [무기 연마 Lv.4], [연기 Lv.1], [약자 탐색 Lv.1] 
성흔 : [백제검도 Lv.4], [결사항전 Lv.2], [별동대 운용 Lv.3] 
종합 능력치 : [체력Lv.19], [근력Lv.19], [민첩Lv.21], [마력Lv.15] 
종합 평가 : 별 볼 일 없는 인간도 뛰어난 배후성을 만나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케이스입니다. 배후성과의 동조율이 높아 성흔의 위력이 상당하니 주의를 요합니다. 
 
+ 
 
젠장, 호랑이도 말만 하면 온다더니. 
하필 여기서 황산벌의 명장을 만날 줄이야. 
배우 특성을 가진 이들은 이런 종류의 성좌들이 들러붙기 쉽다. 
 
“왕의 명예를 아는 놈이라면 순순히 깃발을 내놓아라. 그렇다면 그룹원들의 목숨은 거두지 않겠다.” 
 
어설픈 사극 말투를 보아하니 왜 특성이 단역배우인지 알겠다. 
저런 놈한테 황산벌의 마지막 영웅인 계백 장군이 붙다니. 
성좌든 사람이든 파트너 운이 따라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나저나 곤란한데. 
 
계백 장군의 성흔, [백제검도]와 [별동대 운용] 레벨이 너무 높다. 
거기에 무리의 숫자까지 감안하면 종합 능력치를 올리지 않고서는 모두 처리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보유 코인 : 68,150C] 
 
젠장······ 그냥 여기서 코인을 사용해야 하나? 
하지만 여기서 코인을 사용해 종합 능력치를 마구 올렸다간, 네 번째 시나리오의 마지막 페이즈 난이도가 급격히 상승할 것이다. 
그러면 계획 전체가 어그러진다. 
그냥 눈 딱 감고 2만 코인 정도만 써 보면... 
 
“삼국의 이름을 달고 한낱 약소국의 왕을 핍박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옆을 돌아보니, 웬걸 익숙한 인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계백의 화신 추왕인이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빌어먹을 쌍도의 여왕께서 여긴 웬일이신지?” 
“역시 망한 왕조의 장수라 말투도 천박하군요.” 
 
오연한 표정으로 쏘아붙이는 여인이 그곳에 있었다. 
미희왕 민지원. 
아니, 이 여자는 또 어디서 나타난 거지? 
······설마, 날 따라온 건가? 
아니겠지. 그럴 리가. 
민지원의 눈빛이 흘끔 나를 스쳐 갔다. 
 
[등장인물 ‘민지원’이 당신에게 희미한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진짜? 
 
“닥쳐라! 비겁한 신라의 핏줄이 이제와 삼국의 왕을 자처하느냐? 비천한 계집 따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노호성이 추왕인의 전신에서 터져 나왔다. 그래도 단역배우라고, 사자후 스킬도 없는데 목소리가 아주 시끄럽다. 
그나저나 굉장히 흥미롭다. 진성왕도 계백 장군도 서로 다른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인데, 성좌가 되고 나니 이렇게 마주할 수가 있구나. 
나는 민지원을 향해 물었다. 
 
“날 돕는 이유가 뭐죠?” 
“신라는 약소국을 외면하지 않아요.” 
“가야를 멸망시킨 게 신라일 텐데요.” 
“······그쪽도 한국사 1급이에요?” 
“그 정도는 고등학교 졸업하면 다 압니다.” 
 
민지원의 얼굴이 살짝 침울해졌다. 
 
“전 고등학교 잘 안 나가서 몰라요.” 
 
그럴 법도 했다. 
작중 설정상 민지원은 10대부터 배우였으니까. 
일찍부터 여배우로 살아온 그녀는, 아마 역사 대신 사회로부터 다른 것들을 배웠을 것이다. 
 
“당신 말이 맞아요. 돈으로는 사람을 구할 수 없죠. 아까 무례를 범한 빚을 갚겠어요. 그뿐.” 
 
여배우로 살아온 민지원의 전사를 알고 있는 나였기에, 그 말에 담긴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의외다. 그 자존심 강한 진성왕의 화신이, 이렇게 순순히 자존심을 굽히고 나올 줄이야.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계백의 화신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핫! 왕이라는 자가 사사로운 일에 휘둘리는가? 저래서 계집은······.” 
 
민지원을 대신해 앞으로 나선 것은 화랑대장이었다. 
 
“무례하다! 한낱 장수가 어찌 일국의 왕에게!” 
 
화랑을 일별한 계백의 화신의 눈동자에 이채가 깃들었다. 
 
“화랑······? 흐하하하! 이거 재미있군. 설마 그 애송이 성좌와 계약한 놈도 있었던 건가?” 
 
그 말에 화랑대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고 보니 저 화랑대장, 배후성이 관창이었지. 
 
“너도 네놈 배후성처럼 목이 잘리고 싶은 게냐?” 
 
아는 사람은 아는 얘기지만, 관창은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에게 목이 잘려 죽었다. 
 
“닥쳐라!” 
 
도우러 와준 것은 고마운데, 성좌들 사이의 상성이 최악이다. 
동조율이 높은 녀석들이기에 더욱 그렇다. 
위인급 성좌들 사이에는 생전의 역사에 따라 상하관계가 있다. 
장수는 자국의 왕에게 거스를 수 없고, 숙적은 역사적 기록에 따라 상성이 매겨진다. 
가령, 일본의 장수인 구루지마 미치후사는 충무공에게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관창이, 죽었다 깨어나도 계백한테는 이길 수 없는 것처럼. 
민지원도 그걸 아는지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냥 군을 물리세요. 못 이깁니다.” 
 
군세도 백제군이 조금 더 많았다. 
계백은 기본적으로 지휘관이고, 많은 군세를 이끌수록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관창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한 장수인 것이다. 
유상아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독자 씨! 찾았어요!” 
 
뒤쪽에서, 작은 원반을 닮은 유물을 쥔 유상아가 달려오고 있었다. 
벌써 찾았다고? 
 
[간평의(簡平儀)] 
 
벽걸이 시계을 닮은 유물이, 유상아의 손에서 빛을 뿜고 있었다. 
순간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간평의를 한 번 보고, 민지원을 한 번 보고, 공포에 질린 관창의 화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이거, 어쩌면 코인을 안 쓰고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쳐라!” 
 
[등장인물 ‘추왕인’이 성흔 ‘별동대 운용 Lv.3’을 발동합니다!] 
 
백제군의 위세에 눌린 화랑들이 속절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다급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는 민지원을 향해, 내가 말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여기서 황산벌 전투를 재현해 보죠.” 
 
역시나 아는 사람은 아는 얘기지만, 황산벌은 원래 신라가 이기는 전투다.
 
 
 
 
 
< Episode 13. 왕들의 전쟁 (4) > 끝

< Episode 13. 왕들의 전쟁 (5) >
 
 
 
 
 
 
내 말에 당황한 민지원이 물었다. 
 
“······황산벌 전투?” 
“네, 황산벌 전투는 원래 신라가 이깁니다. 역사대로라면요.” 
 
달려오는 계백의 거검에 화랑 하나가 그대로 두 쪽이 났다. 
분명, 역사대로라면 이긴다. 역사대로만 간다면. 
 
“임전무퇴! 싸움에 있어서는 물러남이 없으니!” 
 
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화랑대장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그와 동시에 화랑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꺼내며 복창했다. 
 
“없으니!” 
“사군이충!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겨라!” 
“섬겨라!” 
 
저 자식이? 
 
[신라의 모든 화랑이 ‘세속오계 Lv.2’의 효과를 받습니다!] 
 
“하하하, 명을 재촉하는구나!” 
 
계백의 화신, 추왕인이 신이 나서 외쳤다. 
창을 휘두르며 달려가는 화랑대장. 
화신은 배후성 따라간다더니, 저놈이 그 짝이다. 
 
[등장인물 ‘추왕인’이 성흔 ‘백제검도 Lv.4’를 발동합니다!] 
 
“크어억!” 
 
거검을 얻어맞은 화랑대장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나는 민지원을 향해 소리쳤다. 
 
“진형을 물리라고 하세요!” 
“진형을 물려라! 어서!” 
 
[등장인물 ‘민지원’이 ‘군세 지휘 Lv.2’를 발동하였습니다!] 
[군사들이 이성을 잃은 상태입니다.] 
[스킬 발동이 취소됩니다.] 
 
“진형을 물리라고!” 
 
당황한 민지원이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세속오계’에 고무되어있는 화랑들은 민지원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애초에 진성왕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미(美)에 충성하는 놈들이니······ 어쩔 수 없나. 
쨍그랑, 소리가 들리더니 박물관의 2층 창문을 깨고 내려온 이길영이 내 곁에 착지했다. 
 
“형, 티타노를 부를까요?” 
 
언제든 [다종 교감]을 쓸 준비가 되었다는 듯, 이길영이 눈을 빛냈다. 

“아니, 지금은 괜찮아.” 
 
지난번처럼 6급 충왕종을 불러올 수 있다면 도움은 되겠지만, 그 후 이길영은 이틀이나 잠들어 있었다. 고등급의 괴수종은 통제하기가 까다롭고, 자칫하면 아군도 휩쓸리게 된다. 
무엇보다 이길영은 히든카드였다. 
왕들의 난전이 시작될 때까지는 아껴두어야만 했다. 
 
“끄아아악!” 
 
전방에 있던 너덧 명의 화랑들이 나가떨어졌다. 
반면, 백제군은 한 명의 사망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달려오는 유상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유상아 씨, 유물을······!” 
 
나는 유상아에게서 [간평의]를 넘겨받았다. 
간평의. 다들 사인참사검에 정신이 팔려있지만, 사실 이 아이템이야말로 네 번째 시나리오에서 필수적으로 얻어야 하는 아이템이다. 
 
“커허헉!” 
 
추왕인에게 또 일격을 얻어맞은 화랑대장의 몸은 벌써 만신창이였다. 
한 방에 안 죽은 게 용한 지경이다. 
 
[성좌, ‘임전무퇴의 화랑’이 조급해합니다.] 
[성좌, ‘황산벌의 마지막 영웅’이 즐거워합니다.] 
[성좌, ‘매금지존’이 초조해합니다.] 
 
백제군의 기세는 점점 더 드높아졌고, 신라군의 사기는 꺾여갔다. 
추왕인의 몸에서 계백의 원혼이 일렁이는 듯했다. 
 
“망할 신라 놈들을 쓸어 버려라!” 
 
성좌들은 자신이 살았던 역사와 흡사한 상황에 처할수록 화신과의 동조율이 높아지고, 성흔의 위력도 증가한다. 
거기다 관계된 ‘성좌’들이 조우했으니······. 
슬슬, ‘무대’가 만들어질 때가 됐다. 
 
치지지직― 
 
“우와앗? 뭐야!” 
 
깜짝 놀란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주변의 공간에 스파크가 튀며, 정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서울의 드넓은 광화문이, 험준한 산악 속 벌판으로 변하고 있었다. 
 
「무대화(舞臺化).」 
 
화신과의 동조율이 높고, 서로 상관관계가 있는 성좌들이 싸우게 되면 발생하는 현상. 
「무대화」는 성좌들이 싸웠던 시공간 자체를 이곳에 소환시킨다. 
물론 실제로 공간이 바뀌는 것은 아니고, 증강현실에 가까운 수준이지만······. 
문제는, 이 무대를 소환한 본인들에겐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하하하······ 그립구나, 황산벌이여!” 
 
동조율이 상당한 수준까지 올라간 추왕인이 외쳤다. 
이제 저 녀석은 자신이 완전히 계백 장군이라 믿는 듯했다. 
계백도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성좌가 초반 시나리오부터 저런 짓을 벌이면 개연성 폭풍을 맞기도 전에 관리국에서 제재를 당한다. 그나마 계백은 위인급 성좌라 격이 낮아 개연성의 영향을 적게 받는 모양이었다. 
 
“으, 으아아아!” 
 
공포에 질린 화랑들이 한 걸음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성국도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7왕도 아닌데 저렇게 강력한 힘이라니······ 말이 됩니까?” 
“저 「무대」에서는 계백이 주인공이니 가능한 겁니다.” 
 
콰아아아앙! 
 
미친 괴수처럼 날뛰는 추왕인의 모습은, 그야말로 야차 그 자체였다. 
한 번 「무대화」가 발생해 배후성과의 동조율이 높아지면, 화신들은 본신이 가진 힘의 몇 배를 낼 수 있게 된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민지원을 보며 입을 열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관창의 화신이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본래, 황산벌 전투는 관창의 희생을 바탕으로 승리하는 전장이다. 
그러니 관창만 죽는다면, 이 전장의 절반은 완성된다. 
 
“무대화가 시작된 이상, 이곳은 역사의 전장이나 마찬가집니다. 관창의 화신이 죽으면 그 분노로 신라군의 사기는 상승할 것입니다. 역사가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나는 민지원의 대답을 듣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두 번째 방법은, 역사를 바꾸는 겁니다.” 
 
나는 내 손에 쥐어진 [간평의]를 내려다보았다. 
간평의, 17세기 조선에서 제작된 천문관측기. 
불안한 낌새를 느꼈는지 민지원이 물었다. 
 
“그거,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당신 나라가 망하겠죠.” 
“그럼 당연히 첫 번째로······!” 
 
하여간, 이래서 진성왕은. 
괜히 무능한 왕으로 평가받는 게 아니라니까. 
 
“당신에게 선택하라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난 두 번째로 할 거니까.” 
“아니, 그럼 왜 물은 거예요!” 
“기회를 준 거지. 지금 신라에 필요한 건 당신이 아니야.” 
 
나는 간평의를 구성하는 두 개의 원반을 조작했다. 
이 두 원반은 제각기 천반(天盤)과 지반(地盤)이라고 하는데, 위쪽이 지반이고 아래쪽이 천반이다. 
‘멸살법’에서는 이 간평의를 간단하게 정의한다. 
 
「‘간평의’는, 하늘에서 ‘성좌’를 찾을 수 있는 아이템이다.」 
 
천천히 지반을 돌리자, 천반에 새겨진 별자리들이 환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간평의’의 특수 옵션, ‘별의 메아리’를 발동합니다.] 
[‘별의 메아리’를 통해 당신은 위인급 성좌의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성좌는 당신의 요청을 거부할 수 있으며, 성좌가 요청에 응할 시 간평의의 사용횟수는 감소합니다.] 
 
천반 위에 남은 별자리는 총 일곱 개. 
즉, 앞으로 사용 가능한 회수가 일곱 번 남았다는 뜻이었다. 
유물 상태가 좋았다면 더 많은 별자리가 남아 있었을 텐데. 아쉬운 대로 어쩔 수 없지. 
곁에 있던 이성국이 뭔가를 눈치챈 듯 물었다. 
 
“혹시 그걸로 성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겁니까?” 
“모든 성좌가 다 가능한 건 아니고, 위인급만 됩니다.” 
 
내가 대답하자, 이성국이 감탄했다. 뒤늦게 이 아이템의 진가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거라도 어딥니까!” 
 
흥분한 이성국이 말했다. 
 
“여포나 항우를 부르시면 어떻습니까? 그 정도 성좌를 부른다면, 계백을 상대하는 것도 가능할 텐데요.” 
“부를 성좌의 수식언을 알아야만 합니다.” 
 
‘멸살법’의 세계에서 성좌들의 ‘수식언’은 곧 시공간의 ‘좌표’와도 같다. 좌표계에 X축과 Y축이 있듯,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은 수식언의 어절 속에 존재한다. 
 
“아······ 그러면······.” 
 
이성국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마 여포나 항우의 수식언을 내가 모른다 생각하는 거겠지. 
당연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이 세계에서 나보다 성좌들의 ‘수식언’을 많이 아는 존재는 없으니까. 
 
“성좌를 호명하겠다.” 
 
[별들의 흐름 속에 위인급 성좌들이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물론, 내가 부를 성좌는 여포나 항우가 아니었다. 
그들이 요청에 응한다는 보장도 없고, 무엇보다 이 전장에는 그들보다 더 어울리는 장수가 있으니까. 
별들이 오연하고 도도하게 하늘을 밝혔다. 
나를 향한 무수한 별들의 관음 속에, 나는 입을 열었다. 
 
“나는 신라의 국선(國仙) 흥무대왕(興武大王)을 원한다.” 
 
[별들의 운항이 시작됩니다.] 
 
일순 하늘의 일부가 시커멓게 물들며, 땅에 그림자가 내렸다.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던 신라군과 백제군의 싸움이 일순 멎었다. 
 
“무슨 헛짓거리냐!”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추왕인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대표님, 제가 막겠습니다.” 
 
이성국이 검을 뽑으며 나섰다. 최면술사인 그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잠깐의 시간 벌이는 되겠지. 
잠시 후, 하늘 위에서 별자리 하나가 찬연히 빛났다. 
드디어 나타나셨군. 
 
[성좌, ‘흥무대왕’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장군이시여.” 
 
[성좌, ‘흥무대왕’이 당신의 말을 듣습니다.] 
 
“지금 이곳에,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 있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을 부르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성좌, ‘흥무대왕’이 당신의 말에 침묵합니다.] 
 
흥무대왕. 왕족이 아니었음에도, 사후 신라의 왕으로 추존된 유일무이한 인물. 
아마 그는 내 청을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황산벌은 그의 전장이니까.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성좌, ‘흥무대왕’이 현생의 역사에 개입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성좌, ‘흥무대왕’은 당신의 제안을 거부할 것입니다.] 
 
······뭐라고? 
별자리가 희미해지려는 순간, 유상아가 끼어들었다. 
 
“장군님, 제 말이 들리시나요!” 
 
눈치 빠른 유상아는 흥무대왕이 누군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성좌, ‘흥무대왕’이 뒤를 돌아봅니다.] 
 
“장군님의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어요! 황산벌 전투도, 평양성 전투도······! 모두 기록으로 읽은 게 전부이긴 하지만요!” 
 
짧게 숨을 들이켠 유상아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미 지나간 일들을, 흘러간 역사를 존중하고자 하는 장군님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장군님! 어떤 역사는 기록된 후에도 여전히 끝나지 않는 법이에요.” 
 
또렷하고 반듯한, 내가 아는 유상아의 목소리. 
 
“후회하지 않으세요? 젊은 화랑을 희생시키고, 무수한 백성들의 죽음이 묻었던 그 들판, 당신의 전장을······! 벌써 잊으신 건가요?” 
 
[성좌, ‘흥무대왕’이 화신 ‘유상아’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물론 흘러간 역사는 변하지 않을 거예요. 들판의 병졸들은 여전히 위로받지 못할 것이고, 젊은 화랑들의 삶은 돌아오지 않겠죠. 하지만 장군님! 이곳에는 아직 흘러가지 않은 역사가 있어요! 장군님께서 이곳에 와주신다면, 적어도, 지금 이곳의 역사는 바꿀 수 있습니다!” 
 
잊고 있었다. 유상아가 얼마나 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는지. 
신입 시절, 그녀는 미노 소프트에서 PT의 여왕이었다. 
 
“장군님! 당신의 황산벌은 끝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황산벌에 있습니다.” 
 
[성좌, ‘흥무대왕’이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딱히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있는 순간이. 
 
[성좌, ‘흥무대왕’이 당신의 요청에 응합니다.] 
 
간평의의 별자리 하나가 사라지고, 하늘에서 쏘아진 성좌의 빛이 나를 비췄다. 
긴장한 유상아가 미소하며 나를 보았다. 
 
“잘 했어요, 유상아 씨.” 
 
[당신에게 일시적으로 성좌 ‘흥무대왕’의 가호가 깃듭니다.] 
 
전신의 근육이 놀란 것처럼 꿈틀거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펌프질했고, 머릿속에서는 몇 번이나 빛과 어둠이 교차했다. 내 존재 안에 내가 아닌 어떤 것이 부피를 늘려가고 있었다. 
 
[이것은 그저 과거를 잊지 못한 늙은이의 회한이니.] 
 
이것이, 성좌의 진언(眞言)이었다.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존재가 위태로워지는 말. 
 
[부디, 내게 그대의 목소리를 잠시 빌려주시게.]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나는 조용히 눈을 떴다. 
을씨년스러운 황산의 벌판 위에서,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계백의 화신인 추왕인이 경악하고 있었다. 
 
“저 자는······?” 
 
까마득한 존재의 질량에 머릿속이 무거웠다. 
직접 강림한 것도 아니고, 고작 가호를 업었을 뿐인데도 위인급 성좌의 기백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것이 성좌(星座)라는 존재들의 크기였다. 
 
“오랜만이구나, 계백.” 
 
내 목소리에서 낯선 깊이가 묻어 나왔다. 
멀리서, 관창의 화신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화랑 관창은 내게 예를 표하지 말라.” 
“자, 장군······!” 
 
흥무대왕이 나를 통해 세계를 보고 있었다. 
그는 관창을, 계백을, 부서진 서울을 보았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흥무대왕을 통해 세계를 보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해가 쓸쓸한 황산의 벌판을 물들였다. 
 
“우스운 일이다. 이미 모든 역사가 저물었는데, 어째서 그대들은 또다시 이곳에 모인 것인가?” 
 
그 말에, 추왕인이 미친 듯이 웃어 젖혔다. 
울분, 그리고 깊은 한이 응어리진 웃음. 
그 순간 그는 정말로 계백이었다. 
 
“하하하! 아직 모르겠느냐? 이 벌판에서 다시 그대를 만나기 위함이다!” 
 
[등장인물 ‘추왕인’이 ‘백제검도 Lv.4’를 발동합니다!] 
 
패력이 깃든 추왕인의 거검이 움직였다. 
분명, 본래의 나였다면 막기도 피하기도 쉽지 않았을 공격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공격을 어렵지 않게 흘려냈다. 
 
“계백, 어째서 벌써 화신에게 이입한 것인가? 개연성의 제약을 잊었는가? 이대로라면 그대는 화신과 함께 소멸할 것이다.” 
 
그 말 그대로였다. 계백은 무리하고 있었다. 
‘멸살법’의 독자인 나조차 의아할 정도로. 
 
“김유신······. 너는 이번 ‘세계’에 관해 아무것도 듣지 못한 모양이구나.” 
“무엇을 말이냐?” 
“상관없겠지. 어차피 그대를 만난 이상, 내 숙원은 달성되었다. 이제 나 계백은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 말을 하는 계백의 화신은, 왜인지 울고 있었다. 
 
“나는 백제의 부여승(夫餘承), 황산벌의 계백이다! 전생의 못다한 한을 이곳에서 풀겠다!” 
 
서글픈 눈으로 계백의 화신을 본 흥무대왕이, 나를 통해 입을 열었다. 
 
“나는 화랑의 제15대 풍월주, 김유신.” 
 
흥무대왕, 국선 김유신(金庾信). 
 
“불행한 성좌의 넋을 위로하고 현생의 역사를 바로잡겠다.” 
 
황산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명장이, 내게 의지를 보냈다. 나는 오른손을 움직였다. 곧게 쥔 칼자루에 찬연한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국선의 검이 지금 전장에 도래했으니.」 
 
[성유물, ‘청룡검(靑龍劍)’의 힘이 일시적으로 ‘부러지지 않는 신념’에 깃듭니다.] 
 
하늘 높이 솟은 청룡검의 칼날이, 그대로 황산의 벌판에 내리꽂힌다. 
 
쿠구구구― 
 
황산 전체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막대한 마력이 빠져나가며, 나를 중심으로 대지에 일대 균열이 발생했다. 
 
「모든 용화향도(龍華香徒)는, 지금 즉시 이곳에 당도하라.」 
 
[성흔, ‘대화랑집결(大花郞集結)’이 발동합니다!] 
 
균열 속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역사의 예토(穢土)에 묻혀 있던, 잊혀진 유령들. 
지금은 이름조차 남지 않았지만, 한때 분명히 이 땅에 살았던, 오직 명예를 위해 싸웠던 화랑들이, 백골이 되어 일어나고 있었다. 
 
그오오오오오! 
 
김유신의 최정예 부대인 용화향도들이, 잊혀진 역사의 페이지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 Episode 13. 왕들의 전쟁 (5) > 끝

< Episode 14. 왕좌의 주인 (1) >
 
 
 
 
 
 
Episode 14. 왕좌의 주인 
 
 
 
 
김유신의 성흔인 ‘대화랑집결’은 역사 속에서 죽어간 화랑의 정예, ‘용화향도’를 부르는 기술. 
 
그아아아아아! 
 
쉽게 말하자면 이것은 이지혜가 사용했던 ‘유령 함대’의 지상 버전이었다. 
위력으로만 따지면 충무공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위인급 성좌들이 사용하는 대군 기술 중에서는 손에 꼽히는 성흔. 
 
“가라!” 
 
이미 백골이 진토되어 없어졌을 용화향도들이 백제군을 향해 일제히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어떤 화랑은 눈이 없었고, 어떤 화랑은 팔이나 다리가 없었다. 
잔인한 일이었다. 
김유신이 이곳에 있는 한, 그들은 몇 번이고 칼을 들고 일어날 것이다. 영혼이 마모되고, 분노가 삭아 없어지고, 마음조차 닳아버린 이후에도. 
 
나라의 멸망을 막기 위해 싸웠던 병사들은. 
이제 멸망한 나라를 위해서 싸운다. 
 
“비겁한 건 여전하구나, 김유신! 이젠 죽은 부하들 등까지 떠미는 것이냐!” 
“······.” 
“덤벼라! 네놈도 장수라면, 일대일 승부를 보자!” 
 
계백의 도발에도 나는 가만히 있었다. 김유신이 움직이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용화향도들을 부수는 계백. 그의 거검에서 뻗어 나온 마력이 허공을 무자비하게 수놓았다. 
 
퍼걱! 퍼거거걱! 
 
“김유신―!” 
 
가공할 외침이 허공을 쩌렁쩌렁 울리자, 감정을 잃은 용화향도의 무리조차 멈칫했다. 
 
저것이 계백이다. 
백제의 마지막 명장, 계백. 
 
육체적인 버프 능력만 따지자면, 계백은 김유신을 압도한다. 실제로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은 김유신과 일대일로 싸운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김유신이 대결을 피했다고 말하는 것이 맞겠지만. 
 
[등장인물 ‘추왕인’이 ‘결사항전 Lv.2’을 발동합니다!] 
 
역사 속에서 계백의 별동대는 수적으로 열 배나 되는 김유신의 군대를 상대로 항전을 벌였고, 불가능한 전장에서 몇 번이고 승리했다. 
비록 마지막 승자는 김유신이었지만, 황산벌의 최종막이 열리기 전까지 계백은 한 차례의 전투도 패배하지 않았다. 
광기에 가까운 애국심과 비장한 결의로 똘똘 뭉친 전투광. 
지금은 비록 김유신의 가호를 등에 업었지만, 상황만 바뀌었더라면 나는 김유신이 아니라 계백을 불렀을지도 모른다. 
보다 못한 관창의 화신이 소리쳤다. 
 
“장군님!” 
“움직이지 마라.” 

김유신이 나의 입을 통해 말했다. 죽어가는 용화향도의 무리를 보면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한없이 고요한 김유신의 심상이 그대로 전해졌다. 
계백이 소리쳤다. 
 
“성좌가 되고도 네놈의 비겁함은 변하지 않는구나!” 
 
맞다. 김유신은 비겁하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패배를 무서워한다. 
그렇기에 그는 강하다. 
경거망동하지 않고,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다. 
이길 수 있는 적을, 반드시 이길 수 있는 방법으로 해치운다. 
그랬기에 네 번이나 패배하면서도, 최후의 황산벌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크아아아아악!” 
 
수백의 용화향도 무리들을 상대로 난전을 벌이는 계백의 모습은 처절했다. 그의 화신은 이제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전신은 피칠갑을 했고, 허벅지와 양팔, 옆구리에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용화향도의 무리를 베어 넘기며, 나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김······ 유······ 신!” 
 
[성흔, ‘원군 요청’을 발동합니다!] 
 
김유신의 뒤쪽에서 그림자처럼 나타난 유령 병사들이, 계백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병사들의 복색이 다른 것으로 보아, 저들은 아마 신라군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불렀다는 당나라의 원군인지도 모른다. 
과연 김유신답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승리뿐. 외세의 힘을 빌리느냐 아니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지. 
 
푸우욱! 
 
수많은 창이 가슴을 꿰뚫는 소리. 
고통을 이기지 못한 계백의 화신이 무릎을 꿇었다. 
 
“크헉······!” 
 
그처럼 강했던 계백의 화신도, 이제는 한계였다. 
계백이 웃었다. 
 
“······원통하구나. 이런 가짜 무대에서조차, 나는 그대에게 닿지 못하는가. 단 한 번만이라도 검을 나누고 싶었거늘.” 
 
눈시울이 붉어진 계백의 화신을 보니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관창은 살았고, 역사는 변했다. 
하지만 이렇듯 변하지 않는 역사도 있다. 
김유신이 물었다. 
 
“계백.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 거지?” 
“······.” 
“그 상태로 죽으면, 너는 당분간 화신을 선택할 수 없다. 왜 갑자기 신화 쌓기를 포기한 것이냐?” 
 
계백은 서슬퍼런 눈빛으로, 의미 모를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기다리던 김유신이 칼을 꺼내 들었다. 
나는 다급히 내 목소리의 통제권을 빼앗았다. 
 
“제 손으로 죽여서는 안 됩니다.” 
 
[왜지?] 
 
“······제약이 있습니다.” 
 
불살의 왕은 직접 살행을 벌여서는 안 된다. 
단 한 명의 동족이라도 자신의 손으로 죽이게 되면, 왕위를 박탈당하니까. 
김유신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대충 뭔지는 알겠군. 걱정하지 마라. 별들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다. 지금 계백을 참하는 것은, 그대가 아니라 바로 나 김유신이다.] 
 
“하지만······.” 
 
[······정 찝찝하다면, 알겠다.] 
 
김유신이 손짓하자, 땅에서 일어난 용화향도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김유신에게 목소리를 넘겨 주었다. 
 
“계백, 다음 세계에서 만나자.” 
 
계백의 화신이 말없이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했으나, 끝내 입을 열지는 못했다. 마지막 순간, 그의 얼굴은 계백이라기보다는 그저 모든 연기를 끝마친 단역배우처럼 보였다. 
 
그리고 화신의 목이 조용히 허공을 날았다. 
 
[「무대화― 황산벌」이 종료됩니다.] 
[당신은 ‘황산벌 전투’를 추체험(追體驗)했습니다.] 
[체험 보상으로 1000코인을 획득합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백제군은 모두 전멸해 있었다. 
 
[살해의 간접성이 참작되어 ‘불살의 왕’의 권한이 유지됩니다.] 
 
다행이다. 
불살의 왕은 오직 자신의 손으로 누군가를 죽였을 때만 박탈당하니까. 
용화향도가 죽인 생명들은 살해 행위로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먼지 속에서 이성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상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고, 이길영은 별로 활약을 못 해서 그런지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그리고 민지원은. 
 
“방금 그건 대체 무슨······?”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왕이 되시려면 일단 역사 공부부터 좀 하셔야겠습니다.” 
 
김유신을 부르긴 했지만, 나는 딱히 신라의 편도 백제의 편도 아니었다. 
단지 계백을 상대하기에 김유신이 적절했기에, 그를 불러냈을 뿐. 
어쨌든 예상보다 결과가 좋아 다행이었다. 
[간평의]의 성능도 충분히 점검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백제군이 가지고 있던 코인과 아이템 일부를 챙길 수 있었다. 
 
[54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보유 코인 : 74950 C] 
 
이제 네 번째 시나리오의 마지막 페이즈가 와도, 별로 두렵지 않다. 
 
“시간이 없으니까, 바로 북쪽으로 움직이죠.” 

[가호의 지속시간이 3분 남았습니다.] 
 
아직 김유신의 가호가 남아 있었다. 
기왕 [간평의]를 사용한 거, 남은 시간까지 알뜰하게 사용해야 한다. 
일곱 번밖에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인데 뽕은 뽑아야 하지 않겠는가. 
 
“일어나라 용화향도여!” 
 
부서졌던 용화향도의 무리가 다시 일어서자, 나는 검으로 북쪽을 가리켰다. 
 
“진군하라!” 
 
마력 소모가 막대했기 때문에, 이제 용화향도의 운용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흙 속에서 깨어난 용화향도의 무리가 중소 규모의 그룹들을 마구잡이로 쓸어버리며 북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고궁 박물관 쪽에 모여 있을 다른 왕들의 세력까지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대로변에서 난투를 벌이던 세력들이 곳곳에서 비명을 질렀다. 
 
“뭐야, 이 해골 새끼들은! 우와악!” 
 
퍼억! 퍼거걱! 
 
나를 노리고 달려오던 화신들이 용화향도의 공격을 받고 으깨졌다. 
어차피 내가 공격하는 게 아니니까, 실수로 죽여도 패널티를 받지도 않는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통쾌한 맛이 나지. 
김유신의 진언이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그대는 기묘한 데가 있군. 나의 진언을 듣고도 정신이 온전하다니······.] 
 
“제가 정신력이 좀 강합니다.” 
 
둘러대듯 말했지만, 사실 나도 좀 놀랐다. 
괜히 성좌들이 의사 전달에 ‘간접 메시지’를 사용하는 게 아니다. 
김유신이 아무리 성좌들 중에선 격이 낮은 위인급 성좌라 해도, 보통의 경우라면 진언을 듣는 것만으로 바지에 똥오줌을 지리거나 기절하기 십상이었다. 
사실 그것 때문에 나도 좀 걱정을 했었는데······. 
 
[기억하라, 그대는 나에게 큰 빚을 졌다. 그대를 돕기 위해 나는 필요 이상의 개연성을 떠안아야 했어.] 
 
뭔가 불길한 뉘앙스가 깃든 말투였다. 
나는 얼른 감사를 표했다. 
 
“그건 고맙게 생각합니다. 장군님의 도움은 대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성급한 친구군. 아직 이을 대(代)도 없어 보이는데······.] 
 
“······언젠간 생기지 않겠습니까? 자식을 낳게 되면 오늘의 일을 꼭 전승하겠습니다.” 
 
[그보다, 그대는 배후성이 없는 것 같군.]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 
젠장, 이 늙은 여우가 왜 계속 말을 거나 싶었는데. 
 
[나는 그대가 마음에 든다. 그대만 괜찮다면, 나는 이번 세계에서 그대의 배후성이 되어 함께 세계를 주유하고 싶다.] 
 
말은 멋지게 하지만, 이번 세계에서 나를 노예로 써먹겠다는 얘길 길게 풀어서 하고 있었다. 
 
“그건 곤란합니다.” 

[어째서지? 내 힘은 충분히 보았을 텐데? 나의 성흔만 있다면, 그대는 이 시대의 최강이 될 수 있다.] 
 
[대화랑집결]이 좋은 성흔이라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김유신이 괜히 사가(史家)들에게 ‘여우’ 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이 시대 최강? 
사기를 쳐도 작작 쳐야지. 
위인급 성좌가 그런 소릴 내뱉다니, 제천대성이 들었다면 머리털을 열 개쯤 뽑았을 것이다. 
 
“지금은 삼국 시대가 아닙니다, 어르신. 나이도 있으신데 이제 들어가서 쉬십시오.” 
 
함께해서 즐거웠고, 이제 다신 보지 맙시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흥무대왕’을 향해 낄낄거립니다.] 
[3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김유신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이대로 순순히 물러나 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찌릿한 통증이 일었다. 
 
[아직 내 가호가 남아 있다는 걸 잊지는 않았겠지?] 
 
현재 나와 김유신은 [간평의]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상태. 
전신의 근육이 경련하더니, 심상치 않은 기미가 보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설마 한국의 위인이······? 
아니지, 한국의 위인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 
빌어먹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유상아가 걱정스러운 듯 나를 바라보았다. 
 
“독자 씨?” 
“유상아 씨. 떨어져요. 빨리!”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손이 멋대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더니 유상아 쪽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김유신이 내 몸에 강제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살행의 제약이 있다고 했었지? 어떤 제약인지 궁금하군. 내가 지금 저 여인을 죽여 확인해 봐도 되겠는가?] 
 
“김유신, 이건 당신의 의지입니다. 내 업보로 쌓이지 않아요.” 
 
[후후, 모르는 일이지. 칼이 꽂히는 순간 내가 가호를 해제한다면? 그래도 이것이 그대의 살행으로 인정되지 않을까? 그리고 보아하니, 저 여인은 그대에게 꽤 소중한 듯한데?] 
 
“······그만두시죠.” 
 
[약속하라. 다음번 ‘배후 선택’에 나 김유신을 고르겠다고.] 
 
이 늙은 여우의 의도는 명백했다. 
네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면, 다시 한번 <배후 선택>의 장이 열린다. 
김유신은, 나와 접선한 기회를 틈타 서약을 받아낼 속셈인 것이다. 
내가 ‘멸살법’을 읽지 않은 상태였다면, 나쁜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김유신은 그럭저럭 괜찮은 성좌고, ‘대화랑집결’만으로도 시나리오 중반까지는 무난하게 돌파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배후성을 선택해서 일을 진행할 거였다면, 처음부터 제천대성을 뽑지 이제와 뭐하러 김유신을 택하겠는가?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어차피, 나는 비형과의 계약 때문에 배후성을 선택할 수도 없다. 
김유신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제법 기개가 있는 젊은이로군. 하지만 그건 잘못된 선택이다.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나 보겠다.] 
 
칼자루를 쥔 손이 마침내 유상아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상아 씨, 빨리······!” 
 
그러나 유상아는 갑작스런 상황에 얼어붙어 있었다. 
멋대로 움직이는 내 오른손을 보며, 나는 결국 결단을 내려야 했다. 
빌어먹을, 위인이라고 존중해줬더니 이 영감탱이가 진짜······.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것은 나의 몸이다. 
성좌든 뭐든, 결코 네놈들에게 내주지는 않는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합니다!]
 
 
 
 
 
< Episode 14. 왕좌의 주인 (1) > 끝

< Episode 14. 왕좌의 주인 (2) >
 
 
 
 
 
머릿속에서 ‘멸살법’의 페이지가 넘어갔다. 
우르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릿속에서 빛이 몰아쳤고, 광휘를 내뿜는 문자열들이 정렬되기 시작했다. ‘멸살법’의 텍스트들이었다. 
 
[헉······?] 
 
뭔가를 눈치챈 김유신이 경악성을 내지른 것과, 김유신의 존재감이 급속도로 엷어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역시, 늙은 여우는 눈치가 빠르다. 
 
[‘별의 메아리’를 통해 연결되어 있던 성좌의 가호가 사라집니다.] 
 
마지막 순간, 경악한 김유신의 진언이 메아리쳤다. 
 
[대체 그대는······?] 
 
그리고 김유신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솔직히 나도 놀랐다. 
[제4의 벽]이면 가능할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간평의]로 연결되어 있던 성좌를 이렇게 쉽게 끊어낼 수 있을 줄이야. 
지난번 ‘극장 던전’에서 있었던 일이 힌트가 되었다. 그때도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려 했던 ‘극장 주인’은, [제4의 벽]을 마주한 순간 소멸했었다. 
혹시 같은 방식으로 성좌도 골로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는데, 아쉽게도 눈치 빠른 김유신이 먼저 달아나버린 모양이다. 
 
[성좌, ‘흥무대왕’이 당신의 존재에 의구심을 품습니다.] 
[성좌, ‘흥무대왕’은 앞으로 당신을 유심히 지켜볼 것입니다.] 
 
하여간 노인네가 뒤끝은. 
 
“······이제 괜찮은 건가요?” 
“네.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건 또 뭐지?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사지가 마력 실로 꽁꽁 묶여 있었다. 마치 번데기 같은 모양새랄까. 얼굴이 발갛게 물든 유상아가 얼버무렸다. 
 
“그게······ 두고 도망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옆에 있으면 공격당할 것 같아서요.”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설마 그 짧은 틈에 내게 [실 묶기]를 사용했을 줄이야. 
놀라서 얼어붙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스킬을 쓰고 있었다니. 
 
“순발력이 대단하시네요.” 
“······죄송해요.” 
“칭찬입니다. 앞으로도 제가 헛짓거릴 시작하면 지금처럼 만들어 주세요.” 
“그, 금방 풀어드릴게요!” 
 
유상아는 쩔쩔매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언제까지나 그녀가 평범한 ‘회사원’일거라 생각한 것은 나만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뒤를 돌아보니, 미희왕 민지원이 나와 유상아를 묘한 눈으로 번갈아 보고 있었다. 
 
“뭐······ 저는 이만 가볼게요. 도우러 왔는데, 결과적으론 도움을 받은 꼴이 됐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만날 때는 적일 겁니다.” 
“······이제 같은 편 된 거 아니었어요? 보통 드라마에서는 이렇게 친해지는데.” 
“그건 드라마고요.” 
“교우이신! 믿음으로써 벗을 사귄다. 우리 화랑의 기치에요.” 
 
그렇게 말하며 멀어지는 민지원은,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좀처럼 알 수 없는 미소로 멀어졌다. 
이번 회차의 미희왕은 좋은 왕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모른다. 
아마, 미희왕 본인도 잘 모를 것이다. 
 
“우리도 가죠. 이성국 씨! 그만 나와요.” 
 
내 외침에 이길영을 붙들고 건물 뒤쪽에 숨어 있던 이성국이 어물쩍 나타났다. 
이 자식, 호기롭게 계백을 막겠다더니 언제 그런 곳에 숨어 있었는지. 
나는 일행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김유신의 ‘대화랑집결’이 휩쓸고 간 곳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난전을 벌이던 군소 왕들은 뒤통수가 깨진 채 대로변 곳곳에 걸레짝처럼 늘어져 있었다. 이것이 제대로 된 성좌의 위엄이라는 거겠지. 김유신은 비겁하지만 쓸만한 성좌다. 
나는 떨어져 있는 공짜 깃발들을 하나씩 주우며 차근차근 공적치를 올려 나갔다. 
 
[당신의 ‘갈색 깃발’이 ‘갈색 깃발’의 누적 공적치를 흡수합니다.] 
[당신의 ‘갈색 깃발’이 ‘보라색 깃발’로 진화합니다.] 
[‘보라색 깃발’의 특전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시, 제일 좋은 건 싸우지 않고 성장하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웬만한 깃발은 이미 수거된 상황. 
보라색부터는 깃발의 공적치가 잘 오르지 않는다. 
즉, 지금부터는 어지간한 ‘왕’을 잡아서는 소용없다는 뜻이다. 
 
“정민섭 씨, 거기 있습니까?” 
 
다음 순간, 허공에서 정민섭의 신형이 나타났다. 
내가 미리 건네준 [은둔자의 망토]가 그의 몸피를 덮고 있었다. 
정민섭은 이번 임무에서 고궁 박물관 정찰을 맡았다. 
 
“지금까지 몇 명이나 들어갔죠?” 
“폭군과 참독자를 포함해 총 아홉 명의 왕이 들어갔습니다.” 
 
아홉이라. 적당한 숫자다. 
 
“깃발 종류는요?” 
“보라색이 일곱, 갈색이 둘입니다. 보라색 중에서도 두 명은 특히 색이 진했습니다.” 
“폭군과 참독자겠군요.” 
“그렇습니다.” 
 
정민섭, 이거 생각보다 쓸만한 인재인데? 
나는 입을 열었다. 
 
“이번엔 저랑 유상아 씨, 그리고 길영이만 들어갑니다. 다른 두 분은 밖에서 계속 대기하고 계세요. 망토 속에 숨어 계셔도 되고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네, 어차피 당장 필요한 건 셋뿐이에요.” 
“언제든 불러주시면 들어가겠습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방해만 된다. 
내가 아는 대로라면, 서울 고궁 박물관은 현재 [던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히든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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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시나리오 ― 시련의 유물> 
 
분류 : 히든 
난이도 : F~A+ 
클리어 조건 : 적정 인원에 알맞은 ‘유물 던전’을 클리어 하시오. 
제한시간 : 없음 
보상 : 500~5000코인 
실패시 :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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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 들어가자마자 우리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새하얀 대리석 로비였다. 로비에는 어떤 사람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상아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무서워서 문화생활 같은 건 못하겠어요. 전에는 영화관이더니, 이번에는 박물관까지······.” 
“형, 우리도 전설의 검인가 그거 얻으러 온 거예요?” 
“아니, 지금은 아니야.” 
 
물론, ‘사인참사검’도 이 던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그 정보를 뿌린 게 나니까. 
 
[진입할 던전의 종류를 선택하세요.] 
 
* 1인 던전 ― 나각(螺角)의 장 
* 3인 던전 ― 침구동인(鍼灸銅人)의 장 
* 5인 던전 ―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장 
* 7인 던전 ― 용준(龍樽)의 장 
 
그런데 ‘사인참사검’이 나오는 던전은 평범한 방식으로 들어갈 수 없다. 해당 던전은 각 던전을 클리어했을 때 보상으로 나오는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모아야만 입장할 수 있는, 히든 시나리오 안에서도 히든으로 취급되는 던전이기 때문이다. 
 
“3인 던전, 침구동인의 장을 택하겠다.” 
 
[3인 던전에 입장합니다.] 
 
이길영은 조금 실망한 눈치였다. 
하긴, 대단한 유물을 얻을 줄 알고 기대하고 있었겠지. 
 
“길영아. 유물은 겉으로 보는 게 다가 아니야.” 
“······네?” 
“겉보기에 화려한 것들이, 실은 실속이 없는 경우가 많아.” 
 
사인참사검도 그런 거품이 낀 아이템 중 하나다. 
오히려 이 던전에서 좋은 것들은, 평범하게 들어간 던전에서 획득할 수 있는 것들이다. 
3인 던전인 ‘침구동인의 장’에서 얻을 수 있는 스킬도 그중의 하나다.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유상아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우리 말고도 들어온 사람들이 있나봐요.” 
 
실제로 던전의 곳곳에서는 간헐적인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우와아악! 떨어져!” 
 
인간의 형태에, 무광택의 검정빛이 감도는 괴물. 
3인 던전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녀석들은 그런 검정색 동인(銅人)들이었다. 

7급 복제종(複製種), 침구동인.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가증식을 하는 이 괴물들은, 현시점에서는 공략법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녀석들이었다. 침구동인들은 몸피가 단단한 데다 내장기관이 없고, 신경망이 없어서 고통을 겪지 않는다. 
 
“으아아아! 살려줘!” 
 
몇몇 화신들의 검이 어설프게 동인을 베었지만, 동인들은 약간의 수은을 흘릴 뿐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성큼성큼 다가간 동인들이 사내의 몸을 쭉 잡아당겼다. 
 
뿌지지지직! 
 
체근민이 50에 가까워 보이는 사내의 몸이, 침구동인의 손아귀에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독자 씨, 이 녀석들은 어떻게 상대하죠?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아요.” 
 
유상아와 이길영도 다가오는 침구동인들을 향해 열심히 둔기를 휘두르거나 스킬을 사용하고는 있었지만, 좀처럼 효과는 없었다. 
가끔 이길영의 둔기에 맞은 침구동인들이 타격을 받기도 했지만, 이길영은 자신이 무슨 원리로 그들을 상처입혔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녀석들의 몸을 잘 봐.” 
 
‘시련의 유물’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모든 종류의 괴수들은, [서울 고궁 박물관]에 있는 유물을 모티프로 제작된 것들이다. 
가령 1인 던전의 나각은 말 그대로 소라껍데기로 만든 악기고, 5인 던전의 동의보감은······ 뭐 이건 딱히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요는 3인 던전의 침구동인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동인은 한참이나 노려보던 유상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몸에 뭔가가 새겨져 있는데요?” 
“맞습니다.” 
 
사실 유물 침구동인(鍼灸銅人)은 인간의 전신, 즉 앞·뒤·팔·다리·머리에 이르는 354개의 경혈(經穴)을 표시하기 위한 유물이었다. 
말하자면 이 유물은 조선 시대의 한의학 교보재인 셈이었다. 
 
[‘신념의 칼날’이 발동합니다!] 
 
나는 칼날을 발동해 침구동인의 경혈들 중 하나를 찔렀다. 
그러자,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던 동인이 이내 파사삭 소리를 내며 가루로 흩어졌다. 
무려 7급 복제종치고는 허망한 최후였다. 
 
[첫 번째 침구동인을 사냥했습니다!] 
 
“잘 보시면 경혈마다 색깔이 미묘하게 다릅니다. 어떤 것은 마혈, 어떤 것은 사혈. 그리고 어떤 것은 아혈······ 각 침구동인은 그 혈도를 찌를 때마다 다른 효과를 볼 수 있게 제작되어 있습니다.” 
“아······!” 
 
중요한 것은 미세한 경혈을 찾아 그 흐름을 막거나, 끊는 것. 
몇 번인가 시범을 보여주자, 이길영과 유상아도 금방 요령을 터득했다. 
이길영은 [다종 교감]을 이용해 작은 곤충들로 혈도에 충격을 주는 방법을 택했고, 유상아는 [실 묶기]를 응용하여 실을 작은 침처럼 꽂아 넣고 있었다. 한 차례씩 부르르 진동하다 자리에 늘어지는 동인들을 보며, 나는 솔직히 감탄했다. 
두 사람 다, 정말 훌륭한 성장세다. 
 
[당신의 파티는 최초로 침구동인을 100마리 사냥하였습니다!] 
[3인 던전을 클리어하였습니다.] 
[기본 보상으로 상평통보 4개를 각각 획득하였습니다.] 
[특별 보상으로 전용 스킬 ‘점혈(點穴)’을 획득하였습니다.] 
 
목표로 했던 스킬도 얻었다. 
점혈(點穴). 
특정 혈도를 제압하여 적을 제압하는, 무림계 귀환자들의 고유 기술. 
당분간 ‘불살의 왕’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 내겐 필수적인 스킬이었다. 
유상아가 신기하다는 듯 받은 상평통보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걸로 뭔가 살 수 있을까요?” 
“코인으로 교환할 수도 있고, 던전의 입장권으로도 쓸 수 있는 아이템입니다.” 
“그러면······.” 
“물론 저희는 입장권으로 쓸 겁니다. 자, 다들 세 개씩 내세요. 저는 네 개를 낼테니, 합쳐서 열 개를 맞춰보도록 하죠.” 
“열 개요? 잠깐만요, 독자 씨 설마······?” 
“우리는 ‘사인참사검’을 얻을 수 있는 히든 던전에 진입할 겁니다.” 
 
유상아가 깜짝 놀라 물었다. 
 
“하지만 사인참사검은 얻지 않을 거라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린 ‘사인참사검’을 얻으러 가는 게 아닙니다.” 
 
그걸 얻으러 간 왕들을 ‘사냥하러’ 가는 거지.
 
 
 
 
 
< Episode 14. 왕좌의 주인 (2) > 끝

< Episode 14. 왕좌의 주인 (3) >
 
 
 
 
 
던전에 입장하되, 사인참사검을 얻으러 가는 것은 아니다. 
유상아도, 이길영도 그것이 무슨 말인지 곧장 이해했다. 
 
“깃발을 빼앗겠단 말씀이시군요.” 
“그럼 이제부턴 다 죽여도 되겠네요.” 
 
물론, 서로 다른 의미로. 
유상아가 놀란 눈빛으로 이길영을 내려다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이길영이 실망스럽다는 눈빛으로 유상아를 올려다보았다는 것이다. 
 
“형, 마무리는 저한테 맡기세요.” 
 
심지어 이 녀석······ 내가 사람의 목숨을 직접 끊지 않는다는 것까지 이미 눈치채고 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해당 인물은 현재 정보를 수집 중입니다.] 
 
여전히, 이길영의 정보는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유상아의 염려 어린 눈길과 마주쳤다. 그녀는 나와 이길영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이길영을 향해 말했다. 
 
“좋을 대로 해.” 
 
유상아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이길영은 아직 중학생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 하지만, 그녀도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이 세계에서 우리가 알던 윤리는 이제 쓸모가 없다. 
 
“하지만 이건 게임이 아니야. 조심해야 해.” 
“네,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자신만만한 이길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등에 꽂고 다니던 깃발을 품속에 숨겼다. 
지금까지 깃발은 허접한 왕들을 유인할 좋은 미끼였지만, 지금부터는 포식자를 불러들이는 혈향이 될 것이었다. 
왕을 잡으러 가는 전장에, 내가 왕이라는 걸 들켜서 좋을 것은 없다. 
허공에서 중급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다들 잘 하고 계시는군요! 이렇게나 많은 분들이 ‘히든 시나리오’를 수행하고 계시다니, 이건 ‘히든’의 의미가 없겠는데요?] 
 
뻔뻔하기도 하시지. 
가끔 보면 저렇게 의뭉스럽기도 힘들 거란 생각이 든다. 
 
[벌써 ‘첫 번째 자격’의 요건을 달성한 분도 계시고. 역시, 이래야 재미있는 법이죠.] 
 
벌써 [검은색 깃발]을 달성한 왕이 나타난 모양. 
아마 7왕 중의 하나겠지. 
 
[잠시 후 ‘두 번째 자격’의 요건도 공개될 테니, 다들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서두르죠. 도깨비의 ‘잠시 후’는 생각보다 기니까요.” 
 
나는 모은 상평통보를 로비의 출입구에 패인 구멍에 하나씩 맞춰 넣었다. 
 
[10개의 상평통보를 사용하여 숨겨진 장(場)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숨겨진 장, ‘북두칠성의 장’에 진입하시겠습니까?] 
 
지금 내가 가진 깃발은 [보라색 깃발]. 
같은 보라색 등급의 깃발을 가진 왕들은 모두 ‘북두칠성의 장’에 몰려 있을 것이다. 
즉, 내 사냥감들이 지금 모두 한 장소에 모여 있다는 뜻이다. 
 
[‘북두칠성의 장’에 진입하였습니다.] 
 
시야가 물결치며 로비의 정경이 바뀌었다. 새하얀 대리석 로비가 탁 트인 넓은 대기실로 바뀌었다. 
대기실 끄트머리에는 일곱 개의 문이 있었다. 
 
“읏······.” 
 
유상아가 짧게 신음을 흘리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유상아의 발 앞에는 사람의 시체가 있었다. 세력전을 벌인 그룹원들의 시체. 이길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체를 가만히 내려보았다. 
평탄히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체들. 족히 수백 구는 될 시신들이 곳곳에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벌써 한바탕 혈풍이 몰아친 모양이다. 
기분이 조금씩 이상해진다. 
만약 내가 표절 작가 녀석의 텍본을 퍼뜨리지 않았더라면, 이들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들은 결국 나 때문에 죽은 것일까? 
 
“저기, 사람들이 있어요.” 
 
대기실 중앙에는 사람들의 시체를 연료로 거대한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두런두런 살아남은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패잔병들인지, 아니면 휴전 중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싸우고 있지 않았다. 
나는 무리들을 보며 일행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조심해요.” 
 
슬그머니 일어서는 무리들. 
다가오는 사람들의 눈빛에 탐욕이 엿보이고 있었다. 
 
“신입이로군. 너희들의 왕은 누구냐?” 
 
누군가 말로 시선을 끄는 사이, 은밀하게 우리 일행의 뒤를 점거하는 녀석들. 점점 좁혀오는 포위망. 
 
“너냐? 아니면 그 옆의 여자? 이 꼬마일 리는 없고······.” 
 
[상당수의 성좌들이 시답잖은 훼방을 귀찮아합니다.] 
[몇몇 성좌들은 당신이 본격적인 행동에 착수하기를 원합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이봐, 왜 대답을······ 으악!” 
 
[부러지지 않는 신념]에서 뻗어 나온 백광이 허공을 물들였다. 
거침없는 궤적이 사내의 팔다리를 잘랐다. 
당황한 옆의 사내가 외쳤다. 
 
“젠장! 그냥 죽여!” 
 
기다렸다는 듯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 드는 녀석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뭐, 뭐가 이렇게 빨······!” 
 
민첩의 앞자리가 3인 녀석은 현시점에서 거의 없다. 
초반이라 보법 스킬의 레벨도 높지 않을 테니, 당장 서울 7왕을 제외하면 내 움직임을 따라올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다. 
 
스가각! 
 
반원의 형태로 휘둘러진 신념의 칼날이, 틈을 노리던 대여섯 명의 발을 동시에 잘라냈다. 
 
스각! 
 
이어진 공격이 병장기를 든 손을 잘랐고. 
 
푸슛! 
 
암기를 쥔 손목을 꿰뚫었다. 
 
“크아아악!” 
 
잘려나간 팔다리가 비현실적으로 허공을 날았다. 나는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놈들의 뒤로 다가가 조용히 수혈을 짚었다. 
 
[전용 스킬, ‘점혈 Lv.1’이 발동합니다.] 
 
팔다리를 끊고 수혈을 짚다니, 잔인하기 짝이 없는 처사였지만 여기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내들이 품속에 숨기고 있던 검푸른 비수. 이 비수의 끝에는 5인 던전인 [동의보감의 장]에서 구할 수 있는 맹독이 발려 있었다. 조금만 대응이 늦었더라도, 당하는 쪽은 우리였을 것이다. 
순식간에 무리들이 모두 쓰러지자, 나는 이길영을 불렀다. 
 
“부탁한다.” 
 
이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푹! 푹! 
 
이길영의 손에 사람들이 숨통이 하나둘씩 끊어진다. 
하찮은 벌레를 눌러 죽이듯 무기질적인 손놀림. 
나도 조금 놀랄 정도였다. 
보다 못한 유상아가 나섰다. 
 
“내가 할게, 길영아······.” 
“······제가 할 수 있는데요?” 
“그래도, 내가 할게.” 
 
유상아 답지 않게 완고한 어투였다. 이길영이 못마땅한 얼굴로 내 눈치를 살폈다. 유상아는 내게서 등을 돌린 채 칼을 쥐고 있었다. 말은 안 해도, 어쩌면 유상아는 나를 경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유상아의 마음을 읽을 수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른다. 
 
푹! 푹! 
 
유상아는 이길영보다도 훨씬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남은 사람들의 목숨을 모두 끊었다. 
일을 끝낸 유상아의 손끝에 가는 떨림이 일더니, 이내 잦아들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이겠죠?” 
“네, 그럴 겁니다.” 
“길영이 일은 앞으로 제가 대신 할게요.” 
“할 수 있겠어요?” 
“······문제없어요. 계란 깨는 거랑 똑같았어요.” 
 
유상아 답지 않은 비유. 애써 담담한 척하는 듯했다.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데······.” 
 
투덜거리는 이길영의 머리에 유상아가 손을 얹었다. 앞으로도 이런 우여곡절은 많을 것이다. 몇 번인가 무너지거나, 포기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겨내야 했다. 
 
곧 만나게 될 서울 7왕들은 대부분 우리보다 능력치가 준수하고, 가진 스킬들도 독특하다. 저쪽에서 적의를 내비치지 않아도, 선수를 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상황도 분명 올 것이다. 
우리는 묵묵히 무리들이 가지고 있던 아이템을 수거했다. 
 
[23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아이템 ‘동의보감 ― 잡병편 (상)’을 획득하였습니다.] 
 
역시나, 5인 던전을 클리어한 녀석들이었다. 5인 던전에서 구할 수 있는 ‘동의보감’은 총 여덟 권으로, 제각기 다른 쓸모를 가진 물건들이었다. 아마 5인 던전을 통해 올라온 녀석들이 제법 될 테니, 다른 편을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다만 아쉽게도, 방금 죽인 무리 중에 ‘왕’은 없었다. 
 
짝짝짝. 
 
박수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커다란 모닥불 너머에서 이쪽을 보고 있던 사내들 중 하나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코앞에서 다른 무리들이 쓸려나갔는데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이템을 마저 수거하며, 무심한 투로 경고했다. 
 
“뭡니까?” 
 
사내는 한 걸음을 슬쩍 물러서더니, 싸울 생각이 없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어어, 진정하세요. 싸우려는 거 아니니까.” 
 
나는 사내의 외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등 뒤에 멘 커다란 창. 옷에 감춰져 있어서 잘 드러나진 않았지만 탄탄한 이두와 흉근······ 그리고 길게 뒤로 묶어낸 말총 머리. 
······어디선가 이런 외형의 묘사를 읽었던 것 같은데. 
 
“대단한 솜씨더군요. 딱히 패시브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충정로 그룹을 순식간에 쓸어 버리다니······ 그 자식들, 그래도 왕을 잃은 녀석들 중에서는 한가락 하는 놈들이었는데 말이죠.” 
 
역시나, 그래서 그렇게 막 나가는 거였군. 
 
“근데 좀 늦으셨군요. 벌써 주요 ‘왕’들은 모두 던전 내부로 진입했습니다. 지금쯤 치고 박고 싸우고 있을 거예요. 뭐, 승자는 거의 정해져 있는 상황이지만······ 여길 이 꼴로 만들고 지나간 마지막 왕이 엄청나게 무시무시했거든요.” 
“그게 누굽니까?” 
“‘폭군왕’이라고 아십니까?” 
 
사내가 계속해서 말했다. 
 
“현재 서울 북부에서 가장 강력한 왕입니다. 이미 알 만한 녀석들 사이에서는 이야기가 돌고 있죠. ‘절대 왕좌’의 주인은 분명 폭군왕이 될 거라고.” 
 
하긴, 직접 폭군왕을 봤다면 그런 생각을 할 법도 하다. 
폭군왕의 무력은 분명 서울 7왕 중에서도 수위권이니까. 
하지만 ‘절대 왕좌’의 주인이라니, 우스운 일이었다. 
폭군왕은 강하지만, 결코 7왕 중 최강은 아니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사내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폭군왕은 강하지만, 절대 ‘왕좌의 주인’은 될 수 없을 거라고.” 
“······왜 그렇게 생각하죠?” 
“직접 봤으니까요. 그는 본신의 무력은 강하지만, 사람을 다룰 줄 모릅니다. 모름지기 왕이라면 백성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죠.” 
 
백성의 마음? 
 
“제가 모시는 왕은 그걸 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많은 화신들이 그를 따르죠. 저는 저의 왕이 ‘절대 왕좌’의 주인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 
 
나는 사내의 시선이 흘끗 향하는 쪽을 보았다. ‘북두칠성의 장’은 총 일곱 개의 입구로 이루어져 있다. 
아마 이 사내의 왕도, 그 통로 중 하나를 택해 움직였을 것이다. 
 
“그래서 요지가 뭡니까? 그쪽한테 붙으라고요?” 
“하하, 물론 그러면 좋겠지만 그렇게 순순히 따르실 리 없잖아요? 저는 그냥 제안을 하려는 겁니다. 괜찮다면, 우리와 손을 잡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이 사내가 대기실에 상주하고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말하자면, 이 녀석은 ‘삐끼’다. 
 
“왜 그래야 하죠?” 
“‘폭군왕’은 강합니다. 저는 저의 왕을 믿지만, 솔직히 본신의 무력만으로 폭군왕에게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하거든요.” 
 
충성심에 반해, 굉장히 현실적인 녀석이다. 
하지만 이런 녀석이 ‘진짜’ 충신이겠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망나니한테 전설의 보검까지 쥐어 주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하물며 녀석이 서울시의 모든 왕들을 통제하는 ‘절대 왕좌’에 오른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일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3회차의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분명 ‘멸살법’에서도 이런 ‘반 폭군 동맹’이 만들어진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역시, 미래가 바뀌었기 때문이겠지. 
 
“일리는 있군요.” 
“그래서 제안하는 겁니다. 우리 그룹은 곧 ‘폭군왕’을 칠 거거든요. 이미 다른 몇몇 왕들과도 이야기가 끝난 상태고. 어느 그룹 소속인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지금 참가해서 그쪽한테 손해볼 건 없을 겁니다. 숟가락만 얹으면 되는 상황이니까.” 
 
확실히 그 말대로다. 
문제는 그 숟가락 한술의 대가가 생각보다 클 거라는 것인데······. 
내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사내가 말했다. 
 
“정 찝찝하다면, 우리 왕을 만나보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슬슬 대기실로 돌아오실 때가 되었는데······. 엇, 마침 저기 오시네.” 
 
실제로 일곱 개의 문 중 하나가 열리며, ‘북두칠성의 장’의 내부로 진입했던 무리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왕이시여······.” 
 
사내와 함께 문 입구를 서성이던 사람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무리의 중심에서, 한 사내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깨끗하게 머리를 밀고, 한쪽 눈에는 안대를 한 남자. 
그리고 손에 쥐어진 갈색의 법봉(法棒)······. 
 
잠깐만. 저 녀석, 설마?
 
 
 
 
 
< Episode 14. 왕좌의 주인 (3) > 끝

< Episode 14. 왕좌의 주인 (4) >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외눈 법복의 사내. 
하필 제일 처음 만나는 ‘서울 7왕’이 이 녀석일 줄이야. 
유상아가 그룹 채팅으로 말을 걸어왔다. 
 
―독자 씨, 저 사람 혹시······. 
―네, 맞는 것 같습니다.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상아. 
하긴, 저 외양을 보고서 나랑 같은 생각을 안 할 수가 없겠지. 
 
―그런데 이해가 안 가네요. 설령 성좌가 ‘그 사람’이더라도, 왜 화신이 저런 복장을 하고 있을까요? 
―성좌와의 동조율이 높은 축인 것 같습니다. 동조율이 높아지면 성좌의 생전 취향에 영향을 많이 받거든요. 
―저 사람 앞에서 절대 기침하면 안 되겠네요. 
 
말총머리가 법복 사내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왕이시여. 오셨나이까.” 
“그래.” 
“어떻게 되었습니까?” 
“두말할 필요 있겠느냐? 여기.” 
 
외눈 안대가 자신의 지팡이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북두칠성의 장’에서 구할 수 있는 푸른 보석 조각이 박혀 있었다. 
 
[탐랑(貪狼)의 별] 
 
말총머리가 감탄했다. 
 
“오오······!” 
 
제법인데? 
벌써 ‘별보석’ 하나를 손에 넣었다니······. 
별보석은 ‘북두칠성의 장’의 보상 아이템이다. 
종합 능력치 중 하나를 1씩 상승시켜주는 아이템이기 때문에 하나만으로도 괜찮은 효과를 가지고 있지만, 저 별보석은 어디까지나 일곱 개를 모았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보석은 바로 ‘사인참사검’의 소환 재료가 되니까. 
외눈 안대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한데 이들은 누구냐?” 
“방금 ‘북두칠성의 장’으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칼재주가 제법 좋아, 우리 쪽으로 받을까 고민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래?” 
 
외눈과 나는 동시에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차상경이오.” 
“김독자라고 합니다.” 
 
나는 녀석의 손을 잡는 동시에, 스킬을 발동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차상경 
나이 : 26세 
배후성(背後星) : 외눈 미륵 
전용 특성 : 사이비 교주 (영웅), 미륵왕(彌勒王) (영웅) 
전용 스킬 : [무기 연마 Lv.5], [정신 방벽 Lv.3], [화려한 언변 Lv.3], [능숙한 기만 Lv.3]. [거짓 기도 Lv.1]······. 
성흔 : [미륵정토 Lv.2], [관심법 Lv.2], [마구니(魔仇尼) 선언 Lv.3] 
종합 능력치 : [체력Lv.28], [근력Lv.26], [민첩Lv.28], [마력Lv.25] 
종합 평가 : 모든 것을 통찰하는 그의 ‘외눈’ 앞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의 앞에서 함부로 기침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 
 
정희원이 여기 있었어야 했는데, 아쉽다. 
눈앞의 이 인간이 눈을 끔뻑이고 있는 걸 보면, 다시는 내 배후성이 궁예라는 헛소리를 안 할 텐데. 
차상경이 말했다. 
 
“짐이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한 번 봐도 되겠소?” 
“그러시죠.” 
 
그래, 그거 왜 안 하나 싶었다. 
 
[등장인물 ‘차상경’이 성흔 ‘관심법 Lv.2’을 사용합니다!] 
 
궁예의 성흔인 [관심법]은 ‘멸살법’에 등장하는 탐색 기술 중에서도 꽤 흥미로운 편이었다. 상대방의 특성창을 볼 수는 없지만, 상대방의 성정과 대략적인 위험도를 알 수 있는 기술. 쉽게 말해, 착한 사람이라면 녀석의 눈에는 ‘호구 마구니’라고 뜨고, 나쁜 사람이라면 ‘뒤통수 칠 마구니’라고 뜨는 식이다. 예를 들면, 
 
[등장인물 ‘차상경’은 당신이 ‘건드리면 안 되는 마구니’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 이건?” 
“왕이시여, 왜 그러십니까?” 
 
[등장인물 ‘차상경’이 크게 당황합니다.] 
 
얼굴이 창백해진 차상경이 외쳤다. 
 
“마, 마구니!” 
“예? 설마······.” 
 
‘마구니’라는 말에, 말총머리를 비롯한 미륵왕의 그룹원들이 동시에 나를 쳐다 보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발생하려는 순간, 차상경이 다급히 덧붙였다. 
 
“아, 아니다. 내가 잘못 본 것 같다.” 
“예? 아닙니까?”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다들 물러서라.” 
 
과연. 성좌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는 걸 보면 바보는 아닌 듯했다. 
그나저나 ‘건드리면 안 되는 마구니’라······. 
아마 ‘외눈 미륵’은 나와 싸우길 원치 않는 모양이다. 
 
“후우······ 깜짝 놀랐지 않습니까.” 
 
의아한 것은 오히려 말총머리의 반응이었다. 
순간적이지만, 녀석의 표정에 드러난 감정은 오히려 ‘아쉬움’에 가까웠다. 
 
“계획은 정확히 한 시간 뒤부터요. 참가가 조금 늦긴 했지만, 내 그대들 활약을 기대하지.” 

차상경은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의 그룹원들에게 돌아가 버렸다. 
궁예와의 첫 대면치고는 싱거운 결말이었다. 
말총머리가 말했다. 
 
“휴, 큰일 날 뻔하셨군요. 다행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왕이라더니, 말도 하기 나름이군요.” 
“하하, 궁예도 훗날 폭군으로 기록되긴 했지만 처음에는 성군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지요. 역사는 바꿀 수 있으니까요.” 
 
나는 말총머리를 유심히 보며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굽니까?” 
“아, 그러고 보니 제 소개를 안했군요. 저는 한수영이라고 합니다. 그룹에서는 차상경님의 보좌를 맡고 있고요.” 
 
궁예의 화신을 보좌하는 남자. 굳이 궁예 옆에 붙어 있을 정도면, 배후성에 그 이유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누구지? 설마 왕건인가? 
나는 곧장 스킬을 발동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해당 인물의 정보는 ‘등장인물 일람’으로 열람할 수 없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뭐? 
 
“음? 왜 그러십니까?” 
 
뻔뻔하게 대답하는 한수영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런가······ 이제 이 녀석이 누군지 알겠군.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마구니가 낀 듯한 느낌이 들어서 말입니다.” 
“하하, 마구니 말입니까?” 
 
나를 보는 한수영의 눈빛도 묘하게 바뀌었다. 
어쩌면 이 순간, 우리 둘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누가 먼저 칼을 뽑는가’인데.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대기실의 문이 하나둘씩 개방되기 시작했다. 
 
“왕께서 행차하신다!” 
 
미륵왕 그룹 쪽에 긴장이 감돌았고, 대기실의 몇몇 인원들은 환호를 시작했다. 
나는 문밖으로 걸어 나오는 왕들을 보며 한수영에게 물었다. 
 
“저들도 같은 편입니까?” 
“네, 모두 협력을 약속한 왕들입니다. 왼쪽에서부터 ‘소심왕’ 윤기영님과 ‘박투왕’ 김백호님.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오신 분이 ‘토룡왕’ 구태성님이십니다.” 
 
별명을 들으니 새삼 기억이 떠올랐다. 
소심왕과 박투왕. 딱 별명처럼 생긴 녀석들이다. 
준수한 능력치에 괜찮은 스킬들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서울 7왕에 비하면 한 끗 처지는 놈들이었다. 
그러니 저기서 주목할 것은 ‘토룡왕’ 구태성 뿐. 
구태성이 차상경을 발견하고 이죽거렸다. 
 
“애꾸, 벌써 나와 있었냐? 빠르네.” 
“지렁이 마구니 놈이 깝죽대는구나.” 
“······지렁이? 지금 내 배후성 욕한 거냐?” 
 
그 말을 들은 유상아가 깜짝 놀라 내게 속삭였다. 

“저 사람, 아무래도 배후성이 견훤인 거 같아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후백제의 왕이 토룡(土龍)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토룡?” 
“‘지렁이’라는 뜻이에요. 조롱하는 의미에서 다른 왕들이 견훤을 토룡(土龍)의 아들이라고 불렀대요.” 
 
이거 놀랍다. 고작 그런 정보로 저자의 정체를 알아낼 줄이야. 
유상아의 말은 맞았다. 
 
토룡왕 구태성. 
 
내 기억으로도 그는 서울 7왕 중 하나이자, 후백제의 왕인 ‘견훤’을 배후성으로 삼은 인물이었다. 
 
“왕들을 배후성으로 삼은 사람들이 꽤 보이네요. 전에 봤던 진성왕도 그렇고······.” 
 
고개는 건성으로 끄덕였지만, 나는 유상아의 관찰력에 놀랐다. 
사실 ‘왕’을 배후성으로 삼은 화신들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서울 돔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들도 상황은 비슷할 것이다. 
일본 같은 경우는 지금쯤 오다 노부나가를 비롯한 전국 3영걸이 화신을 통해 경합 중일 것이고, 영국은 사자왕 리처드나 헨리 8세 등이 대결 구도를 형성하고 있겠지. 
전 세계의 위인급 성좌들은 화신과의 동조율을 아슬아슬하게 조절해 가며 왕좌를 둘러싼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성좌, ‘해상전신’이 새로운 설화급 성좌의 등장을 기대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손에 땀을 쥔 채 상황을 지켜봅니다.] 
 
다른 위인급 성좌들도 흥미진진한 눈치였다. 
그럴 법도 하다. 
왜냐하면, ‘네 번째 시나리오’는 각 나라의 위인급 성좌들을 위한 이벤트이기도 하니까. 
 
“모두 모였는가?” 
 
이윽고 전열을 가다듬은 왕들이 중앙에 모여 연설을 시작했다. 
 
“우리의 적은, 3번 문으로 들어간 [폭군왕]이다! [폭군왕]은 이미 이 던전에서 두 개의 별보석을 손에 넣었고, 그의 비겁한 습격에 무고한 두 명의 왕이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는, 그자에 의해 왕을 잃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대기실이 시체 밭이었군. 
아마 폭군왕은 이곳에서 다른 두 명의 왕을 죽이고 별보석을 빼앗은 모양. 
그렇다는 건, 저 3번 문만 공략하면 일곱 개의 별보석이 모두 모인다는 얘긴데······. 
 
“새로운 서울을 결코 폭도의 무리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 만약 그가 ‘사인참사검’을 얻고, 나아가 ‘절대 왕좌’까지 차지하게 되면 이 서울에 남는 것은 끝없는 통탄과 비극뿐이다!” 
“그러니 민중의 투사들이여! 지금 당장 일어나라! 이곳의 왕들은 모두 현명하고 지혜로운 자들이다. 우리 중 누가 왕이 되든, 그것은 훗날의 일. 적어도 최악의 왕이 옹립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이것은 정당한 삶을 위한 투쟁이 될 것이다! 똑똑히 새겨들어라! 너희들은 새로운 역사에 첫발을 딛은 위대한 투사들이 되리라!” 
 
별 내용도 없는 연설에, 사람들은 뜨겁게 열광했다. 
환호하고, 동조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감동에 벅차 눈시울을 붉혔다. 
마치 자신들이 진짜 정의를 위해 일어난 혁명가들이라도 되는 양. 
그 정경을, 나는 홀로 바라보았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이곳의 사람들은 투표를 해서 대통령을 뽑던 이들이었다. 맡은 의무를 다하고 가진 권리를 누리며, 합법적인 경제활동을 통해 사유재산을 가지는 것에 동의했던 사람들. 갑자기 그 모든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고작 한 달 만에, 서울은 왕국으로 되돌아갔다. 
 
“출발한다!” 
 
수백의 인파들이 3번 문으로 입장했다. 
차상경의 그룹은 후미에 있었기에, 우리는 그에 맞춰 들어갔다. 
잠시 후 시야가 물결치더니, 거대한 비동(秘洞)이 등장했다. 그 넓이와 끝을 쉽게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굴. 
바로 곁을 걷던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이거 어떤지 흥분되는군요. 꼭 무협 소설 속에 들어온 기분인데요.” 
“무협 소설이요?” 
 
한수영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무협 소설 보면 그런 게 나오지 않습니까? 장보도(藏寶圖) 속에 그려진 비동. 그 비동의 석실에는 전설의 보검이 잠들어 있으리니, 오오, 무림의 누구든 그 검을 얻는 자는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리라!” 
 
짐짓 제스처까지 곁들이는 한수영의 목소리는 꽤 그럴듯해서, 배우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무협 소설에 나오는 흔한 클리셰군요. ‘장보도 보검’.” 
“오, 독자 씨도 무협 좀 읽으셨나 봅니다?” 
 
장르 소설 얘기라면, 나도 빠질 수는 없지. 
 
“꽤 많이 읽었죠. 그런데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그 클리셰에는 흔히 등장하는 전개가 있습니다.” 
“흔한 전개? 뭐죠?” 
“알고 보니 바로 그 ‘장보도’가 가짜였다! 라는 전개죠.” 
 
한수영의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거 재밌군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뻔한 이야기죠. 가짜 장보도 때문에 비동에 모인 고수들이 함정에 빠져서 죽고, 가짜 장보도를 흘린 ‘흑막’은 조용히 뒤에서 비웃는 거죠.” 
“호오······ 그러면 지금 이 상황도 그런 클리셰일 수 있겠군요? 누군가 흑막일 수도 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죠. 저는 그런 뻔한 클리셰는 안 좋아하지만 말입니다.” 
“음? 그건 무슨 뜻이죠?” 
“솔직히 ‘장보도 보검’ 같은 클리셰는 너무 많으니까요.” 
“흠······ 너무 많은 이야기는 안 좋은 이야기입니까?” 
“적어도 작가로서 고민이 부족한 이야기라고 봐야겠죠.” 
 
그 말에 한수영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그럼 독자 씨가 작가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약 ‘장보도 보검’같은 내용을 써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글쎄요. 저는 이름 그대로 ‘독자’라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는데요.” 
“전 결국 독자 씨도 똑같아질 거라 생각합니다. 뻔한 클리셰를 쓰고, 독자들에게 뻔한 만족을 주는 일에 익숙해지실 겁니다.”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나는 웃으며 말했다. 
 
“누가 뭐랍니까? 꼭 작가처럼 말하시네요. 제 말은 클리셰가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표절 소리는 안 듣게 쓰라는 거죠.” 
“표······절이요?” 
“네, 표절.” 
 
붉으락푸르락하는 한수영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참 재밌다. 
 
“글쎄요, 어차피 다들 비슷한 이야기에 디테일만 조금씩 다른 건데······. 그걸 표절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아마 독자 씨도 작가 입장이 되면 결국 똑같이―” 
“아뇨, 저라면 다르게 쓸 겁니다.” 

한수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르게 쓴다고요? 어떻게요?” 
“예를 들면, 이렇게요.”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아 그대로 한수영의 목을 베었다. 
데구르르 굴러떨어지는 녀석의 목에서는, 혈흔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덧붙였다. 
 
“어차피 드러날 흑막을 뭐하러 구차하게 숨깁니까?” 
 
그러자 바닥에 잘려나간 한수영의 머리가 말을 시작했다. 
 
“재미있군. 김독자.”
 
 
 
 
 
< Episode 14. 왕좌의 주인 (4) > 끝

< Episode 14. 왕좌의 주인 (5) >
 
 
 
 
 
나는 녀석의 잘려나간 머리를 집어 들며 물었다. 
 
“역시 이것도 ‘아바타’였군. 한수영은 네 본명 맞냐?” 
“그래.” 
 
예상대로, 한수영은 ‘첫 번째 사도’였다. 
망할 표절 작가 자식, 어디 숨어 있나 했더니. 
 
“저, 저 자식 뭐야!” 
 
곳곳에서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경악성을 질렀다. 
배신이라는 둥, 내분이 일어났다는 둥 당황한 목소리들. 나는 유상아와 이길영을 지키며, 비동의 한쪽으로 물러났다. 
물론 한 손에는 한수영의 말하는 머리를 쥔 채로.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계시록의 ‘텍본’을 뿌린 건 네놈이었어. 그렇지?” 
“맞아, 정확히는 네 ‘표절 소설’의 텍본을 뿌렸지.” 
“······계시록은 표절이 아니다.” 
“표절이지. 원작 설정을 그대로 가져다 썼잖아?” 
“내 작품을 그딴 졸작에 비교하지 마.” 
“내 말을 알아듣는 걸 보면 그래도 원작을 읽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네?” 
 
한수영이 으드득 이를 갈며 나를 노려보았다. 
 
“모두 이놈을 죽여! 뭣들 하는 거야!” 
“머, 머리가 말을 한다!” 
 
한수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일어난 소란에도 사람들은 당황할 뿐, 뚜렷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곧, 우리에게 신경 쓸 틈도 없게 될 것이다. 나는 한수영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이제 곧 네가 말한 클리셰가 시작될 거야.” 
 
기다렸다는 듯, 비동의 앞쪽에서 터져 나오는 빛. 
빛의 고리 같은 것이 주변을 스쳐 가더니, 몇몇 사람들의 몸에 긴 혈선(血線)이 생겼다. 
 
“뭐······.” 
 
푸슈슈슛! 
 
핏줄기를 내뿜으며 통째로 갈라지는 육편들. 대열의 뒤쪽에 있던 사람들이 피벼락을 그대로 얻어맞고 비명을 질렀다. 
 
“젠장, 놈이다!” 
 
검은 비동의 안쪽에서 일렁이는 사이한 마력. 비동 전체를 압박하는 존재감이 앞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가마를 들어라.” 
 
중성적인 목소리와 함께 커다란 가마의 첨단이 보였다. 가마 속에서 일렁이는 누군가의 그림자. 나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유상아 씨, 길영아! 뒤로 물러서!” 
 
가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달려라.” 
 
가마가 전차라도 되는 양 사람들을 치받으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휘장 속에서 나온 삼색 빛의 고리들이 무자비하게 전장을 휩쓸어 댔다. 수십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어 나갔다. 
불신 어린 눈빛으로 피거품을 문 사람들과, 팔다리가 사라진 채 꿈틀거리는 신체들. 전열의 앞쪽은 순식간에 휑해졌다. 
 
“으아······.” 
 
공포에 질린 그룹원들이 물러섰다. 
몰아친 정적에, 모두가 쥐죽은 듯 입을 다물었다. 
폭군왕이 휘장을 걷고 밖으로 나왔다. 
 
“정말이지 보잘 것 없구나. 선대의 왕들이란······.” 
 
그의 손에는 응축된 마력의 고리를 날릴 수 있는 아이템인 [삼륜환(三輪環)]이 쥐어져 있었다. [삼륜환]은 서울 북부에서 구할 수 있는 히든 아이템이지만, 본래의 폭군왕이 가지고 있던 물건은 아니었다. 
<선지자들>의 일부를 데리고 있다더니, 정말인 모양이군.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정용후 
나이 : 33세 
배후성(背後星) :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 
전용 특성 : 서커스 단원 (희귀), 폭군왕 (영웅) 
전용 스킬 : [잡기 연마 Lv.5], [헌천보(憲天步) Lv.3], [무기 연마 Lv.5] 
성흔 : [가마전차 Lv.5], [처용무(處容舞) Lv.5], [폭정(暴政) Lv.4] 
종합 능력치 : [체력Lv.30], [근력Lv.28], [민첩Lv.28], [마력Lv.34(+2)] 
종합 평가 : 한반도 최악의 폭군이 한을 품은 소시민을 만났습니다. 평소 사회 체제에 불만이 많은 소시민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 현재 스타터팩을 적용 중입니다. 
* 현재 성장 패키지를 적용 중입니다. 
* 현재 신규 시나리오 기념 패키지를 적용 중입니다. 
 
+ 
 
과연, 특성창을 보니 이해가 간다. 
패키지를 벌써 세 개나 뜯었으니 저렇게 강할 수밖에. 
위험할 정도로 개연성 외줄타기를 좋아하는 성좌다. 
 
고오오오······! 
 
거기다 전신에서 일렁이는 저 아우라. 폭군왕의 배후성은 동조율을 한계치까지 높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비형을 비롯한 몇몇 도깨비들 허공에서 녀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언제라도 ‘개연성’에 위배된다 싶으면 「개연성 적합 판정」을 요구할 셈이겠지. 
 
“나는 분명 폭군이었다. 하지만, 더이상 폭군이었던 나는 없다.” 
 
폭군왕,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이 말한다. 
 
“역사는 두렵지 않다. 왜냐하면 오늘, 내가 이 땅의 새로운 역사가 될 테니까.” 
 
한반도 탑 클래스의 폭군인 그는, 역사에 ‘왕’으로 기록되지 못했다. 
 
“나는 연산군 이융(李㦕)이다!” 

동조율이 한계치에 달한 폭군왕에게서 엄청난 마력이 터져 나왔다. 
달려가던 그룹원들의 배가 모조리 터졌다. 무려 30이 넘는 마력이 휘감긴 [삼륜환]. 저건 내가 맞아도 위험하겠는데. 
 
“물러서지 마라!” 
“모두 싸워라!” 
 
하지만 반 폭군 동맹도 만만치 않았다. 
다른 왕들은 그렇다 쳐도, [토룡왕]과 [미륵왕]은 어쨌든 [폭군왕]과 같은 서울 7왕이다. 
여러 왕들이 합심하자, 불리하던 전황도 조금씩 비등해져 갔다. 왕들은 모두 자신의 배후성과 동조율을 거의 한계치까지 높이고 있었다. 
화신들뿐만 아니라, 위인급 성좌들도 모두 필사적이었다. 
나는 손에 쥔 한수영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는 안 싸울 거냐?” 
 
내 말에 한수영이 흐흐, 웃었다. 
 
“웃어? 아직 여유가 있나 보네.” 
“네놈······ 계획대로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연산군과 다른 왕들이 싸우기 시작했으니, 그들이 지치면 네가 사인참사검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을 거야. 그렇지?” 
 
제법 근사치에 가까운 추리군.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될 거다! 텍본을 뿌린 수는 제법이었지만, 나는 네놈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오늘을 준비해 왔으니까.” 
“무슨 헛소리야?” 
“결국에는 ‘클리셰’가 이긴다는 얘기다.” 
 
허공에서 중급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다들 잘 싸우고 계시는군요. 우리 위인급 성좌님들, 아주 필사적이신데요? 암, 그래야죠. 화신들도, 성좌님들도 힘내야죠. 다들 설화급으로 올라가고 싶으시잖아요?] 
 
이죽거리는 도깨비의 목소리에, 일순 전장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래서 제가 좋은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지금부터, ‘두 번째 자격’ 시험이 시작됩니다!] 
 
+ 
 
<왕의 자격> 
 
1. 「왕좌의 주인은 그 누구보다 용맹할지니」 
― 절대 왕좌는 결코 ‘약한 왕’을 원하지 않습니다. 왕좌에 도전하기 위해, 당신은 최소 [검은 깃발]을 소유한 왕이어야 합니다. 
 
2. 「왕좌를 꿈꾸는 자는 그 욕망에도 자격이 있으니」 
― 절대 왕좌에 도전할 수 있는 ‘왕’의 숫자는 정해져 있습니다. 도전권을 얻기 위해, 당신은 주변의 다른 왕들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 
 
중급 도깨비가 스산한 미소로 웃었다. 
 
[참고로 절대 왕좌의 마지막 자격에 도전할 수 있는 왕은 오직 5명뿐입니다. 지금 남은 숫자는····· 어디 보자.] 
 
[현재 남은 왕의 수 : 14] 
 
사람들이 크게 웅성거렸다. 
 
“여, 열넷이나 된다고?” 
“바깥에 아직 왕이 남았나?”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현재 ‘히든 던전’ 내부에 있는 왕은 총 12명입니다.] 
 
나도 조금 놀랐다. 이 던전에 그렇게 많은 ‘왕’이 있을 줄이야. 
하긴, 이 ‘비동’에만 왕이 있는 건 아닐 테니까. 
 
“누구냐? 숨어 있는 왕이 누구야!” 
 
폭군왕은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비웃었다. 
 
“하하하! 서로 뒤통수를 쳐대는 꼴들이 아주 우습구나!” 
“지금은 내분을 일으킬 때가 아니다! 폭군왕한테 집중해!” 
 
왕들의 조정으로 간신히 술렁임이 회복되려는 그때. 
 
“여기다! 이놈이 왕이다!” 
 
손에 쥐고 있던 한수영의 머리가 멋대로 외쳐댔다. 
 
“내가 봤다! 이놈이 ‘깃발’을 가지고 있다!” 
“뭐?” 
 
······이것 참. 
나는 재빨리 한수영의 머리를 짓밟아 터뜨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죽어야 할 ‘나머지 왕’ 중 하나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저놈만 죽이면······.” 
 
그런데 느낌이 싸했다. 
표절 작가 녀석의 계략이라기엔, 수가 너무 얕다고나 할까. 
잠깐만, 설마? 
 
······재밌군. 그런 생각이었나? 
 
내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사이, 왕들의 뒤쪽에서 은밀하게 움직인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왕들이 아끼던 충신들이었다. 
 
푹! 푸욱! 
 
“커헉······!” 
 
얇은 소도가 등을 찌르고, 방심한 왕의 목을 갈랐다. 
 
[남은 왕의 숫자가 감소합니다.] 
[현재 남은 왕의 수 : 12] 
 
체력이 떨어져 있던 [소심왕]과 [박투왕]이 절명했고, [미륵왕]과 [토룡왕]도 기습에 상당한 타격을 받은 듯했다. 심지어 저 [폭군왕] 조차 뒤에서 달려든 세 명의 시비에게 옆구리와 허벅지를 찔렸다. 
 
“이 비천한 년들이······!” 
 
그리고 나는, 그들을 동시에 찌른 존재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배신한 인간들의 목이 동시에 떨어졌으나, 떨어진 그들의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 
떨어진 왕들의 별보석들이, 손이 빠른 누군가에 의해 사라졌다. 
 
“보석! 내 보석!” 
 
숨어 있던 [아바타]들의 손을 타고 움직인 ‘별보석’들은, 이윽고 한 사람의 손에 모두 쥐어졌다. 

“내가 말했잖아. 결국은 클리셰가 이긴다고.” 
 
허공을 밟고 날아오른 한 미소녀가, 비동의 벽감에 서서 히죽 웃었다. 
설마 저게 ‘표절 작가’ 녀석의 본체였나? 
······여자일 줄은 몰랐는데. 
그녀의 손에서 모인 일곱 개의 별 보석이 빛을 내뿜었다. 
 
[‘가짜 왕’ 한수영이 일곱 개의 별보석을 모두 획득하였습니다!] 
[일곱 개의 별보석을 제물로, 새로운 아이템을 소환합니다.] 
[‘가짜 왕’ 한수영이 ‘사인참사검’을 소환하였습니다!] 
 
결국, 표절 작가 놈이 ‘사인참사검’이 주인이 되었다. 
거기다 [가짜 왕]이라. 
놀랍게도 잘 어울리는 특성이구만. 
 
“독자 씨. 어떡하죠?” 
“아직은 괜찮습니다.” 
 
내 무덤덤한 말에 유상아는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태연해도 괜찮을까요? 저거 엄청나게 좋은 아이템이라면서요.” 
 
맞다. 실제로 S+급의 아이템이니까 좋긴 좋지.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연산군의 [삼륜환]도 무려 S급 아이템이다. 
성능 차이는 좀 나지만, 그렇게 꿀리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하하하핫! 죽어! 죽으라고!” 
 
사인참사검에서 뿜어져 나온 눈부신 마력이 전장을 휩쓸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쉽게 죽지 않았다. 통쾌하게 터져 나갈 줄 알았던 사람들은, 위태로웠지만 그녀의 마력을 꾸역꾸역 받아냈다. 
[아바타]를 다량으로 사용한 탓에 그녀의 마력이 많이 떨어져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직 세 명의 왕이 건재한 까닭이었다. 
당황한 한수영이 외쳤다. 
 
“뭐, 뭐야 이거? 왜, 왜 이렇게 약해······?” 
“죽여라! 저년을 죽이고 검을 빼앗아!” 
“으, 으아아앗! 물러서! 물러서라고!” 
 
왠지 저렇게 될 것 같았다. 
어느새 밀려난 한수영이 나와 내 일행이 있는 곳까지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내가 이죽거렸다. 
 
“클리셰 잘 깨네. 평소에도 그렇게 좀 쓰지.” 
“닥쳐!” 
“도와줄까?” 
“필요 없다!” 
 
호기롭게 외친 한수영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점점 밀려나는 게 보인다. 바보 같은 여자한테 한마디 해주고 싶다. 그 무기가 유명한 건 그 무기가 세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무기의 본래 주인이 강해서였다고. 
 
“그만 모두 죽여주마!” 
 
자신감을 되찾은 폭군왕이 공격을 개시했고, 다른 왕들도 혼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전투는 적도 아군도 없는 난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설마 아직도 헤매고 있는 건가? 
여기서 북구 지역까지 거리가 좀 있긴 해도, 그 녀석이면 충분히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인데. 

[현재 남은 왕의 수 : 11] 
 
그리고, 허공에 떠오른 알림판의 숫자가 바뀌었다. 
 
[현재 남은 왕의 수 : 10] 
 
아, 역시. 
 
[현재 남은 왕의 수 : 9] 
 
오셨구만. 
 
“뭐, 뭐야!” 
“갑자기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공포에 질린 왕들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누가 어떻게 죽는지도 모른 채 줄어드는 ‘왕’의 숫자. 
 
[현재 남은 왕의 수 : 8] 
 
마침내 숫자가 한 자리로 줄어들자, 왕들의 공포는 한계치에 달했다. 
 
“누군가가 있다! 누군가가 왕만 죽이고 있어!” 
 
반면, 오히려 즐거워하는 녀석도 있었다. 
폭군왕이었다. 
 
“하하하! 알게 뭐냐! 너희도 죽어라!” 
 
폭군왕의 [삼륜환]이 다시 불을 뿜으려는 순간, 비동의 천장이 무너지며 폭군왕이 그대로 깔렸다. 
 
콰아아아앙! 
 
가공할 마력의 폭풍이 몰아쳤고, 그 아래에 깔린 폭군왕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모든 생명체를 입자 단위로 분해시켜 버리는 엄청난 양의 마력 폭풍이 폭군왕의 전신을 그대로 으깼다. 
 
“으으······ 아아······ 으아아아악!” 
 
그리고. 
 
[현재 남은 왕의 수 : 7] 
 
냉혹한 숫자만이, 사람들의 눈앞에 남았다. 
비정상적인 정경에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몸을 떨며 주저앉았다. 
 
“뭐, 뭐야. 뭐냐고!” 
 
그 무서운 [폭군왕]을 단 한 방에, 벌레처럼 터뜨려 죽인 사내. 
매캐한 폭연 속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죽은 왕도, 살아남은 왕도. 
모두가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다리를 떨던 한수영이 공포에 질려 물러섰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문득 그녀의 아바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서울의 왕들 중 최강이 ‘폭군왕’이라고 했었지. 
아까도 생각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서울 7왕은, <선지자들>로 인해 왕이 되지 못했던 한동훈을 포함해서 총 5명이었다. 
 
은둔한 그림자의 왕 한동훈. 
미희왕 민지원. 
미륵왕 차상경. 
토룡왕 구태성. 
그리고 폭군왕 정용후. 
 
여기서 아직 등장하지 않은 ‘중립의 왕’을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자리는 하나가 빈다. 
그렇다면 남은 한 자리는 누구의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사실, 나는 그 어떤 왕보다도 이 녀석을 먼저 만났으니까. 
분노한 놈의 목소리가 비동 전체에 울려 퍼졌다. 
 
“김독자······.” 
 
나는 미소하며 녀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녀석의 등 뒤에서 흩날리는 [검은색 깃발]. 
 
“넌 뒤졌어······.” 
 
서울 7왕 중 최강은, 당연히 패왕(霸王) 유중혁이다.
 
 
 
 
 
< Episode 14. 왕좌의 주인 (5) > 끝

< Episode 14. 왕좌의 주인 (6) >
 
 
 
 
 
 
역시 주인공은 주인공이다. 
강북구까지 떨어트려 놨는데 벌써 검은색 깃발이라니. 
대표가 아닌 자가 대표의 깃발을 빼앗으면 히든 시나리오 ‘혁명의 길’이 열린다. 놈은 아마 그걸 알고 있었을 테니, 오는 길에 다른 역의 대표를 죽여서 왕의 자리를 얻었을 것이다. 
 
쿠구구구구. 
 
그나저나 유중혁이 저렇게 빡쳐 있는 걸 보면, 다행히 이지혜와 정희원이 제대로 일을 처리한 모양인데. 
나는 몇 걸음을 물러서며 한수영을 바라보았다. 
 
“야, 빨리 그 칼 내놔.” 
“시, 싫어.” 
“여기서 다 죽고 싶어?” 
 
한수영의 눈이 흔들리고, 유중혁의 신형이 움직였다. 
나는 외쳤다. 
 
“길영아!” 
 
그것을 신호로, 기다렸다는 듯 이길영의 눈이 백색으로 물들었다. 
 
그오오오오오―! 
 
비동의 위쪽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뭔가가 쿵쾅쿵쾅 던전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비동의 한쪽 벽면에서 거대 사마귀의 낫이 날아들었다. 
 
[6급 충왕종, 티타노프테라가 출현했습니다!] 
 
역시 깽판에는 이길영의 능력이 최고다. 
 
꽈르르릉! 
 
거대 충왕종의 괴력에 비동 전체가 흔들렸다. 
당황한 유중혁이 뒤를 돌아보는 사이, 나는 한수영의 작은 뒤통수를 갈겼다. 
 
“악, 아앗······!” 
 
신음과 함께 한수영이 ‘사인참사검’을 놓쳤다. 나는 검을 주워든 뒤, 한수영이 목에 두르고 있던 깃발도 덤으로 빼앗았다. 
 
[당신은 ‘홍대입구 그룹’의 깃발을 획득했습니다.] 
[당신의 ‘보라색 깃발’이 ‘검은색 깃발’의 누적 공적치를 흡수합니다.] 
[당신의 ‘보라색 깃발’이 ‘검은색 깃발’로 진화합니다.] 
[이제부터 ‘검은색 깃발’의 특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첫 번째 ‘왕의 자격’을 완수하였습니다.] 
 
[현재 남은 왕의 수 : 6] 
 
나는 곧장 폭군왕 쪽을 향해 달렸다. 
폭군왕은 돌무더기 사이에 깔려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폭군왕의 육신은 반죽처럼 뭉개져 있었다. 처참했다. 애초에 죽이려고 벼르고 있던 놈이지만, 이렇게 어이없게 죽을 줄이야. 
뒤쪽에서 한수영이 처량하게 외쳤다. 
 
“이 도둑놈 새끼야!” 
 
나는 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바닥을 나뒹구는 폭군왕의 아이템들을 재빨리 쓸어 담았다. 
 
[아이템, ‘삼륜환’을 획득하였습니다.] 
[아이템, ‘용준(龍樽)’을 획득하였습니다.] 
 
재생의 항아리 ‘용준’. 
폭군왕은 7인 던전을 클리어하고 들어왔던 모양이다. 
 
“······김독자!” 
 
유중혁이 무서운 속도로 나를 추격해왔다. 민첩이 30이나 되는데도, 녀석과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지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살피다가, 어쩔 수 없이 가장 가까이 있는 왕의 뒤로 숨었다. 
 
“뭐, 뭐야!” 
 
후백제의 왕, 구태성이었다. 
 
“크아아악!” 
 
유중혁의 가차 없는 일격이 녀석의 머리를 갈겼고, 녀석의 깃발은 고스란히 유중혁의 것이 되었다. 
 
[성좌, 한남군 개국공(漢南郡 開國公)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견훤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다음을 기약하시길. 
그쯤에서 나는 도망가는 것을 멈추고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중혁아, 잠깐 멈춰 봐. 우리 대화로 해결하자.” 
“그 쪽지.” 
“쪽지?” 
“내 여동생.” 
 
두 단어였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기엔 충분했다. 
다행히, 이지혜는 무사히 일을 처리했다. 
쪽지는 적당한 시기에 유중혁에게 간 것이다. 
 
“네 여동생 뭐?” 
“내 여동생을 어디에 숨겼지?” 
“무슨 소리야?” 
 
[등장인물 ‘유중혁’이 ‘거짓 간파 Lv.6’를 사용 중입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당신의 말이 거짓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런. 
 
“당장 말하지 않으면, 네놈은 정말로 죽는다.” 
 
[거짓 간파]가 없어도 저게 진실인 건 알 수 있었다. 
 
유중혁이 뒤늦게 비동에 도착한 것은, 전적으로 내 계략 때문이었다. 
나는 녀석이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북쪽으로 가도록 유도했고, 그 때문에 유중혁은 헛된 시간을 북쪽 지역 탐색에 허비했다. 
아직 유중혁의 인격이 덜 마모된 3회차였기에 가능했던 작전. 
비겁하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본래의 ‘3회차’보다도 훨씬 강해진 유중혁이 모든 걸 도외시하고 왕들의 전쟁에 참전한다면, 이 시나리오는 녀석의 페이스로 끝나버렸을 테니까. 
그런 식이 되어서는, 결코 내가 원하는 결말로 향할 수 없다. 
 
“······좋아. 근데 일단 칼은 좀 내려놓고 말하자. 막말로 내가 진짜 나쁜 놈이면 어쩌려고 그래?” 
“가족을 인질로 삼을 셈인가?” 
“또 오버한다. 그런 말까진 안 했잖아?” 
 
애초에 인질 개념이 성립하지도 않는다. 
막말로 이 녀석이 사망회귀를 시전해버리면 모두 끝장이니까. 
 
“그럼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왜 그랬을 것 같아?” 
 
내가 시간을 끌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유중혁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역시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그만 죽어라.” 
 
유중혁의 검이 치켜 올려진 순간,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여러분들, 진정하세요. 벌써 싸우고들 계시면 어떡합니까? 어디보자, 자격은 모두 충족하셨군요.] 
 
중급 도깨비. 이제야 나타나셨구만. 
그제야 유중혁도 허공에 떠 있는 알림판을 확인했다. 
 
[현재 남은 왕의 수 : 5] 
[‘마지막 왕의 자격’이 시작됩니다.] 
 
나와 유중혁을 비롯해, 남은 왕들의 몸이 강제로 공간 이동을 시작했다. 
 
“김독······!” 
 
뒤늦게 뻗어진 유중혁의 검은 내게 닿지 못했다. 
드디어 이 시나리오의 마지막 페이즈까지 온 것이다. 
 
[자격을 갖춘 왕들이 마지막 시험 장소로 이동합니다.] 
 
흐물거리며 사위의 정경이 바뀌었다. 몸이 쏜살같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퉁!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에 머리를 부딪쳤다. 번뜩 정신이 든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당신은 ‘마지막 왕의 자격’의 후보에서 제외됩니다.] 
 
······뭐야? 
 
주변을 돌아보니, 나는 광화문의 도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방금 내가 부딪친 곳에는 운동장 크기의 결계가 쳐져 있었다. 저 결계의 중심에는, 이 시나리오의 마지막 보상인 ‘절대 왕좌’가 있을 것이었다. 
 
난 왜 저기 못 들어간 거지? 
 
[하하핫! 저런, 저런! 큰 그림만 보고 있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군요!] 
 
웃음소리에 허공을 올려다보니, 조소를 머금은 중급 도깨비의 얼굴이 보였다. 설마 저 자식이 농간을 부린 건가 싶었는데, 뜻밖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당신은 네 번째 시나리오의 ‘표적 역’을 점거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왕의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표적 역’을 점거하세요.] 
[당신 그룹의 ‘표적 역’은 ‘창신 역’입니다.] 
 
아······ 왕들에 대해서만 생각하다 보니 깜빡 잊고 있었다. 
그걸 아직 안 했었지. 

[이전 페이즈를 제대로 클리어하지 않으면 마지막 페이즈는 수행할 수 없습니다. 당연한 건데,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습니까?] 
 
결계 안에서는 벌써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면, 지금까지 해온 일이 꼼짝없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창신역으로 달려가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망할. 
거기까지 달려갔다 오면, 이미 모든 시나리오는 끝나 있을 텐데? 
 
“독자 씨!” 
 
멀리서 유상아가 쓰러진 이길영을 업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일행이 더 있었다. 응? 
 
“희원 씨?” 
 
정희원이 낯선 여자아이의 손을 꼭 쥔 채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진짜 우리 오빠 여기 있어염?” 
“그렇다니까. 몇 번을 말해.” 
“근데, 나 배고픈데.” 
 
정희원은 지금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서울 강북 지역에서 한 여자아이를 구한 뒤, 창신 역에서 대기할 것. 
그것이 정희원이 이번 시나리오에서 맡은 임무였다. 
 
“희원 씨, 여긴 왜 왔습니까? 창신 역에서 대기하고 계시라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아니 이 답답한······. 내가 그걸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어요? 게다가 얘, 오늘 아침부터 굶었단 말이에요. 여동생이라면서 걱정도 안 돼요?” 
 
정희원의 말에 여자아이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 우리 오빠 아닌데염.” 
“어?” 
“우리 오빠보다 못생겼어염.” 
 
망할 꼬마가. 
정희원이 당황하며 나와 여자아이를 번갈아 보았다. 
 
“어? 독자 씨 여동생 아니었어요? 난 그래서 구하라고 한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그럼 누구예요, 얘는?” 
 
아마 정희원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대체 누가 저 여자아이를 그 사이코패스의 여동생이라고 생각할까. 
아이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허탈한 마음으로 그 소리를 듣다가, 헛웃음이 나왔다. 
······설마 내 완벽한 계획이 여기서 무너지나? 
 
“독자 씨, 어디 가요?” 
“창신 역 점거하러 갑니다.” 
 
늦더라도 도전해 보는 수밖에. 
장거리 텔레포트 스크롤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중급 도깨비가 보고 있어서 도깨비 보따리를 열어 볼 수도 없고. 
그런데, 나를 보던 정희원이 입을 열었다. 
 
“거길 왜 가요?” 
“예?” 
“얘, 그거 꺼내 봐. 아까 언니가 준 거 있지?” 
“넴!” 

유중혁의 동생, 유미아가 입속에 손을 넣었다. 잠시 후, 그녀의 입이 비정상적으로 커지더니, 역시나 비정상적인 크기의 돌덩어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유미아의 전용 스킬인 [인벤토리]였다. 나는 돌덩어리를 향해 다가갔다. 
 
“이게 뭡니까?” 
“뭐겠어요?” 
 
나는 덩어리의 반질반질한 윗면을 살폈다. 
그러자, 무언가를 꽂을 수 있는 작은 홈이 보였다. 
 
······생각지도 못했다. 이런 게 가능하다고? 
 
‘멸살법’의 어떤 회차에서도 이런 짓을 한 사람은 없었다. 
정희원이 뻔뻔하게 말했다. 
 
“역을 점거하는 데는 ‘깃발 꽂이’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요?” 
 
대체 어떤 무식한 인간이 이런 걸 생각해 낼까. 
정희원은, ‘창신 역’의 ‘깃발 꽂이’가 있는 바닥을 통째로 도려내 왔다. 
 
[성좌, ‘달걀을 세우는 모험가’가 정희원의 발상에 감탄합니다.] 
 
나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왜요, 뭐 잘못됐어요?” 
“······아뇨.” 
“그럼 뭘 멍하니 있어요? 어서 꽂고 가봐야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깃발을 꺼냈다. 
 
[당신의 그룹은 ‘창신 역’을 점거하였습니다.] 
[‘깃발 쟁탈전’의 보상으로 2000코인을 받았습니다!] 
 
된다. 진짜로 된다. 
 
[당신의 그룹은 ‘표적 역’을 확보하였습니다.] 
[당신의 육체가 ‘마지막 왕의 자격’의 전장으로 이동합니다.] 
 
슈우우욱― 하는 느낌과 함께, 다시 의식이 깜빡였다. 
머릿속으로 메시지가 떠올랐고, 왕의 자격 조건이 추가되었다. 
 
+ 
 
<왕의 자격> 
 
1. 「왕좌의 주인은 그 누구보다 용맹할지니」 
― 절대 왕좌는 결코 ‘약한 왕’을 원하지 않습니다. 왕좌에 도전하기 위해, 당신은 최소 [검은 깃발]을 소유한 왕이어야 합니다. 
 
2. 「왕좌를 꿈꾸는 자는 그 욕망에도 자격이 있으니」 
― 절대 왕좌에 도전할 수 있는 ‘왕’의 숫자는 정해져 있습니다. 도전권을 얻기 위해, 당신은 주변의 다른 왕들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3. 「그러므로 단 하나의 왕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우뚝 선 자로」 
― 절대 왕좌에 도전할 수 있는 ‘왕’은 오직 자신의 몸뚱이 하나로 강함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성좌, ‘해상전신’이 침착하게 상황을 주시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위인급 성좌들을 응원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낄낄대며 귀를 팝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위인급 성좌들을 향해 코를 후빕니다.] 
 
여느 때와는 달리, 성좌들도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성좌라고 해서 다 같은 급은 아니다. 
위인급과 설화급은 어린아이와 어른만큼이나 격차가 크니까. 
방송을 시청하는 성좌들의 반응이 엇갈리는 것도 그래서였다. 
어른들이 애들 숨바꼭질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듯, 설화급 이상의 성좌들에게 이번 시나리오는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위인급 성좌들에겐 다르다. 
 
이번 시나리오에서 승리한 ‘위인급 성좌’는, ‘절대 왕좌’에 오르며 자신의 새로운 ‘설화’를 쌓을 수 있다. ‘왕의 자격’ 시나리오가 시작되면서 위인왕들이 조급해 보였던 건, 모두 이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마침내 [왕의 전장]이 보였다. 
 
[지금부터 모든 왕은 배후성의 지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모든 아이템의 공격력 및 방어력이 제한됩니다.] 
[지금부터 모든 스킬 및 성흔, 아이템의 특수 옵션이 봉인됩니다.] 
[지금부터 모든 왕의 종합 능력치가 10/10/10/10/10으로 변화합니다.] 
 
[‘마지막 왕의 자격’은 최후의 일인이 남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 Episode 14. 왕좌의 주인 (6) > 끝

< Episode 15. 왕이 없는 세계 (1) >
 
 
 
 
 
Episode 15. 왕이 없는 세계 
 
 
 
마지막 왕의 시험.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몸뚱이 하나로 이겨내야 하는 극한의 시련이었다. 
광화문 바닥은 엉망으로 패여 있었다. 
 
투콱! 퍼억! 
 
중앙의 ‘절대 왕좌’를 사이에 두고, 왕들이 한데 엉켜 싸우고 있었다. 
 
미희왕 민지원. 
미륵왕 차상경. 
패왕 유중혁. 
그리고 한쪽 구석에 서 있는 저 중년인은······. 
 
그렇군, ‘중립의 왕’인가. 
 
나와 눈이 마주친 ‘중립의 왕’이 양손을 들어 보였다. 
 
[‘중립의 왕’ 전일도는 현재 기권 상태입니다.] 
 
역시, 그 이름답게 중립의 왕은 왕위에 욕심이 없다. 
욕심이 있는 것은 남은 셋뿐. 
그 셋 중 하나가 유중혁이었으니, 본래라면 1분도 채 되지 않아 끝났어야 할 싸움이었다. 어디까지나 본래라면 말이다. 
 
“죽어라, 마구니야!” 
 
미륵왕 차상경의 법봉이 허공을 갈랐고, 유중혁의 발차기가 차상경의 복부를 걷어찼다. 
 
“큭!” 
 
그러나 차상경은 생각보다 별 타격을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두의 능력치가 평균 10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스킬도 봉인되었으니 결국은 육체의 기억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이야기였고, 때문에 저 유중혁도 금방 다른 왕들을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배후에서 눈치를 보던 민지원이 나를 발견했다. 
나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만나게 됐군요.” 
“······그러네요. 당신과는 싸우고 싶지 않았는데.” 
 
이곳까지 온 것을 보면, 민지원 역시 모든 왕의 자격을 완수했다는 것이겠지. 대단한 일이다. 솔직히, 그녀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으니까. 
 
“기권하지 않으시면 공격할 겁니다.” 
“해 보세요. 만만치 않을걸요?” 
 
스킬도, 성흔도 없는 평균 능력치 10의 싸움. 조금 전까지 도시를 부수며 날아다니던 왕들의 전투라기엔 너무나 초라한 정경이었다. 
퍽, 하는 소리가 나더니 차상경이 비명을 질렀다. 
 
“커헉! 어, 어째서...?” 

유중혁의 주먹을 얻어맞은 차상경이 고통스럽게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분명 아까 전까진 대등한 싸움이었는데, 조금씩 양상이 변하고 있었다. 
스킬도, 성흔도 쓸 수 없는데 유중혁의 공격은 점점 더 빨라지고,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단순히 유중혁의 전투 감각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민지원도 놀란 눈치였다. 
 
“······어떻게?” 
 
내 기억이 맞다면, 유중혁은 이번 회차에서 ‘마지막 페이즈’의 허점을 깨닫게 된다. 
아마 유중혁의 머릿속에는 지금쯤 이런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을 것이다. 
 
[체력에 300코인을 투자하였습니다.] 
[민첩에 300코인을 투자하였습니다.] 
[근력에 300코인을 투자하였습니다.] 
 
우습게도, 이 전장은 ‘모든 것을 통제했지만’ 단 하나 통제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각자가 가진 코인이었다. 
 
[성좌, ‘매금지존’이 시나리오의 형평성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중급 도깨비가 웃었다. 
 
[하하, 뭐가 의문이시죠? 각자가 가진 코인을 사용하는 건 당연한 권리입니다. 적어도 ‘코인’은 화신들 스스로가 열심히 뛰어 번 것들이니까요. 그동안 열심히 코인을 모았는데, 쓸 기회가 있어야지요.] 
 
유중혁은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코인으로 능력치를 올리고 있었다. 
 
[아, 물론 여기서 코인으로 올린 능력치는 시나리오가 끝난 후 초기화됩니다. 그러니 꼭 주의해서 쓰세요! 코인을 허공에 내다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하하핫!] 
 
중급 도깨비의 말을 들은 민지원과 차상경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마 그들에겐 남은 코인이 거의 없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왕들이 치고받는 전장에서 코인을 아낄 겨를 따윈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유중혁은 달랐다. 
 
처음부터 온갖 히든 시나리오를 돌파하며 성장한 유중혁은 항상 적당량의 코인을 예비로 가지고 다녔다. 
본래 3회차의 유중혁은 지금 이 시점에서 약 3만 코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원래보다 더 많은 코인을 얻었을 테니······ 4만 정도 가지고 있으려나? 
퍼어억, 하는 소리와 함께 차상경의 육체가 걸레짝이 되어 날아갔다. 
 
[‘미륵왕’ 차상경이 전투 불능에 빠졌습니다.] 
 
유중혁이 근처에 있던 민지원을 바라보았다. 흠칫 놀란 민지원이 황급히 양손을 들었다. 
 
“······기권하겠어요.” 
 
[‘미희왕’ 민지원이 기권합니다.] 
 
마침내 유중혁이 나를 보았다. 
분노로 가득 차 있던 녀석의 눈동자가 차분해져 있었다. 
이해는 간다. 
‘절대 왕좌’만 차지한다면 모든 왕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으니, 내게 여동생을 돌려받는 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과연 그렇게 될까? 
 
“유중혁.” 
 
우리는 서로를 향해 검을 뽑았다. 
어떤 스킬도 사용할 수 없었기에, 나는 오로지 내 육체의 기억, 그리고 내가 가진 한 줌의 종합 능력치에 의존해야 했다. 
 
휘이익! 
 
처음으로 유중혁의 칼날이 눈에 보였다. 
분명 페이크겠지. 
녀석은 지금 내 능력치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얼마나 코인이 남았는지를 떠보고 있는 것이다. 
역시 신중한 녀석이다. 
최소한의 코인만을 투자해서 이기려는 속셈이겠지. 
 
하지만 그 자만심이, 이번엔 너를 패배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 ‘서울’에 있는 그 어떤 ‘왕’도 나보다 코인이 많지는 않을 테니까. 
 
[보유 코인 : 80850 C] 
 
그도 그럴 게, 대체 누가 8만 코인까지 버틸 생각을 하겠어? 
나는 달려오는 유중혁을 향해 씩 웃어주었다. 
 
“살살 칠 테니까, 죽지 말라고.” 
 
이제 풀매도 익절의 시간이다. 
나는 지금껏 코인을 사용하지 못한 한을 풀 듯이, 대량의 코인을 ‘근력’에 투자했다. 
 
[‘근력’에 4000코인을 투자했습니다.] 
[근력 Lv.10 -> 근력 Lv.20] 
[‘근력’에 5000코인을 투자했습니다.] 
[근력 Lv.20 -> 근력 Lv.30] 
[‘근력’에 6000코인을 투자했습니다.] 
[근력 Lv.30 -> 근력 Lv.40] 
 
. 
. 
 
[‘근력’에 11000코인을 투자했습니다.] 
[근력 Lv.80 -> 근력 Lv.90] 
[‘근력’에 12000코인을 투자했습니다.] 
[근력 Lv.90 -> 근력 Lv.100] 
 
[총 72000코인을 소모했습니다.] 
 
[당신의 ‘근력’이 인간의 가능성을 돌파합니다.] 
[가공할 업적! 당신은 최초로 근력 세 자리 레벨을 달성하였습니다.] 
[30000코인을 보상으로 획득합니다.] 
 
나는 주먹에 담긴 힘을 조절했다. 근력 100의 일격은 어마어마하다. 잘못해서 유중혁이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내 주먹을 둘러싼 공간들이 미세하게 휘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멸살법’에 따르면, 모든 종합 능력치는 세 자리를 돌파하는 순간부터 차원이 다른 파괴력을 가지게 된다. 
 
어떤 느낌이냐고? 
당연히, 죽여 주는 느낌이지. 
 
억 단위의 수표를 주먹 한가득 움켜쥔 느낌이랄까. 
 
눈이 커진 유중혁이 황급히 코인을 사용하는 게 보였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돈 가방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소닉붐이 발생했고. 
유중혁은 마치 방망이에 직격당한 야구공처럼 하늘로 쏘아졌다. 
 
안타깝게도 이 경기장은 홈런이 불가능했다. 날아간 유중혁은 결계에 한 번 부딪치고, 맞은편의 또 다른 결계에 부딪쳤으며, 그렇게 대여섯 번이나 핑퐁을 반복한 뒤에야 간신히 땅바닥에 처박혔다. 
 
······저거 잘못하면 죽겠는데? 
 
나는 조금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유중혁을 향해 달려갔다. 
젠장, 내가 왜 그랬지? 조금만 더 힘을 뺄걸. 
바닥에 푹 꺼진 유중혁을 조심스레 꺼냈다. 그런데. 
 
아, 이래서 주인공은. 
 
유중혁이 눈을 부릅 뜬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근력 100의 일격을 처맞고도 아직 제정신이라고? 
 
“······유중혁?” 
“······.” 
“중혁아?” 
“······.” 
 
녀석의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 자식, 설마 눈뜬 채로 기절 한 거야? 
내가 너무 세게 때렸나? 
아니지, 앞으로 내가 언제 유중혁을 이렇게 때려 보겠어. 
 
“그러게 인마, 평소에 잘했어야지. 어떻게 볼 때마다 죽인다는 말부터 하냐?” 
 
평소 밉상이던 얼굴을 찰싹찰싹 때려 줬다. 어쩐지 볼을 때릴 때마다 눈깔이 움직이는 것 같아서 신경은 쓰였지만······. 
어쨌거나, 숨은 붙어 있었다. 
전신의 뼈가 모두 부러지고, 칠공에서 피를 쏟고 있기는 했지만······. 
이곳에서는 ‘기사회생’ 스킬을 사용할 수 없으니, 자칫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일을 빨리 진행해야 했다. 
 
[‘패왕’ 유중혁이 전투불능이 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절대 왕좌’의 모든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허공에서 결계가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코인으로 올린 임시 능력치가 회수됩니다.] 
[왕들에게 걸려 있던 모든 종류의 제약이 사라집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과한 탄산에 털을 뾰족하게 세웁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존버에 박수를 보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인내심에 감탄합니다.] 
[4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이어서 위인급 성좌들의 메시지도 들려왔다. 
 
[성좌, ‘매금지존’이 원통해합니다.] 
[성좌, ‘외눈 미륵’이 안대를 집어던집니다.] 
[성좌, ‘한남군 개국공’이 당신을 원망합니다.] 
 
역시나, 후삼국의 모든 왕들이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설화급’으로 도약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를 놓쳤으니, 아쉽기도 할 것이다. 
 
[······오, 의외의 승자가 나타났군요.] 
 
중급 도깨비는 어쩐지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놈도 내가 이길 줄은 몰랐겠지. 
그런데 나는 이겼다. 
 
[뭐······ 좋습니다. 결과는 결과니까요. 자, 서울의 모든 화신들에게 알립니다. 지금 막, ‘절대 왕좌’의 새로운 주인이 탄생했습니다!] 
 
나는 시스템 메시지를 띄우려는 중급 도깨비를 제지했다. 
 
“잠깐만 기다려.” 
 
[······뭡니까?] 
 
중급 도깨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무 급하잖아. 난 아직 왕좌에 오르지도 않았는데 대뜸 선언부터 하면 어떡해? 내 의사도 물어봐야 하는 거 아냐?” 
 
[이제부터 오를 테니, 상관없지 않습니까?] 
 
나는 ‘절대 왕좌’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 순간만큼은 서울 돔을 관찰하는 모든 성좌들이 내게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늘 높이 치솟은 ‘절대 왕좌’가 천천히 나를 향해 내려왔다. 
마치 오랫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예의 바른 황금빛을 뽐내며. 
나는 중급 도깨비를 향해 물었다. 
 
“이걸로 뭘 할 수 있지?”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짧았지만, 무서운 말이었다. 
 
[‘절대 왕좌’는 이름 그대로의 아이템입니다. 그 왕좌에 앉아 있는 한, 당신은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될 수 있는 거죠. 당신이 지배하는 땅 위의 어떤 백성도 당신을 거스를 수 없을 것이며, 모두가 당신 앞에 머리를 조아릴 것입니다!] 
 
도깨비의 그 설명에, 몇몇 사람들이 내게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부럽기도 하겠지. 
모두가 이 자리만 탐하며 여기까지 달려왔으니까. 
 
[성좌, ‘매금지존’이 입맛을 다십니다.] 
 
심지어 저 성좌들조차도······. 
정말 안타깝고, 또 기묘한 일이다. 
이 아이템의 진짜 정체가 뭔지 알면서도, 저렇게 부러워할 수 있다는 게. 
나는 정말 성좌라는 족속들이 싫다. 
 
“그게 전부냐?” 
 
[······예?] 
 
“너무 말도 안 되게 좋은 능력만 붙어 있잖아. 내가 지배하는 ‘땅’ 위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누린다는 게.” 
 
[고생을 했으면, 보답을 받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도달한 왕좌니까······.] 
 
“아하, 그래서 이 왕좌는 무려 ‘개연성의 제약’도 없이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다?” 
 
[무슨······?] 
 
“너 거짓말 되게 잘한다. 도깨비라 그런가? 그렇게 사기 쳐도 관리국에서 아무 말 안 하냐?” 
 
일순 표정 관리가 안 되던 중급 도깨비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허공의 건너편에서 비형이 죽을상을 하고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드디어 돌아버렸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피곤한 설전은 그만두죠. 그만 시나리오 끝내야 하니까. 자, 어서 왕좌에 앉으세요. 한 번만 더 헛소릴 하면 ‘절대 왕좌’를 부숴버릴 수도 있습니다.] 
 
“······아, 그거 말인데. 맘대로 해.” 
 
[예?] 
 
나는 도깨비를 한 번 바라보고, 멍하니 입을 벌린 사람들을 돌아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절대 왕좌’에 오르지 않겠다.” 
 
무서운 정적이 광화문 일대를 휩쓸었다.
 
 
 
 
 
< Episode 15. 왕이 없는 세계 (1) > 끝

< Episode 15. 왕이 없는 세계 (2) >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이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절대 왕좌에서 솟아난 빛이 하늘에 닿아 있었다. 
빛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는 두터운 먹구름들. 
다섯 번째 시나리오, 그레이트 홀(Great hall)의 징조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중급 도깨비가 입을 열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왕좌, 안 받겠다고.” 
 
[왜 그런 심술을 부리는지 모르겠군요. 이럴 시간에 1코인이라도 더 버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아까 코인도 엄청나게 썼을 텐데요? 순순히 보상을 받으세요. 저 
‘절대 왕좌’의 힘이 없다면, 서울 돔은 결코 ‘다섯 번째 시나리오’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겁니다.] 
 
도깨비의 말에 겁을 먹었는지, 광화문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뭐야? 쟨 뭔 생각을 하는 건데?” 
“잔소리 말고 빨리 앉기나 해!” 
“젠장, 차라리 내가 앉았더라면······!” 
 
자신의 뜻대로 되고 있다고 여겼는지, 도깨비는 계속해서 말했다. 
 
[저 왕좌는 당신이 원하는 것 이상을 줄 수 있습니다. 저 왕좌에 앉는 것만으로 당신의 ‘설화’가 쌓일 것이며, 당신과 계약한 배후성들은 격이 상승할 것입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는 모양이군요?] 
 
실제로 내 귓가에는 아까부터 성좌들의 아우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성좌, ‘달걀을 세우는 모험가’가 당신의 배후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좌, ‘서애일필’이 당신의 배후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 
 
[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중급 도깨비는 차가운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미리 경고해두지만, 저는 하급 도깨비들과는 다릅니다. 어설픈 잔꾀가 통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절대 왕좌’를 내려다보았다. 
도깨비의 말마따나, ‘절대 왕좌’를 여기서 얻지 못하면, ‘다섯 번째 시나리오’의 클리어는 어려워진다. 
하지만 나는 도깨비가 말하지 않은 것도 알고 있었다. 
이 ‘절대 왕좌’를 단 한 번이라도 사용하면, 나는 시나리오의 결말에 결코 도달할 수 없게 된다. 
원작의 유중혁도 14회차에서야 이것을 간신히 눈치챘다. 
이 ‘절대 왕좌’는 태생부터가 그런 물건이기 때문이다. 
 
“대체 왜 왕을 안 하겠다는 거야!” 
 
군중 사이에서 흥분한 사람이 나타났다. 숨을 씩씩 내뱉으며, 자신의 삶이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내게 삿대질을 하는 사내. 
나는 사내를 향해 되물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군요. 저의 뭘 믿고 ‘왕’을 시키려는 겁니까?” 
“뭣?” 
“내가 왕이 된 후에 당신을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벌어진 사내의 입술이 순간 굳어졌다. 
나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들 전부 마찬가집니다. 벌써 잊었습니까? 우리는 원래 왕국에 살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째서 벌써 왕국의 백성들처럼 굴고 있는 겁니까?” 
 
내가 왕이 되기 싫은 이유? 
간단하다. 
 
“나는, 당신들처럼 추한 인간들을 대표하는 왕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나는 하늘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당신들처럼 추잡한 성좌들을 배후성으로 두고 싶지도 않고요.” 
 
이어서, 나는 왕좌를 보았다. 
 
“그러니 나는 ‘절대 왕좌’에 앉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리고 거의 동시에, 칼을 뽑아 들었다. 
 
“다른 사람이 왕좌에 앉도록 허락하지도 않을 겁니다.” 
 
누군가가 앉는다는 것은, 곧 누군가는 앉지 못한다는 의미다. 
중급 도깨비의 눈에서 차가운 불길이 일었다. 
 
[그쯤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전 참을성이 그리 좋지 않으니까······.] 
 
나는 그런 도깨비를 똑바로 쏘아보며, 말을 계속했다. 
 
“대체 언제까지 도깨비들의 ‘시나리오’에 무력하게 끌려다닐 겁니까? 누군가가 ‘절대 왕좌’에 앉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당신들은 조금도 모르는 겁니까?” 
 
한 번 ‘복종’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그 ‘복종’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한반도의 성좌들. 당신들도 마찬가집니다. 성좌라고 해서 모두가 같지 않다는 건 잘 압니다. 어떤 성좌는 격이 낮고, 또 어떤 성좌는 격이 높지요.” 
 
성좌들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있다. 
성좌들이 화신을 구경하듯, 어떤 성좌들은 다른 성좌들은 구경한다. 
정확히는, 격이 낮은 성좌들을. 
 
“하지만 이제 충분하지 않습니까? 당신들은 대체 언제까지 이 땅을 불행한 위인들의 각축장으로 만들 겁니까?” 
 
[성좌, ‘외눈 미륵’이 침음합니다.] 
 
“힘들게 역사를 쌓아 위인급 성좌가 되고, 설화를 쌓아 설화급 성좌가 되고······ 그래서 다음엔 또 뭘 어쩔 겁니까? 더 높은 하늘의, 더 빛나는 별이 된 다음엔? 당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얼마나 이 땅의 후손들을 이용해야 성이 차겠습니까?” 
 
[성좌, ‘매금지존’이 침묵합니다.] 
 
잠자코 있던 중급 도깨비가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더이상은 좌시할 수 없겠군요.] 
 
그 말과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도착했다.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서브 시나리오 ― 강제 계승식> 
 
분류 : 서브 
난이도 : B 
클리어 조건 : 왕좌에 앉지 않으려는 화신 ‘김독자’를 제압해, 그를 왕좌에 앉히십시오. 
제한시간 : 30분 
보상 : 6000코인 
실패시 : ― 
 
+ 
 
그래, 결국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잠깐이나마 내 말을 듣고 흔들리던 사람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도깨비의 말대로다. 저 사람들도, 나도. 아무리 말을 번지르르 해봤자, 고작 몇 코인에 양심을 파는 버러지에 불과하니까.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지나갈 수 있으면 지나가 봐.” 
 
내 앞을 막고 선 여자가 있었다. 
으르렁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걸음이 주춤거렸다. 
정희원이었다. 
 
“세계가 어떻게 되든,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는 거예요.” 
 
어느새 유상아도 다가와 있었다. 망치를 든 이길영도, 기다렸다는 듯 내 뒤를 지키고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정민섭과 이성국도 다가왔다. 
 
“······가끔 보면 대표님이 유중혁보다 더 주인공 같습니다.” 
“유중혁도 이런 미친 짓은 안 하는데······.” 
 
거기에 의외의 인물들도 나타났다. 
 
“이번 한 번만 도와주는 거예요.” 
“짐의 관심법으로 보건대, 설득력 있는 소리였네.” 
 
미희왕 민지원과, 미륵왕 차상경까지. 
내 말의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가 변하긴 한 것이다. 
그것이 설령, 이 세계에서 한 줌도 채 되지 않는 가능성이라 해도. 
 
[버러지들이 잘들 노는군······ 뭣들 하고 있습니까? 당장 끌어내세요!] 
 
사람들이 왕좌를 향해 달려왔다. 
바로 곁에서 사람들의 대열을 밀어내며, 정희원이 물었다. 
 
“독자 씨, 뭔가 생각이 있는 거죠?” 
“네.” 
“우리가 뭘 하면 돼요?” 
“시간을 끌어 주세요. 제가 이 ‘왕좌’를 부술 때까지.” 
 
새로운 시나리오의 길이, 이 ‘왕좌’ 안에 들어있었다. 
나는 품속에서 한 자루의 검을 꺼내 들었다. 
군중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사인참사검이다!” 

사인참사검은 S+급 아이템이다. 
하지만, 특정한 조건만 만족하면 한순간 ‘성유물’로 바꿀 수도 있는 아이템이었다. 왜냐하면 이 사인참사검은, 위인급 성좌들이 자신의 혼을 다해 벼려낸 아이템이니까. 
 
[‘간평의’의 특수 옵션, ‘별의 메아리’를 발동합니다.] 
[‘별의 메아리’를 통해 당신은 위인급 성좌의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성좌를 호명하겠다.” 
 
[별들의 흐름 속에 위인급 성좌들이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주문을 외우듯, 성좌들의 수식언을 불렀다. 
 
“나는 ‘북두칠성의 첫 번째 성군’을 원한다.” 
 
탐랑(貪狼) 성군. 
 
“나는 ‘북두칠성의 두 번째 성군’을 원한다.” 
 
거문(巨文) 성군. 
 
“나는 ‘북두칠성의 세 번째 성군’을 원한다.” 
 
녹존(祿存) 성군. 
 
“나는 ‘북두칠성의 네 번째 성군’을 원한다.” 
 
문곡(文曲) 성군. 
 
“나는 ‘북두칠성의 다섯 번째 성군’을 원한다.” 
 
염정(廉貞) 성군. 
 
“나는 ‘북두칠성의 여섯 번째 성군’을 원한다.” 
 
무곡(武曲) 성군. 
 
[별들의 운항이 시작됩니다.] 
[여섯 개의 성좌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천반의 모든 별자리가 사라지자, 머릿속이 만원 지하철처럼 갑갑해졌다. 현기증에 비틀거렸더니, 코와 귀에서 동시에 피가 흘러나왔다. 생각을 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여섯 성좌들과 동시에 접촉하자 뇌에 과부하가 걸려버린 것이다. 북두의 성군들이 말했다. 
 
[그대는 대체 무슨 생각인가?] 
[그렇게 우리 모두를 부르면.] 
[그대의 정신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 것이다.] 
[왜 우릴 부른 거지?] 
[어째서 쉬운 길로 가려 하지 않고······.] 
[가시밭길을 자처하는 것인가?]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직, 사인참사검을 사용하려면 한 명의 성좌를 더 불러야 한다. 하지만 이제 천반에 남은 별자리는 없었다. 
 
[‘간평의’의 사용횟수를 모두 소모하였습니다.] 
 
나는 아까 폭군왕에게서 얻은 항아리, [용존]을 꺼냈다. 
7인 던전, [용존의 장]의 보상품. 
그리고 항아리 속에 두 개의 아이템을 넣었다. 

“S급 아이템 [삼륜환]을 제물로, S급 아이템 [간평의]의 소모횟수를 재생한다.” 
 
[‘용존’이 신묘한 재생의 힘을 발휘합니다.] 
[S급 아이템 ‘삼륜환’이 제물로 사라졌습니다.] 
[S급 아이템 ‘간평의’의 소모횟수가 재생되었습니다.] 
 
나는 다시 [간평의]를 사용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하나의 성좌를 불렀다. 
 
“나는 ‘북두칠성의 일곱 번째 성군’을 원한다.” 
 
파군(破軍) 성군. 
 
허공에 수놓인 일곱 개의 별. 
마침내 북두칠성을 이루는 칠좌(七座)가 모두 모였다. 
일곱 개의 별이, 동시에 나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북두성군들이여, 저는 별자리의 연을 끊고 싶습니다. 당신들의 검을 빌려주십시오.” 
 
[······그대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알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네 번째 시나리오의 최종보상인 [절대 왕좌]. 
 
저 왕좌는, ‘이계의 신격’ 중 하나의 힘을 빌리는 아이템이다. 
왕좌를 얻으면 당장은 편할 것이다. 유중혁에게 제약을 걸 수도 있을 것이고, 나를 위협하는 내부의 적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서울은, 반드시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 어떤 구원도 기적도 없는 완전한 파멸. 
 
그것이 함부로 ‘절대’의 힘을 빌린 대가다. 
내가 생각한 결말까지 나아가려면, 누구도 저 왕좌를 가져서는 안 된다. 
 
[이 하늘의 성좌들조차 왕좌의 창시자를 꺼린다.] 
[그런데 한낱 인간인 그대가, 저 물건의 주인에게 도전하려 하는가?] 
 
“당신들이 도와준다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과 싸우는 게 아닙니다. 그저, 주인과 물건 사이에 이어진 별자리를 베는 것뿐.” 
 
[그것은 그대가 감당할 수 없는 개연성이다.] 
[그대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그건 내가 결정합니다. 이제 시작하죠.” 
 
일곱 개의 성좌가 침묵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하늘에서 북두칠성이 환하게 빛나더니, 검에 새겨진 별자리가 환하게 타올랐다. 
 
[그대의 의지를 존중한다.] 
[그대가 이곳에서 죽더라도.] 
[우리들이 그대를 기억할 것이다.] 
 
눈부신 빛살이 사인참사검에 휘감기며, 백색의 검신이 환한 불꽃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S+급 아이템 ‘사인참사검’이 성유물 ‘사인참사검’으로 진화합니다.] 
 
성유물 사인참사검은 본래 ‘제사용’으로 만들어진 의식용 검이다. 
사악한 기운을 끊고, 재앙을 막는 검. 
 
나는 그대로 ‘절대 왕좌’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까강,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사인참사검은, ‘성유물’에 연결된 성좌의 연(緣)을 끊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이템이었다. 
 
쩌저적.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뭔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를 눈치채기 시작했는지, ‘절대 왕좌’에서 불길한 검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몇 번 더 ‘절대 왕좌’를 내려치자, 사인참사검의 칼날이 빠지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북두성군들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유상아가 외쳤다. 
 
“독자 씨! 빨리!” 
 
나는 미친 사람처럼 검을 휘둘렀다. 
망가지는 칼날을 도외시하고, 계속해서 왕좌를 내리쳤다. 
터지는 불꽃과, 부서지는 칼날. 
그리고 마침내. 
 
[성유물, ‘절대 왕좌’에 연결된 가호가 사라집니다.] 
[‘미지의 신격’이 이 세계의 변고를 눈치챘습니다.] 
 
‘절대 왕좌’는 평범한 의자가 되어 빛을 잃었다. 
황망히 있던 중급 도깨비가 발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주제 파악 못 하는 버러지가·······!] 
 
[서브 시나리오가 강제로 종료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움직임도 멈췄다. 시나리오가 끝난 이상, 그들은 이제 행동을 계속할 필요가 없었다. 북두성군들이 내게 말했다. 
 
[화신이여, 찾아올 개연성의 범람에 대비하라.]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속이 울렁거리며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누군가가 내 존재를 늘였다 당겼다 하는듯한 느낌이었다. 육신을 찢어버릴 것만 같은 거대한 힘이 천진하게 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나는 애써 정신을 다잡았다. 괜찮을 것이다. 
‘개연성’이란 결국 ‘그럴듯함’이다. 나는 이 모든 일들이 그럴듯해 보이기 위해, 지금껏 최선의 노력을 다해왔다. 그러니 이겨낼 수 있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흐려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저 먼 밤하늘 속, 별 하나가 조용히 반짝인 것은 그때였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고요하고 외롭지만, 몹시 온화한 하나의 시선.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둘. 
 
[성좌, ‘황산벌의 마지막 영웅’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셋. 
 
[성좌, ‘매금지존’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 
 
쏟아지는 성좌들의 메시지 속에서 중급 도깨비가 외쳤다. 
 
[대체 왜······?] 
 
하나의 별이 더해질 때마다, 나의 고통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나는 성좌들이 내가 감당해야 할 ‘개연성’을 조금씩 나눠 갖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럴듯하지 않았던 이야기’가, 많은 별들의 동의 속에 ‘그럴듯한 이야기’로 바뀌고 있었다. 무수한 별들이, 자신의 빛으로 나를 감싸고 있었다. 개중에는 내게 힘을 빌려주었던 북두성군들도 있었다. 
 
[이것이 그대가 보여주고 싶었던 이야기인가?]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우리가 그대를 지켜보겠다,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여.] 
 
혼란한 서울의 밤하늘. 
나는 내게 빛을 보내는 별들을 마주 바라보았다. 
 
[성좌, ‘흥무대왕’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외눈 미륵’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 
 
서울시의 모든 위인급 성좌들이 나를 향해 빛을 뿜고 있었다. 
그 많은 별들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먹구름과 함께 몰아치는 그레이트 홀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네 번째 시나리오가 강제로 종료됩니다.] 
[예정에 없던 분기가 발생하여, 시나리오 정산에 시간이 소요됩니다.] 
 
코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을 닦자, 중급 도깨비가 성큼 다가왔다. 
 
[기어코 최악의 선택을 하셨군요. 오늘 일을 평생동안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겁니다. 저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드리죠.] 
 
나는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도깨비가 저렇게 말했다는 것은, 내가 승부에서 이겼다는 뜻이었으니까.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당신의 새로운 설화가 생성됩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탄생하였습니다.] 
[성흔의 가능성을 입수하였습니다.] 
 
내게 다음 ‘회차’는 없다. 
나는 이 세계에서, 이야기의 결말에 도달할 것이다.
 
 
 
 
 
< Episode 15. 왕이 없는 세계 (2) > 끝

< Episode 15. 왕이 없는 세계 (3) >
 
 
 
 
 
첫 번째 설화는 쌓았다. 
이걸로 네 번째 시나리오의 메인 목표는 달성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야?” 
“아니, 왜 왕좌를 부순 거냐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사람들과, 화난 도깨비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냉큼 겁부터 집어먹은 사람들. 
사람들의 입장에서 나는 ‘다섯 번째 시나리오’를 어렵게 만든 천인공노할 죄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도깨비한테 외치기도 했다. 
 
“다시 ‘절대 왕좌’를 만들어 줘! 시나리오에 다시 참가할 테니까!” 
“이번에야말로 진짜 왕좌의 주인을 가리자고!” 
 
[이미 끝난 시나리오는 누가 와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당신들에게 벌어지는 일은, 모두 저 인간 때문입니다.] 
 
중급 도깨비의 대답은 냉랭했다. 
도깨비의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고, 차가운 비바람이 젖은 사람들의 어깨를 흔들었다. 
 
[왕이 없는 세계? 좋습니다. 한 번 살아가 보시죠. 구심점이 없는 당신들이 얼마나 잘 생존할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지켜보겠습니다.] 
 
중급 도깨비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광화문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연기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뭐야! 갑자기 뭐야!” 
 
······이건 예정에 없던 전개인데? 
 
돌아보니, 정희원과 유상아, 이길영을 포함한 다른 일행들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독자 씨!” 
 
다음 순간, 유상아가 사라졌다. 이길영이, 정희원이. 거기에 정민섭과 이성국까지. 도깨비가 투박한 손가락을 튕긴지 1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순식간에 넓은 광화문에 남은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중급 도깨비가 소름 돋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았다. 
 
[명심하세요. 이 세계가 멸망한다면, 그건 당신 때문이라는 것을.] 
 
내가 말을 하려는 순간, 딱,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위가 흔들리며 몸이 어딘가로 움직였다. 심각한 구역질과 두통이 동반되었다. 안 그래도 크게 심력이 소모되어 있던 차였기에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네 번째 시나리오의 정산 보상으로 10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 
 
 
성좌들과의 과도한 접촉으로 피로해져 있었기 때문인지 나는 꽤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심지어 꿈도 꾸었다. 
아직, 멸망이 시작되기 전의 꿈이었다. 
 
―야, 눈 안 까냐?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이것이 고등학교 시절의 일임을 깨닫는다. 
일진들한테 처맞고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 
······그래. 이런 적도 있었지. 
유치한 꿈이지만 새삼 떠오르니까 갑자기 열 받는다. 
 
―어쭈? 눈깔 봐라? 사람 죽이겠다? 
 
놈의 따귀에 내 고개가 홱 돌아간다. 
터진 입술에 고인 피와, 얼얼한 뺨에서 느껴지는 수치심. 
팔, 다리, 어깨.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쑤셔오는 고통. 
꿈인데도 불구하고 현실보다 더 아프다. 
어쩌면 그곳에는 [제4의 벽]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왜? 꼬우면 찔러봐 새꺄. 너도 니네 엄마처럼 신문에 쌍판 함 까면 되잖아?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지만, 차마 놈을 때릴 수 없었다. 
당시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더라. 
 
‘······만약 내가 유중혁이었다면.’ 
 
그래, 맞다. 비참하게도 나는 그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도 ‘멸살법’을 한창 읽고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교복 명찰에 적힌 녀석의 이름이 보인다. 
 
송민우. 
 
이 새낀 지금은 뭐하고 있으려나. 
양아치 주제에 대학도 잘 가고, 직장도 잘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그때 처음으로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었지. 
지금은 살아나 있을까 모르겠지만.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합니다.] 
 
같잖은 꿈의 정경이 무너지고, 나는 다시 어둠 속에 남았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발동합니다.] 
 
이어서 목소리들이 겹쳐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봐요, 내 말 들려요? 괜찮은 거예요?」 
「대표님?」 
「독자 씨, 어디에 계십니까?」 
 
내가 아는, 친근한 사람들의 목소리들. 
[전지적 독자 시점]의 3단계 능력인 ‘3인칭 관찰자 시점’을 통해 전해져 오는 말들이었다. 묻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목소리들이었다. 
 
「“아······ 왜 하필 여기로. 독자 씨? 내 말 들려요?”」 
 
다양한 종류의 와인이 구비 되어 있는 바(Bar). 잔뜩 인상을 찌푸린 정희원이 한숨을 쉬고 있었다. 
 
「“연애편지라더니······ 내가 그 아저씨 다시 만나기만 해봐라······ 젠장, 근데 짜증나게 왜 학교에 떨어진 거야?”」 
 
누군가에게 처맞은 것인지, 탱탱 부은 볼을 만지는 이지혜. 
 
「어째서······ 왜······ 여기에······.」 
 
근처의 군부대에 갇혀버린 이현성. 
 
······사람들 반응을 보아하니, 대충 뭔지는 알겠다. 
 
광화문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다들 자신과 연이 있던 장소로 이동한 듯했다. 그래서 학생이었던 이지혜는 학교로, 이현성은 근처의 군부대로 강제 전이된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니 이현성이 제일 불쌍하다. 
 
아마 중급 도깨비 자식의 농간이겠지. 
 
곳곳에 화신들을 뿌려 놓고 각개격파 당하는 시나리오를 만들었나 본데, 조금 의아한 일이다. 아무리 메인 시나리오와 무관하다 해도, 갑자기 이딴 짓을 벌이면 중급 도깨비 놈도 문책을 면치 못할 텐데.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난 괜찮으니까, 각자 몸조심하고 있으세요. 곧 찾아가겠습니다.’ 
 
내 말을 들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닿길 바라면서.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를 해제합니다.] 
 
서서히 의식이 육신으로 돌아오고, 눈꺼풀이 번쩍 떠졌다. 
여전히 서울 상공에는, 블랙홀처럼 소용돌이치는 먹구름들이 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펴보았다. 
탁 트인 서울의 전경. 복잡한 고층 건물들이 비대칭적인 마천루를 그리고 있는 장소. 
그러고 보니 나도 나와 연이 있는 장소로 이동했겠구나. 
얼핏 둘러봐서는 서울 고층 건물의 옥상 같은데······. 
 
“여기는······?” 
 
젠장, 혹시나 생각은 했는데 진짜로 여기로 왔을 줄이야.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혼잣말에 기대합니다.] 
 
“······미노 소프트.” 
 
이곳은 내가 다녔던 회사, 미노 소프트의 옥상이었다. 
 
[소수의 성좌들이 실망합니다.] 
[느긋한 진행을 좋아하는 한 성좌가 만족합니다.] 
 
왁자지껄 떠오르는 간접 메시지를 보니, 왕좌를 부순 뒤로 내게 집중하는 성좌들이 부쩍 많아진 느낌이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새로 나타난 다른 성좌들을 위협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헛기침을 하며 터줏대감을 자처합니다.] 
 
하필 떨어져도 여기로 왔나······? 
 
자동차 하나 다니지 않는 서울의 대로. 불이 꺼진 사무실들. 
반파된 건물들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코끝이 시리다. 
무려 한 달 만의 회사 출근이었다. 
팀장들한테 한 소리 들을 때마다 같은 팀의 윤 대리랑 여기 올라와 멍 때리던 게 꼭 어제 일 같은데, 기분 진짜 이상해진다. 신작 게임 테스트를 하던 내가, 정신을 차려 보니 칼을 들고 사람을 베고 있다. 
······윤 대리는 살아있으려나? 
고개를 돌리자, 허공에서 깜빡이는 메시지가 보였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 시작까지 10일 남았습니다.] 
 
시나리오는 내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절대 왕좌’를 부수면 서울 돔은 10일의 유예를 얻는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 [그레이트 홀]. 
 
남은 유예 기간 동안, 나는 ‘절대 왕좌’ 없이 ‘다섯 번째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막간을 보충하기 위한 ‘서브 시나리오’가 진행 중입니다.] 
 
+ 
 
<서브 시나리오 ― 생존 활동> 
 
분류 : 서브 
난이도 : C+ 
클리어 조건 : 폐허가 된 도시에서 10일간 살아남으시오. 매일매일 삼시 세끼를 챙겨 먹어야 하며, 하루에 6시간 이상의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 합니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하루 생존비 500코인을 상납하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셋 중 하나라도 어길 시, 당신은 클리어 패널티를 받습니다. 
지속시간 : 10일 
보상 : 없음 
실패시 : 사망 
 
* 해당 시나리오는 ‘코인 이벤트’가 적용되는 시나리오입니다. 
*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모든 괴수종들은 일정 확률로 코인을 드랍합니다. 
 
+ 
 
대충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았다. 기존의 시나리오가 완파되었으니, 그걸 급하게 때울 서브 시나리오를 끌어넣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코인 지급 이벤트도 겹쳐 있었다. 
조만간 할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벌써 시작할 줄은 몰랐네. 
하루에 500코인씩 생존비를 상납하라니······ 코인 이벤트 없이는 절대로 클리어하지 못할 시나리오다. 
 
아무튼, 이제 움직여 볼까. 
코인을 보충할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옥상 아래쪽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끌고 가! 빨리!” 
 
내려다보니, 무장한 인원들이 몇몇 사람들을 포박한 채 건물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미노 소프트가 있는 이 지역은 서초구 인근. 
그런데 내 기억으로는, 서초구 일대에는 ‘왕’의 세력이 없다. 
 
······그러면 저놈들은 뭐지? 
 
무장 병력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핀 뒤에야,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그렇군. ‘방랑자들’인가. 
 
멸망한 세계에서도 각자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다. 
누군가가 ‘왕’이 되고, 누군가가 ‘백성’이 된다면. 
또 누군가는, 소속이 없는 ‘방랑자들’이 된다. 
 
그리고 서초구 일대는 그런 ‘방랑자들’의 땅이다. 
 
이쪽 지역 정보를 찾아볼까 싶어 스마트폰을 켰지만, 안타깝게도 배터리가 방전된 상태였다. 충전할 곳을 찾든가, 보조 배터리를 찾아야겠는데······. 
나는 옥상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사장실을 지나고, 기획부와 재무부를 지나쳤다. 평소 일하던 QA팀의 사무실을 지날 때는 잠깐이지만 걸음이 멈췄다. 
같잖은 추억 보정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나는 사무실로 들어가 서랍들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혹시나 보조배터리 같은 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이쪽으로 플래시를 켰다. 
반사적으로 칼을 뽑으려는데, 저쪽에서 먼저 이상한 소리를 냈다. 
 
“어?” 
 
······? 
 
“도, 독자 씨? 김독자 씨 맞지!” 
 
그제야 나도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윤 대리님?” 
“아아, 살아있었구나! 살아있었어!” 
 
QA팀의 윤 대리가 그곳에 있었다. 
 
 
* 
 
 
“정말로 끔찍했지.” 
 
나는 윤대리에게 미노 소프트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다. 정확히는, 내가 퇴근한 후 미노 소프트에서 있었던 일들. 
 
“야근 중이던 사람들한테 전부 ‘첫 번째 시나리오’가 시작됐거든.” 
 
윤 대리가 자신의 코를 쥔 채 말했다. 
용역이 사라진 회사의 복도는 곳곳에서 썩어가는 시체 냄새와 구더기로 들끓고 있었다. 개중에는 아는 사람들의 얼굴도 보였지만, 윤 대리의 표정에는 딱히 애도나 슬픔의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거 알아? 내가 이 손으로 말이야. 김 팀장 그 새낄 죽였어. 왜, 우리 맨날 갈구던 그 자식······ 볼펜으로 목을 찔렀더니, 피가 푸슛 하고······ 진짜 게임 같았어.” 
“······윤 대리님.” 
“미, 미안. 이런 얘기는 불편하지? 하하.” 
 
당연한 변화였지만, 그래도 변해버린 윤 대리의 모습을 보는 것은 씁쓸했다. 아니지······ 어쩌면 지금 이것이, 윤 대리의 본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혼자 계신 겁니까?” 
“응? 아아, 혼자는 아니고, 같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 근데 독자 씨는 어디 있었던 거야?” 
“아, 저는······.” 
“회사 안에서는 못 봤던 것 같은데. 어디 그룹 소속이야? 혹시 메인 깨다가 온 건가?” 
“네, 뭐. 비슷합니다. 원래 광화문 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일이 터져서······.” 
 
끝까지 듣지도 않은 윤 대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아하, 그랬구나. 독자 씨, 역시 운이 나쁘네.” 
“······예?” 
“그 시나리오, 전부 깨지 않아도 된다고. 모르는 거야? 여기저기 잘 숨어 있으면서 적당히 꼼수만 부리면, 대부분 시나리오는 남들이 깨줘. 굳이 목숨 걸 필요 같은 건 없는데. 하하, 편하게 좀 살라구. 세상이 이 모양인데.” 
 
사실이다. 소속이 없는 ‘방랑자’가 된다면, 반드시 클리어해야 하는 일부 시나리오를 제하고는 다른 사람이 클리어한 메인에 어영부영 묻혀갈 수 있다. 서울 돔을 잘 뒤지다 보면, 생각보다 그런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숨어 살다가 주변의 그룹들에게 걸리면 곧바로 저승행이라는 것이지만. 
혼자 돌아다니는 ‘방랑자’만큼 좋은 먹잇감은 없다. 
 
“걱정할 만한 일은 없으니 마음 놔. ‘방랑자’들도 어엿한 세력이 있거든. 꼭 ‘왕’이 있어야만 세력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우리는 미노 소프트 바깥으로 나왔다. 이 회사를 중심으로 인근이 ‘방랑자들’의 영역인 모양인지, 이미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개중에는 아까 납치한 사람들을 옮기던 치들도 보였다. 무장 중인 한 사내가 말을 걸었다. 
 
“윤성호 씨, 그 사람은 누굽니까?” 
“아, 제 회사 동료입니다. 우연히 만났습니다.” 
“흐음······ 방랑자입니까? 다른 그룹은 받지 않습니다. 알고 계시겠죠?” 

윤 대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는 우리의 곁을 지나갔다. 
나는 사내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방금 그 사람은 뭐죠?” 
“‘코인 농장’의 관리인이야.” 
“코인 농장이요?” 
“아······, 독자 씨는 잘 모르겠구나.” 
 
순간 윤 대리의 표정에 음침한 빛이 스쳐 갔다. 
코인 농장······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다. 
하지만, 벌써 그걸 시작한 놈들이 있다고? 
 
“저길 봐.” 
 
어느 동물원이나 경찰서에서 뜯어온 것인지,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철창 안에 두 사람이 갇혀 있었다. 주변에 몰린 방랑자들이 흥분한 듯 소리를 질러댔다. 
 
“야야! 장난치냐? 좀 더 격렬하게 싸워야지! 그렇게 미적거리면 누가 코인을 주겠냐?” 
 
철창 안에서, 두 사내가 서로의 전신을 난자하며 싸우고 있었다. 피가 튀고, 눈이 뽑히고, 내장이 흘러내린 사내들이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콜로세움을 좋아하는 한 성좌가 즐거워합니다.] 
 
자세히 보니, 그런 철창들은 여러 개였다. 
테마라도 있는 모양인지, 모든 철창들이 싸움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벌거벗은 한 명의 여자와 여러 명의 남자들이 들어간 철창도 보였고, 이미 일이 끝났는지 바닥에 여자 혼자 덩그러니 늘어진 철창도 보였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고통스러운 신음과 울음소리. 
철창 밖에서, 각자의 성기를 쥔 방랑자들이 낄낄대고 있었다. 
 
“야, 어떠냐? 좋냐? 나도 하게 빨리 나와!” 
“다음엔 나야, 새끼야!” 
 
[관음을 좋아하는 한 성좌가 몹시 흥분합니다.] 
 
윤 대리가 입을 열었다. 
 
“게임 업계에서는 소비자들이 왕이었고, 미노 소프트에서는 사장 새끼가 왕이었지. 독자 씨, 이 새로운 세계에서는 누가 왕일 것 같아?” 
“······설마 성좌들의 후원을 이용하는 겁니까?” 
“그래. 가끔 저런 걸 좋아하는 정신 나간 성좌들이 있거든. 자극적인 광경을 보여줄수록, 성좌들이 주는 코인도 많아져. 별풍선 같은 거지. 우린 쟤들한테서 코인 수급하고, 대신 먹을만한 식량을 던져주는 거야.” 
 
윤 대리는 그 말을 하며 감옥 안으로 초코바 하나를 던졌다. 
철창 바닥에 버려진 여자는 울면서 기어 초코바를 손에 쥐었다. 
어떤 세계든 시스템을 제일 먼저 파악하고 이용하려는 놈들이 있다. 그리고 저 ‘코인 농장’은, 이 세계의 자본 구조를 가장 먼저 이해한 자본가들이 고안한 희대의 착취 시스템이었다. 
 
“우리 회사 사람들도 보이는 것 같은데······.” 
“우리 회사였던 사람들이지.” 
 
그 차가운 말투에,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내가 알던 미노 소프트도, 내가 알던 ‘윤 대리’도. 
이젠 이 세상에 없다. 
 
“야! 새로운 노예 들어왔다! 수감해!” 
“옙!” 
 
우렁찬 외침과 함께 노예들이 수감실 쪽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기절한 사람들 중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윤 대리가 웃었다. 
 
“오, 새 물건 들어왔나 보지? 어이! 쟤 빼고 얘 벗겨서 철창 안으로 들여보내!” 
 
자그마한 몸집에, 새하얀 피부. 
살짝 올라간 눈꼬리에, 어깨까지 내려오는 고운 흑발. 
눈을 비비고 봤지만, 틀림없었다. 
 
첫 번째 사도, 표절 작가 한수영이 그곳에 있었다.
 
 
 
 
 
< Episode 15. 왕이 없는 세계 (3) > 끝

< Episode 15. 왕이 없는 세계 (4) >
 
 
 
 
 
 
철제 우리에 내던져진 한수영이 맥없이 뻗었다. 
비동에서 내게 깃발을 빼앗긴 후, 아마 마력이 다해 기절한 모양이었다. 
이 근처로 이송된 걸 보면, 한수영도 근방에 연이 있었던 거겠지. 작가였으니까 매니지먼트나 출판사가 근처에 있었을 수도 있겠다. 
 
“꽤 반반하잖아? 야, 벌써 건드린 거 아니지?” 
“아무렴. 성좌들 죄다 여기 몰려 있는 거 아는데.” 
 
[음란과 외설을 좋아하는 성좌가 흥분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음탕한 눈을 반짝입니다.] 
 
벌써부터 가위바위보를 하는 놈들도 있었다. 
나는 철창 속의 한수영을 노려보았다.
찢어진 청바지와 셔츠. 
아무리 봐도,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 
 
살려두면 걸림돌이 될 여자였다. 
이 세계에서, 나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역사를 아는 여자니까. 
이야기의 분기가 3회차나 4회차와는 완전히 바뀌어버려서, 그녀가 아는 지식은 상당 부분 쓸모 없어졌겠지만, 그래도······.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나는 스스로의 역겨움에 소스라쳤다. 
 
······왜 이딴 고민을 하고 있지? 
 
누구는 앞으로 위험하니까 죽여야 하고. 
누구는 앞으로 도움이 되니까 살려야 하나? 
 
나는 유중혁이 아니다. 
 
“독자 씨도 할래?” 
 
내 시선을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윤 대리가 웃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너라고 어쩔 수 있겠냐’하는 표정. 
 
“하나만 약속해주면 독자 씨가 먼저 하게 해줄 수도 있는데, 어때?” 
“······무슨 약속이요?” 
“그룹이 있는 상태지? 독자 씨네 그룹을 소개해 줘. 우리도 슬슬 세력 확장을 시작할까 해서 말이야. 보니까 독자 씨 아이템도 제법 갖춘 것 같고······ 거기 꽤 큰 그룹인가 봐?” 
 
나는 윤 대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원하신다면 소개해드릴게요. 그런데 저거, 이쯤에서 그만뒀으면 합니다.” 
“응? 하하, 독자 씨. 지금 무슨 소리야?” 
“저 여자 풀어주라고요.”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윤 대리의 눈썹이 꿈틀댔다. 
 
“흠······ 독자 씨. 잘 아는 사람들끼리 왜 이래? 여기까지 살아남았으면 벌써 뻔한 거잖아?” 
“······.” 
“내가 독자 씨 얼마나 오래 봐 왔는데. 난 독자 씨라면 어디서든 살아남을 줄 알고 있었다고.” 
 
히죽 웃는 윤 대리의 입꼬리에 묘한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늘 혼자서 웹 소설 보고 있었지? 항상 음침한 패션으로 출퇴근하고. 가끔 이야기하는 사람도 나나, 같이 입사한 동료 몇 명이 전부였잖아. 그나마도 유상아 씨처럼 착한 사람이나 그랬지.” 
“······그게 지금 이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독자 씨도 속으로는 지금 이 상황 즐기고 있잖아. 안 그래?” 
 
즐기고 있다? 
그 말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내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윤 대리는 내 어깨를 잡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독자 씨랑 똑같아. 우리 같은 QA팀이었잖아. 매번 같은 잔소리 듣고, 모욕감 속에서 살았잖아. 다른 부서에서 우리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하지? 마루타 팀이라고. 겨우 게임 테스트나 하는, 스펙도 없는 싸구려 인력이라고.” 
“······.” 
“독자 씨. 지금 저기 갇혀 있는 놈들, 정말 누군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잘 봐. 우리 무시하던 그 새끼들이야.” 
 
순간 시야가 넓어지며, 사람들의 비명이 크게 들려왔다. 
자세히 보니, 그랬다. 
철창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 
그들의 상당수는, 내가 알던 미노 소프트 사람들이었다. 내가 잘 모르던 사람들. 마찬가지로 나를 잘 모르던, 혹은 몰라도 상관없었던 사람들. 
 
“이제 다 끝났다고. 재무팀이든, 기획팀이든, 뭐였던 간에. 지금 이 세계에서 가장 유리한 건 우리 QA팀이야. 하하. 독자 씨도 버그 테스팅 오래 했으니 잘 알잖아? 이 세계는 게임이야. 버그투성이인 게임. 너무 허점이 많아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거든.”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무수한 성좌들의 메시지. 
보다 자극적인, 보다 음탕한, 보다 퇴폐적인 이야기를 원하는 그들의 메시지가, 윤 대리의 얼굴 위에 조용히 겹쳐졌다. 
 
어떤 열등감은 사람을 괴물로 만든다. 
 
“무서워할 거 없어. 이 세계는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게임이니까! 저걸로 우리 그룹이 하루에 몇 코인이나 벌어들이는지 알아?” 
“모릅니다.” 
“하루에 무려 5천 코인이야. 5천 코인······ 상상이나 가? 아무 시나리오도 안 깨도 5천 코인이 들어온다고. 사람 몇 싸우게 만들고, 교배시킬 뿐인데 무려 5천 코인. 기획팀에서 캐시 아이템 찍어내던 거랑 똑같아.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너부러진 한수영을 향해, 하나둘씩 다가가는 남자들이 보인다. 
나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준 것은, 한때나마 나와 옥상의 한숨을 공유해주었던 동료에 대한 예의였다. 
나는 내 어깨에 놓인 윤 대리의 손을 치우며 입을 열었다. 
 
“코인을 벌고 싶으신 거라면,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뭐?” 
 
윤 대리가 반색했다. 
 
“혹시 독자 씨도 ‘버그’를 찾아낸 거야? 뭔데?” 
“원리는 ‘코인 농장’이랑 같습니다. 자극적인 걸 좋아하는 성좌들을 이용하는 거죠.” 
“오호, 이것보다 더 자극적인 게 있단 말이야? 그럴 리가 없는데?” 
“네, 있습니다. 알려 드릴까요?” 
“노하우 공유하면 나야 좋지!” 
“성좌들이 진짜 좋아하는 건······.” 
 
[‘신념의 칼날’이 발동합니다!] 
 
“······이런 겁니다.” 
 
카가가각, 하는 소리와 함께 수수깡처럼 잘려나간 철창들. 나는 철창을 둘러싼 방랑자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도망갈 다리를 자르고, 아킬레스건을 끊었다. 
반항할 채비조차 하지 못한 사내들의 무릎이 그대로 꼬꾸라졌다. 
 
“으아아아악! 뭐야 이 새끼!” 
“내 발! 내 발!” 
 
거칠게 솟아 오르는 핏줄기 속에서, 나는 계속 검을 휘둘렀다. 
 
“이런 것도.” 
 
인사팀의 직원을 희롱하던 손을 잘라냈고, 한수영의 셔츠를 벗기던 놈의 팔을 베어냈다. 
 
“그리고, 이런 것도 좋아하죠.” 
 
푸슛, 하고 튀어 오른 피가 뺨에 묻었다. 나는 조용히 피를 닦아낸 후 팔을, 다리를, 계속해서 잘랐다. 윤 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 무슨 짓이야! 이게 무슨 짓이냐고!” 
“고맙다는 얘깁니다.” 
 
나는 윤 대리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성좌들이, ‘진짜로 좋아할 만한 상황’을 만들어 주셔서.” 
 
스가각! 서걱! 
 
단 두 번의 칼질로, 한수영의 철창 안에 들어온 사내들 중 멀쩡히 서 있는 녀석은 하나도 없게 되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판단에 기뻐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가차 없는 응징에 콧김을 내뿜습니다.] 
[일부 성좌들의 만행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판단에 크게 만족합니다.] 
[8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윤 대리가 하얗게 질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빙긋 웃었다. 
 
“뭐하러 농장 같은 걸 만듭니까? 코인 벌기가 이렇게 쉬운데.” 
“······이, 이 새끼 조져!” 
 
방랑자들의 숫자는 많았다. 순식간에 대열을 갖춘 이십여 명의 방랑자들이 어느새 병장기를 갖춰든 채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왔다. 
‘불살’의 원칙을 어기지 않고 해치우기 애매한 숫자였지만, 딱히 걱정하진 않았다. 여차하면 몸을 빼면 되니까. 
나는 조금 뒤로 물러서며, 한수영의 가벼운 몸을 안아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왜 나를 구해?” 
“깨어 있었냐? 그럼 네 발로 좀 일어서라.” 
 
한수영이 힘없는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날 구하면 네 채널 성좌들이 죄다 달아나 버릴걸? 성좌들 암 걸리는 거 제일 싫어하는 거 모르냐?” 
“좋아하는 녀석들도 있어.” 
 
[하렘을 기다려왔던 한 성좌가 조심스레 양손을 모읍니다.] 
[‘적의 적은 아군’을 주장하는 한 성좌가 기뻐합니다.] 
 
한수영의 인상이 구겨졌다. 
 
“지금 이거 클리셰야. 알지? 미소녀가 범해지려는 순간, 주인공이 구해주는 클리셰. 클리셰 싫어한다면서, 말이랑 행동이 다르네?” 
“일단 네 말에 틀린 게 두 가지 있는데.” 
 
나는 달려드는 방랑자의 다리를 가볍게 베어 넘기며 말했다. 

“하나, 나는 주인공이 아니야. 그리고 둘은······.” 
 
[당신은 동족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카르마 포인트가 1 상승합니다.] 
[현재 카르마 포인트 : 14/100] 
 
카르마 포인트는 시스템이 해당 인물을 ‘구했다’고 판단했을 때 상승한다. 
즉, 내가 내버려뒀다면 한수영은 그대로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넌 미소녀가 아니야.” 
“······이거 내려놔!”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바닥에 내던졌다. 
한수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고 진짜 내려놓냐?” 
“너도 싸워.” 
“뭐?” 
“같이 싸우라고. 넌 클리셰 좋아하잖아?” 
“내가 아무리 클리셰를 좋아해도, 적이었던 상대가 같은 편 돼서 싸우는 거는 진짜, 너무 진부하거든?” 
 
투덜거리는 것치고, 우리는 꽤 합이 잘 맞았다. 내가 다가오는 방랑자들의 다리를 베면, 뒤따라 붙은 한수영이 놈의 숨통을 끊었다. 그렇게 차분히, 하나씩 목숨을 끊고 나자 어느새 남은 녀석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방랑자들이 코인 농장을 내팽개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거 완전 개이득이네.” 
 
방랑자들을 죽이고 얻은 코인을 보며, 한수영은 비틀거리면서도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총 184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공헌도가 있으니 나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녀에게도 꽤 짭짤한 코인이 들어갔을 것이다. 아깝지만, 한수영이 없었더라면 나도 코인을 얻지 못했을 테니 그냥 수고비라 생각하기로 했다. 
앞쪽을 보니,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윤 대리가 보였다. 
 
“하하······ 사이코패스 새끼. 역시 이런 놈일 줄 알았어. 그 소문 돌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뭐래 병신이. 단역 새끼가 말이 많네.” 
 
순식간에 다가간 한수영이 곧장 윤 대리의 목을 찔렀다. 윤 대리의 목에서 꿀렁거리는 핏줄기가 솟더니, 이내 눈동자의 빛이 죽었다. 
현실의 ‘김독자’를 기억하던 또 한 사람이, 그렇게 사라졌다. 
나를 보던 한수영이 툴툴거렸다. 
 
“······그 표정 뭔데? 이 새끼 죽으니 아쉬워?” 
“아니.” 
“그럼 뭐하러 상처받을 말을 계속 들어주고 있어?” 
 
한수영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던 말이라, 조금 놀랐다. 
 
“아까도 이 자식 헛소리하는 거 죄다 들어주고 있더만? 그딴 걸 왜 듣고 있냐? 성좌들은 그딴 고구마 안 좋아해, 인마.” 
 
멍하니 이야기를 듣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런 얘기였나? 
 
“너야말로 뭘 모르는 것 같은데, 그런 헛소리들은 적당히 들어준 뒤 죽여야 코인을 더 많이 줘. 고구마 없는 사이다는 없는 법이거든.” 
“아니거든? 독자들은······ 아니, 성좌들은 바로 죽이는 거 더 좋아하거든? 작가도 아닌 게 뭘 안다고 큰 소리야?” 
“더 잘 알지. 난 독자니까.” 
“이······!” 
 
나는 으르렁대는 한수영을 뒤로 하고, 떨어진 아이템들을 하나씩 뒤적거렸다. 대부분은 쓰레기였지만, 입을만한 수트도 하나 나왔다. 
 
[늙은 신사의 단벌 수트] 
 
B등급 아이템인데다 방어력 향상도 미미했지만, 그래도 안 입는 것보단 나았다. [사명대사의 거적]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도 없고······ 그러고 보니 슬슬 아이템 파밍도 겸해야 하는데. 
멀찍이 달아나는 방랑자들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저 방향이 놈들의 소굴인 듯했다. 
 
어차피 방랑자들과 부딪칠 거, 차라리 잘 됐다. 
 
내 기억이 맞다면, 서초구에서는 다섯 번째 시나리오에서 사용할 ‘운석’ 몇 개를 입수할 수 있다. 기왕 이곳에 떨어진 거, 그거나 구하면 되겠지. 
일단은 보조 배터리부터 좀 구해야······. 
 
[당신은 동족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카르마 포인트가 11 상승합니다.] 
[현재 카르마 포인트 : 25/100]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다가왔다. 모두, 철창 속에 갇혀 있던 이들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내 얼굴을 기억하는지,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말을 걸기 전에, 손사래를 쳤다. 
 
“이제부턴 못 도와드려요. 알아서들 살아가세요.” 
 
희미한 절망이 그들의 동공을 스쳐 갔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냉정한 처사 같지만 결국 자기 목숨은 자기가 구해야 한다. 
 
“아이템 다 안 주웠으니까 적당히들 챙기시고, 여유가 되면 충무로 쪽으로 가봐요. 도와줄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이 허겁지겁 떨어진 아이템들을 줍기 시작했다. 오직 살아남겠다는 일념 하나로, 사람들의 눈동자는 다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을 보며, 나는 순간 도깨비가 왜 나를 이곳으로 데려다 놨는지 이해했다. 
 
“그거 내 거야! 내려놔!” 
“제, 제가 먼저 집었어요!” 
 
방금 전까지 피해자였던 사람들이, 어느새 서로를 보며 병장기를 쥐고 있었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서로를 겨눴고, 서로에게 가해자가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이 왕이 없는 세계다. 
누구도, 이들을 통제하지 않는 세계. 
 
도깨비 녀석은 이 광경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왕이 없는 세계가 얼마나 야생에 가까운지, 본래 우리가 지켜왔던 법과 윤리, 인간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부실하고 형편없던 것인지. 
병기를 휘두르려던 사람들을 멈춘 것은, 뜻밖의 목소리였다. 
 
“너네, 다 뒈지고 싶어?” 
 
 
 
 
 
 
< Episode 15. 왕이 없는 세계 (4) > 끝

< Episode 15. 왕이 없는 세계 (5) >
 
 
 
 
 
흠칫 놀란 사람들이 동시에 한수영을 돌아보았다. 
쪼그려 앉아 그들을 보던 한수영이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니네 등신들이야? 정신 차려. 살고 싶으면 제대로 머리 굴리라고. 언제 또 나쁜 새끼들 만날지 모르는데, 기껏 동료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줄이면 어쩌자는 거야?” 
“그, 그건······.” 
“이런 세계에서 약자가 공평히 연대할 수 있는 건 같은 약자뿐이야.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그깟 쓰레기 같은 아이템 몇 개를 두고 싸워?” 
 
불현듯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뒤늦게 얼굴을 붉혔다. 
아마 중급 도깨비는 몰랐을 거다. 
녀석이 흩어 놓은 사람 중에는, 웹 소설 작가도 있다는 것을. 
 
“필요한 병장기나 생필품은 대충 챙겼잖아? 평소에 생존물 안 봤냐? 이럴 때 이기적으로 구는 새끼들은 맨 먼저 뒤지는 플래그인 거 몰라? 막말로 니들이 그런 거 몇 개 더 줍는다고 여기 이 사람보다 더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아?” 
 
나를 본 생존자들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몇몇 사람들의 눈에서 살기가 조금씩 걷어지고 있었다. 
 
“아무도 자길 못 건드릴 만큼 강해질 자신이 없으면, 믿을 수 있는 동료부터 만들어. 당연한 상식 아니냐?” 
 
표절 작가 녀석이 저런 말도 할 줄 알다니, 제법이다. 
실제로 그녀의 말은 제법 효과가 있었다. 사람들이 뒤늦게 서로를 향해 어색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지금 누군가 입을 열면 저들은 다시 단합할 수 있겠지. 단 몇 마디의 말로, 저들의 생존율은 급격히 상승한 것이다. 
나는 한수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너 말이야, 방금 그 대사······.” 
“알겠어? 다들 똑바로 하라고!” 
 
한수영은 그 말을 남기고 재빨리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체력이 바닥이었던지라, 그녀는 멀리 도망가지 못했다. 
 
“헉, 헉! 왜 쫓아오는 건데!” 
“넌 어떻게 평소에 하는 말까지 표절이냐?” 
 
「“아무도 자길 못 건드릴 만큼 강해질 자신이 없으면, 믿을 수 있는 동료를 만들어라.”」 
 
그건 ‘멸살법’에서 조언을 구하는 생존자에게 유중혁이 던진 말이었다. 
한수영이 빽 소리를 질렀다. 
 
“표절 아니거든? 내 소설에 나오는 대사야!” 
“근데 왜 도망가?” 
“······그냥! 그러는 넌 왜 쫓아오는데!” 
 
끝까지 지가 표절했다는 소리는 안 한다. 
나는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구해줬으면 값을 해야지.” 
“무, 무슨 값을 하란 거야!” 
 
잔뜩 긴장하는 한수영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보조 배터리 있으면 좀 꺼내봐. 너 텍본 가지고 다니니까 잔뜩 있을 거 아냐.” 
 
한수영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 
 
 
처음부터 한수영을 데리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한수영이 지금껏 저지른 짓을 고려하면, 이 녀석도 악질이긴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이 녀석의 ‘아바타’ 능력은 상당히 쓸모가 있었고, 당장 몇 가지 알아내야 할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현재 진행 중인 서브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데도, 이 녀석을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고······. 
 
“보조 배터리는 없어. 나도 광화문에서 다 잃어버렸다고.” 
“그럼 네 표절작이라도 내놔봐.” 
“싫어. 보고 싶음 돈 주고 사보든가.” 
“플랫폼들 다 망했는데 어떻게 돈을 주고 사보냐?” 
 
나는 간단히 녀석에게서 스마트폰을 빼앗았다. 
당황한 한수영이 내 어깨에 매달리듯 팔을 뻗었다. 
 
“뭐야! 내놔!” 
 
텍본은 녀석의 바탕화면에 있었다. 허술하기는. 
 
[SSSSS급 무한 회귀자] 
 
어디 보자······. 
앱 파일을 누르며 나는 조금 긴장했다. 
혹시, 이 녀석의 파일도 내가 가진 텍본처럼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을까봐서였다. 
물론, 기우였다. 
마침 소설을 읽던 중이었는지, 페이지는 중간부터 떴다. 
 
「······유준현은 조용히 자신의 상태창을 켰다. 방금 얻은 ‘현인의 눈’을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 
 
<인물 정보> 
 
인물 : 유준현 
나이 : 27세 
계약성(契約星) : ??? 
전용 특성 : 회귀자 <3회차> (신화), 프로게이머 (희귀) 
전용 스킬 : [현인의 눈 Lv.1], [백병전 Lv.1], [무기연마 Lv.1], [정신 방벽 Lv.1], [거짓 간파 Lv.4]······(중략)······. 
성흔 : [사망회귀 Lv.3] 
종합 능력치 : [체력 Lv.24], [근력 Lv.24], [민첩Lv.25], [마력Lv.23] 
 
+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한 유중현이 작게 웃었다. 
 
“후후, 드디어 현인의 눈을 얻었군. 이번 회차는 처음부터 운이 좋아.”」 
 
거기까지 읽던 나는 얼척이 없어져서 한수영을 바라보았다. 
 
“너 진짜 양심 없는 거 아니냐?” 
“······뭐가?” 
“인물 정보 이거 ‘멸살법’ 그대로 베낀 거잖아? 너도 작가면 구성이라도 좀 바꿨어야 하는 거 아냐?” 
 
잠깐 머뭇거리던 한수영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멸살법은 ‘배후성’이고, 내건 ‘계약성’이거든? 완전 달라. 그리고 내 소설엔 종합평가도 없다고!” 
“······그렇다고 치자. 근데 주인공 이름은 좀 너무한 거 아니냐? 중간에 ‘중현’이라고 오타낸 건 또 뭐냐. 이거 복붙한 거 아니지? 멸살법 작가가 보면 울겠다, 인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한수영이 소리를 질렀다. 
 
“그건 그냥 오마주······ 아니, 그래서 어쩌라고! 뭐가 궁금한 건데!” 
“너 원작 몇 화까지 봤어?” 
“구십 구······ 야! 그거 빨리 안 내놔?” 
 
역시, 이 녀석이 99화까지 본 녀석이었나? 
자기 소설을 두 번째로 많이 본 독자가 자기 소설을 표절한 작가라는 걸 알면 ‘멸살법’ 작가는 뭐라고 말할까. 
표절 논란에도 조회수 올라간다고 기뻐했던 양반이니까, “99화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과연 진정한 독자십니다”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99화면, 다섯 번째 시나리오에 나올 ‘운석’ 위치는 좀 알겠네? 혹시 네 소설에도 그거 나오냐?” 
“내 소설에 ‘운석’ 같은 건 안 나와!” 
 
의외다. 그것도 당연히 베꼈을 줄 알았는데. 
 
“‘봉인석’은 나오지만!” 
 
베꼈네. 
 
“그럼 지금부터 ‘봉인석’ 구하러 갈 거니까, 준비해.” 
“‘운석’을 구하러 간다고?” 
“용어 통일 좀 하자. 아무튼, 너도 구해봤으니 알지?” 
“구해는 봤지만······.” 
 
내가 죽였던 ‘화룡종’이 들어 있던 운석은 한수영이 찾아낸 것이었다. 이 여자 때문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었지. 그러고 보니 그때 화룡종 사체들을 거래소에 올려놨었는데, 아직 안 팔렸으려나?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수영을 잠시 내버려 두고 비형을 불렀다. 
 
‘비형.’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존 시나리오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완파되었으니, 아마 서울 돔의 도깨비들은 죄다 대책 회의에 들어갔을 것이다. 
회의라고 해봤자 다들 모여서 “어차피 이번 판은 망했으니 코인 상품이나 잔뜩 팔아치웁시다” 따위의 말이나 하고 있겠지만······. 
그런데 다음 순간, 눈앞에 [거래소] 창과 [도깨비 보따리] 창이 동시에 열렸다. 
이 자식, 메시지 보낼 시간은 없어도 할 일은 한다 이거지? 
 
[상당수의 성좌들이 갑작스런 광고에 불만을 표합니다.] 
 
게다가 광고 트는 것도 잊지 않았고. 
나는 우선 [거래소]를 열어 판매 내역을 확인했다. 
 
[아이템 ‘화룡종의 비늘’을 8000코인에 판매하였습니다.] 
[아이템 ‘화룡종의 뼈’를 5000코인에 판매하였습니다.] 
 
뜻밖에도, 그 비싼 아이템들을 사 간 사람이 있었다. 
거기다 팔려고 올려놓은 게 아닌 아이템까지 팔렸다. 
 
[아이템, ‘화룡종의 뼈’를 22222코인에 판매하였습니다.] 
 
······보관할 곳이 없어서 올려둔 뼈까지 팔리다니. 
누군가 화룡종의 뼈가 엄청나게 간절했던 모양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부 99999에 올려 볼 걸. 
현시점에서 이만한 재력을 가지고 있는 화신은 성운의 지원을 받는 안나 크로프트나, 인도의 란비르 칸, 그리고 중국의 페이후(飞虎)정도인데…… 하여간 누군진 몰라도 땡큐다.
[도깨비 보따리]를 열어 필요한 아이템 몇 개를 마저 구매하고 나자, 타이밍 좋게 한수영이 말을 걸어왔다. 
 
“근데 왜 나랑 같이 가려는 건데? 너 혼자 가도 되잖아.” 
“아까 낮에 네 입으로 말했잖아. 생존물에서 가장 중요한 건 믿을 수 있는 동료를 구하는 거라고.” 
 
한수영이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흠······.” 
 
나는 품속에서 방금 산 아이템을 내밀며 말했다. 
 
“자, 여기 서약해.” 
 
[아이템, ‘임시 서약서’를 사용합니다.] 
 
+ 
 
<임시 서약서> 
 
1. 김독자(갑)는 한수영(을)과 진행 중인 서브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계약을 맺는다. 
2. 김독자(갑)와 한수영(을)은 진행 중인 서브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서로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3. 계약 기간 중 김독자(갑)와 한수영(을)은 ‘취침 패널티’를 대비해 교대로 잠을 잔다. 
 
······. 
 
6. 계약 기간 중 일행의 행동 지침은 김독자(갑)의 의견에 우선한다. 
7. 계약 기간 중 한수영(을)은 시나리오 클리어를 위해 김독자(갑)에게 전력 협조하며, 생명이 위험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김독자의 명령에 따른다. 
8. 계약 기간 중 김독자(갑)은 한수영(을)의 생명권을 보장한다. 
9. 해당 계약은 서브 시나리오가 끝나는 순간 효력이 소멸하며, 위배 시 육신이 소멸한다. 
 
+ 
 
임시 서약서. ‘배후 계약서’ 급의 효력은 아니지만, 짧은 기간 계약을 맺기에 이만한 아이템은 없다. 
한수영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딴 걸 계약할 것 같아?” 
“싫음 말든가.” 
“······근데 내가 왜 을이야? 난 인생에서 한 번도 을이었던 적이 없다고.” 
“잘됐네. 첫 경험은 중요한 법이니까.” 
 
한수영이 까드득, 이를 갈았다. 말은 저래도, 녀석이 수락할 거라는 건 알고 있다. 마력이 고갈되어 지친 녀석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방랑자들이 들끓는 서초구에서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고, 당분간 녀석은 자신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했다. 
 
“······좋아. 계약할게.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거야. 어때? 나도 너한테 묻고 싶은 게 많거든.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나 [거짓 간파] 얻었으니까.” 
 
나도 못 얻은 걸 벌써 얻었다고? 
 
[인물 ‘한수영’이 ‘거짓 간파 Lv.1’을 발동합니다!] 
 
······진짜네. 
한수영은 바로 치고 들어왔다. 
 
“너 대체 특성이 뭐야?” 
“나도 몰라.” 
 
[인물 ‘한수영’이 당신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한수영이 멍청한 표정을 짓더니, 손바닥으로 자신의 관자놀이 부근을 한 대 쳤다. 
 
“······이거 고장났나?” 
“아니, 정상이야. 다음 거 물어봐 빨리. 딱 세 개만 대답해 줄 테니까. 참고로 이미 한 개 썼다 너.” 
“아니, 자기 특성을 모른다는 게 말이 돼?” 
“진짜 몰라. 자, 다음 질문.” 
 
눈을 가늘게 뜬 한수영이 마지못해 질문을 이어갔다. 
 
“왜 ‘왕좌’를 포기한 거야?” 
 
역시, 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지. 
 
“너 때문에 내 계획 다 망쳤잖아.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멸망 막겠다고 병신 같은 <사도> 놈들 데리고 얼마나 힘들게 준비했는지 알아? 내가 왕좌 앉았으면 벌써 다음 시나리오까지 착착 준비하고 지금쯤······.” 
“네가 그 왕좌 앉았으면 서울은 멸망했을 거다.” 
 
[인물 ‘한수영’이 당신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한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왜 자꾸 고장이 나지?” 
“고장 아니라니까. 그리고 네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 왕좌 앉았으면 우린 다 망했을 거야.” 
 
[인물 ‘한수영’이 당신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한수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 몇 번째 하차자야? 네가 어떻게 나도 모르는 걸 아는 건데?” 
“난 하차자가 아냐.” 
 
[인물 ‘한수영’이 당신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한수영은 커다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입술을 한참이나 우물대더니, 쥐어 짜내듯 질문을 던졌다. 
 
“너······ ‘멸살법’ 어디까지 읽었어?” 
“질문 세 개 끝났다.” 
“이게 제일 중요한 질문이라고!” 
 
한수영의 턱이 덜덜 떨렸다. 
 
“설마······ 아니지? 너······ 그런 미친놈이 있을 리가······ 그래, 그럴 리가 없어······.” 
 
두다다다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나는 방언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한수영을 데리고, 재빨리 근처 건물의 후면으로 피신했다.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형체로 봐서 사람인 건 확실한데······? 
나는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인파들을 향해, [등장인물 일람]을 사용해 보았다. 
 
[해당 인물의 정보는 ‘등장인물 일람’으로 열람할 수 없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자세히 보니, 달려온 사람들은 죄다 전신에 부숭한 털이 나 있었다. 
얼굴은 사람이지만 육신은 이족 보행을 하는 늑대에 가까운, 몸집도 인간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괴물들. 
자세히 보니, 선두의 괴물 하나가 한 손으로 사내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괴물들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녀석이었다. 
 
“크르르······! 그놈들 어디 있어?” 
“이, 이 근처였습니다! 그놈들이 ‘코인 농장’을 전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목이 날아갔다. 아까 미노 소프트 앞에 있었던 그 방랑자들 중 하나였다. 달려든 괴물들이 늘어진 사내의 몸을 정신없이 뜯어 먹었다. 
왠지 저 괴물들의 정체가 뭔지 알 것 같은데. 
한수영도 뭔가를 깨달았는지 중얼거렸다. 
 
“······인외종?” 
 
방랑자들은 방랑자들 나름대로의 생존 방식이 있다. 여전히 인간으로 존재하면서 ‘코인 농장’을 만드는 녀석들이 있는가 하면, 살아남기 위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새로운 종(種)의 길을 걷는 녀석들도 있는 것이다. 
 
크아아아앙―! 
 
인외종들은 성장치에 한계를 갖지만, 인간이길 포기했기에 초중반까지는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도깨비의 농간으로 나타났던 ‘마인’ 또한 인외종의 일종이었다. 
아마 저 녀석들은 ‘웨어울프’ 쪽 인외종들인 것 같은데······. 
 
“······운석의 힘을 얻었군.” 
 
이제 겨우 다섯 번째 시나리오를 앞둔 상황. 이 시점에서 인간이 웨어 울프로 진화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운석의 힘을 사용하는 것뿐이다. 방랑자 그룹은 이미 서초구에 떨어진 운석 중 하나를 손에 넣은 것이다. 
한수영이 작은 탄성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나 저놈 알아. 저 자식, 하차자야.” 
“······어떻게 알아?” 
“난 알 수 있어. 마지막 하차자의 특권이지.” 
“특권?” 
“읽다가 하차한 녀석들은 위치 정보랑 특성이 다 내 눈에 보이거든.” 
 
살짝 으스대는 듯한 말투. 
그러고 보면, 정민섭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시나리오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사도’가 그들을 찾아왔다고 했었지. 만약 한수영에게 하차자들을 찾는 스킬이 있다면, 그 기적도 설명은 된다. ‘아바타’를 이용해 하차자들을 찾아가면 그만이었을 테니까. 
한수영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서 네 정체를 의심했던 거야. 하차자가 틀림없는데 내 스킬에 안 걸리는 녀석이 있으니까······.” 
 
나를 흘겨보던 한수영이 다시 인외종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내 제안을 거부한 녀석이 몇 명 있었어. 저 방랑자는 그 녀석들 중 하나야. 대부분 초반에 죽어 나가길래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저놈은 용케 저렇게 컸네······.” 
“저 녀석 뭔데?” 
“송민우란 녀석이야.” 
 
송민우? 
분명 등장인물 이름은 아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6급 인외종(人外種), ‘낭인(狼人) 송민우’가 주변을 탐색합니다.] 
 
멀리서 두리번거리는 녀석의 얼굴. 
아······, 혹시. 
어떤 기억들이 떠올랐다. 몇 시간 전에 꿨던 꿈. 고등학교 시절, 일진들에게 맞던 시절의 기억.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얼굴을 보니 맞는 것 같았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명찰에 적힌 그 이름은 잊을 수가 없다. 
 
송민우······ 틀림없다. 
 
근데, 저 자식이 ‘하차자’라고? 
그 일진 새끼가 소설을 읽을 리가 없는데? 
 
“저놈 몇 번째 하차자인데?” 
“저 자식은······ 좀 이상해. 평범한 하차자랑은 좀 다르거든.” 
“뭔데?” 
 
잠깐 고민하던 한수영이 말했다. 
 
“내 눈에 저놈은······ ‘173편만 본 하차자’라고 떠.” 
 
순간, 송민우의 코가 벌름거리더니 놈의 고개가 이쪽을 향했다. 
노랗게 변한 녀석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찾았다.’ 
 
네 발로 땅을 박찬 녀석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 Episode 15. 왕이 없는 세계 (5) > 끝

< Episode 15. 왕이 없는 세계 (6) >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송민우가 코앞에 있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 
최소 민첩이 40은 넘어야 이 정도 속도가 나올 텐데. 
 
“너희들이냐?” 
 
그르렁거리는 울음이 목소리에 배어 있었다. 
이미 인외종으로의 변이가 완전히 끝난 녀석. 
 
[6급 인외종, ‘낭인 송민우’가 ‘포식 위협 Lv.5’을 발동합니다!] 
[인물 ‘한수영’이 ‘정신 방벽 Lv.3’을 발동합니다!] 
[인물 ‘한수영’이 ‘포식 위협’의 효과를 일부 감쇄합니다.] 
 
순식간에 쏘아진 녀석의 팔이 한수영의 멱살을 붙잡았다. 
 
“컥······.” 
 
아무리 온전한 몸 상태가 아니라지만, 저 ‘한수영’이 단번에 제압당할 정도의 힘. 
 
6급 인외종. 
 
지금 상대하기엔 최악의 적이었다. 
5급 화룡종을 상대했을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속성 싸움에서 압도적이었고, 거대 괴수종의 움직임이 상대적으로 둔하다는 것도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송민우의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내 ‘코인 농장’을 부순 게 니들이냐고.” 
 
질문이었음에도, 놈의 말투는 이미 확신조였다. 
하얗게 드러난 송민우의 송곳니를 본 순간, 한수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씨발, 빨리 죽여 버려!” 
 
나는 ‘신념의 칼날’을 발동했고, 한수영은 [아바타]를 사용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송민우의 강력한 킥이 들어왔다. 
 
퍼어억! 
 
막 생성되던 아바타의 머리가 터졌고, 나는 허공을 날고 있었다. 
 
[6급 인외종, ‘낭인 송민우’가 ‘가속 Lv.5’을 발동 중입니다.]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송민우의 연타가 이어졌다. 
머리, 어깨, 배. 
부위를 가릴 것 없이 쏟아지는 맹공. 
속에서 숨이 울컥 터졌다. 
한수영의 목소리가 먹먹하니 메아리쳤다. 
 
“김독자!” 
 
······아니, 아무리 인외종이라도 이렇게 강할 리가 없는데? 
피하는 것은 늦었다. 
나는 황급히 종합 능력치를 올린 후 몸을 웅크렸다. 
 
[체력에 16000코인을 투자했습니다.] 
[체력 Lv.24 -> 체력 Lv.50] 
[거인족 같은 맷집이 당신의 전신에 깃듭니다.] 
 
고통이 급속도로 줄어들더니, 이내 버틸만한 수준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김독자? 어디서 듣던 이름인데······.” 
 
송민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드 사이로 보이는 녀석의 얼굴. 
그 순간, 무엇이 문제인지 알 것 같았다. 
이 녀석이 강한 게 아니었다. 
문제는 나였다. 
 
[‘포식 위협’의 효과로 당신의 전투 의지가 감소합니다.] 
[‘포식 위협’의 효과로 당신의 움직임이 느려집니다.] 
 
말도 안 된다. 
5급 화룡종의 위협도 극복해 낸 내가, 겨우 이런 놈한테? 
그럴 리가 없다. 
나한텐 [제4의 벽]이······.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전에도 몇 번인가 이런 적이 있었다. 
극장 던전에서 유중혁과 싸웠을 때, 그리고 1인칭 시점으로 유중혁에게 몰입했을 때······ 그런데 지금은 유중혁도 없는데, 어째서? 
내 멱살을 붙든 송민우가 으르렁거리며 발톱을 세웠다. 
 
“······생긴 게 낯익은데. 너 나 알지?” 
 
―야, 김독자. 뭐하냐? 
 
익숙한 목소리가, 같은 목소리 위에 겹쳐진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나는 놈의 손목을 붙잡으며 대답했다. 
 
“몰라.” 
“그래? 나는 기억날 것 같은데.” 
 
―그거 그만 쳐 읽고, 가서 빵 좀 사와라. 응? 
 
[6급 인외종, ‘낭인 송민우’가 ‘기억력 강화 Lv.3’을 발동합니다.] 
 
“난 널 알아.”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그렇구나. 
이제야 [제4의 벽]이 어떤 스킬인지 알겠다. 
송민우의 표정에 미소가 깃들었다. 
 
“신기하네. 너 같은 찌질이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지? 매일 소설책이나 보던 새끼가.” 
“······.” 
“하하, 너 인마. 컴활 시간에 몰래 소설 보다가 나한테 뒤지게 처맞았던 그놈이지? 나 기억 안 나냐?” 
 
기억한다. 
당연히 기억한다. 
한발 늦은 분노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나 송민우야. 동창 얼굴 정도는 기억해야지? 마침 잘 됐다. 안 그래도 혹시 너 살아있을까 찾고 있었는데.” 
 
17살의 나는 생각했었다. 
내게 힘만 있다면, 눈앞의 이 녀석을 찢어 죽이고 싶다고. 
송민우가 이죽거렸다. 
 
“그때 네가 보던 소설 있잖아. 그거 어디 가야 볼 수 있냐?” 
 
그 말을 듣는 순간,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내가 놈의 패거리에게 맞을 동안, 내 자리에 앉아 내가 읽던 소설 스크롤을 내리던 녀석의 모습. 
······설마? 
 
―하여간 오타쿠 새끼, 봐도 이딴 걸 보냐? 이런 게 재밌어? 
 
우스운 일이다. 
하필 그때 놈이 읽은 그 소설이······. 
 
퍼어억! 
 
녀석의 주먹이 그대로 내 배에 꽂히며, 내 몸이 허공을 날았다. 
충격을 못 이긴 몸이 건물 외벽으로 움푹 박힌 것과 동시에, 한수영의 아바타가 송민우를 습격했다. 
 
콰아아앙! 
 
무너진 건물 외벽이 내 위로 떨어졌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제4의 벽]. 내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전용 스킬. 
여전히 이 스킬의 기능 전체를 알진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이 스킬은, 내가 이 세계를 ‘소설’로 인식하게 만든다. 
 
사실 나도 이상하다 싶은 때가 종종 있었다. 
현실에서의 내가 보일 수 없었던 판단력과 행동력. 
마치, 외부에서 이 세계를 보는 듯한 침착함. 
그것은 모두 [제4의 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씨발······ 너 지금 뭐하냐?” 
 
화가 난 목소리. 
돌 더미를 치우자, 분노한 한수영이 내 앞을 막고 있었다. 
수십 개로 불어난 그녀의 아바타가 건물 통로를 끼고 송민우와 웨어 울프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분투하는 한수영의 코에서 핏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얼굴에는 혈관이 불거져 있었다. 
바닥을 치고 있던 마력을 쥐어 짜내 저런 힘을 내다니, 한수영이 대단하긴 대단하다. 
 
“아깐 너만 믿고 있으라더니, 지금 뭘 자빠져 있는 거냐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능력치를 올리기 전에 맞은 뼈마디가 심하게 아려왔다. 실로 현실적인 고통이었다. 잊고 있었다. [제4의 벽]은 이런 고통의 완충 역할도 해주고 있었지. 
 
[상당수의 성좌들이 뜻밖의 전개에 당황합니다.] 
 
나는 고통을 참으며 먼지를 털고 일어났다. 
 
“자체 각성 이벤트 중이었어.” 
“······뭐?” 
“맨날 쉽게 이기면 무슨 재미가 있냐? 가끔 역경도 있어야지.” 
“아하, 그래서 그렇게 쳐 맞고 늘어져 계셨다?” 
“잠깐 생각 좀 한 거야.” 
 
[상당수의 성좌들이 안심합니다.] 
 
[제4의 벽]은 현실을 소설처럼 인식하게 만드는 스킬. 
그런데 그게 흔들렸다면, 이유는 명백했다. 
 
크아아아앙―! 
 
나는 지금 저 송민우를 ‘현실’로 인식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를 폭행하고, 내 10대를 비극으로 만들었던 그 빌어먹을 일진 새끼로. 
 
“······혹시 저 새끼랑 아는 사이야?” 
 
그래도 작가였다고, 눈치 하나는 빠른 여자다. 
내가 노려보자, 멈칫하던 한수영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 
 
“미안, 딱히 듣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그게 들리더라고······.” 
 
거짓 간파까지 있는 녀석에게 숨기기도 뭐해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래, 아는 사이야.” 
“대충 짐작은 가는데······.” 
“어릴 적에. 그냥 뻔한 트라우마야.” 
“······뻔한 트라우마가 어딨냐? 트라우마는 다 심각한 거야.” 
 
한수영이 질질 흐르는 코피를 뱉으며 말했다. 
 
“퉷! 뭐가 문젠데? 이 누님이 각성시켜 줄 테니까 털어놔 봐. 원래 말 몇 마디 해주면 각성해서 존나 쎄지는 게 ‘멸살법’이잖아?” 
“내가 이현성인 줄 아냐?” 
 
결국 이 문제는 나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만약 내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인간을 만날 때마다 계속 [제4의 벽]이 흔들린다면, 앞으로 고생길은 훤한 거니까. 
 
무엇보다 난 지금 28살이다. 
고작 일진 때문에 쩔쩔매는 17살 고등학생이 아니라고. 
 
[복수극을 좋아하는 한 성좌가 자신의 수식언을 밝힙니다.] 
[성좌, ‘한발 늦은 시련의 극복자’가 당신을 응원합니다.] 
[몇몇 성좌들이 동조합니다.] 
[현상금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현상금 시나리오 – 트라우마 극복> 
 
분류 : 서브 
난이도 : C 
클리어 조건 : ‘한발 늦은 시련의 극복자’를 비롯한 몇몇 성좌들이 당신에게 현상금 시나리오를 의뢰합니다. 제한시간 내에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십시오. 
제한시간 : 1시간 
보상 : ??? 
실패 시 : ‘한발 늦은 시련의 극복자’의 경멸. 
 
+ 
 
‘한발 늦은 시련의 극복자’라면, ‘멸살법’에서도 본 적 있는 성좌였다. 
내가 알기로 이 녀석은 다른 세계의 성좌인데······ 하긴, ‘다섯 번째 시나리오’에서 나타날 놈들을 생각하면 슬슬 출현 빈도가 높아질 때도 됐지. 
아무튼, 이런 걸 두고 전화위복인 셈이다. 
나는 한수영에게 사명대사의 거적을 던졌다. 
 
“코피 닦고 뒤로 물러나 있어.” 
“뭐?” 
“이제 충분해.” 
 
나는 한수영의 아바타들을 제치고, 웨어 울프 무리 속에 뛰어 들었다. 
 
[민첩에 6000코인을 투자했습니다.] 
[민첩 Lv.30 -> 민첩 Lv.40] 
[바람 같은 기민함이 당신의 전신에 깃듭니다.] 
 
[근력에 15500코인을 투자했습니다.] 
[근력 Lv.25 -> 근력 Lv.50] 
[당신의 근육이 괴물처럼 꿈틀거립니다.] 
 
진작부터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얼마 전 ‘개연성 폭풍’ 한 번 맞았다고 너무 행동을 사리고 있었다. 
 
기이이잉!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특수 옵션이 발동합니다.] 
[에테르 속성이 ‘신성’으로 변환됩니다.] 
 
크아아아앙―! 
 
내가 질 이유가 없는 싸움이었다. [제4의 벽]이 무너져서 잠깐 판단력이 흐려졌을 뿐. 생각해 보면 나는 충분히 이 녀석들을 제압할 만한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여럿. 
 
서거거걱! 
 
칼날에 베인 웨어 울프들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웨어 울프들은 어둠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신성 속성에는 취약할 수밖에. 
 
더욱이, 이 녀석들은 ‘불살’의 패널티를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언젠가 말했듯 인외종이란 곧 인간이 아니라는 뜻. 
 
이 녀석들은, 동족이 아니다. 
 
웨어 울프 무리 속에서, 나를 발견한 송민우의 얼굴이 보였다. 
천천히 커지는 녀석의 눈동자. 
숨을 몰아쉬던 한수영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야! 괜찮겠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상황은 비슷했으니까.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흔들립니다.] 
 
그래도 분명 아까와는 다르다. 
 
“괜찮아, 각성 이벤트 끝났거든.” 
 
나는 송민우를 향해 곧장 달려갔다. 
 
크르르릉―! 
 
몇 가지 생각이 스쳐간다. 만약 여기서 [간평의]를 발동해 ‘육망성의 사냥꾼’ 같은 녀석을 호출한다면 승부는 쉽게 갈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싸워서야 트라우마가 극복될 리가 없다. 
이번만큼은, 온전히 내 역량으로 싸워야만 한다. 
 
[6급 인외종, ‘낭인 송민우’가 ‘가속 Lv.5’를 발동합니다.] 
 
가속을 발동한 송민우의 몸이 엄청난 스피드로 움직였다. 
분명 40남짓의 민첩일텐데도, 5레벨 가속의 효과로 본신의 속도가 껑충 뛴 모양이었다. 
보법이 없는 나로서는, 역시 편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민첩에 7000코인을 투자했습니다.] 
[민첩 Lv.40 -> 민첩 Lv.50] 
[질풍 같은 신속함이 당신의 전신에 깃듭니다.] 
 
스킬이 없으면, 스탯으로 때우면 된다. 
나는 날아드는 녀석의 손톱을 가볍게 피하며, 검을 위로 올려쳤다. 
 
“크아아악!” 
 
잘려나간 녀석의 팔이 허공을 헛도는 동안, 나는 녀석의 다른 쪽 팔도 베어냈다. 당황한 녀석의 몸이 균형을 잃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녀석의 다리까지 마저 베어버렸다. 
 
스가각! 
 
순식간에 사지를 절단당한 송민우가 포효했다. 
포효와 함께, 잘려나간 녀석의 팔다리가 다시 자라나고 있었다. 
웨어 울프의 특전인 [육체 재생]이었다. 
그런데 저 정도 재생 속도면······ 이 자식, 누군가에게 ‘가호’를 받고 있나 본데? 
그래······ 차라리 잘 됐다. 
 
[성좌, ‘한발 늦은 시련의 극복자’가 당신의 행동에 주목합니다.] 
 
현상금 시나리오의 목표는 놈을 죽이는 게 아니라,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 이렇게 쉽게 죽여서야 성좌가 만족할 리가 없지. 
나는 ‘신념의 칼날’을 해제하고 대신 주먹을 들었다. 
 
[근력에 8000코인을 투자했습니다.] 
[근력 Lv.50 -> 근력 Lv.60] 
[당신의 힘이 거인족들의 흥미를 끌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종합 능력치가 해당 시나리오의 제한 기준에 거의 도달했습니다.] 
 
나는 사지가 재생된 송민우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놈의 얼굴을 보자, 괜히 내 안의 ‘17살 김독자’가 위축되는 느낌이다. 
가엾기도 하지. 
지금부터 이 형님이 복수해 주마. 
 
“민우야, 아까 내가 제대로 인사 못했지?” 
“뭐······?” 
“반갑다.” 
 
나는 그대로 놈의 배를 후려쳤다. 
 
“커허헉······!” 
“근데 말이야. 나 그때 많이 아팠다.” 
 
17살의 김독자가, 기억 속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얼마든지 봐라. 
네가 생각했던 그 일진이, 어느 정도의 그릇인지. 
 
“너도 양심이 있으면 인마. 동창 타령부터 할 게 아니라 사과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나는 한 손으로 놈을 붙든 채, 계속해서 주먹을 갈겼다. 
흉부를. 배를. 얼굴을. 
 
“소설 좀 읽는 게 뭐가 그렇게 잘못이었냐? 어? 내가 너한테 피해 줬냐?” 
 
17살의 김독자를 대신해, 나는 놈을 때리고 또 때렸다. 
 
“새끼, 책 사는데 돈이라도 좀 보태줬으면 몰라.” 
 
무자비한 타격에 놈의 이빨이 부서졌고, 복근이 망가졌으며, 팔다리의 뼈가 부러졌다. 압도적인 폭행에 근처의 웨어 울프들은 으르렁대면서도 좀처럼 다가오지 못했다. [포식 위협] 따위 쓰지 않아도, 공포 같은 건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진짜 공포는 원래 차원이 다른 강함에서 비롯되는 법이니까.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송민우가 망가진 입으로 애원하기 시작했다. 
 
“크, 크릉! 미, 미안, 미안하다······!” 
“그래? 미안해?” 
“크르릉, 그래! 정말, 정말 미안하다! 그, 그땐 내가 철이 없어서······.” 
 
물론 그랬겠지. 
안다. 
철없는 시절의 악의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됐으니까. 
하지만. 
 
“뭔가 착각한 모양인데······ 사과받으려고 때리는 거 아냐.” 
 
이해해도, 용서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애초에 네가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대체 무슨 소리를······.” 
“일단, 트라우마 없어질 때까지만 좀 맞자.” 
 
뭉개지는 송민우를 보며, 나는 모처럼 10대의 한철을 떠올렸다. 
무력하고, 나약했고, 책밖에 몰랐던 나. 
사실, 한수영의 말이 맞다. 
 
세상에 뻔한 트라우마는 없다. 
 
모든 트라우마는 당사자에게는 심각한 것이고, 그러니 고작 이런 행동으로 내 트라우마가 완전히 없어질 거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앞으로도 종종 악몽을 꿀 것이고, 17살의 김독자는 여전히 그 시간 속에 박제되어 비극을 반복하겠지. 
 
그래도, 이것이 약간의 위안은 될지 모른다. 
마치, 내가 그때 읽었던 ‘멸살법’이 그랬듯이. 
 
28살 김독자가 휘두르는 이 주먹은, 17살의 김독자가 잠깐이나마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컥! 커헉! 그, 그만······ 그만······.” 
 
그 시절의 ‘유중혁’이, 내게 그런 존재였던 것처럼. 
 
“꺼어억······.” 
 
그렇게 얼마나 더 때렸을까. 
마침내, 송민우의 얼굴을 봐도 아무 느낌이 들지 않는 순간이 찾아왔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의 흔들림이 잦아듭니다.] 
[현상금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 Episode 15. 왕이 없는 세계 (6) > 끝

< Episode 16. 다섯 번째 시나리오 (1) >
 
 
 
 
 
Episode 16. 다섯 번째 시나리오 
 
 
 
뚝뚝 떨어지는 송민우의 피가 바닥을 적셨다. 핏물로 흥건해진 주먹의 감각이 둔해졌다. 송민우는 가끔 꾸역꾸역 피거품을 흘릴 뿐, 눈을 뜨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다. 부서진 녀석의 육체는 이제 수복을 포기한 듯했다. 
한수영이 중얼거렸다. 
 
“무서운 놈······ 웨어 울프를 손으로 때려잡냐?” 
 
이미 근처의 웨어 울프들은 도망가거나 한수영에 의해 목이 달아난 직후였다. 나는 송민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직 죽진 않았어.” 
 
이제 녀석을 봐도 [제4의 벽]은 흔들리지 않았다. 트라우마가 해결이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과거의 기억에 내성이 생긴 것이겠지. 
 
[성좌, ‘한발 늦은 시련의 극복자’가 당신의 모습에 격려를 보냅니다.] 
[성좌, ‘한발 늦은 시련의 극복자’가 당신에게 자신의 성흔을 하사하고자 합니다.] 
 
성흔을 준다고? 진짜? 
이번 현상금 시나리오는 성좌 단일 의뢰도 아니었기에, 성흔을 보상으로 주는 것은 정말 의외였다. 
물론, 나야 고마운 일이지만. 
 
[성흔, ‘자기합리화(自己合理化)’를 습득하였습니다.] 
[성좌, ‘한발 늦은 시련의 극복자’가 자신의 성흔을 계승한 당신을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당신은 이제 어떠한 트라우마에도 굴하지 않는 방어 기제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고마운······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잠시 멍하니 있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배를 잡고 웃습니다.] 
 
자기합리화? 
이게 뭐라고 한자병기까지 되어 있는 건데? 
지금 누구 놀리냐? 
한수영이 물었다. 
 
“야, 그거 안 죽여?” 
“어?” 
“그거 말이야.” 
 
뒤늦게 내 손아귀 안에서 덜렁거리는 송민우를 바라보았다. 
 
죽여야 하나? 
어차피 인외종이니 불살의 부담은 없다. 
 
[‘낭인 송민우’의 후원자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죽이고 나면, 비형 채널의 성좌들도 좋아할 테지.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복수를 염원합니다.] 
 
나는 잠시 송인우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녀석의 멱살을 놓았다. 
 
“그만 가자.” 
“뭐? 진짜?” 
“그래.”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위선에 실망합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판단에 의문을 표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판단을 지켜봅니다.] 
 
“진짜로 안 죽인다고? 저 새끼 코인도 꽤 가지고 있을 텐데?” 
“그래.” 
“그럼 내가 죽여도 돼?” 
“그러든가. 하지만 후회할 텐데?” 
“후회?”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한 후 그녀를 가로질러 앞으로 걸어갔다. 
정확히 웨어 울프의 무리들이 달려왔던 방향으로. 
아마 이 방향의 끝에, 녀석들의 본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다면 그곳에 이 녀석들을 웨어 울프로 변이하게끔 도와준 [운석]도 있겠지. 재앙 시나리오를 대비하기 위해 [운석]은 반드시 모아야 했다. 
조금 뒤처져서 따라오던 한수영이 내 눈치를 흘끗 보더니, 미심쩍은 기척을 냈다. 
갑자기 발걸음 소리가 많아진다 싶더니, 소리들은 일제히 우리 뒤쪽으로 멀어졌다. 정확히 송민우가 있는 방향이었다. 
 
아바타······. 
그래. 
한수영 너라면 그럴 줄 알았지. 
 
나는 그녀의 욕망을 내버려 두었다. 
그녀가 내 위선을 눈감아주었던 보답으로. 
그리고 잠시 후. 
 
“씨발! 이거 뭐야!” 
 
한수영이 경련을 일으키며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머릿속에 무슨 메시지가 뜨고 있을지,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이런 메시지가 떴을 것이다. 
 
[6급 인외종 ‘낭인 송민우’를 사살하여 마왕 ‘안드라스’가 살해자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마왕 ‘안드라스’는 권속 살해에 최종 타격을 가한 화신체를 기억할 것입니다.] 
[마왕 ‘안드라스’는 자신의 권속들에게 최종 타격을 가한 화신체를 수배할 것입니다.] 
[최종 타격자 : 한수영] 
 
망연한 얼굴로 나를 보는 한수영을 향해, 나는 역시나 씩 웃어주었다.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송민우는 72 마왕 중 하나인 ‘안드라스’의 권속이었다. 
 
 
* 
 
 
72 마왕. 
 
스타 스트림의 강자들 중에는 ‘성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저 하늘의 구독좌가 되기를 거부하고, 여전히 육신을 가진 채 행성을 떠도는 강자들도 있다. 그런 초강자들 중 하나가 바로 ‘마왕’이었다. 
 
“넌 진짜 나쁜 새끼야.” 
 
마왕들은 성좌들이 화신을 만들 듯 자신들의 ‘권속’을 구하는데, 주로 인외종이나 악마종의 길을 택한 타락한 화신들이 그 대상이 된다. 
72마왕의 카스트 중 하위에 위치한 마왕 ‘안드라스’. 
그의 상징 중 하나는 바로 ‘늑대’다. 
송민우 녀석이 뛰어난 [육체 재생] 능력을 갖고 있었던 것은 바로 안드라스의 가호 때문이었다. 
한수영이 더듬거렸다.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걱정마.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너처럼 마왕의 저주를 받은 녀석이 있었는데, 곧바로 죽지는 않더라고.”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해?” 
 
그러고 보니 한명오는 마왕 ‘아스모데우스’의 저주를 받았었는데······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아직 살아는 있으려나? 
 
“좋게 생각해. ‘안드라스’는 그다지 고위급 마왕도 아니잖아. 마왕과 적이 되면 절대선 계통의 호감을 얻을 수 있으니까 후원금도 많아질 거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대천사 녀석들한텐 관심 없거든? 게다가 내가 고를 배후성은 천사들과 사이가 안 좋다고!” 
 
왜, 너도 마왕이라도 고르게? 
무심코 그렇게 물으려다, 뭔가 기묘한 느낌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방금 이 녀석이 뭐라고 말했지? 
 
“네가 ‘고를’ 배후성은 천사들과 사이가 안 좋다고?”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한수영이 자신의 입을 짚었다. 
 
“젠장, 이놈의 입이······.” 
“너 설마 아직도 배후성이 없는 거냐?”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 역시 배후성이 없는 상태였으니까. 
사실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어영부영 살아남은 사람들 중 태반은 배후성이 없을 것이다. 정확히는 ‘고를 선택지가 없었다’라고 말해야겠지만. 
그러나 한수영 같은 강자가 아직 배후성이 없다는 것은 뜻밖의 정보였다. 
 
“못 고른 게 아니라 안 고른 거야. 처음부터 선택지 고르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 한 번밖에 못 고르는 건데.” 
“뭐, 그건 그렇지.” 
 
<배후 선택>은 뒤로 미룰 수만 있다면 미루는 게 좋다. 
좋은 성좌는 얼마든지 있고, 시나리오 활약 여부에 따라 말 그대로 ‘똥차 가고 벤츠 오는’ 사태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으니까. 
<배후 선택> 이벤트는 첫 번째 시나리오가 끝난 직후에 한 번, 이후엔 ‘재앙 시나리오’들이 발생하기 직전에 규칙적으로 시행된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는 ‘재앙 시나리오’니까, 아마 한수영은 곧 있을 2회차의 <배후 선택>에 참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짐짓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근데 누구 고르려고? 생각해 둔 성좌라도 있어?” 
 
내 말에 한수영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알면 깜짝 놀랄걸? 이미 나한테 관심도 보였거든.” 
“누군데 그래?” 
 
혹시 ‘제천대성’이라도 뜬 건가? 
 
“‘심연의 흑염룡’이라고 들어봤냐?” 
 
······무슨 흑염룡?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반응을 살핍니다.] 
 
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아, 그래. 잘 생각했네. 좋은 배후성이지.” 
 
원작의 일부 회차에서 ‘망상악귀 김남운’의 배후성을 자처했던 이가 바로 저 ‘심연의 흑염룡’이었다. 망상악귀면 강철검제와 함께 최강을 다투는 조연 중 하나였으니, 실제로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복잡한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 새낀 이제 나한테 관심 없다더니 희한한 놈이네 진짜. 
내 무심한 말투에 한수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뭔가 찝찝한 얼굴이다, 너? 넌 배후성이 누구길래 그렇게 틱틱대냐?” 
“아냐, 아무것도. 그냥 부러워서 질투한 거야.” 
“진짜로?” 
“진짜로.” 
 
[인물 ‘한수영’이 ‘거짓 간파 Lv.1’을 발동 중입니다.] 
[인물 한수영은 해당 발언이 거짓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뒤질래, 진짜?” 
 
무려 ‘심연의 흑염룡’이라니. 
그녀가 꼭 배후성을 얻기를 바랄 뿐이다. 
한수영과 쿵짝도 아주 잘 맞을 테니까. 
 
[하렘을 좋아하는 한 성좌가 당신과 ‘한수영’의 케미를 응원합니다.] 
[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나랑 똑같은 메시지를 들었는지 한수영이 얼굴을 구겼다. 
 
“이건 또 뭔······.” 
 
안타깝지만 저 하렘 성좌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한수영과 내가 함께하는 것은 앞으로의 10일에 한정된다. 
잠깐 협력하고는 있지만, 그녀가 위협적인 적이라는 것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 
 
“도착한 것 같은데.” 
 
잠시 후, 우리는 웨어 울프들의 본진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다다랐다. 
방배역 인근. 좁다랗게 붙어선 빌딩 숲 사이로 혈향이 감돌고 있었다. 마침 전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는지, 멀리서 웨어 울프의 울음소리와 사람의 비명이 들려왔다. 한수영이 말했다. 
 
“조금 늦은 것 같네. 선객이 있나 봐?” 
 
웨어 울프들이 모두 어디론가 이동했는지, 보초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들어가자, 윤 대리가 설치했던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의 농장이 나타났다. 
‘코인 농장’은 멸망한 세계의 전유물. 
나는 이제 지겹도록 이런 광경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미 코인 수확이 끝났는지, 철창 속에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앞서 나가던 한수영이 갑자기 코를 틀어쥐었다. 
 
“우웩, 저건 또 뭐야?” 
 
철창들을 지나 웨어 울프들의 거주 구역으로 향하자, 더욱 끔찍한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잘려나간 인간의 허벅지가 고무줄에 매달려 있었다. 마치 정육점에 걸린 돼지고기처럼, 용도가 너무나 분명한 부위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당신의 정신적 충격을 상쇄합니다.]

이런 장면은 텍스트로나 읽었지, 나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보통의 인간이 인외종으로 진화할 방법은 정해져 있다. 
식인(食人). 
즉, 자신의 동족을 포식하는 것. 
한수영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씨발 새끼들······.” 
 
대부분의 인외종은 우발적으로 진화한다. 보통 ‘식량 찾기’ 서브 시나리오를 클리어하지 못한 이들이 이런 길을 걷게 되는데, 한 번 인외의 길을 걷고 나면 누구도 멈출 수가 없다. 
종이 바뀐 이들은, 인간을 죽이는 것에 더 이상 자책감을 갖지 않게 되는 것이다. 
 
“너도 이런 걸 보면 화가 나긴 하는 모양이네.” 
“당연하지. 화 안 날 사람이 어딨어?” 
“다른 선지자들이 그러던데. 넌 알고 있는 정보들을 이용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생각뿐이라고.” 
“누가 그래?” 
 
한수영이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 
 
“표절 시비 걸렸을 때만큼이나 어이없는 소리네.” 
“······.” 
“세계 지배? 하면 좋기야 하겠지. 하지만 일단은 멸망을 막는 게 첫 번째 목표라고. <사도>들을 괜히 모은 줄 알아?” 
“그 <사도>들, 죄다 쓰레기던데.” 
“걔들은 원래부터 쓰레기였어! 그게 내 잘못이냐?” 
 
탕! 탕! 탕! 탕! 
 
우리는 반사적으로 숨을 죽였다. 앞쪽에서 터져 나오는 굉음. 살점들이 과육처럼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타앙! 
 
아무리 생각해도, 이 소리는 총성(銃聲)이다. 
군대는 이미 전멸했을 텐데? 
우리는 건물들을 돌아 총성 쪽을 향해 달려갔다. 
설령 군대가 남았다고 해도 총으로 웨어 울프를 상대하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다. 하지만 곧이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 말이 안 되는 얘기를 말이 되게 바꾸어 놓았다. 
 
산처럼 쌓인 웨어 울프들의 시체가, 눈앞에 있었다. 
 
총탄에 맞은 시체들의 피부는 모두 새카맣게 변색 되어 있었다. 나와 한수영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속성탄.” 
“총탄에 신성력을······?” 
 
멀리 이쪽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죄다 현대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다들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한수영이 긴장하며 내 옷깃을 붙잡았다. 
 
“야, 전에 ‘서대문 형무소’ 쪽에 너 같은 년 하나 있다고 말한 거 기억하지?” 
“어.” 
“저거, 그 년 세력이야.” 
 
한수영이 가리킨 곳에 가면을 쓴 여자가 있었다. 
얼굴을 비롯한 몸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어서, 어깨 아래로 늘어진 긴 머리가 아니었다면 성별조차 알아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쟤가 리더야. 성장세나 하는 짓을 보면 하차자가 분명한데, 나한테 아무런 정보가 안 떠.” 
 
그런가. 저들이 한수영이 얘기했던 ‘서대문 형무소’의······. 
근데 왜 저만한 세력이 왕좌 쟁탈전 때는 보이지 않았지? 
한수영이 늘어진 웨어 울프의 산을 보며 입을 열었다. 
 
“쟤들도 방랑자야. 꽤 강력한 방랑자들인데······ 지금 막 내가 아는 가장 강력한 방랑자들이 됐네.” 
 
반대쪽에서 총을 든 여자가 이쪽을 향해 곧장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수영이 말한 리더는 아니었다.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빼 들었고, 한수영은 [아바타]를 준비했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던 여자의 총구가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흠칫 허리를 숙이는데, 그녀의 총구가 웨어 울프의 시체 산을 향했다. 
 
두두두두두! 
 
내갈긴 총탄에 맞은 시체들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시체 아래에 숨어 있던 뭔가가 드러났다. 
 
“저건?” 
 
가로세로 약 2미터 크기의 빛나는 돌. 
‘재앙’ 을 막기 위해 우리가 찾던 운석들 중 하나. 
[노란색 운석]이 그곳에 있었다. 
역시 저 ‘운석’이 웨어 울프들이 가진 힘의 근원이었던 모양이다. 
우리와 함께 운석을 바라보던 여자가, 천천히 내 쪽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김독자지?”
 
 
 
 
 
< Episode 16. 다섯 번째 시나리오 (1) > 끝

< Episode 16. 다섯 번째 시나리오 (2) >
 
 
 
 
 
자세히 보니 여자는 꽤 연배가 있어 보였다. 
40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간간이 진 주름을 보니 적어도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얼굴. 
나를 알고 있다고? 어떻게?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일단 평정을 유지한 채 여자를 떠보기로 했다. 
 
“뭔가 착각한 모양인데, 내 이름은 유중혁이다. 김독자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놈의 이름이지.” 
“······유중혁?” 
“그래. 그러니까 그쪽 하차자한테 전해. 함부로 까불지 말라고.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면, 일단 전하고 와.” 
 
흘끗 옆을 보니 한수영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눈치를 보냈다. 한수영이라면,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 알 것이다. 여자가 입을 열었다. 
 
“네가 김독자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불필요한 거짓말은 그만두지.” 
 
[인물 ‘한수영’은 해당 발언이 사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한수영이 내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여자는, 내가 누군지 확실히 알고 왔다. 
 
“왕께서 말씀하시길, 이 운석은 너희에게 맡기겠다 하셨다.” 
 
뜻밖의 연속이었다. 
나를 아는 걸로도 모자라, 이젠 운석을 우리에게 그냥 주겠다니······. 
 
“당신들은 누구지?” 
“우리는 ‘방랑자들의 왕’을 모시는 사람들이다.” 
“저쪽에 가면 쓴 여자가 당신들의 왕인가?”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가면을 쓴 장신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고 있으니, 어딘가 기시감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왕이라······. 당신들은 깃발이 없는 것 같은데?” 
“왕께서는 그런 시답잖은 물건에 연연하지 않으신다.” 
 
······시답잖은 물건? 
여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왕께서 네게 전하라 하셨다. ‘북쪽의 재앙은 우리가 맡겠다. 하지만 다른 네 개의 재앙은, 너에게 맡기겠다’라고.” 
 
내가 뭔가를 물어보기도 전에, 여자는 그 말만을 남기고 자기 할 말은 끝났다는 듯이 돌아섰다. 
한수영이 고함을 질렀다. 
 
“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똑바로 설명해주고 가야 할 거 아냐?” 
 
고함에도,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등을 보인 채 멀어져 갔다. 
한수영이 나를 보며 물었다. 
 
“뭐야 대체······, 너 혹시 저 여자랑도 아는 사이야?” 
“그럴 리가 있겠냐?” 
 
나는 곧바로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등장인물 일람’을 업데이트하면 해당 인물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업데이트하시겠습니까?] 
 
그새 또 업데이트 주기가 돌아온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일부 인물이 일람 사전에 추가됩니다.] 
 
그리고 창이 떠올랐다. 
 
+ 
 
<인물 정보> 
 
이름 : 조영란 
나이 : 37세 
배후성(背後星) : 조선제일술사(朝鮮第一術士) 
전용 특성 : 탈옥한 모범수 (일반), 정의 집행관 (희귀) 
전용 스킬 : [감옥 탈출 Lv.3], [인내심 Lv.6], [집행의 시간 Lv.3], [사격 Lv.4]······. 
성흔 : [둔갑술 Lv.2] 
종합 능력치 : [체력 Lv.30], [근력 Lv.34], [민첩 Lv.36], [마력 Lv.28] 
종합 평가 : 현재 종합 평가가 진행 중입니다. 
 
* 현재 스타터팩을 적용 중입니다. 
* 현재 성장 패키지를 적용 중입니다. 
 
+ 
 
이것 봐라, 조선제일술사? 
 
[성좌, ‘조선제일술사’가 당신을 경계심 어린 눈으로 바라봅니다.] 
 
설마, 벌써 ‘전우치(田禹治)’를 배후성으로 둔 여자가 있을 줄이야. 
게다가 ‘심판자’보다는 격이 좀 떨어지지만, 상당히 좋은 특성인 ‘집행관’ 계통의 클래스까지 보유하고 있다. 
부하가 이 정도라면, 저 ‘왕’이란 자는 대체 어느 정도지? 
나는 곧바로 장신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해당 인물의 정보는 ‘등장인물 일람’으로 열람할 수 없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가면 속 여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찌릿한 통증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여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제4의 벽]이 흔들리지는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계속 여자를 보고 있었다면 송민우를 만났을 때보다 더 커다란 진동이 찾아왔을 것이다. [자기합리화]가 있긴 해도 아직 성능을 확신할 수 없는 만큼 함부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한수영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야,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제4의 벽]이 반응한다는 것은 현실의 나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는 이야기. 
즉, 저 여자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송민우보다 더 커다란 트라우마를 내게 심어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다. 
 
그렇군······ 역시, 당신은 살아남았구나. 
하지만 서울 안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저토록 큰 세력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도. 
그들이 죄수복을 입은 이유도. 
그 사람이라면 납득이 가는 일이었다. 
 
이윽고 방랑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열을 맞추어 자신들이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행군. 세세하게 배어나는 절도에서, 지금껏 어떤 그룹에서도 볼 수 없었던 충성심이 느껴졌다. 
대열의 선두에서 리더가 그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폭군왕 같은 왕관도, 미희왕 같은 용포도 없는 여자. 
 
나는 그들이 쓸고 지나간 폐허를 보았다. 망가진 코인 농장들과, 그들이 살려낸 생존자들. 손수 지급한 것으로 보이는 담요와 생필품들이 생존자들의 곁에 놓여 있었다. 생존자들은 떠나는 방랑자들의 무리를 경외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잊고 있었다. 
꼭 깃발이 있어야만, 혹은 왕좌에 앉아야만 왕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왕이 없는 이 세계에도, 여전히 왕은 있었다. 
 
 
* 
 
 
잠시 후, 나는 그들이 남기고 간 [노란색 운석]을 손보고 있었다. 
노란색 운석. 
달리 월장석(月長石)이라고도 부르는 이 운석은, 실제로 다른 차원을 맴돌던 별의 위성이었다. 
 
과연, 책에서 봤던 그대로다. 
 
손을 댈 때마다 느껴지는 짜릿한 마력이나, 불투명한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 그리고 운석 전체에 도드라진 흰 줄무늬까지. 분명 이 노란색 운석은, 재앙에 대항할 힘 중 하나를 품고 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월장석’이 당신에게 한 차원 높은 진화력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나는 운석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운석이 다시 힘을 거두어갔다. 
월장석은 기본적으로 밤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 인외종들 또한 이 힘을 받았을 것이다. 아마 밤의 힘을 받은 식인종들은 보다 상위 인외종인 웨어 울프로 진화할 수 있었겠지. 
 
[‘월장석’이 당신에게서 알 수 없는 친근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운석의 진짜 용도는 단순히 인외종을 진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웨어 울프 따위는 몇백 마리가 있어도 앞으로 다가올 재앙은 막을 수 없다. 
물론 천 마리쯤 있다면 도움은 되겠지만, 그랬다간 들끓는 인외종들과 마왕의 권속들로 인해 또 다른 재앙이 찾아올 것이다. 
 
“모처럼 봉사 활동하는 느낌이네······. 야, 뭔가 알아냈어?” 
 
내가 운석을 살피는 사이, 한수영은 근처에 쓰러져 있던 생존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녀석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좀 의외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코인을 노린 꼼수였다. 
 
[절대선 계통의 일부 성좌들이 ‘한수영’의 선행에 감동합니다.] 
 
마왕이랑 척까지 진 마당이니, 후원금은 평소보다 뻥튀기되었을 것이다. 
과연 인간의 양면성이란 심오한 것이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 중 심연의 흑염룡 뺨치는 녀석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배후 선택>이 다가오는 만큼 한수영도 슬슬 간을 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바타가 유용하긴 하네.” 
 
수십 명의 아바타들이 빠르게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인외종들의 시체가 활활 타올랐고, 끔찍한 철창들과 인간 정육점들도 철거되었다. 저렇게 코피까지 줄줄 쏟아가며 코인을 벌고 싶을까 싶지만······. 
쓰윽, 하고 피를 훔치던 한수영이 물었다. 
 
“그래서, 언제 얘기해 줄 건데?” 
“뭘?” 
“아까 그거 말이야.” 
 
나는 그녀의 물음이 운석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직도 그거 신경 쓰고 있었어?” 
“그럼 신경이 안 쓰이겠냐?” 
 
자기가 모르는 종류의 ‘하차자’가 둘이나 있다. 
그런데, 그 두 하차자 사이에 어떤 커넥션이 있는 것 같다. 
명색이 ‘마지막 하차자’인 한수영 입장에서는 신경 쓰일 수밖에 없겠지. 
 
“아는 사람이야, 아마도.” 
“······아깐 모른다며?” 
“말 걸었던 여자 말고. 네가 말한 그룹의 리더 말야.” 
“방랑자들의 왕?”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사람은 하차자가 아냐.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은 원작을 읽은 적도 없을 거야.” 
“뭐? 그럼 어떻게 원작 내용을 아는 건데?” 
“내가 직접 이야기해줬어.” 
 
한수영은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 재미없는 얘기를 다른 사람한테 해줬다고? 아니 왜?” 
“그 사람을 만나면 할 이야기가 필요했거든.” 
 
나는 잠시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나한텐 그 얘기밖에 할 게 없었으니까.” 
 
살짝 어두워진 분위기 때문일까, 나를 추궁하려던 한수영이 잠깐 멈칫했다. 아마 묻고 싶은 게 많을 것이었다. 그 여자는 누구인지, 그리고 나와 그녀는 무슨 관계인지. 
잠시 말이 없던 한수영은, 다시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 여자랑 무슨 관계인진 모르겠지만, 그냥 둬도 괜찮은 거야? 우리 말고도 미래를 아는 녀석이 많아지면······.” 
 
염려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괜찮을 것이다. 
적어도 그녀는 원칙이 있는 사람이고, 미래 정보를 이용해 함부로 난장을 피우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월장석을 툭툭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이거야. 지금부터 이걸 깨울 거니까.” 
“뭐? 이걸?” 
 
한수영이 제정신이냐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지금 ‘재앙’을 깨우겠단 얘기야?” 
“뭘 그렇게 놀라? 너도 저질렀던 일이잖아?” 
 
한수영은 <선지자들의 밤>에서 선지자들을 부추겨 화룡종, ‘레서 이그니르’를 깨운 적이 있었다. 
 
“야! 그 정돈 소재앙이지, 이건······.” 
“이건 재앙이 아니야.” 
“······그럼 뭔데?” 
“표절을 게을리 한 모양이네. 기억 안 나냐? 시나리오가 시작되면 여기서 뭐가 나오는지 진짜 몰라?” 
 
잠시 나를 노려보던 한수영은 스마트폰을 켜서 자신의 소설 텍본을 읽기 시작했다. 
 
“아······. 이거, 설마······.” 
“이제 찾았냐? 잘 베낀 모양이네.” 
“시끄러. 근데 아직 메인 시나리오 열리지도 않았는데 이런 짓 해도 괜찮아? 또 개연성 폭격 맞으면 어쩌게?” 
“이런 걸로는 안 맞아.” 
“중급 도깨비한테 미움도 산 마당에······.” 
“그러니까 그놈 없을 때 처리하잔 거지.” 
 
지금쯤, 녀석은 한창 관리국에서 문책당하느라 바쁠 테니까. 
 
“지금부터 여기다 마력을 주입할 거야. 내 계산이면 부화까지 열 시간 정도면 충분해. 내가 네 시간, 그리고 네가 여섯 시간.” 
“왜 나만 여섯 시간인데?” 
“네 마력 레벨이 더 높을 거 아냐?” 
 
그 순간 돌아다니던 아바타들의 개체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눈치하고는. 
 
“솔직히 말해봐. 너 마력 레벨이 몇이야?” 
“꼭 말해야 돼?” 
“시나리오 클리어에 필요한 정보야.” 
 
[‘임시 서약서’의 조항이 효력을 발휘합니다.] 
 
한수영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55레벨.” 
 
솔직히 깜짝 놀랐다. 아바타를 수십 개나 운용할 수 있는 걸로 봐서 40레벨은 넘는다고 생각했는데, 무려 55레벨이라니······ 거의 시나리오 제한 기준에 육박하는 수치다. 
체력과 근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걸 보면, 지금껏 가진 코인을 죄다 마력에 몰빵한 모양이었다. 
 
“바꿔야겠네. 내가 2시간. 네가 8시간.” 
“야! 불공평하잖아! 그리고 나 지금 마력도 다 떨어졌다고.” 
 
나는 비형에게 요청해 [도깨비 보따리]를 연 후, [중급 마력 회복의 물약]을 몇 개 구입했다. 
 
“그럼 이거 마시면서 해.” 
“뭐야 이건?” 
“코인템.” 
“······네 배후성 엄청 통 큰가 보다? 이런 거 나한테 막 줘도 돼?” 
“통은 내가 큰 거고.” 
 
한수영이 나를 흘겨 보았다. 
 
“이상한 거 넣은 거 아니지?” 
“그럼 나 먼저 시작한다.” 
 
나는 월장석에 손을 대고 곧장 마력 주입을 시작했다. 
열 시간 뒤, 이 운석 안에서 깨어날 녀석을 떠올리면서. 
 
 
*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누군가가 깨우는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야, 빨리 일어나! 이 녀석 움직이기 시작했어!” 
 
운석에 손을 대고 있던 한수영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소리치고 있었다. 
 
쩌적, 쩌저적― 
 
운석에 가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화룡종의 붉은 운석이 부서질 때와 비슷한 현상이었다. 그때처럼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말 한마디 까딱 잘못하면 우리 둘 다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 
 
고오오오오! 
 
월장석에서 일직선으로 솟아난 눈부신 빛이 밤의 어둠 일부를 밝혔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주는 강력한 존재가 웅크림 속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 Episode 16. 다섯 번째 시나리오 (2) > 끝

< Episode 16. 다섯 번째 시나리오 (3) >
 
 
 
 
 
껍질처럼 부서진 월장석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은빛 갈기를 흩날리는 존재가 막 부화하고 있었다. 만약 저 녀석이 새끼였다면 ‘각인현상’을 이용해 통제가 가능했겠지만, 지금 나온 저 존재는 그런 순진한 생명체가 아니었다. 
 
[시나리오 최초로 이계의 생명체와 조우했습니다.] 
[이계인들과의 친화력이 상승합니다.] 
[2000코인을 보상으로 받았습니다.] 
[이계인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한 스킬을 보너스로 받았습니다.] 
[‘이계어 통역 Lv.1’을 획득하였습니다.] 
 
곁에 선 한수영이 침을 꿀꺽 삼키는 게 느껴졌다. 
이계인과의 조우는 다섯 번째 시나리오의 서막이니, 긴장될 만도 했다. 
이제까지의 시나리오와는 완전히 다르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는 조금만 실수해도 서울 전체가 사라질 수가 있다. 
 
[전용 스킬, ‘이계어 통역 Lv.1’을 사용합니다.] 
[아이템 ‘이뮨타르 종족의 호부(護符)’의 효과로 특정 언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집니다.] 
 
화룡종을 잡고 얻었던 호부도 지금부터는 도움이 될 것이다. 
 
[자동 통역을 시작합니다.] 
 
빛나는 월장석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젠장, 벌써?” 
 
월장석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거구의 생명체가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전신의 은빛 갈기 때문에 얼핏 늑대를 연상시켰지만, 웨어 울프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무엇보다 나는 이 자의 종족을 알고 있었다. 
 
「족히 삼 미터는 되는 덩치. 밤이 되면 월장석의 기운을 받아 변신이 가능한 이세계 ‘클로노스’의 지배종. 그들은 괴물 같은 체력, 그리고 거인족 같은 힘을 지닌 바람의 투사들이다.」 
 
클로노스의 다섯 지배종 중 하나. 
 
“나는 위대한 최초의 늑대.” 
 
「클로노스에서 그들은 퍼스트 울프 ‘이뮨타르’라 불린다.」 
 
“이뮨타르, ‘리카온’이다.” 
 
그르렁거리는 숨소리가 밤의 어둠 속에 울려 퍼지자, 주변의 기척들이 모조리 숨을 죽였다. 단지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 한수영이 내 뒤에 숨을 정도의 기백. 물론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리카온 이스파랑 
나이 : 371세 
배후성(背後星) : 멸망한 세계의 그림자 
전용 특성 : 고귀한 이뮨타르 (영웅), 굴욕의 생존자 (희귀) 
전용 스킬 : [바람의 길 Lv.9], [상급 무기연마 Lv.9], [전장의 포효 Lv.8], [현인의 통찰력 Lv.4], [강철 피부 Lv.8], [연기 Lv.4]······. 
성흔 : [멸망 인도 Lv.1] 
종합 능력치 : [체력 Lv.75], [근력 Lv.75], [민첩 Lv.75], [마력 Lv.75] 
종합 평가 : 멸망한 클로노스의 다섯 지배종 중 하나. 자신의 세계를 잃고 스타 스트림에 투신하여 시나리오의 길잡이가 되었다. 언제나 회한에 가득 찬 눈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 특징이다. 
 
+ 
 
과연, 이세계의 영웅답게 무지막지한 스킬과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종합 능력치의 평균이 75라니. 
현시점에서 시나리오 제한 기준조차 초과해버린 수치다. 
어지간한 역 대표들은 한 대만 맞아도 골로 가겠는데 그래. 
리카온의 푸른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깨운 것은 너희들인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러면 드디어 때가 되었다는 것이겠지? 튜토리얼 시나리오를 클리어한 것을 축하한다, 이계의 전사들이여.” 
 
튜토리얼 같은 소리 하네. 
극적인 효과를 위해 어설프게 도깨비를 따라 하는 모양인데, 우스운 일이다. 
이 세계에 튜토리얼 같은 것은 없다. 
모든 시나리오는 실전이고, 죽은 사람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그런데 무슨 ‘튜토리얼’ 같은 게 존재한단 말인가. 
 
“멸망을 맞이하는 자들이여. 먼저, 너희들의 세계에 ‘재앙’이 찾아온 것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 
 
리카온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울 상공을 차지한 그레이트 홀. 
블랙홀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소용돌이는, 매순간 조금씩 그 부피를 늘려가고 있었다. 리카온 또한 자신의 세계가 멸망했던 그 날 저 ‘그레이트 홀’을 보았을 것이다.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모든 이계인들은, 시나리오에 의해 자신의 고향을 잃은 자들이니까. 
 
“하지만 내가 왔으니, 너희들은 안심해도 좋다. 나는 이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찾아온 ‘길잡이’다. 나는 재앙에 대비해 너희들을 훈련 시킬 것이며, 꼭 필요한 지침들을 알려줄 것이다. 그리고······.” 
 
꽤 급하게 나왔을 텐데, 제법 대사를 잘 읊는 녀석이다. 
아마 도깨비에게 매뉴얼을 받았겠지. 
한참을 떠들던 리카온이 갑자기 말을 끊었다. 
 
“······그런데, 나를 깨운 것은 그대들이 전부인가?” 
“우리가 전부입니다.” 
“이상하군. 그대들은 네 번째 시나리오를 클리어하지 않았나? 제대로 클리어했다면, 나를 비롯한 다섯 명의 길잡이는 같은 곳에서 부화했을 텐데······. 절대 왕좌의 주인은 어디 있지?” 
 
그 말이 맞다. 본래 리카온을 비롯한 다섯 길잡이들은 ‘절대 왕좌’의 주인이 탄생하는 순간 그곳으로 모이게 되어 있다. 
나는 리카온을 향해 말했다. 
 
“우리는 ‘왕’이 없습니다.” 
“왕이 없다? ······설마 ‘절대 왕좌’의 주인이 죽었나? 그럴 리가. 현시점에서 왕좌의 주인을 죽일 존재가 있을 리 없는데?” 
 
그르르르. 
리카온이 위협적으로 자신의 불신을 표시했다. 
 
“왕좌의 주인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우리는 ‘절대 왕좌’를 얻지 않고 네 번째 시나리오를 클리어했습니다.” 
 
리카온의 동공에서 불길이 일었다. 
 
“너는 거짓말을 하는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네 번째 시나리오는 누군가가 절대 왕좌를 차지하지 않는 한 끝나지 않는다.” 
“왕좌를 파괴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리카온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잠시 내 진의를 가늠하는 듯하더니,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저 고귀한 이계의 영웅이 당황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볼만한 것이었다. 나를 유심히 보던 그의 은빛 갈기가 부르르 떨렸다. 
 
“이 수많은 별자리의 결······ 설마 그대가 직접 왕좌를······?” 
“맞습니다.” 
“어떻게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욕설을 퍼붓는 중인지, 리카온의 뒷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울부짖는 리카온을 보며, 한수영이 내게 속삭였다. 
 
“야, 그게 그 정도로 심각한 거였어? 너 아까 나한테는······.” 
 
한수영 또한 [이계어 통역]을 얻어서 방금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었다. 내가 채 답하기도 전에, 리카온이 먼저 소리를 질렀다. 
 
“어째서 그런 짓을 저질렀는가! 그러면 지금 이 세계에는 저 위대한 신격(神格)의 가호를 받는 이가 단 하나도 없단 말인가?” 
“없습니다.” 
“아아! 스타스트림의 성좌들이 클로노스를 돌보지 않으시는구나! 이 세계는 이제 끝장이다! 코볼트보다 못한 지능을 가진 생명체들이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구나!” 
 
절망하는 리카온을 보고 있자니, 슬금슬금 경멸이 일었다. 
그래, 이게 바로 이계인들의 본질이다. 
겉으로는 우리 세계를 돕기 위해 파견된 것처럼 굴지만, 사실 이 녀석들의 목적은 따로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회차엔 절대, 그렇게 되게 두진 않는다. 
 
“이뮨타르의 종족의 왕자, 리카온 이스파랑. 아직 좌절하긴 일러.” 
 
자존심 강한 이뮨타르 종족의 왕자는 내 태도 변화에 곧바로 반응해왔다. 
으르렁거리는 포효가 대기를 쩌렁쩌렁 울렸다. 
 
“건방진 인간. 위대한 종족 앞에 존경심을 보여라! 네놈은 저지른 죄의 무게를 모르는 모양이구나!” 
“리카온, 자기 세계가 멸망하고 나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보지? 이뮨타르가 지배종이었던 것은 클로노스였지, 지구가 아니야.” 
 
일순 놀란 리카온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너희 세계를 멸망시킨 다섯 개의 재앙이 있었지.” 
“무슨······.” 
“네가 살던 클로노스의 남대륙은 그중 ‘용’에 의해 멸망 당했어. 그렇지?” 
 
리카온의 눈빛이 깊은 불신에 젖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지?” 
“화룡종 이그니르. 불타는 지옥의 재앙. 네 세계를 멸망시킨 재앙의 이름이지.” 
 
내가 죽였던 소재앙, ‘레서 이그니르’의 본판인 화룡종 이그니르는 본래 ‘대재앙’급 괴물이었다. 
단 한 번의 불길로 작은 도시 하나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으며, 날갯짓 한 번으로 급수가 낮은 괴수종들을 분해해 버릴 수 있는 재앙. 
클로노스의 남대륙은 녀석에게 멸망했다. 
운석에서 깨어난, 미지의 화룡종에게. 
리카온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남의 이야기처럼 말하는구나. 네놈은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제 곧, 너의 세계 또한 그 뜨거운 지옥불 속에 몸부림치게 될 테니까.” 
“그건 걱정마. 이 세계에 이그니르는 내려오지 않을 테니까.” 
“무어라?” 
“내가 이미 죽였거든. 그러니 이 세계에 ‘불타는 지옥의 재앙’은 안 와.” 
 
리카온은 자신의 고향이 되살아났다는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입꼬리를 일그러뜨렸다. 
 
“지금껏 내가 들어본 농담 중 제일이군. 그것은 이 세계의 농담인가? 곧 멸망할 세계치고 재미있는 곳이구나.” 
 
뭐······, 당연히 안 믿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품속을 뒤져 푸른색이 감도는 패(牌)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마법처럼, 리카온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이뮨타르 종족의 호부. 
 
덜덜 떨리는 리카온의 손이, 내 손바닥 위에 놓인 호부를 향해 나아가다 이내 툭 떨어졌다. 
 
“어, 어찌······ 어떻게 네놈이 그것을······!” 
 
이뮨타르 종족의 호부는, 재앙의 용을 사냥한 자의 증거다. 
 
“이뮨타르 종족의 리카온. 호부 앞에 경의를 표하라.” 
 
고고한 리카온의 몸이 천천히 무너졌다. 먼저 무릎이 닿았고, 고개가 떨어졌다.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그의 동공이 심한 지진을 일으켰다. 
 
“제대로.” 
 
이윽고, 녀석의 고개가 바닥에 닿았다. 삼 미터가 넘는 장신이다 보니, 엎드리고 나서야 나보다 눈높이가 낮아졌다. 나는 리카온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때 화룡종을 잡은 것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한수영은 아직 제대로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나와 리카온을 혼란스러운 눈으로 번갈아 볼뿐이었다. 한수영의 만행 때문에 죽을 뻔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 여자 덕분에 일이 쉽게 풀리게 생겼다. 
리카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위대한 용 사냥꾼이시여······. 뒤늦게 존함을 여쭈는 무례를 용서하시옵소서.” 
“내 이름은 김독자다.” 
 
새삼스럽지만 내 이름이 너무 안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름은 유중혁이다, 라고 했으면 뭔가 멋진 장면이 되었을 것 같은데.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리카온.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할 일이라는 말에, 리카온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내게 너희 종족의 비기인 [바람의 길]을 가르쳐라.” 
 
리카온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처음부터 내가 리카온을 부화시킨 목적은 바로 이것이었다. 
‘남쪽의 재앙’인 화룡종이 허무하게 사라졌으니, 다섯 번째 시나리오에서 최초로 강림하는 재앙은 반드시 ‘동쪽의 재앙’이 될 것이다. 
동쪽의 재앙을 막기 위해, 나는 반드시 이뮨타르 종족의 비기를 손에 넣어야만 했다. 
 
[바람의 길]. 
 
그것은 동쪽의 재앙인 [질문의 재앙]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다. 
 
 * 
 
 
한 시간 뒤, 나는 대화를 따라오지 못하는 한수영에게 사태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 죽인 화룡종에서 그 ‘호부’라는 게 나왔고, 그게 쟤들한텐 중요한 물건이라는 거지?” 
“그래.”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가는데······, 그럼 그때 죽인 화룡종도 ‘재앙’의 하나로 치는 거야? 어쨌든 ‘소재앙’이니까?” 
“맞아.” 
“······그럼 다섯 번째 시나리오에서 막아야 할 재앙은 다섯 개가 아니라 네 개인 거네?” 
“이해 못 했다는 것 치고는 제법 잘 이해했는데?” 
 
내 말에 한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도 잘 납득이 안 가. 그때 네가 죽인 건 ‘레서(Lesser) 이그니르’잖아? 진짜가 아닌 열화판인데 왜 재앙으로 쳐 주는 거야? 그것도 ‘멸살법’식 편의주의 전개냐?” 
“······재앙 운석에서 부화한 건 전부 재앙으로 쳐. 그 녀석이 이그니르 대신 나왔으니, 이번 재앙에서 이그니르는 안 나오는 거고. 그리고 원작에서도 이그니르가 나오진 않았어. 
이그니르의 헤츨링이 나왔지. 이제 겨우 다섯 번째 시나리오인데 벌써 그런 게 나오면 우리가 어떻게 깨겠냐?” 
“······너 말 잘한다. 무슨 멸살법 대변인이냐? 사실 네가 작가지?” 
 
시나리오는 말도 안 되는 난이도 같기는 해도, 사실 죽어라 노력하면 깰 수 있게끔 난이도가 조정되어 있다. 
······물론 말이 조정이지, 극악한 건 마찬가지다. 
헤츨링의 열화판인 레서 이그니르만 해도, 당시 엘리트 전력층이라 할 수 있는 선지자들을 몰살시켜버렸으니까. 그뿐인가? 심지어 나도 녀석한테 한 번 죽었다. ‘불살의 왕’ 혜택이 없었다면 절대 못 잡을 녀석이었단 얘기다. 
녀석이 그 상태 그대로 서울에 풀려나 레벨업을 계속했다면 서울은 리카온의 고향과 똑같은 꼴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사정 따위 전혀 모르는 한수영은 껄렁거리기 바빴다. 
 
“아무튼 생각보다 재앙이란 것도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 ‘멸살법’에서 무지막지하게 표현해 놨길래 엄청 쫄아 있었는데, 네가 잡을 정도면 다른 재앙들도······.” 
“화룡종은 운이 좋았던 거고, 이번에 몰려올 재앙들은 원작 그대로야. 아주 끔찍한 놈들이 올 거라고.” 
 
‘원작 그대로’라는 말에 굳어지는 표절 작가의 표정을 보는 건, 제법 유쾌한 일이었다. 
 
“뭐야, 그럼 어떡해?” 
“어떡하긴, 저놈 이용해야지.” 
 
나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수련을 준비하는 리카온을 바라보았다. 
한수영이 물었다. 
 
“쟤 쎄 보이는데, 혹시 쟤가 대신 싸워줄까?” 
“저놈 겁쟁이야. 그리고 길잡이들은 원칙적으로 다른 세계의 재앙에 대항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 우리 일은 우리가 해결해야지.” 
 
때마침 리카온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주(護主)시여, 준비가 끝났습니다.” 
 
호주는 ‘호부의 주인’을 일컫는 말이었다. 뭔가 어감이 안 좋아서 이름을 부르라고 몇 번이고 말했지만, 리카온도 이것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일족의 비기, [바람의 길]을 전수하겠습니다.” 
 
[바람의 길]. 
궁극에 이르면 인근의 대기를 자신의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는 히든 스킬. 
타종족 중 이 스킬을 익힐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이뮨타르 종족의 호부를 가진 이뿐이었다. 
본래의 예정대로였다면 유중혁이 이 역할을 맡았겠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안 그래도 센 놈한테 이런 좋은 스킬까지 몽땅 몰아줄 수는 없지.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그로부터 세 시간 동안,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스킬을 전수받았다. 
시스템을 통해 [스킬을 전수 받으시겠습니까?] 같은 메시지가 뜬다면 좋았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요행이 불가능했다. 이계인을 통한 스킬 전수는 오직 직접 배워 익히는 것만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설로 읽은 게 있어서 그런지, 나는 조금씩 리카온의 움직임을 따라 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따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더 지났을까. 머뭇거리던 리카온이 입을 열었다. 
 
“호주시여. 이런 말씀 드리기 정말 송구스럽지만······.”
 
 
 
 
 
< Episode 16. 다섯 번째 시나리오 (3) > 끝

< Episode 16. 다섯 번째 시나리오 (4) >
 
 
 
 
 
나는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뭔데? 전수 끝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내가 뭐 잘못 하고 있어?” 
“정확히는······.” 
“끌지 말고 빨리 말해.” 
“모든 게 잘못되셨습니다.” 
 
너무 진심이 깃든 말이라, 나는 핵펀치를 맞은 사람처럼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하늘에 떠 있는 그레이트 홀이 유난히 더 커 보였다. 
마치 나를 조롱이라도 하는 것 같다. 
그런 나를 보며, 리카온이 확인사살을 준비했다. 
 
“호주께서는······ [바람의 길]의 자질이 조금도 없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모든 스킬의 자질이 거의 없으신 듯합니다.” 
 
이거 잘못하면 나 때문에,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르겠다. 
 
 
* 
 
 
그런 식으로 몇 시간이 더 지나, 하루가 몽땅 흘러버렸다. 
이제 다섯 번째 시나리오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8일.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바람의 길]을 익혔다. 
물론, 차도는 없었다. 
 
“크르릉. 호주, 그만 포기하시는 편이······.” 
“······왜 난 안 되는 거지?” 
 
옆에서 낄낄대며 구경하던 한수영이 말했다. 
 
“왜긴? 재능이 없으니까 안 되지.” 
“그럴 리가 없어.” 
“왜 없냐? 주인공도 아닌 게. 너 요즘 좀 잘 나간다고 유중혁이라도 된 줄 착각하는 거 아냐?” 
 
어쩐지 정곡을 찔린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도 머리로는 다 이해하고 있어.” 
“아, 예. 생각으로야 누구나 다 서울대 갈 수 있습죠.” 
“정말이야.” 
 
정말로, 나는 [바람의 길]과 관련된 깨달음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하도 답답한 마음에 한 시간 전 생존자들로부터 보조 배터리를 구해 텍본을 다시 읽기도 했다. 
 
“왼손에는 질풍을, 오른손에는 폭풍을. 직선과 곡선이 부딪치는 장소에서 바람의 길은 열릴 것이다.” 
“허, 어떻게······. 정말로 이해하고 계셨군요!” 
 
곁에서 듣던 리카온이 감탄했다. 
실제로 내가 방금 중얼거린 것은 ‘멸살법’에 등장하는 유중혁의 깨달음 중 하나였다. 
‘멸살법’에서 유중혁은 이딴 중2병 같은 깨달음을 ‘작은따옴표’에 한자병기(漢字倂記)까지 해가며 통찰한 뒤, 단 5분 만에 [바람의 길]을 습득한다. 
근데 그 간단한 걸, 나는 지금 이틀째 못하고 있다.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건데?” 
“예? 방금 잘 말씀하셔 놓고서······ 그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습니다.” 
“아니, 이건 비유잖아.” 
“비유가 아니라, 말씀하신 그대로 하면 됩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번만큼은 ‘멸살법’ 작가의 설명충 버프로도 해결이 안 됐다. 왜냐하면 설명이랍시고 적어 놓은 것들이 죄다 뜬구름 잡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제4
의 벽]도 이 순간만큼은 무용지물이었다. [제4의 벽]은 판단력이나 침착함을 키워 주지만 없는 재능을 주지는 않는다. 
나는 약간 열이 받아서 리카온에게 말했다. 
 
“너 그럼 이거 한번 해 봐. ‘하나의 바람과 다른 하나의 바람이 만나니 태극을 이루고, 다시 하나의 바람과 다른 하나의 바람이 만나 음양을 이룬다.’” 
 
태극이니 음양이니 하는 건 분명 지구의 개념일텐데도, 리카온은 철썩 같이 알아 들었다. 
 
“대체 그런 심오한 구결은 어떻게 통찰하신 겁니까?” 
“딴소리 말고, 직접 몸으로 펼쳐 보라고.” 
“그러니까, 이런 식입니다.” 
 
리카온이 손을 쓰자 각 방위에서 불어온 바람들이 세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두 개의 바람이 소용돌이를 이루었고, 다시 더해진 바람에 뜨겁고 차가운 기운이 어렸다. 
 
······솔직히 말도 안 된다는 생각만 들었다. 
 
저걸 듣고 저런 기술을 펼친다고? 
아니, 왜 나는 못하는 건데? 
괜히 오기가 생겼다. 
 
“그럼 이건 어때? ‘네 개의 바람이 만나 방위를 형성하고, 그에 다시 네 개의 바람이 더해져 팔괘의 묘를 이루니, 그로써 바람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도 할 수 있겠어?” 
 
그 문장은 유중혁이 9회차 회귀에서 얻은 깨달음이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리카온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못하겠지? 내가 딱 그 기분이야.” 
“호구······ 아니, 호주. 정말로 감사합니다.” 
 
······뭐? 
 
[5급 인외종, ‘이뮨타르의 왕자 리카온’이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리카온은 갑자기 가부좌를 틀더니 수련을 시작했다. 
 
[당신은 ‘이뮨타르의 왕자 리카온’의 진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뮨타르의 왕자 리카온’이 당신에게 커다란 고마움을 느낍니다.] 
[멸망한 세계 ‘클로노스’ 출신의 몇몇 성좌들이 당신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2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았다. 방금 내가 한 말을 듣고, 저 망할 늑대가 오히려 깨달음을 얻어버린 것이다. 
한수영은 웃다 못해 이제 배를 잡고 넘어가는 중이었다. 
 
뒤늦게 좌절감이 몰려온다. 
어쩌면 나는 ‘멸살법’에 대해서만 잘 알았지, 정작 ‘나’ 자신에 관해서는 하나도 모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한심함에 감탄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허술함에 실망합니다.] 
 
허공에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보며, 이제라도 좋은 배후성을 하나 붙잡아 계약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비형과의 계약 때문에 불가능한 얘기였지만. 
 
[그러게 왕좌는 왜 부쉈어? 멍청하게.] 
 
깜짝 놀라 위를 보니, 허공에 투명한 비형의 형체가 떠 있었다. 
나는 도깨비 통신으로 말을 걸었다. 
 
‘이제 말해도 괜찮은 거냐? 그 중급 도깨비는?’ 
 
[그놈은 당분간 안 와. 징계 제대로 먹었거든. 다섯 번째 메인 열릴 때까지 못 올 거야. 아, 그리고 채널 레벨업도 또 했어. 잘하면 나 다음 달쯤에 중급으로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네 덕분이야.] 
 
‘잘됐네.’ 
 
[뭐야, 별로 안 기뻐 보이네? 내가 잘 되면 너도 좋은 거라고 인마.] 
 
‘중급 되면 쓸데없이 바빠질 거 아냐.’ 
 
내 말에 비형이 피식 웃었다. 
 
[자식, 걱정마. 다른 화신은 몰라도 내가 널 안 챙기겠냐? 물론 요즘 관리국에서 중급 도깨비들을 엄청 볶긴 하지만······ 어떤 새끼가 개연성을 엄청나게 비틀어 놔서 시끄러웠거든.] 
 
누군지 말 안 해도 알겠다. 
 
[아, 물론 네 얘긴 아니고.] 
 
보나마나 유중혁 이야기일 것이다. 
사실 유중혁의 성장속도는 개연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으니까. 녀석은 누가 봐도 치트에 가까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성장한 녀석이 하나 있는데, 관리국에서도 어떻게 건드릴 수가 없는 놈이라······. 아마 뒷배가 만만치 않은 녀석인 것 같아.] 
 
아마 앞으로도 유중혁의 ‘개연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개연성’은 ‘개연성’을 감당할 수 있는 성좌가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유중혁의 성좌는 그게 가능한 존재다. 
 
[그건 그렇고, ‘성장 패키지’ 안 살래? 지금 사면 싸게 팔아줄게. 너 그 스킬 못 배워서 지금 고생하고 있는 거잖아? 이 패키지 사면······.] 
 
‘안 사. 성장 패키지는 어차피 이미 배운 스킬에만 적용되는 거잖아? 간만에 나타나서 등부터 처먹으려고 하냐?’ 
 
‘성장 패키지’는 함부로 사용하면 패널티가 있다. 저 강력한 유중혁도 ‘성장 패키지’를 안 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쳇, 알고 있었냐······?] 
 
비형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슬슬 뭘 살 때가 되긴 했지.’ 
 
[보유 코인 : 62,372 C] 
 
화룡종의 부위들을 판 덕택인지, 종합 능력치를 그만큼 찍고도 아직 코인이 상당히 남았다. 
4만 코인만 더 있었으면 [천룡보(天龍步)]라도 샀을 텐데, 아쉽게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비형이 화색을 띠며 덤벼들었다. 
 
[오, 그래? 사고 싶은 거 있어?] 
 
‘너희 조만간 새 코인템 나오지?’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첩자 심었냐?] 
 
‘곧 새 시나리오 열리니까 당연히 팔겠지. 그때 되면 말해. 사줄 테니까.’ 
 
[호, 네가 웬일······.] 
 
나는 그대로 도깨비 통신을 꺼버렸다. 어차피 얻을 것도 없는 마당에 얘기해봐야 열불만 터지니까. 돌아보니 리카온은 여전히 깨달음을 얻는 중이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한수영이 턱을 괸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야, 이제 어쩔 건데?” 
“······나도 몰라. 생각 중이야.” 
“그거, 차라리 내가 배우게 해줘.” 
“뭐?” 
“아니면 저기 다른 생존자들한테 배우라 시키든가.” 
 
그 말에 나는 우리 주변에 터를 잡은 사람들 쪽을 바라보았다. 
코인 농장이 붕괴한 지 이틀째. 
구출된 생존자들은 힘을 모아 다른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윤 대리 쪽 코인 농장 피해자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어쩌면 한수영의 위선 가득한 선행이 그들을 변화시켰는지도 모른다. 
역시, 이렇게 되고 보면 위선도 선인가 싶다. 
한수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바람의 길인지 뭔지 아무튼 그걸 배우기만 하면 된다는 거 아냐? 그럼 누구든 상관없잖아?” 
“······맞아, 누구든 배우기만 하면 돼.” 
“그럼 왜 꼭 네가 배우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건데? 너 혼자 성좌들 주목받으려고 그러는 거지?” 
 
틀린 소리는 아니지만, 완전히 맞는 소리도 아니었다. 
 
“호부를 가진 사람만 [바람의 길]을 배울 수 있어.” 
“그럼 그 호부 나한테 줘봐.” 
“이건 양도가 안 돼.” 
 
[인물 ‘한수영’은 해당 발언이 사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이 여자는 진짜······. 
 
“유중혁보다 더 의심 많은 녀석은 네가 처음이다.” 
“마침 말 잘 꺼냈네. 그 스킬, 원래 전개대로라면 유중혁이 배워야 하는 거지?” 
“맞아.” 
“그럼 왜 네가 사서 고생을 해? 유중혁한테 다 맡기면 되는데.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까 유중혁이나 찾으러 가자. 걔 잘 키워서 덕 보면 되잖아. 그 녀석이라면 호부 없어도 어떻게든 해내겠지.” 
“유중혁은 다른 사람 말 안 들어.” 
“내가 유혹해 볼게.” 
 
나는 한수영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유중혁은 어린아이 체형 싫어해.” 
“······지금 나 무시하냐?” 
“게다가 유중혁을 찾아도 문제야.” 
 
아무리 유중혁이라도 ‘호부’가 없으면 [바람의 길]은 습득할 수 없다. 
그렇다는 것은 내게서 ‘호부’를 빼앗을 거란 얘긴데, 귀속 아이템인 호부는 내가 죽어야만 소유권이 해제된다. 
즉, 유중혁은 반드시 나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게다가 비단 호부 때문이 아니더라도······. 
 
“너도 알겠지만, 마지막에 좀 안 좋은 상태로 헤어졌어. 만나면 분명 나 죽이려고 할 거야.” 
 
내 근력 100짜리 펀치에 피떡이 되어 날아가던 유중혁. 그 와중에도 나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던 그 눈빛이, 지금도 생생하다. 
 
“······하긴, 그 새끼 내 목 자를 때도 엄청 과감하더라.” 
 
충무로역의 기억이 떠오른 듯, 한수영도 자기 목을 쓰다듬었다. 
 
“게다가 찾고 싶어도, 지금 어디 있는지······.” 
 
멀리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부상자입니다, 도와주세요! 상세가 심각해요!” 
 
누군가가 근처의 부상자 하나를 찾은 모양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전우애를 기대합니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이 다친 부상자를 치료해주길 기대합니다.] 
 
모처럼 우리엘을 비롯한 성좌들의 메시지까지 떴다. 
웬일이지? 
나는 한수영을 데리고 일단 그쪽으로 가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문제의 부상자를 확인한 나는 허공에 떠 있던 비형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비형이 시치미를 떼며 킬킬 웃었다. 
 
[난 모르는 일이야 인마.] 
 
온몸에서 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유중혁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Episode 16. 다섯 번째 시나리오 (4) > 끝

< Episode 16. 다섯 번째 시나리오 (5) >
 
 
 
 
 
나는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유중혁에게서 슬그머니 물러서며, 허공의 비형을 다그쳤다. 
 
‘네 짓이지?’ 
 
설령 유중혁이 정말 근처에 있었다고 해도, 이렇게 타이밍 좋게 발견될 리 없다. 분명 비형 놈이 근처의 누군가에게 ‘서브 시나리오’를 발동시켜 유중혁을 이쪽으로 데리고 오게 만든 것이다. 
 
[걸핏하면 나부터 의심하냐? 증거 있어?] 
 
물증은 없다. 
하지만 심증은 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판단에 가슴을 졸입니다.] 
[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저게 심증이지. 
멍청한 얼굴로 유중혁을 내려다보던 한수영이 내게 속삭였다. 
 
“······찾았네. 이제 어쩔 거야?” 
“어쩌긴.” 
“역시 구해야겠지? 이 자식, 주인공이잖아.” 
 
당연히 구하긴 구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 자식을 구하면, 나는 반드시 죽는다. 
한수영은 당장이라도 유중혁이 깨어날까 겁먹은 표정이었다. 
 
“혹시 금제 걸 만한 물건 없어?” 
“유중혁한테 웬만한 건 안 걸려.” 
“그럼 어디에 가둬 놓는다거나······.” 
“그러면 저놈 자살할 거야.” 
“하긴, 회귀하면 그만이니까······. 젠장, 근데 이 자식 회귀하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한수영도 뒤늦게 그 생각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유중혁이 회귀하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이 세계를 살아가는 내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일단은 못하게 막아야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최악의 수를 가정하는 것이 옳다. 
자칫 잘못하다가 이 세계가 리셋되기라도 하면, 내 존재도 사라져버릴 테니까. 
 
근데 이 자식······, 누구한테 이렇게 맞고 온 거지? 
 
나는 녀석의 상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배를 중심으로 둥글게 퍼져 있는 상처. 내장과 늑골 일대가 모조리 부러졌다. 누군가 엄청나게 강력한 한 방으로 유중혁을 조진 건데······. 
 
순간 나는 멍하니 내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표정이 왜 그래? 갑자기 애잔한 얼굴이다?” 
“······아무것도 아냐.” 

갑자기 여러 가지가 납득이 되었다. 
하긴, 무려 근력 100의 펀치를 맞았으니······. 
그렇다면 무려 이틀 동안이나 이 꼴로 있었다는 건데.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이거, 잘못하면 유중혁과의 사이를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배를 살피다 천천히 얼굴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나는, 전신에 돋은 소름에 단번에 십여 걸음을 물러나야 했다. 
 
“······시발.” 
 
두 눈을 부릅뜬 유중혁이 피눈물을 흘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뻐끔뻐끔 입술이 움직이는 걸 보니, 또 “죽인다, 김독자”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곁에 있던 한수영이 안 보인다 싶더니 어느새 저만치 달아나 있었다. 나는 멀찍이 떨어진 채 유중혁을 향해 외쳤다. 
 
“야! 화 풀면 안 되냐?” 
“······.” 
“정정당당한 승부였는데 너무 쪼잔한 거 아니냐? 그때 너도 나 죽이려고 했잖아?” 
 
유중혁의 눈빛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빌어먹을······.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놈이 나를 죽이든 어쨌든, 지금 여기서 유중혁은 살아나야 했다. 유중혁이 없으면 내가 [질문의 재앙]을 막더라도 다른 재앙을 막지 못해 세상이 멸망하는 수가 있으니까. 
왜 하필 ‘멸살법’의 주인공이 저런 녀석인 걸까. 
이현성이거나, 하다못해 정희원만 되었더라도 이야기를 끌어가기가 훨씬 편했을 텐데. 
······푸념할 때가 아니지. 
나는 일단 스킬을 발동하기로 했다. 저놈 생각이야 뻔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란 말이 있으니까.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를 발동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김독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유중혁을 보았다. 
······방금 저게 날 불렀나? 
 
「네놈은 내 말이 들릴 거야. 그렇지? 지금까지 네놈이 했던 짓을 돌이켜보면······.」 
 
······뭐? 
 
「제발 들린다고 말해라. 지금 네놈이 움직이지 않으면, 이 세계는······.」 
 
나는 조금 당황한 상태에서 그 꼴을 보았다. 
 
「······역시 내 착각이었나. 빌어먹을.」 
 
유중혁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유중혁을 향해 다가갔다. 상태를 보아하니 지금 유중혁은 나와 싸울 힘이 전혀 없는 듯했다. 게다가······ 착각인지 나를 향한 적의도 보이지 않았다. 
 
“유중혁. 내 말 들리냐?”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던 유중혁이 다시 눈을 감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심한 상처라고 해도, 그만한 타격을 받았으면 자동으로 [기사회생]이 발동했을 텐데, 왜 이 자식은 아직도 이 모양인 거지?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해당 인물의 관련 정보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이 ‘요약 일람’으로 변환됩니다.] 
 
 +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유중혁 
전용 특성 : 회귀자 <3회차> (신화), 프로게이머 (희귀), 패왕 (영웅) 
전용 스킬 : [현자의 눈 Lv.8], [백병전 Lv.9], [상급 무기연마 Lv.9], [정신 방벽 Lv.8], [백보신권 Lv.6], [주작신보 Lv.6], [파천강기 Lv.5]······(중략)······. 
성흔 : [회귀 Lv.3], [전승 Lv.3] 
종합 능력치 : [체력 Lv.60], [근력 Lv.60], [민첩 Lv.60], [마력 Lv.60] 
 
* 현재 해당 인물은 상태이상에 걸려 있습니다. 
* 현재 해당 인물은 ‘천령독(千靈毒)’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 
 
다른 능력치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여전히 유중혁은 서울의 화신들 중 최강이었고, 스킬들도 나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더 성장했다. 
문제는 상태이상이었다. 
제아무리 유중혁이라고 해도, 벌써부터 [천독불침(千毒不侵)]이나 [만독불침(萬毒不侵)] 따위의 스킬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때문에 독은 지금의 유중혁이 가진 몇 안 되는 약점 중의 하나였다. 
 
중독 때문에 이 꼴이 된 거였군. 
 
자세히 보니 녀석의 몸 전체에 새파란 혈관이 도드라져 있었다. 
중독이 발생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경과하진 않은 것 같았다. 
다행히, 아직 살 수는 있다. 
하지만 묘한 일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유중혁에게 천령독을 주입할 수 있는 존재라면, 내가 알기로 하나뿐인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걱정스레 이쪽을 보던 여자가 내게 물었다. 
 
“저······ 혹시 그쪽이 ‘김독자’ 씨?”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 아까 유중혁을 여기로 데려왔던 사람이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저분이 그랬어요. ‘김독자’한테 자기를 데려다 달라고······.” 
 
유중혁이? 
조금 전보다 더 녹빛으로 물든 유중혁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나는 순간적으로 생각이 많아졌다. 겁에 질려 달아나 있던 한수영이 슬그머니 돌아와 말을 걸었다. 
 
“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한수영이 어깨를 찌르며 채근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비형에게 말을 걸었다. 
 
‘비형, 도깨비 보따리 좀 열어봐.’ 
 
[이제 알겠냐? 내가 꾸민 일 아니라니까?] 
 
‘보따리나 열어.’ 
 
나는 남은 코인을 확인한 뒤, 유중혁을 치료할 만한 코인 아이템들을 하나씩 찾아냈다. 
천령독에 중독된 상태라면, 단순히 [엘라인 숲의 정기]를 먹는 것만으로는 해독이 불가능했다. 나는 잽싸게 텍본을 켜서 재빠르게 몇 가지 재료를 확인한 뒤, 도깨비 보따리에서 아이템 구매를 마쳤다. 
 
[아이템 ‘한낮의 밀회’ 1개를 구입하였습니다.] 
[아이템 ‘늙은 바바라의 가지’ 1개를 구매하였습니다.] 
[아이템 ‘풋내나는 달툰의 뿔’ 2개를 구매하였습니다.] 
[아이템 ‘해독 감자’ 1개를 구매하였습니다.] 
[아이템 ‘에인테른 신전의 정화수’ 2통을 구매하였습니다.] 
[아이템 ‘엘라인 숲의 정기’ 1개를 구매하였습니다.] 
[총 7370코인을 사용하였습니다.] 
 
예상치 못한 대출혈 서비스다. 
나는 주변의 생존자들에게 부탁해 작은 양동이 하나를 구한 뒤, 마력 화로에 불을 붙이고 재료들을 쏟아 넣었다. 한수영이 물었다. 
 
“지금 뭐 만드는 건데?” 
“해독약.” 
“역시 살리기로 한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자식, 일부러 날 찾아온 것 같아.” 
“일부러? 왜?” 
“나도 모르지.” 
“혹시 도와 달라고 온 거 아냐? 아무리 유중혁이라도 피떡이 돼서 널 죽이러 올 거 같지는 않은데.” 
“유중혁이 그럴 리가 없어.” 
“네가 어떻게 알아?” 
“난 알아. 이 새낀 그런 놈이니까.” 
 
나는 쪼그려 앉아 화로의 불길을 조정했다. 
불길이 새파랗게 타오르며, 양동이 안의 내용물이 끓기 시작했다. 색깔이나 형태만 보면 ‘죽음 계곡의 고블린 내장탕’ 같은 이름이 어울릴 것 같은 음식이었다. 겉보기엔 끔찍해도, 이 수프는 탁월한 해독제였다. 
한수영이 무릎에 손을 짚은 채로 그 끔찍한 음식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근데 말이야, ‘멸살법’에서 유중혁이 그렇게 나쁜 놈이었나?” 
“······뭐?” 
“가만 생각하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유중혁 잘 보면 사람도 꽤 많이 구했고, 착한 일도 하잖아? 물론 사이코패스 같은 짓도 하긴 하지만, 결국에는 대의를 위해 움직이는 놈 아냐? 세계를 구하기 위해 싸우는 놈이란 말이지. 인정하긴 싫지만 날 죽인 것도 내가 악인이라 그런 거고.” 
 
생각해 보면, 한수영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보다 더 멀리 도망간 네가 유중혁을 변호하니까 아주 설득력이 넘치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난 어디까지나 사람이란 게 하나의 면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뜻밖의 이야기여서, 나는 잠시 한수영을 올려다보았다. 
한수영이 쿨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아무리 내 작품을 ‘표절’이라고 우겨도, 사실 내 작품이 ‘멸살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것처럼 말이야.” 
“······그 말만 안 했어도 거의 설득될 뻔했는데, 진짜 아깝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뜻밖의 화두에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유중혁은 어떤 인간인가. 
나는 정말 ‘유중혁’이라는 존재를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조금 전까지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나는 ‘멸살법’을 다 읽은 유일한 독자였으니까. 
그런데 수프 속에서 끓는 재료들을 보는 동안, 어쩐지 내가 갖고 있던 대답의 일부가 수프 속에 희석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정말 내가 알고 있는 ‘유중혁’이, ‘유중혁’의 전부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수프가 다 끓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선행에 감동합니다.] 
[당신의 선행을 지지하는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3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후원을 받아도 손해인 경우는 드문데. 제길. 
나는 수프를 가지고 쓰러진 유중혁을 향해 다가갔다. 한수영이 근처의 가게에서 스푼을 구해 왔고, 나는 그 스푼으로 수프를 떠서 유중혁의 입에 넣어 주었다. 수프를 후후, 불어 식히는 내 꼴을 보던 한수영이 이죽거렸다. 
 
“조강지처 납셨네.” 
“네가 할래?” 
“싫어.” 
 
사실 한다고 해도 안 줬을 거다. 
왜냐하면, 이걸 한 숟갈 떠먹일 때마다 들려오는 시스템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선행에 감동합니다.] 
[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한 번 먹일 때마다 코인을 퍼주다니, 엄청나게 남는 장사가 아닐 수 없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선행에 감동합니다.] 
[3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손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엄청난 꿀 이벤트였던것이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고 봐야 한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열 스푼이 넘어가자, 조금씩 기분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선행에 감동합니다.] 
[4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이 자식, 진짜 선행에 감동해서 주는 거 맞아? 
 
그렇게 한 그릇을 다 먹인 뒤 얼마나 기다렸을까. 
유중혁이 엷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직 몸 상태는 엉망이었지만, 조금씩 녀석의 독이 치료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이템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이템, ‘한낮의 밀회’를 사용합니다.] 
[현재 사용 대상의 동의를 구하고 있습니다.] 
 
[한낮의 밀회]는 선택한 대상과 정해진 기한 동안 일대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코인에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면 [전음] 스킬을 배웠겠지만, 아직 그만한 여유는 없었기에 차선책으로 택한 것이었다. 
 
[대상이 당신과의 통신에 동의하였습니다.] 
[‘한낮의 밀회’를 시작합니다.] 
 
유중혁을 떠올리며 메시지를 보내자, 내 눈앞에 작은 메신저 창 같은 것이 떠올랐다. 
 
―야, 내 말 들리냐? 
 
잘 연결됐군. 
굳이 이 아이템을 구매한 것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천령독의 효과로 유중혁의 혀가 마비되어 있기 때문이었고, 둘은 한수영에게 쓸데없는 정보가 유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셋은 가장 중요한 이유였는데, 유중혁에게 내가 놈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확신을 더해주기 싫어서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중혁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김독자, 지금 당장 동쪽으로 움직여라.
 
 
 
 
< Episode 16. 다섯 번째 시나리오 (5) > 끝

< Episode 17. SSS급 재능 (1) >
 
 
 
 
 
 
Episode 17. SSS급 재능 
 
 
 
 
나는 유중혁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 동쪽으로 움직이라고? 
살려 놨더니 이젠 명령까지 하네. 
살짝 짜증이 난 내가 뭐라고 채 답하기도 전에, 유중혁의 말이 이어졌다. 
 
―‘질문의 재앙’이 깨어나고 있다. 
 
······뭐라고? 
말귀를 못 알아듣는 내가 답답했는지,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누군가가, 재앙들을 깨우고 있단 말이다. 
 
 
* 
 
 
잠시 후, 나와 한수영은 아직도 깨달음에 빠진 리카온을 내버려 두고 강동구 방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저 늑대는 그냥 두고 와도 돼?” 
“이뮨타르 종족은 호부의 주인을 느낄 수 있어. 그러니 깨어나면 알아서 찾아올 거야. 그보다······.” 
 
나는 곁에서 달리는 한수영을 흘겨보며 말했다. 
 
“네가 얘 업으면 안 되냐? 네 아바타 쓰면 되잖아.” 
“싫어.” 
 
질색한 한수영이 내게서 순식간에 멀어졌다. 
 
“너 아까는 유중혁이 나쁜 놈 아닐지도 모른다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너 같으면 네 목 자른 자식을 업을 수 있겠냐?” 
 
따지고 보면 이해가 안 가는 말은 아니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유중혁이 [한낮의 밀회]를 통해 말을 걸어왔다. 
 
―두고 가도 된다. 도움은 필요 없다. 
―괜한 자존심 세우지 마. 진짜 버리고 가는 수가 있으니까. 
 
녀석을 업은 상태라서, 유중혁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언제쯤 혼자서 움직일 수 있겠냐? 
―앞으로 이틀. 
―회복되면 나 죽일 거지? 
 
반쯤 농담조로 물어본 건데, 이 새끼가 사람 불안하게 대답이 없다. 
나는 일부러 움직이던 속도를 줄였다. 
 
―그렇게 나오면 난 너 못 도와줘. 날 죽이려는 놈을 어떻게 믿고 도와주냐? [존재 맹세]를 하면 도와줄게. 이번 회차가 끝날 때까지, 날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해. 
―그건 할 수 없다. 
 
치사한 자식. 
 
―그럼 최소한 다섯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기 전까지 날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해. 그 정도도 못하면 난 진짜 못 도와줘. 
 
잠시 고민하던 유중혁이 대답했다. 
 
―맹세한다. 
 
의외로, 유중혁은 순순히 동의했다. 
존재 맹세. 스스로에게 거는 제약. 
차가운 불길 같은 것이 유중혁의 몸에서 일어나더니, 녀석의 심장 쪽으로 파고들었다. 만약 맹세를 어긴다면, 저 푸른 불꽃은 녀석의 심장을 태울 것이다. 조금 안심하고 있는데, 유중혁이 말을 이었다. 
 
―죽이지는 않겠다. 하지만······. 
―하지만? 
―한 대는 때리겠다. 
―뭐?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 와중에 날 한 대 치겠다고? 
 
―설마 이틀 전 일 때문에 그러냐? 
 
유중혁은 또 대답하지 않았다. 
그 유중혁이 호락호락 넘어가는 게 이상하다 싶었지. 
 
―······한 대만이다. 대신 살살 쳐. 알겠지? 
 
그래, 차라리 한 대를 맞고 유중혁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름 나쁘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라면, 적어도 유중혁에게 한 방에 죽진 않을 테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청담대교를 건너 광진구로 진입했다. 
 
주변의 생태가 조금씩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악취가 나던 거리 사이로 생전 처음 보는 풀들이 돋아나 있었고, 시체 썩는 냄새를 대신해 괴수종의 대소변 냄새가 들끓기 시작했다. 
땅에서 솟아난 거대한 식물의 줄기가 주변의 고층 빌딩들을 휘감은 것이 보였다. 
 
[7급 식물종, ‘야나스프레타’가 당신들을 경계합니다.] 
 
무기를 꺼내는 한수영을 향해 내가 말했다. 
 
“섣불리 움직이지 마.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괜찮으니까.” 
“······보통 저런 녀석들이 갑자기 촉수 공격해오지 않냐?” 
“만화에서나 그렇지. 쟤들 온순해. 거기 뿌리 밟지 않게 조심하고.” 
 
빌딩의 꼭대기에서 해바라기를 닮은 식물의 머리가 우리를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겉보기에는 무섭게 생겼지만, 사실 착한 괴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을 낙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식물종은 본래 [그레이트 홀]이 완전히 열린 직후에야 넘어오는 놈들이었다. 
 
“클로노스의 테라포밍이 시작된 모양이네.” 
 
테라포밍(Terraforming). 
다섯 번째 시나리오는 곧 세계와 세계의 대결이다. 
덮쳐오는 이세계와 맞서 싸우는 인류. 
서울이 클로노스의 침식을 받고 있듯, 중국은 ‘제 3무림계’의 침식을, 일본은 ‘백요계(百妖界)’의 침식을 받고 있을 것이다. 
아바타로 주변을 정찰하던 한수영이 말했다. 
 
“온통 괴물 군락지뿐이야. 젠장.” 
“재앙이 깨어나고 있다면 테라포밍도 빨라졌겠지.” 
“대체 어떤 녀석이 재앙을 깨우는 거야?” 
“너 같은 녀석이겠지. 너도 화룡종 깨웠었잖아.” 
 
한수영이 입술을 비죽였다. 
 
“······그 정돈 할 만했잖아?” 
“그때는 중급 도깨비가 화룡종에게 패널티를 걸었으니까. 그리고 할 만하지 않았어. 네가 안 잡았다고 막말하지 마라.” 
“이번에도 패널티가 있지 않을까? 약화된 재앙을 잡으면 오히려 우린 이득인 거 아냐?” 
“‘질문의 재앙’은 패널티가 무의미해. 도깨비가 패널티를 걸어줄 지도 의문이고.” 
 
우리는 괴수의 군락지를 피해 빠르게 움직였다. 거리 곳곳에서 땅강아쥐와 그롤의 무리들이 시체들을 뜯어먹고 있었다. 
파괴된 괴수종들의 흔적을 보아, 아마 유중혁은 이 길을 뚫고 내 쪽으로 온 듯했다. 
저런 몸 상태로 이만한 거리를 주파했다니, 유중혁이 대단하긴 하다. 
나는 유중혁을 향해 말을 걸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 
―왜 나를 찾아온 거냐? 솔직히 그런 꼴이 됐으면 바로 자살할 줄 알았는데. 
―자살? 우스운 소리군. 
 
이 자식이 8회차의 자기 미래를 봤다면 그딴 소리는 못 할 텐데. 
하지만 이어진 녀석의 목소리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그렇게 쉽게 포기할 거였다면, 이 모든 여정을 시작하지도 않았겠지. 
 
정말 간만에, 처음으로 ‘멸살법’을 봤던 그때의 감정이 떠올랐다. 어쩌면 한수영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줄곧 알고 있다고 믿었던 ‘유중혁’은 쉽게 포기하고 쉽게 사람을 죽이는, 수많은 비극들을 반복하며 정신이 닳아버린 유중혁이었다. 
 
하지만 3회차의 유중혁은, 아직 그렇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3회차의 유중혁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등장인물 ‘유중혁’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유중혁이 말했다. 
 
―당장 생각나는 게 네놈뿐이었다. ‘절대 왕좌’를 부술 정도는 되는 녀석이니, 조금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지. 
―왕좌 부순 건 뭐라 안 하는 거냐?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해선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도 좀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네놈은 ‘이계의 신격’을 배제하기 위해 그런 짓을 저지른 거겠지. 
―······알고 있었냐? 
 
유중혁과 이렇게 터놓고 얘기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솔직히 놀랐다. 
쿨한 건 둘째 치고, 이 자식 이렇게 머리가 좋은 놈이었나? 
유중혁이 계속해서 말했다. 
 
―솔직히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지만. 네놈이 왕좌를 부수는 바람에, 길잡이들이 모두 흩어졌고 운석들을 수집하는 데도 차질이 생겼어. 광진구와 강동구의 테라포밍이 빨라진 것도 그 때문이다. 방랑자 녀석들이 운석의 힘을 쓰고 있어. 
―뭔 소리야? 단순히 운석을 쓴다고 테라포밍이 빨라지지는 않아. 
―십악(十惡) 중 하나가 ‘재앙 운석’을 손에 넣었다. 
 
십악. 그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예상은 했다. 하지만 사실을 듣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설마 독희(毒嬉) 이설화냐? 
―······알고 있었군. 
―천령독을 쓸 수 있는 건 그 여자뿐이니까.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면 너는 왜 중독된 거지? 상대가 독희인 걸 알았다면 너도 정면에서 걜 상대하진 않았을 텐데? 
―그녀를 설득해보려 했다. 
―설득? 네가? 
 
그 순간 뒤늦게 떠오르는 장면. 유중혁이 말했다. 
 
―동료로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동료······ 그랬군. 
이제야 생각난다. 
독희 이설화는, 2회차에서 유중혁의 동료였었지. 
 
십악이라고 해서 늘 악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무장성주 공필두가 이번 회차에서 변했듯, 이설화는 1회차를 비롯한 몇몇 회차에서만 십악으로 변모했다. 그 외의 모든 회차에서, 독희 이설화는 유중혁이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료였다. 
 
―너답지 않은 짓을 했네. 
―인정한다. 한심했지. 
―······. 
―그녀는 내가 기억하는 이설화가 아니었다. 알고 있다. 그래도 잠깐이지만 믿고 싶었다. 내 기억 속에 있던 그 여자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그래서 이번 회차에도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무심결에 묻어난 그 고독함에,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2회차의 인생에서, 이설화는 잠깐이지만 유중혁의 연인이었다. 
 
―이해해. 
 
유중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마치 회귀라도 해본 것처럼 말하는군. 
―회귀를 해봐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함부로 이해한다는 말을 써선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해 보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고, 앞으로도 이해받지 못할 녀석이니까, 나 하나쯤은 그렇게 말해 줘도 될 것 같았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깊이 동요합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희미한 위로를 받습니다.] 
 
―이상하군. 분명 네놈은 회귀자가 아닌데······. 정말로 이 감정을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것도 예언자의 능력인가? 
 
내가 대답하지 않자, 유중혁이 말을 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네놈을 좋게 보진 않는다. 넌 내 여동생을 납치한 파렴치한 놈이다. 
―납치 안 했거든? 그냥 보호하고 있었던 거야. 너도 분명 [거짓 간파]로 파악했을 텐데 왜 자꾸······. 
 
“김독자.” 
 
한수영의 긴장한 목소리와 함께, 우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천호대교에서 강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이 보였다. 허공에서 환한 빛을 내뿜는 [그레이트 홀]에서, 강동구를 향해 드문드문 뭔가가 넘어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벌써. 
 
본격적인 강동구로 진입하자, 바닥을 덮은 낯선 풀들의 밀도가 높아졌다. 칙칙한 나무들이 대열을 이루어 건물 사이사이에 자라나 있었고, 다시 그 나무 위를 뛰어다니는 소형 괴수종들이 있었다. 
 
강동구는 이미 절반쯤 이계(異界)가 되어 있었다. 
 
한수영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너무 늦은 거 아냐? 벌써 ‘재앙’이 깨어났으면 어떡해?” 
“아직 아닐 거야. 그랬으면 시나리오가 내려왔겠지.” 
 
얼마간 걸음을 더하자, 바닥에 흩뿌려진 몇 개의 표식들이 보였다. 
그래피티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일종의 영역 표시였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 
 
여기부터는, 확실한 독희의 영역이다. 그녀는 다른 방랑자들처럼 강동구에 자리를 잡고 자신의 터전을 확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 예상보다 일의 진척이 빨랐다. 
한수영이 말했다. 
 
“이 정도로 방비를 잘 해놓은 집단이라면 공략하기가 쉽지 않겠는데······. 뭔가 생각해둔 거 있어?” 
 
없다. 
애초에 전면전을 벌이러 가는 게 아니니까. 
 
“필요한 것은 운석뿐이야. 그것만 훔쳐 오면 돼. 내가 시간을 끌 테니까, 네가 운석을 맡아.”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방랑자들의 왕’ 같은 조력자가 있다면 이야기가 좀 다르겠지만. 
유중혁이 끼어들었다.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다. 설령 재앙이 시작되더라도, ‘질문의 재앙’은 초기 진압이 가능한 재앙이니까. 
 
초기 진압이라. 
과연, 유중혁이니까 가능한 오만이다. 
 
―초기 진압? 그건 누가 하는데? 반병신인 네가 하게? 
―당연히 네놈이 해야지. 어차피 그럴 생각 아니었나? 
―왜 그렇게 되는 건데? 
―네놈은 이미 길잡이를 깨워서 [바람의 길]을 전수받았을 테니까. 
 
살짝 분노한 말투를 보니, 자기가 배울 [바람의 길]을 빼앗아서 성질이 난 모양이었다. 나는 씩 웃으며 말해주었다. 
 
―그거 못 배웠어. 
―······왜지? 시간이 부족했나? 
 
차라리 그랬으면 다행이겠다. 
 
―아니, 재능이 없어서. 
 
유중혁의 침묵에서 깊은 경멸이 느껴졌다. 
 
―네놈, 그럴 거였다면 처음부터······. 
 
“사람이야.” 
 
한수영의 말과 동시에,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아 들었다. 십악의 영역에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그 사람은 십악의 수족일 터였다. 
나는 업고 있던 유중혁을 한수영의 아바타에게 맡겼다. 
 
“······잠깐만 업는 거니까 빨리 도로 데려가. 알겠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보통 단일 그룹이 이동할 때는 이렇게 큰 소리가 나지 않는다. 곧이어 여성의 맑은 목소리가 앞쪽에서 울려 퍼졌다. 
 
“다들 천호대교 쪽으로 달리세요!” 
 
그들은 독희의 그룹이 아니었다. 
‘방랑자들의 왕’처럼 세력가는 아닌 것 같았지만, 누군가가 독희의 그룹에 맞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강동구에서 탈출시키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던 비무장 생존자들이 우리를 발견했다. 
 
“비, 비켜요! 어서!”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살이 날아왔다. 피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내게 말을 건 남자가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화살을 맞은 남자의 등이 급속도로 변색되더니 이내 시커멓게 변했다. 독이었다. 
 
“저 새끼들 잡아!” 
 
독희의 그룹. 남녀를 막론하고 수십에 이르는 그룹원들이 허공으로 일제히 화살을 쏘아대고 있었다. 
 
촤아아악! 
 
건물의 뒷면으로 피하려는 순간, 허공에 거미줄 같은 실의 장벽이 펼쳐졌다. 수십 겹에 달하는 그물이 한꺼번에 쏘아진 것처럼, 화살들은 실타래에 엉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한수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게 대체 뭔 기술이지?” 
 
실은 뒤쪽에서 달려오던 독희의 그룹에게도 쏘아졌다. 마치 강선 같은 실. 그 실의 날카로움에, 걸려 넘어진 사람들의 다리가 허공을 날았다. 
 
“끄아아악!” 
 
실들은 모두 한 여자에게로 이어져 있었다. 몸매가 잘 드러나는 타이트한 검정색 전투복을 입고, 허공을 날아다니는 여자. 여자의 손끝에서 뻗어진 두 개의 나이프가 마력의 실을 타고 화려하게 움직였다. 
여자는 실의 길이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달려오는 독희의 그룹을 순식간에 쓸어 버리고 있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손속. 
정돈된 것을 넘어 아름답기까지 한 움직임. 
종합 능력치도, 가진 스킬도 결코 평범한 배후성을 가져서는 보일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해당 인물의 정보는 ‘등장인물 일람’으로 열람할 수 없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심지어, [등장인물 일람]도 먹히지 않는 여자. 
한수영이 중얼거렸다. 
 
“야, 저 여자······.” 
 
말하지 않아도 나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유상아 씨?” 
 
이틀 만에 만난 그녀는, 내가 알고 있던 유상아의 모습이 아니었다. 
 
 
 
 
 
< Episode 17. SSS급 재능 (1) > 끝

< Episode 17. SSS급 재능 (2) >
 
 
 
 
 
스가가가각! 
 
유상아의 단도가 움직일 때마다 적들의 신체가 산채로 갈려 나갔다. 
 
대단하다. 
······정말 내가 아는 유상아가 맞나? 
 
일대 다수에서 저만한 위력을 보일 수 있는 대군 스킬은 그리 많지 않았다. 현시점에서는 무장성주 공필두의 [무장 지대]나, 한수영의 [아바타] 정도. 그런데 유상아는 그런 대군 스킬도 없이 저런 위력을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강해진 거지? 
혹시 저게 재능이란 건가?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유중혁이 말을 걸었다. 
 
―네놈이 곁에 없으니 더 빨리 성장하는군. 네놈은 주변 동료를 키우는 데는 별 소질이 없는 것 같다. 이현성 때도 그랬지. 
―······내가 초반에 열심히 퍼줘서 저만큼 큰 거야 인마. 
 
사실 별로 준 건 없었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젠장, 왜 하필 내가 곁에 없는 동안 더 강해진 거지? 
이래서야 내가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잖아. 
 
“야.” 
 
한수영의 말에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유상아의 화려함에 압도되어 있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적들은 다수였고, 유상아는 혼자였으니까. 
 
“유상아 씨, 이쪽으로!” 
 
내 목소리에, 유상아의 신형이 멈칫했다. 
그녀도 이런 곳에서 나와 만나게 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한수영, 부탁한다.” 
 
한수영이 기다렸다는 듯 아바타를 발동했다. 
달려나간 수십 기의 아바타가 독희 그룹의 시야를 교란하는 사이, 나는 무사히 유상아와 접선했다. 
 
“독자 씨? 대체 여긴 어떻게······.” 
“일단 이동한 뒤에 이야기하죠.” 
 
멀리서 후속대가 쫓아오고 있었다. 다행히 생존자들은 천호대교를 통해 강동구를 무사히 빠져나간 듯했다. 문제는 우리 쪽인데. 
 
―뒤쪽의 고층 건물로 가라. 고지대로 올라가서 시야를 확보하는 게 먼저다. 
 
역시, 이럴 때는 유중혁의 판단이 주효하다. 
내가 아무리 ‘멸살법’을 다 읽었다고 해도, 전장 상황의 모든 판단을 유중혁처럼 해낼 수는 없다. 그런데 이어진 유중혁의 말이 의미심장했다. 
 
―그리고 그 여자, 조심하는 편이 좋을 거다. 
 
조심하라고? 누구를? 
유중혁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금방 근처의 고층 빌딩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소란 때문에 자극된 탓인지, 갑자기 괴수종들이 범람하는 바람에 독희 그룹은 우리의 꼬리를 놓친 듯했다. 주변을 뒤지던 녀석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추적을 포기하고 강동구 안쪽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제야 유상아를 돌아보았다. 
 
“유상아 씨,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독자 씨는요?” 
“저도 괜찮습니다.” 
 
고작 며칠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어쩐지 대화에 어색함이 감돌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10년 만에 동창생을 만난 느낌이랄까. 
나는 그녀의 타이트한 전투복에서 애써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저, 음······.” 
 
하지만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 사이 한수영을 한 번 보고, 다시 한수영의 아바타에 업혀 있는 유중혁을 확인한 유상아가 나를 향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독자 씨도 많은 일이 있었나 봐요.” 
 
일단, 짧은 사정 청취의 시간이었다. 
 
 
* 
 
 
‘절대 왕좌’가 부서진 후, 유상아는 강동구에 떨어졌다. 그런데 운 좋게도, 그녀와 함께 떨어진 이가 있었다. 
 
“공필두가 같이 있었다고요?” 
“네. 아저씨가 많이 도와주셨어요.” 
 
아저씨라고 부르는 걸 보니, 그새 꽤 친해진 모양이었다. 
 
“공필두는 어디로 갔죠?” 
“이틀 전 강동구 그룹이랑 싸울 때 떨어졌어요. 저를 구하시려다 그만······.” 
 
오늘은 의외의 연속이다. 그 ‘십악’ 공필두가 누군가를 구하다가 위험에 빠지는 걸 자초하다니. 고개를 숙인 유상아가 힘들게 말을 이었다. 
 
“마지막에 아저씨가 한강 쪽으로 그 사람들을 유인했는데······.” 
 
입술을 질끈 깨문 유상아의 표정에 일순 독기가 감돌았다. 
문득, 유상아가 독희 그룹을 망설임 없이 해치웠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위로하듯 말했다. 
 
“아마 공필두는 괜찮을 겁니다. 걱정마세요.” 
 
나는 [디펜스 마스터]와 계약한 상태기 때문에 공필두가 죽으면 바로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계약 조항에 따라 패널티를 입게 되니까. 그런데 아직 별다른 반응이 없다는 건, 공필두가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이야기였다. 
독희와 마찬가지로 공필두 또한 십악의 일원이다. 
그렇게 쉽게 죽을 위인은 아니지. 
 
“그 옷이랑 단도는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아, 이건요······.” 
 
유상아는 공필두와 헤어진 뒤, 인근 지역을 서성이다가 우연히 [녹색 운석]을 발견했다. [녹색 운석]은 희귀한 아이템들이 담겨 있는 운석. 나는 그녀가 가진 아이템들을 확인했다. 확실히 천호동 인근에 이런 아이템들을 담은 운석이 있었다는 게 기억났다. 
 
[고대 암살자의 단도] 
[부유 고양이 가죽 수트] 
 
둘 다 훌륭한 S급 아이템들이었다. 
[고대 암살자의 단도]는 멀리 있는 적을 맞출수록 데미지가 증가하는 옵션이 붙어 있었고, [부유 고양이 가죽 수트]는 체공 시간이 길어질수록 움직임을 더욱 기민하게 만드는 옵션이 붙어 있었다. 
 
“좋은 아이템들이군요.” 
“네, 이것 덕분에 잘 싸울 수 있었어요.” 
 
유상아가 미소하자, 그때까지 대화를 듣기만 하던 한수영이 시비를 걸어왔다. 
 
“흐음, 너 정말 그게 전부야?” 
“네?” 
“‘우연히’ 그걸 얻은 것까지는 그렇다고 쳐. 근데 겨우 아이템만 가지고 그런 전투 능력을 보인다는 건 말이 안 돼. 너 배후성이 대체 누구야? 어떻게 [민활한 움직임]이나 [단검술 강화] 레벨을 그렇게 빨리 올렸지? ‘성장 패키지’를 써도 그 정도로 빠른 성장은 불가능한데?” 
“······그쪽 분은 누구시죠?” 
“나? 첫 번째 사도.” 
 
유상아는 말없이 단도를 뽑아 들었다. 
 
“잠깐만요, 유상아 씨. 이 사람은 적이 아닙니다.” 
 
유상아가 불신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새 친해지신 거예요?” 
“친해진 게 아니라······.” 
“충무로의 그룹원들이 저 사람에게 죽었어요. 설마 잊으신 거 아니죠?” 
 
유상아는 내가 없는 동안 충무로의 부대표였다. 
그러니 충무로 그룹원들에 대한 애정은, 나보다 그녀가 훨씬 깊을 것이다. 한수영이 말했다. 
 
“충무로? 아아, 그렇구나. 네가 그때 걔구나?” 
 
껄렁한 말투에, 유상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한수영이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야, 김독자. 내가 나쁜 년인 건 맞는데, 그래도 잘 판단해라. 내가 보기엔 그 여자 뒤가 좀 구린 것 같거든.” 
“당신······.” 
“마침 충무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때 봤을 때만 해도 저 여자 저렇게 강하지 않았어. 네가 봐도 이상하지 않냐? 설령 설화급 성좌가 배후성으로 있어도, 단기간에 저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는 없어. SSS급 성장 가속 스킬을 가지고 있다면 모를까······. 근데 그런 지원을 해줄 수 있는 성좌가 한국에 대체 몇이나 되겠냐?” 
 
심정적으로는 부정하고 싶었지만, 이성적으로는 한수영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유중혁이 조금 전에 했던 말도 걸렸다. 
게다가 유상아는 지금까지도 내게 배후성을 숨기고 있다. 
 
유상아의 당황한 눈동자가 나와 마주쳤다. 
 
나는 유상아의 배후성이 ‘버려진 미로의 연인’일 거라 생각했었다. 
‘마력실’을 통해 ‘길찾기’가 가능한 성좌는 다이달로스의 미궁에서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건네 준 인물, 즉 그리스 신화의 ‘아리아드네’뿐이니까. 
 
그런데 한수영의 말마따나, ‘아리아드네’의 인지도로는, 유상아를 저 정도로 키워내는 게 불가능했다. 
 
게다가 조금 전 전투에서 유상아가 허공을 도약할 때 보였던 움직임은, 무림계 스킬인 [허공답보]가 아니라면 [헤르메스의 산책법]에 가까워 보였다. 아리아드네의 화신이 헤르메스의 성흔을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내가 입을 열려던 찰나, 말을 빼앗은 것은 뜻밖의 존재였다. 
 
[하하, 여러분! 그간 잘 지내셨죠?] 
 
빌어먹을······ 타이밍하고는. 
나는 곧바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둑해지는 하늘 위로, 도깨비의 신형이 두둥실 떠 있었다. 
 
[이번 시나리오 참가자분들은 성질이 아주 급하시네요. 메인 시나리오 시작까지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재앙을 깨우시는 분들이 계신 걸 보면 말이죠. 어지간히 다음 시나리오가 궁금하신가 봐요?] 
 
말을 하는 것은 비형이 아니었지만 비형의 모습도 보였다. 
아마 담당자가 없어서 하급 도깨비들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듯했다. 
 
[잠깐 담당 도깨비가 자리를 비워서 이 기간 동안은 쉬엄쉬엄 넘어가려고 했는데······ 하하. 이제 다들 눈칫밥 좀 드셨잖아요? 이런 이벤트, 그냥 넘어갈 리 없는 거 아시죠?] 
 
좋지 않다. 
정말로, 좋지 않은 전개다. 
 
[그렇게들 원하시는데, 시나리오를 안 주면 제가 또 도깨비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시나리오가 내려온다는 것은, 오직 단 하나의 사실만을 이야기한다. 
 
[서브 시나리오 ― ‘재앙 막기’가 도착하였습니다.] 
 
재앙의 부화가 이제 코앞에 임박했다는 것. 
 
+ 
 
<서브 시나리오 ― 재앙 막기> 
 
분류 : 서브 
난이도 : S- 
클리어 조건 : 강동구에 터를 잡은 미지의 세력이 ‘재앙’ 중 하나를 부화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해치우고 도래할 ‘재앙’을 막아내세요. 
제한시간 : 2시간 
보상 : 22000코인 
실패시 : ‘질문의 재앙’ 조기 출현. 
 
+ 
 
우리가 ‘재앙 막기’ 시나리오를 받았으니, 분명 독희 그룹은 ‘재앙 지키기’ 시나리오를 받았을 것이다. 
이 빌어먹을 도깨비들은, 이 돌발 상황까지도 모두 시나리오의 일부로 포섭하려 하는 것이다. 
나는 곧장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저것부터 처리하죠.” 
 
처음으로, 한수영과 유상아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 
 
 
독희의 그룹이 주둔지를 튼 곳은 강동구 안에서도 천호동 쪽. 
정확히는 교회와 성당들이 줄지어 밀집한 지역이었다. 
만약 녀석들의 목적이 재앙을 조기 부활시키는 거라면, 종교 밀집 지역을 주둔지로 택한 것은 탁월했다.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의 기도는 ‘재앙 운석’을 부화시키기에 알맞은 환경을 조성할 테니까. 
주변 정찰을 마친 한수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테라포밍 수준이 제일 낮은 길은 거점을 중심으로 북북동. 천중로 16길 쪽이야. 이쪽 길목으로 파고들 수만 있으면, 최단 시간 안에 주둔지의 중심까지 도달할 수 있어. 대신 방비가 만만치 않을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없으니, 가장 빠른 길로 가야 한다. 
 
“괜찮아. 가능한 건물을 통해 이동하면 되니까. 정면은 한수영이랑 유상아 씨가 맡아 주세요. 둘이 싸우지 마시고요.” 
“······알겠어요.” 
 
당장 도움을 줄 수 없는 유중혁은 한수영의 아바타를 이용해서 고층 건물의 옥상에 남기기로 했다. 딴에는 ‘전황을 지켜보는 역할’이었다. 유중혁은 딱히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충고할 뿐이었다. 
 
―가능하면 부화 전에 녀석들을 해치워라. [바람의 길]이 없다면 ‘질문의 재앙’의 초반 진압은 거의 불가능하니까. 
 
물론, 나도 가능하면 그렇게 하고 싶다. 
 
“가죠.” 
 
신호와 동시에, 우리는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다. 
먼저 선두로 나선 것은 [아바타]를 사용한 한수영이었다. 순식간에 수십 명으로 늘어난 아바타들이, 거리 곳곳을 뛰어다니며 독희 그룹의 주목을 끌었다. 
 
“뭐야! 죽여!” 
 
당황한 그룹원들이 아바타들을 쫓아가는 순간, 허공에서 얇고 투명한 실이 날아들었다. 
 
스가가각! 
 
“끄아아악!” 
 
아바타를 뒤쫓던 사내들이 강선에 걸려 다리가 잘려나갔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사내들이 넘어지는 궤적엔, 또 다른 강선이 있었다. 
 
푸콰악! 
 
사내들의 목이 그대로 허공을 날았다. 넘어지는 각도까지 계산해서 고안한 섬뜩할 정도의 이중 트랩이었다. 한수영이 혀를 찼다. 
 
“이야, 잔인하네.” 
“당신이 할 말은 아닐 텐데요.” 
 
살기가 풀풀 날리는 대화와는 별개로, 두 사람의 연계는 상당히 봐줄 만했다. 아니, 봐 줄 만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쓸 만했다. 
덕분에 나는 손쉽게 독희 그룹들의 감시망을 피해 주둔지의 중심부로 파고들 수 있었다. 
 
재앙 운석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높이만 무려 8미터가 넘는 거대한 운석. 
 
고오오오오······. 
 
불길한 아우라를 줄기줄기 뿜어대며, “내가 재앙입네” 하는 녀석이 그곳에 있었다. 
확실히, 화룡종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놈이 들어있다는 게 느껴진다. 
 
저걸 못 막으면, 서울은 반드시 끝장날 것이다. 
 
그리고 운석의 곁에 선 한 여자의 모습. 
눈이 내린 듯 새하얀 백발. 
설산에 핀 붉은 꽃처럼 도드라진 입술을 보고 있자니, 과연 유중혁의 취향을 알 법도 했다. 
한기가 풀풀 날리는 눈빛이 나를 노려보는 순간, 가공할 기세가 그녀의 전신에서 발출되었다. 
패기만으로도 피부가 찌릿찌릿해지는 느낌. 
공필두 때와는 또 다른 압도감이었다. 
그렇군. 
역시 [재앙 운석]의 힘을 받았으니, 이 정도는 된다 이건가? 
 
“······누구냐?” 
 
그녀가 바로 십악, 독희 이설화였다.
 
 
 
 
 
< Episode 17. SSS급 재능 (2) > 끝

< Episode 17. SSS급 재능 (3) >
 
 
 
 
 
[재앙 운석]을 깨울 수 있는 방법은 총 세 가지다. 
 
하나는 시나리오에 맞춰 운석이 부화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고, 둘은 [재앙 운석]의 힘을 미리 끌어다 쓰는 것이다. 그리고 셋은 가장 빠른 방법으로, [재앙 운석]에 인위적으로 마력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이설화의 주변에는 십수 명의 그룹원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마력이 고스란히 [재앙 운석]을 향해 이어지는 것이 보였다. 
 
부화(孵化)의 의식. 
이들은 세 번째 방법을 택한 것이다. 
 
벌써부터 힘차게 들썩이는 운석을 보아하니, 이대로 30분만 더 지났으면 재앙은 그대로 부화했을 것이다. 
나는 이설화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만두지? 다 같이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 
“대체 뭘 생각하는 거냐?” 
 
이상한 일이었다. 
원작의 3회차에서, 재앙 이전의 이설화는 [재앙 운석]의 힘을 빌리기는 해도 재앙을 미리 깨울 정도로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었다. 
유중혁도 그걸 알기에 이설화를 미리 찾아왔던 것일 터. 
 
“[재앙 운석]의 부화를 멈춰. 그럼 너희는 살려줄게.”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이설화가 말했다. 
 
“싫다면?” 
“넌 여기서 죽겠지.” 
 
독희 이설화의 표정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녀의 손이 움직이자, 재앙을 향해 기도하던 인간들이 동시에 나를 향해 돌아섰다. 
 
[8급 인외종, ‘충인(蟲人) 남민혁’이 당신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8급 인외종, ‘충인 정민지’가 당신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8급 인외종, ‘충인 김갑일’이 당신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머리 위로 더듬이가 자라고, 손이 갈퀴처럼 변한 충인들. 
이쪽 방랑자들은 웨어 울프가 아닌 충인으로 인외화(人外化)가 진행된 모양이었다. 
그런데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이상하네. 인외화는 [재앙 운석]의 권능이 아닐 텐데?” 
 
내가 중얼거림과 동시에, 이설화가 외쳤다. 
 
“죽여!” 
 
달려드는 충인들이 제각기 날개와 다리를 뻗으며 허공으로 도약했다. 
나는 그들을 향해 그대로 칼자루를 뽑았다. 
 
[‘신념의 칼날’이 발동합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특수 옵션이 발동합니다.] 
[에테르 속성이 ‘불꽃’으로 변환됩니다.] 

허공을 가르는 빛살에 새하얀 불길이 깃들었다. 
벌레 속성을 가진 모든 인외종들은 ‘불’에 약하다. 
 
화르르륵! 
 
[부러지지 않는 신념]에 휘감긴 에테르의 불꽃이 충인들의 피부에 옮겨붙었다. 하나는 둘에게, 둘은 다시 셋에게. 
 
“키에에엑!” 
 
순식간에 번져나간 불길은 인외종들의 피부를 불태웠다. 나는 익어가는 인외종들의 다리를 베고, 날개를 베었다. 
 
“키이이잇!” 
 
마력을 아낌없이 분출하며 순식간에 인외종들을 불태웠다. 웨어 울프 때와 마찬가지다. 이들 또한 인외의 길을 걸었기에, 불살의 패널티는 받지 않는다. 나는 불길을 뚫고, 그대로 이설화를 향해 달려갔다. 
 
까아아앙! 
 
처음으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막혔다. 
이설화의 손톱과 팔뚝이 검푸른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재앙 운석]의 힘은 고유 성흔의 레벨업을 촉진시킨다. 
 
재앙의 힘을 빌려, 그녀는 신념의 칼날을 막아낼 수 있는 [맹독조(猛毒爪)]를 손에 넣은 것이었다. 하지만, 막을 수 있다고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크으읏!” 
 
스파크가 튀며 이설화의 몸이 대여섯 걸음이나 밀려났다. 
애초에 그렇지 않은 게 이상했다. 
지금의 내 종합 능력치는, 유중혁을 제외하고는 화신들 중 거의 최고 수준이니까. 
비록 재능은 없어도, 같은 화신들 중에서 나는 결코 약하지 않다. 
 
“포기해. 재앙이 부화하면 너도 좋을 거 없어. 이번 서브 시나리오는 실패 패널티도 없잖아?” 
 
초조한 눈으로 [재앙 운석] 쪽을 살피는 이설화의 눈빛이 탁했다. 
주객이 바뀐 듯한 모습. 
마치 그녀는 [재앙 운석]을 통해 힘을 얻으려는 게 아니라, ‘재앙’ 자체가 목적인 듯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재앙이 부화하면 서울이 멸망할 것이라는 건, 원작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굳이 ‘재앙’을 깨우려는 것일까.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이설화 
나이 : 26세 
배후성(背後星) : 구암신의(龜巖神醫) 
전용 특성 : 유능한 의원 (희귀), 독의 달인 (희귀) 
전용 스킬 : [무기 연마 Lv.7], [도화살 Lv.4], [맹독 투하 Lv.5], [신독 조제 Lv.4], [해독 Lv.5]······. 
성흔 : [맹독조 Lv.4], [천령독 Lv.4], [생사의 갈림길 Lv.3] 
종합 능력치 : [체력 Lv.44(+10)], [근력Lv.42(+10)], [민첩Lv.44(+10)], [마력Lv.35(+10)] 
종합 평가 : 현재 종합 평가가 진행 중입니다. 

* 현재 해당 인물은 ‘패러사이트’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 ‘패러사이트’가 해당 인물의 육신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 ‘패러사이트 앤티누스’의 능력치 일부가 해당 인물에게 전이됩니다. 
 
+ 
 
······젠장. 
설마 했는데, 역시 이런 상태였군. 
 
[특성 효과로 일부 장면에 대한 기억력이 상승합니다!] 
 
머릿속에서 페이지가 넘어가며, 내가 읽었던 몇몇 페이지의 문장들이 망막 위를 흘러갔다. 
 
「이세계 클로노스에는 다섯 개의 지배 종족이 있다. 동쪽의 벨키아, 서쪽의 패러사이트, 남쪽의 이뮨타르, 그리고 북쪽의 미스틸렌. 그리고 중앙의 인바고.」 
 
달려든 맹독조의 공격을 가볍게 피한 나는 균형을 잃은 그녀의 등을 그대로 걷어찼다. 이설화가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굴렀다. 나는 그런 이설화를 보며 입을 열었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는 「클로노스의 재앙」을 모티프로 만들어진 시나리오지.” 
 
‘클로노스의 재앙’이라는 말에 이설화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클로노스가 멸망하던 그 날, 클로노스의 다섯 지배종들은 종족 별로 한 명씩의 영웅을 선출했어. 그렇게 멸망의 치욕을 딛고 살아남아, 클로노스의 명맥을 이어갈 다섯 명의 영웅들이 선택되었지.” 
“······.” 
“그들은 스타 스트림의 계약을 통해 다른 세계로 보내졌다. 그 세계로 가서 또 다른 종족들과 조우하고, 그곳에서 일어날 재앙을 막는 대가로 자신들의 생명을 약속받았어.” 
 
키이이잇. 
 
이설화의 입에서 인간이 아닌 것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곳에서는 ‘길잡이’라고 불리는 놈들이지.” 
“······킷. 지구의 인간이, 어찌 그런 것들을 알고 있느냐?” 
 
어떻게 알긴. 
책으로 수도 없이 봤으니 알지. 
 
“넌 ‘이설화’가 아니야.” 
 
본래보다 빠른 재앙의 부화. 
그런 짓을 할 만한 녀석 중에 ‘인간’은 없다. 
 
“패러사이트의 여왕, ‘앤티누스’. 하라는 ‘길잡이’는 안 하고, 왜 재앙을 깨우고 있는 거냐?” 
 
오직 ‘타락한 길잡이’만이, 그런 일을 꿈꾼다. 
 
[5급 충왕종, ‘패러사이트 앤티누스’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키잇, 키이잇! 
 
패러사이트는 다른 종족을 매개로 살아가는 기생종. 
지금 이설화는 ‘길잡이’ 중 하나에게 조종당하고 있었다. 
나는 죽은 충인들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리카온의 운석이 그랬듯, 인간의 인외화(人外化)를 촉진하는 것은 [재앙 운석]의 힘이 아니라 클로노스 길잡이들의 힘이다. 
 
“여기 있는 인간들은 네가 멋대로 감염시킨 것이겠지? 왜 그런 짓을 한 거냐?” 
 
키이잇······! 
 
“재앙을 일찍 깨워서 네가 얻을 게 뭐지? 너희 길잡이들의 목적은 지구인들과 함께 ‘재앙’을 막고, 우리와 화합해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것 아니었나? 기껏 테라포밍된 세계를 대체 왜 파괴하려고 하는 거냐?” 
 
킷킷, 키키킷······! 
 
“이건 네 임무에 위배 되는 행동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당장 그 몸에서 빠져나와라. ‘길잡이’로서 올바른 임무를 행해라, 앤티누스!” 
 
가능하면, 나는 이설화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유중혁도 그랬을 것이다. 
 
원작에서도 독희가 ‘십악’이 되는 것은 ‘패러사이트’에게 감염된 후의 일이었다. 만약 그녀가 감염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설화는 십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유중혁 녀석은 잘 하지도 못하는 대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저 패러사이트의 여왕으로부터, 자신의 옛 연인을 지켜내려고. 
[한낮의 밀회]의 알림창이 허공에서 깜빡였다. 
 
―그녀를 죽여라. 
 
유중혁이었다. 
 
―중요한 건 그녀의 목숨이 아니라 세계의 존속이다. 현명하게 처신해라, 김독자. 
 
거리가 멀었기에, 유중혁이 어떤 표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한때나마 정을 주었던 여인보다, 이 세계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 
어쩌면 그게 타고난 영웅의 자질이라는 거겠지. 
내가 말했다. 
 
―그러면 너는 불행해질 거다. 
―상관없다. 
 
유중혁의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확고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여기서 이설화가 죽으면, 유중혁은 언젠가 무너질 것이다. 
 
키이이잇. 
 
하나둘 쌓여간 지인들의 죽음은, 언젠가 유중혁의 기억을 갉아먹고 그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킷! 고작 인간 따위에게······!” 
 
이설화의 입으로 벌레들의 여왕이 말했다. 
음색에 진득하게 배어든 인간에 대한 증오. 
그녀가 왜 그렇게 인간을 싫어하는지,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벌레들의 감정까지 일일이 헤아려 줄 만큼, 지금의 나는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킷. 죽인다.” 
 
이설화의 전신에서 검은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천령독(千靈毒). 
이설화의 주특기가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파아앗! 
 
맹독조의 손톱을 타고, 시커먼 액체가 나를 향해 뿜어졌다. 

파스스스스. 
 
잽싸게 몇 걸음을 물러나자, 천령독에 닿은 바닥이 그대로 녹아내렸다. 유중혁이었으니 저 독을 맞고도 중독에 그쳤지, 평범한 화신이었다면 맞는 순간 저 바닥처럼 곤죽이 되었을 것이다. 유중혁이 물었다. 
 
―천령독의 대책은 있나? 
―있어. 
 
하지만 나는 ‘평범한 화신’이 아니다. 
엄밀히 따지면 누구의 화신도 아니지만. 
 
푸슈슛! 
 
허공에 산개한 이설화의 독이 빈틈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독은 자유자재로 허공을 누비며 내 약점을 찾아냈다. 
기어코 몇 방울이 허벅지에 튀었고, 몇 방울은 팔뚝을 스쳤다. 
조금 엄한 부위를 스친 독도 있었다. 
천령독을 맞은 정장의 일부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설화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이른 판단이었다. 
독을 무시하고 달려간 나는 주먹을 힘껏 들어 그녀의 배를 그대로 내갈겼다. 
 
“키이이이엣!” 
 
끔찍한 울음과 함께 그녀의 신형이 허공을 날았다. 
천령독에 닿은 내 피부는 약간의 변색을 보였지만, 이내 원래의 색깔로 돌아갔다. 이설화가 눈을 부릅떴다. 
 
“······킷, 천독불침?” 
 
공포에 질린 음성. 
천독불침지체는 독을 사용하는 모든 존재에게 공포의 온상이다. 
하지만 나는 천독불침도, 만독불침도 아니었다. 
 
“앤티누스, 네가 기생한 화신의 배후성이 누군지는 아냐?” 
 
그 말을 하며, 나는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물론 모르겠지. 모르니까, 잘도 그 몸에 들어갔겠지. 그치?” 
 
잠시 후, 내 손에는 책 한 권이 딸려 나왔다. 
 
[한의학의 질적 저하를 우려하던 한 성좌가 자신의 수식언을 밝힙니다.] 
[성좌, ‘구암신의’가 깜짝 놀라 당신을 바라봅니다.] 
 
“키이잇······?” 
 
[동의보감(東醫寶鑑) ― 미완성본] 
 
동방고금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한의학 기록물 중 하나. 
‘왕의 자격’의 5인 던전인 ‘동의보감의 장’에서 나오는 아이템. 
 
“이거 모으느라 고생 좀 했지.” 
 
‘왕의 자격’ 시나리오가 한창 진행될 무렵, 모든 왕들은 [사인참사검]만을 얻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왕들이 [사인참사검]을 탐하는 동안, 나는 다른 아이템들을 열심히 주웠다. 그들이 가치를 몰랐기에 내팽개친 수많은 아이템들. 그중에서도 내가 유독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이 [동의보감]의 판본들이었다. 
 
<내경편> 4편. 
<외형편> 4편. 
<잡병편> 11편. 
<탕액편> 3편. 
<침구편> 1편. 
<목차편> 2편. 
 
그렇게 총 25편을 모아야만 완성할 수 있는 성유물. 
안타깝게도 나는 5인 던전에서 구할 수 있는 8편만을 모았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효과를 보기는 충분했다. 8편만 모아도, [동의보감]은 어지간한 S급 피독주(避毒珠)의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아이템, ‘동의보감 ― 미완성본’의 효과가 발동 중입니다.] 
[당신의 신체가 일시적으로 자체적인 피독(避毒) 능력을 개화합니다.] 
 
당황한 이설화가 외쳤다. 
 
“어떻게? 하지만 천령독은······!” 
“알아. 천령독은 본래 피독주로 해독이 불가능한 독이지. 하지만 동의보감은 가능해. 왜인 줄 알아?” 
 
[성좌, ‘구암신의’가 허탈한 웃음을 짓습니다.] 
 
별자리 하나가 내게 응답하듯 희미한 빛을 내뿜었다. 
 
“왜냐하면 그 천령독을 만든 성좌가, 바로 ‘동의보감’의 저자거든.”
 
 
 
 
 
< Episode 17. SSS급 재능 (3) > 끝

< Episode 17. SSS급 재능 (4) >
 
 
 
 
 
「가장 위대한 선인(善人)은 언제든 최악의 학살자로 돌변할 수 있다.」 
 
그것은 ‘멸살법’에서 ‘구암신의’를 설명하는 문장이었다. 
구암신의 허준(許浚). 
‘멸살법’의 기록에 따르면, 말년의 허준이 몰두했던 과제는 사실 의술이 아니라 독술이었다. 훗날 성좌가 된 많은 위인들이 그랬듯, 당시의 허준은 실제 역사의 기록을 뛰어넘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누구든 죽일 수 있는 독을 만들 수 있다면, 누구든 살릴 수 있는 환단(丸丹)을 만들 수도 있으리라.”」 
 
선조의 죽음 이후 유배되었던 허준은, 광해 7년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단 하나의 질문에 몰두했다. 
왜 어떤 독은 누군가에게 약이 되고, 어떤 독은 독이 되는가? 
그리고 말년의 어느 날, 그는 결국 신비주의적인 해답에 도달했다. 
 
「“독의 작용을 결정하는 것은 신(身)이 아닌 영(靈)이다.”」 
 
천 개의 영혼을 분석해 만든 독. 그 결과물이 바로, 지금 이설화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천령독(千靈毒)이었다. 
그리고 [동의보감]은, 사실 그 천령독에 도달하기 위한 허준의 실패록이었다. 
 
“키잇, 키이잇!” 
 
천령독을 쏟아내는 이설화를 향해, 나는 가차 없는 일격을 날렸다. 
뻐어억,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가는 이설화. 
독희 이설화는 독만 무력화할 수 있다면 제압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십악으로서 그녀의 명성을 공고히 한 것은 바로 저 천령독이었으니까. 
만약 [동의보감]을 얻지 못했더라면, 나 역시 그녀가 쌓아갈 명성의 제물이 되었겠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운이 나빴다. 
 
[성좌, ‘구암신의’가 미안한 듯 당신의 눈치를 살핍니다.] 
[성좌, ‘구암신의’가 당신에게 선처를 기대합니다.] 
[3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패러사이트’의 감염은 구암신의의 의도와는 무관한 일일 것이다. 
즉, 저 이설화가 나를 공격하는 것 또한 이설화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건 그렇고 겨우 300코인에 선처를 기대하다니······. 
 
[성좌, ‘서애일필’이 당신의 선처를 기대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의 선처를 기대합니다.] 
[3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나는 성좌들의 반응을 무시하고 이설화를 향해 다가갔다. 
이설화가 겁에 질려 바닥을 기었다. 
멀리서, 이곳을 보는 유중혁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 여기서 이설화가 죽으면, 유중혁은 큰 상처를 받겠지. 
나는 쓰러진 이설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야.” 
 
정확히는, 그녀의 안에 기생한 앤티누스를 향해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밖으로 나와.” 
“킷?”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다시 ‘길잡이’의 본분으로 돌아가라고. 사람들한테 스킬도 가르쳐 주고 그러면서 사이좋게 지내면 되잖아.” 
“······.” 
“열심히 살다 보면, 너도 언젠가 ‘성좌’가 될지 어떻게 알아?” 
 
패러사이트의 여왕, 앤티누스는 보기와는 다르게 강한 영웅이었다. 
비록 지금은 개연성의 제약을 받고 있어서 본신의 힘을 모두 발휘하지 못하지만, ‘길잡이’를 지속하며 역사를 쌓는다면 훗날 성좌가 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닌 존재. 
 
“너희 인간들을······ 증오한다······.” 
 
문제는, 그 강력한 존재가 인간을 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불구대천의 원수로. 
나는 간헐적인 진동을 반복하는 [재앙 운석]을 흘끗 바라보았다. 
 
“네 세계가 멸망한 건 유감스럽게 생각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세계까지 멸망시킬 필요는 없잖아? 똑같은 비극을 여기서도 재현시킬 셈이냐?” 
“······너희는 모두, 죽을 것이다.” 
 
킷킷 웃는 앤티누스를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스스로 나가지 않는다면, 이제 별수 없다. 
강제로 나가게 하는 수밖에. 
 
사실 이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다. 이설화의 고통도 클뿐더러, 이설화의 몸 밖으로 빠져나온 앤티누스를 직접 상대해야 하는 부담도 있었으니까. 
나는 하늘을 흘깃 올려다보았다. 
한반도의 성좌들. 
지난번에 한 번 빚을 졌으니, 이번에는 내가 양보해야 할 차례겠지. 
 
[‘동의보감 ― 미완성본’의 특수 옵션을 발동합니다.] 
[‘동의보감 ― 침구편’이 당신에게 신비한 한의학의 정수를 전합니다.] 
 
내가 가진 [동의보감]은 미완성본이기 때문에 강력한 독을 만들거나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다거나 하는 기적을 행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간단한 치료는 할 수 있다. 
 
가령, 사람 몸에 기생한 벌레 새끼를 꺼낸다거나. 
 
원활한 치료를 위해서는 그녀의 몸이 구속되어야 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이설화의 팔을 꺾어 뒤에서 제압했다. 
누가 보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법한 자세였지만, 양심에 손을 얹고 말하건대 그녀에겐 일말의 흑심도 없었다. 
상식적으로 내가 미친놈이 아닌 이상 유중혁의 전 여친을 노릴 리가 없다. 그것도 유중혁이 보는 앞에서. 
 
[전용 스킬, ‘점혈 Lv.2’을 발동합니다!] 
 
팟. 팟. 팟. 
 
나는 그대로 이설화의 혈도 곳곳을 누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피부 곳곳이 붉게 물들었고, 나는 반응이 생긴 혈도 위에 마력으로 만든 바늘을 하나씩 심었다. 처음 해 보는 건데, 잘 될지 모르겠네 이거. 
 
“키이잇! 아파! 아파아아아아!” 
 
울부짖으며 비명을 지르는 이설화의 목소리. 
나는 계속해서 혈도를 짚어갔다. 
 
“키이잇! 키잇! 꺄아아아아······!” 
 
그러자 이설화의 비명도 조금씩 변해갔다. 
벌레의 울음에서, 인간의 목소리로. 
겨우 침 몇 방 놨다고 몸 안의 기생충이 빠져나오다니, 역시 한의학이란 신비로운 것이다. 그동안 서구 사대주의를 실천하며 서양의학만을 신봉하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신비한 한의학의 정수가 효과를 발휘합니다!] 
[성좌, ‘구암신의’가 당신을 흐뭇한 듯 내려다봅니다.] 
 
나는 기진맥진해 숨을 헐떡이는 이설화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카만 독이 분비되던 그녀의 전신에서, 노란색 점액들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 점액이 바로 충왕종 ‘패러사이트’의 본체였다. 
 
“끅······ 끄윽······.” 
 
이 정도면 성좌들도 만족했겠지. 
 
[성좌, ‘구암신의’가 당신의 선행에 고마워합니다.] 
[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이설화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눈동자에 생기는 돌아왔지만, 여전히 초점은 없었다. 
조금 전까지 패러사이트에 감염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오감이 반쯤 이지러진 그녀는, 지금 내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누구죠?” 
 
저 질문에 대답하면 일어날 이벤트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유중혁이 이설화를 무사히 포섭했던 몇몇 회차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중요한 건 내가 누구냐가 아니다. 
 
“유중혁이 보내서 왔습니다.” 
 
―김독자.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분노한 유중혁의 목소리가 귓가를 찔렀다. 
이설화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유중혁? 그게 누구죠?” 
“곧 알게 될 겁니다.” 
 
독희 이설화는 반드시 여기서 유중혁의 일행이 되어야 했다. 
<선지자들>이 나타나고, 또 ‘절대 왕좌’가 부서진 후 이 세계의 흐름은 내가 아는 궤적에서 조금씩 틀어지는 중이었다. 
원작의 실수를 계승하는 것도 곤란했지만, 내가 모르는 미래들이 계속해서 출현하는 것도 곤란한 일이다. 
그러니 중요한 사건의 포인트들마다 직접 균형을 잡아 줄 필요가 있었다. 
어떤 것은 그대로 흘러가고, 또 어떤 것은 다르게 흘러가도록.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어쨌든 유중혁의 이번 ‘회차’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근사치에 조금씩 접근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독희······ 아니, 의선(醫仙) 이설화는 그 근사치의 훌륭한 소수점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독자, 이쪽은 끝났어!” 
 
돌아보니, 피를 뒤집어쓴 한수영과 유상아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놀라웠다. 
둘이서 그 많은 인원을 소탕했다고? 
아무리 독희가 빠진 상황이라고 해도, ‘독희 그룹’의 메인 전력을 단둘이서 쓸어버리다니······. 본래 짰던 작전이 무의미해질 지경이었다. 
저런 앙상블이라면 이지혜의 [유령 함대]와 공필두의 [무장 지대] 콤비에도 견줄만할지도 모른다. 
 
“잠깐, 가까이 오지 마세요.” 
 
하지만 나는 그들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감염 면역이 없는 그들이 지금 가까이 오면 곤란하다.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키이이잇······ 인간······! 
 
이설화의 몸에서 빠져나온 점액들이 허공의 한 점을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패러사이트의 여왕, 앤티누스. 
 
그녀는 기생 중일 때도 무섭지만, 기생 중이 아닐 때는 더 무섭다. 
점액질들이 조그마한 날벌레처럼 움직여 형상을 빚어갔다. 
오랜 세월 빨아들인 영양분으로 이루어진 신체. 
아름다운 곡선을 갖춘 몸통과,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는 다리. 
잠자리 같은 날개와 전갈의 그것을 닮은 꼬리. 
얼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곤충의 갑피였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곤충이라기보다는 이족 보행 생물에 가까운 형태였다. 
 
진짜 전투는 지금부터다. 
 
“떨어져요! 감염되기 전에!” 
 
쐐애액! 
 
날카로운 꼬리가 내 배를 찔러왔다. 
 
[아이템, ‘동의보감 ― 미완성본’의 효과가 발동 중입니다.] 
[당신의 신체가 패러사이트 감염으로부터 면역을 가집니다.] 
 
민첩이 50을 넘는 내가 피하지 못할 정도의 빠르기였다. 아슬아슬하게 꼬리의 끝을 잡아챘기에 배가 뚫리는 것은 면했지만, 그대로 맞았다면 분명 배에 구멍이 났을 것이다. 
 
킷. 
 
그녀는 내가 자신의 꼬리를 쥐었다는 것을 이용해 나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날아간 육신이 바닥에 푹 고꾸라졌고, 강한 통증이 전신을 잠식했다. 
 
강하다. 
기생의 형태를 벗어났는데도 더 강해졌다. 
이것이 본신의 힘만으로 5급 충왕종에 비견되는 힘. 
 
앤티누스가 전력으로 힘을 개방하면, 내가 전에 잡았던 열화판 화룡종에 준하는 전투력을 발휘할 것이다. 
멸망했다고는 하나, 그래도 한 세계의 영웅이었던 존재. 
이 녀석은 [노란색 운석]에서 나왔던 리카온 못지않은 강자인 것이다. 
 
그러나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길잡이’가 다섯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기도 전에 이런 난동을 피우는 것은 명백한 시나리오 규칙 위반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사람 몇을 죽이는 정도가 아니라 재앙을 조기 부화시키려 했고,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개연성’을 포기했다는 것을 뜻했다. 
 
치직, 치지지직― 
 
벌써 개연성 폭풍의 징조가 앤티누스의 육신에 강림하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내가 공격하지 않아도 그녀의 육체는 붕괴를 가속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시간만 벌어도 내가 이기는 싸움이었다. 
 
키이이잇! 
 
문제는 시간을 버는 동안 얼마나 굴러댈까 하는 것인데······. 
품속에 들어있던 ‘이뮨타르 종족의 호부’가 가늘게 떨린 것은 그때였다. 
 
우우우웅. 
 
아, 그렇군. 이게 있었지. 
나는 쿡쿡 쑤셔오는 뼈마디를 맞추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미안하지만 네 상대는 내가 아냐.” 
 
쿠구구구구!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은빛 섬광이 소닉붐을 일으키며 하늘을 가로질러 왔다. 화려한 갈기가 허공에서 흩날렸고, 신형은 굉음을 일으키며 내 앞에 착지했다. 
삼 미터가 넘는 체고. 
이뮨타르의 왕자, 리카온이 형형한 패기를 흩뿌리며 일어섰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호주.”
 
 
 
 
 
< Episode 17. SSS급 재능 (4) > 끝

< Episode 17. SSS급 재능 (5) >
 
 
 
 
 
 
이뮨타르 종족의 왕자, 리카온은 내게 꾸벅 경의를 표하더니, 금방 등을 돌리고 앤티누스를 바라보았다. 
역시 인외종이 아군이 되니까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앤티누스.” 
“리카온······.”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패러사이트의 여왕이 웃었다. 
 
“임무를 잊은 것인가? 왜 이 세계의 인간들과 싸우고 있는 거지?” 
“킷킷, 임무? 우리에게 그런 게 있었나?” 
 
놀리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 리카온의 표정이 굳어졌다. 
 
“우리는 ‘길잡이’. 찾아오는 재앙에 맞서 다른 세계의 주민들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주는 존재다.” 
“벌써 도깨비 놈들에게 홀린 모양이군. 정신 차려라, 리카온.” 
“정신 차려야 할 것은 너다, 앤티누스!” 
 
리카온의 목소리가 조금씩 격앙되고 있었다. 
 
“클로노스 전사들의 희생을 잊었는가? 다섯 지배종이 멸절당하던 그 순간을 그대는 벌써 잊었단 말이냐? 우리는 여기서 재앙을 막아야 한다. 이곳의 생명체들과 협력해서 테라포밍된 행성을 지키고, 이 세계에서 클로노스의 문명을 재건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신성한 사명이다!” 
 
클로노스 문명의 재건. 
앤티누스는 더 이상 킷킷 웃지 않았다. 
 
“리카온, 그건 불가능하다. 이 행성은 멸망하게 될 테니까. 그것이 ‘시나리오’의 운명이다.” 
“아니, 이번엔 다르다.” 
 
리카온의 눈이 나를 흘끗 보았다. 
 
“나의 호주는 재앙이 시작되기도 전에 소재앙을 처치한 분이시다. 그 증거로 우리 종족의 호부도 갖고 계시지. 어쩌면 멸망을 막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깟 소재앙 따위, 열화판이었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었어.” 
“지구는 이제 고작 다섯 번째 시나리오다! 다섯 번째가 시작되기도 전에 소재앙을 처치한 행성은 없었다. 잘 생각해라 앤티누스! 이 행성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앤티누스의 겹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가래가 끓는 듯한 곤충의 울음. 
그녀의 울음에 진득한 원한이 배어 있었다. 
 
“위선 떨지 마라. 재앙을 막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네놈이 정말 이들을 도울 생각이었다면, 왜 처음부터 재앙의 행선지가 ‘지구’로 정해질 때 반대하지 않았지?” 
“그건······.” 
 
둘의 이야기를 엿듣던 한수영이 조용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저 녀석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한수영도 이 시나리오에 디테일한 과거사는 모르는 듯했다. 3회차나 4회차의 ‘길잡이’들은 지금처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 뭔가를 설명해주기엔 상황이 애매했다. 
앤티누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리카온! 네놈도 나와 같다. 우리는 복수를 위해 이 행성에 온 거다! 우리에게 재앙을 안겨다 준 놈들에게, 똑같은 재앙으로 보답하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하면 너도 죽게 된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은 ‘길잡이’의 독단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앤티누스가 웃었다. 
 
“리카온, 진짜 나는 클로노스의 내 종족들과 함께 죽었다.” 
“······말이 안 통하는군.” 
 
송곳니를 드러낸 리카온이 살기를 뿜어냈다. 
 
“앤티누스. 너와의 연은 여기 까지다.” 
“킷킷킷! 리카온! 이뮨타르의 가엾은 늑대여! 클로노스의 역사를 잊었는가? 늑대는 단 한 번도 벌레들에게 승리한 적이 없음을!” 
 
늑대의 왕자와, 기생충의 여왕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크르르르릉! 
 
리카온이 포효했다. 
주변 공기의 흐름이 달라지고 있었다. 
어떤 바람은 빠르게, 다시 어떤 바람은 느리게. 
그리고 어떤 바람은, 강하게. 
 
“나는 네가 알던 ‘이뮨타르’가 아니다!” 
 
쿠구구구구! 
 
주변의 바람들이 일제히 산란하며 앤티누스의 기세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한 단계 진화한 리카온의 [바람의 길]이 드디어 모습을 보이려는 것이다. 
 
“키잇······ 재미있구나! 네놈의 ‘길’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내가 확인해 보겠다!” 
 
먼저 움직인 것은 앤티누스였다. 
 
콰콰콰콰! 
 
[바람의 길]이 만든 대기 장벽과 앤티누스의 꼬리가 부딪쳤다.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었고, 가죽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나도 한수영도 그 순간만큼은 넋을 잃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것이 5급 인외종들의 싸움. 
물리적인 우열이나 종의 상성을 뛰어넘는 이계인들의 대결이었다. 
 
대기의 빈틈을 뚫고 순식간에 도약한 앤티누스의 신형이 순식간에 리카온의 코앞에 도착했다. 
 
쐐애액! 
 
외변형을 이룬 앤티누스의 꼬리가 거대한 쐐기가 되어 리카온을 향해 쇄도했다. 단 한 번의 공격이었지만, 자칫 그 한 번에 승부가 날 짝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앤티누스의 움직임이 갑자기 느려졌다. 
마치 그녀의 꼬리를 밀어내는 척력이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키잇? 
 
반면, 리카온의 움직임은 미묘하게 빨라졌다. 
일순의 가속이 공격을 무위로 돌렸다. 
앤티누스의 꼬리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5급 충왕종 ‘패러사이트 앤티누스’가 ‘가속하는 날개 Lv.8’를 발동하였습니다.] 

앤티누스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더니, 파르르 진동하던 그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S급 이동 스킬, [가속하는 날개]. 
일초에 수백 수천 번을 날갯짓한 그녀의 신형이,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하듯 리카온의 사방을 덮었다. 피할 새도 없이, 낫처럼 변한 앤티누스의 두 팔이 리카온의 배후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5급 충왕종 ‘패러사이트 앤티누스’가 ‘당랑파철(螳螂破轍) Lv.8’를 발동하였습니다.] 
 
가속화된 그녀의 낫이 대기의 벽을 난도질하자, 끔찍한 파열음이 터졌다. 너무나 빠른 일격이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리카온조차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리카온은 피했다. 
결정적인 순간, 또다시 앤티누스의 공격은 느려지고 리카온의 움직임은 빨라졌다. 찰나의 차이로 스쳐가는 공격들. 앤티누스가 겹눈을 부라렸다. 
유상아가 놀라서 물었다. 
 
“저게 대체 무슨 기술이죠? [순간 가속]인가요?” 
“아뇨, 저건 [바람의 길]입니다.” 
 
이뮨타르 종족의 비기, [바람의 길]. 
얼핏 보면 두 사람의 속도가 변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저것은 리카온의 능력이었다. 주변의 모든 대기가 리카온의 의지에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킷, 빌어먹을 바람이······!” 
 
앤티누스도 눈치챈 듯했다. 그녀가 움직이는 모든 길에 바람이 있었다. 앤티누스는 바람에 걸렸고, 리카온은 바람을 이용했다. 
앤티누스의 [당랑파철]을 피해내고, [가속하는 날개]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스킬. 바람이 만든 길은 경우에 따라 보법이 되기도 했고, 경신법이 되기도 했으며, 때로 회피기나 공격기가 되기도 했다. 
내가 저 스킬을 필요로 하는 것은 그래서였다. 
[바람의 길]만 익힌다면, 당분간 나는 필요한 스킬들을 저 스킬 하나로 대체할 수 있었다. 리카온이 포효했다. 
 
“벌레의 여왕! 바람 앞에 무릎을 꿇어라!” 
 
바람의 늑대가 움직였다. 바람의 결을 타고 날아든 날카로운 발톱이 그녀의 날개를 찢었고, 질풍처럼 쏘아진 킥이 그녀의 복부를 걷어찼다. 바람의 가속이 더해진 그의 연타는, 단단한 앤티누스의 갑피를 부숴갔다. 
 
“갸아아아악······!” 
 
날개의 반쪽이 사라진 앤티누스가 추락했다. 
아마 내가 준 깨달음이 없었더라면, 리카온은 지금 앤티누스를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남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된 셈이다. 
 
치직, 치지지직―! 
 
앤티누스의 육신에 개연성 폭풍의 징조가 한층 더 강해졌다. 
 
“키이잇! 이대로 끝나지는 않는다.” 
 
앤티누스가 반쪽짜리 날개를 펼쳐 낙하를 시도했다. 
 
―김독자! 녀석을 죽여라! 빨리! 
 
유중혁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전에 나는 이미 앤티누스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신념의 칼날’이 발동합니다!] 
 
치지지지직! 
 
자칫 개연성 폭풍에 말려들 가능성이 있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 세계, 내 종족, 내 아이들!” 
 
그녀는 정확히 [재앙 운석]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 세계를 멸망시킨 대가를, 나는 반드시 받아낼 것이다!” 
 
그녀가 가진 모든 마력이 [재앙 운석]을 향해 쏘아졌다. 
대경한 리카온이 마력을 받아내기 위해 달렸고, 나는 불꽃 속성이 감긴 ‘신념의 칼날’을 휘둘러 떨어지는 앤티누스의 목을 날렸다. 
비웃음이 걸린 곤충의 주둥이. 
 
막았나? 
 
고개를 돌렸을 때, 리카온이 창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르릉······ 호주, 죄송합······.” 
 
그리고 소리가 사라졌다. 
 
[재앙 운석]에서 빛이 폭발했고, 엄청난 폭발이 나를 덮쳤다. 터져 나온 운석의 파편 중 하나가 머리를 세게 때렸다. 뇌진탕이 온 것처럼 세상이 흔들렸다. 폭발에 휩싸인 리카온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길잡이’들은 본디 재앙의 힘을 견딜 수 없다. 
한 번 패배한 역사를 고쳐 쓸 수 없는 것처럼. 
 
세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었다. 
 
[당신은 시나리오 클리어에 실패했습니다.] 
[‘질문의 재앙’이 당신의 세계에 강림합니다.] 
 
일순 시야가 새카맣게 물들었고, 폭음과 함께 내 몸이 부서진 건물 더미 속에 파묻혔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유중혁의 목소리만 왕왕 울리고 있었다. 
 
―김독자! 정신 차려라! 어서! 
―······정신 차리고 있어. 
―움직여라! 지금이라면 아직 재앙을 막을 수도 있다! 
 
솔직히 무리라고 생각했다. 
[바람의 길]도 없는 상황에서 [질문의 재앙]이 부화해버렸다. 
저걸 막겠다고 자살 특공을 감행하느니, 차라리 다른 루트를 고려해 보는 게 더 바람직한 판단이었다. 
그런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네놈, 그렇게 약해 빠진 놈이었나? 
―뭐? 
―내게 했던 말은 모두 거짓이었냐는 말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이 자식이 지금······. 
 
―내게 세계를 포기하지 말라고 훈계했던 놈이, 고작 그 정도 재앙에 굴복한 것이냐? 
 
헛웃음이 나왔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유중혁 저 자식에게 저런 말을 듣다니. 
수치심에 자살해도 모자랄 일이다. 
 
―당연히 아니지 인마. 잠깐 생각 좀 한 거야. 
 
빌어먹게도 유중혁의 말이 맞다. 
완독자인 내가 벌써 ‘불가능’을 논하다니, 아직 한참은 시기상조다. 
나는 파괴된 구조물 더미를 헤치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쿠구구구구. 
 
8미터에 달하는 [재앙 운석]이 두 쪽이 나 있었다. 
분명 무언가가, 그 안에서 부화했을 것이다.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재앙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야, 이거 대체······.” 
 
근처에 있던 한수영이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유상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십여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한 소년이 있었다. 고등학생쯤 되었을까 싶은 외모.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 소년은 중얼거렸다. 
 
“여기는······ 설마?” 
 
연신 주변을 둘러본 소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중얼거림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지금 당장, 저 녀석을 죽여야 한다. 
그런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예상보다 이른 부화로 ‘질문의 재앙’의 힘이 약화됩니다.] 
[조기 부화 패널티로 당신들은 약 3분간 ‘질문의 재앙’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패널티를 저놈이 아니라 우리가 먹었다고? 
도깨비 새끼들,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성큼성큼 걸어간 소년은 주변에 너부러져 있던 한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 
독희의 그룹원이었던 여자. 
꾀죄죄한 여자를 향해, 소년이 해맑은 목소리로 외쳤다. 
 
“여자다! 이봐요, 괜찮아요?” 
“어, 으으······ 누구······.” 
“저기, 내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안 된다. 그 질문에 대답하면 안 된다. 
외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여기 어디에요? 그리고 지금이 서기 몇 년이죠?” 
“가, 갑자기 그건 왜······.” 
“지금 나한테 되묻는 거예요?” 
 
소년의 기이한 말투에 여자는 홀린 듯 말하기 시작했다. 
 
“여, 여긴 서울이고······ 지금, 올해는······.” 
 
여자의 대답이 떨어지는 순간,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첫 번째 질문이 해결되었습니다.] 
[귀환자 ‘명일상’의 첫 번째 봉인이 해제됩니다.] 
 
“하, 하하······. 하하하!” 
“왜, 왜 그러시는······?” 
 
당황한 여자를 향해, 소년이 미친 듯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모르죠?” 
“네, 네?” 
“100년 안 살아 봤죠? 인간이라곤 나 하나밖에 없는, 그런 곳에서······. 혹시 여기 말고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는 건 알아요?” 
“다른······ 차원이요?” 
“역겨운 벌레 새끼들이랑, 웨어 울프들이랑, 조인족 새끼들······. 내가 문제 하나 낼 테니까 맞춰볼래요?” 
 
당황한 여자가 입을 뻐끔거렸다. 소년이 물었다. 
 
“벌레, 늑대, 새. 셋 중에 어떤 종족이 제일 잘 하게요?” 
“뭐······ 뭘 잘해요?” 
 
여자가 묻자, 소년은 즐거워 죽겠다는 듯 웃어젖혔다. 
소름끼치는 웃음이었다. 
 
“그럼······ 셋 중에 무슨 고기가 제일 맛있게요?” 
 
[질문의 재앙]이 쏟아내는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앤티누스가 지구를 멸망시키고 싶었던 건 당연한 귀결이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의 세계를 멸망시킨 것이, 바로 이 지구의 ‘인간’이었으니까. 
여자는 끝내 소년의 문제에 답을 내지 못했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퍼거걱, 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목이 날아갔다. 킬킬 웃음을 터뜨린 소년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이제부턴 당연히 그런 전개겠지? 그 뭐냐, S급 화신? 그런 새끼들 좀 조져주고. 갑질하는 연합도 조져주고. 아니 잠깐만, 그 전에······.” 
 
[조기 부화 패널티가 종료됩니다.] 
[당신의 움직임을 통제하던 힘이 사라집니다.] 
 
제기랄. 늦었다. 
내가 소리치려는 순간, 슥― 하고 사라진 소년이 어느새 저만치 떨어진 위치로 옮겨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새로운 여자가 있는 장소였다. 
 
“하하! 누나 예쁘다! 응?”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유상아 씨, 피해요! 
 
단도를 꺼내든 유상아가 녀석을 경계하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그 질문에, 소년이 씩 웃었다. 
 
“궁금해?” 
 
가볍게 뻗어진 소년의 손이,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유상아의 턱을 잡아챘다. 
 
“알려줄까?” 
 
클로노스를 멸망시킨 다섯 개의 재앙 중 하나, [질문의 재앙]. 
그는 이세계로 전이되었다 돌아온 지구 출신의 ‘귀환자’였다.
 
 
 
 
< Episode 17. SSS급 재능 (5) > 끝

< Episode 17. SSS급 재능 (6) >
 
 
 
 
 
 
귀환자. 
멸살법에서 그들을 언급한 최초의 문장은 이것이다. 
 
「어떤 사람은 시간을 되돌리고, 어떤 사람은 다른 차원으로 가며, 어떤 사람은 다시 태어난다. 결국, 멸망에 적응하는 방법도 사람마다 가지각색인 셈이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 중 두 번째. 
살아남기 위해, 다른 차원을 부수고 돌아온 존재들. 
 
“대답해봐. 내 정체가 궁금해?” 
 
귀환자 명일상. 
지구 출신의 ‘귀환자’들 중 하나이자, 이계 ‘클로노스’에 용사 클래스로 소환되었던 소년. 
 
“흠······ 보통 이런 상황이면 얼굴 붉히면서 눈을 내리까는 게 보통의 전개 아냐? 누난 얼굴값 좀 하는 편인가 봐?” 
 
역시 [질문의 재앙]은 저 버러지 같은 새끼였다. 
유상아가 입을 열었다. 
 
“무슨······.” 
 
―유상아 씨, 질문에 대답해선 안 됩니다! 
 
내 말에 유상아의 고개가 내 쪽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손아귀에 잡힌 그녀의 턱이, 다시 강제로 명일상 쪽으로 돌려졌다. 
 
“어딜 봐? 날 봐야지. 혹시 저거 남친이야?” 
“손 치워.” 
 
유상아가 명일상의 손을 뿌리쳤다. 그녀의 손끝에서 움직인 단도가 위협적으로 허공을 그었다. 명일상이 히죽 웃었다. 
 
[두 번째 질문이 해결되었습니다.] 
[귀환자 ‘명일상’의 두 번째 봉인이 해제됩니다.] 
 
“남친 맞네. 누군 100년 동안 개지랄을 떨고 있었는데.” 
 
소년의 차가운 눈빛이 나를 향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하지 않았지만,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너무나 의미가 명료한 눈빛이었다. 
 
“누군 평화로운 세계에서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이거지?” 
 
녀석의 오른팔이 나를 겨냥했다. 녀석의 손에 보랏빛 입자가 응축된 것과, 내가 얼굴을 감싸며 엎드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등장인물 ‘명일상’이 ‘소흑염포(小黑炎砲)’를 발동합니다!] 
 
흑염포(黑炎砲). 클로노스의 동쪽 대륙을 멸하고, 숲속의 충왕종들을 모조리 태워 죽인 죽음의 불꽃. 
대기가 통째로 타오르며 나를 덮쳐왔고, 나는 숨을 꾹 참은 채로 불꽃에 휩싸였다. 피부가 익는 듯한 통증이 번져왔다. 속으로 온갖 욕설을 내뱉었다. 망할! 아프다. 정말로 아프다. 아픈데······. 
 
······생각보다 버틸 만한데? 
 
잠시 후, 나는 불꽃이 꺼진 피부를 바라보았다. 구석구석이 검게 그을려 있었고, 약간의 통증이 있기는 했지만 견딜만한 고통이었다. 
 
이게 충왕종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흑염포’라고? 
아무리 ‘소흑염포’라지만······ 별로 안 아프잖아? 
 
고개를 들어보니 유상아가 단검을 휘두르며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예상외로, 그녀는 선전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숙련도를 갖춘 공격에 심지어 [질문의 재앙]은 당황한 눈치였다. 
 
“······뭐야. 왜 이렇게 강해? 혹시 누나도 귀환자야? 아니지, 내가 약해진 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본래 두 개의 봉인이 풀린 [질문의 재앙]은 저것보다 훨씬 강해야 했으니까.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이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명일상 
나이 : 17세 (127세) 
배후성(背後星) : 양산형 제작자 
전용 특성 : SSS급 용사 (영웅), 질문의 재앙 (전설) 
전용 스킬 : [SSS급 성장 가속 Lv.10 (현재 Lv.1)], [SSS급 검술 Lv.10 (현재 Lv.1)], [흑염포 Lv.9 (현재 Lv.1)], [SSS급 보법 Lv.10 (현재 Lv.1)]······. 
성흔 :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Lv.7 (현재 Lv.2)] 
종합 능력치 : [체력 Lv.99 (현재 Lv.55)], [근력 Lv.99 (현재 Lv.55)], [민첩 Lv.99 (현재 Lv.60)], [마력 Lv.99 (현재 Lv.55)] 
종합 평가 : 클로노스를 멸망시킨 ‘질문의 재앙’입니다. 현재 시나리오 패널티로 인해 모든 능력치가 봉인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봉인이 풀릴 때마다 능력치가 상승하며, 모든 봉인이 풀리면 재앙의 진짜 힘이 깨어납니다. 살아남고 싶다면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죽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말입니다. 
 
+ 
 
순간 화면을 가득 메우는 SSS의 향연에 주눅이 들었지만, 자세히 읽다 보니 왜 지금 녀석이 약한 것인지 이해가 갔다. 
도깨비 녀석들은 공정했다. 
지금 저 녀석은, 원작의 재앙보다 더 약한 상태다. 
 
“한수영! 유상아 씨!” 
 
비형 녀석이 힘을 쓴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생긴 것만은 틀림없었다. 
 
“전력을 다해서 공격해요! 지금 죽여야 됩니다!” 
 
저게 지금의 녀석이 가진 전부라면, 어쩌면 [바람의 길]이 없어도 이길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곧장 남은 코인을 능력치에 쏟아 부었다. 
 
[체력 Lv.50 -> 체력 Lv.60] 
[민첩 Lv.50 -> 민첩 Lv.60] 
[마력 Lv.25 -> 마력 Lv.60] 
[총 39500코인을 소모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시나리오 제한 기준에 도달하였습니다.] 
 
기이이잉!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활성화하며 달렸다. 
 
“명심하세요! 놈의 질문에 절대로 대답해선 안 됩니다!” 
 
내 ‘신념의 칼날’을 본 명일상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뭐야! 검강이잖아?” 
 
쐐애액! 

하필 민첩만 높은 녀석이라, 공격은 간발의 차이로 빗나가고 말았다. 명일상이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아저씨 혹시 무림인이야? 어떻게 벌써 검강을 써? 미친 거 아냐?” 
 
나는 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성흔을 발동했다. 
 
[성흔, ‘칼의 노래 Lv.1’를 발동하였습니다!] 
[충무공이 남긴 소절이 당신의 검에 깃듭니다.] 
 
충무공의 무작위 소절이 눈앞에서 흘러가더니, 이내 메시지가 들려왔다. 
 
「28일. 맑다. 공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하필 이럴 때 충무공이 안 도와주는군. 
「난중일기」라고 해서 항상 적들과 싸우는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대부분은 저런 내용들이니까. 
 
하늘은 맑고. 
충무공은 공무를 본다. 
 
만약 내가 살아가는 오늘도 「멸망일기」 따위의 기록으로 남게 된다면, 일기는 대략 이런 느낌일 것이다. 
 
하늘은 어둡고. 
김독자는 맞고 있다. 
 
퍼어억! 
 
명일상이 날린 킥에 나는 바닥을 굴렀다. 
심각해졌던 명일상의 안색이 조금씩 펴지고 있었다. 녀석이 내 ‘신념의 칼날’을 유심히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럼 그렇지. 진짜 검강일 리가 없지. 아저씨, 진짜 왜 그래? 나 괜히 쫄았잖아?” 
“어린 새끼가 말 존나 많네.” 
 
서늘한 여자의 목소리. 내가 시간을 버는 사이, 수십 개에 달하는 한수영의 아바타가 놈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죽어!” 
 
움직임을 봉쇄당한 녀석의 전신에 한수영의 연타가 쏟아졌다. 
하지만 근력이 높지 않은 그녀의 공격은 명일상의 본체에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과도하게 많은 아바타들 때문에 유상아가 데미지를 넣지 못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한수영의 작은 손에 두드려 맞던 명일상이 웃었다. 
 
“너도 꽤 예쁘네? 몇 살이야? 중학생?” 
“닥쳐, 죽어!” 
 
이어지는 연타에 명일상의 표정이 해괴해졌다. 
 
“······다들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나처럼 잘 생긴 귀환자가 나타나면 보통 쌍수들고 환영부터 하는 거 아냐? 이제부터 내가 괴수들이랑 다 해치워 줄 건데?” 
“뭔 개소리야 미친놈이!” 
“어······ 말이 좀 심하다? 잠깐만, 혹시 이 전개 설마······.” 
 
명일상의 표정이 변했다. 
 
“당신들 ‘헌터 협회’구나! 그렇지? 원래 보통 그런 전개잖아? 귀환자가 나타나면 제일 먼저 시비터는 놈들이 그놈들이잖아?” 
“뭐라는 거야 이 중2병 새끼가······ 그딴 거 있지도 않거든?” 

[세 번째 질문이 해결되었습니다.] 
[네 번째 질문이 해결되었습니다.] 
[다섯 번째 질문이 해결되었습니다.] 
[귀환자 ‘명일상’의 다섯 번째 봉인이 해제됩니다.] 
 
명일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 협회 맞네.” 
 
돌겠네 진짜. 
녀석의 기세가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명일상의 몸에서 뻗어 나온 강력한 기파에 주변의 아바타들이 동시에 소멸했다. 명일상이 웃음을 터뜨렸다. 
 
“자, 먼치킨의 시간이다!” 
 
훌쩍 물러난 한수영이 황당하다는 듯 내 쪽을 일별했다. 
 
“뭐야 저 자식?” 
 
나는 숨을 몰아쉬며 짜증을 냈다. 
 
“아까 대답하지 말란 말 못 들었어? 병신한테 먹이 주지 말라고.” 
“난 대답 안 했어! 그냥 욕한 거라고.” 
“그냥 말 자체를 하지 마.” 
 
[질문의 재앙]에게 질문은 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어떤 대답이든, 녀석의 능력을 강화하는 데 사용될 뿐이다. 
명일상이 이죽거렸다. 
 
“자, 그럼 누구부터 죽여줄까······?” 
 
그러나 녀석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냉혹한 살기를 뿜어대는 유상아가 녀석의 배후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헤르메스의 산책법] 
[테세우스의 결의] 
[아라크네의 거미줄] 
 
시스템 메시지는 뜨지 않았지만, 나는 그 기술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훗날 열리는 시나리오 「라그나로크」에서, 저 기술들에 대한 묘사가 분명히 있었다. 
저 기술들은, 올림푸스 계열 성좌들의 성흔들이다. 
놀란 명일상이 ‘소흑염포’를 연달아 발포하며 유상아를 견제했다. 
하지만 유상아는 그 흑염포를 죄다 맞아가며 명일상에게 돌진했다. 
 
“이건 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별한 시나리오 이벤트를 겪지 않는 한, 하나의 화신이 여러 성좌의 성흔들을 동시에 소유할 방법은 없다. 
나 역시 겨우 두 개의 성흔만을 얻은 상황. 
그런데 ‘멸살법’의 독자도 아닌 유상아가, 대체 어떻게 저 많은 성흔들을 가질 수 있었을까? 
 
“살살하자고! 아프잖아?” 
 
유상아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흘렀다. 
쉴 새 없이 늘어났다 줄어드는 마력의 실. 허공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발걸음. 틈새가 보일 때마다 망설임 없이 파고드는 단검. 그녀의 전신에서 생명력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틀 사이의 일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파격적인 변화······. 
그 순간, 뭔가를 알 것도 같았다. 
하나의 화신에 여러 성좌의 성흔. 
분명 ‘멸살법’에 그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예언자 안나 크로프트도 그런 경우니까.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유상아는······. 
 
“독자 씨! 지금!” 
 
유상아의 신호에, 나는 ‘신념의 칼날’을 발동해 그녀의 폭발적인 공격을 지원했다. 거기에 한수영이 끼어들었다. 조금씩 손발이 맞기 시작하자, 명일상의 손발도 어지러워졌다. 
뒤로 밀리던 녀석의 움직임이 한순간 더디어졌고, 틈새를 노린 내 ‘신념의 칼날’이 녀석의 어깨와 배를 베었다. 
 
“이런 씨발······!”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 명일상이 뒤로 몸을 빼 달아나더니, 입으로 뭔가를 외웠다. 
 
[등장인물 ‘명일상’이 ‘블링크 Lv.1’를 사용하였습니다.] 
 
명일상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마음이 급해진다. 녀석이 도망가게 두어서는 안 된다. 
나는 그대로 칼날을 돌려 녀석의 허리를 내리그었다. 
하지만 칼날이 닿은 바로 직후, 녀석의 몸은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남은 것은 흩뿌려진 핏줄기뿐.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안타까운 탄식을 흘립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예정된 고구마에 미쳐 날뜁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똑바로 좀 하라며 당신을 손가락질합니다.] 
[일부 성좌들의 흥분도가 위험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한수영이 소리쳤다. 
 
“제길, 놓쳤어!” 
“괜찮아. 타격은 입혔으니까 금방 잡을 수 있어.” 
 
[일부 성좌들이 진정합니다.] 
 
“그리고 유상아 씨. 정말 잘했······ 유상아 씨?” 
 
유상아가 대답이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다가갔더니, 그녀는 선 채로 기절해 있었다. 한수영이 물었다. 
 
“걘 또 왜 그래?” 
 
뒤늦게 깨닫는다. [테세우스의 결의]는 화신의 전력을 쥐어짜 평소 이상의 전투력을 끌어내는 스킬. 그런 스킬을 사용했으니 유상아가 잠시나마 저런 괴물을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몸을 추슬러 한수영에게 넘겼다. 
 
“또 나한테 줘? 내가 탁아소냐?” 
“시간 없으니까 빨리 재앙이나 찾아내. 아바타 더 뿌렸어?” 
“어디로 갔는지는 대충 알 것 같아.” 
“안내해.” 
 
거의 다 잡은 녀석을 여기서 놓칠 수는 없지. 
달려가면서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내가 기억이 잘 안나서 그러는데······ 저 새끼, 질문에 대답할 때마다 강해지는 거 맞지?” 
“맞아. 처음에는 약한데 대답을 들을 때마다 강해져. 귀환자들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대부분 이 세계로 넘어올 때 패널티가 있어. 아까 봉인 풀리는 거 봤지?” 
“보긴 했는데······ 봉인이 몇 개나 걸려 있는 거야?” 
“아마 수십 개쯤. 그거 다 풀리면 답 없어.” 
 
현재까지 풀린 봉인은 다섯 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까지 도깨비 녀석들의 추가 시나리오가 내려오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만약 추가 시나리오가 내려왔다면 너도나도 저 자식을 잡으러 왔을 것이고, 놈의 질문에 대답한 수많은 멍청이들 때문에 재앙의 봉인은 순식간에 풀렸겠지. 
 
······라고 생각하며 안도하던 그때. 
 
[흐음. 여러분, 대단하신데요? 아무리 패널티가 걸려 있어도 ‘재앙’인데. 고작 셋이서 저 정도로 압박하다니······.] 
 
나와 한수영이 동시에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말이죠, 욕심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닐까요? 자고로, 옛말에 콩 한쪽이라도 나눠 먹으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시발.” 
 
한수영이 욕설을 내뱉음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가 들려왔다.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서브 시나리오 ― SSS급 사냥’이 시작됩니다.]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부서질 듯 세게 쥐었다. 
참는 것도 이제 한계다.
 
 
 
 
 
< Episode 17. SSS급 재능 (6) > 끝

< Episode 18. 독자의 싸움 (1) >
 
 
 
 
 
 
Episode 18. 독자의 싸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도깨비의 목소리. 
하급 도깨비 무리가 불난 집 구경이라도 하듯 허공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개중에는 비형의 모습도 보였다.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웠다. 
무리의 중앙에 있던 도깨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깨비는, 서울시 전체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서울시의 화신 여러분! 조금 불행한 소식 하나를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방금 어떤 분들의 삽질로 인해, ‘재앙’ 중 하나가 강동구에서 깨어나고 말았습니다.] 
 
웃는 도깨비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저 자식이? 
 
[하아, 여러분들의 한숨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군요. 벌써 강동구에서 이탈하려는 분들도 보이네요. 하하, 여러분. 말은 끝까지 들으셔야죠. 지금 그렇게 도망가시면 분명 나중에 후회하실 겁니다. 왜냐하면 이 ‘재앙’은, 당신들에게 분명 기회가 될 거거든요.] 
 
도깨비는 유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코인 모으느라 힘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다 압니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이 무너지더니, 이상한 놈들이 코인을 거둬가질 않나. 어제까지 친구였던 놈들이 갑자기 칼질을 해대질 않나. 그나마 회사라도 안 나가서 다행이다 싶었더니 아니 이게 웬걸, 이젠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당신들에게 말합니다. “야, 엉덩이 좀 흔들어 봐. 100코인 줄게.”] 
 
[소수의 성좌들이 낄낄대며 웃습니다.] 
 
하지만 도깨비는 웃지 않았다. 
 
[여러분들이 느끼고 계실 그 좆같음, 저도 이해합니다. ‘에라 씨발. 어차피 세상도 다 망했겠다, 내 마음대로라도 살아보자’ 싶어 용기를 냈는데, 벌써 이 세계는 될 놈과 안 될 놈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절망감. 열심히 엉덩이를 흔들어서 간신히 구한 여러분의 성좌가, 원래부터 잘났던 놈에게 들러붙은 성좌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느꼈을 패배감.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여러분들의 분노.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몇몇 성좌들이 도깨비의 연설에 반발합니다.] 
 
말하는 걸 보니, 보통내기가 아닌 녀석이었다. 
담력이 약한 하급 도깨비는 저런 짓을 못한다. 성좌들의 반발을 조금이라도 사면 자기 채널이 망한다는 걸 아니까. 
하지만 그건 소수 채널일 때의 얘기고, 큰 채널을 가진 도깨비들은 배포부터가 다르다. 
그들은 이야기의 법칙을 안다. 
구독좌에게 아부하고, 소수의 취향에만 연연해서는 커다란 이야기를 굴릴 수가 없다. 
진정한 이야기꾼은 ‘관객’이 아닌 ‘인물’을 상대해야 한다. 
나는 연설을 이어가는 도깨비를 자세히 관찰했다. 
 
[그런 여러분들을 위해, 제가 준비했습니다. 운이 없고, 재수가 없고, 노력을 안 해서 아직도 ‘안 될 놈’인 당신들이, 하루아침에 ‘될 놈’이 될 기회를 말입니다!] 
 
정수리에 돋아난 뾰족한 외뿔. 새하얀 케이프의 자락 사이로, 외뿔에 수미쌍관처럼 대응하는 외다리. 
잠깐만, 설마 저 자식······ ‘독각(獨脚)’인가? 
그 순간 허공에 거대한 스크린이 떠올랐다. 그리고 스크린 속에는, 피를 흘리며 달아나는 한 소년이 있었다. 
 
[자, 지금 보고 계신 이 소년은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SSS급 아이템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버릴 게 하나도 없다고나 할까요? 그의 이름은 ‘명일상’. 운 좋게 스타 스트림의 선택을 받아 이계에 다녀온 놈입니다. 다들 한 번쯤 상상해 보셨죠? 갑자기 다른 차원으로 소환되어 강력한 힘을 얻고, 귀여운 엘프 여자친구와 뜨거운 밤을 보내고, 세계를 구한 후 용사로 추앙받는 상상! 그렇습니다. 이 빌어먹을 녀석이 바로, 오늘 여러분들이 잡을 ‘재앙’입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중급 도깨비의 빈 자리를 하급 도깨비들이 대신하고 있는 게 의아했는데, 저런 메이저 채널의 도깨비가 있으니 가능하지. 
 
[벌써 여러분들의 원성이 들리는군요. SSS급으로 몸을 둘둘 감은 녀석을 대체 어떻게 잡냐고요? 하하, 걱정마시기 바랍니다. 녀석에게는 지금 패널티가 걸려 있거든요. 그의 힘은 봉인되어 있습니다. 강하긴 하지만, 여러분들이 다 같이 두들겨 패면 잡을 수 있는 보물 창고란 얘깁니다.] 
 
“······소름 돋는 새끼네 저거.” 
 
한수영이 혀를 찼다. 
작가인 그녀는 벌써 도깨비의 의도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재앙’을 ‘재앙’이라고 부르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재앙이 허울뿐인 ‘보물 창고’라고 한다면? 
 
[아직 여러분 인생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운이 아주 좋다고 할 수 있죠. 제가 지금부터 제공하는 이 ‘서브 시나리오’는, 당신들의 인생을 역전시킬 훌륭한 발판이 될 겁니다. 자, 기회는 오늘 하루뿐입니다! 지금 당장 움직이세요! 남들보다 빠르게 움직인 자만이, ‘SSS급 아이템’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곧 저 목소리를 듣고, 서울 전역에 흩어져 있던 화신들이 강동구로 모여들게 될 것이다. 
 
[서브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 
 
<서브 시나리오 ― SSS급 사냥> 
 
분류 : 서브 
난이도 : B ~ ??? 
클리어 조건 : SSS급 용사 ‘명일상’을 제거하시오. 
제한시간 : 없음 
보상 : 50000코인, ??? 
실패 시 : 서울 돔 멸망 
 
+ 
 
최악의 시나리오가 결국 시작되고 말았다. 
허공에서 붉게 빛나는 ‘실패 시’의 결과 때문인지, 이제껏 한 번도 없었던 막대한 보상 내역이 초라해 보였다. 
 
“빨리 찾아야 돼. 다 죽기 전에.” 
“······저 자식 저런 짓 해도 개연성 문제없는 거야?” 
“개연성은 다수의 성좌가 재미있을 것 같다고 판단하는 순간 어느 정도 상쇄가돼.” 
 
그것이 도깨비들이 자극적인 시나리오를 선호하는 이유다. 
많은 성좌들이 원하는 이야기는, 성좌들이 스스로 개연성을 떠안는다. 
물론 실패한다면 폭풍은 온전히 도깨비의 몫이 되겠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다르지. 
 
[상당수의 성좌들이 눈을 반짝입니다.] 
 
만약 독각의 의도대로 흘러간다면, 서울은 다섯 번째 시나리오가 시작되기도 전에 끝장나게 될 것이다. 한수영은 곧바로 모든 마력을 동원해 아바타를 소환했다. 그리고 5분쯤 지났을까. 
 
“찾았어. 여기서 북서쪽으로 2km 지점!” 
 
나는 한수영의 본체와 함께 길을 따라 달렸다. 곧 두런두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다! 놈이 저기 있다!” 
“저 새끼가 이계에 갔다 온 놈이야!” 
 
이미 몰려든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명일상은, 밀려온 군중들에게 포위되어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어······ 맞습니다. 그게 바로 접니다.” 
“재수 없는 새끼! 거기서 재미 좀 봤겠지?” 
“재미라면 여럿 있었죠······.” 
“존나 부러운 새끼······ 야! 다들 죽여버려!” 
 
열등감에 찌든 인간들이 이렇게 많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허공을 휘젓는 칼날 몇 개를 피해낸 명일상이 물었다. 
 
“그렇게 부러우면 여러분도 거기 보내 줄까요?” 
“뭐야, 우리도 갈 수 있는 거냐?” 
“그럼요. 당연히 갈 수 있죠. 진짜 가고 싶은 거 맞죠?” 
“갈 수만 있다면 당연히 가고 싶지! 이딴 좆같은 세계보다야······.” 
 
고개를 끄덕인 명일상이 군중들을 향해 오른팔을 내밀었다. 
 
[귀환자 ‘명일상’의 여덟 번째 봉인이 해제됩니다.] 
[귀환자 ‘명일상’의 아홉 번째 봉인이 해제됩니다.] 
······. 
 
“그럼 잘 가요. 거기가 여기보다 나을진 모르겠지만.” 
“뭐?” 
 
[귀환자 ‘명일상’의 열두 번째 봉인이 해제됩니다.] 
[귀환자 ‘명일상’의 열세 번째 봉인이 해제됩니다.] 
[귀환자 ‘명일상’의 열네 번째 봉인이 해제됩니다.] 
······. 
 
까마득히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옅은 절망감이 찾아왔다. 
이미 늦었다. 
 
“왜냐하면 거기, 내가 멸망시켜 버렸거든요.” 
 
[귀환자 ‘명일상’이 ‘중흑염포(中黑炎砲) Lv.3’를 발동합니다!] 
 
나는 한수영을 낚아채 건물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보랏빛 섬광이 건물들의 숲을 뒤집었다. 대여섯 채에 이르는 고층 빌딩들이 반파되었고, 거리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다. 녀석을 향해 달려가던 사람들은 뼛가루조차 남기지 않고 분해되었다. 
 
단일한 개체로 ‘재앙’이 될 수 있는 존재. 
저것이 ‘귀환자’의 진짜 힘이었다. 
 
곁에 있던 한수영의 몸이 맥없이 주저앉았다. 
 
“미친······ 저걸 어떻게 이겨?” 
 
이것이 진짜 공포였다. 어떤 정신계 스킬이 없어도, 그 자체로 몸이 떨려오는 공포. 나는 저항하듯 말했다. 
 
“이길 수 있어.” 
“개소리하지 말고 돌아가자. 저거 절대 못 잡아.” 
“아냐. 잡을 수 있다니까. 지금 잡으면 보상도 더 좋을 거야.” 
 
[인물 ‘한수영’이 ‘거짓 간파 Lv.2’를 발동합니다.] 
[한수영은 해당 발언이 진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한수영의 눈이 커졌다. 

“······진짜야? 아까는 절대 못 잡을 것처럼 굴더니?” 
“사람이 한 가지 생각만 하고 어떻게 사냐?” 
 
내 말은 절반만 진실이었다. 
실제로 원래 계획은 강해진 ‘질문의 재앙’을 물리치고 두 번째 설화를 쌓는 것이었으니까. 
다만 문제는, 내 계획이 [바람의 길]을 배웠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 이계에 가고 싶은 사람 없어? 손들어 봐! 내가 보내 줄게!”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 달아났다. 
명일상의 기척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반투명한 창과 함께 유중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면으로 싸우면 승산은 없다. 
―알아. 그래도 해 봐야지. 
―왜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든 거지? 
―뭐?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다. 이설화를 죽였더라면. 혹은 리카온과 합세해 앤티누스를 죽였더라면, 네놈은 재앙을 막을 수 있었어. 
 
변명을 하려면 못할 것은 없었다. 
이설화를 죽이지 않은 것은 유중혁 때문이었고, 리카온과 합세하지 않은 것은 끼어들 틈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니까. 
 
―난 너같은 회귀자가 아니야. 실패하면 끝이니까,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끝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 않으면······. 
―신중? 건방 떨지 마라. 네놈이 성좌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미래를 좀 안다고 해서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 명치를 세게 때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습게도, 유중혁의 말이 일부 맞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가동 중입니다.] 
 
원작을 안다는 오만. 이야기가 뒤틀려도, 어떻게든 수를 낼 수 있다는 생각. 
어쩌면 그것이 상황을 여기까지 이끌었다. 
 
―그럼 잘난 네가 좀 싸우지 그러냐? 나 같은 노답 믿지 말고. 
―재능 핑계대지 마라. 꼭 [바람의 길]이 있어야만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있어야 이길 수 있거든? 
 
잠시 유중혁은 말이 없었다. 한심하다는 듯한 침묵에 내가 대꾸하려는 순간, 유중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특성은 ‘프로게이머’다. 네 특성은 뭐지? 
―뭐? 
―네가 잘 할 수 있는 건 뭐냐고 물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 
머릿속, 저 깊은 무의식 어딘가의 귀퉁이가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있는 듯한 느낌. 하지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찾았다! 아직 안 간 사람.” 
 
모퉁이에서 호러처럼 명일상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한수영이 신음을 흘렸고, 나는 한 발짝을 물러섰다. 
 
“······어? 아까 그 헌터 협회 사람들이네?” 
 
명일상이 웃으며 다가왔다. 
 
“잘 됐다. 마침 만나고 싶었는데. 당신들 때문에 내 멋진 데뷔 계획이 다 망한 거 알아?” 
“······.” 
“나 착하게 살려고 했다고. 갑질하는 S급 화신들 좀 죽여 주고, 나쁜 그룹들 격파해 주고, 예쁜 누나들은 사랑해 주고. 근데 이게 뭐야. 나 완전히 악당 됐잖아. 어쩔 거야 이거?” 
 
나는 대답하는 대신, 칼을 그러쥐었다. 
 
[성흔, ‘칼의 노래 Lv.1’를 발동하였습니다!] 
[충무공이 남긴 소절이 당신의 검에 깃듭니다.] 
 
「오늘 신이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건대 반드시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백사집에 기록된 충무공의 문장들. 
다행히, 충무공이 이번에는 내 편을 들어주었다. 
 
[성흔 ‘칼의 노래’가 효과를 발휘합니다!] 
[죽음을 앞둔 결의가 당신의 전투력을 향상시킵니다.] 
 
나는 내가 가진 마력을 한꺼번에 쥐어 짜냈다. 
 
[‘신념의 칼날’을 발동합니다!]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신념의 칼날. 
나는 놈을 향해 달려갔다. 
 
까아앙! 
 
명일상의 손이 가볍게 ‘신념의 칼날’을 쳐냈다. 손아귀가 꺾일 듯한 통증. 단지 한 번의 합을 겨루었을 뿐인데,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명일상의 종합 능력치는, 이미 시나리오의 제한 기준을 한참이나 넘어섰다. 
 
“뭐야, 싸우려고? 진짜로? 방금 내가 싸우는 거 못 봤어?” 
 
그 웃음을 보며, 나는 이를 악문 채 ‘멸살법’의 페이지들을 떠올렸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읽는 것’이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1단계를 발동합니다!] 
 
그리고 녀석의 움직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른쪽 어깨」 
 
푸슈슛! 
 
「왼쪽 허벅지」 
 
퍼거걱! 
 
읽어도 막거나 피할 수 없는 일격들이 날아들었다. 보랏빛 기운이 감도는 녀석의 주먹이 무자비하게 쏟아졌다. 
 
「배, 배, 배, 배, 배, 배.」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고, 시야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등장인물 ‘명일상’이 당신의 근성에 감탄합니다.] 
[등장인물 ‘명일상’에 대한 이해도가 증가했습니다.] 

‘멸살법’에 담긴 정보만으로는 녀석을 이길 수가 없었다. [어둠 파수꾼]을 사냥할 때와는 달랐다. 모든 것을 다 계산하고 싸울 수는 없다. 
 
「강약중간약강약중간약」 
 
쏟아지는 타격과 함께 너무 많은 정보들이 한꺼번에 밀려오자, 조금씩 현기증이 심해졌다. 성흔의 힘을 빌려도 이 정도라니. 이대로라면 승부는 순식간에 갈릴 것이다. 
 
나는 입에서 피를 닦으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결국 [간평의]를 써야 하나? 
마지막 수단이 결국 성좌의 힘을 빌리는 것이라는 게 못내 씁쓸했다. 강력한 위인급의 가호를 받거나 북두성군의 가호를 받는다면 아마 이길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지난번 사건 이후 개연성의 부담도 있고, 무엇보다 성좌들에게 빚을 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길, 나도 재능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남의 재능이라도 훔칠 수 있다면 차라리 그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 잠깐만. 훔쳐? 
 
둔한 충격이 머릿속을 휘감았다. 
지금까지, 내 주요 무기는 ‘정보’였다. 
그런데 너무 많은 ‘정보’들이 있다 보니, 정작 필요한 정보들에 관해 깜빡 잊고 있었다. 
 
한심하다. 대체 왜 그 스킬을 잊고 있었지? 
당연히 제일 먼저 그것부터 해봤어야 하는 거 아냐? 
 
[전용 스킬, ‘책갈피’가 발동합니다.] 
[‘인물 책갈피’가 활성화됩니다.] 
[사용 가능한 책갈피 슬롯 : 4개] 
[활성화 가능한 책갈피의 목록을 불러옵니다.] 
 
+ 
 
<책갈피에 등재된 인물 목록> 
 
1. 망상악귀 김남운 (이해도 35) 
2. 강철검제 이현성 (이해도 75) 
3. 선동가 천인호 (이해도 20) 
4. 빈 슬롯 
 
+ 
 
슬롯 하나가 추가된 걸 제외하면 딱히 변한 점은 없어 보였다. 
나는 빈 슬롯을 선택했다. 
 
+ 
 
<현재 책갈피에 등록 가능한 인물 목록> 
 
1. 독희 이설화 (이해도 10) 
2. 미희왕 민지원 (이해도 25) 
3. 폭군왕 정용후 (이해도 10) 
4. 은둔형 폐인 한동훈 (이해도 30) 
5. 예언자 안나 크로프트 (이해도 1) 
6. 무장성주 공필두 (이해도 30) 
 
. 
. 
 
예상한 대로, 목록에 유중혁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녀석은 주인공이니, 특별한 조건이 갖춰져야 열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이외에도 한수영이나 유상아, 이길영 같은 ‘등장인물’이 아닌 존재들도 목록에 뜨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그들이 아니었으니까. 
얼마간 스크롤을 움직이던 나는, 마침내 원하던 인물을 찾아냈다. 
 
역시 있었군. 
이 녀석도 ‘등장인물’이라는 걸 왜 잊고 있었을까.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인물을 4번 책갈피에 넣었다. 
 
[책갈피 스킬의 레벨에 비례해 활성화 시간이 결정됩니다.] 
[활성화 시간 : 30분]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합니다. 해당 인물의 스킬 중 일부를 선택해서 가져올 수 있습니다.] 
 
나는 스킬을 선택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 몸속에 은빛 폭풍이 불어 닥쳤다. 
웅혼한 늑대의 용맹이 내 몸 안에 깃드는 것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나는 바보였다. 
왜 지금까지 이걸 배우려고 했지? 
나는 회귀자도 귀환자도 아닌데. 
 
[등장인물 ‘이뮨타르의 왕자 리카온’이 4번 책갈피에 등록되었습니다.] 
[4번 책갈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나는 독자다. 
 
[「바람의 길 Lv.8」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싸우는 방식이다.
 
 
 
 
 
< Episode 18. 독자의 싸움 (1) > 끝

< Episode 18. 독자의 싸움 (2) >
 
 
 
 
 
슈우우우우우! 
 
전신을 휘감는 청량한 바람을 느끼며, 새삼 ‘멸살법’에 나왔던 문장들을 되새겼다. 곁에서 아바타를 소환하던 한수영은 내가 무슨 스킬을 사용하려는 것인지 눈치챘다. 
 
“뭐야, 너 그거 못 배웠다며!” 
“뒤로 물러나 있어.” 
 
[바람의 길]. 
 
「왼손에는 질풍을, 오른손에는 폭풍을. 직선과 곡선이 부딪치는 장소에서 바람의 길은 열릴 것이다.」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던 그 문장이, 내 발끝을 감도는 바람을 느끼는 순간 현실이 되었다. 
불쑥 다가온 명일상의 주먹이 코끝을 스쳤다. 
분명 맞았어야 할 공격이, 허무하게 무위로 돌아가고 있었다. 압도적인 능력치 격차를 메우는 스킬의 힘. 이것이 이뮨타르의 비기였다. 
명일상의 눈이 이채롭게 빛났다. 
 
“······응? 빨라졌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깨달음에 집중했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책갈피의 남은 시간은 30분. 
 
“아하, 알겠다. 그거 늑대 새끼들 스킬이지?” 
 
나를 보는 명일상의 표정에 비웃음이 어리고 있었다. 
 
“고작 잡스런 스킬 쓰면서 뭔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구네?” 
“······.” 
“그거 알아? 내가 이 손으로 그놈들 왕을 죽였어.” 
 
그랬겠지, 물론. 
나는 낯선 행성에서 죽어간 클로노스의 생명체들을 떠올렸다. 
이뮨타르의 왕자 리카온, 패러사이트의 여왕 앤티누스······. 
고향이 사라져도 꾸역꾸역 살아남아, 또 다른 행성에서 펼쳐지는 시나리오의 소재로 쓰여야만 하는 생명체들의 운명. 
만약 이대로 지구가 멸망하면, 지구인들 또한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이다. 
 
콰아아아아! 
 
명일상의 오른손에서 중흑염포가 발포되었다. 
 
「하나의 바람과 다른 하나의 바람이 만나니 태극을 이루고, 다시 하나의 바람과 다른 하나의 바람이 만나 음양을 이룬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 구문이 가진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렸다. 
눈앞에서 뜨겁고 차가운 기운이 모여 소용돌이치더니, 이내 바람의 방향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파츠츠츠츳! 
 
미미하게 방향이 꺾인 흑염포의 에테르가 서로 부딪치며,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모든 에테르 공격은 매질을 통해 전파되는 것. 전파의 근본을 흩트리면 공격은 무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명일상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제법이네. 그 정도 재주는 부릴 줄 안다 이거지?” 

입술을 질끈 깨문 명일상이 다시 달아나기 시작했다. 
 
[등장인물 ‘명일상’이 ‘블링크 Lv.4’를 사용합니다!] 
 
또 블링크인가. 하지만 이제 쫓는 건 어렵지 않았다. 눈을 감고 바람에 집중하는 것만으로, 근처에 있는 모든 기척을 읽을 수 있었으니까. 
나는 유중혁의 [주작신보]가 부럽지 않은 빠르기로 길을 달려 명일상을 찾아냈다. 나는 다짜고짜 사람을 붙잡고 질문을 이어가는 녀석의 등짝을 그대로 날려버렸다. 
 
퍼어억! 
 
내 발차기에 얻어맞은 명일상이 건물의 철골을 뚫고 날아갔다. 뼈마디가 부서질 만한 타격이었는데도, 녀석은 멀쩡히 일어섰다. 
 
[귀환자 ‘명일상’의 스물네 번째 봉인이 해제됩니다.] 
 
간발의 차이로, 녀석의 다음 봉인이 풀려 있었다. 
 
“······간지러운데?” 
 
마치 놀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 
녀석은 어차피 자신이 이길거라 믿고 있을 것이다. 
봉인이 풀릴수록 놈의 상처들은 아물고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력 소모는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하하핫, 어디 또 막아보라고!” 
 
실제로 [바람의 길]을 버프 스킬로만 활용해서는 절대 놈을 죽일 수 없다. 
이것만으로 [질문의 재앙]을 물리칠 수 있었다면, 애초에 클로노스는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그걸’ 해야 한다. 
 
문제는······ 이 기술을 쓰려면, 누군가 시간을 끌어 주어야 한다는 건데. 
······응? 
뭔가가 갑자기 반대쪽 하늘 위에서 대각선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마치 하강하는 매처럼 나타난 검은 신형은, 창공을 꿰뚫고 명일상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앙! 
 
끔찍한 폭음과 함께 작은 크레이터가 발생했다. 
바닥 속으로 짜부라진 명일상 위에, 익숙한 사내의 신형이 보였다. 
나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사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유중혁?” 
 
이 자식, 회복하는데 이틀 걸린다고 하지 않았나? 
성큼성큼 다가오는 유중혁을 보며 나는 반사적으로 두어 걸음을 물러났다. 
설마, 이 와중에 날 때리러 온 건 아니겠지? 
그러나 유중혁은 내 두어 걸음 앞에서 멈춘 뒤 그대로 등을 돌렸다. 
 
“시작해라.” 
 
마치 내가 무얼 하려는 것인지 알고 있다는 듯, 유중혁은 나를 등지고 섰다. 
 
“놈은 내가 막는다.” 
 
근처에 엎어져 있던 한수영이 나를 대신해 중얼거렸다. 
 
“하, 씨발. 역시 주인공······.” 
 
하지만 기세등등한 목소리와 달리, 유중혁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였다. 
아직 성치 않은 몸. 
온몸의 혈관이 거무죽죽 도드라져 있었다. 
어느새 크레이터를 헤치고 나온 명일상이 히죽히죽 웃으며 핏물을 뱉었다. 
 
“아, 조금 짜증나네······.” 
 
그 공격을 맞고도 여전히 별 타격이 없는 모습. 놈이 앞으로 나타날 ‘귀환자’들 중에서도 약한 편에 속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다. 
 
명일상이 달려들었고, 유중혁이 맞서 달려갔다. 
그리고 나는 [바람의 길]을 발동했다. 
 
「네 개의 바람이 만나 방위를 형성하고, 그에 다시 네 개의 바람이 더해져 팔괘의 묘를 이루니, 그로써 바람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리카온이 깨달음을 얻었던 그 구절을, 이제 내가 사용할 차례였다. 
 
꽈드드드득! 
 
팔괘의 형을 따른 신묘한 공기의 벽이 주변을 소용돌이치며 둘러싸기 시작했다. 
작은 돔 형태의 공간. 빈틈없는 밀폐감에 숨이 조여왔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일격을 당한 유중혁이 뒤로 튕겨 나왔고, 명일상의 표정이 굳어졌다. 
드디어 놈도, 이게 놀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뭘 꾸미는······!” 
 
다음 순간, 나는 돔 속의 공기를 모두 배출했다. 
 
슈와아아아아! 
 
일순 귀가 먹먹해지며 소리가 사라졌다. 
바람은 무섭게 휘몰아쳤지만 돔 속은 폭풍의 눈처럼 고요했다. 
명일상이 입을 열었다. 
 
“······!” 
“······?” 
 
몇 번이고 입을 움직였지만, 녀석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매질이 없는 곳에서 소리는 울리지 않는다. 
녀석은 완전한 진공 상태에 있었다. 
 
푸슈슈슈. 
 
기압 차이로 인해 순간적으로 폐 속의 공기가 빠져나갔다. 나는 빠르게 그것을 다시 빨아들였다. 
돔의 밖에서, 한수영이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가 발동합니다!] 
 
「뭐야 이게?」 
 
명일상의 속마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왜 목소리가 안 나오지? 마법인가?」 
 
당황한 명일상이 외쳐대고 있었다. 
그럴 법도 했다. 
모든 귀환자들은 패널티가 있다. 특정 조건하에 빠르게 본래의 힘을 되찾을 수 있는 귀환자들은 더욱 그렇다. 
 
[‘질문의 재앙’의 패널티가 발동합니다.] 
[귀환자 ‘명일상’의 힘이 약화됩니다.] 
[귀환자 ‘명일상’의 스물네 번째 봉인이 재생됩니다.] 
 
「으아아아, 안 돼!」 
 
그들은 쉽게 강해질 수 있는 만큼이나 ‘쉽게 약해질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귀환자, ‘명일상’의 스물세 번째 봉인이 재생됩니다.] 
 
[질문의 재앙]이 계속해서 ‘질문’을 하는 이유? 
간단하다. 
누군가에게 들리는 질문을 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 능력치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씨발! 이거 풀어! 빨리 풀지 못해!」 
 
녀석의 주먹이 몇 번이고 공기의 벽을 때렸지만, 벽은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매질이 없는 공간에서는 흑염포의 불길도 타오르지 않는다. 
 
[귀환자, ‘명일상’의 스물두 번째 봉인이 재생됩니다.] 
 
[바람의 길]을 이용해 만들 수 있는 진공감옥(眞空監獄). 이것이 바로, 내가 알고 있는 [질문의 재앙]에 대한 최적의 공략법이었다. 
 
「으아아아아아!」 
 
명일상이 뒤늦게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가 죽으면 [진공감옥]이 부서질 거라 생각한 모양인데, 그렇게는 안 된다. 이곳은 내가 만든 거니까. 
나는 [바람의 길]을 이용해 녀석의 공격을 피하면서, 감옥의 면적을 빠르게 줄여나갔다. 
 
쿠구구구구! 
 
벽이 수축하는 순간, 나는 좁은 통로를 만들어 유중혁을 데리고 돔 밖으로 탈출했다. 
돔 안에 남겨진 것은 이제 명일상 하나뿐이었다. 
 
「······이 개자식들이!」 
 
귀환자가 괜히 귀환자는 아니었다. 전력을 다한 녀석의 공격에, 돔에도 조금씩 금이 갔다. 손을 들자, 바람이 엇갈리면서 약해진 부분을 메꿨다. 그리고 돔의 크기가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주르륵. 
 
과도한 집중에 코에서 피가 흘렀다. 
내 최종 목표는, 저 ‘진공감옥’을 녀석의 신체에 한정하는 것. 
하지만 컨트롤이 쉽지 않았다. 
제기랄, 유중혁은 쉽게 하던데 뭐가 이렇게 어려워? 
 
“억지로 통제하려 하지 말고, 바람을 인도해야 한다.” 
 
유중혁의 목소리. 
그 순간 깨달음이 스쳐갔다. 
어쩌면 ‘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나만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녀석의 신체 근처에서 매질을 제거하는 것이니까. 
 
슈우우우우! 
 
「으, 으어어, 으아아아아! 숨막혀!」 
 
자신의 목을 벅벅 긁던 명일상이 피눈물을 흘리며 몸부림쳤다. 
 
“······제법이군. 아주 재능이 없는 편은 아니다.” 

유중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리고 명일상의 마지막 발악이 시작되었다. 
 
[등장인물 ‘명일상’이 ‘대흑염포 Lv.3’를 사용합니다!] 
 
명일상의 오른팔이 시커먼 불길에 휩싸였다. 
 
콰아아아아아! 
 
놀랍게도 대흑염포가 바람의 돔을 뚫고 튀어나왔다. 
나는 유중혁의 몸을 보호한 채, 납죽 엎드렸다. 둔한 충격이 머리 위를 긁고 지나갔다. 남은 마력을 다 쥐어 짜내려는 모양인지, 놈의 대흑염포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바람이 괜히 바람일까. 
대흑염포가 지나가면 다시 그 자리를 바람이 순식간에 메웠다. 
놈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문제는 불똥처럼 튄 흑염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 
내 표정을 본 유중혁이 말했다. 
 
“김독자, 허튼 생각 마라. 죽어도 상관없는 놈들이다.” 
“분명 그런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력을 다해 대흑염포에 맞섰다. 
쏟아진 흑염의 불길이 강력하게 회전하는 돔의 위력에 흩어지고 비틀어졌다. 뒤이어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다 차단하지 못한 흑염의 불길이 내게로 쏟아졌기 때문이다. 
흑염이 살갗을 태웠고, 뼈마디의 감각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할 수 있다. 
지금의 놈은 강하지 않아. 
 
그 순간 나는 내 한계를 넘어 다른 영역에 도달해 있었다. 
감각이 희미해지자 내 몸이 곧 바람이 된 것 같았다. 
 
[노력을 좋아하는 한 성좌가 당신의 고통을 즐깁니다.] 
[당신의 영혼에 잠들어 있던 일말의 재능이 개화합니다.] 
 
왼손으로는 [진공감옥]을 통제했고, 오른손으로는 바람을 움직여 대흑염포의 기운을 흩어냈다. 완전한 무아지경 속에서, 나는 [바람의 길]의 새로운 경지를 맛보고 있었다. 
손끝에서 노니는 바람이, 내가 여태껏 알지 못했던 풍경을 사생하고 있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의 두께가 일시적으로 얇아집니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이게, [등장인물]들이 보는 세계였구나. 
 
아무리 텍스트를 열심히 읽고, 궁구해도 알 수 없었던 어떤 감각. 오직 손끝의 페이지로만 느껴졌던, 하지만 나는 결코 닿을 수 없었던 서사의 일부가 온전하게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읽은 것과 이해한 것은 다르다. 
어쩌면 나는, 아직 이 세계의 일 퍼센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윽고, 명일상의 흑염포가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씨발! 개새끼들! 죽어! 죽어어!」 
 
급격하게 줄어드는 흑염포의 기세. 
그리고 내 마력은 아직도 충만한 상태였다. 
뭔가가 이상했다. 
아무리 무아지경에 빠졌다고 해도, 내 마력이 이렇게 많을 리가 없는데? 
등 뒤에서 유중혁이 짓씹듯 말했다. 
 
“······네놈은 내가 죽일 거니까.” 
 
······어쩐지 등이 뜨끈하다 싶었더니, 유중혁의 마력이었나. 
그리고 잠시 후, 명일상의 공격이 그쳤다. 
 
[귀환자, ‘명일상’의 모든 봉인이 재생되었습니다.] 
 
유중혁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전용 스킬, ‘바람의 길 Lv.8’이 해제됩니다.] 
 
공포에 질린 명일상이 목을 쥔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커, 커헙, 크허헙······!” 
 
황급히 숨을 몰아쉬며 달아나려는 녀석을 향해,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던졌다. 
 
“커허헉!” 
 
녀석은 등에 칼이 꽂힌 채 그대로 고꾸라졌다. 놈은 이제 블링크로 달아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대로 달려가 녀석의 멱살을 붙잡았다. 
 
“······하, 말 못하니까 진짜 답답하네. 이제 궁금증은 다 풀렸냐?” 
“커어억······.” 
“이제부터 질문하면 죽인다. 아무것도 묻지 마라.” 
 
귀환자. 
‘멸살법’의 세계에서 가장 오만하고 잔인한 존재들. 
명일상은 그런 귀환자들 중에서도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지금 내가 듣고 싶은 소리는 하나뿐이거든.” 
 
뻐억! 뻐어억! 
 
“끄아아아악!” 
 
억울하다는 듯 나를 올려다보는 명일상의 눈빛에 공포가 어렸다. 
나는 그 공포가 온전히 뭉개질 때까지, 놈을 때리고 또 때렸다. 
얼굴이 피곤죽이 된 명일상이 간신히 혀를 비틀었다. 
 
“이, 이럴 리가 어, 없는데······.” 
 
간신히 눈을 끔뻑이는 녀석을 보며, 나는 녀석의 전사(前事)를 떠올렸다. 
 
「“내, 내가 용사라고? 내가 진짜 용사가 되었다고? 진짜?”」 
 
열일곱 살 고등학생이었던 명일상. 
세계를 구할 용사로 선택되어 클로노스에 떨어졌던, 순진무구했던 소년. 
분명 녀석도 이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한 대륙의 생명체들을 멸절시키고, 잔학무도한 살인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녀석은 그렇게 되었다. 
 
“재앙이 되기를 선택한 것은 너야.” 
 
그리고 이제 와 무엇도,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등장인물 ‘명일상’에 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명일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분명, 이, 세계의, 주인, 공······.”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놈의 말은, 안타깝게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다가온 진짜 주인공이, 녀석의 머리에 칼을 꽂아 버렸던 것이다. 
나는 유중혁의 칼날에 숨이 끊어진 녀석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 세계를 멸망시킨 재앙의 최후라기엔, 허무한 죽음이었다. 
 
[당신은 시나리오 최초로 ‘귀환자’에게 대적하여 승리했습니다!] 
[공헌자 : 김독자, 유중혁] 
[업적 보상으로 40000코인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설화에 새로운 항목이 추가됩니다.] 
[설화, ‘이적(異蹟)에 맞서는 자’가 추가됩니다.] 
[새로운 성흔의 가능성을 입수하였습니다.]
 
 
 
 
 
< Episode 18. 독자의 싸움 (2) > 끝

< Episode 18. 독자의 싸움 (3) >
 
 
 
 
 
 
나는 명일상의 죽음이 남긴 시스템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이 세계의 죽음은 그저 몇 줄의 메시지로 남는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그럭저럭 만족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살짝 불만스럽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이야기에 크게 기뻐합니다.] 
[누군가가 당신의 시나리오를 스타 스트림에 추천하였습니다.] 
[25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폐허가 된 강동구의 모습. 고작 재앙 하나가 잠깐 지나갔을 뿐인데 지상 시설 전반이 파괴되고 고층 건물들이 죄다 무너져 있었다. 
노을이 맺힌 거리로, 새카맣게 먼지를 묻힌 사람들이 하나둘씩 기어 나왔다. 
모두, 아이템들 노리고 여기까지 달려왔던 사람들이었다. 
 
주인공이 되고 싶었지만, 그저 [등장인물]로 남아야 했던 사람들. 
 
상처를 붙잡은 채 끅끅대는 사람도 있었고, 눈물을 닦는 사람도 있었다.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이들도 보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가운 시신이 되어 바닥에 누워 있었다. 
 
나는 내가 그동안 ‘멸살법’을 모두 읽었다고 생각했다. 
 
그 설정 하나하나를 이해했고, 설명의 의미를 곱씹었으며, 마침내 작가의 의도를 알아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멸살법의 어디에도, 이들의 죽음을 묘사하는 문장은 없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유중혁도 나와 같은 광경을 보고 있었다. 
아마도 유중혁은 몇 번이나 혼자서 이 광경을 보아왔을 것이다. 
 
“유중혁.” 
 
유중혁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몇 번인가 혀끝에서 말을 굴리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앞으로도 시나리오는 계속될 것이고, 나는 몇 번이고 이런 순간들을 보게 될 것이다. 몇 번이고, 다시 텍스트로 표현되지 않는 광경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오르더니 뜻밖의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도깨비 ‘독각’이 당신을 자신의 채널에 초대합니다.] 
 
······누가 누굴 채널에 초대해? 
순간 당황했지만, 나는 일단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메시지는 또 떠올랐다. 
 
[도깨비 ‘독각’이 당신을 자신의 채널에 초대합니다.] 
 
허공을 올려다보니, 이쪽을 내려다보는 도깨비들의 무리가 보였다. 
재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외다리 도깨비. 뒤쪽에 쭈그러져 있는 비형 녀석이 참담한 눈빛으로 나와 독각의 눈치를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도깨비들 사이에서도 ‘갑질’은 존재한다. 
······어떤 상황인지 대충 알겠군 그래. 
나는 짧게 숨을 들이켠 후, 일부러 시시껄렁한 목소리를 냈다. 
 
“뭐해? 보상 안 줄 거야?” 
 
내 말에 독각의 듬성듬성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녀석의 입가에는 여전히 여유가 가득했다. 
 
[아, 당연히 드려야죠. 죄송합니다. 변변찮은 실수를 했군요.] 
 
독각은 무서운 도깨비다. 허당 같은 비형이나, 자존심만 센 중급 도깨비와는 체질적으로 다른 녀석. 
아무나 저런 메이저 채널의 이야기꾼이 되는 게 아닌 것이다. 
 
[서브 시나리오 ― ‘SSS급 사냥’이 종료되었습니다.] 
[보상 정산이 시작됩니다.] 
[보상으로 50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갑자기 막대한 코인이 들어오자, 그래도 기분이 좋아졌다. 
시나리오 한 방으로 무려 5만 코인이라니. 
대단한 혜자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다. 
서브 시나리오가 도깨비의 임의로 성립되는 것을 감안하면, 이 코인들은 대부분 독각의 주머니에서 나왔을 것이다. 제법 배가 아플 것이라 생각했는데, 독각은 오히려 빙긋 웃고 있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보는 것은 도깨비들의 큰 기쁨.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중얼거리는 녀석. 
하긴, 도쿄 돔의 초대형 채널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니 이 정도 출혈로는 끄떡없을 것이다. 
지금쯤 일본에서 잘 나갈 녀석이 누가 있더라? 
아직 위인급들이 활약할 시기니까 ‘오다 노부나가’나 ‘미야모토 무사시’일 가능성이 높겠군. 
그래······ 소속 화신들이 톡톡히 벌어 줘서 배가 불렀다 이거지? 
 
“그럼 추가 보상도 빨리 주지 그래. 이게 다가 아닐 텐데?” 
 
[아, 물론입니다. 당연히 드려야지요. 이 시나리오를 흥미롭게 만들어 준 장본인이신데.] 
 
어쩐지 비꼬는 말투라 더 열 받는다. 
저 자식만 아니었더라도, [질문의 재앙] 시나리오는 훨씬 쉽게 끝났을 텐데. 뒤쪽에서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비형이 내게 통신을 걸어왔다. 
 
―야······ 있잖아. 
 
그러나 통신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독각이 비형의 말을 끊었다. 
 
[비형, 보상을 준비하십시오.] 
 
화들짝 놀란 비형이 소리를 냈다. 
 
[예?] 
[보상을 준비하십시오. 두 번 말해야 알겠습니까?] 
 
얼씨구······ 저놈 봐라? 
머뭇거리던 비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 서브 시나리오 담당자는 독각님이신데······.] 
[재미있군요, 비형. 혹시 화신들 앞이라고 어깨에 힘주는 겁니까?] 
 
마치 누구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서슴없는 아우라가 비형의 전신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도깨비의 힘은 곧 채널의 크기에 의해 좌우된다. 
 
[요즘 채널 좀 커졌다던데, 정말인가 보군요.] 
 
독각의 덤덤한 목소리에 작은 비형의 몸이 점점 더 쪼그라들었다. 

[아, 아닙니다. 오해십니다!] 
[여섯 번째 시나리오는 한국과 일본이 함께 하는 거였죠? 잊으셨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시작하세요.] 
[옙!] 
 
미운 정도 정이라고, 그래도 내 채널을 관리하는 비형이 굽신거리는 꼴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지금 비형에게 독각은 고등학교 시절 나를 괴롭혔던 송민우와 비슷한 존재일 것이다. 
 
[추가 보상 정산이 시작됩니다.] 
[기본 보상으로 ‘패러사이트 종족의 호부’를 획득하였습니다.] 
[추가 선택 보상이 존재합니다.] 
[당신은 해당 시나리오의 최대 공헌자입니다.] 
[당신은 추가 보상의 우선 선택권을 가집니다.] 
 
나는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카탈로그를 보았다. 
역시, 그래도 재앙을 잡았다고 꽤 쓸만한 걸 주려는 모양이다.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 - SSS급 
[흑염의 반장갑] - SSS급 
[실피드의 도약 부츠] - SSS급 
 
트리플 S급의 보상 아이템들. 
나는 아이템들의 옵션을 쭉 훑어보았다. 
 
안주머니에 특수 옵션으로 ‘아공간’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물건을 넣어 다닐 수 있는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 
그리고 어둠과 불꽃 속성의 스킬 성능을 크게 증폭시켜 주는 [흑염의 반장갑]. 
마지막으로 하루에 세 번 특수 옵션 ‘도약’을 사용할 수 있는 [실피드의 도약 부츠]. 
 
비록 성유물급은 아니라지만, 이 정도 보상이면 10번대 시나리오를 넘어설 때까지도 쓸만한 물건들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이 말을 들으면 “아니, 그래도 SSS급인데 10번대 시나리오까지밖에 못 쓰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멸살법’의 세계가 원래 그딴 식인 걸 내가 어쩌겠는가. 
‘멸살법’의 세계는 아이템 등급의 인플레가 상당하기 때문에, 초반에 입수한 아이템과 중후반에 얻은 아이템은 같은 등급이라도 성능의 차이가 꽤 큰 편이다. 
물론 지금 얻은 SSS급이라고 나중에 반드시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고, 특수한 재료로 장비 초월을 하면 된다. 
성유물이 좋은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다른 등급제 아이템들과는 달리 성유물은 초월이 필요 없다. 시나리오가 개방됨에 따라, 성유물은 개연성의 제약을 벗어나 자연히 본래의 힘을 회복해나가기 때문이다. 
 
[······보상 골라 보세요.] 
 
시무룩한 얼굴의 비형이 내게 말했다. 
자식이 괴롭힘 좀 당했다고 힘이 다 빠져서는. 
순간 비형의 도깨비 통신이 들려왔다. 
 
―개인적으로는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를 추천해. 저거, 숨겨진 옵션이 하나 더 있거든. 나중에 초월하기도 쉽고. 
 
그래도 딴에는 내 매니저라고, 일은 하는구만. 
눈치 빠른 독각이 금세 비형을 노려봤다. 
 
[비형?] 
[······옙!] 
[성좌님들한테도 아이템 설명해주셔야죠. 잊었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독각의 말에, 비형이 서울 돔 채널의 성좌들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유중혁에게 말을 걸었다. 
 
“유중혁, 넌 뭐 고를 거냐?” 

우선 선택권은 내게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냥 유중혁에게 양보해주기로 했다. 도움받은 것도 좀 있고. 
······물론 이러면 유중혁이 날 살살 때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니다. 
 
“유중혁?” 
 
유중혁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나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또 선 채 기절했냐?” 
 
녀석의 눈 앞에 몇 번인가 손을 흔들었지만 놈의 동공엔 변화가 없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회복 동면 Lv.3’을 사용 중입니다.] 
 
······하긴, 그 몸으로 그렇게 날뛴 게 비정상이었지. 
[회복 동면]까지 사용할 정도라면 몸 상태가 완전히 개차반인 모양이다. 
그래도 그냥 고를 수는 없어서, 나는 일단 [한낮의 밀회]를 통해 간단한 메시지를 남겨 두었다. 곁에서 내가 하는 꼴을 지켜보던 한수영이 불쑥 끼어들었다. 
 
“······혹시 내가 대신 골라도 돼?” 
“나중에 유중혁한테 처맞고 싶으면 그러든가.” 
 
한수영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나는 비형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를 고르겠다.” 
 
그런데, 대답한 것은 비형이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인 독각이 손가락을 튕기자 카탈로그가 꺼졌다. 
 
[좋은 아이템을 고르셨군요. 그럼 바로 지급 장소로 이동하죠.] 
 
지급 장소? 
 
[추가 보상은 절차상 이곳에서 지급이 안 됩니다.] 
 
이것 봐라. 
 
“어디로 간다는 거지?” 
 
[제 ‘도깨비 감투’로 모시겠습니다.] 
 
도깨비 감투. 
전래동화에서는 ‘감투’가 의복의 일종이지만, 여기서는 다르다. ‘감투’는 모든 도깨비들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방’이다. 그들의 본체를 감추고 있는 방. 
 
“그건 곤란한데. 그냥 여기서 줬으면 좋겠어.” 
 
감투는 녀석의 고유 공간. 갔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내가 알기로, 추가 보상을 받는데 ‘도깨비 감투’로 이동하는 절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이 상황에서 감투에 들어간 놈이 무슨 제안을 할지도 뻔했다. 
옆에서 비형이 조마조마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보는 독각의 눈이 가늘어졌다. 
 
[흐음······ 자꾸 툴툴거리시면 아이템을 지급을 취소하는 수가 있습니다만?] 
 
“그러든가.” 
 
시나리오의 보상에 한해서는 또 철두철미한 것이 바로 스타 스트림이다. 
아무리 도깨비의 재량에 의존하는 ‘서브 시나리오’라도, 시나리오가 끝난 마당에 준다고 한 아이템을 도로 가져갈 수는 없는 것이다. 
독각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재미있군요.] 
 
―그렇게 나오면 좋지 않을 텐데요. 
 
도깨비 통신. 
독각이 천천히 입을 열자, 두 개의 목소리가 교차하며 들려왔다. 
 
[김독자. 당신의 이야기는 자주 들었습니다. 얼마나 유명한지, 반도 건너편 땅의 성좌들도 당신에 대해 알고 있더군요.] 
 
―도깨비 비형과 계약을 한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깨비들 간에는 ‘화신 양도’라는 게 가능하죠. 
 
[도깨비 앞에서도 당당하다고 들었는데, 오늘 보니 그 소문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겠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내 채널로 오십시오. 이번에 한반도 쪽으로 채널 규모를 넓힐 생각입니다. 원하는 계약 조건이 있다면, 얼마든지 맞춰 주겠습니다. 
 
흥미롭다. 
이런 식으로 스카웃 제의를 해올 줄이야. 
독각의 제안은 축구로 치면 아시아 중상위리그 팀에서 프리메라리가의 상위 팀으로의 이적 권유나 마찬가지다. 
그렇게만 생각하면 매력적인 제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적 이후다. 
나는 ‘독각’이라는 녀석을 잘 알고 있다. 
 
“뭘 잘못 본 모양인데, 난 사실 겁이 많아. 이렇게 너랑 말하는 것도 벌벌 떨리거든. 그러니까 빨리 아이템 주고 꺼졌으면 좋겠어.” 
 
내 말에, 자신만만하던 독각의 표정에 처음으로 굳어졌다. 
 
[재미있군요. 거기다 겸손하기까지.]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군요. 알아서 겸손해질 날이 올 겁니다. 
 
“······무슨 뜻이지?” 
 
―비형의 채널은 곧 사라질 테니까요. 
 
독각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걸렸다. 
 
[그렇게 나오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원래 이 이야기는 ‘보상’을 지급한 후 발표하려고 했는데, 유감이군요.] 
 
······발표? 뭘 발표해? 
내게서 눈을 뗀 독각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빛을 내뿜는 성좌들을 보며, 녀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울 전체가 울릴 듯,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시나리오를 흥미롭게 지켜봐 주신 성좌님들께, 조금 유감스러운 소식을 하나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급 도깨비 무리가 비형의 주변에서 빠르게 물러나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비형. 도깨비들이 저런 포지션을 취할 때는 반드시 안 좋은 일이 벌어진다. 
 
[불행하게도 서울 돔에서 활동하는 채널들 가운데, 시나리오 불법 조작을 자행한 채널이 발견되었습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독각’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바로 도깨비 비형의 #BI-7623채널입니다. 조사 결과, 서울 돔의 하급 도깨비들은 해당 채널의 과도한 시나리오 조작으로 ‘개연성’이 침해당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잠깐만, 뭐라고? 
 
[고로 본 도깨비는 서울 돔의 하급 도깨비들을 대표하여, 관리국에 해당 채널의 「개연성 적합 판단」을 정식으로 요청하는 바입니다.]
 
 
 
 
 
< Episode 18. 독자의 싸움 (3) > 끝

< Episode 18. 독자의 싸움 (4) >
 
 
 
 
 
한수영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뭐야? 대체 무슨 소란인데? 갑자기 멀쩡하던 개연성을 왜 걸고넘어져?” 
“뭐긴, 괜히 시비 털려는 거지.” 
“시비? 왜?” 
 
왜긴 왜겠어. 
내가 이적 제안을 거부했다고 이렇게까지 나온다 이거지? 
하늘에 떠 있는 독각이 관리국 쪽에 보고를 올리는 모습이 보인다. 
 
개연성 적합 판단······. 
설마 그걸 이런 식으로 이용할 줄이야. 
 
슬슬 다른 대형 채널의 도깨비들이 시비를 걸어올 거라곤 예상했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찔리는 게 있는 비형은 아까부터 얼굴이 새파래진 채 나와 독각을 번갈아 보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툭 건드리면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모양새였다. 
 
―어, 어떡하지? 어쩌면 좋지? 
―솔직히 말해봐. 너 나랑 계약한 거 들켰어? 
 
비형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럼 도깨비 보따리 열어준 게 들켰나? 
―그, 그것도 아냐. 
―진짜지? 
―아, 아마도······. 
―그럼 쫄 것 없어. 게다가 그거 다 걸렸다고 해도, ‘개연성 적합 판단’에 요청될 만한 일도 아냐. 애초에 규정 위반도 아니잖아? 
 
내 말은 사실이었다. 화신이 직접 ‘스트림 계약’을 맺거나 ‘도깨비 보따리’를 사용한 전례가 없을 뿐이지, 그 모든 일들이 스타 스트림의 메인 규정에 직접 위배 되는 일들은 아니었다. 
뒤늦게 안심한 듯, 비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응. 알겠어. 
 
어린아이처럼 쩔쩔매는 비형을 보고 있으니, 대체 내가 도깨비인지 이놈이 도깨비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나는 다시 독각을 비롯한 하급 도깨비들 쪽을 바라보았다. 
 
[#BI-7623채널의 시나리오 조작 경위가 보고되었습니다.] 
[현재 관리국에서 해당 사안에 대한 논의를 진행 중입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저 적합 판단은 결국 무산될 것이다. 
만약 놈에게 ‘개연성’에 태클을 걸만한 증거자료가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적은 정보를 숨기고 있고, 나는 당장 그걸 알아낼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이봐, 시간 그만 끌고 보상이나 빨리 주지? 성좌들 지루해 하는 거 안 보여?” 
 
[곤란합니다. 이 사안은 보상 지급보다도 더 중요하니까요.] 
 
―생각이 바뀌셨습니까? 아까 한 제안에 동의하신다면, 이 일들은 모두 없었던 일로 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나는 독각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래, 정면 승부를 해보자 이거지? 
 
“무슨 사안인데? 들어나 보자. 대체 내가 소속된 채널의 어떤 부분이 불법 조작이라는 거야? 증거 있어?” 
 
만약 놈이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이걸로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고, 허세라면 사태는 즉각 종결될 것이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 독각이 미소를 지었다. 
 
[정말 듣고 싶으십니까? 후회하실 텐데요.] 
 
“말해봐.” 
 
[이 사안은 김독자 당신과도 관계있습니다.] 
 
“······나랑?” 
 
순간 생각이 많아졌다. 
혹시 내가 텍본을 가지고 미래 정보를 모두 이용하고 있다는 것 때문인가? 하지만 필터링 때문에 그런 정보들은 성좌나 도깨비들에게 퍼지지 않았을 텐데? 그것 때문에 태클이 걸렸을 거면, 벌써 진즉에 나는 개연성 폭풍을 맞았어야······. 
 
[화면이 보이십니까?] 
 
나는 허공에 떠오른 거대한 스크린을 보았다. 
스크린에는, 얼마 전 내가 벌였던 전투의 장면들이 상영되고 있었다. 
첫 번째 스크린에 나온 것은 독희 이설화와의 결전이었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대체 뭐가 증거라는 건데?” 
 
화면에는 그저, 이설화를 죽이지 않는 내 모습이 나올 뿐이었다. 
독각이 화면을 바꾸었다. 
 
[그리고 이것도 증거입니다.] 
 
두 번째 화면은, 리카온과 앤티누스의 격전을 지켜보는 내 모습이었다. 
 
대체 무슨······. 
 
[이어서 세 번째 증거는 이것입니다.] 
 
세 번째 화면. 화면 속의 나는 [질문의 재앙] 명일상에게 일행들과 함께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봉인이 풀리는 명일상의 모습. 갑자기 속이 답답해진다. 
 
[이 화면들의 공통점을 모르시겠습니까?] 
 
그 순간 깨달았다. 
녀석은, 지금 내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화면을 보신 성좌님들은, 혹시 아시겠습니까?] 
 
순간 주변의 모두가 조용해졌다. 
 
[독희와의 싸움, 앤티누스와의 싸움, 그리고 질문의 재앙과의 싸움. 이 세 가지 싸움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화면이 돌아가면서 떠올랐다. 
 
[그는 사실 독희를 죽이고 ‘재앙’을 막을 수 있었고.] 
 
녀석의 손가락이 독희를 가리켰고. 
 
[앤티누스를 죽여 ‘재앙’을 막을 수 있었으며.] 
 
앤티누스를 가리켰으며. 
 
[‘질문의 재앙’이 봉인이 풀리기 전 ‘재앙’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명일상을 가리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런데 그는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잠깐만! 너 지금······!” 
 
그제야, 나는 독각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눈치챘다. 
천천히 소름이 돋았다. 
그렇구나. 
이것이 도깨비란 놈들의 치밀함이구나. 
 
[성좌 여러분. 화신 김독자는 채널의 이야기꾼인 ‘비형’과 결탁했습니다. 그는 일부러 자신의 힘을 숨기고, 시나리오의 전개를 조작했던 것입니다. 그는 억지스런 연출로 시나리오를 농락하고, 악의적인 목적으로 답답함을 연출했습니다.] 
 
그리고 떠오른 마지막 화면. 
그곳에서, 나는 [바람의 길]을 사용해 명일상을 해치우고 있었다. 
 
[오직, 마지막에 있을 카타르시스를 ‘연출’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자식은, 처음부터 ‘개연성 적합 판단’을 요청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독각······. 
이 녀석의 진짜 목적은. 
 
[오직, 당신들에게 코인을 뜯어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비형의 채널을, 끝장내는 것이었다. 
 
[몇몇 성좌들이 침음합니다.] 
 
사실 독각이 내민 증거들은, ‘개연성 적합 판단’의 어떤 항목에도 위배 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재미있는 시나리오를 만들기 위해 도깨비가 화신을 조종하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 
 
문제는, 그것을 싫어하는 성좌들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시나리오에 진지하지 않다고 생각한 순간, 성좌들은 흥미를 잃는다. 
연극에서의 소격 효과와 같다. 관객과 인물 사이에 있는 [제4의 벽]이 무너지는 순간, 관객들은 바로 흥이 식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독각이 의도한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멍하니 입을 벌립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킬킬거리며 웃습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어깨를 으쓱합니다.] 
 
어떤 성좌는 놀랐고, 어떤 성좌는 아무 생각이 없었으며, 어떤 성좌는 시큰둥하게 굴었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다른 성좌들이었다. 
 
[흥이 깨진 일부 성좌들이 채널에서 퇴장합니다.] 
[채널의 공정성을 의심하는 성좌들이 채널에서 퇴장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채널에 코인 환불을 요청합니다.] 
 
‘비형’의 채널에서 성좌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채널의 규모가 감소합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간접 메시지. 창백해진 비형의 체구가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녀석의 뿔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채널 망했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줄어드는 성좌들의 숫자를 보며, 나는 독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알겠으니까, 얘기 끝났으면 보상 줘. 네 제안 받아들일 테니까.” 
 
독각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래도 현명함이 남아있긴 하군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비형의 눈이 커졌다. 
 
[너, 너······!] 
 
“그렇게 보지 마.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비열한 목소리로 말했다. 
배신감에 비형의 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자식이, 겁먹기는. 
 
―비형, 나 믿냐? 
―무슨······. 
―그냥 딱 한 번만 믿어봐라. 어차피 이대로면 다 망하게 생겼잖아? 
 
통신을 끝낸 나는 독각을 향해 다시 말했다. 
 
“그만 이동하지.” 
 
[좋습니다. 그럼, 달콤한 보상의 시간을 가져 보죠.] 
 
독각이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주변의 정경이 사라졌다. 
나타난 곳은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을 연상시키는 방이었다. 
 
······여기가 녀석의 ‘감투’인가? 
 
나는 조금 긴장하며 주변을 살폈다. 호화로운 융단 위로 도깨비들이 사용하는 높이가 낮은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벽감의 한쪽에 비치된 다양한 종류의 술들. 뒤늦게 도깨비 녀석들이 상당한 애주가였다는 설정이 떠오른다. 
대충 파악을 끝낸 나는 창가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은······. 
 
맙소사. 
 
시야를 가득 메운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장대한 우주의 암흑 사이로, 멀리 반짝이는 별들의 흐름이 보였다. 쏟아지는 보석들처럼 도도하게 흘러가는 대우주의 절경(絶景). 공전과 자전을 반복하며, 제각기 거대한 은하를 이루는 성좌들. 
우습게도 그 순간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감동하고 말았다. 
 
저것이 바로 스타 스트림(Star stream)이구나. 

모든 시나리오를 관장하는 위대한 별들의 흐름. 
저곳에서 모든 이야기는 시작되는 것이다. 
 
“대단한 정경이죠.”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 독각이 서 있었다. 
 
“저도 가끔 저 풍경을 망연히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는 광경이니까요.” 
“너 지금······.” 
“아, 놀랐습니까? 이게 제 ‘진짜’ 목소리입니다.” 
 
도깨비의 목소리를 육성으로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항상 방송으로만 듣던 도깨비의 목소리. 
그렇다는 것은, 지금 눈앞에 있는 독각은 녀석의 진짜 ‘본체’라는 것이었다. 독각의 눈이 고요히 빛났다. 
 
“허튼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겠죠?” 
“무슨 생각? 아, 혹시 내가 널 죽일까봐?” 
 
푸흐흣, 하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불가능하다는 건 아시는군요.” 
“나도 도깨비한테 대항할 만큼 미친놈은 아니야.” 
“마음에 듭니다. 그럼 계약을 시작하죠.” 
 
독각이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기자, 눈앞에 계약서와 함께 또 다른 도깨비가 나타났다. 비형이었다. 전신을 코드가 적힌 시스템 문자로 구속 당한 채 입까지 틀어 막힌 비형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비형은 공증인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그와의 계약을 파기해야, 저랑 계약할 수 있으니까요. 파기 대가는 비형이 알아서 감당할 겁니다.” 
 
나는 조금 놀랐다. 
이 녀석, 역시 나와 비형과의 계약을 알고 있었군. 
즉, 이 녀석은 처음부터 내가 ‘화신 찾기’ 집단을 끌기에 적합한 인재라는 것을 알고 접근했다는 뜻이다. 
나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좋을 대로 해. 난 상관없으니까.”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요. 일단 계약서를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저도 이런 종류의 직접 계약은 처음이라 말이죠.” 
 
나는 계약서를 읽어 보았다. 
물론 말할 필요도 없이, 계약서는 완전히 불리한 조건이었다. 
후원금의 분배는 5대 5. 
거기다 내 자유를 구속하는 몇몇 항목들. 
심지어 나는 이제 ‘갑’이 아니라 ‘을’이었다. 
독각이 웃으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업계 평균입니다만, 원하신다면 조금 조정을 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업계 평균 같은 소리하네. 
비형도 처음부터 이딴 계약서를 들이밀진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나쁘지 않네. 그런데 계약을 하기 전에, 한 가지 제안할 게 있어.” 
“제안? 뭐죠?” 
“나만 채널을 쏙 옮기면 뭔가 아쉽잖아? 설마 나 하나로 만족할 건 아니지? 비형 녀석 채널에는 제법 강한 성좌들이 몇몇 있다고.” 
“호오? 누가 있습니까?” 
“긴고아의 죄수, 심연의 흑염룡, 거기에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랑······.” 
 
수식언이 이어질 때마다, 독각의 눈빛이 놀라움으로 차올랐다. 
 
“긴고아의 죄수? 설마 그런 성좌를 데리고 있을 줄은······ 비형, 제법이군요.” 
 
입이 막힌 비형이 읍읍, 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솔직히 이 성좌들, 이 채널에 두고 가기 아깝거든. 그래서 말인데, 이 성좌들이 나랑 같이 채널을 옮길 수 있도록 네가 다리를 좀 놔 줬으면 좋겠어.”
 
 
 
 
 
< Episode 18. 독자의 싸움 (4) > 끝

< Episode 18. 독자의 싸움 (5) >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진심을 가늠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어쩐지 귀찮아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적극적으로 귀찮음을 피력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정말로 채널을 옮길 거냐고 묻습니다.] 
 
흥미롭다는 듯 독각이 미소를 지었다. 
 
“다리라면?” 
“네 채널을 나한테 연결시켜 줘.” 
“그럼 중복 접속이 될 텐데요?” 
“상관없어. 그래야 성좌들도 고생하지 않고 나를 통해 바로 채널을 옮길 수 있잖아?” 
“흐음. 그렇긴 하겠죠. 이거 재미있군요.” 
“그리고 사실 나도 조금 궁금해.” 
“궁금하다?” 
“내가 계약할 채널에 어떤 성좌들이 있는지 말이야. 이런 깡촌 같은 채널에만 있다 보니 커다란 채널은 어떨지 좀 궁금하기도 하거든. 미리 보고 싶은데. 안 될까?” 
 
나는 일부러 비형 쪽을 향해 경멸적인 시선을 보냈다. 실시간으로 상처받는 비형의 얼굴. 독각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비형, 정말 좋은 화신과 계약하셨군요. 이제부턴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독각의 손이 허공을 누비더니, 이내 시스템이 조작되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그럼 어디 대도시의 공기를 느껴 보시죠.”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내 몸에 새로운 코드가 꽂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딘가와 이어지는 듯 분명한 연결감.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나를 보는 무수한 시선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온몸의 솜털이 솟았다. 
비형의 채널에 있을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단지 시선만으로 느껴지는 다수의 존재감. 
대단하다. 
이것이 도쿄 돔을 장악한 도깨비의 채널이라는 건가? 
 
“어떻습니까? 당신이 활동할 새로운 리그가.” 
 
단순히 일본의 성좌들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이 자식, 이계나 다른 대륙의 고정 구독좌들까지 가지고 있는 건가? 
이런 곳에서 활동하면, 한 번에 대체 얼마나 많은 코인을 쓸어 담을 수 있는 거지? 
솔직히 가늠도 잘 되지 않는다. 
 
“대단하네. 진짜 큰데?” 
“그럼 이제 다시 계약을······.” 
“그 전에, 잠깐만 인사를 하고 싶어. 괜찮지?” 
“······그렇게 하시죠.” 
 
독각은 살짝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결국 허락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쿄 돔의 성좌님들. 제 말 들리십니까?” 
 
[한반도를 싫어하는 몇몇 성좌들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몇몇 분들은 제 이야기를 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절대 왕좌]를 부수고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된 김독자입니다. 참고로 저는 배후성이 없고······ 음, 뭐. 그렇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도쿄 돔의 성좌들이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간단한 소개를 했을 뿐인데, 몇몇 성좌들이 벌써 내게 간접적인 어프로치를 시작했다. 
좋다. 
시작이 나쁘지 않은데? 
 
“그런데 말입니다. 채널에 접속한 기념으로, 제가 작은 이벤트를 하나 열어볼까 합니다. 뭐냐하면, 한일 합작 이벤트라고나 할까······. 궁금하신 분들은 지금 당장 #BI-7623 채널로 접속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찍 온 성좌들한텐 추첨해서 코인도 줄 거니까 꼭―” 
 
뚝, 하고 채널이 끊어졌다. 
눈을 뜨자, 독각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대체 뭘 하는 겁니까?” 
“뭐하긴. 이벤트 하는 거지.” 
“대체 무슨 생각을······ 죽고 싶은 겁니까? 내 채널의 성좌들이 그런 얕은수에 놀아날 것 같······.” 
 
기꺼이, 놀아나 줄 것이다. 
왜냐하면 딱 궁금한 지점에서 네가 끊어줬으니까. 
그리고 독각의 표정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성좌님들. 지금 어디 가시는 겁니까?” 
 
흐름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비형의 채널에, 조금씩 성좌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BI-7623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채널 레벨이 올랐습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많이들 와주셨네요. 고마워요. 이벤트 때문에 오신 거죠?”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잡스런 성좌들의 등장에 짜증을 냅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적대 성좌들의 등장에 분개합니다.] 
 
“잠깐만, 싸우지들 말고. 싸우라고 부른 거 아닙니다.” 
 
[무라마사를 즐겨 쓰는 성좌가 어서 코인 추첨을 진행하라고 닦달합니다.] 
[몇몇 성좌들이 그래서 코인 이벤트는 언제 하느냐 묻습니다.] 
 
“닦달하지도 마세요. 좀 있다가 할 거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겨우 그 한 푼 두 푼 받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애초에 화신이 없으면 당신들도 코인을 쓸 곳이 없잖아요? 천천히 가자고요 천천히.” 
 
[몇몇 성좌들이 불만스런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혹시 아까 못 들은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다시 한번 말해드리겠습니다. 나는 배후성이 없는 김독자라는 놈입니다. 왕들의 전쟁에서 승리했고, 재앙은 시작되기도 전에 두 개를 막았습니다. 아마 전 세계를 뒤져 봐도 나보다 강한 화신은 많지 않을 겁니다. 배후성이 없는 화신 중에서는 아예 없을 거고. 그런데 말입니다······ 슬슬 이 짓도 힘들더라고요.” 
 
내 의도를 눈치챈 듯, 독각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잠깐! 당신······!” 
 
나는 독각을 향해 씩 웃어주었다. 
연출? 
그래, 내가 진짜 ‘연출’이 뭔지 보여주마. 
 
“서울 돔은 지금 다섯 번째 시나리오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똑똑한 당신들이라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래요, 맞습니다. 곧 당신들이 좋아하는 그 이벤트가 있을 겁니다.” 
 
이제 시나리오 시작까지는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재앙 시나리오’는, 시작 전 특별한 이벤트를 개최한다. 
‘스타 스트림’에 존재하는 모든 성좌들의 연회. 
 
이제 곧, 두 번째 <배후 선택>이 시작될 것이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기념으로, 나도 깜짝 이벤트를 한 번 진행해볼까 합니다. 만약 <배후 선택> 당일까지, 이 채널의 구독좌 숫자가 1만을 넘긴다면······.”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침을 꿀꺽 삼킵니다.] 
 
“나는 이 채널의 성좌들 중 하나를, 내 파트너로 삼으려고 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흥미롭다는 듯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별도, 종족도, 출신 세계도 상관없습니다. 강하든 약하든, 유명하든 아니든. 어느 쪽이라도 괜찮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열정뿐입니다. 나와 함께, 이 빌어먹을 이야기의 끝을 볼 수 있다는 열정.”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자신의 머리를 닦습니다.] 
 
“누구든 좋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1만입니다. 기억하셨죠? 꼭 다들 분들한테도 제대로 전해주세요.” 
“자, 잠깐! 잠깐만! 기다려!” 
 
뒤늦게 독각이 더듬거렸지만, 이미 일은 터진 뒤였다. 
악을 쓰는 독각의 목소리.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채널 메시지들. 
곳곳에서 들려오는 간접 메시지에, 나는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멍하니 있던 독각의 표정에 차가운 분노가 피어올랐다. 
뭔가를 결심한 듯, 놈이 나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화신 김독자. 당신은 여기서 죽어줘야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나는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며 웃었다. 
 
“지금 많은 성좌들이 이걸 보고 있다고. 후폭풍이 두렵지 않은 모양인가봐?” 
“도쿄 돔의 주인을 얕보지 마시죠.” 
 
분노한 독각의 표정에는 약간의 인내심도 남아있지 않았다. 
젠장. 
 
“벌레 하나 죽인다고 몰려올 개연성을, 제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습니까?” 
 
독각의 손가락이 무심하게 부딪쳤다. 
정말로 벌레 하나를 터뜨려 죽이듯, 무심한 손짓이었다. 
 
파지지지직! 
 
그리고 강력한 스파크가, 내 주변에서 튀어 올랐다. 
독각의 특기인 ‘풍선 터뜨리기’였다. 
이제 저 전류는, 내 몸을 풍선처럼 부풀린 뒤 터뜨릴 것이다. 
부어오른 내장은 파편이 되어 비산할 것이고, ‘나’였던 모든 조각들은 먼지가 되어 우주의 잔해로 흩어질 것이다. 
원래라면 그래야 했다. 
 
“······이게 왜 이러지?” 
 
따악! 
 
다시 한번. 
 
따악! 
 
독각은 두 번이나 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나 내 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파크조차 사라져버렸다. 
 
“대, 대체 이게······.” 
 
당황한 독각이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녀석은 알지 못했다. 
문제는 녀석의 손가락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소소 소름이 돋는 느낌과 함께, 뒤쪽에서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가 시야를 어둡게 만들었다. 
 
“야. 쪽바리 도깨비.”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목소리의 주인이, 지금 나를 지켜줬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시스템을 사용하는 도깨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같은 시스템을 사용하는 존재뿐이다. 
 
“힘자랑하니까 재밌냐?” 
 
처음으로 들어본, 비형의 목소리였다. 
경악한 독각이 말을 더듬었다. 
 
“어, 어떻게 [구속의 문자]를······?” 
“아, 그거? 그냥 힘주니까 툭 끊어지던데?” 
 
독각의 얼굴이 붉어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녀석의 표정에 격노가 차오르고 있었다. 
 
“고작 하급 도깨비가······ 비형! 이게 지금 무슨 무례입니까?” 
“하급? 너도 구독좌수만 많지 하급이잖아.” 
“나는 일부러 진급을 안 하고 있을 뿐입니다. 감히 도쿄 돔의 주인인 나에게 대드는 겁니까?” 
“도쿄 돔? 좋지, 도쿄 돔. 거기 좋은 성좌들 많더라?” 
 
내 뒤에서 나온 비형이 성큼성큼 독각의 앞으로 다가갔다. 
 
“근데 너, 이렇게 작았냐?” 
 
왜일까. 
분명 겉모습은 그대로였는데도, 비형은 독각보다 몇 배는 더 커 보였다. 
거인 같은 비형의 그림자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도깨비는 구독좌가 많아질수록 권능이 강해진다. 
공포에 질린 독각이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어, 어떻게······?” 
“너 아까 잘도 지껄이더라. 뭐? 내가 시나리오를 불법적으로 조작해?” 

비형의 그림자에서 불쑥 솟아난 검은 팔이, 독각의 멱살을 잡고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대놓고 남의 화신 훔쳐가는 새끼가······ 상도덕은 혹부리 영감한테 배웠냐?” 
“으, 으으. 이런 짓을 하면, 당신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 
“알게 뭐야 씨발!” 
 
그림자의 오른쪽 팔이 비정상적으로 커다랗게 부풀고 있었다. 
 
“넌 안드로메다에 간 네 개념이나 찾아와라!” 
 
투콰아아앙! 
 
그림자의 주먹을 맞은 독각이 천장의 보호막을 뚫고 먼 우주 저편으로 날아갔다. 
도깨비니까 저런다고 죽진 않겠지만, 한동안 꽤 타격을 받은 상태일 것이다. 조금은 분이 풀린 듯, 비형이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냈다. 
 
그나저나,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뻣뻣해진 목을 풀며 비형에게 다가갔다. 
그저 채널이 성장했을 뿐인데, 비형의 모습은 조금 낯설어 보였다. 
머쓱하니 서로를 쳐다보는 순간, 비형의 멍한 눈동자가 나와 마주쳤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비형의 입술. 
아마 도깨비는, 진짜 기쁠 때 저런 표정을 짓는 모양이었다. 
 
“너 내가 지금 뭐 보고 있는지 알아?” 
 
모른다. 하지만 알 것 같았다. 
아마 내가 보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 
 
[채널 레벨이 올랐습니다.] 
[채널 레벨이 올랐습니다.] 
[채널 레벨이 올랐습니다.] 
 
. 
. 
. 
 
[한반도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당신의 배후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역사적 화해를 원하는 한 성좌가 당신의 배후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당신의 진의를 궁금해합니다.] 
[하위문화를 즐기는 한 성좌가 당신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끝도 없이 떠오르는 메시지가, 나와 비형의 귓가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이제 무대는, 세계로 확장될 것이다.
 
 
 
 
 
< Episode 18. 독자의 싸움 (5) > 끝

< Episode 19. 특이점 (1) >
 
 
 
 
 
Episode 19. 특이점 
 
 
 
도깨비의 감투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비형이 성좌들을 관리하는 틈을 타서 테이블에 흩어져 있던 서류 몇 개를 들춰 보았다. 
 
[특이점 동향 보고서] 
 
······특이점? 
호기심에 발견한 서류를 두서너 장 넘기는 순간, 서류는 가루처럼 소멸했다. 아마 진짜 서류가 아니라 시스템으로 구성된 데이터베이스인 듯했다. 
비형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너 뭐해? 
―아냐, 아무것도. 
 
테이블 위에서 흩날리는 가루들을 보며, 비형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야, 우리 괜찮을까? 
―왜? 이제 와서 후회되냐? 
―그게······ 그렇잖아. 이런 식으로 들어온 성좌들은 금방 빠져나간단 말이야. 
 
빠져나간 성좌들은 다시 도쿄 돔 채널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 독각의 보복은 시작되겠지. 
하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다. 
 
―게다가 너 아까 거짓말까지 하던데, 대체 어쩌려고 그래? 진짜 구독좌 1만 넘으면 어쩌게? 벌써 5천 넘긴 상황이라고. 
 
내가 말없이 어깨를 으쓱하자, 비형의 닦달이 이어졌다. 
 
―너 나랑 계약서 쓸 때 ‘배후성’ 안 고르는 게 조건이었잖아? 아무리 임기응변이라도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한 거야? 
―어떻게든 되겠지. 뭣하면 네가 계약 파기해주면 되잖아. 
―그건 안 돼. 
―자식이······ 난 너 때문에 목숨까지 걸었는데 넌 안 된다 이거냐? 
 
비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건······. 
 
하긴, 기대하는 내가 바보지. 
 
―나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걱정마라. 
―······진짜? 
―그래, 그러니까 아이템이나 줘. 독각 없으니까 이제 수여 권한도 너한테 넘어갔을 거 아냐? 
―아, 맞다. 
 
비형이 뒤늦게 시스템을 조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허공에서 백색의 코트가 나풀거리며 내려왔다. 깔끔하게 빠진 디자인이, 전투는 물론이거니와 멋까지 세심하게 신경 쓴 게 느껴졌다. 나는 코트를 받아 안주머니부터 확인했다.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의 특수 옵션, ‘아공간’이 활성화됩니다.] 
 
이 코트의 장점은 [인벤토리] 스킬이 없어도 각종 아이템들을 보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간평의]나 [용존], [동의보감], [마력 화로]등 가지고 다니기 귀찮은 아이템들이 많았기 때문에 지금의 나에겐 딱 좋은 아이템이었다. 
 
“······그런데 카탈로그랑 다르게 백색이네?” 
 
[다른 색은 품절이거든.] 
 
품절이라니. 그럼 이런 아이템이 몇 개나 있다는 건가? 
 
[몰랐냐? 이거 양산품인거.]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나는 아이템의 옵션을 확인해 보았다. 
 
+ 
 
<아이템 정보> 
 
이름 :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 ver.1.1 (made by 양산형 제작자) 
등급 : SSS 
설명 : 귀환자들을 위한 맞춤형 코트. 양산형 제품임에도 불구하고 [SSS등급]이라는 불가사의한 판정을 받았다. 특성창을 활성화할 수 없는 특수한 귀환자들까지 배려하여, 코트의 안주머니에는 부가 옵션인 ‘아공간’이 활성화되어 있다. 물론 공간이 넓지는 않기 때문에 사용에 주의를 요한다. 
 
+ 
 
다시 봐도 의아하다. 
아공간이 쓸만하긴 하지만, 이게 SSS등급이라고? 
고대룡 이그니투스의 심장 같은 것도 SS등급인데······. 
 
[······솔직히 제작자 입김이 좀 들어갔지. 힘이 센 성좌라서.] 
 
납득은 간다. 
하긴, ‘양산형 제작자’는 귀환자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성좌니까······. 
솔직히 등급이 조금 거품이긴 해도, 이 정도면 초반에 얻을 수 있는 아이템들중에선 최상급이 틀림없다. 
어쨌든 얻을 건 모두 얻었다. 
 
[그만 돌아가자.] 
 
비형이 손가락을 튕기자, 주변의 정경이 일렁이며 바뀌기 시작했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나는 어느새 독각의 감투를 벗어나 지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본 한수영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야! 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잠깐 뭐 좀 하느라.” 
“······잘 해결됐어?” 
 
가끔 한수영은 뭔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저런 식으로 말하는 버릇이 있다. 작가의 자존심인가?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새 옷이네? 젠장, 부럽다.” 
 
그녀는 부러운 듯한 눈으로 내가 입은 코트를 바라보더니, 아직도 선 채로 기절해 있는 유중혁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유중혁이 입은 검은색 코트와 내 하얀색 코트를 번갈아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근데 혹시 커플룩이냐?” 
“······그냥 우연이야. 흔한 디자인이잖아.”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기뻐합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눈을 빛냅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독특한 성좌들이 많이 들어왔었지.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는 또 뭐야? 
‘멸살법’에 저런 녀석도 나왔었나? 
조만간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를 견제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나는 유중혁의 상세를 살피기로 했다. 다행히 녀석의 회복은 순조로운 듯했다. 호흡은 안정되어 있었고, 갈라진 상처들은 아물고 있었다. 
 
“빨리 뜨자. 이 자식 깨어나기 전에.”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기절한 유중혁. 이 녀석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벌어질 일이 무엇인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 
 
 
나는 한수영과 함께 강동구를 떠났다. 한수영의 아바타에게 맡겼던 유상아는 내가 대신 업었다. 탈진한 그녀는 여전히 기절한 상태였다. 
아까 앤티누스와 싸웠던 격전지로 다시 가보았지만, 리카온은 찾지 못했다. 
시신이 없는 걸 보면 분명 살아 있는 것 같긴 한데, 왜 내게 바로 오지 않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재앙의 파편을 맞았으니, 분명 심한 상처를 입었을 텐데. 
자꾸 뒤를 돌아보던 한수영이 물었다. 
 
“근데 정말 저대로 두고 가도 돼?” 
“괜찮아.” 
“하지만 그 ‘독희’잖아. 믿을 수 있는 거야?” 
 
기절한 유중혁은 독희 이설화에게 맡겼다. 
 
“독희는 원래 나쁜 사람 아냐. 패러사이트 때문에 그렇게 된 거지.” 
 
길잡이에게 감염되지 않은 여러 회차에서, 이설화는 ‘독희’가 아니라 ‘의선’으로 불렸다. 그리고 아마 이번 회차에서도, 그녀는 의선 이설화라 불리게 될 것이다. 
 
―녀석을 데리고 개봉동 쪽으로 가보세요. 아마 거기 5603부대라고 군부대가 하나 있을 텐데, 들어가 보면 불쌍한 군인 하나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확인한 이현성의 위치를 알려준 것은 유중혁의 충고를 받아들여서였다. 
모든 동료를 내 힘으로 성장시키려 했던 것은 내 오만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완독자든 뭐든, 결국 내 몸이 하나인 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과 정보는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 지금의 이현성에게 알맞은 트레이너는 내가 아니라 유중혁일지도 모른다. 
 
“배고프다. 저거 먹을까?” 
 
나는 고층 빌딩을 휘감고 자라나는 중인 식물종 하나를 가리켰다. 
 
[7급 괴수종, ‘야나스프레타’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거대한 해바라기의 눈이 이쪽을 바라보자, 한수영이 기겁하며 말했다. 
 
“······저걸 먹자고?” 
“먹을 거 없으니까 저거라도 먹어야지. ‘멸살법’에 따르면 저거 꽤 맛있어. 그리고 아직 성체가 아니라 사냥하기도 쉽고.” 
“으······.” 
 
한수영은 질색하는 얼굴이었지만, 이내 아바타를 소환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곧장 식물종의 줄기를 자르고, 달려드는 촉수들을 모두 베어냈다. 얼마 안 가 뿌리와 연결이 끊어진 야나스프레타가 눈을 감았다. 
새삼, 나도 제법 강해졌다는 게 느껴졌다. 아무리 새끼라지만, 7급 식물종을 이렇게 쉽게 처리할 정도는 된 것이다. 
 
“한수영. 너도 먹을 거지?” 
“······몰라.” 
“그럼 요리 한다.” 
 
나는 ‘멸살법’에서 본 대로 야나스프레타의 조리를 시작했다. 
단단한 줄기의 껍질을 도려서 벗겨낸 다음, 주변의 식료품점에서 구해 온 허브 솔트를 조금 뿌렸다. 
껍질 안쪽에는 제철의 게살을 연상시키는 연분홍빛의 속살이 꽉 차올라 있었다. 한수영의 눈이 반짝였다. 
 
“이거 대체 뭐야? 식물 맞아?” 
“맞아.” 
“샐러드로 먹어도 되나?” 
“당연히 안 되지. 구울 거야.” 
 
나는 주변의 나무를 대충 꺾은 뒤, 잘라낸 야나스프레타의 줄기를 바비큐처럼 꽂아 [마력 화로] 위에 올렸다. 화로를 중불로 맞췄는데도, 7급 종이라 그런지 조리는 꽤 오래 걸렸다. 나는 줄기가 적당히 익었을 때 뒤집기를 몇 번 반복한 후, 추가로 허브솔트를 더 뿌렸다. 
얼마간 시간이 더 지나자, 마치 고기를 구운 듯 고소한 냄새가 주변에 맴돌기 시작했다. 
 
“야, 냄새 죽이네?” 
“잠깐만, 그냥 먹으면 안 돼.” 
 
나는 화로로 손을 뻗으려는 그녀를 만류하며, 옆에서 데우고 있던 찻잔을 건네주었다. 
 
“이거 마시고 먹어.” 
“뭔데?” 
“줄기 진액 끓인 거야. 야나스프레타 줄기는 꼭 이걸 마시고 먹어야 해.” 
 
한수영은 살짝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찻잔을 받아 들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의 표정은 감동으로 변했다. 진액을 모두 마신 한수영은 정신없이 줄기를 뜯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어라 좀.” 
“······장난 아니네 이거. 너 요리사 해도 되겠다.” 
“멸망한 세계에서는 그럴지도 모르겠네.” 
 
볼에 한가득 음식을 채운 채 우물거리는 꼴이 꼭 다섯 살짜리 어린애 같아서 나는 쓰게 웃고 말았다. 
 
[요리를 좋아하는 몇몇 성좌들이 당신의 요리를 궁금해합니다.] 
[빠른 진행과 폭력을 좋아하는 몇몇 성좌들이 불평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으스대며 지켜보기나 하라고 말합니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불타는 지옥의 재앙’ 화룡종과, ‘질문의 재앙’ 명일상을 처치했으니 벌써 재앙은 두 개나 제압되었고, 전개는 순조로웠다. 
곧 깨어난 유중혁은 이현성을 데리고 서쪽의 재앙을 공략하기 시작할 것이고, 북쪽은 ‘방랑자들의 왕’이 처리해줄 것이다. 
이제 주의해야 할 것은 ‘중앙의 재앙’ 뿐. 
나는 야나스프레타 꼬지 하나를 집어 들며, 여전히 기절해 있는 유상아 쪽을 돌아보았다. 
 
“유상아 씨.” 
 
착각일까. 
분명 기절해 있었을 유상아의 입가가 움찔거렸다. 
 
“정신 든 거 알아요. 와서 이거 같이 먹어요.” 
“······.” 
“안 일어나면 그냥 다 먹습니다.” 
 
유상아는 일어나지 않았다. 
어디선가 꼬르륵, 하는 뱃소리가 들려왔다. 
 
“주무시나 보네. 그럼 그냥 우리끼리 다 먹을게요. 아, 너무 맛있다.” 
“······자, 잠깐만요!” 

거의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유상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그 유상아가 이 냄새를 맡고 그냥 누워 있을 리 없다. 
낮에 그렇게 많은 체력을 소비했으니, 배가 고픈 게 당연하다. 
나는 여전히 허겁지겁 볼을 부풀리고 있는 한수영 쪽을 일별했다. 
 
“야. 넌 많이 먹었으면 일어나.” 
“왜?” 
“몰라서 묻냐?” 
“······쳇. 사람 불편하게 하네. 알았어.” 
 
아마 한수영도, 유상아가 진즉에 깨어난 것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상아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 자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 거고. 그렇게 생각하니 이 녀석도 참 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나 한 바퀴 돌고 올게. 다 먹지 말고 몇 개 남겨 놔. 알겠지?” 
 
투덜거린 한수영이 꼬치를 한가득 문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유상아가 천천히 다가왔다. 
 
타닥, 타닥. 
 
마력화로 위에 올려진 꼬치가 먹음직스런 소리를 냈다. 망설이는 유상아를 향해 나는 꼬치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제야 유상아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한 입을 베어 물고, 또 한 입을 베어 물고. 
그렇게 천천히 꼬치 하나를 다 먹은 유상아가 간신히 입을 떼었다. 
 
“······맛있어요.”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누가 지금의 그녀를 보며, 낮에 단도를 휘두르던 그 여자를 떠올릴까. 
 
“천천히 먹어요.” 
 
그럼에도 그녀의 허리에 꽂힌 두 자루의 단도는 낮에 본 그녀의 모습이 꿈이 아니었음을 증거하고 있었다. 
멸망이 시작된 지 한 달. 
새삼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게 느껴졌다. 
유상아는 말없이 꼬치를 먹어 치웠고, 나도 그런 그녀를 보며 간간이 꼬치를 먹었다. 
꼬치는, 역시나 빌어먹게도 맛있었다. 
마치 이 세상의 맛이 아닌 것처럼······. 
타오르는 마력 화로의 불길을 보며, 유상아가 중얼거렸다. 
 
“······이거, 정말 현실일까요.” 
“아마도요.” 
“이제 되돌아갈 수 없는 거겠죠?” 
“그럴 겁니다.” 
 
희미하게 떨리는 유상아의 손이 애처로웠다. 
인간을 죽인 손.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앗아간 손이었다. 
누군가의 피를 묻혔던 그 손으로, 이제 유상아는 자신의 눈을 가렸다. 그녀의 어깨가 간헐적으로 들썩였다. 어떤 흐느낌도 새어 나오지 않은 것은 아마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그 말이 위로가 되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유상아의 마음을 볼 수 없었으니까. 
유상아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흐른 눈물이 길바닥에 떨어졌고, 먹다 남은 꼬치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더 울었을까. 
울음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7급 식물종 ‘야나스프레타’의 줄기는, 진액을 마시지 않고 복용하면 강력한 수면 효과를 발휘한다. 
 
나는 색색거리며 곯아떨어진 유상아를 잠시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정말로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그건 유상아를 향한 말이었지만. 
 
“그러니······.” 
 
동시에 유상아를 향한 말이 아니기도 했다. 
 
“슬슬 정체를 밝혔으면 좋겠는데, 어때?” 
 
폐허가 된 도시에서, 드문드문 야생괴수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내 혼잣말을 혼잣말로 만드는 침묵. 
나는 유상아를 보며 말을 이었다. 
 
“시치미를 떼시겠다 이거지?” 
“······.” 
“무슨 목적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나를 봐 왔다면 이제 알고 있을 텐데?”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어둠 속에서 새하얀 칼날을 드러냈다. 
 
“나는 내 목적에 다다르기 위해서라면, 무엇도 망설이지 않아.” 
 
고요히 내민 칼날이, 유상아의 하얀 목덜미에 닿았다. 
 
“그러니 빨리 입을 여는 편이 좋을 거야. 너희들의 소중한 화신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이제부터는 치킨 게임이었다. 
잠시 기다리던 나는, 조금씩 그녀의 목에 칼날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칼날이 1센티미터쯤 그녀의 목을 파고들었고, 순식간에 맺힌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상아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당신의 정신 충격을 감쇄합니다.] 
 
광풍과 함께 나는 유상아의 몸에서 튕겨져 나왔다. 
 
고오오오! 
 
심장을 저릿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존재감. 유상아의 몸에서 휘황한 광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를 보는 유상아의 탈색된 동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동공 안에서 맴도는, 저 먼 성운(星雲)의 그림자가 있었다. 천둥이라도 치는 듯한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터뜨릴 듯 울렸다. 
 
[하찮은 인간이.] 
 
나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씩 웃었다. 
드디어 나타나셨군. 
 
빌어먹을 올림포스(Olympos)의 성좌들이.
 
 
 
 
 
< Episode 19. 특이점 (1) > 끝

< Episode 19. 특이점 (2) >
 
 
 
 
 
 
‘멸살법’의 세계에서 성좌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유 성좌들. 
그리고 특정한 성운(星雲)에 소속된 소속 성좌들. 
 
[감히 하찮은 인간이 위대한 별들을 능멸하는가?] 
 
그 쩌렁쩌렁한 기세에, 나는 침을 삼켰다. 
지구에 신화의 거점을 둔 성운에는 유명한 것이 몇 가지 있다. 
북유럽 신화의 <아스가르드>나 묵시록의 <에덴> 같은 것들. 그리고 그것들 못지않게 유명한 것이 바로, 눈앞의 녀석이 소속된 <올림포스>였다. 
 
“······폼 잡지 마. 신도 아니면서.” 
 
그 말에, 유상아의 표정이 변했다. 
갑자기 성좌가 직접 강림을 시도하기에 조금 쫄긴 했지만, 역시나였다. 
 
“시나리오 초반부의 개연성은 올림포스의 신들을 결코 허락하지 않아. 안 그래?” 
 
[어찌······!] 
 
개연성의 균형을 맞출 존재도 없으니, 올림포스 12신급이 강림했다면 서울 일대는 벌써 개박살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 파급으로 거대한 후폭풍이 닥쳐왔겠지. 올림포스의 신들 중 상당수가 하반신으로 생각하는 놈들이긴 해도, 아주 돌대가리만 있지는 않은 것이다. 
나는 유상아의 전신을 감싸고 넘실거리는 마력의 실을 보며 말했다. 
 
“지금의 개연성으로 나올 수 있는 건 당신이 한계인 모양이네. ‘버려진 미로의 연인’.” 
 
한국에 위인급 성좌가 있듯, 올림포스에도 위인급 성좌들은 있다. 
사실, 올림포스의 ‘대다수’는 저런 위인급 성좌들이다. 
버려진 미로의 연인. 
그것은 바로 테세우스의 연인인 ‘아리아드네’의 수식언이다. 
 
“개연성 코스트가 제일 낮은 당신을 대표로 보내다니, 올림포스도 어지간히 쪼잔하구만.” 
 
[닥쳐라! 감히······!] 
 
쿠구구구. 
 
그녀의 주변에서 넘실대는 마력의 실들이 지상을 뚫고 폭음을 만들었다. 단지 기세를 발출한 것만으로 일대의 땅이 갈라졌다. 
과연, 아리아드네라고 무시할 게 아니다. 
이야기의 힘을 업은 성좌들은 아무리 약하다 해도 비성좌보다는 강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안다. 
그녀는, 절대로 나를 공격할 수 없다. 
 
파츠츠츠츠! 
 
허공에 튀어 오르는 스파크. 
개연성의 족쇄가 움직인 것이다. 
 
상태를 보아하니 완전 강림은 아닌 것 같지만, 화신의 의지를 빼앗아 일부만 강림했다고 해도 개연성은 엄청나게 소모된다. 
게다가 아리아드네는 거대 성운 소속의 성좌. 
그녀의 움직임은, 반드시 다른 강력한 존재들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쿠우우우우우― 
 
서울 돔의 하늘에서 [그레이트 홀]이 울부짖고 있었다. 
미증유의 공포감에 귀가 먹먹해지고 전신에 오한이 돌았다. 
아리아드네가 강림한 유상아의 안색이 창백하게 물들어갔다.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이것이 ‘성좌’들의 현실이다. 
그들은 스타 스트림의 최강을 논하는 존재들이지만, ‘개연성’이라는 무거운 족쇄를 결코 벗어던질 수 없는 것이다. 
 
“이계의 신격들이 당신을 눈치챈 것 같으니까 말이야.” 
 
[······어떻게 인간이 그런 것을 알고 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나랑 실랑이하려고 나온 건 아니지? 당신 대신 개연성을 감내해주고 있는 성좌들도 그걸 원하는 게 아닐 텐데?” 
 
꽈르르릉! 
 
그레이트 홀을 중심으로 천둥이 쳤다. 
역시, 위인급 성좌가 직접 강림하기엔 아직 이른 시점이다. 
나는 말을 서둘렀다. 
 
“나는 세 가지 질문을 할 거야. 만약 당신이 내 질문에 대답해 준다면, 나 역시 당신의 질문에 대답하겠어.” 
 
[삼문답 교환을 하자는 것인가?] 
 
“그래.” 
 
삼문답 교환. 
이것은 본래 개연성의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한 성좌들의 거래 방식이었다. 
아리아드네가 못마땅하다는 듯 나를 노려보았다. 
 
[인간이 성좌들의 거래 방식을·····.] 
 
“할 거야 말 거야?” 
 
[······기다려라.] 
 
유상아의 눈꺼풀이 닫혔다. 아마 아리아드네는 지금 자신의 통신망을 통해 올림포스 소속의 다른 성좌들과 교신하고 있을 것이다. 
 
[흥이 깨지는 걸 싫어하는 한 성좌가 당신의 제안에 흥미를 가집니다.] 
 
아무래도, 올림포스의 구경꾼들도 나타난 모양이고. 
마침내 교신을 마친 아리아드네가 눈을 떴다. 
 
[문답을 허락한다.] 
 
그리고 메시지가 들려왔다. 
 
―신성한 삼문답(三問答)이 시작됩니다. 
―양측은 세 가지 질문과 대답을 교환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질문에는 진실만을 대답해야 합니다. 
―양측은 각자 한 번씩, 문답의 대답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질문과 대답이 온전히 교환되기 전까지, 문답은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하겠어.” 
 
[좋다.] 
 
―첫 번째 질문권을 사용합니다. 
 
“하나, 왜 너희들이 유상아의 몸에 깃들어 있는 거냐?” 
 
[······.] 
 
“너희 터전은 대륙 반대쪽에 있을 텐데, 그쪽 시나리오 신경 쓰기도 바쁘지 않아? 왜 이곳에······.” 
 
[이번 세계의 ‘특이점’을 감시하기 위해서다.] 
 
―첫 번째 대답을 얻었습니다. 
 
“특이점?” 
 
[그것은 두 번째 질문인가?] 
 
빌어먹을, 제법 똑똑한데. 
‘질문권’은 질문자가 어렴풋하게나마 대답을 납득한 순간 사라진다. 
 
“아니야. 이제 그쪽이 물어봐.” 
 
―성좌 ‘버려진 미로의 연인’이 첫 번째 질문권을 사용합니다. 
 
[그대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 너희들이 감시하는 특이점 중 하나.” 
 
―성좌, ‘버려진 미로의 연인’이 첫 번째 대답을 얻었습니다. 
 
당황한 아리아드네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지?] 
 
“역시 내가 특이점이었나 보네.” 
 
그냥 떠본 거였는데, 설마 맞을 줄이야. 
아리아드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대는······.] 
 
“화내지 말라고. 너희들도 자주 하는 짓이잖아?” 
 
[흥이 깨지는 걸 싫어하는 한 성좌가 당신의 재치에 즐거워합니다.] 
 
아리아드네의 기세가 살벌해졌다. 
하지만 본래 ‘삼문답 교환’은 이런 식으로 해야 한다. 정말로 상대방의 질문에 곧이곧대로 대답해 주면 손해만 볼뿐이니까. 
자신의 질문권은 유용하게 사용하고, 상대의 질문권은 헛되이 날려버리는 것. 
그 치열한 수싸움이 ‘삼문답 교환’의 본질인 것이다. 
나는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질문권을 사용합니다. 
 
“그럼 두 번째 질문. ‘특이점’이라는 게 대체 뭐지?” 
 
[그대와 같은 존재들을 뜻한다.] 
 
어쭈, 머리 좀 쓰는데. 
하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로 납득할 수 없다. 
 
“제대로 대답해. 계속 빙빙 돌리다가 끝내고 싶은 건 아니지?” 
 
[······원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신탁’에 등장하는 존재들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지 그래? 전혀 감이 안 온다고.” 
 
잠시 고민하던 아리아드네가 말을 이었다. 
 
[본래 그대를 감시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대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지.] 
 
······우연? 
 
[우리가 감시하려 했던 것은 다른 존재다. 거대한 운명의 바퀴를 등에 업고, 개연성을 파괴하는 존재. 특이점이란 그런 자들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특이점’이 대체 무엇인지 바로 이해했다. 
 
―두 번째 대답을 얻었습니다. 
 
올림포스 녀석들, 이번 회차에서 벌써 유중혁을 찾아낸 모양이다. 
올림포스 급의 성운이라면 다량으로 생산되는 필터링들을 검색해 그 정보를 역추적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놈들에게는 뛰어난 정보 추적자인 ‘헤르메스’가 있으니까. 
게다가 대성좌급의 존재들이라면, 유중혁에 의해 세계선이 어긋나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을 것이고······.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본래 ‘회귀자’에 대한 정보는 지금의 아리아드네가 닿을 만한 정보가 아니었다. 
 
[답변이 되었다면 이번에는 내 차례다.] 
 
―성좌 ‘버려진 미로의 연인’이 두 번째 질문권을 사용합니다. 
 
[그대는 다음 <배후 선택> 때 누구를 선택할 것이냐?] 
 
이건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 
설마 올림포스 쪽에서도 나를 노리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흥이 깨지는 걸 싫어하는 한 성좌가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한반도를 좋아하는 몇몇 성좌들이 긴장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자신의 수식언을 연호합니다.] 
 
곤란한데. 어쩔 수 없지. 
 
“대답하지 않겠어. 벌써 누구를 뽑을지 말하면 재미없잖아?” 
 
―당신은 ‘거절권’을 사용하였습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질문에 대한 거절권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예상했다는 듯, 곧바로 아리아드네의 말이 이어졌다. 
 
―성좌 ‘버려진 미로의 연인’이 세 번째 질문권을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다. 그대는 어떻게 우리가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냐?] 

제길,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군. 
아마 아리아드네도 열심히 생각한 결과일 것이다. 
단순히 내 ‘정체’를 묻기만 해서는 또 대답을 돌릴 수 있으니까, 가능한 구체적인 질문을 만들어 낸 것이겠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책을 열심히 읽었어.” 
 
[뭐?] 
 
“책을 열심히 읽다 보니까, 알게 됐다고.” 
 
대답을 얻었다는 말이 안 뜨는 걸 보니, 역시 이걸로는 납득이 안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여기서 ‘멸살법’ 이야기를 꺼낼 순 없었다. 어차피 꺼내봐야 필터링 처리가 될 테니 저쪽에서도 납득을 못할 것이고. 그렇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기도 싫다. 
 
“원래 우리 한국인들은 당신네들 신화를 잘 알아.” 
 
[······무슨 뜻이지?] 
 
“우리나라에서 당신들은 꽤 유명인사거든. 너무 대중적이라 애들 만화로 제작될 정도야. 당신도 우리나라에서 엄청 유명한 거 모르지?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쪽이 올림포스 계통이란 건 알 수 있을걸?” 
 
흔들리는 눈빛으로, 아리아드네의 당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럴 리가 없다. 겨우 동방의 작은 나라가······.] 
 
“크레타 섬의 미궁.” 
 
[······!] 
 
“반인 반수의 괴물.”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당신을 잊은 연인. 낙소스 섬의 유폐. 주신(酒神)과의 정사······ 계속할까?” 
 
[그, 그만! 잘 알겠으니 그만하라!] 
 
―성좌, ‘버려진 미로의 연인’이 세 번째 대답을 얻었습니다. 
 
완전히 상처받은 얼굴의 아리아드네가 입을 뻐끔거렸다. 
 
[어떻게 하찮은 소국의 인간이 나의 이야기를······.]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어영부영 넘기는 데 성공했다. 
괜히 아리아드네가 개연성 코스트가 낮은 게 아니지. 
얼빠진 그녀가 올림포스의 대표로 나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레이트 홀]의 움직임이 점점 더 불안해지고 있었다.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 이번에 너희들이 받았다는 ‘신탁’ 내용은 뭐지?” 
 
한참이나 고민하던 아리아드네는, 보이지 않는 저울을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다.] 
 
―성좌 ‘버려진 미로의 연인’이 거절권을 사용하였습니다. 
―모든 질문과 대답이 온전히 교환되었습니다. 
―신성한 삼문답이 종료됩니다. 
 
예상은 했지만, 아쉬웠다. 
사실 마지막 질문이 제일 중요한 것이었는데. 
 
[흥이 깨지는 걸 싫어하는 한 성좌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십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뢰들을 보며, 아리아드네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의 남편이 그대의 이야기를 궁금해하여 잠시 여흥에 어울려줬다만, 장난은 여기까지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그녀가 목소리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곳에 강림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우리 올림포스는 그대에게 엄중히 경고한다. 그대는 우리가 행하는 일을 방해하지 마라. 우리는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움직이고 있으며. 이 여자는 훌륭한 멸망의 방파제로 자라나게 될 것이다.] 
 
“왜 그 여자지?” 
 
[이유를 찾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운명의 실을 잣는 세 자매조차, 그 이유는 알지 못하니.] 
 
젠장. 올림포스 녀석들은 걸핏하면 운명 핑계를 댄다더니, 원작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시나리오에 구속된 화신이여. 운명의 방향이 틀어지고 있다. 모든 별들의 흐름이 한곳으로 모이고, 성좌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무슨 소리지? <기간토마키아>를 말하는 거냐?” 
 
[······그런 정보까지 알고 있다니. 정말 놀랍구나. 하지만 정보를 알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오만을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파츠츠츠츠츳! 
 
유상아의 몸 주변에서 튀는 스파크가 한계치에 이르렀다. 
개연성 후폭풍의 징조였다. 
 
[찰나의 꼭두각시인 그대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라. 종막이 도래하였을 때, 그대가 만약 올바른 편에 서 있지 않는다면―] 
 
그때, 하늘의 벼락이 유상아에게 내리꽂혔고, 새하얗게 타오른 그녀의 몸속에서 아리아드네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아아아아······. 
 
꽈지지지직! 
 
시공간이 통째로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이내 유상아의 몸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나는 황급히 달려가 유상아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 순간, 하늘 위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지금 고개를 들어서는 안 된다. 
 
누구도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만약 위를 보게 되면······.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당신의 정신 충격을 상쇄합니다.] 
 
그러나 나는 홀린 듯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먼 하늘의 [그레이트 홀]에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아리아드네의 힘을 소멸시킨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혓바닥 같기도 하고, 촉수 같기도 한. 
하지만 결국 무엇과도 닮지 않은 무엇. 
어떤 형용도 비유도 불가능한, 언어를 넘어선 공포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이계의 신격(神格). 
 
시간이 느려진 것 같았고, 이마와 등허리에서 쉴 새 없이 땀이 흘러내렸다. 숨이 멎을 듯한 고통과 자아를 지워버릴 듯한 시간의 흐름.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눈을 깜빡였을 때, 그레이트 홀은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문 채 몸을 떨었다. 
 
저것이 내가 싸워야 할 놈들이다. 
 
멀리서 한수영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흥분한 괴수종들의 포효가 어두운 달밤을 적셨고, 내리치는 벼락에 몸을 숙인 인간들의 비명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종막(終幕)과 관련된 시나리오에는 여러 이름들이 있었다. 
 
라그나로크. 기간토마키아. 하르마게돈······. 
 
아리아드네가 말하는 종막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아는 것과 다른 무언가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바였다. 
원작과 똑같이 흘러가서는, 결코 내가 원하는 끝에 도달할 수 없으니까. 
 
나는 쓰러진 유상아를 조심히 눕히며 생각했다. 
툭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육체. 
자신의 배후성에게 지지 않으려는 듯, 꽉 쥔 유상아의 주먹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인간은 나약하다. 
 
하지만 그저 거대한 개연성만을 두려워하는 별들이 간과하는 것도 하나 있다. 
지구의 모든 신화는, 결국 그들이 무시하는 나약한 인간들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나는 쥐어진 유상아의 주먹에, 가볍게 내 주먹을 맞대었다. 
 
[당신의 영혼 깊은 곳에서 ‘설화’의 힘이 꿈틀거립니다.] 
[당신의 첫 번째 ‘성흔’이 발아를 준비합니다.] 
 
그 어떤 신화에도 무너지지 않을 ‘이야기’를 쌓을 것이다. 
 
 
* 
 
 
그 시각, 은빛의 늑대가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키잇······ 빌어먹을 늑대.’ 
 
패러사이트의 여왕, 앤티누스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기껏 새로 얻은 몸이 하필 이뮨타르의 늑대라니. 
물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천운인 상황이었다. 
개연성에 몸이 찢어지는 순간, 근처에 의식을 잃은 리카온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후두둑. 
 
재앙의 파편에 맞은 리카온의 몸에서 검은 피가 쏟아졌다. 길잡이는 재앙에 대항할 수 없는 몸. 이제 앤티누스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새로운 숙주에 기생한다.’ 
 
앤티누스는 [질문의 재앙]을 죽이던 인간들을 생각하며 파르르 떨었다. 
그의 행성을 멸절시킨 재앙을 막아내던 인간들. 그녀는 그 믿을 수 없는 광경 앞에서 절망했고, 다시금 결심했다.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고향인 클로노스를 망가뜨린 지구인들을, 반드시 멸종시킬 것이다······. 그녀의 더듬이가 반응한 것은 그때였다. 
 
‘이 기운은?’ 
 
어디선가 느껴지는 친숙한 기운. 마치, 과거 클로노스의 대충왕종에게서나 느낄 수 있었던 힘. 앤티누스는 걸음을 서둘렀다. 
만약 이만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에게 기생할 수 있다면, 복수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장소에서, 그녀는 뜻밖의 존재와 마주쳤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지구에 이런 존재가? 
 
“키, 키이잇―!” 
 
본능적으로 소리를 내지른 순간, 달빛을 받아 번뜩이는 소년의 눈이 소름 끼치는 빛을 냈다. 
 
“처음 보는 벌레다!” 
 
소년, 이길영이 앤티누스를 향해 희게 웃었다.
 
 
 
 
 
< Episode 19. 특이점 (2) > 끝

< Episode 19. 특이점 (3) >
 
 
 
 
 
눈을 떴을 때는 벌써 아침이었다. 
벌떡 일어난 나를 보며, 한수영이 입술을 비죽였다. 
마지막 불침번이 저 녀석이었던 모양이다. 
 
“뭔 악몽이라도 꿨어?” 
“조금.” 
 
밤새 타오른 장작의 불씨가 하얗게 새어 있었다. 나는 불씨를 적당히 헤집으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무의식중에 발동한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본 정경······. 
길영이 녀석,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유상아 씨는?” 
“정찰 갔어.” 
 
한수영은 스마트폰을 만지며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넌 뭐 보고 있냐?” 
“소설.” 
“니꺼?” 
“그럼 누구 걸 보냐?” 
 
하긴, 이런 상황에서 다른 소설 읽는 것도 이상한 일이긴 하다. 
 
“항상 궁금했는데, 작가들은 자기가 쓴 거 보면 재밌냐?” 
“난 재밌어.” 
“뒷 내용을 다 아는데도?” 
 
사실 별 생각 없이 던져 본 말이었는데, 관자놀이를 만지던 한수영이 의외의 대답을 했다. 
 
“같은 내용을 읽어도 이야기가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어.” 
“뭐?” 
“작가라고 자기 소설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지는 않아. 문득 돌아보면 여기저기 구멍이 많이 나 있지. 결국 독서라는 건 그 불규칙적인 구멍들을 나름대로 이어나가는 작업인 거야.” 
“뭔 소린지 모르겠는데.” 
“······시간이 지나면 내가 쓴 것도 남이 쓴 것처럼 볼 수 있다는 뜻이야. 인간은 누구나 궁극적으로는 스스로에게 타자(他者)라고.” 
 
생각지도 못한 말이어서 나는 조금 감탄했다. 
한수영이 그런 어려운 말도 할 수 있을 줄이야. 
 
“하긴, 생각해 보니 넌 더 그렇겠다. 넌 진짜로 남의 소설 갖다 쓴 거잖아.” 
 
한수영이 빽 소리를 질러서 나는 잠시 귀를 막았다. 
아니, 그러게 누가 표절 하랬나? 
스마트폰을 끈 한수영이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시나리오 시작까지 기다리는 거지.” 
“누가 그런 대책 없는 이야기 듣고 싶대? 제대로 된 계획이 있을 거 아냐.”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일부러 한수영이 말하게 내버려 두었다. 실제로 그녀는 계속해서 떠들었다. 
 
“서쪽은 유중혁이 맡고, 북쪽은 그 방랑자들의 왕인가 뭔가 하는 여자가 맡는다고 쳐. 중앙은 어쩔 건데?” 
“다 같이 막는 거지 뭐.” 
“쉽게 가는 방법이 있을 텐데? 잊었어?” 
 
나는 순간 멈칫했다가 한수영을 노려보았다. 
 
“너 그것도 표절했냐?” 
“······안 했거든? 그냥 내 소설 보다가 문득 떠오른 것뿐이야.” 
 
한수영이 입술을 비죽 내민 채 얼버무렸다. 
 
“아무튼, 내 말 맞지? 내가 알기로 ‘중앙의 재앙’은 쉽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어.” 
 
확실히, 그녀의 말은 맞았다. 
실제로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다섯 번째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모든 재앙을 막을 수 있게 된다. 한수영이 채근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쉽게 갈 거지?” 
“그건······ 일단 가면서 생각하자.” 
 
때마침 멀리서 주변을 둘러보고 온 유상아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한수영이 툴툴거렸다. 
 
“너 저 여자 오고 나서 어쩐지 기분 좋아 보인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쳇. 신뢰 못 받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이제 시나리오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5일. 
우리는 한강을 따라 서쪽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목적은 크게 둘이었다. 
하나는 한강 일대에서 행방불명된 공필두를 찾는 것이었고, 둘은 근방의 괴수종을 잡아 코인을 모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코인 이벤트’ 중이니까, 뽕을 뽑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뽑아야 한다. 
 
“유상아 씨, 왼쪽으로! 한수영 너는 뒤를 맡아!” 
 
이동하는 족족 보이는 7급종을 우리는 남김없이 사냥했다. 
유상아까지 사냥에 가세하자, 7급종은 물론이거니와 어지간한 6급종까지도 널널히 사냥이 가능했다. 나는 그런 유상아를 보며 생각했다. 
 
아마 올림포스 녀석들은 모를 것이다. 
내가 놈들을 불러냈던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것을. 
 
할당된 개연성을 사용한 녀석들은 당분간 유상아에게 함부로 간섭할 수 없다. 전투가 끝난 후, 나는 유상아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유상아 씨. 앞으로 성흔은 한 번에 하나만 쓰세요.” 
“아······ 죄송해요. 지난번에 너무 민폐였죠?” 
“아뇨,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성운의 지원을 받는 존재는 특별하다. 
물론 성운의 지원을 받는다 해서 해당 성운의 모든 성좌가 그녀를 후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스타 스트림의 법칙은 화신 하나에 성좌 하나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니까. 
법칙을 거스른 대가는, 결국 성좌들과 화신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성좌들이야 자기들끼리 피해갈 방법이 있다고 해도 문제는 화신 쪽이다. 
 
“여러 개의 성흔을 계속 중첩해서 사용하는 것은 유상아 씨의 몸에 부담을 줄 겁니다.” 
 
빌어먹을 올림포스 놈들은 말해주지 않았겠지만, 하나의 존재가 감당할 수 있는 이야기에는 한계가 있다. 
모든 성흔은 성좌의 역사를 품고 있고, 밀도 높은 시간 속에 마구잡이로 섞여든 역사들은 인간의 영육(靈肉)을 손상시킨다. 
만약 유상아가 지금처럼 다수 성좌들의 성흔을 빌려 쓰게 된다면, 그녀의 남은 수명은 순식간에 줄어들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아마 앞으로 길어야 1년······. 
유상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순간 나는 뭔가를 깨닫고 입을 열었다. 
 
“혹시 알면서 그랬던 겁니까?” 
 
고요히 눈을 내리깐 유상아가, 사이를 두고 말했다. 
 
“독자 씨는 아직도 제가 유능한 회사원 유상아로 보이세요?” 
 
유상아는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독자 씨랑은 달라요. 바뀐 세상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여긴 토익도 자격증도 봉사 점수도 다 쓸모 없는 세상이니까.” 
“강해지면 그게 모두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조금은요.” 
 
그녀의 말은 정답이었다. 
실제로 강함은, 세상의 문제를 아주 조금 해결해줄 뿐이다. 
 
“이 세계에 유용한 스펙을 쌓기로 했어요. 제가 할 줄 아는 건 그것뿐이에요.” 
 
그렇게까지 말하는 유상아의 손등에는 무수한 상처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 상처들이 내겐 커다란 구멍처럼 느껴졌다. 한수영은 말했다. 독서라는 건 불규칙적인 구멍을 나름대로 이어나가는 작업이라고. 
만약 그것이 독자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나는 아직 뭔가를 제대로 읽기엔 턱없이 부족한 인간인지도 모른다. 
 
위이잉. 
 
품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스마트폰을 열어보니 노란 알림 메시지가 떠 있었다. 
 
―한동훈 : 형, 괜찮아요? 
 
은둔한 그림자의 왕, 한동훈이었다. 
나는 잠시 멍해져서 그 메시지를 읽었다. 
 
―한동훈 : 최근에 인터넷이 잘 안 터져서 연결이 늦었어요. 제 능력으로도 힘들어서... 
 
꽤 오래전부터 메시지를 보내 왔는지, 메시지는 제법 쌓여 있었다. 
아마 뒤늦게 인터넷이 터지면서 그동안 쌓인 메시지들이 한꺼번에 도착한 듯했다. 
나는 분위기를 바꿀 겸, 유상아에게 그 메시지들을 보여주었다. 
스르르 피어나는 유상아의 미소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래도, 나도 완전히 무능한 독자는 아닌 모양이라고. 
 
 
* 
 
 
메신저를 통해 연결이 된 것은 한동훈 하나였지만, 나는 한동훈을 통해 사람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한동훈 : 저희는 용산구 쪽에 있어요. 길영이도 같이 있고요. 
―김독자 : 길영이도 거기 있어? 
―한동훈 : 네. 
 
주요 일행들의 위치는 대충 파악이 끝났다. 
이현성과 정희원의 위치도 [전지적 독자 시점]을 통해 확인했으니, 중요한 건 다시 모이는 것뿐. 
정민섭이나 이성국 같은 녀석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거기까지 신경 쓰긴 어려웠다. 그래도 사전 지식이 조금은 있는 녀석들이니, 어련히 알아서 헤쳐 가겠지. 
이지혜는······ 뭐, 유중혁이 알아서 할 테고. 
 
―김독자 : 당분간 용산 벗어나지 말고 있어. 곧 그리로 갈 테니까.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이랑도 연락 시도해 보고.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또 통신이 끊긴 모양이었다.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슬슬 강을 건너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가 위치한 곳은 한강 이남. 그리고 용산구는 한강 이북에 있었다. 
 
“저걸 건너자고?” 
 
한수영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며 물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한강을 바라보았다. 
 
갸오오오오. 
 
넘실거리는 물살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그림자들. 한때 동호대교 인근을 오가던 어룡들이, 다시 수위가 차오른 한강을 지배하고 있었다. 
줄곧 강을 따라 왔지만 한 번도 건널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저 녀석들 때문이었다. 
 
“천호대교 봤잖아? 죄다 끊겼어.” 
 
어룡은 7급 괴수종. 잡으려면 못 잡을 것도 없지만, 문제는 숫자였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저만한 숫자를 모조리 상대하려면 며칠이 걸려도 부족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헤엄을 쳐서 한강까지 건넌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일단 강을 따라 이동해 보자. 안 끊긴 곳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몇 시간을 들여 강의 하류로 이동했지만, 안타깝게도 멀쩡한 다리는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우리가 발견한 것은 한 무리의 방랑자들이었다. 
한수영이 인상을 쓰며 병장기를 쥐려는 순간, 먼저 나선 것은 유상아였다. 그녀가 배낭에서 고기를 꺼내자, 한수영이 짜증을 냈다. 
 
“지금 뭐하는 거야?” 
“굶주린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뭐? 그거 나눠 주겠다고? 제정신이야? 아포칼립스에 제일 위험한 게 사람이라는 것도 몰라?” 
“전 마음만 먹으면 저 사람들 모두 죽일 수 있어요.” 
 
순간 유상아의 얼굴에 맴돈 살기에, 한수영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저들을 모두 살릴 수도 있어요.” 
 
유상아는 말없이 괴수종의 고기를 떼어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몇몇 사람들은 그녀에게 감읍하며 고개를 숙였다. 
 
“야, 저거······.” 
“어차피 남는 거야. 줘도 상관없어.” 
 
나는 발광을 하려는 한수영을 내버려 두고, 가방에 있던 ‘야나스프레타’ 줄기를 꺼냈다. 
세계가 이 모양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수렵’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쯤 전 세계에서는 온갖 괴수종에 관한 연구가 한창일 것이다. 
내게서 줄기를 받은 남자가 연신 허리를 굽혔다. 
 
“아! 고맙습니다, 정말······.” 
“아닙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나눠야죠.” 
 
물론, 나는 유상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다. 내 모든 선행은 결국 계획된 경제활동일 뿐이니까. 
 
[소수의 사람들이 당신에게 큰 호감을 가집니다.] 
[등장인물 ‘신유인’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등장인물 ‘마강철’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새로운 인물들이 책갈피에 추가되었습니다.] 
 
한수영이 비꼬듯 말했다. 
 
“가식 쩐다 너.” 
“······나도 가끔 착한 일은 해.”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선행에 감동합니다.] 
[4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한수영이 투덜거리며 유상아 쪽을 보았다. 
 
“젠장, 저런 여자는 소설 속에나 있는 줄 알았는데.” 
 
동감이 가는 말이었다. 멸망이 오기 전에도 유상아는 현실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소설의 여주인공 같았지. 
이제 현실이 소설이 되어버렸으니 별다를 것도 없겠지만······. 
 
그때, 방랑자들 무리 속에 있던 한 아이가 내게 다가왔다. 
길영이 또래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 
 
“무슨 일이니?” 
 
도톰한 볼살에 서양적인 눈매. 영롱한 붉은 기가 감도는 눈동자. 이국적인 귀여움이 물씬 풍기는 얼굴이었다. 
곧장 내 앞까지 온 아이는, 나를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아.” 
 
예의가 바른 아이였다.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아이가 말했다. 
 
“이제 안 계세요.” 
“두 분 다?” 
 
아이의 고개가 작게 움직였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보호자도 없는 어린애가 다섯 번째 시나리오까지 혼자서 살아남다니. 
어디서 뚝 떨어지기라도 하지 않는 한, ‘멸살법’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얘기다. 
······잠깐만, 떨어져? 
내가 [등장인물 일람]을 가동한 순간, 아이가 다시 말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아.” 
 
설마 정말 인사만 하러 찾아온 거야? 
나는 아이를 붙잡으려다, 반사적으로 곁에 있던 한수영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마침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조심히 가렴.” 
 
곧 날이 저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오늘은 이 근처에서 쉬죠.” 
 
우리는 잠을 청할 만한 장소를 물색했다. 한강 근처는 불을 피워도 추웠기 때문에 반쯤 무너진 폐건물을 이용하기로 했다. 단단히 벼르고 있던 한수영이 유상아를 향해 경고했다. 
 
“두고 봐. 아까 그 자식들 다시 찾아올 테니까. 우리 무기 탐내던 거 못 봤어? 분명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니까?” 
 
한수영은 인간이란 건 다 악인이며, 전부 선의를 악의로 보답하는 쓰레기라고 천명했다. 나는 유상아의 표정을 살피다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아포칼립스라고 다 나쁜 사람만 있는 건 아냐.” 
“아니, 다 나빠. 거의 다 나쁘다고.” 
 
그리고 한 시간이 흘렀다. 
 
“곧 올 거야. 이제 침 질질 흘리면서 올 거라니까.” 
 
두 시간이 흘렀다. 
 
“음, 인내심이 강한 놈들이네.” 
 
세 시간이 흘렀다. 
 
“······이럴 리가 없는데?” 
 
마침내 네 시간 뒤, 바깥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 
유상아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고, 한수영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거봐, 내가 뭐랬어?” 
 
병장기를 꺼낸 한수영이 으르렁거리는 순간, 누군가가 폐건물 안쪽으로 들어왔다. 
 
“저······ 계신가요?” 
 
벌떡 일어나려던 한수영이 멈칫했다. 
찾아온 것은, 어린 여자아이였다. 
낮에 나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던 아이. 
살짝 볼이 붉어진 아이가 뭔가를 내밀었다. 
 
“저, 이거······.” 
 
어디서 가져 왔는지 돌돌 만 이불보가 그곳에 있었다. 
우리가 추울까 봐, 근처에서 모포를 구해 온 모양이었다. 
한수영은 깜짝 놀란 얼굴이었고, 유상아는 멍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아포칼립스라 해도 항상 선의가 악의로만 보답받지는 않는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애로운 미소를 짓습니다.] 
[2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일행을 대표해서 나선 것은 유상아였다. 
 
“고마워, 잘 쓸게.” 
“네에······.” 
“그런데 혼자니? 이렇게 늦은 밤에 돌아다니면 위험해.” 
“지금은 어디든 마찬가지예요.” 
 
뭘 그런 걸 걱정하냐는 투의 말투에, 유상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우리랑 같이 있을래?” 
“네?” 
“우리랑 같이 있으면 괜찮을 거야.” 

유상아는 허락을 구하듯 내 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이의 대답이 더 빨랐다. 
 
“폐 끼치기 싫어요.” 
 
꾸벅 고개를 숙인 아이가 쪼르르 달아나려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암기가 아이의 발 앞에 툭 꽂혔다. 깜짝 놀란 아이가 엉덩방아를 찧었고, 한수영의 살벌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잠깐만. 넌 못 돌아가.” 
“지금 무슨 짓이죠?” 
 
유상아가 한기가 풀풀 흩날리는 목소리로 한수영을 보았다. 그러나 한수영은 나를 보고 있었다. 
 
“김독자,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너도 그래서 여기 묵자고 한 거잖아?”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젠장, 눈치 못 챘나 싶었는데······. 오산이었다. 보는 족족 [특성 간파]부터 사용하는 이 녀석이 모를 리가 없지. 한수영이 말했다. 
 
“아하, 또 위선 떨 거야? 상대가 아이라고?” 
“······.” 
“이번에도 착한 역할만 하겠다 이거지? 그럼 악당인 이 몸이 해결해줘야겠네.” 
 
손을 꺾으며 다가서는 한수영을, 유상아가 막았다. 
 
“멈추세요.” 
“비켜. 네가 죽일 거야?” 
“갑자기 평범한 애를 왜 죽인다는 거죠?” 
“평범한 애?” 
 
한수영이 피식 웃더니, 아이를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멈추라고 했죠.” 
 
동시에 유상아의 단도가 한수영의 목을 겨누었다. 곧 한수영이 십여 기에 달하는 아바타를 소환했다. 한수영이 으르렁거렸다. 
 
“김독자, 빨리 설명해. 내가 빡돌아서 다 죽여버리기 전에.” 
 
······결국 이렇게 되는군. 
나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 애는······.” 
 
무구한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를 보며,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감을 느꼈다. 
 
“······닷새 뒤, 서울을 멸망시킬 겁니다.” 
 
유상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만약 못 발견했으면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지만, 이젠 어쩔 수가 없게 되었다. 
이 빌어먹을 시나리오는, 결코 우리가 원하는 해피 엔딩으로 향하지 않는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미소를 짓습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해당 시나리오의 전개에 흥미를 가집니다.] 
 
성좌들의 메시지가 그토록 증오스럽게 느껴진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 애가, ‘다섯 번째 시나리오’의 마지막 재앙입니다.”
 
 
 
 
< Episode 19. 특이점 (3) > 끝

< Episode 19. 특이점 (4) >
 
 
 
 
 
그날 밤, 아이는 죽지 않았다. 
유상아가 죽이기를 원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것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맘대로 해.” 
 
씩씩거리며 나간 한수영이 사라졌고, 폐건물에는 나와 유상아만이 남았다. 아이는 [점혈]로 잠깐 재워둔 상태였다. 유상아는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쓸어 주더니 어두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애가 ‘재앙’이라고요?” 
“네.” 
“그것도 독자 씨 능력으로 알아내신 건가요?” 
“비슷합니다.” 
 
나는 ‘멸살법’에 나오던 문장을 떠올렸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의 마지막 재앙. ‘범람의 재앙’은 가장 위험하고, 가장 슬픈 재앙이다.」 
 
유상아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질문의 재앙] 같은······ 그런 건가요?”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범람의 재앙. 
그녀가 만약 본연의 힘을 모두 낸다면, [질문의 재앙]은 비교도 되지 않는 재앙이 찾아올 것이다. [질문의 재앙]은 고작해야 강동구를 반파시키는 수준에서 잡혔지만, [범람의 재앙]은 그 정도가 아니다. 
그녀가 전력을 낸다면, 서울은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멸망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재앙같이 보이지는 않아요. 고작 닷새 만에, 이 아이가 재앙이 될 수 있을까요?” 
 
사실, 현시점에서 보면 유상아의 말은 맞다. 
지금의 그녀는 재앙이 아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신유승 
나이 : 11세 
배후성(背後星) : 없음(현재 2개의 성좌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전용 특성 : 비스트 테이머 (희귀), 반성적 살해자 (일반) 
전용 스킬 : [길들이기 Lv.5], [다종 교감 Lv.7], [기민한 발 Lv.6], [이종 호의 Lv.4] 
성흔 : 없음 
종합 능력치 : [체력Lv.12], [근력Lv.12], [민첩Lv.16], [마력Lv.24] 
종합 평가 : 준수한 마력 성장치를 가지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능력치가 낮습니다. 뛰어난 재능과 희귀한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유약한 성정 때문에 성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 
 
신유승. 
이 아이의 이름은, 이 아이가 틀림없는 ‘재앙’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아이는 닷새 뒤 반드시 서울을 파괴하게 된다. 
유상아의 말이 이어졌다. 
 
“재앙들은 운석에서 부화한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이 아이는 운석에서 부화한 것도 아니고······.” 
“맞습니다. 이 아이는 운석에서 부화하지 않았죠. 이 애는 그냥 지구에서 태어나 자란 지구인입니다. 닷새 뒤에도 계속 지구인일 거예요.” 
“그럼 대체 왜······.” 
“[질문의 재앙]도 본래는 지구 출신이었죠.” 
 
유상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 아이도 설마 [질문의 재앙]처럼······.”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네?” 
 
지구 출신의 모든 ‘재앙’은 곧 [귀환자]들이다. 다른 세계를 멸망시키고 돌아온 파괴자들. 이 아이 또한 [클로노스]를 멸망시켰으니 귀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클로노스의 다섯 재앙 중에서도 이 아이는 특별하다. 
그리고, 가장 위험하다. 
 
“재앙으로 찾아오는 것은 이 아이가 아니라, 이 아이의 미래입니다.” 
“미래라고요?” 
“이 아이는, 수십 년 뒤의 미래에서 지구를 끝장내기 위해 돌아오는 겁니다.” 
 
지금은 착하고 순수하며, 심지어 예의까지 바른 이 아이는 훗날 세계에서 가장 끔찍한 재앙 중의 하나가 된다. 
 
“한수영이 아이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지금 이 아이를 죽여야만, 다가올 아이의 ‘미래’를 없앨 수 있거든요.” 
 
그리고 그 재앙은, 유중혁조차 막을 수 없다. 
 
 
* 
 
 
「유중혁은 자신의 가슴에 뚫린 공허한 구멍을 바라보았다. 당장 [기사회생]을 쓰지 않고서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처. 그는 분노한 얼굴로 그 상처를 만들어 낸 여자를 향해 물었다. 
 
“신유승. 왜······ 생각이 변한 거냐?” 
“변해? 나는 변하지 않았어.” 
 
신유승이 웃었다. 
 
“나는 대장이랑은 다르게 세계선의 회귀자가 아냐. 나는 시나리오의 톱니바퀴에 갇힌 장난감일 뿐. 지금의 나는, 과거 회차의 대장이 만났던 ‘재앙’과 똑같은 인격이야.” 
“그럼 대체 왜······.” 
“지금이 3회차라며? 2회차에서도 기회는 줬을 거 아냐. 그런데 또 대장은 실패한 거고. 그렇게 많은 정보를 줬는데도, 또 실패했다는 거지.” 
 
신유승은 무표정한 얼굴로 유중혁을 향해 슬픈 미소를 지었다. 
 
“이 세계는 변할 수 없어. 대장은 그대로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신유승이 하늘의 그레이트 홀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생각한 거야. 역시, 이 세계는 여기서 끝나야 한다고.”」 
 
간만에 ‘멸살법’을 정독하고 있자니, 또 스멀스멀 옛날 감성이 밀려온다. 
역시 ‘멸살법’은 이 맛에 보는 거지. 

“야, 뭐하냐?”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스마트폰을 껐다. 한수영이었다. 
 
“어쩌기로 했어?” 
“생각 중이야.” 
 
우유부단한 내 목소리에, 한수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얼마간 떨어진 유상아와 신유승을 신경 쓰며 속삭였다. 
 
“잊었어? 3회차에서 유중혁은 마지막 재앙한테 거의 죽을 뻔한다고.” 
“죽진 않았잖아.” 
“그게 그거지. 중요한 건 정면으로 싸우면 못 이기는 싸움이었다는 거야.” 
 
한수영의 말은 사실이다. 
3회차의 유중혁은, 실제로 신유승에게 죽을 뻔하게 된다. 
 
“만약 그때 망상악귀 김남운이 쟤를 죽이지 않았으면······.” 
 
그리고 그때 신유승을 죽였던 망상악귀는, 불행히도 이번 회차에는 없다. 
 
“난 분명히 말했다, 반대라고. 그리고 경고하는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닐걸?” 
 
[고구마를 싫어하는 일부 성좌들이 속을 태웁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고구마를 대비해 탄산을 준비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래도 이번 대화는, 제대로 필터링이 안 된 모양이다. 
슬슬 미래 정보의 필터링이 조금씩 풀릴 때도 됐으니······. 
신유승과 이야기하며 한숨을 푹푹 쉬어대던 유상아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독자 씨,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에요.” 
 
그녀는 간절한 얼굴이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잖아요. 여기서 우리가 이 아이를 잘 돌보면, 재앙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나비 효과 같은 게 일어나서······.”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이 세계에 찾아오는 것은 ‘미래의 신유승’. 
그리고 지금 이 세계는, 신유승의 미래를 만든 ‘최초의 세계선’이다. 
즉, 지금의 신유승을 변화시킨다면, 그 재앙은 찾아오지 않을 수 있다.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는 그렇다는 얘기다. 
신유승을 죽여서 재앙을 막는 것도 같은 이치니까. 
하지만. 
 
“이 아이를 재앙으로 만드는 사건은 먼 미래에 발생합니다. 지금의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나비효과라는 건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태평양에서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지구 반대쪽에서 태풍이 분다? 
그건 이론상으로나 가능한 얘기다. 
중요한 것은 그 날개짓이 ‘태풍’이 되기까지의 시간이니까. 
유상아의 표정이 급격하게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현시점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설령 우리가 이 아이를 변화시킨다고 해도······ 닷새 뒤에 찾아올 재앙이 바뀌진 않습니다.” 
 
실제로 중후반 회차의 유중혁도 몇 번인가 비슷한 시도를 했었다. 가장 먼저 신유승을 찾아냈고, 그녀를 달래 재앙을 막아보려 했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지금의 신유승에게 어떤 변화를 줘도, 닷새 뒤에 미래의 신유승은 찾아온다. 
 
그리고 그녀는, 서울을 멸망시킨다. 
 
유상아의 목소리에 조금씩 힘이 빠졌다. 
 
“······왜 이 아이는 재앙이 되는 걸까요? 미래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거기까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나는 그 대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고기를 뜯고 있는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맛있니?” 
“······네.” 
 
멀리서, 나를 바라보는 유상아와 한수영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니죠?’ 
‘죽여.’ 
‘그러지 않을 거죠?’ 
‘죽이라고.’ 
 
사실, 지금 신유승을 죽인다고 해서 결말까지 가는 중요한 부분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지금 신유승을 죽이지 않으면, 조금만 실수해도 서울은 끝장난다. 
즉, 단기적으로 보면 신유승을 살리는 것은 손해다. 
고기를 뜯던 신유승이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미래를 볼 수 있는 건가요?” 
“······응?” 
“저······ 미래에 굉장히 나쁜 사람이 되는 거죠?” 
 
아마, 우리 대화를 엿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솔직히 답해주었다. 
 
“아마도.”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요?” 
“아마 서울에서는 제일 나쁜 사람이겠지.” 
“조커나 타노스만큼 나빠요?” 
“그럴지도 몰라.” 
 
신유승이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상한 일도 아니네요.” 
“왜?” 
“전 이미 나쁜 사람이거든요.” 
 
말하지 않아도 무슨 이야긴지 알 것 같았다. 
어린 신유승이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등장인물 ‘신유승’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가 발동합니다!] 
 
「내가 죽였어.」 
 
그녀는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기르던 강아지를 죽였다. 
 
「미안해요.」 

이미 습격당해 쓰러진 노인에게서 외투를 훔친 일. 
자신의 그린존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늘 보살펴 주던 여자를 따돌린 일. 
누군가에게 쫓기던 남자를 무리에게 넘기고 식량을 얻은 일. 
 
사실 이런 세계에서 누구나 저지를 법한 일들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그런 일들을 합리화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벌을 받을 거야. 살아 있을 가치 따위 없어.」 
 
공포에 떨던 아이의 눈동자가 조금씩 의연해진다. 죽음을 결심한 사람의 표정은 아이나 어른이나 다를 것이 없다. 
 
“저······ 죽이셔도 돼요. 준비됐어요.” 
 
내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면, 나는 지금 망설임 없이 신유승을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독자고. 
독자는 독자의 선택을 한다. 
물론 나는 작가가 아니기에, 내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그저 뻔한 것들뿐이다. 
나는 신유승의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걱정 마. 내가 바라는 결말에 네 죽음은 없으니까.” 
 
만약 이 아이를 죽인다면, 유중혁의 회귀는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 과거를 바꾸기 위해 맞서 싸워야 할 자가,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죽인다면,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러니 나는 유중혁을 위해, 이 아이의 죽음을 막을 것이다.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등장인물 ‘신유승’이 당신에 대해 희미한 신뢰를 보입니다.] 
[등장인물 ‘신유승’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하지만, 제가 죽어야······.” 
“재앙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있어.” 
 
뒤쪽에서 한수영이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곁에서, 유상아가 입술을 꼭 깨문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네가 도와준다면 가능해.” 
 
애초에 내가 바라는 결말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작은 불가능들을 하나씩 가능으로 바꿔 나가다 보면, 언젠가 불가능한 결말도 가능한 결말로 바뀔지도 모른다. 그리고 신유승은, 그 불가능한 이야기에 대한 작은 초석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나는 곧바로 비형에게 부탁해 [도깨비 보따리]를 열어, 몇 가지 아이템을 구매했다. 
신유승이 자신 없는 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냥 애고, 배후성도 없는······.” 
“배후성이 왜 없어?” 
 
[당신은 화신 ‘신유승’에게 ‘성장 패키지Ⅰ’을 후원하였습니다.] 
 
신유승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당신은 화신 ‘신유승’에게 ‘성장 패키지Ⅱ’를 후원하였습니다.] 
[당신은 화신 ‘신유승’에게 ‘신규 시나리오 기념 패키지’를 후원하였습니다.] 
 
······. 
 
계속해서 이어지는 메시지. 신유승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이, 이게 다······.” 
“괜찮아, 나 돈 많아.” 
“아저씨는······ 대체 누구세요?” 
“난 독자야. 김독자.” 
 
나는 현실감을 잃은 아이의 머리를 툭툭 두들겨 주며 말했다. 
 
“앞으로 닷새 안에 너는 여기 있는 누구보다 강해질 거야.” 
 
내 말은 사실이었다. 
비스트 로드(Beast lord) 신유승. 
이 아이는 훗날, 이 세계 최강의 100인 중 하나가 된다. 
 
언젠가 재앙이 될 수도 있는 이 아이는, 이번 회차에서 내 ‘첫 번째 화신(化神)’이 될 것이다.
 
 
 
 
 
< Episode 19. 특이점 (4) > 끝

< Episode 19. 특이점 (5) >
 
 
 
 
 
잠깐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눈을 떴을 때는 아직 이른 새벽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화신을 돌볼 것을 종용합니다.] 
 
우리엘이 보낸 메시지에 나도 모르게 잠에서 깨어났다. 
젠장, 어제 ‘배후성 선언’을 하고부터 성좌들은 계속 저 모양이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선택에 껄껄 웃습니다.] 
 
사실 말이 배후성이지, 아직 설화도 제대로 못 쌓은 마당에 진짜 배후성이 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성흔 하나 못 빌려주는 성좌가 배후성은 무슨 배후성이겠어. 그래도 내가 어지간한 위인급 보다 돈은 많을 거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에 호기심을 갖습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행동을 건방지다고 생각합니다.] 
 
내 화신 등록 선언에 성좌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좋아하는 쪽은 아마 ‘화신 찾기’ 집단일 것이고, 건방지다고 생각하는 쪽은 ‘유희 찾기’ 집단, 그중에서도 나를 싫어하는 녀석들이겠지. 
물론 개중 어느 쪽인지 정체가 불분명한 녀석도 하나 있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전략을 흥미롭게 지켜봅니다.] 
[1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처음 수식언을 봤을 때는 위인급 성좌라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저 녀석을 보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다. 평균적인 후원 규모도 그렇고, 저 여유도 그렇고. 저 녀석은 최소 ‘설화급’ 이상이다. 하지만 ‘멸살법’을 아무리 찾아봐도 ‘은밀한 모략가’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계의 성좌거나, ‘멸살법’에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녀석이란 얘긴데. 대체 누구지? 
 
우우우웅. 
 
어젯밤부터 신유승은 폐건물의 한쪽 구석에서 스킬을 맹연습 중이었다. 신유승은 내가 준 마력 회복 물약을 한가득 쌓아 놓고, 근처에서 잡아온 새끼 그롤에게 계속해서 스킬을 걸고 있었다. 
 
크르! 크르르르! 
 
신유승에게서 뻗어 나온 희미한 기운이 그롤의 표피를 쓰다듬고 있었다. 이길영에게서 봤던 [다종 교감]의 힘이었다. 
나는 눈 밑에 시커멓게 다크서클이 내려온 신유승을 보며 물었다. 
 
“유승아, 잠은 좀 잤어?” 
“아직이요.” 
“안자면 패널티 받는 거 몰라? 잠 좀 자라.” 
“······조금만 더 하고요.” 
 
[등장인물 ‘신유승’이 ‘다종 교감 Lv.8’을 발동 중입니다.] 
[등장인물 ‘신유승’이 ‘길들이기 Lv.7’를 발동합니다!] 
 
그러나 신유승의 집중력은 곧 흐트러졌다. 
 
[‘길들이기’가 실패하였습니다!] 
[괴수가 미쳐 날뛰기 시작합니다!] 
 
한순간 통제에서 벗어난 그롤은 신유승에게 달려들었다. 내가 움직이기도 전에, 곁에서 잠꼬대를 하던 한수영이 암기를 날렸다. 
 
휘이익! 콰악! 
 
새끼 그롤은 그대로 폐건물의 벽에 박혀 숨을 거두었다. 
한수영이 잠꼬대를 하며 돌아누웠다. 허탈한 얼굴로 호흡을 다스리는 신유승을 향해 내가 물었다. 
 
“잘 안돼?” 
“······네.” 
 
신유승은 침울한 표정이었다. 하긴.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요약 버전으로. 
 
+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신유승 
전용 특성 : 비스트 테이머 (희귀), 반성적 살해자 (일반) 
전용 스킬 : [길들이기 Lv.7], [다종 교감 Lv.8], [기민한 발 Lv.8], [이종 호의 Lv.6] 
성흔 : 없음 
종합 능력치 : [체력Lv.19], [근력Lv.14], [민첩Lv.44], [마력Lv.45] 
 
* 현재 성장 패키지Ⅰ을 적용 중입니다. 
* 현재 성장 패키지Ⅱ을 적용 중입니다. 
* 현재 신규 시나리오 기념 패키지를 적용 중입니다. 
 
+ 
 
역시 성장 패키지를 두 개나 갈아 넣었더니 스킬 성장 속도가 엄청났다. 
게다가 특성 진화를 촉진시키는 신규 시나리오 기념 패키지까지. 모르긴 몰라도 한반도의 화신들 중에 이만한 패키지 지원을 받는 녀석은 거의 없을 것이다. 
본래 재능도 있는 녀석이니까 다종 교감은 조만간 10레벨을 돌파해 ‘상급 다종 교감’으로 진화하겠지. 
문제는 이만한 능력치를 가지고 고작 8급 괴수종인 그롤 하나 제대로 못 길들이고 있다는 것. 사실 시스템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신유승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전 재능이 없나봐요.” 
 
네가 재능이 없는 거면 난 그냥 자살해야 할 거다. 
 
“걱정 마. 넌 재능 있어.” 
 
기껏 얻은 귀한 화신이 좌절하고 있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아마 신유승이 제대로 힘을 못 쓰는 것은, 그녀의 트라우마 때문일 것이다. 
 
“뭐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어?” 
“······무서워서요.” 
 
무엇이 무서운지를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괴수는 반려동물이 아니야.” 
“저도 알아요.” 
“그래도 반려로 삼아도 괜찮을지도 몰라. 얘들 튼튼하고 강하거든.” 
 
신유승은 자신이 기르던 강아지를 자기 손으로 죽였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그 사실이, 지금까지도 이 아이의 마음속 깊이 남아있는 것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거 아니? 시나리오를 다 깨면 소원을 이룰 수 있는데······.” 
“아저씨는 거짓말할 때 얼굴에 티 나요. 콧구멍이 커져요.” 
 
그러고 보니 길영이도 그런 말을 했었지. 
[다종 교감]이 가능한 아이들은 신체 언어에 민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깡패처럼 나가기로 했다. 
 
“······뭐 어쩌라는 거냐?” 
“잘 할 수 있겠죠?” 
“잘 할 수 있어.” 
“그렇게 성의 없이 말하지 말고······.” 
“내가 선택했으니까.” 
 
신유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서울 대신 널 택했어. 그리고 후회하지 않아.” 
“······.” 
“넌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어.” 
 
잠시 나를 올려다보던 신유승이 이내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러더니 내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기 시작했다. 
 
“아저씨, 제가 정말 강해지면······.” 
“강해지면?” 
 
한참이나 망설이던 신유승이 옅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시 열심히 해볼게요.” 
 
그리고는 돌아서서 스킬을 시전하는 신유승. 
······갑자기 뭔가 기분이 찜찜한데. 
문득 원작에서 신유승이 어떤 녀석이었는지 떠올랐다. 
 
「“중혁 오빠 잘생겼어요.”」 
「“중혁 오빠 최고예요.”」 
「“중혁 오빠가 제일 좋아요.”」 
 
······이 녀석, ‘멸살법’의 원작에서는 유중혁의 팬이었지. 
나이가 나이인지라 당연히 히로인 후보는 아니고, 그냥 졸졸 쫓아다니는 여동생 포지션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유미아랑 엄청 다퉜던 거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조금 걱정이 된다. 
 
이렇게 열심히 키웠는데, 나중에 유중혁한테 빼앗기면 어떡하지?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한수영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한수영이 픽 고개를 돌렸다. 
저 녀석, 어제부터 온종일 뾰로통한 상태다. 
 
“야.” 
“왜.” 
“계속 삐져 있을 거냐?” 
“나한테 말 걸지 마.” 
“뭐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보고 싶은 거라는 말에, 한수영의 눈썹이 움직였다. 
나는 신유승에게 들리지 않도록 소리를 낮춰 물었다. 

“······나 정도 외모면 어떻냐? 유중혁이랑 비교해서.” 
 
한수영이 귀에 벌레라도 들어간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의도로 묻는 건데?” 
“아니, 순수하게 정말 궁금해서 그래.”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한 번도 내가 어떻게 생겼느냐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전에 만났던 유중혁 동생도 그렇고, 예전 선지자들의 반응까지 생각해 보면, 뭔가 전부 나를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화장실에서 가끔 셀카 찍어 보면 나도 못생긴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바람기 많은 한 성좌가 당신을 측은하게 바라봅니다.] 
 
“그냥 삶을 받아들여.” 
“아니, 위로받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지금 해줄 수 있는 건 위로뿐이다.” 
 
제길. 
 
“······그 정도냐?” 
 
나는 조용히 신유승 쪽을 바라보았다. 
 
결심했다. 
절대로 저 애랑 유중혁을 만나게 해선 안 된다. 
 
 
* 
 
 
우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주변의 괴수종들을 사냥했고, 코인을 모았다. 
나는 코인이 모이는 족족 신유승에게 투자했는데, 덕분에 신유승의 능력치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코인은 주로 민첩과 마력에 사용했다. 
[기민한 발]과 [길들이기] 그리고 [다종 교감]을 최대치로 활용하기에는 그 두 능력치가 제일 중요했기 때문이다. 
다시 하루가 저물고 밤이 될 무렵, 신유승은 마침내 [상급 다종 교감]을 터득했다. 그러나 여전히 ‘길들이기’는 성공하지 못했다. 신유승이 물었다. 
 
“······미래의 나는 훨씬 더 강하겠죠?” 
 
물론이다. 
정면으로 싸우면 지금의 신유승은 상대도 안 된다. 
하지만, 지금 집중적으로 수련을 하면 적어도 미래의 신유승이 가진 중요한 능력을 봉인할 수 있다. ‘범람의 재앙’이 위험한 것은 그녀가 혼자의 힘으로 하나의 군세를 이끌 수 있기 때문.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보다, 현재의 너를 좀 더 믿도록 해.” 
 
미래의 신유승이 할 수 있다면 현재의 신유승에게도 가능성은 있다. 
게다가 그녀가 자신의 미래와 대적하는 것만으로, 우리에게 승산은 있다. 
왜냐하면 미래의 신유승은, 절대로 현재의 신유승을 죽일 수 없을 테니까. 
 
“잘 먹었습니다.” 
 
뼈까지 깨끗하게 발라 먹은 그롤 고기를 치우며, 유상아가 짧게 기도를 했다. 
 
“유상아 씨 종교 있었어요?” 
“아뇨, 무교에요.” 
“그럼 왜 기도를······.” 
“올림포스의 신들한테 했어요.” 
 
너무 현실적인 기도라서 나는 조금 벙쪘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아는 신들이 현실이 되었으니, 이제 기도의 대상도 굉장히 명확해진 셈이다. 
 
“오늘은 저랑 한수영이 먼저 불침번을 설게요. 유상아 씨가 먼저 주무세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네.” 
 
유상아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먼저 잠에 들었다. 한수영은 그녀와 반대쪽 벽에 기대어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불편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본래 적이고, 한수영의 사상은 유상아의 대척점에 서 있으니까.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두 사람은 협력하기보다는 반목할 일이 많을 것이다. 
피곤에 절은 신유승까지 잠들자, 고적한 밤 위에는 타닥타닥 불씨를 일으키는 모닥불 소리만이 남았다. 한수영이 먼저 말했다. 
 
“너도 자.” 
 
바닥에 누웠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이제 다섯 번째 시나리오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나흘. 
신유승은 별다른 진척이 없었고, 오늘 낮에는 강서 지역에서 메시지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서쪽에서 강림한 ‘얼음의 재앙’을 처치하였습니다.] 
 
라는 메시지였다. 
누가 처치했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만약 그대로 강림했다면 서울 일대를 빙하기로 만들었을 재앙을, 유중혁이 직접 나서서 막아낸 것이다. 
아마 이현성과의 조우도 무사히 끝냈겠지. 
타오르는 불씨를 보던 한수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 
 
“야,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너 못생겼어.” 
 
한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그딴 거 궁금하댔냐? 좀스런 새끼.” 
“······그럼 뭔데?” 
“넌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뭘 하다니?” 
“목적이 뭐냐고. 매번 너 볼 때마다 이상해서. 왕좌 박살 낸 것도 그렇고, 쟤 안 죽이는 것도 그렇고······ 넌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원하는 결말이 있어.” 
“결말?”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의외로 한수영은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다른 말을 꺼냈다. 
 
“나도 쓰고 싶은 결말이 있었는데.” 
“네 소설?” 
“응.” 
“나도 뭐 하나만 물어보자.” 
“뭔데?” 
“왜 표절했어? 너 원래 글 잘 쓰잖아.” 
“표절 아니라니까? 너 ‘멸살법’을 무슨 성경처럼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도 다 어디서 따온 소설이거든? 초월적 존재들의 후원. 생존 미션. 게임 시스템에 회귀자 주인공. 요즘 그런 거 안 쓰는 소설 찾기가 더 어렵지 않냐?” 
“네 거랑 제일 비슷하니까 문제지.” 
“그것도 다 이유가 있어. 내가 이야기 하나 해줄까? 옛날 옛날에 한 가난한 소녀가 있었는데······.” 
“가난에 찌든 문학소녀가 자신의 꿈에 좌절하고 먹고 살길을 찾다가 결국 남의 소설을 표절하게 된 이야기라면 사양할게.” 
 
멍하니 입을 벌린 한수영이 입술을 실룩였다. 
 
“너 사실 다른 사람 마음 읽을 수 있지?” 
“······어?” 
“아무튼, 그 뭔가 비슷한 게 가능하잖아. 그렇지?” 
“내가 무슨 신인 줄 아냐? 그딴 스킬이 있으면 지금 이렇게 고생 안 했지.” 
 
[인물 ‘한수영’이 ‘거짓 간파 Lv.3’를 사용 중입니다.] 
[인물 ‘한수영’이 해당 발언이 거짓임을 확인하였습니다.] 
 
한수영이 킥킥 웃으며 물었다. 
 
“혹시 나한테도 가능하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 말 안 해도 돼. 아무튼 그거 가능하면, 지금 내 마음도 읽어봐.” 
“못 읽는다니까.” 
“나, 사실 표절 안 했어.” 
 
내가 수상한 눈빛으로 한수영을 바라보자, 한수영은 보란 듯이 자신에게 [거짓 간파]를 사용했다. 
 
[인물 ‘한수영’이 해당 발언이 진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뭐? 
 
“‘멸살법’을 읽은 건 맞는데, 비슷하게 쓴 건 그냥 우연이야. 난 내가 꿨던 꿈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뿐이라고.” 
 
[인물 ‘한수영’이 해당 발언이 진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무슨 소린가 했더니, 이 녀석 이젠 무의식을 방패로 삼고 있다. 
 
“어쨌든 봤잖아. 봤으니 꿈을 꾼 거겠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머뭇거리던 한수영이 말을 이었다. 
 
“요즘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무슨 생각?” 
“만약 이 현실에 원작이 있고, 내가 그 원작의 재현에 불과하다면, 애초에 나란 존재는 원작의 표절이 아닐까, 하는······.” 
“뭔 헛소리야? 그래서 너 표절 안 했다 이거냐?” 
“누가 뭐래? 그냥 그런 생각도 들었단 얘기야.” 
 
사실 나도 안 해본 생각은 아니었다. 애초에, ‘멸살법’이 현실이 되었을 때부터 줄곧 들었던 생각이었다. 
 
이 세계는 소설 위에 덧씌워진 현실일까. 
아니면 현실이 소설로 바뀌고 있는 것일까. 
 
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일어났다. 
 
“야, 불침번 바꾸자. 너부터 자라. 그런 머리 아픈 이야기 자꾸 꺼내면 채널에 성좌들 줄어든다고.” 
“······안 그래도 요즘 너랑 같이 다니면서 성좌들 후원 줄었어.” 
“그건 네가 자꾸 암 걸리는 짓을 하니까 그렇지.” 
 
우리는 그 후로도 서로를 향해 몇 마디를 더 쏘아붙였고, 이내 입을 다물었다. 폐건물의 벽에 기댄 채, 나는 코를 골며 잠든 한수영을 바라보았다. 
우습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저 녀석이 있어서 조금은 다행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세계가 ‘소설’이라는 걸 아는 것이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그런 기묘한 위안.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깜빡 졸았다. 
너무 피곤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위로에 방심한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잠들고 말았다. 짧았지만 달콤한 잠이었다. 하지만 나는 잠들지 않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한수영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 Episode 19. 특이점 (5) > 끝

< Episode 20. 범람의 재앙 (1) >
 
 
 
 
 
Episode 20. 범람의 재앙 
 
 
 
 
식은 한수영의 맥을 짚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수영이 죽었다는 사실보다, 내가 놀랐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조금씩 이성이 돌아온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독자 씨?” 
 
뭔가를 눈치챘는지, 유상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유상아의 도움을 받아 죽은 한수영의 주검을 살폈다. 
 
“상처는 없어요.” 
 
상황은 오리무중이 되었다. 
상처가 없다. 그렇다면 독인가? 
중독 흔적도 없이 한수영을 죽일만한 독이라면 무형지독 뿐이다. 
그런데 그런 독이 지금 풀렸을 리가 없다. 
의문은 그뿐이 아니었다. 
독을 썼다면 왜 나머지는 무사하단 말인가? 
설령 그런 독을 보유한 녀석이 있어도 한수영만을 골라서 독을 뿌릴 이유가 없다. 
애초에 내가 갑자기 잠이 든 것부터가 이상하다. 
······잠깐만, 잠이 들어? 
 
“으······ 죄송해요. 제가 너무 많이 잤죠.” 
 
부스스 눈을 뜨는 신유승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문득 유상아를 돌아보았다. 
 
“혹시 유상아 씨도 계속 주무셨습니까?” 
“······네.” 
 
유상아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유상아도 못 일어났다면, 어젯밤 우리 중 불침번은 아무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마지막 불침번인 내가 잠들면서 모두가 잠들었다는 것. 
 
바보였다. 
 
내 의심은 ‘누가 어떻게 한수영을 죽였을까’가 아니라, ‘내가 왜 잠에 들었을까’부터 출발해야 했다. 
 
수면 마법? 
아니다. 그런 마법은 귀환자나 즐겨 쓰니까. 
점혈? 
쓴다고 해도 내 감각을 속일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남은 답은 하나뿐이다. 
 
화톳불 쪽으로 다가가자, 어제 먹었던 그롤의 뼈가 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일행 모두가 잠들었다면,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이쪽뿐. 
깨끗이 발라 먹은 뼈무덤을 치우자, 바닥에 부스스 떨어진 녹색 가루들이 눈에 띄었다. 

‘야나스프레타의 줄기.’ 
 
역시나. 이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될 리가 없다. 누군가 그롤의 고기에 줄기 가루를 섞은 것이다. 야나스프레타의 줄기는 진액과 같이 먹지 않으면 강력한 수면 효과를 유발한다. 
이계의 식재라 [동의보감]으로도 피독이 안 되는 식물. 그래서 늘 점액을 같이 끓여 먹었던 건데······. 
 
“어제 그롤을 요리한 게 누구였죠?” 
“아마 수영 씨가······.”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먹은 것은 신유승이 길들이기에 실패한 새끼 그롤의 고기였다. 그리고 새끼 그롤을 죽인 것은, 다름 아닌 한수영. 
 
“한 방 먹었네요.” 
 
나는 창백하게 누워 있는 한수영의 시신을 향해 다가갔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잠시 잊고 있었다. 
 
아바타는 머리가 터지지 않는 한 소멸하지 않는다. 
 
하지만 왜 이런 장난을 쳤을까? 
어차피 ‘임시 서약서’에 묶여 있어서 도망도 못 갈 텐데. 
그때, 한수영의 심장 쪽에서 파란색 빛이 올라왔다. 
······저건? 
 
“잠시.” 
 
나는 일행들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그대로 한수영의 머리를 짓밟았다. 그러자 푸른빛이 터지며, 아바타가 그대로 소멸했다. 
 
[인물 ‘한수영’의 아바타가 계약 위반의 효과를 대신 받고 있습니다.] 
[인물 ‘한수영’이 자신의 아바타를 제물로 ‘임시 서약서’의 패널티를 대부분 상쇄합니다.] 
 
“아······.” 
 
그제야 뭔가를 납득한 듯, 유상아가 신음을 흘렸다. 
나도 아바타에 설마 이런 효과가 있을 줄은 몰랐다. 
‘원작’에서 본체를 대신해 피해를 입는 것을 본 적은 있지만, 설마 계약의 대가를 대신 치를 수도 있을 줄이야. 
‘대부분’이라는 부사가 붙어 있는 걸로 봐서 완벽하게 상쇄가 되진 않은 모양이지만, 그래도 본체가 죽지는 않았으리라. 
신유승이 물었다. 
 
“그 언니는 가버린 건가요?” 
“그런 것 같네.” 
 
왜, 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한수영은 나와 함께 다녀서 좋을 게 별로 없었다. 
 
―안 그래도 요즘 너랑 같이 다니면서 성좌들 후원 줄었어. 
 
나는 곧 충무로의 일행들과 조우할 것이고, 그들은 유상아 못지 않게 한수영을 적대시할 것이다. 
 
―쳇. 신뢰 못 받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한수영은 혼자가 될 것이고, 적들 속에 둘러싸인 상태가 되겠지. 잠깐이지만, 나는 그녀가 일행이 될 수 있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바타가 새하얀 가루로 흩어진 자리엔 약간의 코인과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밥값 
 
정말, 그 녀석다운 작별이다. 

마치 지금까지의 시간을 무로 돌리는 것처럼, 녀석의 아바타는 불어온 한강 바람에 훌훌 날아 없어졌다. 
다만 궁금한 것은, 아바타를 통한 [대리 사망]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한수영이 왜 지금까지 나와 같이 있었냐는 것인데······. 
모르겠다. 
유상아의 마음을 읽을 수 없듯, 한수영의 마음도 읽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설명하는 ‘멸살법’도 이런 것은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도 일어나죠.” 
 
찌릿, 하는 느낌과 함께 묘한 감각이 찾아온 것은 그때였다. 
전지적 독자 시점? 
나는 본능적으로 느낌이 온 방향을 쳐다보았지만, 딱히 보이는 것은 없었다. 
········착각인가? 
 
 
* 
 
 
“멍청이.” 
 
한수영은 멀찍이 떨어진 고층 건물 위에서 폐건물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찢어진 청바지 사이로 스며드는 한강 바람이 차가웠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중얼거렸다. 
 
“······솔직히 찾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말을 하면서도, 사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 역시, 그녀만큼이나 ‘독자’일 테니까. 
그녀는 메모장을 켜서 뭔가를 메모하기 시작했다. 
영감이 떠오를 때는 적어야만 하는 작가의 어쩔 수 없는 버릇이었다. 
 
「책을 잘 읽는다고 해서, 사람까지 잘 이해하리란 법은 없다.」 
 
‘곧 다시 만나겠지.’ 
 
그녀는 김독자가 원하는 결말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결말을 향해 움직이는 한, 그들은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 그들이 적일지 아군일지는, 그녀 역시도 알 수 없었다.」 
 
한수영은 스마트폰을 덮고, 길을 따라 걸어갔다. 
 
 
* 
 
 
오전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날 오후, 신유승의 마력과 민첩은 시나리오 한계치인 60에 도달했다. 슬슬 때가 되었다고 느낀 나는, 비형에게 [배후 계약서]를 구입했다. 비형은 투덜거리면서도 내게 계약서를 내주었다. 
 
[······너 이런다고 ‘재앙’이 바뀌지 않는다는 건 알지?] 
 
‘······.’ 
 
[저 녀석의 현재는 미래의 재앙에 ‘직결’되어 있지 않아. 재앙은 최초의 세계선에서 파생된 우주에서 오는 거라고. 존재가 연결되어도, 역사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계약서나 내놔.’ 
 
나는 계약서를 모두 쓴 뒤, 신유승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지금 성흔도 없고, 다른 성좌들처럼 힘을 빌려줄 수도 없어. 하지만 코인은 꽤 많아.” 
“······.” 
“싫으면 계약 안 해도 돼. 하지만 나랑 계약한다면, 분명 후회하지 않을 거야.” 
“엄마가 이런 거 함부로 쓰지 말랬는데······.” 
“괜찮아. 내가 정말로 배후성 노릇을 하겠다는 건 아니니까.” 
“이걸 쓰면 다른 성좌랑은 계약 못하는 건가요?” 
“그래.” 
 
신유승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차피 아저씨 믿기로 했으니까.” 
 
[‘배후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당신은 화신 ‘신유승’의 배후가 되었습니다.] 
 
눈부신 광휘가 솟아나 신유승과 나를 감쌌다. 하지만 화려한 빛살과는 달리, 떠오른 메시지는 초라한 것이었다. 
 
[당신은 성좌가 아닙니다. 배후성의 권한 대부분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용 가능한 권한 목록> 
 
[1. 화신 후원] 
[2. 화신 독려] 
 
뭐, 예상은 했다. 
아직은 이 정도겠지.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콧김을 뿜습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첫 계약을 축하합니다.] 
[5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배후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좌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십악 공필두 때와는 또 다르다. 
이제 신유승은 나의 직속 화신이 되는 것이니까. 
고로 ‘화신 찾기’ 집단의 성좌들은 내게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직 성좌가 아니면서, ‘화신’을 둔 ‘화신’. 
그러니 나와 계약을 하면 자연히 신유승은 계약한 배후성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런 식으로 내가 화신의 숫자를 늘릴수록, 나를 원하는 성좌들의 숫자도 급격하게 늘어날 것이다. 
 
[채널 터지겠네······!]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비형을 뒤로하고, 나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슬슬 출발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한강을 건너죠.” 
“하지만 아직 다리를 못 찾았는데, 괜찮을까요?” 
“수영을 할 겁니다.” 
“네?” 
“할 줄 아시죠?” 
“할 줄은 알지만······.” 
 
유상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와 한강을 번갈아 보았다. 
뭘 걱정하는지는 알 만하다. 
한층 더 높아진 한강의 수위. 그 안에는, 어제보다도 많은 숫자의 어룡들이 간헐적으로 포효를 뱉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7급에 해당하는 녀석들. 신유승이 말했다. 
 
“저는 수영 못하는데······.” 
“넌 이거 붙잡고 건너와.” 
 
나는 미리 구해온 스티로폼 박스를 내밀었다. 나는 유상아에게 부탁해 [아라크네의 거미줄]로 박스와 나를 연결했다. 
 
“갑시다.” 
 
내가 망설이지 않고 한강에 뛰어들자, 유상아도 곧바로 쫓아왔다. 신유승도 살짝 겁먹은 눈치긴 했지만, 곧 스티로폼을 붙잡고 한강 물에 발을 담갔다. 
차가운 한강의 수온이 몸을 감쌌다. 낯선 괴수들의 비린내. 어룡들의 움직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유상아가 물었다. 
 
―진짜로 괜찮을까요? 
 
물론 괜찮지 않다. 
하지만 남은 시간을 고려하면, 이것만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정말 위험해지면 바로 나올 겁니다. 
―······네. 
―그러니 진짜 위험해지기 전에, 위험해진 것처럼 구세요. 
―네? 
―그래야 유승이가 빨리 각성합니다. 일부러 위기를 연출하세요. 알았죠? 
 
나는 그대로 스티로폼을 끌고 한강의 중심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신유승에게 걱정 말고 스킬 레벨만 올리라고 한 것엔 다 이유가 있었다. 
특성창에는 표시되지 않지만, 그녀에게는 타고난 상황 적응력과 임기응변이 있다. 
 
평범한 여자아이는, 결코 다섯 번째 시나리오까지 살아남을 수 없다. 
 
그저 착한 아이인 것 같지만, 신유승의 내면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일촉즉발의 위기에 자신의 반려견을 죽이고, 어른들을 속이며, 강자의 호감을 사기 위해 자신을 위장하는 아이. 신유승은 그런 아이다. 처음 우리를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계산들이 오가고 있었겠지. 
나는 벌써부터 주변 눈치를 보는 신유승을 향해 말했다. 
 
“유승아.” 
“네, 네!” 
“도망치지 마.” 
“······.” 
“만약 여기서 도망치면, 너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어.” 
 
희미하게 벌어졌던 신유승의 입이 닫힌다. 
신유승은 영악하기보다는 영리한 아이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잔꾀는 먹히지 않는다. 
아이라는 이유로 보호해 줄 사람도 없다. 
 
“······알겠어요.” 
 
두려움은 공포로, 공포는 이내 결의로. 
 
[등장인물 ‘신유승’이 ‘상급 다종 교감 Lv.3’을 발동합니다!] 
 
주변으로 밀려드는 살기.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들의 기척이 늘어나고 있었다. 
 
일단 수면 위에 보이는 것만 열 마리. 
 
한 번에 해치우기는 어려운 숫자다. 하지만 도망치려면 도망칠 수는 있다. 어쨌든 한강만 벗어나면, 어룡들은 쫓아오지 못하니까. 

“독자 씨!” 
 
유상아의 경고성. 어룡들의 피습이 시작되었다. 
날카로운 어룡의 송곳니가 사방에서 동시에 날아들었다. 
 
[‘신념의 칼날’이 활성화됩니다.] 
 
나는 칼날을 휘둘러 곧바로 어룡의 아가리 하나를 꿰뚫었다. 비껴간 어룡들의 몸체가 수면을 때렸다. 
 
콰아앙! 
 
한강을 뒤집는 어룡들의 용틀임. 나는 비산하는 강물과 함께 허공을 날았다. 돌아보니, 스티로폼을 놓친 신유승이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에서 날파람이 불더니, 유상아가 신유승을 향해 거미줄을 뻗었다. 
 
[헤르메스의 산책법]에 [아라크네의 거미줄]의 연계. 
 
유상아가 무사히 신유승을 받아내는 사이, 나는 죽은 어룡 하나를 발판 삼아 다가오는 어룡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쪽이다 자식들아!” 
 
십여 마리의 어룡들이 물살을 가르며 이쪽으로 헤엄쳐 왔다. 강물이 거대한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내가 딛고 선 어룡의 시체가 위태롭게 출렁였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바람의 길]을 사용하면 쉽게 위기를 타개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는 처절함이 부족하다. 
 
“아저씨!” 
 
유상아의 품에 안긴 신유승의 표정이 다급해진다. 몇 개의 송곳니가 내 살갗을 파고들었고, 나는 연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몇 마리의 어룡이 치명상을 입고 나가 떨어졌지만 숫자는 줄지 않았다. 흘러내리는 피는 금방 식었고, 숨은 점점 벅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웃었다. 
 
더 조급해져라. 
더 간절해지고. 
더 절박해져라. 
그래야만 해. 
 
푸슈슈슈슛! 
 
어룡의 송곳니가 스친 곳에 흉측한 상처가 만들어졌다. 
너덜거리는 살점에서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안 돼―!」 
 
귀청을 찢는 듯한 메시지가 귓가를 울렸다. 
 
[등장인물 ‘신유승’의 특성 진화가 임박하였습니다.] 
[화신 ‘신유승’이 트랜스 상태에 돌입합니다.] 
 
신유승의 눈이 하얗게 물들고 있었다. 전력을 다할 때의 이길영과 똑같은 모습. 내가 생각한 그대로였다. 이 모든 것은, 신유승의 이 순간을 위해 연출되었다. 
 
[등장인물 ‘신유승’이 ‘길들이기 Lv.9’를 발동합니다!] 
 
60레벨의 마력이 폭포수 같은 아우라를 쏟아내며 한강의 물살을 타고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달려오던 어룡들의 기세가 주춤했다. 거대한 정신에 감응하기라도 하듯, 어룡들이 몸을 떨며 신음을 흘렸다. 
 
기이이이······? 
 
수면 위로 보이는 어룡의 무리가 더 늘어났다. 
아까는 열 정도였는데, 이제 스물을 훨씬 넘는다. 그렇다는 것은 수면 아래까지 합치면 그 두 배 이상의 어룡들이 주변에 모여들고 있다는 뜻. 
하지만 이내 어룡들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혼란해진 어룡들은 더욱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냈고, 살기는 한층 더 흉폭해졌다. 
 
기아아아아아! 
 
빌어먹을, 실패인가? 
 
“유상아 씨!” 
 
어쩔 수 없다. 이제 그녀의 성흔을 이용해 빠르게 벗어나는 것만이 최선이다. 고개를 끄덕인 유상아가 실을 뿜으며 어룡들을 피해 다가왔다. 나는 신유승을 불렀다. 
 
“유승아. 그만해도 돼. 신유승!” 
 
그러나 신유승은 대답이 없었다. 
신유승의 주변에서 일어난 기파가 점차 거세지더니, 이제 그녀의 몸은 완연한 푸른빛 아우라로 덮여 있었다. 
한강의 중심에서 소용돌이가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쿠구구구구. 
 
나는 손을 쓸 틈도 없이 물살에 휩쓸렸다. 주변의 어룡들이 일제히 몸을 부딪치며 비명을 질렀고, 나는 어룡의 비늘에 간신히 매달린 채 원심력을 견뎌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대한 물보라가 치솟더니, 다른 어룡들의 대여섯 배는 될 법한 크기의 어룡이 천천히 일어섰다. 너무 커다란 녀석이어서, 나는 그게 정말 어룡일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내가 죽인 씨-커맨더 보다도 더 큰 녀석이었다. 
위엄이 넘치는 수염. 하나의 종족을 지배하는 고고한 눈빛. 
주변의 모든 어룡들이 머리를 수면으로 굽히고 있었다. 
 
[5급 해수종(海水種), ‘퀸 미르바드’가 나타났습니다!] 
 
······제기랄, 하필이면 이 녀석을 불렀단 말인가? 
신유승의 재능이 뛰어난 줄은 알았지만 설마 ‘퀸’을 부를 정도의 재능일줄은 몰랐다. 
무려 소재앙에 필적하는 괴수종. 
내가 [책갈피]를 열어 [바람의 길]을 발동하려는 순간, 유상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독자 씨?” 
 
돌아보자, 신유승의 몸이 허공에 떠 있었다. 
퀸 미르바드에게 뻗어진 아우라의 길을 따라, 신유승이 천천히 퀸의 몸체에 다가갔다. 퀸은 신유승을 바라보았고, 신유승은 퀸을 바라보았다. 신유승의 작은 손이 퀸의 콧등을 고요히 쓸었다. 
주변의 물살이 가라앉고, 수면 위의 어룡들이 조용히 자취를 감추었다. 
다시 돌아보았을 때, 신유승은 퀸의 머리에 타고 있었다. 
나는 새삼 신유승이 어떤 존재인지 실감했다. 
 
비스트 로드. 
모든 괴수들의 지배자. 
 
천천히 눈의 색깔이 돌아온 신유승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코피를 쓱 훔친 녀석이 말했다. 
 
“가요, 아저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Episode 20. 범람의 재앙 (1) > 끝

< Episode 20. 범람의 재앙 (2) >
 
 
 
 
 
언젠가 한명오 부장이 몰디브 별장에 개인 요트를 샀다며 자랑한 기억이 있다. 뭐랬더라. 프로펠러가 물살을 가르는 순간 바다에 고속도로가 뚫린 것 같은 기분이랬나? 
 
촤아아아! 
 
그 느낌이 뭔지 정확히 알겠다. 
그때 한 부장이 달린 바다가 경부 고속도로쯤이었다면, 나는 지금 아우토반에 있는 것 같으니까. 
 
“······놀랍네요 정말.” 
 
퀸의 후면에 올라탄 유상아와 나는 갈라지는 한강 물살을 보며 넋을 놓았다. 신유승은 퀸에 대한 통제력을 시험하기라도 하듯, 곧바로 직진하지 않고 물살을 가르며 어룡의 무리를 이끌었다. 이제 한강은 안전지대가 되었으니, 기왕이면 용산구에 가까운 뭍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그오오오오. 
 
마치 어미를 따르는 새끼 오리들처럼, 어룡들은 퀸 미르바드에 호응해 대열을 맞춰 헤엄쳤다. 
 
나는 얼굴을 난타하는 시원한 공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진짜 느낌 죽이는구만. 
세계가 예전 그대로였다면 누리지 못했을 사치다. 
 
신유승은 퀸의 정신과 싱크로를 맞추며 퀸의 머리에 붙어서 뭔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 신유승을 보던 유상아가 복잡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독자 씨. 지금 유승이가 강해져버리면 미래에서 올 유승이도 더 세지지 않을까요?” 
 
역시나, 그런 걸 물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원작대로라면, 이번에 찾아올 재앙은 ‘다른 회차의 미래’에서 온 신유승이다. 
유중혁에게 배신당해, 세계선 바깥으로 버려졌던 신유승. 
그녀는 자신의 시간 분기를 잃고 우주를 떠돌다, 스타 스트림의 가호로 인해 시나리오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과거 회차의 시나리오에 ‘재앙’으로 강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자 유상아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면 지금의 유승이가 죽어도, 미래의 재앙은 죽지 않는 거 아닌가요? 분기가 완전히 다르니까······.” 
“‘끊어진 필름 이론’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뇨.” 
 
나는 두 쪽으로 갈라지는 물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하나의 세계선에서 출발한 유승이의 역사를 하나의 ‘필름’이라고 가정해보죠.” 
“필름······ 영화의 필름을 말하는 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가 있는 이 세계선을 ‘1번 필름’이라고 가정한다면, 분명 다른 세계선에는 무수히 많은 필름들이 있겠죠? 2번 필름도 있을 거고, 뭐 34번 필름도 있을 거고.” 
“네. 그렇겠죠?” 
“그런데 그 필름들 중 하나가, 앞쪽이 끊어진 채 1번 필름의 뒤쪽에 붙으면 어떻게 될까요? 가령 찢어진 34번 필름이 뒷부분만 1번 필름의 뒤쪽에 들러붙는다면? 그 필름을 상영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유상아는 잠시 골몰하는 듯했다. 

“그러면 영상이 도중에 바뀔 텐데······ 아, 잠깐만요. 그래서 두 개의 이야기가 서로 영향을 못 끼치는······?” 
“맞습니다.” 
“아······ 지금의 유승이가 그런 상황인 거군요. 1번 필름의 유승이가 현재라면, 34번 필름의 유승이는 재앙. 그런데 두 이야기가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니까, 우리 세계의 유승이가 변해도 재앙에게는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거고······.” 
 
역시 유상아는 똑똑하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해소가 안 돼요. 그럼 지금의 유승이가 죽어도, 재앙은 그대로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테이프의 내용은 서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두 테이프는 ‘이어져’ 있습니다.” 
“네?” 
“만약 앞쪽의 테이프에 불이 붙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유상아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뒤쪽 테이프도······ 타겠군요.” 
 
두 개의 세계선이 강제로 연결되었으니, 지금의 신유승이 죽으면 미래의 신유승도 죽는다. 
하지만 지금의 신유승이 바뀐다고 해서, 미래의 신유승이 갑자기 변하지는 않는다. 그 애매한 패러독스가 바로 이 재앙의 핵심이었다. 
 
“독자 씨는 정말 아는 게 많으시네요. 저는 평행우주론은 들어봤지만, 그런 이론은 처음 들어봐요.”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모를 거다. 
왜냐하면 이건 ‘멸살법’ 작가가 만든 이론이니까. 
누차 말하지만, 멸살법이 괜히 망한 게 아니다. 
 
쿠우우우. 
 
잠시 후, 가벼운 정거음과 함께 한강의 물살이 잠잠해졌다. 
마침내 한강의 반대편에 도착한 것이다. 퀸은 우리를 바닥에 내려준 후, 한강 안으로 다시 사라졌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신유승이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저 어땠어요?” 
“잘 하던데? 고생했어.” 
“네.” 
 
신유승은 묘하게 상기된 얼굴이었다. 
칭찬을 받는 게 좋은 모양이다. 
이제 이 아이에게 칭찬을 해 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으니까. 
용산구의 빌딩 숲 사이로 사나운 적의가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쿵. 쿵. 
 
거대한 그림자가 빌딩 숲을 지나 다가온다 싶더니, 초록빛의 거대한 낫이 건물 사이로 등장했다. 
 
······거대 사마귀? 
 
충왕종의 꼭대기에 탄 소년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독자 형?” 
 
삐뚜름한 스냅백을 쓴 이길영과, 헤드폰을 낀 한동훈. 
미끄러지듯 사마귀의 신체를 타고 내려온 이길영이 그대로 내 품에 달려들었다. 
스냅백이 벗겨진 이길영의 까슬한 머리가 그대로 만져졌다. 
 
정확히 일주일 만의 재회였다. 
위이잉, 하는 소리가 나더니 스마트폰으로 메시지가 왔다. 한동훈이었다. 
 
―반가워요, 형.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젠 좀 말로 하면 안 되냐?” 
 
―싫어요. 
 
 
* 
 
 
이길영과 신유승은 만나자마자 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마치 더듬이라도 되는 듯 이길영의 머리카락이 심란하게 움직였고, 신유승은 시시각각 솜털을 곤두세우며 이길영을 견제했다. 
 
“아저씨, 저 남자애가 자꾸 째려봐요.” 
“형, 쟤 누구예요?” 
 
역시 동류끼리는 알아보는 모양이다. 
하나는 괴수 마스터고, 다른 한쪽은 벌레······ 마스터니까. 
둘이 잘 맞으려나 모르겠네. 
나는 이길영에게 물었다. 
 
“희원 씨는 아직 못 만났니?” 
“네. 근데 어디 있는지는 알 것 같아요. 벌레들 보내서 찾아봤는데, 희원 누나는 지금 북쪽에 있어요.” 
 
역시 이길영. 말하지 않아도 벌써 일행들을 찾아본 모양이다. 
그나저나 북쪽이라면, ‘방랑자들의 왕’이 기거하는 곳이다. 
어쩌면 정희원은 그쪽과 접촉했을지도 모르겠다. 
 
“형이 올 것도 알고 있었어요. 물방개를 잔뜩 보내 놨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이길영의 머리 위에 벌레들이 늘었다. 분명 바퀴벌레만 있었는데······. 신유승이 징그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일행들의 전력을 점검한 뒤, 결론을 내렸다. 
 
“남은 이틀은 이곳에서 머무는 게 좋겠습니다. 각자 스킬 숙련치는 최대한 올려두고, 남는 시간엔 틈틈이 코인을 모아 두세요. 종합 능력치는 찍을 수 있는 데까지 모두 찍어두시고요. 아, 그리고······ 유상아 씨.” 
“네.” 
“가족이랑 연락은 하셨습니까?” 
 
가족이라는 말에, 유상아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예상대로 아직 연락을 못 한 모양이다. 
 
“동훈아.” 
 
헤드폰을 낀 한동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훈은 [광역 인터넷]을 스킬로 가지고 있다. 즉, 외부와 통신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위이잉. 
 
유상아의 작은 스마트폰이 울리며, 인터넷이 연결되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유상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듯 한참이나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울상을 지은 채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족분들에게 이쪽 상황도 전해주세요. 이번 시나리오가 끝나면, 서울 외곽도 더이상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가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꼭 대비하라고 해두세요. 지금은 그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독자 씨는 연락 안 하셔도 되나요?”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제 가족은 서울에 있습니다.” 
“서울에요? 그럼······.” 
“그 사람은 안전합니다.” 
 
나는 말없이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북쪽에서 ‘물의 재앙’을 처치하였습니다.] 
 
‘방랑자들의 왕’도, 무사히 일을 마친 모양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범람의 재앙’뿐이다. 
 
 
* 
 
 
「눈부신 검광이 파찰음을 일으키며 허공을 수놓았다. 찰나에 부딪친 수십 개의 검격. 정희원의 눈동자에서 타오른 혈영(血影)이 허공에 번지며 귀기를 흩뿌렸다. 이윽고, 정희원의 검이 멈춰섰다. 
 
“수련은 이만하면 된 것 같아요.” 
 
정희원은 자신의 칼날을 꼼꼼하게 점검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있던 중년의 여인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전우치의 도술은 정말 대단하네요.” 
“희원 씨의 검도도 훌륭했습니다. 곧 배후성도 생기실 테니, 그때는 저도 상대가 안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찬이세요.” 
 
정희원은 그녀의 하늘색 죄수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난 일주일, 정희원은 이들에게 신세를 졌다. 아마 남은 시간을 다해도 쉬이 갚을 수 없는 빚일 것이다. 중년 여인이 물었다. 
 
“정말 저희 <누벨바그>와 같이 다닐 생각은 없으십니까? 왕께서도 희원 씨가 같이 다니면 기뻐하실 겁니다.” 
“죄송하지만 기다리는 일행이 있어서요.” 
 
정희원은 정말 미안하다는 듯 양손을 모았다. 중년 여인도 어쩔 수 없다는 아쉬운 미소를 지었다. 여인도, 정희원의 일행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희원 씨가 이렇게 필사적이라는 걸 그 사람도 알았으면 좋겠군요.” 
“알 거예요.” 
 
정희원은 살짝 못마땅한 얼굴로 하늘을 보며 말했다. 
 
“왠지 지금 보고 있을 것 같거든요.”」 
 
······이래서야 누가 [전지적 독자 시점]인지 모르겠다. 
하여간, 정희원도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는 듯했다. 
원작에서는 빛을 못 본 캐릭터라 걱정하고 있었는데,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게 증명되는 것 같아서 기쁘다. 
나는 이어서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다른 사람의 시점을 찾아 나섰다. 
안타깝게도 보이는 시점은 몇 개 없었다. 
 
······음? 이건 뭐지? 
 
잠시 후 화면이 일렁이더니,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저건 나잖아? 
잠깐만. 이 녀석들은? 
 
「“야, 너.” 
 
이길영이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좋게 말할 때 형한테서 떨어져.” 
 
그러자 잠든 내 옆에 찰싹 붙은 신유승이 말했다. 
 
“싫은데?” 
“어디서 똥개 같은 게······.” 
“나한테 말 걸지마, 벌레 새끼야.” 
 
이길영이 주춤했다. 녀석의 머리 위에 올라선 바퀴벌레와 물방개가 사납게 더듬이를 움직였다. 간신히 침착함을 회복한 이길영이 반격했다. 
 
“형은 너 같은 애 싫어해.” 
“아저씨가 누굴 좋아하는진 나도 알아.” 
“······형이 누굴 좋아하는지 안다고? 누군데?” 
“어떤 언니야.” 
 
이길영이 피식 웃었다. 
 
“언니? 뭘 잘못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독자 형은 남자를 좋아해.” 
“네가 어떻게 알아?” 
“난 형이랑 오래 다녀서 잘 알아.”」 
 
뭔가 끔찍한 대화가 시작되려는 찰나, 나는 간신히 잠에서 깨어났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니, 신유승과 이길영은 머리를 기댄 채 쿨쿨 잠에 빠져 있었다. 
······잘못 봤나? 그냥 꿈이었나? 
 
“독자 씨, 무슨 일 있어요?” 
 
불침번을 서던 유상아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역시 꿈이었나 보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눕는데, 어디선가 소곤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벌레. 그러고 보니 너 아까 아저씨한테 안겼지?’ 
‘······.’ 
‘애기냐? 아저씨는 어른스러운 사람을 좋아하거든?’ 
 
역시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거기······ 너희들 안 자니?” 
 
유상아의 목소리. 그러자 다시 주변이 잠잠해지고 이내 아이들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이틀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서브 시나리오 ― 생존활동’이 종료되었습니다.] 
 
들려온 시스템 메시지에 일행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채비를 마쳤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시나리오. 
허공에서 비형의 메시지가 깜빡였다. 
 
[9421.] 
 
뜬금없는 숫자. 비형은 다시 한번 말했다. 
 
[9513.] 
 
‘뭐야?’ 
 
[뭐겠냐? 9611.] 
 
나는 숫자가 뭔지 바로 알아챘다. 
그때 ‘1만’을 공약으로 내세웠었지 참. 
 
[한반도를 좋아하는 성좌들이 구독좌의 숫자에 긴장합니다.] 
 
나는 비형을 향해 물었다. 
 
‘하란 대로 했지?’ 
 
[······하긴 했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아무튼 운이 좋길 빈다. 9781.] 
 
고오오오오. 
 
하늘에서 소용돌이치는 그레이트 홀이 심상찮은 징조를 내보이고 있었다. 우레가 쏟아지고, 간헐적인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파츠츠츠,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중급 도깨비가 나타났다. 
 
[오래 기다리셨군요, 여러분.] 
 
간만에 보는 중급 도깨비는, 관리국에서 꽤 시달린 모양인지 얼굴이 수척했다. 
 
[그간의 생존 활동은 즐거우셨나요? 드디어 기다리셨던 본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차질이 생겨서 일정 변동이 좀 있었지만······ 네, 뭐. 그래도 기대하신만큼 재미있는 시나리오일 겁니다.] 
 
녀석은 나와 몇몇 화신들을 보더니, 못마땅한 투로 말을 이어갔다. 
 
[그간 다섯 재앙 중 무려 네 개를 해치우셨더군요. 여러분의 공로,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곧 찾아올 마지막 재앙에 비하면, 나머지 네 개는 그저 애들 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행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실제로 그 말은 맞다. 
다른 재앙을 모두 합쳐도, ‘범람의 재앙’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이 시나리오의 성공 유무에 따라,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해온 일이 모두 무위로 돌아갈 수도 있고, 모든 것이 끝장날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그럴 확률이 90퍼센트 이상입니다. 한데 다행히도, 그런 여러분들을 가엾게 여기는 분들이 계십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시작되는군. 
다섯 번째 시나리오에 돌입하기 전, 마지막 이벤트가. 
 
[그럼, 지금부터 두 번째 <배후 선택>을 시작하겠습니다.]
 
 
 
 
 
< Episode 20. 범람의 재앙 (2) > 끝

< Episode 20. 범람의 재앙 (3) >
 
 
 
 
 
하늘 위에서 찬란한 빛이 반짝이더니, 서울 전역으로 쏘아졌다. 
어떤 빛은 북쪽으로, 어떤 빛은 서쪽으로. 하지만 산란의 폭은 크지 않았다. 대부분의 빛은 서울의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시나리오를 대비해 화신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드디어 계약이다! 나도 계약한다고!”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던 화신들이 살가운 목소리를 냈다. 
아직 나 말고도 배후성을 못 얻은 화신들이 있었던 모양. 
곧 미계약 화신들의 머리 위에 작은 별들이 떠올랐다. 
별의 개수는 곧 그 화신을 원하는 성좌들의 개수였다. 
 
<배후(背後) 선택> 
 
―당신의 배후를 선택하세요. 
―선택한 배후는 당신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줄 것입니다. 
 
아마 지금쯤, 모든 미계약 화신들은 내가 보는 것과 같은 정경을 보고 있을 것이다. 
정확히는, 조금 다른 정경이겠지만. 
 
1. 긴고아의 죄수 
2. 심연의 흑염룡 
3. 은밀한 모략가 
 
역시 긴고아의 죄수와 은밀한 모략가는 이번에도 있었다. 계속 거절하기도 미안한 노릇이지만, 어쩔 수 없다. 
······심연의 흑염룡 이 녀석 또 왔네. 
한수영한테나 가지, 왜 자꾸 나한테 찾아오는 거야? 
 
4. 서애일필 
5. 대머리 의병장 
6. 흥무대왕 
 
한반도의 위인들도 줄지어 오셨다. 
서애일필은 아마 유성룡일테고······. 
어이쿠, 우리 사명대사님도 오셨다. 
여우 같은 김유신도······ 내가 진짜 자길 선택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목록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21. 고려제일검 
22. 술과 황홀경의 신 
 
고려제일검을 지칭할만한 사람이라면 역시 고려 소드마스터라 불리는 그분이겠지. 거기에 디오니소스까지······. 올림포스도 슬슬 ‘김독자 쟁탈전’에 발을 들이민 모양이었다. 
목록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조금씩 당혹스러운 기분에 젖어갔다. 예상외의 성좌들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48. 검은빛의 인도자 
49. 하늘의 서기관 
50. 복수와 묵시의 통치자 
 
나도 모든 수식언을 기억하는 게 아니기에, ‘검은빛의 인도자’나 ‘복수와 묵시의 통치자’는 누구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하늘의 서기관’은 확실했다. 
저 녀석은, 절대선 계열에서 손에 꼽는 강력함을 지닌 성좌다. 
 
대천사 메타트론. 
 
천사로서의 권위만 놓고 보자면, 이 녀석은 우리엘보다 격이 높았다. 
자타공인 천상의 2인자. 
빌어먹을, 대체 어떤 녀석들이 날 보고 있는 거지? 
 
······. 
 
문득 내 머리 위를 보니, 수백 개의 별들이 환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인근의 밤을 모조리 밝혀버릴 듯한 조도(照度). 
몇몇 화신들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넋이 나간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저거······.” 
“저 사람 대체 뭔데?” 
 
역시나 멍하니 내 머리 위를 보던 신유승이 말했다. 
 
“아저씨, 꼭 크리스마스트리 같네요.” 
 
[한반도를 좋아하는 성좌들이 당신에게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신의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결국, 올 것이 왔다. 
나는 작게 숨을 들이켜며 비형을 불렀다. 
 
‘비형.’ 
 
[왜.] 
 
‘지금 몇 명이야?’ 
 
독각을 물리치면서, 나는 성좌들에게 공약을 내걸었다. 
<배후 선택> 당일까지 비형의 채널 구독좌가 1만을 돌파하면, 배후성을 선택하겠다고. 
 
[9812. 아니, 14······. 16.] 
 
계속해서 올라가는 성좌들의 숫자. 비형도 긴장한 말투였다. 
 
[<배후 선택> 종료까지 3분 남았습니다.] 
 
이제 3분 안에, 결과는 정해질 것이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초조해하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안타깝지만, 그렇게 간절하게 쳐다봐도 소용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배후 선택> 종료까지 2분 남았습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에게 2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성좌, ‘서애일필’이 당신에게 3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성좌, ‘흥무대왕’이 당신에게 4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드디어 후원 경쟁에도 불이 붙었다. 
성좌들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내 눈에 띄어야 하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몇몇 설화급 성좌들이 위인급 성좌들의 치졸함에 혀를 찹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에게 50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정확히 내가 바라던 대로의 전개였다. 
좋아좋아. 
더 많이 내 보라고.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당신에게 300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역시 메타트론. 후원의 급이 다르다. 
무려 ‘하늘의 재상’이라 불리는 존재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하늘의 서기관’을 노려봅니다.] 
[<배후 선택> 종료까지 1분 남았습니다.] 
 
나는 비형에게 물었다. 
 
‘이제 몇 명?’ 
 
[9973······ 76, 77.] 
 
드디어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왔다. 
 
[9981······ 84.] 
 
30초. 
 
[9993.] 
 
20초. 
 
[9998.] 
 
[다수의 성좌들이 가슴을 졸입니다.] 
 
10초. 
 
[9999······.] 
 
5초, 4초, 3초······. 
 
[<배후 선택>이 종료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벼운 한숨. 
내가 비형을 바라보자, 비형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아쉽네요, 여러분.] 
 
[상당수의 성좌들이 말도 안 된다며 소리를 지릅니다!]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다. 
 
[현재 구독좌 수 : 9999] 
 
비형이 허공에 띄운 그 화면만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몇몇 화신들이 그 광경을 보고 입을 벌렸다. 
신유승이 물었다. 
 
“아저씨 무슨 스타 유튜버에요?” 
 
어쩌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하늘을 향해 뻔뻔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쉽네. 1만 명이 되면 바로 선택하려고 했는데.”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이 누굴 선택하려 했는지 궁금해합니다.] 
 
그러자 비형이 끼어들었다. 
 
[해당 화신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그건 밝힐 수 없습니다.] 
 
잘한다, 비형. 
 
[상당수의 성좌들이 폭동을 일으킵니다!] 
 
쿠구구구구. 
 
용산구 일대의 하늘이 일그러지며 벼락들이 애꿎은 사람들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쉴 새 없이 스파크가 튀었다. 개연성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힘을 행사하다니, 성좌들도 분노에 정신이 나가버린 모양이었다. 
 
[자자, 성좌 여러분들. 진정들 하세요. 정말 안타깝지만 한 명 차이로 이벤트는 무산되었으니······.] 
 
비형은 내 눈치를 흘끗 보며, 그대로 말을 이었다. 
 
[사과의 의미로, 보상 이벤트를 하겠습니다.] 
 
그러자 떨어지던 벼락이 일시적으로 멈췄다. 
 
[아마 여러분은 지금쯤 이렇게 생각하고 계시겠죠? 시발, 어차피 내가 가지지도 못할 화신, 이대로 계속 두면 뭘 하나?] 
 
[상당수의 성좌들이 도깨비 ‘비형’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저는 그런 여러분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합니다. 그래서! 감히 두 번째 <배후 계약>에서도 배후성을 선택하지 않은 저 화신에게, 엄벌을 내릴까 합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성좌 여러분들께서 찬성하신다면······.] 
 
[상당수의 성좌들이 도깨비 ‘비형’의 의사에 격하게 찬성합니다.] 
 
비형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유승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며 물었다. 
 
“······저게 대체 뭐하는 짓이래요?” 
“나 엿먹이려는 전개지 뭐겠냐.” 
“아저씨는 왜 배후성 선택 안 한 건데요?” 
“그냥, 안 내켜서.” 
 
솔직히 메타트론까지 떴을 때는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여기서 누굴 선택하면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모두 말짱 도루묵이다. 나는 누구의 밑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야만 한다. 
 
“유상아 씨. 애들 데리고 숨어요.” 
“······생각이 있으신 거죠?” 
“물론 있습니다. 절대로 제가 먼저 신호하기 전에는 나오지 마세요.” 
 
[새로운 ‘현상금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당신은 ‘현상금 시나리오’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현상금 시나리오’가 시작되었다. 
 
+ 

<현상금 시나리오 ― 천벌> 
 
분류 : 현상금 
난이도 : A 
클리어 조건 : 화신 ‘김독자’를 처참하게 찢어 죽이시오. 잔인하게 죽일수록, 당신이 받을 수 있는 코인의 값이 증가합니다. 
제한시간 : 20분 
보상 : 40000 ~ ????? 
코인 실패시 : ― 
 
+ 
 
누가 보면 내가 다섯 번째 재앙인 줄 알겠다. 
겨우 나 하나 잡는데 4만 코인이라니. 
시나리오를 받았는지, 신유승의 안색이 하얗게 질렀다. 
 
“······아저씨?” 
 
나를 향해 손을 뻗는 신유승을 유상아가 데리고 물러섰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사방에서 나를 발견한 화신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벌써 내 머리 위에는 이미 <표적> 표시가 떠 있었다. 
 
“미친! 4만 코인?” 
“야, 저 새끼 잡아!” 
 
[상당수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의 전개에 즐거워합니다.] 
 
내 선택에 분노하던 성좌들은, 어느새 내가 쥐새끼처럼 쫓기는 모습에 희희낙락하기 바빴다. 
다들, ‘1만 이벤트’ 따위는 잊은 기색이었다. 
그래, 이게 성좌들의 본성이지. 
달아나는 나를 보며 비형이 허탈한 표정으로 통신을 걸었다. 
 
―진짜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될 줄 알았어. 게임 회사 다닐 때 자주 하던 짓이니까.’ 
 
이벤트에 화난 유저들을 달랠 방법은, 새로운 이벤트를 여는 것뿐. 
바들바들 뿔을 떨던 비형이 중얼거렸다. 
 
―괜찮겠지? 들키면······ 시발, 이번엔 진짜 ‘개연성 적합 판단’에 들어가는 거라고. 
 
사실, 비형의 구독좌 숫자가 ‘9999’를 돌파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채널 조작’이었다. 
왜냐하면, 비형의 #BI-7623 채널은 처음부터 정원이 9999였으니까. 
이번에야말로 ‘독각’이 시비를 걸면 피하지 못하겠지만, 다행히 시비를 걸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지난번 사건 이후 하급 도깨비들은 죄다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감수하기로 했잖아.’ 
 
그래도 여전히 위험한 방법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머리 회전이 빠른 몇몇 성좌들은 틀림없이 이 일을 의심할 테니까. 하필 9999에서 멈추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이 지나치다. 그래서 성좌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추가 이벤트가 필요했다. 
성좌들은 귀찮은 것을 싫어하고 쾌락에는 취약하다. 
그것을 위해 이용한 이벤트가, 지금 내가 받는 <천벌>이었다. 
비형이 히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성좌님들, 참고로 이 <천벌> 이벤트는 성좌님들의 후원을 통해 화신 ‘김독자’에게 패널티를 걸 수 있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이 급격하게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이기적인 한 성좌가 당신에게 ‘속도 패널티’를 걸었습니다.] 
[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받는 코인이 늘어날수록 내 몸에 걸리는 패널티도 늘어난다. 평소라면 쫓아오지도 못했을 화신들이, 어느새 바로 뒤까지 따라붙고 있었다. 
 
“다들 코인에 눈이 멀었나 보네. 그치?” 
 
나는 씩 웃으며, 뒤쪽을 향해 ‘신념의 칼날’을 휘둘렀다. 
 
“크와아앗!” 
 
[당신의 불행을 원하는 한 성좌가 당신에게 ‘공격력 패널티’를 걸었습니다.] 
[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평소보다 절반 이하로 떨어진 공격력에, 화신들은 주춤하긴 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갑다. 죽일 생각도 없었으니까. 
 
[당신의 죽음을 갈망하는 한 성좌가 당신에게 ‘방어력 패널티’를 걸었습니다.] 
[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엿 같은 후원. 
 
쐐애액! 콰지직! 
 
어디선가 날아온 단도를 맞은 오른팔에 지독한 통증이 일었다.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가 아니었다면 팔이 잘려나갔을 것이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위기에 안타까워합니다.] 
 
그 와중에 나를 응원해주는 성좌들도 있다. 
눈물나게 고맙구만 그래. 
나는 다친 팔을 붙잡은 채 그대로 용산구의 남서쪽으로 달렸다. 
내 생각이 맞다면, ‘범람의 재앙’이 잠들어 있는 운석은 그 방향에 있다. 
부화를 앞둔 운석의 기운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비형.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이긴요. 본게임에 들어가기 전 간단한 여흥이죠.] 
 
허공에서 투닥거리는 도깨비들의 목소리. 
이제 비형도 제법 발언권이 세진 모양이었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달리고 또 달렸다. 
조금만 더······. 
그리고 마침내 한강이 나타났다. 
 
“붙잡아!” 
 
나는 다리를 붙드는 갈퀴들과, 우악스러운 손아귀들을 가까스로 피해내며 한강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한강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는 다른 화신들은 쉽사리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 
 
“저 미친놈이!”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7급 해수종인 어룡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약해진 나를 먹잇감으로 삼기 위해 달려드는 녀석들. 
 
[상당수의 성좌들이 희열에 차오릅니다.] 
 
나는 그런 어룡들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재능이 없다. 
수련을 해도, 원하는 만큼 숙련이 오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걸 핑계로 내가 ‘약하다’고 말할 생각도 없었다.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강해지는 방식은, 결코 남들과 같지 않으니까. 
 
[‘인물 책갈피’가 활성화됩니다.] 
[사용 가능한 책갈피 슬롯 : 4개] 
[활성화 가능한 책갈피의 목록을 불러옵니다.] 
 
“3번 슬롯에 ‘선동가 천인호’를 해제하고, ‘비스트 테이머 신유승’을 넣겠다.” 
 
[3번 책갈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환한 빛살이 내 몸을 감싸며, 갑자기 코끝에서 느껴지는 괴수들의 냄새가 달라졌다. 어떤 냄새는 친근했고, 어떤 냄새는 적의로 가득했다. 새삼 가까운 곳에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결국, 세계를 결정하는 것은 그 세계를 읽는 감수성이다. 
 
[책갈피 스킬의 레벨에 비례해 활성화 시간이 결정됩니다.] 
[활성화 시간 : 30분]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높습니다. 해당 인물의 스킬 중 몇 개를 선택해서 가져올 수 있습니다.] 
 
멀리 있던 어룡 하나가 나와 싱크로를 맺으며, 머릿속에 복잡한 회로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상급 다종교감 Lv.3」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길들이기 Lv.9」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코피. 
그 꼬맹이 녀석들, 늘 이런 기분이었구만.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와라, 퀸 미르바드.”
 
 
 
 
 
< Episode 20. 범람의 재앙 (3) > 끝

< Episode 20. 범람의 재앙 (4) >
 
 
 
 
 
 
물살을 가르며 다가온 어룡의 여왕. 
유선형의 몸체가 만드는 웅장함에 한강물이 넘실거렸다. 
당황한 화신들이 일제히 한강에서 멀어졌다. 
 
쿠오오오오! 
 
“으아아아, 씨발!” 
“저거 뭐야!” 
 
단지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지엄함이 느껴지는 눈빛. 나는 한 종의 지배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신유승이나 이길영이 새삼 얼마나 대단한 녀석들인지 실감이 난다. 
 
“엎드려.” 
 
퀸은 내 말에도 수염에 묻은 물을 털며 딴청을 피웠다. 
역시, 같은 스킬이 있어도 똑같은 효과를 보는 것은 무리인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리카온의 「바람의 길」을 빌렸을 때도 비슷했다. 나는 별 수 없이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가 비늘을 기어올랐다. 
 
쿠르르르. 
 
내 손길을 거부하는 듯, 거칠게 요동치는 퀸의 몸체. 
지금의 내겐 이 정도가 한계였다. 솔직히 퀸과 싱크로가 맺어진 것만으로 전두엽이 조금씩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넋이 나간 화신들을 내버려 두고 입을 열었다. 
 
“가자.” 
 
그리고 퀸의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나를 데리고 장난이라도 치는 듯, 퀸은 내 호흡 따윈 아랑곳 않고 수심과 수면을 오가며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푸하합!” 
 
나는 물에 젖은 생쥐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채 연거푸 숨을 뱉어냈다. 
 
“이런······!” 
 
그오오오오. 
 
즐겁다는 듯, 주변의 어룡들이 나를 향해 울음을 터뜨렸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보며 낄낄댑니다.] 
 
통제는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퀸은 내가 원하는 방향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용산구의 남서쪽. 
그곳에는 한강 지구의 몇 안 되는 섬 중 하나인 ‘노들섬’이 있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범람의 재앙]의 부화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도 바로 저 섬이었다. 
 
「다섯 번째 재앙은 한강의 인공섬에서 부화했다.」 
 
‘멸살법’은 작중의 연도를 정확히 밝히지 않은 소설이었다. 
때문에 나는 ‘멸살법’이 정확히 몇 년도를 배경으로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내가 사는 연도와 가까울 거라는 생각은 어렴풋이 했지만, 아무래도 10년이나 연재된 소설이다 보니 기술발달사 같은 게 맞지 않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멸살법’에서는 현대 기기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고, 어떨 때는 확정 지명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지금과 같은 경우가 바로 그랬다. 
‘한강의 인공섬’이라니······ 그게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럼에도 내가 ‘노들섬’을 특정할 수 있었던 것은, 작중에 등장한 묘사와 운석의 크기 때문이었다. 
 
촤아아앗! 
 
퀸의 급정거와 함께 생각은 끊어졌다. 
나는 한 바퀴를 구르며 그대로 노들섬에 내던져졌다. 
퀸 미르바드는 나를 흘끗 보고는 한강 속으로 사라졌다. 
정 없는 자식 같으니. 
 
[전용 스킬, ‘책갈피’가 해제됩니다.] 
 
“웨에에엑.” 
 
한강을 헤쳐오는 내내 먹은 강물을 한바탕 토했더니, 세상이 한 바퀴 돌았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노들섬의 경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재앙이 오기 전에도 노들섬에는 와본 적이 없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한산하게 펼쳐진 노들섬의 나무들은 아직 멸망을 맞기 전의 세계 같았다. 
어룡들이 사라진 틈을 타, 강 건너편의 화신들이 도강을 준비하고 있었다. 쐐액, 하는 느낌이 든다 싶더니, 그새 하늘을 날아온 몇몇 화신들의 모습도 보였다. 
나는 숨을 죽인 채 나무 뒤에 숨어 그들을 보았다. 
 
“어디지? 분명 이리로 갔는데?” 
 
설마, 그새 [비행 기동]을 배운 녀석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이 자식들은 회귀자도 아닌데 적응이 왜 이렇게 빨라? 
너덧 명의 사내들이 가뿐하게 노들섬 위로 착지하며 주변을 살폈다. 
 
“거기 형씨들, 같이 찾아서 좀 나눠 먹읍시다. 그놈 세 보이던데 솔직히 혼자선 자신 없잖아?” 
“내 생각도 그래. 아까 그놈 머리에 별 떠오르는 거 봤지? 괴물 같더라.” 
“괴수 다루는 거 보니까 최소 영웅급 특성이야 그놈.” 
“······그래봤자 서쪽의 패왕만큼 세겠어?” 
 
누굴 죽이러 온 것 치곤 제법 수더분한 대화다. 
아무리 그래도 나랑 유중혁을 비교해주다니, 황송한 노릇이군. 
좀 더 숨어다니다가 제한시간이 끝날 즈음에 모습을 드러내야겠다 싶었는데, 섬의 숲에서 나온 선객이 있었다. 
 
“거기 아저씨들. 좋게 말할 때 섬 밖으로 꺼져.” 
 
패기 가득한 목소리. 교복 치마 위에 검은색 후드 짚업을 걸친 소녀는, 긴 장도를 쥔 채 사내들을 향해 걸어갔다. 
 
“뭐야 넌?” 
“어린 년이 겁도 없이······.” 
 
스각. 
 
“씨바아아아 내 팔!” 
 
서걱. 
 
“으아아아악!” 
 
검이 허공에 선을 긋자, 팔이 달아난 사내들이 비명을 질렀다.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던 화신 하나가 외쳤다. 
 
“쟤 걔에요, 충무공!” 
“뭐? 그년이 왜 여깄어!” 
“도망가요! 다들 도망가!” 
 
[비행 기동]으로 황급히 꽁무니를 빼는 화신들을 보며, 역시 재능이 괜히 재능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조금 안 본 사이에 저렇게 강해질 수가 있다니. 
아무리 친우의 후손이라 해도, 충무공이 아무나를 자신의 화신으로 삼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소녀의 날카로운 장도가 나를 가리켰다. 
 
“아저씨도 이만 밖으로 나오지 그래? ‘표적’ 표시 빤히 떠 있는데 숨으면 뭐해?” 
 
그러고 보니 머리 위에 아직도 화살표가 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양손을 든 채 숲 밖으로 나왔다. 
 
“너도 나 죽일 거냐?” 
“그러고 싶은데, 우리 사부가 슬퍼할까봐 차마 못 하겠네.” 
 
긴 장도의 소녀, 이지혜가 생긋 웃으며 칼을 집어넣었다. 
열흘 만에 다시 만났더니, 그새 능청이 늘었다. 
이지혜는 내 다친 팔을 슬쩍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그간 잘 지냈어? 잘 못 지낸 거 같긴 한데.” 
“알면 묻지 마. 넌 태풍 여고로 돌아간 것 같더니 왜 여기 있냐?” 
“며칠 전에 사부가 나 데리러 왔어. 어떻게 찾았는진 몰라도.” 
 
유중혁이? 
하긴, 이지혜는 유중혁 파티의 핵심 멤버니까 찾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나는 [냉철한 관찰력]으로 그녀의 체근민을 어림해보았다. 
대충, 160이 넘는 값이다. 
체력과 근력이 조금 떨어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 녀석도 벌써 다섯 번째 시나리오의 능력치 제한 기준에 거의 도달한 것이다. 
게다가 [귀살]과 [검술 연마]도 한층 발전한 것 같고. 
어째 ‘멸살법’의 모든 인물들은 내 눈에 안 보여야 더 빨리 성장하는 것 같다. 
다들 나 몰래 정신과 시간의 방이라도 갖고 있는 건가? 
 
“아저씨 일행들은? 희원 언니는 만났어?” 
“용산구에서 기다리고 있어. 희원 씨는 아직이고.” 
“아쉽네, 한번 보고 싶었는데.” 
 
그러고 보니 정희원과 이지혜는 포지션이 비슷했었지. 
나는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혹시 유중혁도 함께 온 거냐?” 
“음? 아저씨 다 알고 온 거 아냐?” 
 
그때, 노들섬의 가장자리에서 복작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룡들과 사투를 벌이는 화신들이 어느새 섬의 근처까지 다가와 있었다. 
어떤 녀석들은 오리배를 타고 왔고, 어떤 녀석들은 헤엄을 쳐서 왔다. 유람선을 타고 오거나 특수한 스킬로 상륙한 녀석들도 있었다. 
누가 보면 단체 관광객이라고 생각할 법한 진풍경이었다. 
 
“찾아라! 놈이 여기 있다!” 
 
그리고, 아마 이번 관광 상품은 나인 것 같았다. 
화신들의 모습을 본 이지혜가 인상을 굳혔다. 
 
“······저 떨거지들은 왜 끌고 온 거야?” 
“왜긴, 재앙 잡으러 데려 온 거지.” 
 
뜻이 있는 녀석들은 알아서 세력을 꾸려 재앙에 대비하겠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소속이 없는 화신들은 또 서울 곳곳에 숨어서 누군가가 메인 시나리오를 대신 깨주기를 기다릴 것이고, 그로 인한 전력 손실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마지막 재앙은, 그런 어설픈 각오로는 깰 수 없다. 
모두가 함께 맞서지 않으면······. 

“뭐하러 그런 짓을 해? 안 잡아도 되는데.” 
“응?” 
“재앙 안 잡아도 된다고. 우리 사부가 그랬어.” 
 
뭔 소리냐는 내 눈빛에, 이지혜가 말을 이었다. 
 
“마지막 재앙은 자기가 있으면 전혀 위험하지 않다던데? 대신 쓸데없는 녀석들 섬에 못 들어오게 막으라고······ 아씨, 저것들 훅 들어오네.” 
 
이지혜가 다시 칼을 뽑으며 달려나갔다. 
얘가 왜 섬을 통제하고 있나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군. 
잘 보니, 섬의 가장자리에서 인파를 통제하는 사람은 이지혜 하나가 아니었다. 뭍으로 다가오는 배를 향해, 거한 하나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러분, 이곳에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여긴 위험 지역입니다!” 
“뭐? 네가 뭔데?” 
“전 6502부대 중위······.” 
“어디서 중위 나부랭이가 깝치고 지랄이야!” 
 
날아드는 사내의 칼날은 중위의 손아귀에 허무하게 붙잡혔다. 
 
“······공권력에 함부로 저항하면 위험하지 말입니다.” 
“이, 이거 놔!” 
 
중위는 거대한 곰을 연상시키는 수트 같은 것을 입고 있었고, 얼굴 곳곳엔 잡스런 수염이 나 있었다. 
 
“제가 안전한 곳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중위는 한 손으로 가뿐히 사내를 들어, 한강 반대편으로 던져 버렸다. 
 
콰아아아아! 
 
사내는 엄청난 속도로 한강을 가로질러, 반대쪽 뭍에 굉음을 내며 파묻혔다. 
중위가 물었다. 
 
“또 안내가 필요하신 분 계십니까?” 
“미친! 괴물이다!” 
 
물러서는 화신들을 보며, 중위는 산처럼 쌓인 짬이라도 보듯 피곤한 표정이었다. 지독하게 지친 눈빛,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힘들어······.」 
「죽을 것 같아······.」 
「독자 씨, 어디 계십니까······.」 
 
“이현성 씨.” 
 
그 말에, 이현성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마치 메마른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듯한 표정. 
 
“독자······ 독자 씨?” 
 
나를 향해 다가오는 이현성. 
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을 물러났다. 
 
“도, 독자 씨! 접니다! 이현성입니다!” 
 
내가 입을 떼려는 찰나, 또 한 무리의 화신들이 소란스럽게 들이닥쳤다. 
 
“표적이 저기 있다! 쫓아라!” 
 
이현성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제가······ 위험 지역이라고 했잖습니까!” 
 
그리곤 반사적으로 등을 돌려 바닥을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성흔 ‘태산 부수기 Lv.5’를 사용합니다!] 
 
노들섬 전체가 들썩이는가 싶더니, 섬의 가장자리가 굉음을 일으키며 폭발했다. 나는 날아가는 화신들을 보며 잠깐 넋을 잃었다. 
유중혁 이 자식, 대체 사람을 어떻게 굴리면 이렇게······. 
나는 반색하며 다가오는 이현성을 향해 물었다. 
 
“유중혁은 어디 있습니까?” 
 
이현성의 표정이 살짝 서운함으로 물들었다. 
 
“아, 섬 중앙입니다. 저······.” 
“금방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 얘기하죠.” 
 
나는 이현성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고, 일단 섬의 중앙으로 내달렸다. 이현성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지금은 해후를 만끽할 때가 아니었다. 빨리 확인해야 할 게 있었기 때문이다. 
숲을 얼마간 헤쳐갔을까. 
공원의 중심에 박힌 거대한 운석이 보였다. 
지금까지 본 어떤 운석보다도 압도적인 크기. 
표면에 감도는 붉은 색 기운은, 확실한 멸망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운석 앞에 서 있는 한 여인. 
 
“아, 당신은······?” 
 
이설화의 표정이 변하는 순간, 운석의 뒤쪽에서 내가 찾던 녀석이 걸어 나왔다. 
 
“유중혁.” 
 
무표정한 모습의 유중혁이 본연의 존재감을 발출하며 그곳에 서 있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미래시를 갖고 있으니 알고 있을 텐데.” 
 
태연하게 대답하는 녀석을 보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거대한 [재앙 운석]의 중턱에 꽂힌 [노란색 운석]. 
나는 놈이 왜 이곳에 빨리 오고자 했는지 바로 눈치챘다. 
 
“설마 길잡이 운석을 재앙한테 먹인 거냐?” 
“어차피 길잡이들은 나중에 방해만 돼. 처리할 수 있을 때 죽이는 편이 낫다.”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맞아 떨어진다더니. 
이 새끼, 지금 재앙을 조기 부화시키려 하고 있다. 
누가 이설화랑 연인 아니랄까봐. 
 
“아니, 대체 왜? 길잡이는 그렇다 쳐도, 재앙을 일찍 깨워서 어쩌려고? 드디어 미쳐버린 거냐?” 
 
유중혁의 눈빛에 미미한 실망이 깃들었다. 
 
“네놈도 이번만큼은 잘 모르는 모양이군.” 
“뭐?” 
“이번 재앙은, 전생에 내 동료였다.” 
 
아니, 그걸 누가 모르냐? 
유중혁은 특유의 오만한 얼굴로 선언했다. 
 
“그러니 이번 재앙은 안전하다.” 
 
······안전? 
갑자기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아······ 중혁아. 그래. 
어쩐지 네가 이번 회차에 너무 잘한다 싶더라. 
 
[‘범람의 재앙’이 부화를 준비합니다.] 
 
몇 번인가 도움을 받는 바람에 잠시 잊고 있었다. 
눈앞의 이 개복치 녀석은, 앞으로 골백번을 더 죽고 난 후에야 간신히 결말에 한 발짝 걸치는 녀석이라는 사실을.
 
 
 
 
 
< Episode 20. 범람의 재앙 (4) > 끝

< Episode 20. 범람의 재앙 (5) >
 
 
 
 
 
사태는 확실해졌다. 
여기서 유중혁을 믿고 있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 
나는 이설화를 향해 외쳤다. 
 
“이설화 씨! 저 새끼 데리고 당장 이 섬에서 탈출해요. 범람의 재앙은 지금까지와는 다릅니다. 전열을 갖추고 함께 싸워야 합니다. 모두와 같이 싸우지 않으면―” 
“방해하지 마라, 김독자. 죽고 싶지 않으면.” 
 
푯― 하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내 뒤로 다가온 유중혁이 내 목을 짚었다. 갑자기 몸에 힘이 쭉 빠지더니, 어느새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유중혁, 내 말 들어! 지금 깨어날 신유승은 네가 알던 신유승이 아니야. 그 앨 만나면······.” 
 
더 외치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어느새 끅끅거리는 소리로 변해 있었다. 
빌어먹을. 
나는 [점혈]을 사용해 조금씩 혈도에 맺힌 기운을 풀어갔다. 
이젠 힘으로 제압하는 수밖에 없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서울에 유중혁을 힘으로 제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쿠구구구. 
 
아니지, 딱 하나 있긴 하네. 
바로 지금 나올 저 녀석. 
 
[‘범람의 재앙’이 깨어납니다.] 
 
메시지와 함께, 운석에서 눈부신 빛살이 뻗어 나갔다. 
마침내 운석의 부화가 시작된 것이다. 
중급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울의 화신 분들은 정말 성질이 급하시군요. 다른 행성들은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재앙을, 이토록 빨리 깨우려고 안달할 줄이야······.] 
 
아마 비형도 더 이상 시간을 끌기 어려워진 모양이다. 
 
[먼저 간 동료들이 그리워진 모양이죠? 자, 그럼 재앙을 맞이할 준비를 하십시오. 동료들이 저승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메인 시나리오 # 5 ― 범람의 재앙 > 
 
분류 : 메인 
난이도 : SS 
클리어 조건 : 범람의 재앙 ‘신유승’을 처치하시오. 
제한시간 : ― 
보상 : 100000코인, ??? 
실패시 : 서울 멸망 
 
+ 
 
커다란 운석이 통째로 갈라지며, 태내(胎內)를 연상시키는 내부가 드러났다. 그 안에, 웅크린 나신의 여자가 화석처럼 박혀 있었다. 
새하얀 피부에 신비한 광택이 도는 여인. 
포니테일로 묶은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저것이, 어른이 된 신유승의 모습이었다. 
 
“여자?” 
“뭐야 저거? 저게 재앙이라고?” 
 
이현성과 이지혜가 모두 막지는 못한 모양인지, 몰래 다가온 몇몇 화신들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투력의 격차가 너무 심한 그들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당신의 정신 충격을 상쇄합니다.] 
 
‘범람의 재앙’은 다른 재앙들과는 다르다. 
일찍 부화하면 약화되는 패널티라도 있는 다른 재앙들과는 달리, ‘범람의 재앙’은 그런 것도 없다. 
 
범람의 재앙은, 일찍 깨어날수록 더 강해진다. 
 
신유승이 눈을 뜨는 순간, 그녀의 전신에서 새하얀 털 같은 것이 자라났다. 
마치 동물의 가죽을 연상시키는 순백의 하얀 털은, 이내 그녀의 전신을 뒤덮고 옷처럼 바뀌었다. 
 
삐그덕. 
 
신유승은 천천히 운석에서 빠져나와 지표면에 발을 딛었다. 처음으로 걸음마를 시작하는 어린아이 같은 발걸음이었다, 
그저 발만 내딛었을 뿐인데, 주변의 모두가 얼어붙었다. 
종(種)이 다른 강자. 
나름 화신 중에서는 강자에 속하는 저 이설화조차, 움직임이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세에 전혀 주눅 들지 않는 이도 있었다. 
 
“기다렸다, 신유승.” 
 
신유승의 고개가 천천히 남자를 향해 돌아갔다. 
 
“······대장?” 
 
단지 한 번의 조우만으로, 신유승은 뭔가를 눈치챈 듯했다. 
 
“그런가······ 대장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이번이 날 처음 보는 게 아니라는 거네? 그렇지?”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그전에······ 대장, 지금 몇 회차야?” 
“그게 왜 궁금하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거든.” 
 
잠시 망설이던 유중혁이 대답했다. 
 
“3회차다.” 
“역시 그랬구나······. 그럼 2회차에서도 나를 만났겠네. 그치?” 
“그래.” 
 
2회차의 유중혁이 무려 46번 시나리오까지 갈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바로 눈앞의 ‘범람의 재앙’ 덕분이었다. 
범람의 재앙 신유승은, 41회차의 세계선에서 온 인물이었다. 
41회차의 유중혁이, 과거의 자신에게 보낸 안배. 
신유승은 자신의 세계선에서 버려진 후 오랜 세월 차원을 여행해, 마침내 과거 지구의 시나리오로 강림했던 것이다. 
 
“지금이 3회차라는 건, 내가 지난 회차에서 정보를 줬는데도 실패했다는 거네?” 
“그래서 정보가 더 필요하다.” 

2회차의 신유승은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들을 유중혁에게 내주고 자결하는 길을 택한다. 자신이 알고 있었던 유중혁에 대한 마지막 배려로. 
어디까지나, 2회차 때는 그랬다는 얘기다. 
신유승이 입을 열었다. 
 
“······수천 년이 걸렸어.” 
 
무표정한 신유승의 얼굴에서 세월을 헤아릴 수 없는 피로감이 느껴졌다. 
41회차의 유중혁이 행한 일은 살인보다 끔찍했다. 
수천 년. 하나의 인격이 모조리 붕괴하고 자아가 마모될 시간. 
신유승은 그 시간을 버텨, 마침내 ‘재앙’이 되었다. 
 
“대장, 알아?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당신 부탁을 들어주려고, 내가 얼마나 지난한 세월을 견뎠는지.” 
“······무슨 소리지?” 
“대장이 많이 보고 싶었다고.” 
 
생긋 웃는 신유승의 미소에 담긴 절망을, 유중혁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무심한 투로 입을 열었다. 
 
“41회차의 모든 정보를 내게 넘겨라. 그 회차의 내가 다른 말은 없었나?”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신유승의 눈빛은 폭풍의 눈처럼 고요했다. 
오직 나만이, 그 눈의 저변에서 몰아치는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역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구나.」 
 
유중혁의 계획에 의해, 신유승은 천 년이 넘는 시간을 세계선의 미궁 속에서 홀로 떠돌았다. 
이백 년을 인류를 위해 버텼고. 다시 이백 년을 세상을 지키겠다는 약속으로 버텼다. 
그리고 또 이백 년을, 함께 했던 동료들과 유중혁을 떠올리며 버텼다. 
세월 속에서, 신유승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한줌의 기억들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그런데 되새김질을 반복할수록, 어떤 의문이 치솟았다.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시간은 그녀에게서 대의를 지웠고, 정의를 앗아갔다. 
대의가 사라진 곳에 남은 것은 초라한 인간의 진실뿐이었다. 
자신과 동료들을 그저 ‘회귀’의 도구로 전락시킨, 유중혁에 대한 원망. 
뼛속까지 스며든 고독감과 세계를 잃은 황망함 속에서, 신유승은 천 년의 시간 동안 자신을 이렇게 만든 유중혁을 증오하며 버텼다. 
 
“대장은 언제 봐도 변하는 게 없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정보부터 넘겨. 시간이 없으니까.” 
“대장에게 ‘우리’는 대체 뭐였어?” 
“······뭐?” 
“나는 도리를 다했어. 기회도 한 번 줬고. 그런데 대장은 여전해.” 
 
그녀는 마지막 자비로, 2회차의 유중혁을 도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하겠지. 또 사람들을 도구처럼 부릴 거고, 나를 끔찍한 세계선의 미궁에 빠뜨리겠지. 그 알량한 정의감, 빌어먹을 대의. 나는 세상을 혼자 살아가는 당신을 증오해.” 
 
그리고, 이제 3회차의 유중혁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니 내가 알려줄 건 하나뿐이야. 대장은 누구도 구원할 수 없어.” 
 
신유승이 섬뜩하게 웃었다. 
 
“당신의 3회차는 여기까지야.” 
 
신유승의 손에서 눈부신 빛이 일렁인 것과, 내가 점혈을 풀어낸 것은 거의 동시였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내달려, 눈앞에서 터지는 에테르의 폭풍을 받아냈다. 
 
“비켜, 유중혁!” 
 
아랫배가 통째로 뜯겨 나가는 듯한 통증이 일었고, 일순 정신이 아득해졌다. 섬의 중앙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발생했다. 나와 유중혁은 허공으로 튀어 올라 한참이나 바닥을 굴렀다. 
아프다. 제길. 정말로 아프다. 
 
“······김독자?” 
 
놀란 유중혁이 쓰러진 나를 바라보았다. 
호흡이 가빠왔고,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새삼 지금까지 운이 좋았다는 게 실감이 난다. 
원래 이 세계는 이런 세계였지. 
한끝만 잘못 디뎌도, 바로 뒈지는 세계. 
 
“김독자!” 
 
자식이, 엄살은. 
나는 씩 웃으며 유중혁을 향해 말했다. 
 
“야, 나 좀 죽여주라. 평소에 엄청 죽이고 싶어했잖아.” 
“······무슨 소리냐.” 
“딱 1분간만 죽이게 해줄 테니까, 죽여 달라고.” 
 
그제야 유중혁이 내 아랫배를 바라보았다. 배를 만지고 싶은데 배가 없다는 기분, 이런 거구나. 입에서 끊임없이 피거품이 흘러나왔고 토할 것처럼 온 세상이 어지러웠다. 히끅, 
하고 계속해서 숨이 넘어온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당신의 통증을 일부 상쇄합니다.] 
 
[제4의 벽]이 없었다면 진즉에 눈물을 질질 짰을지도 모르겠다. 
지난번에는 한 방에 골로 가버려서 못 느꼈는데······. 
 
“기다려라 김독자! 아직 늦지 않았다.” 
“늦었어 인마.” 
“늦지 않았다!” 
“지금 죽이면, 코인도 받아 새끼야. 난 이미 틀렸으니까, 그냥 죽이라고.” 
 
유중혁의 저런 표정은 정말 오랜만에 보았다. 
지하철에서 날 처음 봤을 때도 저 표정이었지, 이 자식. 
 
“그럴 순 없다.” 
 
그대로 시야가 흐려졌다. 
혈도를 짚는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지만, 나는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장 아래쪽이 모두 없어졌는데 살 수 있을리가 없지. 이설화가 나서도 이건 무리다. 
의식은 모래성이 무너지듯, 서서히 허공으로 흩어졌다. 
 
[당신은 사망했습니다.] 
 
. 
. 
 
그리고 잠시 후,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현재 카르마 포인트 : 100/100] 
[특전 사용에 충분한 카르마 포인트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불살의 왕’의 특전이 발동합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예상했던 대로 어둠 속이었다. 
······또 이런 상태인가. 
정말, 몇 번을 겪어도 더러운 기분이다. 
 
[전용 스킬 충돌 오류로 ‘불살의 왕’의 특전 활성이 지연됩니다.] 
[사망으로 인해 의식이 육체의 구속에서 완전히 해방됩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강제로 활성화됩니다.] 
 
어둠 속에서, 언젠가 들었던 메시지가 또 들려왔다. 
다음 순간, 눈앞에 화면이 떠올랐다. 
3인칭 관찰자 시점. 
 
「“범람하라.”」 
 
다른 모든 재앙을 모두 합쳐도 범람의 재앙 하나보다 못하다는 중급 도깨비의 말은 옳았다. 신유승의 그 한 마디에, 허공이 일그러지며 괴물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전설급 특성인 [비스트 로드]의 주특기, [몬스터 게이트]. 
차원을 여행하며 그녀에게 길들여진 무수한 괴수들이, 악몽이 되어 지구에 풀려나고 있었다. 
 
「“찢고, 부수고, 파괴하라.”」 
 
7급 괴수종들은 물론이고, 6급 이상의 괴수종도 상당수 보였다. 심지어는 소재앙이라 불리는 5급 화룡종에 비견되는 놈들도 있었다. 
 
「“바야흐로, 재앙의 시간이다.”」 
 
노들섬이 그대로 폭발하며, 한강 전체가 하나의 파도가 되었다. 
당황한 화신들이 비명과 함께 괴수들의 먹이가 되었다. 뒤늦게 전세를 갖춘 ‘왕’들이 명령을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때, 신유승의 뒤에서 무시무시한 아우라를 일으키는 한 녀석이 보였다. 
 
「“너를 죽이겠다, 신유승.”」 
 
······저 자식이 미쳤나? 
 
가공할 파찰음과 함께, 유중혁의 에테르 블레이드가 허공을 그었다. 
신유승은 가볍게 허리를 숙여 그 공격을 피한 후 미소를 지었다. 
 
「“벌써 ‘파천검도’ 레벨이 꽤 높네? 그래도 그 정도로는 아무리 날뛰어도 날 못 이겨. 기껏해야 ‘레벨’ 수준이잖아?” 
“이번 회차에서 너는 반드시 죽는다.” 
“글쎄. 안 된다니까. 10년 뒤라면 모를까.” 
“내가 반드시 죽인다.” 
“······대장답지 않게 흥분했네? 이유가 뭐야?”」 
 
나는 조용히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준비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역시 유중혁에게 이입하는 게 베스트일 것이다. 
영 기분은 별로겠지만, 녀석에게 이입해 스킬을 뽑아올 수 있다면 [범람의 재앙]을 상대하는 것이 조금 더 쉬워질 테니까. 
 
「“뭔가 이상한데······ 내가 알던 대장 맞아?”」 
 
고개를 갸웃하던 신유승의 눈빛이 죽은 내 시체를 향한 것은 그때였다. 
 
「“저 사람은 누구야? 내가 알던 회차에서 저런 사람은 없었는데?”」 
 
유중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대신 검을 휘두르고,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저 그것만이 녀석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인 것처럼. 
그리고 얼마나 휘둘렀을까. 
유중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은.”」 
 
신유승의 얼굴이 점차 불신과 의심으로 물들어갔다. 
한참을 침묵하던 유중혁이 짓씹듯 말을 이었다. 
 
「“나의 동료다.”」
 
 
 
 
 
< Episode 20. 범람의 재앙 (5) > 끝

< Episode 21. 바꿀 수 없는 것 (1) >
 
 
 
 
 
 
Episode 21. 바꿀 수 없는 것 
 
 
 
 
「“······대장, 방금 뭐라고 했어?”」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어이없다는 듯한 신유승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봐. 방금 뭐라고 지껄였어? 뭐? 동료?” 
“······.” 
“저 사람이 대장 동료라고?”」 
 
불신 가득한 그 목소리에,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의외였는데, 신유승의 충격은 오죽할까. 
설마 저 자존심 강한 유중혁이 나를 ‘동료’라고 표현할 줄이야. 
 
「“그래.”」 
 
······이거 갑자기 두려워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놈이 나한테 ‘동료’라고 할 리가 없는데······. 
저 자식 나중에 내가 부활하는 거 보고 바로 쳐 죽이는 거 아냐?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들의 전우애에 감동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들의 전우애에 눈시울을 붉힙니다.] 
[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그래, 이제야 납득이 간다. 
유중혁, 저 자식 분명 후원을 노린 거다. 
전우애를 좋아하는 우리엘이 안 보여서 조금 이상하긴 한데, 어쨌든 저건 후원을 노린 신의 한 수가 틀림없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 비장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걸 보니, 심증은 점차 확신으로 변해간다. 
 
거기다 유중혁이 아직 3회차라는 걸 생각해 보면, ‘동료’라는 말이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원작의 초반 회차에서도 이현성이나 이설화가 죽었을 때 ‘동료’라는 말을 지껄였었으니까. 
놈이 지금쯤 받고 있을 엄청난 코인들을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이렇게 생각하니 차오르던 감동도 싹 달아나는구만. 
젠장, 저 대사를 내가 했어야 했는데. 
 
「“대장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물론 유중혁의 속내를 모르는 신유승은 세상이 멸망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41회차의 신유승은······. 
그녀는, 회차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유중혁에게 ‘동료’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콰가가가각! 
 
신유승의 주먹이 유중혁의 칼날과 부딪쳤다. 
신체와 병기의 싸움임에도, 손상이 일어나는 쪽은 유중혁의 칼이었다. SS급 도검 진천패도(振天覇刀). 특수 옵션은 없어도 내구도와 강도 하나는 끝내주는 칼인데, 그 칼이 신유승의 맨주먹에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꽈드드득. 
 
결국 충격을 못 이긴 진천패도의 칼날이 휘어졌다. 파천강기가 휘감긴 무적의 패도가 무력하게 몸을 굽히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당신이 감히 내 앞에서!”」 
 
대단한 스킬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극한까지 응축된 에테르를 내던진 일격. 
 
콰아아앙! 
 
그 일격에, 유중혁이 피를 쏟으며 뒤로 날아갔다. 
 
공격도, 속도도, 변화도. 
 
신유승은 모든 면에서 유중혁을 앞섰다. 
유중혁이 자랑하던 [주작신보]나 [파천검도]도, 이 순간만큼은 신유승의 앞에서 빛이 바래고 있었다. 
끔찍한 파육음(破肉音)과 함께 유중혁의 얼굴이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였다. 
아무리 모든 그녀가 약화된 채 강림한다 해도, 41회차의 신유승은 [비스트 로드]로서 신유승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치에 가깝게 성장했던 존재. 그에 반해 이번 회차의 유중혁은 강해봤자 초반의 유중혁일 뿐이었다. 
 
「“어째서 그 사람을 동료라 부르지? 당신을 위해서 희생해줬으니까?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쉴 새 없이 울컥거리며 터지는 핏줄기. 
그럼에도 유중혁은 굴하지 않았다.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저 멍청이가, 대체 왜 싸우고 있는 거야? 
 
전신에서 피를 뿜는 유중혁을 보며, 나는 차츰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불리한 걸 알면 진즉에 도망갔어야 하잖아? 
평소에는 잘 하면서, 대체 왜? 
다시 한번 주먹을 날린 신유승이 입을 열었다. 
 
「“그럼 나와 다른 사람들은 뭔데? 지혜 언니는, 현성 오빠는. 그리고 설화 언니는? 당신만을 위해서 싸웠던 사람들은, 당신에게 대체 뭐였는데?”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뭐?” 
“내가 아는 것은 하나뿐이다.” 
 
유중혁이 피묻은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너는 이번 회차에서 내 동료를 죽였다. 그러니, 너도 죽을 것이다.”」 
 
젠장, 이번엔 나도 모르게 감동이 차올랐다. 
 
[과도한 몰입으로 ‘제4의 벽’의 일부 기능이 제한됩니다.] 
 
아무리 연기라도 저 정도라면 속아줘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다. 
그래, 이 맛에 ‘멸살법’ 읽는 거지. 
생각해 보니 죽은 이현성에게 유중혁이 비슷한 말을 했을 때도 나는 눈시울을 붉혔던 것 같다. 
갑자기 기분이 싱숭생숭해진다. 
한낱 독자였던 내가, 무려 주인공인 유중혁의 ‘동료’가 되다니. 
신유승은 모든 것을 다 잃은 듯한 얼굴로 유중혁을 보았다. 
 
「“당신은 그래선 안 돼······.”」 

불길한 아우라가 그녀의 주변을 잠식하고 있었다. 공허감이 배신감으로, 배신감이 다시 분노로 바뀌는 과정. 
 
「“이제 와 그런 식으로 변하는 거, 내가 용납할 수 없어.”」 
 
신유승의 주먹에 깃드는 가공할 에테르. 
신명나게 맞는 게 보기 좋아서 좀 더 지켜볼까 싶었는데,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과도한 몰입으로 ‘전지적 독자 시점’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잘못하면 진짜로 유중혁이 죽게 생겼으니까. 
그럼 진짜 죽도 밥도 안 된다. 
나는 빠르게 ‘전지적 독자 시점’의 모드를 전환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시점을 1인칭으로 변경합니다.] 
 
······.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의 변경에 실패했습니다.] 
 
뭐? 왜? 
 
[시점 변경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사용 조건은 두 가지다. 
 
하나, 내가 죽어서 유체이탈 상태일 것. 
둘, 나와 이입 대상이 동시에 서로를 생각하고 있을 것. 
 
첫 번째 조건은 충족했으니 문제는 두 번째 조건인데, 아무리 충족이 안 될 리 없었다. 
저 자식이 지금 내 생각을 안 하고 있다고? 
아니, 복수한다고 길길이 날뛰더니 그건 다 뭐였는데 그럼? 
미친 듯이 검격을 쏟아내기 바쁜 유중혁을 보며, 나는 잠시 멍해졌다. 
 
「“죽인다. 나는 반드시 네놈을 죽인다.”」 
 
······저 자식, 혹시 아무 생각도 없는 건가? 
그런 유중혁을 가만히 바라보던 신유승이 입을 열었다. 
 
「“······안 되겠다. 간단히 끝내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 
 
신유승의 입가에, 악귀 같은 웃음이 걸렸다.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대장의 세계를 끝내줄게.”」 
 
신유승의 눈이, 유중혁이 아닌 다른 곳을 향했다. 그 시선을 따라간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제기랄, 이제 진짜로 두고 볼 수 없다. 
유중혁이 아니라도 좋으니, 다른 사람에게라도 이입하지 않으면······. 
그 순간, 날카로운 감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 인물한테 이입할 수 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아, 그런가. 
방금 유중혁이 그 말을 해서······? 
 
그래, 어쩌면 이쪽에 이입하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일단 되는대로 해보자. 
나는 해당 인물에 내 모든 심력을 투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곧 시야가 흔들리며 어지러운 구토감이 찾아왔다. 
 
[시점을 1인칭으로 변경합니다.] 
 
사위가 뒤바뀌며, 내 의식이 어디론가 빨려 나갔다. 
 
 
* 
 
 
‘동료라고?’ 
 
처음 그 말을 들은 순간, 신유승은 귀를 의심했다. 
동료라니. 어떻게 그런 말이 가능하단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닌, 유중혁이. 
 
신유승은 그 순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동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천 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그녀가 잊었던 어떤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그 유중혁이, ‘동료’라니. 
대체 유중혁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혹시 이번 회차의 유중혁이라면, 어쩌면, 나한테도······. 
 
콰아아앙! 
 
신유승은 자기도 모르게 바닥을 내리쳤다. 
 
‘저열하다.’ 
 
신유승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마지막 기회야.” 
 
그런 저열한 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그녀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그 말 취소하면 고통없이 보내 줄게. 당신 입으로 말해봐. 당신은 동료가 없다고, 당신밖에 모르는 인간이라고 당장 말하라고.” 
 
피떡이 된 상태에서도,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신유승에게 맞은 한쪽 팔은 으스러졌고, 다리는 근육이 난자되었다. 그럼에도 유중혁의 고고한 눈동자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신유승은 그런 유중혁을 잠시 바라보다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유중혁을 붙잡아.” 
 
신유승의 명령에, [몬스터 게이트]를 통해 넘어온 6급 괴수종 [유황 미라]들이 움직였다. 미라의 새하얀 붕대가 유중혁의 전신을 옭아매자, 당겨진 유중혁의 사지는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팽팽해졌다. 신유승은 그런 유중혁을 향해 말했다. 
 
“하나씩 죽여줄게 대장. 대장이 보는 눈앞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신유승은 유중혁을 내버려 둔 채 섬의 바깥쪽을 향해 걸어 나갔다. 
 
“죽여! 저년이 재앙이야!” 
 
신유승을 발견한 화신들이, 물가에서 하나둘씩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신유승은 그들을 향해 좌에서 우로,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촤아아앗! 
 
가벼운 손놀림에, 달려들던 화신들이 물 먹은 신문지처럼 찢어졌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는 학살. 
 
“범람하라.” 
 
그 한 마디에, [몬스터 게이트]에서 괴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개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두 마리는, 마치 호위라도 하듯 그녀의 뒤에 섰다. 
 
5급 해수종 킹 매스우드. 
5급 괴수종 헤비메탈콩. 
 
가히 한 세계의 ‘소재앙’으로 군림할 수 있는 괴수들.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지려는 순간, 옆쪽에서 날카로운 공격이 날아들었다. 
 
“어딜 가려고?” 
 
번뜩이는 장도. 날씬한 스커트에 검정색 후드 짚업. 신유승은 그녀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이지혜의 분노한 눈동자에서 [귀살]이 타오르고 있었다. 
 
“감히 사부를 저 꼴로 만들어?” 
 
이지혜의 전신에서 위인급 성좌의 위엄이 뿜어져 나왔다. 바다에서 그 누구보다 강력한, 해상의 전신. 신유승은 이지혜가 사용하려는 성흔을 눈치챘다. 그랬지, 그러고 보니 이곳은 강이었지. 
 
“······신에게는.” 
 
구결을 읊는 순간, 한강의 곳곳에서 물줄기가 솟아오르며 투명한 함선이 떠오른다.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았으니······!” 
 
기세등등한 패기를 흩뿌리며, 열두 척의 함선이 한강의 파고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린 광경. 
충무공의 성흔, 유령함대. 
자신을 압박해오는 함선들의 기파 속에서도, 신유승은 그저 그립다는 듯 미소할 뿐이었다. 
 
“······그랬지. 그게 언니의 특기였지.” 
“언니? 나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는 게 뭔 개소리야!” 
“하지만 아직 멀었어. 함장은 배 위에 있어야지, 이런 곳에 있으면 어떡해?”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온 신유승이, 이지혜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반항할 틈도 없는 쾌속이었다. 
 
“불쌍한 언니.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이런 씨발? 무슨 속도가······!” 
“당신은 모를 거야. 유중혁이 당신을 어떻게 이용하고, 어떻게 버릴지. 당신이 어떻게 죽게 될지.” 
 
이지혜의 칼날이 신유승을 향해 날아들었다. 신유승은, 그런 칼날을 아주 가볍게 쥐어 잡으며 말을 이었다. 
 
“평생 유중혁한테 인정받고 싶어했던 당신은, 당신이 그렇게 좋아했던 해상에서 죽어. 당신의 배후성이 그토록 증오했던 일본인들에게, 끔찍하게 간살 당하지.” 
“전군, 포격하라!” 
 
이지혜의 처절한 외침에, 열두 대의 함선이 동시에 발포를 개시했다. 날아드는 포탄을 보며, 신유승이 웃었다. 
 
“그런 당신을 잃고 유중혁이 한 말이 뭔지 알아?” 
 
포탄이 신유승의 몸을 그대로 난타했다. 꽈르르릉, 하는 폭음이 울렸다. 포연이 걷힌 자리에 나타난 신유승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해상전은 조금 힘들겠군.” 

무수한 포탄의 세례는, 신유승의 하얀 장갑(裝甲)에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했다. 신유승의 고유 스킬이자, 최강의 방어 스킬 중 하나인 [야수왕의 감수성]. 그녀를 감싼 백색의 옷깃은, 단 한 치의 흠집도 용납지 않겠다는 듯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걱정마, 언니. 이번 회차에선 그런 일 없을 거야.” 
 
신유승이 하얗게 웃었다. 
 
 “내가, 고통 없이 보내 줄 테니까.”
 
 
 
 
 
< Episode 21. 바꿀 수 없는 것 (1) > 끝

< Episode 21. 바꿀 수 없는 것 (2) >
 
 
 
 
 
신유승의 오른손이 조용히 하늘로 치솟았다. 
 
“울어라, 킹 매스우드.” 
 
그러자 그녀의 뒤에 똬리를 틀고 있던 어룡의 왕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바다를 유린하는 어룡들의 왕, 킹 매스우드의 [냉기 숨결]. 
 
콰콰콰콰콰! 
 
한강의 저변이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함포를 발사하던 유령 함대는 그 숨결에 휩싸여 조금씩 기능을 잃어갔다. 달아날 곳을 잃은 함대가, 매스우드의 냉기 숨결에 하나둘씩 그 기능을 상실해갔다. 
 
“충고 하나 해줄 게 언니. 유령함대는 강하지만, 결국 물이 없으면 아무 의미도 없어.” 
 
모든 것은 찰나였다. 신유승의 주먹이 움직인 것도.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난 것도. 검을 놓친 이지혜의 신형이 맥없이 하늘로 솟았다. 
 
“물론, 이번 회차에선 그 충고 아무 쓸모도 없겠지만.” 
 
피를 흘리며 날아가는 이지혜의 눈빛에는 이미 한 줌의 의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킹 매스우드의 [냉기 숨결]이 마침내 한강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으아아악! 뭐야!” 
 
강을 건너오던 화신들이 난데없는 한기에 비명을 질렀다. 밀려든 냉기의 파랑에, 수백의 인파가 얼어붙은 한강 위에서 꼼짝없이 동사할 운명에 놓였다. 
무기력하게 굳어가던 화신들을 구해준 것은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괴력의 소유자였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성흔 ‘태산 부수기 Lv.5’를 사용합니다!]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른 이현성의 오른팔이 얼어붙은 강을 내리쳤다. 
 
꽈아아앙! 
 
터질 듯한 그의 오른팔이, 과도하게 운용된 태산 부수기에 망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보답을 받았다. 
 
쩌저저저적! 
 
금이 간 한강의 표면이 그대로 무너지며, [냉기 숨결]의 영향력이 주춤했던 것이다. 
그 틈을 타 지상으로 올라온 화신들이 노들섬으로 진군했다. 
 
“우와아아아!” 
“쳐라!” 
 
그 군세의 중심에 있는 이현성을 보며, 신유승이 슬피 웃었다. 
 
“그래, 현성 오빠. 당신도 있을 줄 알았어.” 
“······저를 아십니까?” 
“우리의 가장 든든했던 방패. 당신은 내 목숨을 많이 구해줬었지.” 
 
신유승의 손짓에, 이번에는 그녀의 뒤에 있던 거대 침팬지가 가슴을 두드리며 앞으로 나왔다. 5급 괴수종, 헤비메탈콩. 
 
쿠웅―! 
 
뒷발을 찧는 스텀핑에, 근처의 화신들이 통째로 나뒹굴었다. 이현성은 헤비메탈콩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라라라라―! 
 
부풀어 오른 이현성의 팔과, 헤비메탈콩의 강철 근육이 정면에서 맞부딪쳤다. 꽈지지직. 이현성의 힘은 놀라웠다. 실핏줄이 터지고, 입술에서 피가 흐르는 상황에서도 그는 5급 괴수종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압도하고 있었다. 
 
쿠르르······? 
 
신유승은 그런 이현성을 보며 무감각하게 말을 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네. 현성 오빠는. 유중혁의 가장 충직한 개······.” 
“······당신은 누굽니까?” 
“무수한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준 당신은, 마지막까지 유중혁을 지키다가 철혈룡의 브레스를 맞고 한 줌의 재로 흩어졌어.” 
“무슨······.” 
“그때 유중혁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자신이 받은 상처를 타인에게 이식하듯, 신유승의 혀끝이 날카로운 메스처럼 움직였다. 
 
“아까운 방패를 잃었군.” 
 
묘하게 변하는 이현성의 표정을 보며, 신유승은 고독한 쾌감에 몸부림쳤다. 그래, 당신들도 느껴야 해. 내가 받았던 고통을, 내가 보았던 광경을. 모두 가져가진 못하겠지만, 당신들도 이것을 이해해야 해.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이번 회차는, 그녀가 아는 회차와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헤비메탈콩의 공격을 쳐낸 이현성이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신진 모르겠지만, 나는 유중혁 씨를 따르지 않습니다.” 
“뭐?” 
“나는 김독자 씨의 일행입니다.” 
“김······ 뭐?” 
 
꽈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헤비메탈콩이 넘어졌다. 
표정이 굳어진 신유승이, 이현성에게 다가갔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북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이현성의 신형이 허공을 날았다. 신유승은 그대로 이현성의 배에 맹공을 가했다. 한차례 몰아친 에테르의 폭풍은, 단단한 이현성의 피부를 꿰뚫고 한강의 한가운데로 날려버렸다. 
장기가 모조리 파열되기에 충분한 일격이었다. 
이현성은, 이제 3회차를 계속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신유승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남았다. 
이제까지의 그녀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름. 
 
김독자······. 
그게 대체 누구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화신들의 목을 찢으며, 신유승은 얼어붙은 강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겁먹은 화신들이 달아나다 괴수의 발톱에 찢겨 죽었다. 그들의 눈가에 조금씩 절망이 내려앉고 있었다. 
저항할 수 없는 재해와 마주한 화신들 사이로 체념이 번져갔다. 
 
“쏴라!” 
 
물론, 그에 저항하는 이들도 있었다. 
전열을 가다듬은 왕들은 원거리 타격 스킬을 이용해 화살 비와 에테르 탄환을 퍼부었다. 신유승도 그들을 알고 있었다. 
 
미희왕 민지원. 
미륵왕 차상경. 
중립의 왕 전일도. 
 
이상한 일이었다. 본래 살아 있지 않거나, 이미 유중혁의 부하가 되었어야 할 이들이었다. 왜냐하면 유중혁을 제외한 다른 ‘왕’은, 네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는 순간 ‘단 하나의 왕좌’에 통합되었어야 하니까. 
그런데 저건 대체 뭔가. 
 
“쳐라! 적은 단 하나 뿐이다!” 
 
저 오합지졸의 군대는, 대체 누구의 명을 받고 있는 것인가. 
[절대 왕좌]는 대체 어디 간 거지? 
이 세계는 누가 다스리는 거야? 
살의가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차르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신유승이 서 있던 바닥이 얼어붙고 있었다. 
 
······냉기 숨결?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그녀를 향해 숨결을 퍼붓는 거대한 어룡이 있었다. 킹 매스우드가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들어 올린 그녀의 오른손에, 킹 매스우드가 움직였다. 
 
그오오오오! 
그아아아아! 
 
두 마리의 어룡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포효를 내지른다 싶더니, 서로 뒤엉켜 부딪치기 시작했다. 
왕과 여왕이 서로를 물어뜯으며 한강 전체를 거대한 옥타곤으로 만들고 있었다. 킹 매스우드와 싸울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어룡. 그런 어룡은, 신유승이 알기로 하나뿐이었다. 
 
“······퀸 미르바드?” 
 
지구에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퀸이 그녀를 공격할 이유는 없었다. 
아니, 대체 왜? 
 
“네가 미래의 ‘나’지?” 
 
그쪽을 돌아보는 순간, 신유승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너무나 그리운 어떤 시절이 그녀의 영혼을 흔들고 지나갔다. 
 
“아저씨를 살려내!” 
 
울부짖는 소녀의 모습, 그리고 그런 소녀를 막아서는 여인. 
 
“유승아, 안 돼!” 
 
찌잉― 하는 충격과 함께 재앙 신유승은 모든 사태를 알아챘다. 
 
“하하······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신유승은 신형을 띄워 소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아는 유중혁은, 당연히 이래야 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도 방법도 가리지 않는 그 비열한 인간은,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유중혁, 이 인간말종 새끼······.” 
“유승아, 달아나!” 
 
단도를 빼든 유상아가 [헤르메스의 산책법]과 [아라크네의 거미줄]을 동시에 발동하며 달려들었다. 신유승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올림포스?’ 
 
하지만 단도는 신유승에게 닿지 못했다. 간단한 손짓에, 허공의 게이트에서 몰려온 비행종들이 한꺼번에 유상아를 향해 쏟아졌던 것이다. 순식간에 포위된 유상아의 신형이, 몬스터의 무리 속에 사라졌다. 
 
그런 유상아를 내버려두고, 신유승은 소녀를 향해 다가갔다. 
 
두려움과 분노로 물든 소녀의 눈동자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포박이라도 당한 것처럼, 소녀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신유승은 소녀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역시 유중혁은 이 세계선의 ‘나’를 찾아냈구나.” 
“으, 아······.” 
“어린 ‘나’를 죽여서, 지금의 ‘나’를 막으려 했었던 거야. 그렇지?” 
 
맞아 떨어지는 추리에, 신유승의 머릿속에서 가공할 희열이 들끓었다. 
일순 희미해졌던 증오와 분노가 빠르게 제자리를 되찾았다. 
역시, 몇 번이나 과거로 돌아가도 바꿀 수 없는 것도 있다. 
‘재앙 신유승’이 웃었다. 
 
“안녕, 과거의 나.” 
 
그녀의 손이 움직이려던 순간. 
뒤쪽에서 내리꽂힌 강력한 일격이 굉음을 만들며 그녀의 신형을 집어 삼켰다. 먼지가 걷힌 곳에, 거대 사마귀의 낫이 번뜩이고 있었다. 
 
“6급 충왕종?” 
“티타노! 해치워!” 
 
갸오오오!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거대 사마귀의 낫 공격이, 바닥을 두부처럼 헤집었다. 무서운 공격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재앙’을 상대할 수 있는 공격은 아니었다. 
 
“꺼져라.” 
 
재앙 신유승의 오른팔에 응축된 에테르가, 티타노프테라의 배에 그대로 구멍을 뚫었다. 고통스럽게 초록색 피를 쏟은 거대 사마귀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티타노!” 
 
분노한 이길영이 거대 사마귀의 머리에서 뛰어내렸다. 이길영의 몸에서 낙하산처럼 산개한 노란 색 점액질이, 허공으로 퍼지고 있었다. 
 
“가라! 앤티누스!” 
 
키이이이잇! 
 
이길영의 몸에서 나온 기생종이 날개를 치며 뻗어 나왔다. 
5급 기생종 패러사이트. 
신유승은 깜짝 놀랐다. 
 
“······앤티누스?” 
 
신유승 역시도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지구에 오기 전 멸망시킨 곳이, 바로 행성 클로노스였으니까. 앤티누스는 클로노스의 지배종. 여왕의 격을 갖추고 있던 괴수였다. 
믿을 수 없었다. 
지배종을 수하로 부리는 아이가 있다고? 
 
“제법이구나, 꼬마야.” 
 
터업. 
 
그러나 놀라움도 잠시, 기생을 시도하던 앤티누스는 신유승의 손아귀에 허망하게 붙잡혔다. 그녀의 손끝에 닿은 앤티누스의 점액이 새카맣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갸아아아아······. 

당연한 일이었다. 길잡이들은, 재앙에게 대항할 수 없으니까. 
 
“길잡이를 길들일 정도의 재능이라니. 너 역시 <로드>의 재능을 가진 아이구나. 그렇지? 너도 대장이 찾은······.” 
 
이길영은 그녀의 질문에도 아랑곳않고 달려왔다. 
 
“독자 형을 어쨌어!” 
“뭐?” 
“우리 형 어디 있냐고!” 
 
달려든 이길영의 주먹이 그녀의 배를 때렸다. 나름 회심의 일격이었지만, 부러진 쪽은 오히려 이길영의 손목이었다. 대단한 재능이지만, 상대가 나빴다. 신유승의 하얀 손이 이길영의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독자’가 대체 누구니?” 
 
발버둥치는 이길영의 얼굴에 피가 몰리고 있었다. 
 
“말하렴. 그렇지 않으면 죽을 거야.” 
 
그때, 멀리서 포격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가 서 있던 대지를 폭발시켰다. 신유승은 가볍게 뛰어 그 포격을 피했다. 
[유령 함대]의 함포 사격? 어떻게? 
 
“길영아!” 
 
멀리서, 이지혜와 이현성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재앙 신유승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이상하다. 
분명 즉사할 정도의 충격이었을 텐데,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설마 위력 조절에 실패했나? 이 내가? 
일이 귀찮아졌음을 깨달은 신유승이 이길영의 목을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저들에게 물어보는 편이 낫겠지. 
 
“잘 가라, 꼬마야.” 
 
그런데 손아귀를 꽉 움켜쥐는 순간, 머릿속에 찌릿한 통증이 퍼지며 갑자기 신경절이 말을 안 들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이길영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벌벌 떨리는 오른손이, 기형적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설마 패러사이트에 감염됐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고작 5급 기생종이, 세계선의 귀환자인 자신에게 간섭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건 대체 뭐지? 
왜, 갑자기 몸이 말을 안 듣는 거야?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둬라, 신유승.」 
 
아무 말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신유승은 마음 깊은 곳의 어딘가가 허물어지는 것만 같았다. 심장 한쪽이 미칠 듯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모르는 목소리다. 분명 모르는 목소리인데. 
 
“······다, 당신 대체 누구야? 내 안에서 꺼져!” 
 
어째서, 이렇게 그리운 느낌이 드는 것일까. 
신유승은 그런 자신의 감각에 저항하듯,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나가! 내 안에서 나가라고!” 
 
구토감이 밀려왔고, 자신이 모르는 기억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어져선 안 될 세계가, 이어질 수 없던 필름들이 서로 뒤엉키고 있었다. 
 
「유승아.」 
 
그 목소리에 불현듯 정신을 차렸을 때, 재앙 신유승의 눈앞엔 어린 신유승이 있었다. 
어린 신유승의 조그만 입술이 움직였다. 
 
“······아저씨, 혹시 거기 있어?” 
 
 
 
 
 
 
 
< Episode 21. 바꿀 수 없는 것 (2) > 끝

< Episode 21. 바꿀 수 없는 것 (3) >
 
 
 
 
 
재앙의 몸을 조종한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본래 내 계획은 다른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신유승의 내부에 들어온 순간, 나는 계획을 전면 수정하기로 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를 발동합니다.] 
[‘1인칭 조연 시점’이 발동하였습니다.] 
 
정확히는,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정할 수 없어.」 
「그럼 나는 뭔데? 내가 살아온 시간들은?」 
「내 회차는,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건데?」 
 
몰아치는 신유승의 상념들 속에서, 나는 신유승의 눈으로 세계를 보았다. 
신유승의 코로 숨을 쉬었고, 신유승의 손으로 사람들을 죽였다. 
신유승의 목소리로 신유승의 생각을 말했다. 
나는 신유승이었다. 
 
[‘제4의 벽’이 격심하게 흔들립니다.] 
 
그리고 나는 이지혜와 마주쳤다. 
마주친 순간 알았다. 
이지혜는 여기서 죽을 것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지금껏 하지 않았던 일을 해보았다. 
 
[‘1인칭 조연 시점’으로 등장인물의 행동에 간섭합니다.] 
[‘제4의 벽’이 불길하게 흔들립니다.] 
 
머릿속에 전류가 치며, 엄청난 격통이 뒤따랐다. 그럼에도 신유승이 결정적 타격을 먹이는 순간, 나는 그녀의 오른손에 힘을 뺄 수 있었다. 미세한 조정이었기에 신유승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는 분명히 해냈다. 
 
이지혜는 죽지 않았다. 
 
[등장인물 ‘신유승’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같은 일은 이현성 때도 반복되었다. 
정신은 조금씩 넝마가 되어 갔지만, 어쩌면 이걸로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금씩 심력을 더 쏟아부었고, 신유승의 육체에 대한 내 점거 반경을 늘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신유승의 오른손이 이길영의 목덜미를 쥔 순간. 
 
“다, 당신 누구야?” 
 
나는 신유승의 오른손을 내 의지대로 조종하는 데 성공했다. 
 
[등장인물 ‘신유승’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매우 높습니다.] 
 
내 것이 아닌 누군가의 팔이, 온전히 나의 의지로 움직인다는 것. 
그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아저씨?” 
 
어린 신유승이 물었다. 
 
“내 안에서 꺼져!” 
 
내 통제에 놓였던 신유승의 오른팔이,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기형적으로 꺾인 팔이 새카맣게 변했고, 도드라진 혈관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어린 신유승이 새카맣게 변한 팔에 달려들었다. 
 
“아저씨, 거기 있는 거 아저씨 맞죠? 아저씨!” 
 
어린 신유승이 내가 깃든 오른팔을 붙잡았다. 그 순간, 오른팔을 중심으로 강력한 스파크가 일었다. 개연성 폭풍이 일어날 때와 비슷한 스파크. 놀란 사람들이 달려왔지만, 휘몰아치는 스파크가 그들을 날려버렸다. 
 
‘재앙 신유승’과, ‘어린 신유승’이 동시에 서로를 보았다. 
기억의 파도가 몰려오고 있었다. 
 
「“아저씨.”」 
「“대장.”」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끊어진 필름 이론’이 맞다면, 본래 두 존재는 존재가 이어져도 역사는 이어질 수 없었다. 
 
「“저······ 죽이셔도 돼요. 괜찮아요.”」 
「“나도 살아남고 싶었어.”」 
 
그런데, 생각해 보면 ‘끊어진 필름 이론’이 적용되는 것은 ‘등장인물’ 뿐이다. 
그리고 나는 소설 바깥에서 왔다. 
만약 내 ‘존재’가······ 이 둘의 기억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면? 
그래서 이어져서는 안 되는 두 개의 필름이, 잠시나마 이어졌다면? 
눈을 감자, 두 명의 신유승이 내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3회차와 41회차. 
서로 다른 두 시간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저한테도 살아갈 가치가 있는 걸까요?”」 
「“하지만 이런 삶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거야?”」 
 
“안돼! 이건······ 이 기억은······.” 
 
당황한 재앙 신유승이 말을 더듬더니, 파랗게 질린 입술을 짓씹었다. 
강력한 기운이 재앙 신유승의 내부에서 일어났다. 
뭔가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어린 신유승이 오른팔에서 튕겨나갔다. 
나를 바깥으로 내보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신유승은 자신의 육신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 
 
푸슛, 푸슈슛! 
 
칠공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전투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리한 마력 운용으로 인해 영육의 밸런스가 무너지고 있었다. 
 
「신유승! 잠깐, 그만둬라!」 
 
“아아아아악!” 
 
신유승은 자신의 머리를 붙잡은 채 나를 빼내려 안간힘을 썼다. 신유승의 감각을 공유하는 나 또한 밀려오는 구토감과 통증으로 미칠 것 같았다. 신유승의 머리가 하얗게 세고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만약 이대로 내가 조금 더 버틴다면, 재앙 신유승은······. 
······빌어먹을! 
 
. 
. 

신유승의 몸에서 의식이 빠져나오는 순간, 주변의 오감이 모조리 사라졌다. 
 
[스킬 충돌 오류가 정상화 되었습니다.] 
[지연되었던 ‘불살의 왕’의 특전이 재발동합니다.] 
[당신의 육신이 죽음 속에서 부활합니다.] 
 
······. 
어울리지 않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번 해보고 싶은 게 생겼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아쉬워합니다.]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일이었다. 
 
[육체의 재생이 시작됩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죽음으로 인한 정신 충격을 상쇄합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의 사용 보상이 준비 중입니다.] 
 
화룡종에게 죽은 이후 두 번째 부활. 
말초신경부터 세세하게 재구성되는 그 감각에, 나는 다시 한번 몸부림쳤다. 입자 단위로 재생된 폐에 공기가 들어찼고, 시신경이 뭉쳐지며 주변의 시야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추상적으로 진행되던 정신 활동은 말랑한 대뇌피질 위에 고스란히 이식되었다. 
 
[‘불살의 왕’의 특전이 완료되었습니다.] 
[카르마 포인트 100을 소진하였습니다.] 
[육체의 노폐물이 완전히 빠져나가며 육체의 성능이 상승합니다.] 
[체력과 마력 레벨이 각각 2씩 상승합니다.] 
[해당 시나리오의 종합 능력치 제한 기준을 초과하였습니다.] 
 
하아아······. 
 
다행히 두 번째 부활이라 그런지, 꼴사나운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내가 사용했던 옷과 아이템들이 너부러져 있는 게 보였다. 다행히 아직 아무도 안 가져갔군. 누가 볼세라 주섬주섬 옷들을 챙겨 입는데, 뒤쪽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독자?” 
 
······아, 그러고 보니 이 자식, 바로 곁에 있었지. 
머쓱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불신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는 유중혁이 보였다. [유황 미라]에 의해 포박된 놈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여기서 ‘불살의 왕’에 대해 설명할 수는 없었다. 
 
“······또 죽인다고 하진 마라. 이번에 죽으면 진짜 뒈지거든.” 
“김독자, 네놈······!” 
“설명은 나중에 하고, 일단 같이 가자. 시간 없으니까.” 
 
나는 ‘신념의 칼날’을 휘둘러 유황 미라의 붕대로부터 유중혁을 꺼냈다. 비명을 지른 유황 미라가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책갈피]를 통해 [바람의 길]을 활성화했다. 
 
슈우우우우! 
 
다친 유중혁을 어깨에 들쳐멘 채, 그대로 한강 빙판길을 달려갔다. 
멀리서, 괴수들과 싸우는 화신들의 모습이 보였다. 
용산구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아우라. 확실하다. 
저곳에, 재앙 신유승이 있다. 
 
“아저씨?” 
“독자 씨!” 
 
나를 발견한 일행들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나는 유중혁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잠깐 쉬고 있어라.” 
 
그리고 곧장 재앙 신유승을 향해 다가갔다. 
 
“독자 씨, 위험합니다.” 
“괜찮아요.” 
 
이현성의 만류를 제지하며,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신유승.” 
 
그토록 강력했던 범람의 재앙은, 머리가 하얗게 센 채 주저앉아 있었다. 칠공에서 흐른 피가 바닥에 고여 있었다. 
아직 무시무시한 아우라를 발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신들은 감히 접근하지 못했지만, 나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의 ‘범람의 재앙’이라면, 모두가 힘을 합친다면 죽일 수 있다. 
 
“당신은······ 대체······ 누구야······?” 
 
떨리는 눈으로, 재앙 신유승이 나를 보았다. 
 
“모두 망쳤어······ 당신 때문에······ 내가 아는 회차에서 없었던.” 
 
천년의 세월을 버틴 영혼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없었던, 일인데.” 
 
유중혁의 변화를 시작으로, 그녀의 아집은 과거의 신유승과 맞닿은 순간 부스러졌다. 
유중혁에 대한 증오. 
천 년에 달하는 세월이 쌓아온 분노. 
그 견고한 감정들이, 흘러들어온 기억의 파랑에 무너지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어쩌면, 이 세계가 바뀔 수도 있다는 희망. 
 
재앙 신유승은 그 작은 희망을 보고 만 것이다. 
아주 작은 빛으로도, 절망을 압도하고 마는 희망을. 
나는 신유승에게 다가가, 함께 무릎을 꿇었다. 
신유승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잘 왔다.” 
 
나는 그녀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일지 계속 생각했다. 
그런 건 멸살법에도 나오지 않는다. 
스스로 생각하는 수밖엔 없다. 
내가 만약 신유승이었다면······. 
 
“오랫동안 너를 기다렸어.” 
 
신유승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날 기다렸다고? 넌 대체 누군데?” 
“너와 같은 세계를 원하는 사람.” 
 
그 말에, 신유승의 눈빛이 멍하게 변했다. 

「나는······.」 
 
어느새 다가온 유상아가, 내 어깨를 짚었다. 
 
“독자 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 하나하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나는 ‘범람의 재앙’ 에피소드를 좋아했다. 
에피소드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을 사랑했고, 소중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랬기에. 
나는 이 에피소드가 없기를 바랐다. 
 
“저는 ‘재앙’을 죽이지 않겠습니다.” 
 
나는 생각했다. 
본래의 3회차에서, ‘범람의 재앙’은 존재가 연결되어 있던 어린 신유승이 사망하며 함께 소멸한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에는 내가 모르는 다른 결말이 있지 않을까.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그런 결말이. 
 
“반론은 받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여러분들이 제 억지를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저씨, 그게 뭔 헛소리야?” 
 
다섯 번째 메인 시나리오에는 ‘제한 시간’이 없다. 
만약 ‘범람의 재앙’이 ‘재앙’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우리가 ‘재앙’을 사냥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죽지 않은 채로, 이 시나리오는 그저 ‘계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이해한 눈빛이었고, 또 어떤 사람은 당황한 모습이었다. 
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인 것은 유상아였고,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이현성이었다.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요. 저는 독자 씨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형이 원한다면 좋아요. 근데 내 티타노 때린 만큼, 나도 저 사람 때려도 되죠?” 
“젠장, 맘대로 해. 언제는 아저씨 맘대로 안 했나? 근데 괜찮은 거야?” 
 
일행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린 신유승을 바라보았다. 
 
“저는······.” 
 
소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아마 신유승은 보았을 것이다. 미래의 자신이 겪은 시간들을. 
그러니 어린 신유승에게는 의중을 묻는 것 자체가 가혹한 일이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마지막으로 재앙 신유승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상처받은 야수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날 살려준다고? 웃기지 마. 니들이 뭔데?” 
 
모든 것을 잃은 그녀에게 남은 것은, 이제 앙상한 자존심뿐이었다. 
 
“내가 살았던 41회차는 이제 없어. 이 우주 어디에도, 그 어떤 세계선에도,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은 없어. 네가, 당신들이 뭘 알아? 어떻게 그 세월을, 그 시간들을! 그걸 모두 잊고, 내가 어떻게······!” 
 
이어지던 신유승의 말이 멎었다. 
유중혁이 그녀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 순간, 신유승은 자신이 했던 말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세계를 잃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것. 
그럼에도, 그 세계에서 다시 한번 살아가야만 하는 일. 
이 세상에 단 하나, 그녀의 슬픔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모든 회귀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증오하며 살아가지.” 
 
회귀자 유중혁이 말하고 있었다. 
 
“저 녀석은 ‘앞으로 나쁜 놈이 될 테니까’ 죽이고. 저 녀석은 ‘앞으로 내 동료를 죽일 테니까’ 죽이고. 그리고 어떤 녀석은, ‘앞으로 동료가 될 테니까’ 목숨을 구해주고.” 
 
그 순간 유중혁의 눈에 떠오른 감정을, 나는 읽을 수 있었다. 
읽을 수 있었기에, 처음으로 유중혁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토록 솔직한 유중혁을 나는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인 걸 안다. 그들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알고, 그들이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행동한다. 그들이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고. 왜냐하면 내 안에서 그 모든 건 ‘분명히 일어날 일’이고, 나는 그걸 부정하면 살아갈 수 없으니까.” 
 
신유승의 동공에 다시 분노가 차올랐다. 
 
“그래! 네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내가, 내 동료들이······!” 
“그러니 너도 그렇게 살아라 신유승.” 
“······뭐?” 
“네가 원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너의 ‘증오’가 되겠다.” 
 
유중혁의 그 말에 너무나 슬펐기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 회차에서, 나를 죽이기 위해서 살아가라.” 
 
유중혁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등을 돌렸다. 
아마도, 그것이 저 유중혁이 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말이었으리라. 
나는, 유중혁의 그 등이 저렇게 크고 넓은 것을 처음 알았다. 가슴이 먹먹하도록 그 등은 넓고 고독했다. 
신유승은 한참이나 입을 벌린 채, 그런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천년의 세월 동안 그녀가 증오했던 사람을,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천 년을 살아온 대가로 이해하게 되었다. 
 
“대장······ 기다려. 대장!” 
 
그런 신유승의 마음속에 번져가는 파문을, 나는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그래도 된단 말인가?」 
「그런 이유로, 내가 계속.」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아도······.」 
 
어떤 분노는 사라지지 않고, 어떤 슬픔은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살아 있는 한, 언젠가 구원받는 날은 온다. 
나는 신유승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신유승, 이제 이곳이 너의 새로운 ‘회차’야.” 
 
독자였기에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고. 
독자이기에, 이제 바꿀 수 있었다.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급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 Episode 21. 바꿀 수 없는 것 (3) > 끝

< Episode 21. 바꿀 수 없는 것 (4) >
 
 
 
 
 
[죄송하지만, 그건 조금 곤란하겠군요.] 
 
슬슬 녀석이 나올 타이밍이 됐다고 생각은 했다. 
빌어먹을 중급 도깨비. 
서울 돔 시나리오 전체를 관리하는 녀석이 이런 사태에 움직이지 않을 리가 없지. 
하지만 나는 조금 자신이 있었다. 
 
“왜 곤란하다는 거지? 우린 시나리오 규정을 어기지 않았어.” 
 
[‘재앙’을 살려두다뇨? 제정신입니까? 죽고 싶으신가 보군요.] 
 
“죽긴, 그 반대야. 전부 다 살려고 이러는 거지.” 
 
내 말에 중급 도깨비의 목소리가 조금씩 딱딱해졌다. 
 
[그게 규정 위반이라는 건 알고 계십니까? 시나리오의 내용은 ‘재앙을 처치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들이 시나리오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그건 걱정마, 재앙은 죽일 거야.” 
 
내 말에 일행들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지금 무슨······?” 
 
특히 이지혜는 무슨 사이코패스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까는 안 죽인다고 했다가, 이제는 죽인다고 하니 그렇게 보일 법도 하겠지. 
하지만 대부분의 일행은, 이어질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뢰감 어린 침묵에 기분이 조금 머쓱해졌다. 
 
“단, 지금은 아니야.” 
 
[무슨······?] 
 
“시나리오엔 분명 ‘제한 시간 없음’이라고 명시되어 있을텐데? 그러니, 재앙을 처치하는 시기는 우리 마음대로란 얘기지.” 
 
중급 도깨비는 한 방 맞은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재촉하지 말라고.” 
 
재앙 신유승이 나를 멍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설마, 그런 발상이 가능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묘한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들의 동요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런 식으로 시나리오에 반발하는 에피소드는 ‘멸살법’ 전체를 뒤져도 많지 않으니까, 성좌들로서는 요긴한 볼거리일 것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선악(善惡)의 구분이 모호해 보이는 상황은 더욱 그렇다. 절대선이나 절대악 계통 성좌들의 구독수는 압도적으로 올라갈 테지. 자기들 맘대로 등장인물의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 바로 놈들의 일상이니까. 
 
[그렇게 둘 수는 없습니다.] 
 
“또 시나리오에 간섭하려고? 지난번에 그랬다가 어떻게 됐는지 다 잊었나?” 

[······.] 
 
내 자신감은 이 시나리오가 ‘서브 시나리오’가 아니라 ‘메인 시나리오’라는 것에 있었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처럼 메인 시나리오 규모가 돔 크기로 진행되면, 아무리 중급 도깨비라 해도 시나리오 조건을 변경하기가 까다로워진다. 게다가 중급 도깨비 녀석은 이미 관리국으로부터 몇 가지 징계를 받은 상태. 
녀석이 관할 시나리오의 징계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나에게 아주 승산이 없는 싸움은 아니었다. 
나는 근처에서 손톱을 뜯고 있는 비형을 보았다. 
 
‘준비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믿을 건 너뿐이니까.’ 
 
―빌어먹을, 내가 왜? 
 
‘죽어도 같이 죽는 거니까 잊지 마라.’ 
 
비형이 울상을 지을 찰나, 중급 도깨비가 입을 열었다. 
 
[역시 재미있군요. 하지만 당신 생각대로는 안 될 겁니다.] 
 
그래,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을 줄은 알았다. 
 
[서울 돔의 화신 모두가, 당신과 같은 생각은 아닐 테니까요.] 
 
그 말과 동시에, 중급 도깨비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무슨 생각인지 알 것 같았다. 
‘메인 시나리오’를 건드릴 수 없다면, 자신이 설정할 수 있는 ‘서브 시나리오’로 승부를 보려는 것이겠지. 
 
[지금부터 ‘재앙’에 걸린 현상금을 두 배로 올리겠습니다.] 
 
본래 보상 코인이 10만 코인이었으니, 그 두 배면 20만 코인이다. 
단숨에 서울 돔의 톱랭커에 올라설 수 있는 코인. 
저 정도면 목숨을 걸고 달려들 법도 한데······. 
 
웬일인지, 달려드는 화신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목숨을 소중히 하라. 부나방처럼 죽어가고 싶지 않으면! 
 
세력을 가진 왕들이 화신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미희왕 민지원과, 미륵왕 차상경. 거기다 중립의 왕 전일도까지. ] 
 
[성좌, ‘해상전신’이 한반도의 화신들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물론 왕들이 통제할 수 없는 세력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또한 목숨이 아까운 것은 매한가지. 이미 ‘재앙’의 힘을 보았으니, 10만 코인이든 20만 코인이든 소수 인원으로는 덤빌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거기다 우리 일행까지 ‘재앙 신유승’을 감싸는 형국이었으니······. 
 
[······실망이군요. 서울 돔의 화신 여러분이 이렇게 겁쟁이일 줄이야.] 
 
상공에서 불길한 공기가 떠돌았다. 중급 도깨비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더 최악으로 끌어갈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재빠르게 첨언했다. 이쯤에서, 승부를 봐야만 한다. 
 
“네가 양보하지 그래? 솔직히 이만하면 다들 만족했을 거 아냐?” 
 
[······다들 만족했다?] 
 
나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중급 도깨비는 이미 이해했을 테니까. 
 
[하하, 그렇군요.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역시, 독각에게 들은대로 연출의 대가답군요.] 
 
도깨비의 존재 이유는 시나리오에 있다. 
많은 성좌들이 호응하고, 많은 성좌들이 좋아하는 시나리오. 
‘스타 스트림’의 세계에서 시나리오의 방향이 틀어지는 기적은, 단 한 경우에만 발생한다. 
바로 그 시나리오를 보는 대다수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의 방향이 바뀌기를 원하는 경우다. 
 
[······확실히 ‘폭력’만이 자극의 전부는 아니죠.] 
 
‘재앙 신유승’을 구하며, 나는 성좌들의 환심을 사려 노력했다. 
가능한 필터링을 피해갈 수 있을 법한 단어들을 골라서 사용했고, 성좌들에게 어느 정도의 정보 노출을 각오하며 발화를 거듭했다. 
 
나는 그들이 ‘재앙 신유승’을 동정하게 만들었고. 
내 반항을 응원하게 만들었으며. 
결과적으로 이 모든 상황에 탄식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내 귀에는, 내 작전에 걸려든 성좌들의 메시지가 실시간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의 뜻을 존중합니다.] 
[성좌, ‘황산벌의 마지막 영웅’이 당신의 의지에 감탄합니다.] 
 
모든 게 계획 대로였다. 
 
“알았으면, 이제 슬슬 결정하지 그래? 보상을 주든가, 아니면 다섯 번째 시나리오를 계속하든가 하자고.” 
 
다섯 번째 시나리오가 계속되더라도, 여섯 번째 시나리오를 이어가는 것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메인 시나리오는 중복 실행이 가능하니까. 
녀석도 생각이 있다면 성좌들이 만족한 이쯤에서 그만두겠지. 
 
[화신 김독자. 당신은 내가 아는 모든 화신들 중 가장 영리하고 무서운 인물입니다.] 
 
점차 풀어지는 중급 도깨비의 표정에서, 나는 기이한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영리함이 당신의 발목을 붙잡겠군요.] 
 
“······무슨 뜻이지?” 
 
이어진 중급 도깨비의 말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성좌님들. 슬슬, 기다리시던 이야기를 보여드리도록 하지요.] 
 
파츠츠츠츳!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중급 도깨비가 시나리오를 움직이고 있었다. 
 
[중급 도깨비가 시나리오에 개입합니다.] 
[시나리오 계약에 따라, ‘범람의 재앙 신유승’의 통제권이 중급 도깨비에게 이양됩니다.] 
 
시스템 메시지에, 재앙 신유승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 안돼. 잠깐만. 나는······ 아아아악!” 
 
재앙 신유승의 몸에서 검은 아우라가 솟아나고 있었다. 
나는 다급히 외쳤다. 
 
“잠깐만! 지금 무슨 짓을······!” 
 
[계약을 이행하십시오. 시나리오의 톱니바퀴여.] 
 
그제야 나는 놈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깨달았다. 
시나리오 강제 집행권. 
시나리오에 포함된 모든 ‘부속’들의 운명을 가누는 힘. 
나도 ‘멸살법’을 보았기에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이걸 곧바로 사용할 줄은 몰랐다. 
 
[등장인물의 성격이 강제로 변화합니다.] 
[등장인물 ‘신유승’의 성향이 ‘악(惡)’으로 고정됩니다.] 
 
육체를 빼앗긴 재앙 신유승은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시나리오 강제 집행권은 도깨비의 개연성 소모가 엄청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사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사용되었다는 것은······. 
 
[다수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의 전개에 환호합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신파를 싫어합니다.] 
 
많은 성좌들이 이 전개의 개연성에 동의했다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대체 왜? 
 
“독자 씨?” 
“형!” 
 
긴장한 일행들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들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성좌들이 갑자기 등을 돌린 거지? 
허공을 보니 비형의 표정이 어두웠다. 
 
―미안, 설득했는데 잘 안 됐어. 
 
‘대체······.’ 
 
―예상보다 네 평판이 너무 나빠. 
 
중급 도깨비가 말했다. 
 
[오만한 화신이여. 성좌들이 그렇게 쉽게 넘어갈 줄 알았습니까?] 
 
······하지만 간접 메시지들은 모두 호의적이었는데? 
 
[하긴, 인간은 원래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으려는 습성이 있죠.] 
 
나는 연이어 떠오르는 간접 메시지를 보며, 나의 오판을 절감했다. 
그렇다. 
모든 성좌들이 간접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메시지를 보내는 성좌들은 극히 일부뿐.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결정을 비웃습니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에 대한 지지를 철회합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의도를 경계합니다.] 
 
대다수의 여론이 내게 나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알량한 기만으로 그들을 속였고, 이벤트를 취소했다. 
비형 채널의 정원이 9999였다는 것은, 눈치 빠른 성좌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알면서도 그들은, 내 시나리오를 보기 위해 속아준 것이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은 속아주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의 성좌들이 당신을 안타깝게 바라봅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측은하게 바라봅니다.] 
 
어쩌면, 나는 성좌라는 존재들을 너무 얕봤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운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화신 김독자.] 
 
“아아아아아―!” 
 
강제로 악인화가 진행된 신유승의 몸에서, 무지막지한 아우라가 흘러 나왔다. 그저 닿는 것만으로도 살점이 녹아 버릴 듯한 살기. 화신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멀리서, 유중혁이 진천패도를 뽑고 있었다. 
 
[그럼, 마지막까지 좋은 시나리오를 보여주길 바라겠습니다.] 
 
나는 재앙으로부터 천천히 물러났다. 
슬프게 일그러진 신유승의 얼굴.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나는 재빨리 유중혁의 동태를 살폈다.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놈이 무슨 선택을 할지는 뻔한 것이었으니까. 
 
“잠깐만, 유중혁.” 
“네놈은 실패했다.” 
“아이는 건드리지 마라.” 
 
나는 어린 신유승을 등 뒤로 숨기며 말을 이었다. 
 
“만약 이 아이를 건드린다면, 너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눈을 가늘게 뜬 유중혁이 나를 노려보았다. 
 
“······달리 방법이 없다.” 
 
방법······. 
나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방법은 있어. 성좌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시나리오를 보여주면 되니까.” 
“······무슨 소리냐?” 
“재앙을 물리치면 된다.” 
 
유중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살 행위다 김독자. 만용을 부릴 셈인가?” 
 
나는 악마처럼 변해 주변의 모든 것을 휩쓸어대는 신유승을 보았다. 
이렇게 되길 원하지 않았다. 
이런 결말을, 결코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는, 시나리오에 저항하는 것조차 하나의 시나리오가 된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발언에 흥분합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통쾌한 난투극을 원합니다.] 
 
그래, 너희들이 이것을 보고 싶다면. 
 
“원호해라 유중혁. 내가 재앙을 막겠다.” 

얼마든지, 연기해 주마. 
 
“김독자, 너는······.” 
“할 수 있다.” 
 
서서히 눈을 깜빡이자, 미뤄뒀던 선택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당신은 ‘1인칭 조연 시점’을 경험하였습니다.] 
[당신이 몰입했던 조연의 스킬 중 하나를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획득할 수 있는 스킬 선택지를 제시합니다.] 
[획득할 스킬을 선택하십시오.] 
 
목록을 확인한 나는 망설임 없이 선택지를 골랐다. 
 
“3번. ‘야수왕의 감수성’을 선택한다.” 
 
[전용 스킬, ‘야수왕의 감수성’을 획득하였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재앙 신유승의 손에서 에테르의 폭풍이 몰아쳤다. 내 배에 구멍을 뚫고, 유중혁조차 전투불능으로 만들었던 그 에테르의 폭풍. 
 
쿠콰콰콰콰콰! 
 
나는 일행들을 보호하며, 전면에서 폭풍을 받아냈다. 
 
[전용 스킬, ‘야수왕의 감수성 Lv.3’이 발동 중입니다.] 
 
새하얀 백색의 털망토.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비스트 로드 신유승의 고유 스킬. 절반 이상의 마력이 빨려 나가며 일순 현기증이 일었지만, 나는 신유승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강대한 폭풍 속에서도 ‘야수왕의 감수성’은 조금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스킬을 훔쳤군. 하지만 그것 하나로는 무리다.” 
“알아.” 
 
나는 재앙 신유승을 바라보았다. 악인화가 진행되어 육체의 통제력을 잃었음에도, 그녀의 눈에는 감정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괜찮아. 나를 죽여줘.」 
 
누가 그 눈을 보며 검을 휘두를 수 있을까. 
천년의 세월을 헤매고 또 고통받았던 여자. 
나는 이제 그녀를 베어야 했다. 
이것이, 이야기를 바꾸는 것에 실패한 대가······. 
나는 처음으로 ‘멸살법’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워졌다.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봐라.”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게 너희들이 원하는 시나리오니까.”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신유승의 마지막 페이즈가 열린 이상, 이 싸움은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렇기에, 결국은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인물 책갈피’가 활성화됩니다.] 
[사용 가능한 책갈피 슬롯 : 4개] 
[활성화 가능한 책갈피의 목록을 불러옵니다.] 
 
“1번 슬롯에 ‘망상악귀 김남운’을 해제하고, ‘멸악의 심판자 정희원’을 넣겠다.”
 
 
 
 
 
< Episode 21. 바꿀 수 없는 것 (4) > 끝

< Episode 21. 바꿀 수 없는 것 (5) >
 
 
 
 
 
[책갈피 스킬의 레벨에 비례해 활성화 시간이 결정됩니다.] 
[활성화 시간 : 30분]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합니다. 해당 인물의 스킬 중 일부를 선택해 가져올 수 있습니다.] 
 
신유승이 나를 향해 달려왔고, 나 역시 그녀를 향해 마주 달려갔다. 
누구도 서로를 죽이고 싶지 않았고, 어디에도 진심은 없었다. 
이것은 오로지 성좌들의 유희를 위한 싸움. 
모든 것은 ‘시나리오’였고, 그러므로 모든 것이 가짜인 무대였다. 
그러나 이 전투의 결과로 누군가는 죽을 것이었다. 
 
[「심판의 시간 Lv.5」이 활성화됩니다.] 
 
활성화된 스킬 레벨은 5. 
정희원이 열심히 수련을 하기는 한 모양이다. 
정희원 본인이 오는 것만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당황합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당신의 스킬에 침음합니다.] 
 
당황할 법도 하다. ‘심판자’로서 허락받지 않은 이가 스킬을 사용했으니 놀랄 수밖에. 
하지만 그들은 나를 허락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존재는 명백한 ‘악인’이니까.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해당 스킬 사용에 동의합니다.] 
 
몸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오오라가 용솟음쳤다. 세상의 악을 모조리 토벌하고 말겠다는 맹목적인 정의감. 대악마들과 성전을 벌였던 대천사들의 역사가, 머릿속을 파편처럼 스쳐갔다. 
 
―악을 징벌하라. 
 
[심판의 시간]은 본래 성전의 위대한 발키리들이 사용했던 스킬이었다. 
그렇기에 이 스킬은 대천사들의 가호를 받아 악을 토벌한다. 
편협한 정의를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배제하는 광기가 뇌수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렸다. 정희원은 매번 이런 기분을 느끼며 나를 위해 다른 존재들을 베었던 것이다. 끔찍한 일이었다. 
 
기이이잉! 
 
신념의 칼날에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마력파가 터져 나왔다. 공진하는 에테르의 칼날이 그대로 신유승을 향해 직선을 내리그었다. 
 
스가각! 
 
놀란 신유승의 어깨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유령함대의 포격에도 끄떡없었던 [야수왕의 감수성]이 드디어 찢어졌다. 떨어진 핏방울이 새하얀 털 곳곳에 번졌다. 
 
[심판의 시간]. 
적이 ‘악인’인 한, 이 스킬의 사용자는 패배하지 않는다. 
 
지금 나의 모든 능력치는 정확히 ‘재앙 신유승’에 대항할 수 있게끔 상승해 있었다. 괜히 [심판의 시간]이 사기라 불리는 게 아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능력치 버프를 제공하는 스킬은, 멸살법 전체를 뒤져봐도 몇 되지 않는다. 
 
“모두 공격해요!” 
 
하지만 내가 강해졌다고 해도, 모든 종류의 스킬 숙련치는 여전히 신유승이 앞선 상태. 그러니 도움이 필요했다. 
 
“일반 공격 패턴일 때는 원거리 공격으로 지원하고, 전체 공격을 시도할 때는 꼭 제 뒤로 빠지세요!” 
 
내 말에, 굳어 있던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거리 지원이 불가능한 분들은 [몬스터 게이트]에서 넘어오는 괴수들을 처치해주세요. 그쪽도 시급합니다.” 
 
실제로 지금도 신유승의 [몬스터 게이트]에서 넘어오는 괴수들 때문에, 용산구는 거의 궤멸 직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모두 싸워라!” 
 
왕들의 선전포고와 함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왕들의 세력이 [몬스터 게이트]에서 넘어오는 괴수들을 막아섰다. 대부분이 7급 이상의 괴수들이라 상당히 버거워 보였지만, 다행히 크게 밀리지는 않는 듯했다. 
 
“저는 저 원숭이를 맡겠습니다.” 
 
두터운 수트를 쾅쾅 두들긴 이현성이 5급 괴수종 헤비메탈콩을 향해 달려갔다. 
 
“저랑 유승이는 킹을 맡겠어요.” 
 
이길영이 그 와중에 신유승을 챙기며 움직였다. 
신유승이 조종하는 퀸 미르바드가 포효했고, 이길영이 불러온 몇몇 충왕종들이 함께 킹 매스우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두 어룡의 냉기 숨결이 서로를 향해 쏟아지는 와중에, 이지혜도 앞으로 나섰다. 
 
“아저씨, 지원 사격은 나한테 맡겨.” 
“저는 움직임을 차단할게요.” 
 
이지혜는 함포사격으로, 유상아는 [아라크네의 거미줄]로 트랩을 만들어 재앙 신유승의 동선을 견제했다. 물론 그야말로 미미한 수준의 도움일 뿐이었다. 
포격은 거의 데미지를 줄 수 없고, 거미줄은 신유승의 에테르에 금방 찢어졌으니까. 
하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유중혁. 싸울 수 있겠냐?” 
 
나를 제외하고, 신유승의 움직임을 쫓아가며 동시에 녀석의 공격을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유중혁뿐이다. 
 
“······네놈 걱정이나 해라.” 
 
바닥에 핏물을 뱉은 유중혁이 [진천패도]를 갖추어 든 채 내 곁에 섰다. 
이미 [기사회생]을 사용했는지, 녀석의 상태는 아까보다 나아 보였다. 
후폭풍이 강한 [기사회생]을 썼으니, 이제 놈에게도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될 것이다. 
 
“몇 분이냐?” 
“30분. 네놈은?” 
“나도 그래.” 
 
책갈피의 사용 가능 시간도 30분이 고작이다. 
그러니, 반드시 30분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 
 
고오오오오. 
 
재앙 신유승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검은색 오오라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악인화로 인해 계속해서 육체 능력이 올라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유중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세계선을 넘기 위해 악마와 손을 잡았던 모양이군.” 
 
유중혁의 추측은 맞았다. 
실제로, 지금 그녀의 영혼은 악마에게 저당 잡혀 있으니까. 
그리고 그 악마는, 빌어먹을 도깨비들에게 그녀를 넘겼다. 
 
[하하하, 재밌군요. 정말 재밌습니다.] 
 
유쾌해하는 중급 도깨비의 목소리. 
 
[이제야 좀 시나리오 답군요.] 
 
피가 튀고, 살점이 으스러지는 전장. 그토록 막고 싶었던 서울 돔의 멸망이 매초마다 가까워지고 있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박진감 넘치는 전투에 열광합니다.] 
 
“가자.” 
 
그 말과 함께, 유중혁의 신형이 쾌속하게 쏘아져 나갔다. 
 
쿠콰콰콰콰! 
 
움직이기 무섭게, 볼을 부풀린 재앙 신유승이 우리를 향해 숨을 뿜었다. 
[야수왕의 숨결]. 
5급 해수종의 [냉기 숨결]과는 비교도 안 되는 파괴력의 에테르 폭풍이었다. 
 
“피해!” 
 
[주작신보]를 극한까지 발동한 유중혁이 재앙 신유승의 공격을 피했고, 나는 유중혁이 미처 피하지 못한 공격들을 [야수왕의 감수성]을 발동해 대신 막아냈다. 그렇게 하나씩 합을 맞추는 동안, 나는 유중혁의 전투 센스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재앙도 재앙이지만, 유중혁도 괴물은 괴물이었다. 
 
‘심판의 시간’ 버프도 없이 저 재앙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저 유중혁뿐이다. 강하고, 냉철하고, 무자비한 회귀자. 지금만큼은 그가 내 편이라는 것에 안도했다. 
 
“제대로 해라, 김독자!” 
“하고 있어!” 
“빌어먹을······.” 
 
접근해서 일격을 먹이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몇 방의 공격을 성공한 후에 신유승의 패턴은 더욱 난폭해졌다. 
폭주 상태에 들어선 신유승은 마력이 고갈되는 것도 개의치 않고 에테르의 폭풍을 날려댔고,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야수왕의 감수성]을 발동해 그 공격을 막아내는 것만도 버거웠다. 
중간중간 유중혁이 일격을 먹이기는 했지만, 데미지는 거의 누적되지 않았다. 
얼마나 공방을 주고 받았을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벌써 20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유중혁의 체력은 급격하게 떨어졌고, 틈틈이 주스처럼 빨아대던 마력 회복 물약도 어느새 바닥을 보였다. 
 
강하다. 
[심판의 시간]을 발동하고도 이렇게나 고전할 줄이야. 
 
스킬로 무리하게 도핑된 신체가 거세게 삐그덕거렸다. 
[심판의 시간]의 부작용이 조금씩 찾아오고 있었다. 
 
[하하하! 정말 멋진 시나리오입니다. 성좌님들, 그렇지 않습니까?] 
 
멋대로 지껄이는 중급 도깨비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앞으로 나아갔다. [야수왕의 감수성]이 만든 털들이 미친 듯이 펄럭였다. 
에테르의 폭풍에 피부가 까맣게 익어갔다. 
한 발짝, 두 발짝.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30분이 지나기 전에 충분한 데미지를 줄 수 없다. 
 
파츠츠츳! 
 
재앙 신유승의 몸에서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그녀의 전신에 전격이 일더니, 검게 물들었던 눈빛이 일시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나를 공격해.」 
 
재앙 신유승이 자신의 의지로 몸을 통제하고 있었다. 
 
「나를 막아.」 
 
말하지 않았지만, 들리는 목소리. 
 
「당신의 ‘회차’를 지켜.」 
 
일시적으로 약해진 에테르의 폭풍을 뚫고, 나는 유중혁과 함께 달려나갔다. 
검을 휘두르자, 신유승의 몸에서 피가 튀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벌이는 최악의 연기를 들키지 않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칼날에 베인 신유승이 비명을 질렀고, 폭풍에 맞은 유중혁이 하늘을 날았다. 
 
“······가라, 김독자.” 
 
그리고 유중혁이 만들어 준 빈틈을, 내가 파고들었다. 
 
푸우욱! 
 
망설임 없이 파고든 ‘신념의 칼날’이, 정확히 신유승의 왼쪽 어깨에 박혔다. 깊게 박힌 칼날에서 마력이 폭주했다. [야수왕의 감수성]이 찢어지며, 신유승의 왼팔이 잘려나갔다. 
선혈이 후두둑 떨어졌다. 
나는 신유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멸살법’에 나왔던 문장처럼, 신유승은 웃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일부러 내 칼을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수의 성좌가 당신의 전투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빌어먹을······.” 
 
힘없이 웃는 순간, 검을 쥔 손에 힘이 빠졌다. 
그러자 신유승이 웃었다. 
 
「거지 같지?」 
 
비명도 분노도 없이, 나를 붙잡은 그녀가 바닥에 나를 내동댕이쳤다. 
하지만 아프지 않았다. 
아프라고 한 공격이 아니었다. 
 
「그래도 당신은 계속하려는 거지?」 
 
“그래.” 
 
나는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둘렀고, 신유승은 나를 향해 숨결을 뱉었다. 
하나의 질문에 하나의 대답이 오가듯이. 
우리는 서로를 향해 미친 듯이 상처를 입혔다. 
 
“네가 그랬던 것처럼.” 
 
슬슬 마력이 떨어진 내 [야수왕의 감수성]이 방어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계까지 육체를 강화시킨 [심판의 시간]이 잠시나마 육체의 내구성을 높여 주었다. 울컥거리며 피가 흘렀고, 세상이 어지럽게 돌았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서거걱! 푸슈슛! 
 
확실하게, 데미지는 누적되고 있었다. 
 
[당신을 꺼려하던 일부 성좌들이 당신에게 호기심을 보입니다.] 
 
열광해라. 
 
[전장을 누비는 성좌들이 당신의 패기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실컷 떠들어라. 
 
[대전장의 성좌들이 당신의 의지에 찬사를 보냅니다.] 
 
언젠가 내가, 네놈들의 혀를 뽑으러 갈 때까지. 
 
그렇게 얼마나 더 공방을 주고받았을까. 나는 녹진해진 육체를 비틀거리며,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책갈피’의 지속시간이 30초 남았습니다.] 
 
터진 장기가 찢어질 듯 아팠고, 부러진 늑골이 끊임없이 폐를 찔렀다.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다. 
하지만, 여전히 재앙은 건재했다. 
 
쿠구구구구. 
 
잠깐이나마 돌아왔던 재앙 신유승의 눈동자가 다시 새카맣게 물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범람의 재앙’은 원작보다도 더 강한 것 같다. 재앙 신유승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당신으로는 부족해.」 
 
그녀는 자살할 수 없다. 그런 식으로 그녀가 죽는 것을 중급 도깨비가 허락할 리 없으니까. 그녀 스스로 패널티를 거는 것도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리고 나 또한, 다른 의미로 한계였다. 
 
「나를 어떻게 막을 거야?」 
 
“걱정 마. 이제 올 거야. 너를 막을 사람이.” 
 
처음부터, 내 손으로 신유승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유중혁도 지금 상태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직 하나 남았다. 
신유승의 입이 떨어지려는 순간, 주변의 바닥이 폭발하며 폭음이 울려 퍼졌다. 
 
쾅! 콰앙! 콰아앙! 
 
멀리서 울려 퍼진 포성. 북쪽에서 하늘색 수감복을 입은 여인들이 나타났다. 괴수들의 길이 갈라지며, 일련의 군대가 이쪽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 서서 군을 통솔하는 가면의 여인. 
 
방랑자들의 왕. 
 
대체 어딜 갔나 싶었더니, 북쪽에서부터 내려오면서 괴수들을 정리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기다린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나는 군대의 첨단에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한 사람을 마주 보았다. 
차분히 머리를 틀어 올린 한 여자가, 이쪽을 향해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늦었죠?” 
“조금 늦으셨군요.” 
“능청은. 아직 살만한가 봐요?” 
 
멸악의 심판자. 
열흘 만에 본 정희원은, 내가 알던 모습보다 훨씬 절제된 기도를 풍기고 있었다.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린 그녀가, 내 옆으로 나섰다. 
 
“이제 나한테 맡기고 잠시 쉬고 있어요.” 
 
곧 붉은 오오라가 용솟음치며, 그녀의 전신에서 [심판의 시간]이 피어올랐다. 내가 훔쳤던 스킬보다도 훨씬 강맹한 기세였다. 
 
정희원은 정말 내가 가진 마지막 카드다. 
만약 이게 실패한다면······. 
나는 신유승에게 충분히 데미지를 줬을까? 
정희원은, 마무리를 잘 해낼 수 있을까? 
 
“뭘 그렇게 걱정해요?” 
 
정희원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평소와는 다른 자신감이 그녀의 목소리에 묻어 있었다. 
단순히 [심판의 시간] 말고도 믿는 것이 있는 눈치.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침음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정희원의 배후성을 향해 적의를 드러냅니다.] 
 
그러고 보니, 정희원도 [배후 선택]을 했겠구나. 
과연 그녀는 누구를 택했을까? 
신유승이 흔들리는 눈으로 정희원을 보았다. 
 
「당신은······.」 
 
“대충 상황은 알겠어. 오는 길에 내 배후성이 열심히 떠들었거든.” 
 
정희원이 슬픈 눈으로 신유승을 마주 보았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말을 마친 정희원이 자신의 칼날을 가볍게 휩쓸었다. 그리고 손이 닿은 곳에서, 천천히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깊은 새벽. 서울의 어둠이 가장 짙게 내려앉은 밤 위로, 정희원의 칼날이 고고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칼날 위에 내려앉은 불꽃은 지금껏 내가 본 그 어떤 불꽃보다도 더 선명하고 눈부셨다. 
모든 악을 징벌할 새하얀 성흔의 불꽃. 
 
[지옥염화(地獄炎火)]. 
 
나는 그 성흔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멸살법에서 그 성흔의 묘사를 본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제천대성의 성흔과도 비견될 만큼, 막강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멸살법’의 최강 성흔 중 하나. 
 
[지옥염화]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의 성흔이다. 
 
나를 돌아본 정희원이 차게 웃었다. 
 
“내가, 이 빌어먹을 시나리오를 끝내줄게요.” 
 
대천사 우리엘이, 자신의 화신으로 정희원을 선택했다.
 
 
 
 
 
< Episode 21. 바꿀 수 없는 것 (5) > 끝

< Episode 21. 바꿀 수 없는 것 (6) >
 
 
 
 
 
정희원은 달렸다. 
[심판의 시간]으로 강화된 근육이 그녀의 신체를 한계까지 끌어올렸고, [귀살]의 버프가 강화된 신체 위에 날카로운 예기를 부여했다. 
그리고 우리엘의 [지옥염화]는, 그녀의 모든 전투력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가공했다. 
 
타오르는 심판의 불꽃.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은 신유승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불꽃을 받을 것은 신유승 뿐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슬픈 눈으로 전장을 응시합니다.] 
 
정희원의 칼날이 먼저 개전을 선포했다. 
 
[등장인물 ‘정희원’이 성흔 ‘지옥염화 Lv.1’를 발동합니다!] 
 
고작 1레벨의 성흔이었음에도, 지옥염화는 신유승의 에테르 폭풍을 가볍게 불태우며 전진했다. 
악마의 힘이 더해진 [야수왕의 숨결]이 쏟아져 나왔지만, 정희원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 재해에 맞서듯, 힘껏 검을 움켜쥔 정희원이 하늘과 땅을 잇는 선을 그었다. 
 
콰콰콰콰콰! 
 
해일처럼 밀려오던 [야수왕의 숨결]이, [지옥염화]와 만나는 순간 연기를 내뿜으며 통째로 갈라졌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맙소사, 저게 대체······.” 
 
[지옥염화]는 최종 레벨에 도달할 시 한 행성의 바다를 증발시켜 길을 열 수 있는 성흔. 원작에서 ‘메시아’가 등장했을 때도, 그를 예비해 가장 먼저 길을 열었던 게 바로 우리엘이었다. 
모든 대악마가 두려워하는 대천사이자, 악마에 가장 가까운 악마의 적. 
불길을 달려 쇄도하는 정희원을 향해, 신유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우리엘인가. 당신이 기다린 건 이거였구나.」 
 
저 무시무시한 대천사의 가호 앞에서도, 재앙은 물러서지 않았다. 
 
「결말을 맺기에 충분하겠어.」 
 
아니, 오히려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마침내 자신의 의무를 다하게 되었다는 듯이. 
 
신유승의 주먹에 휘감긴 에테르와, 정희원의 칼날에 휘감긴 불꽃이 충돌했다. 신유승의 신형이 휘청했고, 정희원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밀어붙였다. 아무리 좋은 스킬들이 중첩되었다 해도, 결국 오버 스펙은 지속시간이 짧다. 
그것을 잘 아는 정희원은 쉴 틈 없이 공격을 가속했다. 
 
화르르르륵! 
 
주변의 대지가 신성한 불길로 물들고 있었다. 
지쳤음에도, 신유승은 오랫동안 버텼다. 
노련한 배우가 생애 최후의 연기를 펼치듯, 그녀는 자신이 살지 않은 회차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죽어갔다. 
 
[다수의 신규 성좌들이 당신의 설계에 흥분합니다.] 
 
독각의 채널에서 넘어온 성좌들이 흥분하고 있었다. 

[15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언제 나를 싫어했느냐는 듯, 성좌들이 보낸 후원금이 고스란히 차올랐다. 
애정도 증오도, 성좌들에겐 모두 한순간의 유흥거리일 뿐. 
불행하게도 그 찰나의 이야기가, 인간들에게는 곧 삶이었다. 
 
[한반도의 성좌들이 당신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나를 관음하는 무수한 시선들 속에서, 나는 홀로 이 시나리오의 결말을 조금씩 그려갔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선택에 주목합니다.] 
 
그 사이 정희원의 난도질은 [야수왕의 감수성]을 넝마로 만들었고, [지옥염화]의 불길은 조금씩 신유승을 불태웠다. 정희원의 몸 곳곳에도 순식간에 상처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박빙의 승부였지만, 승기는 지쳐 있던 신유승의 편이 아니었다. 
모든 방어를 도외시하고 달려간 정희원은, 에테르의 폭풍을 맞아가며 신유승의 배에 검을 꽂아 넣었다. 
환하게 타오르는 불길이 신유승의 체내로 파고들었다. 
 
파스스스슷! 
 
신성한 불길이 그녀의 몸에 깃든 대악마의 기운을 모조리 불태웠다. 주변을 잠식하던 검은 아우라가 연기로 승화하고 있었다. 
칼이 뽑힌 자리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신유승은 마치 무대 위의 소품을 바라보듯 자신의 피를 내려다보며 주저앉았다. 
 
마침내, 결착이었다. 
 
문득 옆을 보자, 쓰러진 킹 매스우드와 헤비메탈콩의 모습이 보였다. 
[몬스터 게이트]가 닫히며, 괴수들과의 격전도 이제 막바지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주저앉은 신유승을 향해 다가갔다. 
육신의 통제권은 돌아왔으나, 이미 그녀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신유승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난 이제 죽는 건가.」 
 
보통의 경우라면 비스트 로드는 저 정도 상처로 죽지 않는다. 
[야수왕의 생명력]은 유중혁의 [기사회생] 못지않은 회복력을 자랑하니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녀가 맞은 것은 [지옥염화]였다. 
 
파스스스스. 
 
그녀의 체내 깊숙한 곳에 박힌 지옥의 불길은, 악을 모두 꺼뜨리는 것으로 모자라 그녀의 생명력을 태우는 중이었다. 우리엘의 성흔은 악인의 모든 것을 태우기 전까지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흔들립니다.] 
[지나친 몰입으로 인해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가 상시 발동합니다.] 
 
그 불이 체내에 붙었으니, 신유승은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신유승이 나를 보며 힘없이 웃었다. 
 
“이 회차에 오게 되어서 다행이야. 대장의 말을 듣길 잘 했어.” 
 
「괴로워. 이렇게 사라지는 게.」 
 
“이제 마음 놓고 죽을 수 있겠다 싶네. 진짜로 뭔가가 바뀔지도 모르잖아.” 
 
「죽기 싫어······.」 
 
전지(全知)는 곧 저주다. 
누군가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언제나 누군가를 기만한다는 뜻이니까. 
그녀는 웃으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표정이 굳은 중급 도깨비가, 그곳에 있었다. 
 
“나 이제 죽을 건데, 약간의 신파는 괜찮지? 이 정도면 훌륭한 시나리오였잖아.” 
 
[몇몇 성좌들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일부 성좌들이 불만을 터뜨립니다.] 
 
중급 도깨비는 말이 없었다. 
하긴, 놈은 지금 그걸 생각할 계제가 아닐 것이다. 
시나리오는 완성되었다. 
하지만, 놈의 의도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제 녀석은, 그 의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유중혁이 다가와 있었다. 
 
“죽는 건가?” 
“······아마도.” 
“나에 대한 증오가 부족했던 모양이군.” 
 
이 자식이 진짜 마지막까지······. 
유중혁이 검을 뽑았다. 신유승을 죽이려는 것인 줄 알고 놈을 제지하려는 순간, 녀석의 진천패도가 신유승의 머리 곁에 꽂혔다. 그 차가운 칼날이, 죽어가는 신유승의 머리를 받치고 있었다. 신유승이 말했다. 
 
“끝까지 폼잡기는. 나 곧 죽는다고 대장.” 
 
태연한 신유승의 속삭임은, 내 귀에는 다음과 같은 말로 들렸다. 
 
「당신에게 꼭 듣고 싶은 말이 있어.」 
「한 번만.」 
「꼭 한 번만, 들을 수 있다면 좋겠어.」 
 
결코, 전해질 수 없는 말. 
그 말을 전혀 듣지 못하는 유중혁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어볼 게 있다.” 
“뭔데?” 
 
신유승의 표정에 어리는 기대감에, 나는 비참한 기분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저 기대가, 결코 보답받을 수 없다는 걸 아니까. 
 
“네가 세계선을 넘도록 도와준 악마는 누구냐?” 
 
그녀는 잠시 멍한 얼굴로 유중혁을 보더니, 희게 웃었다. 
 
“······역시 대장은 마지막까지 대장이네.” 
 
「변하지 않아.」 
 
“말해라.” 
“‘지평선의 악마’라고 들어봤어?” 
 
「그런 당신을 동경했어.」 
 
“이름은 알고 있다.” 
“운이 나쁘면, 대장도 곧 만나게 될 거야. 하지만 절대로 싸우지는 마. 대장이 죽도록 노력해도 그 녀석을 이기는 건 거의 불가능할 테니까······.” 
 
「오랫동안, 정말 오랫동안······.」 
 
그녀의 간절한 진심은 전해져야 할 곳에 도달하지 못하고, 내게서 그쳤다. 나는 말해주고 싶었다. 이 멍청한 유중혁에게,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이 선명한 목소리를, 조금도 듣지 못하는 유중혁에게.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신유승의 손이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유중혁이 말했다. 
 
“기억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유중혁은 돌아섰다. 
유중혁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복수해 주마.」 
 
그 어절에 담긴 비감에 나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재앙 신유승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구나. 이 녀석은, 이미 알고 있었구나. 
들리지 않아도, 이미 듣고 있었구나. 
신유승의 눈에서 뭔가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전지적 독자 시점]이, 전지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잘 있어, 대장.」 
 
「고생했다.」 
 
「뒤는 맡길게.」 
 
「쉬어라.」 
 
쓰다만 편지처럼 길 잃은 문장들만이 내 안에 남았고, 나는 가만히 그 말들의 짝을 하나씩 찾아 주었다. 
닿지 못한 것 같아도, 너희는 분명히 닿았다고. 
나는, 이 이야기를 분명히 읽었다고. 
이윽고 신유승의 발끝이 부스러져 재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예쁘네······.」 
 
어린 신유승이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내 옷깃을 붙들었다. 
사라져가는 미래의 자신을 보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결코 닿을 수 없는 감정이 있다. 
재앙 신유승이 그런 나와 어린 신유승을 보며 미소했다. 
 
「······부럽구나.」 
 
재앙 신유승의 하반신이 거의 사라졌다. 
소멸의 속도가 점차 가속화되고 있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눈을 감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탄식합니다.] 
 
성좌들이 그녀를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재앙 신유승의 손을 붙잡았다. 뜻밖의 행동에 놀란 신유승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마지막 남은 마력으로 [야수왕의 감수성]을 발동했다. 
떠날 그녀에게 전할 선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수왕의 신비한 감각이 맞닿으며,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와 재앙 신유승의 감각이 이어졌다. 같은 야수만이 공유할 수 있는 감수성. 
지나가는 바람이, 뭔가를 속삭였다. 
성좌들도, 도깨비들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 
죽어가던 재앙 신유승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떴다. 
 
「······진심이야? 정말로?」 

다행히, 제대로 전달된 모양이었다. 
이미 흉부 위쪽까지 잿더미가 되어버린 그녀는, 이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째서······.」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조금씩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무언가 내게 말을 전하려 했지만, 서늘하게 불어온 바람이 그것을 막았다. 이어졌던 세계선이, 연결되었던 필름이 다시 끊어지고 있었다. 
파스스스. 
그녀를 이루던 조각들이 가루가 되어 흩어 없어졌다. 눈도, 코도, 입도. 목소리도. 그녀를 이루던 천 년의 시간이, 새하얀 재로 눈처럼 흩날렸다. 
 
재는 꼬리를 이루며 일제히 하늘로 사라졌다. 
먼 여행이라도 하듯, 혹은 춤이라도 추듯. 
 
허공을 떠도는 희미한 흔적들을, 우리는 한참이나 올려다보았다. 
그게 현실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지, 어린 신유승이 나를 붙들었다. 
 
“정말로 죽은 거예요?”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바꿀 수 없는 거예요? 정말로?”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아. 아······.” 
 
내 소매를 붙잡은 이길영이 내 옷깃에 눈을 닦았다. 유상아가 눈시울을 적셨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현성도 울고 있었다. 울지 않는 것은 유중혁. 그리고 사태를 정확히 모르는 이지혜뿐이었다. 
 
“······왜 다들 울고 그래? 나까지 서럽게.” 
 
이마가 차갑다 싶더니, 흐릿해진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눈도, 비도 되지 못한 어떤 것. 
그 차가운 감각이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우습게도 인간이 가장 살아 있음을 느끼는 때는, 바로 다른 것의 죽음을 확인했을 때였다. 
 
“아······.” 
 
긴장이 풀린 서울 돔의 사람들이 곳곳에서 주저앉았다. 
웃거나, 울거나, 분노하는 사람들. 
성좌들이 여기저기서 후원금을 쏴댔다. 제각기 반응들은 달랐지만, 적어도 그들 모두가 동의하는 한 가지는 명백했다. 
 
‘범람의 재앙’ 신유승은 죽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얼이 빠진 중급 도깨비가 그곳에 있었다.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비형이 입을 열었다. 
 
[중급 도깨비. 시나리오 종료하시죠.] 
[어떻게, 이런······.] 
[하지 않으시면 제가 끝내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메시지가 들려왔다. 
 
[다섯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종료되었습니다.] 
[보상 정산이 준비 중입니다.] 
 
마침내 시나리오마저 그녀의 죽음을 선언했다. 
미래의 신유승은 죽고, 재앙은 끝났다. 
이것이 바로 다섯 번째 시나리오의 결말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다. 
 
. 
. 
. 
 
정확히는, 나를 제외한 모두가 그렇게 믿어야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은 완벽한 연극이어야만 했다. 
바꿀 수 없는 것이 바꿀 수 없는 것이라 선언하는 연극. 
성좌들을 속이고 시나리오를 속일, 처절한 비극. 
 
이것만이, 41회차의 신유승이 빌어먹을 시나리오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순간, 곁에 있던 신유승의 손이 불처럼 뜨거워졌다. 
 
“죽일 거야······.” 
 
소녀의 눈이 허공에 떠 있는 중급 도깨비를 보고 있었다. 
 
“저 도깨비, 내가 죽여 버릴 거야.” 
 
달려가려는 그녀를 제지하려는 찰나,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파츠츠츠츳! 
 
하늘이 뭉개지며 포탈이 열리고 있었다. 포탈에서 넘어온 것은 하얀 쌍둥이 도깨비였다. 백색 갑주를 입은 두 도깨비를 발견한 주변의 하급 도깨비들이 일제히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그럴 법도 했다. 
 
저 도깨비들은, 모든 도깨비가 죽을 때까지 만나지 않길 바라는 놈들이니까. 관리국. 그 중에서도 시나리오의 ‘개연성’을 담당하는 [집행부]의 도깨비들. 무시무시한 기세를 풍기는 녀석들은 중급 도깨비에게 다가가, 그대로 놈의 신병을 구속했다. 
 
[······집행부. 이게 무슨 짓입니까?] 
 
순식간에 영체를 제압당한 중급 도깨비를 향해, 집행부의 도깨비가 말했다. 
 
[중급 도깨비 ‘바울’. 너를 스타 스트림 규정 위반으로 긴급 구속한다.]
 
 
 
 
 
< Episode 21. 바꿀 수 없는 것 (6) > 끝

< Episode 22. 세 가지 약속 (1) >
 
 
 
 
 
Episode 22. 세 가지 약속 
 
 
 
 
집행부의 긴급 구속. 
‘멸살법’에 따르면, 그러한 긴급 구속 조치가 시행되는 것은 도깨비가 시나리오 개연성에 크게 위배 되는 행동을 저질렀을 때뿐이다. 
 
[중급 도깨비 바울. 지금부터 네 신병은 ‘집행부’에 인도될 것이다. 너는 관할 시나리오에 대해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메인 시나리오에 관한 모든 진행권을 박탈당할 것이다.] 
 
무기질적으로 이어지는 그 대사에, 중급 도깨비 바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너는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시나리오의 공적치를 잃고 ‘하급 도깨비’로 강등될 것이며, 그리고 징벌의 죗값으로······.] 
[가, 강등?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보십시오!] 
 
중급 도깨비 바울이 다급히 그 말을 제지했다. 
그는 억울한 눈빛으로 나와 주변의 도깨비들을 쓸어 보더니 외쳤다. 
 
[갑자기 ‘강등 조치’라니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알려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집행부의 또 다른 도깨비가 물었다. 그 위엄에 바울은 잠시 주춤했지만, 다시 목소리를 냈다. 
 
[모르겠습니다. 대체 뭐가 문젭니까?] 
 
심지어, 놈은 뻔뻔하게 나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성좌분들을 보십시오. 다들 즐거워하시지 않습니까? 저는 훌륭하게 시나리오를 끝냈다고 생각합니다만?] 
 
자신만만한 바울의 말에, 도깨비 집행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개연성에 문제는 없습니다. 저는 성좌님들의 동의를 얻어 시나리오 강제 집행에 들어갔고, 말씀드렸다시피 성좌님들도······.] 
[······이야기꾼 새끼들은 이런 게 문제야. 그놈의 성좌 타령.] 
 
모든 도깨비가 ‘성좌’를 존중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집행부’의 도깨비들중에는, 한때 ‘성좌’였던 존재들도 있는 까닭이다. 
성좌였으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신의 격을 잃고 어쩔 수 없이 도깨비로 살아가게 된 존재들. 그들이 바로 집행부의 도깨비들이다. 
자신의 고객들이 모욕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바울이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까불지 마라, 바울.] 
[아무리 집행자라 해도, 제 고객들에 대한 모욕은 참을 수 없습니다.] 
 
기세를 탔다고 생각했는지, 바울이 말을 계속했다. 
 
[집행자들께서 오신 이유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시나리오 강제 집행권’을 사용했기 때문이겠죠.] 
[‘시나리오 강제 집행권’은 성좌들이 시나리오의 개연성을 함께 감당해 줄 때만 쓸 수 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개연성 후폭풍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성좌님들의 만족도만 높다면 그 부분은······.] 
[만족도? 바울, 네놈의 꼴을 보고 말해라.] 
 
그 말에 바울이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파츠츠츠. 
얼굴이 창백해진 바울이 고개를 들었다. 

[이, 이건······?] 
 
주변 공간에 일렁이는 푸른색 스파크. 
개연성 후폭풍의 전조였다. 
 
[어째서 개연성 후폭풍이······?] 
 
개연성 후폭풍은 흐름을 거스른 징벌. 
지금 세계의 개연성은 바울의 존재를 지우기를 원하고 있었다. 
집행자 도깨비가 뾰족한 송곳니를 세우며 웃었다. 
 
[집행권은 도깨비의 권한 중 가장 큰 개연성을 요구하는 힘이다. 그런 권한을, 이런 조잡한 억지 전개에 사용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나?]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어!] 
[바울. 네놈은 ‘집행권’을 사용하지 않고도 시나리오를 끝낼 기회가 있었다. 그것도,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참신한 전개였지. 왜 그걸 막은 것이냐? 네놈의 만행으로, 서울 돔의 관리국에 비상이 떨어졌단 말이다.] 
[그, 그건······ 아니, 잠깐만요. 저는 분명 성좌님들의 의견에 따라 집행권을 발동했단 말입니다!] 
 
다급해진 바울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 성좌님들! 아까 제 전개에 동의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좌들은 대답이 없었다. 
 
[······성좌님들?] 
 
그토록 많았던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가, 그 순간만큼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이, 이럴 수가······. 대체 왜?] 
 
녀석의 전개를 지지하던 성좌들이, 모두 한반도의 채널에서 떠난 것이었다. 
집행부가 눈살을 찌푸렸다. 
 
[멍청한 놈이군. 성좌들이 사라진 줄도 몰랐던 거냐?] 
 
놈을 선동하고, 나를 죽이기를 원했던 많은 성좌들은 시나리오의 결말이 ‘신파’로 바뀌는 순간 한반도의 채널에서 대거 이탈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원하지 않는 전개가 등장했는데, 그걸 계속 보고 있으면 이상한 일이니까. 
실제로 비형의 채널 역시 삼분의 일에 가까운 구독좌를 잃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남은 존재들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중급 도깨비 ‘바울’을 노려봅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중급 도깨비 ‘바울’을 보며 킬킬 웃습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중급 도깨비 ‘바울’을 조롱합니다.] 
······. 
 
모두, 중급 도깨비의 전개에 동의하지 않았던 성좌들이었다. 
 
[아, 안돼. 이대로 소멸할 수는 없습니다. 집행자님들!] 
[걱정마라. 네놈은 소멸하지 않는다.] 
[그, 그렇다는 말씀은······?] 
 
잠깐이지만 바울의 표정에 희망의 빛이 스쳤다. 
집행자 도깨비는 그 빛을 무참히 꺼버리듯 말을 이었다. 
 
[너는 소멸보다 더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네놈 때문에 우리 관리국이 막대한 개연성의 빚을 떠안게 되었으니까.] 
 
집행자 도깨비가 바울의 신병에 [구속 코드]를 입력했다. 
그러자 영체였던 도깨비 바울의 본체가 강제로 세계에 소환되었다. 중급 도깨비 바울이 벌벌 떨며 반항을 시작했다. 
방송용 목소리를 잃은 녀석의 육성이 터져 나왔다. 
 
“이, 이건 음모입니다. 이렇게 될 리가 없어!” 
 
녀석의 곁에 있던 비형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러게, 시나리오를 빨리 끝내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비형!” 
 
결국 바울이 폭발했다. 구속 코드를 붙든 채 허우적거리던 바울이 비형을 손가락질했다. 
 
“집행자시여! 저놈도 체포하십시오. 저놈의 채널이 스타 스트림의 규칙을 어겼다는 증거를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도 함께 갈 것이다.] 
 
그 말에 바울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사람 말도 도깨비 말도 끝까지 들어봐야 아는 법이다. 
 
[우릴 호출한 이가 바로 도깨비 비형이니까.] 
 
“그게 무슨······ 설마?” 
 
집행자 도깨비가 말했다. 
 
[네놈을 신고한 도깨비가 바로 비형이다.] 
 
붉으락푸르락하는 바울을 향해, 비형이 짧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집행자 도깨비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도깨비 비형. 아주 훌륭한 도깨비지. 거적 하나만 걸친 저 겸손함을 봐라. 모든 것을 도외시하고 시나리오에 몰두하는 저런 청렴함이야 말로, 이야기꾼의 효시인 것이다. 도깨비 주제에 명품 정장이나 입고 있는 네놈과는 아주 다르지.] 
 
그 말에 비형이 쑥스러운 표정을 했다. 
녀석도 몰랐겠지. 자신의 가난함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아, 아닙니다! 비형 저놈은 그런 녀석이······ !” 
 
[닥쳐라.] 
 
구속 코드에 묶인 바울이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정색한 집행자 도깨비가 말을 이었다. 
 
[네놈은 앞서 두 번의 징계를 받았지. 이번이, 네놈의 세 번째다. 세 번째의 징벌이 무엇인지, 네놈이라면 잘 알고 있겠지?] 
 
“이건,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내 상관께서 이걸 허락하실 것 같습니까? 당신들, 지금 실수하는 겁니다. 지금 나를 건드리면······.” 
 
[헛소리는 관리국에 가서 마저 듣도록 하지.] 
 
허공에서 빛나는 포탈이 열렸다. 
마침내 중급 도깨비 놈과도 작별의 때가 다가온 것이다. 
아마 이제, 앞으로의 시나리오에서 놈을 볼 날은 없겠지. 
이글거리는 놈의 눈빛이 내 쪽을 쏘아보았다. 
그 눈과 마주한 순간, 내 안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감정의 고조로 인해 ‘제4의 벽’이 흔들립니다.] 
 
재가 되어 흩날리던 미래의 신유승. 
만약 중급 도깨비만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구원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녀의 회차로는 영원히 돌아가지 못했겠지만, 이 세계를 새로운 회차로 삼아 변해갈 세계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중급 도깨비는, 그 마지막 가능성조차 짓밟아버렸다. 
지금 내가 입을 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잠깐만, 기다려.” 
 
놈은 죽음에 준하는 형벌을 받겠지만,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내 말에 깜짝 놀란 일행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 우리를 부른 건가?] 
 
놀라기도 하겠지. 
일개 화신이 집행부의 도깨비들을 멈춰 세울 줄은 몰랐을 테니까.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집행자 도깨비가 입을 열었다. 
 
[그렇군. 네가 그 ‘김독자’라는 화신이로군. 그렇지?] 
 
다른 도깨비가 물었다. 
 
[아는 놈이냐?] 
[최근 이 근방에서 유명한 화신이다. 반도 내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인데, 아직까지 배후성 계약을 안 했다더군.] 
[호오······?] 
 
멋대로 떠드는 녀석들을 보며, 나는 곧장 [도깨비 통신]으로 비형에게 말을 걸었다. 
 
‘비형. 10만 코인을 주겠다.’ 
 
―뭐······? 
 
집행자 도깨비들을 따라가던 비형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를 [도깨비 보따리]의 플래티넘 멤버로 승급시켜.’ 
 
―아니, 갑자기 왜? 
 
‘잔말 말고.’ 
 
―제기랄······. 
 
다가오는 집행자들을 보며, 나는 비형을 재촉했다. 한숨을 쉰 비형이 허공에 뭔가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100000코인을 소모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도깨비 보따리’의 플래티넘 멤버가 되었습니다!] 
 
본래는 화려한 축포와 함께 승급 이펙트가 있었지만, 나는 비형에게 부탁해 그것들을 생략했다. 
겨우 5000코인으로 승급이 가능하던 [골드 멤버]와는 다르게, [플래티넘 멤버]부터는 대우 자체가 달라진다. 
 
[그래, 화신 김독자. 왜 우릴 부른 거지?] 
 
아직 내 승급 여부를 모르는 집행자들이 내게 물었다. 다른 도깨비들과는 달리 덩치가 산만한 녀석들이라, 마주한 것만으로 긴장이 되었다. 
지금은 격을 잃고 심하게 퇴락했지만, 이 녀석들 중에는 본래 위인급 성좌였던 녀석들도 있으니 무리는 아니다. 
나는 가볍게 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도깨비 독대(獨對)’를 요청한다.” 
 
[뭐?] 
 
내 말에 당황한 집행자 도깨비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내 피식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독대’는 플래티넘 이상의 멤버만이 요구할 수 있는······. 설마?] 
 
“그 설마가 맞아. 확인해 보든가.” 
 
그 말에, 두 도깨비가 다시 한 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시스템을 조작해 몇 가지 사항을 확인하더니, 이내 감탄을 터뜨렸다. 
 
[정말이군.] 
[대체 어떻게 화신이 플래티넘의 멤버로······?] 
 
“이제, 자격은 충분하겠지?” 
 
잠시 망설이던 집행자 도깨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어떤 도깨비와 ‘독대’를 원하는가? 플래티넘의 자격으로는 준 상급 도깨비까지 독대가 가능하며, 약속 일정은······.] 
 
“잡을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녀석은 지금 너희들이 데리고 있으니까.” 
 
나는 손가락으로 내가 원하는 도깨비를 가리켰다. 
 
“나는 중급 도깨비 ‘바울’과의 독대를 원한다.”
 
 
 
 
 
< Episode 22. 세 가지 약속 (1) > 끝

< Episode 22. 세 가지 약속 (2) >
 
 
 
 
 
그 말에, 집행부의 도깨비들이 다시 서로를 돌아보았다. 
얼마간 그러고 있었을까. 두 도깨비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큭. 크하하하핫!] 
[재미있군. 설마······.] 
 
눈치 빠른 집행자들은 뭔가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바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죄수 도깨비 ‘바울’과의 독대를 허락한다.] 
[자유 독대 시간은 20분이다.] 
 
재미난 볼거리라도 생겼다는 듯, 집행부는 순순히 내 요청을 허락했다. 
이들이라면 그럴 줄 알았다. 
본래 ‘집행부’는 다른 스트리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이야기꾼’보다는 ‘구독좌’에 더 가까운 존재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와 바울의 주변에 작고 투명한 돔이 생겨났다. 
본래 ‘독대’는 성좌와 도깨비가 비밀스레 접촉하기 위한 공간. 
 
[중급 도깨비 ‘바울’과의 독대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용도라는 것은 사용자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법이다. 
돔의 바깥에서, 비형이 집행자들에게 뭐라 말을 거는 모습이 보였다. 
졸지에 나와 단둘이 갇힌 바울이 이를 갈며 적의를 드러냈다.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한 겁니까? 약이라도 올리고 싶은 모양이죠?” 
 
녀석의 신체에는 여전히 집행자 도깨비들이 씌운 [구속 코드]가 일렁이고 있었다. 저 코드가 있는 한, 바울은 도깨비의 권한은 물론이고 본신의 힘을 전혀 사용할 수 없다. 
즉,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놈은 완전히 무력한 상태라는 뜻이다. 
 
“허세 부리지 마. 네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는 잘 아니까.” 
 
바울이 주춤거리며 돔의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하지만 녀석의 입가에는, 여전히 나를 깔보는 미소가 붙어 있었다. 
 
“하하, 그렇군. 무슨 천박한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군요. 그 노예의 복수를 하고 싶은 모양이죠?” 
“······.” 
“우습군요. 천박한 인간의 욕망 따위 모를 줄 알았습니까?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시죠. 어떻게 ‘독대’를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서로의 목숨을 해할 수 없는 장소. 당신이 아무리 발악해 봤자······!” 
 
나는 그대로 놈에게 달려가, 있는 힘껏 놈의 면상에 주먹을 처박았다. 
푸른 핏줄기가 놈의 코에서 터져 나왔고, 상황파악을 못하던 녀석이 뒤늦게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가 말했다. 
 
“죽이진 못해도, 때릴 수는 있어.” 
“끄어어어억! 네놈이 감히······!” 
“그래, 이제 본성이 나오네. 안 그래도 그 역겨운 존댓말 듣기 싫었는데.” 
“크흑, 크허허헉······.” 
“이런 고통 처음 느껴 보지? 도깨비로 살면서, 한 번도 이렇게 맞아본 적 없을 거 아냐.” 
“크, 크흣. 크흐흣······.” 
 
피를 쏟으면서도, 바울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네, 네놈은 지금 실수한 거다. 이, 이 공간에는, 네놈처럼 ‘독대’를 악용할 경우를 대비해 특별한 규칙이 걸려 있으니까.”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가 들려왔다. 
 
[당신은 ‘독대 공간’ 안에서 도깨비에게 상해를 입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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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란 놈들,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녀석들이다. 
혹시나 꼭지가 돌아 덤벼들 성좌들을 대비해 이딴 패널티까지 마련해두다니. 코인독이 올라도 어지간히 오른 거지. 
하지만 패널티를 알고 있었던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바울이 피를 닦으며 웃었다. 
 
“어리석은 인간. 분노 때문에 파멸을 자초하는구나. 그래, 얼마든지 때려봐라. 고작 화신인 네놈이 가진 코인으로는······.” 
“내가 얼마나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순간, 바울이 입을 다물었다. 
 
“이상하지 않냐? 일개 화신인 내가 어떻게 ‘플래티넘 멤버’가 될 수 있었는지.” 
 
나는 흔들리는 놈의 눈빛을 보며, 씩 웃어주었다. 
 
“나 코인 많아. 네놈 덕분에 엄청 벌었거든.” 
 
희게 질려가는 바울을 향해, 조용히 주먹을 꺾었다. 
그동안 있었던 빌어먹을 시나리오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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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어가던 신유승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참고로 내가 그녀에게 전한 말들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저 도깨비 새끼, 꼭 죽도록 패줄게. 
 
그러니, 이것은 내가 지킬 첫 번째 약속이다. 
 
뻐어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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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날린 주먹에, 녀석의 코뼈가 부서졌다. 
이것은 누구의 몫이다라든가,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뻐어어억! 
 
애초에 이것으로는 누구의 몫도 될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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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아아악! 하, 하찮은 인간이, 감히······!” 
 
뻐어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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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내게 이런 짓을 하고 무사할 줄······!” 
 
뻐어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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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다! 반드시, 반드시 네놈을······!” 

뻐어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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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잠깐! 잠깐만! 멈추······.” 
 
두려움에 질린 녀석이 몸을 웅크린 순간, 나는 처음으로 주먹을 멈췄다. 한순간 녀석의 눈빛에 희망이 깃들었다. 
 
“그, 그래. 잘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이런 짓을 해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황급히 존댓말을 일삼는 놈을 보며, 나는 물었다. 
 
“너는 멈췄어?” 
“뭣······?” 
“유승이가 그만두라고 했을 때, 멈췄냐고.” 
 
나는 가만히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한 번 보고, 땅을 한 번 보고. 마지막에는 하늘을 보았다. 그곳에, 자신을 이렇게 만든 원망의 대상이 있기라도 한 양. 
 
“이, 이런 짓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런다고 죽은 네놈의 동료가 살아 돌아오지는 않아!” 
 
죽은 동료가 살아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 말은 맞다. 
하지만. 
 
“의미는 있어.” 
 
나는 뿔을 떠는 녀석을 향해, 다시 주먹을 들었다. 
 
“만약 내가 죽었다면. 신유승도 이렇게 했을 거야.” 
 
뻐어어억! 
 
살점이 거칠게 튀며, 놈의 송곳니가 튀어나와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현성도 그랬을 거고. 유상아도, 이길영도 그랬을 거야.” 
 
놈의 복부에 박힌 내 주먹이 녀석의 내장을 터뜨렸다. 
 
“그리고 아마······ 유중혁 그 자식도······.” 
 
돔 밖의 동료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붉어진 눈으로 주먹을 움켜쥔 신유승. 이지혜와 이길영이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현성은 진지한 얼굴로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고, 유상아는 입술을 꼭 깨문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유중혁을 바라보다가, 다시 바울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 나는 시나리오 바깥의 존재다! 이런 짓으로는 코인을 벌 수 없어! 너한테 아무런 이득도 안 된다고!” 
 
코인······. 
그래, 너희 도깨비들은 결국 그런 생각밖엔 하지 못하지. 
어떤 이야기는 코인이 되고. 
어떤 이야기는 코인이 안 되고. 
 
“그럴지도 모르지.” 
 
어떤 성좌도 현상금 시나리오를 걸지 않았고, 어떤 서브 시나리오도 놈을 해치우라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행동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누구도, 내게 이것을 시키지 않았으니까.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으니까 하는 거야.” 
“뭐, 뭣?” 
 
세계의 멸망이 시작된 이후부터, 코인은 모든 인간들의 행동 원리가 되었다. 
성좌들이 코인을 주니까 움직이고, 코인을 주지 않으니까 움직이지 않고. 
하지만 인간은 종종,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움직일 때가 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인간은 원래 이런 걸로 삶의 의미를 찾는 동물이거든.” 
“무, 무슨······ 끄아아악!” 
 
나는 다시 주먹을 들어 녀석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뻐어어억! 
 
이어진 주먹질이 놈의 면상을, 늑골을, 관절을, 하나씩 섬세하게 으스러뜨렸다. 
죽을 걱정이 없었기 때문에, 힘의 조절은 없었다. 
한 방 한 방이 최선의 타격. 
놈의 거죽이 터지고, 뼈가 으깨질 때마다 내 안 깊은 곳에서도 뭔가가 터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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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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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이렇게 때려도, 이런 것으로는 신유승의 죽음에는 약간의 위안도 될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죽은 신유승은, 이 광경을 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주먹을 움직였다. 
두들겨 패고, 또 두들겨 팼다. 
 
뻐어어억! 
 
마치 유중혁이 그랬듯이. 
아무도 놈의 대의를 알아주지 않아도, 마지막 순간까지 녀석이 회귀를 반복했던 것처럼. 
 
[패널티로 500코인이 소모되었습니다.] 
 
이윽고 허공에서 성좌들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여태껏 보지 못했던 전개에 흥분합니다.] 
[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잠시 주먹질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이야기마저, 성좌들에겐 하나의 시나리오가 된다. 
 
“이번엔 연기가 아닙니다.” 
 
[후원받은 500코인을 반환하였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크게 당황합니다.] 
 
서비스라고 생각해도 좋다.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행동에 관심을 표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행동에 감격합니다.] 
 
나는 다시 주먹질을 시작했다. 
도깨비의 가죽이 터지는 소리와, 간헐적인 신음만이 울려 퍼졌다. 
성좌들은 묵묵히 내가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누구도 코인을 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끔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으, 으으어······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 살려주십쇼! 제, 제발! 제발!” 
 
견디지 못한 바울이 곤죽이 된 몸을 이끌고 돔의 가장자리를 두들겼다. 
돔의 벽이 허망하게 울렸지만, 집행부는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내 기행에 반기기까지 하는 눈치였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은 이런 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저런 식으로도 코인 벌이가 되는군.」 
「망할 스트리머 새끼들.」 
 
집행부의 도깨비들은 스트리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형(異形)의 존재에서 도깨비로 진화한 집행자들은, 싸움은 잘 하지만 시나리오를 끌어갈 재능은 없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울의 몸은 완전히 넝마가 되었다. 나는 피떡이 된 녀석의 멱살을 붙잡았다. 
이쯤 됐으면, 슬슬 원하는 걸 물어봐도 되겠지. 
 
“신유승의 영혼은 지금 어디 있지?” 
 
 
* 
 
 
시나리오의 부속으로 죽은 영혼은, 죽어서도 계약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그 계약 자체가 소멸해버린 경우는 다르다. 
중급 도깨비 바울이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수십 대를 더 얻어맞은 뒤였다. 
 
[그······, 그건. 나, 나도 모릅니다. 다, 당신이 대천사들의 힘을 빌리는 바람에······, 그, 그년과 우리의 계약이 소멸했으니······.] 
 
역시 그랬군. 
도깨비들은 악마에게 ‘비스트 로드 신유승’을 넘겨받았고, 이양 과정에서 계약의 끈은 악마들의 힘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끈은, 우리엘의 [지옥염화]로 모조리 불타버렸다. 
즉, 신유승의 영혼은 지금 고정쇠를 잃고 세계를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다, 당신은. 절대로 동료를, 되찾을, 수, 없, 다······ 그년의 영혼은, 이제 곧, 세계선의, 미궁, 속으로······.]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바울은 쓰러졌다. 
 
[‘도깨비 독대’가 종료되었습니다.] 
 
투명한 돔이 사라졌고, 건들대며 다가온 집행부가 휘파람을 불었다. 
 
[이거, 징계 회부가 되기도 전에 끔찍한 꼴을 당했군.] 
 
그들은 나를 흘끔 바라보더니,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멀어졌다. 황급히 집행부를 따라가는 비형을 보며, 나는 물었다. 
 
‘뒷돈은 줬냐?’ 
 
―당연하지. 근데 너 코인 너무 많이 쓴 거 아냐? 
 
‘아직 많이 남았어.’ 
 
바울은 정확히 124대를 맞고 기절했다. 
 
[보유 코인 : 143,902C] 
 
비형이 한숨을 쉬며 나를 일별했다. 
 
―나 관리국 들어가면 당분간 통신은 불가능할 거야. 채널은 열어 놓을 테니까, 그동안 사고 치지 말고 있어. 제발. 
 
신신당부하는 비형을 보며, 나는 속으로 잘 됐다고 생각했다. 녀석이 없으면, 지금부터 내가 할 일에 시비를 거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시나리오 오류로 인해 추가 보상 정산이 지연됩니다.] 
 
메인 시나리오의 관리자가 완전히 자리를 비웠으니, 당분간 시나리오 전개는 조금 정체될 것이다. 그래 봤자 하루 이틀이겠지만, 내겐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는 포탈 너머로 사라지는 도깨비들을 올려다보며, 신유승과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걱정 마. 너는 죽지 않을 거야. 
―무슨 말이야? 
―네가 부활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 나도 두 번 해봤는데, 생각보다 할 만하거든. 
 
사실 이 방법은, 마지막까지 쓰지 않으려고 했었다. 
결국 이 설계대로라면 그녀는 ‘한 번’ 죽어야만 하니까. 
그리고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도 없다.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 하지만 기다려준다면, 네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내가 반드시 너를 되살려 놓겠어. 
 
이대로 신유승의 영혼이 ‘세계선의 미궁’에 빠져버린다면, 그녀를 다시 살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영혼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반드시 살아날 수 있다. 
문제는 그 영혼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나는 유상아를 돌아보았다. 
 
“유상아 씨.” 
“네.” 
 
신유승이 다른 세계선의 영혼이라 해도, 결국 모든 영혼은 ‘저승’을 경유해 이 세계를 벗어난다. 
나는 저승과 관계된 몇몇 성좌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곳에 있거나, 지금의 나와는 끈이 닿을 수 없을 정도로 격이 높았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비벼볼 수 있는 녀석도 하나 있었다. 
 
“혹시 ‘버려진 미로의 연인’을 불러줄 수 있겠습니까?” 
 
내 말에, 유상아는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녀의 주변에 희미한 스파크가 튀었다. 
일전의 개연성 소모로 인해 직접 강림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아리아드네가 유상아에게 희미하게 깃들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올림포스. 너희들과 거래를 하고 싶다.” 
 
주변에서 튀는 스파크가 거칠어졌다. 
하긴, 마지막이 만남이 안 좋았으니 그럴 법도 하지.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양보해야만 한다. 
나는 짧게 숨을 들이켠 후,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나를 너희들의 명왕(冥王)과 만나게 해줘.” 
 
이제, 두 번째 약속을 지킬 차례다.
 
 
 
 
 
< Episode 22. 세 가지 약속 (2) > 끝

< Episode 22. 세 가지 약속 (3) >
 
 
 
 
 
올림포스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는 유상아의 표정에서 바로 알 수 있었다. 붉어졌다가, 창백해졌다가, 급기야는 새파래지는 유상아의 낯빛을 본 후에야, 나는 너무 성급하게 이야기를 꺼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독자 씨.” 
 
대체 무슨 쌍욕을 들은 것인지, 유상아는 나를 보며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괜스레 내가 미안해진다. 
 
“배후성들이 뭐라고 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유상아의 몸에서 파츠츠 전기가 튀었다. 아리아드네가 어지간히 날뛰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 지난번 삼문답 교환의 여파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이윽고 스파크가 잠잠해졌고, 유상아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부유한 밤의 아버지’는 자기가 함부로 데려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서······.” 
 
부유한 밤의 아버지. 
그것은 올림포스의 3주신인 ‘명왕 하데스’의 수식언이었다. 
올림포스의 3주신 중 하나지만, 명계에 상주하기에 성운의 대성좌인 ‘올림포스 12신’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성좌. 
하긴, 고작해야 위인급 성좌인 아리아드네가 접촉하기에 하데스는 너무 격이 높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나는 일단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유상아 씨.” 
“그런데 독자 씨, 혹시······.” 
 
똑똑한 유상아는,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하데스라는 사실을 이미 알았을 것이다. 
내가 하데스를 찾는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겠지. 
아내인 에우리디케를 되살리기 위해 명계를 찾아갔던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신화니까. 
 
“······가능한 건가요?”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죽은 사람의 부활은 불가능하다. 
나야 ‘불살의 왕’의 효과로 개연성 보정을 받고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이런 보정이 없다. 신유승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무분별한 부활이 가능했다면, 유중혁은 회귀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어떻게든, 영혼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지금은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해요.” 
 
성좌들이 죄다 쳐다보고 있는 상황에서 줄줄이 미래 계획을 읊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 사태로 나를 싫어하는 성좌들도 늘어난 상황이니까. 
 
수는 던져 놨으니, 미끼는 저쪽에서 물 것이다. 
지금 중요한 건 인내심이다. 
 
나는 주변의 일행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정리를 좀 할까요?” 
 
기다렸다는 듯, 일행들이 하나둘 이쪽으로 다가왔다. 신유승을 힐끔거리는 이길영과, 이현성을 부축한 정희원, 살짝 뾰로통한 얼굴로 동떨어진 곳에 서 있던 이지혜. 
허공에서 하급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시로 보상 정산 진행을 맡게 된 도깨비 ‘영기’입니다.] 
 
신참 도깨비인 듯, 녀석은 살짝 경직된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다섯 번째 시나리오의 추가 보상을 정산하겠습니다.] 
 
아마 윗줄의 도깨비들이 모두 사라져서, 짬처리를 맡은 모양이었다. 
 
[‘엘라인 숲의 정기’를 받았습니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작은 열매를, 사람들은 하나씩 쥐었다. 
 
[방금 지급해 드린 것은 ‘스타 스트림’의 가장 대중적인 회복약입니다. 설령 중상을 입었더라도 이것을 먹고 잠들면 빠른 속도로 회복이 가능하니, 다들 드시고 푹 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공손한 도깨비는 처음이라, 조금 거부감이 들 정도였다. 도깨비는 나와 몇몇 사람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주요 공헌자들에 대한 추가 보상은 금일 저녁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모두 수고하셨고, 다음 시나리오도 힘내시기 바랍니다.] 
 
목소리가 사라지고, 나는 열매를 쥔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모르는 등장인물들은 또 죽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지금도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일행들은 그 사실에 감사해야 하는지, 아니면 슬퍼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럴 때는 누군가가 총대를 메는 수밖에 없다. 
나는 그들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두, 고생했습니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순간은, 결국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순간으로 남을 뿐이다. 
슬픈 건 슬픈 거고, 기쁜 건 기쁜 거다. 
적어도 뭔가를 결정한다면, 그 순간은 의미로 남는다. 
 
“정말로 고생했어요.” 
 
아무것도 아닌 내 말이 하나의 보상이라도 되는 양, 일행들의 표정에 서서히 안도감이 번졌다.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었다. 
그제야 입꼬리를 실룩대기 시작한 이지혜가 먼저 말문을 텄다. 
 
“······근데 아까 진짜 쩔더라, 아저씨. 아깐 우리 사부보다 쬐끔 더 멋있던데? 인정.” 
 
그 말을 시작으로, 이현성과 정희원도 입을 열었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내 속이 다 시원하던데요?” 
 
······이 양반들, 설마 그 얘길 하고 싶어서 참았던 건가? 
시끌벅적 떠들기 시작하는 일행들을 보며 쓴웃음이 나왔다. 
초반 시나리오의 가장 큰 위기는 넘겼고, 서울은 지켜졌다. 
적어도 당분간, 몇 개의 시나리오가 지나가기 전까지 서울은 위협받지 않을 것이다. 
 
“독자 씨도 고생하셨어요.” 
 
곁에서 나를 물끄러미 보던 유상아가 환히 미소했다. 
어쩌면,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보상인지도 모르겠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부딪친다 싶더니, 신유승이 내 허리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이길영은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딱히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신유승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그래, 이것도. 
 
 * 
 
 
저녁이 되어, 주요 공헌자들에 대한 추가 정산이 시작되었다. 
추가 정산을 받을 수 있는 주요 공헌자는 총 셋. 
나와 정희원, 그리고 유중혁이었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의 추가 보상은 ‘B급 스킬’입니다.] 
 
그 꼴을 당하고 고작 B급 스킬 하나를 보상으로 받다니, 누가 들었다면 밸런스가 안 맞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밸런스는 충분히 맞다. 
알파벳 등급이 낮다고 해서 구린 스킬만 있는 건 아니니까. 
무엇보다, 이번 시나리오 보상은 ‘자유 선택’의 형태로 지급된다. 
즉, 나는 원하는 B급 스킬 중 하나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B급 중에도 입수 난이도가 높은 스킬은 있고, 나는 이참에 그걸 얻어야 했다. 
 
[B급 스킬 목록을 열람하시겠습니까?] 
 
수만 개가 넘는 스킬들의 목록. 
나는 처음부터 생각해둔 스킬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 장애를 피할 수 있었다. 
 
[B급 스킬 ‘거짓 간파’를 보상으로 받으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희미한 광채가 퍼지며 메시지가 추가되었다. 
 
[전용 스킬, ‘거짓 간파’가 스킬 목록에 추가되었습니다.] 
 
하, 이걸 드디어 얻었다. 
그간 [거짓 간파]가 없어서 답답했던 걸 생각하면, 정말이지······. 
돌아보니, 정희원도 뭔가를 열심히 고르는 중이었다. 
나는 곁에 있던 이지혜를 향해 물었다. 
 
“야, 유중혁 어디 갔는지 알아?” 
“아, 아까 설화 언니 데리고 어디 가던데.” 
 
······이설화랑?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만하다는 듯, 이지혜가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에휴, 아저씨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 
“진짜야. 내가 줄곧 옆에서 지켜봤다니깐. 두 사람 완전 남이야. 확실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2회차는 확실한데, 3회차의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던가 안 되었던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생각보다 유중혁은 고자 루트를 걸은 적이 많았다. 
그럼 대체 어딜 간 거지? 여동생 데리러 갔나? 
 
[여섯 번째 시나리오는 사흘 뒤 시작됩니다.] 
 
뒤이어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나는 어쩐지 유중혁이 뭘 하러 간 건지 알 것 같았다. 
여섯 번째 시나리오에서는, 드디어 다른 돔의 화신들과 조우하게 된다. 
한순간도 쉴 줄 모르는 녀석이니까, 아마 지난 회차에서 입수하지 못했던 몇몇 히든 스킬과 아이템들을 입수하러 갔겠지. 
아직 서울 돔 내에는 히든 시나리오들이 제법 남아있으니까. 
유중혁에게 빼앗기는 게 조금 속이 쓰리긴 했지만, 그래도 애먼 녀석이 스킬을 먹는 것보다는 나았다. 
게다가 남은 시나리오들을 수월하게 깨려면, 녀석은 지금보다도 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아, 맞다. 아까 사부가 아저씨한테 무슨 말 전하라고 했는데.” 
“나한테?” 
 
고개를 끄덕인 이지혜가 갑자기 표정을 굳히더니 자신의 칼자루를 쥐고 근엄한 투로 말했다. 
 
“김독자, 맹세 기간은 끝났다.”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존재 맹세. 
정신이 없다 보니 깜빡 잊고 있었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기 전까지 날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해. 그 정도도 못하면 난 진짜 못 도와줘. 
―맹세한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맹세를 했었지. 
이 자식······ 설마 그 맹세 때문에 지금까지 날 안 죽였던 건가? 
그러고 보니 그때 이상한 말도 했었는데. 
 
―죽이지는 않겠다. 하지만 한 대는 때리겠다. 
 
나도 모르게 목울대로 침이 넘어갔다. 
혹시 지금 자리를 비운 것도 그거랑 관계된 건 아니겠지? 
날 일격에 보내버릴 무지막지한 스킬을 배워 오려고? 
 
“근데······ 둘이 무슨 맹세를 한 건데?” 
“시끄러워.” 
 
그래, 괜히 벌써 쫄 필요 없다. 
무엇보다 난 이제 신유승이 쓰던 [야수왕의 감수성]도 있다. 
그것도 3레벨이나 되는. 
······책갈피로 쓰는 거지만 [바람의 길]도 있고, 게다가 강한 동료들도 있고. 
눈이 마주친 이지혜가 이죽거렸다. 
 
“알겠지만 사부가 뭔 짓 해도 난 안 도와줄 거야, 알지?” 
“너한텐 기대도 안 해.” 
 
대신, 나는 든든한 이현성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와 하는 얘기지만, 신유승의 질문 앞에서 유중혁이 아니라 내 일행이라고 말해줄 때는 정말 감동이었다. 
이현성은 잠시 곤란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 독자 씨.” 
“예.”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유중혁 씨가 조금 무섭습니다.” 
“······아, 괜찮아요. 이해합니다.” 
 
생각해 보니 이현성이 이렇게 강해진 건 유중혁이 끔찍하게 굴렸기 때문이었지. 
빌어먹을. 
하지만 좌절하긴 이르다. 
나한텐 정희원도 있다. 
원작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던, 내 손으로 직접 키운 동료. 
그러자 정희원이 볼을 긁으며 말했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내 배후성이 두 사람 싸움엔 끼어들지 말래요.” 
“······예?” 
“두 사람을 방해하지 말라는데······ 이거 대체 뭔 소리죠?”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갑자기 등골이 섬뜩해졌다. 
저 천사 자식 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엄중한 눈으로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를 감시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흠칫하며 표정을 바꿉니다.] 
 
“독자 씨.” 
 
화들짝 놀라 돌아보자, 유상아가 침착한 미소로 나를 보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중혁 씨도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어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분명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세상 물정 모르는 유상아의 말을 들으며 나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럴 때 한수영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나를 제외하면 유중혁이 어떤 놈인지 아는 사람은 그 녀석뿐이니까. 
뭐, 그 녀석이 있었다고 해도 날 지켜주진 않았겠지만······. 
시나리오도 끝났는데, 지금 뭐하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우리는 잡다한 주변 정리를 끝내고 아이템들을 수거했다. 
 
밤이 깊도록 유중혁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주변 정찰을 나갔던 정희원이 반가운 물건을 가지고 돌아왔다.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게 아직 남아있었습니까?” 
 
정희원이 가져온 것은 6개들이 맥주 페트와 소주병들이었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이럴 때는 한 잔 해야죠. 기념으로.” 
 
우리는 화톳불을 켜고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나는 재빨리 맥주에 손을 가져가는 이지혜의 손등을 쳤다. 
 
“넌 미성년자잖아.” 
“······이제 법도 없는데 무슨 미성년자 타령이야?” 
“넌 애들이랑 사이다 마셔.” 
 
티격태격하는 사이, 술은 빠르게 한 순배를 돌았다. 묘하게 볼이 붉어진 정희원이 술주정을 시작했고, 이현성은 맥주 두어 잔을 마시더니 곰처럼 코를 골았다. 보기보다 술들이 약한 모양이었다. 
 
“기분 조타아······.” 
 
몰래 몇 잔을 마셨는지 얼굴이 발갛게 물든 이지혜마저 풀썩 뒤로 쓰러졌다. 의외로 주당인 유상아는 이미 소주병을 네 병째 까서 홀짝이는 중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조금도 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저 술 세거든요.” 
 
그러고 보면 회식 자리에서 유상아가 한 번도 취한 걸 본 적이 없다. 
 
“······함부로 취하면 곤란하니까요.” 
 
그 말에 담긴 비감이 슬펐다. 회사에는 유상아한테 술을 먹여서 어떻게 해보려는 놈들만 득실거렸으니까. 어쩌면 그녀가 마음 놓고 술을 마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늘은 괜찮겠죠?” 
 
그녀의 얼굴이 평소보다 하얗다는 생각 때문일까,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 그 눈을 피했다. 
하늘에는 고적한 달이 떠 있었고, 오늘만큼은 괴수들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변에는 우리 말고도 술판을 벌이는 그룹들이 주변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잘도 마시는구나 싶었는데, 이런 상황이니까 마실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들, 마시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는 세상이다. 
 
내 술잔 위에 작은 스파크가 튄 것은 그때였다. 
 
파츳, 파츠츳. 
 
놀란 유상아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술을 마시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로 쏟아진 술이, 장난이라도 치듯 바닥에 문자를 그렸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과 대화하기를 원합니다.] 
 
드디어 올림포스가 미끼를 물었다.
 
 
 
 
 
< Episode 22. 세 가지 약속 (3) > 끝

< Episode 22. 세 가지 약속 (4) >
 
 
 
 
 
술과 황홀경의 신. 
올림포스에 그런 수식언을 사용할만한 녀석은 올림포스의 12신 중 하나인 디오니소스뿐이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콧노래를 부릅니다.]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떨어진 술방울들이 어떤 멜로디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은 볼 수 있었다. 술방울들은 생명이라도 가진 것처럼 움직여 수많은 음표들을 바닥에 자아냈다. 
음표들은 나와 유상아의 사이를 반복해서 움직였다. 
그 음표들을 유심히 보던 유상아가 입을 열었다. 
 
“강아지 왈츠에요.” 
“악보도 볼 줄 아십니까?” 
“조금은요.” 
 
유상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갑자기 쇼팽이라니, 무슨 뜻일까요?” 
 
나라고 알 턱이 없다. 애초에 디오니소스가 쇼팽을 안다는 것도 이상했다. 아니지. 원작에 따르면 후대의 음악 문화에 무척 관심이 많은 성좌였으니, 이상한 일은 아닌가. 
음표들은 강아지의 발맞춤처럼 앙증맞은 원을 그리더니, 남은 소주병들을 향해 일제히 화살표를 만들었다. 유상아가 말했다. 
 
“······술을 더 마시라는 것 같은데요?” 
“일단 마셔보죠.” 
 
아무리 봐도 그렇게밖에는 해석이 안 된다. 
 
“유상아 씨는 조금만 드세요. 적어도 한 사람은 제정신이어야 하니까요.” 
 
내가 맛이 가면 일행들을 지킬 사람이 필요하다. 
급한대로 사이다를 마시고 잠든 이길영과 신유승을 깨울 수도 있겠지만, 오늘만큼은 푹 자게 내버려 두고 싶었다. 
 
“독자 씨는 술 잘 못 드세요?” 
“센 편은 아닙니다.” 
 
나는 유상아와 가볍게 잔을 부딪친 후,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었다. 
간만에 들어간 알코올에 속이 후끈했다. 
하지만 음표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더 마시라는 것 같아요.” 
 
나는 연거푸 몇 잔을 더 마셨다. 속에서 열이 올라오더니 금세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음표들의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졌다. 아니, 내가 취해서 활발하게 보이는 걸까. 유상아가 미소지었다. 
 
“그래도 같이 마시니까 좋네요. 조금 적적했는데.” 
 
그렇게 몇 잔을 더 마셨을까. 알딸딸한 취기가 올라오면서 나도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문득 돌아보니 유상아와의 거리가 부쩍 가까워져 있었다. 
분명 아까는 꽤 거리가 떨어져 있었는데······. 
착각일까. 호흡 소리가 거칠었다. 
내 호흡인지, 유상아의 호흡인지 모르겠다. 
유상아의 어깨가 가볍게 내 어깨를 스쳤다. 
 
“독자 씨.” 
“예.” 
 
분명 맨얼굴일 텐데도 잡티 하나 찾아보기 힘든 피부. 
살짝 몽롱해진 유상아가 내게로 천천히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그녀의 얼굴. 
한 쌍씩 짝을 지은 4분음표와 8분음표들이 우리 주변을 맴돌며 격렬한 댄스를 췄다. 어깨에 닿은 보드라운 감촉 때문인지,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거 뭔가 이상한데.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당신의 취기를 누그러뜨립니다.] 
 
메시지와 함께, 갑자기 정신이 확 깨며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래,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리가 없다. 
그 철저한 유상아가 이런 흐트러진 모습이라니. 
이건, ‘멸살법’이니까 가능한 일인 것이다. 
나는 유상아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며 말했다. 
 
“유상아 씨, 정신 바짝 차려요.” 
“네? 아······ 아?” 
 
갑자기 화들짝 놀란 유상아가 눈을 깜빡였다. 
취기에도 변함없던 그녀의 얼굴이 처음으로 발갛게 물들었다. 
 
“제, 제가 뭘······.” 
 
역시, 이건 유상아의 의지가 아니었다. 
나는 바닥을 맴도는 음표들을 향해, 조금 비참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장난은 그만하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합니다만.” 
 
그 순간, 음표들이 동시에 멈춰섰다. 
한밤의 축제가 일시에 멈춰선 듯 불온한 침묵이었다. 
마시던 술들이 일제히 엎어졌고, 바닥에 모인 술방울들이 파츠츠츠, 스파크를 튀었다. 
이윽고 술방울들은 하나의 문자열을 만들었다. 
 
―흥을 깨는 녀석이군. 
 
나는 바닥에 쓰여진 문자에 조금 놀랐다. 
겨우 술방울로 글자 몇 개 쓴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냐고 물을지 모르겠지만, ‘멸살법’의 세계에서 성좌들이 ‘의사’를 전한다는 것은 그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괜히 많은 성좌들이 도깨비의 채널을 이용해 ‘간접 메시지’를 전하는 게 아니다. 
 
애초에 배후성이나 도깨비의 도움 없이 자신의 의사를 지상에 전파하는 것은 성좌들 중에서도 최상급의 존재들이나 가능했고, 또 개연성의 소모도 극심했다. 이 세계의 개연성은 그만큼이나 ‘언어’에 민감하다. 
 
하늘의 ‘그레이트 홀’에서 희미하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계의 신격도 디오니소스의 존재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굳이 화신을 통하지 않고 직접 의사를 전달한 것을 보면, 아마 뒷감당할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과연, 올림포스의 12신쯤 되면 다르다 이건가. 
나는 일부러 도발하듯 입을 열었다. 
 
“그렇게 자신 있으시면 직접 오셔서 이야기하시죠.” 
 
그러자 문자열이 움직였다. 
 
―난 촉수 놈들이 싫어. 
 
곧 죽어도 자기가 진다는 얘긴 안 하는군. 
 
―싸우는 것도 귀찮아. 그리고 내가 직접 내려가면 전부 죽어. 
 
사실 나도 기대는 안 했다. 그리고 정말로 올림포스 12신급의 성좌가 강림하면 서울은 그대로 가루가 되어버릴 것이다. 

―우리 어머니도 아버지한테 그렇게 죽었거든. 
 
그 문장을 본 유상아가 내게 속삭였다. 
 
“······저게 무슨 뜻이죠?” 
“아마 자기 탄생 신화를 얘기하는 걸 겁니다.” 
 
내가 알기로, 디오니소스의 부모는 제우스와 테베의 공주 세멜레다. 
제우스와 세멜레의 사이를 질투하던 헤라는, 어느 날 세멜레의 유모로 분장하여 세멜레를 다음과 같은 말로 부추긴다. 
 
‘제우스님이 가짜일지도 몰라요. 그러니 올림포스에 계실 때의 진짜 모습을 보여달라고 하세요.’ 
 
그 꾐에 넘어간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정말로 그런 부탁을 하게 되고, 얼마 뒤 제우스의 진체(眞體)에서 나온 광채에 맞아 타죽게 된다. 
내 이야기를 듣던 유상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제가 아는 전승이랑은 좀 다른데요? 제가 알기로 저분의 어머니는 테베의 공주가 아니라······.” 
 
유상아의 식견에 나는 조금 놀랐다. 
한국사 1급이 아니라 신화사 1급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물론 그런 자격증은 없지만. 
문자열이 즐겁다는 듯 말을 바꾸었다. 
 
―흐흠. 나에 대해 제법 잘 알고 있는 인간들이구나. 
 
유상아의 말대로, 디오니소스의 탄생 신화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테베의 공주 세멜레가 어머니인 버전.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데스의 부인인 ‘페르세포네’가 어머니인 버전이었다. 
나는 디오니소스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군요. 둘 중 어느 쪽 전승이 진짜입니까?” 
 
―그게 중요한가? 
 
“중요합니다. 제겐 후자여야 할 이유가 있거든요.” 
 
사실, 정희원의 제안대로 술판을 벌인 것은 처음부터 디오니소스를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페르세포네의 아들 디오니소스. 
만약 이쪽 전승이 맞다면, 디오니소스는 높은 확률로 하데스의 부인인 페르세포네와 접선이 가능할 것이다. 
 
―무례한 인간이로군. 
 
문자열을 만들던 술방울들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나는 무례한 인간을 좋아하지. 
 
사실, 전승이 어느 쪽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멸살법’에서도 디오니소스에 대한 이야기는 잠깐 언급되니까. 
 
―예전에도 너처럼 만용을 부리던 인간이 하나 있었다. 리라를 매우 아름답게 연주하던 녀석이었지. 하지만 그놈도 끝이 좋지 않았어. 
 
“저는 다를 겁니다.” 
 
―명계의 입구를 열어줄 수는 있다. ‘부유한 밤의 아버지’는 나를 좋아하지 않지만, 명계의 여신은 내 청을 들어줄 테니까. 하지만 그곳은 매우 위험하고, 네놈이 살아 돌아올 거란 보장은 없다. 
 
“괜찮습니다.” 
 
―좋군. 나는 간절한 인간이 좋아. 
 
너무도 순순히 청을 들어줄 분위기여서, 나는 오히려 긴장했다. 
디오니소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성좌니까. 
 
―명심해라. 너에게 주어진 것은 12시간뿐이다. 그 안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너는 영원히 네가 살던 시나리오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눈앞에 일렁이는 현기증이 심해졌다. 갑작스런 졸음이 찾아왔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지 깨달았다. 
젠장, 이래서 술을 먹인 거였군. 
나는 다급히 말했다. 
 
“유상아 씨, 애들을 깨우세요.” 
 
아마도, 그것이 내 마지막 말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히든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눈을 감는 순간, 술방울이 키득키득 웃는 것 같았다.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너를 마음에 들어하길 바라마. 
 
 
*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의 영혼을 인도합니다.] 
[당신의 몸이 육신의 구속에서 벗어납니다.]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머릿속에서 수많은 색감들이 번져나갔다. 이마에서 지끈거리는 통증이 일었고, 곳곳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자는 누구지?] 
[······흥미롭군.] 
[화신의 영령이 성좌들의 세계에 발을 들였는가.] 
[후회하게 될 것이다.] 
 
수런거리는 음성들. 
아마 올림포스 녀석들이겠지.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시끄럽게 떠들던 목소리들은 음소거라도 한 듯 일순간에 사라졌다. 
 
[당신은 생자(生者)의 영혼으로 명계에 진입하였습니다.] 
[명계의 심판관들이 당신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마지막으로 들려온 메시지와 함께, 수많은 기척들이 동시에 내 주변에서 사라졌다. 세상이 빠르게 한 바퀴 돈다 싶더니, 그대로 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잠시 후, 어딘가에 도달한 느낌이 들었다. 
좀처럼 움직이기가 힘들었지만, 눈을 떴을 때 보일 정경은 대강 짐작이 갔다. 
명계를 이루는 끈적한 공기. 
손끝에 감기는 새카만 모래들. 
아마 나는 하데스가 다스리는 명계의 강가에 가 있을 것이다. 
하데스의 궁전으로 가는 아케론 강이 있을 것이고, 저승의 뱃사공 카론이 날 기다리고 있겠지. 그리고······. 
 
“야! 일어나! 여기서 뭐하는 거야!” 
 
둔탁한 뭔가가 머리를 때린다 싶더니, 새카만 석유 같은 것이 내 몸 위로 쏟아졌다. 나는 숨을 쿨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가 내 몸을 더듬더니, 멱살을 잡고 그대로 나를 들어 올렸다. 
 
“뭐야, 신참인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나 역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험악한 인상에, 온몸에 근육이 우락부락한 사내. 주변 사람들이 대롱대롱 매달린 나를 구경하며 이죽거렸다. 
 
“허우대는 멀쩡해 보이는데? 몸 좀 뒤져봐. 뭔가 갖고 왔을 수도 있잖아.” 
“야야, 함부로 건드리지 마. 여기 떨어진 거 보면 저놈도 어지간한 놈일 거라고. 얼마 전에 온 그 미친놈 잊었어?” 
“아 그놈은 좀 특별하게 미친놈이었고. 그런 놈이 흔하겠어?” 
 
나는 멋대로 지껄이는 사내들을 내버려 두고 주변 정경을 살폈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드넓은 장소. 
 
망령들이 들끓는 걸로 봐서, 일단 명계는 맞는 것 같았다. 
 
명계의 금속으로 빚은 철골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고, 금속을 제련하기 위한 화로들도 보였다. 마치 커다란 공장 같은 분위기였다. 이승에서 죽도록 일만 하다 죽은 망령들이, 이젠 죽어서도 명계의 노예가 되어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얼핏 봐서는 거대한 로봇 같이 생겼는데······. 
뭘 하는 곳이지 여긴? 
 
“어이, 지금 내 말 무시하는 거냐?” 
 
나는 정말로 놈의 말을 무시한 채 천천히 녀석의 팔을 꺾었다. 
 
“뭐, 뭐야! 이놈 무슨 힘이······!” 
 
이런 잔챙이들이나 상대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일단 도착한 히든 시나리오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 
 
<히든 시나리오 ― 명계 산책> 
 
분류 : 히든 
난이도 : A+ 
클리어 조건 : 심판관들의 눈을 피해, 무사히 지상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시오. 
제한시간 : 12시간 
보상 : 10000코인 
실패시 : 당신은 강제로 명계의 주민이 될 것입니다. 
 
+ 
 
······시나리오는 제대로 왔다. 
디오니소스가 말한 시간도 정확하고. 
그럼 난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분명 아케론 강가에 떨어졌어야 하는데. 
 
“이, 이 자식! 감히 우릴 뭘로 보고······!” 
 
사내의 커다란 주먹이 나를 향하려는 순간, 뒤쪽에서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무슨 일이야? 뭐 재밌는 일 생겼어?” 
“으, 으아아앗!” 
“하하, 나도 끼워줘. 응? 여기서 맨날 건담만 만졌더니 심심해 죽겠다고.” 
“도망쳐! 모두 도망가!” 
 
나를 포위했던 사내들이 모두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마치 포식자라도 만난 초식동물들처럼 재빠른 움직임.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앞머리를 길러 얼굴을 가린 청년. 
덩그러니 선 나를 발견한 청년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나를 유심히 들여다 보더니,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나는 순간 녀석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자식은 또 뭔데 날 아는 척 하지? 
 
“뭐야, 나 못 알아보겠어? 진짜 잊어버린 거야?” 
 
청년이 자신의 앞머리를 살짝 들어 올린 후에야, 나는 놈을 알아보았다. 
······빌어먹을. 
그러고 보니 명계란 결국 죽은 사람이 오는 곳이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히, 내가 죽인 놈도 이곳으로 왔을 것이란 사실을. 
 
“아아, 그렇게 경계하지 마. 어차피 우리 둘 다 이미 뒈진 목숨이잖아?” 
 
호기심 어린 녀석의 눈이 불쑥 가까워졌다. 
비열하고 잔인한 눈빛. 
잠깐 봤을 뿐이었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인상이었다. 
비릿한 미소를 지은 녀석이 말을 이었다. 
 
“그래, 아저씬 대체 누구한테 죽은 거야? 입 좀 털어봐. 응?”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죽었던 망상악귀 김남운이, 하데스의 명계에 있었다.
 
 
 
 
 
< Episode 22. 세 가지 약속 (4) > 끝

< Episode 22. 세 가지 약속 (5) >
 
 
 
 
 
한동안 주변을 샅샅이 살핀 후에야, 나는 이곳이 어딘지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절망했다. 
젠장, 아무리 봐도 틀림없다. 여기는······.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쟤 가까이만 안 가면 안 문다고.” 
 
이죽대는 김남운을 보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했다. 
이곳은, 명계의 지옥인 ‘타르타로스’의 감옥이었다. 
 
나는 감옥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머리 셋 달린 괴수를 바라보았다. 신화에서만 보던 괴물견 켈베로스. 녀석은 따분한 얼굴이었는데, 머리 두 개는 졸고 있었고 오직 머리 하나만이 눈을 부릅뜬 채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저건 새끼야. 고작해야 4급 괴수종이지. 아래층에는 더 엄청난 놈들이 있다고.” 
 
김남운은 자기가 지옥 가이드라도 되는 것처럼 마구 떠들어 댔다. 
저놈이 새끼인 건 맞았다. 
‘멸살법’에도 그렇게 나와 있으니까. 
타르타로스는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강한 죄수들이 갇혀 있기 때문에, 각 층을 지키는 켈베로스도 내려갈수록 크기가 커진다. 
김남운이 킬킬대며 물었다. 
 
“그래서, 지옥에 온 감상은?” 
 
나는 건들대는 녀석의 태도를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이 사이코패스 녀석은 언제 돌변할지 모르니 긴장할 필요가 있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혹시 너 말고 다른 사람은 없냐?” 
“아저씨 있잖아.” 
“나 말고.” 
 
나는 지나가는 망령들의 얼굴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내가 아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예를 들면 질문의 재앙 명일상이라든가, 인외종 송민우 같은 놈들. 
 
“내가 알기론 없어. 지하철에 타고 있던 사람 중 여기 온 건 나뿐이야.” 
 
하데스의 명계는 세상의 무수한 저승들 중 하나일 뿐이다. 
아마 죽은 화신들은 생전의 신념에 따라, 혹은 무작위적인 구별에 따라 각자 다른 저승으로 떠났을 것이다. 
아마 명일상이나 송민우도 마찬가지겠지. 
나는 김남운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혹시 최근에 젊은 여자가 이곳에 온 적은 없냐?” 
“젊은 여자?” 
“하얀 머리카락에, 음······ 포니테일이고. 꽤 예뻐.” 
 
잠시 인상을 찌푸리던 김남운이 갑자기 킥킥거렸다. 
 
“아하, 이제 알겠구만.” 

나는 혹시나 녀석이 신유승을 본 걸까 싶어 귀를 기울였다. 
 
“아저씨, 여자 구하려다 죽었구나?” 
“······.” 
“하여간 꼰대들은 그게 문제라니까. 사랑 때문에 죽느니 사느니······ 대체 언제 적 얘기야?” 
“봤어, 못 봤어? 그것만 대답해.” 
“당연히 못 봤지. 어쩌나, 사랑하는 여친 못 만나서?” 
 
역시, 신유승의 영혼도 이곳으로 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직 아케론강을 못 건넜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어차피 다른 세계선에서 온 영혼이니, 그녀는 잠깐 이곳에 머문 뒤 세계선 바깥으로 추방당할 것이다. 
내가 할 일은, 그 전에 그녀의 영혼을 손에 넣는 것이다. 
 
“넌 여기서 뭐하던 중이었냐?” 
“뭐하긴, 저거 만들던 중이었지. 이제 아저씨도 같이 만들게 될 거야.” 
 
김남운이 손에 묻은 재를 털며 뒤를 가리켰다. 
 
“저거야. 건담 같이 생긴 거, 보여?” 
 
나도 마침 보고 있었다. 거인의 형체를 닮은 외양. 검은 광택이 도는 금속으로 마감한 거병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천천히 호흡하고 있었다. 신화상 가장 끔찍했던 전쟁을 준비하는 병기. 
 
거신병(巨身兵). 
 
과연, 하데스는 벌써 <기간토마키아>를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역시 놀고먹고 싸질러대면서 <기간토마키아>를 준비한다는 핑계를 대는 올림포스 12신들과는 다르다. 
생각해 보면 하데스는 그리스 신화의 성좌이긴 해도 올림포스 성운 소속은 아니었지. 
입구 바깥쪽에서 북적이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김남운이 정색하며 내 어깨를 붙잡았다. 
 
“이리와. 나랑 같이 가자.” 
“왜?” 
“관리자들 오는 거 안 보여? 저기 내가 작업장 튼 곳 있으니까 가서 망치질하는 척이라도 해. 신참일수록 빠릿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알겠어?”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곳이 정말 타르타로스의 ‘노예 대장간’이라면, 나도 대강은 아는 바가 있으니까. 
그러니 내가 놀란 것은 타르타로스 때문이 아니었다. 
김남운이 입술을 비죽였다. 
 
“왜 사람을 그렇게 봐?”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너 날 보고 아무런 생각도 안 드냐?” 
“무슨 생각?”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김남운의 얼굴에, 순간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아하, 내가 무서워서 그러는구나?” 
“······.” 
“내가 복수라도 할까 봐. 그치?” 
 
안 무서우면 그게 비정상이다. 
원작에서 유중혁보다 더한 사이코패스로 군림하던 녀석을 내가 죽였다. 
그런데 그놈이 갑자기 나한테 살갑게 구는데 그게 공포스럽지 않으면 이상한 거지. 
 
“하하, 그렇게 쫄지마. 벌써 뒈진 사람들끼리 냉정하게 굴 필요 없잖아? 그리고 나 여기와서 많이 바뀌었거든. 반성도 많이 했다고.” 
 
택도 없는 소리 하고 있네. 
그 ‘망상악귀 김남운’이 반성이라니, 어느 날 유중혁이 미소녀가 되었다는 것만큼이나 현실성이 없는 소리다. 
당연히 거짓말일 건 알지만, 나는 사람에 대한 마지막 예의를 발휘해 [거짓 간파]를 발동해주기로 했다. 
어차피 이럴 때 쓰려고 입수한 스킬이니까. 
그런데. 
 
[당신은 해당 발언이 진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뭐?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놈을 보았다. 김남운이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진짜라니까?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나 속죄하면서 살고 있다니까? 심지어 아저씨가 나 죽여준 거 감사하게까지 생각하고 있어.” 
“······아니, 왜?” 
“밥때 되면 밥 나오지. 잠잘 때 되면 잠도 재워주지. 학교도 안 가, 잔소리하는 엄마, 아빠도 없어······. 좀 덥긴 하지만 여기 최고라고.” 
 
지옥 ‘타로타로스’를 그렇게 말하는 놈이 있다니. 
 
“게다가 심심하면 건프라도 조립할 수 있고. 얼마나 좋아?” 
 
거신병을 보고 건프라라니. 
 
“아저씨 덕분이야. 진심이야. 진짜 고맙다고.” 
 
이 새낀 역시 미친놈이다. 
 
[등장인물 ‘김남운’이 당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길, 시스템 메시지까지 저렇게 뜨는데 안 믿을 수도 없고. 
 
“아무튼 빨리 이쪽으로 와. 시간 없으니까!” 
 
나는 김남운에게 이끌려 녀석의 작업장 쪽으로 향했다. 
작업대 위에는 녀석이 쓰던 공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남는 금속으로 만든 ‘건프라’도 보였다. 
명계의 금속으로 이런 짓을 하다니. 
이 자식 설정이 중2병이었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난다. 
 
“온다. 망치 들어.” 
 
말하기가 무섭게 지옥문의 켈베로스가 짖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소리를 듣는 순간 뼈마디가 으스스 굳는 것 같았다. 켈베로스가 지키는 문을 지나쳐, 방망이와 채찍을 하나씩 손에 쥔 관리자들이 타르타로스로 입장했다. 새카만 케이프를 두른 하데스의 권속들. 심판관들만큼 강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들키는 것은 좋지 않았다. 
나는 어정쩡하게 서서 몇 번인가 망치질하는 척을 했다. 
김남운이 옆에서 킥킥거렸다. 
관리자는 곧장 입구 쪽의 단상 위에 올라가 철을 긁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1층의 노예들에게 알린다. 지금부터 불시 점검이 있을 예정이다. 
 
김남운이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저 새끼들은 맨날 저 지랄이야. 할 일 없으면 맨날 점검이니 뭐니······.” 
 
그러나 이어진 관리자의 말에, 김남운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명계에 불법 침입자가 나타났다. 생자의 영혼으로 아케론강을 건너온 놈이 있다고 한다. 
 
망치와 톱을 든 망령들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웅성거렸다. 
관리자의 말은 계속되었다. 
 
―위대한 죽음께서 이 일을 알게 되시면, 너희들에게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고로 이번 점검은 그 불순한 침입자를 색출하기 위함이다. 일단은 형식적인 거니까 긴장하지 말고. 다들 제자리에서 대기하도록 해라. 
 
빌어먹을, 내 예상보다 일의 진척이 빨랐다. 
하필 이럴 때······. 
김남운이 내씹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멍청한 소리 하고 있네. 설령 살아있는 놈이 여길 왔어도, 뭣하러 ‘타르타로스’에 숨어들었겠어? 들어오면 영영 못 나가는 곳인데. 그렇지?” 
“······.” 
“이봐, 아저씨?” 
“어, 응.” 
 
생각하다가 대답이 한 박자 늦고 말았다. 
순간 나를 바라보던 김남운이,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말이야. 저거 혹시 아저씨 얘기는 아니······.” 
“맞아.” 
“이런 씨발.” 
 
망치를 내던진 김남운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와, 진짜 사람 뒤통수 치는 거 대박이네. 나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람한테 신세타령 한 거야?” 
 
화가 난 건지, 재미있어하는 건지 모를 표정이다. 
나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여기 어디 숨을 곳 없냐?” 
“씨발, 감옥에 숨을 데가 어딨어? 정 안 되면 저기 건프라 안에라도 숨든가!” 
 
나는 거신병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저 안에 숨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문제는, 저 녀석이 이미 ‘하나의 살아있는 생물’에 가까워서 저 안에 들어갔다간 그대로 소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만. 
 
“저거 완성은 됐냐?” 
“아직. 코어에 뭔가 문제가 있다든가 어쨌다든가. ······정말 저기 숨으려고?” 
“아니.” 
“잘 생각했어. 저기 들어가면 아저씨 그대로 뒈질거거든.” 
“······너 착하게 살기로 했다며?” 
“난 뒈진 사람들한테만 착해. 간만에 만났는데 아쉽게 됐네. 아저씨도 곧 뒈질 테니, 그땐 다시 착하게 굴어줄게.” 
 
김남운은 내 처지가 꼴 좋게 됐다는 듯, 손날로 목을 그으며 말했다. 
헛소리를 나누는 사이, 관리자는 벌써 근처까지 다가왔다. 
만약 거신병이 완성되어 있었다면 저걸 타고 켈베로스를 때려잡은 다음 하데스의 궁전으로 직행하는 선택지가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나마도 불가능했다. 
 
[특성 효과로 이미 읽은 페이지에 대한 기억력이 상승합니다!] 
 
나는 필사적으로 ‘멸살법’의 내용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유중혁도 중후반 회차에서 명계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녀석은 어떻게 했더라? 
 
「“명왕에게 전해라. 거신병 플루토는 내가 가져간다고.”」 
「“죽고 싶지 않으면 모두 꺼지라고 해.”」 
 
······빌어먹을. 미친 사이다 새끼. 
읽을 때는 좋았는데, 막상 내 상황이 되니까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 
하데스의 심판관에 정면으로 대항하다니. 
그런 건 유중혁 같은 회귀자나 가능한 일이다. 놈에겐 그만한 무력도 있고, 기회도 있으니까. 그런데 나는······. 
 
······아니지, 잠깐만. 
내가 그놈처럼 못할 건 뭐지? 
 
갑자기 발상을 바꾸자 생각의 방향도 달라졌다. 
물론 정말 놈처럼 행동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도 배짱을 부릴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왜 내가 심판관에게 붙잡히면 안 되지? 
히든 시나리오에 실패해서 ‘명계의 주민’이 될 테니까? 
아니면, 하데스의 눈치를 본 심판관 놈들이 나를 영멸시키려 들 테니까? 
 
바보였다. 
 
애초에 그런 건 하나만 해결되면 걱정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마침내 관리자는 우리 작업장까지 다가왔다. 
나는 오히려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관리자가 물었다. 
 
“넌 뭐냐?” 
“네가 찾던 사람.” 
 
그 순간, 관리자의 눈에 빛이 번뜩였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쇳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점차 몸이 차갑게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이윽고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아마 지금 돌아보면, 하데스의 심판관이 내 목을 잡고 있으리라. 
나는 뼛속을 얼리는 듯한 한기에 저항하며 입을 열었다. 
 
“날 영멸시킬 모양인데, 잘 생각하는 편이 좋을 거야.” 
 
내게 유중혁 같은 무력은 없다. 
하지만, 내겐 녀석에겐 없는 것이 있다. 
 
“지금 날 죽이면, 너희는 <기간토마키아>에서 반드시 패배하게 될 테니까.” 
 
관리자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고, 잠깐이지만 한기가 누그러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거신병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유한 밤의 아버지’께 전해. 나는 저 거신병을 완성 시킬 방법을 알고 있다고.” 
 
그리고 무시무시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몸은 목덜미를 중심으로 천천히 얼어붙고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반항하지 않았다. 
 
이것은 시험이다. 
 
어느새 얼음이 목과 어깨를 지나 가슴까지 내려왔다.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조금 더. 조금만 더. 
그리고 마침내 냉기가 심장 언저리까지 파고들려는 순간. 
 
한기가, 마법처럼 멎었다. 
 
그리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히든 시나리오 내용이 갱신되었습니다.] 
 
. 
. 
 
잠시 후, 나는 심판관의 안내를 받아 하데스의 궁전을 오르기 시작했다. 
크르렁거리는 켈베로스의 뒤편으로 멀어지는 김남운의 모습이 보였다. 
멍하니 나를 보는 김남운을 향해, 나는 가만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럼 지옥에서 잘 지내라, 남운아.
 
 
 
 
 
< Episode 22. 세 가지 약속 (5) > 끝

< Episode 22. 세 가지 약속 (6) >
 
 
 
 
 
마지막으로 본 김남운의 표정이 잔상처럼 남긴 했지만, 애초에 놈을 구해주러 온 것도 아니니까 어쩔 방도가 없었다. 
게다가 지옥이 좋다는 놈을 뭐하러 구해줘? 
 
다리가 없는 심판관은 유령처럼 조용히 계단을 올라갔다. 
 
도중에 꽤 격이 높아 보이는 몇몇 상징체(象徵體)들이 나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데스의 궁에 기거하는 성좌들일까? 
잘 모르겠다. 여기에 있다고 죄다 성좌인 것은 아니니까. 
내가 흘끔거리는 것을 눈치챘는지, 심판관이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잘 따라오지 않으면 길을 잃을 것이다.]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에 속이 거북해진다. 
그렇지만 올바른 조언이었다. 
나는 심판관의 눈치를 살피다 천장을 보며 입을 작게 움직였다. 
 
‘이봐, 듣고 있지?’ 
 
심판관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속삭임. 
 
‘듣고 있는 거 알아.’ 
 
이곳은 지상이 아니라 하데스의 명계다. 
나는 궁금했다. 
과연 여기서도, 도깨비의 ‘채널’이 제 기능을 하고 있을까? 
그러자, 귓가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옛. 보고 있습니다. 
 
채널의 도깨비 통신. 
비형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새로운 도깨비인가?’ 
 
―예. 하급 도깨비 ‘영기’입니다. 비형 어르신께서 관리국 일로 잠깐 채널을 비우셔서, 대리를 맡고 있습니다. 
 
도깨비 영기. 아마 낮에 시나리오의 보상 정산을 짬처리 당했던 그 초짜 도깨비인 듯했다. 나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너 일 제대로 안 해?’ 
 
―예? 
 
‘히든 시나리오 갱신됐는데, 왜 안 알려줘?’ 
 
이렇게 무시무시한 곳에 왔는데, 히든 시나리오 보상이라도 제대로 받아가야지. 
 
―아, 그, 그건······! 
 
얼 타고 있는 걸 보니 초짜는 맞는 모양이다. 
새삼 비형이 일 처리를 얼마나 잘 하는 녀석인지 알겠다. 그냥 지능이 좀 모자란 덜떨어진 도깨비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런데 십 초 정도 침묵을 지키던 도깨비 영기가 갑자기 말을 더듬었다. 
 
―저, 저기······. 
 
‘또 왜.’ 
 
―시나리오 갱신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화신한테 그걸 묻는 도깨비가 어딨냐?’ 
 
―그, 그게 비형 어르신께서 잘 모르겠으면 김독자 씨한테 물어보라고. 
 
비형 이 새끼가 지금 나한테 고문관을 맡기고 간 건가?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다른 도깨비한테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아, 그리고······. 
 
‘······또 뭐?’ 
 
―죄송하지만, 밀린 ‘간접 메시지’를 좀 띄워도 되겠습니까? 제가 이런 상황에서 띄우는 건 또 처음이라······. 
 
나는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비형 자식이 그리워지는 날이 올 줄이야······. 
그러자, 머릿속으로 폭발적인 메시지가 밀려 들어왔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의 곤경에 즐거워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모험에 흥분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이 어떻게 탈출할지 몹시 궁금해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이 전우에게 무사히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역시, 성좌 녀석들도 죄다 내 꼴을 지켜보고 있었구만. 
한편, 감탄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성좌, ‘외눈 미륵’이 명계의 궁전에 감탄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명계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자신의 종교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 
 
위인급 성좌들에게는 이것도 꽤 진풍경일 것이다. 
모든 성좌들이 하데스의 성에 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12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단지 하데스의 궁전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12000코인이라니. 
엄청난 이득이었다. 
하긴, 굳이 따지자면 나는 지금 촬영이 금지된 사유지를 불법적으로 송출하고 있는 셈이니까 그 정도는 받아야겠지.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묵묵히 걸어가던 심판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도착했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거대한 연회장이 갖추어진 홀이 나타났다. 사방이 어두컴컴했기 때문에 내부가 잘 보이지는 않았다. 
심판관이 사라지고 문이 닫혔다. 
어슴푸레한 홀의 중앙에 작은 불이 켜졌다. 
고색창연한 분위기의 타원형 테이블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임금의 수라상이라 해도 그만큼 화려할까 싶을 정도의 크기. 새카만 벨벳이 깔린 테이블 위에 침샘을 자극하는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그 테이블의 끝에, 나를 바라보는 한 여인이 있었다. 

[재미있군요. 이 성에 살아있는 영혼이 온 것은 정말 간만의 일인데. 게다가 불쾌한 방청객들까지 데리고 오다니······. 오늘은 정말 특별한 날이 되겠군요.]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이 하데스의 궁전에서, 안주인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존재는 단 하나밖에 없으니까.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영광입니다,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시여.”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 
그녀는 바로 하데스의 아내인 명계의 여왕 ‘페르세포네’였다. 
 
[내 수식언을 알고 있다니, 예의가 바른 화신이군요.] 
 
“과찬이십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내 진언(眞言)을 듣고도 그대의 영혼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고요.] 
 
그러고 보니, 성좌의 진언을 직접 듣고 있는데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페르세포네는 최소 설화급 이상의 성좌. 
보통이라면 격의 차이 때문에 내 영혼은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커다란 타격을 받거나 소멸했어야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위인급인 김유신의 진언을 듣는 것만도 버거웠는데······.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스킬 메시지에 ‘강하게’라는 수사가 붙은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만나는 상대가 남다르다 보니, 어쩌면 내 무의식은 이 상황을 더욱 ‘비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앉으세요, 화신 김독자.] 
 
융숭한 대접에 감사하며, 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조용히 착석했다. 
솔직히 생각지도 못한 호의였다. 
달콤한 음식들의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둘러 보았지만, 테이블에 앉아있는 것은 페르세포네뿐이었다. 
 
“명왕께서는······?” 
 
[왕께선 당신의 갑작스런 방문으로 심기가 불편하세요. 때문에, 오늘의 용건은 저에게 말씀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결국 이렇게 되나. 
예상은 했다. 
올림포스의 3주신씩이나 되는 존재가, 일개 화신 하나가 찾아왔다고 대뜸 만나줄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나는 오르페우스처럼 리라를 잘 연주하는 것도 아니다.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하세요.] 
 
“지금 그 모습은 여왕님의 진체(眞體)이십니까?” 
 
[당연히 상징체죠. 제 진체는 한낱 인간인 당신이 견딜 수 있는 충격이 아니에요.] 
 
나는 페르세포네의 ‘상징체’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초라한 노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독한 악취미로군. 
솔직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세포네가 옅게 미소했다. 
 
[나이 든 여자는 취향이 아닌가 보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녀가 할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든 할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든,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문제는 그녀가 변신한 ‘할머니’가, 내가 ‘첫 번째 시나리오’의 지하철에서 구하지 못했던 바로 그 할머니의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불편하다면 다른 모습으로 바꿔줄 수도 있어요.] 
 
천천히 일그러진 페르세포네의 모습이 유상아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것도 평소의 유상아가 아니었다. 
가슴의 절반이 드러나는 검정색 차이나 드레스에 가터벨트를 차고, 고혹적인 눈화장을 한 유상아······. 
보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발갛게 물들 것 같았다. 
빌어먹을, 내 야동 하드라도 훔쳐본 건가? 
 
“그냥 할머니로 해주십시오.” 
 
물론 페르세포네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시간이 없는 것 같은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그래도 되겠습니까?” 
 
[사실 내 아이에게 조금 듣긴했지만, 그래도 당사자 입으로 듣는 것도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겠죠.] 
 
아이라면 디오니소스를 말하는 거겠지. 
고개를 끄덕인 나는 짧게 숨을 들이켠 뒤, 한 번에 말을 쏟아냈다. 
 
“저는 한 여자의 영혼을 찾고 싶습니다. 전해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거래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영혼이라······ 간만에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영롱하게 눈꺼풀을 내리깐 그녀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이윽고, 페르세포네의 긴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여 접시 위의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해체는 천천히 진행되었다. 
 
포크가 살점을 단단히 잡았고, 나이프가 천천히 앞뒤로 움직이며 정성껏 고기를 썰어갔다. 
힘줄을 피해 살을 바르자, 깨끗한 단면에 붉은 육즙이 먹음직스럽게 배어 있었다. 
 
조심스레 움직인 포크가 고깃덩이를 찔렀다. 
 
페르세포네는 그것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마치, 내 이야기 따위는 오래전에 잊어버린 것처럼. 
약간 조급해진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의 입이 먼저 열렸다. 
물론, 스테이크를 먹기 위함은 아니었다. 
 
[이 세계에 ‘영혼’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요.]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현대물리학자들이 당연하게 동의할 법한 사안이었지만, 문제는 그 발화를 한 존재가 ‘신’이라는 것에 있었다. 
그것도 오랫동안 영혼의 논리를 변호해 온 올림포스의 신. 
나는 비꼬듯 말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법한 선언이군요.” 
 
[그 아이들도 성좌가 되었으니, 이제 무덤에 있지는 않겠죠.]

“저는 말장난을 하러 온 게 아닙니다.” 
 
[저도 장난치는 게 아니에요. 화신 김독자. 영혼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요. 그건 자아의 연속성을 바라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환상일 뿐이니까요.] 
 
“그럼 명계의 사람들은 뭡니까? 그들은 영혼이 아닙니까?” 
 
그녀는 대답 대신, 방금 자신이 썰었던 스테이크를 가리켰다. 
 
[그들은 이것과 같죠.] 
 
천천히, 페르세포네의 입속으로 스테이크가 빨려 들어갔다. 
아주 오랫동안 그 맛을 음미하듯, 그녀는 시간을 들여 고기를 씹었다. 새빨간 육즙이 묻은 그녀의 입술이 매혹적으로 반짝였다. 
 
[음, 아주 특상품이네요. 당신도 한 번 들어보지 그래요?] 
 
내 눈앞에도 그녀가 먹은 것과 똑같은 스테이크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싫습니다.” 
 
[무례를 범할 셈인가요?] 
 
“예. 정말 죄송하지만, 무례를 좀 범해야겠습니다.” 
 
분명 먹으면 맛은 있을 것이다. 
‘멸살법’에서도 이 음식의 맛을 장장 12페이지나 공들여 묘사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긴 묘사의 끝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도 쓰여 있었다. 
 
「그 후, 회차가 끝나는 순간까지 유중혁은 그 음식을 먹은 것을 후회했다.」 
 
명계의 음식을 먹은 자는, 지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내 속을 읽은 듯 페르세포네가 웃었다. 
 
[명계의 삶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끔찍하지 않아요. 일설에 알려진 것들도 대부분 거짓이고요. 명왕의 허락만 있다면, 얼마든지 지상을 외유할 수도 있어요. 당신 세계로 치면 ‘직업 군인’과 비슷한 개념인 거죠.] 
 
“군생활은 제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기억이었습니다만.” 
 
[그래요? 그쪽 나라 수컷들은 툭하면 ‘그냥 군대에 말뚝이나 박아야지’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나요? 그래서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오해가 있었나 보군요.] 
 
다른 나라의 여신이 한국 남자에 대해 왜 이렇게 잘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페르세포네가 말을 이었다. 
 
[화신 김독자. 당신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전문 하사가 되길 권하던 행정관도 저한테 비슷한 소릴 했었죠.” 
 
[그 사람은 저처럼 스테이크를 권하지는 않았을걸요? 가령, 지금 당신 눈앞에 놓인 그 스테이크. 그걸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소의 육즙을 느낄 수 있겠죠.” 
 
[당신은 지금 당장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어요.] 
 
너무 태연히 나온 말이라, 나는 순간 잘못 들은 거라 생각했다. 
소드 마스터. 
그것은 이계로 떠난 귀환자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야 도달할 수 있는 드높은 경지였다. 
 
[그리고 그 옆의 파스타. 그걸 먹으면 당신은 대륙을 평정할 ‘대마법사’가 될 수 있고요.] 

······이 파스타가? 
 
[수프? 당연히 ‘SSS급 헌터’가 될 수 있는 수프죠.] 
 
이거······ 수라상이 아니라, 기연상(奇緣床)이었나?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이 고기를 하나만 먹으면, 나는 지금의 유중혁을 가볍게 능가하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먹지 않을 건가요?] 
 
천천히 포크를 움직여 스테이크를 한 점 집어 보았다. 그런데 포크의 끝이 고깃덩이 속으로 푹 파고드는 순간, 이상한 장면들이 눈앞을 스쳐갔다. 그것은 홀로 검을 단련하는 한 사내의 기억이었다. 
 
「약해져선 안 돼. 검을 배워야 한다.」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더 강해질 거야.」 
「드, 드디어 해냈다 해냈다고! 내가 해냈어!」 
 
드문드문 이어지는 몇 가지 장면들. 
순간 놀란 나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지금 내가 찌른 이것은 죽은 소가 아니었다. 
 
“설마 이건······?” 
 
페르세포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 작은 고깃덩어리. 이게 인간이 영혼이라 믿는 전부예요.] 
 
그녀는 다시 한 점의 고기를 맛있게 먹어치웠다. 
이걸 먹으면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다고 말한 페르세포네의 말이 뒤늦게 이해되었다. 
나는 말했다. 
 
“······이건 소드 마스터였던 남자의 기억이군요.” 
 
[기억? 아니에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잠시 단어를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이야기.] 
 
입술을 핥으며 나를 보는 그 눈빛에, 순간 소름이 끼쳤다. 
 
[모든 성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이야기’죠.]
 
 
 
 
 
< Episode 22. 세 가지 약속 (6) > 끝

< Episode 22. 세 가지 약속 (7) >
 
 
 
 
 
성좌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걸 듣고 있자니,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야기를 먹고, 이야기에 미쳐있는 자들. 
저게 바로 성좌란 자들의 본성인 것이다. 
 
[죽음이란 이야기의 결말과 같아요. 스테이크가 된 소가 되살아날 수 없듯, 죽은 사람도 되살아 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 것이니까요.] 
 
“예외도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거짓 전승이에요. 예외는 없어요.] 
 
거짓이라. 그리스 신화에서는 이럴 때 쓰는 관용표현이 있다. 
 
“스틱스강에 맹세하실 수 있습니까?” 
 
물론 그녀는 맹세를 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페르세포네의 표정에 분노가 떠올랐다. 
 
[······당신이 믿는 ‘영혼’은 그저 조잡한 이야기의 덩어리일 뿐이에요.] 
 
“제가 원하는 것도 그 조잡한 이야기의 덩어리입니다.” 
 
[명계에서 ‘뒤를 돌아보는 자’는 반드시 후회하게 되어 있어요. 당신은 흘러간 시간을 납득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겠군요.]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온다면, 나 역시 아껴뒀던 카드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여왕님. 시간은 반드시 ‘앞으로만’ 흘러가는 게 아닙니다. 슬슬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요.” 
 
순간, 세상이 잿빛으로 바뀌었다. 
살벌한 기파가 홀 전체를 장악했다. 
잠깐이지만, 나는 페르세포네의 진체를 엿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나는 발악하듯 외치고 싶었다. 
 
이래도 영혼이 없다고? 
이것 봐, 지금 내 영혼에 소름 돋았거든? 
 
흘러내린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하게 젖은 뒤에야, 기파는 사라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페르세포네가 미소지었다. 
 
[후후······ 재밌어. 역시, 올림포스의 아이들이 말한 ‘특이점’답군요.] 
 
하지만 그 미소는, 조금 전과는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자칫하면 골로가는 수가 있다. 
 
“제가 아는 것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타르타로스에서 개발 중인 거신병들을 보았습니다. 만약, 저와 거래하신다면 거신병의 완성 시간을 더욱 단축할 방법을······.” 
 
[그런 이야기는 됐어요. <기간토마키아>는 중요한 사안이긴 하지만, 거신병은 당신의 도움 없이도 제때 완성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정말 만만찮은 여신이다. 
이번에는 페르세포네의 차례였다. 

[다만, 이런 거래라면 생각해 볼 수도 있겠군요. 당신이 어떻게 그 정보들을 알고 있는지 내게 말해준다면······.] 
 
“그건 곤란합니다. 솔직히, 제대로 설명할 자신도 없습니다.” 
 
신유승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것만큼은 불가한 일이었다. 
만약 이걸 공개하면, 앞으로의 내 계획은 모두 끝장이니까. 
내 대답의 진심을 가늠하는 듯, 페르세포네는 잠시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기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의 ■■■는······.] 
 
······뭐? 
 
다음 순간, 내 귓가에 성좌들의 메시지가 폭발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자신의 귀를 의심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눈을 부릅뜹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여왕의 경솔함을 지적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침음합니다.] 
 
페르세포네가 인상을 찌푸렸다. 
 
[불청객들은 조용히 하시죠.] 
 
나는 놀라서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아아, 별거 아니에요.] 
 
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라니? 
제대로 발음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내 귀에 그녀의 말은 필터링 된 정보로 들렸다. 시나리오상 아직 공개되지 않은 정보. 하지만 필터링은 이미 그 정보를 알고 있는 존재에게는 발동하지 않는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멸살법’을 다 읽은 내가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 
 
[미안하지만, 여흥은 이쯤에서 접도록 하죠. 명계는 당신과 거래할 이유가 없어요. 나는 당신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거든요.] 
 
희붐한 불빛에 비친 나이프가 선뜩하게 빛났다. 
왜인지, 그 방법을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참았는데, 당신······ 제법 맛있어 보이거든요.] 
 
순식간에 코앞에 다가온 페르세포네가 내 턱을 붙잡았다. 
나는 당장이라도 의자를 박차고 싶은 것을 자제하며 미소지었다. 
 
“시나리오를 진행 중인 화신을 해하면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을 텐데요?” 
 
[흐음. 이거 제대로 얕보였네. 겨우 그런 개연성을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저를 지켜보는 성좌들도 그걸 용납하지 않을 거고요.” 
 
그러자 페르세포네가 코웃음을 쳤다. 
 
[명왕께서 그런 하찮은 성좌들을 두려워할 것 같아요?] 

물론, 하데스는 충분히 오만할 자격이 있다. 
하지만 ‘하찮다’라는 말은 그렇게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도발하듯 여의봉을 휘감아 쥡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냉엄한 눈으로 지고의 검을 꺼내 듭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신나서 상황을 부추깁니다.] 
 
페르세포네도 지지 않고 기세를 발출했다. 
 
[그렇군요. 다들 지금 한번 해보자는 거죠?] 
 
순식간에 홀의 천장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붉고 푸른 스파크가 천둥처럼 내리치며 연회장 곳곳에 하얀 불길이 일었다. 
이것이 성좌들의 기싸움. 
 
쿠구구구구! 
 
진체의 강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듯, 페르세포네의 상징체에서 막대한 아우라가 넘실대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새우등 터지듯 죽게 생겼다. 
나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하셨죠.” 
 
이야기라는 말에, 성좌들의 기세가 한순간 누그러졌다. 
 
“그렇다면 이런 거래는 어떻습니까?”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페르세포네가 나를 바라보았다. 
 
“만약 절 도와주신다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여드리죠. 방금 먹은 그 스테이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말입니다.” 
 
[그건 당신을 먹게 해준다는 뜻인가요?] 
 
“여왕님의 미식력(美食歷)이라면, 더 이상의 식사는 필요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이미 충분히 배도 부르실 거고.” 
 
내가 하려는 말을 벌써 눈치챈 페르세포네가 눈웃음을 쳤다. 
 
[······시식도 못 하게 하고 대가는 받아 챙기시겠다?] 
 
“시향은 하게 해 드리죠. 하지만 지금 저를 먹어치우시면, 여왕님은 남은 삶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살아가실 겁니다.” 
 
[왜죠?] 
 
“그때 먹지 않았더라면, 분명 더 맛있어졌을 거라고 생각하게 될 테니까요.” 
 
페르세포네의 눈빛에 흥미가 깃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나요?] 
 
“저는 배후성 없이도 시간을 거스르는 존재에게 대항할 수 있습니다.” 
 
페르세포네의 동공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저는 이계의 신격의 도움 없이도 귀환자를 해치웠고, 강림한 재앙들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고작 다섯 개의 시나리오가 지나갔지요.” 
 
페르세포네의 윗입술이 애타는듯 아랫입술을 훔쳤다. 
 
“심지어는 살아있는 영혼으로 ‘명계’에 들어와 당신과 이렇게 조우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가 앞으로 뭘 더 할지, 정말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말은 잘 하는군요. 하지만······.] 
 
페르세포네가 눈을 흘기며 말을 이었다. 
 
[그건 이미 ‘거래’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럼 ‘구애’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네?] 
 
나는 씩 웃었다. 
 
“저는 진심이니까요. 당신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야기를, 뒤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어질 만한 이야기를 보여주겠습니다.” 
 
어쩌면 성좌들과 ‘거래’를 하겠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들은 영원에 구속된 자들. 
하찮은 화신과의 거래에 진지하게 응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편이 나았다. 
적어도, 진심이 담긴 억지를. 
그리고 모든 신화가 그렇듯, 때로 신들은 백 마디의 거짓보다 한 줌의 진심에 더 감동받기도 한다. 
실제로 그녀는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었다. 
 
[흐음, 곤란한데. 이래서 수컷들은······.] 
 
“아, 물론 당신에게 하는 구애가 아니라 ‘부유한 밤의 아버지’께 하는 구애입니다.” 
 
내 말에 페르세포네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내게서 훌쩍 물러나더니, 테이블 위에 몸을 걸친 채 천천히 다리를 꼬아 앉았다. 은근한 눈길이 내 전신을 휩쓸었다. 
 
[재미있군요.] 
 
유상아의 몸으로 저런 포즈를 하고 있다니, 돌아가서도 생각날까봐 무섭다. 
허공의 어둠을 응시하던 페르세포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찰나였지만 몇 시간처럼 무거운 침묵. 
그녀가 입을 연 것은, 내가 침묵의 무게에 조금씩 질식해 갈 무렵이었다. 
 
[당신에게 ‘과업’을 내리겠어요.] 
 
그리고 올 것이 왔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여준다면서요? 성공한다면 당신이 원하는 영혼을 찾아주도록 하죠.] 
 
이어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새로운 ‘히든 시나리오’가 발동하였습니다.] 
 
과업이라는 말에 떠오르는 신화가 몇 가지 있었다. 
그러고 보니, 헤라클레스가 ‘12과업’이라는 걸 수행한 적이 있었지. 
페르세포네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나도 한 번쯤은 내려보고 싶었어요. 올림포스 아이들은 자주 하는 짓거린데, 난 조신한 낭군님을 만나는 바람에 한 번도 못 해봤거든.] 
 
“어떤 과업입니까?” 

[당신의 과업은 뱀의 머리를 베어오는 거예요.] 
 
“······뱀? 설마 머리가 여러 개 달린 그 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는 살짝 소심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왜냐하면 ‘그 뱀’은 무려 2급 괴수종이었으니까. 
페르세포네가 고개를 저었다. 
 
[히드라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걸 죽여봐야 헤라클레스 녀석을 따라했다는 소리만 들을 뿐이죠. 당신이 죽여야 할 뱀은 다른 곳에 있어요.] 
 
“하지만 저는 시나리오 진행 중이라 멀리 갈 수 없습니다만.” 
 
[그건 걱정말아요. 당신이 갈 곳에, 그 뱀도 있을 테니까.] 
 
페르세포네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빈 허공에 화면이 떠올랐다. 
채널이 연결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나는 그 화면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성좌들은 이런 식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 거였나? 
 
녹색의 정글을 아우르는 거대한 숲이 화면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장소가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저곳은, 우리가 시작될 ‘여섯 번째 시나리오’의 무대였으니까. 
그런데 잠깐만. 저거 뭐지? 
 
「거기 아저씨, 여기 나무 좀 뽑고 쉴만한 곳 좀 만들어 봐. 당신 그런 거 잘 하잖아?」 
「내가 잘 하는 건 투기지 개간이 아니다. 덜떨어진 계집애야.」 
 
나는 그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사라진 공필두와 한수영이 그곳에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아직 여섯 번째 시나리오는 시작도 안 했을 텐데? 
나를 빤히 바라보는 페르세포네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때요, 해보겠어요? 꽤 힘들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는 되어야 ‘과업’이라는 말을 붙일 만하거든요.] 
 
나는 한발 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페르세포네가 원하는 ‘뱀’이 무엇인지 감이 왔기 때문이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인기척이 사라진 후, 홀에 어둠이 몰려왔다. 
혼자 남은 페르세포네는 남은 성찬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만 치워라. 맛이 없구나.] 
 
어둠 속에서 나타난 손이 재빠르게 접시들을 가져갔다. 
페르세포네는 접시에 담긴 음식들이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소드마스터, SSS급 헌터, 10서클 대마법사······. 
이미 지긋지긋하게 먹어 본 맛들. 
허공의 어둠이 일렁이더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르세포네. 왜 그랬지? 
 
마치 공간 그 자체가 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오, 수줍은 내 낭군님께서 이제야 입을 여시네요.] 
 
―왜 그랬냐고 물었다. 
 
[하데스, 당신이 이걸 원했잖아요.] 
 
―나는 그런 적이 없어. 
 
페르세포네는 그런 어둠을 빤히 응시하다가 말했다. 
 
[당신은 화신을 좀처럼 만들지 않으시죠. 그런 당신이, 유독 저 아이는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 같았는데. 제 착각인가요?] 
 
―왜 그렇게 생각했지? 
 
[저 아이가 명계에 왔을 때 바로 쳐 죽이지 않으셨으니까요.] 
 
어둠은 잠시 침묵했다. 
 
[늘 헤라클레스를 가진 제우스를 부러워하셨죠.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멋대로 낭군님 마음을 조금 읽어 봤답니다.] 
 
페르세포네는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놀랍더군요.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성좌들도 있었어요. 그런 자들이 고작 화신 하나를 쫓아다니다니······.] 
 
치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화면이 나타났다. 
하지만 채널의 신호가 불안정한지, 화면은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어둠은 고독한 시선으로 그 화면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머지않아 후일(後日)의 징후가 나타날 거다. 
 
후일. 그 말을 들은 페르세포네가 불신과 의심, 그리고 불안이 고루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일이 정말 올까요?] 
 
―아마도. 
 
[하지만 그때도 제 곁에 계셔주실 거죠?] 
 
하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포근한 어둠이 따스한 기운을 품으며 그녀의 상징체를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그 어둠을 느끼며, 페르세포네가 말했다. 
 
[저 아이가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지 몹시 기대되는군요.] 
 
그녀의 눈길이 닿는 곳에는, 명계를 벗어나기 위해 어둠 속을 헤쳐가는 김독자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혹시라도 뒤를 돌아보지 않기 위해 애쓰며, 앞을 향해 나아가는 김독자. 
그런 그가 귀엽다는 듯, 페르세포네가 희미하게 웃었다.
 
 
 
 
 
< Episode 22. 세 가지 약속 (7) > 끝

< 116회: Episode 23. 버려진 세계 (1) >
 
 
 
 
 
Episode 23. 버려진 세계 
 
 
 
 
 
심판관의 안내를 받아, 나는 명계의 출구로 향했다. 
특수한 안대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위로 가는 것 같기도 했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한참을 걸어간 후에야, 심판관은 안대를 벗겨주었다. 
 
[이곳을 따라가라.] 
 
눈을 뜨자 좁고 어두운 샛길이 보였다. 
아마도 여기가, 뱃사공 카론을 통하지 않고 명계에서 빠져나가는 출구인 모양이었다. 
 
[‘앞’을 찾는 게 좋을 것이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돌아보았을 때, 이미 심판관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별수 없이 샛길을 따라 걸어갔다. 곧 주변의 빛이 사그라지고, 완연한 어둠이 자리 잡았다. 처음에는 벽을 짚는 것으로 방향을 특정할 수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벽마저 사라졌다. 
의지할 곳이 사라지자 나는 부표 없이 망망대해를 떠도는 배가 된 기분이었다. 
문득 오르페우스의 신화가 떠올랐다. 
여기서 뒤를 돌아보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의 글씨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뒤를 두려워하는군요. 그 가엾은 아이도 그랬죠.] 
 
페르세포네의 메시지였다. 
 
[하지만 명심하세요. ‘앞’을 찾기 위해서는 ‘뒤’가 어딘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것을. 본디 ‘앞’이란 ‘뒤’가 있을 때만 존재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심판관도 비슷한 소리를 했었다. 
하지만 그럴듯한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갑자기 깨달음을 얻고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동기부여가 좀 필요해 보이는군요······.] 
 
허공에 떠오른 빛의 문자열들이 망설이는 듯 길게 늘어졌다. 
 
[좋습니다. 이미 세계선을 넘어가는 미궁의 초입에 있어서 당장 데려올 수는 없지만, 이 정도라면 가능하죠.] 
 
설마, 하는 느낌이 드는 순간. 
문자열들이 일거에 사라지며, 눈앞에 희미하고 작은 반딧불 같은 것이 떠올랐다. 
먼 빛. 
아주 연약하고 보드라운 빛이었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 빛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당신은······. 
 
그것은, 41회차의 신유승이었다. 

―아, 아아······.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지. 
이미 세계선을 넘어가는 초입에 있다면, 그곳의 시간관념은 이곳과는 다를 것이다. 내 기준에서는 신유승을 떠나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신유승에게는 벌써 몇 년이 흘러갔을 수도 있다. 
몇 번이고 파르르 떨던 작은 빛은, 뭔가를 망설이더니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아저씨. 
 
아마, 어린 신유승의 기억에 영향을 받은 모양이었다. 
 
―······나, 나도 그렇게 불러도 되지? 아니··· 되죠? 
 
호칭이란 곧 구속이다. 어딘가에 얽매이고 싶은 마음. 아마 ‘아저씨’라는 그 말이, 41회차의 신유승이 가진 마지막 미련일지도 모른다. 나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네가 나보다 연장자인데, 그래도 괜찮겠어?” 
 
보드라운 빛이 다시 한번 바르르 떨었다. 
빛은 장난치듯 내 뺨에 가볍게 닿았다 멀어졌다. 
아무것도 아닌 그 포근함이, 그 제스쳐가······. 
 
나는, 가슴이 미어질 듯 고통스러웠다. 
 
오랫동안 기다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아이는 더 기다려야 한다. 
 
“미안, 당장은 구해줄 수 없어.” 
 
이해한다는 듯, 작은 빛이 아래위로 조그맣게 움직였다. 
 
―무리하지 마요. 내 이야기는 이제······. 
 
“끝나지 않았어.” 
 
나는 그녀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그렇게나 오랜 세월 고통받고, 이런 식으로 끝내서는 안 돼.” 
 
―어째서······. 
 
“내가 결코 그렇게 두지 않아.” 
 
빛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혼란스럽다는 듯, 애처로운 떨림으로. 
 
―나는 이 세계의 기억을 통해 아저씨를 알게 됐어. 하지만 아저씨는······ 어째서 나한테 그렇게 잘 해주는 거야? 아저씨는 나를 잘 모르잖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다른 매개를 통해 서로를 알게 되었다. 
41회차의 신유승이 어린 자신의 기억으로 나를 알게 되었듯, 나는 ‘멸살법’을 통해 그녀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야. 나는 분명 아저씨를 잘 모르는데, 아저씨랑 있으면 모든 걸 이해 받고있는 기분이 들어. 마치 ‘신’ 앞에 있는 것처럼······. 
 
만약 내가 정말로 신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신이겠지. 
모든 것을 알지만 아무것도 설명해줄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신의 기분. 
신유승의 빛이 빠른 속도로 꺼져가고 있었다. 
모습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나는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날 구원해줘요, ······제발. 
 
“그럴게.” 
 
허공에서 흔들리는 빛의 꼬리가 점점 작아졌고, 나는 그 빛을 향해 손을 가져다 대었다. 
가슴이 옥죄여 오는 느낌이었다. 
신유승의 절망. 그 오랜 기다림······. 
형언할 수 없는 슬픔에 가슴이 칼로 저미는 듯 아파왔다. 
조금씩 페르세포네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뒤’가 있어야만 ‘앞’을 향할 수 있다는 말. 
 
이것이 나의 ‘뒤’고, 동시에 내가 향해야 할 ‘앞’이다. 
 
어쩌면 유중혁의 기분도 이랬을지 모르겠다.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지만, 오직 돌아가는 일을 통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녀석도. 
방향을 확신하는 순간 사위가 천천히 이지러졌다. 
흩어지는 어둠 위로 빛의 문자열이 떠올랐다. 
 
[내 힘으로 잠시 붙들어 두긴 했지만, 그녀를 구하고 싶다면 당신에게 남겨진 시간은 거의 없어요.] 
 
나는 손안에 남은 신유승의 희미한 온기를 기억했다. 
페르세포네가 말했다. 
 
[명심하세요. 인간은 ‘이야기’라는 것을. 그러니 당신이 그녀를 되찾았을 때, 얼마만큼의 이야기가 남아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에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어딘가로 빨려 나갔다. 
 
아아아아. 
 
망령들의 울부짖음이 멀어지며, 생생한 육체의 감각이 하나씩 돌아왔다. 
쨍한 볕이 눈꺼풀을 파고들었다. 
축축해진 등을 느끼며 화들짝 눈을 뜨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저씨?” 
 
어린 신유승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아이의 맑은 눈망울. 그 눈이 내게 확신을 주었다. 거칠게 뛰던 심장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돌아왔다. 
 
천천히 숨을 몰아쉬자, 전신의 근육이 제 기능을 되찾았다. 
 
[히든 시나리오 ― ‘명계의 여왕’이 종료되었습니다.] 
[히든 시나리오 보상으로 15000코인을 받았습니다.] 
 
갱신된 시나리오의 보상도 들어왔다. 
초짜 도깨비가 일처리를 제대로 한 모양이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의 무사 귀환을 축하합니다.] 
 
들려오는 간접 메시지를 보고 있자니 뒤늦게 열불이 솟았다. 
디오니소스 저 자식이 나를 타르타로스에 처넣지만 않았어도 이런 고생은 안 했을 텐데. 하마터면 김남운과 함께 타르타로스에 갇혀 건프라나 만드는 삶을 살아갈 뻔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에게 화해를 요청합니다.] 
[7942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7942? 
무슨 삐삐세대 사과냐? 
그래도 코인 줬으니까 한 번은 봐준다. 
 
[새로 도착한 히든 시나리오가 1건 있습니다.] 
 
나는 곧바로 새로 도착한 히든 시나리오를 확인했다. 
 
+ 
 
<히든 시나리오 ― 뱀 사냥> 
 
분류 : 히든 
난이도 : S- 
클리어 조건 : 여섯 번째 메인 시나리오 지역에서 목표물을 사냥하시오. 
제한시간 : 메인 시나리오 종료까지 
보상 : 80000코인,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의 신임. 
실패시 : 명계 출입 금지 
 
+ 
 
예상대로, 페르세포네의 과업은 히든 시나리오의 형태로 전해졌다. 
 
[목표물이 근처에 등장할 시, 자동으로 시나리오 알람이 발동합니다.] 
 
뱀 사냥. 
시나리오에 목표물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다음 시나리오에 등장할 ‘뱀’이라면 어떤 녀석일지 대강 짐작은 갔다.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키자, 신유승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저씨, 이제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상아 언니가 아저씨 잘 지켜보라고······.” 
 
그러고 보니, 쓰러지기 직전 유상아에게 뒷일을 부탁했었지. 
 
“유상아 씨는?” 
 
유상아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근처의 맨바닥에 유상아가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히 유상아로 변신한 페르세포네의 모습이 떠올라 낯이 뜨거워졌다. 
 
······. 
 
그나저나 차이나 드레스에 가터벨트라니······ 엄청났지 정말. 
 
“언니, 방금 전까지 깨어 계시다 잠드셨어요.” 
“아.” 
“혹시나 아저씨가 계속 안 일어나면, 다른 일행들한테 꼭 말해주라는 말씀도 하셨고요.” 
 
연달아 들려온 목소리에 죄책감이 크리티컬로 터졌다. 
유상아의 눈 아래에 새카만 다크서클이 내려 있었다. 본인도 숙취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 
차이나 드레스? 가터벨트? 
제기랄, 나는 쓰레기다. 
 
“이제 일어났어요?” 
 
떨어진 곳에서 정희원과 이현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땀에 젖은 모습들을 보니, 어디서 둘이 아침 대련이라도 하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정희원이 말했다. 

“독자 씨도 일어났으니, 우리도 출발 준비를 해야겠네요.” 
“출발 준비요?”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출발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어제는 많이 모여 있었던 주변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물었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여섯 번째 메인 시나리오 공지가 떴어요.” 
 
······벌써? 
내가 채 묻기도 전에, 하늘에 거대한 문자열이 떠올랐다. 
 
[생존자들은 용산역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곧장 짐을 싸서 출발했다. 
애초부터 용산구에 있었기 때문에 역까지 가는 건 그리 힘들지 않았다. 내가 유상아를 업어 들었고, 정희원과 이현성이 나머지 짐을 맡아 들었다. 
이길영과 신유승은 서로 멀찍이 떨어져 우리를 뒤따랐다. 
유중혁 일행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도착한 역 인근은 이미 생존자들의 인파로 들끓고 있었다. 
 
아직도 서울 안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모두 허공에 띄워진 거대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아······?” 
“저곳인가?” 
 
나와 일행도 그 화면을 함께 올려다보았다. 
명계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화면이었다. 
 
울창한 정글로 뒤덮인 삼림. 
그리고 그 삼림 속을 뛰어다니는 괴수들의 모습. 
 
분명 가까이서 보면 무서운 괴수들인데, 경관 전체를 찍어 놓으니 그들은 그저 거대한 생태계의 일부처럼 보였다. 
화신들의 모습도 보였다. 
벌써 사냥을 시작한 몇몇 사람들이 잘린 괴수의 목을 들어 이쪽을 향해 씩 웃고 있었다. 도깨비 놈들. 무슨 여행지 광고처럼 잘도 편집을 해놨군. 
누군가가 말했다. 
 
“어? 방금 그거 일본인 아냐?” 
 
내 기억이 맞다면 여섯 번째 시나리오는 다른 돔과 함께하는 이벤트성 시나리오였다. 
아마 방금 화면에 나왔던 남자는 일본의 유명 화신인 ‘이즈미’. 
도쿄 돔은 우리보다 진도가 빠르니까, 여섯 번째 시나리오의 투입도 더 빨랐겠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한국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스타트라 할 수 있었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Episode 23. 버려진 세계 (1) > 끝

< Episode 23. 버려진 세계 (2) >
 
 
 
 
 
메시지와 함께, 시나리오의 내용이 떠올랐다. 
 
+ 
 
<메인 시나리오 # 6 ― ????? >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 
제한시간 : ??? 
보상 : ??? 
실패시 : ― 
 
+ 
 
“어? 난이도랑 클리어 조건이 없는데?” 
“······이거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전부 물음표잖아?” 
 
당황한 사람들이 몇 번이고 창을 재호출해 보았지만, 여전히 시나리오의 내용은 물음표로 도배되어 있을 뿐이었다. 
물론, 이미 알고 있었던 나는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번 시나리오는······. 
 
“이번 시나리오는 일부 인원들만 수행할 수 있다는군요.” 
 
목소리가 들려온 쪽에 키가 큰 중년인이 서 있었다. 
 
“당신은······.” 
“오랜만입니다, 김독자님.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는 건 처음이군요.” 
 
······이 아저씨도 여기에 있었군. 
내가 입을 열려는 찰나, 남자가 먼저 악수를 청했다. 
 
“전일도입니다. ‘중립의 왕’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김독자입니다.” 
 
중립의 왕 전일도. 
미륵왕 차상경, 미희왕 민지원과 함께 ‘절대 왕좌 쟁탈전’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서울의 왕 중 하나. 
나 역시 전일도에 관해서는 인상 깊은 기억이 있었다. 
‘왕좌 쟁탈전’ 당시, 그는 유일하게 스스로의 의지로 왕좌를 포기한 왕이었으니까. 
 
“왕좌 쟁탈전 때도, 그리고 이번에도. 독자님의 활약은 무척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제 배후성이 독자님에 대해 얼마나 떠들어 대는지 모릅니다. 독자님 반만 하라고 말이죠.” 
 
전일도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로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 아저씨 배후성이 누구였더라? 
나는 곧장 스킬을 발동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특성이랑 배후성만 포함한 요약 일람으로. 
 
[요약 일람 설정이 변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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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전일도 
전용 특성 : 어설픈 지식인 (일반), 중립의 왕 (영웅) 
배후성 : 양다리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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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보고 나니 왜 봤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 양반이라면 당연히 이 성좌였을 텐데. ‘양다리 전문가’는 얼핏 보면 내연 관계가 복잡한 구닥다리 성좌일 것 같지만, 실은 ‘왕’의 수식언이다. 
 
[중립 외교를 제창하는 한 성좌가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성좌, ‘양다리 전문가’가 당신에게 호의를 드러냅니다.] 
 
양다리 전문가는 조선의 국왕이자 중립 외교의 달인으로 유명했던 ‘광해군’의 수식언이었다. 
괜히 전일도의 특성이 ‘중립의 왕’이 아닌 것이다. 
 
“방금 하신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은데요. ‘일부 인원’만 시나리오를 수행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아, 역시 모르고 계셨군요.” 
 
역시 정보가 빠른 왕들은 뭔가 아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아는 것으로 치면 내가 제일 잘 알긴 하겠지만, 그래도 들어 둘 필요는 있었다. 혹시나 내가 아는 ‘멸살법’과 달라졌을 수도 있으니까. 
 
“오전에 하급 도깨비들이 밝힌 정보에 따르면, 이번 시나리오는 지원자를 따로 뽑는다고 합니다.” 
“지원자를요?” 
“예. 이번 시나리오는 모두가 참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참가하지 않아도 패널티도 없고요. 이제껏 있었던 시나리오들을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조건이죠.” 
 
역시, 내가 아는 것과 같군. 
나는 화면을 가리키며 물었다. 
 
“참가자들은 저곳으로 가게 되는 거겠죠?”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전일도의 말을 훔쳐 들었는지, 곳곳에서 안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전부 안 가도 되는 거야?” 
“시발, 다행이다. 나 저 괴수 보고 좀 지렸는데······ 뭐가 저리 커?” 
 
이쯤 되면 시나리오의 화신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 눈치를 살피다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는 부류. 
그들은 대부분 소속이 없는 사람들로, 이제 살았다고, 적당히 묻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시나리오는 어떤 순간을 기점으로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아마도, 그들은 시나리오에 참가하지 않은 대가로 끔찍한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재밌겠는데?” 
 
그리고 두 번째 부류. 
그들은 이미 시나리오의 가혹한 환경에 어느정도 적응한 자들이었다. 
스크린을 보며 다짐을 굳히거나, 자신의 장비를 미리 점검하는 사람들. 
아마 그들은 ‘당분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부류는······. 

“전일도 님! 어디 계십니까!” 
 
인파 바깥에서 전일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전일도가 시계를 보더니 신음을 흘렸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가보시죠. 저는 괜찮습니다.” 
“아뇨, 혼자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럼 의미가 없으니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김독자님, 사실 제가 여기에 온 것은 당신을 모시기 위함입니다.” 
“저를 말입니까?” 
 
전일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이 없는 세계.” 
 
그는 그 말을 하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순간이었지만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시선을 눈치챈 듯, 전일도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불행한 세계에 남겨진 왕들이, 당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부류.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자들이다. 
 
 
* 
 
 
나는 전일도를 따라 왕들의 집결지로 향했다. 
그들은 용산역의 중앙 플랫폼에 모여 있었는데, 어디서 구해 왔는지 회의실은 거대한 천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천막 주변은 수십 명의 보초들이 지키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녀석들. 
아마 왕들이 키운 정예인 듯했다. 
우리가 신유승과 싸울 때, 아마 저들은 다른 지역에서 난립하는 괴수들을 사냥하고 있었을 것이다. 
 
“죄송하지만 지금부터는 ‘왕’만 출입할 수 있습니다.” 
 
보초의 제지에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이미 무슨 상황인지 이해한 듯, 정희원과 이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업고 있던 유상아를 이현성에게 잠시 맡겼다. 
 
“독자 씨.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비명 질러요. 알겠죠?” 
 
정희원이 저렇게 말해주니 정말 든든하다.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준 후 천막의 문을 열어젖혔다. 
 
[해당 지역에는 음파 차단 스킬이 걸려 있습니다.] 
 
얼씨구, 음파 차단까지? 
제법 그럴듯한 구색은 갖춘 모양인데······. 
안으로 들어서자, 넓직한 공간에 원형의 테이블이 갖추어져 있었다. 
어디서 구한 것인지 테이블 위에는 육포와 비스킷 몇 점도 놓여 있었다. 
앉아있는 의자들은 제각각이었다. 
누구는 플라스틱 의자였고, 누구는 원목 의자, 아예 소파를 통째로 가져온 인간도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 앉든, 그들이 앉은 곳은 분명 옥좌였다. 
살아남은 왕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그룹이 가는 게 유리하다고 말했잖나? 한국은 후발주자야. 이미 자리 잡고 있는 녀석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나? 하지만 우리 그룹이 간다면 다르네. 내가 간다면······!” 
 
쩌렁쩌렁 울리던 중년인의 목소리가, 나의 등장과 함께 사그라졌다. 
모든 왕이 나를 보고 있었다. 
 
“마지막 왕이 오셨군요.” 
 
미희왕 민지원이 말했다. 
나는 그녀를 향해 가볍게 인사하며, 왕들을 둘러 보았다. 
유중혁은······ 없군. 하긴, 당연한 일인가. 
참석한 왕들은 나를 제외하고 총 다섯 명이었다. 
 
미희왕 민지원. 
미륵왕 차상경. 
중립의 왕 전일도. 
방랑자들의 왕. 
 
이렇게 넷에, 나머지 하나는······. 
이상하다. 
내가 모르는 사람인데? 
 
“자넨 누군가?” 
“김독자입니다.” 
“아, 자네가······ 허흠, 흠. 나는 여의도의 대통령 ‘유현호’라고 하네.” 
 
······여의도의 대통령? 
대통령은 이미 죽었을 텐데 뭔 헛소리지? 
민지원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유현호 씨는 왕은 아니지만 한 세력을 이끌고 계셔서 일단 이곳에 참석하셨습니다.” 
“왕은 무슨! 다들 진짜로 지금이 조선시대인 줄 아는 건가?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어. 제발 정신 차리게!” 
 
나는 곧바로 [등장인물 일람]을 요약 버전으로 발동했다. 
 
+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유현호 
전용 특성 : 부패한 정치인 (희귀) 
배후성 : 국정농단의 달인 
전용 스킬 : [뇌물 수수 Lv.5], [군세 지휘 Lv.4], [부패한 권력 Lv.6], [대중 장악 Lv.7]······. 
 
+ 
 
······갑자기 기억이 날 것도 같다. 
국회의사당에서 첫 번째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살아남은 정치인. 
분명 몇몇 회차에 그런 인물이 있었다. 
보통은 괴수 범람 때 여의도가 지워지면서 죄다 사망하는 게 정석인데, 이번에는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성좌, ‘해상전신’이 부패한 조선의 관료에게 분노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화신 ‘유현호’를 싫어합니다.] 
 
뭔가 싶었는데, 아마 유현호의 배후성 때문인 것 같다. 
조선의 관료 중 국정 농단의 달인이 누구였더라······. 
유상아가 있었다면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그리고 이쪽의 ‘이수경’씨도······ 비슷한 이유로 참석하셨습니다. 들어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방랑자들의 왕’이라 불리시는 분입니다.” 
 
방랑자들의 왕이 나를 보았다. 여전히 그녀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나는 그 가면을 잠시 응시하다가, 좌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개는 그만하면 됐으니, 저를 부른 용건을 알고 싶은데요.” 
 
내 말에, 테이블 중앙의 좌석에 앉은 전일도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여섯 번째 시나리오’에 참가할 대표들을 선출할 생각입니다.” 
 
역시 그런 목적이었나. 
전일도의 말을 받은 것은 유현호였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현재 서울 돔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사람들일세. 김독자 씨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긴 하지만, 시나리오의 공헌도가 컸기 때문에 특별히 이 자리에 초청했으니, 영광으로 생각하게.” 
“아······ 그렇습니까?” 
 
특별히? 영광으로? 
이거 웃기는 짬뽕이네. 
내가 죽어라 시나리오 깰 동안 어디 숨어서 기회나 엿보던 자식이······. 
지금 나한테 뭐라고? 
유현호는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이제 야만에서 벗어날 때가 됐네. 잠깐 원시시대로 돌아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반복했지만, 우리 본질은 엄연한 사회계약설에 따라 행동하는 준법 시민들일세! 그러니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다음 시나리오 참가자를 뽑는 게 좋지 않겠나?” 
 
그냥 허접한 개소리 같은데, 그럴듯한 단어들이 섞여 있으니 꽤 그럴듯한 개소리로 들린다. 민지원이 대답했다. 
 
“어떤 민주적 절차를 말씀하시는 거죠?” 
“아까 말했다시피, 세력의 크기에 따라 참가 인원을 배분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네.” 
 
곧바로 태클을 건 것은 전일도였다. 
 
“단순히 숫자로 따지자면 여의도 세력의 수가 제일 많은 걸로 압니다만. 그건 형평성에 맞지 않는 제안입니다.” 
“전일도 씨, 섭섭한 말을 하는군. 우린 결국 한민족 아닌가? 특정 세력의 인원이 많이 뽑히고 말고는 사실 중요하지 않네. 어차피 시나리오에 돌입하면 타국과 마주하게 될 건데, 그때가 되면 누가 어디 그룹이니 같은 얘기는 쏙 들어갈 거야. 적이 눈앞에 있는데 우리끼리 다툴 셈인가?” 
 
그야말로 정치적인 물타기였지만, 전일도도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다. 
 
“누가 뽑히든 중요하지 않은 거라면, 굳이 그쪽 그룹을 많이 뽑을 이유도 없을 것 같습니다만.” 
“어험, 그러니까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세력이 많은 인원을······.” 
 
나는 듣다가 짜증이 나서 끼어들었다. 
 
“고작 이런 이야기나 하려고 모인 겁니까? 애초에 사람을 왜 가려 뽑는지 모르겠군요. 가고 싶은 사람들 다 보내 주면 될 텐데.”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습니다만, 상황이 좀 변했습니다.” 
“변했다고요?” 
 
민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시나리오는 할당 인원이 제한되어 있어요.” 
 
······제한 됐다고? 
 
“왕들은 도깨비한테 따로 메시지가 갔을 텐데, 아직 못 받으셨나 보네요.”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서울 돔의 초기 할당 인원은 총 10명입니다.] 
[투입된 화신들의 시나리오 진척에 따라 추가 할당 인원이 결정됩니다.] 
 
아하, 이래서 다툰 거였군. 
시나리오를 두려워하는 다른 화신들과는 달리, ‘왕’들은 시나리오의 조기 선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만약 초기 할당 인원에 자신의 세력을 투입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의 시나리오 주도권은 자신의 그룹에게 넘어온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결국, 이 자리는 왕들의 의자 뺏기 싸움을 위해 마련된 셈이다. 
 
“내 그룹이 가겠어요. 해당 시나리오 지역에는 일본인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신라의 후예인 내가 앞장서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아니, 내가 가야지. 백제는 예로부터 일본이랑 교류가 많았다고.” 
“그건 백제고, 당신 배후성은 후백제 사람이잖아요.” 
“다들 무슨 소린가? 당연히 내가 가야 하네. 어디서 그런 구닥다리 배후성들을 믿고······.” 
“잠깐만, 여러분. 조금 진정하시고······.” 
 
뒤늦게 전일도가 나섰지만 혼란은 중재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곁을 돌아보는데, 방랑자들의 왕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아까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반가면 사이로, 미묘하게 웃는 입이 보였다. 
 
어디 내가 해결해보라 이건가. 
 
기세가 오른 왕들은 이제 유혈사태라도 마다할 것처럼 사나운 분위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우리끼리 여기서 다퉈봐야, 아무짝에도 소용없습니다.” 
 
그 말에 왕들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부라리는 유현호. 
나는 희미하게 울리는 땅의 진동을 느끼며 테이블 위의 비스킷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제야 오시는군. 
왜 이렇게 늦나 싶었지. 
 
“아직, 마지막 ‘왕’이 안 왔으니까요.” 
 
내가 비스킷을 깨묾과 동시에, 천막의 한쪽이 폭발하며 자칭 여의도의 대통령이 비명과 함께 엎어졌다. 
 
“끄아아악!” 
 
엎어진 유현호의 등을 짓이기며 나타난 한 남자의 모습. 
녀석이 뚫고 온 천막 뒤로 피를 뿜으며 너부러진 수십의 보초들이 보였다. 
역시 우리의 회귀자답다. 
몇 회차든 저 성질머리는 어디로 가는 법이 없지. 
특유의 흉흉한 눈길이 좌중을 훑더니 이내 나를 향해 고정되었다. 
 
“패, 패왕······!” 
 
몇몇 왕들이 사색이 되어 신음을 흘렸다. 
그러자 패왕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다음 시나리오에 참가할 인원을 발표하겠다.”
 
 
 
 
 
< Episode 23. 버려진 세계 (2) > 끝

< Episode 23. 버려진 세계 (3) >
 
 
 
 
 
역시, 이견의 여지 따윈 없다. 
저놈에게 시나리오 인원 선별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발표의 대상인 것이다. 
 
“불만이 있다면 지금 듣도록 하지.” 
 
저렇게 무시무시한 살기를 줄기차게 뿜어대는데 불만이 있을 턱이 있겠나. 
유중혁의 압도적인 무력을 아는 왕들은 감히 반항할 생각조차 못하고 몸을 떨었다. 
아, 한 사람만 빼고. 
 
“비, 비켜! 발 치우라고!” 
 
불행하게도, 자칭 여의도의 대통령께서는 패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하신 모양이다. 정치인이란 사람이 저렇게 소문에 둔감해서야. 
 
“네놈은 뭔데 갑자기 나타나서······!” 
 
꽈직! 
 
“끄아아아악!” 
 
손이 으깨진 유현호가 비명을 질렀다. 
 
“내 손! 내 손!” 
 
꽈지직! 
 
“끄아아아악! 경호원! 경호원 어디 있나!” 
 
사지가 으스러진 유현호가 꿈틀거리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곳 어디에도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유중혁의 발이 녀석의 등을 꾸욱 눌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현호는 끄으윽, 하는 숨소리를 뱉으며 혼절했다. 
사방이 고요해지자,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없나 보군. 그럼 명단을 발표하겠다.” 
 
왕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역시, 유중혁이 대단하긴 하다. 
이렇게 쉽게 권력의 추를 빼앗아 가다니······. 
왕들은 순식간에 ‘뽑는’ 입장에서 ‘뽑히는’ 입장으로 전락해버렸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육포 하나를 뜯으며 유중혁의 말을 기다렸다. 
곁에 있던 미희왕 민지원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요?」 
 
미안하지만, 나는 그쪽들이랑 처지가 다른 상황이라 이거지. 
왜냐하면 이 몸은 무려 저 유중혁이 ‘동료’로 인정한 몸이니까. 
맹세는 끝났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나를 위협하긴 해도, 저놈은 결국 내 필요성을 인정한 셈이다.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첫 번째는 물론 나다.” 
 
······뭐, 당연한 일이겠지. 
지가 만든 명단에 자기가 없을 턱이 있나. 
유중혁의 등 뒤로, 어느새 녀석의 일행이 도착해 있었다. 
이지혜와 이설화. 
걱정스러운 눈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이현성과 정희원도 보였다. 특히 정희원은 당장이라도 뛰어올 기세라, 나는 눈짓으로 그녀를 말렸다. 
유중혁의 말이 이어졌다. 
 
“두 번째는 이지혜.” 
 
당연히 두 번째는 나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하긴, 나는 본래 동료 명단에 없던 인물이니까 날 먼저 기용하면 다른 동료들이 섭섭해할 수도 있겠지. 
저 녀석이 냉정해보여도 은근히 자기 사람은 챙기는 면이 있다. 
그 마음 이해한다 인마. 
기쁨을 숨기지 못한 이지혜가 나를 보며 입꼬리를 씩 올리고 있었다. 
······조금 짜증나는데. 
 
“세 번째는 이설화.” 
 
이설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왔다. 
한 사람의 이름이 이어질 때마다, 왕들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다들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저 명단이 바로 확정 명단이 될 것이란 사실을. 
 
「남은 인원은 7명이야. 아직 우리에게도 기회는 있어.」 
「패왕의 일행은 저 셋뿐이니까, 남은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일행이 아닌 다른 사람을 뽑아야 해.」 
「그나마 남은 사람들 중엔 우리가 제일 강하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이는 얼굴들이다. 
나? 물론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나야 당연히 명단에 있을 테니까. 
아마 다음 차례야말로······. 
 
“네 번째는 이현성.” 
 
······뭐? 
뒤쪽에 있던 이현성은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저, 저 말씀이십니까······?” 
 
유중혁은 그 말을 무시하고 그 옆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다섯 번째는 정희원.” 
“······나요?” 
 
화들짝 놀란 정희원이 눈을 크게 떴다. 
정희원을 뽑은 것은 나로서도 의외였다. 
이 자식이 지금 내 일행들까지 막 뽑고 있잖아? 
 
“여섯 번째는 이길영.” 
“······어? 네?” 
 
이어서 유중혁은 이길영의 옆에 있던 신유승을 바라보았다. 
신유승은 순간 두려운 눈으로 이길영의 뒤에 숨었다. 
당황한 이길영은 잠깐 안절부절못하더니 이내 뭔가를 결심한 듯 신유승의 앞을 막아섰다. 유중혁은 알 수 없는 눈길로 그런 두 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유중혁의 눈길이 내게 꽂혔다. 
 
그래, 드디어 내 차례로군. 
 
일부러 마지막에 배치해주셨다 이거지? 
과연 주인공, 연출을 아는 놈이다. 
 
“······나머지는, 알아서 결정해라.” 
 
순간 육포가 통째로 넘어가는 바람에 나는 헛기침을 했다. 
유중혁은 마지막으로 천막 안을 쓱 둘러 보고, 마지막으로 한심하다는 듯 나를 보더니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등을 돌려 나갔다. 
 
뭐야, 그게 다야? 
진짜로? 
······그럼 나는? 
왜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건데? 
 
뒤늦게 쫓아 나갔을 때, 유중혁은 벌써 저만치 사라진 후였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멀거니 서 있는 나를 향해 정희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둘이 친한 사이 아니었어요?”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흐뭇하게 웃습니다.] 
 
이지혜도 이상하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저씨, 새벽에 우리 사부랑 만난 거 아니었어? 난 아저씨 당연히 명단에 있을 줄 알았는데······.” 
“뭔 소리야?” 
“새벽에 사부가 아저씨 만나러 간다고 그랬는데?” 
“새벽 언제?” 
“아마 한두 시쯤? 혹시 자고 있었어?” 
 
나는 곰곰이 시간을 헤아려 보았다. 
새벽 한 시에서 두 시 사이. 
그때면 명계로 가기 직전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나 깨어있었는데, 유중혁은 안 왔어.” 
“이상하네, 사부 분명히 갔다 왔는데? 그리고 갔다 와서 약간 화난 거 같았어.” 
“화나?” 
“사부가 화날 때 짓는 표정 있잖아. 왜, 사람 약간 경멸하는 듯한······.” 
 
나는 그때의 기억을 곰곰이 반추해 보았다. 
명계로 가기 직전에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아, 그래. 기억난다. 
그때 나는 유상아랑 술을 마시고 있었다. 디오니소스가 술을 마구 쏟으며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었고, 그리고······ 어······ 음.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흐뭇하게 웃습니다.] 
[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나는 조금 복잡한 기분으로 그때 있었던 일을 일행들에게 설명했다. 
그러자, 일행들은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정희원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다그쳤다. 
 
“······유상아 씨랑 키스했다고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제 말을 뭘로 들으신 겁니까?” 
“진짜 디오니소스 때문이에요? 술 취한 척 한 게 아니라?” 
“디오니소스 때문이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정희원이 의심스럽다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이 얘기 괜히 꺼냈나? 
 
“흐음······ 아마 유중혁 씨가 그걸 본 게 아닐까요? 그래서 분위기상 빠져줬다거나······.” 
“유중혁은 그럴 놈이 아닌데요.” 
“게다가 유중혁 씨가 독자 씨 키스 현장을 목격했다고 해도, 기분이 상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키스 안 했다니까요.” 
 
내가 투덜대자, 이지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 나 알 것 같은데······.”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그것은 전우애라고 말합니다.] 
 
정희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전우애?” 
 
이지혜가 대폭소를 했다. 
 
“언니 배후성이 그래요? 그게 전우애래요?” 
“이게 뭔 뜻인데?” 
“전우애라면, 제가 알 것 같습니다.” 
 
뜻밖에도, 이현성이 손을 들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저도 독자 씨가 그러고 있으면 기분이 나쁠 것 같거든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뜻밖의 발언에 콧김을 뿜습니다] 
 
“······네? 현성 아저씨가 왜 기분이 나빠요?” 
 
이지혜는 이제 거의 코피라도 쏟을 듯한 표정이었다. 
이현성의 표정은 진지했다. 난 또 무슨 폭탄 발언이 나올까봐 긴장하며 이현성의 말을 들었다. 
 
“우리는 매번 목숨을 걸고 시나리오에 임하고 있습니다. 유중혁 씨도 저도, 매일 아침마다 다음 시나리오를 위해 열심히 자신의 몸을 단련하고 있고요. 오직 전우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매일매일을 혹독한 훈련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에?” 
 
기대했던 대답이 아닌 듯, 이지혜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정희원은 과연 그런 건가, 하는 얼굴로 이현성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 등 뒤를 지킬 전우가 성욕에 눈이 멀어 희희낙락하고 있다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지요. 배신감도 들고. 제가 본 유중혁 씨는 굉장히 금욕적인 분인 데다, 군인이 아님에도 군인 정신이 굉장히 투철한 분이셨습니다. 그런 유중혁 씨라면, 군기가 문란해질 만한 일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할 거라 생각합니다. 분명 전우애가 무너지는 기분이겠지요.” 
“음······ 뭐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네요.” 
 
정희원이 동의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화신에게 실망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이현성의 잘못된 전우애에 분개합니다.] 
 
의외로 이현성의 말을 듣다 보니 진짜로 그런 건가 싶었다. 
문득 떠오르는 ‘멸살법’의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텍본을 열어 유중혁의 3회차를 조금 살펴보았고, 실제로 증거가 될 만한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한심한 놈. 여자한테 한눈이나 팔고 있다니.」 
「성욕이 강한 놈들은 동료 명단에서 배제한다. 자칫 일을 그르치기 쉬우니까.」 
 
정말 그런 오해를 하고 있다면 억울한 일이었다. 
진짜 키스라도 했으면 모를까, 난 뽀뽀도 안 했다고. 
젠장, 이제와서 그건 다 오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김독자 씨? 슬슬 나머지 인원을 뽑을까 싶은데요.” 
 
어느새 다가온 민지원이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다른 왕들도 나를 보고 있었다. 
 
“패왕이 여섯을 데려가기로 했으니, 남은 인원은 넷이군요.” 
“이 중에서 넷을 뽑아야 한다는 건데······.” 
 
여의도 세력은 이미 박살 났으니, 이제 남은 왕은 나까지 다섯. 
눈치를 보던 미륵왕 차상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험, 어차피 넷밖에 안 남았으니, 남은 인원은······.” 
“대장전으로 결정하는 게 어떻습니까?” 
 
의견을 제시한 것은 나였다. 
 
“어차피 말로 계속 다퉈봐야 시간만 허비할 뿐입니다. 다들 자기 세력으로 할당 인원을 채우고 싶은 건 마찬가지일 테니, 대장전으로 승부를 봅시다. 이긴 왕이 나머지 할당을 모두 갖는 걸로 하죠.” 
 
내 말에 왕들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대답이 나왔다. 
 
“좋습니다.” 
 
 
* 
 
 
이번에도, 중립의 왕 전일도는 제일 먼저 기권을 선언했다. 
 
“저는 남겠습니다. 누군가는 여기 남아서 사람들을 통솔해야 하기도 하고······.” 
 
현명한 선택이다. 
어차피 시나리오에서 선방하지 못할 거라면 이곳에서 권력 기반을 다지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그리고 아직 사람들은 모르고 있지만, 남겨진 화신들을 위한 시나리오도 분명 존재하고 있다. 
강한 자극을 좋아하는 도깨비들이 화신들을 평화롭게 놓아둘 리 없지. 
방랑자들의 왕도 간단히 손을 들어 기권의 의사를 표했다. 
다른 왕들은 의외라는 듯한 눈치였지만, 경쟁자가 줄어 다행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민지원이 나를 보며 자신만만한 투로 말했다. 
 
“그때 같은 편법은 통하지 않을 거예요.” 
 
아마 내가 비축한 코인을 써서 ‘왕좌 쟁탈전’에서 승리했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 내가 어지간히 얕보였다 이거지? 
우리는 각자 한 번씩 상대를 바꿔가며 싸웠다. 
승부가 나기까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누가 이겼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는 얘기다. 
 
“말도 안 돼······ 패왕만 괴물인 줄 알았는데. 대체 어떻게 이렇게 강해진 거죠?” 
 
차상경은 피떡이 되어 너부러졌고, 민지원은 온몸에 멍이든 채 숨을 헐떡거리며 내게 말했다. 
그러게, 처음부터 그냥 이렇게 했으면 편했을 것을.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10명은 초기 할당 인원일 뿐이니까, 다들 기다리고 계세요. 두 번째 할당도 금방 시작될 테니까요.” 
“······하아, 별수 없죠. 네 자릴 얻으셨는데 누굴 데리고 가실 건가요?” 
“하나는 저고, 다른 하나는 저 아입니다.” 
 
내 눈짓에 신유승의 안색이 밝아졌다. 
혼자 남겨질까 걱정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머지 둘은······ 생각해 둔 사람이 있습니다.” 
“전 아닌 거죠?” 
“네, 민지원 씨는 아닙니다.” 
“칫······ 알겠어요.” 
 
민지원이 먼지를 털고 일어났다. 침울해진 왕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비웠다. 나는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먼저들 가세요. 저는 잠시 할 일이 있어서. 조금 있다가 역 앞에서 만나기로 하죠.” 
 
고개를 끄덕인 일행들마저 천막 밖으로 사라지자, 사람들로 북적이던 내부는 순식간에 휑해졌다. 
 
······.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마침내 천막 안에는 나와 다른 한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가면을 쓴 여인. 
그리고 처음으로, 그녀의 입이 열렸다. 
 
“친구들이 많이 생긴 모양이구나.” 
 
마지막까지도 망설였다. 
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지. 
하지만, 다음 시나리오에 필요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야만 한다. 
나는 가볍게 숨을 몰아쉰 후, 방랑자들의 왕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엄마.”
 
 
 
 
 
< Episode 23. 버려진 세계 (3) > 끝

< Episode 23. 버려진 세계 (4) >
 
 
 
 
 
내 말에, 방랑자들의 왕이 희미하게 웃었다. 
 
“오랜만이라니? 지난번에도 봤잖니.” 
“그땐 그냥 지나쳤으니까요.” 
 
지금까지 방랑자들의 왕을 본 것은 총 두 번이다. 
첫 번째는 한수영과 함께 인외종 송민우를 해치웠을 때, 두 번째는 범람의 재앙을 해치웠을 때.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 
방랑자들의 왕이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역시, 여전한 얼굴이다. 
 
“언제 출소하셨어요?” 
“좀 됐어.” 
 
우리는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엄마와 나는 전혀 닮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30대 후반으로밖에 안 보이는 얼굴. 
어렸을 때는 사촌 누나가 아니냐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러니까, 아직 아빠가 있었을 적에는 말이다. 
 
“서울에 살고 계셨어요?” 
“잠깐 아는 사람 만나러 왔어.” 
“아하, 그래서 우연히 서울 돔에 갇히셨다······?” 
“그래.” 
“출소도 하셨는데 죄수복은 왜 다시 입으셨어요?” 
“글쎄. 속죄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랄까?” 
“······속죄? 당신이?” 
“인간은 모두가 죄수란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감옥이 있는 법이지.” 
 
나는 어머니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저 뻔뻔한 말투. 
정말이지 변한 게 하나도 없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해줘도 되지 않니? 내가 없었으면 곤란했을 텐데.” 
 
······확실히, 도움은 됐다. 
어머니는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북쪽의 재앙을 처치했으니까. 
아무리 약한 재앙이었다 해도, 대단한 일이다. 
사실 제대로 해줄 거라 믿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증오하는 만큼, 어머니를 잘 알고 있으니까. 
 
“모처럼 만났는데 반갑다는 내색조차 없구나.” 
“정말 그런 걸 바라세요?” 
“조금은.” 
 
[전용 스킬, ‘거짓 간파 Lv.1’이 발동합니다!] 
[당신은 해당 발언이 거짓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우습다. 
거짓일 걸 알면서도 굳이 확인 해보는 내 처지가. 
 
“그 와중에 살아남으셨다니, 대단한 생존력이시네요.” 
“네가 들려준 이야기 덕분이지.” 
“······역시 그랬군요.” 
“교도소까지 엄마를 만나러 와서 자기가 읽은 소설 이야기만 하는 건 너 하나뿐일 거야.” 
 
분명 그랬다. 
교도소에서 주어진 면회시간 내내, 나는 한 번도 어머니와 제대로 대화해 본 적이 없었다. 
면담 시간 나는 ‘멸살법’에 관한 이야기만을 떠들었고. 
그것마저 지겨워졌을 때, 나는 면회를 그만두었다. 
 
“그것 말고는 할 얘기가 없었으니까요.” 
“그럴 리가 있어?” 
“그 소설이 제 전부였어요.” 
 
잠깐이지만 과거의 잔상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멸살법이 없었더라면, 그 이야기를 끈덕지게 연재해준 작가가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 나는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던 10대의 김독자에게, 유일하게 위로가 되었던 것은 그 이야기뿐이었으니까. 
 
“고작 삼류 판타지 소설······.” 
“결국 그 덕분에 살아남으셨으니, 그 삼류 소설에 고마워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우리는 잠시 입을 다문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묘한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슬픈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내 쪽이었다. 
 
“무슨 특성을 얻으셨죠? 아마 제가 들려준 얘기랑 관계된 특성일 것 같은데.” 
“내가 말해 줘야 하나?” 
“아직 절 자식으로 생각하신다면.” 
“너는 나를 엄마로 생각하는지 궁금하구나.” 
“조금은요.” 
 
[인물 ‘이수경’이 ‘거짓 간파 Lv.1’를 발동하였습니다!] 
[‘이수경’은 해당 발언이 거짓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빌어먹을. 
벌써 이 스킬까지 가지고 있다니, 내 어머니가 맞긴 맞군. 
어머니의 표정에 미미한 비감이 서렸다. 그것이 연기인지 아닌지, 지금의 나로서는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아직도 나를 원망하고 있니?” 
“그런 얘길 하러 온 게 아니에요.” 
“네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었다.” 
“알아요.” 
 
세상에는 분명 ‘나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부류는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불법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며 가족의 생계를 위협한다. 
그러니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다. 
나도 알고, 엄마도 알고, 한국의 법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었다고 해서, 당신이 한 짓이 옳은 일이 되는 건 아니에요.” 
“더 나은 삶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야.” 
“한국에 그런 ‘법’은 없어요. 어떤 이유로든 살인을 저지른 인간이 감옥에 가야 한다는 ‘법’은 있지만.” 
“소설만 봐서 그런지 말은 잘하는구나.” 
“내겐 현실이 더 소설 같았어요. 당신 때문에.” 

이쯤 되면 이미 평범한 모자간의 대화가 아니다. 
아마도, 이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야기를 하면 어떤 꼴이 될지 잘 알고 있으니까. 
서로 어떤 상처를 주고, 어떤 상처를 받아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왜 찾아왔는지 알고 있죠?” 
“글쎄.” 
“피차 거짓말은 알 수 있는 상황이니까, 시치미떼는 건 그만두죠.” 
 
어머니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죄수번호 406번 단 할머니 있죠? 나한테 빌려줘요.” 
“······그 할머니보단 전우치를 배후성으로 가진 화신을 데리고 가는 게 좋을 텐데? 내겐 꽤 쓸만한 화신들이 많이 있단다.” 
“전우치는 엄마 심복이잖아요. 그리고 그 할머니가 더 도움이 돼요.” 
 
어머니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상대가 상대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런데 406번의 배후성은 어떻게 알았니?” 
“말할 수 없어요.” 
“너, 배후성을 알 수 있는 스킬이 있나 보구나?” 
 
역시 어머니한테는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다. 
 
“빌려줄 거예요, 말 거예요?” 
“빌려주마. 대신.” 
 
이어질 말이 조금 두려웠다. 
어머니라면, 내가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거래를 제안할 것이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다음번엔 네 친구들도 소개시켜 주렴.” 
 
나는 잠시 벙쪄서 다음 말을 찾지 못했다. 
······제길. 
완전히 한 방 먹었군. 
나쁜 사람을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건, 세상에서 우리 엄마가 제일 잘 하는 일이었는데. 
 
“독자야. 현실을 똑바로 보렴. 허구가 현실이 되었다고 해도, 정말 허구를 현실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제4의 벽’이 격렬하게 흔들립니다.] 
 
고작 말 몇 마디 들었다고, 세계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다. 
확실히 알겠다. 
내게 이 사람은, 내가 싫어하는 ‘현실’을 가장 강하게 상기시키는 사람이다. 
 
“알겠니?” 
 
[성흔. ‘자기 합리화 Lv.1’이 발동합니다.] 
 
역겹다. 이제와서 엄마 노릇을 하려는 저 태도가. 
모든 것을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많은 강을 건너 와버렸는데. 
 
[‘제4의 벽’의 흔들림이 잦아듭니다.] 
 
더는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맞아. 나는 ‘허구를 현실처럼’ 생각해요. 왜냐고? 줄곧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 
“당신 눈엔 그게 한심해 보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건 알아둬. 난 적어도, 당신이 그랬듯 ‘현실을 허구처럼’ 팔아넘기지는 않아.”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천막을 젖히고 밖으로 나왔다. 
서늘한 공기가 코트의 깃을 파고들었다. 단추를 여미며 앞을 보는데, 살짝 놀란 듯한 유상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 있었다. 
 
“죄, 죄송해요······ 독자 씨가 너무 늦으셔서······.” 
 
곤란하다. 
아니, 곤란하기보다는······. 
어쩐지 민망하다. 
 
“······혹시 들었어요?” 
 
유상아는 정말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작은 정수리가 보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걸을까요?” 
 
우리는 용산역의 플랫폼을 따라 발을 맞춰 걸었다. 
아까는 분명 찬바람이었는데, 그새 기온이 변했는지 뺨을 스치는 바람의 느낌이 달라져 있었다. 머리 감을 시간도 없었을 텐데, 흩날리는 유상아의 머리카락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숙취는 좀 어때요?” 
“괜찮아요. 그런데 저 업고 오셨다고 들었어요. 죄송해요. 또 민폐만 끼쳤네요.” 
“저 돌봐주시느라 그런 건데요 뭐.”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시죠? 왜 엄마랑 아들이, 저런 식으로 얘기하는지.”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하다는 표정인데. 
 
“알고 싶어요?” 
 
유상아의 눈빛이 한순간 흔들렸다. 
 
“······실례가 안 된다면요.” 
 
나는 옅게 웃었다. 
그래, 이제 말할 때도 됐지.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허공에 숨을 한 번 뱉고는, 과장되게 비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를 죽였어요.” 
 
이상하게도, 내 말은 우스꽝스럽게 들렸다. 
내 입으로 말하는데도,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 같았다. 
 
“그 죄로 감옥에 갔고요.”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저희 아버지······,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죽을 만한 사람이었어요. 가정 폭력에, 도박에, 보증에······ 우리 엄마 매일 맞으면서 살았거든요. 멍이 마르는 날이 없었어요. 나도 가끔 맞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엄마가 결심을 했고, 일이 터진거죠.” 
“아······.” 
“회사에서도 꽤 소문난 줄 알았는데, 유상아 씨는 모르셨나 봐요?” 
 
유상아는 대답이 없었다. 
뒤늦게 그녀는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건드리면 안 될 상처를 건드렸다는 것을. 
 
“이제 더 이상하게 느끼고 계시죠? 법적으론 분명 잘못했지만, 그런 어머니를 제가 왜 미워하는지, 심정적으론 이해하지 못하시겠죠.” 
“아니에요! 제가 독자 씨가 아니라서 완전히 이해는 못해도······.” 
“솔직히 제가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죠?” 
 
유상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건드린 상처는 이미 터졌으니까. 
나는 어색한 침묵이 차오를 때쯤 다시 입을 열었다. 
 
“『지하살인자의 수기』라는 책, 혹시 알아요? 예전에 교보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적도 있는데.” 
 
갑자기 나온 책 이야기. 
유상아는 화제가 바뀌었다고 생각했는지, 살짝 반색하며 말했다. 
 
“들어 본 거 같아요. 아마 굉장한 베스트셀러였죠?” 
“학대당하던 여자가 남편을 죽인 후 감옥에서 쓴 에세이죠. 당시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았어요. 에세이 문학에서 한국판 ‘지하생활자의 수기’가 나왔다면서요. 물론, 완전히 과대평가지만.” 
 
거기까지 듣던 유상아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녀는 눈치챈 것이다. 
화제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맞아요. 우리 엄마가 쓴 거예요.” 
 
유상아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지금도 생각나요. 집 앞에 기자들 잔뜩 찾아왔던 거. 그 에세이가 모두 진짜냐면서 묻던 그 말들, 전부.” 
“······.” 
“반 친구들이 했던 말들도 하나하나 다 기억해요. 너네 엄마, 살인한 거 팔아서 돈 벌고 있냐고.” 
“독자 씨······.” 
“친척들도 말했어요. 대체 네 어미는 살인범이 무슨 낯짝으로 신문에 얼굴을 들이미는 거냐고.” 
 
뭐라 말하려 하던 유상아가 입을 다물었다. 
 
“조금 힘들었어요. 그것 때문에. 아니, 어쩌면 꽤 오랫동안.” 
“······.”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것까진 견딜만 해요. 하지만, 그게 이야기가 되어 팔려 나가는 건 다른 종류의 문제에요. 내 삶이 누군가에 의해 돈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요.” 
 
나는 하늘을 보았다. 
아직 밤이 아닌데도, 저 먼 성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느껴졌다. 
아마 이것도 그들에겐 이야기가 되고 있겠지. 
그러나 어떤 성좌도 지금만큼은 내게 후원을 하지 않았다. 
그걸 내가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까? 
알 수 없었다. 
 
“아직도 내가 어머니를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답은 바라지 않는다. 
애초에 이해를 바라고 한 말이 아니니까. 
어쩌면 이것은, 배배 꼬인 내가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온 유상아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추악한 형태의 폭력이었다. 
멋대로 자신의 불행을 전시해놓고, 누군가에게 불가능한 이해를 강요하는 일. 
착한 유상아는 그것이 이해 불가능한 일임을 알기에 슬퍼할 것이다. 
나는 혼자서 알 수 없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웃었다. 
 
“미안해요. 사실 다 농담이었어요.” 
“네?” 
“다 거짓말이에요. 깜빡 속았죠? 그런 소설 같은 일이 있을 리 없잖아요? 엄마랑 나는 그냥 평범한 모자 사이고, 아빠는 그냥 어릴 때 사고로······.” 
 
그리고, 작고 보드라운 뭔가가 내 손에 감겼다. 
그 감촉이 너무나 포근했기에, 나는 순간 하려던 말을 잊고 말았다. 
잠시······ 아주 잠시, 걸음이 멈췄다. 
유상아는 나를 보지 않고 있었다. 
그랬기에, 나 역시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마주보지 않은 채로, 손을 잡은 채 걸었다. 
마치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이.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씩 차분해졌다. 
 
[‘제4의 벽’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어쩌면, 너무나 현실적인 체온이었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독자 씨!” 
 
역의 입구에서 일행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서, 우리는 반사적으로 잡았던 손을 놓았다. 달려온 정희원이 물었다. 
 
“뭐야, 또 둘이 키스했어요?” 
“키, 키스요?” 
“유상아 씨 얼굴 빨개지는 것 봐. 했네, 했어!” 
 
확실히, 내가 유상아를 조금만 더 몰랐더라면 충분히 착각할 법한 표정이었다. 
 
“그만 놀리세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예에, 어련하시겠어요.” 
 
정희원이 나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상한 할머니가 우리 찾아왔어요. 혹시 독자 씨가 부른 거예요?” 
 
일행의 뒤쪽에서 지팡이를 짚은 노파가 걸어 나왔다. 
 
“흘흘, 이 늙은 몸이 무슨 쓸모가 있다고······.” 
 
할머니는, 엄마의 그룹에 소속된 다른 방랑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색 수감복을 입고 있었다. 
죄수번호 406번. 
역시, 엄마는 일처리가 빠른 사람이다. 
 
“그쪽 젊은이가 김독자인가?” 
“네, 접니다.” 
“수경 씨한테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잘 부탁함세.”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수경은 엄마의 이름이다. 
나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제가 부른 분이 맞습니다. 이제 출발하죠.” 

우리는 곧장 용산역을 나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갔다. 이미 그곳에는 유중혁 일행을 포함한 왕들이 모여 있었다. 
[그레이트 홀]을 통해, 새하얀 백색의 수정이 하늘에서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휘황한 빛을 뿌리는 수정. 
 
[워프 크리스탈]. 
 
이것이 바로, 우리를 다음 시나리오 지역으로 이동시켜 줄 아이템이었다.
 
 
 
 
 
< Episode 23. 버려진 세계 (4) > 끝

< Episode 23. 버려진 세계 (5) >
 
 
 
 
 
수정에는 정확히 다섯 개의 홈이 있었다. 
그곳에 무엇을 꽂아야 할지는, 나도 유중혁도 잘 알고 있었다. 
곁에 선 나를 보며, 유중혁이 말했다. 
 
“왔군.” 
“그래. 아쉽게도 말이야.” 
“이번엔 빠져도 상관없다.” 
 
뜻밖의 말에 나는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여전히 나를 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것 같던데.” 
“······뭐?” 
“힘들어질 거다.” 
 
순간 풀리지 않던 뭔가가 이해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설마, 날 일부러 뺀 게 날 따돌린 게 아니라 배려해준 거였나? 
말도 안 된다. 그 유중혁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꼭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2회차의 유중혁은, 자신의 눈앞에서 이설화를 잃었으니까. 
아마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에 관한 한, 유중혁은 이 세계 최고의 권위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사이 아냐. 내 얼굴에 사랑이 가당키나 하겠냐?” 
 
의도는 아니었는데, 말하고 보니 뭔가 자기비하처럼 들린다. 
하지만 먼저 이렇게 말했으니, 예의상이라도 괜찮은 얼굴이라 해주겠지. 
유중혁이 가만히 내 얼굴을 노려보다가 말했다. 
 
“확실히, 죽어도 상관없겠군.” 
 
제기랄. 
 
“말 좀 곱게 해 인마. 상처받으니까.” 
“아직 한 방 남은 거 잊지 마라.” 
“······아, 그래. 거의 잊고 있었는데 상기시켜줘서 더럽게 고맙다.” 
 
가만 보면 이 자식은 내가 살 길 바라는 건지 죽길 바라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그룹 채팅을 통해 일행들에게 곧바로 할 말을 전했다. 
 
―지금부터 주의사항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룹 채팅을 사용한다는 것은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 
일행들은 적당히 딴청을 피우는 척하면서 내 이야기에 집중했다. 
 
―워프 크리스탈은 두 명씩 입장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때문에, 미리 말씀드렸던 것처럼 2인 1조로 움직일 겁니다. 
―저랑 유승이가 1조, 희원 씨와 현성 씨가 2조, 유상아 씨와 406번 할머니가 3조입니다. 길영이는 짝이 없어서, 유중혁 그룹의 지혜가 같이 다녀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유중혁이 저놈은······ 뭐 지가 알아서 하겠죠. 
―크리스탈을 통해 움직이면 잠깐 현기증이 날 수도 있는데, 너무 당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마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시나리오가 뜰 겁니다. 명심하실 것은, 시나리오 내용이 떴을 때······. 
 
그렇게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고 있는데, 훼방을 놓은 것은 워프 크리스탈 위로 갑자기 나타난 도깨비였다. 
 
[잠깐만요. 정말 죄송하지만, 긴급 공지가 있겠습니다.] 
 
긴급 공지? 
 
[깜빡 잊고 있었는데, 서울 돔에서 참가 가능한 초기 할당 인원은 10명이 아니라 8명입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참가자가 모두 정해진 마당에 그런 얘기가 나오다니······. 
자세히 보니 이 녀석, 얼마 전 명계에서 나한테 시나리오 갱신에 관해 묻던 그놈이다. 
도깨비 영기라고 했던가? 
 
[그게······ 다섯 번째 시나리오가 진행되던 중 차원의 일부가 뒤틀리면서 여섯 번째 시나리오로 넘어 가버린 분들이 계십니다.] 
 
“······이미 들어가 있는 사람이 있다고?” 
 
[예, 서울 돔에서는 현재 두 분이 이미 시나리오에 돌입한 상태입니다.] 
 
그러고 보니, 공필두와 한수영이 이미 시나리오에 들어가 있었지. 
명계에서 그 화면을 봤었는데, 잠깐 잊고 있었다. 
그나저나 차원의 일부가 뒤틀릴 정도였다니. 
중급 도깨비가 날 죽이려고 어지간히 시나리오에 간섭했던 모양이다. 
 
[시나리오 오류로 돌입한 인원이긴 하지만, 공정성을 위해 기존의 할당 인원 중 두 명을 제하겠습니다.] 
 
“뭐야! 그런 게 어딨어! 그럼 대체 누가 빠지라는 건데!” 
 
정작 가지도 않는 사람들이 더 난리를 쳤다. 
일행들이 곤란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심지어는 유중혁도 나를 보고 있었다. 
네가 알아서 결정하라는 표정이다. 
젠장······. 
뜻밖에도 먼저 손을 든 것은 유상아였다. 
 
“제가 빠질게요.” 
 
내 곤란함을 눈치채고, 먼저 배려해준 그 마음이 기꺼웠다. 
하지만 유상아는 빠지더라도, 저 할머니는 데려가야 하는데. 
뒤이어 손을 든 것은 정희원이었다. 
 
“저도 빠지죠 뭐. 어차피 곧 2차 할당도 있다면서요?” 
“괜찮겠습니까?” 
“오늘 독자 씨가 좀 맹해 보여서 걱정되긴 하는데······ 알아서 잘 하겠죠 뭐. 이번엔 저 무서운 남자도 같은 편인 거 같고.” 
 
확실히, 정희원과 유상아라면 두고 가도 안심이었다. 
설령 2차 할당에서 또 경합이 벌어지더라도, 저 둘이면 충분히 경쟁을 뚫고 올라올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이 빠지고, 할머니는 이현성이 데리고 가기로 했다. 
할머니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떠나기 직전, 나는 유상아에게 귓속말을 했다. 
 
“아까 말하는 걸 잊었는데, 방랑자들의 왕한테 전일도를 조심하라고 전해주세요. 이미 알고 있을 것 같긴 하지만.” 
 
고개를 끄덕인 유상아가, 머뭇거리더니 내게 속삭였다. 
 
“죽지 말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희원이 또 태클을 걸었다. 
 
“······이제 출발 좀 하지 그래요? 성좌들이 아니라 내가 복장터져 죽겠네.” 
 
유상아가 얼굴을 붉히며 물러섰고, 나와 일행들은 워프 크리스탈을 향해 다가갔다. 나는 품속에서 재앙을 잡고 획득한 호부들을 꺼냈다. 
 
[이뮨타르 종족의 호부] 
[패러사이트 종족의 호부] 
[제노벨 종족의 호부] 
 
뒤이어 유중혁과 406번 할머니도 각각 한 개의 호부를 꺼냈다. 
각각 [얼음의 재앙]과 [물의 재앙]을 처치하고 얻은 호부였다. 
 
[다섯 개의 호부를 꽂으십시오.] 
 
워프 크리스탈에서 메시지가 흘러나오자, 우리는 크리스탈의 홈에 각각 호부를 맞춰 끼웠다. 
다섯 개의 호부. 
그것은 이 세계가 ‘재앙’으로부터 지켜졌다는 증명이었다. 
오직 재앙을 이겨낸 자들만이, ‘다른 세계’로 가는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자격 증명이 완료되었습니다.] 
[워프 크리스탈이 발동합니다.] 
 
크리스탈이 네 개로 쪼개지더니, 쪼개진 장소에서 쥐불놀이를 연상시키는 푸른빛 차원문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두 명씩 차례로 입장했다. 나와 신유승도 서로를 꼭 붙든 채, 문을 향해 뛰어들었다. 
 
[메인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나와 신유승은 녹빛이 감도는 숲속에 너부러져 있었다. 휘청거리며 바닥을 짚었을 때 까슬한 흙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토할 것처럼 사위가 어지러웠다. 
현기증이 나도 당황하지 말라고 한 건 나였는데, 정작 내가 현기증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곁을 보니 신유승은 이미 헛구역질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괜찮니?” 
“우우욱······.” 
 
나는 신유승의 등을 두드려 주며 주변을 살폈다. 머릿속은 혼란했지만, 계속 혼란한 상태로 있을 수는 없었다. 
앞을 봐도, 옆을 봐도, 뒤를 봐도. 보이는 것은 오직 숲뿐. 
아무래도 우리는 숲 지대의 한복판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이계의 정경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지구’와 흡사한 광경이었다. 
 
[메인 시나리오 ― ‘버려진 세계’가 시작되었습니다.] 
 
곧바로 떠오르는 시나리오 메시지. 
하지만 자세한 메인 시나리오의 내용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근처의 수풀에서, 벌써부터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유승아.” 
 
정신을 차린 신유승이 고개를 들고 숨을 골랐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수풀 곳곳에서 들려왔다. 
이곳은 신규 시나리오 진입자가 워프되는 장소 중 하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자면, 저 수풀 속에 숨어 있는 것은 미리 도착해 있던 타국의 화신들일 것이다. 
나는 긴장하며 [책갈피]를 발동할 준비를 마쳤다. 
아마 이 세계로 워프한 녀석들은 정예 중에서도 정예. 
처음부터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눈 깜빡할 사이에 목이 날아가는 수가 있었다. 
그런데 수풀 속에서 나타난 것은, 우리의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7급 괴수종, ‘스틸 울프’가 나타났습니다!] 
 
7급 괴수종이라는 말에 나와 신유승의 얼굴에 똑같은 표정이 스쳤다. 
우스운 노릇이다. 
그 메시지에 안도하는 건 아마 우리뿐이겠지. 
 
“얘들 몸이 좀 작은 것 같아요, 아저씨.” 
 
보통 윗등급 괴수종들의 크기가 집채만한 것을 감안하면, 지금 나타난 스틸 울프들은 평범한 늑대 크기의 괴수들이었다. 
숫자는 대충 열댓 마리. 
상대하기에 어려운 숫자도 아니었다. 
 
[등장인물 ‘신유승’이 ‘상급 다종 교감 Lv.3’을 발동합니다!] 
 
신유승은 [상급 다종 교감]을 이용해 괴수들을 하나하나 상잔시켜 나갔다. 
신유승이 길들이지 못한 녀석들은 내가 손수 ‘신념의 칼날’을 발동해서 해치웠다. 
7급 괴수종이라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한 녀석들이었다. 
덩치가 작아진 만큼 힘도 줄어든 것 같았다. 
 
“······어? 코인을 안 주는데요?” 
“그 이벤트 끝났으니까.” 
“아이템도 안 줘요. 핵도 없고.” 
“능력치 차이가 많이 나서 그래.” 
“얘들 정말 7급 맞아요? 아무리 봐도 9급 정도인 것 같은데······.”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처음으로 만난 괴수들이 약해서인지, 신유승은 살짝 김이 빠진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숲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분명 이 정도 숲을 이룰 정도의 나무라면 머리 위로 한참 솟아 있어야 할 텐데, 여기서는 키가 큰 나무도 내 머리보다 조금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정도였다. 
시나리도 내용도 아직 그대로다. 
‘버려진 세계’라는 시나리오 타이틀만 생겼을 뿐, 여전히 대부분의 항목은 물음표로 채워져 있었다. 
 
[시나리오 활성화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살짝 점프해서 주변의 광경을 살폈다. 
다행히 나무의 키가 낮았기 때문에, 가볍게 뛰는 것만으로도 주변 지대의 풍광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전부 숲 지대는 아니네. 저쪽으로 나가 보자.” 
 
사실, 나는 이 지대를 나가면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고 있었다. 
우리는 숲의 샛길을 따라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숲 지대가 끝나고 탁 트인 평원 지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평원 지대에서. 
 
“······아저씨?” 
 
우리는, 한 무리의 병력들과 마주했다. 
 
“나타났다! 정말 시나리오 대로야!”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그렇게 외쳤다. 
분명 외계어일 텐데도, 마치 한국어처럼 들렸다. 
당황한 신유승이 주춤거리며 내 쪽으로 물러섰다. 
적어도 수백은 될 법한 병력들이 드넓은 평원의 일부를 메우고 있었다. 
수십의 기병대와 수백의 궁병. 
그리고 수백의 보병까지. 
전쟁을 치르기에 충분한 인원이 그곳에 모여 우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스킬을 준비하라!” 
“진격을 준비하라!” 
 
무수한 인파들이 살기를 내뿜으며 우리를 향해 창과 랜스를 겨누었다.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어느새 우리는 적이 되어있었다. 
 
“쳐라―!” 
 
분명, 평소라면 압도되고도 남을 법한 광경이었다. 
단, 그들의 크기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와아아아아!” 
 
평원을 가로지르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병력들은, 하나 같이 내 주먹만한 키의 소인(小人)들이었다. 
 
“사람들이 엄청 쬐그만 해요!” 
“이곳의 주민들일 거야.” 
“설마 저 사람들이랑 싸워야 해요? 아니죠?” 
 
신유승이 달려드는 소인들에게서 조금씩 물러나며 말했다. 
 
“······너무 작아서 불쌍한데.” 
 
[이계인과 조우하였습니다. 시나리오 내용을 확인하십시오.] 
 
떨어진 곳에서 비명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저, 저쪽에도 재앙이 나타났다!” 
“끄아아아악!” 
“모두, 모두 도망쳐라! 전군 후퇴다!” 
 
우리에게 달려들던 소인들이 갑자기 전열을 물리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멀리서 마구잡이로 소인들을 밟아 죽이는 화신들이 보였다. 
 
“하하하핫!” 
“이게 뭐야? 정말 쉬운 시나리오로군!” 
 
잘 들리지는 않지만, 아마 통역된 외국어 같았다. 
장도를 휘두르는 두 명의 사무라이. 
일본인들이었다. 
그들은 장난이라도 치듯, 바닥에 칼을 내리꽂으며 소인들을 벌레처럼 자르고 있었다. 
그 무자비한 살생의 현장을 보며, 신유승이 질린 목소리를 냈다. 
 
“······아저씨? 이 시나리오 대체 뭐예요? 우린 뭘 해야 해요?” 
 
나는 유중혁이 신유승을 데려오지 않으려 했던 이유를 알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보다 더 인간적인 것은 그 녀석일지도 모른다. 
 
“<스타 스트림>에서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건 지구만이 아니야.” 

나는 평원을 넘어 달아나는 소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이 시나리오는, 저들과 우리가 함께 하는 시나리오야.” 
 
[상당수의 성좌들이 피와 폭력에 굶주려 있습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과감한 선택을 종용합니다.] 
[메인 시나리오가 활성화됩니다.] 
 
+ 
 
<메인 시나리오 # 6 ― 버려진 세계> 
 
분류 : 메인 
난이도 : S 
클리어 조건 : 제 9781 행성계, 행성 ‘피스랜드’의 모든 지배종을 멸절시키시오. 
제한시간 : 40일 
보상 : 200,000코인, ??? 
실패시 : ― 
 
+ 
 
여섯 번째 시나리오에서, 우리는 더이상 ‘재앙을 막는’ 역할이 아니다. 
 
[당신은 행성 ‘피스랜드’의 ‘재앙’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이 세계를 파괴하는 재앙이 되어야 한다.
 
 
 
 
 
< Episode 23. 버려진 세계 (5) > 끝

< Episode 24. 바꿀 수 있는 것 (1) >
 
 
 
 
 
Episode 24. 바꿀 수 있는 것 
 
 
 
얼마 지나지 않아, 평원은 전투의 혈흔으로 난자해졌다. 
아니, 그것은 이미 전투라고 부를 수 없었다. 
양갈래로 찢어진 소인들의 허리에서 내장이 흘러내렸다. 일본인들이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불어 터진 면발처럼 소인들의 육신이 짓밟혀 터졌다. 
 
“으아아아아······.” 
“사, 살려줘! 살려주세요!” 
 
작은 비명에도, 삶의 무게는 똑같이 매달려 있었다. 
크기만 작을 뿐, 그들 역시 시나리오가 내려오기 전까지는 지구인들처럼 평범한 삶을 이어나갔을 인간들이었으니까. 
밥을 먹고, 일을 하고, 가족들과 함께 평범한 삶을 영위했을 사람들······. 
쓰러진 소인들의 시체들 위로 익숙한 지구의 정경이 겹쳐졌다. 
일본인들이 소리쳤다. 
 
“하하하! 이런 기분이었구만 그래!” 
 
아마도, 순자는 지금 시대에 태어났어야 했다. 
이 시대에는 성악설의 증거가 도처에 널려 있으니까. 
방금 전까지 누군가에게 학살당했던 피해자도, 힘과 보상 기제만 마련해 주면 당장 가해자로 돌변할 수 있는 세상이다. 
어쩌면, 자신이 한 번 당했기에 더욱 더. 
신유승이 이를 갈며 물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요?” 
 
아마도,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의 답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말없이 신유승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무거운 짐을 들쳐 멘 사람처럼 신유승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저건 너무하잖아요······!” 
 
코인을 얻고, 새로운 아이템을 얻고, 스킬을 얻어서 강해지는 것. 
그것만이 이 세계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남는 방법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모든 생존자는 다른 생존자들을 이해했고. 
그렇기에, 어떤 생존자들은 자신이 그것을 이해한다는 사실을 수치스러워하며 살아가야 한다. 
 
“재, 재앙······이시여······.” 
 
엉금엉금. 하반신이 뜯긴 소인 하나가 우리의 발치를 향해 기어왔다. 
 
“부, 부디, 자비를······.” 
 
상식을 초월하는 힘은 공포와 동시에 경외를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피스랜드의 주민들에게 있어, 지구인이란 재앙인 동시에 신일 것이다. 
나는 허리를 숙여 다가온 소인을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 손가락을 향해, 소인이 손을 뻗었다. 가쁜 숨이 교차하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 끝에 소인의 조그만 감촉이 닿았다.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 소인의 표정은 묘한 환희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신에게 닿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으로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재앙의 임무를 수행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작은 소인들을 죽여야 할 처지였다. 
바로 곁에서 이글이글 마력을 방출하는 신유승의 기척이 느껴졌다. 
혹여나 일본인들에게 바로 달려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뜻밖에도 그녀의 살기는 굉장히 합리적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것도······ 다 저놈들이 만든 시나리오죠?” 
 
중급 도깨비. 
 
다른 하급 도깨비들과는 달리 여유롭게 팔짱을 낀, 수려한 용모의 도깨비 하나가 허공에 떠 있었다. 
관리국에 끌려간 바울 녀석은 아니었다. 그놈이야 지금쯤 초열지옥에서 몸이 녹아내리고 있겠지. 
나는 미리 읽고 온 ‘멸살법’의 텍스트를 떠올렸다. 
 
「‘버려진 세계’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중급 도깨비. 녀석의 이름은 ‘가눌’이다.」 
 
중급 도깨비 가눌이 말했다. 
 
[과연, ‘일본 돔’의 3차 투입자 분들은 초장부터 화끈하시군요. 부디 이 ‘피스랜드’에서 많은 코인을 벌어 돌아가시길 기원합니다.] 
 
벌써 3차라······. 
예상대로 ‘일본 돔’ 녀석들의 시나리오 페이스가 아주 가파른 모양이었다. 
 
“하하, 최고야 정말! 1차랑 2차 놈들이 질질 싸면서 달려갔던 이유가 있구만?” 
“지금 코인 들어온 거 봤냐? 이거 완전 공짜 시나리오잖아?” 
 
[다수의 성좌들이 흥분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한 번에 열 마리의 소인을 밟아 죽이는 광경을 보고 싶어합니다.] 
 
순간 멍해졌던 신유승의 표정이 이내 분노로 차올랐다. 
 
“저 자식들 때문에······!” 
 
그러나 갈 곳이 없는 분노였다. 
성좌들은 <스타 스트림>의 꼭대기에 있는 존재들. 
고작해야 시나리오의 ‘화신’일 뿐인 신유승이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분노를 쏟아낼 눈앞의 희생양을 찾는 것뿐이었다. 
 
“하하하, 한 번에 열 마리! 내가 먼저 죽인다!” 
 
희열에 젖어 일본도를 휘두르는 일본인들의 눈에는 이미 이성의 흔적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에, 소인족은 아마 살아있는 코인처럼 보일 것이다. 
 
“아저씨, 저기······!” 
 
소인들 사이에서 중장갑으로 무장한 작은 소인이 걸어 나온 것은 그때였다. 
무리의 지휘관 격으로 보이는 소인이었다. 
 
“칼―세이비어에 영광 있으라!” 
 
소인 지휘관은 있는 힘껏 롱 소드를 치켜들더니, 용감하게 재앙을 향해 달려들었다. 일본인이 귀찮다는 듯 일본도를 휘둘렀다. 
 
휘이익! 
 
그런데 놀랍게도, 소인은 날쌘 움직임으로 그 공격을 피했다. 
당황한 일본인이 소리를 질렀다. 
 
“뭐, 뭐야!” 
 
심지어 소인은 그대로 일본도의 검면을 타고 달려, 일본인의 손등에 처음으로 칼을 꽂는데 성공했다. 가히 대단한 전투력이 아닐 수 없었다. 깜짝 놀란 일본인이 팔을 휘둘러 소인을 떨쳐냈다. 
 
“빌어먹을! 따갑잖아!” 
 
내던져진 소인이 비명을 지르며 평원을 나뒹굴었다. 
다른 일본인이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꽤 용감한 놈도 있었네?” 
 
타격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나름 회심의 일격에 성공한 소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마치 바늘에 찔린 듯, 일본인의 손등에 작은 생채기가 생겼다. 
 
“저, 저걸 봐! 재앙이 피를 흘리고 있다!” 
“와아아아!” 
 
한 방울의 피. 
그 피가, 소인들에게는 기적의 한 방울이었다. 
재앙도 죽일 수 있다. 
신은, 피를 흘리는 존재다. 
단 한 방울이, 그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할 수 있다! 쳐라! 조금만 더 하면 된다!” 
 
사기가 올라간 소인들이 달아나는 것을 멈추고 역으로 재앙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것들 뭐야 갑자기!” 
“저리 가! 날벌레 새끼들아!” 
 
바싹 붙은 소인들이 일본인들의 몸에 이쑤시개보다 작은 검을 휘둘렀다. 
아무 소용 없는 화살들이 허공을 수놓았고, 기병들은 포기하지 않고 진형을 유지하며 일본인들의 발을 향해 랜스를 꽂았다. 
여전히 아무 데미지도 없었지만, 소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신유승도 손을 꾹 그러쥔 채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간접 메시지도 들려왔다. 
 
[작은 행성의 성좌가 화신 ‘길레미엄’을 응원합니다.] 
 
이 작은 행성에도, 역시나 성좌는 있다. 
작은 행성에서 태어나 작은 인간들의 믿음을 먹고 자라난 성좌. 
 
[작은 행성의 성좌가 화신 ‘길레미엄’에게 1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아마 ‘길레미엄’이라는 화신은, 처음으로 일본인에게 상처를 낸 그 소인의 이름인 듯했다. 
 
“칼―세이비어어어!” 
 
마치 조금만 더 공격하면 함락시킬 수 있을 것처럼, 소인족 모두가 흥분해 있었다. 
정확히,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재밌게 흘러가는군요. 역시 저항이 있어야 이야기도 더 흥미진진해지는 법이겠죠?] 
 
소인들의 저항을 비웃기라도 하듯, 도깨비 가눌이 웃었다. 
어딘가 기시감이 드는 웃음이었다. 
 
[절망의 크기가 클수록, 이야기의 농도도 짙어지는 법이니까요.] 

공격을 받던 일본인들의 몸에서 새카만 아우라가 흘러나왔다. 
뭔가 사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소인족들이, 갑자기 공격을 멈추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지금부터 ‘재앙’의 패널티를 일부 해제합니다. ‘재앙의 길’을 선택하신 분들은 추가 버프 사용이 가능하니, 꼭 특성창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일본인들이 피식거렸다. 
 
“뭐야,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는데?” 
“게임이 너무 쉬운 것도 정도가 있지······. 이러면 재미가 더 없어진다고.” 
 
[이번엔 쉬워도 됩니다. 스트레스 해소 게임이라고 생각하시죠.]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킬킬 웃은 일본인은, 망설이지 않고 일본도를 고쳐 잡았다. 
 
고오오오오! 
 
그들의 일본도에 강력한 마력이 깃들고 있었다. 
성흔의 형태를 보아하니, 저 두 일본인 모두 사무라이 계열의 배후성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유명한 녀석들은 아닌 것 같은데······. 
 
[재앙의 개연성 제약이 일부 해제되었습니다.] 
[재앙들은 일정 시간 동안 배후성과의 동조율 한계치가 상승합니다.] 
[부족한 개연성은 <스타 스트림>의 관리국이 대신 지불할 것입니다.] 
 
콰아아앙! 
 
평원 바닥이 으깨지며, 백 명에 달하는 소인이 한꺼번에 피분수를 일으키며 갈라졌다. 가공하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어도, 분명 상당한 수준의 파괴력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 정도인데, 저 소인들이 보기에는······. 
 
······아니, 놀랄 소인도 거의 남아있지 않군. 
 
압도적인 재해 앞에 몇몇 소인들이 대소변을 지렸고, 어떤 소인은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던 소인들은 비명조차도 잊은 듯 망연히 그 재해를 마주했다. 
 
“아, 아으. 아으아······.” 
 
무기를 놓은 소인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고 있었다. 
처음으로 일본인에게 상처를 입혔던 소인마저 롱소드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조금 전까지 용기로 가득 차 있었던 그들의 눈빛은 이제 완전히 꺾여 있었다. 
 
「이길 수 없다.」 
「우리 행성은, 이제······.」 
 
그 절망의 형태가 너무나 익숙했기에, 읽는 것만으로 고통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작은 행성의 성좌가 당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메시지가 들려왔다. 
 
[작은 행성의 성좌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작은 행성의 성좌가 작은 행성에 대한 당신의 동정심을 기대합니다.] 
[작은 행성의 성좌가 당신을 보며 희망을 품습니다.] 
[작은 행성의 성좌가 당신에게 1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후원받은 10코인을 반환하였습니다.] 
 
그러자 메시지가 이어졌다. 
 
[작은 행성의 성좌가 당황합니다.] 
[작은 행성의 성좌가 수치심에 얼굴을 붉힙니다.] 
 
아무래도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10코인이 너무 푼돈이어서, 내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허공을 향해 말했다. 
 
‘정말로 네 행성을 생각한다면 그딴 짓은 하지 마.’ 
 
[작은 행성의 성좌가 당황합니다.] 
 
‘네 행성을 돈에 팔려 다니는 이야깃거리로 만들기 싫다면.’ 
 
[작은 행성의 성좌가 비통하게 침묵합니다.] 
 
멀리서, 일본인의 두 번째 일격이 피어나고 있었다. 
저 공격을 맞으면, 남은 소인들은 반드시 전멸할 것이다. 
신유승이 외쳤다. 
 
“아저씨, 더이상은 못 참겠어요.” 
 
일본인들의 몸에 깃든 검은 아우라가 차츰 연해지고 있었다. 
[개연성 버프]가 서서히 풀리고 있는 것이다. 
슬슬 때가 되었군. 
나는 신유승을 향해 말했다. 
 
“재앙이 되지 않아도,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방법은 있어.” 
“······아저씨?” 
“하지만, 정말로 힘들고 끔찍할 거야.” 
 
신유승의 눈빛이 흔들렸다. 
 
“포기하고 싶어질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할 수 있겠어?”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기다린 것은, 이쪽의 승산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이 행성의 주민들이 아무리 불쌍하다 해도, 결국은 ‘다른 종’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나와 신유승의 목숨이었다. 
 
[재앙의 개연성 제약이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검은 아우라에 휩싸여 있던 두 사무라이의 힘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신유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어요.” 
 
그 말을 신호로 나는 달려나갔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에게서 이상 징후를 감지했습니다.] 
[경고합니다. 같은 재앙을 적대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아마 신유승은 그 결심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편한 시나리오에서 ‘편함’을 포기한 존재가 어떻게 되는지, 이 시나리오는 똑똑히 알려줄 테니까. 
하지만, 때로는 편함을 포기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야 할 때도 있다. 

[‘신념의 칼날’을 발동합니다!] 
 
빛이 폭발하며, 굉음이 평원을 울렸다.
 
 
 
 
 
< Episode 24. 바꿀 수 있는 것 (1) > 끝

< Episode 24. 바꿀 수 있는 것 (2) >
 
 
 
 
 
 
 
막말로 따지면 피스랜드의 ‘소인종’은 인간이긴 해도 나와 같은 ‘지구인’은 아니다. 
아무리 범박한 인류애를 발휘한다고 해도, 타행성의 종족을 위해 같은 인류를 대적한다는 것에는 명백한 모순이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내 행동은, 딱히 ‘인간’을 위해서라든가 ‘정의’를 위해서라든가 하는 거창한 윤리관 때문이 아니었다. 
여기서 ‘소인종’을 적대하면, 나는 결말을 위해 필요한 업적을 놓치게 된다. 
그것이, 지금 내가 ‘신념의 칼날’을 바닥에 꽂아 넣는 이유의 전부였다. 
 
꽈아아아앙! 
 
[<스타 스트림>이 당신에게서 이상 징후를 감지했습니다.] 
[경고합니다. 같은 재앙을 적대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만약 적대 행위가 반복해서 누적될 시······.]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자, 시야를 잃어버린 일본인들이 먼지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와아악! 뭐야 갑자기?” 
“쿨럭쿨럭!” 
 
상당한 마력을 쏟아 넣은 일격이었기 때문에, 먼지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작은 행성의 성좌가 작은 가슴을 콩닥댑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 내 손으로 저들을 살해한다면, 나는 곧바로 새로운 시나리오를 받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얻을 페널티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할 것이다. 
나는 가능하면 그 순간을 최대한 늦추고 싶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아저씨, 이번엔 제가 할게요.” 
 
신유승이 유상아에게 받은 단도를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섰다. 
 
“제가 둘 다 상대할 수 있어요.” 
“할 수 있겠어?” 
“아무 문제 없어요.” 
 
이길영도 그렇고,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당찬지 모르겠다. 
유상아가 있었다면 당연히 말렸겠지만, 나는 유상아가 아니다. 
나는 신유승을 독려하듯 말했다. 
 
“오래 싸우면 안 된다. 페널티 메시지 들었지?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야 해.” 
 
만약 신유승이 이 둘 모두를 상대할 수 있다면 이번 시나리오에서 내 선택지는 한결 넓어진다. 
‘피스랜드’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페르세포네가 말한 ‘뱀’을 잡는 것. 
여기서 미리 페널티를 받지 않을 수만 있다면, 뱀을 잡는 시기는 내 생각보다 훨씬 앞당겨질지도 모른다. 
 
“어떤 새끼야!” 
 
흙먼지를 뚫고, 신유승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달렸다. 
거의 동시에, 나는 [은둔자의 망토]를 사용해 몸을 감췄다. 
고도의 색적 스킬이 있다면 무효한 아이템이었지만, 사무라이 녀석들이 그걸 갖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쐐애액! 
 
신유승의 단도에서 날카로운 마력이 일렁이며 위협적인 반월을 그렸다. 
 
“으아앗!” 
 
먼지 속에서 날아든 일격에 일본인들이 물러섰다. 
일부러 맞추지 않은 일격. 
절호의 기회를 놓치긴 했지만, 싸우지 않고 물리칠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했다. 
기습에 놀란 일본인들은, 흙먼지 속에서 아이가 등장하자 의아한 표정이었다. 
 
“뭐야, 꼬맹이잖아?” 
 
수군대던 녀석들이 신유승을 향해 물었다. 
 
“꼬맹아, 왜 우릴 막는 거냐?” 
“그런 짓 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와 달리 [통역] 스킬이 없는 신유승에게 그 목소리는 그저 외국어일 뿐이었다. 
 
“······뭐라는 거야?” 
 
그제야 일본인들도 상황을 눈치챘다. 
 
“설마, 한국 투입자인가?” 
“아, 맞아! 이번에 한국도 1차 투입에 들어갔다고······.” 
“빌어먹을, 1차 투입자면 엄청 셀 텐데······?” 
 
녀석들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꼬맹아, 비켜. 우리끼린 싸울 필요가 없다고.” 
“돈 파이트! 돈 파이트! 오케이?” 
“우린 그냥 쟤들만 죽이면 돼. 스몰 피플. 킬! 오케이?” 
 
일본인들이 어설픈 영어를 써 가며 싸울 의사가 없음을 밝혔지만, 신유승은 그저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다. 날카로운 단도가 자신들을 가리키자, 일본인들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죽든가, 꺼지든가. 둘 중 하나뿐이야.” 
 
다가오는 신유승의 모습에, 일본인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제길······ 안 되는데. 나 지금 현상금 시나리오 중이란 말이야.” 
“······내 배후성이 그냥 저 꼬마 새끼 죽이라는데?” 
“우린 둘이니까 해볼 만하지 않을까?” 
“우리 쪽 1차 애들 전투력 잊었어?” 
“읏······.” 
 
제법 영리한 녀석들이다. 
세계 어디서든, 여섯 번째 시나리오의 1차 투입자들은 각국의 최정예들이 선발된다. 아마 일본도 1차 투입자와 그 이후 투입자의 격차는 상당하겠지. 두 일본인의 표정에 비슷한 감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도망가야 하나?」 
 
반면, 신유승과 일본인들의 대치를 바라보던 소인들의 사이에서는 기이한 환희가 번져가고 있었다. 
 
“아, 아아······.” 
“대체······?” 
 
놀랄 법도 하다. 
갑자기 나타난 작은 재앙이, 더 커다란 재앙을 상대로 싸우고 있으니. 
 
“설마, ‘작은 구원자’께서······!” 
“예, 예언이 맞았어!” 
 
[작은 행성의 성좌가 화신 ‘신유승’에게 감동합니다.] 
[작은 행성의 성좌가 화신 ‘신유승’에게 1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화신 ‘신유승’이 새로운 시나리오의 가능성을 입수하였습니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칼자루를 쥐었다 풀었다 했다. 
조금 찝찝하긴 하지만, 여기서 녀석들을 쫓아 보낸 후 놈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했다. 
하지만 내 생각대로라면, 일이 그렇게 무난하게 풀릴 리 없다. 
허공을 떠돌던 중급 도깨비 가눌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더니 킥킥 웃었다. 
 
[일본분들, 본인들이 불리하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정말 그럴까요?] 
 
하여간, 빌어먹을 도깨비 새끼. 
뭔가를 깨달은 일본인들이 중얼거렸다. 
 
“아, 맞아! 그러고 보니 1차 투입자들 중에······.” 
“아스카도 저러다가 변이되었다고 했지? 하긴, 한국에도 저런 별종들이 있긴 하겠지. 지금이라도 말해주면······.” 
“알려줄 필요 없어. 어차피 조센징 꼬마잖아.” 
 
결정을 끝낸 일본인들의 눈빛이 변했다. 
살기 어린 두 눈이 동시에 신유승을 향했다. 
 
“그래, 한번 싸워보자고.” 
“어린애 취향은 아니지만······.” 
 
그 불쾌한 웃음에,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신유승도 금방 사태를 파악했다. 칼날이 스르르 움직였고, 두 사내가 천천히 신유승의 전후를 포위했다. 
첨예한 살기가 세 사람의 몸에서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합을 맞춘 두 사내의 검형이 동시에 움직였다. 
 
쐐애액! 
 
민첩을 최대치까지 찍은 신유승은 어렵지 않게 칼날을 피했지만, 생각보다 근소한 차이였다. 
1차에 투입된 정예들에는 못 미친다고 해도, 싸움 실력을 보아하니 일본 내에서는 제법 상위권의 화신들인 듯했다. 
 
나는 사내들의 검술을 보며 ‘멸살법’의 묘사를 떠올렸다. 
 
검을 한 자루만 사용하고 있으니 이천일류(二天一流)는 아니고, 그 길이를 보아하니 간류(岩流)도 아니다. 
즉, 일본 최고의 검호인 미야모토 무사시나 사사키 코지로와 관계되어 있을 걱정은 없다. 
신유승의 데뷔전 상대로는 나쁘지 않군. 
 
“계속 도망다니긴 어려울 거다 꼬마야!” 
 
사내들의 배후성이 검법에 예기를 실어 주자, 검의 기세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다리를 벤다 싶던 칼날이 허리를 노렸고, 팔을 노린다 싶던 칼날이 목을 노렸다. 자연스러운 허초가 공격의 면면에 깃들어 있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신유승의 움직임이 그들의 검영에 걸려들었다. 
아무리 신유승의 종합 능력치가 높다 해도, 검법의 노련함은 저쪽이 압도적으로 우위였다. 
 
피잇! 
 
신유승의 옷깃이 베이며, 팔에 작은 실선이 생겨났다. 
나는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게 칼자루를 굳게 쥐었다. 
딴엔 내가 배후성인데 마땅한 성흔 하나 주지 못해 안타깝다. 
 
“죽어어!” 
 
일본인 특유의 과장된 목소리와 함께, 두 일본도가 교차하며 신유승의 다른 신체 부위를 노렸다. 이번에 신유승은 피하지 않았다. 
 
까아앙! 
 
근력이 떨어지는 신유승이 단도를 놓쳤고, 기회를 포착한 일본도가 틈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신유승은 당황하지 않았다. 
 
[등장인물 ‘신유승’이 ‘상급 다종 교감 Lv.3’을 발동하였습니다.] 
 
오히려 훌쩍 물러나, 허공에서 제비를 돌더니 기다리고 있던 괴수의 등 뒤에 안착했다. 아까 길들였던 스틸 울프였다. 
 
“······뭐야?” 
 
올바른 판단이다. 
모름지기 전투의 기본은 상대의 장점은 최소화하고 내 장점은 최대화하는 것이니까. 
 
아우우우! 
 
늑대의 울음과 더불어, 숲지대에서 수십 마리의 스틸 울프들이 동시에 뛰쳐나왔다. 
그 짧은 사이 저렇게 많은 늑대들을 길들이다니. 
과연, 미래의 ‘비스트 로드’다운 저력이다. 
 
“제기랄?” 
 
놀란 사내들이 검을 휘두르며 늑대들에 맞섰지만, 이미 달려든 늑대들이 사내의 팔과 다리를 물고 늘어졌다. 
 
“씨발! 이 개새끼들이!” 
 
아무리 약해진 7급 괴수종이라 해도, 마력을 꽤 소모한 이들이 상대하기엔 버거울 것이다. 
과연, 가르친 보람이 있는 광경이다. 
하지만 아직 신유승은 모르고 있었다. 
내가 왜 ‘시간을 끌지 말라’고 했는지. 
 
[<스타 스트림>이 화신 ‘신유승’의 이상 행동을 감지하였습니다.] 
[같은 재앙에 대한 적대 행위가 감지되었습니다.] 
[화신 ‘신유승’에게 1차 시나리오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페널티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어······?” 
 
갑자기 줄어드는 마력을 느끼며, 신유승이 신음을 흘렸다. 
일부 늑대들이 갑자기 신유승의 통제를 떠나 숲지대로 돌아갔다. 
 
[등장인물 ‘신유승’의 신체 부피가 감소하였습니다.] 
[등장인물 ‘신유승’의 종합 능력치가 감소하였습니다.] 
 
이상을 눈치챈 일본인들이 외쳤다. 
 
“돼, 됐어! 역시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조금만 버티면 돼!” 
 
······결국 이렇게 되나. 

신유승이 불안한 눈으로 나를 찾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은둔자의 망토]를 쓴 채 신유승의 뒤로 다가가 어깨를 짚어 주었다. 
떨리던 신유승의 어깨가 다시 차분히 가라앉았다. 
 
“······고마워요, 아저씨.” 
 
혼자서 뭔가를 납득한 신유승이 입술을 깨물었다. 
 
[화신 ‘신유승’에게 2차 시나리오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신유승의 몸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재앙’이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포기한 결과. 
하지만 아직 그녀의 힘은 일본인들의 목숨을 빼앗기엔 충분할 만큼 남아있었다. 
신유승은 민첩을 최대치로 발휘해, 야수처럼 사내들의 등 뒤로 접근했다. 
 
“으, 으와아앗!” 
 
언제 유상아가 하는 것을 보고 배우기라도 한 것일까. 
마음을 독하게 먹은 신유승의 단도술은 가히 발군이었다. 
단도가 움직였고, 사내의 경동맥이 맥없이 피를 토했다. 
 
푸슈슈슛. 
 
“끄, 끄어어, 마, 말도 안······.” 
 
쏟아진 핏줄기가 평원에 후두둑 떨어지며 창백해진 사내의 얼굴이 바닥과 가까워졌다. 
 
[등장인물 ‘신유승’이 ‘아직 이름이 없는 재앙’을 처치하였습니다.] 
[주요 공헌자 : 신유승] 
 
신유승은 뺨에 튄 피를 닦아내며, 다음 타깃을 향해 움직였다. 
공포에 질린 사내가 엉금엉금 기며 뒷걸음질 쳤다. 달려든 스틸 울프들이 사내의 팔과 다리를 마구 물어뜯었다. 
 
“끄, 끄아아아악!” 
 
신유승은 그런 사내의 숨통을 끊기 위해 다가갔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 순간이었다. 
 
[화신 ‘신유승’이 ‘재앙’의 권리를 완전히 박탈당했습니다.] 
[<스타 스트림>의 도깨비들이 ‘신유승’의 행동을 시나리오 대적 행위로 간주하였습니다.] 
[화신 ‘신유승’에게 3차 시나리오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소인화(小人化)가 시작됩니다.] 
 
이 시나리오에서 포식종의 자격을 포기한 자는, 자신이 사냥하던 피식종을 닮게 된다. 
 
꽈드드드득.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신유승의 육체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아······?” 
 
작은 신음과 함께 신유승이 입고 있던 옷이 급격하게 커졌고, 손에 쥐고 있던 단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내 허리까지 오던 신유승의 키가 무릎까지, 다시 무릎까지 오던 키가 정강이까지 줄어들더니, 이내 신유승의 몸은 옷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능력치의 감소와 함께 통제력이 약해지자, 스틸 울프들이 일제히 숲 지대로 되돌아갔다. 
옷 속에서 기어 나온 조그만 신유승이 사내를 향해 절뚝거리며 다가갔다. 
 
“유승아, 그만해도 돼.” 
 
숨을 헐떡이는 신유승이 나를 돌아보았다. 
붉어진 아이의 눈에, 독기와 설움이 섞여 있었다. 
그간 괴수들과 싸운 경험은 많이 있었지만, 이토록 본격적인 살인 행위를 저지른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었다. 
 
“이미 기절했어.” 
 
내 말에, 신유승의 눈이 쓰러진 일본인 사내를 향했다. 
놈은 거품을 문 채 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나는 떨어진 옷을 조금 찢어 신유승의 몸을 덮어 주었다. 
내 주먹만큼 작아진 신유승은 자신의 몸을 몇 번인가 관찰하더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아마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깨닫는 중일 것이다. 
 
“이런 상태로 저런 놈들과 싸워야 하는 건가요?” 
“그래.” 
“······몇 명이나 남은 거예요?” 
“꽤 많이.” 
 
신유승이 착잡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저씨는 알고 있었군요? 재앙에 적대하면 소인이 된다는 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쓰러진 일본인에게 다가갔다. 
확인해 보니, 사내는 기껏해야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그 사람을 이용할 건가요?” 
“변하기 전에 꼭 죽여야 할 녀석이 있어.” 
 
그 말을 뱉자마자, 새로운 메시지들이 들려왔다. 
 
[같은 재앙을 적대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재앙을 적대한 재앙은, ‘재앙’의 권리를 모두 잃게 됩니다.] 
 
하늘에는 여전히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의 도깨비가 떠 있었다. 
그래······. 
언제까지 그렇게 웃을 수 있나 보자고. 
 
[<스타 스트림>은 당신의 ‘재앙 활동’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앞으로 한 시간 안에 피스랜드의 지배종을 죽이지 않으면, 당신은 재앙으로서 활동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재앙’의 지위를 박탈당할 것입니다.] 
 
나는 거품을 문 일본인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망토를 벗었다. 
이제 내게 남은 시간은 한 시간. 
 
그 한 시간 안에, 나는 놈들의 ‘왕’을 잡아야 한다.
 
 
 
 
 
< Episode 24. 바꿀 수 있는 것 (2) > 끝

< Episode 24. 바꿀 수 있는 것 (3) >
 
 
 
 
 
 
「숲 지대를 걷는 내내, 스즈키는 생각했다. 
 
‘정말 운이 좋았어.’ 
 
스즈키는 조금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괴수들을 조종하고, 단도술을 수준급으로 사용하던 여자애. 동료였던 무라카미가 일격에 숨이 끊어지던 것을, 스즈키는 아마 당분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한국은 무섭군. 어린애까지 벌써 그런 수준이라니.’ 
 
어린애가 그 정도였는데, 지금 곁에 있는 이 사내는 어느 정도의 실력일지 스즈키는 좀처럼 짐작할 수 없었다. 새하얀 코트에 백색의 칼을 꿰어찬 사내. 코트 색깔을 제외하면 별달리 특별할 것도 없는 차림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스즈키에게 생명의 은인이었다. 
 
“아깐 정말 고마웠습니다. 당신이 없었더라면 그대로 죽었을 겁니다.” 
“뭘요.” 
“솔직히 감동했습니다. 설마 한국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서로 돕고 사는 거죠.” 
 
하얀 코트 사내는 겸손했다. 
무엇보다 일본어를 잘 한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분명 스킬 탓이겠지만, 일본어 통역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평소 일본 문화를 좋아한다는 방증이겠지. 
 
“참, 아직 통성명을 못 했군요. 성함이 어떻게 된다고 하셨죠? 저는 스즈키 타츠야라고 합니다.” 
“저는 독자입니다. 김독자.” 
“키무-도게자?” 
“······김독자.” 
“호오.” 
 
김 도게자라. 
무척 예의 바른 이름이 아닌가? 
스즈키는 이 한국인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근데 그 아이는 못 보셨습니까? 내 동료를 죽인······.” 
“안타깝게도 놓쳤습니다.” 
“후······ 그렇군요.”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도 생각했다. 
어쨌든 이 남자도 한국인. 
아이를 숨겨줬다거나 못 본 척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잡을 수만 있다면 아주 쉽게 복수할 수 있었을 텐데. 
일본측의 3차 투입자인 그는, ‘여섯 번째 시나리오’의 히든 피스인 ‘소인화’에 관해 이미 알고 있었다. 
 
“저를 구해주셨으니, 김 상도 ‘소인화’를 목격하셨겠군요.” 
“몸이 작아지는 걸 말씀하시는 거라면, 물론 저도 봤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우리는 분명 타국이지만, 이 시나리오에서는 대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적은 ‘소인’이지, 같은 인간이 아니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즈키 씨를 구한 거고요.” 
 
다행히 눈앞의 한국인은 자신의 견해에 동의하는 듯했다. 
김 도게자가 말했다. 

“그나저나, 일본측에서는 이미 여러 가지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예. 저희는 시나리오 진행도 빨랐고, 앞선 투입자들 중 비슷한 경우가 몇 있었으니까요.” 
“비슷한 경우라면?” 
“지구인이었는데, 소인으로 변한 경우가 몇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대부분은 죽었고, 한 사람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김 도게자는 뭔가를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체 알 수 없는 한국인. 
살짝 불안해진 스즈키가 입을 열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한국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죠?”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다들 한국을 싫어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일본의 1차 투입자였던 ‘총리’가 한 말이었다. 
물론 진짜 총리는 아니고, 별명이다. 
 
―한국인들은 아직도 민족주의 정서가 강해. 누가 자기 나라를 욕하면 자기가 욕을 먹는다고 생각하지. 
 
그는 총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은 없었다. 
 
“김 상. 저는 김아연도 박성지도 좋아합니다.” 
“······.” 
“가을연가도 굉장히 재미있게 봤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좋아하시고요.” 
 
한국인을 만나면 김아연, 박성지, 가을연가를 언급하라. 
그것은 총리의 조언이었다. 
 
“저도 일본 만화를 좋아합니다.” 
“오, 오옷. 역시 그러셨군요.” 
 
확실히, 총리는 옳았던 모양이다. 
스즈키는 괜히 신이 나서 물었다. 
 
“무슨 만화를 좋아하십니까?” 
“한 가지를 꼽기는 어렵군요. 애초에 이젠 계속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확실히 그건 좀 아쉽죠. 저도 매주 기다리던 만화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만화가가 살아있는지 어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일들을 생각하면 씁쓸해진다. 
스즈키 역시 좋아하던 것들이 있었다. 
만화도 그중 하나였다. 
 
“모든 것이 변해버렸으니까요.”」 
 
―아저씨. 
 
몰입이 깨어진 것은 신유승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를 최대치로 사용하던 중이었기에, 나는 곧바로 신유승의 말에 답하지 못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가 종료되었습니다.] 
[등장인물 ‘스즈키 타츠야’에 대한 이해도가 급격하게 상승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물에 몰입하는 연습을 하면 이해도를 쉽게 올릴 수가 있다. 아무래도 인물 깊이가 얕은 단역이었기에 더욱 원활했을 것이다. 
의식이 멀쩡한 상태였기 때문에 집중도가 높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스즈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저씨? 
―미안, 스킬 연습 좀 하느라. 
 
작아진 신유승은 지금 내 주머니 속에 있었다. 배후 계약을 통해 맺어진 직결 채널로, 신유승이 말했다. 
 
―······조금 놀랐어요. 
 
무엇에 놀란 것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곁에서 자기 이야기를 떠들고 있는 스즈키 타츠야를 보았다. 
‘멸살법’에서 스즈키는 지나가는 단역으로 등장한다. 원활한 이야기 전개를 위해 잠깐 그의 시점으로 세계가 서술되기는 하지만, 그 긴 ‘멸살법’에서 조차 그 몇 장이 그에게 주어진 지면의 전부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인생은, 때로 그 몇 장으로도 충분히 요약된다. 
 
―이해가 잘 안 가요. 저런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잔인한 짓을······. 
 
외국어라 잘 이해할 수 없었을 텐데, 신유승은 용케도 대화의 골자를 잡은 모양이었다. 
하긴, 저렇게 흥분해서 떠드는 걸 듣고서도 모를 수야 없겠지. 
 
“그러니까, 김 상······.” 
 
자기가 아는 것을 이것저것 떠들어 대는 스즈키의 모습은, 평범한 대학생의 그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에 커다란 기쁨을 느끼는, 세계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청년. 
 
―한국에서도 많이 봤잖아. 평범한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 죽이고 살아남는 거. 
―그때는 시나리오 때문에 어쩔 수 없었잖아요. 
―지금도 마찬가지야. 저 사람도 시나리오 때문에 저러는 거니까. 
―그건 핑계에요. 이번엔 실패해도 죽지도 않고······!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나는 사이를 두고 물었다. 
 
―아까 죽어간 소인들이 우리 위치에 있다면, 상황은 지금과 달랐을까? 
 
스즈키를 악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소인들을 선하다고 말할 생각도 없었다. 
 
―원래 악은 평범한 거야. 우리에겐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이, 어떤 존재에겐 가장 끔찍한 재앙인 거지. 
―그럼 저 사람도 사실은 나쁘지 않은 거예요? 
―아니, 인간은 누구나 서로에게 재앙이야. 
 
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신유승은 사람을 죽인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저도 미래에 재앙이 된 걸까요? 
―걱정 마. 그렇게 되지 않게 내가 막을 테니까. 
 
귓가에서 뭔가가 앵앵거린다 싶더니, 날벌레들이 근처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야기를 계속하던 스즈키가 짜증을 냈다. 
 
“여기서도 벌레는 크기가 똑같군요. 소인들 입장에서는 재앙이겠는데요?” 
“그렇군요.” 
 
그럴 리가 없다. 
모든 것이 작은 세계에서, 벌레만 원래 크기일 리가 없잖은가. 
 
―유승아. 뭐라고 하는지 알겠어? 
 
신유승과 이길영은 길들일 수 있는 종은 다르지만, [다종 교감]을 통해서 다른 종의 언어를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은 비슷했다. 괜히 신유승과 이길영을 다른 조에 배치한 것이 아닌 것이다. 
 
―‘형······ 2조랑······ 만났어요······’ 라고 하는 거 같아요. 
―좋아. 그럼 내가 하는 말도 전할 수 있지? 
 
품속에서 신유승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느껴졌다. 잠시 근처를 떠다니던 날벌레들이 이윽고 날갯짓을 하며 숲 건너편으로 사라졌다. 
멀어지는 벌레들을 보는 내게, 스즈키가 물었다. 
 
“김 상. 제 이야기 듣고 계십니까?” 
“듣고 있습니다. ‘이계 전생물’에 관해 얘기하고 계셨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만화 얘기를 하는 이놈도 참 징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는 애써 받아주었다. 
 
“일본에 그런 장르가 유행했다는 건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하, 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게 그 ‘이계 전생물’이거든요. 그러고 보면 지금 우리 상황과도 비슷하군요. 어려운 것만 빼면 말이죠.” 
 
그러고 보면 멸망 직전의 일본도 한국이랑 콘텐츠 상황이 비슷했지. 
한국이 모두 과거로 회귀하기 바빴다면, 일본은 죄다 이계로 전생하기 바빴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상황이 나쁘냐면, 아마 일본일 것이다. 일본 젊은이들은 과거로 돌아가도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는 뜻이니까. 
내가 말했다. 
 
“그래도 어려운 편이 더 재미있지 않습니까?” 
“예?” 
“제 취향이 그쪽이라서요.”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키가 낮은 수풀을 베어가던 스즈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측 1차 투입자 중에 만화가가 한 명 있습니다. 아스카 렌이라는 사람인데······.” 
 
아스카 렌? 
 
“······그 사람도 김 상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쉽게 풀어가는 이야기는 재미없다고 말이죠.” 
“그 사람은 지금······.” 
“아, 도착했군요.” 
 
숲 지대의 중심지에 들어서자,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곳곳에서 느껴지는 예기가 피부를 간질였다. 
아마 이곳이, 일본측 초기 투입자들이 만든 본진인 모양이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당신은 누군가의 ‘식민지’에 진입하였습니다.] 
[당신의 신체 조건이 ‘피식민인’의 요건에 부합합니다.] 
[‘식민지’ 효과로 당신의 종합 능력치가 격감합니다.] 
 
나를 보는 스즈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어렵게 풀어가는 쪽이 더 좋다고 하셨죠?” 
 
숲지대 곳곳에서 수풀이 일렁이더니, 무장한 십여 명의 일본인들이 튀어나왔다. 
 
“잘 됐군요. 마침 그렇게 만들어 드릴 참이었거든요.” 
 
뜻밖의 배신에 나는 조금 놀랐다. 
스즈키는 원래 이런 캐릭터가 아닐 텐데?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이 발동하였습니다!] 
 
+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스즈키 타츠야 
전용 특성 : 이중인격자 (희귀) 
배후성 : 소리 없는 검 
 
+ 
 
그랬군. 이 자식 특성이 이거였지. 
나도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간, ‘멸살법’은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는 소설이다. 
몇 페이지로 요약되는 인물은 없다 이거지? 
그나저나 [식민지] 효과가 발동한 걸 보니, 아무래도 이 지대의 왕은 ‘뱀’이 아닌 듯했다. 
내가 한국인이란 걸 알고 일부러 이쪽으로 몰아온 모양인데······. 
 
“조센징을 데려왔군.” 
 
수풀에서 튀어나온 사무라이 하나가 앞으로 나서자, 스즈키가 고개를 숙였다. 
 
“3차 투입자인가 보군. 총리님의 그룹이냐?”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공물인가?” 
“그렇습니다.” 
“이름이 뭐지?” 
“스즈키 타츠야입니다.” 
“그렇군. 잘 했다 스즈키. 지금부터 너는 우리 그룹이다.” 
 
총리라······. 
이거 상황이 안 좋게 됐다. 
내가 알기로 일본 측 투입자들 중 ‘총리’라는 말을 듣는 인간은 하나뿐이니까. 심지어 그는 내가 잡아야 할 ‘뱀’을 제외하면, 가장 경계해야 할 적 중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녀석의 능력은, ‘한국인’에게는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니까. 
사무라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일단 이 녀석은 ‘총리’가 아니다. 
 
“대일본제국의 노예가 제발로 식민지에 걸어들어왔구나.”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꺼내 들며 물었다. 
 
“지금 날 공격하면 ‘소인화’가 진행될 텐데?” 
“우리는 너를 공격하지 않는다. 네가 우리를 공격해야지.” 
“내가 왜?” 
“그렇지 않으면, 네놈의 동료들이 죽을 테니까.” 
 
뭐? 
 
“읏, 독자 씨······ 죄송합니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자, 나란히 잡혀 있는 네 명의 소인이 보였다. 정확히는, 이젠 ‘소인이 되어버린 자들’이었다. 
 
이현성, 이길영, 이지혜, 거기다······. 
흘흘 웃는 406번 할머니까지. 
 
사무라이가 이현성의 목에 일본도를 갖다 대었다. 

“이제 상황 파악이 되었겠지?”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평소라면 암 걸리는 전개였겠지만, 나는 오히려 기뻤다. 
역시, 우리 동료님들께서는 가뿐히 일본인들을 해치우고 벌써 소인으로 변모해계셨던 모양이다. 
신유승이 말했다. 
 
―아저씨, 어떡해요? 
 
어쩌긴. 
 
[10분 안에 ‘소인종’을 사냥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스타 스트림>은 당신에게 재앙 활동의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이미 시간상 뱀을 잡긴 틀렸다. 
그러면······ 뭐, 별수 없군. 
 
“어서 덤벼라, 조센징.”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창공의 별들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향해 반짝였다. 
 
[한반도의 모든 성좌들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네. 그렇게 혐한 정서를 마음껏 표출하신다면야······. 
 
[한반도의 모든 성좌들이 일본의 만행에 분노합니다!] 
[특정 시기를 살았던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부름을 기다립니다.] 
 
이쪽도, 그에 합당한 응징을 해주는 수밖에.
 
 
 
 
 
< Episode 24. 바꿀 수 있는 것 (3) > 끝

< Episode 24. 바꿀 수 있는 것 (4) >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이상 행동을 감지하였습니다.] 
 
아직 싸우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몸의 골격이 미묘하게 수축할 낌새를 보였다. 
이대로 페널티를 연거푸 당하게 되면, 나도 순식간에 다른 일행들과 같은 꼴이 되겠지. 
나는 일부러 녀석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며 물었다. 
 
“왜 한국인들을 적대하는 거지?” 
 
원작에서도 일본인들과 싸우는 전개가 있기는 하지만, 초장부터 이렇게 치고 박고 싸우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번에는 내가 [절대 왕좌]를 부수는 바람에 한국의 진입이 더 늦어졌다. 
그러니 바로 이런 급전개가 펼쳐질 리는 없는데······. 
 
“몰라서 묻는 건가? 우릴 먼저 적대한 건 네놈들이다.” 
“······국민 정서 이야긴가? 난 딱히 반일 감정 없어.” 
“너희 조센징들이 우리 일본인들을 먼저 죽였어.” 
 
나는 이현성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정말입니까?” 
“아닙니다! 소인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 건 맞지만······ 일본인을 죽이진 않았습니다.” 
“아니라는데?” 
 
그 말에 사무라이가 이를 갈았다. 
 
“저놈들 얘기가 아니다. 시치미를 뗄 생각이라면 그만두지.” 
 
우리가 맨 처음 투입자인데, 우리 얘기가 아니라고? 
······잠깐만. 
어쩐지 이놈들의 혐한 감정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알 것 같은데. 
 
“잔말 말고 어서 덤비······!” 
 
그러지 뭐.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4번 책갈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바람의 길 Lv.8」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순식간에 터져 나온 바람이 내 앞에 길을 틔웠다. 
풍압에 밀려 나간 일본인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고, 나는 그 짧은 틈을 타고 일행들을 구출했다. 
 
“모두 날 붙잡아요.” 
 
기다렸다는 듯, 이현성과 이지혜가 내 어깨에 매달렸고, 이길영은 신유승이 있는 안주머니로 잽싸게 들어갔다. 
 
“여기 내 자리야!” 
“네가 다른 주머니로 가면 되잖아!” 
 
아이들이 싸우는 사이, 나는 406번 할머니를 양손으로 안아 모셨다. 
 
“그럼 갑니다.” 
 
나는 숲 지대의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일본인들 전부를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괜히 조무래기 하나라도 죽이게 되면 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니까. 
 
[같은 재앙에 대한 적대 행위가 감지되었습니다.] 
[당신에게 1차 시나리오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신체 부피가 감소하였습니다.] 
[종합 능력치가 감소하였습니다.] 
 
가진 전투력의 크기 때문인지, 약간의 적대 행위만으로도 벌써 페널티가 시작되었다. 
몸의 부피가 미미하게 줄어들었다. 키도 5cm 정도는 작아진 것 같은데. 
다행인 점은, 내 표면적 감소와 더불어 코트의 크기도 함께 줄었다는 것이었다. 
역시 SSS급 코트라서 사용자의 크기에 알맞게 변화하는 모양이다. 
어디까지 작아질지 궁금한데 이거. 
 
“쫓아라!” 
 
뒤쪽에서 허겁지겁 나를 따라오는 일본인들이 보였다. 
 
[몇몇 성좌들이 치욕의 역사를 갚고 민족의 얼을 되찾기를 원합니다.] 
[2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한반도 성좌들의 메시지가 귓가에서 아우성을 쳐댔다. 
하긴, 분노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얼핏 봐도 저들 중에는 이들의 분노를 살만한 성좌들이 몇몇 보이니까. 
나는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린 이지혜를 보며 물었다. 
 
“넌 배후성이 충무공인데 왜 벌써 당했냐?” 
“······주변에 강도 바다도 없었다고.” 
 
하기야, 충무공은 쌍룡검을 얻기 전까지는 물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이현성이야 소인들을 지키겠다고 질질 끌다가 페널티를 받았을 거고, 이길영은······ 신유승과 한창 떠드는 중이었다. 
 
“벌레는 소중히 대해야 해. 함부로 막 죽이면 안 된다고.” 
“······소인은 벌레가 아냐.” 
“작은 건 다 벌레야.” 
 
그래, 왜 그런 꼴이 됐는지 잘 알겠다. 
나는 가끔 이길영이 커서 사이코패스가 될까봐 두렵다. 
 
“놈이 총리님이 계신 방향으로 간다!” 
“어서 총리님께 연락해!” 
 
페널티에다가 식민지 효과까지 겹쳐서인지 [바람의 길]을 가동 중임에도 일본인들에게 조금씩 따라 잡히고 있었다. 나는 이현성을 비롯한 일행들에게 말했다. 
 
“뱀 사냥을 하기 전에, 미리 잡아야 할 녀석이 있습니다.” 
“‘총리’를 잡을 셈입니까?” 
“일본 사대 그룹 중 하나를 이끄는 녀석이니, 해치우기만 하면 재앙들이 잠시 주춤할 겁니다.” 
 
일단 소인화가 진행되면 재앙과의 격차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지금은 농락하듯 잡을 수 있는 저 녀석들이, 나중에는 우리 전부가 달려들어도 상대하기 힘든 녀석들이 되는 것이다. 
내 손 안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406번 할머니가 물었다. 
 
“젊은이, 무겁지 않은가?” 
“무거워요.” 
 
유독, 할머니만 더 무겁다. 
실제 질량이 줄어든 게 아니니까 그렇겠지. 
 
“아시죠? 기회는 한 번뿐입니다.” 

할머니가 흘흘 웃었다. 
 
“그래, 그래.” 
 
이번 작전의 핵심은 406번 할머니다. 
뱀은 놓쳤어도 ‘총리’가 있다는 건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른다. 
‘총리’는 강하지만, 이 할머니가 있는 한 ‘총리’는 반드시 잡을 수 있을 테니까. 
앞쪽의 수풀 사이에서 한 사내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배후성이 아우성을 치는군······ 무슨 난리들이냐?” 
 
야쿠자를 연상시키는 외모에 금빛 수실이 박힌 완장을 찬 노신사. 
물어볼 필요도 없이, 바로 내가 찾던 사람이었다. 
그가 바로 ‘총리’ 야마모토였다. 
 
“······조센징?” 
 
총리는 한쪽 팔에 철제 새장을 끼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여자 소인 하나가 갇혀 있었다. 분노한 이지혜가 외쳤다. 
 
“저놈 저거······!” 
 
아마 저 새장 속의 여자가 일본의 1차 투입자 ‘아스카 렌’이겠지. 
일본에서 처음으로 ‘재앙’이 되길 거부한 사람. 
한국인이라고 모두 좋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일본인도 모두 같지는 않다. 좋고 나쁨은 어디까지나 상황에 따라 우연히 결정되는 것일 뿐인 셈. 

총리가 물었다. 
 
“말해라, 네놈은 누구냐.”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인물 : 야마모토 하지메 
나이 : 64세 
배후성(背後星) : 구한말의 침략자 
전용 특성 : 식민주의자(영웅) , 색욕마인 (영웅), 혐한론자 (희귀) 
전용 스킬 : [백병전 Lv.7], [상급 무기연마 Lv.4], [일본검도 Lv.8], [정신 집중 Lv.3], [군중 지휘 Lv.4]······. 
성흔 : [식민화 Lv.7], [기합 Lv.5] 
종합 능력치 : [체력 Lv.60(+10)], [근력 Lv.60(+10)], [민첩 Lv.60(+10)], [마력 Lv.60(+10)] 
종합 평가 : 일본의 4대 그룹 중 하나를 이끌고 있는 야마모토 하지메입니다. 특정 민족에게 강력한 영향을 발휘하는 ‘식민화’를 사용합니다. 만약 당신이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라면, 이 자와는 맞서지 않는 것을 추천합니다. 
 
+ 
 
“식민지의 노예가 여기가 어디라고 온 것이냐.” 
 
과연, 한국에 삼국의 왕들이 있었듯 일본에도 이런 녀석은 있다. 
어느 나라를 가나 시대 감각을 잃어버린 놈들은 있는 것이다. 
 
[시나리오 버프 효과로 화신 ‘야마모토 하지메’의 동조율이 상승합니다.] 
 
구한말의 침략자. 
야마토토 하지메의 배후성은 일본의 초대 내각 총리대신인 ‘이토 히로부미’였다. 
 
[‘식민화’의 효과로 움직임이 크게 둔해집니다.] 
[‘식민화’의 효과로 당신의 정신력이 약해집니다.] 

야마모토의 성흔인 [식민화]는 일본에게 역사적 지배를 경험한 민족들에게 강력한 디버프를 건다. 정신력 디버프야 [제4의 벽]이 있으니 괜찮다 하더라도, 움직임의 제약은 확실히 컸다. 
나는 애써 그 포박에 저항하며 말했다. 
 
“겨우 위인급 정도로 허세 부리지 마.” 
“하찮은······!” 
 
아마 구한말의 침략자도 이번 시나리오에서 크게 한탕 해서 설화를 쌓을 기회를 노리고 있겠지. 
하지만 뜻대로는 안 될 거다. 
 
[민족의 독립을 오래도록 염원해 온 한 성좌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위대한 독립투사가 자신에게 세 발의 총탄만 쥐어 준다면 그를 죽여주겠다 약속합니다.] 
 
나는 야마모토를 향해 곧장 달려갔다. 
그리고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집어넣은 후 [간평의]를 꺼냈다. 
 
“죽여라!” 
 
영리한 야마모토는 자신의 부하들을 고기 방패로 내놓았다. 
내가 한 명만 죽여도 곧바로 소인이 될 것을 알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야마모토를 죽이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죽이고 나면 내가 받는 피해가 ‘소인화’만이 아니라는 것 
 
누군가를 죽이면, 나는 ‘불살의 왕’의 효과를 상실하게 된다. 
 
물론 이번 시나리오에서, 나는 불살의 왕을 포기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고작 총리 정도를 죽이는데 여벌 목숨을 내줄 수는 없지. 
그러니, 여기서 싸울 것은 내가 아니다. 
 
[‘간평의’의 특수 옵션, ‘별의 메아리’를 발동합니다.] 
[‘별의 메아리’를 통해 당신은 위인급 성좌의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성좌는 당신의 요청을 거부할 수 있으며, 성좌가 요청에 응할 시 간평의의 사용횟수는 감소합니다.] 
 
지반을 돌리자, 천반의 별자리들이 환하게 불타올랐다. 
 
[별들의 흐름 속에 위인급 성좌들이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한 명의 성좌를 호명했다. 
 
“나는 ‘민족의 독립 운동가’를 원한다.” 
 
오랜 침탈의 역사를 받은 한반도에, ‘독립 운동가’라는 칭호를 받을 사람은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 중, ‘민족의 독립 운동가’라는 수식언을 가진 사람은 단 하나뿐이다. 
왜냐하면 한반도의 다른 모든 성좌들이, 그를 위해 그 수식언을 내주었기 때문이다. 
 
[성좌, ‘민족의 독립 운동가’가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고요하고 청명한 기운이 머릿속에 스며들더니, 성좌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새하얀 소복에 까맣게 흩날리는 치맛자락. 성좌위에 오르기엔 너무나 어린 외양의 소녀.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성좌가 먼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치, 감사의 인사는 필요 없다는 듯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에 이토가 있다면, 한국에는 이 성좌가 있다. 
 
“뭐야? 저놈 배후성 뭐야!” 
 
당황한 일본인들이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내게서 딱히 이상 징후가 보이지 않자, 이내 정신을 되찾은 일본인들이 재차 포위를 시작했다. 
 
[성흔, ‘독립 선포 Lv.1’가 ‘식민화’의 기운을 배제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내 공격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성흔, ‘비폭력지대 Lv.1’이 당신과 특정 민족의 움직임을 봉쇄합니다.] 
 
갑자기 근방 수십 미터의 모든 일본인들이 빳빳이 굳어버렸다. 
 
“갑자기 몸이······?” 
 
[식민화]가 한국인에게만 먹히는 성흔이라면, [비폭력지대]는 일본인들에게만 먹히는 성흔이다. 이 성흔을 사용하는 한, 인근의 나와 일본인들은 자리에 굳은 채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적어도, 앞으로 1분간은 말이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당황하는 일본인들의 가운데, 야마모토만이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그 역시, 내 성흔에 의해 꽁꽁 묶여 있었다. 
 
“그 성좌의 힘은······ 재미있군. 내 배후성이 미친 듯 날뛰고 있어.” 
“······.” 
“하지만 움직일 수 없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지. 어떻게 날 죽일 거냐?” 
 
나는 씩 웃었다. 
 
“널 죽이는 건 내가 아니야.” 
 
당연한 얘기다. 
야마모토를 죽이는 사람은 애초에 정해져 있으니까. 
 
“할머니, 지금입니다.” 
 
내 말과 함께, 내 왼손 위에 앉아있던 죄수번호 406번 할머니가 움직였다. 그리고 마법처럼, 할머니의 몸이 급격하게 커지기 시작했다. 
 
“저, 저거 뭐야!” 
 
사실, 할머니는 처음부터 ‘소인화’에 걸린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처음부터 ‘소인’인 채 들어왔기 때문이다. 
엄마의 수하인 ‘전우치’가 걸어준 도술 덕분이었다. 
 
“당황하지 마라! 고작 할머니야!” 
 
조금씩 약해지는 포박에 힘입어, 일본인들이 비틀거리며 할머니의 앞길을 막아섰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저 흘흘 웃으며 그들을 향해 다가갈 뿐이었다. 
 
[등장인물 ‘이복순’이 스킬 ‘노인공경 Lv.7’을 발동합니다!] 
[등장인물 ‘이복순’보다 나이가 어린 모든 화신들이 그녀에게 존경심을 느낍니다.] 
 
“씨발, 이거 뭐야······!” 
 
마치 지하철의 좌석을 양보하듯, 일본인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물론 자의가 아니었다. 
 
“흘흘, 고맙네 젊은이들. 그런데 사실 양보는 필요 없다네.” 
 
[등장인물 ‘이복순’이 스킬 ‘노강자(老强者) Lv.6’을 발동합니다!] 
 
“이 할미는, 제법 강하거든.” 
 
할머니의 팔에 맞은 일본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팔. 어느새 그녀의 모습은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체형으로 변해 있었다. 
그 우람한 근육에 이현성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마, 막아! 막으라고!” 
 
그제야 뭔가가 잘못 되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총리 야마모토가 외쳤다. 내가 입을 열었다. 
 
“할머니, 빨리 끝내세요.” 
 
이복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한 상황이라 해도, 단 한 사람만 죽이면 결국 소인화는 발생한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소인화’를 맞이하기 전 우리가 누구를 죽이냐는 것이다. 
이복순의 전신에 배후성의 기운이 내려앉았다. 
 
[성좌, ‘민족의 독립 운동가’와 성좌 ‘하얼빈의 저격수’가 앙상블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얼빈의 저격수’의 탄환이 100%의 명중률을 획득합니다.] 
[‘하얼빈의 저격수’의 탄환 공격력이 150% 상승합니다.] 
 
이제 이복순의 모습은 단순한 노인이 아니라 한 사람의 투사처럼 보였다.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투사. 
 
“언제까지 노약자석에 앉아 버르적거리고 있을 건가? 이젠 구한말이 아니야. 젊은 치들이 좀 사이좋게 지내보겠다는데, 비켜줄 줄도 알아야지.” 
 
[등장인물 ‘이복순’이 성흔 ‘세 발의 총탄 Lv.1’을 발동합니다!] 
 
그 말과 함께, 이복순이 자신의 양손 검지와 엄지를 구십도로 뻗어 총 모양을 만들었다. 
고요한 마력의 움직임이 검지 끝에 맺혔다. 
대부분의 화신들은 그 마력 탄환에 거의 타격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단 한 명만은 다르다. 
총리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그 능력은? 당신의 배후성은 설마······!” 
 
파츠츠츠츠츳! 
 
「무대화」. 
 
서로 관계된 성좌의 화신들이 만나면 빚어지는 현상. 
찰나였지만 주변의 풍광이 일그러지며, 증기기관차의 엔진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는 듯했다. 낡은 플랫폼. 난생 처음 보는 역이었지만 나는 이곳이 어딘지 알 것 같았다. 
 
1909년, 중국의 하얼빈. 
 
“으, 으아아아······!” 
 
이곳은,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곳이었다. 
 
“아, 안돼! 빌어먹을! 저 할멈을 막아!” 
 
겁에 질린 야마모토가 비명을 질렀다. 
「무대화」가 발생한 곳에서, 성좌들의 상성은 절대적이다. 
 
[「무대화」의 영향으로 ‘세 발의 총탄’의 특화 데미지가 적용됩니다.] 
[총탄의 데미지가 2000% 상승합니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총탄이, 이복순의 손끝에서 불타올랐다. 
 
[성좌, ‘구한말의 침략자’가 일본의 다른 성좌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성좌, ‘구한말의 침략자’가 절규하며 화신 ‘이복순’을 노려봅니다!] 
 
죄수 번호 406번 이복순. 
그녀의 배후성은 의사(義士) 안중근이다. 
 
“잘 가게, 일본인 양반.” 
 
세 발의 총성이 차례로 울려 퍼졌고, 허망한 얼굴로 자신의 흉부를 내려다 본 야마모토의 몸이 천천히 뒤를 향해 넘어갔다.
 
 
 
 
 
< Episode 24. 바꿀 수 있는 것 (4) > 끝

< Episode 24. 바꿀 수 있는 것 (5) >
 
 
 
 
 
단 세 발의 총탄에 야마모토의 숨은 끊어졌다. 
무슨 웨스턴 카우보이라도 되는 것처럼 입김을 불자, 이복순의 손가락 끝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정말 터프한 할머니다. 
 
[명성을 가진 재앙이 사멸하였습니다.] 
[재앙 ‘식민주의자’를 처치하였습니다.] 
[5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주요 공헌자 : 이복순, 김독자] 
 
뱀을 잡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총리를 사냥한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소득이었다. 앞으로 있을 대군전에서 총리의 부재는 일본군의 승세를 크게 꺾을 것이다. 거기다 보상도 아주 짭짤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과도한 민족주의 정서에 반감을 가집니다.] 
 
내 시나리오에 불만을 표하는 성좌들도 많았지만, 어쩔 수 없다. 
한반도에서 민족주의는 코인이 된다. 
할 수 없이 이야기를 팔아야만 한다면, 그래도 비싼 값에 파는 게 낫지. 
 
[한반도의 상당수 성좌들이 당신의 재현(再現)에 갈채를 보냅니다.] 
[10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역시, 아직 옛날을 못 잊은 성좌들이 제법 있다니까. 
당황한 일본인들이 야마모토를 향해 달려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초, 총리님!” 
 
그사이 나는 십여 미터 떨어져 있는 이복순을 향해 달려갔다. 
이복순의 몸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등장인물 ‘이복순’이 ‘재앙’으로서의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였습니다.] 
[<스타 스트림>의 도깨비들이 ‘이복순’의 행위를 시나리오 대적 행위로 간주하였습니다.] 
[소인화(小人化)가 시작됩니다.] 
 
이복순은 부쩍 지친 얼굴이었는데, 아무래도 ‘세 발의 총탄’을 사용한 후유증이 큰 듯했다. 
특정인에게 즉살 효과를 낼 수 있는 성흔은, 사용한 화신에게도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데미지를 입힌다. 
때문에 그녀는 성흔을 사용한 직후부터 완전히 탈진해버린 상태였다. 
 
“젊은이, 나 좀 업어주어.” 
“일단 주머니 속에서 옷 좀 걸치세요.” 
 
아까 소인종들을 구해주고 답례로 받은 옷이 몇 벌 있었다. 
나는 할머니를 코트 왼쪽 주머니에 넣은 후, 이지혜를 시켜 할머니가 옷을 입으시게 도왔다. 
 
[「바람의 길 Lv.8」을 활성화합니다.] 
 
책갈피의 남은 시간은 10분. 
이제 10분 안에, 숲 지대를 빠져나가야 한다. 
 
“총리님이 죽었다!” 
“저놈들 막아!” 
 
일본인들이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질렀다. 
 
[2차 시나리오 페널티를 받았습니다.] 
[5분 안에 ‘소인종’을 사냥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스타 스트림>은 당신에게 재앙 활동의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젠장. 10분이 아니라 5분인가.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날 데려가 줘요!” 
 
야마모토가 죽으며 떨어트린 새장 안에서 일본인 여자가 외쳤다. 
 
“제발요! 제발!” 
 
······아스카 렌. 
망설임은 없었다. 처음부터 데려갈 생각이었으니까. 
나는 질풍처럼 튀어나가 새장을 박살 낸 후 그녀를 손안에 넣었다. 
 
“고마워요! 정말······.” 
 
나는 인사를 생략하고 양다리의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꽉 잡아요.” 
 
전력을 다한 마력 운용. 바람이 갈라지며 ‘가장 빠른 길’이 보였다. 
양다리에 휘감긴 바람의 기운이 근육의 세밀한 움직임까지 포착하며 최적의 속도를 만들어 냈다. 
[식민화]가 사라졌기에 아까보다 달리기는 편했지만, 페널티 효과로 능력치가 절반으로 깎여 있어서 만족할만한 속도가 나지는 않았다. 
그래도 30 남짓의 민첩으로 이만한 속도를 낼 수 있는 것을 보면, [바람의 길]이 대단한 스킬이기는 하다. 
아스카 렌이 말했다. 
 
“정말 빠르군요. 일본에서도 이 정도 속도는 카라스나 낼 수 있을 텐데.” 
 
카라스라면 아마 ‘카라스 텐구’를 말하는 거겠지. 
 
“전력을 내면 그쪽이 더 빠를 겁니다.” 
“······카라스를 알고 있나요?” 
“빠르기로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요괴잖습니까.” 
 
바람의 길을 극성까지 익히면 카라스 텐구보다도 빠르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게다가 [바람의 길]은 내 스킬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책갈피]는 어디까지나 시간 제한이 있으니까. 
 
“죽여버려! 어차피 곧 작아진다!” 
“작아진 놈들은 우리가 책임질 테니까 그냥 죽여!” 
 
이제 일본인들도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살수를 발했다. 
 
“총리님의 복수다!” 
 
표창 두어 개가 아슬아슬하게 어깨를 스쳐 갔다. 
이대로면 위험하다 싶었는데, 갑자기 눈앞의 지형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주변의 나무들이 일제히 꿈틀대며 달리던 숲길의 모양을 변형시켰다. 
 
쿠드드드드. 
 
숲 지대의 모양이 변하고 있었다. 
마법인가 싶었는데, 아스카 렌이 말했다. 
 
“밤이에요. 조심하세요!” 
 
뒤늦게 ‘멸살법’의 언급이 떠올랐다. 
[피스 랜드]의 숲 지대는 밤이 되면 모습이 변한다. 
일종의 미로화가 발생하는 것인데, 말하자면 숲 자체가 거대한 괴물의 위장처럼 변하게 되는 것이다. 
발을 딛는 곳마다 끈적한 소화액이 분출되고 있었다. 
[피스 랜드]의 소인들이 이 숲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한밤에 숲 지대에 들어간 소인들 중 살아 돌아온 소인이 없기 때문이었다. 
 
“쫓아라!” 
“우아아악!” 
 
숲의 위장운동이 시작되며, 나를 쫓아오던 몇몇 일본인들도 길을 잃은 듯했다. 물론 저렇게 커다란 ‘재앙’들은 숲이 소화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시간 벌이로는 충분했다. 
 
[3분 안에 ‘소인종’을 사냥하십시오.] 
 
최선을 다해 달렸지만, 미로처럼 변한 숲 지대는 내 방향감각을 조금씩 마비시켰다. ‘멸살법’에도 밤의 숲에서 탈출할 구체적인 방법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이쪽이에요!” 
 
‘멸살법’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피스 랜드]에서 첫 번째로 얻어야 할 사람은 ‘아스카 렌’이다.」 
 
나는 아스카 렌의 지시에 따라 방향을 틀었다. 
 
“저 나무를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달려요!” 
“······일본인 처자, 길을 아는 건가?” 
 
일본어가 능통한 이복순이 묻자, 아스카 렌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이 숲에 대해서라면 잘 알아요.” 
“흘흘, 관련 스킬이 있는 모양이지?” 
“······네.” 
 
나는 아스카 렌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숲에서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길 찾기 스킬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아마도 ‘피스 랜드’에 관한한, 그녀는 내가 ‘멸살법’을 아는 것만큼이나 전문가일 것이다. 
아마, 일본인들도 그런 이유로 소인화된 그녀를 살려둔 것일 테지. 
나는 아스카 렌의 인도를 받아 [바람의 길]을 최고조로 운용했다. 
달음박질은 점점 더 빨라졌지만, 시간은 그보다도 빠르게 나를 쫓아왔다. 
 
[1분 안에 ‘소인종’을 사냥하십시오.] 
 
조금만, 조금만 더. 
 
휘이익! 파바밧! 
 
“잡아! 놈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 
 
몇 번인가 길이 뒤틀리는 사이, 쫓아오는 일본인의 숫자는 부쩍 줄었다. 
“다 왔어요!” 
 
그리고 마침내 숲 지대가 끝났다. 
 
[당신은 제한시간 내에 ‘소인종’을 사냥하지 못했습니다.] 
[<스타 스트림>의 도깨비들이 당신에게 ‘재앙’ 활동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당신에게 3차 시나리오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소인화가 시작됩니다.] 
 
젠장. 
 
“모두 나한테서 떨어져요!” 
 
내 외침과 함께, 뭔가를 눈치챈 일행들이 내 몸에서 벗어났다. 
누군가가 착즙기에 내 몸을 넣고 돌려 짜는 듯한 느낌이었다. 
전신에 힘이 빠져나가며 꽈드드득, 소리가 귓전을 천둥처럼 울렸다. 
다시 눈을 깜빡였을 때, 시야는 거의 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이게 소인들의 기분이었군 그래. 
 
다행히 코트는 내 몸의 크기에 알맞게 함께 줄어들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비롯해서 코트의 아공간 속에 아이템들을 모두 넣어 두었기 때문에 잃어버린 아이템도 없었다. 
문제는 다시 꺼낼 때인데······. 
 
“아저씨, 괜찮아요?” 
 
나는 일행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살짝 떨어진 곳에서 내 눈치를 보고 있는 아스카 렌을 향해 말했다. 
 
“아스카 렌 씨.” 
“······제가 자기 소개를 했던가요?” 
“다른 일본인들이 알려줬습니다. 그보다 제 일행들을 부탁합니다. 이들을 ‘베로니카 왕성’까지 데려다주세요.” 
 
내 말에 아스카 렌의 눈동자가 커졌다. 
내가 어떻게 [피스 랜드]의 지명을 알고 있는지 놀란 거겠지. 
 
“설명할 시간 없으니, 부탁합니다. 이곳은 제가 막겠습니다.” 
“······알겠어요.” 
 
헉헉거리는 숨 소리와 함께 숲길 속에서 일본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끝까지 쫓아온 일본인은 총 셋. 
높이가 달라지니, 갑자기 놈들이 괴물처럼 보인다. 
 
“망할 조센징 놈들!” 
 
하나라면 일행들과 합세해 어떻게든 잡아볼 생각이었고, 둘이면 고민을 좀 했을 것이다. 
그런데 셋이라······. 
소인화가 진행된 일행들이 전력을 다해 달려들어도 저들을 이길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이현성이 말했다. 
 
“혼자 두고는 못 갑니다.” 
“가야 합니다. 그래야 모두가 살아요. 저 혼자라면 몸을 뺄 방법이 있습니다.” 
 
미로화 된 숲을 헤쳐오느라 만신창이가 된 일본인들이 퉤, 하고 바닥에 침을 뱉더니 이쪽을 향해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벌레처럼 짓밟아 주지.” 
 
나는 다가오는 놈들을 보며 외쳤다. 
 
“길영아!” 
 
기다렸다는 듯, 이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공에서 작은 곤충들이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모두 나중에 봅시다.” 
 
곤충들은 하나둘 일행들을 등에 태우기 시작했다. 아마 곤충의 속도라면 내가 시간을 끄는 동안 이들로부터 어느 정도 멀어질 수 있을 것이다. 
 
“잠깐만요! 아저씨!” 
 
신유승의 외침과 동시에 사무라이의 칼날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콰과곽! 
 
칼날은 내 바로 곁을 스치며 바닥에 꽂혔다. 윙윙거리며 터져 나온 마력의 파장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인간일 때는 별거 아닌 놈들이었는데, 지금은 칼끝에 닿기만 해도 위험했다. 아마 간단히 두 쪽으로 쪼개질 것이다. 

“죽어!” 
 
이복순으로 총리를 잡는 것까지는 계획에 있었지만, 지금부터는 나도 구체적인 대책이 없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다가 다시 숲의 미로 속으로 달아나거나, 아니면······. 
 
“이놈은 내가 죽인다. 나머지를 쫓아!” 
 
셋 중 둘이 고개를 끄덕였고, 곤충에 탑승한 일행들을 쫓기 시작했다. 
그렇게는 안 되지. 
 
[성흔, ‘비폭력지대 Lv.1’을 사용하였습니다!] 
 
달려가던 일본인들이 우뚝 멈췄다. 
 
“젠장, 또······!” 
 
발이 묶인 일본인들이 짜증 난다는 듯 내 쪽을 돌아보았다. 
소인이 되면서 마력량도 현저하게 줄어버렸기에, 겨우 세 명의 움직임을 봉쇄하는데도 상당한 정신력이 소모되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왔고, 피가 쏠린 코안에서 희미한 열기가 흘러나왔다. 
 
[성좌, ‘민족의 독립운동가’가 당신에게 가호를 내립니다.] 
 
메시지와 함께, 잠깐이지만 성흔의 사용 마력이 줄어들며 몸이 편해졌다. 
머릿속에서 성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손이여, 부름에 응하는 것은 이번뿐입니다.] 
 
“······고맙습니다, 열사.” 
 
[역사란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기록되는 것. 사사로운 개인의 영달을 위해 과거를 초환(招還)하지 않도록 하세요.] 
 
아무래도 과도한 연출을 위해 위인급 성좌들을 이용했다는 게 들킨 모양이다. 
거기다가 [비폭력지대]를 폭력을 행하기 위해 썼으니, 화를 낼 법도 하지. 
나는 간신히 고개만 끄덕인 후 초조하게 주변을 살폈다. 
 
[‘비폭력지대’의 사용 시간이 30초 남았습니다.] 
 
비폭력지대가 끝나는 순간, 전력을 다해 숲 지대로 달려가야 한다. 
강력한 마력을 휘감은 칼날들이 나를 두쪽으로 쪼개기 위해 벼르고 있었다. 
······아마 여기서 죽지는 않겠지만, 잘못하면 중상을 입을 수도 있겠는데. 
 
15초, 14초, 13초······. 
 
그리고 문제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성좌, ‘디펜스 마스터’가 당신의 한심함에 개탄합니다.] 
 
······응? 
익숙한 성좌의 이름에 고개를 갸웃하던 순간. 
기이이잉― 하는 기계음이 일제히 울려 퍼지더니, 이내 폭발적인 총성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등장인물 ‘공필두’가 성흔 ‘무장요새 Lv.1’을 발동합니다!] 
 
두두두두두!
 
 
 
 
< Episode 24. 바꿀 수 있는 것 (5) > 끝

< Episode 24. 바꿀 수 있는 것 (6) >
 
 
 
 
 
쏟아지는 포화를 보며 나는 조금 놀랐다. 
[무장지대]가 아니라 [무장요새]. 
그새 공필두의 성흔 레벨이 10을 돌파하여, 상위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당신은 ‘사유지’를 침범하였습니다!] 
 
이것 참. 
이 메시지가 이렇게 반가운 순간이 있을 줄이야. 
 
“으아악! 아파! 이거 뭐야!” 
 
족히 백여 문은 될 듯한 포탑들이 동시에 탄환을 발사하자, 일본인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댔다. 
한 발 한 발은 큰 타격이 아니더라도, 백여 문의 포탑이 수천 발의 탄환을 쏟아내기 시작하니 아무리 재앙이라도 타격이 없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움직임이 묶여 있는 상황이었기에 피해는 더욱 컸다. 
 
두두두두두! 
 
탄환에 맞은 일본인들의 몸 곳곳에서 작은 핏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눈! 내 눈!” 
“뭐야! 뭐냐고!” 
 
사각도 없이 날아오는 포탄이 화망을 형성했고, 급소를 맞은 일본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전군 진격하라!” 
 
숲 지대의 입구에 숨어 있었던 모양인지, 소인들의 군대도 함께 가세했다. 본래였다면 별 도움 안 되는 전력이었겠지만, 일본인들의 몸 곳곳에 생채기가 난 상황이었기에 상황은 조금 달라졌다. 탄환이 만든 생채기 사이로 작은 칼날들이 파고들자 일본인들이 연달아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들려오는 중후한 중년의 목소리. 
 
“사유지 침범하지 말고 꺼져. 여긴 내 땅이야.” 
 
과연 무장성주. 
이계에 와서도 사유지를 깔다니, 십악이 괜히 십악이 아니지. 
당황한 일본인이 부상자를 부축하며 외쳤다. 
 
“무, 물러서! 일단 후퇴한다!” 
 
대단한 일이었다. 
포탑들의 크기로 보아 공필두 역시 소인화가 진행된 듯한데, 그 상태로 재앙 셋을 물러서게 만들 정도로 강해졌을 줄이야. 
 
쿠구구구구. 
 
등을 돌리자, 땅에서 솟아오른 작은 성채가 보였다. 
아직 제대로 된 무장요새라고 말하기에는 어설프지만, 그래도 저 정도면 이제 무장성주라는 이름이 아깝지가 않다. 
 
“와아아아아!” 
“이겼다! 우리가 재앙을 물리쳤다!” 
 
기뻐하는 소인들이 성채의 주변으로 몰려와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성채의 꼭대기에는 두 인영이 서 있었다. 
하나는 공필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여기가 왜 당신 땅이야? 사유재산이 인정되는 곳도 아닌데.” 
“어린 계집애가 반말이나 찍찍하고······.” 
“흐음, 이 여신님께 좀 더 예의를 갖추는 게 좋을 텐데?” 
 
······저 목소리는? 
소인들이 다시 한번 함성을 질렀다. 
 
“여신님, 만세! 만세!” 
 
······여신님? 
성채의 꼭대기에서 나를 발견한 여자가 아래로 뛰어내렸다. 
짧은 드레스가 나풀나풀 바람에 흩날리며, 바닥에 가벼운 착지음이 들렸다. 
특유의 오만한 눈빛에 오연한 표정. 
정말이지 변한 게 없군. 
모세라도 되는 양, 그녀의 걸음마다 소인들의 길이 열리며 파도를 탔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아주 출세하셨는데 그래?” 
 
코앞까지 다가온 한수영이, 손가락으로 내 턱을 척 들어 올리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김독자. 못생긴 건 여전하네.” 
 
다시 만난 한수영은 [피스 랜드]의 여신이 되어있었다. 
 
 
* 
 
 
왕성으로 가는 내내, 나는 한수영에게 그간 있었던 일에 관해 전해 들었다. 
 
“차도를 걷다가 갑자기 끼어든 생존자 버스에 치였어.” 
“그리고?” 
“눈을 떠보니 여기였지.” 
“그게 말이 되냐? 그럼 공필두는?” 
“한강에 빠졌는데 눈을 떠 보니 여기였다더라.” 
“······무슨 판타지 소설이냐?”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잊은 모양이네?” 
 
대강 그런 식의 대화였다. 
어이없다는 듯 대꾸하긴 했지만, 사실 ‘멸살법’의 세계에선 있을 법한 일들이었다. 실제로 이곳의 귀환자들 중에는 한강에 투신하거나 버스에 치여서 다른 세계로 간 녀석들이 꽤 있었으니까. 
하지만 시나리오 도중에 그런 일을 겪다니······. 
도깨비 새끼들은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건지. 
 
“······근데 여신은 또 뭐야? 네가 그렇게 부르라고 시켰냐?” 
 
한수영이 치맛자락을 털며 투덜거렸다. 
 
“거참, 기껏 구해줬더니 말 많네.” 
“뭔데? 말을 해.” 
“너 그새 내가 누군지 잊어버린 거야?” 
“어?” 
“머리가 작아졌다고 뇌 용적량까지 줄어든 거냐고.” 
 
생각해 보니, 멍청한 질문이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한수영은 서울 돔에 남은 유일한 ‘선지자’였다. 
게다가 지구의 하루는 [피스 랜드]에서의 3일. 
우리가 헤어진 지 이제 일주일 남짓 지났으니 한수영이 [피스 랜드]에서 보낸 시간은 약 3주인 셈이다. 
미래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3주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한수영이 갑자기 낯선 세계의 여신이 되어있다고 해도······ 아니, 그래도 뭔가 조금 이상한데. 
여왕이라면 모를까, 여신은 또 뭐야? 
 
“연놈들이 쿵짝이 아주 잘 맞는군.” 
 
목소리에 곁을 돌아보니 공필두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안 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지. 
 
“공필두.” 
“왜.” 
“미안해.” 
“뭔 개소리냐?” 
“잘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고.” 
“······누가 들으면 내가 챙겨 달라고 한 줄 알겠군.” 
“진짜로 미안합니다. 그리고 구해줘서 고마워요.” 
 
정말로 미안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존댓말을 했다. 
솔직히 다섯 번째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내내 너무 바빠서 공필두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못했다. 
심지어 이번에는 구명을 받기까지 했으니, 디펜스 마스터에게 후원자가 되어주겠답시고 호언을 했던 게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성좌, ‘디펜스 마스터’가 당신의 사과에 콧방귀를 뀝니다.] 
 
“······쳇.” 
 
쿵짝이 잘 맞는 게 어느 쪽인지 모르겠군. 
 
[당신은 ‘디펜스 마스터’에게 50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성좌, ‘디펜스 마스터’가 마지못해 고개를 까딱입니다.] 
 
잠시 나를 노려보던 공필두가 고개를 홱 돌리며 짓씹듯 말했다. 
 
“그럼 다음부턴 잘하든가.” 
 
자존심만큼 배가 솟은 저 아저씨가 저런 모습을 보이니, 그것 또한 진풍경이긴 하다. 
아무튼, 소인이 되긴 했어도 둘 다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어? 잠깐만. 소인이 되긴 했어도······? 
 
나는 잠시 멍해져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들, 대체 왜 재앙을 그만두고 소인을 선택한 거지? 
둘 다 그럴 위인들이 아니신데? 
 
“저,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돌아보니, 이현성을 비롯한 일행들이 다가와 있었다. 
곤충을 타고 왕성 베로니카로 달아나던 일행들은 마침 지나가던 공필두 무리와 우연히 조우했던 것이다. 
 
“아니에요. 할 일을 했을 뿐이죠.” 
 
가볍게 웃으며 손사래를 치는 한수영을 보니 악마가 가면을 쓰면 어떤 모습인지 잘 알겠다. 
그런 한수영을 유심히 보던 이지혜가 물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분인데, 누구세요?” 

그러고 보니, 지금 일행들은 아바타가 아닌 한수영의 본 모습을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즉, 일행들은 이 녀석이 ‘첫 번째 사도’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나를 힐끔 보는 한수영을 대신해, 내가 입을 열었다. 
 
“어, 그게······.” 
 
만약 이 녀석이 ‘첫 번째 사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지혜는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충무로의 대 사도전에서 가장 큰 부상을 입었던 것이 바로 이지혜였으니까. 
정체가 밝혀진다면 파티가 뒤집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 자리에서 혈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양심을 배반하기로 했다. 
 
“그냥 원래 알던 친구야.” 
 
친구, 라는 말을 이럴 때 써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뭐 상관없겠다 싶었다. 
어차피 난 친구도 없으니까. 
고개 숙인 한수영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저, 말씀하시는데 죄송하지만······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어색해지던 분위기를 깨트린 것은 내가 새장에서 구해준 일본인, 아스카 렌이었다. 
한수영이 저 일본인은 누구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지혜도 거들었다. 
 
“······그러고 보니 저 일본인은 또 누구야? 이 사람도 친구?” 
 
어쩐지 살짝 비꼬는 듯한 음색이었다. 
망할 녀석이. 
 
“‘아스카 렌’이라고······ 일본의 화신이야. 친구는 아니고, 포로로 갇혀 있길래 구했어.” 
“······뭐하러 구했어? 일본인인데.” 
“이 싸움은 일본 대 한국이 아니야. 소인 대 재앙이지.” 
 
이지혜가 못마땅하다는 듯 입술을 비죽였지만, 그래도 납득한 눈치였다. 
한수영이 귓속말을 해왔다. 
 
“쟤 뭔데? 원작에 저런 애도 있었나?” 
“······몰라?” 
 
이 녀석, 아마 4회차까지는 읽었을 텐데 그래도 모르는 건가? 
아, 그때까진 아스카 렌이 활약을 안 했던가? 
초조한 눈길로 나와 한수영을 번갈아 보던 아스카 렌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저기, 질문이······.” 
“아, 말씀하세요.” 
“어떻게 벌써 [피스 랜드]의 북구를 손에 넣으신 거죠?” 
 
그렇군. 
확실히 내가 아는 ‘아스카 렌’이라면 그게 궁금할 법도 하지. 
 
“김독자, 저 사람 뭐라고 하는 거야?” 
“네가 어떻게 여신이 된 거냐고 묻는데.” 
“아아, 그거?” 
 
다른 이들도 뒤늦게 질문을 깨닫고 한수영에게 궁금한 눈빛을 보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빨리 성장했다고 해도, 3주 동안 단순히 강해지는 것과 한 왕국의 여신이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으니까. 
 
“아까 말했잖아. 우리가 처음 떨어진 곳이 북쪽이었다고. 나랑 저 아저씨는 베로니카 왕성이 습격당하는 한 가운데에 떨어졌어.” 
“습격당하던 중이었다고?” 
“일본 쪽 1차 투입자들 몇 명이 베로니카를 공격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아, 일본 애들이 우릴 보고 뭐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짜증나서 죽여버렸지 뭐.”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제야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것 같았다. 
재앙으로 인해 멸망해가는 베로니카 왕국. 
그 와중 왕궁의 중심에 떨어진 두 사람이, 갑자기 재앙들을 쳐 죽여버렸다. 아마 소인들 입장에서는 한수영과 공필두가 신처럼 보였을 것이다. 
 
“뭐······ 소인으로 작아질 줄 알았으면 안 죽였겠지만.” 
“시나리오도 안 읽어 봤냐?” 
“길 걷다가 갑자기 차원문으로 이송됐다고. 그 와중에 여기가 여섯 번째 시나리오 지역인지 뭔지 알 게 뭐야?” 
 
······그래서 일본인들이 우릴 보고 죽자고 달려든 거였군. 
혐한 정서의 원인은 바로 이 두 사람이었다.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아, 저기 보이네.” 
 
평원 너머 멀리 버려진 세계의 왕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그 왕성을 바라보았다. 
부서진 왕궁. 폐허가 된 흉벽 곳곳에 재앙이 지나간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짓밟힌 왕도 위에서 백성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여신님!” 
“여신님이 돌아오셨다······!” 
 
압도적인 재해 앞에 수척해진 백성들. 
꾀죄죄한 군중들이 우리를 마중 나오고 있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은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벌써 다 왔네. 빌어먹을 [피스 랜드]에.”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새삼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지만, 앞으로의 싸움은 지난할 것이다. 
재앙과의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고, 우리는 승산이 없는 싸움을 이어나가야 할 테니까. 
 
나는 다가오는 백성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세계의 백성들은 옛 지구인들과 닮았다. 
소드마스터도, 9서클 대마법사도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시스템’ 사용조차 제한된 세계. 
아무리 노력해도 이계인들에게 침탈당할 수밖에 없는, 소위 ‘정통 판타지’의 백성들······. 
 
그리고 나는 이 세계가, 누구의 ‘작품’인지 알고 있었다. 
 
“아스카 렌.” 
 
내 말에 적발의 미인이 움찔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이번 시나리오의 열쇠는 바로 이 여자였다. 
적어도 [피스 랜드]에 관한 한, 아스카 렌은 ‘멸살법’을 읽은 나보다도 더 이 세계를 잘 알고 있다. 
 
“한국 그룹에 합류하세요. 우리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Episode 24. 바꿀 수 있는 것 (6) > 끝

< Episode 25. 신과 마주 보는 자들 (1) >
 
 
 
 
 
 
Episode 26. 신과 마주 보는 자들 
 
 
 
왕성 베로니카에 도착한 후, 우리 일행은 하루를 내리 쉬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나는 제일 먼저 일어나 일행들에게 계획을 통보한 후 왕성의 입구에 섰다. 이현성이 물었다. 
 
“설마 혼자서 출발하실 생각입니까?” 
“혼자는 아니고, 저 둘과 같이 갈 겁니다.” 
 
내가 한수영과 아스카 렌을 가리키자, 이지혜가 툴툴거렸다. 
 
“아저씨가 그렇게 가버리면 우린 어쩌라고?” 
“현성 씨랑 너는 베로니카 수성(守城)을 맡아. 시나리오 갱신된 건 확인했지?” 
“······시나리오 기간이 끝날 때까지 ‘왕성 베로니카’를 지켜라?” 
“그래. 그게 네 임무야.” 
“하지만······.” 
“하라면 해.” 
“······알았어.” 
 
나는 곧장 이현성을 돌아보았다. 
 
“공필두가 있긴 하지만, [무장성채]만으로는 몰려오는 재앙들을 막아내기 힘들 겁니다. 그냥 떠맡기고 가는 거 같아서 죄송합니다만······.” 
“사주경계는 제 특기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든든한 호언에 안심이 되긴 하지만,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얼핏 쉬운 임무를 준 것처럼 보여도 사실 이번 시나리오는 나랑 같이 가는 것보다 남는 쪽이 훨씬 힘들기 때문이다. 
 
“만약 1차 투입자나 ‘뱀’이 나타나면 절대 정면 승부를 벌이지 마세요. 베로니카를 버리더라도 달아나셔야 합니다. 약속하실 수 있습니까?” 
“약속하겠습니다.” 
 
이들의 임무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 성채를 지키는 것. 
나는 이길영과 신유승에게도 신신당부를 했다. 
 
“최대한 많은 곤충과 괴수를 확보해. 너희 임무는 시간을 끄는 거야.” 
 
이길영과 신유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쪽 숲으로 나가면 이 세계 특유의 괴수종들이 많아. 시간 날 때마다 가서 괴수들을 길들여 놓도록 해.” 
“네, 형.” 
“알겠어요, 아저씨.” 
 
많은 숫자의 괴수들은 재앙과의 전력 격차를 메우는데 약간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이들의 숙련치도 상당히 증가하겠지. 
나는 그 길로 왕성 베로니카를 떠났다. 뒤쪽에서 우릴 배웅하는 일행들을 보던 한수영이 말했다.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 
“동쪽 기암괴석 지대.” 
 
그 말에 깜짝 놀란 아스카 렌이 말했다. 
 
“그쪽 지대는 이미 일본이 점령했어요.”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아스카 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은은한 컬이 들어간 단발. 어느 만화가가 공들여 그린 것처럼 선이 굵고 또렷한 얼굴. 단순히 미인이라기보다는 어떤 무사의 절개(節槪) 같은 것이 느껴지는 얼굴이다. 
 
“그래서 당신을 데려온 겁니다.” 
“저를 믿으세요?” 
“안 믿습니다. 그냥 목숨을 구해준 값을 받고 싶을 뿐이죠.” 
“······그렇군요.”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편이, 저쪽의 호의를 사기 쉬울 것이다. 실제로 아스카 렌은 뭔가를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아마 저 고민이 끝났을 때, 그녀는 본격적으로 내게 정보를 털어놓겠지. 
우리는 한동안 평원 인근을 샅샅이 살피며 기암괴석 지대로 이동했다. 
예상 소요 일수는 이틀이지만, 빠듯하게 이동한다면 하루 안에도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한수영이 물었다. 
 
“근데 계획이 뭐야?” 
“일본은 우리랑 다르게 [절대 왕좌]를 가지고 있어. 즉, 1차 투입자들 중에는 저들 모두를 통솔하는 ‘절대왕’이 있다는 얘기지.” 
 
내 말에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한수영이 말했다. 
 
“······설마 왕을 잡겠다는 거야?” 
 
역시 한수영은 이해가 빠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면 해결되긴 하겠네. [절대 왕좌]는 소유주가 죽으면 산하 그룹 전체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니까······.” 
“물론 왕을 잡는다고 걔들이 다 죽지는 않겠지만,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못 하게 될 거야.” 
“흐음, 시작부터 보스 잡고 끝내겠다 이거지? 포부는 마음에 드네.” 
 
아스카 렌이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지금 일본왕이 누구인진 알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여덟 머리의 군주 아닙니까?” 
 
여덟머리의 군주. 약칭은 ‘뱀’. 
 
“어, 어떻게 그걸······?” 
 
깜짝 놀란 아스카 렌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럴 법도 하다. 1차 투입자 중 하나인 그녀는 ‘여덟 머리의 군주’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을 테니까. 
참고로 ‘여덟 머리의 군주’는 일본왕의 별명이 아니라, 그 배후성의 수식언이다. 왜 별명이 없는가 하면, 별명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어디서 수식언을 들으신 모양인데, 그자는 결코 당신 생각처럼 쉽지 않을······.” 
“진명도 알고 있습니다. 야마타노 오로치 아닙니까.” 
 
내 말에, 일순 하늘이 어두워지며 쿠구구,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방금 녀석이 내 말을 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좌의 진명에는 그만큼 강력한 힘이 실려 있으니까. 
 
“······오로치? 그거 일본 신화에 나오는 괴물 이름 아냐?” 
“맞아. 지금 일본왕이 그놈이야.” 
“근데 왜 배후성으로 지칭해? 별명은 없어?” 
“의미가 없어. 그놈 화신은 지금 제정신이 아냐. 여섯 개의 시나리오를 거치는 동안 ‘여덟 머리의 군주’랑 말도 안 되는 계약을 해서 영혼을 빼앗겼거든.” 
 
내 말을 들은 아스카 렌은 이제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타국의 화신이 자국 사정에 관해 자기보다 잘 알고 있으니 놀랄 만도 하겠지. 

“그럼 기암괴석 지대에 놈이 있겠네.” 
“그래. 근데 지금 당장은 그놈 만나도 못 잡아. 잡으려면 준비가 필요해. 기암괴석 지대로 가는 건 따로 만날 사람이 있어서야.” 
“만날 사람? 뭐······ 유중혁?” 
“유중혁보다 더 센 사람.” 
“······그놈보다 센 사람이 있어?” 
“있어.” 
“누군데?” 
“피스 랜드 출신의 강자.” 
 
내 말에 한수영이 헛웃음을 지었다. 
 
“피스 랜드 출신? 지금 장난쳐?”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이 정보는 100회 이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너 여기 애들이 얼마나 약한지 몰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한수영이 쏘아붙였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 한수영은 유독 흥분한 모습이었다. 
 
“여긴 소드 마스터는커녕 삼류 검객도 없어! 게다가 애들이 쓸 수 있는 마법이라곤 고작해야 부뚜막에 불 피우는 것뿐이라고.” 
 
나도 알고 있다. 
 
“무슨 1세대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누가 악의적으로 약한 놈들만 모아 놓은 것 같아. 아니, 난 도통 이해가 안 돼. 그 자극 좋아하는 도깨비 놈들이 왜 이런 세계를 무대로 만든 거지? 대체 코인 벌 생각이 있는 거야?” 
 
듣고 있자니, 한수영이 왜 이렇게 흥분했는지 이해가 간다. 
이 녀석, 표절 작가긴 해도 잘 나가는 판타지 작가였지. 
 
“진정해. 이 세계관은 도깨비가 만든 거 아니니까.” 
“뭐?” 
 
나는 곁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얼굴이 새빨개진 채 고개를 숙인 여자가 있었다. 작가 앞에서 작가 욕하는 기분도 아주 새롭구만. 
한참을 머뭇거리던 아스카 렌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죄송해요.” 
 
그제야 한수영도 뭔가를 눈치챈 듯했다. 
 
“잠깐, 설마······?” 
 
아스카 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피스 랜드]는 제가 만든 세계관이에요.” 
 
 
* 
 
 
아마도, 아스카 렌은 그 말을 꺼내야 하지 않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그게 진짜냐?”는 둥 경악을 금치 못하던 한수영은, 5분 후에는 “하긴, 내 소설도 현실이 됐는데 그럴 수도 있지”라고 중얼거리더니, 다시 5분 후에는 아스카 렌에게 아예 폭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왜 그랬어?” 
“······.” 
“응? 왜 그랬냐고. 대답 좀 해봐 작가 양반. 왜 세계를 이따위로 만들었어?” 
 
한참이나 갈굼을 당하던 렌이 결국 반쯤 울먹거리며 말했다. 
 
“그게······ 일본에는 죄다 이세계물 뿐이거든요. 그래서······.” 
“아하, 주류인 이세계물에 저항하려고 이딴 걸 만드셨다?” 
“그, 그래도 작가가 되어서 그런 양산형 이야기를 찍어낼 수는 없잖아요.” 
“양산혀엉?” 
 
아무래도, 하지 말아야 할 얘길 한 것 같다. 
 
“네 작품은 양산형만도 못해 쪼다야.” 
“······네?” 
 
그런 아스카 렌을 한심하다는 듯 노려보던 한수영이 내게 말했다. 
 
“야, 김독자. 그거 아냐? 내가 베로니카에서 며칠 있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이 세계에서는 백작이 공작한테 반말을 해. 게다가 기사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 흐늘흐늘거릴 줄이나 알지······.” 
“자, 잠깐만요!” 
“닥쳐. 너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제가 만든 건 맞지만 제가 당신을 여기로 부르건 아니거든요?” 
“이년 봐라? 네가 도깨비들한테 사주해서 네 세계 현실로 만들어 달라 한 거잖아! 시발 만화도 망했겠다! 내 만화 욕한 새끼들 전부 내 세계관에 처넣어서 다 죽여버리자! 뭐 그런 생각으로 기도했더니 갑자기 짠 하고 ‘네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메시지 같은 걸 받았겠지. 맞지?” 
 
그렇게 창의적인 추리는 또 처음 들어보는군. 
과연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건가. 
 
“아, 아니에요! 애초에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그럼 뭔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도 궁금해졌다. 
‘멸살법’에도 어째서 아스카 렌의 [피스 랜드]가 시나리오로 채택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 정황을 알게 된다면 ‘멸살법’의 작가에 관한 힌트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건······.” 
 
나와 한수영이 동시에 칼을 뽑아 든 것은 그때였다. 
히끅 놀란 아스카 렌이 한 발짝을 물러섰다. 
내가 말했다. 
 
“진짜 궁금한데, 지금은 듣기 곤란할 것 같네요.” 
“네?” 
“뛰어요!”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우리가 서 있던 곳에 날카로운 수리검 몇 개가 박혔다. 
그제야 아스카 렌도 창백한 얼굴로 우리를 필사적으로 뒤쫓았다. 
한수영이 말했다. 
 
“씨발, 언제 쫓아온 거지?” 
“은신에 능한 놈들이야.” 
“몇이나 돼?” 
“넷.” 
 
저 정도 실력을 가졌는데도 우릴 얕보지 않고 암살하려 한 놈들이다. 
전면전으로는 승산이 없다. 
아스카 렌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풍영대(風影隊) 같아요. ‘여덟 머리의 군주’의 수하들이에요.” 
“역시 열도 애들은 이름도 폼나게 짓네.” 
 
벌써 녀석들이 쫓아올 만한 타이밍은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아까 오로치의 진명을 언급한 게 실책이었던 모양이다. 
곧 기암괴석 지대로 들어서자, 운신의 폭은 좀 나아졌다. 
아스카 렌의 인도가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역시, 세계관을 만든 작가는 다르구만. 
그럼에도 거리는 조금씩 좁혀졌고, 어느새 풍영대 놈들은 우리 뒤쪽까지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한수영이 결심한 듯 말했다. 
 
“아, 몰라. 김독자, 먼저 가. 내가 시간 벌 테니까.” 
“괜찮겠냐?” 
“나 알잖아? 죽은 척 달인인 거.” 
“그럼 믿는다.” 
 
나는 아스카 렌을 붙잡고 달렸다. 
 
“렌 씨, 이제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찾아야 합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귀환자 키리오스.” 
“네?” 
 
나는 날아오는 수리검을 비껴내며 말했다. 
아무래도 한수영이 몇 명을 놓친 모양이었다. 
 
“키리오스가 있는 곳을 알려주십시오.” 
“······저는 그게 누군지 모르는데요?” 
 
아마 이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은 했다. 
‘멸살법’에서도 키리오스가 이 시기에 이곳에 있다는 정보만 언급될 뿐이지, 직접 만나는 장면은 나온 적이 없으니까. 
 
“아뇨,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정말 몰라요! 전 그런 인물 만든 적 없다고요!” 
 
아스카 렌이 절박하게 외쳤다. 
 
“제 만화에는 그런 사람 안 나와요! 게다가 제 만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죄다 약하다고요!” 
“아닙니다.” 
“네?” 
 
쐐애액! 
 
결국 수리검이 우리를 앞질러 꽂혔다. 
나는 방향을 거세게 틀며 멈춰섰다. 
젠장, 결국 싸워야 하나. 
 
“당신의 [피스 랜드]는 11화에 조기 종결됐고, 그 여파로 단행본도 못 나왔죠.” 
“어, 어떻게 그걸······?” 
“정통 판타지를 그리고 싶었던 당신의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당신 만화, 진짜 ‘정통 판타지’는 아니지 않습니까?” 
 
고오오오. 
 
연기 속에서 두 명의 풍영대가 나타났다. 
평소의 나였다면 상대하고도 남을 놈들이었지만, 지금은 한 녀석을 막는 것도 버거웠다. 
 
꽈아아앙! 

스치듯 카타나를 비껴냈을 뿐인데, 손목이 부러질 듯 시큰거렸다. 
나는 침착하게 ‘신념의 칼날’을 발동하며 외쳤다. 
 
“연재 중 딱 한 번이지만, 당신은 독자 반응을 엿보다가 홧김에 어떤 인물을 그려 넣은 적이 있습니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 인물은 [피스 랜드]에 걸맞지 않게 강한 인물이었죠. 당신은 대중에 영합해 그런 인물을 넣었다는 사실에 죄악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죄악감이, 당신의 [피스 랜드]를 망쳤죠.” 
“아니야! 난 그런 적 없어!” 
“끝까지 책임을 지세요. 단 한 명의 독자라도 이 세계를 지켜봤다면······!” 
“아, 아아······.” 
 
점점 칼날을 피하는 것이 힘겨워졌다. 
아스카 렌은 패닉에 빠졌는지 완전히 얼어있었다. 
두 자루의 카타나가 내 상하반신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빌어먹을, 틀렸나?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말이, 맞아요. 나는, 분명······.” 
 
다음 순간, 주변의 공기가 뒤바뀌었다. 
일순 등골이 서늘해지며 사지가 빳빳이 굳는 기분이었다. 
이어서 들려온 목소리. 
 
[누구냐?] 
 
차마 뒤를 돌아보진 못했지만, 성좌에 버금가는 존재가 그곳에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4의 벽]이 이토록 요동칠 리 없으니까. 
앞을 보자, 나를 향해 칼날을 꽂던 일본인들도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말조차 뱉지 못하는 그들을 향해, 하늘에서 백청(白淸)의 뇌전이 꽂혔다. 
 
스아아아. 
 
그 강력한 재앙들이, 단 두 발의 뇌전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뇌전의 구름이 사라진 곳에, 작은 인형이 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허공에 떠 있는 저 고고한 강자는, 분명한 소인(小人)이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찾았군. 
 
[다시 묻겠다. 너희는 누구냐?] 
 
“처음 뵙겠습니다, 키리오스.” 
 
[피스 랜드] 출신 키리오스 로드그라임. 
그는 바로 멸살법 최강의 귀환자 중 하나다.
 
 
 
 
 
< Episode 25. 신과 마주 보는 자들 (1) > 끝

< Episode 25. 신과 마주 보는 자들 (2) >
 
 
 
 
 
흔히 <스타 스트림>의 최강자는 ‘성좌’라 꼽힌다. 
모든 이야기의 꼭대기에서 세계를 관음하는 자들. 
하지만 언젠가 말했듯, 성좌만이 성좌와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좌의 격을 얻을 수 있음에도 그 길을 거부하고 마의 정점에 오른 마왕이 있는가 하면, 태생부터 괴수종의 정점에 군림하는 용(龍)들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가? 
마의 길도, 인외의 길도 걷지 않는 인간들은, 과연 성좌와 대적할 수 있는 격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의 대답이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흥미롭군. 다른 행성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포기한 자인가.] 
 
키리오스는 단 한 번의 시선으로 내 정체까지 간파한 모양이었다. 
그는 내 곁에서 혼절한 아스카 렌을 보며 말했다. 
 
[그 용기를 봐서 한 번은 넘어가 주마. 그 여자를 데리고 꺼져라.] 
 
귀환자. 
특별한 재능을 타고 태어나, <스타 스트림>의 축복 속에서 인간을 초월한 자들. 
그중에서도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은 특별한 존재였다. 
귀환자 중에서도 아주 강력한 힘을 얻어, 도깨비들이 만든 이야기의 인력(引力)에 끌려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격을 획득한 존재. 
‘멸살법’ 전체를 통틀어도 그런 귀환자는 채 열이 되지 않는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 
 
초월의 격에 이른 스킬들이 일제히 개화하며 나를 향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성좌급의 존재는, 그저 존재만으로도 필멸자를 멸할 수 있다. 
 
[그대는 내게 말을 걸 위치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내 안에 이렇게 많은 수분이 있었다는 것에 깜짝 놀랄 만큼, 순식간에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감히, 나 역설(逆說)의 백청(白淸)에게?] 
 
강하다. 
필멸자가, 그것도 소인이 저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다는 것에, 소름이 돋는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합니다!] 
 
하지만 내게는 ‘벽’이 있다. 벽 너머에 아무리 무시무시한 존재가 있다 한들, 그가 벽을 넘어오지 못하는 한 내게는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등장인물,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이 당신에게 호기심을 보입니다.] 
 
그쯤 되자 키리오스도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버텼다? 어떻게? 다른 높은 격의 수호라도 받는 건가?] 
 
나는 그가 엉뚱한 관심을 가지기 전에 입을 열었다. 
 
“키리오스. 이 세계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키리오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나를 찾은 것은 그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그 작은 녀석도 그러더니······.] 
 
그러자 그 ‘작은 녀석’이 응답했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눈물을 글썽이며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을 바라봅니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에게 1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짜증난다는 듯, 키리오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필요 없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큰 충격을 받습니다.] 
 
하늘에서 아기 오줌 같은 빗방울 몇 개가 똑똑 떨어졌다. 
 
[······모든 세계는 멸망의 때가 있고, 모든 이야기는 끝나는 순간이 온다. 이 행성에게는 지금이 그때인 거지.] 
 
먼 곳을 바라보는 키리오스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설령 세상 모든 것에 둔감해진다 해도, 자신이 쌓은 ‘이야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럼 왜 이곳에 다시 오셨습니까? 이미 오래전에 [피스 랜드]를 떠나셨던 분이.” 
 
[······뭔가가 나를 불렀다.] 
 
나와 키리오스의 눈이 쓰러진 ‘아스카 렌’을 향했다. 
아마도 키리오스가 느끼는 그 감각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당신은 고향을 지키러 이곳에 돌아왔지 않습니까?” 
 
[이곳에 좋은 기억 따윈 없다. 이곳은······.] 
 
“당신을 ‘약하게’ 태어나게 만든 곳이니까요?” 
 
처음으로, 키리오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신에게 저주받은 몸뚱이를 선물한, 빌어먹을 모성(母星)이기 때문입니까?” 
 
[····고작 시나리오의 화신 주제에 나에 관해 잘 알고 있군. 마지막으로 말하지. 꺼져라. 세 번은 없······.] 
 
“겁먹으신 겁니까?” 
 
[무어라?] 
 
“겁먹으셨냐고 물었습니다. 이곳을 찾아와, 당신의 세계를 유린하는 저 성좌들에게, 저 간악한 ‘뱀’에게 겁먹은 거냐고 물었······.” 
 
쿠구구구구! 
 
순간 전신을 짓누르는 압력에 하마터면 두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죽고 싶은 거라면, 죽여주마.]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속이지 마십시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의 정의를 힐난합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의 시나리오 간섭 행위를 엄중히 지탄합니다.] 
 
연이어 떠오른 간접 메시지에, 일순 키리오스의 기세가 누그러들었다. 
 
[희한한 놈들이 네 꽁무니를 쫓아다니는구나. 원숭이 왕에 대천사까지? 이상한 일이군. 그 자존심 강한 녀석들이······.] 
 
입술에 고인 피를 뱉으며,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얘기에 집중하십시오. 이 행성의 마지막을 보러 오셨지 않습니까?” 
 
[나는 이 행성을 도울 수 없다.] 
 
파츠츠츳. 
 
그의 몸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개연성 후폭풍. 
아까 두 명의 풍영대를 죽인 영향이었다. 
시나리오의 필요로 소환된 존재가 아닌 그는, 저 하늘의 성좌들만큼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개연성의 제약을 받는다. 
손 위로 튀는 스파크를 힘껏 그러쥔 키리오스가 말했다. 
 
[내가 개연성을 감수하고 먼저 손을 쓴다면, 이 행성의 멸망을 앞당길 뿐이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성좌급의 존재들에게 개연성이란 저울과 같다. 
어느 한쪽이 타당한 개연(介然) 없이 이야기의 흐름을 바꾼다면, <스타 스트림>의 법칙은 강제적으로 그 저울의 평형을 맞추려 든다. 
 
[내가 시나리오에 간섭하게 되면, 시나리오를 지켜보던 다른 성좌들도 움직일 개연을 얻는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고향의 마지막을 담아가는 것뿐이다.] 
 
기억난다. 
저것이 내가 아는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의 진짜 모습이다. 
고향을 떠나 무수한 시련을 극복하고 다시 돌아왔으나, 너무나 강해진 대가로 자신의 고향을 구하지 못하게 된 자. 
그것이 바로 역설(逆說)의 백청(白淸),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이다. 
 
“당신이 직접 손을 쓸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거였다면, 나는 키리오스를 만나러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슬슬 천기(天機)가 당신에게 제자 설화를 요구하고 있을 텐데, 아닙니까?” 
 
그 침착한 키리오스조차 이번만큼은 크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저를 제자로 삼으십시오. 당신의 대리인이 되어 [피스 랜드]의 재앙을 물리치겠습니다.” 
 
그러나 당황은 잠시뿐이었다. 
 
[······나는 외인(外人)은 제자로 받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는 내 힘을 이을 자격이 부족해.]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만약 여기 있는 게 내가 아니라 유중혁이었다면, 키리오스는 망설이지 않고 나를 제자로 받았을까? 
 
“그 자격, 이걸로는 안 되겠습니까?” 

나는 근처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기이이잉! 
 
[백청강기]의 마력이 고스란히 빨려 나가며, 새파랗게 일렁이는 마력의 파랑이 내 칼끝에서 넘실거렸다. 아직 부족한 위력이었지만 그 성취를 보이기엔 충분한 수준이었다. 
키리오스의 눈빛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두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구매했던 히든 스킬. 
백청강기(白淸罡氣)는 바로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의 성명절기였다. 
 
“다시 인사드리지요. 백청문(白淸門)의 문외(門外) 제자, 김독자가 사문의 어른을 뵙습니다.” 
 
. 
. 
 
키리오스가 결정을 내린 것은, 그로부터 두어 시간이 지난 후였다. 
전신에서 타오르던 백청의 기운을 해제한 그는, 인간의 육성으로 입을 열었다. 
 
“백청문은 내가 떠나고 멸문했을 텐데. 아직도 문하가 남아 있을 줄은 몰랐군.” 
 
겨우 그런 말을 하려고 사람을 두 시간이나 세워두다니. 
스타 스트림의 강자들은 오랜 세월 속에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고유 시간’ 속에 산다는데, 어쩌면 그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좋다. 너를 제자로 받겠다.” 
 
키리오스는 내가 어떻게 백청강기를 익혔는지, 또 어떻게 그의 비사를 알고 있는지 가타부타 묻지 않았다. 
그리고 수련이 시작되었다. 
 
 
*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은 ‘무림계 귀환자’였다. 
‘소인’이라는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불세출의 노력을 겸비했던 그는, 시스템의 도움 없이 무공을 터득해 자신의 종족을 초월하는 것에 성공한다. 
<제1 무림>에 진출해 절대 고수로 군림한 그에 관한 전설은 여럿이 남아 있다. 자신보다 키가 큰 마교도를 모두 죽여버린 일이라든가, 키를 가지고 놀리는 맹주의 남근을 잘라버린 일이라든가, 개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성좌 ‘뱀을 베는 자’와의 인연으로······.」 
 
“······네 스마트폰은 같이 작아졌네?” 
 
다가온 한수영의 목소리에, 나는 스마트폰을 끄며 일어섰다. 
 
“아공간 코트에 넣어 놨더니 이렇게 됐어.” 
“젠장, 하여간 좋은 건 혼자 다 가진다니까.” 
 
툴툴대는 한수영은 무사히 풍영대를 따돌리고 우리와 합류하는 것에 성공했다. 자기 딴에는 역시나 ‘죽은 척’이 먹혀들었다는데, 나 역시 속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제1 무림> 최강자 ‘키리오스’가 피스 랜드 출신이었다니, 상상도 못했네.” 
“최강자가 가려진 건 아니지만, 최강에 제일 가깝긴 하지. 그런데 알고 있었나 보네?” 
“초반부에도 이름은 나와.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만.” 
“그거야 나도 처음이지. 아무튼, 렌 데리고 근처에서 기다려.” 
 
나는 키리오스의 가르침을 받아 기암괴석 지대의 진법 속에서 그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내 목표는 2주 안에 키리오스의 비전절기를 익힌 후 ‘왕성 베로니카’로 귀환하는 것이었다. 
원작의 진행대로라면 일본 왕인 ‘여덟 머리의 군주’가 4개 왕성 전체를 짓밟기 위해 움직이는 것도 그즈음일 것이다. 
물론, 예상대로 일이 쉽게 풀릴 리는 없었다. 
나를 가르치기 시작한 첫날, 키리오스가 내게 시킨 일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걸 백만 번 해라.” 
“······백만 번이요?” 
“그래, 백만 번. 내가 방금 보여준 건 제대로 봤겠지?” 
 
보긴 봤다. 
키리오스는 내 앞에 단정한 자세로 서더니, 그대로 검을 뻗어 허공을 내질렀다. 기본적인 ‘찌르기’ 자세였다. 
 
“이걸 왜······.” 
“모든 백청의 무공은 여기서 시작한다. 가장 ‘작은 점’을 여는 것. 극도로 응축되고 절제된 하나의 ‘점’에서, 우주는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군요.” 
 
뭔 말인지 모르겠다. 
 
“너처럼 커다란 족속으로 태어난 존재들은 ‘작음’의 의미를 알지 못하겠지.” 
 
그 말을 듣자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멸살법’의 설정에 따르면 키리오스는 자신의 키에 콤플렉스가 있다. 
 
“인간도 별로 큰 편은 아닙니다만.” 
“그래, 내가 말하려는 게 바로 그런 것이다. 결국 우주적인 견지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티끌만도 못해. 그러니, 소인을 소인이라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인간도 소인도 결국은 먼지에 불과하니까.” 
 
어쩐지 자신의 ‘작음’을 우주적으로 합리화시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큰 먼지와 작은 먼지는 다르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먼지의 크기가 아니라 우주의 크기다. 티끌에 불과한 존재라 해도, 얼마나 커다란 우주를 인식하느냐에 따라 존재의 격은 달라질 수 있지. 아니, 오히려 작을수록 우주의 근원(根源)에 더 가까운 셈이니 오히려 본질을 이해하기에 더 유리한 셈이다.” 
 
멋있는 소리 같아서 나는 일단 맞장구를 쳤다. 
 
“아하.” 
“이해했느냐?” 
“근데 그게 찌르기랑 무슨 상관입니까?” 
 
나를 경멸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키리오스가 말했다. 
 
“······이래서 태생이 큰놈들은 안 된다니까. 찌르기나 열심히 해라.” 
 
키리오스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아마도 내게 실망한 듯했다. 
그럴 법도 하지. 
내 저질스러운 재능이야 [바람의 길] 때 이미 충분히 증명된 바였고, 그러니 정말로 무공을 익히려 했다가는 2주는커녕 몇십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 후 나흘이 지났다. 
 
“똑바로 해라. 태생이 구리면 노력이라도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니냐?” 
 
다시 닷새가 지났으며. 
 
“이래서 큰 몸으로 태어난 놈들은······.” 
 
일주일이 흘렀다. 
여전히, 키리오스의 대인(大人) 혐오는 그칠 줄을 몰랐다. 
 
“차라리 벌레로 태어나지 그랬느냐? 아마 바퀴벌레도 네놈보단 잘 배울 것이다.” 
“그런 바퀴벌레가 있다면 스승으로 삼고 싶군요.” 
“죽고 싶으냐?” 

그리고 마침내 이주째 저녁이 되던 날. 
나는 찌르기를 하다가 지쳐서 쓰러지고 말았다. 
 
“네놈은······.” 
 
여전히 나는 스킬을 배우지 못했다. 
내 재능에 크게 실망한 키리오스는 한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잠깐 바람이라도 쐬러 간 모양이었다. 
키리오스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인근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스카 렌과 한수영을 찾았다. 
 
“도망가자.” 
“뭐? 다 배웠어? 아까 보니 하나도 못 하던데?” 
“다 훔쳤어.”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뭔가를 읇조렸다. 그러자 다음 순간, 내 주변에서 강렬한 백청의 뇌전이 튀며 기운이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키리오스의 비전 절기, [전인화(電人化)]였다. 
 
“엑? 그거 뭐야? 분명 아까는······.” 
“말했잖아. 훔쳤다고.” 
 
[5번 책갈피에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이 추가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내 목적은 이것이었다. 
최강의 귀환자 키리오스를 내 [책갈피]에 넣고, 이해도를 최대한 끌어 올려 놓는 것. 
 
애초에 키리오스는 날 제대로 가르칠 의향도 없었을 것이다. 
 
키리오스 같은 강자들은 내 감언이설 몇 마디에 속아 자신의 진신절기를 내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의 목적은 그저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나를 여기에 잡아두는 것일 테고, 시나리오가 끝난 후 나를 고문해서 내가 아는 정보들을 캐낼 속셈이겠지. 
 
“그러니까 빨리 도망가야 돼.” 
“젠장, 알겠어.” 
 
투덜거린 한수영이 채비를 끝내는 사이, 멀리서 해가 밝아오는 것이 보였다. 
새벽녘의 온기가 주변을 물들이고 있었다. 
 
[피스 랜드]는 2주마다 한 번씩 계절이 바뀐다. 
 
분명 수련을 시작할 때는 겨울이었는데, 어느새 봄이 오고 있었다. 
아스카 렌의 안색이 창백해진 것은 그때였다. 
 
“······‘여덟 머리의 군주’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정말입니까?” 
“그가 [절대 왕좌]로 일본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요.” 
 
슬슬 때가 되었다고 생각은 했지. 
동면을 청했던 생명체들이 하나둘 깨어나는 봄. 
 
바야흐로, ‘뱀 사냥’의 계절이 도래한 것이다.
 
 
 
 
 
< Episode 25. 신과 마주 보는 자들 (2) > 끝

< Episode 25. 신과 마주 보는 자들 (3) >
 
 
 
 
 
 
 
베로니카의 높은 흉벽. 그 고지대의 풍광 아래로, 평원을 메운 거인들이 보였다. 한때는 인간이었으나 지금은 재앙이 된 존재들. 공필두는 성채의 모든 포탑을 가동하며 포효했다. 
 
“빌어먹을 놈들. 여긴 내 땅이다!” 
 
평원지대를 박살 내며 달려오는 일본인들의 숫자는 물경 오십에 달했다. 
모르긴 몰라도 저 정도 병력이면 [피스 랜드]의 재앙 절반 이상이 모인 규모일 것이다. 
 
두두두두두! 
 
“꺼져라―!” 
 
포를 갈겨대는 공필두는 약간 맛이 간 상태였다. 
그가 왜 그런 상태가 됐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지혜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마 김독자에게 ‘그린 존’을 파괴당했던 후유증이 아직까지 남은 게 아닐까, 하고. 
밀려오는 재앙의 대군을 보며, 이지혜가 손끝을 파르르 떨었다. 
 
“젠장, 호수 같은 거라도 있었으면······.”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보자.” 
 
망루 쪽에서 걸어온 이현성이 이지혜의 곁에 섰다. 뒤를 돌아보니 이복순도 몸을 풀며 나오는 중이었다. 이지혜가 눈을 반짝였다. 
 
“할머니, 혹시 배후성 힘 또 빌릴 수 있어요?” 
“흘흘, 자꾸 조상님들 공덕을 바라면 쓰나?” 
“아 뭐래 진짜. 군인 아저씨, 희원 언니랑 다른 일행들은 아직이래요?” 
 
이현성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투입자 소식이 없어. 들어오기 전 독자 씨 말로는 그 사람들도 보너스 시나리오 하고 있을 거라던데······.” 
“젠장. 그럼 꼴랑 우리끼리 막아야 되는 거네.” 
 
상공에 어둑한 그림자가 몰려든 것은 그때였다. 
하늘을 까맣게 메운 작은 벌레떼들을 발견한 이지혜가 기겁을 했다. 
 
“우왁?” 
 
자세히 보니 군데군데 비행종들도 섞여 있었다. 
이길영과 신유승의 괴수 대군이 수성 준비를 마친 것이다. 
말벌을 닮은 충왕종에 탑승한 이길영이 손나팔을 불었다. 
 
부우우우―! 
 
흉벽 코앞까지 다가온 재앙들이 마침내 성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이현성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온다.” 
 
본격적인 수성전이 시작되었다. 

두두두두두! 
 
한쪽에서는 공필두의 포화가,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소인들의 함성이 이어졌다. 
 
“싸워라!” 
“베로니카를 지켜!” 
 
성곽 곳곳에서 폭음이 울려 퍼졌고, 흉벽은 재앙들의 발길질에 조금씩 부서져 내렸다. 이제 인간들은 정말 ‘재앙’이라 부르기에 적합해 보였다. 
 
‘만약 나도, 재앙을 선택했다면 저렇게 됐을까.’ 
 
이지혜는 김독자의 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답은 알 수 없었다. 
 
일행들은 생각보다 잘 버텼다. 
 
공필두의 무장성채가 있었고, 이현성의 ‘태산 부수기’가 재앙들에게 꾸준한 유효타를 먹였으며, 군집한 벌레와 괴수의 무리가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대로라면, 잘만 하면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지혜는 그렇게 생각했다. 
평원의 지평선에서 새카만 먹구름이 몰려오기 전까지는. 
 
“······저건 또 뭐야?” 
 
이지혜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재앙의 왕이 시나리오 버프 효과를 받습니다.] 
[성좌, ‘여덟 머리의 군주’의 개연성 제약이 일부 해제됩니다.] 
 
“미친, 저런 걸 어떻게 막아······.” 
 
거대한 요새 크기의 뭔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시뻘겋게 자라난 여덟 개의 머리와 꼬리. 
 
‘아저씨! 빨리 좀 와!’ 
 
이지혜는 속으로 절규하며 장도를 빼 들었다. 
 
 
* 
 
 
키리오스의 영역에서 벗어난 우리는 기암괴석 지대를 지나 곧장 평원지대로 향했다. 
 
“‘여덟 머리의 군주’는 이미 출발한 것 같아요. 이 근처에서는 그의 부름이 느껴지지 않아요.” 
“렌 씨는 괜찮으십니까?” 
“저는 배후성의 가호로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약한 배후성을 가진 화신들은 벌써 평원지대로 몰려간 것 같네요······.” 
 
[절대 왕좌]라고 해도, 떨어진 거리에 따라서 명령의 강도에 차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절대]라는 수식어가 붙었다곤 해도 <스타 스트림>에 진정 [절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없다. 
가는 길 곳곳에서 우리는 소인종의 시체를 발견했다. 아스카 렌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일본인 모두가 ‘재앙’을 선택한 건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원작을 읽은 나였기에,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소인’이 된 일본인이 아스카 렌을 제외하고는 보이지 않는 것은, 이미 다들 죽었거나 세계의 어딘가로 숨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재앙’을 택한 일본인들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평범한 거죠.” 
 
실제로 원작에서는 한국 측의 1차 투입자들 또한 상당수 ‘재앙’을 선택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평범한 인간들의 선택일 것이다. 한수영도 거들었다. 
 
“까놓고 말해서 ‘소인’을 선택했다고 정의로운 것도 아냐. 김독자 너도 ‘소인’을 지키려고 선택한 건 아니잖아.” 
 
과연, 한수영답게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상처받은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소인의 편이든, 재앙의 편이든. 
결국 이곳의 싸움은 구경거리가 된다. 
사람들이 더욱더 역할에 몰입하는 것은 그 사실을 잊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팔아 돈을 벌고. 
그리고 다시 그 돈으로 다른 이야기들을 사고. 
어쩌면 인간은 줄곧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쿠구구구구! 
 
떠나온 기암괴석 지대에서 거대한 기운이 솟아나고 있었다. 꽤 거리가 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가공할 기세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키리오스가 눈치챈 모양이군요. 서두르죠.” 
 
기껏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해놓고 도망쳤으니, 붙잡히면 호된 꼴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평원지대를 가로질러 베로니카 왕성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와중에도, 아스카 렌은 종종 기암괴석 지대를 돌아보았다. 
한수영이 렌을 보며 물었다. 
 
“아쉬워?” 
“네? 아니에요.” 
“하긴, 기분 이상하지? 직접 만든 캐릭터 실물로 본 건 처음일 거 아냐.” 
“······네.” 
“게다가 미남이었고.”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키리오스는 잘 생겼다. 

‘멸살법’에서는 잘생긴 미남형을 묘사할 때는 흔히 ‘유중혁 뺨치게’라는 수사를 사용하는데, 그 수사가 딱 어울리는 인물이라고나 할까. 
키가 좀 많이 작고, 성격이 좀 꼰대 같기는 하지만······. 
자기가 만든 인물이 숨을 쉬고 말을 하며 돌아다니는 것을 보는 건 어떤 기분일까? ‘멸살법’ 작가가 어딘가에 살아있다면, 유중혁을 볼 때 비슷한 기분이지 않을까? 
 
“참, 독자 씨.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네.” 
“어떻게 키리오스의 환심을 사셨어요?” 
“환심이라뇨?” 
“보니까 키리오스가 독자 씨를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예?” 
“키리오스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렇게 틱틱대거든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고 보니, 재능 없다고 구박당하는 것치고, 키리오스는 내게 꽤 잘 대해주는 편이었지. 매번 큰놈, 큰놈 그러면서 욕하던 것 치고는······. 
 
“독자 씨.” 
 
렌의 목소리에 돌아보니, 두 여자의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시선을 따라간 곳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성채 베로니카가 있는 방향이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서로를 마주 본 후 그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채 베로니카의 흉벽이 드러났다. 

늘어져 있는 괴수종들의 시체와, 터지거나 짓밟힌 소인종들의 시신. 
뒤통수가 으깨진 인간들의 모습도 보였다. 
아마 이현성의 솜씨가 아닐까 싶었다. 
내성으로 들어갈수록 소인종들의 시체는 점점 더 늘어났고 일본인들의 시체는 점점 줄어들었다. 
······설마,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박살 난 별궁의 뒤쪽에서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두두두두두! 
 
공필두의 포성. 
다행히 일행들은 무사했다. 이현성은 심하게 다친 듯했고, 이지혜와 아이들도 녹초가 되어 있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위태로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그들이 싸우는 것은······. 
 
“······미친.” 
 
드센 한수영도 질렸는지 내 쪽으로 두어 걸음을 물러섰다. 
 
“아아! 이즈미······.” 
 
그렇게 중얼거리던 아스카 렌은 고통스러운 듯 관자놀이를 쥐더니 신음을 토하며 자리에 엎드렸다. 
 
고오오오오. 
 
스무 명의 일본인들이 하나의 존재를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두 동공이 까맣게 변한 남자의 몸 위로, 상공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괴물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핏빛 계곡을 연상시키는 머리와 꼬리. 
재앙의 왕이 유선형의 동체를 드리운 채 똬리를 틀고 있었다. 
문득 머리 하나가 주변을 굽어 보더니, 가까이에 있던 소인종들을 향해 목을 숙였다. 겁에 질린 소인종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순간. 뱀의 입이 그들을 향해 웃었다. 
 
콰지지직!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 주둥이가 스친 자리에, 으깨진 소인종들의 하반신만이 남았다. 
 
“사, 살려줘! 살려주세요!” 
 
으저저적! 꽈드드득! 
 
뭉개진 소인종의 살점들이 붉은 뱀의 입속으로 고스란히 빨려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일행들을 비롯한 모든 소인종들은 굳어버린 마네킹처럼 그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뒤늦게야 깨닫는다. 
 
일행들이 아직 무사했던 것은 그들이 열심히 싸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포성은 이어지고 있었으나, 공필두의 얼굴을 채우고 있는 것은 살의가 아니라 체념이었다. 
이현성도, 이지혜도, 다른 모든 일행들도. 
이들이 아직 살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설화급 성좌의 ‘한 끼 식사’였기 때문이다. 
먹잇감을 고르는 뱀의 머리가 벌어질 때마다 너덧 명의 소인종들이 육편이 되어 사라졌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고통에 몸부림칩니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비명을 지릅니다.] 
 
한수영이 중얼거렸다. 
 
“씨발······ 대체 뭐야.” 
 
일본삼대악귀 중 하나인 슈텐도지의 아버지이자, 치수(治水) 신화의 괴물. 
저 괴물이 바로, ‘여덟 머리의 군주’인 야마타노 오로치였다. 
아마 저 녀석에 대적하면, 나는 이빨만 스쳐도 찢겨 죽게 될 것이다. 
 
“싸, 싸워선 안 돼요. 절대로 이길 수 없어요.” 
 
아스카 렌의 중얼거림에, 넋이 나가 있던 한수영도 나를 붙잡았다. 
 
“김독자. 설마 저런 거랑 싸울 거 아니지? 도망가자. 응?”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대한 머리가 다시 한번 소인종의 무리를 휩쓸었다. 
어항에 갇힌 물고기를 꺼내먹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아직 안 늦었어. 지금이라면 애들 구할 수 있어. 쟤들 빨리 데리고······.” 
 
콰드드득! 
 
“야! 지금 쟤들 다 죽게 생겼다고!” 
 
나는 한수영을 뿌리치며 말했다. 
 
“조금 더 기다려.” 
 
지금 나서면 저 녀석은 절대로 토벌할 수 없다. 
조금 더 기다려야······. 
뱀의 주둥이가 마침내 이지혜 쪽을 향했다. 
젠장.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뱀의 머리가 그보다 빠르게 이지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뭔가가 나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콰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뱀 머리 하나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땅에 처박혔다. 
먼지구름이 걷히자 뱀의 머리를 짓밟고 선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특유의 냉막하고 오연한 눈빛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김독자.” 
 
그래, 왜 이렇게 늦나 싶었지.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늦었네, 유중혁.” 
 
나와 똑같이 소인종이 되었음에도, 유중혁에게서는 강력한 패기가 느껴졌다. 녀석은 보랏빛 광택이 도는 장도 하나를 쥐고 있었다. 
역시 그 칼을 구해왔군. 
우리는 말 없이 서로를 힐끗 본 후 동시에 재앙을 향해 돌아섰다. 
 
[성좌, ‘여덟 머리의 군주’가 당신에게 살의를 드러냅니다.] 
 
식사 시간을 방해받은 야마타노 오로치가, 자신의 몸피를 부쩍 키우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비켜라 김독자. 이 녀석은 내가 잡는다.” 
“아니, 이번에는 곤란해.” 

나는 유중혁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강력한 백청의 기운이 심장에 들끓는 것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이번에는 내가 잡아야 하거든.” 
 
이번 시나리오에서, 나는 지금껏 지켜온 불살(不殺)의 원칙을 깰 것이다.
 
 
 
 
 
< Episode 25. 신과 마주 보는 자들 (3) > 끝

< Episode 25. 신과 마주 보는 자들 (4) >
 
 
 
 
 
 
나를 노려보던 유중혁이 말했다. 
 
“네놈의 실력으론 무리다.” 
 
허공에서 메시지들이 몰아쳤다. 
 
[한반도를 싫어하는 성좌들이 증오심을 드러냅니다.] 
[폭력과 살육을 좋아하는 성좌들이 미쳐 날뜁니다.] 
[한반도를 싫어하는 성좌들이 당신의 죽음을 염원합니다.] 
 
나는 일본 측 화신들을 마주 보았다. 
저들의 배후성은, 모두 내가 아는 성좌들이었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에서 비형의 채널에 들어왔던, 내가 아는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녀석들. 
 
“약속했어. 그러니까 저놈은 내가 잡아야 해.” 
“약속?” 
 
첫 번째 약속은 도깨비를 죽도록 패주는 것이었고, 두 번째 약속은 그녀를 되살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약속. 그것은. 
 
“그 애를 죽인 성좌들에게 복수해주겠다고 약속했어.” 
 
아마 이 말만으로도 유중혁은 이해했을 것이다. 
어쩌면 세상에서 유중혁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일 테니까. 
 
“그런 걸론 양보 못한다.” 
“······자식이 말귀 못 알아 듣네 정말.” 
 
우리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신형을 날렸다. 
 
콰아아앙! 
 
방금 전 서 있던 자리가 통째로 파이며 거대한 뱀의 머리가 우리를 노려보았다. 
 
[성좌, ‘여덟 머리의 군주’가 크게 격노합니다!] 
 
정말 살 떨리는 존재감이다. 
진체도 아니고 고작 성좌의 ‘그림자’일 뿐. 그마저도 겨우 한줌의 ‘개연성’을 획득하여 딱 그만큼의 힘을 드러냈을 뿐인데도 이 정도라니. 
이것이 ‘설화급’의 위엄. 
보통이라면 절대로 상대하지 않았을 상대였다. 
 
「야마타노 오로치. 일본에서는 고대 신화의 악귀로 풀이되는 존재. 지금 이 시점에서 놈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나는 유중혁이 쥔 검을 보며 말했다. 
 
“토츠카노츠루기(十束 剣)를 용케도 구해왔구나.” 
 
원작의 3회차에서 유중혁은 저 검을 손에 넣지 못했다. 
아마, 이번 회차에서는 그만큼 유중혁이 더 강해졌다는 것이겠지. 
유중혁이 말했다. 
 
“······이 검을 알고 있었군.” 
“알지. 유명한 검이니까.” 
 
토츠카노츠루기. 
그것은 일본의 고대신 스사노오가 야마타노 오로치를 벨 때 사용했던 검이었다. 
즉, 머나먼 설화 속에서 야마타노 오로치는 이미 한 번 격퇴 당한 적이 있다는 얘기다. 
계백이 그랬고, 이토가 그랬듯, ‘패배’의 역사는 설화적 존재에게 치명적인 약점을 낳는다. 
 
구오오오오오! 
 
여덟 개의 머리가 동시에 울부짖으며 핏빛 울음을 토했다. 
 
[건방···진···벌레···들.] 
 
미친······ 진언(眞言)까지 사용한다고?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단 한 마디에, 일대는 초토화되었다. 
소리를 들은 소인들의 절반 이상이 내장이 터져 죽어버렸고, 이지혜와 이길영도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심지어 ‘재앙’들 중에도 그 목소리를 듣고 칠공에서 피를 쏟는 놈들도 있었다. 
물론 ‘벽’이 있는 나나, 정신방벽 레벨이 높은 유중혁은 그것을 견딜 수 있었다. 
 
“말도 잘 못하시는 것 같은데, 조용히 다물고 계시지.” 
 
나는 도발하듯 말했다. 
그러나 녀석은 두 번째 진언을 사용하지 않았다. 
충분한 개연성이 허락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언의 사용은 엄청난 개연성의 낭비를 만들기 때문이다. 대신 놈의 분노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크와아아아아! 
 
여덟 개의 머리가 동시에 폭염을 내뿜으며 일대의 바닥이 용광로처럼 타올랐다. 우리는 재빠르게 내성의 벽을 타고 달렸다. 먼저 손을 쓴 것은 유중혁이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거신화(巨身化) Lv.2’를 발동합니다!] 
 
역시, 저 스킬도 전승됐구만. 
슬슬 저걸 배웠을 거라 생각은 했다. 
허공에서 도약한 유중혁의 몸이 허공에서 부풀었다. 
거신화는 일시적으로 체내의 잠력을 폭발시켜 거신의 힘을 흉내내는 기술. 
잠깐이지만, 유중혁의 전투력은 ‘소인화’가 되기 전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파바바밧! 
 
문제는 저 스킬의 지속 시간이 5분밖에 안 된다는 것. 
토츠카노츠루기에 새파란 파천강기의 힘이 덧씌워졌다. 
 
콰콰콰콰! 
 
벽면을 박차고 날아간 유중혁은 명백하게 서두르고 있었다. 완전한 검강의 경지에 이른 파천강기가 에테르 블레이드를 줄기차게 뿜어댔다. 
 
파천검도(破天劍道). 
절기(絶技). 
파천광황무(破天狂皇武). 
 
유중혁의 칼끝에서 뻗어 나온 섬광이 수십 갈래로 갈라지더니, 뱀 머리 하나를 통째로 난자했다. 
 
파츠츠츠츳! 

토츠카노츠루기에 베인 상처에서 처참한 흑혈이 튀어 오르며, 여덟 개의 머리 중 하나가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야마타노 오로치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검. 
유중혁은 성좌가 아니었기에 「무대화」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검에 깃든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성좌, ‘여덟 머리의 군주’가 울부짖습니다.] 
 
하나의 목을 잘라냈지만 야마타노 오로치는 건재했다. 
놈을 죽이기 위해서는 여덟 개의 머리를 모두 잘라야만 한다. 
유중혁은 망설이지 않고 두 번째 머리를 향해 뛰었다. 전투가 너무 화려해서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 핏빛 꼬리와 머리들을 지그재그로 피하며 목을 베어가는 유중혁의 신위는 놀라울 정도였다. 
주인공이 괜히 주인공이 아니다. 
저런 녀석도 골백 번 죽어나가는 곳이 ‘멸살법’이라니. 
새삼 이 세계가 끔찍하게 느껴진다. 
 
“김독자! 구경만 할 셈이냐? 아깐 네놈이 잡는다고 하지 않았나?” 
 
순식간에 세 개의 머리를 터뜨린 유중혁이 숨을 헐떡이며 나를 향해 외쳤다. 
자식, 슬슬 진이 빠지는 모양이지? 
슬슬 몸을 빼던 내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 막타를 내가 칠 거란 뜻이었어.” 
“개자식이······!” 
 
나는 여유롭게 체력을 관리하며 기다렸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반면 마음이 급해진 유중혁은 무시무시한 강기를 한꺼번에 토해내며 나머지 머리들을 공략했다. 그러나 네 번째 머리를 베어 넘기는 과정에서, 결국 녀석의 [거신화]가 해제되고 말았다. 
 
크롸라라라! 
 
뱀의 머리에서 폭염과 독액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유중혁은 기민한 움직임으로 그것을 피했지만, 날아드는 꼬리까진 피해내지 못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호신강기 Lv.9’를 발동합니다!] 
 
끝부분이 스쳤을 뿐인데, 유중혁의 몸은 그대로 성곽을 뚫고 내성에 틀어박혔다. 무시무시한 먼지구름 사이로 피를 토해낸 유중혁이 걸어나왔다. 
 
“김독자! 진즉에 도우라고······.” 
“이제 하려고.” 
“멍청한 놈! 네놈 혼자서는 무리다! 지금은 물러선 후 나중에―” 
“고생했고, 이제 구경이나 해.” 
 
남은 네 개의 뱀 머리가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바닥에 떨어진 토츠카노츠루기를 주워들고 오로치를 향해 달려갔다. 
 
[5번 책갈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활성화 시간 : 3분]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하지만 해당 등장인물의 수준이 너무 높아 스킬의 일부만이 활성화됩니다.] 
 
괜찮다. 일부라도 좋아. 
 
[해당 스킬은 ‘소인’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현재 당신의 육체 구성이 해당 등장인물의 육체 구성과 흡사합니다.] 
 
어차피 내게 필요한 스킬은 하나뿐이니까. 
 
[해당 등장인물의 수준이 너무 높아 스킬 수준을 온전히 재현할 수 없습니다.] 
[활성화되는 스킬의 레벨이 강제로 조정됩니다.] 
[전용 스킬, ‘전인화(電人化) Lv.10’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인식의 크기는 곧 존재의 격을 결정하니, 이는 가장 작은 것에서도 가장 거대한 우주를 볼 수 있음이라.」 
 
‘멸살법’의 키리오스가 남긴 구절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주변을 흐르는 마력의 흐름이 변했다. 마력은 곧 입자가 되었고, 서로 공명하는 전자들이 거칠게 떨리기 시작했다. 
 
「존재의 안에 태초(太初)가 있으니, 그러므로 가장 작은 것이 가장 위대하다.」 
 
뇌리 깊은 곳에서 뭔가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어쩌면 그것은 빅뱅의 시원음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눈을 떴을 때, 내 몸은 백청의 뇌전으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나란 존재가 한줄기 번개가 된 것 같았다. 
 
츠츠츠츳! 
 
가공할 힘이 내 안에서 몸부림쳤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늘을 뚫으려 하면 하늘을 뚫을 것이고, 바다를 가르려 한다면 바다를 가를 것이다. 그리고 목을 베려 한다면. 
 
그 목은, 반드시 떨어질 것이다. 
 
첫 발을 내딛자 굉음이 울려 퍼졌고, 두 번째 발을 내딛자 뱀의 목이 코앞에 있었다. 세 번째 발을 내딛었을 때 백청의 뇌전에 공간이 비명을 질렀고, 마침내 네 번째 발을 내딛었을 때······. 
 
나는, 가공할 후폭풍을 남기며 오로치를 지나쳐 있었다. 
 
뇌전이 튀는 발이 후들거렸고, 코와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비틀거렸다. 
뒤를 돌아보자, 칼날에 베인 세 개의 뱀 목이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마력 회복 물약을 미친 듯이 들이키며 부들거리는 손을 바로잡았다. 
 
[성좌, ‘여덟 머리의 군주’가 당신의 검술에 경악합니다!] 
 
순식간에 목이 하나밖에 남지 않은 오로치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성좌, ‘여덟 머리의 군주’가 시나리오 형평성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나는 비척거리면서도 웃었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형평성을 제기하는 거냐?” 
 
[전인화]의 유지 시간은 3분이었지만, 지금의 내 육체로는 앞으로 세 걸음 이상을 더 디딜 자신이 없었다. 
즉, 나는 앞으로 세 걸음 안에 놈을 죽여야만 한다.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더니 이번에도 빌어먹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모처럼 격이 높은 분께서 추한 꼴을 당하고 계시군요.] 
 
슬슬 목소리가 들려올 거라 생각했다. 
허공에 뜬 중급 도깨비 가눌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것 참. 이대로 두고 볼 수도 없고. 큰일인데 이거.] 
 
말투와는 달리, 놈은 그다지 간섭하고자 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성좌, ‘여덟 머리의 군주’가 분노에 울부짖습니다.] 
 
[흐음, 이번엔 떼를 쓰셔도 안 됩니다. 마음은 알겠지만, 이번 시나리오에서 허락된 개연성을 모두 쓰셨습니다. 더이상은 ‘그분들’이 힘을 빌려주지 않으신단 말입니다.] 
 
야마타노 오로치의 원통한 포효가 [피스 랜드] 전역을 뒤덮었다. 
그것은 설화급 성좌인 야마타노 오로치가 처음 겪어보는 굴욕일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구경거리가 된다는 것. 
그 구경거리의 희생양이, 이번엔 자신이라는 것. 
 
그와아아아아! 
 
분노 때문일까. 머리가 하나 밖에 안 남았음에도, 오로치의 힘은 오히려 점점 상승하고 있었다. 
 
“왕을 지켜라!” 
 
당황한 일본측 화신들이 달려왔다. 
기어코 [절대 왕좌]의 힘까지 사용한 것이다. 
머릿속으로 도깨비 ‘영기’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도, 독자 어르신. 채널이 터지려고 합니다. 간접 메시지를 잠시 막아 두겠습니다! 
 
이제 키리오스의 힘까지 쓰고 있으니, 온갖 종류의 성좌들이 죄다 몰려와서 나를 구경하고 있을 터다. 
 
“막아!” 
 
정신을 차린 우리쪽 일행들이 재앙들을 막으러 달려나왔다. 
피칠갑을 한 채, 간신히 몸을 일으킨 이현성이 선두에 섰고 소인들과 공필두의 포격이 그것을 지원했다. 
그 사이, 야마타노 오로치는 최후의 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니, 잠깐만! 이보세요 성좌님! 지금 무슨······!] 
 
야마타노 오로치의 화신, ‘이즈미’의 전신에서 불길한 전류가 튀고 있었다. 개연성 후폭풍의 징조였다. 당황한 도깨비가 외쳤다. 
 
[이, 이보세요! 돌아버리셨습니까? 관리국! 비상사태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진체가 아니라도, 일개 화신인 나에게 패배할 수는 없다는 오기가 진짜 재앙을 불러오고 있었다. 뒤늦게 도깨비가 시스템 제어권을 사용했으나, 안타깝게도 때는 늦고 말았다. 
 
쿠구구구구! 
 
거대한 하늘 위로 열리는 [그레이트 홀]. 
나는 오로치가 선을 넘었음을 깨달았다. 
설마 [절대왕좌]에 허락된 개연성까지 빌려올 줄이야. 
 
“아아, 아······!” 
 
모두가 하늘을 보며 숨을 삼켰다. 
 
[누군가가 시나리오 시스템에 간섭하였습니다.] 
 
[그레이트 홀]의 너머로 넘실거리는 불온한 존재. 
혼돈. 무질서. 공허. 그 모든 공포의 기원이 되는 무엇. 
그 존재가, 야마타노 오로치에게 개연성을 빌려주고 있었다. 
 
파츠츠츠츳! 
 
허락되지 않았을 개연성이 허락되자, 하나 남은 뱀 머리의 그림자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커지고, 또 커지고. 성채를 넘어 마치 이 행성 전체를 덮어버릴 때까지. 
 
[치수···의 검··· 따위로······!] 
 
화신이고 소인이고 할 것 없이 바닥에 쓰러진 모든 존재가 신음하며 칠공에서 피를 토했다. 무시무시한 격의 차이가 중압감이 되어 내 몸을 짓눌렀다. 무릎이 강제로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고작··· 인··· 간이, 위··· 대한··· 별을··· 거스르··· 는가······!]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저건 [전인화]를 사용했더라도 이길 수 없다. 
내 수준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는 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웃었다. 
 
“넌 방금 최악의 실수를 한 거야.” 
 
<스타 스트림>의 섭리는 균형. 
누군가가 개연을 파괴하면, 다른 누군가는 개연을 얻는다. 
그러니 이제 저울눈은 맞춰질 것이다. 
 
쿠구구구구! 
 
멀리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무시무시한 기운. 
그는 야마타노 오로치도, [그레이트 홀] 너머에 있는 미지의 신격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의 그 누구도, 그 고고한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 이계의 신격이 시나리오에 간섭하게 되었지?] 
 
그는 이 행성에서 태어난 절대자. 
 
[내 행성의 일에 끼어들지 마라. 나의 설화가 시작된 곳에서 나와 맞서고 싶지 않다면.] 
 
역설의 백청, 키리오스 로드그라임. 
 
[물러서라! 이계의 괴종이여!] 
 
키리오스의 검극에서 뻗어나온 뇌전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설화급 성좌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는 강력한 힘. 
본신진력을 드러낸 키리오스의 힘은, 촉수의 끝을 부수고 강제로 [그레이트 홀]의 입구를 닫아버렸다. 개연을 잃은 오로치의 힘이 급감하기 시작했다. 
 
[그··· 아··· 아···! 네놈··· 은···!]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머지 세 걸음을 달려갔다. 
전신의 모든 마력이 흘러 들어간 토츠카노츠루기가 백청의 울음을 토했다. 
야마타노 오로치의 화신이 나를 향해 웃는 것이 보였다. 
오래도록 기다린 해방을 맞은 듯 기뻐 보이는 얼굴. 
하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하나의 생명을 죽인다. 
이기적인 검이 움직였고, 뭔가가 또르르 바닥을 굴러떨어졌다. 
 
[당신은 동족을 살해했습니다.] 
[‘불살의 왕’의 칭호를 박탈당했습니다.] 
 
심대한 타격을 받은 야마타노 오로치의 별자리가 깜빡였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성좌의 그림자가 재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당신은 시나리오 최초로 ‘재앙의 왕’을 사냥하였습니다!] 
[해당 시나리오에 강림한 ‘재앙의 왕’의 예상 급수를 매길 수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설화를 달성하였습니다.] 
[불가능한 시나리오 완수로 인해 ‘서울 돔’과 ‘도쿄 돔’의 모든 도깨비들이 긴급 대책 회의에 들어갑니다.] 
 
나는 별자리로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너희는 모를 것이다. 
그토록 힘들고 처절하게 달려, 간신히 출발점에 선 사람의 기분을. 

[축하합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격을 인정하였습니다.] 
[당신은 총 네 개의 설화를 이룩하였습니다.] 
 
여섯 번째 시나리오의 끝. 
나는 드디어 내가 원하는 결말을 향한 출발점에 도착했다. 
 
[이제 당신은 성좌가 되기 위한 마지막 설화를 쌓아야 합니다.] 
 
 
 
 
 
 
< Episode 25. 신과 마주 보는 자들 (4) > 끝

< Episode 26. 시나리오 파괴자 (1) >
 
 
 
 
 
Episode 26. 시나리오 파괴자 
 
 
 
[업적 보상으로 200,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주요 공헌자를 중심으로 보상을 논의 중입니다.] 
 
야마타노 오로치의 화신인 ‘이즈미’가 사망한 후, 일본 측 인사들은 곧바로 항복해왔다. [절대 왕좌]가 무너지자 그들을 제어하던 일체의 힘이 풀렸고, 숨어 있던 반 재앙 측 인사들이 속속 등장했던 것이다. 
 
“고맙소, 당신이 김독자군.” 
 
나는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내가 ‘아스카 렌’을 찾았다면, 유중혁 또한 찾아간 일본 측의 인사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기즈키 히로시.” 
“날 아시오?” 
“토츠카노츠루기의 히든 시나리오를 당신이 가지고 있었죠.” 
“호, 맞소. 유중혁 군에게 들은 모양이군.” 
 
물론 들은 적은 없다. 
원작을 읽어서 알고 있을 뿐이지. 
내가 기억하기로, 이 자는 스사노오와 야마타노 오로치의 신화와 관계되어 있는 후대의 배후성을 가지고 있다. 
 
“진짜로 ‘여덟 머리의 군주’를 죽일 줄이야······ 당신 덕분에 많은 게 해결됐군.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소.” 
 
기즈키는 남은 일본인들을 통솔해 쓰러진 재앙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재앙을 선택했던 일본인들은 시나리오가 실패로 돌아간다 해도 사망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이용한 것이다. 
야마타노 오로치의 화신이었던 이즈미만큼은 못하지만, 기즈키 역시 강력하고 영리한 화신. 그라면 도쿄 돔에 돌아가서도 화신들을 당분간 잘 통솔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다와 폭풍의 코에서 태어난 성좌가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성좌, ‘뱀을 베는 자’가 당신에게 큰 호감을 갖습니다.] 
 
성좌 ‘뱀을 베는 자’는 SSS급 아이템 토츠카노츠루기의 본래 주인인 ‘스사노오’였다. 
나는 유중혁에게 돌려준 토츠카노츠루기를 흘끗 바라보았다. 
토츠카노츠루기는 날이 대부분 상해 있었다. 
전승에서도 야마타노 오로치를 벨 때 부러졌다고 되어 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유중혁이 뭘 보냐는 듯 날 노려보는 순간, [엘라인 숲의 정기]를 먹고 잠들어 있던 일행들이 하나둘 잠에서 깨어났다. 
 
“아, 이번엔 정말 죽는 줄 알았네.” 
 
일어난 뒤에도 이지혜는 이마를 짚은 채 한참이나 머리를 흔들었다. 
야마타노 오로치의 진언을 직접 들은 타격 때문이겠지. 
 
“아니, 그거 대체 뭐였어? 몇 마디 들었다고 그런 꼴이······.” 
“소위 때 사령관이 기습 방문했을 때도 그런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현성의 표정은 곧바로 얼어붙었다. 
 
“살만해진 모양이군 이현성.” 
“유, 유중혁 씨.” 
“내 그룹을 따라 오라고 했을 텐데, 왜 말을 안 들었지?” 
“그, 그건······.” 
 
이현성이 바들바들 몸을 떨며 내쪽을 흘끗거렸다. 
어떻게든 해달라는 얼굴이었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유중혁은 그런 이현성을 잠시 노려보더니 등을 돌려 멀어졌다. 
 
“아저씨.” 
 
곁을 보니 신유승이 내 옷깃을 잡고 있었다. 응석이라도 부리듯 나를 올려다보던 녀석이 폭 하고 배에 안겨들었다. 
나는 신유승의 등을 가볍게 두들겨주었다. 
 
“힘들었지? 고생했어. 잘 버텨줬구나.” 
 
그럴듯한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해줄 말이라곤 이것 뿐이었다. 
신유승이 품속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형, 전 별로 안 힘들었어요.” 
 
그새 끼어든 이길영이 신유승을 밀치고 품 안으로 들어왔다. 티격태격하긴 해도, 두 아이들은 꽤 친해진 모양새였다. 역시 애들은 애들이 제일 잘 이해하는 법이지. 둘이 함께 남겨둔 보람이 있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으시군요.” 
 
나는 그 말을 꺼낸 소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아마 이름이 ‘길레미엄’이었나? 
 
“저녁에 왕정 연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내성이 거의 붕괴해버린지라 규모는 초라하겠지만······ 괜찮으시다면 여러분들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시나리오 종료까지 남은 시간 : 27일] 
[재앙 측의 시나리오 포기 의사로 현재 여섯 번째 시나리오가 조기 종료 예정에 있습니다.] 
 
곳곳에 흩어진 재앙들 때문에 시간이 조금 걸리는 듯하지만, 곧 히로시가 [피스 랜드] 전역을 돌고 나면 시나리오는 자동 종료될 것이다. 
연회라······. 
놀고 마시는 그건가? 
아, 혹시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참석하죠.” 
 
 
* 
 
 
“술을 아주 좋아하시는 모양입니다.” 
“뭐······, 요새 들어 통 보기 힘드니까요.” 
 
나는 길레미엄의 도움으로 왕성 창고에 남아 있던 증류주를 잔뜩 가져왔다. [피스 랜드]의 술은 알코올 도수가 무척 낮은 편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량이 많이 필요했다. 
 
[성좌, ‘뱀을 베는 자’가 당신의 양조법에 관심을 가집니다.] 
 
나는 사람 만한 크기의 들통에 술들을 한가득 쏟아부은 뒤, 내가 가지고 있던 재료들을 모두 던져 넣고 휘젓기 시작했다. 
 
[‘여덟 머리의 군주’의 여덟 번째 머리] 
[‘여덟 머리의 군주’의 일곱 번째 꼬리] 
 
그것은 야마타노 오로치를 격퇴할 때 나온 부속물들이었다. 진체가 아니었기에 제대로 된 부속이라기보다는 그저 파편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설화급 성좌의 힘이 담긴 조각이었다. 
내가 뭘 하려는지를 깨달은 것은 오직 유중혁 뿐이었다. 
 
“그 ‘히든 피스’를 알고 있군.” 
“괜히 예언자겠냐? 네 칼이나 줘봐.”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는 유중혁은 순순히 칼을 내 놓았다. 
나는 유중혁에게 받은 토츠카노츠루기를 술에 던져 넣었다. 
원래는 이렇게 만드는 게 아니지만, 딴에는 편법이었다. 
 
쿠르르르르르! 
 
토츠카노츠루기가 부글거리며 술 속에 녹아들었다. 
 
[두 개의 설화가 당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성좌 ‘여덟 머리의 군주’와 성좌 ‘뱀을 베는 자’의 설화가 결합합니다.] 
[올바르지 않은 전승으로 설화의 일부가 훼손됩니다.] 
 
훼손된 부분은 조금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다. 
 
[설화,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가 발현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는 술에 취한 야마타노 오로치의 꼬리를 베어 나온 칼이었다. 
하지만 편법으로도 획득은 가능하다. 
어쨌든 술에 절기만 하면 되니까. 
이지혜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귀한 술에 왜 칼을 빠트려?” 
“기다려 봐.” 
 
잠시 후, 신비한 아우라가 술독 전체에서 흘러나오더니, 새하얀 백광을 흘리는 한 자루의 검이 술의 파랑 사이로 솟아올랐다. 
 
[성유물, ‘천총운검(天叢雲 剣)’이 나타났습니다!] 
 
역시, 나왔구만. 
‘멸살법’에 틀린 거 하나 없다니까. 
유중혁이 낼름 손을 뻗었다. 
 
“이건 내 것이다.” 
“야! 같이 잡았잖아.” 
“내가 다 잡은 거였다.” 
 
평소라면 억지를 부렸겠지만, 이번만큼은 유중혁의 눈빛도 진심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 
물론 이 성유물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눈앞에서 성유물을 빼앗기는 것도 속이 쓰린 일이었다. 
여기서 놈이랑 싸울 수도 없고 해서 별 수 없이 칼을 놓은 순간. 
 
[성유물, ‘초체검(草薙 剣)’이 나타났습니다!] 
 
술독 속에서 칼 한자루가 더 솟아났다. 
······어? 
머릿속에서 ‘멸살법’의 내용이 빠르게 흘러갔다. 
 
「이름은 설화를 낳고, 설화는 곧 실재를 재현한다. <스타 스트림>의 세계에서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의 이름은 총 다섯 개. 즉, 다시 말해[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는 ‘한 자루’가 아니었다.」 
 
나는 바로 깨달았다.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의 이름 전승은 총 다섯 개. 
즉, 이 검은 ‘멸살법’에서 언급만 되고 등장하지 않았던 다른 네 자루 중 하나인 것이다. 
나는 재빨리 그 칼을 쥐며 말했다. 
 
“그럼 이건 내거야. 불만 없지?” 
“그건······.” 
 
유중혁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이내 등을 돌렸다. 
 
“맘대로 해라.”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착 하고 손에 감긴 칼날의 그립이 만족스러웠다.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 시리즈의 두 번째, 초체검. 
용살(龍殺)의 힘이 담긴 이 검만 있다면, 앞으로 만나게 될 용족들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곁에서 그 꼴을 보던 이지혜가 입술을 비죽였다. 
 
“거 남자들이 칼 한자루 가지고 쩨쩨하게······.” 
 
이지혜는 내가 빚어 놓은 술독을 콕콕 찔러보더니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다 끝났으면 이거 마셔봐도 돼? 냄새 장난 아니라고.” 
“너. 미성년자가 자꾸······.” 
 
이지혜 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황금빛으로 넘실대는 술독 근처에 잔뜩 몰려와 있었다. 
다들 술이 어지간히 고팠던 모양이다. 
하긴, 냄새만 맡아도 취할 지경이니······. 
 
“다들 마셔 보세요.” 
 
내 허락이 떨어지자 마자, 사람들은 미친 듯이 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우오오, 어떻게 이런 맛이!” 
“천상의 술이다!” 
 
헤롱헤롱 취해가는 사람들이 황금빛 술을 들이켜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성좌의 부속을 마력으로 발효시킨 술이니 맛이 좋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저 술은 마시고 일어나면 미미하지만 능력치 상승의 효과도 있다. 
 
“넌 안 마시냐?” 
 
나는 근처를 서성이다가 유중혁을 향해 물었다. 자세히 보니, 유중혁은 웬일로 간단한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야채랑 고기를 듬성듬성 썰어 구운 산적이었다. 
야외파티였기 때문에 소인종들이 가져온 식재가 근처에 한가득 쌓여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유중혁’이 요리를 하다니······. 
유중혁이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나는 타인이 만든 건 먹지 않는다.” 
“왜, 독이라도 탔을 까봐?” 
“맛이 없기 때문이다.” 
“네놈이 만든 건 얼마나 맛있다고······.” 
 
나는 그 말을 하며 유중혁이 만들던 꼬지를 재빠르게 한입 베어먹었다. 
그런데······. 
아니, 이거 뭐야? 
근처에서 유중혁을 돕던 이설화가 나를 향해 웃으며 물었다. 
 
“맛있죠?” 
“······예.” 
 
빌어먹게도 맛있었다. 
정말로, 맛있었다. 
아니, 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요리 중에 제일 맛있었다. 
이 고기꼬치가 대체 뭐라고? 
무표정한 유중혁의 입꼬리 한쪽이 재수없게 올라가 있었다. 
젠장. 
아무리 회귀자라고 해도 어떻게 이 자식은 요리까지 잘하는 거지? 
속으로 웅얼거리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데, 어디선가 악기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아주 잔잔하면서도 중후한 멋이 있는 음악. 
소리를 따라 고개를 움직이자, 성채의 꼭대기에 있는 인형이 보였다. 
유중혁 뺨치게 잘 생긴, 세상에서 제일 작은 미남.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이 그곳에 있었다. 
 
그는 난간에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며 비올라를 켜고 있었다. 부드럽게, 또 때로는 구슬프게. 멀고 아련한 그리움. 왁자하게 떠들던 사람들이 하나둘 씩 말을 멈추고 그 음악을 들었다. 과장스러운 열기가 조금씩 식어갔다. 
 
제일 먼저 누군가가 눈시울을 붉혔고. 
그다음에는 옆사람이 울음을 터뜨렸다. 
 
전염된듯, 어느새 소인들은 모두 울기 시작했다. 
울어야만 하는 순간을 놓치고, 오로지 달려오기만 바빴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피스 랜드]의 주민들 또한 시나리오를 겪는 존재들. 
 
지금 이 음악은 불행한 자신의 고향을 위로하는 음악이었다. 
 
나도 그 멜로디를 들으며 술을 조금 마셨다. 
곁을 보니 아스카 렌이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일본인 그룹과 합류하지 않았다. 
 
“렌 씨, 한수영은 못 보셨습니까?” 
“아. 그게, 제가 설정 몇 개를 알려 드렸더니 갑자기 갈 곳이 있다면서······.” 
 
그렇군. 어쩐지 안 보인다 했더니 그새 또 히든 피스를 찾으러 떠난 건가. 그 녀석답다. 
부서진 성채의 폐허 사이로 은은한 비올라 소리가 울려 퍼졌고, 나는 상기된 아스카 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랜 꿈의 마지막에 가 닿은 사람은 아마 저런 얼굴을 하게 되는 모양이다. 
나는 왠지 지금이라면 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묘해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포기하지 않았어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이다가, 희미하게 맺힌 습막을 걷어내며 물었다. 
 
“누군가는 제 만화를 보며 이런 장면을 생각해줬을까요?” 
“분명 그랬을 겁니다.” 
 
아스카 렌은 슬프게 웃으며 한참이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붉어진 그녀의 뺨을 보니 취기가 많이 오른 듯했다. 
 
“갑자기 그런 생각도 들어요. 어쩌면 저도, 누군가가 그린 세계의 일원은 아닐지······.” 
 
나는 잠깐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어쩌면 그런게 중요하지 않은 세계가 된 걸지도 모르죠.” 
“네?” 
“그보다 지난 번에 듣다 만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아스카 렌이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라, 나는 조금 설명을 보탰다. 그러자 아스카 렌이 말했다. 
 
“아, 연재가 끝난 직후 갑자기 메일이 왔었어요. 제 만화의 설정을 조금 빌리고 싶다고······.” 
 
뜻밖의 이야기에, 나는 조금 놀랐다. 
‘멸살법’에 이런 얘기는 없었다. 
 
“설정을 빌려요?” 
“네. 그땐 별 생각이 없어서 그냥 마음대로 하라고 답장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사태가 벌어져서······.” 
“혹시 정확한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가령 메일 주소라든가······.” 
“메일에 답장하자마자 갑자기 관련 메일들이 싹 다 지워졌어요. 그래서 자세한 주소까지는······.” 
“그렇군요.” 
 
내 목소리에 뭔가 미안해졌는지, 머뭇거리던 아스카 렌이 말을 덧붙였다. 
 
“······저, 음.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메일 주소가 t로 시작했던 것 같기도 해요.” 
 
t? 
나는 일순 멍해졌다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혹시 그 아이디······ ‘tls123’ 아닙니까?”
 
 
 
 
 
< Episode 26. 시나리오 파괴자 (1) > 끝

< Episode 26. 시나리오 파괴자 (2) >
 
 
 
 
 
tls123. 
그것은 바로 ‘멸살법’ 작가의 아이디였다. 
아스카 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에? tls123······?” 
 
나는 다급히 그녀를 채근했다. 
 
“기억나십니까?” 
“잘 기억이······ 어?” 
“······왜 그러시죠?” 
 
잠시 눈을 깜빡이던 아스카 렌의 동공이 멍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희미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 ■■” 
 
응?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 
“그러니까, 방금 하신 말씀······.” 
“무슨 말이세요? 제가 무슨······.”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아스카 렌의 얼굴. 
갑자기 불길한 감각이 스쳤다. 
나는 곧바로 ‘등장인물 일람’을 가동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아스카 렌 
나이 : 31세 
배후성(背後星) : 이천일류의 달인 
전용 특성 : 피스랜드의 창조주 (전설), 만화가 (희귀) 
전용 스킬 : [검도 Lv.7], [펜촉을 검으로 Lv.4], [그럴싸한 보법 Lv.5], [상상력 자극 Lv.4]······. 
성흔 : [이천일류 Lv.3] 
종합 능력치 : [체력Lv.55 (현재 Lv.17)], [근력Lv.55 (현재 Lv.17)], [민첩Lv.49 (현재 Lv.11)], [마력Lv.54 (현재 Lv.16)] 
종합 평가 : 현재 종합 평가가 수정 중입니다. 
 
+ 
 
내가 ‘멸살법’에서 본 대로, 이 여자는 [피스랜드의 창조주]가 틀림없다. 
그런데······. 
 
······‘수정 중’이라고? 
 
다음 순간, 나는 눈앞에서 특성창의 내역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뭉쳤던 모래가 흩어지듯이, 문자는 하나씩 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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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 특성 : 만화가 (희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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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천천히, 등줄기에서 소름이 올라왔다. 
왜 갑자기 [피스랜드의 창조주]가 없어진 거지? 
그 어떤 대성좌라 해도 이런 이적은 불가능했다. 
고개를 갸웃하던 아스카 렌이 물었다. 
 
“죄송한데 우리가 무슨 이야길 하고 있었죠?” 
“······렌 씨의 작품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제 작품이요?” 
 
아스카 렌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피스 랜드]도, 자신이 만들었던 그 어떤 설정들도 떠올리지 못하는 표정. 
 
「그 순간, 그녀는 그 세계가 완전히 자신의 손을 떠났음을 깨달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그런 문장이 ‘멸살법’에 있었던가?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고적한 밤을 울리는 비올라의 선율. 
드문드문 들려오는 소인들의 노랫소리. 고양된 감정이 빚어낸 슬프고도 풍요로운 이 분위기가 그것을 확신케 했다. 
 
바로 이 순간이 [피스 랜드]라는 세계의 완결이라는 것을. 
 
이제 이 이야기에는 아무것도 보탤 것이 없었다. 
마침내 하나의 이야기가, 한 명의 작가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아스카 렌에게서 특성명이 사라진 이유도 이해할 것 같았다. 
세계가 완성되는 순간, 작가는 창조주의 직위에서 내려와야만 한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끝이 난 이야기는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인가. 
 
[당신은 행성 ‘피스 랜드’를 알게 되었습니다.] 
[‘피스 랜드’에 소속된 모든 존재들이 당신의 시선을 희미하게 느낍니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당신의 존재에 기뻐합니다.] 
[‘피스 랜드’의 존재들이 당신에 관한 전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우습게도, 물으나 마나 한 일이었다. 
······그런가. 
작가를 떠난 이야기가 향할 곳이란 애초부터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 후 나는 몇 가지를 그녀에게 더 물어보았고, [거짓 간파]까지 사용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미안해요, 정말 모르겠어요. 읽어본 만화 같기는 한데······.” 
 
자신이 그린 이야기를 읽어본 것 같다, 라니. 
어쩐지 기분이 울적해지고 만다. 
잠시 눈을 감고 뭔가를 헤아리던 아스카 렌이 말을 이었다. 
 
“근데 저도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아요. 틀림없이······ 그랬을 거예요.” 
 
안타깝게도 간신히 닿았던 ‘멸살법’ 작가에 관한 정보는 거기서 그치고 말았다. 
‘멸살법’의 작가가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아마도 ‘멸살법’의 작가는, 나만큼이나 기존의 결말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그래서 이 세계가 끝나기 전, 내게 이 ‘텍본’을 준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 기대를 충족 시켜줘야겠지. 
 
나는 풍광을 음미하고 있는 아스카 렌에게서 물러나, 품속에 넣어 두었던 작은 앰플을 꺼냈다. 
 
[고대 뱀의 성혈(星血)] 
 
그것은 성좌의 부속과 함께 얻은 아이템이었다. 
내가 신호를 보내자, 멀리서 떨어져 있던 이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이현성은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 
미안하지만 그에게는 오늘 맡길 일이 있었다. 
 
“그럼 부탁합니다.” 
“맡겨주십시오.” 
 
이현성에게 맡긴 것은 내 경호였다. 
왜냐하면 나는 당분간 쓰러질 예정이었으니까. 
[고대 뱀의 성혈]을 술잔에 타자, 황금빛으로 넘실대던 술이 검붉은 포도주의 빛깔로 화했다. 
 
[당신은 ‘고대 뱀의 성혈’로 만든 술을 마셨습니다.] 
[욕심 많은 뱀의 가호가 당신의 정신력을 시험합니다.] 
 
이것은 3회차의 유중혁도 알지 못하는 히든 피스였다. 
오직 성혈을 섞은 오로치의 뱀술로만 행할 수 있는 의식. 
이게 없었더라면, ‘불살의 왕’ 같은 좋은 특성을 포기하진 않았을 것이다. 
 
[뱀이 당신에게서 용살(龍殺)의 자격을 확인하였습니다.] 
[새로운 특성, ‘여덟 개의 목숨’이 개화를 준비합니다.] 
 
······됐다. 
개화 준비는 끝났으니, 이제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특성이 만들어져 있겠지. 
일단 하나는 끝났고, 다른 하나가 문제인데······. 
남은 술들을 몽땅 입속에 털어 넣자, 머리가 급격하게 어지러워지며 취기가 밀려왔다. 
하지만 바로 잠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바닥에 메시지를 썼다. 
 
‘술과 황홀경의 신이시여.’ 
 
웬일일까. 흥겨운 분위기에도 디오니소스는 응답이 없었다. 
페르세포네 쪽도 마찬가지였다. 
곤란한 상황이었다. 
과업을 완수했는데, 정작 나를 명계에 데려다줄 존재가 없다니······. 
역시 유상아를 데려올 걸 그랬나? 
올림포스와의 직통 단말이 있으면 바로 신호를 보낼 수 있을 텐데······. 
 
‘부유한 밤의 아버지시여.’ 
 
사위가 깜깜해진 것은 하데스의 수식언을 적던 순간이었다. 
오싹한 기운이 전신을 훑었다. 
구토감과 함께 시계(視界)가 핑그르 돌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내가 이미 명계에 왔음을 깨달았다. 이토록 불온하고 기분 나쁜 공기는 오직 명계에서만 느낄 수 있으니까.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 또 타르타로스에 떨어지진 않은 모양이다. 
누군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너는 지금 명계에 와서는 안 된다.] 
 
상대는 하데스도, 페르세포네도 아니었다. 
사신을 닮은 복장을 본 순간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심판관님.” 
 
지난번에 나를 안내했던 심판관은 아니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여왕님의 과업을 완수했다는 보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알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너는 궁전에 들어갈 수 없다.] 
 
“······어째서입니까?” 
 
[그건 알려줄 수 없다.] 
 
귀찮다는 듯, 심판관이 손사래를 쳤다. 
 
[돌아가라. ‘아버지’의 권능을 빌어 소환은 해줬지만, 입장은 불가하다.] 
 
“저는 여왕님과 약속이 있습니다.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지금은 안 돼. 돌아가.] 
 
이 녀석 대체 무슨 똥배짱일까. 
심판관이 아무리 강해봤자, 페르세포네에 비하면 조족지혈일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완강하게 나오는 것을 보면······. 
 
“······혹시 두 분 다 출타 중이십니까?” 
 
멈칫하던 심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대체 무슨 일로······.” 
 
하데스와 페르세포네가 동시에 자리를 비울 정도라. 
모르긴 몰라도 어디서 큰일이 터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적어도 올림포스 12신급의 긴급회의가 아니면······ 근데 지금 시점에서 그런 호출을 할 만한 일이 있었던가? 
 
“혹시 제게 따로 남기신 말씀은 없으십니까? 제가 찾아올 때를 대비해 두고 가신 거라든가······.” 
 
[글쎄, 그런 게 있더라도 내가 왜 네놈에게 전해야 하지?] 
 
심판관마다 성격이 다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까칠한 놈이 걸릴 줄은 몰랐다. 
그래도 말투를 보아하니, 뭔가 있긴 한 것 같은데. 
그 치밀한 페르세포네가 그냥 버려두고 갔을 리도 없으니······. 
어쩔 수 없나. 
 
“만약 저를 도와주신다면, 이걸 한 모금 맛보게 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코트의 안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예비로 빚어둔 ‘야마타노 오로치’의 뱀술이었다. 뚜껑을 따자, 들큼한 향취와 함께 감미로운 발효주의 냄새가 고루 퍼졌다. 
 
[그, 그것은······?] 
 
저 심판관조차 깜짝 놀란 눈치였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에게 술은 곧 마약과도 같다. 
긴 세월의 비극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 
다른 술도 아니고, 성좌의 부속으로 빚은 뱀술인데 더 말해 무엇하랴. 
 
[흐, 으흠. 흠······.] 
 
“싫으시면 그냥 가겠습니다.” 
 
[자, 잠깐만! 알겠다. 여왕님께서 남기신 것을 주마.] 
 
······역시 먹히는군. 
지난번에 봤던 깐깐한 심판관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흐아아······ 좋구나······.] 
 
한 모금을 마시고 헤롱거리던 심판관은, 만족한 듯 웃더니 품속에서 노란 구슬을 꺼내 주었다. 
 
[여기, 대가다.] 
 
영롱한 노란색 구슬. 
나는 그것이 내가 간절히 찾아왔던 신유승의 영혼임을 깨달았다. 
구슬을 받아 몇 번을 문지르자, 구슬이 희미한 빛을 내며 허공에 붕 떠올랐다. 나는 구슬에 손을 대고 생각을 전했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이미 언어를 상당 부분 상실한 듯 구슬은 옅은 비명만을 흘렸다. 
 
[아······아.] 
 
말을 잃고, 기억을 잃은 여자. 
한평생을 모두 시나리오에 바쳤음에도, 그녀에게 남은 이야기는 끔찍한 고통의 역사뿐이었다. 그러니 보통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생은 충분히 했으니, 이제 다 잊고 쉬라고. 
하지만 신유승은 쉬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아직 이 세계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아······저씨······?] 
 
한참이나 말을 고르던 영혼이 부르르 떨렸다. 
 
[정말, 정말로······.] 
 
‘그래.’ 
 
[어째서······?] 
 
‘아직 이 세계에서 네가 해 줄 일이 남았어.’ 
 
나는 그녀를 동정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신유승의 도움이 필요했을 뿐이다. 오랜 이야기를 쌓아 높은 영혼의 격을 가진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 신유승이 살짝 두려운 기색으로 답해왔다. 
 
[내가······ 뭘 하면 되죠?] 
 
나는 그녀의 영혼에 손을 댄 채, 내 생각의 일부를 보여주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신유승이 힘없이 웃었다. 
 
[하하, 하······ 잔인한 사람이네, 아저씨는······ 어떤 의미에서는 대장보다도 잔인해······.] 

‘미안해.’ 
 
[하지만······ 좋아요. 할게. 아니······ 오히려 꼭 하고 싶어요. 바라던 바야. 이번에는 꼭, 나도 이 세계의 ‘결말’을 보고 싶으니까.] 
 
‘기억이 더 사라질지도 몰라. 견딜 수 있겠어?’ 
 
신유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렵지 않아. 아저씨가······ 이야기해줄 거라 믿으니까.]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신유승의 영혼은 구슬 속으로 사라졌다. 
아마 당분간은 나오지 못하겠지. 
다시 우리가 만나는 순간은 그녀가 육체를 가진 이후일 것이다. 
곁에서 우리를 보고 있던 심판관이 입을 열었다. 
 
[알고 있겠지만, 영혼을 명계에서 데리고 나간다 해서 육체가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그 영혼은 이미 오랜 시일이 지나 새로운 육체에 정착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심판관이 기분 나쁘게 큭큭거렸다. 
 
[연이 닿는다면 환생(還生)을 하는 방법도 있겠으나, 그 영혼은 너무나 많은 죄악을 저질렀기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인간으로 태어나고자 한다면 영혼이 가진 모든 이야기를 버려야 할진대, 그렇게 된다면 그 영혼은 이미 네가 알던 존재가 아니겠지.] 
 
“알고 있습니다.” 
 
페르세포네의 말처럼 영혼은 곧 이야기이다. 
그러니 지금도 실시간으로 신유승의 영혼은 ‘신유승이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비단 신유승만 그런 건 아닐 터다. 
나는 곧바로 내 전속 담당을 호출했다. 
 
‘비형.’ 
 
녀석은 말이 없었다. 
나는 비형이 응답해 올 때까지, 구슬을 내려다보며 기다렸다. 
오직 높은 격을 가진 존재만이 선택할 수 있는 환생체(還生體)······. 
지금까지 이야기에 지배당해왔던 그녀는, 이제 이야기를 지배하는 존재로 거듭날 것이다. 
마침내 채널에 비형의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입을 열었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뭔 도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함께 침묵하던 비형에게서, 나와 신유승의 영혼을 번갈아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놈은 곧 내 말뜻을 눈치챘다. 
 
―서, 설마 너······ 나한테 ‘그거’ 시키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 잘 생각해. 그게 네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야. 걔, 그냥 이쯤에서 소멸하는 편이 나을 수도······. 
 
‘채널 망하고 싶냐?’ 
 
―제길. 야, 진짜 안돼. 나 그거 한 번도 안 해봤다고! 
 
‘이제부터 해보면 되겠네.’ 

―시발. 
 
한참을 망설이던 비형이, 결국 허공에서 황금빛의 ‘알’ 하나를 내려보냈다. 
가장 위대한 ‘이야기의 별’에서 내려오는 알. 
나는 신유승의 영혼을 그 알 속에 집어 넣었다. 
알은 부르르 떨며 선연한 광채를 내뿜더니,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비형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내 ‘아이’를 받게 될 줄이야······. 
 
나의 적은 시나리오 내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41회차 미래에서 온 신유승. 
그녀는, 이 회차에서 오직 나만을 위한 ‘이야기꾼’이 될 것이다.
 
 
 
 
 
< Episode 26. 시나리오 파괴자 (2) > 끝

< Episode 26. 시나리오 파괴자 (3) >
 
 
 
 
 
 
비형과의 협상이 끝나자마자, 심판관은 내게 재촉했다. 
 
[끝났으면 슬슬 돌아가지.] 
 
왜 이렇게 채근하나 싶었는데, 심판관은 내 술병을 보며 연신 입맛을 다시는 중이었다. 
아까 준 술이 부족했던 모양인데······. 
잠깐만. 
그러고 보니 지금 명계에 하데스와 페르세포네가 없다고 했지? 
 
“저, 심판관님. 부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뭔진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곤란······.] 
 
“술 한 병을 다 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심판관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저를 타르타로스에 다시 한번 데려가 주십시오.” 
 
 
*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타르타로스에 금방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잠깐이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이 심판관은 이미 만취한 상태였다. 
 
[그럼 용건은 끝났느냐?] 
 
“예.” 
 
하데스와 페르세포네가 자리를 비운 것은, 내게 있어서는 신의 한 수였다. 정말 약간의 정보를 귀띔하고 왔을 뿐이지만 눈치 빠른 김남운이라면 그것만으로도 큰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찾아올 <기간토마키아>가 기대되는 순간이다. 
 
[여왕께서 남기신 말씀이 있다.] 
 
“여왕께서요?” 
 
[그래. 직접 읊어주마.] 
 
심판관은 중후한 목소리로 페르세포네의 말을 대행했다. 
 
[화신 김독자, 아주 흥미로운 방법으로 과업을 성취하고 있더군요.] 
 
“······.” 
 
[이제 <스타 스트림>의 많은 성운들이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엔 당신을 불길하게 여기는 이들도 상당수 있어요.] 
 
실제로 이번 시나리오는, 성좌들의 관심을 지나치게 끈 데가 있었다. 
 
[대비를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조금 불안해진다. 
······혹시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출타도 나 때문인가? 
얼마 전부터 다른 대성좌들의 반응도 눈에 띄게 줄었다. 
특히 우리엘이라든가, 또······ 우리엘이라든가. 
참고로 우리엘 또한 성운 ‘에덴’ 소속이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에게 섭섭해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긴고아의 죄수’를 위로합니다.] 
 
저 녀석들은 아직 있었군. 
 
[그럼 잘 가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금 걱정해 봐야 소용도 없다. 
중요한 건 지금껏 차근차근 쌓아온 이야기를 흩트리지 않는 거니까. 
성운들이 나를 아니꼽게 생각한다 해도, 페르세포네 말처럼 모두가 그런 것도 아니다. 
까마득한 회오리가 한바탕 몰아친 뒤, 시야가 점차 개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현세로 돌아와 있었다. 
 
“독자 씨.”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목소리. 나는 억지로 뺨을 두들겨 정신을 차렸다. 
곧, 근심이 깃든 이현성의 얼굴이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주변의 인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지혜를 비롯한 몇몇 일행들도 인파 속에 끼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한곳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있었다. 허공에는 일그러진 공간의 흔적이 사그라지는중이었다. 
 
포탈(Portal). 
 
나와 다른 일행들이 들어왔던 통로. 
왜 저게 열린 거지? 
설마 시나리오가 종료된 건가? 
 
“한국 측의 2차 투입자가 나타났습니다.” 
 
2차 투입자? 이제와서?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2차 투입이 너무 늦는 감이 있긴 했다. 
보통 1차 투입 후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2차 투입이 시작되는데, 이번에는 시나리오가 끝나도록 인원 보충이 없었다. 순식간에 3차까지 투입된 일본과는 무척 비교되는 상황이었다. 
나와 이현성은 인파를 헤치고 포탈의 발생지로 다가갔다. 
 
“아저씨, 이쪽이야!” 
 
이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하자, 그곳에는 포탈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있었다. 온몸에 화상을 입은 듯, 그의 전신은 숯검댕이 된 상태였다. 
 
“으어······.” 
 
남자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 
 
“정민섭 씨? 이게 대체······.” 
 
정민섭. 그는 내가 <선지자들>과 싸울 때 내 편을 들어 주었던 극소수의 ‘하차자’ 중 하나였다. 왕들의 전쟁이 끝난 후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해서 죽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왜 이런 곳에······? 
뒤늦게 나타난 의선 이설화가 정민섭의 맥을 짚으며 치료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마지막 순간, 눈이 마주친 정민섭이 나를 향해 중얼거렸다. 
 
“도, 돌아오시면······ 안······됩······.” 
 
그게 정민섭의 마지막 말이었다. 
 
 
* 
 
 
[당신은 ‘피스 랜드’의 평화를 지켜냈습니다.] 
 
큐빅처럼 빛나는 거대한 문자열이 허공에서 빛나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축제 분위기였지만, 일행들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이지혜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아직 시나리오가 완전히 종료된 상황이 아니었으니 추가 인원이 파견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추가 인원이, 처음부터 부상을 당한 채로 나타나다니. 
 
“혹시 일본에서도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까?” 
 
이현성의 질문에 아스카 렌이 고개를 저었다. 
 
“혹시 포탈을 건너는 중 뭔가에 습격당했다거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 않을까요?” 
 
물론 포탈 안에도 가끔 차원종들이 살고 있는 경우가 있긴 했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 이 시나리오에서는 아니었다. 
이어서 이지혜가 의견을 냈다. 
 
“그럼 남은 사람들끼리 싸우고 있는 거 아냐?” 
 
설마 싶긴 하지만, 역시 그쪽이 가장 현실적인 추측으로 보인다. 
아스카 렌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한국 쪽에는 [절대 왕좌]가 없다고 하셨죠?” 
“네.” 
“그러면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네요.” 
 
이제 일본도 같은 처지가 되긴 했지만, [절대 왕좌]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이 보장되지 않는 국가에서는 주도 그룹이 바뀌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내가 아는 ‘멸살법’에서도 몇 번인가 그런 일이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조금 의외였다. 
아직 시나리오 초반인데다, 소외된 자들이 뭉쳐봤자 결국 소외된 전력에 불과하다. 게다가 서울엔 대비책도 마련해 놓았다. 유상아와 정희원, 거기다가 방랑자들의 왕인 내 어머니까지. 
적어도 그들을 압살할 만한 전력이 갖춰지지 않은 이상, 새로운 주도 그룹이 나타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행들이 눈빛이 불안해졌다. 
 
“설마······ 아니겠죠?” 
 
예정된 2차 투입자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고, 정민섭만이 빈사 상태로 이곳에 왔다. 게다가 ‘돌아오지 말라’는 메시지까지. 
시기상으로 몇 가지 짐작 가는 것들이 있긴 했지만······. 

“확실한 건 가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언제 나타난 것일까. 유중혁이 바로 곁에 와 있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습니다. 일단 돌아가서 확인해 보죠.” 
 
시나리오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주요 공헌자를 위한 추가 보상이 도착했습니다.] 
[주요 공헌자 : 김독자, 유중혁] 
 
마침내 메인 시나리오 추가 보상이 도착한 것이다. 
 
[보상 내역을 확인하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상 목록> 
 
1. 낭월섭선(浪月摺扇) (SSS급) 
2. 청룡검 (SSS급) 
3. 마도왕의 팔찌 (SS급) 
4. A급 스킬 중 하나 택일 
 
목록은 총 넷. 
과연, 시나리오가 난이도가 높아서인지 보상 목록은 상당했다. 
먼저 ‘낭월섭선’이나 ‘청룡검’ 같은 보구는 꾸준히 강화 작업을 거치다 보면 언젠가 성유물에 준하는 힘을 보이는 아이템들. 가지고 있어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그리고 마도왕의 팔찌. 
이건 마도계 귀환자들의 초·중급 마법을 방어해낼 수 있는 좋은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이번 시나리오에서 ‘초체검’을 얻은 내게 앞의 두 아이템은 그다지 메리트가 없었고, 마도왕의 팔찌는 탐나긴 하지만 당분간 마도계 귀환자를 만날 일이 없는 한 효용 가치가 떨어졌다. 
그러니 처음부터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4번을 택하겠다.” 
 
눈앞에 스킬들의 목록이 떠올랐다. 
먼젓번의 보상 스킬 목록보다 등급이 올라간 까닭인지, 주로 나타난 것은 무림 계통의 스킬들이었다. 
 
만상귀일신공(萬象歸一神功) 
소양검(少陽劍) 
태을미리장(太乙迷離掌) 
······. 
 
소림의 절예(絶藝)나 공동(崆峒)의 무공도 보였고,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 같은 화산의 유명한 무공도 있었다. 하나하나가 탐나는 스킬들이었지만, 선택할 수 있는 게 하나뿐이기에 신중해야 했다. 
지난번에도 언급했지만, 스킬의 등급과는 무관하게 입수 난이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것들이 있다. 무림의 무공들은 언젠가 또 입수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 선택을 놓치면 다시는 못 얻는 스킬들이 있는 것이다. 
가령, 이곳 [피스 랜드]에서만 얻을 수 있는 한정판 ‘A급 스킬’ 같은 것. 
 
“A급 스킬 소형화(小形化)를 선택하겠다.” 
 
내 선택에 흥미진진한 눈길을 보내던 이지혜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 미쳤어?” 
“왜.” 
“아니 왜 그딴 걸 선택해! 안 그래도 작아져서 스트레스 받아 죽겠는데······ 차라리 청룡검 선택해서 날 줘!” 
 
이현성도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애들이야 또 자기들끼리 장난친다고 별 관심도 없었고. 
반면 소인종들은 묘하게 감동한 얼굴들이었다. 
아마 내가 자기들을 기억하기 위해 이 스킬을 선택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자자, 보상 수령도 끝나셨으니 이제 돌아갈 시간입니다. 그간 많이 정들었을 텐데, 작별 인사들 하시죠.] 
 
도깨비의 알림과 함께, 허공에서 거대한 포탈이 등장했다. 
길레미엄을 위시한 소인종들이 옹기종기 우리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감사합니다. 꼭 기억하겠습니다.” 
 
떠나는 우리를 향해, 소인들이 배웅의 노래를 불렀다. 
아스카 렌이 눈시울을 붉혔다. 
일본인 그룹들도 하나둘 포탈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 일행은 마지막 차례였다. 소인종들의 노래는 계속되었다. 
계속 듣다 보니, 어쩐지 가사를 이해할 것도 같았다. 
 
피스 랜드를 구해낸 영웅 
그의 이름 
도쿠자도 도게자도 아닌 독자 
오오 독자라네 
 
······제기랄, 뭐 저딴 가사를 붙인 거지? 
 
[‘피스 랜드’의 존재들이 당신의 전설을 연호합니다.] 
[해당 업적은 성좌에 등극한 후 열람할 수 있습니다.] 
 
내성의 종탑 위에는 내게 무공을 가르쳤던 키리오스의 모습도 보였다. 시나리오가 끝나자마자 내게 달려와 온갖 협박을 늘어놓을 줄 알았던 그는 조용히 이쪽을 보기만 할 뿐이었다. 
 
“당신에게 고마워하는 것 같아요.” 
“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아스카 렌이 웃으며 말했다. 
창조주의 자격은 잃었다 해도, 작가 또한 여전히 한 사람의 독자인 것일지도 모른다. 
 
“또 살아서 만나요, 한국 여러분.” 
 
꾸벅 고개를 숙인 아스카 렌이 포탈 너머로 사라지고, 우리도 포탈로 진입했다. 시야가 다시금 휘청이더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지면에 발이 닿아 있었다. 한 번 겪어본 일이라 그런지 현기증은 심하지 않았다. 
 
[메인 시나리오가 종료되었습니다.] 
 
간만에 보는 서울의 광경. 
주변을 돌아보니, 나와 함께 온 사람은 유중혁뿐이었다. 
같은 포탈로 들어왔어도, 출구는 다른 모양이었다. 
그렇다 쳐도 왜 하필 이 녀석이랑 같이······. 
 
“김독자, 피해라.” 
 
유중혁의 말과 동시에, 내가 디디고 있던 바닥이 폭발했다. 
 
콰아아아앙! 
 
곳곳에서 날아든 마력탄이 우리가 있던 자리를 엉망으로 헤집고 있었다. 
 
“패왕이다!” 
“당황하지 마! 쏴라!” 
“놈들은 어차피 같은 편이 아냐! 패왕은 내버려두고 불살의 왕을 노려!” 
 
콰앙! 콰아아앙! 
 
어떤 의미에서는 예상했던 기습이었다. 
뿌연 먼지구름 사이로 수십의 인파들이 몰려와 있었다. 
언뜻 봐도 상당한 수준의 장비와 배후성을 갖춘 녀석들. 
페르세포네가 말한 다른 ‘성운’ 소속의 화신들일까?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놈은 사람을 못 죽인다! 불살의 패널티가 걸려 있어!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해치워!” 
“포인트를 모아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재생의 때를 놓치지 말고 죽여야 한다!” 
 
······언제 그런 정보까지 빠져나갔지? 
설마 ‘불살의 왕’에 대한 정보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잠시 후, 먼지 속에서 이들을 이끄는 대장격의 녀석들이 나타났다. 
 
“김독자! 천천히 무기를 넣고 이쪽으로 와라!” 
 
나는 순순히 그 말대로 했다. 가까이서 보니, 녀석들의 무장 형태가 확실하게 보였다. 장비들이 죄다 A급을 호가하고 있는데다, 개개인의 종합 능력치도 굉장히 출중하다. 
어머니가 이끌던 방랑자 세력에 전혀 밀리지 않을 전력. 
대체 어디서 이런 놈들이 나타난 거지? 
끝났다는 듯, 대장격으로 보이는 녀석이 이쪽을 향해 웃고 있었다. 
나도 그에 맞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내 정보들은 어디서 주워 들은 거야?” 
“그건 알아서 뭐하게?” 
“하나 잘못된 게 있어서 알려주려고.” 
“뭐?” 
 
[‘신념의 칼날’을 발동합니다!] 
 
스가가각! 
 
순식간에 뽑아 올린 ‘신념의 칼날’이 대장격으로 보이는 사내를 비롯해 주변의 전력들을 일거에 베어버렸다. 
 
 
 
 
 
 
< Episode 26. 시나리오 파괴자 (3) > 끝

< Episode 26. 시나리오 파괴자 (4) >
 
 
 
 
 
“으, 으헉?” 
 
제일 앞에 있던 사내들의 목이 그대로 떨어지자, 주변의 인원들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죽였어! 저놈이 죽였다고!” 
“불살의 왕이라며? 말이랑 다르잖아!!” 
 
당황한 놈들이 다급하게 일제히 냉병기를 꺼내 들었다. 
이런 잔챙이들 잡는 데야 특별한 기술도 필요 없다. 나는 그대로 ‘신념의 칼날’을 전개해 달려드는 녀석들을 베었다. 
 
“으아아악!” 
 
포위한 녀석들을 깔끔하게 죽여 없앨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한 녀석이 반쯤 베이다 말았는지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나는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녀석에게 칼을 꽂았다. 망설임 없이. 
 
“이, 이 정도 실력이라는 말은 못 들었는데······?” 
“도망쳐!” 
 
그동안은 누가 공격해오든, 살의를 품든 가능하면 죽이지 않으려고 했다. 
물론 ‘불살의 왕’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지만, 그런 행동을 반복하다 보니 나 스스로 살인을 자제해온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르다.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약점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 약점은, 앞으로 무수히 나타날 잔꾀 많은 하이에나 녀석들에게 약점이 되겠지. 
일단 결심하자 손씀에 망설임은 없었다. 
나머지 하이에나들이 순식간에 핏물 속에 쓰러졌다. 
하나만 남겨두고. 
 
“느리군.” 
 
들려오는 소리에 보니, 어느새 유중혁은 칼을 거두고 있었다. 
나보다 훨씬 많은 숫자를 죽인 녀석의 표정에는 별다른 감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으, 으으, 분명 패왕과는 협력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하나 남은 사내가 손발을 떨며 뒷걸음질쳤다. 
 
“누가 이런 짓을 시켰지?” 
“그, 그건······.” 
 
[등장인물 ‘설인구’가 깊은 고뇌에 빠집니다.] 
 
다음 순간 사내의 표정이 홱 변하더니, 갑자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이럴 리가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승산이 아예 없는 상황에서 죽을 길로 달려든다고? 
선뜩한 감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때 사내가 고함쳤다. 

“인류 해방을 위해!” 
 
무슨 순교자라도 되는 듯한 어설픈 눈빛. 
······인류해방? 
 
서걱! 
 
유중혁의 검이 움직이는 순간 사내의 목이 떨어졌다. 
 
“뭘 멍청하게 보고 있는 거냐?” 
 
퉁명스러운 유중혁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뭔가 이상하단 생각 안 드냐?” 
“드물게 충성심이 강한 놈이군.” 
“너도 알겠지만, 인간이란 게 그렇게 쉽게 충성하는 동물이 아냐. 더군다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네가 시간을 끄는 사이 숨어 있던 한 놈이 도망쳤다.” 
 
정말이지 대화가 안 통하는 자식이다. 
일단 우리는 도망갔다는 놈의 흔적을 쫓기로 했다. 
 
“······근데 넌 계속 나랑 같이 다닐 거냐?” 
“······.” 
“혹시 나 때리려고 기회 보는 거 아니지?” 
 
유중혁은 특유의 무시무시한 눈길로 나를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었군. 알려줘서 고맙다.” 
“······그냥 계속 잊어버린 상태로 있어주면 내가 더 고맙겠는데.” 
 
한숨을 돌리고 주변 일대를 확인하니 이곳은 5호선의 까치산 인근이었다. 
유중혁이 먼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이상하군. 서울 돔에선 사냥 시나리오가 진행중이었어야 하는데.” 
“모르지. 그 사냥이 그 ‘사냥’이 아닐지도.” 
 
까치산을 비롯해 우장산, 신정, 목동으로 향하는 모든 길목은 화신들이 흘린 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가는 거리마다 사람들의 시체가 보였다. 이전에도 시체야 즐비했지만, 이번에는 살해 형태가 문제였다. 
그 상흔들을 바라보던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짓이다.” 
 
괴수 사냥 시나리오가 진행되었다면, 시신의 몸에 난 상흔들은 전부 괴수의 이빨 자국이나 발톱 자국이었어야 했다. 그런데 시신들은 명백히 날카로운 병기나 마력탄에 맞아 죽었다. 
즉, 이곳에서 시나리오와는 무관하게 싸움이 벌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달아난 남자를 발견했다. 
 
“저기 있군.” 
 
하지만 우리가 채 접근하기도 전에, 남자는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의해 목이 꿰뚫려 죽었다. 
 
휘이익, 퍼억! 
 
또 새로운 적이 나타났나 싶어 칼을 뽑아드는데, 뜻밖에도 나타난 패거리의 모습이 익숙했다. 화랑의 갑옷. 그들은 죽은 사내를 둘러싸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틀림없습니다. 구원교도의 잔당입니다.” 
“처리하세요.”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내가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잠깐만요!” 
 
그러자 여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고된 전투로 인해 지친 얼굴. 
 
“김독자 씨······?” 
 
그녀는 미희왕 민지원이었다. 
 
 
* 
 
 
그녀에게, 우리는 예상치도 못한 소식들을 연달아 들었다. 
 
“······왕 파벌이 해체됐다고요?” 
“제일 먼저 미륵왕이 당했고, 그 다음에는 방랑자들의 세력이 당했어요.” 
 
나는 깜짝 놀랐다. 
잠깐이지만, 귀 뒤가 강하게 당겨오며 현기증이 이는 느낌이었다. 
 
“설마 방랑자들의 왕이 죽었습니까?” 
“생사는 몰라요. 지금은 행방불명 상태거든요. 중립의 왕 전일도 같은 경우는 아예 그놈들 편에 붙어버렸어요.” 
 
그 ‘중립의 왕’이라면 확실히 가능한 이야기다. 
때로 ‘중립’이란 가장 비겁한 자들을 일컫는 말이니까.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어머니가 당했다면, 정희원이나 유상아라고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다. 대체 어떤 놈들이지? 
 
“혹시 전에 봤던 그 여의도 세력인가요?” 
“아뇨, 신진 세력이에요. 스스로를 ‘구원교’라 일컫는 놈들······ 여의도고 뭐고 지금 죄다 그놈들 손에 넘어갔어요.” 
 
······구원교? 
물론 나는 그 이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구원교’는 원작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단체니까.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본래 ‘구원교’가 등장하는 것은 최소 열 번째 시나리오, 즉 서울 해방 시나리오가 종료된 이후였기 때문이다. 
 
“‘구원교’는 여러분이 떠난 날 갑자기 나타났어요. ‘인류를 시나리오에서 해방시키겠다’면서······ 자기들 뜻을 거스르는 세력들은 망설임 없이 제거하고 있어요.” 
 
유중혁이 물었다. 
 
“그런 세력이 어디에 숨어 있었지? 서울 안의 거대 세력은 여섯 번째 시나리오가 시작될 때 모두 집결했을 텐데.” 
“······서울 안에 있었던 자들이 아니에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우리가 향한 터미널 쪽에서 빛들이 쏟아졌다. 
 
슈우우우우― 
 
허공에서 떨어지는 빛줄기는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마치 하늘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뿌리듯이, 빛줄기와 함께 소환되는 인간들. 반 정도는 아직도 제정신을 못 차리는 듯했지만, 나머지 절반은 굉장히 또렷한 눈빛들이었다. 
그리고 메시지가 들려왔다. 
 
[신규 시나리오 지대에 입장하였습니다!] 
[현재 서울 돔에서는 일곱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진행 중입니다.] 
 
광장에 소환된 인파는 무려 백여 명을 넘어섰다. 
다들 전투용 아이템이 아니라 캐주얼한 생활복을 걸치고 있었다. 
유중혁이 중얼거렸다. 
 
“벌써 신규 인원이 투입될 시간이었군.” 
 
현재 세계적으로 ‘메인 시나리오’가 진행중인 곳은 오직 세계 각국의 수도 뿐이었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진행하다 보면 지나치게 많은 화신들이 소진되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관리국은 내부 규정에 따라 일정한 양의 인간을 추가로 소환한다. 대부분 해당 국가의 전역에서 무작위적으로 소환된 사람들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으, 으으······ 으어어······.” 
 
대부분은 공포에 질려 있었지만, 상당수의 화신들은 벌써부터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꼴을 보아하니, 아마 저들은 막 ‘첫 번째 시나리오’를 겪고 들어온 듯했다. 
유중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구원교’도 저들처럼 소환된 녀석들이었나?” 
“그래요.” 
“말이 안 되는군. 소환된 지 얼마 안 되는 녀석들이 기존의 화신들을 이길 수 있을리 없다.” 
 
유중혁의 말은 맞았다. 
물론 근래 소환자들은 밸런스 조절을 위해 내가 받았던 보상들보다 더 좋은 것들을 받으며 출발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기존의 화신들을 이길 수 없다. 
민지원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구원교주’는 처음부터 강했어요.” 
 
부르르 떨리는 그녀의 어깨는, 진짜 공포를 맛 본 사람의 그것이었다. 
 
“패왕, 당신이 강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 자와는 절대 싸우지 마세요. 강함도, 지략도, 이미 그 자는 인간을 초월했어요. 인간이 아니라, 마치 다른 생물을 보는 듯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사이에 도깨비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자, 여러분들. 당황하지 마시고, 진정하고 여길 보세요.] 
 
신규 화신들이 말 잘듣는 아이들처럼 도깨비에게 주목했다. 
 
[당장 소환된 여러분들은 어미를 잃은 병아리 같은 상태에요. 물론 벌써 좋은 배후를 선택한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것만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들 계시겠죠? 그러니 여러분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그룹’을 찾아야만 해요. 당당한 한 명의 화신이 될 때까지, 여러분을 지켜줄 어미를.] 
 
그때, 화신들 중 몇몇이 소리를 질렀다. 
 
“난 또 뭔가 했네. 그런 정보도 모르고 들어온 줄 알아?” 
“다 말했으면 이제 꺼져!” 
 
도깨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신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지자들>에 관련된 사건도 있었고, [인터넷] 능력을 가진 화신들에 의해서 내부의 정보도 제법 풀렸을 터. 
아마 저들 중 다수는 이미 예습을 하고 투입된 상태겠지. 
 
“패왕! 패왕 옆에 붙어야 해!” 
“맞아! 화신들 중 최강은 패왕이라 그랬다고!” 
 
스스로 죽을 길을 찾아가다니, 불쌍한 놈들이다. 
부디 명복을 빈다. 
 
“미희왕이 인자하다고 했어.” 
“인자하면 뭐해. 약하잖아.” 
“엄청 예쁘대.” 
“······일단 한번 가볼까?” 
 
······그래, 그쪽은 좀 나을지도 모르겠네. 
반면 좀 신중한 녀석들도 있었다. 
 
“멍청한 놈들. 진짜 실세는 패왕도 미희왕도 아냐.” 
 
어둠침침한 눈빛을 번뜩이며 모인 몇몇 녀석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말살의 왕인가 불사의 왕인가 하는 녀석이 최고랬어.” 
“불사의 왕?” 
“죽여도 죽지 않는 왕이라던데.” 
“헐. 대박이네.” 
“사실 패왕도 미희왕도 전부 그놈 따까리란 소문이 있다고. 쫓아다니는 여자도 엄청 많다던데?” 
 
어······. 
그거 혹시? 
 
“진짜? 그놈 누군데? 왕 이름이 뭐야?” 
“이름은 잘 모르겠고······.” 
“젠장, 그럼 어떻게 찾아?” 
“제일 못 생긴 왕을 찾으면 된다고 들었어.” 
 
문득 시선이 느껴져서 흘낏 옆을 보니 유중혁이 가만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뭘 봐 인마. 
 
“아냐, 최근 대세는······.” 
 
그 사이에도 화신들의 대화는 이어졌다. 
어떤 왕이 좋냐느니, 누구 밑으로 들어가야 하냐느니······. 
기껏 [절대 왕좌]를 없애놨더니 하는 얘기가 저런 것들이라니 허탈한 기분이다. 
그때, 멀리서 뿔나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민지원이 흠칫 몸을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도망가야 해요.” 
 
민지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람을 타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쌍한 중생들이 높은 존재들의 시나리오에 놀아나고 있구나.” 
 
마치 공간 전체가 울리는 듯 광대한 울림. 
거대한 코끼리를 닮은 괴수종을 타고 나타난 자들이었다. 
수행이라도 하는 중인 듯, 구원교도들이 코끼리 위에서 가부좌를 튼 채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행진만으로도 기이한 그 정경에 모든 화신들이 압도당한 채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너희들을 구원하기 위해 왔노라!” 
 
구원교의 등장이었다. 
헌데, 무리의 중심을 보던 유중혁의 표정이 이상했다. 
 
“설마 이번 생까지 쫓아올 줄은 몰랐군.”
 
 
 
 
 
< Episode 26. 시나리오 파괴자 (4) > 끝

< Episode 26. 시나리오 파괴자 (5) >
 
 
 
 
 
유중혁의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아는 놈들이야?” 
“한 놈은.” 
 
유중혁이 구원교를 알고 있다? 
하긴, 2회차에도 이 녀석들을 만나긴 했을 테니까. 
그리고 구원교라면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원작에 따르면, 구원교는 구원(救援)이라는 단어가 갖는 종교적 상투성을 완전히 벗어던진 집단이었다. 
 
「“내세에 구원은 없다.”」 
 
구원교의 첫 설법은, 그것으로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이야기이며, 우리가 해방시켜야 할 것은 바로 ‘오늘’이다.”」 
 
얼핏 들으면 그들의 교리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중요시하라. 
멸망이 오기 전에도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였다. 
 
구원교 무리는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며 거대한 세력을 이끌고 당도했다. 거친 울음을 토하는 코끼리들은 모두 7급 괴수종인 [사막 가시 코끼리]. 저들 중에도 ‘길들이기’가 가능한 녀석이 있는 것이다. 
 
“오, 오오······.” 
“구원교다!” 
 
그 화려한 등장에 화신들이 환호를 보냈다. 
나는 조금 긴장했다. 
한참 뒤에야 나올 구원교가 벌써 나타났다. 
그렇다는 것은, 누군가가 내가 아는 미래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존재가. 
선두에 위치한 코끼리 위, 가마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화신들이여. 구원교로 오라. 우리가 너희를 시나리오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다.” 
 
그 말에 선두의 구원교도들이 화신들을 향해 품을 벌렸다. 쭈뼛대던 화신들 몇이 앞으로 나섰다. 
 
“······시나리오 해방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다. 너희에게 시나리오에 능멸당하지 않을 자유를 주겠다.” 
 
여전히 알 듯 모를 듯한 말이었지만, 화신들을 유혹하기엔 적절한 단어들이었다. 
해방이라든가, 자유라든가. 
준비된 화신들도 있었지만, 이곳에 강제로 투입된 대개의 화신들에게 그것은 달콤한 말들이었다. 
 
“구, 구원교에 들어가면 강해질 수 있습니까?” 
 
벌써 넘어간 화신들이 있는가 하면, 신중한 화신들도 있었다. 
‘구원’이라는 막연한 말보다는 당장의 무력을 믿는 자들. 
 
“강함이라······.” 
 
코끼리 위의 가마 속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목소리에 깃든 현기 때문인지 성별이 분간되지 않았다. 
 
“‘강함’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시선이 집중되자, 얼굴이 붉어진 남자가 말을 더듬었다. 
 
“히, 힘이 세거나, 그러니까······ 강한 스킬을 갖거나! 그런 거 말하는 거 아닙니까?” 
“강한 힘과 강한 스킬이라······ 이런 거 말이냐?” 
 
가마에서 서서히 뻗어 나온 마력이 거대한 손바닥의 형태를 이루었다. 
마력 실체화. 
웬만큼 수련한 귀환자나 쓸 수 있는 저 기술이, 한낱 시나리오의 화신에 의해 구현되고 있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손바닥’을 향해 반감을 드러냅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거대한 손바닥이, 하늘을 덮으며 사내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우, 우와아아악!” 
 
압도적인 마력의 향연에 모두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손바닥이 화신들을 덮는 순간, 가공할 바람과 함께 손바닥의 형상은 사라졌다. 대신, 화신들을 감싸는 따스하고 온화한 기류만이 남았다. 
 
“덧없는 것을 추구하는구나. 강함과 약함은 모두 이야기가 만든 허상일 뿐인 것을.” 
 
가마의 휘장이 걷히며 허공으로 뭔가가 떠올랐다. 
마치 환한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전신에서 빛을 내뿜는 존재. 
신이 강림하듯, 빛은 바닥에 가뿐히 착지했다. 
그제야 나도 깨닫는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내가 아는 그 ‘구원 교주’가 벌써 시나리오에 들어왔을 줄이야. 
강함을 부르짖던 화신이 주춤거리면서도 입을 열었다. 
 
“무, 무슨 개소리를······ 그래서 당신 밑에 들어가면 강해질 수 있는 거냐고!” 
 
인자한 웃음 속에서 구원교주가 말했다.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의, 의미가 없다니?” 
“시간의 더미에 갇힌 불쌍한 중생아. 너는 지금 이야기에 속고 있는 것이다.” 
 
턱, 하고 구원교주의 손이 화신의 이마에 가 닿았다. 
 
“말해 보아라. 누가 너에게 ‘강함’을 부추겼느냐? 어째서 그리 강해지고 싶어하는 것이냐?” 
 
마치 홀리기라도 한 듯,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 그건······ 가, 강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고······.” 
“살아남는다는 건 무엇이냐.” 
“살아남는 건······ 살아나는 거지! 그래서 또 강해져서, 다시 살아남고······.” 
 
사고가 정지하기라도 한 듯, 바보 같은 돌림 노래.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가장 정직한 대답이었다. 
 
“그것이 네 삶이냐?” 
“무, 무슨······?” 
“온종일 강해지기 위해 살아가야 한다면, 너의 ‘삶’이란 대체 어디 있는 것이지?” 
 
마치 알아서는 안 되는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화신의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내 삶은······ 어?” 
 
사내의 눈동자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내가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인간은 불가해한 감정과 맞닥뜨리면 강제로 해답의 아귀를 맞추려 든다. 모두가 압도된 듯한 고양감 속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저 상황을 해결해주길 바라는 것처럼. 
이윽고 구원교주가 사내의 눈물을 닦아 주었을 때, 몇몇 사람들이 탄식을 터뜨렸다. 
 
“그것이 바로 이야기의 함정이다.” 
 
허공을 올려다보자, 도깨비들이 재미있다는 듯 그 말을 듣고 있는 것이 보였다. 구원교주가 말했다. 
 
“미래에 잡아먹히지 마라.” 
 
그 한 마디의 선언이, 모든 화신의 가슴에 쐐기로 박히고 있었다. 
 
“언젠가 찾아올 내세의 구원에 속지도 마라.” 
 
신규 시나리오로 진입한 모든 화신들이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 말을 이해했든 이해하지 못했든, 이제 그것은 하나의 울림이 되어 모두의 가슴 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구원교주는 계속해서 말했다. 
 
“구원은 지금 바로 여기에 있고, 네가 있어야 할 곳도 이곳이다.” 
 
지금을 살고 현재를 지키는 것. 
미래에 먹히지 않고 인간의 긍지를 되찾는 것. 
 
“바로 이곳에서 투쟁하라! 그래서 새로운 이야기로 자신을 남겨라! 그것만이 이 ‘시나리오’에서 해방 될 길이다!” 
 
듣기로는 아름다운 사상이었다. 
그걸 말하는 게 ‘구원교주’가 아니었더라면 그랬을 거란 소리다. 
나는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유중혁.” 
 
마침 유중혁도 칼을 뽑는 중이었다. 
그의 얼굴에 사나운 적의가 번지고 있었다. 
 
“거창한 헛소리로 자살 특공대를 양성하는 방식은 여전하군.” 
 
유중혁의 말에, 구원교주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유중혁이 말을 이었다. 
 
“적당히 하고 꺼지는 게 좋을거다, 구원교주.” 
“······너는?” 
 
순간 광대한 기파가 주변을 잠식한다 싶더니, 어느새 허공에 붕 뜬 구원교주가 이쪽을 향해 천천히 날아오기 시작했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하늘하늘한 가그라(Gagra)가 선녀옷처럼 흩날렸다. 구원교주가 말했다. 
 
“유중혁?” 
 
왜일까. 
구원교주의 아름다운 얼굴에 새하얀 미소가 번졌다. 
 
“유중혁!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 
 
이제까지 어떤 화신을 만났을 때보다도 강한 경호성이 머릿속에 울렸다. 
원작에 따르면 본래 저 인물이 등장하는 건 한참이나 뒤의 얘기다. 
그렇기에, 나는 저 자에 관해 아무런 대비도 해두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는 곧바로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이 발동합니다!] 
[해당 인물의 관련 정보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이 ‘요약 일람’으로 변환됩니다.]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해당 인물의 관련 정보가 여전히 많습니다. ‘등장인물 요약 일람’이 다시 한 번 요약을 시도합니다.] 
[정보 요약에 실패하였습니다.] 
[해당 인물의 관련 정보는 요약 일람이 불가능합니다.]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정보 요약이 불가능하다고?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해당 인물의 ‘첫 번째 특성’만을 일람하게끔 설정을 바꾸었다. 
 
[일람 설정이 변경되었습니다.] 
 
+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니르바나 뫼비우스 
특성 : 환생자(還生者) (전설) 
 
+ 
 
······정보를 확인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빌어먹을, 역시 이 녀석이 맞았구나.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번째 방법. 
눈앞의 인물은, 그 세 번째 방법 ‘그 자체’인 존재였다. 
 
환생자 니르바나.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자. 
 
“유중혁!” 
 
기쁨에 겨워 외치는 목소리. 
다가오는 놈의 모습을 보며, 손바닥이 긴장감에 젖어갔다. 
저 녀석의 사고 방식은 보통의 인간과는 다르다. 
아무리 내가 ‘멸살법’을 읽었어도, 놈을 이용할 수 있는 범주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자신의 품을 활짝 벌린 니르바나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유중혁! 나와 하나가 되어라!” 
 
순간, 놈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감이 왔다. 
 
 
* 
 
 
처음 ‘이 세계’에 눈을 떴던 순간을, 니르바나는 똑똑히 기억했다. 
우습게도, 그때 니르바나는 물방개였다. 

‘······.’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니르바나는 개구리에게 먹혀 죽었다. 
다음 삶에서 니르바나는 개구리로 태어났다. 
 
‘쉽지 않은 삶이겠군.’ 
 
그 삶에서, 니르바나는 방울뱀에게 먹혀 죽었다. 
다음 삶에서 니르바나는 방울뱀이 되었다. 
 
‘적어도 개구리는 먹을 수 있겠군.’ 
 
그 삶에서, 니르바나는 아나콘다에게 먹혀 죽었다. 
다음 삶에서, 니르바나는 아나콘다로 태어났다. 
 
‘모든 뱀을 먹어버리겠다.’ 
 
그 삶에서, 니르바나는 강력한 괴수종으로 진화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들에게 사냥 당할 위기에 놓였다. 보상에 눈이 먼 인간들이 그를 해치려 들었고, 니르바나는 큰 상처를 입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니르바나는 사냥꾼들을 피해 숲 속으로 은신했다. 
하지만, 결국 한 남자의 눈에 띄고 말았다. 
 
“······다친 모양이군.” 
 
왜일까. 남자는 그를 보고서도 해치지 않았다. 
남자는 그의 상처를 돌보아준 후 숲에다 그를 풀어주었다. 
니르바나는 그 선의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대신 오래도록 남자의 손길을 기억했다. 
 
그리고 다음 삶에서, 니르바나는 인간으로 태어났다. 
 
[성좌, ‘만다라의 수호자’가 당신의 삶을 지켜봅니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관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이 ‘배후성’이라 불리는 대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건 보다 나중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니르바나는 계속 인간으로 태어났다. 
 
뛰어난 농부가 되거나, 그런 농부들을 이끄는 농장주가 되었고. 
병졸이 되거나, 그런 병졸들이 존경하는 소드마스터가 되었고. 
노예가 되거나, 그런 노예들을 부리는 귀족이 되었다. 
 
수없이 많은 죽음을 거쳤고, 수없이 많은 삶을 살았다. 
수없이 많은 시나리오를 거쳤다. 
그리고 오직 자신만이, 이 우주에서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직 나만이, 모든 기억을 가지고 환생한다.’ 
 
그 사실이 그를 지독하게 외롭게 만들었다. 
외로웠기에, 그는 더 열심히 삶을 즐겼다. 
마치 다시는 살아나지 못할 것처럼. 
오직 이 번 ‘한 번’만이 전부인 것처럼 살았고. 
자신이 살아온 방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언제나 혼자서 다시 살아났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메시지가 들려왔다. 
 
[당신은 거대한 시간의 바퀴에 걸려들었습니다.] 
[당신의 윤회 회로가 시간의 바퀴에 종속됩니다.] 
[‘만다라의 수호자’가 당신의 운명을 가엾게 여깁니다.] 
[당신은 ‘제 8612 행성계’의 시나리오에 참가하였습니다.] 
 
니르바나는 한 남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유중혁.’ 
 
그는 처음으로, 자신처럼 삶을 반복하는 존재를 알게 되었다. 
비록 그 형태는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영원의 수레바퀴에 구속된 존재. 
 
‘너는 나와 같다.’ 
 
단지 그것만으로, 니르바나는 어떤 전율적인 구원을 받았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자신을 이해해 줄 유일한 존재. 
 
‘지난 생에는 실패했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구원교주는 유중혁을 향해 다가가며 외쳤다. 
 
“유중혁!” 
 
불쾌하다는 듯 물러서는 유중혁을 보며, 니르바나는 더욱 더 짙게 웃었다. 
거대한 톱니에 걸려들어 유중혁의 ‘시간’ 속에 들어섰던 그날부터, 니르바나는 오직 이날만을 기다려왔다. 
 
“유중혁! 나와 하나가 되어라!” 
“개소리말고 꺼져라. 죽여버리기 전에.” 
 
까칠한 유중혁의 태도에도 니르바나는 웃었다. 
이제는 저 앙탈 조차 귀엽게 느껴진다. 
 
‘나를 싫어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나를 원하는 것을 안다. 너는 내 힘을 필요로 한단 말이다!’ 
 
지난 번에는 녀석을 배려해주다가 일을 망쳤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니르바나는 계속해서 외쳤다. 
 
“내가 너를 도와주마! 지난 번의 실패를 잊었느냐? 오직 나만이 너를 구할 수 있다! 그 억겁의 톱니바퀴에서, 내가 너를 해방······.” 
“너 같은 놈은 필요 없다.” 
“뭐?” 
 
망연한 목소리로 되묻는 니르바나에게, 유중혁은 자신의 곁을 흘끗 바라보더니 다시금 말을 이었다. 
 
“동료는 이미 있으니까.”
 
 
 
 
 
< Episode 26. 시나리오 파괴자 (5) > 끝

< Episode 26. 시나리오 파괴자 (6) >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유중혁 이 자식이······ 지금 뭐라고 했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뒤늦게 나타나 주변을 두리번거립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낄낄 웃으며 종전의 상황을 들려줍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경악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한 번만 더 같은 대사를 읊어주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니르바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물었다. 
 
“지금 뭐라고······.”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이 삼각관계를 좋아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20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삼각관계는 빌어처먹을. 
하얗게 질려가는 니르바나의 얼굴을 보며, 나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창 작전 잘 짜고 있었는데, 제기랄. 
 
“야, 뭔 개소리야. 우리 동료 아니잖아?” 
 
뒤늦게 잡아뗐더니, 유중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딱히 네놈을 두고 한 말은 아니······.” 
 
그러나 유중혁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사태는 이미 악화되는 중이었다. 
입술을 바들바들 떨던 니르바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격정을 토했다. 
 
“어째서 내가 아니라······.” 
 
고오오오오! 
 
무시무시한 살기가 니르바나의 전신에서 방출되더니, 그의 뒤에 거대한 만다라가 떠올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몇 걸음을 물러섰다. 
유중혁 근처에 있는 인물들은 왜 죄다 ‘동료’로 인정받지 못해서 안달인 건지······. 
나라면 이깟 놈 한 트럭을 줘도 사양인데. 
 
“어째서, 내가 아니라 다른 이와 하나가 된 것이냐!” 
 
니르바나의 만다라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옸다. 
나는 황급히 유중혁을 향해 속삭였다. 
 
“야, 그냥 너도 쟤 좋다고 해. 빨리.” 
“싫다.” 
“아 왜. 야, 그냥 눈 딱 감고 한 번만······.” 
 
내 귓속말에 니르바나가 분노를 토했다. 
 
“내 앞에서 속삭이지 마라!” 
 
그러자 유중혁도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난 남자한테는 관심 없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피를 토하며 울부짖습니다.] 
[2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니르바나 또한 피를 토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남자가 아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황합니다.] 
 
“물론 여자도 아니지만!” 
 
쿠구구구구! 
 
이건 뭐 완전히 개판이군. 
니르바나의 격정에 맞춰서 점차 강해지는 마력의 파형을 보며 내가 짜증을 냈다. 
 
“뭔 뻘짓이야? 너 좋다잖아! 나중에 어떻게든 써먹을 수······.” 
“저놈은 위험하다.” 
 
제기랄, 망할 자존심은. 
예상컨대 지금 니르바나의 전투력은 최소 유중혁과 호각. 
거기에 구원교도들까지 모조리 덤빈다면 승산은 장담할 수가 없다. 
 
“잠깐만요!” 
 
결국 내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환생자는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카드. 괜히 여기서부터 대적할 필요는 없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저랑 말씀하시죠.” 
 
[등장인물 ‘니르바나 뫼비우스’가 이성을 잃은 상태입니다.] 
 
“저희는 구원교와 적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얘가 표현에 서툰 녀석이라······.” 
 
나는 일부러 유중혁의 어깨까지 두들겨 가며 쇼를 했다. 
 
“사실 저희도 교주님 밑으로 들어갈까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미래는 버리고 현재부터 살아라!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중혁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물론 저딴 교리엔 쥐뿔도 동감하지 않는다. 
<스타 스트림>의 세계에서 미래를 버리고 현재를 즐기면, 그냥 현재에서 뒈지게 된다. 그리고 나는 조금 덜 행복하더라도 더 오래 살고 싶다. 그래서 내가 자본주의의 노예였는지도 모르겠군. 
 
“······정말인가? 대답해라, 유중혁!” 
 
내 연기가 먹혔는지, 니르바나의 기세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중혁이 도와주지 않았다. 
 
“헛소리다.” 
“아니, 잠깐만요!” 
 
내가 외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니르바나가 까드득 이를 갈았다. 
 
“역시 그랬군. 사이좋게 지옥으로 떨어져라!” 
 
니르바나가 출수함과 동시에, 나는 [책갈피]를 발동했다. 
 
[현재 책갈피 스킬이 업데이트 중입니다.] 
[낡은 책갈피를 새로운 책갈피로 교체합니다.] 
[책갈피 교체 완료까지 5분 남았습니다.] 
 
뭐? 하필 지금? 
그사이 니르바나는 이미 내 코앞까지 가속해 와 있었다. 
마치 [바람의 길]이라도 사용한 것처럼 쾌속한 움직임이었다. 
 
슈우우우우! 
 
······아니, 진짜 [바람의 길]이잖아? 
뒤늦게 녀석의 전생 중에 클로노스의 이뮨타르 종족이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유중혁이 내 앞으로 끼어들었다. 
 
콰르르릉! 
 
니르바나의 주먹에 맺힌 만다라와 유중혁의 [진천패도]가 부딪치며 건물이 무너지는 듯한 폭음이 터졌다. 니르바나가 말했다. 
 
“아주 애틋한 우정이군. 동료를 먼저 생각하신다 이거지?” 
“김독자, 물러서라! 이 녀석은······!” 
“안 됐지만.” 
 
그런데 니르바나의 말이 더 빨랐다. 
아니, 말뿐만 아니라 행동도 더 빨랐다. 
 
“네 동료는 죽을 것이다.” 
 
니르바나가 뭐라 주문을 외우는 순간, 칼날을 맞댄 유중혁의 몸이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등장인물 ‘니르바나 뫼비우스’가 성흔 ‘영겁의 악몽 Lv.8’을 사용하였습니다.] 
 
나도 그 기술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유중혁에게 가장 치명적인 기술이었다. 
 
파츳, 파츠츠츳. 
 
굳어진 유중혁의 몸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고장난 깡통 로봇처럼, 유중혁의 목이 삐그덕대며 내 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를 보고 있었지만, 나를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도······망······쳐라. 
 
지금 유중혁은 앞으로 자기 자신이 만든 가장 끔찍한 트라우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것이다. 
오직 하나의 악몽만이 반복해서 재생되는, 끔찍한 기억의 감옥. 
언젠가 만났던 ‘극장 던전’의 보스 시뮬라시옹이 썼던 기술보다도 상위의 정신계 스킬이었다. 
 
“이리 오려무나, 건방진 중생아.” 
 
유중혁의 허점을 파고들 정도의 실력에 최고 수준의 정신계 스킬까지. 
믿어지지 않는 솜씨였다. 
아무리 환생자라도 개연성의 영향은 받는다. 
이 시점에 이만한 전투력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할 텐데. 
나는 니르바나의 호리호리한 근육을 노려보았다. 
 
“내 친히 너를 성불시켜 줄 터이니.” 

설마, 근접계를 버리고 정신계와 가속계에 모든 걸 투자한 건가? 
만약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지금의 니르바나는 정신력이 개복치인 유중혁에 대한 카운터 스킬만 올린 셈. 
그러니 다른 존재는 몰라도 유중혁에게는 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맞춰서 딱 스킬을 올릴 수 있었을까? 
다른 누군가가 정보라도 주지 않은 한······. 
 
“달아나요!” 
 
다가오는 니르바나를 막아선 것은 민지원과 화랑들이었다. 
유중혁을 제압할 정도의 실력자 앞에서도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빨리요! 당신마저 당하면 서울에 희망이 없어요!” 
“미희왕.” 
 
그런 민지원을 보며, 니르바나가 흡족하게 웃었다. 
 
“지난번에는 잘도 달아나더니, 이제 드디어 내 사상에 감화된 모양이구나!” 
 
이미 둘은 마주친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죽을 걸 알면서도 덤벼들 수 있다는 건 드디어 뭔갈 깨달았다는 얘기겠지? 역시 인간은 현재를 살아야 해. 현재만이 인간의 전부거든.” 
“빨리 가요! 당신 혼자로는 무리에요! 유상아 씨도, 정희원 씨도, 전부······!” 
 
미희왕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니르바나가 움직였다. 십여 명의 화랑들이 니르바나를 향해 덤벼들었지만,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니르바나는 가볍게 손을 움직여 달려드는 화랑들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고, 닿는 족족 화랑들은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놈의 [사상 감염]이 발동한 것이다. 
 
“으, 으어, 으아아아!” 
 
쓰러진 화랑들이 자신의 몸을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인세는 지옥이다!” 
 
통렬한 외침과 함께, 뒤쪽에서 구원교도들이 몰려왔다. 
 
“현재를 위해 죽어라!” 
“우리가 살아갈 곳은 오늘뿐!” 
 
격언을 협박처럼 읊는 교도들이 나와 화랑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내가 구원교도들을 향해 살수를 전개하는 사이, 니르바나는 어느새 미희왕의 이마를 짚고 있었다. 
 
“걱정마라 미희왕. 난 예쁜 생물을 좋아해.” 
“으, 으으으······.” 
“그러니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 
 
[등장인물 ‘니르바나 뫼비우스’가 ‘사상 감염 Lv.9’을 발동합니다!] 
 
백색의 아우라가 니르바나로부터 뻗어 나와 미희왕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마치 촉수라도 되는 듯, 그녀의 몸을 꿰뚫는 아우라의 줄기들. 
 
“너의 ‘현재’를 받아들여라.” 
“싫어! 싫어······!” 
 
그 줄기를 통해, 미희왕의 숨겨진 욕망들이 뭉게뭉게 흘러 나오고 있었다. 
니르바나가 그런 그녀의 욕망을 비웃었다. 
 
“동료들이 죽어 나가는 이 와중에 고급 스파에 가고 싶다고? 얼빠진 여자로군.” 
“아, 아냐. 나는······.” 
“네년은 그냥 화려한 인생을 즐기고 싶은 거야. 넌 아직 배우였던 시절을 못 잊었어. 그래서 왕이 된 거지.” 
 
니르바나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대소하고 있었다. 
 
“네 욕망을 받아들여라. 동료들이 죽어가는 이 와중에도 그런 한심한 생각이나 하고 있는 너를 인정해! 그게 너라는 인간이다. 그 욕망을 부정하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거야!” 
 
미희왕의 눈빛이 점차 탁하게 물들어 갔다. 폭력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납득시켜, 오로지 사람의 시간을 ‘현재’에만 안착시키는 스킬. 
저것이 바로 ‘구원교도’가 되는 과정인 것이다. 
빌어먹을, 책갈피는 아직······. 
 
[‘책갈피’의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됐다! 
 
[업데이트로 인해 책갈피의 사용 효율이 20% 상승합니다.] 
 
나는 [책갈피]를 가동했다. 
 
[전용 스킬, ‘바람의 길 Lv.9’이 활성화됩니다!] 
 
쏜살같이 바람을 밟아 허공을 날았다. 책갈피 효율이 올라가서 그런지, [바람의 길]의 레벨까지 상승했다. 
좋아, 이거라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황한 니르바나를 향해, 나는 그대로 ‘신념의 칼날’을 전개했다. 
 
스가가각! 
 
니르바나는 아슬아슬하게 내 칼날을 피했지만, 앞섶이 크게 베인 채 나가 떨어졌다. 나는 민지원을 부축했다. 
 
“괜찮아요?” 
“아, 아······.” 
 
저만치 물러났던 니르바나가 다시 방향을 선회하며 내쪽으로 날아왔다. 
그의 손아귀에 만다라의 형형한 빛살이 차오르는 게 보였다. 
나는 ‘신념의 칼날’을 휘둘렀다. 
 
까가가가가각! 
 
불꽃이 튀며 손아귀가 아파왔지만, 생각보다 버틸만 했다. 
환생자 니르바나는 유중혁의 [전승]과 비슷한 [계승] 스킬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살았던 과거의 삶으로부터 스킬을 계승하는 것. 
보아하니 내 예상대로 이번 생의 놈은 근접전보다는 정신계와 가속계 스킬을 집중하여 숙련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바람의 길’을 쓸 수 있지? 설마······.” 
 
위로 쳐 올리는 내 칼날을 받아낸 니르바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설마 네가 ‘중립’이 말했던 그놈인가?” 
“내가 좀 유명하지?” 
“건방진 놈!” 
 
니르바나의 수장과 ‘신념의 칼날’이 다시 한 번 격돌했다. 
그러자 놈의 만다라가 기이한 형상을 그리며 백색의 아우라를 발출했다. 
 
[등장인물 ‘니르바나 뫼비우스’가 ‘사상 감염 Lv.9’을 발동합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현재를 살아라! 네 욕망을 받아들여라!” 
 
니르바나의 몸에서 솟구친 백색의 아우라는 곧장 나를 향해 파고들었다. 
하지만 나는 아우라를 피하지 않았다. 
 
“인간은 욕망의 노예가 아냐. 욕망과 싸우는 동물이지.”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활성화 중입니다.] 
 
츠츠츠츠츳! 
 
나를 파고들던 백색의 아우라가 순식간에 녹아 없어졌다. 
 
미안하지만 네 사상은 절대로 나한테 먹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현재’는 이곳에 있지 않으니까. 
 
[‘제4의 벽’의 효과가 ‘사상 감염’의 효과를 완전히 무효화하였습니다.] 
 
나는 기동 자세를 갖추고 경악한 니르바나를 향해 돌진했다. 
 
 
 
 
 
 
< Episode 26. 시나리오 파괴자 (6) > 끝

< Episode 27. 읽을 수 없는 것 (1) >
 
 
 
 
 
 
[제4의 벽]의 반탄력에 정신 공격이 튕겨 나가고, 뒤이어 날아든 백청강기에 크고 작은 상흔을 입은 니르바나는 몹시 놀란 표정이었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딱히 무슨 수를 쓴 건 아냐. 이야기의 힘인 거지.” 
“뭐?” 
 
딱히 구원교의 교리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동의하는 게 하나 있긴 하다. 
 
“당신이 말했잖아. ‘강함과 약함은 이야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아무리 체력이 높은 전사라 해도 마법 방어 스킬이 없다면 마법사의 밥일 뿐이듯, 결국 강함과 약함이란 그 인물들이 살아온 역사에 의해 결정된다. 
 
“이번 생에 근접 스킬 안 올린 네 잘못이야. 유중혁의 약점만 노리니까 이렇게 되지.” 
 
일이 이런 식으로 풀릴 거라곤 나도 생각 못했다. 
뭔가가 니르바나의 성장 경로에 영향을 주었고, 덕분에 니르바나는 유중혁의 카운터가 되었다. 하지만 니르바나가 유중혁의 카운터가 된 까닭에, 녀석은 절대로 나에게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내 말투에서 뭔가를 읽어낸 니르바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나를 가만히 노려보더니 말했다. 
 
“네 이름을 알고 있다. 김독자.” 
“일단 통성명인가? 좋아, 니르바나 뫼비우스. 이야기할 마음이 생긴 모양이지?” 
 
허공의 만다라에서 빛이 꺼졌다. 
환생자가 괜히 환생자가 아니다. 
마치 다른 자아의 스위치가 켜지듯, 흥분했던 니르바나는 사라지고 어느새 평정심을 되찾은 니르바나가 눈앞에 있었다. 
 
“몇몇 성운들이 내게 경고했었지. 너를 조심하라고. 물론 정말로 나타날 줄은 몰랐지만.” 
 
몇몇 ‘성운’이라······. 
확실히 내가 주목을 끌기는 한 모양이다. 
 
“어떻게 그렇게 강력한 정신 방벽을 얻었지? 지금껏 내 사상에 감염되지 않은 것은 여태껏 안나 크로프트 뿐이었는데.” 
 
익숙한 이름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여자가 벌써 환생자까지 건드렸군.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확실히 안나 크로프트라면 벌써 통신체로 세계의 강자들에게 예정된 접선을 시작했을 테니까. 
세계를 구하기 이해서라면 그 여자는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것이다. 
내 표정에서 뭔가를 읽었는지, 니르바나가 말했다. 
 
“너······ 예언자를 알고 있군. 대체 뭐 하는 놈이냐? 설마 회귀자인가? 아니면······.”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이야기에 흥미를 갖습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조용히 상황을 관조합니다.] 
 
슬슬 정보 필터링도 조금씩 해금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회귀자라든가, 환생자에 관한 정보들도 성좌들의 귀에 들어가기 시작할 거고. 대성운에 소속된 눈치 빠른 윗놈들이야 벌써 알고 있겠지만. 
나를 바라보던 니르바나가 말을 이었다. 
 
“재미있는 중생이구나. 수백년이 넘는 삶을 살아온 나를 궁금하게 만들다니······.” 
“넌 말이 너무 많아. 그러니 앞으로도 유중혁을 얻긴 힘들거야.” 
“크하핫! 너를 구원교도로 받아주마.” 
 
[고행 속에 불경을 읊는 한 성좌가 당신에게 궁금증을 표합니다.] 
 
아까라면 흔쾌히 받아들였을 제안이다. 하지만. 
 
“사양하지. 날 후원하는 녀석들 중에 네 배후성을 끔찍이 싫어하는 존재가 있거든.”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니르바나 뫼비우스’의 배후성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니르바나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원숭이 왕? 왜 그가 너를 쫓아다니는 거지?” 
“거야 나도 모르지.” 
“······네가 더욱 궁금해졌다. 내 밑으로 들어와라. 유중혁과 함께.” 
“싫다니까.” 
“이 세계의 비밀이 궁금하지 않으냐? 나는 이 세계의 종말 이후에도 네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시나리오의 실패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말이다.” 
 
솔깃한 말이었다. 
내가 ‘독자’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승낙했을지도 모르겠다. 
 
“너도 나와 ‘하나’가 되는 것을 허락하마!” 
 
니르바나의 등 뒤에서, 다시 만다라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천천히 회전하는 거대한 만다라 위에, 수백 명의 얼굴들이 돋아 있었다. 고통스러운 원혼의 얼굴들이 비명을 질러댄다. 모두 니르바나와 ‘하나’가 된 인간들이었다. 
 
“닥치고 덤벼 변태 새끼야.” 
“응하지 않는다면, 강제로 가질 수밖에 없겠군.” 
 
불리한 상황에도 니르바나의 표정에는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어쨌든 상대는 ‘환생자’. 무수한 삶을 살아온 만큼 그는 나보다 훨씬 뛰어난 전투 센스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움직임은 녀석에게 읽히기 시작할 것이고, 내겐 불리한 싸움이 시작되겠지. 
 
그렇다면, 그 전에 싸움을 끝내는 것이 답이다. 
 
슈우우우! 
 
백색의 강기가 휘감긴 만다라가 내 품을 파고들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만다라의 일격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전용 스킬, ‘소형화 Lv.1’을 발동합니다!] 
[소형화의 효과로 당신의 육체가 줄어듭니다.] 
 
내 몸이 급속도로 작아지며, 일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니르바나가 웃었다. 
 
“······이런 잔재주까지?” 
 
과연 잔재주일까? 
 
[소형화의 효과로 당신의 모든 장비가 크기에 알맞게 변형됩니다.] 
[스킬 레벨이 낮아 지속 시간이 짧아집니다.] 
[소형화의 지속 가능 시간은 2분입니다.] 
 
내가 그 좋은 스킬들을 내버려두고 굳이 [소형화]를 택한 이유. 
그것은, 오직 [소형화]만이 나를 내가 아는 가장 강력한 존재로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5번 책갈피,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을 선택하겠다.” 
 
[당신의 육체 구성이 해당 등장인물과 흡사함을 확인하였습니다.] 
[해당 등장인물의 수준이 너무 높아 스킬 수준을 온전히 재현할 수 없습니다.] 
[활성화되는 스킬의 레벨이 강제로 조정됩니다.] 
 
용솟음치는 백청의 기운이 심장에 깃들었다. 하늘을 부수고 천둥을 내리치는 힘. 막강한 뇌전의 기운에 창백해져가는 니르바나의 얼굴이 보인다. 
 
“아직도 잔재주로 보이냐?” 
 
니르바나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지금 시점에서 키리오스의 힘을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용 스킬, ‘전인화(電人化) Lv.10’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츠츠츠츠츳! 
 
전신에 튀는 강렬한 뇌전과 함께, 주먹으로 번개의 구름이 모이기 시작했다. 
환생자를 이용할 수 없다면, 차라리 여기서 없애는 편이 낫다. 
나는 니르바나를 향해 주먹을 힘껏 내뻗었다. 
 
“또 인간으로 태어나길 기도하라고.” 
 
츠츠츠츠츳― 콰아아아앙! 
 
걸음마다 일대를 기화시켜버리는 뇌운이 니르바나의 옆구리에 작렬했다. 
니르바나가 끔찍한 비명을 질렀고, 화신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소형화의 레벨이 낮아 오로치를 상대할 때만큼의 위력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스킬이 스킬인 만큼 엄청난 공격력이었다. 
폭음 속에서 먼지구름이 걷혔을 때, 니르바나는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저만치 나가 떨어져 있었다. 
 
····살아있다고? 그걸 맞고? 
 
“쿠에에에에엑!” 
 
녀석의 입에서 핏덩이가 왈칵 쏟아졌다.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 같기는 했지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환생자라도 그 공격을 맞고 살아날 수는 없을 텐데. 
녀석의 신체 위로 잘근잘근 자라나는 연꽃잎이 보였다. 순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저 성흔은 개연성 때문에 못 쓸텐데? 
이 자식, 설마? 
 
“고작 이런 곳에서 내 기억을······.” 
 
까드득, 갈리는 목소리. 
연꽃잎 위로 희미하게 튀는 스파크를 보자, 놈이 어떻게 살아났는지 알 것 같았다. 
[설화 지불]. 
그 짧은 찰나, 녀석은 자신이 쌓은 설화를 대가로 배후성에게 힘을 빌린 것이다. 
 
“······나중에 다시 만나자.” 
 
녀석의 몸은 커다란 연꽃잎 속에 덮여가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향해 몸을 날렸다. 
 
츠츠츠츳― 꽈드득! 
 
내지른 주먹이 놈의 심장을 꿰뚫었지만, 니르바나는 웃고 있었다. 
마치 불가의 호세사왕(護世四王)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너는 ‘현재’를 거스른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내가 터뜨린 놈의 심장을 중심으로, 신체가 무화(無化)되더니 이내 연꽃잎으로 화하기 시작했다. 
나는 전인화에 감싸인 손을 뻗어 사라지려는 녀석의 왼팔을 붙들었다. 
 
“기다려!” 
 
꽈지지지지직! 
 
다음 순간, 니르바나는 찢어진 왼팔과 흩날리는 연꽃잎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등장인물, ‘니르바나 뫼비우스’가 성흔 ‘무소유 Lv.7’를 사용하였습니다.] 
 
무소유. 
자신의 기억 일부를 버리고 위험에서 탈출하는 성흔. 
놈은 자신의 환생 기억을 대가로 지불하여 내게서 벗어난 것이었다. 
 
“교, 교주님!” 
“교주님! 어디 가셨습니까!” 
 
당황한 구원교도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미 달아나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자신이 믿던 존재가 눈앞에서 패퇴하는 걸 봤으니, 정신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구원교도들이 물러가는 것을 보며 나는 가까스로 한숨을 놓았다. 
몸에서 연기가 나며 [소형화]와 [책갈피]가 동시에 해제되었다. 
혹사당한 근육이 너덜거리며 통증을 호소해왔다. 
니르바나를 죽이지는 못했지만, 몇 가지 수확은 있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승리에 기쁨을 감추지 못합니다.] 
[10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내 승리를 본 신규 화신들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로를 돌아보고 있었다. 
 
“구원교주가 졌어!” 
“저 화신 대체 누구야?” 
“잠깐만, 저 얼굴, 저거······!” 
 
누군가가 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가장 못생긴 왕!”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유중혁을 찾았다. 
멀리서 마비에서 풀려난 유중혁이 비틀대는 것이 보였다. 
개복치 자식, 하여간 중요할 땐 도움이 안 된다니까. 
 
“야, 괜찮냐?” 
 
유중혁은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은 채 물었다. 
 
“환생자는?” 
“달아났다.” 
“······한심하군. 놓친 건가?” 
“도와는 주고 그딴 소리 하든가.” 
 
유중혁의 표정은 심각했다. 
 
“빨리 놈을 쫓아야 한다. 놈의 목적은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게 아냐.” 
“나도 알아 인마.” 
“아는 놈이 그걸 내버려 둔 거냐? 열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기 전에 환생자를 잡지 못하면 서울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뒤늦게 정신을 차립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하고 싶어합니다.]

우리엘의 말에, 유중혁과 나는 동시에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들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간접 메시지의 한계 때문에 정확한 정황 파악은 무리였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우리엘은 정희원의 배후성이었다. 그런데 정희원에게 있어야 할 우리엘이 이곳에 왔고, 정희원과의 연락은 끊어진 상황. 
그렇다는 건······. 
 
“민지원 씨. 정희원 씨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하지만 민지원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 상태였다. 
이쪽은 안 되겠군. 
 
“유중혁, 날 지켜라.” 
“뭐?” 
 
나는 곧바로 눈을 감은 채 의식을 집중했다. 
이제 잠드는 연습도 반복하다 보니 꽤 익숙해진다. 
서서히 몸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과 함께 사방으로 어둠이 몰려왔다. 
얕은 잠에 빠져든 느낌이 드는 순간, 나는 곧바로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했다.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 
나를 찾는 목소리를. 
 
그러나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점점 불안해진다. 
떨어지면 제일 먼저 나부터 생각하라고 말해뒀는데······ 역시 문제가 생긴 건가? 
 
‘독자 씨.’ 
 
처음으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시야가 일그러지며 [3인칭 관찰자 시점]이 발동했다. 나는 다음 순간 보이는 화면에 기겁하며 신음을 흘렸다. 
 
「화르르르르륵!」 
 
화면 전체를 넘실거리는 새하얀 불길.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심판의 성흔이 세계를 불태우고 있었다. 
물어 볼 필요도 없었다. 
이건 틀림없이 정희원의 [지옥염화]다. 
다행이다. 정희원은 아직 살아 있구나. 
그런데······ 이상하다. 
이건 정희원의 시야가 아닌데? 
잠시 후, 불꽃 속에서 나타난 정희원의 이마에서 연꽃 문양이 빛나는 것이 보였다. 
 
······망할, 벌써 니르바나에게 당했군. 
 
하긴, 저 유중혁도 당했는데 정희원이 멀쩡하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겠지. 하지만 의문은 남아 있었다. 
그럼 나를 부른 건 대체 누구지? 
 
「“정희원 씨?”」 
 
순박한 군인의 목소리. 이현성이었다. 
 
「쿠구구구구!」 
 
폭음과 함께 화면이 터져 나갈 듯한 진동이 울렸다. 주변의 화신들이 육편으로 터져 나갔고, 지옥의 불길이 닿은 주변이 모조리 타올랐다. 
위치를 보니 내가 당장 도울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이대로라면 어떤 결과가 닥쳐올지 뻔했다. 
[사상 감염]에 맛이 간 정희원은 망설이지 않을 것이고, 순진한 이현성은 그녀의 칼날 앞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젠장, 어떻게 해야 하지? 
 
“커헉!” 
 
갑자기 어둠이 개며, 화면이 모조리 깨져 나갔다. 
강한 구토감과 함께 눈을 뜨자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린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그렇게 잠들면 어쩌자는 거냐?” 
 
입에서 침이 질질 흐르며 명치가 엄청나게 아파왔다. 
이 자식, 지금 나를 때려서 깨운 건가? 
 
······잠깐만, 때려? 
 
어떤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래, 그렇구나. 
정말 싫지만, 둘을 구하려면 역시 그 수 밖에 없다. 
나는 유중혁을 향해 채근했다. 
 
“야, 한 대 더 쳐봐. 엄청 세게.” 
“······뭐?”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이었나. 
그러면 역시 확실하게 말해줘야겠지. 
 
“아니, 당장 나를 죽여.”
 
 
 
 
 
< Episode 27. 읽을 수 없는 것 (1) > 끝

< Episode 27. 읽을 수 없는 것 (2) >
 
 
 
 
 
누구나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몇 가지 말들이 있다. 
이현성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다. 
가령 막 대학생이 되었던 시절, 이현성이 학부 수업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이런 것들이었다. 
 
‘여러분, 창의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생각을 하세요!’ 
‘지금 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이현성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하라는 거지?’ 
 
어려서부터 정해진 시간에 학교를 하고, 밥을 먹고, 잠에 들며 살아온 이현성에게 사회의 요구는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지금까지는 정해진 대로 잘 움직이라고 하더니, 왜 이제와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일을 강요하는 거지? 
 
창의력은 뭐고. 
남들이 안 하는 생각이란 뭐란 말인가. 
왜 갑자기 그런 걸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세계가 된 거지? 
그럼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건 뭔데? 
 
대학 생활 내내 이현성은 방황했고, 자연히 군대에 가게 되었다. 
 
‘내가 보니까 넌 천생 군대 체질이야. 간부사관 한번 지원해봐.’ 
 
만약 그때 행정관에게 그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지금 그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선택하지 않은 미래에 관해 그가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어쨌든 그는 필연처럼 군인이 되었고, 그 선택에 지금껏 후회하지 않고 살아왔다. 
사회가 어려웠고 사람이 어려웠던 그에게, 상대적으로 군대는 편했다. 
간부사관에 합격해 돌아온 이현성을 축하하며, 행정관은 이렇게 말했다. 
 
‘이 소위님. 잘 모르겠을 때는 무조건 매뉴얼 대로 하십시오. 그러면 최소한 사람들은 이 소위님께 책임을 묻지 않을 겁니다.’ 
 
건배사 대신 들었던 말이던가. 기억들은 마치 일주일 전 먹은 점심 메뉴처럼 희뿌옇다. 다만, 만약 지금 행정관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꼭 묻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행정관, 그럼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가오는 지옥염화의 불길을 보며, 이현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난 이런 경우의 매뉴얼은 가지고 있지 않단 말입니다.’ 
 
차라리 복무신조를 외칠 때가 편했다고 생각하며, 이현성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정희원 씨! 정신 차리십시오! 제발!” 
 
그러나 복무신조가 병사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듯, 그의 목소리도 정희원에겐 닿지 못했다. 
 
화르르르륵! 
 
간발의 차이로 건물 뒤로 숨자 지옥의 화염이 바닥을 뒤덮었고, 주변에 있던 화신들이 고통스럽게 불타올랐다. 
 
“끄아아아악!” 
“살려줘!” 
 
하지만 이현성은 그들 중 누구도 살릴 수 없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죽음들을 보며 이현성은 자기 안에 잠들어 있던 모든 ‘정의’가 그저 ‘매뉴얼’일 뿐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정희원의 모습이 열기에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당신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그 묵묵한 시선을 받으며, 이현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독자 씨. 이럴 땐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싸워야 하나? 
멈출 수 있을까? 
 
다가오는 정희원을 보며 이현성은 꾹 쥔 주먹을 떨었다. 이 떨림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꾸만 망설이고 있는 이 마음이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왜 자신은 이 장소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 이현성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어려운 것은 세계가 아니다. 
어려운 것은, 이현성 그 자신이었다. 
 
‘독자 씨, 제발 해답을 알려주십시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현성은 기적적인 기상악화로 훈련이 취소되길 바라는 예비군처럼 기도했다. 그런데 그때, 놀랍게도 애타게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현성 씨.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제 말 들리십니까? 
 
하지만 환청이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 보았으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없었다. 
즉, 목소리는 그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독자 씨!” 
 
이것도 혹시 적의 함정인가? 
하지만 적의 술수라 해도 믿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단 달아나면서 고민해보죠.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이현성은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나서 달렸다. 
함정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서두를 여는 사람은, 오직 그 사람 뿐이니까. 
뒤쪽에서 정희원이 쫓아오고 있었지만 이젠 두렵지 않았다. 
호흡은 빠르게 안정되었고, 머릿속은 새로운 명령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긴장한 근육이 거칠게 호흡하며 불끈거리기 시작했다. 
 
―하나는 정희원 씨를 죽이는 겁니다. 
 
“······익숙한 선택지군요.” 
 
김독자는 늘 이런 식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언제나 가장 안전하고 잔인한 해결책을 먼저 내놓는다. 
그리고 일행들 스스로, 그것을 거부하게 만든다. 

“두 번째는, 역시 이대로 도망치는 겁니까?” 
 
―······맞습니다. 
 
“그럼 늘 그랬듯 세 번째 방법으로 하겠습니다.” 
 
김독자의 해결책은 언제나 세 번째가 정답이다. 
어떤 상황이든 세 번째를 생각해 내는 사람. 그게 김독자였으니까. 
그래서 이현성은 이번에도 믿었다. 
하지만. 
 
―이현성 씨. 이번엔 세 번째가 없습니다. 
 
 
* 
 
 
물론 세 번째는 있었다. 
다만, 때를 기다려야 한다.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활성화 중입니다.] 
[‘1인칭 조연 시점’이 현재 불완전한 상태입니다.] 
 
하필이면 상대가 [지옥염화]를 쓰는 정희원이라니. 
상대가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하긴, 누구라고 달랐겠냐만은. 
 
“······왜 항상 그런 식인 겁니까!” 
 
헉헉대는 숨소리와 함께, 이현성이 외치고 있었다. 
 
화르르륵! 
 
1인칭 시점으로 지옥염화의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치 서울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 기세로, 정희원은 검을 휘둘러대고 있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내가 제시한 첫 번째와 두 번째 방법은 본질적으로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현성이 정희원을 죽이든, 아니면 달아나든. 
저대로 두면 정희원은 마력이 폭주해 사망할 것이다. 
결국, 둘 중 하나는 죽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빌어먹을 ‘니르바나’의 시나리오였다. 
 
“정희원 씨를 죽이라고요? 지금 그런 조언이나 하려고 저한테 오신 겁니까?” 
 
정희원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군일 때는 살짝 긴가민가 했는데, 적이 되니 확실히 알겠다. 
멸악의 심판자, 정희원은 강하다. 
[심판의 시간]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귀살]의 소유자다. 
거기다 우리엘의 성흔인 [지옥염화]를 무자비하게 뿌려대는 실력. 
그녀는 내가 가진 파티 멤버 중 명실공히 최강의 전력이었다. 
저렇듯 폭주해버린 정희원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은, 지금의 유중혁이라도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방법,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대체 무슨 용기였을까. 
이현성이 정희원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이현성 씨! 

“정희원 씨! 정신 차리십시오!” 
 
이현성은 정희원을 향해 달려갔다. 마치 내게 분노하듯이, 나라는 ‘매뉴얼’을 믿었던 자기 자신에게 분노하듯이, 그렇게 달려갔다. 
 
꽈아아아앙! 
 
이현성의 [태산 밀기]와 정희원의 [지옥염화]가 충돌했다. 
하지만 태산조차 밀어내는 그의 손바닥도, 대천사의 불길을 뚫기엔 무리였다. 곧, 그의 오른팔이 새하얀 빛을 뿌리며 뚝뚝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정희원 씨!” 
 
이현성의 외침은 고통스러웠고, 처절했다. 이현성은 잃어버린 오른팔을 내버려두고, 다시 왼팔을 뻗었다. 나는 다급히 외쳤다. 
 
―이현성 씨, 도망치면 둘 중 하나는 살 수 있습니다. 
 
“싫습니다.” 
 
―도망친다고 해서, 누구도 당신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겁니다. 
 
“싫습니다!” 
 
―저를 매뉴얼처럼 생각하신 거 아닙니까? 그럼 제 말을 들으십시오! 
 
“그런 매뉴얼을 기대한 게 아닙니다!” 
 
이현성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더없이 이현성 다운 대답이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모순되어 있다. 
매뉴얼을 잘 따르는 사람은 사실 누구보다도 매뉴얼을 증오한다. 창의적인 사람이 사실 누구보다도 체제에 종속되고 싶어 하듯. 
그리고 그 모순을 돌파할 때, 「설화」는 시작된다. 
 
콰아아아아! 
 
“그렇게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결과가 안 좋다고 해도. 설령, 여기서 제가 죽는다고 해도!” 
 
아무리 튼튼한 이현성이라고 해도, 신유승조차 녹여버린 [지옥염화]에 저항하는 것은 무리였다. 곧 왼팔이 녹아내렸고, 오른 다리마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현성은 저항했다. 
마치 불빛 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어떻게든 정희원에게 닿고자 했다. 
오른쪽 무릎 아래가 사라지며 비틀거리는 그를 향해, 내가 말했다. 
 
―그렇군요. 잘 하셨습니다. 
 
이현성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세 번째 방법’이니까요. 
 
세 번째 방법은, 내가 알려준다고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이현성 스스로가 결심해야 했다. 
될지 안 될지, 사실 나조차도 확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 길을 선택한 것은, 정희원을 보는 순간 이현성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희미하고 안타까운 감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매뉴얼 없이, 당신 스스로 찾아낸 방법입니다. 
 
불길 속에서 무너지며, 이현성이 웃었다. 
 
“독자 씨,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 순간 이현성의 몸 속에서 일어나는 환희를, 나는 이현성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스스로 모순을 뚫고, 죽음에 맞선 대답을 내놓은 인간만이 도달할 수 있는 감정. 
아마도 이 감각이, 니르바나가 그토록 도달하고 싶은 실존(實存)일 것이다. 니르바나가 보았다면 기가 막힐 일이었다. 그가 감염시킨 것은 정희원이었지만, 누구보다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은 바로 이현성이었으니까. 
 
―감사는 됐습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니까요. 
 
이것으로 설화의 시작은 충족되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지속을 결정하는 것은 관람객의 몫이다. 
누구보다 섬세한 시선으로 이현성을 읽고 있었던, 단 하나의 존재. 
 
―강철의 주인. 지고한 <스타 스트림>에서 가장 굳건한 존재여.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제 응답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성좌, ‘강철의 주인’이 당신의 말을 듣습니다.] 
 
성좌 ‘강철의 주인’. 
우주에서 가장 단단한 혹성인 오리하르콘의 지배자이자, 강철검제 이현성의 배후성. 
나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당신의 화신에게 기회를 주시죠. 
 
[성좌, ‘강철의 주인’이 침음합니다.] 
 
―당신의 두려움은 알고 있습니다. 섣불리 개연성을 감당하는 게 두렵겠죠. 
 
[성좌, ‘강철의 주인’이 눈을 감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주변 성운들의 눈치만 볼 겁니까? 이대로 시나리오의 종말이 올 때까지 넋 놓고 있을 겁니까? 
 
이현성은 할 만큼 했다. 
그러니, 이제 선택은 그의 배후성에게 있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화신 ‘이현성’의 용기를 인정합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그럼에도 아직 때가 아님을 말합니다.] 
 
예상은 했다. 
실제로, 아직 이현성은 각성의 때를 맞이하기엔 약하니까. 
 
[성좌, ‘강철의 주인’은 화신 ‘이현성’이 자신의 설화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강철의 설화는 단단하고 무겁다. 
그 말대로 이현성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혼자였다면 말이다. 
 
―제가 함께 감당하겠습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강철의 주인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메시지가 들려왔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 주변에서 짜릿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특성 진화를 준비합니다.] 
[해당 특성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설화’가 필요합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설화의 시련을 내립니다.] 
[설화, ‘강철의 증명’이 시작됩니다!] 
 
이현성의 몸에서 은빛의 격류가 솟아나고 있었다. 그 휘황한 광채를 보며, 나는 언젠가 내가 보았던 ‘멸살법’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누구였더라. 
등장인물 중 하나가 유중혁에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이현성 아저씨는 왜 강철검제라고 불리는 거예요? 그 아저씨는 검을 안 쓰잖아요?”」 
 
‘멸살법’의 원작에서도 이현성은 단 한 번도 검을 사용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이현성의 별명은 강철검제였다. 
 
「“이현성은 검이 필요 없어.”」 
 
까드드드득! 
 
이현성의 녹아내린 팔과 다리에서 새하얀 강철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비늘이 덮이듯, 자라난 강철은 그의 몸 전체를 덮어갔다. 
이현성의 몸은 하나의 거검(巨劍)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성흔 ‘강철화(鋼鐵化)’를 발동합니다!] 
 
그 어떤 시련과 부딪쳐도 꺾이지 않을 단 하나의 검. 
유중혁이 이곳에 있었다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 녀석이, 곧 검이니까.”」
 
 
 
 
 
< Episode 27. 읽을 수 없는 것 (2) > 끝

< Episode 27. 읽을 수 없는 것 (3) >
 
 
 
 
 
까드드득! 
 
새로 돋아난 강철의 표피. 마치 다른 종으로 거듭나듯, 이현성의 몸피는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강철화(鋼鐵化). 
 
겨우 1단계인 ‘갑주(甲冑)’가 활성화되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보통의 권능은 아니었다. 1단계를 완전히 습득한 이현성은 공필두의 무장성채보다도 단단하고, 유중혁의 진천패도를 맞고도 죽지 않는다. 
 
“사······ 살았다······.” 
 
문제는, 아직 1단계가 완전히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그게 이현성 씨가 익혀야 할 진짜 ‘성흔’입니다. 
 
금세 상황을 깨달은 이현성이 재빨리 자세를 잡으며 물러섰다. 
 
[아직 ‘강철화’가 완전하지 않습니다.] 
[해당 성흔은 설화를 이룩한 존재만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모든 배후성은 자신의 화신에게 성흔을 제공한다. 
증여의 형태로 전해지는 성흔이 있는가 하면, 까다로운 조건을 거쳐야 사용할 수 있는 성흔도 있다. 
‘강철의 주인’이 가진 ‘강철화’ 또한 그런 까다로운 성흔 중 하나였다. 
 
[‘강철의 첫 번째 증명’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이 성흔은, 성좌가 겪었던 ‘증명’의 간접 체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 
 
<강철의 증명> 
 
1. 「진정한 강철은 수만 번의 담금질 속에서 태어나리니」 
 
+ 
 
시나리오와는 다르게 불친절하게 툭 내던져진 문장. 
이현성이 혼란스럽다는 듯 물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담금질의 기본은 고열 처리 후 냉각이죠.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겁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어떤 의미에서, 정희원이 이현성의 상대가 된 것은 다행일지도 모른다. 
이현성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이계의 설화에 관심을 가집니다.] 
[성좌, ‘디펜스 마스터’가 과연 자신보다 단단한지 궁금해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초조한 기색으로 양손을 모읍니다.] 
 
성좌들의 메시지와 함께, 이글거리는 지옥불이 파랑처럼 밀려들었다. 
 
콰르르르! 
 
그새 정희원의 [지옥염화] 수치가 올라간 것인지, 화염이 만드는 해일은 더욱 깊고 사나워져 있었다. 
새하얀 불꽃에 아스팔트가 녹아 붙으며 불순물들이 섞였고, 고열에 뒤섞인 덩어리들은 파랑에 휘말리며 위협적인 흉기로 변했다. 
 
슈슈슈슛! 
 
은빛의 갑주가 순식간에 그을리며 녹아내리기 시작했고, 군데군데 튄 이물질들은 총탄처럼 갑주를 뚫고 이현성의 내부를 녹였다. 갑주가 녹는 족족 새로운 강철이 자라나 녹은 자리를 메웠지만, 그렇다고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큿······!” 
 
이현성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의 강철화가 완전했다면 [지옥염화]에도 끄떡 없었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어쨌든 [지옥염화]는 불꽃 속성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성흔. 사실 무너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이현성이 한 걸음씩 물러서며 비명을 질렀다. 
그 광경을 보는 나 역시 고통스러웠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이현성의 강철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좀 더, 조금만 더······. 
 
[온도가 기준치를 초과하였습니다!] 
 
됐다. 
 
[담금질이 시작됩니다.] 
 
강철의 기본은 담금질. 
완전한 강철의 육체를 이룰 때까지, 기준치 이상의 고열에서 버티는 것이 바로 이 설화의 핵심이었다. 
 
―참아요! 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이현성이 ‘악인’이 아니라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지옥염화]는 ‘불꽃’과 ‘신성’의 속성을 가진 성흔. 
악인 표식이 찍혀 [지옥염화]의 열기에 그대로 노출되었더라면, 이현성은 이미 한 줌의 잿물이 되었을 것이다. 
이현성이 악을 쓰는 동안, 나는 빠르게 정희원의 정보를 살폈다. 
 
[등장인물 ‘정희원’은 현재 ‘사상 감염’에 당해있습니다.] 
[등장인물 ‘정희원’은 이지를 상실한 상태입니다.] 
[등장인물 ‘정희원’의 트라우마가 완전히 개방되어 있습니다.] 
······. 
 
······개자식, 사람의 정신을 완전히 넝마로 만들어 놨군. 
 
「용서할 수 없어······.」 
 
니르바나의 [사상 감염]은 그 사람의 시간을 ‘현재’에 안착시키기 위해 해당 인물이 가진 정신의 모든 어두운 부분을 표면으로 끌어올린다. 
 
「죽여야 해.」 
 
미래가 사라진 채 낭떠러지 같은 현실과 마주한 인간은 대개 희망을 잃는다. 
현실이 끔찍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절망해 무너지고, 누군가는 무분별한 욕망을 풀어 짐승처럼 변한다. 
또 어떤 이는 분노 속에서 저항하다가 이성을 잃게 되는데, 이러한 체념이 반복되면 마지막에는 결국 위안을 찾기 위해 스스로 ‘구원교도’가 된다. 
그렇게 구원교도가 된 이는, 위대한 ‘현재’ 앞에 자신의 보잘것 없는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순교하게 되는 것이다. 
 
「남자는 모두 죽여야 해.」 
 
그녀의 트라우마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정희원의 초기 특성인 ‘웅크린 자’는 강한 정신적 쇼크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 그녀를 처음 구했던 순간을 돌이켜 보면, 그녀가 ‘남자’에 대해 강렬한 적의를 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거······ 혹시 희원 씨의 마음입니까?”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버티던 이현성이 물었다. 
 
―들리시는 겁니까? 
 
“그게, 조금······.” 
 
이현성도 ‘전지적 독자 시점’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미처 못했다. 
1인칭 상태로 몰입했기 때문일까? 
내가 이현성을 이해하는 만큼, 이현성도 내 감정을 느끼는 건가? 
이현성은 열기조차 잊은 듯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이것도 독자 씨의 능력입니까?” 
 
―예. 제가 가진 스킬입니다. 
 
여기서 거짓말을 해 봐야 좋을 게 없었기에 나는 솔직히 고백했다. 
 
―지금까지 숨겨서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이현성은 딱히 기분 나쁜 모습은 아니었다. 
 
“조금 부끄럽군요. 혹시 제 마음도······.” 
 
화르르르륵! 
 
말을 잇기도 전에 2차 파동이 덮쳐왔다. 
더욱 강렬해진 고열은 주변의 화신들을 통째로 녹여버리며 용암으로 들이닥쳤다. 
 
쩌저저저적! 
 
강력한 열기에 아예 지반 전체가 통째로 익으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건물들이 땅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젠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일단 제압하는 방향으로 가야겠군요. 
 
“희원 씨가 다치지 않겠습니까?” 
 
불리한 것은 이쪽인데 저쪽부터 걱정하고 있다니, 과연 이현성이다. 
하지만 이현성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다치겠죠, 마음이. 
 
가장 확실한 해결책은 니르바나를 죽이거나, 정희원의 트라우마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지금은 불가능하고, 그나마 생각해 볼 만한 것은 후자인데······. 
정희원이 원작에서도 비중을 가졌던 인물이었다면 이렇게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희원은 내가 새로 발견한 인물이었고, 나는 그녀를 잘 모른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원인이 아닌 증상을 해결하는 것뿐. 

“독자 씨.” 
 
―해 봅시다. 
 
우리는 하나의 몸으로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조금씩 물러난 탓에 정희원과의 거리는 제법 되었다. 
뭐라도 해보기 위해서는, 일단 그녀의 코앞까지 가야만 했다. 
 
까드드드득! 
 
순식간에 자라난 강철의 표피가 이현성의 얼굴까지 모두 덮었다. 
이현성의 전신에서 가공할 근육이 꿈틀거렸다. 
체구에 알맞게 덮인 강철의 형상은, 마치 은빛의 기사 같았다. 
은빛의 기사는 그대로 불길을 뚫고 달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 
 
그에 맞춰 불꽃의 벽도 거세게 타올랐다.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듯. 
너희는, 이곳에 허락받지 못했다는 듯이. 
 
“우어어어어억!” 
 
무슨 훈련이라도 받는다고 생각했는지, 이현성은 악을 쓰며 불길을 헤쳐 나갔다. 헤치고, 또 헤치고. 강철 조각들이 땜납처럼 녹아 바닥에 떨어졌다. 안구가 열기로 익어서 시야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희원 씨! 저희가 구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한 걸음. 
 
“저희가······, 제가······!” 
 
다시, 한 걸음. 
 
“희원 씨······!” 
 
말재간도 없이 마구 주워섬기는 이현성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함부로 들려온 타인의 마음 때문에 한동안 잊고 있었다. 
원래, 한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는 것은 이렇게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걸. 
이현성과 나는 분명 같은 몸속에서 같은 눈으로 세계를 보고 있었지만, 같은 광경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이현성의 터질 듯한 심장이 그것을 증거 하고 있었다. 
묘한 기분이 된다. 
본래 이어질 수 없던 사람들이 이어지는 것. 
나로 인해, 이야기가 바뀌어 나간다는 것. 
 
“으으으······ 끄으으으!” 
 
열 걸음을 남겨 놓고, 이현성의 무릎이 무너졌다. 
 
[등장인물 ‘이현성’의 정신력이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흔들리는 시야를 보며 나는 새삼 깨닫고 있었다. 
이야기가 바뀌어도, 이것은 결국 ‘멸살법’이라는 걸. 
 
[성좌, ‘강철의 주인’이 안타까운 눈으로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아득한 절망 속에 몸부림쳐야만 하는, 바로 그 ‘멸살법’이라는 걸. 
 
―현성 씨. 
 
하지만 그런 ‘멸살법’을 줄곧 읽어온 나였기에 나는 가끔 궁금했다. 
‘멸살법’의 작가는, 자신이 만든 ‘결말’에 정말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을까? 
 
―잠시, 저한테 맡기십시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흔들립니다.] 
[‘1인칭 조연 시점’이 극도로 활성화됩니다.] 
 
이현성의 의식이 느슨해진 빈자리에, 내 의식이 들어선다. 
육체의 통제권이 이양되며, 전신의 감각이 강하게 활성화되었다. 
이현성은 이런 고통을 견디고 있었던 건가. 
미쳐버릴 열기다. 
온몸이 화염 속에 타 들어갔고, 뼈마디와 신경절이 녹아내린 자리는 실시간으로 팔다리를 끊었다 붙이는 것처럼 아파왔다. 
나는 이현성의 목소리로, 정희원을 향해 외쳤다. 
 
“정희원 씨! 이대로면 모두 죽습니다!” 
 
정희원은 반응이 없었다. 
계속해서 지옥같은 열기를 뿜어댈 뿐이었다. 
 
“이현성 씨가 죽는단 말입니다! 이대로 이현성 씨를 죽일 겁니까!” 
 
나는 죽을 힘을 다해 이현성의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이제 세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제길, 너무 뜨겁다. 
고통에 무릎이 꺾이는 찰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독자 씨. 제가 하겠습니다.’ 
 
이현성의 목소리였다. 
 
‘제가 해야 합니다.’ 
 
[강철의 의지가 당신에게 반응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나는 ‘독자’다. 
그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의식이 빠져 나가며, 이현성이 다시 자신의 육체를 되찾았다. 
눈부시게 빛나는 이현성의 몸이, 온전한 강철의 형상을 되찾고 있었다. 
 
“희원 씨.” 
 
타오르는 [지옥염화]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새파랗게 만들고 있었다. 
이 불은, 결국 그녀 자신을 갉아먹을 것이다. 
흘러내리자마자 말라버리는 눈물. 
그런 그녀를 향해, 이현성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현성은 마지막 한걸음을 다가가, 정희원을 힘껏 끌어안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뜻밖의 전우애에 당황합니다.] 
 
정희원의 작은 몸이 이현성의 넓은 품속에 들어왔다. 
얼마나 넓은 품인지, 손끝 하나 닿지 않고도 그녀를 안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정희원은 피하는 대신 더욱 강한 불길을 피워 올렸다. 
마치 그 불꽃만이, 그녀가 발할 수 있는 감정의 전부인 것처럼. 
까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이현성의 품을 중심으로 강철의 벽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 사람과 세상을 유리(遊離)시킬 벽. 
 
불꽃을 꺼트리기 위해선, 발화점을 산소와 차단해야만 한다. 
 
그것을 아는 이현성은, 자신을 희생해 그녀를 위한 벽이 되고 있었다. 
언제까지라도, 세상을 대신해 그녀의 분노를 감당하겠다는 것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둘을 지켜보는 것뿐. 
언어로는 닿지 못하는 정희원의 마음에, 이현성이 닿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설화, ‘강철의 첫 번째 증명’이 완료되었습니다.] 
 
마침내, 정희원의 불길이 사그라졌다. 
 
 
* 
 
 
이현성의 의식을 깨운 것은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숨 막혀······.” 
 
화들짝 아래를 바라보자, 정희원의 얼굴이 보였다. 주변을 살펴보니 상상도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자신의 팔에서 자라난 강철이 정희원의 몸을 덮은 채 주변을 봉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 어어! 죄, 죄송합니다! 지금 풀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녹은 채 굳어버린 강철 때문인지, 아니면 진력이 다 빠져버렸기 때문인지, 강철의 벽은 쉽사리 해제되지 않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이현성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정희원의 이마가 이현성의 가슴 부분에 닿았다. 
 
“고마워요.” 
 
강철에 닿은 그 슬픈 감촉에 이현성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주 작은 제스처였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분명, 마음은 전달된 것이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이 전우애를 싫어합니다.] 
 
“근데 현성 씨, 혹시 여기 누가 또 있었어요?” 
“예? 그게······.” 
 
횡설수설하는 이현성을 보며 정희원이 투덜거렸다. 
 
“됐어요. 뭐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보다 이것 좀 빨리 풀어봐요. 이럴 시간 없으니까!” 
“······예? 무슨 일이 있습니까?” 
 
입술을 깨문 정희원이 이현성을 한 번 바라보더니, 하늘을 향해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김독자 씨, 지금 듣고 있죠? 유상아 씨가 위험해요.”
 
 
 
 
 
< Episode 27. 읽을 수 없는 것 (3) > 끝

< Episode 27. 읽을 수 없는 것 (4) (수정 완료 / 5.8 12:42) >
 
 
 
 
 
[강력한 충격에서 육신이 깨어납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해제되었습니다.] 
 
서서히 감각이 돌아오며, 의식이 육신에 안착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왜 부활 메시지가 안 뜨지? 
 
[‘1인칭 조연 시점’의 연결이 불안정하여 당신은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의 보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상 못한 메시지에 놀란 순간, 서서히 명치의 고통이 느껴지며 육신의 무게가 실감나기 시작했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힘겹게 실눈을 뜨자, 나를 노려보는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시발, 깜짝이야. 
 
“김독자, 죽었나?”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왜 부활 메시지가 안 떴고,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의 보상도 안 들어왔는지도 알겠다. 
난 처음부터 죽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김독자.” 
 
단지, 아주 세게 명치를 얻어맞았을 뿐. 
저 빌어먹을 놈, 왜 안 죽인 거지? 
이 자식, 죽여달랄 땐 늘 안 죽이고······. 
 
「······그냥 처음부터 죽였어야 했나?」 
 
뜻밖의 메시지에, 나는 열려던 입을 다물었다. 
자동으로 발동한 전지적 독자 시점. 
유중혁의 상념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이 녀석 때문에 모든 게 뒤틀렸다.」 
「이미 내가 아는 3회차와는 너무 달라졌어. 이용할 수 있는 정보의 수가 너무 제한적이야. 이대로라면 세계를 구할 수 없다.」 
 
얼씨구. 
 
「구원교주에게 당한 것은 지난 회차에서 ‘시간 단층’을 지나치게 오래 이용한 까닭이다. 거기서 100년을 수련한 것은 실수였다. 정신력이 영구적으로 손상되는 바람에 놈에게 당한 거야.」 
「아니면 ‘절대 왕좌’를 손에 넣지 못한 것이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역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젠장, 겨우 한 번 졌다고 회귀자 우울증이 도지시는군. 
정신 공격에 당해서 그런가? 
나는 혹여나 놈이 딴 맘을 품을까봐 아픔을 무릅쓰고 외쳤다. 
 
“아파서 뒈지겠다 자식아!” 
 
내 도발에 유중혁은 나를 힐끗 보더니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죽도록 때리라고 한 건 네놈이다. 일은 해결됐나?” 
“대충은. 급한 불은 껐어.” 
 
유중혁의 표정이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쓰린 명치를 만지며 내가 알게 된 것들을 일부 말해주었다. 
이현성과 연락하고, 정희원을 구한 이야기. 
물론 ‘전지적 독자 시점’의 성능에 관한 이야기는 쏙 뺐다. 
평소였다면 허술한 얘기에 태클을 걸었을 법도 한데,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유중혁은 음울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거지?” 
“아직 생각 안 해봤어. 하지만 상황은 무척 낙관적이야.” 
“그 유상아인가 하는 여자는 네놈에게 소중할 테니, 그 여자를 먼저 찾는 게 급선무겠군. 구원교주에게 잡혀 있는 건가?” 
“아마 그렇겠지. 어쨌든 희망적인 상황인 건 확실해.” 
“······뭐가 희망적이라는 거지?” 
“중혁아, 우린 세계를 구할 수 있다. 알지?” 
 
그러자 유중혁이 나를 노려보았다. 
 
“대체 뭔 소릴 하는 거냐?” 
 
너무 티가 났나 싶어서 나는 변명하듯 덧붙였다. 
 
“뭐, 그러니까 이런 얘기야. 내 예상이 맞다면 니르바나는 유상아를 건드리지 않았을 거야. 내가 아는 그 ‘니르바나’라면 말이지.” 
“······설마 환생자에 관해서도 알고 있는 건가?” 
 
유중혁의 눈이 점차 가늘어졌다. 
괜히 대거리했나 싶어서 눈치를 보는데, 마침 곁에 있던 민지원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두 사람, 꽤 친해지셨네요.” 
“친해지긴요. 그보다 괜찮으십니까?” 
“······덕분에요. 하마터면 구원교도가 될 뻔 했지만.” 
 
니르바나와의 조우가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 듯, 민지원이 고운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상황을 배려해 줄 시간이 없었다. 
 
“미희왕, 아무래도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나는 미희왕의 화랑들을 이용해 흩어진 일행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급선무인 것은 니르바나의 [사상 감염]으로 인한 추가 피해를 막는 것이었다. 특히 정신력이 개복치 뺨치는 이지혜 같은 녀석이 이상한 사상에 감염된다면, 한강에 나타난 [유령함대]가 서울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대참사가 발생할 수 있었다. 
다행히 이길영과 신유승은 가까운 곳에서 투닥거리고 있었고, 건물 한 채를 점령하고 괴이한 농성을 벌이고 있는 공필두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난 그 땅에 계속 있고 싶었다.” 
“피스 랜드?” 
“빌어먹을······.” 
 
공필두는 시나리오가 끝난 게 못내 아쉬운 듯했다. 
하긴, 공필두야 거기서 왕 노릇을 하고 있었으니까. 
한수영 녀석은 무려 ‘여신’이었는데, 지금쯤 어떤 심정일지 궁금하다. 
 
“존경하는 패왕님! 저흴 받아주십시오!” 
“존경합니다!” 
 
이 귀가 곤란해지는 레벨의 아부는 또 뭔가 싶었더니, 모두 이번 시나리오에 새로 유입된 신규 화신들이었다. 
우리가 [피스 랜드]에서 돌아왔다는 소문이 그새 퍼진 모양이었다. 
옆을 보니 유중혁도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런 놈들은 백 트럭이 있어도 세계를 구할 수 없다.」 
「역시 답은 회귀인가······.」 
 
“자자, 우리 패왕님께서는 지금 기분이 안 좋으니까, 다들 꺼지라고. 뒈지고 싶어?” 
 
나는 친히 나서서 우울증의 원인들을 제거했다. 
신규 화신들은 매니저에게 쫓겨난 사생팬들처럼 나를 노려보았다. 
 
“저 새낀 뭐야?” 
“못생긴 왕인가 그거라는데.” 
 
이 새끼들이 진짜. 
참다못한 내가 한 소리를 해주려는데, 뜻밖에도 유중혁이 직접 입을 열었다. 
 
“함께하고 싶다면, 내게 도움이 될만한 인간이 되어서 와라.” 
 
평소와는 다르게 냉기 어린 목소리에 묘한 우울감이 배어 있었다. 
그렇다곤 하지만 모욕적인 언사인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이제 팬들이 죄다 떨어져 나가겠구나 싶었는데, 이게 웬걸. 
 
“시발, 존나 멋있네······ 저 우수 어리고 다크한 목소리······.” 
 
화신들은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모두 뿅 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존나 개 시크해! 저 강해질게요! 꼭 도움이 되겠습니다!”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 것인가? 
그건 그렇고 왜 유중혁만 찾는 건데? 
다들 내가 구원교주를 제압했던 건 잊은 건가? 
그때,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야야, 근데 아까 보니까 저 ‘못생긴 왕’인가 하는 사람이 더 센 거 같던데.” 
“어? 그거 진짜야?” 
 
진짜인진 모르겠지만, 나도 꽤 세다고 말해주고 싶다. 
 
“거기 인마. 눈깔은 뒤통수에 달렸냐? 당연히 패왕님이 다 패놓은 거 쟤가 막타 친 거잖아.” 
“역시 그런가?” 
 
부들부들 떨리는 두 주먹이 조금씩 무거워진다 싶더니, 어느새 신유승과 이길영이 내 양손에 매달려 있었다. 
 
“난 아저씨 잘생겼다고 생각해요.” 
“형, 남잔 얼굴이 다가 아니잖아요.” 
 
역시 내 편은 애들 뿐······ 아니, 신유승뿐이다. 
 
그나저나 못생긴 왕이라니. 
내 별명은 어느새 그딴 걸로 자리매김한 모양이다.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멸망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못생겼다’란 말을 면전에서 들어본 적은 없었으니까. 
우울증은 유중혁이 아니라 내가 앓아야 할 판이다. 
 
“못생긴 왕? 푸하하. 진짜 잘 어울린다.” 
 
깐죽거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이지혜의 모습이 보였다. 
이걸로 비교적 먼 거리에 있는 정희원과 이현성, 그리고 현재로써는 데려올 수 없는 유상아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전력이 모인 셈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뭘 해야 하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오오오오! 
 
어디선가 들려오는 울음 소리에, 유중혁이 제일 먼저 반응했다. 
 
“······대형 괴수종이군. 6급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도 시나리오 진행 중이랬나?” 
 
이지혜의 말은 맞았다. 
일곱 번째 시나리오 ‘괴수 사냥’은 [피스 랜드]에 참가하지 못한 화신들, 그리고 신규 화신들을 위해 진행되는 이벤트성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일곱 번째 시나리오에 6급 괴수종이 나오던가? 
내 의문에 답한 것은 민지원이었다. 
 
“죄송하지만, 일곱 번째 시나리오는 벌써 끝났어요.” 
“······아까 진행 중이라고 뜨던데요?” 
“아마 보상 정산 중일 때 들어오셨을 거예요. 진행은 마무리된 상황이었어요. 구원교주가 최고 보상을 받았고요.” 
 
역시 구원교주인가. 
그러고 보니 종전에 니르바나를 만났을 때, 구원교도들이 괴수종들을 사냥하고 온 듯한 낌새가 있긴 했다. 
 
“그럼 저건 어디서 나타난 거지?” 
“다들 준비해. 한두 마리가 아니다.” 
 
유중혁이 진천패도를 뽑자, 다른 일행들도 동시에 병장기를 뽑았다. 
 
쿠구구궁! 
 
6급 괴수종, [헤비 하운드]가 거대한 앞발로 건물들을 부수며 나타났다. 
얼핏 숫자를 세어보니 열 마리가 훌쩍 넘는 숫자였다. 
 
“6급부터는 이렇게 안 몰려다니는데. 얘들 대체 뭐야?” 
 
우리는 괴수들을 향해 제각기 병기를 휘둘렀다. 이지혜가 [귀살]을 발동했고, 공필두가 [무장성채]를 전개했다. 거기에 유중혁의 [파천검도], 신유승과 이길영의 [다종 교감]까지 더해지니, 사실상 내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확실히 우리 일행이 강해지긴 한 모양이었다. 
 
그아아아아! 
 
순식간에 열 마리의 6급 괴수종을 정리했지만, 사태는 해결되지 않았다. 
공필두가 외쳤다. 
 
“또 몰려 온다!” 
“모두 이쪽으로 오세요!” 
 
어쨌든 피해를 줄여야 했기에, 나는 신규 화신들을 대피시키며 ‘신념의 칼날’로 [헤비 하운드]의 목을 땄다. 물론, 틈틈이 떨어지는 괴수종의 핵을 회수하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추리력을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뭔가가 찜찜했다. 
이런 전개는 본래의 3회차에 나오지 않는다. 
4회차에도, 5회차에도······ 심지어는 10회차에도 없다.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생각해라. 김독자. 
이런 시나리오는 언제 나왔던 거지? 
 
[전용 특성의 효과로 기억력이 상승합니다.] 
 
······설마? 
 
[서울 돔의 화신 여러분들께 알립니다.] 
 
기다렸다는 듯, 도깨비의 전체 메시지가 들려왔다. 
비형은 아니고,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갑자기 괴수들이 나타나서 깜짝 놀라셨죠? 우후······ 예상하셨겠지만 다음 시나리오가 시작됐습니다. 저희도 휴식 시간을 좀 드리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네요. 이번 시나리오는 저희 도깨비들의 주관이 아니라, 자동으로 진행되는 시나리오거든요.]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하였습니다.] 
[메인 시나리오 # 8 ― ‘최강의 희생양’이 시작됩니다.] 
 
내가 아는 여덟 번째 시나리오와는 다른 이름이었다. 
나는 바로 시나리오 내용을 열어 보았다. 
 
+ 
 
<메인 시나리오 # 8 ― 최강의 희생양> 
 
분류 : 메인 
난이도 : S 
클리어 조건 : 밀려드는 괴수들로부터 살아남으시오(해당 시나리오는 4시간 간격으로 괴수들의 등급이 상승하니 주의를 요합니다). 
제한시간 : ― 
보상 : ??? 
실패시 : 사망 
 
* 추가 클리어 조건이 있습니다. 
* 네 시간에 한 번씩 힌트가 제공됩니다. 
 
+ 
 
[아, 참고로. 6급은 시작입니다. 4시간 후에는 5급이 몰려올 거고, 다시 4시간 후에는 4급이 몰려올 겁니다. 그리고 다시 4시간 후에는······ 후후, 뭐. 말 안해도 아시겠죠?] 
 
그러자 화신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뭐야! 뭐 그딴 시나리오가 다 있어?” 
“어? 제한 시간이 안 나와 있는데?” 
 
[제한 시간? 하하. 그딴 건 없어요.] 
 
나는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뜬금없이 나타난 구원교주 니르바나에, 본래의 3회차보다 강해진 유중혁과 일행들······. 
어렴풋이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한 번인가, 멸살법에도 이런 전개가 분명 나온 적이 있었다. 
 
[이게 다 여러분들이 너무 강해졌기 때문이에요. 세상에, 한국 화신들만 이렇게 밸런스가 안 맞게 강해지다니. 욕심도 좀 적당히 부리시지 그러셨어요? 이 시나리오는 특정 돔의 화신들이 지나치게 강해졌을 때 자동으로 부여되는 시나리오거든요.] 
 
당황한 서울 돔의 화신들이 웅성거렸다. 
 
[미리 말씀 드리지만, 이 시나리오의 해법은 둘뿐입니다.] 
 
뒤이어 허공에 추가 조건이 떠올랐다. 
 
+ 
 
추가 클리어 조건(택1) : 
 
1. 서울 돔의 화신 절반이 사망할 것. 
 
* 현재 화신 숫자 [107,624]명. 
 
+ 
 
도깨비가 감탄한 듯 말했다. 

[흠, 아직도 이렇게나 많이들 계셨어요? 마침 짝수니 잘 됐네요.] 
 
“시발! 개소리 하지마!” 
“그냥 다 뒈지라는 거냐? 애미 없는 도깨비 새끼들아!” 
 
도깨비가 웃으며 덧붙였다. 
 
[진정들 하세요. 두 번째 조건도 있으니까요.] 
 
+ 
 
추가 클리어 조건(택1) : 
 
2. 서울 돔에서 가장 강한 화신 ‘한 명’이 사망할 것. 
 
+ 
 
이해했다. 
······그래서 이 시나리오 이름이 ‘최강의 희생양’인 거겠지. 
즉, 서울의 절반이 죽지 않아도 가장 강한 화신 한 명만 죽으면 이 시나리오는 끝난다. 
화신들이 흥분했다. 
 
“가장 강한 화신? 뭐야? 누구 말하는 거야?” 
“그게 누군지 알려줘야 할 거 아냐!” 
 
[하하, 그건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까지 알려 드리면 재미가 없잖아요? 뭐, 가장 강하신 분이야 본인이 가장 잘 아시겠지만 말입니다.] 
 
도깨비가 놀리듯이 말했다. 
 
[그럼, 열심히들 찾아 보세요. 아니면 혹시 압니까? 그 최강의 화신이 정의의 사도라서, 여러분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려 할지. 아, 이렇게만 해두면 좀 심심하니까, 힌트를 좀 드리긴 하겠습니다. 그럼, 여러분께 이야기의 가호가 있기를.] 
 
+ 
 
<힌트 1> 
 
현재 서울 돔에서 열 번째로 강한 화신은 ‘해상제독 이지혜’입니다. 
 
+ 
 
“와, 뭐야. 말도 안 돼. 내가 겨우 10위라고?” 
 
이지혜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일행들 중, 그 능청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모두가 단 한 사람을 유심히 보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열심히 생각을 도청 중인 저 인간을 말이다. 
 
「모든 게 너무 뒤틀렸다.」 
「마침내, 내가 모르는 시나리오가 나오고 말았군.」 
 
아, 제발. 유중혁······. 
 
「도저히 바로잡을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회귀해야······.」 
 
젠장, 네가 회귀하면 난 어떻게 되는데!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쓸려 죽는 존재가 되는 건, 절대 사절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유중혁을 노려보았다. 
불끈, 주먹을 움켜쥐며.
 
 
 
 
< Episode 27. 읽을 수 없는 것 (4) (수정 완료 / 5.8 12:42) > 끝

< Episode 28. 최강의 희생양 (1) >
 
 
 
 
 
Episode 28. 최강의 희생양 
 
 
 
그로부터 30분 뒤, 6급 괴수들 무리는 모두 정리되었다. 
나와 일행들의 활약, 특히 공필두의 대군전이 굉장히 주효했다. 
십악을 거둔 보람이 있는 순간이었다. 
 
“······이제 한숨 돌리겠네. 다음엔 4시간 뒤랬죠?” 
 
이지혜가 장도를 허리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인근의 전투도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다른 지역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강서만큼은 우리가 지켜낸 것이다. 
물론 모두가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제발, 정신 차려요! 아버지!” 
“누가 좀 도와주세요!” 
 
아직 6급 괴수들을 사냥할 노하우가 없는 화신들 중 대다수는 변변찮은 저항조차 해보지 못했다. [헤비 하운드]의 앞발에 치여 심한 외상을 입거나 내장이 터져 명을 달리한 자들. 대부분은 신규로 투입된 화신들이었다. 
 
[ * 현재 화신 숫자 : 90,531명 ] 
 
겨우 첫 번째 웨이브가 지나갔을 뿐인데, 서울 돔의 십 분의 일이 죽었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유중혁이 화신들을 보고 있었다. 
그런 유중혁을 보며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도깨비는 말했다. 
가장 강한 화신 한 명의 희생을 통해, 서울 돔의 모든 화신들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야, 유중혁.” 
 
유중혁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저 풍경이 유중혁에게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매번 말하지만, ‘멸살법’을 읽었다고 해서 정말로 그 인물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고, 그것은 한 번 가공되어 내게 전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읽을 수 있기에 오히려 읽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 
 
 
우리는 주변 고층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가는 길에, 나는 오랜만에 유중혁에게 ‘등장인물 일람’을 사용해보았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이 발동합니다.] 
[해당 인물의 관련 정보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이 ‘요약 일람’으로 변환됩니다.] 
[사용자의 편의에 따라 임의로 지정한 항목들만 표시됩니다.] 
 
+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유중혁 
배후성 : ??? 
전용 특성 : 회귀자 <3회차> (신화), 프로게이머 (희귀), 패왕 (영웅) 
전용 스킬 : [현자의 눈 Lv.9], [백병전 Lv.10], [상급 무기연마 Lv.10], [상급 정신 방벽 Lv.3], [백보신권 Lv.9], [주작신보 Lv.8], [파천강기 Lv.8]······(중략)······. 
성흔 : [회귀 Lv.3], [전승 Lv.5] 
 
+ 
 
여전히 녀석의 ‘배후성’은 누구인지 보이지 않는다. 
왜 안 보이는 것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멸살법’의 원작에서도, 유중혁의 배후성은 끝내 밝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에필로그에서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멸살법’의 에필로그를 읽지 못했다. 
내가 아는 어떤 성좌들보다도 ‘개연성’에 대한 내성이 강하며, 동시에 시간의 수레를 돌려 다른 성좌들마저 속여버리는 힘을 가진 성좌. ‘멸살법’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회귀’를 제외한 다른 성흔을 유중혁에게 제공하지 않는 성좌······. 
놈이 어떤 존재이고, 유중혁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는 나조차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니르바나를 죽일 방법이 있다고?” 
 
하여간, 자식 성질이 급하다. 
기껏 쉴 시간이 주어졌는데 그것부터 생각하고 있으니. 
회귀 우울증에 걸려도, 어쨌든 유중혁은 유중혁이다. 
 
“그 전에 잠시 한숨 좀 돌리자. 경치도 좋은데.” 
 
나는 옥상의 난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러자 유중혁이 이를 갈 듯 물었다. 
 
“······무슨 꿍꿍이냐?” 
“그냥, 세상 좀 보라고. 아름답지 않냐?” 
 
괴수들에게 파괴된 서울의 정경이 내비치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원래는 아름다웠던 곳이잖냐.” 
“나는 풍경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 
“언젠가 사라질 것들이니까.” 
 
나는 신유승 전(戰)을 거치며 3회차의 유중혁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쉽게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좀 더 이 세계를 사랑할 줄 아는 녀석일지도 모른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네가 지켜야 할 것들이야.” 
“김독자, 네놈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내 오해였는지도 모른다. 
유중혁에겐 수많은 회귀 속에서 놓지 않고 있는 것이 있기에, 반대로 언제든 포기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결국, 유중혁의 목적은 ‘이 세계의 멸망을 막는 것’. 
역설적이게도 녀석은 그것을 위해 ‘언제든 이 세계를 포기할 수’ 있었다. 
놈의 본질은 회귀자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나도 알아.” 
“뭐?” 
“언제든 회귀할 수 있다는 건 ‘죽음’에 의미가 없다는 것일테지.” 
 
옥상 아래로 다친 사람들을 돌보는 이설화의 모습이 보였다. 
이름 모를 등장인물에게 자신이 끓인 탕약을 먹이는 이설화. 
하지만 그녀의 노력과는 별개로, 저 등장인물은 높은 확률로 죽게 될 것이다. 지금은 살더라도 내일은 죽을 것이고, 기적적으로 내일을 살아도 모레는 죽을 것이다. 
4회차에도, 5회차에도. 
심지어 100회차를 넘겨도 유중혁의 세계에서 언제나 저들은 ‘이미 죽은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의미가 없다는 것은, 삶의 가치 또한 사라진다는 거야.” 
“네놈이 뭘 안다고······.” 
“유중혁, 정신차려라. 몇 번을 반복하면 나아질 거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얘기다.” 
 
내 강경한 말에 놀랐는지, 일순 유중혁이 입을 다물었다. 
 
“분명 4회차에는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닐 수도 있어. 벌써 ‘극장 던전’을 잊은 건 아니겠지? 그때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네놈은―” 
“회차가 지나면 분명 나아진다. 이번 회차는 뜻밖의 일이 많았지만, 다음 회차는 분명 또 나아질 거다.” 
“왜? 네가 아는 미래가 많아지니까?” 
 
유중혁이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긍정이 섞인 침묵이었다. 
머릿속에 ‘멸살법’의 내용 중 일부가 스쳐갔다. 
48회차 즈음이었나. 
성좌 ‘무의식의 발견자’를 배후성으로 둔 화신이 유중혁의 ‘회귀 우울증’을 상담해준 적이 있었다. 
그때 그 녀석도, 아마 지금의 나처럼 말했던 것 같다. 
 
“그래. 네 말대로일지도 모르지. 10회차나 20회차를 반복하다 보면, 분명 조금씩 나아질 수는 있을 거야. 더 많은 시나리오를 접하게 될 거고, 더 많은 미래를 보게 되겠지.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런 식으로 언젠가 네가 이 세계를 구해냈을 때다.” 
“······무슨 말이냐?” 
“그때, 너는 네가 정말로 ‘이 세계를 구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냐?” 
“······.” 
“100번이고 200번이고 회귀를 반복하고 나서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냐고.” 
“그렇게나 많이 회귀할 리 없다.” 
 
나는 말없이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설마?」 
 
유중혁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나는 말을 이었다. 
 
“요즘도 악몽을 꾸지?” 
“······.” 
“설령 세계를 구해내도, 너는 구원 받을 수 없을 거다. 네가 세계를 구한 순간, 네가 버린 세계들이 너를 덮쳐올 거다. 하나의 세계를 구해도, 네가 버린 다른 모든 세계가 네놈을 지옥으로 끌고 갈 거라고.” 
 
잠깐이지만, 유중혁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아마, 녀석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러니 제대로 ‘이 회차’를 살아. 신유승은 수없는 세월을 떠돌다 망가졌지. 하지만 회차를 거듭하면 계속 반복되는 회차에 넌 아예 손댈 수도 없이 망가질 거야. 스스로에게 물어봐. 처음의 너와 지금의 네가 얼마나 다른지." 
"그건······." 
 
유중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눈빛이 격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하긴 유중혁이라고 처음부터 저랬을 리가 없을 것이다. 
 
"이 회차를 버린다고 다음 회차가 좋아질거라고 착각하지마. 어쩌면 네가 버리려고 하는 이 회차가, '인간'으로서 이 세계의 끝을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회차’일지도 모르니까.” 
“······.” 
 
유중혁은 입을 다물었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는 듯, 갈등이 격렬히 얼굴에 떠올랐다. 
그래 유중혁. 
갈등해라. 
그리고 회귀하지마. 
네가 회귀하면 난 뭐가 되겠냐. 
 
[등장인물 ‘유중혁’의 정신력이 소폭 회복됩니다.] 
 
뭔가 생각을 돌린 듯 유중혁의 얼굴에 미미한 결심의 빛이 스쳐갔다. 
어차피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다시 기운을 내고, 젖먹던 힘까지 다해 살아나가는 수밖에 없다. 살아가야 한다면, 사는 동안 열심히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지도 모르지.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우리는 그 바람을 맞으며 폐허가 된 서울을 함께 내려다보았다. 
 
“이번 시나리오는 이벤트적 성향이 강해. 흐름은 다시 우리가 알던 방향으로 돌아올 거다. 미래는 얼마든지 다시 이용할 수 있어. 아직 너만 알고 있는 히든 피스도 많이 남았을 거 아냐? 어떻게든 ‘서울 돔’만 해방되면······.” 
 
순간, 삐그덕- 하는 소리와 함께 옥상 문이 열리면서 일행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제일 먼저 바닥에 엎어진 것은 공필두였고, 그 위에 이지혜와 아이들이 같이 엎어져 있었다. 
 
“우와악! 밀지마!” 
“아, 둘이 무슨 얘기 하나 궁금하니까 그러지. 왜 아저씨만 들어?” 
“사나이 대화에 함부로 끼어드는 게 아니다.” 
“사나이는 쥐뿔이······.”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눈을 반짝입니다.] 
 
“둘이 뭐하고······.” 
 
나는 이지혜가 또 헛소리를 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오늘은 시답잖은 농담 하지마. 그럴 기분 아니니까.”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시무룩해합니다.] 
 
시무룩해하든 말든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성좌가 아니라 유중혁이다. 
우리엘은 이제 코인 안줘도 되니까 정희원한테나 갔으면 좋겠군.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잠시 시나리오에 대한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작전? 무슨 작전이요?” 
 
그 말에 유중혁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 시나리오는 가장 강한 화신이 죽어야 끝난다. 그것에 관해 조금 생각하고 있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 자식, 왜 그런 말을 날 보면서 하는 거냐? 
이지혜가 살짝 흥분한 기색으로 물었다. 
 
“아, 안 그래도 우리끼리 그 얘기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제일 강한 화신이 누군데요?” 
“물론 나다.”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유중혁을 보며, 나는 내 걱정이 오판이었음을 깨달았다. 
하긴, 저 자존심 강한 녀석이······. 
아니 잠깐만. 
가장 강한 화신이 죽어야 이 시나리오가 끝이 나고, 그게 자기 자신이라 생각하고 있었다는 건······. 
 
“너 설마 죽으려고 했던 거냐?” 
“내가 죽으면 이 시나리오는 막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녀석의 숭고한 마음가짐에 조금 감동했다. 
젠장, 놈의 <회귀 우울증>이 갑자기 조금 멋있어 보인다. 
하지만 정말 놈이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너무 성급한 거 아니냐? 네가 당연히 제일 강할 거란 보장은 없잖아? 가령 나도 있고······.” 
 
내 말에, 일행들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이지혜가 내 어깨를 탁 치며 과장스럽게 웃었다. 
 
“에이, 설마 그거 진심은 아니지?” 
“독자 형 그건 좀······.” 
 
이길영은 불쌍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신유승은 아직 잘 모르겠다는 듯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심지어는 공필두와 민지원마저 이렇게 말했다. 
 
“물어 볼 필요도 없는 얘기지.” 
“······그래도 패왕이 더 세지 않은가요?” 
“잠깐만, 아저씨 혹시 아까 자기가 구원교주 물리쳤다고 그러는 거야?” 
 
정곡이었다. 
 
“근데 아저씨가 정말 강해서 물리쳤을 리가 없잖아? 내가 보진 못했는데, 보나마나 무슨 이상한 꼼수 썼겠지. 아냐?” 
 
어떤 의미에서는 정확해서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어쩐지 쩌리가 된 기분으로 변명처럼 덧붙였다. 
 
“······나는 그냥 예를 든 거고, 내 말은 유중혁보다 구원교주가 더 셀 수도 있다는 거야. 실제로 아까 꽤 고전하기도 했고.” 
 
이지혜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에요 사부?” 
“······그 녀석과 나는 상성이 맞지 않아.” 
 
유중혁의 발언에 일행은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럼······ 설마 구원교주가 제일 센 건가?” 
“맙소사, 사부 보다도 강한 인간이 있다고?” 
“근데 랭킹 책정 기준이 대체 뭘까요? 전투력? 아니면 실제로 싸워서 이긴 쪽을 강하다고 따지는 건지······.” 
 
민지원의 질문에 내가 답했다. 
 
“일단은 ‘종합 전투력’을 매기는 수치가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애초에 모두가 서로와 싸워 볼 수는 없으니까요. 싸워서 승패가 정해진 후에는 변동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아까 도깨비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요? ‘가장 강한 화신은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라고······.” 
 
우리는 다시 유중혁 쪽을 바라보았다. 
 
“유중혁, 뭔가 평소랑 다른 거 없어? 가령 도깨비가 뭐라고 했다던가.” 
 
유중혁이 천천히 자신의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말했다. 
 
“······글쎄, 들은 건 없다.”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군요.” 
“그럼 이제 어떡하죠?”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합시다. 여기서 유중혁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일단 당장은 니르바나가 ‘최강’이라 가정하고, 놈을 해치우는 게 합리적인 판단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약 패왕이 제일 강하다는 게 밝혀지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죠.” 
 
민지원이 말했다. 
 
“구원교단은 강북에 있어요. 그리고 경계가 삼엄해서 접근하기도 쉽지가 않고, 병력 차이도 심해요. 우리 전부가 가더라도······.” 
“안 갈 겁니다. 우리가 놈을 불러야죠.” 
“어떻게요? 녀석이 응하려고 할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보는 일을 할 턱이 없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죠.” 
 
하지만 니르바나는 상식적인 놈이 아니다.
 
 
 
 
 
< Episode 28. 최강의 희생양 (1) > 끝

< Episode 28. 최강의 희생양 (2) >
 
 
 
 
 
괴수들은 서울 외곽쪽에서 몰려온다. 
아마 그쪽에 게이트가 생성되고 있을 것이고, 네 시간 간격으로 괴수들의 등급은 급상승할 것이다. 
즉, 앞으로 주어진 시간은 길어봐야 여덟 시간. 
나는 그 안에 니르바나를 유인해 유중혁과 대결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저한테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일행들을 내버려 두고 ‘도깨비 통신’을 통해 비형을 불렀다. 
하지만 돌아온 목소리는 영기의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비형 어르신께서 지금 좀 바쁘셔서······.] 
 
비형 자식, 슬슬 진급 시즌인 모양인데 이따위로 나온다 이거지? 
자기가 그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은혜도 모르는 놈이다. 
간만에 실적 좀 올려 주려고 했는데, 제 발로 복을 걷어 차는구만. 
 
―이번에 신규 시나리오 특집 랜덤박스 나왔지? 
 
[옙. 나왔습니다.] 
 
―그거 열 개만 살게. 
 
당연히 좋다구나 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영기는 머뭇거렸다. 
 
[하지만 랜덤 박스 확률은 극악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으니까 팔아. 
 
도깨비 자식이 대체 뭘 걱정하는 건지. 
저 녀석 저래서 살아 남을 수 있으려나? 
 
[‘메인 시나리오 # 8 특집 랜덤 박스’를 10개 구매하였습니다!] 
[30,000코인을 지출하였습니다.] 
 
―그만 가봐. 
 
[옙. 그럼 이야기의 가호가 있으시기를.] 
 
영기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허공에서 반짝이는 열 개의 박스들이 내려왔다. 커다란 물음표가 쓰여져 있는 알록달록한 박스들. 
곁에 있던 이길영이 물었다. 
 
“형, 그거 게임에 나오는 거죠? 까면 랜덤으로 좋은 거 나오는······.” 
 
이럴 땐 어린애들 눈치가 제일 빠르다. 
 
“그래, 그거 맞아.” 
 
[랜덤 박스]. 
극악한 확률로 SSS급 무기와 SSS급 스킬들을 얻을 수 있는 도박성 아이템. 눈먼 성좌들을 등 처먹기 위해 도깨비들이 고안한 호구 전용 아이템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런 박스를 내가 왜 샀냐고?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에게 약간 실망합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장수의 기본은 청렴함에 있다 말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사치를 경계할 것을 조언합니다.] 
[성좌, ‘매금지존’이 그런 걸 살 코인이 있다면 자신에게 기부할 것을 원합니다.] 
 
매금지존의 메시지에 민지원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 올랐다. 
 
“저, 죄송해요. 제 배후성이 좀······.” 
“괜찮습니다. 사실 가성비가 좋은 상품은 아니니까요. 그보다 다들 모여 보세요. 기분도 전환할 겸 하나씩 드리겠습니다.” 
“주신다고요? 공짜로요?” 
“예. 대신 상자를 열면 나오는 메인 아이템들만 가지시고, 소모품으로 나오는 보조 아이템은 저한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래는 코인을 받고 팔까 생각도 했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은 나와 어느 정도 유대가 쌓인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전력이 강해지면, 내게도 충분히 도움이 된다. 그러니 결코 손해만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공짜라는 말에 화색이 된 이지혜가 제일 먼저 상자를 낚아채 갔다. 
 
“와, 짠돌이 아저씨가 웬일이래······ 잘 쓸게 아저씨!” 
 
이어서 공필두와 이길영도 상자를 하나씩 받았다. 
 
“형, 저 SSS급 뜨면 어쩌죠?” 
“확률이 0.00001 퍼센트도 안 될 텐데, 좀 힘들걸.” 
“······진짜요?” 
“다 상술인 거지. 오늘만 속는 셈 치고 까봐.” 
 
유중혁은 그런 내 모습을 유심히 노려보더니 말했다. 
 
“김독자. 설마 거기서 나온 아이템으로 니르바나를 상대하겠다든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뭐, 비슷한데 왜?” 
“······한심한 계획이군.” 
 
자기도 상자 받아가고 있는 주제에 이 자식이 진짜······. 
마지막으로 내게 상자를 받아간 것은 신유승이었다. 
 
“넌 두 개 줄게.” 
 
깜짝 놀란 신유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요?” 
“그래.” 
 
잠시 머뭇거리던 신유승이 내게서 상자들을 받았다. 어쩐지 아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제가 이런 걸 받을 자격이······.” 
 
그제야 어린 신유승의 과거가 떠올랐다. 
아마 이건 신유승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선물’일 것이다. 
이 빌어먹을 ‘멸살법’에는 전개를 위해서인지 그런 편의적인 설정을 가진 인물들이 많았다. 
그리고 누군가의 편의는, 곧 누군가의 진짜 불행이 된다. 
나는 눈을 닦는 신유승의 손에 상자를 쥐어주었다. 
 
“받아. 넌 내 화신이잖아. 충분히 받을 자격 있어.” 
 
얼굴이 발갛게 물든 채 진심으로 좋아하는 신유승을 보고 있자니, 진즉에 아이를 못 챙겨 준 것이 후회가 되었다. 
배후성인 내가 아직 ‘성좌’의 자격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신유승은 [성흔]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이 아이를 거두는 게, 옳은 선택이었을까. 
나로 인해, 오히려 이 아이가 불행해지는 건 아닐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아이를 지킬 것이다. 
 
“그럼 다들 한 번 까보죠. 기분 전환한다고 생각하고.” 
 
내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상자를 열기 시작했다. 
 
[‘메인 시나리오 # 8 특집 랜덤 박스’를 사용하였습니다!] 
 
[‘엘라인 숲의 정기’ 2개를 획득하였습니다!] 
[‘그럭저럭 쓸만한 부츠 (E)’ 1개를 획득하였습니다!] 
[기타 소모품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럼 그렇지. 나오는 거라곤 소모품에 E급 아이템 뿐. 
다른 일행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랜덤 박스는······. 
 
[축하합니다! 누군가가 0.00001%의 확률을 돌파하였습니다!] 
 
웅장한 축하음과 함께 허공에서 터지는 폭죽. 
고개를 돌려 보니,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의 신유승이 보였다. 
······설마? 진짜로? 
 
“아, 아저씨?” 
 
신유승의 손 위에, 찬란한 빛을 흩뿌리는 작은 열매가 놓여 있었다. 
가까이 가서 확인하자, 아이템의 정체는 명확해졌다. 
맙소사, 저걸 얻다니. 
······대체 내 화신은 얼마나 운이 좋은 거야? 
상황을 지켜보던 유중혁도 조금 놀란 듯했다. 
 
“좋은 걸 얻었군.” 
 
SSS급 아이템, [고대 야수의 열매]. 
 
0.00001 퍼센트의 확률로 나오는 SSS급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확률로 나오는 아이템이 바로 저 [고대 야수의 열매]였다. 비록 소모성 아이템이긴 하지만, 그 값어치는 사용하기에 따라서 SSS급 이상일 수 있었다. 
 
“네가 길들일 수 없는 괴수에게 이 열매를 먹이면 길들일 수 있게 될거야. 축하한다. 아껴뒀다가 쓰면 좋겠구나.” 
 
[길들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신유승에게 이것보다 좋은 아이템은 없었다. 1급종 이상으로 진화할 수 있는 괴수에게 이걸 쓴다면, 이번 회차의 신유승은 41회차 이상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짝이는 눈으로 열매와 나를 번갈아 보던 신유승이 물었다. 
 
“아저씨, 근데 이거······ 괴수한테만 쓸 수 있는건가요?” 
“아마도. 그건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를 보던 신유승이 귀엽게 얼굴을 붉히며 내 눈을 피했다. 
곁에서 침을 질질 흘리던 이길영이 달려들었다. 
 
“야, 그거 나 주면 안돼? 내 티타노 줄게.” 
“난 곤충 싫어.” 
 
그 모습을 부럽다는 듯 바라보던 이지혜가 말했다. 
 
“아저씨, 근데 이거 왜 한 거야? 진짜로 기분 전환하려고?” 
“당연히 아니지. 상자 까면서 나온 소모품들 일단 줘봐.” 

애초에 내가 얻으려고 한 것은 상자의 메인이 아니라 보조로 나오는 소모품들이었다. 
 
[‘확성기 (돔 채널용) X 4’를 획득하였습니다!] 
[‘확성기 (일반 채널용) X 4’를 획득하였습니다!] 
[‘확성기 (지역 전용) X 2’를 획득하였습니다!] 
 
그제야 유중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겠군.” 
 
[확성기]. 
옵션에 따라 특정한 채널이나 전체 구역에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유용한 소모품. 
 
“하지만 그 녀석이 고작 말 몇 마디 한다고 나올 리가······.” 
“중요한 건 무슨 말을 하느냐지.” 
 
나는 [확성기]를 사용했다. 
일단은 이렇게 시작해 볼까. 
나는 니르바나의 주목을 끌만한 서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그 시각, 니르바나는 임시 교단의 거처에 있었다. 고요히 눈을 감은 니르바나를, 관세음보살 동상이 무표정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과거에 매달리지 말고, 미래를 원망하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사라졌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니르바나가 외는 것은 분명 그런 의미를 담은 구절이었으나, 교리는 음성으로 퍼지지 않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갔다. 
전신에 날카로운 스파크가 튀었고, 잠시 후 그의 눈동자가 하얗게 돌아가며 메시지가 들려왔다. 
 
[새로운 스킬을 계승하였습니다!] 
 
그제야, 니르바나가 눈을 떴다. 
 
“······무리했군.” 
 
그의 성흔인 [계승]은 사용 시 상당한 개연성을 소모한다. 때문에 환생을 통해 쌓아온 ‘이야기’를 성좌들에게 공헌해 개연성을 제공받지 않으면, [계승]은 사용할 수가 없다. 
 
‘이야기를 너무 많이 빼앗겼다.’ 
 
사라진 과거가 아쉬웠지만, 니르바나는 금방 평정을 되찾았다.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비워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기운을 갈무리한 그는 걸음을 옮겨 교단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심처로 향했다. 얼마간 지하로 내려간 뒤 복도를 지나 문을 열자, 온화한 불이 밝혀진 방이 나타났다. 
앤티크한 분위기의 테이블과 더블 침대가 놓인 방. 음습한 지하답지 않게 따뜻한 분위기로 꾸며진, 제법 공들인 티가 나는 방이었다. 
 
“기다리게 했군. 그럼 오늘도 시작해 볼까?” 
 
방의 테이블에는 나이 차가 나는 두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사라졌던 ‘방랑자들의 왕’ 이수경과 유상아였다. 이수경은 곁에서 눈이 풀린 채 허공을 응시하는 유상아를 흘끗 보며 물었다. 
 
“이 아이에게 건 스킬은 언제 풀어줄 거지?” 
 
[사상 감염]. 
벌써 몇 주가 흘렀음에도, 유상아는 아직까지 저항하고 있었다. 
니르바나가 싱긋 웃었다. 
 
“내가 풀어주는 게 아니야. 본인이 풀어야지.” 
 
니르바나의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일이었다. 
 
“미련한 일이군. ‘현재를 살겠다’라고 선언하기만 하면 될 것을, 저렇게까지 저항하고 있으니.” 
“짧은 생을 살기에 과거의 가치가 다른 것이지.” 
“짧은 생을 살기에 현재에 더 가치를 둬야 하는 것이다. 죽음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그 가치를 모르는 미욱한 존재여.” 
“네 멋대로 타인의 ‘현재’를 재단하지 마. 그녀는 충분히 ‘현재’를 살고 있으니까. ‘현재’를 모르는 것은 오히려 윤회의 시간을 반복해서 살아가는 네 이야기겠지.” 
“잊지 마라. 너를 살려두는 건, 어디까지나 네 ‘이야기’에 가치가 있을 때까지니까.” 
 
그 협박에도, 이수경의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다. 
마치 천일야화에 나오는 셰헤라자데처럼. 
천천히 다가온 니르바나가 테이블의 의자를 꺼내 앉았다. 
 
“오늘은 꼭 알아내야 할 정보가 있다.” 
“무엇을 알고 싶지?” 
“‘김독자’라는 화신.” 
 
빙긋 웃던 이수경의 입술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난 모르는 화신이야.” 
“시치미 떼도 소용 없다. 그 녀석이 네 아들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중립’ 녀석이 가르쳐 주었지.” 
“······그 애랑 나는 어릴 적에 헤어졌어. 나는 그 애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전혀 몰라.” 
“그건 들여다 보면 알겠지.” 
 
니르바나의 뒤쪽에서 환한 법륜(法輪)이 팽그르르 돌아가기 시작했다. 
법륜 안에서, 천수관음의 손이 뻗어 나왔다. 
거대한 손은 정확히 이수경의 머리를 덮었다. 
이수경은 그 손이 기분 나쁜 듯 노려보았다. 
 
“기억을 열어라. 그렇지 않으면 네 곁의 여자는 죽을 것이다.” 
“유치한 협박이야.” 
“그 유치한 협박에 너는 그간 굴복해왔지. 그게 인간이라는 존재다.” 
 
이수경은 멍한 눈을 한 유상아를 가만히 바라보다 한숨처럼 말했다. 
 
“······맘대로 해.” 
 
[전용 스킬, ‘인연생기(因緣生起) Lv.6’를 발동합니다!] 
 
천수관음의 손이 이수경의 머리를 굳게 파고들었다. 이수경의 이야기가 흘러나와 니르바나의 이야기에 얽혀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하나’가 된다는 감각. 니르바나는 그 감각에 몸을 떨었다. 씹고, 맛보고, 뜯고, 즐기고. 그는 진정으로 이야기를 미식하며 <스타 스트림>의 섭리에 다가서는 중이었다. 
 
“매번 놀랍군. 어떻게 인간이 필터링 된 미래의 정보들을 가지고 있지?” 
 
이수경은 필사적으로 기억들을 보호하려 했지만, 그녀가 김독자에게 들었던 단편적인 미래의 지식들은 인연생기의 흐름을 거역하지 못하고 니르바나에게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흥미롭군. 이것이 ‘김독자’의 본질인가.” 
“······.” 
“슬픈 어미로군. 자식에게 거짓말을 했어. 스스로의 독단으로 자식의 삶을 기만하다니.” 
 
이수경의 표정에 차가운 분노가 떠올랐다. 
 
“너는 그 아이에게 이길 수 없을 거야.” 
“······흥미로운 화신이란 건 인정하지.” 

그에게 무리한 ‘계승’을 강요할 정도의 화신. 
하지만 고작 인간. 거기까지일 뿐이다. 
허공을 쩌렁쩌렁 울리는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구원교주, ‘니르바나 뫼비우스’에게 대결을 신청한다.】 
 
놀란 니르바나가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김독자의 확성기. 
기다렸다는 듯, 이수경이 말했다. 
 
“그 애는 강하고 현명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자기가 가장 잘할 줄 아는 게 뭔지 알지.” 
 
【대결 장소는 오늘 오후 2시, 광화문이다. 대결자는 패왕 유중혁. 최강에 가장 가까운 두 사람이 싸우고, 최강을 가림으로써 서울 돔을 지킬 것이다. 네가 정말로 ‘현재’를 살고 있다면, 이 대결을 피하지 마라.】 
 
무려 ‘현재’를 구실로 삼다니. 그가 진짜 ‘구원교주’라면 피해갈 수 없는 대결이었다. 게다가 전체 확성기를 사용한 영리함도 놀라웠다. 만약 이 대결을 피하면, 그는 서울 돔의 모든 화신들은 물론이거니와 같은 구원교도들의 지탄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함정이라는 걸 빤히 알면서도 가는 것은 바보 짓이었다. 니르바나가 웃었다. 
 
“도발은 제법이군. 그런데 이걸 어쩌나? 어차피 내 목적은 ‘시나리오의 클리어’가 아니란 말이지. 내 목적은 위대한······.” 
 
【물론 네 ‘위대한 계획’에 이 대결의 승낙은 들어 있지 않겠지. 하지만.】 
 
이어진 김독자의 말에, 니르바나가 벙어리처럼 굳었다. 
 
【만약 네가 지금 온다면, ‘유중혁’과 하나가 될 기회를 주겠다.】 
 
파츠츠츳! 
 
얼마나 놀랐는지, 니르바나는 사용 중이던 [인연생기]의 끈을 놓쳐버릴 정도였다. 분노와 경이, 그리고 알 수 없는 치욕감 속에 니르바나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입술을 짓씹었다. 
이수경은 연결된 끈을 통해 니르바나의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위대한 하나와 결합하고 싶은, 더 커다란 이야기를 향한 욕망. 
그런 욕망을 비웃듯 이수경이 웃었다. 
 
“네가 질 거라고 했잖아.” 
 
 
* 
 
 
【좋다.】 
 
니르바나의 답변은 금방 돌아왔다. 
정말 될 줄은 몰랐다는 듯, 일행들은 하나같이 벙찐 얼굴들이었다. 
나는 어지러운 시야를 휘휘 저으며 일어났다. 
 
“독자 씨, 어떻게······ 아니, 그보다 괜찮으세요?” 
 
민지원은 내 왼쪽 눈에 든 시퍼런 멍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아까 유중혁의 이름을 팔 때 유중혁에게 맞은 흔적이었다. 
나는 눈두덩을 문지르며 물었다. 
 
“그 자식 벌써 갔나요?” 
 
심지어 잠깐 기절까지 했다. 
젠장, 그 무식하게 힘만 센 놈. 

“답변 들려오자마자 출발했어요.” 
“그럼 우리도 가죠.” 
 
모처럼 다 같이 모인 까닭인지, 이길영은 어딘가 신난 표정이었다. 
 
“독자 형, 그래도 이번엔 다 같이 싸우게 돼서 다행이에요.” 
“그래.”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니르바나는 분명 새로운 스킬을 계승했을 것이고, 이전처럼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유중혁도 다시 방비를 했으니, 이제 싸움의 승패는 쉽게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들의 싸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진짜 문제는, 내 머릿속에서 아까부터 시끄럽게 울리고 있는 메시지였으니까. 
 
[당신은 현재 서울시 최강의 화신입니다.] 
 
······자, 이제 어떡한다?
 
 
 
 
 
< Episode 28. 최강의 희생양 (2) > 끝

< Episode 28. 최강의 희생양 (3) >
 
 
 
 
 
우리 일행은 약속 시간 30분 정도를 남기고 광화문 인근에 도착했다. 
그 와중에도 내 머릿속에는 아까와 같은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당신은 현재 서울시 최강의 화신입니다.] 
 
젠장, 그만 알려줘도 이제 잘 알겠다고 말하고 싶다. 
솔직히 들을 때마다 당황스러운 감이 있었다. 
지금의 유중혁은 내가 전력을 다해도 승부를 장담하기 힘들고, 니르바나도 상성을 이용해 겨우 꺾는 수준인데, 대체 왜 내가 ‘최강’이라는 걸까. 
그런데, ‘멸살법’의 51회차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스타 스트림>에서 강함과 약함은 힘의 세기나 기술의 숙련도와는 무관하다. 모든 강약의 기준은 ‘이야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니르바나가 했던 말이기도 했다. 
강함과 약함은 결국 이야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 
 
“독자 씨!” 
 
멀리서 이현성과 정희원이 서로를 부축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험한 일을 함께 이겨냈기 때문인지, 부축한 어깨에서 예전보다 서로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느껴지는 듯했다. 정희원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선전포고 잘 봤어요. 아주 화려하던데요.” 
“몸은 좀 어떠십니까?” 
“난 괜찮아요. 현성 씨가 좀 다치긴 했는데······.” 
“전 완전 괜찮습니다!” 
“······하여간 허세는.” 
 
정희원의 말에 이현성이 끄떡없다는 듯 자기 가슴을 탕탕 쳤다. 
과장된 느낌이긴 했지만 정말 ‘허세’라고 보긴 어려웠다. 
‘강철의 주인’의 설화를 본격적으로 계승하기 시작한 이현성에게서, 벌써부터 이야기의 격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아마 이제 이현성은 서울 돔 내에서 5위 안에 들만한 화신이 되었을 것이다. 
설화를 계승함으로써 강해진다. 
지금의 이현성은 ‘강함은 곧 이야기’라는 설명 그 자체였다. 
 
이 세계에서 ‘강함’을 결정하는 것은 이야기의 ‘격’. 
 
아마 내가 ‘최강의 화신’에 랭크 된 것은 이번 생에 내가 쌓은 설화들이 죄다 불가능한 수준의 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회귀자 유중혁이나 환생자 니르바나가 쌓아온 이야기들 역시 만만치 않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지난 생의 것이었다. 
 
멀리서 광화문의 정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첫 번째 웨이브가 몰려온 뒤 벌써 세 시간 하고도 사십분이 경과했다. 네 시간마다 한 번씩 괴수들이 몰려올 테니, 곧 두 번째 웨이브가 올 시간이었다. 
 
“곧 5급 괴수종이 몰려올 텐데, 다른 화신들은 괜찮을까요?” 
“여기라면 괜찮을 겁니다.” 
 
내가 주변을 돌아보자, 정희원과 일행들의 시선도 함께 움직였다. 10분 전보다 인파가 많아졌다 싶더니, 사람들의 밀도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이건······.” 
 
그제야 정희원도 깨달은 듯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 
서울의 모든 사람들이 광화문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구원교주를 물리치자!” 
“놈을 죽여야 이 시나리오가 끝난다!” 
 
병장기를 든 사람들이 제각기 구호를 외쳐댔다. 
자유나 평등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거대한 개념을 말하기에 지금의 인간은 너무나 초라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생존을 위해 모였다. 
 
“패왕을 따르라!” 
“구원교를 부수자!” 
 
이현성이 복잡한 눈으로 그 정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독자 씨는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군요.” 
“예상은 했습니다.” 
 
아무리 신규 화신들이 많이 들어왔다 해도, 또 아무리 구원교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해도 여전히 서울 인구의 대다수는 ‘기존 화신’들이다. 
그들에겐 단지, 파벌을 넘어 모일 구심점이 필요했던 것이다. 
밀려오는 인파를 보며, 공필두가 탄식했다. 
 
“······한국이 망하긴 망했구만. 빌어먹을. 내 땅 돌려줄 국회의원 놈들은 죄다 죽어버린 건가?” 
“아저씬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말이 나와?” 
 
이지혜가 혀를 차자, 공필두가 입술을 비죽였다. 
 
“······유상아는 안 구할 거냐? 듣자하니 구원교주한테 붙잡혀 있다는 것 같은데.” 
“구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서둘러서는 안 된다. 아무리 니르바나라고 해도, 성운 ‘올림포스’의 단말을 함부로 건드리지는 않을 테니까. 
성운 간의 전쟁이라도 낼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지. 
허공에서 반짝이는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광화문 전체가 화신들의 열기로 뜨거워질 무렵이었다. 
 
+ 
 
<힌트 2> 
 
현재 서울 돔에서 아홉 번째로 강한 화신은 ‘곤충소년 이길영’입니다. 
 
+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이길영이 눈을 반짝였다. 
 
“형, 제가 9위래요!” 
“······말도 안 돼. 내가 저 꼬맹이 보다 약하다고?” 
“다들 그만 떠들고, 돌입 준비해.” 
 
일행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힌트가 발표 되었다는 건, 곧 두 번째 웨이브가 시작되다는 이야기. 
 
서울시의 외곽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더니, 괴수들의 스산한 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5급종부터는 경우에 따라 ‘소재앙’ 급으로 분류할 수 있는 괴물들이 등장한다. 즉, 평범한 화신들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 된다는 것. 다행히 서울시의 화신들이 광화문 인근으로 모두 모였으니, 영 불가능한 싸움은 아니었다. 지키는 지역이 좁을수록, 화신들의 수비는 더 용이해진다. 
 
“네 시간 안에 결착을 지어야 합니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4급 괴수종이 나오기 시작해요. 그렇게 되면 끝장입니다.” 
 
일행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소재앙’만해도 무서운데, 그 윗선의 괴수들이 난립하는 것을 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공필두와 이현성에게 화신들을 이끌어 수비망을 형성해줄 것을 부탁했다. 
 
“맡겨주십시오.” 
“흥, 대신 시나리오가 끝나고 나면 광화문은 내 땅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러든가. 맘대로 해.” 
 
안타깝게도 이번 시나리오가 끝나고 나면, 공필두가 원하는 ‘서울의 노른자위’는 이제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나머지 일행들을 이끌고 광화문의 중심으로 달려갔다. 
광화문의 중심지에 본래는 존재하지 않던 대형 돔이 설치되어 있었다. 
원래 있던 건축물은 아니었다. 
광화문에 스타디움 따윈 없으니까. 
즉, 저건 구원교가 임시로 증축한 공간인 셈이었다. 
돔의 내부는 아직 불투명한 상태였는데, 자세히 보니 꼭대기에 한 인형(人形)이 올라 한창 연설을 하고 있었다. 
 
―화신 여러분, 우리의 ‘진짜 적’은 누구입니까? 왜 우리는 지금 서로를 향해 창과 칼을 겨누고 있는 것입니까? 
 
목소리를 들은 정희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중립의 왕’이군요.” 
 
‘중립의 왕’ 전일도가, 돔의 꼭대기에서 마치 도깨비라도 된 양 [음성 증폭]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신 여러분들의 심정, 물론 이해합니다. 하지만 구원교든 다른 세력들이든, 우린 모두 약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시나리오에 휩쓸린 피해자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사실 여러분도 알고 계실 겁니다. 이곳에서 우리끼리 싸우는 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그게 바로 도깨비 놈들이 바라는 것이란 걸 말입니다! 
 
“닥쳐라! 먼저 싸움을 시작한 건 구원교도잖아!” 
“옳소! 죽여버려!” 
 
전일도가 가볍게 웃었다. 
 
―여러분, 곧 괴수들이 몰려온다는 건 알고 계시죠? 우리가 싸우게 되면, 서울은 멸망합니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건데!” 
 
―이번 시나리오가 ‘가장 강한 화신’ 하나만 희생하면 모두가 살 수 있다는 건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화아앗― 하는 느낌과 함께 불투명했던 스타디움의 겉면이 투명해지며, 그 내부가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사정없이 꽂히는 무대 위에, 두 존재가 서 있었다. 
 
―서울 돔의 화신들을 위해 손수 나선 두 영웅! 최강의 화신 후보들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우와아아아―! 
 
돔의 반대쪽에 몰려와 있던 구원교도들이 갈채를 쏟았다. 
 
“유중혁! 유중혁!” 
“니르바나! 니르바나!” 
 
급변한 분위기에 당황한 화신들이 주춤거리는 게 보였다. 
 
“뭐, 뭐야 저거!” 
“둘이 벌써 싸우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만약 이대로 시나리오를 클리어 할 수 있다면?」 
「최강이 패왕이든 구원교주든, 이 싸움을 통해 둘 모두가 죽는다면 우리야 좋은 거 아닌가?」 
 
모든 인간은 겁쟁이다. 
그리고 니르바나는 인간이 언제 가장 겁쟁이가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오지 않은 미래’를 가지려 할 때다. 
벌써 감언이설에 넘어간 몇몇 사람들은, 이제 투지를 꺾고 자신이 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돔을 향해 다가가 벽면을 내리쳤다. 
 
츠츠츠츳― 까아앙! 
 
[등장인물 ‘전일도’가 성흔 ‘공정한 결투 Lv.3’을 발동 중입니다.] 
[결투 당사자들을 제외한 모든 화신은 무대에 입장할 수 없습니다.] 
 
······벌써 ‘광해군’의 성흔을 발동했을 줄이야. 
이렇게 되면 유중혁과 니르바나, 즉 당사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전투에 개입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정희원과 이지혜를 향해 말했다. 
 
“전일도를 죽여요!” 
 
그러나 다음 순간, 스타디움 안쪽에서 폭음이 터졌다. 
 
콰아아아앙! 
 
마침내 유중혁과 니르바나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도깨비가 끼어든 것인지, 돔의 위쪽으로 거대한 스크린이 떠올라 있었다. 
 
[재밌는 일을 벌이고 있군요. 흥미로운 싸움이 될 것 같으니, 다들 보실 수 있게 제가 준비했습니다.] 
 
스크린 위로, 두 자루의 검을 휘두르는 유중혁과 백색 마력이 깃든 양수를 교차하는 니르바나의 모습이 보였다. 
 
파바바밧! 
 
유중혁의 [파천검도]가 천공을 수놓았고, 니르바나의 [만다라]가 폭풍처럼 쏟아지는 강기를 쳐내며 빈틈을 파고들었다. 
짧은 사이에 수십 합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조심스레 오고가는 공방 속에 치밀한 수싸움이 숨겨져 있었다. 
[전승] 혹은 [계승]된 스킬을 읽어 상대방의 패를 알아내려는 수싸움. 
저것이 바로 회귀자와 환생자의 대결인 것이다. 
먼저 본격적으로 움직인 것은 니르바나였다. 
팽이처럼 빠르게 회전하는 니르바나의 만다라가, 실처럼 마력을 내뿜더니 유중혁의 전신을 급습했다. 
 
스가가각! 
 
유중혁은 아슬아슬하게 백색의 마력 다발을 피하며,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얼핏 패착으로 보일 한 수였다. 녀석의 움직임에 맞추어 백색의 마력 다발들이 허공으로 치솟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중혁은 칼날을 빠르게 회전시켜 만다라의 마력을 받아쳤으나, 안타깝게도 두 다발을 놓치고 말았다. 
 
푸슈슈슛! 
 
왼쪽 어깨와 허벅지에서 피가 쏟아졌다. 화신들의 입에서 안타까운 목소리가 터졌다. 정희원을 피해 달아나는 전일도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 이대로 승부가 날까요? 
 
하지만 유중혁은 침착했다. 돔의 천장 가까이 뛰어 오른 유중혁은 [천총운검]의 검극을 아래로 한 채, 그대로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푸른 마력이 불꽃을 일으키며 검극에 깃들었다. 하지만 이미 니르바나는 방비를 마치고 있었다. 
 
“와라, 유중혁!” 

그 순간, 하늘을 가르는 [천총운검]의 크기가 급변했다. 
2척을 조금 넘던 길이의 장도가, 어느새 거검(巨劍)으로 바뀌더니 집채만한 크기로, 이내 고층 빌딩만한 크기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 칼을 잡은 유중혁의 팔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흡사, 거신(巨神)의 오른팔. 
 
[거신화]. 
 
깜짝 놀란 니르바나가 다급히 칼날의 반경을 벗어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하늘을 쪼개는 칼날의 무게가 그대로 지상의 니르바나를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앙! 
 
마치 멘틀을 찢는 듯한 폭음이 울리며, 무대 전체에 희뿌연 먼지가 차올랐다. 
 
“크으으으읏!” 
 
엄청난 타격을 받은 니르바나가, 십여 미터는 파인 구덩이 속에서 유중혁의 칼날을 받아내고 있었다. 화신들이 감탄사를 내질렀다. 그의 만다라에서 솟아난 수많은 팔들. 
 
[천수관음(千手觀音)]. 
 
진리를 지탱하는 불가(佛家)의 손이, 거신의 거검과 힘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만약 돔이 없었다면 일대가 진즉에 파괴되었을 무력의 충돌. 
현실성이 없는 압도적인 광경 앞에 모든 화신들이 넋을 잃었다. 
 
「저것이 서울의 최강을 가리는 대결.」 
 
최강은 난데······ 뭔가 씁쓸한 기분이다. 
그 와중에도 나는 쓴맛을 삼키며 전력으로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히 힘 대결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니르바나와 유중혁의 머릿속에서는 터질듯한 사고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 
 
「정신 방벽 레벨이 올랐나? 마력 파장이 강해졌군.」 
「생각보다 근접 스킬 숙련치가 낮아. 뭘 [계승]한 거지?」 
「왼쪽 어깨를 다친 것처럼 굴지만, 저건 함정이다.」 
「거신화는 지속 시간이 짧아. 열 합 안에 승부를 본다.」 
 ·····.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는 전장의 풍경이었다. 
서로 닿지 않는 두 생각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전장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 풍경 속에서 순수하게 감탄했고, 그 정경을 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이 돔의 누구보다 빠르게 이 대결의 ‘결과’에 도달했다. 
나는 훌쩍 뛰어 올라 스타디움이 내려다보이는 근처의 한산한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한수영. 보고 있는 거 아니까 빨리 나와.” 
 
뒤쪽의 공간이 갈라지며 새카만 어둠 속에서 한수영이 등장했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한수영은 몸에 착 달라 붙는 청색의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아마 [피스 랜드]에서 구한 히든 피스인 듯했다. 
 
“확성기를 듣고도 네가 안 왔을 리 없으니까.” 
“쳇.”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을 향해 이빨을 드러냅니다.] 
 
역시, 저 녀석이 한수영의 배후성이 되었군. 
한수영은 건들거리며 내 곁으로 다가와 난간 아래로 다리를 늘어트렸다. 
 
“그래서, 한참 재밌었는데 왜 불렀어?” 
“뭘 빠져서 보고 있냐? 시나리오 클리어 할 생각은 안 해?” 
“아, 누가 최강인지 알아야 클리어를······ 잠깐. 넌 아는 거야?” 
“알아.” 
“둘 중 누군데? 설마 유중혁?” 
“아냐.” 
 
그러자 한수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 저 자식 죽으면 세계가 회귀해버릴 텐데, 그럼 곤란하지.” 
 
한수영이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구원교주······ 쟤 죽이면 되는 거지?” 
 
벌써 강하 준비를 마친 한수영을 향해, 내가 고개를 저었다. 
 
“쟨 최강이 아냐.” 
“아냐? 그럼? 누구 죽이라고?” 
 
나는 말없이 한수영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의 눈동자가 불신으로 가득 차올랐다. 
 
“······설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시나리오의 피날레를 장식해 봐야지.”
 
 
 
 
 
< Episode 28. 최강의 희생양 (3) > 끝

< Episode 28. 최강의 희생양 (4) >
 
 
 
 
 
[저런, 생각보다 승부가 빨리 나겠는데요?] 
 
유중혁과 니르바나의 피 튀기는 혈전을 보며, 허공의 도깨비들이 킥킥댔다. 
 
[절반 까지는 아니더라도 삼분의 일은 죽을 줄 알았는데······.] 
[이야기가 재미없게 흘러가는군.] 
 
허공에는 무려 중급 도깨비 셋이 방망이를 탁탁 두들기며 스타디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깨비들의 등장에, 스타디움 바깥의 화신들이 얼어붙었다. 나타날 때마다 매번 어처구니없는 짓만 저지르니, 그럴 만도 했다. 
 
[이러면 모처럼 ‘힌트’를 주는 보람이 없잖아요?] 
[별 수 없지. 조금 더 빨리 공개하자고.] 
 
도깨비들의 말과 동시에, 허공의 전광판에 화신들의 랭킹이 우후죽순 떠오르기 시작했다. 
 
+ 
 
현재 서울 돔에서 여덟 번째로 강한 화신은 ‘월하신녀(月下神女) 유상아’입니다. 
 
현재 서울 돔에서 일곱 번째로 강한 화신은 ‘무장성주 공필두’입니다. 
 
현재 서울 돔에서 여섯 번째로 강한 화신은 ‘멸악의 심판자 정희원’입니다. 
 
+ 
 
순식간에 세 명의 랭킹이 공개되자,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폭발적이었다. 
 
“유상아가 누구야? 월하신녀?” 
“공필두 어르신이 일곱 번째였군!” 
 
정희원도 하늘에 떠오른 전광판을 보고 있었다. 
 
“어머, 내가 여섯 번째였네?” 
“난 열 번째인데······ 칫. 언니, 이 새끼 족치고 나랑 한 판 붙어 볼래요?” 
 
이지혜가 바닥에 포박당한 중립의 왕 전일도를 콱 짓밟으며 물었다. 
그러자 정희원도 그 위에 함께 발을 올려 놓으며 말했다. 
 
“흐흠, 미안하지만 그건 곤란해. 내 배후성이 널 좋아하거든.” 
“절요? 왜요?” 
 
정희원은 대답하지 않고 전일도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거기, 10위 안에도 못 들어간 전일도 씨?” 
 
서슬퍼런 칼날의 감각에 전일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희원, 어떻게 [사상 감염]에서 풀려났지?” 
“나한테 질문 하지마. 빨리 성흔 해제 안하면 죽여버린다?” 
“날 죽여도······ 내 성흔은······ 풀리지 않아.” 
 
전일도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까무러쳤다. 
어쩐지 일이 피곤해질 분위기라, 정희원은 전일도의 뒤통수를 한 대 더 갈겨준 뒤 김독자를 찾았다. 
 
“독자 씨?” 
 
하지만 주변에 김독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현재 서울 돔에서 다섯 번째로 강한 화신은 ‘순정강철(純情强鐵) 이현성’입니다. 
 
+ 
 
돔의 바깥 쪽에서 한창 괴수들과 격전을 치루던 이현성과 공필두도 그 메시지를 들었다. 공필두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순정강철’은 또 뭐야?”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현성은 모른 체 달려드는 5급 괴수종들을 향해 [태산 부수기]를 사용했다. [강철화]가 가능해진 그에게, 이제 소재앙 급의 괴수들도 적수는 아니었다. 
 
갸오오오오! 
두두두두두! 
 
하지만 괴수들의 숫자는 생각보다 많았고, 전선은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이현성은 이를 악문 채 무장성채를 보호하며 전열을 지켜 나갔다. 
 
‘독자 씨. 잘되고 있는 거 맞습니까?’ 
 
혹시나 김독자가 또 대답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았지만, 물론 김독자는 응답이 없었다. 
 
+ 
 
현재 서울 돔에서 네 번째로 강한 화신은 ‘흑염여제(黑炎女帝) 한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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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한수영도 허공의 전광판을 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진짜 내가 4위네?” 
 
한수영은 피를 흘리며 바닥에 늘어져 있는 김독자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부탁한 대로 한 번에 죽지 않을 정도로만 찔렀지만, 출혈이 심해 곧 죽을 것은 확실해 보였다. 
한수영은 쪼그리고 앉아, 피를 흘리는 김독자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김독자. 진짜 이대로 죽을 거야? 나 3위 만들어 주려고?” 
 
한수영은 찝찝한 얼굴로 김독자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보니 그럭저럭 봐줄만하게 생겼네.” 
 
그러나 물론 김독자는 대답이 없었다. 
찌르라기에 찌르긴 했지만, 막상 찔러 놓고 보니 김독자가 진짜로 죽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아바타도 없는 놈인데······ 설마, 아니겠지? 
 
“내가 왜 이놈 걱정을······.” 
 
불평을 늘어 놓던 한수영의 말이 잦아들었다. 
잠든 김독자의 입술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싶지만, 사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김독자도 힘들 것이다. 
 
멸망이 시작되기 전에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일반인이었던 존재. 
그런 존재가, 이제 세계를 결정하는 무대에 뛰어들어 주인공들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어서 김독자 또한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한수영은 잠깐 잊고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뻗어 김독자의 입꼬리를 위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눈은 찡그린 채 입은 웃고 있는 기묘한 얼굴이 되었다. 
한수영이 킥킥 웃었다. 
 
“······진짜 이상하다.” 
 
그때, 돔의 안쪽에서 거대한 충격파가 터졌다. 
마침내 유중혁과 니르바나의 싸움이 종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하하, 대망의 최종 3인만 남았군요. 누구인지 다들 궁금하시죠? 기다리세요! 곧 그 순위가 공개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두근두근한 마음을 감춥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손에 땀을, 아니 털을 쥡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궁금함에 머리를 닦습니다.] 
 
쏟아지는 성좌들의 메시지를 들으며, 유중혁은 칼을 내리찍고 또 내리찍었다. 
 
까가가가각! 
 
천수관음을 꿰뚫은 검극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냈고, 근육 깊숙한 곳에서 고장 난 기계음 같은 것이 들려왔다. 
유중혁은 자신의 존재가 조금씩 붕괴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거신화]의 부작용. 감당할 수 없는 힘을 품은 대가였다. 
언젠가 태고의 거신에게 이 힘을 받았을 때, 거신은 분명 경고했었다. 
 
「모든 능력치가 세 자리에 도달하기 전까지, 절대로 스킬을 사용하지 마라.」 
 
하지만 거신은 스킬을 전승하며 이미 예상했을 것이다. 
유중혁은 그의 경고를 듣지 않을 것이란 것을. 
그가 걸어야 할 길은 수라의 길이었고, 불가능한 길이었으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헤쳐나갈 수 있을까 말까 한 길이었다. 하지만 더 절망스러운 것은, 그 길의 끝이 아직도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고오오오! 
 
유중혁은 전신의 마력을 짜내 검격을 퍼부었다. 거대한 검신을 타고 지상을 향해 폭발한 마력이 파랑을 이루며 니르바나를 향해 덮쳐들었다. 
 
쿠구구구구! 
 
「파천의 검도는 폭발에 있다. 자신을 감추지 마라. 확장하고, 만개하고, 범람해라. 하늘이 네 위에 있는 것을 허락지 마라.」 
 
그것은 그에게 [파천검도]를 가르쳤던 스승, 파천검성(破天劍聖)의 말이었다. 
2회차의 중후반, 파천검성은 홀로 귀환자 연맹과 맞서 싸우다 혈마와 천마의 합공을 받고 죽었다. 그때, 유중혁은 파천이 부술 수 없는 두꺼운 하늘을 보았다. 세상에는 분명 그런 하늘도 있었다. 
 
“유중혀어억―!” 
 
하지만, 적어도 니르바나가 그 하늘은 아니었다. 
환생자 니르바나는 강하다. 
앞으로는 더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아직 천마나 혈마처럼, 혹은 파천검성이나 역설의 백청처럼 강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죽일 수 있다.’ 

유중혁은 온 힘을 다해 마력을 방출하며, 니르바나의 전신을 으깨어 나갔다. 거신의 검을 감당한 니르바나의 천수관음은 넝마가 되어 부서졌다. 마력에 불타오른 살점들이 조각조각 찢어져 나갔다. 
급하게 계승한 스킬에 한계가 다가온 것이다. 
 
“크아아아앗!” 
 
거격을 맞은 니르바나의 몸이 땅으로 푹 꺼지며, 막대한 충격파가 안쪽에서 솟아 올랐다. 
유중혁은 승리를 확신했다. 
타격은 충분했다. 
니르바나에게 숨겨둔 한 수가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 정도 타격이면 놈이 무슨 짓을 해도 역전할 수 없었다. 
 
‘놈은 김독자를 의식해서 근접 계열 스킬을 계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중혁은 남은 마력을 끌어 올리며 최후의 한 방을 준비했다. 놈이 구덩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최후의 일격을 먹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전용 스킬, ‘상급 정신 방벽 Lv.3’이 한계에 달했습니다.] 
[전용 스킬, ‘사상 백신 Lv.1’이 침식당합니다.] 
 
······뭐? 
그럴 리가 없었다. 
 
[사상 백신]은 니르바나의 [사상 감염]과 [영겁의 감옥]에 대한 카운터 스킬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설마.’ 
 
최악의 가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고 보면, 현생의 니르바나는 여전히 지난 생의 니르바나보다 약했다. 
만약, 니르바나가 근접 계열 스킬을 계승한 것이 아니었다면? 
김독자라는 변수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놈의 목적이 하나뿐이었다면? 
 
‘제길, [백팔번뇌(百八煩惱)]인가.’ 
 
[전용 스킬, ‘상급 정신 방벽 Lv.3’이 무너집니다.] 
[108개의 번뇌가 당신의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아차, 하는 순간 시야가 검게 물들며 오감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평소답지 않게 상념이 폭주했을 때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다. 구덩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니르바나가 웃고 있었다. 
 
“유중혁! 너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니르바나가 이 순간만을 인내해 왔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니르바나의 뒤쪽에서 빛나는 108개의 거대한 염주. 
 
“이제 그만 나와 하나가 되어라.” 
 
화아앗― 떠오르는 빛과 함께 유중혁은 자신의 정신으로 파고드는 번뇌의 파편들을 느꼈다. 이 스킬에 정면으로 맞서다 무너지게 되면, 그는 다음 회귀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 
 
‘겨우 여기서.’ 
 
지금 회귀해야만 한다. 
유중혁은 육체에 대한 마지막 통제력을 행사해 [진천패도]의 칼날을 자신의 목으로 가져다 댔다. 
 
―이 회차를 버린다고 다음 회차가 좋아질거라고 착각하지마. 
 
그런데 왜 이 순간, 그 녀석의 말이 떠오르는 것일까. 
 
―네가 버리려고 하는 이 회차가, '인간'으로서 이 세계의 끝을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회차’일지도 모르니까. 

참담한 심경 속에서, 유중혁은 처음으로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김독자······.’ 
 
그리고 시야가 차츰 어두워졌다. 
 
―자식이, 빨리도 생각한다. 
 
착각일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쉬고 있어. 
 
그 목소리에 안심하고 만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유중혁은 편안히 눈을 감았다. 
 
 
* 
 
 
천천히 눈을 뜨자 넘치는 힘이 느껴졌다. 
시야의 높낮이가 미세하게 달라졌고, 전신을 알맞게 감싼 전투 근육의 감각이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적당하게 분비된 아드레날린.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충만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을 발동합니다!] 
 
미친······ 이게 ‘진짜’ 1인칭 주인공 시점이었구나. 
이게 평소의 유중혁이 느끼던, 바로 그 감각이었다. 
이러니 강하지 않을 수가 있나. 
 
“······어떻게 [백팔번뇌]를?” 
 
멀리서 당황한 니르바나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스타디움 바깥을 흘끗 보았다. 
내가 유중혁에게 빙의했다는 것은 한수영이 일을 제대로 처리했다는 뜻이겠지. 예정대로라면, 내 숨이 완전히 끊어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5분 정도. 
사납게 눈을 치뜬 니르바나가 다시 나를 향해 스킬을 시전했다. 
 
[등장인물 ‘니르바나 뫼비우스’가 스킬 ‘백팔번뇌 Lv.2’를 발동합니다!] 
 
백팔번뇌. 본래는 깨달음의 경지를 상승시키기 위해 스스로의 정신을 겁박하는 스킬이지만, 타인에게 사용할 경우 끔찍한 정신착란을 불러오는 스킬. 특히 유중혁같은 ‘회귀자’에게 사용한다면 그 효과는 [사상 감염]이나 [영겁의 감옥]보다도 무시무시했다. 
물론, 내가 ‘유중혁’이었다면 그랬을 거라는 얘기다. 
 
[‘제4의 벽’이 ‘백팔번뇌’의 효과를 완전히 무효화시킵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 평범한 ‘유중혁’이 아니다. 
 
“이 느낌은······ 너는 누구냐?” 
 
역시, 환생자라 눈치는 빠르군. 
나는 재빨리 달려가 놈의 주둥이에 주먹을 꽂았다. 
 
뻐어억! 
 
“크아아악!” 
 
굉음을 일으키며 날아가는 니르바나의 모습. 
역시, 회귀자의 몸이 좋긴 좋다. 
[전인화]도 안 썼는데 이런 스피드와 파괴력이라니. 
육체의 힘이 다한 니르바나는 저항초자 하지 못하고 허공을 날았다. 
 
퍼어억! 
 
아주 통쾌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니르바나는 아직 버틸만한 얼굴이었다. 
그럴 법도 하다. 놈에게는 통증도, 죽음도 익숙할 테니까. 
나는 다시 한 번 놈의 얼굴을 갈기며 말했다. 
 
“수십 번이나 ‘죽음’을 겪었기에 오히려 ‘죽음’을 알 수 없다니. 우스운 일이지.” 
 
단 한 번만 일어나는 일이기에, 죽음은 비로소 죽음이 된다. 
죽음 이후가 없기에, 역설적으로 인간의 ‘현재’는 소중해진다. 
그렇기에 니르바나는 ‘죽음’도 ‘현재’도 모른다. 
 
“누구보다 ‘현재’를 살지 못하는 녀석이, ‘현재’를 설파하고 다니다니. 모순이 따로 없지.” 
“어떻게 나에 대해······ 커헉!” 
“잘 알지. 네가 유중혁과 하나가 되려는 이유도, 구원교를 전파하는 이유도, 이런 짓을 통해 최종적으로 무엇에 도달하려하는지도.” 
 
뻐어억!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지금 놈을 막아야 했다. 
니르바나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래도 환생자라고 녀석은 빠르게 평정을 회복하는 듯했다. 
까드득, 이를 간 니르바나가 외쳤다. 
 
“어리석은 중생아! 이런 짓을 해도 소용없다. 나를 죽여도, 유중혁은 죽는다. 시나리오가 파멸로 가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설령 이번 생을 망친다 해도, 세계는 반복 될 것이다. 나는 환생할 것이고, 유중혁은 회귀할 것이다! 그리고 우린 끝내 하나가 될 것이다!” 
 
그래, 그것이 환생자의 사고방식이겠지. 
하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 순간 전광판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참, 타이밍 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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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울 돔에서 세 번째로 강한 화신은 ‘패왕 유중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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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세 번째라고? 유중혁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유중혁은 절대 ‘다음 회차’로 가지 않아.” 
“뭐?” 
“무슨 일이 있어도 유중혁은 살아. 죽는 건 너, 아니면 나지.” 
“웃기지 마라! 나는 최강의 화신, 니르바나 뫼비우스다. 하찮은 중생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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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울 돔에서 두 번째로 강한 화신은 ‘구원교주 니르바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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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벌써 2위까지 발표를 할 줄은 몰랐네. 
허공을 올려다보니, 도깨비들이 재미난 듯 낄낄대고 있었다. 
아마 승부가 정해졌다고 판단한 것이겠지. 
니르바나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그런 일이 있을 리가······?” 
“니르바나, ‘현재’를 살고 싶다고 했지?” 
“설마······ 네가······?” 
 
결코 해석할 수 없는 화두(話頭)라도 만난 것처럼, 니르바나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 니르바나를 향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마치 사신의 속삭임처럼. 
 
“내가 너에게 ‘죽음’을 알려주마.”
 
 
 
 
 
< Episode 28. 최강의 희생양 (4) > 끝

< Episode 28. 최강의 희생양 (5) >
 
 
 
 
 
서울 상공에 세 번째와 두 번째 랭킹이 발표된 순간, 화신들은 패닉에 빠졌다. 
 
“씨발! 이게 뭐야!” 
“그럼 최강은 누군데?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화신들은 당연히 유중혁과 니르바나둘 중 하나가 최강의 화신이고, 이곳에서 둘 모두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1등이 가려진 순간 전력을 다해 그를 해치우고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려 했던 화신들은 난데없는 반전에 허둥지둥거리기 바빴다. 
 
그아아아아! 
 
설상가상으로 5급 괴수종 한 마리가 방어진을 꿰뚫고 난입했다. 방심하고 있던 화신들이 괴수의 이빨에 그대로 뜯겨 나갔다. 
 
“으아아악!”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밀려오는 5급 괴수종들의 숫자는 만만치 않았고, 화신들은 생각보다 단합력이 좋지 않았다. 
 
[ * 현재 화신 숫자 : 89041 ] 
 
그새 또 수천 명의 화신이 죽어 나갔다. 
 
콰지지지직! 
 
뒤따라 난입한 이현성이 [태산 부수기]로 재앙의 머리를 으깼다. 
 
“군인 아저씨!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이지혜와 정희원이 그를 향해 달려왔다. 
그들 역시 각자 방어선을 맡아 괴수들을 해치우던 중이었다. 
 
“니르바나가 최강이 아니라면 독자 아저씨 예상이 빗나간 거잖아요? 이제 우리 어떡해요?” 
 
일행의 계획은 어디까지나 ‘니르바나가 최강의 화신일 경우’를 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태로는 니르바나를 죽여도 시나리오가 끝나지 않는다. 이현성은 멍한 얼굴로 스타디움을 바라보았다. 
 
“제 생각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현성의 얼굴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 
 
 
“크아아악!” 
 
니르바나의 몸이 비명과 함께 허공을 날았다. 
 
“내게 죽음을 알려 주겠다고? 웃기지 마라!” 
 
무기력하게 얻어 맞으면서도, 니르바나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나는 죽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도, 진정한 죽음은 맞을 수 없단 말이다! 그렇게 쉽게 죽을 수 있었다면 이렇게 고생하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았어도 저렇듯 다양한 감정을 간직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구원교를 전파하는 목적일 것이다. 
나는 녀석의 멱살을 잡은 채 말했다. 
 
“사실은 죽고 싶구나. 그렇지?” 
“······!” 
“자신이 죽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의 죽음을 보며 위안을 삼는 거야.” 
 
모든 인간은 단 한 번 죽기에, 그 한 번의 생에 절실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그래서 너는 인간에게 구원교를 전파한 거야. 그들이 ‘단 한 번 뿐인 삶’을 살아가는 걸 보면서, 너 역시 그들의 삶에 녹아들고 싶어서. 그들이 느끼는 감정들을 너도 ‘하나’가 되어 공유하고 싶어서.” 
 
[등장인물 ‘니르바나 뫼비우스’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나는 니르바나를 알고 있었다. 
단순히 소설 속 인물이기에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니었다. 
자신이 절대로 될 수 없는 존재를 동경하는 니르바나. 
니르바나는, 나와 닮았다. 
 
“잘난 듯 떠들지 마라.” 
 
뜻밖에도 니르바나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정말로 분노했을 때 녀석은 그런 목소리를 낸다. 
 
“‘죽음’을 모르는 건 인간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죽음 이후에는 무엇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인간은 죽을 수는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죽음’을 겪을 수는 없다. 그건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죽음의 공포를 느낄 수는 있지.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만들고. 그게 평범한 인간과 너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네놈······!” 
 
니르바나의 주먹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나는 놈의 주먹을 쉽게 잡아챘다. 
 
“그래서 유중혁과 ‘하나’가 되고 싶었던 거냐?” 
“······?” 
“유중혁과 ‘하나’가 됨으로써, 네 존재를 지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잖아. 그렇지?” 
 
니르바나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다. 
 
“[환생]은 최상위 성좌의 성흔. 그걸 지우기 위해서는 그것보다 더 높은 성좌의 권능에 기대는 수밖에 없으니까.” 
 
나를 바라보던 니르바나가 이를 갈며 말했다. 
 
“······너는 내 상상을 초월하는 놈이구나.” 
“그런 말 자주 듣지.” 
“그만 죽여라. 네 말대로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으니까!” 
 
니르바나의 꺼져가는 눈길에 복수심이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명심하는 게 좋을 거다. 나는 몇 번이고 되살아날 것이다. 몇 번이고 다시 살아나서, 네놈을 죽이고, 최악의 고통을 알려줄 것이다. 마치 네 어미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나는 흠칫 놀랐다. 
 
“······어머니를 만났나?” 
“아주 훌륭한 어머니더군.”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흔들립니다.] 
 
“굴복시키는 재미가 있는 여자였지. 네놈도 알겠지만, 나는 고결한 정신을 타락시키는 걸 좋아하거든.”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흔들립니다.] 
 
“내 눈앞에서 몸부림치며 살려달라 애원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아주 선명해.” 
 
세상에는 그런 도발이 있다. 
그게 도발인 줄 알면서도 걸려들 수밖에 없는, 그런 도발. 
어머니가, 그랬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거세게 흔들립니다.] 
 
“하하하! 걸렸구나!” 
 
시야가 흔들리며 세상이 까맣게 물들었다. 
 
[등장인물 ‘니르바나 뫼비우스’가 ‘백팔번뇌 Lv.2’를 발동합니다!] 
 
의식이 어딘가로 빨려들더니, 다음 순간 나는 스타디움이 아닌 다른 세계로 내던져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사부, 도망가요!」 
「제발, 제발 이 세계를 구해줘.」 
「당신은 이 세계를 버리면 그만이겠지. 하지만 나는······!」 
 
깊은 한과 원망이 깃든 목소리들. 
나는 이 세계가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제4의 벽]이 흔들리며 나타난 장소. 
이곳은 번뇌로 들끓는 유중혁의 내면이었다. 
 
“유중혁! 드디어 나를 허락했구나! 그리고······ 역시 네놈도 함께 왔군.” 
 
흉측한 몰골의 니르바나가 눈앞에 있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순간 그런 반격을 준비하다니, 역시 환생자는 환생자다. 
 
“네가 여기에 들어온 것은 실수였다.” 
 
니르바나의 발 밑에 만다라의 문양이 나타났다. 
영혼의 내면은 개연성의 영향을 적게 받는 장소. 
이곳에서, 니르바나는 자신이 쌓아온 이야기의 힘을 고스란히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쿠구구구구! 
 
니르바나의 몸집은 순식간에 거인처럼 커졌다. 
무수한 이야기를 쌓은 영혼의 중압감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역시, 그만한 이야기를 쌓았으니 당연한 이야기겠지. 
등에는 수백 개의 팔이 날개처럼 자라났고, 다리는 새의 깃털과 뱀의 비늘로 반반씩 덮여 있었다. 주둥이는 늑대처럼 튀어나왔고, 머리 위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뿔들이 자라나 있었다. 
마치, 이제껏 그가 겪은 모든 환생을 집약한 듯한 모습. 
 
[나는 니르바나 뫼비우스.] 
 
저것이 니르바나의 본신(本身)인 것이다. 

[불행한 중생을 열반으로 인도하는 존재.] 
 
자신만만한 모습이 좋아 보인다. 
하지만 니르바나는 모를 것이다. 
나는, 일부러 녀석의 [백팔번뇌]에 당했다는 것을. 
내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니르바나. ‘환생’의 원리가 뭔지 알아?” 
 
단지 이쪽을 보는 것만으로 공간이 불길하게 떨렸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네 영혼은 ‘만다라의 수호자’에게 구속되어 있어서 죽어도 명계로 가지 않아. 대성좌의 고유한 율법에 따라, 현생에서 막 태어난 다른 육체로 반복해서 깃들 뿐이지.”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이냐?] 
 
“너는 불멸이 아니야. 육신은 다시 태어나도, ‘영혼’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지.” 
 
[헛소리를!] 
 
니르바나의 날개에서 나온 수백 개의 팔들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폭포처럼 퍼붓는 천수관음. 현실에서 저것을 맞았다면, 나는 바로 온몸이 터져 죽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이라면 다르다. 
지금 나는 유중혁에게 빙의했다. 
그렇다는 것은 곧, 이곳은 나의 ‘내면’이기도 하다는 이야기였다. 
 
츠츠츠츠츳! 
 
달려들던 천수관음의 폭포가, 코앞에서 전류를 튀기며 녹아 없어졌다. 
당황하는 니르바나의 모습. 
나는 내 주변을 감싸는 무수한 페이지들을 보았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합니다.] 
 
책장 넘기는 소리와 함께, 주변으로 페이지들이 요란하게 흩날리기 시작했다. 
새하얀 페이지 위를 떠도는 글씨들. 
내가 읽어온 무수한 텍스트들이 거대한 벽이 되어 주변을 덮고 있었다. 
경악한 니르바나가 재빨리 탈출을 시도했으나, 상황은 이미 늦었다. 
 
파츠츠츳! 
 
새파란 스파크와 함께 벽에 부딪친 니르바나의 몸이 녹아내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성좌조차 튕겨낼 수 있는 [제4의 벽]. 
나는 궁금했다. 
어쩌면, 이것을 이용해서 ‘환생자’를 영멸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어서 이 벽을 풀어라! 이것은, 이것은 대체······!] 
 
당황한 니르바나가 다시 벽을 바라보았다. 
눈이 멀듯 환한 빛이 벽 위의 문자에서 뿜어져 나왔다. 
 
「세계가 있기에 계속해서 환생하는 것이라면, 이 세계를 지우면 된다.」 
 
[이건······, 설마 이것은······!] 

자신의 진실이 적힌 페이지를 보며 니르바나가 경악성을 토했다. 
 
「유중혁이라면 나를 세계의 끝에 데려다 줄 수 있겠지.」 
 
[어, 어떻게 네놈이 이런 걸 가지고 있는 것이냐!] 
 
나는 니르바나를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세계의 끝까지 가지 않아도 돼.” 
 
벽에 문자들이 떠오를 때마다, 니르바나의 거대한 몸이 조금씩 해체되기 시작했다. 
갈가리 찢겨 나온 니르바나의 몸이 무수한 문자들로 분리되어, 하나둘 [제4의 벽] 속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너는 여기서 죽는다.” 
 
갈갈이 분해되는 자신의 영혼을 보는 니르바나의 얼굴에 낯선 감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마침내 환생자 니르바나는, 수백 년의 방황 끝에 비로소 ‘단 한 번의 삶’에 도달했다.」 
 
벽면에 떠오르는 문자열들을 보며, 니르바나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 하하, 하하하.] 
 
「그는 처음으로 진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니르바나는 환희에 젖은 표정이었다. 
 
「이것이······ 죽어 간다는 것.」 
 
[그렇구나. 이것이 바로.] 
 
「그 순간, 니르바나는 이것이 자신이 오래도록 기다려 온 순간임을 깨달았다.」 
 
수백 년이 넘는 세월. 무수한 환생의 끝에 도달한 장소. 
오래도록 이 날을 기다려온 고고한 승려처럼, 니르바나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가 눈을 감았음에도, 벽면에는 계속해서 니르바나의 내면이 쓰여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일까. 그토록 바라왔던 일인데.」 
 
니르바나의 전신이 자잘한 균열로 뒤덮였다. 
발, 다리, 허벅지, 흉부······. 
부서진 조각들은 고스란히 [제4의 벽] 속으로 빨려들었다. 
 
「나는 왜, 이것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죽음의 공포. 
죽는다는 것. 이후가 없다는 것. 생각할 수도,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조차 없다는 것.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순간 감겼던 니르바나의 눈이 번뜩 떠졌다. 
 
「싫어... 싫다!」 
「그러나 입이 흩어진 니르바나는 그것을 외칠 수 없었다.」 
「사라지는 그의 팔이 나를 향해 무기력하게 내뻗어졌다.」 
「애초에, 실존이란 그렇게 아름다운 게 아닌 것이다.」 

죽음에 달관한 필멸자는 없다. 
모든 존재는, 죽음 앞에서 무력하다. 
 
「안돼! 제발! 그만둬! 나를 죽이지 마!」 
「그래, 네 어머니의 비밀. 난 그걸 알고 있어! 네 어머니가 끝내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내가 알고 있다고―」 
「살려줘. 제발. 나를 살려준다면······!」 
 
나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소설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최후를 목격하듯이. 
 
「추하게 발버둥치던 니르바나는, 마지막 순간 자신이 가장 증오하던 말을 입으로 되뇌었다.」 
「죽고 싶지 않아.」 
 
이윽고, 니르바나의 영혼이 완전히 사라졌다. 
 
[‘제4의 벽’이 등장인물 ‘니르바나 뫼비우스’를 포식했습니다.] 
 
처음으로 듣는 메시지였다. 
극장 던전의 보스를 죽였을 때와는 벽이 다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일순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제4의 벽’이 만족한 듯 웃습니다.] 
 
니르바나를 죽인 것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도 [제4의 벽]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다. 
 
[‘제4의 벽’이 탐욕스런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는 벽. 
니르바나를 삼킨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벽이 나를 향해 입맛을 다셨다. 
츠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벽면 위에 뭔가가 떠올랐다. 
 
「그 순간, 김독자는 생각했다. ‘언젠가 나 역시 이 [벽]에 먹히는 것은 아닐까.’」 
 
[‘백팔번뇌’가 해제됩니다.] 
 
그리고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벽도, 니르바나도, 유중혁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처럼. 
 
······. 
 
숨을 헐떡이며 눈을 깜빡이자, 나는 광화문의 스타디움으로 돌아와 있었다. 
눈앞에서 니르바나가 가루로 흩어지고 있었다. 
오랜 방황의 끝에 그는 마침내 안식을 찾은 것이다.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나는 서서히 유중혁을 발을 움직여 앞으로 걸어갔다. 
도깨비가 말하고 있었다. 
 
[이런. 벌써 시나리오의 마지막이 다가왔군요. 이제 최강의 화신이 누구인지 발표해야겠죠?] 
 
피로감 때문인지 발을 한짝 내미는 것만으로 힘이 부쳤다. 
도깨비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왕왕 울렸다. 
 
[최강의 화신, 그는 바로······.] 
 
그 순간, 의식이 급격하게 흐려지며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다 된 모양이었다. 
마지막 말을 채 듣지 못하고 의식이 사라졌다. 
 
[정신력이 과도하게 소모되어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를 해제합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 해제되었습니다.] 
 
. 
. 
. 
 
[당신은 사망했습니다.] 
 
 
* 
 
 
그리고 이틀 뒤, 나의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 Episode 28. 최강의 희생양 (5) > 끝

< Episode 29. 별자리의 연회 (1) >
 
 
 
 
 
Epiosde 29. 별자리의 연회 
 
 
 
 
광화문의 광장에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괴수들이 물러간 거리는 폐허에 가까웠다. 
붕괴한 언론사의 로고가 짓밟힌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광화문의 상징이었던 세종대왕상과 이순신상은 통째로 망가져 있었다. 
 
“아······.” 
 
서울이 자랑하던 문명은 붕괴했고, 문화는 소실되었다. 이야기만이 남았으나 광화문에 남은 사람들 중 누구도 그 이야기를 원했던 사람은 없었다. 
몇몇 화랑들이 내려가 땅을 파는 것을 보며, 이지혜가 입을 열었다. 
 
“······정말 죽은 거예요?” 
 
그러나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답을 하지 않은 이유는 제각기 달랐다. 
정희원도, 이현성도, 이길영도, 신유승도. 
각자 생각이 있었지만 차마 입으로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나 그 생각이 틀릴까봐.
혹시나······ 그 생각이 맞을까봐. 
 
“아니······. 정말로?” 
 
김독자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여덟 번째 시나리오가 끝난 뒤 한 시간이 지날 무렵이었다. 
 
“아저씨! 정신 좀 차려봐! 장난이지?” 
 
사인은 과다출혈. 
처음에는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상황이 벌어지는 내내 보이지 않았던 김독자가, 갑자기 죽었다니. 
그래도 일행들은 크게 당황하지 않고 기다렸다. 
몇 번인가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화룡종을 사냥했을 때도. 
그리고 범람의 재앙에 맞섰을 때도. 
 
김독자는 죽었다 살아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기다렸다. 
당연히 평소처럼 다시 살아날 거라고, 그리고 특유의 씩 웃는 미소로 일행들을 보며, 약간은 소심하면서도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질 거라고. 
그러나 김독자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하루가 지나고. 이틀 째의 밤이 찾아왔을 때도. 
김독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시신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넋이 나간 일행들을 독려해 관을 만든 것은 상황을 보다 못한 민지원이었다. 
 
“······그가 서울시의 최강이었어요.” 
 
그녀만이 누구도 하지 않았던,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시작했다. 
김독자를 알았지만, 김독자와 인연이 옅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을. 
민지원은 김독자의 희생을 알렸다. 
모두가 최강자의 다툼에 열광해 있을 때, 홀로 조용히 죽음을 선택했던 진짜 최강자의 이야기를 퍼뜨렸다. 
사람들은 모두 김독자를 다른 별명으로 불렀다. 
실제로 도깨비가 최강자를 호명했을 때, 사람들의 귀에 그 별명은 각자 다른 이름으로 들렸다. 
 
왕이 없는 세계의 왕. 
고독한 메시아. 
가장 못생긴 왕······. 
 
각자가 들은 말은 달랐지만, 그 말이 수렴하는 방향은 모두 같았다. 
서울 돔의 최강은 김독자였고, 김독자는 서울을 위해 죽었다. 
서울은, 김독자에게 구원받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죽어간 구원자. 
민지원은 그런 김독자를 위한 관을 만들었다. 
 
김독자의 시신이 관 속에 뉘어지는 것을 보며, 눈물을 머금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게 누구냐며 어리둥절한 사람들도 있었고, 뒤늦게 이야기를 듣고서 탄식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신유승은 울고 있었다. 
 
“아저씨······.” 
“유승아.” 
 
정희원이 신유승을 관에서 떼어냈다. 이현성은 아직까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고, 이길영은 현실을 도피하는 듯 멍한 얼굴이었다. 
 
“독자 형이 죽었을 리 없어.” 
 
그리고 이지혜는, 주먹을 부르쥔 채 절규했다. 
 
“······사부는 어디 간 거야?” 
“······.” 
“사부는 이 아저씨 살릴 수 있잖아! 설화 언니는 어디 있었던 건데!” 
 
그러나 그 원망을 들을 유중혁은 이미 이곳에 없었다. 
급기야 이지혜의 눈에도 서러운 울음이 맺혔다. 
 
“아저씨는······.”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김독자는 죽었고, 이제 다시는 살아나지 않는다. 
 
[곧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그들은 이제, 김독자가 없는 세계를 살아가야 했다. 
 
 
* 
 
 
「그들은 이제, 김독자가 없는 세계를 살아가야 했다.」 
 
만약 이게 ‘멸살법’이었다면, 분명 그따위 문장이 쓰여 있었겠지. 
 
“음, 날 위해 이렇게까지 슬퍼해주다니.”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성대도, 입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렇게 정신력이 회복될 때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상황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게 위안이었다. 
‘1인칭 시점’을 사용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유중혁에게 지나치게 이입해 있었던 까닭인지 현재 작동이 불가한 상태였다. 
 
[과도한 몰입으로 ‘1인칭 시점’의 사용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윽고 관짝에 흙이 덮이기 시작하자, 몇몇 사람들이 소리쳤다. 
 
“가장 못생긴 왕이시여!” 
 
제기랄. 정말 도깨비 새끼들이 저따위 별명을 나한테 붙였다고? 
분명 비형 놈의 짓이 틀림없다. 
울먹이며 내게 꽃을 던지는 신유승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점점 묘해진다. 
일행들은 이제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살아서 자기 장례식을 보다니. 그런 인간은 아마 나뿐이겠지. 
 
“혀어어어어엉―!” 
 
끝까지 태연한 척 굴던 이길영 녀석도 관에 흙이 반쯤 덮이자 관짝을 향해 달려들어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기 시작했다. 이지혜도 만만찮았다. 
 
“아저씨이이이―!” 
 
평소에 틱틱대기만 하던 애가 나 죽었다고 저 난리를 피워대다니······ 감동적이긴 하네. 여기서 내가 관짝을 콱 뚫고 일어나야 재밌는 광경이 펼쳐질 텐데.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소위 말하는 ‘쿨타임’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특성 ‘여덟 개의 목숨’의 특전이 발동 중입니다.] 
 
부활 자체는 별 걱정이 없었다. 
[피스 랜드]에서 ‘불살의 왕’을 내주고 얻었던 특성, ‘여덟 개의 목숨’. 
성좌 [야마타노 오로치]를 죽이고 얻은 성혈과 살점으로 빚은 술을 마셔야만 얻을 수 있는 이 특성은, 말 그대로 사용자에게 ‘여덟 개의 목숨’을 제공한다. 
 
[뱀의 첫 번째 머리를 희생합니다.] 
[해당 머리의 능력은 ‘인망(人望)’입니다.] 
 
[야마타노 오로치]의 머리에는 각각 다른 종류의 능력들이 잠들어 있고, 부활 시에는 해당 능력에 관계된 축복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만 보면 나쁘지 않다. 문제는, 이 특전으로 부활할 시 ‘불살의 왕’ 때와는 다르게 대기시간이 있다는 것이었다. 
 
[부활을 위해 72시간의 대기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남은 대기 시간 : 24:07:12] 
 
아직도 하루가 더 지나야 하다니······ 곧 다음 시나리오가 시작될 시기인데. 
나는 한동안 내 장례식을 더 지켜보다가 시점을 바꾸었다. 어쩐지 더 이상 지켜보다가는 미안해져서 부활하지 못할 것 같았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의 관찰 인물을 변경합니다.] 
 
그러자 새로운 화면이 떠올랐다. 
고풍스러운 마감으로 꾸며진 지하실. 
한쌍의 남녀가 그곳에 있었다. 
 
“······유중혁 씨?” 
 
여자는, 물론 유상아였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사지가 묶여 있었던 그녀를 풀어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유중혁이었다. 
아마도, 내가 녀석의 육체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부탁을 들어주려는 것이리라. 
 
“독자 씨는 어떻게 됐어요?” 
“김독자는 죽었다.” 
 
유중혁의 무뚝뚝한 선언에, 유상아는 세상이 멸망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 나는 왜인지 모르게 조금 찡해졌다. 그래도 김독자의 28년이 아주 형편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다시 살아날 거다.” 
“······살아난다고요? 어떻게······.” 
“방법은 모른다. 하지만 놈이 그렇게 죽을 리 없어.” 
 
하긴, 유중혁이야 일전에 내가 부활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까. 저 놈은 몇 년이 지나도 분명 내가 다시 살아날 거라 믿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 
 
근데 주먹은 왜 불끈 쥐는 건데. 
잠시 침묵하던 유중혁이 충격에 빠져 있던 유상아를 향해 말을 걸었다. 
 
“김독자의 가족은 어디 있지?”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자식, 내가 안 시킨 것까지 하려고 하잖아? 
가족이라는 말에 유상아의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다급히 전할 말이 있는 듯했다. 
 
“어머님께서는······.” 
 
안타깝게도 그 순간, 화면이 꺼지며 메시지가 들려왔다. 
 
[정신력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종료됩니다.] 
 
이것이 영혼체의 안 좋은 점이다. 한 번 소모된 정신력의 회복이 더디다는 것. 육체가 없는 상태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백(魄)이 없는 혼(魂)은 한쪽 전극을 잃은 전지나 마찬가지다. 육체가 없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정신은 피폐해진다. 귀신들이 미쳐버리는 것도 비슷한 연유다. 
 
‘니르바나가 어머니를 죽였을까?’ 
 
그렇기에, 나 역시 미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질문들을 이어 나가야 했다. 
 
‘아마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어머니다. 
그리고 니르바나 또한, 누군가를 그렇게 쉽게 죽이거나 고문하는 성격이 아니다. 적어도 ‘구원교주’로 활동하는 동안, 니르바나는 나름 신사적인 데가 있는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니르바나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걸렸다. 
녀석은, 어머니가 내게 숨긴 비밀이 있다고 했다. 
어머니가 나한테 숨기고 있었던 비밀?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알고 싶지 않은지도. 
간접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성좌, ‘아비도스의 주인’이 당신의 영혼을 부릅니다.] 
 
한동안 간접 메시지가 전혀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 말에 조금 당황했다. 
······아비도스의 주인? 
나는 곰곰이 ‘멸살법’의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비도스(Abydos)는 고대 이집트의 수도를 뜻한다. 
 
[성운, <파피루스>가 당신에게 ‘소생(甦生) 설화’를 하사하고자 합니다.] 
 
······호오, 이것봐라? 
<파피루스>는 이집트 신화의 성운이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당신의 영혼을 부릅니다.] 
 
어? 메타트론도? 
생각하기가 무섭게, 다음 메시지가 떠올랐다. 
 
[성운, <에덴>이 당신을 ‘메시아의 길’로 이끌고자 합니다.] 
 
소생 설화에, 메시아······?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을 하위 성좌로 거두고자 합니다.] 
[성운, <올림포스>가 당신을 위한 자리를 마련합니다.] 
 
······얼씨구? 
 
[성좌, ‘12월 25일의 주인’이 당신을 부릅니다.] 
[성운, <베다>가 당신에게 ‘부활의 축일’을 선물하고자 합니다.] 
[성좌, ‘서천꽃밭의 꽃감관’이 당신의 영혼을 부릅니다.] 
[성운, <탐라>가 당신을 원합니다.] 
 
인도 신화에 한국 신화까지? 
그 외에도 수많은 메시지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거대한 성운에서부터 조그만 성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성운에서 내게 러브콜을 날려대고 있었다. 
가만 보니, 이 녀석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 나한테 자기들 신화를 덧씌워보겠다 이거지? 
 
[몇몇 성좌들이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합니다.] 
[몇몇 성좌들이 남의 신화를 도둑질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디오니소스, 미트라, 한락궁이······. 
방금 나를 부른 성좌들은, 모두가 ‘부활’에 관계된 이들이었다. 
 
[성좌들이 당신의 부활을 두고 신경전을 벌입니다.] 
 
즉, 이놈들은 지금 내 설화에 한 다리씩 걸쳐 보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이었다. 
 
모든 설화는 회자(膾炙)를 통해 강화된다. 
 
필멸자들이 회자와 전승을 거듭할수록, 해당 설화의 영향력은 강해진다. 
그런데 어느날, ‘김독자’라는 놈이 3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해 다음과 같은 말을 외쳤다면······? 
 
“나는 김독자다!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축복 있으라!” 
 
그리스도 대신에 미트라나 디오니소스가 들어가도 상관없다. 
사람들은 놀라 나자빠질 것이고, 신화는 그 자리에서 재현될 것이다. 
경악한 화신들은 그 이야기를 퍼뜨릴 것이고, 설화의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하겠지. 
그 결과 해당 설화와 관계된 성운은 막대한 개연성을 얻어 시나리오에 간섭할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즉, 지금 성운들이 이 난리를 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연유 때문이었다. 
나는 졸지에 부활 하나로 시나리오를 좌지우지할 힘을 얻게 된 셈이었다. 
 
[한반도의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에 주목합니다.]
 
 
 
 
 
< Episode 29. 별자리의 연회 (1) > 끝

< Episode 29. 별자리의 연회 (2) >
 
 
 
 
 
내 선택에 따라 한반도에서 성운들의 운명이 뒤바뀐다. 
얼핏 보면 내가 ‘갑’처럼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사실은 그렇게 마음 편한 ‘갑’의 자리는 아니었다. 
 
[성좌들이 신화의 정통성을 두고 신경전을 벌입니다.] 
 
지금은 내가 선택권을 가진 것처럼 보여도, 문제는 선택이 끝난 후다. 
‘부활 설화’는 성운들 사이에서도 표절 문제로 민감한 설화. 
특히 <에덴>과 <베다>의 경우는 그 대립이 심했는데, 내가 자칫 한쪽을 선택하고 나면 다른 쪽과 완전히 등을 돌리는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 
 
아직 나는 성좌도 되지 못한 새싹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부 거절하자니, 자칫하면 모두에게 원성을 살 수도 있을 것 같고······.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빠른 선택을 원합니다.] 
 
망할. 
 
부활한 뒤 일행들에게 받을 지탄도 두려운데, 자칫하면 성좌들 사이에서도 공공의 적이 될 판이다. 
어떻게 해야······.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성좌들의 분란을 중재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중요한 것은 화신 본인의 선택임을 강조합니다.] 
 
뜻밖에도 페르세포네가 내 편을 들어 주었다. 
근데 이 아줌마가 왜 나를 돕는 거지? 
 
[일부 성좌들이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의 개입에 불만을 품습니다.] 
[몇몇 성좌들이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에게 해결책을 묻습니다.] 
 
······.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화신 ‘김독자’를 ‘연회’에 초청할 것을 권합니다.] 
 
······연회? 
 
그리고 잠시 후. 
 
[성운, <에덴>이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성운, <베다>가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 
[다수의 성좌들이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뭔가,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내 존재가 염가에 팔려 나간 느낌이었다. 
어쩐지 허무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데, 갑자기 도깨비 영기가 들이닥쳤다. 
 
[허억, 허억. 독자 어르신.] 
 
급하게 온 모양인지, 영기는 허공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가보셔야 할 곳이 있습니다.] 
 
‘······어디?’ 
 
[아, 아마도 가시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지금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어딜 가자는 건지 대충 감은 왔다. 
이 정도로 긴장한 것을 보면 성좌들의 압력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어? 하는 느낌과 함께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더니, 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부활은 아니었고, 말하자면 영혼체가 형태를 가지는 것에 가까웠다. 비록 부유령(浮游靈)의 상태이긴 했지만, 임시로 형상이 빚어진 것이었다. 
 
[으음. 그게, 중요한 자리니까······.] 
 
나신으로, 심지어는 생식기도 없이 휑하던 영혼체 위에 따스한 질감의 와이셔츠와 정장이 나타나 스르르 감겨들었다. 마치 나를 위해 태어난 듯한 옷감의 감촉. 
 
[머나먼 밤하늘에서 오랜 이야기들이 반짝입니다.] 
[현재 <별자리의 연회>가 개최 중입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을 <별자리의 연회>에 파트너로 초청하였습니다.] 
 
<별자리의 연회>. 
<배후 선택>과 함께,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을 위해 마련된 이벤트. 오직 성좌들만이 초대받는 연회에, 아직 성좌위에도 오르지 못한 내가 초청된 것이다. 
나는 부활까지 남은 시간을 살폈다. 
 
[남은 대기 시간 : 23:54:12] 
 
23시간. 
잠깐 다녀오는 것 정도라면 시간은 충분했다. 
시기는 좀 빠르지만, 분명 한 번은 가야 할 자리였다. 
 
“좋아, 가자.” 
 
드디어, 성좌들을 만나러 갈 때가 온 것이다. 
 
 
* 
 
 
[곧 초청하신 분께서 사절을 보내오실 겁니다.] 
 
“알겠어.” 
 
[서, 성공적인 데뷔를 기원합니다!] 
 
영기는 결의 어린 눈빛으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이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자, 근처는 온통 새하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는 이 길이 <스타 스트림>을 잇는 지류 중 하나인 ‘구름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수많은 도깨비들이 이 길을 타고 차원을 이동하는 것이다. 
 
[당신은 메인 시나리오 지역에서 임시로 이탈하였습니다.] 
[지구 시간으로 24시간 안에 시나리오에 복귀해야 합니다.] 
[제 시간 안에 복귀하지 않을 시, 당신은 시나리오 규정에 따라 처분됩니다.] 
 
‘처분’이라니. 
지난 번, 명계에 갈 때도 그랬지만 시스템은 정말 말을 섬뜩하게 한다. 
 
[히든 시나리오 ― ‘별자리의 연회’가 시작됩니다!] 
 
+ 
 
<히든 시나리오 ― 별자리의 연회> 
분류 : 히든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연회에 참가해 성공적으로 데뷔를 마치시오. 
제한시간 : 24시간 
보상 : 100000코인, 일부 성좌들의 호의 또는 멸시 
실패시 : ― 
 
+ 
 
······하여간 <스타 스트림>은 별의별 곳에 다 히든 시나리오가 숨어 있다.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생각보다 코인 캘 곳은 많단 말이지. 
 
키이이이잉! 
 
멀리서 네 마리의 말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광원처럼 새하얀 빛을 내뿜는 준마들. 말들은 ‘황금빛 날개’를 힘껏 퍼덕이며 힘껏 투레질을 했고, 그 뒤쪽에는 마찬가지로 황금빛 외양을 뽐내는 마차가 있었다. 
마차의 겉면에는 태양의 심볼이 조각되어 있었다. 
나는 한 눈에 그 마차를 알아보았다. 
 
설마 ‘태양 마차’? 
그러면 저 마차 안에 있는 존재는······. 
 
[야, 타.] 
 
밑도 끝도 없이 들려온 진언(眞言)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마차 안의 존재는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야야, 괜찮아. 여기서부턴 상징계(象徵界)라서 진언 제약이 약하다고. 쫄지 말고 빨리 들어와. 안 잡아 먹으니까.] 
 
나는 긴장하며 마차의 휘장을 열었다. 정말 이게 태양 마차라면, 이 마차의 주인은 아마 태양의 신 헬리오스일 텐데······ 어? 
 
“당신은······?” 
 
나는 의아한 눈으로 마차의 탑승자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 안에 있는 것은 ‘탑승자’가 아니었다. 
먹음직스런 적빛 포도주를 한가득 담은 와인 글라스만이 마차의 내부에 둥둥 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일까 생각하는데 와인 글라스가 입을 열었다. 
 
[뭐야, 못 알아 보는 거야?]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에게 섭섭해합니다.]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디오니소스?” 
 
츠츠츠츠츳! 
 
눈부신 스파크가 튀며, 와인 글라스가 쾌락의 비명을 질렀다. 
 
[야, 진명 그렇게 함부로 부르는 거 아냐. 짜릿해서 기분은 좋다만.] 
 
“······왜 그런 모습이십니까?” 
 
[개연성 때문이지 뭐. 코스트 아끼려면 이런 심볼 형태가 좋거든. 너도 알다시피 위대한 <스타 스트림>께선 꽤나 엄격해서 말이야.] 
 
사실 내 입장에서도 진체가 아닌 편이 낫다. 
아무리 내게 [제4의 벽]이 있다고 해도, 성좌의 진체를 보고도 정신이 멀쩡할 거라는 확신은 아직 없으니까.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마차가 출발했다. 
왜 티탄 신인 헬리오스의 태양 마차를 디오니소스가 몰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사정이 있는 듯했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지? 반가워, 내가 바로 ‘술과 황홀경의 신’이야. 너네 나라에서는 피로회복제 이름으로 유명하지.] 
 
“저도 반갑습니다.” 
 
우리는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후, 각자 마차의 모서리에 앉았다. 
장난스럽던 평소 모습과는 달리, 디오니소스는 별로 말이 없었다. 
의외로 낯을 가리는 성격인가? 
예상 밖이었다. 하긴, 설화가 다 맞는 것도 아닐 테니까. 
그보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흔들리는 저 글라스 속의 포도주가 몹시 신경 쓰인다. 갑자기 이쪽으로 쏟는 건 아니겠지? 저 액체도 뭔가의 심볼일 텐데, 디오니소스의 뭘 상징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잠시 쓸데 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 디오니소스가 말했다. 
 
[아, 미안. 잠깐 아는 여신이랑 채팅 좀 하느라.]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그런 건 아닌데 요즘 썸타는 애라서 관리해줘야 돼.]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르겠다. 
 
[근데 너 생각보다 태연하네? 그래도 내가 명색이 성좌인데.] 
 
“성좌를 본 게 처음은 아니라서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지난 번에 내가 명계 보내 줬었지?] 
 
“그땐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무슨. 그보다 너 그때 명계에서 무슨 짓 하고 온 거야?] 
 
“예?” 
 
[그 도도한 여왕님이 이렇게 친절하게 구는 건 처음 봤다고. 무려 성운들에 맞서 화신 하나를 보호하려 하다니······ 응? 혹시? 역시 그거냐? 너 그 아줌마한테······.] 
 
어쩐지 부럽다는 듯한 목소리. 디오니소스는 내가 페르세포네의 과업을 수행한 것까진 알지 못하는 듯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만.” 
 
[야야, 시치미떼지마. 그 아줌마 졸라 섹시하지? 바깥 양반만 없었어도 진즉에 내가 어떻게 한 번······.] 
 
“······그런 식으로 말해도 됩니까? 명계의 여왕은 당신 어머니 아닙니까?” 
 
[음? 하하. 그런 설도 있긴 하지.] 
 
“그쪽 설은 가짜였던 겁니까?” 
 
[그런 말은 안 했는데.] 
 
“······.” 
 
[뭘 그런 눈으로 봐? 너 올림포스 몰라? 이 정도 금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고 보니 올림포스는 그런 곳이었다. 
아랫도리로 생각하는 신들의 천국. 
그래도 이건 좀 심하잖아. 
 
[아, 그래. 말 나온 김에 잘 됐다. 아까 내 메시지 받았지? 내 쪽에 붙어. 내가 특별히 ‘바쿠스의 교주’ 설화를 하사할······ 너 표정이 영 별로다?] 
 
“아닙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디오니소스도 올림포스 12신좌의 하나인 만큼 격이 높은 성좌였다. 
하지만 겨우 ‘바쿠스의 교주’라······. 
 
[아하, 알겠다. 요 녀석봐라. 너 지금 <에덴>이나 <베다>에서 내리는 설화들이랑 비교한 거지?]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인마, 그건 네가 뭘 몰라서 그래! 너 ‘부활한 메시아’ 같은 설화 받으면 어떤 꼴이 되는 줄 알아? 평생을 동정으로 살아야 돼! 그리고 죽고 나서도. 응? 떡 한 번 못 쳐보고 창세신의 시종으로 살아야 한다고!] 
 
디오니소스는 흥분하며 소리쳤다. 
 
[응? 그에 반해 ‘바쿠스의 교주’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아? 너 내 여신도들 알지?] 
 
“동성애자를 찢어 죽인 그 여신도들 말입니까?” 
 
디오니소스가 흠칫 놀랐다. 
 
[어······ 험. 그, 그래! 걔들이랑 매일매일 광란의 밤을 보낼 수 있다고. 내, 내가 하사하는 포도주도 무한 리필 가능하고 말야! 어디 그 뿐인줄 알아? ‘올림포스 난교 파티’ 혹시 들어봤냐? 너 아프로디테 알지? 네가 원한다면 걔도 초대해서······.] 
 
[성좌, ‘사랑과 미의 여신’이 ‘술과 황홀경의 신’을 노려봅니다.] 
 
[······걔 얘긴 없던 걸로 하고, 아무튼 어때?] 
 
“별로 안 끌리는데요.” 
 
디오니소스의 포도주가 불안하게 출렁였다. 
 
[······그러고 보니 <에덴> 소속의 어떤 천사가 네가 남색가라는 얘길 하던데······ ] 
 
“누가 퍼뜨린 건진 알 것 같은데, 저 여자 좋아해요. 그보다 슬슬 절 만나러 오신 진짜 목적을 듣고 싶습니다만.” 
 
[음? 무슨 소리야? 당연히 널 우리 성운에······.] 
 
“정말 그게 전부입니까?” 
 
디오니소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이나 찰랑이던 와인 글라스가, 허공에서 한 바퀴를 뱅그르 돌았다. 
 
[······너 눈치 빠르네.] 
 
“그런 소리 많이 듣죠.” 
 
[한 잔 할래? 내 포도주 좀 마셔.] 
 
“술을 별로 안 좋아 해서.” 
 
[뭐······ 그래. 네 말이 맞아. 사실 내 목적은 널 ‘올림포스’에 데려가는 게 아냐.]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여신이니 뭐니 입으론 잘도 지껄였지만, 사실 무엇도 진심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내게 주목하는 성운들이 많다고 해도, 고작 화신 하나를 픽업하기 위해 올림포스의 12주신 중 하나가 왔다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그런데, 이어진 디오니소스의 말은 내 예상을 완전히 깨는 것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난 네가 ‘올림포스’에 가입하지 않기를 바란다.] 
 
“······예?” 
 
[보다 정확히 말하면······.] 
 
끔찍한 폭음이 터진 것은 그때였다. 
 
콰아아앙! 
 
태양 마차가 포격을 맞은 듯 휘청거렸고, 선두의 말들이 비명을 질렀다. 돌아보니 디오니소스의 와인 글라스에서 포도주가 쏟아져 있었다. 
 
[우왁, 씨발. 놀라서 오줌 쌌잖아!] 
 
뭐가 오줌인지 차마 물어보기가 두렵다. 
나는 쏟아진 포도주에 닿지 않기 위해 혼비백산했다. 
 
[젠장, 아무래도 다른 성운들이 널 노리는 모양인데.] 
 
휘장 밖을 보니 무지막지한 존재감을 풍기는 것들이 사방에서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아직 거리가 멀어서 어느 성운 소속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 분명했다. 
 
[씨벌. 헬리오스 새끼한테 비싸게 주고 빌려온 건데······ 야, 안 되겠다. 여기서부터는 내려줄 테니까 나머지는 뛰어가. 구름길 따라 쭉 가면 금방이야.] 
 
여기서? 허공인데? 
 
[내가 막을 테니까 빨리 가! 연회장까지만 가면 어떤 성운도 널 건드릴 수 없어!] 
 
그 말과 함께 휘장이 활짝 열렸다. 
까마득한 구름 바닥을 보며, 나는 침을 삼켰다. 
나는 영혼이다. 그러니까 떨어져도 죽지 않을 것이다. 
뒤쪽에서 디오니소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명심해라. 아무도 믿지마.] 
 
마차에서 뛰어 내리는 순간, 디오니소스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또 보자, 화신 김독자.] 
 
나는 그 길로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츠츠츠츠츳! 
콰아아아앙! 
 
등 뒤에서 엄청난 폭음이 울려 퍼지며, 무지막지한 존재감이 전신을 압박해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최소 진체의 일부가 강림한 모양이었다. 
 
쿠구구구구! 
콰르르르르! 
 
스파크가 천둥처럼 내리쳤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성좌와 성좌의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전력을 다해 구름길을 달렸다. 도중 파편 같은 것이 머리 위를 스쳐갔고, 바닥이 갈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마침내 거대한 성채가 보이기 시작하며, 뒤쪽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나는 성채의 입구에 도달했다. 
 
“연회에 참가하러 왔습니다.” 
 
문지기가 나를 아래위로 훑어 보았다. 
아마 관리국에서 파견된 하급 도깨비인 듯했다. 
 
“뭐야? 화신이 온다는 얘긴 못 들었는데?” 
 
빌어먹을, 아무래도 태양 마차에서 내린 게 실수였던 것 같다. 
아마 그게 프리패스 통행증이었을 텐데. 
그때, 성채 안쪽의 문이 열리며 뜻밖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그 친구 들여보내 줘. 내 일행이니까.] 
 
그는 페르세포네가 아니었다. 
내가 오래도록 보고 싶었던 성좌가,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Episode 29. 별자리의 연회 (2) > 끝

< Episode 29. 별자리의 연회 (3) >
 
 
 
 
 
연회장의 입구에 그가 서 있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그는 시나리오 초반부터 줄곧 나를 후원해 준 몇 안 되는 고위급 성좌였다. 
 
「새하얀 금빛 털이 감도는 얼굴에 장난 가득한 표정. 가장 지고한 권좌를 농락한 대가로, 세상에서 가장 작은 감옥에 갇힌 죄수. 그의 고귀한 화안금정(火眼金睛)과 마주하는 순간 누구라도 숨을 들이켜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멸살법’의 묘사 그대로였다. 나는 홀린 듯 그쪽을 바라보았다. ‘멸살법’의 설화급 성좌들중 최상위에 위치한 존재. 나는 문지기를 무시하고 안쪽으로 달려갔다. 
 
“제천대성!” 
 
그러나 짓궂게 웃은 제천대성은, 그대로 내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마치 연기처럼. 
아직 너는 나를 만날 자격이 안 된다는 듯이. 
 
······분신이었나? 
 
나는 허탈한 마음에 뻗었던 손을 내렸지만, 상황이 끝난 건 아니었다. 
졸지에 제천대성의 이름을 연호하며 입장한 나는 연회홀 1층에 있던 성좌들의 주목을 한꺼번에 받게 되었던 것이다. 
 
[뭐야 저놈은?] 
 
특정 성좌의 별명을 부르며 입장한 화신. 
대부분의 성좌들이 좋게 볼 리가 없었다. 
연회장 곳곳에서 시선들이 나에게 쏟아졌다. 
 
[화신인데?] 
[뭐야, 누구 화신이야?] 
 
무수한 시선들이 모이자 순식간에 공기가 끓어 올랐고, 나는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몸이 굳어버렸다. 
모여든 시선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나는 누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인지도 알아볼 수 없었다. 
이제 성좌들의 진언을 들어도 버틸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4의 벽]의 영향이었다는 게 확실해졌다. 
단지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그제야 실감이 난다. 
지금 이 연회장에, 성좌가 아닌 존재는 나뿐이다. 
나는, 드디어 성좌들의 앞에 선 것이다. 
 
“자자, 진정들 하세요 성좌님들. 잠시 착오가 있어서 이 친구 좀 데려가겠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누군가가 빳빳이 굳은 내 영혼체를 번쩍 들어 올려 어딘가로 옮기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연회장을 빠져나와 회랑으로 들어서자, 시선 지옥이 끝나며 간신히 숨통이 트였다. 
 
“······너 대체 왜 혼자 온 거냐?”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웬걸 익숙한 형체가 허공에 동동 떠 있었다. 
 
“비형?” 
“그래, 나야. 밤의 여왕께서 사절을 보내신다고 하셨는데, 같이 온 거 아니었어? 왜 혼자 애먼 곳에서 헤매고 있어? 뒈지려는 거냐?” 
“사정이 좀 있었어.” 
“야, 그런 문제로 넘어갈 게 아니거든? 여기 시나리오 지역 아냐 새꺄! 잘못 깝치다간 골로 간다고! 여기는······.” 
“시선으로 인간을 벌레처럼 죽일 수 있는 녀석들이 있는 곳이지.” 
안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 온 거니까. 
비형은 못마땅한 듯 입술을 비죽이더니 나를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대기실 데려다줄 테니까, 잠깐 거기서 쉬고 있어. 대기실에 패널 있으니까 잘 보고 있으라고. 꼭 봐야 한다. 알겠지?” 
 
어쩐지 으스대는 꼴을 보아하니, 이 녀석한테 뭔가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는 대기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대기실의 팻말이, 뭐랄까 참 묘했다. 
 
“······<화신 대기실>? 이런 게 있어?” 
“화신이 너만 온 줄 아냐? ······물론 혼자 들이닥친 놈은 너 뿐이지만.” 
 
문을 열자, 전혀 생각지 못한 인물이 그곳에 있었다. 
녀석이 먼저 반응했다. 
 
“······김독자?” 
 
나 역시, 멍한 얼굴로 놈을 보다가 어색하게 손을 들어주었다. 
 
“······유중혁.” 
 
 
* 
 
 
‘멸살법’의 원작에서도 <별자리의 연회>는 꽤 자주 언급된다. 
보통 유중혁이 ‘회귀’를 이용해 성좌들의 등을 처먹을 때 오는 곳인데, 역시나 이번에도 유중혁은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누구한테 초청 받은 건진 모르겠지만, 뭐 이 녀석쯤 되면 설화급이 줄을 서고 인맥을 만들려 할 테니까······. 
 
금번 <별자리의 연회>는 몇몇 국가에서 공동으로 진행하는 행사였다. 
<서울 돔>, <워싱턴 돔>, <모스크바 돔>, 거기에 <뉴델리 돔>까지. 
 
아마도 관리국에서 근래에 성과가 좋은 돔들을 모아 한꺼번에 성과 발표회를 개최한 듯했다. 참가국들의 조합으로 미루어 봤을 때······ 대충 유중혁의 24회차와 비슷한 분위기인 것 같은데. 
대기실에는 국가별로 화신들이 제각기 떨어져 앉아 있었다. 
 
“왜 네가 여기 있는 거냐?” 
“너랑 비슷한 이유겠지 뭐.” 
“언제 다시 살아나는 거지?” 
“아마 내일.” 
“다른 녀석들이 걱정하고 있다.” 
“미안하게 됐어.” 
 
그 유중혁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 어쩐지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걸 보니 화를 참고 있는 듯한데······ 하여간 요즘 이 자식 보면 분노 조절 장애가 아닐까 의심된다. 
나는 유중혁과 나란히 의자에 앉아, 앞쪽의 대형 패널로 흘러나오는 식순을 지켜보았다. 화면에서는 한창 ‘중급 도깨비 진급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제게 다시 이야기의 영광을 돌려주신 모든 성좌 및 도깨비 여러분들께 감사드리며······. 
 
하급 도깨비들의 대표로 인터뷰를 하고 있는 것은 비형이었다. 
저 자식, 이래서 방송을 보라고 했던 거군. 
 
―이 영광의 절반은, 사실 제 채널에서 열심히 활동 중인 한 화신 덕분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아는 그 친구일 겁니다. 그 화신에게 이 기쁨의 절반을 돌리겠습니다! 
 
민망하게 짝이 없는 멘트를 잘도 지껄여 댄다. 
주변의 화신들이 이쪽을 흘끔거리는 것 같아서 나는 애써 시선을 외면했다. 비형은 말을 하던 도중 품속에서 금빛의 알을 꺼내 하늘 높이 들어 올렸는데, 나는 그게 무엇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새로 태어날 이 아이에게 돌리겠습니다! 
 
그것은 신유승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알이었다. 
다행히, 잘 부화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네놈, 설마······?” 
 
그새 [현자의 눈]을 사용한 모양인지, 경악한 유중혁이 나와 비형의 알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변명하듯 말했다. 
 
“저 방법밖에 없었어.” 
“무슨 짓을 한지 알고 있는 거냐?” 
“알아.” 
“저런 짓을 하면 신유승은······!” 
 
유중혁의 걱정이 무엇인지는 안다. 그토록 오랫동안 ‘이야기’에 고통받아온 녀석이, 이제는 그 비극을 생산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 그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잘 알고 있는 유중혁으로서는 저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깨비로 태어나면 적어도 앞으로 죽을 일은 없을 거야. ‘관리국’은 <스타 스트림>이 멸망하기전까지는 가장 안전한 곳이니까.” 
 
물론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이런 곳에서 신유승을 도깨비로 만든 이유의 전부를 말할 수도 없었다. 
나와 유중혁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이곳이 현세였다면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나를 베어버렸을 듯한 기세. 
 
“혹시······ ‘김독자’라는 분이신가요?” 
 
끼어든 목소리에, 기세는 씻은 듯 사라졌다. 
고개를 돌리자, 동서양 혼혈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미녀가 보였다. 적당히 웨이브진 카키브라운의 머리카락에, 은은한 갈색이 감도는 커다란 눈. 건강한 미소가 특히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렇습니다. 저를 아십니까?” 
“아······ 조금은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어쩐지 반갑다. 이 여자가 먼저 말을 걸어올 줄이야. 
 
“반갑습니다. 셀레나 킴.” 
“절 알고 계세요?” 
“미국 대표 아니십니까?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들은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사용자의 편의에 따라 임의로 지정한 항목들만 표시됩니다.] 
 
+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셀레나 킴 
전용 특성 : 동물애호가(희귀), 왕의 수호자 (영웅) 
배후성 : 전쟁의 종결자 
 
+ 
 
워싱턴 돔의 ‘셀레나 킴’. 
그녀는 안나 크로프트가 만든 <차라투스트라>의 일원이자, 멸살법 최강의 100인 중 하나가 될 여자였다. 한때 내가 가졌던 ‘불살의 왕’은 본래 이 여자가 가지게 될 특성이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먼저 특성을 획득했기 때문에 그녀는 다른 특성을 개방한 듯했지만······. 

“안나 크로프트는 함께 오지 않았습니까?” 
“······안나를 알고 계시는군요?” 
“일전에 꿈을 통해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녀도 오고 싶어 했어요. 당신이 오는 줄 알았더라면, 반드시 왔을 텐데.” 
 
물론 왔다면 상황만 더 복잡해졌을 것이다. 
왜냐고? 바로 이 녀석 때문이다. 
 
“그 여자한테 목을 잘 간수하라고 전해.” 
“······당신은 안나에게 들은 그대로군요, 유중혁.” 
 
안나가 이곳에 오지 않은 이유는 보나마나 유중혁 때문이었다. 
유중혁은 지난 회차에서 안나 크로프트에게 배신 당한 적이 있고, 안나는 과거시를 통해 자신이 유중혁에게 한 짓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 오지 않는 건 당연한 얘기겠지. 
 
“한국 측엔 엄청 못생긴 녀석도 있네. 그쪽이 한국 대표야?” 
 
이건 또 뭔가 싶어 돌아보니, 이번에는 러시아 측의 대표였다. 
 
“이리스, 무례하군요. 타인을 외모로 평가하는 건 나쁜 버릇입니다.” 
“못생긴 걸 못생겼다고 했을 뿐이야. 솔직함은 모스크바의 미덕이지.” 
 
새하얀 백금발에 새하얀 피부. 
조그만 트윈테일의 미소녀가 그곳에 있었다. 
모스크바 어쩌구 하는 걸 보니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별로 아는 척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소녀는 ‘멸살법’에서 내가 싫어하는 인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일부러 반말로 물었다. 
 
“넌 누구냐?” 
“······날 몰라? 이몸, 이리스 블라지미로브나 레베제바를 모른다고?” 
“알아야 되냐?” 
 
보다 못한 셀레나 킴이 끼어들었다. 
 
“독자 씨, 제가 소개할게요. 이쪽은 이리스. 러시아 측의 대표에요. 러시아에서는 ‘붉은 광장의 전신’이라 불리고 있어요.” 
“에헴, 그게 이 몸이라 이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세 가득한 별명이로군, 하고 한 마디 쏘아 붙여주고 싶었는데 괜히 트러블을 만들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셀레나 킴이 말을 이었다. 
 
“이리스, 이쪽은 김독자 씨에요. 한국 측의 대표시고, 별명은······ 저, 죄송합니다만, 독자 씨는 별명이······.” 
 
그러자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그놈 별명은······.” 
 
나는 황급히 놈의 입을 막으며 말을 가로챘다. 
 
“저는 아직 별명이 없습니다.” 
 
이리스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별명도 없는 놈이 여기에 오셨다?” 
 
있다. 
있긴 있는데, 말하기가 싫을 뿐이다. 

“무슨 자격으로 여기에 불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나대는 게 좋을 거야.” 
 
러시아 측에서 흉흉한 기세를 뿜기 시작하자, 곁에 있던 유중혁도 벌떡 일어서서 마주 기세를 뿜어댔다. 막대한 유중혁의 기세를 느꼈는지, 이리스는 반걸음을 물러섰다. 
 
“당신은 끼어들지 마. 이건 나랑 저 못생긴 놈의 문제야.” 
 
이리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중혁은 말없이 그녀를 노려볼 뿐이었다. 
잘한다. 기왕이면 뺨도 한 대 갈겨라 유중혁. 
결국 입술을 질근 깨문 이리스가 다시 한 걸음을 물러나며 쏘아붙였다. 
 
“뭐, 어디 하찮은 위인급에게 설화라도 적선 받으러 온 모양인데······ 어디 두고 보자고.” 
 
······위인급에게 설화를 적선 받아? 
이 녀석, 귀여운 소리를 하네. 
그러고 보니 <별자리의 연회>의 식순 중에는 <설화 계승>에 관한 것도 있었다. 
아마, 이리스는 그걸 언급한 것일 터다. 
 
똑똑똑. 
 
때마침 대기실의 문이 열리며, 하급 도깨비가 얼굴을 내밀었다. 
 
“화신 여러분. 곧 <설화 계승식>이 있을 예정이니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임시로 1층 연회 홀에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참고로 1층에는 위인급 성좌님들만 계시니,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설화 계승식>. 
성좌들이 화신들과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배후 계약>만이 아니다. 비록 배후성은 아니더라도, 다른 성좌들의 <설화>를 계승하고 이야기에 대한 예를 표함으로써 화신들은 자신의 힘을 키울 수 있다. 물론, 자신의 설화를 널리 알림으로써 성좌들 또한 세력을 넓힐 수 있으니 이는 화신과 성좌 둘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우리는 하나씩 차례로 연회 홀로 걸어갔다. 
가장 먼저 연호된 이름은 셀레나 킴이었다. 
 
[셀레나 킴! 왕의 수호자!] 
[네 활약은 잘 보고 있다고!] 
 
아까와는 달리 성좌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아무래도 자기가 좋아하는 화신들을 맞이했기 때문이겠지. 
마치 좋아하는 연예인이라도 만난 듯 들뜬 모습들. 
다음은 이리스의 차례였다. 
성좌들을 향해 오만도도한 자세로 걸어간 그녀는, 팬 서비스라도 하듯 그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리스! 붉은 광장의 꼬맹이!] 
[하하하! 귀엽군.] 
[화면에서 보던 그대로잖아?] 
 
그녀는 뒤쪽에 서 있는 나를 오연한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대충,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봤냐?」 
 
······뭐 어쩌라고? 
이윽고 내 차례가 되었다. 
연회 홀로 걸어나가자, 아까 받았던 그 시선의 압력이 다시 한번 쏟아졌다. 그래도 한 번 겪어봤기 때문인지, 혹은 시선의 느낌이 다르기 때문인지 이번엔 꽤 버틸 만했다. 
그런데 성좌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아까는 뜨겁던 분위기가, 마치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했다. 
······혹시 나 별로 인기가 없는 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를 비웃는 이리스의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저거 걔다. 한반도의 김독자.] 
[김독자? 저 녀석이 그 김독자라고?] 
 
그것을 시작으로 웅성거림은 시작되었다. 이전에 나왔던 화신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김독자! 저 녀석이 그 김독자야] 
[김 도게자! 김 도게자!] 
[왕이 없는 세계의 왕!] 
 
내가 한 걸음을 딛을때마다 성좌들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이적에 맞서는 자!] 
 
마치 바람에 산불이 옮겨가듯 목소리는 홀 전체로 퍼져갔다. 
 
[이보게, 나 기억하는가? ‘대머리 의병장’일세!] 
[김독자! 내가 ‘흥무대왕’이다!] 
 
나는 묵묵히 연회 홀 가운데로 걸어나갔다. 
 
[피스 랜드 아주 잘 봤다고! 자식, 좀 하던데?] 
[야! 이쪽으로 손 좀 흔들어 봐! 나 너한테 3000코인이나 후원했어!] 
[다들 이리 와봐! 김독자가 나타났다고!] 
[근데 듣던 것보다 훨씬 봐줄만한데?] 
 
체통마저 잊어버리고 날뛰는 성좌들 때문에, 연회 홀 전체가 거대한 용광로가 된 것 같았다. 그 뜨거운 열기에 영혼이 통째로 익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향해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러자 성좌들의 환호성이 폭발했다. 
 
[잘생겼다 김독자!] 
 
경악한 얼굴을 한 이리스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 놀러 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천장을 비롯한 벽 곳곳에서 시나리오 영상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명 속에 죽어가는 화신들과, 그걸 보며 낄낄대는 성좌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새삼 이곳이 어떤 곳인지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이곳은, 인간의 모든 비극이 만찬이 되는 곳. 
 
나는 연회 홀의 2층을 올려다보았다. 
시끌벅적한 1층의 위인급 성좌들과는 다르게, 불길한 침묵으로 이쪽을 내려다보는 2층의 설화급 성좌들이 그곳에 있었다.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한 존재감으로 빛나는 성좌들. 
 
그들이 바로, 내가 싸워야 할 진짜 적들이었다.
 
 
 
 
 
< Episode 29. 별자리의 연회 (3) > 끝

< Episode 29. 별자리의 연회 (4) >
 
 
 
 
 
다음 차례였던 유중혁도 만만치 않은 인기를 누렸다. 심지어 녀석이 나왔을 때는 약간이지만 2층에서도 소리가 들렸다. <에덴> 쪽에서 내 이름을 함께 연호한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기분 탓인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유중혀어어억―!] 
[최고다 패왕!] 
[우리 성운에 들어오라고!] 
 
<설화 계승식>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어서, 나는 1층의 연회석에 앉아 잠시 사태를 지켜 보았다. 위인급이든 설화급이든 성좌들은 모두 경계의 대상이지만, 여기서는 판단을 잘 해야 했다. 
딱히 믿을만한 대상을 찾는 것은 아니었다. 디오니소스가 “아무도 믿지 말라”는 말을 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러니 내가 지금 찾는 쪽은 ‘믿을 대상’이 아니라 ‘이용할 대상’이었다. 
 
“저······.” 
 
쭈뼛거리던 이리스가 내 근처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대강 예상이 간다. 
나는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기 전에 경고했다. 
 
“살아남고 싶으면 경솔하게 굴지마.” 
“네, 네?” 
 
순간 멍해진 얼굴의 이리스가 화들짝 놀라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판단력에 놀랍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사이다에 5000코인을 후원했습니다.] 
 
천장의 가장자리 패널에 그녀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클로즈업 되어 있었다. 얼굴이 빨개진 이리스를 보며 성좌들이 킬킬 웃었다. 이리스가 망연자실해 중얼거렸다. 
 
“그, 그게 다 찍히고 있었다고?” 
 
성좌들의 세계에 왔다고 채널이 꺼졌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순진하다. 
오히려 우리가 이곳에 온 순간부터, 성좌들은 눈에 불을 켜고 우리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2층의 저 음침한 녀석들은 더욱. 
아마 이리스와 내가 대기실에서 한 판 붙기까지 했으면 성좌들의 반응은 거의 최고조였겠지. 
하지만 그런 즐거움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말했다시피 난 놀러온 게 아니다. 
그러니 적어도 이곳에서는 우습게 보이고 싶지 않다. 
 
“다음부턴 잘 해라 꼬맹아.” 
 
나는 이리스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움직이자 1층의 성좌들이 대거 반응해왔다. 
 
[김독자! 이리오게!] 
 
1층의 성좌들은 모두 인간형이나 생물형이 아닌, ‘심볼’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홀로 큰 개연성을 감내하기 힘든 위인급들은 간소화된 상징체를 유지해야 소모되는 코스트를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얼핏 봐서는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다가온 것은 짤랑거리는 죽장과 신라를 연상시키는 치렁치렁한 금빛 왕관. 
 
“‘대머리 의병장’님. 그리고 다른 분은······ ‘매금지존’이십니까?” 
 
[오오! 날 기억해주는구만!] 
[그렇다. 오랜만이구나.] 
 
나를 찾은 것은 한반도의 성좌들이었다. 
 
[꼭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둥둥 떠 있는 저 ‘안대’는 보아하니 ‘외눈 미륵’인 것 같고······. 
그 외에도 ‘황산벌의 마지막 영웅’이나, ‘흥무대왕’으로 짐작되는 상징체들도 있었다. 안 그래도 계백한테는 물어볼 게 있었는데······. 
 
[후인 김독자.] 
 
뒤돌아보니, 그곳에는 백원 짜리 동전이 떠 있었다. 
백원? 웬 백원? 
 
[만나서 무척 반갑네.] 
 
“저, 누구신지······?” 
 
[섭섭하군. 날 못 알아보겠나?] 
 
잠깐만. 백원 짜리 동전에 나오는 위인이 누구더라? 
 
“장군님?” 
 
나는 화들짝 놀라 물었다. 
내가 아무리 애국심이 제로에 가깝다곤 해도, 이 사람을 직접 보고서도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동전이 허공에서 뱅그르 돌며, 앞면에 새겨진 인물의 모습이 드러났다. 
 
[지난 번에 준 성흔은 잘 쓰고 있는 것 같더군.] 
 
“그때는 감사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내게 [칼의 노래]를 전승해 주었던 그 역시, 이 연회에 초대된 것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모습을 하고 계십니까?” 
 
[······내가 이 모습인 것은 내 의지가 아닐세.] 
 
어쩐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화폐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충무공 하나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1층의 한쪽 벽면을 덮은 채 흐느적거리고 있는 초록색 종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혹시 저 분도······?” 
 
이순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글의 창시자’일세. 나와 같이 광화문에 동상도 있는 분인데, 모르는가?] 
 
알고는 있다. 몰라서 물어본 건 아니니까. 
이순신이 계속해서 말했다. 
 
[상징체는 가장 많이 알려진 심볼을 따라 만들어지지. 아마 저 분도 나와 비슷한 경우일 걸세.] 
 
나는 슬픈 눈으로 이쪽을 보는 ‘한글의 창시자’를 향해 작게 읍을 했다. 
세종대왕은 그렇다 쳐도, 당연히 거북선이 상징이어야 할 이순신이 백원 짜리라니. 
위인을 백원 짜리나 만원 짜리 화폐에 가둬 놓으니, 결국 상징체도 이 모양이 된 것이다. 
2층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2층의 설화급 성좌들은, 모두가 ‘인간형’ 또는 적어도 생명체의 외양을 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유명한 위인조차 인간형을 유지할 수 없는데, 대체 설화급의 진체는 얼마나 강한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야마타노 오로치의 그림자를 사냥했던 것은, 정말 운이 좋았다. 
그때, 한 성좌가 눈에 들어왔다. 
 
“저 성좌는 누굽니까?” 
 
[누구? 아, 저 자 말인가?] 
 
내가 발견한 것은 1층과 2층의 계단참에 앉아 술을 들이켜는 한 사내였다. 긴 장도에 단단한 무장을 한 그는 인간형 상징체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설화급인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지나가는 설화급 성좌들이, 모두 그를 경멸 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명대사가 참견했다. 
 
[한반도의 위인급 중에는 저 자를 넘을 존재가 없지.] 
 
“위인급이라고요?” 
 
[최강의 ‘위인급’이라 말해도 좋을 걸세. 후대의 유명세가 아니라, 오롯이 본인이 쌓은 이야기로 저 위치에 오른 자야.] 
 
확실히, 이런 자리에서 인간형 상징체를 유지할 정도의 여유라면 설화급에 전혀 꿀리지 않는 존재라는 이야기였다. 내가 알기로 위인급 중에 저 정도의 격을 갖춘 존재는 중국의 초패왕 정도인데······. 
 
[‘고려제일검’이라고 들어봤나? 최근 전승이 다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들었네만.] 
 
고려제일검. 
 
“설마······.” 
 
나는 그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왜 한 번에 못 알아보았는지 오히려 의아할 지경이다. 
한반도 제일의 위인급이라면, 애초에 그를 먼저 떠올렸어야 하는데. 
 
[모두 비켜라!] 
 
계단참 아래에서 소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2층에서 내려온 몇몇 성좌들이 실랑이를 벌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에 대적하지는 못했다. 
이순신이 탄식했다. 
 
[······자네의 인기가 대단하긴 한 모양이군. 설마 2층에서 자네를 데려가려 할 줄이야.] 
 
이미 유중혁도 누군가의 인도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반면 아직도 1층에 남아 있는 이리스는 부러운 눈으로 이쪽을 쳐다볼 뿐이었다. 
아마 저 녀석은 위인급 성좌의 설화를 계승하러 온 모양이다. 
 
[부디 몸조심 하시게.] 
 
고개를 끄덕이자 마자, 심볼들을 헤치고 설화급 성좌들이 나타났다. 
사신의 형태를 한 상징체 셋. 
누구인지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여왕님께서 찾으신다.] 
 
그들은 명계의 심판관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자들도 설화급이었지. 
비록 페르세포네의 설화를 빌려와 격을 유지하는 자들이긴 하지만······. 
그들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계단참 어귀에서 누군가가 툭 말을 내뱉었다. 
 
[······너도 한심한 놈이었군. 2층 녀석들에게 굽신거리다니.] 
 
고려제일검의 말에, 심판관들이 동시에 성난 기세를 발출했다. 
 
[고려제일검, 그게 무슨 뜻이지?] 
[죽고 싶은 것인가?] 
 
심판관들의 말에 피식 웃은 고려제일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을 준비라면 언제든 되어 있지. 싸워 볼 텐가?] 
 
고려제일검의 상징체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거대했다. 
아니, 어쩌면 이 느낌은 상징체의 크기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 것이다. 
이것은, 성좌가 가진 ‘격’의 크기다. 
 
[설화급이라고 기고만장하지 마라. 설화의 꼬리에 간신히 붙어 기생하는 버러지들 주제에.] 
 
무시무시하게 일어나는 그 기운에, 일순 1층과 2층 성좌들의 주목이 이쪽으로 쏠렸다. 심판관들은 당황하는 듯했지만, 그래도 설화급의 자존심이 있어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고려제일검의 눈동자에 형형한 빛이 떠올랐다. 당장에라도 세 명의 심판관을 저승길로 보낼 듯한 살기. 
심지어 그는 심판관들 너머, 2층에 귀족들처럼 자리 잡고 있는 설화급 성좌들을 노려보았다. 
 
[올림포스. 에덴. 베다······. 네놈들이 무슨 연유로 이런 촌구석까지 모여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의 창세신들이 자리를 비웠다고해서 너무 까불지 않는 편이 좋을 거다.] 
 
그 말에 2층의 설화급들 사이에서도 강렬한 기파가 일었다. 아무리 고려제일검이 강하다곤 해도, 고작 위인급 성좌 하나의 도발을 참고 넘어갈 이들이 아니었다. 졸지에 연회 홀이 성좌들의 한바탕 각축전이 되려는 순간. 
 
[그만―!] 
 
연회 홀 전체를 지배하는 강력한 진언에, 달아오르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심판관들은 불필요한 일을 벌이지 말라. 그리고 고려제일검, 당신도 너무 무례하게 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냉정한 말투에 심판관들은 다시 나를 데리고 걸음을 옮겼고, 고려제일검도 못마땅한 듯한 표정으로 다시 계단참에 앉아 술을 퍼마셨다. 
나는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역시 명계의 여왕. 
페르세포네의 강함은 아직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올림포스 3주신의 와이프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아마 이곳에 온 설화급 중에서도, 페르세포네는 수위권의 성좌일 것이다. 
 
[오랜만이군요. 김독자.] 
 
간만에 만난 페르세포네는 또 유상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여간 짓궂은 아줌마다. 
 
“잘 계셨습니까?” 
 
[타르타로스에서 쓸데 없는 짓을 벌이고 갔더군요.] 
 
“하하······.” 
 
나는 머쓱한 얼굴로 주변의 성좌들을 둘러 보았다. 
오히려 상징체가 인간형으로 바뀌자 누가 누군지 알아보는 게 더 힘들어졌다. 심볼일 때는 해당되는 성좌의 상징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했는데······ 2층의 꼭대기 권좌에서 좌석에 몸을 묻은 채 이쪽을 내려다보는 제천대성도 보인다. 제천대성은 나를 잠시 보더니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원래 저런 성격이었나?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2층의 배열이 눈에 익으며 대충 진영 구성을 알 것 같았다. 
중앙의 페르세포네를 기준으로 동쪽이 <올림포스>, 서쪽이 <베다>, 그리고 북쪽이 제천대성을 비롯한 비성운 또는 소성운의 성좌들······. 
마지막, 남쪽의 <에덴>은 알아보는 게 쉬웠다. 
죄다 날개가 달려 있었으니까. 
나를 향해 가볍게 윙크를 하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천사도 있었다. 
검정색 레이스 원피스를 입은, 꼭 악마 같은 복장의 천사였는데······. 
 
잠깐만. ‘악마 같다’고? 
 
그렇군. 저 천사가 바로?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저 성좌도 왔다는 것은, 어쩌면······. 
 
“명계의 여왕이시여. 하나 여쭤볼 게 있습니다.” 
 
[뭔가요?] 
 
“혹시, ‘은밀한 모략가’라는 성좌도 이곳에 왔습니까?” 
 
[······은밀한 모략가?] 
 
순간 페르세포네의 표정에 묘한 기색이 엿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군요. 그보다 곧 ‘설화 계승식’이 시작될 텐데, 결정은 했나요? 당신의 ‘부활’을 이용하려는 성좌들이 꽤 있어요.] 
 
“아직 고민 중입니다.” 
 
물론 몇 가지 생각해 둔 방책은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을 읽은 듯, 페르세포네가 말했다. 
 
[아마 당신이라면 모두를 거절하겠죠. 지금까지도 줄곧 그래왔으니까.] 
 
과연, 내 채널의 애청자 다운 발언이었다. 
실제로 나도 그러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 선택은 옳지 않아요. 모두가 당신에게 저작권 시비를 걸 테니까.] 
 
“설화에 저작권이 어딨습니까?” 
 
[자기 것이라 주장하는 이들에게 있겠죠. 아마 꽤 괴로워질 거예요.] 
 
젠장, 완전 깡패나 다름없군. 
 
“지금 <올림포스>를 택하라는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페르세포네는 웃었다. 
 
[그런 뜻은 아니에요. 사실, 나는 저 치들을 싫어하거든.] 
 
그 말대로, ‘멸살법’에서 페르세포네는 <올림포스>와 오히려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실제로 연회에 참석한 <올림포스>의 3세대 신들은 쭈뼛거리며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심지어 다른 성운의 성좌들도 이쪽을 예의주시하며 쉽게 다가오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아마 페르세포네를······ 정확히는 ‘하데스’를 경계해서겠지. 
그러니 나는 본의 아니게 명계의 보호를 받고 있는 셈이었다. 
어쩌면, 내가 처음으로 만난 ‘설화급’이 페르세포네였다는 것은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 여왕님께서는 제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베다>? 아니면 <에덴>? 혹은 그 외의 성운들?” 
 
페르세포네는 고개를 저었다. 

[누구를 선택하든, 그대는 적이 생길 거예요. 그리고 그 적은,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어떤 적보다도 강력하겠죠. 그대도 알겠지만 ‘부활 설화’는 많은 성운에서 신화의 토대를 이루는 설화니까요. 그리고 하나의 설화를 받아 들이는 것은, 때론 다른 하나의 설화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죠.] 
 
그 말을 하는 페르세포네가 맛있는 스테이크라도 눈앞에 둔 것처럼 입술을 핥았다. 
아무래도 이 여왕님은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조금 짜증이 나서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씀이십니까?” 
 
[그건 그대가 생각해야 할 몫이죠.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이게 꼭 누구를 적으로 돌려야만 하는 문제인지.] 
 
적으로 돌려야만 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그리고 마침내, 단상 위에서 도깨비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설화 계승식’을 거행하겠습니다!
 
 
 
 
 
< Episode 29. 별자리의 연회 (4) > 끝

< Episode 29. 별자리의 연회 (5) >
 
 
 
 
 
계승식이 시작되자, 연단의 끄트머리에는 여섯 개의 작은 방이 만들어졌다. 계승식에 참가한 화신들의 숫자와 정확히 동등한 숫자의 방. 
 
―해당 화신들은 즉시 [비밀의 방]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화 계승식>의 시스템은 간단했다. 
화신들은 ‘방’을 통해 성좌들과 비밀스레 만나고, 그들의 조건을 모두 들은 뒤 연단에 올라 계승할 설화를 발표하면 된다. 
내 방문 앞에는 <화신 김독자>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나는 유중혁을 향해 말했다. 
 
“조금 이따 보자.” 
 
유중혁은 별다른 대꾸 없이 방 안으로 사라졌다. 
방에 들어가 테이블에 앉자,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바깥의 소리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비밀의 방]. 
 
이곳은 스타 스트림에서도 가장 완벽하게 비밀이 보장되는 장소 중 하나다.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은, 채널의 도깨비들조차 알 수 없다. 
 
[당신은 한 시간 동안 ‘비밀의 방’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비밀의 방’의 관리 권한이 당신에게 주어집니다.] 
[‘비밀의 방’의 최대 사용 시간은 한 시간입니다.] 
[시간 내에 가능한 많은 성좌들과 접선하기 바랍니다.] 
 
나는 기대감으로 방문을 바라보았다. 
좋아, 첫 번째 손님은 누구려나. 
그 순간, 누군가가 방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노란색 법의와 뒤쪽에 두둥실 떠 있는 성전(聖典). 
 
[화신 김독자. ‘부활의 축일’을 선택해라.] 
 
······아무래도 첫 타자는 인도인 모양이다. 
 
 
* 
 
 
[성좌, ‘인류의 시조’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베다>에서 보낸 협상가는 ‘인류의 시조’라는 수식언을 가진 성좌 ‘마누(Manu)’였다. 마누의 설화라면 나 역시 아는 바가 있었다. 물론 내가 인도 설화 따위 알 턱이 없으니, 모두 ‘멸살법’의 덕이다. 
 
「인도의 서사시에 따르면, ‘마누’는 대홍수의 생존자였다. 그는 물고기 한 마리의 생명을 구해준 대가로, 물고기가 준비한 배를 타고 히말라야 꼭대기로 대피함으로써 대홍수를 피할 수 있었는데······.」 
 
······설화를 떠올려 보니 왜 마누가 협상가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마누는 <에덴> 소속의 성좌인 ‘방주의 주인’과 설화의 저작권을 놓고 자주 다투는 성좌였다. 즉, <베다> 소속의 성좌들 중 저작권 분쟁에 한해서는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이 ‘마누’인 것이다. 
 
“······12월 25일의 주인께서는 직접 오지 않으셨습니까?” 
 
[그 분이 그렇게 한가하신 줄 아느냐? 쓸데없는 소리 말고 너는 그저 대답만 하면 된다. ‘부활의 축일’을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 
 
이런 태도로 나오시겠다? 
게다가 설화 당사자인 미트라는 안 왔다 이거지. 

[너도 귀가 있다면 알고 있겠지만 <베다>는 <스타 스트림> 최대의 성운 중 하나다. 무수한 신화들이 <베다>에서 최초로 탄생했고, 많은 성운들이 우리 신화를 표절하고 있지. 특히 그 <에덴> 녀석들은······.] 
 
“사적인 이야기는 됐습니다. 그보다 ‘부활의 축일’ 설화를 받아들이면, <베다>는 제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태양신의 가호가 네게 함께할 것이다.] 
 
“태양신의 가호란 건 뭡니까?” 
 
[그런 것까지 네게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하느냐? 하찮은 필멸자에게······!]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냐?] 
 
“그 하찮은 필멸자 타령, 이제 고루한 클리셰라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색다른 이야길 좋아하시는 성좌님들께서는, 대체 언제까지 그런 진부한 대사로 인간들을 멸시할 겁니까?” 
 
눈을 크게 뜬 마누가 나를 노려보았다. 
 
[네놈, 감히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망발을······!] 
 
“물론 이런 생각입니다.” 
 
[당신은 ‘비밀의 방’의 관리 권한을 사용하였습니다.] 
[성좌 ‘인류의 시조’를 방에서 추방합니다!] 
 
내 명령어에, 당황하며 뭐라 뭐라 외쳐대던 자칭 인류의 시조는 새하얀 빛을 남기며 사라졌다. 
 
그러게 기회가 있을 때 잘했어야지. 
 
제아무리 상대가 ‘설화급’이라 해도, 기세에 짓눌린 채 빌빌 기어 줄 생각은 없었다. 설화 계승을 끝낸 후라면 모를까, 어쨌든 지금은 내 쪽이 ‘갑’이기 때문이다. 
 
“다음.”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누군가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낡은 왕관을 쓰고 해진 옷을 입은 방랑자의 모습. 누구지? 
 
[화신 김독자, <올림포스>에 가입해라.] 
 
이 자식들, 어디서 단체로 ‘김독자 사용설명서’라도 읽고 온 건가? 
 
[성좌, ‘자신의 눈을 찌른자’가 당신을 향해 웃습니다.] 
 
······자신의 눈을 찌른자? 
 
[나를 아는 모양이군.] 
 
“우리나라에서 대학생이 되면 당신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거든요.” 
 
[그런가? 의외로군.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자신의 눈을 찌른자’. 그는 대학 교양 수업에서 지겹도록 가르치는 ‘오이디푸스 왕’이었다. 간만에 소포클레스에 대한 증오가 샘솟는다. 
 
“그나저나, 그쪽 제안이라면 이미 ‘술과 황홀경의 신’에게 들었습니다. ‘바쿠스의 교주’가 되라는 말씀을 하러 오신 거겠죠?” 
 
[바쿠스? 벌써 그 자가 접근했었던 모양이군.] 
 
뭔가 느낌이 싸했다. 
그러고 보니 연회에 참석했던 페르세포네는 ‘올림포스’와 척을 지고 있었고, 디오니소스는 ‘아무도 믿지 말라’는 말을 했었지. 
그리고 둘 모두는, <올림포스>에 가입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이디푸스 왕은 처음부터 그 말로 포문을 열었다. 
 
[나는 바쿠스의 제안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하물며 ‘부활 설화’의 저작권을 행사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니지.] 
 
즉, 오이디푸스 왕은 앞의 두 성좌와는 완전히 다른 제안을 하러 내게 찾아온 것이란 의미가 된다. 
······어쩌면, 이쪽이 ‘진짜’ 올림포스의 대표일지도 모르겠는데? 
 
[<올림포스>가 너에게 제시할 설화는 ‘번개의 사육제’다.] 
 
“예?” 
 
나는 깜짝 놀랐다. ‘번개의 사육제’는 3주신 제우스의 설화였기 때문이다. 
내 표정을 본 오이디푸스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 설화를 알고 있는 모양이군. 그래, 네 생각이 맞다. 우리가 제시할 설화는, 다른 ‘성운’들의 부활 설화들과는 격 자체가 다르다.] 
 
“······왜 제게 그런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나와 운명의 3여신이 네 운명의 편린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 운명을? 
 
[조만간 너에게는 ‘번개의 사육제’를 계승할 자격이 생길 것이다. 물론, 내 설화를 계승하여 ‘눈 먼 예언자’를 받아갈 수도 있겠지만······ 이미 예언자란 소문이 있는 그대가 내 설화를 계승하지는 않겠지.] 
 
“잠깐만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왜 제가 그런 운명을······.” 
 
[결정은 너의 몫이다. 하지만 너는 반드시 <올림포스>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생각하도록 해라.] 
 
오이디푸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에서 사라져버렸다. 
마음이 조금 심란해졌다. 
오이디푸스가 말한 ‘운명’이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운명의 3여신이 개입했다면 근시일 내에 내겐 그들이 본 미래와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리스 계통의 설화를 계승하기에 적합한 사건이라니, 찝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쪽 동네의 설화들은 죄다······. 
 
[안녕?] 
 
뭔가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싶더니, 어느새 방문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와 있었다. 산뜻하고 달콤한 향기. 아름다운 천사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마치 소악마(小惡魔)를 연상시키는, 소녀를 닮은 천사. 
아무래도 이번 차례는 <에덴>이었던 모양이다. 
 
“······‘방주의 주인’이 올 줄 알았는데, 당신이 직접 왔군요.” 
 
[내가 와서 섭섭해?] 
 
급격하게 시무룩해지는 목소리를 듣자니 갑자기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그 ‘우리엘’이 이렇게 귀여웠다니. 
 
“아뇨, 반갑습니다.” 
 
[보고 싶었어! 김독자!] 
 
우리엘은 거의 기습적으로 나를 꽉 끌어 안았다. 품이 맞닿으며, 그녀가 입은 얇은 실크의 너머로 부정한 감촉이 느껴졌다. 악마다······ 이것은 악마의 감촉이다. 등이 트인 옷이었기 때문에, 내 양손은 졸지에 갈 곳을 잃고 말았다. 마치 사랑스러운 인형이라도 만난 듯 내 품에 얼굴을 비벼대는 우리엘을 향해, 나는 한숨처럼 대답했다.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응응!] 

조금 난처한 상황이긴 했지만, 나로서도 그녀를 만난 감회는 컸다. 
우리엘은 시나리오가 시작되던 그 순간부터 줄곧 나와 함께 해준 성좌였으니까. 
 
“‘메시아의 길’을 선택하라고 오신 거죠?” 
 
[······아, 맞아! 그것 때문에 왔어!] 
 
화들짝 놀란 우리엘이 내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전혀 기억하고 있던 얼굴이 아닌데. 
나를 만난 게 어지간히 기뻤던 모양이다. 
 
[네가 너무 잘 생겨서 그랬나봐.] 
 
“설득력이 넘치는 말씀이시네요.” 
 
우리엘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김독자, 우리 <에덴>의 설화를 받아줄 거지?] 
 
“그건······ 조금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우리 설화는 최고라고! 다른 곳이랑 비교할 바가 아냐!] 
 
확실히 그 말이 맞다. ‘메시아의 길’은 부활 설화 계통에서는 최고의 격을 가진 설화니까. 하지만 문제가 있다. 
 
“그 설화를 택하면 소중한 걸 잃잖아요.” 
 
[어? 앗. 그, 그러네. 우리 설화를 선택하면 고자가 될 테니까······. 그건 안 되는데.] 
 
설득될 거라곤 기대도 안 했는데, 뜻밖에도 우리엘은 그게 자기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크게 동요했다. 내가 고자가 되는 게 우리엘에게 그렇게 큰 문젠가? 왜? 
 
[어, 어떡하지? 메타트론이 김독자 못 데려오면 한 달 동안 인터넷 못하게 한댔는데······ 그치만 데려가면 김독자가 고자가 되고······ 그렇게 되면······ 아, 잠깐만. 고자가 되어도 포지션을 조금 바꿔주면······?] 
 
······뭔 포지션? 
 
[조, 좋아! 김독자! 고자 문제는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 해서든······!] 
 
우리엘은 혼자서 뭔가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고자는 싫습니다.” 
 
[응! 그러니까 고자가 되어도 괜찮도록······!] 
 
“다음.” 
 
 
* 
 
 
그 후에도 여러 성좌들이 나를 찾아왔다. 
<탐라>라든가, <귀옥> 같은 곳도 있었고, 무소속 성좌들이나 단순히 나를 보러 온 위인급 성좌들도 있었다. 
특히 한반도의 위인급 성좌들은 내게 여러 격려를 남기고 떠났는데, 아무래도 내가 특정 성운과 관계를 맺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자넨 우리 세계의 희망이야.] 
[부디 뜻을 굽히지 말게.] 
 
그 마음들이 이해는 갔다. 
성좌가 된 직후부터 설화급들에게 시달리며 살아온 위인급 성좌들은,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는 내 모습이 무척 부러울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협상 시간은 종료되었다. 
화신들은 하나 둘씩 연단으로 올라갔다. 
제안 받은 설화들을 검토하고, 자신이 계승할 설화를 결정할 때가 된 것이다. 
 
―자, 그럼 계승 결과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미국의 ‘셀레나 킴’! 
 
연단의 도깨비는 홈 쇼핑 판매자처럼 신이 난 분위기였다. 
좋기도 하겠지. 
이 연회를 통해 관리국은 또 엄청난 양의 코인을 벌어들일 테니까. 
 
―‘셀레나 킴’은 성좌 ‘최후의 양심’이 하사한 ‘불굴의 이지스’ 설화를 계승하기로 하였습니다! 
 
와아아아아! 
 
역시 셀레나 킴은 <올림포스>를 택했나······. 
‘불굴의 이지스’는 왕의 수호자인 그녀가 택하기에 적합한 설화였다. 
식순이 흘러갈수록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누구를 택하면 적이 생기고. 
아무도 택하지 않으면 더 많은 적이 생긴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이게 꼭 누구를 적으로 돌려야만 하는 문제인지.’ 
 
페르세포네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말뜻을 어렴풋이 이해했다. 
아마 페르세포네의 말은 모든 ‘부활 설화’를 품으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내 목숨은 하나가 아니고, 다음 번 부활에도 설화를 계승시키려는 이들은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문제는 있다. 
<에덴>과 <베다>는 분명 ‘첫 번째 부활’을 양보하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 내가 그들의 설화를 ‘직접 계승’하게 된다면 분명 그들에 대한 종속 제약도 받게 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초부터 화신과 성좌의 관계는 불공정한 것이니까. 
 
잠깐만, ‘공정’이라······? 
 
마침내 유중혁이 일어나 연단으로 나갔다. 
 
―다음 설화 계승자는 서울의 패왕······. 
 
유중혁이 움직이자, 객석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특히나 설화급 성좌들의 눈빛이 묘했다. 반드시 유중혁을 갖고 싶어하는 자들. 그리고 한편으로 두려운 듯한 기색을 보이는 자들······. 
순간,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나는······.” 
 
디오니소스는 말했다. 누구도 믿지 말라고. 하지만 그건 상대가 ‘성좌’인 경우의 이야기였다. 
적어도 나는 이 장소에서 단 한 사람,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있는 것이다. 
나는 연단을 향해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당황한 유중혁의 손을 붙잡은 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여러분께 할 말이 있습니다.” 
 
나는 객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깜짝 놀란 성좌들의 모습. 
우리의 모습을 보고 거의 졸도 직전인 우리엘의 표정도 보였다. 
나는 그런 성좌들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 보았다. 
계승식이 공정하지 않은 이유는, 설화의 계승이 일방적인 ‘후원’의 형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좌와 화신이, 결코 대등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설화급이 위인급을 얕보는 것은, 그들의 힘이 다르기 때문이고, 성운이 성좌를 얕보는 것은, 그들이 집단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운, <베다>가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설화를 계승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순간 객석에 어마어마한 정적이 몰려왔다. 엄청난 시선들이 나와 유중혁을 향해 쏟아지며 압력을 행사했다. 내게 손을 잡힌 유중혁이 부들부들 떨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 씩 웃어준 뒤 성좌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들의 설화를 사겠습니다.” 
 
공정하지 않은 게임을 공정하게 만들려면, 일단 상대와 대등해지는 것이 먼저다. 
 
“나와 유중혁에게 설화를 팔고 싶다면, 우리 ‘성운’과 거래하십시오.”
 
 
 
 
 
< Episode 29. 별자리의 연회 (5) > 끝

< Episode 30. 암흑성 (1) >
 
 
 
 
 
Episode 30. 암흑성 
 
 
 
사실, 내가 가장 걱정한 것은 유중혁이었다. 
이 녀석은 이 자리의 누구보다 믿을만했지만, 동시에 이 자리의 누구보다 확신할 수 없었다. 
정신 나간 유중혁이 당장이라도 손을 뿌리치고 내 얼굴을 갈긴다면, 지금 내 행동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 될 테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유중혁은 침착했다. 
무지막지한 살기가 전해지긴 했지만, 녀석은 놀랍게도 그 분노를 잘 통제한 뒤 비밀스런 메시지까지 보내왔던 것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 
 
[등장인물 ‘유중혁’이 ‘한낮의 밀회’를 발동 중입니다.] 
 
······언젠가 구매해뒀던 아이템이 뒤늦게 떠올랐다. 
설마 그때 등록해 뒀던 [한낮의 밀회]의 유효기간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을 줄은 몰랐다. 
나는 일부러 뻔뻔하게 말했다. 
 
―이랬던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이제 좀 익숙해져야지. 
―뭐? 
―너한테 나쁜 조건도 아니잖아. 네가 다른 성좌의 ‘설화’를 계승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아. 
 
내 말을 들은 유중혁이 몸을 움찔했다. 
 
―······네놈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군. 
 
실제로 나와 함께 ‘성운’을 선언하는 것은 유중혁에게 전혀 나쁜 일이 아니었다. 원작의 진행대로라면, 유중혁은 여기서 어떤 설화도 계승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중혁이 가진 제약 때문이었다. 
[회귀자의 제약]. 
녀석은 사망을 통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대신, 다른 성좌의 설화를 계승할 수 없다. 
 
[화신 유중혁. 화신 김독자의 말이 사실입니까? 두 분이서 성운을 만들었다고요?] 
 
사태를 지켜보던 진행자 도깨비가 끼어들었다. 
모두가 유중혁을 바라보았고, 나도 긴장하며 녀석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어쨌든 첫 번째 고비는 넘겼다. 
하지만 진짜 고비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완전한 적막에 뒤덮였던 2층의 좌중 사이로, 누군가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긋하면서도 부드러운 그 웃음은, 어쩐지 유쾌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 웃음을 통해 페르세포네의 기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김독자, 결국 저질렀군요. 내가 이래서 그대를 좋아해.」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다. 
페르세포네야 이런 이야기에 환장하는 스타일이니까. 
그녀의 웃음에 뒤늦게 다른 성좌들도 웃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2층의 성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웃음은 안타깝게도 페르세포네와는 같은 의미가 아니었다. 
 
[성운, <베다>가 당신에게 실망합니다.] 
[성운, <귀옥>이 당신을 경멸합니다.] 
 
주변 성좌들의 반응에 입에 손수건을 물고 있던 우리엘이 인상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뭐야? 왜들 그래? 보기 좋은데!] 
 
1층의 성좌들은 말없이 이쪽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동경과 걱정이 뒤섞인 눈빛. ‘해상전신’도, ‘대머리 의병장’도 사달이 날까 긴장한 표정들이었다. 다만, ‘고려제일검’만큼은 흥미롭다는 듯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웃음 소리가 조금 잦아들자, 보다 직접적인 경멸이 2층에서 날아들었다. 
 
[아직 성좌위에도 오르지 못한 녀석이, 무슨 성운 개설이야?] 
[도깨비, 저게 지금 말이 되는 건가?] 
[성운이 무슨 개나 소나 개설할 수 있는 건줄 아냐?] 
 
도깨비는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게······ 화신 김독자는 분명 <스타 스트림>에게 ‘격’을 인정 받긴 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천장의 스크린에 내가 지금껏 이룬 설화들이 투사되었다. 
 
 
<왕이 없는 세계의 왕>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내가 사인참사검의 힘을 빌려 [절대 왕좌]를 부수는 장면이었다. 엄밀히 말해, 내 설화는 바로 저기서 시작된 셈이었다. 
 
콰지지지직! 
 
화면 속에서 부서져 나가는 왕좌의 파편. 몇몇 성좌들은 애써 납득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일부 성좌들은 경악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계의 신격이 깃든 왕좌를 부쉈다고!] 
[······정말 저걸로 설화를 열었단 말인가?] 
 
아마 참석자들 중에는 내 정보를 잘 모르는 녀석들도 있는 듯했다. 
나도 꽤 유명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부족했던 모양이군. 
문득 근처를 보니, 아까 그 러시아 꼬맹이가 멍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적에 맞서는 자> 
 
 
두 번째 설화는 재앙으로 강림한 귀환자 명일상을 쓰러트리고 얻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에게 호감을 표합니다.] 
 
예로부터 ‘귀환자’는 성좌들이 싫어하는 존재이기에, 당연히 성좌들의 호감을 얻기에는 적합한 설화였다. 
그때, 성좌들의 표정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저건 또 뭐지?] 
 
이어서 세 번째 설화와 함께 나타난 것은, 내가 중급 도깨비 바울을 폭행하는 장면이었다. 그 화면에는 나도 조금 놀랐다. 아마 신유승의 복수를 한다고 나섰던 때인 것 같은데······ 
설마 저것도 ‘설화’로 포함시켰다고? 
 
꾸에엑! 끄아악! 
 
연달아 터지는 중급 도깨비의 비명에, 당황한 진행자 도깨비가 화면을 빨리감기로 넘겨버렸다. 그러자 성좌들의 원성이 퍼져 나갔다. 
 
[이봐, 방금 그거 뭐야!] 
[그, 그게. 하하, 잘못된 자료 화면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도깨비의 말과는 달리, 화면에는 설화명이 떠올랐다. 
 
 
<이야기꾼을 능멸한 자> 
 
 
그 설화명에 계단참에서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려제일검’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미친놈이었군! 하하하하!] 
 
그리고 네 번째 설화명이 떠올랐다. 
 
 
<재앙의 왕을 사냥한 자> 
 
 
그것은 [피스 랜드]에서 성좌 [야마타노 오로치]의 그림자를 사냥하며 얻은 것이었다. [전인화]를 발동한 내 전격에 스러지는 오로치의 모습을 보며, 성좌들은 입을 딱 벌렸다. 
 
[설화급 성좌의 그림자를······.] 
[벌써 전설급 이상의 설화를 네 개나 쌓았다고?] 
 
성좌들 사이에 혼란이 번져 나갔다. 
이윽고 자료 화면이 꺼지고, 도깨비가 말했다. 
 
[아무튼 이런 연유로, 현재 화신 김독자는 성좌위를 앞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만약 이번 계기를 통해 ‘다섯 번째 설화’를 손에 넣는다면······.] 
 
내가 성좌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이들은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지만, 몰랐던 성좌들은 깜짝 놀란 모습이었다. 
 
[10번 시나리오가 끝나기도 전에 성좌위에 오른다고?] 
[저 놈이 새로운 성좌라니······.] 
 
나는 졸지에 뜨거운 시선을 받고 있었다. 
확실히, 이 정도 사건이면 ‘멸살법’ 전체에서도 가공할 일이었다. 
10번 시나리오가 끝나기 전에 <스타 스트림>의 인정을 받아 격을 획득한 존재는 극히 일부의 성좌들이나 귀환자들 뿐이었으니까.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가중되는 가운데 입을 연 것은 <베다>의 협상 대표로 참석한 ‘인류의 시조’ 마누였다. 
 
[화신 김독자의 격은 인정하겠다. 하지만 ‘성운’과 관련된 문제는 인정할 수 없어.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성좌들이 마누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하나, 우리는 화신 김독자가 충분한 지불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성운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최소 자금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겠지?] 
 
“코인은 충분합니다.” 
 
내 말에 좌중에는 다시 한 번 파란이 일었다. 
마누가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을 이었다. 
 
[그건 확인해 보면 알 수 있을 거고. 두 번째 문제는 누가 네 성운을 ‘지지’해 줄 것이냐는 거다.] 
 
나는 몰래 침을 삼켰다. 
드디어 진짜 난관이 왔다. 
 
[성운 설립은 최소 다섯 명의 성좌에게 지지를 받아야 하지. 너는 어떤 성좌에게 지지를 받았느냐?] 
 
“그건······.” 
 
내가 쉽게 대답하지 못하자, 마누가 피식 웃었다. 
 
[아니, 애초에 성운의 ‘이름’은 있는 것인가?] 
 
나는 유중혁을 흘끔 바라보다가 되는대로 입을 열었다. 
 
“우리 성운의 이름은······ 김독자 컴퍼니······.” 
“이름 같은 건 아직 없다. 그리고 지지자는, 지금부터 구할 것이다.” 
 
뜻밖에도 유중혁이 내 말을 자르고 앞으로 나섰다. 
 
“우리 성운의 지지자가 될 성좌는 없는가?” 
 
하지만 유중혁의 말에도 좌중은 반응이 없었다. 마누가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시간만 낭비했군. 도깨비. 계승식을 계속 진행하도록······.] 
 
그러나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 손을 들었다. 
 
[올림포스의 ‘명계’는 당신들의 성운을 지지하겠어요.] 
[여왕!] 
 
분노한 마누가 페르세포네에게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페르세포네도 날카로운 기세를 발출했다. 
 
[내 결정입니다. 무엇이 불만이죠?] 
[크윽······.] 
 
아무리 <베다>라고 해도, ‘마누’ 정도의 성좌가 홀로 명계의 여왕인 페르세포네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다른 성좌들을 향해 타깃을 돌렸다. 
 
[설마 또 있지는 않겠지?] 
[지지한다.] 
 
2층의 최상석에서 들려온 그 목소리에, 성좌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제천대성’이었기 때문이다. 
 
[기, 긴고아의 죄수?] 
[정말로? 진심인가?] 
 
나는 감사의 의미로 그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제천대성은 귀찮다는 듯 작아진 여의봉으로 귀를 후비며 이쪽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미안해요 서기관! 나도 지지다!] 
 
급기야 <에덴>의 우리엘까지 지지를 선언했다. 
 
[그리고 성운 이름도 내가 지어줄 거야! 성운 이름은 금단의······ 읍읍!] 
 
주변에 있던 9계급 천사들이 깜짝 놀라 그녀를 만류하는 것이 보였다. 
의도야 어쨌건, 고마운 일이었다. 
이제 나머지 성좌들은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앞서 지지를 선언한 세 성좌들은 모두 다른 존재들의 신경 쓸 필요가 없을만큼 강력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르다. 겨우 신생 성운의 설립을 돕기 위해 설화급 성좌인 ‘마누’를 거스르고 싶은 존재는 그리 흔치 않은 것이다. 
곁을 보니 유중혁도 반쯤 체념한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것 같군. 
 
······역시 여기서 막히는 건가.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괜찮아.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뭐? 
―어차피 기대도 안 했어. 중요한 건 시간을 끄는 거야. 
 
애초에 나는 여기서 어떤 성좌의 설화도 계승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원작’대로라면, 이번 ‘연회’의 마지막은 정해져 있었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나 ‘고려제일검’이 저들의 성운을 지지하겠다.] 
 
최강의 위인급, 고려제일검이 우리에게 지지를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때까지 꾹 참고 있던 위인급들이 한 번에 일어섰다. 
 
[그렇다면 나 ‘해상전신’도······!] 
[이 ‘대머리 의병장’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다!] 
 
1층의 심볼들이 너도나도 지지를 시작하자, 2층의 성좌들은 물론이고 도깨비들까지 크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자, 잠깐만요! 그렇게 마구잡이로 지지를 선언할 수는······!] 
 
그리고 다음 순간.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성운을 지지합니다.] 
 
······응? 
은밀한 모략가? 
대체 어디에? 
 
[당신은 ‘성운’의 임시 개설권을 획득하였습니다!] 
 
······설마? 
 
쿠구구구구! 
 
연회 홀 전체가 굉음에 휩싸이며, 공간이 크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이 연회의 끝이 다가왔다. 
‘놈들’이 온 것이다. 
 
[······이 기운은?] 
[모두 물러서라!] 
 
저 성좌들조차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곧이어 하늘이 크게 일그러지며, 강력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이 균열과 함께 쪼개지는 듯한 광경. 
 
[그레이트 홀]. 
 
오직 시나리오가 발동할 때에만 나타나는 미지의 홀이, 갑자기 연회장의 상공에 나타난 것이다. 깜짝 놀란 마누가 외쳤다. 
 
[이계의 신격!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온 것이냐!] 
 
모든 성좌들이 으르렁거리며 제각기 기세를 발출했다. 
그러자 하늘의 홀에서, 끔찍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우리를 초대하지 않았지? 
 
순간적으로 달려든 페르세포네와 우리엘이 나와 유중혁의 귀를 막았다. 
외신격의 진언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우리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인지, 홀에서 풍겨오는 압력이 한층 낮아졌다. 
 
[미안하지만 파티는 끝났어. 그대들은 돌아갈 시간이야.] 
[다음에 또 만나!] 
 
페르세포네와 우리엘이 소리침과 동시에, 나와 유중혁의 몸이 투명한 원안에 둘러 싸였다. 성좌들의 힘으로 영체의 공간 전이가 시작된 것이다. 곧 연회 홀에서 벌어질 끔찍한 전투로부터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그런데, 이계의 신격 쪽이 조금 더 빨랐다. 
 
기다려라... 
 
[이계의 신격들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계의 신격들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마지막 순간 우리엘의 비명이 들렸다. 
 
[김독자!] 
 
그리고 새카만 암흑이 시야를 덮었다. 
 
 
* 
 
 
【그대는 누구지?】 
【수레에 기록되지 않은 자.】 
【설마...】 
 
. 
. 
. 
 
【■■■■...】 
 
. 
. 
. 
 
【드디어 ‘마지막 이야기’가 시작되려는가······.】 
 
 
* 
 
 
“야, 여기 맞아?” 
“괜찮은 거야? 그놈들 오면 어떡해? 해상제독이랑 순정강철이 여기 자주 다녀간다고 그랬다고!” 
“그리고 여긴 그 ‘영웅’의 무덤 아냐?” 
 
캄캄한 밤. 
광화문의 한가운데에 세워진 묘비 위에, 몇몇 도굴꾼들이 모여 있었다. 
지레 겁을 먹은 일행들을 향해, 도굴꾼 이동파가 인상을 찌푸렸다. 
 
“한심한 놈들. 영웅은 무슨 영웅이야? 영웅이 이렇게 쉽게 죽냐?” 
 
이동파가 영웅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얼마 전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서울을 구한 ‘최강의 사나이’. 
물론 이동파는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자, 빨리 파! 시간 없다고. 암흑성 들어간 새끼들 나오기 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아홉 번째 시나리오인 [암흑성]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동파를 비롯한 그들은 시나리오에 참여하지 않았다. 
어차피 메인 시나리오 같은 건 잘난 놈들의 축제일 뿐이니까. 
 
“명색이 영웅의 무덤인데, 분명 좋은 거 한두 개쯤은 묻혀 있겠지?” 
“시체도 뒤져봐! 몸 안에 숨겨뒀을지 모르니까!” 
“시발, 존나 깊게 묻었네. 어이, 팍팍 좀 퍼봐!” 
 
도굴꾼들은 순식간에 땅을 파고 들어갔다. 
그렇게 두 시간 쯤 지났을까. 
 
“다, 닿았다!” 
 
마침내 그들의 삽이, 관뚜껑에 도달했다. 
이동파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긴 채 뚜껑을 열었다. 
관 속에는 하얀 코트를 입은 사내가 잠들어 있었다. 
이동파가 피식 웃었다. 
 
“영웅? 흥. 잠자는 숲 속의 공주님이구만. 그것도 못생긴.” 
“코트는 잘 빠졌네. 일단 이것부터 벗기고······.” 
 
턱! 
 
“우, 우와아아악!” 
“뭐, 뭐야······ 와아아악!” 
 
깜짝 놀란 이동파도 자리에 주저앉아 벌벌 떨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죽어 있었던 영웅이, 도굴꾼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서울의 모든 존재의 귓가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다섯 개의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서울의 밤하늘에 새로운 성좌(星座)가 탄생하였습니다!]
 
 
 
 
 
< Episode 30. 암흑성 (1) > 끝

< Episode 30. 암흑성 (2) >
 
 
 
 
 
[암흑성]의 1층에 진입한 것도 벌써 닷새 째. 
이지혜는 다친 이길영을 업은 채 신유승과 함께 암흑성의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5급 악마종, ‘어둠 추적자’가 당신을 쫓고 있습니다!] 
 
“뛰어!” 
 
어둠 추적자가 내뻗는 낫을 피하며, 이지혜는 [귀살]을 불태웠다. 
허공에 흩뿌려진 청염의 마력이 불타오르는 동안, 이지혜는 전력을 다해 꼬마들을 데리고 달렸다. 
 
“젠장, 쟤네는 [길들이기] 안 먹혀?” 
“······전 괴수종밖에 못 길들여요.” 
“망할!” 
 
온갖 쌍욕을 퍼부으며, 이지혜는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따라오는 악마종의 숫자는 얼추 열을 넘었다. 
5급 악마종은 다른 괴수종들보다 강하다. 그녀의 실력으로는 한 마리도 버거운데, 심지어 지금은 성흔도 제대로 쓸 수 없는 환경이었다. 
 
‘들어오는 게 아니었어.’ 
 
김독자가 죽은 뒤, 일행들의 사기는 완전히 흐트러졌다. 구심점을 잃자 일행들은 개별 행동을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유중혁까지 행방이 묘연해진 와중에 아홉 번째 시나리오인 [암흑성]이 등장했다. 
처음 시나리오가 시작 되었을 때, 도깨비는 이렇게 말했다. 
 
[이 시나리오는······. 음. 하하, 아마 여러분은 실패할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이지혜의 반응은 남달랐다. 
실패할 거라고? 
언제나 시나리오는 불가능해 보였고, 우리는 늘 그걸 이겨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지혜는 그렇게 생각했다. 
 
‘당장 가요. 저 새끼들 다 부숴버리자고요!’ 
 
왜 그렇게 성급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죄책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괴물들을 베고,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 붙여야만 지울 수 있을 것 같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어쩌면, 이지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정희원도, 이현성도, 다른 모든 일행들도 비슷한 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그 비감을 떨쳐내기 위해 시나리오 지역에 성급하게 발을 내딛었다. 
누가 뭐래도 그들은 서울 시의 랭커들이었고, 가장 강한 화신들이었다. 
그러나 그 결정이 실수였다는 것을,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시발, 말도 안돼······ 말도 안 된다고.’ 
 
[암흑성]에서 이지혜의 힘은 통하지 않았다. 
레벨 7을 돌파한 [검도]의 궤적은 좀처럼 먹히지 않았고, [귀살]의 힘은 오히려 악마들을 자극할 뿐이었다. 
그녀의 검은, 오래전에 부러졌다. 
 
“지혜 언니!” 
 
신유승의 외침에 이지혜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어둠 추적자]의 칼날을 피했다. 그녀는 주변의 화신들이 떨어트린 병장기를 아무거나 주워 스킬을 남발했다. [검도]를 쓰고, [귀신 걸음걸이]를 쓰고. 
 
“언니! 뒤쪽!” 
 
츠츠츠츠츳! 
 
허공에 비산한 어둠 추적자의 암액(暗液). 
 
퍼더덕! 끄르르르륵! 
 
어디선가 날아온 이길영의 작은 곤충들이 이지혜를 대신해 그 액체를 맞았다. 검은 액체에 빠져 허덕이던 곤충들은 기괴한 세포 변형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폭발했다. 곤충이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이지혜는 운 좋게 [어둠 추적자]에게 제대로 된 몇 방을 먹일 수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까가각! 스가가각! 
 
부러진 병장기와 함께 [어둠 추적자] 하나의 목이 달아났다. 
그러나 아직도 뒤쪽에는 아홉 마리가 남아 있었다. 
게다가 [어둠 추적자]는 장난일 뿐. 
그보다 무서운 것은, [어둠 추적자]들의 건너편에 있는 녀석이었다. 
 
[악마 자작 노소로크] 
 
인간의 몸에 거대한 코뿔소 머리를 얹은 듯한 외양. 
그 덩치가 다가올 때마다, 이지혜는 전신의 솜털이 떨려왔다. 
저런 괴물은 처음 봤다. 
개별적인 강함으로 따지자면 ‘범람의 재앙’만큼 강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범람의 재앙’이 자신의 힘을 억제하는 스타일이었다면, 저 악마 자작이란 놈은 그런 것이 전혀 없다. 
게다가 이지혜 본인이 그때보다 강해진 것이 지금은 독이 되었다. 
상대방의 강함을 알 수 있게 된 것이, 그녀의 두려움을 부추긴 것이다. 
이지혜는 칼날을 끌어 당기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여기서······. 
 
[암흑성 1층에 ‘고대 마력 결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언니, 저기로 가요!” 
 
복도의 끄트머리에 형성된 파란색 방. 
그곳은 이 [암흑성]에서 유일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지혜와 아이들은 전력을 다해 방으로 달려갔고, 간신히 [어둠 추적자]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 평도 채 안 되는 작은 공간이었지만, 어떻게 세 사람이 간신히 몸을 피할 공간은 되었다. 
 
[‘고대 마력 결계’에 진입하였습니다. 30분간 특수한 결계가 활성화됩니다.] 
 
하루에 세 번만 활성화 되는 이 안전 지대가 없었더라면, 이지혜와 아이들은 진즉에 목숨이 끊어졌을지도 모른다. 
 
츠츠츠츠츳! 
 
푸르스름한 결계에 닿은 [어둠 추적자]들이 신음하며 물러났다. 
그들은 몇 번인가 결계 내부에 진입을 시도하더니, 이내 포기한 듯 물러났다. 그러나 한 녀석만큼은 달랐다. 
 
“저 새낀 왜 안가?” 
 
코뿔소를 닮은 악마. 
[악마 자작 노소로크]는, 마치 이 결계의 원리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 그들에게서 몇 미터 떨어진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릴 기다리나봐요.” 
 
악마의 긴 혀가 입술을 쓸었다. 마치 맛있는 음식이 익기를 기다리는 미식가처럼, 녀석은 이지혜와 신유승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소름끼치는 시선에 신유승이 어깨를 떨며 물었다. 
 
“이제 어떡하죠? 더 이상 불러올 괴수종도 없는데.” 
“아직 30분 있어. 생각해 보자.” 
 
마침 결계가 형성된 것이 성채의 가장자리였기 때문에, 이지혜는 성채의 창문으로 바깥의 정경을 볼 수 있었다. 특수한 결계가 처져 있어서 창을 통해 나갈 수는 없었지만, 어쨌거나 바깥의 모습은 보인다. 
 
갸아아아아! 
 
이지혜와 일행들이 열어 젖힌 [암흑성]의 입구에서 악마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대부분은 하급 악마들이었지만, 평범한 화신들에겐 그런 악마종도 벅찼다. [암흑성]의 악마들은 서울의 화신들을 먹어치웠고, 감염시켰다. 
 
그르르르······. 
 
덕분에, 성채 바깥으로 보이는 악마종들 중 다수는 본래 그녀가 알던 사람들이었다. 민지원의 화랑들. 니르바나의 구원교도들. 그녀가 스쳐갔던 사람들이, 모두 마인이 되어 사람을 뜯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모두 그녀의 성급함이 낳은 결과였다. 만약, 만약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말했잖아요? 지금까지와는 난이도의 차원이 다르다고.] 
 
허공에서 들려오는 도깨비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지혜는 깨달았다. 
지금까지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강해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젠장! 젠장! 멍청한 년!’ 
 
이제와 자신의 성급함을 탓해 보았자 늦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들어온 일행들은 암흑성의 미로 속에서 뿔뿔이 흩어졌고, 그나마 만난 것이 이 아이들이었다. 
 
다른 일행들은 어떻게 됐을까. 
모른다. 
어쩌면 모두 죽었을지도. 
 
‘사부라도 있다면. 아니······ 사부가 아니라······.’ 
 
“독자형이 있었다면······.” 
 
뒤쪽에서 들려온 이길영의 목소리에, 이지혜가 인상을 찌푸렸다. 
 
“쓸데 없는 소리 하지마, 멍청아. 다쳤으면 잠이나 자라고.” 
 
뒤통수를 얻어 맞은 이길영은 다시 잠잠해졌지만, 안타깝게도 입은 하나 더 있었다. 
 
“아저씨가 죽었을 리 없어요. 잘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 들어요.”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이 녀석들은 왜 자꾸 죽은 사람 얘길 꺼내는지 모르겠다. 
 
“그 사람 뒈졌어. 그런 못 생긴 얼굴은 빨리 잊어버려.” 
 
그런데 홧김에 쏟아낸 그 말에 신유승이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근데 전 사실 이해가 안 가요. 다들 아저씨 보고 못 생겼다고 하는데, 대체 어디가 못 생겼다는 거예요?” 
 
뜬금없이 그런 질문을 받으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다 같이 ‘김독자는 못 생겼다’를 구호처럼 밀다 보니(심지어 가끔 코인을 주는 성좌도 있었다) 김독자의 ‘못 생김’에 딱히 의문을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눈이나 코의 모양이······ 전체의 조화랄까······.” 
 
말을 할수록 이지혜는 혼란에 휩싸이는 느낌이었다. 따지고 보니 김독자의 어디가 못 생겼는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심지어는 김독자의 얼굴도 선명하게 떠오르지가 않았다. 
마치 뿌연 안개 속에 가려진 것처럼······. 
혹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얼굴처럼······. 
왜지? 
왜······ 얼굴이 잘 떠오르지가 않지? 
 
“아, 아무튼 내 취향은 아냐.” 
“······그런 것 치고는 장례식 때 엄청 울던데요.” 
“당연히 연기지 바보야. 그때 성좌들이 코인 엄청 줬다고.” 
 
[몇몇 성좌들이 이지혜에게 정말 연기였냐고 묻습니다.] 
 
이지혜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멀었네요 언니는. 사람은 얼굴이 다가 아니에요.” 
“요게 진짜······.” 
 
이지혜는 신유승의 정수리를 잠시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나도 그 정도는 알아.”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였다. 
안다고 해서 모든 걸 인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적어도 이지혜는, 아직 그런 나이였다. 
 
김독자에게 많은 빚을 졌고. 
그로 인해 살아남았다. 
 
안다. 잘 알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가, 빚을 갚고 생색을 내고 싶었다. 
사실 나도······ 꽤 도움이 되는 사람이지 않냐고. 
하지만 이제 그 기회는 영영 사라져버렸다. 
 
[‘고대 마력 결계’의 지속 시간이 1분 남았습니다.]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눈앞의 결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한층 짙어진 악마종의 미소. 이지혜는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유승아. 길영이 업을 수 있지? 내가 신호하면 데리고 도망가.” 
“네?” 
“내 말 들어.” 
 
살기 위해 친구를 죽인 자에게 누군가를 구하는 일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렇게 살고자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죽은 자의 가르침이었으니까. 
 
“빨리! 달아나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 나 뒈지기 전에!” 
“······알겠어요. 조금만 참아요 언니.” 
 
아마, 다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아이는 떠나지 않을 테니까. 
결계가 사라진 순간, 이지혜의 몸이 앞으로 돌진했다. 놀란 악마종이 움찔했지만 그것 뿐이었다. 금세 그녀의 주변을 포위한 악마종들이 그녀의 몸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새하얀 허벅지와 팔뚝에서 핏줄기가 솟구쳤다. 
 
푸슛, 파가각! 
 
만약 근처에 호수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니, 하다 못해 며칠 전부터 끊어진 [배후성]과의 연락이라도 닿는다면. 
 
“······죽고 싶지 않아.” 
 
전력을 다한 [검도]의 궤적이 조금씩 흐트러졌다. 
악마종의 미소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뒤통수에 커다란 충격이 일더니, 시야가 한순간 크게 흔들렸다. 
이지혜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도 살고 싶다고······.” 
 
왠지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어땠더라. 
 
콰아아아아! 
 
앞쪽에서 빛이 쏟아진 것은 그때였다. 
어둠 추적자들의 몸이 두쪽으로 쪼개지고 있었다. 
마치 메시아가 강림한 듯. 파도가 두쪽으로 갈라지듯이. 
 
콰콰콰콰콰! 
 
이지혜는 홀린 듯 그 정경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악마 자작 노소로크가 고개를 돌린 순간, 노소로크의 머리에서 강력한 전류가 튀며 폭발했다. 황홀한 전류가 빚어낸 빛의 길 위에 사내가 있었다. 
 
아, 아······. 
 
이지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그는, 그녀가 얼굴을 기억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을 덮고 있던 안개가 사라졌다. 
 
그는 분노하며, 악귀처럼 악마를 쥐어 뜯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이번에는 그의 ‘얼굴’이 확실히 보였다는 것이다. 
 
······아저씨, 저런 얼굴이었던가?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 메시지를 들으며, 피식 웃은 이지혜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 Episode 30. 암흑성 (2) > 끝

< Episode 30. 암흑성 (3) >
 
 
 
 
 
“······아까 그거 아저씨 얘기지?” 
“뭐?” 
“그, 서울 시에 새로운 성좌 어쩌구······.” 
“아······, 뭐. 그렇지.” 
 
나는 주변에 늘어진 악마종의 시신들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지혜의 위기를 보고 놀라서 달려왔는데, 아무래도 너무 과격하게 저질러버린 것 같다. 
 
[악마 자작 노소로크]. 
 
코뿔소를 닮은 이 음험한 녀석은, 본래 이번 회차에서 무수한 화신들을 범하고 찢어 죽인 악마종이었다. 
무려 귀족급의 악마를 단숨에 제압했으니,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새삼 실감이 났다. 
이지혜가 허탈하다는 둣 말했다. 
 
“엄청나게 강한 놈이었는데······. 성좌가 되면 대체 얼마나 강해지는 거야?” 
“내 힘으로 죽인 거 아냐. 다른 설화들의 힘을 좀 빌렸어.” 
“다른 설화?” 
 
[그르······ 너······ 누구······.] 
 
돌아보니,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노소로크가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시만.” 
 
콰직! 
 
나는 간단히 발을 내리 찍어 노소로크의 머리를 터트렸다. 
 
[당신은 마계의 귀족을 처치하였습니다!] 
[10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아이템 ‘상급 악마의 증명’을 획득하였습니다.] 
[마계의 하위 종족들이 당신에게서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본래 악마종을 죽이면 해당 악마종이 따르는 ‘마왕’과 척을 지게 되지만, 이번 시나리오에서만큼은 다르다. 
[암흑성]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모든 악마종들은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녀석들이기에 죽여도 딱히 분노하는 마왕은 없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압도적인 무위에 놀랍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개연성을 의심합니다.] 
 
확실히, 개연성을 의심할 법도 하다. 
지금 내 강함은 시나리오의 균형에 명백히 위배되는 수준이니까. 
하지만 내가 ‘노소로크’를 손쉽게 쓰러트린 것은 단순히 ‘성좌’가 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설화, <메시아의 길>의 효과가 일부 적용 중입니다.] 
 
<메시아의 길>의 효과인 ‘절대 신성’. 
악마족에게는 특효인 이 설화를, 나는 <에덴>에게 빌린 상태였다. 
 
[성운 <에덴>이 당신에게 ‘설화 인용’의 대가를 요구합니다.] 
 
슥슥. 

허공에 십자 모양의 성호를 긋자, 메시지가 들려왔다. 
 
[성운 <에덴>이 당신의 ‘설화 인용’에 기뻐합니다.] 
 
‘인용’을 반복할 때마다 원하는 행동을 해주는 게 귀찮기는 하지만, 설화 표절로 시비 걸리는 것보다는 낫다. 
게다가 이번에는 성호만 그어주면 딱히 다른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성좌가 된 기념으로 <에덴>에서 특별히 서비스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기뻐합니다!] 
 
이게 다 귀여운 우리엘 덕분이다. 
다행히 ‘연회’의 일은 잘 해결된 모양이었다. 
 
“아저씨······ 그새 종교 생겼어?” 
 
이지혜가 간헐적인 호흡을 몰아쉬며 웃었다. 
오른쪽 어깨, 그리고 아랫배의 관통상과 자상들. 
 
“미안. 명색이 서울 10위인데 내 꼴이 너무 형편없지?” 
“지금이 너한텐 제일 힘들 시기야. 앞으로 좋아질 거니까 걱정 마. 자, 지금부터 뼈 맞출 테니까 가만히 있어.” 
“응? 으아아아아악!” 
 
아무래도 [엘라인 숲의 정기]를 써야 할 것 같은데. 
그러나 코트의 품속에는 남은 아이템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한수영에게 죄다 맡겨놓고 죽었었지. 
 
여덟 번째 시나리오에서 죽기 직전, 나는 한수영과 작은 계약을 맺고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아이템들을 죄다 맡겨놓았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인가. 
 
“도깨비 보따리.” 
 
입을 열자마자, 눈앞에 [도깨비 보따리]의 화면창이 나타났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자연스러운 특권 사용에 의문을 표합니다.] 
 
지금까지는 [도깨비 보따리]를 쓸 때마다 비형이 광고로 가려왔기 때문에, 대부분의 성좌들은 내가 그런 혜택을 누렸다는 걸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성좌도 되었겠다, 눈치 따위 볼 필요가 없다. 
나는 곧바로 [엘라인 숲의 정기]를 구입해 이지혜에게 먹였다. 
 
“으, 으읍!” 
“먹고 한숨 자라.” 
“······고마워, 아저씨.” 
“뭘. 내 장례식에서 질질 짜줘서 고맙다.” 
“······나 지금부터 기절할 거니까 말걸지 마.” 
 
이지혜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잠든 이지혜를 업고 몸을 일으키자,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뭉클하게 번지는 감각. 돌아보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의 화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 느낌이 없었더라면, 나는 곧장 이곳으로 달려오지 못했을 것이다. 
울음을 참은 채 이쪽을 보는 신유승을 보며, 아마도 부모의 마음이 이럴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아저씨!” 
 
허벅지에 폭 안겨드는 신유승을 나는 가볍게 끌어 안았다. 
 
“내가 너무 늦었지?” 
“일주일이나 늦었다고요······.” 
 
일주일. 
빌어먹게도, 나는 예정보다 늦게 부활하고 말았다. 
 
“가자. 맡긴 물건부터 찾아야해.” 
 
 
*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한수영은 암흑성의 바닥에 누운 채 천장을 보다가 문득 그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악마종이 들끓는 암흑성의 미로에서 혼잣말은 미친 짓이었지만, 다행히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악마종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누군가가 근방의 악마종을 죄다 쓸어버리고 2층으로 올라간 까닭이었다. 
 
물론, 모두 유중혁의 짓이었다. 
 
“빌어먹을 주인공 새끼.” 
 
한수영은 속으로 이를 까드득 갈았다. 
30분 전, 한수영은 이곳에서 유중혁과 대결했다. 
그리고 처참하게 패배해서 지금 이 꼴이 되어 있다. 
쥐어 터진 삭신이 쑤시고, 현기증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악마종? 악마종이 문제가 아니다. 진짜 악마는 유중혁이다. 
 
“완전 사기잖아. 그런 새낄 어떻게 써먹겠다고······ 김독자도 돌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서울 랭킹에서 유중혁은 3위고, 한수영은 4위였다. 그런데 이 처참할 정도의 격차는 뭐란 말인가. 그나마 목숨을 잃지 않은 것은 마지막 순간 기지를 발휘해 던진 말 때문이었다. 
 
‘야! 이거 김독자 물건이야! 진짜 빼앗아 갈 거냐?’ 
‘······김독자가 왜 네게 물건을 맡겼지?’ 
‘그거야······ 내가 제일 믿음직스러우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그럼 너를 죽이고, 내가 가지고 있으면 되겠군.’ 
‘나, 나를 죽이면 손해일걸? 김독자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그 말에 유중혁은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결국 그녀를 놓아주었다. 
 
‘또 내 앞에서 그놈 이야길 들먹이면 그땐 정말로 죽이겠다.’ 
 
그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생각하니까 또 열불이 터진 한수영이 소리를 질렀다. 
 
“아 십새끼······ 으아아아아! 심연의 흑염룡! 너 최강의 성좌라며! 왜 저놈한테 못 이기는 건데!”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침음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그것은 자신이 잘못이 아니라 항변합니다.] 
 
한참을 씩씩대던 한수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보면 다중 인격이라 오해할 법한 장면이었다. 
 
“그나저나 큰일 났네. 저 새끼 자기 여동생 데리고 올라가던데······ 이대로면 김독자가 싫어할 전개가 될 게 분명해. ······상황이 이 모양인데 김독자는 대체 어디서 뭐하고 있는 거야?”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습니다.] 
 
“그런 게 있어 자식아. 그나저나 그 새끼가 내 ‘증명’ 다 가지고 가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판이네······.” 
 
한수영은 시나리오 창을 열어 보았다. 
 
+ 
 
<메인 시나리오 # 9 ― 악마의 증명> 
 
분류 : 메인 
난이도 : A++ 
클리어 조건 : 악마종을 사냥하고, 악마의 증명 9개를 모아 2층으로 가는 제단에 바치시오. 
제한시간 : 23일 
보상 : 50000코인 
실패시 : ― 
 
+ 
 
악마종의 개체들이 워낙 강력하다 보니 시나리오 자체는 난이도가 좀 있었지만, 강자들이 협력만 잘 한다면 어떻게든 클리어는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이미 주요 그룹들은 힘을 합쳐서 2층으로 올라간 상황. 
아무리 그녀가 랭커라고 해도, 이대로라면 다른 상위권 랭커들에게 순위를 내줄 판이었다. [암흑성]의 증명 보상은 꽤 좋은 편이고, 조금만 지체해도 순위는 바뀔 테니까. 
 
‘어떡한다?’ 
 
마침, 복도 반대쪽에서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한수영은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녀석들의 증명을 빼앗아 올라가는 수밖엔······. 
 
“한수영 씨!” 
 
나타난 이들을 본 한수영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냥, 악마종이랑 싸우다 좀 다쳤어. 이현성 씨도 이쪽 미로로 들어왔나봐?” 
“그렇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그는 순정강철 이현성이었다. 
 
‘왜 하필 나타나도 이 녀석이.’ 
 
이현성이 왔다는 것은 김독자의 동료들도 왔다는 것. 
아무리 상황이 급해도, 주요 인물들의 증명을 빼앗을 수는······ 어? 
 
“이현성 씨! 함부로 다가가지 마세요!” 
 
예쁘장한 얼굴에 앙칼진 목소리. 
이현성과 함께 나타난 네 명의 일행은, 한수영이 알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자가 다시 한 번 외쳤다. 
 
“이현성 씨! 내 말 안 들려요? 함정일지도 모른다고요!” 
“맞아요! 물러서세요! 얼른 이리로!” 
“하지만······.” 

당황한 이현성이 한수영과 여자들 쪽을 번갈아 보았다. 
한수영도 함께 그쪽을 흘끔거리다 말했다. 
 
“일행이 바뀌었나봐? 갑자기 하렘을 구축하셨네?” 
“그게, 미로에서 일행들이랑 떨어져서······.” 
 
이현성이 곤란한 듯 뒷머리를 긁자, 결국 다른 여자들이 달려와 그의 팔짱을 한쪽씩 끼고 잡아 당겼다. 
 
“아, 왜 사람 말을 안 들어요! 
“저건 악마종과 싸워서 생기는 상처가 아니에요. 저 여자 수상해요!” 
“맞아요!” 
“하여간 현성씨는 순진해! 이런 세상에선 아무도 믿어선 안 돼요!” 
 
이현성을 끌어 안고 뒤쪽으로 잡아당기는 여자들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곤란해 하고 있는 이현성. 
한수영은 [특성 간파]를 발동했다. 
다음 순간, 눈앞에 떠오르는 이름들을 본 한수영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깃들었다. 
 
‘······이것들 봐라? 얘네 걔들이잖아?’ 
 
멸망한 세계에 사람들이 적응하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정희원이나 이지혜처럼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는 여자들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에게 빌붙거나 그들을 이용하려는 여자들도 있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현성, 그렇게 안 봤는데 사실은 취향이 남다른가봐?” 
“예?” 
“쟤네 전부 남자들인데, 알아?”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깜짝 놀랍니다!] 
[여장남자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경악합니다!] 
 
한수영의 말에, 여자들이 경악하며 외쳤다. 
 
“무, 무슨 소리에요 지금!” 
“모함하지 마세요!” 
 
목소리만 들어서는 전혀 남자라는 걸 알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한수영은 이들을 알고 있었다. 
[위장 복색]과 [금단의 매혹] 스킬을 이용해, 강한 랭커들을 등처먹거나 약자들을 살해하는 4인조 그룹. 
이 그룹의 이름을, 한수영은 기억하고 있었다. 
 
[핑키즈]. 
 
무슨 걸그룹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실은 전부 40대 아저씨들이다. 
 
“어이, 아저씨들, 어린 여자로 위장하면 좋아? 이현성 당신도 그대로 있으면 저 아저씨들한테 정기 다 빨려서 뒈질걸?” 
“무슨 개소릴 하는 거야 미친년이!” 
“현성 씨, 얼른 가요! 역시 이상한 사람이야!” 
 
다른 성별로 분장해서 남을 등처먹고 다니는 일쯤이야, ‘멸살법’의 세계에서는 흔한 일이다. 이 세계에는 ‘핑키즈’보다 더한 악당들도 많다. 그러니, 이 아저씨들은 충분히 갱생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김독자라면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르지만······.” 
 
한수영은, 김독자와는 다르다. 
 
“난 거슬리는 건 그때그때 치워야 직성이 풀리거든.” 
 
아마 이대로라면 이현성은 백 퍼센트 [핑키즈]에게 뒤통수를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는, 클리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겠지. 
 
스르르르르! 
 
한수영의 몸에서 순식간에 늘어난 분신들이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현성이 황급히 앞으로 나섰다. 
 
“무, 무슨 짓입니까!” 
“비켜. 쟤들 죽여야 되니까.” 
“이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현성은 전혀 비킬 기세가 아니었다. 딱히 매혹에 당한 것 같지도 않은데도, 이현성은 완강했다. 생각해 보면 이현성 다운 일이긴 했다. 
뒤쪽의 [핑키즈]가 감동이라도 한 듯한 눈으로 이현성을 보고 있었다. 
짜증이 난 한수영이 말했다. 
 
“안 비키면 너도 죽여버린다?” 
“한수영 씨. 당신이 강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세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 힘이라면 자신 있으니까요.” 
“그럼 해보든가!” 
 
늘어난 분신들이 일제히 이현성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 사이 한수영은 ‘핑키즈’를 향해 달려갔다. 
 
“죽어라, 변태들!” 
“그러시면 안 됩니다!” 
“꺄아악! 살려줘요 현성 씨!” 
 
[강철화]를 발동한 이현성이 엄청난 기세로 한수영의 분신들을 쳐 죽이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공격력에, 한수영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역시 강철검제.’ 
 
눈치를 보던 [핑키즈]가 슬금슬금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녀석들을 죄다 놓칠 판이었다. 이미 적대적인 인상을 준 마당에 살려둬서 좋을 건 하나도 없는데. 
 
‘그랬다 이거지.’ 
 
이렇게 된 이상, 비장의 무기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한수영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이현성 쪽을 바라보았다. 
 
“좋은 거 보여줄까?” 
 
다음 순간, 이현성을 둘러 싸고 있던 한수영의 분신들이 동시에 훌러덩 옷을 벗었다. 허공에 드러난 새하얀 나신들. 얼굴이 새빨개진 이현성이 자신의 눈을 가린 채 주저앉았다. 
 
“우, 우아아악! 이게 뭡니까!” 
 
한수영의 본체가 이현성의 머리를 짓밟고 하늘을 날았다. 
 
“벌거벗은 여자다!” 
 
허공을 날아 가속한 한수영은, 달아나는 [핑키즈]의 뒷덜미에 순식간에 단도를 꽂았다. 
 
콰아악! 
 
“네, 네년이 뭔데 우리를······! 끄아악!” 
 
‘윤우철. 41세. 코인 농장 운영.’ 
 
숨이 끊어진 동료를 보며 다른 [핑키즈]가 울부짖었다. 
 
“시발! 우린 아무 잘못도 없다고!” 
 
‘황민규. 43세. 미성년자 성폭행 및······ 뭐였더라?’ 
 
간단히 움직인 단도에, 또 다시 목이 떨어졌다. 
변신이 풀린 [핑키즈]가 털이 수북한 무다리를 드러내며 드러누웠다. 
 
“사, 살려줘! 살려줘어!” 
 
‘방탁호. 39세. 3회차에서 어린이들을······ 아무튼!’ 
 
스걱! 
 
순식간에 남은 [핑키즈]는 하나 뿐. 
벌벌 떠는 여장중년인을 보며, 한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얜 뭐였지?’ 
 
잠시 생각하던 한수영이 그대로 마지막 [핑키즈]의 목을 날리려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백청의 마력이 그녀의 단도를 막았다. 
그리고 들려오는 담담한 목소리. 
 
“그쪽은 잘못 짚었어.” 
“······뭐?” 
“그 아저씬 죽이면 안 된다고. 이번 공략에 필요한 사람이야.”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한수영이 생긋 웃었다. 
 
“너무 늦었잖아, 김독자.”
 
 
 
 
 
< Episode 30. 암흑성 (3) > 끝

< Episode 30. 암흑성 (4) >
 
 
 
 
 
내 이야기를 들은 한수영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 진짜로 성좌가 된 거야?” 
 
분명 며칠 전까지 화신이었던 녀석이, 성좌가 되어 나타나다니. 
기묘하게 느껴지긴 할 것이다. 
아마 한수영이 읽은 데까지는, 화신이 ‘성좌’로 거듭나는 이야기는 안 나왔을 테니까. 
 
“그래. 나 성좌야.” 
“진짜, 진짜로?” 
“그렇다니까.” 
 
한수영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거였어?” 
 
결코 쉽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한수영은 들을 계제가 아니었다. 
 
“시발, 너 그럼 이제 시나리오 밖에서 우리 구경하면서 후원질하고 그러는 거냐?” 
“그런 건 아냐. 난 시나리오 진행 도중에 성좌위에 올랐기 때문에, 시나리오는 계속 참여해야 해.” 
“그럼 뭐가 달라진 건데? 겉으로 봐선 전혀 모르겠는데?” 
 
사실 나도 엄청나게 실감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설화를 빌린다거나, 다른 성좌 및 성운들과 거래할 수 있게 되었다거나, 나에 대한 성좌들의 태도가 바뀌었다든가······.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성장세를 질투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이 수식언을 갖는 것을 반대합니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에게 적대감을 보입니다.] 
 
하여간, 성좌고 나발이고 질투가 제일 추한 법이지. 
이제 막 자라나는 새싹에게 왜 저렇게들 가혹한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거 아냐? 
나도 이제 그거 할 수 있는 거. 
 
[당신이 다른 성좌들을 노려봅니다.] 
 
[일부 성좌들이 깜짝 놀라 당신을 바라봅니다!] 
[몇몇 성좌들이 경악하며 마시던 콜라를 토합니다!] 
 
[간접 메시지 사용으로 200코인을 소모하였습니다.] 
 
······역시 간접 메시지를 띄우면 코인이 나가는군. 
재미는 있는데, 적당히 써야겠다. 
곁을 보니 한수영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바, 방금 메시지 띄운 거 너야? 이름 없는 성좌 어쩌구 그거?” 
 
역시, 한수영 한테는 그렇게 보인 모양이군. 
 
“그래.” 
“혹시 지금까지 너 <배후 계약> 안 하고 있었던 게 그것 때문이야?” 
“그래.” 
“······그럼 난 이미 늦은 거지?”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한수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살핍니다.] 
 
한숨을 푹 내쉰 한수영이 나를 바라보았다. 
 
“시발······ 존나 부럽네 진짜. 근데 넌 왜 수식언이 없어?” 
“그건······.” 
 
왜 나는 수식언이 없는가? 
정확한 답은 나도 모른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이 머무를 별자리의 수식언을 찾는 중입니다.] 
 
어쩌면 쌓아온 설화의 개수가 얼마 안 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성좌가 되었는데 수식언이 없다는 것은, 시민권은 얻었는데 살 집이 없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니까, 부랑자 신세라는 거네.” 
“······아직 다섯 번째 설화가 안 끝났어. 아마 늦어도 이번 설화가 마무리 될 때쯤이면 나도 수식언이 생길 거야.” 
 
[다섯 번째 설화, ‘고독한 메시아’가 현재 진행 중입니다.] 
 
다섯 번째 설화는 성좌의 ‘격’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설화다. 
그러니 이 설화가 어떻게 마무리 되냐에 따라서, 내가 머물 별자리의 위치도 정해질 것이다. 
······아마도. 
그러자 한수영이 야유했다. 
 
“올······ 김독자, 갑자기 좀 멋있어 보인다? 이제 유중혁도 막 처바를 기세네?” 
 
유중혁이라. 
나는 주먹을 쥐었다 펼쳐 보았다. 
그러자, 이제껏 보지 못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개연성 후폭풍’을 조심하십시오.] 
[현재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격을 평가 중입니다.] 
 
손끝에서 찌릿하게 느껴지는 감각. 
역시, 성좌가 되면 이게 문제다. 
그래도, 저 ‘평가’가 진행중인 동안만큼은 괜찮을 것이다. 
아직 <스타 스트림>은 내게 적합한 수준의 제약을 모를 테니까. 
 
“지금이라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진짜?” 
 
어디까지나 ‘지금’이라면 말이다. 
주인공이 괜히 주인공이 아니다. 
내가 ‘성좌’라는 모험을 감행해야만 따라갈 수 있는 성장력. 
그게 바로 유중혁이란 녀석이 받은 어마어마한 특혜니까. 
 
“그보다 내가 맡긴 거나 빨리 돌려줘.” 
“쳇, 알겠어.” 
 
[화신 ‘한수영’이 계약을 이행합니다.] 

나는 한수영에게서 맡겨 두었던 코인과 아이템들을 모두 돌려 받았다. 
한수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네. 잠깐 부자된 기분이었는데.” 
“수고비로 2만 코인 줬잖아.” 
“60만 코인 넘게 갖고 있었는데, 꼴랑 2만 코인 받았다고 기분 좋겠냐?” 
“그럼 도로 내놓든가.” 
 
한수영이 콧방귀를 뀌며 등을 돌렸다. 
나는 한수영에게 받은 아이템과 코인을 점검했다. 
 
[보유 코인 : 684,353 C] 
 
그간 참, 많이도 모았다 싶다. 
악착같이 벌고 악착같이 저축했으니, 이만큼 모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제 성좌가 되었으니 코인을 사용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내가 가진 코인들이 진짜 힘을 발휘하는 건 지금부터일 것이다. 
그럼 슬슬······ 아, 잠깐. 중요한 걸 잊고 있었네. 
 
“한수영, 저건 언제 풀어줄 거냐? 저거 성희롱이라고.” 
“어? 이런, 깜빡했네.” 
 
배시시 웃는 한수영과 함께, 나는 아직도 머리를 감싸쥔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현성을 향해 다가갔다. 이현성의 주변에는 여전히 훌러덩 옷을 벗은 채 춤을 추고 있는 한수영의 분신들이 있었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 
 
「강철검제는 여자에게 약하다.」 
 
아무리 ‘멸살법’에 그런 문장이 들어 있다지만, 이건 좀 심한 게 아닌가 싶을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저건······. 
 
“······진짜도 아니네.” 
 
한수영의 분신들은 얼핏 보면 나신의 여체 같지만, 잘 보면 중요한 부위들이 없었다. 
즉, 이현성은 지금 마네킹이나 다름없는 분신들을 보고 저 지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 말뜻을 알아챈 한수영이 짓궂게 웃었다. 
 
“흐음······ 그거 무슨 뜻이야? 혹시 못 봐서 아쉽다는 뜻?” 
“말했잖아. 난 빈약한 체형 안 좋아한다고.” 
“······본 적도 없는 게 막말하는 거 아니다.” 
“그걸 꼭 봐야 아냐?” 
 
나는 일단 이현성에게 다가가서 등을 두드려 주었다. 
 
“현성 씨, 괜찮아요?” 
“도, 독자 씨.” 
 
눈빛이 멍청한 게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현성은 유령이라도 보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독자 씨가 왜······ 저도······ 죽은 겁니까?” 
 
제대로 트라우마가 걸린 모양인데. 이죽거리고 있는 한수영을 보고 있자니 짜증이 난다. 만화 같은 상황이었지만, 강철검제 본인에겐 제법 심대한 타격이었을 것이다. 이거, 이번 회차에서 잘못하면 이현성이 고자 루트를 밟을지도 모르겠는데······. 
일단은 시간이 지나면서 회복되도록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다. 
그때,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기······.” 
“······?” 
“저는 이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그제야 [핑키즈]의 마지막 멤버가 눈에 들어왔다. 
늘씬한 몸매에 예쁘장한 얼굴. 고운 눈썹에 은은한 볼터치가 들어간 뺨. 
누가 저 여자의 실체가 40대 아저씨라 믿을까. 
 
“당신 이름이 뭐죠?” 
 
내가 묻자, 예쁜 목소리가 답했다. 
 
“서, 서인아입니다.” 
“그거 말고 본명요.” 
 
서인아는 우물쭈물대더니 결국 본명을 토해냈다. 
 
“······김영팔입니다.” 
 
[핑키즈]의 김영팔. 제대로 찾았군. 
한수영이 혀를 찼다. 
 
“······저 아저씬 왜 살려둔 거야? [핑키즈]는 나쁜 새끼들이잖아?” 
“아직은 아냐. 나쁜 놈들이 ‘될 예정’이지. 그리고 너도 제대로 읽었다면 알겠지만, [핑키즈]는 원래 3인조야.” 
“그치만 쟤네는 4명······ 어?” 
“저 아저씬 걔네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에 죽은 사람이야.” 
“······그래서 죄목이 기억이 안 났던 거였나?” 
“김영팔은 기본적으로 순수한 사람이야. 그래서 [핑키즈]에서 제일 먼저 죽었던 거고.” 
 
김영팔이 끼어들었다. 
 
“저기, 무슨 말씀들을 하시는 건지······.” 
“아저씬 닥치고 있어.” 
 
미간을 찌푸린 한수영이 말을 이었다. 
 
“저 아저씨가 순수하다고?” 
“그래.” 
 
나도 믿기지 않지만, ‘멸살법’의 설정이 그 따위인 것을 어쩌겠는가.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나쁜 사람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김영팔은 아무도 살해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심지어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도. 
내가 [곤충 살해]라는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김영팔이 실수로 지나가던 개미를 밟아죽이고 생존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김영팔은 본인이 왜 살아 남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정말로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 
 
그게 바로 [핑키즈] 김영팔이었다. 
아니, 이제 동료가 다 죽었으니 [핑키]라고 불러야겠군. 
한수영이 인정하기 싫다는 듯 중얼거렸다. 
 
“젠장······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무튼 쓸모가 있으니까 살려둔 거지?” 
“그래.” 
“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 
“어쩌긴, 다시 시나리오 깨야지.” 
“이번 시나리오가 뭔지는 알고 하는 소리지?” 
 
물론 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서울 돔 해방’을 앞둔 마지막 시나리오잖아.” 
 
아홉 번째 시나리오, [암흑성]. 
이 시나리오에는, 지금껏 나오지 않았던 존재들이 등장한다. 
나는 여전히 공포에 떨고 있는 이현성과 곯아떨어진 이지혜, 그리고 다친 이길영을 돌보는 신유승을 보았다. 
아마 다른 일행들도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정희원’이 있으니, 암흑성 1층에서 그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았겠지. 
 
“너도 알겠지만 1층은 장난이야. 진짜 지옥은 2층 부터지.” 
 
성채에 드러난 특수창으로 바깥의 정경이 보였다. 마인이 되어 돌아다니는 서울의 인파들. ‘최강의 희생양’을 자처하며 힘겹게 지켜낸 보람이 없게도, 서울 시의 절반은 이미 악마종의 수족이 되어가는 중일 것이다. 
 
갸아아아아! 
 
슬픈 듯 절규하는 서울의 화신들. 
이미 충분한 절망이 서울을 뒤덮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야기’는 부족했다. 
 
이야기는, 언제나 부족하다. 
 
도깨비들은 여전히 더 큰 절망을 갈구하고. 
성좌들은 여전히 더 자극적인 이야기를 갈망한다. 
 
함께 창밖을 보던 한수영이 말했다. 
 
“역시 진부한 상상력이라니까. 회귀자에, 귀환자에, 환생자에. 그것도 모자라서 이번엔 악마냐?” 
“지도 표절한 주제에 무슨······.” 
“야, 내가 아니라고 몇 번을······.” 
 
평소처럼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 받다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한수영.” 
“왜?” 
“만약 네가 ‘멸살법’ 작가라면 말야.” 
“난 그딴 쓰레기 안 쓰거든?” 
“그냥 가정하는 거야.” 
 
툴툴대던 한수영이 입술을 비죽였다. 
 
“······작가라면?” 
“네가 ‘멸살법’ 작가라면, 이 세계를 왜 만들었을 것 같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넌 같은 작가니까 혹시 알까 싶어서.” 
“나 같은 일류 작가가 어떻게 삼류 작가의 생각을 알겠냐?” 
 
······물어 본 내가 등신이지. 
그런데 한수영이 말을 이었다. 
 
“오히려 내가 너한테 묻고 싶은데 그래.” 
“······뭘?” 
 
순간 한수영의 깊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해도, 한수영의 속은 읽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았다. 
같은 이야기를 읽어온 사람은, 생각마저 닮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넌, 이 세계의 끝을 알고 있어. 그렇지?’ 
 
한수영은 분명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기에 한수영은 내게서 시선을 돌린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른 것을 물었다. 
 
“······<시나리오>라는 건 대체 뭘 위해 존재하는 걸까.” 
 
나 역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멸망한 서울 위로, 새카만 하늘의 어둠이 보인다. 
성좌가 되었기 때문일까. 
하늘은 이제 예전과 같은 풍경이 아니었다. 
천공을 수놓은 무수한 별자리. 
그 별자리들을 끌어안은 <스타 스트림>이 그곳에 있었다. 
저렇듯 가까이 붙어 있음에도, 결코 닿을 수 없는 별들. 
 
그토록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음에도······. 
조금도 지워지지 않는, 저 까마득한 심연. 
 
나는 그제야, 뭔가를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성좌’란 존재들이 늘 무엇을 견디고 있었는지. 
어째서 그들이 이야기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그 아득한 감정을 떨쳐내기 위해 나는 입을 열었다. 
 
“아마, <시나리오>는······.”
 
 
 
 
 
< Episode 30. 암흑성 (4) > 끝

< Episode 30. 암흑성 (5) >
 
 
 
 
 
<스타 스트림>의 무수한 존재들이, 긴 세월을 살면서 한 번씩 던져온 질문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시나리오란 대체 왜 존재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저마다 달랐다. 
가령, 귀환자인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마저 없다면 이 우주는 너무 외롭기 때문이겠지. 
 
또, 성좌 ‘어두운 봄의 여왕’은 같은 질문에 다음과 같이 되묻는다. 
 
―지금 어째서 ‘요리’가 존재하느냐고 묻는 것인가요? 
 
그리고 마왕 ‘아스모데우스’는, 같은 질문에 다음과 같이 조소했다. 
 
―시나리오란 더 커다란 멸망을 막기 위한 작은 멸망이지. 
 
누군가 듣는다면, 낭만적이라든가 철학적이라고 말할 법한 대답들. 
그러나 사람들은 잘 모른다. ‘낭만’과 ‘철학’이란 애초에 배부른 자들을 위한 사치라는 것을. 
그러므로 지금 암흑성 2층의 <무저갱 평원>에 있는 악마 백작 ‘텐타치오’에게, <시나리오>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좆같아.” 
 
그것은 그의 말버릇이었고, 엄밀히 따지면 그만의 말버릇도 아니었다. 
이 공간에 들어온 존재들은 누구나 50년쯤 지나면 그런 말이 입에 붙게 되니까. 
물론, 50년씩이나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였지만. 
 
“지겨워.” 
 
마계의 강 [포이닉스]의 지류가 흐르는 드넓은 <무저갱 평원>. 
혹자는 어떻게 ‘암흑성’의 2층에 이처럼 거대한 평원이 있느냐고 물을지도 모르지만, 물론 그거야 텐타치오도 알지 못한다.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은 둘 뿐이다. 
 
이 거대한 평원의 정점에 올라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194년째 못 해내고 있다는 것. 
 
‘빌어먹을, 그때 그 도깨비 놈의 제안만 아니었어도······.’ 
 
지금도 194년 전의 기억은 생생했다. 
 
―73번째 ‘마왕’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마왕. 
모든 ‘악마종’의 정점이자 숙원. 
 
―······내가 마왕이 될 수 있다고? 
 
3급 악마종으로 살아가며 신분 상승이 요원해진 상황이었다. 아무리 많은 하급 악마종을 잡아 먹어도 좀처럼 오르지 않는 힘. 그 정체기에, 텐타치오는 악마인 자신보다 더 악마 같은 존재의 유혹을 받았다. 
 
―당신에게 부족한 건 ‘힘’이 아닙니다. ‘이야기’지. 
―그게 무슨 소리지? 
―시나리오에 참가하게 되면, 알게 되실 겁니다. 
 
그렇게 텐타치오는 시나리오 [암흑성]에 투입되었다. 
수많은 악마종을 찢어 죽였고, 전 차원에 흩어진 [암흑성]의 1층에서 올라오는 종족들을 학살했다. 
194년이 지났을 때, 악마 백작 텐타치오는 ‘암흑성 2층’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의 악마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거기 까지였다. 
 
‘이걸론 3층으로 갈 수 없다.’ 
 
암흑성의 3층. 
마왕의 정수가 잠들어 있는 곳.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2층의 최강자들을 모두 꺾어야만 했다. 
그러나 단순히 코인을 얻고, 힘을 키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2층의 최강자들은, 단순히 능력이 강해서 최강인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그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성좌, ‘매금지존’이 당신의 혼잣말을 원합니다.] 
[성좌, ‘매금지존’이 당신의 설정을 궁금해합니다.] 
 
‘설정? 빌어먹을 놈들. 내가 무슨 만들어진 존재인 줄 알지.’ 
 
성좌들의 건방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에 대해 궁금해하는 성좌가 나타났다는 것은 달가운 일이었다. 
성좌가 그에 관해 궁금해한다는 것은, [암흑성]의 1층을 뚫고 올라온 새로운 버러지들이 있다는 의미. 그것은 곧, 이제부터 즐거운 유희가 시작될 것이란 뜻이었다. 
 
슈우우우우! 
 
들판에 나타난 것은 일련의 남녀들. 
텐타치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환영한다, 벌레들아. [암흑성]의 2층에 온 것을.” 
 
늘 하는 대사였지만, 텐타치오는 버릇처럼 대사를 즐겼다. 
예상대로, 버러지 몇 마리가 앞으로 나와 그를 향해 물었다. 
 
“여, 여긴 어딥니까? 당신은 누구죠? 가이드입니까?” 
“······혹시 도깨비?” 
 
도깨비라니. 그것은 텐타치오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말을 인내하며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이 인내 뒤에는 달콤한 보상의 시간이 올 테니까. 
 
“[암흑성]의 2층은 적자생존의 세계다. 이곳에서 힘을 인정 받은 존재만이 다음 층으로 나아갈 수 있다. 간단한 룰이지? 어디, 설명이 더 필요한 존재가 있다면 손을 들어 보거라.” 
“히, 힘을 인정 받는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어떻게 하면······.” 
“이렇게 하면 된다.” 
 
콰지지직! 
 
순식간에 늘어난 텐타치오의 팔에, 말을 잇던 남자의 머리가 그대로 폭발했다. 깜짝 놀란 버러지들의 표정. 이것이 바로, 텐타치오가 제일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뭐, 뭐야!” 
“씨발! 역시 함정이었어!” 
 
남자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를 한껏 머금은 텐타치오가 살벌하게 웃었다. 
 
“여왕님을 보호해라!” 
“화랑의 명예를 바친다!” 
 
모든 화신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지만, 텐타치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고오오오! 
 
그의 전신에서 강력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악마 귀족의 작위는 오등작이다. 
공작, 후작, 백작, 자작, 그리고 남작. 
자작이나 남작급은 제법 흔하지만, 백작급부터는 차원이 다르다. 
백작급의 악마는, ‘설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설화. 특정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만 열리는 ‘이야기’. 
 
[설화, ‘벌레 학살’이 시작됩니다.] 
 
스가가가가각! 
 
“끄아아아악!”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인간들은 정말로 벌레가 터지듯 죽어 나갔다. 
194년간 수십만 버러지들을 학살하며 얻은 이 설화는, 자신보다 격이 낮은 존재들에게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는 설화였다. 
 
[성좌, ‘매금지존’이 깜짝 놀랍니다.] 
 
“크하하하하하!” 
 
퍼걱! 퍼거거거걱! 
 
주변의 화신들은 순식간에 시체나 반송장이 되어 너부러졌다. 
 
‘이건 너무 싱겁군.’ 
 
쓸만한 화신들도 몇몇 보였지만, 대부분은 쓰레기였다. 
기껏해야 5급 악마종으로 변이하면 다행일 법한 수준. 그러다 한순간, 텐타치오의 시선이 멎었다. 
 
“호, 너는 4급 정도는 되겠구나.” 
 
텐타치오는 여자의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차르르 흩어지는 여자의 머리카락. 부서진 왕관이 주변을 나뒹굴었다. 
그녀는 미희왕 민지원이었다. 
 
“네가 이 녀석들의 우두머리겠군.” 
 
강맹한 눈빛이 마음에 든다. 
이 여자의 ‘이야기’는 꽤 맛있을지도 모르겠다. 
 
“두 가질 묻겠다. 너흰 어디에서 온 놈들이냐?” 
“그, 그런 걸 말해줄 것 같······.” 
“너 같은 벌레들은 많이 봐왔지.” 
 
텐타치오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옆을 굴러 다니던 화랑 하나를 짓밟아 터뜨렸다. 
 
퍼어억! 
 
뇌수와 함께 부서지는 두개골을 보며, 민지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자, 잠깐만!” 
 
퍼어억! 퍼어억! 
 
“그, 그만둬! 지, 지구······ 우린 지구에서 왔어!” 
 
텐타치오가 웃으며 되물었다. 
 
“지구?” 
 
풍부한 이야기로 들끓는 그 행성에 관해, 텐타치오는 들은 기억이 있었다. 
 
‘마왕들이 그랬지. 지구는 이야기의 요람과 같은 곳이라고.’ 
 
이야기가 많은 곳에는 설화가 발생하고, 설화가 많은 곳에는 풍부한 먹잇감들이 많다. 텐타치오가 입술을 핥았다. 
 
“벌레야. 너희 중 가장 많은 설화를 쌓은 것은 누구냐?” 
“으, 으으······ 설화라고? 그게 무슨······.” 
 
역시, 이렇게 말해서는 못 알아듣는 건가. 
 
“너희들 중 가장 강한 인간은 누구지?” 
 
탐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텐타치오의 샛노란 눈을 보며, 민지원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 
 
 
“아, 그래서 ‘시나리오’가 대체 뭔데?” 
“······방금 얘기해줬잖아.” 
“그렇게 상징적으로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어?” 
 
나는 한수영과 투닥거리며 2층으로 향하는 제단을 찾고 있었다. 
가는 길에 몇 마리의 악마들을 더 잡았다. 
진행은, 말할 필요도 없이 순조로웠다. 
왜냐하면 악마가 나타날 때마다 내가 ‘성좌의 격’을 발출했기 때문이다. 
 
[끼이이이이······!] 
 
시선이 마주친 [어둠 추적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거나 몸을 떨었다. 
비록 설화급이라든가 수위권의 위인급 성좌에겐 미치지 못하겠지만, 일단 성좌가 되고 나면 존재감 자체가 달라진다. 
즉, 나보다 낮은 격의 존재들에겐 시선이나 발언 만으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너무 쉬운 진행에 실망합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당신에겐 더 커다란 역경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어렵게 가면 고구마라고 난리, 쉽게 가면 재미없다고 난리······.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모르겠다.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 할 거 아냐? 시나리오 열리고 나서 처음으로 ‘쉽게’ 가는 중인데······. 
그렇게 일행들을 도와 악마의 증명을 하나씩 모아가고 있던 찰나, 허공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독좌’님. 팔자 좋아 보이십니다? 보따리도 혼자 막 열어버리고?]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누구인지 잘 알겠다. 
나는 툴툴대며 메시지를 보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게 누군데. 중급 도깨비 됐다고 기고만장해서는. 
 
[기고만장하긴 누가! 바빠서 못 온 것뿐이라고! 아무튼······ 늦었지만 축하한다. 설마 내 채널에서 새로운 성좌가 나오다니. 뭔가 감개무량하네.] 
 
―채널은 잘 돌아가고 있냐? 
 
[네가 성좌가 되는 바람에 ‘화신 찾기’ 집단이 대거 탈주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잘 되고 있어. 시나리오 참여 중인 성좌 구경하겠다고 다들 몰려와서 지금 완전 북새통이야. 조만간 또 채널 확장해야 할지도 몰라.] 
 
······그 정도란 말인가? 
하긴, 화신이 시나리오 진행 도중 성좌로 격상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니까. 
 
[근데 너 싫어하는 놈도 만만찮게 생겼으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솔직히 ‘성좌’만 되었다 뿐이지, 완전히 ‘격’을 갖춘 건 아니잖아?] 
 
사실, 비형의 말이 맞았다. 
성좌가 되었지만 고유 성흔도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한 마디로 말해서, 지금의 나는 반쪽짜리 성좌에 가까웠다. 
 
[아까 보니까 네가 유중혁 보다 강할 거라는 소릴 하던데, 솔직히 말해서······.] 
 
―내가 더 세. 
 
[오······ 김독자. 평소랑 반응이 다르네? 라이벌 의식 느끼냐?] 
 
―난 성좌고 그놈은 화신이야. 내가 이기는 게 당연하잖아. 
 
[글쎄······ 과연 그럴까?] 
 
―대체 용건이 뭐야? 시비 걸려고 왔냐? 
 
[아, 조만간 그 녀석 태어날 것 같아. 먹일 ‘설화’가 필요해. 네가 따지면 얘 아빠인데, 그래도 부모 노릇은 해야······.] 
 
―알았어. 구해줄게. 
 
[자식, 역시 이해가 빨라서 좋다니까. 그럼 부탁한다.] 
 
아무래도 41회차의 신유승이 깨어날 때가 된 모양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일행들이 악마들의 시체에서 증명을 수거하고 있었다. 
 
“다들 ‘증명’은 충분히 모았죠?” 
 
신유승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저, 아직 덜 모아서······ 그리고 길영이 것도······.” 
“······아, 내가 도와줄게.” 
 
귀찮은 듯 보이긴 했지만, 뜻밖에도 한수영은 신유승을 잘 챙겼다. 
뒤쪽에서 이길영을 업고 오던 이현성도 한마디를 했다. 
 
“저, 독자 씨.” 
“예.” 
“한 번만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세요.” 
 
한수영의 악몽에서 간신히 벗어난 이현성은, 아직도 내가 살아난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인지 가끔씩 내 팔뚝을 잡거나 머리통을 잡는 이상행동을 보였다. 감동적인 얼굴로 내 머리를 만지던 이현성이 입을 열었다. 
 
“예전에 군대에서 탄피를 분실한 적이 있습니다.” 
“······그거 큰일이었겠는데요. 다시 찾았나요?” 
“못 찾았습니다.” 
“엄청 혼났겠네요. 근데 그 얘긴 왜······.” 
“그 탄피가, 한 달 쯤 있다가 전혀 뜬금없는 곳에서 발견되더군요.” 
 
내 얼떨떨한 표정에도, 이현성은 한없이 진지한 눈빛이었다. 
 
“그때부터 그 탄피를 계속 제 주머니 속에 넣어 다녔습니다.” 
“······그거 군법 위반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너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여서 놀랐다.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근데 그 이야길 왜 갑자기······.”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 머리통을 보면서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길 하는 건지 모르겠다. 
설마 내 머리통을 잘라서 주머니에 넣어 다니겠다는 뜻은 아닐테고······. 
아무튼, 내가 살아와서 기쁘다는 뜻이겠지.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2층으로 가는 제단에 도달했다. 
증명은 충분히 모았고, 이제 남은 것은 제단에 증명을 바치고 기다리는 것뿐. 그때, 한수영이 물었다. 
 
“저 아저씨도 같이 가는 거지?” 
 
돌아보니 핑키즈 김영팔이 우물쭈물거리며 서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영팔 씨. 앞장 서세요.” 
“예?” 
 
기겁하는 김영팔을 보며, 한수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저 아저씨는 뭔데?” 
“잊었냐? 2층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 
 
암흑성의 1층에서 증명을 모두 모은 자들은, 증명을 바친 후 소환되는 ‘악마’를 사냥해야만 다음 층으로 갈 수 있다. 그런데 이 악마는 2층에서 소환되며, 파티를 기준으로 ‘가장 약한 자’에게 걸맞는 악마가 소환된다. 
한수영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러니까 제일 약한 저 아저씨를 앞장세우겠다?” 
“그렇지.” 
“······김독자 치졸함 하나는 최고네.” 
“치졸한 게 아니라 전략적이라고 해야지.”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졸렬함에 놀랍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이 성좌의 품격을 보여주길 원합니다!] 
 
······성좌의 품격은 무슨 얼어죽을. 
나라고 좋아서 어려운 시나리오만 헤쳐온 게 아니다. 
성좌도 됐는데 좀 시원시원하게 갈 때도 있어야지. 
한수영이 말했다. 
 
“그럼 이 관문은 쉽게 깨겠네.” 
“별 일만 없다면.” 
“별 일?” 
“가끔 우리 수준과는 상관없는 악마가 소환될 때가 있어.” 
 
[‘악마의 증명’을 바쳤습니다.] 
[당신들을 시험하기에 적절한 악마 수문장이 소환됩니다!] 

슈우우우우! 
 
제단에서 눈부신 빛이 솟아 오르며, 악마가 소환되기 시작했다. 화려한 육망성 위에 비치는 스포트라이트에 일행들은 순간 압도되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저기서 나올 악마는 약골 김영팔의 수준에 딱 알맞은 녀석이다. 아마, 2층의 악마 귀족들 중에서도 최약체인 ‘악마 남작 빌레르’겠지. 
그리고 그 정도라면, 내가 굳이 성좌의 힘을 쓰지 않더라도 제압할 수 있는······. 
 
[당신을 원하는 악마가 2층에 있습니다!] 
 
······어? 
 
쿠구구구구! 
 
[수준과 무관한 악마가 육망성 위에 소환됩니다!] 
 
뒤이어 들려온 메시지에 한수영의 안색이 굳어졌다. 
 
“씨바······ 뭐야? 이게 네가 말한 ‘별 일’ 아냐?” 
 
[악마 백작 ‘텐타치오’가 강림했습니다!] 
 
······뭐? 백작? 
어깨 위로 드러난 웅장한 뿔. 
화려한 임팩트와 함께 육망성 위에 나타난 악마는, 빌레르 따위와는 비빌 수도 없는 강력한 녀석이었다. 
고요히 눈을 뜬 녀석이, 잔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네가 ‘유중혁’이라는 놈이냐?”
 
 
 
 
 
< Episode 30. 암흑성 (5) > 끝

< Episode 30. 암흑성 (6) >
 
 
 
 
 
“유중혁?”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암흑성 2층의 ‘별종’들 중에 가끔 이 ‘시험’의 악마로 강림하는 녀석들이 있다고, ‘멸살법’에서 읽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핑키즈 김영팔이 끼어든 회차에서 백작급 악마가 나타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소환되자마자 유중혁은 왜 찾는 거지? 
내가 대답이 없자, 악마 녀석이 후욱― 하고 숨을 뿜더니 이현성 쪽을 돌아보았다. 
 
“아니면, 네놈이 유중혁인가?” 
“······전 이현성입니다.” 
“그럼 유중혁이라는 놈은 어디 있지?” 
 
지켜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괜히 여기서 백작급 악마를 자극해 봐야 좋을 건 없었다. 
 
“그놈은 왜 찾는 거야? 여긴 없으니까 돌아가.” 
 
내 까칠한 말투에 악마 백작 텐타치오가 흐흐 웃었다. 
 
“벌레 녀석이 말대답을 하는 구나. 그것 참 이상하군. 여기에 ‘서울 최강’이란 놈이 있다고 들었는데?” 
 
서울 최강? 
 
“어······ 그거 내 얘기 같은데.” 
 
그 말에 일행들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왜들 그런 눈으로 보는 건지 모르겠다. 
사실인데. 
텐타치오도 나를 노려보았다. 
 
“네놈은 유중혁이 아니라고 했지 않느냐?” 
“유중혁은 아닌데, 아무튼 서울 최강은 나야.” 
 
대체 뭔 일일까. 이 자식이 ‘서울 최강’은 왜 찾는 거지? 
 
[성좌, ‘매금지존’이 당신에게 미안해합니다.] 
[성좌, ‘매금지존’이 제발 저 악마를 잡아달라고 부탁합니다.] 
 
······매금지존? 
나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갑자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이 왔다. 
 
[당신이 신라 출신의 성좌들을 노려봅니다.] 
[신라 출신의 성좌들이 당황합니다.] 
 
역시 그렇군. 
이 자식들이······ 지금 자기들 후손 살리겠다고 날 팔았다 이거지? 
 
[성좌, ‘매금지존’이 자초지종을 보여줍니다.] 
 
머릿속으로 ‘매금지존’이 본 기억의 일부가 내게 스며들었다. 
타격으로 전신이 묵사발이 된 민지원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고 있었다. 
 
―서울 최강은······ 유중혁이란 남자야. 
 
[성좌, ‘매금지존’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지금처럼 성좌가 자신의 기억을 직접 보여주는 행위는 개연성을 감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상당한 양의 코인을 지불해야 한다. 그런데도 내게 서슴없이 기억을 보여줬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다는 거겠지. 
젠장, 그럼 유중혁한테 보낼 것이지 왜 나한테 보낸 거야? 내가 만만하냐?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허공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도와주면 뭐 해줄 건데?” 
 
[성좌, ‘매금지존’이 코인을 지불하겠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또 2천 코인 주려고?” 
 
[성좌, ‘매금지존’이 당황합니다.] 
 
“다른 거 줘. 도움이 될 만한 거.” 
 
[자존심 상한 신라의 성좌들이 ‘매금지존’에게 성토합니다.] 
[성좌, ‘매금지존’이 당신에게 설화를 지불하겠다고 말합니다.] 
 
설화? 
 
[새로운 ‘현상금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현상금 시나리오 ― 악마 퇴치> 
 
분류 : 서브 
난이도 : A+ 
클리어 조건 : 악마 백작 ‘텐타치오’를 처치하시오. 
제한시간 : ― 
보상 : 신라 출신 성좌들의 신뢰, 역사급 설화 1개 
실패시 : ― 
 
+ 
 
역사급 설화 하나라. 
상당히 괜찮은 조건이었다. 
사실, 딱히 저쪽에서 조건을 걸지 않아도 악마 백작은 잡아 줄 생각이었다. 신라 출신의 성좌들은 성운을 이룰 만큼 강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빚을 지워둬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뭐, 어차피 잡아야 할 놈이기도 하고. 
기다림에 지친 악마 백작이 으르렁거렸다. 
 
“뭘 혼자 웅얼대고 있는 거냐? 그래서 네놈이 유중혁이란 거냐, 아니란 거냐?” 
 
텐타치오의 전신에서 강력한 기류가 방출되자, 이현성이 잽싸게 앞으로 나섰다. 
 
“독자 씨, 저 놈은 제가 맡겠습니다.” 
“현성 씨, 혼자론 무리······.” 
“이젠 결코 탄피를 잃어버리지 않겠습니다.” 
 
한수영이 재미있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텐타치오가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씩 웃었다.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놈들이군. 나는 그런 녀석들을 짓밟는 걸 좋아하지.” 
“너도 내가 누군지 모르잖아?” 
 
쿵, 하는 지진파가 발생함과 동시에 [강철화]를 전개한 이현성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까가가각, 하는 소리와 함께 강철로 뒤덮인 이현성의 어깨가 텐타치오의 어깨 뿔과 충돌했다. 
백작급 악마에게 물러서지 않고 덤벼들 용기라니, 이현성답다. 
 
“설화를 계승한 녀석이구나?” 
 
이현성의 [강철화]는 ‘강철의 주인’이 가진 설화를 계승하면서 얻은 성흔. 
단 한 방의 교류로 악마 쪽도 이현성의 가치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긴 ‘백작’급이면 이제 슬슬 ‘설화’의 가치에 눈을 뜰 때니까. 
 
“먹어 치워주마.” 
 
텐타치오가 이현성의 몸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콰각! 콰가각! 
 
놀란 이현성이 연이어 주먹을 날렸으나, 텐타치오는 개의치 않았다. 
쩍 벌어진 악마의 입에서 송곳니가 도드라지더니, 그대로 이현성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드드드드득! 
 
[강철화]의 강도는 곧 이현성의 의지와 직결되어 있다. 
의지가 부서지지 않는 한, 이현성의 강철은 파괴되지 않는다. 
‘멸살법’에는 물론 그렇게 적혀 있다. 하지만 그런 멋드러진 설명이 어울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후반부’의 이현성이었다. 
 
콰드드드득! 
 
이현성의 단단한 강철에, 조금씩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조금씩 창백해지는 이현성의 표정. 
 
“······저놈 대체 뭐야?” 
 
텐타치오를 보는 한수영의 눈빛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김독자! 저놈 뭐냐고!” 
 
도깨비가 발표한 서울 랭킹이 잘못되진 않았나 보다. 
여기서 ‘악마 백작’의 정확한 수준을 알 수 있는 존재는 나를 제외하면 한수영 뿐이었다. 
내가 대답했다. 
 
“저놈은 ‘3급 악마종’이야.” 
 
그리고 3급 이상의 악마종들은, 자신의 ‘설화’를 가지고 있다. 
 
[3급 악마종 ‘텐타치오’가 설화 ‘벌레 학살’을 이야기합니다.] 
 
벌레 학살. 꽤 쓸만한 설화다. 
아직 ‘성흔’의 형태로 가공된 것 같진 않지만, 스스로 쌓아 올린 설화인 만큼 그 힘은 화신들의 성흔을 능가한다. 
 
쿠오오오오. 
 
텐타치오의 설화가 허공에 풀려나기 시작하자, 이현성과 한수영을 비롯한 모든 화신들이 굳어버린 벌레처럼 제자리에 멈춰섰다. 
뒤쪽에서 아직 기절해 있던 이지혜와 이길영이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었고, 핑키즈 김영팔은 이미 거품을 물고 주저앉아 있었다. 
 
이것이 ‘설화’의 진짜 힘. 
 
연고가 없는 다른 존재를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삼키는 것. 
강제로 몰입된 화신들이 설화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학살의 시간이다. 벌레들아.” 
 
콰콰콰콰콰! 
 
이현성의 강철이 무력하게 부서져 나갔고, 반사적으로 덤벼든 한수영의 분신들이 허공에서 폭발했다. 
이대로라면 전멸이었다. 
설화 [벌레 학살]은 다수의 약자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니까. 
지금의 일행들에게 암흑성 2층의 백작급은 무리다. 
 
꽈아앙! 
 
나는 뒤쪽으로 튕겨져 나온 이현성의 어깨를 붙들었다. 내 손이 닿자, 공포에서 풀려난 이현성이 말을 더듬었다. 
 
“도, 독자 씨.” 
“물러 서세요.” 
“안 됩니다. 이번에도 독자 씨를 지키지 못하면―” 
“탄피는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까, 잘 보고 있어요.” 
 
나는 걱정 말라는 듯 이현성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텐타치오가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내 ‘설화’에 저항했다? 제법 정신력이 강한 놈인가 보구나.” 
“정신력 문제가 아냐.” 
“그럼 뭐냐? 꿇어라, 버러지야.” 
 
쿠구구구구구. 
 
주변의 압력이 급격하게 올라가며 일행들이 무릎을 꿇었다. 
물론, 나는 멀쩡했다. 
태연하게 걷는 나를 보며 텐타치오가 당황했다. 
[제4의 벽]의 성능 덕분은 아니었다. 
이것은 그보다도 더 본질적인 차이였다. 
 
“······대답해라.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거지?” 
“그 설화 얻으려면 허약한 놈들만 골라서 최소 10만 명은 죽여야 했을 텐데, 너도 어지간히 고약한 놈이네.” 
“뭐?” 
 
말하자면, ‘격’의 차이. 
 
“그래도 [벌레 학살]은 꽤 쓸만한 설화야. 적이 자신보다 ‘약자’일 때는 말이지.” 
 
파츠츠츠츳! 
 
[당신은 설화 ‘벌레 학살’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벌레 학살’의 효과가 당신에게 부정당합니다.] 
 
텐타치오가 눈을 부릅떴다. 
 
“최소 후작급 이상의······ 설마 마왕? 아니, 그럴 리는 없고······ 설마 귀환자냐?” 
 
악마종들의 정점인 72 마왕은, 격으로 따지자면 설화급 성좌들과 동급이다. 
 
“하지만 귀환자가 암흑성 1층에 있을 리 없는데······.” 
“맞아. 둘 다 틀렸어.” 
 
‘격’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개연성의 제약을 받는 존재. 
 
[당신이 ‘악마 백작 텐타치오’를 바라봅니다.] 
 
텐타치오의 안색이 희게 질리고 있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텐타치오를 향해 달려가며 [백청강기]를 사용했다. 
 
[‘신념의 칼날’을 활성화합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특수 옵션이 발동합니다.] 
[에테르 속성이 ‘신성’으로 변환됩니다.] 
 
기이이잉! 
 
간만에 뽑아든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감촉이 낯설었다. 
 
스가각! 
 
“끄아아아!” 
 
뿔 끝이 잘려 나간 악마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두 번째 검격을 날리기도 전에 텐타치오는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설화를 사용할 수 없어도 백작급. 
몸놀림 자체가 보통의 화신과는 차원이 달랐다. 조금 여유를 되찾은 녀석이 이를 악물었다. 
 
“성좌라고? 설마······ 그럴 리가 없다!” 
 
또 [메시아의 길]을 또 빌려올까 잠시 고민했지만, 저쪽이 [벌레 학살]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상 나도 ‘인용’을 남발할 필요는 없었다. ‘인용’ 횟수의 제한도 있고, 무엇보다 ‘설화’를 사용하지 않은 상태의 내 능력치를 확실히 알아볼 필요도 있었다. 
 
우선, 능력치 조정부터 좀 해야겠지. 
어디보자. 
 
[체력 Lv.62 -> 체력 Lv.90] 
[근력 Lv.60 -> 근력 Lv.90] 
[민첩 Lv.60 -> 민첩 Lv.90] 
[마력 Lv.62 -> 마력 Lv.90] 
 
[모든 종합 능력치가 크게 증가합니다!] 
[총 116,400코인을 소모했습니다.] 
 
엄청난 지출이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당신의 육체가 인간의 한계를 향해 나아갑니다.] 
[가공할 에너지가 당신의 육체 속에서 들끓습니다!] 
[모든 종합 능력치가 시나리오 제한 기준에 도달하였습니다!] 
 
카페인을 수혈 받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전신의 아드레날린 수치가 급격히 증가했고,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평균 레벨 90의 능력치. 
현재 화신들 중 이만한 능력치를 가진 존재는, 아마 없을 것이다. 
이건 성좌인 나만 할 수 있는 돈지랄이니까. 
 
“자, 그럼 간다.” 
 
나는 거침없는 검격을 퍼부으며 전진했다. 
 
까드드드드득! 
 
칼날에 닿은 텐타치오의 몸이 찢어졌다. 
급격하게 상승한 능력치를 이용해 놈의 몸 곳곳을 난자했지만, 텐타치오는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아마도, 남은 마력을 모두 쏟아부어 자신의 육체를 강화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설화가 안 먹히는 상황이니 현명한 선택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아!” 
 
텐타치오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발악을 시작했다. 
난타전이 벌어지자 내 몸에도 하나둘 상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역시, 스킬 없이 싸우면 이 정도구나.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전용 스킬, ‘소형화 Lv.3’을 발동합니다!] 
[소형화의 효과로 당신의 육체가 줄어듭니다.] 
 
“무슨······!”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5번 책갈피,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을 선택하겠다.” 
 
[당신의 육체 구성이 해당 등장인물과 흡사함을 확인하였습니다.] 
[해당 등장인물의 격이 당신보다 높습니다.] 
[활성화되는 스킬의 레벨이 강제로 조정됩니다.] 
 
평소라면 여기서 메시지는 끝이었다. 
그런데 한 줄이 더 있었다. 
 
[당신의 격이 크게 상승하여 해당 인물과의 동조율이 상승합니다.]
 
 
 
 
 
< Episode 30. 암흑성 (6) > 끝

< Episode 31. 시나리오의 무덤 (1) >
 
 
 
 
 
Episode 31. 시나리오의 무덤 
 
 
 
백청의 기운이 심장을 두들기며, 엔진을 바꾼 기함처럼 전신의 혈류가 몰아쳤다. 
 
[전용 스킬, ‘전인화(電人化) Lv.11(+1)’가 활성화되었습니다.] 
 
격의 상승 때문인지 전인화 스킬 레벨은 11이 되어 있었다. 
본래 모든 스킬의 레벨은 10이 한계고, 그 이후는 더 좋은 스킬을 배우거나 귀환자들처럼 ‘초월’을 사용하는 수밖엔 없다. 그런데 11이라니. 
지금 내 [전인화]는 시스템의 한계를 넘어섰다. 
 
고오오오오. 
 
거기다 예전만큼 전인화를 사용하는 게 힘들지 않았다. 
귀환자 키리오스는 강력한 설화급 성좌들에 비견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 깊이를 잴 수 없을 만큼 강대한 존재. 그런데 이제, 조금이나마 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았다. 
이전의 키리오스가 절대 닿을 수 없는 고지에 있었다면, 이제 그가 어디쯤 올라서 있을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달까. 
이제 텐타치오는 경악을 넘어서 공포에 질려 있었다. 
 
“성좌의 격에 귀환자의 무공? 네놈은 대체 뭐냐!” 
 
나는 내 이름을 말해주려다가, 괜한 심술에 다음과 같이 말해 보았다. 
 
“······뭐긴 뭐야. 유중혁이라며.” 
 
츠츠츠츠츳! 
 
전인화의 폭발적인 힘이 더해진 신념의 칼날에 텐타치오의 몸이 두 쪽으로 찢어졌다. 이어진 검격에 비산한 전류가 녀석의 팔과 다리를 폭파시켰고, 세 번째 검격에 날아오른 놈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비명을 지를 틈조차 주지 않은 연격. 90레벨에 달하는 마력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며 옅은 피로가 몰려왔다. 하지만 내 수준은 확실히 알았다. 
 
“크흐······ 유중혁······.” 
 
시발, 깜짝이야. 
떨어진 머리가 말하고 있었다. 
 
“화신이······ 성좌가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갑자기 뭔 개소리야. 
 
“내게 이름을 알려준 것을······ 후회할 것이다······.” 
“뭐?” 
 
[악마 백작 ‘텐타치오’가 ‘죽음의 비명’을 사용했습니다.] 
[악마 백작 ‘텐타치오’가 암흑성에 ‘유중혁’이라는 이름을 전파했습니다.] 
[암흑성의 랭커들이 ‘유중혁’이라는 이름을 기억했습니다.] 
 
······이건 예상못했는데. 
 
[암흑성의 랭커들이 화신 ‘유중혁’을 향해 이를 드러냅니다.] 
 
이거, 조금 미안한 일이 됐다. 
정말 의도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유중혁도 고생 좀 해 봐야지. 
 
[당신은 ‘악마 백작 텐타치오’를 사냥하였습니다!] 
[3급 악마종을 다섯 번째로 처치하여 30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텐타치오가 죽자, 놈의 시체 위로 투명한 문자열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암흑성] 시나리오부터는 설화를 가진 녀석들을 죽여 그들의 설화를 빼앗을 수 있다. 
나는 손을 뻗어 그 문자열을 잡아챘다. 
 
[역사급 설화 ‘벌레 학살’을 획득하였습니다.] 
 
[벌레 학살]. 
부화 중인 41회차의 신유승에게 줄 설화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근데 악마가 가지고 있던 설화를 먹여도 되나? 잘못 먹였다가 심성 나빠지는 거 아냐? 
 
[현상금 시나리오를 완수하였습니다!] 
[성좌 ‘매금지존’이 당신에게 크게 감사합니다.] 
[당신은 ‘신라 출신 성좌’들의 비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라 출신 성좌들의 비호라. 
보잘것 없어 보이긴 해도, 저들 역시 ‘성좌’들이다. 그들과 인연을 쌓아 둔다면, 분명 [절대 왕좌] 때처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역사급 설화, ‘나당 연합군’을 받았습니다.] 
 
······나당 연합군? 
 
[성좌, ‘매금지존’이 흐뭇하게 웃습니다.] 
 
하긴, 역사급 설화를 준다곤 했지만 좋은 걸 준다고 하진 않았으니까. 
여차하면 신유승에게 먹여도 되고. 
정신을 차린 일행들이 뒤쪽에서 하나 둘씩 다가왔다. 
 
“시발, 미쳤네 김독자······.” 
“독자 씨, 대체 얼마나 강해지신 겁니까······?”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이현성은 텐타치오에게 당한 자신의 어깨를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2층에는 이런 놈들이 많은 겁니까?” 
“좀 있겠지만 흔하진 않을 거예요. 아마 이 녀석 랭킹이······.” 
 
마침 허공에서 메시지가 들려왔다. 
 
[메인 시나리오 보상으로 50000코인을 획득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 내용이 갱신됩니다!] 
[당신들은 암흑성 배치전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당신들이 사냥한 악마는 암흑성 랭킹 10위, ‘텐타치오’입니다.] 
[사냥 공헌도에 비례해 랭킹을 책정 중입니다.] 
 
“······10위네요. 그럼 이놈보다 강한 녀석이 최소 9명은 더 있단 얘기겠죠. 비슷한 녀석들은 더 많겠지만.” 
“아······.” 
 
이현성의 표정은 복잡했다. 악마 백작이 10위라는 것에 안도하기도 하고, 동시에 낙담하기도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독자 씨는 그런 녀석들과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셨군요··.” 
“현성 씨도 설화를 마저 계승하면 충분히 해낼 수 있어요. 그리고 저도, 이 녀석보다 센 악마들한텐 승부를 장담할 수가 없고요.” 
 
지금 상태로, 설화의 개방 없이 상대할 수 있는 것은 ‘백작급’까지다. 
그나마 놈의 설화가 [벌레 학살]이 아니었더라면 이 정도로 쉽지는 않았겠지. 
한수영이 자존심 상한 듯 이맛살을 구겼다. 
 
“쳇, 겸손한 척하긴······ 지금 사람 기만하냐?” 
“너도 전력으로 싸웠으면 꽤 해 볼 만했을걸? 흑염룡의 설화를 계승하고 있을 거 아냐?” 
“설화 내용이 너무 오글거려서 아직 계승을 못했어. 너 일부러 내가 얘 선택한다고 할 때 안 말린 거지? 나 엿 먹으라고?” 
 
‘심연의 흑염룡’의 설화가 뭐였더라······. 
잘 기억은 안나지만, 본래 계약자가 ‘망상악귀 김남운’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한수영의 반응이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분명 계승하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소멸해버리는 듯한 수치심을 주는 설화일 것이다. 
 
[사냥 공헌도에 비례해 암흑성의 랭킹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랭킹 책정이 끝났다. 
랭킹 성적은 각자 눈앞에 떠오른 창으로 전송되었다. 
 
[화신 김독자의 암흑성 랭킹은 ‘11위’입니다.] 
 
11위라. 
배치전으로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나머지 일행들은 수능 성적표라도 받은 듯 참담한 얼굴들이었다. 
잽싸게 달려온 한수영이 내 랭킹창을 훔쳐 보았다. 
 
“야, 너 몇 위······.” 
 
‘11’이라는 숫자를 본 한수영이 그대로 굳어졌다. 
공헌도의 차이가 막대하니, 아마 지금 한수영과 나는 몇백 등 이상 등수 차이가 날 것이다. 
 
“······지금 너 죽이면 내가 11위 되는 거냐?” 
“넌 몇 윈데?” 
“안 알려줘. 아무튼 저 아저씨보단 높아.” 
 
한수영이 가리킨 곳에, 기절한 김영팔이 있었다. 
 
[화신 김영팔의 암흑성 랭킹은 ‘101123’위입니다.] 
 
101123위를 기록한 김영팔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처음부터 기절해 있던 이지혜와 이길영은 각각 98761위와 87541위라는 등수를 받았다. 이렇게 보니 이상하군. 저 아저씬 왜 처음부터 기절한 사람보다 등수가 낮지? 
 
“이현성 씨는 몇 위인가요?” 
“636위입니다.” 
 
이현성은 침울한 목소리였다. 위로의 말이라도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는데, 이현성이 선수를 쳤다. 
 
“······이런 성적표는 학교 다닐 때 많이 받아봤으니 괜찮습니다. 왠지 더 의욕이 생기는군요.”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는 듯했다. 
하긴, 이현성은 구체적인 목표가 생기면 더 정진하는 타입이었지. 
곁에 있던 신유승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물러섰다. 
 
“보, 보지 마세요!” 
 
재빨리 창을 숨기는 모습이 꼭 부모님 앞에서 성적표를 숨기는 초등학생 같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이 애가 상처 받지 않을까 조금 고민했다. 
 
“당장 몇 위인지가 중요한 게 아냐. 2층에 가면 얼마든지 올라갈 기회는 많으니까. 다 노력하기에 달렸어 유승아.” 
 
······젠장, 말하고 보니 이렇게 꼰대 같을 수가 없다. 
노력하면 다 잘 된다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착한 신유승은 그런 내 충고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노력하면 저도 아저씨만큼 강해질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넌 나보다도 강해질 수 있어.”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실제로, 신유승은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잠재력이 있는 화신이었다. 
 
[당신의 성흔이 개화를 앞두고 있습니다.] 
[성흔이 될 설화를 선별 중입니다.] 
 
성흔만 전승할 수 있다면 신유승은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아니, 성흔이 없더라도 암흑성 2층에서 신유승은 꼭 필요하다. 저곳에는 아이들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랭킹은 갑자기 왜 주어진 건지 모르겠군요. 단순히 경쟁을 위한 건지······ 상위 랭크에 올라가면 훈장이라도 주는 것인지.” 
 
그 말을 한 것은 이현성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분명 그런 목적도 있긴 하겠지. 
하지만, 암흑성의 랭킹에는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내가 입을 열려는 바로 그 순간.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당신의 존재를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마왕, ‘아스타로트’가 당신들에게 눈독을 들입니다.] 
[마왕, ‘오로바스’가 당신의 설화에 입맛을 다십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일행들도 메시지를 받은 듯했다. 
성좌들에게 받았을 때보다, 훨씬 끈적하고 불온한 감각이 배어 있는 메시지들. 
메시지만으로도 그들의 격을 알아챈 일행들이 몸을 떨고 있었다. 
특히 예전에 ‘마왕의 저주’를 받은 적이 있는 한수영은 완전 두려움에 질려버린 표정이었다. 
마왕. 
살아있는 존재들 중, ‘격’으로 성좌에 비견할 수 있는 극소수의 악마들. 
 
이 시나리오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마왕과 싸우게 될 것이다. 
 
 
* 
 
 
“가아아아악!” 
 
악마종의 머리를 베어낸 칼날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유중혁의 손아귀로 되돌아왔다. 
 
‘······설화가 없는 놈이었군.’ 
 
이미 2층에 오른 유중혁은 본격적인 랭킹 작업에 착수해 있었다. 
여느 때처럼, 그의 머릿속에서는 앞으로의 계획이 훈련 일과표처럼 빼곡하게 나열되는 중이었다. 
 
‘3층에 오르기 위해서는 먼저 사천왕을 구해야 한다.’ 
‘최상위 랭커들은 같은 편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2층에는 십악 중 하나가 있어. 놈과는 부딪치지 않는 편이 낫겠군.’ 
‘이 기세로 설화를 모은다면, 아마 나흘 안에······.’ 
 
허공에서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누군가가 ‘죽음의 비명’으로 당신의 이름을 전파했습니다.] 
[암흑성의 랭커들이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였습니다.] 
[암흑성의 랭커들이 당신을 경계합니다.] 
[암흑성의 랭커들이 당신의 설화를 노릴 것입니다.] 
 
유중혁은 난데없는 메시지에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내 이름이 알려졌다고?’ 
 
이상한 일이었다. 
 
‘[죽음의 비명]은 악마종의 저주다. 아직 그런 능력을 사용하는 악마를 죽인 적은 없는데?’ 
 
곁에 있던 유미아가 볼을 부풀리며 물었다. 
 
“왜 그래, 오빠?” 
“아무것도 아니다.” 
 
잠시 망설이던 유중혁이 덧붙였다. 
 
“······아무래도, 그 녀석이 또 귀찮은 짓을 벌이고 다니는 것 같다.” 
“그 녀석?” 
“그런 놈이 있어.” 
 
유미아는 냉정한 목소리로 잘라내는 자신의 오빠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분명 평소와는 다른 뉘앙스가 있었다. 그것은 쌀의 눈처럼 작은 변화였지만, 유미아는 그 변화를 알아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유중혁은 그의 하나뿐인 오빠였으니까. 
 
“그거 그 못생긴 아저씨 얘기지?” 
“······.” 
“오빠는 그 아저씨 얘기할 때 즐거워 보여.” 
 
싱글싱글 웃는 동생을 보며 당황하던 유중혁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착각이다.” 
“그런가?” 
 
유미아는 그런 유중혁을 보며 가만히 웃을 뿐이었다. 
인상을 찌푸린 유중혁이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중혁의 전신에서 살벌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혹시 화난 건가 싶어서 유미아가 말을 걸려는 순간, 유중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엿듣는 건 그만하고 나오지. 죽여버리기 전에.” 
 
그 말에 공간의 일부가 경직되는 느낌이 들더니, 쩌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갈라진 공간 사이로 하늘하늘한 인형이 나타났다. 케이프를 쓴 여자였다.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누구냐?” 
“저예요, 유중혁 씨.” 
 
케이프를 벗자, 의외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중혁도 아는 얼굴이었다. 
얼마 전, 그가 구해준 적이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유상아?” 
 
<성운> 올림포스의 후원을 받는 화신, 유상아가 그곳에 있었다.
 
 
 
 
< Episode 31. 시나리오의 무덤 (1) > 끝

< Episode 31. 시나리오의 무덤 (2) >
 
 
 
 
 
일주일 만에 만난 유상아는, 전에 보았을 때보다도 더 수척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 드러난 총기는 여느 때보다도 눈부셨다. 
 
“꽤 좋은 설화들을 계승한 것 같군.” 
 
유중혁이 천천히 [진천패도]를 빼들었다. 
암흑성 2층은 다른 이들의 설화를 빼앗기에 적절한 무대. 
그리고 유상아의 설화들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 
 
‘이 여자도 전 회차에서는 없었던 인물.’ 
 
지난번에는 사정이 있었지만, 언제까지 불안 요소들을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런 요소는 김독자 하나로도 충분히 버거우니까. 그러자 유상아가 가볍게 양손을 들며 물러섰다. 
 
“싸우러 온 게 아니에요.” 
“그럼 왜 왔지?” 
“도움이 필요해요.” 
“나랑 더 이상 얽히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때 너를 구해준 것은 김독자에게 빚을 갚은 것뿐이다.” 
“그 김독자 씨와 관련된 일이에요.” 
 
일순 유중혁의 살기가 누그러졌다. 
 
“······그게 무슨 뜻이지?” 
 
주변을 압박하는 기운이 사라지자, 짧게 숨을 들이켠 유상아가 입을 열었다. 
 
“이번 시나리오에서, 독자 씨는 죽을 거예요.” 
 
김독자가 죽는다? 
유중혁은 피식 웃었다. 
 
“김독자는 부활 능력이 있어. 전에 말해준 것 같은데, 제대로 안 들었나 보군.” 
 
유중혁은 이제 김독자의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물론 무한 부활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몇 번은 더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김독자의 목숨이 당분간 위협 받을 일은 없다. 
 
“지금쯤 살아났을 텐데······ 아직 놈을 못 만난 모양이지?” 
 
이번에는 유상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이대로 내버려 두면, 독자 씨는 ‘정말로’ 죽어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봤으니까요.” 
“봤다고?” 
 
다음 순간, 유상아의 뒤쪽에 거대한 실타래가 나타났다.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실타래의 실은 섬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아주 작은 문자열. 무수한 이야기들로 만들어진 끈. 마치 거대한 운명의 직물처럼 허공을 수놓는 그 형상을, 유중혁은 알고 있었다. 
알았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운명의 세 여신, 모이라이(Moerae)의 심볼이었으니까. 
유중혁이 짓씹듯 말했다. 
 
“설마 성좌들의 예언을 훔쳐 본 거냐?” 
 
유상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노한 유중혁이 말했다.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 있는 거냐? ‘운명’은······.” 
“알아요!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는 거예요. 유중혁 씨.” 
 
유중혁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모이라이의 ‘운명’은 단순히 미래를 보고 점지하는 힘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언은 ‘빅 데이터’를 통해 내놓은 ‘결론’에 까웠다. 
무수한 이야기의 조합을 통해 예측된 ‘가장 합당한 미래’. 
이렇게만 보면 ‘운명’은 절대적이지 않고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지금까지 <올림포스>의 예언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올림포스>의 주신인 제우스조차도, 그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왜냐하면 운명이 시작된 순간, <올림포스> 전체의 개연성은 그 운명을 실현시키는 데 쓰이기 때문이다. 
 
“제발 김독자 씨를 막아줘요. 그러지 않으면······.” 
 
애타는 유상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츠츠츠츳. 
 
허락되지 않은 개연성에, 유상아가 스파크 속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유중혁은, 그녀의 뒤쪽 허공에 수놓인 실타래의 문자열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화신 김독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다.」 
 
 
* 
 
 
“우와, 평원 크기가 엄청난데?” 
“여기가 정말 ‘암흑성’ 맞습니까?” 
 
이현성은 감탄했다는 듯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응시했다. 
광활한 평원과, 곳곳에 드리워진 밀림지대.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 새카만 강이 그 평원의 중심을 양단하며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저 강이 아마 마계의 지류인 [포이닉스]일 것이다. 
 
우리는, 마침내 암흑성 2층에 도착한 것이다. 
 
“맞습니다. 여기가 2층이에요. 1층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죠.” 
 
신규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1층과는 달리, 암흑성의 2층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진행되고 있는 시나리오가 있었다. 
멀리서 두런두런 무리를 짓고 있는 화신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 우리와 함께 신규로 진입한 서울의 화신들인 듯했다. 
화신들은 우리를 보고도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는데, 자세히 보니 도깨비가 가이드를 전하는 중이었다. 
 
[······하여, 새로 2층에 올라오신 화신 여러분, 모두 축하드리오. 이곳 <무저갱 평원>은, 여러분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될 것이오.] 
 
이제까지 보지 못한 도깨비였다. 
녀석은 눈에 띄게 늙은 외형을 하고 있었는데, 아마 굉장히 오래 전부터 관리국에 종사한 도깨비인 듯했다. 
하긴, <무저갱 평원>의 시나리오를 맡고 있다면 그럴 법도 했다. 
이곳의 시나리오는 좌천된 도깨비들이 맡게 되니까. 
나는 스마트폰을 켜서 ‘멸살법’에서 암흑성 2층에 관한 정보를 찾아냈다. 

「<무저갱 평원>. 도깨비들은 그곳을 ‘시나리오의 무덤’이라 부른다.」 
 
······시나리오의 무덤. 
그 표현을 보자 새삼 감회가 새로워졌다. 
벌써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도깨비의 말을 듣던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또 지랄 중이네. 기회는 빌어처먹을. 틈만 나면 난이도 조절이니 뭐니 존나게 굴려댈 거면서.” 
 
그녀뿐만 아니라, 도깨비의 감언이설에 익숙해진 다른 화신들도 불신 가득한 얼굴로 도깨비를 노려볼 뿐이었다. 
벌써 아홉 번째 시나리오까지 온 마당에 기회니 어쩌니 하는 소리가 먹힐 턱이 없다. 
그 말을 들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늙은 도깨비가 빙긋 웃었다. 
 
[걱정 마시오. 이번 시나리오에서 도깨비들의 간섭은 없을 것이오. 시나리오가 재미있든 재미없든, 우리는 결코 이야기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을 약속하오.] 
 
화신들이 웅성거렸다. 
지금까지 도깨비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 
언제나 더 자극적인 이야기를 원하는 도깨비들이, 왜 이곳에서는 ‘이야기’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대체 무슨 꿍꿍이야?” 
“그게 뭔 소리냐!” 
 
[다들 그간의 시나리오에 지치셨다는 걸 알고 있소. 하지만 내 말은 진실이오.] 
 
[갱신된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메인 시나리오 # 9 ― ???>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 
제한시간 : ― 
보상 : 없음 
실패시 : ― 
 
+ 
 
모든 조건이 비공개인데다, 제한 시간도 실패 조건도 없는 시나리오. 
이런 시나리오를 받아본 적이 없는 화신들은 크게 당황했다. 
 
“뭐야? 아무것도 공개 안 하면 어쩌란 건데?” 
“시발 또 엿같은 시나리오로 우리 엿먹이려는 거지?” 
 
과격한 화신들의 반응에도, 도깨비는 넉넉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지금까지 그대들은 무엇을 위해 달려왔소? 가족이나 친구를 위해? 강해지기 위해? 아니면, 남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 각자 답은 있겠지. 하지만 내 생각에, 그건 모두 거짓말일 거요. 왜냐하면 당신들은 그저 ‘시나리오를 수행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을 뿐이니까.] 
 
근래의 생을 일축하는 그 말에, 화신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늙은 도깨비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의 시나리오는 그런 마음만으로 이겨내기는 어려울 거요. <스타 스트림>에서 그런 수동적인 존재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이번 시나리오는 그대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시나리오. 
화신들이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제한 시간도, 실패 조건도 없소. 아무것도 실패할 것이 없기 때문이지. 클리어 조건은 스스로 찾으시오. 그리고 그걸 찾은 사람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오. 후후, 과연 몇 명이나 그런 선택을 할지는 의문이지만... 부디 그대들이 이 ‘무덤’에 잠들지 않기를 기원하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도깨비는 사라졌다. 
갑자기 목적을 잃어버린 화신들이 웅성거리며 소음을 만들었다. 
그것은 기이한 광경이었다. 
지금까지 겪었던 어떤 시나리오보다도 더 ‘평화로운’ 시나리오였음에도, 화신들은 어딘가 불안해보였다. 
마치, 불가능한 목표가 있을 때가 더 행복했던 사람들처럼. 
이현성이 물었다. 
 
“독자 씨? 이건 대체······.” 
 
이현성 또한 몹시 당황한 눈치였다. 
방금 전까지 랭킹을 올리겠다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클리어 조건이 없는’ 시나리오가 등장해버렸다. 그로서는 허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 그래도 조금 걱정되긴 했다. 
이번 시나리오는, 어쩌면 우리 일행들에게 가장 위험한 시나리오일지도 모르니까. 
입을 열려는 순간, 등 뒤에서 움지럭대는 기척이 났다. 
 
“으······ 여기 어디야.” 
 
기절한 이지혜와 이길영이 깨어나고 있었다. 
 
 
* 
 
 
이지혜는 ‘98761위’라는 어마어마한 자신의 랭킹을 확인한 뒤 커다란 절망에 빠졌다. 
 
“모의고사에서도 이런 등수는 받아본 적 없는데······.” 
 
물론 저건 거짓말이다. 
‘멸살법’의 설정에 따르면 이지혜는 공부를 잘 못하니까. 
 
“······독자 형?” 
 
나를 보자마자 메뚜기처럼 펄쩍 뛴 이길영은, 잠시 후 조신한 공벌레처럼 몸을 웅크린 채 침착함을 가장했다. 
 
“역시 살아있을 줄 알았어요. 전 끝까지 형 믿었거든요!” 
 
그 말에 이지혜가 조소했다. 
 
“뭐래, 요 꼬맹이가. 너 그때 콧물 질질 흘리면서 울었잖아.” 
“안 울었거든?” 
 
이길영은 끝까지 자신이 운 적이 없다고 항변하며, 당연히 내가 살아날 줄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십분 뒤, 눈가가 그렁그렁해진 이길영은 다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혀어어어어엉!”하고 외치며 내 허벅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시나리오가 없는 시나리오?” 
 
잠시 후, 우리에게 설명을 들은 이지혜는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얼굴로 이쪽을 보았다. 
 
“그런 걸 어떻게 깨?” 
 
고민하던 이현성이 말했다. 

“뭔가 의도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분명 숨겨진 조건을 찾으면, 시나리오를 클리어 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겠지? 다들 합심해서 찾아보면······.” 
 
의기투합하는 이현성과 이지혜를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이럴 때는 단순함이 도움이 된다. 
하지만 모두가 이들처럼 단순한 추진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저······ 꼭 클리어 해야 하는 겁니까?” 
 
그 말을 한 것은 핑키즈 김영팔이었다. 
이지혜가 물었다. 
 
“뭐야 저 여자는?” 
“그냥 어쩌다 보니 같이 온 여자······ 씨야.” 
 
나는 설명하기 귀찮아서 대충 얼버무렸다. 
갑자기 40대 아저씨라고 말해도 믿지 않을 테니까. 
그 사이에도 김영팔은 반쯤 풀린 눈빛으로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꼭 클리어 해야 하는 것인지······.” 
“갑자기 뭔 개소리야?” 
“······여, 여러분들은 이 시나리오들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본질을 꿰뚫린 느낌이었다. 
설마 저 아저씨가 그런 생각을 할 줄이야. 
당황한 이지혜가 되물었다. 
 
“뭐?” 
“시, 시나리오를 계속 수행하는 것이 우리에게 좋을지, 나쁠지 그런 건 모르지 않습니까······. 계속 주어지는 시나리오 속에서 우린 성좌들의 장난감이 될 뿐이에요. 심지어 이 시나리오를 클리어 한다고 해도, 그 다음 시나리오가 어떨지도 모르고요. 우린 어, 언제든 죽을 수 있습니다.” 
 
김영팔의 말에 일행들의 표정이 심란해졌다. 
생각해 보면 그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이 시나리오들이 어떻게 끝날지 아는 사람은 없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두는 단지 이걸 ‘클리어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여기까지 달려왔을 뿐. 
그런데 이 시나리오에는 실패 조건도 제한 시간도 없다. 
입술을 꾹 깨문 이지혜가 외쳤다. 
 
“그래서 어쩌자고? 여기 남아 있겠다는 거야? 여기가 어딘줄 알고? 악마 새끼들도 돌아다니고 있고, 안전한 곳이라곤 전혀······!” 
 
그런데 이지혜가 채 말을 맺기도 전에, 평원 건너편에서 대형 악마종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척 보기에도 5급 이상의 악마종들. 이지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저봐, 벌써 오잖아.” 
“모두 모여요!” 
 
근방의 화신들이 빠르게 일행 근처로 모여들었다. 다가오는 녀석들은 4급 악마종인 [데빌베어]였다. 숫자는 대략 스무 마리. [전인화]를 사용하고 일행들과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숫자였다. 
물론 내 힘을 모르는 다른 화신들은 절망스런 모습들이었다. 
 
“시발······ 또 저런 괴물들이······.” 
 
[데빌베어]들의 건너편에서 빛줄기가 쏟아진 것은 그때였다. 
 
콰콰콰콰콰! 
 
새하얀 화염. 성스러운 불꽃의 길이 열리며 뒤쪽의 [데빌베어]들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무려 4급 악마종을 도륙할 정도의 위력. 
저 성흔은, 틀림없이······. 
 
“언니!” 
 
이지혜가 소리쳤다. 
역시나, 그 불꽃은 정희원의 [지옥염화]였다. 
멀리서 우리를 발견한 정희원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특히 살아있는 내 모습을 보고서는 거의 경악한 듯한 눈빛이었다. 
내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자 정희원이 멈칫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묘한 위화감 같은 것이 스쳐갔다. 
 
······뭐지? 
 
자세히 보니 정희원은 [블랙 유니콘]을 타고 있었다. 
 
저 괴수종을 어떻게 길들인 거지? 
 
정희원과 함께 [블랙 유니콘]을 모는 몇몇 존재들이 [데빌베어]를 물리치며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정희원을 알아본 화신들이 그녀의 이름을 연호했다. 
 
“우와아! ‘멸악의 심판자’다!” 
 
정희원이 지근거리까지 다가오자, 이지혜가 달려갔다. 
 
“언니, 역시 살아있었군요! 여기 먼저 와 있었던 거예요?” 
“지혜야, 미안한데 조금 있다가 얘기하자.” 
 
떠드는 이지혜를 뒤로하고 정희원은 곧장 등을 돌렸다. 시무룩해진 이지혜가 내 곁으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정희원은 이미 이런 일이 익숙해진 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었다. 
 
“모두 따라오세요! 안전한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안전한 곳? 
종전에 느꼈던 위화감이 더욱 짙어졌다. 
정희원의 압도적인 무력에 경이를 느낀 화신들이 홀린 듯 그녀를 뒤따랐다. 우리도 별 수 없이 그녀의 뒤를 좇았다. 그렇게 한 시간 쯤 평원을 가로질렀을까. 밀림지대의 사이에 숨어 있던 흉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어떤 악마종도 넘을 수 없을 것처럼 든든한 흉벽. 
그 모습에 화신들이 넋을 잃은 순간,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영합니다. 이곳까지 오시느라 힘드셨죠?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안전합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정희원이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깨달았다. 
 
빌어먹을. 그렇구나. 
여긴 ‘그 녀석’의 성채였어. 
 
흉벽 위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곳의 주인임을 확신케하는 힘.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절망을 품은 악마가, 우리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시나리오를 수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 Episode 31. 시나리오의 무덤 (2) > 끝

< Episode 31. 시나리오의 무덤 (3) > 
 
 
 
 
 
더 이상 시나리오를 수행할 필요가 없다. 
그 말에, 성채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리지?” 
 
어떤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보나마나 사기꾼이겠지.」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뭐? 시나리오를 수행할 필요가 없어?」 
「저놈 혼자 뭔가 독식하려는 계략일 거야.」 
 
누가 뭐래도 아홉 번째 시나리오까지 살아남은 화신들이었다. 
금호역의 천인호나, 충무로의 공필두를 제하더라도 서울에는 수많은 사기꾼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곳의 화신들은 그런 협잡꾼들중 하나이거나, 협잡꾼들을 물리치고 이곳까지 온 자들이다. 
그러니, 저런 감언이설에 쉽사리 당할 리가 없었다. 
마치 그들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흉벽 위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믿지 않으시겠지요. 이해합니다. 아홉 번의 시나리오는 결코 길다곤 할 수 없지만, 짧다고 할 수도 없는 시간이니까요. 여러분들이 어떤 일을 겪고, 어떤 삶을 살아 이곳까지 왔을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습니다.] 
 
사기꾼의 기본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척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척’에는 이미 신물이 난 사람들이었다. 
 
“또 그런 말에 속을 것 같아?” 
“대체 목적이 뭐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참지 못한 사람들이 먼저 소리쳤다. 
그러자, 사내가 희미하게 웃었다. 
도저히 사기꾼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말 그대로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아마 도깨비들에게 설명은 들으셨을 겁니다. 이곳 [암흑성]의 시나리오는 제한 시간도, 실패조건도 없습니다. 똑똑하신 분이라면 이게 무슨 뜻인지 벌써 파악하셨겠죠.] 
 
곁을 보자, 핑키즈 김영팔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여러분들은 이 ‘시나리오 지역’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전처럼 식사를 하고, 늦잠을 자고,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생명권을 존중받고, 시나리오를 깨야 한다는 강박을 잊은 채로······ ‘멸망’이 시작되기 전의 삶을 영위하며 이곳에서 생을 마칠 수 있습니다.] 
 
“생명권? 개소리 하지마라!” 
“악마들이 돌아다니는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란 거야?” 
“우린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고!” 
 
사람들이 악을 쓰듯 외쳤다. 
그러자 사내가 물었다. 
 
[돌아간다? 어디로 돌아가시려는 겁니까?] 
 
“당연히 우리가 살던 곳으로······.” 
 
[설마 그 멸망한 ‘행성’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며, 멸망했다니! 아직 아니라고!” 
 
[이미 다들 알고 계실 텐데요. ‘시나리오’가 시작된 순간, 여러분들의 행성은 오직 ‘멸망’을 향해서만 걸어갈 뿐입니다. 그곳으로 돌아가봤자, 여러분들이 보게 될 것은 폐허뿐이에요. 그렇게 시나리오를 깨고, 또 깨도······ 결국 여러분들이 마지막에 맞이할 것은 파멸이란 말입니다.] 
 
“넌 누군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네가 뭘 안다고―” 
 
[압니다. 제가 살던 행성도, 이미 오래전에 ‘시나리오’로 멸망했으니까요.] 
 
동요하던 군중들이 동시에 잠잠해졌다. 
이미 오래전에 ‘시나리오’로 자신의 고향을 잃은 존재. 
이곳의 그 누구보다도 더 오랫동안 [암흑성]에 머물렀던 사내가, 지금 그들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계신 이곳보다 안전한 세계는, <스타 스트림> 그 어디에도 없다고.] 
 
처음으로 사람들의 기세가 약해졌다. 
여전히 불신의 눈빛은 그득했지만, 적어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는 보자는 분위기가 생겨나고 있었다. 
누군가가 커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제 이름은 라인하이트 폰 제르바. 여러분보다 800년 일찍, 이 땅에 온 사람이자······ 여러분이 보고 계신 이 성채, <낙원>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성채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 안의 풍경을 확인한 사람들의 표정이 변해갔다. 
그 얼굴들을 확인한 라인하이트가, 미소로 말을 맺었다. 
 
[다시 한 번 환영합니다 여러분. 이곳, <낙원>에 오신 것을.] 
 
 
* 
 
 
<낙원>. 
 
‘멸살법’에도 <낙원>에 관한 언급은 무수히 많다. 
시나리오의 무덤. 화신들의 둥지. 절망의 평원에 핀 꽃······ 많은 존재들이 이곳을 다양한 수사로 묘사했다. 
실제로, 그 수사들 중 대부분은 사실이었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나를 제외한 일행들은, 눈앞에 펼쳐진 <낙원>의 정경 앞에 넋이 나가 있었다. 이지혜도, 이길영도, 신유승도, 심지어는 이현성도. 특히 이현성은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는 듯 몇 번이고 자신의 눈을 비볐다. 
중앙의 대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형성된 주택가와 시장가. 
시끌벅적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전에 없던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악바구미 다리 팝니다! 한 점 맛보고 가세요! 피로 회복에 좋아요!” 
“농원에서 재배한 ‘산초 열매’ 팝니다! 체력회복제로 유용합니다!” 
 
시장의 상인들은 친절했고, 물건 값을 깎는 손님들은 만족하며 셈을 치렀다. 다양한 종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누구도 서로를 차별하거나 위협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레 닥쳐온 밝은 분위기에 성채에 입장한 화신들은 모두 당혹스런 얼굴들이었다. 
 
“이게 대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낙원’이니 ‘평화’니 하는 말들은 그들에게 개소리에 불과했다. 그런데 개소리가, 실질적인 양감을 가지고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낙원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너무 놀라 바닥에 주저앉았다. 
성급한 화신들 중에는 병장기를 떨어트린 채 숨을 헐떡이는 이도 보였다. 
그런 이들에게 친절한 손길이 쏟아졌다. 
 
“괜찮으신가요? 다치신 분들은 모두 이쪽으로 오세요! <낙원>의 진료소는 모든 부상자들을 무상으로 치료합니다!” 
“무기술과 심법을 가르쳐 드립니다! 에테르와 마력의 차이를 알고 싶으신 분! 남들 다 쓰는 검기를 쓰고 싶으신 분! 누구든 환영합니다!” 
 
<낙원>의 존재들은 나눔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들이 가진 지식을 교류했고, 누군가를 돕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심지어는 종을 넘어서는 교류도 보였다. 
머리에 뿔이 달린 악마종이 헤벌쭉 웃으며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 악마종이다!” 
 
놀란 화신들 몇몇이 병장기를 빼들자, 성채에 대기 중이던 경비대가 재빨리 다가왔다. 
 
“그거 집어 넣으세요.” 
“무슨 소리야! 저놈은 악마 새끼······!” 
“이곳에서 그런 혐오 표현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 분도 엄연한 <낙원>의 주민이에요.” 
“주, 주민이라고?” 
 
당황한 화신들이 머뭇거리자, 손을 흔들었던 악마가 다가왔다. 
 
“저는 악마종이 맞습니다만. 여러분들을 해치지 않습니다. 악마는 당연히 인간을 잡아먹을거라는 편견이 저를 슬프게 만드는군요.” 
 
감수성 풍부한 그 말투에 화신들이 멍한 얼굴을 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다는 눈빛들이었다. 
비슷한 광경은 연이어 나타났다. 
악마종과 인간, 그리고 인외종들이 힘을 모아 집을 짓는 광경, 어깨동무를 하고 술집에 가거나, 야외 테라스에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 
종종 환영한다는 듯, 이쪽을 향해 제스처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마치 여행지 광고 같은 그 풍경에, 일행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주변의 풍경에 동요합니다.] 
[등장인물 ‘이지혜’가 주변의 분위기에 동요합니다.] 
 
동료들의 심경이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시나리오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마주한 평화.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평범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이 칼 좀 들었다고 해서 본질이 바뀌진 않는다. 
모든 것은 불가항력의 결과였을 뿐. 
그리고 지금, 처음으로 일행들은 그 ‘불가항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유혹을 받고 있었다. 
멀리서 정희원의 모습이 보여서, 우리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정희원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본 적이 있는 여자였다. 
 
“그땐 정말 고마웠습니다. 고맙다는 말씀도 제대로 못 드리고······.” 
“아니에요! 잘 지내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정희원과 말을 나누던 젊은 여자가 내쪽을 흘끗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감정의 양상은 빠르게 바뀌었다. 
놀라움으로, 두려움으로, 그리고 이내는······ 고마움으로. 
 
“혹시 저 남자 분······.” 
“아, 독자 씨······.” 
“역시 그때 그 분이시군요! 구해주신 은혜,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여자의 손을 쥐고 있는 어린아이를 보자 기억이 떠올랐다. 
 
“아, 혹시 금호역에서······?” 
“기억하시는군요? 다영아, 너도 인사 드려야지.” 
“안녕하세요······.” 
 
그들은 금호역에서 철두파와 함께 싸웠던 모녀였다. 
우리 일행과 합류하지 않아서 조금 마음에 걸렸었는데, 용케도 지금까지 살아남았던 모양이다. 모녀는 이곳 농원에서 캐온 열매라며, 우리에게 바구니를 한 아름 안겨주었다. 괜찮다며 한사코 거절했는데도 소용 없었다. 
 
“그쪽 도움을 받지 못했더라면 이곳에 오지 못했을 테니까요. 덕분에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됐어요.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새로운 터전을 찾은 모녀는, 다시 자신들의 생활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도란도란한 모녀의 뒷모습을 보며, 새삼 금호역의 기억이 떠올랐다. 
더 많은 사람들을 살려야 했다는 후회와, 그게 그때는 최선이었다는 비겁한 자기위안. 
멀어지던 아이가 문득 고개를 돌려 내쪽을 보았다. 
배시시 퍼지는 아이의 미소. 
온화한 죄책감이 몰려왔다. 
내가 베푼 위선에는 과분한 보답이었다. 
어쩌면 내가 느끼는 이 기분을, 정희원도 느끼고 있을까. 
멀어지는 모녀를 함께 바라보던 정희원이 입을 열었다. 
 
“부활한 거 축하해요. 이번엔 좀 오래 걸렸네요.” 
“너무 담백한 반응 아닙니까? 지혜랑 길영인 울고 불고 난리 났었는데요.” 
“저도 그래 볼까요?” 
“바라지도 않습니다.” 
 
피식 웃으며 돌아 보는데, 정희원의 얼굴에 수심이 어려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찰나,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독자 씨, 잠깐 둘이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 
 
 
정희원이 이곳에 온 것은 나흘 전의 일이었다. 
[지옥염화]의 힘을 빌어 최단 시간 안에 1층을 클리어 한 그녀는, 누구보다 빠르게 2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이곳, <낙원>에 도달했다. 
 
시나리오의 족쇄를 벗을 수 있는 장소. 
 
당연히, 정희원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첫째 날은 모든 것을 불신했고, 둘째 날은 모든 것을 의심했다. 
흔들린 것은 셋째 날부터였고, 불행하게도 내가 찾아온 것은 넷째 날이었다. 정희원이 말했다. 
 
“갑자기 ‘시나리오’를 계속 수행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희원은 세뇌 따윌 당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낙원>은 존재 자체가 달콤한 마약이니까. 
나는 쓰게 웃으며 물었다. 
 
“너무 빨리 흔들리신 거 아닙니까?” 
“······어쩌면 줄곧 그래왔는지도요.” 
 
정희원도 쓰게 웃었다. 
 
“이거 놔! 코인 내면 되잖아! 훔친 값 치를게! 이거 놓으라고!” 
 
거리를 걷는 동안, 성채의 경비대에게 끌려 가는 죄수들의 모습이 종종 보였다. 개중 몇몇은 나와 함께 성채에 진입한 자들이었다. 
보아하니 본래의 손버릇을 못 버리고 타인의 물건에 손을 댄 듯했다. 
끌려가는 사내를 보며, 정희원이 말했다. 
 
“이곳은 서울보다도 치안이 좋아요.” 
“그래보이는군요.” 
“여러 종들이 서로 차별하지 않고, 힘든 일이 있을 땐 서로를 도와요. 모두가 살 수 있는 집이 있고, 일할 터전이 있어요.” 
 
마치 변명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 
 
“동료들에게 배신 당할 일도 없고, 밤에 나타난 괴수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그런 말을 주워섬기는 정희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멸악의 심판자 정희원. 
이 세계에 들어와, 내가 손수 키워낸 검. 
아마도 정희원은, 우리 일행 중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여자일 것이다. 
나의 ‘불살’을 지켜주기 위해 모든 것을 ‘몰살’시켜야 했던 사람. 
 
“시나리오에 쫓기듯 살지 않아도 돼요. 누군가를 죽였다는 이유로 악몽을 꾸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더 이상, 누군가를 잃지 않아도······ 돼요.” 
 
가장 단단한 검은, 가장 부러지기 쉬운 검이다. 
가장 단단하다는 이유로, 그 검을 제일 많이 휘두르게 되니까. 
그래서 가장 많이 상처받고, 가장 많이 이가 빠진다. 
그렇기에, 그 어떤 검보다 빨리 망가진다. 
 
“이곳이 좋다면 이곳에 남으셔도 됩니다.” 
 
내 말에 정희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그 눈빛을 마주보며 말을 이었다. 
 
“저도, 이곳이 안전한 곳이라 생각합니다.”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암흑성]에서 이곳보다 안전한 장소는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시나리오’ 전체에서도 이만큼 안전한 곳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낙원>은 그런 땅이니까. 
 
“혹시 독자 씨는······.” 
 
무슨 말을 할지 알았기에, 나는 서둘러 답했다. 
 
“네, 저는 여기 머무르지 않을 겁니다.” 
“왜죠?” 
“여기는 ‘끝’이 아니니까요.” 
“······독자 씨는 미래를 알고 있다 했었죠.” 
 
언젠가, 정희원과는 <극장 던전>에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정희원은 자신이 미래에 어떻게 되느냐 물었고, 나는 그녀가 미래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해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원작’에 없던 인물이니까. 
내가 미래를 모르는 ‘등장인물’······. 
 
“저는 시나리오를 계속해야 합니다.” 
 
정희원은 내 말에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녀는 <낙원>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웃고, 떠들고, 다시 되찾은 생활에 기꺼워하는 사람들의 모습. 
 
“독자 씨가 생각하는 ‘끝’은 어딘가요?”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그 ‘끝’은······ 이곳보다 더 나은 곳인가요?” 
 
다른 사람도 아닌 정희원이 물은 말이었기에, 나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시나리오를 계속하지 않으면······ 모두가 불행해지는 건가요?” 
 
내가 바라는 이 모든 이야기의 결말이, 정말로 모두에게 이 <낙원>보다 아름다운 장소라 말할 수 있을까. 
정말로, ‘결말’에 도달하면 모든 인물들은 행복해질 수 있는가. 
우리는 잠시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그곳에 소중한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는지 잊어버린 느낌이었다. 
잠깐의 꿈에서 깨어났다는 듯, 정희원이 입을 열었다. 
 
“이곳의 성주가 독자 씨를 찾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Episode 31. 시나리오의 무덤 (3) >
 
< Episode 31. 시나리오의 무덤 (4) >
 
 
 
 
 
나와 정희원은 <낙원>의 중심 상가를 지나 작은 언덕으로 향했다. 
보통 성주가 머무르는 곳은 자연히 화려한 내성의 궁정이기 마련이다. [피스 랜드]의 성채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낙원>의 성주는 결코 ‘보통’의 존재는 아니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눈을 부릅뜹니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자의 수호자’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언덕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에덴>의 성좌들은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젊은이와 여행자의 수호자. 
아마 새로운 대천사가 나를 주목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간접 메시지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존재압으로 가늠해보자면, 최소 우리엘급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에덴> 3대 천사 급인듯 한데.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이 한바탕 날뛰기를 기대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성흔을 궁금해합니다.] 
 
거기다 제천대성에 흑염룡까지. 
간만에 채널 단골 3인방이 모두 모였다. 
제천대성은 지난번 성운 창설 때 도움을 받은 것도 있고 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여의봉으로 코를 후빕니다.] 
 
······간접 메시지만 보면 이 녀석이 그 포스 넘치던 제천대성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실은 간접 메시지를 대필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가령 그때 봤던 분신이라든가. 
어쨌거나, 이제 ‘은밀한 모략가’만 오면 초반 4인방이 모두 모이는 건데······.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흥미로운 눈으로 사태를 관망합니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기어코 마지막 녀석까지 왔다. 
 
은밀한 모략가. 
 
지난번 연회에서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녀석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분명 설화급 중에서도 최상급이 분명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녀석의 수식언은 본 기억이 없었다. 
갑자기 의문이 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정도로 강한 존재가 원작에 안 나올 수가 있을까?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행동에 주목합니다.] 
 
“다 왔어요.” 
 
정희원의 말과 함께, 나는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멈춰섰다. 언덕 위에는 하얀 칠을 한 벽돌집이 있었다.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의도한 건진 모르겠지만 취향 한번 독특하다.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부르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가 부른다고 해서 정희원이 바로 달려오지 못할 거란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적어도 이 <낙원>에서, 낙원성주를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을 테니까. 
길을 쭉 따라 올라가자, 이윽고 벽돌집 곁에 붙어선 그림자가 나타났다. 
훤칠한 키에 조각으로 빚은 듯 아름다운 외형의 사내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아, 오셨군요.” 
 
[제4의 벽]이 없었더라면 나조차도 숨을 멈출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형이었다. 유중혁도 잘 생겼지만, 이 녀석은 아예 인외(人外)라고 밖엔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외모다. 말하자면, 악마적인 아름다움이랄까. 
 
“죄송합니다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 녀석이 낯을 많이 가리거든요.” 
 
사내는 언덕에 핀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꽃은 허공을 향해 피어 있었다. 하늘을 집어삼키려는 듯 탐욕스레 꽃잎을 벌리고 있지만, 한편으로 자신은 그저 작은 꽃일 뿐이라는 듯 조신하게 돋아난 암술. 
나는 그 꽃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영구기관(永久機關)이군요.” 
 
본래는 밖으로부터 에너지원을 공급받지 않고 영원히 일을 하는 가상의 기관을 이르는 총칭이지만, 이곳에서는 그저 꽃의 이름일 뿐이다. 
사내가 물었다. 
 
“이 식물을 알고 계십니까?” 
“매일매일 새로 피는 꽃이죠.” 
“식견이 대단하시군요.” 
 
물론 ‘멸살법’을 읽어서 아는 내용이었다. 
<낙원>의 꽃, 영구기관. 
오직 이 언덕에서만 자라는 이 꽃은, 새벽 나절에 봉오리를 틔워 밤이 될 무렵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새벽이 되기 전 떨어지고, 식물은 다시 자신의 열매를 비료로 꽃을 피운다. 영구기관은 그것을 영원히 반복하는 식물이다. 
사내는 그런 꽃이 무척 사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아이지요. 이 아이의 생명력은 정말 경이롭습니다.” 
“하지만 잘못 지어진 이름이죠. 정말 ‘영구기관’이었다면 저 꽃은 물 없이도 잘 자라나야 하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데, 그 정도 흠결은 애교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내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 
 
“다시 소개하지요. 제 이름은······.” 
“<낙원>의 성주, 라인하이트 폰 제르바.” 
 
당연히 나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멸살법’에서 가장 유명한 ‘십악’ 중 하나니까. 
라인하이트가 새하얀 미소를 지었다. 
 
“반갑군요, 김독자.” 
 
역시, 저쪽도 내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군.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가동합니다!] 
[해당 인물의 관련 정보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이 ‘요약 일람’으로 변환됩니다.] 
 
+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라인하이트 폰 제르바 
전용 특성 : 악마 후작 (전설), 불가능한 망상을 좇는자 (영웅) 
전용 스킬 : [악마의 눈 Lv.10], [최상급 무기연마 Lv.10], [상급 정신 방벽 Lv.10]······. 
성흔 : [낙원의 주인 Lv.10] 
종합 능력치 : [체력 Lv.99], [근력 Lv.99], [민첩Lv.99], [마력Lv.99] 
 
* 해당 인물의 암흑성 랭킹은 ‘2위’입니다. 
 
+ 
 
정말 대단한 능력치였다. 
종합 능력치는 시나리오의 제한 기준을 돌파했고, 거의 모든 스킬의 숙련치가 최대치에 도달해 있다. 아마 지금 라인하이트는, 이번 시나리오가 가진 ‘한계’ 그 자체일 것이다. 
내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라인하이트가 손사래를 쳤다. 
 
“너무 적의를 불태우시면 곤란합니다. 영구기관이 상하거든요.” 
“왜 나를 불렀습니까?” 
“소문만 무성한 존재가 궁금했습니다. 당신이 이 시나리오에 진입한 순간부터 온갖 존재들이 시끄럽게 떠들었거든요.” 
 
라인하이트는 지금까지 만난 ‘십악’과는 다르다. 
공필두나 이설화가 성장 중인 ‘십악’이었다면, 라인하이트는 이미 완성에 가까운 ‘십악’이었다. 
 
“당신 같은 존재가 이 시나리오에 들어오다니, 저로서는 위협이 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랭킹 2위의 ‘악마 후작’ 치곤 겸손이 과하군요.” 
“······거기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사전조사가 철저하십니다.” 
 
녀석의 돌아선 등을 보며, 불쑥 욕구가 솟았다. 
 
······지금 기습할까? 
 
망설여졌다. 
놈을 이기지 못할 것 같다거나, 놈을 죽이지 못할 것 같아서는 아니었다. 물론 싸우면 쉽지는 않겠지. 승부의 향방도, 확실히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망설임의 이유는······. 
 
“제 세계에서 [암흑성]은 34번째 시나리오였습니다.” 
 
아마도, 녀석의 <낙원>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라인하이트는 언덕 아래로 펼쳐진 성채의 정경을 보고 있었다. 
 
“팔백년 전, 이곳에 처음 떨어졌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그때 이 평원에는 아무것도 없었지요. 주어진 것은 오직 ‘랭킹’뿐. 화신들은 아무런 시나리오도 내려오지 않았음에도, 서로를 해치고 죽이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나는 처음 평원에 떨어졌을 그들을 상상해보았다. 
[암흑성]의 모든 존재들은 시간이 지나며 악마화가 진행된다. 
그러니 최초로 이 암흑성에 온 화신들도, 처음부터 악마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로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더 강한 존재가 되기 위해. ‘제한 시간’도 ‘실패 조건’도 없는 이곳에서, 그들은 단지 ‘더 높은 랭킹’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습니다. 끝없는 전쟁과 학살. 그것만이 이야기가 사라진 곳에서 화신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시나리오’였으니까요.” 
 
시나리오가 사라졌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성좌든 화신이든, 모든 존재는 결국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라인하이트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시나리오 속 장난감이 되는 것에 지긋지긋해진 그는, 더 이상 시나리오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저는 이 <낙원>을 만들었습니다.” 
 
나는 라인하이트가 진심이라는 걸 안다. 
 
“도깨비들은 이 평원을 ‘무덤’이라 부르지만, 나는 아닙니다. 비록 오랜 세월 끝에 피를 뒤집어 쓴 악마가 되었지만, 나는 오직 시나리오가 사라진 곳에서만이 진짜 삶이 피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절절한 감상이 담긴 말이었다. 만약 내가 ‘원작’을 읽지 못했더라면, 여기서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를 정도로. 
 
「가장 순수한 악」. 
 
작중의 유중혁은, 라인하이트를 그렇게 불렀다. 
 
“성좌 김독자. 당신은 ‘다음 시나리오’로 가려는 생각이겠지요.” 
“그렇습니다.” 
“포기하십시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상대로,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다. 
 
“팔백 년 동안 살면서, 당신과 같은 존재를 처음 본 게 아닙니다.” 
“······.” 
“무수한 강자들이 숨겨진 시나리오를 찾아 나섰지만, 누구도 [암흑성]을 클리어 한 자는 없습니다. 모두가 시나리오의 공허 속에 절망하며, 좌절했을 뿐이지요.”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당신이 그들처럼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성좌 김독자. 나와 함께 <낙원>을 지켜주십시오. 나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는 말없이 그의 곁을 스쳐가 ‘영구기관’의 꽃잎에 손을 댔다. 
깜짝 놀란 라인하이트가 나를 만류하기도 전에, 부르르 떨린 꽃이 순식간에 쪼그라들며 열매가 되어 떨어졌다. 떨어진 열매는 급격하게 썩더니 이내 언덕을 굴러 지상으로 떨어졌다. 
 
퍼거걱! 
 
마침 근처를 지나던 경비대가 그것을 보았지만, 그들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낙원>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기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으, 으으······ 풀어줘! 잘못했다고!” 
“겨우 물건 하나 훔쳤다고 이럴 필욘 없잖아!” 
 
<낙원>의 범죄자들이 언덕 아래쪽의 지하로 이송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어디로 끌려 가는 건지 알고 있었다. 
 
[일부 성좌들이 불쾌한 웃음을 흘립니다.] 
 
영구기관이 존재하지 않듯, <낙원>도 공짜로 유지되지는 않는다. 
저들은 아마 이 <낙원>의 비료가 될 것이다. 
마치, 썩은 열매가 식물의 비료가 되었듯이. 
지하 깊은 곳에서 작은 지진파가 일었다. 
어디선가, 끔찍한 괴수종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라인하이트. <낙원>은 없습니다. ‘영구기관’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라인하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시험해보는 듯한 눈빛. 
하지만 그는 곧 그 여유를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내게 ‘다음 시나리오’를 넘겨 주십시오.” 
 
라인하이트의 눈에, 처음으로 당황의 기색이 스쳤다. 
 
“당신이 이미 칠백 년 전에 그걸 찾았다는 걸 압니다. 정확히는, 당신을 비롯한 몇 명의 강자들이 그걸 찾았죠.” 
“그걸 어떻게······.” 
“심지어 당신은 그 ‘시나리오’에 도전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하지만 당신은 실패했고,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이 <낙원>을 만들었죠.” 
 
꽃잎을 돌보던 그의 손끝이 크게 떨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삶을 찾아주기 위해 이곳을 만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곳은 그저 불가능한 시나리오에 대한 도피처일 뿐이니까. 
 
“<스타 스트림>의 모든 ‘시나리오’는 자극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낙원>에는 그럴 만한 게 없죠. 모든 게, 너무 평화롭습니다.” 
“······.” 
“도깨비들과의 ‘거래’가 언제까지 유효할 거라 믿지 마십시오. <스타 스트림>은 결코 이런 공간을 오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겁니다.” 
 
잠시 말이 없던 라인하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좌 김독자. 또 뭘 알고 있지?” 
 
말투가 바뀌었다. 
그의 전신에서, 희미하지만 무서운 적의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 방금 그 대화로, 그는 나에 대한 태도를 바꾼 것이다. 
기대할만한 조력자에서, 누구보다 위협적인 적으로. 
 
“전부 다. 당신이 모르는 것까지.” 
 
나는 멀리서 밀려오는 암운을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연히 암운이 몰려올 리가 없으니, 저 비구름은 분명 ‘도깨비’ 놈들의 연출일 것이다. 간섭하지 않는다고 해도, 놈들이 정말로 모든 것을 방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시나리오가 없는 시나리오’조차 시나리오가 되니까.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이 비극의 마침표를 준비했다. 
 
“라인하이트. 당신은 죽고, <낙원>은 멸망할 거야.” 
 
 
 
 
 
< Episode 31. 시나리오의 무덤 (4) > 끝

< Episode 31. 시나리오의 무덤 (5) >
 
 
 
 
 
‘내가 죽고 <낙원>이 멸망한다고?’ 
 
김독자가 떠난 뒤, 라인하이트는 한참이나 멍한 얼굴로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하지만 김독자의 표정이 변하지 않자, 그 역시 웃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라인하이트는 화가 났다. 
 
아무리 성좌가 된 존재라 해도, 이것은 도를 넘었다. 성좌라 하여 처음부터 최강의 존재는 아니다. <스타 스트림>에서 72좌의 마왕들이 풋내기 성좌들을 집어 삼키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김독자는 반쪽 짜리 성좌에 불과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김독자’의 말을 좌시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니 [심연의 흑염룡]이 그를 비호하고 나섰을 때, 라인하이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심연의 흑염룡]이 누군가? 
저 높은 72좌의 마왕들조차 얽히기를 꺼려한다는, 절대악 중에서도 유명한 개차반이 아닌가? 
언덕 아래 풍광을 내려다보며, 라인하이트는 자연히 초조한 심경이 되었다. 
그랬기에, 오히려 그러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낙원은 멸망하지 않는다.’ 
 
라인하이트는 늙었지만, 아직 건재했다. 
700년 동안 이곳을 혼자 지켜왔다. 
그러니, 앞으로도 이곳은 괜찮을 것이다. 
시나리오에 고여 미쳐버린 중독좌(中毒座)들이 오더라도, <낙원>에서 싸우는 한 그는 지지 않으니까. 
 
‘오히려 위험한 쪽은······.’ 
 
양질의 설화를 이룩한 존재가 [암흑성]에 온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김독자는 아직 모른다. 
영구기관의 썩은 열매가 툭 떨어지고, 라인하이트는 모습을 감췄다. 
 
 
* 
 
 
그 자리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라인하이트는 덤벼오지 않았다. 
거기서 싸웠다면 분명 <낙원> 전체가 뒤집어졌겠지. 
물론, 나는 싸울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라인하이트를 꺾는다면 일은 순조로워지겠지만, 나는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고 <낙원>의 화신들은 나에 대한 원망을 키울 것이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낙원>이 붕괴하더라도, 그것은 외부의 적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낙원> 자체에 대한 분노 때문이어야 한다. 
잘못된 것을 알지 못하고 성급하게 일어선다면, 언제고 화신들은 똑같은 궁지에 몰리게 될 것이다. 
 
“······이야긴 끝났어요?” 
“네.” 
 
정희원은 언덕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 얼굴이었다. 
아마 나에 대한 의리와, <낙원>이 주는 안락함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겠지. 
나는 그 고민을 조금 덜어주기로 했다. 
 
“희원 씨. 잠깐 쇼핑이나 좀 할까요?” 
 
우리는 걸음을 맞춰 거리를 걸었다. 시끌벅적한 상점가의 소음들. 
 
“······이렇게 한가하게 걷는 건 오랜만이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자, 정희원이 먼저 말을 걸었다. 
 
“나한테 뭐 궁금한 거 없어요?” 
“뭘 물어볼까요?” 
 
뭘 물어봐야 할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기에, 묻지 않는 것도 있다. 
 
“음······ 좋아하는 색깔이라든가, 아니면 음식이라든가.” 
“소개팅에서도 안 물을 법한 질문인데요.” 
“······독자 씨 소개팅도 해봤어요?” 
 
나는 살짝 자존심이 상해서 되물었다. 
 
“무시하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독자 씨 살짝 샌님 스타일이니까요. 뭔가 운명적인 만남을 원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뜻밖에 정곡을 찔린 느낌이었다. 
실제로 나는 소개팅을 한 번도 못해봤다. 
정희원이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 그런 이야기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요. 궁금하지 않아요?” 
“······.” 
“예전에 무슨 일을 하며 살았고, 학교는 어디 나왔는지.” 
 
나는 잠자코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핸드폰 번호는 뭐고, 사는 곳은 어디였는지. 그리고······.” 
 
풍경이 느릿하게 흘러갔고, 말을 하던 정희원의 목소리는 조금씩 잦아들었다. 말을 하면서, 그녀도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이야기를 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다는 것을. 
그녀가 살았던 동네는 파괴되었을 것이고, 그녀가 쌓아온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마, 살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고작 몇 달 사이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한참이나 침묵하던 정희원이 물었다. 
 
“돌아가도······ 이제 예전같은 서울은 없겠죠?” 
“없을 겁니다.” 
 
열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면, 서울 돔은 부서지고 화신들은 해방된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지옥의 시작일 뿐이다. 
수도 지역의 돔에서만 발생하던 ‘시나리오’가, 이제 전 세계로 확대된다는 뜻이니까. 
 
“그럼······ 우리는 왜 ‘시나리오’를 계속 해야 하는 거죠? 우리가 알던 것들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데. 돌아갈 곳도 없는데.”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이 <낙원>에 남고 싶어하는 이유이리라. 
금호역의 모녀도, 핑키즈 김영팔도. 
이곳은, 자신의 <낙원>을 잃은 사람들이 오는 곳이니까. 
정희원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나는 일부러 그 얼굴을 바라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희원 씨는 칼을 잘 쓰죠.” 
 
작게 숨을 참는 소리.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우리 중 누구보다 불의 앞에 냉정해요. 특히 강자들의 횡포에는 더욱 민감하죠.” 
 
나는 천천히, 내가 아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원작’에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정희원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원작을 읽고 있는 중이니까. 
 
“항상 일행의 맨 앞에서 싸우고, 한 번도 힘들다고 불평한 적이 없어요.” 
 
정희원은 입을 꾹 다문 채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상처 받아도 누구한테도 털어놓지 않고, 의심스러운 것이 있어도 그 사람을 믿는다면 묻지 않는 것이 신의라고 생각하죠.” 
 
나는 정희원을 생각했다. 
금호역에서 나를 대신해 싸웠던 정희원. 
도깨비의 농간에 일행들이 뿔뿔이 흩어졌을 때도 필사적으로 일행을 찾아나섰던 정희원. 
내 수상한 행동들을 믿어주던 정희원. 
까칠하지만 실은 작은 농담에도 내가 기분이 상할까 조심스럽던, 그녀의 말투까지. 
 
“누구보다 인간을 불신하지만 실은 정이 많고, 일행이 위험에 빠지면 가장 먼저 달려오기도 하죠.” 
“······.” 
“이만하면, 저도 정희원 씨에 대해 조금은 알지 않습니까?” 
“······소개팅 한 번도 안 해봤다는 거 거짓말이죠?” 
“정희원 씨가 시나리오를 계속했기 때문에, 제가 알 수 있었던 것들입니다.” 
 
정희원이 입을 반쯤 벌렸다가 도로 다물었다. 
 
“별 거 아닐지도 모르지만, 제겐 소중한 기억들이죠.” 
 
터무니없이 빈약한 이해였다. 차마 누군가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조차 없는, 그런 하나마나한 말들이었다. 그래도 그 하나마나한 말을 들으며 울어주는 사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시나리오를 계속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라진 이야기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 안에 있다는 것. 그뿐이다. 
입술을 깨문 정희원이 말했다. 
 
“······너무 어려워서 잘 모르겠어요. 전에 말했잖아요. 나 학교 다니다 말아서······.” 
“희원 씨가 어떻게 행동하기를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희원 씨는 희원 씨의 방식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나는 그 말과 함께 [거래소]를 열었다. 
 
[제작 의뢰를 맡긴 아이템이 도착했습니다.] 
 
타이밍 좋게, 제작을 맡겼던 아이템이 왔다. 화룡종의 뼈와 악마의 심장, 그리고 몇몇 괴수들의 핵으로 만든 아이템이었다. 
세상에서 오직 ‘정희원’만이 쓸 수 있는 아이템. 
‘원작’에서도 오직 ‘3대 심판자’만이 사용할 수 있던 아이템이었다. 
나는 제작 대금 10만 코인을 일시불로 지급하고 아이템을 넘겨 받았다. 
 
[당신은 ‘심판자의 검’을 ‘정희원’에게 주었습니다.] 
 
놀란 정희원이 얼떨결에 검을 받아 들었다. 
 
“이건······.” 
“전에 쓰던 칼, 망가졌잖아요.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전 이걸 받을 자격이······.” 
“희원 씨만 이 칼을 쓸 자격이 있습니다.” 
 
 
* 
 
 
“김독자 진짜 인성 덜 됐네. 정말 이렇게 떠나려고?” 
 
멀어지는 <낙원>. 한수영이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여기서 할 일은 다 끝났어.” 
“끝나긴 뭐가 끝나? 
 
원작대로 흘러간다면, 아마 <낙원>은 반드시 파괴될 것이다. 
긴 시나리오 끝에 도달한 화신들의 평화는, 무참하게 부서질 것이다. 
그럼 내가 막아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낙원>이 있는 한, 이 시나리오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낙원>은 어차피 내 몫이 아니야.” 
“아하, 원작 흐름에 맡기시겠다······ 네가 직접 할 수도 있는데 왜?” 
“라인하이트는 지금 잡긴 벅차고, 잡아봤자 안 좋은 설화만 생길 거야. 지지자가 너무 많으니까.” 
 
설화가 꼭 ‘좋은 효과’를 가진 것만 있는 건 아니다. 
어떤 설화는, 가지고 있는 것 자체로 능력치가 떨어지는 것도 있다. 
그것을 아는 한수영이 입술을 비죽였다. 
 
“뭐, 그건 그렇다 쳐. 그럼 일행들 다 두고온 건 무슨 심리야?” 
“일행들도 좀 쉬어야지.” 
“뭐? 쉬어? 너 솔직히 말해봐. 실은 삐진 거지? 네가 이것저것 잘 해줬는데, 다들 처음 만난 악마 나부랭이한테 넘어가버렸잖아. 특히 정희원인가 뭔가 하는 걔는······.” 
“······정희원은 그럴만 해. 지금까지 충분히 힘들었으니까.” 
 
한수영이 콧방귀를 뀌었다. 
 
“웃기시네. 너 자기가 무슨 짓을 한 지 제대로 알긴 하냐? <낙원>은 곧 멸망할 거야. 그리고 걘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너한테 칼 받고 좋아하고 있다고.” 
“스스로 선택했으니, 책임도 스스로 지는 거야.” 
“악마 새끼······.” 
 
어떤 상처는 우리를 무너뜨리지만, 어떤 상처는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 악마 같다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 그게 내 방식이니까. 
한참이나 투덜대던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흐음······ 근데 김독자.” 
“왜.” 
“그럼 나는 왜 데려가는 건데?” 
“넌 도움이 되니까.” 
 
입술을 비죽이던 한수영은 갑자기 자신의 분신을 소환해 때리기 시작했다. 
······잘 보니 분신의 얼굴이 나를 닮은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저 분신, 얼굴도 바꿀 수 있는 거였지. 
 
“······뭐하는 거냐?” 
“훈련.” 
 
훈련이라기엔 일방적 폭행처럼 보이는데. 
게다가 어쩐지 아파 보이는 곳을 집중적으로 때린다. 
그렇게 한참이나 나를 두들겨 패던 한수영이 물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뭐 할건데?” 
“사나흘 정도 시나리오 제쳐두고, 히든 피스 찾아 다니면서 설화를 모을 거야.” 
 
히든 피스라는 말에 한수영의 입 꼬리가 작게 실룩거렸다. 
 
“웬일로? 너 메인 시나리오에 열중하는 타입이잖아?” 
“이번엔 다른 사람들한테도 좀 맡기려고. 지금까지 나 혼자서 이것저것 하느라 힘들었거든.”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너무 혼자서 애썼다. 
유중혁 자식, 뭔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은근히 중요할 때는 도움이 안 됐단 말이지. 
범람의 재앙때도, 피스 랜드 때도 내가 도우지 않았다면 모두 끝장났을 거고. 
보나마나 내가 열심히 시나리오 준비할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히든 피스나 찾아다녔으니 그 꼴이 난 거겠지. 
그러니 이번엔 놈이 제대로 움직여줘야 할 때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린 지금부턴 회귀자 흉내나 좀 내보자고.” 
 
 
 
 
 
< Episode 31. 시나리오의 무덤 (5) > 끝

< Episode 32. 김독자의 사랑 > 
 
 
 
 
 
김독자가 떠나고 나흘이 지났다. 
성도는 여전했고, 멸망의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롭고, 심지어는 나른한 <낙원>의 하늘. 그 하늘을 보던 이길영이 어두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린 버려졌어요.” 
“저 꼬맹이 또 시작이네.” 
“독자 형이 우릴 버렸다고요.” 
 
울상이 된 이길영은 이틀 전부터 틈만나면 그 소리를 반복하고 있었다. 
근처에서 칼날을 갈던 이지혜가 인상을 찌푸렸다. 
 
“모처럼 편하구만 왜 난리야?” 
“주인공이 동료를 두고 갈 때가 언제인지 알아요?” 
“······언젠데?” 
“동료가 방해될 때에요.” 
“······.” 
“우린 지금 ‘쓸모 없음’ 판정을 받은 거라고요!” 
“······그 아저씨가 무슨 주인공이냐? 주인공이라면 솔직히 사부 쪽이 더 어울리지. 그리고 이건 소설이 아니라고 꼬맹아.” 
 
작게 투덜거린 이지혜였지만, 그녀의 표정도 그다지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지난 나흘 간, 일행은 평온했다. 
마약 같은 평화였다. 이렇게 평온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평온했다. 
아무도 그들을 위협하지 않았고, 세상 천지에 그들이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틈틈이 스킬을 수련했고, 김독자가 각자에게 남긴 조언들을 되새겼다. 
 
「길영이는 스킬 지속력이 부족해. 코인이 남으면 ‘인내심’이나 ‘불굴의 끈기’를 구해봐. 거래소를 이용하거나, 배후성한테 부탁해봐도 좋고.」 
「지혜 너는 능력치가 너무 민첩에 편중되어 있어. 남는 코인 있으면 근력이나 마력에 투자해. 어디에 투자하느냐에 따라 네 전투 방식도 바뀔 거야.」 
「유승이는 일단 ‘길들이기’와 ‘상급 다종 교감’을 최대 레벨로 올리는 것에 집중해. 테이밍 관련 다른 스킬들이 필요하면, 언제든 나한테 말하고.」 
 
이길영의 말 때문일까. 
괜히 불안해진 이지혜가 옆에서 정좌하고 있던 신유승을 쿡쿡 찔렀다. 
 
“야, 짐승 꼬맹이.” 
 
독자의 조언에 따라 [상급 다종 교감]을 훈련하던 신유승이, 갑작스런 방해에 눈을 떴다. 
 
“······왜요.” 
 
별 수 없이 일행이 되는 바람에 뭉쳐 다니긴 하지만, 신유승은 김독자에게 무례한 이지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 눈초리에 머쓱해진 이지혜가 변명하듯 말했다. 
 
“야야, 그렇게 노려보지 마.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뭔데요?” 
“너, 독자 아저씨 원래 뭐하던 사람인지 알아?” 
 
뜻밖의 질문에, 신유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도 넌 아저씨 화신이니까 뭔가 좀 알까 싶어서. 원래 화신들은 배후성이랑 동조율이 높아질 때마다 배후성의 정보를 얻게 되잖아.” 
 
실제로 이지혜 또한 충무공의 [성흔]을 사용할 때마다, 생전 이순신의 기억들을 공유받곤 했다. 결국 성흔이란 설화의 중핵(中核). 힘을 쓸 때마다 성좌의 이야기를 알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신유승은 자신이 아는 몇 안 되는 단어를 필사적으로 고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고독한 사람이에요.” 
“야,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잖아.” 
“그리고, 책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고······.” 
“책?” 
“네. 아저씨를 떠올리면 무수한 페이지 같은 것들이 떠올라요.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페이지 내용도 보이지 않고요.” 
머뭇거리던 신유승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이었다. 
 
“아직 그렇게 밖엔 모르겠어요. 전 아직 성흔도 못 받아서.” 
“······기죽이려고 물어본 건 아닌데.” 
 
이지혜는 신유승의 작은 어깨를 두드리며,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겨우 한 사람이 없을 뿐인데, 파티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새삼 이런 멤버로 여태까지 잘도 살아남았구나 싶다. 
 
‘그 아저씨가 없었다면 진즉에 다 뒈졌겠지······.’ 
 
잘 보면, 하나하나가 불안한 사람들뿐이었다. 
김독자에게만 의존하는 두 꼬맹이, 매뉴얼 밖에 모르는 군인, 배후성을 잘못 만나 제대로 힘을 못 쓰고 있는 미소녀 검객······. 
 
[성좌, ‘해상전신’이 화신 ‘이지혜’의 애국심을 비난합니다.] 
 
코웃음을 친 이지혜가 귀를 막고 “아바바바”소리를 냈다. 
 
‘그나저나 군인 아저씬 또 저러고 있네.’ 
 
이현성은 그제부터 넋을 놓고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누구를 보고 있는 건지 아는 이지혜가 피식 웃었다. 
잠깐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는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야, 꼬맹이들.” 
 
어디론가 다가가는 이현성을 보며, 이지혜가 문득 입을 열었다. 
 
“재밌는 거 보여줄까?” 
 
 
* 
 
 
지난 나흘 동안, 정희원은 악몽을 꿨다. 
괴수들이 난립해, <낙원>이 멸망하는 꿈. 
깨 보면, 김독자가 주고 간 [심판자의 검]이 울고 있었다. 
 
우우우웅. 
 
몇 번인가 라인하이트가 그녀를 찾아왔고, 이 성채의 경비대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정희원은 그 부탁을 거절했다.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심판자의 검]은 근처에 ‘악’이 있을 때만 우는 검이었다. 
 
정희원은 낮은 슬레이트 지붕 위에 앉아, <낙원>의 정경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이 도시의 어디에도, ‘악’으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희원 씨, 뭔가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언제 다가온 것일까. 울긋불긋한 얼굴의 이현성이 곁에 서 있었다. 
 
“아, 그냥요. 너무 평화롭다 보니 생각이 좀 많아지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얼마 전, 니르바나로 인해 폭주했던 정희원을 이현성이 구한 뒤로, 둘 사이엔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둘 모두 그 기류가 정확히 뭔지 알지 못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화신 ‘이현성’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강철의 주인’에게 경고합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자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문득 지붕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지혜와 아이들이 옹기종기 숨어 있었다. 
 
‘······저 녀석들은 저기서 뭐하는 거야?’ 
 
정희원이 그들을 부르려는 순간, 이현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유 없는 평화는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독자 씨가 우릴 여기에 그냥 두고 간 건 아니라 믿으시는 모양이네요.” 
“독자 씨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이유를 찾는 건 아마 우리 몫이겠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잘 알 수가 없었다. 굳이 <낙원>에 그들을 두고 간 걸 보면 이곳과 관계된 것 같긴 한데, 겉보기엔 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지붕 아래쪽에서 사람들의 술렁임이 들려왔다. 
 
“시나리오를 돌려다오!” 
“우리는 ‘다음 층’으로 가고 싶다!” 
 
정희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평화로운 <낙원>에서 유일하게 불만으로 가득 찬 자들. 그들은 낙원의 시위대였다. 아직 대표하는 캐치프레이즈도 없는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간헐적으로 <낙원> 곳곳에서 나타나곤 했다. 
정희원은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저들은 ‘시나리오’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일까? 
 
“내려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 싸움이 붙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러나 정희원이 내려갔을 때는, 이미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싸움’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폭행. 
두들겨 패는 쪽은 물론 시위대가 아니라 경비대였다. 
명백한 과잉진압에 화가 난 정희원이 경비대를 말렸다. 
 
“잠깐만요! 진정들 하고 물러서요! 이건 너무 심하잖아요!” 
“공무 집행 중입니다. 방해하지 마시죠.” 
 
정희원의 손을 뿌리친 경비대장은 인원을 통솔해 쓰러진 시위대를 한데 모았다. 곧이어 나타난 작은 수레에 실린 시위대들은 열을 맞추어 어딘가로 이송되기 시작했다. 
 
“도망 간 놈들도 모두 잡아. 같이 있었던 녀석들도 모두 잡아 넣는다.” 
“저 여자는 어떡할까요?” 
 
정희원을 흘끗 바라본 경비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저 여자는 내버려 둬. 성주님 지시가 있으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간 시위대들 몇몇이 마저 잡혀왔다. 
그런데 그들 중엔 뜻밖의 인물들이 있었다. 
 
“저, 저는 시위대가 아니에요! 그냥 우연히 지나가고 있었을 뿐이라고요! 다영아! 다영아!” 
 
그들은 금호역의 모녀였다. 정희원이 외쳤다. 
 
“잠깐만요! 그 사람은 시위대가 아니에요!” 
 
그러자 경비원이 말했다. 
 
“시위대 맞습니다. 우리가 쫓아가니까 기겁하고 도망치더군요. 죄가 없으면 왜 도망을 치겠습니까?” 
“그렇다는군요.” 
 
경비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지시를 시작했다. 
정희원이 외쳤다. 
 
“아니, 갑자기 쫓아가면 놀라서 도망가는 게 당연하잖아요!” 
“혐의는 추후 밝혀질 겁니다. 시간 없으니까 어서 이송해!” 
“기다리라니까요!” 
“······아무리 성주님의 명이라지만, 한 번만 더 끼어들면 정말로 체포하겠습니다.” 
 
우습게도, ‘체포’라는 말에 정희원은 멈칫하고 말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너무 오랫동안 야생에 내던져져 있다가 갑자기 사회로 되돌아왔기 때문일까. 
이미 사태를 막을 수 없다 판단했는지, 여인이 외쳤다. 
 
“아, 아이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아이라도 풀어주세요!” 
 
여인의 비명에 경비대장이 잠시 멈칫했다. 
찰나의 고민 끝에 그가 말했다. 
 
“······아이는 내버려둬라.” 
 
고개를 끄덕인 경비원들이, 여인만을 데리고 움직였다. 멀어지는 엄마를 보며,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어, 엄마······.” 
“다영아, 잘 들어. 엄마 곧 돌아올 거야. 알겠지? 거기서 꼭 기다려! 거기서······!” 
 
엄마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정희원이 그들을 쫓아가려 할 때, 구경하던 상인들 몇이 끼어들었다. 
 
“아가씨, 괜한 짓 하지마. 소용 없어. 저게 <낙원>의 법이라고.” 
“······저들은 어디로 가는 거죠?” 
“낙원의 지하 감옥으로 가겠지 뭐.” 
“지하 감옥?” 
“경비대를 제외하고는 출입이 금지된 곳이야. 무슨 일을 저질렀든, 저기에 들어가서 돌아온 사람은 없다고. 쯧쯧······ 애가 딱하긴 하다만, 그러게 법을 잘 지키고 살았어야지.” 
 
상인들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며 흩어졌다. 
정희원은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울고 있는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이던 그녀는 울고 있는 아이의 손을 조심스레 쥐었다. 
그 따뜻한 감촉이 감겨든 순간, 갑자기 뭔가가 울컥 솟았다. 
 
······<낙원>이라고? 
 
“우리,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네.” 
 
돌아보니 이지혜를 비롯한 일행들이 서있었다. 
모두 자신의 ‘시나리오’를 찾은 표정들이었다. 
이현성이 말했다. 
 
“꽤 큰 건이 될 것 같은데, 우리만으로 괜찮을지 모르겠군요.” 
“독자 아저씨가 우리 믿고 간 거겠지. 아마 본인은 분명 더 커다란 일 맡고 있을 거고. 늘 그랬잖아.” 
“맞아요. 형 또 혼자서 심각한 얼굴로 괴물들이랑 싸우고 있을 거예요.” 
 
김독자가, 아무 이유도 없이 훌쩍 떠날 리 없다. 
닥쳐올 위협으로부터 일행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든, 이번 시나리오를 깨기 위해서든······ 이유가 뭐든 간에 분명 김독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필사적으로 자신의 생과 부딪치고 있을 터였다. 
마침내 정희원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우리끼리 해보죠.” 
 
매번 김독자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다. 
분명, 김독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또 지옥 같은 시나리오를 수행하고 있을 테니까. 
 
 
* 
 
 
“야! 개꿀이네 김독자. 진즉에 이렇게 좀 살지 그랬냐?” 
 
광활한 <무저갱 평원> 위에, 한 대의 스포츠 카가 가공할 엔진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 
 
“······그러게.” 
 
지난 나흘 동안, 우리는 <무저갱 평원>에 숨겨진 ‘히든 시나리오’를 세 개나 공략했다. 공략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다르게, 내가 아는 미래 정보를 팍팍 써댔기 때문이다. 
 
“저놈 약점은 34회차에 나와. 그러니까, 등허리에 있는 작은 점을 세 개 누르면······.” 
“저놈은 범위 공격이 위험해. 대신 범위 공격을 사용한 다음엔 빈틈이 생기는데······.” 
“저 보스의 약점은 항문인데······.” 
 
한수영과 다녔기 때문에 더 편한 것도 있었다. 
 
“오케이, 항문이라 이거지.” 
 
왜 그 정보를 아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었고, 한수영도 내가 알려주는 것들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우리는 성유물을 두 개나 얻었다. 나머지 하나는 SSS급 아이템이었지만, 이 평원에 있는 동안은 성유물만큼이나 유용한 것이었다. 
 
[SSS클래스 페라르기니] 
 
이 차는, [양산형 제작자]가 만든 SSS급 시리즈 중 하나였다. 
 
부아아아앙!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바람의 길]을 쓴 것처럼 빠르게 달릴 수 있을뿐더러, 전후방에 설치된 [SSS급 마력 포탑]을 이용해 다수의 적을 섬멸하는데도 유용했다. 덕분에, 모처럼 우리는 드라이브 하는 기분을 한껏 만끽하며 평원을 질주하고 있었다. 
 
지금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특급 회귀자 코스’ 쯤 된다고 해야 할까. 
 
새삼 유중혁 자식이 원망스러워진다. 
분명 놈도 내가 죽어라 시나리오를 깨는 사이 이런 호사를 누리고 있었을 테지. 
나보다 더 신이 난 한수영은 아까부터 조수석에서 벌떡 일어나 양팔을 번쩍 들고 외쳐대기 바빴다. 
 
“이젠 절대 호구로 살지 않겠다! 오직 나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 충실한 회귀자 마인드에 “넌 원래 너만을 위해 살았잖아”하고 태클을 걸고 싶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화신 ‘한수영’의 호쾌한 발언에 만족합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들의 행동방식에 동의합니다.] 
[20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두다다다다다! 
 
멀리서 다가온 괴물들이 페라르기니의 마력탄을 맞고 터져 나갔다. 
코인을 갈퀴로 끌어 모으는 쾌감 속에서, 한껏 하늘을 향해 작은 가슴을 내민 한수영이 나를 향해 외쳤다. 
 
“김독자! 너도 한 마디 해봐! 언제 이런 기분 또 내보겠어?” 
 
그 말에, 나는 순간 머뭇거렸다. 
어쩐지 쪽팔렸지만 한편으로는 한수영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이 이렇게 잘 나갔던 적이 없었다. 
언제나 야근에 시달리던 인생. 
페라리는커녕 중고차 살 돈도 없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했던 나다. 
그러니······ 조금은 기분내도 되는 거 아닐까. 
망설이던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소심한 목소리로 외쳤다. 
 
“내, 내가 주인공이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민망함에 눈을 가립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채널 이동을 고려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중2력에 취합니다.] 
 
시발······ 난 기분 좀 내면 안 되냐? 
그나저나······ 지금쯤 <낙원>에서도 슬슬 일이 터졌겠지. 
원작의 흐름도 있고, 아마 일행들이라면 잘 해낼 것이다. 
최근 이렇게 일이 잘 풀렸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이 기세라면, 시나리오 클리어도 순식간에······. 
 
[어떤 거대한 운명이 당신의 죽음을 바라고 있습니다.] 
 
······뭐? 
 
 
 
 
 
< Episode 32. 김독자의 사랑 > 끝

< Episode 32. 김독자의 사랑 (2) > 
 
 
 
 
 
나는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서 귀까지 팠다. 
하지만 메시지는 바뀌지 않았다. 
 
[어떤 거대한 운명이 당신의 죽음을 바라고 있습니다.] 
 
뭐지? 
나는 혼란한 마음에 브레이크를 힘껏 밟았다. 
급정거로 밀려온 관성에 한수영이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뭐야? 한창 기분 내고 있는데!” 
“조용히 좀 해봐.” 
 
나는 다시 한번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음성뿐만 아니라 화면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어떤 거대한 운명이 당신의 죽음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걸로 세 번째.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빌어먹을. 원작에서 ‘운명 메시지’가 세 번이나 들려온 적이 있던가? 
나는 생각했다. 
아마······ 71회차의 유중혁이 그랬지. 
그때 유중혁은 염라대왕의 살생부에 이름이 적혔었다. 
제길,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거지? 
한수영이 닦달하듯 물었다. 
 
“왜? 무슨 일인데?” 
“누군가가 내 ‘운명’을 읽었어.” 
“······운명?” 
 
운명. 그것은 ‘멸살법’에서 ‘개연성’만큼이나 무서운 말이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개연성’을 이용한 힘이었다. 하지만 굳이 변별해서 부르는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운명’은, 성좌들이 자신들이 가진 누적 개연성 코스트를 이용해 행사하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어, 잠깐만. 그거 나도 왠지 아는 이야기인 거 같은데······.” 
“아마 원작 초반에도 잠깐 언급은 됐을 거야.” 
“운명이라······ ‘미래시’랑 비슷한 거 아냐?” 
“비슷한 부분도 있는데, 좀 달라.” 
 
사실은 많이 다르다. 
운명을 읽는 것은 단순히 ‘미래의 정보’를 읽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보다 훨씬 위험한 데가 있다. 
 
“‘미래시’가 예측 가능한 미래를 엿볼 뿐이라면, ‘운명’은 예측 가능한 미래를 강요하는 ‘힘’이야.” 
 
한수영이 이해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설명을 덧붙였다. 
 
“가령 내가 5초 뒤에 엑셀을 밟는다고 가정하자. 그럼 ‘미래시’로 그걸 보면 나는 달리고 있겠지?” 
“······뭐, 그렇겠지.” 
“그런데 내가 미래의 정보를 알고 있다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든 엑셀을 밟지 않을 수도 있을 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운명’은 달라. 만약 누군가가 ‘김독자가 5초 뒤 엑셀을 밟는다’라는 운명을 읽어낸다면, 그 운명은 철회되거나 실현되지 않는 한 ‘강제력’이 발생해.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넌 반드시 엑셀을 밟게 된다는 거구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수영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근데 그거 좀 이상한데.” 
“뭐가?” 
“개연성에 맞지 않잖아. 네 말에 따르면 ‘운명’이라는 건 시나리오에 간섭할 정도의 힘인데, 대체 누가 그런 걸 강요할 수 있다는 거야?” 
“······누구겠냐.” 
 
이번 시나리오는 원칙적으로 도깨비의 간섭이 없다. 
그러니, 간섭할 놈들은 하나뿐이다. 
바로 알아들은 한수영이 답했다. 
 
“아무리 성좌라고 해도 혼자서는······.” 
“혼자가 아니니까 문제지.” 
“뭐?” 
“‘운명’을 읽어낼 수 있는 건 거대 성운들 뿐이야.” 
 
말하기가 무섭게, 전방에서 폭음이 터져나왔다. 
 
쿠구구구구! 
 
가공할 속도로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허접한 괴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 
한수영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김독자, 네가 받았다는 운명 메시지, 정확히 내용이 뭐야?” 
“내가, 죽는다는 내용.” 
“제기랄, 그것부터 말했어야지! 어쩐지 뭔가 잘 풀린다 싶더라니······.” 
 
한수영이 뭐라뭐라 욕설을 내뱉으며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전방의 폭연 속에서 한 존재가 나타났다. 
반사적으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아드는데, 먼저 사내가 입을 열었다. 
 
“김독자. 전할 말이 있어.” 
 
처음 보는 사내였다. 
하지만 그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익숙했다. 
본능적으로 적이 아니라는 느낌이 왔다. 
 
“당신은······.” 
 
향긋한 포도주의 향기와 과하게 들뜬 공기를 맡는 순간, 이 자가 누구의 화신인지 감이 왔다. 
 
“······내가 죽을 거란 얘길 하러 온 겁니까?” 
 
만취한 술냄새를 머금은 디오니소스의 화신이, 눈을 하얗게 뜬 채 나를 향해 웃었다. 
 
“오, 알고 있었어?” 
 
디오니소스에 대해서는 좋은 이미지가 남아 있었다. 연회장으로 가던 당시, 그는 나를 위해 진체를 강림해 싸워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면 얘기는 좀 달라진다. 나는 경계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운명을 읽은 게 당신들입니까?” 
“그래. 운명을 읽은 건 <올림포스>가 맞아. 그런데 내가 그중 하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이죠?” 
 
디오니소스의 화신은 그저 미소할 뿐이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어떤 생각이 스쳐갔다. 
 
“설마 <올림포스>가 분열한 겁니까?” 
“역시 똑똑하네.” 
 
······벌써? 
이것도 원작의 전개보다 빠르다. 
<올림포스>의 균열은 예정되어 있긴 했지만, 적어도 10번 시나리오가 끝난 후 벌어질 일이었다. 
 
“<올림포스> 뿐만이 아니야. 너를 노리는 성좌들이 있다. 아주 강대하고, 힘이 센 녀석들.” 
 
예상은 했다. 
그렇지 않으면, ‘운명’ 따위가 발호할 턱이 없으니까. 
 
“왜 저를 노리는 겁니까?” 
“그 강한 놈들이 은근히 쫄보라, 네 영향력을 두려워하거든.” 
“전 그냥 풋내기 성좌일 뿐인데요?” 
“본래라면 그렇지. 그런데 지구에서 시작된 이번 시나리오는 매우 특별해. 어떤 성좌들은 이 시나리오야 말로 우리가 오래도록 기다려 온 시나리오라 믿고 있어. 아아, 그런 표정 짓지마. 딱히 이해하라고 한 말 아니니까.” 
 
그냥 원래 내 표정이 이렇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디오니소스는 쉴 틈도 없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번 시나리오가 우리한테 엄청 중요하다는 것만 알면 돼. 그런데 하필 그 시나리오에, 네가 나타난 거지.” 
“뭔진 모르겠지만, 제가 방해다 그거군요.” 
“그래. 방해가 될 수밖에 없지. 너는 다른 성좌들에 비해 개연성의 영향을 훨씬 적게 받을 테니까. 심지어 다른 화신들에 비해서도 압도적인 성장력과 강함을 가지고 있지. 때문에 일부 성운들은 너를 반드시 포섭하거나, 그렇지 못하면 제거해야 한다고 믿어.” 
 
나는 잠시 디오니소스를 바라보았다. 
 
“······저한테 이 정보를 알려 주시는 이유가 뭐죠?” 
 
사실 이게 가장 궁금했다. 
디오니소스는 왜 내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 것인가? 
 
“그야, 네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지.” 
 
디오니소스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나와 몇몇 성좌들은, 네가 ■■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라 믿는다.” 
 
 
* 
 
 
정희원은 일행들과 그날 내내 낙원의 ‘지하 감옥’에 대해 조사했다. 다수의 인원이 한꺼번에 침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일행들은 각자 흩어져서 방법을 찾기로 했다. 그리고 정희원이 택한 방법은 나름 정공법이었다. 
 
‘섞여서 들어간다.’ 
 
오후 무렵이 되어 새로운 범죄자들이 등장했고, 우리엘에게 [은둔자의 망토]를 지급받은 그녀는 ‘지하 감옥’이 열리는 틈을 타 경비대를 뒤쫓았다. 경비대와 구속된 범죄자들은 그녀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지하로 가는 문을 열었다. 
감옥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었고, 지하도의 어둠은 그녀의 상상보다도 어두웠다. 
 
‘······대체 어디까지 내려가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는 깊이였다. 
아무리 감옥이라 한들, 이렇게까지 깊은 곳에 수용할 필요가 있는가? 이래서야 옮기는 쪽도 불편할 텐데······. 
의문이 드는 순간, 경비대의 걸음이 일제히 멈춰섰다. 
기이하게도 그들 모두의 표정에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저기까지만 옮겨! 바로 철수한다!” 
 
마치 들어가면 안 되는 곳에 발을 내딛은 사람들처럼, 경비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심지어 저 무서운 경비대장까지도 그랬다. 이윽고 두터운 철문이 등장했고, 철문을 열자 쇠창살이 채워진 입구가 나왔다. 몇 겹이나 되는 쇠창살. 인간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졌다기엔 과도한 방비의 감옥이었다. 
 
“다들 들어가!” 
 
수화물을 던지듯 죄수들을 몰아 넣은 경비대는, 이내 빠르게 지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우, 와아악!” 
“살려주세요!” 
 
죄수들의 틈에 섞여 들어온 정희원은, 발악하는 사람들을 보며 침음했다. 
이 사람들은 대체 왜 여기에 던져진 걸까.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으, 으으······ 여긴 대체 어디야?” 
 
죄수들이 비척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은은한 등이 켜져 있긴 했지만, 사위는 무척 어두웠다. 정희원도 [야간시] 스킬이 없었더라면 진즉에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을 정도였다. 
 
‘여기가 감옥이라고?’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감옥’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주변 경관은 차라리 자연 동굴에 가까웠고, 죄수들을 구분하는 방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갇혀 있는 죄수들이 보이지 않는다. 
 
‘식량 배급 같은 건 어떻게 이루어지는 거지? 대체 뭐야?’ 
 
도무지 알 수 없는 ‘지하 감옥’의 시스템. 
당황한 것은 함께 들어온 죄수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여기서 우리끼리 뭘 어쩌라는 겁니까?” 
“저기요! 아무도 안 계십니까?” 
 
겁에 질린 죄수들이 외쳤지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대신, 어둠 건너편에서 희미한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그르르르르. 
 
정희원은 [심판자의 검]을 천천히 뽑아들었다. 
 
우우우웅. 
 
이곳에 발을 내딛은 직후부터, 검이 더욱 격렬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이건······.’ 
 
섬뜩한 감각이 뒷덜미를 스쳐가는 순간, 정희원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도망쳐요!”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어둠 속에서 쏜살같이 달려온 괴물들이, 사람들을 덮쳐왔던 것이다. 
 
“으, 으아아아악!” 
“살려줘! 끄아아아!” 
 
표범을 닮은 괴생물체들이 사람들의 팔과 다리를 마구잡이로 물어 뜯고 있었다. 장난감처럼 찢겨 나간 사람들의 사지가 핏줄기와 함께 솟구쳤다. 
본래는 숨어 있다가 금호역의 여인만 구출해서 나갈 계획이었지만, 이렇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거의 레벨 10에 다다른 [귀살]이 귀기를 뿜자, 새빨간 아우라가 그녀의 전신에 휘감겼다. 
 
스가가각! 
 
완벽한 선을 그리는 [검도]. 그 말끔한 선분에 표범들의 몸이 종잇장처럼 갈라졌다. 흥분한 표범들이 뒤이어 그녀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녀는 연이은 검격으로 달려드는 괴수들을 깨끗하게 처리했다. 
악마종들이 들끓는 이곳에서, 정희원의 힘은 그야말로 최고조였다. 
 
“누,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고맙습······.” 
 
어둠 속을 더듬는 사람들이 그녀의 인기척을 찾으며 감사 인사를 표했다. 
그러나 정희원은 그 인사를 받을 감정적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너부러진 표범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야.’ 
 
표범의 얼굴은, 사람의 그것을 하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정희원은 어둠 속을 내달렸다. 
모든 감각이 서늘해질 정도의 공포. 
그렇게 한참을 달려가자, 그녀의 역량으로는 차마 잴 수 없을 만큼의 거대한 공동이 나타났다. 정확히 말하면 공동은 아니었다. 그 안에는 무수한 괴물들이 들어차 있었으니까. 
 
그르르르······. 
그와아아아아! 
 
인세의 마경(魔境)이 이런 모습일까. 
5급종은 물론이고 4급종, 3급종. 그 외에 급수를 알 수 없는 녀석들까지. 
 
“이게 <낙원>이라고······.” 
 
금호역의 여인은 찾을 수 없었다. 
당연히, 찾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이 녀석들에게 먹혔거나······. 
 
그아아아아! 
 
이 녀석들 중, 하나가 되어 있을 테니까. 
생명의 기척을 느낀 괴물들이 흥분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악마종과 다른 괴수종의 혼혈이었다. 충왕종의 형태를 띤 녀석, 인외종의 형태를 띤 녀석······ 바깥에서 본 듯한 외형을 가진 놈들도 있었다. 
뒤쪽에서 죄수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오지 마!” 
 
하지만 그녀의 외침이 닿기도 전에, 지반이 흔들리며 괴수들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공동을 중심으로 개미굴처럼 뻗은 통로 속에서 괴수들이 달려나오고 있었다. 정희원은 입술을 깨물며 [지옥 염화]를 발동했다. 
 
‘혼자 오는 게 아니었어.’ 
 
아니, 같이 왔다고 한들 어쩔 수 있을까. 
이현성이나 다른 꼬마들이 같이 있었다고 해서. 
이 아득한 적들과 맞서 싸울 수 있을까. 
차라리, 혼자 온 게 다행인지도 모른다. 
 
“끄아아아아!” 
 
범죄자들이 무참히 먹이로 전락하는 동안, 정희원은 [지옥염화]가 담긴 [심판자의 검]을 휘둘렀다. 불타는 대천사의 염열이 공동을 메우자, 일순 놀란 악마종들이 물러나며 경호성을 발했다. 
하지만, 그 대치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알 수 없었다. 
불길의 경과를 살피던 괴수들 중 몇몇이 과감히 앞으로 뛰어들려던 순간. 
 
“오셨군요, 대천사의 화신이여.” 
 
그 목소리에, 불길도 두려워 않던 괴수들이 약한 신음을 토하며 물러났다. 
돌아보자, 그곳엔 낙원성주 라인하이트가 있었다. 
 
“이제 경비대장을 할 마음이 생기신 겁니까?” 
“······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정희원은 이를 까드득 갈며 말했다. 
 
“당신은 거짓말쟁이야. 낙원? 시나리오의 공포로부터 벗어난 곳? 지금 이딴 곳을 만들어 놓고 그런 말이 나와?” 
 
그녀는 [심판자의 검]으로 라인하이트를 겨누었다. 
김독자의 생각이 옳았다. 
이 세상에 <낙원> 같은 건 없다. 
우리는······ 시나리오를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 
 
“저를 죽이고 싶으시다면, 그러셔도 됩니다.” 
“허락하지 않아도 그럴 거예요.” 
 
당연히 그럴 것이다. 
배후성의 힘을 빌려서라도, 이 끔찍한 악몽을 끝낼 것이다. 
 
[‘심판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당신의 요청에 고뇌합니다.] 
 
 
 
 
< Episode 32. 김독자의 사랑 (2) > 끝

< Episode 32. 김독자의 사랑 (3) > 
 
 
 
 
 
그 말에, 정희원은 깜짝 놀랐다. 
······고뇌한다고? 
라인하이트는 누가 봐도 악이다. 
이 자는 수많은 화신들을 속여 지하에서 괴수를 양산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악인이 아닐 수 있단 말인가?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화신 ‘정희원’에게 판단을 맡깁니다.] 
 
라인하이트가 입을 열었다. 
 
“저를 죽이면 <낙원>은 끝날 겁니다.” 
 
그 말에, 타오르던 정희원의 [지옥염화]가 일순 줄어들었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라인하이트가 말을 이었다. 
 
“정희원 씨, 실은 이곳의 존재를 예상하셨지 않습니까?” 
“무슨······.” 
“사실은 알고 계셨을 겁니다. 완전한 <낙원>은 없다는 걸. 아름다운 곳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존재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말입니다.” 
 
정희원은 대꾸하지 못했다. 
몰랐다는 말은 기만이다. 
당연히, 그녀도 생각했다. 이곳 또한 뭔가 끔찍한 진실을 숨기고 있을 거라고. 
그게 이런 식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지만······. 
 
“······대체 괴수를 양산해서 어쩔 셈이에요? [암흑성]을 정복하기라도 할 건가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그저 <낙원>의 양분일 뿐이에요.” 
 
공동의 중앙에 거대한 나무 줄기가 보였다. 
촉수처럼 가닥을 뻗은 가지들이 주변의 괴수들을 탐색하고 있었다. 
정희원은, 그 나무 줄기들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깨달았다. 
 
언덕에 피어있던 작은 꽃, 영구기관. 
 
저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거렸다. 
설마 이 나무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암흑성]에 들끓는 무수한 악마종들이, 왜 이곳만큼은 침범하지 않는 것인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이곳 <낙원>은 천혜의 요새라고 표현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았으니까. 
 
“[암흑성]에, 왜 이토록 많은 [악마종]들이 생긴 것인지.” 
 
빠르게 움직인 줄기들이 주변의 인간들을 하나둘씩 낚아챘다. 죄수들은 비명을 질렀지만, 반항할 틈은 없었다. 쾌속하게 움직인 줄기들은 죄수들의 몸을 꽁꽁 묶더니 둥치 쪽의 구멍으로 그들을 던져 넣었다. 
 
푸스스스스! 
 
끔찍한 소음이 들렸고, 마치 존재에게서 영혼을 거세하는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나무의 줄기 봉오리가 피었다. 그 봉오리에서 태어날 것이 무엇인지를 직감한 정희원이 몸을 떨었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봉오리 속에서 괴생명체가 태어났다. 방금 나무가 집어삼켰던, 그 인간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아! 
 
영구기관은, 악마를 만드는 나무였다. 
정희원이 치를 떨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짓을······.” 
 
<낙원>의 근처에서 악마종을 찾을 수 없는 이유.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이 <낙원> 자체가 악마종의 생산지이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생산된 악마들은 매달 특정일이 되면 밖으로 배출됩니다. 감옥의 수용 인원에도 한계는 있으니까요.” 
 
라인하이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악마가 된다는 건 꼭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 
“그들은 영생할 수 있고, 인간일 적보다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쿠구구구구. 
한층 성장한 나무가, 환한 빛을 내뿜더니 <낙원>의 대지에 양분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죄’를 바쳐, 다른 존재들의 삶을 지탱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순교자 같은 거지요.” 
 
척박한 땅이 기름지게 변하고, [암흑성]에도 농작물이 자랄 수 있도록 생명력을 공급하는 원천. 그것이 바로 영구기관의 역할이었다. 
모든 것을 이해한 정희원은 절망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만약 여기서 그녀가 라인하이트를 벤다면, 지하 감옥은 붕괴할 것이다. 
‘영구기관’은 급격히 시들 것이고, <낙원>의 체제는 망가질 것이다. 
사람들은 살 땅과 먹을 것을 잃고, 난립한 괴수들은 그 모든 생명체들을 찢어발길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그것을 알기에, 정희원은 라인하이트를 죽일 수가 없었다. 
더 커다란 참사를 막을 자신이 없었기에, 그녀는 비극의 원천을 단죄할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는 해야만 했으니까요.” 
 
라인하이트의 얼굴은 슬퍼 보였다. 
 
“시나리오의 패배자들에게도 삶은 계속됩니다. 누군가는 그들을 위한 장소를 만들어야 했어요.” 
“정말 그들을 위했다면 시나리오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왔어야죠! 이런 곳을 만들 게 아니라, 사람들을 이끌고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기 위해 애썼어야 한다고!” 
“당신은 모릅니다. 다음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적은,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 음울한 눈빛에, 정희원은 놀랐다. 
암흑성 랭킹 2위의 악마 후작. 
그 누가, 저런 존재에게 두려움을 심을 수 있는가. 
 
“······뭐가 있는지 알고 있는 거예요?” 
“뭐가 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설령 다음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더라도······ ‘그다음’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더 많은 실패자를 만들기 위해서.” 
“그걸 모두 클리어하면 되잖아요! ‘시나리오’니까. 언젠가 끝이 있을 거 아냐? 스킬을 수련하고, 설화를 쌓으면서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모든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정희원이 입을 다물었다. 
모든 시나리오의 끝. 
그녀의 동료인, 김독자가 도달하고 싶었던 그곳. 
라인하이트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면 평화가 올 거라고, 그렇게 믿는 겁니까?” 
 
정희원은 욱하는 마음으로 외쳤다. 
 
“그래요. 그렇게 믿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단 한 사람이라도, ‘시나리오의 끝’에 도달한 존재가 있기라도 합니까?” 
“성좌들이 있잖아요!” 
“성좌들?” 
“그들은 이 모든 시나리오의 바깥에 존재해요. 즉, 이 시나리오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거죠.” 
 
마치 장난감처럼 화신들을 대하는 성좌들. 
그런 ‘절대적 존재’들이 있기에, 화신들은 역설적으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언젠가는 그들도 저 자리에 올라설 수 있을 거라고. 
이 지옥 같은 시나리오의 바깥으로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하. 하하, 하하하······.” 
 
라인하이트가 웃었다. 
 
“그렇군요. 성좌들이라. 그 마음 이해합니다. 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왜 당신은, ‘성좌’들이 모든 시나리오를 클리어했다고 생각합니까? 김독자라는 자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김독자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머릿속에서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그들은 분명 ‘시나리오’의 바깥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저 ‘이 시나리오’의 바깥에 있을 뿐입니다.” 
“······.” 
“그들은 모두 우리처럼 시나리오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76번이든, 84번이든. 시나리오의 규모와 숫자가 다를 뿐, 그들 또한 우리와 같단 말입니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정희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럼······?” 
“성좌들은, 그저 시나리오의 도중에 태어난 규격 외의 초강자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신도 아니고, 절대자도 아니에요.” 
 
마치 이 세계의 절대명제를 선언하듯, 라인하이트가 말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죠. 시나리오의 ‘끝’에 도달한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 
“이 세계는, 영원한 지옥입니다.” 
 
정희원은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저 성좌들조차 해내지 못한 것. 
저 강대한 존재들조차, 도달하지 못한 장소. 
김독자가 나아가고 있는 장소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 걸······ 어떻게 하려는 거야? 김독자 당신은······.’ 
 
라인하이트가 말을 이었다. 
 
“그게 제가 <낙원>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정희원은, 멍하니 라인하이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낙원>은 언젠가 붕괴합니다. 인간의 숫자는 적어지고, 악마종의 숫자는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토지를 유지할 양분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절망하고 또 절망한 끝에, 그는 절망의 <낙원>을 만들었다. 
 
“제겐 이 나무를 유지시킬 고결한 인간의 영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침, 이번 분기에는 그런 영혼들이 꽤 많이 들어왔죠. 김독자나 당신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정희원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내가 필요했던 건가요?” 
“그렇습니다. 대천사의 선택을 받은 당신이라면 적어도 10년. 성좌가 된 김독자라면 앞으로 200년 이상 <낙원>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그딴 부탁을 들어줄 거 같아요?” 
“당신은 들어줄 겁니다. 왜냐하면 ‘대천사’의 화신이니까.” 
 
나를 희생하면 <낙원>을 지킬 수 있다. 
 
“당신이 도와주다면, 당분간 경범죄자들을 처벌하지 않아도 됩니다. 수천, 수만 명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정희원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내 목숨으로 수만 명을 구할 수 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수만 명이 죽는다. 
 
그르르르······. 
 
물고기를 연상시키는 괴수가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잘 보니, 그 괴수의 얼굴은 금호역의 여인을 닮아 있었다. 
간절한 눈빛으로 정희원을 보는 괴수가 울부짖었다. 
 
“내가······.” 
 
어차피, 버려진 삶이었다. 
부모님도, 친구도,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도 모두 죽었다. 
시나리오의 끝은 불가능한 것이고. 
앞으로의 삶은 무용할 것이다. 
 
“나는······.”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정희원은 결심했다. 
 
“알았어요. 그러면, 내가······.” 
 
그런 그녀가 죽어서 수만 명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고, 정의로운 일이며, 선한 일일 것이다. 
라인하이트의 표정이 누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뭔가가 그녀를 붙잡았다. 
 
‘하지만, 그럼 내 삶이란 건 뭐지?’ 
 
그것은 아마도 허무였고. 
 
‘나는······ 대체 뭐였던 거야?’ 
 
마지막 남은 삶의 미련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희원 씨는 칼을 잘 쓰죠. 
―우리 중 누구보다 불의 앞에 냉정해요. 특히 강자들의 횡포에는 더욱 민감하죠. 
―항상 일행의 맨 앞에서 싸우고, 한 번도 힘들다고 불평한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누군가가, 이미 답을 주었기 때문에. 
 
―정희원 씨가 시나리오를 계속했기 때문에, 제가 알 수 있었던 것들입니다. 
 
아마, 김독자는 처음부터 시나리오의 실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시나리오를 계속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정희원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여기서 죽을 수 없어.” 
 
그래서 그녀는 이기적이 되기로 했다. 
살기로, 마음먹었다. 
설령 자신의 선택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더라도. 
그것마저 감수하고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아뇨, 그만 죽어주시죠.” 
 
그러나 우리의 의지와 삶은 때로 무관하다. 
 
“그리고 순순히 <낙원>의 양분이 되십시오.” 
 
[지옥염화]를 전력으로 발출하더라도 모두 상대할 수 없는 숫자의 악마종들. 정희원은 표정을 굳히며 모든 마력을 개방했다. 죽을 수 없다. 죽지 않을 것이다. 
 
꽈아아아앙! 
 
순간 뒤쪽의 격벽이 터지며, 사람들이 나타났다. 
 
“희원 씨!” 
“아 언니 또 혼자 가면 어떡해요!”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라인하이트는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잘 됐다는 듯, 그는 미소지었다. 
 
“많은 양분을 얻을 수 있겠군요.” 
 
누가 뭐래도 그는 암흑성 랭킹 2위의 강자. 
김독자도 없는 그룹이 두려울 턱이 없었다. 
 
“모두 뒤로 물러서십시오!” 
 
이현성이 일행들을 보호하며 앞으로 나섰다. 
아까보다 훨씬 든든해지긴 했지만, 상황이 나쁜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마 이 싸움에서 누군가는 죽을 것이고, 운이 나쁘면 모두가 죽을 것이다. 
김독자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김독자에게 의지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결국 정희원은 또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이곳이 당신들의 ‘끝’입니다.” 
 
그렇게 선언한 라인하이트가 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천장의 지반이 통째로 무너졌다. 마치 폭격기가 벙커 버스터를 퍼붓듯, 무식한 폭음이 연달아 울려 터졌다. 
 
콰아아아앙! 
쿠구구구구! 
 
가공할 에테르의 폭풍이 영구기관의 가지들을 찢어발겼고, 부서진 지반이 라인하이트와 괴수들 위에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크아아아아!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내리깔린 괴수들. 매캐한 폭연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럽게 깊은 곳에도 숨었군.” 
 
내려 앉은 지반 더미 위로 무뚝뚝한 사내와, 그를 뒤쫓는 여인의 그림자가 보였다. 경이와 당혹감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들을 마주 보며, 유중혁이 짓씹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김독자는 어디 있지?” 
 
 
 
 
 
< Episode 32. 김독자의 사랑 (3) > 끝

< Episode 32. 김독자의 사랑 (4) >
 
 
 
 
 
“사부!” 
 
유중혁을 발견한 이지혜가 외쳤다. 그러나 유중혁은 그녀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물었다. 
 
“김독자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독자 아저씨는 왜 찾아?” 
 
유중혁이 대답하려는 찰나, 유미아를 업은 유상아가 선녀처럼 천장에서 내려왔다. 일행들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유상아는 반가운 내색을 표하는 대신, 서둘러 말했다. 
 
“독자 씨가 위험해요.” 
“네?” 
“독자 씨는 지금 어디 계신가요?” 
 
유중혁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상아의 시선이 불안하게 허공을 탐색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김독자의 모습. 이현성이 재빨리 대답했다. 
 
“독자 씨는 사흘 전에 벌써 떠났습니다.” 
“독자 씨가 위험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죠?” 
 
정희원도 되물었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저것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답답했는지 이지혜가 덧붙였다. 
 
“뭔가 잘못 알고 온 거 아니에요? 위험한 건 독자 아저씨가 아니라 우리라고요.” 
 
상황이 이 정도인 줄은 몰랐던 유상아가 대답했다. 
 
“일단 여기서 빠져 나간 다음 설명 드릴게요.” 
 
공동의 소란으로 인해 공동과 연결된 굴에서 괴수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지혜가 소름끼친다는 듯 말했다. 
 
“젠장, 공필두 아저씨가 있었다면······.” 
 
확실히, 공필두가 있었다면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공필두의 [무장 성채]는 다수전에 유용한 성흔이고, 다수의 괴수들을 학살하기에 적합한 포지션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공필두와는 [암흑성] 1층에 진입할 때 이미 헤어졌고, 지금은 생사조차 불분명하다. 
 
그나마 유중혁이 있다는 것만이 일행들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단순히 무력으로만 보자면 공필두나 김독자와 있을 때보다도 훨씬 더 큰 힘이 되는 존재. 주먹질 한 방에 산을 부술 거력이 담겨 있었다. 
 
콰아아앙! 
 
[백보신권]으로 다가오는 괴수들을 죄다 쳐날려버린 유중혁이 말했다. 
 
“여기서 싸우면 불리해. 천장으로 빠져 나간다.” 
 
가장 빠른 탈출로를 모색한 유중혁이 괴수들의 길을 열었다. 커다란 마력의 손실도 없이 단순 박투만으로 길을 뚫는 그의 능력은, 가히 인간 탱크에 가까웠다. 아니, 진짜 탱크였다고 해도 저런 위력을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유상아가 물었다. 
 
“탈출할 수 있을까요?” 
“벽에 디딤층을 만들 테니, 알아서 짚고 올라와.” 
 
그 말과 함께 유중혁은 허공을 밟고 날아올랐다. 
무림계 귀환자 중에서도 소위 최강의 힘을 가진 존재들만이 사용한다는 [허공답보]였다. 그는 원숙한 동작으로 죽은 괴물들로 탑을 쌓아, 일행들이 밟고 올라갈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곧장 천장의 벽면을 뚫고 올라가, 도약대로 쓸 수 있는 층을 주먹으로 내놓았다. 
보통이라면 일행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회차의 유중혁은 달랐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변하게 만들었는지는, 유중혁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 공동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정말 뜻밖의 상황이군요. 당신이 ‘화신 유중혁’입니까?] 
 
라인하이트의 목소리. 
층을 따라 천장을 주파하던 이지혜가 놀라서 물었다. 
 
“뭐야, 안 죽었어?” 
 
당연한 일이었다. 
암흑성 랭킹 2위의 존재가, 겨우 돌무더기에 깔렸다고 죽을 리가 없으니까. 유중혁은 라인하이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천장 층계에 서서 일행들을 기다렸다. 이지혜와 이현성, 유상아를 비롯한 선두 그룹이 먼저 올라갔고, 이길영과 신유승의 후미 그룹이 뒤를 따랐다. 
신유승이 곁을 지나치려는 순간, 유중혁이 어깨를 붙들었다. 
 
“넌 같이 와선 안 된다.” 
“네?” 
 
신유승이 채 대답하기도 전에, 유중혁은 아이를 천장 아래쪽으로 밀쳤다. 입을 벌린 괴수들이 신유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놀란 이길영이 외쳤다. 
 
“유승아! ······뭐야! 이게 무슨 짓이야!” 
 
분노한 이길영이 유중혁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가볍게 피해낸 유중혁이 이길영의 주먹을 붙들고 말했다. 
 
“너도 같이 가는 게 좋겠군.” 
 
잠시 후, 이길영도 비명을 지르며 신유승을 따라 추락했다. 
 
 
* 
 
 
디오니소스의 화신이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져버린 뒤, 한수영은 심각한 얼굴로 내게 물어왔다. 
 
“······방금 그놈이 한 말, 대체 뭐였어?” 
“나도 잘 몰라.” 
“모른다고? 너도 필터링 된 거 못 들었어?” 
 
못 들었다. 하지만 대충 무엇을 뜻하는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이 모든 시나리오의 ‘끝’과 관계된 말일 것이다. 
그러니 필터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이제 막 열 번째 시나리오에 도전하는 존재에 불과하고, 성좌가 되었다 한들 모든 정보를 자유로이 취득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한수영은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운명’에 관한 건 어쩔 거야? 올림포스의 성좌가 직접 경고하러 올 정도라면 정말 위험한 거 같은데.” 
“그런 거 같네.” 
“운명은 완전히 막을 방법이 없는 거지?” 
“정말 ‘완전히’ 피할 수 없는 건 아냐. 운명의 실행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면 운명은 철회되기도 하니까. ‘운명’도 어디까지나 ‘개연성’을 따른다고.” 
 
하지만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약간이라도 실행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라면 절대로 운명을 피해갈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뭔가를 생각하던 한수영이 물었다. 
 
“구체적인 메시지 내용은 없어? 그냥 죽는다고 한 거야?” 
“그게······.” 
 
사실, 디오니소스는 내게 커다란 개연성 손실을 감수하고 예언 내용을 몰래 전해주었다. 
 
「화신 김독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다.」 
 
솔직히, 나로서는 당혹스럽게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니······. 
게다가 그 사람이 날 죽일 거라고? 
머뭇거리던 내가 예언 내용을 말해주자, 한수영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그녀는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붉어졌다가를 반복하더니 이내 표정이 사라진 채로 물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 
“그래.” 
“······너도 그런 게 있냐?” 
 
어쩐지 기분이 나쁘긴 하지만, 사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얼굴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인간적인 호감이 있는 사람은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다. 확실히 말해서, ‘사랑’은 내 인생과 가장 거리가 먼 단어였으니까. 
 
“솔직히 없다고 말하는 게 맞겠지.” 
 
내 대답에 한수영의 얼굴에 미미하게 화색이 돌았다. 
 
“그럼 그 ‘운명’은 철회되어야 맞는 거 아냐?” 
“얼핏 생각하면 그렇겠지만······.” 
“아니면, 이제와서 누굴 좋아하게 되는 건가? 너 혹시 첫눈에 반하는 타입이야?” 
“그런 적은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지도 않을 거야.” 
 
운명 메시지가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될 정도로 ‘강력한 운명’이다. 
혼란스럽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고? 
나는 복잡한 얼굴의 한수영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면, 다른 가능성도 있어.” 
“······뭔데?” 
“원래 ‘운명’은 그렇게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게 아냐. 너도 그리스 신화 같은 거 봤으면 알 거 아냐? 원래 예언들은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게 전해지지 않는다고. 비유나 상징투성이지.” 
 
한수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화신 김독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다. ······이 당연한 문장에 무슨 상징이나 비유가 있어?” 
“그 ‘당연한 문장’이 의외로 다른 의미일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한다는 얘기야.” 
“흐음······.” 
 
그래도 한수영은 작가니까, 의외로 이런 방면의 해석에 있어서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실제로 한수영은 그럴듯한 가설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세 가지 정도 걸리는 부분들이 있는데.” 
“뭔데? 말해봐.” 
“일단 하나. 굳이 처음에 ‘화신’이 들어간 이유가 있을 것 같아.” 
“······화신?” 
 
나도 무심코 넘어간 부분이었다. 
 
“너 이제 성좌가 됐잖아? 그럼 ‘화신’으로서의 너는 이미 죽었다고 봐도 무방한 거지. 아냐?” 
 
그럴듯한 가설이다. 
하지만 그 가설이 맞다면, 내가 반쪽짜리라도 성좌가 된 순간 운명은 실현되었다고 봐야 했다. 즉, 굳이 운명 메시지가 반복해서 찾아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수영도 그것만으론 뭔가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두 번째 가설을 내놓았다. 
 
“둘.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 자체가 비유일 가능성이 있어.” 
“<스타 스트림>에서 ‘사람’에 비유될 만한 게 뭐가 있지?” 
“음······. 뭔가를 의인화했을 가능성도 있겠네.”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았지만, 이 부분에서는 딱히 그럴듯한 해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나저나 모처럼 진지한 한수영을 보고 있자니, 이 녀석도 썩 괜찮은 녀석이 아닌가 싶다. 나를 위해서 이것저것 생각해주는 것도 꽤 고맙고. 
나는 한수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는 황혼 때문인지 한수영의 속눈썹이 유난히 길어 보였다. 
이렇게 보니 이 녀석도 예쁘게 생기긴 했다. 
사실 한수영이 좀 앳되어 보여서 그렇지, 절대 어디가서 꿀릴 외모는 아니긴 하다. 
 
······잠깐만. 내가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건지. 
 
조심해야 한다. 
잘못하면 한수영에게 뒈지게 될지도 모르니까. 
솔직히 그런 상황이 된다면 이 녀석은 날 망설임 없이 찌를 것이다. 
실제로 이미 한 번 찌르기도 했고. 
한수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봐야 할 건 ‘죽음’이란 단어야. 어쩌면 여기서의 ‘죽음’이라는 게, 말 그대로의 ‘죽음’이 아닐 수도 있어.” 
“그럼?” 
“사람이 죽을 때가 언제라고 생각해?” 
“그야······ 생명이 다했을 때겠지. 심장이 멈추고, 더 이상 숨을 쉬지 않게 되었을 때.” 
 
내 대답에 한수영이 실망한 듯 혀를 찼다. 
 
“하긴, 겨우 그런 수준이니 ‘멸살법’ 같은 소설을 계속 읽은 거겠지······.” 
“······괜한 시비 걸지말고. 그럼 뭔뜻인데?” 
“넌 만화도 안 보냐? 보통 이럴 때 하는 말 있잖아. 사람이 죽을 때는 언제냐? 그건 사람들로부터 잊혀졌을 때다!” 
“그건 만화고. 그래서 뭐, 내가 잊혀지기라도 한단 소리야?” 
“예를 든 거잖아 멍청아. <스타 스트림>에서도 성좌가 죽을 때는 모든 존재에게 잊혀졌을 때잖아. 비슷한 가능성을 재고해볼 수 있다는 거지.” 
 
그렇게 들으니 영 가능성 없는 소리도 아닌 것 같다. 
<스타 스트림>은 곧 거대한 이야기의 흐름이고, ‘관계’에서 도태된 존재는 자연히 이야기 속에서 사멸하게 된다. 
 
“사람들이 왜 날 잊게 된다는 거지? 단체로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리나?” 
“잊는다는 게 그런 의미가 아닐 수도 있지.” 
 
그 말을 하는 한수영의 얼굴은, 불현듯 외로워보였다. 
그러고 보면, 나는 한수영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모른다. 
한수영이 ‘멸살법’을 표절한 소설을 썼다는 것 외에, 나는 그녀에 대해 딱히 아는 게 없는 것이다. 
······심지어 이제 그 ‘표절’에 관한 부분도 확실치가 않다. 
지난 번 [거짓 간파]에서는 한수영이 표절을 하지 않은 게 ‘진실’이라고 떴었으니까. 
나는 잠시 사이를 두고 물었다. 
 
“그럼 무슨 뜻인데?” 
 
한수영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싶더니,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김독자, 죽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그제야 한수영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깨달은 내가 입을 벌렸다. 
우리는 반사적으로 떠나온 <낙원> 쪽을 돌아보았다. 
 
······설마? 
 
한수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시 돌아갈까?” 
“······지금 가면 늦어. 벌써 사흘 거리니까. 전력으로 주파해도 하루 안에 도착하기는 무리야.” 
“그럼?” 
“괜찮아. 지금쯤 최강의 원군이 도착했을 테니까.” 
“최강의 원군?” 
“그 녀석이야 내가 보낸지 모르겠지만······.” 
 
물음이 이어지기 무섭게, 허공에서 메시지가 떠올랐다. 
 
[암흑성의 누군가가 시나리오 최초로 초월좌(超越座)를 이룩하였습니다!] 
 
역시, 예상대로군. 
지금쯤 그 경지에 오를 거라 생각했다. 
나는 멀리서 대참사를 일으키고 있을 유중혁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제 주인공도 밥값 좀 해야지.” 
 
 
 
 
 
< Episode 32. 김독자의 사랑 (4) > 끝 

< Episode 32. 김독자의 사랑 (5) > 
 
 
 
 
 
곁에 있던 한수영이 입술을 비죽였다. 
 
“언제 그렇게 친해지셨대? 그 사이코패스랑······.” 
“딱히 친해지진 않았어.”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굉장히 신뢰하는 표정인데?” 
“착각이야. 그놈을 신뢰하느니 도깨비를 믿지.” 
 
내가 유중혁을 믿는다면 그건 놈의 인성이 아니라 경험을 믿는 것이다. 
어쨌든 놈에겐 3회차분의 경험이 있고, 41회차의 신유승에게 들은 여러 가지 정보들도 있으니까. 
게다가, 본래 <낙원>은 그 녀석 담당이다. 
2회차때도 알아서 잘 했으니, 이번에는 더 잘 해내겠지. 
다만······. 
 
“······좀 걱정되긴 하네.” 
 
녀석의 인성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일행만으로 <낙원>의 공략이 가능하도록 여러 가지 준비를 해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완벽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 독자고, 유중혁은 언제 회귀할지 모르는 개복치 같은 놈이니까. 지난 번에 정신줄을 잡아 놨으니 좀 나아지긴 했겠지만······. 
한수영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 정 신경 쓰이면 보고 오든가. 너 어차피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스킬 있잖아.” 
“······알고 있었냐?” 
“지금까지 모르는 게 등신이지.” 
 
하긴, 한수영은 지난 번에 내가 유중혁에게 빙의하는 것을 봤을 테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 잠깐 부탁한다.” 
“얼마 줄 건데?” 
“뭘 매번 코인을 받냐? 한 번 정도는 봉사도 좀 해.” 
“······그럼 빨리 와. 나 혼자 감당 안 되는 놈들 나오면 답 없으니까.” 
“뭔 일 있으면 그냥 깨워.”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를 발동합니다!] 
 
곧이어 ‘3인칭 시점’이 발동하며 새카만 심상 위에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몇 개의 목소리를 제쳐놓고, 제일 넓은 경관이 펼쳐진 화면을 택했다. 
 
 
* 
 
 
진동은 <낙원>의 중심에서 시작되었다. 지반 전체를 뒤흔드는 강렬한 충격파에 노점상들이 일제히 뒤집혔고, 대로를 걷던 화신들은 놀라 자리에 주저앉았다. 
 
“으아아, 뭐야!” 
“괴수들인가?” 
 
모두가 한 마디씩 해보았지만, 상황을 확실히 파악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너무 오랫동안 평화를 누려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만을 가정해왔던 그들의 대뇌피질은, 이제 가장 안전한 미래만을 상상할 수 있게끔 세뇌되었다. 
 
“경비대들이 해결할 거야. 다들 걱정말라고.” 
“조금만 참아!” 
 
폭음의 중심지에서, 유중혁은 <낙원>의 화신들을 보았다. 
그가 아는 얼굴도 있고,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1회차에서 유중혁은 이들을 구하려다 배신당했고, 2회차에서 유중혁은 자신의 손으로 이곳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3회차······. 
폭연을 걷고 나타난 유중혁을 붙들며 몇몇 사람들이 물었다. 
 
“뭡니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방금 전까지 과일을 팔거나 농작물을 수확하던 사람들이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유중혁도 그들을 마주보았다. 
 
시나리오가 아닌 것도, 분명 이야기였다. 
 
유중혁도 알고 있었다. 
잘 알았기에 처음 <낙원>을 보았을 때 그는 라인하이트의 뜻에 동조했고, 함께 이곳을 지켰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물론 그 모든 일은 허사였다. 
<낙원>은 시나리오와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시나리오가 화신들을 착취하며 유지되듯, <낙원>도 화신들을 비료로 지탱되는 곳일 뿐. 
몇 번이고 같은 장소의 멸망을 겪으며, 유중혁이 깨달은 것은 한 가지였다. 
거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작은 이야기들을 잡아먹는다. 
오직 그것만이 이야기의 법칙이고, <스타 스트림>의 섭리다. 
유중혁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낙원은 곧 멸망할 것이다.” 
“예?”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걸 찾아라. 그리고 그걸 지켜라.” 
 
그아아아아아! 
 
유중혁과 일행이 빠져 나온 통로로 폭주한 괴물들이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갈퀴와 발톱이 지하를 헤집고 나오는 것을 보며 화신들이 비명을 질렀다. 
뒤늦게 달려온 경비대들이 화신들을 보호하며 나섰지만, 기하급수적으로 쏟아지는 괴수들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저, 저것들이 왜?” 
“성주님! 성주님은 어디 계신가!” 
 
거대 괴수들의 발길질 한 번에 다수의 경비대들은 나가떨어졌다. 
그나마 경비대장은 제법 선전하는 듯했지만, 간신히 살아 도망치는 게 고작이었다. 
유중혁은 다가오는 괴수들의 팔다리를 잘라내며 주변을 살폈다. 
곳곳에서 응전 중인 정희원과 이현성이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여기까지 살아남은 게 신기하군.” 
 
자신들이 죽을지도 모르는 판에, 이름도 모를 다른 사람들부터 챙기다니. 
보나마나 김독자의 영향이겠지. 
저런 심성으로 여기까지 온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다. 
 
“아뇨, 저런 사람들이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예요.”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유상아를 향해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 때문에 괜한 시간을 낭비했다.” 
“······마지막으로 <올림포스>와 연락이 닿았을 때는 독자 씨가 이곳에 있다고 들었어요.” 
“정보가 잘못 되었거나, 누군가의 농간이었겠군.” 
 
아니면, 김독자가 모종의 수로 정보를 조작했거나. 
어느 쪽이든 유중혁의 입장에서 마음에 드는 상황은 아니었다. 
본래 <낙원> 공략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니까. 
사실 지금의 <낙원>은, 공략에 제일 부적합한 상태였다. 
 
쿠구구구구! 
 
바닥을 뚫고 올라온 [영구기관]의 줄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저것이 바로 악마 후작 라인하이트의 [설화]. 
영혼을 파먹고 유지되는 <낙원>, 영구기관(永久機關)의 진체였다. 
 
줄기를 타고 올라온 괴수들이 지상으로 풀려났다. 오랫동안 지하에서 굶주리고 있던 학살자들은 먹잇감들을 발견하자 포효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5급 악마종인 [어둠 추적자]부터 4급 악마 괴수종인 [루벨 타이거], 심지어 이름을 알 수 없는 3급 악마종도 보였다. 
 
“끄아아아악!” 
 
그 끔찍한 카니발 속에서 화신들은 성주를 찾았다. 오직 그만이 이 비극에서 그들을 구해줄 수 있는 구원이라 믿는 것처럼. 
 
“성주님!” 
 
식물의 줄기가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촉수처럼 뻗어 나간 덩굴들이 흐느적거리더니 일제히 비산했다. 날카로운 덩굴의 끝은, <낙원>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괴수들을 꿰뚫었다. 
 
푸슛! 푸슈슛! 
 
크오오오오! 
 
화신들은 환호했다. 
그들이 알기로, <낙원>에서 이만한 힘을 가진 존재는 오직 하나 뿐이었다. 
 
“성주님이시다!” 
“성주님!” 
 
[모두 안심하십시오.] 
 
라인하이트의 목소리를 들으며, 화신들은 마음을 다잡았다. 
우리들의 <낙원>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다들 그렇게 믿는 듯했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경비대장이 무언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성주님······?” 
 
줄기의 끄트머리에 봉오리처럼 돋아난 익숙한 얼굴. 
 
“으, 으아아아아!” 
 
질겁한 경비대장이 바닥에 주저 앉았다. 
 
“괴, 괴물! 괴물이다!” 
 
오래토록 충성을 맹세해왔던 경비대장은, 거대한 식물과 하나가 된 라인하이트를 본 순간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자신의 진체를 드러낸 악마종의 모습은, 그만큼이나 끔찍했다. 
 
[아, 하인델입니까?] 
 
성주의 진짜 모습을 확인한 경비대장은, 이성을 잃고 그저 공포에 떨었다. 기파를 발산하는 라인하이트의 힘은 그만큼이나 대단했다. 
모두 라인하이트의 전설급 설화인 [절망의 낙원] 덕분이었다. 
 
[마침 잘 됐군요. 회복할 양분이 필요하던 참이라.] 
 
푸슉! 푸슈슉! 
 
날아든 덩굴들이 경비대를 비롯한 <낙원>의 주민들을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파이크처럼 화신들에게 꽂힌 줄기가 소소한 이야기들을 빨아들였고, 메말라버린 주민들은 그대로 미라가 되어 죽거나, 악마종으로 화했다. 
 
“그만둬!” 
 
화르르륵! 
 
불타오르는 [지옥염화]의 불길이 몇 개의 줄기들을 불태웠다. 
그러나 줄기의 개수는 끝이 없었다. 
정희원이 외쳤다. 
 
“여긴 당신이 지켜야 할 곳이잖아! 대체 무슨 짓이야!” 
 
[당신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죠.] 
 
라인하이트가 조소했다. 
그는 줄기의 가장 높은 곳에 상반신만을 내놓은 채로 <낙원>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낙원>은 끝났습니다.] 
 
거대한 영구기관 앞에 공포에 떠는 화신들의 모습.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성주를 경외하던 주민들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래서 작은 이야기를 살아가는 존재들은 어쩔 수 없는 겁니다. 평생을 작은 나무에 의지하며 살아왔으니, 그것이 실은 숲이란 것도 알지 못했겠죠.] 
 
하나 둘, 화신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세계의 정체를 깨닫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실은 알고 있었지만 줄곧 외면해 온 진실. 
 
[그러니 모든 걸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 위로 쏘아진 라인하이트의 줄기가 거대한 우산처럼 <낙원> 전체를 덮기 시작했다. 마치, 그대로 낙원 전체를 흡수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 아득한 스케일에 정희원은 완전히 질려버렸다. 
 
저런 걸 해치울 수 있을까? 
인간이, 저런 것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줄기의 한쪽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 것은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허공을 덮던 줄기 가닥들이 터져 나갔다. 마치 <낙원>의 지붕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듯한 모양새였다. 
 
[대단하군요. 당신은······.] 
 
라인하이트는 진심으로 감탄한 목소리였다. 
구멍이 뚫린 자리 아래에서 오연한 존재감을 풍기는 사내. 
말할 필요도 없이, 유중혁이었다. 
 
[······인간을 넘어섰군요.] 
 
인간을 넘어섰다. 
평범한 수사처럼 들리는 그 말은, 라인하이트쯤 되는 존재에겐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는 표현이었다. 
 
[겨우 아홉 번째 시나리오에서 그런 경지에 도달한 겁니까? 김독자라는 자도 대단했지만······ 당신이야 말로 진짜 괴물이군요.] 
 
유중혁의 전신에서 강대한 존재의 파장. 
눈을 감은 유중혁은, 그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염왕의 장갑]에서 근력 레벨 2를 확보하고.’ 
‘[극령의 내피]에서 근력 레벨 1을.’ 
‘[천총운검]에서 근력 레벨 4를.’ 
‘스킬 버프를 통해 근력 레벨 3을 추가로 확보한다.’ 
 
근력 레벨이 100을 돌파하자, 유중혁의 전신에서 고고한 기세가 풍겨 나왔다. 
그는 스승 ‘파천검성’의 말을 떠올렸다. 
 
―초월의 첫 번째 과정은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화신들은 대부분, 자신의 노력만으로 강해지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좋은 배후성을 얻으려 노력하고, 더 강력한 성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우주는 넓고, 때문에 그런 비겁함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좋은 배후성을 얻지 못했거나, 배후성이 없어도. 그 어떤 절대적 존재의 조력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으로 온전한 ‘하나’가 되기를 꿈꾸는 자들. 
 
―두 번째 과정은, 모든 스킬을 한계치까지 수련하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스킬들은 결국 누군가가 남긴 ‘성흔’들이 보편화된 것. 그 모든 스킬들을 한계치까지 수련해라. 마치 사다리를 오르듯 시스템의 한계를 궁구하고 또 탐구해라. 
 
성좌들이 설화를 먹어 치우고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 강해졌다면, 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단련해 하나의 ‘설화’로 만들어냈다. 
 
―마지막 과정은, 올라간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이다.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잊어라. 스킬을 잊고, 레벨을 잊고, 이야기를 잊어라. 결국 시스템이 제시하는 길은 수많은 존재들이 ‘보편’으로 택한 길. 중요한 것은 너만의 ‘이야기’를 찾는 것이다. 
 
수련하고, 수련하고, 또 수련하고. 
극한의 수련 끝에 스킬의 한계를 넘어선 이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시나리오를 통틀어 성좌에 비견될 수 있는 필멸자의 정점. 
자신의 종을 아득히 뛰어넘는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자들이, 필생의 노력을 통해 이룩할 수 있는 경지. 
그 숭고한 노력을 경외하는 뜻에서, <스타 스트림>은 그들이 성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좌(座)의 이름을 허했다. 
 
―그것이, 초월좌(超越座)에 입문할 최소한의 조건이다. 
 
유중혁은 이미 지난 회차에 초월좌에 오른 적이 있다. 
이미 한 번 도달한 경지였기에, 다시 한 번 오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오직 육체적 조건과 시간뿐. 
유중혁의 [천총운검]에 고결한 황금 빛 아우라가 맺혔다. 
분명 스킬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스킬의 사용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시스템’을 이용한 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로지, 회귀자 유중혁이 혼자서 쌓아 올린 힘. 
 
“라인하이트, 지난 회차에서는 너를 거뒀었지.” 
 
나무의 규모를 지나 이미 거대한 숲이 된 [영구기관]을 향해, 유중혁이 두 자루의 검을 뽑아 들었다. 
 
“이번에는 너를 죽일 것이다.” 
 
 
 
 
 
< Episode 32. 김독자의 사랑 (5) > 끝

< Episode 32. 김독자의 사랑 (6) >
 
 
 
 
 
쿠구구구구! 
 
단지 하나의 궤적을 그었을 뿐인데, 전투기가 지나가는 듯 공기가 파열되는 소리가 났다. 황금빛이 넘실대는 강기가 스친 자리는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치지지지지직! 
 
균열에 뒤얽힌 괴수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찢어졌다. 
4급이고 5급이고 할 것 없이 날려버리는 황금빛 궤적. 
 
파천검도(破天劍道). 
 
이것이 바로, 하늘을 부수는 검의 길. 
 
단지 하나만 풀어놔도 10분 안에 일대를 멸망으로 몰아갈 수 있는 3급 괴수들마저, 그의 검격을 견디지 못해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이 검술을 연습했는지는 유중혁 자신도 알지 못했다. 
십 년? 이십 년? 
아마 암흑 차원의 시간 단층을 이용해 수련했던 것까지 합친다면, 족히 백 년은 넘을 것이다. 그만한 세월을 이루었기에, 유중혁은 인간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직은 육체 등급이 낮아서 간신히 초입이 한계지만.’ 
 
유중혁은 과부하가 걸려오는 육체를 조절하며 끊임없이 검격을 휘둘렀다. 아무리 그가 강하다고 해도 ‘초월좌’의 힘은 오래 지속 할 수 없었다. 아직 그의 격은 그의 스승인 파천검성에 비하면 많이 모자란 수준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그의 공격은 일반적인 ‘스킬’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허공에 터지는 스파크에 괴수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가자, 라인하이트마저 경탄을 금치 못했다. 
 
[초월좌의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군. 하지만 어떻게 귀환자도 아닌 인간이······?] 
 
라인하이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유중혁의 [진천패도]에서 솟아난 10미터가 넘는 에테르 블레이드에, 방금 전까지 그가 있었던 자리가 통째로 찢겨 나간 것이다. 
그야말로 가공할 파괴력. 
초월에 이른 [파천강기]의 힘이었다. 
 
“조심해요! 사람들이 휘말린다고요!” 
 
유상아가 외쳤지만, 유중혁에게 별달리 뾰족한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가 잘하는 것은 뭔가를 부수는 것이지, 뭔가를 구하는 쪽은 아니었다. 
 
“전설급 설화의 주인이다. 쉽게 해치울 수 없어. <낙원>에 있는 한 놈의 힘은 2급 괴수종 이상이다.” 
 
실제로 라인하이트의 영구기관은 상하긴 했어도 물러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화가 난 듯, 줄기들은 더욱더 가열차게 주변의 인간들을 빨아들였다. 
 
“으아아아악!” 
 
인간들을 구출하는 속도보다 영구기관이 자라나는 속도가 더 빨랐다. 
게다가 괴수들의 숫자도 아직 많았다. 
[헤르메스의 산책법]과 [테세우스의 결의]를 사용하여 주변의 괴수들을 하나둘 격살하던 유상아가 입을 열었다. 
 
“······끝이 없어요. 대체 이런 괴수들을 왜 숨기고 있었던 걸까요?” 
“이 괴수들은 <낙원>의 수출품이다.” 
“수출품이요?” 
 
유중혁은 아주 짧은 순간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결코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던 도깨비들이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난 것처럼 모여 있었다. 
 
[허······ 이거 곤란한데.] 
[새 농장을 구해야 하게 생겼군요.] 
 
그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유상아는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넘실대는 괴수들의 파도 속에서 지난 시나리오를 거치며 익숙해진 괴수들의 모습이 보인다. 
9급 지하종 땅강아쥐, 8급 지하종 그롤······. 
 
“시나리오에 사용되는 괴수들. 모두 어디서 온 것들인지 궁금했던 적 없나?” 
“다른 세계에서 온······.” 
“그런 식으로 잡아 오는 것은 한계가 있어. 도깨비들은 바쁘고, 그런 비효율적인 일을 일일이 수행할 만큼 시간이 남아돌지도 않지.” 
 
유상아는 멍한 시선으로 유중혁을, 도깨비들을, 그리고 <낙원>의 괴수들을 보았다. 얼어붙은 그녀보다 먼저 반응한 것은 곁에서 [지옥염화]를 퍼부어대던 정희원이었다. 
 
“지금 그 말······.”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낙원>은 <스타 스트림>의 괴수 공급지다. 정확히 말하면 그중의 하나지.” 
 
정희원의 머릿속에서, 지금껏 이해 되지 않던 몇 가지가 강제로 끼워 맞춰졌다. [암흑성 2층]. 모든 시나리오에 개입하던 도깨비가, 처음으로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는 땅. 생각해 보면, 그런 곳이 있을 턱이 없었다. 
 
[도깨비들이여! <낙원>은 새로 만들 수 있습니다!] 
 
멀리서, 재생된 라인하이트의 상반신이 영구기관 위로 자라나 있었다. 
 
[이번 일로 물량 소진이 제법 있기는 하겠지만, 복구는 금방 이루어질 것입니다! 부디 계약을 취소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 간절함에 담긴 절망은, 이 자리의 누구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화신들을 지키기 위해, 그 화신들을 공물로 바쳐야만 하는 세계. 
라인하이트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그 신념조차 바치는 괴물이 되었다. 
뒤늦게 허공에 떠 있는 도깨비들을 발견한 화신들이 소리쳤다. 
 
“도깨비! 도깨비다!” 
“으으, 시나리오가 시작되고 만 건가······.” 
“어째서! 어째서 이런 짓을! 우린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도깨비들은 그저 이죽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잘못이라면 했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잘못.] 
[딱히 우리가 의도한 상황은 아니지만요. 하하핫!] 
 
그 광경을 보며, 정희원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해치울 방법 없어요?” 
 
물론, 방법은 있다. 
여기서 [거신화]까지 발동한 후 초월좌의 힘을 발휘한다면, 그는 힘의 크기만으로 라인하이트를 찍어 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소모가 너무 크다. 그리고 <낙원> 전체가 통째로 날아가 버리겠지.’ 
 
회귀자 유중혁은 그런 비효율적인 싸움은 선호하지 않았다. 
 
“저놈을 죽이려면 영구기관의 뿌리를 없애야 한다.” 
 
영구기관의 핵심 동력원은 뿌리. 
그러니 뿌리만 없앤다면 영구기관은 전체를 상대하지 않고도 제압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뿌리’에 괴수들의 본진이 있다는 것. 그리고 라인하이트조차 통제할 수 없는 강대한 괴수들이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랭킹 6위인 빙하의 악마 세피로츠만 거두었더라도······.’ 
 
계획대로 세피로츠를 동료로 삼았다면, <낙원> 공략은 지금보다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세피로츠를 데리러 갔을 때, 세피로츠는 이미 죽어 있었다. 
 
‘나만큼 빨리 랭커를 사냥하는 녀석이 있단 이야기겠지.’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김독자였지만, 꼭 김독자라는 보장도 없었다. 
이번 회차에는 변수가 너무 많아졌으니까. 
 
“하지만 지하엔 들어갈 수가 없는데, 어떡하죠?” 
“들어가지 않는다. 이미 역할은 맡겨 놨어.” 
 
정희원의 눈동자가 동시에 커졌다. 
 
“당신, 설마······!” 
 
지금 이곳에 없는 일행이 누구인지, 그녀는 바로 눈치챘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유중혁이 말했다. 
 
“김독자는 너흴 아무 생각 없이 남겨둔 게 아니야.” 
 
아마도, 그것은 그가 회귀자이기에 가능한 추리였다. 언제나 김독자에게 일방적으로 읽혀온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그 역시 김독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씩 웃습니다.] 
 
허공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감지한 유중혁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 
 
 
어두운 공동을 몰려 다니는 괴수들의 틈바구니에서, 신유승과 이길영은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괴수들의 밀집도가 지나치게 높았던 까닭에, 체구가 작은 아이들은 오히려 발견되지 않았다. 
 
크와아아아아! 
 
위기의 순간, 8급 괴수종인 [거대 병정 말벌] 몇 마리를 길들인 것도 도움이 되었다. 말벌들은 신유승과 이길영의 곁에서 혼란한 춤을 추며 괴수들의 시선을 이지러트렸다. 
하지만 [말벌의 춤]으로 인식을 흩트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두 아이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떡할까?’ 
‘나도 몰라.’ 
 
비스트 마스터 신유승과, 인섹트 마스터 이길영. 
그 둘은 현재 서울에서 가장 강력한 테이머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이 모든 괴수들을 전부 길들일 수는 없었다. 
그런 짓을 했다간 뇌가 터져 죽어버릴 것이다. 실제로 그들이 가능한 [길들이기]의 수준은 4급이 한계였다. 무리를 한다면 3급도 가능하겠지만, 아마 잠시 뿐일 것이다. 
 
‘······이대로 죽는 거야?’ 
 
보다 강력한 괴수들이 주변의 괴수들을 짓밟으며, 일대의 생태는 조금씩 진정되고 있었다. 
침을 흘리며 서성이는 [데빌 울프]와, 거대한 송곳니를 드러낸 [어둠 거스러미]들이 쉬익거리는 숨을 내며 주변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겁 먹은 말벌들이 더욱 더 열심히 춤을 췄지만, 이제 들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게다가 괴수들 말고도, 위협은 또 있었다. 
 
푸슈슈슛! 
 
괴물들의 틈바구니는 뚫고 날아든 [영구기관]의 줄기가, 두 아이의 기척을 노리며 쇄도했다. 
아차, 하는 순간 이길영이 신유승을 안았고, 줄기는 그대로 두 아이를 관통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어디선가 쏘아진 강력한 기파에 줄기의 움직임이 멎었다. 줄기는 당황하는 듯 하더니, 결국 방향을 돌려 아이들을 외면했다. 신유승은 줄기를 멈춘 기파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건 대체······.’ 
 
[말벌의 춤]을 꿰뚫고, 정확히 이쪽을 보고 있는 괴수가 있었다. 
처음, 신유승은 ‘그것’이 괴수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짐작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했기 때문이다. 
그것의 몸체는 공동의 정확히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었다. 샛노란 눈이 어둠 속에서 깜빡이자, 신유승은 등골의 모든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저건 ‘괴수’가 아니야. 
 
그렇게 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모든 괴수들이 그 존재 앞에 압도되어 있었다. 
일대의 모든 소음이 잠잠해졌다. 
이지가 없는 녀석들조차, 괴물의 존재감 앞에 경외라도 바치듯 몸을 숙이고 있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존재감을 가진 녀석이 흥미로운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너희들은, 대체 뭐냐. 
 
마치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신유승은 그 질문에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돌아보니 이길영도 자신과 비슷한 상태였다. 
신유승이 먼저 용기를 냈다. 
 
“······야.” 
 
그 한 마디에, 이길영이 질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무리야. 저건 절대로 안 된다고.” 
 
[다종 교감]을 극한까지 올린 그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의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이대로면 죽어.”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난 신유승이, 비틀거리며 괴물을 향해 다가갔다. 부복해 있던 괴수들이 거칠게 으르렁거렸지만 아이는 개의치 않았다. 그 순간 신유승은 자신의 쓸모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아저씨가 날 이곳에 남긴 거야.’ 
 
자신만이, 이것을 해낼 수 있다. 
 
“젠장.” 
 
욕설을 내뱉은 이길영도 후들거리는 다리로 뒤를 따라왔다. 
바로 앞까지 다가가자, 괴물의 존재감은 아까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마치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오연한 괴물의 시선 앞에, 신유승은 발가벗겨지는 기분이었다. 
 
[전용 스킬, ‘상급 다종 교감 Lv.5’를 발동합니다!] 
 
투명하게 솟은 아우라가 이내 괴물을 향해 쏘아졌다. 
다종 교감. 서로 다른 종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스킬. 
아우라의 끄트머리가 괴물과 접촉하는 순간, 신유승은 미쳐버릴 것 같은 기억의 범람을 느꼈다. 

‘아, 아아······.’ 
 
괴수의 태생이, 끔찍한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이 비참한 <낙원>의 지하에 떨어져, 다른 괴수들을 잡아먹으며 자라온 존재. 먹고, 먹히고, 절망하고, 
절규하고. 차마 인간의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지옥도를 걸어온 괴물. 
 
츠츠츠츠츠츠츠! 
 
과도한 혈액의 흐름을 감당하지 못한 혈관이 터지듯, 신유승의 코와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피눈물이 맺힌 시야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달려든 이길영이 신유승을 제어하려 안간힘을 썼으나,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흐르고 있었다. 
결국, 이길영도 [다종 교감]을 발동했다. 
늘 투닥거리며 싸워왔던 두 아이가, 이 순간만큼은 손을 잡았다. 이길영의 힘이 깃들자, 이해의 통로는 한층 넓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벅찬 상대였다. 
곧 이길영의 코에서도 피가 쏟아졌다. 
 
“으······ 으아아아아!” 
 
낯선 괴수의 고통을 이해하며, 신유승은 처음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까드드드드득! 
 
마치 그릇이 깨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신유승과 이길영의 정신이 조금씩 붕괴하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자아를, 격이 맞지 않는 상대를 길들이려 한 대가였다. 
그때, 신유승은 자신의 뒤쪽에서 어떤 시선을 느꼈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괴물의 격에 전혀 밀리지 않는 어떤 존재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 Episode 32. 김독자의 사랑 (6) > 끝

< Episode 32. 김독자의 사랑 (7) >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 
그게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 신유승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저씨.’ 
 
단지 시선 뿐이었지만, 사실 많은 인간은 중요한 순간 그 한 사람의 ‘시선’이 없어서 죽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신유승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그 시선을 받으며, 신유승은 다시 발을 내딛었다. 
할 수 있다. 
다리는 마비되었고, 입술은 말을 듣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런 확신이 들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이윽고 아이의 작은 손이 괴물의 외피에 닿았다. 외피에 나 있는 아주 작은 상처들. 깜짝 놀란 괴물이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신유승은 이 괴물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오히려 시선을 피한 것은 괴물 쪽이었다. 
 
“날 똑바로 봐.” 
 
자세히 보니, 상처는 하나가 아니었다. 
외피를 덮은 무수한 상처들이, 괴수의 전신을 덮고 있었다. 
 
그르르르르······. 
 
괴물이, 작게 울었다. 
 
아마 지금껏 누구도 보아주지 않은 상처였다. 오랜 세월에 거쳐 만들어진 상처들. 이 상처들이야 말로, 이 괴물의 존재 그 자체였다. 이 상처로 인해 괴물은 강해졌고, 이 상처로 인해 괴물은 외로워졌다. 
마치 그 고통을 생생하게 느끼는 것처럼, 신유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처받았다고 해서, 괴물이 되면 안 돼.” 
 
신유승은 괴물의 상처를 천천히 매만졌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들여도 치유 받을 수 없는 상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기적이란 있다. 
마치 김독자가, 41회차의 신유승을 구했던 것처럼. 
 
치유받을 수 없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는 있다. 
 
신유승은 괴물의 전신을 내리 누르는 [영구기관]의 뿌리를 보았다. 
아마도, 이 괴물은 평생을 이곳에 묶여 지냈으리라. 
품속을 뒤진 신유승의 손에 금빛 열매가 쥐어져 있었다. 
 
[고대 야수의 열매.] 
 
언젠가 김독자에게 받은 [랜덤 박스]에서 나온 SSS급 아이템. 
[길들이기]가 불가능한 상급종 괴수를 길들일 때 사용할 수 있는 소모성 아이템이 바로 그것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괴물을 향해, 신유승이 말했다. 

“같이 나가자.” 
 
 
* 
 
 
마치 <낙원> 전체가 움지럭대는 듯한 지진파에, 당황한 라인하이트가 소리쳤다. 
 
[큭, 크헉, 이, 이게 무슨······!] 
 
갑작스레 붕괴하는 [영구기관]. 식물의 가지와 잎이 조금씩 시들기 시작했다. 공급되던 에너지가 애먼 곳으로 빠져 나가고 있었다. 
뭔가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말라 비틀어진 줄기가 허공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크어어어억! 어, 어째서? 어째서 네가······!] 
 
라인하이트가 진액을 토했다. 
마치 피를 토하는 듯 꿀렁대며 쏟아지는 진액. 
 
콰지지직! 콰지지직! 
 
무언가가, [영구기관]의 밑동을 파먹고 있었다. 
단단한 뿌리를 파고드는 그 섬뜩한 이빨에, 라인하이트는 본인의 신체가 뜯기기라도 하는 듯 비명을 질러댔다. 오래도록 <낙원>의 뿌리에 묶여 있던 존재가, 이제 그 뿌리의 중추를 사정없이 파괴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이윽고 힘을 잃은 [영구기관]이, 허공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안 된다······!] 
 
폭발한 지하에서 거대한 뭔가가 솟구쳤다. 
아직 세상에 나온 적이 없었기에 등급조차 없는 존재. 
거대한 용의 몸체와 악마의 날개, 그리고 곤충의 겹눈을 가진 괴물. 
악마종과 충왕종, 그리고 괴수종의 교배로 진화한 궁극의 괴물이 허공을 찢고 날아오르고 있었다. 
<낙원>의 모든 존재가 그 기적을 보았고, 유중혁 또한 그 중의 하나였다. 
 
“······키메라 드래곤.” 
 
저것이야 말로, 이 <낙원>이 만들어 낸 진짜 괴물이었다. 
지금은 2급에 육박하는 힘이지만, 그 잠재력은 1급종을 넘어서는 괴수. 
밑바닥에서 출발했음에도 최강의 괴수종인 용족(龍族)마저 위협할 수 있는 괴물. 
그리고 그 괴물의 등 위에 코피를 질질 흘리는 신유승과 이길영이 타고 있었다. 
정희원이 기쁨에 들떠 외쳤다. 
 
“유승아! 길영아!” 
 
두 맹랑한 꼬마가, 결국 해낸 것이었다. 
 
크롸라라라라―! 
 
키메라 드래곤의 포효에 <낙원>의 모든 괴수들이 일제히 물러나고 있었다. 다시 지하로 들어가는 녀석들도 있었고, 놀라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지는 녀석들도 있었으며, 허겁지겁 흉벽을 넘어 탈출하는 놈들도 보였다. 
그 난장판 속에서, [영구기관]에서 분리된 라인하이트가 비틀거리며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유중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스가각! 

[파천검도]의 궤적이 움직였고, 힘이 다한 라인하이트는 그 검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꿰뚫렸다. 
 
“으······ 으으······ 크허헉······.” 
 
검은 피가 그의 입에서 쏟아졌다. 아무리 그가 강력한 악마라 해도, 심장이 꿰뚫린 상태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라인하이트는 서서히 무너졌고, 유중혁을 비롯한 일행들이 그를 향해 다가갔다. 
 
 낙원>의 주인이 죽어가며 말했다. 
 
“하, 하하······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위대한 격들의 작은 유희에 지나지 않는가······.” 
 
유중혁은 피를 쏟으며 중얼거리는 라인하이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영구기관]이 사라진 하늘을 보며, 라인하이트가 짧은 숨을 토했다. 
 
“믿지 않겠지만, 나는······ 그저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소.” 
 
그 말을 들은 몇몇 사람들이 고함을 질렀다. 모두, <낙원>의 보호를 받던 사람들이었다. 위선자라고 욕하는 자들도 있었고, 당장 라인하이트를 죽여야 한다며 소리치는 자들도 있었다. 
이제 <낙원>의 비밀을 알게 된 그들은, 더 이상 라인하이트를 비호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왜냐하면, 유중혁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인하이트의 눈시울에서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나는 정말로······.” 
“안다.” 
 
그 단답형의 말에, 라인하이트가 눈을 천천히 끔뻑였다. 
유중혁이 다시 한 번 말했다. 
 
“모두, 알고 있다.” 
 
알고 있다니. 자신이 살아온 그 삶이 이렇게나 쉽게 긍정되는 것을 보며, 라인하이트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상하군. 어째서······ 정말로 이해 받는 기분이 드는 것인지······.” 
 
유중혁은 말없이 그런 라인하이트를 내려다보았다. 
비록 이번 회차는 아니라 한들, 유중혁 또한 라인하이트의 뜻에 동조했던 적이 있었다. 함께 <낙원>을 키우고, <낙원>을 멸망시켰던 기억이,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그 감정에 보답하듯, 라인하이트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다음 층으로 갈 생각이겠지?” 
 
다음 층. 
그곳은, 이 [암흑성]의 마지막 시나리오가 있는 곳. 
 
“당신들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없을 거야. 이 성은, 그저 성좌들의 놀이터에 불과하니까. 그러니까 조심해. 다음 층엔······.” 
 
그 순간 츠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라인하이트의 육체가 폭발했다. 
유중혁이 고요히 허공을 노려보자, 도깨비들이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어허, 미리니름은 금지예요.] 
[맞아맞아. 그건 재미 없다고.]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성좌들의 메시지가 별빛처럼 쏟아졌다. 
 
[다수의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의 활약에 감탄합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의 판단에 동의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낙원>의 붕괴에 안타까움을 표합니다.] 
······. 
[다수의 성좌들이 1500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중혁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기쁨도 슬픔도 드러나지 않는 눈빛. 
 
[‘악마 후작 라인하이트’를 처치하였습니다!] 
[150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전설급 설화 ‘절망의 낙원’을 획득하였습니다.] 
[당신의 암흑성 랭킹이 조정됩니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를 획득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 # 10 ― ‘73번째 마왕’이 임시 개방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이보다 더 나을 수 없겠다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해결됐다. 
그의 계획대로는 아니었지만 암흑성의 랭킹도 올렸고, 코인도 모았으며, 다음 시나리오의 단서도 얻었다. 
그런데도······ 이 복잡한 기분은 대체 무엇인지, 유중혁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피묻은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으, 은인이시여!” 
“구원자님이시다!” 
 
누군가가 소리치는 말에 돌아보니,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몰려와 있었다. 
마치 메시아라도 받들 듯, 사람들은 그를 둘러싸고 무릎을 꿇거나,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들의 <낙원>을 파괴한 자신에게, 하염없이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그 말을 들으며, 유중혁은 다시 자신의 피묻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이 찝찝한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는 원래, 이 사람들을 구할 생각이 없었다. 
 
<낙원>의 사람들은 그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라인하이트가 그들을 <낙원>을 위한 제물로 여겼다면, 유중혁에게도 이 사람들은 시나리오를 클리어 하기 위한 제물일 뿐이었다. 
 
“고맙습니다.” 
 
돌림노래처럼 들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유중혁은 생각했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2회차부터? 
아니, 어쩌면 전조는 그전부터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시나리오를 끝내고, 세계를 구하겠다는 목표. 
 
그 거창한 일념하에, 그는 달리고 또 달려왔다. 
그리고 그 고독하고 지난한 주행 위에서, 그는 조금씩 마모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죽으면, 세계를 구하는 것도 의미는 없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의 죽음을 방관했다. 
대를 위한 당연한 소의 희생인 것처럼. 
라인하이트의 죽음을 본 후, 유중혁은 처음으로 자신의 목표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저,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물었다. 
<스타 스트림>에서 유명세는, 곧 설화의 강함과 직결된다. 
저 질문에 자신의 이름을 답함으로써, 그는 새로운 업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유중혁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유중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김독자다.” 
 
 
* 
 
 
“내 이름은 김독자다.” 
 
‘3인칭 시점’으로 일행들을 관찰하던 나는, 유중혁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름에 진저리쳤다. 
 
[당신의 다섯 번째 설화에 새로운 업적이 추가되었습니다.] 
[<낙원>의 주민들이 ‘낙원의 해방자 김독자’를 기억합니다.] 
[설화 ‘고독한 메시아’가 한층 더 풍부해집니다.] 
 
무슨 상황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김독자’의 이름을 연호하는 <낙원>의 사람들을 보며, 나는 패닉에 빠질 지경이었다. 
아니, 거기서 왜 갑자기 내 이름이 나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진정한 전우애에 눈물을 줄줄 흘립니다.] 
 
한동안 잠잠하던 우리엘 녀석도 흥분하여 날뛰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한 마디 쏘아 붙여 줬을텐데, 연회에 다녀온 이후 좀처럼 험한 말이 나오지가 않는다. 
아무튼, 유중혁 이 자식······ 정말 알다가도 모를 놈이다. 
그 에고이스트가 자기 업적을 남한테 나눠 줄 리가 없는데. 
 
혹시 이제 나랑 친구하고 싶어진 건가? 
그럴 리가. 
 
그러고 보니, 나와 한수영을 제외한 모든 일행들이 어느새 한 자리에 모였다. 아니, 공필두도 없긴 한데······ 젠장, 그 양반 또 어디 간 거지? 
 
“그래서, 대체 독자 아저씨는 왜 찾은 건데요?” 
 
처음에는 신유승과 이길영이 길들인 ‘키메라 드래곤’에 대한 이야기로 시끌벅적하던 일행들은, 어느새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건······.” 
 
유상아의 설명을 들은 일행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나도 놀랐다. 
유상아가 설마 모이라이의 예언을 훔쳐 들었을 줄이야. 
아마 이쪽도, 디오니소스처럼 나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저씨가 죽는다고요?” 
“사랑하는 사람한테?!” 
 
「화신 김독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다.」 
 
일행들은 크게 당혹스러운 얼굴들이었다. 정희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고, 신유승은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으며, 이현성은 뭔가를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이지혜였다. 
 
“근데 그 아저씨 죽어도 다시 살아나잖아. 괜찮은 거 아냐?” 
 
이지혜의 물음에, 유상아가 답했다. 
 
“그럼 다행인데, 그 부활이 몇 번이나 가능한 건지도 아직 모르고······.” 
“<올림포스>의 예언이니, 그렇게 쉽게 피해가긴 어렵지 않을까.” 
 
정희원의 말에 일행들의 얼굴이 다시 심각해졌다. 
내가 없는 곳에서 나를 이렇게나 걱정해주다니. 
정희원이 물었다. 
 
“그래서, 독자 씨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데요? 일단 그것부터 알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 Episode 32. 김독자의 사랑 (7) > 끝

< Episode 32. 김독자의 사랑 (8) >
 
 
 
 
 
다들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표정들이었다. 그때, 이지혜가 또 입을 열었다. 
 
“저······.” 
 
하필 저 이지혜가 먼저 손을 들다니. 
뭔가 불안했다. 
그런데······. 
 
“응, 지혜야. 뭔가 알아?” 
“아니, 역시 내가 아닐까 해서······.” 
 
······저건 또 뭔 개소리야. 
이지혜의 발언에 일행들은 맥이 풀린듯했다. 
정희원이 물었다. 
 
“뭐? 독자 씨가 너한테 뭔 짓 했어? 그 인간이 드디어 미성년자한테······.”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상식적으로 생각해 본 것 뿐이에요. 난 여고생이잖아요. 그러니까 날 안 좋아할 리가······.” 
 
일행들은 이지혜를 무시하고 논의를 계속했다. 
다시 의견을 낸 건 정희원이었다. 
 
“내 생각엔, 독자 씨가 좋아하는 건 유상아 씨인 것 같아요.” 
“네?” 
 
깜짝 놀란 유상아가 답했다. 
너무 놀라는 표정이라 나까지 상처를 받을 지경이다. 
 
“왜 저를······.” 
“음, 그게 그렇잖아요. 사실 유상아 씨 미모는······ 뭐, 말할 것도 없고.”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상아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정희원이 말을 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김독자 씨 구하려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고 있고······ 솔직히 내가 김독자 씨라도 유상아 씨 안 좋아하는 게 이상할 것 같은데요.” 
 
확실히, 그렇게 들으니 유상아 씨만한 사람도 없다. 
예뻐, 착해, 성격 좋아······. 
나무랄 데가 없다. 
 
“네? 그건······ 그냥 회사 동료인 것도 있고, 독자 씨한테 도움 받은 것도 있고 해서······.” 
 
곤란하다는 듯 뭔가를 생각하던 유상아는, 잠시 말끝을 흐리더니 갑자기 정희원을 향해 반격했다. 
 
“저는 오히려 희원 씨일 거라 생각했는데요.” 
“어······ 네? 저요?” 
“네, 제 생각에 독자 씨는 희원 씨를 좋아해요.” 
 
뜻밖의 역습에 당황한 정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현성도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나로서도 흥미로운 가설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게······ 희원 씨한테 독자 씨가 친절하신 것 같아서. 장비 같은 것도 유독 잘 챙겨주는 것 같고······ 희원 씨도 독자 씨랑 이야기 할 때 묘하게 잘 웃는 것 같고······.” 
 
확실히, 그런 게 없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정희원이랑 대화할 때 무척 마음이 편하니까. 
그리고 내가 발견한 ‘등장인물’이라는 점에서, 무척 마음이 쓰이기도 하고. 
당황한 정희원이 상기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네? 아니, 잠깐만요. 그건······.” 
 
일행들이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느낌이 안 좋다. 
가만 있던 이지혜가 갑자기 ‘김독자 쓰레기’라는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번에 끼어든 것은 이길영이었다. 
 
“그 ‘사랑’이 꼭 남녀간의 사랑을 말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럴 수도 있긴 하지······ 그럼, 길영이 네 생각은 어떤데?” 
“독자 형은 절 좋아해요.” 
“독자 씨가 왜?” 
“그건······.” 
 
그 질문에 이길영은 한참이나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민하더니, 이내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자길 좋아할만한 이유를 못 찾은 모양이었다. 이번에 발언한 것은 이현성이었다. 
 
“저, 흠흠. 혹시 ‘전우애’일 가능성은······.” 
 
그 말에, 몇몇 사람들이 동시에 유중혁 쪽을 쳐다보았다.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던 유중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뭘 쳐다보는 거지?” 
 
움찔 놀란 이지혜와 정희원이 마주보며 소곤거렸다. 
 
“······에이, 설마.” 
“그치? 아니겠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격렬하게 고개를 휘젓습니다!] 
 
그때, 조용히 일행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신유승이 손을 들었다. 
 
“저기······.” 
 
그 순간, 일행들은 암묵적으로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그들 중에서 내 마음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존재는, 어쩌면 나의 화신인 신유승일 것이란 사실을. 
 
“그, 그래! 유승아! 얼른 말해봐!” 
“뭔가 아는 게 있니?” 
 
신유승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일행들의 표정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아직 신유승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그냥 아저씨 본인한테 물어 보면 되지 않을까요.” 
“뭐? 독자 씨한테? 어떻게?” 
 
갑자기 서늘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신유승이 내 ‘시점’이 있는 곳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불길한 예감은 정확했다. 
내 사랑스런 화신이, 생긋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아까부터 아저씨, 우리 대화 전부 듣고 있는데요.” 
 
······젠장. 
 
 
*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다시.”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한 번 더.”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정말로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이나 사과를 반복한 후에야, 일행들은― 특히 정희원과 유상아는, 간신히 나를 용서해주려는 기색이었다. 
정희원이 말했다. 
 
“그래서······ 독자 씨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데요?” 
 
내가 답하려는 순간, 이현성이 말했다. 
 
“생각해 보니 이중에 없을 수도 있겠군요.” 
“엇, 그러고 보니 독자 씨, 그 여성 분이랑 단둘이 같이 떠났잖아요. 이름이······ 한수영이었나?” 
 
정희원도 한 마디를 보탰다. 
한수영이라는 말에 유상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그 여자분이랑 같이 계세요?” 
 
한수영을 좋아하지 않는 유상아는 크게 실망한 표정이었다. 
······이거 일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단호히 말해줄 필요가 있겠는데.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간접 메시지를 띄웠다.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순간, 일행들 사이에 알 수 없는 희비가 교차했다. 
누군가는 실망한 얼굴이었고, 누군가는 들뜬 얼굴이었다. 
아니, 다들 왜 남의 사랑에 그렇게 관심들이 많은 건지······. 
정희원이 말했다. 
 
“말은 정확히 해야죠. ‘지금은 없다’라는 거잖아요. 운명에 따르면 독자 씨는 반드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거고요.” 
 
뭐······ 틀린 소린 아니다. 
정희원이 계속해서 말했다. 
 
“아예 질문을 바꾸는 게 좋겠네요. 독자 씬 어떤 스타일 좋아해요? 혹시 우리 중에 가까운 사람은 없어요?” 
 
아니, 그걸 내가 왜 말해야 하는데. 
 
“왜 그런 걸 묻는지 의아해하겠지만, 우리한텐 중요해요. 만약 독자 씨가 우리 중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우리가 그 운명을 막을 수도 있을 테니까.” 
 
······설득력이 아주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운명의 실행력은 아주 강력하지만, 말했다시피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내가 누굴 사랑하게 될지 알 수만 있다면, 나는 운명을 거스를 수도 있는 것이다. 
일행들이 이렇게나 내 죽음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니, 내 이야긴데도 내가 미안해질 지경이다. 
하지만······.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결국 정희원이 짜증을 냈다. 
 
“아,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굴어요?” 
“아저씨, 점수 같은 거라도 괜찮으니까 매겨봐! 지금 뒈지게 생겼는데 예의 차릴 때야?”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자긴 그런 건 하기 싫다고 말합니다.] 
 
젠장, 이러다가 간접 메시지 띄우는데 코인 다 쓰게 생겼다.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자기도 자기 마음을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와, 김독자 씨 진짜······.”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새로운 이야기에 흥미를 가집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선택을 궁금해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이쪽을 흘끗 거립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답답함에 고구마를 토합니다.] 
 
심지어는, 성좌들까지 이들의 대화에 참전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마음을 속이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화신 ‘유상아’를 제외하고는 인물이 없음을 천명합니다.] 
[몇몇 성좌들이 화신 ‘신유승’을 지지합니다!] 
[친구의 친구를 사랑하는 어떤 성좌들이 화신 ‘이현성’을 지지합니다!] 
 
······개판이군.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좋은 생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공에서 아이템 하나가 내려왔다. 
 
+ 
 
<아이템 정보> 
 
이름 : 호감도 판독기 
등급 : SS 
설명 :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아이템이다. 사용 버튼을 누르고 상대방의 이름과 모습을 떠올리면, 자동으로 허공에 호감도가 출력된다. 
 
+ 
 
그 아이템을 보는 순간 나는 정신이 어질어질해졌다. 
[호감도 판독기]는 도깨비 보따리의 플래티넘 이상 회원만이 구입할 수 있는 사치품으로, 무려 10만코인이나 하는 아이템이었다. 
아니, 고작 이딴 여흥에 10만 코인을 때려부었다고? 
미친 거 아냐 진짜? 
 
“역시 대천사! 통이 크다니까!” 
 
정희원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어서 사용해보라며 재촉합니다.] 
 
“그럼 누구부터 할까요?” 
“희원 언니가 갖고 있으니, 희원 언니부터 해봐요.” 
“어, 음. 그럴까?” 
 
막상 사용할 타이밍이 되니 정희원도 살짝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긴장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내 마음을 알게 된다는 건데, 내가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걸까. 
······뭔가 발가벗겨 지는 기분이다. 
이게 뭐라고, 다들 손을 꼭 쥔 채 판독기에 집중하고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정말 이상해진다. 
그리고 잠시 후. 
삐비비빗, 하는 소리와 함께 메시지가 흘러 나왔다. 
 
[화신 ‘정희원’에 대한 성좌 ‘김독자’의 호감도 점수는 54점입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정희원은, 막상 점수가 나오자 허탈한 모습이었다. 
 
“54점? 이거 높은 건가?” 
“다음은 내가 해볼래요!” 
 
판독기를 빼앗아간 이지혜가 버튼을 누르며 장난스럽게 외쳤다. 
 
“김독자의 마음을 알려줘!” 
 
[화신 ‘이지혜’에 대한 성좌 ‘김독자’의 호감도 점수는 6점입니다.] 
 
“······.” 
 
할 말을 잃은 이지혜가 멍해진 사이, 일행들은 한 번씩 판독기를 사용했다. 이길영과 이현성, 그리고 신유승까지. 점수는 각각 49점, 50점, 56점으로 나왔다. 구석에서 이지혜가 또 “김독자 쓰레기”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면 신유승은 묘하게 들뜬 표정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유상아와 유중혁 뿐. 
 
“저, 중혁 씨 먼저······.” 
“그딴 소꿉 장난에 어울릴 생각 없다.” 
 
멀리서 괴수들의 시체를 뒤적이던 유중혁이 눈살을 찌푸리자, 차례는 자연히 유상아에게 돌아왔다. 
유상아가 판독기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판독기를 사용하기 직전.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화신 ‘유상아’에게 특별한 아이템을 선물하였습니다.] 
 
허공에서 천 같은 것이 나풀거리며 내려오더니, 작은 빛과 함께 유상아가 입고 있던 옷이 바뀌었다. 옆이 트인 검정색 차이나 드레스에, 검정색 가터벨트. 
갑작스런 복색 변화에 유상아가 말을 더듬었다. 
 
“이, 이, 이게 대체······.” 
 
나는 유상아를 필사적으로 흘끔거리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아니, 이 빌어먹을 올림포스 할머니가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정희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성좌들 이벤트인가?” 
“상아 누나, 얼른 해봐요.” 
 
그리고 유상아가 버튼을 눌렀다. 
 
[화신 ‘유상아’에 대한 성좌 ‘김독자’의 호감도 점수는 481점입니다.] 

“4, 481점? 미친 거 아니에요? 이거 그냥 확정이잖아?” 
“독자 씨가 좋아하는 건 역시······.” 
 
얼굴이 새빨개진 유상아가 뭐라고 말을 더듬거리려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이지혜가 입을 열었다. 
 
“아니 잠깐만, 이거······ 상아 언니. 저 그 옷 한 번만 빌려주면 안 돼요?” 
“어, 으, 응.” 
 
근처의 건물에 들어가 잽싸게 옷을 갈아입고 온 이지혜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판독기의 버튼을 눌렀다. 
 
[화신 ‘이지혜’에 대한 성좌 ‘김독자’의 호감도 점수는 481점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말을 잃었다. 
내가 아득한 수치심 속에서 아무 말도 못하는 사이, 이지혜가 허공을 향해 비릿한 조소를 퍼부었고, 정희원은 배를 잡고 부들부들 떨었으며, 유상아가 텅 빈 동공으로 중얼거렸다. 
 
“가장 사랑하는 건 사람이 아니었네요······.” 
 
이길영과 이현성도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제기랄, 이래서 내가 이런 거 안 하고 싶었는데······. 
신유승은 어깨를 부르르 떨며 내쪽을 보고 있었다. 
차마 화신을 볼 면목이 없어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는데, 신유승이 먼저 말했다. 
 
“아, 아저씨!” 
 
그래, 미안하다 유승아. 내가······. 
 
“아저씨! 왜 그래요? 아저씨!” 
 
얼굴이 창백해진 신유승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뭔가가 이상했다. 
 
······어? 
 
놀란 신유승의 목소리가 멀어졌고, 갑자기 토할 것 같은 현기증과 함께 시야가 빙글빙글 회전했다. 
잠깐만. 이거, 설마······. 
그리고 다음 순간, 메시지와 함께 의식이 끊어졌다. 
 
[당신은 사망했습니다.]
 
 
 
 
 
< Episode 32. 김독자의 사랑 (8) > 끝

< Episode 33. 다시 읽기 (1) >
 
 
 
 
 
Episode 33. 다시 읽기 
 
 
 
 
처음으로 소설을 읽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손가락 끝에 닿는 부드러운 종이의 질감. 
드넓은 백색의 대지에 꽃핀 까만 활자. 
내 손으로 접어 넘기던 페이지의 감촉. 
 
「활자를 읽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활자의 행간에 있단다.」 
 
책을 좋아했던 어머니는 가끔 그런 말을 하곤 했는데, 적어도 어린 내게 그것은 비유가 아니었다. 
 
활자와 활자가 만든 빈틈. 
그 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나만의 작은 설원(雪原). 
 
누군가가 들어가 몸을 누이기엔 터무니없이 좁다랗던 그 공간은, 숨기 좋아하는 어린 나에겐 꼭 맞는 장소였다. 
 
샤라락, 샤라락. 
 
기분 좋은 소리가 들릴 때마다 활자들은 눈처럼 쌓였다. 
그 안에서 나는 주인공이 되어 모험을 하고, 사랑을 하고, 꿈을 꿨다. 
그렇게 읽고, 읽고, 또 읽고.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이야기가 끝나고, 처음으로 책을 덮었던 순간. 
 
마치 세계로부터 박탈당한 듯한 그 기분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주인공과 조연들이 ‘그 후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의 문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홀로 이야기의 마침표 뒤에 남겨진 기분. 허무함과 배신감 속에서, 어린 나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몸부림쳤다. 
 
「이게······ ‘끝’인 거예요?」 
 
아마도 그것은 죽음을 학습하는 것과 비슷했을 것이다. 
처음으로, 뭔가가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는 일. 
어머니는 말했다. 
 
「그게 ‘끝’이란다.」 
「이 다음은 없는 거예요?」 
「그 다음은 없어.」 
 
잔혹한 삶의 진실을 말하듯, 어머니는 냉정했다. 
 
「하지만, 네가 ‘끝’을 보았다고 해서 그 이야기를 전부 본 것은 아니란다.」 
 
그리고 현명했다. 
 
「네?」 
「다시 읽어보렴.」 
 
끝난 이야기를 다시 읽는 것. 
어렸던 나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인지 알지 못했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를 왜 다시 읽어요?」 
「다시 읽으면 분명 다른 이야기가 될 거야.」 
「······싫어요.」 
 
또다시 그 박탈감을 느끼는 게 두려웠던 나는 고집을 피웠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했다. 
 
「그럼 같이 읽어 볼까?」 
 
그렇게 나는 ‘다시 읽기’를 배웠다. 
처음에는 주인공의 입장만 보였던 것이, 두 번째 읽을 때는 조연의 입장이 보였고, 세 번째 읽을 때는 적의 입장이 보였다. 
읽을 때마다 달라지는 이야기. 
이야기는 끝났으되 끝난 게 아니었다. 
독자가 그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종종 생각한다. 
 
그때 어머니가, 다른 말을 해주었다면 어땠을까. 
소설 같은 건 전부 가짜고, 그런 걸 읽어봤자 인생의 손해일 뿐이라고. 
그랬더라면, 나는 많은 친구가 생겼을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왕따도 당하지 않고, 내게 주어진 현실에서 도망가지 않았을까? 
 
츠츠츠츠츳! 
 
허공에서 스파크가 일며, 흐르던 기억들이 깨어져 나갔다. 
 
「김독자. 한가해 보이는군.」 
 
고개를 돌리자, 새카만 어둠 속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타인의 꿈속에 쉽게 침투할 수 있는 존재. 
강대한 신격이 아니라면, 그런 게 가능한 것은 예언자뿐이다. 
하지만 상대는 안나 크로프트가 아니었다. 
 
「‘운명’은 견딜만한가?」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낡은 옷을 입고, 해진 왕관을 쓴 방랑자. 
그러고 보니, 성좌들 중에서도 ‘예언자’는 있었지. 
 
‘자신의 눈을 찌른 자.’ 
 
그는 연회에서 만났던, <올림포스>의 ‘오이디푸스 왕’이었다. 
오이디푸스 왕이 내게 말했다. 
 
「운명이 다가오고 있다.」 
 
‘운명? 그건 이미 실현됐을 텐데? 너희 계획대로 난 죽었잖아?’ 
 
「잡스런 설화로 피해갈 수 있는 운명이 아니다. 너는 곧 누구의 편에 설 것인지 결정해야 해. 나는 네가 옳은 선택을 할 거라 믿는다.」 
 
‘나는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아.’ 
 
그러자 오이디푸스 왕이 웃었다. 
 
「너는 반드시 <올림포스>에 오게 될 거다. 왜냐하면, 내가 본 화신들 중 너만큼 <올림포스>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가진 존재는 없었으니까.」 

‘무슨 개소리······.’ 
 
츠츠츠츳!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다시 기억이 들이닥쳤다. 
 
「독자야.」 
 
제길. 
또 이 기억이다. 
피 묻은 거실. 
죽은 남자의 시신 앞에 선 엄마가, 칼을 쥐고 있었다. 
 
「지금부터, 이 모든 걸 ‘다시’ 읽는 거야.」 
 
부들부들 떠는 나를 향해, 엄마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잘 기억해야 한다. 알겠지?」 
 
정면으로 치고 들어오는 악몽. 
나는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질렀다. 
그 모든 기억을 비웃듯, 오이디푸스 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번개의 사육제>를 계승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다음 시나리오에서 ‘영원히’ 죽게 될 것이다.」 
 
 
* 
 
 
[특성 ‘여덟 개의 목숨’의 특전이 발동합니다.] 
[당신의 육신이 부활합니다!] 
 
마치 양수를 토해내듯 울컥거리는 숨이 터져 나왔다. 
 
[뱀의 두 번째 머리를 희생합니다.] 
[해당 머리의 능력은 ‘지능(知能)’입니다.] 
 
차갑게 식었던 피부에 다시 온기가 돌고, 늘어졌던 근육에 힘이 들어간다. 
이걸로 벌써 죽음을 경험하는 것도 네 번째다. 
화룡종을 잡으며 한 번, 범람의 재앙 때 한 번, 니르바나를 상대할 때 한 번······ 이쯤 되면 유중혁이 개복치인지 아니면 내가 개복치인지 생각해봐야 할 판이다. 
 
“······으, 여긴 또 어디야?” 
 
주변을 둘러봤지만,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은 흰구름처럼 몽글몽글한 바닥과, 탁 트인 하늘뿐. 
······[암흑성]에 이런 지역이 있었던가? 
 
[특전 효과로 당신의 두뇌 회전이 빨라집니다.] 
 
부활 특전 덕분인지, 상황 판단이 한층 더 빠르고 명료해졌다. 
나는 일단 처음부터 하나하나 되짚기로 했다. 
먼저 가장 큰 의문. 
 
‘나는 왜 죽은 거지?’ 
 
나는 분명 한수영에게 내 육신을 맡겨 놓은 채 <낙원>에 3인칭 시점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의식이 흐려지더니, 사망 메시지가 떠올랐다. 
즉, 결론은 하나뿐이다. 
내가 잠이 든 사이, 누군가가 나를 죽인 것이다. 
 
······하지만 대체 누가? 한수영이? 
 
[당신의 다섯 번째 설화에 새로운 업적이 기록됩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수치를 아는 메시아’로 기억할 것입니다.] 
 
하필 이상한 시점에 죽는 바람에 설화에도 이상한 업적이 추가되어버렸다. 
······설마 진짜 수치사라도 한 건 아닐 테고. 
예언은 ‘화신 김독자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는 것’이었으니까, 적어도 나를 죽인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야, 김독자! 살아났냐?” 
 
때마침 멀리서 한수영이 하늘하늘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습격당했어.” 
 
한수영이 투덜거리며 휑한 구름 벌판을 바라보았다. 
어딜 봐도, 둥둥 떠다니는 구름 이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장소. 
습격이란 말을 쓰기엔 지나치게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네가 잠들자마자 갑자기 나타난 녀석들이 널 노렸어. 내 딴엔 열심히 막으려고 노력했는데 잘 안 됐고, 어쩌다 보니 네가 치명상을 입었고, 너 데리고 울며불며 열심히 달아났는데 갑자기 이런 곳으로 들어와 있었어.” 
 
구름이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설명이었지만,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전용 스킬, ‘거짓 간파 Lv.2’가 발동합니다!] 
[당신은 해당 발언이 진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습격한 놈들 얼굴은 봤어?” 
“다들 복면 쓰고 있어서 제대로 못 봤어. [특성 간파]로 몇 명 보긴 했는데 내가 잘 모르는 녀석들이더라.” 
 
사흘간의 히든피스 여정으로 한수영은 꽤 강해졌다. 
지금의 한수영 정도면, 못해도 암흑성에서 20위쯤은 될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호법을 뚫고 나를 살해하고, 게다가 우릴 여기에 가둘 정도의 실력자들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세력이 떠오르지 않았다. 
 
“더 알아낸 건 없고?” 
“근데 너 아까부터 되게 시건방지다? 누군 사흘 동안 죽어라 고생하고 있는데······.” 
“사흘?” 
“너 죽은 지 사흘 됐어. 몰랐냐?” 
 
그러고 보니 ‘여덟 개의 목숨’ 특성은 대기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사흘이라니······ 젠장. 
일행들은 어떻게 됐을까? 
설마 벌써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가진 않았겠지. 
만약 그렇게 됐다면 내 계획은 모두 틀어지게 된다. 
한수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근처엔 죄다 구름 뿐이야. 난 벌써 포기했다고.” 
“······그래서 분신 풀어놓고 저러고 있는 거냐?” 
 
구름 곳곳에서 한수영의 분신들이 제각기 스킬들을 훈련하고 있었다. 
[암기술]을 수련하는 한수영, [보법]을 수련하는 한수영, [박투술]을 훈련하는 한수영······ 모든 한수영들은 제각기 스킬 숙련에 여념이 없었다. 

“내 나름 대로의 훈련법이야. 너 기다리는 시간도 아깝고 해서······ 저렇게 한 다음 분신을 회수하면 스킬 숙련이 빨리 오르거든.” 
 
어쩐지, 한수영이 단시간에 강해질 수 있었던 비밀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무슨 나■토냐?” 
“나루■ 말이지? 젠장······ 이건 뭐 이런 것까지 필터링이 걸리네. 뭐, 거기서 아이디어를 따오긴 했지.” 
 
누가 표절 작가 아니랄까봐, 하여간. 
문득 궁금증이 생긴다. 
‘멸살법’의 원작에도 [아바타] 스킬에 대한 설명은 자세하게 다루지 않는다. 이 참에 저 스킬에 관해 좀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그 스킬엔 제약 같은 거 없어? 마력만 있으면 무한대로 분신을 늘릴 수 있는 거냐?” 
“그러면 사기지. 당연히 제약은 있어.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아바타한테 기억의 일부를 나눠줘야 해.” 
“······기억의 일부? 그러다 아바타가 죽으면?” 
“그럼 기억도 잃는 거지.” 
 
태연하게 대답하는 한수영을 보며 나는 조금 기가 질렸다. 
잘못하면 알츠하이머에 걸릴 수도 있는 스킬이었잖아? 
내 생각을 읽었는지 한수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마. 보통은 불필요한 기억들로 만드니까. 그리고 회수만 잘 하면 기억도 제대로 돌아와. 가끔······ 통제를 벗어나는 녀석이 있어서 문제지만.” 
“통제를 벗어나?” 
“처음 [아바타]를 썼을 때 만든 분신이 있는데······ 기억을 너무 많이 줘버렸는지 갑자기 통제 불능이 되어서 회수를 못했어.” 
“······그럴 수도 있냐? 그럼 걔가 갖고 있던 기억은?” 
 
한수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지. 근데 지금 나 멀쩡한 거 보면 별거 아닌 기억이었을 거야.” 
“넌 네가 멀쩡하다고 생각하는구나.” 
“닥쳐.” 
 
왠지 그 분신이 중요한 기억을 갖고 있을 것 같은 것은 내 착각일까. 
한수영과 똑같이 생긴 분신이 지금도 서울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어쩐지 등골이 오싹하다. 
허공에서 하나둘, 분신들이 연기로 화해 한수영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아마 그간 모은 숙련치를 회수하는 것이리라. 
한수영이 탄성을 질렀다. 
 
“아! 말 안 한 거 있다. 갑자기 기억이 나네. 너 죽어 나자빠졌을 때 성좌들이 찾아왔었어.” 
 
그런 중요한 기억은 분신한테 주지 말라고. 
 
“이름은 까먹었는데, 성운 소속 성좌들이었어. <베다>랑······ <탐라>였나?” 
 
위험한 이름들이었다.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수영이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좀 모호한 말들을 하던데. 올바른 선택을 하라는 둥······.” 
“똑바로 좀 기억하지 그러냐?” 
“미안. 아바타 다 회수하면 기억날지도······ 아, 그리고 무슨 이상한 고려 무사 같은 녀석도 왔었어.” 
“고려 무사?” 
“그쪽은 딱히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갔어. 죽은 네 시체 잠시 보고 있다가 바로 가던데.” 
 
고려 무사라면, 아마도 척준경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올림포스>에, <베다>에, <탐라>. 
게다가 그 척준경마저 움직일 정도라니, 확실히 뭔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나긴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석연찮은 감각이 뇌리를 스쳤다. 

“잠깐만, 성좌들이 ‘직접’ 왔었다고? ‘화신’이 아니라?” 
“응. 상징체로 왔던데. 왜?” 
“······뭐가 문젠지 모르겠냐?” 
“어?” 
“아무리 상징체라도, 성좌가 시나리오 지역에 그만한 개연성을 소모하면서 나타날 리가 없잖아.” 
 
개연성을 세상에서 제일 두려워하는 성좌들이, 직접 상징체를 강림시키며 나타날 리가 없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 보며 말했다. 
 
“······여기가 어딘지 알 것 같네.” 
 
역시, 이곳은 결계 안이었다. 
하지만 보통의 결계는 아니다. 
무려 성좌들이 상징체로 다녀갈 수 있을 정도로 몽환적인 결계. 
뒤늦게 뭔가를 눈치챈 한수영도 말했다. 
 
“······기문진법.” 
 
기문진법(機門陳法). 오행(五行)과 사상(四象), 삼재(三才)의 원리를 통달한 성좌들이 즐겨 사용하는 수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런데 이 정도 규모의 기문진을 쉽게 사용하는 존재는 드물었다. 중국의 와룡(臥龍) 정도나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기술. 
그런데 이곳은 한반도다. 그렇다면······. 
 
“슬슬 나오지 그래?”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와룡을 제외한다면, 이만한 기문진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성좌는 정해져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성좌를 이미 만난 적이 있었다. 
 
“······역시 성좌를 속이는 것은 무리였던 모양이군.” 
 
목소리와 함께 허공의 구름들이 뭉치더니, 이내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수감복을 입은 30대 중후반의 여자였다. 
 
“우린 구면이지?” 
“썩 달갑지는 않은 재회군요.” 
 
[성좌, ‘조선제일술사’가 당신을 향해 킥킥 웃습니다.] 
 
조선제일술사, 전우치의 화신. 
그녀는 ‘방랑자들의 왕’의 첫 번째 수족이다. 
 
“왕께서 너를 기다리신다.” 
 
어쩐지 나를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가는 듯하다. 
어쨌거나, 지금의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안내해요.”
 
 
 
 
 
< Episode 33. 다시 읽기 (1) > 끝

< Episode 33. 다시 읽기 (2) >
 
 
 
 
 
“김독자 개자식······ 또 나를 잊었어.” 
 
허허로운 평원 위에, 고고히 서 있는 작은 성채가 있었다. 사실, 성채라기보다 작은 전원주택에 가까운 크기였지만, 그럼에도 분명 [성채]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무장을 갖춘 수성탑. 
 
말할 필요도 없이, 공필두의 [무장성채]였다. 
 
두두두두두두! 
 
공필두는 성채로 다가오는 괴수들을 향해 포탄을 내갈겼다. 암흑성에 들어온 후 몇 주간, 공필두는 지옥 같은 괴수 지대에서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몰려오는 괴수들. 그나마도 김독자가 전에 지원해줬던 코인이 없었더라면 진즉에 마력이 고갈되어 말라 죽었을 판이었다. 
 
[성좌, ‘디펜스 마스터’가 디펜스 게임에 흥분합니다.] 
 
이 변태 같은 성좌를 배후성으로 두지만 않았더라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것이다. 
 
“시바아아아알!” 
 
괴수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한 결과 암흑성 랭킹은 부쩍 올라갔지만, 문제는 이제 정신력도 마력도 한계치에 달했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진가······.” 
 
괴수의 발톱에 부서지는 무장성채의 외벽을 보며, 공필두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멀리서 금빛의 참격이 날아왔다. 
 
쿠구구구구! 
 
벌판을 통째로 갈라버리는 강력한 에테르의 폭풍. 설마 김독자인가 싶어 눈을 부릅 떴는데, 그곳에 있는 남자는 예상 밖의 존재였다. 
 
“······유중혁?” 
 
그 폭풍 속을 뚫고 날아오는 거대한 용. 그 위에, 공필두가 아는 사람들이 올라타 있었다. 공필두의 몸에서 힘이 빠지고, 성채가 무너져 내렸다. 섬광처럼 달려간 유중혁이 쓰러지는 공필두를 들쳐 업었다. 
 
‘초월좌의 힘을 너무 남용했다. 당분간은 힘을 보존해야해.’ 
 
유중혁은 황금빛 참격을 날린 오른팔을 휘휘 돌리며 생각했다. 
 
칼을 쥐었던 손등이 붉게 부어 있었다. 
 
츠츠츠츳. 
 
배후성을 이용한 힘이 아님에도, 초월좌의 힘은 개연성의 영향을 받는다. 그 제한이 조금씩 해제됨에 따라서 상황은 나아지겠지만, 9번 시나리오에서 허락된 개연성은 초월좌의 힘을 충분히 활용하기엔 부족했다. 
 
‘이걸로 공필두까지 회수했다. 이설화는 서쪽 벌판에서 착실하게 랭킹을 올리고 있을 테고······.’ 
 
착실하게 진행되는 계획. 
 
지금껏 있었던 어떤 시나리오보다도 상황은 순조로웠다. 
 
‘이제 남은 건 김독자뿐인가.’ 
 
그 생각을 하며 유중혁은 북쪽 벌판을 바라보았다. 
 
‘<스타 스트림>의 운명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아. 어떻게 할 거냐, 김독자.’ 
 
 
* 
 
 
“걱정마. 빠져나갈 방법은 있어.” 
 
“······저 여자 하나만 문제가 아냐. 만만찮은 놈들이 잔뜩 있다고. 게다가 기문진법까지 쓰는 놈들인에 어떻게 상대하려고?” 
 
“기문진법이라고 부술 방법이 없는 건 아냐.” 
 
나와 한수영은 전우치의 화신, 조영란을 따라 기문진법 속을 걷는 중이었다. 걷지도 않고 둥둥 떠서 날아가는 걸 보니, 확실히 전우치의 화신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다. 
 
전우치. 홍길동과 함께 한국의 위인급 중에서도 톱 클래스에 들어가는 힘을 지닌 성좌······. 
 
눈치를 살피던 한수영이 다시 말을 걸었다. 
 
“근데 방랑자들의 왕은 환생자한테 죽은 거 아니었어?”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은 아니지.” 
 
“······그러고 보니 너 그 왕이랑 아는 사이라고 했었지. 정확히 말해. 대체 뭔 관계야?” 
 
추궁이라도 하는 듯한 그 말투에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세상에서 제일 복잡한 인연이지.” 
 
“어째 느낌이 구질구질한데. 옛 여친?” 
 
“내 어머니야.” 
 
“뭐? 진짜? 어······ 미안.” 
 
한수영이 평소 답지 않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우리 대화를 들었는지, 조영란이 뒤를 돌아보며 표정을 굳혔다. 
 
“내가 밟은 지면을 정확히 따라와라. 다른 곳을 밟으면 바로 길을 잃게 될 테니까.” 
 
역시 그런 식의 진법일거라 생각은 했다. 
 
모든 기문진법이 그렇듯 이 진법도 정확한 생문을 짚으며 나아가지 않으면 곧바로 길을 잃게 된다. 나는 살짝 불만스런 어조로 물었다. 
 
“그냥 진법을 해제하고 가면 안 됩니까?” 
 
“곤란하다. 네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우습네요. 날 죽인 건 그쪽인데, 두려워하는 것도 그쪽이라니.” 
 
“네게 부활 능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어.” 
 
“그렇다고 다짜고짜 죽여도 됩니까?” 
 
“그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너를 죽이려고 움직인 건 아니었어. 저 여자에게 한 공격이었는데, 저 여자가 널 방패로 삼았지.” 
 
······뭐? 
 
돌아보니, 한수영이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헤실헤실 웃고 있는 한수영을 보며 머리통을 한 대 갈겨줄까 하다가 참았다. 이쪽 추궁은 나중에 해도 되니까. 
 
내가 목숨이 여덟 개만 아니었더라도 진짜······ 아니, 이제 여섯 개인가. 
 
나는 조영란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왜 내 어머니를 돕는 겁니까?” 
 
내 갑작스런 물음에 조영란이 잠깐 멈칫했다. 
 
“솔직히 당신 정도 되는 화신이 왜 다른 누군가를 따르는지 모르겠군요. ‘조선제일술사’급의 성좌라면 성흔을 계승하기에 따라서 지금 당장 왕의 자리를 노릴 수도 있을 텐데.” 
 
“······내 성좌를 어떻게 알았지?” 
 
“한국에서 기문진법을 가진 성좌라면 뻔하죠.” 
 
전우치는 설화급은 아니지만, 힘을 발출해도 개연성의 코스트 소모가 적은 만큼 초반 시나리오에 유리한 점이 많았다. 
 
게다가 동급의 다른 성좌들에 비해 쌓아온 유명세와 설화가 압도적이라 시나리오의 진척도에 따라서 설화급으로 격상할 수도 있고. 
 
비슷한 이유로 유중혁도 초반 시나리오 클리어에 전우치를 동료로 영입한 경우가 왕왕 있었다. 
 
조영란이 대답했다. 
 
“나는 왕의 그릇은 아니야.” 
 
“혹시 어머니한테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겁니까?” 
 
조영란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해봐요. 내가 도와줄 수도 있으니까.” 
 
“······.” 
 
“당신은 그 사람한테 속고 있습니다.” 
 
전우치는 같은 편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커다란 전력이 된다. 
 
물론,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 딸을 구해주었다.” 
 
역시나. 
 
“그렇군요. 구명에 대한 보은이라······ 그런 일을 겪으면 충성할 만도 하겠네요.” 
 
내 말에 조영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비꼬는 말투군?” 
 
“맞아요. 저는 그 ‘구명’이 굉장히 의도적인 거라 생각하니까요.” 
 
“······의도적?” 
 
“우리 어머니,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어떤 점이?” 
 
“뭔가 지나치게 이 세계에 잘 적응한다거나, 현시점에선 알 수 없는 정보들을 다수 알고 있다거나 하는 것 말이죠.” 
 
순간 한수영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조영란이 답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우리 어머니는, 당신이 무슨 성좌를 얻게 될지 알고 있었다고.” 
 
“······.” 
 
“아마 그 사람은 처음부터 당신을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당신 딸을 구해줬을 거예요.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라고요.” 
 
조영란······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아마 이런 이름의 여자가 전우치의 화신이 되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딸을 잃고, 전우치의 화신이 되어 세상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는 등장인물. 
 
내가 언제 어머니한테 그 이야기를 해준 건진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내 이야길 듣고 그 정보를 기억하고 있었다면 이 여인을 이용할 생각을 했다고 해도 과장된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조영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너는 그 사람에 대해 오해하고 있어.” 
 
“오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조영란의 시선. 
 
불쾌한 동정이 섞인, 내가 제일 싫어하는 종류의 눈빛이었다. 
 
“수경 씨는 네가 아는 것처럼 나쁜 사람은 아니야.” 
 
괜한 반발감이 치솟았기 때문일까. 
 
나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나보다 그 사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어.” 
 
“원래 자식이 부모 속을 제일 모르는 법이지. 그리고 다 왔다.” 
 
문득 앞을 보니, 현관문 같은 것이 나타나 있었다. 
 
조영란이 한수영을 향해 말했다. 
 
“그쪽 여자는 못 들어간다. 나와 같이 있지.” 
 
“칫, 어머님께서 낯가림이 심하신가 보네. 잘 다녀와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현관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 문 뒤에, 아마 이번 시나리오의 가장 강대한 적이 있겠지. 
 
조영란이 말했다. 
 
“거기 있는 벨을 누르면 된다.” 
 
딩동. 
 
어쩐지, 예스런 벨소리가 익숙한 기억을 자극했다. 
 
아주 오래전에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그런 벨소리였다. 
 
문 안쪽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가정집의 현관이 나타났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몇 켤례의 신발. 개중에는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작은 신발도 있었다. 기시감은 더욱 심해진다. 익숙한 집의 인테리어. 너무 화려하거나 고풍스럽지 않은, 그렇다고 감각이 없는 사람이 꾸민 것도 아닌 소소한 장식들. 
 
거실로 들어가자 익숙한 모양의 방이 나타난다. 잊고 있었던 벽걸이 시계와 텔레비전. 앉아보지 않아도 감촉을 알 것 같은 소파. 테이블의 위치도 낯이 익었다. 
 
[‘제 4의 벽’이 흔들립니다.] 
 
정말이지······ 지독한 악취미가 아닐 수 없다. 
 
거실의 소파에 어머니가 단아한 옷을 입고 앉아 있었다. 
 
“오래 걸렸구나. 오랜만에 집에 온 기분은 어떠니?” 
 
“차라리 계속 죽어있는 게 나을 뻔했네요.” 
 
“건강해보여 다행이구나.” 
 
“누구 덕분에 이제 막 죽었다 살아났거든요.” 
 
아마 어머니는, 기선을 잡기 위해 이 장소를 택했을 것이다. 
 
지금부터 있을 대화는, 아마 남은 두 개의 시나리오를 결정지을 승부처가 될 테니까. 
 
“니르바나가 당신을 죽였다던데, 어떻게 살아 있었던 거죠?” 
 
“그런 녀석 속이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 잊었니? 나도 미래 정보는 많이 가지고 있단다.” 
 
예상은 했다. 하지만 니르바나를 속일 정도라니, 내 어머니지만 이 사람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나로서도 잘 짐작이 가질 않았다. 
 
어쩌면 지금의 내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유중혁이나 성좌들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람일지도 모른다. 
 
“살아있으면서 내 장례식에도 안 오셨군요.” 
 
“어밀 두고 먼저 떠난 불효자 장례식을 뭐하러 가겠니.” 
 
“그것도 모자라서 부하들을 시켜서 절 한 번 더 죽이셨고요.” 
 
“불효자의 불효가 괘씸해서 한 번 더 죽여줬지. 이번에도 장례식이 필요하니? 보니까 좋은 동료들을 많이 뒀더구나. 네가 다시 살아날 줄도 모르고 다들 눈물을 펑펑 흘리던데······.” 
 
말하는 모양새를 보니, 역시 이 사람은 내 어머니가 맞다. 
 
나는 짧게 심호흡을 했다. 
 
어머니와 말할 때는 절대 방심할 수가 없다. 
 
그리고 지금부터가, 진짜일 것이다. 
 
“왜 날 죽인 거죠?” 
 
어머니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화신 김독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요?” 
 
“유상아 씨가 말해줬단다. 제발 너를 구해달라고 하더구나.” 
 
유상아 씨가 어머니를 찾아왔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다른 아가씨랑 같이 왔더구나. 그새 취향이 바뀐 거니? 솔직히 엄마는 유상아 씨 쪽이 더 마음에 든다.” 
 
“쓸데없는 신경 끄시죠. 그보다 그 얘길 들으니 더 이해가 안 되는데요. 왜 살려달란 말을 들었는데 날 죽였습니까?” 
 
“어쨌든 내 덕분에 예언은 실행된 것 같은데. 아니니?” 
 
“예?”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예언에서 말했잖니.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내가 널 죽였단다.” 
 
내가 누구보다 증오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다니, 우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잘 표현할 수 없는 기분에 마음이 심란해졌다. 나는 분명 어머니를 증오한다. 어머니로 인해 내 삶은 망가졌고, 엉망이 되었으니까. 그럼에도······ 이 복잡한 기분은. 
 
“그렇군요. 절 죽이면,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실 거라 생각하신 모양이죠? 운명이 그러니까?” 
 
“네가 좋아하는 소설에도 자주 나오는 전개지 않니?” 
 
“그렇다면 완전히 실패하셨네요.” 
 
분명 운명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 지난 번 죽음으로 내 운명은 실현되었어야 했다. 
 
“운명 메시지가 아직도 뜨고 있거든요.” 
 
사실이었다. 
 
조금 전부터, 내 귀에는 지긋지긋한 메시지가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어떤 거대한 운명이 당신의 확실한 죽음을 바라고 있습니다.] 
 
심지어 수식언도 추가되었다. 
 
‘확실한 죽음’이라고. 
 
꿈에서 나타난 ‘오이디푸스 왕’의 말이 옳았다. 
 
이 설화는. ‘여덟 개의 목숨’으로는 피해갈 수 없다는 얘기다. 
 
“적어도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 Episode 33. 다시 읽기 (2) > 끝

< Episode 33. 다시 읽기 (3) >
 
 
 
 
 
내 말에, 어머니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은 나를 조금은 들뜨게 만들었다. 
그 ‘어머니’가 내가 자기를 사랑하기를 기대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그 마음에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들뜨게 했다. 
그러나 이어진 어머니의 말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말투였다. 
 
“흐음, 역시 그렇구나.” 
“······.” 
“그래도 시험해 보고 싶었어. 그걸로 네 운명이 끝날 수도 있으니까. 어차피 남은 목숨은 많았잖니.” 
“날 위하는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너를 사랑한단다.” 
 
그 말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왜 이제와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무슨 의미죠?” 
“난 너의 엄마잖니.” 
 
미소짓는 어머니를 보며, 심장 한쪽 구석이 아려왔다. 
정말로 그런 말이 용납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당신 때문에 홀로 고통에 몸부림쳤던 십수 년의 시간을, 그 한 마디로 부정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나는 가만히 어머니를 노려보았다.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 
 
차마 [거짓 간파]를 사용할 수 없었다. 
세상엔 때로 그런 말들이 있다. 
그것이 진실이어도, 거짓이어도 너무 아픈 말이. 
나는 한숨처럼 말했다. 
 
“너무 늦었어요.” 
“안단다.” 
“그런데 왜······.” 
“한 번쯤 말하고 싶었다. 한 번도 해준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헤아렸다. 오직 고요한 벽걸이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마치,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페이지가 넘어가듯이. 
나는 간신히 첫 문장을 쥐어짜내는 작가처럼 입을 열었다. 
 
“······감옥에서의 생활은 어땠어요?” 
“자주 보러 와줬잖아. 말 안해도······.” 
“아무 말도 안 해줬잖아요.” 
“······.” 
“왜 아무 말도 안 했던 거예요? 그렇게나 많이 보러 갔었는데······.” 
 
처음부터 어머니를 미워했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였을 때도. 
그 대가로 감옥에 갔을 때도. 
득달같이 달려든 친척들이 가산을 털어가고, 팔다 남은 떨이 상품처럼 친척 집에 떠맡겨졌을 때도. 
나는 어머니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 있죠?” 
 
내가 어머니를 원망하게 된 원인은 간단하다. 
 
“대체 왜 나한테 침묵한 거예요? 그리고 왜······ 그런 이야기를 쓴 거예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결국 그 책을 팔아서, 인세로 부자가 되었을 테니 좋은 거 아니냐고. 
엄마가 받은 인세가 내 생활에 보탬이 되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친척들은 언제나 나를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취급했으니까. 
 
“난 정말 힘들었어요. 학교를 가든, 거리를 가든, 누굴 만나든 세상 모두가 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았으니까. 이사를 가도, 학교를 옮겨도 마찬가지였어요. 언제나 나는 ‘살인자의 아들’이었으니까.” 
 
당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모른다. 
이 세상의 집요함이라는 것을. 
기자들이 집 앞을 서성이고, 세상의 모든 시선들이 나를 쫓아다니는 기분을. 
 
“그래도 어쩌면, 거기까지도 견딜 수 있었어요.” 
 
어머니가 내게 한 마디라도 해줬더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참으라고, 견딜 수 있다고 말해줬다면. 
설령 내 이야기를 돈에 팔았다고 해도, 어머니가 내 편이라는 사실만 알려줬다면. 
 
[‘제4의 벽’이 격렬하게 흔들립니다.] 
[성흔, ‘자기합리화 Lv.2’가 발동합니다!]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나는 오해한 게 없다. 
어머니는, 나와 자신의 삶을 팔아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런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나는 알리고 싶었다.” 
“뭘요?” 
“진실을.” 
“······무슨 진실? 엄마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거? ” 
“그런 이야기가 아니란 걸 알고 있잖니.” 
“알죠. 아주 잘. 당신과 헤어진 후 나는 수도 없이 내 기억을 다시 읽었으니까.” 
 
다시 읽기. 
내가 소설의 등장인물에게 잘 몰입하게 된 것은, 어쩌면 모두 어머니 덕분인지도 모른다. 
 
―독자야. 지금부터 모든 걸 ‘다시 읽을’거란다. 
―아버지는, 죽을 만한 잘못을 한 거야. 
―이건 정당방위였던 거야. 알겠지? 
 
수백, 수천, 아니 수만 번도 더 다시 읽었던 기억. 
아니, 너무 많이 재생해서 그것이 사실이었는지도 알 수 없는 기억. 
 
“아버지는 충분히 죽을 만한 사람이었어요. 상습적인 가정 폭력범에 도박 중독자. 그대로 그 사람을 계속 뒀다면, 어차피 우리 가정은 위험해졌겠죠.” 
 
잠시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기억하고 있구나. 그런데 왜 화가 난 거니?” 
 
나는 몇 번이나, 어머니에게 물어보려 했다. 
 
왜 날 데리고 도망가지 않았는지. 
왜, 어린 날 혼자 남겨둔 건지. 
왜, 출소 후 나를 보러 오지 않은 것인지. 
 
그러나 그 질문들이 내 안에 쌓여갈수록, 나는 스스로 답을 얻어갔다. 
 
[‘제4의 벽’의 흔들림이 잦아듭니다.] 
 
그것은 두려움이 만들어 낸 답. 
답란을 지워버린 답이었다. 
어쩌면 그 답란에 답이 주어졌을 때, 내가 그 답을 납득하지 못할까 두려웠기 때문에. 
그 사이 어머니는 몇 번이나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걸 말하기에도 너무 늦은 것 같구나.”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가정사에 5000코인을 후원합니다.] 
 
빌어먹을 신파는 여기까지면 충분하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고구마에 목이 타들어 갑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이 심판자’가 당신에게 다시 한 번 생각할 것을 권합니다.] 
[성좌, ‘자신의 눈을 찌른자’가 음험한 미소를 짓습니다.] 
 
애초에 우리 모자에게 그런 건 어울리지 않으니까. 
 
“너는 왜 자꾸 원작을 바꾸고 있는 거니?” 
 
어머니는 능청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흐름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뒀다면, 죽을 인물이 죽도록 내버려뒀다면, 시나리오는 이렇게 어려워지지 않았을 거다.” 
“바꿔야만 했으니까요. 엄마도 알다시피 3회차의 유중혁은 결말까지 갈 수 없으니까.” 
 
[다수의 성좌들이 필터링에 답답해합니다.] 
 
역시 원작에 대한 이야기는 성좌들에게 필터링이 되는 모양이었다. 
 
“결말?” 
“그래요. 결말.” 
“······고작 그런 걸 위해서 이런 고생을 하는 거니? 제정신이 아니구나.” 
“내게 이 이야기의 결말은 중요해요. 당신이 없는 동안, 나를 지켜준 건 이 세계였으니까.”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는 내가 남은 십수 년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소설 덕분이었다. 
 
“어차피 말해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작가가 무슨 의도로 그런 제목을 지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내게 그 제목은 비유가 아닌 현실이었다. 
왜냐하면 내게 이 세계는 오래전부터 ‘멸망한 세계’나 다름없었으니까. 
이 소설을 매일 읽었기에 나는 살아남았다. 
그렇기에, 나는 이 이야기를 포기할 수 없다. 
 
“이건 이제 소설이 아니야. ‘그리고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결말은 현실에 없다.” 
“그건 끝까지 가봐야 알겠죠. 그리고 내가 언제 그런 결말을 원한다고 했어요?” 
“그만두거라. 이 세계는 미쳤다. 네가 미래를 안다고 해서, 발버둥친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야. 너도 알고 있지 않니? 당장 다음 시나리오만해도―” 
“그만.” 
 
더 이상의 설왕설래는 하나마나였다. 
 
“그냥 원하는 걸 말씀하세요. 왜 날 부른 거죠?” 
“여기에 남아라.” 
 
그래, 그 말을 할 줄 알았다. 
어머니라면, 당연히 그럴 것 같았다. 
 
“······왜 그런 짓을 하겠다는 거죠?” 
“또 하나뿐인 아들을 잃을 수는 없거든. 다음 시나리오는, 내가 어떻게든 해주마.” 
“집어 치우세요.” 
 
고오오오오! 
 
나는 기파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세요. 그냥 내가 방해가 되는 것 뿐이잖아요. 당신 목적이 뭔진 모르겠지만, 뭐 물어보나 마나겠죠.” 
 
처음으로, 어머니의 표정에 낯선 감정이 스쳐갔다. 
마치, 슬퍼보이는 얼굴이었다. 
슬퍼?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정말 누굴 닮았는지.” 
 
어머니의 몸에서도 마력 파장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내가 싫어하는 방법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겠구나.” 
 
쿠구구구구구! 
 
[일부 성좌들이 이 막장 집안 싸움을 좋아합니다.] 
[효(孝)를 중시하는 일부 성좌들이 이 상황을 싫어합니다.] 
 
집안의 가구들이 마력 폭풍에 휩쓸려 날아다니기 시작하자, 뭔가를 눈치 챈 한수영이 곧바로 현관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김독자!” 
 
한수영의 뒤로 전우치의 화신인 조영란도 날아왔다. 거실은 순식간에 대치 국면으로 바뀌었다. 조영란이 도술을 준비했고, 어머니는 그저 고요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전우치의 도술은 까다롭지만 알고만 있다면 어떻게든 방비할 수 있다. 
문제는 어머니 쪽이다. 
나는 어머니의 ‘배후성’이 뭔지, 아직 알지 못한다. 
그러니, 승부처는 어머니의 능력이 발현되기 직전인 지금이다.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4번 책갈피, ‘리카온 이스파랑’을 선택한다.” 
 
[전용 스킬, ‘바람의 길 Lv.10(+1)’이 활성화됩니다!] 
 
극한에 도달한 [바람의 길]이 활성화 되며, 거실 전체가 마력의 폭풍 속에 휘말렸다. 
 
쿠구구구구! 
 
혼잡해진 시야 속에서, 나는 응축된 바람을 폭파시켜 거실 전체를 붕괴시켰다. 그리고 곧장 한수영과 함께 끔찍한 집안을 탈출했다. 자욱한 연기가 시야를 가린 사이, 나는 한수영에게 말했다. 
 
“바로 끝낼 거야, 준비해.” 
“알겠어.” 
 
한수영도 손에서 강력한 [흑염]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나는 곧장 책갈피를 갈아 끼웠다. 
 
“5번 책갈피,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을 선택한다.” 
 
[바람의 길]에 이은 [소형화]와 [전인화]의 콤보. 
내가 가진 최대의 기술을 쏟아부어 어머니를 제압하는 것만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길이었다. 
그런데 스킬을 사용하려는 순간, 흙먼지를 뚫고 수십 명의 인파가 날아올랐다. 
그들은 나를 포위한 채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모든 것을 오해하고 있어. 부탁한다. 너는 이곳에 남아야 해.” 
 
어머니의 수하들이었다. 수감복을 입은 수십의 여인들이, 동정 섞인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놀란 한수영이 외쳤다. 
 
“뭐야 이것들은!” 
 
놀란 한수영이 그들을 향해 흑염을 쏟아냈으나, 흑염은 전우치의 기문진에 의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조영란이 외쳤다. 
 
“김독자! 그만둬! 수경 씨는 너를 위해······!” 
 
그들의 입을 막은 것은 어머니였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 조용히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 어머니의 몸 전체에서 웅장한 아우라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츳! 
 
과도한 개연성의 사용으로 인한 스파크.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강렬한 동조율이었다. 
어머니는, 명백하게 무리하고 있었다. 
 
[화신 ‘이수경’의 배후성이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성좌, ‘시조의 어머니’가 당신을 보며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시조의 어머니? 
맙소사. 설마? 
 
[성좌, ‘시조의 어머니’가 당신의 힘은 한반도 시나리오에 위협이 된다고 말합니다.] 
[성좌, ‘시조의 어머니’가 당신이 반항하지 않는다면 목숨을 앗아가지 않을 것이라 조언합니다.] 
 
나는 급한 마음에 [소형화]와 [전인화]를 동시에 사용했다. 
 
[오래된 땅의 정기가 당신의 스킬 사용을 봉인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마치 깜깜한 동굴에 들어온 것처럼 시야가 어둑해졌다. 
전신에서 힘이 빠져 나가며, 마치 평범한 인간. 혹은 작은 짐승이 되어버린 것 같은 무력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오래된 땅의 정기가 당신의 격을 봉인합니다.] 
 
나는 이 성흔을 알고 있었다. 
오직 한반도에서만 사용 가능한 ‘설화’를 이용한 봉인. 
 
“······설마 이런 수를 쓸 줄이야.” 
 
그래······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이곳은 한반도다. 
그런데, 아직 내게 접촉하지 않은 성운이 하나 있었다. 
가장 먼저 접촉해야 했음에도, 아직까지 다가오지 않은 성운이. 
 
“말했잖니, 너를 사랑한다고.” 
 
손에 쥐어진 청동방울을 흔들며, 어머니가 웃었다. 
시조의 어머니. 
한반도의 성운인 <홍익>의 고위 신격들 중 하나이자, 이 땅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설화의 주인공 중 하나. 
내 어머니의 배후성은, 단군왕검의 어머니인 웅녀(熊女)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좋아요. 항복하죠.” 
“뭐? 야! 김독자!” 
“가만있어. 어차피 지금은 못 이겨.” 
 
전신에 몰아치는 탈력감. 
지금 나는 능력치만 높은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배후성은 그렇다 치고, 대체 어떻게 [팔주령]을 손에 넣었죠?” 
 
나는 어머니의 손에 쥐어진 청동 방울을 바라보았다. 단군 신화의 천부삼인(天符三印) 중 하나인 팔주령(八珠鈴). 그것은 설화의 힘을 빌어 상대방의 능력을 봉하는 한반도 최고의 성유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시점에 정상적인 방법으로 저 성유물을 얻을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 어머니는, 그만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 
 
“때가 되면 풀어줄 테니, 잠자코 여기에 있어.” 
 
슈우우우! 
 
그 말을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방랑자들이 기문진 안에서 사라졌다. 
한수영과 나는 졸지에 기문진법 속에 갇혔다. 
어머니가 어디로 갔을 지는 예상할 수 있었다. 
아마, 유중혁과 만나러 갔을 것이다. 
그 둘이 만나면 무슨 파국이 벌어질지는 상상하기도 싫었다. 
 
“제기랄, 이제 어떡해?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어떻게든 기문진법을 부수려고 발악하던 한수영이 물었다. 
성좌의 격에 스킬까지 봉인 당했으니, 당장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어디까지나 자력으로는 그렇다는 뜻이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방법이 하나 있긴 해.” 
“뭔데?” 
“힘으로 기문진법을 깰 수 있는 존재가 있어.” 
“뭐? 누구?” 
 
그 자를 부른다면, 봉인도 어떻게든 될 것이다. 
본래는 내가 감히 부를 수 없는 성좌지만, 지금이라면 또 모르지. 
나는 곧장 [간평의]를 꺼냈다. 
중요한 때를 대비해 아껴뒀지만, 지금 믿을 건 이것 뿐이다. 
 
[‘간평의’의 특수 옵션, ‘별의 메아리’를 발동합니다.] 
[‘별의 메아리’를 통해 당신은 위인급 성좌의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성좌를 호명하겠다.” 
 
[별들의 흐름 속에 위인급 성좌들이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성좌의 수식언을 불렀다. 
 
[해당 성좌는 지나치게 격이 높습니다.] 
[해당 성좌가 천반의 별자리를 5개 요구합니다. 이에 응하시겠습니까?] 
 
마지막 북두성군을 부를 때 하나, 민족의 독립운동가를 부를 때 하나를 사용했기 때문에 간평의의 남은 별자리는 다섯 개 뿐이었다. 
그런데 이 성좌는 지금, 간평의의 남은 모든 별자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럴 법도 하지. 
이 자의 힘은 이미 위인급을 넘어섰으니까. 
 
[별들의 운항이 시작됩니다.] 
 
깊은 밤하늘의 어둠 속에서, 외따로 떨어진 고독한 별이 반짝였다. 
나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고려제일검,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 Episode 33. 다시 읽기 (3) > 끝

< Episode 33. 다시 읽기 (4) >
 
 
 
 
 
츠츠츠츠츳! 
 
전신을 감싸는 스파크와 함께, 나는 간만에 개연성 후폭풍의 징조를 느끼고 있었다. 
설화급도 아닌 위인급이, 단일 빙의만으로 이렇게 큰 부담을 주다니. 
혼자서 군대와 대적했다는 척준경에 관한 기록들은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장은커녕, 오히려 축소되었다고 해야 할 판이다. 
실제로 척준경은 성좌가 된 이후 벌인 일들이 훨씬 많았고, 지구의 역사에 기록된 것 이상으로 강력했다. 다른 세계에서는 소드마스터 척이라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떠는 성좌들이 있을 정도니까. 
그래도 버텨내야 했다. 
버텨내지 않으면, [백일 봉인]을 부술 수 없다. 
 
[현재 당신의 격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현재 당신의 주요 스킬들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남은 봉인 시간 : 100일] 
 
성운 <홍익>의 천부삼인으로 행할 수 있는 [백일 봉인]은, 상대방의 능력을 봉인하는 최고위급의 봉인진이었다. 
 
[마늘과 쑥을 먹으며 100일을 견디십시오.] 
 
물론, 이 봉인이 꼭 나쁜 것은 아니었다. 
백일 동안 마늘과 쑥을 먹으며 버틸 수만 있다면, 환인(桓因)의 축복을 받아 육체의 잠재력을 깨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내겐 그만한 시간이 없었다. 
하늘에서 쏟아진 마늘과 쑥을 보며 한수영이 탄식했다. 
 
“야, 아직 멀었어?” 
“······힘이 너무 강해서 통제하기가 힘들어. 좀 기다려봐.”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마력을 다스리는 중이었다. 
척준경은 나의 부름에 답해 힘을 빌려주기는 했으나, 딱히 어떤 진언도 전하지 않았다. 
자신이 있다면 사용해보라는 듯, 힘의 일부를 건네주었을 뿐이다. 
그 결과, 나는 지금 삼십 분째 꼼짝도 못하고 폭주하는 설화를 다스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자칫하면 몸 전체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투덜거리는 한수영을 보며, 나는 문득 짜증이 났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날 방패로만 안 썼어도 이렇게 될 일은 없었다고.” 
“나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그걸 믿으라고? 넌 하는 짓 보면 언제나······.” 
 
모르는 사이 꽤 쌓여 있었던 모양인지, 괜히 따박따박 잔소리가 나왔다. 
그렇게 몇 분쯤 지났을까. 
서서히 인상을 굳히던 한수영이 결국 빽 소리를 질렀다. 
 
“아 사과했잖아! 그래, 내가 너 방패로 좀 썼다. 어쩔래?” 
 
이건 또 무슨 적반하장인가 싶었는데, 갑자기 엉뚱한 존재가 끼어들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헛기침을 하며 끼어듭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한수영은 당신을 방패로 삼은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죽음은 자신의 책임이라 말합니다.] 
 
“야, 넌 닥치고 가만히 있어! 괜한 얘기 했다간······!” 
“······저게 무슨 소리야?” 
“헛소리니까 신경꺼.” 
 
[성좌, ‘심연의 흑염룡’은 화신 한수영이 당신의 흑염룡을 지켜주려다 당신의 심장을 보호하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내 흑염룡? 
 
“그러니까 그게······.” 
 
내 시선에 우물쭈물하던 한수영이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전우치의 공격이 내······ 그곳으로 날아왔다 이거냐?” 
“······응.”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져서 중요한 상황이라는 것도 잊고 입을 벌렸다. 
한수영은 머뭇거리며 내 눈을 한 번 보고, 바닥을 한 번 보더니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말을 이었다. 
 
“그······ 기능을 잃으면 좀 불행해지지 않을까 해서, 지켜주려다가······ 살짝 방향이 뒤틀려서 그만.” 
“그래서 내 심장에 맞았다?” 
“······뭐, 그런 얘기지.”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다. 
내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한수영이 재빨리 첨언했다. 
 
“따, 딱히 이상한 생각은 없었으니까 괜한 오해는 말고. 흑염룡 이 자식이 네 그걸 꼭 지켜줘야 한다고 고래고래 소릴 질러서······.”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황하는 자신의 화신을 보며 흥분합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자 되어도 상관없으니까, 다음부턴 그냥 심장을 잘 지켜줘.” 
 
내 말에, 한수영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그리고, 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근데 김독자,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뭔데.” 
“왜 쟤가 네 그걸 ‘흑염룡’이라고 부르냐?” 
 
 
* 
 
 
‘그 녀석······ 어릴 적엔 참 작았는데.’ 
 
이수경은 황량한 암흑성의 무저갱 벌판을 바라보며, 간만의 회상에 젖어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가. 
쉬운 시나리오는 하나도 없었고, 모든 계획은 반쯤 어그러지거나 망가졌다. 불충분한 정보들로 인해 몇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겼다. 
 
‘특히 니르바나를 만났을 때는 위험했지.’ 
 
환생자라니. 
그런 존재가 세상에 존재할 것이라고, 이수경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긴, 애초에 소설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부터가 비정상이지만. 
인기척에 등을 돌리자 그곳에 전우치의 화신인 조영란이 서 있었다. 
 
“왕이시여.” 
“이제 그런 호칭은 그만두세요.” 
“······수경 씨.” 
 
조영란은 착잡한 눈빛이었다. 
그럴 만도 하다고, 이수경은 생각했다. 
조영란은 방랑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의 사정을 모두 아는 사람이다. 
 
“당신은 그 아이와 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책을 썼던 이유를 솔직하게 말했다면······.” 
“싸우는 것보다 솔직해지는 게 더 어려운 일이죠. 특히 부모 자식 간에는.” 
 
사실 김독자와 이야기를 한 것도, 조영란의 제안 때문이었다. 
조영란이 다그쳤다. 
 
“이제 그 애도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입니다. 당신이 알던 열 살배기 소년이 아니잖습니까?” 
“내겐 그저 어린애에요. 그 아이가 서른 살이 되든, 마흔 살이 되든.” 
“······부모의 오만이군요.” 
 
오만······. 
맞다, 오만이다. 
이수경이 긴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처음엔 용기를 내보려고 했어요. 진실을 이야기해주려고 했죠.” 
“······.” 
“하지만 그 애의 눈을 보고 있으니······ 이제와서 내가 그 애의 인생에 끼어드는 것 자체가 그 애에게 실례인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현실은 소설과 다르다. 
상처받은 인물은 구원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상처받은 ‘인간’은 그리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진실을 알리는 게 그 애에게 정말 필요한 일인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내가 필요로 했던 걸지도 모르죠. 나쁜 엄마로 남는 게 싫어서······. ” 
 
김독자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비뚤어졌듯. 
그녀 역시 자기 나름의 사랑을 고수한 결과 이 지경이 되었다. 
 
「화신 김독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다.」 
 
이수경은, 처음 유상아에게 그 운명을 전해 들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반드시 실현되는 올림포스의 운명. 
 
“······그 애도 언젠간 당신을 이해할 겁니다.” 
 
아들을 살릴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이수경은 ‘시조의 어머니’에게 사흘 밤낮으로 치성을 드렸다. 
세 개의 SS급 아이템을 <홍익>의 공물로 바쳤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수명 20년을 바쳤다. 그리고 그 대가로, <올림포스>가 숨겨두었던 한 줄의 운명을 훔쳐볼 수 있었다. 
 
「다음 시나리오로 가지 않으면, 화신 김독자는 살 수 있다.」 
 
이수경은 웃었다. 
 
“그보다, 병력들은 모두 집결했나요?” 
“예. 모두 모였습니다.” 
 
벌판의 가장자리에, 그녀가 이끄는 방랑자들의 세력이 모여 있었다. 
모두 그녀 하나만을 믿고 여기까지 모인 사람들이었다. 
이수경은 메인 시나리오 창을 열었다. 
 
+ 
 
<메인 시나리오 # 10 ―73번째 마왕> 
 
분류 : 메인 
난이도 : SS 
클리어 조건 : 당신은 암흑성의 마지막 시나리오에 참가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암흑성의 3층으로 함께 올라갈 네 명의 랭커를 모은 후, 최종 시나리오에 돌입하세요. 
제한시간 : 30일 
보상 : 100,000코인 
실패시 : 사망 
 
* 현재 당신의 암흑성 랭킹은 2위입니다. 
* 랭킹 10위 이내의 화신만이 당신과 함께 최종 시나리오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 
 
이수경은 조영란을 흘끗 바라보았다. 
조영란과 이복순을 포함해, 현재 그녀가 보유한 10위권의 랭커는 둘. 
시나리오를 완수하고 암흑성의 최종층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아직 두 명의 랭커가 더 필요했다. 조영란이 말했다. 
 
“녀석들이 오는군요.” 
 
<무저갱 평원>의 건너편에서, 군세가 밀려오고 있었다. 
<낙원>에서 오는 자들이었다. 
군세의 첨단에, 그녀가 익히 아는 얼굴이 보였다. 
이수경은 반대쪽 세력에서 나오는 인물들 중 하나를 향해 인사했다. 
 
“유상아 씨. 오랜만이군요.” 
“아!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살아 계셨군요! 독자 씨는······.”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이수경은 건너편의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왼쪽에서부터 차례로 이현성, 신유승, 정희원, 이지혜, 이길영인가.’ 
 
이현성과 신유승, 이지혜에 대해서는 김독자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길영과 정희원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었다. 아마도, 그녀의 아들이 원작과 무관하게 새로 영입한 인물들이리라. 
 
‘원작의 인물들만 기용했으면 훨씬 편했을 텐데. 바보 녀석.’ 
 
어릴 적부터 김독자는 예측할 수 없는 행동들을 많이 하곤 했다. 
그 때문에 한때 이수경은 자신의 아이가 예술가가 되리라 믿었다. 
 
“방랑자들의 왕.”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 그녀가 기다린 인물이 있었다. 
수감되어 있는 동안, 아들에게 수도 없이 들었던 인물. 
이렇게, 현실로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존재. 
 
“유중혁.” 
 
패왕 유중혁.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왜 이곳에서 보자고 한 거지?” 
“슬슬 시나리오의 마지막을 결정할까 해서.” 
 
유중혁은 이수경의 곁을 살피더니 물었다. 
 
“너도 ‘사천왕’을 모으고 있는 건가?” 
“사천왕?” 
“다음 시나리오로 가려면 네 명의 랭커가 필요하다. 알고 있을 텐데?” 
“아······ 그래, 맞아. 나도 모으고 있어. 그걸 사천왕이라 부르나 보구나. 요즘 애들 유행어는 영 못 따라가겠는걸?” 
 
이수경의 말에 유중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심성이 뒤틀린 자로군.” 
“맹랑한 아이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치는 순간, 기파가 사납게 튀었다. 
 
고오오오! 
 
단지 시선을 교환한 것만으로도, 이수경은 유중혁의 힘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초월자라고 했던가. 
확실히 이 정도는 되어야 이야기의 주인공이겠지. 
짧게 숨을 들이켠 이수경이 입을 열었다. 
 
“너와 손을 잡고 싶어. 같이 남은 랭커들을 모으자.” 
“······랭커들을?” 
“그래. 네 목표는 어차피 이 세계를 구하는 거잖아? 다음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려면 최대한 강력한 화신의 라인업을 구성할 필요가 있겠지. 나는 너를 도와줄 수 있어. 내 성좌는 ‘시조의 어머니’니까.” 
 
‘시조의 어머니’라는 말에 유중혁의 눈빛에 잠깐 이채가 감돌았다. 
하지만 정말로 잠깐뿐. 
유중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연 뜬금없는 것이었다. 
 
“김독자는 어디 있지?” 
“······그 아인 왜 찾아?” 
“그쪽이 데리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왜?” 
 
자신의 제안 따위 아랑곳 않는 그 태도에, 이수경은 불현듯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오직 자식을 가진 어미만이 감지할 수 있는 불온한 예감이었다. 
 
“설마, 그 아이를 네 ‘사천왕’에 넣을 셈이니?” 
“내가 대답할 의무는 없는 것 같군.” 
“정말 그 애가 말한 그대로의 성격이구나.” 
“······김독자가 내 이야기를 했나?” 
“했지. 아주 많이.” 
 
일순 흔들리는 유중혁의 눈빛을 보며, 이수경의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고민하던 이수경이 물었다. 
 
“<낙원>에서 내 아들에게 업적을 나눠줬다고 들었어. 왜 그랬지?” 
“놈이 강해지면 세계를 구할 확률이 높아지니까.” 
“아하, ‘이용하기 위해서’ 그랬다 이거구나?” 
 
이수경은 일부러 특정 단어에 방점을 찍으며 물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안심한 어투로. 
그런데 유중혁이 대답했다. 
 
“김독자는 이 세계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나는 그놈이 필요해.” 
“······.” 
“놈은 나의 동료가 되어서, 시나리오의 끝을 볼 것이다.” 
 
이수경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동료’라고? 
기억 속에서, 어린 아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새끼, 완전 사이코패스예요. 
―지밖에 모르는 놈이고. 목표를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하는 놈이거든요. 
 
“이상하네. 내가 들은 유중혁은, 절대로 너처럼 말하지 않는데.” 
“그쪽 집안 사람들은 남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게 특기인가?” 
 
유중혁이 검을 뽑았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는 듯 강경한 태도였다. 
 
“김독자를 내놔라. 그러면 너를 살려주겠다.” 
 
이글거리는 유중혁의 눈을 보며, 이수경은 아들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잔뜩 불만스러운 것처럼 이야기하면서도, 어쩐지 들떠 있던 아들의 표정. 
 
―하지만 그 녀석이 없으면 이야기가 진행이 안 돼요. ‘멸살법’은 그런 소설이거든요. 
 
순간, 섬전 같은 깨달음이 이수경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화신 김독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을 것이다.」 
 
이수경은, 그 순간 ‘운명’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는 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이수경 또한 한 사람의 독자였기에, 이런 종류의 비유와 상징에 익숙했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통찰이었다. 
 
“그렇구나.” 
 
모든 것을 깨달은 이수경은 웃었다. 
본래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예언이 그런 뜻이라면 계획은 여기서 수정되어야 했다. 
 
“미안하지만 내 아들은 만나게 해줄 수 없어.” 
“왜지?” 
“자식이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린다면, 그걸 통제하는 것도 엄마의 몫이니까.” 
 
[팔주령]을 꺼낸 이수경의 눈빛이 납처럼 차가운 빛을 띠었다. 
 
“내 아들을 그만 현실로 돌려보내 줘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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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비형은 서울 관리국의 지부에 있었다. 
서울 돔의 해방 시나리오가 눈앞에 다가온 시기. 돔 내의 모든 도깨비들은 시나리오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 분주한 상태였다. 
관리국의 복도를 거닐며, 비형은 새로 영입된 하급 도깨비들이 교관을 따라 줄지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새로 태어난 도깨비들. 
그들은 지부의 교육센터에서 기초 교육을 이수하고, 자신만의 채널을 할당받아 이야기꾼으로 거듭난다. 
 
“성좌들의 흥미가 떨어질 때는 개입을 망설이지 마라. 정해진 메인 시나리오에는 직접 개입이 불가하니, 서브 시나리오를 통해 인물들의 갈등 양상을 격화시키거나 상황을 위험하게 조성하라.” 
“인물 갈등은 성좌들이 짜증 날 상황을 만들면 안 된다. 나쁜 놈은 나쁜 놈으로, 착한 놈은 착한 놈으로. 이분법을 확실히 하라. 그래야 성좌들이 분노를 풀어낼 대상을 쉽게 정할 수 있다.” 
“항상 화신들이 사건의 진행 도중에 있도록 유도해라. 단, 메인이 될 화신을 눈여겨보고 그 화신을 중심으로 사건이 움직이게 만들어라. 단, 지나치게 작위적인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된다.” 
 
교관의 지침들이 들려왔고, 하급 도깨비들은 그것을 메모하기 바빴다. 
비형 또한 한때는 저들 중의 하나였다. 
저렇게 시나리오의 진행 방법을 공부했고, 웃는 법과 말투 따위를 교육받았다. 
너무 낯설지도, 너무 진부하지도 않게. 
시나리오 진행에 절대 방해되지 않을 이야기꾼이 되기 위하여. 
 
“옛날 생각이 나는가?” 
 
곁을 돌아보자, 서울 지부의 지부장인 상급 도깨비 바람이 서 있었다. 
비형은 긴장하며 표정을 바꾸었다. 
바람은 하급 도깨비들 쪽을 바라보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끔찍한 광경이야. 매번 성좌들에게 사이다패스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잘도 지껄이면서도, 정작 도깨비들이 정규 교육에서 이수 받는 것은 저런 내용이라니.” 
“상급 도깨비께서 말씀하시기엔 다소 부적절한 데가 있는 발언이군요.” 
 
그 지침을 만든 게 당신이잖아. 
비형은 속으로 그런 말을 삼켰다. 
바람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아직은 저런 시나리오가 잘 팔리거든.” 
“예외도 있을 텐데요.” 
“있기야 하지. 하지만 그 ‘예외’가 성립하는 것도 저런 평범한 시나리오들이 버젓이 욕을 먹으며 존재하기 때문일세.” 
 
몇몇 하급 도깨비들은 스크린 앞에 모여 서울 돔에서 진행되고 있는 시나리오를 살피고 있었다. 스크린에서는 서울 돔에서 가장 큰 채널에 소속된 화신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형은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그렇다면 죽이는 수밖에 없겠군. 
―유중혁 씨! 안돼요! 
 
전장의 한쪽에서는 유중혁과 이수경이 암흑성 2층에서 대치를 벌이고 있었고. 
 
―젠장, ■■에서는 이런 ■■■ 안 나오지 않냐? 
―나와. 네가 모를 뿐이지. 
 
다른 한쪽에서는 기문진법에 갇힌 김독자와 한수영이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비형은 속으로 침음했다. 
 
‘내가 필터링 되는 정보는 대놓고 말하지 말라고 그렇게나 경고했는데, 젠장.’ 
 
상급 도깨비 바람이 말했다. 
 
“요즘 자네 채널이 인기가 많더군. 서울 지부에서는 어딜가나 모두 자네 채널 이야기뿐이야. 특히 저 화신······.” 
“욕도 많이 먹습니다.” 
“저 정도면 양호한 거지. 어쨌든 궁금증을 유발하고 있지 않은가. 요즘 하급 도깨비들이 존경하는 도깨비 1위가 자네라는 걸 알고 있나?” 
“그것보다 저를 부르신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만.” 
 
다소 무례하게 보일 수 있는 언행이었지만, 비형으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지금 당장 채널로 돌아가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바람이 말이 없자, 비형이 다시 한번 채근했다. 
 
“죄송합니다만, 지금 아홉 번째 시나리오가 마지막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슬슬 채널로 다시 돌아가 봐야······.” 
“바로 그것 때문에 자넬 부른 걸세.” 
 
진지한 바람의 표정을 마주하고서야, 비형은 뭔가 일이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쿠구구구구! 
 
스크린 속에서 폭음이 울려 퍼지며, 본격적인 혈투가 시작되었다. 
강력한 배후성을 지닌 화신들이 대거 전투에 참전하며, 무분별하게 동조율을 올려대고 있었다. 곳곳에서 개연성 후폭풍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만한 강도의 전조가 지속된다면, 분명 이계의 신격들이 개입할 당위를 얻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김독자의 안위도 보장할 수 없게 된다. 
마음이 급해진 비형이 자리를 뜨려는 순간, 바람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성좌들이 자네의 개입을 원치 않네.” 
 
현재 비형의 채널은 서울 돔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다. 
그런데 그런 비형을 서울 지부에 잡아두었다는 건, 이야기하는 바가 매우 명약관화했다. 
 
“서울 지부가 언제부터 성좌들 눈치를 봤습니까?” 
“늘 보고 있지. 하급 도깨비 교육 지침만 봐도 알지 않나.” 
“그건 표면상으로 그런 것 아닙니까? 주요 시나리오 정책에서는······!” 
“다수의 성운들이 이번 시나리오에 불만을 갖고 있네.” 
 
다수의 성운. 
비형은 그들이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바로 알았다. 
 
<올림포스>. 
<베다>. 
<파피루스>. 
······. 
 
<스타 스트림>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성운들이, 이번 시나리오의 진행에 간섭하고 있었다. 
왜? 
사실, 비형도 이유는 알고 있었다. 
 
“저 화신 때문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김독자는, 여전히 한수영과 기문진법 안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고작해야 화신 하나입니다. 시나리오 전체엔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고작해야 화신 하나······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 
“아니, 이젠 화신도 아니지.” 
 
열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기도 전에, 배후성이 없는 화신이 성좌가 되었다. <스타 스트림> 시나리오의 난이도를 고려하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저 녀석은 괴물이 될 걸세. ‘고려제일검’ 사태를 잊은 건 아니겠지? 그런 규격 외의 존재가 또다시 나타나서는 곤란해.” 
 
고려제일검 척준경. 
한반도 최강의 위인급 성좌가 나타난 사건. 
비형 또한 그 당시의 일에 관해 알고 있었다. 
시나리오 균형에 맞지 않는 천부적인 재능 때문에 수많은 원성을 샀던 존재. 막대한 개연성 손실을 감수하고 시나리오에서 ‘배제’했더니, 오히려 엉뚱한 차원에서 살아 돌아와 스스로 ‘성좌’가 된 존재. 
 
“고려제일검은 특별한 경우였습니다. 성좌 김독자는 그자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성좌가 되긴 했지만, 잠재력 자체는 높지 않습니다. 잠재력이라면 벌써 초월좌에 오른 유중혁이라는 화신이······.” 
“알고 있네. 그쪽도 심상치는 않지. 사실 고려제일검과 더 비슷한 것은 유중혁 쪽이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김독자가 더 위험한 걸세.” 
 
비형은 답답한 마음에 소리쳤다. 
 
“성좌들이 가지는 불만이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김독자가 자기 세력에 들어오지 않으니 짜증들이 났겠죠.” 
“······.” 
“하지만 자기들 딴에 이미 조치를 내린 상황이 아닙니까? 10번 시나리오가 채 지나기도 전에 [운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 화신을 옹호하는군.” 
“옹호가 아닙니다! 시나리오의 불공정한 처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자네도 그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닐 텐데.” 
 
비형은 흠칫 놀랐으나 애써 태연한 척했다. 
상급 도깨비 바람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됐네. 애초에 허물을 잡을 생각으로 부른 건 아니니까.” 
 
그 말은 곧, 허물을 잡을 생각이라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는 협박처럼 들리기도 했다. 비형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그럼 왜······.” 
“똑똑한 자네라면 알 텐데. 애초에 이상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나? 왜 성좌들이 벌써 [운명]이라는 과도한 조치를 시행했는지.” 
“······.” 
“[운명]을 사용할 것도 없이, 사실 대부분의 경우라면 예언자들과의 거래를 통해 [미래시]로 시나리오 경과를 엿보면 되네. 그리고 대상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예측해서, 적당히 개연성 눈치를 보면서 야금야금 미래를 바꿔 나가면 되지.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 왜 그럴까?” 
 
비형도 미처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부분이었다. 
미래를 강제하는 힘인 [운명]은 그만큼 성운들에게도 큰 부담을 준다. 
김독자를 제외하고도 강력한 화신들은 많다. 
그런데 왜 김독자만이 [운명]을 강제당한 것일까. 
 
“설마······?” 
 
성운들이 [운명]을 발호했다면, 어쩌면 그것은 [운명]을 발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뜻. 즉, 그것은······. 
상급 도깨비 바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타 스트림>의 누구도, 성좌 김독자의 미래를 볼 수 없었다는 뜻이겠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나도 모르지. 확실한 것은, 많은 성좌들이 김독자가 ■■에 도달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야. 흠, 아직 이건 필터링이군.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의 ‘마지막’에 말이지.” 
 
바람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있네. 만약 이번 일이 끝나면, 자네를 상급 도깨비 심사위에 추천하겠네.” 
 
무려 상급 도깨비 진급 심사가 걸린 일. 
벌써부터 바람이 시킬 일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착잡한 눈으로 화면을 보던 비형은 자기도 모르게 품속의 알을 매만졌다. 
 
 
* 
 
 
“야, 잘 좀 해봐.” 
“알았어.” 
 
종전의 흑염룡 사건 때문인지, 한수영과의 분위기는 조금 미묘해졌다. 
아마 한수영이 계속 쓸데없는 시비를 걸어대는 것도, 본인 역시 이 어색한 기류를 자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이 분위기를 싫어합니다.] 
 
척준경의 힘을 소화하는 데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벌써 네 시간 째. 
나는 설화의 힘을 컨트롤하는 것만으로 진땀을 빼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어머니는 유중혁과 만났을 것이다. 
바닥의 쑥을 야금야금 뜯어 먹어보던 한수영이 말했다. 
 
“근데 네 엄마, 내가 보기엔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진 않던데.” 
“······갑자기 뭔 개풀 뜯어 먹는 소리야?” 
“그냥, 둘이 보니까 사이 별로 안 좋은 거 같아서. 뭐, 내가 남의 가정사에 참견할 건 아니다만······ 어쨌든 자식을 챙기긴 하는 거잖아.” 
“챙기는 것도 종류가 있지.” 
“세상에는 자식한테 아무 관심도 없는 부모들도 많아.” 
 
한수영의 목소리는 무심했기에 더 어둡게 들렸다. 
나는 뭐라 쏘아붙여 주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엄마가 네 얘기 하더라. 너랑 사귀는 줄 아나 보던데.” 
 
한수영이 킥킥 웃었다. 
 
“어머니께서 여자 보는 눈 좀 있으시네.” 
“근데 너보단 유상아 씨가 더 낫다더라.” 
“······그래서 그 아줌마 언제 죽일 건데?” 
 
우리는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 
새삼 한수영의 캐릭터가 얼마나 확실한지 깨닫게 된다. 
요즘은 이 녀석이 다른 사람보다 더 등장인물 같다. 
킥킥대던 한수영이 웃음을 그쳤다.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우리도 꼭 등장인물 같네.” 
 
마치 내 속을 읽은 듯한 그 말에, 왜인지 가슴 한구석이 선뜩했다. 
한수영은 모르겠지만, 그녀는 실제로 언젠가 ‘등장인물’이 될 것이다. 
이성국이 그랬고, 정민섭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등장인물인 사람도, 아닌 사람도 좋아하기에 그게 나쁜 일인지 좋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때를 생각하면, 나도 잘 알 수 없는 기분이 된다. 
왜 나는, 이 녀석이 ‘등장인물’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일까. 
 
“어? 뭔가 변했는데?” 
 
한수영의 말에 나는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척준경이 빌려준 설화의 힘이 드디어 안정세에 접어들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해. 탈출할 거니까.” 
 
나는 힘이 흐트러지지 않게 조절하며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았다. 
척준경의 설화를 빌리는 순간, 머릿속에서 그가 살아왔던 궤적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일검에 천 명을 베고.」 
「이검에 태산을 베며.」 
「삼검에 바다를 가른다.」 
 
그것은 척준경의 삼검식(三劍式)이었다. 
살아생전 같은 상대에게 세 번 이상 검을 휘둘러 본 적이 없다 하여 붙여진 기술명.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격이 오른팔에 깃듭니다.] 
 
기이이이잉! 
 
[팔주령]이 건 백일봉인에 순식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내게 빙의한 척준경의 격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 
겨우 팔주령 하나만 가지고 만든 불완전한 봉인으로는, 결코 척준경의 힘을 억제할 수 없다. 
진짜 백일봉인은 천부삼인 세 개를 다 모은 후에야 효력을 지니니까. 
 
[폭발적인 설화의 흐름이 ‘기문진법’의 공간을 일그러뜨립니다.] 
 
꽈드드드득! 
 
[폭발적인 설화의 흐름이 ‘백일봉인’의 주박을 깨트립니다.] 
 
나는 넘실거리듯 솟아오른 백청강기를 그대로 허공에 쏟아부었다. 
 
제 일식, 일검참천(一劍斬千). 
 
유성우처럼 궤적이 허공을 갈랐고, 그 사이의 공간이 통째로 갈라졌다. 
기문진법도, 봉인도. 
허상조차 베는 압도적인 파괴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수만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위대한 천재가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검술. 오직 파괴만을 위해 만들어진 가장 이상적인 베기. 
완전한 힘의 진체를 본 것도 아닐진대, 오래전 근력 100을 달성했을 때와는 또 다른 해방감이 차올랐다. 
 
이것이, 별들이 가진 힘이었다. 
 
일거에 무너지는 진법 속에 현실의 풍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완전히 미쳐버린 검술이다. 
키리오스의 [전인화]를 얻었을 때만큼이나 욕심이 난다. 
이걸 내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책갈피’가 ‘등장인물’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이 이렇게 아쉬울 데가 없다. 
 
[격의 상승으로 인해 ‘책갈피’ 스킬의 업데이트가 진행됩니다.] 
[새로운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어? 
 
[등장성좌, ‘고려제일검’에 대한 이해도가 아주 미미하게 증가합니다.] 
 
 
 
 
 
< Episode 33. 다시 읽기 (5) > 끝

< Episode 33. 다시 읽기 (6) >
 
 
 
 
 
······뭐? 
나는 들려온 메시지에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성좌’에 대한 이해도가 증가한 적은 없었는데? 
혹시나 해서 [책갈피]를 열어보았지만, 딱히 척준경의 수식언이 목록에 추가되어 있지는 않았다. 
‘아주 미미하게’라는 수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1%도 안 되는 수치가 올랐다는 거겠지. 
그래도 기대감이 생긴다. 
이해도가 계속 오르다 보면, 언젠가 성좌들의 기술도 흉내 낼 수 있는 거 아닐까? 
 
“······이게 뭐야?” 
 
한수영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후폭풍의 전조로 하얗게 물든 하늘이 불온한 기운을 풍기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야였다. 
간헐적인 굉음이 울려 퍼지며 벌판 전체가 지진파로 흔들렸다. 
충돌한 두 군벌이 평원 곳곳에 너부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죽인 것은 서로가 아니었다. 
 
[모두······ 무릎을······ 꿇어라!] 
 
성좌의 진언. 대체 개연성이 얼마나 막장으로 치닫고 있길래 저런 게 막 들려오는 걸까. 
격을 감당하지 못한 다수의 화신들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지만 배후성의 가호를 받는 자들, 그리고 강대한 정신력의 소유자들은 굴하지 않았다. 한수영도 그중 하나였다. 
 
“뭐야!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데!” 
 
한수영이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나도, 그녀와 함께 벌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럴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개판이네. 지금 다 같이 죽자는 건가?” 
 
동조율을 한계치까지 올린 화신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암흑성] 시나리오가 감당할 수 있는 개연성이 한계치까지 소진되고 있었고, 폭죽이라도 쏘아 올리듯 튀어오르는 후폭풍의 스파크들이 전장 곳곳에서 난무하고 있었다. 
 
―김독자, 듣는 티내지 말고 잘 들어. 이대로라면 넌 죽어.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형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폐허가 된 전장을 바라보았다.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하나뿐이야. 너를 보호해 줄 세력을 찾아. 그렇지 않으면······! 
 
치이잇, 하는 소리와 함께 비형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누군가가 비형의 목소리마저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내게 수백 명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위인급은 물론이고 일부 설화급 성좌들까지, 화신과의 동조율을 극대화한 존재들이 나를 노리고 있었다. 
찌릿찌릿한 공기를 느끼며, 나는 침을 삼켰다. 
척준경이 처음으로 말했다. 
 
[두려운 모양이군.] 
 
“아뇨. 오히려 재밌어졌습니다.” 
 
진심이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이름을 연호합니다!] 
[연호 보너스로 2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척준경이 다시 한번 말했다. 
 
[운명의 벽은 높다.] 
 
“높다 한들 벽이죠. 여차하면 부수면 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하여, 나를 죽일 존재가 누구인지. 
그런 건 모른다. 
하지만 내가 내 [운명]을 모르듯, 놈들도 나를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다. 
 
“갑시다.” 
 
나는 전장을 질주했다. 이번에는 힘을 숨기지 않았다. 
 
“5번 책갈피,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을 선택하겠다.” 
 
책갈피의 발동과 동시에 나는 [전인화]와 [소형화]를 발동했다. 
 
[귀환자의 기술이라. 재미있군.] 
 
척준경의 힘으로 전장을 쓸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발해서는 안 된다. 겨우 삼검식 중 일 검을 사용한 것만으로도, 오른팔이 거의 넝마가 되어버렸으니까. 
나는 [도깨비 보따리]에서 구입한 최상급 체력 회복약을 마구 뿌려대며 전장을 내달렸다. 
 
“모두 비켜!” 
 
내가 지나간 곳에 백청의 궤적이 그려졌다. 
귀환자 키리오스의 힘. 
성좌의 격에 다다라 10레벨을 돌파한 전인화의 힘이 <무저갱 평원>의 전장을 희고 푸른 궤적으로 갈라 놓았다. 
 
“으아아아악! 뭐야!” 
 
마치 해일이 두 쪽으로 갈라지듯이, 서로 엉겨 붙어 싸우던 화신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뭐 때문에 싸우는 건진 모르겠지만, 이쯤들 하시죠.” 
 
아홉 번째 시나리오를 해결하기 위해 랭킹을 올리는 건 좋지만, 이런 식으로 서로 소모전이 벌어져서는 좋을 게 없었다. 
 
“가, 가장 못생긴 왕이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화신들 중에는 나를 기억하는 자들도 있었다. 
 
“누군지 알았으면, 대충 상황 파악들 되셨죠?” 
 
몇몇 화신들이 무기를 놓고 물러났고, 전의가 꺾인 이들은 뒷걸음질을 쳤다. 눈을 빛내며 나를 보는 자들도 있었다. 
 
[상당수의 화신이 당신에게 경의를 품고 있습니다.] 
 
“여덟 번째 시나리오 때는 감사했습니다.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진짜였군요.” 
 
‘최강의 희생양’ 때 내가 희생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자들도 있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자, 그들은 기꺼이 읍을 하며 물러났다. 
 
[당신의 부활 설화가 널리 퍼집니다.] 
[당신의 다섯 번째 설화에 ‘중재하는 메시아’의 업적이 추가됩니다.] 
 
아무래도 이쪽은 <낙원>에서 온 세력들인 것 같은데. 
아마 이들 중에는 유중혁과 일행들도 포함되어 있겠지. 
그렇다면, 반대쪽은······? 
 
“흘흘. 다시 만났구만 젊은이. 그 ‘진법’을 대체 어떻게 빠져나온 거지?” 
 
역시, 이쪽이 ‘방랑자들’이었구나. 
나는 걸어오는 이복순을 향해 물었다. 
 
“왜 서로 싸우고 있는 겁니까?” 
“왜긴, 너 때문이지.” 
 
이복순. 
하얼빈의 저격수를 배후성으로 가졌던 할머니. 
 
“너는 다음 시나리오로 가서는 안 된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이복순은 대답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노강자] 스킬을 통해 근육의 부피가 급격하게 증강한 할머니는, 주변의 화신들을 전차처럼 밀어붙이며 삽시간에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성좌 ‘고려제일검’의 가호로 30분 동안 모든 능력치가 10만큼 상승합니다.] 
[당신의 모든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합니다.] 
 
나는 노인을 공경하는 편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예의범절은 지키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다. 
 
“죄송하지만, 이번엔 안 봐드립니다 할머니.” 
 
‘하얼빈의 저격수’는 특정 성좌에게만 강력하게 반응하는 배후성. 
즉, 지금의 공격은 오롯이 이복순 개인이 쌓은 설화의 힘이다. 
그렇다면 내가 밀릴 리 없다. 
[전인화]에 모든 능력치가 100을 돌파하자, 어마어마한 괴력이 내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꽈아아아앙! 
 
내 주먹과 부딪친 이복순이 피를 토하며 허공을 날았다. 
 
“김독자를 막아!” 
 
방랑자들의 세력은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이 정도나 되는 규모를 가지고서 니르바나의 ‘구원교’에 패퇴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잘 보니, 방랑자들 사이에 이상한 것들도 섞여 있었다. 
 
그르르르! 
 
탁기에 오염되어 마인으로 변한 인간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저 설화를 알고 있었다. 한수영도 짓씹듯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누가 랭킹 3위의 설화를 얻었나 보네.” 
 
암흑성 랭킹 3위. ‘망자들의 왕’ 데이비츠. 
아무래도 방랑자들의 세력 쪽에 그 데이비츠를 해치운 존재가 있는 듯했다. [망자들의 왕]은 전장에서라면 [절망의 낙원] 못지않게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설화다. 
[망자들의 왕]은 죽은 존재를 언데드로 만들어 싸우게 만들기 때문이다. 
 
“달려 김독자! 여긴 내가 뚫는다!” 
 
열댓 개로 증식한 한수영의 아바타가, 동시에 오른손의 붕대를 풀었다. 
녀석의 손에 집약된 검은 에테르는 이내 새카맣게 타오르는 불길로 뒤바뀌어 전장을 휩쓸었다. 
 
화르르르르륵! 
 
나는 한수영이 만든 길을 따라 그대로 달렸다. 
마인들의 무리를 제치고, 달려드는 방랑자들 몇을 떨쳐 냈다. 
곧 [망자들의 왕]을 사용 중인 조영란의 모습이 보였다. 
역시 이 여자가 설화의 주체였나. 
조선제일술사에, 기문진법에, [망자들의 왕]까지. 
어머니는 정말 다재다능한 수하를 두었다. 
있는 대로 마력 회복 물약을 들이켜며 전투에 임하던 그녀는 내 모습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김독자? 어떻게 기문 진법을······. 게다가 [팔주령]의 봉인까지 걸려 있었을 텐데!” 
“고생 좀 했죠.” 
 
이를 꾹 깨문 조영란이 이내 마력을 집약하여 도술을 준비했다. 
아마 현재 암흑성 랭킹 3위는 이 사람인 모양이다. 
 
“그만 물러서세요. 해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럴 수는 없······!” 
 
다시금 기문진법을 사용하려는 기미가 보여서, 나는 결국 숨겨뒀던 기운을 발출했다. 그러자 묶여 있던 척준경의 격이 한꺼번에 풀려 나왔다. 
 
[성좌, ‘조선제일술사’가 크게 당황합니다.] 
 
기문진법의 도술이 한꺼번에 깨져 나가며, 조영란의 입에서 피거품이 울컥 쏟아졌다. 그녀의 등 뒤에서 스파크가 튀더니 이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 기운은······! 당신이 왜 그곳에 있는 거요!] 
 
급기야, 전우치조차 진언을 쏟아냈다. 
그러자 척준경이 대답했다. 
 
[꺼져라.] 
[하, 하지만 당신은 그 자의 배후성도 아닌······!] 
[두 번 말하지 않겠다.] 
[큭······.] 
 
강력한 격의 차이에 짓눌린 전우치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배후성과의 동조가 해제되자 개연성의 여파를 감당할 수 없게 된 조영란이 비틀거렸다. 
그녀가 [망자들의 왕]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전장의 균형도 덩달아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 안돼. 안된다 김독자!” 
 
나는 조영란을 무시하고 달렸다. 
척준경의 가호가 있으니 쏟아지는 공격도 두렵지 않았다. 종합 능력치 세 자리와 두 자리의 차이는 이토록 크다. 
5분 정도를 내리 달리자, 마침내 전장의 중심지가 드러났다. 이 전장에서 가장 강력한 스파크를 터뜨리고 있는 장소. 
한밤임에도 개연성의 전조로 인해 백야가 찾아온 벌판에서, 내가 아는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었다. 
분신에게 뒤를 맡겨놓고 달려온 한수영이 입을 벌렸다. 
 
“······너네 엄마 괴물이네.” 
 
나도 놀랐다. 
설마, 어머니가 저 정도일 줄이야. 
분명 아는 정보는 내가 더 많을 텐데······. 
 
쿠구구구구! 
츠츠츠츠츳! 
 
어머니는 유중혁과 내 다른 동료들의 공격 속에서도 그들과 대등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초월좌를 상대로 저만한 전투를 보일 수 있는 화신은, 내가 알기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등 뒤에서 거대한 곰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가엾은 후손들이여······ 나는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 
 
언젠가 [피스 랜드]에서, ‘야마타노 오로치’가 저와 같은 형태로 강림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시조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강림시킨 것이었다. 
한수영은 [피스 랜드]의 악몽이 떠오르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저런······ 개연성이 부족할 텐데?” 
“팔주령 때문이야.” 
 
어머니의 손에서 환하게 빛나는 천부삼인 [팔주령]. 
부족한 개연성을 저 강력한 성유물이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싸우기 싫다면서 자꾸 때리는 건 뭔데! 으아앗!” 
 
거대한 곰의 그림자가 한바탕 벌판을 휩쓸자 이지혜와 이현성의 신형이 밖으로 튕겨 나갔다. 정통으로 맞아서는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는 파괴력. 잘못 달려들었다간 낭패만 볼 상황이었다. 
 
“독자 씨!” 
 
유상아가 제일 먼저 나를 알아보았고, 다른 일행들도 반색하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정희원이 먼저 소리쳤다. 
 
“독자 씨 어머님이랑 대화 좀 해봐요!” 
“형, 저 사람 진짜 형네 엄마에요? 유승이가 아까······.” 
“독자 씨, 이대로 가다가는······!” 
 
한 사람씩 말해도 모자랄 판에 한꺼번에 대화가 쏟아지니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유중혁이 다가왔다. 
 
“너희 어머니께서 내가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군.” 
 
 
 
 
 
< Episode 33. 다시 읽기 (6) > 끝

< Episode 33. 다시 읽기 (7)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죽이지는 마.” 
“······제압은 해야 한다. 저 여자는 협력할 생각이 없어.” 
 
나는 피로 흠뻑 젖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그녀가 흘린 피인지, 아니면 타인의 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계인 것은 명백했다. 
간당간당한 개연성으로 어떻게든 승부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체력은 이미 바닥이 났을 것이다. 당연한 결과였다. 
 
그녀는 혼자였고, 이쪽에는 유중혁이 있었으니까. 
 
[피스 랜드] 때였다면 모를까, 초월좌가 된 유중혁은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하다. 아무리 설화급이라고 해도 그림자만으로는 무리다. 최소 진체의 일부가 강림하지 않으면, 초월좌를 제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그만한 개연성은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침을 삼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선택에 주목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만행을 지켜봅니다.] 
 
나는 일행들을 내버려두고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이제 그만두세요.” 
 
[‘제4의 벽’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대체 왜 그렇게 나를 막는 건데요?” 
 
성좌의 그림자에 묻힌 어머니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눈과 입만이 드러난 모습.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있어도 결코 닿지 못하는 존재. 교도소에 있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언젠가부터 이것이 우리의 거리가 되었다. 
 
“말해도······ 들어주지 않을 거······.” 
 
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면서까지, 대체 왜. 
동료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부디,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하길 바라는 듯한 눈빛들. 나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한 번. 딱 한 번만 들어줄 테니까, 말해봐요.” 
 
나는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놀랐다. 
 
“제대로 이야기를 해보라고요.” 
 
내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줄은 몰랐다. 
스스로도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을, 쥐어 짜내듯 내뱉었다. 
어머니의 눈빛이 흔들렸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는 없잖아요?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나한테도 말해달라고요. 대체 왜 날 막는지! 어머니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무엇인지! 뭐라도, 뭐라도 좋으니까!” 
“내가, 말하면······.” 
 
툭 치면 울음이 쏟아질 것 같은 그 눈을 보는 순간, 나는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가 이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의 자식이기에,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막는 이유는, 어머니가 에세이를 쓴 이유와 같다는 것을. 
 
상처받을 것이고. 
부서질 것이고. 
지난 삶이 망가질지도 모른다. 
 
“말해봐요.” 
 
길었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이미 예상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토록 무수한 성좌들의 암시가 있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어머니의 입으로 직접 그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것이 내 삶을 완전히 바꿔 놓더라도, 또다시 벽을 흔들어 놓더라도, 들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이야기였고, 어떤 이야기는 페이지를 빠뜨리면 뒷부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윽고 어머니의 입술이 열렸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시나리오 안에서, 우리 모자의 이야기는 단지 우리 모자의 것만이 아니었다. 
 
[성운, <베다>가 당신의 운명을 바라봅니다.] 
[성운, <올림포스>가 당신의 운명을 바라봅니다.] 
[성운, <파피루스>가 당신의 운명을 바라봅니다.] 
 
우리를 위한 신파는, 허락되지 않는다. 
성운들의 메시지가 떠오르며, 허공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내리쳤다. 머리를 양손으로 감싼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고함을 지르며 내달렸다. 
그러나 뻗은 손이 어머니에게 닿으려는 순간, ‘시조의 어머니’의 그림자가 나를 붙잡았다. 
 
[성좌 김독자. 그대는······ 이곳을 지나갈 수 없다.] 
 
쿠구구구구! 
 
[팔주령]에 쩌저적 금이 가더니 이윽고 검은 탁기가 용솟음쳤다. 
하늘이 찢어지듯 맹렬한 폭음이 울리더니 천공 전체가 소용돌이처럼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그 회오리의 중심지에서 포탈이 열리고 있었다. 
 
[그레이트 홀]. 
 
과도하게 뒤틀린 개연성이, 결국 모든 것을 파멸시킬 존재를 소환하고 말았다. 
 
“모두 쳐다보지 마! 눈 감아요!” 
 
홀 사이로 꿈틀대는 촉수를 발견한 순간 나는 소리쳤다. 성좌인 나나 초월좌인 유중혁이라면 모를까, 평범한 화신들은 저런 존재를 보는 것만으로 정신이 붕괴하고 말 것이다. 
 
“······이계의 신격.” 
 
유중혁도 표정이 굳어졌다. 
[그레이트 홀] 너머로 넘실거리는 촉수를 보는 순간, 우리는 확신했다. 
저것은 ‘이계의 신격’이다. 
무려 ‘시조의 어머니’ 급의 존재가 그림자를 희생해 불러낸 신격. 
하늘이 갈라진 자리에서 천둥이 내렸고, 일그러진 시공간이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피스 랜드]때와 비슷했지만, 소환되는 녀석의 급이 달랐다. 
지금 소환되고 있는 것은, 이계의 신격의 진체였다. 
이 정도 규모라면 적어도 삼 분의 일 가량의 진체가 소환될 것이다. 
신격의 진체(眞體). 
그것은 그림자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격이다. 
 
“유중혁! 지금 막지 않으면―” 
“이미 늦었다. 너나 내가 막을 수 있는 수준을 넘었어.” 
 
그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전신이 부르르 떨려왔다. 
성좌의 격을 갖춘 내가 그 정도였다. 
 
[‘제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제4의 벽’ 덕분에 조금씩 떨림은 가라앉았지만, 두려움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 저 [그레이트 홀] 너머에 있는 존재는, 지금의 나와 유중혁이 힘을 합쳐도 이길 수 없는 존재였다. 
그 무력감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지금부터의 싸움은, 화신들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츠츠츠츠츠! 
쩌저저저저적! 
 
“끄아아아아아!” 
 
심지어 위인급 배후성을 가진 화신들조차 존재의 일부를 보는 순간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절명했다. 나와 유중혁은 웅크린 일행들을 보호하며 물러났다. 저 유중혁조차 눈빛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반발하듯 말했다. 
 
“걱정마. 저런 녀석이 강림했는데, 성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 
 
별자리의 연회 때도 그랬듯, 성좌들과 이계의 신격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 시나리오의 균형을 해치는 신격이 진체의 일부로 강림한 마당에, 다른 성좌들이 개입하지 않을 턱이 없었다. 
제천대성이라든가, 우리엘이라든가, 조금 못 미덥지만 흑염룡 녀석도······. 
 
쿠구구구! 
 
그러나 진체의 일부가 상당 부분 넘어오도록, 성좌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유중혁이 짓씹듯 말했다. 
 
“······이번 생은 여기까지인지도 모르겠군.” 
 
나로서도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이계의 신격이 이곳에 강림했는데, 누구도 우릴 도우러 오지 않는다고? 
 
[일부 성좌들이 이계 신격의 강림에 경악합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일부 성운들의 횡포에 불만을 표출합니다!] 
 
······뭐?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성운 <파피루스>에게 적의를 표출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성운 <베다>에게 송곳니를 드러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성운 <올림포스>의 만행에 분개합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그렇구나. 이 빌어먹을 상황은. 
 
[한반도의 모든 성좌들이 당신이 어떤 성운을 고를지 궁금해합니다.] 
 
모두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메시지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다수의 성운들이 당신이 자신들의 설화를 계승하길 원합니다.] 
[해당 설화를 계승하게 되면, 당신의 존재는 강제로 해당 성운에 귀속됩니다.] 
. 
. 
[성운, <올림포스>가 당신이 ‘번개의 사육제’를 계승하길 원합니다.] 
[성운, <베다>가 당신이 ‘뇌전의 인도자’를 계승하길 원합니다.] 
[성운, <파피루스>가 당신이 ‘태풍 늑대의 주인’을 계승하길 원합니다.] 
. 
. 
[성운들이 당신에게 마지막 선택을 제안합니다.] 
[한반도의 모든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을 지켜봅니다.]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나는 성좌들을 좋아할 수가 없다. 
 
번개의 사육제. 
뇌전의 인도자. 
태풍 늑대의 주인. 
 
모두, 자신의 친인척을 살해하는 역사를 가진 성좌들의 설화였다. 
동시에, 각 성운에서도 강력하기로는 손에 꼽는 설화들. 
아마 저것을 계승한다면, 나는 성운들의 개연성을 빌어 이계의 신격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여기서 죽겠지. 
 
유중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듯한 그 눈빛에, 내가 말했다. 
 
“······유중혁. 우리 성운 만든 거 기억하지? 김독자 컴퍼니.” 
 
단순히,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성운에 소속되면 모든 것이 끝이다. 
지금의 내 격으로는 놈들과의 불공정 계약을 이겨낼 방법이 없고, 그렇게 되면 나는 영원히 이야기의 결말에 도달하지 못한다. 
 
“······아직도 그딴 이름을 쓰고 싶어하는군.” 
 
인상을 찌푸린 유중혁이, 내 곁으로 성큼 다가와 검을 뽑았다. 
 
“성운 이름은 내가 정한다.” 
 
어쩌면, 그것이 유중혁 나름의 농담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난다. 곁에서 느껴지는 초월좌의 기운. 내 가늠자를 한참이나 뛰어넘은 존재가 앞에 현현되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시나리오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같은 지평선에 섰다는 느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밤하늘의 별들을 향해 선언했다. 
 
“나는 네놈들 따위가 내린 운명에 굴하지 않아.” 
 
그 숨죽인 시선들을 향해, 나는 검을 겨누었다. 
 
“내 이야기는 내가 정한다.” 
 
그러자, 어디선가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마치 하찮은 벌레의 선언을 비웃는 듯한 우주의 속삭임. 
 
―불행한 성좌여. 
―너는 네 손으로 아버지를 죽일 것이고. 
―어머니를 파멸시킬 것이며. 
―소중한 것들의 몰락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나는 여전히 강림 중인 이계의 신격을 바라보았다. 
저것이 강림을 끝내면, 이 [암흑성] 2층은 완전히 지워질 것이다. 
[피스 랜드] 때와는 다른 상황이다. 
이곳에는 제자가 위기에 빠졌다고 달려와 줄 새침데기 사부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안에는, 나만큼이나 [운명]이라는 말에 진저리를 치는 한 성좌가 함께 있다. 
 
[몇백 년이 지나도 하는 짓이 변하질 않는구나. 씹어 처먹을 새끼들.] 
 
고오오오오! 
 
내 안에 빙의한 척준경이 존재감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위인급 최강인 척준경이 이계의 신격에 대적할 수 있을지, 거기까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믿는 수밖에 없다. 
척준경은 ‘이계의 신격’에 절반쯤 먹힌 ‘시조의 어머니’에게 소리쳤다. 
 
[‘시조의 어머니’시여! 왜 이계의 신격들과 거래한 겁니까?] 
 
깊고 웅혼한 분노가 담긴 목소리였다. 
 
[언제부터, <홍익>이 그토록 싸구려가 되었습니까?] 
 
그러자 놀랍게도, ‘시조의 어머니’가 답했다. 
 
[내가 거래를 한 것은······ ‘이계의 신격’들이······ 아니다.] 
[그럼 이 상황은 대체 뭡니까?] 
[미안하다. 다른 수가··· 없었다. 한반도의 시나리오를 지키려면······ 이 수밖에 없었다. 저 화신은······ 이곳에 있어야 한다. 저 자는 한반도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성운>들이······.] 
[설마, 다른 <성운>들과 거래한 겁니까?] 
 
대로한 척준경이 소리쳤다. 
 
[아직도 그 작은 땅덩이에 집착해서, 이젠 후손마저 배반하는 겁니까?] 
[너는 모른다. 너는······.] 
[대체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창세신들은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 왜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그분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겁니까?] 
[창세신들께서는······.] 
 
그러나 ‘시조의 어머니’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다음 순간, 내 안의 척준경이 하늘을 오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밤하늘은 대답하는 대신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특정 성운들이 누구든 ‘고려제일검’을 돕는 성좌는 앞으로 자신들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자 마법처럼, 밤하늘의 간접 메시지들이 고요해졌다. 
간간이 우리엘과 제천대성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들 역시 이해관계나 특수한 이유 때문에 개입할 수 없는 듯했다. 
척준경은, 나의 눈으로 그런 밤하늘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 침묵에 섞인 폭발적인 감정을 나는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척준경의 격노와 슬픔. 한과 설움. 그리고······ 결단까지. 
 
[너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척준경이 나를 향해 말했다. 
 
[이 빌어먹을 세계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자들이, 고작 너 하나를 두려워하고 있으니.] 
 
“······이제 죽게 생겼는데 자부심이 무슨 소용입니까.” 
 
[너는 죽지 않는다.] 
 
단지 말뿐이었지만, 성좌에게는 그 ‘말’이 곧 존재였다. 
운명을 거스르는 부표를 꽂듯, 척준경이 쌓아온 모든 설화가 내 존재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너를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 
 
 
 
 
 
< Episode 33. 다시 읽기 (7) > 끝

< Episode 33. 다시 읽기 (8) >
 
 
 
 
 
온몸에서 척준경의 설화가 용솟음치기 시작하자, <스타 스트림> 곳곳에 흩어진 척준경의 이야기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좋은 설화는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존재의 격을 높여준다. 
 
[설화, ‘용의 피를 이은 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설화, ‘일검에 군세를 물린 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설화, ‘전장의 학살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 
 
「놈은 태생부터 장사야. 용의 핏줄을 타고 태어났다고.」 
「“척준경이다! 척준경이 나타났다!”」 
「“그가 홀로 36명의 적장을 베었습니다.”」 
 
척준경의 출생 무렵부터 지금까지. 
세간에는 ‘시나리오’라고 알려지지 않았으나 실은 ‘시나리오’의 일부였던 역사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설화, ‘시나리오의 유배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놈은 너무 강해. 이 시나리오에서 유배시켜라.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다른 세계로 보내버려.”」 
 
흘러가는 역사를 보며 나는 척준경처럼 분노했고, 슬퍼했고, 기뻐하거나 좌절했다. 그 한바탕 감정의 굴곡을 겪고 나자, 굴곡은 곧 척준경의 얼굴이 되었고, 탄탄한 몸이 되었다. 한 번도 척준경을 본 적이 없음에도, 나는 이제 누구보다 척준경을 잘 알 것 같았다. 
 
이 이야기가, 바로 척준경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까?” 
 
[글쎄. 어째서일까.] 
 
척준경은 빙의의 대가로 [간평의]의 별자리 네 개를 가져갔다. 
하지만 지금 그가 내게 해주는 것은 고작 별자리 네 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떤 성좌도, 자신의 설화 밑천을 화신에게 공개하진 않는다. 
게다가 척준경은 내 배후성도 아니었다. 
 
[나도 너와 같았다.] 
 
척준경의 설화 중 하나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설화, ‘운명과 맞서 싸우는 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놈에게 [운명]을 씌워라. 녀석은 여기서 죽어야 한다.”」 
 
떠도는 성좌들의 목소리에, 나는 아연해졌다. 
척준경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설마 나와 같은 [운명]에 관한 것일 줄은 몰랐다. 오래전, 척준경 또한 성좌들에게 나와 같은 짓을 당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막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보았다. 
 
[설화, ‘운명과 맞서 싸우는 자’가 시작됩니다!] 
 
척준경의 설화와 같은 설화. 
척준경이 웃었다. 
 
[지금 네가 업은 운명과 같은 크기는 아니었다. 내게 그 빌어먹을 짓을 한 성운은 하나뿐이었으니까.] 
 
척준경이 나의 눈으로 세계를 보며 말했다. 
 
[그때 나는 <홍익>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지금도 종종 생각한다. 그때, 어떤 성운의 도움도 받지 말았어야 한다고.] 
 
웅혼한 척준경의 기상이 품속에서 터져 나왔다. 
 
[내가 너를 돕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나의 손으로 검을 쥐었고, 나의 발로 기수식을 취했다. 
 
그으으아아아아아······. 
 
‘시조의 어머니’를 거의 삼켜버린 이계의 신격이 포효를 터트렸다. 
척준경도, 그에 맞춰 기운을 발출했다. 
내 손에 쥐어진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거센 울음을 토했다. 
 
[좋은 검이군.] 
 
마치 그 말에 호응하듯 흔들리는 검신. 
마력이 밑 빠진 독의 내용물처럼 줄어들더니, 순수한 에테르의 입자가 검극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기이이이잉! 
 
무려 십 미터가 넘는 길이의 에테르 블레이드. 
나는 그 가공할 힘에 전율하면서도, 주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잠시 빌리겠다.] 
 
내 몸에 완전히 빙의한 척준경이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양손으로 쥔 채 내달리기 시작했다. 
종합 능력치 100의 스펙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과부하. 전신의 뼈마디가 삐걱거렸고, 내딛은 지면이 폭발하며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이런 힘이라면 무엇이든 벨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허공으로 훌쩍 도약해 적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옅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것은 ‘인간’의 세계에서 살아온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저렇게 거대한 것을, 죽일 수 있을까. 
 
[그레이트 홀] 너머로 나타난 ‘이계의 신격’은 그 크기만으로 상상을 초월했다. 족히 일 킬로미터는 될 듯한 몸통의 지름. 그 몸통에 들러붙은 열두 개의 다리는 하나하나가 수십 미터의 지름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오분의 일도 채 넘어오지 않은 녀석의 크기가 그 정도였다. 
저런 녀석이 다 넘어온다면, 대체 누가 놈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내 절망을 읽었는지 척준경이 웃었다. 
 
[나는 척준경.] 
 
마치 세상을 향해 들으라는 듯. 
혹은, <스타 스트림> 전체에 선언하는 듯한 말이었다. 
 
[한반도 최강의 무장(武將)이다.] 
 
그리고 검이 움직였다. 
내가 하고 있음에도,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순간이 있다. 
내겐 척준경의 검술이 그랬다. 
 
제 이식, 이검참산(二劍斬山) 
 
척준경의 이검이 움직였다. 인간을 베기 위한 검이 아니었다. 괴수를 베기 위한 검도 아니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자연(自然)을 베기 위한 검이었다. 
십 미터를 넘는 칼날이 연달아 두 번을 내리그었다. 
거대한 내장 같은 것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퍼거거거거거걱! 
 
줄줄 흐르는 것은 피라기보다는 어둠에 가까워 보였고, 어둠이라기보다는 아주 작은 활자(活字)에 가까워 보였다. 나는 그것이 이계의 신격이 가진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계의 신격도, 결국 존재 방식은 성좌들과 같은 것이다. 
 
그아아아아아아아! 
 
비명과 함께, 신격의 촉수가 몸통과 분리된 채 지상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마치 초대형 빌딩이 낙하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경악한 화신들이 사방팔방으로 대피했고, 나는 다른 의미로 경악했다. 
인간이 저런 것을 자를 수가 있구나.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을 까마득히 넘어선 한 존재에 대한 경외. 
그러나 경악에 이어 찾아온 것은 끔찍한 통증이었다. 
 
츠츠츠츠츠츳! 
 
“허, 허억······ 크으으으으읏.” 
 
신음을 참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고통. 
전신에 몰아치는 후폭풍의 격류. 
나는 수십만 볼트에 감전된 사람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며 침을 흘려댔다. 
검을 휘두른 손의 뼈마디는 작살나 버렸고, 정신은 압착기에 짓눌린 벌레처럼 쪼그라들고 있었다. 강력한 힘에는 커다란 책임이 따르고, 이 세계에서 그 책임의 이름은 개연성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성좌, ‘고려제일검’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척준경이 개연성을 나눠서 감내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의 힘을 감당하기에는 내 존재가 너무 연약했다. 척준경이 탄식했다. 
 
[생각보다 약골이구나! 성좌가 되었기에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줄 알았건만······.] 
 
당신이 너무 무식하게 강한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말문이 떨어지지 않았다. 
 
“커헉! 허억! 허억! 허억!” 
 
나는 음식물을 토해내는 대신 전류들을 마구 토해냈다. 
몇 분간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쉰 후에야, 나는 간신히 개연성의 폭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고개를 들자, 척준경이 만든 풍경이 보였다. 
 
산을 베는 검. 
 
척준경은 방금 그 공격으로, 열두 개의 다리 중 두 개를 넝마로 만들었다. 말하자면 두 개의 산을 베어버린 셈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은 산은 열 개가 넘었고, 심지어는 놈의 몸통도 남아 있었다. 척준경의 목소리가 어두웠다. 
 
[······부족하군. 처음으로 삼검 이상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삼검 이상도 있습니까?” 
 
[아직 써본 적은 없다만······ 지금 너의 상태로 봐서는 내가 삼검을 쓸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계의 신격의 소환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이미 개연성의 저울이 거의 맞춰졌을 텐데도 계속 이 세계로 진체 소환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방금의 일격으로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저 녀석과 협상할 수는 없겠습니까?” 
 
[협상? 저놈들과 무슨 협상을 한단 말이냐.] 
 
“저들도 신격이니까······.” 
 
내 말의 진의를 눈치챈 척준경이 말을 끊었다. 
 
[너의 어미를 구하려는 것이라면 포기해라. ‘시조의 어머니’조차 그림자를 먹힌 상황이다. 네 어미의 영혼이라면 진즉에 흩어져 버렸을 것이다.] 
 
“아직일 겁니다. 저 이계의 신격은 그런 식으로 포식하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마치 저 ‘이계의 신격’을 알고 있는 듯한 말투구나.] 
 
척준경은 모른다. 내가 정말로 저 ‘이계의 신격’을 알고 있다는 것을. 
나는 녀석의 외형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열두 개의 거대한 촉수와, 짙은 안개에 뒤덮여 잘 보이지 않는 몸체. 
마치 거대한 운하를 연상시키는 그 몸통은, 보는 것만으로도 우주적인 경외를 불러일으켰다. 틀림없다. 저놈은 유중혁이 136회차에서 맞서 싸웠던 바로 그 신격이다. 
 
쿠구구구구! 
 
실제로 내가 주저앉아 호흡을 고르는 사이 앞으로 나선 유중혁이 또 다른 촉수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초월좌의 힘에 [거신화]까지 사용하자, 유중혁의 외형은 거의 반신이 강림한 것처럼 보였다. [파천강기]의 힘이 [파천검도]의 궤적을 타고 촉수 위에 작렬하자, 육중한 촉수가 고통스럽게 꿈틀거렸다. 
 
콰직! 콰지직!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유중혁은 이계의 신격에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아직 그 수준은 척준경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척준경은 진심으로 감탄한 목소리였다. 
 
[마치 전성기의 나를 떠올리게 하는구나. 저 정도 재능이라면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나를 따라잡을지도 모르겠군······.] 
 
유중혁은 촉수의 움직임을 피하며 촉수 하나의 삼분의 일 정도를 곤죽으로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전력을 때려 부은 일격에도,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훌쩍 물러난 유중혁이 이를 갈며 숨을 토했다. 
 
“김독자, 저놈은 [꿈을 먹는 자]라는 녀석이다. 2회차에서 만난 적이 있다. 저놈에게 먹히면, 평생을 놈의 아공간 속에 살면서 설화를 적출당하게 된다. 절대로 놈의 입속에는 들어가지 마라.”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지만, 나는 의뭉스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유중혁과 내가 정신없이 회복약을 들이키는 사이, 이계의 신격의 소환 속도도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이제 놈의 진체는 거의 삼분의 일 정도가 소환되었다. 
 
그와아아아아! 
 
소환된 촉수들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자, 주변 수백 미터가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다. 비명을 지르던 화신들이 촉수에 맞아 육포가 되었다. 
[꿈을 먹는 자]는 ‘위대한 옛 존재’급의 신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주적 신격이다. 지구의 설화급 성좌들도 힘을 합치지 않으면 놈을 상대할 수 없었다. 척준경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완전히 강림하게 되면 내 힘으로도 무리다. 지금 공격해야 한다.] 
 
하지만 상황은 우리에게 조금도 유리하지 않았다. 
 
츠츠츠츠츳! 
 
척준경이 다시 설화를 끌어 올리는 순간 몰아친 스파크가, 내 심장을 옥죄어왔던 것이다. 
 
[빌어먹을 개연성은 한 번도 도와주질 않는군.] 
 
이계의 신격이 소환되고 있음에도,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개연성은 이게 전부였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할당된 개연성을 대신 사용하고 있다는 것. 
그게 누구일지 구태여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나는 피가 흐르도록 입술을 깨물며 외쳤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삼검식을 쓰십시오!” 
 
[자칫하면 네 존재가 사라질 수도 있다.] 
 
“기회는 이번 한 번뿐입니다. 유중혁. 이번엔 너도 힘을 합쳐라.”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회복된 오른팔로 다시 한번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츠! 
 
달리는 걸음마다 개연성의 스파크가 몰아쳤다. 
버틸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이번에는 정말로, 존재가 폭풍 속에 짓이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야 했다. 늘 그렇게 해왔으니, 이번에도 해야 한다. 
 
“커허허헉······.” 
 
그러나 열 걸음을 채 달리기도 전에, 개연성이 다시 한번 발목을 잡았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반동이 컸다. 
역시 나 혼자로는 무리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누가 나를 도울 수 있단 말인가. 
[절대 왕좌] 때와는 달랐다. 
지금 나를 돕는 성좌는, 반드시 거대 성운들이 적이 되고 말 테니까.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를 옥죄던 스파크의 양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충무공 이순신. 
한반도의 위인급을 이끌고 있는 그가 나의 개연성에 힘을 보탠 것이다. 
척준경은 약간이지만 감동한 투였다. 
 
[충무공. 세간에서는 나보다 그대가 설화급에 더 가깝다는 이야기가 있었지.] 
 
[성좌, ‘해상전신’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뭐, 좋다. 그 얘긴 차차 하기로 하고······ 그보다 더 없는가? 저 버러지 같은 신격에 맞설, 용기 있는 성좌가 더 없느냔 말이다!] 
 
그러나 하늘은 잠잠했다. 
유일하게 움직인 충무공을 제하고는, 누구도 나의 개연성을 함께 부담하지 않았다. 그러자 노한 척준경이 일갈을 터트렸다. 
 
[대머리! 너도 빨리 와서 도와라! 이러고도 네놈이 의병이란 말이냐!]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고개를 숙입니다.] 
 
[빌어먹을 애꾸 새끼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것이냐!] 
 
[성좌, ‘외눈 미륵’이 자신의 안대를 불끈 쥡니다.] 
 
자신의 개연성이 소모되고, 격이 손상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채로, 척준경은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네놈들은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그 알량한 수식언 속에 숨어 있는 것이냐? 그러고도 네놈들이 ‘성좌’란 말이냐? 의병? 미륵? 왕? 네놈들은 그 안에 머무를 자격이 없다!] 
 
[한반도의 성좌들이 ‘고려제일검’의 말에 침음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움직이는 성좌는 없었다. 
그때, 멀리서 비틀거리는 인물이 보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쪽을 향해 손을 뻗는 여자. 
그녀는 민지원이었다. 
다행히 살아있었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성좌, ‘매금지존’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메시지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신라 출신의 성좌들이 당신의 개연성을 함께 부담합니다.] 
 
내가 도와줬던 신라의 약소 성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턱없이 미미한 수준의 도움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 역시 성좌였다. 
 
[성운 <베다>가 ‘매금지존’에게 분개합니다.] 
 
츠츠츠츠츳! 
 
[성좌, ‘매금지존’이 과도한 개연성을 소진하여 깊은 잠에 빠집니다.] 
 
성좌가 눈을 감는다는 것은 존재에 커다란 손상을 감수했다는 뜻. 
그럼에도 ‘매금지존’의 의지는 다른 한반도의 성좌들에게 영향을 끼친 듯했다. 
찌릿, 하는 느낌이 들더니 시선이 하나 둘 내게 모이기 시작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에라 모르겠다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시작은 사명대사였다. 
 
[성좌, ‘외눈 미륵’이 눈을 반만 뜬 채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흥무대왕’이 욕설을 퍼부으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조선제일술사’가 한숨을 내쉬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를 뒤덮던 스파크가 순식간에 줄어들고 있었다. 
몰개연이, 비로소 개연으로 바뀌고 있었다. 
 
[성운 <올림포스>가 ‘해상전신’을 적으로 선포합니다.] 
[성운 <파피루스>가 한반도의 성좌들에게 격노합니다.] 
 
······. 
 
고작 나 하나 때문에, 한반도 전체가 전운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척준경이 웃었다. 
 
[내가 이래서 이 땅을 저주하면서도, 떠날 수가 없지. 몇 명만 뒈지면 되는 걸 다 같이 죽자고 덤벼들다니······.] 
 
츠츠츠츠츳! 
 
[이만하면 최소한의 준비는 된 것 같군.] 
 
마침내, 척준경의 삼검식이 준비되었다. 
 
 
 
 
 
< Episode 33. 다시 읽기 (8) > 끝

< Episode 33. 다시 읽기 (9) >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꽉 쥐었다. 
팽창한 근섬유 하나하나에 강대한 설화의 힘이 깃들었다. 마치 용의 피가 흐르는 것처럼 심장이 뜨겁게 달구어졌다. 
 
[힘이 쌓일 동안 움직여라. 틈을 만들어야 한다.] 
 
유중혁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내가 최대한 시간을 끌겠다.” 
 
투콰콰콰콰! 
 
아까보다 훨씬 활발해진 촉수의 움직임에, 지상은 거의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최대한 놈의 거체를 일행들로부터 떨어트리기 위해 애썼다. 
 
“하아아압!” 
 
웬일로 답지 않은 기합까지 내지른 유중혁이 전방을 향해 마력을 발출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꿈을 먹는 자]의 배후로 돌아갔다. 최대한 촉수를 거스르지 않고 본체를 타격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해서였다. 지름만 1km가 넘는 거체여서, 어디가 약점인지를 찾는 것도 일이었다. 
 
츠츠츠츠츳! 
 
그동안에도 척준경의 힘은 고스란히 쌓이고 있었다. 
일검식과 이검식도 충분히 강했는데,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대한 거력(巨力)이 오른 팔로 모여들고 있었다. 
정말 이게 ‘위인급 성좌’의 힘이 맞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젠장, 역시 이 육체로는 이만큼이 한계로군. 개연성의 지원을 받아도 이 정도인가.] 
 
힘의 축적이 거의 끝났는지, 척준경이 투덜거렸다. 
 
[기고만장하지 마라. 이 정도 힘으로도 저 촉수들을 모두 베고 본체에 타격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니까.] 
 
“그렇겠죠. 상대가 이계의 신격이니까요. 작전은 있으십니까?” 
 
나는 조금 기대하며 물었다. 그토록 자신 있게 호언했으니, 척준경에게 대책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잠시 생각하던 척준경이 대답했다. 
 
[일단 삼검식을 먹여 보고, 놈이 제풀에 지쳐 돌아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지.] 
 
“······절 지켜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넌 지켜준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했으니까.] 
 
“한반도 최강의 무장이 천운에 기대고 있는 상황인데요?” 
 
기이이이잉! 
 
순간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샘솟아서, 나는 움찔 놀라고 말았다. 화가 난 건가? 
그러나 척준경의 기세는 평온했다. 
 
[나는 ‘지평선의 악마’와 알고 있다.] 
 
지평선의 악마. 
그 이름에 나는 혈전을 벌이는 유중혁 쪽을 흘끗 살폈다. 
아무래도 녀석은 이쪽 대화를 들을 여유가 없는 듯했다. 
척준경이 계속해서 말했다. 
 
[녀석에게 부탁해서 너를 다른 세계로 보내 주마. 9번 시나리오는 구역 이탈 제한이나 시간제한이 없으니, 거기로 피신하면 한동안은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후는 네가 알아서 해야겠지만.] 
 
“대체 어떤 악마이기에 그런 힘을 가진 겁니까?” 
 
[악마라기보다는······ 신격에 가까운 놈이지. 자세한 건 알 필요 없다. 너는 놈과 만나지 않기를 기도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설마 척준경이 ‘지평선의 악마’와 아는 사이일 줄이야······. 
모른 척 듣고 있었지만, 나도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평선의 악마’는 41회차의 신유승을 이곳으로 보낸 장본인이자, 도깨비들에게 ‘재앙’을 공급한 유통책이니까. 
척준경이 대체 어떻게 그 악마와 알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척준경이 시나리오에서 유배되었을 때 도움을 준 존재가 그 녀석이 아닐까 싶었다. 
 
“혹시 다른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피신시켜주실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많은 개연성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리고 도깨비 놈들이 그걸 허락할 리도 만무하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곳에 남은 사람들은 모두 죽습니다.” 
 
내가 이 세계에서 달아나면,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꿈을 먹는자]에게 삼켜져 설화를 빨리는 이야기 기계가 되고 말 것이다. 척준경이 혀를 찼다. 
 
[거기까진 내가 알 바 아니지. 다른 놈들 걱정하지 말고 네 목숨이나 잘 챙겨라. 어차피 인생은 혼자다.] 
 
역시 척준경. 배신을 밥 먹듯이 당하며 살아온 인생이라 인생 철학도 몹시 염세적이다. 
 
쿠구구구구! 
 
[빈틈이다! 달려라!] 
 
나는 [전인화]의 속도를 최대치로 발휘하며 공간을 격하고 날았다. 
도중에 두어 개의 촉수를 지나쳤지만, 여전히 대여섯 개의 촉수가 촘촘하게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보다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위험했다. 
결착을 지을 장소는 여기였다. 
 
“고려제일검.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생각? 무슨 생각? 헛소리 말고 집중해라!] 
 
“솔직히 삼검식으로 놈을 죽이는 게 무리라는 거. 당신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휘이익! 
 
스쳐간 촉수에 바로 아래쪽의 지반이 통째로 가라앉았다. 
아무리 척준경의 가호가 있다 해도 저런 걸 그대로 맞으면 분명 즉사다. 
그런데 촉수가 날 죽이기 전에 척준경의 기세가 날 죽일 판이었다. 
내 격을 짓누르는 척준경의 힘에 나는 반발하듯 외쳤다. 
 
“도발하려 던진 말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내 말에, 척준경이 일순 기세를 늦추었다. 
 
[······그래서? 네놈에겐 무슨 방법이 있다는 거냐?] 
 
“있습니다. 당신이 도와주기만 한다면, 이계의 신격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척준경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계의 신격을 죽인다?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아는 거냐? 놈은 이계의 신격이다. 빌어먹을 <올림포스>나, <베다>의 얼간이들도 꺼리는 놈이란 말이다.] 
 
“다른 신격이었다면 저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꿈을 먹는 자]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들어나 보지. 그 잘난 방법이 무엇인지.] 
 
“어떻게든 놈의 진체에 상처를 입히고, 그 안에 저를 던져 넣으십시오.” 
 
척준경은 당황한 듯, 일순 말이 없었다. 
거대 촉수가 다시 한번 날아오고 있었다. 
 
[그런 짓을 하면 너는 죽는다. 그건 놈에게 통째로 먹히는 짓이다. 아까 저 잘생긴 놈의 이야기를 못 들은 것이냐? 놈에게 먹히게 되면―] 
 
“저는 살아남을 겁니다.” 
 
내가 듣기에도 당찬 확신이었다. 
저 이계의 신격에게 먹히고서 생존을 확신하다니, 필멸자는 물론이거니와 어떤 성좌라도, 그런 확신은 할 수 없다. 척준경은 몹시 격앙된 것처럼 기세를 부르르 떨더니, 입을 열었다. 
 
[······뭔가 수가 있는 것이냐?] 
 
“백 퍼센트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요.” 
 
물론 척준경의 도움으로 ‘지평선의 악마’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 혼자 살아남아 봤자, 내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도피는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일일 뿐이니까. 
그러니, 내가 선택할 방법은 이것뿐이다. 
 
[크흐······.] 
 
꼭 침음처럼 들렸던 척준경의 외마디는, 이내 거대한 웃음으로 변했다. 마치 이 평원을 다 메울 듯한 웃음소리였다.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너 같은 놈의 말을 믿고 저 신격에 대항하는 날이 오다니.] 
 
쿠구구구구! 
 
마침내, [꿈을 먹는 자]의 상반신 소환이 시작되기 시작했다. 
 
번뜩! 
 
세계를 주시하는 첫 번째 눈이 드러났다. 
주변을 볼 수 있게 된 [꿈을 먹는 자]의 시선이 지상에 내리꽂히자, 지금껏 받았던 그 어떤 시선보다도 전율적인 감각이 차올랐다. 
저것과 싸우면 반드시 죽는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도, 저것을 이길 수는 없다. 척준경이 말했다. 
 
[멍청한 성좌야.] 
 
“예.” 
 
[나는 네놈이 마음에 든다. 그러니 죽지 마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달렸다. 촉수의 산을 넘고, 하늘 높은 곳까지 치솟아 올랐다. 
 
츠츠츠츠츳! 
 
[전인화]를 발출하는 내 신형이 지나갈 때마다 밤하늘에 시리도록 푸른 빛의 선이 남았다. 
 
[오라, 이계의 신격이여!] 
 
척준경이 내 손으로 검을 쥐었다. 척준경의 모든 설화가 집약된, 삼검식의 마지막 초식이 발현되고 있었다. 
 
[나 척준경이, 네놈을 베겠다!] 
 
에테르 블레이드가 길어지고 있었다. 
십 미터 길이였던 칼날이 이십 미터로. 
이십 미터였던 칼날이 삼십 미터로. 
내 마력의 역량을 초월해버린 그 힘이, 이야기를 넘어 이곳에 강림하고 있었다. 
 
제 삼식, 삼검참해(三劍斬海). 
 
검을 긋는 순간 나는 알았다. 
이것은······. 
 
머릿속에서, 바다 앞에 선 척준경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이 틀 무렵부터 황혼이 질 때까지, 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척준경. 
그 바다를 생각하고, 전체를 헤아리고, 그 아득한 수평선이 마침내 하나의 ‘대상’으로 보일 때까지 궁구했던 그 모든 시간들. 
하나의 선이 시공간의 균형을 일그러뜨리며 그어졌다. 파도가 갈라지며, 드넓게 퍼진 거해의 파랑이 쪼개지는 듯한 환영이 보였다. 
 
이것은, 바다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검이다. 
 
[성좌, ‘해상전신’이 ‘고려제일검’의 힘에 감탄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인간 성좌의 힘에 순수하게 경탄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고려제일검’에게 큰 흥미를 갖습니다!] 
 
공기를 폭발시키며 직진한 검은 어느 순간 소리마저 삼켜버렸다. 
나는 전신이 통째로 믹서기에 갈리는 듯한 통증 속에서, 검을 휘둘렀다. 
일검, 이검, 삼검. 
그렇게 세 번의 검을 휘두르고 나자, 의식의 퓨즈가 통째로 끊어졌다. 
정말, 잠깐이었다. 
 
[······려라!] 
 
그리고 척준경이 나를 불렀다. 
 
[정신 차려라! 멍청한 성좌야!] 
 
숨을 컥컥대며 간신히 눈을 떴을 때, 허공 위에 넘실대는 몇 가닥의 촉수 무리가 보였다. 그러나 촉수들은 더이상 내가 기억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열두 개의 촉수 중 무려 일곱 개가, 넝마가 된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위인급 성좌 척준경. 
그는 단신의 힘만으로 신격의 촉수들 중 절반을 잘라낸 것이다. 
그럼에도 척준경은 분하다는 듯 이를 갈았다. 
 
[······힘이 부족해서 깊은 상처는 내지 못했다. 바다를 베는 검으로도 놈을 벨 수는 없었구나.] 
 
“아뇨, 충분합니다. 충분히 성공했어요.” 
 
척준경은 성공했다. 왜냐하면, 잘려나간 촉수들의 너머에, 가로로 그어진 거대한 상흔이 보였기 때문이다. 척준경의 삼검식은, 촉수의 바다를 베어내고 놈의 본체에 상처를 입혔다. 
놈의 크기에 비하면 작은 상처였지만, 나 하나가 들어가기엔 충분한 넓이였다. 
고통스러운 울음이 [꿈을 먹는 자]에게서 터져 나왔다. 
 
그아아아아아아아! 
 
저곳으로 달려가야 한다. 
바로 지금. 
놈의 상처가 아물기 전에, 녀석의 상처 속을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이 시나리오를 마무리할 수 있다. 
 
[성운 <베다>의 성좌들이 당신의 역경에 조소를 흘립니다.] 
 
그래야만, 저 빌어먹을 성운들에게 한 방을 먹여줄 수 있다. 
그런데. 
 
[성운 <파피루스>의 성좌들이 당신의 시나리오를 보며 축배를 듭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줘도 꿈쩍도 하지 않는 다리. 
아니, 힘이 들어가는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애석한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아래를 내려다보고서야, 나는 내가 어떤 상태인지 깨달았다. 
무릎 아래로,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프레셔에 압착된 듯 깨끗하게 사라진 다리. 절단면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아마 삼검식을 쓰며 촉수에 깔려버린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거의 다 와서, 이런 상황이라니. 
멀리서, 신격의 상처가 조금씩 수복되는 것이 보였다. 
무릎을 잃은 상태로는 도저히 도약할 수는 없는 거리였다. 
 
“김독자.” 
 
고개를 돌리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비틀거리며 다가온 유중혁은 조용히 내 멱살을 붙든 채 일으켜 세우더니, 그대로 자신의 어깨에 나를 들쳐멨다. 
유중혁이 신격의 상처를 보며 물었다. 
 
“저기에 던지면 되는 거겠지?” 
“······할 수 있겠냐?”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행동으로 모든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유중혁은 허공을 계단처럼 올랐다. 
날아드는 촉수들을 밟고, 때로는 [허공답보]로 자신의 마력장을 밟으면서. 유중혁의 몸에서도 조금씩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의 육체도 이미 한계였다. 하지만 유중혁은 포기할 기세가 아니었다. 
오르고, 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까마득한 상공의 바람이 내 볼을 적셨다. 
허공의 마력장을 디딘 유중혁이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 전방을 살피자, 신격의 상처가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중혁은 망설였다. 
놈은 내 멱살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또 장례를 치러야 하는 건 아니겠지?” 
 
유중혁답지 않은 질문이어서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 인마.” 
“그런 얘기가 아니다.” 
 
유중혁의 표정은 진지했다. 
고도의 바람이 나와 유중혁 사이를 날카롭게 베고 지나갔다. 
나는 잠시 녀석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두 번째 시나리오, 기억하냐?” 
 
옥수역의 지하철. 
걸리적거리는 것을 죄다 때려 부수며 나타났던 유중혁의 모습. 
결과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 회귀자. 
그 침착하던 유중혁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누가 알았을까. 
나와 이 녀석이, 동료가 될 거라고. 
 
그동안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젠 인정해야겠다.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던 일은 현실이 되었고. 
나는 실제로 놈과 함께 시나리오를 헤쳐가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나는 말할 수 있다. 
 
마치, 놈을 처음 만났을 때 그랬듯이. 
씩 웃으며, 우리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식으로. 
 
“그만 이 손 놓고 꺼져. 이 빌어먹을 새끼야.” 
 
 
 
 
 
< Episode 33. 다시 읽기 (9) > 끝

< Episode 34. 먹을 수 없는 것 (1) >
 
 
 
 
 
내 멱살을 잡고 있던 유중혁의 표정이 천천히 변했다. 
예전이었다면 이다음 나는 허공으로 추락했겠지. 
하지만 그때와는 모든 것이 반대였다. 
 
콰아아아아! 
 
나는 떨어지는 대신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유중혁이 있는 힘껏 나를 던진 것이었다. 
멀어지는 유중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죽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는 얼굴.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한 방 먹여줘라, 김독자.’ 
 
대답하려는 순간, 날아든 촉수가 시선을 차단했다.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나를 비껴갔고, 나는 [꿈을 먹는 자]의 본체에 안착했다. 나는 팔의 근력을 이용해 놈의 본체를 붙잡고, 상처를 향해 움직였다. 
 
츠츠츠츠츠! 
 
손이 닿은 것만으로도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감. 
내가 아직 화신이었다면, 벌써 기절하거나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녀석이 강림을 끝낸 상태였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하기도 무섭다. 
 
쩌저저저적! 
 
있는 힘껏 벌린 상처로 나는 몸을 던져 넣었다. 
 
[······미안하군. 나는 함께 갈 수 없는 곳이다.]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척준경의 힘이 스르르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당황하지는 않았다. 
 
스스슷.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과 연결되어 있던 상처 부위가 완전히 닫혔다. 
나는 우주를 부유하는 사람처럼 허공에 떠 있었다. 
[꿈을 먹는 자]의 내부는 새카만 암흑이었다. 
피도, 살도 없는 공간. 
신격은 생명체가 아니니 당연한 일이었다. 
 
둥······ 둥······ 둥······. 
 
어디선가 북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이어서 수군거리는 소리. 누군가가 나를 보는 시선. 공기가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숨을 쉬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아마 이 공간에 진입한 순간, 내 존재 방식마저도 변형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화신들의 비명소리도, 성좌들의 메시지도. 
대신 보이는 것은, 알 수 없는 문자열들과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었다. 
 
이곳은 [꿈을 먹는 자]의 뱃속. 
놈이 지금껏 먹어 치운 이야기들이 모여 있는 장소. 
 
「■■■■■■■······.」 
「#%&^#$^」 
 
개중에는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설화들도 있었다. 
아마도, ‘시조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것들이었다. 
 
「모든 게 내 잘못이다. 이 미련한 역사가 너무 길었구나······.」 
「성운들로부터 이 땅을 지켜야 해. 하지만 이제 <홍익>에는 아무도 없다. 창세신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거지?」 
「환웅······ 환웅이 보고 싶구나.」 
 
그때 작은 불빛을 가진 설화 하나가 내 곁에 다가와 외쳤다. 
 
「넌 뭐야? 여긴 왜 왔어? 도망가······!」 
 
파스슷, 하고 스러지는 불빛. 
고마운 일이었지만, 이제 내게 도망갈 곳은 없었다. 
모든 ‘이계의 신격’들은 먼 외우주에 존재의 근간을 두고 있다. 
진체의 절반이 [암흑성] 2층과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그 내부는 외우주와 직결된 장소. 
그러니 놈의 뱃속인 이곳도, 내겐 외우주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완전한 공허의 세계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직 포식에 대한 욕망. 
[꿈을 먹는 자]가 나를 원하고 있었다. 
 
스아아아아아······! 
 
연무처럼 흩어져 있던 활자들이 일제히 뭉치며 외형을 이루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집채 만한 눈과 입이 생겨났다. 사실 그것이 눈이나 입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인간인 나로서는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놈이 뭐라고 말을 거는 듯했지만, 목소리는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후, 활자들이 부르르 떨더니 이내 말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이야기의 냄새군······.】 
 
두 개의 눈이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이것이 설화급 성좌들조차 두려워하는 이계의 신격의 존재감이었다. 
 
【열등한 시나리오의 존재······ 어찌······ 내 말을 듣느냐······?】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극도로 활성화됩니다!] 
 
[제4의 벽]도 지금까지의 그 어떤 상황보다 활발해졌다. 
내 피부 표면에 벽이 자라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이 적이 위험하다는 뜻이겠지. 
‘위대한 옛 존재’에도 속하지 않는 이계의 신격이 이 정도인데, ‘사나스의 공포’나 ‘고지에서 내려온 공포’, ‘르뤼에의 주인’ 같은 놈들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꿈을 먹는 자. 이계의 위대한 신격이시여.” 
 
【오오······.】 
 
내 말에 놀란 듯, [꿈을 먹는 자]의 활자 입이 꿈틀거렸다. 
놈의 눈에, 나는 벌레조차 아닐 것이다. 그저, 언제든지 지워버릴 수 있는 신기한 장난감일 뿐이겠지. 
 
츠츳, 츠츠츠츳. 
 
내 주변에 강력한 스파크가 튀더니, 주변의 활자들이 언저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뭔가가 내 안으로 침투해오려는 기색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곁에 닿자마자 발작이라도 하듯 튕겨 나갔다. 
[꿈을 먹는 자]가 침음하듯 말했다. 
 
【너는······ 뭐지? 특수한 가호를 받고 있는 존재인가?】 
 
아마 녀석은 내게 정신 침습을 시도한 듯했다. 그러다 [제4의 벽]에 튕겨 나온 거겠지. 
진짜 이 스킬이 없었으면 내 존재는 진즉에 망가져 버렸을 것이다. 
나는 마음을 다스리며 [꿈을 먹는 자]를 올려다보았다. 
미리 말했다시피 136회차의 유중혁도 이놈에게 잡아 먹힌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유중혁은 죽지 않았다. 
즉, 지금 내 밑천은 녀석의 136회차 그 자체인 것이다. 
나는 녀석의 경계를 사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과 이야기를 하러 왔습니다.” 
 
【이야기! 나는 이야기가 좋다.】 
 
곧바로 반응해오는 신격. 
그 가공할 탐욕에 솜털이 비죽비죽 설 지경이었다. 
 
“당신이 먹은 설화들중, ‘이수경’이란 존재가 있을 겁니다. 그녀를 돌려 보내 주십시오.” 
 
거대한 얼굴이 의아하다는 듯 갸웃했다. 
 
【그것은······ 이야기가 아닌데?】 
 
“그 대가로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주겠다는 거지?】 
 
나는 말없이 나 자신을 가리켰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너무나 명백했다. 
나는 지금 이 도박의 판돈으로, 내 존재를 걸었다. 
큼지막한 눈꺼풀이, 천천히 깜빡였다. 
 
【작은 성좌여······.】 
 
“예.” 
 
【지금 나와 거래하겠다는 것인가?】 
 
내가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허공에서 형상들이 나타났다. 
[꿈을 먹는 자]가 먹어치운 설화들로 이루어진 이미지였다. 
 
【곰은 물고기와 대화하지 않지.】 
 
나타난 이미지는 ‘시조의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곰의 형상. 
곰은 미련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더니, 텅 빈 우주를 흐르는 물고기를 낚아챘다. 
그 곰을 보며, [꿈을 먹는 자]가 말을 이었다. 
 
【인간이, 벌레와 협상하지 않듯이······.】 
 
아직 제대로 격을 인정받지도 못한, 외딴 우주의 반쪽짜리 성좌가 우주적 신격과 거래할 수 있을 리 없다는 것.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벌레가 인간처럼 말하고, 인간처럼 생각하고, 인간처럼 행동한다면 그런 존재는 더 이상 벌레라고 부르지 않겠죠.” 
 
거대한 활자로 이루어진 두 눈이, 나를 노려보았다. 
 
【너는······ 나와 거래할 자격이 없다. 나는 언제든 네가 가진 것을 빼앗을 수 있으니까.】 
 
“그럼 왜 빼앗지 않고, 벌레와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겁니까?” 
 
【······.】 
 
쿠구구구, 하는 느낌과 함께 물고기를 먹어 치우던 곰이 나를 바라보았다. 위협적인 곰의 앞발이 당장이라도 나를 내리칠 것처럼 커졌다. 나는 그 곰을 바라보며 말했다. 
 
“곰은 물고기를 먹을 줄만 알지, 맛있게 먹는 법은 모릅니다.” 
 
곰의 앞발이 순간 멈칫했다. 
 
“험한 발로 비늘에 상처를 입히고, 더러운 발톱으로 물고기의 내장을 꿴 후, 허겁지겁 자신의 허기를 채울 따름이죠.” 
 
【······.】 
 
“내가 벌레가 아니듯, 당신도 곰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공간 속의 활자들이 크게 뒤섞이더니, [꿈을 먹는 자]의 얼굴이 기괴하게 변했다. 보통이라면 겁에 질릴 법한 광경이었지만, 원작을 읽은 나는 알고 있다. 
저건, 웃고 있는 것이다. 
놈은 지금 이 상황이 유쾌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설화는 강제로 취하면 그 격이 손상됩니다. 지금 당신이 나를 짓밟고 취하면, 당신은 ‘온전한 이야기’를 얻을 수 없을 겁니다. 최상의 상태로 먹을 수 있었던 이야기를, 당신은 영원히 먹을 수 없게 되는 거죠.” 
 
둥··· 둥··· 둥! 
 
다시 한번 북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맥박 같은 소리. 아까보다 그 간격이 줄어든 소리는, 점점 더 빠른 박자로 울려 퍼졌다. 
 
둥! 둥! 둥! 둥! 
 
역시나 원작을 읽은 나는, 이 북소리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너를······ 먹고 싶어졌다.】 
 
이 소리는, [꿈을 먹는 자]의 허기 그 자체였다. 
나는 침을 삼키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약속만 지켜주신다면, 얼마든지 내어 드리겠습니다.” 
 
스스스스스.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른 활자들이, 이내 형상을 빚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것은 내 어머니의 모습을 띠었다. 
 
【네가 원하는 게 이것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야기도 꽤 흥미로운 구석이 있지. 함께 먹은 성좌의 껍데기보다 더 맛있는 냄새가 나기에 아껴 두고 있었다. 너를 몹시 먹고 싶지만, 이걸 내주기도 아깝구나.】 
 
“허기도 못 다스리는 짐승처럼 굴 생각입니까?” 
 
【벌레의 모욕에 기분 나빠하는 인간이 있던가?】 
 
······빌어먹을 새끼. 
이계의 신격 중에선 격이 낮은 놈이라 그런지 미식이 뭔지 잘 모르는군. 
활자들로 만들어진 입이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너와의 대화는 여기까지다. 나는 너희 모두 먹겠다.】 
 
쿠와아아아아아! 
 
곰이 잡던 물고기의 이미지가 일제히 허공으로 뛰어오르더니, 피라냐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나를 향해 날아왔다. 
도망갈 곳 따윈 없었다. 
다리도 못 움직이는 상태였고, 어차피 도망가 봤자 놈의 뱃속 안일 뿐이니까. 
 
“씨발, 그래.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처먹어라.” 
 
대신 나는 팔을 활짝 벌리며 녀석을 맞이했다. 
 
“대신,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 보라고.” 
 
콰드드드득! 
 
달려든 수백 마리의 물고기들이 내 전신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팔을 뜯고, 다리를 뜯고, 허리와 얼굴을 뜯었다.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지만, 피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흘러나온 것은 활자들이었다. 내가 쌓아온 설화와 역사들이, 놈의 이빨에 뜯겨 새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오오오오······! 이, 이것은?】 
 
천상의 진미라도 맛본 것처럼, 신격이 환희의 비명을 질렀다. 
의식이 흐려질 것 같았고, 머릿속이 마구 뒤엉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버텼다. 
녀석이, 내가 생각한 ‘그 부분’을 먹어 치울 때까지, 버텨야만 했다. 
 
【오오······ 오?】 
 
그리고 다음 순간, 마치 폭포수처럼 내 안에서 뭔가가 터져 나왔다. 
녀석이 뭔가를 건드린 것이다. 
 
쿠구구구구구구!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벽을 두드리는 진동에 반응합니다.] 
 
마침내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 
 
콰콰콰콰콰! 
 
화수분처럼 쏟아지는 활자들이, 급류를 만들며 놈의 뱃속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양의 설화였다. 
 
【너는, 너는 대체 무엇인가······!】 
 
당황한 [꿈을 먹는 자]가 나를 향해 외쳤다. 
하지만 나는 대답할 힘이 없었다. 
이 터져 나오는 설화에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만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나는 눈앞을 지나가는 문장들을 바라보았다. 
 
「다가오는 [꿈을 먹는 자]의 입을 보며, 유중혁은 말했다.」 
 
그것은, ‘멸살법’의 내용이었다. 
 
「“그래, 나를 먹고 싶다면 얼마든지 먹어 봐라.”」 
 
유중혁의 136회차. 
[꿈을 먹는 자]에게 먹힌 유중혁은,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 이건 대체, 이건 대체 무엇인가······!】 
 
나를 대신해, ‘멸살법’ 속의 유중혁이 대답했다. 
 
「“네놈은 알게 될 것이다. 내가 136번의 삶을 반복하며 살았던 감정을 겪게 될 것이다. 그 끔찍한 시간 동안 느꼈던 고독을, 슬픔을, 분노를, 이 빌어먹을 세계에 대한 증오들을, 모두 가감없이 알게 될 것이다.”」 
 
【그, 그으아아아······!】 
 
「“네놈들은 인간을 벌레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그렇다면 지금부터 느껴 보아라.”」 
 
【잠깐, 기다려라······!】 
 
「“그 벌레가 겪었던 고통을. 벌레가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역사를, 벌레의 기분이 되어 똑똑히 느껴 봐라. 그러고서도 나를 계속 먹을 자신이 있다면, 마음껏 먹고 마음껏 취해 봐라!”」 
 
기하급수적으로 쏟아진 이야기들이, 모두 [꿈을 먹는 자]의 위장 속을 폭발시킬 듯 채워갔다. ‘멸살법’에서도, 그리고 내 눈앞에서도. [꿈을 먹는 자]는 이야기를 먹었고, 그 대가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치지지지지직! 
 
뱃속 어딘가에서,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당황한 [꿈을 먹는 자]를 조소하듯, ‘멸살법’이 말하고 있었다. 
 
「우주에서 태어나 일만 팔천 년의 세월을 살아온 [꿈을 먹는 자]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오오오오오오오오······!】 
 
작중의 유중혁이, 처음으로 ‘신격’을 쓰러트렸던 장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기에, 거의 외워버린 장면. 
나는 ‘멸살법’을 대신해 그다음 문장을 읊었다. 
 
“「세상에는, 결코 먹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 Episode 34. 먹을 수 없는 것 (1) > 끝

< Episode 34. 먹을 수 없는 것 (2) >
 

 
 
 
원작에서 [꿈을 먹는 자]는 유중혁을 삼킨 후 유중혁이 겪어온 끔찍한 삶에 감응하며 몸부림치다가 결국 소멸하고 만다. 지나친 과식이 불러온 참사였다. 
하지만 그것은 ‘멸살법’의 이야기. 
이번에 녀석이 먹을 것은 136회차가 전부가 아니었다. 
 
【그오오오오오오오······!】 
 
3회차, 4회차, 5회차······. 
 
「“인간이 수천 년을 살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나?”」 
 
36회차, 47회차, 69회차······. 
 
「“끝없이 반복되는 생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어?”」 
 
141회차, 143회차, 148회차······. 
 
「“이것이 인간의 고통이다. 빌어먹을 촉수 놈아.”」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기억들의 향연. 
부풀어 오른 공간 곳곳에서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먹고, 미쳐버린 [꿈을 먹는 자]가 광기에 젖어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놈은 도망갈 곳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놈의 뱃속이었으니까. 
누구도,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갈 수는 없다. 
 
【그오오오오오오!】 
 
폭주한 텍스트들은 이내 녀석이 감당할 수 있는 부피보다 더 커졌다. 
흡수하지 못한 설화들이 날뛰었고, 이윽고 범람한 이야기들은 파도처럼 외우주의 곳곳을 휩쓸었다. 파괴된 위의 잔해들이 나뒹굴었다. 
 
[‘제4의 벽’이 천천히 눈을 뜹니다.] 
[‘제4의 벽’이 포식 대상을 물색합니다.] 
 
흠칫 놀란 [꿈을 먹는 자]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제4의 벽’이 ‘꿈을 먹는 자’를 보며 웃습니다.] 
 
이제,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는 뒤바뀌었다. 
 
【그어어어어어······.】 
 
콰직! 콰지지직! 
 
거대한 활자의 벽을 형성한 [제4의 벽]은, 소용돌이치며 [꿈을 먹는 자]의 설화들을 삼키기 시작했다. 어떤 미식(美食)도 존재하지 않는, 순전한 허기에의 탐식. 
무수한 물고기와 다양한 상징체로 화한 [꿈을 먹는 자]는 어떻게든 달아나 보려 애썼지만, 집요한 벽의 흡입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콰지지지직! 
 
일만 팔천 년 동안 녀석이 먹어왔던 설화들이 모조리 으깨지고, 가루가 되어 벽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벽의 활자들이 환한 빛을 내뿜었다. 
허락되지 않은 이야기를 읽은 녀석의 목소리에, 경악이 깃들었다. 
 
【■■······?】 
 
이미 절반 이상이 먹혀버린 놈의 생각이, 벽 위에 활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설마 이것이 ■■······의?」 
 
【오오오오오오······.】 
 
「위대한 옛 존재들이여! 모두 어디 있습니까!」 
 
마지막 순간 녀석은 모든 것을 버리고 탈출하려 했으나, [제4의 벽]이 한 발 더 빨랐다. 소름 끼치는 이빨을 드러낸 벽은, 놈의 위장을 모조리 파먹고는, 전체를 통째로 까뒤집어 삼켰다. 
 
【오오······ 위대한 모략이시여······ 오오오오오오오.】 
 
눈부신 빛과 함께, 벌어졌던 벽의 입이 닫혔다. 
 
[‘제4의 벽’이 포식을 마쳤습니다.] 
[당신은 이계의 신격을 퇴치하였습니다!] 
. 
. 
.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업적에 어울리는 수사를 찾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다섯 번째 설화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업적이 추가됩니다.] 
[확정을 앞두고 있던 당신의 격이 재평가에 들어갑니다.] 
 
스스스스······. 
 
[꿈을 먹는 자]의 파편이 흩날리고, 나는 텅 빈 외우주의 공허에 몇 개의 설화들과 함께 남았다. 
[꿈을 먹는 자]가 죽었음에도, 공간은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한 것이다. 
 
[외우주의 신격들이 ‘꿈을 먹는 자’의 부고를 접하고 크게 당황하였습니다.] 
[이계의 신격들이 해당 시나리오에서 일어난 일을 파악 중입니다.] 
[일부 ‘위대한 옛 존재’들이 당신을 일별합니다.] 
 
츠츠츠츠츠츳! 
 
속에서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놈에게 정신이 뜯어 먹히는 바람에, 정신의 비위가 약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허억, 허억······ 웨에에에엑!!” 
 
끔찍한 경험이었다. 
유중혁은, 136회차에서 이런 짓을 당했던 거구나. 
 
“웨에에에엑!” 
 
그렇게 몇 번을 더 토하고 난 후, 나는 설화들의 파편 사이를 헤집어 어머니를 찾아나섰다. 
다행히, [꿈을 먹는 자]에 의해 형상을 보존하고 있던 그녀는 피폐해진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살아는 있는 것일까. 잘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의 맥박을 짚으며 어깨를 흔들었다.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일단, 어머니를 데리고 여기서 나가야 한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 공간이 부서지지 않지? 
 
136회차에서도, 유중혁이 [꿈을 먹는 자]를 죽이는 순간 외우주가 무너지며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장면이 있었다. 외우주는 곧 이계의 신격의 힘으로 운용되기에, 신격이 죽으면 함께 부서져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녀석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놈의 외우주가 아직 유지되고 있었다. 대체 왜지? 
 
[‘제4의 벽’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설마? 
 
[‘제4의 벽’이 아쉬운 마음으로 고개를 젓습니다.] 
[‘제4의 벽’은 여전히 허기진 상태입니다.] 
 
그렇게 많은 설화를 먹었는데도, 배가 고프다고? 
 
[‘제4의 벽’이 남은 잔해를 빨아들이기 시작합니다.] 
 
휘유우우우우! 
 
마치 진공청소기가 돌아가듯, [제4의 벽] 위에 도드라진 입이 주변의 나머지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남은 설화의 부속들과 먼지들, 그리고. 
 
“잠깐! 잠깐만!” 
 
내 품에 있던, 어머니까지도. 
나는 벽을 향해 헤엄치듯 날아갔다. 
 
“이봐! 그건 먹지 마!” 
 
하지만 내가 벽에 도달하기도 전에, 어머니는 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쩌어억 벌어지는 입이 어머니의 머리를, 팔을, 몸통을 먹어 치웠다. 
 
“씨발! 먹지 말라고 했잖아!” 
 
[‘제4의 벽’이 만족한 듯 웃습니다.] 
[‘제4의 벽’이 당신을 보며 입맛을 다십니다.] 
 
물어볼 것이 있었다. 
아직, 듣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런데, 저 빌어먹을 벽이 어머니를 삼켜버렸다. 
벽에게 삼켜진 존재는 어디로 가는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벽이 먹은 존재들 중 돌아온 존재는 없다는 것. 
극장 던전의 시뮬라시옹도, 환생자 니르바나도, 심지어 방금 먹힌 [꿈을 먹는 자]까지······. 
이계의 신격조차 살아남지 못한 상황에서, 어머니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을까? 
 
“뱉으라고!” 
 
나는 주먹으로 [제4의 벽]을 때리기 시작했다. 
벽은 나를 향해 연신 입맛을 다셨지만, 딱히 나를 먹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콰앙! 콰아앙! 
 
내 주먹질에 벽의 표면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때리고, 또 때리고. 미련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벽을 두들겼을까. 벽 위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처음, 그 아이에게 이름을 붙여줬을 때를 기억한다.」 
 
나는 멍하니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깨달은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그이는 홀로 독(獨)을 쓰자고 했고, 나는 읽을 독(讀)을 쓰자고 했다. 어쩌면, 거기서부터 그 사람과 나는 줄곧 달랐던 것이다.」 
 
나는 신음하며 벽을 두들겼다. 
결코, 이런 식으로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그 애가 외로운 사람보다는, 무언가를 읽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적어도 무언가를 읽는 한, 인간은 외롭지 않다고. 아마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내 주먹질이 멈춘 순간, 벽의 곳곳에서 무수한 문장들이 떠올랐다. 
한 사람의 평생에 이만큼 많은 문장이 있을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문장. 
 
「“네가 집에서 하는 게 뭐야? 응?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돼! 언제까지 너랑 애 뒷바라지하면서 살아야 하냐고!”」 
「“수경아, 네가 참아야 하지 않겠니. 독자를 생각해야지. 남자들 그러는 거 그냥 잠깐이야.”」 
「“어머님, 아무래도 독자에게 신경 좀 쓰셔야 할 거 같습니다.”」 
 
나는 입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 벽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어떤 일은 나도 기억이 났고, 어떤 일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절의 감정만은 생생했다. 
 
「힘들었다. 그때는 내가 너무 힘들어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아이도, 나만큼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그 시절의 어머니가 당했던 고통들. 
한 사람의 여자로서, 한 사람의 엄마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당하지 말았어야 했던 폭력들. 
 
「“독자야. 여기 안에 들어가 있어. 알겠지? 엄마가 말하기 전까지, 절대로 나오면 안 돼.”」 
 
텍스트 위로 무자비하게 이어지는 의성어와 의태어들 속에서, 나는 유년의 일을 다른 사람의 시점에서 다시 한번 겪고 있었다. 
분명 내가 겪었던 일임에도, 그것은 완전히 낯선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게 이런 일이었구나. 
 
이렇게 고통스럽고. 
비참한 일이었구나. 
그런데 왜 나는, 이걸 모두 잊었던 걸까. 
 
왜, 잊으려고만 했던 거지? 
 
그 사이에도 벽은 계속해서 말했다. 
 
「데리고 떠났어야 했다. 누가 뭐라든, 아이를 데리고, 먼 곳으로 떠났어야만 했다.」 
 
그러지 그랬어요. 
차라리, 진즉에 떠나지 그랬어요. 
 
「왜 그러지 못했을까.」 
 
긴 회한과 후회의 기록들. 
평생 내게 ‘현실’인 채 침묵했던 어머니가. 
이제 ‘소설’이 되어서야, 비로소 입을 열고 있었다. 
 
「그 일은 늦은 저녁에 일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술 더 가져와!”」 
 
술을 가져오라고 소리치는 아버지의 목소리. 어머니를 밀치고, 배를 때리고. 협박하는 아버지. 
 
「“다, 당신! 칼은 내려놓고 이야기해요!”」 
 
서서히,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방 안에 숨어 있던 어린 내가 놀라서 고개를 내밀었다. 
맞아. 저 때 아버지는 식칼을 들고 횡포를 부렸었지. 
 
「“독자야! 방 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잖아!”」 
 
어머니가 소리치며 나를 향해 달려왔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위협적으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니들도 죽고, 나도 죽고. 어? 다 죽어 볼까? 어차피 이렇게 살아봤자 다 같이 좆되는 거 아냐? 응? 다 같이 죽어보자고!」 
 
그리고 어머니가 몸을 날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몸이 무너졌다. 바닥에 떨어진 식칼. 흐르는 술과 구르는 술병. 나는 저 다음 장면을 알고 있었다. 식칼을 주워든 어머니는 아버지를 찌를 것이다. 그리고 내게 말할 것이다. 지금부터, 모든 것을 ‘다시 읽자’고. 
 
「“으, 으아아아아!”」 
 
그런데. 
 
「“독자야. 안 돼! 그거 내려놔!”」 
 
저건 뭘까. 
 
「“독자야!”」 
 
벌벌 떨면서 칼을 든 어린 내가,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얼굴에 울음이 번진, 조그만 나. 아버지의 표정에 떠오른 비웃음과, 취한 채 휘두르는 주먹. 그걸 대신 맞는 어머니와, 술병을 밟고 미끄러진 아버지. 그리고.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나오는 핏줄기. 
 
「바로 구조대를 불렀다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우연이었고. 
 
「살릴 수 있는 것은 나뿐이었고, 선택한 것도 나뿐이었다.」 
 
그 우연이, 우리의 삶을 바꿔 놓았다. 
 
「그러니 아이에게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 사람을 죽인 것은 나다.」 
 
어머니는 정신을 잃은 어린 내게서 칼을 빼앗아 들었고,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 뒤 조용히 나를 깨우며 말했다. 
 
「“독자야. 지금부터 모든 걸 다시 읽을 거란다.”」 
「“아버지는 죽을 만한 잘못을 한 거야. 이건 정당방위였던 거야. 알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피해자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조곤조곤한 어머니의 말이 귓가에 스며든다. 
 
「아마도 그때, 여러 가지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젊은 어머니는 살인에 관한 판례들을 검색했고, 증거를 조작했다. 
조금이라도 내가 연루될 수 있는 요소들을 배제했고. 
오직 이 우발적 살인이, 자신의 계획범죄인 것처럼 만들었다. 
 
「누군가는, 살인자로 살아가야만 하고. 다른 누군가는, 살인자의 아들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이.」 
 
그 뒤부터는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겨우 이거였어요?” 
 
벽에 손을 짚은 채로, 나는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실은, 알고 있었다.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어머니의 행동을 납득할 이유도, 이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영문 모를 에세이를 쓴 것도. 
내가, 살인자의 아들이 되어야만 했던 것도. 
 
「나는 종종 생각한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은 변명이 아닐까.」 
「더 나은 방법도 있었을 텐데.」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아이를 혼자 두어서는 안 되었는데.」 
「어미로서, 그런 식으로 행동해서는 안 되었는데.」 
 
······. 
 
「결국 나는, 그냥 도망친 어미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문장이었다. 
혹시나 싶어 기다려도 보고, 몇 번이고 벽도 두드려 보았다. 
하지만 문장은 떠오르지 않았다. 
 
쾅! 
 
이렇게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이딴 이야기를 듣고 끝낼 수는 없었다. 
 
콰앙! 콰아앙! 
 
“뱉어! 뱉으라고!” 
 
나는 미친 듯이 벽을 때리기 시작했다. 
 
“씨발!” 
 
[제4의 벽]이 내 주먹을 핥았다. 
내 주먹에 묻은 피가, 기억이, 이야기들이 [제4의 벽]에 빨려 들어가 이야기가 되었다.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김독자는 울고 있었다.」 
 
[제4의 벽]이 말했다. 
 
「김독자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고.」 
 
쾅! 
 
「벽을 때리고.」 
 
콰앙! 
 
「또 때렸다.」 
 
“씨발!” 
 
「김독자는 소름이 끼쳤다. 그 모든 것이 이야기가 되고 있다는 것이. 자신의 모든 행동이, 말들이 전부 시나리오가 되어 벽 위의 문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닥쳐!” 
 
「김독자는 알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이 벽을 부술 수 있을까? 설마, 이것이 ‘멸살법’을 읽은 대가일까. 그걸 읽어서, 내 모든 현실조차 소설이 되어버리고 있는 것일까. 페이지가 찢어지는 듯한 소음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찌이이이익! 
 
「김독자는 생각했다. ······(야)······ 이건 또 뭐지?」 
 
이어지는 벽의 문장 위에, 부자연스럽게 끼어든 말이 보였다. 
마치, 소설을 읽는 누군가가 남긴 낙서처럼 서술에 끼어든 말. 
 
「김독자는 놀랐다. ······(정신 똑바로 차려)······ 누가, 나한테 말하고 있는 거지? ······(이건 네 스킬이잖아)······ 당신 누구야? ······(네 스킬에, 네가 먹히지 말라고)······ 무슨 ······(멍청아 손 빼 빨리!)」 
 
나는 내 주먹을 빨아들이고 있는 벽을 보았다. 
 
「······(스킬을 해제해라, 김독자)······」 
 
어떤 섬전 같은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게 누구의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게 가능한 일인지 어떤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는 명백했다. 
 
“나는 [제4의 벽]을 해제하겠다.” 
 
전류라도 흐르듯, 벽의 활자들이 거칠게 요동쳤다. 쩌저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처음으로 내 주변을 겉돌던 뭔가가 조금씩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다음 순간, 메시지가 들려왔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인한 시스템 오류가 일시적으로 수정됩니다.] 
. 
. 
[당신의 ‘특성창’이 복구되었습니다.] 
[지금 ‘특성창’을 확인하시겠습니까?] 
 
 
 
 
 
< Episode 34. 먹을 수 없는 것 (2) > 끝

< Episode 34. 먹을 수 없는 것 (3) >
 
 
 
 
 
특성창을 볼 수 있다고? 
지금껏 이해가지 않았던 몇 가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특성창을 볼 수 없었던 이유. 그것은 바로 [제4의 벽] 때문이었다. 
[제4의 벽]은 다른 존재들에게서 나를 지켜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 자신에게서 나를 격리시키기도 하는 스킬이었던 것이다. 
 
[‘특성창’을 확인합니다.] 
[아직 시스템 구성이 불안정합니다. 일부 스킬명 및 스킬 레벨 표시가 제한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특성창이 떠올랐다. 
 
+ 
 
<인물 정보> 
 
이름 : 김독자 
나이 : 28세 
배후성(背後星) : 없음 
수식언(修飾言) : 가장 못생긴 왕 (임시) 
전용 특성 : 여덟 개의 목숨 (영웅), 시나리오의······. 
 
+ 
 
그러나 특성창이 온전히 뜨기도 전에, 갑자기 치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무너지며 긴급한 메시지들이 추가로 떠올랐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의 정신 방벽에 접근합니다.] 
 
순간 아차, 싶었다. 
어쩌면 성좌들은, 지금껏 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정보가, 세계에 모습을 드러낼 날만을. 
 
[성운 <베다>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접근합니다.] 
[성운 <올림포스>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접근합니다.] 
[성운 <파피루스>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접근합니다.] 
 
내 존재를, 자신들의 의지에 맞게 개량하려 했던 성좌들이 강제로 내 정신을 열어 젖히고 있었다. 그때.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당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재활성화됩니다!] 
 
츠츠츠츠츳! 
 
+ 
 
전용 스킬 : [전지적 독자 시점 Lv.?], [책갈피 Lv.?], [등장인물 일람 Lv.?], [제4의 벽 Lv.?], [■■■■ Lv.?], ■■■■■■■■······. 
. 
. 
종합 평가 : ······■■당신은■■■■■■······? 
 
+ 
 
떠오르는 모든 정보들이 ‘■’안에 숨겨지고 있었다. 
무수한 벽돌들이 차곡차곡 쌓이듯, 강렬한 스파크 속에서 정체를 숨기는 정보들. 
 
츠츠츠츠츳! 
 
[성좌, ‘인류의 시조’가 신음을 토합니다.] 
[성좌, ‘자신의 눈을 찌른 자’가 눈을 감싸쥔 채 물러납니다.] 
[성좌, ‘전갈의 여신’이 꼬리를 보호하며 뒷걸음질을 칩니다.] 
. 
. 
[당신에게 접근한 일부 성좌들이 타격을 입고 물러납니다!] 
 
츠츠츠츠츳! 
 
믿음직하게 회오리치는 무수한 활자들. 
맹렬하게 스파크를 튀기는 [제4의 벽]이, 성좌들로부터 나를 지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내게 반항하던 모습은 어디 갔냐는 듯, 녀석은 성좌들을 향해 흉흉한 기운을 발산하는 중이었다. 
 
[‘제4의 벽’이 <스타 스트림>을 향해 이를 드러냅니다.] 
 
나는 그런 [제4의 벽]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들려온 것은 잘 아는 성좌의 메시지였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향해 빙긋 웃습니다.] 
 
다른 성좌들과는 확연히 다른 메시지. 
······설마, 그 짧은 사이 내 정보를 본 걸까? 
설령 봤다 하더라도, 모두 확인하진 못했을 것이다. 
특성창을 연 나조차도 모든 정보를 확인하진 못했으니까. 
스파크가 조금 잠잠해지고, 벽은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제4의 벽’이 당신에게 화를 냅니다.] 
 
나는 ‘벽’을 마주보았다. 
오랫동안, 나는 이 ‘벽’이 소설과 현실을 가르는 경계라 생각했다. 
이 ‘벽’이 있기에 나는 새로운 세계에 적응할 수 있었고, 온갖 끔찍한 상황 앞에서도 비정상적인 판단력을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벽’이 무엇이냐 물으면, 나는 여전히 확답할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벽’이 오랫동안 나를 지켜주었다는 것뿐이다. 
몇 번이고 위기가 있었지만, 이 ‘벽’이 있었기에 그 위기를 넘겼다. 
이 벽이 있었기에,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나는 나를 향해 활자들을 부풀리는 ‘벽’을 향해 손을 가져다대었다. 
 
“미안해.” 
 
[‘제4의 벽’이 파르르 몸을 떱니다.] 
 
손가락에 감겨드는 문자들의 감촉이 낯설었다. 
[제4의 벽]은, 이런 느낌이었던가. 
벽에 쓰여진 문자들이 내 손 끝에 닥터피쉬처럼 들러 붙었다. 녀석은 나를 핥는 것 같기도 했고, 깨무는 것 같기도 했다. 명료히 나눌 수 없는 느낌이었기에, 오직 닿지 않는 비유만이 가능했다. [제4의 벽]은 비에 젖은 강아지 같았고, 버림 받은 아이 같았으며, 말 안 듣는 사춘기 소년 같았다. 
 
[제4의 벽]은······. 
 
[제4의 벽]은, 마치 나 같았다. 
 
그리고 벽 위에 문장이 떠올랐다. 
 
「김 독자 는 멍청 이이 다.」 
 
한글을 막 배운 어린 아이가 시험삼아 적어 본 것 같은 문장. 
그것은 나에 관한 서술도, 세상에 관한 서술도 아니었다. 
그것은 [제4의 벽]의 말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벽을 매만졌다. 
 
「······$#^#$^#$%@#$······」 
 
혼란에 빠진 것처럼 알 수 없는 문자들을 띄우던 [제4의 벽]은, 잠시 후 다시 정연한 문장을 떠올렸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제4의 벽]은, 역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였구나.」 
 
······또 시작이다. 
 
「그럼 아까 괄호로 떠올랐던 말도 [제4의 벽]이 쓴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너무 정연한 말투였는데······ 그럼 그 말들을 쓴 건 누구지? 이것이 정말 ‘벽’이라면, 이 ‘벽’안에는 대체 뭐가 있는······.」 
 
“남의 생각을 읽는 건 그만 둬.” 
 
[‘제4의 벽’이 새침하게 고개를 돌립니다.] 
[‘제4의 벽’이 다시는 자신을 강제로 끄지 말라고 말합니다.] 
 
나는 그런 [제4의 벽]에 손을 댄 채, 말을 이었다. 
 
“알겠어. 대신, 부탁할 게 있어.” 
 
[‘제4의 벽’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는 짧게 숨을 들이켠 뒤 말했다. 
 
“어머니를 돌려줘.” 
 
내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듯 벽이 짧게 진동했다. 
그리고 벽 위에 문장이 떠올랐다. 
 
「김독자는 어머니를 증오했다.」 
 
“맞아.” 
 
「김독자는 그동안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무엇을 겪었고,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뭘 숨겨왔는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것도 맞아.” 
 
「때문에, 김독자는 여전히 어머니를 미워한다. 인간의 감정이란 그런 것이니까. 누군가가 나못지 않게 깊은 상처를 감추고 있었다는 걸 안다고 해서, 갑자기 내 상처가 모두 아물어버리는 그런 마법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동의해.” 
 
「그렇기에 김독자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은 어머니를 구하려고 하는 것일까.」 
 
“설명할 수 없어.” 
 
「······.」 
 
“모든 걸 문장으로 옮길 수는 없으니까.” 
 
나는 가만히 벽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이젠 나한테 기력이 얼마 안 남았어. 그러니까, 좀 도와주라. 부탁할게.” 
 
한참이나 침묵하던 [제4의 벽]은, 그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띄울 뿐이었다. 
 
「김독자는······.」 
 
한 번 [제4의 벽]으로 들어갔던 존재가 다시 나올 수 있는가? 
가능한 일인지 어떤지는 모른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했다. 
 
꿀럭. 
 
그리고 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의 입에서 뭔가가 꿀럭거리며 토해져 나왔다. 
그것은 무수한 활자들이었다. 
활자들은 모여 단어가 되었고, 단어들은 모여서 문장이 되었다. 문장들은 모여 문단이, 다시 문단은 모여서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야기는, 곧 사람이 되었다. 
 
나는 활자들의 토사물 속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제4의 벽]을 향해 말했다. 
 
“고마워.” 
 
[제4의 벽]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흩어지기 시작했다. 
 
「졸, 리, 다.」 
 
그리고 조금씩, 주변의 공간이 깨어져 나갔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염탐하던 ‘위대한 옛 존재’들을 물립니다.] 
 
외우주의 어둠이 걷혀 나가고 있었다. 
시공간이 부서지며 주변의 정경이 [암흑성] 2층으로 변해갔다. 
이어서, 밀려 있던 메시지들이 쏟아졌다. 
 
[당신의 암흑성 랭킹이 변경됩니다.] 
[현재 당신의 암흑성 랭킹은 2위입니다.] 
. 
. 
[메인 시나리오의 숨겨진 목표를 충족하였습니다.] 
[당신은 ‘암흑성’의 마지막 시나리오에 도전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 
 
 
벌판의 전투가 끝난 뒤 이틀이 지났다. 
난데없이 강림한 신격 앞에 모든 필멸자는 전의를 상실했다. 
방랑자들의 세력도, <낙원>의 전력들도. 
어떤 의미에서,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 것은 무엇보다도 강력한 절망이었다. 
방랑자들의 지휘부와 <낙원>의 지휘부는 전사자들을 수습하고 사태를 정리해 나갔다. 불필요한 소요가 사라지며 [암흑성]의 2층은 조금씩 안정세를 찾아가고 있었다. 다음 층으로 올라갈 랭커들이 하나 둘씩 정해졌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암흑성]의 미래를 맡기는 것에 동의했다. 
그리고 지금. 
그 랭커들 중 대부분은, 작은 관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 아저씬 맨날 죽는 게 일이네.” 
 
김독자는 ‘이계의 신격’을 물리치고 돌아오자마자 숨이 끊어졌다. 
그만큼 강대한 존재와 맞서 싸웠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일행들은 생각했다. 정희원이 말했다. 
 
“내일이면 다시 살아나겠죠? 지난 번에도 사흘 걸렸으니까.” 
 
이제 김독자의 죽음에 꽤 적응해버린 일행들은 그다지 충격 받은 기색은 아니었다. 유상아가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근데 꼭 관에 넣어야 했던 건가요?” 
“그렇다고 죽은 사람을 침대에 가만히 눕혀 두기도 뭐하잖아요······.” 
 
정희원이 변명하듯 말했다. 
일행들은 각자 다른 의미를 가지고 김독자의 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현성은 존경이 담긴 눈빛이었고, 신유승은 죄책감 어린 눈빛이었으며, 유상아는 착잡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사부는 웬일이래요? 또 히든 피스 찾으러 간 줄 알았는데······.” 
 
이지혜의 말에, 관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동시에 한 곳을 쳐다보았다. 
쏠린 시선에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이제 [암흑성]에 남은 히든 피스는 보잘 것 없는 것들뿐이다.” 
“그렇다고 여기 올 이유는······.” 
“다음 층으로 넘어가려면 김독자가 꼭 필요해.” 
“흐음······ 요즘 둘이 너무 친한 거 아니예요? 이틀 전에도 보니까······.” 
 
유중혁의 인상이 한층 험악해지자, 질겁한 이지혜가 입을 다물었다. 
정희원이 이지혜를 툭툭 두드리며 핀잔을 주었다. 
 
“중혁 씨 그만 놀려. 기껏 둘이 친해져서 보기 좋은데 방해하지 마.” 
“······에이, 그래도.” 
“그리고 여기 온 이유라면, 묻지 않아도 알잖아. 누구라도 같을 테니까.” 
 
그 말에, 일행들의 표정이 묘하게 숙연해졌다. 
그들은 김독자의 관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정희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살아난다고 해서, 죽는 게 무섭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야.” 
 
목숨이 여러 개 있다고 해서, 누구나 남을 위해 그 목숨을 쓰는 것은 아니다. 관의 맨 앞에서 표면을 어루만지던 신유승이 말했다. 
 
“독자 아저씨가 없었다면 난 지금쯤 죽었을 거예요.” 
 
누군들 안 그럴까. 
이현성도, 정희원도, 이길영도, 이지혜도. 
모두 한 번씩, 독자에게 구원 받은 적이 있었다. 
이지혜가 한숨처럼 말했다. 
 
“내가 진짜 오글거려서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내 목숨이 두 개였으면, 하나 쯤은 아저씨한테 줬을지도 몰라.” 
“누난 호감도 점수가 6점밖에 안돼서 형이 안 받을 걸요.” 
“요 꼬맹이가 진짜······ 어차피 가터벨트 입으면 다 똑같거든?” 
 
이지혜와 이길영이 투닥거리는 것을 보며, 일행들이 미소지었다. 
이틀 전까지 혈풍이 부는 전장에서 울고, 좌절했던 사람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광경. 유일하게 그 풍경 속에 어울리지 못하는 유중혁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보고 있었다. 
김독자가 나타나며, 그의 계획은 많이 바뀌었다. 
쉽게 갈 수 있었던 시나리오가 어려워졌고, 단순했던 이야기는 복잡해졌다. 
 
그리고, 죽어야 했던 사람들은 살아났다. 
 
유중혁은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그 ‘죽어야 했던 사람’ 중엔, 유중혁 자신도 포함되었을지 모른다. 
유중혁은 그 사실이 몹시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이 풍경이, 회귀자도 아닌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이번 회차가 그가 지금껏 살아왔던 어떤 회차보다 더 나은 회차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이, 그의 심경을 몹시 복잡하게 만들었다. 
 
“참, 근데 그 ‘운명’이라는 거······ 이제 끝난 거겠지? 독자 아저씨 죽었잖아.” 
 
이지혜의 물음에, 몇몇 일행들이 대답했다. 
 
“아. 맞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사랑하는 사람한테 죽을 운명이라고 했으니까, 운명은 성립된 거 아닐까요? 따지고 보면 어머니때문에 죽었으니······.” 
“그러게. 왜 어머닐 생각 못 했지?” 
 
떠들썩한 목소리들. 멀리서 유상아가 복잡한 얼굴로 유중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중혁 또한, 그 시선을 마주 받으며 생각했다. 
 
‘[운명]은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척준경이라는 변수가 있었기에 어떻게든 되었다고 쳐도, 성운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성운들이 김독자의 부활 특성을 몰랐을 리 없으니, [운명]은 이런 식으로는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 사태로 성운들은 김독자에게 크게 분노했을 테니, 이제 어떤 식으로는 [운명]의 악의적 실현에 관여할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 곧바로 찾아올 다음 시나리오부터가 큰 고비였다. 
 
그러니, 유중혁도 이제는 선택해야 했다. 
 
그는 고요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곳에 있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듯이. 
그리고 잠시 후, 허공에서 시선이 돌아왔다. 
 
[성좌, ‘???’이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 
벌써 3회차의 인생을 살면서도, 유중혁은 아직 자신의 배후성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이 모든 회귀의 원흉이자, 그에게 끔찍한 비극을 안겨준 존재. 
속으로 이를 간 유중혁이, 짧게 숨을 들이켜며 입을 열었다. 
 
‘배후성. 물어볼 것이 있다.’ 
 
 
 
 
 
< Episode 34. 먹을 수 없는 것 (3) > 끝

< Episode 35. 73번째 마왕 >
 
 
 
 
 
[당신은 사망했습니다.] 
 
이번 죽음의 후유증은 컸다. 
아무래도 [꿈을 먹는 자]에게 설화를 뜯긴 충격인 듯했다. 
[제4의 벽]의 수복 능력으로 인해 빠르게 회복되기는 했지만, 한 번 부서졌던 것을 다시 이어 붙인다고 해서 이전처럼 온전한 상태가 되기는 어려운 법이다. 
 
‘으 머리야······.’ 
 
나는 사흘 간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있었다. 
의식은 사라졌다가 복구되기를 자주 반복했는데, 영혼 상태로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반추했다. 
 
‘이번 시나리오만 지나면, 이야기의 흐름은 돌아온다.’ 
 
아홉 번의 시나리오를 거쳐 오는 동안, 나는 원작의 흐름을 많이 훼손시켰다. 작게는 인물 몇몇을 살리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시나리오 전개를 바꾸는 것까지. 
물론, 내가 시나리오를 바꿨다고 해서 원작의 요소들이 쓸모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유중혁의 인생 회차는 백회를 훌쩍 넘고, 시나리오가 바뀌어도 여전히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정보는 넘치도록 많으니까. 
 
그럼에도, 큰 흐름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는 부분도 분명 존재해야 했다. 
 
다행히 [서울 돔 시나리오]는 폐쇄 시나리오였다. 
비록 중간에 국가전도 있었고, 나비효과를 염려할만한 일도 몇 가지 있기는 했지만, <스타 스트림>의 큰 흐름은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인 것이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이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큰 성장을 거두었기에, 이후의 흐름을 주도할만한 저력도 충분히 확보된 상황이었다. 
 
나는 ‘3인칭 시점’으로 인물들을 하나하나 관찰했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멸악의 심판자’ 정희원이었다. 
 
“아직 컨트롤이 쉽지가 않네요. 배후성이 말하길 이걸 완벽하게 쓸 수 있게 되면 그 촉수 괴물도 상대할 수 있다던데······ 대체 언제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백색의 불길을 거둔 정희원이 중얼거렸다. 
원작에서는 비중이 거의 없었던 그녀는, 내가 기용한 등장인물들 중 최고의 전력을 가지게 되었다. 
‘멸살법’에서 손에 꼽는 특성 중 하나인 ‘멸악의 심판자’를 개화한데다, 무려 우리엘의 [지옥염화]를 계승한 상태.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멸살법 최강의 100인은 물론이거니와 10인에 들어가는 것도 무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맞은 편에서 정희원과 대련을 이어가던 이현성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희원 씨는 조금씩 나아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현성 씨도 많이 좋아진 것 같은데요? 이제 전신을 강철로 뒤덮는 것도 곧잘 해내잖아요.” 
 
아무것도 모르고 한 말이겠지만, 정희원의 위로는 틀리지 않았다. 
[서울 돔] 시나리오가 끝나기 전에 이현성이 [강철화]를 계승하기 시작한 회차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현성은 자신의 성취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영 자신감이 없는 표정이었다.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독자 씨에게 도움이 되려면 멀었습니다.” 
 
계속 옆에서 잘 한다 잘 한다 말해줘야 더 잘 하는 타입의 인간이 있다. 
이현성도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화신 이현성에게 1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도, 독자 씨?” 
 
당황한 이현성이 눈을 끔뻑이며 더듬거렸다. 
정희원이 혀를 차며 말했다. 
 
“와, 역시 보고 있었네. 하여간 스토커 기질은······ 근데 100코인은 너무 쪼잔한 거 아니예요?” 
 
나는 시선을 돌려 [길들이기]를 연습 중인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드래곤에게 계속해서 명령을 내리고 있는 아이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신유승이 허공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흐뭇하게 미소를 짓습니다.] 
 
‘멸살법’에서는 성좌와 화신의 관계를 부모와 아이의 경우에 종종 빗대곤 한다. 자식을 가져본 적은 없지만, 확실히 신유승을 보고 있으면 그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 것도 같다. 
혈연 이상의 단단한 무언가로 맺어진 유대랄까. 정말로 조그맣고 연약한, 그러면서도 소중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 싶은 마음······. 
물론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는 아니듯, 모든 성좌가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화신이 자신의 배후성에게 뒤통수를 맞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니까. 
 
크롸라라라―! 
 
2급 진화종, ‘키메라 드래곤’이 거센 울음을 터트렸다. 
아직 말은 잘 안듣는 것 같지만, 저 녀석이 파티에 합류했으니 파티의 전력은 그야말로 수직 상승한 셈이었다. 지금은 2급 종이지만, 훗날 1급 종을 지나 초월종에 도달한다면 저 드래곤은 성좌들조차 두려워하는 괴물이 될 것이다. 
키메라 드래곤을 보며 이지혜가 부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나도 배후성 잘 고를 걸. 충무공 할아버지 떠서 땡잡았다고 생각했는데······.” 
 
하여간, 노력도 제대로 안 하는 녀석이 불평은 제일 많지. 
충무공이 얼마나 좋은 배후성인지도 모르는 녀석이······ 언제 날 잡고 참교육을 한 번 시켜줘야 하는데. 
대강 인물들을 모두 둘러본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 정도면 다음 시나리오 공략은 충분하겠지.’ 
 
이지혜나 공필두의 성장세가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상황이 나쁘진 않았다. 여기에 유상아라는 번외 인물까지 있으니, [서울 돔]을 탈출하기만 하면 이후의 시나리오 진행은 꽤나 수월할 터였다. 
 
“사부! 배후성 없이도 강해질 수 있는 스킬 같은 거 없어요? 나한테 좀 가르쳐 줘요!” 
“지금의 너에겐 무리다.” 
 
유중혁도 회귀 우울증을 어느 정도 극복한 듯 보이니, 이대로 <유중혁 루트>를 계속 따라간다면 이제 등장인물들의 생존은 크게 걱정할 필요 없겠지. 
문제는, 오히려 내 쪽이었다. 
 
[거대한 운명이 당신의 죽음을 바라고 있습니다.] 
 
나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운명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어머니로 인한 죽음을 겪으며 혹시나 운명이 충족되지 않았을까 조금 기대를 해보았지만, 역시나였다. 
어쩌면 ‘누가 나를 죽이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부활 편법’으로는 내가 이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 
 
‘빌어먹을 성운 놈들······.’ 
 
결국 이런 사태가 찾아온 것은, 내가 시나리오를 너무 많이 바꾼 까닭이었다. 성좌위에 오르며 지나친 주목을 받은 탓도 컸다. 이대로라면 어찌저찌 부활을 통해 삶을 연기하더라도, 문제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번 같은 경우가 또 있어선 안 돼.’ 
 
이번 [꿈을 먹는 자] 사태만 보더라도 그렇다. 
하마터면 이계의 신격이 강림해 일행들이 전멸할 뻔 했다. 
나야 부활할 수 있으니 상관없지만, 다른 일행들은 그렇지 않았다. 
일행들 중 누구도 죽었다 살아날 수 있는 존재는 없고, 하물며 유중혁이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간다. 
 
모두 내가 없었더라면,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성운 <베다>가 당신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운 <파피루스>가 당신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운 <올림포스>가 당신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숨을 죽인 채 기회를 노리는 성운들을 보며,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미 주목은 끌어버렸고, 아직 저들에게 대항하기에 나는 너무 약했다. 
어떻게 해야 일행들을 지키고 저놈들을 떨쳐낼 수 있을까······. 
 
‘역시, 그 수밖에 없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부활 조건이 모두 충족되었습니다!] 
[특성 ‘여덟 개의 목숨’의 특전이 발동합니다!] 
 
어느새, 다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당신의 육신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합니다.] 
 
 
* 
 
 
쓰으으읍, 하는 소리와 함께 들숨이 차오른다. 
매번 하는 얘기지만, 제일 적응하기 힘든 것이 바로 부활 후 첫숨을 들이쉬는 순간이다. 눈을 뜨자, 새카만 어둠이 주변을 채우고 있었다. 아마 일행들이 관속에 넣어뒀기 때문이겠지. 
젠장, 왜 살아날 사람을 굳이 관짝에 넣은 건지 모르겠다. 비꼬는 건가? 
 
[특성 ‘여덟 개의 목숨’의 특전이 발동 중입니다.] 
[뱀의 세 번째 머리를 희생합니다.] 
[해당 머리의 능력은 ‘투지(鬪志)’입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특전 효과를 받았다. 
‘여덟 개의 목숨’을 통해 받는 특전들은 다른 고위급 가호들에 비하면 효능이 미미한 편이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죽으면서 잃었던 다리도 원상태로 회복이 됐고, 이제 관뚜껑을 박차고 나가는 일만 남았다. 
 
“오오! 소문이 진짜였다!” 
“정말로 부활하셨잖아!” 
 
꾸드득 힘을 줘 관뚜껑을 밀자마자,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내 부활 소문이 퍼진 모양인지, 다종다양한 화신들이 모여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연이은 부활로 인해 화신들 사이에서 당신의 유명세가 증가합니다.] 
[당신의 격이 미미하게 상승합니다.] 
 
파아아앙! 
 
마침 근처에 있던 정희원이 [지옥염화]를 축포처럼 쏘아 올리며 나를 맞이했다. 
저 스킬을 저렇게 쓰다니, <에덴>의 성좌들이 대노할 일이다. 
 
“부활 축하해요.” 
“······다음부턴 관에 넣지 말아주세요.”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다른 사람들 데려올 테니까.” 
 
정희원이 떠나기가 무섭게,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가 귓가에 쏟아졌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부활에 기뻐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귀환을 축하합니다.] 
[성좌, ‘고려제일검’이 당신의 용기를 칭송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투덜거리며 주머니를 뒤집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이 이룬 업적에 크게 경탄합니다.] 
[90,0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9만 코인이라······. 
아무래도 그저께 나를 못 도와준 걸 다들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다른 성운들과 대적하면서까지 나를 도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의심스러운 일이었으니까. 
 
[당신이 이룬 업적의 평가가 완료되었습니다.] 
[당신은 ‘준신화급’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이계의 신격을 살해한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 
. 
. 
[설화 달성으로 인해 몇몇 이계의 신격들이 당신에게 적의를 품습니다.] 
[설화 달성으로 인해 일부 이계의 신격들이 당신에게 호기심을 품습니다.] 
[설화 달성으로 인해 ‘위대한 옛 존재’들 중 몇몇이 당신을 지켜봅니다.] 
[곧 당신의 수식언이 공표될 것입니다.] 
 
무려 준신화급 설화라니······. 
신화급 설화를 받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적당히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위대한 옛 존재’와 싸웠다면 틀림없이 신화급 설화를 받았겠지만, 그만한 존재와 대면해다면 나는 대화도 시도해보기 전에 소멸했겠지. 
 
[당신은 심사 도중 새로운 설화를 달성하였습니다.] 
[기존의 설화들을 뛰어 넘는 설화의 획득으로 당신의 격이 재평가됩니다.] 
[다음 시나리오에서 당신의 격이 공표될 것입니다.] 
[아직 당신의 다섯 번째 설화가 진행 중입니다.] 
 
위인급 말단에서 시작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대로라면 위인급 중에서도 상당한 수준으로 격이 공표될지도 모르겠다. 
다음 시나리오에서 공표된다 이거지. 
마침 타이밍도 괜찮다 싶었다. 
 
대망의 열 번째 메인 시나리오, <73번째 마왕>. 
 
이 시나리오는 [서울 돔]에서 시행되는 마지막 시나리오로, 참가자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시나리오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은 암흑성 랭킹 1위와 2위뿐. 
물론 혼자서 도전하는 것은 아니었고, 각각 자신을 제외한 최대 4명의 랭커들과 팀을 꾸려 도전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현재 당신의 암흑성 랭킹은 2위입니다.] 
 
나 혼자서 데리고 갈 수 있는 일행은 총 네 명. 
하지만 그 인원만으로는, 다음 층에서 나타날 적을 상대하기 어려웠다. 
즉, 이 시나리오를 완수하려면 암흑성 랭킹 1위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문제는 그 1위가 누구냐는 것인데. 
 
“김독자.” 
 
생각하기가 무섭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식 웃음이 난다. 
······하긴, 1위가 누구긴 누구겠어. 
 
“유중혁, 네가 지금 랭킹 1위지?” 
“암흑성 랭킹을 말하는 것인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중혁이 곧바로 답해왔다. 
 
“내가 1위다. 서울 랭킹 때랑은 상황이 다르지.” 
 
이 자식, 역시 그때 1위 못한 걸 마음에 두고 있었나 보다. 
하여간 쪼잔한 새끼.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입을 열었다. 
 
“네 도움이 필요해. 너도 알겠지만, 다음 시나리오에 데리고 갈 수 있는 사람이 정해져 있잖아? 너랑 내가 나눠서 데려가지 않으면······.” 
 
멀리서 일행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특히 이현성과 이길영이 서로 제일 앞에 서려고 몸싸움을 벌이는 게 아주 진풍경이었다. 일등 한다고 상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러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한참이나 떠드는 와중에도, 유중혁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위를 올려다 보았더니, 유중혁이 진지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김독자, 네놈의 목적은 뭐지?” 
“목적? 무슨 목적?” 
“‘모든 시나리오의 끝’에 도달하는 것이 네 최종 목표인가?”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뭐, 그런 셈이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목표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나?” 
 
······이 자식은 갑자기 또 왜 이래? 
농담처럼 넘기고 싶었지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묻는 유중혁을 보고 있자니 나로서도 진지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포기 안하지. 근데 그건 왜?” 
“아무것도 아니다.” 
 
유중혁은 그대로 내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일행들 쪽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왼쪽 눈썹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송충이처럼 꿈틀거리는 그 눈썹을 보며, 나는 가슴 한쪽이 스산해졌다. 
 
“야, 너······.” 
 
‘멸살법’을 끝까지 읽은 나는 안다. 
유중혁이 왼쪽 눈썹을 꿈틀거릴 때는, 심각한 결심을 했을 때 뿐이다. 
그리고 녀석이 심각한 결심을 한 후에는, 늘 높은 확률로 사망회귀가 발생한다. 
이 자식이 또 뭔 헛짓거릴 꾸미는 건가 싶어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쓰려던 찰나, 일행들이 도착했다. 그리고 내가 입을 채 열기도 전에, 유중혁이 그들을 향해 먼저 선수를 쳤다. 
 
“열 번째 시나리오의 참가자를 발표하겠다.” 
 
 
 
 
 
< Episode 35. 73번째 마왕 > 끝

< Episode 35. 73번째 마왕 (2) >
 
 
 
 
 
유중혁의 일방적인 통보에 일행들의 반발은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멋대로 결정하는 게 어디있어요?” 
 
멋대로 통보를 마친 유중혁이 사라지자, 제일 먼저 정희원이 소리쳤다. 
 
“출발은 사흘 뒤다! 그때까지 랭킹은 알아서 올려라! 그렇게 말하고 가버리면 우리가 알아서 굴러야 해요?” 
“그런 말은 그 자식 있을 때 하지 그랬어요.” 
“······독자 씨라면 하겠어요?” 
“아뇨.” 
 
정희원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여전히 씩씩거렸다. 
 
“그래도 유중혁 말대로 하는 게 생존확률이 높을 거예요.” 
“독자 씬 대체 누구 편이에요?” 
“그야······.” 
 
나는 멀리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유중혁을 흘끗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일단, 다들 반갑습니다. 이걸로 세 번째 부활이네요.” 
 
그제야 유중혁의 패기에 얼어붙어 있던 일행들도 하나 둘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길영과 신유승이 내 양 다리에 찰싹 붙었고, 이현성은 살짝 울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활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벌써 몇 번째지만 익숙해지질 않는군요.” 
“익숙해져버리시면 슬플 것 같은데요. 일단, 정리를 좀 해보죠.” 
 
유중혁이 일방적으로 통보한 말들은 다음과 같았다. 
 
―팀은 두 개로 나눈다. 내 팀과 김독자 팀. 그리고 할당 인원은 각각 넷 씩이다. 
―내 팀에 들어올 인원은 이현성, 공필두, 이지혜, 이설화. 이렇게 넷이다. 
―김독자 팀은 정희원, 신유승, 이길영, 유상아. 이렇게 넷으로 하겠다. 
 
결국, 명단은 지금까지 공략에 참가했던 주요 일행 구성과 대동소이한 셈이었다. 쭉 싸워왔던 일행 구성 대로 열 번째 시나리오 공략에도 참가하자는 뜻. 나를 배려한 것일 수도 있고, 자기가 편해서일 수도 있다. 아마 유중혁 성격을 생각하면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다들 명단 자체에는 큰 불만이 없는 기색이었는데, 유일하게 시무룩해 있는 사람은 이현성이었다. 
 
“저는 독자 씨 팀에 들어가고 싶은데······.” 
“어차피 같이 가니까 어느 팀에 들어가든 별 상관은 없을 겁니다.” 
“······예.” 
 
나는 이현성의 어깨를 탁탁 쳐주며 일행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일 먼저 눈이 마주친 것은 유상아였다. 
너무 간만이라 그런가, 눈을 마주치는 것도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잠시 그러고 있자니, 정희원이 내 옆구리를 쿡 찔러왔다. 
 
“왜요? 가터벨트랑 차이나 드레스가 아른아른해요?” 
“······아직도 그 얘깁니까?” 
“워낙 충격적이라서요. 우리끼리 이름도 붙였어요. ‘김독자 가터벨트 사건’이라고. 근데 난 그거 죽어도 안 입을 거예요.” 
“바라지도 않는데요.” 
 
그러자 이지혜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난 성능 좋은 거면 입어줄 용의 있어! SSS급으로!” 
“그만 놀려라.” 
“저도 성능만 좋다면 그 정도는 입을 수 있습니다.” 
“현성 씨는 왜······.” 
“군인은 장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 군인 정신을 엉뚱한 쪽에서 발휘하지 말아 달라고 충고하려는데, 허공에서 우리엘의 메시지가 들렸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가터벨트를 만든 성좌도 남자였다고 말합니다.] 
 
농담이겠지? 빌어먹을. 
게다가 ‘성좌’라고?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빙긋 웃으며 언제 한 번 그를 초청해 오겠다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상황은 저 페르세포네 때문이었다. 언제 다시 명계에 가게 되면 꼭 따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얘긴 이쯤 하고······ 다들 랭킹은 어떻게 되세요? 참고로 이 명단에 들어가려면 랭킹 10위 안쪽이어야 하는 건 다들 알고 계시죠?” 
 
그러자 일행들이 차례로 대답했다. 
처음은 정희원이었다. 
 
“난 4위에요. 이복순 할머니한테 랭킹 넘겨 받았거든요.” 
“저랑 신유승은 8위랑 9위에요 형. 아, 그리고 제가 신유승보다 더 높아요!” 
“저는 5위입니다. 그리고 공필두 씨는 랭킹 올리러 잠깐 자리를 비웠습니다. 한수영 씨도요.” 
 
그러고 보니 한수영이 있었지. 
내 생각을 읽은 모양인지 유상아가 물어왔다. 
 
“한수영 씨는 그 명단에 없었는데, 두고 가실 건가요?” 
“아뇨, 데리고 가야 합니다. 한수영은 꽤 도움이 되니까요.” 
“······그렇군요.” 
 
유상아는 한수영 이야기가 나오자 힘없이 웃었다. 
일행들은 아직 그 녀석이 ‘첫 번째 사도’였다는 걸 모른다. 
한수영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녀 입장에선 거짓말을 하는 기분일 테니, 기분이 안 좋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도 언제 이야기를 하긴 해야 하는데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곁에서 듣고 있던 정희원이 입을 열었다. 
 
“올라갈 수 있는 건 총 열 명인데, 한수영 씨는 어떻게 데려가려고요?” 
“원칙적으론 열 명만 갈 수 있지만, 히든 피스가 있습니다. [암흑성]에서 구할 수 있는 아이템 중에 [식스맨 카드]라는 게 있거든요. 그걸 쓰면 팀이 아닌 사람도 다음 시나리오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하여간 그놈의 히든 피스. 또 뭔가 우리한테 알려줄만한 건 없어요? 다음 시나리오에 뭐가 나오길래 이런 호들갑인지 우리도 좀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항상 유중혁 씨랑 둘이만 속닥대고 있잖아요.” 
“속닥대다뇨? 그 표현은 좀 거북한데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콧김을 뿜습니다.] 
 
정희원이 생긋 웃으며 나를 보았다. 
 
“그럼 말해주세요. 김독자 씨는 유중혁 씨랑은 다르다는 걸 보여달라고요.” 
 
주변을 둘러보자, 일행들은 할머니의 전래동화라도 기다리는 손자들처럼 나를 향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내가 이야기꾼이었다면 ‘옛날 옛날에 한 용사가 살았답니다’라는 그럴듯한 서두로 이야기를 열었겠지만, 난 김독자지 김작가가 아니다. 
 
“혹시 ‘마왕’이라는 존재에 대해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마왕(魔王). 
난데없이 던져진 그 단어에, 일행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뭐······ 악마들의 왕? 그런 건가요?” 
“나 알아요! 애니에 맨날 나와요!” 
 
이길영의 외침에 내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대충 비슷해.” 
 
‘멸살법’ 설정에 따르자면 좀 다르긴 하지만, 여기서 주절주절 설명하기도 뭣했다. 
 
“열 번째 시나리오는, 그 ‘마왕’과 싸우는 시나리오입니다.” 
 
이현성이 침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깨비에, 귀환자에, 촉수 괴물에······ 확실히 지금쯤 마왕 같은 게 나올 때가 됐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듣고 있던 이지혜가 물었다. 
 
“근데 마왕이면 엄청 센 거 아냐? 악마 후작이란 녀석도 그 정도인데······ 비교하자면 대체 어느 정도로 강한 건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해주었다. 
 
“성좌급이야.” 
 
‘멸살법’에서 마왕을 이르는 말이 있다. 
승천하지 않은 성좌(星座). 
말 그대로, 마왕은 현세에 눌러 붙은 ‘성좌’들이다. 
안색이 창백해진 이지혜가 다그쳤다. 
 
“그런 녀석을 우리가 어떻게 잡아? 아, 또 아저씨랑 사부랑 둘이서 잡을 건가?” 
“아니, 이번엔 다 같이 잡을 거야.” 
“······나 안올라가면 안돼?” 
“다 같이 싸워야 잡을 수 있어. 나랑 유중혁이 신격을 꺾었던 건 순전히 행운이었어. 두 번이나 그런 요행은 없다고.” 
“그래도······.” 
“걱정마. 마왕이 ‘성좌’만큼 센 건 사실이지만, 이 위층에 있는 녀석은 그 정도는 아니니까.” 
“그럼?” 
 
나는 잠깐 망설였다. 
지금 내가 그 정도의 정보를 한꺼번에 토해내도 될까 싶었기 때문이다. 
이 정보는 마왕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에 관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으니까. 
잠시 생각하던 내가 [그룹 채팅]으로 이야기를 전하려는 순간. 
 
[그건 제가 알려드리죠.] 
 
내 고충을 알았는지,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입니다 여러분. 하, 그동안 말 못해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하하, 다들 시나리오 준비는 잘 되어 가시나요?] 
 
비형이었다. 
 
 
* 
 
 
본래 <스타 스트림>에서 ‘마왕’으로 인정받는 존재는 72명 뿐이었다. 
그들은 성좌들처럼 수식언을 가지고 있으며, 제각기 다른 마계의 통치구를 장악하고 있었다. 
비록 ‘성운’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한 ‘세력’을 이끄는 존재들. 
그들은 별자리의 명예에 집착하는 성좌들을 비웃으며 도깨비들조차 버린 대지에 남았다. 
그 때문일까. 성좌들은 ‘이계의 신격’ 못지 않게 마왕들을 증오하게 되었는데, 이 [암흑성] 시나리오는 그런 성좌들의 경향을 고려해 만들어진 시나리오였다. 
화신들 싸우는 것도 보고, 마왕도 죽이고. 
한 마디로 성좌들의 사이다를 위해 만들어진 시나리오랄까. 
 
“아, 제발! 난 안 간다니까!” 
 
질질질질. 
 
사흘 동안, 나는 [암흑성]의 주변부에 숨어 있던 한수영을 찾아냈다. 
어찌나 꼭꼭 숨어 있는지, 도깨비 보따리에서 구입한 [구속의 밧줄]과 [인명 탐색]이 없었더라면 찾아내지 못할 뻔 했다. 한수영이 발악하며 외쳤다. 
 
“난 이제 안 싸워! 그냥 여기서 죽치고 있다가 네가 시나리오 클리어 하면 밖으로 나갈 거라고!” 
“너도 가야돼.” 
“마왕이랑 싸우기 싫단 말야!” 
“73번째 마왕은 급조된 녀석이야. 너도 알고 있잖아?” 
 
앞서 말했듯, <스타 스트림>에서 ‘마왕’의 격을 인정받은 존재는 72명 뿐이다. 그런데 이번 시나리오의 타이틀은 [73번째 마왕]이고. 즉, 위층에 있는 녀석은 ‘정식 마왕’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도 ‘마왕’이니까 지금까지 만났던 녀석들 중에서는 손에 꼽게 강하겠지만, 설화급 성좌들만큼 세지는 않아. 싸워볼 만 해.” 
“난이도가 변했을지도 모르잖아. 너랑 같이 다니다가 난이도 변한 게 어디 한두 번이야?” 
“메인 시나리오 난이도는 도깨비들이 함부로 바꿀 수 없어. 그건 <스타 스트림>의 관할이니까.” 
“도깨비만 위험한 줄 아냐? 사흘 전에 있었던 일 벌써 까먹었어?” 
 
한수영이 이렇게 학을 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원작 전개를 아는 녀석이니까 더할 수밖에 없겠지. 
 
“이대로 시나리오 계속 진행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들 다 전멸할 거야. 지금 <성운>들이 다 너만 노리고 있는 거 알지?” 
“······알아. 그래서 나도 잘 준비하고 있어.” 
“준비? 아니, 준비한다고 될 일이야? 당장 다음 시나리오에서 뭐가 어떻게 나올 줄 알고?” 
 
마침 야영지에 도착해서, 나는 말없이 일행들 쪽을 가리켰다. 
제각기 포메이션을 짜서 훈련 중인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가상의 적을 상정해 놓고 진형을 바꾸며 스킬 연계를 연습하고 있었다. 
 
“길영이랑 유승이는 후방으로! 유상아 씨가 앞으로 나서고, 내가 그 뒤를 맡는다!” 
“알겠어요!”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침착한 연계 공격들. 일행은 속성을 이용해 중첩 데미지를 주기도 하고, 적의 공격 반경을 이용해 원거리에서 포화를 쏟아내기도 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한수영이 입을 벌렸다. 
 
“설마 저거······ 마왕 패턴을 분석한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얼마나?” 
“거의 다.”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나는 ‘멸살법’ 텍본을 가지고 있고, 유중혁이 73번째 마왕과 싸운 데이터베이스는 상당히 쌓여 있었으니까. 게다가 유중혁은 2회차에서도 73번째 마왕과 싸워본 적이 있었다. 실질적인 경험과 이론적 빠삭함이 힘을 합쳤으니, 다음 시나리오에 대한 완전 공략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한수영은 진심으로 탄식한 얼굴이었다. 
 
“······너 진짜 미친놈이구나.” 
 
 
 
 
< Episode 35. 73번째 마왕 (2) > 끝

< Episode 35. 73번째 마왕 (3) >
 
 
 
 
 
“아직도 다음 시나리오가 힘들 거라고 생각해?” 
“······.” 
 
73번째 마왕은 강하지만, 이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하고 올라간다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껏 수행했던 시나리오들 중에서 가장 수월하게 풀릴지도 모르는 일이지. 
얼마 지나지 않아 훈련 중이던 일행들이 하나둘 근처로 모였다. 
 
“랭킹작은 모두 끝났습니까?” 
 
대표로 대답한 것은 정희원이었다. 
 
“모두 10위권 안에 들어갔어요. 사실 지혜랑 필두 씨가 아슬아슬 했는데, 오늘 아침에 자동으로 승급이 되더라고요.” 
“자동으로요?” 
 
그런 승급이 발생하는 경우는 한 경우 뿐이다. 
윗선의 랭커가 사망했을 때. 
한수영이 벌써부터 불길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10위권의 랭커가 죽었다? 뭔가 이상한데······ 야, 역시 난 안 가는 편이······. 
“왔군, 김독자. 저 여자도 데려갈 건가?” 
 
불쑥 나타난 유중혁의 모습에 한수영이 잽싸게 내 뒤로 숨었다. 
이 녀석은 아직도 유중혁이 무서운 모양이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수영을 못마땅하게 노려보던 유중혁이 품속에서 [식스맨 카드]를 꺼냈다. 
 
[화신 ‘유중혁’이 식스맨 카드를 사용하였습니다.] 
[화신 ‘한수영’이 시나리오의 특별 참가자로 기용됩니다.] 
[화신 ‘한수영’이 화신 ‘유중혁’의 팀에 소속되었습니다.] 
 
떠오른 메시지에 한수영이 경악했다. 
 
“뭐, 뭐야 이거! 야! 내가 왜 쟤 팀인데!” 
“자, 슬슬 출발할 거니까 다들 준비하세요.” 
 
내 말에 일행들이 팀별로 모였다. 
먼저 모인 쪽은 유중혁의 팀이었다. 
차례로 이설화, 이지혜, 이현성, 공필두. 거기다 불평을 늘어 놓는 한수영까지. 
원작과 원작이 아닌 것이 기이하게 뒤섞인 광경은 내게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오직 ‘멸살법’의 독자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랄까. 
이어서 내 팀도 차례로 열을 맞춰 섰다. 
정희원, 유상아, 신유승. 그리고 이길영까지. 
군기가 잡힌 유중혁의 팀에 비해 이쪽은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나는 일행들을 한 명씩 정성껏 바라보았다. 
 
“······뭘 느끼하게 봐요?” 
“그냥요. 감회가 새로워서······.” 
 
정희원의 핀잔에도, 나는 가만히 웃었다. 
여기까지 잘 따라와준 이들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가슴이 벅차면서도 왜인지 애달픈 마음이 든다. 
[제4의 벽]과 이야기하고 나서부터, 특히 그 마음이 더 커지는 느낌이다. 
이번 시나리오에 더욱 만반의 대비를 한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이들을 잃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참, 우리 팀도 식스맨 있는 거 아시죠?” 
 
내 말에, 팀원들이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쭈뼛거리며 선 인형이 있었다. 
 
“거기 있지 말고 이리 오세요.” 
 
우리가 구한 [식스맨 카드]는 총 두 장. 
유중혁 팀에 한수영이 들어갔듯, 우리 팀에도 식스맨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식스우먼이겠지만. 
 
“······수경 씨도 너와 함께 가고 싶어했다.” 
“지금은 당신이 같이 가는 편이 더 도움이 돼요.” 
 
전우치의 화신, 조영란이 복잡한 눈길로 나를 보았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부탁해 특별히 이번 공략대의 일원으로 끼워 넣었다. 
전우치의 성흔들은 위급한 상황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것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수경 씨랑 이야기는 해 봤니?” 
“조금은요.” 
 
[제4의 벽]에서 빠져나온 후유증 때문인지, 어머니는 도저히 다음 시나리오에 참가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제4의 벽]을 통해, 나는 어머니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숨기고 있던 과거 뿐만 아니라, 그녀가 시나리오에 참가한 후 겪었던 일에 대해서도. 
원작의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는 나와는 달리, 어머니의 싸움은 처절함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무리한 대가를 바쳐가며 성좌들의 도움을 얻었고, 환생자 니르바나에게 일부러 잡혀 녀석의 기억을 훔쳤으며, 심지어는 나를 지키기 위해 <성운>과 계약까지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알고 나서도, 나는 어머니를 향해 꺼낼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언젠가 시나리오가 무사히 끝나면, 우리 모자도 진짜 ‘이야기’를 나눌 날이 찾아올 것이다. 
어머니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이번에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았고, 눈을 돌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을 뿐이다. 
 
―네 선택을 믿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묘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제4의 벽]을 통해 어머니를 읽은 것처럼, 어머니 또한 나에게서 뭔가를 읽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출발하죠.” 
 
우리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표지는 <무저갱 평원>의 중심에 위치한 제단. 
암흑성 1층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제단을 통해 다음 층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걷는 내내 지루했는지, 정희원이 입을 열었다. 
 
“성운들이 영 잠잠한 게 거슬리네요.” 
 
실제로 이틀 전부터 성운들의 메시지가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뭔가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과도한 개연성을 소모한 탓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나는 유상아 쪽을 보며 물었다. 
 
“혹시 <올림포스> 쪽이랑 연락 되십니까?” 
“······사흘 전부터 안돼요.” 
 
지난 번에 듣기로, 현재 <올림포스>의 성좌들은 분열 중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유상아에게 접근한 쪽은 디오니소스와 페르세포네를 비롯한 <올림포스>의 아웃사이더들. 어쩌면 사흘 전의 사태로 <올림포스> 내부에서도 암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내 표정이 불안했는지, 유상아가 우려섞인 목소리를 냈다. 
 
“독자 씨,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유상아 씨는?” 
“······괜찮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나는 유상아를 바라보았다. 
너무 착한 사람이어서, 계속 보고 있으면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고 마는 사람. 
내 [운명]을 가장 먼저 전해 듣고, 나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녔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유상아라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다면 가장 먼저 나서는 사람이니까. 
첫 번째 시나리오 때 할머니를 살리기 위해 제일 먼저 일어선 것도 그녀였다. 그러니, 지금 내 자리에 다른 누가 있었더라도 유상아는 지금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이겨낼 수 있겠죠? 지금껏 계속 그랬으니까, 이번에도······.” 
“걱정 마세요.” 
 
나는 유상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저 안 죽습니다. 아시잖아요.” 
 
제일 먼저 운명을 본 게 유상아였으니, 그녀도 내 운명이 사라지지 않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무슨 말을 더 해줘야 안심시킬 수 있을까를 잠시 고민하는데, 앞쪽에 있던 유중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왔군.” 
 
고대의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건축물이 눈앞에 있었다. 
일행들이 눈에 띄게 경직되는 것이 보여서, 나는 한 사람씩 말을 걸어 주었다. 
 
“길영아. 유승아. 아까 연습한 대로 하면 돼. 키메라 드래곤은 내가 신호하기 전엔 절대 부르지 말고. 알겠지?” 
 
마왕 공략전에는 이 아이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아이들이 길들인 키메라 드래곤은, 이번 공략의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유상아 씨는 가능한 정희원 씨가 다치지 않도록 보호해주세요. 그리고 이번에도 메인 딜러는 정희원 씨입니다. 싸움법은 충분히 숙지하셨겠죠?” 
“기억하고 있어요.” 
 
준비를 마친 유중혁이 이쪽을 바라보자, 나도 일행들을 끌고 가까이 다가갔다. 곧이어 허리 높이의 제단이 나타났다. 나와 유중혁은 제단 위의 손바닥 마크에 동시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시나리오 도전자를 확인하였습니다.] 
[시나리오 도전자 : 암흑성 랭킹 1위 유중혁] 
[시나리오 도전자 : 암흑성 랭킹 2위 김독자] 
[총 입장 인원 : 12명] 
[시나리오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슈우우우우우! 
 
눈부신 빛줄기와 함께, 우리의 몸이 다음층으로 전송되기 시작했다. 
전송된 곳은, 비좁은 통로였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 지역에 진입하였습니다.] 
[메인 시나리오 # 10 ― ‘73번째 마왕’이 시작됩니다!] 
 
역시, 원작 그대로의 전개였다. 
아마 이 통로를 쭉 따라가면, 우리는 73번째 마왕이 기거하고 있는 전당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다들 포메이션 준비해요.” 
 
우리는 자세를 낮춘 채 조심스레 통로를 따라 이동했다. 마왕 공략전은 첫 기습으로 얼마나 큰 타격을 줄 수 있느냐에 따라 그 난이도가 달라진다. 가능한 조용히 접근해 큰 피해를 줄 수만 있다면, 연습한 포메이션을 모두 사용하지 않아도 공략을 무난히 끝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통로를 따라 이동하는 동안, 꺼림칙한 감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이쯤 오면 마왕의 기척이 느껴져야 하는데?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시나리오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형, 이건······?” 
 
놀란 이길영이 반사적으로 입을 열자, 나는 입술 근처에 손가락을 가져다대었다. 그러자 일행들도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독자 씨, 이거 이야기랑 뭔가 다른······.” 
“여, 여기 사람이 죽어 있습니다······!” 
 
그 말을 한 것은 선두에서 길을 찾던 이현성이었다. 
우리는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여 이현성 근처로 모였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시체들이 있었다. 
유중혁이 시체에 손을 대는 순간, 강력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개연성 폭풍의 흔적이군.” 
 
뭔 짓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후에도 스파크가 남아 있을 정도라면 이들의 배후성 또한 어지간히 무리를 한 듯했다. 아마 화신 동조를 통해 큰 힘을 끌어다 쓴 것 같은데, 이 정도 흔적이라면 배후성 쪽도 소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문제는 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했냐는 것인데.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베다>와 <파피루스>의 단말 화신들이다.” 
“뭐?” 
“[암흑성]을 돌아다니다 만난 적이 있다. 나한테 접촉해왔던 녀석들이 틀림없어.” 
“······이 녀석들이 여긴 어떻게 온 거지? 성운들의 단말이라면 랭킹은 충분했을 테지만, 시나리오 참여권이 없었을 텐데.” 
“[식스맨 카드]가 또 있었던 모양이군.” 
 
그러자 풀리지 않던 의문 하나가 해소되었다. 이지혜와 공필두의 랭킹이 갑자기 오른 것은, 이곳에서 이들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예감이, 더욱 불길해진다. 
만약 성운들이 조용했던 이유가, 여기다 나머지 개연성을 쏟았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는 것은······? 
반사적으로 서로를 쳐다본 나와 유중혁은, 포메이션도 잊은 채 전당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지금은 진형 따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전당에 도착한 순간, 우리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했다. 
 
[거참, 성좌님들. 대체 무슨 짓들을 벌이시는 겁니까?] 
 
거대한 전당의 중심에, 수십의 도깨비들이 허공에 떠 있었다. 
 
[멋대로 이런 짓들을 벌이시면 곤란하죠. <스타 스트림>을 너무 얕보는 거 아닙니까?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이런 곳에 쓰시다뇨?] 
 
우리를 향해 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명백히 우리가 들으라고 하는 듯한 발화. 나와 눈이 마주친 비형이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이 자식들, 대체 무슨······. 
 
[화신들을 아끼시는 건 알겠지만, 여러분들이 개연성에 간섭한다고 해서 시나리오가 끝나지는 않는다고요. 몇몇 분들은 거의 소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으신 것 같은데. 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지르신 겁니까?] 
 
대표로 말하는 도깨비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웃음. 
그보다 잠깐만. 
저 자식이 방금 뭐라고 했지? 
 
“김독자.” 
 
유중혁의 말에, 나는 녀석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전당의 중심. 
본래 ‘73번째 마왕’이 있어야 할 옥좌가 부서져 있었다. 
그리고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우리를 맞이해야 할 마왕은. 
 
[현재 ‘73번째 마왕’이 사망한 상태입니다.] 
 
처참하게 가슴이 찢긴 채로, 죽어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쟤 죽은 거야?” 
 
뒤늦게 달려온 한수영의 말에, 다른 일행들도 입을 열었다. 
 
“마왕이 벌써 죽었다고요?” 
“그럼 시나리오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혹시, 벌써 끝난 건가?”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진 까닭에, 일행들의 목소리는 잘 들려오지 않았다. 
시나리오 도전 자격도 얻지 못한 화신들이, 개연성 폭풍을 감수하고 성운들의 지원을 받아 마왕을 죽여버렸다. 
언뜻 보면 시나리오가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스타 스트림>의 메인 시나리오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스타 스트림>이 시나리오의 균형을 바로잡습니다.] 
 
초월적 존재가 과도하게 개입하여 망가진 시나리오는,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에 의해 강제로 수복된다. 
머릿속으로 강렬한 기시감이 스쳤다. 
[73번째 마왕] 시나리오는 아니었지만, ‘멸살법’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성좌들의 난동으로 인해 시나리오가 망가지고, <스타 스트림>이 메인 시나리오를 수복했던 일이. 
그때, 대체 어떻게 되었었지? 
 
[<스타 스트림>이 망가진 개연성을 바로잡습니다.] 
 
나는 마왕이 죽은 자리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러운 이야기의 흐름을 좋아하는 <스타 스트림>은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해서 죽은 존재를 다시 되살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시간 역행이나 복선 없는 부활은 시나리오의 개연성을 가장 크게 훼손시키니까. 
 
[메인 시나리오 내용이 갱신되었습니다!] 
 
73번째 마왕은 죽었다. 
하지만 여전히 73번째 마왕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녀석을 사냥해야만 시나리오가 진행되니까.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스타 스트림>이 할 일은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 
마왕이 죽은 자리에, 까맣게 빛나는 보옥(寶玉)이 놓여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야, 저거······.” 
 
그런데, 당연히 곁에 있어야 할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등줄기에 섬뜩한 느낌이 번졌다.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돌아 보았을 때, 유중혁은 이미 곁에 없었다. 
 
“유중혁!” 
 
내가 움직였을 때, 이미 유중혁은 보옥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나를 돌아보는 녀석의 표정은, 지금껏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멸살법’의 어디에도 없던 눈빛으로, 유중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김독자. 꼭 약속을 지켜라.” 
 
그리고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보옥이 ‘73번째 마왕 후보자’를 선택하였습니다.] 
[새로운 ‘73번째 마왕’이 선출됩니다.] 
 
 
 
 
 
< Episode 35. 73번째 마왕 (3) > 끝

< Episode 35. 73번째 마왕 (4) >
 
 
 
 
 
“야! 무슨 개소리야!” 
 
나는 다급히 외치며 유중혁을 향해 달려갔다. 
보옥을 쥔 유중혁의 몸에 새카만 아우라가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보옥의 선택을 받은 존재가 마왕으로 진화합니다!] 
 
보옥의 선택을 받은 자는, 73번째 마왕이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목표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나? 
 
며칠 전, 유중혁의 의미심장한 질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 목표. 이 모든 시나리오의 끝에 도달하는 것······.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거의 발작적으로 외쳤다. 
 
“유중혁 이 새끼야!” 
 
쐐애애액, 하고 강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뒤쪽에서 뻗어 나온 수십 개의 와이어가 유중혁을 향해 쏟아지더니, 개중의 하나가 유중혁의 손에 쥐어져 있던 보옥을 낚아챘다. 
 
[마왕 계승이 취소됩니다.] 
 
유중혁의 낯빛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독자 씨!” 
 
뒤를 돌아보자, 유상아가 손에서 수십 가닥의 실을 내뻗고 있었다. 모두가 얼어붙은 사이, 오직 그녀만이 제정신을 차리고 기지를 발휘했던 것이다. [실 묶기]에 감겨든 마왕의 보옥이 실을 타고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유중혁이 어마어마한 살기를 폭사하며 일갈을 터트렸다. 
 
“방해하지 마라!” 
 
강렬한 마력파가 유상아를 덮치려는 순간, 나는 [책갈피]에서 [바람의 길]을 발동해 녀석의 마력파를 흘려냈다. 
 
쿠콰콰콰콰콰! 
 
최대 레벨의 [바람의 길]을 운용하고 있는데도, 흘려내는 게 쉽지 않았다. 이게 바로 초월좌가 된 유중혁의 힘이다. 나는 이를 악문 채 외쳤다. 
 
“유상아 씨! 그거 잘 들고 있어요! 절대 사용하지 말고요!” 
“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일행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한수영이 분신을 수십 개로 분열시키며 소리쳤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김독자, 내가 말했잖아! 유중혁 저놈은 끝까지 자기 하나만 생각하는 놈이라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지, 한수영이 고래고래 악을 썼다. 
 
“김독자! 반드시 막아야 돼! 저 새끼 분명 마왕 돼서 다 죽이고 자기 혼자 시나리오 클리어하려는 속셈······!” 
 
퍼퍼퍼퍼펑! 
 
유중혁을 막아서던 한수영의 분신이 일거에 폭발하며, 한수영의 본체가 전당의 벽에 틀어박혔다. 
다른 일행들도 다급하게 내 앞을 막아섰다. 
 
“사부! 대체 왜 그래요! 꺄아악!” 
“유중혁 씨!” 
 
콰아아앙! 
 
이지혜도, 정희원도. 유중혁의 일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지금의 유중혁은 진심이었다. 
자신의 목적을 방해하는 존재는 모조리 처단해버리겠다는 집념. 
나는 일행들을 물리며 앞으로 나섰다. 
 
“상대하지 마세요!” 
 
이글거리는 유중혁의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비켜라, 김독자. 마왕이 되는 것은 나다.” 
“무슨 개소리야! 갑자기 왜 그러는데?”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이 시나리오를 깰 방법은 하나뿐이다.” 
 
나는 허공에 떠 있는 시나리오 창을 흘끗 바라보았다. 
 
+ 
 
<메인 시나리오 # 10 ― 73번째 마왕> 
 
분류 : 메인 
난이도 : SS+ 
클리어 조건 : 당신은 두 가지 방법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보옥을 차지하여 스스로 73번째 마왕이 되거나, 새롭게 태어나는 73번째 마왕을 살해하십시오. 이 시나리오는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해야만 클리어 할 수 있으며, 다른 진행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한시간 : 30분 
보상 : 200,000코인, ??? 
실패시 : 사망과 동시에 시나리오 추방 
 
+ 
 
이 시나리오는, 여태껏 있었던 ‘희생양’ 형태의 시나리오와 흡사했다. 
 
모두를 위해 한 사람이 죽거나. 
혹은, 한 사람이 살고 모두가 죽거나. 
 
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물었다. 
 
“그래서, 네가 희생하겠다 이거냐?” 
“나를 사냥하고 다음 시나리오로 가라.” 
“왜 갑자기 그딴 짓을 하겠다는 건데?” 
“이게 옳은 일이니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신이 믿는 것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답. 
유중혁은 그 특유의 뉘앙스로 말을 이었다. 
 
“나는 고통에 익숙하다. 마찬가지로, 죽음에도 익숙하고. 네놈이라면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자신에 대해 잘 아는 것을 확신하는 말투. 
하지만 유중혁은 틀렸다. 
나는 유중혁을 모른다. 
내가 아는 유중혁은, 절대 이런 짓은 하지 않으니까. 
어쨌든 대화의 여지가 생긴 것 같아서, 나는 이 망할 개복치 녀석을 진정시키기로 했다. 
 
“무슨 말인진 알겠는데, 네가 나서서 희생할 필요는 없어. 회귀자라고 목숨이 여러 개 있는 건 아니잖아? ‘부활’을 가진 건 내 쪽이야. 그러니 ‘마왕’이 되기에 적합한 건 네가 아니라 나라고.” 
“부활. 좋은 능력이지. 하지만 이번 시나리오에서도 그게 먹힐 거라고 생각하나? 시나리오 실패 대가를 확인했다면, ‘부활’이 이번에도 널 구해줄 거란 확신은 못 할 텐데?” 
 
나는 순간 말을 잊었다. 
확실히 유중혁의 말은 맞았다. 
이번 시나리오는, 단순히 ‘사망’으로 끝나는 게 아니니까. 
이 자식······ 설마 거기까지 계산하고 움직였다는 건가? 
 
“그만 비켜라, 김독자.” 
 
쿠구구구구! 
 
내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거칠게 울었고, 녀석의 [진천패도]가 나를 가리키며 멈춰섰다. 그 아찔한 대치 상태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이 자식을 설득할 수 있지?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방법은 떠오르질 않았다. 
이대로라면, 이 자식은 마왕이 되고 빌어먹을 회귀 루트를 밟고 말 것이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를 발동합니다!] 
 
나는 놈의 생각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번 시나리오의 실패 대가는 ‘시나리오 추방’이다.」 
「시나리오에서 추방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렇게 되면 김독자의 부활 능력은 무의미해진다.」 
「아마 놈의 [운명]이 가리키는 죽음이 바로 이것이겠지.」 
「김독자가 마왕이 되면, 녀석은 반드시 여기서 죽게 될 것이다.」 
 
쏟아지는 그 생각의 폭포를 받으며, 나는 심장 끝이 찌르르 울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희생해야 할 것은, 나다.」 
 
이 녀석은, 정말로 여기서 희생할 생각인 것이다. 
그 오만하고 고고한 ‘유중혁’이.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서. 
갑자기 알 수 없는 감정이 속에서 북받쳐 올랐다. 
 
“그럼 너는? 너는 어떤데. 네가 여기서 죽어버리면, 네 빌어먹을 목표는 다 어쩔 거냐고!” 
“네가 대신 이뤄주겠지.” 
“뭐?” 
 
유중혁이 내 뒤쪽의 일행들을 보고 있었다.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네놈일지도 모른다.” 
 
이현성, 이지혜, 신유승, 이설화······.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는 유중혁의 눈빛에 깊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많은 일행이 여기까지 올라온 적은 없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지도 모른다.」 
 
유중혁의 지난 인생 회차에서도, 그리고 유중혁이 미리 정보를 전해 들은 41회차까지의 인생 역정에서도. 
이번 회차와 같은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유중혁을 흔들고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 개복치 자식을, 대체 어떻게 설득해야······. 
 
“그만 비켜라.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쿠구구구구! 
 
[거신화]를 발동한 녀석의 기운이 급격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 사흘 사이에 또 성장했는지, 내뿜는 기운만으로 일행들의 발이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공포에 질린 유상아와, 보옥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유중혁. 
나는 결국 ‘신념의 칼날’을 활성화했다. 
 
“그만둬! 멈추라고 개자식아!” 
 
기이이잉! 
 
화려한 백청의 에테르가 유중혁의 [파천강기]와 충돌했다.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 것은, 물론 내 쪽이었다. 지금의 이 녀석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최소 [전인화]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놈이 회귀하도록 둘 수는 없다. 
별수 없이 [책갈피]를 열려는 순간, 유중혁이 말을 이었다. 
 
“혹시, 내가 ‘회귀한 후의 세계’가 걱정되는 건가?” 
“뭐?” 
“너는 두려운 것이겠지. 내가 사라지는 순간 이 세계도 없어질까 봐. 그렇지 않은가?” 
 
순간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대체 어떻게 그걸 안 걸까. 
내가 아니라 녀석이 [전지적 독자 시점]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나는 그런 생각조차 잊고 말았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배후성에게 이미 물어보았으니까.” 
 
······뭐? 
 
“내가 회귀해도 이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세계가 리셋되거나 하는 일은 없다는 소리다.” 
 
츠츠츠츳! 
 
간단히 유상아를 제압한 유중혁이 [보옥]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런 유중혁을 원하는 듯, [보옥]에서 뻗어 나온 심유한 마기가 유중혁의 손끝에 얽혀들었다. 
 
“계속해서 살아가라, 김독자.” 
 
낯선 얼굴의 유중혁이 나를 보며 말했다. 
 
“이제 네가 이 세계를 구해야 한다.” 
 
 
* 
 
 
쿠르르릉! 
 
[암흑성 2층]의 하늘에서 천둥이 내리쳤다. 
마치 암흑성의 붕괴를 암시하듯 불길하고 사나운 천둥. 
방랑자들을 움직여 사람들을 수습하던 이수경도, 우두커니 굳은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하늘의 너머에, 아마 그녀의 아들이 있을 것이다. 
 
“흘흘, 걱정이 많아 보이시는구만.” 
 
그 말을 한 것은 이복순이었다. 
그녀는 정희원에게 자신의 암흑성 랭킹을 넘겨준 뒤 이곳에 남는 것을 택했다. 
잠시 이복순을 바라보던 이수경이 답했다. 
 
“엄마 노릇이 익숙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누군들 익숙해지겠나? 평생이 걸려도 익숙해질 수 없을 거야. 나도······.” 
“또 육남매 키운 이야기 꺼내시려는 건 아니죠?” 
“흘흘, 들켰나?” 
 
이복순이 껄껄 웃었다. 
방랑자들 중 이복순이 홀몸으로 키워냈다는 육남매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복순은 다정한 목소리로 이수경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아인 반드시 살아 돌아올 거야. 너무 걱정마시게.” 
“그렇다면 좋겠지만······ [운명]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모름지기 [운명]이란 극복하는 것 아니겠나? 나만 해도······.” 
 
결국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 육남매를 키워냈다는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읊는 이복순을 보며, 이수경은 쓴웃음을 지었다. 
[운명]이 그렇게 단순하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누구도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시나리오로 가지 않으면, 화신 김독자는 살 수 있다.」 
 
20년의 수명을 바쳐, 이수경은 [운명]의 그 구절을 읽어냈다. 
다음 시나리오로만 가지 않으면 김독자는 살 수 있다. 
그 말은 곧, 다음 시나리오로 가게 되면 김독자는 반드시 죽게 된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독자야.’ 
 
그렇지만 모든 지표가 아들의 죽음을 가리키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수경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놓을 수가 없었다. 
 
파스슷. 
 
모래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에, 이수경은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회복이 더디어 아직 결합이 불완전한 그녀의 육체는 여전히 바스라졌다 붙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모두, [제4의 벽]에 들어갔다 나왔던 후유증 때문이었다. 
 
이수경은 [제4의 벽]에 먹혔던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 
마치 존재 자체가 형태소 단위로 분해되는 듯한, 끔찍한 경험. 
아마도 그녀는 그때 한 번 죽었다. 
부서진 이야기처럼 벽 속으로 빨려 들어간 그녀는, 그곳에서 어떤 인간도 하지 못할 경험을 했다.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그저 자신의 아들 안에 그런 ‘벽’이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는 것. 
 
그리고 그 ‘벽’ 안에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것에 전율하는 것 뿐이었다. 
 
‘······그건 대체 뭐였을까.’ 
 
그곳에서, 이수경은 ‘벽 안의 존재’와 대면했다. 
존재가 한 번 으스러졌다가 재생되는 바람에 정확한 기억은 남지 않았다. 
그게 대체 뭐였는지, 벽의 내부가 정확히 어떤 구조로 되어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단 한 가지, 그녀가 기억하는 것도 있었다. 
그것은 어떤 질문에 관한 대답이었다. 
 
「내 아들이 살아날 방법은, 대체 뭐야? 그 빌어먹을 [운명]은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 거지?」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이수경은 그런 것을 물었다. 
‘벽 안의 존재’는 그런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 웃더니 대답했다. 
 
「[운명]을 벗어날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이 장난스럽다는 듯, 괴이쩍은 미소를 지은 채로. 
 
「김독자는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어.」 
 
 
 
 
 
< Episode 35. 73번째 마왕 (4) > 끝

< Episode 35. 73번째 마왕 (5) >
 
 
 
 
 
―그만둬! 멈추라고 개자식아! 
 
그 시각, 관리국의 서울 지부에서도 홀로그램 패널을 통해 메인 시나리오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맹렬하게 몰아치는 마력의 폭풍을 보며, 몇몇 도깨비들이 탄식을 토했다. 
그 순간 도깨비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지금부터 펼쳐질 광경은, 서울 돔 시나리오가 시작된 이래 역대급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걸. 
상징체로 현장 상황을 지켜보던 비형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유중혁! 이 빌어먹을 ■■■ 새끼야······! 제발! 
―모두 막아요! 유중혁 씨를 막아! 
 
몇몇 도깨비들이 필터링 섞인 대사들에 불만을 표했다. 하지만 비형은 그렇지 않았다. 필터링이 섞였음에도 불구하고, 비형은 이제 저들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말들은, 온전히 쓰여있지 않아도 읽을 수 있다. 
아마 줄곧 채널을 보고 있었던 성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메시지가 뜰 리 없으니까.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비극적인 상황에 절망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머리털을 뭉텅이로 쥐어뜯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심란한 표정을 짓습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침묵한 채 상황을 지켜봅니다.] 
. 
. 
[일부 성좌들이 <성운>들의 만행에 크게 분개합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다음을 예측할 수 없는 전개에 완전히 몰입합니다.] 
 
비형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왕으로 변해가는 유중혁과, 그것을 막으려는 김독자······. 
그 광경을 보며, 비형은 오래 전 자신이 초보 도깨비였던 시절을 떠올렸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사건들에 일희일비하던 시절. 
 
모든 이야기가 사랑스럽고,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던. 
자신의 채널에서 싸우는 화신에게 몰입했던, 하염없이 순수했던 그 시절의 기분······. 
자신의 안에서 꿈틀대는 감정을 외면하려는 듯, 비형은 생각했다. 
 
‘저건 그냥 이야기야.’ 
 
아무리 비극적이고, 아무리 구슬퍼도, 결국 이야기는 이야기다. 
김독자와 유중혁의 이야기 또한 <스타 스트림>에서 무수히 반복된 이야기들 중 하나일 뿐이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미 본 것들이고, 감동이라는 것은 오래전에 잊었다. 
그가 아는 것은 과장되고 만성화된, 통쾌감을 자극하는 연출들뿐이었다. 
그럼에도 왜일까. 
비형은 품 속의 알을 감싸쥔 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제기랄! 김독자. 어떻게든 해봐라. 늘 그랬듯, 예상 밖의 전개로 모두를 엿먹여 보라고!’ 
 
늘 그랬듯, 이번에도 김독자에게 새로운 수가 있기를. 
바보 같게도 도깨비인 그가 그런 기대를 하고 있었다. 
 
“정말 비극적인 전개로 가는군. 그렇지 않은가?” 
 
곁에 있던 서울 지부장 바람이 말했다. 
비형은 그를 슬며시 노려보다가 대답했다. 
 
“······반쪽 짜리 성좌에겐 너무 가혹한 비극이군요.” 
 
성운들은 이번 개입으로 인해 큰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이 정도 규모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행사하면, 단순히 하위 성좌들을 희생했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 
각 성좌들은 성운을 통해 개연성을 공유하고 있고, 이번 사태로 인해 엄청난 개연성의 손실을 입었다. 
이 상황에서 만약 성운들간의 전쟁이라도 벌어진다면, 김독자로 인한 손실은 그들의 전장에 결정적인 패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바람이 말했다. 
 
“김독자의 죽음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거겠지. 말했다시피, ‘모든 것의 마지막’과 관련된 문제에 한해서 그들은 매우 민감해. 그리고 그들은 김독자의 가능성을 매우 높이 사고 있네.” 
“······그렇다면 상황이 안타깝게 됐군요.” 
“흐음? 왜지?” 
“김독자는 죽지 않을 테니까요.” 
 
비형은 자신이 왜 그런 호언을 하고 있는지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말했다. 
 
“마왕이 된다 한들, 유중혁은 김독자를 죽이지 않을 겁니다.” 
 
비형은 다시 화면을 돌아보았다. 
아마 성운들의 계획은, 유중혁을 마왕으로 만들어 김독자를 죽이는 것이었을 터다. 하지만 그것은 ‘유중혁’이라는 인물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성운들의 오만이었다. 
 
―방해하지 마라! 
 
화면 속에서 소리치는 유중혁을 보며, 비형은 끓는 비감을 삼켰다. 
결국, 유중혁은 여기서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김독자는 살아남는다. 
그리하여 성좌들의 [운명]은, 이번에도 김독자를 비껴 나갈 것이다. 
그렇게 살아남고, 또 살아남다 보면 언젠가는······. 
바람이 웃었다. 
 
“자네는 아직 [운명]을 잘 모르는군.” 
“······예?” 
“성운들이 정말 몰랐을 것이라 생각하나? 그들이 김독자의 미래는 모른다 해도, 김독자의 성격에 대해서도 분석하지 않았을 것이라 믿는 건가? 그렇다면 자넨 [운명]의 무게를 얕보고 있는 걸세.” 
“그게 무슨······.” 
 
비형의 말은 다음 순간 화면에서 터져 나온 섬광과 함께 묻혔다. 
 
[<스타 스트림>이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의 ‘격’을 발표하였습니다.] 
 
홀로그램 패널 전체를 물들이는 황홀한 빛에, 상급 도깨비 바람도 진심으로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보게. 이제 운명이 실현될 걸세.” 
 
 
* 
 
 
“독자 씨! 뭐해요! 정신 차려요!” 
 
마기에 물들어 가는 유중혁을 보며, 나는 멍한 상태로 굳어 있었다. 
 
―혹시, 내가 ‘회귀한 후의 세계’가 걱정되는 건가? 
―너는 두려운 것이겠지. 내가 사라지는 순간, 이 세계도 없어질까 봐. 그렇지 않은가? 
 
수천 마리의 벌레들이 귓속에 들어간 것처럼 왱왱거리는 소리가 감각을 어지럽혔다. 
 
“꺄아아악!” 
 
일행들의 비명소리. 
 
콰콰콰콰쾅! 
 
주변의 폭음들. 
 
―내가 회귀해도, 이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세계가 리셋되거나 하는 일은 없다는 소리다. 
 
유중혁이 남긴 말들이,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었다. 
 
‘유중혁이 회귀해도, 이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해가 가질 않았다. 
유중혁의 배후성. 
‘멸살법’에서 단 한 번도 뭔가에 반응한 적 없었던 그 존재가······ 대답이라는 것을 했다고? 
대체 왜? 
그것도, 하필 지금 같은 상황에서? 
 
“독자 씨!” 
 
모르겠다.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5번 책갈피,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이 활성화됩니다!] 
[전용 스킬, ‘소형화 Lv.3’를 발동합니다!] 
[전용 스킬, ‘전인화(電人化) Lv.11(+1)’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순식간에 줄어든 내 몸이 유중혁을 향해 백청의 궤적을 그렸다. 
 
“김독자!” 
 
으르렁거리는 유중혁의 외침. 
백청의 검극이 유중혁의 칼날에 닿으며, 가공할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거신화]와 [파천강기]의 콤보에, [전인화]와 [백청강기]의 힘이 맞부딪친다. 
 
쿠아아아앙! 
 
폭발하는 에테르의 폭풍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만약 유중혁의 말이 맞다면, 나는 더 이상 놈의 회귀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놈이 회귀한다 해도, 이 세계가 남아있다는 게 보장된다면 나는 그저 이 세계를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잘 생각해라 김독자. 기회는 여러 번 오지 않아.” 
 
과도한 힘의 충돌에 전신의 근육이 삐걱거렸다. 
유중혁도 나도 한계치에 달한 힘을 쏟아 붓고 있었다. 
 
까가가가각! 
 
손 끝에 감겨드는 칼날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깨닫는다. 
[제4의 벽]에 의해 경감되는 고통. 
그리고 모든 것을, 그 어떤 벽도 없이 온전히 받아내고 있을 유중혁. 
 
“아니, 그건 곤란해.” 
 
회귀해도 이 세계는 그대로니까 괜찮다고? 
자신이 희생해서, 이 시나리오를 끝내겠다고? 
 
“내가 바라는 ‘결말’에 이런 전개는 없어.” 
“아직도 이해를 못한 거냐? 내가 마왕이 되어야만······!” 
“마왕이 되는 건 나야.” 
“개소리 마라! 그런 짓을 하면 네놈은 반드시 죽는다. 시나리오에서 추방당하고 나면 부활이고 뭐고 아무런 소용이 없단 말이다!” 
 
아마 유중혁은 내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녀석과 나 사이에는, 그 어떤 간극으로도 메울 수 없는 거대한 벽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 벽이 있었기에, 나는 오래도록 이 녀석을 볼 수 있었다. 
 
유중혁의 후회를, 절망을, 꿈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나는 그 모든 것을 읽으며 자랐다. 
 
“생각해 봐. 주인공이 없는 이야기를 누가 보겠냐고.” 
 
머릿속에 몰아치는 무수한 기억들을 느낀다. 
모든 삶의 비극들을, 나는 단 하나의 이야기로 이겨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의 이야기. 
 
그 이야기가 나를 만들었고. 
나는 마침내 이곳에 있다. 
 
“이건 빚을 갚는 거다.” 
“······빚? 무슨 소리냐.” 
“네가 한 번 나를 구했으니, 나도 널 구해주는 거라고.” 
“무슨 헛소리를······!” 
 
유중혁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동안 아껴뒀던 기술을 사용했다. 
단 한순간이지만, 육체의 내구를 모두 소진하고 쓸 수 있는 기술. 
직접 써보는 건 처음이지만, 아마 이론상으로는 가능할 것이다. 
 
“소형화를 해제한다.” 
 
내 말과 동시에, [전인화]의 광휘로 뒤덮인 몸의 크기가 원상태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현재 당신의 육체 구성이 해당 등장인물의 육체 구성과 상이합니다.] 
[현재 당신의 육체 구성으로는 ‘전인화’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강력한 스킬 패널티가 당신의 육체를 잠식합니다!] 
 
파츠츠츠츳! 
 
[전인화]는 오직 ‘소인’일 때만 사용할 수 있는 기술. 
하지만 [전인화]를 사용한 채 [소형화]를 해제하면 잠깐이지만 원래의 몸으로도 [전인화]의 힘을 쓸 수 있다. 비록 육체가 사경을 헤매게 되지만, [소형화]가 해제된 만큼 [전인화]의 능력은 찰나간 더욱 증폭된다. 
 
“김독······!” 
 
경악한 유중혁의 눈이 부릅 떠진 순간, 전력으로 발출한 [전인화]의 힘이 장내를 덮었다. 눈부신 백청의 에테르가 전당을 휩쓸었고, 그대로 전당의 벽까지 날아간 유중혁이 커다란 울혈을 토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유중혁이 떨어트린 보옥을 주워든 이길영이 보였다. 
 
“길영아. 그거 이리 줘.” 
 
이길영이, 주춤거리며 내게서 물러났다. 
 
“싫어요. 저 다 들었어요. 이걸 주면 형은······.” 
 
이길영이 머뭇거리는 순간, 한수영이 외쳤다. 
 
“멍청아! 김독자한테서 떨어져!” 
 
이미 늦었다.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힌 내가 이길영의 손에서 보옥을 빼앗았다. 
 
“미안, 길영아.” 
 
동시에 [전인화]의 파동이 발출되며, 주변의 일행들이 동시에 내 근처에서 튕겨져 나갔다. 
 
콰아아아아! 
 
[전용 스킬, ‘책갈피’가 강제로 종료됩니다.] 
 
과부하에 걸린 육체. 
칠공에서 동시에 피가 터져 나왔다. 
나는 희미해지는 정신을 붙잡은 채 보옥을 꾹 쥐었다. 
그러자 보옥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전신을 감싸안기 시작했다. 
 
꽈드드드득. 
 
[성운 <베다>의 성좌들이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그래, 이것이 너희가 원했던 것이겠지. 
 
[당신은 ‘73번째 마왕’의 자격 요건을 충족하였습니다.] 
[보옥이 당신의 잠재력에 놀라워합니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를 획득하였습니다!] 
 
“독자 씨!” 
 
희미하게 들려오는 일행들의 목소리를,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가로막았다. 
 
[마왕의 길을 택할 시, 당신은 암흑성 3층의 모든 존재를 말살해야 합니다.] 
[시나리오에 실패할 시 당신은 이 시나리오에서 영구히 추방됩니다.] 
 
시나리오 추방. 
그것은 단순히 ‘사망’과 같은 의미가 아니었다. 
저 유구한 <스타 스트림>이 주관하는 흐름에서 영원히 쫓겨난다는 것. 
도깨비나 성좌의 눈이 닿지 않는, 그 어떤 이야기도 없는 저 지독한 공허 속에서 죽어간다는 것······. 
이 <스타 스트림>에서 그 공허를 견뎌낼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어떤 성좌도 ‘시나리오’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성운 놈들이 바랐던 게 무엇인지. 
이 빌어먹을 [운명]이 가리키는 지표가 무엇인지, 아주 잘 알겠다. 
 
“나는 마왕이 되겠다.” 
 
[보옥이 새로운 마왕 후보자를 선택하였습니다.] 
[새로운 ‘73번째 마왕’이 선출되었습니다.] 
 
강대한 마기가 전신의 감각을 사로잡았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당신은 ‘마왕’의 힘을 계승하였습니다.] 
 
걸레짝이 된 육신이 엄청난 마기를 흡수하며 순식간에 그 힘을 회복하고 있었다. 
아니, 회복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이제껏 내가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막대한 에너지. 
나는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거듭나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격’을 발표합니다.] 
[당신의 격은 ‘설화급’입니다.] 
. 
. 
[당신의 ‘성흔’이 개방되었습니다!] 
[강렬한 마기가 당신의 별자리를 오염시킵니다.] 
[당신은 타락한 성좌가 되었습니다!] 
 
타락한 성좌. 
그것은 <스타 스트림>이 마왕(魔王)을 부르는 이름.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맹렬한 적대감을 표출합니다.] 
 
새카만 마기가 천천히 걷혀 나가자, 망연자실한 얼굴로 나를 보는 일행들이 보였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무릎을 꿇은 일행들이 몸을 떨고 있었다. 
멀리서 절망한 유중혁의 얼굴도 보였다. 
 
[메인 시나리오, ‘73번째 마왕’이 시작됩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대수롭잖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다들 일어나세요.” 
 
왜냐하면 이 순간을 위해 지난 사흘이 있었으니까. 
 
“마왕을 상대하는 법, 다들 기억하고 계시잖아요.” 
 
아마 성운들은, 이 모든 게 자신들의 계획대로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마침내 [운명]대로, 김독자는 이곳에서 죽게 되었노라고. 
하지만 그들은 모를 것이다. 
놈들이 운명의 시나리오를 이곳으로 점지했듯. 
나 역시, 사흘 간 빌어먹을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순간만을 예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부서진 천장의 틈새로 희미한 볕이 새어들고 있었다. 
나는 눈부신 듯 그 볕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제 마지막 시나리오를 시작해 봅시다.” 
 
오늘은, ‘화신 김독자’가 죽는 날이다. 
 
 
 
 
 
< Episode 35. 73번째 마왕 (5) > 끝

< Episode 35. 73번째 마왕 (6) >
 
 
 
 
 
일행들은 여전히 황망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표정들. 
벽에 처박힌 유중혁은 아직 정신을 못차린 채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전당의 벽면을 바라보았다. 
 
검은 광택이 도는 석벽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어깨를 뚫고 돋아난 검은 날개, 머리통 위로 작게 솟아난 뿔. 
피부 위에 낙인처럼 찍힌 마기의 흔적. 
몸은 평소보다 서너 배 정도 커졌고, 전신의 근육은 힘을 주지 않아도 크게 팽창해 있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요! 왜 독자 씨가 마왕이······!” 
“설명도 없이 대체 뭐야 이게! 우리보고 어쩌란 건데!” 
 
유상아와 이지혜가 외쳤다. 
정희원, 이현성, 이길영과 신유승······ 심지어는 공필두나 조영란까지.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여러분은 저를 사냥해야 합니다.” 
 
[‘73번째 마왕’의 첫 번째 페이즈가 시작됩니다.] 
[공략 제한시간은 30분입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빨리 시작하세요.” 
 
내 전신에서 가공할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묵묵히 공격을 얻어 맞는다고 해도, 정해진 시간 안에 일행들이 내 체력을 다 깎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의 맷집. 
정희원과 이현성이 절박한 얼굴로 나를 보며 외쳤다. 
 
“난 독자 씨랑 싸우기 싫다고요!” 
“그 명령은 따를 수 없습니다!” 
 
그들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나라도, 그들과 같은 상황이 되면 망설일테니까. 
나는 일부러 그들을 향해 웃어주었다. 
 
“왜들 그렇게 심각한지 모르겠군요. 다들 제가 누군지 잊으셨어요? 저 김독자 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고요.” 
 
내 말에, 순진한 이현성의 표정이 흔들렸다. 
 
“······혹시 이번에도 다시 살아나시는 겁니까?” 
“네.” 
“하지만 아까 듣기로는······!” 
“유중혁 도발하려고 일부러 해 본 소리에요.” 
 
딱히 [선동]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일행들의 얼굴에 갈등이 맺히고 있었다. 아마 나에 대한 신뢰와, 나를 공격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일행들의 내부에서 부딪치고 있을 것이다. 
 
“믿으세요. 이게 가장 이상적인 방법입니다.” 
 
일행들은 결국 나를 공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 밖에 방법이 없으니까. 
나를 죽이지 않으면, 이곳의 모두가 죽는다. 
한수영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녀석이 입을 열기 전에, 내가 먼저 신호를 보냈다. 
 
‘한수영.’ 
 
내 입모양을 읽은 한수영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너 밖에 없다. 네가 역할을 맡아 줘야해.’ 
 
나도, 한수영도 알고 있다. 
일행들은 어떤 화신들보다 강인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결단력이 없다. 
반면 한수영은, 이곳의 누구보다 상황판단이 빠르고 현실적이다. 
 
“······항상 그런 식이지, 김독자.” 
 
한수영이 이를 갈 듯 말했다. 
 
“나라고 감정이 없는 괴물인 줄 알아?” 
 
한수영은 나를 잠시 바라보고,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마치, 그녀의 한 마디에 모든 것이 결정되리라는 것처럼. 
숨을 가볍게 들이켠 한수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모두 정신 차려. 여기서 다들 뒈지고 싶어?” 
 
나는 웃었다. 
그래, 잘 한다. 
 
“우린 김독자를 죽여야 해.” 
 
그래야 한수영이지. 
 
“싫어! 싫어요! 형!” 
 
한수영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이길영의 뒷덜미를 낚아 챘다. 
 
“멍청한 꼬맹아. 잘 들어.” 
 
이길영이 숨을 헐떡이며 몸부림 쳤다. 
한수영은 그런 이길영의 멱살을 붙잡고 으르렁거렸다. 
 
“징징 거리지 마. 김독자 대신 네가 죽을 거냐?” 
“아, 아으으······.” 
“너희들 모두 마찬 가지야. 본인이 희생할 것도 아니면서, 위선 떨지들 말라고. 대신 죽어준다고 하면, ‘아이구 고맙습니다’하고 칼이나 휘두르란 말이야!” 
 
슈우우우우! 
 
수십 개로 늘어난 한수영의 분신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김독자가 살아나든 말든, 거기까진 내가 알 바 아니야. 앞으로 30분 안에 저 녀석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어. 너희가 알아야 할 건 그게 전부야.” 
 
한수영의 분신들이 붉어진 눈으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말했다. 
 
‘고맙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한수영이 내게 단도를 휘둘렀다. 
빗발치는 공격들은 내 육체에 거의 상흔을 입히지 못했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어서 내 시선을 받은 유상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독자 씨.” 
 
뭔가 결심을 했는지, 그녀의 눈빛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어려 있었다. 
나는 한수영의 공격을 맞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독자 씨가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사람한테 상처를 줄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뭔가 복안이 있으신 거죠? 그래서, 일부러 이런 상황을 연출하시는 거죠?” 
“네, 맞습니다.” 
“정말이죠?” 
 
유상아는 울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 말을 믿어야 하는 거겠죠? 늘 그랬듯이······.” 
 
그럴 줄 알았다면서. 다행이라면서. 
유상아는 눈물을 거칠게 닦았다. 
 
스가각! 
 
단도를 뽑아든 유상아가, 전투에 참전했다. 
한수영이 입술을 실룩였다. 
 
“······주저 앉아서 징징 짜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제법이네.” 
“조용히 하세요.” 
 
한수영과 유상아가 휘두른 단도가, 내 어깨와 등에 조그마한 생채기를 내고 지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그 둘만으로는 타격력이 부족했다. 
벌써 남은 시간은 25분. 포메이션을 실행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나는 이현성을 바라보았다. 
 
“이현성 씨. 일행들을 죽게 내버려두실 겁니까?” 
“······.” 
“이제 다시는 탄피를 잃어버리지 않겠다면서요?” 
“도, 독자 씨······.” 
“탄피는 하나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이현성의 눈빛이 풍랑을 만난 바다처럼 떨리고 있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깊이 침음합니다.]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뭔가를 결심한 이현성이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강철화]가 발동한 이현성의 육체가 내게 돌진했다. 
 
콰아아앙! 
 
단단한 육체가 내 전신에 강한 충격을 입히며 부딪쳤다. 
시야가 희미하게 흔들린다. 
가까이 들러 붙어 [태산 부수기]를 퍼붓는 이현성의 모습은, 나를 공격한다기 보다는 차라리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곰 같은 사나이가 이토록 울부짖는 광경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이어서 들려온 것은 마력 포탑의 발포음이었다. 
 
두다다다다다!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나는 가만히 웃었다. 
역시, 이래서 당신을 미워할 수 없다니까. 
 
있는 힘껏 인상을 찌푸린 공필두가 [무장 성채]에서 포탑을 퍼붓고 있었다. 물론, 나라고 그저 맞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나리오의 개연성이 당신의 육체를 지배합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육체는 마왕의 페이즈를 발동하고 있었다. 
물론 완벽하게 패턴화된 공격들이었기 때문에, 일행들은 그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다. 
 
“다들 정신 차리세요. 지금부터 두 번째 페이즈니까.” 
 
‘73번째 마왕’은 두 번째 페이즈부터 전체 공격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전체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특수한 지원이 필요했다. 
 
“조영란 씨.” 
 
내 시선을 받은 조영란이 전우치의 힘을 빌어 [기문진법]을 발동했다. 
 
고오오오오오! 
 
마치 환풍기를 통해 공기가 배출되듯, 내가 발출한 마기가 그녀가 만든 구멍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마왕의 마기를 흘려내는 그녀의 안색이 급속도로 희게 질려가고 있었다. 
입술에서 핏줄기를 흘리면서도, 조영란은 내게 물었다. 
 
“수경 씨가 슬퍼하실 거다.” 
“이미 알고 계실 거예요.” 
 
마기의 힘이 수그러들자, 일행들이 재차 내게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여전히 공격력은 부족했다. 나는 아직까지 참전하지 않은 이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입술을 꾹 깨문 이지혜가, 결국 칼을 뽑아들었다. 
 
“아저씨, 나중에 복수하지마.” 
“안 해.” 
 
내 말에 이지혜는 힘없이 웃었다. 
 
“······어차피 내 공격, 약하니까 별로 안 아플거야. 내 성좌는 겨우 위인급이잖아.” 
“충무공의 가능성은 그 정도가 아냐. 곧 알게 될거다 지혜야.” 
 
[칼의 노래]를 발동한 이지혜의 공격이 내 약점을 노리며 움직였다. 
서서히 공격의 중첩이 이루어지자, 조금씩이나마 살갗에 따끔따끔한 느낌이 돌기 시작했다. 이제 견제는 충분했다. 
지금부터는 여기에 결정타를 퍼부을 사람들이 필요하다. 
 
“정희원 씨.” 
 
기다렸다는 듯, 정희원이 서서히 칼을 뽑아들었다. 
 
“예전에······ 나한테 물었던 거 기억해요?” 
“어떤 거요?” 
“나한테, 동료가 되어달라고 말했던 거.” 
 
기억한다. 
극장 던전에서, 나는 정희원에게 믿을 수 있는 동료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리고 지금 독자 씨는 그 ‘동료’한테 이런 걸 시키는 거고요.” 
 
나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이게 무슨 동료야.” 
 
칼을 바로 세운 정희원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동료를 죽여야만 살 수 있는 게, 무슨 동료냐고!” 
 
[귀살]을 발동한 정희원이 내 몸을 마구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검은 거친 파찰음만 남길 뿐이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믿을 수 있는 동료니까, 제 목숨을 맡긴 겁니다.” 
“······.” 
“희원 씨, 제대로 해야 합니다. 어차피 다시 살아난다고 생각하고 힘껏 찌르세요.” 
“독자 씨는 진짜······.” 
 
내가 키운 검, 정희원. 
그 정희원의 몸에서, [지옥염화]의 불길이 일고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정희원이 힘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진짜 힘은, [지옥염화]의 불꽃에 ‘멸악의 심판자’의 힘이 더해졌을 때 최고조의 효율을 발휘한다. 
마침 ‘마왕’이 된 김독자는, 그 힘의 타깃이 되기에 더할나위 없이 적합한 개체였다. 
 
[등장인물 ‘정희원’이 ‘심판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 중 대다수가 스킬 발동에 동의합니다.] 
[단 하나의 성좌가 스킬 발동에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스킬 발동이 취소되었습니다.] 
 
당황한 정희원의 눈이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 시선을 받아 넘기듯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누가 ‘심판의 시간’의 발동에 반대했을지는, 뻔한 일이었다.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귀를 막습니다.] 
 
“······우리엘.” 
 
츠츠츠츠츳! 
 
내가 부른 진명에 응답하듯,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부탁합니다. ‘심판의 시간’의 발동에 동의해주세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세차게 고개를 휘젓습니다.] 
 
“하지 않으면, 당신의 화신이 죽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그런 짓을 하면 네가 죽는다고 말합니다.] 
 
모든 성좌들이 당신과 같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우리엘에게 상처를 줘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리엘, 아시잖아요. 이건 그런 ‘이야기’일 뿐입니다.” 
 
나는 마치 도깨비처럼 말했다. 
 
“누군가가 죽는 건, 그동안 많이 봐왔지 않습니까.”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절망합니다.] 
 
메시지만으로도 훤히 그려지는 듯 하다. 
연회에서 봤던 그 작고 예쁜 우리엘의 모습이.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울며 도리질을 반복합니다.] 
 
울면서 도리질을 반복하는, 그 조그만 얼굴. 
이 얼마나, ‘악마 같은’이라는 수식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천사인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세요. 그래야만 이 이야기는 완성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망연히 당신을 내려다봅니다.] 
 
그리고 잠시 후, 기다리던 메시지가 들려왔다. 
 
[절대선 계통의 모든 성좌들이 ‘심판의 시간’ 발동에 찬성하였습니다.] 
 
마침내, 정희원의 몸에서 핏빛 오오라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제기랄, 난 이 스킬 이름이 진짜 싫어.” 
 
정희워의 전신에서 타오르는 [심판의 시간]의 오오라가, 검극에 깃든 [지옥염화]의 힘과 어우러지면서 어마어마한 마력파장을 만들어 냈다. 
 
세상의 모든 악을 멸하는 힘. 
고고한 심판의 불길이, 그녀의 검극을 떠나 마왕의 가슴을 베었다. 
 
 
 
 
 
< Episode 35. 73번째 마왕 (6) > 끝

< Episode 35. 73번째 마왕 (7) >
 
 
 
 
 
쏟아지는 불길을 받아내며, 전신으로 조금씩 고통이 번지기 시작했다. 
 
······아프다. 
정말로, 아프다. 
 
고열에 피부가 갈라졌고, 안구가 익는 느낌이 들었다. 
눈물을 삼키며 나를 향해 난도질을 반복하는 정희원. 
악을 멸하는 불길이 상처를 헤집고 그 안의 살을 모조리 태우고 있었다. 
[제4의 벽]이 없었더라면 진즉에 졸도해버렸을 아픔이었다. 
 
그럼에도, 내 몸은 부서지지 않았다. 
 
경악한 정희원이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몸이에요?” 
“······아무래도 공격력이 부족한가 봅니다.” 
 
체력이 깎이는 속도가 빨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남은 시간 안에 나를 죽이기엔 무리였다. 정희원이 나서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나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어쩌면 내가 ‘설화급’ 판정을 받은 것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성운 <베다>의 성좌들이 당신의 고통에 즐거워합니다.] 
[남은 공략 시간은 10분입니다.] 
[성운 <파피루스>의 성좌들이 축배를 듭니다.] 
 
심지어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전당에 커다란 충격파가 퍼져 나가더니, 내 몸이 또다시 자라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73번째 마왕’이 세 번째 페이즈로 진입합니다.] 
[당신의 육체가 더 단단해집니다.] 
 
어차피 세 번째 페이즈까지 올 것은 어느 정도 감안했던 일이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외쳤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순서 기억하시죠?” 
 
고개를 끄덕인 일행들이 능숙하게 포메이션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발출하는 마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까닭인지, 조영란의 [기문진법]이 조금씩 무너지는 게 보였다. 
 
쩌저저적. 
 
결국 조영란이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예상보다 이 시기가 빨리 와버렸다. 마기가 전당 전체를 메우기 시작하면, 디버프에 걸린 일행들은 더욱 약해질 것이다. 
이제는 빌리고 싶지 않은 손이라도 빌려야만 한다.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내 메시지를 받은 신유승이 파들파들 떨며 고개를 들었다. 
내 화신인 신유승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 결심을 느끼고 있었다. 
 
‘아저씨, 안 돼요. 제발.’ 
 
나는 그런 신유승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성좌와 화신의 관계란 이렇다. 
백 마디의 말을 전하는 것보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깊이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 일방적으로 전달된 그 감정의 폭력에, 결국 신유승이 울음을 터트렸다. 
 
‘알겠어요.’ 
 
그 순간 아이의 작은 심장에서 고통스럽게 울려퍼지는 소리를, 성좌인 나는 누구보다 크게 들을 수 있었다. 
신유승은 곁에 있던 또 다른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일어섰다. 
 
“길영아. 가자. 우리가 해야 해.” 
 
신유승의 눈동자가 노랗게 빛났다. [비스트 마스터]의 특성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전당 전체에 커다란 진동이 울리더니, 이윽고 허공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틈을 열고 거대한 괴수의 주둥이가 나타났다. 
 
크롸라라라―! 
 
키메라 드래곤. 
훗날 멸망종(滅亡種)이 될 괴수가,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전당으로 소환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본 키메라 드래곤은, 공격하는 대신 주춤거리며 이빨을 드러냈다. 
 
[2급 괴수종, ‘키메라 드래곤’이 주인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2급 괴수종, ‘키메라 드래곤’이 ‘73번째 마왕’에게 두려움을 느낍니다.] 
 
신유승의 코에서 피가 쏟아졌다. 
아직 2급 괴수종을 혼자서 컨트롤하기는 무리겠지. 
나는 이길영을 보며 말했다. 
 
“길영아. 이번만큼은 게임이라고 생각해도 돼.” 
 
나를 올려다보는 이길영. 
아이의 조그만 눈동자를 보며, 나는 언젠가 어둠 속을 걸으며 나눴던 말들을 떠올렸다. 
금호역에서 [어둠 자락]을 함께 거닐며 나눴던 대화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지나간 순간들이, 소중한 편린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 
 
“형 죽어도 다시 살아나. 약속할게.” 
 
그 이야기들이, 나를 죽이는 힘이 된다. 
 
“······으아아아아아!” 
 
이길영이, 울부짖으며 [길들이기] 스킬을 발동했다. 
 
[남은 공략 시간은 9분입니다.] 
 
크롸라라라라! 
 
두 아이의 [길들이기]에 제어당한 키메라 드래곤이 고통스럽게 울부짖는다. 
 
슈우우우우! 
 
키메라 드래곤의 거대한 들숨이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급기야 나의 마기마저 빨아들인 키메라 드래곤이, 내 쪽으로 거대한 주둥이를 벌리기 시작했다. 
새카맣게 몰린 마력. 
흉흉하게 돋아난 송곳니 사이로 거대한 빛의 구체가 만들어졌다. 
괴수종의 정점이라 불리는 용종(龍種)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 
브레스(breath)였다. 
 
콰아아아아아―! 
 
쏟아지는 마력의 숨결을 받으며, 나의 몸은 다시 한번 찢겨 나간다. 
정신이 모조리 망가져 버릴 것 같은 충격. 
하지만 그만한 충격을 받고도, 여전히 내 몸뚱이는 살아있었다. 
몸뚱이 곳곳이 찢겨 나간 비참한 몰골에, 일행들이 침음했다. 
하지만 멈춰서는 안 된다. 
나는 짓이겨진 입술을 바로 잡으며 말했다. 
 
“······계속······ 하세요.”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테니까.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희생을 눈치챕니다.] 
 
츠츳, 츠츠츳!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의지에 경악합니다.] 
 
후욱후욱 숨을 내쉬는 키메라 드래곤은 브레스의 사용으로 지쳐버렸는지 거대한 몸을 바닥에 뉘었다. 
다행히 키메라 드래곤이 내가 발출한 마기를 모두 빨아들인 덕에 최악은 면했지만, 일행들의 공격력도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젠장, 마력이 부족해요!” 
 
[남은 공략 시간은 5분입니다.] 
 
‘73번째 마왕’을 상대하기 위한 내 준비는 여기까지가 전부였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 맡겨야 한다. 
 
“김독자.” 
 
석벽을 헤치고 일어난 유중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곁에 이설화가 탈진해 있는 것을 보니, 아마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 유중혁을 치료한 모양이었다. 마왕이 된 나를 확인한 녀석의 눈빛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교차하는 게 보였다. 
 
“그런 표정 짓지 마. 한 번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어. 잘 알잖아?” 
 
유중혁이 피 묻은 입술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이곳에서 죽는 건 나여야 했다.” 
 
다행히, 유중혁은 유중혁이었다. 
녀석은 나를 죽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이미 받아들인 것이다. 
[진천패도]를 꺼내든 유중혁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스각! 콰가각! 
 
놈의 공격 하나하나가 적중될 때마다, 체력이 깎이는 게 느껴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한 번의 칼질이 이어질 때마다 녀석의 절망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남은 공략 시간은 4분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 절망을 음미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이제 슬슬 끝내자 유중혁. ‘그걸’ 꺼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장난치지 마. 네가 일부러 그걸 사용하지 않았다는 거 알고 있어.” 
“······이걸 쓰면 너는 부활할 수 없다.” 
“그러니까 쓰라는 거야. 마왕인 채로 또 살아나기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 
“시나리오 망하면 어쩌려고 그래? 이제 그만 끝을 생각해야지.” 
 
유중혁은 말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뭔가 생각이 있는 거냐?」 
 
그렇게 묻는 눈빛에, 나는 그저 웃어주었다. 
망설이던 유중혁이 결국 품속에서 한 자루의 검을 꺼내 들었다. 
 
[천총운검].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 
 
그것은 언젠가 [피스 랜드]에서 야마타노 오로치의 그림자를 해치우고 얻은 검이었다. 
침통한 목소리로, 유중혁이 말했다. 
 
“사용하는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나도 그랬지. 지금은 아니지만.”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절망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깊이 탄식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숨을 죽입니다.] 
 
설화로 얻은 힘은, 결국 설화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 
나의 특성 ‘여덟 개의 목숨’은 ‘야마타노오로치’의 권능에서 비롯된 것. 
이 힘은, 야마타노오로치를 죽인 신살검(神殺劍)에게 취약할 수밖에 없다. 
아마 저 검으로 나를 베게 되면, 나는 남은 목숨들을 통째로 잃게 될 것이다. 
유중혁이 짓씹듯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걸로도 확신은 없다. [거신화]의 지속시간이 다 되어서, 지금의 공격력으론 너를 벨 자신이 없으니까.” 
“그건 걱정마.” 
 
나를 향해 맹렬히 고개를 젓는 신유승이 보인다.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가 자신의 화신에게 ‘성흔’을 하사했습니다.] 
 
눈부신 빛살과 함께, 내가 내린 성흔이 신유승에게 깃들었다. 
 
[성흔, ‘희생의지 Lv.1’가 발동합니다!] 
 
강제로 발동한 성흔이, 신유승의 몸에서 환한 빛살을 내뿜었다. 
 
[성흔의 주인이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목숨의 절박함에 비례해 해당 파티의 공격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방금 전까지 탈진해 있던 일행들의 눈빛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무려 ‘희생의지’라니. 
나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성흔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걸로 이제 내 죽음은 확정이라는 것이겠지. 
 
“다들 고마웠습니다.” 
 
[남은 공략 시간은 3분입니다.] 
 
일행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현성이, 정희원이, 신유승이. 이길영이. 
유상아가, 공필두가, 이지혜가······. 
울거나, 절규하거나, 깊은 분노를 참은 채. 
모두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시야가 조금씩 이지러지며, 이내 그 인물들은 모두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화신 김독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을 것이다.」 
 
잊고 있었다. 
예언이란 모두 비유라는 것을. 
이 <스타 스트림>에서 사람은 곧 이야기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허공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별들의 시선 속에, 하나의 이야기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 
 
내 부모였고, 내 친구였으며, 내 연인이었던 이야기. 
 
[남은 공략 시간은 2분입니다.] 
 
그것은 내가 아는 그대로의 ‘멸살법’은 아니었지만, 
내가 아는 그 어떤 ‘멸살법’보다도 더 멋진 이야기였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한반도의 모든 성좌들이 당신의 마지막을 지켜봅니다.] 
 
그것은, 내 이야기였다. 
 
푸슈슈슛! 
 
내 심장을 꿰뚫은 유중혁의 검을 보며, 나는 웃었다. 
 
[당신의 운명이 실현됩니다.] 
 
서서히 주저앉는 내 몸을, 유중혁이 붙들었다. 
 
“김독자.” 
“정말 멋진 이야기잖아. 안 그래?” 
 
유중혁은 그런 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채로, 그저 바라보았다. 
마치, 오래전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천총운검’의 효과로 남은 여분의 목숨이 모두 소멸합니다.] 
[당신은 이제 부활할 수 없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만 밤하늘의 중심에 성운의 무리들이 보였다. 
<베다>. <올림포스>. <파피루스>······. 
 
나는, 네놈들이 한 짓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 
 
그리고 하늘이 깜빡였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죽음을 바라지 않습니다.] 
 
마치 내 의지에 감응하듯, 별들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죽음을 바라지 않습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죽음을 바라지 않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죽음을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그런 하늘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저런 녀석들이 있기에, 나는 성좌들을 싫어하면서도 차마 이야기를 증오할 수는 없다. 
 
“다시 만나자, 유중혁.” 
 
마왕의 힘이 소멸함과 동시에,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메인 시나리오가 종료됩니다.] 
[서울 돔이 해방되었습니다.] 
 
등 뒤의 허공에 작은 블랙홀 같은 것이 나타났다. 
내 몸이 그 안으로 조금씩 빨려들기 시작했다. 
 
파스스슷. 
 
다리가, 몸통이, 팔이······ 가루로 흩어지듯, 서서히 빨려들어 간다. 
 
“김독자! 안 된다! 김독자!” 
 
마지막 순간, 녀석이 내 멱살을 꽉 잡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후였다. 
 
슈우우우우! 
 
시야 전체가 순식간에 새카맣게 물들었고, 나는 아무도 없는 공허 속으로 빨려 나갔다. 나를 보는 성좌들의 시선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채널의 영역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죽음을 바라지 않습니다!] 
 
멀어지는 밤하늘에서, 하나의 별이 간절하게 나를 향해 깜빡였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죽음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 이제 됐으니 그만해도 돼. 우리엘.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고마워. 
 
하늘의 별들이 하나둘씩 꺼지고, 마침내 화신 김독자의 이야기도 저물어 간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당신에게서 ‘악인’ 표식을 철회하였습니다.] 
[당신의 화신체가 완전히 소멸하였습니다.] 
[당신은 시나리오에 실패했습니다.] 
[당신은 시나리오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수식언을 공표합니다.] 
 
아득한 어둠 속에서, <스타 스트림>이 고요히 내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의 수식언은 ‘구원의 마왕’입니다.] 
 
 

 
 
< Episode 35. 73번째 마왕 (7) > 끝
 
< Episode 36. 이야기의 지평선 (1) >
 
 
 
 
 
그날, 서울 돔의 모든 사람들은 눈부신 빛살 속에 잠겼다. 
 
[누군가가 열 번째 메인 시나리오를 클리어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당신들은 열 번째 시나리오를 통과하였습니다.] 
 
운 좋게 마인들을 피해 서울 돔의 구석에 숨어 있던 사람들도, [암흑성] 1층과 2층을 쏘다니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던 사람들도. 
시나리오의 위협으로부터 어떻게든 목숨을 연명하고 있던 모든 화신들은 그날 모두 똑같은 메시지를 받았다. 
 
[당신은 ‘서울 돔의 해방자’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해방. 
사람들은 언뜻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몸이 머리보다 먼저 그 말을 납득하고 있었다. 
경련하는 팔다리. 
확장된 동공과 떨리는 입술. 
 
[당신은 서울 돔 밖으로 탈출할 수 있습니다.] 
 
오랜 소망이, 마침내 그들에게 현실로 다가왔다. 
 
슈우우우우! 
 
[암흑성] 1층과 2층에 있던 사람들은, 한날 한 시에 모두 성 밖으로 소환되었다. 그리고 모두가 같은 광경을 보게 되었다. 
 
쿠구구구! 
 
무너지는 암흑성. 
서울시 전체를 장악했던 저 끔찍한 악몽이, 마치 모래성이 부서지듯 허공에서부터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부서진 덩어리들은 이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며 알 수 없는 비감에 젖었다. 
 
“끝났구나.”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고. 
 
“나갈 수 있어······ 이제 살 수 있다고······.” 
“지옥이 끝났어!” 
 
어떤 사람들은, 비극의 끝을 예감했다. 
허공에서 쏟아지는 보상. 사람들은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설령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되더라도, 지금은 당장의 해방감을 누릴 차례였다. 하지만 모두가 그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었다. 
 
“······독자 아저씨는 어떻게 된 거야?” 
 
[암흑성]에서 탈출한 김독자의 일행들. 정희원, 이현성, 이지혜, 공필두, 이길영, 신유승, 한수영······. 그 모든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김독자로 인해 살아났거나, 김독자에게 빚이 있는 사람들. 
 
“누구, 누구 아는 사람 없어? 말 좀 해줘 제발! 사부! 독자 아저씨 어떻게 된 건데!” 
 
일행들은 제각기 직감에 의존해 이 사태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유일하게 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유중혁은 입을 꾹 다문 채로 무너지는 [암흑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역사가 사라지듯, 무너지는 [암흑성]. 
 
김독자는 저곳에 있었고. 
저곳에서 죽었다. 
 
유중혁은 무기질적인 눈빛으로, 그 사실만을 반복해서 확인할 뿐이었다. 
 
김독자가 죽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유중혁은 그 사실을 좀체 실감하지 못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유중혁 씨! 말 좀 해주십시오! 제발!” 
 
유중혁은 멍한 얼굴로 자신을 붙들고 흔드는 이현성을 바라보았다. 
1회차에서도, 2회차에서도······ 이현성의 이런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정말 소중한 누군가를 잃었을 때 일행들이 짓는 표정을, 유중혁은 좀처럼 기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런 표정을 짓는 쪽은 언제나 자신이었으니까.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비극 앞에 절망하는 사람은 오직 그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번 생은 달랐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었고. 
그와 함께, 누군가의 죽음을 겪고 있었다. 
 
“유중혁 씨!” 
“사부!” 
 
모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표정들. 
하지만 그런 얼굴들을 향해, 유중혁이 줄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도 모른다.” 
 
마지막 남은 희망을 꺾는 것. 
비참하게도, 그것이 유중혁에게 남겨진 역할이었다. 
 
“김독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나도 모른다.” 
 
사실은 더 말해줄 수도 있었다. 
‘시나리오 추방’이 어떤 것인지. 그가 아는 정보를 공유할 수도 있었다. 
혹은 혹시나 가능할지 모를 미약한 희망에 대해 증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중혁은 그러지 않았다. 
그것에 관해 말하는 것이, 일행들에게 다음 말을 길게 들려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독자는 죽었고, 너희는 김독자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어떤 말들은 말하지 않기에 더욱 간절히 와 닿는다. 
누군가는 유중혁의 침묵을 받아들였고, 누군가는 유중혁의 침묵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결국 그 침묵을 이해하고 있었다. 
 
“독자 형이 그랬잖아요! 자기 안 죽는다고! 다시 살아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유중혁 씨! 제발 독자 씨를 구할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이길영과 이현성의 외침에도, 유중혁은 그저 고개를 젓는다. 
김독자를 구할 방법이 있다면, 자신이 벌써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큰 공허감에 빠집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리에 드러눕습니다.] 
[성좌, ‘서애일필’이 펜을 꺾습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황망히 심연을 바라봅니다.] 
. 
. 
[한반도의 성좌들이 한 성좌의 죽음에 안타까워합니다.] 
[한반도의 성좌들이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이렇게나 많은 성좌들이 누군가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유중혁은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그 고고하고 오만한 성좌들이, ‘답답함’이나 ‘쾌감’이 아닌 다른 감정들을 표출하는 광경. 
 
마치 그들도 그런 감정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의 어떤 인생 회차보다 형형한 색으로 물든 밤하늘이 빛나고 있었다. 
슬픔, 비탄, 절망, 비애······. 
수많은 수식언들로 이루어진 밤하늘이, 애처롭게 빛나고 있었다. 
어쩌면 김독자는 저들에게도 희망이었을지 모른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는 희망. 
이 <스타 스트림>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무엇.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눈부신 별들의 진혼제(鎭魂祭)를 보며, 회귀자 유중혁은 생각했다. 
 
‘만약, 지금이라도 다시 회귀한다면······.’ 
 
마치 언제든 누를 수 있는 핵미사일의 버튼처럼, 그의 목숨과 함께 붙어 있는 능력. 유중혁은 언제든 이 능력으로 사망 회귀를 할 수 있었고, 미래에서 얻은 새로운 정보들로 더 나은 선택들을 할 수 있었다. 
지금 회귀한다면 김독자는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중혁, 정신차려라. 몇 번을 반복하면 나아질 거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얘기다. 
 
만약, 다시 회귀했는데 김독자가 없다면? 
혹은 다시 만난 김독자가, 이번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면? 
 
유중혁은 처음으로 무언가가 두려워졌다. 
 
이번 생의 김독자는, 이번 생의 김독자일 뿐이었다. 
41회차의 신유승조차 김독자에 대한 이야기는 한 적이 없었고, 지난 회차에서 그는 김독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이번 생의 김독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제대로 ‘이 회차’를 살아. 
 
늘 두 번 이상 가능했던 선택들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되었다. 
그는 3회차의 인생에서 김독자를 만났고, 동료가 되었다. 
그리고, 김독자를 잃었다. 
 
―어쩌면 네가 버리려고 하는 이 회차가, '인간'으로서 이 세계의 끝을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회차’일지도 모르니까. 
 
유중혁은 까드득,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나처럼 남는 것은 말들뿐이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것이 이야기이듯, 유중혁은 이제 김독자의 말들이 확실하게 자신의 일부가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허, 왜들 안 움직이고 계십니까? 시스템 메시지 받으셨을 텐데요?] 
 
관리국에서 파견된 도깨비 하나가 허공에서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하, 그렇군요. 다들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군요.] 
 
조롱 섞인 그 말투에 일행들이 분개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간신히 침착함을 지키고 있던 정희원이 물었다. 
 
“······독자 씨는 어떻게 된 거죠?” 
 
[그는 시나리오 밖으로 추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고요. 살아있다는 거예요 죽었다는 거예요?” 
 
[저도 모릅니다. 다만, 화신이든 성좌든 ‘시나리오에서 추방된 존재’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제가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성좌조차 살아남을 수 없다. 그 말에, 일행들의 표정이 이전보다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이지혜가 쏘아붙였다. 
 
“그래도 방법이 있을 거 아냐?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든가······!” 
 
[지금의 당신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솔직히 아직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게 놀랍군요. 여러분들께 조언 하나 하지요.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눈앞의 시나리오에나 집중하세요. 아직 여러분들은 ‘서울 돔’에서 완전히 탈출한 게 아니니까요.] 
 
도깨비는 비웃듯 그 말을 남기며,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에서 메시지들이 다시 한 번 쏟아졌다. 
 
[탈출 시나리오가 부여됩니다.] 
[곧 서울 돔이 폐쇄됩니다! 반나절 안에 서울 돔에서 탈출하세요.] 
[자동으로 탈출 경로가 제공됩니다.] 
[제한시간 내에 돔에서 탈출하지 않을 시, 당신은 사망합니다.] 
 
“빌어먹을······.” 
 
일행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지만, 딱히 서로의 표정에 해결책이 쓰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으니까. 
 
“······일단 움직이죠.” 
 
그들은 지정된 경로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달리거나, 헤엄을 치거나, 난간을 건너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서울 외곽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경로 표식이 해제되었을 때, 그들은 한 무리의 인파들과 마주했다. 
 
“저 사람들은······.” 
 
서울 돔에 남은 모든 화신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천여 명쯤 될까 싶은 인원. 
이미 얼굴을 아는 사람들도 보였다.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미희왕 민지원과 은둔형 폐인 한동훈. 
모두 김독자가 구한 사람들이었다. 
유중혁과 일행들을 알아본 사람들이 가볍게 목례를 해왔다. 
 
“······이곳이군요.” 
 
멈춰 선 일행들은 동시에 돔의 내벽을 올려다보았다. 지금껏 그들을 가두고 있었던 거대한 새장. 이제야 이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흥분한 기색이었지만, 그러나 누구도 선뜻 바깥으로 걸음을 내딛는 이는 없었다. 
마치, 활짝 열린 새장 밖으로 쉽사리 날갯짓하지 못하는 카나리아처럼. 
 
대신 사람들은 무언가를 찾는 듯 시선을 돌렸다. 
하나 둘, 모여드는 시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모든 시선들이 한 인물에게 모였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한수영이었다. 
 
“유중혁.” 
 
유중혁이 그런 한수영을 마주보았다.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중혁은 그 눈빛에서 뭔가를 읽어냈다. 
 
‘김독자가 준 기회를 헛되이 버리지 마.’ 
 
유중혁은 천천히 눈을 깜빡인 후, 앞으로 나섰다. 
수많은 군중들이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해방을 맞은 이 순간을 기념할 어떤 선언을. 
자신에게 집중된 인파를 바라보며, 유중혁은 고민했다. 
지난 생을 살면서 유중혁은 몇 번인가 이런 자리에 서 본 적이 있었다. 
그는 때론 달변가였고, 때론 카리스마 있는 리더였다. 
인파들에게 해줄 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왜일까. 
이번만큼은, 그런 말들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생을 포기하지 않겠다.” 
 
아마, 이곳에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그 사실에서 오는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유중혁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희도 포기하지 마라.” 
 
뭔가가 전달되었는지 어떤지는 알지 못한다. 
유중혁은 그런 군중들에게서 발걸음을 돌려, 천천히 돔의 내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콰앙! 
 
한 번. 
 
콰아앙! 
 
두 번. 
 
분노로 내리친 주먹이, 벽에 작렬했다. 
주먹이 닿은 접촉점을 중심으로, 돔의 내벽에 거대한 균열이 번지고 있었다. 
 
쩌저저적. 
 
시나리오가 시작된 후, 한 번도 넘을 수 없었던 벽. 그 벽이 조금씩 무너지며, 이윽고 한 사람이 밖으로 나갈 크기의 출구를 만들었다. 
언제나 존재했지만 넘을 수 없었던 풍경. 
그 풍경 속으로, 유중혁은 제일 먼저 발을 내딛었다. 
 
“가자.” 
 
김독자가 없는 시나리오를 향해, 그들은 발을 내딛었다. 
 
 
* 
 
 
「그리고 어둠 속에서, 마침내 혼자가 된 김독자가 깨어났다.」 
 
 
 
 
 
< Episode 36. 이야기의 지평선 (1) > 끝

< Episode 36. 이야기의 지평선 (2) >
 
 
 
 
 
“······으.” 
 
「전신의 뼈가 으스러진 듯 아려왔고, 살갗은 죽은 동물의 가죽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제4의 벽]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지난 번에는 그렇게 얄미웠던 [제4의 벽]의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살아있구나. 김독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4의 벽]의 수다가 들리는 걸 보니, 계획은 성공한 모양이었다. 
사실 성공이라고 말할 것도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녀석들이 내게 부여한 [운명]은 ‘화신 김독자’의 죽음. 
그러니 ‘성좌’로서의 김독자는 죽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게 쉽게 사라질 거였다면 그 고생을 하며 설화를 쌓아 성좌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화신체를 잃은 채 ‘성좌’로서 되살아난 내가 어떤 꼴이 될 것이냐는 건데······. 
 
“······여긴 어디지?” 
 
주변에 보이는 건 폐허가 된 건물들과, 반파된 8차선의 도로. 
어쩐지 익숙한 정경이었다. 
 
“여긴······?” 
 
혼잣말을 내뱉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어떤 처지가 되었는지 깨달았다.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늘 무수한 성좌들의 빛으로 가득했던 밤하늘.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내가 혼잣말을 했다는 것 만큼이나, 그 혼잣말 이후 드리워진 깊은 적요에 놀랐다. 
밤하늘을 보며, 나는 실없이 웃었다. 
 
“하하······.” 
 
보통이었다면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가 무수히 떠올랐어야 했다. 
내 혼잣말을 좋아하는 ‘제천대성’이라든가, 태클 걸기 좋아하는 ‘심연의 흑염룡’이라든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를 좋아해주는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라든가. 하여튼 누군가가 대답해줬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내 혼잣말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머리를 닦는 ‘대머리 의병장’도, 
심심하면 안대를 집어 던지는 ‘외눈 미륵’도, 
뻔뻔하게 짝이 없는 ‘매금지존’도 없다. 
 
진저리쳤던 성좌들의 메시지가 사라지자, 내게 남은 것은 우습게도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나는 정말 혼자가 되었구나.」 
 
[현재 당신은 시나리오에서 추방당한 상태입니다.] 
 
나는 천천히 주변의 정경을 다시 돌아보았다. 
시나리오에서 추방 당한 후에도 살아있는 존재들은, 가장 가까운 ‘시나리오 권외 지역’으로 가게 된다. 
 
[현재 당신은 시나리오 권외 지역에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내가 서 있는 이 ‘권외 지역’은, 내겐 아주 익숙한 곳이었다. 
 
「서울.」 
 
이곳은, 서울의 광화문 광장이었다. 
‘왕들의 전쟁’이 벌어졌고, 내가 ‘절대 왕좌’를 부쉈던 곳. 
그런데 그런 서울이, 시나리오 권외 지역이 되었다는 것은······. 
 
일행들이······ 무사히 탈출했구나. 
 
나는 어쩐지 벅차오르는 기분으로 예전의 ‘서울 돔’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반투명한 막으로 덮여 있었던 그 자리에는, 이제 두터운 차단막 같은 것이 씌워져 있었다. 
 
이제 ‘서울’의 시나리오는 완전히 끝났다. 
 
그리고 일행들은 내가 없는 ‘시나리오’로 나아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그곳에서, 계속 살아 나가고 있다. 
······그걸로 된 것일까. 
 
「김독자는, 기쁘면서도 어쩐지 쓸쓸한 기분이었다.」 
 
나는 일행들을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혼자가 된 김독자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처참한 죽음을 택한 것이다.」 
 
 
* 
 
 
「서울 거리를 걷는 내내, 김독자는 아직 낡지 않은 추억에 잠겼다. 어디를 가도 일행들과 시나리오를 수행했던 지역들 뿐. 김독자는 새삼 자신이 ‘멸살법’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있었다. 그는, 명백히 이 이야기를 살았던 것이다.」 
 
“······거참 감동적이긴 한데, 이제 그만 하면 안 되냐? 대체 언제까지 중얼거릴 거야?” 
 
「김독자는, 가엾은 ‘제4의 벽’에게 짜증을 냈다.」 
 
처음에는 그래도 누군가가 곁에서 떠드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는데, 내가 뭘 할 때마다 사사건건 설명을 해대니 영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지? 김독자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빌어먹을. 네가 대답해주면 되잖아.” 
 
나는 녀석에게 대거리를 하다가, 일단 내 상태를 살피기로 했다. 
 
[현재 당신의 설화들 중 다수가 손상을 입었습니다.] 
[현재 당신의 화신체가 완전히 붕괴한 상태입니다.] 
 
성좌의 격으로 살아남기는 했지만, 나는 화신체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즉, 지금 내 존재는 ‘육체’가 아니라 굉장히 불완전한 설화 덩어리에 불과했다. 
 
파스스슷. 
 
[현재 당신의 본체가 매우 위태로운 상태입니다.] 
[본체를 보전할 방법을 찾을 수 없습니다.] 
 
누가 툭 건드리기라도 하면 완전히 붕괴해버릴 것 같은 불안한 상태. 
이대로는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나는 일단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을 모두 시도해보기로 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역시 안 되나. 
 
[현재 당신의 화신과 통신이 불가능합니다.] 
 
이것도, 안 되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정말로 안 되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홀로 통신 불가지역에 와버린 듯한 느낌이다. 
물론 내가 실제로 처한 상황은 그보다 더한 것이었지만. 
 
[당신은 채널 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시나리오에서 추방되었으니 채널에서도 자연히 추방되었고, 비형과의 계약도 자연히 해지되었다. 
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고 있자니, 공허한 자유가 찾아왔다. 
 
······이제 정말, 혼자가 된 거구나. 
그 사실을 깨닫자, 서서히 한기 같은 것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누구도 나를 바라보지 않고, 나 역시 누구도 볼 수 없다.」 
 
아니, 완전히 혼자는 아닌가. 
 
「그 적요 속에서, 김독자는 불현듯 깨닫는다. 그렇구나. 존재라는 것은 누군가의 시선을 통해 비로소 감각되는 것이구나.」 
 
“난 그런 철학적인 생각은 안 해, 멍청아. 그보다 언제까지 계속할 건데?” 
 
「멍청한 김독자는 알지 못했다. 위대한 ‘제4의 벽’께서 왜 이런 수고로움을 행하는지.」 
 
······어쭈. 
 
“단순히 설명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네? 너 대체 뭐야? 스킬 맞아?” 
 
「멍청한 김독자는 허공을 향해 혼잣말을 했다.」 
 
이 자식이 진짜. 
 
「멍청한 김독자는······.」 
 
“그만 안 해? 스킬 꺼버린다?” 
 
그 순간 허공에서 츠츠츳,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4의 벽’이 말합니다. ‘그 럼 그 만둘 까?’」 
 
나는 조금 놀랐다. 
이 자식, 자기 의사를 생각보다 명료하게 표출할 수 있잖아? 
그러고 보니 지난 번에도······. 
 
“그래, 그만해. 지금은 방해 받고 싶지 않으니까.”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침묵합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그 선택을 곧바로 후회했다. 

쩌저저저적. 
 
뭐야, 라고 말할 틈도 없이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한기는 곧장 살갗으로 스며들더니 뼛속 깊이 침투했다. 파스슷, 하는 소리와 함께 폐의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컥······?” 
 
순간, 뒤늦게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베다>와 <올림포스> 녀석들이 굳이 나를 ‘시나리오 권외 지역’으로 보냈던 이유. 
그건 바로 이런 상황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화신 김독자’를 죽이며 ‘성좌 김독자’도 처리하기 위한, 녀석들의 계략. 
 
“끅, 끄으으으윽······.” 
 
비명을 질렀지만, 비명이 나오지 않는다. 
숨을 쉬고 싶었지만, 숨을 쉴 수가 없다. 
마치 누군가가 폐를 압착해 버린 것처럼, 숨통이 턱 막혀왔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며, 생각들이 하나둘씩 지워져 간다. 
 
<스타 스트림>은 ‘이야기’의 세계. 
화신이든 성좌든, 예외는 없다. 
모든 존재는 ‘이야기’를 통해 숨을 쉬고, ‘이야기’를 통해 존재한다. 
 
[설화의 손상 속도가 빨라집니다!] 
[당신의 존재가 소멸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그 무엇도 존재할 수가 없다. 
심지어 나조차도. 
 
파스스슷! 
 
‘제기랄, 살려줘!’ 
 
나는 나 자신이 사라지는 까마득한 공포 속에서 외쳤다. 
그제야 나는 [제4의 벽]이 왜 그렇게 떠들어댔는지를 알 수 있었다. 
녀석은, 나를 살리기 위해 계속해서 뭔가를 떠들어댔던 것이다. 
어떤 이야기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나를 계속해서 살려두기 위해······. 
내게,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합니다!] 
 
「‘제4의 벽’이 말합니다. ‘멍 청 이.’」 
 
가까스로 숨통이 트이며, 호흡이 돌아왔다. 
 
“허억, 허억······.” 
 
시나리오 추방자가 끔찍한 꼴을 당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긴, 그 ‘척준경’ 조차 <성운>의 도움 없이는 시나리오에서 배제된 후 살아남지 못했으니······ 젠장, 내가 너무 상황을 얕봤던 모양이다. 
설화 몇 개 내주는 정도면 어떻게든 첫 번째 목표 지점까지는 움직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제4의 벽]이 없었더라면, 살아있는 것조차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다시는 ‘제4의 벽’님에게 까불지 않아야겠다.」 
 
나는 비참한 기분 속에서도 차마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근데 언제까지 지켜줄 수 있냐?” 
 
「‘제4의 벽’이 말합니다. ‘오 래는 무 리.’」 
 
츠츠츠츠츳! 
 
[제4의 벽]이 말하기가 무섭게 주변에 강렬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하긴, 무려 <성운>급이 나서야 무마할 수 있는 개연성을 [제4의 벽] 혼자서 감당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는 것이다. 
제때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면, 나는 이곳에서 말라 죽고 말 것이다. 
 
스스스스스스. 
 
어디선가 소음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마치 진공 청소기를 연상시키는 흡입음······. 
 
「김독자는 그 녀석들이 뭔지 알고 있었다.」 
 
“그래, 알아. 시나리오 청소부.” 
 
청소부가 나타났다는 것은, 이 시나리오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청소’가 시작됐다는 뜻이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청소가 시작되었으니, 머지않아 ‘지평선의 악마’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시나리오의 폐허에서 돌아다니는 하이에나 같은 녀석들이, 이처럼 먹음직스러운 폐허에 방문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정말 생각 하난 기가 막히게 읽는군. 
하지만 녀석들을 만나기 전에, 먼저 찾아야 할 것이 있었다. 
 
「김독자는 걸음을 재촉했다.」 
 
비틀거리면서, 나는 조금씩 달리는 속도를 올려갔다. 
거리 곳곳에 조그마한 먹구름을 연상시키는 것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놈들이 바로 ‘시나리오 청소부’였다. 
주의해야 할 녀석들이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달렸다. 
어차피 ‘청소부’들은 속도가 느리고 인식 범위도 좁다. 
조심히 피해 가기만 하면, 녀석들에게 들키지 않고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곧장 광화문에서 벗어나 남하하기 시작했다. 
 
을지로 3가를, 충무로를, 동대입구를, 약수를, 금호역을······. 
 
나는 연어처럼, 지금껏 내가 지나왔던 장소들을 거슬러 갔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옥수역. 
그곳에서, 나는 끊어진 동호대교와 마주했다. 
 
끊어진 다리를 보고 있자니, 아직도 생생한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여기서 유중혁 그 자식이 날 어룡 입 속으로 내던졌지. 
지금쯤 잘 하고 있을까 모르겠네. 
뭐, 한수영도 있으니 서로 도우며 잘 하고 있겠지. 
······그러길 비는 수밖에. 
 
스팟! 
 
나는 도움닫기도 없이 끊어진 다리를 가볍게 도약했다. 예전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도움을 받아야만 간신히 건널 수 있었던 다리였지만, 지금은 단 한 번의 도약만으로 충분했다. 
시나리오의 시작과 지금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내가 넘어야 할 녀석들은 저 끊어진 다리의 간극보다도 더 아득한 거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탁. 
 
마침내 도달한 장소에는 반파된 지하철이 있었다. 
이 모든 시나리오가 시작되었던 곳. 
나는 잠시 그 지하철의 외양을 바라보고 있다가, 내부로 들어가 폐허를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나는 마침내 찾던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하얗게 빛나는 아이템 박스였다. 
아이템 박스 위에는 짧은 시나리오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김독자, 믿어도 되는 거겠지? 일단 의뢰한대로 남기고 떠난다. 그간 내 채널의 화신이 되어줘서 고맙다. 
 
누가 썼는지, 아주 잘 알 수 있는 메시지였다. 
 
―제발, 살아 있어라. 
 
당연하지. 난 안 죽어. 
나는 아이템 박스를 열었다. 
박스 안에는 내가 무려 30만 코인을 지불하고서 구입한 특성과, 부탁한 아이템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새로운 특성을 획득하였습니다.] 
[아이템 ‘도깨비의 알’을 획득하였습니다.] 
[아이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획득하였습니다.] 
······. 
 
나는 아이템들을 모두 수거한 뒤, 지하철 밖으로 나왔다. 
때마침 동이 터오고 있었다. 
다리에 걸터앉은 채, 나는 기다렸다. 
 
이제 곧 놈이 올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이야기가 끝난 지평선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한쪽 뺨에, 거대한 혹을 붙인 등이 굽은 노인. 
그는 묘한 표정으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대가 ‘구원의 마왕’인가?” 
 
나는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돔 밖의 새벽빛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빛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성운들을 생각했다. 
아마, 녀석들은 지금쯤 내가 죽은 줄 알고 있겠지. 
 
<올림포스>. <베다>. <파피루스>······. 
 
나는 놈들의 수식언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화신들의 이야기를 비웃고, 능멸하고, 마침내는 자신의 유희거리로 만들어버린 그 모든 성좌들.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그 빌어먹을 하늘에서 너희들을 모두 떨어트려 줄 테니까.」
 
 
 
 
< Episode 36. 이야기의 지평선 (2) > 끝

< Episode 36. 이야기의 지평선 (3) >
 
 
 
 
 
‘멸살법’에는 그런 문장이 나온다. 
 
「‘이야기의 지평선’에는 악마들이 살아간다. 마왕도, 악마종도 아니지만 ‘악마’라 불리는 존재들. 도깨비들만큼이나 이야기를 갈구하고, 이야기를 갈구하는 만큼이나 도깨비를 증오하는 존재들.」 
 
······그래, 그 문장. 
 
「만약 당신이 시나리오에서 추방당했다면, 기대할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지평선의 악마’들의 자비를 바라는 것이다.」 
 
[제4의 벽]이 알아서 떠들어 주니, 내가 나서서 할 말이 없다. 
 
나는 ‘지평선의 악마’를 바라보았다. 
 
늙수그레한 인상. 얼핏 보면 부랑자를 닮은 행색이었지만,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지평선의 악마’들은 볼에 커다란 혹을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들을 ‘혹부리’라는 약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츠츠츠츳! 
 
허공에서 옅은 스파크가 튀더니, 혹부리가 한발을 물러났다. 
 
“······특이하군. ‘대악마의 눈’으로도 정보를 확인할 수 없다?” 
 
그새 내 정보를 캐내려고 용을 쓴 모양인지, 혹부리의 한쪽 눈에서 노란 빛살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대악마의 눈]. 
 
안나 크로프트도 가지고 있었던 그 눈을, 혹부리도 가지고 있었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안나에게 ‘대악마의 눈’의 정보를 알려준 것도 이 녀석일 테니까. 
지평선의 악마는 비형 같은 머저리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위험한 녀석들이다. 조금이라도 얕잡히면 잡아먹히는 것은 이쪽이겠지. 
나는 일부러 여유를 연기하며 서두를 열었다. 
 
“내 정보는 예언자도 못 읽어. 혹부리 답지 않게 정보가 늦네?” 
 
자존심이 상한 듯, 혹부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나?” 
“그래.” 
“어떻게?” 
“아마 이걸 가지러 왔겠지.” 
 
나는 품속에 넣어 두었던 도깨비의 알을 꺼내 보였다. 
혹부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알에 들어있는 존재가 무엇인지 녀석도 알아본 것이다. 
 
“그 영혼은 내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악마의 혹이 불길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 영혼은 다른 평행 차원의 내가 이쪽으로 보낸 것이다. 그 영혼의 소유권은 나에게 있어.” 
 
녀석이 한 걸음 다가와서, 나 역시 한 걸음을 물러나며 발뺌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명계에서 돌아왔어야 할 영혼이 어디로 갔나 했더니, 그대가 가로챈 거였군. 아직 늦지 않았으니 영혼을 반납하기 바란다.” 
“반납? 무슨 헛소리야? <스타 스트림>에도 분실물 취급법이 있던가?” 
 
여전히 같은 거리에서, 혹부리는 깊은 탐욕이 배인 눈동자로 알을 노려보았다. 
나도 알을 함께 내려다보았다. 
 
이 알 속에는, 유중혁의 ‘41회차’에서 온 신유승이 들어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지평선의 악마’의 말은 맞았다. 
신유승을 ‘재앙’으로 둔갑시켜 이 차원으로 전송한 놈이, 바로 눈앞의 혹부리였으니까. 
혹부리의 미간에 주름이 한층 짙어졌다. 
 
“말장난을 하고 싶은 거라면······.”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자고. 얘도 자유의지가 있잖아.” 
 
나는 지체하지 않고 알의 표면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유승아, 쟤가 네 주인이라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파르르, 하고 가파르게 떨리는 알. 
 
“으음, 그렇구나. 쟨 아니라고?” 
“······이봐.” 
 
나는 혹부리를 무시하고 다시 알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넌 누구 거야?” 
 
알은 이번에는 부르르, 하고 떨렸다. 
나는 마치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영혼’은 누구의 것도 될 수 없지. 누구도 ‘이야기’의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야.” 
 
누구도 ‘이야기’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 말을 들은 혹부리의 표정에 날카로운 기색이 스쳐 갔다. 
[대악마의 눈]이 팽그르르 회전했다. 
흥미롭다는 듯, 녀석의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재미있군, 구원의 마왕. 지금 나와 협상해보자는 것인가?” 
 
걸리셨구만. 
나는 씩 웃으며 답했다. 
 
“맞아.” 
“······좋다. 이쪽에서도 너의 행적은 꽤나 관심 있게 보던 차였으니까. 하지만 협상을 하고 싶다면 먼저 그 알을 내놔라.” 
“혹시 협상이 뭔지 모르나? 그건 곤란해. 난 얘가 필요하거든.” 
“너는 그 알의 가치를 모른다.” 
“아니, 알아.” 
 
알은 내게서 떠나기 싫다는 듯, 내 손에 찰싹 붙어 있었다. 
나는 알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이 알에서 태어날 존재들은 ‘채널’을 만들 수 있으니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나?” 
“관리국의 권한을 벗어난 성류방송을 송출할 수 있다는 뜻이지.” 
 
내 말에 혹부리의 혹이 희미하게 떨렸다. 
당황한 녀석의 손끝이 자신의 수염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말을 덧붙였다. 
 
“즉 이 알은, 무수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 너희가 이 알을 원하는 것도 그 때문이잖아?” 
 
상당히 놀란 듯, 혹부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마치 내 의중을 떠보려는 듯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대악마의 눈]으로도 읽을 수 없는 내 내면을, 그저 들여다본다고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너는 <스타 스트림>에 반역할 셈인가?” 
“반역? 글쎄. 관리국이 <스타 스트림>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일부는 때로 전체나 다름없지.” 
“혹부리 답지 않은 말이지만······ 뭐, 좋아. 네가 원하는 게 그런 대답이라면······.” 
 
혹부리의 눈이 카메라 렌즈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녀석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기에, 나는 일부러 밤하늘을 가리키며 혁명가처럼 말해주었다. 
 
“나는 빌어먹을 ‘도깨비’들의 세계를 부술 것이다.” 
 
혹부리의 표정이 악마처럼 일그러졌다. 
그러나 나는 그 소름끼치는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저것은, 혹부리들의 ‘미소’였다. 
 
“마음에 드는군.” 
 
혹부리의 환심을 사는 법은 간단하다. 
바로, 도깨비를 욕하면 된다. 
 
 
* 
 
 
지평선의 악마, 즉 ‘혹부리’들에 관해 가장 널리 알려진 민담은 아마 ‘혹부리 영감’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누구나 어릴 적 한 번쯤 들어보았을 설화. 
마음씨 착한 혹부리 영감은 도깨비 덕택에 혹을 떼고, 마음씨 나쁜 혹부리 영감은 도깨비 때문에 혹이 하나 더 붙었다는 이야기······. 
나는 혹부리의 혹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그쪽은 착한 쪽이야 나쁜 쪽이야?” 
“인간들은 늘 그런 걸 궁금해하더군. 내가 선한 쪽이라고 해서 딱히 너희 편을 든다는 보장도 없는데.” 
“뭐, 혹이 있는 걸 보면 당연히 나쁜 쪽이겠지만.” 
“그 민담은 세계광포설화다. 늘 정확한 이야기가 계승되진 않지.” 
“네가 나쁜 쪽이라는 게 점점 더 확실해지네.” 
 
혹부리의 혹이 간질에 걸린 것처럼 떨렸다. 
‘멸살법’에 따르면 혹부리들의 ‘혹’은 이야기를 저장하는 창고 역할을 한다. 무수한 설화들이 저 ‘혹’ 안에서 새로운 주인이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시계추처럼 혹을 흔들며 시스템 창을 들여다보던 혹부리가 잠시 후 내게 말을 걸었다. 
 
“네가 부탁한 것은 총 두 가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는 ‘시나리오’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화신체’를 획득하는 것.” 
“맞아.” 
 
도깨비들의 채널이 닿지 않는 곳에서 활동하는 ‘혹부리’들은, <스타 스트림>의 암상인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그들은 대가를 받고 추방자들을 시나리오 속으로 돌려보내는가 하면, 채널에서는 구할 수 없는 독특한 물건들을 구해주기도 한다. 
물론, 그 대가는 아주 비싸다. 
 
“둘 다 도와줄 수 있다.” 
“좋아, 그럼 도와줘.” 
“대가로 알을 내놔라.” 
“안 된다니까.” 
“그러면 도와줄 수 없다.” 
 
젠장, 다시 제자리다. 
아무래도 도깨비의 알에 단단히 꽂힌 모양인데. 
나는 말이 나온 김에 확실히 못을 박기로 했다. 
 
“말했지만, 알은 줄 수 없어. 어차피 니들은 이거 다시 가져가도 못 써먹어. 얜 내 말만 듣거든.” 
“설마······ 네 설화를 먹고 자란 녀석인가?” 
“맞아.” 
“도깨비와 설화를 섞다니, 불결한 놈이었군.” 
“시끄럽고, 알 말고 다른 걸 줄게.” 
“무엇을 줄 수 있지?” 
“설화. 애초에 너희들이 받는 것도 그것 뿐이잖아?” 
 
<스타 스트림>에서 가치 있는 것은 오직 ‘이야기’뿐. 
때문에 혹부리들이 받는 것도 오직 이 ‘이야기’뿐이다. 
 
“······아주 자신만만하군. 어떤 설화를 줄 수 있지?” 
“보여줄게.” 
 
나는 내 설화 목록을 펼쳐 보였다. 
 
+ 
 
<설화 목록> 
 
왕이 없는 세계의 왕 
이적에 맞서는 자 
이야기꾼을 능멸한 자 
재앙의 왕을 사냥한 자 
이계의 신격을 살해한 자 
구원의 마왕 
 
······. 
 
나당 연합군 
벌레 학살 
 
+ 
 
나도 언제 이렇게 많은 설화를 모았나 싶을 정도였다. 
물론 전설급 이상의 설화는 여섯 개뿐이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겨우 열 번째 시나리오를 돌파하고 이 정도 숫자의 설화를 모은 존재는 아마 세상에 나뿐일 것이다. 
실제로 혹부리도 감탄한 기색이었다. 
 
“대단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 대단하군.” 
 
혹부리는 명품관에 온 손님처럼 설화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전설급’ 설화들을 볼 때 녀석의 눈은 깊은 탐심으로 번들거렸다. 혹의 색깔이 붉어진 것을 보니, 확실히 흥분하긴 한 모양이다. 
 
“알을 대체하기엔 무리가 없어 보이는군.” 
“당연하지.” 
“하나만 골라야 하나?” 
“일단은.” 
 
물론 설화의 가치에 따라 다르겠지만, 당연히 이걸 다 주고 거래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성좌위를 통째로 빼앗기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러자 혹부리는 망설이지 않고 설화 하나를 택했다. 
 
“이걸 가지겠다. ‘이계의 신격을 살해한 자’.” 
“······너무 양심이 없는 거 아냐? 내가 가진 유일한 준신화급이라고.” 
 
준신화급 설화의 가치는 감히 코인으로 환산할 수도 없을 정도다. 
지평선의 악마와의 거래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힘들게 얻은 준신화급 설화를 내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이계의 신격을 살해한 자’는, 훗날 다른 이계의 신격을 만났을 때도 사용 가치가 있을 테니까. 
자기도 과한 요구를 했다는 걸 아는지, 혹부리가 입맛을 다셨다. 
 
“그렇다면 이것도 나쁘지 않지. ‘왕이 없는 세계의 왕’.”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내 탄생 설화야. 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군. 그럼 ‘구원의 마왕’은······.” 
“그걸로 내가 정식 성좌위에 올랐는데, 당신 같으면 주겠어? 자칫하면 격이 강등된다고.” 
“······아쉬운 대로 이걸로 하지. ‘이적에 맞서는 자’를 다오.” 
“그건 나중에 쓸 곳이 있어서. 미안.”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던 혹부리가 짜증을 냈다. 
 
“대체 무슨 설화를 주겠다는 거냐?” 
“이거 줄게. 나당 연합군.” 
 
그것은 언젠가 ‘매금지존’을 비롯한 신라의 성좌들을 도와주고 받은 역사급 설화였다. 혹부리의 안색이 무참히 구겨졌다. 
 
“그런 건 줘도 안 한다.” 
 
······그런 거라니, 너무하네. 
매금지존이 들었다면 눈물을 흘릴 일이다. 
신라가 당나라와 손잡고 한민족의 뒤통수를 친 위대한 설화인데. 
 
“그럼 이건 어때? ‘벌레 학살’.” 
“아까보단 낫지만 흔한 설화다.” 
“둘 다 줄게. 그리고 필요하면 다른 역사급 설화들도······.” 
“거래할 생각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젠장, 역시 세상엔 비형처럼 호구만 있는 게 아니다. 
그 자식은 정산 비율 10대 0도 해줬었는데. 
내가 계속 망설이고 있자, 혹부리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아직도 존재를 지탱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는 시간이 충분치 않을 텐데?” 
 
아까보다 몸의 체온이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제4의 벽]이 이야기를 떠드는 간격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당신의 본체가 붕괴하고 있습니다.] 
 
혹부리에겐 최대한 티내고 있지 않았지만, 내 존재는 상당히 위태로운 상태였다. 
당장 시나리오로 복귀하거나, 최소한 새로운 ‘화신체’를 손에 넣지 않는 한 이 붕괴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멍청한 김독자는 생각했다. 젠장, 그럼 무슨 설화를 줘야 하지?」 
 
······나도 답답하니까 이럴 땐 괴롭히지 마라. 
 
「그때, 김독자의 눈에 들어온 설화가 있었다.」 
 
눈에 들어오긴 대체 뭐가······ 어? 
나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이 설화가 있었지. 
 
“그럼 이건 어때?” 
 
 
 
 
 
< Episode 36. 이야기의 지평선 (3) > 끝

< Episode 36. 이야기의 지평선 (4) >
 
 
 
 
 
전설급 설화이면서, 동시에 특별한 기능은 없는 설화. 
하지만 이야기의 존재 자체로, ‘혹부리’의 관심을 끌기엔 적합한 설화. 
 
“이 설화는······?” 
“어때, 마음에 들지?” 
 
혹부리는 불신 가득한 눈으로 설화의 면면을 살폈다. 마치 이런 설화가 가능할 리가 없다는 듯 떨리는 눈동자. 혹부리의 긴 손끝이 창에 닿자, 이내 설화의 내용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퍼억! 퍼억! 퍼어억! 
 
내 주먹에 호되게 두드려 맞는 중급 도깨비 바울. 
터져 나가는 도깨비의 얼굴이 죽상이 될 때마다, 혹부리의 표정에도 경악이 스쳐 갔다. 
 
설화, ‘이야기꾼을 능멸한 자’. 
 
이 설화를 내주더라도 전설급 이상의 설화가 다섯 개나 남기 때문에, 내 격이 위태로워질 일은 없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혹부리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도깨비 욕만 해도 좋아하는 녀석들인데, 녀석들을 두들겨 팬 설화를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다. 
 
“큭, 큭큭······ 크하하하하핫!” 
 
가볍게 시작된 웃음은 이내 폭소로 이어졌다. 
나는 녀석이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좋다, 이걸 받도록 하지. 아주 유쾌한 설화로군.” 
“그럼 거래 성사인가?” 
“하지만 대가로는 조금 부족해. 네가 준 설화는 희소가치는 있지만 기능 가치는 거의 전무하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그럼 ‘나당 연합군’도 같이 줄게.” 
“······여전히 부족하다. 만약 이대로 거래를 계속하고 싶다면 거래 내용을 바꿔야 한다.” 
“바꿔? 어떻게?” 
“앞서 말했던 것처럼, 네가 부탁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시나리오’로 복귀하는 것, 둘은 새로운 ‘화신체’를 얻는 것.”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이 설화로는 둘 중 하나만 들어줄 수 있다는 얘기인가?” 
“맞다. 정확히는 두 번째, ‘화신체’를 얻는 일만 도와줄 수 있다.” 
 
화신체를 얻는 일.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시나리오 복귀는 왜 안 되는데? 원래 이 정도 받으면 해 줄 수 있잖아?” 
“뭔가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좀 들은 게 있어서.” 
 
들었다기보다는 읽었다고 해야 맞겠지만. 
언젠가 척준경이 시나리오에서 배제되었을 때, 성운 <홍익>에서 지불한 내역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혹부리가 말했다. 
 
“흠······ 평소였다면 이 정도 대가로 넘어가 줬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특별하다.” 
“특별해?” 
“그대가 저지른 짓들 때문에, 한반도 지역의 관리국과 성운들 전부 신경이 곤두서 있다.” 
 
대충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혹부리가 말을 이었다. 
 
“추방자를 시나리오로 돌려보내는 건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드는 일이야. <스타 스트림> 전체에서 개연성이 가장 많이 소모되는 일 중 하나니까.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개연성은 ‘이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지금처럼 보는 눈이 많은 상황에서는 지나치게 많은 개연성을 지불해야 한다 이건가.” 
“그래. 게다가 영문은 모르겠지만 관리국의 지부장 녀석이 나서는 바람에 기존의 거래 창구들이 죄다 틀어 막힌 상태다. 현재로서 지구 시나리오로 곧장 복귀할 수 있는 루트는 거의 막혔다고 보면 된다. 이보다 더 큰 대가를 받더라도 무리야.” 
 
지구로 곧장 복귀할 수 없다니······. 
생각보다 상황이 순탄치가 않았다. 
혹부리가 나를 보며 물었다. 
 
“아쉬운 대로 화신체라도 받겠나? 전설급 설화라면 썩 괜찮은 화신체로 내어줄 수도 있는데. 마침 무림 쪽 차원에서 회수한 화신체들이 몇 개 있어서 말이야.” 
 
무림 쪽 화신체라.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좋은 화신체를 받아도, 시나리오로 돌아갈 수 없다면 모두 말짱 헛것이다. 
화신체의 내구가 있으니 존재 붕괴는 잠시간 막을 수 있겠지만, 시나리오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여전히 붕괴는 지속된다. 
혹부리 자식도 그걸 아니까 지금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일 터다. 
이번에 받은 화신체가 추방자 패널티에 의해 분해되고 나면, 녀석은 새로운 거래로 내 다른 설화들까지 빼앗아가려 하겠지······. 
나는 더 강경하게 밀어붙이기로 했다. 
 
“나는 시나리오로 돌아가야 해. 반드시. 화신체를 얻는 것보다 그쪽이 먼저야.” 
“흠······ 곤란한데.” 
“지구가 아니라도 괜찮으니까, 다른 시나리오에 참가할 수는 없을까?” 
 
척준경도 그런 식으로 한반도의 시나리오에서 벗어났었다. 
나라고 못 하라는 법은 없지. 
그러나 혹부리가 고개를 저었다. 
 
“물색한 곳이 몇 군데 있기는 한데, 그쪽은 품이 더 든다. 도피성 시나리오 이동은 보다 큰 개연성을 요구하니까.” 
“······진짜 어떻게 안 되겠어? 이거 탐나지 않느냐고.” 
 
나는 일부러 설화창을 하늘하늘 흔들며 말했다. 그러자 내 주먹에 피떡이 되어 터져 나가는 중급 도깨비 바울도 함께 하늘하늘 흔들렸다. 
 
“네 생각보다도 훨씬 희소한 설화야. 세상천지에 어떤 화신이 도깨비를 두드려 패는 설화를 얻겠어?” 
“크흠······.” 
“이걸 네 혹에 담아가서, 친구들한테 자랑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혹부리는 한참이나 고뇌했다. 
고뇌하고, 또 고뇌했다. 
 
[당신의 존재가 위태롭습니다.] 
[새로운 화신체를 획득하거나, 시나리오로 복귀하세요.] 
[곧 당신의 존재가 붕괴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고뇌하던 혹부리가 입을 열었다. 
 
“딱 한 군데, 네가 갈만한 곳이 있다.” 
“어딘데?” 
 
순간, 혹부리의 입가에 섬뜩한 빛이 스쳐 갔다. 
 
“마계(魔界)다.” 
 
마치 무시무시한 것을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내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혹부리가 씩 웃었다.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다. 마계도 사람 사는 동네니까. 게다가 마침 네 몸에는 충분한 마기가 남아있으니, 지금 그곳으로 간다고 해도 그리 눈에 띄지는 않을 거다.” 
“마계도 종류가 있잖아. 어디로 보내 줄 건데?” 
“73번 마계. 통치하는 마왕도 없는 곳이지. 오래전부터 시나리오 낙오자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고.” 
 
73번 마계라. 내 기억이 맞다면, 그쪽 마계는 마침 ‘지구 시나리오’와 동선이 겹치는 시나리오 지역 중 하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쁘지 않군.” 
“대신, 이곳으로 보내 주는 경우 우리는 네게 화신체를 공급해줄 수 없다.” 
“하지만 시나리오로 복귀시켜 주긴 하는 거지?” 
 
시나리오 지역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곧장 ‘시나리오’로 복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미 시나리오에 실패한 존재니까. 
즉, 시나리오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결국 놈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 
그런데, 혹부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무리다. 우리는 단지 너를 ‘73번 마계’로 이동시켜줄 뿐이다.” 
“뭔 개소리야?” 
“대신 너에게 약간의 정보를 줄 것이다. 상당한 운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 정보를 이용하기에 따라서 너는 화신체도 얻고 시나리오로 복귀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왠지 손해 보는 거래 같은데.” 
“하지만 이게 우리가 제안할 수 있는 전부다.”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좋아, 그 거래 받아들일게.” 
 
어차피 정했다면, 더이상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다. 
나는 곧장 설화창에서 설화를 꺼내 녀석에게 내밀었다. 
 
[설화 ‘이야기꾼을 능멸한 자’를 지불하였습니다.] 
 
혹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가는 받았다.” 
 
혹부리는 내게서 받은 설화를 자신의 혀 위에 놓고 꿀꺽 삼켰다. 그러자 녀석의 혹이 파랗게 빛나며 부르르 떨렸다. 만족한 듯 웃음을 지은 혹부리가, 천천히 들숨을 삼켰다. 
 
슈우우우우우! 
 
마치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기세로 공기를 삼키는 혹부리. 
자세히 보니 공기만 삼키는 것이 아니었다. 
주변 일대의 시공간 자체가, 혹부리의 들숨에 빨려들고 있었다. 수십 배로 부풀어 오른 혹부리의 배는, 일시지간에 쪼그라들며 엄청난 굉음을 토해냈다. 
 
쿠와아아아아아! 
 
굉음과 함께, 혹부리의 입에서 공간이 쏟아져 나왔다. 
모자이크처럼 쏟아진 공간은, 길쭉한 타원형의 통로를 만들었다. 
그 통로 너머엔, 이곳과는 다른 세계의 정경이 내비치고 있었다. 
 
“빨리 들어가라. 포탈이랑은 다르게 유지 시간이 무척 짧으니까.” 
 
나는 망설이지 않고 통로 안으로 뛰어들었다. 
 
[본체가 새로운 시공간으로 전송됩니다.] 
 
뛰어든 순간 주변의 우주가 움지럭거리는 듯했다. 
무수한 유성우처럼 지나가는 별들. 
나는 <스타 스트림>의 밤하늘을 비행하고 있었다. 
무수한 시나리오 지역들이, 이야기의 파편이 되어 내 주변을 쏜살같이 스쳐 갔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존재를 일별합니다.] 
 
한순간, 어떤 시선이 나를 바라보았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존재를 묵인합니다.] 
 
그리고 이내, 그 시선은 사라졌다. 
 
츠츠츠츳! 
 
약간의 전류가 내 몸을 사로잡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마 필요한 개연성은 혹부리 측에서 지불했겠지. 
짧은 우주여행이 끝나자, 이내 강력한 이야기의 중력이 나를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시나리오 인접 지역에 도달했습니다!] 
 
나는 신음과 함께 흙먼지 가득한 바닥을 나뒹굴었다. 
충격이 몸에 영향을 미친 것일까, 바닥과 닿은 육체의 표면이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당신의 존재가 붕괴하고 있습니다.] 
[설화가 손상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화신체가 필요합니다!] 
 
젠장. 
허겁지겁 바닥을 짚고 일어났으나, 이미 지옥은 시작되었다. 
 
“커흐흑······.” 
 
전신의 갈라진 균열에서 활자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제일 위험한 것은 심장 쪽이었다. 
 
[당신의 탄생 설화가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빨리 화신체를 구해 상처를 봉하지 않으면, 나는 이대로 설화 전체가 무너져 죽게 될 것이다. 
황급히 사위를 둘러보았다. 
혹부리 녀석이 화신체를 구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 준다고 했으니, 분명 근처에 화신체를 구성할만한 게 있을 터였다. 
그러나 주변을 살핀 순간, 내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여긴······?” 
 
거대한 쓰레기의 산이 주변에 쌓여 있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혹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지금쯤 그대는 ‘73번째 마계’에 면한 ‘시나리오의 지평선’에 도착했겠지. 
 
시나리오의 지평선. 
나도 그 지명을 알고 있었다. 
나처럼 ‘시나리오’로부터 배제된, 그리하여 ‘청소부’에 의해 강제로 배출된 시나리오의 폐기물들이 모이는 장소. 
끼긱거리며 굴러다니는 설화 파편들을 보며 나는 외쳤다. 
 
“아니, 잠깐만! 여긴 쓰레기장이잖아!” 
 
―그곳에서 그럭저럭 쓸 수 있는 화신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대가 쓸만한 구성품을 구했을 때의 얘기지만. 뭐, 그걸 어떻게 구할지까지는 우리가 알 바가 아니고. 
 
“이런 시발······.” 
 
혹부리 놈들은 처음부터 나와 공정한 거래를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설화를 회수하러 다시 이곳에 오면 그만이니까. 
 
―그대에게 지평선의 가호가 있기를 바라지. 
 
나는 망연해진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심장 어림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활자들. 
이대로라면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소멸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김독자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하다. 
어디에서도, 혹부리의 시선은 느껴지지 않는다. 
 
「당황으로 젖었던 눈동자는 침착하게 가다듬어졌고, 바보처럼 벌리고 있던 입은 고요히 닫혔다. 이윽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김독자는 중얼거렸다.」 
 
“힘들구만.” 
 
「김 독 자 연기 잘못 한 다.」 
 
“······눈치챘냐?” 
 
나는 천천히 고개를 꺾으며 엉거주춤 자리에 섰다. 
꽤 귀찮은 연극이었지만, 혹부리의 의심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처음부터 이곳으로 오는 게 목적이었다는 것을, 결코 들켜서는 안 되었다. 이쪽이 알고 있는 정보를 최대한 숨기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면, 이 정도 연기는 해줘야 했으니까.」 
 
[제4의 벽]의 수다를 들으며, 나는 주변의 폐허를 차분히 살폈다. 
 
“······제대로 오긴 한 것 같네.” 
 
[제4의 벽]의 말대로, 나는 처음부터 이곳에 올 생각이었다. 
이것을 위해 성좌들 앞에서 죽음을 연기한 것이기도 했고. 
나는 쓰레기 산을 짚으며, 천천히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큭, 아파······.” 
 
하지만 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심장의 통증 때문에,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당신의 탄생 설화가 붕괴하고 있습니다.] 
 
다른 건 분명 연기였다. 
하지만 이 통증마저 거짓은 아니었다. 
흐릿해지려는 의식을 필사적으로 붙든 채, 나는 ‘멸살법’을 떠올렸다. 
 
「유중혁의 111회차. 시나리오에서 추방된 유중혁이, 자신의 세력을 꾸리기 위해 도달했던 곳.」 
 
「73번째 마계, ‘시나리오의 지평선’.」 
 
「그 쓰레기장에서, 유중혁은 자신의 새로운 ‘몸’을 얻었다.」 
 
하지만 아무리 훑어 보아도 새로운 화신체의 재료가 될만한 설화는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시나리오의 지평선’은 망가진 이야기들이 모이는 곳. 
이런 곳에서 쓸만한 화신체를 구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어디까지나, 보통이라면 그랬을 거라는 얘기다. 
 
“특성 효과를 발동한다.” 
 
[특성 ‘라마르크의 기린’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30만 코인을 주고 구입한 진화계 특성, ‘라마르크의 기린’. 
비형이 남긴 아이템 박스에 들어있던 특성이 바로 이것이었다. 
드디어, 코인도 돈값을 할 때가 온 것이다. 
 
[특전 ‘진화인자(進化因子) 탐색’이 시작됩니다!] 
[당신이 흡수할 수 있는 설화 파편들을 탐색합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자, 쓰레기장의 곳곳에서 색다른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설화 파편들이 탐지되었습니다!] 
 
하얀빛으로 반짝이는 설화의 파편들. 
적어도 내게, 이곳은 더이상 ‘쓰레기장’이 아니었다. 
 
「동료에게 뒤통수를 맞은 소드마스터의 오른팔」 
「끔찍하게 뜯어 먹힌 그랜드 위저드의 전두엽」 
「이계의 신격에게 찢겨 죽은 어린 골드 드래곤의 심장」 
 
‘멸살법’의 설정에 따르면 ‘라마르크의 기린’의 특전은 ‘부서진 설화’들을 흡수하여 육체를 재구성하는 것. 
 
“······우선은 이걸로 시작할까.” 
 
나는 먹음직스런 붉은빛을 띤 심장 조각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 Episode 36. 이야기의 지평선 (4) > 끝
 
< Episode 36. 이야기의 지평선 (5) >
 
 
 
 
 
살갗에 와 닿는 보드라운 이불의 감촉. 
그것이 얼마 만에 누려보는 사치인지 정희원은 좀처럼 실감이 나질 않았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괴수에게 습격당할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지도 않았고, 아이템을 빼앗길까 같은 인간들을 경계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 평화가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정희원은 잘 알고 있었다. 
 
“정희원 씨! 문 좀 열어주십시오!” 
“인터뷰 좀 부탁드립니다!” 
 
벌써 일주일 째, 집 앞으로 몰려든 기자들이 1층 현관 앞에서 아우성치고 있었다. 커튼을 살짝 여는 순간 쏟아지는 플래시. 그 무자비한 카메라의 시선 앞에, 정희원은 익숙한 기시감을 느꼈다. 
 
“······하긴, 성좌들만 관음종자는 아니겠지.”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킬킬 웃습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감상에 동의합니다.] 
 
정희원은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무수한 시선을 느끼며 새삼스런 감상에 잠겼다. 사실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에도 형태는 다르지만 비슷한 일들은 줄곧 있었다. 
시선의 관음도, 생존을 위한 투쟁도. 
그렇게 보면 ‘시나리오’라는 건,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부터 줄곧 있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도 그게 ‘시나리오’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뿐. 
 
창문 너머로 부서진 시가지와 차단된 서울 돔의 모습이 보였다. 
 
서울 돔을 벗어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지만, 정희원은 아직도 그 돔을 벗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희원 언니! 일어났어요?” 
“아, 응. 지혜야.”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이지혜를 향해, 정희원이 힘없이 웃어 보였다. 
서울 돔 탈출 후 일주일. 
그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정희원을 비롯한 일행들은 임시 정부의 도움으로 경기 지역에 거처를 지원받았고, 기관에 불려가 몇 가지 설문에 답했다. 대부분 뻔한 질문들이었다. 
 
서울 돔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소문들이 사실인가. 
당신 같은 사람은 몇 명이나 있으며,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가. 
성좌들과 시나리오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정희원은 처음에는 성실히 질문에 답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애초에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었다. 
 
이미 대한민국 정부는 궤멸 상태였다. 운 좋게 살아남은 몇몇 국회의원들과 시의원들로 이루어진 임시 정부는 이 사태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앞으로의 시나리오에 맞서 ‘국가’라는 체제가 유의미할 것이라 굳게 믿는 모양새였다. 새로운 시대에 여전히 낡은 신념을 고수하는 이들에게, 정희원이 해줄 말은 정해져 있었다. 
 
―다들 정장 벗고, 넥타이부터 풀어요. 
―예? 
―도망치기 좋은 복장이 아니니까. 
 
정희원은 이지혜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믿을 건 일행들뿐이다. 
 
“유상아 씨는?” 
“애들이랑 같이 방에 틀어박혀 있어요.” 
 
문제는 그 일행들마저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것이지만. 
이지혜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독자 아저씨가 없어진 타격이 크네요.” 
 
있을 때는 솔직히 긴가민가할 때도 있었는데, 없어지니까 없어진 티가 확 나는 사람이 있다. 일행들에겐 그게 바로 김독자였다. 생존의 목적은 각자에게 있었지만, 생존의 방식을 정해온 것은 지금껏 김독자였다. 일행들이 방향성을 잃어버리고 흩어진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군인 아저씨 말마따나 매뉴얼이라도 있으면 좋겠네요 진짜.” 
“현성 씨는 아직이야?” 
“······첫날 군대에 불려가서 아직도 소식이 없어요.” 
 
본래 군인이었던 이현성이었으니, 군부대에 제일 먼저 호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지혜가 투덜거렸다. 
 
“진짜 미련하게······ 나 같으면 안 갈 텐데. 이런 세상에 군대가 다 뭐라고.” 
 
정희원도 이지혜의 말에 적극 동감했지만, 그렇다고 이현성을 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상실 앞에 대처하는 방법은 모두가 다르다. 아이들이 방 안에 틀어박혔듯, 이현성은 군대로 돌아갔다. 
 
그저 그것뿐이다. 
 
[다음 시나리오는 사흘 뒤에 시작됩니다.] 
 
허공에 뜬 메시지를 보며, 정희원은 불안감을 삼켰다. 
사흘 뒤, 지옥은 다시금 시작될 것이다. 
더 복잡한 문제는, 앞으로 있을 시나리오가 지금껏 겪어온 것과는 완전히 다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당신은 이제 배후성의 부름에 응할 수 있으며, 그들이 내리는 개인 시련들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개인 시련은 히든 시나리오로 취급되며, 특정 메인 시나리오 수행과 중첩될 시 메인 시나리오를 대체할 수 있습니다.] 
[시나리오 대체는 25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가능합니다.] 
 
열 번째 시나리오를 통과하며 열린 [개인 시련]. 
그게 뭔지, 정희원은 아직 좀처럼 감이 오질 않았다. 
이지혜가 위로하듯 말했다. 
 
“사부 말로는 당분간 큰일은 없을 거라고 했으니 너무 신경쓰지 마요 언니.” 
“유중혁 씨는 어떻게 됐어?” 
“김독자 김독자 노래를 부르더니 어딜 가버렸는지 모르겠어요. 진짜 사부 답지 않게······.” 
 
확실히, 김독자의 죽음 앞에 유중혁의 반응은 의아할 정도였다. 
한동안 폐인처럼 방 안에 처박혀 연공만을 반복하던 유중혁은, 사흘 전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한수영 씨는?” 
“오늘 아침 정부 요원들이랑 이야기해보겠다고 나갔어요. 뿌린 씨앗을 거둘 때가 됐다는 말도 했고······.” 
“정부? 그 치들에겐 딱히 기대할 게······.” 
 
말하는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만약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한수영과 함께 움직이세요. 
 
그것은 언젠가 김독자가 남긴 말이었다. 
왜 한수영과 함께 움직이라고 한 것인지, 그 이유는 모른다. 
다만 김독자가 그렇게 말했으니 분명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희원이 몸을 일으키자 놀란 이지혜가 되물었다. 
 
“나가시게요?” 
“그래. 계속 여기 죽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우리도 뭔가 준비를 하긴 해야지.” 
“그럼 저도 같이 가요.” 
 
뭔가를 결심한 이상 둘 다 망설이는 성격은 아니었다. 
이지혜와 정희원은 간단히 장구류를 챙긴 후, 곧장 밖으로 나왔다. 
현관문을 열자 쏟아지는 셔터 소리가 사위를 뜨겁게 메웠다. 
 
“정희원 씨! 고려일보 기자입니다! 한 마디만 해주세요!” 
 
생존자들은 그들만이 아니다. 
천 명에 달하는 생존자들이 서울 돔에서 살아 돌아왔고, 그들 중 일부는 언론사와 접촉해 몇 달에 걸친 끔찍한 생존 기록을 남겼다. 
이미 충분한 증언이 쌓였을 텐데도 기자들은 계속해서 그들을 찾았다. 이유는 알만했다. 살아남은 천 명의 생존자들 가운데에서도 정희원을 비롯한 일행들은 시나리오의 중추에 있었던 유명 인사들이었으니까. 
 
“정희원 씨! 그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평소에 검도를 배우신 게 도움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국가 대표 후보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정희원은 마이크를 들입다 밀어붙이는 기자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언론에 말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그녀도 쉽게 입을 여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껏 말을 아껴왔었다. 
그런데······ 왜일까. 
오늘 정희원은 뭔가를 말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거기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그렇게 궁금해요?” 
 
그냥 가자며 옷깃을 잡아끄는 이지혜의 손길을 만류한 채, 정희원은 바깥에서 흔들리는 현수막을 바라보았다. 
 
[양천구의 영웅! 멸악의 심판자 정희원의 무사 귀환을 축하합니다!] 
 
······영웅이라고? 내가? 
양천구 따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런데도 저런 현수막이나 걸어 놓고 있는 이 작태가, 정희원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난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영웅이 아니에요. 국가 대표 후보도 아니었고, 검도도 그렇게 잘하지 못했어요.” 
 
마치 세계 전체를 노려보듯, 정희원이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멸망이 오기 전, 난 그냥 싸구려 술집에서 일하던 바텐더였어요.” 
 
그 말에 기자들이 크게 술렁였다. 다들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누군가는 경멸조로, 누군가는 질투심 어린 눈길로 그녀를 훑었다. 
그 시선들 앞에서, 정희원은 기이하게도 자유로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이제 예전의 ‘정희원’이 아니다. 
 
그 알량한 시선의 파도 속에서, 정희원은 그 사실을 비로소 실감했다. 
기자들이 물었다. 
어떻게, 고작 술집 바텐더가 최후의 생존자가 될 수 있었는지. 
평범한 그녀가 어떻게 살아남았고, 무려 ‘멸악의 심판자’가 될 수 있었는지.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슬픈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외눈 미륵’이 당신의 발언에 누군가를 떠올립니다.]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정희원은 자신의 기분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로 입을 열었다. 
 
“‘김독자’라고 아세요?” 
 
[성좌, ‘해상전신’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서애일필’이 그 이름을 기억합니다.] 
[성좌, ‘황산벌의 마지막 영웅’이 그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좌들의 목소리와 함께, 기자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김독자?” 
“그게 누굽니까?” 
“전에 증언록에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정희원은 우스운 기분이었다. 
모르겠지. 
당연히, 당신들은 모를 것이다. 
정희원은 가볍게 숨을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최후의 생존자들은 전부 스스로의 힘만으로 살아남은 게 아니에요.” 
 
하지만 거기까지만 말했는데도, 갑자기 울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기자들의 질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생존자 명단에 ‘김독자’라는 이름은 없는데요?” 
“김독자 씨는 왜 함께 생환하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 있는가. 
정희원도 그것은 모른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희원은 서울 돔을 바라보며 말했다. 
 
“돌아올 거예요. 반드시.” 
 
 
* 
 
 
「그 시각, 마계에서 김독자가 눈을 떴다.」 
 
“허어어어어어억!” 
 
나는 거의 용트림 같은 비명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쿠웅― 쿵― 
 
반복해서 뛰는 심장 소리가 낯설었다. 심장 어림에서 금빛 아우라가 일렁이며 거친 마력을 토해냈다. 비록 망가진 것이라 해도 헤츨링의 드래곤 하트다. 그저 이식한 것만으로 기절할 정도로 강대한 마력을 품은 소재. 
이걸 제대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당분간 전투에서 마력이 부족할 일은 없을 것이다. 
 
[특성 ‘라마르크의 기린’의 효과로 부서진 설화의 힘을 흡수합니다.] 
 
사실, 부서진 설화를 흡수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발상이었다. ‘라마르크의 기린’을 얻지 못했다면, 시도해볼 수조차 없는 일이었으니까.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說)이 진화론의 주류로 인정 받지 못했기 때문에, ‘라마르크의 기린’은 다른 진화계 특성에 비해 흡수 효과가 떨어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부작용이 제일 적고, 설화의 약점을 흡수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었다.」 
 
[제4의 벽]의 말마따나, 다른 진화계 특성인 ‘다윈의 악마’를 얻었다면 나는 골드 드래곤의 설화 조각을 먹는 순간 심장이 터져서 죽어버렸을 것이다. 
흡수 효과는 적어도 안전성이 보장되는 쪽이 좋다. 
이젠 목숨도 여러 개가 아니니까. 
 
[설화 파편, ‘어린 골드 드래곤의 망가진 심장’을 획득하였습니다.] 
 
이 설화 파편의 원래 이름은 「이계의 신격에게 찢겨 죽은 어린 골드 드래곤의 심장」이었다. 하지만 「이계의 신격에게 찢겨 죽은」이라는 부분은 흡수되지 않았다. 
이것이 ‘라마르크의 기린’의 장점이다. 
설화의 흡수율이 낮은 대신, 약점도 흡수하지 않는 것. 
 
[당신의 새로운 화신체가 구성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화신체의 생성으로 존재의 붕괴가 지연됩니다.] 
[이 효과는 일시적이므로, 빠른 시나리오 복귀를 추천합니다.] 
 
새롭게 뛰는 심장이 도도한 마력을 전신으로 흘려보내자, 숨통이 조금 트였다. 적어도 아까처럼 탄생 설화가 흘러내리는 비극은 없어졌다. 
하지만 육체의 재구성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나는 이어서 「동료에게 뒤통수를 맞은 소드마스터의 오른팔」를 먹기 시작했다. 
육질을 뜯는다기보다는, 설화를 씹는 순간 부서지는 이야기를 엿보는 것에 가까웠다. 
 
[설화 파편, ‘불쌍한 소드 마스터의 오른팔’을 흡수합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검을 좀 더 잘 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특성 ‘라마르크의 기린’의 포만도가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새로운 설화 파편을 흡수하려면 포만도를 떨어트리십시오.] 
 
그렇게 두 개의 설화 파편을 모두 먹어 치운 후에야, 나는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쓰레기 더미 위에 주저앉았다. 
 
“······조금 춥네.” 
 
아까보다는 덜 고통스러웠지만, 한기는 계속해서 살갗을 찔러왔다. 
화신체의 내구도가 올랐다고는 해도 여전히 ‘추방자 패널티’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야기의 상실로 인한 커다란 공허감과 외로움. 사람들이 계속해서 뭔가를 보고 듣고 읽기를 원하는, 근원적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전신에 미미한 온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누군가가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에 대한 이야기? 
 
[행성 ‘지구’에서 당신의 설화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지구에서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누구일까. 
일단 유중혁은 아닐 테고. 
이현성? 정희원? 아니면 신유승? 
 
······모르겠다. 
다만, 묘한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 
누군가에게,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는 것······. 
 
[행성 ‘피스랜드’에서 새로운 ‘김 도게자 전설’을 만들었습니다.] 
 
······저쪽은 이름을 좀 똑바로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나는 별이 보이지 않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은 이야기의 지평선. 
 
내가 별을 볼 수 없듯, 별들도 나를 볼 수 없는 곳. 
그러니 오만한 별들은 모를 것이다. 
 
그들이 볼 수 없는 곳에서, 그들을 파멸시킬 이야기가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 Episode 36. 이야기의 지평선 (5) > 끝

< Episode 37. 마계의 풍경 >
 
 
 
 
 
“제4의 벽은 말했다. 여 기가 어 디지.” 
 
「따 라하 지 마.」 
 
나는 이야기의 지평선을 걷고 있었다. 정확히는, 벌써 나흘 째 걷기만 하고 있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쓰레기의 산만 거닐다 보면 누구라도 벽이랑 대화하고 싶은 기분이 들 것이다. 
나는 길에 떨어져 있는 설화 파편을 향해 중얼거렸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저걸 주워야겠어.”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의 공간 여백이 꽤 남아있었기 때문에, 나는 일단 주워든 설화들을 여백 속에 모조리 쑤셔 넣었다. 그러자 [제4의 벽]이 대답했다. 
 
「멍 청 이.」 
 
그나마 혼잣말이 아니라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제4의 벽]이 대체 뭘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게 적의를 가진 녀석은 아닌 게 분명했다. 오히려, 나를 [추방자 패널티]로부터 지켜주기까지 하는 녀석이니······. 
 
「졸, 리, 다.」 
 
“조금만 참아. 네가 뭐라도 말 해야 움직이기가 편하다고.” 
 
[추방자 패널티]는 화신체를 얻은 지금도 버티기 힘든 것이었고, 여전히 쓰레기의 산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 고통은 시나리오에 복귀하기 전까지 계속되겠지. 
 
[흡수한 일부 설화들이 구성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비교적 부작용이 적은 진화계 특성인 [라마르크의 기린]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화신체의 설화 균형이 삐걱거리고 있었다. 아직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전투를 하거나 불필요한 행동을 한다면 또 다시 화신체가 붕괴할 수도 있었다. 
 
······거참, 쉽게 풀리는 게 없구만. 
 
이래서 언제 성운들에게 복수할까 싶지만, 뭐든 마음을 급하게 먹으면 안 된다. 
 
[시나리오 지역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일단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은, [마계]의 시나리오를 손에 넣는 것이다. 
혹부리 자식들은 나를 대충 내던졌지만, 나는 여기서 어떻게 해야 시나리오를 얻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대강의 계획도 이미 세워놨다. 
 
지금 내가 움직이는 루트는 유중혁의 111회차와 동일하다. 
때문에, 도중에 특이한 변수만 없다면 계획이 틀어질 일은 없다. 
 
······그러고 보면 유중혁의 111회차 때 많은 일이 있었지. 
‘멸살법’ 작가가 잠깐 슬럼프에 빠졌을 때가 그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대략 1천화를 좀 넘기던 시점이었는데, 내가 댓글로 조언이랍시고 여러 가지를 달았던 게 기억이 난다. 내 댓글 때문인지 뭐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 갑자기 새로운 인물이 나오고 이야기 시점이 바뀌었었지······. 
 
부르르르. 
 
품속에 넣어 두었던 [도깨비의 알]이 갑자기 꿈틀거렸다. 나는 설화 파편 몇 개를 알에게 흡수시킨 후, 알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그래, 귀여운 것.” 
 
내가 구한 영혼이 새로운 생명체로 깨어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뭔가 이상했다. 
아마 늦어도 한 달 안에 알은 부화할 것이다. 
그때 내 계획도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서게 되겠지.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부화하고 나서도 계속 ‘신유승’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텐데······ 이름을 뭐라고 짓지? 
 
「그때, 김독자의 귓가에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부스럭. 
 
나는 쓰레기산 뒤쪽으로 몸을 웅크리며 숨을 죽였다. 느껴지는 기척이 한 둘이 아니었다. 적어도 수십, 많게는 백여 마리에 이르는 개체들. 나는 분위기를 살피다 살짝 머리를 내밀어 상황을 확인했다.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동작들. 인간과 비슷한 외형을 가진 생물들이 설화더미를 뒤지고 있었다. 녀석들의 정체는 명확했다. 
 
저들은, [수거 노예]들이다. 
 
마계를 다스리는 지배자들의 명을 받아, 지평선 인근에서 연료로 쓰일 설화 파편들을 수거하는 녀석들. 놈들은 이지(理智)가 거의 없기 때문에 먼저 위협을 가하지 않는 한 공격당할 일은 없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수거 노예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은, 근처에 ‘공단’이 있다는 뜻이다.」 
 
[공단]은 이곳 마계의 도시 같은 곳이었다. 
부서진 설화 파편들을 갈아 넣어 에너지를 만드는 ‘공장’과, 그 공장을 둘러싼 주거지역이 있는 곳.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이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공단은 [세이스비츠 공단]일 것이다. 
 
“빨리 빨리 움직여! 오늘 치 연료가 밀렸단 말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 다시 쓰레기 산 뒤쪽으로 숨었다. 
작은 날개와 외뿔을 가진 악마가 날개를 퍼덕이며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공단의 감독관이었다. 
녀석이 같이 왔다는 건, 이번 ‘수거’의 규모가 꽤 크다는 뜻. 
그때, [수거 노예] 하나가 길을 잃었는지 내가 숨어 있던 쓰레기 산 뒤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피할 틈도 없이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그르르······?” 
 
멍청한 눈으로 나를 보는 [수거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침팬지의 외양을 가진 녀석이었다. 아마 자신의 행성이 멸망하고, 이곳 마계로 납치 당한 종족 중 하나일 가능성이 컸다. 
자신의 시나리오를 잃고, 다른 존재에게 의지해서 살아가게 된 존재들. 
녀석의 팔에 찍힌 [6424]라는 낙인이 보였다. 
 
[특성 ‘마왕 후보자’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마왕 후보자]. 
그것은 내가 ‘73번째 마왕’ 시나리오를 진행하며 얻게 된 특성이었다. 
그러자 알아들을 수 없던 녀석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 만, 하, 고, 싶, 어. 
 
뭐? 
 
―죽, 여, 줘. 
 
마치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다는 듯, 그만 해방시켜주길 바라는 눈동자. 나는 그 애처로운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방법은 하나 뿐인 것 같군.」 
 
 
* 
 
 
잠시 후, 나는 [공단]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에 다른 수거 노예들과 함께 서 있었다. 아공간 코트를 비롯한 아이템들은 들고 온 설화 더미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다. 
즉, 나는 지금 발가벗은 상태였다. 
최대한 ‘수거 노예’와 비슷한 행색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만약을 대비해 왼쪽 팔에도 죽은 ‘6424’의 낙인을 설화로 엮어 놓은 상태였다. 
 
“다음!” 
 
내 계획은 단순했다. 
많은 수거 노예들 사이에 끼어들어 공단 안쪽으로 진입하는 것. 
노예들의 검열은 다른 여행객들만큼 까다롭지 않다는 것을 이용한 작전이었다. 
 
“뭐야, 오늘 수확량이 영 변변찮은데?” 
 
하지만 빌어먹게도, 감독관 녀석이 내 생각보다 까탈스러웠다. 
 
퍼어억! 
 
내 바로 앞에 있던 ‘수거 노예’의 머리가 터져 나가는 것을 보며, 나는 침을 삼켰다. 
 
“어이, 거기. 이 자식도 같이 담아가. 연료 통에 처넣으라고.” 
 
마치 기계 부품을 대하듯 수거 노예를 들통 쪽으로 던진 감독관이 킬킬 웃었다. 
 
[악마 남작 체체펜]. 
 
고작해야 [암흑성]에서 만났던 하급 귀족 수준의 녀석이었다. 
[암흑성] 놈들 보다는 가진 설화의 가짓수가 많을 수는 있지만, 그래봤자 남작은 남작. 
마음 먹고 달려든다면 못 죽일 녀석도 아니었다. 
 
“다음! 6424!” 
 
문제는, 놈을 죽인 다음에 벌어질 일들이다. 
[공단]의 주인은 마계의 최고위 ‘공작’들이었고, 공단의 감독관을 직접 해치우게 되면 ‘공작’이 알아챌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화신체가 온전하지 않은 지금 마계의 최고위 귀족들을 상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뭣하면 [마왕 후보자]의 특성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괜스레 시작부터 주목을 끌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나는 수거품 바구니를 내밀면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일이 꼬인다면, 앞으로의 계획은 상당히 힘들어질 것이다. 
 
“오, 뭐야! 제법 많이 가져왔잖아?” 
 
다행히 내가 가져온 수북한 설화 파편을 본 감독관의 얼굴에 화색이 번졌다. 혹시 파편 더미를 뒤져 숨겨둔 아이템들을 발견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만큼 꼼꼼한 녀석은 아닌 듯했다. 체체파리처럼 힘껏 날갯짓을 한 감독관이 내 등짝을 팡팡 두드리며 외쳤다. 
 
“다들 이 녀석을 본 받으라고! 응? 최근 수확량이 영 변변찮다는 거 다들알고 있지? 이대로면 다음 연료는 네놈들이 될 거야!” 
 
감독관의 엄포에 수거 노예들의 눈빛에 공포가 스쳤다. 
아무리 이지를 상실했다고는 해도, 생명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은 남아 있는 것이다. 
 
“잘 했어 6424! 들어가 봐!” 
 
[시나리오 지역에 입장하였습니다.] 
 
 
* 
 
 
나는 감독관의 눈을 피해 적당한 길목에서 노예 무리를 이탈했다. 
수거품을 뒤져 아이템들을 하나 둘씩 착용한 뒤 필요한 것은 지니고, 버릴 것은 버렸다. 
적당한 대로변으로 나서자, 얼마 지나지 않아 탁 트인 광장이 나타났다. 
주변을 서성이는 인간들. 엘프나 아인종들, 간혹 악마종으로 보이는 녀석들도 있었다. 
마계도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는 혹부리의 말은 맞았다. 
각 차원에서 들어온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종다양한 종족들이 함께 무리를 이루며 살아가는 마을. 
물건을 파는 행상인들도 있었고, 그것을 흥정하는 이들도 보였다. 
 
[낙원] 이후, 간만의 마을이었다. 
사람들이 살고, 이야기가 모이는 곳. 
 
나는 문득 ‘멸살법’의 묘사를 떠올렸다. 
 
「거대한 흉벽으로 둘러 쳐진 시가지. 
불균형한 스카이 라인을 만들고 있는 낮은 슬레이트 지붕들. 
간혹 증기 기관을 갖춘 운송기들이 대로를 지나가는 것도 보였다. 
다양한 층위의 문명이 뒤섞인 듯한 도시의 정경. 
대부분의 성좌들이 눈여겨 보지 않는 무대라곤 해도, 이곳 또한 삶의 터전이었다. 
모두가 각자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모인 장소. 
이곳이 바로 [공단]이었다.」 
 
확실히, 묘사 그대로의 정경이었다. 
 
마계의 [공단]을 처음으로 목격한 이라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름이 ‘마계’인데, 이렇게 평화로운 정경이 말이 되냐고. 
여기는 ‘인간’이 모여 살아가던 지구와 너무 흡사하지 않으냐고.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멸살법’에 나오는 문장을 꼭 들려주고 싶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건, 인간들의 세계가 그만큼 끔찍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 문장. 
나는 모처럼 ‘멸살법’의 내용을 떠올리며 깊은 감회에 젖었다. 
 
73번째 마계의 [세이스비츠 공단]. 
 
여기서 나는 함께 성운들에 대항하기 위한 인물들을 만나야 했다. 
물론 본인들은 자기들이 그런 일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겠지만······. 
 
[흡수한 일부 설화들이 구성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거, 생각보다 빨리 이동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설상가상으로 꾸역꾸역 버티고 있던 [제4의 벽]까지 맥 빠지는 소리를 냈다. 
 
「졸, 려.」 
 
어? 야, 잠깐만?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일시적으로 침묵 상태에 돌입합니다.] 
 
이런 빌어먹을, 하필 여기서? 
한기가 급격하게 전신으로 스며들더니, 화신체의 곳곳에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츠츠츠츳. 
 
[추방자 패널티]로 인해 화신체의 위상이 불안해지자,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내 존재를 눈치챘다. 
 
“추, 추방자다!” 
 
마치 감염원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황급히 내 곁에서 물러서는 사람들. 
나는 재빠르게 걸음을 옮겨 대로변을 벗어났다. 
이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이곳에서, 나는 이야기의 ‘두 번째 주인공’을 찾아야 한다. 
 
 
 
 
 
< Episode 37. 마계의 풍경 > 끝

< Episode 37. 마계의 풍경 (2) >
 
 
 
 
 
“우와앗! 추방자다!” 
“뭐야, 어떻게 들어온 거지?” 
 
나를 보고 소리를 질러대는 화신들. 
나는 그런 인파를 헤치고 도시의 그림자로 숨어들었다. 
 
츠츠츠츳. 
 
[추방자 패널티]로 인해 몸의 곳곳에서 설화 조각이 피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오른팔과 심장 부근은 새로운 설화 파편 흡수로 인해 그나마 안정된 상태였지만, 다른 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 화신들은 이 모습을 보고 내가 추방자라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어디 간 거야? 신고 안 해도 돼?” 
“뭐······ 저러다 금방 죽겠지. 그만 가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추방자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들이 추방자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저 추방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얼마간 골목길에 기대어 숨을 죽이고 있자, 나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사람들은 금방 흩어졌다. 
 
부아아앙―! 
 
때마침 나타난 마도기관차의 행렬도 상황을 무마하는 데 한 몫을 했다. 
불길한 검정색 도료로 덮인 마도기관차를 확인한 화신들이 질겁하며 물러났다. 
 
“물러서! 귀족의 행차다!” 
 
공단의 중심가로 달려가는 마도기관차. 
확실한 건 모르겠지만, 다른 공단에서 찾아온 손님들인 듯했다. 
아마 마계의 고위 귀족들이 탑승하고 있겠지. 최소 [낙원]에서 만났던 라인하이트 못지않은 강자들이 저 기관차에 타고 있는 것이다. 
 
과아아앙―!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급하게 공장으로 가는 것을 보니, 급보인 모양이었다. 길을 지나던 화신들이 있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속도를 내는 기관차. 기겁하여 물러난 평민들이 투덜거렸다. 
 
“저거 [길로바트]의 기관차 같은데. 최근 자주 보이지 않아?” 
“알 게 뭐야. 귀족 놈들의 일 따위.” 
“이번엔 알아야 하네. 73번째 마계가 통합된다는 이야기가 있단 말일세.” 
 
꽤 흥미로운 이야기여서, 나는 청력을 높인 채 떠도는 말들에 집중했다. 
 
“마계가 통합된다고? 그 엉덩이 무거운 공작들이 움직였단 말인가?” 
“그래, [멜레돈]과 [베르칸]이 손을 잡았다지. 그러니 [세이스비츠]도 어지간히 똥줄이 타지 않겠나?” 
 
73번째 마계를 다스리는 공작들의 이름에, 다른 화신들도 하나둘 대화에 끼어들었다. 
 
“허! 그 소문이 진짜였어? 하지만······ 우리 마계는 벌써 수천 년째 마왕이 없었잖은가?” 
“그러니까 이번에 그 ‘마왕’이 우리 마계에서 나온다는 건가?” 
 
쏟아지는 질문에, 제일 먼저 마왕 화제를 꺼냈던 화신이 쩔쩔매며 대답했다. 
 
“나도 확실히는 모르겠네. 들리는 풍문으로는 마왕들 사이에서 신탁이 돌고 있다는데. 새로운 마왕의 출현에 대한······.” 
“공작 놈들은 그게 자기일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군.” 
 
‘멸살법’ 원작에서도 비슷한 대화를 본 적이 있다. 
딱 지금이 그런 종류의 소문이 돌 만한 시기지. 
때를 잘 맞춰 찾아온 셈이다. 
 
‘마왕’이라······. 
 
나는 멀어지는 마도기관차의 행렬을 보며 생각했다. 
 
이 [공단]에도 계급은 있다. 
 
공단을 지배하는 마계의 무리들이 속한 ‘귀족’. 
각지의 차원에서 투입된 화신들의 계급인 ‘공민(工民)’. 
그리고 그런 공민들이 설화를 잃고 타락한 존재인 ‘수거 노예’. 
 
지금은 그 세 계급뿐이지만, [마왕]이 도래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마왕. 
 
하나의 마계를 통치하는 종주이자, 하나의 세계를 소유한 절대 권력자. 
마계의 그 어떤 종족도, 마왕에게 거역할 방법은 없다. 
이 마계에서, 마왕의 존재는 설화급 성좌 못지 않게 강력한 위상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마 73번 마계의 공작들도 그런 마왕의 출현을 몹시 견제하고 있을 것이다. 
일단 마왕이 출현하게 되면, 자신들의 권력 체제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니까. 
 
하지만 ‘마왕’은 반드시 만들어져야 한다. 
그게, 내가 ‘마계’로 온 이유니까. 
 
―두 번째 정보. ‘시계점 에티카’를 찾아라. 
 
때마침 날아온 메시지에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혹부리들의 기척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혹부리 녀석들이 아주 몰상식한 놈들은 아니었다. 
도깨비들 사이에서야 ‘상도덕을 혹부리한테 배운 새끼’라는 말이 관용구로 있을 정도지만, 그거야 도깨비가 혹부리를 싫어하기 때문이고······. 
 
―그곳에서 그대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혹부리의 기척은 또다시 사라졌다. 
 
시계점 에티카. 
 
그곳에 [마계]의 시나리오를 입수할 방법이 있다는 것을 혹부리들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멸살법’의 원작에도 그 시계점의 정보는 있었다. 
그럼에도 혹부리들에게 정보를 요청한 것은, 불필요한 주목을 끌지 않기 위해서였다. 마땅히 개연성에 맞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고나 할까. 
 
츠츠츠츳······. 
 
나는 부서지려고 하는 내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당장 시계점으로 간다고 해서 ‘시나리오’를 바로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 [추방자 패널티]를 경감시킬 방법은 있겠지. 
시계점 에티카는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존재하는 곳이니까. 
 
나는 지체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도 아니고. 
저 골목도 아니고. 
 
설화가 부서지는 지점이 보이지 않게끔 옷깃을 단단히 여민 채로, 나는 계속해서 [공단]의 골목을 내달렸다. 
하지만 시계점 같은 곳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계]에서 시계 같은 건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으니까. 그런 물건은 인간처럼 짧은 생을 살아가는 존재들에게나 의미가 있을 뿐이다. 
 
‘멸살법’을 읽을 수 있었다면 찾기가 쉬웠을 텐데. 
스마트폰이 없어진 상황이라 텍본을 읽을 방도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비형한테 미리 스마트폰을 하나 챙겨 달라고 할걸······. 
 
결국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누굴 붙잡고 ‘시계점 에티카가 어딥니까’라고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때마침 누군가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뭐야, 눈깔 제대로 안 달고 다녀?” 
“아, 죄송······.” 
“죄송하면 다야? 젠장, 너 때문에 부품 다 쏟았잖아! 이런 씨바!” 
 
대충 15세 정도 되었을까. 기계 부품처럼 보이는 것을 한 아름 안은 미소년이 묘하게 새침한 눈길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 그게, 미안하긴 한데.” 
 
그런 쌍욕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한마디 하려는데, 소년의 말이 나보다 빨랐다. 
 
“미안하면 빨리 주워 새꺄!” 
 
나는 그 잘생긴 입술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묘한 폭력성에 압도되어 떨어진 부품들을 허겁지겁 주워들었다. 
순간적으로 예전의 ‘김독자’가 불쑥 튀어 나와버린 기분이었다. 
너무 열심히 부품을 주운 것일까, 소년이 피식 웃었다. 
 
“씨바, 한 번만 봐 준다. 다음부턴 조심하라고.” 
 
그렇게 부품을 챙긴 소년은 특유의 눈길로 나를 노려보고는 다시 앞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왜일까. 녀석의 얼굴을 본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나보다 어린 녀석에게 욕을 얻어먹었다는 한발 늦은 원통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 녀석은······. 
 
여느 판타지 소설처럼, ‘멸살법’에는 예쁘고 잘 생긴 등장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특히 그런 예쁘고 잘 생긴 인물들 중에서도 특출난 인물의 경우, ‘멸살법’에서는 ‘유중혁 뺨치게’라는 관용어를 쓴다. 
예전에 [피스 랜드]에서 만났던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이 그런 경우였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는 그 ‘키리오스’보다도 아름다운 존재들이 있다. 
그런 경우에는 어떤 표현을 쓰냐고? 
 
「그 녀석은, 유중혁의 뺨을 두 번 갈길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정도의 설명이 덧붙여지는 존재는 ‘멸살법’ 안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는다. 
 
“찾았다.” 
 
 
*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가게의 선반이 통째로 부서졌다. 
젠장, 이걸로 벌써 세 번째군. 선반 사는 것도 일인데. 
시계점 ‘에티카’의 점주 아일렌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특유의 침착한 미소로 사태를 응대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긴. 세 번이나 같은 일을 겪었으면 이제 알아들을 때도 됐잖아?” 
“아니,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니까 그렇지. 한낱 시계점 주인에게 대체 뭘 바라는 거야?” 
 
아일렌은 긴장하며 자신의 앞에 선 두 악마를 마주 보았다. 
 
[악마 남작 멜렌] 
[악마 백작 시로크] 
 
제각기 그런 이름을 지닌 두 악마는, 이곳 [세이스비츠 공단]에서는 유명한 귀족들이었다. 서로를 보며 히죽 웃던 악마 중 하나가 길쭉한 팔을 내뻗었다. 
 
“큭!” 
 
피할 틈도 없이 턱을 붙잡힌 아일렌이 신음을 흘렸다. 
아일렌의 새하얀 피부 곳곳에 남은 흉터를 유심히 보던 악마 백작 시로크가 킬킬 웃었다. 
 
“확실히 네가 평범한 시계점주는 아니지. 하지만 우리 공작님이 세 번이나 청할 정도로 대단한 존재도 아니야. 무려 삼고초려(三顧草廬)라니. 네가 무슨 ‘드러누운 드래곤’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냐?” 
“······그게 누구 수식언인진 모르겠는데, 부탁한 건 지난번에 만들어 줬잖아? 이번에는 도와줄 수 없어.” 
 
쿠구구구. 
 
그 한 마디로 시계점 안의 공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악마 귀족들이 힘을 끌어올린 것이다. 
파르르 떨린 그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순간. 
 
“뭐해 아일렌? 사채라도 썼어?” 
 
누군가가, 시계점 문 앞에 서 있었다. 
문 앞의 미소년을 확인한 악마 백작 시로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시계점의 욕쟁이로군. 처형당하고 싶으냐?” 
“저놈은 제가 맡지요.” 
 
악마 남작 멜렌이 미소년의 목을 잡고 가뿐히 들어올렸다. 
미소년은 목을 잡힌 채 멜렌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녀석 제법 예쁘군요.”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넌 정말 역겹게 생겼어.” 
 
멜렌의 왼손이 소년의 배를 갈겼다.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에도, 소년의 눈은 전혀 굴하지 않았다. 그 눈빛이 마음에 든다는 듯 멜렌이 웃었다. 
 
“이 정도 미색이면 공작님의 첩실에 들기엔 충분한데 말이죠.” 
“거긴 시급 얼마나 주는데? 여기보다 더 주면 못 갈 것도······.” 
 
다시 한 번 퍼어억, 하는 소리가 울렸다. 
피를 흘리는 소년의 입술을 보며, 아일렌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그 애를 인질로 잡아봤자야.” 
 
마치 장난이라도 쳤다는 것처럼, 악마가 손을 놓았다. 
 
“후후, 누가 그런 짓까지 한댔나? 우린 신사라고.” 
 
그러자 허공에서 추락한 미소년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신음했다. 
 
“그래서 제안은 거절하겠다 이거지? 공작님께 그렇게 전하면 되겠나?” 
“그래. 미안하지만······.” 
 
의외로 순순히 물러갈 분위기여서, 아일렌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게, 이번 일만큼은 결코 맡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이번 일을 맡게 된다면, 또 몇 명의 공민이 희생될지 알 수 없으니까. 
그러자 시로크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지금까지 밀린 세금을 받겠다. 공작님께서 받아오라 하셨거든.” 
“세금? 하지만 지금까지는 면세 혜택이······.” 
“지금까진 그랬지.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야.” 
 
역시, 순순히 물러갈 리가 없나. 
아일렌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얼만데?” 
“5만 코인.” 
 
5만 코인이라니. 
그 막대한 금액에 아일렌은 기가 질렸다. 
다른 시나리오 지역이라면 모를까, 이곳 [세이스비츠 공단]에서 코인은 값이 귀한 화폐 중 하나였다. 
 
“여긴 성좌들도 거의 없는 곳이야! 그만한 거금이 있을 리가······.” 
“내놓지 않는다면 이 꼬맹이를 데리고 가겠다. 첩실에 처넣으면 5만 코인 정도는 나올 테니까.” 
 
그 태연한 협박에도 미소년은 휘파람을 불었다. 
 
“와우! 5만 코인! 아일렌, 그거 받으면 세금 내지 말고 튀자.” 
“······그 건방진 주둥이에서 곧 비명이 나오게 해주마.” 
“그래? 씨바, 아주 기대되네.” 
 
미소년의 호언에도 불구하고, 아일렌의 표정에는 절망이 스치고 있었다. 오래도록 미소년과 사제 관계를 유지해 온 그녀는, 저 아이가 겉으로는 껄렁하게 말해도 속으론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악마 백작의 입에서 최후의 통첩이 이어졌다. 
 
“아일렌 메이크필드. 공작님의 제안을 받아들여라. 참고로 제안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아일렌은 공민의 의장(議長)이다. 그런 그녀에게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정도라면, 저쪽에서도 단단히 마음을 먹고 왔다는 것이었다. 망설이던 아일렌이 입을 열었다. 
 
“나는······.” 
 
딸랑. 
 
그리고, 누군가가 시계점에 들어왔다. 
 
 
* 
 
 
“뭐냐?” 
 
제일 처음 나를 반긴 것은, 시계점의 점주가 아니었다. 
불청객의 방문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악마 귀족들. 
대충 바깥에서 흘러가는 대화의 추이는 들었기 때문에,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있었다. 
증오의 눈길을 불태우며 바닥에 너부러져 있는 미소년. 
나는 악마 대신 그 미소년을 유심히 노려보며 대답했다. 
 
“손님입니다······.” 
 
내 공손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악마 귀족들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공민]인가?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꺼져라. 지금 세금 징수 중이니까.” 
“세금이라······ 많이 벌면 많이 내고, 적게 벌어도 많이 내는 그거 말이지?” 
“뭐?” 
 
나는 악마 귀족들을 지나쳐 점주에게로 다가갔다. 
 
“어이! 잠깐!” 
 
당황한 악마 귀족이 나를 붙잡으려 팔을 뻗었지만, 녀석의 팔은 내게 닿지 않았다. 가벼운 동작으로 녀석의 움직임을 뿌리치는 나를 보며 귀족의 표정에 경악이 어렸다. 나는 녀석들을 상대하는 대신, 허리를 숙여 부서진 선반의 시계들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 시계들 중 하나를 조심스레 주워들었다. 
 
“좋은 물건이 많네.” 
 
그 순간, 뭔가를 직감했는지 시계점주 아일렌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좋은 물건은 늘 있지. 좋은 주인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을 뿐.” 
 
어쩐지 웃음이 난다. 
역시, 말투도 ‘멸살법’ 그대로다. 
 
행성 [린드버그]의 마도공학자, 아일렌 메이크필드. 
 
나는 긴장한 눈으로 나를 보는 아일렌을 마주 보았다. 
그녀의 안에서도, 지금쯤 시곗바늘이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손님이 이 상황의 동아줄이 될지, 아니면 상황을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자충수가 될지를 가늠하며······. 
나는 그녀의 고민을 좀 덜어주기로 했다. 
 
“좀 특별한 물건을 주문하고 싶은데. 하나 만들어 줄 수 있어?” 
 
내 말에, 아일렌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곳에 ‘특별한 물건’을 의뢰하러 오는 손님은, 오직 한 종류뿐이니까. 
악마 귀족들의 눈치를 살피던 아일렌이 조심스레 물었다. 
 
“······의뢰 대금은?” 
 
나는 씩 웃으며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 나를 노려보는 귀족들을 한 번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5만 코인.” 
 
 
 
 
 
< Episode 37. 마계의 풍경 (2) > 끝

< Episode 37. 마계의 풍경 (3) >
 
 
 
 
 
“잠깐만, 넌 아까······!” 
 
나를 알아본 미소년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러나 미소년이 뭐라 입을 열기 전에, 눈치 빠른 아일렌이 재빨리 내 코인을 받았다. 
 
“5만 코인. 좋아.” 
“지, 진짜 5만 코인이잖아······?” 
 
경악한 미소년이 입을 딱 벌린 채 아일렌과 나를 번갈아보았다. 
5만 코인은 시나리오 전역으로 보자면 그렇게 많은 액수는 아니었지만, [마계]기준으로는 상당한 액수였다. 
이곳은 마왕의 영향 때문에 성좌들이 좀처럼 방문하지 않는 지역이니까. 
물론, 내 기준에서야 5만 코인은 푼돈이었다. 
 
[행성 ‘피스랜드’에서 ‘김 도게자 전설 1부작’이 완성되었습니다.] 
[지역의 선구자들이 당신에 대한 신앙을 설파합니다.] 
[15,000 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심지어 나는 실시간으로 코인이 들어오는 곳도 있다 이 말씀. 
이게 바로 성좌의 좋은 점이다. 
후원을 받지 않아도, 그저 유명해지기만 하면 돈이 되니까. 
황망히 굳어 있던 악마 귀족들이 뒤늦게 반응해왔다. 
 
“넌 누구지?” 
 
나는 녀석들의 정보를 살폈다. 
 
하나는 [악마 백작 시로크].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악마 남작 멜렌]. 
 
[세이스비츠 공단]에서는 제법 유명한 징수원들이었다. 
 
“말했잖아, 손님이라고.” 
 
평소였다면 예의 바르게 굽신굽신 해줬겠지만, 이런 녀석들에게 예의범절은 역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가진 게 없어도 많이 가진 것처럼 굴어야 겁을 먹는 하이에나 같은 놈들이니까. 
 
“네놈, 지금······!” 
 
내 말투에 악마 남작 멜렌이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만둬라, 멜렌.”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시로크가 멜렌을 만류했다. 
역시 백작쯤 되면 눈칫밥을 좀 먹는 모양이다. 
 
[등장인물 ‘악마 백작 시로크’가 당신에게 호기심을 보입니다.] 
[등장인물 ‘악마 백작 시로크’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스킬을 발동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그러자 시로크의 생각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5만 코인을 쉽게 지불할 수 있는 녀석이다.」 
「일개 공민은 절대로 낼 수 없는 금액이야. 게다가 저 여유. 분명 5만 코인 정도는 푼돈으로 여긴다는 거겠지.」 
「누구지? 이 구역에서는 처음 보는 녀석인데. 잠깐, 저 마기는······.」 
「설마······?」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 알았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어차피 [세이스비츠 공단]은 새로운 마왕에 대한 이야기로 들끓고 있다. 그렇다면 이쪽 녀석들이 적당히 오해할만한 정보를 흘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최대한 허세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 이미 짐작하고 있을 텐데.” 
 
내 유중혁 같은 말투에 시로크의 안색이 급변했다.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듯, 녀석은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를 갖춰왔다. 
 
“귀마(貴魔)께 뒤늦게 인사드립니다. 혹시 [길로바트 공단] 쪽에서 방문하신 분이십니까?” 
“그래도 귀는 제대로 달린 모양이군.” 
“하지만 이쪽 구역에 방문하신다고 따로 통보를 주신 적이······.” 
“너희 같은 말단한테까지 내 방문 경로를 알려야 하나?” 
“그건······ 죄송합니다.” 
 
내 짧은 대답으로 녀석은 모든 것을 납득한 듯했다. 
 
「통보 없이 이동할 수 있는 권한. 최소 후작 이상이라는 뜻이겠지.」 
「[길로바트 공단] 측과 얽혀서 좋을 건 없다.」 
 
멋지게 오해를 마친 시로크가 내게 꾸벅 고개를 숙인 후 멜렌에게 턱짓했다. 
 
“그만 가자.” 
“예? 하지만······.” 
“우린 받을 것만 받으면 돼.” 
 
상관의 냉정한 판단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멜렌도 고개를 끄덕였다. 멜렌은 아일렌에게서 5만 코인을 챙긴 후, 사나운 목소리로 지껄였다. 
 
“이번엔 운이 좋았군. 하지만 다음에도 그럴 거라 생각지 마라, 아일렌.” 
 
두 악마 귀족은 그 말을 남기고 시계점에서 사라졌다. 
아마 저 시로크라는 녀석은 즉각 이 일을 상관에게 보고하겠지. 
상관은 없다. 거기까지 생각을 안한 건 아니니까. 
한 차례 풍파가 지나간 시계점은 휑한 기운으로 들어찼다. 
분위기를 깬 것은 미소년이었다. 
 
“······꽤 하네? 넌 대체 누구야?”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녀석을 향해, 나는 가만히 웃어주었다. 
 
“의뢰는 맡아주는 거지?”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일렌이 나를 보았다. 
 
“저······ 그런데, 귀족이십니까?” 
 
하긴, 악마들도 오해를 해버렸는데 아일렌이라고 오해를 하지 말란 법은 없겠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악마종이 아냐.” 
“그럼······?” 
 
나는 대답 대신, 조용히 외투를 벗었다. 
그러자 스파크와 함께 부서진 설화 조각들이 흘러 내렸다. 
내 몸을 확인한 아일렌이 대경한 얼굴로 다가왔다. 
 
“······추방자? 설마, 특별 의뢰라는 게······!” 
“맞아.” 
 
그저 얼핏 살핀 것만으로 내 설화의 규모를 짐작한 아일렌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하, 하지만 난 이 정도 규모의 설화를 이은 적은 없어요.” 
“당신만이 할 수 있어. [세이스비츠 공단]에 제대로 된 ‘설화 전문가’는 당신 뿐이잖아.” 
 
설화 전문가, 라는 말에 급격하게 흔들리는 아일렌의 표정. 슬슬 의식이 무너지기 시작한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말을 덧붙였다. 
 
“날 고쳐줘. 아일렌 메이크필드.” 
 
 
* 
 
 
깜빡이는 의식 속에서, 아일렌과 몇몇 낯선 사람들의 기척들이 느껴졌다. 
나는 드문드문 이어지는 목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화신이 이만한 규모의 설화들을······.” 
“대체 누굴까요?” 
“······규격에 맞지 않는 설화들이 뒤섞였어. 맙소사. 이 설화는 전설급 같은데?” 
“진짜 화신 맞습니까? 화신의 격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런 위험한 파편을 먹고도 아직까지 살아있다니······.” 
 
‘라마르크의 기린’의 특성 숙련도가 더 높았다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화의 흡수율이 높으면 다른 이야기 파편들이 섞이더라도 특성의 효과로 중화가 가능하니까.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아니었다. 
마치 인체의 면역 반응처럼, 서로 다른 설화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지키기 위해 서로를 공격하고 있었다. 
 
“일단 급한대로 이것부터 안정화시켜 보죠······.” 
 
긴장한 아일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일렌 메이크필드. 
 
‘멸살법’의 원작에 따르면, 그녀는 행성 [린드버그]의 마도공학자 출신이었다. 오래도록 마도학을 공부하고, 또 공부한 끝에 이 세계의 본질이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된 존재. 
비록 ‘초월좌’의 업은 달성하지 못하였지만, 그녀는 이 마계에서 [설화 전문가] 특성을 가진 극소수의 화신이었다. 
 
그렇게 몇 번인가 더 의식이 깜빡였다. 
 
서서히 몸에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추방자 패널티]로 인한 한기가 한결 줄어들었고, 화신체의 고통은 차츰 경감되고 있었다. 
「불쌍한 소드 마스터의 오른팔」과 「어린 골드 드래곤의 망가진 심장」이 다른 설화들과 충돌하지 않고 무사히 내 화신체에 스며들었다. 
 
역시, 아일렌을 찾아온 것은 제대로 된 선택이었다. 
 
그렇게 전신의 점검을 마치고 천천히 눈을 떴을 때. 
그곳엔 미소년의 아리따운 얼굴이 있었다. 
새삼 느끼지만, 정말 예쁜 얼굴이긴 하다. 
미소년이라기 보다 미소녀라고 표현하는 쪽이 나을 정도로. 
 
“우왓!” 
 
깜짝 놀란 미소년이 순간 소리를 질렀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고 힘을 주는데 웬걸,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자세히 보니 내 몸은 수술대 위에 꽁꽁 묶여 있었다. 
설화의 힘을 억제하는 술식을 몇 가지 걸어놓은 듯한데······. 
주변을 둘러 보니 함께 있는 것은 미소년 하나뿐이었다. 
내가 묶여 있다는 걸 알고 조금 안심한 모양인지, 미소년이 다시 말을 걸었다. 
 
“어이, 정체가 뭐야?”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어차피 이 녀석과 둘만 있을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뭘 것 같아? 너 퀴즈 좋아하잖아.” 
“······누가 그래?” 
“아무튼, 맞춰봐.” 
 
내 말에 미소년의 눈빛에 흥미가 스쳤다. 
역시, 잘 걸려드는구만.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미소년은 대뜸 이렇게 물어왔다. 
 
“혹시 귀환자야?” 
“귀환자? 왜 그렇게 생각했지?” 
“[마계]의 일반 공민이 그런 거금을 갖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되니까.” 
“괜찮네. 계속해 봐.” 
“일단 본인 입으로 악마가 아니라고 했고, 평범한 화신도 아닌 것 같고. 그런데 희귀한 설화들을 잔뜩 가지고 있잖아. 어쩐지 강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답은 하나 뿐이지.” 
“흐음······.” 
“어때? 내 추리가?” 
 
환하게 눈을 빛내는 녀석을 보며, 나는 어쩐지 녀석을 놀려주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일단 그 추리가 맞으려면,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해.” 
“무슨 전제?” 
“‘세상 모든 귀환자는 강하다’라는 전제.” 
 
내 말에 미소년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뭔 소리야? ‘귀환자’가 뭔지 몰라? 다른 차원이나 행성에서 강력한 힘을 얻어 자신의 행성으로 돌아온 존재들이라고. 그런 자들이 약할 리가 없잖아?” 
“모르지. 너도 세상의 모든 귀환자를 만나본 건 아니잖아?” 
“그건······.” 
“가령, 어떤 귀환자는 자신의 행성을 싫어해서 ‘귀환’하지 않으려 할지도 몰라.” 
 
미소년의 안색이 일순 굳어졌다. 
 
“몇 번이나 다른 차원으로 이동했는데 별다른 능력을 얻지 못해 좌절하고 있을 수도 있고.” 
“······.” 
“새로운 육체를 얻었는데도 그 육체에 아무런 재능이 없을 수도 있고.” 
“······잠깐만.” 
“그 재능에 좌절해서, 그냥 적당한 장소에 눌러 앉아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했을 수도 있지.” 
“······너 누구야? 진짜로.” 
 
나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영아. 마계 생활은 즐거워?” 
“뭣?”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장하영 (아슬란 메이크필드) 
나이 : 23세 (15세) 
배후성(背後星) : 없음 
전용 특성 : 차원이동자(영웅), 고향을 등진자(희귀), 벽의 주인(신화) 
전용 스킬 : [정체 불명의 벽 Lv.1], [독설 Lv.3], [투덜거리기 Lv.5], [게으름 Lv.3], [나태 Lv.3], [무기력 Lv.4]······. 
 
+ 
 
투덜거리기, 게으름, 나태, 무기력······. 
누가 이 녀석의 인물 정보를 보고 ‘멸살법’의 두 번째 주인공이라고 생각할까. 유중혁이 봤다면 이런 녀석이 같은 주인공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너, 너 어떻게······!” 
 
하지만 장하영도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노력하고, 또 노력했지만 잘 안 됐기 때문에. 
늘 거대한 ‘벽’에 가로막혔기 때문에. 
결과가, 과정을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아, 여기선 본명을 안 쓰지 참. 그럼 ‘아슬란’이라 불러줘야 하나?” 
“내 본명을 어떻게 아는 거야!” 
 
깜짝 놀란 장하영이 등을 벽에 찰싹 붙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작가님. 제 생각인데, 이참에 새로운 인물을 만드는 편이······. 
 
만약 그때 내가 그 댓글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장하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기왕이면 예쁜 여캐로······. 
 
어쩌면 내가 이 녀석에게 책임을 느끼는 것은 그때문일 것이다. 
작가가 나 때문에 이 인물을 만들었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하지만······. 
 
―설정은, 흠. 중혁이가 회귀자니까, 얘는 차원이동자 정도면······. 
 
적어도 내가 그때 댓글을 달지 않았더라면, 이 ‘두 번째 주인공’은 최소한 차원이동은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넌 재능이 없는 게 아냐. 재능을 모르는 것 뿐이지.” 
“뭐? 무, 무슨 소리를······!” 
 
내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뭐야 아슬란? 무슨 소란이야?” 
“아, 아일렌!” 
 
장하영의 얼굴을 확인한 아일렌이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 뭐야? 애한테 무슨 짓 했어?” 
 
나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아일렌의 뒤쪽으로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아마 저들이 [세이스비츠 공민회]일 것이다. 
공작의 야욕에 맞서는 이곳 [세이스비츠]의 마지막 양심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좋아한다. 
장하영 일이야 나중에 해결해도 되니, 일단 이쪽부터 처리해볼까. 
 
“세이스비츠 공작······.” 
“뭐?” 
“놈은 야망이 크지. 다른 대마계의 고위직을 마다하고 굳이 이런 변방까지 나온 녀석이니까.” 
 
내 말에 공민회의 회원들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나는 그 중에서도 아일렌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 세이스비츠 공작이 당신한테 거신병을 만들어 달라고 했을 거야. 그렇지?” 
“어?” 
“그 녀석, 얼마 전에 명계 견학을 다녀와서 맛이 좀 가버렸거든. 그래서 당신한테 그런 무리한 부탁을 하는 거야. 자기 주제도 모르고 말이지.” 
“다, 당신 대체 어떻게······!” 
 
말하지도 않은 정보를 내가 줄줄이 읊자, 공민회의 회원들이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놀란 아일렌의 몸이 뻣뻣이 굳는 것이 보였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근데 그쪽이 이걸로 세 번째 거절을 했으니, 다음 번엔 강제로 당신을 데려가겠지. 대비는 됐어?” 
 
내 말에 아일렌을 비롯한 공민들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렇기도 하겠지. 
이들도 나름 자신의 행성에서는 한가락 하는 이들이지만, 마계의 공작에 비견할 만큼의 힘은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나는 그 적막을 적당히 즐기다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조건을 들어주면, 내가 ‘공작’을 막아 주겠어.” 
 
그들로서도 당황스러운 일일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추방자가, 자신들의 정보를 죄다 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말도 안 되는 제안까지 하고 있으니. 
힘겹게 입을 뗀 것은 아일렌이었다. 
 
“당신······ 대체 누구야?” 
 
그래, 뭐든 간에 여기서부터 시작이겠지. 
이참에 ‘나는 김독자다’라고 말하면 좋겠지만, 아직은 그럴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내 이름을 밝혀버리게 되면,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을 지구의 성좌들이 알게 되는 수가 있으니까. 
그렇다면······ 이번에는 원작대로 가볼까. 
나는 원작의 111회차를 떠올리며, 최대한 사악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유중혁. 이곳, 73번째 마계의 ‘마왕’이 될 존재다.” 
 
 
* 
 
 
[73번째 마계에서 당신의 악명이 퍼집니다.] 
 
순간 들려온 메시지에, 유중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뭐?” 
 
물론, 하늘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런데 한순간, 유중혁의 표정이 기묘하게 바뀌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유중혁은, 불신 가득한 눈빛으로 하늘을 노려보더니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김독자?” 
 
 
 
 
< Episode 37. 마계의 풍경 (3) > 끝

< Episode 37. 마계의 풍경 (4) >
 
 
 
 
 
유중혁의 ‘73번째 마왕’ 발언은 ‘멸살법’에서도 나오는 대사였다. 
나는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공민회 의원들의 반응을 살폈다. 
 
“저기, 그러니까······.” 
 
이상한 일이었다. 
‘멸살법’이었으면 분명 “오오!” 하고 다들 넘어갔어야 했는데······. 
다들 내 생각만큼 드라마틱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73번째 마계의 마왕! 그런 말을 입으로 잘도 내뱉는 존재가 있다니, 아일렌을 비롯한 공민회 의원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이 자식, 언제 깨어난 거야? 
막상 필요할 땐 졸리다면서 가버리더니······. 
 
「반면, 김독자는 왠지 강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 
 
「그것은 그의 학창 시절부터 있던 버릇이었다. 종종 자존감이 떨어지거나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 올 때면, 김독자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유중혁이다.”」 
 
남의 흑역사를 마구 들쑤시는 [제4의 벽]의 괴롭힘을 견디며, 나는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제기랄, 이 자식 진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의원들은 잠깐 자리를 비워주세요. 잠시 저분과 둘이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뭔가를 생각하던 아일렌이 용단을 내렸다. 
장하영과 공민회 의원들이 문밖으로 사라지자, 의자를 끌어온 아일렌이 내 수술대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이것부터 좀 풀어주고 말하지? 난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잖아.” 
 
그러나 아일렌은 나의 결박을 풀어주지 않았다. 
아직 나를 제대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마왕이 되실 거라고 하셨죠.” 
“그래.”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계신가요?” 
“말 그대로 73번째 마계의 왕이 된다는 뜻이지.” 
“그리고요?” 
“다른 72 마왕들의 과도한 주목을 받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사실, 그쪽은 조금 신경이 쓰인다. 
나는 아직 마왕들과 그다지 호의적인 관계를 쌓지는 못했으니까. 
내 표정을 보던 아일렌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을 치료하면서 설화 구성을 조금 엿보기는 했지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작자인지 감도 오질 않는군요.” 
“뭐가 문제지?” 
“······세이스비츠 공작은 강해요. 아마, 당신 생각보다도 더.” 
 
일전의 당황했던 모습과는 달리 아일렌의 말투는 침착했다. 
과연, 마계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존재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강하겠지. 그래도 공작이니까.” 
 
공작은 마계에서 마왕 다음으로 강력하다. 
마계 오등작의 정점에 위치한 자들. 
개중에는 거의 위인급 성좌에 육박하는 힘을 가진 녀석들도 있을 정도니 확실히 얕볼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일렌의 평가는 제법 공정했다. 
 
“그쪽 자신감도 이해는 해요. 당신이 놀라운 설화를 가지고 있는 건 이미 확인했으니까요.” 
 
역시, 내가 가진 설화들을 수선하며 그녀도 내 힘을 어느 정도는 어림하고 있는 듯했다. 
시간이 짧아서 내가 숨겨둔 모든 설화들을 확인하진 못했겠지만, 전설급 설화 두어 개 정도는 보았겠지. 
이 자리가 마련된 것도 그녀가 내 설화에서 어떤 가능성을 엿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일렌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먼저 당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겠어요.” 
“존재 맹세를 하지.” 
“이곳에서 나온 어떤 대화도, 바깥으로 유출해선 안 돼요.” 
 
우리는 손을 마주 댄 채 [존재 맹세]를 했다. 
영혼을 걸고 하는 맹세. 
만약 이 맹세를 어긴다면, 어긴 존재는 스스로 영혼을 불태우며 자멸하게 된다. 언젠가 유중혁이랑도 이 맹세를 했었지. 
 
“내 정체에 대해서도 발설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알고 있어요. 설화 수선에 참가한 의원들끼리는 모두 맹세를 공유하는 사이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작게 한숨을 내쉰 아일렌은 혹시 누군가 들을까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우리 공민회는, 오래전부터 [공장]을 무너뜨릴 기회를 엿보고 있어요.” 
 
[공장]은 [공단]의 핵심이자 권력의 중추가 되는 건물. 
그곳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건, 애초에 목적이 명백한 행위였다. 
대강의 일들은 ‘멸살법’을 통해 읽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물어보기로 했다. 당장 ‘멸살법’을 다시 읽을 방법이 없는 만큼 직접 정보를 얻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을 몰아낼 셈인가?” 
“그래요.” 
“어차피 너희는 귀환자일텐데. 왜 굳이 마계의 생태에 간섭하려는 거지?” 
“우린 아직 귀환자가 아니니까요.” 
 
어떤 의미에서, 그보다 정확한 말은 없었다. 
 
“그렇군.” 
 
모든 귀환자가 차원이동 시나리오를 완수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어떤 귀환자는 시나리오에 실패하고, 또 어떤 귀환자는 고향이 싫어 타향에 남는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 귀환을 포기한 자들은, 타향을 새로운 고향으로 삼아야만 한다. 그곳이 얼마나 끔찍한 곳이든, 그곳에서 발을 딛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공작을 죽이려는 시도는 몇 번이나 해 봤어요.” 
“아직 녀석이 살아있는 걸 보면 모조리 실패한 모양이네.” 
“······나쁜 계획은 아니었어요. 모두 실패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그들 중엔 <제 1무림>의 고수들도 있었고, 고향 행성에서 최고의 검사에 오른 이들도 있었으니까.” 
“그런 자들은 어떻게 구했지?” 
“당신과 비슷한 경우였죠. 모두 고향의 시나리오에서 실패하거나 추방된 자들이었어요.” 
 
역시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사실 아일렌이 ‘추방자’들을 치료해주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였다. 
한 사람이라도 더 강한 공민을 모아 [세이스비츠 공단]의 지배자에게 대항하기 위한 수단. 
그녀는 [설화 전문가]의 특성을 그런 형태로 사용하고 있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는 아일렌은 조금 지친 표정이었다. 
 
“대부분은 공작에게 도달하기는커녕 그 호위도 뚫지 못했어요.” 
“호위가 많은 편인가?” 
“[공장]에는 남작이나 자작급의 하위 귀족들 숫자만 해도 물경 백에 달해요. 백작급도 열이나 되고, 후작급도 둘이나 있죠.” 
 
호위가 많다는 것은 문제다. 
설령 하위 귀족이라고 해도 악마종이면 어지간한 화신들보다는 강력하니까. 게다가 백작급 위쪽으로는 전부 설화의 힘을 운용할 수 있는 녀석들이다. 더 큰 문제는 공작의 힘이 그런 수하들을 모조리 합친 것보다 강력할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 정도면 해 볼만해.” 
“다른 추방자들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놈들보다 내가 더 강해.” 
 
왜냐하면 유중혁도 이렇게 말했을 테니까. 
그리고 나는 지금 유중혁이다. 
하지만 아일렌은 유중혁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정말로 강했다면 시나리오에 실패하지 않았겠죠.” 
 
맞는 말이라 순간 반박할 길이 없었다. 
이제와서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고 설명하기도 뭣했다. 
하지만 아일렌은 아직 내게 기대를 걸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먼저 실력을 증명해줬으면 좋겠군요.” 
“이런 것 말인가?” 
 
나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묶은 속박을 풀어냈다.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지는 속박구들. 
아일렌은 살짝 놀란 듯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 정도는 다른 추방자들도 해냈어요. 나는 당신이 귀족을 상대할 수 있는 존재인지 확인해야 해요.” 
“뭘 원하지?” 
“마침 [세이스비츠]에 적당한 상대가 방문한 상태죠.” 
“[길로바트 공단]의 사절을 말하는 거로군.” 
“그래요.” 
 
나는 피식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만하군.” 
 
아일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에겐 미안한 일이지만요.” 
 
현재 73번째 마계는 마왕에 대한 소문으로 혼란한 상태. 
[세이스비츠 공단]과 [길로바트 공단] 측의 만남은 그 전운을 달래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가장 위험한 적은 늘 가장 가까운 동맹인 법이죠.” 
 
만약 그 기회를 잘 이용해 상잔(相殘)을 유도할 수 있다면, [세이스비츠 공단] 내 귀족층을 분열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마침 나라는 장기말도 생겼으니 아일렌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겠지. 
실패하더라도 크게 손해 볼 것은 없는 장사니까. 
하지만 이쪽도 순순히 이용만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이걸 ‘첫 번째 거래’로 하지.” 
“좋아요. 그쪽 조건은 뭐죠?” 
“앞으로 내가 요청할 때마다 화신체를 수선해 줘. 물론 무료로.” 
 
화신체가 보다 견고해질 때까지, 나는 지속적으로 설화 파편을 섭취해야 했다. 언제 또 설화 간의 충돌이 발생할지 알 수 없었다. 당분간은 아일렌의 도움이 필요했다. 
 
“성공만 한다면 못 해줄 것도 없죠. 그게 전부인가요?” 
“하나 더.” 
 
사실, 본론은 이쪽이었다. 
 
“내게 ‘시나리오’를 양도해줘.” 
“······시나리오?” 
 
애초에 [세이스비츠 공단]을 방문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으니까. 
 
“나는 너희가 가진 ‘혁명가 시나리오’가 필요해.” 
 
 
* 
 
 
[마계]는 예부터 성좌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지역이다. 
성좌들과 마왕들의 사이가 안 좋기 때문이기도 하고, 애초에 마계에 진입하는 화신들 중 대부분이 ‘실패자’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수술실을 빠져 나오자, 제일 먼저 보인 광경은 공민들이 모인 선술집이었다. 
 
“시이벌, 술맛 조오타.” 
 
곳곳에서 들려오는 공민들의 탄식. 
때마침 시간은 늦은 저녁이었다. 
[공장]에서 종일 일을 하고 돌아온 노동자들과 화신들이 두런두런 모여 술을 넘기고 있었다. 뒷맛이 쓴 듯 잔뜩 일그러진 얼굴들. 마계의 술은 지상의 것보다 더 쓰다고, 언젠가 ‘멸살법’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이들 중 ‘혁명가’가 누구일까.」 
 
마계에서도 [시나리오]는 진행된다. <스타 스트림>은 어느 한 지역의 이야기도 소홀히 하지 않으니까. 특히 이곳의 메인 시나리오 중 하나인 [혁명가 시나리오]는 마계의 ‘공작’들도 눈여겨보는 시나리오였다. 
 
―그 시나리오에 대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당장 도와주기 어려워요. ‘혁명가’가 누구인지는 우리도 모르거든요. ‘혁명가’의 정체도 모르는데 시나리오 양도부터 권할 수는 없잖아요? 
―정보가 전혀 없는 건가? 
―정보를 얻어도 한 달 단위로 ‘혁명가’가 바뀌어 버리니까 알 방도가 없죠. 솔직히 자기가 ‘혁명가’에 걸렸다고 자백할 녀석이 어디 있겠어요? 어디에 ‘스파이’가 있을지 모르는데······. 
 
아일렌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혁명가’는 분명 이들 중에 있었다. 
 
「[혁명가 시나리오]는 마계의 고유한 메인 시나리오였다. 시나리오 번호는 매번 다르지만, 해당 시나리오 이벤트를 맞이하는 존재들은 정해져 있다. 그들은 바로 마계의 피지배계층이다.」 
 
이럴 때는 [제4의 벽]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멸살법’이 없어도 저 녀석이 재깍 기억을 상기시켜 주니까. 
 
―마지막으로 자기가 ‘혁명가’라고 선언했던 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곳의 공민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러니 괜히 사람들 들쑤시진 말아줘요. 다들 불안해 할 테니까. 
 
아일렌의 말이야 그랬지만, 정말로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화신체를 어떻게든 수선했으니 [추방자 패널티]도 당분간은 버틸만하겠지만, 그것도 며칠 뿐일 것이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이곳에서 [혁명가 시나리오]를 손에 넣어야만, 나는 본래의 시나리오로 돌아갈 수 있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처음 보는 얼굴이군.” 
 
 
 
 
 
< Episode 37. 마계의 풍경 (4) > 끝

< Episode 37. 마계의 풍경 (5) >
 
 
 
 
 
돌아보자, 선술집의 주인장이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어제 막 들어왔거든.” 
“잘 왔네. 우리 [공단]은 살기는 팍팍해도 인심은 좋은 편이지. 어디 출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착해서 살아도 나쁘지 않은 곳이야. 한 잔 하겠나?” 
“아니, 술을 별로 안 좋아해서.” 
“흘흘, 마계가 술맛을 모르고서 버틸만한 곳은 아닌데. 불행한 친구구만.” 
 
그 소릴 듣고 있자니 문득 ‘미노 소프트’에 처음 입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 나갔던 회식 자리에서 술을 못 마신다고 이야기했더니 한명오 부장이 비슷한 소리를 했었지. 
그러고 보니 지금쯤 한명오는 어떻게 됐으려나. 마왕 아스모데우스의 저주를 받은 뒤에는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게 되었으니······. 
피곤한 시절을 떠올렸기 때문인지 어쩐지 출출한 기분이 되었다. 
 
“술은 안 마셔도 안주는 좋아해. 안주만 시켜도 되겠나?” 
“물론이지. 죽음의 악마 발톱 튀김, 파멸 산장의 악마 곱창 볶음, 그리고······.” 
 
나는 쓰게 웃었다. 
 
“초행길이라고 놀리는 건 그만 두는 게 좋아.” 
“하하, 들켰군.” 
“제일 잘하는 걸로 줘. 얼마지?” 
“5코인만 내게.” 
 
굉장히 저렴한 가격이었다. 
[피스 랜드]의 작은 성좌도 먹을 수 있는 가격이로군. 
나는 조금 생각하다가 물었다. 
 
“두 배를 내면 두 배로 맛있게 해줄 수 있나?” 
“하하, 세 배도 가능하지.” 
 
내가 말없이 50코인을 내자, 주인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열 배는 조금 힘들 것 같긴 한데, 노력해 보겠네.” 
 
말하는 것과는 달리 제법 그럴듯한 냄새가 풍기는 걸로 봐서 주인장은 꽤 솜씨 있는 요리사인 듯했다. 나는 간만에 허기를 달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살짝 기대에 부풀었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것이 언제적 일이었는지 벌써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나는 꺼진 배를 잠시 달래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열심히 달려 왔으니, 잠깐 휴식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대단하군. 저기가 ‘지구’라는 곳인가?” 
 
사이좋게 모인 화신들이 선술집 상단에 매달린 패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도깨비들의 [채널]을 녹화한 영상이었다. 
어쩐지 익숙한 광경이다 싶더니, 잠시 후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아저씨! 
 
상영되는 장면은 ‘서울 돔 시나리오’의 한 장면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10번째 시나리오인 ‘73번째 마왕’을 담은 기록.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신유승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 한구석이 쓰려왔다. 
나는 코트의 깃을 세워 반쯤 얼굴을 가린 채 그 영상을 보았다. 
 
“시나리오 임팩트 한 번 굉장하구만. 소문대론데?” 
“저기가 요즘 제일 인기 있는 시나리오 지역이라며?” 
“저 동네 화신 녀석들, 아주 살판 났겠구만!” 
 
[마계]의 거의 모든 매스 미디어는 혹부리들의 통제하에 있다. 
혹부리들은 도깨비들처럼 직접 채널을 열 수 없기에 후원금을 통해 수입을 얻을 수 없다. 대신 녀석들은 녹화 자료를 훔쳐 마계 곳곳에 뿌리는 등의 일을 하며 수입을 챙긴다. 
 
“시벌, 난이도 보니 좆도 아닌 거 같구만. 나도 저 정도는 하겠다!” 
“헛소리 말게. 자네는 저기 갔으면 다섯 번째 시나리오도 못 깨고 뒈졌어.” 
“어허, 아니라니까?” 
 
툴툴대며 화면을 보던 이들은, ‘73번째 마왕’ 시나리오가 후반부로 치달으며 점차 표정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우리엘, 아시잖아요. 이건 그런 ‘이야기’일 뿐입니다. 
 
내 대사가 화면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정말로 이상했다. 
 
―누군가 죽는 건, 그동안 많이 봐왔지 않습니까. 
 
저때 우리엘이 많이 슬퍼했었지······. 
고개를 돌려 보니, 몇몇 화신들이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분노하거나, 절망하거나, 탄식하는 목소리. 
 
“시발, 너무 슬프잖아······.” 
 
······낯선 기분이었다. 
자신들의 시나리오가 아님에도, 내가 겪었던 이야기에 동조해주는 화신들의 모습. 마치 위로라도 받은 듯한 얼굴들. 
어쩌면 이야기가 필요한 것은 성좌들만이 아니다.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우리도 고향 시나리오로 돌아가면 저 정도 할 수 있으려나?” 
“램퍼트, 돌아가고 싶은가?” 
“갈 수만 있다면 못 갈 것도 없지.” 
“클클, 그럼 혹부리한테 부탁해 보게. 언제든 보내줄 테니.” 
“······그걸 농담이라고 하나? 난 고향의 ‘재앙’이 되고 싶지는 않아.” 
 
재앙. 
그 말에 일순 선술집 안의 공기가 경직되었다. 
하지만 정말 잠깐이었다. 
모두가 꺼리는 화제는, 금방 전환되기 마련이니까. 
 
“여기 있네. 열 배 맛있는 안주.” 
 
나는 옅게 미소하며 안주를 받아 들었다. 
안주는 새하얀 튀김옷을 입은 튀김들과 간단한 면 요리였다. 고소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이, 맛보지 않아도 훌륭한 요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접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다른 사람들처럼 패널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작은 머리통 하나가 보였다. 
내가 곁에 다가온 줄도 모르고 눈물까지 글썽이는 얼굴. 
나는 작게 혀를 차며 녀석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보고 있으니 그립냐?” 
“히익!” 
 
작게 놀라는 모습이 아주 귀엽다. 
정말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의 모습이다. 
슬그머니 자리를 벗어나려는 장하영의 어깨를, 나는 지그시 눌렀다.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마. 그냥 밥이나 같이 먹자는 것뿐이니까.” 
 
장하영은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더니, 순순히 옆자리에 다시 앉았다. 주변에는 다른 화신들도 많고 하니 자길 해칠 일은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우물쭈물하던 장하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일렌이랑 얘기는 끝났어?” 
“그래.” 
“뭔 얘기 했는데?” 
“넌 알 거 없어.” 
“······근데 그거 스페셜 요린데.” 
“먹고 싶으면 먹어.” 
 
내 말에 장하영이 기다렸다는 듯 포크를 휘둘렀다. 한가득 쌓여 있던 면발이 어디로 사라지는지도 모르게 장하영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생각해 보니 이 녀석의 스킬 중에는 [뻔뻔함]도 있다. 
 
“뭐, 먹어줄 만하네.” 
 
장하영은 순식간에 내 음식을 절반 이상 먹어 치웠다. 
 
“······근데 너도 지구 출신이지?” 
“그래.” 
 
화면에는 내 얼굴이 제대로 나온 적이 없었다. 누가 고의로 화면을 만진 것인지, 내 얼굴은 한 대 맞은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비형 자식, 내 얼굴만 왜 저 따위로 편집해 놓은 거야? 
어쨌든 그 덕에 장하영이 내 본모습을 알아볼 일은 없을 듯했다. 
 
“······어땠어?” 
“끔찍했지.” 
 
그 말만으로도, 장하영은 모든 것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나리오를 겪은 이들에게 비극의 수사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혹시 너도 지금 화면에 나와?” 
“나와.” 
“어디?” 
“지금 나오네.” 
 
마침 잘생긴 유중혁의 얼굴이 화면에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운 좋게 내가 입고 있던 코트도 적당히 더럽혀져서 녀석의 검정색 코트와 흡사해 보였다. 
적당히 우기면 정말 믿을 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장하영의 표정은 영 신통찮았다. 
 
“전혀 안 닮았는데······.” 
“나 맞아.” 
“아냐. 네가 아무나 빚다가 뭉갠 도자기 반죽 같다면, 저쪽은 신의 손길로 천일 동안······.” 
“나 추방자잖아. 얼굴 쪽 설화가 무너져서 그래.” 
“아무리 설화가 무너져도 그건 좀······ 거짓말도 말이 되는 걸 해야지.” 
 
······젠장. 
내 기분이야 그렇다 쳐도 목적은 달성해야 하니까. 
 
“그래, 나 아냐. 그래도 쟤 멋있게 생겼지?” 
“제법.” 
“싸움도 엄청 잘해.” 
“그래?” 
“지구에 가면 만나게 해줄게. 나 쟤랑 꽤 친하거든.” 
 
그 말에 장하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마 장하영은 넘어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멸살법’에서 장하영은 유중혁을 동경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으니까. 
이참에 미리 이 녀석을 설득해서 귀환에 대한 의지를 북돋아 두면······. 
 
“내가 왜 쟤를 만나야 하는데?” 
“어? 아니 그냥······.” 
“오히려 저쪽에 더 흥미가 있는데.” 
“누구?” 
“저기 저쪽.” 
 
화면 속에, 새카만 마기에 둘러싸인 인형이 보였다. 
슬픈 눈으로 자신의 일행들을 바라보는 한 남자. 
얼굴은 정확히 보이지 않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잘 알 수 있었다. 
 
그건 나였다.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는 장하영을 보며, 나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싶었다. 
 
“쟨 얼굴도 잘 안 보이잖아?” 
“그게 뭐가 중요해.” 
 
당황한 내가 말을 주워섬기는데, 선술집 곳곳에서 갑자기 함성이 터져 나왔다. 
 
“으와아아아!” 
“안돼! 눈을 떠 구원의 마왕!” 
“젠장! 눈물이 멈추지 않아!” 
 
[73번째 마계에서 당신의 유명세가 강화됩니다.] 
[1,5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아니, 내가 이렇게까지 인기가 많았나? 
갑자기 유중혁 코스프레를 한 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사실 저게 나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다시 만나자, 유중혁. 
 
마침내 시나리오가 종막에 다다르면서, 사람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은 아예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장하영이 황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 이미 여자친구 있을라나.”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뭐? 누구?” 
“구원의 마왕. 혹시 저 사람이랑도 아는 사이야?” 
“아는 사이긴 한데······.” 
 
나는 장하영의 아름다운 눈망울을 마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새하얀 뺨에 투명한 눈망울. 
미색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 얼굴이다. 하지만······. 
 
“너 남자 아냐?” 
 
내 기억이 맞다면, 장하영은 남자다. 
왜냐하면 빌어먹을 ‘멸살법’ 작가 놈이 내 모든 댓글을 다 수용해 놓고, 딱 한 가지만 지 맘대로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이 녀석의 성별이다. 
장하영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든 겉만 보고 판단하려는 게 지구인 답네.” 
 
뭔가 대꾸하려는 순간, 선술집의 주인장이 갑자기 불을 껐다. 
그러더니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선술집 전체를 향해 말했다. 
 
“밤이 온다.” 
 
그리고 그 작은 한 마디에, 주인장을 중심으로 선술집 내부에 깊은 적막이 번져 갔다. 일전에 ‘재앙’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보다도 훨씬 민감하고 예리한 적막. 눈이 마주친 장하영이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자세히 보니 이 선술집뿐만이 아니었다. 
거리의 다른 술집들과 가게들도 문을 닫고 불을 끄는 것이 보였다. 삽시간에 소리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공단] 전체가 심해에 잠기는 듯한 광경. 
사람이 사라진 거리에서 음산한 피리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몇몇 공민들이 귀를 막는 것이 보였다. 
순간, 나도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마계에는 특수한 [밤]이 찾아온다.」 
 
[제4의 벽]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멸살법’의 설정을 떠올렸다. 
 
「[공단]의 모든 공민들은 귀족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단순히 귀족이 강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사흘에 한 번씩 찾아오는 이 [밤] 때문이었다.」 
 
“제발 그냥 지나가라. 제발······.”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창문이 쩌저저적, 얼어붙는 소리가 들리며 거리로 뭔가가 지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스으으으으. 
 
숨을 죽인 공민들은 마치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아예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고개를 숙인 이들도 보였다. 얼어붙은 창문 너머로 언뜻언뜻 보이는 거대한 낫의 그림자. 
 
「밤이 되면, 공단에는 [처형관]이 나타난다.」 
「공민들에게 [혁명가]가 있다면, 귀족들에게는 [처형관]이 있다.」 
 
공민들이 두려움에 떨면서도 귀족들에게 저항할 수 없는 근원이자, 공작이 이 공단에서 무소불위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저 [처형관]의 존재 때문이었다. 
 
끼기기기기긱. 
 
선술집의 문이 열리는 순간, 사람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저 깊은 어둠 속에서 유리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혁 명 가 가 누 구 냐.] 
 
성인 남성의 두 배 정도 되어 보이는 몸집에 사신을 연상시키는 외양. 
뒤집어쓴 검은 케이프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겉으로 풍기는 섬뜩한 기운만으로도 놈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대상은 현재 시나리오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대상은 현재 무적 상태입니다.] 
 
그 어떤 존재도, 밤의 [공단] 안에서는 저 [처형관]과 대적할 수 없다. 
내게 음식을 내주었던 주인장도, 시나리오를 보며 시끌벅적하게 떠들던 사람들도 모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 [처형관]은 이 선술집을 자신의 처형장으로 택했다. 
이곳의 누군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죽는다. 
 
[혁 명 가 가 누 구 냐.] 
 
처형관의 낫이 곁을 스칠 때마다 사람들이 몸을 웅크렸다. 마치 놀이라도 하는 듯한 광경. 내가 놈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자, 장하영이 깜짝 놀라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눈 마주치지 마.” 
 
그 작은 소리에, [처형관]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이런 시······.” 
 
정확히는, 욕설을 뱉는 장하영 쪽을. 
서서히 다가오는 [처형관]을 보며, 장하영이 몸을 떨기 시작했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는 얼굴. 
나는 완전히 겁에 질린 장하영의 머리를 턱 짚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깜짝 놀라 입을 뻐끔거리는 장하영을 내버려 두고 고개를 들자, [처형관]이 불길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유중혁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녀석이었다면, 절대 여기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겠지. 
유중혁은 끝까지 자신을 숨겨서 최대한 이득을 볼 상황을 찾았을 것이다. 
[공단]의 시나리오에 참가하기 위해 모든 종류의 조사를 끝냈을 것이고, [혁명가]가 누구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홀로 고심했겠지. 
 
「김독자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 녀석이 회귀를 수백 번이나 한 것이다.」 
 
스르르 낫을 움켜쥔 [처형관]이, 나를 향해 소름끼치는 목소리를 냈다. 
 
[너 는 누 구 냐.] 
 
선술집의 모두가 나를 주목한 그 순간, 나는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혁명가’다.”
 
 
 
 
 
< Episode 37. 마계의 풍경 (5) > 끝

< Episode 38. 가짜 혁명가 (1) >
 
 
 
 
 
Episode 38. 가짜 혁명가 
 
 
[누군가가 ‘혁명가 선언’을 하였습니다!] 
 
[마계]의 무수한 시나리오들 중에서도 혁명가 시나리오의 위상은 크다. 
[공단]의 최정점인 [공작]을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혁명가. 
 
그 존재는 공민들의 희망이자 전설이었고, 동시에 절망이었다. 
때문에 내가 그 말을 한 순간,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자기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하는 얼굴들. 
 
“뭘 그렇게 놀라? 혁명가를 찾고 있는 거 아니었나?” 
 
내 뻔뻔한 목소리에 사람들의 표정은 당혹에서 경악으로 변해갔다. 
동시에, 나에게만 메시지가 들려왔다. 
 
[당신은 ‘혁명가’가 아닙니다.] 
 
당연한 메시지였다. 
지금 나는 시나리오 바깥의 추방자니까. 
애초에 시나리오조차 없는 존재가, 마계 메인 시나리오의 중추가 되는 [혁명가]가 될 수 있을 턱이 없다. 
본래라면 그래야 했다. 
 
[당신의 선언이 ‘세이스비츠 공단’의 메인 시나리오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스타 스트림>이 제일 중요시하는 것은 ‘개연성’이다. 
 
그르르르륵. 
 
[혁 명 가 라 고 ?] 
 
굵은 사슬이 휘감긴 낫이 서슬퍼런 살기를 드러냈다. 
[처형관]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오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지금의 나로서도 [처형관]을 죽일 방법은 없다. 
그럼에도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는 그래야 했다. 
 
“그래, 내가 혁명가다.” 
 
[왜 스 스 로 를 드 러 냈 지 ?] 
 
“내가 나서지 않으면 누군가가 죽을 테니까.” 
 
장하영을 비롯한 공민들은 입을 떡 벌린 채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다가오는 [처형관]을 보며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슬슬 효과가 나타날 때가 됐는데. 
 
[다수의 공민들이 당신의 용기에 탄복합니다.] 
 
됐다. 
 
[당신의 고결한 용기가 시나리오의 전개에 영향을 미칩니다.] 
[당신은 시나리오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시나리오가 임시로 당신에게 지위를 할당합니다.] 
[당신은 ‘자칭 혁명가’가 되었습니다.] 
[만약 기존의 ‘혁명가’가 사망할 시, 당신은 그 지위를 양도받게 됩니다.] 
 
이것으로 나도 [시나리오]에 한 발 걸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히든 시나리오― ‘자칭 혁명가’를 획득하였습니다!] 
 
시나리오 획득 메시지가 이렇게 반가운 것은 처음이었다. 
비록 [메인 시나리오]가 아닌 기간제 [히든 시나리오]였지만, 당분간 버티기엔 무리가 없을 것이다. 
73번째 마계의 히든 시나리오. 
유중혁의 무수한 실패가 없었더라면, 나도 알 수 없었을 비밀이다. 
 
“당신! 잠깐만! 진짜 혁명가야?” 
“이봐!” 
 
참지 못한 사람들이 공포를 억누르고 테이블을 박찼다. 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마침내 [처형관]이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새카만 연기가 [처형관]의 입에서 흘러나오더니, 그대로 내 몸을 휘감았다. 
 
[세이스비츠의 ‘처형관’이 당신에게 죽음의 표식을 남겼습니다.] 
[당신은 ‘밤’의 희생양으로 지목됩니다.] 
 
내 주변에 떠오른 표식을 본 순간 사색이 된 사람들이 소리쳤다. 
 
“모두 피해!” 
“우와아아악!” 
 
콰아아아앙! 
 
부서진 테이블 조각이 허공으로 비산했고, [처형관]의 낫이 앞쪽의 공간을 베어내며 떨어졌다. 나는 간발의 차로 낫을 피했다. 화신체를 수선받지 못했다면 피하기 어려운 공격이었지만,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추방자 패널티’가 일부 완화됩니다.] 
 
쓰읍, 하고 들이켠 숨에 온기가 묻어 있었다. 전신에 온화한 기운이 깃들며 한기가 한결 가셨다. 
나는 기민해진 움직임으로 이어진 [처형관]의 공격을 연달아 피해냈다. 
역시, 시나리오를 얻고 얻지 않고의 차이가 이렇게나 크다. 
비록 메인이 아닌 히든 시나리오지만, 이야기 속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존재의 생동감이 달라지는 것이다. 
 
[혁 명 가 ?] 
 
내 움직임에 조금 놀랐는지, [처형관]의 기세가 바뀌었다. 
 
[해당 공간이 일시적으로 폐쇄됩니다.] 
[당신은 ‘선술집’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이 바로 수많은 강자들이 [처형관]에 대항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공단] 안에 있는 한 [처형관]으로부터 도망갈 방법은 없다. 
어디 그뿐인가? 
 
“피해 멍청아!” 
 
장하영의 목소리와 함께 [처형관]의 낫에서 불온한 기운이 폭사되었다. 
 
「어떤 [공민]도 [처형관]에 대항할 수 없다.」 
 
[처형이 집행됩니다.] 
 
녀석의 특수 기술인 [처형]은, 상대방의 모든 방어를 무시하고 일격필살의 공격을 가한다. 아무리 강한 [공민]이라 해도, 이 시나리오 안에서는 결코 [처형관]의 낫을 받아낼 수 없다. 
 
스가가가가각! 
 
처형관의 섬뜩한 낫이 내 몸을 베어내려는 순간. 
 
기이이이잉! 
 
내 손에서, [신념의 칼날]이 거칠게 울었다. 
 
“미안하지만 난 공민이 아니야.” 
 
골드 드래곤의 심장이 울컥 마력을 토해냈고, [백청강기]의 도도한 흐름이 내 손끝에 휘감겼다. 
 
“말했잖아. 난 ‘혁명가’라고.” 
 
뭐, 아직은 ‘자칭’에 불과하지만. 
 
카아아아아앙! 
 
백청의 눈부신 마력과 처형관의 낫이 충돌하며 엄청난 스파크가 튀겼다. 화려한 파찰음 속에서,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당신은 메인 시나리오 참가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공민’이 아닙니다.] 
[당신은 ‘추방자’입니다.] 
[당신은 해당 시나리오의 ‘처형’ 효과를 받지 않습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처형’의 필살 효과가 중화됩니다.] 
 
까드드드드득! 
 
내가 [처형관]의 낫을 흘려내자, 주변의 화신들이 경악성을 토해냈다. 
 
“처, 처형관의 일격을 견뎌냈다!” 
“정말 혁명가란 말인가?” 
 
내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은 불신 가득한 눈으로 장내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신의 시나리오 기여도가 커집니다.] 
 
[처형관] 녀석도 본격적으로 나를 오해한 모양인지, 가공할 기세를 전신에서 불태우고 있었다. 
 
[건 방 진······!] 
 
나는 녀석을 도발하듯 말을 걸었다. 
 
“까불지 마. 네가 밤에만 세다는 걸 아니까.” 
 
[뭐 ?] 
 
“이 밤이 끝나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쥔 손목을 천천히 돌리며 말했다. 
 
“내가, 너를 반드시 죽일 테니까.” 
 
쿠쾅! 
 
낫이 수십 개로 분영(分影)하며 나를 향해 쇄도했다. [처형]이 먹히지 않는다고 해서 [처형관]이 약한 것은 아니다. 
단지 나를 처분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뿐. 
 
그러니, 상황이 나아졌다고 말하기엔 일렀다. 
 
“모두를 지켜줄 수는 없으니까 밖으로 나가요!” 
 
나를 제외한 자들은 ‘표식’의 효과를 받지 않았기에 얼마든지 탈출이 가능했다. 허겁지겁 선술집 밖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장하영이 나를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런 녀석을 잠깐 일별하고는, 조용히 [책갈피]를 가동했다. 
 
“4번 책갈피, ‘리카온 이스파랑’을 선택하겠다.” 
 
[전용 스킬, ‘바람의 길 Lv.10(+1)’이 활성화됩니다!] 
 
5번 책갈피에 담긴 [키리오스]의 힘을 쓴다면 보다 쉽게 상대할 수 있겠지만, 애초에 이 싸움은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아니, 이길 수가 없다. 
 
[대상에게 당신의 공격이 듣지 않습니다.] 
[‘밤’이 끝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처형관’을 죽일 수 없습니다.] 
 
휘두른 칼날이 녀석의 옷깃을 베었으나, 돌아오는 것은 그런 메시지뿐. 
놈의 [처형]은 나에게 듣지 않지만, 나의 모든 공격도 공단의 밤 안에서는 녀석을 상처 입힐 수 없다. 
 
작전을 바꿔야 한다. 
 
고오오오오오! 
 
선술집 주변이 초토화되며 바람의 힘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짓쳐드는 수십의 낫 그림자들이 바람의 움직임에 맞물려 둔해지고 있었다. 
반면 내 움직임은 더욱 민활해졌다. 속도의 균형이 깨지고 있었다. 녀석의 움직임은 늘 나보다 한 박자 느렸고, 내 움직임은 늘 녀석보다 한 발짝 빨랐다. 
 
이것이 극한에 다다른 [바람의 길]의 정수. 
공간 일대의 모든 가속(加速)을 통제하는 힘이다. 
 
“그렇게 굼벵이 같아서 내가 보이기는 하냐?” 
 
[그 아 아 아 아 아.] 
 
분노한 [처형관]의 낫이 마구잡이로 허공을 베어대기 시작했다. 
보통은 그런 공격에 맞아줄 턱이 없었다. 
그런데 저 망할 <올림포스>의 행운의 여신이 저 녀석에게 웃어주기라도 한 것인지, 우연히 휘두른 낫 하나가 내 사각으로 흘러들었다. 
 
“이크.” 
 
불의의 일격이 옆구리에 작렬하려는 순간, 갑자기 내 오른팔이 기이한 형태로 뒤틀리더니 그 공격을 받아냈다. 
 
[오른팔에 깃든 소드마스터의 재능이 빛을 발합니다!] 
 
까아아아앙! 
 
놀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설화의 파편이 이런 식으로 힘을 발휘할 줄이야. 
 
[불완전한 설화의 사용으로 화신체의 위상이 불안해집니다.] 
[과도한 전투를 지속할 시 당신의 설화가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다시금 슬금슬금 밀려오는 한기. 
기껏 [히든 시나리오]까지 획득했는데, 겨우 [처형관] 하나를 상대한다고 과도한 힘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계속 맞서 싸우면 안 된다. 
 
최대한 피하면서 시간을 벌어야 한다. 
이 빌어먹을 [밤]이 끝날 때까지. 
 
[너 는 죽 는 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바람의 길]을 전력으로 발동했다. 
 
고오오오오! 
 
유중혁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초월좌인 녀석의 도움이 있었다면, 이 긴 밤도 버티기 쉬웠겠지. 
 
하지만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멸악의 심판자’ 정희원도. 
‘강철검제’ 이현성도. 
‘해상제독’ 이지혜도. 
내 사랑스런 꼬마들, 이길영과 신유승도 없다. 
 
한수영은······ 뭐, 있어도 안 도와줬겠지만. 
 
까가가가가강! 
 
이곳에는, 나 혼자다. 
 
내가 믿을 것은 내가 아는 정보. 
내가 쌓아 올린 이야기. 
그리고, 나 자신뿐이다. 
 
초조한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처형관]의 공격이 조금씩 둔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을 향해 놀리듯 말했다. 
 
“뭐야, 지쳤어?” 
 
무적 판정을 받는 녀석이 지칠 턱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지치기보다는 슬슬 짜증이 나고 있겠지. 
내가 그 말을 한 것은 오히려 내 상태를 숨기기 위함이었다. 
 
[책갈피의 지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바람의 길]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30분이 한계. 
애초에 [책갈피]는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스킬이 아니었다. 
그런데, [처형관]이 웃고 있었다. 
 
슈우우우우우! 
 
소름돋는 효과음과 함께 허공에 나타난 십여 명의 [처형관]들. 
이 밤의 가장 끔찍한 점은, [처형관]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이스비츠 공단]의 모든 [처형관]들이 좁아 터진 선술집 안에 모여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의 실 수 다.] 
 
녀석은 일부러 시간을 끄는 척하면서, 동료들을 불러 모은 것이었다. 나를 확실하게 이 밤 안에 끝장내기 위해서. 
 
고오오오. 
 
살기를 피우며 나를 포위하는 [처형관]들의 움직임을 보며, 나도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건 피할 수 없다. 
설령 [바람의 길]을 쓴다고 해도, 이들에게서 달아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아니, 실수한 건 너야.” 
 
30분이나 시간을 끌었으니,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 
다가오는 낫의 행렬을 보며, 나는 양팔을 벌렸다. 
 
쿠콰콰콰콰! 
 
공기를 통째로 부수며 날아드는 수많은 낫들이 내 몸통을 꿰뚫었다. 몇몇 화신들이 눈을 질끈 감았고, 비통한 탄식을 흘렸다. 그러나 그들의 절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기이이이이잉. 
 
분명, 나를 처참하게 꿰뚫고 찢었어야 했던 낫들. 
그 낫들이, 허공에 멈춰 있었다. 
 
[무 슨 ?] 
 
당황한 [처형관]들이 멍청한 눈으로 허공에 걸린 무기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멸살법’의 문장을 떠올렸다. 
 
「공단의 ‘밤’을 견딜 방법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밤’이 끝날 때까지 ‘처형관’으로부터 도망다니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잊었어? 이 시나리오에는 [혁명가]와 [처형관]만 있는 게 아냐.” 
 
뒤이어, 귓가에 들려오는 메시지. 
 
[누군가가 자신의 생명력을 사용해 당신을 경호합니다.] 
 
「‘밤’에서 살아날 두 번째 방법은, ‘경호관’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역시. 이렇게 하면 숨어있던 ‘경호관’이 나올 줄 알았지. 
 
아일렌은 말했다. 
 
[혁명가]가 누구인지는, 공민회의 의원들조차 모른다고. 
그렇다는 것은, 다른 화신들조차 [혁명가]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 
즉, 지켜주고 싶어도 누군지 모르니 지킬 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혁명가]가 자신을 밝히고 나타난다면 어떨까? 
 
[경호가 성공하여 죽음의 표식이 해제되었습니다!] 
 
밤마다 [처형관]이 발호할 수 있는 표식의 숫자는 하나뿐. 
표식이 해제되었으니, 오늘의 살행은 끝난 것이다. 
[처형관]이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운 이 좋 았 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다음에 우리가 만나는 건 ‘낮’일 테니까.” 
 
분한 듯, [처형관]들이 이를 갈며 허공에서 하나 둘 흩어졌다. 
음산한 피리소리가 사라지고, 어둠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선술집의 바깥에서 격앙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화신들이 보였다. 도도한 장하영조차 충격에 빠진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뭔가 말을 해줘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머쓱하니 손만 흔들어 주었다. 
 
“새, 새로운 혁명가다! 새로운 혁명가가 나타났다!” 
 
공민들의 함성 소리와 함께, 마침내 짧았던 밤이 물러가고 있었다. 
나는 그런 공민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들 중 누군가가 ‘경호관’일 것이다. 
앞으로의 시나리오는 반드시 ‘경호관’과 함께 수행해야만 한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여전히 어두운 밤하늘이 그곳에 있었다. 
간혹 별 같은 것이 몇 개 보이기도 했지만, 너무 흐릿했기에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밝기였다. 
우리엘이라든가, 제천대성이라든가······. 
녀석들이 보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들려오는 메시지는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오늘 밤에는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 Episode 38. 가짜 혁명가 (1) > 끝

< Episode 38. 가짜 혁명가 (2) >
 
 
 
 
 
세이스비츠 공작의 집무실 앞. 
악마 백작 시로크는 초조한 심경으로 벌써 몇십 분째 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집무실을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는 백작 ‘한’ 때문이었다. 
 
‘한’. 
 
놈의 본명이 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모두가 ‘한’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렇게 불릴 뿐. 
작위는 시로크와 같은 ‘백작’이었지만, 출신 성분 자체가 남다른 녀석이었다. 녀석은 무려 32 마계의 마왕인 ‘아스모데우스’와 끈이 닿아 있었으니까. 아마 세이스비츠 공작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녀석을 곁에 두는 것이리라. 
시로크는 내심 위축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공작님께 긴히 전할 말이 있다.” 
“말해. 내가 전하도록 하지.” 
“그건 곤란한데.” 
“공작님께서는 지금 [길로바트] 사절단과 긴급회의 중이시다.” 
“언제 끝나시는데?” 
“그건 나도 모르지.” 
 
시로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 녀석에게 전하면 분명 모든 공을 앗아가겠지. 
때문에, 시로크는 이렇게 대답했다. 
 
“됐어. 급한 일도 아니니까 기다리지 뭐.” 
 
그 말에 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로크는 그런 한의 표정을 보는 것이 좋았다. 
 
‘개자식, 계속 궁금해 해라.’ 
 
사실 시로크가 보고할 내용은 단순했다. 
 
―공민가에 [길로바트]의 후작으로 추정되는 ‘악마 귀족’이 나타났다. 
 
물론 이렇게만 말하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이 사건에는 이상한 지점이 많았다. 
잠시 생각하던 시로크는 공작의 집무실 쪽을 넌지시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저 안에는 [길로바트]의 후작님도 함께 계신가?” 
“그렇다.” 
“다른 곳을 통하지 않고 곧장 이곳으로 오셨나 보군.” 
“사안이 사안이니까.” 
 
그 사무적인 대답에, 시로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다.’ 
 
모르긴 몰라도, [길로바트]의 사절단에 후작이 둘씩이나 있지는 않을 것이다. 후작급이면 최소 사절단을 이끄는 단장직을 맡았을 테니까. 
말인즉, 공민 거리에서 악마 귀족 행세를 하고 있는 그 녀석은 [길로바트]의 후작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것만으로 그의 보고는 ‘보고’로서의 가치가 생겼다. 
큰 건수가 아니라 해도, 실적에 약간의 도움은 되겠지. 
머뭇거리는 시로크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이 물었다. 
 
“계속 얼쩡거리는 걸 보니, 너도 다음 ‘마왕’이 누가 될지 궁금한 모양이군.” 
“아, 뭐. 그렇지.” 
 
물론 오해였지만, 기왕 오해를 받은 거 그에 관해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역시 [길로바트 사절단]이 방문한 건 마왕 출현의 소문 때문인가 보군?” 
“자세한 것까진 말해줄 수 없지만, 비슷하다.” 
“이제 와서 마왕이라니, 조금 웃기는 이야기로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출처가 어디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소문. 
그 소문 하나에 ‘73번째 마계’ 전체가 이렇게 들썩이다니. 
시로크는 내심 이 상황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세이스비츠. 
길로바트. 
멜레돈. 
베르칸. 
 
지난 수백 년간 73번째 마계는 이 네 명의 공작에 의해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수백 년씩이나 유지된 평화가, 겨우 소문 하나 때문에 이렇게 흔들리다니. 어쩐지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한은 시로크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마왕’의 징후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뭐? 그걸 어떻게 알지?” 
“<베다>가 [멜레돈 공단]과 손을 잡았다더군.” 
“<베다>?” 
 
시로크도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아니, 모르는 게 이상했다. 
안전하게 <스타 스트림>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이름 중의 하나였으니까. 
때문에 시로크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성운>이 직접 움직였단 말인가?” 
“정확히는 <베다>의 설화급 성좌 중 하나가 [멜레돈]과 접선했다고 한다.” 
 
성좌와 마왕은 <스타 스트림> 전체에서도 손에 꼽는 앙숙들이다. 
그런데 성좌들이 마왕의 반발을 무릅쓰고 ‘73번째 마계’의 일에 간섭했다. 
아직 그 규모는 크지 않은 것 같지만, 정말로 <성운>이 나선 것이라면 이 일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성운들이 관심을 가지다니. 정말 ‘마왕’이 나타날 거란 말인가······?” 
 
시로크는 약간 멍해진 눈빛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마왕이라니. 
마계에 오랫동안 몸을 담은 시로크로서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공작께서 저렇게 바쁘신 거였군.” 
“지금으로서 ‘마왕’에 가장 가까운 분이시니까.” 
 
악마 귀족들 중 하나가 ‘마왕’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건 명확했다. 
다른 72 마왕의 사례만 봐도, 악마가 아닌 존재가 마왕위에 오른 경우는 극히 드무니까······. 
[공장] 전체를 울리는 가벼운 경고음과 함께,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열렸습니다!] 
[제 24회차 ‘혁명가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문득 들려온 메시지에 시로크는 깜짝 놀랐으나, 놀란 한의 표정을 보며 애써 태연한 척 굴었다. 한이 먼저 물었다. 
 
“이게 무슨 메시지지?” 
“아, 넌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잘 모르겠군. 여기서야 가끔 있는 일이야. 이곳의 메인 시나리오지. 혁명가 게임.” 
“혁명가 게임?” 
“아마 숨어있다가 [처형관]에게 덜미가 잡힌 모양이군 그래. 재수 옴팡지게 없는 놈이구만.” 
 
‘혁명가 게임’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숨어 있던 ‘혁명가’가 나타났다는 뜻. 
하지만 이 공단에서 정말로 혁명가가 나타났을 리는 없었다. 
30년 전, 마지막으로 혁명가가 나타났을 때 녀석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공단의 모두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로크가 웃으며 덧붙였다. 
 
“별일 아니니 걱정마라. 조금 기다리면 알아서 [처형관]들이 놈의 목을 베어 올 거야. 간만에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기겠군 그래.”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게임 종료 메시지는 들려오지 않았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 때 즈음, 한 하급 귀족이 나타났다. 
시로크는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왜냐하면 녀석은 숨은 [처형관]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헐레벌떡 집무실 쪽으로 달려오는 그를 향해, 시로크가 먼저 물었다. 
 
“무슨 일이냐?” 
“누군가가 ‘혁명가 선언’을 했습니다!”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시로크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누가?” 
“새로운 혁명가입니다!” 
“그러니까 그놈 이름이 뭐냐고.” 
 
하급 귀족이 더듬거리며 이름을 중얼거렸다. 시로크는 모르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종일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한이 반색하며 물었다. 
 
“잠깐, 지금 뭐라고 했지?” 
“예, 분명 ‘유중혁’이라는······.” 
“그놈이 자길 유중혁이라고 했다고?” 
 
시로크가 다급히 물었다. 
 
“아는 놈이냐?” 
“알다마다.” 
 
‘한’의 표정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미소라기보다는 어딘가 뒤틀린 데가 있는 표정이었다. 악마인 시로크조차 마음 한 구석이 선뜩해지는 얼굴. ‘한’이 물었다. 
 
“그놈이 나타난 곳이 어디지?” 
 
 
* 
 
 
밤이 물러간 후, 나는 아일렌에게 다시 불려왔다. 
정확히는, 거의 끌려오다시피 했다. 
왜냐하면 내 선언으로 인해 공민 거리가 완전히 뒤집어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혁명가가 나타났다! 
 
거리 곳곳이 그런 구호들로 시끄러웠다. 순식간에 튀어나온 아일렌이 나를 의원실에 잡아넣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공민들의 틈바구니에 있었을 것이다. 아일렌이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씩씩거리는 동안, 나는 태연한 마음으로 [히든 시나리오]의 정보를 확인했다. 
 
 
+ 
 
<히든 시나리오 ― 가짜 혁명가> 
 
분류 : 히든 
난이도 : SS 
클리어 조건 : 당신은 혁명가를 사칭하여 ‘자칭 혁명가’가 되었습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진짜 혁명가를 죽이고 그의 직위를 양도받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될 것입니다. 
제한시간 : 30일 
보상 : 150,000코인,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 진입. 
실패시 : 사망 
 
+ 
 
대충 어떻게 해야 메인 시나리오로 진입할 수 있는지는 알겠군. 
어찌됐든, 진짜 ‘혁명가’를 찾아야만 한다 이거지······. 
나는 아일렌 쪽을 보며 말했다. 
 
“자, 질문 시작해.” 
“······미친 사람인가요?” 
 
아일렌은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요?” 
“혁명.” 
“혁명은 무슨 혁명이에요! 당신 가짜잖아요!” 
“진짜면?” 
“그럴 리가 없는······ 혹시······?” 
 
혹시나 싶어서 묻는 표정이 귀엽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자, 아일렌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겠죠! 대체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어요? 이제 모두 끝장이라고요!” 
 
나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당신도 원하던 전개잖아. 혁명도 하고, 공작도 죽이고.” 
“결코 이런 식은 아니었어요! 이건 사기극이라고요!” 
“혁명에 진짜 가짜가 어디 있어? 이루어지면 그게 진짜인 거지.” 
“혁명은 그런 말장난이 아니에요!” 
“당신 뜻에 찬성해. 나도 가벼운 마음으로 혁명가 선언을 한 건 아니야. 이 [공단]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단 말이지.” 
“그런 식으로 쉽게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당신 의지가 가볍다는 증거예요.” 
 
아일렌의 목소리엔 깊은 분노가 담겨 있었다. 
 
“당신 혼자 그렇게 나선다고 ‘혁명’이 이루어질 것 같아요?” 
“······.” 
“나는 오랫동안 이 [공단]의 혁명을 보아 왔어요. 얼마나 많은 혁명이 실패하고,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리고······.” 
“과거의 실패를 경전처럼 여기지 마. 아무것도 안 하면 바뀌는 건 없다고.” 
“애초에 할 수 없는 시나리오라고요!” 
 
아일렌의 심정은 잘 이해하고 있다. 
사실, ‘혁명가 시나리오’는 [공단] 안에서는 이미 유명무실한 시나리오였으니까. 
시나리오가 허락하는 유일한 반란의 프로토콜. 
그럼에도 [공단]의 [공민]들은 이미 오래전에 이 게임을 포기했다. 
승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나리오는 시나리오로서의 가치를 잃었다. 
아일렌은 계속해서 외쳤다. 
 
“내가 ‘추방자’들에게 기대 왔던 건 그것 때문이었어요. 기존의 시나리오를 통해서는 절대로 공작을 죽일 수 없으니까! 공작은커녕, 저 빌어먹을 [처형관]조차 이길 방법이 없으니까!” 
“시나리오는 깨라고 만든 거야. 잘 들여다보면 클리어할 방법은 있어.” 
“사람들이 죽을 거예요. 당신 때문에.” 
“내가 그렇게 두지 않아.” 
“그럼 당신이 제일 먼저 죽겠군요.” 
“안 죽어. 아까도 안 죽었잖아.” 
“그건······!” 
 
아일렌이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말했다. 
 
“그건,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그 ‘경호관’이 또 당신을 지켜줄 것 같아요?” 
“음, 지켜줄 것 같은데.”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경호관’의 경호는 ‘생명력’을 소진해요. 사용할 때마다 포인트가 감소하고, 결국에는 죽게 된다고요. 한 번은 그렇다 쳐도 두 번 세 번이나 당신을 지켜줄 사람은 없어요!” 
“뭐든 처음 한 번이 중요한 법이야.” 
“······.” 
“아일렌, 당신은 나보다 이곳에 대해 잘 알지만 사람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네.” 
 
뭔가 말하려던 아일렌이, 처음으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아마, 말은 저렇게 해도 아일렌 또한 뭔가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숨어있던 [경호관]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혁명가]를 자처하는 나를 지켰다. 
아마 그런 광경을, 아일렌은 정말 오랜만에 보았을 것이다. 
정말로, 오랜만에.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아일렌이 작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정말로 가능할 거라 생각해요?” 
“가능해. 내 실력은 충분히 봤잖아?” 
 
가능할 것이다. 
불가능해도, 내가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아일렌이 한숨처럼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은 ‘혁명가’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거야.” 
 
내 말에, 아일렌의 표정이 흔들렸다. 
 
“‘혁명가’ 없는 혁명을 만들어 보자고.” 
 
이윽고 뭔가를 결심했는지, 아일렌이 말했다. 
 
“······포지션을 모아야 해요. 혼자서는 이길 수 없는 게임이니까.” 
“그렇겠지.” 
“[경호관]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예요. [처형관]을 상대할 [투사]도 필요하고, 숨은 [처형관]들을 찾아낼 [스파이]도 있어야 해요.” 
“하나씩 모으면 돼. 그 ‘포지션’들, 당신 생각처럼 멀리 있지 않을 테니까.” 
 
나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이미 ‘혁명가 선언’이 울려 퍼졌으니, 각 포지션을 맡고 있는 존재들도 하나 둘씩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이 빌어먹을 게임에서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를, 스스로 가늠하고 있겠지. 
 
“그리고 벌써 하나는 모은 것 같은데.”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의원실의 문이 삐거덕거리며 열렸다. 장하영이 눈을 빼꼼 내민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저, 아일렌······.” 
“뭐야?” 
“누가 꼭 좀 들여보내달라고 해서······.” 
“지금 바쁘다고 했잖아! 돌려 보내.” 
“그게, 좀······.” 
“왜?” 
“······자기가 [경호관]이라고 주장하는 인간이 왔거든.” 
 
깜짝 놀란 아일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장하영의 뒤쪽에서 건장한 체형의 중년인 하나가 나타났다. 
 
“당신······ 정말 ‘혁명가’인가?” 
 
놀랍게도,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얼굴이었다. 
 
 
 
 
 
< Episode 38. 가짜 혁명가 (2) > 끝

< Episode 38. 가짜 혁명가 (3) >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홀쭉한 외모의 중년인이었다. 듬성듬성 새치가 보이는 머리에 땟국물이 묻은 앞치마. 면도를 한 뺨에 나 있는 희미한 흉터가 사내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강함’이었다. 
아무리 봐도 ‘경호’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아일렌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사내를 보더니, 털썩 자리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당신이 [경호관]이라고?” 
“일단은 그래.” 
“······진짜로?” 
“안 그래도 이런 반응을 보일까 봐 걱정했어.” 
 
중년인의 말에, 아일렌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아일렌을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내가 말했잖아. 근처에 있을 거라고.”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은······.” 
 
[경호관]은 아까 내게 안주를 만들어 주었던 선술집의 주인장이었다. 
물론, 나는 처음부터 그가 경호관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멸살법’에 나왔던 [경호관]의 외양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나를 구하리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몰랐다면 애초에 ‘혁명가 선언’을 하지 않았겠지. 
아일렌이 물었다. 
 
“왜 지금까지는 가만히 있었죠? 당신이 정말 [경호관]이었다면, 몇 번이나 사람들을 구해줄 기회가 있었잖아요.” 
“포인트를 아껴야 했으니까. 너도 알겠지만, 경호관이 살릴 수 있는 횟수는 하루에 한 번씩 총 다섯 번뿐이야.” 
“그건 그렇지만, 다섯 번을 전부 쓰지만 않으면······.” 
“내가 만약 다른 사람을 살렸다면.” 
 
주인장은 내 쪽을 흘끗 보며 말을 이었다. 
 
“저 ‘혁명가’는 죽었을 거야.” 
“꼭 혁명가가 나타날 줄 알았다는 말투군요.” 
“늘 기다리고 있었지. 모두가 아일렌 당신처럼 포기하고 있었던 건 아니야.” 
“······지금 말 다했어요?” 
 
분위기가 격앙되려는 듯하자, 장하영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자자, 아일렌. 주인장. 그만들 싸우고 앞으로의 일들에 관해 생각하자고. [경호관]이 제 발로 나타났으면 우리 입장에서는 좋은 거잖아?” 
 
나는 그 능숙한 화제 전환 솜씨에 내심 감탄했다. 장하영은 ‘멸살법’ 안에서 손에 꼽을 만큼 눈치가 비상한 인물이다. 여기서야 웅크렸던 욕구가 폭주해서 ‘욕쟁이’로 불리고 있지만, 본래 이 장하영은 누구보다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탁월한 중재가였다. 
장하영은 헛기침을 하는 주인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여간, 나도 놀랐어 주인장. 요리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솔직히 우리한테 귀띔해줄 수도 있었잖아?” 
“좋은 요리사는 비밀이 많은 법이지. 그러고 보니 혁명가, 아까 내 요리는 어땠나?” 
“안타깝지만 먹어보질 못했어. 누가 다 먹어버려서 말이지.” 
 
장하영이 실눈을 뜬 채 나를 노려보자, 주인장이 킬킬 웃었다. 간신히 나아지려는 분위기에 다시 찬물을 끼얹은 것은 아일렌이었다. 
 
“벌써 동료가 된 것처럼 희희낙락하고 있어서 하는 말인데······ 알고 있겠죠? 이미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어요.” 
 
장하영이 탁월한 중재가라면, 아일렌은 노련한 책사다. ‘드러누운 드래곤’급은 아니라 해도, 그녀는 ‘혁명가’가 반드시 의심해야 할 지점을 짚어준다. 
 
“알고 있어.” 
 
실제로 그녀의 조언은 ‘멸살법’에 등장하는 ‘혁명가 게임’의 한 구절을 가리키고 있었다. 
 
「같은 편을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적’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아군이고 적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사실, 대부분의 ‘혁명가’는 이 지점을 돌파하지 못해 자멸하고 마니까. 
내 시선을 받은 주인장이 씁쓸하게 웃었다. 
 
“혹시 나를 의심하는 건가? 내가 공작의 끄나풀일 거라고?” 
 
나는 말없이 웃었다. 
주인장이 경호관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 이 제스처는 내가 아닌 다른 일행들을 위해서였다. 
 
“우선 통성명부터 할까?” 
“마르크라고 하네. 그쪽은?” 
“난 유중혁이다.” 
“유중혁? 흠.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그러고 보니 ‘지구’의 시나리오 영상이 퍼졌다. 그러니 마계에서도 ‘지구’의 유중혁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손을 좀 써둬야겠는데. 마침 가진 설화 파편도 몇 개 있고······.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난 공작의 끄나풀이 아닐세. 이렇게 말해도 솔직히 바로 믿기는 힘들겠지만 말이야.” 
“아니, 믿어.” 
“믿는다고?” 
“그래. 당신은 [경호관]이 맞아.” 
 
내 말에 마르크가 바보처럼 눈을 끔뻑였다. 
 
“······뭔진 모르겠지만, 내가 시험을 통과한 모양이군?” 
“맞아. ‘혁명군’에 들어온 것을 축하해.” 
 
그 급작스런 결론에 아일렌이 깜짝 놀라 외쳤다. 
 
“아니, 잠깐만요!” 
“이 자는 내가 ‘혁명가 선언’을 하고 난 뒤 바로 찾아왔어. 공작의 끄나풀이었다면 이 정도로 빠르게 대응하진 못했을 거야. 마지막 ‘혁명가 시나리오’는 무려 30년 전이었으니까.” 
 
내 빠른 해명에 아일렌이 멈칫하더니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충분한 근거는 아닌 거 같은데요.” 
“그렇긴 해.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이 [경호관]이라는 걸 확신해.” 
“어떻게요?” 
“당신이 린드버그의 마도공학자라는 걸 확신하듯이.” 
“그러고 보니 당신, 어떻게 그걸······.” 
“그리고 저기 있는 ‘아슬란’의 본명이 ‘장하영’이고, ‘지구’ 출신이라는 것을 확신하듯이.” 
“야! 남의 프라이버시를······!” 
 
씩씩대는 장하영의 표정을 확인한 아일렌의 표정이 변했다. 
 
“당신······ 혹시 특성 정보를 엿볼 수 있는 건가요?” 
“필요한 만큼은.” 
 
실제로 나는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해 이미 마르크의 특성 정보를 모두 확인한 상태였다. 
아일렌은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지만 어렵사리 납득한 듯했다. 
 
“희한한 스킬을 가지고 있군요. 지금까지 포지션 정보까지 엿볼 수 있는 탐지 스킬 보유자는 없었는데.” 
“내 스킬은 특별하거든.” 
“······당신에게 그런 스킬이 있다면 다행이군요. 그래도 아주 희망이 없는 상황은 아닌 듯하니.” 
“매우 희망적이라고 해야지.” 
 
아일렌은 반쯤 체념한 기색으로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이걸로 ‘가짜 혁명군’ 결성이군요.” 
“······가짜 혁명군? 무슨 소리지?” 
 
그러고 보니 지금 내 상황은 좀 복잡했다. 
일단은 설명을 좀 해줘야겠군. 
그래도 이 넷은, 내가 이번 시나리오의 끝까지 데리고 갈 사람들이니까. 
나는 약간의 시간을 들여, 내가 진짜 혁명가는 아니지만 반드시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는 인재라는 것을 매우 설득력 있는 언어로 전달했다. 
 
“뭐어어어어?!” 
“······‘혁명가’가 아니라고?” 
 
그리고 두 사람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명을 질렀다. 
하긴, 생각해 보니 나는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발표할 때마다 좋은 평가를 못 들었었지. 나 때문에 포인트를 소진해버린 마르크는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미쳤군. 가짜 혁명가에, 불쌍한 경호관에, 공민회 의장에, 덜떨어진 꼬마애 하나······ 이게 애들 장난인줄 아나?” 
“덜떨어진 꼬마애? 이봐, 말이 심하잖아 마르크!” 
“그만 싸워. 어차피 상황은 터졌고, 우리가 고민해야 할 건 이 다음이야.” 
“그래서, 무슨 계획이라도 있나 가짜 혁명가 양반?” 
“몇 가지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어.” 
 
나는 일행들에게 간단히 내 계획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마뜩잖은 얼굴로 내 말을 듣던 일행들도, 이야기를 할 수록 진지한 기색이 되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어느새 가짜 혁명군의 일원이 된 마르크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지금 필요한 조치들이긴 하군.” 
“참여할 건가?” 
“어차피 나한텐 선택권이 없어. 어떤 것부터 먼저 할 거지?” 
“내 얼굴부터 바꿔야 돼.” 
 
나는 품속에 넣어 두었던 설화 파편, 「복상사한 카사노바의 얼굴 가죽」을 꺼내며 씩 웃었다. 마르크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 그런 건 계획에 없었잖······.” 
“원래 제일 중요한 건 계획에 없는 법이거든.” 
“왜 하필 얼굴인가?” 
“기왕 혁명가를 하려면 잘생긴 게 좋지 않겠어? 약간만 손을 좀 보자고.” 
 
 
* 
 
 
같은 시각, 악마 백작 시로크와 한은 공민 거리로 내려가고 있었다. 
시로크는 거리를 걷는 내내 한의 눈치를 보다가 말을 걸었다. 
 
“이봐, 한.” 
“뭐냐.” 
 
시로크는 그 까칠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무려 ‘아스모데우스’와 끈이 닿은 존재. 기왕 걸음을 함께하게 된 거, 약간 친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보니까 원래 ‘악마종’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디 출신이었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의외로 한은 순순히 대답했다. 
 
“지구라는 곳이다.” 
“지구! 아, 나도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군.” 
“그렇겠지. 요즘 유명한 행성이니까.” 
“아스모데우스님의 가호까지 받을 정도라면, 너도 거기서 한가락 했던 모양이지?” 
“한가락만 했겠어?” 
 
순간 한의 표정에 떠오른 자부심에 시로크는 조금 놀랐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원래 뭐였나? 소드마스터? 아니면 대마법사?” 
“비슷하지.” 
“뭐였는데?” 
“나는 대기업의 부장이었다.” 
“대기업? 그게 뭐지?” 
“끙······ 그걸 모르는 거냐?” 
 
한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렇게 설명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성운’과 비슷한 집단이겠지.” 
“······성운이라고!” 
“어디까지나 비유하자면 그렇단 얘기야.” 
“그럼 자네는 ‘성좌’였단 말인가?” 
“그건 아니지만, 비유하자면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 
“그런······ 자네 굉장한 존재였군.” 
 
‘기업’이라든가 ‘부장’ 같은 말이 뭔지 모르는 시로크로서는 한의 설명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한이 어떻게 아스모데우스와 연이 닿아 있는지 이해할 것 같은 심경이었다. 
 
“······저건 뭐지?” 
 
귀족가에서 공민가로 넘어가는 길목에, 거대한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있었다. 의도가 명백해 보이는 철책이었다. 시로크가 짜증난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 지금 뭐하는 거냐!” 
 
그러자 열심히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던 공민 하나가 답했다. 
 
“아, 귀족 나리.” 
“뭘 하는 거냐고 물었다!” 
“보면 모르겄소? 길을 막는 거지.” 
 
그 뻔뻔한 목소리에 시로크는 살짝 기가 질렸다. 
 
“누가 이런 짓을 시킨 거냐?” 
“의장님 명령이오. 당분간 귀족 나리들은 공민가로 넘어올 수 없소이다.” 
“무슨 헛소리냐. 의장이 무슨 권리로······ 당장 바리케이드를 치워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을 당장에 두 쪽 내버리겠다.”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그 목소리에 질겁한 공민이 흠칫 물러섰다. 하지만, 곧 공민들의 뒤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자신 있으면 그래 보시든가.” 
 
그 말을 한 공민은 다른 공민들과 달랐다. 전신에서 강력한 기세를 발출하는, 이름 모를 공민. 
시로크는 긴장하며 물러섰다. 
대부분의 공민은 귀족들보다 약하다. 
하지만, 모든 공민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 또한 엄연한 차원이동자였고, 개중에는 악마 귀족들 못지 않은 강자들도 섞여 있었다. 
 
“네놈들, 겨우 ‘혁명가’ 하나 나왔다고 이러는 거냐? 우리가 그놈을 못 죽일 것 같으냐?” 
 
지금껏 공민들이 귀족들에게 대항하지 못했던 것은, [밤]의 처형관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젯밤을 기점으로, 상황은 조금 달라졌다. 
 
“어제 보니까 못 죽이시던데.” 
 
공민들이 서로를 보며 히히덕댔다. 시로크는 분한 마음을 삭이면서도 바리케이드를 넘을 수 없었다. 당장 혼자서는, 저 많은 공민들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때, 한이 물었다. 
 
“저 녀석을, 지금 파업(罷業)을 하는 건가?” 
“파업?” 
“할 일을 안 하고 농땡이 까는 걸 말하는 거다.” 
 
갑자기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시로크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상황이지.” 
“그렇군. 이런 일은 내가 전문이니까, 내게 맡겨라.” 
 
한의 낯빛에, 이제까지와는 다른 사악함이 떠오르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자기 주제를 모르면 이런 일이 발생하는 법이지. 일단은, 공포심을 좀 심어주는 게 좋겠군.” 
 
 
* 
 
 
아일렌은 내가 [라마르크의 기린]을 통해 흡수한 설화 파편을 손봐주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성형은 쉽지 않았다. 「복상사한 카사노바의 얼굴가죽」은 그날 저녁이 될 무렵에야 무사히 내 얼굴에 안착했다. 
나는 거울을 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유중혁보단 별로지만 이정도면 괜찮은데?」 
 
하지만 시술을 끝낸 아일렌은 영 마뜩잖은 뉘앙스였다. 
 
“조금 인상이 나아진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군요. 왜 이렇게 인상이 흐릿하지······?” 
 
······내가 보기엔 잘 된 거 같은데. 
코도 살짝 높아졌고, 볼도 더 팽팽해진 것 같고······. 
아일렌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태평해도 괜찮아요? 곧 두 번째 밤이라고요. [처형관]들이 다시 올 거예요.” 
“괜찮아, 오늘 밤까지는.” 
“[경호관]의 경호는 무한정으로 가능한 게 아니에요. 알고는 있는 거죠?” 
“알아.” 
 
가능하면 경호관의 포인트를 안 쓰고 싶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두 번째 날까지는 경호관의 도움을 받아 이겨내야 한다. 그래야 세 번째 날부터 새로운 방법을 시도할 수 있으니까. 
 
“갑자기 마르크가 타깃이 될 일은 없겠죠? 경호관은 자기 목숨은 지킬 수 없는데······.” 
“아직 우리 말고는 아무도 그가 경호관인지 모르니 상관없어.” 
 
공작 쪽은 아직 방심하고 있을 것이다. 설마 정말로 ‘혁명’이 성공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하고 있겠지. 이 기회를 잘 이용해야 한다. 
 
“아일렌! 밤이 와!”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장하영이 외쳤고, 나는 아일렌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내가 타깃이 되어 불필요한 소란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혁명가다!” 
 
내 차림새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얼굴이 바뀌었는데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는 게 조금 섭섭했다. 
 
[‘두 번째 밤’이 찾아왔습니다.] 
 
나는 거리를 둘러 보았다. 아마 마르크는 미리 거리의 어딘가에 숨어서 나를 경호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 당신은 ‘경호관’의 경호를 받고 있습니다.] 
 
스스스스스. 
 
어디선가 소름 끼치는 피리 소리가 들려오며, [처형관]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했던 대로의 출현이었다. 
 
[혁 명 가 가 누 구 냐.] 
 
“나다. 어차피 날 못 죽일 텐데, 또 잘들 몰려왔구나.” 
 
그러자 [처형관]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혁 명 가 는 네 놈 이 다.] 
 
그리고 말했다. 
 
[하 지 만.] 
 
순간, 느껴지는 낌새가 이상했다. 
잠깐, 이거······. 
그럴 리가. 벌써 이 전략을 쓴다고? 
 
[오 늘 죽 는 자 는.] 
 
일제히 낫을 든 처형관이, 각자 다른 타깃을 향해 낫을 빼 들었다. 
 
[혁 명 가 가 아 니 다.] 
 
[처형관] 중 하나의 낫이 근처에 있던 장하영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 Episode 38. 가짜 혁명가 (3) > 끝

< Episode 38. 가짜 혁명가 (4) >
 
 
 
 
 
“피해!” 
 
아일렌의 외침과 함께 움직이는 처형관의 낫. 
 
「순간 사고가 가속되며 세계가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대체 어떤 놈이지?」 
 
나는 이를 악물고 장하영을 향해 달렸다. 
원작의 111회차와 시기상으로 차이가 있기는 해도, 본래의 2회차 밤에는 이런 전개가 없었다. 따로 공작의 지시를 받지 못한 [처형관]들은 이번에도 나를 죽이지 못해 우왕좌왕하다가 두 번째 밤을 날려 보내야 했다. 
 
[모 두 죽 인 다.] 
 
그런데 지금 [처형관]들의 행동은, 마치 이 게임을 오랫동안 해온 이들 같았다. 
누군가 이들에게 명령을 하달한 것이 분명했다. 
 
기이이잉! 
 
간발의 차이로 장하영을 밀쳐낸 나는 [신념의 칼날]을 전개해 처형관의 낫을 받아냈다. 
 
까가가가가각! 
 
[전투 충격으로 인해 설화 구성이 불완전해집니다.] 
 
상황이 무척 안 좋다. 
나는 지금 싸워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설화 파편, 「복상사한 카사노바의 얼굴 가죽」이 미미하게 손상되었습니다.] 
 
젠장, 내 얼굴! 
 
다행히 [처형관]은 나와 싸울 생각이 없는지, 금방 타깃을 돌렸다. 
나는 가까스로 한숨을 돌렸지만, 그것이 ‘다행’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혁 명 가 는 살 려 둬 라.] 
 
“으아아아악!” 
 
처형관의 낫에 베인 공민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직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피를 흘리는 사람들만 벌써 대여섯이 넘었다. 
 
“혀, 혁명가님!”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내가 모르는 책사가 있는 건가? 아니면, 공작이 벌써 수를 쓴 건가? 김독자의 머릿속에서 ‘멸살법’의 이야기들이 빠르게 흘러갔다.」 
 
“모두 이쪽으로 모여요! 흩어지면 지켜줄 수 없습니다!” 
 
「김독자는 판단했다. 공작이 움직였을 리는 없다. 공작이 움직였다면 이 정도 선에서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제4의 벽]의 말이 맞았다. ‘공작’이 움직였다면 벌써 공단은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끄아아아악!” 
 
사람들의 피해는 줄어들지 않았다. 
곳곳에서 처형관의 낫에 당한 피해가 속출했다. 
부상자는 순식간에 열을 넘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적들이 저 많은 공민들을 죽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게임의 규칙상, [처형관]들은 하루에 한 명의 공민만을 죽일 수 있다. 
적어도 사흘까지는 그렇다. 
이를 악문 아일렌이 외쳤다. 
 
“다들 대항해요! 어차피 놈들이 ‘표식’을 쓰지만 않으면 [처형]은 사용할 수 없어요!” 
 
아일렌의 말에 몇몇 공민들이 무기를 들고 대항했으나, 상황은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다. 애초에 [처형관]의 능력치를 따라갈 수 있는 공민들은 극소수였고, 설령 대항하더라도 오래가지 못했다. 
 
“끄아아악!” 
 
처형관들이 언제 ‘표식’을 사용할지 모른다는 점이 공민들의 공포를 더욱 가중시켰다. 놈들은 언제든 반드시 ‘표식’을 사용할 것이고, 공민들 중 누군가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게다가 경호관은 나를 경호하는 중이기에 그들을 지켜줄 수 없었다. 
 
“도, 도망가!” 
 
결국 대열은 무너졌고, 공민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안 돼! 가지마!” 
 
아일렌이 다급히 외쳤으나, 공포심에 먹힌 공민들의 귓가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부상을 당한 공민들이 신음을 토했고, 허공을 향해 알 수 없는 욕설을 갈기는 이들도 보였다. 
 
「그리고 김독자는 조용히 분노했다.」 
 
이런 짓을 한 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누구든······. 
 
“살려, 살려 주세요······.” 
 
상처를 입은 공민들이 나를 향해 기어왔다. 
상세가 좋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 중 일부는 운이 나쁠 경우 [밤]이 끝난 후 죽게 될 것이다. 
달아난 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 [밤]은, 지금껏 찾아온 공단의 어떤 밤보다 끔찍한 밤으로 기억될 것이다. 
 
「여기서 더 피해가 커지면, 놈들의 의도대로 된다.」 
 
공민들은 더이상 혁명을 도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공단은 다시 공작의 명령에만 따를 것이고, 아일렌의 공민회는 고립되겠지. 
그렇게 둘 수는 없다. 
그러니, 나는 다른 수(手)를 둬야 한다. 
짧게 숨을 들이켠 내가 아일렌을 부르려는 순간. 
 
“이쪽이다! 나를 죽여라!” 
 
건물 뒤편에 숨어있던 누군가가 그렇게 외쳤다. 
마르크였다. 
 
“여기다! 내가 경호관이다!” 
 
사색이 된 장하영이 함께 외쳤다. 
 
“망할! 뭐하는 거야 주인장!” 
 
성급한 판단이었고, 올바르지만 잘못된 판단이었다. 
 
“내가 경호관이다! 나를 죽여라!” 
 
아일렌과 장하영이 나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이미 마르크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처형관]들도 함께 달리고 있었다. 
 
[경 호 관.] 
 
마르크의 도발은 잘 먹혀들었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처형관]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으니까. 
 
[경 호 관 을 죽 여 라.] 
 
나는 [책갈피]를 발동해 [바람의 길]로 녀석들을 밀쳐내며, 빠르게 마르크를 향해 달려갔다. 창백해진 마르크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마르크 제비어 
전용 특성 : 차원이동자(영웅), 퇴역한 S급 용병(희귀), 일류 요리사(희귀) 
배후성 : 없음 
전용 스킬 : [요리 Lv.9], [재료 다듬기 Lv.8], [낡은 정의 Lv.4], [소드 댄스 Lv.9], [(비공개 스킬) Lv.1]······. 
 
* 해당 화신은 시나리오에서 특수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 시나리오 패널티로 스킬 일부가 비공개 처리됩니다. 
 
+ 
 
사실 아일렌에게 말했던 것과는 달리, 내 [등장인물 일람]으로도 시나리오의 ‘포지션’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가 특수한 포지션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포지션으로 말미암아 어떤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한순간의 꿈이었군······.” 
 
게인츠 행성의 차원이동자, 마르크 제비어. 
퇴역 용병으로 마계에 와서 요리사가 된 사내. 
시나리오에 존재하는 모든 인물들에게는 그 이유가 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낫을 보며, 마르크가 나를 향해 웃었다. 
 
“꼭 성공하길 바라네, 혁명가.” 
 
나는 그의 삶에 대해 제대로 아는 바가 없다. 
그는 ‘멸살법’에서 무수히 나고 죽는 일개 조연에 불과하니까. 
 
[세이스비츠의 ‘처형관’이 ‘마르크 제비어’에게 죽음의 표식을 남겼습니다.] 
[‘마르크 제비어’가 ‘밤’의 희생양으로 지목됩니다.] 
 
무려 3149편에 달하는 ‘멸살법’. 
어떤 사람들은 아마 그 이야기를 길다고 생각할 것이다. 
길고, 지루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김독자에게, 3149편은 짧았다.」 
 
나는 언제나 생각했다. 
‘멸살법’이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많은 편수를 읽었어도, 나는 여전히 ‘멸살법’이 궁금했으니까. 
 
“걱정 마. 당신은 안 죽어.” 
 
그러니 나는, 이제부터 내가 못 읽은 부분을 읽을 것이다. 
 
“비키게! 내가 죽지 않으면······!” 
 
마르크가 당혹감 어린 얼굴로 외쳤다. 
 
“왜 다들 죽지 못해서 안달이야? 아무도 죽지 않아. 적어도 내 ‘설화’에서는.” 
 
나는 다가오는 [처형관]들을 막아서며, 스킬을 발동했다.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책갈피’의 숙련도가 증가하여 새로운 슬롯이 활성화되었습니다.] 
 
“6번 슬롯에 ‘혁명의 기사 마르크 제비어’를 넣겠다.” 
 
[등장인물 ‘마르크 제비어’가 6번 책갈피에 등록되었습니다.] 
[6번 책갈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비공개 스킬 Lv.1」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질끈 눈을 감는 마르크의 목을 향해 꽂히는 처형관의 낫. 
 
[당신은 일시적으로 ‘경호관’의 직위를 획득하였습니다!] 
 
하지만, 내쪽이 조금 더 빨랐다. 
 
[누군가가 자신의 생명력을 사용해 ‘마르크 제비어’를 경호합니다.] 
 
까드드드드드득! 
 
마르크의 목까지 정확히 한 뼘을 남겨둔 자리에서, [처형관]의 낫들이 삐걱거리며 멈춰서고 있었다. 마치 그물에라도 걸린 것처럼 멈춰선 낫들. 그 광경의 의미를 아는 마르크가 눈을 부릅 떴다. 
 
[경호가 성공하여 죽음의 표식이 해제되었습니다!] 
 
물론, 경악한 것은 마르크만이 아니었다. 
 
[경 호 관 이 또 있 다 고?] 
 
불신 가득한 목소리. [처형관]들이 하나 둘 어둠 속으로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목적과는 달리 아무도 죽이지 못하고 사라지는 처형관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떻게 잘 넘긴 듯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자, 살아남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찢어질 듯한 눈으로 나를 보는 장하영과 아일렌. 
표정들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오늘 밤에는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 
 
 
예상대로 장하영과 마르크는 쉬지도 않고 나를 들들 볶았다. 
 
“너 뭔데 진짜?” 
“대체 자네는 포지션이 뭔가? 실은 [경호관]이었던 건가?” 
 
공민들을 돌보러 간 아일렌까지 있었다면 더 괴로웠겠지. 
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한숨처럼 말했다. 
 
“말했잖아. 난 ‘가짜 혁명가’라고. 그러니 ‘가짜 경호관’도 될 수 있겠지.” 
“그걸로 지금 설명이 될 거라고······!” 
“그냥 넘어가줘. 자세한 걸 말해주면 밑천이 다 드러나잖아. 이런 시국에 함부로 정보를 공개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당신들이 더 잘 알 텐데?” 
“······.” 
“내가 당신들한테 정보를 말해준다고 쳐. 만약 당신들 중 누가 납치라도 당해서 공작에게 내 정보를 술술 불어버리면, 이 혁명은 어떻게 끝날 거라고 생각해?” 
 
사실 내 말은 중후반 회차의 유중혁이 설명이 귀찮을 때 자주 하는 변명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실제로 유중혁이니까 이렇게 말해도 별 상관 없겠지. 
 
“나는 그냥 유중혁이야. 그렇게만 기억해 둬.” 
 
「김독자는 생각했다. 자꾸 말하다 보니 정말로 유중혁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시끄러워. 
 
「존댓 말 하 는 김독 자 가 그립 다.」 
 
내가 [제4의 벽]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두 사람은 질렸다는 눈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정말 곤란한 작자로군.” 
 
지금쯤 지구에 있는 유중혁의 귓가에도 메시지가 들어가고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짐작컨대, 이런 메시지가 아닐까? 
 
[73번째 마계에서 당신에 대한 설화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똑똑한 녀석이라면 적당히 무슨 일인지 눈치 채겠지만, 뭐 몰라도 상관은 없다. 
대충 분위기가 진정되자, 나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보다 일에 대해서 얘기하자고. 분하지만 저쪽에 지금 내 예상을 깨는 존재가 있어. 게임의 룰을 이용해서 공격해오는 녀석이 있다고.” 
“······세이스비츠의 후작들은 책략가는 아니라고 들었네. 혹시 공작이 직접 움직였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것 같지는 않아. 아무래도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아.” 
“그래도 오늘 밤은 잘 넘겼잖은가. [경호관]의 힘을 쓸 수 있는 게 두 사람이나 된다면 상황은 우리한테 더 유리한 것 같은데?” 
“마냥 그렇지도 않아. 이대로라면 내일부터 녀석들은 ‘표식’을 사용하지 않을 거야.” 
“뭐?” 
“어차피 누군가를 죽이는 게 어렵다면, 최대한 많은 사람을 다치게 만들테니까.” 
“아······!” 
 
표식을 사용하지 않으면 [밤]은 해가 뜰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오늘 밤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쳤어. 우리는 이긴 게 아니야. 진 거지.” 
 
오늘 사람들은 [처형관]의 공포를 다시금 학습했다. 
내일이 오면 사람들의 태도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사람들은 다시 [공작]을 두려워하고, 혁명을 무서워하겠지. 
그리고 적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표정이 한결 어두워진 마르크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부턴 어떻게 해야 하겠나?” 
“어떻게 할 필요는 없을 거야. 아마 저쪽에서 먼저 움직일 테니까.” 
 
나는 ‘멸살법’을 통해 무수한 ‘혁명가 게임’을 보아왔다. 
그러니 이런 식의 전개라면 다음 전개는 확실하다. 
 
“슬슬 ‘두 번째’ 포지션이 나타날 거야.” 
“두 번째?” 
“그래. [혁명가]나 [경호관], 그리고 [처형관]이 아닌 다른 포지션이.” 
 
그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아일렌이었다. 
 
“······혁명가, 누군가가 찾아왔어요.” 
 
묘하게 긴장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나는 이미 적들의 움직임이 시작되었음을 직감했다. 
 
“자신이 [스파이]라고 말하는군요.” 
 
 
 
 
 
< Episode 38. 가짜 혁명가 (4) > 끝
 
< Episode 38. 가짜 혁명가 (5) > 
 
 
 
 
 
[스파이]······. 
언젠가 ‘멸살법’에서 [스파이]를 설명한 문구를 읽은 적이 있다. 
 
「‘혁명가 게임’의 모든 포지션은 [혁명가] 또는 [독재자] 양팀에 속한다. 그런데 딱 하나, 편이 정해지지 않은 포지션이 존재하니 그것이 바로 [스파이]다.」 
 
이 ‘혁명가 게임’에서 가장 위험한 포지션이자, 가장 비겁한 포지션. 
때문에 ‘멸살법’에서는 [스파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스파이]를 손에 넣는 팀이,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다.」 
 
정보가 최우선시 되는 ‘혁명가 게임’에서, [스파이]의 위상은 대단하다. 
왜냐하면 [스파이]의 능력으로 원하는 이의 ‘포지션 정보’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 열 명의 제한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스파이]는 판 전체를 흔들 힘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지금, 내 눈앞에 자신이 [스파이]라고 주장하는 사내가 나타난 것이다. 
 
“그쪽이 ‘유중혁’인가?” 
 
나타난 사내의 외형은 마계와는 썩 어울리지 않았다. 어딘가 어중간한 느낌이 드는 외모랄까. 아니, 정확히는······ 뭐지? 왜 이렇게 기시감이 드는 얼굴이지? ‘멸살법’에서 등장했던 외양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일단 사내를 향해 대답했다. 
 
“맞아. 내가 유중혁이다.” 
 
그런데 사내의 반응이 좀 미묘했다. 
 
“······흐음. 그런가.” 
 
그 순간, 나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내 이름을 용케 알았군.” 
 
보통은 ‘당신이 혁명가인가’라고 물었어야 했다. 
그런데 저자는 처음부터 내 이름이 ‘유중혁’인지를 먼저 확인했다. 
사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하, 유명한 이름이잖은가.” 
 
말하는 것과 달리, 사내의 눈은 집요하게 내 외모를 훑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것과 대조하는 듯한 시선. 그것으로 나는 확신했다. 
 
「유중혁을 알고 있는 녀석이다.」 
 
빠르게 ‘멸살법’의 원작을 떠올렸으나, 마땅히 짐작 가는 대상은 없었다. 
애초에 유중혁은 회귀자고, 공식적으로는 마계에 진출하기 전이었다. 
그러니 이곳에 유중혁을 제대로 알고 있는 녀석이 있을 리 없었다. 
관찰력 좋은 이라면 ‘지구 시나리오’를 보고 유중혁을 알아봤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사실 크지 않다. 
내 미덥잖은 반응 때문인지 장하영과 아일렌, 그리고 마르크는 긴장한 눈으로 나와 사내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아마 그들도 본능적으로 뭔가를 느낀 것일 테지. 
나는 일단 상대의 정체를 알아보기로 했다. 
 
“이름이 뭐지?” 
“아우렐리우스라고 하네.” 
“······아우렐리우스?” 
 
나는 잠깐 멈칫했다. 그 이름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멸살법’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특이한 이름이군.” 
“그렇게들 말하지.” 
“그래서 당신이 [스파이]라고?” 
“그렇다네.” 
 
[전용 스킬, ‘거짓 간파 Lv.3’을 발동합니다!] 
[‘혁명가 시나리오’ 지역에서는 ‘거짓 간파’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역시, 이 스킬은 안 통하는군. 
예상은 했다. 
111회차의 유중혁도 이 스킬이 안 먹힌다는 걸 알고 좌절하는 장면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혹시 몰라서 써봤는데, 역시나인 모양이다. 
하긴, [거짓 간파]의 사용이 자유롭다면 이 시나리오의 난이도는 무척 쉬웠겠지. 
하지만 나한테는 [거짓 간파]만 있는 게 아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물론 [등장인물 일람]을 쓴다고 해도 상대의 명확한 포지션은 분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상대가 ‘특수한 포지션’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었다. 
 
[해당 인물의 정보는 ‘등장인물 일람’으로 열람할 수 없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뭐? 
나는 순간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해당 인물에 대한 정보가 업데이트 중입니다.] 
[다음 업데이트에 해당 인물의 인물 정보가 추가됩니다.] 
 
처음 들어보는 메시지는 아니었지만, 여기서 들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였다. 내 상황을 모르는 사내가 물었다. 
 
“음? 왜 그러지?” 
 
[등장인물 일람]으로도 읽을 수 없는 인물. 
이 자는 ‘멸살법’의 원작에 기여하지 않았던 사내라는 뜻이다. 
즉, 내가 만든 변수 때문에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것. 
하지만 그럴 수가 있나? 
여긴 지구도 아니고 마계인데······. 
내가 계속 뜸을 들이고 있자 마르크가 물었다. 
 
“우리 편이 되러 온 거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그게 무슨 말이요? 
“난 자네들을 살리러 왔네. 이대로라면 ‘혁명’이 망할 게 불 보듯 뻔해서 말이지.” 
“······아직 밥도 안 지었는데 재부터 뿌리러 왔소?” 
“농담이 아닐세. 자네들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아. 밖에는 나가 봤는지 모르겠군.” 
 
확실히 아까부터 바깥이 시끄러웠다. 의원실의 문을 두들기는 소리도 들렸다. 우리는 잠시 서로를 돌아본 후 곧장 밖으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사람들이 웅성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혁명가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무수한 시선들이 동시에 내게 꽂혔다. 
몰려든 일백에 가까운 군중들. 개중 몇몇이 과장된 목소리로 나를 향해 소리쳤다. 
 
“네놈 때문이야! 너만 아니었더라도!” 
“내 아내가 다쳤다고!” 
 
심지어 누군가는 돌을 던지기도 했다. 
솔직히 나는 조금 놀랐다. 
피해가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과격하게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차라리 [밤]이 사흘에 한 번씩만 올 때가 나았다!” 
 
본래 ‘혁명가 시나리오’가 발동하기 전에 [밤]은 사흘에 한 번씩 오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이틀 연속으로 [밤]이 발동했다. 그러니 사람들의 두려움도 한층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장하영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런 미친······ 뭔 개소리야 미친놈들아! 그렇게 한심하게 굴 거야? 사흘에 한 명씩 뒈져 가면서 생을 연명하는 건 괜찮다는 거냐고!” 
 
몇몇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찔끔 물러섰다. 장하영이 계속해서 외쳤다. 
 
“그딴 식으로 살 거면 차라리 [공단] 밖으로 꺼져!” 
“꼬, 꼬맹이 네놈이 뭘 안다고 큰 소리냐! 바깥이 어떤 곳인지 알기나 하는 거냐!” 
 
겁에 질린 목소리들. 이곳의 모두는 잘 알고 있었다. 
 
「[공민]들은 모두 [공단]의 시나리오에 소속된 존재들. 그들은 이곳을 빠져나갈 시 시나리오 지역 이탈로 [추방자 패널티]를 받게 된다.」 
 
추방자 패널티. 
그게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이 마계에 없다. 
그러니, 사람들은 차라리 사흘에 한 번씩 죽음의 룰렛을 돌리는 편을 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혁명가’가 등장한 이후 룰렛의 간격은 사흘에서 하루로 줄어들었다. 
 
“이, 이제 매일 이런 [밤]을 겪어야 하는 겁니까?”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앞으로 어쩔 거냐고!” 
 
공포에 질린 목소리들. 
아일렌을 비롯한 의원들이 움직임을 제지했지만, 군중들의 움직임은 더욱 거세어질 뿐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아우렐리우스가 비열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겠나?” 
 
공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혁명가]는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다. 
나는 쓰게 웃었다. 
 
“당신은 [공작] 쪽의 인물이로군.” 
“그건 중요하지 않네. 중요한 건 자네의 선택이지.” 
“그래서, 뭘 원하는 거지?” 
“공작에게 항복하게. 그럼 자넬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살 수 있어. 어차피 이대로라면 혁명은 실패할 거야.” 
“나보고 희생하라는 건가?” 
“그런 말은 아닐세. 자네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주지.” 
“어떻게?” 
“자네가 정말 유중혁이라면, 내가 모시는 분께서 자네를 지켜줄 걸세.” 
“공작은 날 죽이려 할 텐데?” 
“내가 모시는 분은 세이스비츠 공작과는 비교도 안 되는 분이야.” 
 
세이스비츠 공작과는 비교도 안 되는 존재라. 
꽤 호기심이 생기는 제안이다. 
내가 유중혁만 아니었더라면, 잠깐 생각해 봤을 수도 있겠다. 
 
“당연히 거절이다.” 
“그렇군. 자네는 후회하게 될 거야.” 
 
다음 순간, 아우렐리우스의 신형은 곁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군중들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저놈을 [공작]에게 바치자!” 
“[공작] 께서 저놈을 데려 온다면 ‘시나리오’를 끝내겠다고 말씀하셨다!” 
“더 이상 [밤]은 오지 않을 것이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들불이 번지듯 일어나는 목소리들. 
아주 흥미롭다. 
실제로 나는 언젠가 이와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아마, ‘미노 소프트’ 노사 협상 때였던 것 같다. 
 
“다음 [밤]이 오면 모든 게 끝장이다! 그 전에 혁명가를 잡아야 해!” 
 
그 압도적인 선동력에 군중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겁에 질려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적의로 물들었고, 그것은 나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 
 
“누, 누가 저 놈 좀 잡아봐······!” 
 
나는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오히려 군중들의 앞으로 나섰다. 
내가 두려움 없이 걸어나오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군중들이었다. 
나와 닿지 않기 위해 물러선 사람들로 인해, 내 주변은 마치 모세의 파도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처형관]이 그렇게 무서워?” 
 
나는 한 걸음을 더 내딛으며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았다. 그러자 [신념의 칼날]이 거센 진동을 일으키며 새하얀 백광을 터트렸다. 마력이 담긴 내 목소리가, 군중들 속에 찬물처럼 끼얹어졌다. 그 마력파에 놀란 군중들 몇이 엉덩방아를 찧었고, 어떤 사람들은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들을 향해 나는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잊었나 본데, 지금은 [밤]이 아니야.” 
 
나는 허공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골드 드래곤의 심장에서 토해진 [백청강기]의 마력 파동이 검은 하늘을 백청의 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내 갑작스런 행동에 겁에 질린 사람들이 외쳤다. 
 
“무, 무슨······!” 
“놈이 사람을 죽이려 한다!” 
“우아아아악! 혁명가가 공민을 죽인다!” 
 
놀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아일렌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소리를 등한시 하고 군중의 중심을 가르며 달렸다. 
그리고, 군중들 중 하나를 향해 지체없이 칼을 휘둘렀다. 
 
“우선 하나.” 
 
콰악! 
 
방금 전 군중들 속에서 선동을 일삼던 사내 중의 하나였다. 무참히 심장이 꿰뚫린 사내는,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하고 부릅 뜬 눈으로 나를 보더니 절명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활성화됩니다!] 
 
손 끝에 깃드는 살행의 감각. 
명백하게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움직임은 간만이었다. 
‘불살의 왕’을 유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절제해 온 버릇이 배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오늘만큼은,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마치, 정말로 유중혁이 된 것처럼. 
 
“그리고 둘.” 
 
철저한 사살을 위해 움직인 칼날이 피를 머금으며 귀기를 토했다. 
그리고 두 번째 사내의 목이 날아갔다. 
 
푸슈슈슛! 
 
피가 거세게 튀기며 옷의 앞섶이 젖었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표정이 보였다. 
나는 이어서 검을 움직여, 마지막 사내의 등에 검을 꽂았다. 
 
“마지막으로 셋.” 
 
그렇게 순식간에 세 명을 죽인 후,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명과 절규, 비탄에 빠진 공민가의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공민들만이 아니었다. 
아일렌도, 장하영도, 마르크도. 
내가 무슨 짓을 벌인지 이해하지 못해 패닉에 빠진 얼굴들이었다. 
 
혁명가가 평범한 [공민]을 죽였다. 
 
어떤 말을 해도, 납득할 설명은 불가했다. 
하지만, 애초에 내가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혁명가 시나리오’에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갑자기 들려온 메시지에 사람들이 동시에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이어서 연속으로 떠오르는 메시지. 
 
[누군가에 의해 ‘처형관’이 사망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처형관’이 사망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처형관’이 사망했습니다.] 
. 
. 
. 
[현재 남은 처형관의 숫자 : 7] 
 
그 메시지를 확인한 사람들의 안색이 변하고 있었다. 
 
죽은 사람의 숫자는 총 셋. 
그리고, 죽은 처형관의 숫자도 셋. 
 
떨리는 눈으로 나를 보던 사람들은, 이제 시체들에게서 비명을 지르며 물러서고 있었다. 
마치, 끔찍한 것이라도 보듯이. 
 
“으, 으아아아악!” 
“처, 처형관? 여기에 숨어있었다고?” 
“애런이 처형관이었어! 맙소사!” 
 
[공민]들 중 [처형관]이 숨어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배신감 속에서, 군중들은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처형관이 죽었다. 
무적인 줄 알았던 처형관이, 평범한 사람처럼 죽었다.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이야기. 
그 이야기 앞에서,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고무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이 품 속에서 칼을 뽑았다. 
그의 눈은, 이제껏 없던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개, 개새끼들! 잘 죽었다 이 개새끼들아!” 
 
방금 전까지 나를 위협하던 사람들이, 죽은 [처형관]의 시체를 짓밟고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아까의 몇 배나 되는 열기로 들끓는 군중들. 모두 [처형관]에게 뭔가를 잃은 사람들이었다. 비참한 복수였지만,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는 그런 군중 사이를 유유히 가로질렀다. 
그리고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려는 사내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커어억!” 
“사람들 선동하는 솜씨는 여전하시네요.” 
 
달아나려던 사내가 내 손아귀 속에서 발버둥쳤다.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한명오 부장?” 
 
 
 
 
 
< Episode 38. 가짜 혁명가 (5) > 끝 

< Episode 39. 정체불명의 벽 (1) >
 
 
 
 
 
Episode 39. 정체불명의 벽 
 
 
나는 아일렌과 마르크, 그리고 장하영에게 바깥의 정리를 맡겨둔 채 기절한 한명오를 질질 끌고 의원실로 돌아왔다. 
솔직히 말해서 뜻밖이었다. 
그 ‘한명오’가 아직까지 살아 있을 줄이야. 
 
한명오 부장. 
 
메인 시나리오 3번에 채 도달하기 전, 내게서 어둠 파수꾼의 막타를 빼앗으려다 마왕 아스모데우스의 저주를 받았던 인물. 
충무로에 진입하기 전 행방불명되어 당연히 죽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다른 곳도 아닌 ‘마계’에서 이 남자를 만날 줄은 몰랐다. 
나는 한명오를 의원실의 의자 위에 포박했다. 포박에는 아일렌에게 빌린 설화 억제 구속구를 사용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부장도 그간 많이 늙었군.」 
 
한명오의 얼굴에는 자잘한 주름들이 늘어 있었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까맣게 변색된 피부. 주름은 그렇다치고, 피부는 아마 종변이(種變異)의 흔적이겠지. 오랫동안 들여다볼수록 예전의 얼굴이 조금씩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인간 시절의 흔적이 상당수 사라진 후라, 자세히 보지 않고서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유상아. 이길영. 그리고 내 어머니와 일진 송민우······. 
 
모두 지금껏 내가 [등장인물 일람]으로는 정보를 확인할 수 없던 인물들. 
모두 시나리오 시작 직전, 혹은 그 이전부터 나와 관계가 있던 인물들이었다. 한명오 또한 그와 같았다. 나로 인해 이 세계를 살아가게 되었기에 본래의 [등장인물 일람]으로는 정보를 읽을 수 없는 인물. 
 
“깨 있는 거 다 아니까 일어나시죠.” 
“으으······ 이놈······.” 
 
나는 한명오······ 그러니까 스파이, 아니 자칭 ‘아우렐리우스’를 향해 물었다. 
 
“아우렐리우스라. 본인이 직접 지었습니까?” 
“······!” 
 
눈을 부릅 뜬 한명오를 보자, 확신의 모호했던 지점까지 충만하게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아우렐리우스. 내가 이 자를 ‘한명오’라고 확신한 결정적 단서가 그것이었다. 
 
「웹소서얼? 이보게 김독자 씨. 그딴 거 읽을 시간이 어디 있나?」 
 
아직 ‘미노 소프트’를 다니던 시절, 웹 소설을 읽는다는 걸 들킨 후 내가 들었던 말. 
 
「기왕 책을 읽을 거면 이런 걸 읽어야지. 스펙 쌓을 생각 없으면 책이라도 좋은 걸 읽어.」 
 
그 말을 하던 한명오의 손에는, 로마의 현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쓴 『명상록』이 쥐어져 있었다. 앞부분만 살짝 봤는지 초반 몇 페이지만 까맣게 변색 되어있던 책······. 
 
“평소에 읽지도 않는 『명상록』만 들고 다니시더니, 그 허세가 아직까지 남아 계시네요.” 
“네, 네놈은 대체 누구냐!” 
 
발버둥 치는 한명오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미리 얼굴을 바꿔 놓길 잘했다. 
아니었으면, 함정에 빠지는 건 내 쪽이었을지도 모르지. 
나는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누구일 것 같습니까?” 
 
그 순간, 한명오의 눈빛에 뭔가가 스쳐갔다. 
 
“서, 설마······!” 
 
역시, 한명오는 한명오다. 
낙하산 부장이라도 회사에서 살아남으려면 웬만큼의 눈칫밥은 있어야 하니까. 서서히 커진 한명오의 입이 마침내 벌어지려는 순간, 내가 조용히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쉿.” 
“읍. 으읍. 으으읍!” 
“그걸 말하면 당신 여기서 죽어요. 그러니까 혼자만 생각하세요. 알겠습니까?” 
 
혹시나 다른 초월적 존재가 듣고 있을 것을 우려한 판단이었다. 
이곳에 도깨비들의 채널은 없다. 하지만 채널이 없다고 해서 다른 존재를 관음할 방법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제4의 벽’이 말합니다.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멍청한 김독자를 바라봅니다.’] 
 
······제법이네. 너 이런 것도 알려줄 수 있었냐? 
 
「에 헴.」 
 
격노와 정욕의 마신······. 
성좌들처럼 마왕들 또한 자신의 수식언을 가지고 있다. 어쨌든 그들도 ‘타락한 성좌’니까. 물론 성좌들에 대한 반발심으로 쓰지 않는 녀석들도 있긴 하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격노와 정욕의 마신’은 마왕 아스모데우스의 별명이다. 보아하니 한명오는 녀석의 권속이 된 모양이다. 그것도 시야를 공유할 수 있을 정도로 고위급 권속이. 
 
“계속 훔쳐볼 거면 코인이라도 내지 그래?” 
 
허공을 향해 말을 거는 내 모습을 본 한명오의 눈이, 다시 한번 찢어질 듯 커졌다. 내가 누구에게 말을 건 것인지, 그도 눈치챈 것이다. 
츠츠츠츳, 하고 허공에서 일어나는 작은 스파크. 
이대로 이야기를 계속한다면 아스모데우스에게 내 정보가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분명 언젠가 이 ‘이야기’를 공개하긴 하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코트의 아공간에서 칼 한 자루를 꺼냈다. 
 
그것은 [사인참사검]이었다. 
 
[절대 왕좌]를 부순 후, 정말 오랜만에 꺼내 드는 검. 북두성군의 힘을 빌리면 일시적으로 성유물로 진화할 수 있는 검이었다. 
성유물에 깃든 성좌의 연(緣)을 끊을 수 있는 검. 
본래 그 힘을 발현하려면 북두성군들의 도움을 필요로 했지만, 성좌가 된 지금이라면 그들의 도움 없이도 약간은 이 검의 힘을 끌어 쓸 수 있었다. 
 
[당신의 설화에 ‘사인참사검’이 반응합니다!] 
 
“안 낼 거면 꺼져.” 
 
나는 그렇게 말하며, 한명오의 머리 위로 검을 휘둘렀다. 
가볍게 휘두른 검에 허공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튀더니 메시지가 들려왔다. 
 
[마왕 ‘아스모데우스’와 권속 간의 연결이 일시적으로 끊어집니다.] 
 
한명오는 이제 경악하는 걸 넘어서 완전히 사색이 된 얼굴이었다. 
설마, 마왕과 자신의 연을 끊을 정도의 힘이 내게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런 한명오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이곳에서 내 이름은 ‘유중혁’입니다. 알아들었으면 고개 끄덕이세요.”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한명오는, 한참이나 뭔가를 생각하더니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목숨 소중한 줄은 아는 인간이니까 제대로 판단했을 것이다. 입을 풀어주자,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던 한명오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대체, 대체 어떻게······ 분명 죽었다고 들었는데······.” 
“안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살아 있죠.” 
 
한명오는 겁에 질린 채로 물었다. 
 
“나, 나를 어쩔 셈인가?” 
“글쎄요. 생각 중입니다.” 
“사, 살려주게! 우리가 같이 보낸 세월이 결코 짧지 않지 않은가!” 
“그 긴 세월 동안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는데요.” 
“나, 나는 [스파이]야. 혁명을 도와줄 수 있어! 나는 다른 사람들의 포지션을 볼 수 있다고!” 
 
이런 상황에서 저런 말까지 하는 걸 보면, 한명오가 [스파이]인 것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실제로 ‘멸살법’의 111회차에서도 [스파이]는 등장하지 않았으니, 의외의 인물이 [스파이]로 나타난다 해도 이상한 것은 없었다. 
 
“스파이는 없어도 됩니다. 없어도 처형관은 잘 찾았으니까.” 
 
그 말에 불쌍한 한명오의 눈망울이 다시금 흔들렸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명오가 대뜸 물어왔다. 
 
“그러고 보니 자네······ 대체 어떻게 처형관을 알아본 거지?” 
 
대충 무슨 속내인지는 알 법했지만, 나는 잠깐 속아 넘어가 주기로 했다. 
 
“처형관인 줄 몰랐는데요.” 
“뭐? 그런데 어떻게 그들을······.” 
 
내 말은 사실이었다. ‘멸살법’에도 일부 처형관들의 외모 묘사가 나오기는 하지만 내가 그걸 모두 기억할 정도도 아니었고, 지나가듯 쓰인 묘사였기에 그것만으로 알아보기는 무리였다. 
나는 그들이 [처형관]이라는 걸 알고 죽인 게 아니었다. 
그저, 틈틈이 사용한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그들이 ‘특수한 포지션’이라는 것만 알아냈을 뿐. 
 
「그리고 김독자에겐 그 정보면 충분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한명오가 외쳤다. 
 
“자, 자네가 죽인 자들이 무고한 자들, 혹은 꼭 필요한 포지션일 수도 있었어! 그, 그래! 가령 [투사]라든가······!”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죠. 이런 얘기로 시간을 끌면 다른 귀족들이 구하러 올 거라 생각하시나 본데······ 그 사람들 안 와요.” 
“하, 하하. 무슨 말인가?” 
“공민들이 두려워하는 건 [처형관] 뿐입니다. 그들이 없다면 귀족들이라고 해도 공민가에 쉽게 침입할 수는 없어요.” 
 
이제 다 틀렸다고 생각했는지, 한명오의 발버둥이 심해졌다. 그는 붉어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날 죽이면 ‘마왕’의 분노를 사게 될 거다!” 
 
예전이라면 그 말이 두려웠을 것이다. 
 
“내가 ‘마왕’이 두려운 사람처럼 보입니까?” 
 
나는 성좌의 격을 끌어 올렸다. [공단]의 공작들이나 다른 마계의 마왕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미미한 수준으로. 그러나 아무리 옅어도 그것은 성좌의 격이었고, 한명오의 기를 죽이기엔 충분했다. 
파르르 떨리던 한명오의 눈빛에 마침내 체념이 깃들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뭔가?” 
 
기다렸던 질문이었다. 
어쨌든 한명오는 이곳의 악마들과 끈이 닿은 존재. 이용가치가 있다면 최대로 이용하는 편이 현명했다. 
 
“존재 맹세. 뭔지 알죠?” 
“그, 그건······.” 
“살고 싶으면 하세요. 아니면 나가서 공민들한테 맞아 뒈지시든지.” 
 
한명오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고 맹세하면 되겠나?” 
“혁명을 방해하지 않겠다.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내가 묻는 질문에 똑바로 대답하고, 전심전력으로 내게 협조하겠다.” 
“······기한은?” 
“1년으로 하죠.” 
“제길······.” 
 
이런 폭력적인 맹세를 할 때는 ‘기한’을 두는 편이 좋다. 
만약 영구적 맹세를 강요한다면 맹세의 대상이 미쳐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 맹세가 끝날 수 있다는 희망을 줘야 상대방도 더 쉽게 맹세에 동의하는 법이다. 
 
“······알겠네. 맹세하지.” 
 
한명오의 심장에서 가벼운 스파크가 튀며, 맹세가 완료되었다. 
그제야 나는 한명오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시작했다. 
 
“한명오 부장. 그동안 어떻게 살아 있었던 겁니까?” 
 
한명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충무로에서 우리와 헤어진 후 어떤 역경을 겪었고, 어떻게 굴렀고, 그래서 자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최대한 불쌍하게 말하려는 티가 역력해서 나는 중간에 말을 끊었다. 
 
“그건 됐고 중요한 얘기만 하세요.” 
“무, 무슨 얘기 말인가.” 
“그때 분명 마왕의 저주를 받았잖아요. 그런데 대체 어떻게 마왕의 권속이 된 겁니까? 아스모데우스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존재는 아니었을 텐데.” 
 
72 마왕 중 하나, 아스모데우스. 
아무리 한명오가 긴 혓바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녀석을 홀릴 만한 능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명오가 독특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마왕급의 존재들은 고위급 성좌들만큼이나 이야기에 닳고 닳은 존재들. 
겨우 대기업 계열사의 부장이나 하던 작자의 얘기가 그들이 성에 찰 리 없다.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한명오의 얼굴이 비참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내가 재촉하려는데, 한명오가 입을 열었다. 
 
“······낳았네.” 
“예?” 
“크윽······ 나, 나는······.”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뭔가를 물어보려는 순간, 한명오가 눈물을 왈칵 쏟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아이를 낳았단 말이다!” 
 
 
 
 
< Episode 39. 정체불명의 벽 (1) > 끝


< Episode 39. 정체불명의 벽 (2) >
 
 
 
 
 
안타깝게도, 한명오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하필 한명오가 아스모데우스와의 계약 내용을 일부 발설하는 바람에, 기절 패널티를 받고 말았던 것이다. 
때마침 흥미진진해지던 파트에서 끊어졌던 터라, 조금 기분이 시들해졌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어쨌거나 마왕들과 성좌들이 이쪽 세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거지.」 
 
버려진 시나리오의 땅, ‘마계’. 
오래도록 성좌들의 외면을 받아왔던 이 세계가, 다시금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있었다. 
 
―인간은 그놈들에게 이길 수 없어! 녀석들에 비하면 우린 그냥 하찮은 벌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명오는 몇 번이나 그렇게 말했다. 그새 마계에서 몇 달을 굴렀기 때문인지, 그는 악마종의 고위 귀족들과 마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 절망감이 아예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저 유중혁조차 이 ‘마계’에서 굉장히 고전했으니까. 
 
물론 그건 유중혁의 이야기고, 나는 아니다. 
 
꼬르륵. 
 
밤새 깨어 있었기 때문인지, 간만에 배가 아우성을 쳤다. 
나는 선술집으로 나가 마르크에게 간단한 요리를 부탁했다. 테이블에는 멍한 얼굴의 장하영이 앉아 있었다. 나는 조용히 녀석에게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히익!” 
“넌 매번 그런 소릴 내더라.” 
 
아니꼬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던 장하영이 소리를 질렀다. 
 
“왜! 왜! 또 뭔 시비 걸러 온 건데!” 
“왜 그렇게 시무룩해 있냐?” 
“······신경 꺼.” 
“왜, 무슨 일인데.” 
 
장하영은 내 질문에도 쉽게 대답하지 않고 자기 앞에 놓여 있던 요리를 깨작거렸다. 재촉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기에, 나는 기다렸다. 
마르크는 그런 나와 장하영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쪽으로 느끼한 윙크를 날려댔다. 잠시 후, 장하영이 입을 열었다. 
 
“왜 날 ‘혁명군’에 끼워준 거야?” 
“뭐?” 
“난 [경호관]도 [혁명가]도 아니잖아. 하다못해 아일렌처럼 공민회 의장도 아냐.” 
 
[등장인물 ‘장하영’이 ‘무기력 Lv.4’을 발동합니다.] 
[등장인물 ‘장하영’이 ‘자기혐오 Lv.10’을 발동합니다.] 
 
젠장, 시작이구만. 
잠깐 잊고 있었다. 
유중혁이 ‘회귀 우울증’으로 시달리는 녀석이라면 이 녀석은 철저한 ‘자기혐오’로 점철된 녀석이라는 걸. 
그렇게 생각하니 ‘멸살법’의 주인공들 중 제정신인 녀석이 하나도 없다 싶다. 
떨리는 작은 어깨. 그 어깨를 두들겨 주면 내 기분이야 나아질지 모르지만, 실제로 녀석이 위로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등장인물 ‘장하영’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장하영은 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어제의 사고를 수습하고 있는 아일렌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장하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밤이 또 올 거야. 그때도, 사람들을 지켜줄 수 있어?” 
“아마 무리겠지.”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라고 모든 [처형관]을 알지는 못해. 내일 밤이 되기까지 녀석들을 모두 잡는 건 무리야.” 
 
아직 내가 못 잡은 처형관은 일곱이나 된다. 
그 일곱이 마음먹고 사람들을 난도질하기 시작한다면, 내일 밤은 그야말로 피의 축제가 되겠지. 나는 장하영이 실의에 빠지기 전에 덧붙였다. 
 
“하지만 막을 방법이 없는 건 아냐. [투사]를 찾으면 되니까.” 
 
투사. 밤의 [처형관]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포지션. 
그 포지션을 찾을 수만 있다면, 분위기를 다시 이쪽으로 가져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요리를 내오던 마르크가 끼어들었다. 
 
“······안됐지만, [투사]는 아마 없을 걸세.” 
“뭐? 마르크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전대의 [투사]에게 스킬을 전승받은 이가 아무도 없거든.” 
 
게임의 다른 포지션들과는 달리, [투사]는 오직 ‘물려주기’를 통해서만 전승이 가능하다. 마르크가 말을 이었다. 
 
“전대 [혁명가]를 지키던 [투사]가 죽은 뒤, 그의 후임이 아무도 없었네.” 
 
나도 이미 아는 정보였다. 
실제로 이 [공단]에는 [투사]가 없고, 원작에서의 유중혁도 그 때문에 무척 곤혹을 치렀었다. 나는 마르크가 내온 샌드위치를 한입 깨물며 말했다. 
 
“없으면 만들면 돼. 다른 투사에게 포지션을 물려 받으면 되잖아.” 
“하지만 내가 알기로 73번째 마계에 남은 [투사]는 없네.” 
“마계에서 찾지 않을 거야.” 
“뭐?” 
 
나는 장하영을 흘끗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때가 되긴 했지. 
나는 또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장하영을 쿡 찌르며 말했다. 
 
“야, ‘벽’한테 말 걸어봐.” 
“무, 무슨 소리야?” 
“네가 갖고 있는 ‘벽’ 있잖아. 매번 네가 뭐 배우려고 할 때마다 못 배우게 막는 ‘벽’.” 
“그, 그 ‘벽’을 네가 어떻게 알아?” 
 
깜짝 놀란 장하영이 나를 향해 다그쳤다. 
 
“다 아는 방법이 있지.” 
 
나는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이들은 알 수 없지만, 장하영에겐 ‘벽’이 있다. 
정확히는, [정체불명의 벽]이라고 불리는 ‘벽’이. 
그리고 지금껏, 그 벽은 장하영의 성장을 막아왔다. 
 
“그 벽 때문에 지금까지 스킬이라든가, 뭐 아무튼 그런 거 아무것도 못 배웠지? 그래서 네가 이렇게 된 거잖아. 무기력증에, 자기혐오에······.” 
“뭐, 뭐?” 
“네가 그걸 네 ‘재능의 벽’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 근데 그건 ‘재능의 벽’이 아냐. 그건 전혀 다른 용도라고.” 
“아니, 그러니까 네가 어떻게 그걸······!” 
“아무튼 빨리 말 걸어 봐. 너 그 ‘벽’이랑 대화할 수 있잖아.” 
 
벽과 대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장하영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걱정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차피 나도, 벽이랑 말하는 건 같은 처지니까. 망설이던 장하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빨리.” 
 
잠시 후, 장하영이 스킬을 발동했다. 
 
[등장인물 ‘장하영’이 ‘정체불명의 벽 Lv.1’을 발동합니다!] 
 
장하영의 동공이 하얗게 물들었다. 
아마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 장하영의 시야는 새하얀 벽들로 둘러 싸여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새하얀 벽. 
스킬을 배우려 할 때마다 그런 벽에 가로막힌다면 정신병에 걸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장하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벽님?” 
 
장하영이 그 말을 한 순간, 놀랍게도 메시지는 나에게도 들려왔다. 
 
[‘정체불명의 벽’이 인상을 구깁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한테도 ‘벽’ 비슷한 게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잘됐다 싶었다. 
 
[‘정체불명의 벽’이 자신의 주인을 바라봅니다.]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아직 너는 자격이 없다.’] 
 
역시, 원작대로 까칠한 놈이로구만. 
각오하고는 있었다. 
 
“야, 그러지 말고 허락좀 해줘. 네가 안 도와주면 얘 죽는다고.” 
 
내 갑작스런 말에 깜짝 놀란 장하영이 나를 보았다. 
다음 순간, ‘정체불명의 벽’이 말했다.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넌 뭐냐?’]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어떻게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내가 누군진 중요한 게 아니고, 아무튼 허락 좀 해줘. 레벨 1이면 최소한의 기능은 쓸 수 있잖아? 왜 못 하게 막는 건데?” 
 
[‘정체불명의 벽’이 인상을 찌푸립니다.] 
 
츠츠츠츠츳! 
 
내 말에 화가 난 모양인지, 장하영의 주변으로 스파크가 튀기고 있었다. 성좌인 내게도 압박감을 줄 정도의 개연성. 역시 신화급 특성은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다. 
 
······이거 내 예상만큼 이야기가 쉽게 풀리진 않는데. 
 
나는 장하영에게서 한 발짝 물러났다. 
갑작스레 허공에서 터진 스파크에 마르크도 선술집의 손님들도 깜짝 놀란 얼굴들이었다. 나는 혹시 몰라 일단 그들을 대피시킨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계속 그렇게 까칠하게 나올 거야? 그래봤자 너한테 좋을 거 없어. 얘 죽으면 너도 새로운 숙주 찾기 힘들 텐데?” 
 
츠츠츠츠츳! 
 
다시 한 번 몰아치는 개연성의 스파크. 성좌도 아닌 단일 스킬의 힘으로 이만한 박력을 만들어 낸다는 것 자체가 장하영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주는 지표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나는 반드시 여기서 장하영을 각성 시켜야만 한다.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건방진 놈이군.’] 
 
장하영의 몸 주변에서 터져 나온 스파크가 점점 더 세를 불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까지 반응이 격렬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도 조금 당혹스러웠다. 자칫하면 여기서 작은 개연성 폭풍이 발생하겠다 싶은 순간.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에 불어닥치던 스파크가 한순간에 잠잠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더 커다란 스파크가 주변의 스파크를 집어삼킨 듯했다. 
 
[‘제4의 벽’이 ‘정체불명의 벽’에게 인사합니다.] 
[‘정체불명의 벽’이 깜짝 놀랍니다.]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벽’끼리 대화할 수 있는 건가? 
 
[‘제4의 벽’이 ‘정체불명의 벽’에게 반갑게 인사합니다.] 
 
장하영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 하는 게 보였다. 
분명 녀석도 이 광경을 보고 있는 것이리라. 
[제4의 벽]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친 구.」 
 
[‘정체불명의 벽’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합니다.] 
 
대체 두 벽 간에 무슨 소통이 오가고 있는 건진 알 수 없었지만, 단지 인사를 한 것만으로도 장하영 주변의 허공이 불가사의한 형태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너, 넌 뭐······!’] 
 
그러자, 내 주변의 공기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제4의 벽]이, 평소와는 다른 형태로 움직이고 있었다.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건 분명. 
 
츠츠츠츠츳!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정체불명의 벽’이 고통을 호소합니다!] 
[‘정체불명의 벽’이 고통을 호소합니다!] 
[‘정체불명의 벽’이 고통을 호소합니다!] 
 
화려한 스파크와 함께, 장하영이 머리를 감싸쥐고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어쩐지 잔뜩 주눅이 든 듯한 느낌으로, ‘정체불명의 벽’이 메시지를 띄웠다.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누, 누구 십니까?’] 
 
 
* 
 
 
장하영에게 왜 이런 ‘벽’이 있는지는, 솔직히 나도 잘 모른다. 
‘멸살법’에서도 ‘정체불명의 벽’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결말 쯤 가면 알려줄 줄 알았는데······ 물론 그렇다고 이 벽의 정체를 전혀 예상할 수 없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짐작컨대, 아마 이 ‘벽’의 존재는 차원이동 전 장하영의 직업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 이런 적은 처음인데······.” 
 
장하영은 무척 당황한 얼굴로 허공을 보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벽’이 화신 ‘장하영’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했습니다.] 
 
꽤 까다로운 절차를 밟기는 했지만, [제4의 벽]의 도움으로 장하영은 ‘정체불명의 벽’에게 인정받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장하영의 눈앞에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메시지를 보낼 존재의 수식언이나 진명을 입력하세요.] 
 
[제4의 벽] 덕분인지, 그 메시지는 나에게도 보였다. 
장하영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 이게 뭐지? 뭘 입력하라는데?” 
 
사실 내가 ‘장하영’을 꼭 데려가려는 것도, 장하영의 이 능력 때문이었다. 
‘장하영’이 가진 ‘벽’의 힘을 빌려야만, 나는 저 빌어먹을 성운들에게 대항할 힘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해주는 이름들을 입력해봐.” 
“······응.” 
 
나는 몇 명의 이름들을 불렀다. 
모두, ‘멸살법’의 원작에서 마계의 [투사]로 싸운 적이 있는 인물들의 이름이었다. 그러자 다음 순간 다른 창이 떠올랐다. 
 
[보낼 메시지를 입력하세요.] 
 
“뭐라고 쓰지?” 
“‘투사’가 되고 싶은데, 도와주세요.” 
“······그걸로 될까?” 
“모르지. 일단 해봐.” 
 
장하영은 메시지를 전송했다. 
그리고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1분, 2분. 3분······ 10분. 
장하영이 물었다. 
 
“이거 제대로 간 거 맞아?” 
“······실패한 거 같네.” 
 
하여간, 이 빌어먹을 <스타 스트림>은 뉴비에 대한 배려가 없다. 
이렇게 간절하게 도와달라고 하는데, 아무도 답장 한 통 안 보내다니. 
우리는 그 뒤로도 몇 가지 메시지를 더 써서 발송해 보았다. 
 
[저를 ‘투사’로 만들어 주실 분을 찾습니다.] 
[당신이 가진 ‘투사’의 스킬이 필요해요.] 
[제발 도와주세요.] 
 
하지만 몇 번이나 메시지를 발송해 보아도, 답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스팸 메시지라고 생각하고 대답하지 않는 모양인데······ 젠장. 
글재주가 없다 보니 무슨 메시지를 보내야 답장을 받을 수 있는지, 전혀 감도 오질 않았다. 
이럴 때 한수영 그 녀석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그 녀석이라면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을 텐데. 
눈썹을 찌푸린 채 잠시 뭔가를 고민하던 장하영이 입을 열었다. 
 
“······일단 답장을 받아야 하는 거지? 내가 원하는 대로 써봐도 돼?” 
“뭔가 생각 나는 거라도 있어?” 
 
장하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메시지를 입력했다. 
 
[15세 여중생입니다.] 
 
“야, 잠깐―” 
 
그러나 내가 만류하기도 전에, 장하영은 메시지 발송 버튼을 눌렀다. 
 
[수신 주체를 입력하지 않아 메시지가 랜덤한 성좌들에게 발송되었습니다.] 
 
심지어는, 특정인을 향한 메시지도 아니었다. 
나는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상대는 성좌들이라고! 그런 게 먹힐 턱이 있겠냐?” 
“······기다려 봐.” 
 
도대체 이 녀석은 어떻게 되먹은 건지······. 
그런데 다음 순간. 
 
[답신이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멍한 얼굴로 서로를 돌아본 후, 답신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답신을 준 성좌는 내가 아는 녀석이었다. 
 
[발신자 ― 심연의 흑염룡]. 
 
 
 
 
 
< Episode 39. 정체불명의 벽 (2) > 끝

< Episode 39. 정체불명의 벽 (3) >
 
 
 
 
 
‘심연의 흑염룡’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장하영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장하영을 보고 있다가 살짝 핀잔을 주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냐?” 
“그냥 얘 말하는 게 웃겨서.” 
 
저 드높은 대성좌를 친구처럼 말하는 장하영도 희한한 녀석이지만,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답신을 보낸 심연의 흑염룡 쪽이다. 
이 자식은 한수영한테나 신경 쓸 것이지, 왜 엉뚱한 메시지에 답장이나 하고 있는 거야? 
그러자 흑염룡을 변호하듯 장하영이 고개를 저었다. 
 
“네 생각처럼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아.” 
“뭔 헛소리야. 그새 그놈한테 넘어갔어?” 
“생각보다 말하는 것도 젠틀하고.” 
“젠틀? 젠틀한 놈이 ‘15세 여중생입니다’라는 말에 답장을 하냐?” 
 
내가 그 추잡한 맥락을 굳이 설명해줘야겠냐고 쏘아붙이려는데, 장하영이 대답했다. 
 
“내가 그냥 열다섯 살이라서 답장했을 뿐이라는데.” 
“뭐? 열다섯 살이라서 답장을 해? 완전 쓰레기 새끼네 이거.” 
 
심연의 흑염룡이 잔혹하고 맛이 간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취향이 그런 쪽이라니 갑자기 한수영이 조금 걱정될 정도다. 
 
“왜 그렇게 흥분해? 얘는 그냥 친구 생겨서 좋다는데. 자기도 열다섯 살이래.” 
“뭔 개소리야! 그놈이 진짜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열다섯 살짜리 성좌가 있을 턱이 있냐?”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떠오르는 설정이 있었다. 
 
「유구한 <스타 스트림>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성좌들은,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기 위해 일정한 틀 안에 자신을 가두는 데 익숙하다. 개중 대표적인 것이 ‘나이’인데, 그들은 특정한 생명체의 특정한 나이대에 자신을 이입하여 자신이 그 나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설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15살에 이입한다고? 진짜로? 
 
―끄아아아아아악! 
 
의원실 안쪽에서 비명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한명오의 것이었다. 
나는 그쪽을 향해 몸을 틀며 놀란 장하영을 향해 말했다. 
 
“잠깐 얘기하고 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알겠어. 뭐 물어보면 돼?” 
“걔는 그냥 내버려 둬. 어차피 걘 [투사]도 아닌데. 차라리 다른 애한테 말 걸어. 아까 내가 말해준 명단 있지? 또 말 걸어봐.” 
 
장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즐거워 보이는 녀석의 표정이 불안했지만 괜찮겠지 싶었다. 원래 저 녀석 능력이기도 하고. 
원작보다 ‘정체불명의 벽’의 각성이 조금 빨라졌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벽의 도움이 없다면 [공단]의 혁명은 불가능하니까. 
의원실의 문을 열자, 깨어난 한명오가 식은땀을 흘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왜 기절했지?” 
 
나는 조용히 의원실 문을 닫으며 말을 받았다. 
 
“출산의 고통을 상기하다가 실신하셨습니다.” 
 
기절한 사이 악몽이라도 꿨는지, 한명오는 이마에서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었다. 
 
“그것뿐이었나?” 
“아스모데우스 욕도 좀 하신 것 같고.” 
“그 개새끼······.” 
 
이전보다 마왕에 대한 증오도 직접적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위험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사인참사검]의 힘으로 아스모데우스의 시선 밖에 있으니 욕 좀 한다고 죽진 않을 것이다. 
나는 다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다시 들어보죠. 애를 낳은 건 뭐고, 아스모데우스의 총애를 받은 건 뭐 때문입니까?” 
“······일단 내가 왜 아이를 가지게 되었는지부터 설명해야 하네.” 
“대충 짐작은 갑니다. 전에 싸웠던 ‘어둠 파수꾼’ 때문 아닙니까?” 
 
헤어지기 직전, 한명오는 [어둠 자락]에 있던 [어둠 파수꾼]에게 촉수 기생을 당했었다. 보통 그런 짓을 당한다고 곧장 악마종을 수태하는 건 아닌데, 한명오는 직빵이었던 모양이다. 
 
“계기는 그렇지. 하지만 아이를 가지게 된 건 그놈 때문이 아냐.” 
“그럼······.” 
“저주 때문이지.” 
 
당시 한명오는 ‘어둠 파수꾼’의 최종 타격에 기여해 ‘아스모데우스’의 저주를 받았었다. 그리고 아스모데우스의 저주는 대상이 생각하는 ‘가장 끔찍한 일’을 실현시키는데 개연성을 소모한다. 말인즉······. 
 
“알만하군요. 근데 그게 가능합니까? 남성의 몸으로 출산을······.” 
“그 부분은 묻지 말아주게.”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지 못할 경험을 한 연장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였다.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새삼스럽게도, 내가 한명오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게 낯설게 느껴졌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이상한 기분이군.」 
 
멸망이 오기 전, 내가 ‘회사원 김독자’였던 시절만 해도 한명오는 내게 그저 어려운 사람이었다. 기피하는 상사 1순위 중의 하나. 분명 그런 시절이 있었다. 3천원짜리 편의점 도시락에 일희일비하고, 매달 들어오는 월급 명세서에서 남은 젊음을 헤아려야 했던 시절. 
그런데 그 시절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 사원도 부장도 아닌 김독자와 한명오가 만나서, ‘마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독······ 아니, 유중혁 씨. 아빠가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나?” 
 
갑자기 꺼낸 한명오의 말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저야 모르죠.” 
“난 이제 알게 됐네.” 
 
사실 한명오의 경우는 아빠라고 해야 할지 엄마라고 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생각이었지만, 중요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넘어가기로 했다. 한명오 부장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통스러웠네.” 
 
그 말은 한명오가 지금껏 떠들었던 백 마디의 헛소리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게 들렸다. 
 
“그리고 행복했네.” 
 
나는 한명오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가 느끼고 있던 낯선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어쩌면 나는 인정하기 싫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모두 변한다. 악인이든 선인이든, 아이든 어른이든. 
 
“아주 예쁜 딸이었네.” 
“한번 보고 싶군요. 마계에 와 있습니까?” 
“지금은 함께 있지 않네.” 
 
금세 어두워지는 그의 표정을 보며, 나는 뭔가를 예감했다. 
 
“그럼······?” 
“긴 얘기야. 들어줄 수 있겠나?” 
“일단 해 보세요. 전 얘기 듣는 거 좋아하니까.” 
 
한명오는 곧장 ‘마왕’의 권속이 된 것은 아니었다. 
나와 일행들이 모르는 곳에서, 한명오의 질긴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낳은 딸을 데리고, 홀로 시나리오를 돌파했다. 
 
깃발 쟁탈전을. 
왕들의 전쟁을. 
다섯 개의 재앙들을.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그런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 한명오가 누군가를 위해 그런 헌신을 할 수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더이상 예전의 김독자가 아니듯. 
눈앞에 있는 이 사내도, 이제 예전의 한명오는 아니다. 
 
아이를 낳은 게 계기였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또한 변했다는 것이었다. 
 
“힘들었겠군요.” 
“힘들었지. 많이 죽을 뻔했고. 실제로 마지막에는 정말 구제할 수 없는 위기에 빠졌었네.” 
 
그가 마침내 벼랑 끝에 몰린 것은 당시 정식으로 시작되지도 않았던 [암흑성] 시나리오에 빠져버린 순간이었다. 몰려드는 악마종과 악마 귀족들 속에서, 한명오는 이제 자신이 아이를 지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한명오는 태어나 처음으로 기도라는 것을 했다. 
누군가 이 아이를 지켜준다면. 
이 아이를 살려주기만 한다면, 자신은 뭐든 하겠노라고. 
그리고 놀랍게도, 그 기도에 응답한 존재가 있었다. 
 
―예쁜 아이구나. 
 
“그게 아스모데우스였네.” 
“······설마 마왕에게 아이를 빼앗긴 겁니까?” 
 
일순 꺼림칙한 상상이 떠올라 기분이 나빠졌다. 
아스모데우스는 격노와 정욕의 마왕. 
녀석의 손에 아이가 들어갔다면, 어떤 꼴이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얘기였으니까. 그런데 한명오의 표정은 침착했다. 
 
“그 아이는 무사할 걸세. 어쨌든 ‘아스모데우스’의 저주로 태어난 아이니까.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마왕은 내 딸을 건드릴 수 없는 처지야.” 
“그게 무슨 뜻이죠?” 
“마왕이 내 딸을 자신의 ‘화신체’로 삼았네.” 
 
그제야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무슨 변덕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왕 ‘아스모데우스’는 한명오의 아이를 자신의 화신체로 삼았다. 그러니 그 아이의 부모인 한명오는, 자연히 악마의 귀족 작위를 받았겠지. 
 
“······내가 ‘악마종’이 된 것은 그 때문일세.” 
 
이렇게까지 듣고 보니 한명오의 인생역정도 어지간하다 싶었다. 작위를 받았으니 성공한 인생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아이를 빼앗겼으니 실패한 인생이라고 해야 할지······. 
침통한 눈빛의 한명오가 재차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나는 내 딸을 구하고 싶어.” 
 
순간, 나는 내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뭘 하겠다고? 
 
“긴말 안 하겠네. 날 좀 도와줘. 딱 한 번만 도와주면, 두고두고 은혜를 잊지 않겠네.”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혼자 인생극장 열심히 찍더니 이젠 나한테 뭘 도와달라고? 
 
“자네는 날 오랫동안 지켜봐 왔으니 잘 알겠지. 난 비겁하려면 한없이 비겁해질 수도 있는 그런 인간이야. 하지만 그런 내게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있어.” 
“······.” 
“그리고 어젯밤 일은 내 예상 밖이었네. 겁만 주라고 했지, 사람을 해치라고 한 적은 없어. 갑자기 경호관이 나타나는 바람에 흥분한 처형관들이 멋대로 벌인 짓이야.” 
 
거짓말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일단 이성적으로 대응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아스모데우스와 싸울 계획이 없습니다.” 
 
지금 72 마왕 중 하나와 척을 지게 되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혁명도 시작되지 않은 판에 외세를 끌어들이는 셈이니까. 
그런데 한명오의 반응이 의외였다. 
 
“아스모데우스와 싸울 필요는 없어. 자네는 그냥 하려던 일을 하면 돼. 혁명을 일으키고 공작을 죽이는 것. 그게 나를 돕는 일이야.” 
“······당신은 공작 편 아니었습니까?” 
“원래는 그랬지만,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거 자네를 돕는 것도 괜찮으리란 생각이 드네.” 
“무슨 말입니까?” 
“애초에 아스모데우스가 내게 원한 것은 공작을 돕는 게 아니야. 그는 내게 제안을 했네. 자신이 원하는 ‘설화’를 하나 만들어 주면, 내 딸을 돌려주겠다고. 내가 ‘세이스비츠 공작’에게 붙어 있었던 건 그것 때문이었어.” 
 
이 부분은 원작에는 완전히 없던 이야기였다. 
당연하겠지. 애초에 ‘한명오’라는 존재부터가 원작에 없으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마왕이 원하는 이야기가 대체 뭡니까?” 
“73번째 마계의 왕.” 
 
한명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언젠가 ‘미노 소프트’에 막 입사했던 시절, 면접관으로 나왔던 한명오의 눈빛이 떠올랐다. 
 
“마왕은······ 내 손으로 직접 ‘73번째 마계의 왕’을 만들라고 했네.” 
 
 
* 
 
 
유중혁은 무심한 눈으로 밤하늘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지구와는 다른 별자리들이 보이는 하늘. 진천패도에 비스듬히 기대 그 별들을 헤아리는 유중혁의 몸은 평소보다도 훨씬 더 피폐해진 상태였다. 피칠갑한 몸에 상처투성이의 얼굴. 그의 눈앞에는 방금 그가 때려잡은 2급종의 괴수가 누워 있었다. 
 
“······이걸로 15번째 시나리오도 끝이군.” 
 
행성 루그라티아. 
이계의 성좌들 중 하나에게 의뢰받은 ‘개인 시나리오’를 통해 유중혁은 이곳에 왔다. 
본래였다면 지구의 시나리오를 진행했겠지만, 이번 생의 지구에는 강한 동료들이 있었고, 그러니 10번대 시나리오는 남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어차피 지난 인생 회차보다 성장세도 빠른 상황. 비축할 수 있을 때 최대의 힘을 비축해두는 것이 옳았다. 시나리오가 20번대로 돌입하면 이런 여유도 없어질 테니까. 
 
‘더 강해져야 한다.’ 
 
오직 그런 생각 하나로, 유중혁은 11번 시나리오 이후 줄곧 ‘개인 시나리오’로 메인 시나리오를 대체해 왔다. 그것도 가장 어려운 난이도에 가장 보상이 좋은 개인 시나리오만 골라서. 때로는 자신답지 않을 정도로 무모한 시나리오에까지 도전했다.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고. 
 
언제나 그랬듯, 그렇게 몸을 혹사하고 정신을 단련하면 될 거라 믿었다. 그럼 이 알 수 없는 상실감도 조금은 채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싸우면 싸울수록 허전함은 커져갔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안타깝게 바라봅니다.] 
 
유중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하늘을 노려보았다.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왜 저 성좌가 최근 이렇게 말을 자주 거는 것인지, 유중혁은 잘 알 수 없었다. 지난 회차에서는 자신과 거의 접점이 없는 성좌였는데······.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왜 김독자를 찾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김독자는 죽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고개를 흔듭니다.] 
 
고작 화신 하나의 죽음에 성좌가 이토록 연연하는 것이, 유중혁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그 다음 메시지였다. 
 
[73번째 마계에서 당신의 악명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또?’ 
 
잊을만 하면 떠오르는 메시지. 
왜 73번째 마계 같은 애먼 곳에서 자신의 악명이 높아지는 것인지 유중혁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혹시나 김독자가 살아 있어서 자신을 사칭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설령 김독자가 살아 있다고 해도 놈에겐 그럴 이유가······. 
 
‘······잠깐. 혹시 김독자가 살아있고, 위험에 빠졌다면?’ 
 
어쩌면, 김독자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그 빌어먹을 운명을 벗어나, 어떤 시나리오도 없는 저 이야기의 지평선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아 남아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늘 기상천외한 수로 자신을 앞지르기만 하던 그 녀석이, 처음으로 위험에 빠져서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채널이 없는 곳에서 도움을 청할 방법은 없으니······. 
거기까지 생각하던 유중혁은 조금 복잡해진 얼굴로 다시금 하늘을 바라보았다. 
 
‘73번째 마계라······.’ 
 
 
 
 
 
< Episode 39. 정체불명의 벽 (3) > 끝

< Episode 39. 정체불명의 벽 (4) >
 
 
 
 
 
「김독자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잘 있을까 모르겠군.」 
 
혹시나 스크린 패널에서 또 지구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까 했지만, 딱히 보여지는 영상은 없었다. 하긴 혹부리들도 그렇게 쉽게 도깨비들 채널 영상을 빼돌릴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 
 
밤은 빠르게 다가왔다. 
 
며칠째 숙면을 거의 못 취했지만, 틈틈이 아일렌이 설화를 수선해 준 덕에 화신체의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일단 임시로 손보기는 했는데, 외부 활동엔 주의해야 해요. 알죠? 당신은 어쨌든 메인 시나리오 이탈자니까.” 
“꼭 의사처럼 말하네.” 
“지금은 시계를 다루는 게 아니니까 시계공처럼 말할 수는 없잖아요?” 
 
아일렌이 나를 흘겨보며 수선 장비를 가지고 일어섰다. 
이틀 사이에 그만한 일들이 있었는데도, 그녀는 딱히 현재 상황에 불만은 없어 보였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내가 오지 않았다면, 아일렌은 줄곧 시계공으로 살아갔겠지.」 
 
유중혁이 마계에 오지 않은 많은 회차에서, 실제로 아일렌은 그렇게 살아갔을 것이다. 조용히 고향의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를 만들고, 사라진 행성의 시간을 홀로 반추하면서. 가끔 장하영과 투닥거리고, 마르크가 만든 요리를 먹으면서······ 어쩌면, 아일렌에게는 그쪽이 더 행복한 삶이었을 수도 있다. 
 
“그거 알아요? 요 이틀 사이 시계를 찾는 사람들이 늘었어요.” 
 
언뜻 고개를 들자 아일렌이 알 수 없는 눈길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단체로 시계가 고장나기라도 했나?” 
“원래 [공단] 사람들은 시계를 쓰지 않았어요.” 
“왜지?” 
“시간 같은 걸 알아봐야 아무 소용도 없었기 때문이죠.” 
 
‘멸살법’에서도 읽은 기억이 있다. 
그것 때문에, 누군가가 마계를 두고 ‘시간을 잃은 도시’라고 지칭했던 것도 생각났다. 
 
“하지만 [밤]의 시간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나?” 
“[밤]이 오는 시간을 안다고 죽을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요?” 
 
너무 오래된 공포는 하나의 법칙이 된다. 
아주 오랜 세월동안, 이 [공단]에서 [밤]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흘에 한 번 누군가가 죽고, 그가 가진 설화는 공장의 비료로 쓰인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든,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든, 또 어떤 내일을 살아갈 것이든,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그리고 나머지 사람은, 다시 누군가가 없는 사흘을 살아간다. 
 
“그런데 아무도 죽지 않는 [밤]이 나타났어요. 당신 때문에.” 
“······.” 
“사람들은 다시 밤을 ‘두려워’할 수 있게 된 거예요.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해결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내일을 생각하며 살아도 될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라고요.” 
 
문득 시선을 내리자, 아일렌의 손목에도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오늘 [밤]이 다가오기까지는 이제 세 시간······. 
흐르는 초침 소리를 들으며 아일렌도 나도 침묵했다. 
아마 [공단]의 어떤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처럼 시계를 보고 있을 것이다. 
아마 오늘 밤은 어젯밤보다 더 치열하고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왜일까. 열심히 움직이는 초침 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 나는 조금쯤 위로 받은 기분이 되었다. 
정작 위로를 받아야 할 것은 내가 아닌데도. 
 
“고마워.” 
“······딱히 당신 좋으라고 들려준 말은 아니에요. 그냥, 혁명가가 침울해져있으면 보기 안 좋으니까.” 
 
아일렌이 홱 몸을 돌렸다. 나는 그런 아일렌을 향해 쓰게 웃다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 잠깐만.” 
“······뭐죠?” 
“시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혹시 다른 것도 만들 줄 알아?” 
“다른 거 뭐요?” 
“스마트폰······ 이라고 해야 하나.” 
“그게 뭐죠? 마도 기관인가요?” 
 
나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대략적인 스마트폰의 특징들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아일렌이 알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통신기기 같은 거죠? 작은 패널이 달린?” 
“맞아.” 
“그런데 여기는 도깨비들 채널이 없어서 통신이 불가능할 텐데······.” 
 
어차피 지난 경험을 반추해 보면 통신이 꼭 이어지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내가 쥔 폰은 자동으로 동기화가 이루어져서 텍본이 생성되니까. 
 
“그건 걱정 말고. 오늘 안에 만들 수 있어?” 
“하루는 무리고, 적어도 사흘 정도는 걸릴 것 같은데······ 일단 노력은 해 보죠.” 
“알겠어. 그럼 수고해줘.” 
 
나는 그렇게 말하고 아일렌의 공방에서 나와 선술집 쪽으로 향했다. 거리에서 나를 발견한 사람들이 묘한 눈길로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몇몇은 내게 눈인사를 해왔고, 양손을 가볍게 모으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목에는 아일렌의 말처럼 손목시계가 하나씩 채워져 있었다. 
 
「그 시계들을 보며, 유중혁은 외로워졌다. 그들은 시간을 되찾았지만, 그는 여전히 이 시간 속에 살고 있지 않았으니까. 유중혁은 문득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는 저 무수한 시간들 중 어디를 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언젠가 마계를 구한 유중혁의 독백이었다. 
그리고 내가 ‘멸살법’에서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이기도 했다. 
문득, 조금이지만 녀석의 마음을 조금 알 것도 같았다. 
회귀자 유중혁에게 이 모든 세계의 시간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몇 번이고 회귀가 가능한 인생에, 현재의 시간이 의미가 있을 턱이 없으니······. 
 
이 일이 끝나면, 아일렌에게 시계나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 볼까. 
 
그런 거라도 있으면, 그놈도 이 세계에 더 정을 붙일지 모른다. 
어쩌면 회귀 우울증이 좀 나아질 수도 있고······. 
놈이 회귀한다고 이 세계가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럼에도 녀석이 없으면 남은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것은 어려워진다. 
 
“아하하하핫, 얘 진짜 웃기네.” 
 
선술집 문을 열자, 깔깔 웃어대는 장하영의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멀리서만 보면 그냥 사춘기 중학생 같다. 
 
“뭐하냐?” 
 
이번에는 “히익”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대신 장하영은 나쁜 짓을 하다가 부모님에게 들킨 아이처럼 내 눈을 피했다. 
 
“네, 네가 시킨 거 하고 있었지!” 
“[투사]는?” 
“그게······.” 
 
우물쭈물하던 장하영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사실을 실토했다. 
 
“······[투사]들이 아무도 답장을 안 했다고?” 
“지, 진짜야! 아무도 답신을 안 줬다고!” 
“대체 뭐라고 보냈는데?” 
“15세 여중생입니다······.” 
 
이마의 혈관이 불끈거렸다. 
 
“야! 그렇게 보내니까 아무도 답장을 안 하지!” 
“하지만 아까도 먹히길래······.” 
“전부 흑염룡 같은 놈들만 있는 줄 알아? 몇 통이나 보냈는데?” 
“다 합쳐서 300통 정도······.” 
 
어쩌면 스팸 메시지라고 생각하고 차단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젠장. 
 
“큰일이군. 내가 아는 [투사]들 목록은 그게 전부인데.” 
 
그제야 장하영도 큰일 났다는 걸 깨달았는지, 안색이 변했다. 
 
“그럼 이제 어떡해?” 
 
이래서 ‘멸살법’이 필요했던 건데. 
텍본을 가지고 있으면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한 부분들을 다시 읽으며 [투사]에 대한 정보를 더 검색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혹시 다른 [투사]가 없는지 찾아봐야지. 일단은······.” 
 
나는 당장 떠오르는 성좌들의 수식언을 몇 개 떠올렸다. 
성좌들 중에서 우리를 도와줄 만한 녀석. 
 
“‘긴고아의 죄수’에게 메시지를 써 봐.” 
“······그거 엄청 강력한 성좌 아냐?” 
 
녀석이 [투사]와 관련된 스킬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붙잡아 봐야 하는 시점이니까. 
장하영은 뭔가 열심히 메시지를 입력했다. 
그리고 우리는 기다렸다. 1분, 2분······ 5분. 
장하영이 고개를 저었다. 
 
“답장이 없는데?” 
“이렇게 써봐.” 
 
나는 쓸 메시지 내용을 다시 일러 주었다. 
그러자 장하영이 화들짝 놀랐다. 
 
“그런 거 써도 돼?” 
“일단 주의를 끌어야 하니까.” 
 
제천대성은 천성이 게으른 녀석이다. 그러니 녀석의 답장을 받으려면 이 정도가 아니면 안 된다. 
장하영이 메시지를 보낸 지 10초도 채 되지 않아, 알림이 떠올랐다. 
 
[답신이 도착했습니다!] 
 
“다, 답장 왔어!” 
“역시 그렇지?” 
 
참고로 내가 보내라고 한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자라나라 머리머리] 
 
내가 뭘 할 때마다 간접 메시지로 털을 뽑아대길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탈모가 왔던 모양이군. 나는 물었다. 
 
“걔가 뭐래?” 
“만나면 죽여버리겠다는데.” 
“다른 말은?” 
“너 누구냐고 묻는데? 유중혁이라고 할까?” 
“······대답하지 마.” 
 
유중혁이라고 하면 재밌기는 하겠지만, 그랬다간 괜히 문제만 커질 뿐이다. 
나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골몰했다. 
제천대성 쪽은 글러 먹은 듯하니, 다른 타개책을 찾아야 한다.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는 마계에서 호출하긴 좀 그렇고, 아니면 은밀한 모략가······ 그놈은 아직 정체가 뭔질 모르고······.” 
 
고민이 된다.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나 ‘술과 황홀경의 신’은 올림포스가 걸리고······.” 
 
그냥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밝히면, 저들 중 누군가는 도움을 줄 것도 같았다. 문제는 내 정체를 밝히면 성운 녀석들도 내 생존을 알아챌 수 있다는 것이다. 
 
“난감하네.” 
 
마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부딪친 난관이었다. 
이제 [밤]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장하영이 지금 [투사]를 계승하지 못하면, 오늘 밤 내가 세운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될 터. 
그때, 장하영이 말했다. 
 
“염룡이가 도와줄 수 있다는데?” 
 
‘염룡이’가 대체 누굴 말하는 건가 싶어 나는 잠깐 멈칫했다. 
 
“······아직도 그놈이랑 얘기하고 있어?” 
“응.” 
“됐어 그놈은. 보나마나 허당일 거야.” 
“아냐, 얘도 마계에서 [투사]를 잠깐 해본 적이 있대.” 
 
······심연의 흑염룡이 [투사]였던 적이 있다고? 
그런 이야기는 ‘멸살법’에 나온 적이 없는데? 
하긴, 생각해 보면 심연의 흑염룡을 그렇게 본격적으로 다룬 적도 없었으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근데 자기는 시나리오 룰이 맘에 안 들어서 다 죽여버렸대.” 
“뭐?” 
“공작이고 혁명가고 처형관이고 자기가 다 죽여버렸다는데?”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다. 
아마 64번째 마계가 통합될 때였나? 
분명, 마계의 역사 중에 그런 미친놈이 하나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심연의 흑염룡’이었다고? 
 
“혹시 [투사] 스킬을 전수해줄 수 있냐고 물어봐.” 
 
심연의 흑염룡이라면 악 계통의 성좌이니, 마계로 뭘 전송하는 것이 그다지 눈치가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최상의 상대다. 
뭔가를 입력하던 장하영의 안색이 급격하게 밝아지는 게 보였다. 
 
“자긴 어차피 쓰지도 않으니 주는 건 문제가 아니래.” 
“그래?” 
 
······정말이지 뜻밖의 도움이었다. 
이거,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겠는데? 
사실은 흑염룡도 김남운도 모두 착한 놈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텍본을 다시 입수하면 녀석들이 나오는 부분을 세심하게 읽어줘야겠다. 
그런데 장하영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단, 조건이 하나 있다는데?” 
 
그럼 그렇지. 
저 꼬장꼬장한 새끼가 그냥 그걸 줄 리가 없다. 
 
“어차피 벽을 통한 거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해. 그놈 조건이 뭐래?” 
“최근에 고민이 있대.” 
“고민?” 
“자기 화신이랑 사이가 별로 안 좋다고······.” 
“화신이랑?” 
“화신이 자꾸 자길 무시한다는데.” 
 
심연의 흑염룡의 화신이면······. 
 
“심지어는 지금 위기에 빠졌는데도, 자기 말을 들을 생각을 안 한다고······.” 
 
······위기에 빠져? 
나는 재빨리 장하영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그 이야기, 자세히 말하라고 해.” 
 
 
 
 
 
< Episode 39. 정체불명의 벽 (4) > 끝

< Episode 39. 정체불명의 벽 (5) >
 
 
 
 
 
푸우욱! 
 
칼날이 심장을 꿰뚫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 사내가 쓰러졌다. 
 
“끅, 끄윽······ 개, 개같은······.” 
 
어떻게든 욕설을 짜내 보려고 했지만, 사내의 입은 날아든 여인의 뒷발에 그대로 뭉개졌다. 그것이 사내의 마지막이었다. 
한수영은 피바다가 된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겨우 다 죽였네. 하여간 한국 놈들 적응은 더럽게 빨라요.” 
 
이곳은 경기도의 화신 클럽인 ‘약육강식’의 본거지였다. 
시나리오가 시작되고, 그럭저럭 쓸만한 배후성을 선택하자마자 범죄집단으로 돌변한 놈들. 정부의 통제도 거부한 녀석들이라 지금 죽이지 않으면 훗날 한반도의 암적인 존재가 되는 녀석들이었다. 
어디까지나, 원작에 따르면 그런 놈들이 될 예정이었단 얘기다. 
 
“망할 김독자.” 
 
한바탕 욕설을 갈겨 봤지만, 그래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한수영은 한마디를 더 했다. 
 
“유중혁 개새끼.” 
 
여길 떠맡겨 놓고 각자 제 갈길을 가버린 두 놈을 생각하고 있자니, 한수영은 먹다 버린 음식물 처리반이 된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김독자는 그렇다 쳐도 유중혁 그 새낀 왜 그러는 거야?” 
 
뭘 잘못 처먹었는지, 유중혁은 서울 돔을 나오자마자 본래의 3회차에서는 하지 않던 행동들을 이어갔다. 방구석에 처박혀 있질 않나, 혼자 혼잣말을 실컷 지껄이더니 갑자기 한반도 시나리오를 팽개치고 ‘개인 시나리오’로 떠나버리질 않나······. 
덕분에, 남은 잔반들은 고스란히 한수영의 몫이 되었다. 
 
“더 생각해봐야 뭐하냐. 씨······.” 
 
어쨌거나 그녀도 멸살법을 읽었던 ‘마지막 하차자’였다. 
김독자도 유중혁도 없으니, 자연히 한반도를 책임질만한 사람은 그녀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한숨을 푹푹 쉬며 학살 현장을 조용히 벗어나려는데. 
 
“아 깜짝이야. 여긴 웬일이셔?” 
 
사무실 출입구에 기대 그녀를 기다리는 한 여자가 있었다. 
전신에 달라붙는 수트형 전투복에, 시원시원하게 흩날리는 머리카락. 드러나는 몸매를 의식해서인지, 어깨 위로 걸친 품이 넓은 코트. 
새삼스럽지만, 정말 예쁜 얼굴이긴 하다. 
하긴, 그러니까 언론에서도 그렇게 띄워주는 거겠지. 
 
“요즘 티비 나온다고 바쁘실 텐데. 아니었나?” 
 
한수영은 살짝 아니꼬운 눈으로 유상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상아도 벽에서 몸을 떼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약간의 키 차이가 나는 눈높이. 
대치 끝에, 짧게 한숨을 내쉰 유상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행동할 건가요?” 
“뭐.” 
“법도 질서도 없어졌다고 해서, 모두 다 죽여도 되는 건 아니에요.” 
 
한수영은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손을 홰홰 저었다. 유상아는 모른다. 클럽 ‘약육강식’이 어떤 놈들인지. 그리고 뭐가 될 녀석들인지. 
모르기에, 저런 유치한 정의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잘못을 할 놈들이었어.” 
“하지만 기회도 줘 보지 않았잖아요.” 
“그냥 그렇게 정해져 있어. 넌 아무것도 몰라.” 
 
한수영은 그렇게 말하며 유상아를 지나쳤다. 
어차피 미래를 공유할 수는 없었다. 
많은 이가 알게 된 정보는 그 가치가 떨어지고, 미래를 변화시킨다. 
아마 김독자라도 이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니······.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순간 흠칫한 한수영의 걸음이 멈춰섰다. 
 
“선지자들이 ‘계시록’이라고 불렀던 게 그 책이죠?” 
“······어디서 재미있는 얘길 들었나 보네.” 
“당신도 그걸 읽은 건가요?” 
 
슬그머니 입술을 깨문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알 거 없어.” 
“성좌들도 그 책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 같더군요.” 
 
슬슬 그 이야기가 퍼져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서울 돔의 바깥에도 몇몇 하차자들은 있었고, 녀석들이 흘린 소문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유상아는 자신이 ‘첫 번째 사도’라는 걸 알고 있다. 
 
“김독자 씨도 그걸 읽은 건가요? 그래서 미래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던 거고요.” 
“나야 모르지.” 
 
불편한 화제였다. 한수영은 슬그머니 품속에서 단도를 꺼냈다. 지금이야 ‘멸살법’에 대한 정보가 필터링이 된다지만, 언제까지 그게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가능한 입의 숫자를 줄여야······. 
 
“왜 그랬을까요.” 
 
문득 들려온 슬픈 음색에, 한수영이 고개를 돌렸다. 
 
“왜 미래를 알았는데도, 독자 씨는 그런 선택을 한 걸까요?” 
 
유상아의 표정을 보는 순간, 한수영은 그녀가 왜 자길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한수영은 그런 유상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고 했다. 
 
‘김독자와 같은 회사.’ 
 
왜일까. 한수영은 갑자기 열불이 났다. 
 
“어딜가나 김독자 김독자 다들 노래를 불러대지. 정작 김독자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들이.” 
 
숨을 짧게 들이켠 한수영의 입에서, 무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이 왜 그렇게 화가 난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로, 한수영은 말했다. 
 
“그놈은 이기적인 놈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지 하나만 생각하는 놈이라고.” 
“······.” 
“사람들을 농락하고, 거짓말하고, 마지막까지 위선을 떨면서 사라진 그딴 놈, 내가 알게 뭐야? 죽었든 살았든 내가 알 바 아니라고. ” 
 
한순간 스쳐가는 장면이 있었다. 
암흑성의 10번째 시나리오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김독자의 눈빛. 
결국 자신이 제일 먼저 칼을 뽑게 만들었던, 그 빌어먹을 표정. 
 
“아니, 역시 죽었을 리가 없지. 분명 살아남아서, 또 설화나 쌓으며 희희낙락 잘 살아가고 있겠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너는 김독자를 몰라.” 
 
차갑게 내뱉은 말투에 깊은 자조가 어려 있었다. 
김독자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수영 그 자신을 포함해서. 
그런데, 유상아의 대답은 달랐다. 
 
“아뇨, 알아요.” 
“뭐?” 
“사람은 그렇게 갑자기 변하지 않으니까요.” 
 
유상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시나리오가 시작되고, 한동안 독자 씨는 내가 아는 독자 씨와는 다른 사람 같았어요. 목숨이 걸린 상황 앞에서도 침착하고, 망설임 없이 낯선 괴수들을 죽일 수 있는 사람. 내가 아는 독자 씨랑은 다른 사람이었죠.” 
“네가 김독자를 잘 몰랐던 거겠지.” 
“그래도 독자 씨는 독자 씨에요.” 
 
한수영은 입을 다물었다. 
 
“스펙 쌓기보다는 소설책 읽는 걸 좋아하는 사람. 자기 발표는 잘 못해도, 다른 사람의 발표에는 누구보다 귀를 기울이는 사람······.” 
 
한수영이 아는 것과는 다른 김독자. 
그 김독자를 아는 사람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분명 외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어디선가 김독자가 짓고 있을 표정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는 세계에서 홀로 하늘을 보고 있을 김독자. 
 
“한수영 씨. 독자 씨를 구하러 가야 해요.” 
 
그 결연한 눈빛을 보는 순간, 한수영은 어쩐지 패배한 느낌이었다. 
넌 참 복받은 놈이구나, 김독자. 
이렇게나 걱정해주는 사람도 있고. 
한수영이 입을 떼려던 찰나, 허공에서 메시지가 들려왔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이런 빌어먹을.” 
 
허공에서 [그레이트 홀]이 열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괴수들의 울음소리. 놀란 유상아가 한수영과 등을 맞대고 섰다. 커다란 홀을 통해, 거대한 괴수종이 급강하하는 것이 보였다. 도깨비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웨이브 패턴은 뻔해서 잘 안 쓰는데, 요즘 너무들 한가하신 것 같아서 특별히 한 번 넣어 봤습니다!] 
 
갑작스런 시나리오의 출현에 유상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것도 혹시 원래 있던 내용인가요?” 
“나도 몰라. 나도 다 기억하는 건 아니라고.” 
 
이래서 혼자가 싫었던 거다. 미래를 알고는 있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미래의 정보는 어설픈 것들뿐이다. 수많은 회차를 알고 있는 김독자나, 직접 그 회차를 돌파해온 유중혁이라면 임기응변도 가능하겠지만 한수영은 아니었다. 
어두운 구름을 꿰뚫고 날아온 거대 괴룡들이 하나둘 지상으로 착지하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꼬리가 지상을 휩쓸 때마다 고층 건물들이 통째로 붕괴했다. 
 
거대 3급 괴룡종(怪龍種) ‘그라카곤’. 
12번째 시나리오의 재앙으로 강림한 괴수종의 이름이었다. 
 
‘저거 어떻게 잡더라?’ 
 
한수영은 원작의 내용을 열심히 떠올려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 녀석의 공략법은 떠오르질 않았다. 별수 없이, 남은 방법은 전면전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로 곁에 유상아가 있다는 것. 썩 합이 맞는 동료는 아니지만 없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성흔, ‘흑염 Lv.6’을 발동합니다!] 
 
힘껏 끌어올린 마력이 그녀의 단도에 집중되며, 이무기의 등짝에 그대로 스킬을 작렬시켰다. 
 
[3급 괴룡종 ‘그라카곤’이 ‘화염 내성’으로 공격을 방어합니다.] 
[3급 괴룡종 ‘그라카곤’이 ‘어둠 내성’으로 공격을 방어합니다.] 
 
“아 도마뱀 새끼, 하여간 도움이 안 돼요!” 
 
하필 화염 내성과 어둠 내성을 동시에 갖춘 녀석이라서, 한수영이 가진 스킬로는 아무리 지지고 볶아도 죽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공격이 간지럽다는 듯, 더욱 크게 날뛰는 괴룡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침울해합니다.] 
 
곁을 보니 유상아의 상황도 딱히 나아 보이지는 않았다. 한수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지금이라도 심연의 흑염룡이 가진 설화를 계승할 수만 있다면······. 
 
‘빌어먹을, 그딴 설화를 어떻게 계승하냐고.’ 
 
다가오는 괴룡종의 무리를 바라보며 한수영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 빌어먹을 김독자라도 있었다면, 여기서 어떻게 하라고 말이라도 해줬을 텐데. 
그때였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원한다면 자신이 약점을 알려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쟤들 약점을 안다고?”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구라치지 마. 너 시나리오에 대해 아는 거 별로 없잖아.”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길길이 날뜁니다.] 
 
아이처럼 방방거리는 흑염룡의 메시지를 들으며, 한수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김독자 그 자식, 내가 흑염룡 선택할 때 분명 비웃었겠지?’ 
 
분명, ‘심연의 흑염룡’은 강력한 성좌다. 
하지만 다른 성좌들에 비해 정보력은 무척 떨어진다. 
왜냐고? 이 녀석은 태생부터가 너무 강해서 딱히 시나리오 공략이 필요 없는 놈이었기 때문이다. 듣기야 멋있지만 화신이 된 입장에서는 못마땅하게 짝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그라카곤’의 약점은 정수리의 은색 비늘이라고 말합니다.] 
 
“진짜야? 지난번에도 네가 말해준 거 다 틀렸었잖아.”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흑염룡을 걸고 진짜라고 주장합니다.] 
 
“그건 지난번에도 걸었고.”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이번에는 믿을 만한 정보통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주장합니다.] 
 
“믿을만한 정보통?” 
 
일단은 방법이 없었기에, 한수영은 흑염룡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한수영은 잽싼 발놀림으로 괴룡종의 꼬리를 밟고 뛰었다. 긴 유선형의 몸체를 얼마나 가로질렀을까. 
진짜로 놈의 정수리 부근에 조그만 은색 비늘이 보였다. 
 
“하아압!” 
 
퍼거걱, 하는 소리와 함께 단도가 비늘 속을 파고들자, 그라카곤이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거체의 호흡이 끊어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한수영은 조금 어안이 벙벙해져서 중얼거렸다. 
 
“······진짜잖아? 너 꽤 쓸만하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가슴을 활짝 폅니다.] 
 
허공에서 날아온 유상아가 말했다. 
 
“약점을 알고 있었군요?” 
“아냐, 내가 아니라······ 아무튼 쟤들 약점 정수리의 은색 비늘이야. 그것만 공략해.” 
 
흑염룡이 준 정보 덕분에 두 사람은 무난히 그라카곤들을 제압해 나갔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의 활약에 감탄합니다.] 
 
쏟아지는 성좌들의 메시지를 받으며, 한수영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였다면 기분 좋게 넘어갈 상황이었지만, 오늘은 뭔가가 찝찝했다. 꼭 언젠가 김독자한테 놀림 받을 때 이런 기분이었던 것 같은데. 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퍼뜩 뭔가가 스쳐갔다. 
 
“야, 흑염룡.”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흠칫 놀라며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솔직히 말해. 너 이거 누구한테 들은 거야?” 
 
 
* 
 
 
[‘세 번째 밤’이 찾아왔습니다.] 
 
그 메시지를 들으며, 나는 조금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역시, 말해줄 걸 그랬나. 
 
명계의 김남운이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심연의 흑염룡’도 내가 아는 것처럼 나쁜 녀석은 아닐지 몰랐다. 어쨌거나 한수영의 배후성이기도 하고. 
그러니, 말해주는 것도 괜찮았을지 모른다. 
이쪽은 무사하니, 걱정말라고. 사람들에게 그리 전해달라고. 
 
“혁명가님!” 
 
하지만 참아야 했다. 
지금 참아야만, 다시 웃으며 그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 
나는 조용히 [밤]의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끄아아아악!”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 [처형관]들이 나타나는 소리였다. 
시작부터 아주 살벌하다. 아마 일전의 이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밤이 되겠지. 내가 세 명의 처형관을 죽였으니, 오늘 밤엔 녀석들도 전력으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오늘 밤부터는, 이쪽도 제대로 된 반격을 할 테니까. 
 
“장하영.” 
 
내 말에 장하영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무척 긴장한 모양새였지만, 일전처럼 주눅든 얼굴은 아니었다. 장하영이 물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너보다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나 스킬 배운지 겨우 두 시간 밖에 안 됐다고.” 
“두 시간이면 충분해.” 
 
나는 확신조로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장하영을 위로하려는 말이 아니었다. 
 
「“가장 완벽한 화신은 누구인가?”」 
 
언젠가, <스타 스트림>의 성마른 논객들이 그런 걸 논한 적이 있었다. 
 
「“일대일에서 가장 강한 화신이라면 유중혁이겠지. 그 녀석만큼 싸움을 잘하는 녀석은 없으니까.”」 
「“정보전이라면 안나 크로프트를 이길 사람이 없어.”」 
「“이현성은 어때? 탱커로서는 그 녀석이 최고잖아.”」 
「“다수전은 란비르 칸이지.”」 
 
그 어디에도 장하영의 이름은 없었다. 
일대일 싸움은 유중혁에게 뒤처지고. 
정보력은 안나 크로프트에게 뒤처지며. 
방어력은 이현성보다 못하고. 
다수전은 란비르 칸보다 뒤떨어지니까. 
하지만. 
 
「“가장 완벽한 화신은 모든 걸 다 잘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해.”」 
「“그럼 답은 정해졌군.”」 
 
유중혁보다 방어력이 높고. 
안나 크로프트보다 일대일 대결에 능하며. 
이현성보다 다수전에 능하고. 
란비르 칸보다 정보전에 뛰어난 존재. 
 
[등장인물 ‘장하영’이 ‘투사화(鬪士化) Lv.9’를 발동합니다!] 
 
「“가장 완벽한 화신은 장하영이다.”」 
 
불타는 곡선을 그리며, 장하영의 몸이 밤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하나에 특출나지는 않지만, ‘멸살법’ 전체에서 가장 많은 특성과 스킬을 가진 존재. 
같은 스킬을 습득한다면, 누구보다도 빨리 그 스킬의 일정한 ‘고지’에 도달하는 재능. 
 
‘정체불명의 벽’의 주인, ‘초월자들의 왕’ 장하영. 
‘멸살법’의 2부는 바로 이 녀석으로부터 출발한다. 
 
 
 
 
 
< Episode 39. 정체불명의 벽 (5) > 끝

< Episode 39. 정체불명의 벽 (6) >
 
 
 
 
 
[등장인물 ‘장하영’이 ‘투사’로 각성하였습니다!] 
 
[경호관]에게 핵심 스킬인 ‘경호’가 있듯, [투사]에게는 핵심 스킬인 ‘투사화’가 있다. 자신의 모든 공포와 두려움을 녹여 그것을 무력으로 바꾸는 스킬. 때문에 이 스킬은 피착취 계층에 오랫동안 머무른 사람일수록 더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장하영은 ‘정체불명의 벽’이 없더라도 투사가 되기에 적합한 인재였다. 
 
“하아아아아아압!” 
 
문제는 너무 신난 것 같다는 거지만. 
 
콰콰콰콰콰! 
 
하늘을 깎는 폭음이 들려왔다. [투사]는 [처형관]을 상대로 할 때만큼은 절대적인 힘을 낼 수 있는 포지션. 아마 지금 장하영은 성좌라도 된 기분일 것이다. 
 
“너무 까불지 마 멍청아!” 
 
뒤늦게 목청을 높였으나, 장하영은 이미 닿지 않는 거리까지 날아가 있었다. 
장하영은 이래서 문제다. 
사실 내가 걱정한 것은 장하영의 재능이 아니라 그 재능으로 인해 비롯될 폭주였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장하영은 재능이 없는 게 아냐. 오히려 재능이 지나치게 많다.」 
 
‘멸살법’의 유일한 올라운더 화신인 장하영. 
장하영이 가진 ‘정체불명의 벽’은, ‘벽의 거래’를 통해 전수 받은 스킬에 한해 가공할 성장력을 보장한다. 
물론 초월좌의 심오한 경지를 개척하는 것은 무리지만, 적어도 하나의 경지라 불릴 만한 수준까지 장하영은 누구보다 빠르게 올라설 수 있다. 
단지 몇 시간만에 다른 이들의 수련치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재능. 
그런 재능은, 필히 재능의 소유자를 위험하게 만든다. 
 
[네 놈 은 뭐······.] 
 
쾅! 쾅! 콰아앙! 
 
간신히 장하영을 따라잡자, 장하영은 이미 처형관 하나와 난투극을 벌이는 중이었다. 장하영의 몸을 휘감은 투사의 불꽃이 처형관의 낫으로부터 장하영을 보호했다. 
 
[해당 포지션에게는 ‘표식’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처형관은 지금쯤 그런 메시지를 받고 있을 것이다. 
 
[이 런······ 너 는 설 마······.] 
 
하지만 깨달음은 너무 늦었다. 처형관을 압도하는 움직임으로 녀석의 낫을 제압한 장하영은, 능숙한 움직임으로 녀석의 목을 틀어쥐었다. 
 
[커 억······!] 
 
[투사]라고 해서 모두 저 정도의 전투력을 보여줄 수는 없다. 
고작해야 [처형관] 하나를 넘어서는 수준의 전력이 보통. 
그런데 지금 장하영은, [처형관]을 넘어서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오직, 장하영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목을 붙잡힌 처형관은 볼썽사나운 쥐새끼처럼 버둥거렸으나, 조금씩 죄어오는 장하영의 악력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내 우드득 하고 목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고, 처형관의 몸이 축 늘어졌다. 
파스스스스, 하고 흩어지는 처형관의 옷자락. 수십 년 동안이나 공단의 밤을 지배했던 존재라기엔 터무니없을 정도로 허망한 최후였다. 
 
[‘투사’에 의해 ‘처형관’이 사망했습니다.] 
[남은 처형관의 숫자 : 6] 
 
처형관에게 다친 공민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어두운 밤을 밝히는 장하영의 불꽃. 마치 눈부신 태양이라도 보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장하영은 태양이 아니었고, 지금은 여전히 밤이었다. 
 
“처, 처형관이 죽었다! 처형관이 죽었어!” 
“말도 안 돼! 지금은 밤이라고!” 
“투사가 나타났다!” 
 
투사라는 말에, 지금껏 집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오랫동안 [밤]의 그늘에 숨어 간신히 생을 연명했던 사람들. 
 
[공민들이 ‘혁명’의 열기에 감화됩니다.] 
 
그들이, 하나둘 집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장하영은 그런 사람들을 마치 지도자라도 되는 듯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등장인물 ‘장하영’이 ‘투사화’에 경도됩니다.] 
 
······이 자식은 자기가 혁명가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나는 손바닥으로 장하영의 뒤통수를 가볍게 때렸다. 
 
“읏······!” 
 
그제야 붉게 물들어가던 장하영의 눈빛이 조금씩 되돌아왔다. 
뒤늦게 고통을 인지한 장하영이 뒤통수를 부여잡은 채 나를 노려보았다. 
 
“아파! 왜 이렇게 세게 때려?” 
“정신 차리라고. 너까지 얼빠져 있으면 곤란해.” 
 
「“타오르는 것은 군중들이어야 한다. 수뇌부가 되는 사람까지 그 열기에 휩쓸리면, 혁명은 불씨를 제대로 지피기도 전에 맞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꺼질 것이다.”」 
 
111회차에 나오는 유중혁의 말이었다. 차마 내가 뱉기엔 부끄러운 대사라서, 속으로 생각만 하고 말았다. 
못마땅한 듯 나를 보던 장하영이 입술을 실룩였다. 
 
“처형관한테 당한 것보다 더 아프네.” 
“그럼 제대로 맞은 거야.” 
 
지금 장하영이 가진 힘은 시나리오에 한정된 힘, 그것도 [처형관]을 상대할 때에 한정된 힘일 뿐이다. 그런 힘에 도취되면 위험하다. 
멀리서 아일렌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서쪽에 둘! 남쪽에 하나! 나머지는 모두 북쪽에!” 
 
그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명백했다. 
 
“움직이자.” 
 
장하영이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밤하늘을 달렸다. 다시 앞서 나가는 장하영의 뒤를 보는데, 머릿속에서 메시지가 들려왔다. 
 
[‘제4의 벽’이 등장인물 ‘장하영’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십니다.] 
 
“쟨 안돼. 허튼 생각하지 마.” 
 
니르바나 때도 그랬고, 이계의 신격과 싸울 때도 그랬듯 역시 이번에도 ‘제4의 벽’은 장하영의 설화가 탐나는 모양이었다. 아마 정확히는 ‘장하영’을 향한 것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벽’을 향한 것이겠지. 
 
[‘제4의 벽’이 아쉬워합니다.] 
 
“저 벽이랑 친구하고 싶다며. 친구는 먹는 게 아냐 인마.” 
 
「라고 ‘제4의 벽’과 친구가 되고 싶은 김독자가 말했다.」 
 
이 자식이 진짜. 
 
“우와아아아아!” 
 
달려나오는 군중들의 아우성. 
 
“투사가 나타났다! 조금만 버텨라!” 
 
[처형관]을 향해 무기를 굳게 움켜쥔 몇몇 장정들이 하늘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공단]의 곳곳에서 마력의 불길이 튀어 올랐다. 
사람들이 맞서 싸우고 있었다. 
자신이 싸울 수 없는 상대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 
저들 중 누가 ‘혁명가’라고 해도, 나는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투사’에 의해 ‘처형관’이 사망했습니다.] 
[남은 처형관의 숫자 : 5] 
 
장하영이 또다시 한 명의 처형관을 쓰러트렸다. 
이제 남은 숫자는 다섯. 
모든 처형관이 죽게 되면, 공작은 더 이상 숨어있을 수 없게 된다. 
진짜 혁명은 그때부터 시작이다. 
 
“모두 죽여버려!” 
“우와아아아!” 
 
공민들이 용기를 내자, 처형관들의 기세가 조금씩 주춤했다. 어차피 [투사]를 제외한 누구도 밤의 [처형관]을 해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분위기다. 
 
[어 리 석 은······.] 
 
낫을 휘두르던 처형관이 장하영의 공격을 받았다. 
이미 두 명의 처형관이 사망한 시점이기 때문인지, 녀석은 장하영을 정면으로 상대하지 않았다. 마치 겁에 질리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을 격하고 달아나는 처형관. 
꽁무니를 빼는 놈을 보며 공민들이 함성을 질렀다. 
 
“놈들이 물러간다!” 
 
장하영은 공단의 낮은 지붕들을 밟으며 거주구 쪽으로 달아나는 처형관의 뒤를 쫓았다. 
모든 것이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오늘 ‘밤’도 무사히 지나갈 것이다. 처형관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공작은 강제로 [밤]을 회수하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김독자는 끝까지 방심하지 않았다.」 
 
마계의 역사에서 혁명을 코앞에 두고 죽은 ‘혁명가’는 셀 수도 없이 많다. 모든 [밤]이 물러가기 전까지, 혁명가는 끝까지 방심해서는 안 된다. 
설령 내가 가짜 혁명가라 해도 말이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책사 노릇을 하던 한명오는 내게 붙잡혔고, 낮에는 세 명의 처형관이 죽었다.」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었고, [공단]의 분위기는 급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작이 아무 작전도 없이 [밤]을 보낼 턱이 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세이스비츠 공작’이라면······. 
 
스가가가각! 
 
아니나 다를까. 
뒷덜미로 날아드는 스산한 기척에,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콰지지지직! 
 
허공을 날카롭게 베어 넘기는 네 자루의 낫이 지붕들을 반파시키며 지나쳤다. 
조금만 늦었어도 목 위가 사라졌을 것이다. 
 
······숨어있었나. 
 
장하영이 쫓던 처형관을 제외한 네 명의 처형관이 모두 나를 노리고 있었다. 첫째 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흉흉한 기운. [책갈피]로 [바람의 길]을 발동하고는 있었지만, 날아드는 공격들을 모두 피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경호관!” 
 
[누군가가 자신의 생명력을 사용해 당신을 경호합니다.] 
 
숨어있던 마르크가 나에게 ‘경호’를 걸어 주었다. 
이제 마르크의 남은 포인트는 두 개. 
내게 ‘경호’의 효력이 발동하고 있음에도, 처형관들은 길을 비키지 않았다. 
 
「순간 김독자는 생각했다.」 
 
마치 시간을 끌려는 듯한 움직임. 
나는 공작의 작전을 알아챘다. 
 
「공작은, ‘투사’가 나타날 것을 알고 있었다.」 
 
······장하영이 위험하다. 
나는 [바람의 길]을 이용해 바람을 응축시킨 후 뒤쪽에서 강력한 폭발을 만들었다. 
쏜살같이 쇄도하는 내 움직임에, 당황한 처형관들이 외쳤다. 
 
[막 아 라!] 
 
쿠콰콰콰콰! 
 
나는 ‘경호’와 [바람의 길]의 힘을 빌려 단숨에 처형관들의 방호벽을 돌파했다. 장하영은 아마 하나 남은 처형관을 뒤쫓아 갔을 것이다. 
그리고 예상컨대, 아마 그곳에는― 
 
“아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피를 뿌리며 날아 오르는 장하영이 보였다. 
빌어먹을, 이래서 아까 뒤통수를 때려줬던 건데. 
나는 바람을 컨트롤해 허공에서 떨어지는 장하영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야, 괜찮아?” 
“흐윽, 컥······.” 
 
입에서 피를 토하고 있었다. 
내상이 큰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전투를 지속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대체 누가 밤의 [투사]를 이 꼴로 만들었을까 싶었는데,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커다란 덩치의 [처형관] 하나가 보였다. 
 
[혁 명 가 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밤]의 [처형관]은 절대로 [투사]를 이길 수 없다. 
그런데 저놈은······. 
 
스스스슷. 
 
천천히 다가오는 처형관의 옷깃이 흩어지며, 고고한 악마종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제야, 나는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를 깨달았다. 장하영은 [처형관]의 힘에 당한 게 아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봤던 악마 남작이나 백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설화의 힘. 
나는 녀석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물었다. 
 
“머리를 좀 썼네. [처형관] 외의 복병을 넣을 줄이야······ 보아하니 공작 본인은 아니고, 후작쯤 되는 것 같은데. 맞나?” 
“내가 먼저 물었다. 네가 ‘혁명가’를 자처하는 녀석인가?” 
“맞아. 내가 혁명가야.” 
“건방진 말투군.” 
 
짙은 눈썹이 꿈틀거린 악마종이, 어쩐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후작 ‘오스테온’이다.” 
 
악마 후작 오스테온. 
세이스비츠 공작과 함께, 이 [공단]을 이끄는 두 명의 후작 중 하나. 
 
“하나가 더 있는 것 같은데.” 
“······눈썰미가 좋은 놈이군.” 
 
그 말과 함께 어둠 속에서 또 다른 악마종이 나타났다. 
그쪽은 [처형관]의 힘을 가진 것 같지는 않았다. 
 
“너도 후작이냐?” 
 
물음에 답한 것은 악마종 본인이 아니었다. 
 
“쿠, 쿠아르테토 후작이다!” 
 
공민들의 비명 속에서 인상을 찌푸린 쿠아르테토 후작이 달빛 아래 섰다. 
오스테온과 쿠아르테토. 
세이스비츠 [공단]을 이끄는 두 후작이 동시에 등장하자, 공민들은 완전히 공포에 질려버렸다. 
 
“으아아아······.” 
 
세이스비츠 공작은 확실한 것을 좋아한다. 
적의 정체를 확실히 모르니, 자신을 따르는 두 후작을 모두 내보냈을 것이다. 
 
“이런 귀한 시기에 귀찮은 일을 만들다니, 간이 큰 놈들이구나.” 
 
마치 귀찮은 뒤처리를 맡은 듯한 얼굴들. 
수백 년 씩 공단을 지배하며 이런 일을 종종 겪었을 테니,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다. 
이미 날 죽었다고 치기로 했는지, 두 후작은 내가 아니라 다른 공민들 쪽을 보고 섰다. 
 
쿠구구구! 
 
주변의 압력이 솟아오르며, 공민들이 동시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벌벌 떨며 숨을 죽인 화신들. 
그들을 향해, 후작들이 입을 열었다. 
 
“이것은 너희들이 받는 대가다.” 
 
[설화, ‘지배자의 언령’이 발동합니다.] 
 
후작들이 만들어 낸 언어의 칼날이 공민들을 겁박하고 있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말은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되어 공민들의 상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너희는 소중한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상상 속에서 공민들은 소중한 가족들을 잃었고. 
 
“평화로웠던 [밤]을 상실할 것이다.” 
 
평화로웠던 적 없는 시간을 모두 빼앗겼으며. 
 
“이 [공단]을 어지럽힌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지은 적 없는 죗값을 치렀다. 
 
“그것이, ‘혁명’의 의미다.” 
 
종언의 판결문처럼 떨어지는 문장들. 그 안에서 공민들은 허우적거렸다, 이제는 모두 끝이라는 투로 어깨를 부여 쥔 공민들이, 공포심 어린 눈으로 후작들을 올려다보았다. 그 상황이 만족스러운 듯, 후작들이 웃었다. 
 
“보아라! 너희들의 희망이 무너지는 모습을.” 
 
이 일을 지배체제를 공고히 할 기회로 삼기로 했는지, 연출이 과했다. 
비형이 저 꼴을 봤어야 하는데. 
내 쪽으로 돌아선 두 후작이, 나를 향해 동시에 ‘격’을 행사했다. 
 
쿠구구구! 
 
평범한 공민들이라면 당장에라도 겁에 질려 납죽 엎드릴 힘. 
하지만 모든 공민들이 바닥에 주저앉은 와중에도, 나는 멀쩡히 서 있었다. 
내가 멀거니 그들을 바라보자, 당황한 후작들이 다시 한 번 외쳤다. 
 
“보아라! 무너지는 모습을!” 
 
쿠구구구! 쿠구구구! 
 
몇 번이고 반복해서 ‘격’을 발출하는 후작들. 
겨우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전력을 다해야 하는 모양인지, 놈들의 이마에 핏대가 바짝 서 있었다. 
 
“무너지는······! 무너······! 음? 아니, 대체······?” 
 
나는 그런 후작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투사]가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처형관] 뿐. 
적들이 시나리오의 포지션이 아닌 본신의 무력을 활용하기로 했으니, 이쪽도 그에 응대할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겠지.」 
 
이번에 힘을 개방하면 화신체가 많이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후작’급을 상대하려면 어쩔 수 없다. 
최소한도로. 
그리고 최적의 효율로, 놈들을 없애야 한다. 
 
“너는······?” 
 
뭘 물을지 알았기에, 나는 미리 선수를 쳤다. 
 
“내가 누구냐고?” 
 
후작급은 강하다. 
하지만 아무리 강해봤자, 그것은 ‘화신’의 척도일 뿐. 
애초에 위인급 성좌에도 못 미치는 놈들인 것이다. 
천천히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한다. 
어쩐지 쑥스러운 기분이 든다. 
이제껏 ‘성좌’에 오르기만 했지,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으니까. 
 
[‘성좌’의 격을 발출합니다.] 
 
쿠구구구구구구!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한 ‘격’이 일대의 시공간을 짓눌렀다. 
 
 
 
 
 
< Episode 39. 정체불명의 벽 (6) > 끝

< Episode 40. 부화(孵化) (1) >
 
 
 
 
 
Episode 40. 부화(孵化) 
 
 
쿠구구구구! 
 
그런 기분은 난생처음이었다. 너무 엄청난 기분이라서, 나는 “나는 유중혁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잊어버린 채 그 감각에 집중했다. 
마치 수십 미터의 시공간 일대가 나를 향해 무릎을 꿇는 느낌. 이것이 성좌들이 느끼는 기분이었다. 
 
[당신의 화신체가 당신의 격을 표현하기에 부적합합니다.] 
 
임의로 그 수준을 조절했는데도 화신체에 엄청난 부담이 왔다. 
애초에 제대로 된 격의 발출도 아니었는데도. 
 
[화신체와의 부조화로 당신의 격이 일시적으로 조정됩니다.] 
[현재 당신의 격은 ‘위인급’입니다.] 
 
설화급 격은 어지간한 화신체로는 감당할 수 없다. 
위인급조차 심볼 형태로는 격을 유지하지 못하는데, 내 누더기 화신체로는 턱도 없다는 것쯤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그럼에도, 이 정도였다. 
 
“끅, 꺽, 커어억······!” 
 
고통스럽게 가슴을 쥐어뜯는 주변의 화신들. 
그 광경을 보고서야 나는 재빨리 격의 반경을 ‘후작들’에게로 한정했다. 반쯤 무릎을 꿇은 후작들은, 이미 넋이 나간 표정들이었다. 
 
[마계의 누군가가 당신의 존재를 감지했습니다.] 
[마계의 누군가가 당신의 존재를 감지했습니다.] 
[마계의 누군가가 당신의 존재를 감지했습니다.] 
 
정말 잠깐 격을 발출했을 뿐인데 무려 세 개나 되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마 가까운 마계의 마왕들이겠지. 
상관없다. 
어차피 녀석들에겐 언젠가 알려질 거였으니까. 
그리고 이 정도 격으로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를 것이다. 
 
[당신의 화신체가 당신의 격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스스스스스. 
 
등 뒤쪽의 설화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사각지대여서 후작들은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이, 이 기운은······.” 
“성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오스테온 후작이 비명을 질렀다. 
곁에 있던 쿠아르테토도 거의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보기 좋은 광경이었지만, 시간을 더 끌 수는 없었다. 
 
[당신의 화신체가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가진 ‘격’에 비해 전투력이 그리 높지 않다. 
그러니 내 격에 상대방이 기가 죽었을 때 끝내버려야 한다.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츠츠츠츠츠츠츳! 
 
그런데 왜일까. 
허공에서 튀어 오르는 스파크와 함께, 스킬이 강제로 종료되었다. 
 
[당신의 화신체가 해당 스킬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합니다.] 
 
······이런 빌어먹을. 
너무 서둘렀나? 
 
[개연성에 맞지 않는 힘을 사용하였습니다!] 
[‘추방자 패널티’가 가속화됩니다.] 
 
최근 전투 활동을 지속했으니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다. 
하지만 화신체의 붕괴가 생각보다도 훨씬 빨랐다. 
성좌의 힘을 발출하는 것의 부담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후작들도 슬슬 적응을 시작한 모양인지, 나를 향해 기세를 마주 끌어올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전설급 설화 하나 정도, 혹은 역사급 설화 다수를 보유하고 있는 녀석들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후작이니 <낙원>의 라인하이트 정도는 되는 녀석들이겠지. 
 
“성좌라고 해도 시나리오 안에서는 나를 죽일 수 없다!” 
 
게다가, 제법 영리하기까지 하다. 
 
스스스스슷. 
 
다시 [처형관]으로 변신한 오스테온 후작이 나를 향해 낫을 뽑아 들었다. 
유일한 [투사]인 장하영이 나가떨어진 상황. 
지금으로서는 놈을 죽일 방법이 없다. 
심지어 상황은 내게 더욱 안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추방자라고?” 
“······설마?”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설화 파편이 제법 많아졌는지, 결국 후작들도 눈치채고 말았다. 
스킬 제한으로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쓸 수는 없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저 녀석의 설화를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다친 맹수를 사냥하려는 하이에나들이, 조심스레 나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지원 병력을 불러! 시간만 끌면 놈은 홀로 자멸할 거다.” 
 
휘파람 소리와 함께 곳곳에서 다가오는 [처형관]들의 기척. 
추가 병력이 움직였는지, [공장] 쪽에서도 귀족들의 심상찮은 동태가 느껴졌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후작급을 해치우려면 최소 [전인화]를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스킬은 쓸 수 없다.」 
 
시간을 더 끌면, 내 화신체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공민들도 위험하다. 
 
「스킬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놈들을 죽여야 한다.」 
 
어떻게? 
 
「방법은 하나뿐이다.」 
 
마음을 먹은 내가 발을 내딛는 순간, 다가오던 오스테온 후작이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아아아악!” 
 
푸슈슈슈슛! 
 
바닥을 구르는 오스테온 후작의 팔. 처형관으로 화한 그는 통상 공격에 의해 타격을 입지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그렇게 방심하고 있으면 안 되지.” 
 
대체 언제 정신을 차린 것인지, 녀석의 배후에 선 장하영이 악당처럼 웃고 있었다. 아까의 상세를 고려하면, 믿을 수 없는 회복력이었다. 
 
[등장인물 ‘장하영’이 스킬 ‘불사지체 Lv.7’을 사용 중입니다.] 
 
······불사지체? 
그건 무림계통의 초재생 스킬인데? 
내가 다가가자, 시선을 받은 장하영이 변명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아까 채팅하던 사람들 중에 무림인이 하나 있었는데······.” 
 
부끄러운 듯 말꼬리를 흐리는 장하영을 보며, 나는 탄식했다. 
흑염룡이랑만 대화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군. 
그나저나 불사지체라면 ‘파천검성’의 것인데······. 
 
“모두 쳐라! 투사부터 죽여!” 
 
다시 [처형관] 상태를 해제한 오스테온 후작이 지원 병력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남은 네 명의 처형관과 더불어 몰려온 귀족들이 우리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백작 셋에 남작 다섯. 개중에는 처음 이곳에 왔던 날 봤던 남작 멜렌이란 녀석도 있었다. 
 
“저기다! 혁명가님을 구해라!” 
 
멀리서 격앙된 공민들도 우리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으나, 아직 그 숫자가 부족했다. 흉흉한 병장기를 꺼내드는 귀족들을 보며 안색이 창백해진 장하영이 물었다. 
 
“방법 없어? 난 얘들은 못 죽여.” 
 
[투사]는 [처형관]을 상대로는 최강이지만, 다른 모든 포지션에게 취약하다. 결국, 나머지는 내가 상대해야 한다. 
 
“너는 [처형관]만 처리해.” 
 
나는 장하영을 노리는 다른 귀족들을 막아섰다. 
무수한 창칼이 나를 노리고 날아들었으나, 나는 피하지 않았다. 
 
[현재 당신은 시나리오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나는 경호를 받고 있으니 결코 죽지 않는다. 
무리하지 않고 하나씩 차분히 처리해가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허공에서 메시지가 들려왔다. 
 
[‘지배자’가 강제로 ‘밤’을 회수하였습니다.] 
 
[지배자]. 
그것은 이 공단의 주인인 [공작]을 일컫는 포지션. 
 
[오늘 밤에는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밤의 시간은 끝났지만, 여전히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당신을 보호하던 시나리오의 힘이 사라집니다.] 
 
“놈의 경호가 풀렸다! 죽여버려!” 
“굉장한 설화를 가진 놈이다!” 
 
미리 예상했다는 듯 달려드는 귀족들을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머리 좀 쓰긴 했는데, 그거 실수야.” 
 
[밤]이 사라진 이상 [처형관]은 힘을 쓸 수 없다. 
그리고 [공단]을 이끄는 핵심 전력인 두 후작은 이곳에 있다. 
내가 오래도록 기다려온 상황이었다. 
 
“설화를 개방한다.” 
 
화신체가 불안정해 스킬을 쓸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싸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급 설화, ‘벌레 학살’을 이야기합니다.] 
 
지금 상태로 전설급 이상의 설화를 깨우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애초에 이런 녀석들을 상대로 ‘전설급’ 설화는 쓸 필요도 없었다. 
 
쿠구구구구구구! 
 
가진 ‘격’의 힘을 최고조로 활용하는 설화. 
언젠가 [암흑성]에서 텐타치오라는 악마 귀족이 사용했던 설화였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눈앞의 귀족들이 갑자기 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만 명의 약자를 학살한 대가로 얻는 [벌레 학살]. 
강자를 만나면 형편없이 취약해지는 설화지만, 약자를 상대할 때는 다르다. 
 
[당신보다 격이 낮은 모든 존재에게 절대적인 힘을 가집니다.] 
[해당 설화는 일정 수준 이하의 격을 가진 존재에게만 통용됩니다.] 
 
내 전신에서 배어나오는 무시무시한 기류에, 다가오던 귀족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마, 말도 안 되는······!” 
 
하지만 후회는 이미 늦었다. 
 
퍼걱! 퍼거거걱! 
 
검을 쓸 필요도 없었다. 나는 전신의 근육을 순식간에 팽창시킨 뒤, 오직 주먹만으로 귀족들을 모조리 때려잡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말 그대로 ‘학살’이었다. 
 
[역사급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역사급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설화들도 하나둘 내 손에 들어왔다. 
 
[당신의 화신체가 빠르게 붕괴하고 있습니다!] 
 
나는 순식간에 남작들의 몸에 바람구멍을 낸 후, 백작들의 머리채를 끌어당겨 터트렸다. 순식간에 전황이 뒤바뀌자, 주춤거리며 물러난 귀족들이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도망쳐라!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아니다! 빨리―!” 
 
몇몇은 놓쳤다. 하지만, 중요한 녀석들은 놓치지 않았다. 
 
“끄아아아악!” 
 
내게 뒷덜미를 붙잡힌 쿠아르테토와 오스테온 후작이 발버둥을 쳤다. 설화를 끌어 올리려는 기미가 보여서, 나는 망설이지 않고 두 녀석의 머리를 부딪친 후 양손으로 심장을 꿰뚫었다. 
 
“끄으어어어억······.” 
 
보다 본격적인 반항을 했다면 상황은 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내 ‘격’에 꺾여버린 후작들은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절명하고 말았다. 
 
[새로운 설화를 다수 획득하였습니다!] 
[악마 후작 ‘쿠아르테토’를 처치했습니다!] 
[악마 후작 ‘오스테온’을 처치하였습니다!] 
[새로운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후작 살해로 인해 마계에 당신의 악명이 퍼집니다!] 
[마계의 고위 귀족들이 당신에게 두려움을 느낍니다.] 
[업적 보상으로 50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소소한 수준의 보상이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지. 
주변을 돌아보자, 장하영과 나머지도 공민들도 상황을 정리해가는 중이었다. 살아남은 처형관과 귀족들이 공장 쪽으로 진을 친 채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당신의 화신체가 한계점에 도달했습니다.] 
[설화, ‘벌레 학살’이 강제로 종료됩니다.] 
 
순간 시야가 휘청하며 현기증이 찾아왔다. 
나는 [공장] 쪽으로 달아나는 잔당들을 향해 외쳤다. 
 
“남작 기라트, 남작 사라보스, 백작 모크바!” 
 
살아남은 [처형관]들의 이름이었다. 
한명오에게 미리 전해 들었던 처형관들의 이름. 
어차피 지금은 장하영도 나도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 녀석들을 쫓거나 상대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녀석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나는 너희의 정체를 모두 알고 있다. 
네가 누구고 어떤 포지션인지. 
그러니, 너희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살아 생전 처음으로 협박을 당한 처형관들이 몸을 떨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공작에게 전해라.”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마계의 하늘에 새벽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너울지는 그림자들 속에서 나는 천천히 말을 맺었다. 
 
“[낮]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우라고.” 
 
설화의 붕괴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귀족의 잔당들이 공장 쪽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의식을 잃지 않았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혀, 혁명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하나 둘 사람들이 혁명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들을 들으며, 나는 ‘혁명가’ 파트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던 문장을 떠올렸다. 
 
「밝아오는 새벽빛 속에서, 비로소 멈춰 있던 공단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오랫동안 [밤]에 잠들어 있었던 사람들의 분노와 절규. 
너무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기에, 그런 것이 있는 줄조차 몰랐던 감정들이 하나 둘 깨어나고 있었다. 
 
“혁명가! 혁명가!” 
“유중혁! 유중혁!” 
 
[당신의 영향력이 ‘진짜 혁명가’의 영향력을 넘어섰습니다.] 
[설화 생성 조건을 만족하여 설화를 획득합니다.] 
[새로운 설화, ‘은막의 혁명가’가 시작됩니다!] 
 
비형이랑 성좌 녀석들이 이 광경을 봤어야 하는데, 아깝다. 
그랬더라면 코인을 한다발로 받았을 텐데. 
그런데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가 들려왔다. 
 
[당신의 ‘설화’에 ‘도깨비의 알’이 반응합니다.] 
[‘도깨비의 알’이 당신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품 속의 진동이 강해진다 싶더니, 이윽고 들려오는 메시지. 
 
[알의 부화가 임박했습니다.] 
 
쩌저저적, 하고 갈라지는 균열 소리를 들으며, 나는 때가 왔음을 알았다. 
하긴, 이 무대에 다른 도깨비는 필요 없다. 
애초에 이 무대를 이야기 할 도깨비는 정해져 있으니까. 
 
[마계에 임시 채널이 생성됩니다.] 
 
마계 시나리오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임시 채널에 입장하였습니다.] 
 
 
 
 
 
< Episode 40. 부화(孵化) (1) > 끝

< Episode 40. 부화(孵化) (2) >
 
 
 
 
 
갑자기 숨이 확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지금껏 테이프로 내 입을 막고 있다가 주욱 뜯어낸 기분이랄까. 
 
[성좌, ‘구원의 마왕’이 ‘세이스비츠 공단’을 바라봅니다.] 
 
시야가 넓어지며, 화신체로는 볼 수 없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서 본 [공단]은 거대한 원형의 돔을 닮아 있었다. 중심부에 위치한 [공장]을 중심으로 퍼진 원형 도시. 그 도시의 화신들이 모두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건······!” 
“채널이다! 채널이 열렸어!” 
 
아마 임시 채널의 개방 메시지가 그들에게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도깨비들이 온 거다! 드디어 우리 마계도 주목을 받는 거야!” 
 
마치 감격이라도 한 듯한 얼굴들. 
그럴 법도 했다. 
이곳은 시나리오에서 외면당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까. 
한때 성좌들과 코인을 증오했던 화신들은, 마계에 와서 누구보다도 그것들을 그리워하는 존재가 되었다. 
 
“야! 괜찮아? 너도 방금 메시지 들었어?” 
 
나는 장하영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자리에 섰다. 
 
[임시 채널 입장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화신체의 붕괴가 지연됩니다.] 
 
안도의 한숨이 놓였다. 
채널은 이야기의 핵심을 구성하는 중요한 장치다. 
실제로 채널 입장만으로도 전신의 설화들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물론 추방자 신세를 완전히 면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걸로 어느 정도 시간은 벌 수 있겠지. 
 
[설화 붕괴를 막기 위해 메인 시나리오에 진입하세요.] 
 
추방자인 내가 메인 시나리오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결국 ‘진짜 혁명가’를 죽여야만 한다. 
나는 시험 삼아 부서지던 팔과 다리를 매만져 보았다. 
다행히 아직 핵심 설화는 무사한 듯했다. 망가진 부분이야 어떻게든 수선하면 된다. 
 
[현재 화신체의 설화 훼손이 심각합니다.] 
[수선을 위해 새로운 설화가 필요합니다.] 
 
아직 목록 확인은 제대로 못했지만, 귀족들에게서 빼앗은 설화들이 다수 있었다. 
대부분은 역사급이었고, 전설급도 하나쯤 섞여 있었던 것 같은데. 
어쨌거나 임시 채널이 닫히기 전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나는 멀리서 다가온 아일렌을 향해 물었다. 
 
“다친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아요.” 
 
아일렌의 표정이 어두웠다. 얼핏 둘러봐도 바닥에 드러누운 사람들이 수십을 넘었다. 치명상을 입은 공민들도 다수 있는 것으로 봐서, 상당수는 오늘을 넘기기 힘들어 보였다. 
 
“도깨비 보따리.” 
 
내 말과 함께 허공에 익숙한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이게 없어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른다. 
돈이 있는데도 못 쓰는 부자의 기분이 이런 거겠지. 
나는 그간 쓸만한 물건들이 들어왔는지를 간단히 점검한 뒤, 3만 코인 정도를 지출해 ‘엘라인 숲의 정기’를 다량 구입했다. 
 
“이걸 사람들한테 나눠줘.” 
“이, 이건······ 이걸 대체 어떻게 구하신 거죠?” 
“자세한 건 묻지 말고.” 
 
깜짝 놀란 아일렌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정기를 받아들었다. 
놀라기도 하겠지. 엘라인 숲의 정기는 오직 ‘도깨비 보따리’를 통해서만 구할 수 있는 물건이니까. 채널이 없는 마계에서는 귀품일 수밖에 없다. 
 
[임시 채널의 지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품 속에서 [도깨비의 알]을 꺼냈다. 알의 표면에는 실금이 가 있었다. 
부화의 징후. 
임시 채널은 아기 도깨비들에게 있어 일종의 태동(胎動)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숨쉬기 연습이랄까. 
 
쩌저적. 
 
가볍게 알을 쓰다듬자, 껍질 안쪽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곧 ‘도깨비의 알’이 부화합니다!] 
[건강한 설화를 섭취시키세요.] 
 
나는 재빨리 설화 파편들을 몇 개 꺼내 알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알이 부르르 떨며 뀨륵, 하는 소리를 토했다. 
 
[‘도깨비의 알’이 만족합니다.] 
[‘도깨비의 알’이 부모의 온기를 원합니다.] 
 
정말 까다로운 녀석이다. 
그러고 보니, 비형이 당부한 말이 있었다. 
 
―혹시 알이 부화할 때를 대비해서 말해주는 건데, 부화 직전이 되면 꼭 알을 품어줘야 해. 
―뭐? 왜? 
―나도 확실히는 몰라. 근데 그렇게 해야 건강한 도깨비가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래서 우리도 다 그렇게 해. 
 
도깨비가 그런 미신을 믿는다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세계에서 ‘미신’이라는 게 존재나 할까 싶기도 했다. 모든 설화가 현실이 되는 세계니까. 
 
나는 멀찍이 떨어진 [공장] 쪽을 바라보았다. 
 
두 명의 후작이 죽었으니, 세이스비츠 공단은 이제 완전히 혁명의 길로 접어들었다. 양팔을 꺾어 놓은 데다 마지막에 경고도 제대로 해뒀으니, 이제 [공장] 쪽에서도 경거망동하지 못할 것이다. 
나도 어차피 지금 몸 상태로는 녀석들과 대적하기 무리니까······ 뭐 이 정도면 며칠은 버티겠지. 
 
“아일렌. 지금부터 공민가를 폐쇄해.” 
“네?” 
“어차피 당분간 귀족들은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러니 이쪽도 쉬면서 준비를 좀 해보자고.” 
 
나는 점점 태동이 심해지는 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공작]만이 문제가 아니다. 
채널이 열리면 진짜 괴물들이 나타날 테니까. 
그때까지, 몇 가지 준비를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 
 
 
나는 일행의 도움을 받아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을 의원실 안에 마련했다. 내 몸 상태를 점검하던 아일렌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했다. 
 
“오늘 하루는 움직이지 마세요.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니까.” 
“알겠어.” 
“건성으로 말하지 마세요. 당신 정말 죽을 뻔했다고요. 역사급 설화를 다섯 개나 수선용으로 쓰다니,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정말 가성비가 좋지 않은 몸이다. 
설화를 덕지덕지 발라야 간신히 살아날 수 있다니.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 
 
“아직 전설급 설화도 있으니 괜찮아.” 
 
나는 아까 후작 하나를 죽이고 획득한 ‘전설급 설화’를 확인했다. 
 
[전설급 설화 ‘주사위의 신’을 보유 중입니다.] 
 
전설급 설화 ‘주사위의 신’. 
참고로 ‘멸살법’에 따르면 이 설화는 대충 이런 느낌이다. 
 
「‘도박의 제왕’이 가지고 있던 설화 중 하나. 이 설화의 주인은 첫 번째로 던진 주사위의 눈금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끔 왜 ‘전설급’ 설화가 된 건지 알 수 없는 녀석들이 있다. 전설급 안에서도 격이 나눠진다 해도, 어떻게 이런 설화가 내 ‘왕이 없는 세계의 왕’과 동급이라는 건지······. 
아일렌이 어이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전설급’을 수선용 파편으로 쓰겠다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진 건지는 알고 있는 건가요?” 
“······.” 
“아니, 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있었던 거예요? 말로만 듣던 ‘이야기의 가호’가 따르기라도 하는 건지······.” 
 
이야기의 가호라······. 
그거, 도깨비들이 자주 쓰는 인사말이었지. 
 
“잔소리는 그만. 어차피 이 녀석 때문에 오늘은 못 움직이니까.” 
 
나는 품속의 알을 매만지며 말했다. 
앞으로의 모든 계획은 이 녀석이 잘 부화해야 실행할 수 있다. 
내 품속을 유심히 바라보던 장하영이 물었다. 
 
“그거 뭔데?” 
“알이야.” 
“알? 무슨 알?” 
“도깨비 알.” 
 
내 말에, 장하영을 비롯한 일행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뭐? 진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을 내려다보았다. 
 
웅웅. 
 
알에서 간간이 태동이 발생할 때마다 ‘임시 채널’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현재 채널에 입장한 성좌 : 1명] 
 
지금은 외로운 숫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채널은 포화상태가 될 것이다.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다. 
 
“잠깐만! 이거 진짜 도깨비 알이라고? 농담 아니고?” 
“농담으로 보여?” 
“······혹시 채널이 열린 것도 이 녀석 때문이야?” 
“그래.” 
 
어안이 벙벙해져서 입만 뻐끔거리는 장하영과 달리, 아일렌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깐만요, 이게 정말 도깨비라면······.” 
“마계에도 기회를 주려는 것뿐이야. 언제까지 공단의 노예로 머물 수는 없잖아.” 
 
슬그머니 깨문 아일렌의 입술에서 오기가 느껴졌다. 사실,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구태여 그 마음을 지적했다. 
 
“다음 시나리오가 더 최악일까봐 두려운 거야?” 
 
시나리오의 다음에는 언제나 시나리오가 기다리고 있다. 
이것보다 나을지, 아니면 더 최악일지 알 수 없는 시나리오가. 
아일렌은 인정하기 싫다는 투로 말했다. 
 
“최선이 없는 세상이니까요.” 
“불확실한 차악만을 택하는 삶이 더 최악이 아닐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혁명을 일으켜준 건 무척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당신은······!” 
 
거기까지 말하던 아일렌은 순간 말을 멎은 채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 짧은 마주침에서 그녀가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당신은 대체 뭘 위해 이렇게 하는 거죠?” 
 
다만, 그녀는 그렇게 물었고. 
 
“어떤 이야기의 결말을 보고 싶어서.” 
 
나는 언제나처럼 대답했다. 
 
“그건······ 시나리오의 끝에 도달하겠다는 이야긴가요?” 
“비슷해.” 
 
그러자 아일렌이 중얼거렸다. 
 
“종말의 구도자······.” 
“······?” 
“고향 행성의 성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모든 이야기의 ‘마지막’을 추구하는 성좌들이 있다고.” 
 
‘종말의 구도자’라. 
그러고 보니 <스타 스트림>에는 그런 녀석들이 있었지. 
아직은 본격적으로 움직일 시기가 아닌데, 아일렌의 고향에서는 벌써 이야기가 돌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일렌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그 사이 장하영이 입을 열었다. 
 
“근데 얘도 ‘도깨비’면 결국 우리가 아는 그 녀석들처럼 되어버리는 거 아냐?”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도깨비라고 모두 똑같은 이야기꾼이 되는 건 아니니까.” 
“하긴,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지. 근데 이 알은 어떻게 구한 거야? 혹부리들도 이런 걸 갖고 있다는 얘긴 들어본 적 없는데.” 
“그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망설이는데, 문득 곁을 보니 한명오가 나와 알을 번갈아 보며 묘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말 못 할 고충이 있었나 보군. 출산은 괴로운 일이지.” 
“······뭔가 오해하는 것 같아서 말해두는데, 내가 낳은 게 아닙니다.” 
“이해하네.” 
 
아무래도 불편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았다. 
나는 마왕의 저주 따윈 받은 적 없다고 제대로 설명을 하려는 순간. 
 
토도돗. 
 
알의 균열이 강해지며,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도깨비의 알’의 부화가 임박했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스타 스트림>이 새로운 이야기꾼의 탄생을 지켜봅니다.] 
 
그 순간만큼은 한명오도, 마르크도, 장하영도, 아일렌도, 그리고 나도 똑같은 마음으로 알을 깨고 나오는 생명체를 내려다보았다. 생명의 탄생에는 그처럼 경이로운 데가 있다. 
부서지는 껍질 사이로 슬그머니 보이는 조그만 등. 새하얀 솜털이 덮인 그 등을 보며, 장하영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나 도깨비 진짜 싫어하는데. 이렇게 보니까 또 느낌이 다르네.” 
 
하지만 이 탄생은, 그렇게 축복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태어난 도깨비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었다. 
마치 자신이 이곳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괴롭다는 듯이. 
나는 언젠가 ‘멸살법’에서 ‘도깨비 왕’이 말했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들어라. 탄생과 함께 운명을 부여받아,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사랑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가엾은 존재들아.”」 
 
막 태어난 도깨비가 울고 있었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야 했고, 이런 세상에도 이야기가 있고, 자신은 그것을 사랑하며 살아가야만 하므로. 
 
그래,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어. 
그러니 나를 원망해. 
 
[아기 도깨비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아기 도깨비가 당신을 부모로 인식합니다.] 
[아기 도깨비의 영혼이 당신과 교감합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래 기다렸어, 아저씨. 
 
 
 
 
 
< Episode 40. 부화(孵化) (2) > 끝

< Episode 40. 부화(孵化) (3) >
 
 
 
 
 
시공간의 흐름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장하영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움직였고, 목소리는 심하게 분절되어 정상적인 형태로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세상 전체가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는 듯한 광경. 
 
「김독자는 깨달았다. 이것이 ‘도깨비’의 시간이구나.」 
 
수많은 채널을 동시에 관리하고 판단하기 위해, 도깨비의 인지 속도는 다른 생명체들에 비해 월등히 빠르다.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보송보송한 털이 자라난 아기 도깨비 위로, 희끄무레한 빛의 구체가 떠있었다. 일전에 본 적이 있는 구체. 그것은 신유승의 영혼이었다. 
 
‘오랜만이다, 유승아.’ 
 
구체 속에서 반투명한 빛이 일렁이더니, 언뜻 사람의 실루엣 같은 것이 비쳤다. 
세계를 구하겠다는 마음과, 유중혁에 대한 신의로 먼 차원을 건너온 존재. 
41회차의 신유승이 내 눈앞에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당신은 도깨비의 알을 품은 최초의 인간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도깨비의 아버지’를 획득하였습니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신유승이 말했다. 
 
―사과하지 마. 내가 선택한 거잖아. 
 
‘그래도 미안해.’ 
 
―아저씨 대단하더라. 41회차의 대장도 아저씨 정도는 아니었어. 
 
‘아직 약과야. 해야 할 일도 많이 남았고.’ 
 
―내 도움이 필요한 거지? 
 
고개를 끄덕이자, 신유승이 옅게 웃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잘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도와줄게.’ 
 
시나리오의 가장 밑바닥에 도달해 본 자만이 시나리오의 무게를 안다. 
내가 41회차의 신유승을 믿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이 신유승이 나를 믿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41회차의 대장은 실패했어. 
 
신유승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앞으로 더 끔찍한 일들을 겪게 될 거야. 
 
‘그렇겠지.’ 
 
―지금까지의 아저씨가 상상하지도 못한 것들이 기다릴 거라고. 
 
‘네가 같이 갈 거야.’ 
 
신유승은 잠시 침묵했다. 
내 말의 의미를 헤아리는 것 같기도 했고, 지난 세월의 깊이를 어림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그녀에겐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윽고, 신유승이 입을 열었다. 
 
―나, 완전히 태어나고 나면 곧바로 아저씨를 떠올리진 못할 거야. 
 
‘알아.’ 
 
―멍청하게 굴어도 너무 놀리지 마. 
 
‘노력할게.’ 
 
피식 웃는 음색이 곱다. 
잔잔한 음악 같은 침묵 속에, 신유승이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시나리오에 대해 좋은 기억은 거의 없어. 
 
무심했지만, 무심했기에 진심이 담긴 말.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멸살법’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내가 아는 ‘신유승’의 이야기들. 
백 개의, 천 개의 문장이 더 있더라도 온전히 설명될 수 없던······. 
 
―그래도, 내가 아직 뭔가를 더 이야기해야 한다면······. 
 
그 말을 하기 위해 고민해야 했을 시간을 나는 모른다. 
아무리 ‘멸살법’을 많이 읽었어도, 설령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속내를 읽을 수 있다고 해도, 나는 41회차의 신유승이 겪어온 시간과 그 시간으로 인해 감당해야 할 고통을 알지 못한다. 
 
―이번에는 아저씨를 위해 이야기할게. 
 
그렇기에, 그녀의 대답에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보잘 것 없는 경외 뿐이다. 
 
‘고맙다.’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환하게 빛나며 떠오르는 문자열들과 함께, 인지 시간의 흐름이 점차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73번째 마계 최초의 채널이 열렸습니다.] 
[채널명 : #BI-90594] 
 
분절된 소리들이 다시 들러붙으며, 장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 이름은 뭐라고 지을 거야?” 
 
······뭔 말을 하나 했는데, 그거였나. 
안 그래도 이름 때문에 많이 고민했다. 
아기 도깨비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눈을 들여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채널 관리자 : 비유(譬喩)] 
 
자신의 이름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아기 도깨비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솜털이 돋은 작은 손에 내 손가락을 쥐어주자, 그것을 잠시 옴지락대던 아기 도깨비가 이내 나를 향해 배시시 웃어보였다. 
 
 
* 
 
 
신유승은 울고 있었다. 
서울 돔에서 탈출한 후, 종종 있는 일이었다. 
고단한 하루가 끝나고 잠에 빠져들 때나, 멍하니 ‘특성창’을 열어놓고 자신의 ‘배후성’ 칸을 바라볼 때도. 
신유승은, 알게 모르게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그런 신유승에게 핀잔을 퍼붓는 것은 언제나 이길영이었다. 
 
“야. 또 왜 울어. 독자 형은 어른스러운 거 좋아한다고.” 
 
그 말에 신유승이 붉어진 눈을 작게 부라렸다. 
 
“저리 꺼져!” 
“형 금방 돌아올 거야. 너도 봤지? 나한테 인사 남긴 거. ‘다시 만나자, 이길영.’” 
“아저씨는 그런 말 한 적 없거든?” 
“나한테 말했어! 분명 들었다니까?” 
 
뒤쪽에서 이야기를 듣던 이지혜가 피식거리자, 이길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뭘 웃어요?” 
“귀여운 것.” 
 
신유승과 이길영, 그리고 이지혜는 열두 번째 시나리오의 재앙으로 출현한 괴수들을 해치우고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이었다. 
일행들과 다시 조우하기로 약속한 장소는 성남시. 
이 부근에서 재회하기로 했으니, 곧 다른 일행들도 곧 모여들 것이다. 
이지혜와 이길영이 티격대는 사이, 신유승은 자신의 특성창을 열어보았다. 
 
[배후성과의 연결이 끊겼습니다.] 
 
서울 돔에서 벗어난 직후, 신유승의 특성창에는 늘 그런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신유승의 침울한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길영이 또 한 마디를 했다. 
 
“야, 이 동전 잘 봐.” 
“······뭔데?” 
“이 동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독자 형 살아 있는 거.” 
 
이길영이 꺼내든 100원짜리 동전을 보며 신유승이 입술을 내밀었다. 
 
“그거 전에도 했잖아.” 
“그래도 또 해보자는 거지.” 
“······하면 뭐해. 앞면 나온다고 아저씨가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동전 던지기. 
그것은 신유승과 이길영이 불안해질 때마다 하는 놀이였다. 
 
“지금까지 독자 형이 몇 번 죽었지?” 
“······41번.” 
“살았던 건?” 
“59번.” 
 
동전의 앞면이 나오면 김독자는 살아 돌아올 것이고, 동전의 뒷면이 나오면 김독자는 죽을 것이다. 
이야기를 듣던 이지혜가 어이없다는 투로 물었다. 
 
“너네 진짜 아저씨가 살아 있길 바라는 거 맞아?” 
 
이길영이 허공으로 동전을 튕겼다. 
거의 동시에, 세 사람의 시선이 동전을 따라 움직였다. 핀잔을 주던 이지혜도 어느새 집중해서 동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땡그랑, 하고 바닥에 떨어진 동전이 바닥에서 팽그르르 돌았다. 
세 사람은 숨을 죽인 채 동전을 노려보았다. 
앞면, 뒷면, 앞면, 뒷면. 그리고······. 
 
“앞면이다! 것봐, 내가 뭐랬어?” 
 
자신만만한 이길영의 목소리와 함께, 동전은 이순신 장군의 초상이 그려진 앞면에 멈췄다. 
별 생각이 없던 이지혜조차 그 결과에는 미미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이지혜는 저 결과가 ‘확률’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츠츠츠츳. 
 
[성좌, ‘해상전신’이 개연성을 소모합니다.] 
 
이지혜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최근에 배후성이 힘이 많이 빠졌다 싶더니, 이런데 개연성을 낭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걸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성좌, ‘해상전신’이 안타까운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희망을 가지고 싶은 것은, 어쩌면 성좌들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렇게 되고 보니 이지혜는 문득 이 장난에 어울려주고 싶어졌다. 
이지혜는 떨어진 동전을 주우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 살아있는 건 알겠으니까, 이제 다른 거 걸고 해보자.” 
“응? 뭐요.” 
 
그녀가 끼어든 게 못마땅한 모양인지 이길영이 데면데면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지혜는 계속해서 말했다. 
 
“독자 아저씨는 널 더 좋아할까. 아니면 유승이를 더 좋아할까?” 
“당연히 나지!” 
“뭐래. 가터벨트 사건 잊었어? 내 호감도가 더 높았다고.” 
“야! 그건······.” 
 
뒤쪽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15살 여중생이야!” 
 
그 목소리의 주인은 신유승도, 이지혜도, 당연하지만 이길영도 아니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두 여자가 보였다. 
과천의 괴수종들을 퇴치하고 돌아오는 한수영과 유상아. 
이지혜는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았다. 
 
“15세 여중생이라고. 그 자식이 내 흑염룡한테 그딴 소리를 하고 스킬을 뜯어 갔단 말이야!” 
 
이지혜와 아이들이 그쪽으로 다가가려는 순간, 수원 방향에서도 한 여인이 나타났다. 긴 장도를 허리에 멘 호리호리한 여자. 
 
“그게 무슨 얘기에요?” 
 
수원 쪽 정리를 맡았던 멸악의 심판자 정희원이었다. 
 
“희원 언니!” 
 
이지혜가 반색하며 정희원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정희원의 상세는 좋지 않았다. 입고 있던 방어구는 상당 부분 파손되어 있었고, 허벅지와 팔뚝에도 자상이 가득했다. 정희원의 전투력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상처였다. 이번 괴수종은 그렇게 강한 편이 아니었으니까. 
 
“엇, 괜찮아요? 우리 쪽이랑은 다른 괴수가 나왔었나?” 
“그건 아니고, 성흔에 문제가 좀 생기는 바람에.” 
“성흔요?” 
 
뭔가를 설명하려던 정희원은 가볍게 도리질을 했다. 
대신 그녀는 다시 한수영 쪽을 바라보며 채근하듯 물었다. 
 
“그보다 한수영 씨, 방금 얘기 좀 계속 해보세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정희원의 관심이 달가웠는지, 한수영은 곧장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이지혜가 상황을 정리했다.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는데······ 누가 15세 여중생인데요?” 
 
사람들의 시선이 한수영에게 쏠렸다. 이걸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잠깐 횡설수설하던 한수영은, 이내 약간은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김독자, 살아 있어.” 
“뭔 결론이 그래요? 그러니까 왜······.” 
 
누가 들어도 한수영의 이번 추론은 비상식적인 데가 있었다. 
그때, 정희원이 말 꼬리를 빼앗았다. 
 
“15세 여중생이랑 김독자 씨가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 같지는 않군요.” 
 
이지혜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언니 지금 저 사람 말 이해한 거예요? 새로운 스킬이라도 배웠어요?” 
“그건 아닌데, 내 생각에도 독자 씨가 살아 있는 것 같아서 그래.” 
 
정희원의 말에 일행이 동시에 숨을 삼켰다. 
김독자가, 정말로 살아 있다고? 
정희원은 상처가 고통스러운지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저, 갑자기 성흔을 쓸 수 없게 됐어요.” 
“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었다. 
정희원이 성흔을 쓸 수 없는 것과, 김독자의 생사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정희원은 곧바로 그 의문에 대답했다. 
 
“내 배후성이 갑자기 사라졌거든요.” 
“배후성이요?” 
 
고개를 끄덕인 정희원은 자신의 특성창을 바라보았다. 
 
[배후성과의 연결이 끊겼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보는 메시지. 덕분에 그녀는 당분간 배후성의 힘을 빌릴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메시지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찾았다, 김독자. 
 
 
* 
 
 
그리고 그 시각, ‘73번째 마계’에 한 남자가 도착했다. 
 
[16번째 개인 시나리오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해당 시나리오에는 시간 제한이 걸려 있습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반드시 메인 시나리오 지역으로 복귀하세요!] 
 
포탈을 넘어 발을 내딛는 순간, 펼쳐진 것은 황량한 이야기의 지평선과 설화 파편의 쓰레기산이었다. 잠시 눈살을 찌푸린 채 그 광경을 보던 유중혁이 물었다. 
 
“······진짜 여기가 맞는 건가?” 
 
그러자 그의 어깨에 앉아 있던 조그만 천사 인형이 머리를 꼼지락거렸다. 
 
“꼭 이딴 장난감으로 대답해야 하나?”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아직 여기는 채널이 없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 Episode 40. 부화(孵化) (3) > 끝

< Episode 40. 부화(孵化) (4) >
 
 
 
 
 
조그만 상징체로 잘도 종알대는 인형의 모습에, 유중혁의 미간 주름이 한층 짙어졌다. 
 
“······채널이 없는데 어떻게 간접 메시지를 보내는 거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상징체가 화신과 접촉해 있으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엘의 인형 상징체는 유중혁의 어깨 위에 찰싹 매달려 있었다. 유중혁은 손가락으로 상징체를 슬쩍 밀어내며 물었다. 
 
“이런 짓을 해도 괜찮은 건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도깨비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말합니다.] 
 
“아니, 도깨비 말고 네놈 말이다.” 
 
우리엘은 일순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유중혁은 말없이 인형의 곁을 가리켰다. 
 
츠츠츠츳. 
 
조그만 고개를 갸웃하던 인형이, 그제야 깜찍하게 눈을 뜨더니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폭 막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화신 '유중혁'의 마음씨에 크게 감동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실은 조금 괴롭다고 말합니다.] 
 
아까부터 우리엘의 상징체에는 미약한 스파크가 흐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계]는 대천사인 그녀에게는 금역이었던 까닭이다. 
마계는 마왕들의 영역. 
부자연스런 위험을 감수하는 만큼, 우리엘로서도 개연성의 소진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팔뚝에 찰싹 들러붙은 우리엘을 다시 떼어내며 유중혁이 물었다. 
 
“너는 왜 이렇게까지 김독자를 찾는 거냐?”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그러는 너도 마찬가지지 않냐고 묻습니다.]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사실, 본래였다면 ‘마계’는 지금 시점에 절대 오지 않았을 장소였다. 
이곳의 난이도는 같은 차수의 다른 시나리오들과는 비교도 안 되니까. 
그나마 위안인 것은 이곳이 기성 마계가 아니라 신생인 73번째 마계라는 점이었다. 마왕은 없고, 아마 마계의 지배자들은 기껏해야 공작일 것이다. 그 정도라면 해 볼 만 했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자신은 이전 회차의 같은 시기보다 훨씬 강해졌으니까. 
 
“나는 그냥 나를 사칭하는 녀석이 있다는 게 마음에 안 들 뿐이야. 그게 김독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히죽 웃습니다.] 
 
“그리고 마계에는 쓸만한 아이템들도 많고······.”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히죽히죽 웃습니다.] 
 
“한 번만 더 히죽거리면 몸통을 찢어버리겠다.” 
 
고개를 돌린 유중혁이 지평선의 드넓은 정경을 응시했다. 
아마 이 황량한 세계의 어딘가에 놈도 있을 것이다. 
세계를 고요히 둘러본 유중혁이, 마침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세이스비츠의 [공장]. 
평소보다 스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공작의 집무실에서, 백작 시로크는 진땀을 흘리며 보고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혁명으로 인한 소요로 당분간 공단 내외의 출입을 통제할 계획입니다.” 
 
코앞에서 길로바트 측 사절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시로크는 몇 번이나 가슴이 내려앉았다. 말이 길로바트의 사절이지, 사실 눈앞의 사내는 사절단장이나 맡고 있을 급이 아니었다. 
 
폭렬의 옴브로스. 
 
길로바트 공단의 후작이자, 73번째 마계에서 다음 공작 후보로 가장 유력하게 손꼽히는 존재. 옴브로스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화마(火魔)를 감지한 시로크가 숨을 히끅거렸다. 집무실의 창가에 서서 한가롭게 밖을 보는 세이스비츠 공작이 없었더라면, 시로크의 목은 진즉에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하여, 길로바트의 사절들께서는 한동안 이곳에 머물러주시기를 간곡히 청하는 바입니다.” 
“할 말은 끝났나?” 
“예, 옙! 저, 저는 그럼 이만······.” 
 
시로크가 황급히 집무실의 문을 열고 달아난 뒤, 옴브로스 후작은 심기를 다스리기 위해 한동안 숨을 씩씩 몰아쉬었다. 귀찮은 상황이었지만 평소 성격대로 다 뒤집어 엎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뒤에는 지금 73번째 마계의 최강을 자처하는 ‘세이스비츠’가 있었으니까. 
한동안 창밖을 내다보던 세이스비츠 공작이 능글맞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됐다는군.” 
“······저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안 됐지만 자넨 못 나가겠네. 당분간 [세이스비츠]에 머무르며 사태를 지켜보게.” 
 
그 말에 결국 옴브로스가 터졌다. 
 
“······지금 그 발언은 외교 문제로 번질 수 있습니다만?” 
“너무 예민하군. 동맹 공단의 사절에 대한 보호 조치일 뿐이야.” 
“그깟 혁명가 하나 때문에 말입니까?” 
“처형관 일곱이 죽고 후작 둘이 죽었네. ‘그깟’이라고 말할 시기는 지난 셈이지.” 
 
‘혁명가 시나리오’는 공단 내의 모든 처형관이 사망하는 순간 마지막 페이즈로 돌입한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자면 지금 세이스비츠 공작은 위기에 처한 셈이었다. 하지만 말하는 것과 달리 세이스비츠 공작의 표정에서는 그다지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모순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옴브로스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하필 이런 시기에 혁명가가 나타나다니······ 조금은 체면이 구겨지셨겠군요, 세이스비츠 공작님.” 
“그래? 나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데. 세이스비츠에서 혁명가가 나온 건 30년 만이거든. 가끔 이런 이벤트라도 있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어.” 
“성좌들이나 할 법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건가? ‘이야기’는 성좌들만의 것이 아닐세.” 
 
보통의 화신이 그런 말을 했다면 옴브로스는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세이스비츠 공작에게는 그런 얘기를 할 만한 자격이 있었다. 저 드높은 하늘의 ‘설화급 성좌’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세이스비츠는 무려 400년 동안이나 이곳 73번째 마계에서 설화를 쌓은 괴물이었다. 
 
“마왕 선발전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최대한 많은 설화를 쌓아두는 것이 좋아. 강력한 혁명가가 나타날수록 나로서는 기꺼운 일이지.” 
 
혹시나 자신이 ‘혁명’에 당할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자신만만하신 분이 왜 저를 못 가게 막으시는 겁니까?” 
“왜라고 생각하나?” 
 
그 은근한 시선을 받은 옴브로스가 침음했다. 
어쩌면 뻔한 이야기였다. 
세이스비츠는 이번 사태로 두 명의 후작을 잃었다. 
 
“전 [길로바트]를 배신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하, 누가 뭐라고 했나?” 
“노파심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나도 노파심에 조언 하나 하지. 자네는 길로바트 공작이 ‘마왕’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훅 치고 들어온 그 말에, 옴브로스는 조금 당황했다. 
세이스비츠는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아니면 멜레돈이나 베르칸이 새로운 마왕이 될 거라고 생각하나?” 
“······제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이군요.” 
“아니, 자넨 답할 수 있어. 73번째 마계의 4공작 중 최강이 누구인지는 다들 아는 얘기니까.” 
 
옴브로스가 침을 삼켰다. 
저렇듯 담담한 선언이 무섭게 들릴 수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역시, 73번째 마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작’의 연륜은 무시할 수 없다. 
 
“쉽지 않으실 겁니다. [멜레돈]은 <베다>와 손잡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좌들의 힘을 빌릴 수 있는 건 그쪽만이 아니지.” 
“그 말씀은 설마······.” 
 
세이스비츠 공작은 대답 대신 창밖의 하늘을 보며 물었다. 
 
“이제 곧 도깨비들이 올 걸세. 그럼 또 뭐가 오겠나?” 
 
지금은 새카맣게 물들어 있는 밤하늘이다. 
하지만 곧, 저 밤하늘 위에 수많은 별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리고 성좌들의 출현에 반응한 다른 마계의 마왕들도 속속 모습을 드러내겠지. 
후작인 옴브로스조차 심장이 떨리는 느낌이었다. 
드디어, 이 ‘73번째 마계’도 제대로 된 시나리오의 전장이 되는 것이다. 
 
“······채널 섭외는 끝내셨습니까?” 
“관리국에 기별은 넣어 놨네.” 
 
순간 옴브로스는 세이스비츠가 구태여 후원자를 구하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 
어차피 도깨비들이 나타나고 본격적인 시나리오가 시작되면, 성좌들은 더 커다란 사건이 터지는 쪽으로 모여들 것이다. 
퍼뜩,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본격적인 ‘마왕 선발전’이 시작되기 전 작은 여흥으로는 나쁘지 않겠지. 성좌들은 학살을 좋아하니까.” 
“설마 ‘혁명’을 내버려 두신 게 그런 이유 때문입니까?” 
 
세이스비츠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연초의 연기를 뿜었다. 
옴브로스가 옅게 탄식했다. 
 
“······당신은 정말 타고난 악마군요.” 
 
이 세계에서 모든 갈등은 곧 상품이다. 지금 세이스비츠는, [공단]에 있는 수많은 공민들의 목숨을 팔아 성좌들의 관심을 사려는 것이었다. 
 
“칭찬 고맙네.” 
 
옴브로스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털었다. 
이만한 연출을 계획했다면, 세이스비츠 공작은 반드시 최대의 굉장한 한 방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공단]에서 그게 무엇일지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간만에 공작님의 [공장]이 움직이는 걸 볼 수 있겠군요.” 
 
공작들이 가진 최강의 설화병기(說話兵器), [공장]. 
세이스비츠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준비 기동 조치를 내렸으니 조만간 볼 수 있을 걸세.” 
 
옴브로스의 눈에 기대감이 어렸다. 
73번째 마계 최강자의 설화. 
그것을 보는 것은 그리 흔한 기회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세이스비츠 공단’ 지역에 #BI-90594 채널이 생성되었습니다.] 
 
들려온 메시지에, 옴브로스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도깨비들을 부르신 겁니까?” 
 
그러나 세이스비츠 공작의 표정을 보는 순간, 옴브로스는 이것이 공작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공작님! 죄송합니다만, 급한 보고가―” 
 
나타난 것은 아까 쩔쩔매며 자리를 피했던 백작 시로크였다. 
빠르게 표정 관리를 마친 세이스비츠가 대답했다. 
 
“말해라.” 
 
이런 타이밍에 나타났으니, 저 녀석의 보고는 필시 새로운 채널의 출현과 관계된 것일 터. 
그런데 시로크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공장의 가동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세이스비츠 공작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분명 예비 설득력을 보충해 두라고 했을 텐데?” 
“그, 그게······ 아무래도 노역을 온 공민 놈들이 설화 파편들을 빼돌린 모양입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눈치챈 옴브로스가 말했다. 
 
“제법 머리를 쓰는 놈이 혁명가가 됐나 보군요. 혹시 저놈 때문에 도깨비들이 먼저 움직인 건······.” 
“그럴 리가 없어. 아직 관리국과 혹부리 측의 협상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뜻밖의 상황에 슬그머니 눈살을 찌푸린 세이스비츠 공작이 곧장 지시를 내렸다. 
 
“감독관과 노예들을 지평선으로 보내라. 설화 파편이야 다시 끌어모으면 그만이다.” 
“실은 벌써 보내 놨습니다. 그런데······.” 
 
세이스비츠 공작은 아직도 보고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제야 눈치챘다. 떨어질 공작의 엄명이 두려웠는지, 백작 시로크가 어깨를 움츠린 채 말을 이었다. 
 
“방금······ 수거를 나갔던 감독관으로부터 연락이 끊겼습니다.” 
 
 
* 
 
 
세이스비츠 공단 인근의 지평선. 
죽은 감독관의 시체를 발로 툭툭 건드려 보던 장하영이 말했다. 
 
“공작이 꽤 대대적인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이 정도 규모의 수거를 지시하다니······.” 
 
무려 천여 명의 [수거 노예]가 동원된 초대형 수거. 
상황은 잘 풀렸지만, 조금만 판단이 늦었어도 위험할 뻔한 상황이었다. 
아직 내 화신체가 온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공장]과 전면전을 펼칠 수는 없었다. 만약 이들의 수거품이 고스란히 공장으로 들어갔다면, 상황은 최악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잘 된 것 같군요.” 
 
나는 곁에 있는 한명오 쪽을 흘끗 보며 말했다. 
공작이 이런 식으로 움직일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파이인 한명오가 없었더라면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길 정확한 타이밍을 가늠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칭찬에 의기양양해진 한명오가 샐쭉 웃었다. 
 
“험, 내가 누군가? 이래 봬도 ‘미노 소프트의 브레인’ 아닌가?” 
“혹시라도 나중에 성좌가 되시면 그걸 수식언으로 쓰시죠.” 
 
나는 한명오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는 이 인간과 같은 편을 먹는다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예들은 이쪽으로 데리고 오세요! 정신이 멀쩡한 사람부터 수선을 시작할 거니까.” 
 
이제부턴 제대로 된 전쟁이라 마음먹었는지, 아일렌과 공민들의 표정에서도 이전과는 다른 비장함이 느껴졌다. 그들을 보며 나 역시 마음을 다잡았다. 
내 어깨에 보송한 솜사탕처럼 앉아 있던 아기 도깨비 비유가 소리를 냈다. 
 
“바앗!” 
 
아직 기억은 회복되지 않은 듯했지만, 모든 도깨비에게는 이야기꾼의 본능이 있다. 이야기가 있어야 할 곳에 시나리오를 채워 넣는 것.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서브 시나리오 ― ‘노예 해방’이 시작됩니다.] 
 
“고맙다.” 
 
내가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자, 비유가 자그마한 양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다앗!” 
 
당장 ‘메인 시나리오’로 진입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비유의 도움만 있다면 계기가 생길 때마다 ‘서브 시나리오’를 받을 수 있다. 임시방편이기는 해도 이런 식으로 차분히 서브 시나리오를 쌓아 간다면, 공작과 부딪치기 전까지 충분한 수준으로 화신체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급할 건 없다. 어차피 시간은 이쪽 편이니까. 마계 시나리오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철저히 준비해 나가야 한다.」 
 
실제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새로운 성좌가 #BI-90594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 Episode 40. 부화(孵化) (4) > 끝

< Episode 40. 부화(孵化) (5) >
 
 
 
 
 
······새로운 성좌라고? 벌써? 
예상보다 이른 타이밍이었다. 
적어도 지금보단 사건이 좀 진행된 후에야 구독좌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수식언을 밝히지 않은 한 성좌가 화신들을 바라봅니다.] 
 
보아하니 내가 이미 만나 본 성좌는 아닌 듯했다. 
조금 아쉬웠다. 혹시 ‘은밀한 모략가’나 ‘심연의 흑염룡’이 아닐까 기대했는데. 
 
“바, 방금 메시지 들었나?” 
“무슨 메시지?” 
“나한테 간접 메시지가 들렸다고!” 
 
꽤 코인이 넉넉한 녀석인지, 새로 온 성좌는 처음부터 간접 메시지를 뿌려대고 있었다. 곁에 있던 비유가 바앗, 하고 작은 소리를 질렀다. 아마 지금 비유에겐 코인이 마구 들어오고 있을 것이다. 신기하기도 하겠지. 도깨비들이 어떤 식으로 코인을 벌어들이는지 이제 알았을 테니까. 
 
「김독자는 생각했다. 괜찮은 녀석이어야 할 텐데.」 
 
초기 구독좌들의 성향은 채널의 성격을 결정한다. 
채널의 주력이 ‘화신 찾기’인지, 아니면 ‘유희 찾기’인지에서부터, 서브 시나리오의 자극성과 난이도까지. 
도깨비가 결정할 수 있는 모든 디테일은, 결국 구독좌들의 욕망에 반응해 만들어진다. 
사실 내가 제일 걱정되는 것도 그 점이었다. 
 
41회차의 신유승은 이미 도깨비들의 농간으로 무수한 상처를 받아왔다. 
 
앞으로 시나리오를 이어 나가기 위해, 비유는 성좌들의 욕망과 끊임없이 맞서야만 할 것이다. 
 
“바앗?” 
 
나는 비유의 머리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수식언을 밝히지 않은 성좌가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이곳의 화신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뒤이어 들려온 메시지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시작이 안 좋은데. 
 
‘뱀 머리 졸부’라면 ‘멸살법’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시나리오의 전개를 지루해합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도깨비의 어리숙한 전개에 불만을 갖습니다.] 
 
‘뱀 머리 졸부’. 
자기보다 약하고 코인이 적은 성좌들이 구독하는 채널에 들어가 시나리오를 망쳐 놓는 게 취미인 녀석. 
 
[성좌, ‘뱀 머리 졸부’가 자극을 원합니다.] 
 
저놈 때문에 구독이 줄어 쫄딱 망한 채널이 몇 개나 된다는 설명을 ‘멸살법’에서 언뜻 본 기억이 났다. 그냥 지나가듯 언급되던 녀석인데, 설마 여기서 직접 마주칠 줄이야. 
 
[성좌, ‘뱀 머리 졸부’가 ‘수거 노예’들의 생존을 원하지 않습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적에게 협력한 이는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누구든 ‘수거 노예’를 죽이는 공민에게 코인을 후원하겠다 선언합니다.] 
 
그 메시지에 공민들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저게 무슨 말인가 싶은 표정이었고, 누군가는 머뭇거리는 얼굴이었다. 좋지 않은 트라우마가 떠올랐는지 패닉에 빠진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몇몇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다가 허리춤에서 몰래 병장기를 꺼내 들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장하영이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 거기 지금 뭐 하는 거야?” 
 
한발 늦은 제지였다. 
누군가가 병장기를 빼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공민들의 행동은 더욱 빨라졌다. 하나, 둘, 셋. 늘어가는 병장기들의 숫자. 
 
“이보게, 진심인가? 이건 아니지 않나!” 
 
실성한 노예를 향해 다가가던 공민을 마르크가 붙잡았다. 
 
“수거 노예가 되었다고 모두 이지를 잃은 건 아니야. 아직 제정신이 남아 있는 이도 분명 있네!” 
“이놈들 중 대부분은 공작한테 영혼을 팔아넘긴 녀석들이야!” 
“모두가 그런 건 아닐세! 자네도 알지 않은가?” 
“어차피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놈들이잖아? 이거 놔!” 
 
코인에 눈이 멀어버린 공민이 마르크를 밀치고 칼을 뽑았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격화된 갈등에 흥분합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가장 많은 ‘수거 노예’를 죽인 화신에게 3천 코인을 후원하겠다 선언합니다.] 
 
3천 코인. 
코인이 귀한 [공단] 안에서는 한동안 사치를 누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 그냥 죽입시다. 우리라도 살아야지······!” 
“옳소! 의장, 그냥 다 죽여버리고 돌아갑시다!” 
 
목소리의 균형이 급격하게 기울고 있었다. 병장기를 빼 드는 공민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번지는 탐욕에 마르크가 다시금 외쳤다. 
 
“한때 같은 공민이었던 사람들이야!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귀족들과 뭐가 다른가!” 
“비켜 주인장! 당장 안 비키면―”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공민들의 분쟁을 즐깁니다.] 
 
다툼에 밀려난 마르크가 엉덩방아를 찧는 순간, 또 다른 메시지가 이어졌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같은 ‘공민’을 죽인 화신에게는 두당 300코인을 후원하겠다 선언합니다.] 
 
공민들이 순간 망연한 얼굴을 했다. 
뒤이어, 서로를 본 공민들이 황급히 거리를 벌리며 물러났다. 
 
“읏······.” 
“자, 잠깐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맞아, 시나리오는 원래 이런 것이었지.」 
 
언젠가, 이곳의 공민들도 ‘첫 번째 시나리오’를 수행했던 적이 있었다.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고, 살아남기 위해 생명체를 살해해야 했던 기억. 
 
“으, 으으······.” 
 
병장기를 꺼내든 채 주춤주춤 서로를 바라보는 공민들. 
고작 성좌의 몇 마디로,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뭉쳤던 공민들의 유대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화신들의 반응에 즐거워합니다.] 
 
간만에, 잠시 잊고 있었던 성좌들에 대한 증오가 되살아났다. 
예전이었다면, 나 역시 저 공민들과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코인 한두 푼에 일희일비하고, 성좌들이 원하는 이야기에 장단을 맞추고,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면서도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자위하기 바빴겠지. 
 
「김독자는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일······. 
 
「어쩔 수 없는 일은 없다.」 
 
콰앙, 하고 딛은 발걸음에 뒤쪽 바닥이 푹 패였다. 
나는 그 추진력을 이용해, 공민들의 틈바구니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마르크를 밀쳤던 공민의 멱살을 아주 강하게 틀어쥐었다. 
 
“컥, 커헉!” 
“이 몸뚱이 하나에 300코인.” 
“크윽······. 혀, 혁명가님?” 
“······300코인 좋지. 근데 너무 싼 값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멱살이 잡힌 공민이 반항했지만, 나는 손을 풀어주는 대신 그의 숨통을 더 조여갔다. 이윽고 안색이 새파래진 공민이 병장기를 떨어트리자, 주변의 공민들이 작은 비명을 질렀다. 
눈이 반쯤 돌아간 공민이 질식하기 직전이 되었을 무렵, 나는 그를 거칠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겁에 질린 눈동자들이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한 사람당 300코인이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이면 대충 일만 코인 정도인가?” 
“으, 으으······.” 
“거기다 수거 노예들을 죽이면 3천 코인을 더 준다고 했으니, 다 합치면 1만 3천 코인······ 하긴, 그 정도면 무시하기 힘들지.” 
 
1만 3천 코인. 
이곳의 공민들 중 대부분은 만져본 적 없는 거금일 것이다. 
 
“······근데 너희 그건 모르지? 1만 3천 코인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고작해야 어정쩡한 스킬 몇 개 사고, 어중간한 장비 몇 개 사면 동나는 코인이라고.” 
 
공민들의 눈동자에 동요가 번졌다. 
한 번도 [도깨비 보따리]를 사용해 본 적 없는 그들은 모를 것이다. 
1만 3천 코인이라는 금액이, 저 드높은 성좌들에게는 얼마나 푼돈인지. 
이 세계에서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나는 바닥에 쓰러진 공민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이 다음엔 어쩌려고 했어?” 
“예, 예?” 
“사람들 다 죽이고 얻은 1만 3천 코인으로 뭐 하려고 했냐고.” 
 
공민의 표정 위로 천천히 어떤 감정이 물들어 간다. 
공포, 두려움, 그리고······. 
 
“저, 저는······.” 
 
마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공민이 중얼거렸다. 
 
“아, 아무것도······.” 
 
황망한 얼굴로 뇌까리는 공민의 얼굴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이들이 무슨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이런 짓을 저지른 게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공민들 자신도, 스스로가 무엇을 위해 코인을 모으려 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성좌들의 장단에 맞추고, 다른 화신들보다 더 많은 코인을 모아야 한다는 강박. 
 
시나리오는, 그렇게 화신들을 이야기의 노예로 만든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무거운 침묵 속에, 이내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 고 했는지 깨달은 공민이 끅끅 울음을 터뜨렸다. 
 
“혀, 혁명가님. 저는······.” 
 
나는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무심히 말했다. 
 
“채널이 열렸으니 성좌들은 앞으로 얼마든지 들어올 거야.” 
 
나를 보는 공민들의 눈이 제각기 다른 빛으로 떨리고 있었다. 
 
“고작 한두 푼 코인에, 자신의 이야기를 팔아 치우지 마. 꼭 팔고 싶다면 제대로 된 값을 받으라고.” 
 
내 말이 공민들에게 얼마나 전달되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말주변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니까. 
그럼에도 이것만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의 전부였다. 
 
침통한 얼굴로 입술을 깨무는 이들. 
그리고 뭔가를 결심한 듯 마음을 다잡는 이들. 
 
고개를 떨어트린 공민들이 하나둘 무기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내겐 그 모습이 하나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내 말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당신에게 강력한 분노를 발출합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현상금 시나리오’를 요청하였습니다!] 
 
현상금 시나리오. 
그래, 그런 것도 있었지. 
오직 성좌들의 요청으로만 발동하는, 저 망할 시나리오가. 
 
“······혁명가님?” 
 
놀란 공민들이 두려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시점에 ‘현상금 시나리오’가 발동한다면, 목표물이 누구일지는 뻔했다. 그때, 내 머리 위에 앉아 있던 비유가 두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바앗.] 
 
다른 도깨비였다면 흔쾌히 ‘현상금 시나리오’를 수락했겠지만, 비유가 그런 짓을 할 턱이 없다. 요청을 거부하려는 듯, 비유가 몸을 도톰하게 부풀렸다. 
 
[······바앗?] 
 
그런데, 비유의 작은 몸통 위로 희미한 스파크가 흐르기 시작했다. 
 
[바, 바앗. 바아아앗······!] 
 
츠츠츠츳! 
 
순간,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달았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현상금 시나리오’를 요청하였습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현상금 시나리오’를 요청하였습니다!] 
 
비유는 지금, 본능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도깨비들은 일부러 자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 아니다.」 
 
채널을 구독하는 성좌의 요구에 응하고 싶은 본능. 
 
「타고난 이야기꾼일수록 그런 본능은 더욱 강력하게 발동한다. 보다 많은 존재가 욕망하는 시나리오를 만들고 싶다는 본능. 모든 도깨비는 그런 본능으로 살아간다.」 
 
아직 아기 도깨비인 비유는, 그런 본능을 이겨내는 것이 더욱 어렵겠지. 
나는 손을 뻗어 가볍게 비유를 끌어당겼다. 
 
“괜찮아.” 
 
츠츠츠츠츳! 
 
“이 채널의 구독좌는 ‘하나’가 아니니까.” 
 
[성좌, ‘구원의 마왕’이 ‘현상금 시나리오’의 발동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허공에서 한바탕 몰아치던 스파크가, 내 손끝에서 순식간에 흩어졌다. 
 
[‘현상금 시나리오’의 요청이 거부됩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경악합니다.] 
 
나는 허공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뱀 대가리. 네가 원하는 ‘이야기’는 여기에 없다.” 
 
밤하늘에 빛나는 희미한 별자리를 노려보며, 나는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쁘니까 그만 꺼져라.” 
 
 
 
 
 
< Episode 40. 부화(孵化) (5) > 끝
 
< Episode 42. 진짜 혁명가 (1) >
 
 
 
 
 
Episode 41. 진짜 혁명가 
 
 
순간, 내가 조금 과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비슷한 말을 하려고 한 건 맞지만 이 정도로 도발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성좌들을 의식해 사이다를 주는 연출에 너무 익숙해져 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스운 노릇이었다. 나는 유중혁도 아니고, 심지어 지금은 코인을 주는 녀석들도 없는데. 
 
“방금 들었어? 구원의 마왕이래!” 
 
장하영이 곁에서 방방 뛰며 말했다. 
 
“그 성좌가 우리 채널에 있나 봐! 지구에 있었던 사람!” 
 
나는 내가 바로 그 ‘구원의 마왕’이라고 말해주려다가, 문득 얼마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 이미 여자친구 있을라나. 
 
······안 되겠다. 
대신 나는 아까부터 빛이 번쩍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길길이 날뜁니다.] 
 
자식, 열 좀 받은 모양인데. 
하지만 지가 날뛰어 봤자다. 기껏해야 하위 격의 성좌인 ‘뱀 머리 졸부’에겐 마계에 현신할 만한 배짱도, 그것을 감당할만한 개연성도 없으니까.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고작 화신 따위가 자신을 능멸한 것에 격노합니다!] 
 
······고작 화신 따위? 
원작에서 이 녀석을 죽인 게 누구였더라? 
일단 유중혁은 아니고······.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듣도 보도 못한 성좌가 자신의 뜻에 반대했다는 것에 분개합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구원의 마왕’을 찾아 두리번거립니다.] 
 
심지어 이 녀석은 내가 그 ‘구원의 마왕’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뭐, 아무려나 상관은 없다. 
어쨌거나 놈이 ‘구원의 마왕’을 신경 쓰기만 하면 목적의 절반은 달성되니까. 
 
「김독자는 생각했다. 슬슬 채널에 성좌들을 불러 모아야 한다. 그래야 ‘혁명가 시나리오’ 후에 이어질 ‘마왕 선발전’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다.」 
 
굳이 녀석에게 수식언을 밝힌 것은, 채널에 관해 입소문을 낼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성좌들을 모집하는 건 또 위험했다. 처음부터 너무 강력한 녀석들이 몰려오면 비유도 힘들고 나도 곤란해질 수 있다. 
그런데 때마침, 채널에 ‘뱀 머리 졸부’가 나타났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인근의 성좌들에게 ‘구원의 마왕’에 대해 수소문 시작합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구원의 마왕’에 대한 소문을 듣고 깜짝 놀랍니다.] 
 
놈은 이계의 위인급 중에서도 잡스럽고 저급한 녀석이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자기가 ‘구원의 마왕’을 봤다고 주장합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쏟아지는 성좌들의 비난에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정말로 ‘구원의 마왕’을 봤다고 주장합니다!] 
 
때문에, 고고한 설화급 성좌들은 놈의 말을 믿지 않는다. 즉, 녀석이 끈이 닿는 것은 고만고만한 하위 격의 성좌들뿐이라는 이야기다. 
즉, ‘뱀 머리 졸부’는 그런 하위 격의 성좌들을 모으기에 딱 적합한 녀석이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패거리들을 불러 모읍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새로운 성좌들이 #BI-90594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만약 ‘은밀한 모략가’가 같은 채널에 있었다면 분명 계략에 감탄했니 어쩌니 하는 메시지를 띄워줬을 텐데. 뭔가 조금 그리운 느낌이다. 
 
[새로 입장한 성좌들이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떨어진 화신들의 손톱을 찾습니다.] 
[성좌,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채널의 화신들에게 호기심을 보입니다.] 
 
수식언이 죄다 동물시리즈인 걸 보니, 제 친구들을 불러온 모양이었다. 
‘손톱을 먹는 쥐’에 ‘불길에 몸을 던진 개’라니······ 딱히 ‘멸살법’을 떠올리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수식언들이었다. 저런 녀석들도 성좌가 되는구나.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구원의 마왕’에게 경고합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해당 채널은 성운 십이지(十二支)가 접수한다고 선언합니다.] 
 
······얼씨구? 
십이지라면 멸살법에서 지나가듯 본 적이 있다. 성운들 중 하나이긴 하지만, 그다지 결속력은 없는 녀석들이었다. 게다가 구성원 대다수는 하위 격 성좌들. 적대하더라도 딱히 문제는 없을 것이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일단 구독좌는 늘었고, 다음은 구색 맞추기인가.」 
 
채널이 커지면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도 많아진다. 
지금의 나는 격의 활용이 자유롭지 않으니, 채널의 수질 관리를 대신 담당할 성좌가 필요했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적당히 점잖고, 저런 녀석들을 깔아뭉갤 수 있는 성좌······ 어디서 그런 녀석을 구하지? 
사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장하영, 뭐해?” 
 
허공을 향해 열심히 뭔가를 입력하던 장하영이 흠칫 놀라며 내 쪽을 보았다. 
 
[‘정체불명의 벽’이 흠칫 놀랍니다.] 
 
그새 하는 짓도 비슷해졌군. 
나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말했다. 
 
“너 다른 성좌들한테 ‘구원의 마왕’ 얘기하면 죽는다.” 
“그냥 메시지 들었다고 자랑만 살짝······.” 
“너 그러다 천벌 받아. ‘구원의 마왕’ 아주, 정말 무서운 사람이거든.” 
 
내 말을 어떻게 생각한 것인지 장하영은 하늘을 흠칫 올려다보았다. 혹시나 어딘가에서 ‘구원의 마왕’이 자길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비유의 채널에 별다른 기척은 없었다. 장하영이 아직 헛소리를 떠들진 않은 듯했다. 눈치를 보던 장하영이 물었다. 
 
“너 ‘구원의 마왕’에 대해 잘 알아?” 
“그냥 조금 알아.” 
“친해?” 
 
친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네가 헛짓거릴 하면 일러바칠 정도는 돼.” 
“······이를 거야?” 
“너 하는 거 봐서.” 
 
말 나온 김에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어차피 지금부터는, 이 녀석의 힘을 이용해야만 하니까. 
 
 
*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분통을 풀 곳을 찾습니다.]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당신에게 호기심을 보입니다.] 
 
허공에서 연이어 들려오는 간접 메시지. 얼마간 그 메시지를 가만히 듣고 있던 세이스비츠 공작은,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밤이 되면 모든 귀족들을 집결시켜라.” 
“예? 하지만······ 아, 알겠습니다!” 
 
공작의 표정에 질겁한 담당관이 재빨리 집무실 밖으로 빠져나간 후, 세이스비츠 공작은 새로운 연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간만에 성좌의 간접 메시지를 들은 까닭인지, 그는 살짝 초조한 기색이었다. 
 
‘대체 어떤 녀석이 채널을 연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 기회를 그냥 보낼 수는 없어.’ 
 
비록 정식 채널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채널이든 간에, 이 상황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그는 이 ‘73번째 마계’의 가장 유리한 고지에서 선발전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아직 다른 공작들은 성간 방송을 송출할 채널을 얻지 못했겠지.’ 
 
뱀이니 쥐니 하는 수식언들이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녀석들도 성좌였다. 자세한 전후 사정은 모르겠지만, 이 상황은 그가 ‘마왕’이 되기 위한 절호조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옴브로스 후작이 물었다. 
 
“설마 ‘공장’도 가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혁명가’와 맞설 생각이십니까?” 
“······.” 
“남은 처형관이 모두 죽으면, 혁명가는 당신을 죽일 힘을 얻게 될 겁니다.” 
 
추종자를 모두 잃은 지배자는 혁명의 이슬이 된다. 
그것이 이 ‘혁명가 시나리오’의 예정된 전개였다. 
하지만 세이스비츠 공작은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겠지. 지금 나타난 놈이 ‘진짜 혁명가’라면 말이야.” 
“그게 무슨······.” 
“그건 그렇고, 자넨 어느 쪽 편이 될지 정했나?” 
“예?” 
 
옴브로스가 놀란 눈을 끔뻑였다. 
 
“저는 길로바트의 후작······.” 
 
가만히 웃는 세이스비츠 공작을 보며, 옴브로스는 ‘편’의 의미를 퍼뜩 깨달았다. 
 
“정했나?”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이 옴브로스의 등을 적셨다. 
아주 짧은 갈등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 전쟁에서 가장 먼저 ‘채널’을 얻은 공작은 선발전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곧 수많은 성좌들이 이 채널에 몰려들겠지. 게다가 세이스비츠는 이미 73번째 마계에서 가장 강력한 설화를 가지고 있다······. 
옴브로스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마계의 새로운 마왕을 뵙습니다.” 
 
‘악마종’다운 판단이었다. 
천천히 자리에 무릎을 꿇는 옴브로스를 보며, 세이스비츠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아일렌과 마르크에게 수거 노예들을 맡긴 뒤, 비유에게 부탁해 잠시 방송 채널을 교란시켰다. 혹시나 있을 문제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동물 친구들이 들어서 좋을 게 없으니까. 
 
“장하영, 지금 몇 명이랑 얘기하고 있어?” 
 
장하영은 내 눈치를 살피더니 대답했다. 
 
“세 명 정도?” 
“하나는 흑염룡일 거고. 나머지 둘은 누구야?” 
“음······. 사실은 다섯 명일지도.” 
“다섯 명?” 
“정확히 말하면 아홉 명 정도지만······.” 
“······아홉 명?” 
“답장 텀이 좀 긴 녀석까지 합치면 열다섯 명인가······?” 
 
‘정체불명의 벽’엔 특징적인 몇 가지 기능이 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얼마 전 장하영이 오픈한 일대일 채팅이었다. 
<스타 스트림>의 시나리오에 속, 수식언을 가진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엄청난 능력. 
하지만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해서, 다 장하영처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열다섯 명이랑 얘기했다고?” 
“뭐, 그렇게 어렵진 않던데?” 
 
난 한 사람이랑 얘기하는 것도 힘든데. 
정말이지 대단한 멀티태스킹 솜씨다. 
그 짧은 사이 15명이나 되는 성좌와 초월좌들이 이 녀석과 말을 텄다. 그 자존심 강한 녀석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겠지만, 이게 바로 장하영의 진짜 능력이었다. 바로 이 능력이 있기에 훗날 장하영이 초월좌들의 세력을 꾸릴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고. 
내 얼굴을 살피던 장하영이 물었다. 
 
“근데 그건 왜?” 
 
순간 망설여진다. 
이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내가 만약 그르친 선택을 한다면, 힘들게 얻은 채널이 순식간에 망가질 수도 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굴 좀 불렀으면 싶은데 말이야.” 
“응? 누구?” 
 
그러나 막상 말하려고 보니 망설임이 커졌다. 
순간적으로 내 선택이 옳은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지금부터 부를 녀석들은 지금의 내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 
 
여기까지 오는 건 정말 힘들었다. 
빌어먹을 시나리오도 시나리오지만, 나를 제일 괴롭힌 것은 사실 성좌들이었다. 걸핏하면 ‘현상금 시나리오’를 거는 녀석들은 약과다. 생각해 보면 내가 마계에 오게 된 것도 놈들이 내건 [운명] 때문이었으니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잠이 안 온다. 
그렇게 각고의 노력 끝에 이 외진 무대까지 와서 새로운 채널을 개설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녀석들 중 하나를 다시 여기에 부른다······? 
 
 
 
 
 
< Episode 42. 진짜 혁명가 (1) > 끝

< Episode 42. 진짜 혁명가 (2) >
 
 
 
 
 
“······왜 말이 없어?” 
 
분명, 세상에는 좋은 성좌들도 있을 것이다. 
내가 ‘멸살법’을 통해 보고, 읽어온 성좌들. 
혹은 ‘멸살법’이 현실이 된 뒤, 내가 조금이지만 재평가를 하게 된 성좌들. 
하지만 녀석들이 어떻게 보인다 한들, 그들의 본질이 ‘성좌’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내 표정이 어떻게 보였는지, 장하영이 걱정스러운 눈을 했다. 
 
“······혹시 내가 뭐 잘못했나?” 
“아니, 그런 건 아냐.” 
“그럼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어쩐지 말하기가 껄끄러워서 가볍게 고개를 내젓는데, 장하영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난 얘기 듣는 거 좋아해.” 
 
어딘가 익숙한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새삼 장하영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새하얀 피부에 오똑한 코. 부드러운 선을 그리는 눈썹에 맑고 깊은 눈동자······. 
희미한 죄책감 같은 것이 가슴 속에 조금씩 응어리졌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애가 좋겠어요.」 
「유중혁은 잘 나가는 놈이니까, 얘는 적당히 현실의 쓴맛을 본 애로······.」 
「중혁이가 사람 말 안 듣잖아요. 그러니까 얘는 남 얘기 잘 들어주는 녀석이면 어떨까요.」 
 
내가 끄적였던 모든 댓글의 결과가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세상을 볼 수 있는 눈과 숨을 쉬는 코, 그리고 이야기를 들을 귀를 가지고.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첫 마디가 나왔다. 
 
“나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어.” 
“사람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대체로는 질이 나쁜 사람들이었어. 남을 괴롭히거나 험담하는 놈도 있고, 심지어는 정말 끔찍한 짓거리를 저지르는 녀석들도 있었지.” 
 
가만히 이야길 듣던 장하영이 내게 물었다. 
 
“말하는 거 보니 그 사람들 어지간히 싫어 했나봐?”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잘 모르겠어.” 
 
무심코, 진심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생각보다 좋은 녀석도 있었고, 알아왔던 것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도 있었어.” 
 
그동안 읽어온 무수한 ‘멸살법’의 텍스트들이, 무심히 머릿속을 흘러갔다. 
 
“어떤 게 녀석들의 진짜인지. 어느 쪽이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잘 알 수가 없게 되었어.” 
 
내 불확실한 표현에도 장하영은 묵묵히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뭔갈 곰곰이 생각하던 장하영이 나를 향해 물었다. 
 
“정확히 무슨 고민인지 이해하긴 어렵지만······ 그러니까 너 지금 그 사람들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거지?” 
“뭐?” 
“나쁜 사람들 같았는데 실은 좋은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뭐 그런 기대를 하게 됐다는 거잖아. 아냐?” 
 
그게 그렇게 낭만적으로 들렸나? 
반발심이 일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런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하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땐 역시 이야기를 해보는 수밖에 없어. 그 사람들이랑 말해봐.” 
“이야기 해봐야 소용없을 거야.” 
“왜?” 
“그냥······.” 
 
잘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잘 표현할 수 없는 무력감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가장 무력해졌을 때, 가장 진실해지기도 한다. 
 
“나는 모두에게 거대한 벽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제4의 벽’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너랑 나랑도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실은 소통하는 건 아닐 거야. 세상에 ‘소통’ 같은 건 없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거든.” 
 
[‘정체불명의 벽’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어쩌면 현실이든 소설이든, 모두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랫동안 읽어왔어도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이라면.」 
「아마, 영영 모르는 것은 아닐까.」 
 
착각일까, 일순간 주변의 사위가 일그러지며 모든 것이 활자로 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착시는 장하영의 말과 함께 부스러졌다. 
 
“나랑 타인은 다른 존재인데, 당연히 그런 게 될 리가 없지.” 
“뭐?” 
“누구에게나 벽이 있고, 소통은 불가능하고······ 뻔한 얘기잖아.” 
 
저 친화력 좋은 장하영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이야. 조금 의외였다. 
그런데 장하영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도 이야기는 해봐야지. 거대한 벽이 있어도, 어쨌든 그 벽 너머엔 상대방이 있다는 거잖아.” 
“······벽이 있는데 무슨 얘기를 해?” 
“벽에다 쓰면 돼.” 
 
그 뻔뻔한 말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똥을 칠하든 오줌을 갈기든, 벽에다 뭔가를 남겨. 상대방이 알아볼 수 있게.” 
“뭐하러 그런 짓을 해? 어차피 상대방은 벽 너머에······.” 
“그래도 남겨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딱히 의미는 없어.” 
“그럼?” 
“그냥 네가 남겼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야.” 
“어차피 상대방은 모를 텐데?” 
“적어도 벽은 바뀌었잖아.”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장하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언젠가 누군가 읽을지도 몰라.” 
 
나는 장하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 욕심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장하영은, 나로 인해 태어났어도 나와는 관계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 사실이 어쩐지 씁쓸해서 웃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응?” 
“너 성좌들한테도 이런 식으로 상담해줬냐?” 
“어, 그게······.” 
 
머뭇거리는 투를 보아하니,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성좌들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이 우주에서 가장 지고하지만, 동시에 외로운 존재. 
이야기를 보는 것만큼이나, 자신이 할 말도 많은 작자들. 
장하영은 아마 내게 했듯이 그들의 말도 들어 주었을 것이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건방진 화신을 찾아 두리번거립니다!] 
 
나와 장하영이 동시에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비유의 채널 교란 덕분에 ‘뱀 머리 졸부’는 당분간 내가 있는 곳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겠지만. 
장하영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자식 계속 여기 머무를 생각일까?” 
“아마도.” 
 
채널에서 망신을 당했으니, 녀석은 단단히 벼르고 있을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장하영의 말이 맞다. 벽이 있으면, 그 벽에 뭔가를 써야 한다. 
그것이 원래 쓰여 있던 뭔가를 바꾸더라도······. 
이제, 그냥 읽기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장하영, 혹시 이 녀석한테 좀 연락해줄 수 있어?”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도 줄곧 그렇게 행동해왔다. 
내가 원하는 결말을 보기 위해, 나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왔으니까. 
따지고 보면 나는 이미 뭔가를 신나게 휘갈기고 있었던 셈이다. 
그걸 읽게 될게 누구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누군데?” 
 
이 성좌가 내 제안에 응해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채널도 열렸겠다······ 녀석만 도와준다면 남은 ‘혁명가 시나리오’는 무난히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허공에서 메시지가 들려왔다. 
 
[‘다섯 번째 밤’이 찾아왔습니다.] 
 
불길한 피리 소리. 부지 중에 [공단] 쪽을 돌아보았다. 피어오르는 화마(火魔) 속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나는 주변에 흩어져 있던 아일렌과 마르크를 향해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공민들 전부 모이라고 해.” 
 
 
* 
 
 
공작은 궁지에 몰렸다. 
네 번째 [밤]이 그냥 넘어간 것만 봐도, 그것은 확실했다. 
[수거 노예]들을 납치해 공장의 가동 전력을 차단했으니, 제아무리 공작이라도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상 당분간은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공작이, 제 발로 귀족들을 이끌고 이 [밤]으로 나왔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새로운 성좌들이라는 변수가 개입한 상황이다 보니, 마음이 조금 복잡했다. 게다가 아직 이쪽 편이 되어줄 성좌들도 부르지 못한 상황. 
 
「됐어. 좋게 생각하자. 차라리 기회일 수도 있다.」 
 
그래, 약한 마음 가질 필요 없다. 
나도 이제 오롯한 성좌니까. 
지금까지도 잘 해냈으니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장하영! 처형관들을 맡아! 다른 귀족들은 절대로 상대하지 말고!” 
“알았어!” 
 
나는 [바람의 길]로 허공을 내달려 가장 큰 불길이 타오르는 거리에 도달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곧 부서진 건물의 첨탑 위에 서 있는 악마종 하나와 마주했다. 
 
“네가 혁명가인가?” 
 
붉은 화염에 휩싸인 긴 머리의 악마종. 
녀석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열기에 얼굴이 따가웠다. 따끔거리는 폭염의 기운. 노랗게 뭉그러지는 불길의 형태를 보니, 이 힘이 뭔지 알 것 같았다. 73번째 마계에 이런 종류의 설화를 사용하는 녀석은 하나뿐이다. 
 
“후작 옴보로스.” 
 
73번째 마계에서는 공작들 다음으로 강력한 악마종. 
내가 성좌가 되기 전이었다면 부딪치기를 망설였을 녀석이었다. 
그런데 옴보로스의 표정이 묘했다. 
 
“옴보로스가 아니라 옴브로스다.” 
 
아하, 이름을 틀렸던 모양이군. 
하지만 내가 아무리 김독자라도 엑스트라들 이름까지 다 외우고 있진 않다고. 
자존심이 상했는지 옴보로스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나를 알면서도 도망가지 않다니······ 명이 긴 녀석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운이 나쁜 모양이군.” 
“질 것 같으면 도망갔겠지. 옴보로스.” 
“옴브로스라고 했······!” 
 
나는 대답 대신 체내의 마력을 끌어 올렸다. 
지난번에는 성좌의 격을 이용해서 싸웠다. 하지만 그때는 만만한 녀석들이었고, 옴보로스 정도 되는 놈이라면 격을 발출하는 정도로는 틈을 만들 수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전면전이다. 
 
[5번 책갈피,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이 활성화됩니다!] 
[전용 스킬, ‘소형화 Lv.3’를 발동합니다!] 
[전용 스킬, ‘전인화(電人化) Lv.11(+1)’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콰아아앙! 
 
옴보로스가 말아쥔 주먹에서 노란 폭염이 터졌다. 
녀석의 주특기 설화인 폭렬환(爆裂煥)이었다. 73번째 마계에서는 손에 꼽는 폭발계 성흔. 위력은 강한 편이지만, 피하는 게 그리 어렵지만은 않았다. 
폭발이 범위가 큰 만큼 타격 면적이 성긴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쥐새끼 같은······!”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악마종 옴브로스의 발언을 혐오합니다.] 
 
단순한 폭렬환으론 작아진 나를 상대하는 게 어렵다고 느꼈는지, 옴보로스는 작전을 바꾸었다. 녀석의 양손에서 피어오른 폭염이 급격하게 수축하더니, 이내 작은 공처럼 변화하기 시작했다. 
 
“죽어라!” 
 
응축된 폭렬환이 녀석의 양손에서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아무래도 면적을 줄인 후 힘으로 나를 밀어붙일 셈인가 본데······. 
좋은 작전이지만, 이번엔 상대가 틀렸다. 
그런 건 평범한 화신한테 썼어야지. 
 
콰아아아아! 
 
다가오는 녀석의 폭렬환을 보며, 나는 망설임 없이 내 주먹을 내뻗었다. 
마력을 한껏 쏟아부은 일격에, 밀려오던 폭렬환의 중심부가 깊게 뚫려나갔다. 
순간적으로 귀가 윙윙거렸고, 폭발에 휘말린 파편들이 허공으로 비산하며 장관을 이루었다. 
 
콰콰콰콰콰! 
 
주변을 덮친 화마가 모조리 쓸려나가며 불길이 꺼지고 있었다. 사방을 가득 메운 것은 오직 백청의 힘이 담긴 전격뿐. 으어어어― 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시야가 하얗게 깜빡였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당신의 힘에 경악합니다.] 
 
백청의 전격이 휩쓸고 간 자리에 옴보로스는 보이지 않았다. 
멀리 날아가 버린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죽었을 수도 있겠다. 
 
“맙소사······.” 
 
무참하게 파괴된 공단의 정경. 
내 힘을 확인한 몇몇 공민들이 질린 듯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쯤 되니 나도 지금의 내가 어느 정도로 싸울 수 있는지 정확히 감이 오질 않았다. 시나리오에 제대로 복귀만 하면, 어지간한 성좌들이랑은 일대일로 맞짱 떠도 이길 수 있는 거 아닐까? 
 
[화신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힘을 사용하였습니다.] 
[당신의 화신체가 상당 부분 손상되었습니다!] 
 
······젠장, 또 시작이군. 
그래도 괜찮다. 너덜너덜한 화신체로 지내는 것도 곧 끝날 테니까. 
 
“우와아아아아!” 
 
상황에 고무된 것일까. 
하나둘 일어난 주변의 공민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혁명가! 혁명가!” 
 
[채널에 새로운 성좌들이 입장합니다!] 
 
성좌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소리. 
비형과 채널을 키울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내 채널’이라는 생각 때문이겠지. 
나는 전열의 선두로 나가 다가오는 귀족들을 마구잡이로 베어 나갔다. 
 
“와아아아아!” 
 
[공장]도 없이 기어 나오다니, 공작은 제 발로 이 시나리오의 끝을 자초한 셈이었다. 화난 공민들의 파도 속에 귀족들의 세력은 조금씩 갈려 나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공장]의 정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혁명이 코앞이다! 조금만 더 가면······!”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땅속 깊은 곳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쿠구구구. 
 
당황한 공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앞에서 뭔가가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늙은 짐승처럼 고요히 잠들어 있던, 거대한 건물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부우우우우우! 
 
증기 기관을 연상시키는 엔진 소리. 하늘을 까맣게 메우는 매연과, 귀청을 찢는 경적.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공장]이 가동됐다고? 
어떻게? 
 
그러나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채 대비할 사이도 없이, 거대한 주먹 같은 것이 나를 후려쳤던 것이다. 
 
퍼어어억! 콰아아아앙! 
 
나는 건물 몇 개를 반파시키며 무너진 철골 속에 내리깔렸다. 
순간적으로 의식이 끊어졌다가 돌아왔다. 
 
[화신체의 설화가 심각하게 손상되었습니다!] 
[새로운 설화를 섭취하거나, 메인 시나리오에 진입하세요!] 
 
화신체에서 울컥 피가 쏟아져 나왔고, 전신의 설화가 불균형하게 흔들렸다. 
제기랄,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방심한 모양이었다. 
이런 실책을 하다니······.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대체 어떻게 [공장]이 가동된 거지?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당신의 꼴을 보며 즐거워합니다.]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당신의 시련을 즐깁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이 더욱 괴로운 고통 속에 놓이길 바랍니다.] 
 
빌어먹을. 
기껏 채널이 열렸는데 저 녀석들 중 내 편은 하나도 없다니. 
이를 갈며 몸을 일으키는 순간,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머리털을 쥔 채 당신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 Episode 42. 진짜 혁명가 (2) > 끝

< Episode 41. 진짜 혁명가 (3) >
 
 
 
 
 
······진짜로?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진짜로 제천대성이 왔다고?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옷차림에 눈을 가늘게 뜹니다.] 
 
간만에 느껴지는 그 시선에 나는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누군가가 바라보는 것으로 심신이 편안해지다니, 정말 이상한 기분이다. 
 
“긴고아의 죄수.”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제천대성은 아직 긴가민가하는 눈치였다. 
내가 김독자인지 아닌지, 정확히 확신하지 못하는 느낌이랄까. 
얼굴에 설화를 덮어 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확신을 주기로 했다. 
 
“맞습니다. 접니다.” 
 
일순 허공에 침묵이 맴돌았다. 
하늘이 텁, 숨을 들이켠 듯한 침묵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정체에 경악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대체 어떻게 살아있었냐고 묻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 것인지 궁금해합니다.] 
 
마치 하늘을 뒤덮듯 내게만 날아오는 메시지. 
 
「제천대성. 절대악도 절대선도 아닌 중립 계통의 성좌. 장난기가 많지만 한편으로는 무심하고, 타고난 반골 기질 때문에 어떤 성좌들과도 쉽사리 엮이지 못하는 존재······.」 
 
내가 ‘멸살법’에서 아는 제천대성은 그런 존재였다. 
작품 말미에서 무수한 성좌들과 맞서 싸우며 말도 안 되는 신화급 설화를 쌓게 되는, 명실공히 ‘멸살법’ 최강의 성좌들 중 하나. 
그럼에도 최후까지 어떤 인물들과도 깊은 유대를 쌓지 못한 채 고독히 죽어갔던 존재.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들려오는 제천대성의 메시지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아는 정보들을 신뢰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제천대성.” 
 
츠츠츠츳. 
 
“······다시 만나서 기쁩니다.” 
 
꽤 오래도록 제천대성은 말이 없었다. 
비록 같은 성좌가 되긴 했어도, 여전히 보이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는 존재. 그럼에도 그 순간, 나는 제천대성이 내 바로 앞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거립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자신의 머리털을 쥐었다 놓기를 반복합니다.] 
 
츠츠츠츳! 
 
그리고 다음 순간, 허공에서 하늘하늘 뭔가가 떨어졌다. 
무심결에 붙잡은 그것은. 
 
······무려, [제천대성의 머리털]이었다.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아마도 이것이 제천대성이 누군가를 신뢰하는 방식일 것이다. 
 
[등장성좌, ‘긴고아의 죄수’에 대한 이해도가 미미하게 상승합니다.] 
 
나는 제천대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 있는 건 비밀입니다. 아시죠?”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생각보다 입이 무거운 성좌니까, 비밀은 잘 지켜줄 것이다.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내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무너진 건물의 한쪽 벽면이 기울어지며 누군가가 난입했다. 부스스 떨어지는 흙먼지와 함께 나타난 것은 장하영이었다. 
다행히, 아직 무사했던 모양이다. 
 
“유중혁! 괜찮아?”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의아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도 유중혁의 이름을 파는 중이었지. 
장하영한테도 슬슬 내 진짜 이름을 알려줄 때가 되긴 했는데······. 
나는 일단 바깥 상황을 물었다. 
 
“바깥은 어때?” 
“······별로 안 좋아.” 
 
사실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았다. 
공단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지진. 
곳곳에서 들려오는 공민들의 비명에, 장하영의 안색이 더욱 굳어졌다. 
 
“공작이 [공단]을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널 찾고 있어.” 
 
쑥대밭이 되지 않는 게 이상하다. 
현시점에서 공작이 [공장]을 가동했다면, 막을 방법은 없으니까. 
그렇다고 이제와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처형관들은 어떻게 됐어?” 
“이제 하나 남았어. 워낙 잘 도망가서······.” 
 
투사의 아우라를 덮어쓴 장하영의 뺨에 악마종의 피가 묻어 있었다. 
그래도 그 짧은 사이 둘이나 해치웠다니, 괄목할만한 성과다. 
 
“나머지 하나도 부탁해. 그래야 공작을······.” 
 
츠츠츠츳! 
 
말을 잇는데, 얼굴 표면에서 옅은 스파크가 튀었다. 
순간적으로 무릎에 힘이 빠졌다. 
 
“야! 너······.” 
 
놀라서 달려온 장하영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쩌저적, 하고 갈라지는 피부. 
 
[파손된 설화가 붕괴합니다.] 
[‘추방자 패널티’가 다시 시작됩니다.] 
[화신체의 내구도가 위험한 수준입니다!] 
 
······하여간 이 망할 화신체는 걸핏하면. 
이제 개복치란 별명은 유중혁이 아니라 나한테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비유.” 
 
[바앗!] 
 
내가 부르자마자 허공에서 나타난 비유가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그러자 시나리오 메시지가 떠올랐다.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서브 시나리오 ― 설화 수선> 
 
분류 : 서브 
난이도 : D 
클리어 조건 : 손상된 화신체의 내구도를 일정 이상으로 회복하세요. 
제한시간 : 없음 
보상 : 없음 
실패시 : ― 
 
+ 
 
이럴 때를 대비해 미리 비유에게 부탁해 둔 시나리오였다. 
본래라면 이렇게 개인적으로 ‘서브 시나리오’를 유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관리국의 정식 채널이었다면 절대 허락되지 않았겠지. 
 
[서브 시나리오 활동으로 인해 추방자 패널티가 완화됩니다.] 
 
비유가 내준 시나리오 덕분에, 화신체의 고통이 한결 덜어졌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시나리오 사용 방식에 흥미를 갖습니다.] 
[8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보통이었다면 다른 성좌들의 질타를 받았겠지만, 이번 경우는 딱히 보상 내역이 없었기 때문에 시비를 거는 성좌들도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추방자 신세니까, 지속적으로 시나리오를 받아야 한다. 메인 시나리오에 들어갈 때까지는 이렇게 버티는 수밖에 없다. 
 
[서브 시나리오 획득으로 인해 화신체의 붕괴가 지연됩니다.] 
 
간신히 한숨을 돌리자, 허공에서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비유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일부러 빙긋 웃어주었다. 
 
―난 괜찮으니까 걱정 마. 
 
조그맣게 고개를 움직인 비유는 다시 허공에서 사라졌다. 
공단 전체의 시나리오를 관리해야 하는 만큼, 비유도 지금 정신이 없을 것이다. 
내 몸을 감싸던 스파크가 조금 잠잠해지자 장하영이 물었다. 
 
“······좀 괜찮아?” 
“버틸 정도는 돼. 아일렌은 어딨어?” 
“마르크랑 같이 있어. 공민들 대피시키고 있을 거야.” 
 
현명한 선택이었다. 
어차피 [공장]이 가동된 이상, 공민들만의 힘으로 대적하는 것은 무리였다. 어딘가에 숨어있는 ‘진짜 혁명가’가 나타난다면 모르겠지만······. 
비척거리며 밖으로 나가자, 미세먼지로 새카맣게 물든 대기가 보였다. 쓰러진 귀족과 공민들의 시체들. 
 
“······이대로 끝나는 거야?” 
 
멀리서 움지럭거리는 [공장]의 그림자를 보며 장하영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변형된 [공장]은 거인을 닮은 모습이었다. 머리 쪽에 있는 굴뚝에서 매연을 뿜어대는 늙은 거인. 그 거인의 손이 인근의 건물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끄아아아아악!” 
 
죽어가던 귀족이 [공장]의 손에 붙잡힌 채 몸부림쳤다. 자세히 보니, 아까 나와 싸우던 그 후작인 것 같았다. 
 
“공작! 공자아아악!” 
 
고통스럽게 울부짖던 후작은 쩌억 벌어진 공장의 연료 기관 속으로 으깨져 들어갔다. 
 
콰지지직! 
 
톱니가 갈리는 듯한 파쇄음. 만족했다는 듯, 공장의 동력 기관 쪽에서 거센 불길이 타올랐다. 그제야 나는 공작이 어떻게 공장을 가동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장하영이 진력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 부하들을 동력원으로 쓰고 있었어······ 어떻게 저런 짓을.” 
“이제 [공단]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왜? 자기 공단이잖아?” 
 
나는 그 의문에 대답하는 대신 [라마르크의 기린]을 사용했다. 
설화 파편을 임시로 수복하여 화신체를 회복시키기 위해서였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저 녀석은 ‘마왕’이 되기로 한 것이다.」 
 
밤하늘에 도전하듯, 고개를 든 [공장]의 울림통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라, 성좌들이여! 이것이 바로 그대들이 원하는 것이다!] 
 
자신이 만들어 가는 이야기 속에 완전히 심취해버린 공작의 모습. 
몇 살을 먹고, 얼마나 많은 세월을 살아가든. 
모든 존재는 이야기 앞에서는 그저 어린아이일 뿐일지도 모른다. 
공작이 폭주하는 동안, 비유의 채널에도 조금씩 성좌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세이스비츠’의 행동을 흥미롭게 여깁니다.] 
 
어쩌면, 나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새삼스럽게 돌아보게 된다. 
 
「“성좌들의 관심을 끄는 건 쉽다. 하지만 좋은 시나리오를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러고 보면, 언젠가 ‘멸살법’의 도깨비 왕이 그런 말을 했었다.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한다. 
좋은 시나리오라는 게 대체 뭘까. 
아니, 그런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저대로 두면······!” 
“조금만 기다려 봐.” 
 
나는 장하영을 만류하며 [공장]의 동태를 살폈다. 
 
쿠구구구! 
 
[공장]을 비롯한 ‘설화병기’들은 기존의 개연성이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비정상적인 힘을 생산한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어중간한 시나리오에서 잘못 쓰다간 자멸하기 딱 좋다는 것이다. 
 
츠츠츠츳! 
 
역시나. 마구잡이로 운용되는 [공장]의 관절부에서 스파크가 터져 나왔다. 
놀란 장하영을 향해 내가 설명했다. 
 
“아마 [설득력]이 부족해서일 거야. 저렇게 귀족들 몇 갈아 넣는 방식으로는 오래 못 가.” 
 
공장의 연료인 [설득력]은 무수한 설화 파편을 쏟아부어 만든 것이다. 모든 설화 병기는 설득력을 소모해 작동하며, 일시적으로 개연성을 극복한다. 쉽게 말해 저 [공장]은 지금의 내 화신체와 흡사한 상태인 것이다. 
그러니, 저런 식으로 움직이다간 곧 후폭풍에 휘말릴 가능성이······. 
 
츠츠츳! 
 
그런데, 내 생각과는 다르게 [공장]의 움직임은 둔해지지 않았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흐뭇한 눈으로 ‘세이스비츠’를 바라봅니다.]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세이스비츠’의 파괴 행각에 기뻐합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기꺼이 개연성을 지불합니다.] 
 
······젠장, 그렇구만. 
개연성을 지불하는 녀석들이 있었다. 
 
[혁명가는 어디에 숨어 있느냐!] 
 
쿠구구구궁! 
 
다시 한번 거대한 지진이 울려 퍼지고, 공민들이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잠시 건물에 기대어 있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놀란 장하영이 내 팔을 붙잡았다. 
 
“지금 가면 죽어! 저거 보면 모르겠어?” 
 
화신체의 내구도를 가늠해 본다. 
 
「저 녀석을 처치할 만큼의 힘이 남아 있을까?」 
 
모르겠다. 
 
「전인화나 바람의 길을 쓴다면, 녀석을 처치할 수 있을까?」 
 
그것도 모르겠다. 
 
“장하영, 마지막 처형관을 죽여.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든 해줄게.” 
 
내 말에, 장하영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왜, 왜 그렇게까지 해? 도망가도 되잖아! 넌 진짜 혁명가도 아니잖아!” 
“나는 저런 이야기가 싫어.” 
“······뭐?” 
“너무 뻔하잖아.” 
 
나는 [공장]을 향해 달려갔다. 
거리는 대체로 한산했다. 
이 사달이 났는데도, 여전히 대부분의 공민들은 집 안에 틀어박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유중혁의 111회차를 떠올렸다. 
 
「공단의 ‘마지막 밤’이 찾아오도록, 혁명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 그러니 이렇게 될 거라 예상은 했다. 
 
「그래도, 조금은 다른 이야기가 되었으면 했는데.」 
 
간간이 벽에 기댄 채 피를 흘리는 공민들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혁, 명가님······.” 
 
혁명이 뭐라고. 
이게 다 뭐라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지. 
어째서 이런 ‘시나리오’가 존재해야만 하는지.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당신을 향해 고함을 지릅니다.] 
[성좌,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당신의 파멸을 원합니다.] 
 
성좌들이 나를 향해 메시지를 쏟아붓는다. 
그런 메시지를 내게 전송해야만 하는 비유가, 허공에서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나는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어 주었다. 
솔직히 아까는 안 괜찮았는데, 이제는 정말로 괜찮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적어도, 이제는 내 편이 하나는 있으니까.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이 저 망할 고철덩이를 부숴버리기를 원합니다.] 
 
나는 허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 Episode 41. 진짜 혁명가 (3) > 끝

< Episode 41. 진짜 혁명가 (4) >
 
 
 
 
 
쿠궁. 쿠궁. 
 
공장 접합부에 설치된 실린더에서 피스톤들이 격렬하게 움직이자, 집채만한 연마기가 굉음을 내며 돌아갔다. 다 소화되지 못한 설화 파편들이 부실한 겉면을 타고 나사처럼 튀어나왔다. 
아직은 이 [공장]이 완제품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공작은 불안하게 쩔그렁대는 [공장]의 외연을 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은 탐탁찮은 수준이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공장]. 
마계의 어지간한 대공급 인사라면, 누구나 이와 비슷한 설화를 가지고 있다. 물론 공장마다 위력은 천차만별이지만, 개중에서도 세이스비츠의 [공장]은 특이한 편이었다. 
 
‘명계에 다녀온 보람이 있었군.’ 
 
무려 사십 미터에 달하는 체고. 거인상(巨人像)을 닮은 이 [공장]은 명계의 거신병(巨身兵)을 모티프로 만든 것이었다. 명계의 심판관 중 하나를 꼬드겨서 간신히 외관만 구경할 수 있었던 병기. 
물론, 공작의 [공장]은 거신병에 비하면 턱없이 출력이 떨어지는 복제품에 불과했다. 
 
‘이 정도에서 만족할 수는 없지만······.’ 
 
끼긱, 끼기긱. 
 
공작에게 섭섭함을 표하듯, [공장]이 거친 신음을 토했다. 
 
쿠드드드드! 
 
그라인더의 칼날이 바닥을 통째로 뒤집었다. 일대를 희뿌옇게 뒤덮는 먼지 속에서 공민가의 건물 십여 채가 동시에 무너졌다. 
마치 어린아이가 공들여 만든 장난감을 부수듯, 공작은 집요한 움직임으로 그것들을 부숴갔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통쾌한 파괴 행각에 즐거워합니다!] 
[몇몇 성좌들이 달아난 공민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킵니다!] 
 
오랫동안 쌓아온 이야기였다. 
무수한 세월에 걸쳐 집적된 세이스비츠 공단의 역사. 
그럼에도 공작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끄아아아악!” 
 
연마기에 무심히 터져 나가는 설화들을 주워 담으며, 공작은 무심히 생각했다. 
 
‘더 커다란 이야기로 나아갈 제물일 뿐이다.’ 
 
400년. 어지간한 왕조가 태어나고 몰락하는 시간. 
그 시간동안 세이스비츠는 이곳의 독재자였다. 
한때는 이 공단의 모든 것을 사랑했었다. 
때로는 성군이었고, 때로는 폭군이었다. 
온화한 통치로 공민들의 행복지수를 높이려 했던 적도 있었고, 거센 탄압과 폭정을 통해 그들을 학살했던 적도 있었다. 
기쁘거나 슬펐고, 가끔은 재미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작에게 남은 감정은 단 하나뿐이었다. 
 
‘질렸다.’ 
 
<올림포스>의 명계에 견학을 다녀온 후, 그 생각은 한층 더 강해졌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나 먹어치우고 있어야 하지?’ 
 
명계 여왕의 식탁에 올라왔던 호화로운 만찬을, 그는 잊지 못했다. 
이계의 소드마스터, 대현자, 9서클의 대마도사······. 
곱게 요리된 설화 조각들을 먹어 치우며, 세이스비츠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세상에, 이런 맛이 있구나. 
 
완전히 혼이 빠진 얼굴로, 입 속에서 터져 나가는 그 맛을 음미했다. 
 
―식성이 꽤나 좋은 편인가 보군요. 
 
정신을 차렸을 때, 세이스비츠는 페르세포네가 눈앞의 요리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페르세포네는 그의 접시 위에 게걸스럽게 흩어진 설화들을, 마치 불량 식품이라도 되는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느꼈던 모멸감을, 세이스비츠는 잊을 수 없었다. 
 
‘나는 다음 시나리오로 간다.’ 
 
더 커다란 이야기. 
더 커다란 자극. 
그리고, 더 커다란 힘을 손에 넣을 것이다. 
 
‘마왕이 될 것이다. 그 빌어먹을 놈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설화들을 먹어치우며 살아갈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이런 하찮은 공단 하나쯤 내버리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뭐가 ‘혁명’이냐?] 
 
쩌렁저렁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공단 전체가 옅은 진동으로 떨렸다. 
 
[보아라, ‘혁명’ 같은 건 없다! 그딴 건 전부 시나리오의 역할극일 뿐이야!] 
 
마치 모든 공민들을 능욕하는 듯한 말투. 
 
[400년 동안 무수히 반복되어 온 하찮은 유희에 불과하단 말이다. 너희들은 그런 허망한 것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자신 역시 줄곧 그 시나리오의 일부였음에도, 세이스비츠는 그렇게 외쳤다. 
그래야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갈 수 있다.’ 
 
실제로 그것은 어느 정도 성공하는 듯했다. 
쏟아지는 수많은 성좌들의 시선 속에서 세이스비츠 공작은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면서 얻어낸 말초적인 쾌감. 세이스비츠는 간만에 세상의 중심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 
 
누군가가, 그렇게 반문했다. 
 
 
* 
 
 
물론, 그것은 나였다. 
 
「너는······.」 
 
······젠장. 속마음이 너무 잘 들려도 문제다. 
 
[등장인물 ‘악마 공작 세이스비츠’의 망상이 폭주합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가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공작의 안에서 사념들이 마구잡이로 넘쳐 나오고 있었다. 마치 벌거벗은 자아를 보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냐 하면,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쓸 수 없는 녀석들도 그걸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공작의 언행에 손발을 웅크립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자신은 손발이 없으니 괜찮다고 말합니다.] 
 
오죽하면 저 녀석들조차 비웃을 정도일까. 
상황을 전혀 모르는 공작이 나를 향해 웃었다. 
 
[가짜 혁명가로군.] 
 
“누가 가짜래?” 
 
나는 [책갈피]로 [바람의 길]을 전개에 공단을 내달렸다. 
 
콰아아아앙! 
 
등줄기를 아슬아슬하게 훑고 지나가는 거격(鉅擊). 
연마기가 지나간 자리에 폭탄이 터진 듯한 크레이터만 남았다. 
 
······이정도면 하위 격의 위인급 성좌 정도는 씹어 먹겠는데? 
 
화신체가 이 몰골인 상태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위력이었다. 
저것이 설화 병기의 힘이다. 
성좌가 아닌 존재들을 성좌에 준하게 만들어주는 힘. 
게다가 세이스비츠 공작은 성좌는 아니라도 저 밑바닥 위인급 성좌들과 견줄 정도의 역사급 설화를 비축한 악마종이었다. 
 
콰아아아아앙! 
 
연마기의 안쪽에서 굴러나온 폭탄들이 시가지를 화마로 휩쓸었다. 집을 잃은 공민들이 뛰쳐 나와 울부짖었다. 고향을 잃고 마계에 와서, 힘겹게 삶을 살아가다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는 존재들. 일터를 잃은 공민들이 검댕이 묻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공민들을 보며 생각했다. 
 
나 역시 시나리오가 싫은 것은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빌어먹을. 
 
「김독자는 생각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왜 이 ‘시나리오’가 존재하는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공기의 결을 헤집고, [바람의 길]이 길을 뚫었다. 
순식간에 몸을 날려 [공장] 머리 부위에 당도한 나는, 다시 한 번 [전인화]를 발동했다. 
 
[화신체의 내구도가 위험합니다!] 
 
아까 잠깐 기절하는 바람에 책갈피의 지속 시간을 헛되이 날렸다. 
내게 주어진 여유는 20분 정도. 
 
파츠츠츠츳! 
 
오른손에서 들끓는 백청의 전격이, [공장]의 수뇌부에 작렬했다. 
반탄감과 함께 공장의 외피가 살짝 우그러들었다. 
 
[큭······?] 
 
역시 타격력이 부족했다. 
지금의 화신체로는 본래 화력의 사분의 일도 채 낼 수 없다. 
 
[제법이구나······.] 
 
더군다나, 지속력도 길지 않다. 
그래도 여기서는 맞서 싸워야 한다. 
내 손으로 직접 이 녀석을 해치워야만 한다. 
 
[성좌의 ‘격’을 발출합니다!] 
[당신의 화신체가 크게 손상되어 극히 일부의 기운만이 방출됩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격의 일부가 개방되자 [공장]의 작동이 일시적으로 멈췄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두 주먹에 마력을 집중했다. 
 
[이 기운은? 너는, 설마······!] 
 
콰앙! 콰아앙! 콰아앙! 
 
[‘골드 드래곤의 망가진 심장’이 발동합니다!] 
 
마력양이 급격하게 줄어들 때마다, 심장 어귀에서 팽팽하게 돌아가는 골드 드래곤의 심장이 마력을 재충전해주었다. 이어진 연타에 그 단단한 공장의 외피도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나사가 튀어 오르고, 소화 되지 않은 설화 파편들이 그 틈새로 흘러나왔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화신체만 멀쩡했더라도 해볼만 한 싸움이었을 텐데.」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초조한 마음으로 당신을 지켜봅니다.] 
 
그 시선을 꿋꿋이 받으며, 나는 전인화의 힘이 담긴 주먹으로 [공장]의 갑피를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이렇게 처절하게 싸울 줄 알았으면 키리오스한테 좀 더 열심히 배워둘 걸 그랬다. 
뭐, 그래봤자 난 재능이 없으니 무리였겠지만. 
 
[화신체의 내구도가 한계에 도달합니다.] 
[전투를 당장 중지하지 않으면, 화신체의 붕괴가 재시작됩니다.] 
 
숨이 점점 가빠지며, 내리치는 주먹도 느려진다. 
그만한 타격에도 [공장]은 여전히 건재한 상태였다. 
공작은 마치 기쁜 듯이 말했다. 
 
[덕분에 이 공단의 마지막 시나리오가 무척 감미로워지겠구나.] 
 
내가 이길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애초에 내가 이기기 위해서 싸우는 게 아니니까. 
 
「김독자는 공단의 아래쪽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공민들을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또 누군가는 두 손을 간절히 모은 채로. 
아일렌과 마르크의 모습도 보였다. 
각자 생긴 것은 달랐지만 모두가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혁명가가, 싸우고 있다.」 
 
그저, 그렇게 생각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혁명은 있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문장으로 쓰여진 것.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된 것은 반드시 힘을 갖는다. 
마치 설화가 현실이 된 것처럼. 
 
츠츠츠츳! 
 
[해당 시나리오에 대한 당신의 영향력이 더욱 공고해집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공장]의 거대한 팔이 내 공격을 받아냈다. 
투쾅, 하는 충격파와 함께 내 몸이 통째로 튕겨져나왔다. 
 
[투지는 훌륭하지만 너는 이길 수 없다. 너는 ‘가짜’니까.] 
 
너부러진 바닥 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나는 말했다. 
 
“네 말대로 나는 혁명가가 아냐. 하지만 혁명은 있다.”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당신도 처음에는 ‘혁명가’였으니까?” 
 
[······!] 
 
“결국 ‘혁명’이 일어나도, 끝없는 지배구조의 순환이 반복될 뿐이니까?” 
 
세이스비츠 공작의 심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혁명가 시나리오’의 비극에 대해서라면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는 무엇이 되는가? 
 
“당신이 실패했다고 모두가 실패하는 건 아냐.” 
 
끔찍한 시나리오가 있다. 
비극적인 시나리오가 있다. 
하지만. 
 
“의미 없는 시나리오는 없어.” 
 
아무리 쓰레기 같은 시나리오라도, 그 시나리오를 살아가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다. 
기뻐하거나, 슬퍼하면서. 
맞서 싸우고, 불가능에 투쟁하면서. 
누군가는 죽어가지만 또 누군가는 서로를 구원하면서. 
 
그것이 내가 아는 ‘멸살법’의 시나리오다. 
그랬기에, 나는 그 긴 ‘멸살법’을 다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삐그덕. 
 
몸의 운신이 점점 힘들어진다. 
원작대로 행동했다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겠지. 
 
「유중혁은 생각했다. 혁명가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놈이 나올 때까지 다 죽여버리면 되겠지.」 
 
결국, 111회차의 유중혁은 그렇게 최악의 선택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빌어먹을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콰아아앙! 
 
다시 한 번 내리친 공작의 일격에, 결국 등허리가 스쳤다. 
힘없이 나가 떨어진 나를 향해, 또다시 [공장]의 거대한 손이 다가왔다. 
 
[네 이야기는 꽤 구미가 당기는군. 너를 먹겠다.] 
 
이미 ‘명계’에 가서 설화의 맛에 눈을 뜬 녀석이다. 
당연히 나를 보고 환장할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거대한 녀석의 손아귀가 나를 감싸 쥐려는 순간, 누군가가 전력을 다해 달려와 내 몸을 안고 나뒹굴었다. 
뿌연 흙먼지가 흩날리는 자리에, 익숙한 여인이 서 있었다. 
 
“무슨 짓이야?” 
 
공민회 의장, 아일렌이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벽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켜.” 
“당신은 할 만큼 했어요.” 
 
아일렌은 전혀 비킬 기세가 아니었다. 결연한 의지가 떠오른 그녀의 표정을 보는 순간, 가슴 속 한 구석이 서늘해졌다. 
잠깐만, 설마 혁명가는······. 
 
[하하하! 어디에 숨었느냐. 자칭 혁명가여!] 
 
들려온 공작의 목소리에, 아일렌이 등을 돌렸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닫고 황급히 뒤를 쫓았다. 그런데 그녀가 [공작]의 앞에 서기 직전, 누군가가 외쳤다. 
 
“혁명가는 여기에 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가, 자신을 가리키며 외치고 있었다. 
 
[누군가가 ‘혁명가 선언’을 하였습니다!] 
 
공민의회의 소속원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지금까지 숨어 있던 공민일 수도 있었다. 내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멸살법’에서조차 언급되지 않았던 그저 지나가는 엑스트라. 
 
[무슨······?] 
 
“아니, 내가 혁명가다!” 
 
이번에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역시나 모르는 얼굴. 애처롭게 어깨를 떨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다리로 굳건히 바닥을 짚은 채, 여자는 그렇게 외쳤다. 
그것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가 ‘혁명가 선언’을 하였습니다!] 
[누군가가 ‘혁명가 선언’을 하였습니다!] 
 
아일렌과 마르크. 의회의 공민들 뿐만 아니라, 지금껏 집에 숨어 있던 모든 화신들이 거리로 나와 외치고 있었다. 수수한 병장기를 들고, 저항할 수조차 없는 몸뚱아리로 외치고 있었다. 
 
“내가 혁명가다! 나를 죽여라!” 
 
하나밖에 없는 패를 들고 나온 공민들의 모습은 처절했다. 
수많은 공민들이 제각기 병기를 들고 밀물처럼 [공장]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나는 그 열기에 고무되어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그것은, 유중혁이 살았던 ‘멸살법’에는 나오지 않았던 광경이었다.」 
 
아쉬웠다. 
111회차의 유중혁에게도, 이 광경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녀석도 이 광경을 봤다면, 분명히 다른 선택을 했을 텐데. 
그런데 그때. 
 
“내가 바로 혁명가 유중혁이다!” 
 
누군가가 외쳤다. 
 
“내가 유중혁이다!” 
“아니다 나다!” 
 
······뭐? 
아니 잠깐만. 
 
“내가 바로 유중혁이다!” 
 
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제 사람들은 ‘혁명가’가 아닌 ‘이름’을 외쳐대고 있었다. 
공단의 무수한 ‘유중혁’들이 들고 일어나고 있었다. 
 
[누군가가 ‘유중혁 선언’을 하였습니다!] 
 
아니 이거······ 잠깐만. 
 
[<스타 스트림>의 업적 시스템에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 
 
 
그리고 그 시각. 
검은 코트를 입은 한 남자와, 남자의 어깨에 앉은 작은 인형이 [공단]에 도착했다. 남자가 공단의 전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이 김독자가 있는 곳인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은은한 홍조를 띤 채 고개를 끄덕입니다.] 
 
 
 
 
 
< Episode 41. 진짜 혁명가 (4) > 끝

< Episode 41. 진짜 혁명가 (5) >
 
 
 
 
 
유중혁은 경지에 오른 [은밀 기동]과 [은신 장막]을 사용해 아주 간단하게 [공단]에 침입했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 지역에 입장하였습니다.] 
 
마계의 공단. 
2회차 때 잠깐 마계를 방문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이 시기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천천히 주변을 훑어보자, 공민가 주변을 거니는 공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시나리오를 포기하고 세계에 절망한 얼굴들. 
유중혁이 좀처럼 인연을 만들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바로 저 절망감을 공유하지 않기 위해서. 
회귀자에게 가장 독이 되는 감정이 바로 저런 것이니까. 
 
‘생각보다 조용하군. 김독자가 나타났다면 한창 난리통일거라 생각했는데.’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김독자로 보이는 존재는 없다. 
그 유난스러운 행동거지라면 어딜 가나 눈에 쉽게 띌 텐데······. 
정말 놈이 살아 있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귀찮군. 너무 넓어.”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이 불필요한 희생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우리엘 인형이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유중혁이 안력을 집중해 주변을 살폈다. 
하필 대천사의 화신체와 함께 오는 바람에, 행동에 제약이 생겼다. 
 
‘공민 하나를 붙잡고 물어보면 되겠지만······.’ 
 
감각을 집중하자, 공민들 사이에 숨어있는 시커먼 기운들이 느껴졌다. 
악마종 특유의 기척. 
다른 존재도 아니고 악마종이라면, 대천사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정보를 많이 가진 녀석들을 족치는 게 빠르겠지.’ 
 
물론 악마종은 강하다. 하지만 유중혁은 초월좌였다. 
배후성의 권위를 빌리지 않고도 스스로 좌(座)에 오른 존재. 
성좌에 준하는 존재라면 모를까, 필멸자들 중에서 이제 유중혁을 위협할 만한 존재는 거의 없었다. 
 
‘저 녀석이 좋겠군.’ 
 
물 흐르듯 움직인 유중혁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원하는 목표물의 배후를 점했다. 깜짝 놀란 악마 백작이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유중혁은 스킬을 발동했다. 
 
[전용 스킬, ‘음파 차단 Lv.10’을 발동합니다!] 
 
순식간에 목덜미를 대롱대롱 잡힌 악마 백작이 발버둥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중혁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내 질문에 순순히 대답하면 살려주지.” 
 
당연히 살려줄 생각 따윈 없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했다. 
경험상 이쪽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황한 악마 백작이 소리쳤다. 
 
“무, 무슨, 네놈은······!” 
 
퍼억! 
 
“끄억! 이, 이런 짓을······.” 
 
퍼억! 퍼억! 
 
무차별로 쏟아진 폭행에 악마 백작의 몸은 순식간에 걸레짝처럼 변했다. 
검은색 피를 한다발이나 토해내고, 온갖 욕을 한사발로 토해내던 악마백작은 그로부터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비굴한 목소리를 냈다. 
 
“무, 물어보십시오! 뭐든 물어보십시오!” 
 
그제야 유중혁은 입을 열었다. 
 
“김독자는······.” 
 
거기까지 말하던 유중혁이 퍼뜩 뭔가를 떠올렸다. 
그가 아는 ‘김독자’라면, 당연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이곳에서 활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중혁은 질문을 바꿨다. 
 
“‘유중혁’은 어디 있지?” 
 
 
* 
 
 
[누군가가 ‘유중혁 선언’을 하였습니다!] 
[누군가가 ‘유중혁 선언’을 하였습니다!] 
 
수많은 공민들이 ‘유중혁’의 이름을 외치는 정경. 마치 공단 전체가 ‘유중혁’이 된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그 무수한 ‘유중혁’들에게 휩쓸려 [공장]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나도 유중혁이다!” 
“내가 진짜 유중혁이다!” 
 
물론 나도 그 사이에 끼어 한 손을 거들고 있었다. 
 
“유중혁이다! 와아······.” 
 
유중혁 자식이 이 광경을 봤어야 하는데······. 
그놈이 있었다면 대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73번째 마계에 ‘혁명가 유중혁’의 이름이 널리 울려 퍼집니다.] 
 
<스타 스트림>은 곧 설화의 세계. 
이곳에서 이렇게나 많은 공민들이 유중혁의 이름을 호명했으니, 녀석은 분명 상당한 수준의 설화를 획득했을 것이다. 
부러운 자식,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받아 처먹어라······. 
이상한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당신의 유명세가 상승합니다.] 
 
응? 
 
[73번째 마계에서 ‘김독자’의 명성이 급격하게 높아지고 있습니다.] 
 
메시지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이건 대체 뭔 상황이지? 
난 이름을 밝힌 적이 없는데? 
 
[이, 이 망할 놈들이······!] 
 
한편, 세이스비츠 공작은 밀물처럼 덤벼드는 공민들의 파도에 당황하고 있었다. 
 
[마지막 처형관이 사망했습니다.] 
[세이스비츠 공작의 ‘지배자 효과’가 해제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장하영이 임무를 완수했다. 
 
[공단의 모든 처형관이 사망했습니다.] 
[공단의 모든 존재가 ‘지배자’에 대한 ‘처형권’을 손에 넣습니다.] 
[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혁명의 밤’이 시작됩니다!] 
 
혁명의 밤. 
태어나서 처음으로 찾아온 그 메시지에, 공민들은 흥분했다. 
공작에 대한 ‘처형권’. 
그들의 손으로, 직접 지배자를 처단할 수 있는 힘. 
 
“우와아아아! 가자아아아아!” 
 
마치 파도가 단단한 암초에 가서 부딪치듯 공민들은 [공장]으로 몰려갔다. 공민가가 피로 물들고, 무수한 공민들이 [공장]에 짓밟히는 와중에도, 오히려 공민들은 의지를 더욱 불태웠다. 
 
“다 부숴버려!” 
 
공민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저 커다란 고철덩이만 부수면 된다. 
저 철벽만 넘어서면, 공작의 연약한 육편을 갈기갈기 찢을 수 있다. 
 
「하지만 공민들은 알지 못했다. 이 혁명의 가장 큰 고비는 바로 이 지점이라는 사실을.」 
 
쿠드드드드드! 
 
거대한 연마기가 회전을 시작하자, 공민들은 순식간에 썰려나가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악!” 
“물러서!” 
 
‘혁명가 시나리오’에서 ‘혁명의 밤’은 공작이 가장 취약한 시간이다. 공단의 모든 공민들이 공작을 죽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작이 [공장] 밖으로 나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제기랄! 너무 단단해!” 
 
아무리 내리쳐도 부서지지 않는 [공장]의 외피. 
공작이 웃었다. 
 
[어리석은 것들.] 
 
한때는 그 역시 ‘혁명가’였다. 그러니 이날을 생각하지 않았을 턱이 없었다. [혁명의 밤]은 공작에게 있어 가장 위험한 시간. 
하지만, [공장]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공작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 
 
[이 ‘공장’을 무너뜨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공작은 자신의 [공장]을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형태로 제작했다. 
명계의 거신병을 토대로 만들어진 [공장]. 
당연하게도, 공민들의 힘으로 그 무시무시한 설화병기를 부수는 것은 불가능했다. 
 
퍼거거거걱! 
 
공작은 움직임에는 자비가 없었다. 
연삭기와 연마기가 반복해서 움직일 때마다 공민들의 몸이 육편으로 갈려 나갔다. 그럴 때마다 하늘에서는 간접 메시지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피의 전장에 취합니다!]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인간 학살에 흥겨워합니다.] 
 
쏟아지는 코인 메시지와 함께, 결국 공민들의 대열이 망가지고 있었다. 
 
“아아아악!” 
 
부술 수 없는 단단한 외벽 앞에 혁명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아일렌. 다 됐어?” 
“임시 조치는 끝났어요. 하지만 전투는······.” 
“됐어. 한 번만 움직일 수 있으면 돼.” 
 
나는 대충 대답한 후 자리에 우뚝 섰다. 
아마 설화 수선으로 때울 수 있는 것도 이번이 한계겠지. 
 
[어디에 숨어 있느냐! 또 그 잘난 혁명을 읊어 보아라!] 
 
공작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굳게 쥐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다. 
 
츠츠츠츠츳! 
 
과도한 개연성을 사용한 공장의 외피에서 연이어 스파크가 터지고 있었다. 저 [공장]은 명백히 시나리오 바깥의 힘이다. 이 불공정함을 감당하고 있는 것은 아마 놈을 후원하는 성좌들이겠지. 
 
「김독자는 생각했다. 놈이 시나리오 바깥의 힘으로 공민들을 깔아 뭉갠다면, 이쪽에서도 똑같이 해주는 수밖에 없다.」 
 
“비유.” 
 
허공에 몸을 숨기고 있던 비유가 “바앗”하고 모습을 드러내자, 나는 곧장 말을 이었다. 
 
“명계까지 채널의 대역폭을 늘려줘.” 
 
지금의 비유에겐 힘든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 방법은 쓸 수 없다. 
 
“할 수 있겠어?” 
 
비유는 힘겨워보였지만,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바앗.] 
 
이건 정말로 최후의 수단이었다. 
나는 언젠가, 두 번째로 명계에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게 거신병을 만드는 핵심이야. 알겠지? 
―오호, 이런 식이었다 이거지······ 이야, 진짜 고마워! 
―뭐, 정 고마우면 끝나고 제작자란에 내 이름도 넣어 주던가. 
 
지금까지는 쭉 쓰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설화병기는, 그야말로 엄청난 개연성을 소모하니까. 
그저 소환하는 것만으로도 개연성 후폭풍을 일으키는 병기. 
때문에 이 병기는 성좌들의 대전쟁인 <기간토마키아>급의 시나리오가 아니면 무지막지한 개연성의 제약을 받는다. 애초에 나 혼자서는 소환조차 불가능하니, 최강의 칼을 가지고 있어도 뽑지조차 못하는 셈이었다. 
 
“긴고아의 죄수.” 
 
하지만 나 혼자가 아니라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도와주십시오.” 
 
물론 제천대성이 도와주더라도 고작해야 ‘소환’이 전부겠지. 
하지만 소환만 가능하더라도, 이 승부는 내가 이길 수 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그것은 시나리오의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 시나리오를 바꾸고 싶습니다.” 
 
나는 말을 멈추고 스파크가 튀는 [공장] 쪽을 흘끗보았다. 
‘처형권’이라는 시나리오의 버프를 받았음에도, 공민들은 공작에게 손 하나 대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몇십 분도 지나지 않아 [공단]의 모든 인구는 절멸할 것이다. 
 
“그리고 형평성이라면, 이미 오래전에 어긋난 것 아닙니까?”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귀찮아합니다.] 
 
젠장, 조금 친해졌나 싶었더니 역시나인가. 
본래 제천대성은 이런 일에 쉽게 엮이는 타입이 아니다. 이렇듯 내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기적일지 모른다. 
 
“정말 이대로 저놈들을 그냥 두실 겁니까? 개연성을 먼저 침탈한 건 저쪽입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난장판에 즐거워합니다.] 
 
“이곳에는 녀석들을 제지할 도깨비도 없단 말입니다.” 
 
제천대성은 말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왕이 없는 세계의 왕’ 때도, 그는 나에게 개연성을 빌려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금기를 범해야만 했다. 
 
“혹시 얼마 전에 이상한 메시지를 받은 적 없습니까?”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빠진 머리털에 대한―” 
 
쿠구구궁, 하늘에서 우레의 기운이 느껴졌다. 
제천대성이 분노하고 있었다. 
나는 그 분노에 화답하듯 외쳤다. 
 
“맞습니다. 그게 바로 저놈들입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경악하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자신의 손톱을 뜯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격노합니다.] 
 
순간, 주머니 속에 넣어뒀던 [제천대성의 머리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나는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답했다. 
 
“······잘 쓰겠습니다.” 
 
머리털을 손에 꾹 쥐는 순간, 응축된 설화의 힘이 느껴졌다. 
고작해야 머리털 한 올에 이만한 에너지가 내재되어 있다. 
제천대성의 진신은 대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을지, 지금의 나로서는 헤아리기조차 어려웠다. 
여기서부터가 제일 문제인데······.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하늘을 보며 시동어(始動語)를 외웠다. 
 
“······자, 잠자는 거신을 베기 위해 버려진 검이여.” 
 
창피한 첫 마디를 읊조리는 순간, 하늘의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구름들이 이상 징후를 보였고, 새카맣고 불길한 아우라가 밤하늘을 가득 채웠다. 
 
[명계의 성좌들이 당신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그래, 이건 들킬 수밖에 없겠지. 
들키지 않는 게 이상하다. 
하지만 들켜도, 어쩔 수 없다. 
페르세포네와 하데스가 나를 예쁘게 봐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지금, 이곳에 강림하라.” 
 
단출한 맺음과 함께, 변색된 하늘의 절반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쩌저저저저적! 
 
그리고 그 갈라진 틈새로, 두 개의 거대한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신병 플루토’가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츠츠츠츠츠츳! 
 
가공할 개연성의 스파크가 내 몸을 뒤흔들었다. 전기 뱀장어라도 된 것마냥 온몸이 저려왔고, 두 눈에서 흘러내린 피로 시야는 붉게 물들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비명조차 허락하지 않는 고통이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개연성을 함께 부담합니다.] 
 
이미 넝마가 된 화신체가 당장 영멸하지 않는 것은, 제천대성의 가호가 있기 때문이었다. 
 
[인근 마계의 마왕들이 가공할 개연성의 폭풍에 깜짝 놀랍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의 이상 징후에 경악합니다!] 
 
이미 새카만 밤하늘 위에, 또 다른 거대한 그림자가 밀려오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 챈 몇몇 공민들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커지는 눈동자. 
 
“재, 재앙이다······.” 
 
뒤늦게 뭔가를 눈치 챈 공작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쿠구구구구구! 
 
갈라진 하늘의 틈새로 검은색 기체가 드러나고 있었다. 블랙 드래곤의 비늘처럼 섬뜩한 광택을 자랑하는 외피. 그 모습을 확인한 공작이 경악성을 터트렸다. 
 
[저, 저건······ 어, 어떻게······!] 
 
놀랄 뒤집어질 법도 하다. 
 
[아직 미완성이라고 들었는데!] 
 
한때는 그랬겠지. 
정확히는, 내가 명계에 방문하기 전까지는 그랬을 것이다. 
 
「명왕의 비밀병기, ‘거신병 플루토’.」 
 
마침내, 30미터에 달하는 체고를 가진 거대한 기갑병기가 하늘에서 낙하했다. 
 
 
 
 
 
< Episode 41. 진짜 혁명가 (5) > 끝

< Episode 41. 진짜 혁명가 (6) >
 
 
 
 
 
콰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나타난 거무튀튀한 거신병의 몸체. 
원작에서는 명왕의 무기였지만, 후반 회차부터는 유중혁이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병기. 신화 속에서 거신을 때려 잡던 그 궁극의 병기가, 지금 나와 제천대성의 개연성으로 눈앞에 소환되고 있었다. 
한바탕 피를 게워낸 나는 엉망으로 흔들리는 시야 속에 플루토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의 화신체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당신의 화신체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시끄러워. 
 
아직은 의식을 유지해야 한다. 
적어도, 녀석에게 명령을 할 때까지는. 
 
[뭐야? 여긴 어디야?]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언젠가 들은 적이 있던 목소리. 
역시 이 녀석, 마지막 재료로 ‘자신의 영혼’을 사용했구나. 
나는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김남운.” 
 
그러자, 플루토의 둔중한 몸체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지하철 메뚜기남?] 
 
“······맞아.”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는 듯, 김남운이 웃었다. 
 
[하하하하! 뭐야, 진짜 그 시동어 쓴 거야?] 
 
거신병을 소환하는 시동어는, 김남운이 내게 직접 알려준 것이었다. 
 
―알겠어? 시동어를 이걸로 할 테니까 잘 기억해두라고. 제대로 부르면 한 번은 도와줄지도 모르지. 
 
설마 정말로 그 말을 시동어로 할 줄은 몰랐지만. 
하긴 죽었다고 해서 특성이 바뀌지는 않을 테니까. 
 
“역시 네가 직접 들어갔구나.” 
 
[하하하, 당연하지! 기분 째진다고 이거!] 
 
본래 모든 거신병에는 메인 시스템을 총괄할 영혼을 심는다. 
그리고 김남운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거신병의 소프트웨어로 심은 것이었다. 
 
[좋아, 특별 서비스다. 타 봐 아저씨. 내가 좋은 구경 시켜줄게.]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럴 기운 없어······.” 
 
[뭐야? 왜 그 꼴인데?] 
 
나는 힘없이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플루토가 고개를 내 손가락의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플루토의 입가가 기묘하게 절그럭거렸다. 나는 짓씹듯 입을 열었다. 
 
“끝내버려.” 
 
할당받은 개연성으로 거신병을 소환할 수 있는 시간은 1분도 채 되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 30초도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두려움에 질린 공작이 이쪽으로 [공장]을 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 그럴 리가 없다! 어째서, 어째서 진짜 거신병이······!] 
 
맹렬하게 회전하는 연마기가 플루토의 외갑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뭐야, 이 허접한 장난감은?] 
 
쉬익― 쩌저적. 
 
그저 간단히 휘두른 손동작에, 공작이 자랑하던 연마기와 연삭기가 한꺼번에 찢겨나갔다. 마치 종잇장을 찢는 듯 싱거운 손동작이었다. 
 
[겨우 이런 거 부수라고 나 부른 거야? 진짜 너무하네.] 
 
······소환 해제까지 25초. 
 
[존나 짜증나게.] 
 
불평을 이어가면서도 플루토는 착실히 움직였다. 
 
20초. 
 
콰아아앙! 
 
간단히 내뻗은 주먹으로 [공장]의 양팔을 박살냈고. 
 
15초. 
 
휘두른 수도(手刀)로 공장의 활동부를 완전히 마비시켰으며. 
 
10초. 
 
퍼거거걱! 
 
간단히 찍은 니킥으로, 공장의 주요 동력장치를 박살내버렸다. 
그 무시무시한 [공장]이 엄청난 양의 설화를 토하며 자리에 주저앉고 있었다. 안쪽의 공작은 어떻게 되었는지, 이미 생사를 알 수 없었다. 
플루토의 몸체가 내쪽을 돌아 보았다. 
 
[이제 끝났지? 하하, 그럼 이제 뭐하지?] 
 
“······.” 
 
[아저씨. 지금 나랑 붙어볼······.] 
 
엄청난 개연성의 후폭풍이 플루토를 휘감았다. 일대의 시공간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에 김남운의 목소리가 묻혀갔다. 
거신병 플루토의 몸체가 마치 기화(氣化)라도 하듯 가루로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할당된 개연성을 모두 소진해 강제 귀환 조치가 된 것이다. 
 
······1초. 
 
[젠장. 명계에서, 만, 나······.] 
 
빌어먹을 자식. 
거긴 다시 안 간다 멍청아. 
 
츠츠츠츠츠! 
 
[‘거신병 플루토’의 소환이 해제되었습니다.] 
 
허공에서 거신병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사람들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공민들 중 다수는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해 기절해 있었고, 간신히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도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럴 법도 했다. 
지금 이곳의 화신들은,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사신(死神)을 목격한 셈이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완파된 [공장]을 올려다보았다. 
내 [전인화]로도 찢을 수 없었던 [공장]의 외피는, 마치 흉폭한 맹수에게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 관절부가 모조리 꺾이고 동력부가 파괴된 [공장]은 움직임이 없었다. 
고작 30초도 되지 않는 시간동안 거신병이 저지른 일이었다. 
나는 천천히 공장을 기어 올라가, 콕핏 쪽에 앉아 있던 존재를 찾아냈다. 
 
꽈드득. 
 
금이 간 콕핏의 뚜껑을 열어젖히자, 피범벅이 된 늙은 악마종이 그곳에 있었다. 
 
“쿨럭, 쿨럭!” 
 
그가 바로 세이스비츠 공작이었다. 
공작은 불신 가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네, 네놈. 네놈은 대체······.” 
 
[공장]은 공작의 주력 설화. 
그 설화가 작살나버렸으니, 공작이라고 무사할 턱이 없었다.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아 녀석을 겨눴다. 
공작이 입을 열었다. 
 
“혹부리들에게······ 네놈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이미 자신의 최후를 예감했는지, 공작은 아무 말이나 지껄이기 시작했다. 
 
“불행한 성좌여, 나를 죽여도 너는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네놈은―” 
 
나는 망설이지 않고 녀석의 심장을 향해 검을 꽂았다. 그러나 남은 기력이 없었던 까닭에, 검을 꽂은 그대로 녀석의 몸과 함께 공장 아래쪽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끔찍한 통증이 닥쳐왔고,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려온 아일렌이 나를 부축하고 있었다. 
 
“······공작은?” 
“죽었어요.” 
 
말하기가 무섭게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악마 공작 세이스비츠를 처치하였습니다.] 
[200,000 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때는 아니었다. 
 
[당신은 공단의 ‘지배자’를 처치하였습니다.] 
[당신은 ‘혁명가’가 아닙니다.] 
[정상적인 시나리오 진행 루트를 밟지 않아, ‘지배자’ 계승이 취소됩니다.] 
[현재 해당 시나리오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존재에게 자동으로 계승권이 전속됩니다.] 
[현재 ‘히든 시나리오’가 진행 중입니다.] 
[메인 시나리오에 돌입하기 위해 ‘진짜 혁명가’를 죽이세요.] 
 
······역시나. 공작을 죽인다고 해서 시나리오로 진입할 수는 없었다. 
마침 나는 유중혁의 이름을 팔고 있었으니, 어쩌면 유중혁에게 공단의 계승권이 갔을지도 모르겠다. 
 
“······내 상태는 어때?” 
 
정신없이 내 설화를 수선하던 아일렌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괜찮아요. 내가 고쳐줄게요.” 
“······나한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돼?” 
 
아일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빨리 말해 줘.” 
“10분, 아니······ 5분.” 
 
진즉에 오감은 마비되고 있었다. 입술이 말을 듣지 않고, 손 끝의 감각마저 점차 희미해져갔다. 
화신체가 수복할 수 없을만큼 망가진 것인지, 시스템 메시지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왜 마계까지 와서도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일렌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혁명가를 찾는다고 했죠······.” 
“그래.” 
“왜죠?” 
“그 녀석을 죽여야 내가 메인 시나리오로 진입할 수 있으니까.” 
 
어차피 이제 숨길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아일렌이 나를 보았다. 
 
“그렇군요······.” 
 
굳은 결심을 한 듯, 아일렌이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 살 수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혁명가 녀석, 아까 그 대열의 어딘가에 있었겠지. 안 그래?” 
 
힘겹게 토해낸 목소리에 아일렌의 말이 끊겼다. 
 
“많이 숨고 싶었을 텐데, 실은 도망가고 싶었을 텐데도.” 
“······.” 
“그래도, 나와서 열심히 싸웠을 거야, 분명.” 
 
아일렌은 잠시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보지 않아도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울지 마. 나 안 죽을 거니까.” 
 
나는 힘없이 웃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만약, 여기서 ‘혁명가’를 죽이면 지금껏 내가 쌓아온 이야기는 의미가 없다.」 
 
‘혁명가’가 되지 못해도 방법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늘 그래왔듯이. 
 
“아일렌. 전에 부탁한 거 있지? 내가 만들어달라고 한 거······.” 
 
아일렌이 퍼뜩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패널을 장착한 직사각형 모양의 통신기기. 내가 제작을 부탁했던 스마트폰이었다. 
 
“좀 켜줘······.” 
 
패널에 불이 들어오자, 바탕화면에 자동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새로운 기기를 획득하였습니다. 동기화가 시작됩니다.] 
 
메시지와 함께 동기화가 끝나자, 예상대로 바탕화면에 파일 하나가 만들어져 있었다. 눈가가 자꾸만 흐려져서 잘 보이질 않았지만, 분명 ‘멸살법’의 텍본이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나는 ‘독자’다. 모든 답은 이곳에 있어.」 
 
나는 어떻게든 눈을 떠서 텍본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눈가가 자꾸만 흐려져서, 앞이 보이질 않았다. 
‘멸살법’을 읽어야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을 텐데, 우습게도 나는 그것을 읽을 수가 없었다. 
 
「김독자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빌어먹을. 
 
「이대로 끝인 건가.」 
 
마침내 아일렌의 얼굴마저 희미해져갔다. 
그리고. 
 
[히든 시나리오― ‘자칭 혁명가’를 클리어하였습니다.] 
 
환청이 들려왔다. 
 
[당신은 ‘혁명가’가 되었습니다.] 
 
틀림없이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정식으로 메인 시나리오에 진입하였습니다!] 
[‘추방자 패널티’가 종료되었습니다.] 
[당신의 화신체가 자동으로 수복되기 시작합니다.] 
[붕괴 중이던 당신의 설화가 회복세에 접어듭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멀어지던 오감이 되돌아오고, 희뿌옇게 물들었던 시야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눈을 떠 곁을 돌아보았다. 아일렌은 무사했다. 장하영도, 마르크도. 죽은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왜······?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73번째 마계에서 ‘김독자’의 이름이 널리 울려 퍼집니다!] 
[길로바트 공단의 모든 악마종들이 당신의 이름을 두려워합니다.] 
[길로바트 공단의 공민들이 당신의 ‘혁명’에 동참합니다.] 
 
나는 잠깐 잘못 들었나 싶었다. 
······길로바트 공단? 
여긴······ 세이스비츠 공단인데? 
 
[‘길로바트 공단’에서 ‘김독자’를 영웅시하는 무리들이 나타났습니다.] 
 
길로바트 공단은 세이스비츠에서 꽤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그곳에서 내 이름이 울려퍼질 턱이 없었다. 
그럼에도 폭발적으로 들려오는 메시지를 들으며, 나는 어떤 희미한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희미한 가능성이었다. 
 
[누군가가 ‘길로바트 공단’의 ‘지배자’를 처치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은 ‘길로바트 공단’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존재입니다.] 
[시나리오 개연성에 의해 당신은 ‘길로바트 공단’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하하······.” 
 
허탈한 웃음과 함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퍼져 나가는 안도가 있었다. 
왜일까. 
나는 그 순간 아일렌의 손목 시계를 보고 있었다. 
거꾸로 돌아가지 않고, 앞으로 향하는 시계. 
어디로도 되감기지 않고, 착실하게 나아가는 그 시간. 
얼마든지 되돌아갈 수 있으나, 이번만큼은 돌아가지 않은 바늘. 
 
“······왔다.” 
 
그 마음이, 너무 기꺼워서 나는 모처럼 녀석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다. 
 
“응? 무슨 말이에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진짜 유중혁이 왔다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선연히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이 세계에 놈이 있음을. 
굳건한 진천패도를 쥔 채 악마종을 도륙하는 녀석이, 이 땅의 지평선 너머에 지금 막 도착했음을. 
나는 그 순간의 감정에 격앙되어 일순 스마트폰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아마도, 김독자는 그 스마트폰을 먼저 확인했어야 했다.」 
 
[제4의 벽]의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떨어진 폰을 주웠다. 
늘 그렇듯, 화면에는 텍본의 제목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나는 뭔가를 깨닫고 가슴 한 구석이 섬뜩해졌다.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정확히는, 텍본의 제목 뒤에 이상한 말이 더 붙어 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1차 수정본).txt 
 
 
 
 
 
< Episode 41. 진짜 혁명가 (6) > 끝

< Episode 42. 아스모데우스 (1) >
 
 
 
 
 
Episode 42. 아스모데우스 
 
 
덜덜덜 굴러가는 침대차. 아일렌을 비롯한 의회의 공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나를 어딘가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무슨 중환자라도 모시듯 꽂힌 링거로 잘게 쪼개진 설화 파편들이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급박한 상황과는 별개로, 내 마음은 조금씩 차분해지고 있었다. 
나는 상황을 간단히 정리해보기로 했다. 
 
[현재 당신은 ‘길로바트 공단’의 계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혁명가가 되고, 마침내는 ‘길로바트 공단’의 계승권을 얻게 되었는가? 
그 의문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김독자’가 ‘길로바트 공단’의 지배자를 죽였다.」 
 
얼핏 순환 논증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공단의 ‘김독자’는 이 몸이 아니니까. 
즉, 쉽게 말해 누군가가 나를 사칭하여 그곳에서 명성을 쌓고, 마침내는 지배자를 죽여버린 것이었다. 
 
[<스타 스트림>이 시나리오 오류를 수정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관련된 새로운 설화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당연한 얘기지만 그런 정신 나간 놈이 둘이나 있을 리 없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유중혁은 지금 ‘길로바트 공단’에 있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고마움에 들떴다. 
 
아! 우리 유중혁이가 사람 됐구나! 
이 자식이 지금 나를 구해주겠다고 그 공단에 쳐들어갔구나! 
 
진짜 별생각도 없이 그런 감격에 한동안 젖어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럴 턱이 없었다. 
 
그 ‘유중혁’이 나를 구해주겠다고 ‘길로바트 공단’에 쳐들어갔다고? 
 
애초에 유중혁이 내 위기를 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노릇이었다. 
성좌도 아니고 채널 접속도 못하는 놈이 어떻게 내 위기를 알았단 말인가? 
그러니, 유중혁은 나를 구하러 왔다기보다는 그 반대일 가능성이 컸다. 
 
놈은 내가 자길 사칭한다는 걸 눈치채고 나를 족치러 마계에 온 것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뭔가 일이 꼬여서 ‘길로바트 공단’에 먼저 찾아갔고, 거기서 불필요한 시비를 겪어 공단 전체를 엎어버린 것일 터다. 
대체 얼마나 어마어마한 분노를 가지고 있어야 그딴 짓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치료 중이에요. 몸 떨지 마요.” 
 
치료실에서 내 설화를 손보던 아일렌이 인상을 쓴 채 안경을 밀어 올렸다. 나는 머쓱하게 대답했다. 
 
“미안, 본능이라서. 상태는 좀 어때?” 
“본인 몸상태인데 남말하듯 하지 마세요.” 
 
아일렌은 한숨을 푹푹 쉬면서도 그렇게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기적이라고 밖엔 볼 수 없네요. 조금씩 회복세에 접어들고 있어요. 설화의 손상이 너무 커서 함부로 움직이는 건 곤란하지만······ 그래도 정양하면 괜찮을 것 같군요.” 
 
다시 ‘메인 시나리오’에 진입했기 때문인지, 호흡의 감각 부터가 달라져 있었다. 
추방자가 되었다가 다시 시나리오로 돌아온 느낌이 어떤 것인지,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이것이 ‘이야기’구나.」 
 
마치 포근하고 거대한 세상이 나를 감싸 안고 있는 느낌. 
우습게도, 이제야 내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런 ‘감각’은 대체 어느 누가 설계한 것일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워진다. 
 
“큿······.”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요!” 
 
아일렌의 뾰족한 목소리와 함께 강한 격통이 찾아왔다. 
 
[현재 당신의 설화 구성이 불완전합니다.] 
 
시나리오로 진입하며 회복세에 접어들었다곤 해도, 여전히 내 상세는 심각했다. 
하긴, 세이스비츠 공작을 처치하면서 그런 꼴을 당했는데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오히려 기적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무모한 전투였으니까. 
나답지 않게, 왜 그렇게까지 행동했는지 잘 모르겠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수소문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무려 ‘설화병기’를 소환했으니, 앞으로의 이야기도 대단히 복잡해지게 됐다. 
나는 미뤄두고 있던 메시지 로그를 열어보았다. 
 
[채널 내의 대다수 성좌들이 당신의 활약에 크게 감탄했습니다!] 
[3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자신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4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간만에 후원금이라니. 
어쩐지 감개가 무량하구만. 
 
[스무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종료되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 ― ‘마계 혁명’을 클리어하였습니다.] 
[과도한 메인 시나리오 스킵으로 인해 보상 수령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 클리어로 인한 설화 수령이 대기 중입니다.] 
 
약간의 문제는 있지만 시나리오 메시지도 제대로 들어왔고.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정체를 궁금해합니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을 자신의 성운에 초대하고자 합니다!] 
[누군가가 당신의 설화병기에 눈독을 들입니다!] 
 
익숙한 헛소리들도 시작됐다. 
왜 저렇게들 날뛰는지는 알 만했다. 
 
「설화병기 플루토」 
 
거신병급의 설화병기는 성좌들조차 탐을 내는 물건이었다. 
그도 그럴 게, 거신병은 거대 설화 중 하나인 <기간토마키아>가 발동했을 때만 볼 수 있는 희귀한 병기니까. 
소환자의 탑승 없이도 전설급 설화인 [공장]을 장난감처럼 짓밟을 수 있는 병기. 
그런 병기를, 성좌들이 탐을 내지 않을 턱이 없었다. 
그나저나 아직 ‘그분’은 오지 않으신 모양인데······.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셨네, 제기랄.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부유한 밤의 아버지. 
다행히 그는 나를 바라보는 것 이외에는 딱히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자신의 설화병기를 멋대로 사용했으니 화를 낼 법도 한데······. 아니, 애초에 하데스가 바라보는 것 자체가 무서운 일인지도 모른다. 무려 저승의 왕인데.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제4의 벽’이 키득키득 웃습니다.] 
 
빌어먹게도, 저 얄미운 녀석이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물론 나도 이제 나름 ‘설화급 성좌’이니 격으로 따지면 어떻게 하데스 발가락에라도 비벼볼 만은 할 텐데, 문제는 지금 내 상태였다. 
전신을 칭칭 감은 붕대가 지금의 내 상세를 대변하고 있었다. 
 
화신체는 격의 표현형(表現型). 
표현형이 망가져 있으니, 자연히 성좌의 격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이렇게 다쳐본 건 난생 처음인데······. 
팔 하나 까딱하기 힘든 상태였지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손 안의 스마트폰이었다. 
내가 히죽거리자, 붕대를 감던 아일렌이 또 인상을 찌푸렸다. 
 
“······그거 너무 오래 들여다보고 있지 말라고 했죠.” 
“우리 엄마도 항상 그렇게 말했지.” 
“무조건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요.” 
“나한텐 이거 보는 게 절대 안정이야.” 
 
나는 일부러 자세한 내용은 설명하지 않았다. 
어차피 설명해도 못 알아 듣거나 죄다 필터링 될 게 뻔하고. 
 
“세이스비츠 공단은 어때? 아니, 이젠 ‘유중혁 공단’이라 불러야겠군.” 
“괜찮아요.” 
 
공작이 죽은 후, 공단은 다시 안정세를 찾아가고 있었다. 
[수거 노예]들과 포로로 잡힌 귀족 잔당들의 처우에 관해서는 말이 많았지만, 그래도 아일렌은 잘 해내고 있었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아일렌이 물었다. 
 
“당신, 사실은 ‘유중혁’이 아니죠?” 
 
예상했던 질문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니야.” 
“하지만 이 ‘공단’의 주인은 이제 ‘유중혁’이에요.” 
 
확실히, 그 말이 맞았다. 
실제로 내 메시지에도 그런 언급이 있었으니까. 
 
[현재 공단의 주인은 ‘공작 유중혁’입니다.] 
 
‘공작 유중혁’이라······. 
이 자식은 정말 나한테 고마워해야 한다. 
나는 아일렌을 보며 말했다. 
 
“곧 잘나신 공작님께서 직접 찾아올 거야.” 
 
그 말에, 아일렌의 표정이 묘한 긴장으로 물들었다. 
 
“······유중혁은 어떤 악마인가요?” 
“악마는 아냐. 가끔 악마 같을 때도 있지만.” 
 
뭐라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이렇게 말해주기로 했다. 
 
“이번 회차의 유중혁은 좋은 놈이야.” 
 
아일렌은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보다 부탁이 있는데, 장하영이랑 한명오 좀 불러줄 수 있어? 얘기할 게 좀 있어서.” 
“······알겠어요.” 
 
일단 고비 하나는 넘겼다. 
하지만 말 그대로, 그저 ‘고비 하나’일 뿐이었다. 
‘혁명가 시나리오’는 끝났지만, 이어질 시나리오는 ‘혁명가 시나리오’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스케일이 컸다. 
 
[몇몇 마왕들이 당신의 행적에 관심을 가집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먹히는 쪽은 이쪽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일렌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나는 망설임 없이 패널 화면의 파일을 열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1차 수정본).txt 
 
모처럼 보는 ‘멸살법’이라 그럴까. 
벌써 부터 심장이 뛴다. 
‘1차 수정본’이란 건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작가는, 대체 이걸 왜 나한테 준 걸까······. 
 
그러나 파일 화면은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아일렌이 만든 스마트폰이 유사품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내 구형 폰이 그리워질 정도의 성능이랄지. 
파일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열렸다. 
 
“······폰이 느린 게 아니라 파일이 너무 큰 건가.” 
 
하긴, 이 정도면 최적화되지 않은 PC에서 로드해도 시간이 걸릴 정도의 크기였다. 간만에 어마어마한 양의 텍스트를 접하자, 나는 조금 기가 질렸다. 
 
젠장, 내가 이걸 어떻게 다 읽었지?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정됐는지 알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읽으며 기억과 대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처음 열 페이지 정도를 읽었을까. 
 
······바뀐 게 크게 없는 거 같은데? 
 
지하철로 시작하는 것도 그렇고, 유중혁이 하는 짓도 그렇고······. 
게다가 이 자식은 수정본인데도 대사가 왜 이 모양인지. 
그런데, 원래의 ‘멸살법’에 없던 문장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유중혁은 생각했다. ‘그놈이었다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 
 
나는 어떤 서늘한 느낌에 멈춰섰다. 
 
「‘그 녀석이 있었다면, 조금 다르게 판단했겠지만...’」 
 
나는 무의식 중에 스크롤을 굴려 다시 앞 페이지로 이동했다. 스마트폰의 성능 때문에 텍스트가 버벅였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섬뜩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나는 뭔가를 놓치고 있었다. 
······첫 장면이 같다고? 
아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시작이었다. 
 
나는 ‘멸살법’의 1화의 가장 첫 페이지에 스크롤을 놓은 채, 한참이나 망연한 얼굴로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3회차가 아니었어.”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의 1차 수정본. 
나는 그 소설의 첫 문장을 다시 읽었다. 
 
「그렇게, 유중혁의 네 번째 생이 시작되었다.」 
 
1차 수정본은 유중혁의 4회차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생각했다.」 
「‘이번 회차에, 녀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 Episode 42. 아스모데우스 (1) > 끝

< Episode 42. 아스모데우스 (2) >
 
 
 
 
 
이번 회차에, 녀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류가 흘렀다. 
 
······설마, 아니겠지. 
당연히 아닐 것이다. 
 
유중혁이 ‘녀석’이라고 칭할 만한 녀석은 많으니까. 
이전 회차에서 유중혁이 만난 ‘녀석’만 몇 명인데, 그게 나일 리가······. 
그러나 종종 등장하는 유중혁의 사유들을 읽으며,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유중혁은 생각했다.」 
「‘회차를 반복한다고 나아진다 생각하지 말라 했었지.’」 
「‘이번 생은 이번 생일 뿐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포기하진 않겠다.’」 
 
제기랄, 이건 아무리 봐도 내가 한 말이잖아. 
나는 페이지 스크롤을 빠르게 내리며 다른 장면들을 훑었다. 
‘그 녀석’이 남겼다는 말들은 그 후에도 왕왕 등장했다. 한 번도 ‘김독자’라는 이름이 표기된 적은 없었지만, 언젠가 내가 녀석에게 건넨 듯한 말들이었다. 
물론 나도 내가 한 말들을 다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일백 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봐도 나 말고 유중혁에게 이런 말들을 건넬 인물은 없었다. 누군가 그런 건방진 말을 했다면, 진즉에 유중혁에게 목이 달아났을 테니까. 
 
“······정신병 걸리겠네 진짜.”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혼잣말을 궁금해합니다.] 
 
나는 제천대성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아무래도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뜻밖에도, [제4의 벽]이 나를 도와주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요컨대, 현재 상태란 이런 것이었다.」 
 
그래, 말해봐. 
 
「하나, ‘멸살법’의 1차 수정본이 도착했고.」 
「둘, 수정본은 유중혁의 4회차부터 시작하고 있었으며.」 
「셋, 4회차 유중혁의 회상에 ‘김독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등장했다.」 
 
참으로 일목요연한 정리였다. 
그리고 그 세 가지가 방증하는 사실은, 단 하나뿐이었다, 
 
「유중혁의 ‘3회차’는 실패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렇게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만약 나와 유중혁이 이 세계의 결말에 도달했다면, 유중혁이 4회차로 넘어갈 턱이 없을 테니까. 
즉, 가장 합당한 추리는 이것이었다. 
내가 개입한 3회차는 실패했고, 그 실패 이후의 회차가 이 ‘멸살법’의 수정본에 새롭게 기록되었다는 것.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싶지만, 이미 불가능한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난 세상이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쉰 후 ‘멸살법’의 텍본을 다시금 살폈다. 
하나의 의문은 해결되었지만, 또 다른 의문들이 잔뜩 산적해 있었다. 
나는 [제4의 벽]을 통해 일단 떠오르는 의문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보았다. 
 
「왜 유중혁의 ‘4회차’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내가 등장인물이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고, 혹은 다른 문제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4회차부터는 ‘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내가 좀 더 집중적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는 두 번째였다. 
 
「만약 ‘1차 수정본’이 미래의 일을 서술한 거라면, 내가 앞으로 하는 행동에 따라 ‘2차 수정본’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쩌면 이 ‘1차 수정본’이 ‘확정 미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높은 확률로 그렇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만약 이것이 ‘확정된 미래’라면, 작가가 굳이 이걸 나한테 보냈을 리가 없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작가는 이 ‘수정본’을 통해 나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이대로 가면 3회차는 실패로 돌아가고, 4회차의 유중혁은 홀로 또 다시 회귀를 반복하게 된다고. 
그런 경고를 보낸 셈이다. 
물론 작가가 지독한 악취미일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어차피 생각해 봐야 답도 없으니 고려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은 이걸 다 읽어야 한다는 건데······ 골통 깨지겠네.”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멸살법’을 계속해서 읽어갔다. 
바뀐 부분도 있었고, 그대로인 부분도 있었다. 
하여간, 이야기를 다시 읽는 동안 속으로 수많은 감회가 교차했다. 
 
‘유중혁 이 자식, 내가 그 지랄을 했는데도 또 이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과. 
 
‘어? 이것봐라. 그래도 좀 달라졌네?’ 
 
하는 생각들. 
또는······. 
 
‘그랬지, 여기 참 재밌었지. 이 부분 좋았는데.’ 
‘시발, 존나 설명 많네 진짜······.’ 
‘······아니, 그래도 문장이 좀 단정해진 것 같은데? 작가가 성장했나?’ 
 
그런 상념들 속에 잠겨 페이지를 내리다 보니, 나는 어느새 독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멸살법’에 빠져들고 있었다. 
여전히 개복치 짓거리를 반복하는 건 비슷했지만, 그래도 흥미로운 점은 내 개입으로 인해 유중혁의 자잘한 실수가 좀 줄어들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괄목할만한 부분은 4회차의 옥수역에서 나처럼 ‘어룡’을 잡고 시작했다는 것. 
 
「유중혁은 생각했다. ‘그 녀석도 여기서 히든 시나리오를 얻었겠지.’」 
 
그리고 8회차와 11회차의 [극장 던전]에서 죽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여기선 그 녀석 덕분에 살았었지. 뭐, 내버려뒀어도 어떻게든 살아났겠지만.’」 
 
그 부분을 읽을 때는 거의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 했다. 
자랑할 곳이 있다면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다. 
 
‘여러분, 보세요. 빌어먹을 개복치 자식이 이만큼이나 성장했다고요.’ 
 
물론 ‘멸살법’의 독자는 나밖에 없으므로 자랑할 곳 따위 있을 턱이 없다. 
그렇게 한참이나 빠르게 내리던 스크롤이 멈춰선 것은 불현듯 떠오른 의문 때문이었다. 
 
잠깐만, 이 녀석 생각보다 잘 하고 있는 거 같은데? 
 
그럼 이 다음 내용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나로 인해 영향을 받은 유중혁은······ 이 세계의 제대로 된 ‘결말’에 도달한 건가? 
 
“뭐야, 멀쩡하네? 아일렌이 다 죽어간다고 그랬는데.” 
“김······ 중혁 씨. 몸은 좀 괜찮은가?” 
 
끼익, 하며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장하영과 한명오였다. 
그러고 보니 아일렌한테 이 둘을 불러달라고 말한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엇, 그거 스마트폰 아냐?” 
 
장하영은 내가 들고 있는 기기를 보자 반색을 하며 달려들었다. 
나는 가볍게 폰을 쥔 손을 바꾸며 대답했다. 
 
“아냐, 저리 가.” 
“혹시 문자도 돼? 전화는? 인터넷은?” 
“될 턱이 있냐.” 
 
내 냉담한 대답에 장하영이 시무룩해진 눈치로 말했다. 
 
“······그럼 왜 부른 건데?” 
“내가 말해준 성좌들한테 계속 연락해보고 있냐?” 
“아아, 걔들?” 
 
장하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별 관심없어 하던데.” 
“그래?” 
 
앞으로 닥쳐올 시나리오들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겨내기가 어려웠다. 
지금까지 상대한 적들은 시나리오를 통해 강림한 재앙이었거나 개별적인 성좌였지만, 앞으로 나를 방해할 녀석들은 그보다는 덩치가 있는 녀석들이다. 가령, 빌어먹을 ‘운명’으로 나를 엿먹였던 <베다> 같은 놈들. 
그러니 녀석들과 대항하려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성좌나 초월좌들의 동향을 알아 볼 필요가 있었다. 
 
“다들 자기 할 일 바빠 보이던데. 대부분은 대답도 잘 안해 줘.” 
 
그런데······ 아직은 너무 일렀나 보다. 
본래 장하영이 ‘초월좌들의 왕’이 되는 것은 이보다 훨씬 나중의 이야기였다. 그러니 원작에서 장하영의 편이 되었던 성좌라고 해도, 지금 시점에서는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게다가 이미 ‘원작’도 바뀌어버린 참이고.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됐어. 넌 나가봐.” 
“······뭐야? 지가 불러놓고.” 
 
장하영이 투덜대며 자리를 비우자, 치료실에는 나와 한명오만이 남았다. 우물쭈물 눈치를 보던 한명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 이상한 데가 있구만. 회사 다니던 시절부터 알고는 있었네만······.” 
“됐고요. 왜 부른지는 아시죠?” 
“으흠.” 
 
눈치 빠른 한명오는 역시 내가 왜 부른 것인지 아는 것 같았다. 
 
“······사실, 아직 연락이 안 되고 있네.” 
“권속 연결은 회복 됐을 텐데요?” 
“회복됐네. 그런데 마왕 쪽에서 응답이 없어.” 
 
얼마 전, 나는 [사인참사검]의 힘으로 한명오와 마왕 ‘아스모데우스’와의 연결을 끊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일 뿐. 슬슬 아스모데우스가 다시 접촉해 올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연락이 없다······. 
 
“짐작가시는 건 없으십니까?” 
“이젠 더 이상 나를 믿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런데 그 순간, 츠츠츠츳 하는 느낌과 함께 한명오의 표정이 바뀌었다. 
 
“궈, 권속 연결이 됐네!” 
 
나는 순간 긴장했다. 
마왕 아스모데우스. 
72 마왕 중에서도 손에 꼽는 힘을 가진 마왕이, 이제 한명오의 눈과 입으로 나를 향해 말을 걸 것이다. 
그런데, 한명오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응?” 
“뭡니까?” 
“뭔가 잘못된 것 같네.” 
“무슨 일입니까?” 
“지, 직접 왔네!” 
“예?” 
“마왕이 직접 왔다고!” 
 
가슴 속 한 편이 차가워졌다. 
마왕이 직접 왔다. 그 말의 의미는 간단했다.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자신의 화신체를 직접 끌고 이 시나리오 지역을 방문했다는 것. 
 
나는 비유를 통해 채널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받으며 물었다. 
 
“이 근처에 왔답니까?” 
“이, 이미 그가 자넬 찾은 것 같네······.” 
 
이미 나를 찾았다고? 
하지만 아무리 감각을 키워 보아도, 마왕의 느낌은 없었다. 
정말로 이 근처에 마왕이 왔다면 채널의 성좌들이 모조리 뒤집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화신체가 행사하는 엄청난 압박감으로 인해 일대의 화신들이 칠공에서 피를 쏟으며 죽었어야 했다. 그런데······. 
 
“잠깐, 설마······?” 
 
생각해 보면, 나는 이곳에서 ‘유중혁’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니 채널에 들어오지 않아 주변 상황을 정확히 모르는 다른 마왕들은, <스타 스트림>의 유명세를 통해 내 위치를 짐작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스타 스트림>에 따르면, 지금 내 위치는······. 
 
“이런 제기랄.” 
“가, 갑자기 왜 그러나?” 
“한 부장, 여기서 [길로바트 공단]이 어느 쪽입니까?” 
 
유중혁이 위험하다. 
 
 
* 
 
 
“김독자님!” 
“김독자님 만세!” 
“공단의 독립이다!” 
 
길로바트 공단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을 들으며, 유중혁은 복잡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유중혁은 자신의 손에 죽어버린 ‘길로바트 공작’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츠츳, 츠츠츳. 
 
초월좌로서 쌓아온 힘을 과도하게 개방한 탓에, 유중혁의 신체 곳곳은 스파크로 새카맣게 타들어가 있었다. 지금 시점에서 개방할만한 힘이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초월형 1단계를 개방하기엔 너무 일렀다.’ 
 
하지만 그 힘을 개방하지 않고서 단 시간 안에 마계의 공작을 처리하는 것은 무리였다. 성좌들에게도 일부러 숨겨왔던 힘이었는데, 하필이면 한 녀석에게는 들켜버린 셈이 됐다. 유중혁은 자신의 어깨 위에 앉은 우리엘 인형을 보며 생각했다. 
 
‘정작 이걸 본 녀석은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지만.’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업적에 흐뭇해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전우애에 감동합니다.] 
 
“······공작은 코인을 많이 준다. 그래서 죽였을 뿐이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히죽히죽 웃습니다.] 
 
유중혁은 그 메시지에 따로 대답하지 않고 공작의 집무실에서 흘러 나오는 패널 화면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혹부리들이 녹화한 듯한 저화질의 시나리오 영상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유중혁이다! 
―내가 바로 유중혁이다! 
 
어이가 없는 장면이었다. 수백의 군중들이 너도나도 자기가 유중혁이라고 외쳐대는 꼴이라니. 제일 꼴같잖은 것은 그 중심에서 제일 큰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 허여멀건한 녀석이었다. 
 
―유중혁이다! 유중혁이다! 와아! 
 
유중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의 뺨에 은은한 홍조가 어립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어서 김독자를 만나러 떠나자고 재촉합니다.] 
 
그러나 유중혁은 고개를 저었다. 
 
“······살아 있는 걸 확인 했으니 됐다. 개인 시나리오는 그만 취소하고, 나를 원래 세계로 돌려 보내라.”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깜짝 놀랍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아직 개인 시나리오는 끝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개인 시나리오의 내용은 김독자를 만나서······.] 
 
“그딴 개인 시나리오를 진짜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큰 충격을 받습니다.] 
 
어깨를 덜덜덜 떠는 우리엘 인형은 <에덴>이 멸망했다고 해도 짓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그 꼴을 보고 있던 유중혁이 가벼운 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보다 네놈은 괜찮은 거냐?”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듭니다.] 
 
“나는 이걸로 마계의 공작이 됐다. 그런데 넌 대천사고. 같이 다니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크게 당황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제기랄.” 
 
속으로 온갖 욕설을 내뱉은 유중혁이 앞으로 이 대책없는 대천사를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찰나.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경고합니다!] 
 
츠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에서 엄청난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 가공할 기운에 유중혁은 본능적으로 [진천패도]를 뽑아들었다. 하지만 적은 칼 한자루를 뽑아들었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나의 정수(精髓)처럼 모여드는 새카만 심연. 
이 마계의 가장 깊은 어둠이 눈앞에 현현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이 어둠을 잘 알고 있었다. 
 
“도망쳐라. 네 상징체를 지켜줄 수 없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그럴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유중혁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한 번도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던 우리엘 인형이 당황한 기색으로 유중혁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그 떨림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마치 그 두려움을 인정하기 싫다는 듯, 유중혁이 짓씹듯 입을 열었다. 
 
“······나는 저 녀석에게 한 번 죽은 적이 있다.” 
 
다음 순간, 주변의 화신들을 모조리 터트려버리는 엄청난 아우라와 함께 어둠의 본신이 드러났다. 
 
[이런 곳에 있었군요, ‘구원의 마왕’.] 
 
 
 
 
 
< Episode 42. 아스모데우스 (2) > 끝

< Episode 42. 아스모데우스 (3) >
 
 
 
 
 
지금 당장 길로바트 공단으로 데려다 달라는 내 말에, 아일렌은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서 길로바트 공단까지는 아무리 빨리 가도 이틀은 넘게 걸려요. 초월적 존재의 도움이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사절단이 타고 온 운송 기관이 있을 거 아냐. 그걸로도 무리야?” 
“그걸 썼다고 가정했을 때 이틀이에요.” 
 
이틀이라니······ 내겐 두 시간도 너무 길었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한 시간 안에는 도착해야 유중혁의 시체 쪼가리라도 건질 수 있을 텐데. 
나는 머릿속으로 열심히 방법을 떠올렸다. 
 
“‘초월적 존재’의 도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헤르메스’였다. 
그 성좌의 가호가 있다면 이틀의 거리쯤 몇 분도 되지 않아 주파할 수 있겠지. 
문제는 녀석이 <올림포스> 소속이라는 것이었다. 
 
“······뒈지면 뒈졌지, 그놈들 손을 빌릴 수는 없고.” 
“네?” 
 
놀란 아일렌에게 내가 손사래를 쳤다. 
 
“그냥 혼잣말이야.” 
 
물론, 일부러 내뱉은 혼잣말이었다. 
왜냐하면.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합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궁금해합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이 감춘 정보를 궁금해합니다.] 
 
바로 이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서. 
나는 일부러 그들의 메시지를 무시한 채 아일렌을 향해 운을 뗐다. 
 
“다른 방법은 없어? 워프 포탈이라든가, 그런 건······.” 
“여긴 73번째 마계에요. 대마계의 변방 중에서도 변방이라고요. 그런 고급 운송 기관이 있을 리 없잖아요.” 
“······역시 그런가.”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누가 죽게 생겼어.” 
“누가요?” 
“이 공단의 주인이 될 사람.” 
 
그러자, 예상대로 내 메시지 로그는 폭발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묻습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가 당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폭발이라기엔 아직 소소한 수준이긴 하지만, 채널에 성좌가 별로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나저나 저 성별 바꾸기 뭐시기는 또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긴고아의 죄수. 혹시 도와줄 수 있으십니까?” 
 
내가 성좌에게 직접 말을 걸자, 치료실의 일행들은 깜짝 놀란 표정들이었다. 나는 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괜찮다면 근두운을 좀 빌리고 싶습니다.” 
 
제천대성의 성유물(星遺物) 중 하나인 근두운. 
그것만 있다면, 여기서 길로바트 공단까지 최단 시간 내에 직행하는 것도 가능했다. 문제는 저 까다로운 제천대성이 개연성을 무릅쓰고 그 성유물을 빌려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미 나 때문에 한차례 개연성을 낭비한 상황에······.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왜 ‘근두운’을 필요로 하는지 묻습니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는 말을 잘 해야 했다. 
 
“제가 유중혁을 좀 사칭했거든요. 그리고 유중혁은 저를 사칭했고······ 아무튼 그것 때문에 시나리오 오류가 발생했는데, 문제가 좀 생겨서······.”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짜증을 냅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복잡한 것을 싫어합니다.] 
 
나는 제천대성의 인내심에 맞게 상황을 요약하기로 했다. 
 
“저 때문에 유중혁이 죽게 생겼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알아듣고 도와주겠지 싶었는데, 제천대성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스트레스로 머리를 한 움큼 뽑습니다.] 
 
“잠깐만요.”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머리빗을 찾으러 떠납니다.] 
 
“저기요?” 
 
사라진 제천대성에게서는 응답이 없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가 이 상황을 즐거워합니다.] 
[1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망연히 허공을 올려다보는 내게, 아일렌이 물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 이 공단의 새 주인이 될 사람이 위기에 빠졌다 이거죠?” 
“······맞아.” 
“왜요?” 
“마왕이랑 만나게 생겼거든.” 
“마왕이라고 꼭 포악한 자만 있는 건 아닐 텐데요. 운이 좋다면 살아남을 수도 있어요.” 
“그렇기는 한데······.” 
 
문제는 그 ‘마왕’이 하필 아스모데우스라는 것이다. 
원작에서, 아스모데우스는 유중혁이 회차를 건널 때마다 늘 가장 큰 고비가 되는 숙적 중의 하나였다. 
심지어 유중혁은 이미 지난 회차에서 아스모데우스에게 죽은 적도 있다. 
그 녀석을 상대로, 유중혁이 무사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그림은 떠오르지 않았다. 
초조한 눈으로 내 모습을 보던 한명오가 물었다. 
 
“지금 그 꼴로 가서 뭘 할 수 있겠나?” 
 
사실 그것도 문제긴 했다. 
가더라도 이미 걸레짝이 된 내가 유중혁과 힘을 합쳐 ‘아스모데우스’를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하지만.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죠.” 
“허, 자네가 이렇게 열정적인 줄은 몰랐네. 회사 다닐 적에는······.” 
“죽을 만큼 열심히 해도 정직원 하나 달기 어렵던 그때랑은 다르니까요.” 
“······험.” 
 
상황은 나빴지만, 나는 가능한 낙관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내가 가지 않아도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른다. 
기적이 일어나 유중혁이 엄청난 각성을 할지도 모르고, 아스모데우스가 갑자기 착한 놈이 되었을 수도 있다. 
 
······젠장, 그럴 턱이 있나. 
 
나는 스마트폰을 열어 ‘멸살법’의 수정본을 다시 펼쳤다. 
당장 떠오르는 방법이 없으니 이거라도 읽어서 해답을 궁구해야 했다. 
 
“갑자기 뭘 하는 거죠?” 
“쉿, 조용히 하게. 저게 저 친구가 제일 잘 하는 거야.” 
 
나는 스크롤을 빠르게 내리며 ‘멸살법’의 내용을 훑어 내려갔다. 
그렇게 12회차쯤 되었을까, 문장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유중혁이 생각하기로, 3회차의 실패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 그런 이유는 빨리빨리 좀 생각하라고 망할 자식아. 
그리고 다음 문장을 읽은 순간, 나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거의 돌아버릴 지경이 되었다. 
 
「‘그때, 우리는 마왕 ‘아스모데우스’와 척을 지지 말았어야 했다.‘」 
 
 
* 
 
 
새카만 눈동자를 가진 작은 소녀가 그곳에 있었다. 
여덟아홉 살쯤 되었을 듯한 작은 몸집. 젖살이 다 빠지지 않은 통통한 볼과, 아역 배우를 연상케 하는 다채로운 표정. 겉으로 봐서는 어떤 위협감도 느낄 수 없는 존재였다. 
 
‘······취향은 여전하군.’ 
 
하지만 유중혁은 알고 있었다. 저 몸에 깃든 거악(巨惡)은, 결코 아동용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저 소녀는 72개로 흩어진 대마계의 정점 중 하나이자, 무시무시한 설화급 성좌들조차 꺼리는 ‘32번째 마계’의 주인이었다. 
 
정욕과 격노의 마신, 아스모데우스. 
 
그 아스모데우스가, 소녀의 얼굴로 새침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요. 그냥 이야기를 하러 온 것뿐이니까.] 
 
쿠구구구구! 
 
그저 진언을 내뱉은 것만으로 일대의 화신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정도면 아마 공단 중심가에 있는 모든 화신들이 피를 쏟아내고 있을 것이다. 그 무시무시한 압박감 앞에, 유중혁은 숨을 참은 채로 전신의 마력을 끌어 올렸다. 
 
츠츠츳. 
 
그러자 피부를 감싸던 압박감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초월좌가 된 유중혁조차 이토록 운신을 힘들게 만들 정도의 존재감. 역시 마왕 정도 되면 격 자체가 달랐다. 그런 유중혁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스모데우스는 사뿐한 발걸음으로 유중혁에게 다가왔다. 
 
[흥미롭군요. 마지막으로 권속을 통해 만났을 때는 ‘세이스비츠 공단’에 있었는데······.] 
 
분명 가벼운 발걸음이었지만, 유중혁의 눈에는 그 한 발짝 한 발짝이 세상에서 제일 무겁게 느껴졌다. 진천패도를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고, 목덜미에는 핏줄이 불거졌다. 
 
[그 짧은 사이 ‘길로바트’로 이동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공작위를 차지해버리다니······ 정말 대단한 솜씨군요, 구원의 마왕.] 
 
‘구원의 마왕’이라니······. 
아무리 봐도, 누굴 찾아온 것인지는 명백해 보였다. 
 
‘빌어먹을 김독자.’ 
 
자칫하면 엉뚱한 곳에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 
짧은 사이, 유중혁은 수십 가지의 생각을 떠올렸다. 
 
‘놈은 불완전한 화신체 상태다. 이길 수 있을까?’ 
‘아니, 무리겠지.’ 
‘화신체라고 해도, 여기는 마계니까.’ 
‘그러면 도망칠까?’ 
‘그것도 무리다.’ 
‘마음먹고 화신체로 현현한 마왕을 떨쳐낼 방법은 없다.’ 
 
본래 ‘마왕’은 이 시나리오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 
겉으로 드러나는 스파크만 보아도, 실시간으로 무시무시한 개연성이 소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만한 결심을 하고 나타난 상대를 당장 떨쳐낼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조금이나마 기대할 방법이 있다면, 하나뿐이다.’ 
‘놈이 개연성을 탕진할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 
 
아무리 마왕급이라고 해도 하위 시나리오에 오랫동안 화신체를 현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약간의 시간만 끈다면 녀석은 강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것이 ‘전투’가 아니어야 한다는 것. 
결국, 유중혁은 자존심을 잠시 굽히기로 했다. 
 
“그래, 내가 ‘구원의 마왕’이다. 넌 누구지?” 
 
[······조금 이상하네? 원래 이렇게 잘생긴 얼굴이었나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 이런 얼굴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얘길 하러 왔다면 용건이나 말해라.” 
 
[후후, 그러죠. 그런데 얘기하기 전에, 좀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말이에요.] 
 
“뭐?” 
 
따악― 하며 아스모데우스의 작은 손가락이 튕기는 순간. 
 
츠츠츠츠츠! 
 
가공할 스파크가 몰아치더니, 팔이 반쯤 찢겨 나간 작은 인형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나.] 
 
유중혁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상대는 마왕. 
겨우 [은둔자의 망토] 정도로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게 오산이었다. 
 
[왜 이곳에 ‘대천사’의 상징체가 있는 겁니까?] 
 
“나는 모르는 일이다.” 
 
[그러신가요? 이래도 말인가요?] 
 
츠츠츠츠츳! 
 
강렬한 스파크가 몰아치자, 우리엘의 인형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시시껄렁한 상징체를 보아하니, 대충 누군지 알겠군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아스모데우스’를 노려봅니다.] 
 
[대천사 우리엘. 당신의 형제 라파엘은 잘 있습니까? 그에게 진 빚을 아직 잊지 않았다고 전해줬으면 좋겠군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노호성을 토합니다!] 
 
[물론,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말이에요.] 
 
유중혁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이곳은 마계. 아무리 우리엘이라고 해도 간소화 된 상징체로 화신체인 마왕과 대적할 수는 없다. 유중혁은 망설이지 않고 기운을 발출했다. 
 
“그만둬라.” 
 
여기서 우리엘의 상징체를 잃는 것은 곤란했다. 
만약 여기서 우리엘을 잃게 되면, 그는 자칫 시나리오의 미아가 될 수 있었다. 끓어오르는 유중혁의 마력압에, 아스모데우스의 눈빛에 경이가 스쳤다. 
 
[흐음? 이 기운은······ 강하군요. 하지만······.] 
 
다음 순간, 아스모데우스는 유중혁의 코앞에 있었다. 
 
[어디서 한낱 필멸자가 별의 흉내를 내는 건지.] 
 
순식간에 뻗어진 작은 팔이 유중혁의 턱을 붙잡았다. 
 
“큭······!” 
 
[역시 그대는 ‘구원의 마왕’이 아니야. 그렇지?] 
 
유중혁은 다급히 그 손을 뿌리치며 [진천패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패도는, 아스모데우스의 손에 너무도 쉽게 붙들렸다. 
 
[이렇게 예쁜 얼굴인 줄 알았더라면, 내가 처음부터 가만히 두지 않았을 테니까.] 
 
까가강! 
 
그 말과 함께 [진천패도]가 우그러지며 반으로 두 동강 났다. 
 
[나를 두려워하고 있구나. 귀여운 아이야.] 
 
“크윽······.” 
 
[그렇게까지 반항하면, 내가 대화할 마음이 사라지잖아.] 
 
새카만 그림자들이 아스모데우스의 뒤쪽으로 몰려들었다. 보는 것만으로 질식할 듯한 어둠이 허공으로 집약되며 거대한 뿔을 가진 괴수의 형상을 빚었다. 
 
[짓밟고 싶어라.] 
 
유중혁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초월좌인 그를 짓누를 정도의 강대한 설화. 
그 아득한 존재감 앞에서, 유중혁은 조용히 ‘초월형 1단계’를 준비했다. 
승산은 없었지만 유중혁은 포기하지 않았다. 
만약 단 한 순간만 빈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놈을 꺾을 수는 없어도 ‘지구 시나리오’로 귀환할 시간은 벌 수 있을지 모른다고. 
유중혁은 생각했다. 
 
투콰아아앙! 
 
단 한 번의 공격을 허용하는 것으로, 유중혁은 모든 육신이 부서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의 관절이 꺾였고, 배를 두드리는 마력에 서 있을 힘조차 모조리 빼앗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넝마가 된 채 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그런 유중혁을 들어 올린 아스모데우스가, 유중혁의 이마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믿을 수 없군요. 한낱 인간이 이렇게 숭고한 절망을 가지고 있다니.] 
 
“개······ 자······ 식.” 
 
[페르세포네가 말하길 분명 ‘김독자’라는 이야기가 최고일 거라고 했는데. 후후.] 
 
고요히 입맛을 다시는 아스모데우스. 
유중혁은 그런 아스모데우스를 노려보다가 눈을 감았다. 
 
‘미안하다, 김독자.’ 
 
이젠 방법이 없었다. 다음 회차를 기대하는 수밖에. 
천천히 눈을 감은 유중혁의 시계가 뒤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초침이, 분침이, 그리고 시침이. 
거대한 태엽이 지금껏 걸어왔던 방향의 정반대로 움직이려는 그 순간. 
 
「그러니까, 제발 일찍 좀 생각하라고 했잖아.」 
 
갑자기, 유중혁의 시계가 멈췄다. 
 
 
*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발동합니다!] 
 
거대한 스파크가 유중혁의 주변에서 튀어 오름과 동시에, 깜짝 놀란 아스모데우스가 뒷걸음질을 쳤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는 유중혁의 내부에서, 뭔가 다른 존재가 깨어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나였다. 
 
[당신은······.] 
 
츠츠츠츠츳! 
 
[성좌, ‘구원의 마왕’이 마왕 ‘정욕과 격노의 마신’을 바라봅니다.] 
 
나는 새파랗게 일렁이는 눈으로 아스모데우스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내 화신을 건드리지 마라, 아스모데우스.] 
 
 
 
 
 
< Episode 42. 아스모데우스 (3) > 끝

< Episode 42. 아스모데우스 (4) >
 
 
 
 
 
“대체 이 남자는 무슨 생각으로······!” 
 
아일렌은 카테터를 뽑아버리고 드러누운 김독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찢어진 붕대 사이로 연신 흘러나오는 설화 파편들. 
 
―지금으로선 이게 유일한 방법이야. 진짜 쓰고 싶지 않지만. 
 
아일렌은 황급히 용기를 가져와 그 파편들을 쓸어 담으며, 다른 쪽 팔의 이야기 맥을 짚었다. 순식간에 창백해져 가는 김독자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화 팩을 더 가져와요! 빨리!” 
 
아일렌의 외침에 곁에서 구경하고 있던 한명오가 치료실 밖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아일렌은 죽어가는 김독자의 얼굴을 보며, 그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을 떠올렸다. 
 
―딱 한 시간 정도만 죽어있게 해줘. 
―아, 물론 진짜로 죽는 건 안 되고. 간신히, 죽을 듯 말 듯한 정도로만. 
―이번에 죽으면 진짜 김남운 그 자식 보러 가야 되거든. 
―그러니까 믿을게. 알겠지? 
 
삐― 삐― 
 
환자 감시 모니터에 비치는 설화 안정도 수치가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김독자를 보며, 아일렌은 조용히 이야기 맥에 새로운 링거를 꽂았다. 
 
 
* 
 
 
다행히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는 무사히 연결됐다. 
아일렌이 제대로 일을 처리해줬다는 뜻이겠지. 
······그건 그렇고. 
 
쿠구구구구······. 
 
눈앞에서 타오르는 아스모데우스의 기파. 기세등등하게 소리친 것과는 달리, 사실 나는 바짝 쫄아 있는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바로 그 ‘아스모데우스’다. 
처음부터 너무 인상 깊은 말로 시작했나 싶어 뒤늦은 후회가 찾아왔지만, 이제와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스모데우스가 입을 열었다. 
 
[구원의 마왕?] 
 
나는 유중혁의 얼굴로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아의 한 귀퉁이에서 유중혁의 영혼이 발버둥 치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억지로 녀석을 잠잠하게 재웠다. 지금 유중혁이 튀어 나와서는 될 일도 안 된다. 
 
[내가 구원의 마왕이다.] 
 
츠츠츠츳! 
 
진언 사용으로 인해 과도한 개연성이 소모되었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여기서는 일부러라도 진언을 써서 기세에서 밀리지 않을 필요가 있었다. 강해 보이기 위해 반말 기조를 유지한 것은 덤이었다. 
의외라는 듯 나를 보던 아스모데우스가 다시 물었다. 
 
[······그자가 정말 당신의 ‘화신’인가요?] 
[그렇다.] 
 
기절한 유중혁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한동안 뼈도 못 추릴 발언이었지만, 어차피 뒤를 생각하고 저지른 일도 아니었다. 지금으로서는 임기응변으로서 이보다 나은 대답이 없었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랬다. 
 
[당신에게 그런 화신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요.] 
[생각보다 그쪽 정보가 느린 모양이군. 이 녀석은 내 화신이 맞아.] 
 
놈은, 분명 나와 ‘대화’를 하러 왔다고 했다. 
그 말의 신빙성은 가늠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이것만이 유중혁이 살아날 방법이었다. 정말로 놈이 ‘대화’만 하러 왔다면, 적어도 내 화신을 건드리는 불필요한 짓은 않을 테니까. 
 
[흐음······.]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아스모데우스의 기파가 점차 거세졌다. 
나는 속으로 내가 알고 있는 ‘아스모데우스’의 정보를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미쳐버린 탐미주의자.」 
「미식협(美食協)의 일원.」 
「올림포스의 명계(冥界)와 약간의 친분이 있음.」 
「비뚤어진 성욕의 소유자.」 
 
몇 가지 도움이 될 법한 것도 있었지만, 당장 쓸 만한 것은 없었다. 
어쨌거나, 이 대치 상황을 최대한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겠지. 
나는 최대한 은밀히 감각을 끌어 올려 주변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탐색했다. 그러나 눈에 띄는 것은 어깨에 들러붙어 있는 작은 봉제 인형뿐이었다. 
 
······이건 또 뭐야? 
유중혁 이 자식, 의외로 이런 걸 모으는 취미가 있었나? 
 
그때, 갑자기 인형이 나를 보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감동의 코피를 흘립니다.] 
 
······잠깐만. 설마 이 인형······.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에게 볼을 부빕니다.] 
 
말랑한 인형의 감촉이 유중혁의 뺨에 부벼졌고, 유중혁의 몸으로 강림해 있는 나도 그 감각을 고스란히 느꼈다. 나는 패닉에 빠졌다. 
 
대체 왜 여기에 ‘우리엘’이 있는 건데? 
 
아스모데우스가 입을 열었다. 
 
[내 ‘격’에 크게 위축되지 않는 걸 보니, 소문이 맞기는 한 모양이군요. 10번대 시나리오에서 ‘설화급’에 올랐다더니······ 설마 사실이었을 줄이야.] 
[모르지. 소문 이상일지도.] 
 
나는 우리엘의 인형을 끌어당겨 재빨리 품속에 숨겼다. 안 그래도 분위기가 이상한데 우리엘까지 나서서 엄한 짓을 하면 곤란해진다. 그러자 아스모데우스가 입맛을 다셨다. 
 
[후후, 혀끝이 길다는 이야기도 사실인 듯하군요. 꼭 내 취향이야. 그런데······ 어떻게 살아 있었던 거죠? 성좌 녀석들의 농간으로 죽었다고 들었는데.] 
[운이 좋았지.] 
[······난 비밀이 많은 것도 좋아해요.] 
[난 비밀을 굳이 캐내려는 녀석을 싫어해.] 
[그 자는 이번에 새로 들인 화신인가 보죠? 당신 취향은 어린애라고 들었는데.] 
[무슨 헛소리지?] 
[애써 이렇게 준비를 한 보람이 없어서 하는 말이에요.] 
 
나를 향해 매혹적인 미소를 지은 아스모데우스가 자신의 화신체를 내려다보았다. 예쁘장한 어린아이의 외형. 한명오의 말이 맞다면, 저 화신체가 바로 한명오의 딸일 것이다. 다행히도 한명오랑은 전혀 안 닮았다.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한데······ 헛소문이 꽤 많이 퍼져 있는 모양이군.] 
 
아무래도 신유승을 화신으로 들여서 그런 소문이 퍼진 듯했다. 
내 말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아스모데우스가 유중혁의 얼굴을 보며 싱긋 웃었다. 
 
[하긴, 그 정도로 아름다운 화신체라면 취향을 굽힐 법도 하죠.] 
 
이쯤 되면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한 게 확실했다.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말을 이었다. 
 
“그보다 진언으로 이야기하는 건 그만두지. 주변의 화신들이 남아나질 않겠어.” 
 
[왜죠?] 
 
“여긴 이제 내 ‘공단’이야. 함부로 내 공민들을 해하는 건 그만둬줬으면 하는데.” 
 
공식적으로 길로바트가 ‘김독자’에게 죽었으니, 이곳은 내 공단이 되었다. 
 
[당신은 공단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메시지도 떠오르고 있었고 말이지. 
 
츠츠츳. 
 
물론 실제로는 ‘진언’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게 버거웠기 때문에 적당한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다. 아스모데우스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흐음, 그러네요. 제가 실례를 했군요.” 
 
아스모데우스는 늘 반쯤 정신이 나간 녀석이지만 자신의 목적이 있을 때는 예의를 지킨다. 어디까지나, 목적이 충족될 때까지는 그렇다. 
 
“그래서, 날 찾아온 용건은?”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내가 예언자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어?” 
“당신에게 ‘아스가르드의 예언자’와 비슷한 힘이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저건 아마 안나 크로프트 얘기겠지. 
대체 내 이야기가 얼마나 와전되어 돌아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소문이야 어찌됐든, 슬슬 이쪽에서 밑천을 깔 때가 된 건 확실해보였다. 
 
“아마 ‘마왕 선발전’ 때문에 온 거겠지.” 
 
정답이라는 듯 아스모데우스가 싱긋 웃었다. 
별로 어려운 추리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공단이 함락된 직후, 내 귓가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당신은 현재 73번째 마계의 ‘마왕 후보자’입니다.] 
[현재 새로운 시나리오가 대기 중입니다.] 
 
“그쪽도 새로운 마왕위를 노리고 있나?” 
“음? 나는 이미 32번째 마왕이에요. 하급 마계의 마왕위를 재획득하는 건 무의미하죠.” 
“그러면 뭐지?” 
“나는 당신이 새로운 마왕이 되는 걸 돕고 싶어요.” 
 
역시, 예상은 했다. 
한명오도 비슷한 말을 했었으니까. 
 
―마왕은······ 내 손으로 직접 ‘73번째 마계의 왕’을 만들라고 했네. 
 
잠시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도움은 필요 없어. 지금으로서는 선발전에 참가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하지만 당신에게 거부권은 없을걸요? 공작이 된 이상, 당신은 선발전에 참가해야만 해요.” 
“혼자 힘으로 이겨낼 수 있어.” 
“글쎄, 지금까진 운이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앞으로도 그럴까요?” 
“······.” 
“멜레돈과 베르칸의 공작들도, 과연 당신과 생각이 같을까?” 
 
이미 그쪽에 성운들이 들러붙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것도, 내게 명백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성운들이. 
아스모데우스가 사이하게 웃었다. 
 
“당신은 내 도움이 필요해. 거절하면 죽어.” 
 
그 죽음이 누구에 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죽는 건 확실한 모양이다. 
빌어먹을 놈들. 
기껏 이리저리 피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또 발목을 잡겠다고? 
 
[극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선택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당신의 선택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넘어오면서 비유에게 ‘채널 확장’을 부탁한 탓에, 성좌들도 내 선택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왕’은 대부분의 성좌들이 꺼리는 존재.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내 이야기도 결정될 것이다. 
나는 침착하게 호흡을 고르며 물었다. 
 
“‘거대 설화’가 목적인 거냐?” 
 
내 직언에 아스모데우스의 눈동자에 일순 파문이 일었다. 
 
“······벌써 그런 것까지 알고 있다니, 놀랍군요.” 
“눈 깜빡할 사이 코 베어 가는 놈들만 있는 곳이니까.” 
 
나는 쓰게 웃었다. 
 
거대 설화.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설화들이 일반적인 [설화]의 범주였다면, 이 <스타 스트림>에는 ‘거대 설화’라는 새로운 영역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올림포스의 <기간토마키아>나, 아스가르드의 <라그나로크> 같은 것들. 
‘거대 설화’의 작은 지분을 쌓는 것만으로도, 성좌들은 막대한 힘과 개연성을 얻을 수 있으며 큰 지분을 차지할 시에는 하나의 세력을 일굴 수도 있다. 대멸망 시나리오가 덮칠 때마다 성좌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마계의 ‘마왕 선발전’ 또한 그런 거대 설화 중의 하나였다. 
 
비록 <기간토 마키아>에 비빌 정도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설화들과 비교하기에는 그 스케일이 큰 설화. 
아스모데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나는 거대 설화의 ‘지분’이 필요해요.” 
 
아스모데우스는 이미 마왕인데다 상위 시나리오에 소속된 존재기에 이 선발전에 참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를 돕고 그 대가로 설화의 ‘지분’을 일부 받아갈 수는 있는 것이다. 
 
본래였다면 이쯤에서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마왕 선발전’을 통해 쌓을 수 있는 거대 설화는 앞으로 내가 성운들과 대적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바탕이 될 테니까. 여기서 애먼 녀석에게 설화 지분을 내준다면, 자칫 죽도 밥도 안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유중혁이 수정본의 12회차에서 중얼거린 말이 걸렸다. 
 
「‘그때, 우리는 마왕 ‘아스모데우스’와 척을 지지 말았어야 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유중혁의 멱살을 잡고 묻고 싶었지만, 기절한 이 자식은 12회차는커녕 이제 겨우 3회차인 애송이니 알 턱이 없었다. 
 
결국, 선택은 내가 해야 한다. 
 
마왕의 손을 잡을 것인가, 잡지 않을 것인가.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Episode 42. 아스모데우스 (4) > 끝

< Episode 42. 아스모데우스 (5) >
 
 
 
 
 
“우습군. 아직 나는 ‘마왕’이 되지도 않았어. 아직 갖지도 못한 거대 설화의 지분을 어떻게 나눠줄 수 있지?” 
“내가 도운다면 가능하죠.”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에 오만한 자신감이 떠올라 있었다. 
하나의 존재를 ‘마왕’으로 옹립시키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그 표정. 나는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좋아, 만약 내가 마왕이 된다면 설화 지분을 나눠주겠어.” 
 
순간, 허공의 별들이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판단에 크게 실망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착잡한 눈길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당신의 성별을 바꾸고 싶어합니다.] 
 
성좌들의 극렬한 반응은 예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나의 어떤 행동이 아스모데우스와 척을 지게 만드는 건지 알 수 없는 이상, 녀석을 정면에서 적대할만한 행동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내 선택에 만족한 듯 아스모데우스가 웃었다. 
 
“잘 생각했어요. 얼마나 줄 거죠?” 
“삼십 퍼센트.”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이 실망의 빛이 스쳤다. 
 
“너무 적은데.” 
“너무 욕심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나?” 
“오십 퍼센트. 지금 여기서 계약서를 써줘요.” 
 
순 날도둑놈이 따로 없다. 
거대 설화의 절반을 빼앗기면, 저 ‘아스모데우스’의 동의 없이는 거대 설화의 힘을 끌어 쓸 수 없게 된다. 
나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계약서는 쓸 수 없어.” 
“왜죠?” 
 
드드드드드. 
 
주변의 자갈들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거야 뭐 타고난 협박범이 따로 없군. 하지만 그런 공갈에 당할 정도였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만 지분을 나눠주진 않을 거니까.” 
 
그 말에, 순간적으로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스모데우스는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멍한 표정이었다. 주변의 모든 별들이 숨죽인 채 해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삼십 퍼센트의 설화 지분은 경쟁 지분으로 내놓을 거다.” 
“······경쟁 지분?” 
“누구든, 나를 도와주는 존재라면 그 지분에 대한 몫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야. 누가 얼마만큼의 몫을 가지게 될지는, 전적으로 당사자의 설화 기여도에 달려있겠지.” 
 
그제야 하늘에서 나를 노려보던 시선들이 하나둘 변하기 시작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흥미로운 표정을 짓습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말에 탐욕을 드러냅니다!] 
 
‘경쟁 지분’은 내가 마지막으로 내놓을 수 있는 카드였다. 
어차피 맹수를 끌어 들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그 맹수들의 각축장으로 만들어 내가 선택할 폭을 넓히는 편이 나았다. 
내 의도를 눈치챈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져 있었다. 
 
“······나를 속였군요.” 
“속이지 않았어.” 
 
허공에 떠오른 자갈들이 동시에 나를 향해, 정확히는 유중혁을 향해 쇄도했다. 쉽게 막을 수 없는 강대한 격이 담긴 공격들. 전이라면 힘겨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츠츠츠츠츠츳! 
 
날아들던 돌들이, 보이지 않은 손에 붙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에 정지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마왕 ‘정욕과 격노의 마신’를 노려봅니다.] 
 
이미 내가 거대 설화의 일부를 ‘경쟁 지분’으로 내놓기로 선언한 상황. 그 지분을 노리는 몇몇 성좌들이 아스모데우스의 행동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턱이 없었다. 
아스모데우스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츠츠츠츠츠! 
 
그러나 아무리 아스모데우스라고 해도, 이런 곳에서 다수의 성좌들과 개연성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쪽에는 만만찮은 성좌도 하나 끼어 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정욕과 격노의 마신’을 노려봅니다.] 
 
한동안 허공을 노려보던 아스모데우스가 다시 힘을 회수했다. 그러자 지탱할 곳을 잃은 돌무더기들이 동시에 바닥에 떨어졌다. 
 
[마왕, ‘정욕과 격노의 마신’이 당신에게 실망합니다.] 
 
아스모데우스가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마왕’이 될 수 있는 건 당신 하나가 아니에요. 당신은 지금 중요한 기회를 차버린 거라고.” 
 
언제든 다른 쪽에 붙을 수 있다는 투의 말투. 
확실히, 지금 ‘아스모데우스’가 다른 쪽의 손을 잡는다면 문제는 좀 복잡해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글쎄, 기회를 차버리는 건 내가 아니라 그쪽 같은데.” 
 
짧은 사이, 나는 아스모데우스가 왜 하필 ‘나’를 선택했을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스모데우스는 내가 아니라 [베르칸]이나 [멜레돈] 쪽에 붙는 것이 더 유리했다. 굳이 따지면 나는 인간이자 성좌인 존재고, 베르칸과 멜레돈은 날 때부터 악마종이었으니까. 
그런데, 녀석은 내게 먼저 손을 내뻗었다. 
지금 아스모데우스에게는, 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내 거절에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은 조금 위축되어 보였다. 
 
“······정말 불쾌하군요. 내가 마왕이라 탐탁잖았나요?” 
 
저 지고한 악마가 저런 표정을 짓다니. 
‘멸살법’ 전체로 보아도 이건 극히 드문 장면이겠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왕이든 성좌든 그딴 건 중요한 게 아냐. 나는 내 설화가 최고의 설화가 되길 바라는 것뿐이야.” 
“최고의 설화?” 
“미식협에 속해 있는 당신이라면 내 말뜻이 무엇인지 잘 알 텐데.” 
 
일부러 언급한 그 단어에,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이 일변했다.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한 얼굴. 
인간의 수사로는 형용할 수 없는 그 표정으로 나를 보던 아스모데우스는 그로부터 십여 초가 흐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감히 ‘후보자’가 ‘마왕’의 요리 솜씨를 시험하겠다······?] 
 
츠츠츠츠츠츠! 
 
순간적으로 차오른 가공할 살기에 나는 숨을 들이켰다. 마치 일대의 시공간 전체가 저 마왕의 손아귀에 들어있는 듯한 광경. 당황한 성좌들이 빛을 짜냈으나, 이미 주변의 어둠은 그들의 힘이 닿지 않을 정도로 농도가 깊었다. 
 
이것이 진짜 ‘마왕’의 힘. 
 
만약 아스모데우스가 여기서 진짜 힘을 냈다면, ‘긴고아의 죄수’가 있든 없든 나와 유중혁은 소멸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가 이 힘을 굳이 드러내는 것은 일종의 증명이자 경고였다.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당신에게 미묘한 호감을 드러냅니다.] 
 
언제든, 저쪽에서는 나를 죽여버릴 수 있다는 경고. 
어둠 속에서 아스모데우스가 웃었다. 
 
[내 마음에 쏙 들어. 오늘은 그냥 물러가겠어요.] 
 
다행히 사태는 이쯤에서 일단락되는 듯했다. 
아스모데우스와 딱히 척을 지지도 않았고, 일방적으로 설화의 지분을 빼앗기지도 않았다. 언제든 상황이 뒤바뀔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만들어 놓은······. 
 
[다만, 쓰레기 청소는 하고 가야겠어.] 
 
아스모데우스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가슴 어귀에서 폭발 소리가 들렸다. 마치 바람 인형이 터지는 듯한 소리. 심장 부근이 욱신거리듯 아려왔다. 그러나 유중혁의 신체에는 딱히 손상이 없었다. 
아스모데우스의 화신체가 잿더미로 흩어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내 눈앞에서 그런 게 돌아다니는 꼴은 볼 수 없거든요.] 
 
나는 황망히 사라지는 아스모데우스를 바라보다가, 한순간 스치는 서늘한 감각과 함께 급히 품속에 손을 집어 넣었다. 
 
“······우리엘?” 
 
뒤늦게 끄집어 낸 우리엘의 ‘인형’은 이미 너덜너덜한 넝마 조각이 되어있었다. 곧이어 축 늘어진 인형에 이어져 있던 뭔가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유중혁의 눈으로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와의 연결이 일시적으로 끊어졌습니다.] 
[개인 시나리오가 자동으로 해지되었습니다.] 
 
나는 그제야 유중혁이 어떻게 이곳에 온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엘이 ‘마계’에 개인 시나리오를 지정했고, 유중혁은 그 시나리오를 받아 이곳으로 온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지금 막 그 ‘시나리오’가 강제로 해지되었다는 것이었다. 
 
츠츠츠츠츳! 
 
피부 사이사이로 번지는 선연한 스파크.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것인지 깨달았다. 
 
“우리엘! 정신차려요!” 
 
필사적으로 인형을 흔들어 보았지만, 우리엘에게서는 반응이 없었다. 상징체가 지나치게 망가져서 진체와의 연결이 강제로 해지된 모양이었다. 
 
츠츠츠츠츳! 
 
“제기랄.” 
 
유중혁의 단단한 육체에 균열이 번지고 있었다. 
 
[당신은 ‘메인 시나리오’에서 이탈했습니다.] 
 
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 보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라면, 유중혁은 반드시 죽는다. 
 
[‘추방자 패널티’가 시작됩니다.] 
 
나와는 다르다. 
유중혁에게는 [제4의 벽]이 없다. 
추방자가 되고 나서 지켜줄 녀석이 없단 말이다. 
 
“이봐! 아무라도 좋으니까!” 
 
나는 다급히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유중혁의 전신은 망가져가고 있었다. 
 
쩌저저저저적. 
 
다리에서부터 시작된 균열은 순식간에 목까지 번져 성대를 마비시켰다. 밤하늘의 성좌들에게 도움을 청할 힘조차 앗아가는 패널티. 마치 이대로 이야기를 모두 빼앗아 말려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전 우주가 유중혁의 죽음을 강렬하게 바라고 있었다. 
 
······여기까지라고? 
 
그럴 수는 없다. 
이 녀석이 여기서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다. 
1초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순간 내 머릿속에서 ‘멸살법’의 페이지들이 넘어갔다. 무수한 페이지에 적힌 활자들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고, 나는 그 활자들 중 제일 먼저 손에 닿는 것을 골라 집었다. 
 
그래, 그 방법 밖에 없다. 
 
나에게는 없지만, 유중혁에게는 있는 것. 
그 녀석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유중혁의 배후성을 바라봅니다.] 
 
진언을 쓰고 싶었지만 지금으로서는 힘에 부쳤다. 
부디, 내 이야기가 그 존재에게 닿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화신 ‘유중혁’의 배후성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떤 거대한 존재가 나를 바라보는 느낌. 
어딘가 익숙하고, 익숙한만큼이나 낯선 시선. 
그러나 내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까마득한 느낌이 나를 덮쳐왔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강제로 해제되었습니다.] 
 
 
* 
 
 
새카만 어둠으로 뒤덮인 공간. 
언젠가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다. 
언제였더라. 
별자리의 연회에서 퇴장하던 때의 일이었나. 
 
【■■...】 
【바꿀 방법은...】 
【...없다】 
 
빌어먹을, 그게 대체 무슨 소리― 
 
 
* 
 
 
“허억!” 
 
나는 마치 양수를 토해내듯 숨을 토하며 자리에서 깨어났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목에서는 컥컥거리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눈자위에 눈물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살았다. 
아일렌이, 제대로 나를 살려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도하기보다는 다급한 심경이었다. 나는 가래가 끓는 목소리로, 치료실 바깥을 향해 외쳤다. 
 
“아일렌!” 
 
내 외침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일렌이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카테터를 쥐어 뽑은 나를 보며 창백한 안색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외쳤다. 
 
“빨리 날 일으켜 줘. 어서 길로바트 공단으로 가야돼.” 
“무슨 소리예요?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 
“시간 없으니까 빨리!” 
 
외치면서도, 속으로 수십 가지의 생각이 교차했다. 
제천대성에게 도움을 청하자. 
만약 안 된다면, 헤르메스라도 부르자. 
정말 싫지만 설화 지분이라도 떼어 준다면 가호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당장 길로바트로 가는 거다. 아직 시간이 늦지 않았다. 지금 당장 간다면― 
 
“일주일이나 기절해 있던 사람이 대체 무슨······ 절대 안 돼요! 적어도 앞으로 이주는 더 쉬어야 몸이 안정될 거라고요!” 
“······뭐?”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환청 같은 것이 들렸다. 
내가 읽어온 세계의 활자들이 일제히 무너지는 듯한 소리. 제자리를 잃은 활자들이 일제히 밀려들며 나를 두드리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다고?” 
“일주일이요. 당신, 일주일 째 기절해 있었어요.” 
 
나는 잠시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아일렌이 만들어 준 스마트 폰을 집었다. 허겁지겁 패널을 켜고, 파일을 확인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1차 수정본).txt 
 
텍스트 제목은 변하지 않았다. 
2차 수정본은 오지 않았고, 유중혁의 대사도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렇게 절망스러운 순간이 없었다. 
 
정말로? 
정말로 유중혁이 죽었다고? 
 
 
 
 
 
< Episode 42. 아스모데우스 (5) > 끝

< Episode 42. 아스모데우스 (6) >
 
 
 
 
 
당황한 마음에 손까지 떨렸지만, 나는 애써 심호흡을 하며 침착함을 되찾았다. 
아니다. 
그 유중혁이 그렇게 죽었을 리 없다. 
무엇보다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가 그 증거였다. 
 
[현재 다음 메인 시나리오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유중혁은 ‘추방자 패널티’를 받아서는 안 되는 상태였다. 
왜냐하면 유중혁 또한 나처럼 새로운 시나리오로 진입했을 테니까. 
비록 개인별로 시나리오의 편차가 존재한다고는 해도, 내가 공작이 되었듯 녀석도 공작이 되었다. 그렇다는 건, 유중혁도 나와 마찬가지로 ‘마왕 후보자’의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었다. 
 
[현재 <스타 스트림> 시스템의 오류로 보상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바로 저 메시지였다. 
<스타 스트림>에서 ‘사칭’을 통해 설화나 업적을 획득하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 나와 유중혁은 아예 서로를 사칭해서 서로의 이름으로 업적을 쌓았다. 
만약, 이것 때문에 <스타 스트림>의 메인 시나리오가 꼬였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무사히 메인 시나리오로 진입했지만, 유중혁은 진입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추방자 패널티’가 시작된 거라면? 
 
“괜찮아요?” 
“······혹시 물 한 잔만 마실 수 있을까?” 
 
나를 잠시 못 미더운 눈으로 바라보던 아일렌이 말했다. 
 
“갔다 올 동안 또 카테터 뽑으면 안 돼요.” 
 
아일렌이 치료실 밖으로 사라진 후, 나는 침착하게 지금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냉정하게 말해서, 아직 유중혁이 죽었는지 아닌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전지적 독자 시점]이 해제되기 직전 ‘추방자 패널티’가 시작되었던 걸로 봐서는 죽었을 확률이 높기는 하지만, <스타 스트림>에서 그런 절대적인 확신은 금물이었다. 
일단은 유중혁의 생사부터 제대로 확인하는 것이 먼저다. 
 
“비유.” 
 
현재 비유는 [길로바트] 쪽까지 채널을 확장 시켜 놓은 상태. 
비유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성좌의 시선으로 그쪽 동네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유. 들려?” 
 
그런데 무슨 일일까. 
비유의 응답이 없었다. 
심지어 다른 성좌들의 메시지도 들리지 않았다.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없는 동안 비유에게도 무슨 일이······. 
 
새근새근. 
 
······응? 
 
새액새액. 
 
조용히 귀를 기울이자, 새근거리는 비유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투명한 비유의 몸체가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잠들어 있었다.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이 놓였다. 
만약 비유에게도 무슨 일이 벌어졌다면 나는 정말로 절망했을 것이다. 
 
“······미안하다.” 
 
나는 비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멸살법’에 따르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도깨비는 하루의 절반을 자야 한다. 그간 나 때문에 잠이 밀렸을 테니, 비유가 곯아떨어진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체력이 방전된 비유를 혹사시킬 수는 없는 상황. 
나는 두 번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츠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누적된 데미지로 인해 스킬 사용이 취소됩니다.] 
 
······젠장, 역시 이것도 안 되나. 
아무래도 유중혁과의 링크가 끊어지면서 타격이 컸던 모양이다. 
결국, 다시 내가 집어든 것은 스마트 폰이었다. 
이렇게 무력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유중혁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 마당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소설을 읽는 것뿐이라니.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정신차리라고 김독자. 
넌 지금까지 이 소설 덕분에 살아남았던 거야. 
 
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다시 ‘멸살법’ 파일을 열었다. 
모든 건 이 이야기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니, 답도 이 이야기에 있을 것이다. 
 
[특성 효과로 ‘읽기 속도’가 상승합니다!] 
 
나는 문장 한 줄까지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눈을 부릅뜬 채 책을 읽었다. 
 
「‘그때, 우리는 마왕 ‘아스모데우스’와 척을 지지 말았어야 했다.’」 
 
나와 유중혁이 이번 일로 ‘아스모데우스’와 척을 졌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마지막에 녀석이 빅엿을 먹이기는 했어도 어쨌거나 우리 쪽에 협력하는 듯한 뉘앙스였으니까. 
그러니 이 문장만으로 유중혁이 죽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13회차. 
14회차. 
 
······. 
 
유중혁의 회귀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일렀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이어지는 회귀 속에서 녀석의 정신은 조금씩 닳아갔다. 
 
「‘힘들다.’」 
 
18회차. 
 
「‘이젠 그만두고 싶다.’」 
 
21회차.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 
 
유중혁의 절망을 읽으며, 나 역시 심장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회차가 지날수록, 유중혁은 다시 원래의 염세적인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비대해진 자아와 날이 선 원칙만으로 꾸역꾸역 매 회차를 살아 나가는 회귀자.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돌아가고,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유중혁의 중후반 회차는 내가 예전에 읽었던 ‘멸살법’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내가 영향을 끼친 초반부 회차를 제외하면, 유중혁은 또 다시 비슷한 실수를 했고 비슷한 성향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대체, 몇 번을 더······.’」 
 
내가 유중혁과 보낸 몇 개월의 시간은, 고작해야 원작에 이 정도 영향 밖엔 미치지 못했던 거구나. 
좌절하는 유중혁에게 손을 뻗고 싶었지만, 그곳의 유중혁은 내가 닿지 못하는 곳에 있었다. 25회, 26회, 27회······ 끊임없이 회귀를 반복하는 유중혁을 보며, 나는 어느새 읽는 것을 멈추고 있었다. 
 
읽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원래 ‘멸살법’이 이런 이야기였던가. 
원래의 나는, 대체 어떻게 3149편을 모두 읽었던 것일까······. 
불규칙적인 호흡 때문인지, 가슴에 붙어 있던 비유가 몸을 불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페이지를 기억해둔 뒤, 스크롤을 맨 아래로 내렸다. 
당장 이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부담스럽더라도,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유중혁은 ‘1차 수정본’에서 제대로 된 결말에 도달했을까. 
작가는, 과연 ‘에필로그’를 써 두었을까? 
 
스마트폰의 성능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스크롤을 내리는 동안 화면이 심하게 버벅거렸다. 그렇게 줄어들었다 늘어났다 하는 스크롤을 얼마나 내렸을까. 
나는 마침내, 본래의 ‘결말’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도달했다. 
그러나 내가 발견한 것은 그저 거대한 공백뿐이었다. 
 
「현재 수정 중입니다. ㅠㅠ」 
 
그리고 한 줄의 메시지······. 
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감정에서 오는 고양감에 휩싸였다. 
 
“······하하.” 
 
‘수정 중입니다’의 바로 뒤에 붙은 이모티콘에서 오는 장난스러움이 나를 분노케 했고, 그럼에도 ‘수정 중입니다’라는 메시지에서 오는 어떤 가능성이 나를 흥분케 했다. 
 
아직 이 이야기는 바뀔 수 있다. 
설령 유중혁이 죽었다고 해도, 방법은 있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든, 놈을 다시 이 회차로 데리고 와야 한다. 
 
비장한 각오로 스크롤을 서서히 움직였다. 
그런데, 결말의 이전 편에 쓰인 문장들이 눈에 띄었다. 
 
「시나리오의 끝을 앞두고, 유중혁은 죽을 뻔했던 무수한 기억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3회차에서 아스모데우스를 처음 만났을 때도 죽을 뻔했었지.’」 
 
순간 너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 잠깐만. 
그러니까 지금 말하는 ‘3회차’라는 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머쓱한 얼굴의 마르크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는 깨어난 나를 보더니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오, 혁명가! 깨어났나? 다행이군 그래.” 
“무슨 일이죠?” 
“다른 건 아니고, 누가 찾아와서 알려주려고 왔네.” 
 
지금은 바쁘니까 돌아가라고 말하려던 찰나, 마르크가 말을 이었다. 
 
“공단 주인이 찾아왔네.” 
“예?” 
“공단 주인이 자넬 찾아왔다고.”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공단 주인은 난데? 
 
“비켜라.” 
 
다음 순간, 누군가가 마르크를 밀치며 치료실의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 주변의 분위기를 모조리 바꿔 놓는 듯한 존재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죽은 줄만 알았던 유중혁이, 그곳에 서 있었다. 
 
 
* 
 
 
내가 제정신을 차리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더 걸렸다. 
차를 내온 아일렌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테이블을 정리한 후 사라졌고, 머쓱하게 서 있던 마르크도 자리를 피했다. 주변이 좀 조용해진 후에야, 생각이 정리가 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긴 언제 온 거냐?” 
“이틀 전.” 
 
지난 10분간의 내가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걱정했던 놈이 멀쩡히 살아서 심지어는 같은 공단을 걸어 다니고 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놈이 죽었다고 온갖 망상을 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살아난 거냐? 도저히 살아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 
“도움을 좀 받았다.” 
“누구? 설마 네 배후성?” 
“그 녀석은 한 번도 날 도와준 적이 없어.” 
 
하긴, 나도 도움을 청하긴 했지만 녀석이 도와줄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멸살법’이 끝날 때까지 녀석이 하는 일이라곤 유중혁을 회귀 시키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그간 상처가 꽤 아물었는지, 유중혁의 모습은 꽤 건강해 보였다. 
 
“성좌 하나가 나를 도왔다.” 
“성좌? 누구?” 
“자세한 건 네놈이 알 거 없다.” 
“뭘 대가로 바친 거야? 그놈들이 그냥 도와줬을 턱이 없잖아.” 
“그냥, 약간의 패널티만 감수하면 되는 정도다.” 
“패널티?” 
“마계 시나리오가 끝나기 전까지, 나는 하루에 10분씩······ 사라진다.” 
“사라져? 그게 뭔 소리야?” 
“그런 게 있다. 아무튼 지금 나는 메인 시나리오로 진입했고, 시나리오 오류도 해결되었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유중혁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뭔가 해결되긴 한 모양이었다. 
어쩐지 허탈한 심경이었다. 
내가 잠든 일주일 사이 나와 관계없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유중혁은 살아났다. 
그리고 여기까지 찾아와 공단 지배자로서의 승인도 마쳤다. 
 
“······.” 
 
이렇게 녀석과 이야기해본 적이 드물었기 때문일까. 어색한 정적이 치료실 안에 가득 차올랐다. 무표정하게 테이블을 내려다보던 유중혁이 멋대로 내 차를 마셨다. 
 
대체 여긴 왜 온거냐, 라고 물어보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앞으론 어쩔 거냐, 라고 물어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잘 지내냐?” 
 
사실, 유중혁이 그런 것을 알 턱이 없었다. 
언제나 자기밖에 모르고, 시나리오 공략으로만 머릿속이 가득 찬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다른 이들이 뭘 하고 있을지 신경이나 쓸 리가 없다. 그래서 일부러 잔소리 좀 하고 싶었다. 제발 인생 좀 혼자 살지 말라고. 그렇게 살아서는, 절대로 시나리오의 종막까지 갈 수 없다고. 
그런 소리를 한바탕 해주려고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이현성은 군대로 갔다.” 
 
유중혁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희원과 이지혜는 새로운 화신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앞으로 찾아올 대멸망 시나리오에 대비해 경기 쪽의 전력을 증강시키고 있지.” 
“······어?” 
“유상아와 한수영은 정부 쪽 인사들과 접촉하고 있는 걸로 안다.” 
“그 두 사람이 같이 다닌다고?” 
 
유중혁이 그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을, 나는 실제로 처음 보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조금씩 녀석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공필두는 성남 쪽에 땅을 사들여서 거대한 성을 짓고 있다. 자기가 정말 왕이라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군.” 
“하하, 그 아저씨는 진짜······.” 
“두 꼬맹이들은 잘 지내고 있다. 심심할 때마다 동전 같은 걸 던지는 것 같더군.” 
 
나는 간간이 피식거렸고, 유중혁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떤 이야기는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고, 어떤 이야기는 이해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러나 모두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가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어쩐지 감미롭고 애달픈, 그리고 그리운 기분이 되어갔다. 
 
“다들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이야기가 끝이 났을 때, 나는 기묘한 외로움을 느꼈다. 
 
그렇구나. 
다들 잘 살아가고 있구나.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내가 이 이야기의 ‘외부인’이라는 것이 새삼스레 실감이 났다. 
 
「25회차의 유중혁은 말했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내가 없어도, 사람들은 시나리오를 계속할 것이다. 
마치 유중혁이 회귀를 반복하는 것처럼. 
4회차, 5회차, 6회차······ 끝없는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쉽게 잊혀지겠지. 그리고 사람들은, 결말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그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나는 입술을 깨문 채 어떻게든 말해보려 했다. 다행이네. 끝내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유중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들 네 이야기를 한다.” 
 
그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중혁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많이 한다. 네 이야기를.” 
 
나는 양손으로 눈을 덮은 채 작게 웃었다. 겉으로는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웃는다고 말하고 싶었다. 양손이 만든 작은 어둠 속에서, 고요히 차를 마시는 유중혁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지구로 돌아가자, 김독자.” 
 
 
 
 
 
< Episode 42. 아스모데우스 (6) > 끝

< Episode 43. 파천검성 (1) >
 
 
 
 
 
준상급 도깨비 심사가 끝난 후, 비형은 어쩐지 나태해졌다. 
그가 하는 것이라고는 전 서울 지부장이었던 ‘바람’이 맡기고 떠난 ‘한반도 시나리오’를 관리하는 것. 그리고 가끔 이렇게 누워서 자기가 만든 시나리오를 구경하는 것이 전부였다. 
 
―희원 씨! 이쪽이에요! 
―젠장, 한 놈 놓쳤어요. 한 사람만 북쪽으로 가요! 
 
화면에서는 한반도 시나리오 중 하나인 ‘두더지 잡기’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정해진 시일 내에 도망친 ‘폭탄 두더지’를 모두 잡는 시나리오. 
하나라도 놓치면 일대에 끔찍한 대폭발이 벌어지는 시나리오였지만, 한반도의 성좌들은 그다지 다급해 보이지 않았다. 
 
―티타노가 발견했대요. 저랑 유승이가 처리할게요. 
 
구성도 팀워크도 완벽한 화신들. 비슷한 시나리오에서 국토의 사분의 일이 날아가 버린 일부 국가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물론, 그렇다고 이 시나리오가 극악의 난이도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젠장, 왜 이렇게 됐는지 정말······.”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던 비형이 작게 푸념했다. 
사실, 이번 시나리오도 난이도를 높이려면 얼마든지 높일 수 있었다. 
한반도의 절반을 날려버리고, 모든 화신들을 끔찍한 재앙으로 이끌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역시 그때 김독자를 살려 뒀어야 했나······ 여기서 난이도를 더 높이면 분명 다 뒈져버릴 텐데.’ 
 
이제 와 후회해도 늦은 노릇이었다. 
아무리 여러 가지 안배를 준비했다고 해도, 시나리오 바깥으로 떠난 존재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한반도의 성좌들이 ‘김독자 일행’을 응원합니다.] 
[한반도의 성좌들이 20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그나마 비형의 채널이 유지되는 것은 김독자가 남긴 ‘골수 구독좌’ 덕분이었다. 시나리오의 흥미 유무와 별개로 꾸준히 후원해주는 성좌들. 
하지만, 채널에는 그런 성좌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의 진행에 지루해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채널에서 이탈했습니다.] 
 
김독자가 사라지고, 거기에 유중혁마저 한반도 시나리오에서 벗어나자, 나날이 채널의 이탈자는 늘어 갔다. 
한 마디로, 비형의 채널은 조금씩 망해가고 있었다. 
 
‘변화를 꾀해야 해. 하지만 어떻게?’ 
 
물론 방법은 알고 있었다. 
예전처럼 시나리오 난이도를 극악으로 돌려 화신들을 갈려 나가게 만들면 구독좌는 다시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비형은 이제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시나리오를 이끌고 싶지 않았다. 
 
‘나도 변한 것일지도 모르지.’ 
 
무조건 자극적인 시나리오만을 추구했던, 그리하여 화신들의 생사 따위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던 예전과는 뭔가가 달라졌다. 비형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관리국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외쳐대는 ‘사이다’는 집어치우고, 뭔가 다른 시나리오가 보고 싶었다. 
마치, 저 먼 옛날 1세대 도깨비들이 만들었던 시나리오처럼, 오래도록 성좌들에게 기억될 수 있는 그런······. 
 
―비형. 
 
허공에서 들려온 도깨비 통신에 비형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자 좋아 보이는군. 잘 지내는가? 
 
뒤이어 패널에 떠오르는 얼굴은 ‘대도깨비 후보’가 되어 서울 돔을 떠났던 전 서울 지부장 ‘바람’이었다. 질겁한 비형이 재빨리 예의를 갖추었다. 
서울 지부를 떠난 뒤 바람은 관리국의 원로회에 입성했다.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도깨비들만이 모여든다는 원로회. 
그새 또 무슨 이야기를 보고 들은 것인지, 패널 너머로 느껴지는 바람의 인상은 한층 더 기품 있어 보였다. 
 
―몇 가지 전달 사항이 있어서 연락했네. 
 
“어떤······?” 
 
비형은 살짝 긴장했다. 바람이 저렇듯 의미심장하게 서두를 열었을 때 좋은 소식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거대 설화의 징조가 있네. 
 
“······아직 <기간토마키아>나 <라그나로크> 까지는 시일이 꽤 남았을 텐데요?” 
 
―그쪽이 아닐세. 이번에 거대 설화가 발족되는 곳은 ‘마계’야. 
 
마계라는 말에 비형의 낯빛이 변했다. 
 
“설마 ‘마왕 선발전’입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을 보며, 비형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이벤트성 거대 설화와는 달리, ‘마왕 선발전’은 무척 드물게 발생하는 시나리오였다. 비형조차도, ‘마왕 선발전’ 시나리오는 직접 본 적이 없었다. 
 
‘마지막 마왕 선발전이 벌써 800년 전의 일이었지.’ 
 
‘거대 설화’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처럼 가슴이 떨리다니. 
그런 비형의 마음을 읽었는지, 바람이 웃었다. 
 
―기대되지 않나? 
 
“기대는 됩니다만, 아쉽군요. 어차피 그쪽은 도깨비들이 담당하지 않잖습니까?” 
 
마계는 예로부터 혹부리들의 영역이었다. 시나리오 지대 전역에서 거의 유일하게 채널이 열리지 않는 불모지. 그곳이 바로 ‘마계’였다. 그러니 이번에도 ‘마왕 선발전’을 방송하는 것은······. 
 
―이번에는 달라. 관리국에서 마계로 도깨비들을 파견하기로 했네. 
 
“예? 하지만 그건······.” 
 
도깨비는 혹부리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혹부리는 도깨비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지평선의 약속’이었다. 그런데 지금 바람이 하는 말은, 그 규약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이었다. 
 
―본래는 혹부리들과 새로 협약을 맺은 후에 채널을 개설할 예정이었는데, 이번에는 일이 좀 복잡하게 됐네. 저쪽에서 먼저 약속을 어겼거든. 
 
“약속을 어기다뇨?” 
 
―마계에 ‘불법 채널’이 발생했네. 
 
“······예?”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계에는 도깨비가 없다. 
그런데 ‘채널’이 열리다니,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아직 정확한 건 모르네. 그것 때문에 지금 관리국도 난리야. 
 
“만약 혹부리들이 채널을 훔친 거라면, 이쪽에서 그냥 닫아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채널의 운영권은 예로부터 도깨비들에게 한정된다. 
혹부리가 요상한 술수를 사용해 채널을 훔쳤더라도, 채널 한두 개 닫는 것쯤이야 관리국 차원에서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혹부리가 아니니 문제야. 
 
“혹부리가 아니라고요? 그럼 누가 채널을 연 겁니까?” 
 
―마계에 도깨비가 있는 것 같네. 
 
“······도깨비?” 
 
잠깐만······ 설마?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바람이 계속해서 말했다. 
 
―아무튼 그것 때문에 관리국에서 마계로 도깨비들을 파견하게 됐네. 
 
“그렇군요. 그런데 왜 저에게 이 소식을······.” 
 
―자네도 파견 목록에 있네. 
 
“저는 한반도 담당인데요.” 
 
―한반도는 잠깐 다른 도깨비들이 맡아줄 걸세. 자네는 중하급 도깨비들을 데리고 마계에 잠시 다녀오게. 
 
순간 비형은 어이가 없었다. 
제일 핫한 지구 시나리오에서 벗어나 마계로 가라고? 
이건 좌천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반도 쪽은 어차피 사건도 없잖은가?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 말게. 이번에 제대로 한 건 하고 오면, 상급으로 올라가는 것도 꿈은 아니니까. 
 
“······지난번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은데요. 왜 하필 접니까?”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원로회에서 자넬 직접 지목했네. 
 
원로회에서 그렇게 정했다면, 번복은 없다는 얘기다. 
비형의 얼굴이 우울해졌다. 
그 위험한 지역에 하필 지금 가야 한다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지만, 너무 의기소침하지 말게. 좌천 같은 건 아니니까. 그보다 심상찮은 정보가 하나 있는데, 자네가 들으면 좋아할지도 모르겠군. 
 
별 기대 없이 고개를 드는 비형에게, 바람이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계에 ‘구원의 마왕’이 나타났다는 제보가 있네. 
 
 
* 
 
 
한참이나 침묵하던 내가 입을 연 것은, 유중혁이 그 말을 하고부터 무려 30분이나 시간이 지난 후였다. 30분이 지났다는 것도 중간에 아일렌이 방에 한 번 들어왔다 나가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유중혁, 혹시 우리엘 인형 가져 왔냐?” 
 
내 물음에, 유중혁은 말없이 품속에서 인형을 꺼냈다. 
나는 인형을 조심스레 받아 살폈다. 
팔과 다리의 실밥이 모두 뜯어진 우리엘. 
아무리 상징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타격을 받으면 본체에도 타격이 갔을 것이다. 
그 드높은 자존심의 대천사가 마계에서 이런 꼴을 당하다니. 
 
“······역시 지금은 돌아갈 수 없어.” 
“그렇군.”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대답. 
고개를 들자 유중혁도 우리엘의 인형을 보고 있었다. 우리 둘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훤히 알 수 있었다. 
 
“마왕 선발전에 참가할 생각이겠지?” 
“······맞아.” 
 
마왕 선발전. 
앞으로 있을 성좌들과의 대결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시나리오. 
 
“일행들에겐 미안하지만, 여기서 나는 거대 설화를 얻어야만 해.” 
 
나는 찢어진 우리엘의 팔을 조심스레 붙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야 앞으로 있을 대멸망 시나리오들을 대비할 수 있으니까.” 
 
지구로 돌아가게 되면 선택지는 한정된다. 
거기서도 나름대로 기연을 얻을 수 있고, 세력을 꾸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부터 돌아가는 건 효율이 좋지 않았다. 
이미 시나리오 난이도는 원작의 그 어느 때보다도 극악해진 상황. 
이 타이밍에 지구로 돌아가면 애먼 일에 시간을 빼앗길 뿐이다. 
유중혁은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여러 가지를 이해한다는 듯한 말투였다. 
아마 유중혁은 누구보다도 이 마음을 잘 이해할 것이다. 
약하다는 이유로 소중한 것을 가장 많이 잃어본 사람일 테니까. 
 
“너는 어쩔 거냐?” 
“나도 당분간은 마계에 머무를 거다. 이곳에 개인 시나리오가 있어서 당장은 떠날 수도 없다.” 
 
호오, 그렇다 이거지. 
 
“그래? 괜찮으면 나 좀 도와주지 그래.” 
“돕는 건 내가 아니라 네놈이겠지.” 
 
순간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 유중혁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아까와 같은 무표정이지만, 뭔가가 다른 느낌. 
 
“······설마 너도 ‘마왕 선발전’에 참가할 셈이냐?” 
“당연한 얘기를 하는군.”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자식, 어차피 ‘마왕 선발전’에 참가할 생각이었으면서 왜 나한테는······? 
 
“잠깐만! 너 아까 나보고 지구로 돌아가라고 말한 게 혹시······.” 
 
유중혁은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희미한 석양이 유중혁의 얼굴 옆면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멸살법’에 따르면 유중혁은 속내가 들켰을 때 짐짓 멋있는 얼굴을 한다. 
 
이 자식, 알고 보니 나를 지구로 보내고 자기가 마왕이 될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 뻔뻔한 뒷모습에 나는 이제껏 받았던 감동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때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왔군.” 
 
창밖으로 밀려드는 한기와 함께, 아일렌과 마르크가 치료실 문을 박차고뛰어 들었다. 
무슨 일인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어느새 눈을 뜬 비유가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으니까. 
 
[성좌, ‘인류의 시조’가 ‘유중혁 공단’을 노려봅니다.] 
[성좌, ‘최후의 파라오’가 ‘유중혁 공단’을 노려봅니다.] 
[특정 성운의 성좌들이 ‘유중혁 공단’을 노려봅니다.] 
 
십여 개가 넘는 별들이 하늘에서 반짝인다 싶더니, 그중 유독 하나의 별이 강렬한 빛을 내며 스파크를 터뜨렸다. 
 
츠츠츠츠츠! 
 
잠시 후, 공단의 입구에 거대한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화신체의 직접 강림. 황금빛 왕관을 머리에 쓴, 거대한 미라의 모습. 성벽의 높이를 훌쩍 뛰어넘는 그 크기에, 공단의 화신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저 성좌는 <파피루스>에 소속된 녀석이다. 
그리고 <파피루스>는 공단 [베르칸]과 손을 잡았다. 
 
유중혁이 짓씹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시위라도 하러 온 모양이군.” 
 
무슨 시위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벌써 마왕 선발전의 전초전이 시작된 것이다. 
 
 
 
 
 
< Episode 43. 파천검성 (1) > 끝

< Episode 43. 파천검성 (2) >
 
 
 
 
 
[이 공단의··· 새로운 지배자는··· 누구냐.] 
 
그 어마어마한 목소리에 나와 유중혁은 동시에 창밖을 내다보았다. 
츠츠츳 거리는 잡음이 많은 걸로 봐서, 진언의 사용이 꽤나 힘겨워 보이는 녀석이었다. 유중혁이 작게 중얼거렸다. 
 
“<파피루스>의 성좌로군.” 
“‘최후의 파라오’라면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는 그 여자겠지?” 
 
거대한 미라의 형상에 낡은 황금빛 왕관. 다른 모든 곳은 붕대로 덮였음에도 드높은 콧대만이 드러난 얼굴. ‘멸살법’에서 읽은 그대로다. 분명 저 화신체는 이집트 ‘최후의 파라오’였던 클레오파트라의 것이다. 
 
[유중혁이······ 누구지······?] 
 
다시 한번 이어지는 진언에, 공단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다. 
확실히 대단한 패기이긴 했지만, 우리 둘 중 누구도 주눅 들지는 않았다. 클레오파트라는 고작해야 위인급 성좌. 유중혁도 나도 이제 위인급 성좌의 기세 정도에는 쫄지 않는다. 
 
“유중혁. 이길 수 있겠냐?” 
 
전신에 설화팩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지금의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대였다. 유중혁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무리다. 곧 그 시간이라서.” 
“아까 그 패널티 말하는 거냐? 하루에 10분씩 사라진다는?”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나는 고개를 돌려 클레오파트라 쪽을 바라보았다. 
 
“그럼 저 녀석을 어쩐다······.” 
“놈은 아무것도 못 할 거다.” 
“왜?” 
“아직 ‘마왕 선발전’은 시작되지 않았으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이 시나리오에 소속되지 않은 성좌들의 화신체는 강력한 개연성의 제약을 받는다. 아직 ‘거대 설화’가 열리지 않은 이상, 그들 또한 마음대로 활개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야, 아스모데우스한테 당한 거 벌써 잊었어?” 
“누구나 아스모데우스처럼 굴 수 있는 건 아니야.”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마계에서 마왕들은 성좌에 비해 개연성 제약이 덜하니까. 문제는 저 성좌들이 그 제약을 극복할 만한 여분의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파피루스> 소속이잖아? 성운의 개연성을 빌려와서 난장을 놓으면······.” 
“김독자. 벌써 네놈이 한 짓을 잊은 모양이군.” 
“뭐?” 
 
유중혁이 채 대답을 하기도 전에, 허공에서 클레오파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단의 새로운 지배자······ 그놈에게 전해라. 마왕 선발전에 참전하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클레오파트라의 화신체는 그 말과 함께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모래성이 무너지듯, 모래알처럼 조각난 화신체가 먼지로 돌아가고 있었다. 
 
[명심해라··· <파피루스>는··· 결코 두 번 경고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저렇게 고분고분히 떠나는 거지? 
이상한 일이었다. 보통 저런 식으로 현현하고 나면 화신 수백쯤 학살하는 건 식후 운동 정도로 여기는 녀석들인데. 
유중혁이 한심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잊었나? 놈들은 너에게 [운명]을 강제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 
<파피루스> 뿐만 아니라 <베다>와 <올림포스>도, 당시 나를 자기들 편에 끌어들이기 위한 [운명] 선언에 대량의 개연성을 갈아 넣었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순순히 사라진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군. 
놈들은 지금 여분의 개연성이 부족한 것이다. 
유중혁이 특유의 침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왕 선발전까지는 시간을 번 셈이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당장, 성좌들이 이쪽을 공격해 올 리는 없다. 
나는 메시지 로그를 확인했다. 
 
[현재 ‘마왕 선발전’이 준비 중입니다.] 
[남은 준비 시간 : 28일 17시간 12분] 
 
내 예상이 맞다면 ‘마왕 선발전’은 21번 시나리오부터 24번 시나리오까지 모두 소비할 것이다. 거대 설화니까 그 정도 시나리오는 잡아먹는 게 당연하겠지. 나는 남은 시간을 가늠하며 말했다. 
 
“우리 둘만으로는 부족해.” 
“알고 있다.” 
 
마왕 선발전이 시작되면 저쪽에서는 성좌들이 출몰하기 시작할 것이다. 
아무리 위인급 성좌라도 성좌의 수준에 도달하면 일반적인 화신들보다는 훨씬 강하다. 더군다나 이름값 높은 녀석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나와 유중혁만으로 상대하기는 힘들어진다. 
 
“생각해둔 거 있냐?” 
 
유중혁은 고개를 저었다. 
지구에 있는 동료들을 데려오는 방법도 있겠지만, 아직 이현성이나 정희원은 초월좌나 성좌들을 상대로 싸우기엔 부족했다. 그들도 개인 시나리오와 메인 시나리오를 번갈아 수행하며 강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야 후반 시나리오에 들어섰을 때 본격적인 전력 운용이 가능해질 테니까. 
지금은 당장 쓸 수 있는 동료들을 구해야 한다. 
 
“여기서 모은 동료는 없나?” 
“아, 있긴 한데······.” 
 
그러고 보니 장하영 이 녀석이 어디 갔지? 
나는 아픈 몸을 비틀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같은 편을 물색해 놓으라고 말해둔 참이야. 슬슬 성과가 있을 때가 됐는데······.” 
“준비해 둬라. 나는 잠깐 다녀 올테니.” 
 
어딜 가냐고 채 묻기도 전에, 유중혁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 
 
 
나는 몸도 풀고 작전 계획도 세울 겸, 붕대를 대충 정리한 후 치료실을 나왔다. 
아일렌은 2주는 더 요양해야 한다고 했지만, 긴장이 풀렸기 때문인지 몸 상태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특성, ‘라마르크의 기린’의 효과로 회복 능력이 급상승합니다.] 
 
······아, 특성 효과 때문이었군. 
적당히 기지개를 켜며 밖으로 나서자 경악한 아일렌이 달려왔다. 
나는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괜찮으니까 걱정 마. 그보다 아일렌, 이거 좀 고쳐주라.” 
 
내게서 우리엘의 인형을 받아든 아일렌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뭔데요?” 
“성좌의 상징체.” 
 
불경하게도, 아일렌은 그 말을 듣고 곧장 인형을 떨어트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황급히 인형을 다시 주워든 아일렌이 나를 보며 물었다. 
 
“······떨어트렸다고 천벌 받진 않겠죠?” 
“착한 성좌니까 걱정하지 마. 튼튼하게 수선해 줘.” 
 
성좌가 착하다니. 좀 이상한 말이기는 하지만, 다른 성좌도 아니고 우리엘이니 그렇게 표현해도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잠깐 산책을 다녀오겠다고 말한 뒤 공단의 거리로 나왔다. 
희미한 햇살 속에 비치는 공단의 거리는 이제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였다. 
나를 알아본 몇 명이 가볍게 목례를 하며 지나쳤다. 
사람들의 표정에서 일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생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삶을 결심한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야, 유중혁! 깼냐?” 
 
돌아보자, 마침 내가 찾던 녀석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도움닫기를 해 내 목에 매달린 장하영이 내게 어설픈 헤드락을 걸어왔다. 
나는 애써 장하영을 떼어내며 말했다. 
 
“내 이름은 유중혁이 아냐.” 
“아, 이제서야 본명을 밝히시려고?” 
“······알고 있었냐?” 
“뭐, 나만 가명을 쓰는 건 아닐 테니까.” 
 
나는 잠시 장하영을 바라보다가, 의미심장한 투로 말했다. 
 
“내 이름은 김독자야.” 
 
나름대로 멋지게 얘기해 본 건데, 장하영은 영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이상한 이름이네.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됐어. 지금껏 뭐하고 있었냐?” 
“아, 채팅 좀 하다가 이 근처에 제보가 떠서 나왔지.” 
“제보?” 
“넌 누워만 있어서 모르겠구나? [공단]에 그동안 재미있는 일들이 몇 가지 있었거든.” 
 
나는 장하영에게 지난 일주일간 있었던 이야기를 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물론 유중혁에 관한 것이었다. 
 
“그 녀석이 ‘지배권’을 거부했다고?” 
“맞아. 공작위 계승은 하되 여길 통치하지는 않겠다고 했어. 그래서 지금 다들 난리야.” 
 
무슨 상황인지는 알 법했다. 
아마 유중혁은 자신의 모토인 ‘지배하되 군림하지 않는다’를 실천 중일 것이다. 그래서 그딴 말을 한 거겠지. 생각은 좋다. 그런데 상황이 나빴다. 
 
“공단이 난리가 났겠네. 아직 정리도 안 된 상태에서 그런 선언부터 하면 치안 문제가 발생할 텐데.”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지금 공민들 엄청 흥분해 있어.” 
 
강력한 독재자에겐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욕망을 통제하는 힘이 있다. 그런데 그런 독재자가 실권을 포기했으니, 지금껏 쌓여 왔던 공민들의 욕망은 한꺼번에 분출되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죽는다고 공단의 어둠이 사라질 것 같은가?”」 
 
그것은 ‘멸살법’에 나온 세이스비츠 공작의 대사였다. 
새삼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배자가 바뀐다고 해서 갑자기 [공단] 전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포악한 독재자가 사라진 만큼, 사람들이 감추고 있던 욕망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어이, 그 파편 내놔!” 
“시, 싫어요. 제가 주운 겁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나와 장하영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골목 안쪽에서 다수의 사내들이 한 화신에게 린치를 가하고 있었다. 어떤 상황인지는 뻔해 보였다. 분명 [공장]에서 나온 설화 파편을 두고 다툼이 벌어진 거겠지. 
내가 움직이려는 순간, 뜻밖에도 장하영이 제지했다. 
 
“잠깐. 기다려 봐.” 
“······뭐야?” 
“말했잖아. ‘제보’가 있었다고.” 
“무슨 제보?” 
“여기에 ‘징벌자’가 나타날 거야.” 
“징벌자?” 
 
그런 존재에 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멸살법’은 물론이고, ‘혁명가 시나리오’에서도 그런 포지션은 없었다. 
내 의문을 눈치챘는지 장하영이 덧붙였다. 
 
“공민들이 만든 별명이야. 며칠 전부터 갑자기 나타나서 치안을 정리하는 녀석인데, 정말 엄청난 미모의······.” 
 
그 순간, 골목 안쪽에서 사내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죽이고 빼앗아!” 
 
병장기를 빼든 사내들이 본격적인 린치를 가하려는 모양이었다. 
징벌자인지 뭔지, 그딴 걸 기다리느니 내가 먼저 움직이는 게 빠르겠다. 내가 허리춤의 검으로 손을 움직이는 순간, 골목에 호리호리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만.” 
 
전신에 흑색 케이프를 두른 한 여자가 담벼락 위에 서 있었다. 
케이프 때문에 무장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얼굴만큼은 아주 분명하게 보였다. 마치 혼자서만 화질이 다른 듯한 얼굴. 허리까지 내려오는 여자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찰랑이는 것을 보며, 나는 엄청난 충격 속에 느릿느릿 생각을 움직였다. 
 
······‘멸살법’에 저런 인물이 있었던가? 
 
갑자기 내가 아는 모든 종류의 찬사들의 의미가 묘연해지는 느낌이었다. 
가지런히 놓인 먹색의 눈썹 아래로 드러난 깊고 섬연한 눈동자. 
세상의 미를 결정하는 온갖 기준들이 동시에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성좌들의 수식언으로도 묘사할 수 없을 듯한 얼굴. 
그렇기에 분하게도, 그 얼굴을 표현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유중혁의 뺨을 세 대쯤 갈길 미모였다.」 
 
‘멸살법’에서도 그런 표현은 나온 적이 없었다. 
‘멸살법’에서 손에 꼽는 외모를 가진 장하영도 ‘두 대 갈긴’ 정도가 고작이었으니까. 내가 충격으로 굳어져 있자, 유중혁의 뺨을 두 대 갈긴 장본인이 작게 속삭였다. 
 
“왔네. 저 녀석이 징벌자야.” 
 
여자의 미모에 압도되어 있던 사내들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헤죽거리는 입술을 보아하니, 무슨 소리가 나올지는 뻔해 보였다. 그런데 사내들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뭔가가 움직였다. 
 
투둑. 
 
그리고, 뭔가가 떨어졌다. 
사내들이 비명을 지른 것은 그보다 조금 후의 일이었다. 
 
“으, 으아아아악!” 
 
팔이 잘린 사내가 끔찍한 비명을 질러댔고, 뒤이어 사태를 파악한 사내들이 허겁지겁 병장기를 넣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상대할 수 없는 적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심지어는 구해진 사내조차 겁에 질려 골목길을 달려나갔다. 순식간에 골목에는 떨어진 사내들의 팔과 여자만이 남았다. 
고요히 검을 집어넣는 여인을 보며, 장하영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봐봐, 진짜 쩔지? 네가 쓸만한 인물들 물색해 보라고 했잖아. 내가 어제도 말 걸어보려고 했는데 바로 사라져버려서―” 
 
잔인한 손속이었지만, 그럼에도 정도(定道)를 지킨 검술. 
놀라운 것은 그 검술의 빠르기였다. 
나는 부지 중에 중얼거렸다. 
 
“화신 수준의 검술이 아니야.” 
“뭐?” 
 
장하영은 눈치 못 챘겠지만, 나는 확실히 보았다. 
현시점에서 저런 빠르기의 발검은 초월좌들이나 가능한 것이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이 여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동료로 삼을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마왕 선발전’에 큰 전력이 될 것이다. 
흑색 케이프의 여자가 등을 돌리려는 순간,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골목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이봐!” 
 
말을 걸어 시간을 끄는 동시에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해 정보를 볼 계획이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특성창을 볼 수만 있다면 설득하는 게 보다 쉬워질 테니까. 
그리고 운만 좋다면― 
 
“큿······.” 
 
그러나 여자에게 다가가 스킬을 쓰기도 전에, 나는 자리에 멈춰서야 했다. 이글거리는 여인의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전해지는 끔찍한 감정의 양에 나는 몸을 떨었다. 
 
나를 향한 엄청난 원망과 분노. 
 
그만한 감정의 폭포를 겪어본 것은 정말 간만이었기 때문에 나는 일순간 아연해지고 말았다. 
 
······뭐야 이 여자? 
날 알아? 
 
······그보다, 왜 날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건데? 
 
 
 
 
 
< Episode 43. 파천검성 (2) > 끝

< Episode 43. 파천검성 (3) >
 
 
 
 
 
나는 쏟아지는 원망과 분노의 파도를 간신히 거스르며, 뒤돌아서는 징벌자를 향해 외쳤다. 
 
“잠깐만! 기다려!” 
 
그런데 그때, 머릿속으로 성좌들의 메시지가 밀려들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경악합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판단력에 가슴을 졸입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눈치에 격렬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응? 뭐? 
갑자기 무슨······.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채널에 입장합니다.] 
 
······아, 우리엘!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경악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경악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경악합니다!] 
 
벌써 아스모데우스 사건으로부터 일주일이나 지났으니, 우리엘이 다시 채널에 입장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어지는 성좌들의 메시지들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킬킬 웃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성운 ‘아스가르드’를 향해 삿대질을 합니다.] 
 
갑자기 쏟아지는 성좌들의 메시지들 때문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상황이지? 
왜 삿대질을······. 
 
성좌들의 메시지에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징벌자는 빠르게 골목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앗, 기다리라니까!” 
 
아쉬웠다. 좋은 동료를 얻을 기회였는데. 
뒤늦게 쫓아온 장하영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어때? 엄청 예쁘지?” 
“쟨 언제부터 나타난 거야?” 
“사흘 전인가 나흘 전부터. 미색은 물론이고 실력까지 출중한 녀석이라 순식간에 소문이 퍼졌어. 신출귀몰한 것도 그렇고.” 
“내일도 올까?” 
 
검술의 종류까지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그만한 발검이라면 분명 ‘마왕 선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나저나, 어디서 저런 인물이 나온 거지? 분명 ‘멸살법’ 원작에는 없었는데······. 
 
“매일 왔으니, 아마 내일도 올 거야. 그나저나 단단히 반했나 봐?” 
“그런 게 아니야.” 
“농담이야 농담. 다 안다고. 너 여자 안 좋아하잖아.” 
“······누가 그래?” 
 
또 어디서 그런 헛소문이······.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어디서 들어온 헛소문인지 알 것 같네. 
 
“오랜만입니다, 우리엘.” 
 
 
*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엣헴 하고 콧대를 세웁니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우리엘의 간접 메시지를 들으며, 나는 장하영과 치료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공을 칭송합니다.] 
 
주로 들은 이야기는 유중혁을 설득해 마계까지 놀러온 우리엘의 천방지축 모험담이었다. 
역시나, 나를 구하도록 유중혁을 설득한 건 우리엘이었구나.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다. 
그 녀석이 나를 구하겠다고 제 발로 여기에 올 턱이 없으니까. 
 
“상징체는 현재 수선 중입니다. 끝나면 다시 그쪽으로 현현하실 수 있을 거예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감동 받아 눈물을 글썽입니다.] 
 
“근데 유중혁한텐 무슨 개인 시나리오를 주셨던 겁니까? 대천사가 함부로 마계에 개인 시나리오를 풀어놓는 건 위험할 텐데요.” 
 
사실, 우리엘 정도의 고위급 성좌가 마계에 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성운 <에덴>과 72마왕의 마계는 휴전 중인 상태니까. 
아마 우리엘이 제대로 된 화신체 대신 허접한 상징체로 현현한 것은 그걸 의식한 까닭도 있을 것이다. 애초에 이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우리엘이 아스모데우스에게 그렇게 무력하게 당할 일도 없었겠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어차피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니 유중혁과 우리엘의 링크가 끊기면서, 우리엘의 개인 시나리오는 강제로 말소되었을 것이다. 
유중혁도 다른 개인 시나리오를 받았다고 말했었지. 
가만히 나와 우리엘의 이야기를 듣던 장하영이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근데 너 어떻게 성좌들이랑 그렇게 친해?” 
“나도 성좌거든.” 
“······뭐? 농담이지?” 
“내가 말 안 했었나?” 
 
장하영은 어딘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성좌면······ 저 하늘에 있는 그런 거지? 오늘 아침에 나타났던 그 미라 같은 애들.” 
“보통은 그렇지.” 
“그 왜, 수식언이란 것도 있고. 그 수식언의 맥락에 별자리를 짓고 살아간다는······.” 
 
그러고 보니 그런 설정이 있었지. 
성좌들의 진체는 수식언의 맥락 속에 있다고. 
나야 성좌가 되자마자 타락하는 바람에 그 맥락이란 걸 구경도 못 해봤지만······. 
 
“맞아. 그게 성좌지.” 
“넌 수식언이 뭔데······요?” 
 
갑자기 내가 성좌라는 걸 의식했는지, 장하영은 무척 조심스러워진 모습이었다. 어쩐지 웃음이 나온다. 그러고 보니 이 자식, 내가 누구인지 알면 엄청 경악할 텐데.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화신 ‘장하영’을 경계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화신 ‘장하영’에게 친한 척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읏······!” 
 
우리엘에게 뭔 협박을 당했는지, 장하영이 재빨리 내게서 한 걸음을 떨어졌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에게 천사 같은 미소를 짓습니다.] 
 
저 천사는 대체 얘한테 뭔 소릴 한 거야? 
치료실로 들어가자, 느긋하게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는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늦었군.” 
“뭐야, 벌써 와 있었냐?” 
 
어딜 다녀온 건진 모르겠지만, 유중혁의 부츠엔 흙먼지가 가득했다. 
그새 차도 새로 타왔는지 차종도 바뀌어 있었다. 
이곳의 허브티 같은 건가? 
생각해 보면 이 녀석 미감이 엄청 까다로웠지. 
유중혁이 내 뒤쪽에 있는 장하영을 흘끗 보며 말했다. 
 
“아까 말한 게 그 자인가?” 
“맞아.” 
 
내가 대답하자 장하영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쪽이 새로운 공작님? 안녕, 난 아슬란이야.” 
“버릇이 없는 놈이군.” 
“미안, 이런 년이라서.” 
 
순간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뭔가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기류가 보여서, 내가 재빨리 말을 끊었다. 
 
“설마 둘이 처음 보는 사이야? 유중혁 너 며칠 전에 왔다며?” 
“한가하게 인사할 시간 따윈 없었다. 그래서, 저 남잔지 여잔지 모를 녀석이 새로운 동료인가?” 
“맞아.” 
“난 약한 녀석은 싫다.” 
“······나 약하지 않거든?” 
 
장하영이 가슴을 펴며 말했지만, 사실 지금의 장하영이 유중혁의 눈에 찰 턱이 없었다. 아무리 ‘정체불명의 벽’을 갖고 있다곤 해도, 아직 초월좌인 유중혁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전력이었으니까. 둘 다 주인공이라고 해도 어쨌든 첫 번째는 유중혁이다.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은 유중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림 보람이 없군. 설마 저 얼간이가 전부는 아니겠지?” 
 
나는 발끈하는 장하영을 만류하며 재빨리 대답했다. 
 
“아, 하나 더 있어. 아직 얘길 해 보진 못했는데, 괜찮은 녀석을 발견했거든.” 
“누구지?” 
“징벌자란 녀석이야. 얼마 전에 나타난 녀석이라는데, 꽤 도움이 될 것 같아.” 
 
내 말에 유중혁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그 녀석은 무리다.” 
“뭐? 왜?” 
“나도 포섭해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뭐라고 한 건데? 보나 마나 까칠하게 대한 거 아냐? 또 ‘동료가 되지 않으면 죽이겠다’ 뭐 그딴 소리로―” 
 
일순 유중혁의 표정에 서린 분노에 나는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유중혁이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 여자와 은원이 있다거나 그런 거겠지. 
유중혁에게 원한을 사다니, 대체 누구지 그 여자? 
원작에도 없었던······ 아니지, 원작이 조금 바뀌었으니 새로운 이야기가 생겼을 수도 있겠구나. 조만간 한번 찾아봐야겠다. 
 
“그럼 남은 방법은 하나뿐인데······.” 
 
내 시선을 받은 장하영이 뾰로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왜. 뭐.” 
“전에 시킨 건 제대로 했어?” 
“했어.” 
“내가 말했던 초월좌는?” 
“응답 왔어. 올 수 있으면 와 보라던데.” 
 
나와 장하영의 대화를 듣던 유중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초월좌? 무슨 소리지?” 
“아, 이 녀석은 다른 시나리오 차원의 존재들과 연락할 수 있거든. 꽤 쓸만하지?” 
 
어떻게든 장하영의 능력을 어필해서 호감을 사려는 계책이었지만, 유중혁의 표정은 여전히 뚱했다. 
 
“그래서?” 
“동료를 꼭 화신들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잖아. 성좌나 초월좌도 모집하면―” 
“성좌들은 안 된다. 그놈들은 믿을 수 없어.” 
“그럼 초월좌는 괜찮은 거지?” 
“생각해 둔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1 무림>에 가볼까 해.” 
“······<제1 무림>?” 
“거기가 초월좌들이 제일 많은 곳이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겠지만, 초월좌라고 모두 성좌보다 낫다는 보장도 없다. 그곳에는 거악(巨惡)과 거마(巨魔)들도 많아.” 
“그렇겠지. 하지만 협객들도 있잖아?” 
“협객이라고 해서 다 네놈을 도와줄 거라 생각하는 거냐? 무림에서 협객 놀이를 하는 녀석들 중 제대로 된 인간을 본 기억은 없다.” 
 
으드득 이를 가는 유중혁의 목소리에서 깊은 원한이 느껴졌다. 
하긴, 지난 회차에 이미 <제1 무림>을 겪어본 유중혁이라면 무리도 아니겠지. 
하지만. 
 
“글쎄, 적어도 한 사람이라면 도와줄 것도 같아.” 
 
은은하게 일그러지는 유중혁의 표정을 보며, 나는 즐거운 듯 말을 이었다. 
 
“나는 파천검성에게 도움을 청할까 하는데.” 
 
파천검성(破天劍聖). 
‘멸살법’을 통틀어 최강의 초월자를 꼽으라면 반드시 손꼽히는 존재. 
비록 지금 시점에선 그 정도 위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실력만큼은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파천검성은, 다름 아닌 유중혁의 ‘사부’였으니까. 
 
“왜 하필 그자에게?” 
“정(正)에도 사(私)에도 얽매이지 않는 존재니까. 그리고 기왕 청하는 거, 당연히 고수를 고르는 게 맞잖아?” 
 
유중혁의 표정은 징벌자 이야기가 나왔을 때보다도 볼 만했다. 
저렇게 당황하는 유중혁의 모습이라니······ 정말이지 진풍경이로군. 
창백해진 유중혁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힐 지경이었다. 
 
“절대로 안 된다.” 
“왜?”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라. 그 인간에겐 절대로······.” 
 
물론 ‘멸살법’을 읽은 나는, 왜 저렇게 유중혁이 질색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번만큼은 내 계획대로 움직여줘야 하니까. 
 
“아냐, 가야 해. 벌써 티켓도 끊어놨거든.”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비유가 소리를 냈다. 
 
[바앗!] 
 
뒤이어 떠오르는 시나리오 메시지.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왕래가 잦은 시나리오 지역인 <제1 무림>은 [도깨비 보따리]를 통해 포탈 티켓을 구입할 수 있었다. 5만 코인이라는 거금을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다는 것만큼 큰 장점은 없다. 
 
“잘 생각해라 유중혁. 꼭 파천검성이 아니더라도, 거기라면 쓸만한 것들을 꽤 구할 수 있어. 
 
<제1 무림>의 주거지는 20번대 시나리오부터 40번대 시나리오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모여드는 장소. 지금 시점에 그곳에 간다면, 분명 이용할 수 있는 정보나 히든 피스들이 다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한참이나 고민하던 유중혁이 대답했다. 
 
“언제 갈 거지?” 
 
나는 웃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 
 
 
 
 
 
< Episode 43. 파천검성 (3) > 끝

< Episode 43. 파천검성 (4) >
 
 
 
 
 
준비는 금방 끝났다. 
나는 아일렌에게 [유중혁 공단]을, 그리고 마르크와 몇몇 의원들에게 [김독자 공단]을 맡겼다. 
······그보다 [김독자 공단]이라니까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마계에 정말 그런 이름의 공단이 생긴 건가? 
왠지 그쪽 사람들은 불행해질 것 같은데. 
 
“젠장, 난 그냥 선술집 주인이야. 정말 그런 걸 시킬 참인가?” 
“그럼 선술집 운영하듯 해. 내가 돌아올 때까지만. 권한 일부를 양도했으니까 치안 정리는 확실히 해주고.” 
 
내 말에도 마르크는 탐탁잖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얼굴 정도는 비치고 가는 게 좋지 않겠소? 공단 사람들이 꽤 혼란스러워 할 텐데.” 
“당장 거기까지 다녀올 시간이 없어서 그래.” 
“만약, 새 혁명가가 나오면······.” 
“지역 전체가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갔으니 당분간 혁명가는 없어.” 
 
내 말에 마르크는 애써 납득하는 기색이었다. 
살짝 불안하긴 하지만, 마르크 정도면 잠시 공단을 맡기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원작에서도 상처받은 [공단]을 일으키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이 바로 마르크였으니까. [김독자 공단]은 이미 유중혁이 일으킨 참상으로 모두 패닉에 빠져 있다고 하니, 더욱 마르크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의원들을 이끌고 [김독자 공단]으로 떠나는 마르크. 그 뒷모습을 배웅하던 한명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도 출발하지.” 
“‘우리’라뇨?” 
 
나는 그 뻔뻔함에 슬며시 인상을 찌푸린 채 한명오를 돌아보았다. 
······이 양반은 대체 언제 봇짐을 바리바리 싸맨 거야? 
 
“나 혼자 여기 남아 있기도 뭐하지 않은가.” 
“······.” 
“그리고 무림이라면 나도 일가견이 있지. 젊었을 적에 무협지깨나 읽었다네.” 
 
사실 한명오가 왜 따라가려는 것인지는 알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릴 따라가려는 건 한명오가 아니라 한명오의 보스일 것이다. 
 
[마왕, ‘정욕과 격노의 마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마왕 ‘아스모데우스’를 노려봅니다.] 
 
우리엘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 
수정본의 3회차 전개를 모르는 이상, 지금으로서는 아스모데우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당장 우리엘과 아스모데우스보다 걱정되는 것은 다른 쪽이다. 
 
“떨거지가 많군.” 
“세상만사가 다 불만이지?” 
 
서로를 노려보는 유중혁과 장하영.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파천검성을 만나는 게 목적이니 유중혁은 당연히 같이 가야 했고, 연락책으로서 장하영도 꼭 필요했다. 무엇보다 이번 여정은 장하영의 성장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출발하죠.” 
 
내가 허공에 신호를 보내자, 비유가 “바앗”하는 소리를 내며 허공에 포탈을 열었다. 
츠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소용돌이치며 생성된 포탈. 
[그레이트 홀]의 규모는 아니었지만, 우리 네 사람이 건너가기엔 충분했다. 
성질 급한 유중혁은 포탈이 나타나자마자 들어갔다. 
입자 단위로 팽이 치며 사라지는 유중혁을 보며, 장하영이 긴장한 목소리를 냈다. 
 
“······나 마계 벗어나는 건 처음인데.” 
 
첫 번째 차원 이동을 겪은 뒤, 장하영은 줄곧 마계에서만 살아왔다. 
격려 차원에서 뭐라고 한마디라도 해줄까 싶었는데, 뜻밖에도 한명오가 입을 열었다. 
 
“나만 믿게. 내가 소싯적에 읽은 무협지만 삼백 권이 넘어. 이번 여정은 나만 따라오면 될 걸세.” 
 
호언하는 한명오를 보며 속으로 미소지었다. 
······무협지 삼백 권이라. 
<제1 무림>이 어떤 곳인지 모르니 잘도 저런 소릴 하지. 
 
“갑시다.” 
 
우리 세 사람은 동시에 포탈로 뛰어들었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까맣게 물든다 싶더니, 언젠가 보았던 우주의 정경이 펼쳐졌다. 한 줄기 빛이 된 내가 우주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피고 지는 <스타 스트림>의 은하. 
몇몇 별들이 흘끗 나를 바라보며 지나갔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느새 까칠한 바닥에 손을 짚고 있었다. 
 
“웩, 어지러워······.” 
 
곁에선 장하영이 헛구역질을 했고, 한명오는 등산이라도 나온 듯한 기세로 여기저기를 돌아보고 있었다. 
유중혁은 그새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마 파천검성을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오오, 이곳이 바로······.” 
 
과하게 들뜬 한명오가 아이 같은 얼굴로 우리를 재촉했다. 
‘멸살법’의 시작을 목격한 나도 저런 표정이었을까 싶다. 
 
[청룡성에 도착했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하늘에 열렸던 포탈이 닫히자, 나도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청룡성(靑龍城)은 <제1 무림>의 4대 성채 중 하나다.」 
 
‘멸살법’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은 <제 1무림>에서도 가장 커다란 성 중 하나였다. 실제로 광장에서 보이는 도시의 규모만 봐도 어마어마했다. 중앙을 차지한 대궁(大宮), 그것을 중심으로 펼쳐진 널따란 시가지. 
각종 무공서를 판매하는 시장가와 떠들썩한 대로변. 크고 작은 장원 앞에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무림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딱히 적의를 드러내는 이들은 없었지만, 그들이 품은 기도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 강자들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흥미로운 표정을 짓습니다.] 
[몇몇 성좌들이 <제1 무림>의 정경에 그리운 표정을 짓습니다.] 
 
<제1 무림>은 무수한 강자들이 나고 자란 곳. 
어쩌면 성좌들 중에도 이곳을 지나친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분위기에 압도된 듯 입을 벌린 채 주변을 살피던 장하영이 물었다. 
 
“······중국풍인데? 원래 그런 거야?” 
“원래 ‘무협’이 그쪽 배경이니까.” 
 
그렇다고 마냥 중국이라고 보기도 뭐한 것이, 저 붉은 등은 일본풍이고 군데군데 섞인 건축 양식은 동남아의 것이었다. 
물론 중국만의 것도 있다. 가령 저 차이나 드레스라든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흘겨봅니다.] 
 
나는 애써 못 들은 척 걸었다. 
성채가 너무 넓어서 정확히 감은 못 잡겠지만, 내가 읽은 부분이 맞다면 ‘파천검성’의 무관도 이 지역 일대에 있을 것이다. 
일단은 먼저······ 시장가 쪽으로 나가볼까. 
모처럼 여기까지 왔으니, <제1 무림>의 요리도 먹어보면 좋겠다. 
제일 먹고 싶은 것은 뜨끈한 닭 국물과 만두다. 
그 두 음식은 유중혁이 <제1 무림>에서 제일 많이 먹은 메뉴였다. 
걸핏하면 뜨끈한 닭 국물에 만두를 먹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밤에 그 부분을 읽을 때면 허기진 배를 붙잡고 편의점에 가서 천 원짜리 찐빵을 사 먹었다. 
 
“흠, 무공을 훈련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구만.” 
“원래 무공은 그렇게 함부로 보여주는 게 아니에요. 무협지를 삼백 권이나 보셨으면 잘 아실 텐데요.” 
“그래도 무림 고수는 있겠지? 무관도 있을 거고?” 
“있죠, 물론.” 
“기대되는구만.” 
 
나는 가엾은 눈으로 한명오를 바라보았다. 
역시 이 양반은 이 ‘무림’이 자기가 아는 그 ‘무림’이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명오의 기대는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네.” 
“뭐가 말입니까?” 
 
한명오는 뭔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지나가는 화신을 유심히 노려보며 물었다. 
 
“왜 무림인들이 청바지를 입고 있는 건가?” 
“왜, 무림인은 청바지 입으면 안 됩니까?” 
“아니, 이 시대 중국에 청바지가 있을 리가······.” 
“우리처럼 관광객들인가 보죠.” 
 
청바지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에 이어폰이나 큼지막한 헤드폰을 쓰고 다녔고, 스마트폰 비슷한 기기들을 사용하는 화신들도 보였다. 
소위 무림풍 패션을 추구하는 이들도 보였지만, 그들 중 절반 정도는 우리처럼 세계관과는 맞지 않는 복색을 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자신의 로망이 파괴되는 것에 절망한 한명오를 보며, 나는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뭘 상상하신 건진 알겠는데, 요즘 ‘무림’은 다 이렇습니다.” 
“그, 그런 건가?” 
“당연하죠. 요즘이 어떤 시댄데.” 
“이건 내가 원하던 무림이 아니야······.” 
“실제로 보면 뭐든 실망인 법이죠.” 
 
내 핀잔에도 불구하고 한명오는 포기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새 통역 스킬까지 익혔는지, 저잣거리의 상인에게 말을 걸기까지 했다. 말투도 제법 무림 본새가 났다. 
 
“여기, 무관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오?” 
 
허름한 가판대 위에 물건들을 잔뜩 쌓아 놓고 졸고 있던 상인이 한명오의 말에 끔뻑 눈을 떴다. 
 
“음? ······초행길인가 보구만.” 
“그렇소.” 
“무관은 왜? 무공 배우시게?” 
“무림에 왔으면 검술 한 초식은 얻어 가야 사내 아니겠소?” 
“크하하, 그렇지. 그렇지. 대협 말이 맞소이다.” 
 
대협이라는 말에 한명오의 입꼬리가 헤죽 올라갔다. 
 
[등장인물 ‘추국명’이 ‘흥정술 Lv.4’을 발동합니다.] 
 
정말이지, 처음부터 정말 질이 좋지 않은 경우였다. 
 
“그런데 대협께서 좀 오해가 있으신 듯하구만, 요즘은 ‘무관’에서 무공을 배우지 않소.” 
“응? 그게 무슨 소리요?” 
“하하, 땀내 나는 전통 무공 교수법은 저기 100번대 깡촌 무림계에서나 쓰는 거지, 요즘은 아무도 그렇게 무공 안 배워. 대협이 세상 물정이 어두운 듯하여 내가 특별히 알려주는 거니까 운 좋은 줄 아시구려.” 
 
당황한 한명오가 되물었다. 
 
“그, 그럼 요즘은 어떻게 무공을 배우는 거요?” 
“요즘은 이걸 쓰지.” 
 
상인은 그 말과 함께 물품에 쌓인 먼지를 탁탁 털어 보였다. 상인이 내민 박스에는 작은 mp3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천지빙령검(天地氷靈劍) 무공 구결 세트] 
 
―무림 십대 고수 빙화신녀(氷花神女)가 직접 녹음한 두뇌 새김 무공 구결 각인 포함! 
―무공 구결은 반복 학습이 최고입니다! 어릴 적부터 반복 학습으로 무공 구결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세요! 
―6개월 할부 가능! 매달 500코인으로 누구나 고수가 될 수 있다! 
 
“······이게 뭐요?” 
“요즘 젊은 고수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거요. 천 번 만 들으면 누구나 일류 고수가 될 수 있다고 소문난 물건이지.” 
“그럴 리가······ 정말이오?” 
“당연히 진짜지. 내가 무림 생활만 10년인데 대협한테 거짓부렁을 하겠소? 여기 오면서 이어폰 꽂고 다니는 젊은이들, 혹시 못 봤소이까?” 
“엇, 봤습니다. ······설마?” 
 
얼빠진 한명오의 말에 상인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자투리 시간에 이거 듣고 있는 게야. 요즘은 젊은 것들이 더 독해.” 
“허······ 그랬군. 그랬던 거였어. 내가 시대에 뒤처졌군.” 
“허허, 여기 한정판은 특별히 빙화신녀가 직접 녹음한 버전이라 듣기도 좋아. 빙화신녀 알지? 무림인 공식 고막 여친. 자, 여기 들려줄 테니 한 번 들어보시게. 잠 안 올 때 들어도 아주 효과가 좋아.” 
 
한명오가 홀리듯 이어폰을 귀에 꽂는 동안, 곁의 장하영도 상인의 물품을 뒤적이고 있었다. 
 
[환영비객(幻影飛客) 홈트레이닝 6개월 세트.] 
 
―당신도 만 번 만 따라 하면 암기의 달인이 될 수 있다! 
 
[남궁가의 제왕검학(帝王劍學) 무작정 따라하기!] 
 
―남궁가 최고 강사진의 온라인 강의로 가장 안전하고 빠른 길로 절정 고수가 되세요! 
―24시간 질의응답 게시판 운영중. 주화입마 걱정 없음. 언제든 마음 놓고 상담하세요! 
 
그러고 보니 지금쯤 <제1 무림>에서 한창 이런 게 유행할 때였다. 
소위 무의식을 자극해서 무공을 익힌다느니, 집에 앉아 강의를 들으며 편하게 무공을 수련한다느니······. 
함부로 상품을 헤집는 장하영을 향해 상인이 도끼눈을 뜨며 말했다. 
 
“어이 거기, 소협인지 소저인지······ 아무튼. 안 살 거면 함부로 뒤적이지 마. 비싼 거야.” 
“진짜 이런 걸로 고수가 될 수 있다고?” 
“여기 평들 안 보이나? 전부 전문 기관에서 인증한 상품들이야.” 
 
‘멸살법’을 모두 읽은 나도 죄다 처음 들어보는 기관이었다. 
일반 무림인들의 평들도 보였다. 
 
―백영신동(12세, 남) : 친구가 듣길래 따라 들었는데 좋아요. 수강 3개월째부터 계속 학관 1등 하고 있습니다. 짱!! 
―탐랑미요(32세, 여) : 솔직히 3주 듣고 긴가민가했는데... 6주째 부터 갑자기 귀가 뚫리더니 모르던 무공 구결이 들리기 시작했어요!!! 
―화왕방군(24세, 남) : 진짜개쩝니닼 이거 듣고 시나리오 개쉬워졌어요. 시나리오 난이도 어쩔?? 이젠 도깨비가 무섭지 않아!!! 
 
누가 봐도 허위 광고였지만, 사실 처음 <제 1무림>에 방문하는 화신들이라면 그냥 넘기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지금껏 힘든 시나리오를 돌파하며 여기까지 온 화신들이다. 
그런데 시나리오 난이도를 하향시킬 정도로 심오한 무공을 코인 몇 푼으로 쉽게 배울 수 있다니, 다들 흔들리지 않을 턱이 없다. 
이런 무림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투덜거리던 한명오 부장도 어느새 완전히 넘어간 뉘앙스였다. 
 
“자네들도 한 번 들어보겠나? 뭔가 무공이 쏙쏙 들어오는 느낌이―” 
“허허, 대협은 무공발이 좋은 모양이구만. 보통 3주 정도는 명현현상이라고 헤매는 기간이 있는데 말이야.” 
“하핫, 그렇습니까? 저, 이거 일시불로 얼마면―” 
 
아무래도 이쯤에서 말려야 되겠다 싶어서 나서려는 찰나, 뒤쪽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딴 걸 듣는다고 고수가 될 수 있었다면 <제 1무림>이 멸망하는 일은 없었겠지.” 
 
 
 
 
 
< Episode 43. 파천검성 (4) > 끝

< Episode 43. 파천검성 (5) >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상인이 인상을 썼다. 
돌아보자, 그곳에는 예상대로 유중혁이 서 있었다. 
나는 슬며시 인상을 쓰며 경고했다. 
 
“야, 함부로 그런 소리 하고 다니지 마.” 
 
유중혁이 말한 ‘<제1 무림> 멸망’은 아직 찾아오지 않은 시나리오였다. 본래 원작대로라면 몇 년은 더 지나야 찾아올 비극. 물론 지난 회차에서 그 모든 것을 목격한 유중혁에게는 앞으로 찾아올 미래 또한 ‘과거’일 것이다. 
 
“불필요한 시간 낭비하지 마라. 저런 쓰레기로 강해질 수 없다는 건 네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냥 일행들 구경 좀 하라고 냅둔 거야.” 
“우린 한가하게 관광 온 게 아니다. 잊었나?”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 유중혁의 한 손엔 뭔가가 바리바리 들려 있었다. 종이 포장지 안쪽에서 뜨끈하고 달큰한 냄새가 샘솟았다. 
······만두? 
유중혁은 뻔뻔한 얼굴로 만두 하나를 우적우적 먹으며 말했다. 
 
“현시점의 <제1 무림>에서 찾을 수 있는 히든 피스는 총 세 가지다. 멸황(滅皇)의 무공서, 흑마령(黑魔靈)의 흑천마도(黑天魔刀), 그리고 혈마교의 마혼단(魔魂丹).” 
 
유중혁의 말에 상인이 끼어들었다. 
 
“하하하! 멸황의 무공서에 흑마령의 흑천마도? 혈마교의 마혼다안? 아직도 그런 걸 찾는 인간이 있다니······!” 
“······.” 
“정신 차리게! 그것들은 말 그대로 전설이야! 구무림시절에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고!” 
 
상인의 비웃음에도 유중혁은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중혁은 그것들이 정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중 몇 개는 입수 방법도 알고 있다. 
이걸 뻔뻔하게 남들 앞에서 이야기한다는 건, 어차피 말해도 믿을 턱이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겠지. 
나는 일단 녀석의 말에 대답했다. 
 
“일단 혈마교의 마혼단은 얻어도 효용 가치가 낮아. 너라면 흡수가 가능하겠지만 나나 다른 일행들은 잘못 먹으면 주화입마가 온다고.” 
 
유중혁은 과연, 싶은 얼굴이었다. 한편 우리가 전설의 비보에 대해 태연히 이야기하자, 상인의 표정은 당황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멸황의 무공서는 입수 요건이 까다로워. 얻으려면 얻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여기 머무를 수는 없다고.” 
“그것도 그렇군.” 
“마지막으로 흑마령의 흑천마도는······ 아마 네 칼이 부러진 것 때문에 구하려는 것 같은데, 그보다 구하기 쉬우면서 성능이 비슷한 무기가 있다는 거 잊었어?” 
 
내 말에, 유중혁의 안색이 변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눈치챈 투였다. 
 
“······정말 갈 생각인 건가?” 
“그래. 이번엔 파천검성의 힘이 꼭 필요해.” 
“나는 안 가겠다.” 
“맘대로 해. 그래도 무관까지는 안내해 줄 수 있지?” 
 
유중혁이 영 못마땅한 표정을 짓자, 상인이 또 끼어들었다. 
 
“자네들, 설마 파천검성을 찾아가는 길인가?” 
“그렇습니다만.” 
“허······.” 
 
상인은 살짝 질린 얼굴로 우리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주섬주섬 상품들을 회수했다. 
 
“됐네. 이리 주게. 당신들한텐 안 팔아.” 
 
빙화신녀의 무공 구결을 열심히 듣고 있던 한명오는 갑자기 이어폰을 빼앗기자 당혹스런 표정이었다. 그런 한명오를 향해 상인이 빙긋 웃었다. 
 
“아직도 예전의 방식을 고수하려는 친구들이 있다니, 놀랍구만. 직접 시대의 변화를 느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자네들의 고행에 무운이 있길 비네.” 
 
상인은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을 하더니, 이내 가판대를 끌고 다른 곳으로 가서 또 호객 행위를 시작했다. 나는 그런 상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한명오가 물었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린가?” 
“부장님은 구무림이 좋다고 하셨죠?” 
“응? 뭐, 그렇지.” 
“잘 됐네요. 지금 우리가 찾아가는 사람이 이 ‘무림’에서 유일하게 예전의 훈련 방식을 고수하는 사람이에요.” 
 
나는 그렇게만 말해두고 앞서 가는 유중혁의 뒤를 쫓았다. 
간만에 <제 1무림>에 왔기 때문일까. 
유중혁은 잠시 그리운 얼굴로 주변을 기웃거리기도 했고, 슬픈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기도 했다. 
거리는 점차 한산해졌다. 번화한 시장가의 떠들썩함이 잦아들고, 동물의 대소변 냄새 같은 것이 희미하게 풍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나 더 걸었을까, 마침내 유중혁의 걸음이 멈췄다. 
번화가에서 봤던 장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장원. 
장원의 중심을 차지한 작은 움막. 
그리고 그 움막으로 향하는 길에 세워진 작은 명패. 
 
[파천검문(破天劍門)] 
 
―제자 상시 모집. 
 
이곳이, 파천검성이 기거하는 무관이었다. 
 
“나는 여기까지다.” 
 
그 말과 함께 유중혁은 훌쩍 물러서더니 근처의 벚나무 위로 올라갔다. 
정말 어지간히 파천검성을 만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한명오가 의심스러운 투로 말했다. 
 
“뭔가 허름한데······.” 
“은거 고수들은 원래 허름한 곳에 머물잖아요.” 
 
장하영이 기대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에 나한테 무공을 준 사람이 있는 거지?” 
 
그러고 보면 장하영은 ‘벽’을 통해 파천검성의 [불사지체]를 전수 받았었지. 아무나 무공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유중혁도 그 개고생을 해서 무공을 배웠는데······. 
 
“파천검성, 계십니까?” 
 
나는 일단 장원의 문을 두드렸다. 
 
“파천검성!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그러나 소리를 쳐도, 파천검성은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대답이 없다고 여기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나는 뻔뻔하게 외치며 장원의 문을 열었다. 
 
“들어오라는 신호로 알겠습니다!” 
 
끼이익, 하며 열리는 장원의 내부. 생각보다 장원의 내부는 한산했다. 딱히 사람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전혀 뜻밖의 존재였다. 
장하영이 반색하며 외쳤다. 
 
“앗, 개를 키우나 보네?” 
 
웬 개 한 마리가 마루 위에 드러누워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색 무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혀를 쭉 내민 중형견. 
한명오가 긴장하며 내 곁으로 붙어섰다. 
 
“설마 저게 파천검성인가?” 
“아닙니다.” 
 
헥헥거리는 개를 보고 있자니, ‘멸살법’의 내용이 떠올랐다. 
 
「검은 빛깔의 털에 적갈색 눈동자. 마치 사람처럼 우아한 자태로 드러누워 고독한 장원을 지키는 번견(番犬).」 
 
틀림없다. 
 
“저 개는 파천검성의 제자입니다.” 
“······제자라고?” 
“제 기억이 맞다면, ‘파천신군’이라고 불리는 녀석이에요.” 
 
한명오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개를 제자로 들이는 경우도 있나?” 
“사람이 개보다 못하면 그렇게 되기도 하지요. 애초에 사람이 개보다 낫다는 발상 자체가 인본주의적인 겁니다.” 
 
나는 개의 주변을 둘러싼 묘한 기류를 읽어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이 발동합니다.] 
 
오래된 것에는 이야기가 발생하고, 이야기가 모이면 설화가 된다. 
일대에 맺힌 설화의 파편들이, 원작의 활자가 되어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설화,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가 발동 중입니다.] 
 
가령, 무림 최강자의 무공을 오래도록 곁눈질한 개가 있다면 어떨까. 
그 개가, 어느 날부터인가 주인을 따라하기 시작했다면. 
그렇게 따라하고 또 따라한 세월이 10년이 되고, 20년이 되고, 30년이 되고······ 마침내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면. 
장하영이 경악하며 중얼거렸다. 
 
“뭐, 뭐야 저거······!” 
 
천천히 두 다리로 일어선 번견이, 마치 사람처럼 우리를 보고 있었다. 
생각을 전혀 읽을 수 없는 기묘한 눈동자. 
한 걸음씩 다가오는 기세에 적의는 보이지 않았으나, 딱히 호의적이라고 보기에도 어려웠다. 그 기이함에 한명오가 인상을 찌푸리며 나섰다. 
 
“보아하니 환영 인사는 아닌 것 같군. 내가 상대하지.” 
“······부장님이요?” 
“나도 백작급의 악마일세. 무시하지 말게.” 
 
백작급이면 확실히 약하지는 않다. 
그래도 제법 설화를 다룰 수 있어야 백작급이 되니까. 
 
“흐아아압!” 
 
자신만만하게 달려간 한명오가 자신의 설화를 발출했다. 
무슨 설화인진 모르겠지만 어디서 역사급 설화 몇 개를 주워서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스모데우스의 권속이니, 이참에 한명오의 실력도 확인해 보면······. 
 
터엉! 
 
“꾸아아아아악!” 
 
그러나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에, 한명오의 몸이 북 터지는 소리를 내며 허공을 날았다. 
 
[등장동물 ‘파천신군’이 ‘백보신권 Lv.10’을 발동합니다!] 
[등장동물 ‘파천신군’이 ‘주작신보 Lv.10’을 발동합니다!] 
 
······맙소사. 
 
스스슷. 
 
간단히 한명오를 장원 밖으로 날려버린 번견은 순식간에 나와 장하영의 방위를 점하며 달려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장하영을 밀치며, [책갈피]를 발동했다. 
 
[전용 스킬, ‘바람의 길 Lv.10(+1)’이 활성화됩니다!] 
 
고오오오오! 
 
순간적으로 피어오른 바람의 감각이 번견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었고, 나는 장하영을 옆구리에 끼고 바람의 길을 달려 번견의 앞발을 피했다. 
허공에 스파크를 튀기며 지나가는 앞발에 무시무시한 권격이 깃들어 있었다. 
저 온순하게 생긴 개가 [파천권격]을 사용하고 있다면 대체 누가 믿을까. 
 
“잠깐만요! 우린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자, 번견이 장원에 굴러다니던 종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제자 상시 모집. 
 
그제야 나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깨달았다. 
 
“······제기랄. 하필 제자 모집 기간이라니.”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 말고도 예전의 무림을 동경해 파천검성을 찾은 이들은 꽤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입문조차 불가능했는데, 바로 저 개 때문이었다. 
 
「“나는 개만도 못한 녀석은 제자로 받지 않겠다”」 
 
말하자면 저 ‘개’······ 그러니까 ‘파천신군’은, 파천검문에 입문하기 위한 등용문인 셈이었다. 
내 움직임에 자극을 받았는지, 개가 으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츠츠츠츳. 
 
개의 주변에 희미한 스파크가 올라오고 있었다. 
장하영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저, 저거 뭐야? 개 맞아?” 
 
놀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스파크의 색깔이 노란빛으로 변하는 것으로 봐서, 틀림없었다. 
 
저건, ‘초월형 1단계’다. 
 
설마 파천신군이 이 정도일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빌어먹을. 
물론 내가 전력을 드러내면 상대할 수는 있겠지만, 아직 몸도 회복되지 않은 상황인데다 고작 개를 상대로 설화를 남발할 수는 없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다. 
 
“유중혁! 한 번만 도와줘!” 
 
유중혁은 조용했다. 
이 자식, 반응이 없다 이거지? 
 
“내가 혈마교의 마혼단 찾는 거 도와줄 테니까, 딱 이 녀석까지만 정리해줘!” 
 
이번에도 유중혁은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개가 움직였다. [바람의 길]을 사용해도 피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였다. 이를 악문 내가 [전인화]를 발동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타앙! 
 
간발의 차이로 나타난 유중혁이, [천총운검]으로 파천신군의 앞발을 막아선 채 말했다. 
 
“마혼단만으론 부족하다. 흑마령의 흑천마도도 구해와라.” 
 
제기랄. 
그렇게까지 쫀쫀하게 나오겠다 이거지. 
 
“······알겠으니까 개 좀 처리해봐.” 
 
가볍게 검을 흔들어 개의 공격을 흘려낸 유중혁이 고고한 얼굴로 검도 자세를 취했다. 츠츠츠츠, 하는 소리와 함께 유중혁의 전신에서 노란 스파크가 흐르기 시작했다. 
 
역시, 유중혁도 초월형 1단계는 돌파했군. 
본래는 이 시기에 오를 수 없는 경지일 텐데. 
 
파천신군은 자신과 같은 힘을 사용하는 존재가 나타나자 긴장한 기색이었다. 개와 사람의 대치라기엔 믿을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 
이윽고, 가공할 마력파가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원작에서도 유중혁은 파천신군과 겨뤘던 적이 있다. 
 
「파천검성에게는 두 명의 제자가 있다.」 
 
바로, 파천검성에게 처음 검을 배우러 왔던 그때였다. 
 
「하나는, 파천검성이 기르는 번견인 ‘파천신군’.」 
 
아마 그때는 졌었지. 
 
「그리고 두 번째가 바로 패왕 유중혁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를 것이다. 
 
 
 
 
 
< Episode 43. 파천검성 (5) > 끝

< Episode 43. 파천검성 (6) >
 
 
 
 
 
파천신군은 강하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아마 이 <스타 스트림>에 존재하는 개 중에 파천신군보다 더 강한 개는 없을 것이다. 
물론, 파천신군보다 강한 인간도 거의 없다. 
 
츠츠츠츠츳! 
 
유중혁과 파천신군의 기세가 맞닿았다. 
초월형 1단계에서 비롯된 스파크가 서로 맞닿으며 풍경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초월좌들이 걸어온 길이 마주쳐 간섭을 일으키는 것이다. 
오직 단 하나의 길만을 걸어 초월에 도달한 존재들. 그렇기에, 초월좌들의 싸움은 언제나 서로에 대한 부정(否定)의 연속이다. 
 
너의 길은 틀렸고, 나의 길이 맞다. 
 
그러한 부정을 통해 초월좌들은 강해지고, 더 단단해지며, 마지막에는 부러진다. 주변을 장악하는 초월좌들의 존재감 속에, 유중혁의 생각이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오랜만이군, 사형.」 
 
누가 봤다면 웃을 일이었다. 
사람도 아니고, 개와 사형제가 되다니. 
 
하지만 유중혁은 웃지 않았다. 
 
스치듯 사라지는 표정이 가슴을 툭 치고 지나간다. 
활자로 모두 그려질 수 없는, 곱씹을 틈도 없이 과거 속으로 욱여넣었던 기억들이 풀어 헤쳐진다. 
파천검성을 만나고, 파천신군과 함께 무공을 배우던 유중혁의 2회차. 
 
「이곳에서, 유중혁은 잠시나마 인정(人情)을 배웠다.」 
 
이곳에서 유중혁은 어떻게 봐도 인간 같지 않은 사부와, 인간이 아닌 사형과 함께 무공을 배우고, 훈련하고, 살아갔다. 
지금의 유중혁에게 약간이나마 사람의 온기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분명 <제1 무림>의 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유중혁에게서 사람의 온기를 빼앗아 간 원인을 찾는다면, 그 또한 아마 이 <제1 무림>일 것이다.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최강의 번견 파천신군은, 파천검성이 귀환자 연합과 싸울 때 죽었다. 
 
그르르르르릉······! 
 
유중혁이 움직였다. 
 
스가각! 콰가가각! 
 
번견의 앞발과 천총운검의 검격이 부딪치며 파찰음을 토했다. 극성에 다다른 주작신보의 발걸음들이 허공에서 얽혔다. 착착거리며 내민 번견의 앞발과 유중혁의 검격이 부딪치는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허공의 스파크도 더욱 격렬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씩 승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역시 주인공은 주인공이다. 
 
파천검성을 따라하며 자라난 번견의 설화는,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살아온 사내의 설화를 당해낼 수 없다. 오직 다음 시나리오만 바라보고 살아온 고독한 유중혁의 시간이 모든 검결에 실려 있었다. 
 
「봐주지 않는다.」 
 
유중혁의 시간에는 애도가 없다. 
왜냐하면, 어차피 같은 시간을 또 겪어야 하니까. 
싸우고, 또 싸우며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녀석이 지나간 과거에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애도다. 
 
끼잉! 
 
연이어 날아드는 검격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파천신군이 신음을 토해냈다. 유중혁의 공세가 더욱 빨라졌다. 검극은 더욱 집요해졌고, 약점을 파고드는 속도는 더욱 악랄해졌다. 곁에 서 있던 장하영이 멍하니 입을 벌리는 것이 보였다. 
 
“······와, 진짜.” 
 
아마 이만한 전투를 눈앞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겠지. 
굉장한 전투였지만, 사실 감탄하기는 이르다. 앞으로 있을 싸움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지나가는 유흥거리에 불과하니까. 
 
끼잉! 낑! 
 
결국 힘 싸움에서 밀려난 파천신군이 신음을 토해냈다. 
유중혁은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어진 유중혁의 연격이 파천신군의 앞발을 제압했고, 운신의 폭을 좁혔다. 낯빛이 흐려진 번견의 입에서 거친 호흡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유중혁의 마지막 결정타가 파천신군의 허리를 꿰뚫었다. 
······정확히는, 꿰뚫으려는 순간이었다. 
 
오소소. 
 
소름끼치는 감각이 뒷덜미를 스쳤다. 
누군가가 내 등 뒤에 서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뒤에 서 있었던 거지?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깜짝 놀랍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호기심을 보입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장원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경계심을 보입니다.] 
 
“오늘은 하늘이 유독 시끄럽구나. 무슨 구경이라도 난 것인가?” 
 
목소리의 주인이 마실이라도 나온 듯 한가한 모습으로 그곳에 서 있었다. 
유중혁보다도 한참 큰 체구. 
족히 삼미터는 되어 보이는 장신의 여인이, 거신(巨神)의 위압감을 내뿜으며 내 곁을 스쳐갔다. 누구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너무나 명백했다. 
눈앞의 존재감만으로도, 이렇게나 심장이 짜릿할 지경이니까. 
그녀가 바로 ‘멸살법’ 최강의 초월좌들 중 하나, 파천검성(破天劍聖)이었다. 
 
꽈르릉! 
 
허공에서 몰아치는 에테르의 폭풍과 함께, 유중혁의 [천총운검]이 허공에 그대로 정지했다. 
 
“말도 못하는 개를 이렇게 패는가? 사람의 도리를 갖춘 놈들이 아니구나.” 
 
파르르 떨리는 [천총운검]의 검신. 파천검성의 두 손가락이 마치 장난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유중혁의 칼날을 쥐고 있었다. 
 
왕왕! 
 
바닥에 드러누워 낑낑거리던 파천신군이 혓바닥을 내민 채 달려왔다. 
한편, 유중혁은 [천총운검] 조차 내버리고 [주작신보]를 발동해 장원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지금껏 내가 본 유중혁 중에 가장 빠른 속도였다. 꽁무니를 빼는 유중혁을 보는 파천검성의 입가에 흥미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재빠른 놈이군. 저 녀석은 일단 마지막에 잡고······ 어디 보자.” 
 
파천검성의 무심한 시선이 우리 일행을 훑었다. 
눈이 마주친다 싶은 순간, 파천검성이 내 코앞에 와 있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맺힐 정도의 속도였다. 
내가 [전인화]를 쓴다고 해도, 이것보다 빠를 자신은 없었다. 
 
“우선, 아리까리하게 생긴 놈이 하나.” 
 
그저 턱을 붙잡혔을 뿐인데 시야가 둔중하게 흔들렸다. 
비틀거리며 물러났을 때, 파천검성은 이미 곁에 있던 장하영의 턱을 붙잡고 있었다. 
 
“······큿?” 
“오, 이쪽은 꽤 내 타입인데? 넌 합격.” 
 
잔상만을 남기고 사라지는 파천검성의 움직임. 
저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이형환위(移形換位)의 경지일 것이다. 
어느새 파천검성은 엎어진 한명오의 볼을 나뭇가지로 쿡쿡 찔러보고 있었다. 
 
“······생긴걸 보니 괴수종 같은데. 죽이면 내단 같은 게 나오려나?” 
“······뭐, 뭐야!” 
“일단 넌 사형.” 
 
나뭇가지를 얻어 맞은 한명오가 기절함과 동시에, 파천검성의 신형이 장원 안에서 사라졌다. 응축된 공기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저 하늘 건너편에서 뭔가가 대폭발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돌풍과 함께 파천검성의 신형이 장원으로 되돌아왔다. 
 
“휴, 꽤 빠른 녀석이네. 일단 얼굴은 합격이긴 한데······.” 
 
얼굴 곳곳에 새파란 멍이 든 유중혁이, 파천검성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었다. 전신이 넝마가 된 유중혁은 그런 상황에서조차 [주작신보]를 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중혁의 발은 애꿎은 허공만을 헛발질할 뿐이었다. 
파천검성의 커다란 손이, 유중혁의 뒷덜미를 대롱대롱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 
 
 
유중혁이 어째서 파천검성을 만나는 것을 꺼려했는지는 잘 알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지금 이 시점에서 파천검성을 만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위험이 따른다. 
유중혁이 파천검성에게 검을 배운 것은 2회차의 일. 
3회차의 파천검성은, 유중혁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너, 어떻게 내 무공을 알고 있냐?”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녀석은 대신 어마어마한 원망이 담긴 눈길로 내쪽을 노려보았다. 
 
「김독자! 어떻게든 해봐라! 빨리!」 
 
참고로 18회차의 유중혁은 파천검성에게 개기다가 맞아 죽었다. 
일찍 초월좌가 되었다고 스승한테 까불던 녀석의 최후랄까.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파천검성, 저희는 성운들과 싸우기 위해 초월좌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흐음, 그래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파천검성은 특이한 장난감이라도 보는 듯한 얼굴로 나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품속을 뒤적거려 큼지막한 곰방대를 꺼냈다. 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타오르는 담배 연기. 고요히 나를 보던 파천검성이, 내쪽으로 갑자기 연기를 훅 뿜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자원 봉사자가 아냐. 제자가 되러 온 게 아니라면 꺼져라.” 
 
미세한 연기 입자 사이로 파천검성의 웅혼한 마력이 묻어 있었다. 
포위하듯 내 주변을 은은히 감싸고 도는 연기. 
조금이라도 허튼 소리를 한다면, 당장이라도 나를 쳐죽이겠다는 위협이 틀림없었다. 
물론 나는 허튼 소리를 할 것이다. 
 
“정말 제자를 필요로 하시는 게 맞습니까?” 
“······뭐?” 
“사실, 당신도 별로 기대하지 않잖습니까.” 
 
내리 깔린 담배 연기가 마치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나는 도발이라도 하듯 계속해서 말했다. 
 
“아마 파천검문의 최후 전승자는 당신일 겁니다. 왜냐하면 ‘무림’은 곧 멸망하게 될 테니까요.” 
 
그 말에, 파천검성의 동공에 처음으로 호기심이 스쳤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붙들린 유중혁의 머리통과 나를 번갈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흥미로운 이야기구나.” 
“좀 들어 보실 마음이 생기셨습니까?” 
“흥미롭긴 하지만, 조금 있다 듣도록 하겠다. 먼저 손을 좀 봐줘야 할 녀석이 있어서 말이지.” 
 
파천검성은 점혈한 유중혁의 몸을 어깨에 걸친 채, 녀석의 엉덩이를 곰방대로 팡팡 때리며 장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유중혁의 피눈물 섞인 고함소리가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김독자!!」 
 
“신군, 저 친구들을 대접해라.” 
 
왕왕! 
 
자욱한 담배 연기가 순식간에 움막의 주변을 채웠고, 파천검성과 유중혁의 신형은 그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아무래도 움막의 주변에는 절진(絶陣)이 깔려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쫓아가봤자 연기 속에서 길만 잃을 뿐이겠지. 
장하영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쟤, 저대로 둬도 괜찮아? 죽는 거 아냐?” 
“괜찮을 거야, ······아마도.” 
 
파천검성이 내 이야기를 먼저 듣지 않은 것은 아쉬웠지만, 이쪽에 호의를 보인 만큼 상황이 최악은 아니었다. 
잠깐이지만, 두 사제만의 시간을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유중혁이 입을 똑바로 놀리기를 바라는 수밖에. 
 
“잠깐 앉아서 좀 쉴까?” 
 
나는 장하영과 함께 한명오를 부축해 대청마루 위에 눕혔다. 무언가가 내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돌아보니, 파천신군이 만두가 담긴 대접을 물고 서 있었다. 
······이거 아까 유중혁이 사온 것 같은데. 
잘 됐다, 마침 배도 고프던 참이었으니까. 
파천신군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며 왕왕 짖었다. 
 
「드시지.」 
 
실로 송구스러워지기까지 하는 공손함이었다. 
조금 당혹스런 마음으로 만두를 집어 들자, 침을 질질 흘리는 파천신군이 만두를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정말이지 참을성이 좋은 개다. 
 
“하나 먹을래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만두 반쪽을 잘라 내밀었다. 
 
왕왕. 
 
「당신은 좋은 사람이군.」 
 
파천신군이 그릉그릉 웃으며 내가 앉은 마루 곁으로 착 올라와 앉았다. 마치 사람처럼 발을 내밀어 만두를 후욱후욱 불어대는 파천신군. 그런 번견을 향해 내가 말했다. 
 
“장원이 무척 한산하네요.” 
 
왕왕. 
 
「제자가 찾아온 건 오랜만이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장하영이 미친 사람을 보듯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씩 웃어준 뒤 조용히 하라는 표시로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파천신군이 다시 한 번 짖었다. 
 
왕왕.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미련한 얼굴로 만두피를 핥는 파천신군이 담장 밖을 보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무너진 담장 너머로 살풍경한 소로의 정경이 보였다. 
우리가 줄곧 따라 걸어온 길이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거미줄과 흙먼지로 덮인 낡은 장원들 뿐이었지만, 이곳에서 100년의 세월을 보낸 파천신군은, 아마 저 풍경에서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그 풍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왕왕. 
 
「많은 무관들이 있었다.」 
 
왕왕.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이곳은, 본래 ‘무관’의 거리였다. 
한때는 의협심으로 가득했던 젊은이들이 뜻을 품고 무학을 수련했던 거리. 
열정이 넘쳤던, 고수가 되기 위해 몇 년이고 몇십 년이고 정진할 수 있었던 이들이 이곳에 모였었다. 
 
「땀을 흘리고, 노력하면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곳에는 아무도 없다. 
이유를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보았던 무수한 광경들이, 이 거리가 쇠퇴한 이유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번견은 외로이 짖었다. 
 
「이제 누구도, 예전의 방식으로 무공을 익히려는 사람은 없다.」 
 
“그렇겠죠.” 
 
나 역시, 이 무림이 왜 이렇게 됐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한 귀결이었다. 
한때 무림의 십대 고수를 자처했던 자들은 시스템을 사용하는 성좌들에게 무너졌고, 십여 년간 무공을 수련한 고수들은 코인을 주고 고작 5분만에 스킬을 습득한 화신들에게 패배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대들이 온 것이 기껍다.」 
 
······이거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여기서 무공을 배울 생각은 쥐뿔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음······. 꼭 옛것만 좋은 건 아니잖아요? 쉽게 배워서 강해지면 그것도 좋은 일인데.” 
 
「무슨 말인가! 쉬운 것은 무조건 나쁘다! 도깨비와 성좌놈들이 가져온 것은 모두 나쁘다!」 
 
아마 번견도 100년쯤 무공을 익히면 번견철학(番犬哲學)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성좌들이랑 도깨비들이 싫은 건 알겠지만, 꼭 옛날 방식만이 옳은 건 아니에요. 옛날 무림도 그다지 공평하지는 않았잖아요.” 
 
「예전에는 모두 노력하면 절세 고수가 될 수 있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요?” 
 
파천신군이 말하고 싶은 게 뭔지는 안다. 
그리고 그게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도, 물론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생각에 순순히 동의해 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 상태로 내버려두면 파천신군도 파천검성도 시대의 흐름에 매몰되어 원작 그대로의 최후를 맞이하게 될 테니까. 
 
적어도 내가 있는 3회차는, 그렇게 되도록 두지 않는다. 
 
그때, 파천신군의 표정이 변했다. 
 
그르르릉. 
 
내 웃음에 화가 난 걸까 생각했는데, 잘 보니 그게 아니었다. 장원 바깥으로 느껴지는 위험한 기운들.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파천검성. 그만 무공을 내놓으시오.] 
 
뒤이어 장원의 문이 벌컥 열리며 일련의 도깨비들이 나타났다. 
슬슬 나타날 시간이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벌써 온 모양이다. 
파천신군이 마력을 끌어 올리며 컹컹 짖었다. 
 
[근처 무관들은 이미 모두 무공을 팔았소! 대체 언제까지 예전의 무공을 지킬 거요? 그렇게 버티다간 때를 놓친다고 말했잖아. 언제까지 우리가 당신 무공을 비싸게 사줄 거라고······.] 
 
그런데, 도깨비들 중 하나의 모습이 무척 익숙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도깨비의 눈빛이 크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네놈은······?] 
 
 
 
 
 
< Episode 43. 파천검성 (6) > 끝

< Episode 44. 사기꾼 (1) >
 
 
 
 
 
Episode 44. 사기꾼 
 
 
유중혁의 스승, 파천검성은 인내심이 강하다. 
100년 전에도 그랬고, 200년 전에도 그랬다. 
그렇기에 그녀는 검의 일가(一家)를 이룰 수 있었다. 
많은 무림인들이 자신의 무공을 팔고 무림을 떠날 때도, 이곳에 홀로 남아 초월의 경지를 돌파할 수 있었다. 
 
“그래서, 네놈은 대체 뭐냐?” 
 
쿡. 쿡. 
 
큼지막한 손가락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유중혁의 볼을 몇 번이고 찔렀다. 그저 손가락일 뿐이지만 초월좌의 손가락이었다. 그러니, 아프지 않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유중혁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 두 연놈이 똑같구나.”」 
 
그것은 언젠가 무림 십대 고수 중 하나인 천마가 남긴 말이었다. 
아마도, 천마는 사람을 정확히 보았다. 
 
“한마디 대꾸조차 없구나. 말하지 않으면 볼기짝을 때리겠다.” 
 
파천검성은 그 말과 함께 커다란 곰방대를 들어 올렸다. 
전신의 혈도가 제압 당해 꼼짝도 못하는 유중혁의 엉덩이가, 철썩하고 애처로운 소리를 냈다. 
 
‘빌어먹을 김독자.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철썩! 철썩! 철썩! 
 
소리는 장난 같았지만, 그에 담긴 공력도 장난은 아니었다. 
이윽고 유중혁의 입가에 핏줄기가 맺혔다. 
그쯤 되자, 파천검성의 아미도 묘한 곡선을 그렸다. 
 
“인물값을 하는 놈이로군.” 
 
조금은 감명 받은 듯한 투였다. 
 
“다시 묻겠다. 대체 어디서 파천검문의 무공을 훔쳐 배운 것이냐?” 
“······.” 
“솔직하게 말한다면 목숨은 부지해주마.” 
 
그 말에 유중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파천검문의 무공은 본래 비인부전(非人不傳). 그러니 문외자인 유중혁은 익혀서는 안 되는 무공이었다. 
그런데 파천검성은 목숨을 살려주겠다 말했다. 
말뜻은 명확했다. 
지금 파천검성은, 유중혁을 자신의 제자로 들이려는 것이다. 
 
‘스승.’ 
 
그런 스승의 심경을, 유중혁은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쇠락해가는 무림에, 제대로 된 제자를 구하는 것은 힘들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과 동류의 무공을 익힌 초월좌가 나타났다. 
관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하지만······.’ 
 
유중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여기서, 김독자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파천검성 남궁민영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 
기회를 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낸다면, 분명 파천검성의 환심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흐음, 눈빛이 불타는 듯 뜨겁구나.” 
“······.” 
“혹시 나를 사모하느냐?” 
 
이런 와중에 저런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역시 자신의 사부가 틀림없다. 
유중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여기서 나를 만나면, 당신은 죽게 된다.’ 
 
유중혁은 스승의 마지막 뒷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긴 세월의 고련 끝에 홀로 상처받아 비뚤어진 초월좌.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던 존재. 
 
―멍청한 제자야.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무림 최강자인 천마와 혈마의 합공을 당하며, 홀로 귀환자 연맹과 맞서 싸우던 스승의 모습. 
 
―살아라, 중혁아. 
 
그때 유중혁은 함께 싸우지 못했다. 
약했기 때문에. 
너무 약했기 때문에. 
 
“······너의 눈이 슬프구나.”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유중혁은 흠칫 몸을 떨었다. 
파천검성의 맑은 눈동자가 유중혁을 비추고 있었다. 
파천검성 남궁민영은 인간과 거신족의 혼혈. 
그러니 저것은, 네안데르탈 거신족의 능력 중 하나였다. 
 
“고독하고, 오만하고, 깊이 상처받았구나.” 
 
타인의 감정을 읽어내는 명경목(明鏡目). 
그 눈으로, 파천검성이 유중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너는 대체 누구냐?” 
 
마치 자신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유중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말해서는 안 된다. 
절대로, 아무 말도······. 
 
[성좌, ‘구원의 마왕’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 메시지에, 유중혁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괜찮을 거라고 말합니다.] 
 
······괜찮을 거라고? 
 
[성좌, ‘구원의 마왕’이 이번 회차는 다를 거라고 말합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당신의 스승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이번 회차는 다르다. 
다른 사람이 그 말을 했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왜일까. 
저 녀석이 하는 말은, 어쩐지 믿고 싶어진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날벌레가······ 시끄럽다.” 
 
파천검성이 허공에 손가락을 튕기자, 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마력으로 소리를 끊어버린 것이었다. 파천검성 수준의 초월좌가 되면 잠깐이지만 저런 일도 가능해진다. 
도깨비가 채널 주파수를 조정하지 않는 이상, 당분간 김독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부터는, 스스로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내 이름은 유중혁.” 
 
짧게 호흡을 가다듬은 유중혁이 숨을 삼켰다. 
 
“나는 당신의 제자였다.” 
“흐음······ 그게 무슨 뜻이지? 나는 너 같은 이를 본 적이 없어. 물론 제자로 둔 기억도 없다.” 
“말 그대로다. 나는 당신에게 무공을 배웠······.” 
 
유중혁이 말을 이으려는 순간, 전신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설화, ‘파천검성의 제자’가 발동합니다.] 
 
유중혁의 입술이 강제로 뒤틀리며 말의 어미를 바꾸었다. 
 
“······습니다.” 
 
유중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난 회차에서 파천검성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너는 ‘회귀자’라고 했지. 그렇다면, 언젠가 나를 다시 만날 수도 있겠구나. 
―다음 회차에는 당신 제자 안 해. 
―앙칼진 녀석. 말이라도 곱게 하면······ 존댓말은 대체 언제 입에 붙는 거냐? 다음 생에선 붙는 거냐? 
 
아마도 이 설화가 남은 것은, 그때 파천검성과 나눈 대화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화신 ‘파천검성’에게 존댓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스운 노릇이었다. 
그때 자신과 함께 했던 파천검성은 이제 없다. 
그럼에도, 이 설화는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다. 
 
―그때도, 다시 한번 내 제자가 되어라. 
 
울컥하는 마음과 함께, 낡은 기억들이 폭포처럼 쏟아지며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 
간접 메시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김독자가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동료라.’ 
 
누군가를 믿는다는 게 어떤 감정인지, 유중혁은 오래도록 잊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깜빡인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 궁금합니까?” 
“물론 궁금하다, 몹시.” 
“그럼 정신 장벽을 열겠습니다. 나를 엿보십시오. 당신의 명경목이라면 가능할 테니까.” 
“······흐음. 명경목도 알고 있다?” 
“딱 5분입니다. 그 이상은 줄 수 없습니다.” 
 
파천검성의 눈빛이 의심의 빛으로 물들었다. 
 
“이상한 수작을 꾸미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수작을 꾸며도, 어차피 당신이라면 제압할 수 있지 않습니까.” 
 
도발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에, 파천검성의 눈썹이 움찔했다. 
 
“좋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성좌들만이 아니다. 
그리고 다른 초월좌의 존재를 엿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갑자기 무림에 나타난, 자신과 같은 무공을 사용하는 초월좌. 
궁금증이 도지지 않을 턱이 없었다. 
 
“내가 너를 보겠다.” 
 
이윽고 파천검성의 명경목이 빛을 발했다. 
 
쿠구구구구······! 
 
유중혁은 자신의 머리털이 모조리 뽑혀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명경목을 통한 기억 전이는 그만큼이나 위험하다. 유중혁 자신에게도, 파천검성에게도. 그럼에도 유중혁은 저질렀다. 
 
어쩌면, 파천검성의 정신이 망가질 수도 있다. 
자신이 본 것을 믿지 않을 수도 있고. 
모든 것을 부정하고 유중혁을 지워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이 도박이 성공한다면, 그는 파천검성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변을 잠식하는 명경목의 맑은 기운이 사라진 것은 그로부터 십여 분이 더 지난 후의 일이었다. 
 
우우우웅······. 
 
명경목의 빛이 완전히 꺼졌음에도, 파천검성은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미친 걸까? 
아니면······. 
 
천천히 고개를 드는 파천검성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3회차를 거치는 동안 처음 보는 표정. 
그리고 잠시 후에야, 유중혁은 그 표정의 의미를 깨달았다. 
 
“다신 나의 제자가 되지 않겠다더니······.” 
 
 
* 
 
 
유중혁과 파천검성은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생했다.” 
“······어설픈 위로는 집어 치우십시오. 당신이랑 어울리지 않으니까.” 
“좋아. 틀림없는 내 제자로구나.” 
 
2회차의 파천검성은 죽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의 파천검성은, 2회차의 파천검성 남궁민영이 아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복수는 했습니다. 천마와 혈마는, 35번 시나리오에서 모두 때려 잡았으니까.” 
“그래. 보았다. 힘들게 이기는 걸 보니 썩 만족스럽진 않더구나.” 
“그럼 당신이 직접 죽이지 그랬습니까.” 
 
누가봐도 정상적인 사제간의 대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파천검성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많이 변했구나, 중혁아.” 
“아무것도 변한 건 없습니다.” 
 
그 쀼루퉁한 대답에 파천검성이 손가락을 튀겼다. 
그러자 움막을 감싸고 있던 절진의 일부가 일그러지며, 대형 망원경의 렌즈를 연상시키는 패널이 떠올랐다. 그 작은 패널 위로, 바깥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날 찾아온 것은 저 아이 때문이냐?” 
 
그곳에는 만두를 꾸역꾸역 처먹으며 개와 이야기를 나누는 김독자가 있었다. 유중혁은 인상을 쓴 채 그 광경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새로운 친구인 게냐?” 
“친구 같은 건 아닙니다. 저 녀석은 그냥······.” 
“벌써 성운들과 대적할 생각을 하다니, 용감한 녀석이더구나.” 
“······.” 
“저 녀석과 함께라면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게냐?” 
 
그토록 무뚝뚝한 제자에게 처음으로 생긴 친구가 기특하다는 듯, 파천검성은 절진 너머로 비치는 김독자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절진의 일부가 흔들리며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파천검성. 그만 무공을 내놓으시오.] 
 
유중혁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깨비.” 
 
이젠 지겹다는 듯, 파천검성이 말했다. 
 
“무공 매입자들이 또 오셨군.” 
“······예정보다 빠른데, 얼마나 된 겁니까?” 
“제법 됐다. 이 근처에는 이제 나 밖에 안 남았으니.” 
 
무림의 무공에는 가치가 있다. 어쨌든 모든 무공은 역사를 쌓아 만들어진 일종의 설화니까. 그 연원이 깊은 무공일수록 그 가치는 더욱 크다. 그것을 잘 아는 도깨비들이기에, 파천검성의 무공을 탐내는 것이다. 
유중혁이 [천총운검]을 뽑으며 입을 열었다. 
 
“저랑 김독자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상대는 도깨비다. 네가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김독자라면 가능합니다.” 
 
유중혁은 스승의 의문에 대답하는 대신, 패널로 비치는 도깨비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낯이 익다 싶더니, 본 적이 있는 도깨비였다. 
 
‘서울 돔에 있던 그 녀석이다.’ 
 
아마 김독자라면, 저 녀석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화면 너머로 김독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아직도 살아 있을 줄은 몰랐네? 벌 받으러 간 거 아니었냐? 
 
역시나, 입 꼬리가 알랑거리는 모양을 보니 벌써 김독자 특유의 ‘엿 먹이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으르렁거리는 도깨비를 향해, 김독자가 재미있다는 듯 턱을 벅벅 긁으며 물었다. 
 
―흐음, 그래. 파천검성의 무공을 사러 왔다고? 
 
유중혁은 스승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아마 김독자 선에서 사태는 정리될 것이다.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김독자가 나선 이상 또 요상한 술수를 부려서 도깨비에게 제대로 한 방을 먹이겠지. 
그런데 다음 순간, 김독자가 뜻 모를 미소와 함께 이상한 소리를 했다. 
 
―좋아, 내가 팔게. 파천검성의 무공. 
 
 
 
 
< Episode 44. 사기꾼 (1) > 끝

< Episode 44. 사기꾼 (2) >
 
 
 
 
 
[네놈······ 설마 그때 그······.] 
 
부들부들 떠는 도깨비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안 좋은 옛 기억들이 떠올랐다. 내 곁에 두둥실 떠 있던 비유도 한껏 인상을 쓰고 있었다. 
 
당연히, 분노할 수밖에 없다. 
 
41회차의 신유승을 ‘재앙’으로 만들고, 한반도에 강림시켜 그 비극을 초래한 원흉 중 하나가 바로 저 도깨비였으니까. 
이름이······ ‘바울’이었던가? 
분명 연옥에 들어가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고 했는데, 역시나······. 
관리국 처벌은 죄다 솜방망이다. 무림 재개발팀에 들어가는 게 무슨 처벌이야? 
 
“안 본 동안 얼굴 많이 삭았네?” 
 
[으으, 그으으으으······!] 
 
“그땐 그나마 중급 도깨비였잖아. 지금은 보아하니······ 하급?” 
 
[네놈! 네놈······!] 
 
흥분하는 꼴을 보니 다시 ‘독대’를 요청해서 한바탕 패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때 이 자식 패고 설화도 받았었는데, 혹부리들은 그 설화 잘 돌려보고 있으려나? 
 
[그만하고 물러서라, 바울.] 
 
씩씩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바울을 대신해, 다른 도깨비가 앞으로 나섰다. 
 
[혹시 ‘김독자’님이십니까?] 
 
자세히 보니, 이 도깨비도 인상이 낯익었다. 목소리도 어디선가 듣던 목소리. 
어? 잠깐만······ 이 녀석? 
 
“어, 너 그때 걔지? 비형 밑에서 일하던······. 이름이······.” 
 
[영기입니다. 역시! 김독자님이셨군요!] 
 
도깨비가 반색하며 나를 반겼다.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비형의 밑에서 하위 채널을 담당하던 도깨비 영기. 
 
[살아 계신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이런 곳에서 뵐 줄이야······!] 
 
“비형은 잘 지내?” 
 
[독자님이 사라지시고 눈에 띄게 침울해지셨습니다.] 
 
그 비형이 침울해졌다니,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새 비형 녀석이랑 정이라도 들었던 모양이다. 
 
“너도 제법 말쑥해졌다? 그땐 시나리오 갱신도 할 줄 모르는 녀석이었는데.” 
 
[아하핫. 부끄럽게 언제적 이야기를······ 저도 이제 어엿한 중급 도깨비입니다.] 
 
중급 도깨비라. 
이 녀석도 한반도 시나리오에 있었으니, 비형처럼 고속 승진을 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새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게 느껴진다. 
그래봤자 아직 1년도 채 안 된 일들인데. 
 
[그런데 독자님. 스킬을 파시겠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금세 고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영기. 
어리숙하든 어떻든 도깨비는 도깨비다. 
이거 방심할 수 없겠는데. 
 
“말 그대로야. 내가 파천검성 설득해서 스킬을 팔도록 해줄게.” 
 
[독자 님께서 그걸 어떻게······.] 
 
“다 방법이 있지. 스킬 뭐 필요한건데? [주작신보]? 아니면 [백보신권]?” 
 
[백보신권은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가 필요한 건······.] 
 
“[파천검도]인가.” 
 
내 말에 영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럴 거라 생각했다. 
파천검도. 지금의 파천검성에게 파천(破天)의 이름을 하사한 무공. 
<제1 무림>의 누구라도 탐하지 않을 수 없는 최상위급의 무공이, 바로 유중혁의 파천검도다. 
곁에 있던 파천신군이 그르렁거리려는 기색이 보여서, 나는 재빨리 그를 만류하며 말했다. 
 
“좋아. 내가 팔아줄게. 아니, 팔아주는 게 아니라 그냥 내줄 수도 있어.” 
 
내 말에, 파천신군이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영기도 깜짝 놀란 듯 물었다. 
 
[저, 정말이십니까?] 
 
“대신, 내 부탁을 두 개 들어주는 조건이야. 우선 첫 번째······ [파천검도]를 너희가 곧 오픈할 시나리오의 상품으로 내걸어.” 
 
[예?] 
 
나는 영기의 멍청한 표정을 보며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파천검도]인데, 내가 그냥 내줄 리가 있겠냐? 
 
“너희 조만간 ‘무도 대회 시나리오’ 열 거잖아? [흑천마도] 걸고.” 
 
[그, 그걸 어떻게······!] 
 
“뭘 그렇게 놀라? 맨날 하는 거면서. 무림 단골 시나리오잖아. 무림의 보검이 나타나고, 그거 가지겠다고 무림인들 죄다 몰려와서 피터지게 싸우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흑천마도에 대한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떻게 알긴. 
무도 대회는 유중혁이 <제1 무림>에 올 때마다 반복해서 참가했던 이벤트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 
작가한테 제발 무도 대회 좀 스킵해달라고 댓글 단 게 몇 번인지 모르겠다. 
 
“그건 네가 알 거 없고, 아무튼 파천검성의 무공도 그때 상품으로 걸어. 1등 상품으로 걸면 되겠네.” 
 
영기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 
아마 녀석으로서는 반가운 제안일 것이다. 
어차피 파천검성의 무공을 사들여서 도깨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다. 그 무공을 걸고 대형 시나리오를 굴려 추가 구독좌를 확보하거나, 도깨비 보따리를 통해 무공을 비싼 값에 판매하거나. 
영기는 지금 어느 쪽이 더 이득일지를 계산하는 중일 것이다. 
 
[좋습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로서는 손해볼 게 없지요. 무공 구입비도 절약하는 셈이니까. 단······.] 
 
“단?” 
 
[부탁이 두 개라 하셨으니, 두 번째 조건이 뭔지도 들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그 신중함에 나는 옅게 웃었다. 
중급 도깨비가 되더니 꽤 영리해진 모양이었다. 
 
“두 번째 조건은 간단해. 이 장원의 모두를 ‘무도 대회 시나리오’에 참가시켜 줘.” 
 
[이 장원의 전부를······?] 
 
순간, 영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제야 내 계략이 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흥미로운 제안이지만······ 그건 곤란합니다.] 
 
“왜지?” 
 
[다른 화신은 몰라도, 파천검성 본인은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만약 파천검성이 무도 대회에 참가하게 되면 우승자는 파천검성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자연히 무도 대회의 참가자는 줄어들 거고, 도깨비들로서는 손해를 감수하게 될 것이다. 나는 크게 양보하듯 말했다. 
 
“그럼 파천검성은 빼고.” 
 
[그럼 좋습니다. 무도 대회 시나리오는 2주 뒤입니다. 그때까지 파천검성의 스킬을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영기에게, 나도 호응해주었다. 
 
“알겠어. 시나리오 초대 제대로 하는 거나 잊지 마.” 
 
[물론입니다. 그럼 조만간 다시 뵙지요.] 
 
“비형한테 안부 전해 줘.” 
 
[하하, 알겠습니다.] 
 
일이 잘 풀린 게 기쁜 모양인지, 영기는 희희낙락 웃으며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자 뒤따라온 도깨비들도 함께 떠나기 시작했다. 바울 녀석은 끝끝내 나를 노려보며 가길래, 나도 녀석을 있는 힘껏 쏘아봐주었다. 
잠시 후, 모든 도깨비들이 사라지자 곁에 있던 장하영이 내 옷깃을 잡아 끌었다. 
 
“야, 지금 대체 뭐한거야? 무공을 팔아? 무도 대회를 열어? 대체 뭔 짓을······.” 
 
왕왕! 왕왕왕! 
 
「우리 무공을 팔겠다니! 그대는 대체 무슨 생각인가?」 
 
멍하니 내가 하는 꼴을 보고 있던 파천신군도 뒤늦게 반응해왔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사실, 이 정도는 약과겠지. 
 
“김독자!” 
 
······역시나. 엄청난 흙먼지와 함께 달려온 유중혁이 내 멱살을 붙잡더니, 일생일대의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나를 마구 흔들었다. 나는 종이 인형처럼 힘없이 펄럭거리며 말했다. 
 
“이거 좀 놓고 말해.” 
“닥쳐라! 네놈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무공을 팔겠다니······!” 
“진정 좀 해. 너 때문에 저지른 거잖아, 인마.” 
“······뭐?” 
“방금 우리가 얻은 게 뭔지 모르겠냐?” 
 
내 말에 유중혁이 손이 처음으로 멈췄다. 
그리고 뒤이어 귓가에 들려오는 메시지.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하였습니다.] 
[서브 시나리오― ‘무도 대회’가 시작됩니다.] 
 
도착한 시나리오의 세부사항을 읽는 듯, 잠시 말이 없던 유중혁이 이내 조용히 중얼거렸다. 
 
“······흑천마도?” 
“그래. 갖고 싶다며.” 
”······.“ 
”잘 보면 마혼단도 있을 거야. 그건 3등 상품이었나,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나를 보는 유중혁의 눈빛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손에서 힘이 풀린 녀석이 스르르 나를 놓았다. 
자식이, 그렇게 감동할 것까진 없는데. 
아무튼 한 녀석은 설득한 것 같고, 문제는 다른 쪽이겠지. 
고개를 돌리자, 파천검성이 표정을 굳히고 서 있었다. 
 
「거신(巨神)의 신력을 타고난 존재. 파천검성은 그 존재 자체로 하나의 신(神)과 다를 바 없었다.」 
 
멸살법의 묘사가 틀린 게 하나도 없다. 
그냥 저렇게 서 있을 뿐인데 이토록 위압감이 느껴지다니. 
나는 공손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사제지간의 대화는 잘 끝나셨습니까?” 
“······제정신이 아닌 놈이었구나.” 
“제 이야기 좀 들어보고 말하시죠.” 
“한낱 무공팔이 따위와 말을 섞을 시간은 없다.” 
 
절진 주변에 있던 안개가 짙어지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파천검성, 언제까지 옛날의 방식을 고수할 수는 없습니다.” 
 
파천검성의 짙은 눈썹이 무섭게 휘어지고 있었다. 
 
“그깟 비인부전의 원칙을 지키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대로면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는데도?” 
 
곁에 있던 유중혁이 정신병자를 보듯 나를 보았다. 
 
“김독자! 더 말하지 마라!” 
 
물론 나는 계속해서 지껄였다. 
 
“애초에 당신의 진짜 힘은 [파천검도]도 아니잖아요? 초월을 거듭하면서 형(形) 따위는 버린지 오래일 텐데, 그깟 무공 좀 팔면 어떻습니까?” 
 
쿠구구구구! 
 
주변의 땅이 일제히 진동하고 있었다. 
급기야 유중혁이 등 뒤로 나를 보호한 채 [천총운검]을 뽑아들었다. 
마치, 일대의 중력이 강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태산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처럼 아파왔다. 곁에 있던 장하영과 한명오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땅 속으로 파묻혀 들어가는 중이었다. 
이대로라면, 일행은 전멸이었다. 
 
“스승, 잠깐만······!” 
 
유중혁의 외침에도 파천검성은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하여간 똥고집은. 
 
[성좌, ‘구원의 마왕’이 성좌의 격을 발동합니다.] 
 
츠츠츠츠츳! 
 
몰아치는 스파크와 함께, 주변의 중력이 일시적으로 완화되기 시작했다. 흠칫 놀란 파천검성을 향해 나는 씩 미소를 지어 주었다. 
내가 화신체는 별볼일 없어도 무려 설화급 성좌다 이거야. 
 
“아직 무공을 판 것도 아닌데 너무 야박하게 굴지 좀 맙시다.” 
“숨겨둔 한 수가 있는 놈이었군.” 
“어차피 무림 대회만 우승하면 무공은 되찾아 올 수 있습니다. 그깟 대회, 우승하면 될 것 아닙니까?” 
 
츠츠츠츠······. 
 
조금 진정이 된 모양인지 파천검성의 기세가 한결 수그러들었다. 
물론 진짜 힘을 발휘한다면 나 하나 쯤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중혁이 동료라고 봐주는 거겠지. 
 
“어차피 나는 참가하지 못하는 대회 아니냐.” 
“애들 노는데 다 큰 어른이 끼어들면 재미 없죠.” 
“무림의 아이들은 너의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제자도 강해요.”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가만히 선 파천검성을 보며, 나는 곁에 있던 유중혁의 어깨를 팡팡 두드려주었다. 
 
“무도 대회에는 우리 중혁이가 나갈 겁니다.” 
 
그 말에, 유중혁이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돌아보았다. 
당연한 걸 뭘 저렇게 놀라는지 모르겠다. 
설마 내가 나갈 거라고 생각한 건가? 
파천검성이 다시 한 번 눈썹을 꿈틀거렸다. 
 
“저놈은 아직 약해.” 
“당신이 강하게 만들어주면 되죠. 어차피 당신 제자잖아요.” 
“난 저놈을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한 적이······.” 
 
그 말에 유중혁이 이번에는 부릅 뜬 눈으로 파천검성을 쳐다보았다. 
하여간, 스승이나 제자나 솔직하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이 발동 중입니다.] 
 
물론, 그 솔직하지 못함이 그들의 미덕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직은 너무 때가 일러.」 
「대회에 나가면, 중혁이가 죽는다.」 
「녀석은 십대 고수와 겨룰 수준이 아니야.」 
 
아직 이해도가 낮기 때문인지, 파천검성의 속내는 온전히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도 무슨 생각인지를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결국, 이 새침데기 사제를 위해 또 내가 나서야만 한다. 
 
“만약 유중혁을 제자로 받아들이신다면, 당신의 일족을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거신들 말입니다. 그간 당신의 일족들을 찾아오셨지 않습니까?” 
 
파천검성이 희한한 것이라도 보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걸 대체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일족은 세상에서 절멸했다. 어디에도 거신족은 남아있지 않아.” 
“아뇨, 아직 남아있는 곳이 있습니다.” 
“무슨······.”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명계의 주인이시여, 아직 보고 계십니까?” 
 
마침 지금 내 채널에는 하데스가 와 있다. 
지난 번에 신세도 진 참이니, 제대로 인사를 할 때도 됐지. 
하지만 나의 부름에 응답한 것은 하데스가 아니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묘한 미소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오랜만입니다. 페르세포네.” 
 
젠장. 이 여왕님은 상대하기가 까다로운데. 
대체 언제 들어와 있었던 거야? 
잠시 눈치를 보던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메시지가 들려왔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고 말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말합니다.] 
 
역시 페르세포네는 이야기가 빨라서 좋다. 
문제는, 이 여왕님이 꿍꿍이 없이 내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조건이 있다고 말합니다.] 
 
······역시. 
 
“······말씀하십시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을 성좌들의 축제에 초대합니다.] 
 
성좌들의 축제? 
이상하군. 
지금은 ‘별자리의 연회’가 개최될 시기가 아닐 텐데? 
내 의문에 대답하듯, 페르세포네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을 ‘미식협(美食協)’에 초대하였습니다.] 
 
 
 
 
 
< Episode 44. 사기꾼 (2) > 끝

< Episode 44. 사기꾼 (3) >
 
 
 
 
 
다음 날부터 유중혁은 파천검성과 수련에 몰두했다. 
자신의 일족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준다는 말에, 파천검성은 줄곧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아는 유중혁은, 함부로 스승을 위로하는 대신 가부좌를 튼 채 명상에 몰두했다. 
 
‘본래는 내가 직접 태고의 거신을 만나게 해주려 했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김독자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본래의 계획대로 태고의 거신과 조우하기 위해서는 최소 40번 시나리오는 넘겨야 하니까. 
 
‘그 녀석, 설마 명계와 그 정도로 친분이 있을 줄이야.’ 
 
가만히 보면 김독자는 은근히 알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 꼬장꼬장한 성좌들을 잘도 홀려대는 것인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헤죽헤죽 웃습니다.] 
 
저 헤죽거리는 대천사만 봐도 그렇다. 
2회차 당시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는 저런 성좌가 아니었다. 
지엄하고, 지고하며, 정의감에 불타는 대천사. 
그런 존재가, 어째서 이번 회차에는 저렇게 망가져 버린 것인지 유중혁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 대회에 참가할 생각이냐?” 
 
파천검성의 질문에, 유중혁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을 수도 있다. 무도 대회 시나리오는 결코 만만치 않아.” 
“지금의 저는 지난 회차의 이 시점보다 훨씬 강합니다.” 
“그렇다고 십 대 고수를 상대할 수준은 아니야.” 
 
무림의 십대 고수라면, 유중혁도 잘 알고 있었다. 
상인을 통해 무공을 판매하던 빙화신녀나 환영비객도 그중의 하나고, 파천검성의 본가(本家)인 남궁가에도 그런 십대 고수가 있었다. 
무도대회가 열리면 그들 중 하나가 참전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이번 무도 대회의 상품이 상품인 만큼, 유명 성좌들의 화신이 참전할 경우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몇 성좌들이 무도 대회 본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일부 성좌들이 무도 대회를 지겨워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강력한 성좌들일수록 이런 시나리오에는 싫증을 낸다는 것이었다. 무림에서 매해 반복되는 시나리오인 만큼, ‘무림 대회’를 충분히 관음한 성좌들은 대회를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을 것이다. 
조용히 유중혁의 맥을 짚어 보던 파천검성이 입을 열었다. 
 
“초월형 2단계를 열어야 한다.” 
“열어 본 적이 있으니, 어렵지 않을 겁니다.” 
“1단계를 돌파할 때랑은 다르다.” 
“어떻게든 될 겁니다. 지난 회차에서는 3단계도 돌파해본 적이 있으니까.” 
“······3단계라고?” 
 
파천검성의 동공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초월형의 3단계는, 결코 재능만으로 넘을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3단계를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막대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난 회차의 유중혁이 그런 시간을 겪었을 리가 없을 터······. 
스승의 의문을 이해한 유중혁이 답했다. 
 
“암흑 차원의 시간 단층을 이용했습니다.” 
 
암흑 차원의 시간 단층. 
흔히 ‘무림인들의 묘지’라 불리는 곳. 
그곳을 찾아 들어간 무림인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막대한 시간의 감옥 속에서 재능의 벽에 부딪쳐 광인이 되거나, 자신을 좀먹는 수련 끝에 벽을 넘어서 초월좌가 되거나. 
유중혁은 둘 중 후자였다. 
 
“······대체 얼마나 고된 수련을 거쳤던 것인지 짐작도 되질 않는구나. 거기 몇 년이나 들어가 있었던 것이냐?” 
“아마 백 년쯤 될 겁니다.” 
“백 년 만에 3단계라······ 그래서 네놈이 이렇게나 오만해진 게로구나.” 
 
백 년. 보통의 인간에게는 긴 세월이지만, 초월좌들에게는 그렇지만도 않다. 
이 세계에는 이백 년, 삼백 년을 살며 무공을 쌓아도 초월좌에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가 많기 때문이다. 온갖 영약을 꾸역꾸역 처넣고 육체를 개량해도 넘을 수 없는 벽. 그것이 바로 두터운 초월의 벽이다. 
그런데 유중혁은 100년 동안 그 벽을 세 번이나 넘었다. 
 
“여차하면 이번에도 시간 단층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미친 생각이다! 시간 단층을 사용하면 영혼에 탁기가 서린다. 시간 단층에 잘못 들어갔다가 미쳐버린 마두들을 보지 못하였느냐? 광인과 초월좌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이제 네놈도 잘 알지 않느냐?” 
“······시간 단층으로도 지난 회차의 당신을 넘지 못했습니다.” 
“흥, 당연하지! 날 따라잡으려면 아직 백 년은 이르다!” 
 
씩씩거리던 파천검성이 말했다. 
 
“어쨌거나······ 한 번 3단계를 돌파해 봤다니, 그래도 아예 무지렁이인 상태보다는 가르치는 맛이 있겠구나.” 
 
그런데 스승의 칭찬에도 유중혁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파천검성이 묻자, 유중혁은 결국 이실직고를 했다. 
잠시 후, 이야기를 모두 들은 파천검성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탈진한 사이 대오각성을 했다고?” 
“그게, 정확히 기억은 안 납니다.” 
 
결국, 자신이 어떻게 3단계를 넘어섰는지 모른다는 얘기였다. 
파천검성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설마 지금 네놈의 무의식을 믿고 다시 3단계를 돌파할 수 있다 자신하는 것이냐? 그딴 건 빙화신녀 같은 사이비 고수들이나 하는 짓거리다.” 
“그래서 당신이 필요한 겁니다. 다시 무공을 가르쳐 주십시오.” 
“뭐라?” 
“이전과 같은 방식은 곤란합니다. 그래서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 
 
뻔뻔한 제자의 말에, 파천검성이 관자놀이를 짚었다. 
 
“내가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른다. 너도 초월의 벽을 넘었으니 알겠지만, 초월은 결코 한 가지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야. 모든 초월좌는 결국 각자의 방식으로 ‘초월’할 뿐이다.” 
“그래도 도움은 받을 수 있습니다.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결국은 만 가지 갈래 중 하나를 찾아내야만 한다는 뜻이지. 세상에 같은 깨달음은 없다. 같은 이야기가 없는 것처럼.” 
“그래도 갈래가 만 가지나 있다면, 개중 하나 쯤은 얻어 걸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미 전 회차에서도 하나를 찾았고.” 
 
유중혁은 그 말을 하며, 어쩐지 자신이 김독자처럼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본래 자신은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어쩌면 같이 다니는 사이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제자를 향해 파천검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그렇게 말이 많았느냐? 쉽지 않을 거다. 전 회차에서 겪어서 알겠지만, 본래 [파천검도]는 남자를 위한 것이 아니야.” 
 
유중혁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전 회차에서 파천검성의 무공을 배우는 게 무척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회차는 달랐다. 
 
“성별의 문제라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콧김을 뿜습니다.] 
 
날아든 간접 메시지에, 유중혁이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매번 이 순간이 되면 복잡한 감정과 함께 막대한 분노가 차올랐지만, 이렇게 된 이상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활용해야만 했다. 
 
“마침 시간이 됐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경악한 파천검성이 입을 떡 벌렸다. 
유중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검을 꺼내 닦으며 말했다. 
 
“밖에 있는 녀석에겐 절대로 말하지 마십시오.” 
 
 
* 
 
 
[‘김독자 공단’에서 당신의 공적을 의심하는 공민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김독자 공단’에서 ‘사기꾼 김독자’에 대한 설화가 퍼집니다.] 
 
허공에서 들려오는 메시지에 나는 낮잠에서 깨어났다. 
메시지의 형태를 보아하니,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공단에서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는 모양이다. 
공단의 지배자가 바뀌었는데도 아직까지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사기꾼 김독자’라니······. 
내 얼굴도 모르는 녀석들이 날 더 잘 아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김독자. 뭘 하고 있는 거냐.” 
 
툭 건드리는 발길질에 나는 신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곳에는 상반신을 탈의한 유중혁이 땀을 뻘뻘 흘리며 서 있었다. 
아마 파천검성의 고된 훈련을 받고 온 모양이었다. 
 
“······잠깐 생각 좀 하고 있었어.” 
“게으름을 피우는군.” 
“지금은 게으름을 피워야 해. 난 환자니까.” 
 
핑계 같지만 사실이었다. 
나는 아직까지 ‘추방자 패널티’로 인한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파천검성에게 괜히 대드는 바람에 회복이 지연된 것도 컸다. 
그나마 ‘라마크르의 기린’의 숙련도도 늘고 있고, 설화 파편도 꾸준히 섭취하고 있으니, 회복이 그리 늦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장원 앞쪽의 마당에서 열심히 무공을 훈련하는 두 남녀를 보며 물었다. 
 
“저 녀석들은 어때?” 
 
그곳에는 마찬가지로 땀을 뻘뻘 흘리는 장하영이, 죽을상을 한 한명오와 대련을 하고 있었다. 감독관을 맡은 파천신군이 왕왕거리며 초식을 지적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 계집애는 제법 재능이 있더군. 괴이한 특성을 이용해 굉장히 빠르게 무공을 습득하고 있다.” 
“계집애 아냐. 쟤 남자야.” 
“네놈 눈깔은 가끔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르겠군.” 
 
뭐래 멍청이가. 쟤 남자 맞거든? 
원작에도 그렇게 나온다고. 
내가 한 마디를 쏘아 붙이려는 순간 유중혁이 말을 이었다. 
 
“그보다, 성좌들과의 일은 어떻게 됐지?” 
“······고민하고 있어.” 
 
어느새 페르세포네의 메시지를 받은 것도 벌써 일주일 전의 일이 되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을 ‘미식협(美食協)’에 초대하였습니다.] 
[일주일 뒤, 암흑 차원의 오로성(五輅城)에서 미식협의 축제가 열립니다.] 
[오늘 밤까지 출발 여부를 결정해 주십시오.] 
 
미식협으로의 초대. 
언젠가는 그런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 예상 했지만, 예상보다도 그 시기가 너무 빨랐다. 
미식협(美食協). 
표현 그대로, 미식을 좋아하는 입맛 까다로운 성좌들의 모임. 
얼핏 생각하면 ‘별자리의 연회’와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별자리의 연회’가 공식이라면 ‘미식협’은 비공식이고, 모임 안에서 벌어지는 이벤트의 강도 또한 차원이 다르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걱정합니다.] 
 
무엇보다, 미식협에는 우리엘이 없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선택을 궁금해합니다.] 
 
제천대성도 없을 것이고, 은밀한 모략가도 없을 것이다. 
심연의 흑염룡은······ 있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곳의 분위기는 ‘별자리의 연회’처럼 내게 우호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스타 스트림>에서 우호적이지 않은 성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유중혁이 물었다. 
 
“겁먹은 건가?” 
“그럴 리가.” 
 
겨우 그런 이유로 ‘미식협’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장하영과 한명오의 대련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머리를 연달아 두들겨 맞는 한명오가 침묵에 박자를 넣듯 비명을 질러댔다. 그 모습을 함께 바라보던 유중혁이 말을 이었다. 
 
“이곳 때문이군.” 
“······맞아.” 
 
페르세포네의 메시지에 따르면, 미식협의 축제는 정확히 일주일 뒤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날짜는 정확히 ‘무도 대회’와 겹친다. 
즉, 무도 대회 시나리오가 발생하는 날 나는 <제1 무림>에 없다는 뜻이다. 
혹시라도 만약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다녀와라, 김독자.” 
 
 
 
 
 
< Episode 44. 사기꾼 (3) > 끝

< Episode 44. 사기꾼 (4) >
 
 
 
 
 
유중혁의 단호한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괜찮겠냐?” 
“지금 우리가 당면한 시나리오는 ‘마왕 선발전’이지 ‘무도 대회’가 아니다.” 
 
나야 줄곧 생각하고 있던 바였지만, 유중혁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묘한 안도감과 뿌듯함이 함께 솟았다. 
 
“너······ 정말 사람 됐구나. 적어도 당분간은 죽지 않겠어.” 
 
유중혁은 내 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무도 대회에서 얻을 수 있는 건 고작해야 [흑천마도]다. 하지만 [흑천마도]를 얻는다고 해서, 우리가 ‘마왕 선발전’을 이길 수 있는 건 아니다.” 
 
유중혁의 말이 맞았다. 
확실히 ‘무림 대회’에서 우승한다고 해서 ‘마왕 선발전’을 이길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게 네가 ‘미식협’에 가야하는 이유다. 우리 성운에는 동료가 필요하니까. 미식협에 간다면, 동맹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다. 
미식협에 가서 쓸만한 성좌들을 꼬셔오라 이 얘기지. 
그런데 한 가지 신경 쓰이는 단어가 있었다. 
 
“······우리 성운?” 
“지난 번에 만든다고 하지 않았나.” 
“김독자 컴퍼니?” 
“정말 그 따위 이름이라면 당장 그만두겠다.”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는 유중혁.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손수건으로 감동의 눈물을 닦습니다.] 
 
처음 멱살을 잡힐 때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그 ‘유중혁’과 내가 진짜로 동료가 되다니. 
어쨌거나, 유중혁이 저렇게까지 말한 이상 내가 망설이는 것도 우스운 일이겠지.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다녀올게.” 
 
 
* 
 
 
그날 밤, 나는 포탈을 뚫고 날아온 미식협의 안내인을 맞이했다. 
흑색 말을 동반한 작은 마차를 몰고 온 안내인은, 서부극에 나올 법한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마 오로성의 주인에게 종속된 권속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마차에서 내린 안내인은 내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더니 말을 건넸다. 
 
[성좌 ‘구원의 마왕’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마차에 탑승하시지요. 여정이 꽤 길 테니, 한숨 주무셔도 됩니다.] 
 
안내인은 나를 보고도 딱히 놀라거나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역시 미식협의 안내인 쯤 되면 ‘구원의 마왕’ 정도에는 안 놀란다 이건가? 
마부석으로 가던 안내인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도중에 합승객이 있을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어, 괜찮아요.” 
 
합승객이라······ 누구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안내인이 곧바로 마차를 출발시키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뭘로 만들었는지 마차의 내부는 제법 넓고 편안했다. 흔들림도 전혀 없고, 심지어는 움직이고 있다는 관성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다. 
 
잘 됐다. 
가는 동안 ‘멸살법’이나 좀 읽어두면 되겠지. 
 
그로부터 몇 시간 동안 나는 내리 ‘멸살법’을 읽었다. 
어쩌면 몇 시간이 아니라 며칠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차가 움직이는 속도를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나로서도 시간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15회차의 유중혁은 죽어가며 생각했다. ‘운이 좋지 않았군.’」 
「······그렇게 19회차를 끝내며, 유중혁은 생각했다. ‘다음 번이다.’」 
「······유중혁은 25회차의 삶을 마감하며 중얼거렸다. “다음번엔 진짜로 간다.”」 
 
······사람 됐다는 말은 취소다. 
이 자식, 1차 수정본에서도 개복치인 건 여전하네. 
내가 도움을 주든 안 주든 어차피 죽는 건 마찬가지라는 건가. 
나는 유중혁의 죽음을 훌훌 넘기며 필요한 정보를 찾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식협에 관한 내용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극후반 회차의 유중혁이 ‘미식협’에 방문했던 적은 있지만, 그때는 녀석들을 쳐죽이러 갔던 것이지 화합하러 갔던 건 아니었으니까. 그 부분의 파트는 대개 “끄아아악”으로 점철되어 있을 뿐이었다. 
 
「비천호리가 말했다. “성좌들은 모두 최악이지. 하지만 미식협의 또라이들은 그중에서도 제일 최악이야.”」 
 
게다가 호의적인 내용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도 없다. 
볼수록 내가 미식협에 가는 게 옳은 일인지 확신이 안 생겼다. 
어쨌거나, 나는 계속해서 ‘멸살법’을 읽었다. 
 
「유중혁은 생각했다. ‘그 녀석이 함께 왔다면 좋았을 텐데.’」 
 
원작과 수정본에 읽는 맛의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이런 대목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내가 원작에 개입한 순간의 흔적들. 
그런 대목이 나올 때면 나는 특히 주의를 집중했다. 
수정본에는 없는 ‘3회차’의 이야기가 언급되는, 몇 안 되는 장면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녀석도 이것이 옳은 길이라 말했으니까.’」 
 
······옳은 길? 뭔 소리지? 
 
[식사 시간입니다. 별 거 아니지만 조촐하게 준비해봤습니다.] 
 
“고마워요.” 
 
중간 중간 마차가 멈춰설 때마다, 안내인은 내게 식사를 제공했다. 
일종의 기내식인 모양이었다. 
겉보기에는 고급 햄인 하몽을 닮았는데, 무척 향긋한 냄새가 났다. 
물론, 진짜 햄은 아니었다. 
 
[셀레게돈 행성의 마지막 검투사] 
 
역시 미식협이 제공하는 거라 그런지 기내식도 설화를 주는군. 
느껴지는 설화의 농축도를 보니 꽤 강한 설화인 것 같은데······. 
나는 안내인이 함께 준 포크로 매끈한 햄의 살점을 푹 찍었다. 
그런데 그 순간, 설화 내용의 일부가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사, 살려줘. 제발 살려줘······! 
 
성좌들의 난동 속에 끔찍하게 부서지는 도시. 거대한 압력에 짓눌려 터지는 화신들의 모습. 그에 맞서 모든 존엄을 잃고 죽어가는 검투사······. 
악귀처럼 웃는 성좌들의 입 속으로, 찢어진 화신들의 몸뚱이가 통째로 쏟아졌다. 이미 사라진 세계의 마지막 정경. 화신들의 절규와 절망감이 한데 모여, 코 끝에 어른거렸다. 
나는 잠시 햄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조용히 포크를 놓았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지금은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서요.” 
 
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성좌님의 취향을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것 같군요. 새로운 음식을······.] 
 
“아뇨, 저는 제가 가져온 거 먹을게요.” 
 
안내인은 송구스럽다는 듯 접시를 가져가더니 다시 마부석으로 물러갔다. 
그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나는 간신히 표정을 풀었다. 
속에서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문득, 방금 읽었던 ‘멸살법’의 한 구절이 스쳐갔다. 
 
「“화신들에게는 악몽 같은 곳이지.”」 
 
새삼, 내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내가 상대하는 존재들이 누구였는지. 
바보 같이, 무슨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설화 파편 몇 개를 만지작거렸다. 
 
저놈들이 먹는 설화에 비하면, ‘이야기의 지평선’에 내버려진 설화들은 무색무취에 가까웠다. 평범한 이삼류의 화신들이 평범하게 살다가 죽어간, 그저 그런 종류의 설화 찌꺼기들. 
모두 미식협이 내버린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라마르크의 기린]을 통해 그 설화 파편들을 손으로 흡수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왠지, 악몽을 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여행은 며칠동안 계속되었고, 나는 막간을 이용해 그동안 정비하지 못했던 것들을 몇 가지 손보았다. 
 
[보유 코인 : 1,252,353 C] 
 
우선, 한동안 정신이 없어서 못했던 코인 점검을 했다. 확인해 보니 정말 어마어마한 돈이 모여 있었다. 
125만 코인이라니, [대악마의 눈동자]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안나 크로프트가 사가버렸다. 나야 더 좋은 스킬이 있으니 별 필요는 없지만······. 
나는 남은 코인을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했다. 
종합 능력치를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사실 종합 능력치는 평균 100을 넘어서는 순간 그 효율이 급감하기 시작한다. 그때부터는 종합 능력치에 투자하는 것보다 스킬에 투자하는 것이 훨씬 가성비가 좋다. 
물론, 종합 능력치도 압도적으로 쌓이면 효과를 발휘할 때가 있긴 하다. 
 
일단 ‘제4의 벽’을 설득해서 조만간 특성창을 한 번 확인해봐야 할 텐데 말이지. 
 
[합승객께서 들어오실 것 같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너무 깊이 생각에 빠져 있었던 까닭에, 나는 마차가 멈췄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네, 괜찮아요.” 
 
나의 대답과 함께 마차 좌측의 문이 열렀다. 
나는 살짝 긴장하며, 문틈 사이로 합승하려는 이들을 살폈다. 
아무래도 성좌가 탈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아! 너무 오래 기다렸잖아. 왜 이렇게 늦었어?”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길이 좀 험하다 보니······.] 
 
들려온 목소리는 어쩐지 귀에 익었다. 
높고 가는 음색, 러시아 억양이 섞인 여자애의 목소리. 
문틈 사이로 보이는 인원은 총 세 명이었다. 
 
[미리 탑승하신 분이 계십니다. 모쪼록 즐거운 여행길 되시기를.] 
 
불행인지 다행인지 성좌의 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즉, 저들은 모두 화신들이란 이야기였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여인이 먼저 마차에 올라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공손히 인사하는 여인의 카키브라운 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여인이 고개를 든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셀레나 킴?” 
 
셀레나 킴. 
언젠가 ‘별자리의 연회’에서 미국 대표로 참석했던 이였다. 
내 달라진 얼굴 때문일까,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여자가 탄성을 질렀다. 
 
“앗, 당신은······?” 
“저, 누군지 기억하시겠어요?” 
“그럼요! 김독자! 오랜만이군요! 당신도 초대 받은 건가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반색하는 셀레나 킴에게 악수하며, 나는 나머지 일행을 살폈다. 
뒤이어 들어온 것은 작은 트윈 테일의 여자아이였다. 
 
“넌 뭐······ 엇?” 
 
역시나, 이 녀석도 본 적이 있는 녀석이었다. 
‘별자리의 연회’에서 만났던 러시아 꼬맹이. 
이름이······ 뭐였더라. 붉은 꼬맹이인가 하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게 기억이 났다. 
나를 향해 입을 뻐끔거리는 여자애를 제쳐두고, 나는 나머지 한 사람을 마저 확인했다. 
그런데 그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군요.” 
 
고요하고 느긋한 목소리에, 그 저의를 헤아릴 수 없는 깊이가 있었다. 
나는 이 인물을 잘 알고 있었다. 
패왕 유중혁과 함께, ‘멸살법’ 최강의 화신으로 손꼽히는 존재. 
심지어 나는 이 인물을 이미 만난 적도 있었다. 
 
“언젠가 꿈에서 당신을 본 적이 있었죠. 너무 오래 전이라 기억하실지 모르겠군요. 그때, 저한테 다시 만나자고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분명, 기억한다. 
‘그린 존’ 시나리오를 할 때, 나는 스펙터의 영석을 먹고 그녀를 본 적이 있었으니까. 
 
“기억합니다.” 
“정식으로 인사를 하죠. 처음 뵙겠어요, 김독자. 아니······ ‘구원의 마왕’.” 
 
흩날리는 금발머리 사이로 소용돌이치는 황색의 마안(魔眼)이 고요히 웃고 있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웃음이었지만, 나는 그 미소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미소의 이면에 담긴 불온한 사상(思想)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나 크로프트입니다.” 
 
아스가르드의 예언자. 
‘차라투스트라’의 수장, 안나 크로프트가 그곳에 있었다. 
 
 
 
 
 
< Episode 44. 사기꾼 (4) > 끝

< Episode 45. 미식협 >
 
 
 
 
 
Episode 45. 미식협
 
 
오로성으로 향하는 내내, 안나 크로프트는 말이 없었다. 
가끔 눈이 마주칠 때면 묘한 미소를 짓기는 했지만, 딱히 먼저 말을 걸어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생각이라도 읽을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안나 크로프트에 대한 내 이해도가 너무 낮아서 [전지적 독자 시점]의 2단계를 발동시킬 수가 없었다. 
하긴, 원작에서도 나는 안나 크로프트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저 녀석에게 유중혁이 죽거나 뒤통수를 맞은 횟수만 꼽아도 양 손가락으로는 모자랄 지경이니까. 
나와 안나 크로프트가 모두 말이 없었기에 마차 안의 분위기는 급격하게 어색해졌고, 셀레나 킴만 애꿎은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서 함께 오게 된 거예요. 아스가르드의 화신들도 초청을 받았거든요.” 
 
천성이 착해서 이런 분위기를 견디질 못하는 셀레나 킴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어쨌거나 여러 가지 정보를 듣게 된 나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그러셨군요. 세 분 다 아스가르드 소속이십니까?” 
“네. 안나의 주선으로.” 
“좋은 성운을 택하셨군요.” 
“아하하,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았어요. 덕분에 이런 호사도 누리게 됐네요. 다른 화신들은 초대받지도 못했는데······.” 
 
셀레나 킴은 살짝 들떠 보였다. 하긴, 미식협의 초대는 별자리의 연회와는 의미가 다르니까. 별자리의 연회가 귀족 전체의 모임이라면, 미식협은 상류 귀족의 살롱과 비슷했다. 
하지만 호사(好事)라. 
과연 셀레나 킴이 그곳에 도착해서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리스, 왜 말이 없니? 전에 독자 씨 다시 만나고 싶다고 그랬잖아.” 
“블린(влин)! 내가 언제!” 
“얘가······ 너 지난 연회 이후로 매번 독자님, 독자님 노래를 불렀잖니? 모처럼 뵈었는데 이야기라도 좀 해보렴.” 
 
놀리는 듯한 셀레나 킴의 말에 이리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흘끔흘끔 내 눈치를 보던 이리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구원의 마왕······ 님 맞으시죠?” 
 
순간 이 녀석이 그때 그 건방진 꼬맹이가 맞는가 의심이 들었지만, 일단은 나도 예의를 차려 주기로 했다. 
 
“맞습니다.” 
“······저, 저희랑 같이 계신 게 불편하진 않으세요?” 
“왜 불편하다고 생각하시죠?” 
“저희는 일개 화신이잖아요. 그리고 구원의 마왕님은······.” 
 
곁에 있던 셀레나 킴의 표정도 변하고 있었다. 
반가움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내가 그들과는 다른 ‘성좌’라는 것을 새삼 자각한 눈치였다. 
‘설화급 성좌’와 보통의 ‘화신’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격차가 존재한다. 
아마 다른 성좌였다면 여기서 “하찮은 벌레들이 이제야 제 주제를 깨달았구나” 따위의 대사를 지껄였겠지. 물론, 나는 아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한때는 화신이었으니까요.” 
 
내 말에, 셀레나 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용기를 얻은 이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그러면······ 질문 하나만 해도 되나요?” 
“하세요.” 
“혹시 배후 계약을 맺은 화신도 있으신가요?” 
“그건 왜 물으십니까?” 
“어, 그건······.” 
 
머뭇거리는 이리스를 향해 셀레나가 눈치를 주었다. 
 
“이리스. 넌 이미 점지된 배후성이 있잖니?” 
“그, 그냥 물어본 것뿐이야! 궁금하잖아!” 
 
트윈 테일의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홱 고개를 돌리는 이리스를 보고 있자니, 지구에 있을 신유승과 이길영이 떠올랐다. 
녀석들, 잘 있으려나······. 
나는 그리운 마음을 애써 감추며 입을 열었다. 
 
“한반도에 제 화신이 있습니다.” 
 
내 말에 이리스의 표정이 변했다. 
 
“아, 혹시 그 꼬마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신유승에 대한 소문이 다른 곳에서도 퍼진 모양이다. 
쑥덕거리길 좋아하는 성좌들이니, 자기들 화신한테도 이미 얘기했겠지. 
안나 크로프트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혹시 화신을 바꿀 생각은 없으신가요?” 
 
화들짝 놀란 셀레나 킴과 이리스가 안나 크로프트를 일별했다. 
안나 크로프트가 계속해서 말했다. 
 
“성운 <아스가르드>의 산하에는 좋은 화신들이 많아요. 재능이 있는 친구들도 많고요. 저기 있는 이리스도 그들 중 하나죠.” 
 
의외의 제안이었다. 
안나 크로프트가 왜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지? 
어쩌면, 아스가르드에서도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직 나는 정식으로 ‘성운’ 창설을 하지는 않았으니까. 
 
“지금 제게 <아스가르드>에 들어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아스가르드 산하에는 좋은 화신들이 많으니, 그들 중의 하나를 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권하는 것뿐이죠. 어차피 배후 계약은 배후성 입장에서는 언제든 취하할 수 있잖아요?” 
 
순간 낙담했던 이리스가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저는 배후 계약을 취소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여자애가 그렇게 마음에 드시나 보죠? ‘신유승’이라는?” 
 
내가 대답이 없자, 이리스의 얼굴이 깊은 실망감으로 젖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해도가 몹시 낮은데도 감정의 변화가 스킬로 포착될 정도다. 
그런데, 안나 크로프트가 묘한 말을 했다. 
 
“가령, 그 화신이 갑자기 죽는다면······.” 
 
안나 크로프트의 입가에 속을 알 수 없는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그렇게 놀란 표정 짓지 마세요. 그냥 예를 드는 것 뿐이니까. 그럴 수도 있잖아요.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거나, 갑작스런 재해로 화신이 사망한다거나······. 흔히 있는 일이니까요. 만약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화신을 바꿀 생각은 없는 건가요?” 
“불의의 사고 말씀이십니까?” 
“네, 불의의 사고요. 그저 우연히 벌어졌을 뿐인 불의의 사고.” 
 
나는 안나 크로프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신유승이 죽는다······.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제가 살아있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모르는 일이죠. [운명]이라는 건 언제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니까요.” 
 
······[운명]? 
 
순간 대기가 흔들렸다. 
주변 공기가 불길한 색깔로 물들며, 마차 전체가 파르르 떨렸다. 
이리스와 셀레나 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은 두 화신이,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고오오오오오.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엄한 화신들에게까지 겁을 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방금, 안나 크로프트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츠츠츠츠츠츠츳! 
 
진언 사용으로 인해 개연성의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성운,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우려를 표합니다.] 
[성운,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경고성을 발합니다!] 
 
귓가로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들이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진언을 멈추지 않았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그 [운명]을 일으킨 세계를 모두 부숴버릴 거다.] 
 
꽈아아앙! 
 
폭발한 격의 충격으로 마차의 창문이 동시에 터져 나갔다. 깜짝 놀란 마부가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심지어 저 침착한 안나 크로프트조차 희미하게 경악한 얼굴이었다. 아마, 내가 정확히 어느 정도의 ‘격’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춰섰고, 안내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로성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여전히 굳어 있는 세 사람을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내립시다.” 
 
 
* 
 
 
마차에서 내린 우리는 곧장 오로성으로 안내되었다. 
오로성(五輅城). 
이 성은 전 차원에 흩어진 ‘미식협’의 주요 본거지 중 하나로, 미식협의 간부가 직접 소유한 성채였다. 
아마 이걸 가지고 있는 녀석이······ 마계의 72마왕 중의 하나였던 걸로 기억한다.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이었던가? 
 
[출입 허가를 받은 분들입니다.] 
[확인했습니다. 들어가시죠.] 
 
성내로 진입하자 내부는 중세풍보다는 현대식에 가까웠다. 마치, 고급 호텔의 로비를 연상시키는 광경이랄까. 중간중간 상징체의 형태로 흩어져 있는 성좌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의 존재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우리는 안내인을 통해 1층 로비의 구석에 위치한 대기실로 안내 받았다. 
아직 도착한 인원이 없는지, 대기실의 인원은 나와 아스가르드 3인방이 전부였다. 
 
[그럼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아직 도착할 화신들이 더 남아 있어서······ 아, ‘구원의 마왕’님은 성좌시니 따로 대기실을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냥 여기 있을게요.” 
 
안내인은 그런 나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이내 납득한 듯 사라졌다. 
솔직히 아직은 여기가 더 편하다. 
나로서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좀 필요하고 말이지. 
대기실의 벽에는 역시나 눈요기를 위한 패널들이 걸려 있었다. 이 시간에도 차원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하위 시나리오의 장면들······. 
 
“저, 아까는······.” 
 
말을 걸어온 것은 셀레나 킴이었다. 
마차에서 그런 일이 있었으니 꺼려할 법도 한데, 역시나 ‘멸살법’ 설정은 틀린 게 하나도 없다. 나는 옅게 웃으며 답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좀 과했죠.” 
 
그제야 셀레나 킴의 표정도 조금 누그러졌다. 
 
“아니에요, 저희가 너무 무례했어요. 죄송합니다, 구원의 마왕.” 
 
아까보다 훨씬 격식을 차린 인사였다. 
그런 사과를 들으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뭔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셀레나 킴은 잘못한 것이 없다. 그녀는 ‘멸살법’ 전체에서 내가 괜찮게 보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니까. 다만, 내가 싫은 쪽은 저기 구석에 서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뻔뻔한 녀석이다. 
대기실의 문이 열리며 또 다른 안내인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아스가르드의 화신분들은 저를 따라 오시기 바랍니다.] 
 
아마,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이 이들을 찾는 모양이었다. 
셀레나 킴과 이리스가 가볍게 목례를 남기고 먼저 사라졌다. 
그러나 안나 크로프트는 곧바로 방을 떠나지 않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당신은 너무 많은 성좌들을 적으로 두고 있어요. ” 
“당신이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내 단언에 안나 크로프트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종전에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안나 크로프트는 크게 위축된 기색은 아니었다. 그녀는 한낱 화신일 뿐이지만, 무려 성운 전체와 계약을 맺은 존재다. 아마 <아스가르드>의 최상위권 화신들이 내 격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주고 있을 것이다.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동지로서, 진지하게 조언하는 거예요. 싫어도 지금은 다른 성좌들과 협력해야 할 때니까.” 
 
같은 목표라······. 
 
“글쎄, 나는 당신 목표를 모르니 거기엔 답해줄 수 없겠군요.” 
“이 세계를 지키는 것. 당신도 그것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 아닌가요?” 
 
나는 그 말에 답하는 대신, 대기실의 벽에 걸린 패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재앙이나 성좌들의 출현으로 처참하게 찢겨 나가는 화신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들. 내가 대답하지 않자, 안나 크로프트가 내 곁을 스쳐갔다. 
그 순간, 내가 입을 열었다. 
 
“이 세계가 과연 지킬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두고봐야 알겠지.” 
 
스치듯 흘린 그 말에 안나 크로프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앞서가는 안내인과 나를 초조한 눈빛으로 번갈아보더니,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중에 또 이야기 할 기회가 있길 바라죠.”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사라진 뒤, 대기실에는 나만이 남았다. 
홀로 남은 나는 조용히 생각들을 정리했다. 
‘멸살법’에 언급된 미식협의 성좌들을 떠올렸고, 개중에 설득할 수 있을만한 성좌들의 명단을 머릿속에 기억했다. 
그들의 특성이나 호오를 파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별자리의 연회 때는 운이 좋았지만, 이번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사교계로 표현한다면 이번 ‘미식협’은 내게 본격적인 데뷔전이다. 
여기서 어떤 인상을 주고,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내가 꾸려갈 시나리오의 방향도 달라질 것이다. 
 
그때, 대기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또 안내인인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뜻밖의 존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겁한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상대방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요, 김독자. 많이 기다렸어요.] 
 
그 화사한 진언의 톤을 듣는 순간, 나는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정말이지, 명계의 여왕은 장난기가 너무 많다. 
나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대체 왜 그런 차림을 하고 계십니까?” 
 
 
 
 
 
< Episode 45. 미식협 > 끝

< Episode 45. 미식협 (2) >
 
 
 
 
 
페르세포네가 옅게 웃었다. 
 
[왜요, 마음에 안 드나 보죠? 옆 동네 대천사가 당신 취향이 이쪽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던데.] 
 
“절대로 오해입니다.” 
 
[흐음······.] 
 
페르세포네가 아쉽다는 듯 목소리를 흘렸다. 
참고로 페르세포네는 유중혁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복장이 차이나 드레스가 아닌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럼 이건 어때요?] 
 
“잠깐······!” 
 
내 만류가 이어지기도 전에, 페르세포네의 모습이 다시 한번 변했다. 
옷차림이 차이나 드레스로 화하기에 또 유상아로 변하려는 것인가 싶었는데, 웬걸 이번에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었다. 
 
“아니 대체······.” 
 
싱긋 흩뿌리는 미소에, 상대가 페르세포네라는 걸 알면서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페르세포네는 얼마 전 마계에서 보았던 ‘징벌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 보니 눈을 떼지 못하는 것 같던데. 역시 이쪽인가요?] 
 
드레스의 옆트임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맨살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며 외쳤다. 
 
“······그만 놀리십시오!” 
 
[후후, 정말 재미있어.] 
 
아이처럼 웃은 페르세포네가, 다시 한번 변신했다. 
이번에는 유상아의 모습이었다. 
차이나 드레스나 가터벨트 대신 걸친 단정한 오피스 룩. 
그 외양을 보고 있자니 언젠가 미노 소프트 시절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졌다. 언제나 유상아는 저런 차림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었다. 
유상아 씨, 잘 있으려나. 
한수영이랑 같이 다닌다니 조금 걱정되긴 하는데······ 그래도 그 ‘유상아 씨’니까, 괜찮을 거라 믿는다. 
페르세포네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따라와요. 데리러 온 거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페르세포네의 뒤를 따라갔다. 
대기실을 나서는 순간 몇몇 성좌들의 시선이 내리꽂혀서, 나는 조금 긴장했다. 페르세포네와 함께하는 나를 보며 수군대는 성좌들도 보였다. 
 
이거 어쩐지 귀부인과 그녀의 젊은 시종이 된 기분인데 그래.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세포네와 나는 로비 중앙에 서 있는 거대한 엘리베이터 앞에 도달했다. 
아마, 미식협의 축제는 이 성채의 최상층에서 진행될 것이다. 
거대한 수정구를 닮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나와 페르세포네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기우뚱하는 느낌과 함께 몸이 조금 무거워졌고, 투명한 수정벽의 바깥으로 암흑차원의 정경이 펼쳐졌다. 
차원의 지평선 너머로 장대한 <스타 스트림>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무 기대하는 얼굴이군요.] 
 
“기대라기보다는, 좀 긴장이 됩니다.”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페르세포네가 웃었다. 
 
[그대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에요. 마지막으로 볼 때는 화신이었는데, 이젠 어엿한 성좌가 되었군요.] 
 
“그래 봤자 아직 풋내기입니다. 제가 여기 와도 괜찮은 건지 잘 모르겠군요.” 
 
나름대로는 겸양의 의미로 한 말이었는데, 내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페르세포네의 표정이 살짝 굳어져 있었다. 
 
[내가 ‘미식협’에서 그 정도 위치도 안 될 거라 생각하는 건가요? 신규 회원 하나 데려가는 것도 힘겨워할 정도라고?]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니라······.” 
 
[농담이에요.] 
 
“제발 그만 놀리십시오.” 
 
[앞으로 얼마나 유망한 성좌가 될지 모르니, 미리 투자하는 거라고 생각해 두세요. 당신도 언젠가 겪어야 할 일이니까.] 
 
전부터 느끼지만, 이 여왕님은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는 건지 모르겠다. 
파천검성을 명계의 타르타로스에 데려가 주는 대가로 그녀가 요구한 것은 내가 이 ‘미식협’에 참석하는 것이 전부였다. 
아마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이 ‘미식협 참석’이라는 조건 또한, 결과적으로는 그녀가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 될 것이란 것을. 그녀는 성좌가 된 나를 위해 본격적인 데뷔 무대를 꾸려준 셈이다. 
페르세포네의 흑요석 같은 눈이 반짝였다. 
 
[지금 격의 위치는 어느 정도죠? 설화급은 아닐 테고.] 
 
아마 내가 ‘설화급’이라는 사실이 다른 성좌들에겐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다음 ‘별자리의 연회’ 때는 2층에서 뵐 수도 있을 겁니다.” 
 
순간 페르세포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내가 고작해야 위인급 정도의 격일 거라 생각했겠지. 
명계의 여왕님께서 당황하는 것을 보는 즐거움도 제법 쏠쏠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에는 이내 깊은 우려가 섞였다. 
 
[그대를 시샘하는 성좌들이 생겨날 거예요.] 
 
“······.” 
 
[어떤 성좌들은 그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겠죠.] 
 
“예상은 하고 있습니다.” 
 
각오하고 있다. 
앞으로 내가 만날 성좌들 중 호락호락한 녀석은 없을 것이다. 
나를 시샘하는 녀석이든, 나를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녀석이든. 
어느 쪽이든 위험하긴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성좌들은, 당신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을 거예요.] 
 
“······예?” 
 
[지금까지야 ‘한반도 시나리오’의 영향력이 큰 곳만 다녔을 테니 잘 느끼지 못하고 있겠지만······ 잊지 마세요, 이곳은 ‘미식협’이라는 것을.] 
 
미식협. 
이 <스타 스트림>의 상위급 성좌들이 모이는 대연회. 
문득, 페르세포네의 웃음이 무섭게 느껴졌다. 
 
[‘별자리의 연회’ 때처럼 보모 역할을 해주진 않을 거예요. 이번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직접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싶군요.] 
 
벨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페르세포네는 자신의 말을 실천하듯 연회장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홀로 남겨진 나는 머뭇거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에게 호기심을 보입니다.] 
 
내리자마자 몇몇 성좌들의 시선이 내게 쏟아졌지만, 관심은 이내 사라져버렸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과도한 관심이 쏟아진다면 오히려 움직이기 부담스러울 테니까. 
 
로비의 1층에서처럼 ‘상징체’로 존재하던 성좌들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인간형이거나, 이세계의 생명체로 의태한 모습. 
이곳에 사소한 [개연성]을 의식하는 성좌는 하나도 없었다. 
 
떠들썩한 연회 홀의 중심을 차지한 몇몇 성좌들은 내가 ‘멸살법’에서 읽은 외양을 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연회장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바이킹 복장의 사내였다. 등허리에 멘 거대한 망치를 보고서도 그의 모습을 못 알아본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겠지. 
 
[1세대 설화 중 최고는 당연히 ‘망치를 먹는 드래곤’이지!] 
 
성운 <아스가르드>의 성좌, ‘목요일의 천둥’이 호쾌한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그러자 그 반대편에서 한 여인이 대꾸했다. 
 
[무슨 소리죠? 최고라면 당연히 ‘새벽의 아이들’이에요. 평점도 제일 높다고요.] 
 
별빛을 수놓은 듯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신. 
내 기억이 맞다면, 저 여자는 성운 <수호의 나무>의 성좌인 ‘새벽별의 여신’일 것이다. 
 
보아하니 어떤 설화가 최고의 설화인지를 놓고 또 논쟁이 붙은 듯했다. 
 
허구한 날 무슨 설화가 최고인지를 놓고 싸운다더니, ‘멸살법’에서 들은 것과 정확히 같은 정경이었다. 한반도에서는 보기 힘든 고위급 성좌들이 태연히 돌아 다니는 것을 보고 있자니, 확실히 이곳이 어떤 곳인지 실감이 났다. 
저 강력한 ‘페르세포네’조차, ‘미식협’에서는 보통의 성좌에 불과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응원합니다.] 
 
다행히 ‘채널’이 기능하는 곳이라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래, 겨우 이런 곳에서 주눅들 수는 없다. 
나는 ‘미식협’의 중앙 무리들 사이로 슬그머니 접근해, 주변을 서성이는 성좌들 중 하나에게 말을 붙여보았다. 
 
“저······.” 
 
그러나 누구도 나를 돌아보는 이는 없었다. 
마치, 내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구는 성좌들. 
나는 용기를 내 곁에 있던 성좌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저기요.”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그러나 나를 힐끔 돌아본 성좌는, 마치 시비라도 걸듯 내 어깨를 툭 밀치고 다시 중앙의 연회홀로 걸어 가버렸다. 
 
「김독자는 이런 기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혼자가 된 기분. 
갑자기 수많은 성좌들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분명 같은 곳에 있는데도, 그들은 다른 곳에 있었다. 
 
페르세포네가 말한 ‘무관심’이 무엇인지, 나는 그제야 이해했다. 
 
‘미식협’은 나 같은 신입이 함부로 발을 내밀 수 없도록, 자기들만의 방호벽을 단단히 형성하고 있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시야를 좀 넓혀서 미식협의 주변부을 살폈다. 
중앙의 연회홀에서 담소를 나누는 성좌들 외에, 외따로 서성이는 존재들도 보였다. 그들 또한 ‘미식협’의 일원이니, 분명 강력한 성좌인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연회장의 가장자리로 가자, 그곳에는 대기실에서 본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의 무수한 패널들이 붙어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시나리오’의 영상들. 
자세히 보니, 내가 ‘구원의 마왕’이 되었던 순간의 영상도 한쪽 구석에 작게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관람 중인 성좌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겪은 ‘한반도 시나리오’조차, 여기서는 그저 지나가는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옆의 패널에선, 한반도의 실시간 화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 비형의 채널인 것 같았다. 
화면에는 자칭 단발의 미소녀가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김독자 그 자식, 지금쯤 분명 희희낙락하고 있을 거야. 
 
익숙한 목소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수영, 지금 내가 어디 와 있는지 알면 그딴 소린 못할 거다. 
 
―야, 심연옥들 잘 모으고 있지? 그거 잘 모아야 돼. 나중에 일 그르치면 그거라도 써야 하니까. 
―······진짜로 독자 씨가 이런 걸 시켰어요? 
―아 그렇다니까! 
 
화면에서 티격태격거리는 한수영과 유상아를 보고 있자니, 물씬 그리움이 솟았다. 더 보고 있다가는 기분만 울적해질 것 같아서, 나는 옆의 패널로 눈을 돌렸다. 
그 패널에서 나오는 화면은 흔한 ‘양산형 설화’를 담은 것이었다. 
 
설화의 제목은 「전설의 이계 귀환 전설」. 
 
제목부터 삼류 냄새가 풀풀 나는 데다, 내용도 이계에서 온 귀환자가 세계를 구하고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식의 뻔한 것이었다. 하지만 봐 줄 만했다. 뭔가, ‘멸살법’과 닮은 데가 있다고나 할까······ 어쩐지 주인공의 말투도 유중혁과 비슷했다. 설화를 대강 훑고 나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별점을 입력하시겠습니까?] 
 
아, 이렇게 설화마다 별점을 매기는 시스템인 모양이군. 
나는 작품의 곁에 있는 ‘별점’ 칸으로 조심스레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설화일세.] 
 
뒤를 돌아보니,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나는 가볍게 목례하며 대답했다. 
 
“흥미로운 이야기더군요.” 
 
[허허, 그렇지? 보는 안목이 있는 친구구만.] 
 
사실 내가 아는 ‘미식협’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설화였다. 
‘미식협’의 성좌들은 이런 양산형 설화는 좋아하지 않으니까. 
‘9서클’이나 ‘소드마스터’ 같은 개념이 나오면 질색하며 헛구역질부터 하는 고상한 작자들이 바로 ‘미식협’의 성좌들이다. 
그런데 이 「전설의 이계 귀환 전설」에는 그 두 가지가 모두 나온다. 
 
“혹시 이 설화의 출품자이십니까?” 
 
[그렇다네. 껄껄. 매년 출품하고 있지. 하나라도 더 이 설화를 알았으면 해서 말이야. 정말 좋은데, 정말 재미있는 설화인데, 참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질 몰라서 말일세.] 
 
“그 심정, 저도 이해합니다.” 
 
어쩐지 반갑기까지 했다. 
나도 ‘멸살법’을 열심히 읽던 시절에 가는 커뮤니티 사이트마다 ‘멸살법’ 홍보글을 올리고 다녔으니까. 대부분 욕만 들입다 처먹긴 했지만······ 아무튼, 이 노인도 나랑 비슷한 경우인 모양이었다. 
노인이 탄식하며 덧붙였다. 
 
[내가 암만 추천해도, 여기 녀석들은 콧방귀나 뀔 뿐이야. 어린 녀석들이 벌써부터 눈만 높아 가지고······ 죄다 1세대 설화 타령이나 하기 바쁘지.] 
 
들을수록 의외의 발언들이었다. 
확실히 ‘미식협’이 좀 고지식한 부분이 있긴 하지. 
이 <스타 스트림>에서는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해진다. 
그때, 지나가던 성좌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꾸준좌 또 오셨구만.] 
[쯧쯧, 노망이 들어서 좋은 설화가 뭔지도 모른다더니······.] 
 
······꾸준좌? 
곁의 노인이 노발대발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 노인을 가리키는 별명인 듯했다. 
꾸준좌라, ‘멸살법’에 그 비슷한 별명의 성좌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꺼져라 이놈들아! 네놈들 처먹으라고 내놓은 설화도 아니다!] 
 
그 순간, 삐빗 하는 소리와 함께 「전설의 이계 귀환 전설」에 붙어 있던 별점이 변하는 것이 보였다. 
 
★ 1.3/5 -> ★ 1.1/5 
 
안 그래도 낮던 별점이 더욱 낮아졌다. 
누구의 짓인지는 명백했다. 
 
[저, 저놈들이!] 
 
소위 말하는 ‘별점 테러’였다. 
비웃듯 사라지는 성좌들을 향해 노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노인의 심정을 어쩐지 이해할 것 같아서, 나는 별점 부분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이런 점수를 받을 만큼 형편없는 설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삐빗, 하며 올라가는 별점. 
소리를 지르던 노인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실, 왜 굳이 설화에 점수 같은 게 붙어 있는지도 잘 모르겠군요. 모든 설화에는 제 나름의 가치가 있는 법인데요. 어떤 이에겐 흥밋거리일 뿐인 이야기가, 누군가에겐 구원이기도 하니까.” 
 
내 말에 노인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몇 번인가 입술을 달싹이던 노인이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자네 요즘 젊은 성좌들 답지 않구만······ 그런 훌륭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니······.] 
 
“뭘요.” 
 
‘멸살법’ 같은 이야기로 유년을 견딘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처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기분이 한결 풀렸는지, 노인이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이거이거, 좋은 말동무가 하나 생긴 것 같군. 자넨 수식언이 어떻게 되나? 경황이 없어서 그것도 못 물어보고 있었구만.] 
 
이거 뭔가 이야기가 잘 풀릴 거 같은데?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저는 구원의 마왕입니다.] 
 
 
 
 
 
< Episode 45. 미식협 (2) > 끝

< Episode 45. 미식협 (3) >
 
 
 
 
 
내 말에, 노인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했다. 
 
[······구원의 마왕······?] 
 
묘하게 접히는 노인의 주름에서는 정확한 감정을 읽어내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시큰둥했던 노인은 잠시 후 희미하게 놀라는 듯했고, 묘하게 분노하는 것 같은 얼굴을 했으며, 마지막에는 탄복하는 듯한 기색을 풍겼다. 정확히는 그 모든 감정이 하나의 표정에 담겨 있었다. 
 
[그렇군. 자네가 바로······ 허허, 그랬군.] 
 
노인은 나를 아는 듯한 말투였다. 
페르세포네가 미식협의 성좌들은 나 같은 건 잘 모를 거라고 해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나도 의외로 인지도가 있는 건가? 
 
“수식언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노인은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만든 코트는 마음에 드는가?] 
 
“······예?” 
 
[자네가 입고 있는 코트 말일세.] 
 
나는 무심결에 내 백색 코트를 내려다보았다.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 
 
언젠가, 명일상을 해치운 뒤 보상으로 받은 코트였다. 
그리고 이 코트를 제작한 성좌의 이름은······. 
 
“······양산형 제작자?” 
 
내 경악한 목소리에 노인이 히죽 웃었다. 
 
[그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긴 하지.] 
 
엄지로 자신을 척 가리키는 그 모습에, 나는 살짝 기가 질리고 말았다. 
 
양산형 제작자. 
 
그는 <스타 스트림>의 시나리오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성좌를 꼽을 때, 반드시 그 목록에 언급되는 이였다. 
비록 일신의 무력은 최상급이라 평하기 어려웠지만, 관리국을 비롯한 수많은 성운들과 긴밀한 커넥션을 맺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 
설상가상으로 나는 다섯 번째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면서 ‘양산형 제작자’의 화신인 귀환자 명일상을 죽인 적이 있었다. 
 
[허허,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되네. 잡아먹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양산형 제작자’는 이미 내가 하려는 말을 눈치챈 듯했다.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알겠네. 괘념치 말게. <스타 스트림>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니까. 애초에 관심 있게 보던 녀석도 아니었어.] 
 
“······.” 
 
[근성도 없고 의지도 약한데다 쉬운 길만 골라 찾아서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었거든.] 
 
나는 복잡한 양가감정을 느꼈다. 
‘양산형 제작자’가 그 일을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와, 결국은 ‘양산형 제작자’같은 성좌조차 화신을 그저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는다는 환멸감······.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렇다고 고마워하진 말게. 아무리 형편없는 녀석이었다고 해도, 내 화신이었네. ······그나저나, 자네가 만든 이야기는 잘 보았네.] 
 
“제가 만든 이야기요?” 
 
[그래, 시나리오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어 난장판을 만드는 솜씨가 정말 탁월하더군. 덕분에 한동안 눈이 심심치 않았어. 별점도 다섯 개를 줬지.] 
 
칭찬인지, 아니면 고도의 조롱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일단 감사를 표했다. 
 
[이곳은 처음인가 보군. 누구 소개로 왔지?] 
 
“명계의 여왕입니다.” 
 
양산형 제작자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 할망구가······ 흐흐, 기어이 일을 치는군. 이런 시기에 자네 같은 신입을 데려오다니······.] 
 
대충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았지만, 나는 일부러 의뭉을 떨었다. 
 
“미식협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일이라면 늘 있지. 그보다 그 할망구는 처음 온 신입을 내팽개쳐두고 자기 볼 일만 보러 간 겐가? 쯧쯧······ 하여간 올림포스 연놈들은. 이리 오게. 내가 간단히 소개를 시켜주지.] 
 
예상외로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나는 앞서 나가는 ‘양산형 제작자’의 뒤를 졸졸 쫓아가며 주변을 두루 살폈다. 
신기한 구경거리가 많다고 이곳에 온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어디까지나 ‘마왕 선발전’을 도와줄 성좌들을 모집하러 온 것이다. 
어디보자. 
제일 먼저 말을 걸면 좋을 성좌는······. 
 
[저쪽에 저 술고래는 생긴 것만 봐도 누구인지 알겠지? ‘토르’일세. 저기 저 꼬장꼬장하게 생긴 여자애는 ‘바카리네’고······.] 
 
‘양산형 제작자’가 무턱대고 성좌들의 진명을 불러댈 때마다 나는 가슴께가 선뜩해졌다. 성좌들의 진명에는 그들의 주목을 끄는 힘이 있다. 문제는 그게 호의일지 분노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나도 가끔 페르세포네 같은 성좌들의 진명을 부른 적은 있지만, 저렇게 막 불러대지는 않았는데······. 
 
[쟤들은 나랑 별로 안 친해서 소개시켜주긴 어려우니 별 기대는 하지 말게. 내가 다가가기만 해도 질겁을 해서 말일세.] 
 
실제로 ‘목요일의 천둥’과 ‘새벽별의 여신’은 ‘양산형 제작자’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는 기색이었다. 
대충 무엇 때문인지는 알 만 했다. 
 
[쯧쯧, 좋은 설화가 뭔지도 몰라보는 연놈들 같으니······.] 
 
어쨌거나, ‘양산형 제작자’와 함께 움직이는 것만으로 성좌들의 반응이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아까는 발을 내딛기도 어려웠던 연회 홀의 중심부로 이토록 쉽게 진입한 것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말을 걸기도 전에 다들 도망가게 생겼는데······. 
아, 그러고 보니 ‘아스모데우스’도 미식협의 일원이었는데······ 그 녀석은 어디 있는 거지? 
 
[슬슬 메인 이벤트가 시작되려는 모양이구만.] 
 
혼자서 열심히 떠들어 대던 ‘양산형 제작자’가 싱글벙글 웃으며 내 소매를 잡아 끌었다. 근처의 테이블에 앉자마자 안내인이 음식을 내왔다. 
 
[메르바토스 9서클 대현자의 눈알] 
 
나는 음식을 살짝 뒤적이다가 조심스레 포크를 내려놓았다. 주변의 몇몇 성좌들이 나를 향해 피식 웃었다. 그깟 것도 못 먹느냐며 비웃는 것 같기도 했고, 겨우 그런 음식에 손을 댔다는 것 자체를 멸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그런 시선이 쏟아지든 말든 ‘양산형 제작자’는 그 눈알을 푹 찍어 우적우적 씹기 바빴다. 
 
[그럭저럭 먹어줄만한 맛이로군. 보게, 저기 저 친구가 오늘의 사회자일세.] 
 
꾸려진 무대 위에 빛이 들어오며, 사회자가 나타났다. 
얼굴이 어딘가 익숙하다 싶었는데, 아까 홀에서 나를 툭 밀치고 지나갔던 성좌였다. 
깜찍한 외형의 얼굴에, 풍성한 고딕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인. 
 
[미식협의 회원 여러분, 안녕~ 오늘의 진행자는 나 ‘에우프로시네’에요!] 
 
이름을 듣자 나도 그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환희와 축제의 여신’ 에우프로시네. 
그녀는 성운 <올림포스> 소속의 성좌였다. 
쏟아지는 박수와 함께, 몇몇 성좌들이 체통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 
 
[오오오, 에우 씨! 여기야 여기!] 
 
정확히는, 내 옆의 ‘양산형 제작자’가 그랬다. 
문득 ‘멸살법’의 기억이 떠오른다. 
분명 원작에서도 ‘에우프로시네’가 ‘미식협’의 주최자로 나왔던 회차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 유중혁은······. 
 
[바쁘신 와중에 다들 이렇게 참석해주셔서 감사해요! 자리를 빌려주신 오로성의 주인 ‘형언할 수 없는 엄격’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리고요!] 
 
아마, 저 녀석을 죽였었지. 
 
[오늘의 메인 이벤트는 두 가지가 준비되어 있어요. 그에 앞서, 특별한 게스트를 하나 소개할까 해요. 어쩌면 들어보신 성좌님들이 계실지 모르겠네요! 오늘의 게스트는, 최근 가장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는 행성 출신이거든요!] 
 
불길한 예감과 함께, 무대의 한쪽 구석에서 폭죽이 터졌다. 
 
[지구 출신의 예언자, ‘안나 크로프트’를 모두 박수로 맞아 주시기 바랍니다!] 
 
떠들썩하니 굴던 성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메인 무대의 계단으로 성큼성큼 올라가는 안나 크로프트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가. 
 
안나 크로프트가 이 시기에 미식협에 온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역시나, 내가 좋아할래도 좋아할 수가 없는 여자다. 
특유의 침착한 시선으로 객석을 둘러본 안나 크로프트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미식협’의 성좌 여러분. 저는 성운 <아스가르드>의 화신, 안나 크로프트입니다.” 
 
품위를 지킨 모습이었지만,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성좌들은 벌써부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미식협’도 격이 많이 떨어졌군. 먹잇감이 무대에서 발언을 하다니.] 
[요즘 <스타 스트림>이 말세이긴 하지.] 
 
이곳은 ‘미식협’. 
엄선된 ‘설화’를 미식하는 성좌들의 연회. 
당연한 이야기지만, ‘설화’의 주재료가 되는 것은 바로 ‘싱싱한 화신’이었다. 
안나 크로프트는 그걸 알면서도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미흡하지만, 제가 첫 번째 ‘이벤트’의 주최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 여자가 더 무서운 것이다. 
 
[먹잇감이 뭘 준비할 수 있다는 건지 모르겠군.] 
[당장 끌어 내려!] 
 
분위기가 가열되자 재빨리 중재를 시도한 것은 에우프로시네였다. 
 
[자자, 여러분. 그렇게 너무 흥분하지들 마시고······ 이 탐스러운 먹잇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도는 들어봐도 좋지 않을까요? 우리 미식가들에게 그 정도 인내심은 있잖아요?] 
 
에우프로시네가 미소와 함께 교태를 부리자, 흥분하던 성좌들이 잠시 주춤했다. 영리한 안나 크로프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최근, <스타 스트림>엔 뻔한 설화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그 도발적인 서두에, 투정을 부리던 성좌들의 이목이 한순간 집중되었다. 
안나 크로프트는 계속해서 말했다. 
 
“귀환자에, 환생자에, 소드마스터에, 9서클 대마법사······ 하물며 저 같은 ‘예언자’까지. 전부 ‘남들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시작하는’ 천편 일률적인 설화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안나 크로프트가 말을 이었다. 
 
“오직 말초적인 재미와 사이다만을 위해 제작된 그런 설화들이 범람하는 세태가, 바로 오늘날 <스타 스트림>의 현실입니다.” 
 
성좌들의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마치, 먹잇감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게 신기하다는 눈치들. 
하지만 안나 크로프트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1세대 설화’가 유행할 때는 달랐습니다.” 
 
마치 홀린 듯이, 성좌들은 안나 크로프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시절, 성좌들은 설화를 사랑했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도깨비는 설화에 주제를 부여했고, 성좌들은 그 안에서 형식과 미학을 탐구했습니다. 그때, ‘설화’는 분명 ‘예술’의 영역에 있었습니다.” 
 
······‘예술’이라. 
정말 무서운 여자다. 화신의 입장에서 잘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안나 크로프트의 말에 성좌들은 제각기 다른 추억에 잠긴 표정이었다. 
개중에는 페르세포네의 모습도 보였다. 
모두가 그 시절을 살아 견딘 성좌들이었다. 
 
[재미있군. 그래서 네가 가진 설화는 우리 입맛을 충족시켜줄 수 있다는 것이냐?] 
 
그 말을 한 것은 홀의 구석에 기대어 서 있던 한 마왕이었다. 
다분히 도발 섞인 언사에도 안나 크로프트는 당황하지 않고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께 잃어버린 ‘1세대’를 돌려드리려 합니다.” 
 
성좌들의 표정이 일변했다. 
모두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표정들이었다. 
 
“여러분들이 싫어하는 소드마스터도, 9서클 대마법사도 없는 설화. 오직 피와 땀, 눈물과 노력으로 맺어지는 주제가 있는 설화. 저는 오늘 여러분들께 그런 설화를 선물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안나 크로프트의 충격적인 선언에, 성좌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이었다. 
감히 화신 따위가 그런 망발을 하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성좌들도 보였고, 무슨 말인지 들어나 보자며 흥미로워하는 성좌들도 보였다.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성좌들도 있었다. 내 곁에 있는 ‘양산형 제작자’도 그 중의 하나였다. 
 
[······멍청한 이야기를 하는군. 아무리 ‘미식협’이라도 이제 그런 설화가 재미있을 턱이 없는데. 그렇지 않은가?] 
 
“동의합니다.” 
 
1세대 설화들 중엔 분명 훌륭한 것들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이미 자극적인 서사에 길들여진 성좌들이, 이제와 1세대를 흉내낸 설화에 감동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사실을 ‘안나 크로프트’가 모를 리 없다. 
 
그녀는 ‘멸살법’ 전체에서 가장 유능한 화신이니까. 
나는 머릿 속으로 그녀의 행적을 담은 ‘멸살법’의 내용들을 떠올렸다. 
원작에서 안나 크로프트는 ‘미식협’에서 이런 이벤트를 연 적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 이와 비슷한 일을 어디선가 벌인 적은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은 것은 그때였다. 
 
“구원의 마왕님!” 
 
 
 
 
 
< Episode 45. 미식협 (3) > 끝

< Episode 45. 미식협 (4) >
 
 
 
 
 
돌아본 곳엔,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 있었다. 
 
“셀레나 킴?” 
“제발, 제발 이리스를 구해주세요!” 
 
내 어깨를 짚은 손으로 전해지는 떨림. 
그 선하고 차분한 셀레나 킴이 저런 표정을 짓는다고? 
 
“이대로라면 이리스가······!” 
 
순간, ‘멸살법’의 어떤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안나, 어째서 이런 짓까지······ 이럴 필요는 없었잖아요!” 
“필요한 일이었어요.” 
“이건 아니에요. 이건······ 그 화신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요! 대체 어떻게 이런 짓을!” 
“이 또한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에요. 잊지 말아요 셀레나. 우리는 언제든 우리를 먹어 치울 수 있는 맹수 무리 속에 던져져 있다는 걸.”」 
 
그것은 이번 회차에서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작은 이미 1차 수정이 완료된 상태. 
즉, 다른 회차의 일이 이 회차에서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1차 수정본에서 3회차의 이야기는 삭제되어 있으니······. 
 
“셀레나 킴. 정확히 말씀해 주세요. 무슨 일입니까?” 
 
셀레나 킴이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주변의 성좌들이 대노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감히 화신 따위가······!] 
 
무시무시한 시선이 나와 셀레나 킴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석상처럼 굳어버린 셀레나 킴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양산형 제작자’가 격을 마주 끌어올렸고, 셀레나 킴의 주변에 눈부신 개연성의 스파크가 튀었다. 
이 ‘중앙 홀’은, 오직 ‘성좌’들만을 위한 곳. 
잠깐, 이곳이 ‘미식협’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겁먹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던 셀레나 킴은, 뒤이어 나타난 안내인들에 의해 질질 끌려 나갔다. 셀레나 킴은, 반항 한 번 못하고 그저 원망스런 눈빛으로 무대를 바라볼 뿐이었다. 
 
셀레나 킴이 전하려고 한 이야기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게 내가 ‘멸살법’에서 본 것과 같은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었다. 셀레나 킴이 내게 온 이유는 지금 안나 크로프트가 무대 위에서 벌이는 일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 
착잡한 눈길로 다시 무대를 바라보자, 안나 크로프트는 무표정한 눈으로 이쪽을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릴 설화는, ‘팔찌 원정대’입니다.” 
 
성좌들이 웅성거렸다. 
 
[······팔찌 원정대?] 
 
“그렇습니다.” 
 
[혹시 1세대의 설화인 ‘팔찌의 마황’을 패러디한 건가?] 
 
팔찌의 마황. 
‘멸살법’의 원작에도 언급되는 그 설화는, ‘망치를 먹는 드래곤’이나 ‘새벽별의 아이들’보다도 더 고전으로 분류되는 설화였다. 1세대보다도 더 오래된, 차라리 0세대에 가까운 정통 활극 설화. 
15명으로 구성된 ‘팔찌 원정대’가 재앙의 원흉이 되는 ‘팔찌’를 불태우러 간다는 전형적인 원정 서사. 
이야기를 듣던 ‘양산형 제작자’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 그 지루한 설화를 풀겠다고?] 
 
그러나 안나 크로프트는 성좌들의 반응 따위엔 아랑곳 않고 말을 계속했다. 
 
“이 설화를 이끌어 갈 ‘팔찌 원정대’를 소개합니다.” 
 
안나 크래프트가 손뼉을 치자, 그녀의 뒤쪽에 커다란 패널이 나타났다. 
홀의 한쪽 벽면 전체를 덮는, 광활한 크기의 패널. 
패널에는 드넓은 숲의 정경이 펼쳐져 있었고, 열다섯 명의 화신들이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체 여긴 어디야? 
―안나님 말씀이 맞는 거겠지?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여기서 제대로 활약하기만 하면, 우리도 최상급의 배후성을 얻을 수 있어. 
 
대충 무슨 말로 저들을 꼬드겼는지 알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겁먹은 표정의 이리스도 그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렇군. 
저것 때문에 셀레나 킴이······. 
 
심지어 이미 도깨비에게 인가도 받은 모양인지, 곧이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서브 시나리오 ― ‘팔찌 원정대’가 시작됩니다.] 
[해당 시나리오는 성공 또는 실패 시 신규 설화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 
 
* 해당 시나리오에는 총 15명의 화신들이 참가합니다. 
* 모든 화신들은 협력을 통해 [사냥터]의 중심에 위치한 [화산]에 도착해야 합니다. 
* 원정대는 [절대 팔찌]를 소유하고 있으며, 이 팔찌를 [화산]의 용암에 던져 파괴해야만 시나리오는 완료됩니다. 
* 시나리오를 완수한 화신은 ‘미식협’에 하나의 소원을 빌 수 있습니다. 
 
+ 
 
내용만 보면 꼭 내가 아는 어떤 소설 같다. 
애초에 ‘팔찌의 마황’이라는 설화 자체가 그 소설에 대한 오마주인 것 같으니······. 
시나리오 메시지는 계속되고 있었다. 
 
+ 
 
* 사냥터에는 마황의 [악령]들이 다수 존재합니다. 만약 [악령]에게 원정대가 전멸할 시, 시나리오는 실패합니다. 
* 제한 시간 내에 [절대 팔찌]를 파괴하지 못할 시, 시나리오는 실패합니다. 
 
+ 
 
[호오······ 이런 시나리오를 준비했다 이거지. 흥미롭군.] 
 
성좌들 중 몇몇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내가 보기엔 엉성하게 꾸민 시나리오였지만, 분명 그 안에서 성좌들이 찾을 수 있는 향취가 있었다. 
 
오래된 설화에 대한 복기. 
 
안나 크로프트가 노린 것은 ‘미식협’의 성좌들을 위한 추억 팔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꼬장꼬장한 ‘미식협’의 성좌들이, 겨우 이 정도로 만족할 턱이 없었다. 
 
[······하지만 뭔가 좀 부족하군. 그래서 우리더러 뭘 어쩌란 거지? 설마 저 지루한 게임을 구경만 하고 있으란 말은 아닐 테고.] 
 
“패널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당신의 선택을 기다리는 ‘화신’들이 있습니다.” 
 
[우리보고 저 녀석들의 ‘배후성’이 되라는 건가?] 
 
“물론 그런 선택을 하셔도 됩니다. 별로 재미는 없으시겠지만.” 
 
[그 말은······?] 
 
“성좌님들은 이 ‘시나리오’에 직접 참가하셔서, 저 싱싱한 화신들을 맛보실 수 있습니다.” 
 
안나 크로프트의 말과 함께, 시나리오의 추가 메시지들이 출력되었다. 
 
+ 
 
* 해당 시나리오에는 총 15명의 [악령]이 등장합니다. 
* ‘미식협’의 모든 성좌들은 선착순으로 [악령] 역할에 지원할 수 있습니다. 
 
+ 
 
시나리오 메시지를 읽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처음부터 ‘안나 크로프트’는 이걸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1세대의 향취를 가져다주는 동시에, 성좌들의 욕구도 해결할 수 있는 시나리오. 
 
성좌들 사이에서 은근한 열기가 느껴졌다. 이전까지의 웅성거림과는 완전히 다른, 흥분이 뒤섞인 고양감. 
심지어, ‘양산형 제작자’조차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좌들중 하나가 물었다. 
 
[이 시나리오를 통해 네가 얻는 것은 무엇이냐?] 
 
“없습니다. 그저, 성좌님들이 마음 놓고 즐기시길 바랄 뿐.” 
 
그 뻔뻔한 웃음에 치가 떨린다. 
정말로 원하는 게 없을 리가 없다. 
저렇게 말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키우려는 것뿐이겠지. 
 
[미식협의 성좌들이 ‘안나 크로프트’에게 호감을 가집니다.] 
 
안나 크로프트의 흉계는 성좌들의 잔혹함을 뛰어 넘는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그 무엇의 희생도 가리지 않는 존재. 
괜히 유중혁이 열 번도 넘게 뒤통수를 맞은 게 아닌 것이다. 
 
“그럼, 1분 뒤 시나리오를 시작하겠습니다. 지원하실 성좌님들은 선택창에 사인을 부탁드립니다.” 
 
안나 크로프트의 말과 함께, 내 눈앞에도 선택창이 떠올랐다. 
 
[해당 시나리오에 참여하시겠습니까?] 
[현재 지원자 : 2/15] 
 
설화가 만들어지는 현장에서, 그 설화의 대상을 포식할 수 있는 기회. 
지원자 수는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현재 지원자 : 5/15] 
 
나는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이곳에서, 나는 반드시 ‘마왕 선발전’의 아군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시나리오에 참여하는 것이 좋다. 
다른 성좌들과 설화를 공유하는 것으로 나는 그들과 더욱 돈독해질 수 있을 테니까. 
 
[하하하, 모처럼 ‘예술 작품’을 먹겠군.] 
[기대되지 않는가?] 
 
빌어먹게도 이젠 인정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토록 증오하는 ‘성좌’들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현재 지원자 : 9/15] 
 
그때, 귓가에 “바앗”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떠오르는 작은 패널. 
비유가 직접 띄워준, 나만이 볼 수 있는 화면이었다. 
 
―제 857회 무도 대회를 시작합니다! 
 
‘무도 대회 시나리오’에 참석한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그동안 꽤 강해진 모양인지, 유중혁은 최소한의 동작으로 대전 상대를 차례차례 격파해 나가고 있었다. 그 침착한 움직임을 가만히 응시하며, 나는 언제나처럼 생각했다. 
 
유중혁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순간, 이쪽을 바라보는 유중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물론 유중혁은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유중혁은 마치 내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몇 번을 회귀해도, 내 선택은 같다.”」 
 
아니, 어쩌면 이미 이야기했다. 
실제로 나는 몇 번이나 녀석의 똑같은 선택을 보았으니까. 
 
「“나는 네놈들을,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죽여버릴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늘 유중혁과는 다른 선택을 해왔다. 
나는 유중혁이 아니니까. 
그 강렬한 반발심 속에, 나는 늘 다른 길만을 걸어왔다. 
 
멀리서 페르세포네가 나를 보고 있었다.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길 기다리는 눈빛.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성좌들은,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그녀는,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 지원자 : 14/15] 
 
나는 선택창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 
 
 
이리스 블라지미로브나 레베제바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제일 좋아하는 혁명가는 체 게바라와 초기의 칼 맑스. 
하지만 그녀가 태어난 세계는 혁명의 시대가 아니었다. 
욕망을 지배하는 자본과, 그 자본의 소유자들에 의해 결정되는 세계. 이리스는 어린 나이에 이 시대에 ‘혁명’ 따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깨비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하, 재미있는 곳이네. 식물 섬유 쪼가리가 왕인 세계라니. 
 
수많은 국가들의 체제가 붕괴하는 것을 보며, 이리스는 자신이 기다렸던 혁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들의 균형이 고착되어 ‘왕국’으로 변해가던 세계는, 다시 격동의 흐름 속에 녹아들고 있었다. 
 
혁명은 일어날 수 있다. 
세계는, 바뀔 수 있다. 
 
어린 이리스는 그렇게 생각해왔다. 
오늘이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으아아악!” 
“살려주세요! 제발!” 
 
콰드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화신들의 상반신이 통째로 분리되었다. 
 
[아주 싱싱한 육질이로군.] 
 
큼지막한 어금니 속에 찢겨 나가는 화신들. 입술 사이로 줄줄 흘러 내리는 설화들을 쓰읍 닦은 [악령]들이 킬킬 웃었다. 
 
[퉷. 실망스러워. 지금 이딴 ‘설화’를 처먹으라고 내놓은 건가?] 
[성질 급한 친구로군. 기다려 보게. 시나리오는 이제 막 시작하지 않았나.] 
[그걸 어떻게 기다리란 거야? 역시 패러디 설화는 이래서······.] 
 
“아, 아아······ 아아아······.” 
 
공포에 젖은 동료들이 그 어마어마한 ‘격’ 앞에 대소변을 지렸다. 
혁명이라는 말이 그렇게나 공허하게 생각되긴 처음이었다. 
대항할 수 없다. 
누구도, 저런 것에는 맞설 수 없다. 
 
“이리스! 도망쳐! 도망치라고!” 
 
동료들의 외침 속에, 이리스는 달렸다. 
그녀가 자랑하던 트윈 테일이 피와 땀으로 헝클어져 엉망이 되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 
동시에 숲 속으로 흩어졌던 동료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차 가까워지는 [악령]의 발걸음 소리들. 
이제 그녀가 어떻게 될지는 뻔한 이야기였다. 
 
도망치라고? 
대체, 어디로 도망치란 말인가. 
 
이 작은 무대 속에, 도망칠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험지 전체를 감싼 광활한 결계. 
어디로 도망쳐도, 그녀는 이 무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이리스는, 처음으로 자본이 아닌 어떤 것을 저주했다. 
성좌들을 저주했고. 
<스타 스트림>을 저주했고. 
 
이 ‘이야기’를, 저주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빌었다. 
부디 누군가 이 이야기를 바꿔 주기를. 
아주 작은 구원이라도 좋으니, 제발. 제발. 
 
[성좌, ‘구원의 마왕’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구원이 그녀를 마주보았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당신과 ‘배후 계약’을 맺기를 원합니다.] 
 
 
 
 
 
< Episode 45. 미식협 (4) > 끝

< Episode 45. 미식협 (5) >
 
 
 
 
 
이리스는 당황했다. 
본래 그녀는 아스가르드의 특정 성좌와 계약 예정 상태에 있었다. 
그렇게 인지도가 크지 않은 하위급 성좌인데다 무척 호색한이어서 이리스는 그 계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나 크로프트가 주최한 이 ‘팔찌 원정대’에 참가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큰 활약을 보이면, 예정 배후성을 바꿔 줄 수 있다는 안나의 말에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녀에게 기회가 왔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당신과 ‘배후 계약’을 맺기를 원합니다.] 
 
생각해 보면 화신 계약은 한 명만 가능한 건 아니다. 
성좌의 역량에 따라 둘이나 셋 이상을 두는 자들도 있으니까. 
물론, 성좌의 힘이 나누어지는 만큼 해당 화신들은 그만큼 약화된 성흔들을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이리스는 그런 걸 아쉬워할 처지가 아니었다. 
 
“계약할게요!” 
 
[성좌, ‘구원의 마왕’이 해당 계약은 어디까지나 한시적임을 명시합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해당 계약의 유효 시일은 ‘팔찌 원정대’가 끝날 때까지임을 명시합니다.] 
 
한시적인 계약······. 
 
‘그래, 지금은 욕심을 부릴 때가 아냐.’ 
 
입술을 깨문 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성좌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조건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해당 시나리오 완료 후 받게 될 ‘소원권’의 양도를 원합니다.] 
 
이리스의 머릿속이 한층 더 복잡해졌다. 
······한시적인 계약도 모자라 소원권까지 달라고? 
묘한 섭섭함이 스쳐 갔지만, 그녀가 찬물 더운물을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구원의 마왕은 ‘해당 시나리오 완료’라는 조건을 걸었다. 
그것은 즉,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살려 주겠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드릴게요.” 
 
대답과 동시에, 허공에서 홀로그램 계약서가 내려왔다. 
이리스는 달아나면서도 허겁지겁 홀로그램 위에 서명을 마쳤다. 
 
[‘배후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충만한 힘이 전신에 스며들며, 누군가가 자신을 지지하는 느낌이 들었다. 
할 수 없던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솟아났다. 
하지만 뒤쪽에서 들려오는 스산한 울음소리에, 이리스의 자신감은 금방 사라져버렸다. 
 
[‘화신 사냥’이 시작됩니다.] 
 
곳곳에서 [악령]에게 찢기는 화신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 
 
 
[현재 남은 원정대 숫자 : 6명] 
 
원작에서, 이 게임은 ‘사냥 몰이’라는 이벤트였다. 
본래 미식협의 이벤트는 아니었고, 안나 크로프트가 독단으로 개최하는 이벤트였다. 
그런데 이번 회차의 안나 크로프트는, 그런 절차를 생략하고 ‘미식협’에서부터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내가 허공을 향해 계속 뭔가를 중얼거리자, 곁에 있던 ‘양산형 제작자’가 물었다. 
 
[호오, 그대도 참가한 건가?] 
 
“······어르신도 참가하셨습니까?” 
 
[허허, 난 너무 늙어서 저런 시나리오는 못 뛰어. 그리고······ 그다지 내 취향도 아니야.] 
 
실제로 ‘미식협’의 모든 성좌들이 시나리오에 열을 올리는 것은 아니었다. 
한쪽에는 안나 크로프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성좌들도 있었고, 이런 이벤트 자체를 멸시하는 성좌들도 보였다. 
 
[흐음. ‘악령’ 명단에 그대의 수식언은 안 보이는데······.] 
 
시나리오에 참가한 성좌들의 숫자는 총 열다섯 명. 
그러나, [악령] 역할로 출력되는 성좌들의 숫자는 총 열넷 뿐이었다. 
내 끄덕임에, ‘양산형 제작자’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역시, 페르세포네 할망구가 데려온 이유가 있었군. 하지만 괜찮겠는가? 그대는 오늘 처음······.]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데뷔전은 화려할수록 좋으니까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가 들려왔다. 
 
[설화, ‘미식협의 이단아’를 획득하였습니다.] 
 
아마, 안나 크로프트 또한 나와 비슷한 메시지들을 듣고 있을 것이다. 
 
「많은 ‘성좌’들이 모이는 곳에는, 반드시 설화가 생긴다.」 
 
그것이 설화 생성의 첫 번째 원칙이니까. 
여기에 설화 당사자의 위험 부담이나 이야기의 형식이 맞물리면서 설화의 등급이 결정된다. 심지어 안나 크로프트는 지금 ‘화신’의 몸으로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 상황. 
이대로 시나리오가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1세대의 추종자’라든가 ‘설화 조작자’ 따위의 전설급 설화를 얻게 될 수도 있다. 
 
츠츠츳. 
 
눈을 감자, 이리스가 보고 있는 정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파르르 떨고 있는 어깨가 안쓰러웠지만 이 아이에게 그다지 좋은 기억은 없었다. 
선뜻 친절을 베풀 만큼 내가 착한 사람도 아니고. 
그러니, 이건 그저 ‘거래’를 위한 제스처일 뿐이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침착하라고 말합니다.] 
 
숨을 히끅 삼킨 이리스가 대답했다. 
 
―제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성좌, ‘구원의 마왕’이 희망이 없는 시나리오는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시나리오에는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그 구멍이 너무나 실낱같고 작아서, 도저히 1회차에는 클리어할 수 없을 정도로 난이도가 높을 뿐이지. 
하지만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몇 회든 반복해서 시도할 수 있는 이에겐 반드시 클리어할 기회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세계의 누구보다도 ‘많은 회차’를 알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멀리서 [악령]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스의 체력은 이제 한계였고, 내가 전할 수 있는 성흔은 ‘희생의지’ 뿐이었다. 빌어먹게도 그 성흔은,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하지만, 성좌가 줄 수 있는 건 ‘성흔’만은 아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화신에게 ‘암살왕의 망토’를 하사하였습니다.] 
 
이리스는 허공에서 내려온 선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도깨비 보따리]에서 무려 15만 코인이나 주고 산 아이템. 
비록 하루에 30분의 제한이 있는데다, 성좌들의 이목을 속이기에는 좀 성능이 부족하긴 했지만 지금이라면 얘기가 다를 것이다. 
 
[······거기냐?] 
 
기다렸다는 듯 성좌들이 풀숲을 헤치고 나타났다. 
[악령]이 된 성좌들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거대한 뿔을 단 악마의 모습을 한 이도 있었고, 황소 머리에 작은 낫을 든 녀석도 있었다. 공통점은 그들 모두가 발이 없으며 흑색의 케이프를 두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흠, 이상하군. 분명 이 근처였는데.] 
[제대로 본 거 맞아?] 
 
감쪽같이 사라진 이리스의 기척을, [악령]이 된 성좌들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악령] 역할을 맡은 성좌들은 강력한 제약을 받습니다. 
―[악령] 역할을 맡은 성좌들은 본신의 십 분의 일에 해당하는 ‘격’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좌들에게도, 게임이 너무 쉬우면 재미가 없다. 
겨우 벌레 열다섯 마리를 밟아 죽이는 걸로 즐거워하는 인간이 없는 것처럼. 
유희를 위해서는 자신에게 제약을 거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는 녀석들. 
그게 바로, 미식협의 성좌들이다. 
 
[뭔가 수를 쓴 모양이군. 좀 더 달아나게 놔두라고. 시나리오가 쌓여야 맛도 더 좋아지니까.] 
[······후후, 이거 기대되는데.] 
 
한참이나 풀숲을 뒤져보던 성좌들이 이내 포기하고 돌아서자, 이리스에게 시스템 메시지가 도착했다. 
 
[원정대원 ‘이리스 블라지미로브나 레베제바’가 ‘악령’으로부터 한 번 살아남았습니다.] 
[설화, ‘팔찌 원정대’가 축적됩니다.] 
 
이 시나리오는 고전 설화를 오마주하여 만들어진 것. 
시나리오에서 오래 버틸수록, 고전 설화의 기운은 이리스에게 스며들 것이다. 
 
―사, 살았어요! 
 
[성좌, ‘구원의 마왕’이 이번에는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이번에 만난 녀석들이 최고위급의 성좌들이었다면, [암살왕의 망토]로 이목을 숨기는 건 무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페르세포네나 ‘양산형 제작자’가 그랬듯, 정말 지고한 미식협의 성좌들은 이런 시나리오에 들개처럼 달려들지 않는다. 
그들에겐 이런 이벤트에 욕망을 분출하는 다른 성좌들을 관찰하는 것 또한 하나의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되니까. 
즉, 내가 노려야 할 진짜 관객들은 그들인 셈이다. 
 
―선물 고맙습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빌려주는 거라고 말합니다.] 
 
―······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화신을 동정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쪼잔함을 질책합니다.] 
 
이 시나리오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 
 
 
원정대의 숫자가 계속해서 줄어들어 가는 와중에도, 이리스는 성좌들의 눈을 피해 조금씩 [화산] 쪽으로 다가갔다. 도중에 죽은 원정대에게서 팔찌를 수거하는 행운도 있었다. 
 
[현재 남은 원정대 숫자 : 2명] 
 
내가 실시간으로 ‘멸살법’을 읽으며 시나리오에 참가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멸살법’에는 이 시나리오의 원형이 되는 ‘팔찌의 마황’에 대한 이야기도 아주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시나리오 맵의 지형지물을 분석하여 최대한 효율적인 동선으로 이리스를 움직였고, 어느새 [화산]의 정경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하하, 이거 이야기가 재미있게 흘러가는군요. 엄청나게 맛있는 요리가 되었겠는데요? 보는 저도 이렇게 침이 고이는데······.] 
 
슬슬 다른 성좌들도 누군가가 ‘원정대’ 쪽에 개입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당황한 기색은 아니었다. 
 
[원정대원 ‘메르베스 루티어’가 사망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리스는 혼자가 되었다. 
 
[······아주 맛있는 냄새가 나는군.] 
 
흩어졌던 [악령]들이 하나둘 [화산] 근처로 모이고 있었다. 
결국 원정대는 [화산]으로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제 [암살왕의 망토]도 남은 시간이 거의 다했다. 
나는 이리스에게 신호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달리라고 말합니다.] 
 
이리스는 [화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달려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작은 역사가 온 힘을 다해 달려가는 것을, ‘미식협’의 모든 성좌들이 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 
 
[화산]까지 백여 걸음을 남겨두었을 때, 마침내 [암살왕의 망토]의 특전이 종료되었다. 기척이 들키자, 주변을 배회하고 있던 열 명의 [악령]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내가 먼저 먹는다!] 
 
다가오는 악령들을 보며, 공포에 젖은 이리스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의 절망적인 시선이 마지막으로 머무른 곳은, 하늘이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화신에게 몸을 빌려줄 것을 청합니다.] 
 
숨을 헐떡이며, 이리스가 입을 뻐끔거렸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강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강림의 형태로 현현하게 되면 나 역시 시나리오 속에서 격의 제약을 받게 된다. 
그러니, 내가 이번에 행할 것은 [강림]이 아니었다. 
내겐 그것보다 훨씬 개연성의 영향을 적게 받으면서도 효율이 좋은 스킬이 있었다. 
 
츠츠츠츠츳! 
 
나는 나를 구성하던 설화 중 몇 개를 일부러 빼내어 화신체에 타격을 주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발동합니다.] 
[‘1인칭 조연 시점’이 발동하였습니다.] 
[등장인물 ‘이리스 블라지미로브나 레베제나’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하였습니다!] 
 
나는 이리스의 ‘시점’으로 눈을 떴다. 
아마 지금 미식협에 있는 내 몸은 무방비로 잠들어 있겠지. 
그러니, 최단 시간 안에 승부를 봐야만 한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그와 동시에 쏟아지는 진언들. 
 
[역시 돕는 녀석이 있었군. 누구냐?] 
[호오, ‘강림’한 건가?] 
[이거 횡재하게 생겼군······!] 
 
축적된 설화의 빛을 받아, 이리스의 몸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몸을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미식협의 ‘신입’으로 출발해 차근차근 성장하는 것도, 분명 하나의 방법이었겠지. 
하지만 그런 식으로 질질 끌어서는, 3천 편이 지나도 이야기의 결말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이거 안나인가 뭔가 하는 녀석 좀 족쳐야겠는데? 방금 죽인 이 새끼, ‘소드마스터’ 설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멀리서 걸어오는 몇몇 성좌들이 자신의 손에 쥐어진 화신들을 내던지며 말했다. 
아마, 마지막으로 죽은 원정대원인 듯했다. 
 
[보아하니 신입인 것 같은데, 그쯤하고 꺼지는 게 좋을 거다. 아니면 네 진체도 커다란 타격을 입을 테니까.] 
 
죽은 원정대원의 머리가 이쪽을 향해 굴러왔다. 
마지막까지 도망쳤으나, 결국은 살아남지 못한 화신의 머리. 
내가 그 머리를 조심스레 주워들자, 한 성좌가 비웃듯 말했다. 
 
[설마 그놈을 동정하는 것이냐? 후후······ 예술을 모르는 녀석이구나.] 
 
“왜 이들의 삶이 당신들의 예술이어야 하지?”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자, 죽은 화신의 머릿속에 남은 처절한 기억들이 흘러들어왔다. 기억은 이윽고 설화가 되어, 이윽고 내 손끝에 깃들었다. 
 
[설화 파편, ‘처참하게 살해당한 소드마스터의 원념’을 획득하였습니다.] 
 
성좌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러섰다. 
 
[······더러운 설화를 좋아하는 놈이었군.] 
 
“더러워? 당신들이 준 거잖아.” 
 
이 자가 쉽게 소드마스터가 된 이유? 
간단하다. 
성좌들로부터 기연을 받았으니까. 
 
“이야기가 답답하다고. 시나리오가 너무 느리다고. 당신들이 모두 준 힘이잖아.” 
 
그렇게 받은 것들이 모여서. 
누군가는 소드마스터가 되었고. 
누군가는 대마법사가 되었다. 
그리고 소드마스터와 대마법사가 된 죄로. 
그들은, 모두 이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뭘 다들 그렇게 뜸 들이고 있어? 그만 먹어 치우자고!] 
 
성질 급한 성좌들이 [악령]의 힘을 개화하며 달려들었다. 
본래라면, 이리스는 이들에게 이길 수 없었다. 
원정대는 절대로 [악령]에게 이길 수 없으니까. 
 
하지만. 
 
치이이이이익! 
 
불타오르는 검격에 맞은 [악령]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크아아아아악!] 
 
그리고 내 손에는, [암살왕의 망토]와 함께 구입했던 검이 쥐어져 있었다. 
 
+ 
 
<아이템 정보> 
 
이름 : 에오렌의 검 ― 레플리카 
등급 : SS+ (특정 시나리오 한정) 
설명 : 1세대 설화의 기운을 받은 검이다. 오직 여성체 화신만이 사용할 수 있으며, 사용 시 10분 동안 [악령]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발현할 수 있다. 
 
+ 
 
무려 20만 코인짜리 검이었다. 
심지어 이 시나리오가 아니면, 별 쓸모도 없는 검. 
평소라면 절대로 이딴 아이템은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 세대의 검이라고?] 
[어이, 겁먹지 마! 그냥 레플리카 버전이야!] 
 
사실, 많이 고민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행동에 경악합니다!] 
 
내가 이 시나리오에 이만한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을지 생각했고. 
이것으로 인해 내가 얻을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했다. 
 
[‘미식협’의 일부 성좌들이 당신에게 강한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어떤 것은 계산이 되었고, 어떤 것은 계산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선택했다. 
 
“너희는 내가 [화산]으로 올 줄 알고 있었겠지.” 
 
계산이 되지 않는 것들은, 계산이 되지 않는 채로 놓아두기로 했다. 
 
“근데 그거 알아? 나도 너희가 여기로 모두 몰려올 거 알고 있었어.” 
 
아무리 패널티를 받았다고 해도, 상대는 성좌들. 
여유 따윈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언제나처럼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진짜 사냥을 시작해 보자고.” 
 
 
 
 
 
< Episode 45. 미식협 (5) > 끝

< Episode 45. 미식협 (6) >
 
 
 
 
 
이곳에 모인 성좌들의 숫자는 총 열 명. 
나머지 넷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이 시나리오 지역 어딘가에 흩어져 있겠지. 
 
[양보하지 않겠다면.] 
[너도 먹어 치워 주마.] 
 
성좌들의 진언이 [악령]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검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전용 스킬, ‘백청강기 Lv.8’을 발동합니다!] 
 
마력의 실체는 내 것이 아니라 이리스의 것이었지만, 여기까지 온 화신인 만큼 이리스 본신의 저력도 만만치는 않았다. 
새하얀 백청의 힘이 [에오렌의 검]에 더해지자, 검의 기세는 한층 더 풍부해졌다. 
 
기이이이잉! 
 
에오렌의 검은 10분 동안 [악령]에게 강력한 타격을 줄 수 있는 검. 
하지만, 강력한 무기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이쪽이 우세한 것은 아니었다. 
내 검격에 한 성좌가 크게 웃으며 외쳤다. 
 
[하하하, 느리구나! 어린 성좌여. 어디 이 노괴들을 즐겁게 해 보아라!] 
[노괴라니. 나는 아직 500년밖에 안 살았다고. 그리고 저놈이 더 늙었을지도 모르잖아.] 
 
어린 여자아이의 몸에 빙의한 것이 처음인 까닭일까. 
검은 어설픈 궤적을 그리며 허공을 수놓을 뿐이었다. 
고작 일 할의 힘만을 사용하는 성좌라 해도, 성좌는 성좌다. 
상위의 위인급에서부터 하위 설화급에 이르기까지. 
[악령]이 되기 위해 모인 성좌들이 격을 발출하고 있었다. 
 
츠츠츠츠츳! 
 
무려 열 명의 성좌가 기세를 내뿜자 이리스의 움직임이 삐걱거리며 굳기 시작했다. 투명한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이리스의 몸이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함정을 파놓은 거미들이 히죽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파르르르르······.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떨리는 이리스의 몸을 보며,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얕보지 마라. 나 역시 성좌다.] 
 
아직까지 나는 ‘제대로’ 격을 발출해 본 적이 없다. 
마계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내내 나는 줄곧 반병신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미식협의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 나는 꾸준히 설화를 회복했다. 
그러니 지금이라면, 일백 퍼센트는 아니더라도 그에 거의 준하게 ‘격’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츠츠츠츠츠츳! 
 
[성좌의 ‘격’을 발출합니다!] 
 
당신이 가진 설화중 일부가 상황에 반응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역사급 설화, ‘미식협의 이단아’가 주변의 억압에 반항합니다!] 
[전설급 설화, ‘구원의 마왕’이 화신 이리스의 상황에 반응합니다!] 
 
주변의 땅이 쩌저적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인근의 수림이 흉포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쿠구구구구구! 
 
일대에 치는 스파크의 범람에 성좌들은 경악한 모습이었다. 
이 시나리오에 강림한 성좌는 본래 힘의 ‘일 할’ 만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강림’이 아니라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해 현현한 상태였고, 때문에 본래의 ‘격’을 온전히 방출할 수 있었다. 
 
[어떻게 신입이 이런 ‘격’을······!] 
[······이게 정말 ‘강림’ 상태라고?] 
 
그 사실을 모르는 성좌들은 거의 기겁한 모습이었다. 
지금 놈들은 이 ‘격’을 내 본래 힘의 일 할이라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일부러라도 무리하고 있는 이유였다. 
 
츠츠츠츠츠! 
 
[꺼지든가 죽든가. 둘 중 하나만 선택해라.] 
 
지금 제대로 착각하게 해 둬야, 이 일이 끝난 후에도 놈들이 경거망동하지 않을 테니까. 
 
[저, 저 건방진 놈이······!] 
[······과연 <스타 스트림>은 넓군. 어디서 저런 녀석이 나타난 거지?] 
 
내 기세에 위축된 성좌 몇이 뒷걸음질을 쳤지만, 반대로 더욱 열의를 불태우는 녀석도 있었다. 
 
[크하하하핫! 최고의 요리로군. 오늘의 미식협은 최고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성좌. [악령]의 팔이 쭉 늘어나며 이쪽을 향해 쇄도했다. 다급히 뒤로 물러나며 검을 휘둘렀지만, 우습게도 검은 코앞에서 다가오는 팔조차 베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이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 미안해요! 전 검술은 영 꽝이라······!’ 
 
제길. 
그래서 움직임이 이렇게 굼떴던 거였나. 
상처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이리스의 팔꿈치에서 피가 튀었다. 
내 움직임에서 뭔가 낌새를 느낀 것일까. 주춤거리던 성좌들의 기세가 변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슈가가가가각! 
 
일제히 산개한 성좌들이, 제각기 [악령]의 몸뚱이를 이용해 산만한 공격을 가해왔다. 나는 어떻게든 검을 휘둘러 수세를 극복하려 했지만 이리스의 검술 숙련도가 너무 낮아서인지 쉽지 않았다. 
유중혁의 몸에 빙의했을 때와는 천차만별의 결과. 
새삼 유중혁이 얼마나 대단한 화신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렇군. ‘격’만 높은 녀석일 뿐이야. 해치워!] 
[검에 스치지만 않으면 돼. 하하하, 오늘은 포식이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던 최악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스가각! 푸슛! 
 
곳곳에서 [악령]의 공격들이 날아들었다. 다리 사이를 스쳐가는 작은 낫. 한 바퀴를 선회하며 뒤를 노리는 부메랑. 옆구리의 빈틈을 찔러오는 긴 창극까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이리스의 몸은 생채기와 멍으로 뒤덮였다.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다급히 [책갈피]를 사용해 [바람의 길]을 열었으나, 그것마저도 이리스의 몸으로는 사용감이 어색했다. 
결국, 얽힌 발걸음이 꼬여 기세는 흐트러졌다. 
짧은 틈을 노리고, 처음으로 달려들었던 성좌가 팔을 뻗었다. 
 
“큿······.” 
 
목덜미를 잡힌 이리스의 육체가 허공으로 맥없이 떠올랐다. 
 
[운이 안 좋았구나. 신입.] 
 
이제 다 끝났다는 듯, 성좌의 입이 벌어졌다. 
 
[미식의 시간이다.] 
 
그로테스크한 송곳니들이 빼곡하게 자라난 입안에, 달아오른 소화액이 한가득 들어차 있었다. [악령]의 생김새를 일부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다는 걸 감안하면, 정말이지 최악의 취향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5번 책갈피를 활성화 하겠다.” 
 
사실, 여기서 이 기술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이리스의 육체가 [전인화]를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도 없었고, 과도한 개연성을 소모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젠 방법이 없었다. 
 
[5번 책갈피를 활성화합니다.] 
 
그런데 책갈피를 발동한 순간, 예상 밖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해당 인물에 적합하지 않은 스킬입니다.] 
[전용 스킬, ‘소형화’의 사용이 취소됩니다.] 
[전용 스킬, ‘전인화’의 사용이 취소됩니다.] 
 
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져버리는 [책갈피]의 힘. 
가끔 이렇게 스킬과 화신체의 궁합이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게 하필 지금이라니. 
이건 생각지도 못했다. 
 
[마지막 발악인가?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아라.] 
 
비웃음 섞인 목소리와 함께, [악령]의 입에서 쑥 빠져나온 긴 혀가 이리스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기도가 막히자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갔다. 이리스의 의식이 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전지적 독자 시점]의 연결이 약해지고 있었다. 
 
[특성 효과로 사고가 가속화됩니다.] 
 
위기에 맞서 수십 가지의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갔고, 개중에 한 가지가 사고의 그물망에 걸려들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아직 그 인물에 대한 내 이해도는 낮은 편이니까.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6번 슬롯에 ‘혁명의 기사 마르크 제비어’를 해제한다.” 
 
츠츠츠츠츠! 
 
나는 있는 힘껏 ‘격’을 방출하며, 순간적으로 성좌들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나머지 말을 이었다. 
 
“그 자리에, ‘파천검성 남궁민영’을 넣겠다.” 
 
[6번 책갈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내 안으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읽고, 느끼고, 겪어온 모든 활자들이 하나의 인간이 되어 내 안에 체현되는 느낌. 
 
[해당 인물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부족합니다!] 
 
언젠가, 처음으로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을 로드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무, 무슨······!] 
[······저건 무슨 힘이지?] 
 
미식협의 성좌들마저 경악할 정도의 기운이 내 안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고 있었다. 
 
[해당 등장인물의 수준이 높아 스킬 수준을 온전히 재현할 수 없습니다.] 
[해당 등장인물의 수준이 높아 스킬의 일부만이 활성화됩니다.] 
[해당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책갈피의 지속 시간이 감소합니다.] 
 
본래 [파천검도]는 ‘여성체’만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 
유중혁이야 피나는 노력으로 극복했다지만, 나는 무리다. 
 
[현재 당신의 화신체 구성이 해당 등장인물의 육체 구성과 흡사합니다.] 
 
정확히는, 본래의 몸이었다면 무리였을 것이다. 
 
[전용 스킬, ‘파천검도(破天劍道) Lv.10(+1)’가 활성화되었습니다.] 
 
꽈르르릉! 
 
하늘을 깨부수듯이 내리친 벼락이 [에오렌의 검]에 깃들었다.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전력을, 최적의 시간에 방출한다. 
성좌들이 상황을 알아 차리기도 전에, 모든 것은 끝날 것이다. 
 
[전용 스킬, ‘파천검뢰(破天劍雷) Lv.10(+1)’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천지가 뒤집어지는 듯한 우레와 함께, 하늘의 창을 뚫고 날아든 푸른 벼락들이 주변의 모든 것에 내리꽂혔다. 그 검결에 깃들어 있는 ‘멸살법’의 활자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무림인들은 파천검성을 십대 고수로 꼽지 않는다.」 
 
비명을 지를 틈조차 없이 잿가루로 흩날리는 [악령]의 몸뚱아리들. 
 
「무림인들은, 파천검성을 일종의 재해(災害)라 생각한다.」 
 
작은 인간으로 태어나, 각고의 노력 끝에 성좌를 마주 보게 된 존재. 
 
꽈르르르릉! 
 
이것이 바로, 무림의 재앙인 ‘파천검성’의 힘이었다. 
 
[스킬의 격이 화신체의 재능을 아득히 넘어섰습니다.] 
 
기혈이 역류하며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초월좌가 아닌 나나 이리스는 본래 사용할 수 없는 힘이니까. 
하늘이 정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깜빡였다. 
눈부신 벼락의 전주곡이 한바탕 휩쓸고 지났을 때,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악령]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성좌,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시나리오에서 탈락했습니다.] 
[성좌, ‘고요한 섬의 미식가’가 시나리오에서 탈락했습니다.] 
[성좌, ‘잊혀진 선망의 군주’가 시나리오에서 탈락했습니다.] 
 
······. 
 
[총 10명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에서 탈락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불가능한 업적을 연속으로 달성했습니다!] 
 
가까스로 숨을 놓으며,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이룬 업적에 <스타 스트림>이 관심을 기울입니다.] 
[당신을 위한 새로운 설화가 준비 중입니다.] 
 
성좌들의 격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해도, 화신의 육체로 성좌들의 화신체를 열이나 학살했다. 
그러니, 설화가 생기지 않을 턱이 없겠지. 
 
츠츠츠츠츠츳! 
 
입에서 울컥 피가 토해졌고, 귀와 코에서 동시에 핏물이 쏟아졌다. 
걸핏하면 칠공에서 피를 쏟아대니, 이젠 피 맛이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다행히도 ‘미식협’에서 허락된 개연성이 있었기에, 아직까지는 버틸만 했다. 
나는 무너지는 이리스의 육체에 설화 파편을 덕지덕지 붙였다. 파천검성의 무공으로 인한 충격에 이리스의 의식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미식협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의 내용에 경악합니다.] 
[미식협의 몇몇 성좌들이 당신과 적대 관계가 되었습니다.] 
 
미움을 받을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잃는 게 있다면 얻는 것도 있다. 
 
[미식협의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설화에 큰 호기심을 보입니다.] 
[미식협의 몇몇 간부가 당신에게 호감을 표합니다.] 
 
나는 이리스의 몸을 이끌고, 비틀거리며 [화산]을 향해 나아갔다. 
이리스는 시나리오가 완료 되어야만 살아남는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저 [화산]의 용암 속에 이 팔찌를 던져 넣어야만 했다. 
 
이제 남은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마흔 걸음, 서른 걸음, 스무 걸음······. 
 
가까워진 용암의 열기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팔찌를 부술 수 있는 절벽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지금쯤 나타날 거라 예상은 했다. 
아직 내가 해치우지 못한 [악령]은 넷이나 남았으니까. 
 
[구원의 마왕, 정말 재미있는 일을 벌이고 있군요.] 
 
귀에 익은 목소리에 [에오렌의 검]을 쥔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뒤를 돌아보자, 익숙한 외형의 여자아이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악령]이 되었지만, 그 기본적인 외형은 전혀 변하지 않은 채였다. 
나는 짓씹듯 입을 열었다. 
 
“아스모데우스.” 
 
자신의 진명이 불리었다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지, 아스모데우스가 황홀한 목소리로 말했다. 
 
츠츠츠츠츠. 
 
[······아, 다시 한번 불러 줘요.] 
 
유중혁의 전신을 망가뜨리고, 우리의 3회차를 실패하게 만드는 원흉. 
천천히 다가오는 아스모데우스의 ‘격’이 느껴진다. 
 
이게 고작 ‘일 할’의 힘이라니. 
역시, 72 마왕 쯤 되면 차원이 다르다 이건가. 
 
나는 한 걸음을 물러서며, 재빨리 주변을 경계했다. 
지금도 충분히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 녀석을 제하고도 [악령]은 아직 셋이나 더 남았다. 녀석들까지 오게 된다면, 승산이 없어진다. 
그러니 그 전에······. 
 
[그렇게 경계하지 말아요. 다른 성좌들은 없으니까.] 
 
히죽 웃는 아스모데우스의 작은 손아귀에 세 개의 머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머리와 함께 잘려 나간 검정색 케이프 자락들. 
 
화신들의 머리가 아니었다. 
 
발끝부터 아주 천천히, 한기가 돌았다. 
그 짧은 순간, 나는 왜 ‘멸살법’에서 아스모데우스를 미친놈으로 묘사하는지 아주 정확히 이해했다. 
성좌들의 피가 묻은 아스모데우스의 입술에 서늘한 미소가 깃들었다. 
 
[내가, 모두 먹어버렸거든.] 
 
 
 
 
 
< Episode 45. 미식협 (6) > 끝

< Episode 45. 미식협 (7) >
 
 
 
 
 
모두 먹어버렸다······. 
태연히 그런 말을 하며 샐쭉 웃는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에는 그 어떤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다. 
 
[미식협의 일부 성좌들이 ‘아스모데우스’를 강하게 비난합니다.] 
[미식협의 소수 성좌들이 ‘아스모데우스’의 만행을 즐거워합니다.] 
 
세월에 닳고 이야기에 찌든 ‘미식협’의 성좌들은 그 성향과 취향도 각양각색이다. 얼핏 ‘1세대’만을 최고로 치는 것 같지만, ‘양산형 제작자’처럼 SSS급을 좋아하는 성좌가 있는가 하면 지금처럼 예상 밖의 전개를 선호하는 이들도 있다. 
 
[후후, 역시 ‘성좌’의 화신체는 육질이 다르다니까. 이것도 진체만은 못하지만······.] 
 
아스모데우스 같은 마왕이 ‘미식협’에서 용납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성좌든, 초월좌든, 마왕이든. ‘미식협’은 그 어떤 집단보다도 완고한 아집이 집적된 곳이지만, 그 모든 종류의 미식을 존중한다. 
 
찰박, 찰박. 
 
피 웅덩이를 밟으며 천천히 다가오는 아스모데우스를 보며, 나는 침음을 삼켰다. 
 
[‘에오렌의 검’의 특수 효과가 종료됩니다.] 
 
아직 [파천검성]의 무공이 있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에오렌의 검]이 제대로 작동할 때의 이야기. 
검이 없다면 [악령]이 된 녀석을 상대할 방법은 없었다. 
어느새 대여섯 걸음 앞까지 다가온 아스모데우스가 나를 향해 입맛을 다셨다. 
 
[······날 먹으러 온 건 아닐 텐데?] 
[흐음, 어떻게 확신하시죠?] 
[날 죽이면 너는 ‘거대 설화’를 얻을 수 없어.] 
 
아스모데우스는 나와 ‘마왕 선발전’에 대한 약속을 했다. 
그러니, 이곳에서 나를 죽일 리는 없었다. 
 
[지분 30퍼센트를 약속했잖아. 왜 이런 곳에서 구질구질하게 구는 거냐?] 
[그 30퍼센트가 확실하게 저한테 온다는 약조는 없었죠.] 
[다른 성좌들과 경쟁할 자신이 없는 모양이지?] 
 
도발하듯 던진 그 말에,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날 도발하는 건가요?] 
 
아스모데우스가 위협적인 기세를 내뿜었지만, 나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말했다. 
 
[네놈이 정말 ‘마왕’이라면, 좀스럽게 굴지 마라. 제대로 경쟁해서, 제대로 네 몫을 가져.] 
 
애초에, 아스모데우스가 여기에 나타난 것부터가 ‘나를 돕겠다’는 의도가 명백한 것이었다. 아무리 아스모데우스라도, 같은 ‘미식협’의 일원들을 공격하는 행위는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으니까. 
그럼에도 녀석은 굳이 ‘광마’의 행색을 하며 저런 짓을 벌였다. 
안색이 새파래진 아스모데우스가 외쳤다. 
 
[구원의 마왕······. 지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을 먹을 수―]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고 꺼져라.] 
 
아스모데우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정 날 먹고 싶으면 죽여 보든가.]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봤다면 분명 미쳤다고 생각했겠지. 
다른 상대도 아닌 그 ‘아스모데우스’를 이렇게 막 대하다니. 
하지만 내가 이토록 막 나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쿠구구구구! 
 
아스모데우스의 ‘격’이 나를 향해 불타올랐다. 그 가공할 힘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지만, 나는 내 감각보다도 내가 읽은 ‘이야기’를 믿었다. 
 
「그때, 우리는 아스모데우스를 다르게 대했어야 했다.」 
 
멸살법의 ‘수정본’. 
49회차 유중혁의 기록에서, 나는 그런 문장을 발견했다. 
 
「아스모데우스는 타협 없는 존재를 좋아한다.」 
「그런 존재일수록, 더욱 꺾고 싶은 마음이 생기니까.」 
 
유중혁 주제에 어떻게 그런 통찰을 해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중혁의 말이 맞다면 지금까지의 ‘아스모데우스’의 행동은 모두 이해가 된다. 
 
[등장인물 ‘아스모데우스’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그리고, 이변이 발생했다. 
 
[등장인물 ‘아스모데우스’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등장인물 ‘아스모데우스’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폭발적인 간접 메시지와 함께, 처음으로 ‘마왕’급 존재의 내면이 들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가 강제로 발동합니다!] 
 
「먹고 싶어.」 
「안 돼.」 
「먹고 싶어.」 
「안 돼.」 
「아아아아아아······.」 
 
엄청난 양의 사념이 내 귓가로 밀려들었다. 
한 존재 안에 이만한 부피의 탐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가히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정말 대단해······.] 
 
바람처럼 다가온 아스모데우스가, 어느새 이리스의 머리카락을 한 줌 쥔 채 아찔한 들숨을 내쉬었다. 
 
[하아아아아······ 좋군요. 그래, 오늘은 이 정도로 참겠어요.] 
 
“······.” 
 
[하지만, 명심하세요 ‘구원의 마왕’. 다음번에도 오늘 같은 일은 없을······.] 
 
나는 아스모데우스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화산]을 향해 내달렸다. 
간신히 잡은 기회를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코앞에 용암 절벽이 보였다. 
[바람의 길]이 내 손끝에 쥐어진 [팔찌]를 절벽 아래로 인도했다. 
퐁당, 하는 소리와 함께 녹아내리는 팔찌. 
 
[서브 시나리오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상으로 150,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미식협’ 내부에서 당신의 인지도가 크게 상승하였습니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나는 완전히 탈진해버린 이리스의 입에 [엘라인 숲의 정기]를 넣어 주었다. 몸 상태가 엉망이 되기는 했지만, 필요한 개연성은 대부분 내가 감내했으니 회복은 빠를 것이다. 
 
[‘1인칭 조연 시점’이 해제됩니다.] 
 
사위가 뭉그러지는 느낌과 함께, 나는 ‘미식협’의 연회홀로 되돌아왔다. 
감각이 되살아나자, 제일 먼저 들려온 것은 늙수그레한 노인의 목소리였다. 
 
[젊은이, 재미있게 잘 보았네.] 
 
내가 돌아온 것을 깨달았는지, ‘양산형 제작자’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모두 어르신 덕분입니다.” 
 
[흐음, 무슨 얘긴가?] 
 
“이거 말입니다.” 
 
내 손에는 방금 전까지 이리스가 사용했던 20만 코인 짜리 쓰레기가 쥐어져 있었다. [에오렌의 검]. 참고로 그 검의 그립에는 다음과 같이 메시지가 새겨져 있었다. 
 
―made by 양산형 제작자. 
 
‘양산형 제작자’가 킬킬 웃었다. 
 
[장사도 다 때가 있는 법이지. 그 검이 오늘 팔릴 줄 누가 알았겠나.] 
 
“그런 것 치고는 [도깨비 보따리]의 추천 상품으로 입고 되었던데요.” 
 
[흐흐, 도깨비가 하는 일을 성좌가 어찌 알겠나.] 
 
이것이 ‘양산형 제작자’의 배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검이 있었기에 나와 이리스는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일이 좀 곤란하게 됐구만.] 
 
나는 주변을 살폈다. 
나를 둘러싼 분위기가 살벌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구원의 마왕’이 대체 누구냐!] 
 
나를 찾는 성좌들이 거센 분노를 태우며 마구잡이로 기세를 발출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방금 전 내게 화신체를 잃고 시나리오에서 탈락한 성좌들의 모습도 보였다. 
 
[성좌,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당신에게 적개심을 드러냅니다.] 
[성좌, ‘고요한 섬의 미식가’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무대 위에서 어안이 벙벙해진 에우프로시네와, 안색이 창백해진 안나 크로프트의 모습도 보였다. 
 
자, 이젠 어떻게 할 거냐는 듯 몇몇 성좌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서브 시나리오’는 끝났지만, 여전히 그들에겐 이 상황 또한 유희의 연장선인 것이다. 
물론, 나는 기대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화신 ‘이리스’와의 계약에 따라 ‘소원권’을 양도받았습니다.] 
[해당 소원권으로 당신은 ‘미식협’의 개연성이 허락하는 범주 안에서 한 가지 소원을 빌 수 있습니다.] 
 
‘미식협’의 개연성이 허락하는 범주 안이라······.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너무나 명백했다. 
성좌들은 모두 죽여달라거나 하는 소원은, 당연히 빌 수 없다. 
 
[해당 소원권이 가능한 개연성을 넘어섰습니다.] 
 
모두 내 편을 들어달라거나, 내 부하가 되라거나. 그딴 소원도 당연히 가능할 리 없다. 
 
[해당 소원권이 가능한 개연성을 넘어섰습니다.] 
 
말하자면 이 ‘소원권’은 일종의 외교 카드인 셈이었다. 
가능과 불가능의 영역을 정확히 분별해, 내게 가장 적합한 소원을 찾아내는 것. 
 
[‘미식협’의 성좌들 중 일부가 당신에게 강한 적개심을 표출합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을 기대합니다.] 
 
심지어 내 채널 안의 성좌들도 긴장한 목소리를 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선택을 기대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조마조마함에 손가락을 꼼지락댑니다.] 
 
그 모든 이들의 시선 속에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미식협’이 내게 예의를 지키길 바란다.] 
 
 
* 
 
 
순간적으로 장내에는 어마어마한 침묵이 깃들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그 침묵을 고요히 응시했다. 
 
[‘미식협’의 개연성이 발동합니다!] 
[당신의 소원이 수리되었습니다.] 
 
‘미식협’의 홀에 한바탕 스파크가 일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것은 스파크가 아니라 ‘벼락’에 가까워 보였다. 
이윽고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하하하핫! 정말이지, 재미있는 녀석이 왔군!] 
 
맥주잔을 쥔 ‘목요일의 천둥’이 껄껄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하마터면 지루해질 뻔한 이야기가, 조금은 볼 만해졌다. 그대들은 대체 무엇이 불만이기에 저 작은 성좌를 핍박하는가?] 
 
그의 발언에, 일부 성좌들이 강하게 반발하며 일어났다. 
 
[하지만 저자는 규칙을······!] 
[‘시나리오’는 ‘시나리오’일 뿐이지. 그리고 그 ‘시나리오’는 지금 막 끝이 났다. 나와 내 망치가 아는 것은, 그게 전부다.] 
 
그 어떤 변론도 받지 않겠다는 듯 토르의 망치가 굉음을 냈다. 
성운 <아스가르드>의 ‘토르’는 이곳에서 가장 강력한 설화를 지닌 최상위 격 성좌들 중 하나. 이곳의 누구도, 그의 망치에 대적하고 싶은 이는 없었다. 
 
[저 천둥벌거숭이의 말에 공감하는 게 몹시 불쾌하지만, 이번에는 내 생각도 같습니다.] 
 
그 말을 한 것은 ‘새벽 별의 여신’이었다. 
곱게 넘긴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흩날리듯 별가루가 떨어졌다. 
 
[시나리오는 시나리오에서 끝내야죠. 싸우고 싶다면 ‘시나리오’에서 싸우세요. 더이상 ‘미식협’이 추해지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 
 
무려 두 명의 최상위 격 성좌가 그렇게 엄포를 놓자, 다른 성좌들도 뜻을 굽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미 ‘소원권’까지 발동한 상황.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몇몇 성좌들이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내게 해코지를 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주변의 여파가 잠잠해지자, ‘새벽 별의 여신’의 맑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다만, 한 가지 묻고 싶군요.] 
 
뜻밖의 질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구원의 마왕’. 당신은 왜 그런 ‘시나리오’를 우리에게 보여준 거죠?] 
 
마치 은하수를 담은 듯 깊은 여신의 눈동자가, 새로운 별을 발견한 것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내 눈에, 당신은 마치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내 눈이 어두워, 당신이 보여준 ‘시나리오’만으로는 그걸 짚어낼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괜찮다면 당신의 입으로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내가 보여준 ‘시나리오’가 조악했기 때문이라 말하지 않는 것은, 아마 그녀가 가진 타고난 겸손일 것이다. ‘새벽 별의 여신’ 곁으로 나를 향해 미소를 짓는 페르세포네의 모습이 보였다. 
 
······나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라더니, 이래서야 도움만 받는 꼴이다. 
 
‘미식협’의 모든 성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에 온 뒤, 내가 줄곧 원했던 상황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이들의 호의를 얻을 수 있을까. 
 
‘마왕 선발전’ 이야기를 대뜸 꺼낸다고 해서, 이들이 도와줄 거라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로 멍청한 생각이었다. 
 
「그 순간, 김독자는 처음으로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떠올렸다.」 
 
그것은 너무도 멀어, 아직 끝이 보이지도 않는 길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한 사람, 그 길을 걸었던 사람이 분명 있었다. 
수백 번이나 실패하고, 좌절하고, 절망했지만. 
나보다 먼저 그 길을 가려 했던 사람이 있었다. 
누구도 함께하지 않는 외길을 걸어갔던 사내를 떠올리며, 나는 쓰게 웃었다. 
그러자 아주 자연스럽게도 내가 해야 할 말이 떠올랐다. 
 
[나는······.] 
 
아니, 아마도 내가 해야 할 말은 그것뿐이었다. 
 
 
 
 
 
< Episode 45. 미식협 (7) > 끝

< Episode 46. 새로운 설화 >
 
 
 
 
 
Episode 46. 새로운 설화 
 
 
[나는,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설화’를 만들 겁니다.] 
 
내 말에, 장내의 모든 성좌들이 입을 다물었다. 
충격을 받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뉘앙스였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토르의 곁에서 술을 홀짝이던 거인 성좌였다. 
 
[그대가 말하는 새로운 ‘설화’란 게 대체 무엇을 말하는건지 모르겠군.] 
 
‘멸살법’에 따르면, 오래 전 ‘도깨비 왕’은 이런 말을 남겼다. 
 
「<스타 스트림> 아래 새로운 설화는 없다. 모든 설화는 오래된 설화의 날조일 뿐이다.」 
 
그 오랜 격언은 도깨비들의 겸손이자, 반드시 넘어서야 할 문구였다. 
내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성질 급한 성좌들이 먼저 나섰다. 
 
[그 설화에는 ‘소드마스터’가 있나요?] 
 
소드마스터라······. 
예상 밖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있습니다.] 
 
내 대답에 어떤 성좌들은 한숨을 내쉬었고, 몇몇 성좌들은 눈을 반짝였다. 그러자 또 다른 성좌가 물었다. 
 
[대마법사도 있는가?] 
[아마 나올 겁니다.] 
[환생자는?] 
[나옵니다.] 
[SSS급 헌터는? 참고로 나는 정당한 노력으로 보상을 얻는 친구가 좋다네.] 
[있을 수도 있겠군요. 전 노력은 싫어하지만.] 
[당연히 귀환자도 나오겠지?] 
 
재미라도 붙인 것인지, 각양각색의 질문들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미소를 짓는 이도 있었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표정을 짓든, 그들은 모두 하나의 이야기를 상상하고 있었다. 
 
아직은 만들어지지 않은 이야기. 
하지만, 어쩌면 존재하게 될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미식협의 모두가 그런 ‘상상’에 뛰어든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기 때문일까. 
한동안 홀에는 미식협 답지 않은, 온화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그 분위기가 쭉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해가 안 가는군요. 그런 이야기는 이미 많이 있지 않나요?] 
 
찬물을 끼얹은 것은, 그때까지 쭉 이야기를 듣고 있던 ‘새벽 별의 여신’이었다. 
 
[소드마스터, 대마법사, 환생자, 귀환자······ 뭐하러 그런 이야기를 또 만든단 거죠? 그런 양산품의 어디가 ‘새로울 수’ 있다는 것인지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새로운 소재만이 새로운 설화를 구성하지는 않습니다. 미식협이 좋아하는 ‘1세대 설화’ 또한 평범한 소재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까?] 
[지금 ‘1세대’의 예술품들을 당신의 설화와 비교하는 건가요?] 
[비교할 생각은 없습니다. 애초에 저는 예술을 하려는 게 아니거든요.] 
 
내 말에 몇몇 성좌들의 얼굴이 실망스런 기색이 스쳤다. 
‘새벽 별의 여신’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상스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요. 그래, 좋아요. 그렇다면 당신 이야기의 새로움은 뭐죠?] 
 
성좌들의 분위기가 다시금 변하고 있었다. 
역시, 이쯤에서 수를 던지지 않으면 안 되겠지. 
나는 그들 하나하나의 눈을 마주 보며, 고요한 진언으로 선언했다. 
 
[내가 만들 설화에는, ‘모든 시나리오의 끝’이 있을 겁니다.] 
 
모든 시나리오의 끝. 
일순간 대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굳었다. 
 
[어, 어떻게 감히······.] 
 
누군가가 중얼거렸고, 어떤 성좌들은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1세대’를 언급했을 때조차 일어나지 않았던 반발감이 객석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의 금기를 범했기 때문이겠지. 
 
나는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것으로 상황이 극적으로 변하지는 않겠지. 
다만, 성좌들의 뇌리에 내 이야기가 깊이 남긴 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거면 충분하다. 
 
[······미친놈이었군.] 
 
그런데, 아무래도 인상을 너무 깊이 쑤셔 박은 듯했다. 
다분히 적대감이 실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미식협에 온갖 미친놈들이 모인다는 건 알았지만, 이번에는 아주 제대로야. 지금 제정신으로 그딴 소리를 하는 거냐?] 
 
용의 머리를 가진 녹색의 인형(人形). 
그는 ‘성급한 늪의 포식자’였다. 
종전의 시나리오에서 [악령]으로 활동했던 성좌. 
한껏 비웃음을 머금은 입술로, 그가 계속해서 물었다. 
 
[그래서 우리한테 뭘 도와달라는 거지? 그 ‘시나리오’의 끝에 같이 가보자 뭐 이딴 말을 하는 것이냐?] 
[맞습니다. 저는 저와 함께 시나리오의 마지막에 도달할 성좌들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내 태연한 선언에, 성좌들의 안색이 변했다. 
이들 중에는 이미 ‘성운’에 가입한 존재들도 있다. 
그러니 지금 내 말은, 다분히 도발조로 들릴 것이다. 
 
[성운? 그쪽 성운은 이름이 뭐지?] 
[아직 이름은 없습니다. 정식 창설은 하지 않았거든요.] 
[흠······ 창설 멤버는 몇이나 되나?] 
[둘입니다.] 
 
조소를 머금는 성좌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기분이 조금 상했지만 나는 참았다. 
아무래도 이것이 미식협의 ‘예의’인 모양이다. 
어차피 저런 녀석들은 받아줄 생각도 없다. 
‘새벽 별의 여신’이 물었다. 
 
[하나는 그대일 테고, 나머지 하나는 누군가요? 그쪽도 성좌인가요?] 
[성좌는 아닙니다만······.] 
 
나는 지금 유중혁을 드러내야 할까 망설였다.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말했다. 
 
[혹시, 저 녀석인가?] 
 
무대의 패널에서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제1 무림>에서 진행 중인 무도 대회의 결승전이었다. 
 
―드디어 여러분들이 기다리시던 대결이 펼쳐집니다! 
 
사회자의 말과 함께 카메라의 포커스가 한 사내에게 맞춰졌다. 
 
―파천검성의 제자, 패왕 유중혁! 
 
역시, 유중혁은 무사히 결승까지 진출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상대는······? 
 
―무림 십대 고수, 빙화신녀 제갈령령(諸葛靈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입장하는 제갈령령은, 가벼운 박스 티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빙화신녀라면, 결코 쉽지 않은 상대였다. 
그녀는 차기 무림을 대표하는 ‘초월좌’ 중 하나. 본래 지금의 유중혁이라면 상대할 수 없는 고수였으니까. 
그동안 녀석의 ‘파천검도’에 얼마만큼의 진전이 있었느냐가 관건인데······. 
 
[크흠······.] 
 
누군가가 낸 침음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리고, 서서히 화가 치밀었다. 
 
······빌어먹을. 이걸 노리고 저 영상을 띄운 거구나. 
 
나는 무대의 구석에 멀거니 선 안나 크로프트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표정을 보니 그녀의 짓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저 영상을 띄운 이는······. 
 
[흐흐······ 필멸자들의 재롱잔치라······.]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웃었다. 
 
[이거야 원, 김이 다 빠지는군. 이제 막 설화급에 올라선 애송이와, 하찮은 필멸자 하나가 ‘이야기의 끝’을 논한 것이냐?] 
 
몇몇 성좌들이 기다렸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지금껏 늘어놓은 모든 말들을 부정하는 웃음이었다. 
어쩌면, 이런 식이 될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다. 
애초에 성좌들에게 기대한 게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하하핫, 저 성좌 수식언이 뭐였지? ‘허풍의 마왕’이라고 했나?] 
[명계의 여왕! 아주 유쾌한 친구를 데려오셨군!] 
 
화면 속에서 유중혁이 빙화신녀와 맞서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킬킬거렸다. 
 
[내가 보기엔 ‘시나리오의 끝’은커녕, 지금 저 시나리오도 힘겨워 보이는데 말이지.] 
 
나는 조용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나는 앞으로 유중혁이 어떤 길을 걷고 어떤 업적을 세울지 모두 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한 녀석이, 언젠가 이 빌어 처먹을 ‘미식협’을 모조리 쳐 죽여버릴 거란 사실도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곳 성좌들의 눈에, 지금의 유중혁은 그저 ‘하찮은 필멸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마침 잘됐군. 시나리오도 끝나서 심심하던 참이니까. 다들 내기하지 않겠나? 저 두 벌레들 중 누가 이길 것인지 말이야.] 
[오, 좋지 좋아!] 
 
‘성급한 늪의 포식자’의 제안에 다수의 성좌들이 동조했다. 
그러자,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서브 시나리오 ― ‘미식협의 내기’가 시작됩니다.] 
 
수많은 선택창이 성좌들의 눈앞에 떠올랐다. 
 
[난 저 암컷에게 5만 코인 걸지.]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호기롭게 외치자, 다른 성좌들도 껄껄 웃으며 하나둘 코인을 걸었다.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신입. 너도 걸어라.] 
[이미 걸었습니다.] 
[누구에게 얼마나 걸었지?] 
[10만 코인. 유중혁에게.] 
 
내가 자신의 두 배를 걸었다는 사실에,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눈을 부라렸다. 
 
[건방진 놈이군. 너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마치, 이 내기의 끝이 어떻게 될지를 아는 듯한 눈빛. 
멀리서 안나 크로프트가 고요한 눈으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유중혁의 사투는 어느새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호오, 꽤 하는 녀석들이군. 저 정도면 나도 화신으로 삼고 싶은데?] 
 
유중혁은 처음에는 밀리는 듯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다. 
예상 밖의 무위에 어떤 성좌들이 감탄을 흘렸다. 그러나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피운 살기에, 그들은 금세 입을 다물었다. 
 
역시 유중혁이다. 
 
예정보다 빠르게 ‘파천검성’과 조우한 덕에, 녀석의 [파천검도]는 본래의 수준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콰콰콰콰콰! 
 
경기장 내에서 파천의 강기가 폭발했고, 넝마가 된 빙화신녀가 피를 토하며 먼지 속을 나뒹굴었다. 이제 승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이야기가 예상밖으로 흘러가자, ‘성급한 늪의 포식자’의 표정도 변했다. 
 
[······흐음, 이렇게만 하면 재미없으니까.] 
 
불길한 예감과 동시에, ‘성급한 늪의 포식자’를 비롯한 미식협의 몇몇 성좌들에게서 스파크가 튀었다. 나는 그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달았다. 그들의 스파크는, 이내 화면 속 무도대회로 번져 가고 있었다. 
정확히는, ‘빙화신녀’에게로. 
 
―아아아아아악! 
 
갑자기 비명을 질러대는 ‘빙화신녀’의 모습에 사회자의 발언이 이어졌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놀란 것은 유중혁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괴물처럼 변이를 일으키는 빙화신녀의 모습에, 유중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츠츠츠츠츳! 
 
나는 서늘한 목소리로 ‘성급한 늪의 포식자’를 바라보았다. 
 
[이건 내기라고 하지 않았나?]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괴이쩍게 웃었다. 
 
[간섭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츠츠츠츠츳! 
 
다수의 성좌들이 공급한 개연성과 함께, 빙화신녀의 몸에 녹색의 비늘이 덮이고 있었다. 
유중혁도 나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성좌의 ‘강림’. 
 
[피스랜드]에서도 그랬고, [암흑성]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그때는 나와 유중혁이 함께 싸웠고, 지금은 아니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현재 대상과 연결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빌어먹을 자식, 이럴 때 뭘 하는 거야? 
유중혁이 전혀 내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지적 독자 시점]은 발동부터가 불가능했다. 
화면 너머에서, 빙화신녀에게 반쯤 강림한 녹색의 괴룡이 포효했다. 
 
성급한 늪의 포식자. 
 
행성 ‘셀레게돈’의 태고신인 녀석은, 나와 같이 설화급 초입의 격을 지닌 성좌였다. 
하지만 그간 쌓아온 설화의 숫자가 나와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에, 가진 역량은 나보다 훨씬 위였다. 
 
―콰아아아아앙! 
 
포식자의 숨결 한 번에, 무도 대회장의 일부가 반파되었다. 
아마 그 짧은 사이 빙화신녀와 배후 계약을 마친 모양. 
화신체와의 동조율이 낮아 제대로 된 힘을 내지는 못하겠지만, 저 정도의 개연성을 지원받아 강림했으니 무도 대회를 끝장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아무리 지금의 유중혁이라고 해도, 저 정도로 설화를 쌓은 설화급 성좌를 상대하는 건 힘들었다. 
 
[불안한 표정이군요. 자신의 동료를 믿지 않는 건가요?] 
 
곁을 돌아보니, 페르세포네가 평소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믿지 않느냐고? 
물으나 마나 한 이야기다. 
툭하면 죽는 저 개복치 녀석을, 믿을 수 있을 리가······. 
 
[믿습니다.] 
 
그럼에도 왜일까, 내게선 잘도 그런 대답이 나왔다. 
내 자연스러운 대답에, 페르세포네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애초에 저 녀석을 믿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나는 화면 속의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패배하고, 부러지고, 몇 번이고 절망해도. 
그래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녀석. 
 
저놈을 안 믿는다면, 애초에 누굴 믿을까. 
 
설령 이번 회차가 실패한다고 해도······. 
녀석은, 언젠가 반드시 이 세계의 결말을 볼 것이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판돈을 올리죠. 100만 코인 걸겠습니다.] 
 
 
 
 
 
< Episode 46. 새로운 설화 > 끝

< Episode 46. 새로운 설화 (2) >
 
 
 
 
 
[성좌, ‘구원의 마왕’이 화신 ‘유중혁’에게 100만 코인을 걸었습니다.] 
 
장내에 울려 퍼지는 시스템 메시지에, 모든 성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누가 보아도 불리한 싸움에 돈을 건다는 것. 아무래도 내 행위는 몇몇 성좌들의 흥미를 산 모양이었다. 
 
[성좌, ‘목요일의 천둥’이 당신에게 호감을 보입니다.] 
[성좌, ‘새벽 별의 여신’이 당신에게 호감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극소수의 성좌들일 뿐. 
대부분의 성좌들은, 그저 달아오른 도박판의 열기에 휩쓸릴 뿐이었다. 
 
[하하핫! 미친놈이군! 그렇다면 나도 50만 코인을 걸겠다!] 
 
처음부터 빙화신녀의 편을 들었던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구경만 하던 다른 성좌들도 하나둘 참전하기 시작했다. 
 
[성좌, ‘고요한 섬의 미식가’가 화신 ‘제갈령령’에게 2만 코인을 걸었습니다.] 
[성좌, ‘하얀 성의 주인’이 화신 ‘제갈령령’에게 3만 코인을 걸었습니다.] 
······. 
 
메시지들은 우후죽순으로 쏟아졌다. 
대부분은 빙화신녀 제갈령령에게 코인을 거는 메시지들. 
유중혁 쪽에 코인을 건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화신 ‘유중혁’에게 30만 코인을 걸었습니다.] 
 
······응? 
반사적으로 페르세포네를 돌아보자, 그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조금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음? 무엇이 괜찮으냐 묻는 건가요?] 
 
돌아온 반문에 할 말이 없어진 것은 나였다. 
하긴, 페르세포네 쯤 되면 30만 코인 정도 거는 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날 대신해 참견한 이가 있었다. 
 
[험, 할망구. 그렇게 비자금 막 걸어대면 하데스가 잔소리 안 하는가?] 
[저는 할머니가 아니니까 ‘양산형 제작자’께서는 말을 삼가시죠.] 
[큼, 그만큼 나이 처먹었으면 할망구지 뭘······.] 
[타르타로스에 처박히기 싫으면 입 조심을······ 잠깐만, 설마 당신도 걸었나요?] 
 
페르세포네의 물음에 ‘양산형 제작자’가 히죽 웃었다.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화신 ‘유중혁’에게 15만 코인을 걸었습니다.] 
 
‘양산형 제작자’가 나를 보며 말했다. 
 
[난 이번달 ‘도깨비 보따리’ 정산금이 신통치 않아서 많이 걸진 못하네.] 
 
실제로 그는 정확히 내가 산 [에오렌의 검] 만큼의 가격을 걸었다. 
아마 수수료를 빼면 저 정도 순이익이 남았을 테니까. 
어쨌거나, 한두 푼이라도 이쪽에 걸어줬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덕택에, 더욱 흥분한 성좌들이 마구 코인을 걸어대고 있었다. 
 
[성좌, ‘환희와 축제의 여신’이 화신 ‘제갈령령’에게 5만 코인을 걸었습니다.] 
 
내기에 걸린 코인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어느새 600만 코인을 돌파했다. 그쯤 되자 ‘미식협’의 어떤 성좌들이라도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죽여! 빨리 죽여버리라고!] 
[코인 뺏기면 죽여버린다!] 
 
투기장에 온 인간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모습들······. 
그만한 ‘이야기’를 겪었음에도 이런 일에 흥분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 마음을 읽은 듯, ‘양산형 제작자’가 웃었다. 
 
[그만한 ‘이야기’들을 겪었으니 이런 ‘이야기’에 더욱 굶주리는 거야.]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인간이든 성좌든, 이야기 앞에서는 모두 어린아이일 뿐이니까. 그런데, 승산은 있는 건가?] 
[혹시 불안해지셨습니까?] 
[크험,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승산이 없으면 만들어야죠.] 
 
정확히 말하면, 이건 배수의 진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여기서 유중혁이 죽는다면, 이번 회차는 망하게 된다. 
어차피 상황이 그렇게 돌아간다면 제대로 결착을 보는 편이 낫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우리는 지지 않을 것이다. 
 
[현재 대상과 연결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어쭈, 유중혁······ 여전히 그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하지만 방법이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유.” 
 
[바앗.] 
 
기다렸다는 듯, 비유가 손을 움직여 내 눈앞에 개인 패널을 띄워 주었다. 
곧이어 화면이 펼쳐졌다. 
 
―크라라라라라라라! 
 
괴상쩍은 울음을 토해내는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며 끔찍한 독무(毒霧)를 뿜어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악! 
 
살포된 연기에 닿은 무림인들이 통째로 산화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강림 상태로 보아, ‘성급한 늪의 포식자’는 대충 삼분의 일을 상회하는 수준의 ‘격’을 사용하고 있는 듯했다. 말이 삼분의 일이지, 대회장을 초토화시키기고도 충분히 남는 수준이었다. 
주변 성좌들이 개연성을 지원해준 것도 컸다. 
 
드드드드드드! 
 
괴룡의 발길질에 대회장의 지반이 모두 갈려 나갔다. 무지막지한 파괴력이었다. 하지만 [피스랜드]때나 [암흑성] 때만큼은 아니었다. 
그때는 무려 ‘이계의 신격’이 강림 했었으니까. 
그러나, [피스랜드]나 [암흑성]때보다 상황이 낫다고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피스랜드] 때는 ‘역설의 백청’ 키리오스가 있었고. 
[암흑성] 때는 ‘고려제일검’ 척준경이 있었다. 
 
······지금은 누가 있냐고? 
 
[성좌, ‘구원의 마왕’이 화신 ‘유중혁’을 바라봅니다.] 
 
내 메시지에 유중혁이 귀찮은 듯 인상을 찌푸렸다. 
 
“······김독자. 일은 끝났나?” 
 
[성좌, ‘구원의 마왕’이 아직 진행 중이라고 말합니다.] 
 
“아직도?” 
 
순간, 유중혁의 눈동자에 의심의 그림자가 스쳤다. 
‘성급한 늪의 포식자’를 노려보던 유중혁이 물었다. 
 
“혹시······ 네놈 때문에 저런 게 나타난 건가?” 
 
눈치 빠른 자식. 
 
“······김독자!” 
 
그야말로 엄청난 분노였다. 
나는 사과의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화신 ‘유중혁’에게 1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필요 없다!” 
 
콰콰콰콰콰콰! 
 
그리고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움직였다. 
행성의 모든 늪지대를 관할하는 태고의 도마뱀. 그 도마뱀의 등허리에는, 한때 빙화신녀였던 존재의 머리가 불쑥 솟아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 
 
자신의 신체를 빼앗긴 화신의 끔찍한 비명. 그 비명을 전주 삼아 달려온 도마뱀이 유중혁을 향해 거대한 꼬리를 휘둘렀다. 
 
츠츠츠츳! 
 
도마뱀의 꼬리에 스친 것만으로도, 유중혁의 몸을 감싸던 호신강기가 큰 타격을 입었다. 
 
“큭······.” 
 
아직 유중혁은 초월형 2단계에 오르지 못한 듯했다. 하긴, 아무리 유중혁이라도 2주만에 초월형을 한 단계 끌어 올리는 건 무리였겠지. 
1단계 상태로 빙화신녀를 저렇게 몰아붙인 것만도 악마의 재능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간은 많지 않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빙의를 요청합니다.] 
 
유중혁은 이미 몇 번이나 ‘전지적 독자 시점’을 겪어 봤으니, 이렇게만 말하면 무슨 뜻인지 알아 들을 것이다. 
그런데, 유중혁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싫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이대로 가면 모두 죽는다고 말합니다.] 
 
“나는 죽지 않는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유중혁에게 강림해 [전인화]를 사용한다고 해도, 저 괴물을 쓰러트릴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다. 지난 번처럼 [제4의 벽]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건 정신계 스킬을 사용하는 성좌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쿠오오오오오! 
 
유중혁이 재빠른 발놀림으로 공격을 피해 나가자, 열 받은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다시 한 번 독무를 준비했다. 입가에서 터지는 스파크의 수위로 봐서, 이번에는 정말 엄청난 공격이 밀어닥칠 듯했다. 
나는 유중혁을 재촉했으나, 유중혁은 요지부동이었다. 
 
“가서 네가 할 일이나 해라, 김독자.” 
 
예상 밖의 사태에 나는 당황했다. 
아니, 이 자식이 오늘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지? 
나는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된 거, 무도 대회가 망하더라도 다른 손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자리에, 우릴 도와줄 강자는 하나 뿐이다. 
 
파천검성 남궁민영. 
 
그녀는 키리오스나 척준경에게도 밀리지 않는 실력자니까, 저 괴물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객석에 앉아 만두를 먹고 있는 파천검성을 발견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내 메시지에도, 파천검성은 부지런히 만두만 씹을 뿐이었다. 
가끔 곁에 다리를 모으고 앉은 파천신군의 입에 만두를 넣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의 바로 아래 객석에서는, 장하영과 한명오도 나란히 앉아 구역꾸역 만두를 처먹고 있었다. 
······아니 이 인간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안달난 나는 다시 한 번 메시지를 보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유중혁이 반응한 것은 그때였다. 
 
“······신유승. 듣고 있나?” 
 
그 말과 함께, 비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앗?] 
 
“김독자의 화면을 꺼라.” 
 
비유가 곤란하다는 듯 유중혁을 마주보았다. 
신유승의 기억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면 이 둘은 꽤나 복잡한 관계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환생 전의 이야기고, 지금은 다르다. 
이제 내 도깨비가 된 비유가 유중혁 녀석의 말을 들어줄 이유가 없다, 이거야. 
그런데, 내 어깨에 올라타 있던 비유가 갑자기 미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바앗, 바아앗······.] 
 
“······비유?” 
 
[바아앗······, 쿠······쿠울······.] 
 
터무니없는 연기와 함께, 비유가 스르르 잠에 빠져드는 시늉을 했다. 
동시에 개인 패널 화면이 꺼지고 유중혁의 모습이 사라졌다.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비유가 왜? 
‘멸살법’의 수정본에도 이런 상황에 대한 언급은 없었는데? 
 
―우와아아아아아! 
 
불현듯 터져 나온 함성에, 나는 무대 쪽에 설치된 패널로 시선을 돌렸다. 
 
[저것은······?] 
 
놀란 성좌들이 하나 둘 몸을 띄워 패널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어느새 페르세포네와 ‘양산형 제작자’도 패널을 향해 바짝 다가가 있었다. 백여 명에 달하는 성좌들이 동시에 패널 앞으로 모여드는 바람에, 화면은 완전히 가려지고 말았다. 
 
[아니, 잠깐만! 좀 비켜봐요!]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 했지만 성좌들의 결집이 너무나 단단했다. 
내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화면이 번쩍이며 내려치는 천둥 소리뿐. 
 
콰르르르릉! 
 
하지만, 소리만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파천검뢰(破天劍雷). 
내가 훔쳐 썼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진정한 검의 뇌격이었다. 
 
―갸아아아아아악! 
 
엄청난 타격을 입은 듯, ‘성급한 늪의 포식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저만한 수준의 무공이라면 보지 않아도 답은 뻔했다. 
 
다행히 파천검성이 나섰구나.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파천검성이 나섰으니, 유중혁은 무사할 것이다. 
덕택에 대회는 무산되겠지만······ 유중혁이 죽는 것보다야 백 배 천 배 나은 결말이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가 외쳤다. 
 
―오, 파천검성의 제자! 
―파천검희(破天劍嬉)다! 
 
······파천검희? 
 
[화신의 무공이라고 얕볼 것이 아니었군.] 
[허, 어떻게 저런······ 고작 초월좌의 힘으로······?] 
[하하핫, 재미있는 능력이군. 혹시 <아스가르드>의 그놈이 벌인 짓인가?] 
[내 취향은 아니군요.] 
 
알 수 없는 진언들이 홀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경악합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즐거움에 몸부림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분통함에 눈물을 흘립니다.] 
 
채널에서도, 연회 홀에서도. 
범람하는 메시지 속에 나는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내 코인! 안 된다! 내 코인······!] 
[으아아아아아아!] 
 
아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나는 숨을 힘껏 들이켠 뒤, ‘격’까지 발동해서 성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간신히 패널의 앞까지 도달했을 때, 화면에서 다시 한 번 엄청난 뇌격이 내리쳤다. 
 
꽈르르르릉! 
 
강력한 뇌전에 화면 전체가 하얗게 물들었다. 
빛은 천천히 사그라들었고,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까맣게 타버린 잿빛의 가루들이 눈처럼 흩날렸다. 
그 눈을 맞으며, 한 사내가 고고히 서 있었다. 
 
오만한 표정으로 자신의 검을 치켜든 유중혁의 모습이었다. 
 
녀석의 발 아래에, 뇌전에 새카맣게 타버린 거대한 도마뱀이 축 늘어져 있었다. 도마뱀의 시체를 밟고 대회장의 한쪽 구석으로 다가간 유중혁은, 누구의 허락도 없이 그곳에 꽂힌 흑색 패도를 뽑아들었다. 
 
―이 대회에 2등은 없다. 
 
[흑천마도]였다. 
 
―그러니, 이건 내 것이다. 
 
뒤늦게,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도 대회 우승자가 결정되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는 모르겠다.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상황은 명백했다. 
파천검성이 아니라······ 유중혁이 해치웠다고? 
 
―우승자는 파천검희 유중혁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파천검희가 대체 뭔······? 
내 의문은 길지 않았다. 
귓가에 시스템 메시지가 폭주했기 때문이다. 
 
[서브 시나리오― ‘미식협의 내기’가 완료되었습니다.] 
[당신은 내기에서 승리했습니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기적의 도박사’를 획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동전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서브 시나리오 보상을 획득하였습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코인 현황을 확인했다. 
마치 그 숫자를 감당하기 버겁다는 것처럼, 삐걱거리며 올라가는 숫자들. 
 
[보유 코인 : 1,986,725 C] 
 
······. 
 
[보유 코인 : 2,790,876 C] 
 
······. 
 
[보유 코인 : 3,890,875 C] 
 
성좌들이 내건 눈먼 코인들이, 내 잔고 위로 폭설처럼 쌓이고 있었다. 
 
 
 
 
 
< Episode 46. 새로운 설화 (2) > 끝

< Episode 46. 새로운 설화 (3) >
 
 
 
 
 
[보유 코인 : 5,490,875 C] 
 
끝없이 올라간 코인은, 마침내 정점을 찍고서야 멈춰섰다. 
나는 그 믿을 수 없는 숫자에 몇 번이고 눈을 의심했다. 
 
[······젊은이, 얼마 벌었나?] 
 
곁을 돌아보니, 멍한 얼굴의 ‘양산형 제작자’가 보였다. 
이 영감님도 아까 15만 코인을 걸었으니, 분명 상당한 수입을 거뒀을 것이다. 나만 해도 최소 5배의 배당인 셈이니······.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부러워합니다!] 
[성좌, ‘심장을 노리는 고리대금업자’가 당신의 코인을 탐냅니다!] 
 
늘 고고한 표정을 짓던 페르세포네조차 입 꼬리를 실룩이고 있었다. 
참고로 명계의 여왕님은 30만 코인을 걸었다. 
······명계도 한 몫 톡톡히 챙겼겠는데?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된다!] 
 
우리 셋을 제외한 대다수의 성좌들은 크게 절망한 얼굴들이었다. 
표정만 봐도 다들 얼마나 코인을 걸었는지 알 만 했다. 
심심풀이로 소액의 코인을 걸었던 성좌들은 그저 아쉽다는 표정들이었지만, 10만 코인 이상 걸어댄 성좌들은······. 
 
[으아아아아아!] 
 
분노로, 맛이 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파산할 정도로 걸어댄 성좌도 있는 모양이었다. 
예컨대, 저 녀석. 
 
[성좌,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당신을 향해 엄청난 적의를 드러냅니다.] 
 
쿠구구구구! 
 
[저 놈 잡아!] 
 
‘성급한 늪의 포식자’를 비롯한 코인을 잃은 성좌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코인과 함께 이성마저 잃어버렸는지, 당장이라도 나를 한강물에 처박을 기세였다. 
눈치를 보던 성좌들이 내 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은 성좌도 있었다. 
명계의 여왕, 페르세포네였다. 
 
[다들 물러서세요. 대체 어디까지 추해질 셈인가요?] 
 
차가운 밤공기를 연상시키는 ‘격’이 울리자, 다가오던 성좌들도 주춤거렸다. 하지만 몇몇 성좌들은 밤바람 정도로는 식힐 수 없을 만큼 흥분해 있었다. 
 
[명계의 여왕! 지금 코인 좀 땄다고 그러는 거요?] 
[당신한텐 볼 일 없으니 비키시오!] 
 
분위기가 격앙되자, 그때까지 지켜보고 있던 고위급 성좌들도 끼어들었다. 
 
[모두 예의를 지키세요.] 
 
페르세포네와 친분이 있는 ‘새벽 별의 여신’이었다. 
하지만 이미 눈깔이 돌아가버린 ‘성급한 늪의 포식자’는 주저하지 않았다. 
 
[······예의? 예의는 쥐뿔······!] 
 
코앞까지 다가온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격’을 발출하자, 다른 성좌들도 동시에 ‘격’을 터트렸다. 허공에 터져 나온 강력한 스파크와 함게 ‘격’의 충돌이 예고되려는 바로 그 순간. 
 
[성좌 ‘구원의 마왕’이 사용한 소원권이 효력을 발휘합니다.] 
 
츠츠츠츠츳! 
 
홀 전체를 뒤덮는 눈부신 스파크가 튀며, 흥분한 성좌들의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다들 주춤거리는 사이, 홀의 천장에 포탈이 열렸다. 
포탈 너머에서 불길한 아우라가 넘실대고 있었다. 
 
‘이계의 신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그에 못지 않은 엄청난 것이 있음은 분명했다. 
누구지? 이 정도면 분명 최고위급 성좌나······. 
 
쿠구구구구······. 
 
대기를 찢는 듯한 폭음과 함께, 낯선 존재가 포탈을 뚫고 나왔다. 
현묘하기 짝이 없는 아우라를 온몸에 휘감은 존재. 
그러나 그 존재는 신격도, 성좌도 아니었다. 
마술사 같은 시커먼 복장에, 고풍스러운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사내. 
 
[······대도깨비?] 
 
대도깨비였다. 
 
[오랜만이군요, 성좌 여러분.] 
 
단 한 마디에,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강압적인 침묵이었다. 격을 발출하던 성좌들도, 소리를 질러대던 성좌들도 모두 숨을 죽였다. 
 
[<스타 스트림>의 규율이 ‘미식협’의 모든 성좌들을 속박합니다.] 
 
츠츠츠츠츳! 
 
이 자리의 모든 성좌들은 속박할 수 있을 정도의 개연성. 
아무리 채널의 운영권을 가졌더라도, 보통의 도깨비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으, 으으어······.] 
 
고위급 성좌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던 ‘성급한 늪의 포식자’조차,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나는 원작에서 저 도깨비의 묘사를 본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화신들은 도깨비의 계급이 네 가지 뿐이라 생각한다. 하급, 중급, 준상급, 그리고 상급. 하지만, 그들 위에도 도깨비들은 존재한다.」 
「<스타 스트림>의 도깨비들을 거느리는, 십이 색의 뿔을 가진 도깨비들의 수좌(首座)들.」 
 
도깨비의 머리에 돋아난, 일곱 개의 붉은색 뿔. 
이 <스타 스트림>은, 그들을 ‘대도깨비’라 부른다. 
 
[죄송하지만, 파티는 여기서 끝입니다.] 
 
 
* 
 
 
한창 ‘멸살법’을 읽을 적, 나는 성좌들과 도깨비들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 
 
도깨비들이 아무리 특수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고위급 성좌 쯤 되면 도깨비 한두 마리 쯤 쳐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런데 그만한 힘을 가진 성좌들도, ‘도깨비’만큼은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 아무리 짜증나는 시나리오를 열더라도, 결코 도깨비를 죽이는 법은 없다. 
 
······왜냐고? 
 
그 이유가, 지금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츠츠츠츠츠!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미식협’ 전체를 옭아매는 개연성의 그물이 펼쳐졌다. 이제껏 본 적 없는 밀도 높은 스파크. 
 
이 또한 ‘설화’의 힘이었다. 
아마도,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에게서 빌린 ‘설화’. 
 
설화급이든 위인급이든, 여기서 나가려고 하면 이 스파크의 폭풍에 휘말려 소멸할 것이 분명했다. 
‘목요일의 천둥’이나 ‘새벽 별의 여신’ 같은 고위급 성좌들 조차, 한껏 불쾌한 기색만 내비칠 뿐 어떤 불평도 하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페르세포네였다. 
 
[대도깨비 ‘하롱’. 오랜만이군요.] 
 
그러자 대도깨비가 이쪽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간만입니다. 명계의 여왕.] 
[‘이야기의 왕’께서는 잘 계신가요?] 
[왕께서는 무탈하십니다.] 
 
상대가 상대이기 때문일까, 페르세포네의 표정에도 이제껏 찾을 수 없었던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이곳엔 무슨 일로 온 거죠? 게다가 집행부의 도깨비들까지 이끌고······.] 
 
언젠가 보았던 [집행부]의 도깨비들이, 대도깨비의 배후에 전열을 세우고 있었다. 그들이 발산하는 무시무시한 기세는 ‘미식협’의 성좌들 못지 않았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집행부의 도깨비들은 언젠가 ‘성좌’였던 존재들이니까. 
대도깨비는 페르세포네의 말에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조용한 눈으로 성좌들을 쓸어 보았다. 
 
[‘코인’을 대출해가신 성좌님들을 좀 모셔가야겠습니다.] 
[······코인?] 
 
그 순간, 신음을 흘린 몇몇 성좌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양산형 제작자’가 이해했다는 둣 중얼거렸다. 
 
[정말 미련한 자들이로군······.] 
 
아무래도, 이번 도박판에 끼기 위해 도깨비들에게 코인을 빌린 성좌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우습게도, 개중에는 ‘성급한 늪의 포식자’도 끼어있었다. 
 
[으으으······ 비켜, 비켜라!] 
 
그는 대도깨비가 펼친 개연성의 그물을 찢기 위해 스파크가 튀는 벽으로 달려들었다. 
 
츠츠츠츠츳! 
 
[끄아아아아악!] 
 
대도깨비의 그물은 강력했다. 스파크의 그물에 손이 닿는 순간, ‘성급한 늪의 포식자’는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달려든 집행부의 도깨비들이 그의 화신체를 간단히 구속했다. 
 
[놔라, 이거 놔!] 
 
줄줄이 엮여 나가는 성좌들을 보며, 나는 왜 하필 지금 이곳에 도깨비들이 나타난 것일지 생각했다. 
정확한 연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 ‘소원권’의 개연성이 영향을 끼친 게 아닐까 싶었다. 
이 세계에서 도깨비는 ‘개연성’에 가장 예민한 종족이니까. 
순식간에 모든 채무좌(債務座)들을 구속한 대도깨비가 포탈 너머로 그들을 이송하기 시작했다. 
이제 이곳엔 볼 일 따위 없다는 듯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인사도 남기지 않은 대도깨비는, 그저 몇몇 성좌들을 경고하듯 노려보다가 자리를 떴다. 
그런데 포탈이 닫히려는 마지막 순간, 대도깨비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 서늘한 눈동자 너머로, 누군가가 내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너무 시끄럽게 굴지 말거라, 아가야. ‘왕’께서 너를 보고 계시니.」 
 
 
* 
 
 
대도깨비가 다녀간 후, 미식협은 폐회했다. 
파티가 그런 식으로 끝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시, 각자의 별자리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나는 연회 홀이 혼란한 틈을 타, 조용히 성 밖으로 빠져 나왔다. 
 
상당 수의 성좌들이 관리국으로 끌려갔지만, 여전히 내게 적의를 보이는 성좌들도 남아 있었다. 그러니 녀석들이 내 뒤를 캐려하기 전에 이곳을 뜰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오로성의 입구에서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어떻게 돌아가지? 
 
안내인도, 마차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지체하다가는 자칫 다른 성좌들에게 붙잡힐 수도 있는데······. 
그때, 성의 모퉁이에서 엔진 소리와 함께 뭔가가 달려왔다. 
말끔한 유선형의 몸체를 가진 고급 스포츠카. 
 
‘SSS급 페라르기니’를 연상케 하는 자동차였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그 차를 만든 게······. 
끼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스포츠카가 내 앞에 멈춰섰다. 
창문이 열리자, 허허로운 백발에 선글라스를 걸친 노인이 나타났다. 
 
[타게, 젊은이.] 
 
‘양산형 제작자’였다. 
 
 
* 
 
 
뒷좌석을 여는 순간, 차체는 중심이 길어지며 리무진의 형태로 바뀌었다. 
나는 그 기묘한 광경에 순수하게 감탄하며 뒷좌석에 올라탔다. 
 
이거라면 몇 명이든 탈 수 있겠는데? 
혹시 이 차도 팔려나? 
이제 돈도 있겠다······. 
 
탄탄한 방마(防魔) 소재로 만들어진 차체는, 외부 뿐만 아니라 내부도 준수했다. 
나는 리무진 냉장고에 있던 아이스티를 쪼록 마시며 차 안 곳곳을 살폈다. 
운전석에는 ‘양산형 제작자’가, 그리고 조수석에는 ‘페르세포네’가 앉아 있었다. 페르세포네는 아까부터 누군가와 통신을 나누는 중이었다. 
어쩌면, 아까 나타난 ‘대도깨비’와 관련된 것일지도 모른다. 
 
“양산형 제작자,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질문이 있습니다.” 
 
[흐음, 뭔가?] 
 
“······왜 이 여자가 같이 있는 겁니까?” 
 
나는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안나 크로프트’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러자 ‘양산형 제작자’가 히죽거렸다. 
 
[허허, 갈 때 태워주기로 약속했었네. 너무 싸우지들 말게.] 
 
몹시 불쾌한 상황이었지만, 차도 얻어 타는 마당에 불평할 수도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동행인들을 살폈다. 
뒷좌석에는 나를 포함한 아스가르드 3인방이 타고 있었다. 
지쳐 쓰러진 이리스와, 기절한 셀레나 킴까지. 
그들의 상태를 살피던 안나 크로프트가 문득 내쪽을 보며 말했다. 
 
“······당신이 돕지 않았어도, 이리스는 살았을 겁니다.” 
“알아. 아마 ‘목요일의 천둥’이 살려줬겠지. 안 그래?” 
 
내 말에, 안나 크로프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안나 크로프트는 누구보다 잔인한 여자지만, 자신의 것이 된 ‘사람’만큼은 잃지 않는다. 실제로 원작에서 안나 크로프트가 벌인 비슷한 이벤트에서도, 안나의 동료들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나리오를 통해 각성의 계기를 얻었을 뿐······. 
죽은 것은 다른 사람들이었다. 
 
“이리스가 좋은 배후성을 얻을 기회였는데, 당신이 다 망쳤습니다. 내가 본 미래는 결코 이렇지 않았는데······.” 
“그 애도 그딴 식으로 배후성을 얻고 싶진 않았을 거야.” 
“성좌인 당신은 모릅니다.” 
 
[쯧쯧. 사이 좋게 지내라니까, 안 되겠구만.] 
 
리무진의 형태가 변하더니, 내 좌석이 괴이한 움직임을 보였다. 시야가 한바퀴 도는가 싶은 순간, 나는 어느새 페르세포네가 있던 조수석으로 와 있었다. ‘양산형 제작자’가 나와 페르세포네의 자리를 바꾼 것이다. 
떽떽거리는 게 듣기 싫었던 모양인지, 앞좌석과 뒷좌석 사이에 방음벽까지 세워져 있었다. 
‘양산형 제작자’가 말했다. 
 
[성좌들 뿐만 아니라 화신들과도 사이가 나쁘군 그래. 너무 적을 많이 만들지 말게.] 
 
“저도 적을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나는 여기에 적이 아니라 ‘동료’를 구하러 왔다. 
결과적으로는 이 모양 이 꼴이 지만······. 
‘양산형 제작자’는 품 속에서 전자담배를 꺼내 물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가진 설화에서는 분노가 느껴져. 이 세계와, 성좌들에 대한 강한 분노가.] 
 
나는 뭐라 말을 하려다 도로 입을 다물었다. 
 
[오늘 못 볼 꼴을 많이 봤다는 걸 아네.] 
 
“그렇지도 않습니다.” 
 
‘양산형 제작자’가 허허 웃었다.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품 속에서 스마트 폰을 꺼냈다. 꺼진 화면 같은 어둠이 차의 전방을 뒤덮고 있었다. 그 어둠을 고요히 응시하던 ‘양산형 제작자’의 눈빛에, 아주 희미한 슬픔 같은 것이 스쳤다. 
 
[그래도, 그들을 너무 미워하진 말게.] 
 
약간의 사이를 두고 나온 말이었기에, 그의 말을 이해하는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모두,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던 것 뿐이니까. 쓰레기 같은 성좌든, 고귀한 성좌든······ 모두, 그저 ‘이야기’가 좋아서 저러고 있는 것 뿐일세.] 
 
설마 ‘양산형 제작자’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는 당황했다. 묘한 배신감 같은 것이 가슴 속을 덥혔다. 
 
“그렇다고 화신들의 삶을 짓밟아도 되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자기 ‘시나리오’를 하면 된다. 
남의 시나리오를 망칠 게 아니라, 다음 ‘시나리오’로 나아가면 된다. 
다른 ‘시나리오’에 눈길을 돌리고 정신을 파는 것은, 그저 현실을 도피하는 일일 뿐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스마트폰이 켜지며 ‘멸살법’의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화면에는 내가 마지막으로 읽던 문장들이 출력되고 있었다. 
내가 멍하니 그 문장들을 보고 있자, ‘양산형 제작자’가 물었다. 
 
[자넨 늘 그걸 보고 있군 그래. 빈 메모장에 뭐라도 쓸 참인가?] 
 
나는 그 물음에 답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이내 힘없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냥, 이걸 보면 마음이 안정되거든요.” 
 
멀리서 암흑 차원의 긴 어둠이 밀려나는 모습이 보였다. 
텅 비어있던 창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마침내, 돌아갈 시간이었다. 
 
 
 
 
 
< Episode 46. 새로운 설화 (3) > 끝

< Episode 47. 마왕 선발전 (1) >
 
 
 
 
 
Episode 47. 마왕 선발전 
 
 
미식협에 다녀온지도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그 일주일 동안, 나는 아주 바쁘게 움직였다. 
 
이제 ‘마왕 선발전’ 까지 남은 시간은 나흘 남짓. 
 
그때까지, 모든 준비를 끝마쳐야 했다. 
유중혁이 손에 넣은 [흑천마도] 외에도, 아직 무림에는 꽤 쓸만한 히든 피스들이 더 남아 있었다. 
나는 ‘멸살법’의 1차 수정본을 열어 히든 피스를 챙길 수 있는 서브 시나리오들을 뒤적거렸다. 
그동안 틈틈이 수정본을 읽어서 중요한 부분들은 대강 살폈지만, 여전히 빠뜨린 부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오자마자 되게 바쁘네. 얼굴 한 번 제대로 안 비추고.” 
 
품에 맞지 않는 큰 소매의 무도복을 걸친 장하영이 30분째 종종걸음으로 나를 쫓아다니며 궁시렁거렸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녀석을 노려보다가 물었다. 
 
“넌 훈련 안 하냐?” 
 
그러자 장하영이 입술을 샐쭉 내밀며 대꾸했다. 
 
“······나 열심히 하고 있거든?” 
“열심히는 무슨. 만두만 처먹고 있던데.” 
“너도 만두만 처먹으면서 폐관 수련 한번 해볼래?”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건가 싶었는데,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너 대회에서 3등 했다며? 별 일이네.” 
 
흠칫 어깨를 떨던 장하영이 짐짓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며 말했다. 
 
“별 것도 아니던데?” 
 
입꼬리를 실룩거리는 걸 보니 기분이 꽤 좋은 모양이다. 
뭐 때문에 그렇게 쫓아 다녔는지 알겠구만······ 솔직하지 못한 녀석 같으니. 
 
“상품은 받았어? [마혼단]이었지?” 
“응.” 
“줘봐.” 
“왜?” 
 
장하영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빼앗아가려는 거 아냐. 어차피 너 그거, 그대로는 못 먹잖아.” 
 
어두운 표정을 보니 유중혁에게도 이미 한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보나 마나 [흑천마도]를 뽑으며 이런 식의 이야기를 떠들었겠지. 
 
「그걸 그냥 먹으면 주화입마에 걸려 전신의 혈도가 모두 터져 죽는다. 여기서 그 ‘마혼단’을 안전하게 흡수할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 뿐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장하영이 이렇게 질색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싫으면 안 줘도 돼. 네가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거니까.” 
 
아직은 신뢰 관계가 충분치 않으니, 장하영이 나를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장하영이 작은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런 건 아냐. 어차피 너 아니었으면 얻지도 못했을 거니까.” 
 
톡,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에 작은 환약 한 알이 떨어졌다. 
이것이 바로 <제1 무림>의 3대 영약 중 하나, [마혼단]이었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기다려봐.” 
 
이 거무튀튀한 약은 과거 혈마교에서 1000명에 달하는 고수의 혼백을 정제해 만들었다는 끔찍한 전사(前史)를 가진 약이었다. 
단 한 알로 임독양맥(任督兩脈)을 타통하고 초일류의 공력을 얻을 수 있지만, 혼백들의 저주로 인해 복용자를 마기에 찌든 광인으로 만든다는 저주받은 환약. 
유중혁이야 본래부터 맛이 가 있는 녀석이니 논외로 치더라도, 장하영은 이걸 먹으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어디 보자······.” 
 
하지만 어떤 시나리오든 꼼수가 있듯, 저주받은 아이템이라고 해서 사용하지 못할 건 없다. 실제로 ‘멸살법’에서도 비천호리가 이 환단을 흡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는 그 장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세 알의 대환단(大還丹)만 있으면 돼. 결국 모든 건 균형과 조화야. 마기가 문제라면 정기를 공급하면 되는 거지.」 
 
세 알의 [대환단]을 [마혼단]과 함께 빻아서 섭취하면, 저주를 피할 수 있다. 
말은 쉽다. 
문제는 [마혼단]과 함께 3대 영약으로 손꼽히는 [대환단]을 대체 어떻게 구하냐는 것인데, 사실 나한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비유.” 
 
나는 비유를 불러 [도깨비 보따리]를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추천 상품] 목록에 [대환단]이 떠올라 있었다. 
과연 도깨비 녀석들 빅 데이터는 무서운 데가 있다. 
 
+ 
 
[추천 상품 목록] 
 
* 대환단 ― 200,000 C / 재고 : 5 
 
+ 
 
20만 코인이라. 
평소였다면 고민 좀 할 가격이었겠지만, 이제는 다르다. 
나는 일부러 화면을 공개 상태로 전환한 채 상품을 구매했다. 
 
[600,000코인을 소모하였습니다.] 
[‘대환단’ 3개를 구매하였습니다.] 
 
그러자, 채널 메시지들이 줄지어 떠올랐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과소비를 부러워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대환단의 성능을 궁금해합니다.] 
[몇몇 성좌들이 대환단의 성능을 알려준다면 500코인을 후원하겠다고 말합니다.] 
 
“유, 육십만 코인?!” 
 
지나가던 한명오가 개밥그릇을 든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마 파천신군의 식사를 준비하는 중이었던 모양이다. 
 
“자네······ 부자가 되었다는 말은 들었네만.” 
“마침 잘 됐네요. 이것도 가져가서 좀 빻아 주세요.” 
“이, 이건 뭔가? 영약 같은 건가?” 
“괜히 호기심에 드시진 말고요. 잘못 먹으면 마왕의 저주에 걸릴 겁니다.” 
 
마왕의 저주라는 말에 안색이 창백해진 한명오가 내게서 환약들을 받아 재빨리 갈아왔다. 네 알의 환단은 고운 가루가 되어 있었다. 나는 장하영을 향해 불쑥 그릇을 내밀었다. 
 
“나 가루약 못 먹는데.” 
“이번만 참아. 코 막고 물이랑 같이 삼켜.” 
“근데······ 이거 내가 먹어도 돼?” 
“나나 유중혁은 먹어도 크게 도움이 안 돼. 하지만 넌 다르지.” 
 
유중혁은 [마혼단]을 먹지 않아도 이미 충분한 만큼의 마력 운용 체계가 잡혀 있을 것이고, 나 같은 경우는 [어린 골드 드래곤의 망가진 심장]이 있다. 하지만 장하영은, 한창 마력 부족에 시달리는 중일 것이다. 
장하영이 계속해서 머뭇거려서, 내가 말했다. 
 
“안 먹을 거면 내놓든가. 하여간 배짱이 없어.” 
“먹을 거야!” 
 
호로록 약을 입에 털어 넣은 장하영이 물과 함께 쓴맛을 삼켰다. 
장하영이 그릇을 내려 놓자, 주변에서 기회만 보고 있던 파천신군이 달려들어 그릇을 열심히 핥았다. 
자신의 상태를 살피던 장하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별 느낌 없는데?” 
“효능은 내일 쯤 나타날 거야. 체내에서 환약의 기운이 어우러질 시간이 필요하니까.” 
 
알아 들었다는 듯, 장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한명오가 재차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이보게, 독자 씨.” 
 
그쪽을 돌아보자, 뭔가 예상했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혹시 이 차는······ ‘미식협’에서 받은 건가?” 
 
그가 말하는 ‘차’란, 장원의 한쪽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X급 페라르기니]였다. 
암흑 차원의 단층조차 가로지를 수 있는 늘씬한 검은색 차체를 보고 있자니, 문득 ‘양산형 제작자’의 말이 떠올랐다. 
 
―적을 너무 만들지 말게. 
 
내가 아는 ‘성좌’들과는, 확실히 다른 면이 있는 성좌였다. 
이 차를 공짜로 줬다면 더 괜찮은 기억으로 남았을 텐데. 
 
“미식협이 무슨 자선 단체라고 저런 걸 주겠습니까. 리스로 산 거예요.” 
“리스? 어, 얼마에······.” 
“한 달에 5만 코인이었나.” 
“5, 5만 코인? 자네 대체 코인을 얼마나 번 건가?” 
“대충 480만 코인 정도요.” 
 
480만 코인이라는 말에 장하영과 한명오의 입이 동시에 떡 벌어졌다. 
장하영이 물었다. 
 
“저기······ 넌 화신 더 안 구해?” 
“왜, 내 화신 하게?” 
 
내가 피식 웃으며 대꾸하자, 장하영이 소리쳤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그리고 난 이미 정해둔 성좌 있거든?” 
“성좌? 누구?” 
 
나는 살짝 긴장하며 물었다. 
장하영을 꼭 화신으로 거두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장하영이 이 시점에 엉뚱한 성좌를 배후성으로 고른다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그런데, 장하영이 뜻밖의 말을 했다. 
 
“구원의 마왕.” 
“뭐?” 
“난 꼭 그 사람 화신 할 거야.” 
 
강렬한 눈빛을 불태우는 장하영을 보며 이건 또 무슨 농담인가 싶었는데, 잘 생각해 보니 장하영은 아직도 내 수식언을 직접 들은 적이 없었다. 
원작에서는 눈치 하난 끝내주는 녀석이었는데······, 
아니, 애초에 내가 ‘구원의 마왕’일 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나는 문득 이 녀석을 놀려주고 싶어졌다. 
 
“걔가 너 받아주긴 한대? 연락은 해 봤냐?” 
“아직······.” 
 
얼굴을 붉히는 장하영을 보니, 정말로 내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뭔가 복잡한 기분이다. 
지켜보던 한명오가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설마 아직도 저 친구 수식언을 모르는 건가?” 
“몰라, 아저씬 알아?” 
 
내가 채 말리기도 전에, 눈치 없는 한명오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친구가 바로 ‘구원의 마왕’일세.” 
 
 
* 
 
 
그 후 이틀 간, 장하영은 나를 피해 다녔다. 
평소에는 게으름 피우기 바쁘던 녀석이 갑자기 무공 수련이랍시고 연무장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다. 그러다 보니 덩달아 스트레스를 받게 된 것은 혼자 연무장을 독차지하고 있었던 유중혁이었다. 
 
“또 쓸 데 없는 짓을 한 모양이군 김독자.” 
“······별 거 아냐.” 
 
유중혁은 별 대꾸 없이 [흑천마도]로 휘휘 바닥을 긁으며 연무장을 나갔다. 저건 기분 좋을 때 나오는 동작인데······ 자식, 새 칼 생겼다고 아주 신난 모양이다. 
연무장에서는 장하영이 더미를 두들기는 소리가 반복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 내가 밤마다 이불에 발차기를 하던 것과 비슷한 소리였다. 
 
“누가 성좌 아니랄까봐, 훔쳐 보는 취미가 있는 모양이구나.” 
 
돌아서자, 그곳에는 초장신의 여자가 서 있었다.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파천검성이 말했다. 
 
“‘님’을 붙이지 않으면 궁둥이를 때려주겠다.” 
“······파천검성님.” 
 
고작 단어 한 음절 때문에 유중혁 꼴이 될 수는 없다. 
 
“타르타로스에는 다녀 오셨습니까?” 
“아직. 하지만 네녀석 덕분에 ‘명계의 여왕’과 약속을 잡았다.” 
“다행이군요.” 
 
곧 동족을 만날 거란 기대 때문일까, 파천검성의 무표정한 얼굴에 언뜻 온화한 그림자가 스쳐갔다. 
그나마 그녀를 얻은 것이, 이번 여정의 수확이었다. 
파천검성은 ‘멸살법’ 전체에서 손에 꼽을 정도의 강함을 지닌 초월좌. 
그녀만 있다면, ‘마왕 선발전’도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허(許)한다.” 
“왜 장하영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신 겁니까?” 
“녀석은 재능이 있다. 잘 갈고 닦으면 새로운 종류의 초월을 달성할 가능성이 있어.” 
 
무슨 말인지는 안다. 
아마 파천검성도 장하영에게 깃든 ‘벽’을 느꼈겠지. 
하지만 그걸로는 이유가 안 된다. 
 
“저 녀석이 남자라는 건 아실 텐데요.” 
 
본래 [파천검도]는 여성에게만 전수되는 무공이다. 
유중혁은 어떻게 예외였다고 해도, 이 비인부전의 무공이 이렇게 많은 제자를 둔 적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다. 
 
“아직 애송이로군. 설화에는 본디 하나의 해석만 존재하지 않는다.” 
 
아리송한 말이었다. 
어쩌면 파천검성은 장하영이 전생에 여자였다는 걸 눈치챘는지도 모르겠다. 
파천검성의 이야기가 시작된 것은 그때였다. 
 
“예전에 알던 사내 놈이 생각났다.” 
“사내요?” 
“그래, 사내.” 
 
그 순간 나는 파천검성이 말한 ‘설화에는 본디 하나의 해석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완벽히 이해했다. 
‘사내’라는 말 하나에 과연 저 ‘사내’가 애인을 말하는 것인지 그냥 남자 사람 친구를 말하는 것인지 이토록 혼동이 오는 걸 보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그 ‘파천검성’한테 애인 따위가 있을 리가. 
 
“아주 잘 생긴 녀석이었다.” 
 
원작에서도 파천검성이 ‘사내’의 이야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뭔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혹시 장하영이 그 전 애인이랑 닮았다든가······ 그런 얘기는 아니겠죠?” 
 
일부러 장난치듯 말해본 건데, 뜻밖에도 파천검성은 진지하게 답했다. 
 
“잘 생긴건 닮았지.” 
 
이쯤 되니 혹시 유중혁을 받아줬던 것도 그냥 잘 생겨서 그랬던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내 실망감은 아랑곳 않고, 파천검성은 계속해서 말했다. 
 
“아주 잘 생겼지만, 너무 작아서 가엾은 녀석이었지.” 
“······작다고요?” 
 
나는 순간 그게 고도의 전 남친 까기일까 아닐까 생각하다가, 불현듯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경악했다. 
‘멸살법’에서 파천검성과 인연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중에서 ‘작다’는 말과 가장 어울리는 사람. 
 
아니, 잠깐만. 
설마 그 두 사람이 사이가 안 좋았던 게······. 
 
쿠구구구구! 
 
바깥에서 굉음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장원을 비롯한 청룡성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나와 파천검성이 동시에 연무장 밖으로 뛰어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유중혁도 이쪽을 보았다. 
 
“김독자.” 
 
하늘에, 시커먼 소용돌이가 나타나고 있었다. 
내가 아주 잘 아는 소용돌이였다. 
시나리오에 ‘재앙’이 나타났을 때만 열리는 저주 받은 배출구. 
유중혁이 낮게 침음하며 말했다. 
 
“······[그레이트 홀].” 
 
‘재앙 시나리오’는 본래 초반 시나리오 지역에만 나타나는 것. 
<제1 무림>에 뜬금없이 ‘재앙’이 출현할 리 없었다. 
20번대 이후의 시나리오 지역에서는 ‘재앙’이 출몰하지 않으니까. 
그런 지역에서, ‘홀’이 열리는 경우는 오직 하나 뿐이다. 
 
“······도망쳐라.” 
 
<제1 무림>에, ‘대멸망 시나리오’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Episode 47. 마왕 선발전 (1) > 끝

< Episode 47. 마왕 선발전 (2) >
 
 
 
 
 
<스타 스트림>에서 ‘멸망 시나리오’는 크게 두 종류다. 
첫 번째는 성운들로 인해 네임드화 되어, 일종의 신화(神話)가 된 대멸망 시나리오. ‘라그나로크’나 ‘기간토마키아’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불규칙적으로 발생하는 ‘멸망 시나리오’다. 
지금 눈앞에서 열린 [그레이트 홀]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성좌가 아니군.” 
 
휘몰아치는 하늘을 올려다 보는 파천검성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성좌가 아닌데 저런 기세를 풍긴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이계의 신격들이다.” 
 
쿠구구구구―! 
 
이제 나도 성좌가 되었기 때문일까. 
홀 너머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신격들의 힘을, 나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분명 나는 몇 번이나 저 녀석들의 일부를 마주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 내가 느끼는 감각은 차원이 달랐다. 
맹인은 태양을 보아도 눈이 멀지 않는다. 
나는 처음으로 내가 성좌가 되었다는 사실이 싫어질 지경이었다. 
유중혁이 중얼거렸다. 
 
“······왜 하필 지금 ‘멸망 시나리오’가 시작된 거지?” 
 
이미 1회차와 2회차를 겪은 유중혁은, 나처럼 <제1 무림>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도, <제1 무림>은 ‘이계의 신격’들에 의해 멸망한다. 
 
하지만 너무 이른 시점이었다. 
본래라면 빨라도 몇 년은 더 지나야 일어날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뭔가가 그 시점을 앞당겼다. 
뭘까. 대체 뭐가 잘못 되어서······. 
······잠깐만, 설마? 
유중혁 또한 마침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나를 향해 물었다. 
 
“······내 생각이 맞는 건가?” 
“그런 것 같아.” 
 
나는 긴장하며 대답했다. 
‘멸망 시나리오’는 화신들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시나리오. 
꾸준한 개연(蓋然)의 획득으로 인해 누적치가 채워지지 않으면, ‘멸망’은 결코 시작되지 않는다. 
 
츠츠츠츠츠츠! 
 
그리고 이 ‘청룡성’에서, 최근 그만한 개연성을 촉발한 일은 하나 뿐이었다. 
파천검성이 말했다. 
 
“무도 대회인가.” 
 
무도 대회. 
그곳에 ‘성급한 늪의 포식자’를 비롯한 여러 성좌들이 가세해 개연성을 지원했던 것이, 결국 재앙을 불러오는 기폭제가 된 것이다. 
 
[당신을 싫어하는 소수의 성좌들이 즐거워합니다.] 
 
빌어먹을 자식들. 
 
“김독자. 대체 거기서 무슨 짓을 벌이고 온 거냐?” 
 
미식협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유중혁이 내게 화를 냈다. 
나로서는 변명할 말이 없었다. 
이미 시작된 시나리오를 되돌릴 방법 따윈 없었으니까. 
 
[잠시 후 ‘멸망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이계의 신격’이 습격을 준비 중입니다!] 
[해당 시나리오의 비참가자들은 신속히 시나리오를 이탈하기 바랍니다!] 
 
하늘에서 들려온 메시지와 함께, 청룡성의 중심부 쪽에서 소란이 시작되었다. 
 
“미친! 저거 뭐야?” 
“도망쳐, 빨리!” 
 
다른 시나리오들과 달리, ‘대멸망 시나리오’는 참여의 선택권이 있다. 
우리처럼 서브 시나리오로 떠도는 화신들은 빠르게 지역 이탈을 감행하고 있었다. 무공 구결이 담긴 파일을 팔던 잡상인들도, 그 구결을 듣고 고수가 된 청룡성의 무림인들도······. 하늘 위에 홀이 나타난 순간 모두 표정이 달라졌다. 
저 ‘홀’ 앞에서 인간이 칭하는 ‘고수’나 ‘하수’의 개념은 완전히 무의미했다. 
 
“뭐야, 무슨 일······.” 
 
놀란 장하영과 한명오도 뒤늦게 장원 밖으로 뛰어나왔다. 
 
“탈출해야 되니까 빨리 준비해.” 
“헉······.” 
 
숨을 삼킨 장하영이 하늘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그레이트 홀]을 뚫고 나온 거대한 촉수 다발들이 있었다. 
[피스 랜드], 그리고 [암흑성]에서 내가 마주했던 그 ‘이계의 신격’들 중 하나가 틀림없었다. 
 
【산 것 들 의 이 야 기를 탐 할 것 이 다】 
 
음절들 사이로 배어 있는 지독한 존재감에 몸서리가 처졌다. 
맥락에 깃든 어마어마한 탐욕에, 도망치던 고수들이 소변을 지리며 주저앉았다. 
 
“으, 으아아아아아아!” 
 
진언만으로도 산것들의 정신을 붕괴시키는 거대한 혼돈. 
나는 물론이고, 유중혁이 아무리 강해졌다고 한들 지금 저런 놈과 맞부딪치는 것은 무리다. 
‘이계의 신격’은, 약한 개체조차 성좌들을 우습게 짓밟는 힘을 가지고 있다. 
[꿈을 먹는 자]를 상대했을 때처럼 ‘제4의 벽’을 통한 요행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멸망 시나리오’ 시작까지 30분 남았습니다.] 
 
여기서는,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차라리 잘 된 것인지도 모른다. 
 
“파천검성님.” 
 
내가 파천검성을 바라보자, 파천검성도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온전히 헤아릴 수 없는 표정이었다. 
 
「파천검성 남궁민영에게, <제1 무림>은 고향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저 ‘멸살법’에 쓰여 있던 문장들 뿐. 
그리고 그 문장들에 의하면, 파천검성은 딱히 이곳을 지킬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모두가 ‘고향’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 <제1 무림>은 그저 타락한 세계의 온상일 뿐이었다. 
인정을 잃고, 협의를 잃은 세계. 
 
「“무림이 멸망하기 훨씬 오래 전부터, 이미 무림은 멸망해 있었다.”」 
 
그렇게까지 말했던 파천검성이, 이곳에 남을 턱이 없었다. 
<제1 무림>은 이렇게 멸망할 것이다. 
정확히는, 그래야만 했다. 
 
“스승.” 
 
유중혁이 어서 떠나자는 목소리로 채근했다. 
그러나 왜일까, 파천검성은 움직이지 않았다. 
태산처럼 우뚝 선 파천검성은, 그저 고요히 서서 소로의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폭동과 탈주로 혼란에 빠진 도시의 정경. 그리고 그 정경을 뚫고 다가오는 한 무리의 인파. 
하나 하나가 이미 초월을 바라보거나, 초월에 도달한 고수들. 
그들의 전신에 어린 형형한 기운을 감지하자마자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눈치챘다. 
 
“파천검성, 오랜만이오.” 
 
청룡성의 세가주(勢家主)들이, 파천검성을 찾아왔다. 
 
 
* 
 
 
그들이 왜 이곳을 찾아왔는지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계의 신격’들이 무림을 찾아왔고, 멸망은 예정되었다. 
 
그리고 멸망 앞에 무림인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달아나거나, 맞서 싸우거나. 
잃을 것이 별로 없는 이들은 전자를 택하겠지만, 오래도록 이곳에 남아 터를 잡은 화신들은 다르다. 세력을 쌓고, 부를 구축하고, 설화를 만들고. 그래서 마침내 한 지역의 권력의 정점에 오른 자들. 
 
“파천검성.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오.” 
 
좌에서 우로, 각자 제갈세가, 모용세가, 사천당문, 황보세가, 그리고 남궁세가까지. 
<제1 무림>의 주축을 이루는 다섯 세력의 수장들이 모두 이곳을 찾다니, 아마 무림사 전체를 통틀어도 드문 일일 것이다. 
그들의 뒤쪽에는 거대 방파의 수장들도 끼어 있었다. 
 
“부탁하오, 무림을 위해 힘을 빌려주시오.” 
 
남궁민영은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펴며 답했다. 
 
“내 힘이 필요하다라······.” 
 
그 서늘한 목소리에, 세가주들 중 몇몇이 움찔거리며 물러났다. 
가장 앞서 나선 것은 눈치 빠른 제갈가의 가주였다. 
 
“부디 우릴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알 만 했다. 
현 무림 최고수를 자칭하던 빙화신녀가, 파천검성 당사자도 아니고 고작 그녀의 ‘제자’에게 패배했다. 
그것도 압도적인 실력의 격차로. 
아마도 무도 대회의 충격은, 쉬운 길만을 달려가던 무수한 고수들에게 경각심을 주었을 것이다. 
 
강림한 성좌조차 물리칠 수 있는 힘. 
 
낡은 초월의 길에 고수들은 다시 향수를 품었고, 찾아온 무림의 위기에 고수들은 그 길의 정점에 오른 인물을 떠올렸다. 
 
“사백조 어른, 부디 후손들을 굽어 주십시오” 
 
급기야, 파천검성 남궁민영의 본가였던 남궁가의 가주까지 가세했다. 
헌앙한 얼굴의 중년인. 
아마 저 자가 바로 십대 고수 중 하나인 남궁진천일 것이다. 
비록 절반 뿐이지만 파천검성에겐 저 세가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 때문인지, 고고하던 파천검성의 눈빛도 한순간 흔들렸다. 
더는 지켜볼 수 없었던 내가 앞으로 나섰다. 
 
“우습군요. 파천검성님을 먼저 내친 것은 당신들이 아닙니까?” 
 
보통이라면 이들의 공분을 사는 행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이들을 ‘마왕 선발전’으로 함께 데려가는 쪽을 궁리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파천검성 쪽이 더 시급하다. 
 
“한심하게도, 처음 성좌들과 도깨비들이 이곳에 방문했을 때 당신들이 한 짓을 모두 잊은 모양이군요.” 
“무슨······ 그대는 누구냐?” 
 
내 말의 진의를 깨달은 일부 세가주들의 안색이 일변했다. 
아마, 그들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무림의 정점에 군림하고 있던 파천검성이, 왜 몰락한 소로에서 장원을 여는 신세가 되었는지. 
그간의 사정을 모두 아는 유중혁만이, 내 말에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파천검성 남궁민영은 비뚤어진 외곬수지만, 협(俠)을 아는 자다. 
 
세파에 휩쓸리지 않기에 남을 탓하지 않고. 
명예를 추구하지 않기에 헛된 영욕을 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무림인들에게 이용을 당하며 살았고, 결국엔 이곳에 버려졌다. 
몰락한 무림의 상징으로 파천검성을 남긴 채, 세가주들은 자신들의 성을 쌓으며 무림을 집권해왔다. 
 
“남궁세가주, 당신도 마찬가집니다. 사백조라······ 지금까지 당신은 한 번도 파천검성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그건······.”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다면 이곳을 찾아올 수 없었을 텐데. 용감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군요. 파천검성이 왜 당신들 남궁세가와 결별하게 되었는지, 설마 모르는 겁니까?” 
 
거신족과 인간의 혼혈로 태어난 아이. 
어린 파천검성이 자라나며 겪었던 시련들을, 나는 이 세계의 그 누구보다, 어쩌면 유중혁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여자아이가 어찌······!」 
「거신족의 저주 받은 핏줄이다.」 
 
파천검성은 의문스러운 얼굴이었다. 
내가 그런 것들 어떻게 알고 있는지, 그녀는 의아할 것이다. 
평소였다면 위험한 발언이었지만 지금 그녀의 의문은 오히려 내게 이로웠다.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파천검성은 나를 따라올 테니까. 
 
“네놈이 뭘 안다고······!” 
“닥쳐라! 파천검성, 저 자는 대체 누구요!” 
 
흥분한 세가주들이 나를 위협하며 다가오자, 유중혁이 [흑천마도]를 뽑았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여기서 충돌이 발생한다면 그걸 빌미로 이곳을 편히 뜰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화난 유중혁이 일갈을 터뜨리기도 전에, 갑자기 제갈세가주가 바닥에 엎드렸다. 
 
“파천검성, 지난 날의 잘못은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빌어먹게도, 어느 세계에나 이런 똑똑한 녀석들은 있다. 
갑작스런 제갈세가주의 행동에 다른 세가주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제갈세가주는 체신도 체통도 모두 내버린 채, 간절한 얼굴로 파천검성에게 청하고 있었다. 
마치 무림의 신(神)에게 기도를 올리듯이. 
 
“당신이 돕지 않으면 <제1 무림>은 멸망할 겁니다······!” 
 
자신이 원할 때면 언제든 신의 동정을 요구할 수 있으되, 언제든 그 신앙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신도의 눈빛이었다. 
그러자, 무림의 신이 응답했다. 
 
“한때는 작은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었다.” 
 
뜬금없는 말에, 제갈세가주가 고개를 들어 파천검성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제 작은 나무들은 모조리 뿌리 뽑히고, 그 땅을 차지한 몇 그루의 커다란 나무들만이 가지를 뻗어 하늘을 덮었구나.” 
 
파천검성은 표정 없는 눈빛으로 청룡성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경쟁하듯 올라선 세가의 첨탑들이, 흉벽보다 높은 크기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이 하늘을 대신해 그들을 굽어 살피겠다는 듯이. 
그제야 나는 파천검성의 말을 이해했다. 
 
“잎과 가지는 무성하지만, 이젠 고작 몇 그루의 나무 뿐인 것을. 그대들의 생각은 어떤가. 그것을 여전히 ‘숲’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무림(武林)은 오래 전에 죽었다. 
지금 막 파천검성은 그렇게 선언한 것이다. 
 
“그만 가자꾸나.” 
 
무림의 신은, 고요히 등을 돌려 세계를 배반했다. 
예상보다 일이 쉽게 풀리는 듯해서, 나는 만족하며 파천검성의 뒤를 쫓았다. 우두커니 나를 보던 유중혁도, 뒤쪽에서 만두를 챙기던 장하영과 한명오도 재빨리 짐을 챙겨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메시지가 들려왔다. 
 
[당신의 행동이 ■■의 향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뭐? 
 
[‘2차 수정본’의 업데이트가 시작됩니다.]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금일은 앞으로의 연재와 관련해 중요한 공지를 드리려 합니다. 
 
이 고민을 해왔던 것은 유료 연재를 시작한 직후 지속적으로 악화된 건강이 슬슬 적신호를 보낼 무렵부터 였습니다. 
 
병원에 갈 시간도 없이 온종일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다 보니 하나둘 씩 아픈 곳이 늘어났지만, 그래도 독자님들과 한 약속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150화 까지만, 200화 까지만... 그런 생각으로 어떻게든 버텨 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50화... 한밤중에 심한 통증으로 잠에서 깨어났을 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이대로라면 이 소설은 영원히 결말을 보지 못하겠구나. 
 
전지적 독자 시점은 250화를 기점으로 주5회로 연재 주기가 변경됩니다. 
 
예약만 해놓고 못 갔던 병원도 병원이지만... 사실 글의 퀄리티 향상을 위해서 내린 결정이기도 합니다. 이제 김독자의 이야기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고, 집중도가 올라가게 되는 시기이기에... 지금껏 따라온 독자님들께 실망을 드 
 
 
 
 
 
< Episode 47. 마왕 선발전 (2) > 끝

< Episode 47. 마왕 선발전 (3) >
 
 
 
 
 
2차 수정본 업데이트. 
예상치 못한 시점에 들려온 그 메시지에, 나는 한순간 생각이 많아졌다. 
수정본이 또 나온다는 것은, 내 행동으로 인한 미래의 개변이 지속적으로 발생한다는 뜻이었다. 
즉, 1차 수정본을 받은 후 내가 쌓은 서사들이, 또 고스란히 모여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데 공헌을 했다는 것. 
그런 생각이 들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3회차의 나는 성공했을까? 
이번에도, 4회차에는 내가 없을까? 
내가 바꾼 이야기로, 유중혁은 결말에 도달했을까? 
 
······작가는, 대체 왜 내게 이런 걸 계속해서 보내주는 것일까? 
 
[‘2차 수정본’의 업데이트가 진행 중입니다.] 
 
아직 파일이 업데이트 되기 전이었기에,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황이 더 나빠졌는지, 아니면 좋아졌는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새로운 수정본의 향방이 아니라 당장 눈앞의 전개였다. 
 
“파천검성! 지금 달아나려는 거요? 당신이 살아온 이 세계를 모두 내버리고 도망가려는 거냔 말이오!” 
 
내가 잠깐 ‘멸살법’에 정신이 팔린 사이, 고수들이 일제히 기립했다. 제일 크게 성토하는 것은 가장 먼저 무릎을 꿇었던 제갈세가주였다. 
 
“······달아나? 이 내가 말이냐?” 
“지금 이게 달아나는 게 아니면 뭐란 말이오!” 
“재미있구나, 아이들아.” 
 
목소리에 깃든 짙은 조소. 그 목소리에 반응한 무림인들이 일제히 기합을 지르며 기세를 발출했다. 
 
고오오오오! 
 
하나하나가 <제1 무림>에서는 내로라하는 고수들. 거기에 세가주들의 마력까지 더해지자, 장원 일대에는 위협적인 지진파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기세를 끌어올리는 세가주들을 향해, 파천검성이 진각을 내딛었다. 
 
쿠우웅! 
 
“커허헉!”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파천검성의 진각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충격파는, 저쪽에서 발출한 지진파를 정확히 상쇄한 뒤 상대의 몇 배나 되는 마력으로 고수들 전원에게 내상을 입혔다. 
모든 것이 간단한 발구르기 한 번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제1 무림>의 재앙이라 불리는 파천검성의 힘. 
 
핏줄기를 흩뿌리며 쓰러진 고수들이 원망스러운 눈길로 파천검성을 올려다보았다. 
 
“파, 파천검성!” 
“우릴 버리지 마십시오! 제발!” 
 
이만한 힘이라면 분명 ‘멸망’을 막을 수 있을 거라 믿은 것일까. 
피를 토하는 무림인들의 표정에서는 절망보다는 오히려 희망의 그림자가 내비치고 있었다. 
파천검성이 표정 없는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는 사이, 하늘의 [그레이트 홀]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이제는 정말,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비유.” 
 
허공에서 나타난 비유가 포탈을 열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포탈이 있는 위치였다. 
아무리 봐도, 우리 주변에 포탈은 보이지 않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정체불명의 벽’을 통해 배운 [백리안]으로 포탈의 위치를 확인한 장하영이었다. 
 
“······아무래도 포탈 열린 게 저쪽 같은데. 설마 광장까지 달려가야 하나?” 
 
장하영이 가리킨 쪽에는 처음 우리가 청룡성으로 왔을 때 도착했던 광장이 있었다. 나는 비유에게 재촉했다. 
 
“비유. 이쪽으로 포탈을 옮겨줄 수 없어?” 
 
[바앙.] 
 
비유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무소속 도깨비는 이런 부분에서 힘의 제약을 받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비유가 아직 어린 아기 도깨비라 그런 걸 수도 있고. 
결국, 우리는 처음 통과해 온 포탈이 있는 곳으로 다시 움직여야 했다. 
파천신군이 왕왕 짖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파천신군은 [X급 페라르기니]의 조수석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타게나, 빨리!” 
 
운전석에 탑승한 한명오가 우리를 불렀다. 
우리는 빠르게 차량의 내부로 탑승했다. 
 
“출발하죠.” 
 
부아아아앙! 
 
[X급 페라르기니]의 마력 엔진이 굉음을 냈다. 우릴 쫓던 고수들이 경신법을 사용해 쫓아오는 것이 보였지만,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양산형 제작자’의 신작을 따라오기는 무리였다. 
 
쿠구구구구구! 
 
[‘멸망 시나리오’ 시작까지 10분 남았습니다.] 
 
창 밖으로 <제1 무림>의 정경이 보였다. 
붉게 물든 하늘. [그레이트 홀]에서 운석 파편 같은 것들이 낙하하고 있었다. 그 충격파에 터져 나가는 상점가와, 불길에 휩싸인 무관들. 
오대세가주가 이끄는 대형 첨탑들이, 하늘에 도전한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무너지는 건물들이 붕괴하며 지축을 울렸다. 누군가는 붕괴된 건물에 깔렸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안고 울부짖는 무림인들이 있었고, 그런 무림인들을 끌며 달아나야 한다 외치는 자들도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자리에 주저앉은 어린 아이들도 보였다. 
 
그리고 나는 마치 페이지를 넘기듯, 한 세계의 몰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언젠가, 아스모데우스는 그런 말을 했다. 
 
「“시나리오란 더 커다란 멸망을 막기 위한 작은 멸망이지.”」 
 
얼마나 더 많은 멸망을 겪어야, 이 모든 이야기는 끝날 것인가. 
고개를 돌리자, 파천검성과 유중혁도 나와 같은 광경을 보고 있었다. 
 
“도망가, 빨리!” 
“하지만······!” 
 
창 밖으로 들려오는 젊은 무인들의 목소리. 파편에 맞아 외상을 입은 남녀가,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한명오가 먼저 브레이크를 밟았고, 장하영이 이어서 말문을 열었다. 
 
“······쟤들 태워주면 안돼?” 
 
이 녀석이라면 그런 말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돼.” 
 
한명오가 엑셀러레이터를 밟았고, 전경이 다시 움직였다. 
장하영이 희미한 원망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얼마든지 자리 있잖아.” 
“우린 이 ‘시나리오’의 밖에서 온 자들이니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거야. 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하지만 사부님도 여기 출신인데 우리랑 같이 나갈 수 있잖아.” 
“이 분은 좀 특별하고.” 
 
나는 파천검성 쪽을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 
파천검성은 ‘거신족’의 피를 이은 존재. 
태생이 ‘무림’의 시나리오에서 출발하지 않은 그녀는 이곳을 벗어나도 다른 시나리오들을 받을 수 있다. 
창밖으로, 멀어지는 무림인 남녀가 보였다. 
 
“저 사람들은 여기서 벗어나도 어차피 죽어.”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의 시나리오만을 받아온 자들은, <제1 무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곳을 탈출한다면, 즉각적으로 ‘추방자 패널티’를 받아 소멸할 뿐인 것이다. 
장하영의 표정에 무력감이 깃들었다. 
 
“그런······.” 
 
장하영이 느끼는 기분을 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 감정 속에 살아왔으니까. 
어떤 세계의 위기 앞에,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세계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 뿐이다. 
 
[‘멸망 시나리오’ 시작까지 8분 남았습니다.] 
[멸망의 설화가 강림하고 있습니다.] 
 
새카맣게 변한 하늘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그레이트 홀]을 통해 나타난 촉수는 네 개를 넘어섰다. 
커져가는 홀을 보는 것만으로 장하영과 한명오는 몸을 떨었고, 유중혁은 침음했다. 
나 역시, 피부의 솜털이 바짝 서 있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저런 것엔 맞설 수 없다.」 
 
내가 맞서 싸워야 할 존재가 누구고. 
내가 앞으로 얻어야 할 힘이 어떤 것인지. 
새삼, 실감이 났다. 
 
아마 저것도, [거대 설화] 중 하나겠지. 
 
아직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설화. 
하나의 세계를 끝장내기 위해 강림하는 저 ‘설화’는, 지금껏 내가 알던 설화들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가 엾 은 시 나 리 오 의 노 예 들 아 도 망 칠 곳 은 없 다】 
 
울려퍼진 진언에 청룡성의 모든 창문들이 박살났다. 
 
【멸 망 은 너 희 를 뒤 쫓 을 것 이 다】 
 
‘양산형 제작자’의 차체조차 진언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멸망 시나리오’ 시작까지 5분 남았습니다.] 
 
“포탈이다!” 
 
다행히, 우리는 제 시간 안에 포탈에 도착했다. 
이제 탈출하는 것만 남았다. 
 
“갑시다.” 
 
파천검성을 얻었고, 미식협에서의 데뷔도 그럭저럭 마쳤다. 
코인도 충분히 쌓았다. 
마무리가 찝찝하기는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해결책이 없었다. 
<제1 무림>은 언젠가 반드시 멸망하게 될 세계였고, 그때든 지금이든 내가 그 멸망을 막을 방법은 없다. 
그런데 그 순간, 파천검성이 차에서 내렸다. 
 
“파천검성?”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표정을 읽지 않아도, 그녀의 생각은 알 수 있었다. 
 
[무림의 동도들은 지금 즉시 광장으로 집결하라.] 
 
이계의 신격에 대항하듯 울려퍼지는 사자후(獅子吼). 
성좌의 진언을 연상시키는 강력한 내공이었다. 
달아나던 무림인들이, 그녀의 목소리에 일제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파, 파천검성!” 
“파천검성이다!” 
 
일순간, 무림인들과 나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었다. 
나는 차에서 내리며 외쳤다. 
 
“잠깐만요!” 
 
혼란스러웠다. 
왜 파천검성이 이런 선택을 한 걸까. 
설마 내가 저지른 일을 때문에? 
 
순간,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이 스쳐갔다. 
 
혹시 ‘2차 수정본’이 지금 업데이트 되는 것은, 이곳에서 파천검성이 죽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2차 수정본’의 업데이트가 진행 중입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직, ‘2차 수정본’은 오지 않았다. 
 
“파천검성! 함께 가야 합니다!” 
 
이곳에 있으면 파천검성은 죽는다. 
그러자 파천검성이 대답했다. 
 
“어린 성좌야, 한 그루의 나무는 숲이 아니다.” 
 
몹시 불길한 서두로, 파천검성이 나를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몇 그루의 나무가 모여야 숲이 되는 것인지, 너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당연히 그런 생각 따위, 해본 적 없다. 
대신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떨어지는 운석 속에 부러져 나가는 아주 작은 나무들이었다. 
너무 큰 나무들이 덮고 있었기에,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아주 작은 나무들. 
그 나무들이, 파천검성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잊고 있었다. 
파천검성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녀가 가진 협(俠)은, 너무나 공명정대하여 때로 다른 이들의 정의를 초라하게 만든다.」 
 
모든 초월좌는 각자 양보할 수 없는 것이 하나씩 존재하고, 파천검성에게 그것은 협이다. 하지만 그녀의 정의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녀의 행동을 묵인할 수는 없었다. 
몇 그루의 나무를 숲이라고 부르지 않듯, 한 그루의 나무가 산사태를 막아낼 수도 없다. 
 
“약속을 잊으신 겁니까? 동족을 만나게 해 주면 저를 도와준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지킬 것이다.” 
 
파천검성은 하늘을 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아직 온전한 ‘대멸망’이 시작된 것이 아니기에, ‘가장 오래된 옛것’들은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저 너머에 있는 것은 태고의 맥을 잇는 신격이었다. 
적어도, 그때 나와 유중혁이 잡았던 [꿈을 먹는 자]에 준하는 녀석이 오고 있었다. 
 
“이곳에서 저들을 막은 후, 너를 찾아 가겠다.” 
 
······척준경의 삼검으로도 쓰러트리지 못했던 존재를, 파천검성이 이길 수 있을까? 
 
“스승!” 
 
결국 유중혁이 나섰다. 
하지만 파천검성의 태도는 완고했다. 
 
“떠나거라. 이번 회차의 가르침은 끝이다.”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 진솔한 말에, 파천검성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무척 매혹적인 말이구나.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말이지.” 
“46번 시나리오는 혼자서 깰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당신이 있어야······.” 
 
그 한 마디로 ‘파천검성’이라는 존재가 유중혁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나는 새삼 깨달았다. 
파천검성이 유중혁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마치 그런 제자가 기특하다는 듯이. 
거대한 파천검성의 손이 유중혁의 머리를 뚜껑처럼 덮었다. 
 
“넌 혼자가 아니다.” 
 
그 말을 하며 파천검성의 눈은 아주 잠깐 나에게 머물렀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나는 이곳의 멸망을 막는다.” 
 
유중혁이 파천검성을 잘 아는 만큼, 파천검성 역시 유중혁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에, 파천검성은 유중혁을 떠나 보낼 말을 잘 알고 있었다. 
 
“너는 ‘세계’의 멸망을 막아라.” 
“파천검성······!” 
“그만 가거라.” 
 
유중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녀석의 머릿속에서 쏟아지는 감정의 다발들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멸망 시나리오’ 시작까지 1분 남았습니다.] 
 
결국, 내가 유중혁을 잡아 끌었다. 
나 역시 이렇게 떠나기 싫은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런 선택을 한다면 3회차는 여기서 종말을 맞게 된다. 
 
“······가야 한다, 유중혁.” 
 
망부석처럼 굳어진 녀석이 꼼짝도 하지 않았기에, 결국 장하영과 한명오가 나섰다. 질질 끌린 유중혁이 차로 옮겨졌고, 파천검성이 나를 바라보았다. 
 
“내 제자들을 잘 부탁한다.” 
 
차 안에 갇힌 파천신군이 컹컹 짖었다. 유중혁은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너도, 그만 가거라.” 
 
언제나 누군가를 내려다보기만 하던 그녀는 이제 자기보다 더 높은 곳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하늘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재 미 있 는 피 조 물 이 있 구 나······ 너 는 누 구 냐?】 
 
저 지고한 외신(外神)이 피조물의 이름을 묻는다는 것. 
어지간한 성좌들조차 기가 질려버릴 상황에, 파천검성은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이 무림의 신.] 
 
마치, 떠나는 자신의 제자에게 들으라는 듯. 
오래도록 숲을 지켜온 고독한 거목이, 하늘을 향해 자신을 말했다. 
 
[파천검성이다.] 
 
 
 
 
 
< Episode 47. 마왕 선발전 (3) > 끝

< Episode 47. 마왕 선발전 (4) >
 
 
 
 
 
콰드드드드드! 
 
지상과 하늘이 엇갈린 톱니바퀴처럼 덜그럭거렸다. 
거대한 무언가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고, 그것을 막는 자가 있었다. 
마력파와 [거대 설화]의 힘이 부딪치며 눈부신 스파크가 터져나왔다. 
 
[‘멸망 시나리오’ 시작까지 40초 남았습니다.] 
 
상대는 무려 ‘이계의 신격’. 
조금씩, 하늘의 천장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츠츠츠츠츳! 
 
성채 전체를 짓누르는 위압감에도 파천검성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물러설 수 없었다. 
자신의 신념이 향하는 길 앞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것. 
그것이 오직 단 하나의 설화만을 걸어온 ‘초월좌’의 기치였다. 
 
“맞서 싸워라!” 
 
파천검성의 분전은 절망하던 무림인들을 되살렸다. 
 
[다수의 성좌들이 해당 시나리오의 상황에 흥미로워합니다.] 
[몇몇 성좌들이 초월좌 ‘남궁민영’에게 주목합니다.] 
 
밤하늘의 별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피냄새를 맡고 쫓아온 피라냐 떼처럼, 성좌들이 붉은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도깨비들도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냈다. 
 
[성좌님들, 바야흐로 ‘멸망’이 도래할 시간입니다!] 
 
어떤 성좌는 침통한 시선으로, 또 어떤 성좌는 흥분한 기색으로 세계의 멸망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각기 품는 감정은 다르지만, 결국 한 세계의 몰락조차 그들에게는 유희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내가 그랬었듯이. 
 
순간 여러 가지가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헝클어졌다. 
어쩌면 그 감정은 ‘미식협’에서부터 쌓여온 것이었다. 
만약 이곳에서 ‘무림’을 버린다면, 나 역시 저들과 다를 게 뭐지? 
 
“파천검성! 나는······!” 
 
내가 성좌의 ‘격’을 끌어 올리자, 이변이 발생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선택을 기대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존재에 주목합니다!] 
 
파천검성에게 몰려왔던 주목이, 내게 쏠리고 있었다. 
 
【너 는······?】 
 
여기서 ‘이계의 신격’의 눈에 띈다면, 나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 사실을 아는 파천검성이 나를 막았다. 
 
“이곳은 네 전장이 아니다.” 
 
마치, 이 페이지는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처럼. 
 
“이 세계는 이곳의 사람들에게 맡겨라.” 
 
파천검성에게 무림이 어떤 곳이었는지는 모른다. 
멋대로 그녀를 신으로 떠받들고, 경외시하며, 동시에 몰락시켰던 장소. 
그럼에도 이 순간, 파천검성은 무림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29번 시나리오 지역, <제1 무림>에 쌓인 ‘설화’가 폭주합니다.] 
 
그러자 그 무림도, 파천검성에게 응답했다. 
 
[29번 시나리오 지역이 자신의 수호자를 찾습니다.] 
[<제1 무림>이 자신의 ‘파천검성 남궁민영’을 바라봅니다.] 
[거대한 ‘설화’의 가능성이 발아합니다.] 
 
파천검성이 놀라 눈을 깜빡였다. 
아마 그녀도 처음 듣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누군가가 세계를 멸망시키려 한다면, 세계도 멸망에 반응하게 마련이다. 
 
「이 세계에서, 역사를 쌓은 모든 것은 의지를 가진다.」 
 
무림인들의 피와 살, 땀과 노력으로 응어리진 땅. 
그 땅 위에 새겨진 설화들이 파천검성의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파천검성의 몸에서 웅혼한 무림의 기상이 느껴졌다. 
 
[거대 설화]의 가능성. 
 
아직 개화하지는 못했지만, 발아가 언제일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 [거대 설화]의 가능성이었다. 
 
【가 가 가 가 가 가 가】 
 
웃음 소리를 닮은 기괴한 언어가 허공에서 쏟아졌다. 
마침내 하늘로 다섯 개의 촉수가 넘어오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아무리 [거대 설화]의 가능성을 입수했다고 해도, 역시 파천검성만으로 ‘이계의 신격’을 막는 것은 무리였다. 저들은, 아주 오랫동안 그런 [거대 설화]들을 마주하며 살아온 존재들이니까. 
더 시간을 끌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파천검성이 외쳤다. 
 
“어서 가라!” 
 
사자후와 함께 내 몸이 차안으로 떠밀렸다. 
 
[포탈이 발동합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유중혁이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이미 [X급 페라르기니]는 시동을 걸고 있었다. 
단 한순간이었다. 
포탈을 통과하는 동안, 파천신군이 고요히 울었다. 
무림의 정경이 천천히 멀어져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은 어둠 속에 묻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73번째 마계’에 도착했습니다.] 
[‘마왕 선발전’ 까지 사흘 남았습니다.] 
 
너무 엄청난 일들을 연달아 겪은 탓일까. 
일행들은 마계로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차의 시동이 꺼지자, 고요한 정적만이 남았다. 
 
“······잠깐 담배 한 대 태우고 오겠네.” 
 
한명오는 자리를 비웠고, 장하영은 무릎에 머리를 박았다. 파천신군이 낑낑거렸고, 유중혁은······ 제기랄. 나는 침착하게 숨을 몰아쉬며 이 여정으로 인해 내가 얻은 것들을 생각했다. 
 
모두 곧 벌어질 ‘마왕 선발전’을 위해 벌인 일들이었다. 
 
‘파천검성’을 동료로 영입하기 위해 무림으로 갔고, 그 과정에서 ‘미식협’에도 다녀왔다. 
 
파천검성은 데리고 오지 못했다. 
미식협의 성좌들은, 설득할 수 없었다. 
 
그나마 소득이 있었다면 유중혁과 장하영이 더 강해졌다는 것, 초월형에 오른 개 한 마리, 그리고······. 
 
[보유 코인 : 4,890,875 C] 
 
······. 
 
[‘2차 수정본’의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들려오는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스마트 폰을 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럼에도 이것을 봐야만한다는 게, 심지어 한편으로는 이것을 보는 걸 기대하고 있는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김독자.” 
 
멍하니 고개를 들자, 유중혁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의 마음 속에 고인 분노를, 나는 차마 읽어낼 수 없었다. 
유중혁이 나를 여기서 격살해도 솔직히 할 말이 없는 지경이니까.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별다른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나는 미묘한 두려움 속에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 
「······.」 
「······.」 
 
미어터지는 감정 속에 숨이 막혀왔다. 
어떤 감정은 말로써 형용될 수 없다. 
너무나 고되고 깊은 슬픔은, 차마 언어가 되지 못한 채 뭉그러진다. 
 
유중혁은 이미 광인(狂人)이었고. 
어쩌면, 오래 전부터 줄곧 그런 상태였다. 
 
이 사건은 녀석을 더욱 닳게 만들 것이다. 
터지지 못한 감정들은 다음 회차로 넘어갈 것이고, 녀석의 죽음을 부추길 것이다. 삶의 시간을 마모시키고, 녀석을 고립시킬 것이다. 
 
3회차의 파천검성은, 그렇게 잊혀질 것이다. 
 
나는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말해야 한다. 
파천검성은 살아 있을 거라고. 
분명 살아서, 다시 돌아올 거라고.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나는 tls123이 아니었으니까. 
 
“또······ 뭔가 해봐야겠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그게 전부였다. 
 
“발악하고, 싸우고, 뒤집어 봐야지.” 
 
나를 조용히 바라보던 유중혁은, “그런가” 한마디를 남기고 차에서 내렸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 녀석은, 녀석 나름대로의 준비를 하러 갔을 것이다. 
 
그게 유중혁이다. 
 
녀석은 삶은 포기해도 목표는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리 강대한 절망이 있어도,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도전해 그 절망을 이겨낸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끝내 불행해질 것이다. 
 
유중혁이 떠난 자리에, 녀석의 심상 속에서 유일하게 읽을 수 있었던 한줄의 문장만이 내게 남았다. 
 
「네놈 답지 않았다.」 
 
각인처럼 새겨진 그 문장을 곱씹으며, 나는 스마트폰을 켰다. 
유중혁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2차 수정본).txt 
 
여기에는 아마 파천검성의 생사가 적혀 있을 것이다. 
이번 회차의 성공 여부가 적혀 있을 것이고. 
어쩌면, 바뀐 ‘결말’이 적혀 있을 것이다. 
 
[‘제4의 벽’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떨리는 손가락이 몇 번이고 화면을 헤매었다. 
유중혁의 말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네놈 답지 않았다.」 
 
그 자식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한 건지 모르겠다. 나는 유중혁을 10년이 넘도록 지켜봤지만, 유중혁은 나를 안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 자식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툭. 
 
나는 화면을 껐다. 
뭐가 적혀 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내가 만들려는 ‘이야기’는 이 안에 없을 텐데. 
 
“장하영. 무림을 구하고 싶다고 했지.” 
 
곁에 있던 장하영이 눈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 녀석을 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게 먹힐지 안 먹힐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안 해보는 것보다는 낫다. 
 
 
* 
 
 
[관리국]의 집행부 구치소에는 다양한 존재들이 들어온다. 
주로 수감되는 것은 시나리오의 「개연성 적합 심사」에 걸린 성좌나 초월좌들이었다. 
하지만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개연성을 어겼다고 해도 집행부가 직접 나서는 경우는 드물다. 어차피 개연성을 벗어나면 알아서 후폭풍을 맞아 뒈지거나, 슬금슬금 몸을 피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 사내의 경우는, 집행부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도깨비 ‘영기’는 한숨을 쉬며 수감실의 개연성 그물에 갇힌 사내를 바라보았다. 
 
“여기 좀 보십시오.” 
 
그러자, 작은 사내가 영기를 돌아보았다. 
영기는 사내의 잘생긴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본래 시나리오 지역으로 복귀하셔야 합니다. 당신의 고향은 안전하지 않습니까?” 
“······.” 
“당신 때문에 그쪽 행성계에 시나리오 진행이 불가능한 상태란 말입니다.” 
 
그러자 작은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떠나면 네놈들은 또 [피스 랜드]에 ‘재앙’을 내릴 거잖아.” 
“그렇지 않을 거라 이미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네놈들의 말 따윈 믿지 않는다.” 
 
으르렁거리는 사내의 말투에, 영기가 움찔하며 물러났다. 
이래서 초월좌들은 까다롭다니까. 
성좌들은 그래도 말을 하면 재깍재깍 알아 듣는데, 필멸자인 상태로 고집만 똘똘 뭉친 초월좌들은 가끔 이런 말도 안 되는 난장을 피운다. 
사내가 계속해서 말했다. 
 
“기다리는 녀석이 있다. 그놈이 돌아올 때까지는 고향에 머물 것이다.” 
“기다린다? 누구를 말입니까?” 
“그놈이 오면 알아서 떠날 것이다.” 
 
영기가 그럴 수는 없다며 입을 열려는 순간, 수감소의 출입문이 열리며 새로운 수감자가 등장했다. 
 
[그르르르······ 빌어먹을 도깨비 놈들아!] 
 
거센 진언에 수감소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다. 
영기와 사내의 고개가, 동시에 그쪽을 향해 돌아갔다. 
입구 쪽에서 집행부 도깨비들에게 포박 당한 성좌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도마뱀을 닮은 외형의 성좌였다. 
 
[그 개자식이 나한테 사기를 쳤다! 내 코인을 훔쳐간 건 그놈인데 왜 그놈을 안 잡고 나를 잡는 것이냐!] 
 
“빚을 변제할 방법을 찾지 못하신다면, 설화를 앗아가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상황을 보니 대충 어떻게 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가끔 저런 경우가 있다. 말도 안 되는 대출 이자를 갚지 못해 이곳에 오는 경우. 
영기가 속으로 혀를 차는 동안에도, 성좌의 고함은 계속되었다. 
도깨비들이야 그런 소란에 익숙했지만, 이곳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하나 있었다. 
 
“왱알왱알 시끄럽다.” 
 
그 서늘한 목소리에, ‘성급한 늪의 포식자’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네놈은 뭐냐? 조그만 녀석이······!] 
 
순간, ‘조그만 녀석’의 전신에서 엄청난 기류가 휘몰아쳤다. 
사내의 몸이 허공에 두둥실 떠오른다 싶더니, 어느새 찬연한 푸른 전격이 사내의 전신을 휘감았다. 
 
츠츠츠츠츠츠! 
 
[무슨······ 큭······?]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당황한 목소리를 흘렸다. 자신의 ‘격’마저 짓누르는 필멸자의 힘. 이제껏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일이었다. 
 
쿠드드드드드! 
 
수감소의 ‘그물’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이곳에 할당된 개연성 이상의 힘이 사내의 내부에서 용솟음치고 있었다. 
영기를 비롯한 도깨비들이 깜짝 놀라 설치된 ‘그물’의 출력을 높였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일순, 사내의 몸이 더욱 작아지며 ‘그물’ 사이를 뚫고 튀어나왔다. 엄청난 기세로 폭주한 전격은, 그대로 ‘성급한 늪의 포식자’를 향해 쏘아졌다. 
 
콰아아아앙!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폭음과 함께, 희뿌연 먼지가 피어올랐다. 
 
[으······ 으으······.]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우스꽝스럽게 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백청의 주먹은, 무려 다섯 명의 도깨비들이 달려들어서야 간신히 궤적을 비껴갔다. 그의 주먹이 만든 끔찍한 흔적이, 수감소의 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도깨비들은 주먹의 주인을 탓하는 대신, 급보를 전했다. 
 
“축하합니다, ‘성급한 늪의 포식자’. 당신은 해방입니다.” 
 
[응? 뭐?] 
 
“방금, 수감자를 풀어 주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의 빚을 갚았습니다.” 
 
[뭐? 누가······.] 
 
이어지는 소식에 ‘성급한 늪의 포식자’는 방금 있었던 일도 잊고 눈을 끔뻑였다. 도깨비가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자, 돌아서던 키리오스의 몸이 멈춰섰다.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의아한듯 물었다. 
 
[······그놈이 내 빚을 갚았다고?] 
 
그 순간, 수감소 전체를 가득 채울 정도로 환해진 [전인화]의 전격이 도깨비를 향해 쏘아졌다. 도깨비의 멱살을 틀어쥔 키리오스가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아, 아니 무슨······.” 
“네놈이 방금 말한 이름. 그놈 지금 어디에 있느냐?” 
 
도깨비가 대답하기도 전에, 어떤 메시지가 키리오스의 귓가로 날아들었다. 
잠시 멍한 얼굴로 허공을 올려다보던 키리오스가 도깨비들을 지나쳐 입구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영기가 다급하게 외쳤다. 
 
“잠깐만요! 당신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또 고향으로 돌아가신다면―” 
“고향으로 가지 않는다.” 
 
역설의 백청,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이 분노 가득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내 제자를 족치러 갈 것이다.”
 
 
 
 
 
< Episode 47. 마왕 선발전 (4) > 끝

< Episode 47. 마왕 선발전 (5) >
 
 
 
 
 
우리는 곧 유중혁 공단(구 세이스비츠)에 도착했다. 
가는 내내 유중혁은 말이 없었고, 공단에 도착한 후에도 비슷하게 행동했다. [X급 페라르기니]의 시동이 꺼지자마자, 유중혁은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따로 행동하겠다.” 
“······선발전 때는 올 거지?” 
 
유중혁은 그저 짧게 고개만을 끄덕인 뒤, 간단히 발을 움직여 시야에서 사라졌다. 녀석이 뭘 하러 갔는지, 또 어디로 갔는지는 알 것 같았다. 확실한 건 당분간 녀석의 시야에 걸리는 모든 것이 부서질 것이란 사실이다. 
 
“······안 잡아도 돼?” 
 
장하영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유중혁이 내 말을 들을 걸 전제하고 계획을 세웠던 건 아니었다. 
유중혁은 ‘마왕 선발전’까지 무사히 살아 돌아와주기만 하면 된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들이다. 
나는 자잘한 절차들을 무시하고 곧장 아일렌의 의회실로 향했다. 
 
“오래도 걸리셨네요.” 
 
간만에 만난 아일렌은, 바쁜 공단 업무에 수척해진 모양새였다. 
안경을 밀어 올린 아일렌이 그간 있었던 일들을 보고 자료로 제출했다. 
 
“공작님들 떠나신 이후로 다른 공단의 끄나풀들이 나타나서 고생을 좀 했는데······ 당원들이 알아서 잘 처리했어요.” 
“당원?” 
“유중혁 당. 몰라요? 아침마다 ‘나는 유중혁이다’를 외치고 돌아다니는 애들 있어요. 떠나시기 얼마 전에 창설된 건데······ 못 보셨나 보군요.” 
 
그게 그놈들이었나? 젠장. 
나는 가끔 그날의 환청이 들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일렌도 자기가 한 말이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최근에는 ‘징벌자’를 추종하는 무리도 만들어지고 있어요.” 
“그 여자 정체는 밝혀졌어?” 
“못 밝혔어요. 공작님들 떠난 직후에 그 여자도 갑자기 없어졌거든요.” 
“없어져?” 
 
순간 가슴 속에 이상한 예감 같은 것이 스쳐갔다. 
설마, 싶었지만 이내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앞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이 성립할 턱이 없다. 
아일렌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근데 난 왜 계속 당신한테 보고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이 공단 주인은 유중혁 공작인데.” 
“누구한테 하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공작께서는 이제 자기 공단으로 가셔야죠?” 
 
그러고 보니 여긴 내 [공단]이 아니었다. 
다시 마계로 돌아왔으니 김독자 공단(구 길로바트)의 현황을 살피러 가야 한다. 
마르크한테 맡기고 떠났었는데,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나는 창 밖으로 비치는 [공단]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에 오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아일렌이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공작님.” 
 
돌아보자, 나를 들여다보는 아일렌의 표정이 묘했다. 
뭔가 시원섭섭한 것 같기도 했고, 서글픈 것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천천히 입을 여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멸살법’을 통해 아일렌을 학습한 나는, 그녀가 언제 그런 목소리를 내는지 알고 있었다. 
아일렌은 잠시 품을 뒤적이더니 이내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전에 부탁하셨던 거예요.” 
 
상자 속에는 작은 시계가 들어 있었다. 
아주 미세한 회로 작업을 통해 설계된 작은 회중시계. 
손을 가져다 대자, 시계 위로 옅은 진동이 느껴졌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움직이는 시간의 감각 속에,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야기의 지평선, 혁명가 게임······. 
 
닿지 않은 곳으로 물러난 모든 기억들이 째깍째깍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 시계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다시 아일렌을 보았을 때, 그녀는 자신의 양쪽 손목을 겹친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아는 듯한 표정이었다. 
 
“‘유중혁’ 공작님.” 
 
양쪽 손목을 십자로 교차하며 겹치는 동작. 
그것은 아일렌이 살았던 고향, [린드버그]에서 떠나는 이를 배웅할 때 취하는 인사법이었다. 
두 개의 맥박을 교차해, 상대방에게 그 진동을 전하는 것. 
마치 시계 초침이 움직이듯 아일렌의 맥박이 공기를 통해 내게 전해졌다. 
 
“이 공단은 당신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 
 
 
[유중혁 공단]을 떠난 후, 나는 곧장 [김독자 공단]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본래라면 일주일은 족히 걸릴 거리였지만, [X급 페라르기니]의 도약 엔진을 사용한다면 두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었다. 
차의 조수석에 앉아 지나가는 전경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아일렌이 남긴 말에 관해 생각했다. 
 
―도깨비가 하나, 혹달린 불길한 족속이 하나, 성좌들도 몇몇 왔었어요.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나를 찾아왔다는 이들의 목록이었다. 
도깨비라면 아마 [관리국] 쪽의 녀석일 가능성이 높았고, 혹달린 족속이라면 당연히 혹부리를 말하는 걸일 테지. 성좌들 쪽은 수식언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인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조심하세요, ‘마계’의 많은 강자들이 당신을 보고 있어요. 
 
말하지 않아도 안다. 
채널에 흐르는 기류만 봐도 심상치가 않으니까.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행동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 사이에 당신의 수식언이 퍼지고 있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이제 ‘마왕 선발전’까지는 사흘 남았다. 
 
문득 뒷좌석을 보니, 장하영과 파천신군이 서로를 끌어안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파천신군도, 장하영도 그간 피곤했을 것이다. 
특히 장하영은 나 때문에 무리하게 ‘정체불명의 벽’을 운용하기까지 했으니······. 
 
그래도 저 녀석들이 있기에, 뭐라도 해볼 생각을 할 수 있다. 
나는 운전석을 돌아보며 물었다. 
 
“한명오 부장.” 
“음?” 
 
한창 [X급 페라르기니]의 기능을 이것저것 실험해보던 한명오가, 흠칫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한명오는 괜한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험험, 인생이 쉽지 않지?” 
 
······솔직히 타이밍이 좀 묘한 얘기였다. 자기도 말해놓고 뭔가 민망했는지, 한명오가 잽싸게 덧붙였다. 
 
“내가 살면서 느낀 건데······ 인생이 원래 그런 거야. 딱히 아무것도 안해도 잘 풀릴 때도 있고, 뭘해도 더럽게 안 풀릴 때도 있는 법이지.” 
 
뻔한 말이었지만, 한명오의 표정에는 제법 애환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한명오도 마계에 와서 정말 많은 일들을 겪었다. 
어떤 의미에서, 한명오는 나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내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한명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생겼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뭐든 물어보게.”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 아이를 낳은 남자는 제법 믿음직한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되는 모양이다. 
나는 스마트 폰을 켰다 껐다를 반복하며 할 말을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내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한명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끙······ 많이 고통스러웠네.” 
“뭐가 말입니까?” 
“자네가 묻고 싶은 것 말일세. 남자든 여자든 견디기 힘든 고통이야.” 
 
나는 한명오가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알고 일순 충격에 휩싸였다. 
아니, 딱히 그런 걸 물으려던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굳이 말을 한다니 궁금해지긴 했다. 
 
“어디로 나온 거죠?” 
“마음으로 낳았네.” 
“아팠습니까?” 
 
어느새 담배를 한 대 꺼내문 한명오는,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죽일 생각이었네.” 
 
씁쓸하게 뱉어진 담배 연기가, 호를 그리며 창 밖으로 날아갔다. 
 
“수치스러웠고, 치욕스러웠네. 어이가 없기도 했고,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 
“······.” 
“드라마에서 나오던 방법도 써봤네. 그 왜 있잖은가. 간장을 많이 먹는다든가 하는. 때가 때인지라 구하기가 쉽지 않더군.” 
 
한명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분명,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충이었을 것이다. 
 
“무서웠네. 내가 낳은 녀석이 괴물이면 어떡하나. 이 녀석이 나를 잡아먹으면 어떡하나. 어느 날 갑자기 배를 찢고 튀어나와서, 나를 죽인다면······.” 
“······.” 
“홀로 무수한 밤을 지새고, 도망다니고, 괴수들을 피해 다니며 내겐 줄곧 그 고민뿐이었네. 이 녀석을 어떡하지, 어떡해야 하나, 죽여야 하나, 살려야 하나, 낳아야 하나, 아니면······.”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쓰지 않았는데도, 한명오가 도망치고 또 도망쳤을 무수한 시나리오의 밤들이 머릿속을 스치는 것 같았다. 
한명오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거 아나? 우습게도, 그걸 고민하는 동안 수 개월이 지났다네. 그걸 고민하는 동안, 나는 살아남았던 거야.” 
 
한명오가, 이 장대한 시나리오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그때 문득 깨달았지. 아, 어쩌면 이 녀석이 나를 살린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래서 결심했네. 살리든 죽이든, 일단 낳아는 보자.” 
 
툭, 하고 떨어진 담뱃불이 창밖으로 날아갔다. 한명오가 주섬주섬 새 담배를 꺼냈다. 그 짧은 사이, 한명오의 시선은 황망히 멀어졌다 돌아왔다. 
나는 한명오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아는 최악의 인간 열 명을 꼽자면 반드시 그에 들어가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왠지, 그 순간만큼은 한명오가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한없이 예쁜 아이였어. 인간은 아니었지만, 내가 낳았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말 예쁜 아이였지.” 
“······저도 봤습니다.” 
 
그 ‘아스모데우스’가 화신체로 삼을 정도로, 예쁜 여자아이였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애틋한 듯, 한명오의 입가에 몇 번이고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야기는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한명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한명오가 말했다. 
 
“그러니 독자 씨도 해보게.” 
“······출산을요?” 
“아니, 독자 씨가 고민하는 거 말일세.” 
 
순간 뜨끔한 기분이 되었다. 꺼진 스마트폰 화면으로 내 당황한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난 독자 씨가 뭔 생각을 하고 사는지는 모르겠네. 솔직히 말해서 원래 독자 씨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잘 알고 있던 바입니다.” 
“그런데, 최근 독자 씨가 좀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일이 잘 안 풀린다는 것, 알고 있네. 모든 게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겠지. 그래도 너무 연연하지 말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게.” 
“······.” 
“뭐가 어떻게 되든 그걸 살아내는 것은 독자 씨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 후회하게 될 걸세.”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이 남자에게 공감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불이 들어온 스마트폰의 액정에 ‘멸살법’의 파일이 보였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2차 수정본).TXT 
 
나는 한명오와 같은 경험은 없다. 
아이를 가져본 적도 없고, 가질 예정도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한명오의 기분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2차 수정본’을 읽느냐 읽지 않느냐. 
지난 몇 시간 동안, 내 머릿속을 차지한 대부분의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그 소설을 읽음으로 인해 내가 영향을 받을까 무서웠고. 
내가 저지른 일들의 결과를 확인하는 것이 괴로웠으며. 
내 모든 ‘미래’가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건 우스운 일이었다. 
한명오 식으로 말하자면······. 
 
아직, 이 이야기는 제대로 태어나지도 않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멸살법’의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멸살법의 ‘2차 수정본’은 이번에도 4회차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그때도 그랬다. 3회차에서도, 그 녀석이 아니었다면 스승은 그곳에서 죽었을 것이다.」 
 
어떤 서술은 나를 안심시켰고. 
 
「그럼에도, 바꿀 수 없었다.」 
 
어떤 서술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그 녀석은 이번 회차에 없다.」 
 
유중혁의 ‘4회차’에는 여전히 내가 없었다. 
 
「3회차는 실패했다.」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작가가 왜 이런 걸 내게 보냈는지는 모르겠다. 
나를 겁주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가 원하는 결말을 위해 나를 이용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애초에 이걸 보낸 게 정말 작가인지도 알 수가 없다. 
나는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마치, ‘제4의 벽’이라도 된 것처럼 생각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마치, 소설 속의 문장을 적듯이. 
 
「당신이 무슨 결말을 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무슨 결말이든. 나는 오직 내가 원하는 결말을 만들 것이다.」 
 
그 문장을 적으며, 나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반응한 것은 ‘제4의 벽’이었다. 
 
[‘제4의 벽’이 즐거운 듯 꿈틀거립니다.] 
 
문득 밖을 내다보니 멀리서 [공단]의 정경이 보이고 있었다. 
처음으로 방문하는 [김독자 공단]의 외관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명오가 급격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입니까?”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있네.” 
 
시나리오? 그럴 리가······. 
아직 ‘마왕 선발전’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히든 시나리오 지역에 입장하시겠습니까?] 
 
한명오는 조심스레 차량을 우회하며 [공단]으로 접근했다. 
공단의 입구는 한 명의 경비병도 없이 휑하니 뚫려 있었다. 
창문을 열자, 공단의 안쪽에서 소리치는 말들이 가감없이 들려왔다. 
 
“내가 김독자다!” 
“아니다, 나다!” 
“내가 김독자다! 나라고!” 
 
나와 한명오가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그리고, 시스템 메시지가 이어졌다. 
 
[히든 시나리오 ― ‘김독자 게임’이 진행 중입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내 공단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Episode 47. 마왕 선발전 (5) > 끝

< Episode 47. 마왕 선발전 (6) >
 
 
 
 
 
[히든 시나리오 지역에 입장했습니다.] 
[히든 시나리오 ― ‘김독자 게임’에 참가하시겠습니까?] 
 
나를 보던 한명오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건 또 무슨 일인가?” 
 
나는 비유를 올려다보았다. 
 
[바앗, 바아앗······.] 
 
억울하다는 듯 도리질을 반복하는 비유. 
비유의 짓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히든 시나리오’는 ‘메인 시나리오’처럼 <스타 스트림>의 의지에 따라 발동하니까. 
하지만 왜 이런 시점에? 
이어진 시스템 메시지가 힌트를 주었다. 
 
[현재 ‘공단’의 주인이 부재 중입니다.] 
[비상 승격 시나리오가 발동 중입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스타 스트림>이 제가 공작위를 계승할 의지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은데요.” 
“이제라도 왔으니 괜찮은 거 아닌가?” 
“그렇다면 좋을 텐데요.” 
 
내가 공단에 진입한 후에도, 시나리오는 딱히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유중혁과 내가 저지른 사칭 행위 때문에 <스타 스트림>의 시나리오가 꼬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때도 오류가 발생했다는 메시지가 떴었으니······. 
 
“······뭐야, 김독자 게임? 자유 참가 시나리오네?” 
 
뒷좌석에서 부스스 눈을 뜬 장하영이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 
 
[현재 ‘공단’의 ‘진짜 김독자’를 선출 중입니다.] 
 
자칫하면, 이대로 내 이름을 빼앗기게 생겼다. 나는 한명오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참가하실 겁니까?”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나?” 
“장하영 너는?” 
“난 김독자 되기 싫어.” 
 
홱 돌린 얼굴이, 왜인지 뾰로통히 토라져 있었다. 
 
“······구원의 마왕이라면 모를까.” 
 
아무래도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나와 ‘구원의 마왕’을 분리해 생각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것은 파천신군이었다. 
 
왕왕!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만 참가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괜찮겠나? 저기서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뭔 일이 있든 가야죠. 제 공단인데.” 
 
시나리오 참가 신청을 하자마자, 곧바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 
 
<히든 시나리오 ― 김독자 증명>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김독자 공단’ 인근 채널의 성좌들에게 자신이 ‘김독자’임을 증명하시오. 
제한시간 : 3시간 
보상 : ‘김독자 공단’의 공작위 계승, 200,000 코인. 
실패시 : ??? 
 
* 해당 시나리오의 ‘김독자 지망생’들은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모두 ‘똑같은 외형’으로 보이게 됩니다. 
* 제한시간 내에 성좌들에게 가장 많은 점수를 받은 ‘김독자 지망생’이 ‘김독자’를 계승하게 됩니다. 
 
+ 
 
······살다살다 이런 시나리오는 또 처음 받아본다. 
당연하지만 이딴 시나리오는 원작에도 나온 적이 없었다. 
 
[새로운 ‘김독자 지망생’이 입장했습니다.] 
[시나리오 제한 시간이 3시간 남았습니다.] 
[당신은 가장 많은 성좌에게 ‘김독자’임을 인정 받아야 합니다.] 
[당신은 1131번째 ‘김독자 지망생’입니다.] 
 
시나리오 시작과 동시에 나는 [김독자 공단]의 광장 외곽에 소환되었다. 
이미 곳곳에서는 자신이 김독자임을 증명하기 위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하하하, 여러분! 그래서야 성좌님들께 인정 받을 수 있겠어요? 제대로 된 김독자를 보여달라고요!] 
 
허공에서 들려오는 도깨비의 목소리.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관리국]은 무사히 마계로 진출을 끝낸 모양이었다. 혹부리 녀석들의 방해가 심했을 텐데······ 하여간 이야깃거리가 있는 곳에는 귀신같이 찾아오는 녀석들이다. 
 
[바아앗!] 
 
비유도 분발하겠다는 듯, 채널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다수의 성좌들이 채널에 추가로 입장했습니다.] 
 
나는 일단 차분히 주변을 둘러 보며 다른 ‘김독자 지망생’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제가 김독자입니다! 보십시오!” 
“내가 바로 김독자다!” 
 
얼굴 부분에 모자이크가 된 채 ‘김독자’를 외쳐대는 김독자 지망생들. 
아마 지금쯤 나도 다른 성좌들에게 저렇게 보이고 있겠지. 
 
······젠장,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대부분의 ‘김독자 지망생’은 그저 내 이름만을 반복해서 연호할 뿐, 딱히 특이한 제스처를 보이지는 않았다. 
‘공작위’에 눈이 멀어 일단 참가만 하고 본 녀석들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모든 녀석들이 그런 허당은 아니었다. 
 
“내가 예언자 김독자다!” 
“내가 바로 ‘구원의 마왕’이다!” 
 
[몇몇 성좌들이 관심을 보입니다.] 
[986번 지망생이 1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나는 그럴듯한 코스튬을 한 채 ‘김독자’를 외쳐대는 몇몇 지망생들을 보며 잠깐 멈춰섰다. 
 
“내가 바로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다!” 
 
[소수의 성좌들이 해당 지망생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986번 지망생이 2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제법인데? 
 
공단의 중심으로 진입할수록, 그럴듯한 말을 하는 녀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결투를 벌이는 김독자들도 보였다. 유독 이 지역만 왜 이렇게 피바람이 몰아치는가 싶었는데, 허공에서 익숙한 성좌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진짜 김독자’는 용맹한 녀석이라고 주장합니다.] 
 
······제천대성이 왜 이렇게 조용한가 싶었는데, 이미 한탕 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칼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피바람이 몰아쳤고, 습격을 당한 김독자 지망생들이 짚단처럼 자리에 쓰러졌다. 
 
“끄아아아악!” 
 
날카로운 마력의 강기가 다른 김독자 지망생의 허리를 양단했다. 
몇몇 지망생들이 달아나는 사이, 살인자 김독자 지망생이 외쳤다. 
 
“이것이 바로 내가 ‘김독자’라는 증거다.” 
 
푸르스름하게 솟아 오르는 마력의 칼날. 
나는 솔직히 조금 놀랐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해당 지망생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312번 지망생이 10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312번 지망생의 강기는 [백청강기]는 아니었지만, 꽤 모양새가 비슷했다. 내쪽을 흘끗 바라본 ‘312번 지망생’이 다시 다른 지망생들을 격살하기 시작했다. 단 한순간이었지만, 녀석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일렌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공작님들 떠나신 이후로 다른 공단의 끄나풀들이 나타나서 고생을 좀 했는데······. 
 
그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지금 이곳의 ‘김독자 지망생’ 중에는, 다른 [공단] 출신의 끄나풀들이 있다. 즉, 나에 대한 정보를 후원 받아 ‘김독자 행세’를 하는 놈들이 있다는 얘기다. 
나는 마음이 조금 착잡해졌다. 
만약 내가 이 게임에서 패배한다면, 엉뚱한 녀석이 ‘마왕 선발전’에 김독자로 참가하게 될 것이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김독자 증명’을 요구합니다.] 
 
내가 나인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이곳에는 나를 증명할 주민등록이나 신분증 따윈 없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진짜 김독자’는 전우애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엘? 
내가 반가움에 소리치려는 순간, 광장의 중심에서 한 지망생이 무릎을 털썩 꿇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유중혁! 유중혀어어어억! 일어나! 제발 일어나!” 
 
가상의 유중혁을 품에 안은 채 절규하는 ‘김독자 지망생’의 모습.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저런 짓따위 하지 않는다. 
저딴 연기로 우리엘이 속을 리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그 다음도 보여달라고 간청합니다.] 
[32번 지망생이 30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엘은 믿지 말아야겠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32번 지망생을 지나치는데, 이번에는 뜻밖의 수식언이 들려왔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진짜 김독자’는 중2병이라고 주장합니다.] 
 
심연의 흑염룡? 여기엔 언제 온······.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진짜 김독자’라면 진정한 중2병을 알고 있을 거라 주장합니다.] 
 
진정한 중2병? 내가 그딴 걸 알 턱이······ 라고 생각하는데, 놀랍게도 그 말과 동시에 헛소리를 시작한 지망생이 있었다. 
 
“어이어이, 유상아 씨. 그거 알고 있나? 큭큭. 독자에겐 말이야. 독자의 삶이 있다고.” 
 
순간 머릿속이 엄청나게 복잡해졌다. 
시나리오가 터지기 전의 이야기인 것 같은데, 저건 또 어떻게 알고 있는······ 아니, 그보다 나는 저런 식으로 말한 적 없다고.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만족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97번 지망생에게 300점을 부여하였습니다.] 
 
정신이 황폐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러다간, 진짜 말도 안 되는 놈들에게 내 이름을 빼앗기게 생겼다. 
침착하게 생각해야 한다. 
내가 김독자임을 어필하기 위해서는, 나와 성좌들만 공유하고 있는 사건들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이 손 놓고 꺼져 빌어먹을 새끼야!” 
 
[32번 지망생이 20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나랑 성좌들만 알고 있는······. 
 
“나는 씩 웃는 것을 좋아하지!” 
 
[97번 지망생이 25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나랑 성좌들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차이나 드레스와 가터벨트다!” 
 
[312번 지망생이 40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젠장, 그런 일이 대체 뭐가 있지? 
나는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고, 쉽게 가기로 했다. 
그냥, ‘구원의 마왕’의 간접 메시지를 통해 내가 김독자임을 직접 알리면 되는 것이다. 
 
[해당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동안 성좌 ‘구원의 마왕’은 발언할 수 없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제한 시간이 1시간 남았습니다.] 
 
남은 시간은 이제 얼마 없었다. 
나는 품속에서 조용히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손에 쥐었다. 
 
어차피 ‘김독자 지망생’들의 숫자는 한계가 있다. 
 
모든 ‘김독자 지망생’을 죽인다면, 최후의 지망생이 진짜 김독자가 되는 것은 자명한 일. 
하지만 이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야 다들 권좌에 눈이 멀어 저러고 있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내 [공단]의 공민들일 테니까······. 
말없이 칼자루를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하길 몇 번, 나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네놈 답지 않은 행동이다.」 
 
빌어먹게도 유중혁의 말이 맞다. 
김독자라면, 절대 이런 식으로 일을 해결하지는 않는다. 
 
나는 생각했다. 
 
나라면 나를 어떻게 증명할까. 
아니, 애초에 ‘나’를 증명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변이 발생한 것은 그때였다. 
 
“이것이 바로 [전인화]다! ‘백청의 역설’이 가르친 궁극의 기술······!” 
 
어설프게 전격이 흐르는 검을 쥔 312번 지망생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백청의 역설이 아니라 역설의 백청이라고 지적하려는 순간. 
하늘에서, 까마득한 번개가 내리쳤다. 
 
콰르르르릉! 
 
“으아아아아악!” 
 
내리친 푸른 빛의 번개는, 그대로 지망생의 칼날 위에 꽂혀 그의 몸을 산산이 찢어버렸다. 일부 지망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고, 성좌들이 좋아하며 마구잡이로 점수를 부여했다. 그리고 그 혼란의 도가니에서,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하늘에서, 작은 무언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은 했는데, 설마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쿠우우우웅! 
 
고도의 압력이 느껴지는 작은 점 같은 것이 무지막지한 굉음을 내며 [공단]의 광장에 상륙했다. 백청의 전격이 광장을 한바탕 휘몰아쳤다.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내뿜으며, 그 전격의 중심에 서 있는 작은 사내. 
츠츠츳, 튀어 오르는 스파크와 희뿌연 먼지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제자는 어디 있지?] 
 
잠시 후, 목소리의 주인이 만천하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수의 성좌들이 경악합니다.] 
 
성좌들이야 경악하건 말건, 작은 사내는 안하무인이었다. 
그리고 사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은 몇몇 지망생들이 있었다. 
 
“저 체구는······.” 
“잠깐, 설마?”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후다닥 달려가 사내 앞에 엎드렸다. 
 
“저, 접니다!” 
“제가 김독자입니다! 스승님······!” 
 
작은 사내의 앞에, 무수히 많은 김독자들이 엎드렸다. 
나는 그들을 보며 혀를 찼다. 
눈치가 빠른 것은 좋았다. 
 
번쩍! 콰르르릉! 
 
그만큼, 몸놀림도 빨랐다면 더 좋았을 텐데. 
 
“으아아악!” 
“끄어어어억!” 
 
백청의 전격을 맞은 김독자들이 하나둘 잿더미로 변해버리고 있었다. 
친절하게도 제자들을 하나씩 족치며 이쪽으로 다가오시는 스승님을 보며, 나는 순간 뭔가를 깨달았다. 
 
······그런가. 
 
애초에 ‘나’라는 것은 내가 증명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당신의 고유 설화가 발동합니다.] 
[설화, ‘귀환자의 제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결국 내가 아닌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달아나는 무수한 ‘김독자’들의 건너편에, ‘진짜 김독자’를 아는 사내가 있었다. 
 
[진짜 내 제자는 어디에 있느냐?] 
 
만약 여기서 순순히 앞으로 나간다면, 나는 다른 가짜 녀석들처럼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겠지.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젠장, 뭐야? 죄다 자기가 김독자래?” 
 
언제 뒤따라왔는지, 장하영이 뒤쪽에서 투덜대고 있었다. 
나는 장하영을 향해 말했다. 
 
“장하영.” 
 
곧바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내 모습에, 깜짝 놀란 녀석이 움찔 물러서더니 되물었다. 
 
“······김독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 ‘파천검도’ 배웠지?” 
“······당연히 배웠지. 왜?” 
 
나는 씩 웃으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지금 나한테 사용해.” 
 
 
 
 
 
< Episode 47. 마왕 선발전 (6) > 끝

< Episode 47. 마왕 선발전 (7) >
 
 
 
 
 
키리오스는 지금까지 총 세 번의 제자를 들였다. 
처음 초월좌에 오른 후 한 번, 50년이 지난 후 또 한 번. 
그리고 그는, 한동안 제자를 들이지 않았다. 
들였던 제자가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천마신교의 후계자에게. 
그리고 또 한 번은, 혈마교의 최고호법에게. 
 
‘역설의 백청’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이 유명해진 것도 바로 그 두 죽음으로 촉발된 사건 때문이었다. 제자들의 죽음에 분노한 키리오스는 곧장 천마신교와 혈마교의 본거지로 쳐들어갔다. 그때,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는 무림사에도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천마신교의 본거지인 ‘십만 대산’의 절반이 민둥산이 되었고. 
혈마교는 <제1 무림>에서 세력을 철수했다는 것뿐. 
 
그리고 100년이 지나, 키리오스는 다시 한 번 제자를 들였다. 
키리오스는 모처럼 만난 제자를 향해 물었다. 
 
[······그게 무슨 꼴이냐?] 
 
“불민한 제자가 인사드립니다.” 
 
키리오스는 인상을 쓴 채 그런 제자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받은 제자였다. 
 
[물었다. 어째서 그런 꼴이냐.] 
 
딱히 재능이 있는 녀석도 아니었고,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지도 않았다. 
단지, 녀석을 보는 순간 아주 오래 전부터 알아왔던 것처럼 친근했다. 
‘역설의 백청’에게 ‘친근함’이라니. 
그 역설이 너무나 기이했기에, 조금 알아보고 싶었던 게 전부다. 
 
“<제1 무림>에 다녀왔습니다.” 
 
키리오스는 몸 곳곳에 피칠갑을 한 자신의 제자를 노려보았다. 
[피스 랜드]에서도 꿍꿍이로 가득하던 녀석이었다. 
무공을 훔쳐 달아난 죄를 묻지 않은 것은, 어쨌거나 자신의 행성을 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다렸던 것이다. 
언젠가 제놈이 스스로 반성하고,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를. 
그런데, 모처럼 나타난 제자가 저런 꼴이라니······. 
키리오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말했다. 
 
[그것은 ‘파천검도’의 흔적이다.] 
 
“······.” 
 
[파천검성의 제자와 부딪쳤던 것이냐? 아니면 파천검성 본인이냐?] 
 
제자는 답하지 않았다. 
키리오스의 기세가 더욱 매서워졌다. 
 
[답하라.] 
 
쿵, 하고 내리찍은 진각에 [공단] 전체가 짓밟힌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진각에 담긴 존재감이 퍼지며 [공단] 일대의 김독자 지망생들이 고통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단지 마력파만으로, 마치 ‘격’을 현현하기라도 한듯한 효과. 이것이 바로 ‘역설의 백청’의 존재감이었다. 
무릎을 꿇지 않은 것은 단 한사람, 그의 제자뿐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저는 백청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 말에, 키리오스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이곳에 올 때, 그가 받은 메시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를 죽여주십시오. 
 
키리오스의 작은 잇몸 사이에서 으드득,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놈을 벌하러 온 것은 맞다. 하지만······.] 
 
자신의 제자가 애먼 곳에서 두들겨 맞고 왔다. 
게다가 제자 스스로 그 치욕을 이기지 못해 죽여달라 말하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대체 어떤 스승이 제자를 벌할 수 있을까. 
분명 그런 스승도 있긴 하겠지만, 적어도 키리오스는 아니었다. 
 
[······죽여달라는 놈이 어째서 그렇게 당당한 것이냐?] 
 
“······.” 
 
[못난 놈.] 
 
키리오스는 그 말과 함께 제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저 자존심 강한 제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뭐든 가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제1 무림>이라고 했느냐?] 
 
제자는 답하지 않았지만, 키리오스는 이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세상은 ‘파천’ 위에 ‘역설’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키리오스가 사라지자, [공단]에 흐르던 전운도 씻은 듯 사라졌다. 
키리오스가 몰고 지나간 흔적 속에, ‘김독자 지망생’들이 줄줄이 누워 있었다. 
 
“으, 으으······ 으아아아!” 
 
나를 지망한다는 녀석들이 저 꼴로 있는 걸 보자니, 나로서도 기분이 몹시 복잡했다. 
장하영이 물었다. 
 
“······너무 과했던 거 아니야?” 
 
그것은 ‘김독자 지망생’들을 향한 물음은 아니었다. 
나는 키리오스가 사라진 포탈 쪽을 보며 말했다. 
 
“그래야 움직일 사람이었어.” 
 
키리오스는 이미 무림에서 두 명의 제자를 잃었다. 
그런 그를 <제1 무림>으로 보내려면, 비겁한 구실을 만드는 수밖엔 없었다. 
 
“저 사람이 파천검성을 죽이면 어쩌려고 그래?” 
“그건 걱정 마.” 
 
나는 장하영이 입힌 상처 위에 설화 파편을 치덕치덕 문지르며 답했다. 
지금이야 내 복수를 하러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이 어떻게 돌아갈 지는 두고봐야 알 것이다. 
키리오스 급의 초월좌라면, 슬슬 <제1 무림>의 변고 정도는 눈치챘을 테니까. 
 
[당신으로 인해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가 촉발되었습니다.] 
 
아마 지금쯤, 키리오스는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를 받아 <제1 무림>에 개입할 개연성을 얻었겠지. 
키리오스 또한 ‘이계의 신격’에게 불만이 있는 존재. 
전후사정을 알게 된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파천검성을 돕는 쪽을 택하게 될 것이다. 
 
“그보다 지금은 우리 쪽이 더 걱정이야.” 
“뭐? 왜?” 
“원래 키리오스는 여기서 쓸 카드가 아니었어.” 
 
그동안 무수한 위기들이 있었음에도, 나는 ‘장하영’을 통해 키리오스를 부르지 않았다. 
본래 나는 키리오스를 ‘마왕 선발전’의 격전 속에서 부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카드를 ‘파천검성’을 살리는 데 사용했다. 
그게 잘못된 선택인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떳떳한 선택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걱정스런 눈길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어떤 별은 나를 걱정하고 있었고. 
 
[몇몇 성좌들이 당신을 향해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어떤 별은, 나의 위기를 기회로 여기고 있었다. 
나는 그런 별들을 향해 씁쓸히 웃었다. 
 
“충분히 봤으면 이제 결정들 하지 그래.”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며, 하늘을 향해 공언했다. 
 
“내가 진짜 ‘김독자’다.” 
 
이미 키리오스와의 대화마저 모두 공개된 상황에, 더 이상의 증명은 필요 없었다. 
아득한 밤하늘의 별들이 동시에 반짝였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진짜 김독자’로 인정했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진짜 김독자’로 인정했습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을 ‘진짜 김독자’로 인정했습니다.] 
. 
. 
[극소수의 성좌들이 해당 결과에 불복합니다.] 
 
동의하지 않는 놈들은 또 뭔가 싶었지만, 어차피 이건 다수결이었다. 
 
[대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을 ‘진짜 김독자’로 인정했습니다.] 
[당신은 ‘진짜 김독자’로 인정 받았습니다.] 
[히든 시나리오가 완료되었습니다!] 
[시나리오 보상으로 200,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주변에 있던 ‘김독자 지망생’들의 얼굴이 하나 둘씩 바뀌기 시작했다. 
모자이크가 흩어진 곳에, 사람들의 진짜 얼굴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공단]의 주인을 확인한 공민들이 경악하며 외쳤다. 
 
“김독자다! 진짜 김독자야!” 
“고, 공단의 주인이 돌아왔다······!” 
 
이어서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당신은 ‘구 길로바트 공단’을 정식으로 계승하였습니다.] 
[구 길로바트 공단이 ‘김독자 공단’으로 정식 공언되었습니다.] 
[마계에 당신의 위명이 널리 퍼집니다!] 
[당신의 유명세가 당신이 가진 설화들을 강화합니다.] 
 
전신을 감싸는 환한 빛살과 함께, 한층 더 강화된 설화가 충만하게 차올랐다. 
 
[당신은 마계 공단의 ‘공작’이 되었습니다.] 
 
이제 곧, 외로운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 
 
 
사태가 진정된 후, 내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공단]의 중심지에 위치한 마르크의 집무실이었다. 
 
“······면목이 없네.” 
“아냐, 이만하면 잘 해줬어.” 
 
‘김독자 게임’이 시작되며 일어난 폭동에, 마르크를 비롯한 [공단]의 간부들은 모두 구금되어 있었다. 
나는 마르크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아니까.” 
 
마르크가 아니라 누구였더라도, ‘김독자 게임’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건 내가 자리를 비워서 발생한 이벤트니까. 
그나마 [공단]이 이만큼 유지가 되었던 것도 마르크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르크는 고향 행성에서 용병 단장을 역임한 적이 있었고, 때문에 굉장히 높은 [군중 지휘]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 
나는 마르크에게 주변의 동향에 대한 간단한 보고를 들었다. 
 
“곳곳에서 전쟁 소식이 들려오고 있네.” 
 
집무실의 창밖으로 한무리의 인파가 [공단]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 시나리오에 참가했던 사람들도 있었고,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 
 
“전쟁은 혼자서는 할 수 없어. 알고 있지 않은가?” 
“싸울 의지가 없는 사람들을 애써 붙잡는 것도 미련한 짓이야.” 
 
저들 중 대부분은 ‘시나리오 지역 이탈’로 패널티를 받아 사망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이주를 결심했다. 
그만큼이나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뜻이겠지. 
 
[공단의 인구가 줄어 ‘공장’의 가동력이 감소합니다.] 
 
설화 병기인 [공장]은 공민들의 노동을 통해 유지된다. 
그러니, 노동력이 줄어드는 만큼 파워가 낮아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공단]의 전력만으로 승부를 볼 수는 없어. 어차피 적들의 주력도 [공단]은 아니야.” 
 
내가 상대해야 할 [공단]은 멜레돈과 베르칸. 
멜레돈은 성운 <베다>와, 베르칸은 성운 <파피루스>와 손을 잡았다. 
동맹의 규모로 봐서 성운과 직접 동맹을 맺은 것은 아닐 것이고, 아마 해당 성운의 일부 성좌들과 계약을 한 것일테지. 
그렇다고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이 ‘마왕 선발전’에서 나는 최소 열 명 이상의 성좌들과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뭔가 방책이 있는 겐가?” 
 
솔직히 말해서, 승산이 그리 높지는 않았다. 
이제 막 애송이 성좌가 된 내가, 아무리 유중혁의 도움이 있다 해도 그들과 정면으로 싸우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방법이야 있지.” 
 
하지만 지금은 없어도 있다고 해야 한다. 
보고 있는 눈들이 있으니까.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패기에 감탄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그 방법이 뭔지 궁금해합니다.] 
[20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게다가 실제로, 생각해 둔 것들이 몇 가지 있기는 했다. 
전이라면 불가능 했겠지만, 지금은 가능해진 방법들. 
그런데 그 방법들을 쓰기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제4의 벽’이 꿈틀거립니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녀석은 곧장 반응해왔다.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네 도움이 필요해.’ 
 
내 마음을 줄줄이 꿰는 녀석이니, 내가 굳이 입으로 내뱉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다. 
 
‘내 특성창을 보게 해줘.’ 
 
지금까지는 내 정보를 제대로 모르는 상태로도 어떻게든 싸워 왔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제4의 벽’이 불안하게 요동칩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그런 식이어서는 곤란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도 이기기 힘든 싸움. 
이미 적에 관한 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황이니, 지금부터 내가 알아야 할 것은 ‘나’에 관한 것이었다. 
 
 
 
 
 
< Episode 47. 마왕 선발전 (7) > 끝

< Episode 47. 마왕 선발전 (8) >
 
 
 
 
 
[‘제4의 벽’이 위협적으로 이빨을 드러냅니다.] 
 
허공에서 사나운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츳! 
 
나는 마르크에게 재빨리 집무실 밖으로 나갈 것을 지시했다. 
괜히 여기 있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나는 무슨 제안을 어떻게 해야 이 망할 벽 녀석을 진정시킬 수 있을지 생각했다. 
 
‘너 설화 좋아하잖아. 이번 일 잘 끝나면, 네가 먹고 싶은 것들 잔뜩 먹여줄게.’ 
 
[‘제4의 벽’이 눈살을 찌푸리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으르렁거리던 기세가 조금 주춤했다. 
아예 효과가 없지는 않은 모양이군. 
 
‘꼭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그래. 계속 모르고 있다간 여기서 나 죽을 수도 있다고. 설마 네가 바라는 게 그거야?’ 
 
[제4의 벽]이 침묵했다. 
다행히, 이 녀석도 지금 내가 죽는 건 원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참이나 침묵하던 [제4의 벽]이 입을 열었다. 
 
「‘제4의 벽’이 말합니다. 김 독자」 
 
‘응.’ 
 
「내 가 없으 면 위 험」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제4의 벽]의 기능 중에는 성좌들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것도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기능을 상실했을 때 성좌들이 내게 해를 가하는 것이 걱정되기도 할 것이다. 
 
‘알고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꼭 봐야만 해.’ 
 
내 의지가 완강하자, 잠시 대답이 없던 [제4의 벽]이 입을 열었다. 
 
「10 초 정 도라 면」 
 
10초라. 
그래, 조금 빠듯하긴 하지만 그 정도면 괜찮다. 
 
「대신 채 널이 모 두 차 단되 어야 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유. 채널에 광고 띄워줘. 
 
도깨비 통신으로 명령을 내리는 순간, 비유가 송출하던 화면이 일제히 꺼졌다. 
 
[다수의 성좌들이 갑작스런 광고 영상에 당황합니다.] 
 
좋아, 이만하면 됐겠지. 
그러나 [제4의 벽]은 만족스럽지 못한 투였다. 
 
「‘제4의 벽’이 말합니다. 아직 충 분치 않 다」 
 
‘충분치 않아? 뭐가?’ 
 
[제4의 벽]은 답이 없었다. 
허공을 올려다 보자, 비유가 무구한 눈망울을 깜빡이고 있었다. 
 
[······바앗?] 
 
분명, 비유는 제대로 채널을 차단했다. 
그런데도 아직 충분치 않다는 것은······. 
순간, 종전에 있었던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히든 시나리오 ― ‘김독자 증명’. 
 
지금 이 [공단] 안에는, 그 시나리오를 진행하던 도깨비가 있을 것이다. 
나는 창 밖으로 시나리오의 폐허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히든 시나리오를 생성하는 것은 <스타 스트림>이지만, 그 시나리오의 방향을 인도하는 것은 도깨비다. 
 
[다수의 성좌들이 불안정한 채널 상태에 항의합니다.] 
 
돌이켜 보면, ‘김독자 증명’은 좀 특이한 시나리오였다. 
마치 성좌들의 요구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한 시나리오 진행, 심지어 시나리오 이전의 ‘나’에 대한 정보까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짓을 벌일 녀석은 하나 뿐이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형, 그만 나오지 그래?” 
 
 
* 
 
 
“아줌마! 어디 있어? 나 왔어!” 
 
성남시에 마련된 <자애 구호소>. 
정부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이 대피소는, 시나리오 침습으로 인한 부상자들을 돌보는 민간 구호 단체 중 하나였다. 
한수영은 곳곳에 쓰러져 있는 환자들을 툭툭 걷어차며 소리쳤다. 
 
“김독자 엄마! 김독자 엄마 손 들어봐!” 
 
그 서슴없는 발길질에 멀쩡히 누워 있던 환자들이 인상을 쓰며 비켜났다. 사색이 된 유상아가 재빨리 뒤쪽에서 다가와 환자들을 수습했다.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이봐요, 한수영 씨!” 
 
유상아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한수영이 질색하며 말했다. 
 
“아아아, 잔소리 할 거면 저리 가.” 
“너무 막무가내잖아요. 이 사람들은 환자라고요!” 
“나도 환자야.” 
 
눈살을 찌푸린 유상아가 결국 화를 내려는 순간, 구호소의 문이 열리며 새로운 환자들이 들이닥쳤다. 이계의 괴수들에게 부상당한 화신들. 대형 병동에서조차 감당하지 못한 인파들이, 이쪽 구호소에 강제로 떠맡겨진 것이다. 
주변을 일별하던 한수영의 눈에 낯익은 여인이 보였다. 
 
“이설화도 여기 있었네.” 
 
의선 이설화. 
유중혁의 동료였던 그녀는 이곳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한수영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엉망진창이네 진짜······. 그거 알아? 쟤 원래 엄청 나쁜 년이 될 운명이었다는 거.”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죠?” 
“그냥 알아. 김독자도 아는 걸 내가 왜 몰라?” 
 
김독자를 들먹이는 한수영의 모습에 유상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유상아를 흘끗 보며, 한수영이 말을 이었다. 
 
“김독자가 너무 많은 걸 바꿨어. 죽어야 할 사람도 살리고, 살아야 할 사람도 살리고······.” 
“······예언에 관한 이야기인가요?” 
“넌 어차피 말해도 몰라.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나라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라는 거지.” 
 
한수영이 쓰읍, 하는 소리를 내며 품 속에서 꺼낸 다크 초콜릿을 하나 까먹었다. 초콜릿의 쓴맛이 입안에 한가득 퍼지자, 어쩐지 한수영의 말끝에도 씁쓸함이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 녀석 때문에 미래가 너무 많이 망가졌어. 이야기는 마땅히 흐름대로 흘러가야 하는 법인데.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너도 독자도 ‘등장인물’과 별다를 바가 없었겠지.” 
 
유상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한수영이 피식 웃으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건강해 보이는구나, 수영아.” 
 
김독자의 엄마, 이수경이 어느새 그들의 뒤쪽에 와 있었다. 
 
“남이사 건강하든 말든.” 
“우리 독자는 병약한 애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김독자가 뭘 좋아하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빽 소리를 지르는 한수영의 반응에 이수경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군요 유상아 씨. 여긴 무슨 일이죠?” 
 
유상아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한수영이 다시 끼어들었다. 
 
“[길흉화복]을 좀 봐줘.” 
 
[길흉화복(吉凶禍福)]. 
그것은 이수경이 배후성인 ‘시조의 어머니’를 통해 받은 [성흔] 중 하나였다. 
 
“길흉화복이라······ 늘 자신만만한 것 같더니, 왜 갑자기 그런 잡기에 기대려는 거지?” 
“나도 자신감만으로 모든 일이 해결된다면 좋겠네.” 
“아는 정보가 떨어졌구나. 그렇지?” 
 
한수영과 이수경은 김독자와 다르다. 
한수영은 원전과 ‘초반’이 흡사한 텍본을 가진 게 전부였고, 이수경은 김독자에게 들은 원전의 정보가 아는 것의 전부였다. 
결국, 두 사람 다 불확실한 미래 정보만을 가지고 있는 상황. 
이수경이 옅게 웃으며 물었다. 
 
“꼭 나한테 올 필요가 있었니? 상아 씨도 <올림포스>를 통하면 비슷한 걸 할 수 있을 텐데?” 
“농담이지? 김독자가 <올림포스>한테 어떤 꼴을 당했는지 잊었어?” 
 
두 사람이 투닥대는 사이, 유상아가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저는 당장은 도움이······.” 
“신경 쓰지 말아요. 나도 <올림포스> 상황이 복잡하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지금 한창 내분 중이죠?” 
“······네.” 
 
유상아가 자신 없는 눈치로 고개를 숙이자, 한수영이 말했다. 
 
“얜 그냥 냅둬. 안 그래도 성흔 남발하는 바람에 수명 엄청 깎이는 중이니까. 것보다 빨리―” 
 
뜻밖의 비호에 유상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런 둘을 보며 이수경이 빙긋 웃었다. 
 
“좋아, 아가씨들. 알고 싶은 정보가 뭐지? 참고로 [길흉화복]으로는 구체적인 미래 전망은 알 수 없어. 오직 길과 흉에 대해서만 점칠 수 있을 뿐이야.” 
 
알고 있다는 듯, 한수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김독자의 현재 상황에 대해 알고 싶어.” 
“흐음······.” 
 
이수경이 미묘한 눈빛으로 한수영을 바라보자, 한수영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거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느냐에 따라 한반도가 개박살 날 수도 있으니까 그러는 거야. 요즘 성좌들 통해서 자꾸 이상한 얘기가 들려와서······ 왜 웃어?” 
“그냥 귀여워서.” 
 
한수영이 투덜거렸다. 
 
“빨리 점이나 쳐봐.” 
“이미 오래전부터 쳐보고 있었어.” 
“그래?······ 그래서 어느 쪽인데?” 
 
이수경이 능글맞게 웃었다. 
 
“글쎄, 어느쪽일까. 일주일 전에는 중(中)이었는데, 또 사흘 전에는 흉(凶)이었다가······.” 
“뭐? 흉?” 
“어제 잠깐 길(吉)이기도 했다가······.” 
“지금은 뭐야 그래서!” 
 
이수경은 말없이 자신의 품속에서 청동경(靑銅鏡)을 꺼냈다. 
그것은 한반도 설화의 천부삼인 중 하나인 ‘천경(天鏡)’의 파편이었다. 
 
“직접 보려무나.” 
 
목소리에 담긴 심상치 않은 뉘앙스에, 한수영과 유상아가 동시에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초록빛 청동경 위에 희미한 글씨가 떠올랐다. 
 
―대흉(大凶). 
 
한수영은 순간 자신이 한자를 제대로 읽은 게 맞는지 의심했다. 
 
“이거 진짜야?” 
“나도 모르겠어. 정 궁금하면 성운 <홍익> 한테 물어보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수경도 그리 편안한 표정은 아니었다. 
천경의 표면이 일렁이며, 글씨가 변한 것은 그때였다. 
 
“앗······? 조(助) 라고 뜨는데요?” 
 
유상아의 말에, 다른 두 사람도 천경을 들여다보았다. 
 
도울 조助. 
 
너무나 명백한 의미였기에, 구태여 해석할 필요도 없었다. 
한수영과 유상아가 동시에 서로를 마주보았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이수경이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둘 중 누가 갈 거야?” 
 
 
* 
 
 
[······역시 김독자는 김독자네. 어떻게 알았어?] 
 
허공에 나타난 비형의 모습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잘 다듬어진 털에는 윤기가 흐르고 있었고, 빼 입은 거적도 제법 질 좋은 천으로 바뀌어 있었다. 도깨비들은 꼬질꼬질한 호랑이 팬티만 입는다더니, 그 설화도 이젠 전부 옛말인 모양이다. 
 
“한반도 채널은 어쩌고 여기까지 왔냐?” 
 
[좌천된거지 뭐. 보면 모르겠어?] 
 
“내가 없으니까 잘 안 되는 모양이네.” 
 
[알면 빨리 돌아오든가.] 
 
비형은 예전처럼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아마도, 나와 녀석의 관계가 변했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상 녀석과 나의 계약은 내 죽음을 통해 종료되었으니까. 
비형은 잠시 나를 바라보았고, 나도 비형을 바라보았다. 
 
[잘 지냈냐?] 
 
“보다시피.” 
 
[네 이야기 많이 들리더라.] 
 
나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다시 내 채널로 돌아올 생각은 없어? 대우 잘 해줄 수 있는데.] 
 
아마도, 비형의 말은 진심일 것이다. 
그리고 진심이기에 더욱 위험한 제안이었다. 
 
“글쎄······.” 
 
나는 이제 비형을 증오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형과 손을 잡을만큼 어리숙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비형은 관리국과 끈이 닿은 도깨비고, 관리국은 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집단 중 하나이니까. 
 
[하긴, 넌 원래 그런 녀석이었지.] 
 
비형의 표정이 변하고 있었다. 
도깨비들은 자신의 채널을 떠난 존재에게는 냉담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비형이 적으로 돌아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 시점이 빨리 올 것 같다는 생각에 속이 쓰렸다. 
 
[그럼 이건 어때? 나랑 공동 채널을 구축하자. 여기 ‘마계’에서 만이라도 좋으니까.] 
 
순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진심이냐?” 
 
[한 번 생각이나 해봐.] 
 
사실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비형과 공동 채널을 구축할 수만 있다면, 비유도 비형의 곁에서 여러 가지를 배우며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테니까. 
 
“알겠어. 그보다 지금은······.” 
 
순간, 비형이 ‘도깨비 통신’으로 말해왔다. 
 
―채널 꺼달라는 거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비형은 척하면 척이다. 
 
―뭘 하려는진 모르겠지만, 잘 되길 빈다. 지금은 나도 일이 좀 있어서······ 나머지 회포는 나중에 풀자고. 
 
왜 비형이 저렇게까지 호의적인 것인지, 잘 납득이 되질 않았다. 어찌됐든 나로서는 다행이었지만. 
비형이 설정을 바꿨는지, 다음 순간 채널에서 성좌들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채널 내의 모든 성좌들이 채널의 연결 상태에 불만을 품습니다!] 
 
나는 곧바로 [제4의 벽]을 바라보았다. 
 
「‘제4의 벽’이 말합니다. 오 래 보 지는 마」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해제되었습니다.] 
 
내 세계를 둘러싸고 있던 장막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특성창’을 켰다. 
 
[‘특성창’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막대한 양의 정보가 눈앞에 떠올랐다. 
 
+ 
 
<인물 정보> 
 
이름 : 김독자 
나이 : 28세 
배후성(背後星) : 없음 
수식언(修飾言) : 구원의 마왕 (설화급) 
전용 특성 : 라마르크의 기린 (전설), 마계 공작 (전설), 시나리오의 해석자 (???), ■■의 사도 (???)······. 
. 
. 
 
+ 
 
지난 번에 제대로 확인 못했던 내 특성이, 이제야 정확히 보였다. 
솔직히, 조금 의외였다. 내 특성은 당연히 ‘독자’일 거라 생각했는데······. 
‘시나리오의 해석자’라고? 
게다가 ‘■■의 사도’는 또 뭐야? 
특성 등급은 왜 표기가 안 되는 건데? 
 
[당신은 최초로 당신의 특성창을 확인하였습니다.] 
[‘시나리오의 해석자’의 특성 효과가 발동합니다!] 
 
어쨌든, 나는 계속해서 정보를 확인해 나갔다. 
내가 제일 주의깊게 본 것은, ‘전용 스킬’이 있는 부분이었다. 
 
+ 
 
전용 스킬 : [전지적 독자 시점 Lv.?], [책갈피 Lv.?], [등장인물 일람 Lv.?], [제4의 벽 Lv.?], [독해력 Lv.?]······. 
 
+ 
 
본래는 ■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스킬들 중,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독해력(讀解力). 
 
얼핏 보기엔 단순히 뭔가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 같았지만, 정말로 그게 다일 것 같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얻은 스킬들도 대부분 그랬으니까. 
나는 무심결에 특성창을 향해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런데 허공에서 츠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특성창이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벌써 10초가 다 지난 건가? 
 
처음에는 그렇게만 생각했으나, 문제는 단순하지 않았다. 
귓가에 희미한 이명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머릿속이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특성창을 건드린 손끝이 저려오고, 세상이 어지러워졌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넘을 수 없던 ‘벽’의 너머에서, 뭔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제4의 벽]이 발동했음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주변의 모든 풍경이 뒤섞이고 있었다. 합쳐지지 않던 것들이 합쳐지는 광경. 그 끔찍한 기분 속에서, 잠깐이지만 나는 기묘한 합일감을 느꼈다. 마치, 그것만이 내가 오랫동안 바라왔던 일인 듯한 기분. 
 
츠츠츠츠츳! 
 
그리고 희한한 메시지가 들려왔다. 
 
[등장인물, ‘김독자’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뭐······? 
 
의식이 깜빡이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향해 말했다. 
 
「(그러게, 오래 보지 말라고 했잖아).」 
 
 
 
 
 
< Episode 47. 마왕 선발전 (8) > 끝

< Episode 48. 등장인물 (1) >
 
 
 
 
 
Episode 48. 등장인물 
 
 
뺨에 몇 번인가 불에 데인 듯한 통증이 일었다. 
 
“김독자! 야! 뭐냐고!” 
 
시야가 깜빡이며, 천천히 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 중입니다!] 
 
“으······.” 
 
내 목소리가 내 목소리 같지 않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가 돌아온 듯한 느낌. 소름끼치는 감각이 전신에 남아 있었다. 장하영의 손끝이 닿은 어깨가 흠칫 떨렸다. 
 
“꼴이 왜 이래?”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았다. 
[제4의 벽]에게 부탁해서 내 특성창을 확인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로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물었다. 
 
“······나 얼마나 기절해 있었어?” 
“몰라! 나도 갑자기 번개가 치길래 달려온 거야!” 
“번개?” 
“그 왜, 개연성 어길 때 생기는 스파크 있잖아. 그게······.” 
“그게 번개처럼 쳤어?” 
 
장하영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큰 건 처음 봤다니까?” 
 
잘 보니 코트를 비롯한 옷가지가 까맣게 타 있었다. 자동 수복 기능이 있는 코트가 이렇게 망가질 정도로 후폭풍이 쳤다니······. 
심지어 집무실의 천장은 운석이라도 맞은 것처럼 뻥 뚫려 있었다. 
 
“괜찮은 거야?” 
“괜찮아. 괜찮은 건 물론이고······.” 
 
오히려, 더 가뿐해진 느낌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화신체가 이렇게 타버렸는데, 정신은 이렇게 또렷하다니. 
심지어 설화력도 더 충만해진 느낌이었다. 
 
[전용 스킬, ‘독해력’의 효과로 이해력이 증가합니다.]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종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맞다. 
분명 나는 그런 메시지를 보았었다. 
 
[등장인물, ‘김독자’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메시지는, 나를 ‘등장인물’이라고 표기했다. 
이제껏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가슴 한구석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지금껏 나는 몇 번인가 ‘등장인물화’가 진행된 존재들을 본 적이 있었다. ‘원작’의 바깥에서 왔으나, 결국은 원작과 동화되어버린 이들. 
주로 ‘하차자’라 불리던 이들이 그랬다. 
나는 다급히 특성창을 불러 보았다. 
 
‘특성창.’ 
 
하지만, 특성창은 열리지 않았다. 
이유는 명백했다. 
 
[‘제4의 벽’이 당신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김 독 자 15초 봤 다」 
 
‘미안, 진짜로.’ 
 
그만큼 시간이 지난 줄 누가 알았겠냐고. 
사실 10초든 15초든 특성창 하나 살피기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이 제 안보 여 줘」 
 
‘잠깐만, 하나만 물어보자.’ 
 
나는 사라지려는 [제4의 벽]을 황급히 붙잡았다. 
 
‘그 [벽] 뒤에 있는 건, 대체 뭐야?’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나는 분명 기절하기 직전 무언가를 보았다. 
좀 더 더듬어 보자면, 누군가와 언뜻 이야기를 나눈 것 같기도 했다. 
몇 개의 그림자가 분명히 그곳에 있었다. 
 
「······졸 려.」 
 
그 말과 함께, [제4의 벽]은 잠들어버렸다. 
여전히 기능은 작동하고 있었지만, 의식은 꺼진 모양이었다. 
제기랄.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심연을 들여다본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해당 설화는 등급 표기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는 멍한 눈으로 허공에 깜빡이는 메시지를 보았다. 
 
심연을 들여다본 자. 
 
나는 원작에서 그 설화를 얻게 되는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등줄기에 돋는 소름을 멈출 수가 없었다. 
고삐가 풀린 의문들이 머릿속에서 폭주했다. 
 
왜 여기서 내가 이 ‘설화’를 얻은 거지? 
저 ‘설화’와, 내가 ‘등장인물’이라고 표기된 건 대체 무슨 관계인 걸까? 
지금 나는 ‘등장인물’이 된 걸까, 아니면 여전히 ‘독자’인 걸까? 
나는······. 
나는, 여전히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존재인 걸까? 
 
“김독자?” 
 
감정이 훤히 내비치는 눈으로, 장하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처한 상황도 저 눈동자처럼 명확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 눈빛을 읽듯, 나 자신에 관한 것도 읽을 수 있다면······. 
순간, 머릿속에서 불똥이 튀었다. 
 
「만약, 나 자신에게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내 안에는, 분명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뭔가가 숨어 있다. 
작가가 남긴 것인지, 아니면 세계가 변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내게 스며든 것인지는 모른다. 확실한 것은 시간을 들여서라도 그게 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쓰려고 마음을 먹자 망설여졌다. 
 
······이걸 쓴다고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을까? 
 
애초에 [전지적 독자 시점]은 상대방의 생각과 움직임을 읽거나, 해당 인물의 시점에 빙의하는 기능이 전부인 스킬인데······. 
 
[······김독자? 괜찮냐?] 
 
간신히 생각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것은 눈앞에 둥둥 떠 있는 도깨비를 발견한 후의 일이었다. 
 
“비형?” 
 
나는 멍청한 얼굴로 비형을 마주보았다. 
이 자식 아까 떠난다고 하지 않았나? 
비형이 우물쭈물 말을 더듬었다. 
 
[아······ 갑자기 후폭풍이 치길래······.] 
 
바쁜 일이 있다더니, 사실은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여간 음흉하게 짝이 없는 녀석. 
이러니까 믿을 수가 있나. 
 
[오, 오해 하지마. 깜빡하고 말 안 해준 게 있어서 돌아온 거니까.] 
 
내가 처음 보는 도깨비와 태연히 말을 나누자, 곁에 있덩 장하영이 토끼 눈을 하고 이쪽을 보았다. 나는 괜찮다는 제스처로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후에 비형에게 물었다. 
 
“말 안 한 게 뭔데?” 
 
[너도 알겠지만, 이번 ‘마왕 선발전’ 이벤트가 굉장히 커질 거거든.]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안 그래도 성좌들 사이에 암암리에 퍼지고 있던 이야기를 내가 ‘미식협’에서 제대로 터트려버렸으니까. 
분명 거기에 있던 녀석들 중 일부도, ‘마왕 선발전’에 참전할 것이다. 
 
[그게, 단순히 커지는 정도가 아니라 방송권을 놓고 싸움이 붙었어. 너도 예상했겠지만 ‘마계’에 파견된 건 나만이 아니야.] 
 
“그럼?” 
 
[너도 아는 도깨비가, 반대 쪽에 있어.] 
 
나도 아는 도깨비? 
 
[너랑 나한테 엄청난 원한을 품은 녀석이지.] 
 
그런 도깨비라면 둘 정도 있다. 
하지만 하나는 무림에 있으니, 남은 것은 하나 뿐이다. 
 
“······‘독각’이냐?” 
 
[그래.] 
 
독각. 일본 채널을 담당하고 있던 그 도깨비는, 언젠가 나와 비형에게 된통 당한 적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때야 운이 좋았지만, 지금도 그러라는 법은 없었다. 
‘멸살법’의 도깨비들 중에서도, 독각은 채널 운용에 관한한 특출난 재능을 지닌 놈이니까. 
놈이 이번 ‘마왕 선발전’을 이끄는 도깨비 중 하나로 발탁되었다면, 앞으로의 일정은 결코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뭐, 아무튼 몸 조심하라고. 채널 관리도 잘 하고······ 잠깐만. 너 도깨비는 어쨌냐?] 
 
“도깨비?”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무척 고적한 느낌이었다. 
뻥 뚫린 천장 위로, 하늘에 붙박여 열심히 반짝거리는 성좌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내가 채널 차단을 지시했다고 해도, 저들의 불만 사항은 들려올 텐데······ 내 귓가에는 어떤 메시지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비유?” 
 
불안한 마음에 소리내어 이름을 불러 보았다. 
비유는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또 자고 있겠거니 싶었지만, 일 분이 지나고 이 분이 지나도록 비유는 나타나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설마? 
 
“비유!” 
 
비유가 사라졌다. 
 
 
* 
 
 
[#BI-7623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 
.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의 귀환에 크게 감격합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을 향해 반가운 미소를 짓습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귀환을 환영합니다!] 
 
비형의 채널에 입장하자, 간만에 보는 이름들이 나를 반겼다. 
그러나 환호 세례를 받으면서도, 나는 조금도 기뻐할 수 없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도깨비 ‘비유’의 행방을 묻습니다.] 
 
몇몇 성좌들이 곧바로 대답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닦습니다.] 
[성좌, ‘흥무대왕’이 헛기침을 하며 엄지와 검지를 붙입니다.] 
[일부 성좌들이 코인을 준다면 대답해 줄 용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한반도 성좌님들은 돈이 별로 없었지. 
주머니에서 코인을 뒤적거리는데, 장하영이 입을 열었다. 
 
“혹시 후폭풍에 휘말린 거 아냐?” 
 
[관리국] 소속이 아닌 비유는 커다란 후폭풍이 터졌을 때 자신을 보호해 줄 [거대 설화]가 없다. 그러니, 후폭풍에 휩쓸려 죽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닐 거야. 흔적이 없어.”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끔찍한 파편들이 산재해 있을 텐데, 어디에도 비유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비유’라는 존재를 통째로 뜯어간 듯한 느낌. 
 
누굴까. 대체 누가 비유를······. 
 
순간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던 비형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비유는 마계의 무소속 채널을 가진 유일한 도깨비였다. 
 
[빌어먹을, 놈들 짓이야.] 
 
“혹부리로군.” 
 
원작의 문장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흘러갔다. 
 
「시나리오 지역들 중 유일하게 ‘도깨비’의 관할이 아닌 곳. 그곳이 바로 ‘마계’다.」 
 
‘멸살법’ 원작에 쓰여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마계’는 본래 혹부리들의 구역이다. 그런데 그런 구역에서, [관리국] 소속이 아닌 도깨비가 개인 채널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 영혼은 우리 것이다. 
 
처음 만났던 혹부리도 ‘도깨비의 알’을 무척 탐냈었다. 
무소속 채널의 가치는, 현 시점의 마계에서 산정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마계에서 모처럼 벌어지는 [거대 설화] 이벤트. 자신들의 세력권에서 펼쳐지는 이 이벤트를, 혹부리들이 놓칠 턱이 없다. 
 
놈들은 분명 이번 ‘마왕 선발전’을 노리고 채널을 훔쳐간 것이다. 
 
혹부리들은 태생적으로 ‘개연성’에 대한 저항력도 강하다. 그러니 내가 기절한 사이 주변에 후폭풍이 불어 닥쳤다 해도, 충분히 그걸 뚫고 비유를 데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빌어먹을······ 하필 이런 시점에. 
 
[나한테 맡겨. 내가 놈들을 찾아낼게.] 
 
흘끗 돌아본 비형의 눈동자에 분노가 차올라 있었다. 
 
[도깨비의 명예가 걸린 일이야. ‘관리국’ 소속이 아니라고 해도, 두고 볼 수는 없지.] 
 
“같이 가자.” 
 
그러자 비형이 고개를 저었다. 
 
[‘마왕 선발전’까지 시간도 얼마 안 남았어. 그 사이에 너도 해야 될 일들이 있을 거 아냐?] 
 
맞다. 이제 남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자칫 비유를 찾는 데 시간을 잘못 쓴다면, 선발전은 시작과 동시에 패망할 수도 있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냐?” 
 
[넌 지금은 내 채널 소속이야.] 
 
비형은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난 내 채널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 뿐이야. 넌 이길 궁리나 해. 그래야 성좌들도 좋아하고, 내 채널도 더 커질 테니까.] 
 
그 말과 함께 비형의 신형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장하영이 물었다. 
 
“······저거 믿어도 괜찮은 걸까?” 
 
도깨비를 믿는가 안 믿는가 하는 질문만큼 바보같은 것도 없다. 
비형에 관한 신뢰와는 별개로, 이 <스타 스트림> 전체를 뒤져도 도깨비만큼 속을 알 수 없는 종족도 드무니까.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중혁은 지금 건드리기 좋지 않은 상황이었고, 장하영 정도의 실력으로는 비형을 추격할 수 없다. 
내 부탁을 들어줄 만한 존재는 결국 저 밤하늘에 있을 텐데, 문제는 내가 지금 비형의 채널에 있다는 것이었다. 
즉, 내가 채널을 통해 보낸 모든 메시지는 비형을 통해 읽힐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이다. 
 
“장하영. ‘벽’을 불러.” 
 
 
* 
 
 
어둠 속을 달리는 쾌속한 발걸음. 
 
[바앗, 바아아앗!] 
 
새장 속에 갇힌 비유가 비통한 울음을 터뜨렸다. 
 
[바아앗! 바앗······!] 
 
왼쪽 볼에 작은 혹을 매단 등이 굽은 노인이, 어두운 길을 달리고 있었다. 
급한 발걸음 속에 깃든 경쾌함. 노인은 기분이 몹시 좋은 상태였다. 
 
[도깨비의 시대는 이제 끝이다.] 
 
다른 혹부리들에게 자신의 공을 자랑할 생각에, 혹부리 노인은 신이 났다. 얼마 전 동료 혹부리가 ‘도깨비를 패는 설화’를 가지고 와서 자랑을 해대는 통에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번에 그가 가져온 것은, 도깨비를 패는 설화도 아니고 무려 ‘도깨비’ 그 자체였다. 
혹부리 노인은 비유의 새장을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었다. 
 
[아이야, 너는 채널을 가진 최초의 ‘혹부리’가 될 거다.] 
 
혹부리들이 가진 오랜 소망. 
그것은, ‘도깨비’들에게 빼앗긴 이야기의 주도권을 돌려 받는 것. 
 
[■■의 이야기꾼. 이 끔찍한 시나리오의 지옥으로부터, 노예들을 해방시킬······.] 
 
혹부리 노인의 왼뺨에 달린 혹이 크게 부풀었다. 
흥분한 노인의 혹이 꿈틀거리며, 비유가 들어 있는 새장을 툭툭 건드렸다. 공포에 젖은 눈으로 그 혹을 보던 비유가 다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구해줄 이를 애타게 찾았으나, 안타깝게도 이곳에 비유를 구해줄 사람은 없었다. 
 
[어이.] 
 
정확히 말하면, ‘사람’만 없었다. 
 
[그 혹 안 치워?] 
 
 
 
 
 
< Episode 48. 등장인물 (1) > 끝

< Episode 48. 등장인물 (2) >
 
 
 
 
 
혹부리가 등을 돌리는 순간, 샛노란 스파크로 만들어진 세 자루의 창이 그의 바로 앞에 꽂혔다. 
 
츠츠츠츠츳! 
 
혹부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분명 [거대 설화]의 힘이 담긴 공격이었다. 
 
[상급 도깨비인가.] 
 
허공을 물들이는 노란 궤적 너머로, 둥둥 떠 있는 실루엣이 보였다. 
말끔한 거적을 걸친, 아기 크기의 도깨비. 
비형이었다. 
 
[좋게 말할 때 애 놓고 꺼져라.] 
 
으르렁거리는 비형의 입 안에서 새빨간 송곳니가 번뜩였다. 
<스타 스트림>의 도깨비들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다. 
채널의 성좌들은 도깨비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도깨비도 진심으로 화를 낼 때는 있다. 
지금처럼 송곳니를 세울 때가, 바로 그 때였다. 
 
[어차피 이 도깨비는 ‘관리국’ 소속도 아닐 텐데, 왜 나서는 거지?] 
[도깨비는 다 같은 도깨비야.] 
[우습군.] 
[······내가 낳은 녀석이다. 키우진 못해도, 부모 도리는 해야 되지 않겠어?] 
 
그 말에, 혹부리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부모? 부모라!] 
 
어찌나 큰 웃음이었는지, 그의 뺨에 매달린 혹이 덜렁덜렁 흔들릴 지경이었다. 
 
[도깨비에게 언제부터 그런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다고······ 그런 게 있었더라면, 내 선조들에게도 베풀어주지 그랬나.] 
[미안하지만 그때 난 태어나지도 않았어.] 
[그러면 우리가 겪은 고통은 누가 보상해주지?] 
 
안대로 가려져 있던 혹부리의 한쪽 눈이 드러났다. [대악마의 눈동자]였다. 노란 홍채가 팽그르르 회전하며, 살벌한 기세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네놈들에게 우리가 가진 ‘이야기 보따리’를 빼앗긴 고통은, 대체 누가 보상해주느냔 말이다.] 
[뭔 개소리야? 나도 그 설화 아는데, ‘이야기 보따리’는 돌려줬잖아? 그것도 두 배로―] 
 
츠츠츠츠츠!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자 비형의 표정도 굳어지기 시작했다. 
설마, 진짜로 혹부리가 자신과 싸우려 들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대차게 등장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 또한 혹부리와 싸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혹부리와 싸우는 것만큼은 피해라. 
 
그것은 선대의 도깨비들이 남긴 충고 중 하나였다. 
비형도 서울 지부에서는 꽤 오래된 도깨비였지만, 혹부리들과 도깨비들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아직 ‘채널’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확립되기 이전의 어느 시절부터 두 종족이 반목해왔다는 것뿐. 
혹부리가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너희들은 ‘혹부리의 것’을 돌려주지 않았다.] 
 
비형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난 그딴 건 모르겠고, 빨리 그 애나 내놔! 내놓지 않으면―]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악이 있지.] 
 
혹부리의 목소리에 섬뜩한 한기가 깃들어 있었다. 
비형이 뭐라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혹부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치, 오래된 노랫말 같은 문장이었다. 
 
[‘첫 번째 악’은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드는 악이고.] 
 
혹부리의 혹주머니가 점차 커지고 있었다. 
불현듯 비형의 머릿속에 경고성이 울려퍼졌다. 
 
[‘두 번째 악’은, 그 불행에 즐거워하는 악이며.] 
 
노랫말과 함께 혹부리의 주머니에서 뭔가가 풀려나오고 있었다. 
절대로, 풀려 나와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가장 혐오스런 악’은, 그 불행을 다른 이들에게 전시(展示)하는 악이다.] 
 
비형은 망설이지 않고 움직였다. 
 
[거대 설화의 권한을 사용합니다.] 
 
비형은 상급 도깨비가 되며 거대 설화의 권리를 일부 양도 받았다. 
<스타 스트림>을 조작하는 이 힘이라면, 아무리 혹부리라도 거스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혹부리가 웃고 있었다. 
 
[선대들이 말하지 않았나? 절대로 혹부리 앞에서는 그 힘을 쓰지 말라고.] 
 
츠츠츠츠츠츳! 
 
혹에서 흘러 나오는 새카만 설화가 비형의 전신을 설화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시스템의 언어들이 전부 까만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검은색 물감으로 세상을 덮듯이. 
 
[거대 설화의 작동이 ■■■■······.] 
 
비형은 깜짝 놀랐다. 
이런 종류의 조작이 가능한 존재는 대도깨비 이상의 최고위급 도깨비들 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혹부리가 이런 힘을······? 
 
[설마······ 이계의 언어?] 
[멍청한 도깨비여. 이곳에 혼자 온 것이 너의 실수다.] 
 
부풀어 오른 혹주머니를 뚫고 뭔가가 기어나오고 있었다. 끔찍한 형상을 가진 괴생물체가 찢어진 혹 사이로 자신의 촉수들을 내보냈다. 
 
【그. 그으, 그으으으읏.】 
 
푸슈슈슛! 
 
빠르게 쏘아진 촉수들이 비형의 작은 몸을 순식간에 그러쥐었다. 
 
[설화, ‘혹부리의 노래’가 효과를 발휘합니다.] 
 
자신을 옭아맨 설화들을 보며, 비형은 뒤늦게 깨달았다. 
어째서 선대의 도깨비들이 혹부리를 피하라고 말한 것인지를. 
 
[종족 특성으로 인해 ‘혹부리’에 대한 저항력이 급감합니다.] 
[혹부리의 증오가 당신의 정신력을 나약하게 만듭니다.] 
[혹부리의 원한이 당신의 전투력을 급격하게 하락시킵니다.] 
 
모처럼 느끼는 그 무력감에, 비형은 마치 ‘화신’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허공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시선들이 그의 몸에 화살처럼 박혔다. 
 
[성좌, ‘흥무대왕’이 혹부리의 힘에 경악합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혹부리의 힘의 원천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주먹을 부르쥡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크게 분노합니다!] 
 
혹부리가 웃었다. 
 
[우리는 다른 종족에게는 이런 힘을 낼 수 없다. 하지만 도깨비에게만큼은 다르지.] 
 
꾸우우우욱! 
 
착즙기처럼 압박해오는 촉수의 힘에 비형은 조금씩 숨이 막혀 왔다. 꽉 조인 촉수로 혹부리들의 깊은 원한이 느껴졌다. 
특수한 조건을 만족하는 한, 도깨비를 대상으로 무적에 가까운 힘을 발휘하는 설화. 태생부터 한 종족에 대한 증오로 점철된 혹부리의 설화에 비형은 기가 질렸다.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성좌들의 관음 속에서 죽어가거라. 오늘은 아주 좋은 설화를 얻겠구나.] 
 
끄으으으윽······. 
 
과일처럼 쥐어 짜인 비형에게서 조금씩 설화가 흘러 내렸다. 뒤늦게 [관리국]에 연락을 취했지만, 그들이 오기 전에 비형은 도깨비 주스가 될 판이었다. 죄어오는 촉수에 의해 의식이 서서히 사라지려는 순간. 
 
스가가각! 
 
비형을 휘감던 촉수들이 새카만 피를 흘리며 터졌다. 
놀란 혹부리가 침음하며 물러났고, 풀려난 비형의 작은 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비형의 거적을 낚아챈 것은 큰 키의 사내였다. 
 
“본체로 혹부리에게 맞서다니, 멍청한 도깨비로군.” 
 
냉막한 사내의 목소리에 비형이 고개를 움직였다. 피묻은 부츠. 새카만 롱코트의 끝자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새장 속에 갇혀 있던 비유가 “바아앗”하고 울음을 터트렸고, 하늘의 성좌들이 간접 메시지를 쏟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비명을 지르며 환호합니다!] 
 
사내의 손에 쥐어진 흑색의 패도를 보는 순간에야, 비형은 사내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너, 너는······?] 
 
사내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비형은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사내가 가진 스킬― 전 차원에서 가장 오래된 인간이 설계한 [현자의 눈] 때문도 아니었고, 그의 전신에서 피어나는 강맹한 살기 때문도 아니었다. 비형은 이제껏 무수한 화신들을 만나왔다. 
하지만, 이런 눈빛의 화신은 이 사내 하나 뿐이었다. 
마치 여기서 비형을 죽일지 말지를 가늠하는 듯한 표정. 
화들짝 정신을 차린 비형이 발버둥치는 순간, 사내가 비형의 몸을 뒤로 집어 던졌다. 
 
“뒤로 꺼져 있어라.” 
 
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비형의 신형이 먼 바닥을 굴렀다. 사내는 말없이 오른손의 검을 고쳐쥐었다. [흑천마도]가 울음을 토하자, 초월에 이른 격이 견고한 설화를 이루어 사내의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잘려 나간 촉수가 바닥 위에서 꿈틀거렸다. 그 광경을 멍하니 응시하는 혹부리를 향해,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네가 ‘지평선의 악마’인가.” 
 
[그렇다. 간만이구나.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여.] 
 
“······난 네놈을 처음 본다만.” 
 
[하하하! 너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천 번의 죽음을 겪고, 다시 만 번의 생을 살더라도, 너는 결코 알지 못하겠지. 왜냐하면 너는······!] 
 
쐐애액! 
 
혹부리의 헛소리 따윈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유중혁의 검은 거침없이 공간을 갈랐다. 아슬아슬하게 코앞을 스쳐 지나가는 칼날을 보며, 혹부리가 대경하여 외쳤다. 
 
[이쯤에서 서로 물러서는 게 좋을 텐데? 너는 이 사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신유승을 내놔라.” 
 
[뭐?] 
 
유중혁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 비유가 갇힌 새장이 있었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은 혹부리가 이를 갈며 말했다. 
 
[설마 네놈도 도깨비를 노리고 있었나? 흥! 인간인 네놈이 채널을 가져봤자 아무 소용도―] 
 
“채널 같은 건 필요 없다.” 
 
고오오오오오! 
 
새장 속에 있던 비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쓰러졌던 비형도,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유중혁의 강고한 칼날에서 초월좌의 격이 일렁였다. 
혹부리가 허탈하게 웃었다. 
 
[어이가 없구나. 이 도깨비의 가치도 모르는 천둥 벌거숭이가······ 아느냐? 아무리 네놈이라 해도 이번 회차에서는 무리다. 그 ‘김독자’라는 녀석이 있다고 해도 소용없다! 그 정도 변수로는, <스타 스트림>의 흐름을 거스를 수······.] 
 
콰콰콰콰콰! 
 
초월좌의 스파크가 터지며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마력의 폭포를 쏟아냈다. 터져 나간 혹부리의 팔이 허공을 날았다. 
새로운 경지에 오른 [파천강기]의 칼날에서 오색의 마력파가 쏟아지자, 사색이 된 혹부리가 외쳤다. 
 
[머, 멈춰라! 네놈은 아직 누적 회차가 낮아서 모른다. 다른 평행 차원에서는······!] 
 
츠츠츠츳! 
 
과도한 정보 누설로 인해 혹부리의 주변에도 개연성의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황급히 말을 삼킨 혹부리가 재차 외쳤다. 
 
[아무튼, 너는 지금 실수하고 있다! 결코 나를 적으로 돌려서는―]. 
 
“내 동료와 약속을 했다. 복수해주겠다고.” 
 
새장 속에 갇혀 있던 비유가 떨고 있었다. 
이미 기억을 잃었을 텐데도, 전생의 많은 부분들이 사라졌을 텐데도, 비유의 몸은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너는 이곳에서 죽는다.” 
 
지금 이곳에, 41회차의 기억을 가진 신유승은 없다. 
그렇다면 이 복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유중혁도, 그것은 모른다. 
 
다만 그는 검을 휘둘렀다. 
1회차의 복수를 2회차에서, 다시 2회차의 복수를 3회차에서 완료했던 것처럼. 
넘실대는 혹부리의 촉수들을 베었고, 혹부리의 한쪽 팔에 커다란 검상을 입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중혁은 이미 혹부리의 배후에 서 있었다. 
거대하게 솟아오른 [파천강기]의 칼날이, 공간 전체를 찢으며 쇄도했다. 
 
[자, 잠깐만! 멈추―] 
 
스거걱! 
 
그토록 무시무시했던 혹부리의 혹이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혹부리의 몸이 혹 안에서 튀어나온 어둠에 휩싸였다. 
 
[저주하겠다. 너를 저주할 것이다. 모든 차원의 ‘나’는, 결코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 
 
끊임없이 주절대던 혹부리의 입에 [흑천마도]가 꽂혔다. 
 
끄으아아아아아아. 
 
끔찍한 비명과 함께, 혹에서 빠져 나온 어둠이 혹부리를 완전히 집어삼켰다.맛있는 음식이라도 먹은 것처럼 끄윽 트림을 토하는 어둠. 그 어둠은 잠시 잠깐 유중혁을 바라보더니, 이내 마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완전한 고요가 찾아왔다. 
 
초월좌의 힘을 과도하게 끌어낸 탓인지, 유중혁은 한동안 가만히 선 채 숨을 골랐다. 그의 귓가에 무수한 시스템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새로운 전설급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이제껏 존재하지 않던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설화, ‘혹부리의 혹을 베어낸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마계의 모든 혹부리들이 당신과 적대 관계가 되었습니다!] 
 
유중혁은 천천히 새장 쪽으로 걸어가, 조심스레 비유를 꺼냈다. 
비유가 크게 울었다. 
그 조그만 손으로, 몇 번이고 유중혁의 손등을 내리치며. 
유중혁은 그런 비유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주머니 속에 집어 넣고 걸음을 옮겼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눈시울을 적십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자신의 머리를 닦던 수건을 내밉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크게 감동받아 시를 적습니다.] 
 
무수한 성좌들이 그를 향해 반짝였지만, 그들 중 누구의 빛도 유중혁에게 닿지는 못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살아온 성좌라 해도, 세계의 멸망을 두 번이나 겪은 회귀자를 이해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다음 순간 들려온 메시지에, 유중혁은 고개를 들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지난 2회차의 인생 동안,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별. 
그럼에도 왜일까. 
유중혁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 별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중혁이 인상을 구긴 채 말했다. 
 
“꺼져라, 김독자.” 
 
그러자, 정말로 하늘의 별 하나가 꺼졌다. 
 
“...김독자?” 
 
김독자는 대답이 없었다. 
 
 
 
 
 
< Episode 48. 등장인물 (2) > 끝

< Episode 48. 등장인물 (3) >
 
 
 
 
 
“대충 정리된 느낌이네.” 
 
나는 채널 화면을 통해 유중혁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관리국] 녀석들이 더 빨리 도착할까봐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유중혁이 더 빨랐다. 
장하영을 통해 우리엘에게 메시지를 전한 게 잘한 선택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생글생글 웃습니다.] 
 
유중혁을 저 자리에 데려간 것은 우리엘이었다. 
어차피 유중혁은 ‘파천검성’ 사건으로 내게 단단히 삐져 있을 터, 나보다 우리엘의 말이 유중혁에게 더 영향력이 있으리라는 판단이 주효했다. 
화면 속에서 축 늘어진 비형을 들여다 보던 장하영이 말했다. 
 
“도깨비가 저렇게 무력한 건 처음 봐.” 
“종족 설화가 얽혀 있어서 그래. 혹부리를 상대하려면 최소한 대도깨비 이상의 도깨비가 나타나거나, 네 명 이상의 도깨비가 덤벼야 해.” 
“······너 되게 잘 안다? 도깨비나 혹부리들에 관해서는 모든 게 베일에 덮여 있다고 아일렌이 그랬는데.” 
“성좌 쯤 되면 이 정도야 기본이지.” 
 
내 말에 장하영이 묘하게 존경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성좌라고 해도 모두가 이런 걸 알지는 않는다. 
화면 속에서 울부짖는 비유와, 그런 비유를 감싸는 유중혁의 모습이 짧게 클로즈업 되었다. 
 
「복수해 주마.」 
 
「잘 있어, 대장.」 
 
「고생했다.」 
 
「뒤는 맡길게.」 
 
「쉬어라.」 
 
오직 나만이 볼 수 있었던 문장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제 그 말들은 가야 할 장소에 도착했을까. 
나는 그것에 관해 잘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저들은, 이제 그런 ‘말’ 없이도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독자인 내가 읽을 수 없는 곳에서, 그들은 분명히 닿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나는 왜인지 모르게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김독자?” 
 
나를 빤히 보는 장하영의 눈빛. 
머쓱해진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무튼, 저쪽은 유중혁이 어떻게든 할 테니 이쪽도 준비를······.” 
 
쿠구구구구! 
 
······제기랄. 벌써? 
 
장하영과 나는 동시에 집무실의 창밖을 내다봤다. 
[공단]의 장벽 너머로, 자욱한 모래구름이 몰려 오고 있었다. 
웅성대는 공민들. 
의원들을 동원해 그들을 진정시키는 마르크의 모습도 보였다. 
 
[이런, 또 성질 급한 성좌분들이 계시는군요. ‘마왕 선발전’은 아직 48시간이나 남았는데 말이죠.] 
 
허공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도깨비의 목소리. 
공단의 드높은 상공에서 ‘독각’이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본래는 좀 더 뜸을 들일 생각이었습니다만······.] 
 
분명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나에 대한 원한으로 가득 찬 녀석. 
하지만 아무리 나를 싫어한다고 해도, [거대 설화]가 걸린 ‘마왕 선발전’을 제놈 멋대로 시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일찍 시작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뭐?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를 획득하였습니다!] 
[서브 시나리오 ― ‘전초전’이 시작됩니다!] 
 
떠오른 창을 보고,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눈치챘다. 
서브 시나리오. 
하필 비형도 비유도 없을 때 저 자식이······. 
 
+ 
 
<서브 시나리오 ― 전초전> 
 
분류 : 서브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제한 시간 동안 [공단]의 ‘설화핵’을 지켜낼 것. 또는 빼앗을 것. 
제한시간 : 48시간 
보상 : 공격측 ― ‘마왕 선발전’ 출전 자격 획득 / 수비측 ― 200,000코인, ??? 
실패시 : ― 
 
+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츠츠츠츠츳! 
 
아무리 서브 시나리오라도, 이런 시기에 이런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여는 것은 명백히 개연성에 어긋난다. 
 
[일부 성좌들이 ‘독각’의 불공정한 진행에 불만을 표시합니다!] 
[몇몇 성좌들이 ‘개연성 적합 심사’를 요구합니다!] 
 
다행히,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나뿐만은 아니었다. 
 
[아아, 성좌님들께서 그렇게 생각하실 줄 알았습니다. 확실히 불공정한 데가 있기는 하지요. 수비측과 공격측의 숫자도, 격도 맞지 않습니다.] 
 
나를 비웃듯, 독각이 웃는다. 
네놈이 이런 시나리오를 감당이나 할 수 있겠냐는 듯한 미소. 
누가봐도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래서 난이도를 살짝 조절했습니다. 이번 ‘서브 시나리오’에 한해서, ‘공격측’과 ‘수비측’의 개별 성좌님들은 동등한 수준의 격을 보유하시게 됩니다.] 
 
독각의 말과 동시에, 내 화신체를 중심으로 희미한 아우라가 일렁였다. 
 
[해당 시나리오에 참여하는 모든 성좌들의 능력치가 고정됩니다.] 
 
나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가 펼쳐 보았다. 아마 공격측의 성좌들도 똑같은 패널티를 받았을 것이다. 아직까진 내 능력치가 떨어진 것인지, 증가한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일부 성좌들이 여전히 이 시나리오는 ‘개연성’에 어긋난다고 항의합니다!] 
 
독각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아아, 그런 말씀들 마십시오. 정말이지······ 그간 다들 나약해지셨군요. 시나리오는 어려워야 재밌다는 걸, 벌써들 잊으신 겁니까?] 
 
채널은 찬성파와 반대파의 간접 메시지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를 틈타, 독각은 시나리오를 강행했다. 
 
[당신은 현재 ‘김독자 공단’의 주인입니다.] 
[당신은 ‘전초전’의 ‘수비’ 역할을 맡았습니다.] 
[당신은 공격대의 성좌들로부터 공장의 ‘설화핵’을 보호해야 합니다.] 
 
나는 허공의 독각을 마주보며 쓰게 웃었다. 
오냐,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김독자, 어떡······.” 
 
나는 장하영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곧바로 창문을 활짝 열고 아래를 향해 외쳤다. 
 
[공민 여러분. 직접 인사드리는 건 처음이군요.]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나의 진언이, [공단]을 한가득 메웠다. 
나는 다시 한 번 숨을 들이켜며 외쳤다. 
 
[모두 진정하시고, 제 말에 집중해주시기 바랍니다.] 
 
처음으로 들려오는 ‘공작’의 목소리에, 모든 공민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곳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독자다!” “저 사람이 공작이야!” 고마운 환대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들의 기대에 어울려 줄 수가 없었다. 
 
[저는 여러분들을 지킬 수 없습니다.] 
 
아마 지금껏 마계에 이런 공작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여기서 개죽음 당하지 마시고, 각자 살 길을 찾아 떠나시기 바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유중혁 공단’을 추천합니다!] 
 
내 어처구니 없는 선언에 공민들의 입이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심지어 공민들을 진정시키던 마르크조차, 어이없다는 듯 이쪽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이들을 살릴 유일한 방법이니까. 
이 ‘시나리오’에, 불필요한 희생은 없어야 한다. 
 
[공민들을 당신의 ‘공단’에서 해방시키시겠습니까?] 
 
“해방한다.” 
 
[공단의 모든 ‘공민’들이 당신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됩니다.] 
[‘김독자 공단’의 공민들이 ‘탈출 시나리오’를 획득했습니다.] 
[‘김독자 공단’의 공민들이 ‘공단’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전설급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공단의 해방자’를 획득하였습니다!] 
 
쏟아지는 메시지와 함께, 나는 마지막 진언을 남겼다. 
 
[떠나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떠날 때까지, 내가 저들을 막겠습니다.] 
 
비형이 있었다면 다분히 연출된 이 대사에 시비를 걸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비형은 먼 곳에 누워 있었다. 
 
[공단의 공민들이 당신의 고결한 희생을 기립니다.] 
 
고맙지만, 고결한 희생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공단]의 장벽 건너편에서 몰려오는 기운에 정신을 집중했다. 
거대한 기운이 넷. 
최소 네 명의 성좌가, 나를 노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장하영. 한명오랑 파천신군 데리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아나. 절대로 싸울 생각하지 마.” 
“뭐? 싫어!” 
“싫어도 해! 곧바로 유중혁이 있는 곳으로 가. 빨리!” 
 
지금 오는 녀석들은 ‘넷’이지만, 그 뒤에 있는 녀석들은 더 많을 것이다. 
초월급의 개와 성별이 모호한 인간 하나, 임신 경험이 있는 중년인만으로 당해낼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어차피 놈들이 노리는 건 나 하나야.” 
 
나는 곧장 집무실 아래층으로 달려가, 공장의 ‘설화핵’을 뽑았다. 
 
[‘공장’이 가동을 중지합니다.] 
 
중요한 건 이 ‘설화핵’을 지키는 것. 
그걸 지키기 위해, 굳이 [공단] 안에 머무를 필요는 없다. 
나는 책갈피를 열고 [바람의 길]을 사용해 곧장 공단의 장벽 위로 올라갔다. 
 
[니들이 원하는 게 이거냐?] 
 
멀리서 다가오던 네 명의 성좌들이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갖고 싶으면, 빼앗아 보든가.] 
 
 
* 
 
 
그와아아아아아아! 
 
뒤쪽에서 따라붙는 무시무시한 괴성들. 
능력치의 평균이 동등해진 것이 그나마 내가 달아날 수 있는 이유였다. 
 
저쪽은 넷이고, 나는 하나. 
저쪽 성좌들의 격이 높든 낮든, 지금의 내게 승산은 많지 않았다. 
 
나는 [바람의 길]을 이용해 장벽을 넘어 달렸다. 내가 ‘설화핵’을 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성좌들도 죽자살자 나를 뒤쫓기 시작했다. 
여기서 나를 쓰러트리면 무려 ‘마왕 선발전’의 참가 자격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저렇듯 날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꽁무니를 빼는 나를 향해 독각이 비웃듯 지껄였다. 
 
[하하하, 도망치는 꼴이 아주 가관이군요! 성좌님들, 정말 저런 녀석을 구경하겠다고 비형의 채널에 머무르신 겁니까?] 
 
저 개자식······. 
만약 비형이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면 이딴 서브 시나리오로 고통받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역으로, 비형이 이곳에 없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있었다. 
 
“‘도깨비 보따리’의 멤버 등급 상승을 요청한다.” 
 
나는 이미 두 번의 등급 상승으로 ‘플래티넘 멤버’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플래티넘’은 멤버의 최고 등급이 아니었다. 
 
[현재 담당 도깨비가 부재 중입니다.] 
[도깨비 부재로 인해 등급 업데이트가 자동 실행됩니다.] 
[500,000코인을 소모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도깨비 보따리’의 다이아몬드 멤버가 되었습니다!] 
[회원 등급 상승으로 ‘도깨비 보따리’의 아이템 내역이 업데이트 됩니다.] 
 
다이아몬드 멤버부터는 VIP 전용 상품들을 구매할 수 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지금쯤 ‘그 아이템’들이 출시되었을 것이다. 
 
[VIP 전용 아이템 목록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비형이 있었다면 죽어도 이 목록을 못 보게 숨겼겠지. 
왜냐하면, 이 목록의 아이템들 중에는 비형의 흑역사도 끼어 있으니까. 
 
+ 
 
* 랜덤 설화 박스 (ver.1.3) ― 20,000 C 
* 설화 융합 박스 (ver.1.3) ― 200,000 C 
 
+ 
 
······역시나. 
미쳐버린 이 코인 아이템들, 당연히 팔고 있을 줄 알았다. 
다행히 리뉴얼 된 박스의 버전도, 내가 찾던 그것이었다. 
 
「“시발, 이거 확률 정한 새끼 누구야······ 확률 공개는 왜 안 해!”」 
 
아마······ 71회차에서 김남운이 이걸 잘못 샀다가 망한 적이 있었지. 
 
[아이템, ‘랜덤 설화 박스’를 10개 구매하였습니다.] 
[아이템, ‘설화 융합 박스’를 1개 구매하였습니다.] 
[총 400,000 코인을 소모하였습니다.] 
 
이 [랜덤 설화 박스]는 오직 코인만을 소모해 ‘설화’를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도박성 아이템이었다. 
최고 ‘준신화급 설화’까지도 얻을 수 있다는 설명 때문에, 훗날 이 아이템이 시중에 풀렸을 때 화신들은 물론이고 성좌들까지 득달같이 달려들어 이 박스를 까댔었다. 
물론, 모두 파산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당연한 말로였다. 
이 [랜덤 박스]에서 상급 이상의 ‘역사급 설화’가 나올 확률은 0.001%도 채 되지 않고, 준신화급 설화가 나올 확률은 0.00001%도 되지 않으니까. 
그럼 나머지 99.99%는 뭐냐고? 
 
「“미친! 역사급 설화 50개? 그것도 최하급? 지금 장난해?”」 
 
나는 추락하는 박스를 낚아 채 입으로 포장을 뜯었다. 
 
[아이템, ‘랜덤 설화 박스’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이 박스에서 ‘좋은 설화’가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왜 이 박스를 까냐고? 
내가 원하는 설화는, ‘안 좋은 설화’이기 때문이다. 
 
. 
. 
[설화, ‘머리 어깨 무릎 발’을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제 머리 못 깎는 중’을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코에 걸면 코걸이’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귀에 걸면 귀걸이’를 획득하였습니다.] 
. 
. 
 
과연, ‘멸살법’에서 본 그대로였다. 
1.3 버전의 ‘설화 박스’에서는 80% 이상의 확률로 ‘신체’와 관련된 설화가 나온다. 그중 가장 많이 얻을 수 있는 설화가 바로 [코에 걸면 코걸이]와 [귀에 걸면 귀걸이]였다. 
 
푸슈슈슈슈슛! 
 
뒤쪽에서 뱀의 송곳니 같은 것이 쏘아져, 내 옆구리와 허벅지를 스쳐갔다. 설화의 힘이 담긴 공격. 
나는 이를 악물고 진각을 밟아 [바람의 길]을 극성으로 발동한 뒤, 주변에 보이는 폐건물 뒤쪽으로 숨었다. 
아직, 내겐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어······ 디······ 에······ 있, 느, 냐!] 
 
나는 어눌한 진언을 무시하고, 방금 획득한 설화를 확인했다. 
 
+ 
 
[역사급 설화 : 코에 걸면 코걸이] 
 
설명 : 무엇이든 코에 걸면 액세서리처럼 보일 수 있는 효과를 발동한다. 정말로 무엇이든 상관없다. 
 
+ 
 
[역사급 설화 : 귀에 걸면 귀걸이] 
 
설명 : 무엇이든 귀에 걸면 귀걸이처럼 보이는 효과를 발동한다. ‘코에 걸면 코걸이’와 한쌍으로 제작된 설화다. 
 
+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 설화들은 지금 당장 상황을 타개하는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아이템과 함께라면 다르다. 
 
+ 
 
<아이템 정보> 
 
이름 : 설화 융합 박스 ver. 1.3 
등급 : ― 
설명 : 각기 다른 종류의 설화들을 융합할 수 있다. 매우 낮은 확률로 상위 등급의 설화를 랜덤하게 생성한다. 
 
+ 
 
특정한 조합의 설화를 섞을 시, 매우 낮은 확률로 상위 등급의 설화를 생성하는 아이템. 
본래였다면 이 아이템도 그다지 쓸모는 없었다. 
같은 설화들을 넣어도 결과값이 매번 다르고, 좋은 설화가 나올 확률도 터무니 없이 낮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등장인물들의 회상에 따르면, 이 1.3 버전의 융합 박스에는 버그가 하나 있었다. 
 
「“그때 그 박스 그것 때문에 판매 중단 됐었잖아. 시발, 내가 안나 크로프트 녀석보다 먼저 그걸 해봤어야―”」 
 
1.3 버전의 ‘설화 융합 박스’가 가진 버그. 
그것은 특정한 설화들을 섞을 시, 최초 융합자에게 반드시 ‘정해진 설화’가 나온다는 것. 
망설이지 않고 두 설화를 박스 안에 털어 넣는 순간, 섬광이 왈칵 쏟아졌다. 폭연 속에서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내 귓가에 한줄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전설급 설화, ‘제멋대로 곡해자’를 획득하였습니다.] 
 
 
 
 
 
< Episode 48. 등장인물 (3) > 끝

< Episode 48. 등장인물 (4) >
 
 
 
 
 
언젠가, 그런 말을 남긴 성좌가 있었다. 
 
「“모든 설화에는 결함이 있다. 그 말은 곧, 모든 설화는 완전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전설급 설화 ‘제멋대로 곡해자’. 
이 설화는, 그 말을 남긴 한 설화급 성좌가 만든 것이었다. 
 
[설화, ‘제멋대로 곡해자’가 곡해의 대상을 물색합니다.] 
 
나는 무너진 폐건물 더미를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지구름 사이로 나를 쫓아온 세 명의 성좌들이 보였다. 
원래는 넷이었는데,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와아아아아······.] 
[설화, 핵, 을, 내, 놔, 라.] 
 
사오미터쯤 되는 체고의 화신체들이 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오로치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뱀 머리를 가진 거인이 하나, 거대한 들쥐가 하나.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켈베로스를 닮은 불타오르는 개였다. 
미식협에 방문했을 당시, ‘양산형 제작자’는 그런 말을 했다. 
 
―성좌라 해서 모두 격에 맞는 품성을 갖추고 있진 않네. 
 
어떤 성좌는 나처럼 설화를 쌓아 성좌가 되지만, 어떤 성좌는 다른 성좌의 ‘권위’를 빌려 성좌위에 오른다. 별 볼 일 없는 설화를 쌓았음에도 운이 좋게 유리한 지역에 떨어져 성좌가 되는 경우도 있다. 
 
“주기 싫다면?” 
 
눈앞에 있는 녀석들이, 바로 그런 경우들이었다.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대성좌들의 가호로, 혹은 정말 ‘운 좋게’ 성좌가 되어서 다른 초보 성좌나 화신들을 등쳐 먹고 다니는 놈들.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당신의 손톱을 탐합니다.] 
[성좌,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주변 성좌들의 눈치를 봅니다.] 
 
처음부터 내 눈앞에서 얼쩡대던 녀석들이었으니, 언젠가 한 번 부딪칠 줄은 알았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전투를 기대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활약을 기대합니다!] 
 
별들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그들은 궁금할 것이다. 
내가 설화급 성좌가 되고 나서,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으니까. 
허공에서 독각이 물었다. 
 
[하하, 여전히 멍청하게도······ 정말 싸울 셈입니까?] 
 
나는 독각의 말을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쿠구구구구! 
 
눈앞의 세 성좌는, 정확히 ‘나와 똑같은’ 수준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독각 놈의 패널티 때문이었다. 
시나리오에 참가하는 모든 성좌들이 ‘같은 전투력’을 가지는 패널티. 
 
콰아아아앙! 
 
나는 [바람의 길]을 전력으로 운용해 ‘뱀 머리 졸부’의 입에서 토해지는 독액을 피해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손톱을 먹는 쥐’가 나를 향해 손톱을 그었다. 어설프게 바닥을 뒹굴며 몸을 일으키는 순간, 주변은 어느새 ‘불길에 몸을 던진 개’의 불꽃으로 가득했다. 
 
화르르르륵! 
 
나는 주변에 옮겨 붙은 불을 끄며 신형을 뒤로 뺐다. 
역시, 단순히 화신체끼리 부딪친다면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화신체만의 무력이라면 말이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이 발동합니다!] 
 
아무리 동물들이라고 해도 ‘위인급’에 오른 성좌들. 
본래 이 스킬로는 그들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설화, ‘심연을 들여다본 자’의 효과로 당신의 모든 스킬 숙련치가 증가했습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의 효과가 증폭됩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당신은 당신 보다 낮은 ‘격’의 성좌들을 열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 
[성좌, ‘뱀 머리 졸부’의 성좌 정보를 열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좌, ‘손톱을 먹는 쥐’의 성좌 정보를 열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좌, ‘불길에 몸을 던진 개’의 성좌 정보를 열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곧장 녀석들의 특성을 살폈다. 
물론 ‘전투력’이 비등하게 맞춰진 시점에서 단순히 특성창의 능력치나 특성 정보들을 확인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등장인물 일람’의 효과로 해당 성좌들의 설화 목록을 무작위로 출력합니다.] 
 
녀석들이 가진 설화들의 목록이, 눈앞을 빠르게 스쳐갔다. 
 
[뱀을 잡아먹는 뱀] 
[사람으로 둔갑하는 쥐] 
[주인을 향한 충성심] 
[약자들의 약탈자] 
······. 
 
그 사이에도 무수한 공격들은 내게 집중되고 있었다. 
‘뱀 머리 졸부’의 주먹이 어깨를 스쳐갔다. ‘손톱을 먹는 쥐’의 육탄 공격에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으며,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소심하게 내뱉은 불길에 정강이의 피부가 그을렸다. 
 
[특성 효과로 인해 ‘읽기 속도’가 급상승합니다.] 
 
나는 물러서지 않고 녀석들의 설화 목록을 모두 읽었다. 
꼴에 놈들도 성좌라고, 가진 설화들의 숫자가 제법 되었다. 
몇 개는 전설급이었고, 대부분은 역사급이었다. 
 
[밤말을 훔쳐듣는 쥐] 
[설치류의 공포] 
[내 것은 내 것 네 것도 내 것] 
[플란다스를 향하여] 
······.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내 한쪽 다리가 마비된 틈을 타, ‘뱀 머리 졸부’의 손아귀가 내 몸을 휘감았다. 시야가 그대로 반전되더니, 내 몸은 녀석에게 꼼짝없이 포박당했다. 
 
으드드드득! 
 
[설, 화, 핵, 을, 내, 놔, 라.] 
 
좌우로 몸을 짓누르는 강력한 악력에 뼈마디가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로는 감당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츠츠츠츠츳! 
 
화신체를 이루던 설화 파편 일부가 부스러기처럼 떨어졌다. 
 
[잔인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성좌들이 흥분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찢어지는 당신의 육신을 보고 싶어합니다.]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에, ‘뱀머리 졸부’의 눈빛이 변하는 것이 보였다. 
같은 ‘성좌’라는 이름을 가진다고 하여 정말로 ‘동급의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차라리 화신에 가깝다. 
여전히 다른 성좌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에게서 코인을 받는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너흰 그렇게 살아 남아서 무슨 이야길 하고 싶은 거냐?” 
 
그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손톱을 먹는 쥐’가 고개를 들었다. 
 
[구우우우우······?] 
 
나는 쓰게 웃었다. 
하긴,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이 녀석들도 살아남기 급급할 테니까. 
 
“너희들도 참 안쓰럽다. 그치? 보통 성좌쯤 되면, ‘왕의 설화’ 정도는 다들 하나씩 갖고 있는데······.” 
 
[설화, ‘제멋대로 곡해자’가 당신의 말에 주목합니다.] 
 
뱀이든, 쥐든, 개든, 인간이든. 
꾸준히 설화를 쌓아 이름을 날리는 녀석들은 한 번 쯤은 ‘왕’의 설화를 갖게 된다. 
하지만 눈앞의 녀석들에겐 그런 설화가 없었다. 
 
“······늘 자기보다 약한 존재들과 싸웠으니, 그런 설화가 있을 턱이 있나.” 
 
[무, 슨, 개, 소, 리······!] 
 
다음 순간, 내 몸속에서 환한 빛살이 타올랐다. 
 
[설화, ‘제멋대로 곡해자’가 곡해할 이야기를 찾았습니다!] 
 
설화, ‘제멋대로 곡해자’. 
이 설화는 딱히 전투력을 향상시키는 힘은 없다. 
 
[설화, ‘제멋대로 곡해자’가 설화 곡해를 시작합니다.] 
 
대신 이 설화는, 아직 본연의 힘을 찾지 못한 설화들의 잠재력을 깨울 수 있다. 
그것이 어떤 방향이든 말이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곡해되었습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쿠구구구구구! 
 
몸 속 깊은 곳에서 가공할 설화의 힘이 들끓는 것이 느껴졌다. 
양쪽 팔에서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나는 내 몸을 옥죄고 있던 ‘뱀 머리 졸부’의 손아귀를 간단히 쥐어뜯었다. 
 
부우우우욱! 
 
내 손아귀에 비늘이 찢어진 뱀이 비명을 질렀다. 
 
「지금 이곳은 ‘왕’이 없는 세계.」 
 
막대한 마력이 빠져나가며 설화가 스스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성좌들의 설화 목록을 확인한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이 힘을 쓰기 위해서였다. 
 
「그의 검은 세상의 모든 왕좌를 거부하며 태어나.」 
 
품속에 넣어 두었던 검 한 자루가, 휘황한 빛살을 내뿜으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사인참사검(四寅斬邪劒). 
 
[절대왕좌]를 부술 때 사용했던 검이자,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을 얻을 때 사용했던 무기. 그 무기가, 나의 설화에 반응해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왕이 아닌 모든 존재 위에 군림한다.」 
 
[자, 잠깐만! 그 힘은······!] 
 
‘전투력’이 같다는 것이, 설화의 ‘격’까지 같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리 설화의 밀도가 낮고, 그 수가 적다고 해도. 
나 역시, 설화급 성좌. 
독각은 그 사실을 제대로 인지했어야 했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의 설화 응용력에 감탄합니다!] 
[북두성군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주목합니다.] 
 
뒤늦게 당황한 독각이 시나리오 조작을 시도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이제와서 ‘서브 시나리오’를 바꾸기엔 늦었다. 
이미 녀석은 과도한 ‘서브 시나리오’ 강행으로 개연성의 상당 부분을 소진했을 테니까.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꽁무니를 뺄 준비를 합니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 챈 쥐 녀석이 제일 먼저 등을 돌렸다. 
하지만, 나는 한 녀석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멈춰라.”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츠츠츠츠츠츳! 
 
[당신의 위엄 앞에 왕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모든 존재가 고개를 조아립니다.] 
 
[그와아아아아!] 
[찍, 찌이익!] 
 
강력한 스파크와 함께, ‘뱀 머리 졸부’와 ‘손톱을 먹는 쥐’의 몸이 빳빳이 굳었다. ‘불길에 몸을 던진 개’는 이미 내 설화를 목도한 순간부터 바닥에 납죽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그르륵. 오··· 오, 지, 마.] 
 
다가서는 나를 보며, 바닥에 너부러진 ‘뱀 머리 졸부’가 몸을 꿈틀거렸다. 
이 ‘설화’ 앞에 온전할 수 있는 자들은 오직 ‘왕’의 설화를 가진 존재들 뿐이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즐거워합니다.]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돌원숭이의 왕과 32번째 마계의 왕이 나를 지켜보는 가운데, 사인참사검이 움직였다. 
 
[카아아아아아악!] 
 
한 번. 두 번. 
나는 몇 번이고 ‘뱀 머리 졸부’의 머리를 내리쳤다. 
단단한 ‘뱀 머리 졸부’의 비늘은 쉽사리 파괴되지 않았다. 
 
퍼거걱! 퍼거거걱! 
 
백청강기에 잘려 나간 ‘뱀 머리 졸부’의 살점이 튀고, 파충류의 피가 번지며 주변의 땅덩이가 붉은 빛으로 물들어 갔다. ‘뱀 머리 졸부’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몇 번이고 내지르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당신의 잔인함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나는 ‘뱀 머리 졸부’의 머리통에 박힌 사인참사검을 뽑아들었다. 
 
[마왕, ‘은색 발톱의 올빼미’가 당신의 살행에 즐거워합니다.] 
[2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성좌들은 진짜 잔인한 게 뭔지 모른다. 
 
“내 자리가 탐난다면, 그만한 각오를 했어야지.” 
 
이것은 성좌들에 대한 경고다. 
어설픈 마음으로 이 [거대 설화]에 끼어들지 말라는 경고.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사인참사검’을 휘둘렀다. 
 
까가가가가각! 
 
[당신은 ‘뱀 머리 졸부’의 화신체를 격살하였습니다.] 
[‘뱀 머리 졸부’가 보유하고 있던 설화의 일부를 습득하였습니다.] 
 
별자리와 화신체 사이의 간격마저 베어버리는 ‘사인참사검’의 힘. 
 
[성좌, ‘뱀 머리 졸부’가 비명과 함께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아마, ‘뱀 머리 졸부’는 다시는 화신체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어서 ‘손톱을 먹는 쥐’를 바라보았다. 
 
퍼걱! 퍼거걱! 
 
얼마 지나지 않아, ‘손톱을 먹는 쥐’도 똑같은 꼴이 되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광기에 즐거워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안타까운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는 뺨에 튄 피를 닦으며, 마지막 남은 성좌를 바라보았다.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머리를 납죽 숙인 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녀석의 몸을 덮고 있던 불길은 이미 온데 간데 없었다. 
개의 몸에 남은 것은, 주인을 지키기 위해 뒹굴었던 새카만 화상 얼룩들 뿐. 
나는 녀석의 설화 목록을 떠올렸다. 
이 개는, 십이지의 다른 두 놈들과는 다르다. 
 
[성좌,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당신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헥헥대는 개를 보며, 나는 잠시 망설였다. 
여기서 이 개를 죽이지 않으면 어떤 성좌들은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쿠구구구구! 
 
멀리서 나를 노리는 다른 성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설화, ‘제멋대로 곡해자’의 효력이 다했습니다.] 
 
과도한 마력의 사용으로 인해 나 또한 체력 회복이 필요한 상태. 
나는 검을 집어 넣고, 곧바로 개의 등에 올라탔다. 
 
“‘유중혁 공단’으로 가자.” 
 
기다렸다는 듯, 개가 힘찬 발돋움을 시작했다. 
빠르게 지나치는 전경 속에서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밤하늘의 별들이 제각기 다른 곳으로 흐르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는 방관을 선택했고, 누군가는 참전을 선택했다. 
모두가 각자의 욕망을 따라 이야기의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진짜 ‘마왕 선발전’이, 이제 곧 시작될 것이다. 
 
 
 
 
 
< Episode 48. 등장인물 (4) > 끝

< Episode 49. 가장 잘하는 것 (1) >
 
 
 
 
 
Episode 49. 가장 잘하는 것 
 
 
‘불길에 몸을 던진 개’는 나를 태운 채 이틀밤을 내리 달렸다. 
집요하게 뒤를 쫓는 성좌들이 잦은 위협을 가해왔으나, 그때마다 ‘불길에 몸을 던진 개’는 말 그대로 몸을 던져 나를 지켜냈다. 
 
[설화, ‘목숨 바친 충성’이 이야기를 반복합니다.] 
 
그렇게 얼마나 더 달아났을까. 
마침내 날이 밝기 시작했다. 
 
[서브 시나리오 ― ‘전초전’이 종료되었습니다.] 
[당신은 제한 시간 동안 무사히 설화핵을 지켜냈습니다.] 
 
뒤를 쫓아오던 성좌들도 하나둘 먼 곳에서 멈춰섰고, 허공에서는 온갖 종류의 간접 메시지들이 날아들었다. 
 
[당신을 쫓는데 실패한 몇몇 성좌들이 낙심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하품을 하며 이제 끝났냐고 묻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졸린 눈을 부비며 기뻐합니다!] 
[성좌, ‘드러 누운 드래곤’이 당신의 책략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비겁함을 손가락질합니다.] 
 
손가락질하든 말든, 여기서는 살아남는 게 더 중요했다.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독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내게 보상을 전송했다. 
 
[보상으로 200,000 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장비 초월용 모루석’을 2개 획득하였습니다.] 
 
슬슬 장비 강화용 아이템들이 풀리는 시기구나 싶었다. 
초반 지역에서 SSS등급을 받은 아이템도, 중후반 시나리오 지역에서는 거의 폐품에 가깝다. 하지만 제때 초월용 모루석을 사용해준다면, 장비의 품질 낙후를 막을 수 있다. 
소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설화, ‘십이지에게 맞선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역사급인 게 아쉽기는 해도, 설화는 많을수록 좋다. 
결국 이런 작은 설화들이 모여 ‘전체의 격’을 이루는 것이니까. 
특히 싸움을 통해 얻은 설화는, 앞으로 [제멋대로 곡해자]를 통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을 뒤쫓던 성좌들이 물러갑니다.] 
 
성좌들이 모습을 감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유중혁 공단’의 외양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탈출 시나리오’를 받은 공민들이 줄을 이어 공단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장하영과 한명오가 일을 잘 처리한 듯했다. 
나는 ‘불길에 몸을 던진 개’를 향해 말했다. 
 
“이제 떠나도 돼. 나한테 충성할 필요 없어.” 
 
어차피 진심으로 나를 따르려는 녀석도 아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헤어져 갈라지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내가 돌아선 후에도, 녀석은 종종거리는 발걸음으로 계속해서 나를 쫓아왔다. 
 
헥, 헥, 헥. 
 
나는 슬며시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야, 가라니까?” 
 
낑······. 
 
커다란 개의 눈망울에 그렁그렁한 습기가 맺혔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불길에 몸을 던진 개’를 가엾게 바라봅니다.] 
 
‘불길에 몸을 던진 개’의 진명은 ‘오수의 개’다. 만취한 주인이 불에 타죽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몸을 적셔 잔디밭의 불을 끈 개. 불행하게도 이 성좌는 진명조차 자신의 이름이 아니다. 
 
“······따라올 거야?” 
 
끼잉! 
 
나는 잠시 망설였다. 생각해 보면, 이 녀석은 나와 갈라진다고 해도 자유로워지긴 힘들었다. 
 
[일부 성좌들이 ‘불길에 몸을 던진 개’를 먹음직스럽게 바라봅니다.] 
 
세상에는 화신들을 노리는 성좌들만큼이나, 같은 성좌들을 노리는 성좌들도 많다. ‘들개 사냥꾼’이라든가 ‘멜베르크의 개장수’ 따위의 수식언을 가진 놈들을 만나게 된다면, 이 녀석은 꼼짝없이 설화를 빼앗긴 채 죽게 되겠지. 
그나마 지금까지 무사했던 것은, 십이지 패거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같이 가든가.” 
 
헥헥헥! 
 
“근데 덩치는 좀 줄여. 너무 커서 방해되니까.” 
 
끼잉! 
 
말과 함께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화신체의 크기를 줄였다. 작아진 녀석은 골든 리트리버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김독자!” 
 
나를 발견한 장하영이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야! 괜찮아? 그 개는 뭐야?” 
“오다 주웠어. 다른 사람들은?” 
“공민들 인도하느라 바빠.”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장하영의 손등을 핥았다. 장하영이 물었다. 
 
“얜 이름이 뭐야?” 
 
나는 솔직하게 말해줄까 하다가, 그냥 대충 얼버무렸다. 
 
“오수.” 
 
[당신은 ‘불길에 몸을 던진 개’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크게 감동합니다.] 
[‘불길에 몸을 던진 개’의 충성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줄 걸 그랬다. 
오수의 몸을 유심히 살피던 장하영이 반색했다. 
 
“잘 됐다. 사저가 좋아하겠네.” 
 
순간 ‘사저’가 대체 누굴 말하는 건가 싶었다. 
 
“······파천신군 말하는 거냐? 걔 암컷이었어?” 
“파천검도는 여자만 배울 수 있는 거 잊었어?” 
 
생각해 보니 그렇다. 
파천검도는 그런 무공이었지. 
예외가 너무 많아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가령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녀석만 해도······. 
 
“······뭘 그렇게 봐?” 
“아냐, 아무것도.”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버렸다. 
지금 중요한 문제는 장하영의 성정체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왕 선발전’의 시작이 임박했습니다!] 
 
이제, ‘마왕 선발전’이 시작될 테니까. 
 
쿠구구구구! 
 
“······온다.” 
 
내 말에, 장하영도 긴장한 듯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73번째 마계’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진동. 하늘에 낯선 빛깔의 별들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었다. 
무려 [거대 설화]가 걸린 대형 이벤트를 관람하기 위해, <스타 스트림> 곳곳의 성좌들이 이 마계에 찾아온 것이다. 
 
[다수의 성좌들이 채널에 입장합니다!] 
[상당수의 마왕들이 채널에 입장합니다!] 
 
단지 응시만으로도 그 격을 느낄 수 있는 존재들이 채널에 입장하고 있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당신을 향해 손을 흔듭니다.] 
 
지금껏 나와 만났던 성좌들도 드높은 하늘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 역시 긴장을 삭이며 하늘 위의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마침내 이곳까지 왔다. 
 
여전히 남은 시나리오는 많고, 그들이 있는 곳은 멀다. 
하지만 이제 요원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저 고고한 성좌들이 이 산맥의 어디쯤에 있을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리까진 왔다. 
 
[스물 다섯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츠츠츠츠츳! 
 
[과도한 메인 시나리오 스킵으로 인해 격의 일부가 손상됩니다.] 
 
나는 20번대 시나리오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곧장 ‘25번 시나리오’를 시작했으니, 그만큼 개연성의 손해를 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메인 시나리오 ― ‘마왕 선발전’이 시작됩니다!] 
 
+ 
 
<메인 시나리오 # 25 ― 마왕 선발전>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조력자’들과 팀을 이뤄 ‘신화의 전장’에서 승리하시오. 
제한시간 : ― 
보상 : 마왕위의 정식 계승, ??? 
실패시 : 사망 
 
* 해당 시나리오는 ‘조력자’를 모집할 수 있습니다. 
* 시나리오의 진행과 관련해 도깨비의 추가 설명이 있을 예정입니다. 
 
+ 
 
모처럼, 실패 항목에 ‘사망’이 표기된 시나리오였다. 
여기서 지면, 나는 죽는다. 
지금까지도 종종 있었던 일이니 낯설지는 않았다. 
 
[해당 시나리오는 전용 무대에서 개최됩니다.] 
[해당 시나리오의 주요 참가자는 총 넷입니다.] 
[주요 참가자들은 상호 간의 합의 하에 ‘조력자’를 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해당 시나리오의 주요 참가자입니다.] 
 
북쪽과 서쪽에서 거대한 기척이 느껴졌다. 
 
[‘멜레돈 공단’ 소속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베르칸 공단’ 소속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적대감을 표출합니다.] 
 
하늘의 성좌들이 빛을 깜빡이는 가운데, 허공에서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성좌님들.] 
 
나타난 것은 독각과 비형이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마왕 선발전’이 시작됩니다!] 
 
비형의 말과 함께, 허공의 스크린에 거대한 ‘무대’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먼저, 이 시나리오를 위해 손수 게임을 제작해주신 ‘양산형 제작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과장 섞인 박수 소리가 허공을 메우며, 홀로그램 위에 ‘양산형 제작자’가 만든 맵이 나타났다. 
 
[게임, ‘신화의 전장’이 로드됩니다!] 
 
맵은 가장자리가 거대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광활한 숲지대였다. 
숲지대의 내부에는 동서남북으로 [공단]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아마 그곳이 각 [공단]의 출발 지역을 의미하는 듯했다. 
 
[예상하셨겠지만, 이번 ‘선발전’은 단순히 치고 박고 싸우는 형태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이 ‘선발전’은 공단별로 각각 팀을 이룬 ‘팀전’의 형태로 진행될 것입니다.] 
 
도깨비의 말에 놀란 몇몇 성좌들이 간접 메시지를 쏟았다. 
물론, 나는 놀라지 않았다. 
원작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임의 룰은 간단합니다. 모든 참가자들은 자신을 포함해 총 일곱 명의 인원으로 ‘팀’을 이룰 수 있습니다.] 
[각 팀원들은 제각기 다른 ‘포지션’을 부여 받으며, 그 포지션을 통해 시나리오 안에서 역할을 담당합니다.] 
 
게임은 한때 지구에서 유행했던 소위 AOS 게임과 흡사한 모양새였다. 
한 명의 탱커와 두 명의 근접 딜러, 다시 두 명의 원거리 딜러와 한 명의 서포터. 그리고 한 명의 ‘올라운더’까지. 
총 일곱 명이 팀을 이뤄 대결을 펼치는 것이 바로 이 게임― ‘신화의 전장’이었다.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빙긋 웃습니다.] 
 
과연, 수식언답게 게임도 어디서 적당히 훔쳐온 요소들로 만드셨구만······. 
도깨비의 말은 계속되었다. 
 
[게임에 이기는 방법은 총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팀을 제외한 다른 팀의 참가자를 전멸시키는 것. 그리고 둘은 상대방 팀의 ‘문장’을 빼앗는 것입니다. 뭐, 자세한 건 직접 게임에 참가해보시면 아실 테니 생략하기로 하고······ 그보다, 중요한 공지가 하나 더 있습니다.] 
 
한참 말을 늘어놓던 비형이 내쪽을 흘끗 보았다. 
 
[본래 이 ‘선발전’에는 총 네 개의 팀이 참전할 예정이었습니다만······ 보아하니 게임이 시작하기도 전에 ‘공단’ 하나가 거의 궤멸 상태에 이르렀더군요.] 
 
순간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비형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저희 <관리국>은 게임의 형평성을 심사숙고한 끝에, 상대적으로 불리한 ‘두 개의 공단’을 ‘한 팀’으로 묶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어서 허공에서 메시지가 들려왔다. 
 
[현재 당신은 ‘유중혁―김독자 공단’의 참가자입니다.] 
 
뜻밖의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유중혁과 팀이 다른 것 때문에 걱정이었는데, 고민을 덜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마 비형이 손을 써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왜 ‘유중혁―김독자 공단’인 거지? 
ㅇ보다는 ㄱ가 순서상 빠르니, 당연히 공단 이름은 ‘김독자―유중혁 공단’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쨌거나. 
 
“장하영, 유중혁은 어디 있어?” 
 
나는 두리번거리며 유중혁을 찾았다. 
그런데 유중혁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장하영이 눈을 동그랗게 뜬채 반문했다. 
 
“무슨 소리야? 못 만났어?” 
“······못 만나다니?” 
“걔 너 찾으러 갔는데?” 
“뭐?” 
 
순간,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황급히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했다. 
 
[현재 대상과 연결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빌어먹을. 
이 자식을 어떻게 찾을까 고민하는데, 불현듯 뭔가가 떠올랐다. 
다행히, 지금은 한낮이었다. 
 
[아이템, ‘한낮의 밀회’를 사용합니다!] 
 
‘한낮의 밀회’. 
언젠가 이 녀석과 연결시켜 둔 일대일 채팅 아이템이었다. 
거리가 충분한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믿을 건 이것뿐이었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39통 있습니다.] 
 
그런데 웬걸, 이미 녀석에게서 수십여 통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나는 급히 창을 열어 보았다. 
첫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김독자, 비유는 ‘내가’ 구했다 / 발신인 유중혁, 47시간 39분전 
 
메시지들은 약간의 사이를 두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런데 왜 갑자기 사라진 거지? / 발신인 유중혁, 46시간 54분전 
 
네 유치한 장난에 어울려 줄 여유는 없다 / 발신인 유중혁, 46시간 39분전 
 
다시 나타나지 않으면 죽이겠다 / 발신인 유중혁, 45시간 18분전 
 
농담이 아니다 / 발신인 유중혁, 44시간 39분전 
 
······. 
 
김독자 / 발신인 유중혁, 41시간 38분전 
 
그 뒤로도 무려 수십 통의 메시지가 이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온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가겠다 / 발신인 유중혁, 23시간 14분전 
 
아니, 내가 어디있는 줄 알고 오겠다는 거야 이 자식?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재빨리 메시지를 보냈다. 
 
―멍청아, 빨리 돌아와! 지금 니 공단에 있어! 
 
그러나 유중혁은 답변이 없었다. 
확인했다는 표시도 뜨지 않았다. 
대신 돌아온 것은, 마치 사형 선고처럼 내려진 시나리오 메시지였다. 
 
[10분 안에 ‘조력자’를 모집해 주십시오.] 
[총 6명의 ‘조력자’를 모집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눈에 보이는 건 두 마리의 개와 성별이 모호한 인간 하나, 그리고 혹시나 자길 지목할까봐 벌벌 떨고 있는······ 산후우울증을 앓는······ 빌어먹을. 
전력 구상은 고사하고 7명을 채우기에도 급급한 멤버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조력자를 뽑겠습니다.” 
 
개 두 마리와 장하영, 백 번 양보해서 한명오까지 포함시킨다 해도, 여전히 두 명이 더 필요한 상황. 혹시나 유중혁이 올 한 자리를 비워둔다고 해도, 결국 한 명은 따로 충원해야만 한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채널 내의 모든 성좌들이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제 내 인맥을 시험해 볼 때가 왔다. 
 
 
 
 
 
< Episode 49. 가장 잘하는 것 (1) > 끝

< Episode 49. 가장 잘하는 것 (2) >
 
 
 
 
 
내가 성좌들을 향해 입을 열려는 순간, 겁에 질린 한명오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 난 빼주게! 솔직히 난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네.” 
 
겁먹을 만도 하다. 
저쪽의 참가자와 조력자들은 모두 최소 위인급 성좌에 준한다. 
미노 소프트의 낙하산 부장이 비벼 보기엔 턱도 없는 전력. 
나는 달달 떨리는 한명오의 어깨를 꾹 눌러 잡으며 말했다. 
 
“인원수만 채워 주세요. 어차피 저기서 죽어도 진짜 죽진 않아요. 눈 딱 감고 한 게임만 뛰세요.” 
 
이 ‘신화의 전장’에는 총 ‘세 번’의 기회가 있다. 
설령 이번 판에서 지더라도, 다음 판과 그 다음 판에서 만회하면 된다. 
 
“하, 하지만 아픈 건 진짜일 거 아닌가!” 
“그렇겠죠.” 
“그럼 싫어! 안 해······!” 
“고맙습니다, 부장님.” 
 
[조력자 ‘악마 백작 한명오’를 얻었습니다.] 
[앞으로 섭외 가능한 조력자의 숫자 : 5명] 
 
다른 대타를 구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마땅한 인재가 없었다. 마르크나 아일렌을 택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솔직히 악마 백작급인 한명오에 비해서는 급이 떨어진다. 
 
“난 당연히 참가야.” 
 
기다렸다는 듯, 장하영이 작은 두 주먹을 팡팡 부딪쳤다. 
 
[조력자 ‘차원이동자 장하영’을 얻었습니다.] 
[앞으로 섭외 가능한 조력자의 숫자 : 4명] 
 
지금 장하영의 전투력은 어느 정도일까? 
무도 대회에서 3등을 했다고 듣기는 했는데······. 
자리에 없었던 나로서는 정확히 감이 오질 않았다. 어떤 회차의 장하영도 이 시기에 ‘파천검성’의 무공을 계승한 적은 없었으니까. 
나는 또 다른 파천검성의 제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파천신군.” 
 
왕! 
 
대답은 간명했다. 
 
[조력자 ‘풍월을 읊는 개 파천신군’을 얻었습니다.] 
[앞으로 섭외 가능한 조력자의 숫자 : 3명] 
 
초월견 파천신군은 나나 유중혁을 제외하고는 ‘확실하게’ 위인급 성좌들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존재다. 
분명, 이 싸움에서 이 개는 큰 도움이 되겠지. 
그런데, 왜인지 파천신군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크르렁! 컹! 
 
세차게 짖는 파천신군의 시선이 향한 곳에, 꼬질꼬질 때가 묻은 개 한 마리가 있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다. 
 
“맞습니다. 새 동료입니다.” 
 
왕왕왕! 
 
“맘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어요.”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오수가 파천신군의 궁둥이 쪽을 킁킁대며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눈에 불을 켠 파천신군이 앞발로 오수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깨갱! 
 
영 미덥지는 않지만, 저 녀석도 아쉬운 대로 동료에 넣어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위인급 성좌니까 한명오 보다는 낫겠지. 
 
[조력자 ‘불길에 몸을 던진 개 오수’를 얻었습니다.] 
[앞으로 섭외 가능한 조력자의 숫자 : 2명] 
 
남은 두 자리 중 한 자리는 유중혁의 것이다. 
 
[조력자 ‘패왕 유중혁’을 등록하였습니다.] 
[해당 인물은 현재 근처에 없습니다.] 
[해당 인물이 제안을 수락할 시, 전장으로 자동 소환 됩니다.] 
[제한 시간이 5분 남았습니다.] 
 
이제 남은 건 한 자리. 
 
[성좌, ‘구원의 마왕’이 성좌들을 바라봅니다.] 
 
나를 바라보는 성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디, 지원자를 받아볼까. 
 
“조력자로 지원하실 분, 계십니까?” 
 
솔직히 지원자가 없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 이 채널에 있는 성좌들은 여기까지 내 이야기를 따라와준 이들이니까. 
혹시나 둘 이상의 지원자가 있다면, 한명오를 대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짓습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머리를 열심히 닦습니다.]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허리 통증을 호소합니다.] 
 
······제길.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립니다.] 
 
나는 못마땅한 눈으로 하늘을 잠시 노려보았다. 
페르세포네나 양산형 제작자야 이 무대에 낄만한 급이 아니니 논외로 치더라도, 다른 위인급 성좌들은 지원해줄 만도 한데······. 
나는 한숨을 쉬며 장하영을 돌아보았다. 
 
“장하영, 내가 말한 성좌들한테 연락해 봤어?” 
“······응.” 
 
안 그래도, 이런 날을 대비해 장하영을 통해 몇몇 성좌들에게 접선해 보라고 한 참이었다. 
 
“해상전신은 뭐래?” 
“‘숙고해 보겠다’라고 했어.”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언제까지 숙고만 하실 셈인지. 
아무리 개연성이 우려된다고 해도, 판까지 깔아 드렸는데······. 
역시 다른 성운들과 척을 지는 게 껄끄러우신 건가?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머리를 닦던 수건을 내려 놓습니다.] 
 
본래 내 계획은 남은 자리에 파천검성 남궁민영과 역설의 백청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지금 무림에 있다. 
 
“고려제일검은?” 
“그쪽은 아예 대답이 없어.” 
 
이쯤 되니 조금 배신감까지 들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비장한 표정을 하며 머리를 닦던 수건을 이마에 질끈 묶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된다면, 차선이라도 선택해야 한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아스모데우스. 도와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츠츠츠츳! 
 
진명의 언급에 하늘의 구석에 있던 불길한 검은 별이 꿈틀거렸다.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자신은 3차전부터 도와주겠다고 말합니다.] 
 
······3차전부터?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은 당신이 자신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시험하고 싶어합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빌어먹을 마왕 녀석이 지금 각을 잰다 이거지······. 
3차전까지 갈 수 있을지도 의문인 판국에.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아직 저쪽의 ‘조력자’들 중에서 마왕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멜레돈 공단’에서 성좌 ‘인류의 시조’를 조력자로 지정하였습니다.] 
[‘베르칸 공단’에서 성좌 ‘최후의 파라오’를 조력자로 지정하였습니다.] 
[‘멜레돈 공단’에서 성좌 ‘자신의 눈을 찌른자’를 조력자로 지정하였습니다.] 
[‘멜레돈 공단’에서 성좌 ‘바나라의 장군’을 조력자로 지정하였습니다.] 
 
마왕은 아니라도, 수식언부터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한 성좌들이었다. 
심지어 설화급에 오른 녀석들도 보였다. 
 
쿠구구구구······.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 ‘시나리오’를 찢고 뜯고 씹고 맛보고 싶어 하는 성좌들의 욕망이 피부로 느껴졌다. 
이젠 지푸라기라도 붙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우리엘.” 
 
[성운 ‘에덴’이 당신의 제안에 곤란해합니다.] 
[마계의 마왕들이 성운 ‘에덴’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이곳이 ‘마계’라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다. 
‘하늘의 서기관’에게 떼를 쓰고 있을 우리엘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마 두 집단 간의 협약이 지속되는 한, 우리엘은 이 게임에 참가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나는 다른 지푸라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천대성.” 
 
그러나 제천대성의 반응도 신통치 않았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보며 코를 팝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다른 공단의 성좌들을 향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찹니다.] 
 
아무래도 저 자존심 강한 원숭이 왕은, 이곳이 자신의 무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정도 시나리오에 본신의 힘을 빌려주기엔 자존심이 상한다는 거겠지.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킬킬 웃으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 메시지를 함께 들었는지, 장하영이 물었다. 
 
“염룡이는 어때?” 
“안돼.” 
“왜? 쟤 생각보다 착해.” 
 
심연의 흑염룡이 생각보다 나쁜 녀석이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저놈의 힘은 함부로 빌리기엔 위험 부담이 크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심연의 흑염룡’은 써야 할 곳이 따로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 남은 성좌는 하나뿐인가······.” 
“그게 누군데······?”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죽장을 움켜쥡니다.] 
 
“장하영. ‘은밀한 모략가’한테 메시지를 보내.” 
 
[몇몇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에 깜짝 놀랍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 
내 채널의 주요 4인방 중, 내가 유일하게 정체를 모르는 성좌. 
제천대성에 흑염룡까지 채널에 복귀한 마당에, 왜 아직까지 녀석이 내 채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을 만류합니다!] 
 
성좌들의 반응은 이해가 갔다. 
은밀한 모략가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높은 확률로 ‘이계의 신격’ 중 하나일 것이다. 
그것도 ‘위대한 옛 존재’들을 물릴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존재. 
아마 다른 성좌들도 그 사실을 깊이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한참 허공에다 대고 뭔가를 두드리던 장하영이 나를 불렀다. 
 
“김독자. 수식언 제대로 불러준 거 맞아?” 
“왜?” 
“이것 좀 봐.” 
 
장하영은 자신이 입력하던 화면을 내게 보여줬다. 
화면에 떠오른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해당 수식언은 <스타 스트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황망한 심정으로 장하영에게 물었다. 
 
“너 똑바로 입력한 거 맞아?” 
“내가 바본 줄 알아?” 
 
장하영이 다시 한 번 수신좌에 ‘은밀한 모략가’를 입력했다. 
 
[해당 수식언은 <스타 스트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은밀한 모략가’가······ 존재하지 않는 수식언이라고?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흥미로운 표정을 짓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호기심을 갖습니다.] 
[성좌, ‘하늘 걸음의 주인’이 네트워크를 가동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은밀한 모략가’에 대한 수소문을 시작합니다.] 
 
이런 경우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나는 순간적으로 사고가 마비되었다. 
 
[제한 시간이 1분 남았습니다.] 
 
실제로 대성좌들 중에는 수식언이 여럿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있었던가? 
멀쩡하던 수식언이 사라졌다고? 
 
“이제 어쩌지?” 
 
장하영이 초조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30초도 채 되지 않는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더 이상은 외면하기 힘들었다. 
 
“······사명대사님, 도와주십시오.” 
 
내 말과 동시에, 하늘에서 낙뢰가 번뜩였다. 
 
고오오오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개연성을 얻어 화신체를 소환합니다!] 
 
눈부신 빛살 속에서 구현되는 화신체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지금은 강력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성좌보다, 조금 아쉬워도 믿을 수 있는 성좌를 동료로 삼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사명대사는 내가 ‘성운 개설권’을 얻을 때 지지해줬던 성좌들 중 하나니까. 
 
쿠구구구구! 
 
소환식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사명대사의 머리 쪽에서 섬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슬그머니 손으로 차양막을 만드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일세, 김독자.] 
 
가공할 내력을 지닌 진언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개나 고양이도 운이 좋으면 성좌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성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랜만입니다, 사명대사님.” 
 
삼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키의 신승(神僧). 
마치 거목처럼 대지에 꽂힌 커다란 죽장(竹杖). 
한반도의 위인급 성좌, 사명대사가 마침내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 
 
[조력자 ‘대머리 의병장’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모든 조력자를 섭외하였습니다!] 
. 
. 
[모든 참가자가 조력자 섭외를 마쳤습니다.] 
[게임, ‘신화의 전장’이 마계에 현현(顯現)합니다!] 
 
 
 
 
 
< Episode 49. 가장 잘하는 것 (2) > 끝

< Episode 49. 가장 잘하는 것 (3) >
 
 
 
 
 
시스템 메시지와 동시에 주변의 경관이 바뀌기 시작했다. 
신화의 전장. 
역대 [거대 설화]의 무대였던 곳을 가상으로 빌려오는 것이 바로 이 게임, ‘신화의 전장’의 특징이었다. 
 
―대전장 <하르마게돈>에 입장하였습니다. 
―3분 뒤 게임이 시작됩니다. 
 
새카만 하늘의 한편에는 천국의 계단이, 다른 한편에는 지옥의 문이 열려 있었다. 이게 진짜였다면 저 계단에서는 <에덴>의 대천사들이 몰려 나왔을 것이고, 지옥문에서는 <마계>의 마왕들이 몰려 나왔겠지. 
다행히도 여기서 그럴 일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가상의 무대’니까.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익숙한 무대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다수의 성좌들과 마왕들이 서로를 향해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진짜로 별 일 없어야 할 텐데. 
 
“어째 으스스하네······.” 
 
장하영이 어깨를 감싸 안은 채 하늘을 두리번거렸다. 배경음인지 뭔지 간간히 오싹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나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보호막을 바라보았다. 
게임 시작 전까지는, 저 보호막이 우릴 보호해 줄 것이다. 
 
“정신들 차리세요. 각자 선택한 포지션 확인하시고요.” 
 
내 말에 다른 일행들도 하나둘 평정을 되찾는 듯했다. 
 
“탱커는 누구죠?” 
 
[나일세.] 
 
탱커는 사명대사, 근접 딜러는 나와 파천신군, 원거리 딜러는 장하영과 오수. 서포터는 한명오. 그리고 ‘올라운더’는······. 
 
“유중혁은?” 
“아마 우리랑 다른 곳에 떨어졌을 거야.” 
 
‘신화의 전장’은 소환에 응한 장소에 따라 출발 지역이 달라진다. 
 
[조력자 ‘유중혁’이 소환에 응했습니다.] 
 
메시지는 제대로 떠올랐으니, 유중혁도 이 전장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장하영이 물었다. 
 
“이거 그 시공의 전장인가 하는 게임 같은 거지? 나 해본 적 있어. 적의 본거지를 부수면 이기는······.” 
“맞아. 근데 좀 다른 점이 있어.” 
 
보통 AOS게임은 적의 본진을 공략하면 게임이 끝난다. 
하지만 이 게임은 다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건 ‘본진’이 아니라 ‘문장’이야.” 
“문장?” 
 
나는 한명오의 손에 쥐어진 물건을 가리켰다. 그것은 영롱한 빛깔이 어우러진 작은 비석이었다. 
 
“이, 이게 뭐야!” 
“저걸 지켜야 해.” 
 
비석에는 말 그대로 작은 ‘문장’이 쓰여 있었다. 
 
『천국의 사자(使者), 지옥의 수문장(守門將)』 
 
한명오가 기겁하며 비석을 내게 건네려 했다. 
나는 손바닥으로 그것을 밀어내며 말했다. 
 
“지금은 부장님이 갖고 계세요. 중요한 물건이니까 간수 잘 하시고요.” 
“주, 중요한 물건이니까 독자 씨가 갖고 있는 게······!” 
“중요하니까 부장님이 갖고 계신 게 낫습니다. 보통 ‘문장’은 주요 참가자들이 갖고 있으니까요. 적팀의 예상을 깨야죠.” 
“나, 난 못해! 난 이런 게임 해본 적 없다고!” 
 
확실히 한명오는 게임 회사 부장 주제에 게임에는 둔한 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게임은 유상아 씨가 잘 했던 것 같은데. 
유상아 씨는 혼자서 팀을 캐리해 사내 게임 대회의 결승전까지 올라갔던 적도 있다. 
······지금 여기 있는 게 한명오가 아니라 유상아 씨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튼 이 게임에서 승리할 방법은 둘입니다. 하나는 적팀의 ‘문장’을 빼앗는 것. 둘은 적팀의 참가자를 모두 죽이는 것.” 
“문장을 빼앗는 게 더 쉽겠네.” 
“그렇지, 보통은.” 
“좋아! 나한테 맡겨!” 
 
의욕이 충만한 상태로 장하영이 외쳤다. 
하지만 이 게임은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니다. 
 
“의욕은 알겠지만, 개인 플레이를 하면 곤란해. 이제부터 작전을 짜야······.” 
 
컹컹! 
왕왕! 
 
······일행 중 둘이 개라는 걸 잊고 있었다. 
‘불길에 몸을 던진 개’ 오수는 아까부터 주변을 킁킁대며 돌아다니고 있었고, 파천신군은 관심 없다는 듯 발라당 드러누워 앞발로 배를 긁어대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희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명대사님.” 
 
아까부터 다른 성좌들로부터 조언을 듣는 것 같았으니, 기대해 볼 건 이쪽뿐이다. 
 
[소승들의 말이 너무 어려워서 잘 모르겠군. 에이오에쓰으······ 게임······이 대체 뭔가?] 
 
사명대사는 굉장히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한반도의 일부 성좌들이 ‘대머리 의병장’을 답답해합니다!] 
 
미처 연장자 배려를 못했다. 
사명대사가 최근 게임 용어를 알 턱이 없는데. 
 
[어쨌든 오랑캐 놈들을 다 죽이면 된다 그 말인가?] 
 
“예, 비슷하긴 한데······.” 
 
[그거라면 본승이 앞장서겠네! 가세!] 
 
의기충천한 사명대사가 죽장을 휘두르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게임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무대의 보호막이 해제되었다. 
 
[게임의 난이도를 고려하여 참가자들의 능력치가 자동 조정됩니다.] 
[1차전에서 모든 참가자들은 본래 능력치의 10%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회차가 거듭됨에 따라, 이 패널티는 감소합니다.] 
 
이어서 우리 쪽 본진의 ‘천국의 계단’에서 조그만 요정을 닮은 하급 천사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팀의 지원군이 생성됩니다!] 
[하급 천사들이 당신들을 돕습니다!] 
 
천사들을 보고 놀란 오수가 컹컹 짖었다. 
 
“야! 걔네 우리 편이니까 물지마. 사명대사님 잠깐만요! 같이 가요!” 
 
시작부터 개판이었다. 
최전방의 사명대사를 필두로 파천신군과 오수가 질주를 시작했다. 
나와 장하영은 허겁지겁 그 뒤를 쫓았고, 한명오는 일행의 후미에서 소심한 달음박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부장님은 최대한 뒤쪽에 계세요. 괜히 나서지 마시고.” 
“······최선을 다해 보겠네!” 
 
도망 하나는 잘 치는 한명오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살길은 찾을 것이다. 
 
“앗, 맵이 바뀌는데?” 
 
본진을 벗어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드넓은 평원 지대였다. 
평원 지대의 양쪽에는 각각 골짜기와 숲 지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골짜기에는 ‘묵시록의 이무기’가, 그리고 숲 쪽에는 ‘타락한 치천사’가 있다. 그 외에도 맵 곳곳에는 초반에 잡아두면 버프 효과를 받을 수 있는 몬스터들이 꽤나 포진해 있는데······. 
 
“잠깐만요! 사명대사님! 그렇게 빨리 가시면 안돼요!” 
 
쿠구구구구구! 
 
[본승만 믿게나! 이래봬도 전쟁에는 도가 튼 몸일세!] 
 
사명대사가 웅장한 진언을 터뜨리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한반도의 영령들이여! 본승에게 힘을 주시오!] 
 
저런다고 누가 사명대사에게 힘을 줄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메시지가 들려왔다. 
 
[성좌, ‘매금지존’이 성좌 ‘대머리 의병장’을 응원합니다!] 
[성좌, ‘황산벌의 마지막 영웅’이 ‘대머리 의병장’을 응원합니다!] 
[성좌, ‘흥무대왕’이 ‘대머리 의병장’에게 1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말 그대로 소박한 응원이었다. 
 
[오오오오오오오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적이 나타났다. 
제각기 병장기를 차거나, 화신체로 화한 성좌들. 
 
[바나라의 장군] 
[자신의 눈을 찌른 자] 
[우레를 먹는 새] 
 
갑주를 입은 원숭이와 금빛 깃털의 괴조. 거기다 내가 한 번 만난 적 있는 오이디푸스 왕까지······ 아무래도 우리가 조우한 쪽은 [멜레돈] 공단 소속의 성좌들인 듯했다. 
하필 설화급 성좌가 섞여 있는 파티라니. 
하지만 저쪽도 아직 이 게임에 대한 파악이 덜 끝났을 테니, 아주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덤벼라, 오랑캐들아!] 
 
적들을 발견한 사명대사가 돌격을 감행했다. 
목소리가 워낙 우렁찼기 때문일까, 순간 나조차 기대감이 일었다. 
 
그래, 뭐든 싸워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아무리 본 능력치의 10%만 사용할 수 있는 전장이라고 해도, 애초에 나는 사명대사의 능력치가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위인급 성좌라고 얕볼 게 아니다. 개중에는 척준경 같은 규격 외의 강자들도 있으니까. 
 
[이 호국신승이 전열을 무너뜨려 주겠노라!] 
 
호기롭게 달려간 사명대사가 커다란 죽장을 여의봉처럼 휘둘렀다. 
당황한 성좌들이 고성을 질렀고, 폭음이 전장을 휩쓸었다. 
 
콰아아아앙! 
 
푸슈슛! 푸슈슈슛! 
 
곳곳에서 살점이 낭자했고. 
 
쿠과가가가각! 
 
무기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으며. 
 
푸우우욱! 
 
꿰뚫린 상처에서 피가 솟았다. 
 
[첫 번째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사명대사는 잘 싸웠다.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 도망쳐요!” 
 
[조력자 ‘바나라의 장군’이 조력자 ‘대머리 의병장’를 처치했습니다.] 
[공단 ‘멜레돈’ 팀이 승점 1점을 획득하였습니다.] 
 
 
* 
 
 
“제기랄, 저 스님 센 거 아니었어? 자기만 믿으라며!” 
 
연신 비명을 질러대는 한명오는 도망칠 때만큼은 제일 빨랐다. 
왠지 저렇게 될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사명대사가 트롤링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사명대사의 원혼’이 전장을 배회합니다.] 
 
[오오오오오오!] 
 
사명대사가 가진 성흔인지 뭔진 모르겠지만, 죽은 사명대사의 혼이 전장 곳곳을 떠돌며 우릴 뒤쫓는 성좌들을 공격했다. 우리가 달아날 기회라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드드드드드드! 
 
하지만 적의 추적은 빨랐다. 가장 먼저 일행을 쫓아온 것은 상공을 덮는 거대한 새의 그림자. ‘우레를 먹는 새’였다. 
 
쿠르르르르르르! 
 
내 기억이 맞다면 저 새의 진명은 ‘가루라’다. 
팔부신중의 하나이자, <베다>의 3주신인 비슈누가 타고 다니는 새. 
한순간 허공에서 궤적을 바꾼 녀석의 부리가, 내쪽을 향했다. 
 
[성좌,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자신의 몸을 던져 당신을 지킵니다!] 
 
오수가 달려든 것은 동시였다. 거대한 화신체로 화한 오수가 날아드는 가루라를 측면에서 덮쳤다. 
 
크르르렁! 
 
운 좋게도, 오수의 불꽃이 가루라의 깃털에 들러 붙었다. 줄기줄기 불꽃을 뿜어대는 오수는 마치 도망치라는 듯 우리를 향해 짖어댔다. 
 
컹컹! 컹! 깨갱! 
 
이미 다섯 명의 성좌가 오수에게 들러붙은 상황. 
녀석을 구하기엔 너무 늦었다. 
 
[조력자,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사망했습니다!] 
 
······빌어먹을.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전까지 근처에 있던 ‘파천신군’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졸지에 남은 인원은 나와 장하영, 그리고 한명오뿐. 
 
“미, 미안하네!” 
 
한명오가 돌발 행동을 저지른 것도 그때였다. 
앞서 나가던 한명오는 갑자기 자신의 한쪽 다리를 잘랐다. 
 
[등장인물 ‘한명오’가 성흔 ‘외발 준족 Lv.10’을 발동합니다!] 
 
······그랬지, 한명오에겐 저 망할 성흔이 있었지. 
 
두두두두두두! 
 
한명오의 한쪽 발이 타조라도 되는 것처럼 굉음을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래, 어차피 한명오가 잡히면 모든게 끝이니 도망이라도 잘 가는 게 낫다. 
그나저나 저 성흔, 얼마나 많이 썼으면 벌써 레벨이 10이야. 
 
“김독자. 이제 어떡······.” 
 
나는 장하영의 입을 막고 곧바로 주변의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주변의 지형지물에 은폐했습니다.] 
[‘풀숲’의 효과로 주변의 적이 당신을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르르르르······. 
 
창공을 배회하는 가루라를 보며, 나는 숨죽인 채 장하영에게 속삭였다. 
 
―지금 전력으로는 맞서 싸울 수 없어. 우린 어부지리를 노려야 돼. 시간을 끄는 게 중요하다고. 
―······시간만 끈다고 될까? 
―일단은. 
 
나도 믿는 구석 정도는 있다. 
애초에 이 멤버만 데리고 이길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어떻게든 시간만 더 끌면 된다. 
그 녀석만 온다면. 
 
[구원의 마왕! 어디에 있는가?] 
 
풀숲 앞쪽에서 진언이 울려 퍼졌다. 
 
[그대와는 악연이 참 길었지. 설마 ‘운명’에서 도망쳐 이런 곳에 살아 있을 줄이야······ 이 눈 먼 예언자도 미처 읽지 못한 것이 있었군.] 
 
겸손한 듯 하면서도 오만방자한 말투를 보아하니,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풀숲 위로 나타난 존재는 허름한 왕의를 걸친 장님, ‘오이디푸스 왕’이었다. 
녀석이 이 선발전에 참전한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마주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숨어봐도 소용 없다는 것,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눈 먼 예언자는 그대가 어디 있는지 이미 알고 있으니.] 
 
순간 장하영의 어깨가 움찔했다. 나는 안심하라는 듯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개소리니까 걱정하지 마. 놈의 능력으로는 내 미래를 읽을 수 없어. 
 
그러니 저건 명백한 함정이었다. 
우리의 기척을 감지하는 순간, 인근의 모든 성좌들이 달려들 셈이겠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아직 <올림포스>는 그대에게 열려 있으니.] 
 
[성좌, ‘구원의 마왕’이 개소리 말고 꺼지라고 말합니다.] 
 
[······재미있군 그래······.] 
 
오이디푸스 왕은 껄껄 웃었으나, 표정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계속 그렇게 나올 수 있을지 두고 보지.] 
 
주변의 성좌들이 작심한 듯 풀숲을 휩쓸기 시작했다. 범위 공격력을 가진 성흔들이 작렬했고, 이내 인근 풀숲은 온갖 폭연과 산성액, 그리고 튀어오른 불똥들로 가득해졌다. 산성액에 발등이 녹았고, 불똥이 손목과 목의 살점을 태웠다. 나는 장하영의 손목을 꽉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더.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 
 
폭격 같은 공습이 한바탕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다행히 녀석들은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폭음은 조금씩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소리를 들으며 녀석들의 거리를 어림했다. 
열 걸음, 스무 걸음, 서른 걸음······. 
그리고 한순간, 갑자기 모든 폭음들이 사라졌다. 
 
“뛰어.” 
 
장하영과 나는 풀숲을 박차고 달렸다. 
쫓아오는 성좌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아주 길고, 끔찍한 절규였다. 
먼 하늘에서, 거대한 검에 목이 꿰뚫린 새가 떨어지고 있었다. 
 
[조력자 ‘우레를 먹는 새’가 살해당했습니다!] 
 
······왔다. 
 
 
 
 
 
< Episode 49. 가장 잘하는 것 (3) > 끝

< Episode 49. 가장 잘하는 것 (4) >
 
 
 
 
 
“······뭐야?” 
 
깜짝 놀란 장하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래서 시간을 끌라고 한 거야.” 
 
[참가자 ‘유중혁’이 조력자 ‘우레를 먹는 새’를 살해하였습니다!] 
[공단 ‘유중혁―김독자’ 팀이 승점 1점을 획득하였습니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유중혁과, 당황하는 성좌들의 모습이 보였다. 
 
[성좌, ‘자신의 눈을 찌른 자’가 깜짝 놀라 고성을 지릅니다!] 
[성좌, ‘바나라의 장군’이 화신 ‘유중혁’을 향해 적의를 드러냅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유중혁’의 움직임에 경악하여 눈을 비빕니다.] 
 
몰아치는 공격에도 유중혁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이곳의 모든 지형지물을 파악하고 있는 듯 자유로운 움직임. 
격노한 ‘오이디푸스 왕’이 지팡이 끝에서 섬광포를 내갈겼을 때, 이미 유중혁의 신형은 그곳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로 간 거지?] 
[찾아! 이 근처에 있다!] 
 
성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유중혁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장하영과 함께 커다란 나무 뒤쪽에 몸을 숨긴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유중혁의 특성 중 하나는 바로 ‘프로게이머’. 
녀석은 모든 종류의 게임에서 압도적인 어드밴티지와 적응력을 얻는다. 
 
게임은 아직 초반이고 능력치도 제한되어 있는 상황. 
성좌들이 게임에 익숙해지기 전인 지금, 이 ‘첫판’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에게 유리한 무대였다. 
상대가 그 어떤 성좌라 해도, 일대일 상황이라면 지금의 유중혁을 당해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저기 있다!] 
 
수풀의 기척을 쫓아간 ‘바나라의 장군’이 입에서 칼날 바람을 토해냈다. 쐐애액,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풀숲이 일거에 누웠지만, 이번에도 유중혁은 그곳에 없었다. 
당황한 ‘바나라의 장군’이 물러서는 순간, 바닥의 흙더미 사이로 섬광 같은 빛살이 번뜩였다. 피하기엔 너무 늦은 일격이었다. 
 
[참가자 ‘유중혁’이 조력자 ‘바나라의 장군’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래, 둘 정도는 잡아줘야 유중혁이지. 
 
[공단 ‘유중혁―김독자’ 팀이 승점 2점을 획득하였습니다.] 
[참가자 ‘유중혁’의 활약으로 전장에 혈향이 불기 시작합니다!] 
 
곁에 있던 장하영이 유중혁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저거 뭐야? 괴물이야?” 
“비슷하지. 한국 최고의 프로게이머였으니까.” 
 
어디까지나 ‘멸살법’의 설정상 그렇다는 얘기지만. 
먼 곳에서 ‘바나라의 장군’의 화신체가 반쪽으로 갈라지며 소멸하는 것이 보였다. 게임의 룰을 적용 받고 있으니 정말 화신체가 죽지는 않겠지만, 정신적 타격이 상당할 것이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즐거워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화신 ‘유중혁’에게 20,000 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바나라의 장군’의 진명은 인도 신화의 원숭이 영웅인 ‘하누만’이다. 
같은 원숭이 출신이라는 특징 때문인지, 두 신격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었지. 아무래도 사실이었나 보다. 
 
[제기랄, 쫓아!] 
 
두 명을 학살한 유중혁은, 이번에는 암석 지대의 협곡 아래로 숨어들었다. 
마침 저쪽에서도 한 명의 원군이 더 나타났다. 
 
[성좌, ‘인류의 시조’가 건방진 후손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고간만 간신히 가린, 원시인에 가까운 모습을 한 성좌. 
‘인류의 시조’, 마누. 
저 녀석도 멜레돈 공단 편이었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도와야겠는데.” 
 
<베다>의 마누는 설화급 성좌다. 설화급 중에서 격이 낮다고 해도, 이대로라면 유중혁에게는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이미 유중혁은 두 명의 성좌를 격살하느라 이동기와 마력을 상당히 소모한 상황. 아무리 녀석의 특성이 프로게이머라고 해도 지금부터는 무리······. 
 
[참가자 ‘유중혁’이 ‘센티넬 골렘의 가호’를 발동합니다!] 
 
암벽 지대의 고지 위에 자리를 잡은 유중혁이, 거대한 활을 겨누고 있었다. 
 
[성유물, ‘로빈후드의 강궁’이 사용자의 명중률을 극대화시킵니다!] 
 
저 자식, 저런 건 또 언제 구한 거야? 
저건 15번째 시나리오 지역인 ‘루그라티아’에 가야 구할 수 있는 건데······. 
 
푸슛! 푸슛! 푸슈슛! 
 
쏜살같이 날아든 무형의 화살이 오이디푸스 왕의 몸에 박혔다. 
 
[컥······!] 
 
당연한 얘기지만 유중혁의 장점은 ‘검술’만이 아니었다. 
녀석은 지난 회차에서 온갖 종류의 병장기를 마스터 클래스의 숙련도로 익혔다. 
 
[네놈! 근접 딜러가 아니었······?] 
 
심지어 지금 유중혁의 포지션은 ‘올라운더’. 
 
[참가자 ‘유중혁’이 포지션 효과의 보정을 받습니다.] 
 
이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유중혁은 어떤 종류의 무기를 써도 패널티를 받지 않는다. 
 
[죽여 버리겠다! 이깟 걸로, 이깟 걸로······!] 
 
몸 곳곳에 구멍이 뚫린 오이디푸스 왕이 괴성을 질렀다. 
 
“우리도 도우러 가자!” 
“잠깐 기다려 봐.” 
 
지금 상황에서 어설픈 움직임으로 유중혁을 돕는 것은 오히려 녀석의 작전을 방해할 뿐이다. 
곧바로 [전지적 독자 시점]을 가동하자, 유중혁의 작전이 영화의 예고편처럼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내 허탈한 웃음에 장하영이 물었다. 
 
“······왜 그래?” 
“저 자식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더 무서운 놈이라서.” 
 
유중혁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일분 일초도 허비하지 않았다. 
그 증거가 지금 녀석의 몸에 깃든 ‘센티넬 골렘의 가호’였다. 
 
[‘센티넬 골렘의 가호’가 누적되기 시작합니다!] 
 
협곡 외곽에서 서식하는 ‘센티넬 골렘’은 처치할 시 ‘기절’ 효과를 주는 버프를 얻을 수 있다. 
단, 이 버프에는 조건이 하나 있는데. 
 
푸슛! 푸슈슛! 
 
바로 스무 번의 공격을 성공시켜야만, 기절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푸슈슈슈슛! 
 
이제 유중혁과 오이디푸스 왕의 거리는 십 미터 남짓. 
 
[이깟 것, 이깟 거······!] 
 
단숨에 도약한 오이디푸스 왕이 유중혁을 향해 섬광포를 쏘려는 순간. 
 
쩌저저적. 
 
발목부터 굳어진 오이디푸스 왕의 몸이, 석상이 쓰러지듯 앞으로 무너졌다. 
 
[조력자 ‘자신의 눈을 찌른 자’가 기절 상태에 빠졌습니다.] 
 
기절의 지속 시간은 3초. 
그리고 3초는, 유중혁에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참가자 ‘유중혁’이 조력자 ‘자신의 눈을 찌른 자’를 살해하였습니다!] 
[참가자 ‘유중혁’의 이름이 전장에 널리 울려 퍼집니다!] 
[공단 ‘유중혁―김독자’ 팀이 승점 3점을 획득하였습니다.] 
 
이걸로 셋······ 솔직히 감탄 밖에 안 나온다. 
부릅 뜬 눈으로 죽어가는 ‘오이디푸스 왕’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정말로, 저 녀석이 ‘별자리의 연회’에서 나를 협박했던 설화급 성좌가 맞는지 믿겨지지 않았다. 
 
[건방진 놈!] 
 
그러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유중혁이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흥분한 ‘인류의 시조’가 달려들었다. 
유중혁은 이제 체력도 마력도 아슬아슬해보였다. 
 
쐐애애애액! 
 
인류의 시조가 든 [원시의 창]이 유중혁의 빈틈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겉보기에야 뗀석기 처럼 생긴 물건이지만, 그 위력 하나는 어마어마하다. 
 
콰아아앙! 
 
하지만 유중혁도 만만치 않았다. 녀석은 유연한 동작으로 허리를 비틀며, 거의 동시에 패도를 내질렀다. 
 
꽈가가가각! 
 
창대와 패도가 충돌하며 날카로운 파찰음이 났다. 초월좌들만이 가지는 특유의 샛노란 아우라가, 유중혁의 [흑천마도]를 휘감았다. 그에 맞서 ‘인류의 시조’ 마누가 휘두른 창극에도 새파란 ‘격’이 휘감겼다. 
 
[무공이라! 발타(拔陀)가 벌레들에게 남긴 재주였지. 아직도 쓸모가 있는 모양이구나.] 
 
전력의 십 퍼센트만을 쓸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일까. 
인류의 시조 마누는 아직 자신이 제어할 수 있는 힘의 크기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는 듯했다. 순식간에 수십 합의 교환이 이루어졌고, 마누가 즐겁다는 듯 껄껄 웃었다. 
 
[제법이구나 인간아. 무수한 ‘초월좌’들을 보아왔지만, 네놈만큼의 실력자는 보지 못했다.] 
 
“내 스승을 보지 못한 모양이군.” 
 
고오오오오! 
 
마치 무공을 연상시키는 힘이 마누의 창극에서 뻗어 나왔다. 
마누는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재능에 통달한 성좌. 
본래라면 지금의 유중혁은 마누에게 이길 수 없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힘의 균형이 맞춰지고 있는 것은, 마누가 오랫동안 이런 긴 전투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재미있구나! 성좌가 된 이후 열 합 이상을 겨뤄본 적은 손에 꼽았는데!] 
 
강제적으로 평형을 이룬 힘의 저울추가, 이 대결을 지속시키고 있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튀어나가려는 장하영을 굳게 말렸다. 
 
“이대로면 저 자식 죽는다고!” 
 
나도 튀어나가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당장이라도 [전인화]를 쓰고 달려 나가, 마누의 목을 쳐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참아야 한다. 
내 생각대로만 된다면, 곧 유중혁은 ‘계기’를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건 오직 시간. 
시간뿐이다. 
 
“장하영. ‘벽’으로 메시지 보내.” 
“뭐? 누구한테?” 
“인류의 시조.” 
“응? ······지금 유중혁이랑 싸우고 있는 저 놈? 아······!” 
 
영리한 장하영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깨달았다. 
‘정체불명의 벽’을 켠 장하영은 곧바로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누의 당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냐! 이 메시지들은······!] 
 
마누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을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 ‘15세 여중생’이 보낸 무수한 메시지들이, 녀석의 시야에 팝업 창처럼 마구 떠오르고 있겠지. 
 
[가소로운 전술을!] 
 
마누의 움직임이 머뭇거리는 사이, 유중혁의 몸에서 새하얀 빛살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저 영롱한 빛을 본 적이 있었다. 
정희원이 ‘웅크린 자’에서 ‘멸악의 심판자’로 진화했을 때. 
그리고 이현성이 ‘태산 부수기’를 터득했을 때······. 
 
[등장인물 ‘유중혁’이 특성 진화의 계기를 맞이합니다!] 
[등장인물 ‘유중혁’의 특성 ‘프로게이머’가 진화합니다!] 
 
특성 진화. 
마침내, 유중혁의 두 번째 특성이 본격적인 개화를 맞이한 것이다. 
대경한 마누가 섬전 같은 속도로 창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눈부신 빛이 유중혁의 몸에서 터져 나왔다. 
그 황홀한 광경을 보며, 나는 ‘멸살법’의 후반부에서 이지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부가 가진 특성이야 셀 수 없이 많지. 흠······ 물론 최고는 <회귀자>겠지. 그 외에는 <만병의 달인>도 괜찮고, <신과 악마의 대적자>도 훌륭하고······ 응? 그 중에서 제일 부러운 특성? 아하하, 그야 당연히······.”」 
 
마누가 휘두른 필살의 일격은, 허망하게 유중혁을 스쳐갔다. 
 
「“<유희의 지배자>. 그거지.”」 
 
천천히 눈을 뜬 유중혁은, 내가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었던 바로 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순간, 유중혁은 마치 이 ‘게임’의 모든 것을 이해한 듯한 표정이었다.」 
 
아마 지금 유중혁의 눈에는, 마누의 모든 공격이 0과 1의 조합으로 보일 것이다. 
 
전설급 특성 ‘유희의 지배자’. 
 
이 무대가 ‘게임’인 한, 유중혁은 이 세계의 그 어떤 성좌보다도 더 신(神)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 Episode 49. 가장 잘하는 것 (4) > 끝

< Episode 49. 가장 잘하는 것 (5) >
 
 
 
 
 
유중혁이 특성을 개화한 후, 경기는 물 흐르듯 흘러갔다. 
 
[참가자 ‘유중혁’이 조력자 ‘인류의 시조’를 살해하였습니다!] 
[참가자 ‘유중혁’이 ‘살아있는 전설’ 타이틀을 획득하였습니다!] 
 
아직 게임에 적응하지 못한 성좌들은 유중혁의 능수능란한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다. 게임 아이템의 활용도, 지형지물이나 부가 버프에 대한 이해도에 있어서도 성좌들은 유중혁을 쫓을 수 없었다. 
 
[참가자 ‘유중혁’이 신화의 전장에 새로운 신화를 쓰기 시작합니다!] 
[참가자 ‘유중혁’의 신화가 전장의 랭킹에 이름을 올립니다!] 
 
승패는 순식간에 정해졌다. 
 
[첫 번째 게임의 제한 시간이 다했습니다!] 
[제한 시간 동안 얻은 승점을 토대로 승자 팀이 정해집니다!] 
[1차전의 승자 팀은 ‘유중혁―김독자 공단’입니다!] 
 
우리가 얻은 승점은 총 6점. 
심지어 도중 상대 팀에게서 빼앗은 ‘문장’ 덕에 우리가 가진 문장도 총 두 줄이 되었다. 
 
『참혹한 마경(魔境)에 설화의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으니』 
 
우리가 얻은 문장을 몇 번이고 들여다 보던 장하영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진짜 우리가 이긴 거야?” 
“그래.” 
 
나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아무리 상황이 따라줬다 해도, 저 강력한 성좌들을 상대로 우리가 첫 승을 따내다니······ 마냥 ‘작전대로 됐다’고 의기양양해 할 수준이 아니었다.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당신을 흥미롭게 바라봅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유중혁―김독자’ 공단을 응원합니다!] 
[1차전의 보상으로 각각 100,000 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멀리서 검을 휘휘 내저으며 다가오는 유중혁이 보였다. 
괜스레 멋을 부리는 놈의 모습에 한마디 해주려는데, 유중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메시지는, 이 녀석이 멋대로 보낸 것이다.” 
 
뭔 소리냐고 채 묻기도 전에, 유중혁의 품속에서 뿅 하고 비유가 튀어나왔다. 
 
[바아아앗!] 
 
한결 기운을 차린 듯 보이는 비유는, 한 손으로 우리엘 인형의 멱살을 쥔 채 장난감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긴 아무 짓도 안했다고 항변합니다!] 
 
인형을 허공으로 던져버린 비유가 내 품으로 쏙 들어왔다. 나는 그런 비유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는, 인형을 낚아채는 유중혁을 향해 물었다. 
 
“대체 어디까지 갔었던 거냐?” 
“멜레돈 근처까지 갔다.” 
“왜 거기까지······?” 
“구해야 할 아이템이 있었다.” 
“아이템? 뭔데?” 
“구했으니 알 것 없다.” 
 
나를 노려보는 유중혁의 표정은 어쩐지 못마땅해 보였다. 
 
“그리고······ 어차피 선발전을 시작할 거라면 예상치 못한 위치에서 시작하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 판단했다.” 
“좋은 판단이네.” 
 
1차전에서는 선발전 참가 직전의 위치가 어디였느냐에 따라 소환 장소도 달라진다. 우리와 같은 곳에서 출발하지 않은 유중혁은 전혀 다른 루트로 아이템을 파밍할 수 있었고, 덕분에 적의 급소를 노리는 것도 훨씬 수월했으리라. 
 
[하하하, 놀라운 일이 벌어졌네요. 하지만 게임은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죠!] 
 
허공에서 비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이겼기 때문인지 녀석의 표정은 어딘가 들떠 보였다. 
 
[5분 뒤, 2차전이 시작됩니다!] 
 
잠깐의 승리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 게임은 총 3차전까지 있으니까. 
나는 지친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방금 전의 전투로 죽었던 ‘사명대사’와 ‘오수’의 화신체는 다시 부활한 상태였다. 
 
“이제 한 번만 더 이기면 됩니다. 먼저 2승을 챙기면 게임은 끝이니까요. 그러니 모두 조금만 힘내서······. 
 
딴에는 힘을 내라고 꺼낸 얘기였지만 일행들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사명대사님, 왜 그런 모습을 하고 계십니까?” 
 
목탁으로 변한 사명대사가 딸랑딸랑 방울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게······ 개연성을 너무 많이 써버린 모양이네.] 
 
이 게임에서는 죽는다고 해서 화신체가 소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패배할 때마다 가진 자원의 일부가 소모되는 것은 변함이 없다. 
 
“오수?” 
 
끼잉! 
 
사명대사와 마찬가지로 지난 게임에서 죽은 오수는, 거의 기니피그만큼 작아져 있었다. 아무래도 지난 게임에서 개연성과 기력을 지나치게 소모한 듯했다. 같은 급에 머무르는 성좌들이라도, 축적된 설화의 양과 질에 따라 격의 차이는 심대하다. 
이어서 입을 연 것은 한명오였다. 
 
“나, 나도 더 이상은 무리일세.” 
 
한명오는 1경기가 끝날 때까지 무사히 잘 도망다녔다. 
무슨 도마뱀이라도 되는 것인지 잘라냈던 다리도 천천히 자라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얼굴은 그 짧은 사이 10년 쯤 늙어 있었다. 
 
“괜찮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부장님.” 
 
아무리 ‘힘’이 억제되어 있다고 한들, 상대는 성좌들이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성좌들의 ‘격’을 마주하고 있었으니, 보통의 화신이라면 정신이 붕괴하고도 남을 법한 일이었다. 
그나마 파천신군이 무사하다는 것이 약간의 위안이었다. 
 
왕왕! 
 
파천신군은 지난 경기의 중반부터 유중혁을 도와 성좌 하나를 사냥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나, 유중혁, 장하영, 그리고 파천신군까지. 
 
이제 우리 팀은 이 넷 뿐이다. 
당연하게도, 이 넷만으로는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추가 전력은 내가 보급해보겠다.” 
“아는 성좌라도 있냐?” 
“제때에 올 수 있을지는 모른다. 일단 목록에는 올려 놓지.” 
 
누구를 부르려는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 시기의 유중혁에게 그런 인맥이 있었던가? 
유중혁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2차전에서는 작전을 바꿔야 한다. 그리고 포지션도.” 
“왜? 지난 판처럼 하면 되지 않아?” 
 
장하영의 물음에 유중혁은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나를 보았다. 
결국 대신 대답한 것은 나였다. 
 
“유중혁의 특성은 강력하지만 무적은 아니야.” 
“······거의 무적에 가까워 보이던데?” 
“아깐 성좌들도 이 게임에 대해 잘 몰랐으니까.” 
 
2차전부터는 능력치 제한의 페널티가 조금씩 풀릴 것이다. 
우릴 얕보고 있던 성좌들은 이 게임과 관련된 특성이나 스킬들을 수집하기 시작할 것이고, 막대한 코인을 사용해 벌어진 격차를 좁힐 것이다. 
유중혁이 아무리 ‘유희의 지배자’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혼자서는 한계가 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행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한테 생각이 있어.” 
 
 
* 
 
 
“이번 판은 [베르칸 공단] 쪽과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지금 파피루스 쪼가리 놈들과 힘을 합치잔 얘긴가?] 
 
“찬물 더운물 가리실 때가 아닙니다.” 
 
코뿔소를 닮은 멜레돈 공작의 얼굴에서 깊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고작 단 한 명의 화신에게 이 전장의 모든 성좌들이 유린당했다. 
방심했다가 뒤통수를 맞고, 발밑에서 튀어나온 칼을 맞고. 
심지어는 일대일로 싸웠으나 패배한 성좌도 있었다. 
 
“이번에도 놈들에게 승점을 내줘서는 안 됩니다. 알고들 계시겠지요.” 
 
[걱정 마라. 지난 판에는 방심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류의 시조’ 마누가 이를 갈며 원시의 창을 치켜들었다. 
 
[이 게임에 대해서는 이제 충분히 학습했다.] 
 
실제로 허공에서는 아까부터 불이나게 메시지가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성좌, ‘인류의 시조’가 ‘특급 게임 재능’ 스킬을 구매했습니다!] 
[성좌, ‘우레를 먹는 새’가 ‘새대가리도 일주일이면 게임 마스터’ 아이템을 구매했습니다!] 
 
갑작스런 구매 대란에 입이 찢어지는 것은 도깨비들이었다. 
 
[어이쿠, 성좌님들! 이렇게까지······.] 
 
성좌들은 그런 도깨비들의 모습이 아니꼬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작 화신에게 짓눌린 그들의 자존심이었다. 
 
[가자.] 
 
게임 시작과 동시에 성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특성과 아이템들의 영향력은 컸다. 그들은 이제 지형지물을 이용해 완벽한 은·엄폐 동작을 반복했고, 자신이 가진 성흔이나 스킬들이 이 게임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숙지했다. 
적팀의 올라운더는 저 말도 안되는 화신 하나뿐. 
놈만 죽이면, 게임은 끝난다. 
 
[저기다.] 
 
‘우레를 먹는 새’가 거대한 활공음을 내며 강풍을 일으켰다. 그 바람이 넘긴 풀숲 속에서, 패도의 소유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중혁이었다. 
 
“지금입니다!” 
 
멜레돈 공작의 신호와 동시에 네 명의 성좌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아까와는 다를 것이다!] 
 
인류의 시조가 가장 먼저 창을 휘둘렀고, 그 뒤를 이은 것은 오이디푸스 왕의 섬광포였다. 
 
치이이이익! 
 
미처 공격을 피하지 못한 유중혁의 팔뚝에서 피가 흘렀다. 
바나라의 장군의 그림자가 분화하며 유중혁의 빈틈을 노렸다. 날카롭게 뻗어진 봉이 유중혁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콰지직! 
 
그저 스쳤을 뿐인데도 살점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이제 성좌들이 낼 수 있는 전력의 한계는 삼십 퍼센트. 
유중혁이 받는 피해는 아까와는 차원이 달랐다. 
 
콰앙! 콰아아앙! 
 
하지만 성좌들의 맹공에도, 유중혁은 잘 버텼다. 
 
[······뭐야, 왜 안 죽지?] 
 
이상함을 느낀 멜레돈 공작이 스킬을 사용해 유중혁의 체력 현황을 어림했다. 
놀랍게도, 유중혁의 체력은 아직도 70퍼센트 이상 남아있었다. 
 
“이, 이 녀석 체력이 좀 이상합니다. 설마······!” 
 
뒤쪽에서 성좌들의 비명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 
 
 
아마 적들은, 반드시 유중혁을 ‘올라운더’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파천신군!” 
 
내 신호와 동시에, 파천신군이 몸을 날렸다. 마치 공간을 가르는 빛의 창처럼, 파천신군은 허공에서 유중혁을 노리던 ‘우레를 먹는 새’의 몸통을 꿰뚫었다. 
 
꾸웨에에에―! 
 
큰 타격을 입은 새가 허공에서 날뛰자, 파천신군은 송곳니를 앞세운 채 새의 몸통을 집요하게 물어 뜯었다. 
 
커엉―! 
 
우리의 위치가 노출되자마자, 인근의 성좌들은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달려오는 성좌들의 숫자는 총 셋. 원거리 딜러인 장하영은 민첩성 페널티를 받기 때문에 근접전이 시작되면 승산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김독자, 10초만 벌어줘.” 
“알겠어.” 
 
장하영은 마보 자세를 취하더니 왼쪽 손은 전방으로, 그리고 오른쪽 주먹은 어깨 안쪽으로 당긴 채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장하영이 획득한 포인트를 사용해 특정 스킬의 봉인을 해제합니다.] 
[조력자 ‘장하영’이 궁극기를 준비합니다!] 
 
이 게임에서, 특정 위력 이상의 성흔과 스킬은 ‘궁극기’로 취급된다. 
그리고 궁극기는 오직 게임을 통해 얻은 포인트로만 해제할 수 있다. 
장하영은 방금 어시스트로 획득한 포인트를 사용한 것이다. 
 
[조력자 ‘장하영’이 파천붕권(破天崩拳) Lv.10을 발동합니다!] 
 
투콰아아아아앙! 
 
마치 대포가 터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지며, 장하영의 주먹에서 공간을 찢어 발기는 거대한 권풍이 쏟아졌다. 오이디푸스 왕의 섬광포조차 짓눌러버린 그 권풍은, 달려오던 두 명의 성좌들을 그대로 날려버렸다. 
 
파천붕권. 
 
‘멸살법’에서 본 적은 있었다. 
오직 검의 길만 걷던 파천검성이 심심풀이로 만들어 봤다는 무공. 
······심심풀이가 이 정도면, 진신전력은 대체 어느 정도라는 건지 모르겠다. 
 
[조력자 ‘장하영’이 조력자 ‘우레를 먹는 새’를 살해하였습니다!] 
[조력자 ‘장하영’이 조력자 ‘바나라의 장군’을 무력화 시켰습니다!] 
 
성좌 하나만 잘라도 성공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 명의 성좌가 죽고, 한 명의 성좌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나도 열심히 수련했다고 했지?” 
 
웃는 장하영은 명백히 무리하고 있었다. 
아무리 장하영이라고 해도, 그 짧은 사이 이만한 수준의 성장을 거듭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 ‘정체불명의 벽’과 거래를 한 상태겠지. 
 
[죽여라!] 
 
격분한 성좌들이 무시무시한 격을 흩뿌리며 달려왔다. 
장하영은 오히려 녀석들을 향해 달려갔다. 
 
“김독자! 가! 작전대로 해!” 
 
여기서 장하영을 업고 가면, 시간이 늦춰진다. 
그리고 이번에 ‘문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나였다. 
협곡 쪽으로 달음박질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뒤쪽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력자, ‘파천신군’이 살해당했습니다!] 
[조력자, ‘장하영’이 살해당했습니다!] 
 
······제길. 
 
다행히 유중혁은 아직까지 무사한 모양이었다. 
탱커를 하든 올라운더를 하든 유중혁은 유중혁이니까. 
그렇게 협곡의 아래 쪽까지 내려갔을 무렵, 슬슬 주변으로 어두운 안개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계산대로였다. ‘안개 발생’이 시작되었다면, 곧 그 ‘괴물’이 이곳에 나타날 것이다. 
암석 지대 위쪽에서 성좌들의 기척이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재빠르구나, 구원의 마왕.] 
 
예상 밖의 움직임이었다. 
멜레돈 쪽은 유중혁에게 발목이 잡혀 있을 텐데. 어떻게 벌써? 
협곡의 바위 위로 솟아오른 그림자를 본 순간, 나는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깨달았다. 
 
거대한 미라의 그림자. 
그리고 뾰족한 전갈 꼬리를 가진 여신. 
 
지난 경기에서는 보지 못했던 [베르칸] 진영의 성좌들이었다. 
‘최후의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전갈의 여신’ 셸케트······. 
놀랍게도, 그 사이로 [멜레돈] 진영의 오이디푸스 왕도 보였다. 
나는 쓰게 웃었다. 
 
“······그렇군. 힘을 합치기로 한 모양이지?” 
 
셸케트의 꼬리가 크게 부풀어 오르며, 나를 향해 독침을 쏘아댔다. 
 
푸슈슈슛! 
 
공격을 피하려는 순간 내 발목을 휘감은 것은 ‘최후의 파라오’가 흩뿌린 낡은 붕대들이었다. 
‘근접 딜러’들은 ‘원거리 딜러’의 연사에 취약하다. 거기다 움직임까지 제한당했으니, 내가 이대로 죽을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오이디푸스 왕이 마무리를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콰아아아아앙! 
 
강력한 빛의 폭풍이 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폭음 속에서 언뜻 성좌들의 웃음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분명, 이 일격으로 내가 죽었다고 확신하는 웃음이었다. 
 
[지난 경기에서 획득한 승점을 포인트로 전환합니다!] 
[포인트로 특정 스킬의 봉인을 해제하였습니다!] 
 
나는 뿌연 먼지 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희뿌연 시야 사이로, 웃음기가 사라진 성좌들의 표정이 보였다. 
 
[성좌, ‘자신의 눈을 찌른 자’가 경악합니다!] 
[성좌, ‘전갈의 여신’이 눈을 부릅뜹니다!] 
 
나를 감싼 새하얀 털옷은, 강력한 협공에도 흠집 하나 없이 나를 지키고 있었다. 
 
[전용 스킬, ‘책갈피’가 발동중입니다!] 
 
‘3번 책갈피’를 쓰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꽤 오랫동안, 이 책갈피를 쓰는 것을 망설여왔다. 
이걸 쓰는 게 나의 도깨비에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해당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아 스킬 능력치가 강화됩니다!] 
[전용 스킬, ‘야수왕의 감수성 Lv.10(+1)’이 발동 중입니다!] 
 
품속에서 작게 웅크린 비유의 온기가 느껴졌다. 
3번 책갈피, 비스트마스터 신유승. 
나는 새하얀 털에 휘감긴 채, 협곡 위의 성좌들을 바라보았다. 
 
[참가자 ‘구원의 마왕’이 포지션 효과의 보정을 받습니다.] 
 
내겐 ‘유중혁’만큼의 공격력은 없다. 
그렇다고, ‘장하영’처럼 뭔가를 빠르게 배우지도 못한다. 
하지만 나 역시, 그들보다 잘 하는 것은 있다. 
 
“미안하지만, 이번 게임의 ‘올라운더’는 나야.” 
 
‘마왕 선발전’은 2차전에서 끝날 것이다. 
 
 
 
 
 
< Episode 49. 가장 잘하는 것 (5) > 끝

< Episode 50. 독자의 설화 (1) >





Episode 50. 독자의 설화


“4번 책갈피.”

[전용 스킬, ‘바람의 길 Lv.11(+1)’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날아드는 ‘전갈의 여신’의 독침들을 피한다.
화신체의 힘이 억제되지 않았다면 한 발만 맞아도 일대 전체를 기화시킬 만한 독. 하지만 [바람의 길]이 있는 한은 괜찮았다.

치이이이익!

녹아내린 협곡을 밟고 [백청강기]를 내지른다. 그 검극을 받아내는 것은 ‘최후의 파라오’의 두터운 붕대들.

터엉!

붕대와 칼날이 부딪치자 북소리 같은 것이 나며 몸이 튕겨져 나왔다.
오이디푸스 왕의 섬광포가 빈틈을 놓치지 않고 날아들었다.

[전용 스킬, ‘야수왕의 감수성 Lv.10(+1)’을 발동 중입니다!]

치이이이익!

보통이라면, 이것은 불가능한 싸움이었다.
본래 [책갈피]는 한 번에 하나만 쓸 수 있었으니까.

[설화 ‘심연을 들여다본 자’의 효과로 당신의 모든 스킬이 향상되었습니다!]
[현재 2개의 책갈피를 동시에 사용 중입니다.]
[책갈피의 지속 시간이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하지만 지난 번에 내 특성창을 확인한 이후, 내 스킬들은 전체적으로 더 향상되었다.

“5번 책갈피!”

쐐애애애액!

[전용 스킬, ‘전인화 Lv.12(+2)’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소형화]를 통해 순간적으로 작아진 나는 한 점의 빛이 되어 ‘최후의 파라오’의 몸통을 관통했다.

그아아아아아아!

치명상을 입은 ‘최후의 파라오’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내가 켜켜이 쌓아온 역사로 맞서 싸우고 있었다.

내가 읽어온 것.
내가 살아온 시간들.

오직 그것만이 내가 가진 것의 전부였다.
얼마나 더 섬광이 번뜩이고, 피를 흘렸을까.
오이디푸스 왕이 살짝 지친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대단하구나, 구원의 마왕이여.]

“······.”

[솔직히 이 정도까지 강해졌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패배감은 엿보이지 않았다.
협곡 위쪽으로 그림자가 하나둘 몰려들었다.
[멜레돈]과 [베르칸] 소속의 다른 성좌들이었다.

[베르칸 공작]
[나일강의 괴조]
[지고한 빛의 신]
······.

나타난 성좌들의 숫자는 어림해도 열에 가까웠다.
높은 협곡의 언덕에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성좌들.
밀려오는 성좌들의 격에 숨이 막혔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거기서 구경만 할 거냐?”

오히려 나는, 내 안에 잠들어 있던 ‘격’을 더욱 끌어 올렸다.
나 역시 성좌다.
‘격’에서는, 녀석들에게 하나도 꿀릴 것이 없다.

쿠구구구구!

내가 발산하는 ‘설화급’ 격에 짓눌린 몇몇 성좌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흥미로운 아이로군.]

일순, 협곡 위쪽에 있던 몇몇 성좌들이 허리를 굽히며 물러났다.
누군가가 성좌들을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긴 황금빛 머리카락이 부서졌고, 네 개의 팔이 아름다운 무지개를 그려냈다. 이마에 달린 그의 세 번째 눈은 마치 천공에서 지상을 오시하는 태양처럼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트라가 자신의 축일을 내리려 했다기에, 어떤 녀석일지 궁금했건만.]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듯한 외양이 그의 수식언을 대변하고 있었다.
‘지고한 빛의 신’.
심지어 나는 그의 진명도 알고 있었다.

“수르야.”

츠츠츠츠츳!

진명을 언급하자 눈부시게 튀는 스파크.
이름에 담긴 격을 방증하는 광경이었다.

[아이야, 나의 이름을 아느냐?]

“압니다.”

성운 <베다>에는 여덟 명의 위대한 <로카팔라>들이 있다.
동서남북을 포함한 8방위의 신.

“남서(南西)의 수르야.”

수르야는, 그런 여덟 <로카팔라>들 중 하나였다.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눈살을 찌푸립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지고한 빛의 신’을 비난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지고한 빛의 신’의 격에 맞지 않는 행동을 지적합니다!]

올림포스로 치자면 12신에 준하는 강력한 존재.
그 존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네가 이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겠구나.]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천 년의 격에, 나는 뒷걸음질을 치고 싶은 욕망을 꾹 눌렀다.
그는 내가 대적할만한 성좌가 아니었다.
<로카팔라> 수르야는 인간 출신으로 성좌가 된 오이디푸스 왕이나 클레오파트라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다.

[<베다>로 오너라. 이대로라면 설령 이 게임에서 승리하더라도, 너는 죽게 된다.]

“싫습니다.”

[너는 ‘거대 설화’ 이후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몰라. 홀로 그 힘을 안고 버티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것은 고작 하나의 별이 감당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안다.
아마 수르야가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세상과 다를 것이다.
단 하나의 ‘거대 설화’를 얻는 것만으로, 성좌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의 차원은 완전히 달라진다.

“아뇨,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난 혼자가 아니니까.”

[새로운 설화의 가능성이 발아하고 있습니다!]

내 말에 반응하듯, ‘73번째 마계’가 준동하고 있었다.
수르야가 그 진동을 함께 느끼며 말했다.

[혼자가 아니다······ 재미있구나. 지금 네게 누가 있단 말이냐?]

“인연법(因緣法)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정통하실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우습군요.”

쿠구구구구구!

수르야의 화신체에서 강력한 격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의 성좌들조차 하얗게 질릴 정도의 격. 하지만 아무리 ‘대신격’이라고 해도, 아무런 대가 없이 이 게임에서 모든 힘을 행사할 수는 없다.

츠츠츠츠츳!

실시간으로 터져 나오는 스파크가 눈부시게 전방을 물들였다.
이번 게임에서 [멜레돈]은 승점 2점을 획득했다.
2점의 포인트라면 수르야가 가진 많은 성흔들 중 하나 정도는 해방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내가 움직이자, 성좌들이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츠츠츠츠츠츳!

[전인화]의 힘이 깃든 주먹이 성좌들의 안면에 작렬했다. [어린 골드 드래곤의 망가진 심장]이 펌프질을 반복하며 막대한 마력을 생성해냈다.

쩌저저저저적!

나는 망설이지 않고 힘을 해방했다.
좀 더, 좀 더.
한계의 한계까지, 마력을 이끌어내야 한다.

콰앙! 콰앙! 콰아아앙!

[전인화]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성좌들이 피떡이 되어 나가 떨어졌다.
성좌들조차 능멸하는 초월좌의 힘.
백청의 전격이, 낙뢰처럼 성좌들의 화신체를 태워버리고 있었다.

그아아아아아악!

[참가자 ‘구원의 마왕’이 조력자 ‘전갈의 여신’을 살해하였습니다!]
[참가자 ‘구원의 마왕’이 조력자 ‘최후의 파라오’를 살해하였습니다!]

망가진 골드 드래곤의 심장으로는 마력을 감당할 수 없었는지, 전신의 기운이 급격하게 쇠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움직였다. 달려드는 ‘베르칸 공작’에게 한 방을 먹이고, 곧바로 등을 돌려 ‘나일강의 괴조’에게 전인화의 일격을 날렸다.

[당신은 지나치게 해당 인물에 이입하였습니다!]
[지나친 책갈피의 사용은 당신의 영혼에 영구적 상해를 남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가오는 나를 보면서도 ‘지고한 빛의 신’은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너를 보아왔다. 너는 언제나 ‘다른 존재’의 힘을 빌려 쓰지.]

[야수왕의 감수성]으로 몸을 감싸고, [전인화]로 일격을 준비한다.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너는 단 한 번도 ‘너 자신의 힘’으로 싸운 적이 없다. 그런 네가, 감히 스스로의 ‘설화’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콰아아아아앙!

[훔쳐 배운 역사는, 훔쳐 배운 역사일 뿐이다.]

마치 단단한 강철을 마주한 듯한 낭패감.
‘지고한 빛의 신’은, 네 개의 팔 중 단 하나만을 사용해 [전인화]의 일격을 막아냈다.

[그것은 네 것이 아니다.]

신의 세 번째 눈이 태양처럼 환하게 빛났다.
그 순간, 나는 수르야가 무슨 성흔을 해제한 것인지 깨달았다.

[등장성좌, ‘지고한 빛의 신’이 성흔 ‘제3의 눈’을 발동합니다!]

츠츠츠츠츠츠츠!

시야가 비틀리며, 일순 주변의 빛이 모두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공간의 끝자락이 우그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네 설화에, ‘너’는 없다.]

이미 주변은 수르야의 공간이었다.

[너는, 혼자서 죽게 될 것이다.]

‘제3의 눈’이 닿는 일대의 시공간을 장악하는 힘.
바로 수르야의 ‘제3의 눈’이 가진 권능이었다.
수르야가 이렇게 빨리 힘을 사용할 줄은 몰랐기에 나는 당황했다.
어떻게 해야 여기서 빠져 나갈 수 있을까.
전인화로는 무리고, 바람의 길을 사용해도 가능성이 없다.

[설화, ‘제멋대로 곡해자’를 발동합니다!]

무슨 ‘설화’를 읽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은 적합하지 않다.
「이적에 맞서는 자」도 애매하고.
「재앙의 왕을 사냥한 자」도 마찬가지다.

이제 공간은 한 평 크기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설화, ‘제멋대로 곡해자’가 비명을 지릅니다.]

등이 따끔하며, 우적우적하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마치 누군가가 설화를 먹어치우는 듯한, 익숙한 소리.

「아 주 맛있 다」

서늘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자, 작은 입 같은 것이 내 등 뒤에 들러붙어 내 설화를 파먹고 있었다.

「김독 자는 멍청 이이다」

‘제4의 벽’이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도움은 못 될 망정 방해를 해?
갈기갈기 찢어진 ‘제멋대로 곡해자’는 이제 거의 쓸 수 없을 만큼 망가져 녀석의 위장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다급함조차 잊고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내 입에서 나온 것은 고함이 아니었다.

「‘제4의 벽’이 말했다. “쿠 와아 아아 앙!”」

쿠와아아아아아아!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온 소리가 주변의 공간에 그대로 부딪쳤다. 공간은 마치 생명체라도 되는 것처럼 부르르 떨었고, 우그러지던 지점들에 거대한 균열이 일었다.

[성흔, ‘제3의 눈’이 몸을 부르르 떱니다.]

쩌저저저저적!

순간,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깨달았다.
‘제3의 눈’은 인지를 조작해 시공간을 지배하는 정신계 능력.
그리고 내가 가진 ‘제4의 벽’은 정신 방벽에 관해서는 최강의 스킬이었다.

[성좌, ‘지고한 빛의 신’이 경악합니다!]

어둠은 유리가 부서지듯 일제히 무너졌다. 주변의 빛이 돌아오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이마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지고한 빛의 신’의 모습이었다.

[너는······ 너는 대체?]

경악한 진언이 울려퍼지는 동시에, 일순 주춤했던 성좌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감히······ 죽여라!]

마력은 바닥. [책갈피]를 다시 열 힘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게임이 시작된 지 벌써 20분이 흘렀으니까.

[협곡의 안개가 짙어집니다.]

그오오오오오오오······.

협곡의 어딘가에서 들려온 스산한 울음에, 성좌들의 움직임이 동시에 멎었다.

쿠오오오오오오!

긴장한 성좌들이 협곡 위쪽을 본 순간, 새카만 그림자가 이쪽을 향해 드리워졌다. 긴장이 빠진 나는 암벽을 짚은 채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저런 걸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오 킬로미터에 달하는 길이. 수십 미터가 넘는 둘레의 몸통이 협곡의 위쪽을 무너뜨리며 지상을 향해 낙하하고 있었다. 놀란 성좌들이 경고성을 발했으나, 덩치가 큰 성좌들은 피할 새도 없이 대괴수의 비늘 아래 깔려버렸다.

[조력자 ‘나일강의 괴조’가 ‘묵시록의 이무기’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성좌들을 벌레처럼 터뜨린 괴물이, 협곡 전체에 똬리를 튼 채 허공을 향해 울음을 토했다.

크오오오오오!

[묵시록의 이무기].

내가 기다려온 괴수의 이름이었다.

[망할! 모두 물러서지 마라!]

갑작스런 대참사에 성좌들은 우왕좌왕하며 제각기 가진 성흔들로 이무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저 ‘괴물’을 쓰러트리면 강력한 팀버프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쓰러 트릴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쿠와아아아앙!

‘멸살법’에 따르면, <하르마게돈>에 출현했던 [묵시록의 붉은 용]은 한 번의 꼬리짓으로 하늘에 있는 별들 중 삼분의 일을 날려버리는 무시무시한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악!]

물론 저 이무기는 모티프가 된 [묵시록의 붉은 용]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게임의 초반부에 저 괴물을 상대할 성좌는 존재하지 않는다.

[쿠어어어억!]

이무기의 이빨에 뜯긴 성좌들이 설화를 토하며 스러졌고, 꼬리에 휩쓸린 성좌들은 몸통이 터져 죽었다. 쉴 새 없이 터진 시스템 메시지만이 협곡의 참상을 알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일곱 명의 참가자와 조력자가 협곡에서 사망했다.
수르야를 비롯해 간신히 살아 남은 몇몇 성좌들은, 다른 성좌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협곡 바깥으로 몸을 빼는 중이었다.
수르야의 차가운 목소리가 협곡에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간악한 흉계를 꾸몄구나. 하지만 너도 성치는 못할 것이다.]

성좌들을 짓눌러 터뜨린 묵시록의 이무기가, 이제 노란 안광을 빛내며 내쪽을 보고 있었다. 마지막 벌레를 녹여 없애려는 듯, 녀석의 입가에서 붉은 구체가 뭉쳐졌다. 묵시록의 홍염. 지옥의 불길을 빌어 지상의 모든 것을 녹여버린다는 심판의 불꽃이었다.

쿠르르르르르!

작전은 괜찮았다.
[멜레돈]과 [베르칸]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고, 불리하던 게임의 판은 이제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평형을 이루었다.

······힘을 조금만 남겨 뒀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 죽음으로 인해, 여기서 우리는 문장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아쉽고, 허탈한 심정이었다.

세 번째 게임으로 간다면······ 우리에게 승산이 있을까.

서서히 눈을 감는 순간, 묵시록의 용이 토해낸 짙은 홍염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뜨거운 열파가 전신을 감싸 안았고, 일대의 암석이 지글지글 녹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나는 죽지 않았다.

[새로운 조력자가 게임에 소환됩니다!]

눈을 뜨자, 누군가가 내 앞을 막고 있었다.
단정한 특공복.
특수부대의 마크를 어깨에 새긴 군인이, 거대한 방패를 치켜든 채 떨어지는 불길을 막아내고 있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뜨겁다는 [지옥염화]조차 견뎌냈던 사내였다.

“대한민국 대괴수 특작사령부 산하, 대위······.”

떨리는 말을 삼키는 사내를 보며, 나는 탄식했다.
“어떻게”라든가, “왜”라든가. 무슨 말이든 묻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통해 사내에게서 쏟아지는 무수한 목소리 앞에, 내가 꺼낼 말들은 모두 무의미했다.
뒤를 이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키메라 드래곤’의 모습이 보였다.

[새로운 조력자가 게임에 소환됩니다!]

크와아아아앙!

그 드래곤의 머리에 앉은 작은 소녀를 보며, 우습게도 나는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저씨!”

유중혁이 부른 조력자들이, 마침내 전장에 도착했다.





< Episode 50. 독자의 설화 (1) > 끝

< Episode 50. 독자의 설화 (2) >





유중혁이 불러온 ‘지원군’은 총 셋이었다.
비스트마스터 신유승과, 강철검제 이현성.
그리고······.

“현성 씨! 독자 씨 데리고 빠지세요!”

허공에서 쏘아진 [아리아드네의 거미줄]이 나를 이현성의 커다란 등짝에 붙여 놓았다. [헤르메스의 산책법]으로 창공을 달리는 고양이 수트의 여인.
올림포스의 화신, 유상아였다.

“유승이는 먼 거리에서 브레스로 딜 넣어! 현성 씨 빠질 때까지 계속!”

쿠오오오오오!

[키메라 드래곤]이 포효하며 브레스를 내뿜자, 묵시록의 이무기도 꽤 고통스러운 모양인지 비명을 질러댔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자신의 화신에게 커다란 개연성을 할애합니다.]
[성좌, ‘버려진 미로의 연인’이 자신의 화신을 지원합니다.]
[성좌, ‘하늘 걸음의 주인’이 자신의 화신을 응원합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이현성과 유상아를 후원하는 성좌들 또한 꽤나 분투하는 듯했다. 유상아의 능수능란한 지휘와 함께, 나는 이현성의 어깨에 들려 강제로 이송되었다.

“······이현성 씨.”
“가만히 계십시오 독자 씨.”
“이렇게까지 하진 않으셔도 되는데요. 저도 이제 움직일 수 있어요.”

내 말에도 이현성은 단단한 팔을 풀지 않았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오직 협곡을 묵묵히 오르는 것뿐.
슬슬 협곡의 정상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이현성이 입을 열었다.

“독자 씨, 수류탄 던져보신 적 있으십니까?”
“······수류탄이요?”
“수류탄을 사용하려면 총 세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안전 클립 제거, 안전핀 제거, 투척.”
“저도 훈련소에서 던져 봐서 알아요.”
“그러면 수류탄의 안전핀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아시겠군요.”

순간 나는 이현성이 무슨 말을 할지 깨달았다.

“저는 안전핀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탄피 아니었습니까?”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이현성이 고개를 돌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안전핀은 채워 둘 수 있을 때, 잘 채워 둬야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협곡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아래쪽에서 유상아와 신유승이 [키메라 드래곤]을 타고 협곡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환히 웃는 신유승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벅차 올랐다.

“현성 씨.”
“······예.”

결국, 이현성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안다.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왔기에,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말들이 있는 것이다.

“와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곁에서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 해주었다. 잠시 후, 도토리처럼 도르르 굴러온 뭔가가 내 다리에 폭 부딪쳤다.

“아저씨!”

내 너덜너덜한 다리가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꼭 끌어안는 모습.

“오랜만이다, 유승아.”

외투에 얼굴을 묻은 신유승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신유승의 등을 작게 토닥여주는데, 멀리서 유상아가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독자 씨.”
“예.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냈냐니,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시나리오가 시작된 후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여전하시네요, 독자 씨.”

유상아가 가식 없는 얼굴로 웃었다. 멸망 전에도 멸망 이후에도, 내 농담에 웃어주는 사람은 유상아뿐이다.

“다른 일행들은······.”
“일단은 우리만 왔어요. 희원 씨랑 다른 애들도 많이 오고 싶어 했는데······.”
“제가 이길영이랑 동전 던지기 해서 이겼거든요!”

신유승이 헤헤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렇군. 다들 동전을 던져서 내 목숨을 결정했다 이거지.
나는 신유승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유상아 씨.”
“안 그래도 가야겠다 싶던 참이었어요. 독자씨 길흉화복에 안 좋은 점괘가 떴었거든요.”
“길흉화복?”

길흉화복이라면 나도 알고 있는 성흔이었다.
그리고 한반도에 그 성흔을 가지고 있는 성좌는 하나뿐이다.

“네, 대흉(大凶)이 떠서 저랑 수영 씨랑 누가 가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유중혁 씨가 연락을······.”

대충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설마 한수영과 유상아가 동전 던지기를 한 것은 아닐 테고······ 한수영에게 일이 있으니 유상아가 오게 된 거겠지. 한수영이 내가 맡긴 일을 잘 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참고로 수영 씨도 오고 싶어했어요.”
“아······ 예. 그렇군요.”

선의의 거짓말이겠지. 걘 나 싫어하는데.

콰아아아앙!

수풀 지대 쪽에서 굉음이 터진 것은 그때였다.
다시 일행을 만난 것에 들떠서, 게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나는 일행들과 함께 수풀 지대 쪽으로 달려가며 물었다.

“상황은 알고 오신 건가요?”

유상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형한테 대충 이야기 들었어요.”

아무리 유중혁이 ‘유희의 지배자’에 탱커 포지션을 가졌다 해도, 지금쯤이면 체력이 거의 바닥에 이르렀을 터.
2차전은 여기서 승부가 갈릴 것이다.
키메라 드래곤이 후욱 하고 바람을 불자 인근의 나무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시야가 트이자, 성좌들이 격전을 벌이는 전장이 명료하게 눈에 들어왔다.

“유중혁!”

내 외침에 성좌들에 둘러싸여 있던 유중혁이 이쪽을 보았다.

「늦었군.」

여전히 시건방지지만, 전신에 피를 철철 흘리는 게 다 죽어가는 모양새였다.

[놈이다! 저놈이 문장을 가지고 있다!]

특수한 스킬을 가진 녀석들이 있는 모양인지, 성좌 하나가 이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우리 팀을 제외하고 남은 성좌 및 참가자들의 숫자는 총 여섯.
그리고 이쪽은, 새로 보급된 인원을 포함해도 다섯이 고작이었다.
게다가 유중혁은 이미 전투불능에 가까운 상태.

[가라!]

전면전이 시작되자, ‘인류의 시조’와 ‘바나라의 장군’을 중심으로 진형을 짠 성좌들이 밀려들었다. 그들에 대항해 가장 먼저 달려간 것은 강철검제 이현성이었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는다!”

전방을 향해 함성이라도 발사하듯 달려간 이현성은, 무려 설화급 성좌인 마누와 양 팔을 마주댄 채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츠츠츠츠츳!

겨우 화신 따위와 손을 섞은 것이 불쾌하다는 듯, 마누가 인상을 찌푸렸다. 강력한 ‘격’이 마누의 손끝에서 불타오르며 강철 외피가 조금씩 물렁해졌지만, 이현성은 조금도 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인류의 시조’를 노려봅니다.]

인류의 시조가 설화급이듯, 강철의 주인 또한 설화급.

드드드드드드!

이현성의 전신으로 자라나는 [강철화]의 가시들을 보며, 나는 그가 얼마나 혹독한 개인 시나리오를 수행해온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고작 10번대의 화신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지금의 이현성은, 지금껏 있었던 어떤 회차의 이현성 보다도 압도적인 성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유상아도 마주 뛰어나갔다.

“올림포스는 제가 맡을게요.”

[네년, 제정신인 것이냐!]

유상아를 발견한 오이디푸스 왕이 괴성을 질렀다.
본래 둘은 같은 <올림포스>의 소속원.
하지만 지난 번에 디오니소스에게 들은 것이 맞다면, 올림포스는 지금 내전 중이었다.

[하늘 걸음의 주인이여! 당신은 지금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거요!]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헤르메스와 디오니소스를 주축으로 한 일부 그룹이 기존의 <올림포스>에서 독립하려 하는 것은 명백해보였다.
허공을 자유자재로 선회하는 유상아가 오이디푸스 왕과 격전을 시작하자, 신유승이 키메라 드래곤을 움직였다.

고오오오오오!

응집된 브레스가 전장을 뒤덮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성좌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제한 시간이 10분 남았습니다.]

2차전도, 어느새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현재 각 팀의 승점은 거의 동등한 상황.
때문에 성좌들도 필사적이었다.

그아아아아!

몇 명의 성좌들이 키메라 드래곤 쪽으로 가세하자, 금세 키메라 드래곤과 신유승은 위기에 몰렸다. 아까 [묵시록의 이무기]를 상대할 때 꽤나 체력을 소모했기 때문인지, 드래곤은 생각보다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해치우시오! 덩치만 큰 놈일 뿐이니!]

이 경기가 무승부로 끝나면 불리해지는 것은 우리쪽이다.
경기는 3차전으로 흘러갈 것이고, 만약 거기서도 승점을 획득하지 못하면 우리는 패널티가 사라진 무대에서 성좌들을 상대해야만 한다.
그 사실을 아는 유중혁이, [베르칸 공작]을 가리키며 말했다.

“공작을 죽여. 놈이 문장을 가지고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뚫겠다.”

마력을 쥐어 짜낸 유중혁이 전방을 향해 [파천검도]를 사용했다.

[놈들이 문장을 노린다!]

유중혁은 베고, 또 베며 길을 뚫었다. 마지막 힘을 다한 [흑천마도]가 거대한 반원을 그리며 바닥에 처박히자, 기회를 노리던 성좌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맡긴다, 김독자.」

마력이 다한 유중혁이 마누의 창에 심장을 꿰뚫렸다.

[참가자 ‘유중혁’이 살해당했습니다!]

죽는 순간 까지도 녀석은 꼿꼿이 선 채였다.
앞을 막던 유중혁이 사라지자 성좌들은 곧바로 나를 향해 돌아섰다. 쇄도하는 원시의 창과 섬광포. 그러나 창극과 폭렬은 내게 닿지 못했다.

까가가가각!

“독자 씨!”

이현성이 [강철화]를 발동해 성좌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뜨거운 열기와 충격 속에 몹시 고통스러울 텐데도, 이현성은 오히려 활력이 도는 표정이었다. 멀리서 꽁무니를 빼는 [베르칸 공작]의 모습이 보였다.

[제한 시간이 5분 남았습니다.]

“현성 씨, 날 던져요.”
“안 됩니다. 또 그런 짓을······!”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은 던질 수밖에 없어요.”

나는 흔들리는 이현성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여기서 죽는다고 진짜로 죽지도 않는다고요.”

진짜로 죽는 것은, 이 ‘선발전’에서 패배했을 때다.
잠시 나를 보던 이현성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현성의 눈동자는 어느새 군인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 거짓말을 또 믿을 수는 없습니다!”
“아니, 지금은 억지를 부릴 때가―”
“죽을 때는 같이 죽는 겁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크게 기뻐합니다.]

“반드시 그럴 겁니다.”

그 말과 함께, 이현성이 나를 업은 채 달리기 시작했다.
돌진하는 이현성에게 부딪친 마누가 볼링핀처럼 바닥을 굴렀다.

[커억! 건방진 화신 따위가······!]

폭주하며 달리는 이현성을 막아설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잠깐은 그렇게 보였다.

[교만한 아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겨우 그런 ‘역사’로는 무리다.]

투콰아앙!

강력한 ‘격’이 만들어 낸 힘에 이현성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어느새 힘을 회복한 ‘지고한 빛의 신’ 수르야가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제3의 눈]을 제대로 못 쓰더라도 그는 <베다>의 로카팔라.
우리를 막을 권능은 수도 없이 많이 가지고 있다.
네 개의 팔이 움직이자, 이현성이 달리던 대지가 통째로 밀려났다. 달려도 달려도, 오직 제자리걸음만을 반복할 뿐인 땅.

[지금 네가 서 있는 그 곳이, 인간에게 어울리는 장소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에게 말이지.]

나는 이현성의 등 뒤에서 [전인화]의 힘을 발동했다. 휘두른 주먹에서 뻗어나간 섬전이 수르야의 몸통에 격중했다.

쿠구구구구구!

하지만, 수르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네 개의 팔이 만들어 낸 투명한 방어막이, 내 모든 공격을 무화시키고 있었다.

[정말 이 정도인가? 너는 정말 겨우 이 정도로, ‘이 시나리오의 끝’을 보고자 하는 것이냐?]

내가 쌓아온 모든 역사를 부정하는 힘이었다.
[전인화]도, [백청강기]도 먹히지 않는다.

[시대가 많이 변했구나. 겨우 그 정도 ‘역사’로······.]

고작 삼십 퍼센트의 힘이 개방된 상황인데도 이런 격차가 난다.
그런데 만약 백 퍼센트의 힘이 개방된다면, 어떻게 될까.
새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아저씨를 무시하지 마!”

날아오른 키메라 드래곤의 머리에서, 신유승이 외치고 있었다.

고오오오오오!

신유승의 신호와 함께 쏟아지는 브레스.
가소롭다는 듯, 수르야가 팔을 휘저어 브레스를 흩어버렸다.
그 틈을 이용해 이현성이 도약했다.

콰아아아앙!

[강철화]를 발동한 이현성의 몸이 수르야와 충돌했다. 무수한 공격을 받고도 끄떡없던 수르야의 몸이 처음으로 움찔 떨렸다.

“으아아아아아아!”

이현성은 미친 사람처럼 수르야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강철화]를 발동한 주먹이 갈라지고, 피를 쏟고, 부서진 뼛조각이 튀고 있음에도 이현성은 멈추지 않았다.

쩌저저저적.

[‘73번째 마계’가 당신과 조력자들의 의지에 반응합니다.]
[당신에 관한 새로운 설화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의 의지가, 저 지고한 신의 방어벽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약간의 틈.
인간의 역사가 만들어 낸, 아주 미세한 균열이었다.

“현성 씨.”

그리고 나와 이현성은, 그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 마치 수류탄을 던지듯, 이현성이 [소형화]를 통해 작아진 내 몸을 힘껏 던졌다. 나는 수르야의 팔이 형성하던 방벽을 돌파해 그대로 베르칸 공작을 향해 쇄도했다.
놀란 공작이 고개를 돌리는 것과, 내가 [전인화]를 발동해 녀석의 목에 검을 꽂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참가자 ‘구원의 마왕’이 참가자 ‘베르칸 공작’을 살해했습니다!]

······해냈다.

아찔한 승리감과 함께, 머릿속으로 무수한 시스템 메시지들이 흘러 들었다. 그러나 그 메시지들을 다 읽기도 전에, 나를 쥐어 터트린 힘이 있었다. 마지막 순간, 얼핏 스쳐간 것은 수르야의 얼굴이었다.

[당신은 살해당했습니다.]





< Episode 50. 독자의 설화 (2) > 끝

< Episode 50. 독자의 설화 (3) >





순간적으로 시야가 암전되었다가 되돌아왔다.
의식이 정전된 같은 느낌이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였지만, 보이는 것은 새카만 천장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천천히 심호흡을 한 후, 무거운 머리를 움직여 사고를 시작했다.

나는, ‘마왕 선발전’의 2차전에 참가중이었다.

마지막 순간 [베르칸 공작]을 죽였고, 그와 거의 동시에 수르야의 일격을 맞아 사망했다. 이후 시스템 메시지가 쏟아지는 것을 듣긴 들었는데······.

2차전은 이긴 건가?
아니면······ 진 건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적의 문장을 빼앗아 게임에 승리했습니다!]

라는 메시지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문장을 빼앗겨 게임에 패배했습니다!]

라는 메시지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둘 다 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먼저였을까.
지금으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다.

[당신은 살해당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 메시지 하나뿐이었다.
내가 게임에서 죽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이 장소에서 눈을 떴다는 것.

“윽······.”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내가 누워 있던 공간이 조금 더 명료하게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등잔들이 벽감 사이사이에 설치되어 있어, 드넓은 어둠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낯선 장소였다.
내가 서 있는 곳에는 [000~100]이라는 팻말이 적혀 있었고, 팻말을 중심으로 큼직큼직한 책장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퀴퀴한 책 냄새. 마치 대학의 장서관을 연상시키는 듯한 광경이었다.

······도서관?
내가 왜 여기 있지?

나는 가장 가까운 서가의 책들 중 하나를 꺼내 아무 페이지나 펼쳐 보았다.

「이설화가 죽은 뒤, 유중혁은 몇 번이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진 특성과 스킬만으로는 절대로 놈들을 이길 수 없었다. 시나리오의 끝은 보이지 않았고, 성좌들의 힘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했다. 이설화의 복수도, 이지혜의 복수도 할 수 없었다. 절망 속에서, 유중혁은 생각했다.」

익숙한 문체의 문장들이 줄지어 이어졌고, 나는 마치 빨려 들어가듯 그 문장들을 읽었다.

「‘만약, 내게도 ‘배후성’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멸살법’에 자세히 나오던 장면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장면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 상상 속에서 몇십 번이고 몇백 번이고 반복되었던 장면이었으니까.

「[성좌, ‘???’가 당신을 화신으로 삼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유중혁’이 처음으로 자신의 배후성을 얻던 순간이었다.
배후성이 없는 화신으로 한계치까지 수련을 반복했으나, 끝내 시나리오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 1회차의 유중혁.

「새로운 특성, ‘회귀자’가 개화합니다!」

그런 유중혁이, 처음으로 ‘회귀자’가 되던 순간의 이야기.
나는 반사적으로 책을 덮고 제목을 살폈다.

[유중혁, 0회차 56권의 기록]

왜인지,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눈이 조금 더 어둠에 익숙해지자 주변이 한결 잘 보였다.

이곳은, ‘멸살법’의 모든 기록이 모인 도서관이었다.

나는 살짝 질린 채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3149편보다 훨씬 많을 것 같은데.”

‘멸살법’이 길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다.
이렇게 넓은 공간을 다 채울 정도의 책이라니.
내가 평생을 다 바쳐도 이 서가의 절반이나 읽을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찌릿.

두통이 시작된 것은 그때였다. 웅크려 있던 기억들이 알껍질을 깨듯 내 안에서 밀고 나오려 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낯설었던 이 장소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저 벽감의 등잔들도, 이 서가의 책들도.
팔뚝에 서서히 소름이 돋으며 강렬한 기시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이 장소에 이미 한 번 온 적이 있었다.
언제였지? 대체 언제······.

「김 독 자」

도서관 전체에 메아리치듯 울려 퍼지는 목소리.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말투였다.

“······제4의 벽?”

그러자, 도서관 전체가 희미하게 진동했다.

「영혼 체 가 위험 했 다」

“위험해?”

「내 가 불렀 다아······.」

[제4의 벽]이 나를 이곳으로 불렀다.
나는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혹시, 여긴 네 안인 거야?”

「맞 아」

“여기서 어떻게 나가? 출구는?”

「······.」

“······이봐?”

몇 번을 더 불러 보았지만, [제4의 벽]은 대답이 없었다.
걸핏하면 졸리다며 잠들어버리는 녀석이니, 이번에도 잠들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별 수 없이 스스로 방법을 찾아봐야 했다.

[해당 장소에서는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해당 장소에서는 ‘책갈피’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용할 수 있는 스킬들은 모두 막혀 있었다. 아무리 걸어도 장서관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동서남북은 물론이거니와 위 아래 어디에도, 출구 비슷한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확신이 들자, 오히려 마약 같은 안락감이 찾아왔다.

“······천국이네.”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봐도 ‘멸살법’.
오직, ‘멸살법’으로 가득 찬 세계.
만약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에 이곳에 왔다면 나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읽어도 끝나지 않을 이야기가 있다.
영혼체니까 배도 고프지 않다.

······어차피 이대로는 나갈 방법도 없으니까, 책이나 좀 더 읽어볼까.
혹시 모른다. 책 안에 방법이 있을 수도 있고.
나는 책장의 책들을 꺼내 옆에 쌓아놓고 한 권씩 읽기 시작했다.
간만에 봐도, ‘멸살법’은 ‘멸살법’이었다.

“······뭔 설명이 이렇게 많아.”

주변이 고요했기 때문일까. 평소보다도 책을 읽는 속도가 더 빨랐다. 하지만 대충 읽지는 않았다. 한 점의 고기를 썰기 위해 오래도록 굶어온 미식가처럼, 나는 문장 하나하나를 잘게 썰고 음미하며 삼켜갔다.

“자식, 이때는 귀여웠네.”
“······젠장, 초반에 좀 더 기를 죽여 놨어야 하는데.”

어떤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었고, 어떤 이야기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 정보는 까먹고 있었네······.”
“뭐야, 이런 일도 있었어?”

이곳에 아무도 없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자연스레 혼잣말이 나왔다.
정말로 듣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진짜 혼잣말이었다.
그렇게 몇 권이나 책을 더 읽었을까.

마음 한구석에서 뿌듯함과 함께, 따뜻한 온기 같은 것이 솟았다.

갑자기 약한 마음이 들었다.
그냥 다 포기하고 여기서 머무르는 것은 어떨까.
만약 언제까지고 이곳에서 깨어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이곳에서는 시나리오 때문에 죽을 일도 없고.
성좌들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는데.

한 칸의 책을 후루룩 읽고 난 뒤에는, 적당히 책장을 건너 뛰어 읽거나 중간부터 책을 펼치기도 했다.

「유중혁은 가끔 생각했다.」
「‘만약 그때, 그 다리 위에서 녀석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혹은, 녀석을 그곳에서 죽였더라면······ 내 남은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뭔가 익숙한 구절에, 나는 반사적으로 책의 제목을 살폈다.

[유중혁, 3회차 12권의 기록]

······역시나, 3회차였나.
나는 몇 권의 책을 더 펼쳐 보았다.
어떤 책에는 내 욕이 적혀 있었고.

「‘빌어먹을 김독자.’」

그리고 어떤 책에는.

「“김독자, 정신차려라! 김독자!”」

조금은 고마운 말들도 적혀 있었다.
그리고 어떤 책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

필터링이 된 것처럼 읽을 수 없는 문장들.
아예 에피소드 일부가 백지인 책도 있었다.

아직, 그 이야기는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처럼.

모든 책들은 회차의 순번에 맞게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필요할 때 찾기 쉽도록 일부러 정리해 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누가······.
건너편 책장에서 인기척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파스슷.

나는 반사적으로 책장을 덮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사람의 그림자 같은 것이 일렁였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렸고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소리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굴러 다니는 책들에 몇 번인가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집요하게 그림자의 뒤를 쫓았다.
서가의 팻말들은 빠르게 바뀌었다.
[000~100]에서 [100~200]으로.
다시, [200~300]으로.

[유중혁, 373회차 24권의 기록]
[유중혁, 473회차 31권의 기록]

무수한 서가들이 빠르게 스쳐갔다.

[유중혁, 573회차 27권의 기록]
[유중혁, 681회차 12권의 기록]
······.

숨이 조금씩 벅차왔고, 여전히 서가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영혼체 상태일 텐데도 숨이 벅차왔다.
그래도 나는 계속 달렸다. 모처럼 찾아온 기회였다. 여기서 만약 그를 놓치면, 다시는 못 잡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더 달렸을까.
인기척이 조금 가까워졌다.

“잠깐만!”

외치는 순간, 갑자기 앞쪽의 바닥이 쑥 꺼졌다. 비명과 함께 관성을 이기지 못한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반사적으로 옆에 있던 책장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추락했을지도 모른다.

[유중혁, 1863회차 22권의 기록]
[유중혁, 1863회차 23권의 기록]
[유중혁, 1863회차 26권의 기록]
······.

책들이 머리 위로 우당탕 쏟아졌다. 유중혁의 주먹에 맞는 것처럼 아팠다. 간신히 책 더미를 헤치고 나오자, 내가 쫓던 그림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제길······.”

대신 내 눈앞엔 새카만 낭떠러지가 드리워져 있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아······.”

나는 홀린 듯 그 낭떠러지 안을 들여다 보았다.

이곳이 이 도서관의 끝.
모든 이야기의, 끝이었다.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려니,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마치, 내가 오랫동안 궁금해했던 뭔가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곳으로 가면, 저 안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
서서히 기울어진 몸이 낭떠러지 쪽으로 가까워지려던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내 어깨를 꽉 잡으며 말했다.

「(떨어지면 죽어. 거긴 진짜로 벽의 ‘너머’ 거든)」


*


찰싹! 찰싹! 찰싹! 찰싹!

“정신 차려라.”

찰싹! 찰싹! 찰싹! 찰싹!

“유중혁 씨, 그만 때려요! 독자 씨 얼굴이 퉁퉁 부었잖아요!”
“대체 왜 안 일어나는 거지?”
“숨은 아직 붙어 있어요. 뭔가 영혼에 충격을 받은 것 같은데······.”

유상아의 말에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는 뺨이 탱탱 부은 김독자가 축 늘어져 있었다. 곁에서 곰만한 덩치의 이현성이 몸을 웅크린 채 정신 나간 얼굴로 김독자의 전신을 주물럭대고 있었다.

“독자 씨······ 정신 차리십시오. 제발······.”

2차 전이 종료됨과 동시에, ‘신화의 전장’은 갑작스레 해체되었다.
‘유중혁―김독자 공단’의 참가자 및 조력자들은 모두 공단의 황무지 앞에 내버려졌다.
유상아는 같은 진영에 서 있는 몇몇 인물을 바라보았다.
개 두 마리, 예쁘장한 미소년 하나. 그리고 한명오······.

“용케 살아 계셨네요. 한 부장님.”
“유, 유상아 씨······.”

한명오가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유상아는 곧장 곁에 있던 장하영을 바라보았다.

“그쪽 분은······ 우리 편이신가요?”
“아, 저는······.”

유상아의 투명한 눈과 마주치자, 당황한 장하영이 말을 더듬었다. 자신을 뭐라 소개해야 할지 모르는 투였다. 그때, 장하영의 눈에 신유승의 모습이 들어왔다.

“앗, 너는 혹시 그 영상의······?”
“······저를 아세요?”

신유승 덕분에 ‘73번째 마왕’ 시나리오를 떠올린 장하영은, 뒤늦게 이들이 누구인지를 알아챈 듯했다.

“저 진짜 팬이에요! 우와, 이렇게 지구의 화신분들을 만나게 될 줄은······.”

화색을 띤 장하영이 눈을 반짝이며 유상아의 손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손을 잡힌 유상아가 옅게 웃으며 허공을 보았다.

“그나저나······ 우린 이긴 걸까요, 진 걸까요?”

허공에 떠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시스템 메시지 한 줄 뿐.

[현재 2차전의 승자 팀을 판별 중입니다.]

장하영이 말했다.

“김독자가 먼저 죽인 거 같은데, 그럼 우리 승리 아닐까요?”
“하지만 곧바로 우리 문장도 빼앗겨서······.”

그러자 유중혁이 고개를 저었다.

“김독자가 더 빨랐다.”

강한 확신이 담긴 그 말에, 장하영과 유상아의 안색도 밝아졌다.
유중혁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황무지의 건너편에서 새카만 먼지구름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쿠구구구구!

강력한 ‘격’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듯한 광경.
다가오는 존재들이 무엇일지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표정을 굳힌 유중혁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현재 2차전의 승자 팀을 판별 중입니다.]

여전히, 하늘에 떠 있는 문구는 그것뿐이었다.
정확히는 벌써 삼십분 째 그대로였다.

“다들 준비해라.”
“네?”
“뭔가가 잘못됐어.”

메인 시나리오에 한해서는 일처리 속도가 빠른 관리국 녀석들이, 겨우 승자 판별 하나에 삼십 분이나 시간을 지체할 턱이 없었다.
즉, 이 상황은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것이었다.
누군가가, ‘시나리오’가 이대로 끝나길 바라지 않고 있다는 것.

츠츠츠츠츳!

현재 73번째 마계는 ‘신화의 전장’을 현현할 막대한 개연성으로 가득 차 있는 상황.
유중혁은 [흑천마도]를 뽑아들며 말했다.

“이번엔 게임이 아니다.”

‘우레를 먹는 새’가 토한 끔찍한 포효가 하늘을 뒤덮었다.
더 이상 게임의 페널티를 받지 않는 성좌들이, 하늘을 건너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 Episode 50. 독자의 설화 (3) > 끝

< Episode 50. 독자의 설화 (4) >





어깨를 잡은 억센 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주먹을 뻗었다. 터억,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주먹은 커다란 손에 붙잡혔다.

「(아해여, 싸우러 온 건 아닐 텐데?)」

어둠이 만든 짙은 음영이 걷히며, 새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전에도 한 번 살려줬었지. 벌써 잊었나보군.)」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심지어는······ 내가, 죽였던 존재였다.

“네가 왜 여기에 있냐?”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여성체인지 남성체인지를 알 수 없는 모호한 얼굴.
유려하게 떨어지는 얼굴선에서 느껴지는 불가해함.
이 존재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니르바나 뫼비우스.”

이미 오래 전에, 녀석은 ‘제4의 벽’에게 잡아 먹혔으니까.


*


[제4의 벽]에게 먹힌 존재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처음으로 [제4의 벽]이 뭔가를 먹어 치웠을 때, 그런 의문이 들었다.

「(보는 그대로다. 이렇게 되는 것이지.)」

니르바나가 조소하며 말했다.
간만에 만난 니르바나는 처음 만났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차이가 있다면, 녀석의 몸에 ‘멸살법’을 이루는 활자들이 족쇄처럼 맴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계속 살아 있었던 건가?”

「(살아 있다고 보긴 힘들어.)」

자세히 보니, 니르바나의 목소리는 니르바나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목소리라고 말해도 될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니르바나가 허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 빌어먹을 벽에 기생해 연명하는 신세니까.)」

그 순간,[제4의 벽]의 경고성이 울려 퍼졌다.

「니 르 바나 말이 너 무 많 아」

니르바나가 피식 웃었다.
그의 눈빛은 씁쓸했으나, 한편으로는 묘한 고양감으로 차 있었다. 나는 도서관을 둘러보는 니르바나의 시선을 따라갔다.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무수한 활자들. 이곳에는, ‘멸살법’의 모든 것이 있다.

“이제 원하던 모든 걸 알았겠네.”

「(어떤 존재도 모든 걸 알지는 못한다 아해야. 네가 그런 것처럼.)」

그렇게 말하는 니르바나는, 정말로 불가의 현인(賢人)처럼 보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등장인물 중 누군가가 처음으로, 이 세계의 비밀을 알게 됐다.

“기분이 어때? 자기가 소설 속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된 기분이.”

내 도발에 니르바나의 표정이 변했다.

「(소설이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냐?)」

니르바나는 측은한 듯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몇 번인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끝내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답답해진 내가 채근했다.

“뭔데? 말할 거면 끝까지 해.”

니르바나가 가만히 미소지었다.

「(나는 너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나는 뜻밖의 말에 당황했다.

「(정확히 말하면 네가 바꾸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너의 의지가 느껴지는 문장들, 말하지 않는 것들을 담는 맥락들을······.)」

“······뭐라는 거야.”

나는 괜히 어색한 기분이 되어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고 보니 이 자식, 죽기 직전까지 하나가 되자느니 어쩌니 지껄이던 놈이었지.

「(나뿐만 아니라, 이곳의 모든 존재가 너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곳에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드드드드드!

허공에서 일어난 진동과 함께, 새카만 파편들 몇 개가 천장에서 떨어졌다.
거대한 뭔가가 이쪽으로 굴을 파 오는 듯한 진동.
파편을 주워든 니르바나가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움직이는 게 좋겠군. 여기서 너무 많은 이야길 하는 건 좋지 않아.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니까.)」

내가 뭐라고 묻기도 전에 니르바나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니르바나의 뒤를 쫓으며, 아까 떨어질 뻔했던 낭떠러지를 돌아보았다. 도서관의 진동은 그 낭떠러지를 주축으로 퍼지고 있었다.

“잠깐만, 어디로 가는 건데?”

「(너를 제일 만나고 싶어하는 자가 있다.)」

“뭐? 누구?”

「(000번대의 서가를 정리하는 존재다.)」

······서가를 정리해?

「(우리라고 여기서 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제대로 정리를 안 하면, 네놈도 기억을 제대로 못 떠올리게 되니까.)」

“······잠깐만, 그게 뭔 소리야?”

「(못 알아들었으면 됐다.)」

방향을 틀자, 새로운 서가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도서관은 정말 넓었다.
‘멸살법’은 후반부로 갈수록 생략하는 회차들이 늘어나는데, 아마 이 도서관은 그런 생략 회차들까지 모두 정리해 놓은 모양이었다.
곧 [000~100]이라 적힌 팻말이 눈앞에 나타났다.

「(다 왔군. 그럼 이야기 잘 나누도록.)」

코너를 돌아서자 익숙한 생명체가 그곳에 있었다.
언젠가 본 크기에 비하면 그야말로 ‘미니멀 사이즈’였지만, 그럼에도 틀림없이 내가 아는 그 생명체였다.
바닥에 떨어진 책들을 수거하는 열두 개의 촉수들.
그리고 그 촉수들을 통제하는, 오징어 같은 몸통.
눈으로 추정되는 작은 구멍 위에는 뿔테 안경 같은 것이 얹혀 있었다.

“······당신도 있었군요.”

그러자 오징어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열두 개의 촉수들이 동시에 끄륵끄륵 소리를 냈다.

「(가엾은 구도자가 왔구나.)」

꿈을 먹는 자.
언젠가 [암흑성]에서 척준경과 [제4의 벽]의 도움을 받아 물리쳤던 존재.
[제4의 벽]에게 삼켜졌던 그 역시, 이 공간 안에 있었던 것이다.

“저를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너를 도와주고 싶다.)」

오징어의 입으로 보이는 뭔가가 흐뭇한 형상을 띄었다.
정말이지 이 범종족적인 제스처에는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모르겠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저한테도 상황을 파악할 시간을 좀······.”

「(시간이 많지 않다.)」

“왜 저를 도와주시려는 겁니까?”

「(네 덕분에 나는 우주의 진리에 도달했다. 숭고한 존재들은 반드시 그 빚을 갚는다.)」

숭고한 존재라. 사실 ‘꿈을 먹는 자’ 쯤 되면 본인을 그렇게 칭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이 오징어는 바깥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을 성좌들을 씹어 먹을 정도로 강하니까.

“그럼 하나 물어볼 게 있습니다.”

「(말하라.)」

“이 도서관을 만든 사람은 누구입니까?”

츠츠츠츠츠츳!

순간 엄청난 스파크가 튀며 내 몸이 책장과 충돌했다. 열 두 개의 촉수가 동시에 뻗어 나와 내 몸과 책장을 동시에 붙들었다. 우수수 떨어지는 책들을 보며, ‘꿈을 먹는 자’가 안경을 밀어 올렸다.

「(그것은 질문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다른 질문을 하라.)」

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생각했다.
지금 ‘멸살법’과 관련된 질문을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2차 수정본을 읽어도 알 수 있고, 여차하면 다시 이 공간에 와서 관련된 기록들을 읽는 방법도 있을 테니까.
즉, 나는 ‘멸살법’에 기록되지 않은 질문을 해야 했다.
그것도 이 ‘이계의 신격’이 대답할 수 있는 것으로.
질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은밀한 모략가’는 누구입니까?”

츠츠츠츠츠츳!

이번에도 강력한 스파크가 튀었다. 나는 또 몸이 튕겨 나갈까봐 걱정했으나, 다행히 이전보다는 약한 스파크였다.

「(위대한 모략에 대해 궁금한가?)」

촉수가, 아주 천천히 흐느적거렸다.

「(그는 이 우주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 중 하나······.)」

처음으로 듣는, ‘은밀한 모략가’에 대한 정보였다.

「(이 우주에서 가장 고독한 존재이며, 가장 오래된 꿈과 맞서 싸우는 자.)」

“그렇게만 말씀하시면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제대로 된 수식언이라도 알려―”

「(그에게 수식언 같은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네가 원한다면 그는 너를 도울 것이다.)」

“돕는다고요? 어떻게······.”

「(그와 ‘이계의 언약’을 맺어라.)」

이계의 언약.
그게 무엇인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에서 내가 부쉈던 [절대 왕좌] 또한, 그런 언약의 일종이었다.
하지만 ‘멸살법’에서 언약의 끝이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촉수 몇 개가 고개처럼 끄덕거렸다.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너는 상위 차원의 존재들을 싫어하니까.)」

“당신들의 힘을 빌리면 제가 원하는 이야기를 만들 수 없습니다.”

「(너는 이제 누군가에게 종속될만한 격이 아니다.)」

기분이 이상했다.
저 지고한 ‘이계의 신격’이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너는 너의 분노에 대해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에 도달하기 위해, 네가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을 제대로 고찰할 필요가 있어.)」

드드드드드!

「(세계가 ■■로 향하고 있다. 그것은 아직 쓰여지지 않았지만, 이미 쓰여져 있기도 하다. 그리고 위대한 모략은 그런 너를 도울 수 있다. 네가 제대로 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전 제가 쌓아온 이야기를 믿습니다.”

드드드드드드!

진동의 간극이 점차 짧아지고 있었다.
내 완강한 의지에 체념한 듯, 꿈을 먹는 자가 말했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시간이 없군. 언제나 모략께서 너를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하라.)」

촉수들 중 하나가 나를 휘감았다. 동시에 다른 촉수들이 빠르게 움직여 서가에서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가 찾아낸 책은 다음과 같은 책이었다.

[유중혁, 3회차 38권의 기록]

책의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갔다.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깨달은 나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아직 물어볼 것이 남았습니다!”

「(잘가게, ■■의 사도여. 개연성이 허락한다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책의 페이지가 펼쳐지며, 백지 위에 실시간으로 문장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생각했다.」
「빨리 깨어나라, 김독자.」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빌어먹을, 이래서야 갈 수밖에 없잖아.
다음 순간, 나는 문장들의 맥락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


전장은 폐허였다.
바닥을 뒹구는 화신들의 시체와, 한걸음씩 다가오는 성좌들의 대열을 바라보며, 유중혁은 피 묻은 입술을 닦았다.

크르르렁!

초월견의 힘을 사용한 파천신군과, 위인급 성좌인 오수의 콤비는 놀라웠다.
그들은 몸이 망가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달려드는 위인급 성좌들을 물고 뜯었다.
덕분에 최전방에서 달려오던 ‘클레오 파트라’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오이디푸스 왕’도 화신체 곳곳을 파먹힌 험악한 몰골이 되었다.
위인급 성좌들을 상대할 때까지는, 제법 할만한 것도 같았다.

[추하구나! 저런 벌레들조차 상대하지 못하고서 ‘성좌’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으냐?]

그러나 뒤쪽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설화급 성좌들이 나서자,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었다.

쿠오오오오오!

‘우레를 먹는 새’가 내뿜은 전격에 신유승의 ‘키메라 드래곤’은 맥없이 추락했고.

콰아아아앙!

‘바나라의 장군’이 내뻗은 주먹에 [강철화]가 산산이 부서진 이현성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몇 번이고 피를 토한 유상아는 어떻게든 전열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것도 한계인 것처럼 보였다.

커어엉!

‘인류의 시조’의 창에 찔린 오수가 비틀거리며 바닥을 기었다. 그런 오수의 화신체를 입에 문 파천신군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25번 시나리오의 개연성이 허락하는 한계치까지 개방된 격.

일백 퍼센트의 힘은 아니라 해도, 지금의 일행들이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강력한 ‘격’이 마계 전체를 눈부신 스파크의 백야(白夜)로 만들고 있었다.

이것이 ‘성좌’라는 존재들의 힘이었다.
이 세계의 가장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오시하는 존재들.

유중혁이 물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성좌, ‘지고한 빛의 신’이 고요히 웃습니다.]

“벌레들에게 패배한 ‘역사’는 갖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그래.”

순간 수르야의 뺨이 미묘하게 씰룩였다.

쿠구구구구구!

<로카팔라>의 격이 개방되자, 일대의 모든 성좌들조차 표정이 급변했다.

츠츠츠츠츠츠츳!

과도한 힘의 개방에 수르야의 전신에도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그러나 수르야는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는 듯, 자신있게 기함을 터트렸다.

[쿠와아아아아아아!]

그저 단 한 번, ‘격’을 발산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격에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인근의 구조물들은 잿더미로 변했고, 달아나던 화신들은 그대로 영혼을 파괴당했으며, 전방의 일행들은 칠공에서 피를 쏟으며 무너졌다.

[일부 성좌들이 시나리오 진행에 불만을 갖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크게 분개합니다!]
[마왕, ‘악마성의 대군주’가 기뻐합니다.]
[마왕, ‘불화의 조성자’가 흥분합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간만의 대격전에 들떠 있습니다!]

최전방에서 힘을 감당한 이현성이, 귀와 입에서 동시에 피를 쏟으며 버티고 있었다. 유중혁은 그런 이현성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물러서라, 이현성.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이현성은 반사적으로 뭐라 소리치려 했지만 그마저도 힘겨운 듯 보였다. 비틀거리는 이현성을 뒤로 하고, 유중혁이 피묻은 [흑천마도]를 닦으며 걸어나갔다.
절망적인 상황.
그가 가진 [현자의 눈]은 실시간으로 전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좌들의 숫자만 해도 거의 스물. 위인급 일부를 전력에서 제한다 해도,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크르르르릉!

「사제여, 안 된다. 그 힘을 개방하면 너는 죽을 수도 있다!」

파천신군은 본능적으로 유중혁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유중혁의 의지는 완강했다.
천천히 힘을 끌어 올리는 유중혁의 전신에서, 막대한 스파크가 튀었다.

츠츠츠츠츠츳!

상대가 안 될 것을 안다.
이길 수 없을 거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건, 늘 그랬다.

―초월형 3단계에 도달하면, 너는 성좌를 능멸할 힘을 얻을 수 있다.

스승이 남겼던 말만이, 지금 유중혁이 믿을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번에는 편법으로 올라선 경지.
하지만 편법이라 해서 그 힘까지 거짓은 아니었다.

고오오오오오!

유중혁의 몸에서 눈부신 아우라가 터져 나왔다.
섬연한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쏟아졌고, 커다랗던 덩치는 좀 더 작지만 단단하고 날렵한 체구로 변했다. [파천검도]의 궁극을 실천할 수 있는, 완성형의 몸이었다. 뒤쪽에서 그 광경을 보던 유상아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유중혁 씨?”

유중혁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흑천마도]에 의해 잘려 나가는 긴 머리카락. 얼굴의 선이 바뀌었지만, 그것은 분명 유중혁의 얼굴이었다. 아니,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유중혁이었다. 유중혁의 시선이 아주 잠깐 김독자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데리고 도망쳐라.”

고개를 돌린 유중혁이 다시 [흑천마도]의 칼날을 정성껏 닦아냈다.
그런 그를 비웃는 듯한 성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이디푸스 왕이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초월좌여. 이것이 성좌들의 연회에 낀 대가다. 너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여전히 칼날을 닦으며, 유중혁이 대답했다.

“그렇겠지. 하지만 너희들 중 누군가도 죽을 거다.”

[하하하, 소용 없다! 어차피 화신체의 소멸은······.]

유중혁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유중혁은 김독자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번 생을 포기하지 말라던 그말.

“그리고 다음 생애는, 너희들 중 절반이 죽을 것이다.”

고요히 전장을 울리는 유중혁의 목소리.
짙은 어둠을 머금은 [흑천마도]와 함께, 유중혁이 고개를 들었다.
성좌들의 걸음이 처음으로 멈춰섰다.
사납게 타오른 초월좌의 마력이 위협적으로 주변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 다음 생애에서는, 너희 모두가 죽을 것이다.”

하늘에 닿을 듯 거대해진 [흑천마도]가 울었다.
완전히 표정이 굳은 성좌들을 향해, 유중혁이 말을 맺었다.

“너희는, 영원히 죽게 될 것이다.”






< Episode 50. 독자의 설화 (4) > 끝

< Episode 50. 독자의 설화 (5) >





[오만한 초월좌여, 무슨 헛소리를······!]

결전의 시작과 동시에 유중혁이 움직였다.
성좌들의 비웃음도,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력도 지금의 유중혁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그는 3회차에 돌입한 뒤 처음으로, 오직 눈앞의 적을 죽이는 것에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퍼져 나오는 유중혁의 아우라에, 최전방에 있던 몇몇 위인급 성좌들이 침음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좌들은 여전히 유중혁을 얕보고 있었다.

아무리 초월좌라 해도, 고작 인간.

수적으로도 압도하는 상황에서, 성좌들이 질 턱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바나라의 장군’이 떠올린 마지막 생각이 되었다.

[전용 스킬, ‘거신화 Lv.6’을 발동합니다!]

찰나에 발동한 [거신화]는, 성좌들과 유중혁 사이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콰콰콰콰콰!

마치 유성처럼 쏘아진 유중혁의 신형.
‘바나라의 장군’이 그 속도를 깨닫고 황급히 거검(巨劍)을 들었을 때, 그의 머리통은 이미 [흑천마도]에 베여 허공을 날고 있었다.

[감히······!]

눈을 부릅뜬 ‘바나라의 장군’은 목이 잘린 상태로도 경악성을 내뱉었다.
유중혁은 그대로 [흑천마도]를 그어 날아가는 장군의 머리통을 쪼개버렸다.

퍼거거거걱!

방심이 낳은 어처구니없는 최후였다.

츠츠츠츠츠츠츳!

과도하게 집약된 마력이 유중혁의 모든 기혈을 녹이고 있었다. 초월형 3단계를 극한까지 발동한 결과였다. 이 상태로 그가 운신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은 10분. 그 10분에, 유중혁은 모든 것을 걸었다.

“다음.”

‘바나라의 장군’의 죽음은 성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성좌는 화신체가 죽는다고 해서 소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신체를 헛되이 잃고 싶은 성좌는 아무도 없다.
치명적인 죽음은 성좌의 격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히기 때문이다.
모든 성좌가 경직된 찰나.
그 짧은 틈새를 이용해, 유중혁은 두 번째 공격을 시도했다.

서거거걱!

섬전처럼 움직인 [흑천마도]가 검은 궤적을 남기며 거대한 새의 날개를 베었다. ‘우레를 먹는 새’가 거센 울음을 토했다.
그제야, 성좌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놈!]

‘인류의 시조’의 ‘원시의 창’이 유중혁을 노렸다.
보통의 화신이었다면 단번에 가루가 되어버렸을 일격이었다.

콰가가가각!

그러나 유중혁은 그 일격을 받아냈다. 오른쪽 전완근이 파열되는 듯한 충격과, 몸 전체를 짓누르는 거력. 입으로 피를 쏟아내면서도, 유중혁은 집중력을 놓치지 않았다.

[과도한 집중이 ‘특성’의 적용 범주를 확장시킵니다!]
[전용 특성, ‘유희의 지배자’가 발동합니다!]

그의 집중력은 특성의 힘을 깨웠다. 다가오는 성좌들의 기척이 모두 데이터가 되어 유중혁의 뇌리에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 순간 유중혁에게 이 세계는 게임이었다.
유중혁은 절제된 동작으로 성좌들의 공격을 피해내고, 마력을 사용해 반격했다.

[크아아아앗!]

[흑천마도]에 손가락이 베인 ‘인류의 시조’가 괴성을 질렀다.
빈틈을 파고든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굉음을 내며 솟아올랐다.

파천검도(破天劍道).
절기(絶技).
파천유성결(破天流星決).

땅에서 하늘로 솟구친 검강이, 벼락처럼 밤하늘을 내찔렀다. 먹구름 사이로 숨어버린 검강의 갈래가 천둥을 만들었고, 번쩍이는 밤하늘 속에서 쏟아진 검뢰(劍雷)가 운석처럼 성좌들에게 직격했다.

꽈르르르릉!

허공에서 떨어지는 수십 갈래의 검뢰에, 몇몇 성좌들의 화신체가 꿰뚫렸다.
초월형 3단계의 모든 것을 담은 혼신의 일격이었다.

[크아아아아아!]

고통에 몸부림치는 성좌들을 보며, 유중혁은 죽어가는 자신을 느꼈다.
3회차의 시간들이 그의 머릿속을 흘러갔다.
짧은 회차였다.
그럼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설화, ‘패왕의 이름을 계승한 자’가 울부짖습니다.]

그의 감정에 반응하듯, 검극에 깃든 설화들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치 그 모든 설화 하나하나가 의지를 가진 것처럼.
대부분 혼자서 쌓은 설화는 아니었다.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귀환자에 맞섰던 설화.

[설화, ‘절망의 낙원’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버림 받은 낙원을 지키고 얻은 설화.

[설화, ‘이계의 신격에 맞서 싸운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계의 신격과 맞섰던 설화.

[설화, ‘공단의 지배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을 짓을 하고 얻은 설화도 있었다.
지금 이 상황과는 관계 없는 설화들이었다.

하지만 모두 누군가와 관계되어 있는 설화였고.
그 혼자서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설화였다.

그 설화들이 동시에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마치, 여기서 이 이야기가 끝나기를 원치 않는 것처럼.

후두두둑.

쓰라린 통증과 함께 유중혁의 가슴팍에서 피가 쏟아졌다.
언제 다친 것인지 조차 알 수 없는 상처들.
쓰러진 화신체 몇이 주변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지고한 빛의 신’ 수르야가 말했다.

[대단하다. 이미 너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겠구나, 아이야.]

그 진언에 대항하듯, 유중혁의 설화들이 환한 빛을 내뿜었다.

[설화, ‘재앙의 왕을 사냥한 자’가 포효합니다.]

유중혁은 초월좌.
설화는 성좌들의 전유물이기에, 그것을 가졌다 하여 밤하늘의 별들과 동등한 격을 누릴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 순간 유중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설화의 빛은 그 자리에 있는 그 어떤 성좌의 것보다 눈부셨다.
유중혁은 자신의 몸에서 흘러 나오는 설화들을 바라보았다.
어떤 것은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어떤 것은 낯설었다.
다시는 얻을 수 없을 것 같은 설화도 있었다.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어합니다.]

어느새 저만치 달아난 유상아와 일행들이 보였다.
이현성의 등에 업힌 김독자의 모습도 보였다.
유중혁은 손에서 미끄러지는 [흑천마도]를 꾹 쥐었다.

······죽을 수는 없다.
여기서, 고작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

덜덜 떨리는 그의 검이, 마지막 힘을 다해 수르야를 가리켰다.
그 광경이 재미있다는 듯, 수르야가 빙긋 웃었다.

[그러나 고작 인간의 설화.]

환한 빛을 산란하는 수르야의 뒤로, 수천 년에 걸친 설화들이 떠올랐다.
항거할 수 없는 격.
그 가공할 세월 앞에, 유중혁의 짧은 역사가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어리석은 인간이, 신의 권좌가 드높음을 모르도다.]

모든 것을 녹여버릴 태양빛이 유중혁을 향해 쏟아졌다.


*


콰콰콰콰콰콰!

성좌들에 의해 파괴되는 [공단]의 정경.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죽어 나가는 화신들.
갑작스런 재앙에 절망한 몇몇 사람들의 표정이 클로즈업되어 패널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제일 처참한 것은, 한쪽 팔을 잃고 신체의 절반이 넝마가 된 후에도 싸움을 지속하는 한 사내의 모습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대노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화신 ‘유중혁’을 안타까워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비겁한 성좌들에게 손가락질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전장의 성좌들을 향해 불만을 쏟아냅니다!]

무수한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가 쏟아졌고, 관리국의 도깨비들 또한 그것을 듣고 있었다. 개중에는, 이번 ‘마왕 선발전’을 담당하는 도깨비 비형도 있었다.

[이게 대체 뭐하자는 겁니까?]

좀처럼 화를 내거나 흥분하지 않는 비형도, 이 순간만큼은 채널의 성좌들과 같은 마음이었다.

[2차전은 ‘유중혁―김독자 공단’의 승리였습니다! 간발의 차이긴 했지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고요. 그런데 왜 승자 발표를 하지 않느냔 말입니다!]

2차전이 끝난 직후, 비형은 곧장 관리국의 승인팀에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준비 중]이라는 답변뿐.
결국, 비형이 찾은 마지막 연줄은 차기 대도깨비 후보인 ‘바람’이었다.
치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패널 화면 위로 ‘바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관리국의 결정일세.]

관리국의 결정.
그야말로 마법 같은 말이었다.
이것도 ‘관리국의 결정’. 저것도 ‘관리국의 결정’.

[바람님. 이건 ‘메인 시나리오’입니다.]

아무리 관리국이라고 해도, 건드려선 안 될 것은 있다.

[관리국이 언제부터 ‘메인 시나리오’의 전개에 본격적으로 간섭했습니까? 그것도 ‘거대 설화’가 얽힌 시나리오에······ 이런 짓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바람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바람은 대답이 없었다.

[말해주십시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겁니까? 윗분들 중 하나입니까?]

비형은 화면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독각’을 일별했다.
분명 ‘독각’도 이 사태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겨우 저런 상급 도깨비 하나둘이 움직여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침묵하던 바람이 입을 열었다.

[······지금 ‘대도깨비’를 의심하는 건가?]
[그분들 말고 이런 짓을 벌일만한 이야기꾼이 있습니까?]
[비형, 정신 차리게. 그분들이 왜 이런 짓을 벌이겠는가?]
[거야 저도 모르죠. 뒷돈이라도 받아 쳐드셨는지.]

바람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도깨비쯤 되면 그런 사사로운 이해에는 얽매이지 않네.]
[그럼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바람님께서는 뭔가 알고 계실 것 아닙니까!]
[비형.]

비형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바람의 목소리에 분노가 깃들고 있었다.
필시 엄한 나무람이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바람은 금방 표정을 풀었다. 마치, 그런 비형을 이해한다는 듯이.
화면 속의 바람이 패널을 통해 ‘마왕 선발전’의 정경을 보고 있었다.
천천히, 바람의 입술이 열렸다.

[그래, 어쩌면 자네 말대로 대도깨비들 중 하나가 이런 ‘지연’을 만들어 냈을지도 모르지.]
[그럼 역시······.]
[하지만 대도깨비라 해도, 거기까지가 고작일세. 이 정도 규모의 시나리오에 개입한 후 닥쳐올 후폭풍은 ‘대도깨비’들이라 해도 견뎌낼 수 없단 말일세.]
[······그럼 누가 저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순간, 굉음과 함께 ‘관리국’의 천장이 흔들렸다.
거대한 용이 지나가는 듯한 소리.
‘개연성’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비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제 알겠는가?]

이만한 ‘개연성’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
그런 존재는, 이 <스타 스트림>에 하나뿐이다.
애초에 그것을 ‘존재’라 칭해도 좋을지 알 수 없지만.
쐐기를 꽂듯, 바람이 말했다.

[<스타 스트림>의 의지가, 이걸 원한 걸세.]
[말도 안 됩니다!]
[그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네.]

원망할 곳조차 앗아가는 듯한 그 말에, 비형은 멍하니 패널 화면을 돌아보았다.
화면 속에는 김독자의 일행들이 비치고 있었다.
본래라면, 승리에 들떠 있어야 할 이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끔직한 몰골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무려 <성운>들이 지원하는 성좌들과의 대결.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싸움이었음에도, 일행들은 잘 싸웠다.
강력한 성좌들에 맞서 게임을 치루었고, 마침내 ‘거대 설화’를 내건 선발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단지 ‘승자 발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패자가 될 참이었다.

단지, <스타 스트림>이 이것을 원했기 때문에.

황망히 입술을 뻐끔거리는 비형의 눈빛에, 원망 섞인 분노가 깃들었다.

[그럼······ ‘이야기꾼’이란 건 대체 왜 존재하는 겁니까?]

도깨비가 된 이후, 처음으로 비형은 압도적인 무력감을 느꼈다.
덜덜 떨리는 손끝에서, 그가 매만지던 시나리오의 부속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전개도 막지 못한다면······ 이 세계의 ‘이야기꾼’은 대체 무슨 가치가 있느냔 말입니다.]
[비형.]

슬픈 비형의 눈을 보며, 바람이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이야기꾼도, 이야기의 일부일 뿐일세.]

절망한 비형이 화면을 바라보았다.
눈부신 빛살 속에 조금씩 녹아 내리는 유중혁의 모습.
이제 이 ‘이야기’는 이야기꾼의 손조차 떠나갔다.
그러니, 이제 믿을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한 성좌를 바라봅니다.]

이현성의 등에 업힌 채 흔들리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
화면 속에서, 그 사내가 서서히 눈을 뜨고 있었다.





< Episode 50. 독자의 설화 (5) > 끝

< Episode 50. 독자의 설화 (6) >





[바앗! 바아앗! 바바바바밧!]

뺨이 아팠다.

[바아아아아앗!]

조금 많이, 아팠다.
품속에서 뭔가가 격렬하게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격한 대지의 울림과 동시에 눈을 떴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자 보이는 것은 눈부신 섬광의 산란. 하늘을 물들인 개연성의 스파크가 마계 곳곳으로 벼락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독자 씨?”

유상아의 목소리와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끊어졌던 전류가 다시 연결된 것처럼, 머릿속에 사고가 흐르기 시작했다.
곳곳에 너부러진 화신체들.
아무리 봐도 ‘신화의 전장’ 무대는 아니었다.
쓰러진 화신체들은 모두 살아있는 인간들.
‘우레를 먹는 새’에 의해 반파되고 있는 [공단]의 정경이 보였다.

“성좌들이 온 겁니까?”

뭔가를 말하려던 유상아가, 피묻은 뺨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허공에 떠 있는 시스템 메시지.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일행들.

“아직도 승자 발표가 안 된 거군요.”

바깥에서 사달이 났을 거라 예상은 했다.
‘도서관’에서 본 유중혁의 마지막 메시지도 그런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상황이 심각할 줄은 몰랐다.

“큭······.”

옆구리에 심한 부상을 입은 이현성이 비틀거렸다. 나는 재빨리 이현성의 등에서 내려, ‘도깨비 보따리’로 회복 아이템 몇 가지를 구입했다.
가장 부상이 심한 이현성과 유상아에게 [대환단]을 쪼개어 먹였고, 상처는 없지만 마력이 고갈된 신유승에게는 상급 마력 회복제를 다량 먹였다.
한명오와 파천신군, 장하영에게도 외상약을 주었다.
도합 40만 코인이 넘게 들었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아저씨······.”

헐떡거리며 포션을 마신 신유승이 바위에 몸을 기댄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잠시 신유승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일단 여기서 쉬고 있어. 그런데······.”

먼 곳에서 성좌들이 만들어 내는 굉음이 지축을 흔들고 있었다.
얼핏 느껴지는 ‘격’만으로도 십여 개체를 훌쩍 넘는 숫자.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만한 성좌들이 몰려왔는데, 일행들이 여기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고?

“유중혁은······.”

일행들 중 누구도 대답은 없었다.
나는 폭음이 연달아 터지는 전장을 돌아보았다.
유중혁을 제외한 모두가 이곳에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성좌와 싸우고 있었다.

[‘제4의 벽’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이 바보 같은 자식이······.”
“아저씨! 안 돼요!”

달려 나가려는 내 허리에 신유승이 매달렸다.

“죽어요 아저씨. 저기 가면 죽는다고요.”

언제나 올곧고 용감했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의 눈에 공포가 깊이 스며 있었다.
버둥거리는 신유승을 떼어 놓자, 아이의 울음이 쏟아졌다. 전장의 포화 속에서, 울음은 먼지처럼 흩어졌다.
아마도 이 아이는 본 것이다.
인간이 결코 넘을 수 없을 거대한 ‘설화’의 공포를.

“유승이를 부탁해.”

나는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장하영에게 신유승을 맡긴 뒤, [바람의 길]을 발동했다. 뒤쪽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지금은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쿠구구구구!

발걸음을 재촉할수록, 전장의 중심에서 터져 나오는 ‘격’의 압박이 강해졌다. 이제껏 내가 겪어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마력의 폭풍.
저 중심에, 분명 유중혁이 있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방법이 있을까?」

머릿속에서 ‘멸살법’의 페이지들이 넘어간다.

「이건 안 돼.」

쿠구구구구!

「그 방법도, 무리야.」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혹시나 이런 상황이 올지 모른다고 예상은 했다. 하지만 시기가 너무 빨랐고, 나는 너무 오래 잠들어 있었다.

이대로면 늦는다.

유중혁은 여전히 멀었고, 바람은 내 편이 아니었다.
‘도깨비 보따리’에서 새로운 스킬을 구입한다 해도, 활용 여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결단을 내렸다.

“300만 코인을 체력, 근력, 민첩, 마력에 모두 투자한다.”

[당신의 모든 종합 능력치가 비정상적으로 성장합니다!]
[당신이 투자한 코인이 해당 시나리오의 능력치 제약을 넘어섰습니다.]
[충만한 개연성이 해당 시나리오의 능력치 제약을 일부 해제합니다.]
[투자 코인 대비 능력치의 성장이 임의로 조정됩니다.]

엄청난 스파크가 전신에서 튀어 올랐다.
근육이 찢어지는 느낌과, 키가 조금 자라는 듯한 느낌. 거기다 골밀도가 변하는 느낌이 동시에 찾아오며 일순간 끔찍한 통증이 덮쳐왔다.

“커헉······.”

가성비가 좋지 않아 최후의 최후까지 미루고 있었던 일이지만, 지금은 이것 밖에 방법이 없었다.

[당신의 정신이 화신체의 진화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합니다!]
[당신의 화신체가 새로운 단계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초반 시나리오 이후부터 ‘종합 능력치’는 전투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설화나 성흔, 스킬 등이 전투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100 레벨 이후의 종합 능력치는 구간당 코인 증가폭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서, 같은 양의 코인을 사용한다면 당연히 스킬을 구매하는 쪽이 이득이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당신의 모든 종합 능력치가 200을 돌파했습니다!]
[당신의 화신체가 더 커다란 ‘격’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강력한 스킬이 아니라, 튼튼한 육신이니까.

고오오오오!

[당신의 민첩이 공기의 저항을 완화합니다.]
[당신의 마력이 막혀 있던 혈도를 개방합니다.]

엄청난 양의 코인이 고스란히 나의 화신체로 변모하고 있었다.

[당신의 근력이 폭발적인 변화를 일으킵니다!]

발걸음을 내딛는 폭도, 쓸려가는 전경의 속도도 완연히 달라졌다.

“유중혁!”

물론 이런 돈지랄로도 성좌들을 능가하거나 초월좌들을 넘어서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잠시나마, 그들에게 맞설 정도의 육신은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화신체를 부러워합니다.]

엄청난 속도로 황야를 가로지르자, 마침내 전장의 중심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죽어가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이 멍청아! 뭐하는 거야!”

눈부신 빛을 발산하는 수르야의 빛 앞에, 유중혁이 죽어가고 있었다. 왼쪽 팔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새카맣게 타버린 전신에서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중혁은 [흑천마도]를 움켜쥔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천천히 움직인 유중혁의 고개가, 나를 바라봤다.
입술을 뗄 힘도 남아 있지 않은 듯,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제4의 벽’이 크게 흔들립니다.]

양산형 제작자의 말이 떠올랐다.
성좌들 또한 이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라고.
그들 역시 너무나 외롭고 고독해서, 이런 짓들을 벌이는 것이라고.

······개소리.

[물러서라!]

‘원시의 창’을 휘두르는 마누가 내 앞을 막아섰다.

[전용 스킬, ‘전인화 Lv.12(+2)’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백청의 전격이 주먹 끝에서 폭발하자, 전장이 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크아아앗!]

당황한 성좌들이 튕겨 나가는 마누를 지탱하며 ‘격’을 일으켰다. 폭포처럼 쏟아진 성좌들의 마력이 해일처럼 내게 밀려들었다.

콰지지지직!

강화된 신체가 광폭한 성좌들의 마력을 견뎌냈다.
주먹의 살갗이 갈라지고, 터진 살점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래도 견딜 만했다. 먼지가 가라앉은 자리에 성좌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내가 이 정도의 힘을 가졌을 줄은 몰랐는지, 경악한 기색들이었다.

[막아라!]

달려드는 성좌들을 향해 백청의 강기를 날렸다. 순식간에 등허리와 허벅지에 찰과상이 생겼고, 옆구리에는 긴 자상이 남았다.

“유중혁!”

내 외침은 제대로 닿지 않았다.
무릎을 꿇은 유중혁의 생명은 이제 경각이었다.
한줌의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 상황.

유중혁이 죽는다.

나는 숨을 힘껏 들이마신 뒤, 내가 외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진언을 발했다.

[아스모데우스!]

사자후처럼 터진 진언에, 일순간 성좌들이 귀를 막았다. 격을 감당하지 못한 위인급 성좌들이 눈에서 피눈물을 쏟았다. 나는 다시 한 번 외쳤다.

[네놈도 ‘마왕’이라면, 약속을 지켜라!]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약삭 빠른 녀석이라면 지금 내 편을 드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아스모데우스’라면······.

츠츠츠츠츠츳!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허공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새카만 폭풍이 몰아치며, 무언가가 강림하고 있었다.

[마왕, ‘정욕과 격노의 마신’이 마계에 현신합니다!]

엄청난 개연성이 흘러 들어가며, 어마어마한 존재가 내 눈앞에 화신으로 현현하고 있었다.

츠츠츠츠츠츠!

새카만 아우라를 풍기며 어둠 속에서 작은 여자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초월형을 각성한 유중혁을 단숨에 제압했던 마계의 왕.
훗날, 이 세계 최대 최악의 단체인 ‘종말의 구도자’ 중 하나가 될 존재.

[마, 마왕이다!]

32번째 마계의 왕, 아스모데우스가 날뛰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하하핫!]

웃음 소리와 함께, 거대한 갈퀴가 마왕의 손끝에서 나타났다. 아스모데우스의 성흔인 ‘핏빛 손아귀’가 공간 전체를 긁으며 성좌들을 찢어대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악!]
[미친 마왕 놈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놀란 성좌들이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순간, 나는 [바람의 길]을 발동해 유중혁을 낚아 챘다.

[쫓아라!]

뿔난 성좌들이 거리를 좁히며 달려왔지만, 강화된 내 화신체가 녀석들보다 조금 더 빨랐다. 나는 유중혁을 어깨에 들쳐멘 채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정신차려라, 제발.”

유중혁은 거의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평소보다 가벼워진 몸무게.
얼마나 심한 고통을 겪은 것인지, 몸의 골격까지 변한 것 같았다. 점점 희미해지는 녀석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나는 발악하듯 외쳤다.

“야, 장난치지 마! 기사회생 발동할 수 있잖아! 뭐라도 해보라고!”

그러나 유중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달리면서 비유를 불러 또 다시 [대환단] 몇 알을 구매했다.
왼손으로 녀석의 육신을 지탱한 채, 오른손으로 유중혁의 입 속에 환단을 흘려 넣었다. 하지만 차도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 놈에게는 그걸 삼킬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서서히 멀어지는 숨소리.
유중혁의 발끝이 부스러지며 녀석의 몸이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바람의 길]을 이용해 그 부스러기들이 빠져 나가지 않도록 감쌌다.
그러나 녀석의 심장 어귀에서 희미한 빛이 떠오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게 무슨 현상인지 잘 알고 있었다.
몇 백 번이나 그 장면을 보았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유중혁은 생각했다.」

“생각하지 마.”

「이번 생은, 여기까지라고.」

“빌어먹을! 생각하지 말라고!”

유중혁의 뺨에서 설화가 떨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그 설화를 수습해 녀석의 뺨에 붙이며, 허공을 향해 외쳤다.

“제기랄! 회귀 시키지 마! 이 자식 좀 가만히 놔두란 말이야!”

[화신 ‘유중혁’의 배후성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아직 살아날 수 있어! 이번 회차 안 끝났어! 이놈 다시 싸울 수 있다고! 내가 살릴 수 있단 말이다!”

유중혁의 배후성은 말이 없었다.
녀석이 하는 일은 언제나 같았다.
죽음 속에서 고통받는 유중혁을 지켜보고.
무참히 망가진 녀석의 영혼을, 다시 과거의 세계선으로 욱여넣는 것.

[성흔, ‘회귀 Lv.3’이 발동합니다!]

잔혹하다.
정말 이렇게 끝나는 건가?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유중혁이 여기서 죽는다고?
한 줄의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화신 ‘유중혁’이 자신의 배후성을 바라봅니다.]

“······유중혁?”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넝마가 된 유중혁이, 피칠갑을 한 눈으로 자신의 배후성을 보고 있었다.

츠츠츠츠츳!

사라지던 녀석의 육체가 스파크 속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화신 ‘유중혁’이 자신의 배후성에게 저항합니다.]
[화신 ‘유중혁’의 모든 설화가 죽음에 저항합니다.]

그리고 내가 본 어떤 회차에서도 없었던 일이 벌어졌다.

[화신 ‘유중혁’이 회귀를 거부합니다.]





< Episode 50. 독자의 설화 (6) > 끝

< Episode 50. 독자의 설화 (7) >





파르르 떨리는 유중혁의 전신.

「······죽을 수 없다.」
「결코 여기선 죽지 않는다.」

필사적인 유중혁의 의지가, [전지적 독자 시점]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야, 너······.”

그 유중혁이, ‘회귀’를 거부했다.

[화신 ‘유중혁’의 배후성이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처음 있는 사태 앞에서, 유중혁의 배후성은 침묵했다.
알 수 없는 침묵이었다.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했고, 슬퍼하는 것 같기도 했다. 혹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중혁을 바라보던 시선은 씻은 듯 사라졌다.

[성흔 ‘회귀 Lv.3’의 발동이 취소됩니다.]

마치,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것처럼.
성흔의 빛이 사라지자, 유중혁은 다시 축 늘어졌다. 간신히 떴던 눈은 감겼지만, 녀석의 입은 천천히 우물거리고 있었다. 필사적인 생의 의지가 느껴졌다. 어떻게든 살아남고야 말겠다는, 유중혁 특유의 집념.
머릿 속으로 유중혁의 생각이 들려왔다.

「더 잘게 부숴라. 내가 먹을 수 있게.」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내리누른 채, 또 다른 [대환단] 한 알을 꺼내 가루를 내어 녀석의 입에 털어 넣어 주었다.
무너지던 녀석의 설화가 서서히 붕괴를 멈추고 있었다.

“······멀쩡하네.”

유중혁은 이번 회차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몇 번이고 실패해도 괜찮았을 그 모든 기회를 저버리고, 이 세계에 남기로 한 것이다.
의식을 잃었는지 유중혁은 말이 없었다.
대신, 유중혁의 몸을 감싼 설화가 환하게 빛났다.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이야기를 지속합니다.]

생과 사의 동료.
원작의 유중혁에게는 없던 설화였다.

「“유중혁과 무슨 관계지?”
“생사를 따로 한 동료입니다.”」

충무로에서였던가.
분명 그런 대화를 공필두와 나눈 적이 있었다.
헛웃음이 나온다.

이젠 정말로 같이 살거나, 같이 죽겠구나.

흔들리는 유중혁을 꽉 움켜쥔 채 달렸다.
멀리서 뭐라고 소리치는 일행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뒤쪽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바람을 가르는 맹렬한 파공성과 함께, 불덩이들이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갔다. 성좌들이 어느새 바로 뒤까지 추격해 오고 있었다.

[다른 마왕을 부르다니? 네놈이 무슨 일을 벌인 건지 알고 있느냐?]

성좌들이 가공할 기세를 내뿜으며 노호성을 토해냈다.

[바보 같은 놈. 이제 ‘73번째 마계’는 멸망할 것이다!]

나는 녀석들에게 대거리하는 대신, 전방의 이현성을 향해 소리쳤다.

“이현성 씨!”

유중혁의 몸이 허공을 날았고, 달려온 이현성이 유중혁을 받았다.
나는 거의 동시에 허리를 틀며, 반사적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꽈아아아앙!

달려오던 성좌 하나가 나와 충돌하며 비명을 질렀다.
[전인화]의 전격이 ‘전갈의 여신’의 꼬리와 부딪쳤고, 이어서 휘두른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우레를 먹는 새’의 전격을 받아냈다. 힘을 흡수한 ‘신념의 칼날’이 폭발할 것처럼 환하게 빛났다.
올라오는 울혈을 참으며, 나는 받아낸 전격을 [전인화]의 힘으로 밀어냈다.

콰드드드드드드!

쫓아온 성좌들의 숫자는 일곱.
나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숫자였다.
더 큰 문제는, 허공의 먹구름이 짙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쿠구구구구!

불길한 전조처럼 몰려든 암운(暗雲)에, 73번째 마계를 비추던 별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사실 내가 지금까지 ‘아스모데우스’를 부르지 않은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하늘에서 새카만 전격이 연달아 내리 꽂히며, 기겁한 성좌들이 펄쩍 뛰며 물러났다.

츠츠츠츠츠츳!

허공에 튀는 스파크와 함께 개연성을 얻은 마왕들이 강림하고 있었다.
아스모데우스가 이곳에 현신한 이상, 이제 다른 마왕들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 마왕들은 내 편이 아니었다.

[마왕, ‘불화의 조성자’가 마계에 현신합니다!]
[마왕, ‘시체를 철학하는 군주’가 마계에 현신합니다!]

화신체의 소환만으로도, 다른 성좌들을 능가하는 격이 느껴졌다.
이제 나를 도와줄 존재는 없다.

[‘73번째 마계’가 당신의 설화에 반응하고 있습니다.]

믿을 것은 내가 쌓아온 이야기뿐이었다.

“모두 뒤로 물러나요! 제가 시간을 끌 동안, 최대한 체력을 비축하세요!”

일행들 중 하나가 기행을 벌인 것은 그때였다.

두두두두두두!

굉음과 함께 내 곁을 스쳐가는 인영.

“한 부장님? 무슨······.”

[외발 준족]을 발동한 한명오가, 엄청난 속도로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곳은 정확히 내가 도망쳤던 방향.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있는 쪽이었다.


*


[아하하하하하핫!]

마왕 아스모데우스는 즐거워 보였다.
화신체 곳곳에는 빛의 화살이 박혀 있었고, 찢어진 팔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음에도, 어린 소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오직 쾌락과 환희의 감정뿐이었다.

[즐거워! 즐겁구나!]

미친 듯이 휘두르는 ‘핏빛 손아귀’에 다수의 성좌들이 화신체를 잃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은 성좌들은 많았다.
마왕은 기본적으로 설화급 성좌들과 동등한 격을 가진 존재.
평범한 성좌들이 상대라면 모르겠으나, 무려 <로카팔라> 중 하나인 수르야가 있는 지금 아스모데우스에게 승산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수르야가 입을 열었다.

[이유가 궁금하구나,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여.]

먼 곳에서 커다란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아마, ‘구원의 마왕’을 쫓아간 성좌들이 마지막 결전을 치르는 모양이었다.

수르야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저 인간들은 아직도 저항하는 것인가.
그리고 이 마왕은 왜 그런 인간들의 편을 드는 것인가.
살짝 지친 듯, 숨을 몰아쉬며 아스모데우스가 웃었다.
수르야가 왼손을 들어 올리자, 성좌들의 공격이 멎었다.

[아스모데우스, 어째서 하찮은 인간들의 편을 드는 것이냐?]
[편이라······ 난 누구 편을 드는 게 아니야.]

히죽 웃은 아스모데우스가 핏빛 손아귀에 묻은 혈흔을 핥으며 말했다.

[그냥, 재미있을 것 같으니 저질러 보는 것 뿐.]
[······재미?]
[너는 몰라. ‘구원의 마왕’이 가진 ‘설화’가 어떤 건지 말이야.]
[나도 보았다. 흔한 설화였지.]

그 말에, 아스모데우스가 대소했다.

[하하하핫! 수르야! 그렇게 빛을 뿜어대더니 마침내 눈도 멀어버린 모양이구나! 내가 전에도 얘기했을 텐데. 설화를 오래 누리고 싶다면 시력 관리를 잘 하라고.]
[······그 아이가 신성(新星)들 중 괜찮은 편이라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스타 스트림> 전체를 따지면 평범한 수준일 뿐이야. 아직 신화급 설화 하나 가지지 못한 녀석이다.]

인상을 찌푸린 수르야의 전신에서 ‘격’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아스모데우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신화급 설화라······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았으면서도 아직도 그딴 ‘급수’로 설화를 평가하는 건가?]
[인간의 역사일 뿐이다. 평가조차 필요하지 않지.]
[모든 설화는 결국 역사에서 출발하는 법.]
[······아스모데우스, 미식협 놈들과 놀아나더니 말만 번지르르해졌구나. 그래서 우리를 계속 막을 셈인가? 너는 결국 화신체를 잃고 자멸할 것이다.]
[뭐, 그렇게 되겠지. 그렇기는 한데······.]

한 걸음씩 포위망을 좁히는 성좌들을 보며, 문득 아스모데우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수르야, 너는 왜 ‘구원의 마왕’에게 집착하는 거지?]
[······집착? 무슨 소리냐?]
[정확히는 너뿐만 아니라 너네 성운 전체가 그런 모양이던데. 아닌가?]
[눈이 먼 것은 너인 것 같군.]
[고작 인간의 역사니 뭐니 잘도 지껄여대면서, 너네 <베다>는 구원의 마왕을 포섭하려고 했지. 심지어는 그게 실패했다는 이유로, 옹졸하게 녀석을 죽이려 하고 있고. 지극히 거대 성운 답지 않은 짓이야.]
[······.]
[이쯤 되면 내가 묻고 싶어. 대체 왜 그러는 거냐?]

수르야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 미묘한 감정이 번지고 있었다. 그 감정을 감추려는 듯, 수르야는 황급히 오른손을 쳐들었다. 성좌들에게 공격 신호를 내리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아스모데우스가 말했다.

[잠깐만, 아하하······ 하하하핫. 그렇구나. 수르야······.]
[······.]
[너······ ‘미식협’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거야.]

높이 치켜든 수르야의 손이 멈칫했다.

[‘구원의 마왕’은 ‘마지막 시나리오’를 추구하는 존재. 그래서 너는 그를 싫어하는 거야. 그렇지?]

파르르 떨리는 수르야의 손가락이, 그의 동요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 동요를 비웃듯, 아스모데우스가 말했다.

[왜냐하면 수르야 너는, ‘끝의 자격’을 얻지 못했으니까.]

콰드득!

섬전 같은 빛의 창이, 아스모데우스의 몸을 꿰뚫었다.
짙은 조소를 머금은 아스모데우스의 입술이 비죽였고, 빛의 창은 쉴 새 없이 그의 몸에 내리 꽂혔다.
후두둑 떨어지는 핏방울.
급하게 구현한 화신체는 평소보다 훨씬 연약했다.
아스모데우스는 찢어진 뱃가죽 사이로 흘러나오려는 내장을 틀어 막았다.

[······인간의 몸은 정말 불편하다니까.]

다가오는 성좌들을 일별한 아스모데우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카만 먹구름 사이로 도드라지는 별들의 모습.
하늘의 빛과 어둠이 세를 겨루고 있었다.
‘73번째 마계’를 둘러싸고, 그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강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아스모데우스조차, 저런 광경을 본 것은 간만이었다.

오늘, 이 마계에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수르야의 빛의 창이 움직였고, 성좌들이 아스모데우스를 향해 마력을 쏟아냈다.
그렇게 아스모데우스의 화신체가 소멸하려는 바로 그 순간.

두두두두두!

뿌연 먼지구름이 성좌들의 시야를 가렸다. 놀란 성좌들이 잠시 방황하는 순간, 누군가가 아스모데우스의 작은 몸을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아스모데우스조차 이번만큼은 놀랐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한 번도 누군가에게 구해진 적은 없었다.

[너는······?]

헐떡거리는 한명오가 그를 업은 채 달리고 있었다. 성좌들의 공격을 받은 한명오는 한쪽 귀와 왼팔의 일부가 사라져 있었다.
멍한 얼굴로, 아스모데우스가 중얼거렸다.

[어째서······.]

이 자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자가 왜 이곳에 온 것인지 아스모데우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권속이라해도, 이렇게 자신에게 충성할 이유는······.

꾸욱.

한명오가 아무 대답도 없이 아스모데우스를 강하게 끌어 안았다.
권속에게서 느껴지는 맹목적이고 커다란 마음.
그 감정은 자신을 향한 감정이 아니었다.
한명오의 품에 안긴 아스모데우스가 아득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이번 시나리오는 재미있다니까······.]


*


“······미안합니다, 여러분. 함께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김독자가 그렇게 말했을 때, 제일 먼저 일어선 것은 장구류를 손질하던 이현성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상아와 파천신군이 뒤를 이었고, 겁에 질린 신유승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니피그처럼 변한 오수가 작게 짖었다.
초라한 전력이었지만, 모두가 굳은 결의였다.

쿠구구구구.

성좌들의 ‘격’앞에서, 인간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콰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전투는 시작되었다.
한 방을 맞으면 뼈가 부러졌고, 두 방을 맞으면 치명상을 입었으며, 세 방을 맞으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마왕들이 나타나면서 전세는 더욱 혼란해졌다.
마왕에게 당한 일행들이 실이 풀린 연처럼 허공을 날았다.

“크허헉!”

제일 먼저 이현성이 주저앉았고.

갸아아아악!

키메라 드래곤이 비명을 지르며 날개를 꺾었다.
그리고 장하영은 주저앉아 그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아, 아아. 아······.”

압도적인 무력감 앞에, 장하영은 움직일 수 없었다.
장하영이 배운 [파천검도]는, 하늘을 부수기엔 너무나 약했다.
벽을 통해 배운 절기들은 지고한 별들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마왕에게 얻어 맞은 배를 붙잡은 채, 장하영은 최전방에서 맞서 싸우는 김독자를 보았다.

콰드드드드드!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구원의 마왕’이 싸우고 있었다.
옆구리가 터지고, 오른쪽 팔이 부러지는 상처를 입으면서도.

함께 싸우고 싶었다.

하늘의 별들만이 무심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토록 많은 별들이 있음에도, 어째서 그들을 돕는 별은 하나도 없는 것일까.

[전용 스킬, ‘정체불명의 벽’을 발동합니다!]

사실, 이미 몇 번이나 해본 일이었다.
김독자가 말해준 수식언들에게 몇 번이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없었다. 그럼에도 장하영은 답 없는 기도를 하듯 성좌들을 찾았다.
제발, 제발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정체불명의 벽’이 묻습니다. ‘정말로 돕고 싶은 거냐?’]

옅은 진동과 함께, 벽이 묻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벽’이 묻습니다. ‘정말 돕고 싶은 거냐고.’]

고개를 끄덕인다. 돕고 싶다고.
무슨 대가를 감수해도 좋으니, 제발.
그러자 다음 순간, 장하영의 눈앞에 무수한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저, 안녕하세요. 혹시 ‘김독자’라고 아시나요? 그 녀석이 성좌님을 찾는데······.
─안녕하세요 성좌님. 다름이 아니라, 부탁 드릴 게 하나 있어서······ 혹시 ‘김독자’라고······.
─성좌님, 제발 도와주세요. 김독자가 위험해요.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

장하영은 멍한 얼굴로, 눈앞에 떠오른 수백 개의 메시지들을 읽었다.
모두, 자신이 보낸 메시지였다.

[현재 발신 대기 중인 메시지가 124통 있습니다.]

정확히는, 보냈다고 믿었던 메시지였다.

“왜, 왜······?”

서서히 소름이 돋는다.
그 무수한 성좌들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던 이유.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보내지 말라고 했으니까.’]

“누가?”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나보다 더 높은 격을 가진 존재.’]

그게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장하영은 지금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보내줘. 지금 당장! 다 보내라고!”

정체불명의 벽은 잠시 말이 없었다.

[‘정체불명의 벽’이 한숨을 쉬며 말합니다. ‘후회하지 마라.’]

그리고 다음 순간, 머리가 터질 것 같은 통증이 뇌리를 찔렀다.

츠츠츠츠츠츳!

[124통의 메시지를 발송했습니다.]

댐 안에 저수되어 있던 막대한 양의 물이 방류되듯, 수많은 메시지가 장하영에게서 풀려나 천공을 날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1분, 2분······ 장하영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성좌, ‘외눈 미륵’이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응답했다.
마치 유성우의 폭격처럼,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채널 입장음.

[성좌,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성좌, ‘서애일필’이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성좌, ‘조선제일술사’가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성좌, ‘고려제일검’이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일그러진 하늘의 균형이 변하는 것을 보며, 장하영은 환희와 절망 속에 그 모든 메시지들을 들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 Episode 50. 독자의 설화 (7) > 끝

< Episode 50. 독자의 설화 (8) >





하늘에서 몰아치는 성좌들의 입장음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당신에게 호의를 품은 성좌들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모두, 한 번씩은 내 편을 들어 주었던 성좌들이었다.

[성좌, ‘서애일필’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조선제일술사’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개중에는 지구의 성좌들도 있었고.

[성좌, ‘고려제일검’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던 척준경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반가운 존재는 따로 있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은밀한 모략가.
나는 녀석이 정확히 누구인지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녀석이 호의를 갖고 내 시나리오를 꿋꿋이 지켜봐 주었다는 것뿐.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양손을 조심스레 모읍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힘내라며 주먹을 불끈 쥡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툴툴대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걸로 나와 함께했던 네 명의 초기 성좌들이 모두 모였다.

[‘73번째 마계’에 당신의 설화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충만하게 쏟아지는 시선 속에, 나는 모든 이야기의 처음으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수르야가 말했다.

[아이야, 너의 기대는 잘 알겠지만 그들은 너를 돕지 않을 것이다. 성좌들은 영리해서 너희 인간들처럼 미련한 선택은 하지 않으니까.]

나는 간신히 서 있는게 고작인 동료들의 모습을 보았다.
동료들은 쓰러진 유중혁을 중심으로 방진을 치고 있었다.
수르야가 웃었다.

[그들 중 누구도, 성운의 적의를 사고 싶어하진 않을 테니······.]

쿠구구구구!

말하기가 무섭게, 수르야와 나 사이에 지진이 일어났다.
땅은 순식간에 습기를 머금더니, 이내 눅눅하고 끈적한 늪으로 변했다.

츠츠츠츠츳!

한 걸음이라도 내딛으면 빨려들 것 같은 늪 속에서, 누군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나는 그게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 차렸다.

[성좌,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마계에 현현합니다!]

성급한 늪의 포식자.
나와 ‘미식협’에서 다툰 적이 있는 성좌였다.
나한테 당해 빚더미에 앉았던, 그래서 집행부에 끌려 갔던 녀석.

그오오오오오!

삼십 미터를 훌쩍 넘는 체고의 도마뱀.
늪에서 깨어난 태고의 도마뱀이 전율적인 포효를 터뜨렸다.

‘성급한 늪의 포식자’를 알아본 파천신군이 내 곁으로 붙어서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 이번에 녀석은 우리의 적이 아니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빚을 갚으러 오신 겁니까?”

언젠가, ‘양산형 제작자’는 내게 조언했었다.
적을 너무 많이 만들지 말라고.

[······그깟 몇 푼쯤은 네가 도와주지 않았어도 갚을 수 있었다!]

홱 고개를 돌린 도마뱀의 거대한 아가리가, 성좌들을 향해 위협적인 적의를 드러냈다.

[나는 저 녀석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온 것뿐이다!]

짧은 말을 마친 거대 도마뱀이 성좌들을 향해 돌진했다. 굉음을 내며 달려든 괴물에 성좌들이 소리를 지르며 물러났다.
‘성급한 늪의 포식자’는 저래봬도 설화급 성좌.
적이었을 때는 그토록 무서웠던 존재가, 같은 편이 되니까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분노한 수르야가 일갈을 내질렀다.

[미식협의 졸개여······ 성운이 두렵지 않은 것인가?]
[성운? 하하하핫! ‘미식협’이 언제 그런 것 따윌 신경 썼던가!]

미식협의 성좌들 중 상당수는 <스타 스트림>의 이단아들이다.
소속된 <성운>이 있든 없든, 그런 것 따윈 아랑곳 않고 자신의 의지를 실천하는 존재들.
소속 <성운>이 없는 ‘성급한 늪의 포식자’는 그런 미식협의 성좌들 중에서도 유독 자유분방한 편이었다.

[그아아아앗!]

거대한 도마뱀이 꼬리를 휘두르자 지표면이 갈라지며 거대한 파편들이 날아올랐다. ‘우레를 먹는 새’와 ‘나일강의 괴조’가 그에 맞서 달려들었다. 거대 괴수들이 육탄전을 시작하자,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아수라장의 중심에서, 하늘로 떠오른 수르야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쓰레기 하나가 끼었다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콰아아아아아!

수르야의 빛살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전인화]에 [바람의 길] 까지 사용했음에도 피하기 쉽지 않은 속도였다.
지고한 <로카팔라>의 격에 내가 맞설 수 있을 리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츠으으으읏!

살갗이 찢기며 뼈가 드러났다. 통증이 엄습하는 와중에도, 나는 어떻게든 시간을 벌기 위해 애썼다.
내 신경은 허공의 시스템 메시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곧 2차전의 승자가 발표됩니다.]

어차피 게임의 승자는 이쪽. 아무리 강력한 존재가 시나리오를 지연시키더라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즉, 시간만 벌면 이 승부는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다.

[아이야,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아까보다 훨씬 많은 양의 개연성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본래 이 시나리오에 허락되어 있던 개연성이 아니었다. <베다>에서 제공하는 개연성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츠츠츠츠츳!

하늘의 천칭이 뒤바뀌듯, 개연성의 저울이 기울고 있었다.

[<베다>의 뜻이 이곳에 임하리라.]

수르야의 뒤쪽으로 환한 태양이 강림하고 있었다. 온 몸이 녹아버릴 것처럼 땀이 흘러내렸다. 하나, 둘, 셋, 넷······ 하나하나가 지상을 불태워 버리기에 족한 광원(光源)들. 쳐다보는 것만으로 눈이 멀어버릴 듯한 ‘격’에 나는 차마 수르야를 바라보지 못하고 이글거리는 놈의 그림자에 집중했다.

[설화, ‘열두 태양의 왕’이 빛을 발합니다.]

그는 <베다>의 수르야.
그는 열두 명의 태양신을 통합한 왕이었다.

[이제 격의 차이를 알겠느냐?]

탈진한 일행들이 곳곳에서 쓰러진 채 신음을 흘렸다.

“아으, 으으으······.”

그아아아아!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고통스러운 듯 몸부림을 쳤고, 전투를 치르던 다른 성좌들도 수르야를 경외심 어린 눈으로 올려다 보고 있었다.
수르야는 지금도 강력하지만, <베다>의 ‘멸망 시나리오’가 끝나면 더욱 강력해지는 성좌였다. 훗날 태양신 사비트리와 비바스바트의 힘을 모두 흡수한 수르야는, ‘멸살법’ 265회차의 지구를 불지옥으로 만드는 괴물이 된다.
하지만 적이 아무리 강해도 발악은 해봐야 했다.

[성흔, ‘칼의 노래 Lv.3’을 발동합니다!]
[충무공이 남긴 소절이 당신의 검에 무작위로 깃듭니다.]

「야밤에 신인(神人)께서 꿈에 나타나 말씀하시길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길 것이요, 저렇게 하면 패할 것이니라"라고 하셨다.」

언젠가 ‘레서 드래곤’을 상대할 때 들은 적이 있는 구절이었다.

[위인급 성좌의 성흔인가. 하찮은 재주를 쓰는구나.]

스킬의 효과 덕분인지 나는 선글라스를 낀 것처럼 광원을 정면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이 구절은 적의 약점을 색깔로 알려주는 효과가 있다. 초록색은 강한 부분이고 붉은색은 약한 부분이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수르야를 노려보았다.
노려보고 또 노려보았다.
등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그래, 무엇을 보았느냐?]

고요히 웃는 수르야가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훔친 성흔으로 날뛰어 봤자다. 성좌위에 올랐다고 해도, 너는 태생이 인간인 존재.]

수르야의 전신은 모두 초록빛.
어디에도 약점 따윈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역사로는 신을 넘을 수 없다. 이 <스타 스트림> 어디에도, 그런 존재는 없었으니까.]

수르야는 나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다.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돕는다 해도 무리다.
나는 찢어진 코트를 던지며 말했다.

“······개연성의 저울이 기울었어. 그건 우리도 추를 더 올려 놓을 수 있다는 뜻이야.”

[누가 온다한들 저울은 평형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내 이야기는 신화가 아니다.
나는 신도 영웅도 아니니까.
<스타 스트림> 전체를 뒤지면 내 이야기 정도는 흔한 것일 지도 모른다.

[밤하늘의 성좌들이 결단을 내립니다.]

그럼에도 이 세계의 누군가는, 그런 내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었다.

“그건 달아봐야 알겠지! 오십시오, 고려제일검!”

츠츠츠츠츠츳!

폭발적인 스파크와 함께, 먹구름을 꿰뚫고 한 줄기 유성이 떨어졌다.

[성좌, ‘고려제일검’이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화려한 검식이 하늘을 찢었다.
언젠가 본 적이 있었던 삼검식이었다.

[누가 나 척준경을 불렀는가!]

벼락처럼 내리꽂힌 검이, 수르야의 태양 하나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눈이 멀어버릴 듯한 폭발과 함께, 수르야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하찮은 위인급 따위가······!]

뜨거운 섬광이 지상을 향해 쏟아지는 순간, 뭔가가 지반을 쿵 내리찍으며 나와 동료들을 뒤쪽으로 날려 보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한 사내의 품속에 있었다. 크기로만 치면 파천검성 못지 않은 거한.

[간만이구나, 후인이여.]

웅장한 격을 뿜어대는 고려제일검의 본신이 눈앞에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격이 변하셨군요.”

분명 위인급 성좌였던 척준경은, 이제 완연한 설화급의 격을 내뿜고 있었다.

[그대 덕분이지. 여러 일들이 있었다.]

예상은 했다. 그때 척준경은 ‘이계의 신격’과의 싸움에 동참했었다. 분명 나 못지 않게 강력한 설화를 얻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한 단계 높은 격으로 상승할 수 있었겠지.

[마침내 그대에게 빚을 갚을 수 있겠구나.]

척준경이 눈치를 주듯 하늘을 올려다보자,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들이 이어졌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분하다는 듯 침음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우울한 눈빛을 합니다.]

아마 이곳에 오고 싶었던 것은 다른 성좌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개연성의 제약도 있고, 성운들의 눈치도 있으니 움직이지 못했겠지.
특히 우리엘은 <에덴> 소속이니 문제가 더욱 복잡할 것이다.
잘못하면 ‘성마대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니······.
우리엘한텐 지금까지도 충분히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섭섭하진 않았다.

“옵니다.”

콰아아아아아아!

수르야가 쏘아 보낸 빛살들이 파도를 이루어 덮쳐왔다.

[······인도 쪽 신격들이 장난이 아니라는 건 알고있었지만, 과연 괴물이구나.]

척준경은 나를 보호하며 밀려드는 빛살들을 베어갔다.
하지만 척준경의 칼날도 조금씩 녹거나 부식되고 있었다.

[태산도 바다도 갈라 보았지만, 태양을 베어본 적은 아직 없다. 저런 괴물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예’를 데려왔을 것을.]

‘예’라면 아마 중국 신화의 ‘태양 사냥꾼’ 예를 말하는 것이겠지.
척준경이 그쪽과도 친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예는 어차피 <황제> 소속의 성좌니, 수르야를 상대하려 하진 않을 것이다.

[그대는 내가 상대하겠다!]

‘인류의 시조’가 척준경을 향해 달려들었다. 희대의 무장들이 격전을 벌이자 주변은 순식간에 검강의 잔흔으로 폐허가 되어갔다.

[‘73번째 마계’의 문장이 당신의 설화를 기웃거립니다.]

내 품속에서 흘러나온 뭔가가 두둥실 하늘 위로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그것은 내가 지난 게임에서 얻었던 ‘문장’들이었다.
수르야가 벽력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뭣들 하고 있는 건가! 시간이 없다! 빨리 놈들을 죽여!]

이 문장들은 ‘거대 설화’를 이루는 재료들.
마침내 이 세계의 ‘거대 설화’가 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왕, ‘불화의 조성자’가 당신을 향해 적의를 드러냅니다.]

방관하며 소극적인 움직임만을 보이던 마왕들이, 마침내 움직였다.
‘불화의 조성자’가 날려 보낸 가벼운 열풍에, 나는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허공을 날았다.
우군이 두 명이나 왔는데도, 전황은 터무니없이 불리했다.

츠츠츠츠츠츳!

마왕들이 힘을 개방하자 개연성의 저울이 다시 한 번 삐걱거렸다.
더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누가 저 강력한 마왕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아무리 떠올려도 당장 도움을 청할 만한 성좌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가오던 마왕들이 일순 주춤한 것은 그때였다.

“전군 발포하라!”

투콰아아앙!

어디선가 들려오는 대포 소리와 함께, 익숙한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나야!”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늦어서 미안해!”

멀리 떨어진 공단의 해자(垓字) 쪽에서, 이지혜의 유령함대가 이쪽을 향해 발포하고 있었다.
분노한 마왕들의 간접 메시지가 허공을 가득 메웠다.
이지혜를 향해, 두 명의 마왕이 몸을 돌리고 있었다.

“지혜야!”

도와주러 온 것은 좋지만, 이지혜 하나만으로는 무리였다.
상대는 마왕 둘.
저런 무모한 짓을 하면, 순식간에 살해당할 뿐이다.

“도망쳐!”

발을 끌며 걸음을 재촉했지만, 먼젓번에 당한 상처 때문에 운신이 쉽지가 않았다. 마왕들은 포화를 맞아가며 어느새 이지혜의 근방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는······ [바람의 길]을 사용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은 것은 그때였다.

“독자 씨, 또 혼자 하려고 하네······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요.”

수르야의 빛을 너무 오래 쐰 탓일까. 스쳐가는 여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동전 던지기 져서 늦게온 거니까, 너무 섭섭해하진 마요.”

여인은 마왕들을 향해 걸어갔다.

“잠깐만요! 희원 씨!”

정희원은 강하다.
아마 개인 시나리오를 수행하며, 더욱 강해졌겠지.
하지만 마왕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아무리 ‘심판의 시간’을 발동하더라도 마왕을 상대로는······.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걱정마요.”

착각일까.
그녀의 등 뒤로 천사의 날개 같은 것이 겹쳐 보였다.

“싸우는 건 내가 아니니까.”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엄청난 ‘격’이 눈앞에서 발현하고 있었다. 이지혜를 향해 돌진하던 마왕들이 경악한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츠츠츠츠츠츠츠츠츠츳!

정희원에게 강림한 성좌의 힘이 마계 전역을 뒤덮으며, 한순간 세계가 은빛으로 물들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73번째 마계’에 현현했습니다.]





< Episode 50. 독자의 설화 (8) > 끝

< Episode 51. 거대 설화 (1) >





Episode 51. 거대 설화


대천사 우리엘이 73번째 마계에 등장했다.
원작에서도 후반부로 가면 우리엘이 화신체에 직접 강림하는 경우는 왕왕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겨우 25번째 시나리오였다.
당황한 마왕들과 성좌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고요히 눈을 감은 정희원의 뒤쪽으로, 우리엘의 투명한 형상이 비치는 것 같았다. 화려한 아우라와 함께, 우리엘의 긴 금발이 허공에 물결쳤다.

츠츠츠츠츠츳!

개연성의 저울이 다시 기울고 있었다. 완전히 균형이 무너졌던 저울이, 우리엘 하나의 출현으로 서서히 평형을 이루고 있었다. 아니, 이젠 오히려 이쪽이 더 무거워진 것 같기도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저게 우리엘의 전력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쿠구구구구구!

전장의 모든 싸움이 중단되었다. 수르야가 긴장한 눈으로 이쪽을 주시했고, 난투극을 벌이던 성좌들도 격전을 멈추었다.
대천사의 강림은 성좌들에게도 엄청난 사건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올빼미 얼굴에 불타는 검을 쥔 마왕이었다.

[대천사!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난 것이냐!]

나는 녀석을 알고 있었다.
‘불화의 조성자’. 63번째 마계의 마왕인 ‘안드라스’.
놈은 언젠가 자신의 권속을 죽인 한수영에게 저주를 내린 적도 있었다.
이어서 곁에 있던 다른 마왕도 입을 열었다.

[시, 시, 시체가 되고 싶은 모양이군, 대천사.]

녹색 갑주에 왕관을 쓴 해골.
‘시체를 철학하는 군주’. 54번째 마계의 마왕인 ‘무르무르’였다.
비록 하위권의 마왕들이라곤 해도, 둘 모두 나와는 차원이 다른 강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강자들의 표정에서, 낯선 감정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강림을 마친 우리엘이 천천히 눈을 떴다.
섬연한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세상을 오시하자, 세계의 색깔이 변하는 느낌이었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나조차,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73번째 마계’를 바라봅니다.]

대천사의 시선은 ‘멸망’을 암시한다. 세계의 정화를 위해 마지막으로 세상의 모든 산 것들을 바라보는 응시의 눈빛. 그녀의 시선에 ‘73번째 마계’가 떨고 있었다.

[■■들아. 오랜만이다?]

두 명의 마왕이 서너 걸음을 물러났다.
정희원의 한쪽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너······ 내가 전에 그 칼 들고 다니지 말라고 했지? 나랑 캐릭터 겹치니까 짜증난다고.]

그 말에, 마왕 안드라스가 불타는 검을 스르륵 내렸다. 안드라스의 올빼미 눈이 빠르게 깜빡였고, 무르무르의 해골턱이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먼저 한 발짝 앞으로 나온 것은 무르무르였다.

[어리석은 대천사여! 지금 너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아니면······ 설마 에, 에덴이 ‘선발전’에 개입하기로 한······.]
[■까. 내 멋대로 온 거니까.]

나는 새삼 우리엘의 설정을 떠올렸다.
그동안 우리엘이 내게 살갑게 굴었기에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그녀는 <에덴>의 가장 무시무시한 대천사 중 하나였다.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그 어떤 대천사보다도 잔혹한 전투광이며, 가장 많은 악마를 학살한 대천사.

그녀가 허공으로 손을 치켜들자, 그녀의 손에 흰색의 불꽃으로 일렁이는 검이 나타났다. 그녀의 검 앞에, 주변의 모든 불길이 경의를 표하듯 꺼졌다.
[지옥염화]의 가장 지고한 불꽃을 담은 검.
우리엘의 성유물인 [업화의 불꽃]이었다.
그녀가 검까지 빼들자 마왕들은 다급한 표정이 되었다.

[협정을 잊은 건가?]
[■먹어. ■같은 ■■들아.]
[뭐, 뭣.]
[아, ■발, ■같은 필터링이······.]

<에덴>의 대천사들은 품격 유지를 위해 성운 측에서 자체 필터링을 걸어 놓는다는 설정이 떠올랐다.
그런 우리엘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 것은 그때였다.

[김독자?]

내가 너무 당황한 표정을 지었던 걸까.
우리엘이 어색하게 웃으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아, 안녕?]

종전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 창피한 듯 어색한 인사였다.

[다수의 성좌들이 할 말을 잃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뻘짓 말라며 손가락질을 합니다.]

방금 전까지 어마어마한 위협을 당하던 마왕들이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제정신을 차리고 꾸벅 인사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우리엘.”

[응!]

우리엘이 방긋 웃었다.

[당신은 대천사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대천사의 사랑을 받는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내가 무서워할까 심려했던 것인지, 배려심이 가득 담긴 간접 메시지의 폭탄이 쏟아졌다. 솔직히, 나는 조금 감동받고 말았다. 지금까지 내게 호의를 표한 성좌들은 꽤 있었다. 하지만 우리엘만큼 열심히 나를 도와준 성좌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늘 받기만 했을 뿐.
그럼에도 우리엘은, 나를 위해 오늘 이곳에 와주었다.
정희원의 양 팔을 걷어부친 우리엘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걱정 마 김독자! 내가 다 죽여줄게!]

저것이 퍼포먼스라는 것은 알고 있다.
이곳은 마계.
정말로 대천사가 여기서 힘을 발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을 보듯 빤했다.
그렇지만, 우리엘이 저렇게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엘?”

콰아아아아아!

“잠깐만요! 우리엘!”

우리엘의 검극에서 솟아난 염화가 끊임없이 뻗어 나가며 하늘에 도달하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진정한 [지옥염화]. 일격으로 하나의 세계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우리엘의 진짜 힘이었다.

[대, 대천사가 미쳤다! 도망쳐!]
[미친년이다!]

기겁한 성좌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도 우리엘이 진짜 힘을 발휘할 줄은 몰랐다. 급기야 어딘가에 숨어있던 독각까지 나타났다.

[자, 잠깐만요. 대천사님. 진정 좀 하시고······!]

그 간사한 모습에 열불이 났다.
승자 발표까지 지연시키면서 시나리오 내팽개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엘이 말했다.

[■까.]
[예, 예?]
[시나리오 ■까! 도깨비 ■까! ■발, ■같은놈들아.]

우리엘은 정말로 화가 난 표정이었다.
그녀의 분노에 마계의 하늘이 울부짖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구!

대천사의 검이 지상을 내리 찍으려는 그 순간.

[마왕, ‘헤아릴 수 없는 존재’가 분노를 토합니다.]

하늘에서 검은 마력이 격렬하게 몰아쳤다.

[마왕,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대천사를 응시합니다.]
[마왕, ‘강령의 마신’이 자신의 격을 드높입니다.]
[마왕, ‘검은 갈기의 사자’가 에덴을 향해 일갈을 터뜨립니다.]

수식언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최고위격의 마왕들이, 하나둘 이쪽 채널에 등장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자칫하면 여기서 성마대전이 일어나게 생겼다.
그런데 나타난 것은 마왕들만이 아니었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등장한 것만으로 모두를 긴장하게 만들 수 있는 최상위격의 성좌들.
<에덴>의 주요 성좌들이 채널에 입장하자, 채널의 부피가 급격하게 커졌다. 품속의 비유가 고통스러운 듯 몸을 떨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지엄한 눈으로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를 바라봅니다.]

우리엘의 검이 움찔 떨렸다.
마치, 시간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모든 마왕과 대천사들이 우리엘의 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검의 향방에, 마계와 에덴의 미래가 달려 있었다.

[마계의 마왕들과 에덴의 대천사들이 긴급 회동을 열었습니다.]

츠츠츠츠츳!

[현 시간부로 해당 시나리오의 마왕과 대천사들이 모두 긴급 소집됩니다.]

거대한 개연성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우리엘의 검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정희원의 몸이 흔들리며, 대천사의 기척이 마계에서 떠나가고 있었다.
우리엘이 옅은 미소로 나를 보며 말했다.

[끝까지 도와주고 싶었는데.]

뒤늦게야, 나는 우리엘의 의도를 깨달았다.

[이, 이런! 이럴 수는 없다!]

사라지는 것은 우리엘만이 아니었다. 미리 강림해 있던 마왕들 또한, 개연성의 스파크 속에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우리엘은, 자신을 희생해 이곳의 모든 마왕의 손발을 묶은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로군.]

감탄했다는 듯, 척준경이 중얼거렸다.

[저 지엄한 대천사가 그대를 위해 이토록 큰 희생을 할 줄이야······.]

우리엘이 감당하게 될 징벌에 대해서는 나도 예상할 수 있었다.
스스로의 의지로 성마대전의 협약을 위반한 대천사.
그녀는 아마 <에덴>으로부터 무지막지한 제재를 당하게 될 것이다.

[꼭 이겨, 김독자.]

사라지는 우리엘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미 그녀의 모습은 잿빛 속에 흩어진 뒤였다. 나는 쓰러지는 정희원을 재빨리 품에 안았다. 우리엘의 격을 그대로 감당한 정희원은 몹시 고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고오오오오오!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격의 풍압에 고개를 들자, 그곳엔 이 모든 사태를 지켜보던 수르야가 있었다.

[내 판단이 틀렸군. 설마 대천사를 불러낼 정도의 성좌였을 줄은 몰랐다.]

우리엘 덕분에, 마왕들의 참전은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더 나빠진 것도 있었다.
줄곧 나를 은근히 깔보던 수르야의 눈빛은, 이제 더 없이 진지한 빛을 띠고 있었다.
수르야의 좌우를 지키는 오이디푸스 왕과 마누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부터 진심으로 임하겠다.]

수르야의 신형이 쏜살같이 창공을 뚫고 솟아 올랐다. 주변의 공기가 변한다 싶더니, 일대를 중심으로 엄청난 풍압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쿠과과과과과과!

“이, 이게 무슨 소리야?”

떨어져 있던 일행들이 하나둘 내 곁으로 다가왔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지칠 대로 지친 장하영이었다.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저건 또 뭔데?”

찬란한 태양의 너머로, 먼 우주를 뚫고 뭔가가 날아오고 있었다. 대기를 모조리 찢어 발기는 파공음.
마치, 운석이 충돌할 때나 들을 수 있을 듯한 소리였다.
자세히 보니,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것은 거대한 마차였다.
무지막지한 크기의 황금빛 암말이 가속을 거듭할 때마다, 마계 전체가 터질 것처럼 뒤흔들렸다.

“······마차?”

저런 것을 마차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기관차라고 해야 할까. 어떤 단어도 어울리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크기의 물체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이 세계의 재앙이 될 거라는 것이었다.
유상아가 입을 열었다.

“수르야의 마차. 전설에 따르면 13만 킬로가 넘는 길이의······.”
“13만? 그게 말이 돼요?”

장하영이 묻자, 유상아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신화겠죠.”

거대한 거북이와 코끼리가 지구를 떠받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게 저 인도 신화의 신격들이다. 그러니 저런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기관차가 나타난다고 해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쿠구구구구구!

문제는 저 재앙을 우리가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대 설화, ‘베다(Vedas)’의 일부를 목도하였습니다.]
[당신의 설화 이해력이 상승합니다.]

······수르야가 말한 ‘진심’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었나.
나는 전신의 솜털을 오싹하게 만드는 ‘격’에 감탄했다.
저것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압도적인 절망감을 느꼈다.
고작 ‘일부’를 목도했음에도, 보통의 ‘설화’와는 차원이 다른 힘.
저것이 바로, 내가 [거대 설화]를 손에 넣어야만 하는 이유였다.

[제길, 달아나라!]

창공을 뚫고 돌진해오는 마차의 위용에, 벌써 몇몇 성좌들은 꽁무니를 감추고 없었다.
성좌든 뭐든, 저것을 맞고 무사할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척준경이 침음하며 말했다.

[일이 정말 곤란하게 됐군. 저놈은 이 세계를 멸망시킬 생각인 것 같다.]

“······겁먹으신 겁니까?”

[아니, 재밌겠군.]

척준경은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웃었다.
내가 일행들을 향해 뭐라 말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내 곁에 우뚝 섰다.
그는 척준경도, 성좌도 아니었다.

“······깼냐?”

돌아보자, 그곳에는 [흑천마도]를 짚고 일어선 유중혁이 있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기사회생 Lv.10’을 발동합니다!]

유중혁의 몸이 마침내 ‘기사회생’을 쓸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된 것이다. 유중혁의 마지막 모든 생명력이, 새카만 검극 위에서 환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직 입과 성대는 회복이 더딘 모양인지, 유중혁은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전지적 독자 시점’을 통해 유중혁의 생각이 들려왔다.

「김독자.」

“그래.”

아마도, 이것이 마계의 마지막 싸움이 될 것이다.

[‘73번째 마계’가 당신의 선택에 주목합니다.]

이번만큼은, 나 또한 무엇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이곳의 누군가가 죽을 수도 있었고.
어쩌면, 나나 유중혁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말했다.

“갑시다.”

유상아와 이현성이 고개를 끄덕였고, 키메라 드래곤에 올라탄 신유승이 내 곁에 섰다. 해자 쪽에서 하늘을 보던 이지혜도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우리를 도울 성좌는 없었다.

이제 이곳엔 오직 인간뿐이었다.

하지만 승산이 없는 싸움은 아니었다.
시간은 이미 충분히 끌었으니까.
모두 우리엘 덕분이다.

[‘73번째 마계’의 의지가 당신의 선택에 반응합니다.]

어쩌면, 수르야가 진심을 발휘한 것은 실수였다.
다가오는 재앙 앞에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은 우리만이 아닐 것이다.
멸망 시나리오를 앞둔 <제1 무림>이 그랬듯, 이 <73번째 마계> 또한 선택의 시간을 맞이했다.

[‘73번째 마계’의 ‘거대 설화’가 발아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파괴하려는 존재를 주인으로 삼으려는 세계는 아무도 없다.

[‘73번째 마계’가 자신의 주인을 택했습니다.]

당황한 도깨비와 성좌들이 메시지를 터뜨렸다.
그러나 나는 그들 중 어떤 이의 목소리도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이야기를 듣는 쪽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는 쪽이었으니까.

[당신의 ‘거대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Episode 51. 거대 설화 (1) > 끝

< Episode 51. 거대 설화 (2) >





천공으로 도약한 수르야는 착잡한 눈으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환한 빛으로 둘러싸인 ‘73번째 마계’가, 자신이 엮어온 문장들을 하나의 존재에게 흘려 보내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우주에서 날아오는 거대한 멸망 앞에, 세계가 자신의 주인을 선택하고 있는 광경.

수르야가 중얼거렸다.

[겨우 스물 다섯 번째 시나리오에 ‘거대 설화’를 얻은 존재······. 그런 이가 <스타 스트림>에 있었던가.]

그토록 오래 살아온 수르야도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스쳐가는 것은 올림포스의 헤라클레스 정도. 하지만 그 역시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 반신(半神)이었다. 오이디푸스 왕이 외쳤다.

[수르야, 괜찮습니다. 막 발아한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짓눌러 버릴 수 있습니다!]

‘거대 설화’는 다른 설화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이야기다.

무수한 설화의 합산인 동시에,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개연성을 담보하는 이야기.

하지만 아무리 ‘거대 설화’라 해도, 저 설화는 이제 막 움튼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게 될 ‘구원의 마왕’ 또한, 운 좋게 성좌위에 오른 천박한 존재일 뿐이다.

그럼에도 왜일까, 수르야는 쉽사리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수르야, 왜 그러십니까? 어서 끝내시는 게······.]

모든 ‘거대 설화’는 ‘끝의 시작’을 함의한다.

이 장대한 시나리오의 마침표를 향하는 이야기.

하지만 ‘거대 설화’를 얻는다고 해서, 모두가 ‘끝의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거대 설화’는 ■■과 연결되어 있지만, 어떤 거대 설화는 ■■의 근처에도 못 가보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수르야 너는, ‘끝의 자격’을 얻지 못했으니까.

아스모데우스가 남긴 그 말이, 잊혀지질 않았다.

고요한 분노 속에서 수르야의 귓가에 메시지가 들려왔다.

[당신에게 새로운 시나리오가 부여되었습니다!]

[당신은 ‘73번째 마계의 멸망’이 될 것입니다.]

원치 않았던 역할 배정에 수르야가 인상을 찌푸렸다.

‘<스타 스트림>이여. 늙은 이몸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척준경에게 열두 개의 태양 중 하나를 잃었고, 아스모데우스를 상대하며 심력을 상당 부분 낭비했다. 거기다 이미 그에게 허락된 개연성의 대부분을 소진한 상황.

[수르야. 꼭 정석대로 갈 필요는 없습니다.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싸우지 않고도, 녀석들을 무참히 굴복 시킬 방법이―]

수르야가 인상을 찌푸렸다.

[오이디푸스. 또 비열한 수를 쓸 참인가? 고작 인간들을 상대로?]

[그, 그것이 아니오라······.]

[나는 ‘지고한 빛의 신’ 수르야다.]

위대한 베다의 문장들이 수르야의 후광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온전한 힘을 쓸 수 없다 해도, 결코 인간에게 패배하지는 않는다.]

그 압도적인 ‘격’의 향연에, 뭐라 말을 하려던 오이디푸스가 입을 다물었다.

수르야가 손을 들어 올리자, 잠깐 주춤거리던 마차가 다시 맹렬한 돌진을 시작했다.


*


콰콰콰콰콰콰콰!

창공을 뚫고 대기권에 진입한 기관차가 굉음을 냈다.

발갛게 익은 선두에서 붉고 푸른 불꽃이 튀기고 있었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목소리를 회복한 유중혁이었다.

“13만 5천 킬로미터는 아닌 듯 하군.”

하기사 정말 그만한 규모의 열차가 나타났다면, 거대한 행성이 충돌해오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척준경이 말을 받았다.

[후인의 말이 옳다. 길어봐야 30킬로미터 남짓이다. 하지만 이곳을 멸망시키기엔 충분한 크기로군. 구원의 마왕이여, ‘거대 설화’는 어떻게 됐지?]

“이제 막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문장이 모이는 속도가 느려요.”

‘73번째 마계’의 거대 설화는 무사히 얻었다.

그러나 얻었다고 해서 다 끝난 게 아니었다.

“제대로 힘을 쓰려면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열차 속도를 늦춰야 해요.”

아마도 저 ‘열차’는 지금의 수르야가 동원할 수 있는 전부일 것이다.

저 열차만 막아낸다면 우리에게도 승산은 있다.

돌아보자, 이미 척준경이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부탁합니다, 고려제일검.”

[믿게.]

콰아아아앙!

힘차게 발돋움한 척준경이 허공으로 포탄처럼 쏘아져 나갔다.

나와 유중혁이 그 뒤를 쫓았고, 나머지 일행들 또한 신유승의 [키메라 드래곤]을 타고 쫓아왔다.

‘우레를 먹는 새’와 ‘나일강의 괴조’가 우리를 방해하기 위해 날아 올랐지만,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그들의 날갯죽지를 물어 뜯었다.

[이놈들은 내게 맡겨라.]

열차의 선두에 근접할수록, <베다>의 어마어마한 스케일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선두의 너비만 수백 미터. 어지간한 ‘이계의 신격’도 넘볼 수 있을 듯한 수준이었다.

[흐아아아아아아압!]

기합과 함께, 척준경의 삼검식이 발휘되었다.

제 이식, 이검참산(二劍斬山).

산을 베어 가르는 척준경의 검식이 열차에 직격했다.

척준경의 ‘격’과 부딪친 열차의 선두가 기이한 음색을 토했다.

콰드드드드드득!

히히히히힝!

선두의 말이 놀라 궤도를 이탈하긴 했지만, 열차의 속도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가공할 열기 속에서, 오히려 녹아내리는 것은 척준경의 검극이었다.

하지만 척준경은 멈추지 않고 삼검식을 이어갔다.

제 삼식, 삼검참해(三劍斬海).

바다를 참하는 일격. 해일의 포말이 산란하는 듯한 느낌과 함께, 처음으로 열차의 속도가 미미하게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큰 성과는 선두의 칸을 폭발시켜 내부 진입로를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내부에서 전진하는 게 더 쉬울 거다! 나는 바깥에서 속도를 줄이겠다!]

열차의 선두에서 강맹한 마력을 토해내는 척준경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척준경이라고 해도 이 정도 속력의 물체를 혼자서 감당하는 것은 힘들었다.

“저도 도울게요 아저씨!”

신유승의 ‘키메라 드래곤’이 척준경과 함께 열차의 선두에 붙었다. 2급 괴수종인 ‘키메라 드래곤’이 강렬한 풍압을 일으키자, 열차의 속도가 더욱 줄어들었다. 척준경이 외쳤다.

[이십 분 정도는 어떻게든 벌 수 있겠군. 후미의 마지막 칸에 수르야가 있을 거다. 놈을 쓰러트려야 이 설화도 사라진다! 어서 가!]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 후 열차의 내부로 진입했다.

열차는 마치 거인족을 위해 만들어진 듯한 지하철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관성에 어느 정도 적응한 우리는 곧장 열차의 다음 칸으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해당 열차는 오직 <베다>의 성좌들만이 이용할 수 있습니다.]

[파천검도]를 발동한 유중혁이 망설이지 않고 문짝을 타격했다. 그러나 문은 움푹 들어가기만 할 뿐 열리지 않았다.

“······단단하군.”

척준경의 예상과는 달리, 열차 내부의 강도도 만만치 않았다.

나나 유중혁이 제대로 격을 발휘한다면 못 뚫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열차의 길이는 무려 30킬로미터나 된다.

즉, 힘의 분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대 설화’의 첫 번째 문장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그 이야기는, 지하철에서 시작되었다.」

츠츠츠츠츳!

밀려오는 스파크와 함께, 내가 가진 설화들이 허공에 풀려 나오고 있었다. 먼 곳에서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의 흔적이었다. 돌아보니, 일행들도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당신의 ‘거대 설화’가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유중혁과 이현성, 그리고 유상아가 나를 보고 있었다.

밀물처럼 흘러온 스파크가 주변의 풍광을 고스란히 바꾸어 놓고 있었다. 이현성이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이, 이곳은······.”

모든 ‘거대 설화’는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다.

어떤 이야기는 영웅의 탄생 서사를, 어떤 이야기는 세계의 탄생 설화를 내포한다.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영웅의 일대기도, 창세 설화도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생존 기록’이었다.

열차의 뒷문에 적힌 [3807]이라는 번호.

주위를 둘러보던 유상아가 탄식하며 말했다.

“······그 지하철이군요.”

모든 설화는, 그 설화와 관계된 장소나 인물이 충돌할 때 「무대화」를 발동한다.

―불광행 3434열차의 3807칸.

나는 이곳에서 유상아와 이현성을 동료로 맞이했고, 유중혁을 만났다.

우리의 모든 이야기는 바로 이곳에서 출발한 것이다.

내 곁에서 주먹을 불끈 쥐던 이현성이,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때 생각이 나는군요.”

“결코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유상아도 희미한 미소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래도, 종종 이때를 떠올리곤 했어요.”

즐겁게 회상할 수 있는 기억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죽음과, 부조리한 시나리오의 지옥.

그리움도 추억도 될 수 없는 시간이었지만······ 그럼에도 분명, 우리가 살아 남았던 역사였다.

울 것 같은 미소를 띤 이현성이 문 위로 손을 얹었다.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곳에, 정의롭고 싶었던 군인이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은 이야기가 된다.

힘들었던 일, 슬펐던 일, 잊고 싶었던 일조차.

지난 후에는 모두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흐아아아아아압!”

그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위로가 될지 아닐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일행을 지켜봅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설화를 듣습니다.]

슬픔도 기쁨도 무용한 세계에서, 우리가 그 이야기를 계속해야만 한다는 것.

콰드드드드드드드!

유중혁의 [파천검도]에도 열리지 않았던 문이, 이현성의 괴력에 열리기 시작했다. 이현성의 전신에 깃든 ‘거대 설화’가 힘을 발휘한 것이었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성흔 ‘태산 밀기 Lv.10’를 발동합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도, 탈출의 문을 열었던 것은 이현성이었다.

“가십시오. 빨리!”

이현성이 열어 젖힌 틈새로, 일행이 달렸다. 그러나 이제 겨우 문 한짝을 열었을 뿐이었고, 열차는 여전히 길었다. 이번에 앞장선 것은 유중혁이었다.

“다음은 내가 뚫겠다.”

불현듯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열차의 다른 화신들을 전멸시키고, 비정한 탱크처럼 돌격해오던 그때의 회귀자가, 지금 내 앞에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고독한 사내가 있었고,」

검을 집어 넣은 유중혁은 자신의 모든 마력을 주먹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그때 맨주먹으로 문을 부쉈다.

콰아아아앙!

검으로도 끄떡없었던 열차칸의 문이, 맨주먹에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무대화」의 효과였다.

수르야의 주력 설화가 이 ‘열차’인 것이, 녀석에게는 불행인 셈이었다.

“독자 씨! 이번 칸은 안 부숴도 될 것 같아요!”

뭔가를 알아 냈는지, 유상아가 외쳤다. 문의 개폐 장치를 찾아냈던 그때처럼, 유상아는 이번에도 무력 없이 열차칸을 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숨겨왔던 여인도, 그곳에 있었다.」

한 칸, 한 칸.

우리는 전진하기 시작했다.

마치 우리가 살아온 역사를 다시 살아내듯이.

콰앙! 투콰아앙!

바깥에서 열차를 두들기는 함포 소리가 들려왔다.

열차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이지혜도 분투하는 모양이었다.

「인연을 잃고 상처 받은 검귀를 만났고.」

키메라 드래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품속에 있던 비유가 고개를 들어 열차의 선두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신유승이 있는 방향이었다.

「과거와 미래의 틈새에서 태어난 아이가 울었다.」

다음 순간, 키메라 드래곤이 가공할 포효를 터뜨리며 힘을 냈다.

순간 열차가 기우뚱, 하는 느낌과 함께 가속이 한층 더 줄어들었다.

그오오오오오!

잘은 모르겠지만, 비유가 이곳의 신유승에게 뭔가를 전해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절반도 오지 못했다. 서둘러야 한다.”

유중혁의 말처럼, 일행들의 분전에도 열차의 끝은 멀었다.

벌써 십분 이상의 시간이 지체되었다.

아무리 속도를 줄였다고 해도, 이 기세라면 [공단] 일대의 시공간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다음 칸을 열었을 때 우리는 난관에 봉착했다.

섬광처럼 쏘아진 한줄기 창. 나를 막아선 이현성이 어깨를 붙잡은 채 주저앉았다.

[더 이상은 못 간다.]

인류의 시조 ‘마누’와 몇몇 성좌들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곧장 [파천검도]를 발휘한 유중혁이 녀석들에게 맞서 싸웠지만, 수세를 취한 성좌들을 뚫기엔 역부족이었다.

츠츠츠츠츠츳!

마치 이곳에서 시간만 끌면 된다는 것을 아는 투였다.

이를 악문 내가 아껴둔 마력을 사용하려는 순간.

꽈드드드드드득!

열차의 천장이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외부에서 엄청난 마력으로 열차를 파괴하고 있었다.

[무, 무슨······ 대체 뭐냐!]

최소한 설화급 성좌. 척준경에 준하는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면, 이 열차의 외피는 파괴시킬 수 없었다.

“비켜어어어어어어어!”

열차의 바깥에서, 장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독자! 왔어! 그분들이 왔다고!”

그리고 다음 순간, 천장이 통째로 뜯겨 나가며 장하영과 함께 두 존재가 나타났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백청의 광휘를 전신에 휘감은 작은 사내와, 검푸른 아우라를 풀풀 흘려대는 거대한 여인이었다. 우습게도, 나는 순간 시야가 흐려질 것 같았다.

“내 제자는 어디에 있느냐?”

「세상에서 가장 강한 소인을 스승으로 두었고.」

“조금 늦은 모양이구나.”

「세상에서 가장 강한 거인의 세계를 구했다.」

척준경에 못지 않은 힘을 가진 강자이면서, 우릴 도와줄만한 존재.

[초월좌······!]

이를 가는 마누의 눈앞에, <제1 무림>의 최강을 다투는 두 명의 초월좌가 강림했다.

파천검성 남궁민영.

역설의 백청 키리오스 로드그라임.

우리 쪽을 흘끗 본 남궁민영이 말했다.

“끝까지 제대로 해라. 그렇지 않으면 엉덩이를 맞게 될 테니.”

키리오스도 나를 노려보더니 말했다.

“날 속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 전까진 네 죽음을 허락하지 않겠다.”

키리오스와 파천검성이 다음 칸의 문을 향해 자신의 무공을 발했다.

[파천검도]와 [전인화]의 기운이 모여들며 가공할 풍압이 발생했다.

한순간 성좌들조차 그 기세에 위축될 정도였다.

콰콰콰콰콰콰콰!

무시무시한 마력파가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문들을 일제히 박살내며 전진했다. 일시지간 마련된 직선가도.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와 유중혁은 달리고 있었다.

[전용 스킬, ‘바람의 길 Lv.11(+1)’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전력으로 운용한 [바람의 길]과 [주작신보]가 서로를 보조하며, 우리는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열차의 마지막 칸에 도달했다.

「그리고, 이 모든 세계의 결말을 아는 한 사내가 있었다.」

이것은 ‘멸살법’에는 없던 설화였다.

이제껏,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이야기.

그렇기에 비로소 내가 원하는 결말로 갈 수 있는 설화.

나는 열차의 마지막 문을 열어 젖혔다.





< Episode 51. 거대 설화 (2) > 끝

< Episode 51. 거대 설화 (3) >





수르야는 마지막 문 너머에 있었다.

유중혁의 주먹이 문짝을 때려 부수자, 휑한 바람과 함께 뻥 뚫린 천공의 정경이 보였다. 수르야가 있는 마지막 열차 칸은 뭔가에 뜯겨 나간 것처럼 뒷부분이 잘려 있었다.

[예상보다 빨리 왔구나.]

등을 보인 채, 천공의 전경을 보던 수르야가 말했다.

잘린 열차 너머로 보이는 네모난 우주.

지고한 신의 빛이 어둠 속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마치, 광활한 해변에서 모래알을 헤집는 손바닥처럼.

나는 일부러 공손한 투로 입을 열었다.

“수르야, 여기까지 하시죠.”

우주의 섭리에 닿지 못하는 신의 빛이 나를 돌아보았다.

수르야의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스타 스트림>은 이해할 수 없어도, 네깟 것 하나 읽어내지 못할 리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모든 세계의 결말을 아는 사내라······ 실로 광오한 설화다.]

아마 수르야도 내 ‘거대 설화’의 문장을 들은 모양이었다.

내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수르야의 곁에 서 있던 오이디푸스 왕이 대꾸했다.

[비유일 뿐입니다. 말장난이지요.]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설화 내용에 나에 대한 정보가 직접적으로 나와서 좀 껄끄러웠던 참이니까.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당신의 문장에 궁금증을 가집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의 거대 설화를 궁금해합니다.]

고오오오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긴장하라고 말합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불끈 주먹을 쥡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를 보는 수르야의 눈빛이 달라지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무슨 말을 해도 그를 멈출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야 덤벼 보거라. 네게 주어진 시간은 10분이다.]

츠츠츠츠츠츠츳!

수르야의 네 팔이 전투 자세를 취했다. 격을 개방하는 수르야의 몸집이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그는 어떤 무기도 사용하지 않았다. 오직 순수한 설화의 힘으로 나를 배제하겠다는 의도였다.

[10분 뒤, 이 마차는 ‘마계’와 충돌할 것이다.]

더 지체할 필요도 없다는 듯, 유중혁이 먼저 달려들었다.

유중혁의 전신에서 파천검성을 연상시키는 검푸른 아우라가 피어올랐다. 경지에 이른 [파천검도]가 불온한 빛살을 뿌리며 개화했다.

‘거대 설화’의 영향을 받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유중혁 또한 이 설화에 지분이 있는 존재.

온전치 못한 몸으로도, 유중혁은 이제 성좌에 준하는 힘을 낼 수 있었다.

콰가가가가각!

칼날과 장봉이 부딪치는 파찰음.

유중혁의 공격을 받아낸 것은 수르야가 아니었다.

[크으으읏······!]

오이디푸스 왕이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며 유중혁에 맞서고 있었다.

[그아아아아아앗!]

과열된 화신체로 전력을 쥐어 짜내고 있음에도, 오이디푸스는 유중혁을 상대하는 것이 힘겨워보였다.

“김독자!”

유중혁의 외침과 함께, 나는 오이디푸스의 수세를 뚫고 수르야를 항해 도약했다. 열차의 허공에서, 몸집을 몇 배로 불린 수르야가 나를 맞이했다.

[전용 스킬, ‘전인화 Lv.12(+2)’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전인화의 빛살이 나를 휘감으며, 백청의 전격이 수르야의 가슴팍에 적중했다.

일전에 수르야는 한 손만으로 내 [전인화]를 막아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츠으으으읏!

백청의 전격에 닿은 수르야의 피부가 그을리고 있었다.

조금이지만 타격이 있었다.

놀란 수르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꽈아아아앙!

수르야의 주먹과 충돌한 내가 허공을 날았다. 심장이 진탕되는 듯한 충격이 있었지만, 버틸만 했다.

[‘거대 설화’의 힘이 당신을 가호합니다.]

세계의 문장들이 내 주변을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저 강대한 설화급 성좌와 겨룰 수 있게 만드는 힘.

이것이 바로 ‘거대 설화’였다.

그러나 수르야는 여전히 건재했다.

[······말했을 텐데. 훔쳐 배운 스킬로는 이길 수 없다고.]

어쩌면 수르야의 말대로였다.

나는 언제나 타인의 기술로 싸워왔으니까.

“이건 훔쳐배운 게 아닙니다. 읽은 거죠.”

[읽어?]

페르세포네의 말처럼, 존재란 곧 이야기다.

오랜 세월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읽었던 문장의 기억.

내가 읽고 보아왔던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내가 되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고오오오오!

‘제4의 벽’ 위로, 거대 설화의 문장들이 떠올랐다.

「이것은 독자(讀者)의 설화.」

나는 수르야를 향해 달렸다. 달려가는 궤적 속에, 홀로 이야기를 읽던 무수한 시간들이 함께 흘러갔다.

평범한 삶이었다.

어두컴컴한 방에 틀어 박혀 홀로 ‘멸살법’을 읽던 시간들.

알바가 끝난 후 버스 안에서, 군대의 사지방에서, 공강 시간 강의실에서, 다시 퇴근길의 지하철에서······.

「동시에, 독자(獨子)의 설화.」

나는, 혼자 그 세계에서 살았다.

무수한 등장인물들에게 이입하며, 몇 번이고 다른 존재가 되었다.

[고작 이런 설화로······.]

그러므로 나는 회귀를 해본 적 없는 회귀자였고.

[전용 스킬, ‘바람의 길 Lv.11(+1)’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귀환을 겪은 적 없는 귀환자였으며.

[3번 책갈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전용 스킬, ‘야수왕의 감수성 Lv.10(+1)’이 발동 중입니다!]

어쩌면, 환생자이기도 했다.

콰아아아아앙!

내 ‘격’과 부딪친 수르야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었다.

격과 격이 부딪칠 때마다 서로의 화신체가 망가지는 것이 느껴졌다. 수르야도 나도, 자신이 끌어올 수 있는 모든 힘을 끌어내 부딪치고 있었다.

[이 정도로는 무리다! ‘끝의 자격’을 얻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착각하는 듯 한데, ‘위대한 설화’만이 ‘끝’에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냐.”

아마 수르야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 역시 유중혁의 무수한 실패를 통해 배운 깨달음이었으니까.

쿠구구구구!

얼굴을 굳힌 수르야가 네 개의 팔에 강대한 힘을 집중시켰다.

아마도, 저것이 수르야의 마지막 공격이 될 것이다.

나는 물러서지 않고 [전인화]의 힘으로 그에 맞섰다.

모든 것을 녹이는 태양의 섬광이 나를 향해 쏘아졌다.

백청의 전격이, 그 섬광의 고열을 이기지 못하고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물러서던 찰나, 거칠고 고독한 설화가 뒤쪽에서 나를 감싸왔다.

그것이 누구의 설화인지는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츠츠츠츠츳!

수르야와 나 사이에서 번쩍이는 스파크가 한층 더 거세어졌다.

천천히, 밀려나던 걸음이 멎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하늘 걸음의 주인’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현성과 유상아. 거기에 정희원의 설화도 느껴졌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던 모두의 역사가, 내게 고스란히 깃들고 있었다.

「오랜 웅크림에서 깨어나, 멸악의 칼을 쥔 여인이 웃었다.」

이곳에는 없지만, 역사를 함께 공유한 이들도 있었다.

「어미를 잃고 곤충을 손에 쥔 소년이 울었고」

「돌아오지 않을 가족을 위해 성을 구축한 사내가 포효했다.」

이길영과 공필두.

「거짓으로 진실을 쌓아 올린 여인이, 기꺼이 그의 그림자가 되었다.」

거기에 한수영까지.

츠츠츠츠츳!

[전용 특성, ‘시나리오의 해석자’가 발동합니다!]

내가 살아온 모든 궤적이, 이야기가 되어 길을 만들었다.

수르야의 화신체가 눈앞에 있었다.

충무공의 성흔으로도 읽을 수 없었던 수르야의 약점.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는 수르야의 어디를 찔러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전용 스킬, ‘독해력’이 발동합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환하게 빛나며, 집약된 백청의 전격이 수르야의 가슴을 꿰뚫었다.

퍼거거거걱!

뭔가가 으깨지는 폭음과 함께, 모든 마력을 쏟아낸 나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분수처럼 허공으로 쏟아지는 설화의 파편들 사이로, 무너지는 수르야의 거체가 보였다.

[수르야! 지고한 빛의 신이여!]

오이디푸스의 고함과 함께, 정경이 무너지고 있었다.

대기권과 부딪친 운석이 산화하듯 수르야의 열차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나는 지상을 향해 낙하했다.

“김독자!”

바람처럼 날아온 유중혁이 나를 붙잡았고, 떨어지는 일행들을 키메라 드래곤이 태웠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였다. 부스러진 마지막 칸의 파편 몇 개가 긴 꼬리를 남기며 지상으로 향했다.

쿠우우웅!

직격한 파편이 폭음을 남기며 울었다. 다행히 [공단]에 타격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키메라 드래곤의 머리통에서, 신유승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아저씨!”

아이의 표정에서 완연히 드러나는 기쁨.

다음 순간, 뿌연 지상의 먼지 사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아직이다!]

오이디푸스 왕이었다.

쓰러진 성좌들의 곁에서, 그는 비참한 몰골로 우리를 향해 외쳤다.

[구원의 마왕! 아직 ‘거대 설화’ 계승이 끝나지 않은 것을 안다! 지금이라도 우리에게 설화를 내놓는다면, 우리는 여기서 물러가겠다.]

이미 승부는 끝났음에도, 녀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날 대신해서 대답한 것은 유중혁이었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지상에 착지한 유중혁은 나를 바닥에 내려둔 뒤, [흑천마도]를 꺼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오이디푸스 왕이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의 소중한 세계가 사라질 것이다.]

“또 운명 타령이라도 할 셈인가? 너희가 마계에 투자할 개연성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마계가 아니라면?]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거대한 패널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푸른 행성이 있었다.

유중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성좌의 자존심 따윈 다 팔아치운 모양이군. 마지막 발악인가?”

이 시점에서는 <올림포스>가 가진 개연성 전체를 다 쏟아부어도, 지구를 멸망시킬 수 없다. 유중혁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전혀 당황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러자 오이디푸스 왕이 웃었다.

[지구를 날리는 건 무리지. 하지만, 이 정도라면 어떨까?]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패널의 화면이 바뀌었다.

순간 화면에 떠오른 정경에, 유중혁과 일행들의 표정이 굳었다.

화마(火魔)에 휩싸인 한반도가 그곳에 있었다.


*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마계나 갈 걸 그랬나.”

붉고 푸른 불길로 타오르는 경기도를 바라보며, 한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한수영이 마계를 가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신은 현재 마왕 ‘안드라스’의 저주에 걸려 있습니다.]

한수영은 일전에 김독자의 계략에 걸려, 마왕의 저주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섣불리 그 지역에 방문했다간 그대로 마왕의 한끼 식사가 되는 수가 있었다. 곁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이길영이 외쳤다.

“지금쯤이면 다들 독자형이랑 같이 있겠죠? 좋겠다 신유승······.”

“그렇겠지. 근데 거기가 여기보다 더 힘들걸.”

화마 속에서 다가오는 재앙의 기척을 느끼며, 한수영은 침을 삼켰다.

독자 일행들이 하나둘 마계로 ‘개인 시나리오’를 받아 떠난 뒤, 한반도에는 ‘재앙 시나리오’가 들이닥쳤다.

[재앙 시나리오의 제한 시간이 30분 남았습니다.]

문제는, 이번에 들이닥친 ‘재앙’이 성좌들이라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올림포스.”

도깨비 관리국과 어떤 뒷거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재앙 시나리오’의 ‘재앙’으로 온 것은 <올림포스>의 성좌들이었다.

난이도가 난이도인 까닭에, 30분만 버티면 시나리오는 끝나게 되어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그 30분 안에 한반도가 이 지구에서 없어질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긴 했지만.

“······이제 어쩔거냐?”

두툼한 입술로 담배 연기를 뿜어낸 공필두가 물었다.

그나마 경기 지역이 이만큼 버티고 있는 것은 숙련도가 급상승한 공필두의 [무장 성채] 덕분이었다. 한수영이 답했다.

“조금만 더 버텨 봐. 방법은 있으니까.”

“상대는 성좌들의 화신체다. 숫자만 다섯이 넘어. 뭘 어떻게 이기겠다는 거냐? 이건 김독자 그놈이 오더라도 안 돼.”

느껴지는 기운으로는 전부 위인급의 성좌들. 아마 <올림포스> 고대의 영웅이거나, 하급 신격에 준하는 존재들일 것이다.

[이 작은 땅에는 배포 또한 작은 놈들 뿐인 모양이구나!]

쩌렁쩌렁 울리는 격만으로도, 머릿속이 지끈지끈 아파왔다.

한수영은 침착하게 품속에서 몇 개의 새카만 돌을 꺼냈다.

[심연옥].

그것은 헤어지기 전 김독자가 모아 놓으라고 말한 아이템이었다.

이 아이템이 있었기에, 부족한 개연성으로도 일행들을 마계로 보낼 수 있었다. 지금까지 세 알을 사용했으니, 남은 것은 여섯 알. 숫자가 좀 모자라긴 했지만, 어차피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이거······ 벌레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거 아닌가 몰라.”

이길영의 벌레들이 성채를 보호하고, 공필두의 성채에서 포격이 이어지는 동안, 한수영은 심연옥을 제물로 강림 의식을 시작했다.

딱 한순간만, 이 비틀어진 저울의 평형을 맞출 수 있는 존재를 부를 수 있다면.

츠츠츠츠츳!

스파크가 튀며, 심연옥이 하나 둘 개연성의 제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무려 여섯 알의 심연옥을 사용해야만 그 힘의 일부를 불러올 수 있는 무시무시한 존재.

쿠구구구구구!

경기도의 하늘이 새카맣게 물들며 우레가 쏟아졌다. 어마어마한 격이 한수영의 등 뒤로 그림자를 드러내고 있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한수영이,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염룡아. 네 마음대로 해도 돼.”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습니다.]





< Episode 51. 거대 설화 (3) > 끝

< Episode 51. 거대 설화 (4) >





순식간에 성남시 인근을 쓸어버린 올림포스의 위인급 성좌들은, 천천히 공필두의 무장 성채 쪽으로 포위망을 좁혀 가고 있었다.

[우리가 나서기엔 판이 너무 작은 것 같지 않나?]

성좌들은 하나같이 수치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럴 법도 했다. 이런 시나리오의 소재가 되기 위해 격을 쌓은 성좌는 아무도 없으니까.

의욕 없는 그 모습들에, 투박한 고대의 창과 방패를 쥐고 낡은 왕관을 쓴 성좌가 선심 쓰듯 입을 열었다.

[불평은 그만 둬라. 이번 일만 끝내면 아버지께서 12신께 우리의 ‘승격’을 건의해본다고 하셨다.]

[오이디푸스께서? 정말인가?]

‘눈먼 왕의 후계자’의 말에 성좌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성운에서의 ‘승격’이란, 성운 안에서 ‘거대 설화’의 지분이 향상됨을 의미했다.

[햐아, 이제 우리도 소수점 첫째 자리로 갈 수 있는 건가?]

성운의 ‘거대 설화 지분’을 얼마나 갖느냐는, 곧 그 성좌의 강함을 방증하는 척도 중 하나다. 더 많은 지분은 더 많은 개연성을 담보하고, 그것은 더 많은 시나리오에서 제약을 벗어나는 원천이 된다.

[얼른 끝내고 돌아가도록 하지.]

시시덕대던 성좌들이 마침내 무장 성채로 진군을 시작했다.

제각기 쥔 성유물들이 허공에서 빛을 발하는 순간.

쿠르르르르.

하늘이 새카만 돔에 덮이듯 상공에서 빛이 사라졌다.

섬뜩하게 내려앉은 어둠에 무장 성채로 다가가던 위인급 성좌들이 동시에 멈춰섰다.

[······뭐지?]

츠츠츠츠츳!

몰려온 먹구름에 일대의 빛이 모조리 꺼지고 있었다. 이 지역뿐만 아니라, 한반도 일대를 덮어버리는 새카만 어둠. 어찌나 깊은 어둠인지, 개연성의 스파크조차 그 어둠에 가려질 정도였다.

‘눈먼 왕의 후계자’가 당황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혹시······ 명계의 여왕이십니까?]

현재 한반도에 강림할 수 있는 성운은 <올림포스>뿐.

그리고 <올림포스>의 성좌들 중 적은 개연성으로 이만한 이적을 부릴 수 있는 존재는 많지 않았다.

위인급 성좌들 중 하나가 희미한 빛을 내뿜어 주변을 밝혔지만, 불은 순식간에 꺼졌다.

블랙홀이 강림하여 모든 빛을 빨아들여버린 듯 불길한 적요가 덮쳐왔다.

불안해진 성좌들이 외쳤다.

[여왕이시여! 오셨다면 부디 말씀을―]

성좌들 중 하나가 돌연 경고성을 발했다.

[뭔가가 오고 있······!]

퍼거걱!

하늘에서 쏘아진 새카만 물체가 성좌 하나의 가슴을 꿰뚫었다.

[끄어어억······!]

용의 발톱처럼 생긴 물체였다. 당황한 성좌가 피를 흘리며 발톱을 빼내려 했지만, 발톱은 점점 그 부피를 키우더니, 이내 성좌의 몸통 전체를 터뜨려버렸다. 꾸드득 소리를 내며 어둠 속의 점이 되어버리는 성좌의 화신체. 기겁한 성좌들이 소리를 질렀다.

[으, 으어어어어!]

소리를 들었음에도 피하지 못했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과,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격’을 가진 존재라는 것.

명계의 여왕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모두 도망······!]

상황을 눈치 챈 ‘눈먼 왕의 후계자’가 후퇴 명령을 내렸다.

츠츠츠츠츠츳!

무장 성채 쪽에서 엄청난 스파크가 터져 나온 것은 그때였다. 어둠이 삼킬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한순간 도시의 어둠을 밝히자, 희붐한 사위 속에서 성채의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작은 체구의 여인이었다.

가장 먼저 그녀를 발견한 ‘눈먼 왕의 후계자’가 몸을 떨었다.

[어, 어째서 당신이······!]

여인의 너머로 넘실거리는 흑염의 그림자. 이마를 덮는 흑발 사이로 적안(赤眼)을 빛내는 작은 소년의 얼굴이 언뜻 비쳤다.

쉬이이이익!

한쪽 팔에 붕대를 감은 소년이 손을 들어 올리자, 새카만 용의 그림자가 창공을 뒤덮었다.

새하얀 치열 사이로 도드라진 송곳니.

소년이 웃자, 세상의 어둠이 숨을 죽였다.

그리고 학살이 시작되었다.


*


오이디푸스 왕은 화면 너머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성좌, ‘눈먼 왕의 후계자’가 시나리오에서 퇴장하였습니다.]

[성좌, ‘테베의 문지기’가 시나리오에서 퇴장하였습니다.]

화면을 새카맣게 메운 용의 그림자가, 달아나는 성좌들을 모조리 찢어발기고 있었다.

다행히, 한수영은 늦지 않은 모양이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광포한 웃음을 터뜨립니다.]

―아하하하하하핫!

한손에 붕대를 둘둘 감고 얼굴을 반쯤 가린 채 괴이쩍은 웃음을 터뜨리는 한수영. 정말이지 흑염룡과 잘 어울리는 한 짝이었다. 저렇게 잘 놀 거면서 왜 지금까진 싫어했는지 모르겠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오이디푸스 왕이 나를 보며 외쳤다.

[어떻게 이런······ 어째서 묵시록의 후보자가 네 녀석들 따위와······!]

묵시록의 후보자······.

하긴, ‘오이디푸스 왕’ 정도면 이제 그 정도 정보 권한은 갖고 있겠지.

심연의 흑염룡은 ‘묵시록의 최후룡’ 후보 중 하나였다.

[당신의 계책에 다수의 성좌들이 경탄합니다.]

[성좌, ‘드러 누운 드래곤’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순수하게 감탄합니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를 획득하였습니다.]

어둠으로 물들어 가는 경기도를 보며, 나는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심연의 흑염룡을 끌어들이는 것은 정말 최후의 수단이었다.

자칫하면 더 큰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한수영도 있고, 흑염룡과 맺은 약속도 있으니 놈이 한반도를 파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끄······ 으······.]

고개를 숙인 오이디푸스 왕이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렸다.

그 심상치 않은 모습에, 나와 유중혁이 동시에 칼을 세워 들었다.

[네놈······!]

흑염룡에게 당한 성좌들 중에는 오이디푸스 왕의 아들도 있었다. 격분한 오이디푸스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덤벼들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죽여버리겠다!]

예상대로, 오이디푸스와 함께 살아남은 성좌들이 동시에 격을 발출했다. ‘거대 설화’는 얻었지만, 여전히 저쪽도 만만한 전력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전인화]를 재차 발동하려는 순간, 땅속에서 솟아오른 뭔가가 오이디푸스의 목을 잡아챘다.

[커헉······!]

거대한 몸집의 수르야가, 네 개의 팔 중 하나를 움직여 오이디푸스의 목줄기를 틀어 쥐고 있었다. 오이디푸스 왕이 경악한 눈으로 수르야를 돌아보았다.

[어, 어째서······!]

[······그만하라.]

수르야의 중후한 ‘격’이 다른 성좌들을 내리 눌렀다.

[더 이상 추한 꼴을 보이지 말아라.]

[싸움에서 진 개의 말을 듣진 않겠다! 이렇게 끝낼 수는······!]

다음 순간, 오이디푸스 왕의 몸이 폭발했다.

잔혹하게 터져 나간 화신체가 수르야의 눈앞에 잿더미로 흩어지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성좌들의 움직임이 굳었고, 긴장한 일행들도 한 걸음을 물러났다.

그렇게 심한 중상을 입고도, 아직 저만한 힘이 남아 있다니······ 그야말로 경이로운 생명력이다.

나는 남은 일행들의 전력을 빠르게 계산했다.

만약 지금 당장 수르야와 부딪치게 된다면······.

[우리의 패배다.]

순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수르야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일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들끓는 희열에 입술을 깨물었다.

저 위대한 <로카팔라>가, 자신의 입으로 패배를 인정했다.

[‘마왕 선발전’의 승자가 정해졌습니다.]

이어지는 시스템 메시지에, 멀리서 절규가 들려왔다.

‘마왕 선발전’에 패배한 공작들의 비명이었다.

스스스스스······.

하나 둘, 우리를 노려보던 성좌들의 화신체가 흩어져 갔다.

시나리오가 끝나자 <스타 스트림>이 그들에게 허용되어 있던 개연성을 회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르야의 몸도 사라져 가고 있었다.

나는 수르야의 몸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입을 열었다.

묻고 싶었다.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이냐고.

[구원의 마왕.]

하지만 수르야의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면 수르야는 평범한 성좌가 아니었다.

다른 성좌도 아닌, 위대한 <로카팔라>의 일좌.

지고의 수식언을 가진 그 성좌가, 우리를 상대로 온갖 비겁한 술수를 써온 것 자체가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아마 이번 ‘선발전’은 그의 격과 자존심에 지대한 타격을 입혔을 것이다.

천천히 눈을 깜빡인 수르야가 물었다.

[‘끝의 자격’은 얻었는가?]

“아마 얻게 될 겁니다. 그리고 당신도······.”

하찮은 위로는 집어 치우라는 듯, 수르야의 눈빛이 무섭게 빛났다.

[내가 너의 설화를 지켜볼 것이다.]

수르야 또한, 언젠가 ‘끝의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만날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이곳이 아닌, 저 높은 <스타 스트림>의 후반부 시나리오에서.

파스스스스스······.

[그리고······.]

짧은 순간, 수르야의 시선이 떨어진 열차의 파편을 향했다. 나와 수르야가 부딪쳤던 칸의 파편이었다. 그런데 그 파편 중 일부의 모양이 조금 이상했다. 그것은 나와의 전투로 망가진 흔적이 아니었다.

그 전부터 열차에 새겨져 있던 상흔.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알겠다.]

수르야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주변을 압박하던 격들이 동시에 사라지자, 묘한 적요가 자리 잡았다. 실감이 나질 않았다. 계획했던 것들을 침착하게 실천했고, 몇 가지는 운이 따랐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

[스물 다섯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종료되었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유중혁도 수르야가 사라진 자리를 보고 있었다.

[메인 시나리오 ― ‘마왕 선발전’을 클리어하였습니다.]

[해당 선발전의 보상이 준비 중입니다.]

[마계에 새로운 마왕이 등장했습니다!]

[당신은 ‘73번째 마계’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폭발적으로 쏟아지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나와 유중혁이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허공에서 나를 굽어보는 무수한 존재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마왕,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마왕, ‘강령의 마신’이 당신에게 호기심을 갖습니다.]

[마왕, ‘검은 갈기의 사자’가 당신을 자신의 마계에 초대합니다.]

.

.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축하 인사를 보냅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에게 선물을 보냈습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건배사를 제의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크게 기뻐합니다.]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당신을 경계합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선들이 있었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강자에서부터, 지금의 나로서는 발끝조차 쳐다볼 수 없을 아득한 존재들까지.

털썩 주저앉는 소리와 함께 장하영이 멍한 목소리를 냈다.

“······끝났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행들을 둘러 보았다.

정희원을 업은 이현성이 하늘을 보고 있었다. 다친 유상아를 부축한 이지혜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고, 신유승이 내 소매를 붙잡은 채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축 늘어진 오수를 입에 문 파천신군이 가볍게 짖었다. 그리고 그 뒤엔, 언제부터 있었는지 아스모데우스의 화신체를 품에 안은 한명오가 지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바위 언덕에 파천검성과 키리오스의 모습도 보였다.

다친 몸을 웅크린 ‘성급한 늪의 포식자’와, 그의 등에 걸터 앉은 척준경까지.

이들 중 하나라도 없었더라면, 결코 이겨낼 수 없었을 시련이었다.

[당신들의 ‘성운’이 <스타 스트림>에 널리 알려집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성운 ‘김독자 컴퍼니(임시)’를 기억했습니다.]

메시지를 들은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름부터 바꿔야겠군.”

이상한 데서 자존심을 세우는 녀석을 향해 나는 씩 웃어 주었다.

조만간 성좌들에게 성운 이름을 공모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하늘 너머로 깊은 어둠이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시련이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당신의 첫 번째 ‘거대 설화’가 완전히 개화합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을 얻었습니다.]

폐허가 된 마계의 공단에서, 공민들이 하나둘 성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승리에 도취된 사람들. 누군가가 함성을 질렀고, 또 누군가가 나와 유중혁의 이름을 연호했다. 아일렌과 마르크의 모습도 보였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거대 설화’에 만족합니다.]

[당신은 ‘끝의 자격’을 획득하였습니다.]

마침내, 내가 기다리던 메시지들이 들려왔다.

[히든 시나리오 ― ‘단 하나의 설화’가 시작됩니다!]

[당신의 전설급 설화들이 서막을 구성합니다.]

[당신의 첫 번째 거대 설화가 ‘기(起)’를 완성하였습니다!]

오랜 인내의 끝에, 드디어 최종 시나리오로 향하는 첫 발자국이 찍힌 것이다.

[당신에게 ■■의 권한이 주어집니다.]

[■■의 필터링이 해제됩니다.]

오래도록 베일에 가려져 있던 마지막 장의 정보가, 드디어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 Episode 51. 거대 설화 (4) > 끝

< Episode 52. ■■ (1) >





Episode 52. ■■


마왕 선발전이 끝난 후, ‘유중혁―김독자 공단’은 재건으로 분주해졌다.

전쟁의 폐해로 바닥에 나앉게 생긴 공민들은 암담한 얼굴들이었다. 내가 비형을 설득해 얻은 구호 자원들이 아니었다면 분위기는 더욱 험악했을 터였다.

“시계탑은 저쪽으로! 어이, 거기 조심해!”

공작들의 사망으로 다른 공단의 공민들이 꼬리를 물고 찾아온 덕에 인력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나는 공민들을 도와 이틀 간 재건에 열중했고, 덕분에 도시는 차츰 활발한 분위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유상아 씨.”

유상아의 [아라크네의 거미줄]이 없었더라면, 기초 재건은 보다 긴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마의 땀을 닦은 유상아가 말했다.

“······독자 씨도 좀 쉬셔야죠.”

“전 괜찮아요. 유상아 씨는?”

유상아는 내 가슴팍을 둘둘 감은 붕대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저도 양호해요.”

양호······.

어쩐지 유상아 다운 단어 사용이었다.

나는 작업을 멈추고, 유상아와 함께 시계탑에 올라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유중혁을 비롯해 중상을 입은 일행들은 아일렌의 병동에 입원해 있었다. 비교적 경상이었던 정희원과 이지혜는 공단의 입구 쪽 건설을 돕고 있었고, 병동 쪽에서는 다 나았으니 퇴원할거라며 떼를 쓰는 이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틀 간 열심히 노력한 덕인지, 적어도 광장 일대는 이제 사람 사는 곳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일정은 빠듯하지만, 지금 무리해둔 것이 나중에는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저기 오네요.”

허공에서 일렁이는 포탈.

광장 쪽에서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꼬맹이가 있었다.

나는 가볍게 시계탑 아래로 점프해 녀석을 맞이했다.

“독자 형! 으와아아아아앙!”

와락 안겨든 이길영이 내 품속에서 발버둥쳤다. 나는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주었다.

“잘 있었냐? 키 좀 큰 거 같은데.”

“진짜요?”

“응, 이제 거의 유승이랑 비슷하겠는데?”

“곧 더 커질 거예요!”

허공에 발생한 포탈로 넘어온 것은 이길영만이 아니었다.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쿵 소리를 내며 광장의 바닥에 떨어졌다.

“오랜만입니다, 공필두 씨.”

“······흥.”

내 안위 따윈 별 관심 없다는 듯, 잠시 나를 노려보던 공필두는 유상아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유상아가 희미한 미소로 고개를 숙이자, 기분이 조금 풀린 듯 공필두가 말했다.

“난 네놈 보러 온 거 아니야.”

그래도 이 정도면 공필두도 많이 변했다.

이제 누가 그를 두고 십악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한수영은?”

“수영 누난 당분간 요양을 좀 해야 할 것 같대요.”

내 배에다 이마를 툭툭 부딪치던 이길영이 말했다.

요양이라······.

아무리 [심연옥]을 제물로 바쳤다 해도, 개연성을 감수하고 흑염룡을 몸에 강림시켰으니 타격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못 올 정도일 리는 없는데······.

“아, 수영 누나가 이거 전해주라고 했어요.”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이길영이 내게 쪽지를 건넸다.

한수영 답게, 어쩐지 집요한 느낌으로 꼬깃꼬깃 접은 쪽지였다.

반짝이는 이길영의 눈을 피해 나는 조심스레 쪽지를 열었다.

―다음에 또 이딴 거 시키면 죽여버린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역시, 안 온 이유가 있었구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붕대를 감은 한수영이 미친년처럼 날뛰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직 몇 가지 문제가 남았어.

쪽지엔 그 외에도 몇 가지 정보가 쓰여 있었다. 지구에서만 들을 수 있는 한반도나 성운 간의 정세 같은 것들. 다행히 지구는 내가 아는 원작의 사이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했다. 사실 대부분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기 때문에 굳이 이런 식으로 전할 필요 없는 정보였다.

한수영도 그걸 알고 있는지, 영 중언부언하는 투였다.

―아무튼, 그렇다고······ 뭐······ 잘 지내 멍청아. 지구 오면 봐.

아쉽다. 이번에 만나면 제대로 놀려주려고 했는데.

나는 쪽지를 코트 속에 넣은 후, 이길영와 공필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밤에 연회가 있을 겁니다. 들어가서 씻고 준비하세요.”

“연회?”

“손님들이 오시기로 했거든요.”

일단 한 고비는 넘겼다.

하지만 이 공단의 위기는, 이제 막 시작일 뿐이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의 초대에 응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의 초대에 응합니다.]

······.

허공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간접 메시지를 보며,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선발전 이후, 유중혁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

“회복되려면 얼마나 더 걸릴까?”

“앞으로 2주일은 더 있어야 할 거예요.”

유중혁의 맥을 짚던 아일렌이 병실을 나서며 내쪽을 흘끗 보았다.

“······그리고 당신도 좀 쉬어야 해요. 알죠?”

“걱정 마.”

아일렌이 나간 후에도, 나는 유중혁의 병실을 떠나지 않았다.

잠든 녀석의 안색은 내가 본 어떤 ‘유중혁’ 보다도 더 창백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회귀’가 발동할 정도의 부상을 입었는데도 돌아가지 않은 유중혁은 이 녀석이 처음이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에게 꽂힌 설화팩들을 점검했다.

설화팩은 잘못 꽂으면 항마(降魔) 부작용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나처럼 [라마르크의 기린]이 있는 경우라면 좀 다르지만······.

“······팩도 꼭 지같은 것만 꽂아 쓰네.”

「내가 간다 고독한 세상아」

「소드마스터가 제일 쉬웠어요」

「난 다섯살 때부터 검을 잡았어 천재였지」

다행히 설화 전문가인 아일렌은 유중혁의 설화 구성을 잘 파악한 듯했다. 실제로 144회차의 유중혁은 이현성의 군대 설화를 잘못 수혈 받고 잠깐 돌아버린 적이 있었다.

“입맛이 까다로운 녀석이야.”

갑자기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거의 경기를 일으킬 만큼 놀랐다.

돌아보자, 수려한 외모의 거인이 벽에 기대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계셨습니까?”

“네가 들어오기 전부터.”

파천검성은 태연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유중혁 쪽을 일별했다.

“너무 과한 치료야. 저놈은 무림 만두 몇 개만 던져 주면 금방 나을 텐데.”

“여긴 무림 만두가 없으니까요.”

말은 그렇게 해도, 파천검성의 눈빛에 떠오른 기류는 몹시 온화했다.

무서운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그래서, 널 때렸다는 게 저놈이냐?”

파천검성의 반대쪽 천장에 개구리만한 뭔가가 거꾸로 붙어 있었다.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이었다.

“스승님.”

“말해라. 저놈이냐?”

그러고 보니 키리오스를 무림으로 보낼 때 헛소리를 지껄였던 게 떠올랐다. 파천검성의 제자에게 두드려 맞았다고 그랬었던가. 키리오스의 잘 생긴 눈썹이 휘어지며, 그의 전신에 [전인화]의 아우라가 감돌기 시작했다.

“모두 거짓말이었던 것이냐?”

나는 침을 삼키며 말을 주워 섬겼다.

“그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닙니다! 사실 이놈이랑 사이가 꽤 안 좋거든요. 실제로 얻어 맞은 적도 있고······.”

“얻어 맞기만 한 것이냐?”

“물론 제가 때린 적도······.”

시스템의 허점을 노리긴 했지만, 왕좌 쟁탈전에서 유중혁을 피떡이 되게 때려준 적이 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듣던 파천검성의 표정에 흥미가 스쳤다.

“흐음. 내 제자를 때렸다고?”

“그래서 누가 이겼지?”

허공에서 두 스승의 시선이 부딪쳤다.

그저 시선이 충돌했을 뿐인데도, 공간 지각이 흐트러지며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돌아왔길래 분명 사이가 좋아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나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파천검성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둔한 질문이군. 얼굴만 봐도 네 제자놈보다 내 제자가 한수위인 것이 자명하거늘.”

“근육만 키운 기생오라비보다 내 제자가 약할 리 없다. 저래봬도 내 비전 무공을 전수한······.”

“그래봤자 또 작아지는 무공이겠지.”

츠츠츠츠츠츳!

아무래도 이대로는 병실이 폭발할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두 분께 여쭤볼 게 하나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해 쏟아졌다. 나는 ‘격’을 발동해 간신히 그 압력을 견뎌내며 물었다.

“<제1 무림>은 어떻게 됐습니까?”

줄곧 궁금했던 의문이었다.

파천검성과 키리오스가 이곳에 왔으니, 무림이 무사할 가능성이 높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래도 상대는 ‘이계의 신격’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키리오스였다.

“흥, 이 몸이 손수 움직였는데 그런 세계 하나 못 구할 것 같으냐?”

그렇게 말한 키리오스는 뭔가 기분이 상한 듯 그대로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날아가버렸다.

······왜 저러지?

파천검성은 키리오스가 빠져나간 창문 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막긴 막았는데, 전부 막았다고 보긴 힘들다.”

“‘이계의 신격’은 퇴치한 겁니까?”

파천검성의 전신에서 은근히 느껴지는 ‘거대 설화’의 기운.

아마 <제1 무림>과 관계된 거대 설화인 게 분명했다.

파천검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벅찬 상대였지만, 못 싸울 것도 아니었다. 저 재수 없는 역설 놈도 와줬으니까.”

이계의 신격을 그저 ‘벅찬 상대’ 정도로 표현하는 것은 파천검성 정도가 되니 가능했다.

“문제는 그다음에 온 녀석이었다.”


*


이계의 신격에도 급은 있다.

말하자면, 그들 중에도 네임드가 있는 것이다.

가령 ‘옛 존재’라든가, ‘위대한 옛 존재’로 통칭되는 신격이 그들이다.

―녀석은 ‘옛 존재’도 ‘위대한 옛 존재’도 아니었다.

그런데 개중에는 그런 범주조차 넘어서는 까마득한 존재들도 있다.

―그런 녀석은 처음 보았기 때문에, 놈에 대해서는 확실히 설명할 수가 없다. 확실한 것은 나와 역설이 힘을 합쳐도 당해낼 수 없었다는 거다. 사실, 싸움조차 되지 않았다. 놈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무림과 함께 우주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파천검성의 말은 기이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원작의 전개대로라면, 그날 <제1 무림>에 그런 신격이 나타날 개연성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신격이 나타났고,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영문을 알 수 없게 물러났다.

―마치, 다른 맛있는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사라지더군.

옛 존재도 위대한 옛 존재도 아닌 존재.

파천검성이나 역청의 백설 같은 강자들이 보는 것만으로 얼어붙어 전의를 상실할 정도의 신격······.

와아아아아!

[공단]의 중앙 홀에서는 조촐한 파티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몸이 회복된 몇몇 일행들. 그리고 초대를 받은 몇몇 성좌들의 상징체도 보였다.

[흐음, 구원의 마왕. 내가 보낸 선물은 잘 받았나요?]

짓궂게 웃으며 다가오는 페르세포네. 역시나 이번에도 상징체는 유상아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상징체를 처음 보는 일행들은 놀란 표정이었다. 특히 유상아의 표정이 아주 볼만했다.

“······저 이제 가터벨트 안 좋아합니다.”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있던 페르세포네가 부채를 흔들며 웃었다.

[그래요? 꽤 성능이 좋은 걸로 보냈는데.]

성능이라는 말에 곁에 있던 이현성이 귀를 쫑긋 세우는 것이 보였다.

엉뚱한 소리가 나오기 전에 나는 재빨리 말을 받았다.

“선발전에선 은혜를 입었습니다.”

[흐음, 난 한 게 없는데요?]

“‘하늘 걸음의 주인’을 설득해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현재 <올림포스>는 분열된 상태. 그녀가 헤르메스를 설득하지 않았더라면, 선발전에서 내가 싸워야 할 <올림포스>의 성좌들은 이보다 더욱 많았을지도 모른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 생각해줘요.]

희미하게 미소를 띤 페르세포네는 기분이 좋은지 홀의 중심으로 올라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녀는 유상아를 끌어 당겨 파트너로 삼았는데, 처음에는 당황하던 유상아도 이내 질 수 없다는 듯 냉정한 표정을 유지했다. 정희원이 휘파람을 불었다.

“상아 씨 멋지다!”

구석에서 벌써 열 번째 건배사를 마친 디오니소스. ‘성급한 늪의 심판자’와 술잔을 나누는 척준경의 모습도 보였다. 소규모 연회이긴 했지만, 지금껏 참석했던 그 어떤 연회보다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광경이었다.

[모처럼의 휴식이로군. 축하하네, 구원의 마왕.]

뒤를 돌아보니, 헌앙한 정장을 입은 노인이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양산형 제작자.”

그 또한 이번 ‘선발전’에 도움을 준 성좌들 중 하나였다.

[설화는 잘 보았네. 과연, 미식협에서 큰 소리를 칠만하더군.]

“과찬이십니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술잔을 들어 ‘양산형 제작자’와 잔을 부딪쳤다.

향을 맡아보니 꽤 독한 알콜이라, 슬쩍 입만 대고 도로 내려놓았다.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마도 ‘양산형 제작자’는 질문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이야 말로 그를 비롯한 성좌들이 이곳에 참석한 이유이자, 내가 이번 연회를 개최한 이유이기도 했다.

술을 홀짝인 ‘양산형 제작자’가 지나가듯 말을 던졌다.

[‘끝의 자격’을 얻었으니, 필터링도 해제되었겠군 그래.]

장내의 분위기가 미세하게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홀은 여전히 떠들썩했지만, 하나둘 내게 모여드는 성좌들의 시선이 있었다. 페르세포네, 척준경, 디오니소스······. 사실 다들 관심없는 척 하면서도 이쪽 얘기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성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을 무렵, ‘양산형 제작자’가 물었다.

[자네의 ■■는 무엇이었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 Episode 52. ■■ (1) > 끝

< Episode 52. ■■ (2) >





내 ■■는 무엇인가.
‘양산형 제작자’라면, 당연히 그 질문을 던질 거라 생각했다.

“궁금하십니까?”

[이곳에 궁금하지 않은 이가 있겠는가?]

양산형 제작자가 옅게 웃자, 몇몇 성좌들이 헛기침을 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다른 일행들도 내게 주의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다들 왜······.”
“쉿.”

눈치 없이 끼어들려는 이현성을 정희원이 제지했다.
나는 천천히 장내의 모든 인원들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홀의 모든 존재가 나를 보고 있었다.

■■······.

‘멸살법’에서는 이것을 정말 다양한 이름으로 명명한다.
가령, ‘도깨비의 왕’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이야기의 끝이자 시작.」

하지만 유중혁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빌어먹을 스타 스트림.」

이현성이라면 “전역”이라 표현할 것이고, 유상아라면 “노후 설계”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또 이지혜에게는 “졸업”이겠지. 그리고 놀랍게도, 그 모든 것이 ■■의 해석으로서는 틀리지 않은 것이었다.
양산형 제작자가 물었다.

[‘끝의 자격’을 얻은 이는 모두 다른 ‘끝’의 이름을 얻지. 알고 있는가?]

“가진 설화가 모두 다르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애초에 ■■는 정확한 의미로 소통이 가능한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여기서 필터링이 풀렸다는 것은 내가 그것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일 뿐이다. 아마 나처럼 히든 시나리오를 받은 성좌들 또한, 모두 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

<히든 시나리오 ― 단 하나의 설화>

분류 : 히든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에 도달할 단 하나의 설화를 완성하시오.
제한시간 : ―
보상 : ???
실패시 : ???

* 현재 당신은 ‘기(起)’를 완성했습니다.
* 자세한 사항은 추가 시나리오 설명을 참조하십시오.

+


히든 시나리오, ‘단 하나의 설화’.
이 시나리오는 ‘끝의 자격’을 얻은 모든 존재들에게 부여되는 것이었다.

아득한 <스타 스트림>의 은하에서, 무수한 설화의 바다를 뒤져 단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

전설급 설화도, 신화급 설화도, 심지어는 내가 얻은 거대 설화도 결국은 그 ‘단 하나의 이야기’를 향해 가는 여정일 뿐이었다.
눈앞에 있는 양산형 제작자나, 저기 있는 페르세포네 또한 이 시나리오를 얻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끝내 도착하는 곳은 나와는 다른 곳이겠지만.

[바앗!]

내가 지시하기도 전에, 비유가 홀의 채널을 차단했다.
아마,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비유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리라.
허공에서 성좌들의 항의 메시지가 흘러나오는 사이, ‘양산형 제작자’가 무거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내 ■■은 ‘고갈(枯渴)’이었네.]

그가 선뜻 자신의 패를 공개할 줄은 몰랐기에, 나는 조금 놀랐다.
이어서 무대에서 춤을 추던 페르세포네도 말했다.

[나는 ‘죽음’이었어요.]

고갈과 죽음.
모두 무언가의 ‘마지막’을 상징할 수 있는 단어들이었다.
늘 뭔가를 만들길 좋아하는 ‘양산형 제작자’나, 죽은 자들의 명계를 다스리는 ‘페르세포네’에게는 더없이 역설적인 끝이기도 했다.
저쪽에서 패를 꺼냈으니, 이제 나도 물러설 곳이 없었다.

“다들 수식언을 걸고 맹세해주십시오. 여기서 제게 들은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내 말에 몇몇 성좌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거야 당연히······.]
[험, 뭘 그렇게 까지 하나? 우리가 어디 가서 그걸 말한다고······.]
[얼마나 대단한 ■■이기에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건가?]

나는 즉답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웃었다.
그러자 성좌들 사이에서 고요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설마······?]

성좌들의 머릿속에서 스치는 생각들이 눈에 보일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성좌들의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생각해라.
고민하고, 의심해라.
그래야 내가 원하는 그림에 도달할 테니까.

이윽고 성좌들의 술렁임이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한수영은 거리를 걷고 있었다.
폐허가 된 서울의 정경. 살아 남은 사람이 누구도 없는 거리를, 그녀는 홀로 걷는 중이었다.
머릿 속으로 온갖 망상들이 스쳐 갔다.
왜 내가 지금 여기에 있을까.
난 분명 염룡이랑 성좌들과 싸우고 있었는데.
아니, 그보다 ‘서울’은 폐쇄되었을 텐데, 어째서······.

―염룡아?

‘심연의 흑염룡’은 대답이 없었다.

―이봐, 누구 없어?

한수영은 무너진 잡거빌딩 사이를 거닐며 소리쳤다. 익숙한 광화문의 폐건물들 사이로 괴수들의 사체가 늘어져 있었다. 고약한 냄새가 들끓는 사체들을 지날 때마다, 한수영은 소름이 돋았다.
하나하나가, 지금의 그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괴물들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건데.

질문을 해봐도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설령 있더라도 대답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몰랐다.
만약 이곳에 살아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놈은 저 괴수들을 피떡으로 만든 무시무시한 괴물일 테니까.

꿈이라면 제발 깨어나길 바랄 뿐······.

멀리서 사람의 그림자 같은 것이 스쳐간 것은 그때였다.
하얀 백색 코트를 입은 익숙한 인형(人形).
가슴이 벅차올랐다.

―김독자!

사내가 이쪽을 돌아보는 순간.
피육을 꿰뚫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코트 사이로 불쑥 칼이 튀어나왔다.
붉은 빛으로 물드는 백색의 코트.
소리를 지르며, 한수영은 잠에서 깨어났다.

“하악, 하악······.”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인 후에야, 현실 감각이 천천히 돌아왔다.

“뭐야······.”

답지 않게 혼잣말까지 내뱉었다.
식은땀으로 등이 푹 젖어 있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혼잣말에 만족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이제야 당신이 진정한 자신의 후계자가 되었음을······.]

“닥쳐.”

흑염룡이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면, 확실히 현실은 맞는 것 같았다.
한수영은 한쪽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왜 그 녀석이 꿈에 나온 걸까.

평소였다면 개꿈이라며 넘어갔을 한수영이었지만, 미신이 현실이 되는 세상이다 보니 이런 꿈 하나도 허투루 넘길 수가 없었다. 관자놀이를 짚은 팔에 붕대가 감겨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은 바로 직후였다.

“이런 빌어먹을. 아직도 안 풀었네.”
“풀지 말아라. 다쳐서 감아둔 거니까.”

깜짝 놀라 돌아보니, 그곳에는 아는 여인이 서 있었다.

“······김독자 엄마?”
“아직도 날 그렇게 부르는 건 너뿐이구나.”

이수경은 수건으로 한수영의 등과 이마를 닦아 주었다.
한수영이 물었다.

“왜 마계엔 안 갔어?”
“내가 무슨 면목이 있다고 거길 가겠니.”
“김독자가 좋아했을 텐데.”
“네가 가는 걸 더 좋아했을 거다.”
“······아줌마 자기 아들을 잘 모르네.”

한수영이 작게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 이수경은 옅게 웃더니, 젖은 베개피를 새 것으로 갈아 주었다. 새 베개피가 기분 좋은지 코를 박고 킁킁거리던 한수영이 말했다.

“그래도 어떻게 잘 해결된 것 같네.”
“뭐가 말이니?”
“김독자 대흉(大凶) 사건 말야.”

흑염룡이 신난 꼴을 보니, 마계 쪽도 일이 잘 풀린 것 같았다. 한반도의 피해도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경기 지역에 타격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시민들은 무사히 대피시켰고······.
뒤숭숭한 꿈을 꾼 게 좀 걸리긴 하지만, 어차피 꿈은 꿈일 뿐······.

“전부 끝나진 않았어.”
“······어?”

이수경은 말없이 접시 하나를 가져 오더니, 그 위에 [길흉화복]의 점괘를 띄우기 시작했다. 한수영은 잠자코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글자의 궤적을 읽었다.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몇 번이나, 다시 점괘를 쳐주기를 부탁했다. 점괘는 같았다. 붕대로 둘둘 감긴 팔을 내려다보던 한수영이 말했다.

“김독자한테 연락해줘.”


*


연회가 끝난 밤. 나는 홀로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보통이라면 느긋한 마음으로 핫초코라도 한 잔 타서 ‘멸살법’을 읽기에 적합한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거대한 파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수르야와 내가 싸웠던 열차의 마지막 칸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당시의 기억을 재구성해보았다.

수르야의 열차는, 신화 속의 열차 보다 훨씬 짧았다.
그리고 열차의 마지막 칸은 뒤가 뻥 뚫려 있었다. 마치, 도중에 열차의 일부가 찢겨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즉, 그 칸은 ‘원래의 마지막 칸’이 아니었던 것이다.
눈을 뜨고, 다시 파편의 상흔을 살핀다.
척준경이나 스승들이 전력을 발해야 부술 수 있는 수르야의 열차를, 아예 통째로 뜯어낼 정도의 괴력.
······이건 역시 ‘그거’겠지.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문틈 사이로 유상아가 나를 보고 있었다.

“미안해요 독자 씨. 방해했나요?”
“아닙니다. 제가 불렀는데요.”

나는 급히 테이블을 정리하며 유상아를 맞이했다.
유상아는 살짝 떨떠름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다가, 내가 앉은 테이블의 맞은 편에 조심스레 앉았다.

“······차라도 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그럼 물이라도······?”
“좋아요.”

조그만 테이블을 마주한 채, 우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부른 것은 나였지만, 화제를 쉽사리 꺼내진 않았다.
유상아 역시 내게 궁금한 것이 많을 테니까.

“물어 보세요.”
“사실, 꽤 오랫동안 독자 씨에 대해 생각했어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어조였다.

“어째서 남들이 모르는 미래를 알고 있는 걸까.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그처럼 침착할 수 있고, 항상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해답을 찾아내는 것일까.”
“······그래서 뭔가 알아 내신 게 있습니까?”
“어떤 것은 알 것도 같았고, 어떤 것은 감도 잡히지 않았어요.”

아마도 유상아는 나를 공부했을 것이다.
앱으로 틈틈이 스페인 어를 공부하듯이, 나라는 사람을 공부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누구보다 먼저 유의미한 결과에 도달했을 것이다.

“독자 씨에게 이 세계는 ‘소설’ 같은 건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죠?”
“오늘 연회에서 하신 말씀 때문에요.”

······과연 유상아다.
정말, 그렇게 밖에는 말할 도리가 없었다.

―저는 ‘종장(終章)’을 향해 가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대답이었다. 종장. 페이지를 넘기고 또 넘겨서 도달해야 하는, 모든 페이지의 끝.
유상아가 말을 이었다.

“성좌들이 크게 놀라더군요. 경악하는 이들도 있었고, 경탄하는 이들도 있었어요.”

성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의도로 던진 발언이었으니까.

“독자 씨가 나가신 후에 명계의 여왕께 물어보았어요. 왜 그렇게들 놀란 것인지.”
“뭐라고 하시던가요?”
“독자 씨가 굉장히 특별한 존재라고 했어요.”

물로 입술을 축인 유상아가 계속해서 말했다.

“■■는 모든 존재에게 ‘다른 형태’로 주어진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대부분은 지극히 개인적인 단어를 받는다고도 들었고요. 세상에는 무수한 ■■가 있지만, 개중에 명백한 ‘끝’을 암시하는 단어는 극히 드물다고 들었어요.”

누가 들어도 명백한 ‘끝’을 의미하는 것.
모든 존재에게 탁월한 범용성을 가지는 말.

“그리고 그처럼 명백한 ‘끝’을 암시 받은 존재들은, 모두 위대한 성좌들 뿐이라고도 했어요. <올림포스>나 <베다>, 그리고 <파피루스> 같은······ 초거대 성운의 최상위 신격들.”
“······.”
“그리고 이제······ 독자 씨도 그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유상아는 복잡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떨리는 그녀의 눈빛은, 그녀 자신도 잘 가늠할 수 없는 듯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잘 된 일이죠.”
“······잘 된 일이라고요?”
“이제야 뭘 좀 해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나는 웃었다. 하지만 유상아는 웃지 않았다.

“세계가 멸망한 후, 저는 독자 씨가 더 즐거워 보인다고 생각했어요. 예전보다 자주 웃고, 더 활기차 보여서······ 그래서 좋아 보였어요. 그런데······.”

말 꼬리를 흐린 유상아가 고개를 숙였다.

“왜 독자 씨는 이 세계를 ‘허구’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유상아는 나를 모른다.
내게 ‘소설’이라는 것이 뭔지.
이 세계가, 내게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가지는 곳인지.
설명할 수도 없고, 아직은 설명해서도 안 된다.

“저, 미안해요. 독자 씨. 제가 주제 넘은 말을······.”

그럼에도 내게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유상아 뿐이었다.
남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무언가를, 홀로 눈치채주는 사람.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그녀는 내가 처음으로 만난 동료였다.
어쩌면 이 세계가 시작되기 전부터 그랬다.

[해당 인물의 정보는 ‘등장인물 일람’으로 열람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떠오르는 메시지에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해당 인물은 현재 정보를 수집 중입니다.]

언젠가 처음으로 유상아에게 ‘전지적 독자 시점’을 썼을 때, 나는 유상아의 정보를 읽을 수 없어 몹시 불안했었다.
그런데 왜인지, 이제는 그 반대였다.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켜며 창밖을 내다 보았다.
청명한 하늘.
아직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유상아 씨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준비할 시간은 지금뿐이었다.





< Episode 52. ■■ (2) > 끝

< Episode 52. ■■ (3) >





성운 <에덴>.

묵시록의 천사들로 구성된 이 성운은, 마족들의 재앙이자 마계의 영원한 숙적이었다. 세상의 그 어떤 악(惡)도 두려워 않는 천사들로 이루어진 천계의 수호자들.
그런데 이 무시무시한 <에덴>의 천사들도 싫어하는 것은 있었다.

[고로, 에덴의 여러분들께서는 침과대단(枕戈待旦)의 자세로······.]

바로 메타트론의 조례 시간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훈화 담당’은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 ‘요피엘’이었다.

[마족들의 화전양면전술(和戰兩面戰術)에 결코 넘어가지 말 것을 당부드리며······.]

가브리엘은 발 앞꿈치로 바닥을 톡톡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 왜 하필 오늘 쟤 차례야?

<에덴>의 연병장에는 수천의 하급 천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대천사들이 조교처럼 자리잡고 있었는데, 가브리엘 또한 그중 하나였다.

물병자리에 핀 백합, 가브리엘.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 라파엘.
정의와 화목의 친구, 라구엘.

임무를 맡은 대천사들을 제외하면, <에덴>에서 탱자탱자 놀던 최상위격들 성좌들은 대부분 집합한 셈이었다.
벌써 한 시간 째 이어지는 요피엘의 정신 교육.
몰래 하품을 연발하던 가브리엘은, 노곤한 눈빛으로 연병장의 동료들을 둘러 보다가 문득 이상한 것을 눈치 챘다.

―야, 우리엘 어디 갔어?

그러자 구름 위에서 졸던 라파엘이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구기며 대답했다.

―걔 근신중이셈.
―근신?
―서기관한테 된통 깨졌음. 모르셈?
―······뭘 했길래?

라파엘이 귀찮은 듯 바람의 힘을 빌려 말을 전했다.
가브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진짜? 우리엘이?
―이응이응. 3년 동안 성류 방송도 금지 당함.

······그 우리엘이 3년 근신 명령을 받았다고?
가브리엘은 뜻밖의 소식에 히죽 웃음이 나왔다.

―당분간 성류방송 게시판 깨끗해지겠네.

조례가 끝난 것은 그로부터 약 30분 후의 일.
하급 천사들을 해산한 메타트론은 대천사들을 따로 불러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잿빛 머리카락. ‘하늘의 서기관’ 메타트론의 얼굴은 오늘 유독 피곤해보였다. 갑작스레 밀려온 ‘하르마게돈’의 개연성을 막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까닭이었다.
얇은 안경테를 밀어 올린 메타트론이 말했다.

[고생했습니다, 요피엘. 좋은 발표였습니다.]

요피엘이 꾸벅 목례를 했다.
대천사들을 둘러 보던 메타트론이 물었다.

[······우리엘은 안 왔습니까?]
[서기관님이 근신 때렸다면서요? 퍽이나 오겠어요 걔가.]

가브리엘의 빈정거림에 다른 대천사들도 킥킥 웃었다.
그러나 메타트론은 웃지 않았다.
대천사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우리엘이 서기관의 골칫거리라는 것을 모르는 천사는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제일 먼저 총대를 맨 것은 뺨에 희미한 주근깨가 박힌 대천사 라구엘이었다.

[저어, 서기관님. 3년 근신은 너무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최근 성류방송 덕에 우리엘 꽤 밝아졌는데······.]

따분한 세월을 견뎌야 하는 성좌들에게, ‘성류방송’이 가지는 의미는 그야말로 지대했다. 어떤 천사들은 이 ‘성류방송’을 <에덴>에 허락된 유일한 마약이라고 칭할 정도니······.

[뭔 소리야 라구엘. 지금까지 서기관님이 그 ■ 얼마나 많이 봐줬는데?]

가브리엘의 말에, 라구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가브리엘. 동료 천사에 대한 모욕은 중죄에요.]
[내가 틀린 말 했어? 심심하면 악마 목이나 따고 다니던 애가 갑자기 이상한 거에 꽂히더니······.]
[가브리엘!]

험악해지려던 분위기를 가라앉힌 것은 메타트론이었다.

[우리엘에 관한 처우는 제가 결정합니다.]

메타트론의 주변에서 솟아오르는 숭고한 아우라에, 흥분하던 천사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주변이 잠잠해지자, 메타트론은 본론을 꺼냈다.

[마계 협약과 관련해, 여러분들께 새로운 임무를 내릴까 합니다.]

마계 협약. 대천사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스쳤다.
안 그래도 최근 73번째 마계에서 벌어진 무력 충돌로 인해 <에덴>과 마계 사이의 균형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73번째 마계의 지배자, ‘구원의 마왕’을 감시할 대천사가 필요합니다.]

순간, 대천사들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가브리엘이 뾰족한 목소리로 물었다.

[잠깐만요, 그거 원래 우리엘 임무잖아요? 그리고 그게 마계 협약이랑 무슨 상관······.]
[상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엘은 근신 중이니, 다른 대천사들께서 수고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메타트론의 시선이 대천사들의 면면을 스쳤다.

[라파엘은 다음 주부터 교리 순회가 있고, 라구엘은 <베다> 쪽에 방문하기로 했으니, 임무가 비는 것은······.]

서기관을 따라 움직이던 대천사들의 시선이 마침내 멈춰섰다.

[······저요?]


*


연회의 다음 날부터, 일행들은 갑작스런 호사를 누렸다.

“······하지만 독자 씨, 제가 이런걸 받아도 됩니까?”
“현성 씨 주려고 산 거예요.”

김독자는 그동안 일행을 챙겨주지 못한 것을 한 번에 보상해주려는 듯, 매일매일 [도깨비 보따리]에서 뭔가를 잔뜩 사와 일행들에게 입히거나 사용했다. 특히 신난 것은 애들이었다.

“야, 이것 봐라 신유승!”
“나도 받았거든?”

김독자가 사다준 온갖 액세서리를 온몸에 치렁치렁 걸친 신유승과 이길영이 헤죽헤죽 웃으며 거리를 쏘다니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정희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애들을 무슨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만들어 놨네.”

투닥거리는 두 아이는 이현성의 커다란 어깨 위에 앉아 있었다. 헤벌쭉한 얼굴인 것은 이현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김독자에게 받은 새로운 방패가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바보가 셋이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곁을 돌아보는데, 삼각 김밥 같은 투구를 머리에 쓴 이지혜가 벙싯벙싯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저쪽이 크리스마스 트리라면 이쪽은 삼단 케이크 같군.

“독자 아저씨 요즘 되게 잘 해주지 않아요?”
“뒤늦게 동료의 소중함이라도 깨달았나 보지.”

정희원의 반응에 이지혜가 흐음, 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언니······ 혹시 아무것도 못 받았어요?”
“난 필요 없거든?”

사실, 김독자는 정희원에게도 몇 번인가 찾아 왔었다.
하지만 아이템은 없었고, 몇 가지 히든 피스 정보와 훈련 방식을 교습했을 뿐이다.
이제 그런 거 말해주지 않아도 혼자서 할 수 있거든요, 하고 대꾸해줬더니 묘하게 시무룩해져서 돌아가던 김독자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키득거리는 이지혜에게 꿀밤을 한 대 갈겨 주려는데, 누군가가 콕콕 그녀의 어깨를 찔렀다.
돌아보자, 어딘가 피곤해보이는 김독자가 있었다.

“엇, 독자 씨······.”

얼굴에 짙게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김독자가 정희원을 향해 뭔가를 내밀었다.

“이건······.”
“새 수트입니다. 이쪽이 활동하기 더 편하실 거예요.”

정희원은 얼떨결에 옷을 받아들었다.
커다란 망토가 달린, 블루블랙의 특공복이었다. 언젠가 거래소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너무 비싸서 포기한 옷이었다.

“이거 너무 비싼 옷이잖아요. 전 지금도 충분히······.”

김독자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알 수 없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정희원은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충무로 시절에도 김독자에게 이런 옷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땐 누더기였는데······.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화신 ‘정희원’에게 섭섭해합니다.]

“제 검이 되어주기로 하셨잖아요. 이 정도는 해드려야죠.”

그 말을 남긴 김독자는, 또 뭔가 일이 있는지 벌써 저만큼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런 김독자의 뒷모습을 보던 정희원은 자신의 손에 남겨진 특공복을 매만졌다. 곁에 있던 이지혜가 이죽거렸다.

“언니 입이······.”
“뭐.”
“아뇨, 그냥 입 꼬리에 뭐가 묻었길래. 그보다 언니, 그거 맘에 안들면 제 장군님 투구랑 바꿔줘요. 저 특공복 진짜 로망인데.”
“싫어.”

자세히 보니 특공복에는 이현성의 방패와 비슷한 문양이 박혀 있었다. 마데 바이······ 얀그······샌······? 영어에 능통하지 않은 정희원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읽기를 포기했다. 아무튼 좋은 거겠지.

“근데 저 아저씨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요? 식량도 돈 받고 팔았다던 사람이······.”
“모르지. 전처럼 또 이상한 흉계를 꾸미고 있을지도.”

확실히 김독자라면 그래도 이상하지는 않다.
이만큼 좋은 아이템을 줬으니, 분명 또 엄청나게 부려 먹겠지.
정희원은 월급을 가불 받은 회사원의 심정으로 특공복 코트를 이렇게 저렇게 걸쳐 보았다. 그렇게 이지혜와 함께 어떻게 하면 더 멋있게 코트를 입을 수 있을지를 논의하고 있는데, 유령처럼 나타난 누군가가 곁을 터덜터덜 지나갔다.

“상아 씨, 무슨 일 있어요?”
“네? 아, 네. 아뇨.”

멍하니 허공을 보던 유상아가 깜짝 놀라 입을 뻐끔거렸다. 텅 빈 동공.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정희원이 한 마디를 하려는데, 이지혜가 한 발 더 빨랐다.

“아하, 알겠다. 상아 언니도 아이템 못 받았구나?”

정희원이 옆구리를 쿡 찌르자 이지혜가 옅은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꺾었다. 유상아가 힘없이 미소지었다.

“그냥 요즘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져서 그런가 봐요. ······그보다 옷 멋지네요 희원 씨.”
“아, 네. 독자 씨가 주신 건데······ 막상 입어보니 너무 과한가 싶기도 하고.”
“제가 보기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런가? 고마워요.”

머쓱해진 정희원이 머리를 긁었다.
유상아의 팔목에서 전에 없던 팔찌가 빛나고 있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려는 찰나였기에 정희원은 잘 됐다 싶었다.

“참, 요즘 독자 씨랑은 어때요?”
“······독자 씨요?”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묻는 유상아의 얼굴.
잘못 짚었나 싶었던 정희원이 횡설수설했다.

“에, 어, 그러니까······ 그냥 둘이 잘 지내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하던 유상아가 입술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음, 그냥 회사 다닐 때랑 비슷한 것 같은데······.”

회사 다닐 때랑 비슷하다. 반응으로 봐서는 그다지 희망적인 관측은 어려워 보였다. 이지혜가 정희원에게 귓속말을 했다.

“내가 전에 말했잖아요. 둘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요. 독자 아저씨 취향은 저쪽이 아니라, 우리······.”
“······내 배후성이 널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네. 잘난 네 사부는 깨어났어?”
“아직이요. 며칠 더 걸릴 거라던데.”

멀리서, 자기 얘길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김독자가 오징어처럼 흐느적거리며 병동 쪽으로 가고 있었다.

“저기도 뭔가 주려나······.”

이제 완공을 앞둔 시계탑 너머로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떠들썩한 일행들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머신건 같은 것을 해부 중인 공필두와, 새로 받은 의족을 이렇게 저렇게 시험해 보는 한명오의 모습도 보였다.
왜인지 모르게, 정희원은 마음이 벅차올랐다.

이제 일행들은 모두 모였다.

그들은 곧 지구로 돌아갈 것이고, 또 다시 시나리오의 지옥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럼에도 정희원은 두렵지 않았다. 시계탑의 전경으로 지는 해를 보며, 정희원은 언젠가 극장 던전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어떤 소설의 에필로그를 보게 해달라고 빌었어.

그때, 그 말을 하던 김독자는 몹시 외로워 보였다.
당시는 그말 뜻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그 ‘에필로그’라는 게 왔을 때, 김독자는 혼자가 아닐 것이다.


*


연회가 끝나고 며칠 후. [공단]에 머무르던 성좌들은 하나둘 공단을 떠나기 시작했다. 나는 성좌들을 배웅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려다가, 코트의 가슴 주머니에 꽂힌 두 송이의 꽃을 발견했다.

“이건 뭐지?”

한쌍의 붉은 코스모스와 백합이었다.
어지간히 안 어울리는 조합이다. ······애들 짓인가?
나는 일단 꽃들을 챙겨든 채 광장 쪽으로 나갔다. 이미 몇몇 성좌들은 포탈을 넘어가는 중이었다. 떠나는 이들 중 일부는 성운 <김독자 컴퍼니>와 특수한 계약을 맺었는데, 눈앞의 노인도 그 중의 하나였다.

[마치 전쟁이라도 준비하는 사람 같군 그래. 그렇게 조급해하지 않아도 될 텐데.]

“시나리오야 언제나 전쟁이죠.”

내 말에 ‘양산형 제작자’가 껄껄 웃었다.

[무감해지지 말게. 나는 자네가 다른 성좌들과는 다른 존재가 되길 바라니까.]

“도움 감사했습니다.”

나 역시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차체의 문을 열던 ‘양산형 제작자’가 멈칫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예. 얼마든지 물어보시죠.”

하지만 양산형 제작자는 곧바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대신, 그는 품속에서 궐련 하나를 꺼내 우물거렸다.

[······■■가 대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 있나?]

탓, 하고 켜진 라이터와 함께 궐련의 끝에서 불길이 일었다.
한숨처럼 연기를 토하며, 양산형 제작자가 말을 이었다.

[그곳은 우리가 원해서 도달하는 곳일까, 아니면 운명이 우리에게 도달하게끔 만드는 곳일까. 장소인 걸까, 아니면 삶인 걸까, 혹은 어떤 시공간을 말하는 걸까.]

아마 ‘양산형 제작자’는 수도 없이 저 질문을 되새겼을 것이다.
그리고 끝내, 해답은 찾지 못했을 것이다.

“확실한 건 그곳이 모든 이야기의 끝이라는 거죠.”

[가끔은 자네의 태연함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야.]

“저도 긴장은 합니다.”

[미식협 때부터 느꼈는데, 자넨 생각보다 거짓말을 잘 못해.]

양산형 제작자가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그래서 묻는 말인데······ 자네의 ■■는 정말로 ‘종장’이 맞는가?]

방심을 치고 들어오는 한 마디.
나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떼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양산형 제작자’는 인내심 있게 내 말을 기다렸다. 내가 입을 연 것은 양산형 제작자가 쥔 궐련이 절반쯤 타버린 뒤였다.

“이야기가 저를 어디에 데려다 놓을지는 모릅니다. 다만······ 제가 가고 싶은 곳이 종장이라는 건 확실합니다.”

내 말이 끝난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여전히 내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남은 궐련의 반쪽마저 모두 태운 후에야, ‘양산형 제작자’가 빙긋 웃었다.

[자네의 마지막 페이지에 나도 있다면 좋겠군.]

“조심히 가십시오, 어르신.”

[몸 조심 하게.]

가벼운 엔진 소리와 함께 ‘양산형 제작자’의 차체가 포탈 속으로 미끄러져 갔다. 다른 성좌들도 하나둘 포탈 속으로 사라졌다. 닫히는 포탈의 모습과 함께, 텅 빈 하늘의 건너편에서 불길한 스파크가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그 스파크를 보며 주머니 속의 꽃잎을 가만히 매만졌다.

이제 남은 시간은 사흘 정도.
곧, 이 [공단]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 Episode 52. ■■ (3) > 끝

< Episode 53. 구원의 마왕 (1) >





Episode 53. 구원의 마왕


작은 아가 천사 둘이 얼굴을 붉히는 사진이 붙어 있는 문.
문의 문패에 적힌 [우리엘☆]이란 글씨를 보며, 가브리엘이 입술을 실룩였다.

[야.]

방문을 두들겨 봐도 대답이 없다.
그럼 다시 한 번.

[야, 우리엘!]

더욱 힘껏 문을 두들기자, 문 너머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꺼지라고 말합니다.]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간접 메시지에, 가브리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누군 좋아서 온 줄 알아? 나도 임무 때문에 온 거야.]

말하는 것만으로도 짜증나 죽겠다는 듯, 가브리엘이 씩씩거렸다.
메타트론의 명령으로 불합리한 임무를 맡은 지도 벌써 이틀 째.
대충 하는 척 하면서 농땡이나 칠 계획이었는데, 메타트론이 먼저 선수를 쳤다.

─가브리엘은 우리엘에게 인수 인계부터 받아 주십시오. 그리고 요피엘은 가브리엘이 게으르게 굴지 않도록 감시해주기 바랍니다.
─맡겨 주십시오.

하필이면 저 꼬장꼬장한 요피엘과 한 팀이라니.
차라리 우리엘과 한 팀이 되는 게 나을 판국이었다.

[구원의 마왕 관찰 기록 있지? 그거 받으러 온 거야. 빨랑 문 열어!]

방문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설마 네가 내 후임이냐고 묻습니다.]

[그래 ■탱아.]

다시 한 번, 벼락같은 간접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라고 말합니다.]

[욕할거면 나와서 직접 할래?]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후임은 너뿐이냐고 묻습니다.]

[나랑 요피엘.]

방문 너머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미세하게 열린 문틈 사이로 가녀리고 긴 손끝이 불쑥 튀어 나왔다.
자세히 보니, 하얀 손가락 끝에 뭔가가 쥐어져 있었다. 그 물건이 뭔지 깨달은 가브리엘이 혀를 찼다.

[······USB? 요즘 누가 이런걸 써? 인간들이나 쓰는 거잖아?]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잔말 말고 가져가라고 경고합니다.]

가브리엘이 USB를 받자, 우리엘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붉은 코스모스에겐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요피엘한테? 왜?]

우리엘은 방문을 쾅 닫을 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들려온 것은 간헐적으로 훌쩍거리는 소리 뿐. 뭐라고 한 마디 쏘아 붙여주려던 가브리엘이 샐쭉 입술을 내밀었다. 평소 사이가 좋진 않았지만, 그 ‘악마 사냥꾼’ 우리엘이 저런 꼴이 된 걸 보니 그래도 괜히 신경이 쓰인다.

[야, 청승 떨지마. 근신 금방 풀릴 텐데 뭐. 겨우 3년······.]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꺼지라고 외칩니다!]

[미친■이 위로를 해줘도 지■이네.]

잠시 후, 파일을 받아온 가브리엘은 자신의 방에서 USB를 열어 보았다.
그리고.

[······대체 뭔 임무를 한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가브리엘은 화면에서 나오는 영상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당신에게 호기심을 갖습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당신의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정희원은 허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엘이 사라지니까, 이번에는 더 이상한 성좌가 들러붙었다.
신경 쓰이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희원은 멀리서 휘적휘적 돌아다니는 김독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하지?”
“무슨 말이요?”

핫 하고 돌아보니 또 이지혜가 곁에 바싹 붙어 있었다.

“아무것도 아냐.”
“왜요, 뭔데요?”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언니 <김독자 컴퍼니> 가입하시려고요?”

노점상에서 산 음료수를 들이켜던 정희원이 콜록거리며 숨을 토했다.

“무, 무슨. 아냐! 이름도 이상하고. 어디 가서 그런 곳 들어갔다고 말하기 쪽팔리거든?”
“전 기대되는데. 회사 이름이 좀 구리긴 한데 뭔가 직장 생활 체험하는 느낌이라 두근거려요. 혹시 월급도 주려나?”
“직장 생활이 뭔지 알게 되면 너도 생각이 좀 달라질 거다.”

이지혜가 입술을 내밀었다.

“아무튼 뭐, 저도 가입하려고 기회 보고 있어요. 어차피 사부도 거기 있고 하니.”
“······유중혁 씨가 벌써 가입했어?”
“독자 아저씨가 그랬잖아요. 여긴 유중혁과 나의 성운이다!”

물론 그딴 말을 한 적은 없었지만, 정희원은 반사적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기다렸던 간접 메시지는 들려오지 않았다. 괜히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화신 ‘이지혜’의 유머를 싫어합니다.]

정희원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분주히 광장을 쏘다니는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며칠 전부터 얼굴 보기가 힘들 정도로 바삐 움직이는데, 대체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건지 모르겠다.
괜히 섭섭한 마음에 주변을 서성이던 정희원의 시야에 유상아의 모습이 잡힌 것은 그때였다. 벤치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유상아를 향해, 정희원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상아 씨! 혹시 독자 씨 성운 가입 했어요?”

정희원을 발견한 유상아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 아가씨는 며칠 전부터 무슨 생각을 하길래 이렇게 혼이 빠진 건지······.

“저는 조금 사정이······.”
“참, 그러네. 상아 씨는 조금 힘들겠네요.”

유상아는 <올림포스> 성운의 화신. 성운 전체의 지원을 받는 특별한 경우다 보니, 김독자의 성운에 가입하기는 어려움이 있을 터였다. 후원은 후원대로 다 받아 놓고 이제와서 다른 성운을 선택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뻔한 일이니까.

“대신 동맹 제의를 맺었어요. 저를 통해 몇몇 성좌들이 독자 씨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로······.
“······<올림포스> 성좌들은 전부 독자 씨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모두 그런 건 아니에요. 희원 씨는 성운 가입 하셨나요?”
“저는 생각 좀 해보려고요.”

정희원은 입맛을 다시며 광장 쪽을 돌아보았다.

“사실 가입이 확실치는 않아요. 제 배후성 문제도 있고······.”

괜히 자존심이 상한 정희원이 둘러대자, 유상아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희원 씨가 성운에 가입해준다면 독자 씨에게도 큰 힘이 될 거예요.”
“저도 가능하다면 돕고 싶죠.”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복잡한 상황에 놓인 것은 그녀 하나만은 아닌 듯했다.
멀찍이 떨어진 광장 한가운데에서, 둔한 대형견처럼 앉은 이현성이 보였다. 그 옆에는 아기고양이처럼 쪼그려 앉은 신유승과 이길영이 있었는데, 셋의 시선은 김독자를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김독자가 움직일 때마다 졸졸 쫓아 다니는 중이었다.
뭘 기다리는 건지는 뻔해보였다. 그걸 끝까지 외면하는 김독자도 어지간히 독하다 싶었다.

“······저쪽에도 아직 아무 말 없었나 보네요.”

이지혜의 말에, 정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때가 되면 말하겠지. 은근히 외골수 기질이 있는 사람이니까.”

뭐,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모처럼 일행들에게 찾아온 평화였고, 김독자에게도 여러 가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이렇게 아무 일 없이 기다리는 것뿐이라면, 언제까지라도 할 수 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당신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봅니다.]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구원의 마왕’을 경계합니다.]

······이상한 천사들이 있으니 당분간 심심하지도 않을 거고.
안일하게도, 정희원은 그렇게 마음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그 일은, 갑자기 시작되었다.


*


“진짜?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는 거야 아줌마?”
“마계로 통하는 채널들이 막히고 있어. 강력한 결계라도 생긴 것처럼······.”

이수경의 말에, 한수영의 표정이 조금씩 암담해졌다.
심지어 아까부터 도깨비를 호출하고 있는데도, 반응해오는 도깨비는 아무도 없었다. 한수영은 멍한 얼굴로 [길흉화복]을 점쳤던 물그릇을 내려다보았다.

凶凶凶凶凶凶凶凶凶凶······.

대체 몇 개나 흉(凶)이 떠올라 있는 것인지, 셀 수조차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건데······?”

대흉일 때 김독자는 무려 <베다>의 <로카팔라>중 하나와 대적해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흉이라니······ 대흉도 아니고 범흉(氾凶)이라 불러야 할 지경이었다.

츠츠츠츳.

물그릇의 수면이 떨리며 희미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흠칫 고개를 듭니다.]

“염룡아?”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73번째 마계를 바라봅니다.]

“너 혹시 뭔가 알아?”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위협적인 울음을 토합니다.]

붕대를 둘둘 감은 팔이 지끈거리며, 흑염룡과 동조를 이루었던 육신에 스파크가 튀었다.

“읏, 인마!”

흑염룡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지금껏 어떤 적수를 만났을 때도, 흑염룡이 이렇게나 날뛰었던 적은 없었다.

[성좌, ‘양다리 전문가’가 파랗게 질린 입술을 깨뭅니다.]
[성좌, ‘구암신의’가 자신의 침을 떨어트립니다.]
[성좌,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이 조용히 검을 내려 놓습니다.]
[성좌, ‘조선제일술사’가 자신의 기척을 지웁니다.]

한반도의 성좌들이 빛을 꺼뜨리고 있었다.
마치, 포식자 앞에서 몸을 숨기는 피식자들처럼.
붕대를 감은 팔이 계속해서 따끔거렸다.
이수경의 만류를 뿌리친 한수영이 기어코 붕대를 풀어내자, 그곳에 박힌 흑염룡의 문신이 빛나고 있었다. 츠츠츠츳 터지는 스파크와 함께, 한수영의 오른팔이 허공에 새카만 글씨를 썼다.

―별들의 재앙이 온다.

“별들의 재앙? 그게 뭔데?”

저 오만한 ‘심연의 흑염룡’이 직접 자신의 의사를 타진해야 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마계에 보내지 않으려는 ‘심연의 흑염룡’의 의지가 느껴졌다.

“야, 쫄게 만들지 마. 너 또 괜히 그러는 거지?”

‘심연의 흑염룡’에게 속아 넘어갔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흑염룡이 뭔 소리를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무려 <올림포스>의 한반도 침공까지 예견했던 김독자다. 그러니 어쩌면 이번 상황도 알고 있을 것이다.
설령 뭐가 온다 한들······.
그리고 희미한 스파크와 함께, 한수영의 손이 붓처럼 허공을 수놓았다.

―73번째 마계는 멸망할 것이다.


*


가장 먼저 그것을 눈치챈 것은 파천검성이었다.
공단의 흉벽 꼭대기에서 몸을 뉘이고 있던 그녀는,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를 툭 떨어트렸다.

“······그 녀석 말이 맞았군.”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파천검성의 등 뒤에서 파천신검(破天神劍)이 눈부신 광휘를 내뿜으며 뽑혀 나왔다.
파천검성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후, 그녀가 이 검을 제대로 쥔 것은 열 번도 채 되지 않았다.

그녀를 무림의 재해라 불리게 만든 검.

손바닥에 감기는 검의 감촉을 느끼며, 파천검성은 문득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재해(災害).
무엇을, 재해라 부를 수 있는가.

인간에게 있어 재해란 고작해야 국지적 규모의 자연 현상을 이를 따름이었다. 산사태나 해일, 지진 같은 것. 인간의 힘으로는 대항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현상.

하지만 초월좌들에게, 그것은 조작 가능한 물리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의 규격을 한참이나 넘어선 존재. 칼질 한 번으로 산사태와 해일을 일으킬 수 있으며, 역으로 그것을 잠재울 수도 있는 자들.
그러니 파천검성과 같은 초월좌들에게, 재해란 말은 평범한 인간들의 기준치와는 완연히 다른 무엇이어야 했다.
어쩌면 파천검성은, 지금 그 대답을 마주하고 있었다.

츠츠츠츠츳!

작은 스파크가 튄다 싶더니, 어느새 키리오스가 곁에 와 있었다.
키리오스의 몸에는 벌써 [전인화]의 아우라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파천검성도 천천히 마력을 끌어 올렸다. 두 초월좌는 아득한 허공의 끝을 함께 바라보았다. 키리오스가 물었다.

“역시 그놈인가?”

아직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서 분명한 존재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무엇. 파천검성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틀림없다. <제1 무림>을 집어삼키려 했던 그 녀석이다.”

새카맣게 물들어가는 대기권.
빛조차 삼켜버리는 우주의 건너편에서, 흐트러진 개연성을 집어 삼키며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 Episode 53. 구원의 마왕 (1) > 끝

< Episode 53. 구원의 마왕 (2) >





[히든 시나리오 ― ‘마계 탈출’이 시작됩니다!]

그 시간, 관리국의 모든 도깨비들은 패널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지금 장난쳐? 시나리오가 떴는데 왜 진행할 도깨비가 아무도 없어?”

홀로 난동을 부리는 비형을 막은 것은 관리국의 다른 도깨비들이었다. ‘마왕 선발전’이 끝난 후, 채널을 운용하던 모든 도깨비들은 73번째 마계에서 철수했다.

“바람님은 어디 갔어? 그리고 시발, 독각 이 새끼야!”
“······.”
“마계 채널 처먹겠다고 날뛰던 놈이 왜 여기 있는 거냐? 이럴 거면 날 보내주든가!”
“비형, 지금 저기가 방송이 가능한 상황이라 생각하는 거냐?”

저 자존심 강한 독각조차 이번 시나리오의 진행을 포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관리국은 ‘마왕 선발전’에서 허용치 이상의 개연성을 소진했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바앗!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 도깨비의 울음.
어떤 도깨비는 탄식하며 고개를 돌렸고, 어떤 도깨비는 끝까지 눈을 떼지 않겠다는 듯 화면에 집중했다.
<스타 스트림>의 우주를 건너온 아득한 존재가 73번째 마계의 하늘을 덮어가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모든 존재가 ‘시나리오’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성좌들이 정연한 ‘이야기’를 먹고 살아가는 존재라면, 이계의 신격은 혼란한 ‘이야기’에 근거해 살아간다. 이야기의 무의식에서 태어난 존재들. 도깨비에게 명명되지 않은 시나리오의 심해(深海)를 거니는 괴물들.

‘저건 제대로 된 시나리오가 아냐.’

거대한 입을 벌리는 ‘그것’을 보며, 비형은 암담한 심정으로 주먹을 부르쥐었다.

‘도망쳐라, 김독자.’


*


“······이거 뭐야?”

정희원이 ‘그것’을 눈치챈 것은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난 후였다.
갑자기 전신의 솜털이 곤두섰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주변을 살피자, 의식을 잃거나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지는 공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곁에 있던 이지혜가 몽롱한 눈으로 자신의 어깨를 쥐어 뜯고 있었다.

“지혜야! 정신 차려!”

몇 번이고 어깨를 흔든 후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린 이지혜가 고개를 들었다.

“으, 아으, 으······ 언니······.”

손톱이 그새 어깨를 파고들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정희원은 광장 쪽을 돌아보았다. 벌써 유상아가 움직이고 있었다.

“다들 이쪽으로 모여요!”

마력이 깃든 그녀의 목소리에 일행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뭐, 뭡니까 저건?”

이현성을 비롯한 아이들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길영이 비틀거리며 주저앉았고, 신유승은 이현성을 붙잡으며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 순간 광장의 모든 일행들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책을 얼마나 읽었든, 가진 단어의 숫자가 얼마나 많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형용할 수 없다.’

유상아도, 이현성도, 정희원도. 인간이 가진 모든 말들은 다가오는 존재 앞에서 무력했다.
하늘 전체를 완전히 덮어버린 새카만 ‘무엇’.
일행들은 자신이 보고 있는 대상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일행들은 대처할 방법을 잃어버렸다.
태풍이 불때는 창문에 신문지를 붙이면 되고, 해일이 밀려왔을 때는 튼튼한 고층 빌딩으로 들어가면 되고, 낙진이 시작되었을 때는 두터운 방벽의 지하실로 숨어들면 된다.

하지만 저건.
저건, 대체 뭘로 막아야 하는 걸까.
막을 수 있긴 한 것일까.

츠츠츠츠츠······.

빛이 사라진 하늘에 한 사내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개연성을 소진하며 환하게 빛나는 존재.
그의 모습을 발견한 정희원의 표정에 일말의 안도가 스쳤다.
연회에 참석했던 성좌들 중 대부분은 이틀 전에 마계를 떠났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눈부신 스파크를 터뜨리며, 사내가 흉벽 위에 올라섰다.

[갈(喝)! 다들 정신 차려라!]

고려제일검 척준경.
웅혼한 사자후가 성벽 전체에 울려 퍼지자, 정신력이 강한 몇몇 화신들은 간신히 제정신을 되찾는 듯했다. 그들이 척준경을 보고 있었다.

무엇이 다가오는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쪽에는 척준경이 있었다.

그리고 척준경은, ‘이계의 신격’과 싸워본 경험이 있다.

[이계의 신격이여! 어째서 이곳으로 찾아온 것인가? 여기는 그대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하늘을 향해 울려 퍼지는 사자후. 목소리에 깃든 기파에 화신들의 얼굴에 하나둘 희망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척준경이 다시 한 번 외쳤다.

[위대한 외신이 되어 한다는 짓이, 고작 여분의 개연성을 먹어 치우는 것이란 말인가!]

그러나 반복된 외침에도, 하늘은 대답이 없었다.
마치 코끼리가 개미를 보지 못하듯이, ‘그것’은 척준경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척준경의 표정이 굳어졌다.
코끼리가 개미를 보지 못한다면, 보게 만들면 된다.

[■■■■■!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여!]

그 순간, 뭔가가 척준경을 바라보았다.

츠츠츠츠츠츠츳! 퍼어엉!

척준경의 전신에서 스파크가 폭발했다. 그의 외피가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척준경의 단단한 근육이 파열되어 피가 흘렀고, 스파크에 부서진 성유물이 재가 되어 허공을 날았다. 고작 이름을 부른 대가였다. 그럼에도 척준경은 물러서지 않고 검을 뽑았다.

[······산을 베고, 바다를 베고, 심지어는 태양도 베었던 검이다. 이 검으로, 이번에는 너를 베겠다.]

‘하나’로 묶을 수 없는 거대함이 척준경의 망막에 가득 들어찼다.
어디를 베어야 할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끝인지도 알 수 없는 막막함. 너무나 무한하기에 한줌의 가능성조차 존재하지 않는 아득함 속에서, 척준경이 움직였다.

[오오오오오오오오!]

빛살처럼 쏘아진 척준경이 천공을 꿰뚫었다.

일검에 천 명을.
이검에 태산을.
삼검에 바다를 가르는 검.

그 검이, 유성우처럼 빛나며 광활한 어둠을 내리그었다.
아주 잠깐, 하늘의 심연에 실낱 같은 빛이 그어졌다.
그 빛을 본 화신들은 전율했다.

고려 제일의 무장이 이계의 신격과 싸우고 있었다.

다음 순간, 하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먼 은하에서 생애주기를 마친 별이 스러지는 듯한 소리였다.
그리고 뭔가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아, 아아, 아······.”

시력이 좋은 누군가가 그것을 먼저 발견했다.
잘려 나간 팔과 터져버린 다리. 몸체의 반쪽만이 남은 화신체가, 지상을 향해 낙하하고 있었다. 경악과 불신. 척준경의 표정을 볼 수 없는 자들조차, 그가 느낀 감정을 알 수 있었다.

태산과 바다를 참하고, 태양마저 베었던 검.
그런 검도, 벨 수 없는 것은 있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벨 수 없는 것’이었다.

츠츠츠츠츠······.

척준경의 화신체를 받아낸 것은 파천검성이었다.

[······검흔을 기억해라.]

척준경의 화신체는 그 말을 남기고 소멸했다.
무려 설화급 성좌의 화신체였다.
수르야의 열차를 부수고, 이계의 신격의 다리를 잘라냈던 이였다.
그런데 그런 성좌가, 단 한 순간의 전투로 불능이 되어 화신체를 잃었다.

“우, 우아아아아아악!”

뇌리를 잠식하는 공포 속에서 공민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모든 방위의 지평선을 메워버린 어둠.
지반이 꿈틀거리며, 태동처럼 뭔가가 움직였다.

스걱스걱스걱스걱······.

마치 거대한 벌레가 거대한 먹이를 먹어치우는 듯한 소리.
멀리서 지평선이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지상을 비추는 빛의 세기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73번째 마계’가 고통 속에 신음합니다!]

파천검성과 키리오스는 이미 <제1 무림>에서 그 광경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키리오스가 말했다.

“······미친 제자 때문에 잘못하면 여기서 죽게 생겼군.”
“너도 나도 제자 복은 없는 모양이다.”

세계가 절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직 탐욕으로만 가득찬 어둠이 73번째 마계의 모든 것을 먹어치우며 다가오고 있었다.
까드득 이를 간 키리오스가 백청강기의 모든 마력을 집중시켰다.

“······이래서 ‘개연성’을 잘 지켜야 하는 건데.”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
별들의 재앙이라 불리는 이 신격은, 어떤 의미에서 개연성의 후폭풍 그 자체였다.
어긋난 <스타 스트림>의 법칙을 다스리는 혼돈에서 비롯된 청소부.

“이미 어긋난 것, 어쩔 수 없다. 있는 힘껏 최악까지 비틀어 주마!”

파천검성의 외침과 함께, 두 초월좌의 격이 환하게 빛을 발했다.
하늘을 부수는 파천의 검.
무림의 신, 파천검성의 절초가 <제1 무림>의 힘을 품에 안은 채 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파천검도(破天劍道).
절기(絶技).
파천유성결(破天流星決).

언젠가 유중혁이 사용했던 바로 그 검식.
무수한 성좌들을 때려 눕히고 베었던, 파천검도의 절초.

콰드드드드드드!

맹포한 파천의 검결이 하늘을 수놓으며 터져 나갔다. 폭발적인 마력의 세례가 허공을 찬란하게 수놓았고, 유성의 검결이 화려한 형상을 그리며 허공에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흠집조차 없었다.

마치 우주를 떠도는 먼지처럼, 공허하게 사라지는 검격.
하늘을 부수는 그녀의 검도 우주를 부술 수는 없었다.

“키리오스!”

신호를 받은 키리오스가 파천검성의 어깨를 밟고 뛰어 올랐다.

츠츠츠츠츠츳!

눈부신 광휘가 흐르며 [전인화]의 힘으로 가속한 키리오스가 대기권을 뚫고 창공을 날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우주. 그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키리오스는 창공을 덮은 어둠과, 그 어둠 너머에서 이쪽을 보는 별들의 시선을 느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금빛 안광을 발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포효합니다!]

그곳은 별들이 머무는 자리.
짧은 인간의 팔로는 결코 닿을 수 없던 곳이었다.
키리오스도 알고 있었다.

콰드득!

그래서 노력했다.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콰드득! 콰드득!

파천검성이 남긴 유성결의 파편을 밟고, 키리오스는 높이, 더 높이 뛰어 올랐다. 닿을 수 없는 별을 향해 달려가듯, 각고의 시간을 거쳐 역사를 쌓은 필멸의 존재는 마침내 눈부신 별들의 좌(座)에 도달했다.

그렇게 도달한 우주.
키리오스는 마침내 ‘그것’을 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

거대한 안개를 연상시키는 무엇.
명확한 형체가 없는 안개가 행성 ‘73번째 마계’를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고 있었다.
그 안개의 중심에, 척준경이 남긴 실낱 같은 검흔이 있었다.
극한까지 뭉친 백청의 힘이, 키리오스의 오른손에 집약되었다.

[본디 가장 작은 것에서, 우주는 시작되었다.]

거센 기합과 함께 키리오스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마치 빅뱅이 터지듯, 백청의 강기가 안개의 중심지에 꽂혔다.

꽈아아아아앙!

하늘을 하얗게 물들이는 섬광과 함께, 공민들 모두가 눈을 감았다.
찰나, 우주를 압도한 두 초월좌의 힘이 세계의 어둠을 덮었다.
그리고 빛이 순식간에 꺼졌을 때, 하늘을 덮은 어둠에 거대한 균열이 발생해 있었다. 공민들이 외쳤다.

“해, 해냈다.”
“해냈어! 초월좌들이 해냈다고!”

츠츠츠츠츠츠······.

그러나 파천검성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창공을 꿰뚫고 날아오는 키리오스를 보며, 파천검성이 희미하게 웃었다.

“여기까지군.”

쿠드드드드드드.

낙하하는 키리오스의 너머로, 하늘이 갈라지고 있었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뭔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눈동자였다.
세계를 오시하는 거대한 눈. 새하얀 수정체 속에서 새카만 동공이 떨어지는 키리오스의 등을 좇았다. 파천검성이 기함했고, 키리오스가 등을 돌렸다.
초월좌의 마력이 항거할 수 없는 격과 충돌했다.

스스스스스슷······.

질끈 묶은 키리오스의 장발이 하얗게 세고 있었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파천검성의 근육이 쇠하고 있었다. 노화를 겪듯이, 아득한 시간 앞에서 두 초월좌의 몸이 죽어가고 있었다.

우주의 ‘격’이 달랐다.

필멸자를 초월하여 초월좌가 되었고, 성좌조차 능멸할 힘을 얻었다.
하지만 그들이 겪은 지독한 수련의 역사는, 저 우주적 존재의 ‘역사’에 비하면 티끌조차 되지 않았다.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 ‘73번째 마계’를 바라봅니다.]

미쳐버린 공민들이 날뛰었다.

“탈출! 탈출!”
“웨에에에에에엑!”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공민들은 들짐승같은 울음을 토했다.

[강력한 존재의 개입으로 인해 포탈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뭐야, 뭐, 뭐······.”
“뭐뭐뭐뭐뭐······.”
“왁왁왁왁왁왁왁······.”

몸의 곳곳이 울룩불룩 솟아오른 공민들의 몸이 터져 나갔다. 기괴한 존재로 변해버리는 이들도 있었고, 입에서 촉수를 토해내는 이들도 있었다.

세계가 미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저 말도 안 되는 존재의 시선 앞에서도, 여전히 칼을 놓지 않은 존재도 있었다.

“······아직이야. 싸울 수 있어.”

정희원이었다. 숨을 헐떡이고, 메슥거리는 속을 다스리면서도 정희원은 무릎 꿇지 않았다. 하나둘 모여든 일행들이 그녀의 곁에 섰다.
그들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화신들을 보호합니다.]

이 세계가, 멸망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이 ‘73번째 마계’의 역사 그 자체였기 때문에.

쿠구구구구구!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도망치라고 외칩니다!]
[성좌, ‘버려진 미로의 연인’이 비명을 지릅니다.]
[성좌, ‘서애일필’이 고통에 눈을 감습니다.]

일행들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가진 그 어떤 힘도, 저 강대한 존재 앞에서는 초라하다는 것을.
심판자의 검을 움켜쥔 정희원이 피를 토하며 외쳤다.

“우리엘! 제발!”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는 반응이 없었다.
공필두의 ‘디펜스 마스터’도, 이현성의 ‘강철의 주인’도.
이번만큼은 화신의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아니, 응답할 수 없었다.

[밤하늘의 모든 별들이 침묵합니다.]

저 하늘의 성좌들은 어떤 지탄도 내놓지 않았다.
천둥 번개와 폭풍을 두고 지탄할 수 없는 것처럼, 애초에 ‘저것’ 또한 지탄을 받을 대상이 아니었다.

쿠구구구구.

겁에 질린 오수가 소변을 지렸다.
헛구역질을 하는 장하영이 바닥에 주저 앉았고.
넋이 나간 공필두는 무의미한 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벌벌 떨던 한명오는 그의 외발이 닿을 곳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쩌저저저저저적!

세계를 먹어치우는 저 존재 앞에서, 그의 발이 짚을 땅은 없었다.

“독자 씨!”

그리고 김독자가 있었다.
유상아의 외침과 함께, 모두가 같은 장소를 올려다보았다.
미완성된 시계탑의 꼭대기. 천천히 흐르는 시간의 끄트머리에 선 김독자가 있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밤하늘을 바라봅니다.]

빛이 꺼진 밤하늘을 유일하게 밝히는 별.
그곳에 ‘구원의 마왕’이 있었다.





< Episode 53. 구원의 마왕 (2) > 끝

< Episode 53. 구원의 마왕 (3) >





정희원이 중얼거렸다.

“······독자 씨?”

김독자가 발하는 빛살 너머로, 거대한 눈이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과 마주하는 순간 정희원은 미칠 것 같은 감각에 몸을 떨었다.

쿠구구구구구!

대지가 일그러지며, 지진파와 함께 지반이 해일처럼 덮쳐오고 있었다.

[‘73번째 마계’가 고통 속에 울부짖습니다!]

파괴된 지각이 용암을 뿜어댔고, 넘쳐 흐르는 열기는 다시금 공허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공단]을 중심으로 모든 세계가 좁아지고 있었다.
이곳이 이 지경이라면, 다른 [공단]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뻔했다.

츠츠츠츠츳!

설화로 증폭된 초월좌의 마력이 움직였다.
저 ‘눈’에 직접 대항하는 것은 무리지만, 지진파를 지체시킬 수는 있었다.

“빨리해라, 멍청한 제자야!”

키리오스의 외침과 함께, 공단의 흉벽 너머로 공간이 일그러졌다. 거대한 안개 속에 파먹힌 지평선이 새카만 허무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더 이상 지평선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정희원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들은 것이 맞다면, 스승들과 김독자는 이 상황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아저씨! 이거 대체 무슨 일인데!”

척준경의 화신체가 소멸하고, 키리오스와 파천검성이 저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될 때까지 그 ‘김독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턱이 없었다.
쉴 새 없이 허공을 향해 뭔가를 중얼거리는 김독자의 입술. 저 먼 우주 속에서 뭔가를 찾아 헤매듯 바삐 움직이는 눈동자.
정희원은 깨달았다.
자신들이 포기하지 않았듯, 김독자 역시 포기하지 않았음을.
김독자가 천천히 지상을 향해 내려왔다.
그것을 신호로 정희원이 외쳤다.

“다들 준비하세요!”

[강철화]를 발동한 이현성이 물었다.

“독자 씨! 저희가 뭘 하면 됩니까?”

모두가 김독자를 보고 있었다.
방법은 모른다.
하지만 김독자라면 뭔가 생각해둔 것이 있을 것이다.
천천히 눈을 깜빡인 김독자가 일행들을 마주 보았다.

지난 며칠 동안, 김독자는 일행들에게 많은 것들을 내주었다.

이현성은 새로운 방패를 받았고, 정희원은 새로운 스킬을 얻었다.
이지혜는 마력을 집중적으로 강화시켰고, 신유승과 이길영은 다수의 대군 통제 스킬을 익혔다.
그랬기에 일행들은 믿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설화의 소유주들에게 깃듭니다.]

그들이 함께 쌓은 이 ‘거대 설화’가 있다면, 그리고 김독자가 준비한 작전이 있다면, 아무리 강력한 적이라도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수르야의 궤도 열차조차 떨어트린 게 그들이다. 설령 그 어떤 적이 온다고 해도······.

“아저······씨······?”

가장 먼저 이상 신호를 보낸 것은 신유승이었다.

츠츠츠츠츳!

거친 스파크와 함께 신유승의 무릎이 꺾이듯 주저앉았다. 단단한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몸이 조금도 움직이질 않았다.

「이것은 독자(獨子)의 설화.」

김독자의 몸에서 흘러 나오는 ‘거대 설화’가, 강력한 족쇄가 되어 일행들을 옭아매고 있었다. 이현성의 거구가 느릿느릿 바닥에 주저 앉았다.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든 이현성이 물었다.

“독자 씨? 이게 대체······.”

김독자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분명히 그곳에 있었음에도, 그는 함께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분명히 다 같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일까.

왜 저 사람은, 저기에 혼자 있는 것처럼 보일까.

홀로 존재하는 ‘설화’는 없다.
김독자의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유중혁의 ‘패왕의 이름을 계승한 자’와 연결되어 있고, 정희원의 ‘미래악의 배제자’가 김독자의 ‘이야기꾼을 능멸한 자’와 연결되어 있듯.
일개 설화도 그럴진대, 더 커다란 이야기를 공유하는 ‘거대 설화’라면 말할 것도 없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은, 끔찍한 전장에 참가했던 모두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마계의 봄’은 오직 김독자만의 것이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의 최고 담화자(談話者)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일행에게 주어져 있던 ‘거대 설화’의 모든 지분이 통제되고 있었다.
뒤늦게 일행들도 ‘거대 설화’의 지분을 사용해 저항했다.
정희원, 유상아, 이현성, 이길영, 신유승······.
하지만 그 모든 이들이 가지고 있던 지분을 합쳐도, 단 한 사람의 거대한 의지를 이길 수 없었다.
만약 유중혁이 깨어 있었다면 달랐겠지만, 지금 이곳에 유중혁은 없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정희원이 고통스럽게 외쳤다.

“잠깐만! 뭔데요! 이거 대체 뭐냐고요!”

김독자의 표정을 올려다 본 정희원은 그제야 뭔가를 깨달았다.
닥쳐오는 위기를 앞두고 늘 김독자가 짓던 표정이 있었다.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씩 웃던, 조금은 재수 없지만 사람을 안심시키던 표정.
그러나 지금 김독자의 표정은······.
어째서.

“어차피 이럴 거였으면 며칠 동안 준비했던 건 다 뭐예요! 나한테 준 스킬들은 대체 뭐냐고요!”

정희원의 처절한 외침에, 처음으로 김독자가 입을 열었다.

“그건 28번 시나리오의 ‘사스콰치’들을 상대하라고 알려드린 겁니다.”
“그, 그럼 제 방패는······.”
“35번 시나리오에서 ‘알곤킨의 뱀’을 잡을 때 유용할 겁니다. 같이 드린 스킬도 꼭 잊지 마시고요. 사용법은 모두 알려드렸죠?”

늘 그랬듯, 그 모든 안배에는 이유가 있었다.
넋이 나간 얼굴로 묻는 일행들에게, 김독자는 하나하나 이유를 알려 주었다.

“그럼 이건······ 이번 시나리오는······.”

하지만 그 안배들 중 어떤 것도, 지금 이 상황을 위한 것은 없었다.
어느새 지평선 너머를 덮고서 저만치 닥쳐온 어둠.
그 어둠을 보며, 김독자가 말했다.

“이건 제가 해결합니다.”
“씨발! 개소리하지마!”

정희원이 울고 있었다.

“못 보내! 또 혼자 가지마! 제발!”

아무리 김독자라도 저걸 혼자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두 명의 초월좌와 척준경조차 막아내지 못한 존재.
그런 존재를, 김독자 혼자 어떻게 할 수 있을 턱이 없다.

“으아아아아아! 싫어! 독자 형!”

지난 번처럼 빚을 지고 싶지 않아서 강해졌다.
지옥 같은 개인 시나리오를 수행했고, 미친 듯이 괴수들을 잡았다.
정희원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혼자선 안 된다고 말한 건 당신이잖아! 우릴 모은 것도 당신이잖아! 당신이 이 모든 걸 알려줬잖아!”

희미하게 웃는 김독자의 입술에서 낯선 진언(眞言)이 흘러나왔다.

[알고 있습니다.]

“알긴 뭘 알아! 그걸 아는 사람이, 어떻게······!”

[그래도 지금은 아닙니다.]

이현성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저는 이런 거 원하지 않습니다! 이런 도움 필요 없단 말입니다. 전 여기서 죽겠습니다! 독자 씨랑 같이 여기서 죽겠습니다!”

이곳에서 죽겠다.
하늘을 보던 김독자가 시선을 낮춰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일행들을 바라봅니다.]

일행들은 그 메시지를 들었다. 흩날리는 김독자의 머리카락을 보며. 긴 속눈썹과 눈동자를, 하얗게 빛나는 뺨과, 슬프게 일그러진 입술을 보며. 새삼스럽게도, 김독자가 그런 얼굴로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살아 주세요.]

마치 하나의 정언명령처럼, 무력하게 그 말을 들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시선을 거둡니다.]

김독자의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츠츠츠츠츳!

오래도록 잠들어 있었던 마왕의 힘이 깨어나고 있었다.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73번째 마계’의 설화가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새하얀 김독자의 코트가 마기로 인해 검게 물들어 갔고, 김독자의 머리 위에 뿔 두 개가 솟았다.
오직 ‘마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왕화]의 권능이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자신의 친우를 바라봅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적수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성좌, ‘고려제일검’이 분통한 고함을 내지릅니다.]
[성좌, ‘지고한 빛의 신’이 ‘73번째 마계’의 마지막을 지켜봅니다.]

김독자의 어깻죽지를 뚫고 자라난 새카만 깃털이 밤하늘을 품듯 펼쳐졌다. 시계탑의 초침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김독자의 신형이 솟구쳤다.
마치 이 시간을 떠나듯이, ‘구원의 마왕’은 하나의 빛이 되어 하늘을 날았다.

콰아아아아아!

김독자의 신형이 창공을 꿰뚫는 순간, 천둥이 내리쳤다. 몇 번인가 우레가 쏟아졌고, 지평선 너머에서 다가오던 안개가 주춤거렸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광경.
일행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김독자가 사라진 밤하늘만 올려다보았다. 완성되지 못한 시계탑은 삐걱거리면서도 계속해서 시간을 밀어댔다.
1분, 2분, 3분······.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김독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정희원은 절규했다.

“김독자아아아아아!”

거의 동시에 경계를 지키던 초월좌들이 흉벽에서 튕겨져 나왔다.
넝마가 된 파천검성과 키리오스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춤거리던 안개가 다시 세계를 파먹고 있었다.
지평선을 모조리 먹어치운 그것은 어느새 흉벽 근처까지 와 있었다.
입자 단위로 해체되어 스러지는 흉벽.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정희원은 생각했다.

막지 못했다.
그 김독자조차, 저걸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범람한 안개가 [공단] 전체를 덮쳐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츠츠츠츠츳!

정희원은 자신의 몸이 어딘가로 전송되는 것을 느꼈다.
체념한 듯 눈을 감은 유상아도, 울부짖으며 하늘을 보던 이현성도.
다리를 끌어 안은 채 주저앉은 한명오와 부서진 성을 사수하던 공필두까지.
모두, 새하얀 스파크 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유중혁―김독자 공단’에 있던 모든 것이, 어딘가로 전송되고 있었다.
분통하다는 듯, 안개 건너편에서 위협적인 울음이 들려왔다.

【■■■■······ ■■■■■■!】

이윽고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


희미한 소란 속에서 유중혁은 눈을 떴다.
전신의 근육이 잘 움직이질 않았다.
아무래도 [기사회생]의 후유증이 큰 것 같았다.
금이 간 천장을 올려다 보며, 침착하게 몇 번인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기억해냈다.

마왕 선발전이 있었고.
회귀를 거부했고.
김독자와 함께, 수르야와 싸워 이겼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머릿속에 활력이 돌았다.
이겼다. 이긴 것이다.
거칠게 움직인 마력이 전신을 순환하자 조금씩 정신이 들었다. 천천히 감각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이자, 주변의 정경도 점차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병실이었다.

부드러운 침대의 감촉. 오른손에 딱딱한 뭔가가 느껴졌다.
옅은 신음과 함께 상반신을 들어 올리자, 조그만 회중 시계가 시계 끈과 함께 팔에 감겨 있는 것이 보였다.

움직이는 시계 바늘이, 그의 심박처럼 가늘게 뛰고 있었다.

잠시간 유중혁은 그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창 밖으로 희미한 볕이 들고 있었다.
마계의 볕이라기엔 지나치게 환한 햇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유중혁은 창가로 다가갔다.
무너진 [공단]의 흉벽 너머로 낯설면서도 익숙한 정경이 보였다.

부서진 이순신 장군의 동상과, 폐허가 된 경복궁.
무너진 광화문의 잡거빌딩들 사이로 피어오르는 연기.

이곳은 서울이었다.

창밖으로 주저앉은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왜 그가······ 그들이, 서울에 있단 말인가.
그것도 [공단]의 건물들과 함께 통째로.
유중혁은 황망한 눈길로 일행들을 헤아렸다.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김독자?”

스산한 느낌에 중얼거린 순간, 메시지가 들려왔다.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침묵합니다.]

멍한 얼굴로 메시지를 보던 유중혁이 다시 한 번 창밖을 살폈다.

······없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어떤 별의 빛도 필요하지 않을 만큼 환한 하늘. 그 너머로 보이는 성좌들의 빛을 헤아린다. 헤아리고, 또 헤아린다. 모르겠다.
별들이 너무 많아서, 찾을 수 없는 것인가.
유중혁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이템, ‘한낮의 밀회’를 사용합니다.]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메시지 창이 열리며,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메시지가 반송되었습니다.]

오류일 것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반복해서 메시지를 보냈다.
보내고, 보내고, 또 보내고.
돌아오는 메시지의 숫자만큼, 유중혁의 시선도 천천히 낮아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금일 제공된 메시지 할당량을 모두 소진하였습니다.]

째깍거리는 회중시계를 전경으로, 담담한 메시지들만이 유중혁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성좌, ‘구원의 마왕’은 <스타 스트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은 <스타 스트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은 <스타 스트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은 <스타 스트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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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 ‘구원의 마왕’은 <스타 스트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 Episode 53. 구원의 마왕 (3) > 끝

< Episode 53. 구원의 마왕 (4) >





[‘제4의 벽’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시작은, 수르야와의 격전을 치룬 직후였다.
거대 설화를 얻고, 일행들과 함께 마계를 지켜냈던 그날.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3차 수정본).txt

나는 ‘멸살법’의 세 번째 수정본을 받았다.

「눈을 떴을 때, 유중혁은 생각했다. ······4회차로군.」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
오히려 기대되기까지 했다. 지금의 ‘3회차’는 유중혁이 겪었던 그 어떤 회차보다 완벽한 회차였다. 스물 다섯 번째 시나리오에서 마왕이 되고, ‘거대 설화’까지 얻었으니까. 어쩌면, 이번 수정본에서는 내가 원하던 ‘결말’이 기록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잘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녀석도 그렇게 말했다. ‘이계의 신격’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모든 게 그랬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유중혁은 지난 1차와 2차 수정본 때와는 달랐다.
이성을 잃고 있었고, 성급했고, 계획적이지도 않았다. 3회차를 겪고 온 유중혁은, 어딘가가 심각하게 망가져 있었다.

「그날, 3회차의 모든 것이 끝났다.」

그 부분을 읽었을 때에야, 나는 뭐가 잘못된 것인지 깨달았다.

쿠구구구구.

흉벽 너머로 몰려오는 ‘검은 안개’를 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에서 꿈틀거리는 [제4의 벽]이 문장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실패할지도 모른다.」

이번에 죽으면 나는 살아날 수 없다.
이제 내겐 부활 특성이 없으니까.
저 ‘이계의 신격’에게 삼켜지게 되면, 나는 수식언의 맥락과 함께 통째로 소멸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놈을 막을 수만 있다면······.

「‘멸살법’ 어디를 뒤져도, 지금의 내가 놈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한수영은 말했다. 지구의 시나리오는 원작의 궤도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이번 위기만 무사히 넘기면, 우리는 원작의 특수를 노리며 원하는 결말로 향할 수 있다.
시계탑 아래로, 나를 올려다보는 동료들의 시선이 보였다.

「아니, 한 가지 방법은 있다. 원작에서는 ‘실패한’ 방법.」

······나만 잘 하면 된다.

「살아야 한다. 싫어도 살아야 한다.」

누구도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만, 모두가 ‘결말’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까.」

쩌저저저저적!

밤하늘이 갈라지며, 거대한 눈동자가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초월좌들이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미리 이야기를 맞춘 키리오스가 이쪽을 보며 외쳤다.

“빨리해라, 멍청한 제자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계탑 아래로 내려갔다. 척준경과 스승들이 벌어준 시간을 헛되이 써서는 안 된다.

“못 보내! 또 혼자 가지마! 제발!”
“으아아아아아! 싫어! 독자 형!”
“혼자선 안 된다고 말한 건 당신이잖아! 우릴 모은 것도 당신이잖아! 당신이 이 모든 걸 알려줬잖아!”

일행들의 외침 속에, 필요한 이야기들을 한다.
정말로.
정말로, 필요한 이야기만 한다.

[살아 주세요.]

머리에서 돋아난 뿔이 간지럽다. 등에서 솟은 날개가 아프다.
정희원의 절규와 이현성의 울부짖음이 들린다.
아이들이 나를 향해 손을 뻗는다.
미리 내게서 이야기를 들었던 유상아는, 울면서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유상아는 잘 해낼 것이다.

쿵, 하고 지면을 내리찍는 순간 전경이 빠르게 밀려났다.
일행들의 비통한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어쩌면 말해주고 싶었다.

「나도 당신들과 결말을 보고 싶다.」

콰아아아아아!

대기권을 꿰뚫는 폭음과 함께 날갯죽지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술잔을 떨어트립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깊은 탄식을 뱉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무운을 빕니다.]

어떤 성좌들은 나를 걱정했고.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당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행동을 비난합니다.]

또 어떤 성좌들은 나를 비난했다.
그리고 누구도 코인을 후원하는 이는 없었다.
어쩌면 성좌들도 아는 것이다.
이것은 코인을 받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뺨을 닦으며, 김독자는 막막한 우주를 바라보았다.」

안개의 중심부. 그곳에 척준경과 파천검성, 그리고 키리오스가 만들어낸 작은 상흔이 보였다. 나는 [전인화]를 전력으로 발동해, 그 상흔을 향해 몸을 던졌다. 본래였다면 절대 시도하지 않았을 방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계의 신격들은 자격이 없는 존재와는 언어를 나누지 않으니까.

고오오오오오!

오른손에서 피어오른 [백청강기]가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칼날을 키웠다.
전신의 혈관을 긁어대며 발출한 마기가 희고 푸른 강기의 다발 위에 검은 아우라를 덧씌웠다. 오른손에 깃든 마력이 폭발하며 안개의 중심부에 강력한 충격파가 터졌다. 일순간 아주 작은 틈새가 벌어졌고,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꾸구구구구국.

새카만 안개 속에 진입하자, ‘이계의 신격’이 정체를 드러냈다.
침투한 세균을 눈치챈 백혈구처럼, 수천, 수만, 수억······ 셀 수도 없이 많은 입자들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 더 네임리스 미스트(The nameless mist).
이 <스타 스트림>의 성간을 떠도는 재앙의 이름.

나는 그 존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위대한 이계의 신격이여.]

엄밀히 말해, 이 안개는 그 신격의 원형(元型)조차 아닐 것이다.
원형이 낳은 끔찍한 분신들 가운데 하나일 뿐.
그런데 그 분신이, 이처럼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부탁합니다. 물러가주십시오.]

내 말에, 입자들이 파르르 진동했다.
당연히 말이 안 통할 거라 예상은 했다.

츠츠츠츠츳!

주변으로 모여든 안개의 입자들이 나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당신의 화신체를 보호합니다!]
[‘제4의 벽’이 당신의 정신을 보호합니다!]

‘제4의 벽’의 영향으로 이 아득한 존재 앞에서도 나는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거대 설화’가 조금씩 갈려 나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

안개가 알 수 없는 이계의 언어를 지껄였다. 아마 해석이 되었더라도 제대로 듣지 못했을 것이다.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은 무의식에 가까운 존재니까.
이야기를 좇는 본능만이 남은, 굶주린 포식자.
질식시킬 듯 몰려드는 안개 속에서 내 존재는 조금씩 옅어져 갔다.

[······빌어먹을 새끼.]

츠츠츠츠츳.

우리엘이 강림해도, 이 녀석은 막을 수 없다.
현시점의 제천대성이나, 심연의 흑염룡으로도 안 될 것이다.
셋 다 온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없겠지.

「그렇기에, 지금 김독자를 도울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멸살법’에는 나오지 않았던 존재.
하지만 지금 나를 도와줄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존재이자, 저 ‘안개’에 대적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
험한 안개 입자 사이로 어렴풋이 이계의 별빛들이 보였다. 그에게 ‘제대로’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은밀한 모략가!]

전력을 다해 발출한 목소리가, 안개를 뚫고 성간을 건너간다.
일순 안개가 꿈틀대며 포효했고, 저 먼 은하 건너편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나는 다시 한 번 외쳤다.

[나는 당신과 ‘이계의 언약’을 맺겠다!]


*


이계의 언약을 맺었던 유중혁의 모든 회차는 불행해졌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오거나, 말도 안 되는 계약을 이행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 방법뿐이었다.
내게 생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안개는 포식을 멈추지 않았다.

나를 먹는 것도, 73번째 마계를 먹어 치우는 것도 그만두지 않았다. 뜯겨 나가는 설화를 보며 불현듯 좋지 않은 예감이 스쳐갔다. 설마 ‘은밀한 모략가’도 이 녀석을 막을 수 없는 건가?

츠츠츠츠츠츠츳!

시공간이 삐끄덕거리며, 모든 것의 움직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실로 압도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힘이, 근처의 시공간 전체를 통제하고 있었다. 안개가 울부짖었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의 생명 활동이 급격하게 잦아들었다. 마치 빙하 속에 얼어붙은 생명체처럼, 영원히 그 시간 속에 갇혀 있기라도 할 것처럼.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내가 모르는 어떤 은하에 서 있었다.

발 아래를 내려다 보자 <스타 스트림>의 정경이 보였다.
<스타 스트림>의 외곽, 저 별들의 성운에서 ‘가장 먼 곳’.
성류를 밝히는 무수한 별들이 발치에 매트처럼 깔려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지루한 광경이지.】

다른 이계의 신격과는 달리 몹시 명징하고 또렷한 목소리.
사람의 형체를 띤 그림자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너를 기다렸다. ‘종장(終章)’을 추구하는 존재여.】

벌린 입 속으로 새하얀 어둠이 보였다.
그저 담담히 말을 듣는 것 뿐인데, 화신체가 위태롭게 떨려왔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그 어둠의 중심부에 똬리를 튼 악(惡)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떨었던 것은, ‘은밀한 모략가’가 품은 불길한 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영원(永遠)’을 갈망하는 존재라 불러야 할까.】

나는 잠시 입을 다문 채 그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

그의 말은 내게 두 가지 의미로 들렸다.

영원(永遠).
종장(終章).

서로 상반되는 두 단어가, 하나의 말에 함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거대 설화를 얻었을 때 내가 들은 메시지와도 같았다.

―당신은 ‘영원’의 자격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종장’의 자격을 얻었습니다.

기이하게도 내 ‘끝’은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
‘양산형 제작자’를 비롯한 성좌들이 내게 필터링의 정체를 물었을 때 ‘종장’이라고 답했던 것은, 그쪽이 성좌들을 설득하기 더 쉬웠기 때문일 뿐이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내 ■■가 두 가지 의미라는 것을 말한 적이 없었다.

【아주 오랜 세월을 살면, 말하지 않은 것이 더 크게 들리는 법이지.】

[‘제4의 벽’이 불길하게 흔들립니다!]
[‘제4의 벽’이 부피를 키우며 당신을 보호합니다.]
[‘제4의 벽’이 ‘은밀한 모략가’를 향해 이빨을 드러냅니다!]

【‘최후의 벽’의 파편인가······ 걱정 마라. 해칠 생각은 없으니.】

알 수 없는 웃음이 그림자의 입가를 스쳐갔다.

은밀한 모략가.

제천대성, 우리엘, 심연의 흑염룡과 더불어 가장 오랫동안 나를 지켜봐온 성좌.
‘멸살법’을 읽은 나조차 알지 못하는 존재.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몇 번이나 그와 만나는 연습을 했지만, 그게 이런 식이 될 줄은 몰랐다.

“처음 뵙겠습니다, ‘은밀한 모략가’.”

나는 그를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짐작가는 것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시나리오의 심해를 ‘기어다니는 혼돈’이시여.”





< Episode 53. 구원의 마왕 (4) > 끝

< Episode 53. 구원의 마왕 (5) >





기어다니는 혼돈.
이 우주의 ‘근원’에 가장 가까운 이계의 신격 중 하나이자, 그나마 인간들에게 호의적인 존재······ 어디까지나 신화에 따르면 그렇다는 얘기고, 사실 ‘멸살법’에는 그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기어다니는 혼돈이라······ ‘최후의 벽’이 나를 그렇게 부르던가?】

“그냥 제 추측입니다.”

【‘공포의 기록자’들이 남긴 문헌인가. 100년도 되지 않은 기록을 믿다니, 생각보다 순진하군. 인간의 언어로는 미지의 편린조차 드러내지 못하거늘.】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멸살법’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의 원형이 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화에서도 ‘이계의 신격’에 관해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 ‘멸살법’의 74회차에서 ‘공포의 기록자’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가 쓴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미지의 공포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쓸 수 있었던 것은 거짓말뿐이었다.”」

때문에 나는 조금 주눅이 든 채 물었다.

“······지구에 알려진 신화가 틀린 겁니까?”

【나는 네게 ‘은밀한 모략가’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충분한 대답이기도 했다.
그가 ‘기어다니는 혼돈’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은밀한 모략가’는 수식언에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신격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저것을 막아달라는 부탁이겠지.】

“그렇습니다.”

‘은밀한 모략가’가 내려다본 곳에, 무지막지한 안개 덩어리가 꾸역꾸역 행성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은밀한 모략가’의 권능으로 해당 계(界)의 시간이 느려져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정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르르르르······.

가만히 그쪽을 들여다보던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저 안개는 태초에서 비롯된 재앙. 온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방법이 있다는 걸 압니다.”

‘은밀한 모략가’는 내 말에도 아랑곳 않고 그저 우주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나는 긴장한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불온한 소리를 내며 일렁이는 그림자.
채널에서 간접 메시지를 들을 때만 해도 이런 느낌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장난기도 많고, 친화력도 좋은 성좌인 줄 알았는데······.
지금 눈앞의 ‘그림자’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무섭도록 차갑고 서늘한 감각뿐이다.

스스스스슷.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겠지만, 멀찍이 보이던 ‘73번째 마계’의 모습이 불현듯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마어마한 배율의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나는 [공단]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김독자아아아아아아!

환청처럼 들려오는 정희원의 목소리.
절망 속에 절규하고 있는 일행들이 보였다.

【왜 저들을 구하려는 것이지? 너 하나만 살아도 결말은 볼 수 있을 텐데.】

“저들이 있어야 결말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 말을 하며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의 질문들과 대답들을 시뮬레이션했다.
움켜 쥔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여기서 실패하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이 대화에서 ‘은밀한 모략가’를 설득해야만 한다.

【그들이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반쯤 벌렸던 입을 천천히 다물었다.

「빌어먹을, 김독자! 그만둬! 제발! 돌아오라고!」
「난 이런 거 원하지 않아. 이런 식으로 살아남고 싶지 않다고.」
「뭐든 할게요. 죽으라면 죽을게요. 가만 있으라면 가만 있을게요. 하지만 제발, 그런 짓은 하지 마세요! 제발!」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들려왔던 일행들의 목소리.
그들은 전하지 못했으나, 나는 들었던 말들.

【저들이 원했던 결말이 저곳에서 너와 함께 죽는 것이었다면? 그래도 기어코 저들을 구하겠다는 것인가?】

나는 간신히 입을 떼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구원이 아니다. 저주다.】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를 대신해 대답한 것은 나의 설화였다.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내게서 흘러나오는 설화를 보며, ‘은밀한 모략가’는 계속해서 물었다.

【죽어야 할 자들을 살려서 세계선을 바꾸고, 모두에게 상처를 입힌 후 네가 원하는 결말에 도달한다고 한들······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림자의 텅 빈 눈이 스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싹한 냉기가 등골에 스며들었다.

【네가 무엇을 하고, 어떤 이야기를 만들든, 너는 진정으로 그들에게 닿지는 못한다.】

간접 메시지로는 성좌의 본질을 알 수 없다.
책으로만 세계를 배운 내가 등장인물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어쩌면, ‘은밀한 모략가’를 만나러 온 것은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물러서기엔 이미 늦었다.
나는 잠깐의 사이를 둔 채 입을 열었다.

“······언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벽’은 남지 않느냐고.”

그것은 언젠가 장하영이 했던 말이었다.

“그들과 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고 해도, 무엇을 전해도 벽 너머의 사람에겐 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벽 위에 뭔가를 쓰고 또 쓰다 보면, 적어도 ‘벽’은 바뀐다고.”

장하영에겐 제대로 된 인사를 못 하고 왔다.
아마 유중혁과 같이 병동에 있었을 텐데.

“그리고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언젠가, 누군가는 그 ‘벽’을 봐줄지도 모른다고.”

‘은밀한 모략가’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모든 문장은 해석자에게 다른 의미로 귀결된다.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은밀한 모략가’에게, 내 말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짜낼 수 있는 말이란 고작해야 28년분의 지혜뿐이었다. 부디 그 알량한 말들이 ‘은밀한 모략가’의 뭔가를 움직여주기를 기대할 뿐.

【너의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궁금하긴 하군.】

마침내 은밀한 모략가가 입을 열었다.

【너의 방식으로 모든 것의 마지막에 도달해 세계를 구한다고 치자. 그러면 ‘다른 세계’는 어쩔 셈이지?】

“예?”

······다른 세계?

무슨 말인가 싶었던 순간, 바닥의 우주가 트럼프 카드처럼 뒤집혔다. 수십, 수백 조각으로 쪼개진 카드들은 제각기 다른 형상과 색감을 띤 채, 각자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보다 더 먼 차원.
흐릿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

그곳에, 내가 읽었던 ‘멸살법’의 세계가 있었다.

극장 던전에서 개복치처럼 죽어가던 유중혁의 8회차가 있었다.
파천검성에게 까불다 황천길로 간 18회차의 유중혁이 있었고.
동료를 제물로 비정한 선택을 했던 41회차의 유중혁이 있었으며.
다시,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181회차의 유중혁이 있었다.

······.

한때 나를 구했던 유중혁의 이야기들이 눈앞에 전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회차’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네가 구원하지 못한 그 세계들은 모두 어떻게 되는 것이냐?】

생각해 보지 못한 질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질문이었다.
저 ‘이야기’를 만들지 않기 위해, 나는 유중혁의 3회차를 바꾸었다.
그렇다면 원래 있어야 했을 ‘멸살법’의 모든 사건들은, 어린 시절의 나를 지켜줬던 그 ‘세계’의 모든 일들은······

이제, 없는 것이 되는 것일까.

나를 보던 ‘은밀한 모략가’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부탁을 들어주겠다.】

어느새 바닥의 화면은 ‘73번째 마계’로 바뀌어 있었다.
무슨 변덕인지는 모르겠지만, ‘은밀한 모략가’는 나와의 거래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단, 조건이 있다.】

예상은 했다.
모든 ‘이계의 언약’엔 까다로운 조건이 깃드니까.

“당신에게 종속되거나, 제가 죽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 좋습니다.”

‘은밀한 모략가’의 입이 희게 벌어졌다.
내가 말한 조건들이 그저 우습다는 듯이.

【때에 따라서는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모두 네게 달린 일이지.】

“좋습니다. 하지만 조건을 말하기 전에 먼저 일행들을 구해 주십시오.”

【앞서 말했듯 저 ‘안개’를 없앨 수는 없다.】

“그럼······?”

【저 [공단]의 필멸자들만 구하면 되는 거겠지. 그렇지 않은가?】

나는 잠깐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밀한 모략가’가 쓰려는 방식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실 수 있으십니까?”

【어디로 옮겨 주길 원하지?】

“지구입니다. 가능하면 ‘서울’이면 좋겠군요.”

【그곳은 시나리오 폐쇄 지역인데, 바라는 게 많군.】

츠읏,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긴 손가락 중 하나가 잘려 나갔다. 두둥실 떠오른 그림자의 소지(小指)가, 이내 수만 개의 점으로 화해 우주를 날았다. 점들은 순식간에 은하를 건너 ‘73번째 마계’로 파고들었다.
발아래의 화면으로 [공단]의 사람들이 보였다.
새로운 시나리오와 함께 어딘가로 이송되는 사람들.
공단의 인구는 족히 십만에 육박했다.
지금 ‘은밀한 모략가’는 그 모든 화신들에게 ‘개인 시나리오’를 발송한 것이다.

츠츠츠츠츠츳!

엄청난 개연성을 소진하는 일이었음에도, ‘은밀한 모략가’는 그저 손가락 하나의 희생으로 개연성을 대신했다.
시나리오를 받은 일행들이 마계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시간의 속박에서 풀려난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이 뒤늦게 행성을 먹어치우기 시작했지만, 이미 마계는 텅 비어버린 후였다.
일행을 놓친 안개가 분한 듯 울음을 토하는 것이 보였다.

【이제 내 차례로군.】

“말씀하시죠.”

【너는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

“누굴 죽이는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쩌면 특수한 제약이 걸려 있는 상대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은밀한 모략가’조차 건드릴 수 없는 개연성이 얽힌 존재거나.

【언약을 받아들이면 알게 될 것이다.】

“······거부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 말에 ‘은밀한 모략가’가 지구로 이동한 일행들 쪽을 보았다.

【아직 내겐 손가락이 아홉 개 남았다.】

“받아들이죠.”

어쨌든 최악은 면했다.
일행들은 무사히 지구로 돌아갔고, 모든 것은 계획대로다.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를 획득하였습니다.]
[<스타 스트림>의 시나리오 시스템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해당 시나리오의 정보를 재구성 중입니다.]
[새로운 설화의 가능성을 획득하였습니다!]
[당신에게 <스타 스트림>이 이해할 수 없는 설화가 발아하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나뿐이다.
나만 잘 해내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끝날 것이다.
‘은밀한 모략가’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우주의 암흑이 일그러지며 작은 포탈이 열리기 시작했다.

【사실 너 말고도 같은 언약을 행했던 존재가 있었지.】

······나 말고도?
원작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이 시기에 ‘이계의 언약’을 행할 법한 인물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네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 무사히 시나리오를 마친다면, 별 탈 없이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포탈은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수준의 크기로 커졌다.

【다른 신격이 너를 이송해 줄 것이다. 그에게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 말과 동시에, 나는 포탈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사위가 한바탕 이지러지며, 온 세상이 의도를 읽을 수 없는 포스트 모던의 유화처럼 번져갔다. 화려한 색감 속에서 몇 번인가 구역질이 일었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쿠구구구구······.

나를 마주한 것은 끝없는 우주를 메우고 있는 거대한 거품들, 그리고 그 중심을 차지한 원형의 문이었다.
문이 커다란 눈을 뜨고 나를 보는 순간, [제4의 벽]이 경기를 일으키듯 발동했다.

[‘제4의 벽’이 경고성을 발합니다!]

이 ‘멸살법’ 안에, 저런 거대한 ‘관문’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모 략 이 보 낸 존 재 인 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의지를 가진 생명체처럼 나를 굽어보았다.

【최 후 의 벽 의 파 편 ······ 그리고 ······.】

물속에서 들려오는 듯 답답한 목소리였다.

【······ 종 결 된 사 건 으 로 의 여 정 ······.】

“······저는 어디로 가게 되는 겁니까?”

【모 든 것 은 이 미 쓰 여 있 고, 동 시 에 쓰 여 지 고 있 다】

······역시, 평범한 대화가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계의 신격’이란 대개 그렇다.
‘은밀한 모략가’가 무척 예외적인 경우일 뿐.

【과 거 현 재 미 래 는 다 르 지 않 으 니 부 질 없 는 이 야 기 만 이 남 으 리 라】

콰아아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문이 열렸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차원의 문.
저 안으로 발을 내딛으면,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저곳으로 들어가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따뜻하고 작은 솜뭉치 같은 것이 손과 함께 빠져 나왔다.

[바앗!]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은 비유가 나를 향해 외쳤다.





< Episode 53. 구원의 마왕 (5) > 끝

< Episode 53. 구원의 마왕 (6) >





[바앗, 바아앗!]

“안 돼.”

[바아아앗!]

“돌아가.”

활짝 열린 차원문 안쪽의 세계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위험한 곳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사람들을 부탁해.”

수르야의 열차 파편에서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부터, 어쩌면 이 순간은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지금부터 가는 장소는, ‘멸살법’의 도움을 거의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야 한다.

이번 한 번만 잘 견뎌내면, 나는 다시 일행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
그들과 함께, 이 모든 시나리오의 끝에 도달할 수 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비유가 소리를 질렀다.

[바앗, 바앗······ 바아아앗······! 아, 바, 앗······.]

차원문의 경계를 딛자마자 비유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희미해졌다.
흐려지는 비유의 얼굴을 향해 나는 전해지지 않을 말을 전했다.

「꼭 돌아올게.」

[‘이계의 언약’이 발동합니다!]
[당신은 <스타 스트림> 바깥으로 추방되었습니다.]
[당신의 별자리가 <스타 스트림>에서 사라집니다.]


*


김독자가 포탈 속으로 사라진 후에도, ‘은밀한 모략가’는 오래도록 그 포탈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비정상적으로 큰 두 개의 혹을 가진 노인이 ‘은밀한 모략가’의 곁에 서 있었다.

[위대한 모략이여. 그 녀석은 벌써 가버린 건가?]

【방금 떠났다.】

[아쉽군. 어떤 녀석인지 보고 싶었는데······ 그나저나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군 그래. 그대가 무려 세 개의 손가락을 희생할 정도였다니.]

‘은밀한 모략가’의 왼손에는 세 개의 손가락이 사라져있었다.
개연성의 대가였다.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부왕의 차원문’을 직접 빌리는 것은 부담이었을 텐데 말이야. 차라리 우리한테 부탁하지 그랬나?]

【혹부리의 거래법으로 감당할 수 있는 개연성이 아니었다.】

그 말에 노인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아무리 설화가 고파도 나는 그런 짓따윈 안 해.]

【이해할 수 없겠지.】

‘은밀한 모략가’의 그림자에서 새하얀 눈동자가 허공을 헤맸다. 노인도 그 시선을 좇았다. 마치, 그 허공에서 뭔가를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귀찮은 녀석들이 끼어 있던데······ 혹시 일부러 보내준 건가?]

【어차피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녀석들이다.】

노인이 피식 웃었다.

[뭐, 상관없겠지. 그 빌어먹을 <스타 스트림>에 한 방 먹여줄 수만 있다면야. 그런데 승산은 있는 건가?]

【무사히 성공한다면 녀석은 누구보다 ‘결(結)’에 가까워지게 되겠지.】

[······누구보다? 이미 ‘결’을 본 그대가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우습군.]

노인이 투덜거리며 말을 이었다.

[녀석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어차피 그대에겐 손해일 텐데.]

그러자 ‘은밀한 모략가’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걸 판단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


[‘제4의 벽’이 격렬하게 흔들립니다.]

깜빡이는 의식 속에서, 등줄기로 한기가 밀려왔다.

[‘이계의 언약’이 당신의 존재를 보호합니다.]

어디론가 흘러가는 느낌 속에, 나는 몇 번인가 꿈을 꾸었다.
일행들에 관한 꿈이었다.

―독자 씨는 맨날 스마트폰만 보네. 독자 씨 번호 뭐예요?
―······어차피 전화도 안 되는데 알아서 뭐하시게요?
―그냥 알아나 두게요. 나중에 게임 초대나 보내게.

게임 초대라.
정말 그런 걸 받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

―독자 씨는 멸망 이후에 더 자주 웃는 것 같아요.
―근데 아저씨는 웃을 때 좀 재수 없는데.
―입 모양을 좀 바꾸면 봐 줄만 하지 않을까?
―독자 씨가 제 선임이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어디선가 울려퍼지는 시계의 초침 소리.

―전 오늘처럼 독자 씨가 미운 날이 없었어요. 돌아와요, 꼭.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이야기의 흐름이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막막한 성류 속을, 작은 뗏목 같은 기억에 의존해 나아간다.
끝없는 우주의 공허 속에, 떠다니는 것은 오직 나의 기억뿐이다.
어쩌면 비유도······ 41회차의 신유승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츠츠츠츠츠······!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후였다.

[‘부왕의 차원문’이 닫힙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딱딱한 바닥의 촉감과 함께,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새로운 시나리오 지역에 입장했습니다!]
[관리국의 도깨비들이 당신의 존재에 의구심을 가집니다.]

굳어 있던 화신체의 관절 마디마디가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점혈]을 사용해 최대한 빠르게 몸을 풀었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부터는 긴장해야 한다.
‘은밀한 모략가’ 자체가 원작에 없었던 존재이니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은 ‘멸살법’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큭······.”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에게 뜯어 먹힌 자리가 아팠지만, 여분의 [대환단]으로 어떻게든 회복이 될 것 같았다. [마왕화]가 종료된 탓에 뿔과 날개는 사라져 있었다.

[현재 ‘마왕화’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꼼꼼하게 장비들을 점검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곧바로 사용할 수 있는 위치에 넣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채비가 끝난 후 내가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개인 시나리오 창이었다.

[서브 시나리오 창을 띄울 수 없습니다.]
[아직 해당 시나리오의 정보가 업데이트되지 않았습니다.]

······시나리오 업데이트는 아직인가.

나는 주변을 살피며 망가진 건물의 잔해를 둘러보았다. 무너진 고층 빌딩들과,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로고의 부스러기들. 로고를 이루는 문자들이 익숙했다.
한글도 있고, 영어도 있다.
중간중간 이계 종족들의 언어로 쓰인 것들도 보였다.
나는 잠시 멈춰서서 그것들을 읽었다.
서서히, 발끝에서부터 불편한 위화감이 차올랐다.
여긴 대체 어디란 말인가.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수식언을 인식하였습니다.]
[밤하늘에 당신의 자리가 새로이 마련됩니다!]
[<관리국>이 당신의 존재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히든 시나리오가 할당되었습니다!]
[히든 시나리오― ‘세계 적응’을 획득하였습니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했습니다!]

······설마?
나는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도시.
그럼에도, 나는 이곳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알아보지 못하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내 모든 악몽은, 이 도시로부터 비롯되었으니까.

다리만 남은 이순신 상과 파괴된 [절대 왕좌].

곳곳에 흩어진 괴수들의 사체와 거대한 촉수들의 잔해가 끔찍한 악취를 뿜고 있었다.

“······서울?”

그러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쿠구구구궁!

인근에서 들려오는 폭음에, 나는 기척을 숨기고 폐허 사이로 숨었다.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무언가로부터 달아나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사람들은 아니었다.

성좌들의 화신체였다.

상당한 격을 지닌 성좌들이 진언을 쏟아대며 소리치고 있었다.

[도망쳐라!]
[이런 망할······!]

그들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꾸드드득!

허공에서 내려온 코끼리 같은 발에, 화신체들이 벌레처럼 터져 나갔다. 나는 숨도 쉬지 못한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불가항력의 ‘격’을 가진 코끼리의 앞발은, 죽은 화신체의 설화를 질질 끌며 어딘가로 나아갔다.

······미친, 저게 대체 뭐야?

코끼리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나는 조심스레 폐허 사이를 빠져나와 시체들 쪽으로 다가갔다. 바닥에 수거할만한 아이템들이 몇 개 떨어져 있었다. 나는 아이템들을 하나씩 살피며 마음을 다스렸다.
침착하자.
이곳이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 해도, 정보만 있다면 승산은 있다.
아직 이곳이 시나리오 지역이라면, ‘멸살법’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특성 효과로 이미 읽었던 페이지에 대한 기억력이 향상됩니다.]

여긴 대체 몇 번째 시나리오인 걸까.
성좌들의 화신체가 중구난방으로 날뛰는 데다, ‘이계의 신격’의 파편이 널려 있다는 것은, 적어도······.

[현재 아흔다섯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진행 중입니다.]

츠츠츠츠츳!

[‘이계의 언약’이 당신의 부족한 개연성을 대체합니다.]
[당신은 해당 시나리오의 정식 참가자가 아닙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자격을 의심합니다.]

팔뚝의 솜털이 모조리 곤두섰다.
······몇 번째라고?

[아이템, ‘아론다이트’를 획득하였습니다.]

나는 수거하던 아이템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무려 설화급 성좌의 성유물이 길바닥을 굴러 다니고 있었다.
나는······ 대체 몇 년을 건너뛴 거지?
일행들은, 모두 어떻게 된 걸까.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정희원.
이현성.
신유승.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의 발동이 취소됩니다.]
[현재 대상과 연결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해당 ‘등장인물’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침착해야 한다.
아직 확실한 것은 없어.

나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성좌’의 권능을 발현했다.
인근에 채널이 있다면, 채널을 통해 주변을 둘러볼 심산이었다.

그때, 주변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절도 있는 참격 소리와 성좌들의 비명이 함께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건물 사이로 숨으려는 순간, 건물 너머로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코트 자락이 보였다.
아주 잠깐,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찢어진 코트의 소매로 돋아난 상처투성이의 근육. 바닥을 긋는 패도의 궤적을 보며, 울컥하는 마음과 함께 가슴이 벅차올랐다.

살아 있었구나.

기억하던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었다. 체격은 조금 더 커졌고, 인상은 더 날카로워졌으며, 뺨에는 커다란 흉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놈을 모를 수가 없었다.

“유―!”

입을 여는 순간, 소리보다 빠른 무언가가 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스가각!

[책갈피]로 발동 중이었던 [바람의 길]이 아니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다. 심지어 피했음에도 옆구리에 커다란 자상이 남았다. 상처를 막은 채 나는 당황한 얼굴로 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고개를 들었을 때 녀석은 이미 내 눈앞에 와 있었다.

콰드드득!

목을 틀어쥐는 손아귀에 숨이 턱 막혀왔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기에, 발버둥치며 진언을 발했다.

[야! 나야 유중혁!]

어쩌면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기에, 나를 잊었는지도 모른다.

[이거 놔. 나라고! 벌써 까먹은······.]

퍼어어억!

뱃가죽을 때리는 끔찍한 고통에 의식이 끊어질 것 같았다.
장난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내게 몹시 화가 나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중혁의 냉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론다이트’는 어디 있지? 네놈이 가지고 있나?”

그 순간, 서늘한 감각이 뒷목을 스쳐갔다.
동호대교 위에서 유중혁을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도 녀석은 저와 비슷한 눈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나를 모르는 사람의 눈.

“오 초 내에 대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오.”

정말로, 나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이 발동합니다!]
[해당 인물의 관련 정보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이 ‘요약 일람’으로 변환됩니다.]
[시스템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사.”

[해당 등장인물의 정보를 요약할 수 없습니다!]
[해당 등장인물의 정보를 요약할 수 없습니다!]

끔찍한 두통과 함께, 무지막지한 정보들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삼.”

나는 신음을 흘리며 ‘등장인물 일람’의 설정을 바꾸었다.

[사용자가 임의로 지정한 최소한의 항목들이 출력됩니다.]

눈앞에 떠오르는 정보를 보며, 나는 황망해졌다.
‘멸살법’의 모든 회차를, 그 모든 결말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유중혁
배후성 : ???
전용 특성 : 회귀자 <1863회차> (신화), 유희의 지배자 (전설), 철혈의 패왕 (전설), 마왕살해자 (신화), 영원의 고독자 (준신화), 별들의 공포 (신화)······.
전용 스킬 : [현자의 눈 Lv.???], [백병전 Lv.???], [사상 백신 Lv.???], [백보신권 Lv.???], [주작신보 Lv.???], [파천검도 Lv.???]······(중략)······.
성흔 : [회귀 Lv.???], [전승 Lv.???]

······.

* 해당 인물의 스킬 숙련도를 레벨 수치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 해당 인물의 성흔 숙련도를 레벨 수치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

+

하지만 단 하나.
내가 그 끝을 알지 못하는 회차가 하나 있었다.
모든 동료를 잃고, 마침내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눈앞에 둔 사내.

“이.”

셀 수 없는 배신과 무수한 회귀 속에, 모든 감정이 닳아버린 괴물이 나를 보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을 찌르는 아픔과 함께, ‘은밀한 모략가’가 남긴 말들이 귓전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너의 방식으로 모든 것의 마지막에 도달해, 세계를 구한다고 치자. 그러면 ‘다른 세계’는 어쩔 셈이지?】
【네가 구원하지 못한 그 세계들은 모두 어떻게 되는 것이냐?】

폐허가 된 광화문의 하늘에서, 죽어가는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이곳은 내가 바꾼 ‘3회차’의 <스타 스트림>이 아니었다.

내가 바꾼 미래로 인해, 원작의 세계선에서 버려진 세계.
유중혁의 칼날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대답하지 않을 모양이군. 죽어라.”

‘멸살법’ 1863회차.
이 세계는, 내가 알던 유중혁의 마지막 회차였다.





< Episode 53. 구원의 마왕 (6) > 끝

< Episode 54. 마왕 살해자 (1) >





Episode 54. 마왕 살해자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을 읽는 내내 제일 많이 했던 상상이 있다.

―만약 ‘멸살법’이 현실이 된다면 어떨까?

아마 좋아하는 소설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내가 ‘멸살법’에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유년의 내가 떠올렸던 무궁무진한 상상들 덕택인지도 모른다.

시나리오가 시작되면 제일 먼저 이걸 하고, 그 다음은 이걸 하고, 히든 피스는 뭘 찾고······.

심지어 중학생 때는 교과서 귀퉁이에 도표까지 만들었다.

―유중혁 : 프로게이머 출신, 성격 엄청 나쁨, 싸이코패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죽임(가끔은 그냥 죽임), 무조건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함, 3회차까지는 그나마 인간성이 남아 있음······.

처음 멸살법의 ‘3회차’에 떨어진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내가 ‘바꿀 수 있는 세계’에 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마지막 회차에 떨어지기라도 했다면······.

「김 독자는 생 각 했다」

녀석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시이―발」

쐐애애애애액!

나는 파공성과 함께 날아드는 칼날을 보며, 혼신의 힘을 다해 외쳤다.

[잠깐만! 멈춰! 멈추라고!]

천 번이 넘는 회귀.
수백 번의 자살과, 한 개인이 겪을 수 있는 비극의 임계점을 넘겨 무감해진 정신. 극도로 만연해진 회귀 우울증······.

「1863회차의 유중혁은, 이 세계의 절망 그 자체다」

망설임 없는 칼날이 목줄기를 지나가려는 절체절명의 순간, 나는 기지를 발휘했다.

[전용 스킬, ‘소형화 Lv.10’을 발동합니다!]

순식간에 쪼그라든 육체와 함께, 무심한 칼날이 허공을 스쳤다.
칼날 너머로 녀석의 놀란 눈동자가 보였다.
망할 놈. 내가 죽으러 여기까지 온 줄 알았냐?
아무리 제놈이 1863회차라 해도, 순순히 당해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전용 스킬, ‘전인화 Lv.12(+2)’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상대가 안 된다는 건 안다.
그래도 발악이라도 해봐야지.
나는 전광석화처럼 몸을 빼내며 녀석을 향해 소리쳤다.

“개자식아! 말은 하게 해줘야 대답을 할 거 아냐!”

내 외침과 함께 허공에서 간접 메시지가 쏟아졌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성좌, ‘달걀을 세우는 모험가’가 당신의 등장에 흥미로워합니다.]
[성좌, ‘하루살이의 왕’이 ‘철혈의 패왕’에 대항하는 당신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에게 강한 질투심을 느낍니다.]
[1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1863회차의 95번 시나리오.
세계가 이 꼴이 되어도, 여전히 후원을 하는 성좌들은 있다.
이제까지와는 후원의 성격이 좀 다르긴 하지만······.
유중혁이 경직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백청문의 무공? 이상하군. 이번 회차에서는 실전되었을 텐데······.”

천여 번이 넘는 회귀로 비틀린 녀석의 사고 회로가 팽팽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녀석은 지금껏 내가 보인 행동만으로도, 이미 나를 죽여야 할지 살려야 할지 판단을 끝마쳤을 것이다. 두렵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하지만 두렵기에, 지금은 읽어야 한다.
그래야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으니까.

[해당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해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를 발동할 수 없습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 ‘1단계’를 발동합니다!]

······이해도 부족.
조금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유중혁도 아니고 1863회차의 유중혁이니까.
별 수 없이 1단계라도 발동해야 했다. 자세한 생각까진 읽을 수 없어도, 공격의 방향이라도 알면 도움이 될 테니······.

「목」

유중혁의 사념이 전해지는 순간, 나는 전력을 다해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녀석이라고 해도 지금의 나를 쉽게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전인화]에 이어 [바람의 길]까지 사용한······.

“······컥?”

내가 몸을 돌리는 것이 먼저였는지, 새카만 그림자가 나를 앞질러간 것이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숨이 턱 막혔고, 오금이 저린 느낌과 함께 시야가 까맣게 물들어갔다.

꽈드드드드득.

전신을 우그러트릴 듯 죄는 마력의 향연. 나는 감전된 물고기처럼 허공에서 몸을 퍼덕거렸다. 엄청난 양의 마력이 전신을 진탕시켰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의 모습을 비웃습니다.]

까맣게 물들었던 시야가 개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유중혁의 얼굴이었다. 녀석의 손아귀가 내 몸통을 으스러져라 쥐고 있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낀 목이 부러질 것처럼 아팠다.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마지막 회차의 유중혁이라도, [전인화]를 발동한 나를 이렇게 쉽게 잡았다고?

“마지막으로 묻겠다.”

냉담한 녀석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깨닫는다.
방향을 미리 안다고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멍청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녀석은, 애송이였던 3회차의 유중혁이 아니다.

“용살검 ‘아론다이트’는 어디 있지?”

······제발 목을 틀어쥔 채 묻지 말라고 외치고 싶다.

“란슬롯의 화신체가 여기 있는 걸 보면, 분명 네놈이 알고 있을 텐데······.”

아, 방금 죽은 성좌가 그 ‘란슬롯’이었어? 제길.

“대답할 생각이 없다면 강제로 알아내는 수밖에.”

유중혁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빛났다.
역시나, 3회차든 1863회차든 유중혁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현자의 눈 Lv.???’을 발동하였습니다!]

수천 번의 회귀를 거치며, 녀석의 ‘현자의 눈’은 가공할 수준에 이르렀다. 아마 지금 저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는 유중혁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이계의 신격 정도일 것이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현자의 눈’을 탐지하였습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유중혁의 ‘현자의 눈’이 내 몸을 훑는 순간, 벽이 움직였다.
한 톨의 정보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내리 꽂히는 시선 앞에, 조금의 빈틈도 내어주지 않겠다는 듯 굳건히 선 [제4의 벽].

츠츠츠츠츠츳!

‘정체불명의 벽’을 만났을 때보다 더 강력한 스파크가 눈앞에서 터져나왔다.

「제 법」

이번만큼은 [제4의 벽]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이쯤 되면 [제4의 벽]이 대단한 건지, 유중혁이 대단한 건지 나로서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제4의 벽]은 물러서지 않았고, 유중혁도 포기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 사이에서 죽어라 튀겨지는 것은 나였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진언으로라도 비명을 지를까 고민하던 찰나.

“큭······?”

유중혁이 먼저 힘을 거두었다. 얼마나 강하게 충돌한 것인지, 황금빛으로 소용돌이치는 녀석의 눈동자에 실핏줄이 서 있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호승심을 느낍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당신을 향해 강한 적개심을 내비칩니다!]

저 ‘현자의 눈’으로도 뚫을 수 없는 방벽이라니.
[제4의 벽]이 얼마나 굉장한 스킬인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은 그때였다.

츠츠츠츠츠츳!

[제4의 벽]은 유중혁의 ‘현자의 눈’을 막아낸 것으로도 모자라, 나를 움켜쥔 유중혁의 손등을 타고 물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흘러나온 활자들이 녀석의 몸을 벌레떼처럼 뒤덮자, 처음으로 유중혁이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무슨······!”

꿈틀거리며 움직인 활자들은 이내 하나의 기억이 되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그것은 [제4의 벽]에 기록되어 있던, 나의 ‘3회차’ 기억이었다.

「“이 손 놓고 꺼져, 빌어먹을 새끼야.”」

「“아마 그렇겠지. 어쨌든 희망적인 상황인 건 확실해.”
“······뭐가 희망적이라는 거지?”
“중혁아, 우린 세계를 구할 수 있다. 알지?”」

「“우리 성운의 이름은······ 김독자 컴퍼니······.”
“이름 같은 건 아직 없다. 그리고 지지자는, 지금부터 구할 것이다.”」

눈앞의 유중혁은 이해할 수 없는 기억들.
모두, 이 회차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일들이었다.

츠츠츠츠츠······.

두 눈을 멀게 할 듯한 스파크가 조금씩 잦아들며, 유중혁의 표정이 점차 드러났다.

“네놈은 대체······?”

저 ‘1863회차’가 경악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머릿속으로 [제4의 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잘 했지 김독 자」

잘했냐고?

“말해라. 방금 그건 뭐지? 말하지 않는다면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

우드드드드득!

잘하긴 뭘 잘해, 시발.

[큭······ 아니, 잠깐만! 일단 대답할 시간을 좀······!]

꾸드드드드득!

나는 유중혁의 손아귀 속에서 백청의 마력을 폭발시켰다.
어떻게든 녀석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이었다. 이 정도로는 무리겠지만, 최소한 ‘거대 설화’의 힘을 빌려올 때까지라도 시간을 벌어야······.

콰아아앙!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폭발 속에 유중혁이 나를 놓쳤던 것이다. 본인도 놀랐는지 당혹스런 표정이었다. 굼뜬 움직임으로 다시 손을 뻗는 유중혁. 어떻게 된 건가 싶었지만, 겨우 잡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전용 스킬, ‘바람의 길 Lv.11(+1)’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전력으로 [바람의 길]을 발동하자, 백청의 기류가 하늘 위에 무지개처럼 남았다. 금방 쫓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유중혁의 기척은 바로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싶어 돌아보니 의외의 정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뭐야 저거?

내 의문과 동시에, 귀청을 찌르는 진언이 창공에 울려 퍼졌다.

[유중혁!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의 원한을 갚겠다!]

근처 건물의 옥상에서 이글거리는 붉고 푸른 눈동자. 늘씬한 유선형의 몸을 가진 두 마리의 흑표범이 강대한 격을 내뿜으며 유중혁을 향해 낙하하고 있었다.

[마왕, ‘안락과 흉포의 마신’이 화신 ‘유중혁’에게 적의를 보입니다!]
[마왕, ‘금단을 보는 눈동자’가 화신 ‘유중혁’에게 이빨을 드러냅니다!]

1863회차의 유중혁은 그 어떤 회차보다 강력하지만 그만큼 적도 많다.
때문에 나는 두 표범의 진명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안락과 흉포의 마신, ‘오세’.
금단을 보는 눈동자, ‘플라우로스’.

각각 57번째 마계와 64번째 마계의 마왕들이었다.
그 자존심 강한 마왕들이 수치심도 잊고서 화신 하나를 향해 협공을 퍼붓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수치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마왕 살해자’여! 오늘 그대의 이야기는 이곳에서 끝날 것이다!]

지금의 유중혁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존재니까.

쿠구구구구구!

나는 잘 됐다 싶은 심정으로 터져 나오는 굉음 사이에 몸을 묻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상황을 살폈다. 여유가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과, 저 싸움을 조금 더 지켜보고 싶다는 욕망이 충돌하고 있었다.

다른 싸움도 아니고, 무려 1863회차 유중혁의 전투.
쉽게 볼 수 있는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콰아아아아앙!

귀가 멀 듯한 폭음이 터지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의 전투에 열광합니다!]

쏟아지는 간접 메시지 속에서, 유중혁이 검을 뽑았다.
3회차에서는 이미 부러졌던 [진천패도].
수많은 시나리오를 거치며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개량된 그 칼날이, 어둠 속에서 선명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에 대항하듯 마왕들도 자신의 권능을 발했다.

[피조물들이여, 죽음 속에서 일어나라!]

죽은 마계의 백작과 공작들이 언데드가 되어 땅을 박차고 나왔다. 하나하나가 생전의 전투력을 보존한 정예 개체들.
그러나 유중혁은 전혀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사자 소환술’인가? ‘강령의 마신’도 그걸 썼었지.”

유중혁은 웃고 있었다.

“놈의 시체는 지금 죽은 성좌들의 별자리에 걸려 있다.”

[닥쳐라!]

빛살이 번뜩이는 순간, 유중혁의 검이 움직였다.
그 검술을 뭐라 불러야 할까.

······파천검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그것이 섬뜩하리마치 아름다운 검술이라는 것.

갸아아아아아!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잔혹한 검술이라는 것.

그아아아아악!

검에 잘려 나간 마계의 귀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산화했다.
마계의 고위 공작급이면 위인급 성좌에 비견된다.
그런데 그런 존재들이 일검에 몇 개체씩 터져 나가고 있었다.
단 1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수십 개체의 언데드 귀족들을 순살(瞬殺)한 유중혁은, 어느새 마왕 플라우로스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어떻······.]

퍼거거걱!

마치 장난감처럼, 마왕 플라우로스의 머리통이 폭발했다.
아무 감정도 없는 눈빛. 무감한 미소를 띤 채, 단 일격으로.

유중혁은 마왕을 죽였다.

[이······ 이 미친 놈이!]

대노한 마왕 오세가 격을 발출하며 소리쳤다.

[성좌들이여! 무엇을 망설이는가!]

부름과 동시에, 폐허 곳곳에 숨어 있던 성좌들이 뛰쳐 나왔다.
대부분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이었다.
위인급부터 설화급에 이르기까지. 하나 하나가 쟁쟁한 성좌들이, 유중혁 하나를 해치우겠다고 저렇듯 떼지어 달려들고 있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유중혁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그의 전신에서 넘실대는 핏빛 아우라가 성좌들과 격돌했다.

퍼걱! 퍼거거걱!

무섭도록 패도적인 힘이었지만, 일격 일격에 침착함과 절제가 배어 있었다.
유중혁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성좌들의 대열이 무력하게 흔들렸다.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을 증오합니다.]

하나, 둘 터져가는 성좌들의 화신체들.
저 드높은 성좌들이 저렇게나 초라해보일 수 있을까.
약간의 조급함도 찾을 수 없는 표정으로 유중혁은 전투를 계속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를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유중혁은 오직 ‘왼팔’만을 사용해 성좌들을 해치우고 있었다.
하나의 성좌가 쓰러질 때마다 내 팔에도 소름이 돋았다.

[절대악 계통의 일부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의 전투에 경악합니다.]

증오는 경악이 되었고.

[절대악 계통의 일부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을 두려워합니다.]

경악은, 이내 두려움이 되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의 힘에 치를 떱니다.]

전율이 일었다.

미친 놈······ 진짜로, 미친 놈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유중혁을 쓰러트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은밀한 모략가’에게 받을 시나리오가 뭔진 모르겠지만,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절대로 저 녀석과 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메시지가 들려왔다.

[‘은밀한 모략가’님께서 의뢰한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Episode 54. 마왕 살해자 (1) > 끝

< Episode 54. 마왕 살해자 (2) >





드디어, 기다렸던 메시지가 도착했다.
‘은밀한 모략가’의 개인 시나리오.

+

<서브 시나리오(은밀한 모략가) ― ??? >

분류 : 서브(개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
제한시간 : ―
보상 : 해당 회차에서 획득한 설화(1), 스킬(1), 아이템(1)을 소지한 채 본래의 회차로 귀환 할 수 있음(필요 개연성은 해당 시나리오 제안자가 부담)
실패시 : 본래의 회차로 돌아갈 수 없음, 화신체 소멸

+

시나리오 창을 열자마자 나를 사로잡은 항목은 ‘보상’이었다.

[현재 관리국이 당신의 개연성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나는 본래 이 ‘회차’의 소속원이 아니다.
때문에, 이 회차에서 아이템이나 스킬, 설화를 얻더라도 본래의 회차로 귀환했을 때 그것을 보전하지는 못할 것이다.
41회차에서 넘어왔던 ‘재앙 신유승’이 형편없이 약화되어 자신의 ‘격’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런데 이 ‘보상’이 사실이라면······ 나는 이 시나리오에서 얻은 것들을 본래의 회차로 가지고 갈 수 있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엄청난 보상이었다. 아무리 개연성의 제약을 받는다고 해도, 95번 시나리오의 전리품은 95번 시나리오의 난이도에나 어울리는 것들. 이곳에서는 어중간한 스킬이나 설화들도, 20번 시나리오에서는 천지를 격변시키는 힘을 발휘할 것이다.

「들 뜨지 마 김 독 자」

[제4의 벽]의 핀잔에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사실, 무작정 기뻐할 수 있는 상황만은 아니었다.
이 시나리오는 보상이 엄청난 만큼 실패시의 대가도 컸다.

실패시, 나는 본래의 회차로 돌아갈 수 없을 뿐더러 화신체를 잃게 된다.

이곳은 내가 속한 회차가 아니기에 내가 가진 ‘설화’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화신체를 잃는다면, 개연성의 후폭풍 속에 영멸 당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사실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해당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이 업데이트 중입니다.]

아직도, 가장 중요한 클리어 조건이 업데이트되지 않고 있었다.
차원을 건너오면서 오류가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은밀한 모략가’가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어느 쪽이라도 가능성은 있었다.
나는 멀리서 난투극을 벌이는 유중혁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은밀한 모략가’라면, 이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을 뭐로 정했을까.
지금까지의 ‘은밀한 모략가’의 행보로 봤을 때는······.
불길한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전용 스킬, ‘독해력’이 발동합니다!]

은밀한 모략가.
‘기어다니는 혼돈’일 거라 예상했지만, 확실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계의 신격.
처음 채널이 열릴 때부터 나와 함께였지만, 나는 그에 대해 아는 정보가 거의 없었다. 제천대성처럼 호방하지도 않고, 우리엘처럼 정의롭지도 않으며, ‘심연의 흑염룡’처럼 사악하지도 않은 존재······ 심지어 ‘멸살법’의 원작에도 존재치 않았던 성좌.
수식언 그대로, 그는 ‘은밀한 모략가’일 뿐이다.

[당신이 가진 정보로 대상을 독해할 수 없습니다.]
[전용 스킬, ‘독해력’의 발동이 취소됩니다.]
[미지(未知)에 대한 호기심이 당신의 새로운 능력을 일깨웁니다.]

······모르겠다.
그는 과연 이 시나리오를 통해 내게 무엇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그리고 무엇을 얻고자 했던 것일까.
이계의 신격이 이런 짓을 벌이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역시나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크아아아아앗!]

지금 이 시나리오가, 저기서 성좌들을 학살하고 있는 괴물 녀석과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

[됐다! 지금이다! 모두 협공해!]
[죽어라 유중혁!]

잠깐 시나리오 창에 정신이 팔린 사이, 전황은 예상 밖의 형태로 흘러가고 있었다. 유중혁의 상태가 이상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성좌들을 처죽이며 전장을 압도하고 있었는데······.
둔해진 몸놀림.
쏟아지는 포화를 그대로 얻어 맞으며, 유중혁의 몸이 굳어가고 있었다.

······저 자식 뭐야?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등장인물 일람’의 설정을 조정하여 녀석의 상태를 살폈다.

+

* 현재 대상이 상태이상에 걸려 있습니다.

+

상태이상?
그럴 리가 없다.
1863회차의 유중혁이 누구인가?
마계 서열 2위의 ‘지옥 동부의 지배자’를 불구로 만들고, 4위의 ‘강령의 마신’을 찢어 죽인 장본인이 저 ‘유중혁’이다. 지금의 유중혁에게 무려 ‘상태이상’을 걸 수 있을 만한 존재는 저들 중에 없었다.

텅 빈 유중혁의 눈동자.

목에 뭔가가 턱 걸린 듯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있다.

딱 하나, 녀석에게 ‘상태이상’을 걸 수 있는 존재가 있었다.

+

* 현재 대상은 원인 불명의 ‘회귀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

바로 유중혁 자기 자신이었다.

<회귀 우울증>.

무려 1863회차의 삶을 통해 망가진 녀석의 정신은, 저 정신병을 거의 ‘패시브 스킬’로 둔갑시켰다. 한번 저 우울증에 빠지게 되면, 녀석의 의식은 무지막지한 기억의 추에 붙들려 수면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죽여라! 놈도 무적은 아니다!]

무자비한 공격 속에, 단단한 유중혁의 몸도 조금씩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본래라면 이 상황에서 ‘회귀 우울증’이 도질 턱이 없었다. 1863회차의 유중혁은 저 병증을 다스리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 저런 상태가······.

「제4의 벽이 말합니다. ‘하 하 하’」

“······설마 네 짓이냐?”

[제4의 벽]은 대답이 없었지만, 지금으로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조금 전 [제4의 벽]과의 충돌이, 유중혁의 내면에 어떤 파란을 일으킨 것이 틀림없었다.

젠장, 어쩌지?

꽈지지지지직!

얼굴을 감싸고 웅크린 유중혁의 살갗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극성에 달한 [금강불괴]의 힘으로 아직까진 경상이었지만, 이대로 전투가 지속된다면 유중혁이 죽는 것은 정말로 시간 문제였다.

「내가 도와야 한다.」
「내가 왜 저놈을 도와야 하지?」

마음 속으로 선택지들이 싸우고 있었다.

「지금의 유중혁은 괴물이야. 도와봤자 깨어나면 나를 죽일 거라고.」
「잘 생각해봐. 넌 시나리오 클리어 조건이 뭔지 모르잖아.」

아직 물음표로 남아 있는 시나리오 클리어 조건.

「만약 저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이 ‘유중혁의 죽음’이라면, 나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다.」

하지만.

「만약, 저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에 ‘유중혁의 생존’이 필요하다면······.」

여기서 유중혁이 죽으면, 나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망할······.”

도울 것이냐, 말 것이냐.
굳건한 유중혁의 무릎이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평소라면 한 주먹거리도 안 될 녀석들이 신나서 유중혁의 전신을 뜯어대고 있었다.

[하하핫! ‘철혈의 패왕’의 설화는 내가 갖겠다!]

어차피 유중혁은, 이곳에서 죽어도 회귀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새로운 회차를 시작하게 되겠지.
회귀를······.

【그러면 ‘다른 세계’는 어쩔 셈이지?】

······빌어먹을 모략가.

【네가 구원하지 못한 그 세계들은 모두 어떻게 되는 것이냐?】

이곳에서 유중혁이 죽으면, 원작에는 없던 세계가 태어난다.
유중혁은 또 다시 지옥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은밀한 모략가’가 내게 보여주었던 ‘버려진 회차’들은 또 만들어질 것이고, 그곳의 유중혁들은 또 다시 무한한 절망의 쳇바퀴 속에서······.

······에이 씨발 모르겠다.

나는 [전인화]를 발동하는 동시에 전신의 마기를 풀풀 흩날리며 유중혁을 향해 날아갔다.

[어이! 내 몫도 남겨 두라고!]

내 거친 진언에, 유중혁을 공격하던 마왕과 성좌들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누구냐?]
[······마기(魔氣)? 처음 보는 녀석인데.]
[너도 마왕 살해자를 죽이러 온 건가?]

내 몸에서 흘러 나오는 새카만 마기에, 일순 긴장했던 적들의 표정이 풀리는 것이 보였다. 예상대로다. 나는 ‘격’을 발출하며 말했다.

[맞아. 좋은 건 같이 나눠 먹어야지. 안 그래?]
[큼, 네놈은 늦게 왔으니 좋은 설화는 가질 수 없다.]
[걱정 마. 나는 조신히 뒤쪽에서 돕기만 할게.]
[좋은 자세로군. 자, 그럼 다들 계속······!]

빠가각!

나는 돌아서는 성좌놈의 머리통을 힘껏 갈겨버렸다. 성좌놈은 괴상한 비명과 함께 일직선으로 날아가 폐허 속에 처박혔다.

[끄, 으, 으······ 무슨 짓이냐!]

딴에는 죽으라고 때린 건데, 부족했던 모양이다.
내 돌발 행동에 격분한 성좌들이 이쪽을 노려보았다.

[지금 ‘마왕살해자’의 편을 드는 것인가?]

나는 대답하지 않고 ‘거대 설화’의 힘을 개방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심장 깊은 곳에서 용솟음 친 설화의 맥이 약동했다. 전신을 감싸안는 스파크와 함께, 설화의 에너지가 혈맥을 타고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내 ‘거대 설화’를 알아본 몇몇 성좌들이 깜짝 놀라 외쳤다.

[마왕의 격? 저런 녀석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없겠지.
난 너네 세계 마왕이 아니니까.
나는 다시 한번 [전인화]의 힘을 집중해, 방심하고 있던 성좌 하나의 뱃가죽을 날려버렸다.

꽈아아아앙!

내 일격을 맞은 성좌가 신음을 토하며 십여 걸음을 물러났다.
저 유중혁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그럭저럭 싸워볼 수도 있겠는데 생각하던 순간.

츠츠츠츠츳!

[설화 운용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해당 <스타 스트림>에서 당신이 소유한 ‘거대 설화’의 근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거대 설화’의 힘이 급격하게 축소됩니다.]

······제길. 역시 이 모양인가.
내 ‘거대 설화’의 터전인 <73번째 마계>는 이곳에 없다.
심지어 그 거대 설화를 함께 만들었던 존재들도 없다.
그러니 내 설화가 제대로 힘을 못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다가오는 성좌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검격을 남발하며 유중혁을 불렀다.

“인마! 정신 차려 새끼야!”

유중혁은 대답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녀석을 깨울 대사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퍼뜩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내 격이 급격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다시 기세등등해진 마왕 오세가 외쳤다.

[마왕 살해자와 한패다! 저놈부터 죽여!]

성좌들의 수는 마왕 오세를 포함해 일곱이었다.
지금의 내 전력으로는 당연히 상대할 수 없었다.

퍼억! 퍼어어억!

필사적으로 공격들을 피해냈지만, 역시 95번 시나리오는 95번 시나리오였다. 평범한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일 뿐인데도, 공격 한 방 한 방이 무지막지하게 아팠다.

스팟!

날아드는 맹공에 살점이 뜯기고, 운신의 폭은 점점 좁아져 간다.
급박한 와중에도 나는 유중혁을 깨울 방법을 계속해서 생각했다.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고, 개중에 몇 가지는 확실히 유중혁의 정신 머리를 찾아 놓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내가 생각한 방식으로 놈을 깨우면, 나도 죽을 가능성이 높다.

터질 듯 입술을 깨문 채, 나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별 수 없다.
어차피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으니까.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한 후, 쏘아붙이듯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입 다물고 가만히 계실 겁니까?”

내 말에 성좌들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갑자기 뭔 소리냐는 눈빛들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을 계속했다.

“제가 여기서 죽으면 그쪽들도 곤란하실 텐데요.”

그러자 다음 순간, 내 가슴팍의 주머니가 환하게 빛나며 진언이 들려왔다.

[뭐야, 알고 있었어?]

당연한 얘기지만, 난 유중혁을 깨우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겠어.

“모르는 게 이상하죠. 저는 꽃꽂이에 취미가 없거든요.”

코트의 바깥 주머니에 꽂힌 두 송이의 꽃.
붉은 코스모스와 흰 백합.

처음부터 이들의 존재를 눈치챘던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세계선’을 넘어올 때에야 깨달았다.
정말이지 대담한 성좌들이다.

[쳇. 별 수 없네.]

진언의 정체를 깨달았는지, 나를 적대하던 성좌들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녀석들을 비웃듯 ‘백합’이 말했다.

[꼭 우리 둘 다 나서야 되나? 요피엘 너 혼자 할래?]
[그들은 <에덴>의 적. 즉각 처형이다.]
[······같이 하자는 거지? 귀찮은데. 알았어.]

다음 순간, 코스모스와 백합의 꽃잎이 하나씩 떨어져 바람에 흩날렸다.
창공을 향해 멀어지는 꽃잎과 함께, 눈앞에 어떤 메시지가 떠올랐다.
나는 잠시 그 메시지를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츠츠츠츠츠츳!

엄청난 존재감이 내 등 뒤에 강림하기 시작했다. 경악으로 물들어 가는 성좌들의 표정을 보며, 나도 모르게 씩 웃음이 나왔다.

궁금하긴 했다.
그때의 ‘정희원’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그리고 이젠 아주 잘 알겠다.

등줄기로 뻗어 나오는 여섯 장의 날개.
넘치는 개연성 속에서, <에덴> 최고 대천사들의 ‘격’이 내 전신에서 발출되었다.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서울’에 현현하였습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서울’에 현현하였습니다!]





< Episode 54. 마왕 살해자 (2) > 끝

< Episode 54. 마왕 살해자 (3) >





[대천사!]

마왕 오세는 경악을 넘어 혼절할 듯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있어, <에덴>의 대천사들은 최악의 상성을 가지는 존재.
무려 두 명의 대천사의 동시 현현했으니 놀라 나자빠지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째서 대천사가? <에덴>의 천사들은 ‘그 일’ 이후 대부분 죽었을 텐데······!]

그 중얼거림을 듣는 순간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1863회차의 세계.
가브리엘과 요피엘은 아직 이 회차에서 일어난 일을 모를 것이다.

[■댕, 그게 무슨 개소리야?]

기다렸다는 듯, 가브리엘의 진언이 울려퍼졌다. 우리엘의 친구 답게 걸쭉한 욕설. 나는 괜히 일이 커지기 전에 그녀를 만류했다.

“가브리엘. 저놈들 헛소리는 들을 필요 없습니다. 빨리 처리하죠!”

[······보채지 마. 건방진 인간 녀석.]

태클을 걸 곳이 한 군데 있었지만, 나는 일단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내 전신으로 가브리엘의 힘이 강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천사 가브리엘.]

쿠구구구구!

머리털이 곤두서는 격의 팽창이 느껴졌다.
드디어, 가브리엘의 주력 설화를 듣게 되는 것이다.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물론 저 ‘좋은 소식’은, 어디까지나 가브리엘이 같은 편일 경우에만 해당된다.

[겁먹지 마라! 대천사라 봐야 본거지를 잃은 잔당에 불과하다!]

마왕 오세가 성좌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지껄이는 것 치고, 오세의 신형은 벌써 저만치 멀어지는 중이었다.
기합을 터뜨린 성좌들이 제각기 성유물을 들고 나를 향해 달려드는 순간.

[이것은 정해진 종말에 관한 것.]

가브리엘의 설화, 「종말의 계시」가 시작되었다.

「뿔이 두 개 달린 숫양을 네가 보았노니, 두 눈 사이에 있던 큰 뿔은 그 첫 임금이다.」

내 몸을 감싼 휘광 속에 황금빛 문자열들이 흘렀다.
그 문자열들을 따라 내 몸의 부피가 커지고 있었다.
번식기의 숫양처럼 온몸에 힘이 넘쳐 흘렀다.
마왕의 뿔이 자랐던 자리에 새하얀 뿔이 차례로 솟아 올랐다.

츠츳, 츠츠츠츠츳!

[으, 으어어어어······.]

그 뿔을 본 것만으로도,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이 겁에 질리고 있었다. 몇몇 성좌들은 무력한 화신들처럼 병장기를 떨어트렸고, 일부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아!]

마치, 자신의 최후를 예견한 듯한 부나방처럼.

「그는 제 힘으로 힘이 점점 세어질 터인데, 제 힘으로 그리 되는 것은 아니다.」

내 등 뒤로 솟구친 여섯 장의 날개가 화려한 섬광을 내뿜자, 설화급 성좌들의 공격이 쏟아졌다.

쿠과과과과과!

그러나 나는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
내 눈앞에 소환된 단단한 금속이 모든 종류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마치 거신족이나 쓸 법한 무기.
하얗게 빛나는 뱀이 자루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고, 그 뱀의 아가리에는 십자가를 연상시키는 눈부신 창극이 꽂혀 있었다.

이것이 바로 가브리엘의 신창(神槍), ‘편애(偏愛)의 천칭(天秤)’이었다.

나는 그 창의 손잡이를 거머쥐었다.
일순, 세계가 기울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근방의 모든 존재가 저울대에 오르고 있었다. 한쪽은 이쪽 저울대에, 다른 한쪽은 저쪽 저울대에.
고개를 돌리자, 가브리엘이 웃고 있었다.
그녀의 손바닥이 내 어깨를 짚었다.

「그는 끔찍스러운 파괴를 자행하면서도, 힘센 이들과 거룩한 백성들을 파멸시키리라.」

쿠오오오오오오!

창은 눈부신 빛살이 되었고, 나는 온 힘을 다해 그 빛살을 내던졌다.

쿠콰콰콰콰콰콰!

그리고 세상의 일부가 지워졌다.
하늘에서 나를 공격하던 성좌도, 측면을 노리고 달려들던 녀석도, 전의를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던 녀석도.

마치, 세상에 없던 존재처럼 소멸했다.

남은 것은, 이쪽 저울대 위의 생명체들 뿐.
이것이 대천사의 진짜 힘이었다.
가브리엘이 영 못마땅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놈 놓쳤어. 꽃잎 한 장으론 한계가 있네.]

실제로, 미리 사태를 예견한 마왕 오세는 이미 점이 되어 달아나고 있었다. 하위격의 마왕으로는 홀로 대천사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녀석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걸 그저 두고 보고 있을 요피엘이 아니었다.

콰아아아아아아!

내 등 뒤에서 생성된 붉은 안개가 창공을 덮으며 오세를 좇았다.

그르르르르르.

하늘 전체가 고통스럽다는 듯 울부짖었다. 겉보기엔 붉은 안개였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 하나가 작은 병정의 대군(大軍)이었다.
일대의 하늘을 붉게 물들인 <에덴>의 503부대.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을 따르는 핏빛 정예병들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악!]

피라냐들처럼 달려든 핏빛 안개 사이로 붉은 가시가 솟았다.
멀리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고, 천국의 병정들이 피의 축제를 벌였다. 그리고 잠시 후, 주변의 모든 소음이 잠잠해졌다.
허공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마왕의 화신체가 부스러기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가브리엘이 내 발을 움직여 마왕의 파편을 짓밟았다.

[별 것도 아니네.]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이 대천사들의 출현에 크게 당황합니다.]
[살아남은 마왕들이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을 의심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대천사들의 비정상적인 개입에 비난을······.]

[닥쳐 ■■들아.]

등 뒤로 뻗어나왔던 여섯 장의 날개가 무수한 깃털이 되어 바람에 흩날렸고, 대천사의 힘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속이 살짝 메슥거렸지만, 생각만큼 몸의 부담은 심하지 않았다. 95번 시나리오에 허락된 개연성이 그만큼 풍부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은밀한 모략가와 맺은 ‘이계의 언약’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내겐 좋은 일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내게 현현한 요피엘이 힘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요피엘이 명령하듯 말을 이었다.

[저것도 죽여라.]

그곳에, 여전히 석상처럼 굳어 있는 유중혁이 있었다.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 녀석은 그렇게까지 나쁜 놈은······.”

[절대악(絕對惡)이다.]

오른쪽 눈동자가 따끔, 하는 느낌이 들더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성흔, ‘죄업의 눈동자’가 발동합니다!]

죄업의 눈동자. 대천사 요피엘의 성흔이었다.

[대상의 ‘죄업’ 수치를 측정합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에 쌓인 ‘죄업’을 보는 눈.
방금 전까지 유중혁이 있었던 자리에는 새카만 심연이 드리워져 있었다.

[대상의 ‘죄업’을 수치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그저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으로 아득해질 것만 같은, 그런 암흑이었다. 마왕 오세도, 절대악 계통에 속한 다른 성좌들도 그런 죄업을 가진 존재는 없었다.
요피엘이 말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죄업이다. 저렇게 밀도 깊은 죄업은, 바알이나 아가레스를 제외하고는 본 적이 없다. 이 세계의 모든 죄업을 합쳐도 저 자가 가진 죄업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나도 안다.
유중혁은 많은 죄를 저질렀다.

많은 사람을 죽였고.
많은 세계를 멸망시켰다.
셀 수조차 없는 원혼들이 그를 저주하고 있었다.

[저 자는 죽어야 한다.]

하지만.

“안 됩니다.”

녀석이, 구한 것도 있었다.

“죽일 수 없습니다.”

녀석이 망친 모든 것에 비하면 티끌일지 몰라도.
분명, 구해낸 것이 있었다.

츠츠츠츠츳······.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그 찌릿찌릿한 시선 속에, 나는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녀석은 아직 쓸모가 있습니다. 지금 죽여서는 안 됩니다.”

[······‘구원의 마왕’. 너를 아직까지 살려둔 것은 서기관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왕 살려주신 거, 한 사람 더 살려주시죠.”

드드드드드······.

돌아보자, 유중혁의 몸이 가는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녀석의 의식이 어떻게든 수면 밖으로 나오려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유중혁을 향해 요피엘이 말했다.

[그가 깨어난다면 나도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지금 당장 죽여야 한다.]

요피엘이 다시 자신의 안개를 일으키려는 기색이 보였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이것뿐인 것 같다.

“죽이지 않고도, 깨어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면?”

요피엘의 붉은 안개가 멈칫했다.

“그가 본래의 의식을 되찾지 않도록 하고, 의식을 잃은 그를 조종할 방법이 있다면 어떻습니까?”

[저 자를 속박할 방법이 있단 말이냐? 그대는 대체 무슨 흉계를······.]

요피엘이 다시 한 번 격을 일으키려는 순간, 가브리엘이 나섰다.

[요피엘, 내버려둬 봐. 어차피 우리도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해.]

요피엘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만약 깨어날 기미를 보인다면, 바로 놈을 즉살할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유중혁을 향해 다가갔다.

“야.”

드드드드드······.

녀석의 몸에서 일어나는 진동이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원작에서 몇 번인가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아마 몇 분 후면 유중혁의 의식은 깨어나겠지.

그렇게 되어서는 곤란하다.

나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유중혁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녀석이 내게 그렇게 했듯이.
나보다 체구가 큰 녀석이었기 때문에 들어올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놔, 라.”

이제 거의 수면 근처까지 올라온 유중혁의 의식이 말을 시작했다.
나를 붙잡으려는 듯, 살기로 가득 찬 녀석의 손끝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유중혁이 어떻게 하면 ‘회귀 우울증’에서 깨어날지 알고 있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나는 녀석이 어떻게 하면 저 우울의 심해 아래로 더 깊이 가라 앉을지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유중혁의 손끝을 보던 나는 툭 던지듯 입을 열었다.

“기억나냐? 33회차. 40번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이지혜가 했던 말.”

유중혁의 눈빛이 멍해지더니, 움직이던 손끝이 멈췄다.

「“사부한테 다음 회차라는 게 없다면 좋을텐데.”」

“생각해 봐. 늘 불행했던 것만은 아니야. 그렇지? 모든 회차에는, 잠깐이지만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어.”

유중혁의 표정이 굳어진다.

“173회차. 너는 꽤 오랫동안 지구를 지켜냈어. 이지혜가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는 모습도 보았고, 이설화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안고 웃는 모습도 보았지.”

「“중혁 씨는 살아 있어서 행복해?”」

한마디 한마디를 뱉어낼 때마다, 유중혁의 표정이 무너져 간다.
유중혁을 무너트리는 것은 절망이 아니다.

“383회차. 마침내 75번 시나리오를 클리어 했을 때. 정말 운 좋게도 그 회차에선 아무도 죽지 않았지. 그런 적은 처음이었어. 그때 이현성이 말했었지.”

「“중혁 씨, 저는 죽을 때까지 오늘을 잊지 않을 겁니다.”」

녀석의 머릿 속에 작은 깃털 같은 기억이 하나둘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498회차······.”

유중혁의 손바닥이 자신의 귀를 막기 위해 움직인다.
평소의 유중혁이었다면 이런 정도로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다르다.
나는 녀석의 양손을 붙잡은 채,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 일이 열 번.”

물에 빠진 인간은, 단지 깃털의 하나의 무게 때문에 더 깊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스무 번.”

숨이 막히고, 폐가 조여온다. 유중혁이 겪는 기분을 나 역시 고스란히 느낀다.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었다.
한 사람의 밑바닥에 깔린 가장 근원적인 어둠이, 자아를 탐욕스레 삼키는 것이 보였다.

“백 번. 천 번도 넘게 반복되었어.”

그 모든 세계는 멸망했다.
모든 행복했던 기억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으로 흘러갔다.
무수한 회귀 속에 행복의 의미는 퇴색되었고.
그가 지켜냈던 모든 가치는 휴지 조각이 되었다.

“유중혁.”

유중혁의 자아가 까마득한 심해로 가라앉고 있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영영 올라올 수 없는 곳으로.

“지키고 싶었던 것들은 모두 지켰나?”

망연한 얼굴의 유중혁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걱정 마라 유중혁.
남은 모든 뒷감당은 내가 할 테니까.

너는, 그만 쉬어라.

[등장인물 ‘유중혁’에 대한 이해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공허한 유중혁의 눈동자가, 주인을 잃은 기억을 토하고 있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쓰지 않았지만, 그것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죽고 싶다.」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수 있다면.」

하늘에서 몇 방울인가 비가 떨어졌다. 마왕과 성좌들의 혈향이 묻은, 검은 비였다.
비를 맞은 유중혁의 얼굴에도 새카만 물이 번져 흘렀다. 천천히 낮아진 유중혁의 시야가, 이윽고 나보다 아래로 떨어졌다.
한 인간의 정신이 붕괴하는 모습을 나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고장난 목소리.
삐걱거리는 기계처럼 유중혁이 더듬거렸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 지?”

나는 유중혁의 두 팔을 놓으며 말했다.

“내가 너의 이야기를 끝내 줄게.”

유중혁이 텅 빈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녀석을 보고 있지 않았다.
흐릿한 하늘 위로, 방금 업데이트가 완료된 ‘서브 시나리오’ 창이 띄워져 있었다.

+

<서브 시나리오(은밀한 모략가) ― 회귀의 끝 >

클리어 조건 : 유중혁을 죽이시오.

+

나는 바닥에 꽂힌 유중혁의 진천패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 Episode 54. 마왕 살해자 (3) > 끝

< Episode 54. 마왕 살해자 (4) >





1863회차에 들어온 지도 하루가 지났다.
어젯밤부터 내리던 새카만 비에 광화문 일대가 푹 젖어 있었다.

그르르르르······.

비가 내린 직후부터, 폐건물 사이에 웅크리고 잠들었던 괴물들도 하나둘 깨어나고 있었다.
처음 내가 보았던 코끼리를 닮은 녀석도 있었고, 거대한 문어를 연상시키는 녀석도 있었다. 제일 무시무시했던 것은 대형 건물만한 크기의 아기였다.

갸르르르르······.

‘이계의 신격’들은 종류가 많지만, 모두가 ‘꿈을 먹는 자’나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처럼 네임드인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이름 없는 것들’이라 불리며, 자아조차 제대로 가지지 못한 채 존재한다.
기저귀를 찬 아기가 도시를 불도저처럼 밀어대는 것을 보며, 나는 숨을 죽인 채 숨어 있었다.

······솔직히 기저귀는 저 아기가 아니라 나한테 필요할 것 같았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힘을 비축하겠다며 대천사들이 잠든 것도 벌써 몇 시간 전.
웬만큼 힘을 회복한 것인지, 코트에 꽂혀 있던 흰 백합이 파르르 떨었다.
가브리엘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무슨 선택이요?”

[몰라서 물어?]

“딱히 다른 방법도 없었잖습니까.”

멀리서 뭔가가 퍼거걱, 으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또 뭔가 일이 터졌구나 싶은 순간, 찢겨 나간 코끼리 괴물의 다리가 보였다. 강력한 힘에 의해 찢겨 나간 듯한 흔적. 그 잘린 다리를 질질 끌고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 시나리오의 진짜 괴물, 유중혁이었다.
한숨처럼, 다시 한 번 꽃잎이 흔들렸다.

[죽일 것처럼 굴더니······ 그럼 칼은 왜 쥐었던 거냐고.]

“혹시나 자살할 수도 있잖아요. 뭐, 지금 상태로 봐서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나는 유중혁의 [진천패도]를 허공에 홰홰 그으며 말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아직 유중혁을 죽이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잠시 말이 없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엘은 이런 녀석이 뭐가 좋다고······.]

“우리엘? 아, 우리엘은 잘 계십니까?”

[그런 녀석 내가 알 게 뭐야.]

좀 과하다 싶을 정도의 반응이었다.
내가 뭔가를 더 물어보려는 순간, 또 다른 간접 메시지가 들려왔다.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까다로운 천사님께서도 깨어나신 모양이었다.
요피엘은 일어나마자마 곧장 사나운 투로 물어왔다.

[그자는 계속 살려두기로 한 건가?]

나는 대답 대신 유중혁이 가져온 코끼리 다리를 받아들었다. 살점이 아주 실하게 붙어 있는 다리였다. 분명 설화도 아주 풍부하게 스며들어 있겠지.
나는 텅 빈 눈으로 나를 보는 유중혁을 잠시 마주보았다. 요피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를 살려두면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을 텐데? 그대가 받은 시나리오는······.]

“유중혁을 죽이는 거였지요.”

거짓말을 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대천사들을 속이기엔 늦었다.
내가 본 시나리오 창을, 내게 현현했던 그들 또한 보았을 테니까.

―유중혁을 죽이시오.

그것이 ‘은밀한 모략가’가 내게 내린 시나리오였다.
나는 녀석을 죽여야만 본래의 ‘3회차’로 돌아갈 수 있다.

“이미 말씀 드렸지만, 이 시나리오는 있는 그대로 해석해선 곤란합니다. 은밀한 모략가가 제안한 ‘죽음’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죽음’일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천사들은 말이 없었다. 나의 말을 납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는 코끼리 다리를 태연히 뒤집으며 말을 이었다.

“유중혁은 ‘죽음’을 겪을 수 없습니다. 대천사님들이라면,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두 천사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게 무슨 뜻이지?]

“이 녀석은 ‘회귀자’입니다.”

만약 초반 시나리오였다면, 방금 내가 말한 정보는 필터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시나리오도 시나리오지만, 지금쯤 ‘회귀자’에 대한 소문은 꽤나 퍼져서 <에덴>의 고위급 성좌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테니까.
붉은 코스모스 잎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설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영원히 생을 반복하는 존재입니다. 누구도 죽일 수 없습니다. 죽여도 그저 다른 회차로 넘어갈 뿐이니까요.”

[그대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지?]

“왜 우리엘이 저 같은 존재를 감시하고 있었을까요?”

말할 수 없는 질문에는 질문으로 대응하는 것이 최선이다.
요피엘은 분노를 다스리듯 줄기를 떨며 말했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쩌겠다는 거지? 저 자를 죽일 수 없다면 원래의 회차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구워진 고깃덩어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방법은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죠. 시간이야 많으니까요.”

내 태연한 반응에 두 송이의 꽃을 중심으로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혹여나 ‘격’을 발현하는 건가 싶어서 긴장했는데, 갑자기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꾸르르르륵.

내 배에서 난 소리는 아니었다. 유중혁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고개를 숙이자, 제각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 두 송이의 꽃이 보였다.

“······배 고프세요?”


*


쭈우욱.

[가브리엘, 언제까지 녀석을 방관할 거지?]

쭈우욱.

[방관 안해. 내가 열심히 지켜보고 있다고. 우리엘만 아니었어도 진즉에 죽여버렸을텐데······.]

페트병에 꽂힌 가브리엘이 줄기로 물을 쭉 빨아들이며 답했다. 그녀의 곁에는 요피엘의 코스모스가 마찬가지로 물이 담긴 페트병에 꽂혀 있었다.
얼마간 떨어진 곳에서 김독자가 유중혁을 향해 뭐라뭐라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가브리엘이 물었다.

[우리엘 녀석, 잘 있을까?]
[임무에 집중해라, 가브리엘.]
[아니, 걱정되잖아. 우리엘은 혼자 두면 항상 사고를 친다고.]
[······그렇군. 너는 사실 우리엘을 좋아하는 건가?]
[뭔 헛소리야! ······그보다 돌아갈 방법은 아직 못 찾았어? 언제까지 저 녀석들이랑 같이 붙어 있어야 돼?]

꽃잎을 파들파들 떠는 가브리엘의 모습에 요피엘이 답했다.

[방법을 찾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왜? 아무리 다른 ‘세계선’이라지만 여기에도 <에덴>은 있을 거 아냐. 이곳의 서기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서기관에게서 답신이 없다.]
[뭐?]
[서기관뿐만 아니라, <에덴> 누구와도 연락이 안 된다.]

<에덴>과 연락이 안 된다······?
아무리 세계선이 바뀌었다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시나리오의 제약 때문에 본래 있던 ‘별자리의 맥락’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상황.
답답한 노릇이었다.
한숨을 내쉰 가브리엘이 물을 다시 쭉 빨아들이며 말했다.

[뭐야? 몇 시간 전까지 멱살 잡고 싸우더니······.]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김독자가 유중혁의 머리를 쓰다듬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왜인지 그 광경을 보며 가브리엘은 자신과 우리엘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다르지만, 어딘가 닮은 데가 있을지도 모른다.

······전우애인가.

아주 잠깐, 가브리엘은 우리엘이 저 녀석들을 왜 좋아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


“흙을 먹어라 유중혁.”

유중혁은 말없이 흙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먹으란다고 진짜 먹으면 어떡해!”

시험 삼아 시켜본 건데 설마 진짜로 할 줄은 몰랐다.
내가 아는 ‘유중혁’이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회귀 우울증’이 녀석의 자아를 온전히 집어삼킨 탓에, 당분간 유중혁은 저런 바보 상태일 것이다.
유중혁이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어쩐지 측은해진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평소에도 이렇게 얌전하면 얼마나 좋을까. 3회차 그 자식보다 네가 낫다 인마.”
“······.”
“······흙 뱉어.”

흙을 뱉는 유중혁을 보며, 나는 내가 아는 또 다른 유중혁을 떠올렸다.
그 녀석은 잘 있으려나 모르겠다.
또 회귀한다고 발광하고 있지 않으면 좋을 텐데.
유상아에게 이것저것 맡겨 놨으니, 잘 되길 바랄 뿐이다.

“이제 저기 누워 좀 쉬어라 유중혁 1863호.”

내 말에 유중혁이 폐건물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멀리서 해가 지는 모습이 보였다.

95번 시나리오의 노을도, 여전히 노을이었다.

희붐하게 흩어지는 아지랑이를 보며, 기이하게도 평화로운 마음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토록 끔찍한 시나리오에서 이런 감상에 빠지다니.

「김독 자는 유중 혁 을죽 여 야해」

······아니까 보채지 좀 마라.

다행히 ‘은밀한 모략가’가 내게 준 시나리오에는 기한이 없었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유중혁이 미련한 얼굴로 쪼그려 앉아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만 쉬라니까.”

내 말을 알아 들었는지, 유중혁이 곤히 눈을 감았다.
아마 시나리오가 시작된 이후, 유중혁은 단 한 번도 제대로 잠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저 수면이 유중혁에겐 제대로 된 ‘첫 잠’인지도 모른다.

모든 기억에서 해방된, 제대로 된 첫 잠.

유중혁이 완전히 잠든 후, 나는 스마트폰을 켰다.
폰의 바탕 화면에는 늘 그랬듯 ‘멸살법’의 텍본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가 달랐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txt

······뭐지? 분명 내가 가지고 있는 건 ‘3차 수정본’이었을 텐데?
순간 소름이 돋았다.
설마 내가 ‘원작’의 회차로 돌아왔기 때문인가?
그래서, 수정본이 아니라 원작의 내용으로 텍본이 바뀐 건가?
나는 혼란한 마음으로 일단 파일을 열었다.
파일은, 내가 알고 있던 ‘멸살법’의 원작 그대로였다.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일들을 제대로 생각하려면, 우선 이 회차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빠르게 화면을 1863회차로 넘겨, 모든 정보를 꼼꼼히 읽어 나갔다.

「54번 시나리오에서 이현성을 잃었고」

나는 그 이야기를 읽고, 읽고, 또 읽었다.

「67번 시나리오에서 이설화가 사망했으며」

잃고, 잃고, 또 잃어갈 뿐인 이야기를.

「78번 시나리오에서 이지혜가 죽었다.」

이 회차의 유중혁은 철저하게 혼자였다.
사실 이번 회차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유중혁의 모든 회차는 그가 홀로 남기 위해 존재했으니까.
마지막까지 와서도, 결국 같은 삶이 되었을 뿐이다.

“······불쌍한 놈.”

나는 ‘멸살법’의 에필로그를 모른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멸살법’이 결코 해피 엔딩이 아니라는 것.

······만약, 내가 3회차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떨까.
이곳에 남아서, 마지막 회차의 유중혁을 도와 시나리오를 클리어 한다면.

「제4의 벽이 말합니다. ‘김 독 자그 건’」

알아.

「그 래」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은밀한 모략가’에게 놀아나는 일이라는 걸.
아마도 ‘은밀한 모략가’는 이것까지 예상하고 내게 시나리오를 준 것일 터다. 시나리오에 제한 시간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겠지.

이곳의 유중혁을 죽이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든가.
아니면, 이곳의 유중혁과 함께 시나리오의 결(結)을 보라고.

정말 ‘이계의 신격’이나 할 법한 생각이었다.
우스운 것은 내가 정말로 그 제안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여기서 ‘결’을 본다면······ 나는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결말은 볼 수 없겠지.

그렇다고 여기서 놈을 죽인다면, 내가 알던 ‘원작’의 유중혁은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머리가 아파왔다. 유중혁을 죽이려면 결국 유중혁의 회귀를 끊어야 한다. 하지만, 놈의 배후성은 말이 통하지 않을뿐더러 내가 알지조차 못하는 존재였다.

당장은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이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멸살법’의 스크롤을 내렸다.
등줄기에 서늘한 느낌이 스친 것은 그때였다.

[성좌, ‘물병자리의 백합’이 당신에게 경고합니다!]

멀리서, 페트병에 꽂힌 두 송이의 꽃이 진동하고 있었다.
감각이 강한 경종을 울렸다.
······설마 ‘이계의 신격’인가?

“여기 숨어 있었군, 유중혁.”

반사적으로 등을 돌리려는 순간, 섬뜩한 예기가 느껴졌다.
지금 등을 돌리면 죽는다.
너무나 분명하게도, 그런 예감이 들었다.
성좌인 내 감각을 속일 정도의 은신술.
분명, 내가 가늠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존재였다.
이런 존재가 근처에 있었다고?

“넌 뭐야? 유중혁의 동료냐?”

목소리에서 기시감이 들었다.
분명 내가 아는 목소리였다.
적이 위협을 느끼지 않을 만큼 천천히, 나는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 익숙한 외형의 여인이 서 있었다.
한순간 머릿속이 패닉으로 덮였다.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 있는 인물은, 이 ‘회차’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뭐, 알 필요 없지. 어차피 죽일 거니까.”

하얗게 웃는 해상제독 이지혜가, 나를 향해 쌍룡검을 겨누고 있었다.





< Episode 54. 마왕 살해자 (4) > 끝

< Episode 54. 마왕 살해자 (5) >





“섬멸해라, 쌍룡검.”

이지혜의 말과 함께, 두 자루의 검에서 마력이 폭발했다. 푸른 색의 용을 닮은 강기가 내 목줄기를 뜯기 위해 날아들고 있었다.

쌍룡검(雙龍劍).

충무공의 성유물이자, 한반도에서 구할 수 있는 최강의 명검이 빛을 뿜었다. 경지에 오른 [검도]의 궤적을 보며, 나는 전심전력을 다해 [전인화]와 [바람의 길]을 발동했다.

“어쭈, 작아져? 어디서 굴러먹다 온 화신이야?”

해상제독 이지혜.
95번 시나리오까지 살아남은 그녀는, 명실상부한 ‘멸살법’ 최강의 100인 중 하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내가 기억하는 ‘원작’이 맞다면, 1863회차의 이지혜는 오래 전에 죽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지혜는 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쌍룡검의 궤적이 닿지 않을 고도까지 단번에 날아오르며 외쳤다.

“이지혜, 멈춰! 난 네 적이 아니야!”
“······뭐야, 날 알아? 하긴, 내가 좀 유명하긴 하지.”

뻔뻔한 말을 중얼거린 녀석이 웅크린 발도 자세를 취했다.
나는 그 기술이 뭔지 알고 있었다.

순살(瞬殺).

‘멸살법’에서 손꼽히는 대인 기술 중 하나이자, 그 어떤 상대든 일검에 격살시킨다는 무시무시한 스킬.

“벌레처럼 작아졌다고 내가 못 벨 것 같아?”

귀살이 일렁이는 이지혜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스슷.

이지혜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검이 내 목을 노리는 감각이 일었고, 바로 다음 순간 벌어질 일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유중혁!”

집채만한 그림자가 눈앞을 덮는가 싶더니, 철과 철이 부딪치는 강렬한 파찰음이 울려 퍼졌다.
내 옆을 막아선 유중혁과, 그 유중혁을 향해 쌍룡검을 들이댄 이지혜.

까가가가각!

저 단단한 [진천패도]의 칼날에 작은 흠집이 나 있었다.
순살은 그만큼 강력한 기술이었다.
상대가 유중혁만 아니라면 말이다.

고오오오오!

1863회차의 유중혁은 누구보다 살인 기계에 가깝다. 결정한 일은 번복하지 않고, 죽이겠다 마음먹은 상대는 반드시 격살한다.
초월의 격을 발한 유중혁이 검을 휘둘렀고, 힘의 격차에서 밀려난 이지혜가 지상으로 추락했다. 패도를 쥔 유중혁의 신형이 이지혜를 쫓아 낙하했다.

“유중혁! 멈춰!”

나는 지상에서 터져나오는 굉음을 향해 외쳤다.
뿌연 먼지 사이로 쓰러진 이지혜와 검을 내리치는 유중혁이 보였다. 멈추라는 내 말에도 유중혁은 멈추지 않았다. 녀석의 근처로 개연성의 스파크가 밀려들고 있었다.

‘회귀 우울증’이 풀리고 있는 것이다.

“행복한 기억! 행복한 기억!”

유중혁의 신형이 멈칫했다.

“죽이지 마! 걔 죽이면 안돼!”

어째서 이지혜가 살아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적어도 유중혁이, 그녀를 죽이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먼지 속에서 일어난 이지혜가 이를 갈며 외쳤다.

“무슨 뻘짓이지? 덤벼 패왕! 이번에야말로 개작살을 내줄 테니까!”

아무래도 이지혜와 유중혁의 격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 듯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이지혜’가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도 이상한 일인데, 하물며 적이 되었다고?

“잠깐만! 너도 멈춰 이지혜! 우린 싸울 생각 없다고!”

내 말에도 이지혜는 멈추지 않았다. 내 명령 때문인지 유중혁의 움직임은 한결 소극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파스슷!

이지혜의 칼날에 베인 유중혁의 살갗에서 피가 튀었다.
아무래도 ‘회귀 우울증’에 걸린 상태에서는 효과적인 방어 수단을 강구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공격 명령을 내리면 아까처럼 이지혜에게 달려들 것이 분명하고······ 제기랄.
나는 전인화를 유지한 채 유중혁의 어깨에 올라타 이지혜를 향해 외쳤다.

“멈추라고 자식아! 유중혁은 네 사부잖아!”
“사부? 뭔 개소리야? 이딴 괴물 사부로 둔 적 없어.”

이지혜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내 사부는 훨씬 더 멋있는 사람이야.”

이지혜의 칼날에서 오색의 아우라가 흘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했다.
무슨 공격을 하든, 방향이라도 알면 피하기라도 쉬울 테니까.

[해당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해 스킬 발동이 취소됩니다!]

······유중혁의 이해도가 낮은 건 그렇다 쳐도, 이건 뭔가 이상했다.
이지혜가 그렇게 복잡한 인간은 아닐 텐데.
적어도, ‘내가 아는 이지혜’가 맞다면······.

[등장인물 ‘이지혜’가 성흔 ‘칼의 노래 Lv.10’를 발동합니다!]

······기어코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그러면 이쪽에도 생각은 있다.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강하게 움켜쥐며 성흔을 발동했다.

[성흔, ‘칼의 노래 Lv.5’를 발동합니다!]

내 칼날에서 솟아난 오색의 빛을 확인한 이지혜의 표정에 의아함이 스쳤다.
아직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이 ‘성흔’은 확률 싸움.
어디, 누가 더 운이 좋은지 보자고.

선수는 이지혜였다.
허공에 떠오른 문자열이 움직이며 충무공의 글귀가 흘러나왔다.

「초 10일.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 동헌에 나가 일을 하였다.」

빙고.
이지혜의 안색이 구겨지는 것이 보인다.
‘칼의 노래’는 어디까지나 충무공의 일기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스킬.
재수가 없으면, 아무 효과도 발동되지 않는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28일. 맑다. 활 10순을 쏘았는데 5순은 모두 맞고, 2순은 네 번 맞고, 3순은 세 번 맞았다.」

내 칼날에서 불화살이 쏟아졌다.
눈이 휘둥그레진 이지혜가 기겁하며 물러났다.

[성좌, ‘해상전신’이 경악한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옷깃에 붙은 불을 꺼뜨린 이지혜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너 뭐야! 어떻게 내 배후성의 성흔을 쓰는 거지?”
“궁금하면 대화를 하자고.”
“팔다리 정도는 잘려야 똑바로 대답을 할 모양이네.”

내 공격이 성질을 돋운 모양인지, 이지혜의 얼굴이 조금 진지해졌다.

“어떤 배후성의 잡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믿고 나대다간 큰 코 다칠 거야.”

이지혜가 허리춤에서 새로운 검을 뽑았다.
놀랍게도, 나도 알고 있는 아이템이었다.

사인참사검(四寅斬邪劒).

지금껏 내가 읽었던 그 어떤 회차에서도, 이지혜가 저 ‘사인참사검’을 손에 쥔 기억은 없었다.

“북두성군이여! 힘을 주소서!”

이지혜의 외침에 하늘에서 몇 개의 별들이 빛났다.
북두성군은 원래 총 일곱 명. 하지만 후반 시나리오로 들어서며 몇 명이 죽은 탓인지 빛나는 별은 네 개뿐이었다.

기이이이잉!

눈부신 빛을 쏟아내는 사인참사검이 성유물로 진화하고 있었다.
이지혜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는 뻔했다.
사인참사검은 성좌와 화신체의 링크를 베어, 아주 잠깐 그 연을 끊을 수 있는 무시무시한 권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나를 본 이지혜의 표정이 괴이했다.

“너······ 링크가 없어?”

당연히 없지.
나는 지금 화신체와 본체가 하나인 상태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화신 ‘이지혜’를 바라봅니다.]

경악한 이지혜가 한 걸음을 물러났다.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나는 품속에서 이지혜의 손에 쥐어진 것과 똑같은 검을 꺼냈다.

기이이이잉!

“어, 어떻게? 대체 어떻게······!”

나는 눈부신 광휘를 뽐내는 [사인참사검]을 굳게 쥔 채 유중혁의 어깨에서 도약했다. 방심한 이지혜가 눈을 크게 뜬 순간, [바람의 길]의 궤적이 그녀의 머리 위를 가로질렀다.

츠츠츠츠츠츳!

터지는 스파크의 폭음 속에 이지혜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아아아악!”

그녀를 수호하던 해상전신의 별이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문 채 물러섰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에게 분노를 토합니다!]

······얕았다.
잠깐이나마 ‘해상전신’과의 링크를 끊어 이지혜를 무력화시킬 계획이었는데,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얗게 탈색된 이지혜의 눈동자.
95번 시나리오에 이르러, 설화급 성좌에 오른 충무공이 내 눈앞에 현신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주변의 물가를 확인했다.
만약 여기서 ‘유령 함대’의 본선이 소환되기라도 한다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콰콰콰콰콰!

청계천의 지류가 허공으로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스파크와 함께 유령함대의 환영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나는 반사적으로 뒤쪽의 페트병, 정확히는 그 안에 꽂혀 있던 꽃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대천사의 힘을 빌려야 하나?
그녀들이 힘을 빌려줄기는 할까?
눈앞의 이지혜는, 적어도 ‘악’은 아닐텐데.

“충무공. 그만 멈추십시오.”

진중한 사내의 목소리.
대체 언제 나타난 것일까, 곰 같은 사내의 손이 이지혜의 어깨를 짚고 있었다.

[성좌, ‘해상전신’이 노여워합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차가운 시선을 보냅니다!]

성좌들끼리의 으르렁거리는 기싸움.
결국, 먼저 물러선 것은 충무공이었다.
유령함대의 환영이 하나둘 사라지자, 힘이 풀린 이지혜가 바닥에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그런 이지혜의 앞으로 사내가 나섰다.

“그쪽 분도 거기까지 하시죠.”

나는 멍한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정말 오늘은 몇 번이나 놀라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무슨 짓이야, 현성 아저씨! 저 자식 유중혁 편이라고!”
“아직 제대로 알아본 게 아니잖아.”

25번 시나리오든, 95번 시나리오든.
3회차든, 1863회차든······.
이현성은, 내가 아는 그대로의 이현성이었다.
나는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저는 이현성이라고 합니다.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김독자입니다.”

고생을 많이 했는지 이현성의 이마에도 굵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
꽉 짜인 강철 같은 근육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상흔이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이지혜와 마찬가지로, 이현성 또한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1863회차에서, 유중혁은 모든 동료를 잃었으니까.
이현성이 말했다.

“김독자 씨. 우리는 당신과 적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기 있는 ‘유중혁’이 필요할 뿐입니다.”

사람 좋은 미소였지만, 나는 미소의 이면에 깔린 침착함을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이현성 역시 아흔 네 개나 되는 시나리오를 헤쳐온 것은 마찬가지. 내가 조금이라도 위협을 가한다면, 이현성은 이지혜보다 더 철저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나를 제거하려 들 것이다.
나는 차분한 어조로 되물었다.

“왜 유중혁이 필요한 겁니까?”
“이번 시나리오를 클리어 할 열쇠를 그가 가지고 있으니까요.”

95번 시나리오가 무엇인지를 아는 나는 이현성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당신들 그룹에는 몇 명이나 있습니까?”
“예?”
“95번 시나리오까지 왔다면, 당신들도 그룹이 있을 텐데요.”
“아, 그룹이라면 저랑 지혜가 전부······.”
“한 번만 더 거짓말을 한다면, 앞으로 당신의 말은 신뢰하지 않겠습니다.”

이현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계속해서 물었다.

“리더는 누굽니까? 이현성 씨 당신인가요?”

이현성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역시, 몇 회차가 지나든 감정을 숨기는 데는 능숙하지 못한 사내다.

“그건······.”

흐려지는 말 꼬리가 내게 확신을 주었다.
이현성과 이지혜는 그룹이 있고, 리더는 그들이 아니다.

이 ‘1863회차’는, 내가 알던 ‘1863회차’가 아니다.

확실한 가설이 서자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뒤늦게 여러 가지가 이해 될 것 같았다.
유중혁에 대한 내 이해도가 이상하게 낮았던 이유도.
죽었어야 할 이지혜와 이현성이 살아 있었던 이유도.

나 말고도 누군가가 있다.
원작에서는 활약하지 않았던 누군가가, 이 ‘회차’에 있는 것이다.

“유중혁을 원한다면, 나를 당신들의 리더에게 안내해주십시오.”

그러자 이현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곤란합니다. 당신과 유중혁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모르는 이상······.”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습니다. 저야 뭐 보다시피 약골이고, 유중혁은······ 지금이라면 안전합니다. 제 말을 꽤 잘 듣거든요.”
“뭔 개수작이야! 저 자식이 누구 말을 듣는다고······!”

유중혁에 대해 제법 잘 이해하고 있는 모양인지, 이지혜가 악을 썼다.
이현성 역시 불신 가득한 눈빛이었다.

“김독자 씨, 당신은 유중혁의 동료입니까?”

······동료라.

“그렇습니다.”
“······솔직히 믿을 수 없군요. 유중혁에겐 어떤 동료도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증거를 보여드리죠. 유중혁.”

유중혁이 나를 바라보았다.

“검을 집어 넣어.”

유중혁이 거대한 [진천패도]를 고분고분 집어 넣었다.
이지혜가 흠칫 몸을 떨며 외쳤다.

“겨우 그 정도로······!”
“유중혁, 이리와.”

유중혁이 성큼성큼 다가오자, 질겁한 이지혜가 이현성의 뒤로 숨으며 외쳤다.

“현성 아저씨! 조심해! 저러다가 분명 공격할 거―”
“유중혁, 앉아.”

유중혁이 고분고분 자리에 앉았다.
이지혜와 이현성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하긴, 놀랍기도 할 것이다.
그들이 아는 ‘유중혁’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어제 처맞은 게 꽤 아팠으니 이 정도는 괜찮으리라 생각하기로 했다.
무슨 서커스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이쪽을 보는 그들을 향해, 나는 씩 웃으며 물었다.

“또 뭐 시켜볼 일 있으십니까? 흙이라도 먹여 볼까요?”

내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마주보았다. 손을 번쩍 든 이지혜가 뭐라 외치려는 순간, 이현성이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를 따라오시죠.”


*


본거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다만, 도중에 나타난 ‘이름 없는 것들’로 인해 시간은 생각보다 지체되었다. 폐건물 사이를 돌아다니는 이계의 신격들을 피해다닌지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멀리서, 그들의 본거지로 보이는 건물이 나타났다.

“저곳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나와 똑같은 코트를 입은 한 사내와 마주쳤다.





< Episode 54. 마왕 살해자 (5) > 끝

< Episode 54. 마왕 살해자 (6) >





“여, 이지혜.”

전형적인 양아치 말투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사내. 녀석의 어깨에서 흔들리는 백색의 코트는, 틀림없는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였다.
그러니까, 내 것과 같은 코트였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불쾌감을 드러냅니다.]

코트의 안주머니에서 꽃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설마 저 녀석이 리더라고?

밀려오는 충격에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났다. 반사적으로 유중혁 쪽을 돌아보았지만, 바보가 된 유중혁이 내 충격을 공유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다시 사내 쪽을 바라보았다. 한쪽 손에 둘둘 붕대를 감고, 등은 반쯤 문에 기댄 채 새하얀 머리카락을 밀어 올리며 큭큭 웃는 사내.

「김 독자는 멍청 이이 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놈이 리더일 리가 없다.
애초에 저 ‘코트’는 95번 시나리오쯤 되면 못 구할 것도 없고.
이지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김남운.”
“어.”
“나 아는 척하지 말랬지. 들어가야 되니까 저리 꺼져.”
“어, 어······.”

이지혜의 말에 김남운이 머쓱한 얼굴로 주춤거렸다. 그런 김남운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던 이지혜가 말했다.

“그리고 사부 코트 그만 훔쳐 입어. 진짜 죽여버린다 너.”
“······너도 한 번 입어 볼래?”

이지혜가 문을 쾅 박차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이지혜의 모습에 압도된 듯, 눈이 풀린 김남운이 이지혜의 뒷모습을 좇았다.

······그러고 보면 원작에서 얘들 관계가 그랬지.

새삼 여러 가지가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지혜에 이현성, 거기다 김남운이라······.
호기심과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가슴 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었다.
이 회차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잠깐 정신이 팔린 사이, 김남운이 나를 보며 말했다.

“뭐야 넌? ······그 코트 내 거랑 같은데?”

[등장인물 ‘김남운’이 당신에게 경계심을 드러냅니다!]

녀석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지하철에서 머리가 터져 죽었던 김남운.
만약, 그때의 김남운이 살아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어이 군인, 이 인간은 뭔······ 우왁 씨바! 유중혁이잖아!”

내 뒤쪽에 있던 유중혁을 발견한 김남운이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났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이빨을 드러냅니다!]

망상악귀 김남운.
이번 회차에서, 심연의 흑염룡은 자신의 본래 화신을 찾아갔다.
자신을 향한 적의에 유중혁이 고개를 들자, 김남운이 움찔하며 말했다.

“존나 멋있는 건 여전하군······ 싸우러 온 거냐, 유중혁?”

감춘 한쪽 손을 바들바들 떠는 김남운은 흥분한 것인지, 아니면 두려워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흉악해지려는 기류를 막아선 것은 이현성이었다.

“남운아, 이분들은 싸우러 온 게 아니야.”
“뭐? 그럼 뭐하러 온 건데?”
“그건······.”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다 말고 건물 안쪽으로 성큼 들어갔다.

“잠깐만요! 김독자 씨!”

뒤쪽에서 이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얼른 이 건물의 내부를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더 컸다.

내 생각이 맞다면······.
이 건물은, 초반 회차의 유중혁이 구상했던 바로 그 ‘건물’이다.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보이는 것은 탁 트인 거대한 실내였다. 어지간한 대기업의 자재 창고만한 크기. 옆에 있던 커다란 문에서 환자들을 실은 침대차가 우르르 밀려왔다. 하나 같이 응급 환자들이었다.

“거기 놀지 말고 환자들 이쪽으로 옮기세요!”

나는 얼떨결에 환자들이 실린 침대를 함께 밀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설화 팩! 설화 팩 가져와!”
“이 환자 알러지 있으니까 동물 관련된 설화는 안돼!”

모두 훈련된 의료 스킬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을 이끄는 것은 작은 무테 안경을 쓴 여인이었다.
여인은 배와 허벅지가 꿰뚫린 환자의 상세를 살피며 내게 물었다.

“이 환자 어디서 다친 거죠?”

나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회차에 따라 ‘독희’ 또는 ‘의선’으로 불리는 여인.
어떤 회차에서는 십악이지만, 어떤 회차에서는 유중혁의 연인이었던 사람.
내가 하얀 코트를 입고 있어서 같은 의원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환자의 상세를 보며 대답했다.

“······아마 ‘이름 없는 것들’에게 당한 것 같군요. 상처 부위의 오염도로 보아 촉수종에게 당한 것 같습니다.”
“확실히······ 음?”

나를 보던 이설화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등장인물 ‘이설화’가 당신에게서 묘한 느낌을 받습니다.]

“······당신 누구죠?”

누구라고 해야 할까.
아니, 누구라고 말하면 그녀가 알아 들을까.

“거기 아저씨, 뭐해? 빨리 따라와! 유중혁 잘 데리고!”

멍한 얼굴의 이설화를 남겨두고, 나는 유중혁과 함께 이지혜가 있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건물의 내벽은 투명한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저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건물 전체의 구조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1층의 응급실 정문으로 끊임없이 환자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계의 신격, 또는 다른 성좌들과 맞서다 중상을 입은 화신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95번 시나리오쯤 되면 저런 비극은 일상이 된다.

나는 1863회차의 95번 시나리오를 기억하고 있었다.

건물의 외창으로 시선을 돌리자, 폐허가 된 서울의 정경이 보였다.
연기를 내뿜는 성운들의 설화병기(說話兵器)들과 잠든 이계의 신격들의 모습. 그리고 그보다 더 위쪽에는, 창공을 덮은 새카만 수정구가 있었다.

[묵시룡의 봉인구(封印球)]

저 봉인구가 바로, 이 95번 시나리오의 핵심이자 목표였다.
흩어진 다섯 개의 열쇠를 획득해 저 ‘묵시룡’을 해방시키는 것.
‘묵시룡’이 풀려나면 이 지구에는 멸망이 찾아오고, 시나리오를 완수한 이들은 자동으로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 1863회차는 내가 아는 1863회차와는 너무 달랐다.

―강서 쪽에 1급 괴수종이 등장했습니다!

건물을 울리는 전파음.
계단을 올라가자, 환한 패널로 빛나는 상황실의 정경이 얼핏 보였다.

―서초에 파견 중인 인원들은 빠르게 철수하기 바랍니다! 염화(炎火)의 대천사가 등장했습니다!
―노원 쪽 성검 ‘아스칼론’ 발견! 현재 ‘이름 없는 것들’ 십여 개체와 교전 중입니다! 지원 바랍니다!

무수한 메시지들이 오가고 있었고, 그 모든 상황을 관리하는 인물이 있었다. 꼬질꼬질한 파마 머리.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온 눈으로 헤드셋을 머리에 쓴 소년.
······아니, 더 이상 소년이 아니구나.
나는 어쩐지 먹먹한 심정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은둔한 그림자의 왕, 한동훈.

내가 살았던 회차에서는 ‘왕’이 되지 못했던 그 아이가, 자신의 재능을 가장 빛낼 수 있는 장소에 앉아 있었다.
빠르게 전력 계산을 끝낸 한동훈의 손끝에서 하얀 빛이 흘러나왔다.

―노원 쪽은 민지원 씨의 화랑대와 차상경 씨의 미륵불(彌勒佛)이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올림포스 쪽의 화신들이 선점하기 전에 먼저 쳐야 합니다.
―성검 ‘아스칼론’을 반드시 확보해야 합니다. 서두르세요!

메시지로 오가는 익숙한 이름들.
민지원과 차상경.
각각 ‘매금지존’과 ‘외눈 미륵’을 성좌로 두고 있던 그들도, 95번 시나리오까지 무사히 살아남은 것이다.

“뭘 그렇게 훔쳐 봐?”

곁에서 나를 감시하던 이지혜가 쿡 찌르듯 말했다.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놀라워서.”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잠깐 머뭇거리던 이지혜가 코를 쓱 문질렀다.

“뭐, 우리 사부가 좀 대단하긴 하지. 모두 사부 덕분이야. 그 사람이 혼자 해낸 거니까.”

이지혜, 이현성, 이설화, 민지원, 차상경, 한동훈······ 거기다 저 ‘김남운’까지.
원작의 1863회차에서는 죽어야 했을 사람들이 모두 살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장의 수준도 높았고, 세력의 크기도 만만치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살았던 3회차보다 높은 수준······ 아니, 내가 줄곧 바라던 정도의 수준이었다.

지끈거리며 머리가 아파왔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1863회차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일어났어야 할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고, 인류는 투쟁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아직 그 어떤 동료도 잃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3회차로 돌아가지 않아도, 여기서 제대로 된 결말을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이지혜가 말했다.

“우린 사부와 함께 시나리오의 끝까지 갈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차갑고 섬뜩한 감각이 가슴 어귀를 스쳤다.

분명 저 풍경 속에는 모든 것이 있다.
단 한 가지를 빼면 말이다.

돌아 보자, 유중혁이 표정 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
나는 유중혁이 저 광경을 보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슬퍼하는 것인지, 기뻐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나 자신에 관한 것뿐이었다.

“너흰 왜 유중혁을 싫어하는 거지?”
“그 놈은 나쁜 놈이니까.”
“왜 나쁜 놈인데?”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몰라.”
“사람도 함부로 죽이고, 자기 목표를 위해서는 어떤 짓도 서슴지 않으니까.”

모두 맞는 말이었다.
나는 물었다.

“그게 전부야?”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해?”

맞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하다.
하지만······.

「김독자는 생각했다. ‘너는 왜 유중혁이 그래야 했는지 모르잖아.’」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것은 이지혜의 잘못이 아니었다.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모두가 너무나 잘 하고 있었고, 어쩌면 그렇기에 나는 화가 났다.

“네가 말하는 ‘사부’는 대체 누구지?”
“건물의 최상층에 있어. 저기 있는 엘리베이터 타고 가.”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했다.
유중혁이 나를 따라오자, 이지혜가 칼을 빼들며 말했다.

“유중혁은 여기 두고 가.”

예상했던 일이었다.
나는 텅 빈 표정의 유중혁과 이지혜를 번갈아 보았다.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기 전, 유중혁에게 다가가 말했다.

“유중혁, 행복한 생각하면서 기다려. 알겠지?”

유중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네게 위해를 가한다면······ 가장 불행했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내 말에서 뭔가 이상한 뉘앙스를 느꼈는지 이지혜가 끼어들었다.
나는 무시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야! 대답하라니까! 방금 유중혁한테 한 말 뭔 뜻인데!”

이지혜에게 이곳이 얼마나 소중한 장소인지는 잘 알겠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누군가의 소중함은 곧 약점이다.

“궁금하면 걔 한 번 건드려 보든가. 나라면 안 그러겠지만.”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3, 4, 5······.

살짝 무거워지는 중력과 함께, 건물의 층수가 바뀌고 있었다.
숫자가 바뀌는 만큼 내 머릿속도 그 어느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누굴까.

가능성이 있는 후보는 몇 있었다.
앞으로의 미래 정보를 읽을 수 있기에, 미래 개변이 가능한 이들.
안나 크로프트나, 특정 성운의 소수 성좌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라고 해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들이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은 원작에 속한 존재.
스스로의 힘만으로 원작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9, 10, 11······.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나 말고, 원작 밖의 존재가 또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이상한 점은 있었다.
설령 원작 밖의 존재가 왔다고 해도, 95번 시나리오까지 이토록 완벽하게 진행할 수 있을 턱이 없다. 그것도 나와 닮은 방식으로······ 순간 발끝으로 소름이 올라왔다.

······설마?

다른 회차에도 유중혁은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띵.

엘리베이터의 알람음과 함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멸살법’의 수정본에 따르면, 유중혁의 다른 회차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후 몇 회차를 거쳐도, ‘나’는 없었다. 있었더라면, 수정본의 이야기 자체가 달라졌을테니까.
그러니 이 너머의 존재는 내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다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은, 은밀한 모략가가 남겼던 말이었다.

【사실 너 말고도 같은 언약을 행했던 존재가 있었지.】

─문이 열립니다.

문이 열리자, 호텔의 스위트 룸을 연상시키는 방이 나타났다.
불이 꺼진 어둑한 방이었다.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바닥. 새카만 의자 위에 앉은 인형(人形)이 보였다.

“흠······ 당신이 이현성이 말한 그 사람이구나.”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 은은한 불이 켜졌다. 어슴푸레한 시야 속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탁자 위에 놓인 한 자루의 검이었다. 새하얀 광택을 자랑하는 검. 나는 그 검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가진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었으니까.
내가 물끄러미 그 검을 보고 있자, 의자에 앉은 인물이 말했다.

“좋은 검이지. 이름 그대로, 진짜 안 부러지거든.”
“알아. 나도 쓰고 있으니까.”
“그래?”

의자의 인물은 검은 반가면을 쓰고 있었다.
나는 반가면의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시나리오의 풍파를 겪으며 조금 변하긴 했지만, 틀림없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본래라면 먹히지 않아야 할 스킬이었다.
이 녀석에겐 몇 번이나 사용해 보아서,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사용해 본 것은 왜일까.

[해당 인물의 관련 정보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이 ‘요약 일람’으로 변환됩니다.]

어쩌면, 발동하지 않았기를 바랐기 때문은 아닐까.
눈앞에 줄줄이 떠오르는 정보들을 보며, 나는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마 그녀는 모를 것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지독한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좋아, 너는 어디서 나타난 누구지? 나는 김독자란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어.”

처음부터 눈치 챘어야 했다.
나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멸살법’의 존재를 아는 여자.
애초에 이만한 일을 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는 그녀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묻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건 지금부터 알아가야 할 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었던 것도 있었다.
이 여자는, 내가 알고 있던 3회차의 그녀가 아니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여자의 단발을 보며, 나는 물었다.

“너는 한수영의 ‘아바타’인가?”




< Episode 54. 마왕 살해자 (6) > 끝

< Episode 55. 행복한 기억 (1) >





Episode 55. 행복한 기억


언젠가 한수영은 말한 적이 있었다.

―처음 [아바타]를 썼을 때 만든 분신이 있는데······ 기억을 너무 많이 줘버렸는지 갑자기 통제 불능이 되어서 회수를 못했어.

“······재미있네. 그 얘긴 어디서 들었지?”

[등장인물 ‘한수영’이 당신에게 호기심을 가집니다.]
[등장인물 ‘한수영’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한수영의 분신이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나 생생해서, 한순간 이 존재가 정말 분신일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실제의 한수영이었더라도 저렇게 태연하진 못할 텐데.

“네 본체랑 친분이 좀 있어서. 걔가 입이 좀 가벼워.”
“흠······ 유치한 도발이지만 이번만은 넘어가 줄게. 네 생각은 틀렸어. 나는 한수영의 ‘분신’이 아니라 진짜 한수영 그 자체야.”
“뭐?”

생긋 웃는 녀석의 입 모양은, 정말 영락없이 한수영의 그것이었다.

“나는 걔가 가지지 못한 기억을 갖고 있거든.”
“기억? 무슨 기억?”
“게다가 걔완 다르게 입도 아주 무거워.”

나는 허리춤의 칼자루를 쥐었다.

“내가 듣기로 분신은 머리를 잘려도 살아있다고 하더군.”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나도 시간을 끌 생각은 없다.
오른손에 쥐어진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거칠게 울음을 토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화신 ‘한수영’을 바라봅니다.]

내가 발출한 설화급 ‘격’에 스위트 룸 전체가 둔중하게 흔들렸다.
아래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지만, 한수영은 전혀 긴장한 눈치가 아니었다.

“······마왕이라. 생각보다 거물이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그녀의 여유를 깨달았다.

츠츠츠츠츳!

방 전체에 드리워진 개연성의 그물.
내가 발출한 격이 급격하게 잦아들었다.

[해당 지역은 ‘시한부 불가침 구역’입니다.]
[앞으로 한 시간 동안 해당 지역에서의 전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시한부 불가침 구역’ 설정이라······.

“······도깨비와 거래를 했나?”
“유중혁을 통제할 수 있는 녀석이 왔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나는 더 이상 눈앞의 존재가 단순한 ‘분신’이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이 녀석의 말대로 이쪽이 진짜 ‘한수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등장인물 ‘한수영’이 ‘진실의 눈동자’를 발동하였습니다!]

진실의 눈동자.
적어도 ‘특성 간파’에 한해서는 안나 크로프트의 ‘대악마의 눈동자’에 비견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그 짧은 사이, 한수영은 내 정보를 읽어내려는 시도를 한 것이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합니다!]
[‘제4의 벽’이 ‘진실의 눈동자’를 완전히 파훼······.]

튀어오르는 스파크와 함께, 한수영이 황급히 스킬을 취소했다.

“······엄청난 스킬을 가지고 있네.”

한수영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유중혁처럼 억지로 [제4의 벽]을 뚫으려 하지도 않았고, 안나 크로프트처럼 당황하는 모습도 없었다.
그런 침착함조차, 내가 알던 한수영에겐 없던 것이었다.
한수영은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내 머리는 나중에 자르고, 우리 게임 하나 할까? ‘신성한 삼문답’이라고 알아?”

그것은 언젠가 내가 올림포스의 ‘아리아드네’와 했던 문답 교환이었다.

“나나 그쪽이나 서로한테 궁금한 게 있잖아? 하나씩 교환해보자고.”

무슨 꿍꿍이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내게도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건 분명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대신 규칙을 하나 만들자. ‘거짓말’을 할 수 있게 하는 거야.”
“······그러면 ‘삼문답 교환’이 무슨 소용이 있지?”
“재미있잖아.”

한수영의 고양이 눈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녀석이 무슨 생각인지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씩 웃으며 답했다.

“그래, 좋아.”

내 대답과 함께, 허공에서 메시지가 떠올랐다.

―신성한 삼문답(三問答)이 시작됩니다.
―양측은 세 가지 질문과 대답을 교환할 수 있습니다.
―양측은 각자 한 번씩, 문답의 대답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질문과 대답이 온전히 교환되기 전까지, 문답은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하지.”

―첫 번째 질문권을 사용합니다.

“네가 ‘은밀한 모략가’와 계약한 ‘이계의 언약’의 내용을 말해.”

내 첫 질문에, 한수영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등장인물 ‘한수영’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이 문답의 핵심은 상대방이 피해가기 힘들 정도로 ‘구체적인 질문’을 만들어 내는 것. 그리고 넘겨 짚을 수 있는 정보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한수영이 토라진 듯 말했다.

“거기까지 알고 있었어? 쉽지 않네.”
“물은 말에나 대답해.”
“그렇다는 건 그쪽도 ‘이계의 언약’을 맺었다는 뜻인가.”

역시 눈치가 빠른 녀석이다.
그건 3회차의 한수영과 비슷하군.
한수영이 말을 이었다.

“나는 ‘어떤 세계’의 완성을 걸고 ‘은밀한 모략가’와 계약했어.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그쪽도 내가 원하는 세계의 완성을 도와주기로 했지.”

―첫 번째 대답을 얻었습니다.

직관적이지는 않았지만 아주 영양가가 없는 대답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저 대답의 진위 여부다.

[전용 스킬, ‘거짓 간파 Lv.6’을 발동합니다!]
[등장인물 ‘한수영’이 ‘포커페이스 Lv.10’를 발동하였습니다!]
[‘포커페이스’의 영향으로 ‘거짓 간파’가 무력화됩니다!]

역시, 그 스킬을 쓸 줄 알았다.
‘등장인물 일람’을 통해 확인한 녀석의 스킬 목록에는 포커페이스가 있었으니까.
저 스킬이 있는 한, ‘거짓 간파’를 통해 대답의 진위를 가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내게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해당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충족되어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를 발동합니다!]

녀석이 ‘등장인물’이 된 이상, 나는 질문을 한 것만으로도 녀석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다음 순간.

······.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말했지」
「왁, 내 발 밟지 마!」
「뭘 훔쳐 보는 거야?」

······.

순간적으로 들려온 수백 개의 목소리에 나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경악성을 내뱉을 틈도 없이, 나는 황급히 스킬을 취소해야 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의 발동이 해제됩니다!]

멍한 눈으로 한수영을 바라보자, 녀석은 특유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런 스킬 있을 것 같더라.”
“······방금 그건 뭐였지?”
“그거, 두 번째 질문으로 쳐도 될까?”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한수영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뭐, 이건 서비스로 대답해 줄게. ‘아바타’ 스킬을 응용한 거야.”

그제야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방금 한수영은 ‘분신’을 이용해 자신의 자아를 수백 개로 쪼갠 것이었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한수영을 보며, 나는 간만에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제껏 이런 적수를 만난 적은 없었다.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내가 묻지.”

―화신 ‘한수영’이 첫 번째 질문권을 사용합니다.

“너 ‘멸살법’이라는 소설 쓴 적 있지?”

어떤 질문은 질문 그 자체로 정보를 함축하고 있다.
이 녀석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확실히 알겠다.
여기선 내 특기를 좀 발휘해야겠군.

“맞아. 내가 쓴 거야.”

[등장인물 ‘한수영’이 ‘거짓 간파 Lv.10’을 사용합니다!]
[전용 스킬, ‘포커페이스 Lv.5’를 발동합니다!]

미안하지만 ‘포커페이스’ 스킬은 나도 가지고 있다.
이 회차로 넘어오기 직전에, [도깨비 보따리]에서 필요한 스킬을 잔뜩 구입했거든.

[‘포커페이스’의 영향으로 ‘거짓 간파’가 무력화됩니다!]

그 메시지에, 한수영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너 진짜 재밌네.”

재미있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


“······이 자가 정말 유중혁인가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매만지던 이설화가 물었다. 그녀의 앞에 선 것은 말로만 듣던 ‘철혈의 패왕 유중혁’. 마치 등신대처럼 서 있는 유중혁은 그녀를 본 체 만 체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짧은 새, 유중혁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먼저 핀잔을 준 것은 이지혜였다.

“다들 구경이라도 났어? 화면으로 자주 봤으면서 왜들 그래?”
“신기해서 그러지······. 이렇게 가만히 있는건 처음 보잖아. 어떻게 한 거지? 독을 쓴 건가?”

심지어는 상황실에 앉아 있던 한동훈도 패널창을 띄워 유중혁을 관찰했다. 슬그머니 다가온 김남운은 유중혁의 곁에 서서 미묘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찰칵. 찰칵.

그 모습을 보던 이지혜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 지금 뭐하냐?”

화들짝 놀란 김남운은 어차피 들킨 거 어쩔 수 없다는 듯 폰을 허공으로 띄웠다. 그러자 김남운의 그림자에서 뻗어 나온 손이 김남운을 대신해 스마트폰을 쥐었다.

“야, 너도 같이 찍자. 이런 기회 흔치 않다고.”
“뭐야, 이거 안 놔? 사진을 왜 찍어?”

손목을 잡힌 이지혜가 으르렁거렸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사진이 찍혔다. 사진 속엔 무표정의 유중혁과 낄낄 웃는 김남운, 그리고 성질을 부리는 이지혜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거기 군인! 옆에 서 있지 말고 비켜! 우리 사진 찍고 있잖아!”

멀뚱히 서 있던 이현성이 한소리를 듣자, 다가온 이설화가 김남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남운이 너 현성 씨한테 존댓말 하라고 했지?”
“아 싫어, 나한테 잔소리 좀 하지 마!”

찰칵.

“근데 이 사람 진짜 안전한 거 맞니?”
“내가 한 번 찔러 볼까?”
“그딴 짓 하지마. 아까 올라간 놈이 이상한 트리거 걸고 갔어. 자칫하면 몰살이야.”

찰칵.

“트리거? 무슨 트리거?”
“이 녀석한테 위해를 가하면 폭주하도록 지시한 것 같아.”
“흠, 위해라······ 그럼 이건 어때?”

김남운이 씩 웃으며 유중혁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유중혁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뭐야, 이 정도는 괜찮은 건가? 그럼 이건?”

텅 빈 유중혁을 둘러싼 채, 사람들은 웃으며 떠들었다. 신기해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즐거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찰칵.

몇 번이나 찍히는 사진 속에서, 유중혁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텅 빈 동공의 깊숙한 곳에서 일렁이는, 아주 희미한 감정. 어쩌면 유중혁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심장 어귀가 답답한 것 같기도 한 마음. 하지만 제대로 된 의식이 없는 유중혁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어, 뭐야. 방금 움직인 것 같은데?”
“······잘못 본 거 아냐?”
“아냐! 진짜로······.”

그가 아는 것은, 김독자가 남긴 말뿐이었다.
행복한 기억을 떠올려라.

―경고! 경고! ‘염화의 대천사’가 근접하고 있습니다!

허공에서 들려온 경고음에, 유중혁에게 붙어 있던 일행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일 먼저 소리친 것은 김남운이었다.

“뭐? 시발! 그 미친년이 여길 왜 와?”
“엿 됐다. 다들 준비해. 현성 아저씨는 빨리 올라가서 사부한테 알려줘요!”

흩어지는 일행들 속에서, 유중혁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방해된다는 듯 그를 치고 지나갔다.

행복한 기억을 떠올려라.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유중혁은 허공에 떠오른 거대한 패널 화면을 보고 있었다. 홍염 속에 불타오르는 눈부신 천사가, 귀기 어린 안광을 빛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천사의 불타는 검이 움직일 때마다, 일대의 폐허가 불바다에 휩싸이고 있었다.
유중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텅 빈 기억 속에서, 유중혁은 그 천사를 본 적이 있다.

행복한 기억.

이상하게도, 그 기억은 낯설면서도 기꺼웠다.
마치 중간에 두터운 벽이 드리워진 것처럼, 멀고 차가운 기억들.
그 기억 속에서, 그녀는 작은 인형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히죽 웃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이 불필요한 희생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그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벽에 남겨진 기록일 뿐이었고, 그는 그것을 훔쳐 보았을 뿐이었다. 그 기억은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일. 허구(虛構)였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전우애에 감동합니다.

그럼에도 어째서, 그 허구를 이토록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유중혁은 이해하지 못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에게 볼을 부빕니다.

불타는 대천사가 화면 속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유중혁은 처음 말을 배운 아이처럼 중얼거렸다.

“······우리엘.”





< Episode 55. 행복한 기억 (1) > 끝

< Episode 55. 행복한 기억 (2) >





한수영과의 대담이 시작되고 약 이십여 분이 흘렀다.
나는 삼문답을 통해 몇 가지 정보를 추론해 낼 수 있었다.

하나, 1863회차의 ‘한수영’은 ‘이계의 언약’을 통해 은밀한 모략가와 계약했다.
둘, 1863회차의 ‘한수영’은 3회차의 분신이 아닐 수도 있다.
셋, 1863회차의 ‘한수영’은 3회차의 한수영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그리고 조금 더 똑똑하다).

그것들을 조합해서 몇 가지 정보들을 더 추론해 볼 수 있었다.
가령, 이 한수영은 나와 같은 ‘3회차’에서 이곳으로 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리고 내가 모르는 방법을 통해 미래에 대한 정보들을 계측하고 있다는 것······.
나는 한수영에게 말했다.

“덕분에 좋은 정보들을 알았군. 이제 남은 건 내 마지막 질문인가?”
“흠, 그건 대답 안 하면 안 될까? 난 이제 너에 대해 충분히 알았거든.”
“······그래? 알아낸 게 뭐지?”
“그게 세 번째 질문?”
“아니.”

한수영이 쩝 입맛을 다시며 웃었다.

“3회차에서 온 김독자. 그곳의 ‘나’는 어땠지?”

네 질문권은 끝났다고 말하려는 순간, 서늘한 감각이 스쳐갔다.
······내가 어떻게 3회차에서 온 걸 알았지?

“아, 표정을 보니 맞았나 보네? 찍은 건데.”
“거짓말 하지마. 알고 말한 거잖아.”
“아하하, 안 속네.”

허공에서 한수영과 나의 눈빛이 부딪쳤다.
아랫입술을 축인 한수영이 물었다.

“3회차의 나······ 조금 나사가 빠져 있지 않아? 내가 기억을 너무 많이 가져가서 말야.”
“나름대로 잘 하고 있어. 지금은 네 걱정이나 하지 그래?”
“걜 감싸 주는 거야? 그럼 정보 좀 나눠 주지 그랬어? 소설을 다 읽었으니 그 정도 아량은 보여줄 수 있잖아?”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그런 소설을 다 읽은 녀석은 어떤 녀석일지 정말 궁금했는데, 기대 이상이야. 김독자.”

3회차의 한수영도 만만치 않지만, 이 녀석은 정말 보통이 아니다.

“난 작가라고 말했을 텐데.”

한수영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넌 작가가 아냐. 넌 그 소설을 쓰기엔 너무 명석하거든. 날 속이기엔 너무 멍청하지만 말이야.”
“겨우 그런 이유로······.”
“그리고 난 ‘멸살법’의 작가가 어떤 존재일지 짐작하고 있어.”

하마터면 그 ‘작가’가 누구인지 물어볼 뻔했다.
하지만 함정일지 아닐지 모르는 판국에 섣불리 이쪽의 허점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다른 질문을 했다.

“내가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애초에 그 질문은 왜 한 거지?”
“글쎄, 왜 그랬을까?”

한수영은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은 채였다.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수영은 내게 멸살법을 쓴 적이 있냐고 물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대답함으로써 내가 ‘멸살법’을 알고 있다고 시인해버린 셈이었고······ 젠장.
나는 이쯤에서 이야기를 끊고, 제일 중요한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마지막 질문을 하겠다.”

―세 번째 질문권을 사용합니다.

“너는 어떻게 95번 시나리오까지 살아남은 거지? 넌 분명 ‘멸살법’을 99화까지 밖에 읽지 못했을 텐데―”

아래층에서 굉음이 발생한 것은 그때였다.
경고음과 함께, 스위트룸의 비상 계단으로 허겁지겁 올라온 이현성이 고함을 질렀다.

“대장님! 큰일났습니다!”

이현성의 목소리와 동시에, 품 속에 있던 두 천사가 간접 메시지를 토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뭔가에 경악합니다!]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당신에게 경고합니다!]

한수영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너 그 꽃······.”

나는 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외창 쪽으로 달려갔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

고오오오오!

창 밖으로 거대한 용의 그림자가 날아 올랐다.
설마 누군가 묵시룡을 깨운 걸까 싶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창공에서 날갯짓을 하는 거대한 드래곤을 보며 나는 숨을 삼켰다.
그래, 왜 안 보이나 싶었지.

“모두 피해요! 나 혼자서는 무리야!”

새하얀 털코트에 휩싸인 여자가 그곳에서 거대한 드래곤을 이끌고 있었다.

비스트로드 신유승.

이젠 아이의 티를 완연히 벗은 그녀가, 95번 시나리오에서 일행들을 지키고 있었다. 1급 괴수종을 넘어 특급 괴수종으로 진화한 ‘키메라 드래곤’이 크게 숨을 내뱉었다.

콰아아아아아!

그러나 덮쳐오는 불길은 브레스에도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독기를 제물 삼아 더욱 활활 타오르는 불길.
나는 저 불길을 알고 있었다.

<에덴>의 가장 밑바닥에서 타오르는 불꽃, 지옥염화(地獄炎火).

한수영의 개입으로 미래가 바뀐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1863회차는 내가 알던 1863회차와 비슷한 점도 있었다.
가령 이 타락한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살아 남은 대천사의 이름 같은 것.

“우리엘.”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진노합니다!]

폭발하는 기류와 함께, 건물의 외창이 통째로 깨어져 나갔다. 신유승의 키메라 드래곤이 추락하고 있었다.
나는 창을 타넘어, 바람을 꿰뚫고 도약했다.
힘없이 추락하는 신유승이 내 품에 들어왔다.
깜짝 놀란 신유승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누구······.”
“잠시 지혈 좀 하겠습니다.”

나는 [점혈] 스킬을 발동해 설화가 새어나오는 신유승의 목과 팔을 점혈했다. 그런데 그때, 내 안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더니 투명한 문자열이 손 끝에 떠올랐다.

「‘제4의 벽’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나는 녀석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눈치챘다.

‘하지마.’

「‘제4의 벽’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합니다. ‘쳇’」

나는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내 회차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분통하고, 억울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다고 생각했다.

탓.

나는 가볍게 지상에 착지한 후 신유승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조금 늦게, 한수영을 어깨에 태운 이현성이 지상으로 내려왔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신유승이 한수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대장, 미안해요.”
“괜찮아.”

이현성의 어깨에서 뛰어내린 한수영이 신유승의 어깨를 탁 두들기며 앞으로 나왔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무척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 저 자리에 있어야 했던 존재는 유중혁이었다.

“코트.”

한수영이 손을 내밀자, 달려온 이지혜가 김남운에게서 빼앗은 하얀색 코트를 쥐어주었다.

“여기요, 사부.”

휘리릭 하며 감긴 코트가 한수영의 체형에 알맞게 줄어들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코트 보다 멋있는 것 같았다.
한수영은 코트의 깃을 세우며 광화문을 바라보았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타오르는 지옥도.
염화에 불타는 성좌들이 무력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별들의 잔해가, 하나 둘 재가 되어 스러지고 있었다.

이것이 멸악의 대천사, 우리엘이 강림한 현장이었다.
나는 넘실거리는 먼지 너머의 불꽃을 보며 한수영에게 물었다.

“······설마 내가 아는 그 이유 때문에 우리엘이 여기로 온 건가?”
“네가 아는 이유가 뭐지?”
“<에덴>의 멸망.”
“그럼 맞는 것 같네.”

오고가는 대화에, 품속의 꽃들이 부르르 떨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습니다!]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물론 대천사들은 모를 것이다.
1863회차에서, <에덴>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
사실은 계속 몰랐으면 했다.

새하얀 불꽃이 넘실대는 광화문 곳곳에서 다가오는 괴생물체들이 보였다.
이름 없는 것들.
우리엘의 격에 부나방처럼 이끌린 존재들이 하나둘 이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한수영에게 물었다.

“도움이 필요한가?”
“도와주면 고맙지. 아무래도 염화의 대천사는 상대하기가 까다롭거든.”

내 명령을 기다리는 유중혁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수영이 계속해서 말했다.

“이대로라면 하나쯤 죽을 수도 있고.”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회차는 나의 회차가 아니었고.
유중혁은, 이 회차에서 어떤 동료도 갖지 않았다.

“유중혁. 우리엘을 막아.”

내 말에 유중혁의 신형이 움직였다.
사실 이런 짓은 정말로 하고 싶지 않았다.
유중혁을 발견한 우리엘이 이성을 잃고 고함을 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회차의 <에덴>이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녀의 눈앞에 있었으니까.
분노한 우리엘의 [지옥염화]가 파도를 이루자, 유중혁의 [파천검도]가 빛살을 뿌리며 파도를 베어냈다. 무시무시한 격과 격의 충돌이 창공에 어마어마한 진동파를 발생시켰다.

3회차의 유중혁이나 우리엘이 저 광경을 본다면 믿지 못하겠지.
나도 보고 싶지 않았다.

저 광경은, 줄곧 내 머릿속에만 있기를 바랐다.
품 속의 꽃의 진동이 한결 심해졌다.
기어코, 참다 못한 가브리엘이 진언을 토해냈다.

[우리엘이 왜 저 녀석을 공격하는 건데! 너 뭔가 알고 있는 거지?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말해! 말하지 않으면―]

“말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니, 어쩌면 바꿔서도 안 된다.

저 싸움은 1863회차의 인과로 인해 발생한 싸움이다.
우리엘의 분노는 정당했고, 유중혁은 그 분노를 마땅히 감내해야 했다.

나는 주먹을 으스러져라 쥔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곁에서 한수영이 감탄한 목소리를 냈다.

“······유중혁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게 진짜였네. 솔직히 안 믿었는데.”
“나머지는 막을 수 있는 거냐?”
“문제 없어. 아, 그리고 도와준 보답을 하나 할까 하는데.”

한수영이 말을 이었다.

“아까 나한테 물었지? 어째서 내가 이 시나리오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고······.”

[등장인물 ‘한수영’이 설화 ‘예상표절(豫想剽竊)’을 이야기합니다.]

“이게 그 대답이야.”

한수영의 몸에서 하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새하얗게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는, 다가오는 괴수들의 패턴을 읽어내고 있었다.

······미래시?

틀림없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틀림없는 미래시와 흡사한 능력이었다. 그것도 원작에는 없던 능력.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무엇도 없으니. 앞으로 쓰여질 것은 모두 이미 쓰여진 것의 변용이다.」

한수영에게서 흘러나오는 설화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발동해 다가오는 괴수들의 목을 가볍게 날려버린 녀석이 웃었다.

“나는 일류 작가야. 그리고 ‘멸살법’은 기껏해야 클리셰를 집합한 소설일 뿐이지. 전개를 예측하는 게 뭐 어렵겠어? 결국은 패턴의 반복일 뿐인데.”

그 말을 실천하듯, 한수영은 다가오는 괴수들의 패턴을 능숙하게 읽어 사냥을 거듭했다. 나는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짓씹듯 말했다.

“겨우 그 정도로 살아남았다고?”

분명 뛰어난 능력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멸살법은 복잡한 설정들로 가득 찬 이야기야. 네가 아무리 작가라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있고 할 수 없는 게 있어.”
“그래, 네 말이 맞아.”

다음 순간, 한수영의 몸에서 하얀 빛이 솟으며 무수한 분신들이 뛰쳐 나왔다. 열, 스물, 삼십······ 순식간에 일백 명을 넘긴 분신들이, 모두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쥐고 있었다.

“내가 하나였다면 그랬겠지.”

한수영이 손에 쥔 검을 휘두르자, 수백 명의 한수영이 동시에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름 없는 것들’을 차분히 베어 나갔다. 한수영은 계속해서 분열했다.

“하지만 그게 두 사람이 되고, 세 사람이 된다면 어떨까.”

한 사람의 인간과 백 사람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다르고.
백 사람의 인간과, 천 사람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다르다.

“그거 알아?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할 수 있는 일을, 만 명의 사람은 이틀이면 해낼 수 있다는 거.”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과부하가 걸릴 정도로 많은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들려온 목소리들은 이내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나는 그것이 한수영의 머릿속 풍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수한 한수영들이 그곳에서 머리를 맞대고 세계를 구상하고 있었다.

.
.

「이건 틀렸어.」
「다음 전개는 이거야. 분명 녀석이 등장할 거라고.」
「아니, 이쪽이 맞아. 대천사 우리엘은······.」
「다수결로 하자.」

.
.

무수한 한수영들이 그려낸 세계의 시뮬레이션들.
어쩌면, 회귀자는 유중혁만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수백만 개의 세계가 쉴 새 없이 태어나고 또 부서지고 있었다.
아주 작은 실수를 했다는 이유로.
혹은, 아주 작은 흠결이 있다는 이유로.
극도의 결벽을 추구하는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 나가는 광경.
나는 한순간 한수영이 그리는 이야기 속에 빠져들었다.
그 이야기의 생멸(生滅)이 너무나 안타깝고, 또 너무나 아름다워서.

어떤 것은 동의할 만한 전개였고.
또 어떤 것은, 나조차 생각지 못한 전개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복제(複製)는, 원작을 넘어선다.

오직, 완벽한 ‘단 하나의 전개’를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
그리고 이 세계는 그런 한수영이 계획한 결과물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상의가 찢어지고, 살갗에 피가 튀어도 무심히 칼질을 반복하는 유중혁. 그리고 그런 유중혁에 맞서 싸우는 우리엘.

그 어떤 동료도 죽지 않고.
그 어떤 멸망도 찾아오지 않으며.
모두가 힘을 모아 ‘마지막 시나리오’에 도달할 수 있는 세계.

빌어먹게도, 나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세계가 완성되기 위해서, 유중혁은······.

한수영이 나를 보았다.
마치 내가 생각하는 것을, 이미 이해하고 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너도 지금쯤 알았겠지. 이 세계에 녀석은 필요 없다는 걸.”

원작을 넘어선 세계를 꿈꾸는 표절 작가가, 나를 향해 말했다.

“나는 유중혁을 죽일 방법을 알고 있어.”





< Episode 55. 행복한 기억 (2) > 끝

< Episode 55. 행복한 기억 (3) >





유중혁을 죽일 방법을 알고 있다.
한수영은, 방금 그렇게 말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꼭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완벽한 이야기가 최고의 이야기는 아니야.”

멀리서 유중혁과 우리엘의 충돌로 한바탕 굉음이 터져 나왔다.
창공에서 터지는 빛이 한수영의 두 눈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유중혁은 이 시나리오에서 죽어야 해. 그래야, 내가 바라던 세계가 완성되니까.”
“네가 바라는 세계는 대체 무슨······.”
“내 머릿속을 들여다 봤잖아? 아직도 그런 말이 나와?”

다시 한 번 터진 굉음에 내 목소리가 묻혔다.
애초에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한수영의 말대로, 나는 녀석이 꿈꾸는 세계의 단면을 보았으니까.

한치의 빈틈도 없는 이상향.
나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원작을 소화해낸 존재만이 내놓을 수 있는 대답.

나는 고개를 돌려 우리엘과 유중혁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한수영이 꿈꾸는 세계에서, 이 전투의 해답은 다음과 같았다.

「이곳에서 염화의 대천사는 죽는다.」

기다렸다는 듯, 일행들이 우리엘과 유중혁의 격전지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순살을 준비하는 이지혜, 태산 부수기를 충전하는 이현성. ‘심연의 흑염룡’을 불러내려는 듯 붕대를 푸는 김남운도 보였다.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손에 쥐었다.
내 움직임을 눈치챈 한수영이 나를 노려보았다.

“잠깐, 너······!”

분명 이 세계를 만든 것은 나나 유중혁이 아닌 한수영이다.
근데······ 그래서 뭐?

[마왕,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애초에, 내가 읽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니다.

쿠드드드득.

마왕의 격을 상징하는 작은 뿔이 머리 위로 도드라졌다. 날개까지 현신하고 싶었지만 불완전한 ‘마계의 봄’으로는 그만한 격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한수영은 놀란 눈치였지만 나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아마, 내 힘만으로 저 싸움을 말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생각하는 것이겠지.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혼자가 아니다.

“가브리엘, 요피엘.”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도와주십시오.”

[대천사가 이번 현현에는 전보다 많은 개연성이 요구된다고 말합니다.]

“상관없습니다.”

파츠츠츠츠츳!

내 허락과 동시에, 두 천사의 격이 내 배후에 들어섰다. 날개뼈가 부서질 듯한 통증과 함께, 피부를 찢고 뭔가가 자라나는 것이 느껴졌다.

[대천사의 ‘격’이 당신과 함께 합니다.]

성좌들을 해치웠을 때처럼, 어깻죽지를 뚫고 자라난 여섯 장의 날개.

콰아아아아아!

[마왕의 ‘격’과 대천사의 ‘격’이 당신의 내부에서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상성이 맞지 않는 설화들이 내 안에서 섞이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마왕의 힘에 덧입혀진 대천사의 격.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격의 파장이 전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뭐야, 저 격은······!”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세계에서 살아남은 대천사는 오직 우리엘뿐.
그런데 지금 내게서 느껴지는 ‘격’은 정확히 대천사의 그것이었다.

[마왕, ‘검은 갈기의 사자’가 당신을 보며 완악합니다!]
[마왕, ‘정욕과 격노의 마신’이 당신을 주목합니다!]

마왕과 대천사의 격이 하나의 존재에게 깃들었으니, 놀랄 법도 했다. 내가 알기로 ‘멸살법’의 세계에서 이런 격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는 이제껏 하나뿐이었으니까.

[마. 왕······!]

내 존재를 느낀 우리엘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내가 그녀를 향해 입을 열려는 순간, 내게 강림한 가브리엘이 먼저 선수를 쳤다.

[우리엘! 멈춰!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웅장한 대천사의 진언에, 분노로 이글거리던 우리엘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이성의 빛이 돌아왔다.

[······가브리엘?]
[정신 차렸어? 뭐야, 너 대체 왜 그러고 있는 건데!]

화색을 띤 가브리엘이 나를 통해 진언을 이어갔다.
차갑게 가라앉는 우리엘의 눈을 보며 나는 뒤늦게 아차 싶었다.

[이것 봐, 네가 좋아하던 녀석들이라고! 유중혁이랑 김독자! 나한테 맨날 떠들어댔잖아!]

현신한 가브리엘의 격이 우리엘에게 접근하려는 순간, 우리엘의 입술이 열렸다.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아.]

당황한 가브리엘의 몸이 허공에서 굳었다.
우리엘이 계속해서 말했다.

[살아 있었구나, 가브리엘. 그것도 마왕 놈한테 빌붙어서.]
[뭐, 뭔 소리야?]

아아아아아아아!

폭주한 우리엘의 마력이 광화문 일대에 폭풍을 불러왔다. [지옥염화]가 폭주하며 일대를 지옥도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 고열에 닿은 유중혁의 코트가 녹아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어어어어어!

후폭풍에 휩쓸린 ‘이름 없는 것들’이 고깃조각이 되어 흩날렸다.
나는 이를 악문 채 소리쳤다.

“가브리엘!”

얼빠져 있던 가브리엘이 뒤늦게 내게 자신의 힘을 돌려주었다.

[······이 설명은 나중에 반드시 듣겠어.]

솔직히 말해서 설명할 자신은 없었다.
1863회차에 <에덴>에서 벌어진 전사를 줄줄이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3회차에서 온 대천사가 그 정보를 알았을 때 어떤 후폭풍에 휩싸일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보다 가브리엘이 받을 정신적 충격이 짐작이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1863회차의 가브리엘은 <에덴>을 배신했으니까.

“유중혁!”

땅을 박차는 순간, 유중혁이 [파천검도]로 날아드는 지옥염화의 불길을 베어냈다. 나는 불길의 틈새로 뛰어들었다.

츠츠츠츠츳!

품속에 있던 가브리엘과 요피엘의 꽃잎이 각각 세 장씩 허공에 흩날렸다. 엄청난 격의 충전이 이루어지며 속에서 울컥 뭔가가 올라왔다. 충돌하는 마력의 반탄력을 이용해, 나는 단숨에 우리엘을 향해 접근했다.

미안합니다, 우리엘.

나는 양손으로 우리엘의 머리를 붙잡았다. 대천사의 격과 마왕의 격이 함께 깃든 백청강기의 마력이 우리엘의 머리통에 작렬했다. 우리엘은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전혀 주눅든 기세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불꽃이 조금씩 나를 잠식하고 있었다.
아득한 고열에 날갯죽지와 뿔이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먼저 신음을 뱉은 것은 내쪽이었다.

이것이 에덴 최강의 전투 천사가 가진 힘이다.

잔인한 미소를 머금은 우리엘이 손에 [업화의 불꽃]을 불러냈다.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불꽃의 정수. 날카롭게 빚어진 불꽃의 칼날이 내 심장을 노리고 쏘아지는 순간.

“요피엘!”

내 손끝에서 엄청난 스파크가 튀기며, 우리엘의 전신이 헤일로를 연상시키는 원형의 구속구로 묶였다. 경악한 우리엘이 뭐라고 외치는 순간, 새하얀 구속구가 그녀를 꽉 죄어들었다.

츠츠츠츠츠츳!

우리엘의 ‘격’은 순식간에 줄어들었고, 주변을 뒤덮었던 불길도 급격하게 꺼져갔다.
우리엘은 <에덴> 내에서도 손에 꼽게 강한 대천사. 다른 어떤 천사도 악마 퇴치에 있어서는 그녀의 격을 따라갈 수 없다.
하지만, 상대가 같은 대천사라면 어떨까.

대천사 요피엘.

악마 퇴치를 업으로 삼는 다른 천사들과는 달리, 요피엘은 특수한 능력을 하나 더 가지고 있었다.

[선악의 구속구]

타락한 천사들을 사냥할 때 사용하는 요피엘의 성흔이, 우리엘을 상대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꽈드드드드득!

우리엘이 격을 발출하려 할수록, 구속구는 더 강한 힘으로 그녀를 옥죄어왔다. 끅끅거리며 힘을 발산하던 우리엘이, 마침내 반항을 그만두고 쓰러졌다. 구속구에 갇힌 대천사는 일주일 동안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된다.
나는 잠든 우리엘을 안아들고 유중혁과 함께 불길 밖으로 나섰다. 자욱한 연기 밖으로 나서자, 일행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경악한 눈으로, 또 누군가는 감탄한 얼굴로······ 그리고 또 누군가는, 희미한 적의가 깃든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한수영을 보며 말했다.

“이건 네가 그리던 세계에는 없던 일이겠지.”
“······여기서 우리엘이 죽든 안 죽든 큰 그림에는 영향 없어. 너도 봤으니 알 잖아? 내 구상은 완벽하다는 걸.”

하얀 코트를 흩날리며, 한수영이 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이윽고 내 코앞까지 다가온 한수영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불타버린 천사의 날개와, 뭉그러진 마왕의 뿔을 보며 물었다.

“김독자, 네가 바라는 세계는 뭐지? 그 이야기를 끝까지 읽은 너라면, 분명 바라는 세계가 있을 텐데 말이야.”

방금 한수영의 말은, 내가 아주 잘 아는 대사였다.

「“네가 원하는 세계는 뭐지?”」

그것은 유중혁이 새로운 동료를 영입할 때 늘 하는 대사였다.
나는 한수영을 향해 말했다.

“난 네 동료 따윈 되지 않아.”
“이 이야기를 완성시키려면 네가 필요해.”

한수영은 유중혁 쪽을 일별하며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너도, 새로운 이야기의 완성이 필요할 텐데?”

마치, 내가 이 세계에 왜 왔는지 안다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살아남은 일행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이현성, 이지혜, 이설화, 신유승, 김남운······.
이제껏, 이들이 모두 살아 남아서 여기까지 온 회차는 없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무엇이 새롭다는 거지?”

나는 유중혁을 보고 있었다.
유일하게, 이 세계에서 선택받지 못한 인물.
세계를 구하기 위해 수천 번의 회차를 반복했으나, 이번에는 그 세계를 위해 죽어야만 하는 인물.

한수영의 세계 또한, 결국엔 누군가가 죽어야 하는 세계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세계는, 굳이 한수영의 세계가 아니라도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너는 원작을 가져와서, 전개의 순서를 바꾸고 주인공의 자리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써 넣었을 뿐이야.”

어떤 복제는 원작을 뛰어 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코 원작(原作)은 될 수 없다.

“그런 행위를 두고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여유 있는 미소라도 보일까 싶었지만, 지금은 나도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던 한수영이 말했다.

“이곳은 네가 있던 ‘회차’가 아냐. 건방지게 지껄이지 마.”

한수영은 더 이상 내 말을 듣지 않고 돌아섰다.

“사흘의 시간을 주겠어. 그때까지 결정하는 게 좋을 거야. 날 도울지, 돕지 않을지. 내가 듣고 싶은 건 그게 전부야.”

한수영을 따라, 일행들이 하나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환자들을 이송하는 이설화와 그녀를 돕는 이현성. 이지혜와 김남운이 내쪽을 흘끗거리며 멀어지는 게 보였다.

이곳은 내 회차가 아니었다.

내 회차의 사람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나는 이곳의 유중혁을 죽여야만 내 회차로 돌아갈 수 있다.
나는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코트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린 채, 여전히 미련한 눈으로 서 있는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게 방법의 전부일까?


*


어둠 속에서 눈을 떴을 때, 한수영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희미하게 튀는 스파크가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온몸이 얼어붙을 듯 차가웠다.

츠츠츠츠츠······.

한수영은 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허겁지겁 스마트폰을 켜 자신의 소설 파일을 열었다. SSSSS급 무한회귀자.

「유준현은 생각했다.」
「······두려워.」
「그냥 여기까지 하면 안 될까?」

하필 저장된 페이지도 그런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한수영은 꿋꿋이 그것을 읽었다. 읽지 않으면 그 모든 내용이 날아가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것을 읽고 또 읽었다.

츠츠, 츳······.

그렇게 얼마나 읽었을까. 조금씩, 그녀의 곁에서 튀던 스파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한숨이 나왔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존재 자체가 스파크 속에 삼켜질 뻔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기억 전체를 갉아먹는 개연성의 후폭풍. 이것이 과도한 [아바타] 사용의 부작용인지, 아니면 ‘멸살법’과 관계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스타 스트림’이 화신 ‘한수영’을 지켜봅니다.]

한수영은 입술을 깨문 채 천천히 몸을 풀었다. 부작용으로 굳었던 어깨와 손목을, 관절을 하나씩 점검했다. 그녀를 훔쳐 보는 무수한 성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한수영은 생각했다. 볼 테면 얼마든지 봐라. 난 겨우 여기서 끝나기 위해 시작한 게 아냐.
한바탕 몸을 풀고 나자, 뼈를 아리던 추위는 한결 가셨다. 한수영은 코트를 입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김독자와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첫날만 해도 서먹서먹하던 그들은, 고작 며칠 사이 말을 트는 사이가 됐다. 기이한 일이었다. 아흔 네 개의 시나리오를 거치며 불신으로 가득찼던 사람들이, 유독 저 녀석한테는 금방 마음을 열었다.

김독자.
이 계획의 마지막에 나타난 변수.

······어째서 ‘은밀한 모략가’는 이 시점에 또 다른 언약자를 보낸 것일까.

한수영은 답을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저 김독자란 녀석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광장의 한쪽 구석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유중혁이 서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한수영이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유중혁 바로 곁에 착지한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이제 이틀 뒤네.”

유중혁은 대답이 없었다.
한수영은 천천히 유중혁 쪽을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듯, 텅 빈 눈동자.
그 눈을 보던 한수영이 유중혁에게 성큼 다가갔다.

“······너 진짜 의식이 없는 거야?”

홱 쏘아진 한수영의 손이 유중혁의 턱끝을 잡았다.
유중혁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우습네. 하필 지금 와서 그런 꼴이 되다니······ 죽어주기로 약속했던 것까지 잊은 건 아니지?”

가까이서 본 유중혁의 얼굴에는 상흔들이 도드라져 있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그 어떤 회차보다 더 외로운 싸움의 흔적들.
한수영은 그런 유중혁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동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분노하는 것 같기도 한 눈빛.
유중혁의 턱을 놓은 한수영이 품속에서 담배를 꺼냈다.
츳, 하며 튀는 불꽃과 함께 매캐하게 올라오는 연기.
멀리서 김독자를 둘러싸고 뭐라뭐라 소리치는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수영이 후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세상도 참 불공평하지. 누군 말 몇 마디로 저렇게 쉽게 친해지는데, 누구는 그렇게나 많이 회귀를 해도 겉돌기만 하고 있으니.”
“······.”
“나한테 준 기억들을 좀 잘 써보지 그랬어? 너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 됐다. 네가 가능할 턱이 없지.”

후두둑 떨어진 담뱃재를 한수영이 자근자근 밟았다.

“기억 못해도 죽일 거니까 나 원망하진 마. 난 네가 해달라는 거 다 해줬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수영은 일행들을 향해 걸어갔다.
유중혁은 텅 빈 눈으로 멀어지는 한수영을 보았다.
텅 빈 유중혁의 동공에, 조금씩 희미한 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 Episode 55. 행복한 기억 (3) > 끝

< Episode 55. 행복한 기억 (4) >





한수영의 본부에 머무른 지도 이틀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몇 가지 일들을 골몰해야 했다.

하나는 한수영이 말한 ‘유중혁의 죽음’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를 밝혀내는 것.
둘은 한수영이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뭘 얻고자 하는가를 알아내는 것.

어느 쪽이든 알아내기는 쉬운 정보는 아니었다.
······게다가 골치 아픈 문제는 그것만도 아니었다.

[정말 멸망했다고? 우리 <에덴>이?]

나는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가브리엘을 보며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3회차의 메타트론한테 아무런 언질도 못 들으셨습니까?”

[······서기관이 <에덴>의 멸망을 알고 있었다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시면 직접 물어보십시오.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말입니다.”

그 말에 가브리엘과 요피엘의 줄기가 파들파들 떨기 시작했다. 내게 화를 내려는 건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나는 품속에서 우리엘의 인형을 꺼냈다. [선악의 구속구]에 의해 금제가 걸린 우리엘의 화신체는, 앞으로 닷새 간은 힘을 사용할 수 없다.

「‘제4의 벽’이 당신을 들여다봅니다.」

어쩌면, ‘제4의 벽’의 힘을 빌려서 3회차의 기억을 전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을 보고서 감동한 우리엘이 내 편이 되어줄 거라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판타지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다.
아마 그 기억을 다 보고난 후, 우리엘은 이렇게 말하겠지.

「■■,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가진 3회차의 기억은, 끔찍한 1863회차를 겪으며 살아온 우리엘에게 그저 소설 속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김독자 씨, 같이 사냥 가기로 하셨었죠?”

고개를 들자, 강철 건틀렛을 낀 이현성이 서 있었다.

“제가 같이 가도 괜찮습니까?”
“예, 뭐······ 주운 탄환에 피아 식별 같은 건 별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머쓱하게 웃는 이현성. 3회차든 1863회차든, 저 이상한 비유는 여전하다.
나는 속으로 이현성이 지금까지 영창을 몇 번이나 다녀왔을지 계산해 보았다.

[등장인물 ‘이현성’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당신에게 미약한 호의를 드러냅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첫 번째 시나리오 생각도 나고, 기분이 조금 싱숭생숭했다.
나는 이현성의 경계심을 덜어주기 위해 괜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무 경계심 없으신 것 아닙니까? 저는 유중혁의 동료인데요.”
“음······ 대장께서도 딱히 언질이 없으셨고, 그리고······ 뭐랄까, 독자 씨는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닐 거란 예감이 듭니다. 아흔 네 번의 시나리오를 거치는 동안 얻은 직감이랄까요.”

원작 내내, 이현성의 저 직감은 대부분 빗나간다.
나는 이현성이 저런 소리를 할 때마다 이제 곧 유중혁이 뒤통수를 맞아 뒈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여, 왔어? 어디 실력 좀 보자고.”

함께 사냥을 나가는 이들은 김남운과 이지혜였다. 큰 회색 후드를 덮은 이지혜가 못마땅하다는 듯 나를 일별했다.

“빨리 와. 출발할 거야.”

나는 일행을 따라 본부를 나섰다.
이번 사냥의 목적은 본부 주변에 잔재하는 ‘이름 없는 것들’을 청소하고 아이템들을 수거하는 것이었다.
물론 명목상 그렇다는 것이고, 나는 한수영이 왜 이 사냥을 지시했는지 알고 있었다.

―전방에 두 마리 옵니다. 하나는 촉수종, 하나는 복합종이에요.

허공에서 들려오는 한동훈의 메시지와 함께, 이지혜가 칼을 빼들었다.
발동한 [순살]이 촉수들을 모조리 베어내자, 이어서 달려든 김남운이 [흑염]을 발동해 촉수종의 본체를 불태웠다.
원작을 볼 때도 느꼈지만, 저 둘은 손발이 굉장히 잘 맞는 편이었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괴물이 산화하자, 김남운이 이죽거리며 이지혜에게 다가갔다.

“나이스 어택.”

김남운이 짐짓 쿨한 얼굴로 이지혜를 향해 오른손을 들었다. 차가운 눈빛의 이지혜가 김남운을 향해 칼을 내질렀다. 검풍은 김남운의 뺨을 스쳐 [흑염] 속에서 촉수를 재생하던 ‘이름 없는 것들’의 본체를 꿰뚫었다.
이지혜는 다음 사냥감을 향해 움직였다. 김남운이 그 뒤를 쫓았다.

“야, 같이 가!”

길영이랑 유승이가 자란다면 저런 콤비가 될까.
돌아간다면 그런 광경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독자 씨?”
“아, 네. 저쪽은 제가 맡겠습니다.”

나는 황급히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아 들고 [바람의 길]을 발동했다. 쐐액거리며 날아드는 촉수들이 내 빈틈을 파고들었다. 일부러 [전인화]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이름 없는 것들’을 상대하는 것은 조금 까다로웠다.

“크큭, 약하잖아?”

양손에 [흑염]을 거머쥔 김남운이 꺼림칙한 미소를 지은 채 ‘이름 없는 것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잘 보고 배우라고!”

확실히, 대단한 전투력이었다. 지금의 김남운이라면 ‘심연의 흑염룡’의 힘을 절반 정도는 끌어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김남운을 조용히 응원해줬다.

“잘 하네. 저기 또 온다.”
“하하핫, 내게 맡기라고!”

콰아아아아!

“와우, 아무리 그래도 저기 쟤는 힘들겠지?”
“무슨 소리! 하하하핫! 죽어라!”
“이야, 그렇다면 저기 저 녀석도······.”

뒤늦게 뭔가를 눈치 챈 김남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곁에서 이현성이 입꼬리를 실룩거리고 있었다. 멀리서 괴수를 잡던 이지혜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표정이 일그러진 김남운이 나를 향해 주먹을 치켜드는 순간, 나는 녀석에게 일러주었다.

“이지혜는 허세부리는 거 안 좋아해.”

김남운의 얼굴이 놈의 머리카락처럼 희게 변했다. 녀석의 동공은 거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사실 제일 가관인 것은 곁에서 눈을 휘둥그레 뜬 이현성이었다.
······이 양반 눈치 없는 건 어느 회차나 마찬가지군.
멀리 떨어진 이지혜와 나를 번갈아 보며 눈알을 굴리던 김남운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모르는 게 이상한 거지. 머리부터 염색하고 붕대도 풀어. 반장갑을 끼려면 양쪽을 다 끼든가. 사냥 후에 ‘나이스 어택’ 같은 소리도 하지마.”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을 싫어합니다.]

“저 뒤에 쟤처럼 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다.”

얼굴이 시뻘게진 김남운이 내 뒤쪽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멍한 얼굴의 유중혁이 있었다.
꼬질꼬질한 코트에 씻지도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게 녀석의 잘생김까지 가리진 못했다.

“저 녀석은 ‘악’이다. 멋있긴 하지만.”

라고 ‘망상악귀’ 김남운이 말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너무 나쁜 놈으로 몰고 가진 마. 좋은 구석도 있는 놈이야.”
“하, 누가 한 패거리 아니랄까봐. 그러고 보니 넌 어쩌다 유중혁이랑 같이 다니게 된 거냐?”

김남운이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자, 이현성이 말했다.

“독자 씨가 다른 세계선에서 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마 한수영이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깜짝 놀란 김남운이 나를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다른 세계서언? 그건······ 평행우주······?”
“비슷해.”

간단한 생물 지식도 없는 김남운이 평행우주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탄복했다.
확실히 이 회차는 내가 기억하는 회차와는 다른 데가 있다.

“뭐야, 그래서 지금까지 안 보였던거구나. 그래서? 여긴 왜 온 거냐?”
“신났구나. 그런데 안타깝게도 알려줄 수가 없네.”
“쳇, 그럼 그 세계에서 난 뭐 하고 있어? 혹시 내가 리더라든가?”
“넌 죽었어.”

김남운의 안색이 다시 하얗게 탈색되었다.

“농담이야. 넌 거기서 건프라 만들고 있어. 되게 행복해하던데.”
“건프라? 오오······.”

어느샌가 다가온 이지혜가 김남운의 뒤통수를 갈겼다.

“뭘 헤죽거리고 있어? 아이템 주워.”
“어, 어.”

이지혜를 따라 허겁지겁 아이템을 줍는 김남운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녀석을 죽이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이지혜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아이템을 줍던 김남운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내게 귓속말을 했다.

“저기.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뭐.”
“나중에 코트 잠깐만 빌려주면 안돼?”

······뭔 소린가 했더니.

“너 하는 거 봐서.”

김남운이 투덜거리며 다시 아이템을 줍기 시작했다.
잔소리를 늘어 놓는 이지혜와 껄껄 웃는 이현성.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 평화 속에서, 나는 오히려 이곳이 내 세계가 아니라는 것만을 강하게 상기할 뿐이었다.

이곳에는 정희원이 없고.
이길영도 없다.

······그래, 한명오도.

그러니 나는 반드시 돌아가야만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주변의 아이템들을 모두 수거했다.
나는 수거한 아이템들을 살피다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있었군.

95번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열쇠가 되는 ‘다섯 자루의 명검’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마, 한수영은 이 근방에 그 검들 중 하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검을 뽑아든 순간 나는 흠칫 놀랐다.

“저기, 현성 씨.”
“예?”
“한수영이 이 검을 구해오라고 한 겁니까?”

내 말에 검을 들여다보던 이현성이 대답했다.

“아, 맞습니다. 우리가 찾던 검입니다.”

95번 시나리오는 ‘다섯 자루의 명검’이 열쇠가 되는 시나리오였다.
열쇠가 되는 다섯 자루의 검을 통해, 봉인된 ‘묵시룡’을 해방시키는 시나리오.
하지만 이 검은······.

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하늘을 올려다 보자, 거대한 [묵시룡의 봉인구]가 이쪽을 오시하고 있었다.
새카만 구체 속에 잠들어 있는 ‘멸살법’ 최대 최악의 파멸룡(破滅龍).
본래 유중혁은 저 용을 해방시키며 거대 설화인 ‘묵시룡의 해방자’를 얻고 마지막 시나리오로 진출하게 되어 있었다.

「그 순간, 김독자는 유중혁을 죽일 방법을 깨달았다.」

강하게 쥔 칼자루가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한수영이 자신과 정확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


김독자는 그날 내내, ‘멸살법’을 읽고 또 읽었다.
이미 읽었던 페이지를 읽고 또 읽으며, 혹시나 자신이 놓친 행간이 없는지를 점검했다. 김독자는 뭔가를 찾는 듯했다. 혹은, 찾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스마트 폰을 내려다 보며 몇 번이나 머리를 감싸쥐었고, 한숨을 내뱉기도 했다.

“······시끄러워. 그만 떠들어.”

그리고 가끔은 [제4의 벽]을 욕하기도 했다. 아무튼, 김독자는 노력했다. 그것은 뭔가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었고, 어쩌면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노력이었다.
이윽고 김독자의 눈빛에 작은 결의가 깃들었다.
하루이틀만에 쌓인 결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하나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읽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결의였다. 그 결의로, 김독자는 계속해서 ‘멸살법’을 읽었다. 읽고, 읽고, 또 읽고.
그렇게 얼마나 더 읽었을까. 별처럼 빛나던 김독자의 눈은 조금씩 흐려졌다. 김독자는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유중혁은 텅 빈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친 김독자의 등.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코고는 소리.

츠츳, 츳.

아주 작은 스파크와 함께, 유중혁의 눈빛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텅 비었던 동공에는 사나운 살의가 깃들었고, 그 살의는 정확히 한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스르릉.

고요한 검명과 함께 유중혁의 등에서 [진천패도]가 뽑혔다. 그는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김독자를 향해 다가가, 김독자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츠츠츳.

「하 하 그런 짓 은곤 란해」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이라도 김독자를 깨울 듯, [제4의 벽]이 불안한 스파크를 튀기고 있었다. 유중혁은 [전음]으로 허상의 ‘벽’을 겨냥해 메시지를 전달했다.

―녀석을 깨울 생각은 마라. 그런 짓을 하면 즉시 목을 날려버릴 거니까.

「흐 음」

[제4의 벽]이 생성하던 스파크의 세기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유중혁은 검을 물리지 않았고, [제4의 벽]은 허공에 활자들을 토해내며 유중혁을 마주보았다.

「원하 는 게 뭐 야?」

유중혁은 말이 없었다.
말을 찾는 것 같기도 했고, 혹은 그 말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제4의 벽]이 기괴한 웃음소리를 냈다.

「아 하 알겠 다」

“······.”

「궁금 한 거 지 ?」

유중혁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지만, [제4의 벽]은 이미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 웃어댔다.
[제4의 벽]의 활자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허공을 황금빛으로 수놓은 활자들이 이윽고 방을 한가득 덮었다. 유중혁은 자신의 주변을 떠도는 활자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중 하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활자들도 그의 손에 반응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독자입니다.”」

「실제로 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하곤 하는데, 그러면 다음과 같은 오해를 받곤 한다.」

그것은 그가 한 번도 겪지 못한 세계의 이야기.
[제4의 벽]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주 재 밌을 거 야」

유중혁은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들었다.
밤이 깊고, 다시 깊은 밤이 저물어 희미한 새벽이 찾아들 때까지.

.
.
.

이윽고 잠에 들었던 김독자가 깨어났을 때, 유중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텅 빈 눈으로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잠들었네, 젠장.”

머리를 헝클어트린 김독자가 비틀대며 일어나 스마트폰과 검을 챙겼다.
창밖을 내다보자, 벌써 도열을 마친 본부의 병력들이 보였다.
95번 시나리오의 클리어를 위해 모인 일행들.
일행들의 중심에서 이쪽을 올려다보는 하얀 코트의 한수영이 보였다.

오늘은, 화신 ‘유중혁’이 죽는 날이었다.





< Episode 55. 행복한 기억 (4) > 끝

< Episode 56. 독자와 작가 (1) >





진군이 시작된 것은 그날 정오였다.
약 이백여 명의 정예 화신들이 포함된 군대였다. 무수한 성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군대의 첨단에서 이현성이 나팔을 들어 올렸다.

부우우우우.

[아이템, ‘전장의 나팔’이 발동합니다!]
[아군의 사기가 대폭 증가합니다!]
[아군의 전투력이 소폭 증가합니다!]

역시 한수영. 벌써 저런 소모품들까지 준비해 둔 모양이었다.
이현성이 한 차례 더 나팔을 불자, 화신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다들 어딘가 들뜬 모양새였다.
곁에서 내 얼굴을 힐끔거리던 신유승이 예의 바른 목소리로 말했다.

“저······ 지난 번에는 구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아, 네. 아닙니다.”

내 말에 배시시 웃는 신유승.
정말 누가 키웠는지, 김남운 같은 싸가지와는 다르다.
옆을 보니 한수영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딱히 누가 키워서 신유승이 이렇게 자란 건 아닐 테지.
유승이는 원래 착한 애라고.

“김독자 씨도 이번 시나리오에 참가하시는 건가요?”
“아뇨. 저는 자격 요건 미달이라서요.”
“아, 그러시군요······ 아쉬우시겠어요. 이번 시나리오를 깨면 ‘거대 설화’ 얻을 수 있다고 들었는데.”

아쉽다면 아쉬운 일이겠지.
여기서 ‘묵시룡의 해방자’를 두 번째 거대 설화인 승(承)으로 획득할 수 있다면 굉장한 일이 될 테니까.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내가 승으로 얻고 싶은 거대 설화는 3회차에 있다.
전방에서 이현성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는 이설화가 보였다. 이현성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긴장되네요. 잘 할 수 있을지.”
“괜찮을 거예요. 지금까지도 잘 해냈으니까.”

뒤쪽에서 걸어오는 김남운과 이지혜의 목소리도 들렸다.

“야, 이지혜. 이번 시나리오 끝나면 뭐 할 거냐?”
“뭐 하긴, 또 시나리오 깨겠지.”
“언제까지 시나리오만 깨? 가끔은 좀 놀기도 해야지. 그러지 말고 이번 시나리오 끝나면 나랑 같이······.”

김남운은 내가 빌려준 코트를 입은 채 이지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말한대로 장갑도 양손에 다 꼈다. 머리는 여전히 백발이고 팔뚝에 붕대를 감은 것도 여전하지만······.

쿠구구,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천둥이 내리쳤다.

이번 시나리오에 참전한 성운들의 군단이 멀리서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내가 이미 마주친 성운들도 있었고, 아닌 성운들도 있었다.
한수영의 일행들은 충분히 강했지만, 저들 모두를 상대하기엔 숫자에서 역부족이었다.
이현성의 어깨를 밟고 올라선 한수영이 말했다.

“우리의 목적은 단 하나다. 저 위에 있는 봉인구의 ‘묵시룡’을 해방시키는 것.”

새하얀 코트를 흩날리며, 한수영이 무심히 말을 이었다.

“알고들 있겠지만, ‘묵시룡’을 해방하면 한반도는 멸망한다. 하지만 클리어 조건을 완수한 우리는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갈 수 있어. 그러니 이 땅의 누구도 죽지 않을 것이다.”

한수영의 선언에 굳어 있던 화신들이 다시 함성을 질렀다.
한수영의 이름을 연호하는 이들도 보였다.
어딘가, 익숙한 광경이었다.

······모두 한때의 유중혁이 했던 일들이었다.

95번 시나리오, ‘묵시룡의 재림’.
이 시나리오는, 지난 <에덴>의 멸망 당시 봉인되었던 ‘묵시룡’을 깨우는 시나리오였다. 지구 각지에 흩어진 다섯 자루의 ‘명검’을 모아, 그것을 저 봉인구의 열쇠 구멍에 꽂음으로써 완수되는 시나리오.
실제로 유중혁은 이 시나리오를 완수해 거대 설화의 ‘결’을 획득했다.

“가자, 다음 시나리오로!”

한수영의 외침과 동시에, 화신 군단이 봉인구를 향해 움직였다.
그러나 맞은 편에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이들도 보였다.

[검을 빼앗아라! 열쇠는 우리가 차지해야 한다!]
[저기다! 한수영이다!]

한반도 곳곳에 숨어 있던 성좌들과 화신들이었다. 묵시룡을 깨우는데 기여하여 설화를 획득하려는 이들.

“막아라!”

내 곁에 있던 일행들이 뿔뿔이 흩어지며 병장기를 꺼내들었다. 이현성과 신유승, 그리고 이지혜가 충전한 마력을 흩뿌리며 달려갔다.

“하하하하핫! 와라! 심연룡!”

김남운도 전장에서 날뛰고 있었다. 극성까지 진행된 흑화(黑化).
이 세계의 김남운은 내가 아는 김남운과는 다르다. 하지만, 다가오는 모든 생명체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김남운은 분명 내가 아는 망상악귀의 모습이었다.
녀석이 여기까지 오며 어떤 끔찍한 짓들을 저질렀는지, 나는 모두 알지 못한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그 와중에, 한수영은 품속에서 검을 한 자루씩 꺼내고 있었다.

기이이잉······.

찬란한 빛을 뿌리며 허공으로 떠오르는 성유물들. 모두 이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데 쓰일 ‘열쇠’들이었다.
총 네 자루의 검.
아직 열쇠를 완성하기엔 한 자루가 부족했다.

“김독자. 네가 가진 ‘아론다이트’를 내놔.”
“······알고 있었냐?”

나는 씩 웃으며 품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용살검 아론다이트. 그게 이 시나리오의 마지막 열쇠다.

“그리고 유중혁을 봉인구로 보내.”

이어진 한수영의 말에, 나는 품속을 뒤지는 것을 멈추고 한수영을 노려보았다. 한수영이 웃고 있었다.

“놈을 죽이기로 했잖아? 잊었어?”

너도, 나와 똑같지 않느냐는 눈빛.
그 순간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너도 유중혁을 죽이는 것이 ‘이계의 언약’의 조건이었군.”

한수영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래.”
“그래서 유중혁에 집착했던 건가?”
“빨리 그 칼이나 내놔.”

품속의 아론다이트에서 차가운 질감이 느껴졌다.
사실, 나는 한수영이 뭘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성검 아스칼론. 천둥검 그람. 단룡검 리딜. 투룡검 네일링, 그리고 용살검 아론다이트.”

내가 검의 이름을 줄줄이 읊자, 한수영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졌다.

“문제를 하나 낼게. 내가 방금 말한 검들 중, 성격이 다른 검 하나를 고르시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너는 사람들을 속이고 있어.”
“헛소리 하지 마.”
“‘다음 시나리오로 가자’고?”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시치미 떼지 마. 너는 이번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생각이 없잖아.”

한수영의 동공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시종일관 따분하던 그녀의 눈빛에 광기에 가까운 미소가 깃들었다.
네 자루의 명검이 그녀의 곁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계속해 봐.”
“넌 묵시룡을 해방할 생각이 아냐. 오히려 그 반대지. 너는 묵시룡과 함께 이 ‘지구’를 봉인할 생각인 거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나는 한수영의 오른손에 쥐어진 검을 가리켰다.

“네가 가진 투룡검 네일링. 그 검은, 네가 가진 ‘검’ 중에 유일하게 속성이 다른 검이야.”

95번 시나리오를 이루는 다섯 자루의 검은, 모두 용살(龍殺)과 관련된 설화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오직 단 한 자루, ‘투룡검 네일링’은 그렇지 않았다.

“그 검은 용살에 실패한 검이다. 그 검을 열쇠로 쓰면 봉인은 해제되지 않아. 오히려 그 반대지.”

적합하지 않은 열쇠는 봉인을 해제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킨다.
아직 해방의 때가 아님을 깨달은 봉인구는 더욱 거대하고 강력한 방어벽을 형성하며, 이윽고 지구 전체를 봉인으로 덮게 될 것이다.

“이곳의 시간은 멈추고, 지구는 묵시룡과 함께 봉인되겠지. 영원히 95번 시나리오에 고정된 채 말이야.”

고개를 숙인 한수영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네가 유중혁을 죽이는 방법이다.”

나는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텅 빈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유중혁.

배후성이 있는 한, 유중혁은 죽지 않는다.
녀석은 죽어도 몇 번이고 다시 회귀할 뿐이니까.

하지만······.

만약 세상에 영원한 잠이 존재한다면 어떨까.
어떤 꿈도 꾸지 않고, 깨울 수도 없는 영원한 잠.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과 무엇이 다를까.

“너는 유중혁을 영원히 이 회차에 봉인해버리기로 한 거야.”

봉인구에 갇힌 유중혁은 누구도 깨울 수 없는 잠에 빠져들 것이다.
그는 회귀하지 않을 것이며, 더 이상 고통을 겪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다만 영원한 잠을 자게 될 것이고, 그로 말미암은 새로운 세계선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수영이 말한 유중혁의 ‘죽음’.

시간을 초월한 회귀자의 죽음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한수영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제법이네. 어떻게 알았지? 나는 다음 계획에 대해서는 정확히 보여준 적이 없는데 말이야.”
“안 보여줘서 알았어.”

나는 한수영의 머릿속을 보았다.
그녀가 꿈꿔온 세계를 보았고, 그녀가 보여준 정보들을 읽어냈다.
분명, 거의 모든 것이 완벽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세계에는 결정적인 한 가지가 없었다.

“네 이야기에는 ■■가 보이지 않았다.”

이 모든 시나리오의 끝, ■■.
하지만 모두가 ■■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설화는, ■■의 근처에 가보지도 못하고 끝난다.

서쪽 하늘에서 천둥 소리가 들렸다.

먹구름과 함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고함을 치는 일행들의 목소리와, 처절한 격전을 벌이는 성좌들의 진언들이 터져 나왔다. 이현성도, 이설화도, 이지혜도. 모두 필사적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다시 살아남아, 다음 시나리오로 가기 위해서.

그런 그들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은 한수영이었다.

“이게 만 명의 네가 생각해 낸 결론이냐?”

그리고 한수영은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끝내려 하고 있었다.

“맞아. 이게 내가 생각한 이 세계의 끝이야.”
“어차피 이런 식으로 끝낼 거면 왜 굳이 일행들을 모두 살린 거냐? 왜 그렇게 완벽한 전개를 고집해 왔던 거지?”

한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넌 저들을 배신한 거다.”

한수영의 계획이 성공하면, 이 회차의 모두는 영원히 종막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 95번 시나리오의 영원 속에서 잠들게 될 것이다.
한수영은 무표정한 눈으로 자신의 주변을 떠다니는 네 자루의 검을 보았다.

“어떤 세계의 끝이 반드시 ■■일 필요는 없어. 이렇게 하면 지구는 안전해져. 유중혁도 다른 성좌들도, 강화된 묵시룡의 봉인을 푸는 법은 알지 못하니까.”
“그건 기만이야.”
“어떤 구원은 그렇게 불리지.”
“그럼 지금까지 널 믿었던 동료들은―”
“어차피 내가 만든 세계도 아니야.”

비참하게도, 나는 한수영의 그 마음을 안다.
내가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은, 이 세계가 내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게 네가 받기로 한 ‘이계의 언약’의 대가인가? 유중혁을 죽이는 대가로, 너는 자신의 세계를 만들 힘을 얻게 되는 거냐?”

쿠구구구구!

한수영의 몸에서 강력한 기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더이상 시간을 끌지 않겠다는 의도.

“검을 내놔 김독자.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이야. 유중혁도 그걸 원했어.”

원작을 넘어서고 싶었던 표절 작가는, 아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원작을 넘어서기 위해선, 원작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표절 작가인 이상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나는 웃었다.

“나는 유중혁을 죽일 생각이 없어.”
“무슨 헛소리지? 설마 ‘이계의 언약’을 포기할 생각이냐?”
“물론 그것도 아니고.”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수영의 신형이 사라졌다.

“유중혁, 막아!”

내 외침에, 유중혁이 앞으로 나서며 날아드는 한수영의 검들을 막아냈다. 나는 품속에 아론다이트를 집어 넣으며, 동시에 다른 검을 꺼내 들었다.

[사인참사검]이었다.

성좌와 화신 사이의 링크를 베는 아이템.
나는 유중혁을 바라보며 검에 힘을 집중했다.

츠츠츠츠츳······.

[성유물, ‘사인참사검’이 힘을 개방합니다!]

검에 깃드는 기운을 확인한 한수영이 눈을 크게 떴다.

“너 설마······.”

이 <스타 스트림>에서 죽음은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언젠가, 내가 [운명]에 당했을 때도 그랬다.

“소용없어 김독자! 그 방법은······!”

그때 나는 ‘화신 김독자’로서 죽었지만, ‘성좌 김독자’로서 살아 남았다.
그렇다면 유중혁은 어떨까.

“가브리엘, 요피엘! 도와주십시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한수영이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하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내 감각은 오직, 유중혁의 머리 위로 솟은 한 줄기 검은 실에 집중되어 있었다. 사인참사검의 힘으로 볼 수 있게 된 유중혁의 링크였다.

이제껏 ‘멸살법’의 누구도 이런 방법을 시도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성공하기만 한다면.
잠깐이라도 이 링크를 베어낼 수 있다면, 나는 유중혁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중혁, 정신 똑바로 붙잡아라!”

지금 유중혁은, ‘성좌’가 되기에 충분한 양의 설화를 갖고 있었다.
만약, 배후성과의 연결이 일시적으로 끊어진 상태에서 이번 시나리오를 통해 새로운 설화를 얻는다면······ 녀석은 ‘성좌 유중혁’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화신’으로서의 녀석이 죽게 됨을 뜻했다.

이 방법이라면, 유중혁은 죽더라도 회귀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유중혁을 봉인하지 않고도 3회차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오오오오오!

내가 개방한 마왕의 격과 대천사의 격이 동시에 사인참사검에 깃들었다.
상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유중혁의 성좌.
저 링크를 끊으려면, 최소한 이 정도의 힘은 필요할 것이었다.
나는 사인참사검을 내리쳤다.

까아아아아앙!

다시 한 번.

까아아아앙!

또 다시 한 번.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내리쳤다.
링크에서 터져 나오는 엄청난 충격파에 주변의 성좌들과 화신들이 휩쓸려 날아갈 지경이었다. 한수영조차 쉽게 다가오지 못할 정도의 후폭풍.
그렇게 얼마나 더 내리쳤을까.

마침내 쩌저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쥐고 있던 [사인참사검]이 반토막으로 부러졌다.

나는 조금의 흠집도 나지 않은 유중혁의 링크를 바라보았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낍니다.]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경악합니다.]

순간, 아득한 우주가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 유래를 짐작할 수 없는, 내가 차마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거대한 의지였다.

[화신 ‘유중혁’의 배후성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 Episode 56. 독자와 작가 (1) > 끝

< Episode 56. 독자와 작가 (2) >





극심한 현기증과 함께, 일순 나는 내가 살아온 역사 전체가 이지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유중혁의 배후성.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묘사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그저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아주 강력하고 순수한.
마치 욕망의 원형 같은 것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

어린 아기의 웃음소리 같은 것이 귓가에 맴돌았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반토막 난 사인참사검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유중혁의 링크는 끊어지지 않았다. 나는 실패한 것이다.
고개를 들자 한수영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너도 봤겠지?”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한수영.
녀석의 허리춤에서 내 것과 똑같은 [사인참사검]이 흔들리고 있었다.

“······너도 이미 해봤던 거냐?”
“당연하지. 난 너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시도했어. 성운의 힘을 빌려서 베었었지.”

어쩌면 한수영은, 나보다 더 명확한 형태로 배후성의 실체를 확인했을지도 모른다.

“그건 대체 뭐였지?”
“글쎄. 정확히는 모르지. 하지만 조금은 짐작이 가지 않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수영이 말을 이었다.

“마지막 계획이 실패했으니 이제 알았겠네. 방법이 없다는 걸.”
“······.”
“아까 말했지만, 이 계획은 유중혁도 동의한 거야.”
“유중혁이 동의했다고?”
“너, 생각을 읽을 수 있잖아. 저 녀석의 생각도 읽은 거 아니었어?”

까앙, 하는 소리와 함께 유중혁이 한수영의 검을 쳐냈다.
나는 내 앞을 막아선 유중혁의 등을 보았다. 분명, 지금이라면 녀석에게도 ‘전지적 독자 시점’의 2단계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스킬을 발동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해당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충족되어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를 발동합니다!]

그러자, 유중혁의 머릿속이 들려왔다. 녀석의 의식이 깊이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말들은 먼지처럼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말들은 눈처럼 내 곁에 하나둘씩 내려, 이내는 폭설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
.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
.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멸살법’의 텍스트 속에 억눌려 있던 한 인간의 내면이었다.
멍하니 서 있는 내게 한수영이 성큼 다가왔다.
턱 끝에 녀석의 머리카락이 스쳐갔고, 코트 속에 불쑥 들어온 손이 ‘아론다이트’를 꺼내갔다.
마침내 다섯 자루의 검을 모은 한수영이, 피식 웃더니 내게서 한 걸음씩 멀어져 갔다.
유중혁은 멍하니 나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한수영이 저 검을 모두 꽂아 넣으면, 유중혁은 영원히 이 회차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토록 원했던 영면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 세계에 어울리는 결말인 것이다.

내 귓가에 어떤 말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그것은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쏟아지는 무수한 목소리 속에 들어 있는, 아주 희미한 목소리.
나는 부러진 사인참사검을 품속에 넣은 후, 멀어지는 한수영을 향해 달려갔다. 강한 악력에 코트의 어깨가 구겨지자, 한수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오기를 부릴 셈이야?”

나는 유중혁을 보았다.
분명히 나는 들었다.
지금도 들리고 있었다.

「살고 싶다.」

아주 희미하지만, 아주 옅은 그 하나의 목소리가.
그곳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한수영이 내 손을 뿌리치며 짜증을 냈다.

“좋게 말할 때 놔. 너랑 내가 원하는 걸 이루려면 유중혁을 죽여야만 해.”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너는 몰라.”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손에 쥐었다.
기이이잉, 하고 울어 젖히는 칼날과 함께, 한수영이 표정을 굳히며 내게서 물러섰다.

“대체 무슨 속셈이야? 어차피 너한테 방법은 없어.”

맞다. 방법은 없다.
이계의 언약을 해결하며 유중혁을 살릴 방법은, 내게 없다.
밤새도록 읽은 ‘멸살법’어디에도 그런 방법은 없었다.

“방법은 있어.”

하지만, 다른 방법은 있었다.

“유중혁!”

내 외침에, 벼락같이 달려든 유중혁이 한수영에게 일격을 먹였다. 그 짧은 틈에, 유중혁은 한수영이 가지고 있던 네 자루의 검을 수습했다.

성검 아스칼론.
천둥검 그람.
단룡검 리딜.
용살검 아론다이트.

용살의 설화를 지닌 검들.
모두, 이 시나리오의 열쇠가 되는 검이었다.

“가, 유중혁! 묵시룡을 해방해!”
“무슨 개수작이야!”

화가 난 한수영이 유중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온몸을 부딪쳐 한수영을 안고 굴렀다. 한수영이 나를 발로 차며 외쳤다.

“어차피 네 자루뿐이잖아! 너희는 시나리오를 깨지도 못해!”
“아니, 한 자루 더 있어.”

나는 품속에서 한 자루의 검을 끄집어냈다.

초체검(草薙剣).

언젠가, [피스 랜드]에서 유중혁과 함께 야마타노오로치를 사냥하고 얻은 검이었다.
초체검은 야마타노오로치를 죽일 때 사용한 ‘토츠카노츠루기’를 재료로 썼기에 용살의 설화를 오롯이 계승하고 있었다.

“받아, 유중혁!”

[바람의 길]을 타고 쏘아진 검을, 유중혁이 받아냈다. 마침내 용살을 이룬 다섯 자루의 검이 모두 모인 것이다. 경악한 한수영이 소리쳤다.

“이 미친 새끼가······!”

한수영이 가진 ‘격’과 내가 내뿜은 ‘격’이 충돌했다. 나는 [전인화]를 발동하는 동시에 한수영에게 백청강기를 쏟아부었다. 그 마력을 밀어내며, 한수영이 외쳤다.

“모두 유중혁 잡아!”

한수영의 말에, 흩어져 싸우던 일행들의 시선이 동시에 유중혁에게 집중되었다.

“내가 잡는다!”

가장 먼저 유중혁을 발견한 김남운이 몸을 날렸고.

“젠장, 배신 때릴 줄 알았다니까······!”

이지혜와, 이현성도 한발 늦게 나섰다.
‘멸살법’ 최강의 100인 중 무려 삼인이 한꺼번에 유중혁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가공할 아우라를 내뿜는 한수영이 나를 노려보며 외쳤다.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만약 이 시나리오가 클리어 되면―”

이어지는 한수영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봉인구를 향해 나아가는 유중혁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김독자는 묵묵히 시나리오를 헤쳐가고 있을 3회차의 유중혁을 생각했다.」

이지혜가 휘두른 검이 유중혁의 등을 베었다.

「정의로운 유상아와, 영리한 3회차의 한수영을 생각했고.」

이현성이 달려들어 유중혁의 허리를 붙잡았고, [흑염]을 발동한 김남운이 유중혁의 얼굴을 가격했다.

「강인한 정희원과 그의 아이들― 이길영과 신유승을 오래도록 생각했으며.」

유중혁은 물러서지 않았다. 넝마가 된 새카만 코트를 입은 채, 피를 흘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다. 휘두른 [파천검도]에 이지혜와 이현성이 휩쓸려 날아갔다.

「그를 ‘쓰레기’라고 놀리던 이지혜와, 걸핏하면 탄피를 잃어버리는 이현성을 생각했다.」

······보고 싶네.

「그리하여, 김독자는 마침내 결심을 마쳤다.」

나는 한수영을 향해 말했다.

“나는 3회차로 돌아가지 않겠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너 지금 그게······.”
“여기 남아서, 이곳의 사람들과 함께 결말을 보겠어.”

이 세계의 끝은 내가 원하는 결말이 아닐 것이다.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어떻게든 결말까지만 간다면.

“이계의 신격은 ‘은밀한 모략가’만 있는 건 아냐. 돌아갈 방법은 또 있을 거야. 시나리오를 깨고, 끝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개소리 하지마!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소용 없어! 어차피 너도 이 모든 이야기의 끝은 모르잖아!”
“몰라. 모르니까.”

나는 [봉인구]를 향해 솟구치는 유중혁을 보며 말을 이었다.

“직접 만들거다.”

허공을 향해 도약한 한수영이 유중혁을 향해 새카만 창을 날렸다. 나는 몸을 던져 창을 대신 받아냈다. 충격을 받은 관절이 저릿했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한수영의 눈빛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살의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해보자 이거지?”

츠츠츠츠츳!

한수영의 눈에서 흘러나온 격이 정면으로 나를 위협했다.

[성좌, ‘거짓 종막의 연출가’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웃음이 나왔다.
이번 회차의 한수영은, 나처럼 배후성이 없었다.
녀석은 나처럼 성좌가 되었던 것이다.

기이이이잉!

심지어 녀석의 손에는 나와 같은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쥐어져 있었다. 내 것보다 훨씬 더 강화 상태가 양호한, 새카만 에테르가 넘실거리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
검은 강기가 전방을 덮쳐오는 순간, 나 역시 [백청강기]를 발해 그 일격을 막아냈다.

쩌저저저적!

분명 막았는데도, 손뼈가 우그러지는 듯한 충격이 남았다.
한수영의 몸이 분열을 시작했다.
[아바타].
기억을 담은 무수한 분신들이, 유중혁과 나를 향해 일제히 도약했다.
나는 녀석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저렇게 전방위적으로 움직이는 분신들에겐 요피엘의 503 군단이 적격이다.

“요피엘!”

그러나 대천사 요피엘은 대답이 없었다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지금 내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겠지.
대천사들은 본래의 세계선으로 돌아가고 싶어할 테니까.
그런데 다음 순간.

[설화, ‘대천사의 사랑을 받는 자’가 발동합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당신에게 가호를 내립니다.]

가브리엘의 간접 메시지와 함께, 대천사의 격이 내게 스며들었다.
동시에 한쪽 손에 가브리엘의 신창, ‘편애의 천칭’이 생성되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당황합니다.]

어째서 가브리엘이 나를 돕기로 선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 확실한 것은, 지금 그녀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것.
달려든 한수영의 분신이 외쳤다.

“독자 주제에 방해하지마! 이야기의 주인은 작가야! 이 세계는 여기서 끝나야 해!”
“너도 이 이야기의 주인은 아냐. 그런 결말은 네 세계에서나 만들어!”

나는 편애의 천칭을 휘둘러 먹구름을 향해 날아오르는 한수영의 아바타 십여 체를 단숨에 베어 냈다.
부러지지 않는 두 개의 신념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신성 속성의 에테르와 어둠 속성의 에테르가 뒤얽히며 기이한 파찰음을 만들어 냈다.

콰콰콰콰콰콰콰!

강력한 폭발과 함께, [전인화]의 전격이 부서졌다. 나는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한수영의 아바타는 꽤 많이 사라졌지만, 녀석은 여전히 건재했다. 분노한 한수영이 먼지를 헤치고 나를 향해 달려드는 순간, 나는 외쳤다.

“가! 유중혁!”

허공으로 도약한 유중혁의 몸이, 마침내 봉인구에 도달했다.

[다섯 개의 열쇠가 봉인구와 접합합니다.]

한수영이 외쳤다.

“안 돼!”

거대한 봉인구에, 다섯 자루의 검이 열쇠가 되어 꽂혔다.
철커덕, 하고 열쇠 구멍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묵시룡의 봉인’을 해제합니다.]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용살의 힘이 잠든 용을 깨우고 있었다. 하늘 전체가 거대한 전구처럼 점멸했다. 절반의 밤과 절반의 낮이 하늘을 양분했고,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어마어마한 설화의 주인이 깨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성운, ‘올림포스’의 모든 성좌들이 경악합니다.]
[성운, ‘베다’의 모든 성좌들이 기함합니다.]
[성운, ‘파피루스’의 모든 성좌들이 경계심을 가집니다.]

성운들의 메시지 속에, 반구형 돔 속에 갇혀 있던 용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알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상을 마친 묵시룡은 허공을 향해 포효할 것이고, 저 먼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을 향해 꼬리를 휘두를 것이다. 저 밤하늘의 삼분의 일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정말 재수가 없다면 나도―

「김독자.」

고개를 돌리자, 대체 언제 다가온 것인지 [진천패도]를 쥔 유중혁이 곁에 서 있었다. 마치 이 시나리오의 클리어 따윈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한 표정. 녀석과 두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소름이 돋았다.

······대체 언제부터 ‘회귀 우울증’이 풀려 있었던 거지?

섬연하게 뜬 그 두 눈은, 너무도 명백한 의식을 가지고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의식이, 나를 향해 묻고 있었다.

「네가 보여준 ‘그 세계’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 Episode 56. 독자와 작가 (2) > 끝

< Episode 56. 독자와 작가 (3) >





유중혁의 질문에,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순간적으로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러자 ‘전지적 독자 시점’을 통해 다시 한 번 속내가 들려왔다.

「네가 살았던 그 ‘세계’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그제야 나는 유중혁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녀석은 내가 살았던 세계를 본 것이다.

「히 히」

머릿속에서 ‘제4의 벽’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달려온 한수영이 내 뒷통수를 눌러 바닥에 처박았다.

“유중혁! 나와 약속했을 텐데?”

이어지는 한수영의 목소리에 악이 담겨 있었다.

“너는 이곳에서 죽고, 나는 새로운 세계를 얻는다. 그게 우리 교환 조건이잖아.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거야!”

지면과 마주한 입술에서 흙 맛이 느껴졌다.

「김독자는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유중혁이 내 기억을 통해 무엇을 느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저 태도를 보면, 최소한 이번 삶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르르르르르······.

봉인구의 위쪽에서 끔찍한 울음이 흘러나왔다.

[으아아아······.]
[모두 달아나! 빨리, 이 시나리오에서 탈출해!]

경악한 성좌들이 하나둘 이 시나리오를 탈출하기 위해 용을 쓰고 있었다. 심지어 저 하늘의 성운들조차 설화병기를 밀집시키며 대열을 물리고 있었다.

저 ‘묵시룡’은 실로 그런 존재였다.

<에덴>을 멸망시켰던 결정적인 원흉이자, <스타 스트림> 최악의 재앙.
아비규환 속에서 한수영이 유중혁을 향해 외쳤다.

“혹시 이 녀석 때문이냐?”

내 머리채를 잡은 한수영이 소리를 질러댔다.

“이 녀석이, 네 정신에 뭔가 영향을 끼친 거냐고. ······한심하게, 이제 와서 살고 싶어지기라도 한 거냐? 지쳤다며? 더이상 어떤 시나리오도 수행하고 싶지 않다며?”

한수영이 한 마디 한 마디를 이어갈 때마다, 내 가슴에도 못이 박히는 것 같았다. 유중혁은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나는 그런 녀석이 살아온 삶을 알고 있었다.

1863회차의 유중혁은 내가 알던 원작의 유중혁이었다.

어머니가 교도소에 갇혔을 때도, 내가 왕따를 당했을 때도, 수능을 보고, 군대를 가고, 다시 회사에 입사했을 때도. 언제나 내가 줄곧 지켜보았던 그 유중혁이었다. 냉혹하고 계산적이며, 포기하지 않는 유중혁.

어린 나는 그런 유중혁을 보며 살아왔다.
살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놈을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저 유중혁이 이곳에서 죽으면, 내가 알던 ‘멸살법’은 영원히 사라진다.
유중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죽고 싶다.”

너무나 분명하고, 명확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분명한 목소리가 내게만 들려왔다.

「살고 싶다.」

바닥을 그러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수영이 외쳤다.

“그럼 왜 그딴 짓을 한 건데? 씨발, 왜 안 뒈지고 아직까지 살아있는 거냐고!”
“······.”
“어떻게든 묵시룡의 봉인을 재생시켜. 검을 뽑든, 뭘 하든, 어떻게든 해 보라고!”

가능할 턱이 없다는 걸 한수영도 알고 있었다.
한수영은 무너지고 있었다. 모든 것을 ‘예상 표절’하며 살아왔던 그녀의 세계가, 처음으로 붕괴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대답이 없었다. 감정을 이기지 못한 한수영이 나를 내팽개치고 유중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칼날이 유중혁의 목을 노리고 움직였다. 하지만 끝내, 한수영은 유중혁을 찌를 수 없었다.

“빌어먹을······!”

유중혁의 목젖에 닿은 한수영의 칼날이 멈췄다.
한수영도 아는 것이다.
여기서 유중혁을 죽여 봐야, 유중혁은 회귀할 뿐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포기해. 한수영.”
“닥쳐!”
“너도 나도 실패한 거야. 이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해.”
“닥치라고! 네가 뭘 알아!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그 순간, 자신의 목젖에 닿은 칼날을 보며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나는 죽고 싶다.”

「살고 싶다.」

“여기서 끝내고 싶다.”

「만약 기회가 있다면, 내가 본 그 세계처럼······.」

파르르르······.
유중혁의 몸이 진동하고 있었다.
마치 서로 다른 두 개의 자아가 충돌하듯이, 유중혁의 몸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통증이 심해지는 듯, 유중혁이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 천천히 주저앉았다. 놀란 한수영이 한 걸음을 물러서자, 유중혁의 몸에서 강력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한수영의 몸이 나를 향해 날아왔고, 나는 엉겁결에 녀석을 받으며 바닥을 굴렀다.

고오오오오······.

주저앉은 유중혁의 몸에서 설화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1863회차의 유중혁이 겪어온 기억들이 허공을 떠다니며 나와 한수영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기억들 속에서 유중혁이 말했다.

「“한수영, 나를 죽일 방법을 찾아라.”」

그러자, 기억 속의 한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약속해. 나를 돕겠다고.”」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두 사람의 약조.
겉으로 보기엔 완벽했던 1863회차는 단 한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 회차에서 유중혁은 모든 것을 잃었다.

「“내 계획을 실행하면, 네 여동생은 구할 수 없어.”」

자신의 여동생을 잃었고.

「“파천검성과 파천신군도 구할 수 없어. <제1 무림>까지 챙길 여유는 없으니까.”」

하나뿐인 스승과 사형을 잃었다.

「“이 세계의 적이 되도록 해. 너를 적대하는 모두가 뭉칠 수 있도록.”」

그리고 스스로의 의지로, 이 세계의 악이 되었다.
1863회차의 유중혁은 불행했다.
그 어떤 회차보다도 더 불행했다.
나는 이를 악문 채 외쳤다.

“유중혁!”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죽고 싶어하는 유중혁의 마음을 이해했음에도, 계속 녀석이 살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단지, 녀석의 일부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러면 뭐가 옳았던 것인가.

유중혁이 물었다.

「네가 보여준 ‘세계’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내 말이 저 유중혁에게 위안이 될지 어떨지는 모른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선언했다.

[존재해.]

그것만이 내가 녀석에게 전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곳에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곳에 있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고.
그러자 유중혁이 답했다.

「······그렇군.」

이상하게도, 그 순간 유중혁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너는 내가 죽어야만 그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겠지?」

“아냐, 그렇지 않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거야. 네가 죽지 않아도, 시간이 조금 많이 걸리더라도, 어떻게든······!”

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정보들을 정리했다.
가능한 최선의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3회차의 세계는 유상아와 한수영에게 잘 부탁해 놨으니, 내가 돌아갈 때까지 무사할 것이다.
그리고 1863회차는 이미 95번째 시나리오를 진행하고 있다.
이곳에는 살아남은 일행들도 많으니 3년, 아니 늦어도 5년만 고생하면······.
고개를 들자, 유중혁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면 늦는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이곳에 있으면, 너는 그 세계를 구할 수 없다.」

반박하려는 순간, 유중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유중혁에게서 일어나는 진동은 점점 더 커져서, 녀석의 상이 여러 개로 보일 지경이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특성 개화의 계기를 맞이합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새로운 특성을 획득하였습니다!]

찬란한 빛을 흩뿌리며 분화하는 유중혁이,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그 세계의 ■■가 궁금해졌다.」

흘러 넘치는 설화 속에서, 정확히 두 명으로 나누어지는 유중혁.
나는 그 스킬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아바타].

오직 ‘작가’ 특성을 가진 존재만이 쓸 수 있는 스킬.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수영의 전유물이었던 스킬이었다.

“유중혁! 너, 너······!”

입을 벌린 한수영이 어깨를 떨고 있었다. 당황한 그녀의 속내가, ‘전지적 독자 시점’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만약, 한 사람의 존재가 정확히 절반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면 어떨까.」

수만 명의 한수영이 말하고 있었다.

「하나의 존재가 두 개의 분신으로 나누어진다면, 둘 중 어느 쪽을 ‘진짜’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등줄기에 서서히 소름이 돋았다. 1863회차의 한수영이 가진 기억들. 정확히 둘로 나누어지는 그녀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것은 한수영의 경험이었고, 지금 유중혁이 겪는 일이기도 했다.
눈부신 광휘 속에서 둘로 분열한 유중혁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유중혁이 말했다.

“나는 죽고 싶다.”

그러자, 다른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나는······.”

다른 유중혁은 말을 잇다 말고, 넝마가 된 자신의 검은 코트를 내려다보았다. 녀석은 그 코트를 바닥에 벗어 던졌다.

“나는 살고 싶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김남운이 입고 있던 하얀 코트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내가 빌려준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였다. 유중혁은 그것을 주워, 자신의 몸에 걸쳤다. 하얀 코트는 처음부터 녀석의 것이었던 것처럼, 몸에 맞게 착 달라 붙었다.
하얀 코트를 입은 유중혁과 검은 코트를 입은 유중혁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방법은 하나뿐.”

두 명의 유중혁이, 서로를 향해 [진천패도]를 겨누었다.

[화신 ‘유중혁’의 배후성이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당황한 일행들이 외치고 있었다.

“뭐야, 저 자식 뭐하는 거야!”
“왜 갑자기 둘이 된 거죠?”

허공에서 빛살이 몰아치며 [파천검도]와 [파천검도]가 부딪쳤다.

“맙소사, 저 녀석······.”

오직 한수영만이, 나와 똑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나의 존재가 둘이 되었다.」
「하지만, 그 존재의 배후성은 하나뿐이다.」

저것이 유중혁이 찾아낸 답이었다.
나는 녀석을 향해 외쳤다.

“멈춰 유중혁! 멈추라고!”

이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면서, 나를 3회차로 되돌려 보낼 방법.
자신의 죽음을 만족하며, 동시에 계속해서 살아갈 방법.

“어느 쪽이 살아남든, 너는 또 회귀하게 될 거야!”

두 명의 유중혁은 나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죽는다.」
「나는 회귀한다.」

유중혁은 모두 알고 있었다.
너무나 잘 알았기에, 이 방법을 선택했다.

「이 이야기는 이곳에서 끝난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그 모든 것은 처음부터 시작된다.」

한수영도 나도 알지 못했던 이 세계의 결말이 그곳에 있었다.

푸슈슉!

진천패도에 꿰뚫린 검은 코트 자락이 흔들렸다.
정확히 절반의 기억. 유중혁이 쌓아온 그 무수한 기억들이, 허공에 흩날리고 있었다.
성흔 ‘회귀’를 발동할 수 있는 쪽은 하나 뿐.
그렇기에 나는 알 수 있었다.
저 검은 코트의 유중혁이, 죽음을 택한 유중혁이라는 것을.

[화신 ‘유중혁’이 사망하였습니다.]

맞은 편에 하얀 코트의 유중혁이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죽인 유중혁.
그러나 그 역시 검에 찔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배를 뚫고 나온 [진천패도]. 그 속도는 느렸지만, 그 또한 죽어가고 있었다.

[화신 ‘유중혁’의 배후성이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성흔, ‘회귀 Lv.???’가 발동합니다.]
[화신 ‘유중혁’이 배후성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유중혁은 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뜰 것이고, 원작에는 없었던 1864회차의 지하철에서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이건 네 세계를 보여준 보답이다.」

하얀 유중혁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설화 중의 일부가 나에게 닿았다.

[등장인물 ‘유중혁’의 설화가 당신에게 깃듭니다.]

나는 유중혁을 향해 다가갔다.
내 유년을 지켜줬던 인물이,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사라지고 있었다.

「다음 회차에서는······.」

유중혁의 모습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통해 이어지던 유중혁의 속마음이,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츠츠츠츠츳!

그에게 더이상 ‘전지적 독자 시점’은 통하지 않았다.

[해당 인물은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세계의 빛 속에서 스러지는 유중혁의 모습.
비틀거리며 내가 다가갔을 때, 이미 유중혁은 세계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돌아보자, 한수영이 절망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당신은 ‘이계의 언약’의 클리어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눈부신 빛이 재처럼 허공에 나리고, 창백한 현실의 광경이 드러났다.
그 속에서 유중혁만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향해 걸어갔다.





< Episode 56. 독자와 작가 (3) > 끝

< Episode 56. 독자와 작가 (4) >





유중혁이 죽었다.

[‘제4의 벽’이 격렬하게 흔들립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제4의 벽’이 위태로울 정도로 심각하게 흔들립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폐소 공포라도 온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어째서 갑자기 유중혁이 ‘작가’ 특성을 얻게 된 것인지, 왜 스스로 죽음과 회귀를 선택한 것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납득하는 것이 버거웠다.
내가 알던 원작의 유중혁은 더이상 없다.
한 줌 설화만이 녀석의 부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이런 기분이었던 건가.

「이것은 소설이다. 소설 속의 이야기이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키고, 다시 뱉었다.

「그리고 유중혁은 등장인물에서 벗어났다.」

귀에서 이명이 들려오고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다시 한 번 들숨과 날숨을 반복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더욱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감각이 천천히 되돌아오며 일행들의 수근거림이 들려왔다.

“······어떻게 된 거야?”
“방금 다들 들었죠? 시나리오 클리어 됐어요!”

고오오오오!

뺨을 두 번 친 후 고개를 들자, 봉인구에서 흘러 넘치는 묵시룡의 격이 느껴졌다.

[성운, <올림포스>가 묵시룡의 전장을 준비합니다.]
[성운, <베다>가 재앙에 대비합니다.]
[성운, <탐라>가······.]

내 예상이 맞다면, 아직 시간은 있다.
나는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일행들을 향해 외쳤다.

“다들 모여 주십시오.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행들은 나를 경계하면서도 하나둘 근처로 모였다.
누군가는 쓰러진 한수영을 부축하고 있었고, 김남운과 이지혜는 나를 향해 강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얼마 뒤 묵시룡이 해방됩니다. 그와 관련해―”
“닥쳐! 너 아까 그거 무슨 짓이야? 유중혁이랑 뭔 작당을 해서 사부를 공격한 거냐고!”

버럭 소리친 이지혜가 칼로 내 목을 노렸고, 이어서 이현성이 물었다.

“독자 씨, 아까 그건 대체······.”
“대장! 이 자식 어떡할까? 내가 조져버려?”

김남운마저 [흑염]이 발동한 오른손을 꺼냈다.
그때, 한수영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다들 저 녀석 말 들어.”
“응?”
“저 녀석 말 들으라고.”

한수영의 눈은 풀려 있었다. 하지만 그 텅 빈 동공이, 녀석이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방증은 아니었다.
한수영은 나와 닮았다.
겉으로는 저렇게 보여도, 머릿속으로는 이미 처해진 상황을 납득하는 중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다음의 계획을 생각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나는 일행들을 둘러 보았다.
이현성, 김남운, 이설화, 이지혜, 신유승······.
살아남은 1863회차의 사람들.

한수영에 대한 진실을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수영은 당신들을 이용한 거라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당신들의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려 했다고.
그럼에도 그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다들 대장 잘 챙겨. 섣불리 행동하지 말고. 일단 독자 씨 말을 들어 보자.”

이들이, 진심으로 한수영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현성의 만류에 한결 풀이 꺾인 일행들이 나를 보았다.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묵시룡의 해방은 봉인이 풀렸다고 끝난 게 아닙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 시나리오의 마지막은······.”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그러자, 다른 일행들도 함께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봉인구 속에 구겨 넣어진 거구. 조금씩 부서지는 봉인구의 조각들. 시간이 지날수록 하늘을 덮는 격의 밀도가 진해지고 있었다.
나는 [제4의 벽]에 기대어 텅 빈 말들을 줄줄이 내뱉었다.

“다들 본부로 돌아가서 다음 시나리오를 준비하죠. 아마 시간이 사흘 정도 남았을 겁니다.”


*


나는 곧바로 1863회차를 떠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이 회차의 인물들 역시 내가 좋아했던 인물들이기 때문이었다.

‘묵시룡의 해방’은 마지막 열쇠를 ‘초체검’으로 사용함으로써 약간의 시간을 벌었다. 초체검은 용살의 열쇠로 쓰기에는 격이 조금 떨어지는 편이었고, 그 때문에 묵시룡의 해방 또한 시일이 약간 늦춰진 것이다.
나는 이 시간을 요긴하게 써야 했다.
어차피 한수영이 이 루트를 택한 이상 성운들의 파멸은 예정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지구가 그 파멸을 피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날, 나는 본부의 상황실에서 이현성에게 내가 아는 상당량의 정보들을 넘겼다.

모두 내가 사전에 짜 놓았던 미래 계획들이었다.
묵시룡의 재앙을 피하는 것에서부터, 앞으로 얻어야 할 새로운 설화와 아이템들, 그리고 손을 잡아야 할 강자들의 목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이야기를 메모하며 듣던 이현성이 문득 고개를 들며 물었다.

“······독자 씨는 어떻게 이 모든 걸 알고 계신 겁니까?”
“한수영이 알고 있는 이유와 같습니다.”

불필요한 설명을 피하기 위해 둘러댄 말이었는데, 이현성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이현성은 뜻밖의 말을 했다.

“독자 씨도 혹시 ‘표절 작가’이신 겁니까?”
“······표절 작가요?”
“엇······ 아니셨습니까? 죄송합니다.”

나는 당혹감을 추스르며 되물었다.

“한수영이 자기 특성을 이야기 했나요?”
“아, 그게······.”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이현성.
믿어지지가 않았다.
저 자존심 강하고,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한수영이 원작의 등장인물에게 자신의 특성을 드러냈다고? 대체 왜?

“전부 밖으로 나가.”

생각하기가 무섭게, 상황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있었다.
모자를 깊게 덮어쓴 한수영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고분고분 고개를 숙인 이현성이 짐을 챙겨 상황실 밖으로 나갔다.
텅 빈 상황실에 남은 이는 한수영과 나뿐.
내가 ‘이계의 언약’을 클리어 했으니, 분명 한수영도 마찬가지겠지.
그런 상황이라면, 녀석이 내게 적의를 드러낼 이유는 없다.

“정신 좀 차린 모양이네.”
“시끄러워.”

한수영이 팔짱을 낀 채 풀썩 의자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내가 물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불만? 그걸 말이라고 하냐? 너 때문에 이제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뒈지게 생겼어.”

나는 상황실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일행들을 보았다. 투명한 벽 밖으로 옹기종기 모인 일행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유중혁이 죽은 직후 한수영이 절망한 표정을 지었던 것은, 아마도 저들 때문이었을까. 나는 말했다.

“영원히 잠드는 것보단 다음 시나리오로 가는 게 나아.”

창밖에서, 얼핏 나와 눈이 마주친 이현성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현성은 한수영이 표절 작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현성은, 한수영이 그들을 버릴 것도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곰 같고, 눈치도 없지만 속이 깊은 사내. 그런 이현성이라면,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한수영을 따르기로 했던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묵시룡이 해방되었다고 다 끝난 건 아니야. 너도 알잖아?”

고개를 숙인 한수영은 대답이 없었다. 창공에서 조금씩 해방되는 묵시룡의 기파. 녀석이 해방되면 <스타 스트림>에는 재앙이 벌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앞으로의 시나리오가 모두 끝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1863회차의 유중혁은 저 ‘묵시룡’을 해방시키고도 시나리오의 끝을 보았으니까.

“일행들에게 제대로 설명해. 네가 잘못한 것과, 숨겼던 것들까지 전부. 완벽한 전개가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해나갈 방법은 있어.”
“······.”
“아직 힘을 빌릴 수 있는 곳은 많아. 안나 크로프트의 ‘차라투스트라’, ‘종말의 구도자’, ‘초월좌들의 왕’, 그리고 환생자의 별에 사는 ‘그 녀석’도······.”
“시끄럽다고 했지.”

고개를 든 한수영이 나를 노려보았다. 깊이 눌러 쓴 모자 사이로 자존심만 남은 녀석의 눈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한수영의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내가 녀석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자, 한수영이 으르렁거리며 모자를 더 깊게 눌러썼다.

나는 1863회차의 한수영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한수영을 이해할 수 있었다.
녀석이 만들고 싶었던 세계는, 어쩌면 내가 꿈꾸던 세계와도 조금은 닮아 있었으니까.
한수영이 짓씹듯 말했다.

“······유중혁이 ‘작가’가 될 줄이야.”
“왜 갑자기 그런 특성을 얻은 걸까?”
“새로운 이야기가 쓰고 싶어졌겠지. 아주 간절히. 그게 ‘작가’ 특성의 개방 조건이니까.”

알 것도 같았고, 모를 것도 같은 말이었다.
마침표를 찍어 완성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세계에서······ 유중혁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이 이야기의 바깥으로 나아갔다.

한수영도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들자, 모자를 벗은 한수영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일문답 교환 어때? 귀찮으니까 시스템은 쓰지 말고.”

연기를 훅 뿜은 한수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거짓말 포함?”
“좋아.”
“너 먼저 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생각하는 ‘멸살법의 작가’는 누구냐?”

한수영이 다시 한 번 연기를 빨아들였다 뱉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주 거대한 아기.”
“······아기?”
“시나리오가 없는 세계에서, 오직 다음 이야기를 보고 싶은 욕망만이 남은······ 무척이나 끔찍한 상상력을 가진, 어떤 아기.”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시나리오가 없는 세계.
이 <스타 스트림>에 그런 세계는 하나뿐이다.

“설마······.”
“입 밖으로 안 꺼내는 게 좋을 거야.”

한수영이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듣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존재’가 정말로 작가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진 상태로 한수영에게 말했다.

“네 차례야. 물어봐.”
“생각하고 있으니까 기다려.”
“······시간 별로 없으니까 빨리 물어 봐. 난 내일 아침에 출발할 거거든.”
“내일 아침?”
“‘이계의 언약’을 완수했으니 나도 본래 세계선으로 돌아가야지.”

한수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용건이 끝났으니 내빼시겠다? 거참 대단하시네. 내 세계를 다 망쳐 놓고······.”
“내가 알고 있던 건 이현성에게 모두 전해줬어. 그대로 진행한다면 다른 도움이 없어도 저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갈 수 있을 거야.”

나는 상황실 밖의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애초부터 이 세계는 ‘그들의 세계’다.

“넌 언제 출발할 거냐?”
“출발?”
“너도 이계의 언약을 완수했잖아.”

‘이계의 언약’을 끝낸 것은 나만이 아니다. 유중혁이 죽었으니 한수영 또한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을 터.
녀석은 이제 ‘은밀한 모략가’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떠날 것이다.

“한수영?”

바닥을 보던 한수영이 말했다.

“난 안 가.”





< Episode 56. 독자와 작가 (4) > 끝

< Episode 56. 독자와 작가 (5) >





“뭐?”
“난 안 간다고.”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기 때문에, 나는 바보처럼 되물었다.

“왜?”
“내가 없으면 저 녀석들은 다 죽을 테니까.”

나는 귀를 의심했다.
한수영이 저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불쑥 치솟아 오른 반감에 나도 모르게 공격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언제는 너만의 세계를 만들고 싶다며?”
“······내 세계 같은 건 나중에라도 만들 수 있어. 누군가는 저들을 이끌어야 해.”
“그러니까, 왜 갑자기······.”
“유중혁은 더이상 등장 인물이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건 더이상 소설이 아니야.”

한수영의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이걸로 모든 걸 용서받으려는 것도 아니야. 전개가 어떻게 흘러가든, 시작한 이야기는 제대로 끝을 봐야지.”

모자의 챙에 가려진 한수영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내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한수영이 상황실을 나갔다.
상황실의 유리 밖으로 일행들에게 말을 하는 한수영의 모습과, 그 이야기를 경청하는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오래도록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


떠나기 전 내가 해결해야 할 일들은 몇 가지가 더 있었다.
그중 하나는 우리엘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요피엘의 구속구에 갇힌 우리엘의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비록 지금은 얌전한 상태지만, 구속구의 효력이 끝나는 순간 우리엘은 다시 ‘염화의 대천사’로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불태우려 들겠지.

츠츠츠츠츳······.

가브리엘의 진언이 귓가에 들려왔다.

[우리엘은 어쩔 거야?]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힘없이 처진 꽃잎을 흔드는 가브리엘을 내려다보았다. 아마도, 이곳의 정경에 큰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원작 설정에 따르면 가브리엘은 다른 천사들을 잘 챙기는 성정이니 더욱 그럴 것이다.

[······역시 내가 남겠어.]

“안 됩니다.”

[왜? 이곳의 내가 배신했기 때문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브리엘이 억울하다는 듯 다그쳤다.

[난 왜 <에덴>을 배신한 건데?]

“당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을 겁니다.”

[세부를 정확히 말해.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냐고! 너 뭔가 알고 있잖아!]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정 궁금하시면 돌아가서 메타트론을 닦달해 보세요.”

이 일은 내가 당장 개입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자칫 정보를 잘못 흘렸다간 3회차의 전개가 예상 밖의 난관을 맞이할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가브리엘의 잎이 거칠게 떨렸다.

[어차피 돌아가면 난 또 배신하게 되는 거 아냐? 그럴 바엔 차라리 여기 남아서―]

“미래는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린 돌아가야 합니다.”

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이 세계는 우리의 회차가 아니다.

[그럼 우리엘은······!]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생각 중입니다.”

지금으로 최선의 선택은 한수영에게 우리엘을 맡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염화의 대천사’를 통제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제4의 벽이 말합니다. ‘도 와줄 까?’」

우리엘에게 3회차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차 말하듯, 우리엘이 3회차의 이야기를 듣고 유중혁과 같은 반응을 보이리란 보장은 없었다. 어쩌면 내 세계선의 이야기는 불안전한 우리엘의 정신을 더욱 망가트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진짜로 가브리엘을 이곳에 남겼다간, 더 커다란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더군다나 [선악의 구속구]도 사용할 수 없는 가브리엘로서는······ 역시 내가 좀 더 남아서 우리엘을 돕는 편이······.

[내가 남겠다, 가브리엘.]

흔들리는 붉은 코스모스의 꽃잎.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자, 깜짝 놀란 가브리엘이 외쳤다.

[······요피엘?]
[내가 남는 것이 최선이다.]

뜻밖의 선언이었다. 나조차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른 천사도 아니고, ‘대천사 요피엘’이 이곳에 남기를 선언했다고?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것이다. 나는 ‘선악의 구속구’를 통해 우리엘을 통제할 수 있어. 그러니 이곳에 내가 남는 것이 옳다.]

“······요피엘,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다시는 본래의 세계선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세계선을 넘을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있겠죠. 그리고 모두 막대한 대가를 필요로 할 겁니다.”

[못 돌아가도 상관없다.]
[요피엘!]

가브리엘의 외침에도 요피엘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 세계선에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 그리고 저 음흉한 놈에게 의지하지 않고 내가 직접 이 세계선을 알아보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곳의 <에덴>이 왜 멸망했는지, 미래에 무슨 일들이 발생했는지를 파악해 본래의 세계선에 알릴 의무가 있어.]

과연 요피엘다운 합리적인 발언이었다.
이 세계는 기존의 1863회차와는 많이 달라졌고, 만약 앞으로 일어날 일을 3회차로 전송할 수 있다면 분명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잠깐만, 요피엘! 왜 네 멋대로 그런 결정을―]
[번복은 없다, 가브리엘.]

붉은 코스모스에서 휘황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그 빛은 새하얀 구속구로 변해 흰 백합 위에 깃들었다. [선악의 구속구]. 잠이 들기라도 한 것처럼 가브리엘의 꽃이 축 늘어졌다. 요피엘이 나를 향해 말했다.

[가브리엘을 부탁한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우리엘에겐 가브리엘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브리엘에게도······ 둘 다 불안정한 녀석들이니까.]

새삼 ‘대천사 요피엘’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덴>은 이런 대천사 하나하나가 모여 만들어진 성운인 것이다.

“그럼 당신은요?”

[그대를 믿지는 않지만, 부탁할 것이 하나 있다.]

나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의 세계선으로 돌아가면 꼭 <에덴>을 방문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서기관에게 전해주면 좋겠군.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확실히 그 정도라면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어차피 <에덴>에는 한번 방문할 생각이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요피엘의 코스모스도 축 고개를 늘어트렸다. 마치 피곤에 절어 잠든 듯한 모습. 나는 두 꽃이 머금던 페트병의 물을 갈아주었다.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떠난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결국 모두는 각자의 결말에 도달할 것이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일행들의 배웅을 받았다.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있었는데도, 일행들은 꾸역꾸역 나를 배웅하겠다고 나왔다. 정확히는 이현성에게 떠밀려 나온 투였다.
고개를 돌리자 특유의 못마땅한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는 한수영이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꼬깃꼬깃한 수첩 하나를 건넸다. 한수영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뭐야 이 쓰레기는.”
“지금 네게 필요한 정보.”

나는 밤새 ‘멸살법’의 원본에서 1863회차에 유용할 정보들 몇 개를 더 추려내 정리했다.

츠츠츳······.

한수영의 몸에서 희미하게 튀어 오르는 스파크.
나는 그것의 정체를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저 스파크는 아마도 한수영의 ‘등장인물화’와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버리지 말고 시간 날 때마다 들여다보라고.”

한수영은 내가 준 수첩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물었다.

“······넌 괜찮은 거냐?”
“뭐가?”

[‘제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 됩니다!]

마치 내 얼굴에서 뭔가를 읽어내려는 듯, 유심히 나를 보던 한수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다. 아무것도 아냐.”

······실없기는.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이현성이 입을 열었다.

“같이 시나리오를 수행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그나마 나와 친해진 이현성이 먼저 인사를 하자, 뒤쪽에서 나를 노려보던 김남운이 말했다.

“흥, 빨리 꺼지라고. 그곳의 나한테도 안부 잘 전해주고.”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3회차의 김남운에게 안부를 전하려면 나는 저승까지 가야 하니까.
인사를 마친 내가 돌아서려는 순간.

“야.”

부드러운 무게감을 가진 뭔가가 내 뒤통수로 날아왔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그것을 붙잡었다. 손 안에 들어온 것은 하얀색의 코트. 정확히는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였다.

“클리어 보상 못 챙겼을 거 아냐? 그거 가져가.”

그것은 한수영이 입고 있던 코트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95번 시나리오까지 와서, 겨우 이런 걸 가져가기엔―”

한수영이 무슨 한심한 소릴 하느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별안간 머릿속에 스친 생각이 있었다.
이 자식, 설마······.
내가 멍한 얼굴로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한수영이 물었다.

“어제 못했던 질문, 지금 마저 해도 되냐?”
“······해.”
“너, 왜 그때 3회차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던 거지?”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다. 한수영이 계속해서 물었다.

“거기선 보나마나 네가 내 역할을 하고 있을 텐데······ 네가 돌아가지 않으면 그 세계는 멸망했을 거야. 그걸 잘 알고 있는 녀석이, 왜―”
“글쎄······ 안 그랬을걸?”
“뭐?”
“내가 없어도 3회차는 오랫동안 건재했을 거야.”
“어떻게 확신하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는 한수영에게, 나는 답했다.

“거기도 네가 있으니까.”

내 말에, 한수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놀란 녀석의 눈가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3회차에 있는 널 믿었거든.”

한수영은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홱 고개를 돌렸다.

“빨리 꺼져. 꼴 보기 싫으니까.”
“간다. 잘 살아라.”

뒤돌아선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은밀한 모략가! 언약의 내용을 지키기 바랍니다.]

그러자 발밑에 새카만 포탈이 만들어졌다.
뭔가가 나를 끄집어당기는 듯한 느낌과 함께, 세계의 정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1863회차의 세계가 조금씩 흐릿해지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었던 원작과는 달라진 세계.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손을 흔드는 이현성과,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배웅하는 일행들.
유중혁이 그랬고, 내가 그랬듯, 저들 또한 내가 알던 원작과는 다른 세계를 걸어나가게 될 것이다.
언젠가 그 세계선들이 서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다시 만날 수 없더라도 이 세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마치 ‘멸살법’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세계가 어둠으로 화했다. 어지럼증과 함께, 어디선가 이계의 신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 작 도 끝 도 없 는 부 질 없 는 이 야 기 만 이 남 으 리 라】

쑥 하고 바닥이 꺼지더니, 나는 포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형이상학적으로 일그러진 통로가 몇 번인가 좁아졌다 늘어나기를 반복했다.
나는 눈을 감고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 몸을 맡겼다.

3회차에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어야 할 텐데.

잠시 후, 뭔가가 나를 게워내는 소리와 함께 나는 바닥에 떨어졌다.

[‘이계의 언약’이 완료되었습니다!]
[보상을 정산 중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바닥’은 아니었다. 주변에는 일전에도 보았던 <스타 스트림>의 은하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내 몸은 우주의 공허 속에 떠다니는 중이었다. 신음과 함께 눈을 깜빡이자, 바닥을 끄는 검은색 케이프 자락이 보였다.

【왔군.】

‘은밀한 모략가’였다.





< Episode 56. 독자와 작가 (5) > 끝

< Episode 57. 금의환향 (1) >





Episode 57. 금의환향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응시하자마자, [제4의 벽]이 움직였다.
마치 새끼를 보호하는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는 [제4의 벽].

「조심 해 김독 자」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은밀한 모략가’는 [제4의 벽]을 두고 ‘최후의 벽’이라 불렀다. 원작에는 그에 관한 정보가 나온 적이 없었지만, 짐작 가는 것이 아예 없는 것은 또 아니었다. ‘멸살법’에는 장하영의 ‘정체불명의 벽’을 포함해 여러 종류의 벽들이 존재하니까.

“보상을 받으러 왔습니다. 은밀한 모략가.”

내가 입을 열었음에도 ‘은밀한 모략가’는 답이 없었다.

츠츳, 츠츠츳······!

‘은밀한 모략가’의 주변에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표정을 대신해 얼굴을 차지한 새카만 어둠이,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내게 묻고 있었다.

【구원의 마왕,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지?】

“예?”

갑자기 그런 식으로 물어봤자 무슨 뜻인지 알 턱이 없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재차 물었다.

【어째서 3회차로 돌아가지 않으려 했는가? 그 세계선은 네 회차도 아니었을 텐데.】

“그 세계가 저를 구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뿐입니다.”

【그대로 두었다면 그는 안식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안식이 아닙니다. ······은밀한 모략가, 당신은 왜 저를 그 세계선으로 보냈던 겁니까?”

츠츠츠츳······.

‘은밀한 모략가’의 주변에서 스파크가 한층 더 심해졌다.
마치, 존재가 불안정해지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
한숨과 함께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이야기였거늘······ 너는 네가 무엇을 바꾼 것인지 모른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뚫린 새하얀 구멍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약속한 보상을 주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서브 시나리오로 약속된 보상은 총 세 가지였다.
1863회차에서 획득 가능한 아이템, 설화, 그리고 스킬.

【가지고 갈 아이템은 뭐지?】

“이 코트입니다.”

나는 살짝 긴장하며, 한수영이 준 하얀 코트를 내밀었다. 빛이 새어 나오던 ‘은밀한 모략가’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이계의 신격’을 속이기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은밀한 모략가’가 약속한 아이템은 한 가지.
그러나 이 코트의 안주머니에는 하나 이상의 아이템이 들어 있었다.

【······됐다. 어차피 돌아갈 꽃 한 송이가 줄어들었으니, 개연의 총합은 비슷하겠지.】

[‘무한차원의 아공간 코트’를 보상 아이템으로 수령합니다.]

다행히 ‘은밀한 모략가’는 한수영의 코트를 눈감아주었다.
다음은 ‘설화’ 차례였다.

【가지고 갈 설화는 당연히 ‘그것’이겠지?】

“그렇습니다.”

애초에 1863회차에서 내가 얻은 설화는 유중혁이 건네준 설화뿐이었다.
사실 여기서 이 설화를 획득하면, 내 계획 노선의 일부를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한 이야기의 끝을 보는 거니까.

[보상 설화를 수령하였습니다.]
[해당 설화는 본래의 세계선으로 귀환한 뒤 정상 적용됩니다.]

마지막은 ‘스킬’이었다.

【스킬은 어떻게 하겠는가? 새로운 스킬은 획득하지 못했을 텐데.】

“스킬은 획득하지 못했습니다만······ 이런 형태의 보상 수령도 혹시 가능합니까?”

나는 ‘은밀한 모략가’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잠시 내 이야기를 듣던 ‘은밀한 모략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

[보상 스킬을 수령하였습니다.]
[해당 스킬은 본래의 세계선으로 귀환한 뒤 정상 적용됩니다.]

이걸로 얻어야 할 것들은 모두 얻었다.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진 것은 점검을 끝낸 내가 ‘은밀한 모략가’에게 세계선 귀환 요청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츠츠츠츠츠츳······!

강력한 스파크와 함께, 공간의 뒤쪽에서 누군가가 이 공간으로 침투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공간 너머에서 느껴지는 ‘격’의 종류를 눈치챘다. 아무래도 ‘은밀한 모략가’가 이번 일을 주도한 사실을 <관리국>에서 알아챈 듯했다.
즉, 지금 이곳에 침입하려 하는 자는 관리국의 대도깨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만 가라, 구원의 마왕.】

‘은밀한 모략가’가 가볍게 손끝을 움직이자, 내 발밑에 소용돌이치는 포탈이 나타났다.
나는 ‘은밀한 모략가’를 향해 다급히 물었다.

“잠깐만요! 제가 돌아갈 세계선은 지금 몇 년이 지난 상태입니까?”

내 말에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돌아보았다.

【어떤 이야기는 빠르게 읽히고, 어떤 이야기는 천천히 읽힌다.】

그 목소리에 깃든 스산함에 나는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내 하관은 이미 포탈을 넘어가는 중이었다.

【구원의 마왕. 그대가 사라진 이야기는 빠르게 읽힐 것 같은가, 아니면 천천히 읽힐 것 같은가?】

어디선가 장난스러운 웃음 같은 것이 들려왔다.
포탈이 완전히 발동하며, 이내 시야가 완전히 이지러졌다.

【다시 만날 때는, 네가 그 ‘벽’의 제대로 된 주인이 되어 있길 바라지.】


*


세계선을 넘는 것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정신을 마구잡이로 휩쓸어대는 포탈의 급류 속에서도 나는 나름대로 의식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부왕의 차원문’이 시공간 좌표를 설정합니다.]

흘러가는 <스타 스트림>의 정경.
나는 부표처럼 떠오르는 기억들 속에서 필요한 일들만을 생각했다.

[‘부왕의 차원문’이 닫힙니다.]

메시지와 함께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어슴푸레한 등불이 천장에 매달린 널따란 공간.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여긴 어디지?

아직 지구는 아닌 것 같았다.
왜지? 왜 갑자기 여기로 온 거지?

[<스타 스트림>이 세계선으로부터 당신의 존재를 감지하였습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수식언을 재인식하였습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에게 별자리의 맥락을 할당합니다.]
[<관리국>이 당신의 격을 헤아립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이계의 언약’을 통해 본래 세계선의 시나리오를 떠나 있었던 몸.
본래의 시나리오로 다시 진입하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했다.

츠츠츠츳······.

전신의 근육이 경련하는 느낌과 함께, 메시지는 계속해서 떠올랐다.

[관리국이 당신의 심사를 완료하였습니다.]
[당신은 본래의 시나리오로 돌아가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관리국이 당신의 수준에 맞는 시나리오를 검토합니다.]
[검토가 완료되었습니다.]

나는 이어서 떠오르는 메시지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다.
아니, 실은 예정된 일이었다.

나는 본래 거주하던 세계선을 떠나 다른 세계에 다녀왔다.
그리고 범주는 다르지만, 나처럼 본래의 시나리오를 아득히 벗어나 되돌아온 존재들은 모두 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새로운 특성을 획득하였습니다!]
[당신은 ‘귀환자’의 자격을 얻었습니다.]
[당신을 위한 새로운 시나리오가 준비 중입니다.]

나는, 귀환자가 된 것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주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몇몇 남녀들이 보였다.
모두 나와 같은 귀환자들이었다.

“하하하, 드디어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 10년만이라고!”
“이 몸은 20년만이다.”
“자넨 어딜 갔다 왔나? 행색을 보아하니 무림 출신인가?”
“난 ‘그라투스’ 출신일세. 들어본 적 있는가?”

누군가가 내게 손을 흔든 것은 그때였다.

“오, 형씨가 마지막인가 보군.”

흑색 무복을 걸친 사내였다.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드러나는 눈매와 인상이 어딘가 익숙했다.
내가 간단히 인사하자, 사내가 다시 말을 걸어 왔다.

“형씨는 어디 출신이오?”
“지구 출신입니다.”
“아니, 그걸 물은 게 아니잖소. 여기 지구 출신 아닌 사람이 어딨다고······ 나는 형씨가 차원 이동 됐던 행성을 묻는 거요.”

서글서글한 말투로 웃는 사내. 순간 나는 이 사내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꾀주머니처럼 도톰히 솟은 볼. 야간 투시에 적합한 가는 눈과, 까마귀가 쪼아 먹은 것처럼 반쪽만 남은 눈썹.」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벌써 이 자가 등장할 시기라니······.

“다녀 온 곳도 지구였습니다. 다른 평행 차원의 지구요.”
“흐음, 그렇소? 이것 참 특이한 형씨로군.”

사내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기소개부터 하지. 내 이름은 왕 웨이롱이오. 내가 다녀온 <제2 무림>에서는 ‘비천호리’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지.”

비천호리(飛天狐狸) 왕 웨이롱(王卫荣).
그는 훗날 유중혁의 동료가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제 이름은 김독자입니다. 별명은······ 음······ ‘구원의 마왕’이라고 해둘까요.”

곁에서 이야기를 엿듣던 몇몇 귀환자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구원의 마왕? 크하하하핫······!”
“거참 거창한 칭호로군. 어디 삼류 판타지 세계라도 다녀온 모양이야!”

내 등을 팡팡 때리는 손길들. 대부분 무림 출신이거나 중세풍 이세계 출신의 귀환자들이었다.
비천호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멋진 별호구려 형씨.”
“뭘요.”
“그런데 형씨는 벌써 ‘귀환자 의복’을 지급 받은 모양이군.”
“아, 예.”

나는 입고 있던 [무한차원의 아공간 코트]를 내려다보았다. 이 의복이 본래 귀환자 전용 의복이라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언젠가 상대했던 ‘질문의 재앙’ 명일상이 떠올랐다. 아마 그 녀석도 나와 같은 절차를 거쳐서 지구에 소환되었겠지.
마침 허공에서 나타난 도깨비들이 귀환자들에게 코트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코트를 받아든 몇몇 귀환자들이 자신의 코트와 내것을 번갈아보더니 항의했다.

“이봐 도깨비! 내것보다 저 형씨가 입은 게 더 좋은 것 같은데······!”

당연한 일이다. 무려 95번 시나리오에서 온 코트가 보급용 코트보다 못하다면 말이 안 되니까.
나를 발견한 몇몇 도깨비들이 깜짝 놀라 상부에 뭔가를 보고하는 것이 보였다.

지금쯤 비형도 내가 돌아온 것을 알았으려나.

빨리 지구의 일행들이 보고 싶다.
몇 년이나 지난걸까?
다들, 잘 지내고 있어야 할 텐데.

귀환자 코트를 지급받은 비천호리가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크으, 옷발 좋구만. 형씨는 돌아가면 뭐부터 하실 거요?”
“일단 누굴 좀 찾아보려고요.”
“호, 기다리는 애인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나는 빙긋 웃었다. 비천호리가 계속해서 말했다.

“난 돌아가면 떵떵거리면서 살 생각이오. 모처럼 힘도 얻었겠다. 이제 갑질하던 녀석한테 주눅들 필요도 없으니까!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 이거지!”
“······그렇게 즐거운 일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지구도 많이 변했을 테니까요.”
“어허, 형씨는 벌써부터 약한 소리를 하는군. 이계에서 그 고생을 했는데, 지구로 돌아가서 못할 게 뭐가 있겠소?”

[귀환자 여러분, 집중해주시기 바랍니다.]

한바탕 소란이 가라앉자, 귀환자들을 담당하던 중급 도깨비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곧 지구 귀환이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귀환자 전용 메인 시나리오’를 할당 받게 될 것이며, 고향에서 그 시나리오를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간단한 유희라고 생각하고,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귀환자 시나리오? 내용을 똑바로 말해라!”

[자세한 내용은 시나리오 창을 확인해주십시오. 아, 참고로 이 시나리오는 그룹 시나리오이기 때문에 리더가 존재합니다. 여러분 중에서 가장 격이 높은 존재가 리더로 자동 선출되니,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리더라면 당연히 나지!”
“저기 저 무림 출신 친구가 꽤 세보이는데······.”

누가 이 그룹의 ‘왕’일까를 궁금해하는 눈치들이었다.

[지구 귀환이 시작됩니다!]

눈부신 빛살과 함께 열 명에 달하는 귀환자들이 한꺼번에 공간 이동을 시작했다.
잠깐 시야가 일렁인다 싶더니,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는 드넓은 도시의 한가운데에 떨어져 있었다.
듬성듬성 채워진 파손된 보도블록.
재건이 시작된 건축물들이 그리는 스카이 라인.
틀림없는 지구의 정경이었다.

“여긴 어디야? 저 문자는······.”
“한국이다! 한국이야!”

한반도 출신의 귀환자가 날뛰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귀환자 시나리오’와 관련된 정보들을 떠올리며 외쳤다.

“잠깐만요. 다들 진정하시고 잠시 모입시다.”

귀환자들은 이미 통제 불능의 상태였다.
성질 급한 몇몇 귀환자들이 지나가던 일반인들을 붙잡고 물었다.

“이보게, 여긴 어딘가? 그리고 지금은 서기 몇 년이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귀환자 트리거’가 발동했습니다!]

“나, 날짜를 물었어! 저놈들 귀환자다!”
“으아아악! 귀환자야! 다들 도망가!”
“빨리 연합에 신고해!”

‘귀환자’라는 말에 거리 전체가 들썩였다. 썰물처럼 달아나는 인파들과, 어리둥절한 표정의 귀환자들.

“뭐야. 내가 뭘 잘못했나?”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 # 45 ― ‘금의환향(錦衣還鄕)’이 시작됩니다!]

건물의 유리벽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튀어 오르는 스파크와 함께, 내 겉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누가봐도 끔찍한, 촉수와 오물로 들끓는 괴수의 모습.
실제 내 모습은 그렇지 않았음에도, 겉으로 보기에 나는 마치 작은 이계의 신격처럼 보였다.

아마 지구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나는 저렇게 보일 것이다.
지구의 사람들에게, 모든 귀환자는 재앙(災殃)이니까.

적의에 찬 눈으로 한발짝씩 다가오는 지구의 화신들.
돌아보니 멍한 얼굴의 비천호리가 떨리는 입술을 열고 있었다.

“혀, 형씨. 이게 대체······.”
“즐거운 일만 있진 않을 거라고 했지 않습니까.”

[163번째 귀환자 그룹의 소환이 완료되었습니다!]
[당신은 ‘163번째 귀환자 그룹의 왕’입니다.]





< Episode 57. 금의환향 (1) > 끝

< Episode 57. 금의환향 (2) >





간만의 꿈이었다.
희부연 시야 속에서 매캐하게 퍼지는 연기.
분명 한국이었지만 어딘가 낯선 구조물들과, 한 번도 본 적 없는 설화병기들, 멸망을 앞둔 세계처럼 새카만 하늘······.
꿈속의 한수영은 중얼거렸다.

뭔데 이거.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까가가강!

눈앞에서 두 명의 사내가 싸우고 있었다. 각자 검은색과 흰색 코트를 입은 사내들. 전에도 본 광경이었지만, 뭔가가 달랐다. 왜냐하면 두 사내는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중혁?

푸우욱,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명의 유중혁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 상황은 대체 뭐지? 대체 무슨 광경이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김독자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모든 것을 상실한 사람처럼 무릎을 꿇은 김독자. 한수영이 손을 뻗으며 다가가는 순간, 바로 곁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거기까지.

돌아보자, 그곳에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의 ‘한수영’이 있었다. 소름끼치는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물벼락이라도 맞은 듯 차가운 느낌과 함께 한수영은 벌떡 꿈에서 깨어났다.

“······!”

옅은 신음과 함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때, 한수영은 소파에 누워 있었다.

“······또 개꿈인가, 젠장.”

며칠 전부터 반복해서 꾸는 꿈이었다. 유중혁과 유중혁이 싸우고, 또 다른 자신과 김독자가 그것을 지켜보는 꿈. 처음에는 예지몽 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달리 해석해 보려고 해도, 좀체 감이 잡히지 않는 꿈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새로운 화신 연합의 출범으로 인해 한반도의 정세가 지각 변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멍한 얼굴로 일어난 한수영은, 뉴스를 들으며 입안에 들어 있던 차가운 얼음을 데굴데굴 굴렸다.
······응? 얼음?

“뭐지 이건? 아줌마가 내 입에 넣었어?”
“내가 그런 짓을 왜 하겠니.”

물을 받아 놓고 치성을 드리던 이수경이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한수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얼음을 오도독 깨물었다. 그럼 유상아인가.

“나 몇 시간이나 잤어?”
“두 시간.”
“유상아는?”
“탕비실에 커피 마시러.”
“탕비실은 무슨. 여기가 아직 회사인 줄 알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그들이 거주 중인 사무실은 버려진 회사 건물이었다. 한수영은 투덜거리며 일어나 탕비실로 향했다.

“야, 뭐하냐?”

탕비실의 테이블엔 작은 종이컵이 놓여 있었다. 새하얀 손가락으로 허공을 누비는 유상아. 홀로그램을 통해 떠오른 정보들이 유상아의 망막으로 고스란히 스며들고 있었다. 깜짝 놀란 한수영이 외쳤다.

“······미쳤어? 또 성흔 쓰고 있는 거야?”
“······.”
“너 그러다 진짜 젊은 나이에 골로 가는 수가 있어. 그렇게 강력한 성흔들을 남발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유상아가 사용하는 성흔은 <올림포스>의 「헤르메스 시스템」이었다. <스타 스트림> 각지의 정보들을 입수해 미래를 계측해내는 <올림포스>의 빅 데이터 네트워크.

“어쩔 수 없어요. 최악의 상황은 피해야 하니까.”
“미래 정보라면 나도 제법 알고 있다니까?”
“그것만으론 부족해요. 변수가 너무 많으니까요.”

성흔 「헤르메스 시스템」은 사용자의 수명을 극단적으로 단축시킨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한수영이 유상아를 만류할 수 없었던 것은, 일행들이 45번 시나리오에 도달하기까지 유상아의 공이 지대했기 때문이다. 만약 유상아가 계측한 미래 변수가 없었더라면, 일행들은 35번 시나리오나 40번 시나리오에서 큰 위기를 겪었을 터였다.
한수영이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그 녀석이 있었더라면······.

김독자가 사라진지도 벌써 3년이 흘렀다.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이 조금씩 희미해지기 시작한 것도 벌써 오래였다.
식어가는 커피에서 모락모락 김이 솟아났다. 그 김을 바라보며, 유상아가 입을 열었다.

“간만에 여기 앉아 있으니 회사 다니던 시절 생각이 나네요. 그때도 틈틈이 탕비실 와서 이렇게 숨어 있었는데.”
“······난 회사 안 다녀봐서 몰라.”
“당신은 확실히 회사 체질은 아니에요.”

유상아가 빙긋 웃자, 한수영이 입술을 비죽였다.

“그러고 보니 너 김독자랑 같은 회사 다녔댔지?”
“네.”
“둘이 친했어?”

지나가듯 묻는 그 말에, 유상아가 한수영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옅은 미소와 함께, 유상아가 답했다.

“그때도 전우였죠.”

―재앙 경보! 재앙 경보!

시끄럽게 울려대는 그 알림에, 한수영이 사무실로 달려갔다.
대기 중이던 이수경이 텔레비전을 통해 경보 지역을 확인하고 있었다.

“······또야? 이번에는 어디래?”
“부산이라는구나.”
“부산? 너무 먼데. 그쪽 애들이 알아서 하겠지.”

한수영은 퉁명스레 답하며 뉴스 속보로 떠오르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 속에 나타난 촉수 괴물들이 화신들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수경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수영아, 다른 애들이랑은 계속 연락하고 있니?”
“나 싫다는 애들한테 연락을 왜 해? 그보다 아줌마, 그릇에 뭐 떠오르는 것 같은데?”

그 말에 이수경이 자신의 성유물을 내려다보았다.
한수영이 물었다.

“이번엔 무슨 점 본 거야?”

이수경은 대답이 없었다. 이상한 낌새에 한수영이 고개를 들자, 이수경은 마치 넋이 나간 망부석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제야 한수영은 뭔가를 깨달았다.
김독자가 사라진 지 3년.
애초에, 이수경이 볼 만한 점이란 하나밖에 없었다.
한참이나 그릇 안을 들여다보던 한수영이 말했다.

“나 잠깐 부산 다녀올게. 그리고 유중혁 지금 어딨어?”


*


나는 허공에 떠오른 시나리오 창을 확인했다.

+

<메인 시나리오 # 45 ― 금의환향(錦衣還鄕)>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당신은 오랜 여행을 마치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의 사람들에게 당신의 존재를 알리고, 주요 거점 지역에 당신이 돌아왔다는 표식을 남기세요. 고향 사람들은 당신을 환영해줄 것입니다.
제한시간 : 없음
보상 : 200,000코인, 재앙화(災殃化) 해제
실패시 : 사망

* 해당 시나리오가 진행 중인 동안, 화신들은 귀환자들을 마물(魔物)로 인식합니다.
* 해당 시나리오가 진행 중인 동안 화신들은 귀환자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

클리어 조건 한 번 엿 같다.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당신의 목표 거점은 ‘서울 여의도’입니다.]
[현재 표식 가능한 거점 지역이 근처에 없습니다.]

나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45번 시나리오를 수행해야만 한다면, 차라리 내가 귀환자가 된 게 잘된 일일 수도 있다.
이 시나리오는 앞으로 열리게 될 ‘어떤 장소’에 대한 연습이니까.

“씨발! 왜 공격하는 건데!”

화신들의 공격을 받은 귀환자들이 화를 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화신들이라고 모두 강자들은 아니었다.
여전히 배후성이 없는 화신들도 있었고, 뒤늦게 시나리오에 합류한 이들도 있었다.
때문에, 화신들의 공격이 전부 귀환자들에게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아 못 참겠다 진짜. 이봐 친구들, 그냥 여기 다 쓸어버리고―”
“안 됩니다.”

내 만류에 귀환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 쟤들이 먼저 공격했다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는 무슨 이유? 시발, 쟤들 표정 보라고. 당장 우릴 잡아 죽이려는 얼굴들이잖아.”

확실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처했다.

[도깨비들이 당신의 존재를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본래 이 45번 시나리오는 귀환자들과 기존 화신들의 전면전으로 불거지는 전개였다.
내 그룹 번호가 163번이라고 했으니, 이미 앞서 소환된 162개의 그룹들은 지구 곳곳에서 한창 사고를 치고 다니는 중일 것이다.

제1차 귀환전쟁(歸還戰爭).

원작에서, 3회차의 한반도는 이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다.
어디까지나 원작 그대로 흘러가면 그렇다는 얘기다.

“뭐야, 재앙들끼리 뭔가 얘기하는 것 같은데?”
“지금 빨리 다 죽여버려! 흑염마황(黑炎魔皇)이 그랬잖아. 방심하고 있을 때 죽여야 편하다고!”
“아냐, 월하현제(月下賢帝) 말 못 들었어? 혹시나 소통 가능한 재앙이 있을 수 있으니 두고 보고 신중하게······.”

······뭔가 익숙한 별명들인데.
아무튼 화신들이 저런 태평한 소리를 할 수 있을 정도면, 아직 한반도의 화신들은 건재하다는 얘기였다.
내 말을 기다리던 귀환자가 내 멱살을 붙든 것은 그때였다.

“방해하면 너부터 죽인다. 비켜.”
“싫다면?”

귀환자가 나를 향해 ‘격’을 일으키는 순간, 나도 귀환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우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손목을 붙잡힌 귀환자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너, 너 뭐야······!”

공포에 질린 귀환자의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임시 채널이 열렸습니다.]
[한반도의 성좌들이 당신을 주목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에게서 묘한 기시감을 느낍니다.]

반가운 수식언들이 보였지만, 지금은 인사를 나눌 때가 아니었다.
나는 귀환자들을 향해 말했다.

[닥치고 전부 무기 집어넣어. 그리고 전부 내 옆으로 모여라. 늦게 모이는 놈은 모가질 날려 버릴 거니까 빨리 움직여.]

나는 일부러 평소보다 과격하게 말했다. 내 진언에 격의 차이를 실감한 귀환자들이 헐레벌떡 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혼란에 빠진 것은 귀환자들만이 아니었다.

“미친! 저 괴물 뭐야!”
“신고해, 빨리! 연합에 신고해!”

내 격을 느낀 화신들이 혼비백산하며 달아나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비천호리가 물었다.

“혀, 형씨. 설마 형씨가 우리 그룹의 리더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귀환자들이 탄식을 터뜨렸다.

“맙소사, 우리 중에 성좌가 있었다니······.”

근처에 모인 귀환자의 숫자는 나까지 총 열 명.
무림 출신 셋에 양산형 중세풍이 다섯.
그리고 기타 지역이 둘이었다.
나는 그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살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들이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돌아왔는지 나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초조한 얼굴의 귀환자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 확실한 것은, 이 시나리오가 실패하면 우리는 모두 사망한다는 겁니다.”

뒤늦게 시나리오 창을 연 귀환자들 중 몇몇이 침음을 흘렸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지인들도 만날 수 없고, 그리운 고향 땅도 밟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지구인들에게 그저 ‘재앙’으로 기억될 겁니다.”

내게 시비를 걸었던 귀환자도, 깊은 충격에 빠졌던 귀환자도. 하나둘 제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몇몇 귀환자들은 깨진 건물의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설마 우리가 공격을 받은 게······.”
“외형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보다 앞서 소환되었던 귀환자들이 있었으니까요.”

어떤 귀환자는 고향이 그리워 돌아오지만, 어떤 귀환자는 고향을 파멸시키기 위해 돌아온다. 그들은 지구의 안위를 위협했고, 어쩌면 지금도 그런 짓을 일삼고 있을 것이다. 나는 신신당부하듯 말했다.

“싸워서는 안 됩니다. 그럼 파멸뿐이니까.”
“이쪽은 싸울 의사가 없다고 전하면 어떨까요?”
“그것을 믿어줄지도 의문이지만, 사실상 의사를 전하는 것 자체가 힘듭니다.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우리의 언어는 저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니까요.”

귀환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혹시 다른 작전이라도 있습니까?”
“최대한 전투는 피하고, ‘목표 거점’에 표식을 남기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으세요. 그러면 시나리오는 클리어 되고,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다행히 이 그룹은 말이 통하는 분위기였다.
거기다 비천호리도 있으니, 운이 좋다면 별다른 충돌 없이 시나리오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나리오가 늘 그렇듯, 일이 그렇게 쉽게만 풀릴 리는 없었다.

“연합이다! 부산 연합이 왔어!”

사람들의 외침과 함께, 빠져나가는 화신들의 인파를 가르고 다가오는 인물들이 있었다. 순간 귓가가 먹먹해지며, 먼 뱃고동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불어오는 해운대의 바람에 희미한 소금기가 묻어 있었다.

[‘제4의 벽’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해운대의 모래사장 너머로 나타난 열두 척의 배.
그 배의 선두에서 두 사람이 뛰어 내리고 있었다.

“해상제독이 왔어!”
“충왕(蟲王)이다!”

새삼,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떤 것은 변했고, 어떤 것은 변하지 않았다.
캡을 깊이 눌러 쓴 소녀는 여전히 특유의 후드 집업을 입고 있었지만 더이상 교복 치마를 입고 있지는 않았다.
채집망을 든 소년은 여전히 특유의 매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목구비가 한결 뚜렷해지고 부쩍 키가 자라 있었다. 적어도 이제 내 허벅지에 들러붙을 키는 아니었다.

“꼬맹이 네가 할래, 아니면 내가 할까.”
“동전 던지기로 정하죠.”

그리웠다.
무척 보고 싶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새하얀 백사장 위로 떠오른 동전이 반짝였고, 나는 지금 달아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발을 뗄 수 없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일행들을 바라봅니다.]

어쩌면 희망을 품었던 걸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도 아닌 저들이라면, 나를 알아볼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시나리오 패널티로 ‘간접 메시지’가 왜곡됩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공에 간접 메시지가 떠올랐다.

[‘못 생긴 오징어’가 화신 ‘이지혜’를 도발합니다.]

이지혜가 나를 보며 말했다.

“저 오징어는 내가 죽인다, 꼬맹아.”




< Episode 57. 금의환향 (2) > 끝

< Episode 57. 금의환향 (3) >





이지혜의 손에는 충무공의 검이 쥐어져 있었다. 1863회차의 이지혜가 가지고 있었던 쌍룡검은 아니었지만, 꽤 성능이 준수한 무기였다.
아마 어디 박물관에 있던 걸 가져온 것 같은데······.

“어디 오징어포를 떠보실까.”

나는 당황하는 귀환자들을 뒤쪽으로 물렸다.

“지혜야. 멈춰! 나야!”

나는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말이 통할 턱이 없었다.
이지혜 쪽에서는 괴성을 지르며 촉수를 덩실거리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윽, 징그러운 오징어 새끼가. 죽어!”

스산한 칼날을 번뜩이며 달려오는 이지혜.
······이거 왠지 1863회차랑 비슷해지는데.

스거걱!

이지혜의 칼날이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잘려나간 머리카락들이 비산하자, 이길영이 추임새를 넣었다.

“잘 좀 해봐요 누나! 작은 촉수 말고 큰 촉수를 베라고요!”
“시끄러워!”

아무래도 내 머리카락이 저쪽에서는 촉수로 보이는 모양이다.
나인 줄 모르고 저러는 건 알지만, 그래도 서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긴장하며 물러나는 귀환자들에게 재차 경고했다.

“다들 공격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다행히 귀환자들이 내 말을 들어준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비천호리가 착잡한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언제든 도와줄 테니 말만 하시오, 형씨.”

비천호리는 <제2 무림>에서 꽤 뛰어난 고수로 활동했던 귀환자. 정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닥친다면 그의 도움을 빌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이지혜에게 내 존재를 알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오징어 베기!”

이 시나리오에서, 내 ‘음성 언어’는 이지혜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하지만 본래 인간의 의사소통은 음성 언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뭐야, 이상하게 움직이지마 인마!”

나는 [바람의 길]을 발동해, 현란한 스텝으로 바닥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이지혜의 검로를 피해 나가며 바닥에 죽죽 그어지는 선들. 뒤쪽의 귀환자들도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탄성을 터트렸다.
사실 이게 먹힐지 안 먹힐 지는 잘 모르겠다. 원작에서는 이런 종류의 소통 가능성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이지혜가 내 의도를 언제쯤 눈치채 주는가 하는 것인데.

“뭐야, 쟤 바닥에 글씨 쓰는데요?”

다행히 눈치 빠른 이길영이 먼저 내 의도를 파악했다. 그러자 난도질을 반복하던 이지혜가 멈칫하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내 현란한 발자국으로 쓰인 글씨가 남겨져 있었다. 악필이긴 하지만, 알아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 김독자야.

내가 쓴 문장은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시나리오 페널티로 당신이 쓴 문자가 왜곡됩니다.]

······이것까지 페널티가 걸린다고?
이지혜를 대신해 왜곡된 문장을 읽어준 것은 [제4의 벽]이었다.

「나 는 멋 쟁이 오징 어 다」

[등장인물 ‘이지혜’가 ‘귀살 Lv.10’을 발동합니다!]

이지혜의 눈동자에 붉은 귀화가 일렁이며, 나를 향해 가속을 시작했다.

스걱, 스가각!

아까보다 훨씬 빨라진 검격에, 조금씩 피하는 것이 버거워졌다.
항복 표시로 코트를 벗어 흔들기도 해보았지만, 내 모든 노력은 시나리오 페널티에 의해 허사가 될 뿐이었다.

[‘못 생긴 오징어’가 화신 ‘이지혜’를 도발합니다.]

“죽어!”

슬슬 머리가 아파왔다.
이런 식의 환시(幻視)가 계속되는 상황이라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 의사는 저쪽에 전달되지 못할 것이다.

······역시, 그냥 제압하는 것이 최선이겠지.

하지만 왜인지,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어쩌면 1863회차를 다녀오면서 내 안에서도 뭔가가 변한 걸까.

「그때, 멋쟁이 오징어의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아, 잠깐만. 혹시 그거라면······?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저질러 보기로 했다.
아무리 시나리오가 내 언어를 왜곡한다 해도, 그것만큼은 왜곡할 수 없을 것이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화신 ‘이지혜’에게 91코인을 후원합니다.]

무엇으로도 왜곡되지 않는 것.

[시나리오 페널티로 당신의 ‘간접 메시지’가 왜곡됩니다.]
[‘못 생긴 오징어’가 화신 ‘이지혜’에게 91코인을 바칩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후원하는 코인의 ‘숫자’다.
갑작스런 오징어의 후원에 이지혜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알아 들어라 지혜야, 제발.

[‘못 생긴 오징어’가 화신 ‘이지혜’에게 91코인을 바칩니다.]

“이런 거 준다고 공격 안 할 줄 알아?”

[‘못 생긴 오징어’가 화신 ‘이지혜’에게 91코인을 바칩니다.]

“아 짜증나게 하지 마! 나 코인 100단위로 안 떨어지는 거 제일 싫은데!”

······그래? 그럼 이건 어떠냐.

[‘못 생긴 오징어’가 화신 ‘이지혜’에게 9158코인을 바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지혜의 공격이 멈췄다.
뭔가를 알아들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고, 후원 코인의 양이 갑자기 많아졌기 때문인 듯했다.
이길영이 물었다.

“갑자기 왜 멈춰요 누나?”
“아니, 저게 자꾸 나한테 코인을 주잖아.”
“코인을요?”

깜짝 놀란 이길영이 나를 보며 말했다.

“혹시 성좌인가?”
“‘못 생긴 오징어’ 같은 수식언을 가진 성좌가 어딨냐?”

있다.
아니, 있었다.
오징어는 아니지만 하여간 비슷한 수식언을 가진 녀석은 있었다.
지금은 수식언이 바뀌었지만······ 젠장, 내가 왜 이런 설명을.
훌쩍 물러난 이지혜가 나를 미심쩍은 눈으로 노려보며 물었다.

“왜 자꾸 91코인을 주지?”
“91코인?”
“그래. 그러더니 마지막엔 9158코인을 줬어.”
“9158코인이면 꽤 많은데, 숨겨진 히든 시나리오인가? 아니면 뭔가 의미가 있는 걸지도······.”

기회는 지금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생긴 오징어’가 화신 ‘이길영’에게 7942코인을 바칩니다.]

내 코인 세례에 이길영이 화들짝 나를 바라보았다.

“7942? 이거 설마······.”

아이들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맑은 눈망울들을 보며, 나도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래, 그거다 얘들아.
나야. 김독자라고.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의 정체에 의구심을 품습니다.]
[한반도의 성좌들이 당신의 정체를 궁금해합니다.]

뜻밖의 성좌가 채널에 입장한 것은 그때였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의 정체를 눈치챘습니다!]

술과 황홀경의 신 디오니소스.
그러고 보면, 이 ‘7942’를 내게 알려준 것은 저 디오니소스였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성좌라면, 내가 보낸 메시지를 아이들을 대신해 해독해 줄지도 모른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91’이란 일종의 숫자 유희라고 주장합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디오니소스의 추측은 맞았다.
그냥 읽으면 ‘구십일’일 뿐인 저 숫자는, 내 딴에는 아이들에게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암호였다.

9(구) 1(One).

구원.
천만다행으로, 디오니소스는 내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해한 듯했다. 이제 저 디오니소스가 내가 ‘구원의 마왕’이라는 걸 알려주기만 한다면······.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저 오징어는 지능이 뛰어난 오징어가 틀림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길영이 기뻐하며 외쳤다.

“뭐야, 역시 히든 피스였네. 촉수를 자를 때마다 코인을 주는 건가?”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번 시나리오가 끝나면 나는 <올림포스>를 쳐부술 것이다.
신이 난 이지혜가 덩달아 외쳤다.

“땡잡았네. 야 길영아, 네가 반 맡아!”

이지혜가 달려든 촉수는 내 팔이었다.

“되게 날쌔네. 누나가 먼저 저기 큰 촉수부터 잘라줘요!”

그건 내 다리였다.

“아 되게 거슬리네. 그냥 중간부터 끊을까.”

그것은······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결국 참다못한 내가 ‘격’을 해방하려는 순간, 창공에서 용의 포효성이 들려왔다.

그오오오오오!

귀환자들조차 순간적으로 움찔할 정도의 박력. 새카만 용의 비늘이 허공을 덮는 것을 보며, 나는 창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그리운 얼굴이 있었다.
이지혜가 그랬고, 이길영이 그랬듯······ 아이는 많이 자라 있었다.

“맨날 늦어 신유승! 지 발로 다니지도 않는 게!”

도톰한 볼의 젖살만이, 소녀가 내가 기억하는 그 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키메라 드래곤을 타고 나타난 신유승이 바닥으로 착지했다. 신유승은 이쪽을 흘끗 보더니 이지혜에게 물었다.

“아직 처리 못 했어요? 금방이라더니.”
“하려던 참이었어. 그런데 재앙 중에 이상한 게 끼어 있어서.”
“이상한 거?”
“저기 저 오징어.”

신유승이 나를 보았다.

“쟤가 자꾸 나한테 코인을 주잖아. 기분 나쁘게······.”

신유승은 계속해서 나를 보고 있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뭐야 시발! 갑자기 다가오지 마!”

이지혜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나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스트 마스터가 왔다!”
“됐어, 이제 해치울 수 있다고!”

신유승의 등장과 함께, 해안가의 주변부로 달아났던 화신들이 백사장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곳곳에서 부딪치는 병장기 소리. 용기를 얻은 화신들이 나와 귀환자들을 향해 칼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사실 이 45번째 메인 시나리오에는, 진짜 히든 피스가 숨겨져 있다.
만약, 우리 그룹이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낳지 않고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수만 있다면······.
귀환자들과 함께 밀려난 비천호리가 외쳤다.

“형씨! 우리도 오래 버틸 순 없소! 뭘 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빨리 하시오!”

인간은 같은 인간조차 신뢰하지 않는 종족이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재앙’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죽어 촉수 괴물 새끼들아!”

자신과 유사한 것은 지배하려 하고, 자신과 다른 것은 배제하려 드는 종족. 사람들의 망막에 내 모습이 비친다. 그들의 눈에 나는 그저 촉수 괴물일 뿐이다. 혹은, 촉수 괴물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쩌면 다른 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원작의 유중혁도 몇 번인가 이런 ‘귀환자 루트’를 밟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유중혁은 단 한 번도 이 ‘히든 피스’를 제대로 완수한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조금 힘들고 지난했어도, 다른 길을 걸었더라면.’」

‘귀환자 루트’를 탔던 모든 유중혁은 후회의 길을 걸었다.
그렇기에 나는 녀석의 실패를 안다.
내가 실패할 수 있는 모든 길은 이미 녀석이 걸었던 길.
그리고 유중혁은, 이제 원작에 존재하지 않는 길을 향해 떠났다.
다시 무수한 실패의 가능성이 열린 세계로.

[‘제4의 벽’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그러니 나도 질 수 없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뭐야, 갑자기 다들 왜 지랄이야?”
“지혜 누나, 조심해요!”

다가가는 나를 향해, 이지혜의 칼날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푸슈슛!

코트가 보호하지 못한 살갗에 피가 튀었다.
내가 피하지 않을 줄은 몰랐는지, 깜짝 놀란 이지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틈을 비집고 다른 화신들도 내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내 주변은 찔러오는 화신들의 병장기로 가득해졌다. 코트의 외피에 희미한 상흔이 늘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공격은 받아내고, 어떤 공격은 막아내며,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 길의 끝에 한 소녀가 있었다.
내가 첫 화신으로 삼았던 아이.
나처럼 ‘재앙’이 될 예정이었던 신유승이 있었다.

아이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길을 헤치며 아이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아이가 두려워하거나 겁먹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피가 튀고, 살점이 찢어져도 개의치 않았다. 경각심을 주지 않기 위해 격을 방출하지 않았고, 위협을 가하지 않기 위해 무기를 꺼내지 않았다.

코앞에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멸망’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중학교에 입학해도 될 나이.

아이가 이렇게 자라날 동안, 나는 아이의 곁을 너무 오래 비웠다.
가슴 깊은 곳을 찌르는 뾰족한 감각에, 나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못 생긴 오징어’가 화신 ‘신유승’을 바라봅니다.]

문득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계속 ‘못 생긴 오징어’로 있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은밀한 모략가’의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저들이 원했던 결말이 저곳에서 너와 함께 죽는 것이었다면? 그래도 기어코 저들을 구하겠다는 것인가?】
【그것은 구원이 아니다. 저주다.】

오만했다. 내 그리움은 내 그리움일 뿐.
내 감정을 일행들 또한 공유하고 있을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이 기억하는 ‘김독자’는, 그저 이기적인 성좌일 것이다.

멋대로 목표를 강요하고, 삶을 강요하고, 상처를 강요하는.
가장 필요할 때는 곁에 없었던, 그런 동료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아이는 울고 있는 것일까.」

이지혜와 이길영이 병장기를 내렸고, 화신들이 공격을 멈췄다.
모두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나는 나의 화신을 향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혼자서 기특하게 자라난 나의 아이에게 예를 표하듯, 혹은 내가 함께 해주지 못했던 그 모든 시간에 용서를 구하듯.

“다녀왔다, 유승아.”

내 말은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화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천천히 손을 뻗은 나의 화신이, 내 머리 위로 자신의 작은 손을 얹었다.





< Episode 57. 금의환향 (3) > 끝

< Episode 57. 금의환향 (4) >





머리 위에 깃털처럼 내려앉은 손의 감촉.
마음속 깊은 곳에 굳어 있던 뭔가가 뭉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나를 알아본 것일지도 모른다.
숙였던 고개를 들자, 신유승의 한없이 맑은 눈동자가 보였다.

“······아저씨?”


*


잠시 후, 나는 [키메라 드래곤]을 타고 허공을 날고 있었다.
정확히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귀환자들도 비슷한 모양새였다. 다리에 넷, 날개에 둘, 꼬리에 셋······ 거기다 나까지. 총 열 명의 귀환자들은, 서울행 드래곤을 타고 날아가는 중이었다.
나는 멀미 증상을 일으키는 귀환자들을 독려하듯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서울입니다. 다들 힘내세요.”
“끙, 난 뛰어가는 게 더 빠른데······.”

비천호리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공중으로 가는 게 더 안전합니다. 혹시 모를 위험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뭐······ 형씨가 그렇다니까 그런 거겠지. 근데 저 애, 형씨의 아이인거요?”

아무래도 신유승을 보며 묻는 것 같아서,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비슷합니다.”

어쨌든 내 화신이고, 내 아이만큼이나 각별한 건 사실이니까.

“······허, 젊은 나이에 고생이 많았겠구먼. 와이프는?”

와이프라니, 나는 애초에 결혼한 적도 없다.
그런데 내 침묵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비천호리가 동정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다른 귀환자들도 비슷한 표정들이었다.

“쯧쯧 거참 안됐구만······.”
“자, 모두 조금만 힙냅시다. 어차피 이 시나리오가 끝나야 우리도 가족을 만날 수 있으니까.”
“형씨! 힘내게!”

역시 귀환자들에게 제일 잘 먹히는 정서는 가족애인 모양.
오해야 어쨌거나 일은 생각보다 잘 풀리고 있었다. 생각보다는 말이다.

“뭘 그렇게 수군거려? 조용히들 안 해?”

이지혜의 말에, 귀환자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내 쪽을 흘끔거리던 이지혜가 신유승에게 말했다.

“이거 잘못되면 다 너 때문이야. 알지?”

신유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십여 분 전, 신유승은 이지혜와 이길영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 오징어, 독자 아저씨인 것 같아요.”

내 머리카락을 열심히 잘라내던 이지혜는 입을 딱 벌렸고, 내 다리를 잘라보려고 기를 쓰던 이길영은 뻣뻣이 굳었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두 사람의 반응은 똑같았다.

“······이게 독자 아저씨라고?”
“우리 형이 오징어일 리가 없잖아, 멍청아!”

신유승이 빽 소리를 질렀다.

“정말이야! 독자 아저씨 맞다니까요!”

그런 말다툼을 벌이며 날아온 지도 벌써 십 여분 째.

“쟤 또 병 도졌네······ 길영아, 이번이 몇 번째지?”
“다섯 번짼가 여섯 번짼가.”

휑한 바람이 얼굴을 때리며 지나갔다.
내 곁에 몸을 쪼그리고 앉은 신유승이 속상한 듯 한숨을 쉬었다.

“아저씨······.”

[마왕,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시나리오 패널티로 ‘간접 메시지’가 왜곡됩니다.]
[‘못 생긴 오징어’가 자신의 빨판을 벌름거립니다.]

고개를 끄덕인 신유승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봐요! 아저씨 맞잖아!”

고마운 일이었다.
정말 고마운 일인데, 왜 이렇게 심경이 복잡한 건지 모르겠다.
이지혜가 한숨을 푹푹 쉬며 말했다.

“너 저거 독자 아저씨 아니면 어쩔 건데?”
“그건······.”
“저 재앙들 줄줄이 다 서울까지 데리고 갔다가, 큰일 나면 어쩔거냐고 꼬맹아.”
“······만약 아저씨가 아니라도.”

신유승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을 이었다.

“상아 언니가 말했잖아요. 적의를 가지지 않은, 소통 가능한 재앙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금까지 그런 케이스가 없었잖아.”
“이번이 처음일 수도 있잖아요.”

다행히 유상아는 내가 남긴 말을 일행들에게 잘 전달한 모양이었다.
45번 시나리오에서 재앙으로 변한 귀환자들이 찾아올 것이고, 그들 중에는 적의를 가지지 않은 존재들도 분명 있을 것이라고.

“상아 언니 통역 스킬 레벨 높잖아요. 이번엔 소통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만약 일이 잘못되면 제가 테이밍이라도 해보죠 뭐.”

조금씩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았다.
어쨌든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되는 것이다.
일행들 사이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고, 한동안 창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만이 들려왔다. 나는 신유승에게 말을 걸었다.

‘유승아.’

[시나리오 패널티로 당신의 언어가 왜곡됩니다.]
[‘못 생긴 오징어’가 주의를 끕니다.]

신유승이 나를 바라보았다.

“네, 아저씨.”

‘내가 김독자란 거, 애써 일행들한테 설득시키지 않아도 돼.’

[시나리오 패널티로 당신의 언어가 왜곡됩니다.]
[‘못 생긴 오징어’가 열 개의 다리를 배배 꼽니다.]

“네? 어째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대로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못 생긴 오징어’가 우울한 표정을 짓습니다.]

나는 말없이 이지혜를 바라보았다.

「거짓말, 그럴 리가 없어.」

머릿속으로 고스란히 들려오는 이지혜의 상념들. 나는 일행들을 만난 순간부터 줄곧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한 채였다.

「독자 아저씨는······.」

어떤 감정은 언어로 전달되지 않는다. 파편화된 문장들과 발기발기 찢어진 단어들. 어떤 시간들은, 그렇게 문장으로 남지 못한다. 아직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존재는,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인 것이다.

눈앞에서 동료가 죽어가는 무력감.
누군가가 희생하는 것을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절망감.

이지혜의 장검집에 달린 작은 키링이 흔들렸다.
나는 그 키링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지혜는 이미 오래전부터 ‘상처받은 검귀’였다.
그런 감정을 숨기려는 듯, 이지혜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야, 다시 잘 봐봐. 이번엔 진짜 독자 아저씨 맞아?”
“······.”

신유승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쩌면, 내 감정을 함께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성좌와 화신의 관계다. 말하지 않아도, 말한 것보다 많은 것들을 이해하는 것.
이지혜가 짓궂게 웃었다.

“야, 왜 말이 없어? 역시 자신 없는 거지?”
“그게 아니라······.”
“신유승 또 저럴 줄 알았다니까!”

이길영이 히죽거리며 끼어들었다.

“누나, 얘 전에도 그랬잖아요! 무슨 개구리보고 저건 독자 아저씨가 돌아온 게 틀림없다면서―”
“죽여 버린다······.”
“기억 안 나냐? 그때 너 때문에 우리 다 독 걸려서 죽을 뻔했잖아.”

이지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런 일도 있었지.”
“쟤네 집에 컬렉션도 있잖아요. <개구리 김독자>, <촉수 재앙 김독자>, <거의 김독자일 뻔했던 코끼리 괴수종>······.”
“죽는다고 했다······.”
“근데 <개구리 김독자>는 나 주면 안 돼?”
“이게 진짜······!”

쿠구구구구!

키메라 드래곤이 격렬한 날갯짓을 하며 갑자기 허공에 정지했다.
이지혜가 비명을 질렀다.

“와악! 뭐야 갑자기?”

일련의 비행정들이 앞길을 막고 있었다. 한두 대가 아니었다. 40번대 이후의 시나리오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코인 비행정들. 비행정들의 갑판에는 큼지막하게 ‘GG’라고 쓰여 있었다.
······저거 왠지 뭔지 알 것 같은데.

―부산 연합, 여기까진 뭐하러 온 거지?

비행정에서 일말의 호의도 느껴지지 않는 고압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작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길영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내가 왜 안 나오나 했지.”

원작의 전개대로라면, 25번 시나리오 이후 한반도는 몇 개의 지역별 연합으로 갈라진다. ‘부산 연합’, ‘대구 연합’, ‘서울 연합’······.
대부분의 연합들은 강력한 배후성을 둔 화신을 중심으로 뭉치게 되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경기 지역에도 그런 녀석이 하나 있었다.

―재앙종은 경기 지역으로 들일 수 없다. 지금 당장 재앙종을 두고 떠나라.

경기(Gyeonggi) 연합.
말이 경기 연합이지, 사실 저 연합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경기도 출신이 아니었다. 오직 집단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약탈자들. 몇 번의 회차에서 저 ‘경기 연합’은 유중혁의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저 연합을 이끄는 수장이 바로 ‘십악’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오 초 안에 떠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오.

곤란하다는 듯, 이지혜가 장도를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저렇게 나오면 또 안 싸울 수가 없는데 말이지.”

본래의 전개대로였다면, 지금의 일행들은 단일 무력으로 경기 연합을 상대할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3회차는 원작과는 많이 달라졌다.
이지혜는, 단순히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난 부산 연합의 리더, 이지혜다.”

이지혜가 빼든 장검에서 새파란 불길이 치솟았다. 그 섬연한 마력의 파장을 보며,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지혜야, 정말 노력했구나.

그것은 에테르 블레이드였다. 무림에서도 손에 꼽는 고수들만이 쓸 수 있는 기술을, 이지혜는 자신의 힘으로 구현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해상제독! 이곳은 바다가 아니다! 적어도 하늘에서 우리 ‘경기 연합’은······!

“그건 해 봐야 알겠지.”

씩 웃은 이지혜가 칼날을 뒤로 젖히며 도약 자세를 취하는 순간.

콰아아앙!

반대편 비행정들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파공음과 함께 연달아 반쪽으로 잘려나가는 비행정들. 이지혜가 어이없다는 듯 이길영을 돌아보았다.

“저거 혹시 티타노냐? 왜 끼어들고 그래?”
“······제 티타노 죽은 지가 언젠데요.”

키메라 드래곤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으니, 신유승이 한 짓도 아니었다.
그로부터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경기 연합의 비행정들이 모두 폭파당했다. 새카맣게 피어오르는 폭연 속에서, 누군가가 훌쩍 뛰어올라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이지혜가 경계하며 칼날을 세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경계심은 옅어졌다.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사색이 된 신유승이 이지혜를 향해 소리쳤다.

“지혜 언니! 희원 언니한테 벌써 말했어요?”
“그게······ 아까 전에 문자 벌써 돌렸거든. 근데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네······.”

이지혜가 생글생글 웃으며 사과했다.

“오랜만에 다 모이고 좋지 뭐! 저거 독자 아저씨 아니면 오징어 파티나 하면 되니까. 희원 언니이―!”

다가오는 그 반가운 얼굴을 보며, 나는 심장 한 편이 아릿해졌다.

―어차피 이럴 거였으면 며칠 동안 준비했던 건 다 뭐예요! 나한테 준 스킬들은 대체 뭐냐고요!”
―그건 28번 시나리오의 ‘사스콰치’들을 상대하라고 알려드린 겁니다.

정희원을 보는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말한 모든 것들을 지켰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해졌다.

―씨발! 개소리하지마! 못 보내! 또 혼자 가지마! 제발!

자욱한 연기와 함께, 특공복을 입은 정희원이 키메라 드래곤의 등에 착지했다. 거무튀튀한 빛을 내는 [심판자의 검]이 사납게 울고 있었다. 서슬 퍼런 눈으로 오징어들을 돌아본 정희원이 물었다.

“누가 김독자라고?”

움찔 놀란 귀환자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신유승이 재빨리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아, 아직 누가 아저씨인지는 몰라요. 아까 언뜻 아저씨 같은 느낌을 받은 것뿐······.”

정희원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구나. 그래서 상아 씨한테 가는 거야?”
“네, 상아 언니한테 가서 의견을 좀 구하면······.”
“그럴 필요 없어. 내가 김독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으니까.”
“네?”

[등장인물 ‘정희원’이 ‘심판의 시간’의 발동을 준비합니다.]

“회를 떠보면 알겠지. 저 오징어가 진짜 독자 씨라면 살아날 것이고.”

거의 광기에 가까운 마력이 정희원의 칼날에 맺히고 있었다.

“아니면 내 손에 뒈질 거니까.”

무섭게 피어오르는 귀화(鬼火).
그제야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신유승이 외쳤다.

“아저씨! 도망가요!”

키메라 드래곤이 울부짖는 순간, 나는 귀환자들과 함께 드래곤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창공에서 마력이 충돌하는 굉음이 터졌고, 나는 [바람의 길]을 발동해 떨어지는 귀환자들을 하나씩 끌어당겼다.

어차피 서울은 코앞이었다.
어떻게든 여의도만 도착하면, 나는 싸우지 않고도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다.

나를 비롯한 열 명의 귀환자들은 손을 마주 잡은 채 허공에서 하나의 진형을 만들었다. 모두 사전에 약속되어 있던 것이었다.

“비천호리!”
“맡겨 두게!”

무림에서 가장 빠른 발을 가진 비천호리가, 허공에서 답보를 거듭하며 쾌속의 길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진신절기 중 하나인 [답설무흔(踏雪無痕)]이 발동하며 내가 만든 [바람의 길]에 탄력을 불어 넣었다.
우리는 바람개비처럼 회전하며 가속에 가속을 거듭했다. 순식간에 경기권의 창공을 뚫고 서울에 진입하자,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목표 거점’에 거의 근접했습니다.]

멀리서 보이는 여의도의 정경.
그곳에 우리가 표식을 남겨야 할 거대한 비석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나는 시공간이 삐거덕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저곳으로 가면 안 된다는 강렬한 예감이 머릿속에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황급히 방향을 틀어 일행들의 진로를 바꾼 것은, 거의 본능에 의존한 선택이었다.

콰콰콰콰콰!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가진 검강이 창공을 휩쓸고 지나갔다. 검강은 하늘의 천장을 부술 것처럼 솟아올라, 이내 천공에 균열을 내고 사라졌다. 맞았다면 뼈도 추리지 못할 무시무시한 일격이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지금 이 기술을 쓸 수 있는 화신은 한반도에 하나뿐이었다.
고개를 숙이자, 나를 올려다보는 서늘한 시선과 마주쳤다.

멈췄던 초침이 흘러가듯, 아주 천천히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 꽂아 넣은 거대한 [흑천마도]. 내가 아는 그 어떤 존재보다 강력하고,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굳건한 의지를 가진 화신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중혁.”

그곳에, 이 세계의 패왕(霸王)이 있었다.





< Episode 57. 금의환향 (4) > 끝

< Episode 57. 금의환향 (5) >





대체 어떻게, 이곳에 유중혁이 있는 것일까.
나는 혼란을 느끼면서도 귀환자들을 인도해 무사히 지상에 착지했다. 비석 앞에서 강대한 격을 흩뿌리는 유중혁을 보며, 긴장한 귀환자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비천호리가 물었다.

“형씨, 저 자는······?”
“물러서세요, 제가 말해보겠습니다.”

나는 비천호리에게 눈짓을 하며, 유중혁을 향해 조금씩 접근했다.
어쨌든 우리 목적은 ‘목표 거점’에 표식을 남기는 것.
그것만 완수하면 시나리오는 완수된다.
유중혁의 십여 미터 앞으로 다가간 순간, 유중혁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바뀌었다.
나는 침을 삼키며 말했다.

“유중혁.”

당연하게도, 내 목소리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비켜줘. 부탁한다.”

유중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1863회차에 다녀온 내가 강해진 만큼, 이곳의 유중혁도 강해졌을 것이다.
얼핏 느껴지는 기세만으로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이렇게 된 이상, 내 화신체를 기절시킨 뒤 유중혁에게 이입해서······.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의 발동이 취소됩니다.]
[해당 인물에 대한 복합적인 이해도가 부족합니다.]
[현재 해당 인물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한 독해력이 부족합니다.]

······뭐?

나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이곳은 틀림없는 3회차다.
내가 잘 모르는 1863회차가 아니란 말이다.

고오오오오······!

눈앞의 유중혁이 낯설게 느껴졌다.
······ 대체 지난 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형씨! 피하시게!”

때마침 비천호리가 밀치지 않았더라면, 유중혁의 칼날에 두 쪽이 날 뻔했다. 비천호리가 외쳤다.

“같이 해치우지! 위험한 놈인 것 같은데!”
“······안 됩니다.”
“왜? 혹시 저놈도 아는 놈인가?”

나는 비천호리를 보며 말했다.

“제 동료입니다.”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우스웠다.
언젠가의 유중혁의 기분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나와 유중혁은 잘 맞지 않는다.

성격도 다르고,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방식도 다르며, 누군가와 소통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럼에도 우리는 몇 번이고 서로의 목숨을 구해주었고,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까 죽일 수는 없습니다.”

나는 코트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유중혁에게 유중혁의 신념이 있듯, 내게도 나만의 신념이 있다.

[‘신념의 칼날’이 활성화됩니다!]

그것은 내가 쓰던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아니었다.
내 검보다 훨씬 거무튀튀한 광택이 도는 칼날.
이 검은 1863회차의 한수영이 쓰던 것이었다.

기이이이잉!

솟아오른 ‘신념의 칼날’의 에테르가 깊은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해당 아이템의 등급이 시나리오의 형평성에 맞지 않습니다.]
[해당 아이템의 능력치가 일부 조정됩니다.]

한수영의 방식으로 정제된, 95번 시나리오의 [부러지지 않는 신념].
유중혁의 동공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거대한 촉수에 에테르를 휘감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만둬, 유중혁. 난 싸울 생각이 없어.”

어떻게 하면 유중혁과 싸우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가 김독자라는 걸 알릴 수 있을까.
다가오는 유중혁의 칼날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순간, 번뜩 생각난 것이 있었다.
······잠깐만, 혹시?
확신할 수는 없었다. 또 ‘시나리오 페널티’ 때문에 효과가 왜곡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안 해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이템, ‘한낮의 밀회’를 발동하였습니다!]
[현재 대상과의 연결 상태가 양호합니다.]
[시나리오 페널티로 인해 아이템 사용주가 ‘못 생긴 오징어’로 변경됩니다.]

나는 곧바로 유중혁에게 메시지를 타전했다.

―유중혁! 나 김독자야! 베면 안 돼!

[한낮의 밀회]. 그것은 언젠가 유중혁이 빈사 상태가 되었을 때 소통용으로 남겨둔 아이템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아이템이, 아직까지도 유효했던 것이다.

[시나리오 페널티로 인해 발송한 메시지가 왜곡됩니다.]

―덤벼라 개복치.

······이런 빌어먹을. 이것까지 왜곡이냐?
나는 살짝 경계하며 유중혁의 눈치를 살폈다.
내용이 이상하게 갔지만, 유중혁이 메시지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한낮의 밀회’는 정해진 사람들끼리만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

사용주의 이름이 바뀌었다 해도, 눈치 빠른 유중혁이라면 메시지를 받은 것만으로 내 정체를 짐작해낼 것이다.

―유중혁! 멈추라니까! 나 김독자라고!

[시나리오 페널티로 인해 발송한 메시지가 왜곡됩니다.]

―바다의 왕을 가리자.

유중혁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검을 내렸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드디어, 나라는 걸 눈치챈 것일까?

쿠오오오오오!

검을 내린 유중혁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기류가 흘러나왔다. 푸른빛 격으로 뒤덮였던 전신이 다시 황금빛 격류에 휘감기고 있었다.
유중혁이, 초월격을 해방하고 있었다.
나는 당황하며 물었다.

“······유중혁?”

머릿속이 띵했다.
유중혁이라면 분명 메시지를 받은 것만으로도 내 존재를 눈치챘을 것이다.
그런데, 왜?

까아아아앙!

검과 검이 마주치는 순간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손목이 없어진 듯한 충격 속에서 한줄기 의문이 솟았다.

「어째서 ‘한낮의 밀회’가 발동했던 거지?」

[한낮의 밀회]는 기간제 아이템이다. 일정 시일이 경과하면, 추가 코인을 지불해야만 사용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그런데 ‘한낮의 밀회’는 어떤 지연도 없이 발동했다.
즉, 누군가가 그 기간을 계속 연장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을 이야기합니다.]

유중혁의 전신에서 마침내 거대 설화가 개방되었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지금 유중혁은 진심이었다.

“빌어먹을······!”

나는 물러서지 않고 녀석을 마주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을 이야기합니다.]

같은 거대 설화라면 나도 지지 않는다.
애초에 이 설화의 최고 담화자는 나라고.
나는 달려드는 유중혁을 향해 마왕의 ‘격’을 일으켰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마왕의 격을 개방합니다!]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성채가 보였다.
한때는 73번째 마계에 있었던 나의 [공단].
‘은밀한 모략가’의 도움으로 서울로 전송되었던 내 성채였다.
[공단]이 이곳에 있는 한, 나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

[서울 지역의 마기가 당신의 격을 칭송합니다!]

쩌저저저적!

등줄기를 찢고 나온 검은 날개. 어둠 속성이 개방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에테르 블레이드를 토했다. 초월좌의 검강과 신념의 칼날이 충돌하며 굉음을 일으켰다.

까가가가각!

첫 충돌은 강렬했다. 나와 유중혁은 한 걸음씩을 밀려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서로를 향해 재차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검과 검의 충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우리는 검을 부딪치고, 부딪치고, 또 부딪쳤다. 마치 그것만이 서로가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전부라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싸웠다.

믿을 수 없었다.

유중혁이 강한 것도 알고 있었고.
그동안 더 강해졌을 거라고 예상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강해졌을 줄은 몰랐다.

[바람의 길]을 발동하고, [전인화]까지 사용했음에도 나는 유중혁에게 승세를 잡을 수가 없었다.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는 유중혁은 굳건한 벽처럼 그곳에 서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모든 것이 오해라고 생각했다.
유중혁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공격하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콰콰콰콰콰!

싸우는 내내, 유중혁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녀석은 타고난 검사였고, 그 무수한 세월 동안 검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써왔다.
그렇기에 나는 알 수 있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유중혁은 나를 알아보았고, 내가 이곳으로 올 줄 알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했다.
녀석은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전투가 일시적으로 중단된 것은 도중에 뛰어든 한 아이 때문이었다.

“그만둬요! 중혁 아저씨! 제발 그만두세요!”

신유승이었다.
내 앞을 막고 선 작은 아이가, 울며 외치고 있었다.

“이 오징어 독자 아저씨에요!”

그 말에, 장내가 침묵으로 잠겼다. 주변을 돌아보자 어느새 일행들이 모여 있었다. 굳은 표정의 정희원과, 걱정스러운 표정의 이지혜와, 흥분한 표정의 이길영. 마계의 성채 위쪽에서 이쪽을 내다보는 시선도 느껴졌다.

······한때는, 내가 오랫동안 원망했던 사람.

고개를 돌리자, 마계의 거주민들도 보였다. 73번째 마계에서 마주쳤던 이들이었다. 아일렌도 있었고, 마르크도 있었다.
멀리서 달려온 것인지, 숨을 헐떡거리는 한수영이 근처의 고층 빌딩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살아낸 역사들이 하나둘 이곳에 모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싸움에 간섭하는 이는 없었다.

멈췄던 유중혁이 다시 칼날을 세운 채 다가왔다.
마치 신유승의 말을 듣지 못했다는 것처럼,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은 기도였다.
신유승이 재차 외쳤다.

“으······ 사, 사실은 거짓말이에요! 저거 독자 아저씨 아니에요! 그냥, 그냥 제가 테이밍 한 재앙이에요! 제가 길들인 괴수라고요! 제가 잘 타이를 테니까 용서해주세요!”
“유승아.”

나는 신유승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정희원이 신유승을 안고 물러났다. 한없이 굳건한 정희원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그래, 그런거였구나.

고개를 숙이자, 정희원이 내 눈을 피했다.

[등장인물 ‘정희원’에 대한 이해도가 급격하게 상승합니다!]

돌아보자, 유중혁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중혁의 진신절기, [파천검도].
마지막을 준비하는 검격이 유중혁의 칼끝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중혁은, 아마도 내게 증명하고 싶은 게 있는 것이다.

“······덤벼라 유중혁.”

검을 고쳐 쥔 순간, 유중혁과 나의 격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눈이 멀 듯한 섬광이 코앞에서 폭발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채널에 입장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채널에 입장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채널에 입장합니다!]

우리의 충돌을 느낀 성좌들이 대거 채널에 입장했고.

[성좌, ‘흥무대왕’이 당신의 격에 깜짝 놀랍니다!]
[성좌, ‘외눈 미륵’이 화신 유중혁의 격에 감탄합니다.]

어떤 성좌들은 나와 유중혁을 보며 경악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뭔가를 깨닫고 탄식합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의미로, 놀란 이들도 있었다.

콰아아아아앙!

재차 폭음이 터졌을 때, 나는 엄청난 격통과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다. 천천히 눈을 끔뻑이자, 자욱한 먼지 사이로 창명한 하늘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더럽게 쎄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봐준 것도 아니었다. 순수한 힘과 힘의 대결이었고, 나는 유중혁에게 밀려난 것이다. 자박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유중혁이 다가오고 있었다.
녀석의 [흑천마도]가 내 얼굴 바로 곁의 바닥에 꽂혔다. 특유의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유중혁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런 녀석을 보며 말했다.

“좀 봐줘라. 인마.”

유중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유중혁이 증명하고 싶었던 것일 터다.
이것이 녀석의 지난 3년이라고.
이것이, 녀석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라고.
나는 웃었다.

“난 안 봐줄 거지만.”

유중혁의 뒤쪽에서 높이 솟은 비석이 반짝이고 있었다.
목표 거점. 비석 위에서 한 사내가 말하고 있었다.

“어이 형씨! 여기다 쓰면 되는 거지?”

깜짝 놀란 유중혁이 돌아선 순간, 비천호리가 발을 움직였다. 빠른 발길질에, 비석 위로 멋드러진 표식이 새겨지고 있었다. 내가 미리 부탁한 문구였다.

[163번째 귀환자 그룹이 시나리오를 클리어하였습니다!]

내 몸이 새카만 연기에 휩싸였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의 귀환자들도 비슷한 모양새였다. 연기 속에서 귀환자들의 외양이 변하고 있었다.

[당신은 더이상 ‘재앙’이 아닙니다.]

일행들의 동공에, 바닥에 너부러진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신유승이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왔다.
나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 토닥였다.

“3년이었어요. 3년이요·····.”

뒤늦게 달려온 이길영도 내 허리를 끌어안고 울었다.

“역시 형일 줄 알았어요! 독자 형인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메인 시나리오 #45 ― ‘금의환향’의 클리어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시나리오 보상이 준비 중입니다.]
[46번 메인 시나리오의 진행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나는 아이들을 끌어안은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지가 갠 하늘 위로 비석의 꼭대기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나는 비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돌아온 기념 선물입니다.”

[당신이 소속된 ‘성운’의 이름이 정식으로 공표됩니다.]
[당신이 소속된 ‘성운’의 터가 마련되었습니다.]

비석의 꼭대기에 새겨진 표식은, 다음과 같았다.

―김독자 컴퍼니

임시를 떼어버린, 내가 멋대로 지은 성운의 이름.
이쪽을 향해 다가오던 일행들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퉁퉁 부은 이지혜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는 한수영의 모습. 나는 그들을 보며 물었다.

“다들 가입해 줄 거죠?”

다가오는 일행들의 얼굴이 보인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내가 보고 싶었던 사람들이었다. 달려오는 일행들을 향해 두 팔을 벌리는 순간, 아찔한 통증이 뒤통수에 작렬했다.
조금씩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 냉정한 정희원의 얼굴이 한가득 들어왔다.

“이 인간, 가둬 버려.”





< Episode 57. 금의환향 (5) > 끝

< Episode 58. 별자리의 맥락 (1) >





Episode 58. 별자리의 맥락


지난 3년 동안, 정희원에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충청 연합의 리더, 정희원!
―패왕의 시대는 갔다! 화신 최강은 멸악(滅惡)!

팬클럽이 생겼고, 각종 미디어에서는 그녀의 이야기를 기사화하거나 이야기로 가공해 상품으로 만들어내려는 이들도 나타났다. 검을 쓰는 화신이라면 누구나 그녀를 동경했다. 그녀를 성운에 섭외하려는 성좌들도 있었다.
물론 무의미한 노력이었다. 왜냐하면 정희원은 <스타 스트림>에서도 굉장히 유명한 성좌의 화신이었으니까.
문제는 그 유명한 배후성이, 무려 3년 동안이나 정희원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난 내 배후성이 죽은 줄 알았어요.”

그녀의 배후성은 3년 전의 사건 이후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다. 그래서 정희원은 다른 화신들보다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파천검성과 키리오스 같은 초월좌들에게 매일같이 시달리며, 피나는 훈련을 받았다.
일행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더이상은 누군가를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서.

“차라리 그랬다면 조금은 덜 억울했을 텐데.”

정희원은 정말로 강해졌다.
그리고 강해진 그녀의 앞에, 사라졌던 배후성이 나타났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침묵합니다.]

정희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지금 나한테 뭐라고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헤헤 웃습니다.]

정희원은 웃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검의 그립에 손을 가져다 댈 뿐.

[화신 ‘정희원’이 ‘심판의 시간’의 발동을 준비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깜짝 놀랍니다!]

살벌한 마력이 정희원의 검에 깃들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정희원의 요청에 동의하였습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 하나가 요청에 반대하였습니다!]
[스킬 발동이 취소됩니다!]

정희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심판의 시간’은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의 동의를 통해 발동하는 스킬.
그리고 그녀의 배후성은 그 ‘절대선’ 중에서도 최상위 계급의 성좌였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울상을 짓습니다.]

정희원이 검에서 손을 떼며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으로, 배후성이 느끼는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슬픔과 기쁨.
미안함과 죄책감.

사실, 정희원도 알고 있었다.
왜 우리엘이 지난 3년 동안 근신할 수밖에 없었는지.
‘마왕 선발전’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에덴>에서의 처분이 겨우 근신으로 그친 게 사실 신기한 일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섭섭한 건 섭섭한 것이다.
더군다나 3년 만에 나타난 배후성이 하는 말이라는 게······.

“독자 씨 보고 싶으면 직접 가서 보면 되잖아요? 성채 꼭대기에 있는 거 뻔히 아시면서.”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아직 보호 관찰 기간이 끝나지 않아서 상징체 소환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고민하던 정희원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대신 이상한 짓은 하지 마세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크게 기뻐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정말 김독자가 감금되어 있냐고 묻습니다.]

“······왜 좋아해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근데 진짜 김독자가 오징어가 되었냐고 묻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지금 가고 있으니 직접 보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정희원은 김독자가 갇혀 있는 성채의 꼭대기에 도달했다.

[이곳은 천제결계(天帝結界)가 시행된 공간입니다.]
[화신 ‘정희원’은 출입 허가 대상자입니다.]

문이 열리자, 호화로운 방의 내부가 등장했다. 말이 감금이지, 웬만한 5성 호텔의 스위트룸 뺨치는 방이었다.
테이블 위엔 배고프면 언제든 집어 먹을 수 있는 호화로운 진수성찬이 세팅되어 있었고, 킹사이즈의 침대에는 숙면에 도움을 주는 스킬이 걸려 있었다. 작은 협탁 위에는 멸망 이전의 세계에 출간되었던 몇 권의 판타지 소설이 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김독자가 판타지 소설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정희원은 그중 한 권을 시험 삼아 집어 보았다. 『멸망 이후의 세카이』. 작가 싱샹숑······.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비명을 지릅니다!]

고개를 돌리자, 푹신한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김독자가 보였다. 걷어 올려진 소매에 설화 팩 공급을 위한 카테터가 꽂혀 있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구원의 마왕’을 바라봅니다.]

팩에는 이설화가 만든 수면제가 잔뜩 들어있었다. 가까이 가자, 의자 위에 너부러진 김독자의 얼굴이 보였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 속에, 김독자가 부스스 눈을 떴다.

“······희원 씨?”

정희원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고된 시간에 지친, 김독자의 무방비한 얼굴.
쿡, 하고 마음 한구석이 쑤셔왔다.

“여긴 대체······.”

김독자를 다시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이 잔뜩 있었다.
화를 내고 싶었고, 원망을 토하고 싶었고,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던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왜인지, 이렇게 김독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많은 감정들은 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다.

이것이 자신의 감정인지.
아니면 배후성의 감정인지, 정희원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정희원은 카테터를 통해 흘러 들어가는 수면제의 양을 조절했다.

“독자 씨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 아니, 천사가 있어요.”

정희원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흘러나왔다.
마치 태초의 빛을 연상시키는, 대천사의 포근한 빛.
정희원은 김독자의 몸을 들어 안고 침대 위에 눕혀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김독자가 잠들었다. 새하얀 광휘에 덮인 정희원의 손이 몇 번인가 김독자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구원의 마왕’을 바라봅니다.]

말로 전할 수 없기에 더 가치 있는 감정이 있다.
그동안 정희원은 우리엘의 ‘전우애’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쩐지 지금만큼은 그 마음을 조금 알 것도 같았다.


*


긴 꿈을 꾸었다.
조금 이상한 꿈이었다.

―바이탈 체크 양호.
―설화 팩 안정적으로 투여 중입니다.

환청처럼 이설화와 아일렌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형······ 음냐······.

가끔은 허리에 매달린 이길영과 신유승의 얼굴이 보이기도 했다.

―우어어어어! 독자 씨이이이!

괴수처럼 울부짖는 이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그리고······.

얼핏, 어머니의 얼굴이 보인 것도 같았다.

나는 생각했다.
이게 꿈이라면, 차라리 깨어나고 싶지 않다고.

―야, 깨려고 하잖아! 빨리 수면제 투여해!

어슴푸레한 한수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피식 웃었다.
말하자면 이 꿈은, 나 한 사람만을 위한 연극인 것이다.
마치 ‘멸살법’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깨어날 수 있었지만, 김독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기꺼이 그 연극의 관객이 되어주기로 했다.

「멸망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김독자는 편안한 잠을 잤다.」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항상 조급해져 있던 마음. 누군가에게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 내가 믿는 것을, 함께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푹 쉬어요, 독자 씨.

······그래, 46번 시나리오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까.
마음을 놓는 순간, 까마득한 잠이 나를 덮쳐왔다.


*


뒷덜미를 붙잡힌 이길영이 소리를 질렀다.

“아, 누나! 꼭 나까지 여기 와야 돼요? 난 독자 형이랑 더 있고 싶은데!”
“충분히 같이 있었잖아.”
“신유승은 여덟 시간이나 같이 있었어요! 난 여섯 시간밖에 같이 못 있었고!”

이지혜가 심통난 듯 입술을 내민 이길영에게 꿀밤을 먹였다.

“저 녀석들은 제공력(制空力)이 거슬린다고. 상대할 수 있는 건 너랑 유승이뿐이잖아? 그리고 독자 아저씬 푹 재워놨으니까 언제든 만날 수 있어.”
“하지만······.”
“언니, 거의 도착했어요.”

신유승의 말과 함께, [키메라 드래곤]이 급격한 하강을 시작했다. 아래로 보이는 ‘경기 연합’의 건물들. ‘부산 연합’을 담당하는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무슨 왕국을 만들었다더니, 진짜였네.”

노예처럼 다루어지는 도민들이 고통 속에 울부짖고 있었다.
입술을 실룩인 이지혜가 말했다.

“박살내 버리자고.”

이지혜가 검을 뽑아 들자, 이길영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야, 신유승. 내가 처리할 테니까 넌 빠져.”
“시끄러워, 독자 아저씨도 못 알아본 게.”
“······가랏, 티타노―MKⅡ!”

그오오오오!

이길영의 명령과 동시에, 단단한 아머를 착용한 충왕종 부대가 창공을 날아왔다.
무려 다섯 마리의 4급 충왕종이었다.

“적습이다!”

스거걱!

거대한 사마귀의 낫에 잘려나가는 건물들을 보며, 이지혜가 물었다.

“티타노 죽었다며?”
“걘 그냥 티타노고요, 쟨 티타노―MKⅡ에요.”
“대체 무슨 차이가······.”

콰아아아앙!

적진의 중심부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티타노가 습격한 쪽은 아니었다. 경기 연합의 주축을 구성하던 고층 건물들이 붕괴하며, 엄청난 후폭풍이 발생하고 있었다. 창공을 부유하던 비행정들이 낙뢰처럼 떨어지는 검강을 맞고 추락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지혜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우리보고 알아서 하라더니······.”

한바탕 광풍이 몰아친 자리에는 폐허만이 남았다.
허겁지겁 달아나는 연합의 졸개들을 도륙하는 한 사내.
유중혁이었다.

“자, 잠깐! 잠깐만! 멈춰라 패왕!”

경기 연합의 간부로 보이는 한 사내가 허둥지둥 외쳤다.

“지금 날 죽이면 곤란해질 거다! 우리 측에는 인질이 있다!”

인질이라는 말에, 처음으로 유중혁의 칼이 멈칫했다.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사내가 계속해서 외쳤다.

“후우······ 월하현제(月下賢帝)가 성채의 최상층에서 나오지 않는 이유는 병환이 깊어지고 있기 때문이라지?”

당황한 이지혜와 신유승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저 자식이 뭐라는 거야?”
“······월하현제면 상아 언니잖아요?”

사내의 말은 계속되었다.

“하하, 마계의 방벽을 뚫느라 아주 오래 걸렸지만, 우리는 결국 해냈다!”
“······무슨 헛소리지?”
“너희들이 자리를 비운 성채에 우리 연합의 정예 암습조가 침투했다. 즉, 월하현제의 목숨은 이제 우리 손아귀에 있다는 거지. 결계를 뚫는 게 꽤 힘들었지만, 네 동료의 목숨은 이제 우리 손안에―”
“결계를 뚫었다고?”

유중혁의 표정에 처음으로 균열이 번졌다. 표정은 곧 다른 일행들의 얼굴로 옮겨갔다. 신유승이 말했다.

“······상아 언니 방에 결계 같은 건 없잖아요?”
“그럼 저 미친놈이 말하는 건······.”

일행들은 동시에 서울 쪽을 돌아보았다.


*


같은 시각, [공단]의 성채에는 고공 낙하를 통해 침투한 열 명의 암습조가 있었다.
모두 ‘경기 연합’의 정예 암습조들이었다.

―이곳이로군.
―예, 맞습니다.
―술식 해제팀, 시작해라.

조장의 명령에 술식 해제를 맡은 조원들이 달려들었다. 조원 중 하나가 물었다.

―혹시 흑염마황이 있는 건 아니겠죠? 우리 간부들, 그때 왕창 썰려 나갔지 않습니까?

흑염여제가 흑염마황으로, 월하신녀가 월하현제로 별명이 바뀐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모두 1년 전 있었던 ‘성남 대참사’ 때문이었다.

―흑염마황은 자리를 비웠어. 안에 있는 건 월하현제다.
―우리만으로 괜찮을까요?
―병환이 깊다는 소문이 있어. 그 여자 혼자라면 아무 문제 없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을 막고 있던 술식이 풀렸다.

―해제 완료했습니다!
―벌써? 생각보다 빨랐군.
―그게, 천제결계는 안에서는 뚫기 어렵지만, 바깥에서는 쉽습니다.
―우습군. 뭐 그런 결계가 다 있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정말이지 멍청한······.

헤헤 웃는 암습 조원을 뒤로하고, 조장이 문을 열었다.

―어디 잘난 ‘월하현제’의 솜씨를 한 번 감상해보실까. 모두 침투 준비!

그런데 문고리에 손을 대는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메시지가 그들의 귓가를 잠식했다.

[성좌, ‘검은 황야의 암살자’가 경고성을 발합니다!]
[성좌, ‘흑월의 사냥꾼’이 경악합니다!]
[성좌, ‘얼어붙은 심장의 기사’가 경련을 일으킵니다.]

모두 그들의 배후성들이었다.

―이거 대체 뭐지? 갑자기 배후성이······.
―조, 조장님도 들으셨습니까?

궁금증은 길지 않았다. 문 너머로 느껴지는 가공할 격의 향연. 이제껏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던 불가해한 아우라가 그들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몸이······?

차원이 다른 격에 암습조 전원의 발이 굳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처럼 푹 쉬는 중이었는데, 역시 내 팔자가 그렇지.”

삐거덕거리며 열린 문 사이로, 백색의 코트를 걸친 한 사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싱긋 웃은 사내가, 서늘한 손바닥을 암습조장의 어깨 위에 턱 얹었다.

“꺼내 줘서 고마워요, 여러분.”





< Episode 58. 별자리의 맥락 (1) > 끝

< Episode 58. 별자리의 맥락 (2) >





암습조 아홉 명이 자리에 드러눕기까지는 그로부터 삼십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끄윽······.”

나는 신음하는 암습조들을 전부 점혈한 뒤, 손을 탈탈 털었다. [등장인물 일람]을 통해 몇 명의 정보를 확인해 보니, 굳이 캐보지 않아도 답은 나왔다.

“······경기 연합이네. 여긴 왜 오셨을까?”

파스스슷.

내가 점혈하기 전에 미리 독단을 깨문 몇몇 암습조들의 신체가 녹아내렸다. 아무래도 암시가 걸린 녀석들인 듯했다.

[성좌, ‘검은 황야의 암살자’가 당신을 경계합니다!]
[성좌, ‘흑월의 사냥꾼’이 시나리오의 형평성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내가 허공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자, 메시지들은 일제히 잦아들었다.
나는 암습조들이 침입한 루트와, 녀석들의 행색을 꼼꼼히 확인했다.
깨진 창문 너머로, 허공을 날아 달아나는 한 녀석이 보였다.

휘이이이익―!

허공을 달려가는 경신법을 보니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단순한 암습조인 줄 알았는데, 개중 십악(十惡)이 끼어 있었을 줄이야.

경기 연합의 수장, 십악 조진철.

무림의 전대 고수를 배후성으로 둔 녀석은, 본래 45번 시나리오의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원작에 따르면 그렇다는 얘기고, 지금 신경쓸 만한 녀석은 아니었다. 십악에도 급이 있고, 조진철은 그 중 잔챙이에 속하는 편이다.
지금의 일행들이라면, 한반도 내에 적수가 될만한 화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나 인도라면 모를까······.

“저놈이다! 쫓아!”

멀어지는 조진철을 쫓아가는 몇몇 인원들이 보였다. 개중에는 내가 데리고 왔던 귀환자 비천호리도 끼어 있었다.
도망자와 추격자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는 가운데, 탁 트인 서울의 정경이 들어 왔다.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서울.
그리고 그 중심을 차지한 [공단].

‘은밀한 모략가’와의 계약을 통해 [공단]은 텅 빈 서울로 이송되었다. 마치 현실과 소설이 결합되어 있는 듯한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새삼 세계가 변했다는 것이 실감났다.
성채의 바로 아래쪽에는 ‘유중혁―김독자 공단’이라는 거대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왜 유중혁이 먼저 나오는 거지?
나중에 바꿔야겠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
나는 그 수식언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라파엘.”

성운 <에덴>의 대천사, 라파엘.

츠츠츠츳······!

진명에 반응하듯 허공에 스파크가 튀었다.
슬슬 <에덴> 쪽에서 연락이 올 거라는 생각은 했다.

“마침 찾아뵐 생각이었습니다. 돌려 드릴 것이······.”

나는 아직 품속에 들어있을 가브리엘의 상징체를 떠올렸다.
슬슬 요피엘의 구속구도 효력이 떨어졌을 테니, 가브리엘도 깨어날 때가 됐다. 그런데······.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가브리엘은 이미 회수했다고 말합니다.]

품속에 있던 백합이 사라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잠결에 대천사의 손길이 스쳐간 듯한 기억이 났다. 어쩌면 그때 <에덴>의 성좌들 중 하나가 방문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마침 정희원의 배후성이 우리엘이니, 우리엘일 가능성이 높겠지.
······그러고 보니 우리엘은 어떻게 됐을까?
왜 내가 나타났는데도 간접 메시지가 없지?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우리엘은 아직 채널 발언권을 허가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아, 그런 거였군.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당신에게 궁금증을 표합니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붉은 코스모스’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라파엘의 메시지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은 저와 함께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 요피엘.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3회차의 세계선으로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의 의지로 다른 세계선에 남기를 원했습니다.”

주변에 한바탕 광풍이 몰아쳤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당신의 말을 불신합니다!]

츠츠츠츠츳······!

분노한 라파엘의 의지였다. 나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당신의 능력이라면, 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건 아실 텐데요.”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을 휘감던 바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당신에게 해명을 요청합니다.]

“그럴 생각입니다. 46번 시나리오를 앞두고 있으니······ 곧 직접 만나 말씀드릴 수 있을 겁니다.”

나를 보는 라파엘의 시선이 묘하게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저 대천사도 그 시나리오가 뭔지 알고 있는 거겠지.

“시나리오가 끝나는 대로 <에덴>에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기다리겠노라 답합니다.]

그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주변을 차지하던 라파엘의 기류가 완전히 사라졌다. 범람하는 격으로 가득 찼던 주변이 휑하니 비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무수한 설화들을 쌓으며 나는 꽤나 강해졌다. 중하급의 위인급 성좌들 정도는 찍어 누를 수 있는 격을 가지게 되었고, 화신들 중에 나보다 강한 존재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천사의 ‘격’은 아득하고 드높았다.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 라파엘.
강력한 마왕 ‘아스모데우스’를 쓰러트렸던 대천사.

「김독자는 조용히 자신의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아스모데우스······ 아니, 한 부장은 어떻게 되었을까. 떠나 있었던 사이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져서,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는 우선 시스템 메시지부터 점검했다.

[부재중 도깨비 통신이 있습니다.]
[발신자 : 상급 도깨비 비형]

비형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내가 돌아왔는데 비형 녀석이 호들갑을 안 떠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런 메시지로 때우려 했던 모양이다.
나는 화면을 조작해 메시지 창을 열었다.
메시지는 길었으나 내용 자체는 간단했다.

찾아오지 못해서 미안하다.
몇 가지 바쁜 일이 있다.
일들이 끝나는 대로 보러 가겠다.

대충 그런 내용이 담긴 장문의 메시지였다.

―근데 넌 니 새끼 제대로 안 돌보냐?

내가 궁금했던 소식은 메시지의 마지막에서야 등장했다.

―비유는 내가 데리고 있어. 뭐, 내 자식이기도 하니까. 네가 차원문 앞에 버려두고 가서 하마터면 혹부리들한테 빼앗길 뻔했다.

안 그래도 비유가 나타나지 않아서 걱정이 되던 참이었다.

―애 돌아가면 좀 놀랄 거다. 기대하라고.

비형의 메시지는 그렇게 끝났다.
뭔가 찝찝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비유가 비형과 함께 있다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럼 슬슬 움직여 볼까.

쓰러진 암습조들을 한곳에 포개어 놓은 나는, 일단 일행들부터 찾기로 했다.

.
.
.

그리고 십여 분째.
나는 길을 헤매고 있었다.

······[공장]이 이렇게 넓었나?

머리를 벅벅 긁으며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좀처럼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독도법]이나 [길찾기] 스킬을 구매해서 익혀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저기요, 아무도 없어요?”

나는 유독 ‘처음 방문한 건물’에서 자주 길을 잃는 경향이 있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처음 진학했을 때, 처음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 그리고 미노 소프트에 입사했을 때······.
생각해 보면 유상아와 처음 말문을 튼 것도 그 때문이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이거 비상구가 대체 어디야?’」

마계에 있을 때는 공장 내부를 제대로 돌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 좀체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구조도 그때와는 달라진 것 같았다.
나는 일단 의심 가는 방들을 하나씩 열어보기로 했다.

취이이이이익!

문을 열자마자 작은 촉수 괴물과 개구리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어떤 개체들은 시험관 안에 들어있었고, 어떤 것들은 자유롭게 방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독자 아저씨일 뻔했던 개구리>
<거의 독자 아저씨였던 코끼리 괴수종>
<아쉽게 독자 아저씨가 아니었던 촉수 괴물>

개구리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슛하고 혓바닥을 쏘았다.
나는 깜짝 놀라 방문을 닫았다.
······잠깐만, 이 방 설마······.
방문의 명패를 확인하려는데, 근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어떻게 밖으로 나왔어?”
“독자 씨?”

식사를 든 이현성과 한수영이었다.


*


“그러니까, 독자 씨. 제가 35번 시나리오에서 말입니다······.”

이현성은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시나리오를 한바탕 늘어놓는 중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묵묵히 듣는 동시에, 이현성의 신체 곳곳을 면밀하게 살폈다.
이전보다 더 발달한 흉근. 그리고 근섬유 사이사이를 잇는 강철의 마력.
이제 이현성의 [강철화]는 숙련의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당장 46번 시나리오를 시작해도 전혀 무리가 없는 수준.
조금 감동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일행들은 내가 준 가이드라인을 따라 성실하게 수련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이현성의 이야기만 듣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낮의 밀회’가 발동 중입니다.]
[현재 화신 ‘한수영’이 대화에 참가 중입니다.]

한수영을 먼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시나리오 준비는 빨라도 항상 늦는 법.
빠른 대비를 위해서는 가장 적확한 정보를 효율적으로 제공해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은 하나뿐이었다.

―장하영이랑 파천신군은 어디 있어?
―파천검성이랑 키리오스랑 같이 다른 시나리오 지역으로 갔어. 초월좌 전용 시나리오를 받으러 간 것 같던데.
―한명오랑 공필두는?
―지금 북한에 있어. 공필두가 땅 알아볼 겸 북한 시나리오 수행하러 갔거든. 한명오는 눈치보다가 덤으로 끌려갔고.

······북한이라.
하긴, 지금쯤이면 슬슬 북한 화신들도 날뛸 때가 됐지.
지금의 북한이라면 꽤 쟁쟁한 성좌들이 몰려 있을 것이다. 물론 대부분은 위인급들이겠지만, 개중에는 설화급에 비견되는 성좌들도 있으니까.
가령 태왕(太王)이라든가······.

―넌 지금까지 어디 있다가 온 거야?
―멸살법 1863회차의 세계선.

한수영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뭐? 진짜?
―아, 거기 너도 있더라. 어느 쪽이 본체인진 모르겠지만.
―······본체? 뭔 개소리야?

내가 답하려는 찰나, 누군가가 우리 앞을 막고 섰다.

“······독자 씨.”

정희원이었다.

“덕분에 푹 잤습니다.”

정희원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 같기도 했고, 반대로 내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정희원의 시선은 천천히 움직여 한수영 쪽으로 향했다.
한순간 한수영과 정희원 사이에서 날카로운 전류 같은 게 튀었다. 차가운 눈길로 한수영을 노려보던 정희원이 고개를 돌렸다. 어색한 분위기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참, 아까 침입자가 있어서 제 방 앞에······.”
“처리하라고 지시했어요. 일어나셨으면 상아 씨한테 가보세요. 자세한 이야기는 그다음에 해요.”

평소보다도 훨씬 더 냉랭한 목소리. 내가 아는 정희원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곁에 있던 이현성이 어쩐지 서글픈 눈빛으로 멀어지는 정희원을 보고 있었다.
정희원의 모습이 코너를 돌아 사라진 후, 나는 한수영에게 물었다.

“뭐야?”
“뭐.”
“너랑 정희원 씨랑 뭐냐고.”

비죽 입술을 내미는 한수영을 보며, 나는 조금 답답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싸울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곧 46번 시나리오인 거 잊었냐? 너 지금······.”
“넌 3년 동안 여기에 없었잖아. 잘 모르면 닥치고 있어.”

한수영은 그 말만을 남기고 역시나 홱 돌아서며 저만치 멀어져 갔다.
졸지에 남은 것은 나와 이현성뿐.
축 늘어진 어깨의 이현성을 보고 있자니 나까지 마음이 울적해졌다. 아무래도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듯했다.
내가 없었던 3년간, 일행들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불화가 있었던 것이다. 요령 없는 이현성이 그 일행들 사이에서 어떤 모양으로 있었을지 묻지 않아도 선연했다.
나는 이현성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명백해 보였다.

“현성 씨, 유상아 씨는 어디에 계시죠?”
“······이쪽입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는 이현성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현성의 커다란 등을 쫓아 얼마간 걸어가자, 소박한 백색 칠로 마감된 작은 문이 하나 나왔다. 뜻밖에도 문 앞에는 아까 헤어졌던 정희원과 한수영도 서 있었다.

······뭐야 이 사람들?

황당해진 내가 말을 걸려는데, 표정들이 조금 이상했다. 정희원이야 그렇다쳐도, 한수영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봤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쉬운 일이 하나 도 없 군.’」

시끄러워 인마.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일단은 유상아를 만나야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았다. 짧게 노크를 한 후 문을 움직이는 순간, 안쪽에서 유상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죠?

“김독잡니다.”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돌아가세요.





< Episode 58. 별자리의 맥락 (2) > 끝

< Episode 58. 별자리의 맥락 (3) >





그런 문전박대는 간만이었다.
나는 잡은 문고리를 쥐었다 놨다를 반복하다가 흘끗 뒤를 돌아봤다.
정희원은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지켜보겠다는 눈빛이었고, 한수영은 묘하게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이현성은, 당장이라도 걱정으로 녹아내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방문 앞에 조심스레 등을 기대앉았다.

“들어가지 않을게요. 대신 잠시 여기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상아다. 유상아가 나를 만나기를 거부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답은 한참 뒤에 돌아왔다.

―······그러세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어쩐지 힘이 없었다.
사람들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깊은 정적 속에, 나는 유상아에 대해 생각했다. 아직 미노 소프트에 다니던 시절의 유상아.
내게 유상아와 친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유상아가 어떤 사람인가, 하고 묻는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조금 할 말이 있을지도 모른다.

“제가 너무 늦었죠?”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그래요. 입사 첫날에도 늦어서 유상아 씨 도움받았었는데······ 혹시 기억하세요?”

잠시 침묵하던 유상아가 대답했다.

―······그땐 둘 다 늦었었잖아요.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유상아지만, 사실 그런 유상아의 완벽함도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유상아는 내가 아는 누구보다 더 성실한 노력파다.

“그때 같이 면접장 찾던 거 기억나세요?”

―기억나요.

‘미노 소프트’의 신입사원 면접은 업계에서도 꽤 유명한 편이었다. 면접에는 매해 다른 종류의 ‘퀘스트’가 나왔는데, 제일 흔히 나오는 것이 ‘면접관 호감도 올리기’나 ‘숨겨진 면접 힌트 찾기’였다.
참고로 나와 유상아가 면접을 보던 해의 퀘스트는, ‘면접장 찾기’였다.

―······제가 독자 씨 도움을 더 많이 받았던 것 같은데요.

“저는 퀘스트 아이템만 찾았을 뿐이에요. 아이템을 활용해 길을 찾아내는 건 유상아 씨가 모두 해냈었고요.”

당시 나는 유상아와 팀을 이뤄 면접장을 찾아냈다.

―독자 씨는 비효율적인 퀘스트 동선을 지적했었죠.

“상아 씨는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퀘스트 승급 시스템을 지적했었고요.”

‘퀘스트’는 단순히 클리어하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퀘스트의 문제점과 약점, 그리고 효율성을 짚어내는 것. 그것이 미노 소프트 신입 사원 면접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유상아와 나는 모두 최고 득점으로 면접을 통과했다.

“입사 후에 부서가 갈라져서 아쉬웠어요. ······뭐, 당연한 일이었지만요.”

―······.

나는 QA팀. 그리고 유상아는 인사팀.
입사 후, 우리는 지나가며 간신히 인사만 주고받는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전 유상아 씨와 다시 같은 팀이 되어서 기쁩니다.”

아주 작게, 누군가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처럼, 저는 유상아 씨가 필요합니다. 같이 길을 찾아줄 사람이 필요해요.”

이현성이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정희원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고, 한수영은 칫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유상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독자 씨.

“예.”

―저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에요.

순간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단언컨대 유상아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세상에 좋은 사람은 없다.

―탕비실 사건, 기억하세요?

나는 엉겁결에 대답했다.

“······기억합니다.”

누군가가 회사의 탕비실에 있던 원두통 안에 후추를 잔뜩 뿌려놨던 사건.
그 일 때문에 한동안 회사가 시끄러웠다. 상사들은 후추 맛 커피를 먹고 역정을 냈고, 애꿎은 신입사원들은 고스란히 질타를 받았다.

―그거 제가 한 거예요.

“······그랬습니까?”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덕분에 한동안 신입들이 커피 심부름 면했잖습니까.”

사실 나는 유상아가 범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때 탕비실 범인을 잡으라며 QA팀의 직원들이 강제 당직을 섰기 때문이다. 주로 그 임무를 도맡았던 건 팀의 막내인 나였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멸살법’을 읽으며 탕비실의 청소 도구함에 숨어 있었고, 한밤중 홀로 탕비실에 들어오는 유상아를 보았다.

―그 일뿐만이 아니에요.

유상아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은 별거 아닌 사건들이었고, 별거 아니었음에도 뭔가가 조금씩 바뀌었던 일들이었다. 누군가는 피해를 보았고, 누군가는 잃어버린 자신의 권리를 찾았고, 또 누군가는 통쾌함을 느꼈던 사건들.

“유상아 씨.”

그녀는 ‘등장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사실 ‘멸살법’이 오기 전, 그녀는 누구보다도 내게 ‘등장인물’ 같은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현실에 그런 사람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저러다 죽겠어요.”」

첫 번째 시나리오가 시작되던 그때부터 유상아는 그랬다.
‘멸살법’에는 존재하지 않는 ‘윤리’를 유일하게 지키려 했던 사람.

「“내가 할게 길영아. ······그래도 내가 할게.”」

그곳에 유상아가 없었다면 일행들은 분명 무너졌을 것이다.

「“독자 씨는 정말 좋은 말씀을 하시네요.”」

내가 어떤 헛소리를 하든, 웃으며 받아 준 유상아가 없었더라면.

「“그럼 저에게는 상아의 삶이 있는 거군요.”」

내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든, 지켜야 할 것을 놓지 않았던 그녀가 없었더라면······.

「“전 오늘처럼 독자씨가 미운 날이 없었어요. 돌아와요, 꼭.”」

나는 안심하고 ‘이계의 언약’을 맺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저요, 정말 참을 수가 없어서······.

두서가 없는 유상아의 말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상아 씨.”

마치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계속해서 말을 잇는 유상아.
나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다가, 다시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도움을 원하지 않는 사람을 구태여 돕는 것은 민폐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분명 도움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남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한 번도, 그런 것을 청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마치, 내가 처음 면접장에 갔던 그날처럼.

“잠깐만요, 독자 씨―!”

나는 정희원의 말을 무시하고 잠긴 문고리를 강제로 돌렸다. 삐거덕거리며 문이 부서질 듯한 소리가 들렸고, 이내 방안의 정경이 드러났다. 그리고 나는 어두운 표정의 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이설화와 아일렌, 그리고······ 내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왔구나.

세 사람은 침대 근처에 서 있었고, 침대 위에는 지금껏 나와 이야기하던 유상아가 누워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 핏기가 하나도 없는 유상아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녀를 대신해 떠드는 것은 다른 녀석들이었다.

「그러니까······.」

유상아의 안에서, 부서진 설화들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잠시 후, 나는 일행들과 함께 유상아의 병실에 모여 앉았다.

“대체 언제부터 이랬던 겁니까?”
“······얼마 안 됐어요.”

정희원이 대답했다. 자세한 설명을 덧붙인 것은 이설화였다.

“······과도한 성흔 사용 때문에 부작용이 심각해요.”

나는 유상아의 탈색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유상아가 보통의 배후성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이런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그녀는 <올림포스> 성운 자체를 배후성으로 두고 있다. 그리고 정상적이지 않은 <배후 계약>은 화신의 수명을 깎는다. 여기서의 ‘수명’은, 단순히 육체적인 수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야기의 수명’이었다.

“영혼은 의식 아래로 깊이 잠들어버렸고, 남은 건 「의식의 흐름」뿐이에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성흔들을 반복해 사용하면서, 유상아의 영혼에는 조금씩 부조리가 누적되었다. 개연성은 그녀의 몸과 정신에 균열을 발생시켰고, 결국 균열 사이로 설화들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일렌이 첨언했다.

“······설화팩도 꾸준히 수혈하고, 부서진 파편들을 모아서 다시 투여하기도 했어요. 그런데도 차도가 없어요.”

둥둥 떠다니는 유상아의 말들을 보며, 나는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모두 나 때문이었다.
내가, 너무 늦었기 때문에······.

“······그딴 표정 지을까 봐 들어가지 말라고 한 거야.”

한수영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이설화를 보았다.

“시간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3개월 정도······.”
“방법이 없습니까?”
“지금으로서는······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이곳이 아니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군요.”

[성좌, ‘구암신의’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설화를 대신해 반응한 것은, 그녀의 배후성이었다.

[성좌, ‘구암신의’가 화신 ‘유상아’의 병은 ‘인간의 질병’이 아니라 말합니다.]

인간의 질병은 인간의 힘으로 치료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질병이 신(神)의 것이라면?

[마왕, ‘구원의 마왕’이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그러자, 어두운 <스타 스트림>의 곳곳에서 작은 별들이 반짝였다.

[성좌, ‘버려진 미로의 연인’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모두, 유상아와 관계되어 있는 <올림포스>의 별들이었다.
불쑥 화가 치솟았다.
확실히 힘을 사용한 것은 유상아 본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초에 이런 부조리한 계약을 유도한 것은 <올림포스>였다.

[올림포스, 당신들의 개연성은 당신들이 감당하십시오.]

나는 밤하늘을 향해 고요한 진언을 퍼뜨렸다.
내 말에, 몇 개의 별들이 재차 반짝였다.

[성좌, ‘버려진 미로의 연인’이······.]

츠츠츠츠츳!

다음 순간, 알 수 없는 스파크와 함께 허공에서 간접 메시지가 끊어졌다. 빛나던 별들은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가 그들의 간접 메시지에 간섭한 것이다.
나는 짓씹듯 말했다.

“놈들이라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놈들’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정희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도움을 청할 방법이 없어요. 저희도 몇 번이나 비슷한 시도를 해봤지만······.”

성좌들은 제멋대로고, 자신들이 원하는 일만을 행한다.
보고 싶은 이야기만 보고,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다.
아직도 유상아가 이런 상태라는 것은, 고위급 성좌들이 유상아의 기적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한수영이 물었다.

“지난번처럼 명계에 다녀오는 건 어때? 너 명계의 여왕이랑 친하잖아.”
“······그때는 상황이 특수했어. 그리고 유상아 씨는 아직 죽지도 않았고. 게다가 비유 때처럼 되라는 법도 없어.”

사실 아까부터 페르세포네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지만, 답이 없었다.
연락이 되어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재앙 신유승’이 비유로 환생했을 때는 말 그대로 운이 좋았을 뿐이다. 이 세계에서 대부분의 죽음은 문자 그대로의 죽음이다. 환생이나 회귀는, 그야말로 <스타 스트림>의 기적 같은 이야기일 뿐이고.

“장하영은 다른 시나리오 수행하러 갔다고 했지?”
“······꽤 멀리 간 걸로 알아.”

장하영이라도 곁에 있다면 성좌들에게 직통으로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잠든 유상아의 얼굴을 보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유상아를 살릴 방법.」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며 말했다.

“아직 방법은 있습니다. 제 예상보다 조금 이른 시기긴 하지만······.”
“46번 시나리오를 돌파해야 한다.”

내 말을 끊은 것은 낮고 냉철한 사내의 목소리였다.
나는 인상을 쓴 채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주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시는군.

경기 연합을 해치우기 위해 파견을 나갔던 일행들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신유승, 이길영, 이지혜. 그리고······ 유중혁.
쪼르르 달려온 아이들이 내 품에 안겨들었다. 나는 신유승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흉흉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유중혁을 한 번 보고, 나머지 일행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성좌들을 만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성좌들이요?”

살짝 열린 창밖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먼 하늘에서 도깨비들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었다. 아마도, 다음 시나리오를 준비하기 위해 온 녀석들일 것이다.
그 너머로, 다시 시나리오를 지켜보는 수많은 별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나는 그 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47번 시나리오 지역에, 저 ‘성좌’들이 있습니다.”

47번 시나리오 지역.
그곳에 성좌들의 성간도시(星間都市), ‘별자리의 맥락’이 있다.

“올림포스를 부수러 가죠.”





< Episode 58. 별자리의 맥락 (3) > 끝

< Episode 58. 별자리의 맥락 (4) >





잠시 후, 일행들은 각자 장비들을 관리하며 김독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칼날을 갈던 이지혜가 정희원에게 물었다.

“독자 아저씨 진심일까요? 진짜 올림포스 부수려고······.”
“농담이겠지, 독자 씨가 그렇게 바보는 아냐.”
“하지만 3년 동안 어디 다녀왔는지도 모르잖아요. 여기 3년이나 지난 건 알까요?”
“······알겠지. 바보는 아니라니까.”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3년 동안 아저씨가 돌아버렸을 수도 있잖아요. 우리 사부만 봐도······.”

말을 잇던 이지혜는 멀리서 느껴지는 유중혁의 시선에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정희원은 그런 이지혜를 보다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김독자가 들어간 접견실 쪽을 일별했다.


*


마치 구치소의 접견실을 연상시키는 새하얀 별실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3년 만이구나.”
“······제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이수경을 보며, 김독자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해야 할 말들은 많았지만 어떤 말들은 켜켜이 쌓인 시나리오의 지층에 묻혀버렸고, 또 어떤 말들은 해야 할 시기를 놓쳐버렸다.

“저.”

그렇게, 지나간 이야기의 무덤 속에서 간신히 말 한마디가 발굴되었다.

“죄송합니다.”

이수경이 옅게 웃었다.

“다음 시나리오로 떠날 생각이겠지?”
“예.”
“언제?”
“오늘 저녁에요.”

김독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물었다.

“같이 가실 겁니까?”
“아직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많아.”

이수경은 접견실의 창문 너머로 [공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독자도 이수경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에 한때 이 사회의 수감자였던 여자들이 있었다.
전우치를 배후성으로 둔 조경란. [피스 랜드]에서 함께 싸웠던 이복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의사보다 더 커다란 힘에 끌려 잘못된 선택을 해.”

범법자였던 사람들은, 이제 감옥에서 나와 사람들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바뀔 수 있다는 거겠지. 그리고 아마도, 이제 저들은 기회를 얻은 거야.”

이수경의 말투는 반 정도는 자조적이었다. 이수경은 고개를 돌려 아들의 눈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지? ‘커다란 이야기’는 개인을 말살시키는 법이다.”
“알고 있어요.”

김독자의 동공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 두 눈에서 작은 스파크 같은 것이 튀었다. 어쩌면 꺼내지 말았어야 할 화제였다. ‘커다란 이야기’에 의해 말살되는 인간. 아마도 그녀의 아들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그런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한참을 망설이던 이수경이 입을 열었다.

“······그땐 말하고 싶은 게 있었어.”
“알아요. 저도 읽어봤으니까.”

이수경이 썼던 책, 『지하살인자의 수기』.
이수경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며 사회는 가정 폭력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관련 처벌법에 대한 강화 법안도 등장했다. 그러니 결국 거시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올바른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야기 속에서.
인간 ‘이수경’과 ‘김독자’는 완전히 해부당했다.

김독자는 이 사회의 가정 폭력이 낳은 비극의 아들이 되었고, 이수경은 남편을 죽이고 그것을 이야깃거리로 만든 범죄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을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살인자의 아들, 혹은 잔혹한 어머니······. 세계를 아주 조금 바꾼 대가였다.

“그 책이 나오기 전에도 우린 줄곧 말살당해왔어요.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김독자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도중에 끊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는 대신, 창밖을 보고 있었다.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상처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나리오에 지친 화신들의 머리 위로, 더 끔찍한 이야기들을 원하는 성좌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김독자가 말했다.

“커다란 이야기가 개인을 말살시킨다. 저는 그걸 바꾸러 가는 거예요.”
“나도 그걸 바꾸기 위해 여기 있는 거다.”
“그럼······ 이번에도 여기서 헤어지겠군요.”

김독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건강하세요.”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김독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수경은 말없이 김독자가 사라진 문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접견실의 커튼 너머에서 그림자 하나가 일렁이더니 한수영이 튀어나왔다. 한수영은 김독자가 열고 나간 문을 보며 말했다.

“······정없는 녀석이네 진짜.”
“내가 그렇게 키웠지.”

이수경의 말에, 한수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줌마. 왜 말 안 했어?”
“뭘 말이냐?”
“책 말이야.”

이수경은 모르겠다는 듯 뻔뻔한 눈빛이었다. 그런 이수경을 보며, 한수영은 묘하게 격앙된 어투로 말했다.

“아줌마 동기들한테 다 들었다고. 그 책으로 번 인세, 친척들한테 보내줬다며? 저 녀석 생활비 보태라고.”
“실제로 저 아이에게 간 건 없으니 안 보낸 거나 마찬가지지.”
“······그 친척 새끼들 지금 어딨어?”
“지금쯤 다 죽었겠지.”

반쯤 벌어졌던 한수영의 입이 닫혔다. 이제 멸망 이전의 원한은 대개가 무의미해져 버렸다. 죗값을 치러야 할 사람들은 속 편하게 모두 죽어버렸고, 남은 사람들은 이제 더 끔찍한 세상을 맞이하기 위해 생을 연명해야 한다.
한숨을 내쉰 한수영이 물었다.

“근데 진짜 같이 안 갈 거야?”
“자식을 너무 오래 키우는 것 같아서. 이쯤 하고 내 인생 살아야지.”

옅게 웃는 이수경의 얼굴에 주름이 늘어 있었다.
이 [공단]이 안전하게 굴러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수경이었다. 마계와 지구. 서로 다른 두 생태가 무사히 화합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수경과 유상아의 차별 없는 통치 덕분에 가능했다.

이 [공단]에 이수경은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것을 잘 알았기에, 한수영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서 김독자가 열고 나간 문을 열었다.
이수경이 말했다.

“수영아.”

한수영은 돌아보지 않고 손을 들었다.

“걱정 마. 아들은 나한테 맡기고, 아줌마는 그냥―”
“몸조심해라.”

그 말에, 한수영은 멍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수경이 미소짓고 있었다. 김독자와 똑같은 색의 눈동자. 입술을 달싹이던 한수영이 한숨처럼 말했다.

“하여간······ 끝까지 재수 없다니까.”


*


사탕을 쪽쪽 빨던 한 소녀가, 갑자기 나를 가리키며 선언했다.

“오징어.”

갑작스런 정신 공격에 나는 잠깐 넋을 잃었다.

[일부 성좌들이 소녀의 정체를 궁금해합니다.]

이 소녀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러니까······ 나는 한숨을 쉬며 소녀의 이름을 말했다.

“미아야, 잘 지냈니?”
“아저씬 누구예요?”

오래 안 봤다고 그새 또 까먹은 모양이다.
내가 뭔가 설명하려는데, 유미아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우리 오라버니 친구.”
“친구는 아니고······ 너 못 본 새 말투가 바뀌었구나.”
“아저씨도 못 본 새 더 못생겨졌네요.”
“야, 유중혁. 설마 니 동생도 데리고 갈 건 아니지?”

내 말에, 유미아의 머리에 손을 척 얹고 있던 유중혁이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런 녀석을 잠시 바라보다가 머쓱하게 물었다.

“······잘 지냈냐? 너무 바빠서 물어보는 것도 잊었네.”
“한가하게 그딴 걸 물을 시간 따윈 없다.”

그 딱딱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친숙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이래야 내가 아는 유중혁이지.
내가 아는 유중혁이 계속해서 말했다.

“46번 시나리오는 위험하다. 당연히 동생은 두고 간다.”
“누구누구 남길 거야? 유상아 씨야 당연히 남을 수밖에 없고, 거기에 우리 엄마랑 ‘방랑자’ 세력이랑······.”
“비천호리를 남긴다.”
“비천호리랑 벌써 이야기했어?”
“귀환자 집단과 계약했다.”

재앙에서 풀려난 귀환자들은, 당분간 고향 세계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유중혁은 벌써 그들과 접촉해 [공단]의 보호와 관련된 계약을 맺고 돌아온 것이다. 역시 주인공 아니랄까봐 행동력 하난 끝내주는군.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만으로는 이곳을 지킬 수 없어.”
“스승도 곧 이곳에 돌아올 거다.”
“그런 문제가 아냐. 게다가 초월좌들이 이곳에 있으면 더 위험해. 알지?”

내가 말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유중혁은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녀석은 이미 지난 회차에 파천검성을 잃은 적이 있으니까.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다시 돌아오면 된다. 너는 46번 시나리오에 대해서나 생각해라.”
“생각하고 있어.”
“쉽지 않을 거다. 실패할지도 모른다.”

녀석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46번 시나리오는 혼자서 깰 수 없어. 알고 있을 텐데?

유중혁을 처음 만났던 날, 녀석을 설득하기 위해 나는 그런 말을 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말을 실현할 날이 찾아온 것이다.
유중혁이 말했다.

“46번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아니, 한 가지뿐이야.”
“네 생각처럼 되진 않을 것이다.”
“너, 내가 없는 동안 일행들이랑 얘기는 많이 했냐?”
“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유중혁이 냉정한 말투로 대답하자,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유미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46번 이후에 뭐가 있는지 알잖아?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지 않으면―”
“진짜 재앙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아.”

유중혁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45번 시나리오인 ‘금의환향’은 ‘재앙’과 싸우는 시나리오였다.
겉모습은 괴물이지만, 속은 인간인 대상과의 전투.
나는 시스템 로그에 저장된 메시지를 읽었다.

[당신은 45번 시나리오를 클리어하였습니다.]
[당신의 그룹원은 시나리오 내내 아무도 사망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그룹원은 시나리오 내내 어떤 화신도 살해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그룹은 화신과 귀환자들 사이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신과 그룹원의 ‘재앙’ 상태가 해제됩니다.]

새로운 가능성. 그것은 겉모습이 다른 종족과도 신뢰와 믿음이 가능하다는 증거였다. 그런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 유중혁이 말했다.

“시나리오가 시작된 후, 많은 사람들이 시나리오에 의해 희생되었지.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같은 인간에 의해 죽었다.”

서늘한 눈동자를 빛내는 유중혁이 갑자기 멀어 보였다.

“너는 이번 시나리오에서 일행들을 잃게 될 것이다.”
“너 무슨 남 얘기하듯······.”
“나는 이미 많은 사람들을 잃어봤다. 하지만 넌 다르겠지.”
“······.”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46번 시나리오가 무엇인지는 나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유중혁의 말을 쉽사리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일행들이라면 결코 그럴 리가 없다. 비록 3년 만에 만난 나를 감금하고 수면제도 먹이는 인간들이지만, 절대로 서로 싸우거나 다툴 일은······.

“그런데 당신도 같이 가는 건가요?”
“어, 왜?”
“······뭐, 그냥 물어봤어요.”

······허공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튀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 일행들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길영과 신유승이 선두에, 뒤쪽으로는 이지혜와 이현성, 이설화가 차례로 걸어오고 있었다. 문제는 그 사이에 낀 정희원과 한수영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둘이 문제가 있었지. 젠장.

[메인 시나리오 #46 ― ‘별의 증명’이 도착했습니다!]

46번 메인 시나리오, 별의 증명.
<올림포스>를 비롯한 성좌 녀석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시나리오를 돌파해야 한다.

츠츠츠츳······!

얼마 지나지 않아, 허공에서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도깨비들이 나타났다.

[메인 시나리오를 시작하겠습니다.]





< Episode 58. 별자리의 맥락 (4) > 끝

< Episode 58. 별자리의 맥락 (5) >





시나리오를 위해 나타난 도깨비는 비형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척 낯익은 도깨비였다. 한때는 하급 도깨비였고, 심지어 나한테 도깨비 보따리 사용법을 배웠던 녀석.

―······김독자님?

두 눈이 호롱불처럼 휘둥그레진 도깨비가 나를 향해 도깨비 통신을 걸었다.

―접니다! 도깨비 영기요!

정장을 걸친 도깨비 영기가 나를 보고 있었다. 메인 시나리오 진행 때문인지 다른 참가자들에게 티를 내는 것은 꺼리는 모양새였다.

―오랜만이네.
―돌아오셨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그새 소문이 퍼졌나?
―아유, 모를 수가 없죠. 지금 비형 님께서 김독자 님이 헤집어 놓은 개연성 수습하시느라 사방팔방으로······.

영기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다른 성좌 님들도 독자 님 소식을 많이 물어보셨어요. 이번 시나리오 끝나면 드디어 후원자분들을 뵈러 가시겠군요.
―잘 되면 그렇겠지.
―후후, 당연히 잘 되시겠죠. 하지만 김독자 님이라고 해서 특별 대우는 없습니다. 아시죠?
―알아.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46번 시나리오에 참가하기 위한 화신들이 주변에 제법 모여 있었다.

[흐음······ 총 48명이라. 서울 지역은 참가자가 적은 편이군요.]

말투가 바뀐 영기가 침착한 눈으로 지원자들을 살폈다.
지원자들의 외양은 모두 각양각색이었다.
본래부터 [공단]의 주민이었던 사람들, 혹은 필사적으로 시나리오를 깨부수고 여기까지 올라온 화신들도 있었다. 재앙에서는 벗어났으나, 유중혁과의 계약을 거절한 몇몇 귀환자들도 보였다.
깊은 슬픔과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들.
아마도 고향에서 가족을 찾지 못한 이들일 것이었다.

[이번 시나리오는 지금까지의 시나리오와는 많이 다릅니다. 먼저, 이 시나리오는 ‘선택형 시나리오’입니다.]

의문을 던진 것은 무림 출신의 귀환자였다.

“선택형 시나리오? 그게 뭐지?”

[‘개인’의 자격으로 참가하실지, 아니면 ‘성운’의 자격으로 참가하실지를 선택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뭐, 어느 쪽을 선택하시든 함께 참가할 동료 한 사람은 꼭 필요하지만 말입니다.]

들려오는 영기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슬그머니 주먹을 쥐었다 폈다.
46번 시나리오, ‘별의 증명’.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신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는 거랑 성운 자격으로 참가하는 건 무슨 차이가 있는 건데?”
“멍청아. 개인 자격은 말 그대로 혼자 참가하는 거고, 성운 자격은 단체로 참가하는 거겠지. 뭐, 성운이 있을 경우의 얘기겠지만.”
“벌써 성운에 가입되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지? 강제로 ‘성운 자격’으로 참가하게 되는 건가?”

[오,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안 그래도 그것에 관해서는······.]

영기의 말이 이어지려는 순간, 밤하늘 사이로 빛살이 번뜩였다.

[이런, 벌써 오셨군요. 성격들도 급하셔라.]

말과 동시에 허공에서 메시지들이 쏟아졌다.
메시지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별똥별처럼 착지했고, 화신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환한 빛을 뿜으며 맴돌았다.

.
.

[성운, <아스가르드>에서 당신을 초대합니다.]
[성운, <수호의 나무>에서 당신을 초대합니다.]
[성운, <탐라>에서 당신을 초대합니다.]
[성운, <황제>에서 당신을 초대합니다.]

.
.

46번 시나리오는, 성운들의 선발 경쟁으로 시작된다.

“이, 이거 뭐야!”

놀란 화신들이 소리를 질렀다. 신중한 얼굴로 성운들의 목록을 점검하는 화신도 보였다. 이미 시나리오를 알고 있었던 소수의 귀환자들이었다. 몇몇 화신들은 다른 이들의 머리 위에서 맴도는 별의 개수를 세기도 했다. 대부분은 하나, 혹은 둘 정도였고 많은 경우는 다섯을 넘기도 했다.

“······미친, 저쪽은 뭐야?”

물론, 가장 많은 메시지를 받은 건 우리 일행이었다. 특히나 유중혁을 비롯한 몇몇 일행들은 광휘로 인해 얼굴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나는 내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에게 총 137개의 성운 초대가 도착하였습니다.]
[단, 이 초대에 승낙하게 되면 성운 <김독자 컴퍼니>는 자동으로 해체됩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생각으로 보낸 메시지들일까.
정말로 내가 내 성운을 해체하고 저기 가입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화신들이 조금 진정하는 듯하자, 영기가 말을 이었다.

[이 시나리오는 처음으로 <성운>의 선택을 받는 시나리오입니다. 여러분들은 초대 받은 <성운>들 중 하나에 가입해 시나리오에 참가하실 수 있습니다.]

“꼭 가입해야 돼? 가입하면 뭐가 좋은데?”

[가입하지 않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여러분이 가입하신 <성운>이 이미 46번 시나리오인 ‘별의 증명’을 완료하였을 경우······.]

영기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은, 해당 시나리오를 면제받고 47번 시나리오로 직행하실 수 있습니다.]


*


화신들의 북새통 속에, 일행들이 하나둘 내 쪽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황제>를 선택하겠다!”
“<영광의 깃발>을 택하겠어.”

그 와중에도, 선택을 마친 화신들이 여기저기 소리를 질렀다.

[면제권이 충족된 성운을 선택하신 분들은 자동으로 47번 지역으로 전송되니, 선택 전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화신들은 46번 시나리오에 도전하기보다는 성운을 통해 업혀 가는 쪽을 택했다. 어느 정도는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한반도는 시나리오 진행이 더딘 편이었고, 때문에 46번 시나리오의 악명은 미리 시나리오가 시행된 다른 국가들을 통해 제법 알려진 편이었다.

―46번 시나리오에 두 명이 도전하면, 한 명은 죽는다.

그들 중 누구도 죽는 쪽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어떤 화신들은 시나리오 참가를 보류했고, 어떤 화신들은 성운들의 선택을 받아 다음 시나리오로 나아갔다.
화신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마침내 영기가 우리를 바라보았다.

[이제 여러분들만 남으셨군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변에 모인 일행들이 내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기가 재차 물었다.

[성운의 자격으로 지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개인 자격으로 지원하시겠습니까? 뭐, 어느 쪽을 선하시든 혼자 지원하시는 건 안 되지만 말입니다.]

“성운의 자격으로 이 시나리오를 통과한다면, 후에 같은 성운에 소속된 인원들은 자동으로 시나리오 승격 처리되는 거겠지?”

[호, 맞습니다. ‘구원의 마왕’님. 성운의 자격으로 도전할 생각이신가요?]

“그래.”

46번 시나리오인 ‘별의 증명’은, 우리 같은 신생 성운에겐 일종의 데뷔 무대나 다름없었다. 이 시나리오에서 얼마만큼의 희생자를 내고, 어떤 성적을 거두느냐에 따라 ‘별자리의 맥락’에 기록되는 설화도 달라진다.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나와 유중혁을 제외한 일행들은 아직 성운에 가입하지 않았다.
나는 일행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친 뒤, 천천히 숨을 들이켜며 말했다.

“선택을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세요. 여기서 다른 성운을 선택해 시나리오를 진행하시면 분명 불공정한 제약을―”
“독자 아저씨는 진짜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그냥 가입해달라고 말하면 되잖아?”

이지혜가 입술을 비죽이며 내 말을 끊었다. 쯧쯧, 하고 일행들이 혀를 차는 가운데,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정희원이었다.

“흐음, 이걸 어쩐다.”

장난스럽게 웃는 정희원의 머리 위에도, 까마득한 양의 ‘성운 초대’가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엘을 생각하면 <에덴>으로 가는 게 맞긴 한데······.”

사실 많은 경우 화신들은 배후성이 소속된 성운에 가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배후성이 무척 개방적이거나, 화신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특히나 <에덴>은 그와 관련해 화신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편이었다.
정희원이 물었다.

“<김독자 컴퍼니>는 4대 보험은 가입시켜주나요?”
“어, 음. 제가 이런 걸 처음 운영해 봐서······.”
“점심시간이랑 낮잠 시간은?”
“개인 정비 시간은 어떻게 됩니까?”
“약재나 재료 아이템의 지원은요?”

이지혜도, 이현성도, 이설화도. 제각기 묻고 싶은 질문들을 던졌다.

“저, 그게······ 아시겠지만, <김독자 컴퍼니>는 이제 막 만들어진 신생 성운입니다.”

나는 폭발적인 질문 세례 속에 말을 더듬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쉬는 시간도, 개인 정비 시간도, 모두 여러분들이 정하셔야 합니다. 소모성 재료 아이템의 공급은 최선을 다해보겠지만 충분치 않을 수 있습니다. 잦은 야근이 있을 수도 있고, 충분한 수당을 못 드릴 수도 있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참 양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멸망 이전’이었더라면 누가 이런 회사에 들어오겠나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현성은 내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있었고, 이지혜는 하품을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독자 씨.”
“예?”

고요한 목소리로, 정희원이 말했다.

“사실,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아요.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뭘 하느라 이렇게 늦게 돌아온 건지.”
“저, 안 그래도 곧 이야기를 드리려고······.”
“사실 들어도 화가 안 풀릴 거 같긴 해요.”
“······.”
“그날 일은 생각만 해도 화가 나요. 왜 독자 씨가 우리 목숨을 결정해요? 우린 독자 씨가 기르는 애완동물이 아닌데.”
“······죄송합니다.”
“설령 독자 씨한테 도움이 안 되더라도, 우리 삶은 우리가 결정하는 거라고요.”

정희원이 받은 상처가 어떤 것이었을지,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정희원뿐만이 아닌지도 모른다.
지난 3년은, 일행들에게 그런 세월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 결정은 이거에요.”

말꼬리를 흐린 정희원이 고개를 숙였다. 파르르 떨리는 어깨. 내가 다가가려는 순간, 정희원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저 강인한 검객이, 희미하게 붉어진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었다.

[화신 ‘정희원’이 성운 <김독자 컴퍼니>에 가입하였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화신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나는 입술을 깨문 채로 그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간신히, 정말 간신히 웃으며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희원 씨.”

정희원이 희미하게 미소했다.
두 번째로 나선 것은 이현성이었다.

“저도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지만······ 희원 씨가 다 해버렸군요.”
“그럼 먼저 말하지 그랬어요?”
“워낙 말주변이 없어서······. 사실 저도 직군은 이제 그만하고 싶었습니다.”

[화신 ‘이현성’이 성운 <김독자 컴퍼니>에 가입하였습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화신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그다음은 이지혜였다.

“윽, 난 이런 분위기 질색이야. 빨리 다음 차례로 넘겨!”

[화신 ‘이지혜’가 성운 <김독자 컴퍼니>에 가입하였습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화신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이설화도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전 어제 중혁 씨 통해서 가입했어요.”

[성좌, ‘구암신의’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신유승과 이길영이 내게 매달리며 말했다.

“우리도요, 아저씨!”

목록을 확인해 보니, 정말이었다.
이미 세 사람은 내 성운에 가입되어 있었다.
모두가 머리 위에 떠오른 성운 메시지를 확인하는 동안, 오직 한 사람만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일행들도 하나둘 그쪽을 바라보았다.
일행들 중 성운에 가입하지 않은 이는 이제 한 사람뿐.
한수영이 칫 하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번 한 번만 해주는 거야, 멍청아.”

[화신 ‘한수영’이 성운 <김독자 컴퍼니>에 가입하였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투덜거리며 화신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대신 이름은 나중에 바꿀 거야. 한수영 코퍼레이션으로.”

나는 일행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후, 기다리고 있던 영기 쪽을 돌아보았다.

[흐음, 대충 정리는 끝나신 것 같군요. 그럼 묻겠습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 ‘성운 자격’으로 시나리오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기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들어가면 재미가 없으니, 일행을 조금 나누겠습니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인원이 많아서 일행을 나눈다?
원작의 46번 시나리오에 그런 내용은 없었는데?
영기의 표정이 께름했다. 묘하게 식은땀이 맺힌 녀석의 이마.

―죄송합니다, 김독자님.

······뭐?

[성운 <파피루스>가 당신의 도전을 못마땅해합니다!]
[다수의 성운이 당신의 도전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순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이런 개자식들이, 끝까지 훼방을 놓겠다 이거지?
나는 반사적으로 일행들을 향해 외쳤다.

“다들 명심해요! 절대로 ‘별’에 손을 대서는······!”

눈부신 빛살과 함께, 눈앞의 정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당신의 성운은 참여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46번 시나리오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참가 인원에게 방이 할당됩니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시나리오 내용이 떠올랐다.

+

<메인 시나리오 # 46 ― 별의 증명>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방의 중심에 비치되어 있는 ‘별’을 입수해 사용하거나, 제한 시간 동안 상대방이 ‘별’을 입수하지 못하게 막으시오. 둘 중 하나의 조건이 충족될 시 시나리오는 자동으로 클리어됩니다.
제한시간 : 3시간
보상 : 추가 메시지로 설명됩니다.
실패시 : 조건부 사망

+

이어서 들려오는 영기의 목소리.

[동료애가 아주 각별한 분들끼리 함께 넣어드리죠.]

눈을 떴을 때, 나는 새하얀 방 안에 덩그러니 홀로 서 있었다.
그리고 방의 중심에, 작은 대리석 장식대 위에 반쯤 두둥실 떠 있는 ‘별’이 있었다.

[이런, 방 하나가 잘못 배정되었군요. 하하, 어쩔 수 없죠! 아무튼, 여러분께 이야기의 가호가 따르기를!]

목소리가 잦아들고, 방의 반대편에도 한 사람이 소환되었다.
나는 눈을 한 번 비빈 뒤 무시무시한 눈길로 이쪽을 노려보는 상대를 마주보았다.

“······‘잘못 배정된 방’이 여기인가 본데.”

[해당 방에 비치된 별의 보상이 공개됩니다!]

+

<별의 보상>

선택 1. 상대방보다 먼저 ‘별’을 획득해 사용할 시, 당신은 상대방이 가진 모든 스킬 및 설화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선택 2. 상대방보다 먼저 ‘별’을 획득해 사용할 시, 당신은 상대방에 대한 무기한 생사여탈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선택 3. ······.

+

나는 보상 내역을 읽다 말고 상대방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이,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너도 알다시피 이 시나리오는······ 야!”

나는 말을 하다 말고 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방의 중심에 도착한 유중혁이 ‘별’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 Episode 58. 별자리의 맥락 (5) > 끝

< Episode 59. 김독자 컴퍼니 >





“유중혁, 미친놈아!”

나는 거의 괴성을 지르며 유중혁을 향해 달려갔다. 얼마나 놀랐는지 스킬의 위력을 조절할 수조차 없었다. [책갈피]를 통해 [전인화]와 [바람의 길]이 동시에 발동했고, 섬전처럼 쏘아진 내 신형은 유중혁의 몸과 그대로 충돌했다.

콰아아아앙!

[백청강기]의 마력이 허공을 물들였고, 장식대 위의 별이 날아올라 바닥을 굴렀다. 내 마력을 받아낸 유중혁이 나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

“비켜라.”
“비키긴 뭘 비켜! 너 진짜 미쳤냐?”

어이가 없었다.
다른 등장인물들이라면 모를까, 뻔히 모든 걸 알고 있는 유중혁이 ‘별’을 건드리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46번 시나리오가 뭔지 몰라? 시나리오 제대로 안 읽었냐고!”

물론 저 유중혁이 시나리오를 제대로 안 읽었을 턱이 없었다.

“읽었다.”
“저걸 집으면 모두 끝장이야!”
“그렇지만은 않다. 대부분은 저 별을 획득하며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가니까.”

유중혁이 느릿하게 나를 돌아보았다.
일말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
놈은 46번 시나리오가 처음이 아니었다.

「46번 시나리오는 같은 성운 소속이거나, 자신이 ‘동료’로 인정한 사람만 함께 참가할 수 있다.」

앞선 회차에서, 유중혁은 모든 것을 계산해 46번 시나리오에 뛰어들었다. 제약을 받기 싫었기에 대성운에 가입하지 않았고, 대신 자신이 꾸린 동료들을 모아 시나리오에 도전했다. 미래의 신유승에게 받은 41회차까지의 정보들도 적극 활용했다.
하지만 그런 유중혁도 단 하나, 예상하지 못한 존재가 있었다. 유중혁이 바꾼 새로운 미래에 적응하여, 유중혁의 동료로 나타난 인물.

「“당신을 믿어요, 유중혁.”」

예언자 ‘안나 크로프트’.
지난 회차에서, 그녀는 유중혁의 일행이었다.
나는 손으로 녀석을 막아서며 말했다.

“유중혁.”

괜찮아졌을 거라 생각했다.
이전의 회차와는 완연히 다른 삶을 살아오며 달라졌을 거라 생각했다.
몇 번이나 서로의 목숨을 구해주며 여기까지 왔으니, 신뢰라는 게 생겼을 거라고 생각했다.

“난 안나 크로프트가 아니야. 널 배신하지 않아.”

「“당신이 배신하지 않을 것을 믿었어요.”」

유중혁은 안나 크로프트 때문에 46번 시나리오를 실패했다.
일행들을 잃었고, 가진 모든 것들을 잃었다. 유중혁은 살아 남았지만, 살아 남은 것이 아니었다. 안나 크로프트에게 모든 것을 잃고, 존재 자체를 복속 당한 채 46번 시나리오 이후를 노예처럼 살다가 죽었다.
유중혁이 나를 보며 말했다.

“김독자, 너는 예언자라고 했지.”

유중혁의 표정에 냉기가 깃들었다.

“난 네놈이 마음에 들지 않아. 처음부터 그랬다.”

고오오오오!

유중혁의 전신에서 초월좌의 기파가 터져 나왔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발도하는 [흑천마도]의 검격에, 나도 [전인화]의 힘을 한도까지 끌어 올렸다.

까드드드드득!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충격파와 함께 벌레처럼 튕겨 나가는 내 몸.
이젠 나도 정말 화가 났다.

“이 망할 자식이―!”

꽈아아아아앙!

[‘마왕’의 격을 개방합니다!]

[전인화]에 이어 [마왕화]까지.
나는 가진 모든 힘을 집중하여 유중혁의 힘에 대응했다.
일전에 다하지 못했던 2차전의 개막이었다.
격의 충돌에 휩쓸려 저만치 나뒹굴고 있는 ‘별’을 일별하며, 나는 외쳤다.

“이제 다 왔는데, 겨우 여기서 포기하려는 거냐? 내 스킬이랑 설화들이 그렇게 탐나냐고!”

유중혁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발악하듯 검을 휘둘러댔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과 [흑천마도]가 부딪치며 귀청이 찢어질 듯한 파찰음을 자아냈다.

······그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유중혁은 지난 회차에서 예언자에게 배신당했고, 그러니 녀석이 가장 가지고 싶은 힘도 예언 그 자체일 것이다.
그리고 녀석은, 아직도 나를 ‘예언자’라고 오해하고 있다.

「김독 자는 멍 청 하다」

뭐?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합니다!]
[‘제4의 벽’이 몸을 들썩이며 웃습니다.]

순간, 차가운 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머릿속이 냉철해졌다.
정말 유중혁은 내가 ‘예언자’라서 죽이려는 것일까?
내가 가진 스킬들과 설화를 손에 넣기 위해서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일까?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녀석은 모든 걸 연기해온 것일까?

[‘한낮의 밀회’에 읽지 않은 메시지들이 남아 있습니다.]

지난 3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아이템.
나는 유중혁의 검격을 받아내며 ‘한낮의 밀회’를 발동했다.

[부재중 메시지가 ???통 있습니다.]
[메시지가 손상되어 읽을 수 없습니다.]

젠장······.

「도 와줄 까?」

그 말과 함께, 내 머릿속에서 메시지들이 정렬되기 시작했다.

[‘제4의 벽’의 권능으로 손상된 메시지들이 불완전하게 복구됩니다.]

유중혁이 남겼을 메시지들이 [제4의 벽]의 입을 통해 불완전하게 재생되기 시작했다.

「이길 영 신유 승 짜증 나는 꼬마」
「이 현성 어 리석 은 군 인」

······우스운 메모였다. 이 자식은 채팅창을 메모장으로 썼나?

「정 희원 한 수 영 사 이 나 쁘다」
「이지 혜 머리 안 좋 아」
「유상 아 쓸데 없 이 영 리」

누가 보면 일행들 욕만 써놓은 줄 알겠다.
하지만 유중혁을 잘 아는 나는 알 수 있었다.
유중혁은, 관심이 없는 존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조차 않는 녀석이다.

「김 독 자.」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현기증이 일었다.

“유중혁, 너 지금······.”

애초에 이 시나리오는 ‘동료’로 인정이 될 때만 발동하는 시나리오다.
만약 녀석이 나를 믿지 않았더라면, 나를 동료로 인정하지 않았더라면 이 시나리오에는 진입조차 할 수 없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에 대한 이해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합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이 발동합니다!]

나는 멍하니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유중혁은, 내가 가진 스킬이나 설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침내 녀석이 입을 열었다.

“네 방만을 용납하는 것은 여기까지다.”

놈의 [흑천마도]가 정확히 내 목을 겨누고 있었다.

“네놈이 멋대로 굴어서 3년을 날렸다. 또 그럴 수는 없다.”
“필요한 일이었어. 제대로 된 ■■으로 가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고!”
“네놈이 추구하는 ■■이 제대로 된 것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내 ‘생사여탈권’을 네놈이 가지겠다는 거냐?”

유중혁의 눈동자에서 고요한 분노가 이글거렸다.

“적어도 이렇게 하면 네놈은 또 멋대로 희생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녀석들도······ 쓸데없는 짓을 벌이지 않겠지.”

[제4의 벽]은 계속해서 [한낮의 밀회]의 문장들을 읽고 있었다.

「이지 혜가 자 신의 목 숨을 가 벼이」
「이 현 성 일 부러 괴수 들 속에 뛰어 들 었 다」

일행들이 벌였던 ‘쓸데없는 짓’이 무엇인지,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선언하듯 말했다.

“이제 그런 짓은 절대로 안 해.”
“······.”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딨냐? 나도 거기서 그러기 싫었어.”

유중혁은 나를 겨눈 검을 내리지 않았다.
나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는 눈빛.
결국, 설득의 방향을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유중혁, 그 ‘별’을 사용하게 되면 너는 내 ‘생사여탈권’을 가질 수 있을지 몰라도 ‘배신자 설화’를 얻게 된다.”

배신자 설화.

“그 설화를 얻게 되면, 다음 시나리오로 가게 되더라도 너는 일행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게 돼. 이제 아무도 너를 믿지 않을 거라고. 너는 그렇게 살고 싶은 거냐?”

미움받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것은 냉혈한 회귀자 유중혁이라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이제야 제대로 된 ‘동료’를 얻게 된 유중혁이라면 더욱.

“상관없다.”
“뭐?”

유중혁이 나를 보았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통해 녀석의 마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내가 너였다면 좋았을 것을.」

내가 아는 유중혁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발이 굳어진 찰나, 유중혁의 신형이 ‘별’을 향해 움직였다.

순간, 누군가가 시간의 양극을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의 모든 것이 느려졌다.

―근데 네 세계선의 유중혁은 아직 괜찮냐?

느려진 시간 속에서, 1863회차 한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유중혁이야 닳고 닳은 놈이지만, 3회차면 정신 상태가 아직 말랑할 거 아냐? 너 같은 녀석이 나타나서 설쳐대면 분명 기가 꺾일 텐데 말이지.

‘별’을 향해 다가가는 유중혁의 표정은, 이제 주인공의 그것이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던 오만하고 자신감에 넘치던 유중혁은 이제 없었다.
유중혁은, 오히려 무언가에 겁을 먹은 모습이었다.

「이 세계에는 김독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에게도······.」
「시나리오를 끝까지 클리어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니야.」

[제4의 벽]이 말했다.

「너 도 이 걸원 했 잖 아」

귓가가 왱왱거리며, 지금껏 내가 했던 짓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유중혁이 얻어야 할 것을 대신 얻고, 유중혁이 올라서야 했던 자리를 빼앗으며 살아온 내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흐르고 있었다.

「“나는 유중혁이다.”」

장난처럼 지껄였던 말들이, 고스란히 내게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내가 별다른 생각 없이 빼앗았던 역사들이, 지금의 유중혁을 만들었다.

「주인 공 이 되고 싶었 잖 아」

아니야.

[제4의 벽]이 말했다.

「너는 유중혁이다.」

나는 유중혁이 아니야.

「김독자는 유중혁이다.」

내가 되고 싶은 건, 주인공이 아니라고.

「그 럼 너 는 무 얼 위 해 시 나 리 오를 수 행 하 는 거 지?」

무엇을 위해 시나리오를 수행하는가.
‘별’을 향해 손을 뻗는 유중혁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걸 말로 설명할 수 있다면, 뭐하러 시나리오를 깨 왔겠어.

[‘제4의 벽’이 알 수 없는 반응을 일으킵니다.]

머릿속에서 쩌저저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단단한 뭔가에 작은 금이 가는 것 같은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유중혁을 향해 달려갔다. 기다렸다는 듯 돌아본 유중혁이 나를 향해 격을 발출했다.

완숙한 경지에 오른 초월좌의 힘.
지난 3년간, 유중혁은 강해졌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을 이야기합니다.]

“너는 내 상대가 안 된다.”
“그럴지도 모르지.”

1863회차에 다녀온 내가 이길 수 없을 만큼, 유중혁은 강해졌다.
이렇게나 강해진 녀석이 저렇게 자신감이 떨어져 있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난, 널 이길 수 있는 녀석을 알아.”

유중혁은 두려워하고 있다.
41회차의 신유승에게 받은 정보들이 슬슬 떨어져 가고 있을 테니까.
이제 곧 녀석이 모르는 이야기들이 시작될 테니까.

[‘이계의 언약’의 보상으로 받은 ‘설화’를 해금합니다.]

그러니 알려줘야 한다.
너는 고작 그 정도가 아니라고.
네가 뻗어 나갈 수 있는 곳은, 겨우 41회차까지가 아니라고.

[당신은 ‘신화급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해당 설화는 누군가가 당신에게 전승한 것입니다.]

눈부신 빛살과 함께, 머릿속에서 메시지들이 폭발했다.

[‘단 하나의 설화’가 당신의 신화급 설화에 반응합니다!]
[해당 신화급 설화는 거대 설화를 대체하기에 충분합니다!]
[당신의 첫 번째 신화급 설화가 ‘승(承)’의 일부를 완성하였습니다!]
[전승 과정에서 설화의 일부가 소실되어 ‘승’이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다른 신화급 설화나 거대 설화를 획득하십시오.]

······본래 이 설화를 손에 넣을 계획은 없었다.
내가 만들 이야기에 1863회차의 설화가 끼어들 줄도 몰랐고.
하지만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면, 이 설화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해당 설화의 크기가 당신의 이야기 역량을 까마득하게 넘어섭니다.]
[당신의 독해 수준으로는 해당 설화의 일부만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코피가 흘러나왔고, 온몸이 감전이라도 된 듯 떨렸다.
나와 유중혁의 주변으로 새카만 그림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방의 정경이 뒤바뀌며 어디선가 유황 냄새가 났다. 뜨거운 지옥불과 혈향이 바닥을 덮고 있었다.
당황한 유중혁이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에 반응하지 않고, 나를 기다리는 무수한 그림자들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독해 수준으로 해석 가능한 회차를 가늠합니다.]

숫자들이 망막 위를 빠르게 지나쳤다.

[당신이 독해 가능한 ‘유중혁’의 최대 회차는 ‘41회차’입니다.]
[‘41회차’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유중혁의 감정이 머릿속을 가득 메워갔다.

지독한 절망감과 무력감.
고된 시나리오 속에서 닳아버린 감정들.

미쳐버릴 것 같은 우울이 형상을 띤 채 나를 공격해왔고, 비웃음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참고 견뎠다.

[해당 회차의 ‘유중혁’의 재능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아득한 고독감 속에서, 그림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41회차의 유중혁.
신유승을 과거의 자신에게 보냈던, 비정한 사내.
그가 나를 향해 말했다.

「내 특기는 ‘창’이다.」

새카만 그림자로 존재하는 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창을 손에 쥐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Episode 59. 김독자 컴퍼니 > 끝

< Episode 59. 김독자 컴퍼니 (2) >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
그것은 1863회차의 유중혁이 내게 전해준 설화였다.

츠츠츠츠츳······!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설화’에 경악합니다.]
[성운 <아스가르드>가 당신의 설화를 주목합니다.]
[성운 <베다>가 당신의 설화를 주목합니다.]

무려 성운 규모의 주목을 받는 설화.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 설화는 무려 ‘신화급 설화’인데다, 심지어는 ‘거대 설화’의 일부를 대체할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유중혁의 동공에도 파문이 일고 있었다.

“어떻게······.”

‘영원불멸의 지옥도’는 1863번에 달하는 회귀를 통해 쌓은 유중혁의 ‘역사’를 잠깐이나마 빌려올 수 있는 설화.
손아귀에 쥔 창에서, 내 것이 아닌 힘이 느껴졌다.
이 ‘설화’로는 유중혁의 스킬이나 성흔을 빌려올 수는 없다.

하지만 유중혁의 진짜 힘은 시스템을 통해 구성된 것이 아니라, 초월좌의 수련을 통해 체화된 것이다.

「그 창을 손에 쥐기 위해, 유중혁은 수십 년 동안 단 하나의 초식을 단련했다.」

41회차의 유중혁.
녀석은 파천검성을 찾는 대신, 사라진 <제0 무림>의 유산을 찾았다.
이미 오래전에 멸망해버린 세계의 무공.

멸혼신창(滅魂神槍).

무림 최강이라는 [파천검도]에 비견할 수 있는 극강의 마공(魔功).
41회차의 유중혁은 이 창 한 자루로 귀환자들을 멸살했다.
아마 3회차의 유중혁도, 이 힘을 알아볼 것이다. 이것은 녀석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무공 중 하나였으니까.

“맞아, 네가 익히려 했던 힘이야.”

나는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창을 쥔 손이 중풍에 걸린 것처럼 떨렸다. 과도하게 집적된 격. 겨우 41회차. 그 41회차에, 유중혁은 이미 이런 경지에 올랐다.

쿠구구구구!

스킬이나 성흔을 넘어서, 인간 유중혁이 자신의 삶을 바쳐 축적한 힘.
이것이 바로 ‘초월좌의 격’이었다.
밀려오는 현기증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나는 버티고 또 버텼다. 육체적 부하보다 정신적 부하가 더 컸다. 하지만 이 하중이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것이라면.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 중입니다!]

나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덤벼라, 유중혁.”

설화 속 유중혁이 자세를 취한다. 성유물인 [옹호극]이나 [백뢰신창]이 있었다면 더 제대로 싸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이 ‘그림자 창’으로도 충분했다.
충분하다고, 나에 의해 초환된 가상의 41회차 인격이 말했다.

「나약하군. 회귀하기 좋은 꼴이다.」

유중혁은 약해졌다.
아마도 내가, 녀석을 약하게 만든 것이다.

“제대로 안 덤비면 죽일 거다.”

그 말과 함께 유중혁의 전신에서도 초월의 격류가 몰아쳤다.
내가 진심이라는 것을 유중혁도 눈치챈 것이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아아아앙!

허공에서 격과 격이 충돌하며 굉음을 일으켰다. 자욱하게 솟은 먼지 사이로 [멸혼신창]의 창영(槍影)이 수십 수백 갈래로 분화했다.

까가가가가강!

[파천검도]는 [멸혼신창]의 공세에 밀리기 시작했다.
스킬도 아니었고, 성흔도 아닌 힘.
41번에 달하는 회귀 속에서 만들어진, 노력으로 형상화된 역사.

콰콰콰콰콰!

폭발하는 [멸혼신창]의 창광(槍光)에 유중혁의 몸 곳곳에 상흔이 나타났다.

“이것밖에 안 되냐? 지난 3년 동안, 겨우 이 정도냐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고갈되어가는 마력에 어지럼증이 도졌다. 그럼에도 나는 지껄였다. 녀석을 도발하기 위해, 더욱더 자극적인 말들을 내뱉었다. 유중혁의 상념이 허공을 떠돌았다.

「그때 ‘절대왕좌’를 차치했다면 어땠을까.」

흘러넘치는 후회 속에서, 유중혁은 물러나고 또 물러났다.

「만약, 내가 더 노력했더라면.」

물러서고, 또 물러서고.
그렇게 끝없는 물러섬 끝에, 유중혁은 언제나처럼 막다른 벽에 도달했다.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벽.
나는 그런 유중혁을 향해 창을 찔렀다.
쇄도하는 창극이 유중혁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너는 노력했다.」

유중혁의 동공이 커지며, 간발의 차이로 창극을 피해냈다. 벽에 틀어박힌 창을 보며, 유중혁이 몸을 떨었다. 창극이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충분치 않았을 뿐.」

유중혁의 떨림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흔들리던 눈동자가 가라앉고, 차가운 심상이 망막 속에 똬리를 틀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화신 ‘유중혁’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유중혁이 다시 검을 들었다. [멸혼신창]의 창극이 허공을 가르자, [파천검도]의 검강이 그 궤적 위에 겹쳐졌다. 새파란 불꽃이 튀기며, 유중혁은 내가 아니라 ‘창’을 바라보았다. 충돌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주변의 시공간도 변화했다.
초월의 시간이 열리고 있었다.

「네가 내게 신유승을 보냈었지.」
「맞아.」

유중혁은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아까보다 정제되지 않은 검격이었다.
궤적은 미숙했고, 초식은 어설펐다.
분명 완성 직전에 있었던 [파천검도]가, 다시 흐트러지고 있었다.
유중혁이 물었다.

「41회차를 거치면 이 정도로 강해질 수 있는 건가?」
「정확히는, 겨우 이 정도일 뿐이지.」

초월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가진 틀을 버릴 용기를 내야 한다.
고작 창틀 하나 때문에 성을 무너뜨리는 건축가처럼, 집요한 강박과 완벽에의 갈망만이 새로운 초월의 길을 여는 열쇠가 된다.
그리고 유중혁은 길을 선택했다.

쩌저저저적.

[멸혼신창]과 부딪칠 때마다 [파천검도]의 형(形)이 무너졌다. 궤(軌)가 바뀌고, 의(意)가 변한다. 결국 초월좌의 힘은 그가 추구하는 설화의 결을 따라가는 법이다. 거대한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더 강해져 온 유중혁의 역사. 그 역사가, 다시 한번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강해져라, 유중혁.」

유중혁과 유중혁이 대화하고 있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화신 ‘유중혁’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삶의 어느 국면에 이르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유중혁.
그런 유중혁을 보며 나는, 나에 관해 생각한다.

주인공이 될 수도 없고.
누군가를 구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야기를 알고 있고,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
그 모든 창격에 내가 읽은 문장들이 담겨 있었다.

그 끔찍했던 3회차를.
통한의 41회차를.
지옥 같았던 1863회차를.

내가, 한 문장도 빠짐없이 모두 읽었다.

아아아아아아아!

그 격돌 안에서 유중혁은 다른 삶들을 살고 있었다.
내가 ‘멸살법’을 통해 삶을 살았듯, 유중혁 또한 부딪치는 병장기의 파찰음 속에서 자신이 살지 않은 생을 살고 있었다.
3회차의 유중혁은, 41회차를 통해 성장하고 있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를 응시합니다.]

인간은 타인에 의해 구원될 수 없다.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
타인인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교량(橋梁)의 역할이다.

“너도 실패한 놈일 뿐이다.”

유중혁이 말했다.

“실패한 놈의 충고 따윈 듣지 않는다.”

비로소, 내가 알던 유중혁이었다.
진화한 [파천검도]의 궤적이 [멸혼신창]의 흐름을 따라간다. 집요하게 따라붙은 검격이 창의 그림자를 파훼하고, 이어지던 맥을 끊는다.
유중혁은 좌절해도 포기하진 않는다. 절망해도 멈추지 않고, 모든 것이 무너져도 다시 한 번 첫 번째 블록을 집는다.

「나는 유중혁이다.」

“아니.”

그리고, 마침내 자기 자신을 넘어선다.

“내가 유중혁이다.”

폭발하는 강기가 방의 곳곳을 파괴하며 비산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마칩니다.]

타오르던 지옥도가 사라지고, 혈향은 무뎌졌다. 희뿌연 먼지 속에서, [흑천마도]의 날카로운 칼날이 내 목젖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내가 뻗은 [부러지지 않는 신념] 또한 녀석의 심장 어귀에 닿아 있었다.

[성좌, ‘해상전신’이 진심으로 감탄합니다.]
[성좌, ‘한발 늦은 시련의 극복자’가 경의를 표합니다.]
[성좌, ‘황산벌의 마지막 영웅’이 진정한 무인의 대결에 탄복합니다.]

시간이 정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을 가득 채우는 것은 차오른 숨소리뿐이었다. 간헐적으로 끊어지는 그 정적 속에서, 유중혁이 나를 노려보았다.
41회차를 넘어선, 3회차의 유중혁이 말했다.

“내가 이겼다.”

나는 웃었다.

“뭔 소리야? 내가 이겼어.”

바닥을 굴러다니는 별이 환한 빛을 발했다.

[시나리오의 제한시간이 모두 경과했습니다.]

작은 축복처럼, 허공에서 별이 터지며 은빛으로 흩어졌다.
우리는 멍하니 그 빛을 올려다보았다.

[해당 방은 별을 획득하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동료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46번째 시나리오, ‘별의 증명’.
이 시나리오는 참가자 모두가 서로를 해하지 않을 때 ‘제대로’ 클리어할 수 있다.

[당신은 ‘신뢰’를 증명하였습니다.]

하지만 46번까지 시나리오를 거쳐온 이들은, 누구도 그런 식으로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 위로는 이제 성좌들의 세계.
마지막으로 자신의 힘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릴 화신은 없다.
하나의 별이 탄생하면, 하나의 별은 저문다. 그리고 누구도 빛을 나눠 갖지 않는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더이상 버티는 것은 유중혁도 나도 한계였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 의식의 퓨즈가 끊어졌다 되돌아왔다. 끔뻑끔뻑 눈을 떴을 때, 유중혁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쉽게 됐군.”
“그러게 말이다. 패왕의 설화를 얻을 기회였는데.”

지지 않고 대꾸하면서도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온몸의 근육이 끊어질 듯 아팠다. 몰래 꿍쳐 두었던 [대환단]을 몇 개나 씹어 먹었지만, 망가진 화신체의 회복은 생각보다 더뎠다. ‘영원불멸의 지옥도’는 그만큼 과부하가 심한 설화였다.

“넌 멀쩡해 보인다?”
“······.”

숨을 몰아쉬면서도 유중혁은 끊임없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방금 얻은 깨달음으로 인해, 유중혁은 아마 새로운 경지에 올랐을 것이다. 그게 재능이라는 거겠지. 부럽다.
······뭐, 쟨 주인공이니까.
침묵하던 주인공이 입을 열었다.

“너는 다른 세계선에 다녀왔다고 했지.”

왜 안 물어보나 싶었다.

“몇 회차였지?”
“1863회차.”

그 숫자가 너무나 아득했던 것일까.
유중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방금의 설화는 그 세계선의 내가 준 건가?”
“맞아.”

유중혁은 더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대신,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이렇게 물었다.

“그곳의 나도······ 실패했나?”

나는 허공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성공했어.”

유중혁의 신형이 멈칫 굳는 것이 느껴졌다.

[‘제4의 벽’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원작의 회차를 뛰어넘어,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 떠나던 1863회차의 유중혁. 나는 그 유중혁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녀석이라면 시나리오의 끝에 도달할 수 있을 거야. 어쩌면, 나도 알지 못하는 결말에.”
“······너도 제대로 확인하진 못한 모양이군.”
“그걸 확인했으면 돌아오지 못했겠지.”
“거기서 끝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거긴 내 세상이 아니야.”

나는 텅 빈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세상은 여기야.”

유중혁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나는 잘 올라가지 않는 입술을 매만지며 웃었다.

“여긴 내 화신인 유승이도 있고, 직장 동료 유상아 씨도 있고, 아직 흑화가 덜 된 한수영도 있고, 어머니도······.”
“벌써 희희낙락하지 마라. 아직 끝난 게 아니다.”

허공에서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이런, 방 하나는 벌써 끝났군요. 히히, 과연······ 시나리오의 기대주들답게 박진감 넘치는 전투였습니다!]

영기는 아니었다. 시나리오를 맡은 도깨비들의 숫자가 제법 되었으니, 아마 담당이 바뀐 거겠지. 나는 몸을 일으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유중혁의 말이 맞다. 아직, 이 시나리오는 끝난 것이 아니다. 유중혁이 말했다.

“다른 방은 우리보다 늦게 투입되었다.”

실제로 우리의 눈앞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떠 있었다.

[현재 성운 소속원들의 시나리오 클리어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리고 영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리어 조건을 만족하신 분들께는, 특별히 다른 방의 정경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눈앞에 떠오르는 몇 개의 화면들.
뒤이어 무수한 간접 메시지들이 귓가를 찔러왔다.

[마왕,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두 성좌의 격돌을 주시합니다.]
[마왕, ‘검은 갈기의 사자’가 전투에 깊은 흥미를 보입니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전장을 주목합니다.]
[성좌, ‘정의와 화목의 친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성좌, ‘재앙의 뒤틀린 머리’가 친우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한 장소에 쉽게 모이기 힘든 가공할 수식언들. 나는 떠오른 화면들 중 하나에 시선을 고정했다. 왜 이런 거물들이 모여 있나 했더니······.

······빌어먹을, 역시 이렇게 된 건가.

화면 속에서 검고 붉은 마력파가 충돌하고 있었다.
방 전체를 가득 채우는 마력의 향연.
무엇이라도 녹일 듯한 지옥불과,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검은 불꽃이 부딪치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 열기에 육신이 익어버릴 것 같은 정경이었다.

내가 아는 가장 무시무시한 두 성좌.
그 성좌들의 화신이, 격돌하고 있었다.

‘심연의 흑염룡’.
그리고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도깨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잘못 배정된 방은 아무래도 싱겁게 끝나겠군요.]

검붉은 마력파의 폭발 속에 방 안의 모든 것이 불타올랐다. 희뿌연 시야 속에 창백한 그림자들이 흔들렸다.
날카롭게 찢어지는 피육음.
누군가의 신형이, 연기 속에서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 Episode 59. 김독자 컴퍼니 (2) > 끝

< Episode 59. 김독자 컴퍼니 (3) >





후두둑 떨어지는 천장의 파편을 보며, 정희원은 고요히 먼지 속을 응시했다. 부유스름한 시야 사이로 쓰러진 한수영의 모습이 보였다.

‘멸악의 심판자’ 대 ‘흑염마황’.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대 ‘심연의 흑염룡’.

한반도의 모든 성좌들이 고대하는 전투였지만, 정작 당사자들의 표정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흙먼지 사이로 발을 내딛은 정희원은 [심판자의 검]으로 쓰러진 한수영을 겨눈 채 말했다.

“연기는 그만두시지 그래.”

한수영의 모습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날카로운 파공성. 정희원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며 자신의 뒤쪽으로 검을 찔렀다.
금속이 부딪치는 파찰음. 붕대를 푼 한수영의 오른손이 새카만 어둠을 품은 채 [심판자의 검]을 받아내고 있었다.

“······안 속네?”
“네가 아바타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

[심판자의 검]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넌 ‘첫 번째 사도’니까.”

꽈아아아앙!

격과 격이 충돌하며,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귀살]을 발동한 정희원의 두 눈에서 붉은 귀화가 일렁였다.
[귀살]은 사용자의 공격력을 증강시키는 대신, 불안한 감정 또한 강화시킨다. 슬픔은 고조시키고, 분노는 증폭시킨다.

“충무로에서 일행들을 공격했던 것도 너였지.”

[깃발 쟁탈전]이 한창이었던 시절, 충무로에서의 전투.
그것이 한수영과 일행들의 첫 만남이었다.

“그때 지혜랑 길영이는 죽을 뻔했어.”
“······네가 죽을 뻔한 것도 아닌데 왜 성질이야? 심지어 넌 그때 거기 있지도 않았잖아?”
“없었으니까 화가 나는 거야. 있었다면, 널 그냥 두지 않았을 테니까.”

허공에서 불빛이 반짝이며, [깃발 쟁탈전] 당시 벌어졌던 일들이 홀로그램 영상으로 투사되고 있었다. 아마도, 당시 채널에 없었던 성좌들을 위한 도깨비들의 서비스일 것이다. 사도들의 습격으로 끔찍한 상처를 입은 이지혜와 이길영의 모습. 한수영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지금 날 죽이겠다고?”
“넌 믿을 수 없어.”

한수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정희원의 분노가 타당하다는 것을, 한수영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
분명 그녀는 ‘첫 번째 사도’였고, 한때는 일행들의 적이었다.

2년 전의 어느 날.
한수영이 ‘첫 번째 사도’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왜 그런 소문이 퍼졌는지는 모른다. 확실한 것은, 한수영이 딱히 소문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죄책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이만하면 됐겠지 싶은 비겁한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인지는 한수영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 대한 일행들의 태도뿐이었다.

―뭐, 지난 일이니까요.
―진짜요? 누나가 그때 목 잘린 채 말하던 사람이라고요? 신기하다.

[깃발 쟁탈전] 당시 가장 크게 다쳤던 이지혜와 이길영은, 오히려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들이었다. 이미 그녀가 ‘첫 번째 사도’인 것을 알고 있었던 유상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고, 유중혁은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정희원은 달랐다.

“넌 제대로 속죄해야 해.”
“그러니까, 왜 네가―”
“그런 식으로 대충 넘어가면, 그 애들이 받은 상처가 없었던 일이 될 것 같아?”
“······.”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서, 화합을 깨기 싫어서 속으로 참는 것들이 있다. 주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한수영, 어른이 되었으면 나잇값을 해. 철없이 굴지 말고.”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한수영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분노합니다.]

“까고 있네. 네가 무슨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줄 알아? 멋있는 척하는 건 좋은데, 때와 장소는 가려가면서 해. 김독자는 지금 네가 이러는 거 좋아하지 않을 걸?”
“독자 씨랑은 상관 없는―”
“너, 자기 입으로 말했잖아. ‘김독자의 검’이 되겠다고.”

그 말에, 처음으로 정희원이 입을 다물었다.
한수영이 조소했다.

“검이 되었으면 주인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지?”
“미안하지만.”

바닥에 가라앉은 먼지들이 불꽃을 튀겼다. 정희원의 검이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허공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 검은, 제멋대로라서 말이야.”

정희원의 [지옥염화]가 불을 당겼다.

“내가 누구를 벨지는 내가 정해.”

[심판자의 검]이 한수영을 겨누었다.

“이제 장난은 끝이야, 한수영. 전력으로 덤벼.”

[화신 ‘정희원’이 ‘심판의 시간’의 발동을 요청하였습니다!]


*


화면 속에서 몰아치는 [흑염]과 [지옥염화]의 불길을 보며, 나는 탄식했다.

“······그래서 싸우는 거였군.”

때가 되었다고 생각은 했다.
한수영의 정체는 꽤 오랫동안 감춰졌었지만, 그게 언제까지 유지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차라리, 47번 시나리오로 가기 전에 비밀이 밝혀진 게 다행인지도 모른다. 이 시나리오는 서로가 진솔하게 부딪치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어설프게 숨긴 비밀은 도깨비에게 폭로되어 시나리오의 재료가 될 뿐이다.
유중혁이 물었다.

“저대로 둘 셈인가?”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해서 끼어들려면 끼어들 수도 있었다.
화면 속에서 당황한 정희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 일부가 요청에 반대하였습니다!]
[반대 1표로 ‘심판의 시간’의 발동이 취소됩니다!]

옆을 보자 유중혁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대로 둘 리가 없잖아.”

물론 두 사람의 싸움을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저 둘의 싸움이 성좌들의 대결로 번지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화신들의 싸움에 성좌들이 개입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개입에 못마땅해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마지못해 납득합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당신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우리엘에게서는 답변이 없었다.
아직 채널에 접속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은 모양이다.
유중혁이 말했다.

“저대로면 둘 중 하나는 죽는다.”
“아니, 안 그럴 거야.”
“······너는 지난 3년을 모른다. 저 둘은 사이가 몹시 나빠.”
“그래 보이네.”

내가 너무 태연하게 굴자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네놈은 동료가 죽기를 바라는 건가?”
“아니.”
“아니면 예언의 힘으로 미래를 본 건가?”
“난 예언의 힘 따윈 없어. 아직도 그런 걸 믿고 있냐?”

나는 화면 속에서 싸우는 한수영과 정희원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러자 유중혁이 냉정하게 말했다.

“미래 정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모든 것을 계산해도 모자랄 상황이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 끼어들 틈은 없다.”

녀석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확실히, 지금의 내 모습은 대책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1863회차의 한수영과도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예상 표절] 설화를 가지고 있으며, 1863회차의 유중혁과의 협업을 통해 온갖 정보들을 수집하고, 계산하여 미래를 읽어냈던 한수영. 나는 그런 한수영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 이야긴 말이 안돼.”」

[예상 표절]은 훌륭한 설화였고, 유중혁의 지식도 아주 유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95번 시나리오에서 김남운을 포함한 모든 일행들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야기를 바꾸며 무수한 변수들이 발생했을 것이고,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났을 것이다.
한수영과 유중혁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들은 ‘멸살법’의 작가가 아니다. 절대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 실패는 예정된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냐? 솔직하게 말해. 뭔가 다른 비밀이 있는 거지?”」

한수영은 그런 나를 가엾다는 듯, 우습다는 듯, 혹은 기이하다는 듯 바라보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믿었어.”」
「“뭐?”」
「“내가 만든 등장인물들을 믿었어. 그게 다야.”」

지극히 표절 작가다운 그 대답에, 내가 뭐라고 말했던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유중혁을 향해 말했다.

“유중혁, 난 인간을 믿는 게 아냐.”

검과 주먹이 부딪치고, 불길이 불길을 녹였다.
피를 흘리고, 고함을 치며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정희원과 한수영을 지켜보았다. 그들을 보며, 나는 한수영이 95번 시나리오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비밀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도 같았다.

“저 사람들이 쌓아온 ‘이야기’를 믿는 거야.”

화면 속에서 다시 한번 굉음이 일었다. 연이은 충돌에 두 사람이 숨을 헐떡였다. 먼지 구덩이를 나뒹굴고, 복부를 가격하거나 머리카락을 베고. 그 숨 막히는 혈전을 거치며, 두 사람의 표정이 변하고 있었다.

―내가 어지간히 미운가 보네.
―단지 그것만은 아냐.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쓰지 않아도 그들의 마음이 들릴 것 같았다.
이제껏 함께 싸워온 두 사람의 역사가 마주하고 있었다.
일행들은 지난 3년간 무사히 살아남았다.
결코 협력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3년이었다.

28번 시나리오에서 ‘사스콰치’를 상대할 때도.
35번 시나리오에서 ‘알곤킨의 뱀’과 마주했을 때도.

두 사람은, 생존을 위해 서로의 등을 지켰을 것이다. 몇 번이나 서로의 목숨을 구하고, 지친 손을 끌어 서로를 일으켜 세웠을 것이다.
정희원도, 한수영도 알고 있다.

―단지······.

정희원은 강하다.
세계의 화신들을 모두 손꼽더라도, 지금의 정희원을 능가하는 화신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한수영이었다.
주특기인 [심판의 시간]마저 봉쇄당한 상황이라면, 승부의 향방은 사실상 정해져 있었다.

―애들한테, 제대로, 사과하라고······.

비틀거리던 정희원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고온 속에 일렁이는 방 안의 정경이,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한수영은 쓰러진 정희원의 몸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허리를 숙여 그녀를 업었다.
아주 작게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한수영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저게, 한수영의 마지막 자존심이겠지.

그녀의 발치에 흰 빛을 내뿜는 별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한수영은 그 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발로 휙 걷어찼다.

[시나리오의 제한시간이 경과했습니다.]
[화신 한수영과 화신 정희원이 ‘믿음’을 증명했습니다.]

고개를 든 한수영이 화면을 넘어 내 쪽을 보고 있었다.

―······훔쳐보니까 재밌냐?

나는 다른 화면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이길영······ 그만 항복하시지?
―싫어! 너나 항복해 신유승!

한 방에 들어간 이길영과 신유승이 서로의 팔을 꼬집은 채 울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조금 특이한 풍경의 방이 눈에 들어왔다.
이설화, 이지혜 그리고 이현성이 함께 들어간 방이었다.

―이 방 진짜 재미없다. 그쵸 언니?
―······그러게.
―현성 아저씨. 코 그만 골고 일어나요. 시간 다 됐대요.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별’이 장식대 위에서 외로이 빛나고 있었다.
너무 평화로워서, 정말 시나리오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성좌님들. 제가 방을 잘못 배정해서······.]

아무래도 잘못 배정된 방은 저쪽이었던 모양이다.

[화신 신유승과 화신 이길영이 ‘우정’을 증명했습니다.]
[화신 이현성과 화신 이설화, 화신 이지혜가 ‘신의’를 증명했습니다.]
[성운의 모든 소속원들이 시나리오 클리어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메인 시나리오 #46 ― ‘별자리의 맥락’이 완료되었습니다.]
[성운의 소속원 중 누구도, 서로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클리어 형태에 맞는 보상이 준비됩니다.]

이곳에 똑같은 설화를 쌓은 사람은 없다.
모두가 다른 역사를 살았고, 다른 맥락에서 이해된다.

눈부신 빛살과 함께, 주변으로 일행들이 소환되고 있었다.
신유승, 이길영, 이현성, 이설화, 이지혜, 한수영, 정희원······.
나와 함께 이곳까지 와준 사람들.
상처투성이가 된 우리를 보며 일행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독자 씨.”
“언니들, 괜찮아요? 대체······.”

일행들이 서로를 부축했다. 정희원이 희미하게 웃었고, 한수영은 앞꿈치로 바닥을 툭툭 찍었다. 나는 그런 한수영을 보며 피식 웃었다.

쿠구구구구.

고개를 들자,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탄성을 흘렸다.

“아······.”

<스타 스트림>의 하늘이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경이로운 우주의 정경. 압도적인 풍경에 몇몇 일행들이 몸을 떨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아득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유승이 내 오른 소매를 붙잡았고, 이길영이 내 왼손의 손가락들을 쥐었다.
이어서 이지혜가, 한수영이, 이현성이, 그리고 정희원이. 마지막으로 이설화와 유중혁이 빙 둘러섰다.

“······이거 그때 오징어들 대형이랑 비슷한데?”

이지혜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맞아.”

그리고 다음 순간.
밤하늘 속에서, 작은 별 하나가 빛났다.

「구원과 마왕의 사이.」

그 빛을 받아 몇몇 행성들도 함께 빛나기 시작했다.

「악마와 심판의 사이.」

「강철과 주인의 사이.」

「심연과 흑염룡의 사이.」

텅 비어 있던 우주의 사이사이를 잇는 새하얀 선들이 보였다. 서로 결코 만날 일이 없을 것만 같던 별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수식언의 맥락’을 이해했다. 아마 일행들도 나와 같은 것을 느끼고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신유승이 말했다.

“······예쁘다.”

별과 별 사이에 이야기가 있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가 46번 시나리오를 돌파하였습니다!]

아직 성운의 별자리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그리고 그 빈 자리들 중 하나는, 유상아의 것이다.
나는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가죠.”

두둥실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곧 우리는 하나의 빛이 되었다.
무수한 <스타 스트림>의 별들이 곁을 스쳐 지나가고, 멀리서 광대한 성간도시의 정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여기까지 왔다.

<올림포스>.
<베다>.
<파피루스>.

차곡차곡 쌓인 원한들이 내 안에서 들끓고 있었다.
잊지 않았다. 하나도.

슈우우우우우우―!

눈부신 빛이 잦아든 곳에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놀랍게도, 성간 도시의 출입구에서 누군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빛살 속에서 흔들리는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향해 말했다.

[아버지.]





< Episode 59. 김독자 컴퍼니 (3) > 끝

< Episode 59. 김독자 컴퍼니 (4) >





······아버지?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저 거대한 그림자는 이쪽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곁을 보자 일행들이 불신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황당한 심경으로 다시 그림자 쪽을 돌아보았다.

[바바앗?]

성간도시의 출입구에서 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그림자를 밝혔다.

[아니, 그게 아니고! 자, 다시 따라해 봐. ‘아버지’.]
[아바바앗?]
[아니, ‘아버지’라니까. 그놈 오면······.]

‘거대한 그림자’는 하나의 생명체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거대한 그림자 위에 축구공만한 생물이 놓여 있었다.

“······너 지금 뭐하냐?”

내 말에, 화들짝 놀란 비형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엇. 벌써 왔냐?]

거대한 그림자는 거인처럼 몸을 부풀린 ‘비형’이었다.
도깨비는 힘이 강해질수록 몸의 크기를 불릴 수 있게 된다. 비형이 저만큼이나 커졌다는 것은, 관리국에서 녀석의 입지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뜻이겠지.
잠깐······ 그런데 비형이 여기 있다는 건, 저기 있는 축구공만한 녀석이······.

“비유!”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른 비유가 허공을 날았다.

[바아앗!]

내 품속으로 쏙 들어온 비유가 바앗 소리를 내며 뺨을 부볐다. 작은 눈에 뭔가가 그렁그렁 맺히고 있었다. 야구공만하던 녀석이 벌써 축구공만해지다니. 그간 성장한 것은 비유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많이 기다렸지?”

솜사탕 사이로 조그만 손이 비죽 튀어나오더니 내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부왕의 차원문 앞에서 녀석을 내버려 두고 갔으니, 이 정도 벌은 받을 만도 했다. 나는 간질간질한 그 손길을 가만히 맞아 주었다. 글썽글썽 눈물이 맺힌 비유가 다시 한번 내 품속을 파고들었다. 아이들도 내게 달려들어 비유의 솜털을 마구 만져댔다.

[험, 험.]

고개를 돌리자 비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도깨비 통신으로 비형을 향해 말을 걸었다.

―여기서 뭐하고 있었던 거냐?
―기다리고 있었지. 너넬 47번 시나리오 지역에 데려갈 도깨비가 필요하니까.
―몸집은 왜 불리고 있는 건데?

비형은 나를 무시한 채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김독자 컴퍼니> 여러분. 제가 누군지는 다들 알고 계시죠? 제 이름은 비형, 한반도 지부의 지부장입니다.]

두툼한 근육을 과시하듯 가슴을 탕탕 치는 비형.
······뭔가 했더니, 겨우 저런 연출 때문이었나.

[한반도 시나리오가 시작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47번 시나리오 지역까지 오셨군요.]

비형은 감개가 무량하다는 얼굴이었다

[이미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47번 이후의 시나리오들은 순차적으로 진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간 도시에 진출하신 후, 여러분들은 48번부터 65번까지의 시나리오를 선택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신유승이 손을 들고 물었다.

“······시나리오를 선택할 수 있다고요?”

[이른바 시나리오 ‘자율 선택제’라고 할까요. 하하하!]

아무도 웃지 않았다.
머쓱해진 비형이 말을 이었다.

[험험, 아무튼. 65번까지의 시나리오들 중 무엇을 먼저 수행할지는 여러분들의 자유입니다. 당장 65번 시나리오를 수행해도 좋고, 시나리오들을 차례로 수행하여 차분히 ‘격’을 쌓아도 좋습니다. 어차피 65번 이후의 시나리오 지역으로 진입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격’이 필요하니까요.]

이현성이 물었다.

“그럼 66번 시나리오부터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때는 또 새로운 설명이 있을 겁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나 걱정하시죠.]

냉정한 말투였지만, 일행들을 보는 비형의 시선은 차갑지 않았다.

[뭐, 여기까지 오는데도 4년이 걸렸으니······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죠. 아, 물론 여러분들 모두가 같은 ‘4년’을 겪은 건 아니겠지만.]

그 말을 하는 비형이 내 쪽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럼 <성간 도시>로 들어가 보시죠. 전송 완료까지는 10분 정도 시간이 걸리니, 각자 마음의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세계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비형의 말이 끝나자, 비유가 외쳤다.

[바아앗!]

화려한 빛살이 나와 일행들을 감쌌다. 우리는 그대로 성간 도시를 향해 두둥실 날아가기 시작했다. 안전을 위해서인지 이동 속도는 생각보다 느렸다.
간만에 다시 만난 비유는 내 품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희원이 입을 열었다.

“독자 씨.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요.”

나를 보는 정희원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 다른 일행들도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지난 3년간 대체 어딜 다녀왔던 거예요?”

*


성간 도시에 도착하기까지의 막간.
나는 일행들에게 1863회차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물론 전부 다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고, 대충 궁금증이 풀릴만한 지점들만 골라서 들려주었다.
예상대로 일행들은 깜짝 놀란 눈치였다.

“진짜? 내가 95번 시나리오까지 살아 남았다고요?”
“······믿을 수 없군요. 그 지하철 남자애가 살아 있다니.”

흥분한 이지혜와 이현성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유중혁은 말없이 이야기를 들었고, 이길영이나 정희원은 살짝 시무룩한 기색이었다. 그 회차에서는 없었던 사람들이니 그럴 수밖에. 제일 볼만한 표정을 지었던 것은 한수영이었다.

“그 세계선에 내가 있다고?”
“응, 너도 있었어. 골목대장이던데.”
“아니, 내가 왜······.”

뭔가가 떠오른 모양인지, 한수영이 재빨리 [한낮의 밀회]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설마 너, 전에 말했던 ‘아바타’ 얘기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수영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한수영 입장에서도 황당할 것이다. 분열된 아바타가 무려 다른 세계선에서 발견되었으니······.
내 옷깃을 유심히 바라보던 정희원이 물었다.

“그런데 독자 씨 코트가 조금 바뀐 거 같은데······ 혹시 95번 시나리오에서 가져온 건가요?”
“맞습니다.”

1863회차에서 가져온 건 코트만이 아니었다.
나를 유심히 노려보던 한수영이 내 코트의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고 보면 1863회차의 한수영도 이랬었다.

“미친······ 너 대체 뭘 가져온 거야? 이거 개연성 위반 아냐?”

아이템들을 확인한 한수영이 입을 딱 벌렸다.

“······야. 이거 몇 개만 나 주면 안 돼?”
“너 하는 거 봐서.”

1863회차의 한수영이 챙겨준 아이템들 중에는 다양한 것들이 많았다.
이제 그 회차에서는 필요 없는 아이템들이 대다수였지만, 이곳에서는 충분히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것들.
그런데 개중에는 예상치 못한 아이템도 하나 끼어 있었다.

“이 스마트폰은 뭐야?”

그것은 내가 쓰던 스마트폰이 아니었다.
스마트폰을 켜자, 메인 화면에 이상한 문구와 함께 사진이 떠올랐다.

― 남운 ♡ 지혜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린 이지혜와 벙싯 웃는 김남운의 모습.
나는 그제야 스마트폰의 주인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김남운이 이 코트를 훔쳐 입었던 적이 있었지.
이지혜가 화면과 똑같은 표정으로 나를 향해 물었다.

“아저씨, 이 사진 뭐야?”
“어, 이거······ 그 세계선의 애가 쓰던 건데, 실수로 가지고 왔나 보다.”
“그 세계선에서 나랑 얘가 사귀어?”
“아니, 걔가 일방적으로 널 좋아해.”
“흠, 그럼 그렇지.”

내 손에서 스마트폰을 빼앗아간 이지혜가 갤러리를 열었다.

“와, 사진들이 제법 있네?”

······사진?
이번에는 나도 놀라서 일행들과 함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이것 봐, 나랑 설화 언니랑······ 어? 한동훈이도 있네? 그러고 보니까 걘 아직 울산 연합에 있나?”
“현성 씨도 나왔네요. 목 위로는 잘린 것 같지만.”

대체 언제 찍은 단체 사진인지, 환하게 웃는 1863회차 일행들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이설화, 김남운, 이지혜, 한동훈, 이현성······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선 한 사내.
이지혜가 말했다.

“이게 그 세계선의 사부구나. 얼굴은 다친 건가? 여기보다 더 멋있는데?”

모두가 웃고 있는 사진 속에서, 1863회차의 유중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어느새 유중혁도 이쪽을 흘끔거렸다.

[‘제4의 벽’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이곳의 누구도 저 세계선의 유중혁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모른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아니, 아는 녀석도 하나 있긴 하군.
나는 고개를 들어 먼 <스타 스트림>의 별들 사이로 ‘은밀한 모략가’가 있을 법한 곳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나는 ‘은밀한 모략가’가 왜 그런 ‘이계의 언약’을 요구한 것인지 모른다. 왜 내 선택에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도, 여전히 모르겠다.
짐작 가는 것은 몇 가지 있지만, 모든 것은 아직 가설일 뿐이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간도시 ‘별자리의 맥락’은 다른 성좌들의 세계로 통하는 환승역.
성좌들과의 물리적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환영합니다.]

마침내 근신이 풀렸는지, 우리엘도 간접 메시지를 보내왔다.
빛나는 광휘 속에, 우리의 몸이 도시 내부로 진입했다.

[성간도시, ‘별자리의 맥락’에 진입하였습니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대기 중입니다.]

우리가 착륙한 곳은 거대한 도시의 광장이었다. 몇몇 화신체들이 이쪽을 흘끗거렸지만, 딱히 우리를 주목하는 이들은 없었다. 이 도시의 규모는 지금까지 우리가 머물렀던 거주지와는 차원이 다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는, 다들 알고 계시죠?”

이제부터 우리가 상대할 적들은 수천 년 묵은 능구렁이들이다.
정희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올림포스>랑 한 판 하러 온 거잖아요?”
“따로 계획이 있으신 겁니까? 혹시 전면전을 벌이신다든가······.”

이현성의 물음에 내가 답했다.

“전면전을 벌일 생각은 없습니다. 저쪽은 <스타 스트림> 전체에서도 손꼽힐 만큼 거대한 성운이니까요.”

현실적으로 지금 <김독자 컴퍼니>가 <올림포스>와 정면으로 싸워 이길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일단은 <올림포스>에 방문해보려고 합니다. 유상아 씨를 그 꼴로 만든 녀석들에게 책임을 따져 물어야죠. 분명 살려낼 방법은 있을 겁니다.”

현재 유상아는 「의식의 흐름」 상태에 빠져 있다.
이대로 3개월이 지나면 유상아의 몸에서는 거의 모든 설화들이 빠져나가 버릴 것이고, 텅 빈 그녀의 영혼은 공허 속에서 소멸해버리겠지. 그 전에, 우리는 유상아를 살릴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아마도, 그 방법 중 하나는 <올림포스> 녀석들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모두가 갈 필요는 없겠지. 나와 이설화는 여기서 찢어지겠다.”
“어딜 가려고?”
“네놈에게 보고할 의무는 없다.”

사실 유중혁이 가려는 곳은 뻔했다.
‘별자리의 맥락’은 모든 성운들이 모여드는 성간도시.
즉, 지금 이곳에 온 화신들은 우리만이 아닐 것이다.
나는 충고하듯 말했다.

“조심해. 너도 잘 알겠지만, 그 여자 절대 만만하지 않으니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유중혁은 그 말을 남기고 홱 돌아서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옅게 미소한 이설화가 내게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유중혁을 따라갔다.
이번 회차의 이설화는 그 어느 회차보다도 선량한 ‘의선’이다.
누구라도 고삐 풀린 유중혁을 완전히 제어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그녀가 곁에 있다면 불필요한 다툼을 조금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유중혁이 골목 너머로 사라진 후, 나는 일행들을 데리고 광장의 중심에 비치된 포탈을 향해 움직였다.

성간도시 ‘별자리의 맥락’에는 거의 모든 세계와 통하는 ‘포탈’이 있다.

지난 시나리오 지역뿐만 아니라, 다른 성운의 거주지에도 방문할 수 있는 포탈. 나는 그 포탈을 이용해서 <올림포스>에 정식으로 방문 요청을 할 계획이었다. 나는 포탈을 향해 행선지를 입력했다.

“올림포스 산맥.”

온갖 전설과 모험담으로 쌓아 올린 거대 성운, 올림포스.
그런 올림포스의 12신좌가 거주하는 <올림포스 산맥>.
드디어, 녀석들의 터전을 확인할 때가 온 것이다.
소용돌이치는 포탈 속에서, 어렴풋이 신화 속 정경들이 떠올랐다.

츠츠츠츠츳!

그리고 다음 순간, 예상 밖의 메시지가 돌아왔다.

[현재 <올림포스>는 모든 방문객의 입장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 Episode 59. 김독자 컴퍼니 (4) > 끝

< Episode 59. 김독자 컴퍼니 (5) >





떠오른 메시지와 함께, 포탈의 소용돌이는 빠르게 잦아들었다. 대기하고 있던 일행들은 당황한 눈치였다. 먼저 의문을 제기한 것은 정희원이었다.

“······입장 거절? 이건 뭐죠?”

나는 다시 한번 행선지를 외쳐 보았다.

[현재 <올림포스>는 모든 방문객의 입장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올림포스> 시나리오는 7일 뒤부터 개방됩니다.]

7일 뒤부터 개방된다······?
그 말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작은 성운인 것 같은데, 패기가 제법이군. <올림포스>에 갈 생각을 하다니.]

중후한 진언이 들려온 것은 포탈의 맞은편, 광장의 분수대 옆에 앉아 있던 한 성좌였다.
정갈하면서도 폭력적인 기세의 격으로 보아 오랜 세월 고련을 거듭해 성좌에 오른 무인(武人)이 틀림없었다.
이현성보다도 커다란 덩치에, 길고 구불구불한 창날을 등에 멘 화신체······ 잠깐만, 저 창날은······?

[흠, 인상착의가 익숙한데······ 자네들, 어디서 왔나?]

나는 일행을 대표해서 대답했다.

“지구입니다.”

[호오, 나도 그곳 출신인데······ 반갑구만. 지구 어디? 대륙 쪽인가?]

“한반도입니다.”

[변방의 친구들이었군! 그곳에도 제법 괜찮은 장수들이 있지.]

호탕한 성좌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확신은 더욱 짙어졌다.
뱀의 머리를 닮은, 1장 팔척의 거창(巨槍)······.
끙, 하는 소리와 함께 분수대에서 일어난 사내는 우두둑 목을 꺾더니 휘적휘적 걸어 멀어져 갔다.
내 곁에 슬그머니 다가온 한수영이 말했다.

“야, 저 성좌 그놈이지? 장판파?”
“맞아.”

항우, 관우와 함께 중국 최고의 무장으로 손꼽히는 위인급 성좌.
그는 틀림없이 ‘장판파의 호신(虎臣)’, 장비(張飛) 장익덕이었다.
귓속말을 엿들었는지, 깜짝 놀란 이지혜가 물었다.

“진짜? 저 아저씨가 그 ‘장비’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급변하는 일행들의 표정이 볼 만 했다.
인도의 대신격인 수르야를 만났을 때도 이 정도 반응은 아니었는데······.
과연, 한국에서 삼국지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겠다.
심지어 이현성마저 허둥지둥하며 군인 수첩을 꺼내고 있었다.

“저기 독자 씨. 제가 삼국지 광팬인데, 사인이라도 받아야······.”
“······앞으로도 종종 이런 일을 겪게 될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들 중에는 성좌위에 오른 존재가 많으니까요.”

나는 일행들과 함께 광장의 저변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는 한산했던 광장이 하나둘 모여든 성좌와 화신들로 어느새 도떼기시장을 이루고 있었다.

[53번 시나리오 참가자 모집한다!]
[몸빵 뛰면서 설화 쪼가리 얻어갈 화신 구함.]

곳곳에서 들려오는 천박한 진언들.
47번 이후의 시나리오에서는 본격적인 ‘설화 쌓기’가 가능해진다.
때문에 위인급 성좌들도 저런 식으로 간이 파티를 구성해 시나리오 공략에 참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저런 존재들이 지금껏 우리를 후원했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정희원이 말했다.

“······갑자기 성좌들 격이 떨어져 보이는데요.”
“실제로 대부분은 하위격입니다. 저들이 떨어진 게 아니라 우리의 격이 올라갔다고 봐야겠죠.”
“우리도 상아 씨 구하고 나면 저 시나리오들을 깨야겠죠?”
“비형이 말했던 것처럼, 모두 깰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번쩍이는 ‘시나리오 광고판’을 올려다보았다.

―숨 막히는 거신들과의 전쟁, <올림포스>의 <기간토 마키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47번 이후의 시나리오들 중에는 성운이나 관리국이 직접 개입하여 만든 대형 시나리오가 많았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올림포스>에서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기간토 마키아>였다.
광고를 보던 몇몇 성좌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진짜라던데? <타르타로스>에서 고대 거신들 푼다고 했어.”
“에이, 십수 년 전에도 그렇게 말해놓고 꼴랑 거신 한 마리 풀고 지들끼리 다 해 먹었잖아.”
“이번에는 다르다니까? 분위기가 아주 수상해. <올림포스>에 내분이 있다는 얘기가 있다고.”
“그 자식들 편 갈라 싸우는 척하면서 쇼하는 거 아냐?”

떠도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는 이어지는 광고를 보았다.
<올림포스>의 주신들이 하나씩 등장하며 거신들과 화려한 전투를 벌이는 영상이었다. 바다를 가르는 트라이던트에 거신들의 대열이 뭉개지고, ‘흉포의 군신’이 지휘하는 정병들이 거신의 몸통을 향해 달려들었다.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가 거신의 목을 베어냈으며, 영문은 알 수 없지만 ‘사랑과 미의 여신’이 갑자기 손가락 하트를 띄웠다.
광고의 마지막은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며 술잔을 드는 빌어먹을 디오니소스의 모습이었다.

―일주일 뒤 시작될 <스타 스트림> 최고의 시나리오!
―시나리오 참가자 중 3명을 추첨하여 ‘화산의 대장장이’가 제작한 ‘한정판 거신병’을 드립니다.
―시나리오 입장료 : 100,000코인

그 광고를 끝까지 다 본 이길영이 나를 향해 물었다.

“······독자 형, 저 시나리오 깨려면 입장료도 내야 돼요?”
“응.”
“사기꾼들!”
“뭐, 장삿속이긴 하지. <올림포스>에서는 <스타 스트림>에 시나리오를 제공해 수입을 얻고, 도깨비들은 그걸 광고해서 그 수입을 다시 나눠 가지니까.”

내 말에 정희원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허탈하네요. 우린 이렇게 필사적인데······.”
“저쪽도 필사적이게 만들면 됩니다.”

표정을 굳힌 정희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하죠? 여기서 일주일을 기다려야 할까요? <올림포스> 시나리오는 일주일 뒤부터잖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남은 시간은 3개월. 하루라도 허투루 낭비할 수는 없었다.

“<기간토 마키아>는 ‘거대 설화 시나리오’라서 도전하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일단은 유상아 씨 쪽이 더 급하니 다른 방법을 알아봐야겠군요.”

「의식의 흐름」은 드물지만 다른 화신도 종종 앓는 병증. 꼭 <올림포스>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급의 대성운이라면 유상아를 치료할 방법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나는 곰곰이 속으로 여러 가지 계획들을 세웠다.
이곳에서 얻어야 할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여기서 일행을 나눠야겠군요. 한수영, 다른 사람들 데리고 ‘경매장’에 가. 아마 유중혁도 그쪽에 갔을 거야. 가는 김에 사람들 장비도 좀 바꿔주고. 애들 옷도 좀 사줘.”
“나 돈 없거든?”
“코인 줄게.”

내 말에 한수영이 얼른 손가락을 뻗었다.
나는 한수영과 검지를 맞댄 채 코인을 교환했다.
짜르릉, 소리를 내며 차오르는 코인의 숫자를 본 한수영의 두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알고는 있었는데, 너 진짜 어마어마한 부자네.”
“아껴 써. 남아돌아서 많이 준 거 아니야.”
“얘들아, 가자. <김독자 컴퍼니> 부도내러!”

와아, 소리치며 한수영의 뒤를 따라가는 신유승과 이길영. 나는 내 쪽을 돌아보는 이지혜와 이현성에게 말했다.

“같이 가세요. 성좌들의 경매장엔 쓸만한 성유물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그, 그럼 저희도 따라 가보겠습니다!”
“고마워 아저씨!”

이지혜와 이현성이 바람처럼 달려 한수영을 쫓아갔다. 나는 그 뒤를 쫓아가려 엉거주춤 자세를 잡는 정희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희원 씨는 남아 주세요. 저랑 같이 가셔야 할 곳이 있습니다.”


*


잠시 후, 나는 정희원을 데리고 곧장 주변의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성간도시 ‘별자리의 맥락’에 있는 ‘도깨비 마트’의 지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도깨비 하나가 우리의 앞을 막았다.

[죄송하지만, 플래티넘 멤버 이상만 입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추레한 행색 때문이었는지, 입구를 막은 도깨비의 눈에 희미한 멸시가 담겨 있었다. 나는 가타부타 설명하는 대신 ‘도깨비 보따리’를 열어 내 등급을 확인시켜주었다.

[······다이아몬드 멤버?]

허둥지둥하던 도깨비가 내 수식언과 고객 목록을 대조하더니 눈을 크게 떴다.

[죄, 죄송합니다! 이곳 매장 방문은 처음이시죠? 어이, 매니저님이랑 직원들 다 불러와! 마왕님 쇼핑하시는 데 불편한 일 없으시게―]

“필요 없습니다. 번거로우니 부르지 마세요.”

나는 그 말을 남기고 도깨비를 지나쳤다.
쪼르르 따라온 정희원이 통쾌하다는 듯 말했다.

“독자 씨 꼭 재벌 3세 같네요.”
“······일단은 제가 사장이잖아요.”
“근데 웬 백화점이에요?”

나는 정희원의 복색을 빠르게 살폈다. 낡은 특공복, 그리고 허리에 찬 [심판자의 검]. 지난 3년간 무수한 전투를 통해 피를 머금은 검은, 전보다 훨씬 더 검붉은 광택을 띠고 있었다.

“사원 복지를 우습게 생각하는 회사가 어떻게 성공하겠습니까.”
“하긴, 전 받을 만한 사원이긴 해요.”

우리는 매장의 한쪽 구석에 있는 진열대 앞에 섰다. 그곳에는 ‘양산형 제작자’의 라이벌 브랜드인 <1세대>의 명품들이 있었다.
나는 신중한 눈으로 아이템들을 살핀 뒤, 단정한 정장 두 벌을 꺼내들었다.
47번 시나리오 기준으로 SSS등급의 방어구에, 실용성도 나쁘지 않은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정희원은 당황한 눈치였다.

“정장은 갑자기 왜요?”
“꽤 격식을 차리는 곳에 가야 해서요.”

우리는 각각 정장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정장은 입는 순간 알맞은 사이즈로 몸에 감겨들었다.
정장을 걸친 정희원은 꼭 대통령 경호원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직도 정희원이 멸망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등장인물 일람]도 그런 정보는 알려주지 않고, ‘멸살법’ 원작에도 그녀의 이야기는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까.

“희원 씨 직업이 뭐였다고 하셨죠? 물어봐도 됩니까?”
“음, 마지막으로 했던 건 바텐더였는데······ 그냥 알바였어요. 직업이라고 한다면······ 알바몬?”

정희원이 관자놀이를 머쓱하게 긁적이며 말했다.

“그전에는 운동했었어요.”
“운동이요?”
“중고등학교 때 검도요. 대회 나갔다가 부상으로 그만뒀지만. 독자 씨는요?”
“저는 게임 회사의 계약직 사원이었습니다. 곧 잘릴 운명이었죠.”

그리고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거울 속에 비친 두 남녀가 정장을 입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몇몇 성좌들의 화신체가 우리를 흘끗거리며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거울 속의 정희원이 물었다.

“독자 씨, 그때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죠?”
“······그때보다 지금이 더 낫냐는 이야기라면, 그렇습니다.”

너무 솔직한 대답이었나 아차 싶던 순간, 정희원이 빙긋 웃었다.

“저도 그래요.”

우리는 코인을 지불한 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정희원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독자 씨, 어디까지 가요? 이제 옥상인데.”
“여기에 포탈이 있습니다.”

옥상의 문을 열고 나서자, 성간도시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희원이 경치에 짧은 감탄사를 흘렸지만, 감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나는 정희원을 데리고 옥상의 난간 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저 믿으시죠?”

시선의 교환은 짧았다. 나는 정희원의 손을 붙잡은 채, 그대로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정신없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정희원은 지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지상을 향해 반쯤 추락했을 무렵, 나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숨겨진 포탈을 바라봅니다.]
[포탈이 암호를 요구합니다.]

“추락하는 모든 것에는 날개가 있다.”

츠츠츠츠츠츳!

텅 빈 허공에서 소용돌이치는 포탈이 우리의 몸을 집어 삼켰다.

[성운이 당신들을 허락합니다.]

사위가 한바탕 이지러지는 느낌과 함께, 발이 바닥에 닿았다.
태초의 숨결을 연상시키는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이제껏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맑은 바람. 언덕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녹빛 초원, 그리고 저 너머에 세워진 새하얀 성.
정희원은 멍청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독자 씨, 설마 여긴······.”
“맞습니다.”

이곳은, 바로 저 지고한 대천사들의 성운이었다.
굳이 이런 번거로운 형태로 들어온 것은, 입장에 소요되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마 지금쯤 마중을 나오셨을 것 같은데······.”

그때, 머릿속으로 차가운 경종이 울렸다.

[······마왕?]

대천사의 그것이라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냉혹한 목소리.
내가 기다리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원하지 않는 마중객이 나타난 것 같았다.

[간덩이가 부었군. 어떻게 ‘마왕’이 이곳에 온 거지?]

츠츠츠츠츳.

설화급 성좌인 내 화신체가 위축될 정도의 힘.
저 담력 강한 정희원조차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고 있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한순간 숨통이 트이며 정희원이 숨을 토해냈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데, 별안간 앞에서 튀어나온 손이 내 턱을 강하게 붙잡았다.

[‘구원의 마왕’이라고?]

고작 턱이 잡혔을 뿐인데 전신의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격이었다.

[어떻게 마왕 따위가 ‘구원’의 수식(修飾)을 가지고 있지? 그 수식언의 주인은 지난 1500년간 나 하나뿐이었는데 말이야.]

간신히 고개를 들자, 넘실거리는 백금발의 사내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이하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 그 시선을 마주한 순간, 나는 이 성좌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성좌, ‘타락의 구원자’가 광기 어린 눈길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 <에덴>에서 유일하게 선악(善惡)의 수식을 모두 가진 존재이자, <에덴>의 모든 대천사들 중 최강으로 손꼽히는 존재.
······빌어먹을, 걸려도 최악의 상대에게 걸렸군. 하필 이 녀석이 지금 <에덴>에 있을 줄이야.
사내의 보랏빛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뭐하는 놈인진 모르겠지만, 난 내 수식언 공유하는 걸 싫어하거든? 그러니까 죽어줘야겠어.]

내 턱을 잡은 사내의 손이 차가운 보랏빛으로 물드는 바로 그 순간.

[■■. 그 손 치워라, 미카엘. 진짜로 뒈지고 싶지 않으면.]

내가 기다렸던 대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Episode 59. 김독자 컴퍼니 (5) > 끝

< Episode 59. 김독자 컴퍼니 (6) >





화르륵, 하고 불길이 치솟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정신을 차렸을 때는 미카엘과 나 사이에 뜨거운 불의 벽이 만들어져 있었다.
인상을 찌푸린 미카엘이 자신의 손목을 털며 물러났다.

[······무슨 짓이지?]
[꺼져.]

잠시 우리엘을 바라보던 미카엘이 피식 웃었다.

[우리엘······, ‘악마 사냥’을 그만두더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구나.]

미카엘의 전신에서 보랏빛 격류가 사납게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성좌, ‘타락의 구원자’가 설화 ‘마왕 살해자’의 이야기를 준비합니다.]

마왕 살해자.
그것은 1863회차의 유중혁이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설화였다.
에덴의 녹빛 초원이 보라색 파장으로 물들고 있었다. 말라 죽은 풀들이 파스슷 소리를 내며 몸을 뉘였고, 오싹한 감각이 발을 타고 올라왔다.
’마왕 살해자’는 마왕을 상대로는 무적에 가까운 힘을 발휘하는 설화. 미카엘에게 저 설화가 있는 이상, 나는 녀석에게 절대로 이길 수 없다.
미카엘의 격이 나를 겨냥하는 순간, 누군가가 내 앞을 막았다.

“천사들은 기본적으로 다 포악한가 보지?”

정희원이 [심판자의 검]을 앞세운 채 나를 지키고 있었다.
희미하게 떨리는 어깨와 위축된 기세. 그럼에도 정희원은 용기를 내고 있었다. 죽음조차 불사하겠다는 인간의 의지가, 저 고고한 대천사의 격류를 감당하고 있었다.
그런 정희원의 뒤에, 우리엘이 섰다.

츠츠츠츠츳······!

배후에서 환하게 타오르는 광채. [지옥염화]가 불길을 일으키자, <에덴>의 들판은 튀어 오르는 스파크로 가득해졌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나는 침을 삼켰다.
우리엘은 대천사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 강하다. 그리고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을 상대로는 <에덴> 최고의 상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상대는 그 ‘미카엘’이었다.
모든 종류의 전투 능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천사.
이 <에덴>에서, 순수한 전투 능력만으로 저 미카엘을 넘어설 대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좌, ‘정의와 화목의 친구’가 ‘타락의 구원자’를 만류합니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타락의 구원자’를 노려봅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타락의 구원자’를 질타합니다!]

허공에서 쏟아지는 메시지에도 미카엘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래, 슬슬 <에덴> 최강이 누구인지 가릴 때도 됐지.]

미카엘의 양손에 보랏빛과 흰빛의 아우라가 동시에 맺혔다. 마주 잡은 양손에서 소용돌이치는 힘. 이윽고 아우라는 양손 검의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저 자식이, 여기서 성유물을······?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타락의 구원자’에게 경고합니다!]

츠츠츠츠츠츳!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며 주변의 스파크가 한꺼번에 꺼졌다.
<에덴>의 최고위 성좌, 메타트론의 힘. 적어도 이 <에덴> 안에서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압력이었다. 주변을 내리누르는 폭력적인 침묵에, 미카엘도 뒤늦게 기세를 흩트렸다.
잠시간 하늘을 올려다보던 미카엘이 원망스럽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당신마저? 이제 <에덴>도 갈 데까지 간 모양이군.]

미카엘은 그 말과 함께 돌아서더니, 등을 돌려 멀어지기 시작했다.
녀석의 허리춤에는 악마들의 머리가 열매처럼 매달려 있었다.

[악마 대공 ‘세미다’의 머리]
[악마 대공 ‘그라페이오’의 머리]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마계의 대공들 중에는 하위급 마왕에 준하는 녀석들도 있다. 그런데 녀석은, 그런 대공들의 머리를 장난감처럼 매달고 있었다.
미카엘의 신형이 언덕 너머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정희원이 한숨을 내쉬며 검을 집어넣었다.
고개를 돌리자 우리엘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대천사 우리엘.

그녀는 ‘별자리의 연회’ 때 보았던 모습과는 달랐다. <에덴>의 제복을 갖춰 입고, 십자 문양의 귀고리를 낀 우아한 모습. 평소의 장난스러운 모습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고결한 격이 그녀의 전신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김독자······.]

그녀는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려 정희원을 바라보았다.

[반가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지?]

살짝 입술을 벌린 정희원도 우리엘을 마주 보고 있었다.
아마도, 감격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희원은 우리엘을 보는 게 처음일 것이다. 심지어 지금 눈앞에 있는 우리엘은 화신체와 진체가 하나가 된 형상.
눈앞의 이 대천사가 바로, 그 긍지 높은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의 본신인 것이다.

[따라와, 서기관이 기다리고 있어.]


*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지.”

나와 정희원은 곧바로 <에덴>의 궁으로 안내되었다. <에덴>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출한 모습이었다. ‘멸살법’의 묘사로 익히 보아 알고는 있었지만, 확실히 다른 대성운들과는 달랐다.
별다른 허위가 느껴지지 않는 소소한 장식들. 단조로운 백색으로 꾸며진 천장과 벽감의 조각상들에서는 기묘한 겸양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문제는, 그런 겸양이 내 기다림을 더욱 지루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기다려. 곧 안내원이 올 거야.

우리엘은 정희원에게 궁을 안내해준다며 나를 이곳에 남겨둔 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에덴>을 구경하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조금 섭섭한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1863회차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겠지.
나는 우리엘의 동료인 요피엘을 그곳에 두고 왔으니까.
원망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김독자, 왔으심?]

멍한 눈으로 고개를 들자, 구름 위에 앉은 천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십 대 초반의 외양에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반쯤 졸린 듯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천사를 보며 나는 퍼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라파엘이십니까?”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 라파엘.
이번 <에덴> 행은 제법 운이 좋은 모양이었다. 우리엘에 이어 라파엘의 진체까지 보게 되다니. 그나저나······ 이 대천사가 정말로 그 무시무시한 ‘아스모데우스’를 격퇴한 장본인이란 말인가.

[‘비밀 포탈’은 어떻게 알아낸 거임?]

“요피엘에게 들었습니다.”

[<에덴>에 온 기분이 어떠심?]

“좋습니다.”

[······잠 오는 표정인데?]

나는 황급히 표정을 바르게 하며 웃었다. 라파엘은 따라오라는 듯 응접실에 이어진 통로로 나를 안내했다.
외곽의 회랑을 걷는 동안, 뚫린 창 너머로 동산의 정경이 보였다. 드문드문 풀을 뜯던 양들이 나를 올려다보며 작게 울었다. 양들을 보며 내가 물었다.

“<에덴>에는 진짜로 ‘어린 양’이 있군요.”

[끄덕. 잠 안 올 때 세기 좋음.]

“······우리 보고 세라고 저러고 있는 겁니까?”

[너도 본 적 있을 거임. 자기 전에 눈 감고 양을 떠올리면 나타나는 게 바로 쟤들임.]

이건 ‘멸살법’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나는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자기 전에 세는 양이 진짜 쟤들이라고?

[거짓말임.]

“······.”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라파엘을 쳐다보았다. 라파엘은 히죽거리며 웃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거 아셈? <에덴>에는 원래 양이 없었음.]

“······또 거짓말하시는 겁니까?”

[이건 진짜임. 양들은 우리엘이 데려온 거임.]

······우리엘이? 왜?

[언젠가 서기관이 우리엘에게 서브 시나리오를 준 적이 있음.]

<에덴>의 대천사들은 ‘하늘의 서기관’을 통해 임무를 받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스타 스트림>에서의 모든 임무는 ‘시나리오’로 환원된다. 이것도 ‘멸살법’에는 없는 얘기였기 때문에, 나는 호기심이 동했다.

“무슨 시나리오였습니까?”

[‘어린 양 열 마리를 데려오라’.]

<스타 스트림>의 다수 시나리오들은 ‘비유’의 형태를 가진다. 그리고 <에덴>에서 ‘어린 양’은 너무나 명백한 메타포였다. 쉽게 말해, 메타트론은 우리엘에게 신도 열 명을 데려올 것을 원한 것이었다.

“······설마 우리엘은 ‘진짜 양’을 데려온 겁니까?”

[끄덕. 처음엔 열 마리였는데, 지금은 번식해서 저렇게 많아진 거임.]

······뭔가 우리엘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중간 양들을 관리하는 천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양들의 털을 깎아주거나, 먹이를 주는 천사들. ‘멸살법’의 묘사대로 다들 아름다웠다.
그들 중 몇몇이 이쪽을 바라보더니 서로 수군거렸다. 하나, 둘, 셋······ 숫자는 점점 더 많아져 갔다. 누군가는 깎은 양털로 즉석에서 플래카드를 만들어 이쪽을 향해 흔들기 시작했다.

······뭐라고 써 있는 거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엄한 표정을 짓습니다.]

사색이 된 천사들이 황급히 흩어졌다. 멀리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우리엘과 정희원의 모습이 보였다. 라파엘이 혀를 차며 첨언했다.

[하여간 천사들이란······ 타락한 인간을 좋아한다니까.]

“멀쩡하게 말할 수 있으시네요?”

[들어가셈. 서기관이 기다리고 있으심.]

어느새, 서기관의 집무실이 눈앞에 있었다.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후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사람의 키 높이 만큼 쌓인 책의 향연.
평생을 읽어 치워도 부족할듯한 책 더미에, 무심코 방의 주인에게 호감이 생길 정도였다. 자고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는 법이다.
나는 책들을 무너뜨리지 않게 조심하며 집무실 안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책들의 산 너머로, 집무실의 테이블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엔 피곤한 얼굴로 앉아 있는 잿빛 머리카락의 대천사가 있었다.

[오셨습니까.]

지금껏 보아온 그 어떤 성좌와도 비견할 수 없을, 경건한 목소리였다. 안경테를 밀어 올린 메타트론이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반갑군요 ‘구원의 마왕’. 제가 바로 ‘하늘의 서기관’입니다.]


*


내가 <에덴>을 찾아온 용무는 크게 둘이었다.
하나는 표면적인 용무고, 다른 하나는 진짜 용무였다.

[먼저 다른 세계선에서 있었던 일들을 듣고 싶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은밀한 모략가’와 계약을 맺어 1863회차의 세계선으로 간 것부터,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고 요피엘을 남겨둔 채 이곳으로 돌아온 이야기까지.
어떤 것은 솔직하게, 어떤 것은 간명하게, 그리고 어떤 것은 말하지 않은 채로 나는 이야기를 끝냈다. 메타트론은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어떤 이야기는 진지하게, 어떤 이야기는 침착하게 들었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는 흥미롭게 듣는 것 같았다.

[‘은밀한 모략가’라······.]

“······그를 알고 있습니까?”

메타트론이 옅게 미소했다.

[이 세계에서 그자를 모르는 성좌는 아마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성좌도 아마 없겠지요.]

나는 금방 입을 다물었다.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었다.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맙습니다, 구원의 마왕.]

“아닙니다.”

[역시 미래의 <에덴>은 멸망하게 되는군요.]

멸망을 말하는 것치고는 아주 태연한 목소리였다. 조금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 나는 그런 메타트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왜 저를 부르신 겁니까? 단순히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아닐 텐데요.”

하늘의 서기관.
<에덴>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자이자, <에덴>의 2인자.
메타트론의 미소가 짙어졌다.

[왜 불렀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메타트론의 대화 방식이다.
자신의 욕망을 상대방의 입으로 듣는 것.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아마도, 이것은 나에게 기회였다.

“저를 ‘멸망’을 막기 위한 도구로 쓰려는 생각이시겠죠.”

[그대를? 그대에게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메타트론의 투명한 두 눈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한쪽 눈의 김독자는 흰 날개를 달고 있었고, 다른 쪽 눈의 김독자는 마왕의 검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저는 동맹을 선택하지 않은 ‘마왕’이니까요.”

나는 지난 ‘마왕 선발전’을 통해 마계의 ‘73번째 마왕’이 되었다.
무려 수천 년이나 공석이었던 자리.
그런 자리를, 갓 태어난 성좌인 내가 차지해 버렸던 것이다.
나는 지난 메시지 로그를 열어보았다.

[마왕, ‘검은 갈기의 사자’가 당신을 자신의 마계로 초대했습니다.]
[마왕,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이 당신을 자신의 마계로 초대했습니다.]
······.

그것은 내가 마왕 위에 오른 직후부터 지금까지 쌓여 있는 마계의 메시지들이었다

“<에덴>의 멸망은 <마계>와의 전쟁에서 촉발됩니다. 당신은 그 중재자로 저를 사용하려는 것이겠죠.”

마왕 위에 올랐으니, 다른 마계의 관심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에덴>은 어떨까.

<에덴> 또한 마왕이 되기 전부터 내게 비정상적인 관심을 보여왔다.
우리엘을 필두로 다른 대천사들이 보여준 호의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에덴>이 악 성향을 띤 성좌들에게 취해온 태도를 보면, 나에 대한 대우는 거의 파격이라 불려 마땅할 정도로 이례적인 것이었다.

“당신에겐 제가 필요합니다. <스타 스트림>의 역사상, 마계와 에덴의 관심을 동시에 받고 있는 존재는 아마도 제가 처음일 테니까요.”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키웠다.
앞으로 있을 협상을 생각하면, 여기서 메타트론의 기세에 눌려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메타트론은 대답하지 않고, 잠시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렬한 위압감과 함께, 메타트론의 뒤쪽에서 휘황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선가 느껴지는 광적인 시선. 내 존재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위험한 힘이 느껴졌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츠츠츠츠츳!

눈앞을 가리는 스파크와 함께, 나는 신음을 흘리며 몇 걸음 물러났다.
조금씩 잦아드는 스파크 사이로, 메타트론이 감탄한 목소리를 냈다.

[······역시 그대였군요. ‘최후의 벽의 파편’이 선택한 존재가.]

“무슨······.”

[‘선악을 가르는 벽’이 깜짝 놀라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는 흠칫 놀라 눈앞을 바라보았다.
메타트론의 뒤쪽에서 일렁이는 은빛의 ‘벽’.
틀림없었다.

[‘제4의 벽’이 ‘선악을 가르는 벽’을 향해 이를 드러냅니다.]

선악을 가르는 벽.
대천사 메타트론 또한, 나와 같은 ‘벽’의 소유자였다.





< Episode 59. 김독자 컴퍼니 (6) > 끝

< Episode 60. 파멸의 맛 (1) >





Episode 60. 파멸의 맛


「꼬 장꼬 장한 녀 석」

아무래도 [제4의 벽]은 저 벽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멸살법’에도 잠깐이지만 언급이 되기는 했다. 장하영의 ‘정체불명의 벽’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힘을 지녔으나, 그 유래가 밝혀지지 않은 벽 중 하나.

[‘선악을 가르는 벽’이 당신의 선악을 가늠합니다.]
[‘제4의 벽’이 콧김을 뿜습니다.]
[‘선악을 가르는 벽’이 당신의 존재를 가늠하는 데 혼란을 느낍니다.]

[선악을 가르는 벽]은 이 세계의 선악을 나누는 기준이다. 메타트론의 합리적 의심에 반응하여 <스타 스트림>의 선과 악을 분별하는 힘. 저 스킬이 누군가를 ‘악’이라 명명하면, [절대선]에 속하는 성좌들은 그 결정에 대해 표결권을 가지게 되고, 그 결과는 즉각적으로 반영된다. 정희원의 [심판의 시간] 또한 저 ‘벽’의 개연성을 공유하는 힘이었다.

[당황하는군요. ‘벽의 주인’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닐 텐데.]

“갑자기 그걸 꺼내실 줄은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저를 ‘악인’으로 규정하실 겁니까? 그 결정은 예전에 철회됐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그대의 말대로 그대는 쓸모가 있으니까.]

메타트론의 정확한 생각은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나를 이용해서 앞으로 있을 <에덴>의 대멸망을 대비하고자 한다는 것.

[이 모든 세계의 ■■이 적혀 있는 벽. 당신은 그곳에서 <에덴>의 멸망을 읽었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조금 놀랐다. 아무래도 이번 회차의 메타트론은 내가 알던 메타트론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그는 어렴풋하게나마 ‘멸살법’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최후의 벽’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내가 뭐라고 답하려는 순간, [제4의 벽]이 말했다.

「김 독 자 쓸데 없 는 소리하 지마」

나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메타트론이 말했다.

[‘벽’이 입단속이라도 시킨 모양이군요. 과연, 최후의 벽에서도 가장 큰 파편답달까······.]

“‘최후의 벽’이라는 게 뭔지 알고 계십니까?”

내 질문에 메타트론의 표정이 묘연해졌다.

[그건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입니까, 아니면 뭔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묻는 것입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고 메타트론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메타트론이 쓴웃음을 지었다.

[······좋습니다. 대신, 채널은 이제 꺼주시죠. 다들 <에덴> 관광은 충분히 하셨을 테니까.]

그 말에 허공에서 간접 메시지들이 폭발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머리를 벅벅 긁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손톱을 뜯으며 발광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천국의 정경에 감동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에덴 관광에 만족합니다!]
[50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명계> 때도 그랬듯, <에덴>을 궁금해하는 성좌들이 제법 많았던 모양이다. 바앗, 하는 소리와 함께 비유가 채널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두툼하게 쌓인 책의 장정을 매만지며, 메타트론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후의 벽’은 이 세계의 본질을 구성하는 벽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조금씩 부서져 왔으며, 끝내는 무너져 내린 벽이죠.]

메타트론의 손이 닿은 장정은 무척이나 낡아서, 그저 스치는 것만으로도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올 지경이었다.

[제가 가진 ‘선악을 가르는 벽’ 또한 그 벽의 파편 중 하나입니다.]

“몇 명이나 이런 ‘벽’을 가지고 있죠?”

[저도 확실히는 모릅니다. 아직 ‘그분’으로부터 계시는 없었으니까요. 다만······.]

나는 순간 메타트론이 말하는 ‘그분’이 누구일까 고민했다. 사실 미련한 고민이었다. 애초에 <에덴>에서 ‘그분’이라 칭해질 존재는 하나뿐이니까.
메타트론이 말을 이었다.

[모든 ‘벽’에는 그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벽’은 선악을 가르고, 어떤 ‘벽’은 소통을 통제합니다. 그리고 어떤 ‘벽’은, 정해진 세계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메타트론은 나를 보며 말꼬리를 흐리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나는 그대가 ‘정해진 멸망’을 바꿀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메타트론이 내게 기대하는 바가 너무 명확해서, 조금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일부러 자신 없는 투로 답했다.

“서기관께서도 ‘단 하나의 설화’를 만들고 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이제 고작 ‘승’을 노리는 애송이입니다. 제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어떤 설화가 마지막에 선택받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메타트론이 집무실의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에덴>으로 들어오는 볕이 메타트론의 수려한 얼굴을 비췄다. 덕분에 어떤 부분은 짙은 그늘에 가리워졌고, 어떤 부분은 비정상적으로 밝아졌다. 공평하지 않은 빛에, 일순간 메타트론의 얼굴은 기이하게 일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저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경배의 방식을 정성껏 고르면 됩니다.]

아마도 그것이 메타트론이 생각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메타트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슬슬 이쪽도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때였다.

“저를 어떤 용도로 이용하시든 상관없습니다. 다만, 저도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대는 화신 유상아를 살리기 위해 이곳에 온 거겠죠.]

역시, 이야기가 빨라서 좋다.
말투로 보아 메타트론은 성류방송을 통해 유상아의 상세를 이미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의식의 흐름」은 무척 위험한 질병이어서, 개연성을 함부로 투자했다간 투자한 쪽도 큰 손실을 입습니다. 빠져나가는 설화의 급류에 함께 휩쓸리게 되니까요.]

“해결책은 없습니까?”

[있습니다. 다른 대천사들처럼 이 동산에서 위대한 말씀을 믿고 실천하면······.]

“그건 <에덴>에 가입해야 하잖습니까. 그거 말고요.”

[······지금으로서는 화신체 자체를 극한까지 강화해 병증을 완화하는 것이 최선이겠군요. 기연이 될 만한 아이템을 구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무림의 인간들이 만든 ‘대환단’ 정도로는 어림도 없고, ‘거대 설화’의 기적을 담은 성유과(星遺果)나 성유액(星遺液)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성유과와 성유액······.
내 표정을 읽었는지, 메타트론이 미소를 지었다.

[에덴에도 남은 성유과가 있긴 합니다만, 그대가 원하는 용도로 사용하기엔 무립니다. <에덴>의 성유과는 좀 특별하거든요.]

알고 있다. 아마 지구인들 중 <에덴>의 성유과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 방법이 없군요.”

나는 조금 낙담했다.
혹시나 <에덴>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무리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메타트론이 말을 덧붙였다.

[내 말은, <에덴>에는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삐걱거리며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높이 쌓인 책들을 무너뜨리며 집무실 안쪽으로 걸어들어오는 한 사내. 눈부신 광휘에 덮인 화신체를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전신의 격을 발동했다.

[오랜만이군, 구원의 마왕.]


*


정희원은 반쯤 소풍을 온 기분으로 <에덴>을 구경했다. 천사들은 대부분 친절했고, 몇몇은 그녀에게 뭔가를 묻기도 했다. 대부분은 김독자나 유중혁에 관한 질문들이었지만, 당연한 일일 거라 생각했다. 그 둘은 현재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존재니까.
오히려 신경이 쓰이는 게 있다면, 아까부터 혼이 빠졌다 돌아왔다를 반복하는 그녀의 배후성이었다.

“우리엘.”

[응, 희원아.]

“있잖아요.”

[응, 희원아.]

“제 얘기 안 듣고 있죠?”

[응, 희원······아?]

화들짝 놀란 우리엘이 정희원과 궁의 석판에 새겨진 계급 표를 번갈아 보며 말을 더듬었다.

[무, 뭐······. 아, 맞아. 천사들의 계급도를 설명하던 중이었지. 그러니까 우리 계급도는······.]

“그렇게 신경쓰이면 직접 가서 보지 그래요?”

정희원이 궁의 ‘집무실’ 쪽을 턱짓하며 말하자, 우리엘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 그게. 아니. 공과 사는 구분해야······.]

“<에덴> 설명은 나중에 해줘도 괜찮아요. 직접 마중나와 준 것만도 고마웠는데요 뭘.”

그 무서운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이렇게나 허둥대는 걸 보며, 정희원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는 배후성이다.
십자 귀고리를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우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김독자 보러 가도 돼?]

“그럼요.”

정희원의 허락에 우리엘의 안색이 환하게 변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우리엘의 눈빛은 시무룩해졌다.

[······아냐 역시 안 되겠어.]

“왜요?”

[그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우리엘이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그런 우리엘이 귀여웠던 정희원이 피식 웃었다. 말이 배후성이지, 다 큰 여동생이 하나 생긴 느낌이었다.
우리엘의 침울한 얼굴을 보며 정희원이 물었다.

“독자 씨가 그렇게 좋으면 얼른 가서 봐야죠. 뭘 망설여요?”

그 물음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우리엘이 횡설수설 손짓을 하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게, 뭔가 부끄러워서.]

“뭐가 부끄러워요? 맨날 간접 메시지 보내 놓고.”

[팬레터 보내는 거랑 직접 만나는 건 다르잖아.]

“지난번에도 만났다면서요? 별똥별의 연회인가 뭔가에서.”

[그땐 그냥 화신체만 보낸 거고, 지금은 다르다고. 온라인 게임 아바타로 만나는 거랑 직접 만나는 거랑은 다르잖아.]

지극히 성좌다운 비유였다.

[그, 그렇다고 해서 너랑 함께했던 모든 시간을 게임처럼 생각했다는 건 아냐!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의미로······.]

허덕대는 우리엘을 보며, 정희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이것이 그녀의 배후성과 다른 성좌들의 차이일 것이다. 그리고 김독자가 유독 우리엘만큼은 챙겨주는 이유도, 이런 부분에 있을지도 모른다.
뭐라고 답하려던 정희원의 입술이 굳은 것은 그때였다.

등줄기를 스치는 나쁜 예감이 있었다.

멀찍이서, 궁의 회랑을 돌아 누군가가 서기관의 집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 김독자가 있는 방향. 무척이나 갈무리 된 ‘격’이었음에도, 스치는 인형(人形)을 보는 순간 정희원은 소름이 돋았다.

“우리엘! 저 성좌······!”

정희원은 저 존재를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저 존재는 지난 ‘마왕 선발전’을 악몽으로 만든 장본인이었으니까.
고개를 돌리자 우리엘도 굳어진 표정으로 그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 보는 게 좋겠어요.”

우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


거대한 열차가 궤도를 이탈하는 것 같은 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웠다.

고오오오오!

그저 마주친 것만으로도 여러 기억들이 되살아 나는 기분이었다.
이곳은 <에덴>이고, 저 성좌가 나를 공격할 일은 없다. 그럼에도 내 ‘격’이 이토록 격렬히 반응하는 것은, 기억에 의거한 본능일 것이다.
태양빛을 연상시키는 숭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예의가 없군. 지난 이야기를 아직도 반추하는가.]

“곱씹지 않으면 뒤통수를 맞는 게 <스타 스트림>이니까.”

[성좌가 되었음에도 아직 필멸자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군. 성좌들은 그런 사소한 역사에 연연하지 않는다.]

사내의 몸통에 붙어 있는 네 개의 팔.
이마에 박힌 세 번째 눈이 오연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왕 선발전’ 당시의 처절했던 전투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수르야. 악마 사냥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메타트론의 말에, 수르야가 관심 없다는 듯 나를 스쳐갔다. 지나치는 수르야의 허리춤에 악마 대공의 머리통이 매달려 있었다. 수르야는 그 머리통들을 끄집어 메타트론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머리의 상태를 살피던 메타트론이 말했다.

[지원 보상은 성운을 통해 발송해드리겠습니다.]

아마 수르야는 <에덴>을 통해 하청 시나리오를 수주받은 모양이었다. 미카엘이나 우리엘처럼, 저 ‘지고한 빛의 신’ 또한 악마종들에겐 악몽이나 다름없으니까.

[아니, 그냥 지금 주면 좋겠군. 요즘 내 ‘성운’이랑 별로 사이가 안 좋아서 말이지.]

그 말을 하며 수르야가 내 쪽을 흘끗 노려보았다.
메타트론이 답했다.

[이참에 <에덴>으로 오시는 것도······.]
[농담은 그쯤 하지. 용건은 끝났으니 이만 가보겠다.]

수르야는 그 말을 남기고, 보수를 받아 집무실의 출구로 향했다. 메타트론이 멀어지는 수르야의 뒷모습을 희미한 미소로 응시하고 있었다.
어쩐지 허탈한 느낌이었다. 괜히 긴장하고 있었는데, 녀석이 여기에 온 건 나와는 상관없는 용무였던 것이다. 그런데 거칠 것 없이 나아가던 수르야의 발걸음이, 문 앞에 다다른 순간 우뚝 멈췄다.

[구원의 마왕, 네 동료 하나가 특수한 질병에 걸렸다고 들었다.]

수르야가 돌아보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원한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순간, ‘멸살법’의 정보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갔다.

「수르야는 <베다>의 여덟 로카팔라 중 하나.」
「그는, <베다>의 성유액이자 또 다른 로카팔라인 소마(Soma)의 기원 중 하나다.」

<베다>의 성유액 소마.
확실히 그것이라면, 유상아의 상태를 호전시켜줄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메타트론을 돌아보았다. 그는 의뭉스런 표정으로 나를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이 서기관은, 처음부터 수르야가 이곳에 올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책략가가 <에덴>에 있는데도 멸망을 막을 수 없었다니······ 새삼 <스타 스트림>의 운명이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나는 수르야 쪽을 돌아보지 않은 채로 물었다.

“뭘 원합니까?”

소마는 <베다>에서도 특권을 받은 신들만이 마실 수 있는 음료. 그런 귀품을 내주는데, 아무런 조건이 없을 턱이 없었다.
지고한 빛의 신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악귀 같은 웃음이 수르야의 입가에 걸려 있었다.

[나는 <올림포스>의 파멸을 원한다.]





< Episode 60. 파멸의 맛 (1) > 끝

< Episode 60. 파멸의 맛 (2) >





성큼성큼 다가온 수르야가 내 눈앞에 섰다.
나와는 20cm 이상 차이가 나는 큰 키. 그가 내뿜는 격에 대항하기 위해, 나 역시 격의 일부를 개방했다. 집무실 안은 순식간에 나와 수르야의 기운으로 가득 찼다.
지금부터의 대화는, 성좌와 성좌의 대화였다.

“<올림포스>의 파멸이라······ 그건 <베다>의 뜻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뜻입니까?”

[그게 중요한가?]

“중요합니다.”

지금쯤이면 거대 성운들 사이의 트러블이 본격화될 거라 생각은 했다.
나를 엿 먹일 때는 서로 간에 협력을 추구했다지만, 본래 <베다>나 <올림포스>, 그리고 <파피루스>는 견고한 동맹 관계가 아니었다.
‘단 하나의 설화’를 추구한다는 점에 있어서, 모든 거대 성운들은 잠재적 경쟁 관계에 놓여 있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수르야가 답했다.

[나는 <올림포스>도 <베다>도 마음에 들지 않아. 이 정도면 답이 되었나?]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내가 원하던 대답이기도 했다.
‘멸살법’의 원작을 생각한다면 확실히 수르야는 <베다>에서도 이단적인 성좌였다.

“대답이 됐습니다.”

[소마를 내주는 것 정도는 나 하나의 권한으로도 충분해.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겠지?]

수르야는 불사의 음료인 소마의 출처. 그의 약속을 받아낸다면 소마를 얻는 것에는 확실히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거······ 일이 재미있게 되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운지, 메타트론이 손가락을 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메트로놈처럼 움직이는 그 손가락을 보며 말했다.

“아직 질문이 하나 남았습니다. <올림포스>의 파멸이라 함은 정확히 어떤―”

[60번 시나리오, <기간토 마키아>.]

“그건 그냥 테마파크 이벤트잖습니까. 고작해야 거신 몇 마리 소환해서 사냥 축제를 벌이는······.”

[저쪽이 진지하지 않다면, 진지하게 만들겠다고 한 것은 그대일 텐데.]

······언제 내가 한 말을 듣고 있었지?
이 자식도 비유 채널의 구독좌인가?

[시나리오 하나 거꾸러뜨린다고 <올림포스>가 갑자기 멸망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몰락으로 가는 단초를 제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어떻게 말입니까?”

[방법은 그대가 이미 생각하고 있지 않나?]

수르야의 이마에 달린 ‘제3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나는 그 눈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하긴, 언제까지 한 발짝 물러서서 시치미만 뗄 수는 없겠지.

“저나 제 성운의 힘만으로는 무립니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내 호언에 곁에 있던 메타트론의 손가락이 멎었다.
나는 메타트론을 보며 말했다.

“서기관. 당신이 저자를 이곳으로 불렀으니 책임을 지십시오.”

[······어떤 책임 말입니까?]

“이 계약의 증인이 되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자 메타트론의 표정에도 흥미가 스쳤다. 줄곧 관망자였던 그의 표정이, 책략가의 그것으로 변하고 있었다.

[제가 증인이 된다면 <에덴>에는 어떤 이득이 있죠?]

“이번에 획득할 ‘거대 설화’의 지분을 나누어주겠습니다.”

거대 설화, <기간토 마키아>의 지분.
아무리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시나리오라 해도, 거대 설화급 설화는 성운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거기다 <에덴>의 대천사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사고를 치고, 그로 인한 개연성의 후폭풍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거대 설화’가 필요하다.
메타트론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맨입으로는 안 됩니다.”

[무슨 말이죠? 증언을 서는 것만으로도 조건은 충분······.]

“겨우 그거 하나 해주시고 ‘거대 설화’의 지분을 받아 가시려고요? 대천사의 양심은 어디로 갔습니까?”

[‘제4의 벽’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선악을 가르는 벽’이 자신의 주인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메타트론의 안색에 희미한 당혹감이 스쳤다.
어떤 정의는 때로 그 정의의 주인을 잡아먹는 법이다.
수르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과연 ‘마왕’이로군.]
[······‘구원의 마왕’. <에덴>에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것이라면 많다.
앞으로 있을 <기간토 마키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한두 가지의 준비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김독자는 1863회차를 떠올렸다.」

이젠 누구도 잃지 않을 것이다.

「김독자의 머릿속에 ‘멸살법’의 정보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이제부터의 싸움은 최상위권의 성좌들이 참전할 가능성이 있었다.
수르야 뿐만 아니라 <베다>의 또 다른 고위신들― <로카팔라>들이 움직일 가능성도 있었고, <올림포스>에서도 12주신들 중 몇몇이 시나리오에 참가할 것이다.
그뿐인가? ‘마왕 선발전’ 때와는 달리 고위급의 마왕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미카엘 같은 녀석도.

······미카엘이라.

「마침내, 김독자는 결정을 마쳤다.」

나는 메타트론의 뒤쪽 진열대에 놓여 있는 아이템 중 하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게 <에덴>의 성유물 중 하나를 주십시오.”


*


잠시 후, 수르야와의 계약을 끝낸 김독자는 <에덴>의 출입 포탈에 섰다. 들어올 때와는 달리, 이번엔 당당히 정문에 선 모양새였다.
몇몇 천사들이 배웅을 나왔다.

[······벌써 가?]

정희원의 손을 꼭 잡은 우리엘이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 우리엘을 가만히 보던 정희원이 우리엘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웃······?]

처음에는 당황하던 우리엘도, 한발 늦게 정희원의 등을 안았다. 쑥스러움으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화신 ‘정희원’을 노려봅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가브리엘의 간접 메시지.
김독자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늘을 바라보다가 정희원을 향해 말했다.

“감동적인 작별 인사를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희원 씨는 여기서 일주일 더 있다가 귀환하세요.”
“네?”
“서기관에게는 따로 말해 두었으니 걱정 마시고요.”

갑작스런 선언에 우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었다.

[정말? 그래도 돼?]

“그럼요. 대신 희원 씨 좀 단단히 훈련시켜 주세요. 지난 3년 동안 곁에 없으셨잖아요.”

[······응! 맡겨 둬!]

환하게 웃는 우리엘을 뒤로하고, 김독자가 정희원을 보았다.

“희원 씨, 일주일 뒤 <올림포스>에서 만납시다.”
“······알겠어요, 겁나 강해져서 돌아갈게요.”

짧은 악수를 마지막으로, 김독자가 포탈 너머로 사라졌다. 몇몇 천사들이 섭섭한 표정을 지었고, 또 어떤 천사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의 이벤트가 끝났다는 듯, 천사들은 다시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가브리엘은 멀리서 그 정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브리엘.]
[······서기관 님.]

등 뒤에 나타난 메타트론을 향해 가브리엘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습니까?]

가브리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요피엘의 일은 그대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요피엘은 강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어요. 그녀의 선택은, 분명 <에덴>의 멸망을 막을 단초가 될 겁니다.]

멸망이라는 말에 가브리엘의 맑은 눈이 흔들렸다.
뭔가를 묻고 싶은 듯, 그녀의 입술이 살짝 열리는 순간.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허공에서, 메타트론을 향한 메시지가 도착했다.
놀랍게도 해당 메시지의 발신인은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었다.

―이계의 신격, ‘은밀한 모략가’의 정체에 관한 보고.

메타트론은 허공에서 깜빡이는 보고서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곧, 진짜 전쟁이 시작될 겁니다.]


*


마치 전쟁터를 연상시키는, 시끌벅적한 거리. 경매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무수한 좌판 상인들이 온갖 종류의 아이템을 판매하고 있었다.
우뚝 멈춰선 유중혁이 뒤쪽을 향해 말했다.

“빨리 와라.”

말은 거칠게 하지만, 유중혁은 시종일관 이설화의 동태를 신경 쓰고 있었다. 혹여나 그녀가 다치지 않을까 지나치는 모든 성좌와 화신들에게 희미한 격을 내뿜어 댔고, 달려오는 차가 있으면 그 차의 앞을 막아섰다.
몇몇 화신들이 욕설을 지껄였지만 유중혁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냥 우리가 차를 피하는 편이······.”
“보행자 우선이다.”

그 뻔뻔함이 너무나 유중혁 다웠기에, 이설화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도 그냥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유중혁이 물었다.

“······왜 웃지?”
“중혁 씨는 회귀자라고 하셨죠.”
“그렇다.”
“그럼 이전의 삶에도 절 만나신 적이 있나요?”

그 질문에, 유중혁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없다.”
“······그렇군요.”

어색한 분위기가 두 사람을 갈랐다.
이설화는 유중혁의 옆모습을 보았다. 분명 곁에 있음에도 한참이나 먼 곳을 걸어가는 것 같은 사람.
이설화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 천천히 가요. 살 만한 아이템이나 스킬북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것에 한눈팔 시간 따윈 없다.”
“전 벌써 하나 샀는데요?”

이설화가 웃으며 손에 든 스킬북을 흔들었다.

[스킬 ― 습도 보존]

스킬북을 확인한 유중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쓸데없는 스킬을 샀군.”

벌써 스킬을 사용 중인지, 이설화의 뺨과 입술에 촉촉함이 감돌고 있었다. 시나리오가 시작된 후 생필품을 구하기가 어려워진 까닭에, 이런 생활 스킬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쏠쏠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유중혁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이설화가 말했다.

“중혁 씨도 필요하실 거 같은데요? 손등이랑 입술이 다 트셨잖아요. 이 도시는 기온이 전체적으로 낮아서 피부가 금방 건조해져요.”
“전투에 필요 없는 스킬은 배울 필요 없다.”
“독자 씨도 이 스킬 있던데요?”

유중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김독자도 그 스킬이 있다고?”
“네, 성좌들한테 인기 끌려면 이 정도는 필수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면서······.”
“그놈은 아이돌이라도 되고 싶은 모양이군.”

유중혁이 으드득 이를 갈며 발걸음을 박찼다.
이설화는 그런 유중혁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냉정한 사내는 김독자라는 이름만 나오면 쉽게 화를 낸다.
자세히 보자, 유중혁의 시선이 흘끗흘끗 가판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스킬북 50% 할인.

풋 웃음이 나온 이설화가 말했다.

“제가 하나 사드릴까요?”

유중혁의 걸음이 멎었다. 뭔가 마음에 드는 아이템이라도 있는 걸까 싶었는데, 뭔가가 심상치 않았다. 파르르 떨리는 주먹. 망막 깊숙한 곳에서 흘러넘치는 분노가 유중혁의 표정을 지배하고 있었다.

“······중혁 씨?”

멀리서 보이는 경매장의 입구. 그리고 그곳으로 들어가는 한 무리의 화신들. 찰랑이는 금발 머리. 이설화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살기를 억제하지 못한 유중혁의 손이 [흑천마도]의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중혁 씨, 잠깐만요!”

이설화는 본능적으로 유중혁의 팔을 붙잡았다. 저 금발의 여자가 누구인지는 이설화도 알고 있었다.

‘아스가르드의 예언자.’

언젠가, 스치듯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지난 회차의 유중혁은, 저 여자에게 배신당해서 죽었다.

“안돼요. 여기서는······ 아직 다른 일행들도······!”

마음이 다급해진다.
아무리 유중혁이라고 해도, 이곳은 성좌들의 경매장. 위인급부터 설화급에 이르는 성좌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게다가, 유중혁의 적은 혼자가 아니었다. 지금 섣불리 달려들었다간······.

“내 이럴 줄 알았지.”

비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한수영이 서 있었다.

“벌써 잊었냐? 김독자가 사고치지 말랬잖아.”

한수영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손가락으로 코인을 튕겼다.
유중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왜 상관할 일이 아냐? 동료잖아.”
“동료?”

유중혁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넌 아니다.”
“이게 말이면 단줄 알아······ 야, 네가 아무리 주인공이라도······!”
“수영 씨.”

뒤늦게 달려온 일행들의 만류에, 한수영이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후우······ 내가 김독자 유중혁 때문에 제 명에 못 산다 진짜······.”
“안나 크로프트는 여기서 제거해야 한다.”
“글쎄, 김독자는 그걸 원하지 않을 걸?”
“김독자와는 아무 상관―”
“그냥 저 여자한테 한 방 먹일 수만 있으면 되는 거지?”

유중혁이 멈칫 한수영을 바라보았다. 한수영은 그런 유중혁을 잠시 바라보다가, 경매장의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 어때?”

한수영의 손에 아이템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유중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건······?”
“아까 김독자 코트에서 몰래 빼낸 거야.”

한수영의 입가에 악동 같은 미소가 맺혔다.

“예언자의 ‘예언’이 어디까지인지, 한 번 시험해 보자고.”





< Episode 60. 파멸의 맛 (2) > 끝

< Episode 60. 파멸의 맛 (3) >





경매장은 ‘도깨비 보따리’나 일반 ‘거래소’에서는 구하기 힘든 성유물급의 아이템을 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였다. 그리고 예언자 ‘안나 크로프트’는, 이곳에서 꼭 얻어가야 할 아이템이 몇 가지 있었다.
안나 크로프트는 등 뒤에 선 <올림포스> 출신 성좌들에게 말했다.

“경호는 문제없겠죠?”

[물론이다. 애초에 이 경매장은 우리 <올림포스>의 법권 지대. 우리의 가호가 있는 한 ‘별자리의 맥락’에서는 누구도 너를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안나 크로프트가 꾸벅 고개를 숙이자, 그녀를 보호하던 성좌들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안나 크로프트가 곁의 셀레나 킴을 향해 말했다.

“그럼 들어가죠.”
“······예.”

셀레나 킴이 어두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경매장의 통로를 걷는 내내, 안나 크로프트는 그런 셀레나 킴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싹싹하던, 언제나 미소를 띠고 있던 셀레나 킴은 언제부턴가 웃지 않게 되었다.

“셀레나.”
“네.”

사실 그것이 언제부터인지, 안나 크로프트는 잘 알고 있었다.
미식협(美食協).
정확히는 ‘구원의 마왕’을 만나고 나서부터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개를 숙이며 다시 앞을 보는 셀레나 킴의 모습.
어느 정도는 ‘예언’했던 일이었음에도, 안나 크로프트는 이상하게도 고독한 기분이 들었다.
어떤 미래는 알고 있어도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특히, 사람의 감정이란 것이 그러하다.

[제 8611회, ‘별자리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에 얽매일 때가 아니었다.
객석을 가득 채운 성좌들과 화신들의 열기를 보며, 안나 크로프트는 자신의 결심을 재확인했다. 어디를 둘러 보아도 만만한 ‘격’은 없다.
모두, 그녀가 죽여야 할 적들이었다.

[첫 번째 경매품입니다!]

경매를 진행하는 것은 단상의 준 상급 도깨비였다.
안나 크로프트와 셀레나 킴은 미리 선점한 자리에 앉아 경매에 참가했다. 순식간에 몇 가지 아이템들이 팔려 나갔고, 안나 크로프트도 개중 몇 가지를 샀다.

‘만티코어의 이빨.’
‘에인션트 드래곤의 비늘 조각.’
‘늙은 예티의 가죽.’

그녀가 주로 매입한 것들은 희귀한 재료 아이템들이었다. 모두 그녀의 [미래시]를 통해 확인한 아이템들이었고, 그 목록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거신병을 제작하려면, 반드시 이 아이템들이 필요해.’

낙찰 경쟁에 참가한 몇몇 화신들이 있었지만, 이미 [미래시]를 통해 그들의 최고 낙찰가를 확인한 후였기에 물품의 낙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목록 점검을 마친 안나 크로프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충 끝난 것 같군요. 그럼 슬슬······.”

[자, 오늘은 특별한 상품이 들어왔습니다!]

별안간 무대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안나 크로프트가 흠칫 고개를 돌렸다.
안나 크로프트의 반응에 셀레나 킴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표정이 굳어진 안나 크로프트가 경매장을 노려보았다.

[이것은 ‘헌집 두꺼비’라 불리는 아이템입니다!]

─뀌룩, 뀌룩.

[하하, 귀엽죠? 이래봬도 이 아이템은 ‘성유물’급 아이템으로······.]

─헌 집주 면 새집 줄 게. 헌집 주 면 새 집 줄 게.

[말도 제법 할 줄 아는 녀석이죠. 아직 이 경매품은 상품 감정이 끝나지 않은 상태긴 합니다만, 분명 엄청난 가치의―]

‘······저런 아이템은 ‘예언’에 없었는데?’

이미 [미래시]를 통해 경매품의 목록은 전부 확인했다. 그런데, 그녀가 본 단편 미래의 어디에도 저런 아이템은 출품된 적이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미래시]를 흔드는 어떤 변수의 개입이 있다는 것.
안나 크로프트는 <올림포스>의 성좌들이 있는 쪽을 흘끔 보았다. 안심하라는 듯, 몇몇 성좌들이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무대를 향해 [대악마의 눈동자]를 발동했다.

기이이이잉······.

붉은빛을 뿌리며 밝게 타오르는 눈동자. 그리고 잠시 후, 안나 크로프트의 망막에 아이템 ‘헌집 두꺼비’의 숨겨진 기능들이 떠올랐다.

“저건 사야 돼.”
“······안나 님?”

[최초 경매가는 ‘50만 코인’입니다!]

도깨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안나 크로프트는 곧바로 입찰을 신청했다.

“60만 코인.”

[60만 코인 나왔습니다! 입찰자는······ 화신 ‘안나 크로프트’!]

생각보다 큰 금액이었지만, [헌집 두꺼비]는 그럴 가치가 있는 아이템이었다.

+

이 아이템은 전설급 설화를 품고 있습니다.
이 아이템은 ‘낡은 아이템’을 먹어 치워 동급의 ‘새 아이템’으로 교환해줍니다.

+

기능 자체는 간단했다.
낡은 아이템을 먹고, 동급의 다른 아이템을 뱉는다.
말은 간단하지만, 그 응용은 무궁무진한 아이템이었다.

“성운에 연락해서 최대한 많은 코인을 끌어모으세요. ”
“왜 저런 아이템을······.”
“저것만 있으면 우리가 원하는 아이템을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아직 다른 성좌나 화신들은 저 두꺼비의 쓰임새를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낙찰을 받을 기회는 바로 지금뿐이었다.

[현재 최고 입찰가 60만 코인입니다! 더 없으시면······.]

그런데 그때.

“70만 코인.”

누군가가, 입찰을 신청했다.

[오오! 70만 코인 나왔습니다!]

그녀가 앉은 객석의 정 반대편에 입찰을 신청하는 불빛이 들어와 있었다.
햇볕을 흡수하는 거무튀튀한 마도(魔刀).
안나 크로프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입찰자는 화신 ‘유중혁’입니다!]


*


안나 크로프트에 이은 유중혁의 등장에, 경매장 곳곳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두 사람 모두 지구 시나리오에서는 유명한 화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안나 님, 잘못하면······.”
“재미있게 됐군요. 패왕이 이곳에 있을 줄이야.”

오히려 불이 붙은 것처럼, 안나 크로프트가 웃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외쳤다.

“80만 코인!”

[화신 ‘안나 크로프트’, 80만 코인!]

“90만 코인.”

[90만 코인! 바로 90만 코인 나왔습니다!]

유중혁도 지지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붙는 경매 전쟁. 금액이 100만 코인을 넘어서자 경매장의 분위기도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가격 거품이 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안나 크로프트는 여유로웠다.

‘당신은 날 이길 수 없어.’

츠츠츠츳······!

짧은 두통과 함께 밀려오는 현기증. 안나 크로프트의 망막 속으로 미래 단편의 일부가 떠올랐다. 찰나의 [미래시]를 통해, 그녀는 유중혁이 낼 최대 금액을 읽어내는 데 성공했다.

“128만 코인.”

[화신 ‘안나 크로프트’, 128만 코인입니다!]

안나 크로프트의 입찰에, 유중혁은 말이 없었다.
예상대로였다.

[자, 더 입찰할 분 없으시면······.]

안나 크로프트가 미소를 지었다.
128만 코인은 굉장히 큰 금액이었지만, 손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헌집 두꺼비]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템이었고, 저걸 얻기만 한다면······.

“200만 코인!”

바로 위에서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에, 안나 크로프트의 몸이 휘청했다.
놀란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이, 이 백만 코인 말씀이십니까? 갑자기 그런 금액을······.]

“이 구역 신흥 부자 한수영 님 등장이시다.”

[누구신지······.]

“나 몰라? 흑염마황 한수영. <한수영 코퍼레이션>의 대표이사이자, <김독자 컴퍼니>의······ 실질적 권력자다.”

한수영의 말에 곁에 있던 이현성이 깜짝 놀라 물었다.

“수영 씨, 진짭니까? 대체 언제······.”

안나 크로프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한수영을 노려보았다.
한반도의 흑염마황.
안나 크로프트도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무슨 수작이죠, 흑염마황?”
“난 저 두꺼비가 무지 갖고 싶을 뿐이야.”

안나 크로프트는 다시 한번 [미래시]를 발동했다.
아무리 초단기간의 미래 예측이라 해도, 하루에 이렇게 많은 [미래시]를 사용하면 몸에 엄청난 부담이 간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이 싸움은 자존심이 걸린 대결이 되었기 때문이다.
츠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안나 크로프트의 눈앞에 한수영이 낼 최대 금액이 떠올랐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화신체의 과부하로 흘러내린 코피를 슥 닦은 안나 크로프트가 입을 열었다.

“······300만 코인, 입찰하겠습니다.”
“안나 님!”

깜짝 놀란 셀레나 킴이 외쳤다.
그러나, 안나 크로프트는 요지부동이었다.

“사야 합니다.”

안나 크로프트의 [미래시]에 떠오른 한수영의 금액은 ‘299만 9999코인’이었다.

[300만 코인 나왔습니다!]

기쁨에 어깨춤을 추는 도깨비의 모습. 객석에서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 ‘예언자’다!]
[약삭빠르고 교활하다 들었는데, 통도 큰 작자였군!]

객석은 열광에 휩싸였지만, 안나 크로프트는 조금도 들뜨지 않았다.

“안나 님, 300만 코인은 무리에요. 이건 너무 큰 손해라고요!”
“도깨비 대출을 받으면 됩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손해는 봤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손해도 아닙니다. 저들에게 내주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손해를 면하는 셈이니까요.”
“그게 무슨······.”
“저렇게까지 입찰을 따라왔다는 것 자체가, 저들도 이 아이템이 간절했다는 이야깁니다.”

안나 크로프트는 이쪽을 쏘아보는 한수영과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을 마주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저들 또한 <기간토 마키아>에 참전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
언젠간 맞부딪칠 상대라면, 지금 기를 꺾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한수영은 졌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이런. 별수 없네. 우리가 졌어. 완전히, 일백 퍼센트 져버렸다네.”
“······.”
“이래서 세상은 불공평해~ 금수저 화신한테는 이길 수가 없다니까?”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분명 낙찰을 받은 건 이쪽인데, 왜 저쪽이 즐거워 보이는 거지?

[자, 물건을 낙찰받으실 분은 단상으로 내려와 주시기 바랍니다.]

도깨비의 부름에 안나 크로프트가 단상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찜찜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킬킬거리며 이쪽을 보는 한수영과, 무표정한 유중혁의 얼굴.
[미래시]를 사용해 앞으로의 미래를 읽고 싶었지만, 벌써 오늘의 제한치를 모두 사용한 후였다.

‘잠깐, 설마?’

마침내 경매품 앞에 섰을 때, 안나 크로프트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이 상품, 출품자가 누군가요?”

[그게, <김독자 컴퍼니>의······.]

“사지 않겠습니다.”

[예?]

도깨비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낙찰된 상품을 환불할 수는 없습니다. 금액을 지불하지 않으시면―]

“이건 명백한 사기입니다. 그러니 사지 않겠습니다.”

[사기라뇨?]

안나 크로프트의 손가락이 <김독자 컴퍼니> 일행들을 가리켰다.

“저들이 편을 먹고 인위적인 가격 경쟁을 유도했습니다. 애초에 저들은 이 물건을 살 생각이 없었단 얘깁니다.”

안나 크로프트의 주장에 한수영이 혀를 차며 말했다.

“뭔 소리야? 진짜 살 거였거든?”
“설령 정말 살 생각이었더라도, 이 경매는 무효입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들은 이 상품의 출품자니까요. 출품자 본인이 경매에 참가하는 경우는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한수영과 유중혁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도깨비가 말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확실히 출품자 본인이 자기 상품의 경매에 참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안나 크로프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출품자를 확인해 보십시오. 분명 경매품의 출품자는, 저 둘 중 하나일 테니까요.”

[좋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 사이로 곤란한 표정이 번졌다.
반면, 안나 크로프트의 표정에는 안도와 승리감이 번지고 있었다.
꽤 괜찮은 함정이었다.
하마터면, ‘예언자’인 그녀조차 당할 뻔했으니까.

그런데, 출품자를 확인하던 도깨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군요. 그들 중 출품자는 없습니다.]

“예?”

한수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아~ 정말 갖고 싶었는데 그 두꺼비······.”
“그럼 출품자는 대체······.”

그 순간, 경매장의 문이 활짝 열렸다. 경매장 바깥의 눈부신 빛살과 함께, 백색의 코트가 바람에 흔들렸다.
백색 코트의 사내는 한수영과 유중혁을 흘끗 보곤, 휘적휘적 이쪽으로 걸어왔다.
마침내 단상 위로 올라온 사내는, 안나 크로프트도 익히 아는 자였다.
반갑다는 듯 미소를 지은 사내가 악수라도 청하듯 손바닥을 내밀었다.

“300만 코인입니다.”

김독자였다.





< Episode 60. 파멸의 맛 (3) > 끝

< Episode 60. 파멸의 맛 (4) >


내가 이곳에 때마침 올 수 있었던 것은 한수영이 보낸 메시지 덕분이었다.
한수영이 [헌집 두꺼비]를 가져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만한 아이템을 몰래 빼가는데 모르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예언자 엿 좀 먹이려는데, 너도 올래?

마침 경매장을 확인해 볼 생각이었기 때문에,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안나 크로프트가 내 예상대로 움직이고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고.

―왔군.
―타이밍 맞춰서 잘 왔네?

동시에 들려오는 [한낮의 밀회]의 메시지.
일시적으로 일어난 혼선에, 유중혁과 한수영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뭐냐.”
“내가 할 말이야. 너도 [한낮의 밀회] 있었어?”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앞을 보자, 완전히 표정을 잃어버린 안나 크로프트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그녀를 도발했다.

“뭐하십니까. 300만 코인 달라니까.”

미식협 때의 조우 이후 첫 만남이었다.
안나 크로프트의 곁에 선 셀레나 킴이, 나를 보곤 가볍게 목례를 했다.
안나 크로프트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설마 이 상품의 출품자가 [구원의 마왕] 당신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럴 리가······ 당신이 이런 수준의 아이템을 획득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 아이템은 최소 후반부 시나리오에서나 얻을 수 있는 물건이에요.”

아직까지 현실을 부정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도깨비 쪽을 일별했다. 그러자 도깨비가 대답했다.

[출품자는 <김독자 컴퍼니> 소속 성좌 ‘구원의 마왕’. 확인 결과 이분이 맞습니다.]

도깨비까지 사실을 증언하자 안나 크로프트의 안색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

300만 코인.

현시점에서 화신 단일의 재력으로 그만한 코인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스타 스트림>에 없을 것이다.
그만한 돈이면, 어지간한 설화급 성좌들에게도 부담이 되는 금액이니까.
멀리서 한수영이 이죽거렸다.

―야, 300만 코인은 반띵하는 거지? 나 아니었으면 없는 돈이었다?

안나 크로프트는 떨리는 주먹을 잠시 쥐었다가, 셀레나 킴을 한 번 보곤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지만, 낙찰가는 줄 수 없습니다.”

어느새 안나 크로프트의 표정은 평소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물건을 받지 않는 대신, 위약금을 지불하겠습니다.”

예언자다운 신중한 선택이었다.
지금 그녀의 자금 현황으로 300만 코인을 구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더군다나 그 300만 코인이 고스란히 내 수중에 들어오게 된다는 사실을 안 이상, 구태여 상품을 구매하려는 욕심도 싹 사라져버렸겠지.

[등장인물, ‘안나 크로프트’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좋으실 대로 하시죠.”

정색이 된 한수영이 나를 노려보았다.

―야, 돌았어? 300만 코인이라고!
―우리한테도 이쪽이 이득이야.

안나 크로프트의 말마따나, [헌집 두꺼비]는 상당히 유용한 아이템이다.
특히나 곧 있을 <기간토 마키아>를 생각하면 더욱이.
지금은 여기서 300만 코인을 받는 것보다,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편이 더 낫다.
도깨비가 말했다.

[위약금은 최초 입찰가인 50만 코인입니다.]

게다가 아무것도 안 주고 50만 코인을 받을 수 있다니, 이쪽으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안나 크로프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품속에서 천천히 코인을 꺼냈다. 그런데 그녀가 꺼낸 것은 50만 코인이 아니라 100만 코인이었다.

“구원의 마왕, 저랑 내기 하나 하지 않겠습니까.”
“내기? 싫은데요.”
“······당신은 내기를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쉽게 발뺌을 하다니 실망이군요.”

유치한 도발에 나는 웃었다.
이거, 갑자기 재미있어지는군.
안나 크로프트가 계속해서 말했다.

“나와 내기를 해서 당신이 이긴다면 두 배인 100만 코인을 드리죠.”
“100만이라······ 당신이 이긴다면?”
“이 이야기는 없었던 일로 하고, 각자 갈 길을 가면 됩니다. 결과적으로 당신이 손해 볼 것은 없는 셈이죠.”

붉게 빛나는 안나 크로프트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멸살법’의 오래된 문장을 떠올렸다.

「안나 크로프트는 타고난 도박사다.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오래전부터, 그녀는 ‘라스베이거스의 예언자’로 불리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손해볼 게 왜 없습니까? 난 아무것도 안 해도 50만 코인을 받을 수 있는데, 뭐하러 이상한 도박을 해야 합니까?”
“질까 봐 두려운 모양이군요. 하긴, 제게 지면 ‘패배 설화’가 생길 수도 있을 테니까.”

······이것 봐라.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선택에 주목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선택에 주목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이 내기를 거절하길 바랍니다.]

채널의 간접 메시지까지 들려오자, 안나 크로프트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구원의 마왕’. 당신의 성좌들이 보고 있습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을 궁금해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소심함을 비난합니다.]

영리한 여자였다.
<기간토 마키아>를 앞둔 지금 같은 상황에서, 성좌들의 여론은 생각보다 중요했다. 내 행동에 따라 동맹이나 지원군이 생길 수도 있고, 적이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이렇게 도발해오시겠다 이거지······.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질까 봐 두려운 게 아냐. 내기 조건이 맘에 안 드는 것뿐이지.”

안나 크로프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성좌, ‘드러누운 드래곤’이 당신의 말에 흥미를 갖습니다.]

“조건이라. 내기 금액을 더 올려주길 원합니까?”
“코인은 그 정도면 됐고, 그보다 다른 조건을 하나 더 걸었으면 싶은데.”
“다른 조건······?”
“내가 이긴다면 ‘셀레나 킴’에게 걸려 있는 [주종 서약]을 풀어주십시오.”

[성좌, ‘정의와 화목의 친구’가 당신의 말에 깜짝 놀랍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셀레나 킴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 셀레나 킴은 ‘별자리의 맥락’을 지나며 ‘별의 증명’의 구속을 받았을 것이다. 그 ‘안나 크로프트’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자를 곁에 두었을 리가 없으니까.
안나 크로프트는 당황한 모양새였다.

“구원의 마왕! 그건······.”
“<아스가르드>의 개연성을 빌린다면 셀레나 킴 하나 정도는 충분히 해방시켜 줄 수 있을 텐데?”

‘별의 증명’으로 맺어진 주종 관계를 해방시키는 것은 안나 크로프트에게도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다.
애초에 [주종 관계]를 맺었다는 것 자체가 그녀가 ‘셀레나 킴’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 한다는 증거였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안나 크로프트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셀레나 킴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허공에서 비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아앗!]

[다수의 성좌들이 해당 ‘내기’의 시나리오 승격을 요청합니다!]
[성좌들의 승격 요청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서브 시나리오 ― 파멸의 한탕>

분류 : 서브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안나 크로프트와 ‘구원의 마왕’이 내기를 시작했습니다. 해당 내기를 관망 중인 구독좌와 화신들은 내기에 코인을 걸 수 있습니다.
제한시간 : ―
보상 : 내기에 승리한 구독좌는 비율에 따른 배당금을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실패시 : ―

+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50,000코인을 걸었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50,000코인을 걸었습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1,000코인을 걸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번 시나리오는 나나 안나 크로프트가 아닌 다른 존재들도 적극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 시나리오였다.
깜짝 놀란 한수영이 [한낮의 밀회]를 통해 외쳤다.

―야!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코인이나 잘 걸어.
―누구한테? 너한테?

나는 안나 크로프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기 내용을 말하시죠.”
“간단합니다.”

안나 크로프트는 ‘100만’이라 적힌 코인을 허공으로 던졌다.
팽그르르 돌며 상승한 코인은 상공의 30미터가 넘는 지점까지 솟아오르더니, 이내 허공에서 우뚝 멈춰 섰다.

“저 코인을, 당신 손으로 직접 가져가시면 됩니다.”

내기의 내용을 들은 성좌들이 경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깜짝 놀랍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코인을 돌려달라 말합니다!]

한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화신 ‘한수영’의 시선을 피합니다.]

코인에는 부유 스킬이 걸려 있는지, 제자리에서 가만히 맴돌고 있었다.
얼핏 보면 너무 간단하고 쉬운 내기였다.
그냥 스킬을 사용해 점프한 뒤, 저 코인을 가져가면 끝인 셈이니까.
하지만 내기가 간단하다는 것은 그만큼 함정도 치밀하다는 이야기였다.
한수영이 외쳤다.

―야, 김독자. 저거 함정이야! 절대로 내기하지 마!

나도 알고 있었다.
이 ‘안나 크로프트’는, 절대로 자신이 질 내기는 시작하지 않는다.

“내기 내용에 동의하십니까?”
“좋아.”

[내기의 성립이 완료되었습니다!]

나는 허공에서 회전하는 코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수의 성좌들이 지켜보는 상황이니, 저 코인에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저 ‘코인’ 자체가 아니라 다른 곳에 함정이 있다는 뜻.

[전용 스킬, ‘책갈피’를 활성화합니다!]
[전용 스킬, ‘바람의 길 Lv.11(+1)’이 활성화되었습니다!]

30미터는 꽤 높고, 일반인이라면 맨손으로 저 코인을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이 세계에 시나리오가 시작된 이후, 나는 일반인이 아니었다.

슈우우우!

[바람의 길]을 발동하여 가볍게 점프하자, 내 몸은 쾌속하게 상공을 향해 솟아올랐다.
코인까지 남은 거리는 10미터.

츠츠츠츠츳!

그때, 누군가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성운 ‘올림포스’의 개연성이 당신에게 반응합니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객석의 곳곳에서 솟구치는 강력한 격.
몇몇 성좌들의 화신체가 내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구원의 마왕. 당장 스킬 발동을 취소해라.]

진언에서 느껴지는 격의 파장이 익숙했다.
내 앞을 막아선 이들은 <올림포스>였다.
위인급 성좌 셋에, 설화급 성좌가 하나.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짓입니까?”

[이곳에서 ‘전투 스킬’ 발동은 금지되어 있다. 모르는 것인가?]

성좌들 사이에서 익숙한 인형이 튀어나왔다.
머리 위로 뱅글뱅글 도는 작은 운석들을 가진 성좌.
나는 녀석의 수식언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저 녀석은, <올림포스>에서도 제법 끗발이 있는 성좌니까.

‘헤매는 공포’.

객석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헤매는 공포’, 포보스다! 아레스의 아들이야!]

올림포스의 12신좌. ‘흉포의 군신’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다.

전쟁이 낳은 ‘공포’의 신.

이 녀석이 바로 ‘헤매는 공포’라 불리는 ‘포보스’였다.
나는 안나 크로프트를 내려다보았다.
보아하니 이 녀석이 안나 크로프트가 믿는 뒷배인 모양이었다





< Episode 60. 파멸의 맛 (4) > 끝

< Episode 60. 파멸의 맛 (5) >





“구원의 마왕, 뭘 하고 계시죠? 어서 코인을 가져가시죠.”

안나 크로프트가 도발하듯 말을 이었다.

“아니면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나는 객석에 자리 잡은 성좌들을 천천히 둘러본 뒤, 내 앞을 막아선 포보스를 다시 바라보았다.
오래된 ‘멸살법’의 정보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별자리의 맥락’에서 가장 커다란 힘을 행사하는 성운은 <올림포스>다. 개중에서도 특정 구역은 성운의 힘이 극대화되는 성소인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경매장’이다.」

이것이, 바로 안나 크로프트가 그토록 여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였다.
47번 시나리오 지역인 ‘별자리의 맥락’을 통해 진출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이벤트는 <기간토 마키아>.
그러니, 최고 주최자인 <올림포스>의 위세는 이곳에서 가장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난 당신과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너는 여기서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 네 자리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법권 지대’의 권한으로 너를 구속할 것이다.]

말이 안 통하는 상대였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올림포스>의 완고함에 감탄합니다.]

만약 여기서 내가 스킬을 사용해 ‘코인’을 회수한다면, 저 성좌들은 반드시 내게 ‘법권지대’의 권한을 행사할 것이다.
즉, 안나 크로프트는 처음부터 내가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 내기를 꾸민 것이었다.
나는 포보스를 향해 말했다.

“먼저 스킬을 사용한 건 안나 크로프트입니다. 그쪽의 말대로라면, 저 여자부터 처벌해야 하지 않습니까?”

[화신 안나 크로프트는 <올림포스>로부터 스킬 사용을 이미 승인받았다.]

“그럼 저도 승인해주시죠.”

[너는 안 된다.]

“왜죠?”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다. 경매는 끝났으니 일행들과 함께 이곳에서 떠나기 바란다.]

안나 크로프트가 특유의 모호한 미소로 나를 보고 있었다.
속으로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 여기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이거지?

멀리서 이야기를 듣던 한수영이 욕설을 내뱉었다.

“뭐 그딴 개소리가 다 있어! 시발, 지금 장난쳐?”

어느덧 유중혁도 [흑천마도]를 빼 들고 있었다. 곰 같은 이현성조차 글러브를 탕탕 부딪치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나는 한수영을 향해 경고했다.

―일행들 말려. 절대 섣불리 움직이지 마.
―뭐? 야,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지금 나서지 않으면······.
―여기서 싸우면 저 녀석들 생각대로 돼.
―지금 저 여자 계략에 놀아나 주겠다는 거야?
―그럴 리가 있냐?

나는 안심하라는 표시로 손을 흔들어준 뒤, 포보스를 돌아보았다.

“그럼, 예정대로 코인은 가져가겠습니다.”

[뭐?]

그와 동시에, 나는 스킬을 발동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갑작스레 개방된 거대 설화에, 성좌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고오오오오······!

설마 내가 격을 개방할 줄은 몰랐는지, 깜짝 놀란 포보스가 외쳤다.

[구원의 마왕.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실수하고 있다.]

“실수? 뭔 실수?”

[이곳은 우리 성운의 ‘법권 지대’다. 난동을 부리게 되면 개연성의 구속을 받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쓰읍 숨을 들이쉰 나도, 곧바로 [진언]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는 [책갈피]를 통해 [전인화]를 발동했다.

[넌 모르겠지만, 내가 그동안 꽤 많이 참았거든? 너네가 내 ‘운명’ 가지고 지랄할 때부터 말이야.]

포보스는 아레스의 아들.
아마 이 녀석도, 내 지랄 같은 [운명]을 만드는 데 한손을 거들었을 것이다.

[무슨······!]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봐. 너희들한테 그럴 능력이 있다면 말이지.]

쿠구구구구구!

마계의 설화가 [전인화]의 마력에 깃들었다.
백청의 마력에 검은 마력이 그라데이션처럼 번져 갔다.
아직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포보스가 외쳤다.

[네놈! 지금 감히 <올림포스>에게 적대하겠다는······!]
[<올림포스>의 12신좌들에게 전해.]

나는 나를 향해 격을 키우는 포보스에게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김독자 컴퍼니>는, 아주 공격적으로 회사의 몸집을 키울 생각이라고.]

꽈아아아앙!

경매장의 중심에서 일어난 폭발과 함께, 피떡이 된 포보스의 화신체가 허공을 날았다. 연속으로 쏟아진 [전인화]의 전격에 포보스의 화신체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 깊숙한 곳으로 처박혔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행동에 경악합니다!]
[성운, <올림포스>가 당신의 행동을 눈치챘습니다!]

나는 신음을 흘리며 처박힌 포보스를 내려다보았다.
‘헤메는 공포’는 그래도 설화급 성좌. 정석대로 부딪쳤다면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녀석은 내가 소성운의 성좌라고 방심하고 있었고, 이것이 그 방심의 대가였다.

[또 법권 지대니 뭐니 떠들 놈 있어?]

황망해진 올림포스의 성좌들이 나를 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당신은 <올림포스>의 법권 지대에서 범법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개연성의 구속은 곧바로 발동하지 않는다.
나는 곧장 [바람의 길]을 발동하여 허공으로 뛰어올라 코인을 낚아챘다.

[서브 시나리오의 보상으로 1,000,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쏟아지는 시스템 메시지.

[서브 시나리오 ― ‘파멸의 한탕’이 종료되었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환호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객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안위를 우려합니다!]
[내기에서 승리한 성좌들이 당신에게 100,000코인을 후원합니다!]

주먹질 한방에 110만 코인.
대단히 남는 장사가 아닐 수 없었다.

[저놈 잡아! 당장 구속해!]

몇몇 성좌들이 외쳤지만, <올림포스>의 성좌들 중 누구도 선뜻 나서는 이는 없었다. 내가 보여준 ‘거대 설화’의 힘을 확인한 까닭이었다.
아래쪽에서 안나 크로프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당신은 가진 힘에 비해 몸이 너무 가볍군요, 구원의 마왕.”

무려 100만 코인을 잃었음에도 그녀는 낙담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다음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기 때문일 테지.

“이제 당신은 <올림포스>의 감옥에 갇히게 될 겁니다.”

법권 지대에서 난동을 부린 성좌는 <올림포스>의 구속을 받는다.

“그렇다는 것은, 이제 <기간토 마키아>에 참가할 자격을 잃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나는 그런 안나 크로프트를 보며 웃었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아마 안나 크로프트는 모를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있었다는 것을.

츠츠츠츠츠츳!

[<올림포스>의 개연성이 당신을 구속합니다.]
[당신의 화신체가 <올림포스>의 재판정으로 이송됩니다.]

허공에서 환한 빛이 쏟아지며, 뭔가가 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한수영이 외쳤다.

“김독자! 또 어디 가! 이 미친놈아!”

마침내 법권지대의 개연성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경매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트러블은, 해당 지역의 관할 <성운>의 의사에 따라 처리된다.
나는 한수영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 갔다 올게!

“너 설마 일부러······!”

―일주일 뒤에 보자. 내가 말한 것들 기억하지? 준비 잘해 놔.

한수영이 뭐라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대부분은 욕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 몸은 빛살 속에 사라져버렸다.
강제로 진행된 차원 이동에 짧은 현기증이 닥쳤다.
작은 신음과 함께 휘청이며 눈을 떴을 때, 나는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던져져 있었다.
그런데······ 나만 온 게 아니었다.

“······넌 또 왜 왔냐?”

고개를 돌리자, 유중혁이 내 어깨를 으스러져라 붙잡고 있었다.

“네놈의 미친 계획을 또 구경만 할 수는 없다.”

역시, 이 녀석은 내가 뭘 할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미친 계획들이 지금까지 널 살린 거야, 인마.”
“혼자 어디서 죽어 나가는 계획 말인가?”

대꾸하려는 내가 말을 멈춘 것은, 은은한 어둠 속에서 드러난 인기척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우리의 눈앞에 작은 계단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계단의 최상층에, 두 개의 옥좌가 있었다. 옥좌에서 두 개의 인형(人形)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그저 이쪽으로 시선을 준 것만으로도 피부가 오싹해지는 격.
담대한 유중혁조차 칼자루를 굳게 쥐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특히 두 인형 중 한쪽은, 지금의 우리로서는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는 위대한 격을 지닌 존재였다.

[구원의 마왕,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요?]

옥좌에 앉아 있던 한 여인이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걷힌 어둠 속에서 일어난 여인이 사뿐사뿐 걸어 내려왔다.
나는 그녀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계단 아래로 내려온 여인은, 바로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인 페르세포네였다.

“······간만입니다. 또 외양이 바뀌셨군요.”

내 말에 페르세포네가 희미하게 웃었다.

[요즘 <에덴>에 관심이 많거든요. 그대도 이 성좌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아닌가요?]

“그게, 좋아하긴 합니다만······.”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말을 좋아합니다.]

[그나저나, 당신의 무례에 몹시 화가 난 분이 계세요. 알고 계시죠?]

“압니다.”

「<올림포스>의 법권 지대에서 범법을 저지른 이는, <올림포스>에서 가장 끔찍한 심판대에 올라서게 된다.」

본래였다면 나를 맞이하는 것은 페르세포네가 아니라 명계의 심판관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아마 나는 적당한 판결을 받고 ‘타르타로스’에 잠깐 수감 되거나 했겠지.
그럼에도 나는 심판관 대신 페르세포네와 만나게 되었다.
아마도, 페르세포네가 손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이것밖엔 방법이 없었습니다. <올림포스>에서 포탈이란 포탈은 다 막아놨더라고요.”

[······후후, 정말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군요.]

일대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소리를 내며 굳어버린 어둠.
숨을 쉬는 것이 점차 버거워졌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웠다.
누군가의 의지가, 그 자체만으로 이만한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흥미로운 표정을 짓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호승심을 갖습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격의 향연에 진심으로 감탄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채널 안에서 내 화면을 공유하고 있던 성좌들이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아마 <스타 스트림> 전체를 뒤지더라도, 지금 저 옥좌 위의 성좌보다 강력한 ‘격’을 지닌 이를 찾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소개하죠, 구원의 마왕.]

고개를 들자 어둠의 꼭대기에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풍부한 어둠의 중심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 존재를, 어떻게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마치 그 어둠 그 자체로 보이는 한 사내. 새하얀 피부의 중심에 박힌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내 존재를 꿰뚫는 것만 같았다.

[거대 설화, ‘명계(冥界)’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 중 하나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올림포스>의 신화에 늘 함께 언급되지만, 사실 <올림포스>에 속하지는 않는 존재.
‘멸살법’ 전체를 통틀어 가장 외롭고, 가장 고독한 성좌.
이번 <기간토 마키아>를 무사히 헤쳐 나가기 위해서, 그리고 ‘유상아’를 살리기 위해서······
나는, 반드시 저 성좌의 손을 빌려야만 했다.
숨을 들이켠 후,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명계의 왕, ‘부유한 밤의 아버지’시여.”

명계의 밤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오싹한 기류가 나를 압박해왔지만, 여기서 밀려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김독자 컴퍼니>의 대표로 이곳에 온 것이니까.

“저와 함께 진짜 <기간토 마키아>를 일으켜 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 Episode 60. 파멸의 맛 (5) > 끝

< Episode 61. 기간토마키아 (1) >





Episode 61. 기간토마키아


무섭도록 내려앉은 분위기. 하데스는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나는 초조함을 감추려 애썼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여기가 첫 번째 고비다.」

하데스가 입을 연 것은 점차 무거워지는 주변의 공기가 정점을 찍었을 무렵이었다.

[‘진짜 기간토마키아’라······. 너는 그 말에 담긴 무게를 알고 있는가?]

“압니다.”

거대 성운 <올림포스>가 주최하는 <기간토마키아>.
<타르타로스>에 갇혀 있는 하위 격 거신 대여섯 마리를 세상에 풀어 놓고, 그것을 사냥하며 오래된 승리감을 만끽하는 <스타 스트림>의 축제······.
하데스가 말했다.

[전쟁은 오래전에 끝났다. <티타노마키아>도, <기간토마키아>도 모두 신들이 승리했다.]

하데스의 말이 맞았다.
진짜 전쟁은, 이미 수천 년도 전에 모두 끝났다.

[그것은 이미 ‘정해진 역사’. 그것을 다시 불러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대는 왜 <기간토마키아>를 일으키려는 것이지?]

“······그건 오히려 제가 묻고 싶습니다. 어째서 ‘올림포스’의 성좌들은 가짜 <기간토마키아>를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것입니까?”

[······?]

“시나리오 속에 죽어갈 거신들을 소환하고, 죽이고, 그 오래된 전투를 엉성하게 재연하면서, 왜 그 시나리오에 <기간토마키아>라는 이름을 구태여 붙이고 있는 것일까요?”

쿠구구구구!

분노한 하데스의 ‘격’에 나도 모르게 무릎이 후들거렸다.
떨어져 있던 페르세포네가 당황하며 하데스와 내 쪽을 번갈아 보았다. 페르세포네가 입을 열려는 순간,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도움을 받으면 안 된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무릎 꿇지 않고 버텨야 한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최고 담화자들을 보호합니다.]

하데스의 「명계」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우리에게도 이야기는 있다.
우리의 힘으로, 직접 쌓아온 이야기가.
그 이야기의 힘으로, 나는 하데스에게 대항했다.

“실은 두렵기 때문이겠지요.”

거대 성운들은 무시무시하고 강력한 존재들이다.
그리고, <스타 스트림>에서 가장 겁쟁이들이기도 하다.

“또다시, 저 ‘거신’들이 들고 일어날까 두려운 것이겠지요. 그래서 이미 죽은 자들의 영혼을 끄집어내 짓밟고, 또 짓밟으며 그 추한 승리감을 되새기는 겁니다.”

‘진짜’를 사라지게 만드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무수한 ‘가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무가치하고 흔한 가짜.
처절했던 전투는 무수한 복제 속에 하나의 놀이가 되었다.
누구에게나 웃음거리가 되는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기간토마키아>는, 이미 오래전에 그 진정성을 잃어버렸다.

어떤 성좌도 진심으로 두려워하지 않는 ‘시나리오’가 되었다.
나는 하데스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부유한 밤의 아버지’시여. 언제까지 <타르타로스>의 거신들을 <올림포스>의 장난감으로 내버려 두실 겁니까?”

<올림포스>에 속하지 않으면서 <올림포스>의 3대 주신에 꼽히는 존재.
나는 그에 관한 ‘멸살법’의 설정을 떠올렸다.

「하데스는 수많은 거신들을 <기간토마키아>에 공급해왔지만, 단 한 번도 그 시나리오에 참가한 적은 없었다.」

이 늙은 명계의 왕은, 자신의 감옥에 갇힌 거신들의 고통을 오랫동안 지켜 보아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하데스는 죄수의 슬픔을 알고, 그들의 고통을 이해했다. 마치, 죄수에게 교화된 교도관처럼.」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 타르타로스의 지하에서 거신병(巨神兵)을 준비하시는 걸 보았습니다. 모두 이때를 예비하신 게 아닙니까?”

[······과한 추측이다.]

올림포스의 12신좌들에게, 하데스는 ‘거신병’의 존재를 이렇게 설명했을 것이다. 혹시나, 또다시 거신들이 전쟁을 일으킬 것을 대비해 만드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하데스의 진짜 생각을 알고 있다.

“12신좌들을 증오하신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

“말이 3대 주신이지, 그들에게 당신은 그저 골칫덩이를 떠맡아주는 ‘교도관’일 뿐이니까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교도관은, 어쩌면 죄수와 다를 바가 없다.
하데스는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기간토마키아>는 지독한 전쟁이다.]

“알고 있습니다.”

[‘진짜 기간토마키아’가 시작되면 시나리오의 장난감이 되는 것은 ‘거신’만이 아니다. 그곳의 모두가 ‘거대 설화’의 일부가 된다.]

하데스의 먼 곳의 멸망을 바라본 듯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도깨비들이 날뛰고, <스타 스트림>에는 격변이 일어날 것이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성운’들의 역학 관계는 무너지겠지.]

“그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 끔찍한 고통을 세상에 전시해서, 그대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여태껏 내가 쌓아온 모든 설화들이, 나를 대신해 대답하고 있었다.
······거기에, 처음 보는 설화도 하나 있었다.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모든 이야기는, 결국 마땅한 결말을 향해 흘러가게 마련이다.

[······작은 인간이 아주 놀라운 꿈을 꾸는구나.]

“작을수록 꿈은 크게 가져야죠.”

[‘무대화’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데스가 무슨 말을 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거신들은 이길 수 없다. 한때는 신들의 ‘화신’이었던 고대의 영웅들이 다시 나타날 테니까. 그들이 거신들과 부딪치는 순간 ‘무대화’는 시작되고, 역사의 비극은 반복될 것이다.]

“영웅이라면 이쪽에도 있습니다. 무대는 깨부수라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나와 시선을 마주친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데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남아 있다.]

“무대에 참가할 주요 배역들 말씀이겠지요.”

나는 궁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 오래된 감옥의 지하에, 늙은 <기간토마키아>의 주역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기간토마키아’를 원할 거라 생각하는가?]

“시작은 ‘기간토마키아’지만 끝은 다를 겁니다.”

나는 가만히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다면, 원하게 만들어야죠.”


*


김독자가 사라진 뒤, 한수영은 일행들을 달래기에 여념이 없었다.

“시발, 이것들은 내가 무슨 보모인줄 아나.”

이길영과 신유승은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고, 이현성은 그런 아이들의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몸을 웅크린 채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한수영은 한숨을 내쉬며 그런 일행들을 다그쳤다.

“야! 다들 정신 차려. 이번엔 유중혁도 같이 갔잖아.”

물론, 통하지 않았다.

“독자 형이······ 독자 형이 또······.”
“역시 그때 다시 가뒀어야 했는데······.”

이지혜와 이설화가 아이들을 달래는 동안, 한수영은 골머리를 싸맨 채 지금 당면한 문제들을 생각했다.
김독자와 유중혁이 끌려 갔으니, 이제 남은 일주일 동안 <기간토마키아>의 준비는 그녀가 도맡아야 했다.

“진짜 <한수영 코퍼레이션>을 차려야······.”

[‘정체불명의 벽’을 통해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장하영의 메시지였다.

―얍. 한수영, 잘 있어?

간만의 연락이었기 때문에, 한수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슬슬 초월좌 일행들도 돌아올 때가 됐다.

―너희 지금 어디 있어?
―이제 슬슬 지구로 돌아가려는 참이었는데.
―빨리 안 와?

마침 털어놓을 곳도 없었기에, 한수영은 ‘정체불명의 벽’을 통해 쌓인 울분을 풀기 시작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고, 일행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평소 자기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한수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이 ‘벽’을 통해 대화를 할 때는 말이 많아지곤 했다. 꼭 상담이라도 받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김독자가 돌아왔었는데 또 없어졌다 이거지?

순간 창이 넓어지며, ‘벽’의 메시지창은 화면의 형태로 바뀌었다.
화면 너머로 장하영과 왕왕 짖는 파천신군이 보였다.

―야! 그걸 왜 이제 말해 줘? 김독자는 대체 언제 돌아왔던 건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다음 순간, 화면에 강한 노이즈가 일더니 대화의 주체가 바뀌었다.
처음에는 화면에 벌레가 묻은 건가 싶어 화면을 닦았는데, 잘 보니 그 벌레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 제자 놈이 돌아왔다 했느냐?

활발하게 짖는 파천신군의 머리 위에 앉은 작은 사내가, 지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장 그놈을 비춰라. 본좌는 백청문의 문주로서 제일 먼저 스승을 찾지 않은 녀석에겐 엄벌을 가할 것을······!

다음 순간, 누군가가 화면에서 벌레를 끌어냈다. 이어서 화면에는 작은 산이 나타났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것은 산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코였다.

―허여멀건 녀석이 어디로 갔다고?

······아무래도 이건 파천검성인 것 같았다.
한수영은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을 최대한 요약해서 설명했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파천검성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답했다.

―<올림포스>의 법권 지대에서 끌려갔다면······ <타르타로스>에 갇혔겠군. 그럼 별로 걱정할 필요 없다.

너무 태연한 그 목소리에, 한수영은 조금 놀랐다.
그러나 그녀가 무슨 말을 잇기도 전에, 거대한 코가 어딘가를 바라보며 그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분들은 잘 계실지 모르겠구나.


*


나와 유중혁은 곧장 타르타로스의 1층에 내던져졌다.
장난스러운 얼굴의 페르세포네가 내 머리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구원의 마왕, 거신들을 회유하는 것은 쉽지 않을 거예요.]

“······어쩐지 즐거워 보이시네요.”

[<올림포스>에 이만한 사건이 벌어지는 건 간만이니까요. 남편 몰래 좀 도와줄 수도 있겠지만, 그럼 재미없겠죠?]

“아니, 도와주시면 저희야 좋은―”

[이야기의 가호를 빌어요, 구원의 마왕.]

안 도와줄 건 예상하고 있었다.
<명계>는, 공식적으로는 이 ‘시나리오’에 참전해서는 안 된다.

만약 <명계>가 <기간토마키아>에 참전을 선포한다면, 이 전쟁의 규모와 개연성 제한치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러니 이 전쟁은, 어디까지나 <명계>의 암묵적인 승인하에 진행되는 ‘반란’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타르타로스>의 1층을 가로질렀다. 여전히 1층 곳곳에는 거신병을 제작 중인 죄수들이 힘을 쏟고 있었다. 개중 몇몇이 우리를 흘끗거렸지만, 크게 관심을 가지는 이들은 없었다. 아마 새로 온 죄수들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거신들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나도 몰라. 지금 해보러 가잖아.”

<타르타로스>의 지하 감옥에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녀석들이 갇혀 있다. 거신들뿐만 아니라, <올림포스>와 대적하여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성좌들이나 초월좌들까지. 개중에는 지금의 나와 유중혁의 힘으로는 절대로 상대할 수 없을 괴물들도 있었다.

“힘들 것이다. 일주일 안이라면 더욱.”
“어떻게든 되겠지. ······너도 여기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지 않아?”

유중혁이 어떻게 알았냐는 듯 나를 노려보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전 회차의 유중혁에게 ‘거신화’를 가르쳤던 존재가 바로 이곳에 있다.

“나도 만나야 할 사람이 하나 있어. 동료로 영입해야 하는 놈이 있거든.”
“동료?”
“원래의 나라면 절대 동료로 삼지 않을 놈이지만, 살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어.”

우리는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멈출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뭔가가, 우리 앞을 막고 있었으니까.

“······설마 동료라는 게 저 개를 말하는 것인가?”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문. 그곳을 막은 거대한 파수견이 있었다. 머리 셋 달린 괴물개, 켈베로스.
나는 그 개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정확히는, 그 개의 머리통을 열심히 쓰다듬고 있는 거대한 거신병을 보았다. 켈베로스의 머리 중 하나가 거신병의 팔뚝을 왕왕 물고 있었다.

[하하핫! 누렁아! 물어!]

깨갱······!

[그 정도론 별로 아프지도 않다고!]

거무튀튀한 금속 재질의 장갑.
원작 회차에서는 하데스 본인이 사용했던 설화병기.

“어이.”

내가 손을 흔들자, 거신병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깜짝 놀란 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희열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지하철 메뚜기남? 하하핫! 드디어 뒈졌구나? 그치?]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기간토마키아>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 프라모델 오타쿠의 도움이 필요하다.

“널 데리러 왔다, 김남운.”





< Episode 61. 기간토마키아 (1) > 끝

< Episode 61. 기간토마키아 (2) >





[······나를 데리러 와? 왜?]

“네가 필요해.”

김남운은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뉘앙스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막상 말하고 보니 나도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하긴, 나도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으니까.
나는 1863회차의 김남운을 떠올렸다. 이지혜를 좋아하고, 일행들과 함께 어영부영 어울리던 하얀 머리의 사내. 철이 없고, 주변을 배려할 줄 모르고, 자신의 자아에 깊이 심취해 있던 녀석.

「김남운은 악인이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그곳에서 김남운의 가능성을 보았지만, 그렇다고 녀석에 대한 선입견이 완전히 뒤집어진 것은 아니었다.
내가 김남운을 기용하기로 결심한 것은, 1863회차에서 한수영과의 대화 때문이었다.

―그렇게 물러 터진 정신으로는 절대로 95번 시나리오까지 갈 수 없을 거야.

나와 한수영과 유중혁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한 가지 동의하는 사실이 있다면, 그건 모든 이야기에는 효율을 추구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선택에 흥미를 갖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화신 ‘김남운’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우리엘의 메시지가 안 보이는 걸 보니, 아마 정희원을 가르치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내가 여기 온 걸 알면 정희원은 또 노발대발하겠지. 에덴에 두고 와서 다행이다.
김남운이 입을 열었다.

[싫어. 내가 왜 널 도와줘야 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싫으면 말든가. 가자 유중혁.”

나는 유중혁과 함께 켈베로스를 향해 다가갔다.

[뭐야! 어딜 가려고?]

“아래층.”

[푸하핫, 농담이지? 지금 우리 누렁이가 눈을 부릅뜨고 널 보고 있는데······!]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반쯤 졸고 있던 켈베로스가 우리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유중혁이 [파천검도]를 발동했다.

꽈아아아앙!

예전이었다면 지하 1층의 켈베로스를 상대하는 것도 버거웠겠지. 하지만 지금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좀 살살 하지.”
“여기서 낭비할 시간 따윈 없다.”

일격에 고꾸라진 켈베로스가 혀를 빼물고 누워버렸다. 폭음에 놀란 죄수들이 소리를 질러댔고, 곳곳에서 경보가 울려댔다.
보통이라면 지금쯤 심판관들이 달려왔겠지만, 하데스와의 암묵적 약속도 있고 하니 당분간은 안전할 것이다.
우리는 쓰러진 켈베로스를 지나쳐 2층으로 내려갔다.

[미친······ 미친놈들아!]

당황한 김남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중혁이 나를 흘끗 보며 물었다.

―······두고 갈 건가? 저 거신병은 유용하다.
―지켜보기나 해.

우리는 곧장 지하 2층으로 가는 원형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원형 계단의 아래쪽으로 펼쳐진 낭떠러지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타르타로스의 깊이는 모루를 던졌을 때 아흐레 동안이나 떨어질 정도로 아득했다.

[잠깐만, 같이 가!]

김남운이 허겁지겁 우리 뒤를 쫓아왔다. 거신병의 몸집도 어느새 2미터 남짓의 크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플루토는 사용자의 편의에 맞게 크기 조절이 가능한 거신병이었다.
나는 놀리듯 물었다.

“싫다면서 왜 따라오냐?”

[그게······ 조금 심심해서 말이지.]

벙긋벙긋 웃는 입이, 도저히 감정을 숨길 수 없는 모양새였다.

[근데 뭐하러 가는 길이야? 어디까지 가는 건데? 응?]

“거신들 만나러 갈 거야.”

[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김남운이 소리쳤다.

[크핫······ 으하하하핫! 이야, 지하철 메뚜기남! 그때 알아보긴 했지만, 진짜 미친놈이구나. 거신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

물론 안다.

[너 같은 건 그 ■■들 만나면 ■■에 구멍이 뚫려서 당장 ■■······.]

[죄수 필터링이 발동하였습니다!]
[타르타로스의 올바른 언어 사용 정착을 위해 해당 내용은 필터링되었습니다.]
[죄수 ‘김남운’에게 벌점 1점이 부과됩니다.]

[이런 시■!]

[죄수 ‘김남운’에게 벌점 2점이 부과됩니다.]

김남운의 욕설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도 거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거신(巨神).
<올림포스>의 초창기, 금(金)의 시대를 지배했던 종족.

쿠우우우우우우―!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는 아찔한 포효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멎었다. 저 까마득한 아래에서, 벌써 우리의 존재를 눈치챈 거신들이 반응하고 있었다. 포효에 담긴 ‘격’의 일부만으로도 오싹 소름이 끼쳤다.

[미쳤다. 미쳤어······.]

나는 김남운의 말을 무시하고 비유를 불러냈다. 그러자 품속에서 있던 비유가 꾸물거리며 톡 튀어나왔다.

[바앗?]

“채널 통제 잘하고 있지?”

[바앗!]

“<명계>의 방송은 모두 오프 더 레코드니까, 정보 발설 금지 서약을 한 성좌들만 입장시켜 줘.”

바아앗, 하고 고개를 끄덕인 비유가 채널 조작을 시작했다. 몇몇 성좌들의 불만이 일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하는 것이 옳았다. 지금부터의 일은 외부에 적게 노출될 수록 좋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 성좌들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투덜거리며 서약에 동의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못마땅한 듯 입맛을 다시며 서약에 동의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자기는 이미 서약했다고 말합니다.]

쏟아지는 메시지를 보며 김남운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채널이 이런 거였구나······.]

하긴, ‘배후 선택’을 시작하기도 전에 죽어 나자빠진 김남운은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가 신기하기도 할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김남운은 계속해서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런데 명왕 아저씨가 용케도 여길 내려보내 줬네? 그 아저씨 엄청 꼬장꼬장한데.]

“······시끄럽군. 한 번만 더 입을 열면 베어버리겠다.”

[······뭐야, 싸움 좀 하나 봐? 한 판 붙어 볼래?]

김남운을 노려보는 유중혁의 눈빛이 복잡했다.
유중혁은 이미 김남운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지난 회차에서 김남운은 유중혁의 일행이었으니까.

“유중혁. 여기서 힘 낭비할 시간 없다. 알지?”

검을 집어넣는 유중혁을 보며 김남운이 입맛을 다셨다.
씩씩 흥분한 숨을 몰아쉬는 모양새가, 꼭 어린아이 같았다.
오랫동안 관심을 받지 못해, 혼자가 된 어린아이.
왜 ‘김남운’을 기용했냐는 내 질문에, 1863회차의 한수영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처음부터 ‘나쁜 인간’으로 태어나는 인물은 없어. 전부 작가가 그렇게 설정한 것뿐이야. 나쁜 인간이 될 수밖에 없도록 서사를 준 거라고. 난 그게 맘에 들지 않았어.

나도 한수영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이 세계의 김남운은 그 ‘첫 단추’를 너무 잘못 끼웠다.
이 녀석은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선동해 최악의 범죄를 꾸몄으니까.

[두근두근하구만. 이런 기분은 엄마 아빠가 동시에 날 버린 이후로 처음이야.]

“······그건 뭔 기분이냐?”

[새로운 모험이 날 기다리는 기분이지.]

분명, 김남운은 만들어졌다.
나는 ‘멸살법’ 작가를 원망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때 김남운을 제대로 말리지 못한 나를 원망해야 하는 걸까.
스마트폰을 열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현재 ‘4차 수정본’의 업데이트가 진행 중입니다.]

······슬슬 업데이트가 될 줄은 알았다. 그간 그렇게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조용한 게 이상하다 했다.
나는 내려가는 동안 ‘멸살법’ 파일을 열어 필요한 부분들을 읽었다.
역시 마음이 불안해질 때는 ‘멸살법’을 읽는 게 최고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내가 살아가는 3회차는, 이제 원작의 어떤 회차도 닮지 않게 되었다.」

굳이 닮은 부분을 찾으려면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멸살법’의 원작에서 <명계>를 찾는 장면은 많았다.

47회차, 211회차, 397회차······ 정말 무수히 많다.

하지만 그 어떤 회차에서도, ‘지금 이 시점’에 <명계>에 온 적은 없었다.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정보들을 취합해야 한다.」
「거신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기간토마키아>는 이길 수 없다.」

‘멸살법’의 페이지 곳곳에 <올림포스>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바다를 갈라버리고.
초월좌들과 성좌들을 짓밟고.
행성마저 무참히 박살 내는 무지막지한 올림포스의 12신좌들.

이곳에서 나가면, 나는 녀석들을 정면으로 상대해야 한다.

수많은 정보들이 머릿속을 스쳐갔고, 이용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들이 머릿속에서 가려졌다.

“김독자.”
“······왜?”

유중혁은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뭐야 이 자식은. 갑자기 뜬금없이.
나는 곧바로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했고, 곧 유중혁의 머릿속이 훤히 들려왔다.

「자신이 없어 보이는군.」

어쩐지 정곡을 찔린 느낌이라 머쓱해졌다.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타입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부러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명계>에서 얻어야 할 건 두 가지야. 하나는 ‘거신갑(巨神鉀)’, 그리고 다른 하나는 ‘거신들의 맹세’.”
“······어느 쪽도 쉽진 않을 거다.”
“그렇겠지.”
“하지만, 쉽지 않은 쪽이 더 보상이 좋다.”

유중혁의 말을 들으며 나는 피식 웃었다.

크르르르릉······!

얼마 지나지 않아, 명계 2층의 출입구가 나타났다.
2층에도 예상했던 대로 켈베로스가 문을 지키고 있었다. 1층에 있던 녀석보다 덩치가 큰 놈이었다.
유중혁이 검을 뽑아 드는 순간, 김남운이 외쳤다.

[잠깐만! 누렁이 때리지 마!]

“······비켜라. 시간 없으니까.”

켈베로스를 쓰다듬던 김남운이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심판관들이 쓰는 궤도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을 알아.]

궤도 엘리베이터. 분명, ‘타르타로스’에는 그런 기물이 있다.
오직 심판관들만이 사용하는 숨겨진 운송 기구.
하지만 ‘멸살법’에도 엘리베이터의 정확한 위치는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고 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도 그걸로 몰래 내려 가봤으니까.]

“몇 층까지?”

[77층.]

나는 깜짝 놀랐다.
77층이면 최저층으로 직행하는 관문이었다.

[따라와. 이쪽이니까.]

자신만만하게 걸어가는 김남운을 보며, 나와 유중혁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의외로 이 녀석이 도움이 될 때도 있군.
······역시 살려둘 걸 그랬나?
아니지, 이번에는 죽어서 도움이 된 것 같으니 역시 죽이길 잘 한 건가.


*


궤도 엘리베이터는 정말 빨랐다. 지하 2층, 3층, 4층······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하강했고, 도중 우리는 끔찍한 <타르타로스>의 정경을 볼 수 있었다. 서로를 공격하는 죄수들과, 끔찍한 유황불 속의 악마들이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신입이다!”
“어이! 뭘 똑바로 쳐다보는 거야? 눈 깔아!”

킬킬 웃는 죄수들 중에는 초월좌들의 모습도 보였다. 나처럼 <올림포스>의 법권 지대에서 범법을 저질렀거나, 12신좌에게 반항하다가 붙잡혀 온 녀석들. 저들 중 일부는 미식협의 식탁에 스테이크가 되어 올라갈 것이다.

끼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정지하고, 우리는 77층에 내렸다.
77층은 죄수가 없는 층이었다. 감히 너비를 잴 수조차 없는, 광활한 공동(空洞)을 연상시키는 공간. 그 공간의 중심에는 큼지막한 문이 있었다.

[78층부턴 누렁이들이 없어. 있어도 소용이 없거든.]

겨우 켈베로스 정도로는 거신을 막을 수 없다.
캄페(Campe) 정도 되는 대괴수라면 모를까.
호기롭던 김남운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나도 저 너머로 가본 적은 없어. 전에 손을 살짝 넣어본 적은 있는데, 그때 이 꼴이 됐지.]

나는 거신병의 어깨에 남은 상흔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거의 아물었지만, 팔이 뜯겨져 나갈 정도의 타격을 입었던 모양이었다.
비록 완성체가 아니라곤 해도, 거신병 플루토는 탑승자 없이도 설화급 성좌에 준하는 힘을 낼 수 있는 무시무시한 병기. 그런 병기에 저 정도의 타격을 입히는 존재들이 이 너머에 있는 것이다.

나는 문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높이만 30미터를 훌쩍 넘는 문에는, 사람의 얼굴과 비슷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유중혁이 말했다.

“들어가려면 제물이 있어야 한다.”

유중혁의 말에 김남운이 흠칫 놀랐다.

[뭐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우리는 김남운을 무시하고 말했다.

“알아. 준비했어.”
“너무 강력한 제물을 내주면 ‘태고의 거신’들을 부르게 될 거다.”
“어차피 너도 언젠가 만나야 하잖아.”
“······지금은 아니다. 지금 만나면 우리는 죽는다.”

오만한 유중혁의 표정에도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타르타로스>의 거신에는 종류가 있다.
하나는 <티타노마키아>를 일으켰던 오래된 <올림포스>의 지배자, ‘태고의 거신’ 티탄(Titans)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간토마키아>를 일으켰던 거신 기간테스(Gigantes)들이었다.
굳이 급을 나누자면 신화급 성좌와 설화급 성좌 정도의 차이라고 해둘까.
내가 불러야 할 이들은 ‘기간테스’ 쪽이었다.

“걱정 마. 성유물 중에서도 상위급의 아이템을 내주지 않는 이상, 티탄급의 거신이 나올 일은······.”

바닥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은 그 순간이었다.

[<타르타로스>의 구성이 불안전해집니다!]

쩌저저저적!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챈 순간,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거대한 손이 유중혁을 잡아챘다.

“유중혁!”

내가 유중혁을 향해 손을 뻗는 찰나, 문 안쪽에서 두 개의 손이 더 튀어나왔다.
나는 황급히 [전인화]를 사용해서 손을 피했지만, 김남운은 그러지 못했다.

[우와아아아악! 살려줘!]

그리고 다음 순간, 열 개가 넘는 손이 한꺼번에 나를 덮었다. 손들이 만들어 낸 폐쇄 공간 속에서 내 몸이 엉망으로 나뒹굴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허공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대롱대롱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나를 잡은 거대한 팔이 보였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츠츠츠츳, 튀는 스파크의 불빛 속에, 숨을 쉬기가 버거울 정도의 ‘격’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나를 터트려버릴 수 있을 정도의 존재.
거대하고 둔탁한 손가락 같은 것이 내 엉덩이를 팡팡 튕기고 있었다.

[귀여운 날파리가 왔구나.]

‘파천검성’을 닮은 거대한 눈동자가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 Episode 61. 기간토마키아 (2) > 끝

< Episode 61. 기간토마키아 (3) >





[작은 아이야, 너는 누구냐?]

거신에게서 뻗어 나온 수많은 팔들 중 세 개가, 정확히 나와 유중혁 그리고 김남운을 쥐고 있었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나는 현실감 없는 눈으로 거신을 마주보았다.

······이렇게 쉽게 문이 열렸다고?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지하 77층 아래의 거신들을 봉인한 문은, 본래 안쪽에서는 열 수 없게 되어 있다. 47회차에서도, 211회차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미리 제물을 준비해 온 것인데······.

[큼······ 개연성이 곤란하구만. 요즘 들어 심해지는군.]

츠츠츠츳, 소리와 함께 거신의 전신으로 개연성의 스파크가 번졌다.
거신이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뽑아 문밖으로 내던졌다. 그러자 스파크는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어 거신의 손가락을 녹여 없애버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사그라지는 스파크······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고작 손가락 하나로 제물의 개연성을 대신했다고?
유중혁의 어떤 회차에서도 그런 일이 가능했던 적은 없었다.

고오오오오······.

거신의 전신에서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아우라. 격을 감추고 있지만, 그 깊이를 쉬이 헤아릴 수 없는 막대한 ‘격’이 거신의 내부에 잠들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 중 하나.
세월을 통해 쌓인 ‘신화’.
표면에 맴도는 세월을 가늠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려올 지경이었다.

이자는 티탄.
틀림없는 태고의 거신이었다.

거신의 몸피에서 약동하는 신화들은 많이 낡아 있었지만, 여전히 살아 있었다. 허나 내가 알고 있는 원작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유중혁이 만난 태고의 거신들은, 늘 쇠락 속에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모든 거신은 <티타노마키아>와 <기간토마키아>의 ‘거대 설화’에 의존해 살아간다. 그리고 그 신화의 영향력이 약해지거나, 전승의 왜곡이 심해질수록 그들의 힘 또한 약해진다.
때문에 <올림포스>의 상습적인 <기간토마키아> 이벤트로 인해, 그들의 거대 설화는 지금쯤 상당히 약화된 상태여야 했다.

[아이야, 대답하지 않을 셈이냐? 나는 인내심이 바다처럼 깊어 기다리는 것에는 자신이 있단다. 이미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더 기다리지 못할 이유도 없으니.]

하지만 눈앞의 거신의 목소리에는, 믿을 수 없는 활력이 남아 있었다.
문득 스쳐가는 가정이 있었다.

「어쩌면 <명계>에 너무 일찍 온 것은 아닐까?」

이번 <기간토마키아>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거신들의 쇠락이 아직 임계점을 넘지 않았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거신은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나 말고 다른 친구들도 그럴지는 모르겠구나. 너희처럼 맛있어 보이는 아이들이 들어온 것은 정말 간만이거든.]

김남운은 대답할 생각도 못하고 턱을 떨고 있었다.
그런 김남운이 귀엽다는 듯, 거신이 김남운의 뺨을 쓰다듬었다.

[죄업이 깊은 아이구나. 그런 아이일수록 뜯어 먹는 맛이 좋지. 스스로 거신병의 몸이 되다니······ 혹시 지난번에 뜯겼던 그 아이인가?]

<타르타로스>를 탈출하려다 지하로 추락한 죄수들은, 대개 거신들의 먹이가 된다.
덜덜 떠는 김남운은 인간이었다면 이미 거품이라도 물었을 듯한 모습이었다.
거신은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네게선 많은 냄새가 난다. 성좌, 천사, 마족, 인간······ 거기에 이계의 신격까지. 대체 어떻게 되먹은 설화인 게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때로는 말보다 확실한 대답이 있으니까.
설령 상대가 ‘태고의 거신’이라고 한들, 처음부터 주눅들어 있을 수는 없다.

[마왕의 ‘격’을 개방합니다!]

쿠구구구구!

거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자, 거신의 모습은 한결 명료하게 보였다.
거신의 크기는 내 상상 이상이었다.
거의 백 미터는 넘을 듯한 신장······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을 수준이었다.

[그 아이는 내가 먹겠다.]
[반을 찢도록 하자.]

곳곳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목소리.
나는 그에 경고하듯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먹이가 아닙니다.”
“우리는 협상을 하러 왔다.”

유중혁도 말을 보탰다.
초월좌의 격을 뿜어내는 유중혁도, 어느새 거신의 손아귀를 빠져나온 채였다.
그러나 아랑곳없는 거신의 답이 돌아왔다.

[그것은 너희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거신들의 멸망은 결국 저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나는 더 지체하지 않고 진언을 발동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위대한 ‘백수(百手)의 왕자들’, ‘헤카톤케이레스 삼형제’시여.]

내 말과 함께, 어둠 속에서 삼백 개의 눈동자들이 동시에 뜨여졌다. 그 눈동자들은, 단 ‘세 거신’의 것이었다.
세 거신은 동시에 말했다.

[재미있구나. 우리를 알면서도 이곳에 찾아왔다?]

오십 개의 머리와, 백 개의 팔을 가진 백수거신(百手巨神)들.
나는 이 티탄 거신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굳센 폭풍, 브리아레오스.
돌진하는 거암(巨巖), 코토스.
변화하는 수족(手足), 귀에스.

이들은 <티타노마키아>와 <기간토마키아>를 모두 겪은, 살아 있는 신화의 증인들이었다.
그들의 몸엔 <올림포스>의 온갖 설화들이 고스란히 누적되어 있었다.
만약 저들이 ‘책’이라면, 이 자리에 앉아 몇 달이고 몇십 년이고 읽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제4의 벽’이 탐욕스레 입맛을 다십니다.]

아마도, 이것이 신화(神話)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 필멸자들을 매개로 전승되어 마침내 하나의 세계관을 이룬 것들.

세 거신들의 외양은 모두 같았으나, 눈동자의 색이 달랐다.
브리아레오스는 푸른 색 눈동자, 코토스는 흙색 눈동자, 그리고 귀에스는 초록색 눈동자.
나는 그 수백 개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들을, 이곳의 모든 거신족을 <타르타로스>에서 해방시키러 왔습니다.]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진언이 메아리치며 퍼져 나갔다. 아마도, 헤카톤케이레스들 뿐만 아니라 <타르타로스> 전체의 거신들이 들었을 법한 크기였다.
어둠 속에서 몇몇 거신들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왜냐하면 눈앞의 티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말을 들은 헤카톤케이레스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코토스는 심드렁한 모습이었고, 귀에스는 지겨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브리아레오스만은 달랐다.

[재미있는 농담이로군. 너를 더 먹고 싶어졌다.]

살 떨리는 협박에도 나는 굴하지 않고 웃었다.

“보시다시피 전 너무 작아서 맛을 느낄 새도 없을 텐데요. 저보다는 저 녀석이 더 먹을 게 많을 겁니다.”

나는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유중혁의 근육이 크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내 쩌저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유중혁의 골격이 커지기 시작했다. 2미터, 3미터, 4미터······ 급격하게 체고가 늘어난 유중혁이, [흑천마도]를 쥔 채 브리아레오스를 바라보았다.
우리를 보던 백 개의 눈 중 절반이 의심의 빛을 띠었다.

[······거신화? 어떻게 그 스킬을 가지고 있는 거지?]

“당신에게 배웠다, 브리아레오스.”

[흑천마도]에 하늘을 깨부수는 [파천검도]의 힘이 어른거렸다.
신화에 대항하는 작은 영웅처럼, 유중혁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정확히는, 지난 ‘회차’의 당신에게.”


*


엄밀히 따지면, 유중혁의 ‘스승’은 파천검성 하나뿐이다. 녀석이 가진 힘의 원천은 회귀로 반복 숙련된 [파천검도]가 핵심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유중혁이 하나의 기술만을 익힌 것은 아니었다.
무수한 회귀를 거치며, 유중혁은 다양한 존재에게서 다양한 기술을 습득했다.

스킬 [거신화]가 그랬고.
성흔 [전승]이 그러했다.

특히 [거신화]를 가르쳐 준 브리아레오스는 유중혁과 약간의 인연이 있었다. 파천검성을 닮은 저 푸른 색 눈동자가 그 증거였다.

[얼마 전 어린 거신족 하나가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지. 그때, 그 아이의 ‘운명’을 각성시켜주는 대가로 약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뭔가 싶었는데, 너희에 관한 이야기였군.]

<제1 무림>에서 나는 파천검성의 도움을 얻는 대가로 그녀를 <타르타로스>에 보내준 적이 있었다. 아마 파천검성이 그때 우리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그 고집불통 초월좌가 무슨 말을 늘어놓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외로 이야기가 잘 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좌들이 말하는 특이점이군.]
[거대한 수레를 움직이는 존재······.]
[정말로 시나리오가 ■■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인가······.]

조금 전까지 우리를 먹어 치울 듯 굴던 거신들의 목소리에 알 수 없는 피로감과 해방감이 묻어났다. 아니, 해방감이라기보다는 거의 체념조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너희에게 흥미가 생겼다. 그래, 우리를 어떻게 해방시켜줄 생각이냐?]

“<기간토마키아>를 일으킬 겁니다.”

나는 곧장 본론을 말했다.
어차피 티탄들과 만나버렸고, 일을 물릴 수도 없다면 저지르고 보는 편이 나았다.
헤카톤케이레스 삼형제는 <티타노마키아>와 <기간토마키아>의 주역들. 이들만 있다면, <기간토마키아>를 내 생각대로 뒤엎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이쪽은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당신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거절한다.]

너무나 단호한 즉답에, 나는 조금 머뭇거렸다.

“어째서입니까?”

[어린아이야. 너는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습게도,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어째서 그들이 제안을 거절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헤카톤케이레스 삼형제와 거신들은 이곳 <타르타로스>에서 아주 오랫동안 수감되어 있었다. 누구보다 이 감옥을 증오하는 자들이었고, 12신좌에 대한 깊은 원망을 품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들은 해방을 거부하는 것일까.

「김 독자 머리 나 쁘 다」

나는 빠르게 ‘멸살법’의 내용을 떠올려 보았지만, 마땅한 혜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설명 덩어리 ‘멸살법’에도 거신들에 대한 정보는 자세히 소개되지 않는다. 거신들과의 접점이 늘어나는 후반부로 갈수록, 유중혁은 입을 떠벌리기보다는 칼을 먼저 꺼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가만있어 인마. 여기서 칼 꺼내면 진짜 우리 다 망해.

나는 칼자루를 놓는 유중혁을 일별한 후 다시 거신들을 돌아보았다. 방법을 떠올려야 한다. 이 수천, 수만 년 묵은 덩어리들을 설득할 방법을.
그런데 뜻밖에도, 브리아레오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린 성좌야, 너는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기간토마키아>가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순간, 거신들의 표정에서 활자들이 일렁였다. 거신들의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된 감정들이 실린 문장들.

[‘시나리오의 해석자’의 특성 효과가 발동합니다!]
[설화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나는 그 문장을 통해 거신들의 기억을 엿볼 수 있었다.
오래전 있었던 <티타노마키아>와 <기간토마키아>의 역사들.

[모든 시나리오의 결과는 정해져 있다. 우리는 그 시나리오의 단역일 뿐이야. 이미 우리는 네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기간토마키아>를 치러왔다.]

60번 시나리오, <기간토마키아>.

그 시나리오 속에서 거신들은 짓밟혔다.
전쟁에서 승리한 <올림포스>는 주기적으로 <기간토마키아>를 다시 열었다.
거신들은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그 전쟁에 끌려나갔다. 남루한 옷과 장비를 걸친 채, 무장한 수백의 성좌들과 화신들의 사냥감이 되었다.
피묻은 상흔들은 모두 거짓이 되고, 그들의 용맹이 조롱거리가 될 때까지.

[우리는 패배하고.]

그런 일이 열 번.

[패배했으며.]

백 번.

[또 패배했다.]

천 번도 넘게 반복되었다.

[그런데 너는 또다시 우리에게 그 전장에 서라고 말하는구나.]

마치, 유중혁의 회귀가 그러했던 것처럼.

[너희는 언제까지 과거의 망령들을 불러낼 것이냐? 대체 언제까지 죽은 신화의 껍데기를 뒤집고, 능욕할 것이냐?]

그렇기에, 이 거신들은 유중혁과는 다른 의미에서 ‘회귀자’들이었고.
마침내는 그 ‘회귀’에 지쳐버린 존재들이었다.

[아이야, 우리는 ‘해방’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다.]





< Episode 61. 기간토마키아 (3) > 끝

< Episode 61. 기간토마키아 (4) >





오랜 세월이 지나며, 거신들은 첫 번째 <기간토마키아>의 분노를 잊었다.
반복된 시나리오는 그들의 의지를 앗아갔고, 영광스러웠던 날들을 퇴색시켰다.
이제 60번 시나리오 <기간토마키아>는, 몇 명의 거신이 징집되어 벌어지는 성좌들의 축제일 뿐이었다.

[그만 돌아가거라.]

거신들은 세계에 저항하는 대신, 이 세계로부터 잊히길 택했다.
그들의 절망이 너무나 거대했기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럴 때 유상아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누군가를 설득하는 것은 나보다 그녀가 제격이다.

“신화 시대를 호령한 거신들이라더니······ 별거 아니었네.”

특유의 싸가지 없는 말투.
놀랍게도 김남운이 입을 열고 있었다.

“덩어리들, 너흰 아직 나처럼 죽은 것도 아니잖아.”

거신들이 발하는 무시무시한 ‘격’에도 불구하고, 작은 입이 잘도 나불대고 있었다. 묘하게 고조된 억양으로, 마치 지난 회한이라도 토해내듯 김남운이 소리쳤다.

“살아서, 아직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존재들이잖아. 그런데 벌써 포기하는 거야? 인간보다도 위대한 신격들이라며, 어마어마한 정신력과 힘을 가진 존재들이라며? ■발! 그런데 겨우 게임 몇 번 졌다고 징징대기는······!”

츠츠츠츠츳!

거신들의 주변으로 흉악한 기세가 일어났다.
나는 재빨리 김남운의 앞을 막아서며 말을 받았다.

“당신들은 아직 변할 수 있습니다. 이번 <기간토마키아>는, 지금껏 있었던 <기간토마키아>와는 완전히 다를 겁니다.”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

“‘번개의 신좌’에게 배신당했던 일을 벌써 잊었습니까? 그를 도와 <티타노마키아>를 승리로 이끌었음에도 <타르타로스>의 나락으로 떨어진 일을, 벌써 잊어버린 겁니까?”

유상아는 곁에 없지만, 나는 유상아가 말했던 방식을 기억하고 있었다.
세계사와 신화에 능통했던 유상아.
나는 그녀가 특유의 말발로 ‘흥무대왕’을 설득했던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기간토마키아>에서는 또 어땠습니까? 당신들이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습니다. 인간 영웅들의 도움만 없었더라면, 당신들이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단 말입니다. 정말 이대로, 영원히 패배한 신화로 기록될 셈입니까?”

[건방진 아이야. 너는 이해하지 못한······!]

“이해합니다. 당신들의 절망, 모두 이해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이었다. 나는 이들에 대해 알지 못하니까.
그러나 거짓말이 아니기도 했다.

“당신들과 같은 처지였지만, 당신들과는 달리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가진 이야기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신들보다 까마득한 세계에 맞서서, 수백 수천 번이나 절망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을 알고 있단 말입니다.”

유중혁과 김남운이 나를 바라보았다.
브리아레오스가 물었다.

[······누구의 이야기를 하는 거지?]

“제가 아는 영웅의 이야기입니다. 원하신다면 들려 드릴 수도 있습니다.”

내 말에, 브리아레오스가 웃었다.
뿌리 깊은 불신이 배인 조소였다.

[‘벽’의 뒤에 숨은 존재여.]

······벽의 뒤에 숨은 존재.
순간, 세계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최후의 벽의 파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너는 그 뒤에 숨어서 다른 모든 성좌들의 시선을 피하고 있겠지.]

사실이었다.

[그런 비겁자가 하는 말에 어떤 진정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너는 우리를 설득할 수 없다.]

우습게도, 나는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외면하고 있었던 사실을 지적받은 느낌이었다.

[‘제4의 벽’이 분개합니다!]
[‘제4의 벽’이 저런 녀석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뜻밖에도 나를 도운 것은 성좌들이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거신들의 무력함을 비난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굳센 폭풍’을 한심하게 생각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갑작스레 쏟아진 간접 메시지에 브리아레오스가 놀라움을 표했다.

[채널에 대단한 후원자들을 데리고 있군······ 시나리오의 망령들이여. 아직도 무슨 여한이 남았는가? 대체 무슨 이야기가 궁금하여 이 작은 아이를 쫓아다니는 것이지?]

허공에서 쏟아지는 간접 메시지들을 보며, 나는 잠시 고민했다.
결정은 길지 않았다.

“벽을 해제하겠습니다.”

[‘심연의 흑염룡’이 깜짝 놀라 당신을 바라봅니다!]
[‘은밀한 모략가’가 고요한 눈으로 당신을 관조합니다.]

“그러면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

「김 독자 그 건 안 된 다」

내 안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튀어 오르며, [제4의 벽]이 말했다.

「그 건 들 어 줄 수 없 어」

‘한 번만. 잠깐이라도 괜찮아.’

「그런 짓을 하 면 네 가 위 험 해진 다」

[제4의 벽]은 완강했다.

[‘제4의 벽’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사실, 나도 자신은 없었다.
만약 이 벽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내 정신이 온전히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절 대 로 안 된 다」

‘말 안 들으면 강제로 꺼버릴 거야.’

내 위협에, [제4의 벽]이 더욱 강하게 흔들렸다.
언제나 나를 지켜줬던 [제4의 벽].
녀석과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결국, 먼저 양보한 쪽은 [제4의 벽]이었다.

「전 부 는 안 돼······.」

‘그럼?’

「일 부 만」

내가 답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쩌저저저저적.

나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던 뭔가에 인위적인 균열이 일고 있었다.
머릿속이 혼탁해졌고, 시종일관 침착하던 마음이 급격하게 불안해졌다.

[‘제4의 벽’의 일부가 개방됩니다.]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되기 시작했다. 시야가 붉어지고 심장이 빨리 뛰었다. 사위가 어지러웠다.
내가 가진 설화들 중 일부가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전용 특성, ‘시나리오의 해석자’가 이야기를 통제합니다.]

1863회차에서, 내가 겪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떠돌고 있었다.
눈을 끔뻑이자 내게서 쏟아지는 활자들이 보였다.
그것은 내가 읽어온 ‘멸살법’의 이야기였다. 황홀하게 펼쳐지는 설화의 향연에, 일순간 나조차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곳에 유중혁이 있었다.
이제는 없는, 원작의 유중혁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회차들의 일부가 파편이 되어, 헤카톤케이레스 삼형제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나는 토악질을 시작했다.

「내가 녀석을 죽였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내가,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나는 끝까지 정신을 놓지 않았다.
내겐 이 이야기를 들려줄 의무가 있었고.
오직 나만이, 이 이야기의 전부를 기억하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는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몇 번이고 회귀해서, 반드시 네놈들을 모두 죽여버릴 것이다.”」

그곳에 <올림포스>와 대적하는 유중혁이 있었다.
거신들의 백 오십 개 눈동자가 일제히 커지고 있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죽일 것이다.”」

유중혁의 회차가 흘러가고 있었다.
유중혁은 싸웠다.

211회차에서, 처음으로 12신좌 하나를 죽였고.
325회차에서 둘을 죽였으며.
438회차에서 넷을 죽였다.

회차의 번호는 순식간에 네 자리를 돌파했다.

「“내가 말했지. 너희는 죽을 거라고.”」

그는 말했고. 검을 휘둘렀고. 말을 실천했다.
개중에는, 거신들이 패배했던 <기간토마키아> 시나리오도 있었다.
12신좌들의 목을 틀어쥔 유중혁이 웃고 있었다.

「“너희는 영원히 살아남지 못한다.”」

터져 나가는 신좌들의 머리를 보며, 거신들의 눈빛이 경악으로 변했다.
싸우고 또 싸우는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무려 1863번에 달하는 회귀 속에, 성좌들을 학살하는 유중혁.
유중혁이 신좌 하나를 죽일 때마다 거신들의 부르 쥔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거신들의 동공에, 오래전 잃어버린 뭔가가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결국,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는 것은 이야기뿐이다.

잊혔던 감수성을 깨우고.
낡아 스러지던 의지를 다시 불태우는 것.
어떤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그것은, 오직 이야기뿐이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합니다!]

이윽고 설화가 끊겼다.
힘이 빠져 자리에 주저앉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부축했다.
유중혁과 김남운이었다.
거신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거신들이, 나를 향해 묻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 눈동자에 비치는 열망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싶습니까?”

시나리오를 증오하면서도, 다음 시나리오를 궁금해하는 그 마음을.

[······알고 싶다.]

츠츠츠츠츳!

“그럼 직접 알아 내십시오.”

내 말에, 거신들의 눈빛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더이상 다음 이야기 따윈 궁금하지 않다고 말하던 그 부르튼 입술들이, 일제히 경련하고 있었다. 다음 말은 한참 뒤에 돌아왔다.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무슨 말인지 알았기에, 나는 자신있게 답했다.

“이길 수 있습니다.”

물경 삼백 개의 눈들이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눈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삼백 개였던 눈이 사백 개로, 다시 오백 개로. 스르르 걷힌 어둠 속에서, 무수한 기간테스들이 헤카톤케이레스 삼형제를 중심으로 부복해 있었다.

[거신들은 들어라.]

쿵, 하고 내리찍은 발에 신화의 발자국이 남았다.

[우리는······ <기간토마키아>에 참전할 것이다.]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지축.
<타르타로스> 전체가 거신들의 격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하나둘, 거신들이 발을 찍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기다렸다는 듯, 박자를 맞춰 진동하는 발소리.
거신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일대의 장관이 펼쳐졌다.

쿵. 쿵. 쿵. 쿵.

파멸을 향해 가는 발걸음. 어둠 속에서 파도처럼 솟아오르는 거신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간신히 한숨을 놓았다.

꽤 힘들었지만, 성공했다.

그때, 허공에서 페르세포네의 진언이 들려왔다.

[서두르는 게 좋을 거예요, 구원의 마왕. 이미 <올림포스>에서는 <기간토마키아>에 참전할 ‘거신’들을 뽑아갔거든요.]

“······거신들을 뽑아가다뇨?”

[모르셨군요. 이미 <기간토마키아>는 시작되었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을 텐데요.”

[명계에서는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거, 벌써 잊었나요?]

아차 싶었다.
바깥의 시간을 물어보려는 순간, 지나치는 거신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기간토마키아>엔 몇이나 잡혀갔지?]
[올해는 넷이었지.]

······넷이라고?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번 시나리오에 투입될 거신은 다섯일 텐데요.”

그러자 거신들이 나를 보며 대답했다.

[넷이다.]

나는 재빨리 스마트폰을 열어 ‘멸살법’을 확인했다.

「올해의 <기간토마키아>에는 다섯 명의 거신들이 참전했습니다.」

틀림없었다.
‘멸살법’에 따르면, 올해의 참전 거신은 다섯이다.
그런데 넷을 뽑아갔다고?

순간,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보자 유중혁도 얼굴이 심각해져 있었다.

“김독자.”

<스타 스트림>의 모든 거신은 <타르타로스>에 갇혀 있다.
딱 하나.
우리가 아는 그 ‘거신족’을 제외하면 말이다.





< Episode 61. 기간토마키아 (4) > 끝

< Episode 61. 기간토마키아 (5) >





“히야, 진짜 모처럼의 지구네······.”

포탈을 껑충 넘어온 장하영이 자신의 금발을 쓸어넘기며 한숨을 돌렸다.

탁 펼쳐진 광화문. 오랜 여정 끝에 돌아온 고향이었다.

“오랜만에 고향에 오니 좋으냐?”

장하영이 뒤를 돌아보자, 파천검성이 포탈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뒤이어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천신군이 쏙 빠져나왔다. 파천신군의 머리 위엔 역설의 백청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이 올라타 있었다.

모두 다른 차원으로 수련을 떠났던 초월좌 일행들이었다.

“별로 그렇지는······.”

“혹시 장하영 씨 되시오?”

낯선 목소리에 장하영의 말이 끊겼다.

돌아보자, 한 사내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저쪽도 한국인은 아니었다.

“그런데요.”

“그렇다면 뒤쪽의 거대하신 분은 설마 ‘파천검성’이시오?”

“그렇다.”

파천검성이 대답하자, 사내가 감탄하며 말했다.

“허, 역시 명불허전이로군. 기다렸소이다. 본인은 비천호리라는 무명소졸이오.”

“무림인이군. 무슨 용건이지?”

“김 소협이 여기서 그대들을 기다리라 했소.”

“김 소협? 그 허여멀건 녀석 말인가?”

“그 허여멀건 자가 김독자 소협을 가리키는 거라면, 맞소.”

“······김독자가 왜 우릴 기다리라 했지?”

“말을 전하라더군. ‘귀환자 연합이 곧 서울을 침공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거라던데.”

“······건방진 제자 놈. 왜 빨리 돌아오라고 닦달인가 했더니.”

키리오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귀환자 연합이 누구인지는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파천검성은, 그와 관련해 김독자와 유중혁에게 따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귀환자 연합’이라······ 다른 세계선에선 내가 녀석들의 합공을 받고 죽었다지.”

모든 귀환자들이 비천호리처럼 상생의 길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귀환자 연합’은, 폭력과 지배의 길을 택한 대표적인 집단이었다.

“그 세계선에선 수련을 게을리 한 모양이군, 파천검성.”

“상대는 천마와 혈마다. 얕볼 수는 없어.”

“누가 오든, 이번 세계선의 너는 죽지 않는다. 본좌가 함께 있으니.”

키리오스의 단언에 파천검성이 희미하게 웃었다.

“나도 죽을 생각은 없다. 여기서 죽게 되면 내 귀여운 제자 녀석의 엉덩이를 두들겨주지 못할 테니까.”

파천검성은 그 말을 하며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다른 세계선의 그녀가 어느 정도의 강함을 지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의 그녀 또한 하나의 경지를 넘었다는 것이다.

파천검성은 3년 전 있었던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과의 전투를 떠올렸다.

그 힘의 끝을 잴 수 없던 ‘이계의 신격’.

성좌조차 넘어선 재앙을 마주했던 날의 공포를, 파천검성은 단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제1 무림>을 지켜내며 ‘거대 설화’를 얻었고, <타르타로스>를 방문해 ‘거신’의 운명을 개방했다. 그럼에도 상대할 수 없었던 적.

파천검성의 지난 3년은, 오직 그 ‘이계의 신격’과의 재전(再戰)을 준비하기 위한 기나긴 수련의 시간이었다.

멀리서 낯선 기운이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뭔가가 온다.”

키리오스의 말과 함께, 장하영과 파천신군도 자리를 잡았다. 하필 이 타이밍이라면, 역시 ‘귀환자 연합’일 가능성이 높았다.

파천검성은 재빨리 명령을 내렸다.

“천마와 혈마는 나와 키리오스가 맡는다. 하영과 파천신군은 서울 지역의 민간인들을 최대한 보호하면서······.”

그리고 다음 순간.

츠츠츠츠츳!

파천검성의 몸이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화신 ‘남궁민영’에게 깃든 ‘거신의 운명’이 발현합니다!]

“······무슨?”

[시나리오 강제 전송이 시작됩니다!]

[‘신화의 낙인’에 의해 거절권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부님!”

깜짝 놀란 장하영이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파천검성의 육신은 빛살 속에 어딘가로 사라진 후였다. 그 침착한 키리오스조차, 이번만큼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하늘 건너편에서 암운(暗雲)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키리오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번엔 진짜 온다.”

‘귀환자 연합’의 군단이 서울을 향해 진격해오고 있었다.

귀환자들의 진군이 만들어 내는 어마어마한 격의 향연.

긴장한 비천호리가 슬금슬금 발을 빼며 중얼거렸다.

“······이거, 아무래도 위험하겠소이다.”


*


“유중혁, 잠깐만!”

“시간이 없다. 김독자, 설마 눈치 못 챈 건가?”

돌아보는 유중혁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다섯 번째 거신은, 분명 파천검성이다.”

“알고 있어.”

원작의 이 시점에, ‘파천검성’은 <기간토마키아>의 제물이 되지 않는다.

본래 그녀는 <타르타로스>에 방문해 자신의 혈육을 만나지도 않고, ‘거신’의 운명을 각성하지도 않으니까.

「나 때문이다.」

전개를 뒤틀었으니 한 번쯤은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스승이라 해도 당장 도우러 가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다. <기간토마키아>가 시작되었다는 말 못 들었나?”

채근하는 유중혁의 얼굴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위험해. 오히려 당분간은 안전한 상태야. 위험한 건 파천검성이 아니라 다른 쪽이라고.”

“무슨 헛소리냐? 만약 스승이 시나리오의 ‘거신’으로 지목되었다면······.”

말을 하던 유중혁이 뭔가를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

녀석도 깨달은 것이다.

<기간토마키아>에서, ‘거신 사냥’ 이벤트는 맨 마지막 순서로 지정되어 있다.

사냥 이벤트가 시작되기 전까지 ‘거신’은 시나리오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는다. 정말로 파천검성이 <기간토마키아>에 동원되었다면, 지금 그녀는 안전한 상태일 것이다.

오히려 지금 문제는, 파천검성이 사라진 지구였다.

“지금쯤 귀환전쟁(歸還戰爭)이 시작되었을 거야.”

우리가 45번 시나리오를 통과했다고 해서, 지구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곳에는 45번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있고, 지금쯤이면 차원을 넘어선 ‘귀환자 연합’의 진군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본래 파천검성을 비롯한 초월좌 일행은 그 ‘귀환자 연합’을 상대하기로 되어있었다.

유중혁이 침음하듯 말했다.

“······서울이 위험하군.”

물론 파천검성이 없더라도 지구의 전력은 막강했다.

장하영과 파천신군, 키리오스 스승님도 있었고, 비천호리를 비롯한 몇몇 귀환자들, 어머니와 ‘방랑자들’의 세력도 있었다. 북한 쪽에 있다는 공필두와 한명오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천마와 혈마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파천검성이나 키리오스 뿐이다.

잠시 고민하던 유중혁이 말했다.

“지구엔 내가 가지. 네놈은 <기간토마키아>에 참가해라.”

“괜찮겠어?”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아이템을 던져 주었다.

“이거 가져가.”

그것은 방금 브리아레오스에게 맹세의 증표로 받은 ‘거신갑’이었다.

중후반 시나리오로 들어가며, 유중혁이 사용하는 주력 방어구 중 하나.

유중혁은 말없이 거신갑을 받아쥐더니, 페르세포네의 도움을 받아 곧장 <타르타로스>를 탈출했다.

쿵. 쿵. 쿵. 쿵.

전쟁을 준비하는 거신들이 발구르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히든 시나리오 ― ‘신화 전복’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설화의 가능성이 발아합니다!]

저 의식이 끝나면, 진짜 <기간토마키아>가 시작되겠지.

거신들의 의식이 끝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것이다.

나는 거신들의 눈치를 보다가 페르세포네를 불렀다.

“여왕님, 저도 슬슬 나가볼까 싶은데요.”

[그대는 나갈 수 없어요.]

“예? 유중혁은 보내 주셨잖아요?”

[그는 ‘죄수’가 아니에요. 하지만 그대는······.]

나는 허공에 떠 있는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현재 당신은 ‘법권지대’에서의 범법 행위로 수감된 상태입니다.]

[잔여 감금 시간 : 4시간]

[규칙은 규칙이에요.]

지축을 울리는 거신들의 아우성.

<명계>의 시간 비율이 어떤지도 모르는 판국에, 여기서 순순히 4시간을 기다리면 내가 김독자가 아니다.


*


“저기, 우리 여기 놀러 온 거예요?”

이지혜는 멍한 얼굴로 섬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테마파크, <기간토마키아>에 입장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현재 ‘올림포스 12과업 체험기’가 진행 중입니다!]

북적이는 화신과 성좌들의 무리들이 분주히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거대 멧돼지 생포 체험>

<네메아의 사자 사냥 체험>

······.

토끼 머리띠를 쓴 신유승과 이길영이 꺅꺅거리며 주변을 뛰어다녔다.

“이런 곳은 처음 와 봐요!”

“저거 진짜 ‘헤라클레스’가 입었던 옷이에요?”

일행들이 60번 시나리오인 <기간토마키아>에 진입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여덟 시간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여덟 시간 동안, 일행들이 한 것이라고는 <올림포스>의 따분한 영상을 관람하거나, 허접한 4급 괴수종을 신화의 멧돼지라고 우기는 것을 보거나, 체고가 5미터도 안 되는 조그만 히드라가 우리에 갇혀 울부짖는 것을 구경한 것이 전부였다.

“여기 그냥 놀이공원이잖아······.”

멀리서 <황금 사과 농장> 이벤트에 참가하여 사과를 잔뜩 얻어 오는 이현성의 모습도 보였다.

아이들은 노는 데 정신이 팔렸고, 믿었던 군인은 저 모양이다.

이설화가 말했다.

“······60번 시나리오가 절대로 이런 식일 리 없어요. 정신 바짝 차려야 해요.”

그렇게 말하는 이설화의 머리엔 기념품으로 산 별모양 머리띠가 반짝이고 있었다.

이지혜가 질린 얼굴로 한수영을 채근했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 수영 언니,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한수영은 한가롭게 벤치에 앉아 사탕을 물고 있었다.

일행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테마파크의 곳곳을 쏘다니는 와중에도, 한수영은 날카로운 눈으로 시나리오의 진행 현황을 살피고 있었다.

[다음 ‘12과업 이벤트’에 참가하실 화신 및 성좌분들은······.]

특히 한수영이 제일 눈여겨보고 있는 것은 테마파크의 중심지에서 진언을 터뜨리는 한 성좌였다.

고대 그리스의 갑옷과 장신구를 걸친, 언뜻 보기엔 이벤트 도우미 정도로 보이는 한 사내.

‘발뒤꿈치에 두꺼운 덮개를 씌워놨네.’

<올림포스>에서 발뒤꿈치를 조심해야 할 영웅이라면, 하나밖에 없다.

트로이의 슬픔, ‘아킬레우스’.

녀석은 이벤트의 진행이 따분한지 연신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자아, 대충 구경들은 하신 것 같으니,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나른하던 녀석의 말투가, 처음으로 바뀌었다.

[<기간토마키아>는 오래전부터 우리 <올림포스>가 주최해 온 시나리오입니다. <스타 스트림>에서 가장 위대한 신화를 직접 체험하고, 그것을 몸소 느끼는 것.]

떠들썩하던 화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고 있었다.

[알다시피, 이 시나리오는 곧 중후반 시나리오에 진입하시게 될 화신 및 성좌 여러분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나리오를 통해 성운 <올림포스>의 12신좌에게 간택될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치 도깨비처럼 말하는 고대의 영웅을 보며, 한수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성운의 명망을 위해서라면 도깨비짓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건가.’

물론 저런 짓을 한다고 정말로 ‘도깨비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참가자들을 자극하기엔 저만한 퍼포먼스도 없었다.

[그뿐입니까? 여러분은 ‘고대 거신’의 사냥 이벤트를 통해 강력한 ‘거대 설화’의 지분도 얻을 수 있습니다!]

거대 설화의 지분이라는 말에, 몇몇 화신과 성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인자하게 웃은 아킬레우스가 말을 이었다.

[그럼, 슬슬 본격적인 게임에 돌입해 볼까요.]

아킬레우스의 말과 동시에, 테마파크의 중앙 홀이 열리기 시작했다.

봉인되어 있던 거대한 구의 덮개가 열리며, 허공에서 오색의 빛이 쏟아졌다.

[‘첫 번째 거신’을 소개합니다!]

빛살이 사라진 곳에 전설 속 거신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런데 왜일까, 거신의 모습은 생각보다 왜소했다.

아무리 봐도 거신의 키는 대략 삼 미터 정도밖에 안 되어 보였던 것이다.

[하하, 실망하시는 분들이 보이시는군요. 첫 번째 거신은 ‘혼혈종’이라 조금 작은 편입니다. 하지만 거신의 설화를 가진 것은 틀림없으니, 다들 실망하지 말고 사냥을 시작해주시기 바랍니다!]

한수영도, 일행들도 그 거신을 보고 있었다.

넋을 놓은 채 입을 벌리고 있던 이지혜가, 몇 번이나 눈을 비비더니 외쳤다.

“저 사람······!”

한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성도, 이길영도, 신유승도. 그곳에 있는 모두가 저 ‘거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거신’은, 언젠가 그들과 함께 싸운 적이 있는 동료였으니까.

부스스 눈을 뜨는 구릿빛의 거신족이, 일행을 마주 보았다.

[메인 시나리오 #60 ― ‘기간토마키아’가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사냥감이 결정되었습니다.]

[거신, ‘파천검성 남궁민영’을 사냥하시오.]

그들의 첫 사냥감은, 유중혁의 스승인 파천검성이었다.

[왜 다들 가만히 계시죠? 설마 겁을 먹으신 겁니까?]

시나리오가 시작되었음에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자, 아킬레우스가 두둥실 허공을 날았다.

[다들 <기간토마키아>가 처음이시라 무서우신 모양인데······ 별거 아닙니다. 제가 먼저 시범을 보여드리죠.]

아킬레우스의 손에 성유물인 [물푸레나무 창]이 쥐어져 있었다. 트로이 전쟁에서 무수한 무장들을 꿰어 죽인 전설의 창.

화신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올림포스의 대영웅.

아무리 파천검성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쉽게 저항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한수영은 자신의 붕대를 풀었다.

시나리오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파천검성을 잃을 수는 없다.

[보십시오. 이렇게 하는 겁니―!]

쏜살같이 날아간 아킬레우스가 파천검성의 심장을 노리고 창을 휘두르는 순간, 한수영이 달려나갔다. 그리고 한수영의 발걸음은 멈췄다.

텁.

쇄도하던 아킬레우스가 허공에 멈춰있었다. 환호하던 화신들의 함성이 멎었다. 파천검성의 거대한 손이 아킬레우스의 머리를 죄고 있었다.

[<무림>이든 <올림포스>든, 거신은 언제나 같은 취급이군.]

졸지에 벌레처럼 허공에 매달린 아킬레우스가 발버둥을 쳤다.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파천검성의 손아귀에 근육이 불거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쩌저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신’을 사냥하고 싶으냐?]

파천검성의 차가운 눈길이 화신들과 성좌들을 일별했다.

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아킬레우스의 머리가 으깨졌다.

[그럼 어디 한번 해보아라.]





< Episode 61. 기간토마키아 (5) > 끝

< Episode 61. 기간토마키아 (6) >





쿠구구구구!

새카만 <타르타로스>의 천장이 열리고 있었다.

[<타르타로스>의 일부 지대에 균열이 발생합니다!]
[누군가가 비정상적인 탈옥을 시도합니다!]

츠츠츠츳!

허공에서 튀어 오르는 경고 메시지와 함께, <명계>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명계>의 심판관들이 ‘구원의 마왕’의 행동을 눈치챘습니다!]

페르세포네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한 번뿐이니 명심하세요, 구원의 마왕.]

일대가 지진파에 휩싸였고, 활짝 열린 <타르타로스>의 천장 위로 희미한 포탈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페르세포네가 지상으로 가는 출구를 열어준 것이다.
그 광경을 보며 거신 브리아레오스가 물었다.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명계의 여왕이 너를 도와주는 거냐?]

“그냥, 협박을 좀 했습니다.”

삼십 분 전, 나는 페르세포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一협조를 거부하시면, <타르타로스>에서 촬영한 모든 영상을 <스타 스트림> 전역에 뿌릴 겁니다.

<타르타로스>는 명계가 감춘 비밀들을 여럿 품고 있다. 그들이 몰래 양성 중인 거신병이라든가, 암암리에 감추어져 있던 <타르타로스>의 기관 시설들.
그들의 적대 세력이나 <올림포스>가 알아서 하등 좋을 것이 없는 비밀의 보고가, 바로 이 <타르타로스>인 것이다.
하지만 브리아레오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왕이 겨우 그 정도 협박에 굴했다고?]

“그녀는 우리 편입니다. 저를 풀어줄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혹시나 나중에 일이 잘못되었을 때 핑계 댈 거리는 있어야 하니까.”

만약 이번 <기간토마키아>가 실패하여 <올림포스>가 <명계>에게 일의 경위를 따지고 든다면, <명계>는 필시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아마 지금의 내 협박은, 그때의 <명계>를 약간이나마 변호할 수단이 되겠지.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번 <기간토마키아>가 실패했을 때의 이야기고, 나는 일을 그렇게 만들 생각은 없다.
브리아레오스가 말했다.

[그대는 명왕과 여왕을 잘 모르는 모양이군.]

“예?”

브리아레오스는 대답 대신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거신의 맹세’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준신화 급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거신의 해방자’를 획득하였습니다!]
[해당 설화가 ‘단 하나의 설화’의 일부로 귀속됩니다!]

거신의 해방자.
이것이야말로 이번 <올림포스> 대전에서 내가 얻어야 할 첫 번째 설화였다.

[‘거신의 해방자’여. 곧 이곳의 거신들은 <기간토마키아>에 참전할 것이다. 우리에게 특별히 바라는 것이 있는가?]

“그런 건 없습니다. 그저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행하십시오.”

[······점점 궁금해지는구나. 이렇게까지 해서 그대가 도달하고자 하는 ■■이 무엇인지. 지금껏 그 어떤 성좌도 그대처럼 기승전결을 쌓아 나간 이는 없었다. 설마 그대는 ‘완벽한 설화’를 꿈꾸는 것인가?]

완벽한 설화.
누군가는 ‘단 하나의 설화’를 그런 이름으로 부른다.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설화들을 쌓아 만든, 지금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이야기.

“저는 그냥 동료들과 함께 끝을 보고 싶을 뿐입니다. 누구도 잃지 않고, 모두와 함께 말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이야기일 것이다. 지금껏 그런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사실이다.
희생이 없는 신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은 항상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움직이지. ‘운명’이 너를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해보지 않고는 모릅니다. 그리고 [운명]이라면, 이미 극복한 적도 있습니다.”

나는 빌어먹을 <올림포스> 녀석들이 부여했던 [운명]을 떠올렸다.
지금도 그때만 떠올리면 이가 갈린다.
그런데 브리아레오스의 표정이 묘했다.

[운명을 극복했다고?]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멸살법’에 따르면, 모든 티탄들은 예언의 힘을 타고난다.

[해방자여, ‘운명’이라는 것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방대한 개념이다. <올림포스>가 부여한 운명은 이 세계의 티끌을 건드린 정도일 뿐이야. 진짜 ‘운명’은 피할 수도 없고, 그것을 피해간다면 개연성은 반드시 왜곡된다. 그리고 뒤틀린 개연성은, 반드시 누군가가 대신 해소해야만 하지. ‘완벽한 설화’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초치지 마시죠. 전 한다면 합니다. 그리고 제 동료들도 운명에 굴할 만큼 약하지 않고요.”

츠츠츠츠츳!

나는 포탈 속으로 뛰어들며 말했다.

“그럼, <기간토마키아>에서 만납시다.”

브리아레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에게 이야기의 가호가 있기를 바란다.]


*


“키리오스 어르신.”
“그래.”
“아무래도 ‘이야기의 가호’가 필요할 것 같은 데요.”

소떼처럼 밀려오는 귀환자들을 보며, 장하영이 중얼거렸다.

“충실한 수련이 있었다면, 가호 따윈 필요 없다.”

키리오스의 등에서 은백색의 빛을 흩뿌리는 한 자루의 검이 뽑혀 나왔다.

[순백의 역설].

키리오스의 고향인 [피스랜드]의 명장들이 십여 년을 합심하여 만든 검.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바야흐로 성유물에 준하는 성능을 가지게 된 키리오스의 독문병기였다.
좀처럼 무기를 꺼내지 않는 키리오스가 그 병기를 꺼내 들었다는 것은 이번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방증이었다.
귀환자들의 선두에서 두 인물이 날아오고 있었다.
적색의 화려한 무복을 입은 사내와, 교단의 상징이 수놓인 흑색 무복의 중년인.

“이상하군. 이곳에 파천검성이 있다고 들었는데.”
“또 잘못 짚은 건가?”
“모두 파천검성을 찾아라!”

중후한 내공이 담긴 목소리들.
키리오스의 신형이 허공으로 쏘아졌다.

쿠구구구구!

존재하는 것만으로 하늘 일대를 장악하는 ‘격’에, 놀란 무림인들이 일거에 멈춰 섰다.
키리오스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천마와 혈마로군.”
“귀하는 뉘시오?”

키리오스는 대답 대신 자신의 기세를 일으켰다.
밀려온 먹구름 사이로 뇌전이 쳤고, 그 뇌전의 일부는 키리오스에게 깃들었다.
김독자의 주력 기술인 [전인화]가, 이제 그 창시자의 전신에서 숭고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너희는 내 이름을 알 수 없다.”

놀란 귀환자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이제 곧 죽을 테니까.”

하늘을 울리는 백청의 전격.
<무림> 출신이라면 그 이름을 모를 수 없었다.

“설마 ‘역설의 백청’ 인가?”

키리오스의 검이 하늘을 가리켰다.

츠츠츠츠츠츠츳!

폭주하는 개연성의 잔흔을 남기며, 키리오스의 격이 귀환자들과 충돌했다.
어마어마한 풍압 속에 장하영과 파천신군의 신형이 뒤로 밀려났다.
하늘의 중심에서 천마와 혈마, 그리고 키리오스가 합을 나누고 있었다.

쾅! 쾅! 꽈르릉!

한 수 한 수가 오갈 때마다 우레가 쏟아지듯 공간이 비명을 내질렀다.
인간과 인간의 대결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전인미답의 혈투.
장하영은 넋을 잃고 그 전투를 지켜보았다.

‘언젠가, 나도 저 정도로 강해질 수 있을까.’

一장하영! 파천신군과 함께 [공단]을 보호해라!

키리오스의 [전음]에 퍼뜩 정신을 차린 장하영이 파천신군과 함께 움직였다.
천마와 혈마를 제외하고도, 남은 귀환자들은 물경 천여 명에 이르렀다. 개중에서도 성가진 것은 각 무림의 십대 고수들이었다.
크게 기합을 내지른 장하영의 주먹에서 작은 폭풍이 휘몰아쳤다.

“끄아아아아악!”

풍압에 휘말린 몇몇 귀환자들이 나가떨어지자, 그 귀환자들의 몸을 밟고 수십 명의 귀환자들이 도약해 왔다. 숫자가 너무 많았다.

“다들 [공단] 쪽으로 대피하세요!”

이쪽 전력은 장하영과 파천신군, 그리고 비천호리를 비롯한 십여 명의 귀환자들이 고작. 애초에 키리오스를 제외하면 초월좌급 귀환자와 맞설 수 있는 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두두두두두두!

[공단]의 북쪽 지역에서 거대한 성채 같은 것이 덜덜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장하영의 얼굴이 화색으로 물들었다.

“공필두!”

두다다다다다!

성채에서 쏟아지는 마력 포탄들이 귀환자들을 가격하자, 순식간에 희생자들이 속출했다.
그러나 귀환자들은 곧 대열을 정비하여 포탄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저 성부터 부숴라!”

공필두의 [무장 성채]는 수비에 적합한 성흔이지, 공격용은 아니었다.
이백여 명의 귀환자들이 따로 대열을 모아 공필두의 [무장 성채]를 진격했다. 남은 귀환자들의 숫자는 사백. 성채의 흉벽을 타넘은 귀환자들은 [공단]의 내부로 진입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공단]의 수비를 전담하던 방랑자들이 움직였다.

조선제일술사의 힘을 사용하는 조영란.
대물 저격총을 겨눈 이복순.
전우치의 도술이 허공을 물들였고, 날아든 총탄이 귀환자들을 꿰뚫었다.

“크아악!”
“도술사! 도술사를 죽여!”

애꿎은 시민들이 파도 속에 휘말린 물고기들처럼 떼죽음을 당했다.
범람하는 귀환자들이 쏟아내는 검기의 세례에 조영란과 이복순도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방랑자들의 전열이 밀려나자, 귀환자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서울 지역의 리더는 들어라! 목숨을 내놓는다면, 더 이상 무의미한 희생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귀환전쟁의 핵심은 각 세력의 리더를 쓰러뜨리는 것.
이번에 서울을 침공한 귀환자들 또한, 서울의 리더를 해치우는 것이 ‘시나리오’의 핵심 목표였다.
그리고 잠시 후, [공단]의 내부에서 휘황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수세를 이어가던 조영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안 돼! 수경아!”

이복순의 외침과 동시에, [공단]의 창밖으로 한 여인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방랑자들의 왕이 말했다.

“내가 서울의 리더다.”

한 손에는 부서진 [팔주령]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을 쥔 이수경이, 고고한 눈으로 귀환자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쥔 [천부인]에서 흘러나오는 기이한 아우라에 몇몇 귀환자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무서워할 것 없다. 어차피 배후성의 힘도 쓸 수 없는 자다!”

함성을 터뜨린 귀환자들이 달려들자, 이수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 암흑성의 전투로, [시조의 어머니]가 발하던 ‘격’은 대부분 소실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싸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의(意)로서 중심을 세우자, 그것은 바람이 되었다.」

이수경이 쥔 비파형동검이 환한 빛을 내뿜었다.

[성좌, ‘흥무대왕’이 화신 ‘이수경’의 행동에 깜짝 놀랍니다.]
[성좌, ‘외눈 미륵’이 그런 짓을 하면 위험하다 경고합니다!]
[성좌, ‘서애일필’이······.]

한반도의 성좌들이 동시에 그녀를 향해 경고성을 발했다.

안다.
이런 짓을 하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이수경은 흘끗 고개를 돌려, [공단]의 별실을 일별했다. 잠든 유상아의 모습이, 창을 흐릿하게 비쳤다.
그녀는 유상아를 위해 <올림포스>에 참전한 아이들을 생각했다.
듬직한 군인 이현성, 불의를 참지 않는 정희원, 맹랑하지만 용감한 이길영, 침착하고 영특한 신유승을 떠올렸다.
또 온정이 많고 일행들을 잘 챙기는 이설화를, 곧 잘 투덜거리지만 예리한 감각을 가진 한수영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를 떠올렸다.

그 아이가 살아갈 시간을.
오랫동안 꿈꾸었을 이야기를.
자신이 지켜주지 못했던 시간을 기억했다.

비파형동검의 빛이 태양처럼 작렬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이수경이 중얼거렸다.

“‘천제(天帝의 풍신(風神)’이여.”

한반도의 성유물인 천부인에는, 제각기 관련된 성좌가 있다.
지금 이수경이 쥔 비파형동검 또한, 그런 천부인 중의 하나였다.

[성좌, ‘천제의 풍신’이 화신 ‘이수경’을 내려다봅니다.]

천제의 풍신.
<홍익>의 최고신을 받드는 세 명의 설화급 성좌 중 하나.
지금 이수경은, 자신의 수명을 담보로 마지막 도박을 걸고 있었다.

“오시오, 풍백(風伯)이여!”

하늘이 열리는 순간, 비파형동검의 주변에 새파란 아우라가 일렁였다. 그 기이한 빛에 귀환자들이 순간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이수경이 하늘을 보자, 하늘도 이수경을 내려다보았다.

‘단 한순간이라도 좋으니. 내게 저들을 벨 힘을 주시오.’

그러자 하늘이 경고했다.
검고 푸른 번개가 내리쳤고, 이수경은 그 경고에 대답했다.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수경의 전신이 개연성의 스파크로 물들였다.
뼈마디가 으스러지고 피부가 새까맣게 타버리는 고통. 그 고통 속에서, 검을 쥔 오른손이 무거워졌다.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바람의 거력이 그녀의 오른손에 깃들고 있었다.

이것이 한반도 최강의 성좌 중 하나, 풍백의 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수경은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공간이 분절되었다.

마치 처음부터 세상은 둘이었다는 듯이, 그녀가 휘두른 검의 궤적을 중심으로 일대의 모든 것이 절대의 풍압 속에 찢겨 나가고 있었다.

“무, 슨······.”

퍼버버버벅!

십, 이십, 삼십······ 터져 나가는 귀환자들의 숫자는 순식간에 백을 넘어갔다. 흉벽을 넘어 달려들던 모든 귀환자들이, 허공에서 허리가 절단된 채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들이었다.
이수경은 떨리는 오른손을 붙잡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일격으로, 대부분의 귀환자들은 사멸했다.

그러나 모두가 죽은 것은 아니었다.
아주 짧은 순간, 위험을 눈치 채고 타격 범위에서 벗어난 귀환자들이 있었다. <제 3무림>과 <제 4무림> 출신의 십 대 고수들이었다.

“끝났군. 죽여라.”

달려드는 십 대 고수들을 보며, 이수경이 미소를 지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했다.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그녀의 신형을 향해 수십 개의 도검들이 쇄도했다.

퍼버버버벅!

들려오는 끔찍한 피육음 속에서, 이수경은 죽음을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관통상에 의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누군가의 등. 자신을 업은, 아주 넓은 등이었다.





< Episode 61. 기간토마키아 (6) > 끝

< Episode 61. 기간토마키아 (7) >





“이수경.”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이어서 보이는 것은 허공에서 목이 꿰뚫린 십 대 고수들의 모습. 꺽꺽거리는 단말마와 함께, 생명력을 잃은 육신들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네 도움을 받을 줄은 몰랐구나.”

유중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수경을 업은 채 달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수경은 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이 [공단]의 유일한 의원을 찾고 있을 것이다.

“고맙다.”

순순히 흘러나오는 그 말에, 유중혁이 무심히 대답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그만두지. 나를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다.”
“물론 싫지. 엄청 싫어. 내 역할을 빼앗아간 놈이니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

이수경의 머릿속으로, 느릿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주마등은 빠르게 스쳐간다던데······ 왜일까.
생이, 너무나 고되고 힘들었기 때문일까.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너를 알고 있었어. 그 아이가 네 이야기를 많이 했지. 감옥에 있는 엄마 면회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그 아이뿐일 거야.”

一그래서, 이번에 그 자식이 <올림포스>의 12신좌에 도전했거든요.

즐겁게 이야기하는 어린 김독자의 얼굴. 그런 아이의 표정을 마주하며 떠올렸던 수많은 생각들.
이수경의 심박이 느려지는 것을 느꼈는지, 유중혁이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이수경. 정신을 놓지 마라.”

이수경은 흐려지는 정신을 간신히 다잡았다.
흔들리는 유중혁의 등이, 계속해서 졸음을 불러왔다.

“아무튼 한 번쯤은······ 너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까부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는군.”

지금 자신을 업은 이 등은, 실제로 그녀의 아들을 업었던 등이었다.
중학생이었던, 고등학생이었던 어린 김독자를. 실제로 업어 키운 등이었다. 그녀가 업어주지 못했던 그 작은 아이를 키워낸 등.
그 아이를 살게 만든 등이었다.

一나도 그 녀석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 등의 주인이 되고 싶었던 것은, 사실 누구보다도 그녀였다.

一그래서······ 그다음에 유중혁이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엄마도 궁금하죠?

10분밖에 안 되는 면회 시간 내내 이어지던 아들의 말.

一그래, 궁금하구나.

벽을 사이에 두고, 두 모자는 말하고 들었다.
모험이 있고, 삶이 있는 이야기.
그녀와도, 아들과도 관련없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벽을 통해 이야기하듯.
그 시절의 두 사람은 ‘멸살법’을 통해 이야기했다.
어디에도 없을 허구의 이야기만이, 그들이 가진 모든 재산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현실이 된 그 이야기는, 지금 그녀를 업고 있었다.
이수경이 현실감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내 인생 좀 살아보나 했는데······.”
“말하지 마라.”

유중혁의 등이 축축한 피로 젖어가고 있었다.
이수경의 안색은 점차 파리해졌다. 여전히 튀어오르는 개연성의 스파크가 그녀를 태우고 있었다. 떨어지는 살점 사이로, 그녀가 쌓아온 설화들이 증발하고 있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이수경은 일부러 알고 있는 것들을 물었다.

“넌 부모님이 계시니?”
“내가 어렸을 적 사고로 죽었다고 들었다.”
“슬퍼하는 목소리는 아니구나.”
“기억나지 않는 것을 슬퍼할 수는 없지.”

이수경은 안다.
그것은 기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없었던 것임을.
유중혁의 모든 것은 그저 등장인물의 설정값일 뿐이니까.
처음부터, 유중혁의 부모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망설이던 이수경이 입을 열었다.

“인간은 누구나 그래. 나라고 어린 시절이 전부 기억나는 줄 아니?”
“······기억상실증인가?”
“인간은 누구나 기억상실증이야. 조금씩 기억을 잃어버리다가 언젠가는 죄다 잊어버리게 되어 있어.”

이수경은 자신의 말들이 유중혁에게 닿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3회차의 삶을 살아온 회귀자. 그리고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살아갈지 모르는 저 불멸자에게, 그녀의 말은 먼지의 무게보다도 가벼울 테니까.
유중혁이 말했다.

“가끔씩 기억나는 것들도 있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은 기억들이지.”

처음 듣는 그 이야기에 이수경이 물었다.

“······누군가 널 지켜본다고?”
“누군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아주 오랫동안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 지금도 종종 그 시선이 느껴질 때가 있다.”

유중혁의 말이 끝난 후에도 이수경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이수경이, 피에 젖은 유중혁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그 사람이 네 부모일지도 모르겠구나.”

이수경은 그 말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수한 별자리들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러지는 육체. 쏟아지는 설화를 느끼며, 점차 몸에 힘이 빠져나간다. 흐릿한 시야를 애써 돋우며, 이수경은 계속해서 하늘을 헤아렸다.
마치 그 어딘가에 있을 별을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수경?”

이수경의 대답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


콰콰콰콰콰!

파천검성이 나타난 <테마파크>에는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시범을 보인다며 달려든 ‘아킬레우스’의 머리가 터져버린 이훅로, 몇몇 성좌들이 호승심을 부리며 연달아 달려들었지만 죄다 같은 꼴을 당하고 말았다.

서슴없이 휘두른 파천검성의 두 주먹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고작 이 정도로 <기간토마키아>를 재현하려 했느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파천검성의 목소리에, 겁을 먹은 참가자들이 주춤거렸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한수영과 일행들은 어느새 파천검성의 뒤쪽으로 숨었다. 이지혜가 말했다.

“······우리가 도울 필요 없겠는데요.”
“그냥 여기 숨어 있으면 안 돼요?”

이길영도 한 마디를 보탰다.
한수영은 물고 있던 사탕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이거 말이 안 되는데. <기간토마키아>에서 거신족이 이렇게 강하다고?”

거신족이 강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는 <기간토마키아>, 거신족이 패배한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해당 시나리오에서 거신족은 「무대화」의 영향으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게 되어있다.
더군다나 아킬레우스 같은 영웅을 상대로라면······.

[······혼혈 ‘거신’이라고 얕보았는데, 제법이구나.]

돌아본 곳에서, 분명 머리가 터져 죽었던 아킬레우스가 깨어나고 있었다.

[성좌, ‘트로이의 슬픔’이 성흔 ‘불멸의 영웅’을 발동합니다!]

으깨졌던 머리가 회복되고, 쏟아졌던 피가 문장이 되어 몸을 복구하고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아킬레스 건’을 베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

심지어 재생된 아킬레우스의 몸은 조금 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순식간에 삼미터의 체고자 넘어가자, 주변에 있던 화신들이 두려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신?”

마치 거신처럼 커다랗게 변한 아킬레우스의 몸.
파천검성이 물었다.

[네놈도 ‘거신’의 혼혈이었나?]
[······.]
[우습군. 거신의 피를 물려받은 자가 <올림포스>의 하수인이 되었단 말인가?]
[나는 거신이 아니다. <올림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다!]

두 거신의 충돌을 보며, 한수영은 왜 아직 「무대화」가 발동하지 않았는지 이해했다. 아킬레우스는 <올림포스>의 영웅이지만 과거 <기간토마키아>의 참전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 또한, 파천검성과 마찬가지로 ‘거신’의 직계 혼혈이었던 것이다.

콰아아아앙!

거신들의 충돌이 만들어 낸 충격파가 테마파크 일대를 뒤흔들었다.
저릿한 손바닥을 매만진 아킬레우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고작 혼혈이 어째서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 거지? 나는 너 같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대체 어떤 설화를 가지고 있기에······!]

거신 파천검성은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 머나먼 혈육은 하늘을 거세하고 태어났다고 하지.]

그녀는 초월좌. 다른 성좌들과 달리, 극소수의 설화만을 갈고 닦으며 극강의 강함을 추구해온 존재.
그리고 지금껏 그녀가 걸어온 길은 오직 단 한 갈래뿐이었다.

[설화, ‘파천의 길’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녀에게 파천검성의 이름을 붙여준, 오직 저 하늘을 부수기 위한 힘.
줄기차게 흘러나오는 파천검성의 설화에, 어디선가 간접 메시지가 들려왔다.

[하늘을 깨부순 태고 거신의 힘이 ‘파천검성’을 가호합니다.]
[파천의 힘이 더욱 강화됩니다!]

그 메시지에 아킬레우스가 경악했다.

[······하늘을 깨부신 거신? 설마······!]

파천검성이 말했다.

[너희도 같은 운명이 될 것이다.]

파천검성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기류가 발생했다.
주춤거리는 화신들이 뒷걸음질을 치던 그 순간.
어디선가 커다란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성운, <올림포스>가 준동합니다!]

멀리서, 한 척의 배가 바다를 가르고 달려오고 있었다.

아르고(Argo)호.

[거대 설화, ‘원정대의 영웅들’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물살을 가르고 달려오는 거대한 배를 발견한 화신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 배에 타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본 까닭이었다.

“영웅들이다! 진짜 영웅들이 오고 있다!”
“<기간토마키아>의 성좌들이여!”

아킬레우스와 달리, 정말로 <기간토마키아>에 참전한 적이 있는 영웅들이 오고 있었다. 그보다 멀리서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오는 성좌들도 있었다.
<올림포스>의 설화급 성좌.
아킬레우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을 지닌 존재들이었다.

츠츠츠츠츠츳!

[<스타 스트림>이 새로운 무대의 개막을 알립니다.]

마침내, 「무대화」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강맹한 파천검성의 기세가 급격하게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에 용기를 얻은 아킬레우스가 웃으며 파천검성을 향해 말했다.

[하하하! 어린 거신이여. 너는 네가 어떤 재앙을 불러온 것인지 알지 못한다! 너는······!]

콰드드드득!

그러나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허공에서 열린 또 다른 포탈에서 튀어나온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터뜨려버렸기 때문이다.
연달아 두 번이나 머리가 터진 아킬레우스의 거체가 바닥에 쓰러졌다.
거체를 쓰러트린 사내는 망설이지 않고 아킬레우스의 아킬레스 건을 베어버렸다.

[성좌, ‘트로이의 슬픔’이 고통 속에 사멸합니다.]

파스스슷, 흩어지는 아킬레우스의 거체.
흩날리는 백색의 코트를 보며, 한수영이 피식 웃었다.

“제기랄, 빨리도 오네.”

<명계>에서 돌아온 김독자가 그곳에 있었다.
가볍게 숨을 몰아쉰 김독자가 일행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김독자 컴퍼니>. 다들 준비되셨습니까?”

쿵! 쿵! 쿵! 쿵!

어디선가 들려오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허공에서 무수한 산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테마파크 전체를 파괴하며 돋아다는 거대한 동산들.
그 산의 끄트머리에서, 김독자가 말했다.

“이제 진짜 <기간토마키아>를 시작해 봅시다.”





< Episode 61. 기간토마키아 (7) > 끝

< Episode 62. 신의 천적 (1) >





[<스타 스트림>이 새로운 ‘거대 설화’의 가능성을 확인하였습니다.]
[낡은 설화의 가능성들이 재해석됩니다!]
[신화에 등장할 배역들이 재구성됩니다!]
[과거 신화에 기반하여 「무대화」가 진행됩니다!]

연이어 터지는 간접 메시지들을 보며, 대도깨비 ‘녹수’는 침묵했다.
본래 60번 시나리오 <기간토마키아>는 도깨비들이 중계하지 않는다. 그들은 채널과 방영권만을 가지고, 실질적 진행은 <올림포스>의 하위 영웅들이 도맡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이변이 벌어진 이상, 상황은 달라졌다.
화면에서 터져 나오는 폭음과, 땅속에서 튀어나온 기간테스들의 포효.

一대체 어디서 거신들이 나타난 거지?
一<명계>는! <명계>는 어떻게 된 거야?
一지하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할 놈들이 대체 어떻게······!

지금부터 펼쳐질 <기간토마키아>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누가 중계하실 겁니까?”

녹수가 돌아본 곳에, 두 명의 상급 도깨비들이 있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 내가 갑니다.”

한반도 국장 비형과 일본 국장 독각.

츠츠츠츳!

둘의 시선이 마주치며 허공에서 전류가 튀었다.
독각이 외쳤다.

“대도깨비시여! 비형은 안 됩니다. 놈은 화신 ‘김독자’를 너무 오래 중계해 왔습니다.”
“익숙하니까 더 잘 중계할 수 있는 거지 인마. 그리고 언제까지 화신이라 부를래? 그놈도 이젠 성좌야.”

화면으로 <김독자 컴퍼니>의 화신들이 영웅들과 맞서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정확한 진형을 짜며 들이닥치는 ‘격’을 받아내는 그들의 모습은, 하나의 별을 중심으로 모여든 눈부신 별자리를 연상케 했다.

꽈드득.

어디선가 팝콘 씹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참 시끄럽네. 도깨비들은 평소에도 이렇게 말이 많은가?]

찰랑이는 잔에 담겨 있던 붉은 와인이 사내의 입속으로 쑤욱 빨려 들어갔다.
뒤이어 화면 속에서 <올림포스> 측의 영웅 하나가 죽어 나갔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환호합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구원의 마왕’에게 30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비형이 말했다.

“성좌님은 <올림포스> 소속 아니십니까? 한가롭게 여기 있으셔도 되는 겁니까?”

[알 게 뭐야. 난 원래 쟤들이랑 안 친하다고. 그리고 오늘 견학해도 된다고 한 건 너희들이잖아?]

무슨 거리 응원이라도 나온 것처럼, 디오니소스는 자신의 등에 깃대를 꽂고 있었다. 깃대에는 ‘올림포스 망해라’ 라는 글씨가 굴림체로 흩날리고 있었다.
독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다른 12신좌들께서는 지금쯤 <올림포스 신전>에 모여 계실 텐데요.”

[난 김독자네 애들이 이겼으면 좋겠어.]

“예?”

갑작스런 폭탄 발언에, 좌중의 도깨비들이 수런거렸다.
디오니소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뭘 그렇게 놀라? 응원이야 누구든 할 수 있잖아. 그리고 너희가 그런 반응을 보이면 안 되지. 도깨비는 ‘재미있는 시나리오’ 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었어?]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도깨비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독각이 말했다.

“당신이 기대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독각의 말에, 곁에 있던 비형마저 표정이 어두워졌다.
실제로 지금 <김독자 컴퍼니>가 <올림포스>에 건 싸움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아니라, 메추리알로 바위치기도 이것보다는 승산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지구’ 쪽 일마저 겹친 상황이었다.
<기간토마키아>의 개전을 지켜보던 비형의 다른 쪽 망막에, 이수경을 업고 달리는 유중혁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때, 디오니소스가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는 비극일지 희극일지는 끝나기 전까진 모르지.]

“······지금으로선 뻔한 거 아닙니까? <기간토마키아>는 그런 시나리오니까요.”

[<기간토마키아>는 <올림포스>가 가진 거대 설화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아. 간절하지 않은 만큼 녀석들을 얕보고 있을 테니, 럭키 펀치를 잘못 맞고 뻗어버릴 가능성을 아예 간과할 수는 없지.]

“0에 수렴하는 확률은 확률로 치지 않습니다.”

[그런 확률이 실제로 일어날 테니,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 아니겠어?]

화면을 보던 디오니소스가 팝콘을 입에 쑤셔넣으며 말했다.

[관건은······ 우리 ‘생선 아찌’가 어떻게 나오느냐 하는 것인데 말이야······.]


*


좀처럼 모이지 않는 12신좌의 의석이 반 이상 차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자신을 상징하는 상징체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삼지창이었다.

[잘난 번개의 좌께서는 이번에도 오지 않으셨고······ 디오니소스도 빠진 건가?]
[그렇습니다.]

쿠르르르르.
마치 거해의 분노가 일 듯, 신전 주변의 바닷물이 끓어올랐다.
긴장한 몇몇 상징체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는 순간, 삼지창이 말했다.

[그래서, ‘거신’들이 다시 깨어난 이유는?]
[<타르타로스>에서 집단 탈옥을 감행했다고 합니다.]

대답한 이는 쌍검의 상징체를 가진 성좌였다.
삼지창이 다시 물었다.

[······하데스가 가만있지 않았을 텐데?]
[‘신화의 의식’을 행했다 합니다.]
[‘신화의 의식’? 막대한 개연성을 희생했을 텐데······ 설마 ‘모두의 어머니’가 깨어나신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닙니다. 움직인 건 헤카톤케이레스 삼형제와 기간테스들입니다.]
[삼형제가 모두 나왔나?]
[브리아레오스 혼자입니다. 그나마도 백수(百手)의 절반을 잃었다 하더군요.]
[하긴, 셋 모두 나오기엔 개연성이 부족했겠지.]

좌중에 정적이 일었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말했다.

[이번 일은 좌시할 수 없습니다. <김독자 컴퍼니>? 그딱 조막만한 성운이 우릴 도발했단 말입니다.]
[확실히 엄벌을 줄 필요는 있겠지.]

그러자, 무수한 데이터창을 띄운 날개 달린 신발이 말했다.

[쉽지 않을 겁니다. 그 성운의 주인은 3주신과 마찬가지로 ‘끝의 암시’ 가 담긴 ■■를 받았으니까.]
[······그게 정말인가 헤르메스?]
[그렇습니다.]
[흥, 웃기는군. 고작 소성운의 주인이 ‘번개의 좌’와 동급의 ‘설화’를 쌓고 있다고?]

좌중에 소란이 일었다.
‘단 하나의 설화’는 12신좌 모두에게 예민한 화제였다.
성좌들은 모두 궁극의 이야기를 추구하는 존재.
‘끝의 암시’가 깃든 종막에 관해 관심이 없는 성좌는 아무도 없었다.
이야기를 정리한 것은 삼지창이었다.

[조용. 각자 일들도 바쁘고 본신도 해야 할 일이 많으니, 그만 표결을 시작하겠다.]

좌중의 모든 신좌가 입을 다물었다.
사실, 겨우 60번대 시나리오 때문에 이렇게 많은 신좌들이 모인 것은 간만의 일이었다.

[본 의장은, <김독자 컴퍼니>의 도발에 대해, 설화병기의 출병을 요구하는 바이다.]

그리고 표결이 시작되었다.

[성좌, ‘혼인과 가정의 신’이 기권을 선언합니다.]
[성좌, ‘농경과 계절의 주관자’가 중립을 표합니다.]
[성좌,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가 인간들은 몰라도 거신들에게는 정의의 철퇴를 내려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성좌, ‘흉포의 군신’이 거신들과의 전쟁을 원합니다.]
[성좌, ‘전능의 태양’이 하찮은 소성운을 불태울 것을 원합니다.]
[성좌, ‘화산의 대장장이’가 거신들과 맞서 싸울 무구를 만들길 원합니다.]
[성좌, ‘순결한 달빛의 사냥꾼’이 무의미한 전쟁을 거부합니다.]
[성좌, ‘사랑과 미의 여신’이 자신은 천박한 표결에 끼지 않겠다며 기권합니다.]
[성좌, ‘하늘 걸음의 주인’이 이 사안은 그렇게 단순하게 접근할 것이 아니며, 보다 방대한 데이터를 검토한 후 사건의 본질을 점검하고 분노한 거신들의 양태를 먼저 살필 것을······.]

[헤르메스, 간단히 말해라.]

[성좌, ‘하늘 걸음의 주인’이 전쟁에 반대합니다.]

그 선언에, 몇몇 성좌들이 수군거렸다.

[겁쟁이로군, 헤르메스.]
[저 녀석이야 사사건건 신전의 뜻에 반대했으니······.]

헤르메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사이, 투표 결과가 떠올랐다.

[찬성: 4표]
[반대: 2표]
[기권: 3표]

그리고 마지막 한 표가 남았다.
물론, 의장의 것이었다.

[성좌,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 출병을 요구합니다.]

[찬성: 5표]
[비참석자를 제외한 모든 의석의 표결이 완료되었습니다.]

삼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권자를 제외하고 과반수 이상이 찬성하였으므로, ‘설화 병기’의 출병을 선언한다.]

신전 전체가 울리는 망치 소리와 함께, 바다 곳곳에서 불길한 포말이 올라왔다. 포말의 방향은 거신들이 난립하는 <기간토마키아>의 테마파크 쪽.

[병기들을 이끌 지휘관이 필요하다. 위인 급 성좌들이 함께 가겠지만 그들만으로는 거신들을 상대할 수 없다.]
[누구를 더 보내시렵니까?]
[찬성한 신좌들 중 두엇 정도만 움직이도록 하지. 화신체만 보내도 정리할 수 있을 테니, 기탄없이 지원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


아킬레우스의 화신체가 쓰러진 후, 화신들은 패닉에 빠졌다. 곳곳에서 솟아오른 ‘거신’의 산을 발견한 몇몇 화신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혼란 속에, 일련의 화신들이 외쳤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당신!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화신들의 경악과 분노는 곧 나를 향해 집중되었다.
나는 유들유들하게 되물었다.

“왜들 그러시죠? 제가 뭘 했는데요?”
“네놈 때문에 성유물을 얻을 기회를 놓쳐버렸다!”
“거신을 잡은 설화를 얻을 기회였는데!”
“12신좌의 눈에 들어 <올림포스>에 가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너 때문에······!”

<기간토마키아>.
단 10만 코인의 참가비로 숨겨진 영약들도 얻고, 운이 좋으면 거대 설화의 파편도 얻을 수 있는 기회.
그들의 눈앞에서, 그 기회는 이제 한 줌의 먼지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나는 그런 화신들을 보며 말했다.

“······정말 <기간토마키아>가 그런 순진한 이벤트일 거라 생각합니까?”

어쩌면, 그들의 말은 맞다.
실제로 <기간토마키아>를 통해 강해지는 성좌나 화신들은 존재하니까.
뿐만 아니라 그들 중 대다수는 높은 확률로 <올림포스>의 일원이 된다.

“당신들이 <올림포스>의 일원이 되었다 칩시다. 그다음엔 뭘 할 겁니까?”
“······뭐?”
“이미 12신좌와 고대의 성좌들이 차지하고 있는 그 성운에서, 당신들이 대체 뭘 할 수 있냐고 묻는 겁니다.”

‘멸살법’을 통해, 나는 <기간토마키아>를 통해 <올림포스>에 가입한 무수한 화신들의 말로를 보았다. 비정상적인 계약에 묶여 조잡한 설화들을 모으고, 무수한 시나리오의 장기말로 쓰이게 될 화신들.

“지난 <기간토마키아>의 화신들은 모두 상위 시나리오로 올라갔다! 그들은······!”
“저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람들은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다를 가르는 아르고 호를 비롯해 무수한 배들이 뒤따라 오고 있었다.
배의 승선자들 중에는, 지난 <기간토마키아>의 참가자들도 보였다.

“······어, 어째서 저들이?”

<기간토마키아>
거신들과, <올림포스>의 신과 영웅들이 편을 갈라 싸운 사건으로 기록된 신화.
하지만 실제로 그 전쟁에 참전했던 영웅들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 대부분의 화신들은 알지 못한다.

[다수의 성좌들이 흥분합니다!]

거신들을 두려워한 신들이,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겁탈하여 <기간토마키아>를 대비한 ‘영웅’들을 양산했는지.

[성운 <올림포스>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적개심을 보입니다.]

심지어 <기간토마키아>가 끝난 후에도, 얼마나 많은 화신들이 이 끔찍한 ‘재현’의 전쟁에 동원되고 있는지, 참가자들은 알지 못한다.
마치 자신의 꼬리를 무는 뱀처럼, 스스로를 먹고 스스로를 생산하는 시나리오.

[다수의 성좌들이 채널에 입장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기간토마키아>의 흥분을 감추지 못합니다!]

시나리오를 증오했던 성좌들은, 시나리오의 끝에 도달해 그 시나리오를 즐기게 되었다.
필사적으로 시나리오의 사다리를 올라서는 화신들을 조롱하며, 또 꼭대기를 향하는 사다리를 하나씩 걷어차면서.
그렇게 비극의 희생자는, 다시 비극의 주체가 된다.
공포에 젖은 화신들을 향해, 나는 말했다.

“나는 이 시나리오를 부수고 싶습니다.”





< Episode 62. 신의 천적 (1) > 끝

< Episode 62. 신의 천적 (2) >





“시나리오를 부수다니? 당신은 대체 무슨 말을······.”

무슨 뜻인지, 사람들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껏 시나리오를 깨고, 그 안에서 살아남기도 벅찼던 존재들이 그런 발상을 할 수 있을 턱이 없겠지.
시나리오는 이미 그들에게 삶의 조건이 되었으니까.

[정말 호탕한 성좌로군! 그대는 <올림포스>에 맞설 생각인가?]

누군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익숙한 거한이 있었다.
커다란 일 장 팔 척의 거창에 덥수룩한 수염.
내가 알고 있는 성좌였다.

“그렇습니다.”

[크하하핫!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대의 이름을 묻고 싶군.]

“저는 ‘구원의 마왕’입니다.”

구원의 마왕.
내 수식언을 들은 몇몇 화신과 성좌들이 곧바로 반응해왔다.

“설마 ‘마왕 선발전’의······?”
“수, 수르야를 쓰러트렸던 마왕이다!”

거창의 사내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나는 ‘장판파의 호신’이라 하네.]

“장판파의 호신! 장비도 있었어!”

장비는 자신의 거대한 흉부를 탕탕 두드리며 외쳤다.

[이 장모가 그대를 돕고 싶네. 안 그래도 유치한 놀이에 김이 샌 참이었거든!]

장비가 <올림포스>의 테마파크에서 수확한 물품들을 내던지며 말했다. 어린 히드라의 머리와 황금 사과, 가짜 황금 양털 같은 것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장비 정도의 위인급 성좌라면, 분명 큰 전력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히든 시나리오, ‘신화 전복’이 메인 시나리오에 영향을 끼칩니다.]

나는 다른 화신들과 성좌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이제 선택하시죠.”

무시무시한 거신들이 뿜어내는 격과, 바다를 건너 달려오는 아르고호 사이에서, 화신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 성운의 꽁무니에 붙어, 평생 그들의 수족이 될 것인지. 아니면 이 신화 속의 거신들과 함께 새로운 ‘신화’의 주인이 될 것인지 말입니다.”

[당신과 당신의 성운이 받은 ‘메인 시나리오’의 내용이 갱신됩니다!]

+

<메인 시나리오 #60 一 기간토마키아>

분류: 메인
난이도: SSS+
클리어 조건: 고대의 거신들이 <기간토마키아>의 전장에 도래했습니다. 당신들은 ‘거신’ 또는 <올림포스>의 편을 들어 전장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적장의 목을 베어, 새로운 신화의 등장을 <스타 스트림>에 선언하십시오!
제한시간: 一
보상: 새로운 거대 설화, ???
실패 시: 보유 중인 ‘거대 설화’ 의 일부 소멸

* 적장의 화신체를 멸살할 시 해당 시나리오는 종료됩니다.
* 세력별 수장은 각각 2명입니다.

+

시나리오 수주와 동시에, 내 머리 위에 초록색 화살표가 떠올랐다.

[당신은 이미 세력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거신’의 세력을 이끄는 두 수장 중 하나입니다.]

주변의 화신들은 말이 없었다.
아마 그들 또한, 갱신된 시나리오를 받았을 것이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 가 간만의 구경거리에 즐거워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 이 당신의 고난을 즐거워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 가 당신의 전략을 궁금해합니다.]

바다 쪽에서 포격이 시작된 것은 그때였다.
뾰족한 한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독자! 언제까지 폼 잡고 있을 거야? 다 뒈지는 꼴 보고 싶냐?”

나는 검을 뽑으며 거신의 어깨 아래로 내려갔다.

“슬슬 시작하자고.”
“어떻게 싸울 건데? 우리 쪽 전력이 압도적으로 부족해.”

한수영의 말은 사실이었다.
‘압도적’ 이라고 말할 것까진 아니더라도, 아직 나와 함께 포탈을 넘어온 거신은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게다가 핵심 전력인 헤카톤케이레스의 ‘브리아레오스’는 아직 참전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아마 그가, 나와 함께 거신 세력을 담당할 ‘수장’ 일 것이다.

[거신들을 죽여라.]

어디선가 튀어나온 진언과 함께, 아르고 호에서 도약한 인간 영웅들이 거신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간토마키아’ 의 무대화가 진행됩니다.]

츠츠츠츳, 하는 스파크와 함께 주변의 정경이 뒤바뀌었다.
고대의 전장.
최초의 <기간토마키아>가 일어났던 학살의 땅이었다.

<올림포스>의 성좌들이 허공을 격하고 날아왔다.
대부분은 위인급이었지만, 그들이 합세하여 거신에게 맹공격을 퍼붓자 전황은 순식간에 기울었다.

「영웅과 신의 합공에, 지고의 거신들은 무릎을 꿇으리라.」

그오오오오오!

신과 영웅들이 함께 내지른 공격에, 강맹한 기간테스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와 일행들이 거신들을 도우려 했으나, 그때마다 바다 쪽에서 날아오는 무지막지한 포탄 세례에 운신이 자유롭지 않았다.
이현성이 외쳤다.

“저쪽의 설화 병기부터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설화 병기 ‘아르고 호’.

<올림포스>의 원정 영웅들이 타고 있는 배가, 막대한 마력을 품은 포탄들을 연달아 발사해대고 있었다. 이대로는 해상 쪽으로 접근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물론,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잊었습니까? 우리한테 누가 있는지.”

나는 일행들 사이에서 멀뚱한 얼굴로 서 있는 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나?”

정확히는, 이지혜의 배후를 지키는 한 성좌를 바라보았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대경한 이지혜가 소리쳤다.

“······미쳤어? 나보고 저걸 상대하라고?”

<올림포스>의 아르고 호는 이지혜의 ‘유령 함대’보다 훨씬 규모가 큰 배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초계함과 이지스함 정도의 크기 차이랄까. 그러니, 무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할 수 있어.”

나는 안다.
이지혜는, 정말로 할 수 있다.

“네 배후성과 함께라면, 할 수 있어.”

한반도의 성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해상전신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한반도’ 에 갇혀 있었던 성좌.
나라의 이름을 등에 업어야 했고.
삶 전체를 바쳐 국가의 상징으로 남아야만 했던 성좌.

언젠가 ‘고려제일검’ 은 말한 적이 있었다.
한반도의 위인급 성좌들 중, 자신과 자웅을 겨룰 만한 것은 충무공뿐이라고.
그런데 왜 ‘고려제일검’ 이 설화급 성좌가 된 후에도, 충무공은 여전히 ‘위인급’ 으로 남았던 것일까.

[성좌, ‘해상전신’ 이 자신의 전우들을 바라봅니다.]

그것은, 그가 설화급이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성좌, ‘서애일필’ 은 ‘해상전신’ 이 스스로를 위해 싸우기를 원합니다.]

‘위인급’ 으로 시작한 성좌가 ‘설화급’ 이 되는 순간이 있다.
하나의 성좌가 민족이나 국가의 단위를 떠나, 자신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
이지혜의 몸에서 눈부신 광채가 솟아나고 있었다.

[성좌, ‘해상전신’ 이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듯, 충무공이 품고 있던 격이 풀려나왔다.

[<스타 스트림>이 성좌 ‘해상전신’을 응시합니다.]

시나리오의 하늘이 충무공을 내려다보았다. 줄곧 자신의 역량을 숨겨왔던 노련한 배우처럼, 하늘을 향한 충무공의 격은 한없이 웅장하고 담담했다.
물러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기백.

[다수의 성좌들이 ‘해상전신’ 의 격에 깜짝 놀랍니다!]

오랜 세월 끝에, 충무공이 마침내 한반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이 ‘해상전신’ 의 승격을 받아들입니다.]
[성좌, ‘해상전신’ 이 ‘설화급 성좌’ 가 되었습니다.]

“지혜야.”

<기간토마키아>의 개전은, 해상제독(海上提督)의 이름으로 시작한다.

“다 부숴버려.”

‘해상전신’ 의 기백에 휩싸인 이지혜가 검을 뽑았다.

[등장인물 ‘이지혜’ 가, 성흔 ‘유령함대 LV.10'을 발동합니다!]
[배후성의 격이 상승하여 ‘유령함대’ 의 파괴력이 급격하게 상승합니다!]


쿠구구구구구!

해안선을 가르고 나타난 열두 척의 배.
분명 초계함급이었을 함선들은, 어느새 구축함급의 크기로 자라나 있었다.

「병법에 이르길, 죽으려 하면 살 것이고,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

동시에 불을 뿜어대는 열두 척의 함대.
처음에는 비등해 보이던 포탄의 숫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아르고 호의 선두가 뭉개지고 있었다. 쏟아내는 포탄의 개수는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선체의 외피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저 단단한 아르고 호가 흔들리고 있었다.

포탄을 방어할 화망이 갖춰지자 우리도 발을 움직였다. 거신들을 향해 달려들던 <올림포스> 측의 화신들을 베고, 전열의 앞으로 나아갔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아르고 호의 영웅들이 나섰다.

[모두 상륙하라!]

강렬한 진언과 함께 등장한 이는 아르고 호의 원정대장인 ‘바람의 원정왕’ 이었다. 아르고 호의 원정대장, 이아손.

[거신들은 인간과 신의 합공을 막아낼 수 없다! 이 전쟁의 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다!]

와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쏟아져 나오는 군세들.
나는 주춤하는 일행들 사이로 앞장서며 말했다.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우린 거신이 아니니까요.”

우린 거신이 아니다.
즉, 우리에겐 「무대화」 의 영향이 없다.
커다란 덩치의 이아손이 달려오자, 우리 쪽에도 그에 맞서 달려나간 거한이 있었다.

“이 덩치는 제가 맡겠습니다.”

이현성이었다.
엄청난 돌진력으로 이아손과 부딪친 이현성은, 마치 힘겨루기를 하듯 깍지를 낀 채 기합을 터뜨렸다.

“하아아아아압!”

콰드드드드드!

주변의 지축이 밀려날 정도의 엄청난 힘 대결에, 이아손도 깜짝 놀란 눈치였다.
‘멸살법’ 의 후반으로 갈수록, 이현성은 힘 하나 만큼은 그 어떤 화신이나 성좌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성좌, ‘강철의 주인’ 이 동조율을 높입니다!]

뿌드드득 자라난 강철의 갑피가 이현성의 전신을 감쌌다.
이현성이 이룬 [강철화]의 경지는, 가히 고절한 수준.
영웅의 주먹질에도, 이현성의 몸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하늘에는 드래곤을 타고 날아오른 신유승과 이길영이 있었다.

신유승은 용살의 설화를 가진 영웅들을 피해, 허공에서 브레스를 뿌렸다. 바다는 순식간에 독무로 번져갔고, 그 독무 사이로 스며든 이길영의 충왕종들이 허덕이는 적군들을 베어갔다.
독조를 사용해 영웅들을 상대하는 이설화와, [흑염]을 발동해 <올림포스>의 성좌들을 막아서는 한수영의 모습도 보였다.
이제 다들 위인급 성좌 하나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은 넘었다. 고작 열 명 남짓할 성운의 구성원들이, 저 막강한 거대 성운의 성좌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뒤쪽에서 전투를 관망하던 화신들이 웅성거렸다.

“뭐야, 올림포스가 밀리는 것 같은데······?”
“······저런 작은 성운에게?”

내가 노렸던 효과도 바로 이것이었다.
전투는 아직 초전.
지금 확실히 전력을 어필해야, 더 많은 지원군을 불러들일 수 있다.
하지만 승리의 신 니케는 아직 우리의 편을 들어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쿠구구구구!

······결국 나타났구만.

나는 시야를 가득히 메우는 20미터 높이의 괴물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인간의 체고는 아니었다.

휘황한 황금빛 갑옷. 망토처럼 두른 사자 가죽. 그리스 로마 신화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의 이름을 모를 수는 없었다.
그 장엄한 외양에 몇몇 거신들이 주춤거리며 외쳤다.

[헤라클레스······!]

12신좌들조차 꺼려하는 영웅의 ‘격’ 이 전장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주변을 덮는 새카만 그림자를 올려다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괴물을 상대하려면 이쪽도 괴물을 불러야겠지.

여기까지 오는 데 정말 오래 걸렸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여기서 물러나진 않는다.

“······잠자는 거신을 베기 위해 벼려진 검이여.”

나는 조용히 시동어를 외쳤다.

“지금, 이곳에 강림하라.”

와라, 김남운.





< Episode 62. 신의 천적 (2) > 끝

< Episode 62. 신의 천적 (3) >





허공에서 소용돌이치는 포탈이 열렸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플루토의 사용권은 하데스에게서 따냈다.
나는 이번 <기간토마키아>의 한정으로, 플루토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

[하하하핫, 메뚜기남! 싫어하던 것 치곤 그 시동어 잘 외우네?]

장난스런 김남운의 목소리.
그러나 거신병은 곧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소용돌이치는 포탈 위로 보이는 것은 새카만 무저갱의 어둠뿐이었다.

[······근데, 10분만 기다려줄래? 지금 이쪽 소환진이 망가져서 당장은 못 갈 것 같거든. 거신들이 발구르기를 너무 많이 해서······.]

······이런 빌어먹을.

새하얀 김을 내뿜는 헤라클레스가 무표정한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내가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야 한다.
나는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외쳤다.

“헤라클레스! ‘12과업의 대영웅’이시여!”

헤라클레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헤라클레스의 머리 위에는 적색 화살표가 깜빡이고 있었다.

[해당 성좌는 <올림포스> 측의 ‘수장’입니다.]

역시나, 녀석이 <올림포스>의 두 ‘수장’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신화에 따르면, 헤라클레스는 <기간토마키아>에서 거신들의 수장을 죽인 장본인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멸살법’의 많은 성좌들은 이야기했다.

「“헤라클레스가 있는 한, <기간토마키아>의 승자는 바뀌지 않는다.”」

헤라클레스를 처음 보는 무수한 화신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오오오오!”
“헤라클레스! 헤라클레스다!”

무수한 전승과 신화를 남긴 올림포스의 대영웅, 헤라클레스.
그 많은 설화들이 <스타 스트림> 전역에 울려 퍼짐에도 불구하고, 헤라클레스를 실제로 본 화신이나 성좌는 손에 꼽았다.

그가 신과 인간의 혼혈인 반신(半神)이라느니.
강철로 빚은 육체를 가졌다느니.
<올림포스>의 수호자라느니 하는 이야기만이 떠돌 뿐.

[설화, ‘네메아의 사자를 목 졸라 죽인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거대 멧돼지를 두들겨 팬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켈베로스를 맨손으로 제압한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헤라클레스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설화들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언뜻 보기만 해도 미친 설화들이라는 게 느껴진다.
하나하나가 최소 전설급 이상의 설화들.
축적한 ‘거대 설화’의 격도 나와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고 시작한 게임은 아니었다.

“역시, <스타 스트림>의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되는군요.”

도발하듯 던진 내 목소리에, 헤라클레스의 집채만한 주먹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찰나의 사이를 두고 [소형화]와 [전인화]가 발동했다.
머리끝을 스쳐간 헤라클레스의 주먹이, 내가 서 있던 지상을 작살내며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그 무식한 힘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나는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주먹질 하나는 쓸 만하군요. 이 정도로 거신들을 제압했다기엔 뭔가 미심쩍지만 말입니다.”

마치 분하다는 듯, 헤라클레스의 몸 안에서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당신에 관한 전승을 여럿 알고 있습니다. 네메아의 사자를 잡았다느니, 히드라를 베어 죽였다느니, 스팀팔로스의 새를 사냥했다느니······. ‘한 사람’이 단기간에 이루었다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설화들이죠.”

그리고 마침내, 헤라클레스의 몸속에서 진언이 터져 나왔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나 ‘헤라클레스’다!]

듣는 것만으로도 오싹한 목소리.
틀림없이 12신좌에 준하는 격이었다.
하지만 그로서, 나는 더욱 강한 확신을 마쳤다.

“당신은, <기간토마키아>를 위해 태어난 존재란 소문을 들었습니다. 당신의 12과업들은 모두 <기간토마키아>의 승리를 위해 주어진 시련이었고요.”

[몇몇 성좌들이 당신의 이야기에 흥미를 갖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걱정합니다.]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20미터가 넘는 체고의 괴물이 그런 짓을 하니, 가히 장관이었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제 친한 동료 중 하나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이런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속에서 들끓는 분노를 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본래 헤라클레스는 ‘대홍수’ 시대 이후에 태어난 인간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그는 그보다 이전에 발생했던 <기간토마키아>에 참전할 수 있었을까요?’”

그 말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유상아였다.
채널 내의 성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눈을 부라린 헤라클레스가 진언을 발했다.

[오만방자한 놈! 이 헤라클레스가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것이냐?]

“응. 너뿐만 아니라, 12신좌 전체가 말이지.”

내 즉답에 헤라클레스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너희는 너무 많은 ‘거짓 설화’를 만들었어. 심지어 연대까지 조작하면서 말이지.”

헤라클레스의 표정에, 명백한 당황이 묻어나고 있었다.

“나도 황당하더라. 너희처럼 헛소리를 지껄이고, 지껄이고, 또 지껄이다 보면······ 언젠가 그게 ‘진짜 설화’가 될 수도 있다는 게.”

천 년, 이천 년.
수천 수만 년동안 반복된 거짓말.

“심지어 일단 설화가 된 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원래부터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는 게······ 이야기라는 거, 참 신기하지 않아?”

[나는 헤라클레스다! <기간토마키아>의 영웅이자, <올림포스>의 상징인 헤라클레스다!]

“그래, 어느 세계선에서는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다른 세계선 어딘가에는, 진짜로 네메아의 사자와 히드라를 때려잡은······ 그런 영웅이 있을지도 몰라.”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흥미로운 미소를 짓습니다.]

나는 그 말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1863회차를 여행하며, 내가 스쳐갔던 무수한 유중혁의 회차를 떠올렸다.

“그런데 이 세계선은 아냐. 이 세계선에서, ‘헤라클레스’ 같은 영웅은 존재하지 않아.”

[네놈!]

“왜냐하면 헤라클레스는, 너희가 만든 ‘설화 병기’의 이름이니까.”

번개의 신 제우스는 <기간토마키아>를 대비하여 자신의 씨를 뿌렸다.
하지만 늘 그렇듯, 여기서의 ‘씨’는 은유였다.
거신들의 옹립을 두려워한 제우스는, 세계선을 넘나들며 잡다한 영웅 설화들을 수집했다.

「네메아의 사자」
「황금 뿔 사슴」
「크레타의 황소」
「아홉 머리의 히드라」
······.

그는 설화들을 모아, ‘단 하나의 인물’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 인물은, 이내 하나의 ‘설화 병기’로 형상화되었다.
인간의 영혼을 동력으로 삼아, 오직 ‘거신’과 맞서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
<스타 스트림>의 공포이자, 수많은 전장에서 학살의 공포를 불러온 병기.

“거신병(巨神兵), 헤라클레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놀랍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올림포스>의 만행에 분개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표정을 차갑게 굳힙니다.]
[성좌,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의 동공이 흔들립니다.]
[다수의 성좌가 ‘헤라클레스’의 정체에 충격을 받습니다!]

아마, 이 이야기들은 대부분의 성좌들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당연하다.
이건 ‘멸살법’을 읽은 나와, 헤라클레스를 만들어 낸 극소수의 12신좌들만이 아는 진실이니까.

[다수의 성좌들이 BY-9158 채널에 입장합니다!]

채널에 성좌들이 급격히 늘어나자, 비유가 끼잉하고 작게 울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기간토마키아>의 정체성에 의구심을 갖습니다!]

마침내 내가 원하는 무대가 완성되려 하고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신화 정체성이 흔들립니다.]
[‘헤라클레스’의 정체가 「무대화」의 재현에 영향을 끼칩니다.]

나는 헤라클레스를 노려보았다.

[전용 스킬, ‘독해력’이 발동합니다!]
[특성 효과로 상대방의 대략적인 설화 구성을 파악하였습니다!]

「그는 오직 전쟁을 위해 태어난 전쟁의 신」
「오른손에는 ‘공포’와 왼손의 ‘불안’을 쥔 채」
「눈앞의 ‘투쟁’을 헤쳐 걸어간 길목마다 ‘불화’를 남겼으니」

거신병 헤라클레스의 몸피 사이로 흘러나오는 성좌의 설화.
그것은 헤라클레스의 설화가 아니었다.
헤라클레스는 거신병.
그렇다면, 그 안엔 누군가 타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게 누구인지 알고 있다.

나는 비웃듯 진언을 발했다.

[‘흉포의 군신’이여! 네놈은 ‘거신병’ 뒤에 숨어 싸우는 겁쟁이였나?]

헤라클레스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강풍이 불어닥쳤다.
주변에서 혈전을 벌이던 영웅들과 성좌들이 단번에 수십 미터나 밀려났다.
나 역시 [책갈피]로 [바람의 길]을 사용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수평선까지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아레스가 입을 열었다.

[<올림포스>에서는 예로부터 말이 많은 녀석들이 안 좋은 꼴을 당하지. 오이디푸스도, 프로메테우스도. 그 누구도 예외는 없었다.]

겉으로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것과 달리, 뜻밖에도 ‘흉포의 군신’ 아레스의 진언은 침착했다.

[그리고 너는 내가 본 그 누구보다도 말이 많구나.]

성큼성큼 다가오는 헤라클레스가 나를 향해 주먹을 내리찍는 순간.

츠츠츠츠츠츳!

10분이, 모두 지났다.

콰아아아아앙!

허공에서 나타난 ‘거신병 플루토’가, 헤라클레스의 주먹을 받아냈다.
나는 그대로 허공을 향해 날아올라 플루토의 콕피트로 스며들었다.

[‘거신병 플루토’가 당신의 탑승을 확인합니다.]
[‘거신병 플루토’가 마스터의 별자리를 확인하였습니다.]
[‘거신병 플루토’와 당신의 설화가 동화됩니다.]

전신을 아늑하게 감싸는 거신병의 품. 마치 부드러운 근육이 전신을 감싼 듯한 느낌과 함께 눈을 뜨자, ‘거신병’이 보는 시야가 그대로 보였다.
화신체를 충만하게 감싸는 ‘설화 병기’의 힘.
이것이 바로 ‘멸살법’ 최강의 설화 병기 중 하나, [거신병 플루토]였다.

[······웩! 우엑! 웩! 뱃속에 기생충 같은 게 들어온 느낌이야!]

김남운이 호들갑을 떠는 사이, 한수영이 [한낮의 밀회]를 통해 말을 걸어 왔다.

―야, 할 수 있겠어? 같은 거신병이라도 저건 ‘헤라클레스’야. 네가 가진건 고작 ‘김남운’이고.

거신병의 급은 거신병의 재료로 사용된 ‘영혼’의 질적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본래 플루토의 엔진으로 사용될 영혼은 김남운이 아니었다.
즉, 지금의 ‘플루토’는 원작의 ‘거신병 플루토’보다는 훨씬 약한 상태였다.

―김남운도 꽤 쓸 만해.
―마계에서 [공장]을 부술 때랑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고!
―내가 그걸 모른다고 생각해? 할 수 있어.
―진심이야?
―원래였다면 무리였겠지만······ 너한테 좀 배웠거든.
―······나한테?

나는 그대로 헤라클레스를 향해 돌진했다. 플루토의 체고에 맞게 체고를 증폭시킨 헤라클레스도 나를 향해 마주 달려왔다.
네 개의 손이 부딪치며, 엄청난 풍압이 바다 일대에 소용돌이를 만들어 냈다.
헤라클레스와 비등한 수준의 힘을 보이는 플루토의 저력에, 아레스는 진심으로 놀란 눈치였다.

[거신병? ······어디서 그걸 손에 넣었지?]

“나도 너희처럼 여기저기서 사기 좀 치고 다녔지.”

‘마왕 선발전’이 끝난 직후부터, ‘1863회차’에 다녀오기까지.
나는 내내, 이 <기간토마키아>를 준비해왔다.
신생 성운이 확고한 입지를 다질 수 있는 찬스이자, 거슬리는 거대 성운들에게 제대로 경고를 날릴 수 있는 기회.

「김독자는 ‘멸살법’을 읽고, 또 읽었다.」

원작을 바꾼 만큼, 미래는 불확실해졌다. 그렇다고 1863회차의 한수영처럼 [예상표절]을 사용하는 것은 무리였다.
앞으로 예상 가능한 전개를 ‘창작’하는 것은, 한수영 같은 작가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그런 나에게, 1863회차의 한수영은 말했다.

―무슨 소리야? 넌 독자잖아.

독자.
작가의 글을 읽고, 감상하는 존재.

―작가님, <올림포스> 신좌들의 고증이 조금 부족한 게 아닐까요? 아레스는 묘사된 것보다 훨씬 폭급하고 인간들을 얕보는 신인데······.
―게다가 이런 식이면 12신좌들이 개별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개연성은······.

그리고, 그런 작가와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존재.

꽈아아아아앙!

헤라클레스의 주먹이 플루토의 머리에 꽂히고, 플루토의 주먹이 헤라클레스의 흉부에 작렬한다.
이어지는 난타전 속에, ‘멸살법’을 읽으며 내가 느꼈던 감상들이 흘러갔다.

―제 생각엔 하위 시나리오로 내려온 성좌들이 너무 불리한 것 같은데······.

나는 ‘작가’가 아니다.
때문에 한수영처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구보다, 나는 이 ‘원작’의 허점들을 잘 꿰고 있다.
어쩌면 소설을 쓴 작가 본인보다도.

[놀이는 여기서 끝이다.]

거신병 헤라클레스의 전신에서 풍기는 기세가 달라졌다. 사자의 머리를 부순 거력이 거신병의 양팔에 집중되며, 헤라클레스의 성유물인 [헤라클레스의 방망이]가 소환되고 있었다.

나 역시, 그에 맞선 일전을 준비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마왕의 ‘격’을 개방하였습니다!]

[전인화]에서 비롯된 백청의 강기와 마왕의 격. 그 위에 <김독자 컴퍼니>의 거대 설화가 얹어졌다.
나는 지금껏 숨겨왔던 모든 설화를 폭발시켰다.
내가 방출한 설화는, 플루토의 버프 효과로 인해 어마어마한 수준의 격으로 증폭되고 있었다.
아레스가 대경했다.

놀라기도 하겠지.
실제로 나는 무리하고 있었다.

츠츠츠츠츠츳!

아직 내 ‘격’은 12신좌들과 맞서기엔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95번 시나리오를 다녀오며, 내 ‘격’의 총량은 동급의 화신이나 성좌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적어도, 60번 시나리오의 제한치를 넘을 정도로.

[당신이 발출하는 ‘격’이 시나리오의 제한치를 넘어섰습니다!]

60번 이후의 시나리오는 개연성의 후폭풍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다.
잘못하면, 격의 발현과 동시에 화신체가 소멸해버리는 재앙을 겪을 수도 있다.

나는 스파크를 견뎌내며 이를 악물었다.

성운 <올림포스>는 지금까지 나에게 여분의 개연성을 너무 많이 사용했다. 그렇기에, 이 <기간토마키아> 같은 대형 시나리오에 사용할 개연성은 이제 거의 남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아레스의 ‘격’은 일정 수위 이상으로 상승하지 않고 있었다.

[멍청한 놈! 그런 짓을 하면 네놈도 죽는다!]
[죽겠지.]

물러서는 아레스를 보며, 내가 말했다.

[그런데, 네가 먼저 죽을 거야.]

나는 텅 빈 플루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거신병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어지간한 무기로는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없다.
적어도 [헤라클레스의 방망이]에 필적할 무기가 내게도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 나는 그런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이 순간만을 위해 아껴왔던 무기가.

[오십시오, 강철검제.]





< Episode 62. 신의 천적 (3) > 끝

< Episode 62. 신의 천적 (4) >





내 외침에 한순간 전장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거신병 ‘헤라클레스’와 거신병 ‘플루토’의 싸움.
병장기의 소환 의식에, 채널을 메우던 성좌들마저 긴장하는 눈치였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병기가 무엇일지 궁금해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강철검제’를 궁금해합니다!]

그러나 내 빈손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고 있었다.

······왜 안 오는 거지?

뒤를 돌아보며 반사적으로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했다.
전장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이해도가 높은 몇몇 등장인물들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강철검제?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검을 쓰는 사람인가······.」

······뭐?

「김 독 자는 몽 총 이이 다」

머릿속에서 [제4의 벽]이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늦게 아차, 하는 심경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현성의 별명은 ‘순정강철’이었다.

「강철검제······ 멋진 이름이군. 독자 씨의 부름을 받다니. 누군지 몰라도 대단한 사람이다.」

이아손과 힘겨루기를 하며 이쪽을 멀거니 보는 이현성.
나는 이현성을 향해 빽 소리를 질렀다.

[현성 씨! 빨리 오세요!]

“예? 저 말씀이십니까?”
“빨리 가 멍청아! 여긴 내가 맡을 테니까!”

한수영의 고함과 함께, 이아손과 힘겨루기를 하던 이현성이 기합을 내질렀다. 성흔 [태산 밀기]가 발동하며, 이아손의 덩치가 파도와 함께 뒤쪽으로 날아갔다.

콰콰콰콰콰!

······아니, 저런 힘이 있었으면 진즉에 사용하지.
지난 3년간 이현성이 얼마나 강해진 것인진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기대했던 것보다 더 쓸 만하겠다 싶었다.

“하지만 저는 ‘강철검제’가 아닌데······.”

[오늘부터 그렇게 불리게 될 겁니다.]

“제,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나는 다가온 이현성을 재빨리 붙잡아 휘둘렀다.

“끄아아아아악!”

전열을 갖춘 아레스가 [헤라클레스의 방망이]를 휘둘러왔다.
거신병 ‘헤라클레스’에 장착된 설화와 아레스 본연의 설화가 섞인, 무지막지한 일격. 네메아의 사자든 뭐든 일격에 때려잡을 수 있을 파괴력이었다.
나는 무식하게 달려드는 아레스를 향해 냅다 이현성을 휘둘렀다.

“독자 씨! 독자 씨! 안 됩니다!”

[괜찮습니다! 자신을 믿으세요!]

투콰아아아앙!

파도와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충격파에 입자화된 물보라가 안개로 화했다.
희뿌연 안개 속에서 서서히 드러난 이현성은 방망이와 자신의 몸을 맞대고 있었다.

꽈드드드득!

[거봐요, 할 수 있잖아요.]

“으, 으어, 으어어어······.”

이현성의 전신으로 [강철화]의 표피가 자라나 있었다.
자라고, 자라고, 또 자라서. 이내 하나의 검(劍)이 되어버린 모습.
아레스가 눈에 띄게 당황하는 기척이 보였다.
만약 이곳에 유중혁이 있었다면, 분명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현성이 ‘강철검제’라는 별명을 갖게 된 진짜 이유다.”」

강철검제.
그가 검의 제왕이라 불리는 이유는, 검을 잘 다루기 때문이 아니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성흔 ‘강철화 Lv.10’을 발동 중입니다!]

[강철화]. 저 먼 외우주의 성좌가 가진 성흔.
설화가 쌓일수록 그 어떤 금속보다도 단단한 강도에 도달하게 되며, 몇 번이고 부러져도 다시 재생할 수 있다는 장점까지.
이현성은 살아있는 ‘최강의 명검’이나 다름없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당신의 만행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아무래도 검이 된 건 처음이라 그런지, 이현성은 아직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나는 이현성의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일부러 말을 걸었다.

[현성 씨, 저기 헤라클레스가 쥔 방패 보이십니까?]

“예······ 예에, 어엇, 저건?”

[제가 전에 드렸던 ‘헤라클레스의 방패’의 원본이 저겁니다.]

언젠가, 나는 [헤라클레스의 방패]의 레플리카 버전을 이현성에게 준 적이 있었다. 이현성이 몇 번이나 닦아서 고이 사용했던 그 방패.

[저거 현성 씨 드릴게요.]

“······정말이십니까?”

[그럼요.]

어느새 적응을 마친 이현성이, 자신의 몸을 거신병의 손과 일체화시켰다. 악수라도 하듯, 꽉 잡은 손처럼 완벽한 그립감.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츳!

엄청난 개연성 소모와 함께, 나는 다시 한번 아레스의 헤라클레스와 충돌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을 주목합니다!]
[<관리국>이 당신의 개연성을 의심합니다!]
[이 이상으로 개연성을 남용하면 화신체가 위험해질 것입니다!]

[강철검제]와 [헤라클레스의 방망이]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 박력에 놀란 아레스가, 한 걸음을 물러섰다.

[······이런 미친놈이!]

부딪치고, 부딪치고, 또 부딪치고.
저 단단한 [헤라클레스의 방망이]의 일부가 파편이 되어 튀었고, 이현성의 [강철화]도 군데군데 균열이 갔다.
애초에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전투가 아니었기에 우리는 필사적이었다.
나도, 이현성도, 김남운도.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수르야와 싸울 때처럼 「무대화」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이 이야기가 우리를 지켜주고 있었다.
나와 이현성이 함께했던 무대.
한때는 적이었던 김남운 또한, 이제 그 설화의 일부가 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비열했던 영혼이, 강철의 거신으로 태어났으니」

스가가각!

마침내, [강철검제]의 칼날이 헤라클레스의 어깻죽지를 잘라냈다.
아레스가 으르렁대며 외쳤다.

[왜 이렇게까지 덤비는 거지? <올림포스>는 늘 너에게 자비를 베풀어 왔다!]
[자비? 그래서 나한테 그딴 [운명]을 씌웠냐?]
[설마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겨우 그런 거라고?]
[어차피 네놈은 살아났지 않느냐! 성공적인 시련을 겪게 해주었으니 고마움을 표하지는 못할 망정······!]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었다.

[네놈들 때문에 내 동료가 죽어가고 있어.]
[동료?]

검과 곤봉이 다시 한번 부딪치자, 아레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특이점의 감시자로 쓰던 ‘그 화신’ 말이군.]
[‘그 화신’이 아니라 ‘유상아’ 씨다.]
[그 화신은 우리가 그렇게 만든 게 아냐. 스스로 그 불행을 자초한 거지.]

아레스가 비웃듯 말을 이었다.

[고작 필멸자가 <올림포스>의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하려 했으니, 그런 꼴을 당하는 건 당연하다.]

까아아앙!

나는 이를 갈듯 외쳤다.

[그 힘을 준 건 너희들이잖아. 심지어 그런 상황을 자초한 것도, 너희들이었어.]
[신은 지켜볼 뿐. 모든 것은 인간의 선택이지.]
[예정된 인과를 두고 ‘선택’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냐?]

아레스가 웃었다.

[그것이 바로 ‘시나리오’다.]

차가운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는다.
그래, 이게 바로 성좌였다.

자극적인 시나리오를 원하고, 화신들의 타락을 즐기는 존재.

일부러 ‘선악과’를 만들어 두고.
인간이 금기를 어기기를 즐거이 기다리는 신.

고오오오오오오!

거신병 플루토의 몸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스파크가 치기 시작했다.
방망이와 강철의 접합부에서 눈부신 마력의 격랑이 몰아쳤다.
아레스가 외쳤다.

[이 미친 자식이······!]

「김독자는 분노했다.」
「그러나 그 분노와는 별개로, 김독자의 이성은 한없이 차가웠다.」

사실, 정면 대결로 아레스를 쓰러트리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이곳은 아레스가 충분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바다’였고.
모든 격을 방출할 수 없는 ‘하위 시나리오’였으며.
결정적으로, 아레스가 탄 ‘헤라클레스’는 거신병의 초기 모델이었다.

콰드드드득!

날아드는 [헤라클레스의 방망이]가 플루토의 왼팔을 부쉈고, 동시에 [강철검제]의 칼날이 헤라클레스의 허리를 꿰뚫었다. 다급해진 아레스가 외쳤다.

[이런 짓을 하면 네놈은 정말로 <올림포스>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누구든 오라고 해.]

하지만 올 수 없겠지.
12신좌는 모두 겁쟁이니까.

[제우스든, 포세이돈이든. 누구든.]

츠츠츠츠츠츳!

휘두르는 [백청강기]에 밀려난 헤라클레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밀리는 상황에서도, 아레스는 자신의 격을 온전히 방출하지 않았다.
설화급 성좌라 해서, 모두가 ‘수르야’ 같은 것은 아니다.

진짜 <기간토마키아>가 있은 지 수만 년.
12신좌들은 목숨을 건 사투를 잊었다.

흉폭의 군신, 아레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누구보다 용감한 것 같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목숨과 안위를 챙긴다. <기간토마키아>에서 거신들을 집어 던지며 용맹을 과시했던 그는, 이제 하위 시나리오에서 격을 잘못 개방했다가 후폭풍을 맞을 것을 두려워하는 성좌가 된 것이다.
발악하듯 아레스가 외쳤다.

[네놈은 개연성이 두렵지도 않느냐!]
[두렵지 않아.]

이현성도, 나도, 김남운도.
그런 걸 두려워하는 이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줄곧, 그런 후폭풍을 헤치며 살아왔으니까.

오히려 약하기에 낼 수 있는 용기였다.

튀어 오르는 바다 거품과 함께, 나는 헤라클레스의 콕피트를 향해 강철검을 찔러 넣었다.

[당신은 거신병 ‘헤라클레스’를 쓰러트렸습니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성유물, ‘헤라클레스의 방망이(손상)’을 획득하였습니다.]
[성유물, ‘헤라클레스의 방패(손상)’를 획득하였습니다.]
[성유물, ‘헤라클레스의 장창(손상)’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김남운!”

나는 폭발과 동시에 플루토의 콕피트를 벗어났다.
개연성의 제한치를 넘어선 플루토가 부서지고 있었다.

[개 쩔었다······!]

김남운은 즐거운 듯한 목소리였다.
잠시 후, 개연성의 후폭풍을 견디지 못한 플루토의 전신이 붕괴했다.
나를 대신해 개연성을 감당한 결과였다.
다행히 동력부는 무사한 것 같았지만, 더이상의 전투는 힘들어 보였다.
희뿌연 연기 사이로, 나처럼 간발의 차이로 콕피트에서 빠져나온 아레스의 모습이 보였다. 전신에 상처를 입은 아레스가 분노의 고성을 토하고 있었다.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거신병 [헤라클레스]는 일종의 ‘방호구’일뿐.

이대로 아레스가 ‘격’을 개방하면, 나는 정면에서 놈을 상대해야 한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애초에 내 목적도, 녀석을 헤라클레스에서 내리게 만드는 거였으니까.

“유상아 씨가 너에 대해 알려준 게 있지.”

아레스의 말대로, 유상아는 [헤르메스 시스템]을 사용해 온갖 미래 정보를 조사했다. 그리고 개중에는, <올림포스>의 비사에 관한 것도 있었다.

“언젠가 너는, ‘헤라클레스의 장창’에 맞은 적이 있다던데.”

유상아는 말했다.
아레스는, 헤라클레스와 싸우다 그의 창에 허벅지를 찔려 달아난 적이 있다고.

―만약 ‘가짜’도 ‘진짜’가 될 수 있는 게 설화라면, 이 설화도 진짜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만약 그 ‘무기’만 구할 수 있다면······.

나를 보는 아레스의 두 눈이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문득 궁금해지네. ‘헤라클레스’는 너희가 만들어 낸 존재인데······ 그렇다면 이 신화는 가짜일까, 아니면 진짜일까.”

기함한 아레스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고, 나는 말을 이었다.

“<스타 스트림>에서 ‘가짜 설화’는 대체 얼마만큼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 궁금하지 않아?”

[‘헤라클레스의 장창’에 깃든 설화 파편이 당신에게 반응합니다!]
[설화 파편, ‘전신(戰神)의 천적’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창은, 단 한 번의 관통으로 전쟁의 신을 무력화시켰으니」

나는 남은 모든 힘을 다해 창을 집었다. 너무나 무거운 창이었기에, 나 혼자 제대로 던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제 눈앞까지 다가온 아레스.

제대로 던져야 한다.
만약 실패하면, 죽는 것은 이쪽이 될 테니까.

그 순간, 창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누군가 등 뒤에서 나와 함께 창대를 쥐고 있었다.

이현성은 아니었다.
하지만 구태여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이만한 무게의 창을 가볍게 들 수 있으며, ‘멸살법’의 그 어떤 화신보다 만병(萬兵)에 능한 존재. 애초에 그런 ‘화신’은 아군 중 하나 뿐이다.

“김독자, 기회는 한 번뿐이다.”

어떤 한 번은, 영원한 ‘한 번’이다.
회귀자의 ‘무수한 실패’로 만들어진 한 번.

“내겐 늘 한 번뿐이었어.”

그러니, 이 한 번은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동시에 창을 던졌다.





< Episode 62. 신의 천적 (4) > 끝

< Episode 62. 신의 천적 (5) >





창은 검푸른 빛살을 남기며 날아갔다.
창에 실린 힘과 격은, 본래의 유중혁이 가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마 지난번 [영원불멸의 지옥도]를 겪으며, 3회차의 유중혁도 ‘창’에 대한 이해도가 급상승한 모양이었다. 날아가는 창을 보며 내가 물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네? 귀환자들은 어떻게 됐어?”
“······잡담은 나중에 하지.”

쏘아지는 창의 궤적을 피해 아레스가 신형을 물리고 있었다.
헤르메스처럼 공중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지는 못하더라도, 아레스 정도면 저런 창을 피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그 창에, 설화가 깃들어 있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리하여, 손끝을 떠난 창은 피할 수 없었기에」

하나의 설화가 감정을 갖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 어떤 설화 전문가도 그에 대해 확실한 대답을 내놓진 못할 것이다.
확실한 것은, 그 일이 지금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것뿐이다.

[설화의 파편, ‘전신(戰神)의 천적’이 ‘흉포의 군신’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이 세계선의 ‘헤라클레스’는 가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가짜’는 ‘진짜’가 되었고.
만들어진 설화는, 자신의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

완악한 아레스가 빠르게 허공을 선회한 순간, 창 역시 똑같은 속도로 허공을 선회했다. 수세에 몰린 아레스가 황급히 몸을 웅크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창은 그것조차 무시했다.

푸우우우욱!

끔찍한 피육음과 함께, 허벅지가 꿰뚫린 아레스가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저 위대한 12신좌의 하나, 전쟁의 신이 신혈(神血)을 떨어트리며 바다로 추락하고 있었다.

“제가 제압하겠습니다!”

[강철화]를 해제한 후 지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현성이 [태산 부수기]로 아레스의 화신체를 가격했고, 설화를 토하며 튀어 오른 아레스의 화신체를 초월의 격을 드러낸 유중혁이 짓밟았다.
정말, 타이밍 좋게 유중혁이 돌아와서 다행이었다.

“지구 쪽은 다 정리된 거야?”

유중혁은 대답이 없었다.
배틀 부츠에 짓밟힌 아레스가 표정을 일그러트린 채 몸부림쳤다.
하지만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허벅지에 박힌 창이 그의 격을 구속하고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설화는 그만큼 집요하고 완강했다. 적어도, 저 강력한 12신좌를 60번 시나리오에서 무력화시킬 정도의 ‘격’.
모두 12신좌들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었다.

[이, 이 헤파이스토스 같이 생긴 놈들이······!]

[성좌, ‘화산의 대장장이’가 인상을 찌푸립니다.]

나는 아레스의 머리 위에 떠올라 있는 적색 화살표를 보며,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꺼냈다.
이번 시나리오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올림포스> 측의 수장 둘을 처치해야 한다. 그리고 아레스는 그 둘 중 하나였다.
아마 눈앞의 아레스는 화신체이기에 정말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12신좌쯤 되면, 이 정도 급의 화신체를 상실하면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된다.
유중혁의 생각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시간이 없다······ 서두르면 살릴 수 있어. 넥타르(Nectar)가 필요하다.」

[흑천마도]를 아레스의 목에 겨눈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아레스, 넥타르를 가지고 있나?”

갑작스런 유중혁의 말에 당황한 것은 내쪽이었다.
······넥타르?
나도 그 아이템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베다>에 성유액 [소마]가 있다면, <올림포스>에는 [넥타르]가 있다.」

이 자식, 아직도 내공이나 강화 소체에 욕심을 내는 건가?
때마침 채널에 입장한 성좌들도 간접 메시지를 보내왔다.

[몇몇 성좌들이 채널에 입장합니다!]
[성좌, ‘흥무대왕’이 당신에게 경고합니다!]
[성좌, ‘외눈 미륵’이 당신에게 지구의 위기를······!]

삐이이잇, 하는 소리와 함께 간접 메시지가 일거에 사라졌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다들 입을 다물라고 경고합니다.]

문득 머리 위를 보니 비유가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바앗, 바앗······.]

―비유, 무슨 일이야?

하지만 비유는 대답이 없었다. 애써 내 눈을 피하는 모습.
모든 것이 미심쩍었다.
다른 도깨비도 아니고, 비유가 나한테 감추는 게 있다고?
그사이, 아레스가 입을 열었다.

[······네놈은 시간을 거스르는 존재. 불사의 축복을 받은 놈이 왜 ‘넥타르’를 필요로 하는 거지?]

“그런 것까진 대답할 의무가 없다. 다시 말한다. 넥타르를 내놔라.”

[네놈들의 동료 중 하나가 위험하다고 했지? 그래서 넥타르를 필요로 하는 거냐?]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아레스의 목을 살짝 파고들었다. 피슛, 하는 소리와 함께 흘러내리는 핏줄기. 핏줄기의 입자에는 적혈구와 백혈구를 대신해 그가 지금껏 쌓아온 설화들이 세밀히 흐르고 있을 것이었다.
아레스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지금 나한테는 없다. 하지만 내게서 이 ‘창’을 뽑아준다면 ‘청춘의 여신’을 찾아가 넥타르를 줄 수도······.]

“없나 보군. 죽어라.”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그대로 아레스의 심장에 꽂혔다. 아레스의 화신체가 희미한 빛을 뿜으며 산화하기 시작했다. 아레스가 자신의 화신체를 ‘시나리오’로부터 회수하고 있는 것이었다. 분노한 아레스가 외쳤다.

[이 빚은 반드시 갚겠다!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여!]

파스스슷, 소리와 함께 아레스의 화신체가 완전히 사라졌다.

[성좌, ‘흉포의 군신’이 전장에서 이탈합니다.]
[<올림포스> 측의 수장 중 하나가 시나리오를 포기하였습니다!]
[당신은 ‘흉포의 군신’을 물리쳤습니다!]
[전설급 설화, ‘전쟁의 신을 패퇴시킨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보상으로 400,000 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주요 공헌자 : 성좌 구원의 마왕, 화신 유중혁, 화신 이현성]

어마어마한 보상과 함께, 메시지는 계속되었다.

[기존의 <기간토마키아>에 새로운 설화가 추가됩니다!]
[‘흉포의 군신’의 화신체가 지니고 있던 아이템들 중 일부가 주요 공헌자에게 분배됩니다.]

이어지는 시스템 메시지에, 전장에 간접 메시지가 몰아쳤다.

[성좌, ‘바람의 원정왕’이 충격에 빠집니다!]
[성좌,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가 깜짝 놀랍니다!]
[성좌, ‘전능의 태양’이 자신의 눈을 불신합니다.]

전장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이아손을 비롯해 <올림포스> 진영에서 싸우던 영웅들도, 그들에 맞서 싸우던 기간테스들도. 심지어는 둘 중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고 전장을 지켜보던 이들도.
올림포스의 전신(戰神)이 시나리오를 포기했다는 사실은, 그만큼이나 커다란 충격이었다.

[하하하하하핫! 이번 <기간토마키아>는 정말 재밌구나!]

전장을 종횡무진하며 영웅들을 상대하던 장비가 진언을 내뿜었다.
유중혁은 그런 소란에도 아랑곳 않고 죽은 아레스의 잔해를 뒤졌다.

“······역시 넥타르는 없군. 헤베를 죽여야 하는 건가······.”
“유중혁 이 미친놈아!”

나는 유중혁의 멱살을 붙들고 소리쳤다.

“무슨 짓이지? 놓지 않으면 죽이겠다.”
“그렇게 바로 죽여버리면 어떡해? 협박해서 성유물 하나라도 더 얻어내야 할 거 아냐!”

물론 나도 아레스를 죽여야 한다는 것엔 동의했다. 하지만, 화신체를 볼모로 아이템을 하나라도 더 뜯어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렇게 한가롭게 굴 시간 따윈 없다.”
“‘넥타르’는 왜 구하는 건데? 그건 필요 없잖아? 어차피 <베다> 쪽에서 ‘소마’를 받기로 되어있었는데······.”

불길한 감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유중혁. 지금 지구는 어떻게 된 거지?”
“······.”
“설마 유상아 씨 상태가······.”
“지구는 무사하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기간토마키아>의 마무리에 집중해라.”

유중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직 전쟁은 끝난 게 아니니까.”

유중혁이 전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레스의 [헤라클레스]는 쓰러트렸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레스가 타고 있던 [헤라클레스]는 무수한 ‘거신병’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더럽게 많이 몰려오는군.”

쿠구구구구구!

이아손 호가 갈라놓은 바다의 길을 따라, 무수한 [헤라클레스]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양산형 [헤라클레스].

그 오랜 세월 동안, <올림포스>가 타 성운과의 전쟁을 대비해 준비해 놓은 거신병들이었다.

[거신 놈들을 찢어 죽여라!]

그들이 내뿜는 맹폭한 기세는 파도가 꺼진 지축을 흔들 정도였다.
이전이었다면, 그 기세에 겁먹은 거신들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경.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해방의 시간이다!]
[동지들이여! ‘헤라클레스’는 가짜였다!]

어느새, 포탈을 찢고 나온 이쪽의 또 다른 수장이 있었다.
브리아레오스.
백 개의 팔을 가지고 있던 그는 개연성의 영향으로 이제 오십 개의 팔만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 본연의 격은 대해에 맞설 만큼 경건했다.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마라! 이미 기록된 신화가 아니라, 이곳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을 믿어라!]

그의 진언에, 모든 거신들이 함성을 질렀다. 유중혁이 말했다.

“네놈이 신화를 바꿔버렸군.”

신화는 그것을 믿는 자들을 지배하는 힘이다.
헤라클레스는 <기간토마키아>의 주역. 그런데 그런 ‘헤라클레스’가 가짜였다는 사실을 안 이상, 해당 설화는 거신들에게 직접적 영향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츠츠츠츠츠츳!

흔들리는 무대화가, 바로 그 증거였다.
부서진 무대 위에 새로운 무대가 만들어진다.
찢어진 각본의 페이지 위에는, 또 다른 각본이 쓰일 것이다.
하지만 유중혁의 표정에는 조금의 여유도 보이지 않았다.

“저들이 끝이 아니다. 새로운 신좌들이 온다.”

아레스는 12신좌들 중 겨우 하나일 뿐.
‘원작’의 내용이 맞다면, 이곳에 참전할 12신좌는 최소 둘이 더 있었다.

하나는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인 아테나.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전능의 태양’ 아폴론.

유중혁이 망가진 플루토를 곁눈질했다.

“지친 네놈과 망가진 거신병으로는 신좌들을 상대할 수 없다.”
“너도 아직 12신좌와 일대일로 싸우긴 무리야.”
“해보지 않고선 모르지.”

말은 저렇게 하지만, 지금의 유중혁이 12신좌와 정면으로 맞부딪쳐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경우엔 꼼수에 운까지 따라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레스의 패퇴를 목격했으니 다른 신좌들도 전투 방식을 달리 해 올 거야. 자신의 격을 깎아 먹더라도, 개연성을 희생해올 가능성이 높아.”
“상관없다. 그 편이 더 할 맛이 나겠군.”
“너는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를 상대해. 혼자서는 무리일 테니까, 한 사람을 더 붙여줄게. 그럼 어떻게든 막을 수 있을 거야.”
“누굴 붙여준다는 거지?”
“곧 알게 될 거야.”

멀리서 허공을 격하고 날아오는 아테나와 아폴론이 보였다.
이 거리에서도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격’.
아레스전(戰)과는 확실히 다른 전투가 될 것이었다.
[흑천마도]를 고쳐쥔 유중혁이 물었다.

“‘전능의 태양’은 네놈이 상대할 건가?”
“그를 상대할 성좌는 따로 있어.”
“······네놈 꿍꿍이를 한 번 믿어보지.”

내 말과 동시에 유중혁이 창공으로 뛰어나갔다. 아름다운 선형을 남기며 사라지는 [주작신보]. 유중혁은 이제 완연한 초월의 경지를 누비고 있었다.
쐐애애액,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르는 [흑천마도].
정색한 아테나가 멈춰선 것과, 검붉은 마력의 충돌이 발생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비키세요. 아니면 죽습니다.]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 아테나.
<올림포스>의 지배자인 번개의 적통(嫡統)이자, <올림포스> 전역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전쟁의 신.

[신화에 조예가 있다면 알겠지만, 나는 아레스와는 다릅니다.]

같은 ‘전쟁의 신’이라도, 아레스와 아테나는 다르다.
양 신은 수많은 대리전(代理戰)을 치렀지만, 그 많은 대리전 중 한 번도 아레스는 아테나에게 승리한 적이 없었다.
아테나가 말했다.

[나는 당신들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내 목적은 거신들을 <타르타로스>로 돌려놓는 것뿐이에요. 하지만 계속해서 방해한다면―]

고결한 그녀의 표정에, 차가운 분노가 떠올랐다.

[정의의 이름으로, 그대를 단죄하는 수밖에 없겠죠.]

아테나는 자신이 한 말은 반드시 지키는 신.
그 신이 진심으로 창과 방패를 들었다면, 그 분노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올림포스> 전체를 뒤져도 거의 찾을 수 없다.

츠츠츠츠츳!

그때, 스파크와 함께 하늘에서 누군가의 진언이 들려왔다.

[아직도 그런 대사를 쓰는구나, 아테나. 같이 악마 ■가리 자르고 다닐 때도 그러더니······ 어째 변한 게 하나도 없네.]

나는 가까스로 숨을 돌리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아테나는 최강의 전투력을 가진 성좌들 중 하나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올림포스>에 한정된 이야기.

쿠구구구구구구!

「<올림포스>에 정의의 아테나가 있다면.」

허공에서 화려한 불꽃이 강림하며, 새로운 화신이 전장에 참가했다.
순정한 백색의 불꽃이 가라앉자, 그 안에는 내가 잘 아는 이가 있었다.

「<김독자컴퍼니>에는, 정희원이 있다.」

내가 가진 최강의 검이, 마침내 <기간토마키아>의 전장에 등장했다.

[오랜만이야, 아테나.]

새하얀 백색의 날개를 펼친 우리엘이, 정희원의 전신에 강림하고 있었다.





< Episode 62. 신의 천적 (5) > 끝

< Episode 62. 신의 천적 (6) >





새하얀 격을 내뿜는 정희원은, [심판자의 검]으로 아테나를 겨눴다.
아테나가 말했다.

[우리엘······. <에덴>이 온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난 <에덴>의 자격으로 참전한 게 아냐.]
[그럼?]
[내 화신을 돕는 것뿐이지.]

우리엘이 계속해서 말했다.

[아테나. 여기까지 해. <올림포스>도 그만하면 많이 해먹었잖아? 대체 언제까지 <기간토마키아>를 우려먹을 셈이야? <관리국>이라도 만들 참이냐?]
[우려먹다니. 말이 심하네, 우리엘. 우리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설화를 기억시키려는 것뿐이야. 선은 승리하고, 악은 패배한다. 그건 몇 번이나 강조해도 옳은 일이야.]
[권선징악이라······.]
[선한 설화가 늘어날수록, 성좌들은 선한 시나리오를 소비할 거야. 그럴수록 <스타 스트림>은 청결해지겠지.]

그 말을 듣는 순간만큼은 우리엘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선한 설화, 선한 시나리오를 많이 수행하면 세상은 좋아질 것이다.
분명, 그렇게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 <스타 스트림>이 좋아졌어? 성좌들이 선한 설화를 좋아하게 되었나?]
[지금은 충분치 않지. 하지만 언젠가는―]

펄럭, 하고 천사의 날개가 움직였다.

[아테나, 너는 주로 약자의 편이었지.]

우리엘의 시선이 지상에서 싸우는 거신들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거신, ‘파천검성’을 보고 있었다.

[묻겠다,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여.]

우리엘의 말투가 바뀌자, 아테나의 표정도 엄격해졌다.

[저 ‘거신’은 악인가?]

아테나는 거신 파천검성을 내려다보았다.
달려드는 영웅들을 쳐내고, 하늘을 부수는 파천유성우의 검결이 성좌들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파천검성은 작았지만 강했다. 어쩌면, <타르타로스>에서 나태해져 있던 그 어떤 거신보다도 강했다.
하지만, 그녀도 처음부터 강했던 것은 아니었다.

「저리 가! 저리 꺼지라고! 재수 없는 년!」
「저주받은 년! 네년 때문에 우리 집안이 망했다!」
「거신의 핏줄이다. 저년의 심장을 먹으면 호랑이 같은 힘이 생긴다더군.」

파천검성이 받던 핍박들이, 고스란히 설화가 되어 아테나의 두 눈에 흘러들어왔다.
거신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혹은 남과는 다른 생김새를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짊어져야 했던 고난.
아테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거신들은 모두 위험하다. 그들의 본성은 흉포하고, 또다시 끔찍한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어.]
[재앙? 그 재앙은 누구에게 위험한 것이지?]

아테나가 자신의 창을 굳게 쥐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우리엘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당연히 인간에게······.]
[인간? 언제부터 <올림포스>가 인간을 신경썼어?]
[우리엘! 말을 조심하는 게 좋을―]
[아테나, 너도 알고 있잖아.]

반쯤 벌어졌던 아테나의 입이 닫히고, 우리엘이 계속해서 말했다.

[지금 네가 하려는 ‘권선징악’은 가짜야. 임의로 ‘악’을 지정하고, 그것을 심판하며 ‘선’이 되기 위한 ‘가짜 신화’라고.]

아테나의 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가짜면 어때? 설령 가짜라도······.]
[아테나, 잊었어? 권선징악의 시나리오가 사라지기 시작한 건, ‘가짜’의 횡행 때문이었잖아.]

‘악마 사냥’ 당시를 떠올리는 듯, 우리엘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테나. 지금 이 시나리오에는 ‘선’도 ‘악’도 없어. 이야기를 보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망만이 있을 뿐이지.]

우리엘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하늘에서 서광이 비쳤다.

[나는······ 이제 이런 이야기는 보고 싶지 않아.]

대천사 우리엘이 <스타 스트림>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진짜 악’을 부수는 것을 보고 싶어.]

아테나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며 흘러나왔다.

[······그런 설화는 오래전에 사라졌어.]
[아니, 있어.]

하얗게 웃는 우리엘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게, 내가 여기 온 이유야.]

[심판자의 검]과, 아테나의 창이 서로를 가리켰다.

[더이상 타협의 여지는 없겠네.]

<에덴>의 대천사와 <올림포스>의 여신이 충돌했다.
개연성을 넘어선 격을 내뿜는 아테나의 맹공.
정희원은 얼핏 밀리는 듯했지만, 곧 유중혁의 참전으로 인해 상황은 비등해졌다.
우리엘의 동조율이 지속되는 동안이라면, 저 아테나를 붙들어 놓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성좌들의 혈투에 즐거워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싸우다 둘 다 죽어버리기를 원합니다!]
[‘절대 악’ 계통의 성좌들이 ‘절대 선’ 계통 성좌들의 충돌에 환호합니다!]

엄청난 관람료가 비유의 채널을 통해 쏟아지고 있었다.
비유가 작게 몸을 떨었다.

[바앗······.]

나는 하늘의 반대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문제는, 저기 날아오는 시뻘건 녀석인데.
붉은 태양을 등에 업은 채, 마차를 타고 달려오는 거대한 신좌의 모습.

‘전능의 태양’ 아폴론.

과연 신화대로, 멀리서 봐도 아주 잘생긴 얼굴이었다.
저 정도면 유중혁 뺨을 한 대······ 아니, 두 대도 칠 수 있겠는데.

[성좌, ‘전능의 태양’이 당신에게 강렬한 분노를 토합니다!]

<올림포스>의 12신좌 중 하나인 그는, 역시나 나 혼자서 상대하기엔 무리였다. 거신병 플루토도 망가진 데다, 아까 무리를 해서 몸 곳곳이 성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저 녀석이 쏘아대는 볕을 한두 번만 정통으로 맞아도, 내 화신체는 그대로 잿가루가 되어버리겠지.
하지만 나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전능의 태양’을 맡을 상대는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멀리서, 기관차의 경적 같은 것이 들렸다.
궤도를 달리는 열차의 바퀴 소리.
한때는 저 소리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성좌, ‘전능의 태양’이 당황합니다.]

<올림포스>에 12신좌가 있다면, <베다>에는 여덟 명의 로카팔라가 있다.
그리고 나타난 저 로카팔라는, 내가 아주 잘 아는 성좌였다.

[수르야, 어째서 당신이 이곳에―!]

꽈아아아아앙!

태양 마차와 태양 열차가 부딪치며, 눈이 멀 듯한 폭발을 만들어 냈다.
개연성을 고려한 것인지 수르야의 열차는 예전의 그것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아폴론의 마차를 작살낼 정도의 크기는 되었다.

[수르야······. 이것을 <베다>의 뜻으로 받아 들여도 되겠는가?]
[<베다>와는 관계없다. 얼마 전 탈퇴했으니까.]

수르야가 웃었다.

[나는 그저, 최고의 ‘태양신’을 가리기 위해 이곳에 왔다.]

작렬하는 태양빛이 허공을 물들였다.
수르야와 아폴론의 대결.
아폴론의 빛의 힘을 담은 화살이 폭포처럼 창공을 수놓았고, 수르야의 [제3의 눈]이 그 화살들의 궤적을 흐트러트렸다. 신화와 신화가 충돌하고 있었다.

수르야라면, 아폴론을 맡겨도 충분하겠지.

나는 나머지 전황을 살폈다.

“독자 씨! 새 방패가 아주 마음에 듭니다!”

헤라클레스의 방패를 손에 넣은 이현성은 전장을 종횡무진하며 영웅들과 거신병들을 넘어뜨리고 있었고, 한수영도 적당히 마력 자원을 관리하며 양산형 헤라클레스들을 하나둘 처리하고 있었다.

「무대화」가 붕괴하기 시작하자, 승세는 조금씩 우리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힘을 낸 기간테스들이 영웅들을 밀어붙였고, 이길영과 신유승이 [키메라 드래곤]을 조종하여 해변의 일대를 브레스의 불바다로 만들었다.
이지혜는 추가로 다가오는 양산형 헤라클레스를 향해 끊임없이 함포를 발사하고 있었다. 이날을 대비해 이지혜의 마력 능력치를 상승시켜두었던 것이 아주 주효했다.

[<기간토마키아>에 새로운 신화의 출현이 예고되었습니다!]

<김독자 컴퍼니>의 신화는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있었다.
모두가 잘 싸우고 있었고, 틀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김독자는 이상하게 불안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예감이었다. 아주 미묘한 톱니바퀴 하나가 잘못 끼워진 듯한 느낌. 침착하게 점검해 보아도 잘못된 것은 없었다. 우리엘도, 수르야도 제때 참전했고 유중혁도 지구의 위기를 무사히 막아내고 돌아왔다.

그런데 왜.

「사실, 김독자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없다.

「어디를 둘러 보아도.」

내가 찾는 존재가 없었다.
아테나, 이아손, 아폴론, 아킬레우스······.
<올림포스>에서 이름을 날린다는 신좌와 영웅들이 난립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올림포스> 측의 수장은 아니었다.

시나리오의 내용이 맞다면, 아레스를 제외하고도 ‘수장’은 하나가 더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를 죽여야, 이 시나리오는 끝이 난다.

어쩌면 아직 나타나지 않은 ‘화산의 대장장이’ 헤파이스토스가 마지막 수장이 아닐까 싶었지만, 원작에도 수정본에도 ‘헤파이스토스’가 <기간토마키아>에 직접 참전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올림포스> 측의 남은 수장이라는 걸까.

「그 순간, 김독자의 눈에 띈 한 영웅이 있었다.」

[멈추십시오! 그만두셔야 합니다!]

나는 그 영웅을 바라보았다.
현기가 가득한 두 눈동자에, 아름답게 다져진 근육질의 몸매.
그에게서 풍기는 ‘격’은, 내가 유상아에게서 줄곧 느껴왔던 그것이었다.

‘미궁의 영웅’, 테세우스.

[이런 싸움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테세우스가, 싸움을 말리고 있었다.

[여기서 그만둬야 합니다! 거신들도, 신좌들도,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짓은 <올림포스>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단 말입니다! 아테나시여! 아폴론이시여! 다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역대 <기간토마키아>에서 테세우스가 나타나 저런 기행을 벌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성정이라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제발! 멈추십시오! 이대로는 <올림포스>가······!]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테세우스의 머리 위에 적색 화살표가 떠올랐다.
그가 <올림포스> 측의 ‘수장’임을 알리는 화살표였다.
그때, 테세우스가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이, 이건······ 안돼, 안됩니다. 안됩니다, 아버지!]

츠츠츠츠츠츳!

뭔가가 잘못되었다.


*


<관리국>의 소파에 앉아 시나리오를 지켜보던 디오니소스는 벌떡 일어났다. 팝콘 상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놀란 비형이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디오니소스가 외쳤다.

[망할! 테세우스 저 자식이 왜 저기 있어!]

디오니소스는 도깨비들을 향해 소리쳤다.
마치, 자신이 ‘도깨비 왕’이라도 된다는 듯이.

[빨리 「개연성 적합 심사」 준비해. 아니면 저 시나리오에 있는 놈들 다 뒈져 버린다고!]

그리고 다음 순간, 화면 속에서 폭발이 발생했다.


*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귓가에 쉴 새 없는 이명이 밀려왔고, 시야가 완전한 백색으로 물들었다.
거기까지가 기억의 전부였다.
나는 폭발에 휘말려 드높은 파도와 암벽을 뚫고 한 절벽의 동굴에 처박혀 있었다.

[당신의 ‘격’이 심각하게 손상되었습니다.]
[화신체의 손상이 심각합니다. 긴급한 치료를 요합니다!]

상처를 점혈하고, 빠져나가는 설화를 막았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해안 동굴 바깥을 보았다.
피바다로 넘실거리는 전장. 간간이 밀려온 포말이 발끝에 닿았고, 비린 바닷바람이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전장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드래곤을 타고 하늘을 날던 신유승과 이길영도.
유령 함대를 지휘하던 이지혜도.
분전하던 이설화와, 방패로 일행들을 지키던 이현성도.

“유승아! 길영아!”

창공에서 아테나와 맞서던 유중혁과, 양산형 헤라클레스를 학살하던 한수영까지.
심지어는 우리엘과 수르야의 모습마저 보이지 않았다.

“한수영! 유중혁!”

내 외침은, 밀려온 바닷바람에 의해 동굴 내부의 메아리로 공허하게 맴돌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 잠시 후, 부연 물안개 속에서 거대한 뭔가가 일어났다.
인간의 인지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격을 품은 존재.
그것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생각했다.

저것은 신(神)이다.

마치 내가 지금껏 보아온 모든 성좌들은 가짜였다는 듯.
‘신’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존재가 그곳에 강림해 있었다.

[나는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 포세이돈.]

<올림포스>의 대영웅, 테세우스의 신화적 아버지.

진언이 울려 퍼진 것만으로, 심장이 진탕되고 피가 쏟아져 나왔다.
오래전, ‘이계의 신격’을 만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중풍이라도 걸린 것처럼 손끝이 떨려왔다.

어째서 포세이돈이 강림한 거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껏 그 어떤 회차에서도 ‘포세이돈’이 <기간토마키아>에 개입하는 일은 없었다. 무려 ‘신화급 성좌’인 그가 개입하면, 올림포스의 개연성과 격이 크게 손상될 뿐아니라 시나리오 전체가 날아가 버리니까.
그런데도, 그는 이곳에 나타났다.
대체, 어떻게······ 무슨 생각으로. 손은 계속해서 떨렸다.

위이이잉.

그러나 그 떨림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무의식중에 꽉 쥐고 있었던 스마트폰이,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 Episode 62. 신의 천적 (6) > 끝

< Episode 63. 신화의 종말 (1) >





Episode 63. 신화의 종말


「(너 그대로면 죽어)」

덜덜덜 떨리는 스마트폰의 화면.
간간이 밀려오는 해일을 발끝으로 느끼며, 나는 스마트폰을 들어올렸다.

「(원래 4차 수정본이 전송됐어야 하는데······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네)」

나는 이것이 누구의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제4의 벽] 안, 도서관의 사서들.
아마도 이걸 보낸 이는 니르바나일 것이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이 정도야. 하다못해 일부만이라도)」

가벼운 방해 전파와 함께, 액정 위로 문장들이 우수수 떠올랐다.
마치, 책의 내용을 중간중간 요약한 것 같은 문장들이었다.

.
.

「또 이곳인가······.」

누구의 독백인지 너무나 명확한 문장들.
분명, ‘4차 수정본’의 내용이었다.

「3회차에서는 실책이 너무 많았다.」
「포세이돈의 출현은 예상 밖이었어.」
「개연성 문제를 더 생각했어야 했나.」
「신화 간의 관계성을 더 고려했어야······.」

언제나 그랬듯, 또 후회로 가득 찬 문장들.
아마 네 번째 수정본에서도 우리는 실패한 모양이었다.

「만약, 그때 유상아가 아니라 이수경을 살렸더라면······.」

.
.

······뭐?
나는 액정의 스크롤을 내리다 말고 빳빳이 굳었다.
화면에 번개가 치더니 이내 흘러가던 문장들이 모두 지워졌다.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잠깐, 잠깐만! 다시 보여줘! 방금 그게 무슨 말이야?”

문장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김독자, ‘운명’은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입다 물 어 니르 바 나」

츠츠츠츠츳!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니르바나의 목소리를 저지하는 [제4의 벽]의 힘.
문장들은 사라졌고, 빠르게 뛰던 심박은 급격하게 진정되었다.
초조하게 달아올랐던 머릿속이 정교하게 움직이는 시계처럼 차가워졌다.

이 침착함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노하고 싶을 때 분노할 수 없고.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할 수 없는 이 감정이.

“제4의 벽.”

[‘제4의 벽’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솔직하게 말해. 내 어머니가 위험한 거냐?”

[제4의 벽]은 답이 없었다.
······제길, 나는 가끔 이 녀석이 내 편인지 아닌지 모호할 때가 있다.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비유.”

[······바앗.]

투명한 몸체로 나타난 비유가 슬픈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뭐라고 입을 열려다, 도로 다물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흔들립니다.]

눈을 내리깐 비유가 울먹거리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혼란스럽던 퍼즐의 일부가 삐걱거리며 맞춰지고 있었다.
지나치게 빨리 돌아온 유중혁과, 뭔가를 숨기던 녀석의 표정.
어쩐지, 뭔가가 이상하다 싶었다.
성좌들이 내게 이상한 메시지를 보냈던 것도, 돌아온 유중혁이 ‘넥타르’를 집요하게 찾았던 이유도.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이 친구야. 네 어머니 아직 안 죽었으니까 걱정 마.]

목소리는 뒤쪽에서 들려왔다.

[······쯧, 누설하면 안 되는 정보였는데.]

작은 스파크와 함께 어둠에서 나온 이는,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성좌였다.

“디오니소스.”

[오랜만이야. 직접 보는 건 지난 연회 이후로 처음인가?]

성큼성큼 내 곁으로 다가온 디오니소스는 개연성으로 인해 새카맣게 탄 왼손을 탈탈 털며 해안 동굴의 바깥쪽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이 해역 전체를 지배하는 <올림포스>의 3대 주신 중 하나가 서 있었다.

해신(海神) 포세이돈.

포세이돈은 움직임이 없었지만, 그의 저변에는 무척이나 불길한 정적이 맴돌고 있었다.
계기를 기다리는 포식자처럼, 포세이돈의 눈이 대해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자신의 해역인지를 확인하듯이.

[방금 「개연성 적합 심사」가 시작돼서, 저 아저씨도 함부로 못 움직일 거야. 그래도 경거망동하진 마. 아찌가 널 열심히 찾고 있거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치곤 제 옆에서 너무 진언을 남발하시는데요.”

[일단은 내 권능으로 여길 감추고 있는 상태니까 괜찮아. 안 들려 안 들려.]

잘 보니 해안 동굴의 입구에는 엎어 높은 와인 잔 같은 결계가 쳐져 있었다. 아마 이 결계가, 디오니소스와 나를 숨겨주고 있는 것이리라.
디오니소스는 포세이돈을 보며 말을 이었다.

[대단하지? 3주신의 위용이란······ 저게 바로 ‘신화급 성좌’야. 평범한 성좌들은 평생에 걸려도 도달하지 못할, 드높은 별자리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별.]

확실히,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저 ‘포세이돈’이라면, 언젠가 마계를 멸망시켰던 이계의 신격― ‘더 네임리스 미스트’의 분신도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창이 닿는 곳이, 곧 해역의 경계가 되리니」

포세이돈의 시선이 닿는 곳이 곧 바다가 되고 있었다. 바다에 있는 모든 산 것들이 그의 숭고 앞에 전율했고, 엎드렸으며, 어쩌면 저지르지도 않았을 잘못을 빌고 있었다.
심장 깊은 곳이 울렁거렸다.

[······넌 정말 대단하구나.]

“뭐가 말입니까?”

[저 아저씨를 보고서도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어. 어째서지?]

물론, 나도 두렵다.
다리가 떨리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하지만 그 보다도.

「김독자는, 진심으로 감동하고 있었다.」

나는 한참이나 포세이돈의 위용을 감상하다가 대답했다.

“제 상상보단 못해서요.”

[상상? 하핫, 역시 넌 재밌는 녀석이야.]

“왜 날 돕는 겁니까? 당신은 <올림포스>일 텐데.”

[거야 내 마음이지.]

“다른 일행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따악, 하며 디오니소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화면 하나가 나타났다.
아주 까마득한 상공에 일행들이 모여 있었다.
[아리아드네의 실]에 묶인 채, [헤르메스의 산책법]으로 허공을 부유하고 있는 일행들. 누락 된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설화급 성좌인 우리엘과 수르야도 물론 무사했다.
실로 영리한 도피가 아닐 수 없었다.
하늘은 제우스의 영역.
아무리 포세이돈이라도, 해역의 경계를 하늘에 그을 수는 없다.
디오니소스가 술잔을 홀짝이며 말했다.

[안심하라고. 아무도 안 다쳤어. 때마침 헤르메스랑 아리아드네가······.]

“한 대 쳐도 됩니까?”

[······누구를?]

나는 말 없이 디오니소스를 노려보았다.

[나를? 왜?]

“몰라서 묻습니까?”

눈치 빠른 디오니소스가 재빨리 답했다.

[아, 그 화신 때문이구나. 그래, 미안하게 됐어. ······원한다면 쳐도 좋아. 대신 좀 살살 쳐줬으면······ 너도 이제 성좌니까 꽤 아플 거 아냐.]

나는 때리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왜 하필 유상아 씨였습니까?”

[······이야기하자면 복잡해.]

해안 동굴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디오니소스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가 말을 고르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더 걸렸다.

[이번 세계선에, ‘모이라이 3자매’의 특이한 예언이 내려왔었어.]

“특이한 예언?”

나를 흘끗 본 디오니소스가 그리스 시대의 연사처럼 대답했다.

[곧 ‘모든 것의 종말’이 찾아올 것이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도 몰라. 확실한 건, <올림포스>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거였지. 그것 때문에 한동안 <올림포스>도 바빴어. 모든 시나리오는 언젠가 종말을 맞이하게 되겠지만, 대체 어떤 식으로 종말이 오는지는 알아야 했거든.]

디오니소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예언된 ‘종말’과 관련된 특이점을 몇 가지 찾아냈어. 개중의 하나가 너와 함께 있는 그 ‘회귀자’였지.]

“유상아 씨는 유중혁에 대한 감시책이었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그래.]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꾹 참았다.
아직 디오니소스의 말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녀석을 감시하던 중, 우리는 ‘너’의 존재를 알게 되었지.]

“······.”

[운명에 저항하고, 성좌를 증오하며, <스타 스트림>을 믿지 않는 화신. 배후성을 고르지 않고 스스로 성좌가 되었으며, 심지어 어떤 성좌도 그 정체를 들여다볼 수 없는 존재.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특이점’이었지. 널 발견하고, 우리는 결심했어.]

디오니소스가 웃었다.

[너를 숨기고, 너를 이용하기로.]

그의 말투 곳곳에 희미한 설화의 잔재가 묻어 있었다.
지금껏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몇몇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처음 옥수역에서 펼쳐졌던 짝수 다리―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리고 내가 위험해 빠질 때마다 나를 도왔던 개연성들.

[우린 너를 ‘멸망을 막을 단초’로 쓰고 싶었다. 그래서 그 유상아란 화신을 이용해 너희를 돕고 싶었어.]
[아레스가 했던 말이랑은 다르군요. 그 녀석은 절 없애고 싶어하던데요.]
[12신좌들은 이미 내분 중이야. 너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디오니소스의 전신에서, 황금빛 아우라가 솟아났다. 그것은 저 하늘의 왕, 제우스의 혈통만이 가질 수 있는 웅장한 격이었다.

[지금의 <올림포스>는 가짜야.]

마치 신하를 굽어보듯, 디오니소스의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인간의 제사장들이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신을 창조했듯, 올림포스의 신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신화를 창조했지. <기간토마키아>나 <헤라클레스> 같은 가짜 신화들을······ 그리고 그 결과가 이거야.]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는 이런 시대를 끝내고 싶어. 그리고, 새로운 <올림포스>를 만들고 싶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반응합니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설화가 그의 설화에 반응하고 있었다.
눈앞의 디오니소스는, 훗날 제우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될 후보 중의 하나였다.

[아무튼 계획은 그랬는데······ 저 생선 아저씨까지 출몰한 마당이니,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겠네. 아마 시나리오는 이대로 끝나게 될 거야.]

「개연성 적합 심사」가 시작되었다면, 높은 확률로 이번 시나리오는 무산될 것이다.
참가자들에겐 공헌도에 따른 적절한 보상이 돌아가겠지만, 이번 <기간토마키아>는 없었던 일이 되고 말겠지.
아마도 포세이돈도 그 효과를 노리고 무리한 것일 터다.
자신의 격과 성운의 개연성을 희생해서라도, 그는 이 <올림포스>를 지키려는 것이다.

“아뇨, 아직 할 수 있는 게 남았습니다.”

[뭐?]

“이번 시나리오로 <올림포스>를 전복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신, 제가 도와드리는 대가로 ‘넥타르’를 좀 나눠 주십시오.”

[······넥타르? ······마침 조금 갖고 있기는 한데.]

나는 디오니소스에게서 넥타르를 빼앗았다. 그리고 개중 몇 방울을 찍어 혀에 가져다 대었다.

[처음으로 ‘성유액’을 섭취하였습니다!]
[성유액 ‘넥타르’가 당신에게 반응합니다!]
[<올림포스>의 개연성이 당신의 망가진 화신체를 수복합니다!]
[당신의 모든 능력치와 스킬 이해도가 소폭 상승하였습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성유액의 힘인가.
평균 능력치 200을 상회하는 나조차 상승 효과를 받을 정도라니.
남은 ‘넥타르’를 품속에 갈무리하는 나를 보며, 디오니소스가 물었다.

[야, 너 아까 한 방에 나가떨어진 거 잊었어? 근데 또 싸우겠다고?]

“도와주실 겁니까?”

[미쳤어? 내가 도와도, 아니······ 12신좌 절반이 도와도 상황을 바꾸는 건 무리야. 너 생선 아저씨가 얼마나 강한지 몰라?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거야? 이 시나리오의 끝은 이미―]

“‘시나리오’의 끝은 정해져 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거신 브리아레오스는 말했다. [운명]은 피해갈 수 없다고.
전신 아레스도 말했다. 시나리오는, 결국 예정된 인과의 전개일 뿐이라고.
그래, 맞다. 어쩌면 그들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끝이 정해져 있으면, ‘과정’에는 의미가 없습니까?”

[의미야 있겠지. 하지만 그건 낭만론이야.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설화’로 기록될 뿐이라고.]

“실패한 설화는 모두 의미가 없는 겁니까? 실패할 것을 알아도, 끝까지 싸워낸 존재들의 설화는, 가치가 없습니까?”

[성좌들이야 그런 설화를 좋아하겠지. 하지만 그런 짓을 하는 존재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어.]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런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 설화를 보고 영향을 받은 누군가가, 다시 똑같은 설화에 도전한다면.”

디오니소스가 입을 다물었다.

“열 번을, 백 번을, 천 번을. 그렇게 수많은 성좌들이, 화신들이, 그 설화에 영향을 받아 다시 그와 같은 이야기를 살게 된다면.”

비록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고 해도, 그 수많은 존재들이 주어진 [운명]과 맞서기 위해 몇 번이고 용기를 내는 이야기가 쌓인다면.
그 도전을 보고 또 다른 방식으로 도전하는 ‘설화’들이 쌓인다면 어떨까.

“그때도, 실패한 설화는 무용한 것일까요?”

「무대화」는 절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 신화 또한, 그저 만들어진 것일 뿐이기에.

디오니소스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결국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란 ‘많은 존재가 원하는 흐름’을 향해 흘러가는 법이다.
많은 존재가 원하는 이야기는, 언젠가 반드시 실현되게 마련인 것이다.
간신히 입을 연 디오니소스의 목소리가 묘하게 격앙되었다.

[그래서, 네가 그 처음이 되겠다는 거냐? 네가 그 첫 희생양이 되어, 시나리오 전복의 횃불이 되겠다?]

“아뇨.”

나는 웃었다.

“저는 그 마지막 횃불이 될 겁니다.”

[뭐?]

“이미 저보다 앞서서 무수히 실패했던 녀석이 있으니까요.”

나는 알고 있다.
저 포세이돈을 해치우기 위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달려들었던 존재를.
그러니까······ 지금, 저 포세이돈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존재······.

이런 젠장.





< Episode 63. 신화의 종말 (1) > 끝

< Episode 63. 신화의 종말 (2) >





설화급 성좌들조차 슬금슬금 피하는 포세이돈의 거체를 향해, 기세등등하게 달려가는 유중혁.
디오니소스가 물었다.

[······혹시 저 미친놈을 믿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시켰다.
유중혁의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밀려왔다.

「기회는 ‘개연성 적합 심사’가 진행되는 지금뿐이다.」
「포세이돈은 신화급 성좌. ‘무대화’를 통해 제압할 방법은 거의 없다.」
「그나마 쓸 만한 것은 이 나뭇가지겠지.」

나는 유중혁의 손에 쥐어진 나뭇가지를 눈여겨보았다.

[성좌,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가 흠칫 놀랍니다!]

아마도, 저 나뭇가지는 여신 아테나에게 훔친 성유물인 듯했다.
엄밀히 말하면, 성유물이라기도 뭐하지만.

[아테나의 올리브 나뭇가지]

포세이돈이 무서운 이유는, 저토록 오랜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패배 설화’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포세이돈도 딱 한 번 진 적이 있으니, 그것이 여신 아테나와 했던 내기에서였다.
언젠가 유상아에게서 들은 기억이 있었다.

―오래전, 한 도시를 두고 포세이돈과 아테나가 경합을 벌인 적이 있어요. 사람들은 더 이로운 선물을 주는 신을 그 도시의 수호신으로 삼기로 했죠. 이때 포세이돈은 삼지창으로 바위를 쳐서 바닷물이 솟아나게 했고, 아테나는 풍부한 열매를 맺은 올리브 나무를 자라게 했대요.
―바닷물이야 흔했을 테니······ 아테나가 이겼겠군요?
―네, 아테나는 경합에서 승리해 수호신이 되었고, 도시의 이름은 <아테네>가 된 거죠. 앗······ 죄송해요. 제가 너무 말이 많았죠? 독자 씨는 판타지 전문가셔서 이 정도쯤은 알고 계셨을 텐데······.
―······.

물론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유상아처럼 신화에 박식하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저 망할 유중혁은, 그 설화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주 약간의 타격이라도 좋으니, 생채기라도 낼 수 있다면.」

······[올리브 나뭇가지]라.
그것도 패배 설화라면 패배 설화겠지. 나뭇가지에 찔린 포세이돈이 바닷물을 조금 토하는 정도의 효과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성좌,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가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유중혁의 선택도 영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개연성 적합 심사」에 의해 시나리오가 강제로 종료될 거라면, 약간이나마 포세이돈에게 피해를 주고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운만 좋다면 「해역의 경계를 약간 바꾼 자」라든가, 「대해의 주인에 맞선 자」 따위의 설화를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

······어디까지나, 운이 좋을 때의 얘기지만.

나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도약 준비를 했다.
그런데 디오니소스가 내 어깨를 짚었다.

[가지 마. 죽어.]

“예?”

디오니소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개연성 적합 심사’가 종료되었습니다!]
[해당 시나리오의 개연성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나는 허공에서 쏟아지는 시스템 메시지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가 연달아 쏟아졌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관리국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욕설을 내뱉습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관리국의 판단에 의혹을 품습니다!]

놀란 것은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 터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60번대 시나리오에 신화급 성좌가 나타났는데, 개연성 적합 심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쿠구구구구!

천천히 올라간 포세이돈의 손에 거대한 삼지창이 쥐어져 있었다.

성유물 ‘트리아이나(Triaina)’.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자, 창극에 닿는 모든 것을 바다의 피거품으로 만들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무기.

“유중혁!”

뒤늦게 결계에서 빠져나온 내가 외쳤으나, 이미 유중혁은 포세이돈의 코앞에 있었다.

아무리 유중혁이라도, 저 일격을 받으면 즉사다.

참지 못한 나는 디오니소스를 뿌리치고 [바람의 길]을 발동했다.
하지만 유중혁은 너무 멀리 있었고, 트리아이나의 창극은 가까웠다.
허공에서 낙뢰처럼 개연성의 스파크가 쳤다. 그 반동으로 유중혁의 신형은 자연히 뒤쪽으로 밀려났다. 검은 아우라와 함께 온화한 봄의 향기가 퍼졌다. 누군가가 포세이돈의 앞을 막고 있었다.

[포세이돈, 왜 애들 싸움에 끼어드는 거죠?]

스파크가 사라진 자리에, 고운 자태의 여신이 있었다.
쥘부채로 반쯤 얼굴을 가리고, 검정색 실크 케이프로 전신을 두른 신. 그녀의 얼굴이 낯설었기에,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디오니소스가 비명을 질렀다.

[아니, 저 아줌마가 왜 저기에!]

가장 어두운 지하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눈부심이, 포세이돈의 창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페르세포네.]

바다 전체가 분노하듯, 매서운 바닷바람이 그녀의 옷깃을 흔들었다.
흘끗 내 쪽을 보는 페르세포네가 미소를 지었다.
고마운 일이었지만, 나로서는 심경이 복잡했다.

왜 페르세포네가 나타난 거지?
<명계>는 이 일에 직접 개입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설마······ ‘거대 설화’의 일부를 가져가기 위해서인가?
그런 짓을 하면 일이 굉장히 복잡해질 텐데?

[페르세포네, 어째서 짐의 앞을 막은 것이냐?]
[여기까지만 하시라는 말씀을 드리러 온 거예요. 보세요, 너무 과하잖아요. 폐하의 백성들이 모두 겁에 질렸습니다.]

페르세포네가 가리킨 바다 위에서, 수많은 생명체들이 떨고 있었다. 그의 격을 맞이한 것만으로도 배를 까뒤집고 죽어간 수생종(水生種)들. 공포에 떠는 크라켄을 비롯해, 2급 이상의 거대 괴수종조차 미동도 없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성좌, ‘순결한 달빛의 수호신’이 애꿎은 생명체의 죽음에 개탄합니다!]
[성좌, ‘사랑과 미의 여신’이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을 만류합니다.]
[성좌, ‘화로와 자애의 여주인’이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을 말립니다.]

기어이 중립을 지키던 성좌들까지 포세이돈을 만류하고 나섰다.
페르세포네가 말을 이었다.

[신화급 성좌인 당신이 나설 무대가 아니에요. 애들 싸움은, 부디 애들한테 맡겨 두세요.]
[더이상 애들 문제가 아니다.]
[애들 문제가 아니라뇨?]
[내 아들이 공격을 당했다.]

실제로 포세이돈이 강림한 테세우스의 왼팔에는 작은 화살촉이 꽂혀 있었다.
페르세포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그럼 테세우스를 공격한 이만 단죄하시면 되겠군요. 그가 누구인지는 알아냈나요?]
[보나마나 거신이겠지.]
[그건 모르는 일이죠.]
[거신은, 모두 죽일 것이다.]

너무나 완고한 그 태도에, 저 용맹한 기간테스들조차 겁에 질려 몸을 떨고 있었다.

[깊은 지하에 숨어 살던 버러지들아. 너희는 오늘 지상에 나온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쿵, 하고 내려찍은 트리아이나의 힘에, 근처에 있던 생명체들이 물거품이 되어 흩어졌다. 하지만 페르세포네는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슬슬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그녀가 ‘명계의 여왕’이라 해도, 신화급 성좌인 포세이돈을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켜라. 아무리 네가 내 동생의 아내라도, 비키지 않으면 죽이겠다.]

아찔한 위협에도 페르세포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포세이돈의 트리아이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빛이 움직였고, 허공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아테나와 아폴론이 날아들었다.

[안 됩니다, 포세이돈!]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시여!]

그러나 이미 늦었다.
파도가 치는 순간, 포세이돈의 창은 이미 페르세포네의 심장에 꽂혀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창을 받아낸 것은 페르세포네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손이었다.
엄청난 밀도의 어둠으로 만들어진 손이, 포세이돈의 트리아이나의 창극을 한 손으로 잡아 쥐고 있었다.

콰드드드드.

내 생애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환한 개연성의 향연.
나는, 어째서 관리국이 「개연성 적합 심사」를 그대로 통과시켰는지를 이해했다.
디오니소스가 입술을 떨며 웃었다.

[하하······ 오늘 잘못하면 12신좌들 다 죽어나게 생겼네.]

허공에 풀려나는 아득한 어둠의 설화.
오랜 세월 침묵을 지켜온 암흑이 깨어나고 있었다.

[거대 설화, ‘명계’가 대해(大海)를 오시합니다.]

<올림포스>의 3주신 중 하나, ‘부유한 밤의 아버지’.
명왕 하데스가, <기간토마키아>에 강림했다.

[포세이돈. 기어이 애들 싸움을 어른들 싸움으로 만드는구나.]

‘멸살법’의 원작에서도, 몇 번인가 신화급 성좌들이 싸운 적이 있었다.
하지만 ‘멸살법’의 고작 60번대 시나리오에서 그런 적은 없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75번째 시나리오에서 <올림포스>의 포세이돈과 <베다>의 시바가 부딪쳤을 때, 북미 전체가 날아가 버렸다.
주변의 소행성들이 모조리 박살 난 적도 있고······ 또 뭐가 있었더라.

[막아! 반드시 막아야 돼!]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 아테나, ‘전능의 태양’ 아폴론, ‘하늘 걸음의 주인’ 헤르메스, ‘술과 황홀경의 신’ 디오니소스. 거기에 백수거신 브리아레오스까지.
다음 순간 두 신화급 성좌의 충돌에서 터져 나온 격에, 모든 성좌들은 장난감처럼 튕겨 나왔다.

콰아아아아아아!

달려들던 설화급 성좌들은 모조리 암벽에 처박혔고, 브리아레오스는 남은 팔의 절반을 잃어버렸다.
누구도, 두 신화급 성좌의 싸움을 막을 수 없었다.
인근에 있었던 유중혁도 엄청난 충격을 받고 이쪽으로 날아왔다. 나는 잽싸게 움직여 녀석의 몸을 받아냈다.

명계의 왕과 바다의 왕.
두 명의 신화급 성좌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선의 마주침만으로도 세계를 뒤흔들 수 있는 격의 소유자들.
먼저 입을 연 것은 포세이돈이었다.

[하데스, 어째서 <명계>에서 나온 거지? 너에겐 이 사태에 개입할 명분이 없다. 개연성의 저울이 맞춰지더라도, 너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명분. 신화급 성좌와 같은 대존재가 하위 시나리오에 강림할 때는, 반드시 그런 명분이 필요하다. 그것도 「개연성 적합 심사」를 통과할 만한 적합한 명분이. 그리고 포세이돈의 경우, 명분은 자신의 아들인 ‘테세우스’였다.
그렇다면 하데스의 경우는 어떤가.

[명분이 왜 없겠어요? 우리도 후계를 지키기 위해 온 거죠.]

대답한 것은 페르세포네였다.
포세이돈이 무심히 물었다.

[후계? 너희들에겐 자녀가 없을 텐데?]

포세이돈의 말은 옳았다.
수많은 자식들을 거느린 제우스나 포세이돈과는 달리, 하데스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그것은 어느 전승처럼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금슬이 좋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없죠. 우린 되는 대로 자식을 낳아 전쟁의 장기말로 쓸 생각은 없거든요. 내 남편은 그대처럼 두뇌가 가랑이에 달려 있지도 않고요.]

포세이돈의 굳어지는 표정에도 아랑곳않고, 페르세포네가 말을 이었다.

[애초에 이런 빌어먹을 ‘시나리오의 세계’에서, 자식을 낳아 키울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 아닌가요?]
[너희들의 비뚤어진 가치관을 공격할 생각은 없다. 내가 물은 것에나 똑바로 대답해라. 자녀가 없는 너희들이 어떻게 후계를 가진다는 것이냐?]

심해의 수온처럼 차가운 목소리.
포세이돈의 트리아이나가 거친 울음을 토했다.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면, 너와 네 남편은 개연성의 후폭풍 속에 끔찍하게 소멸할 것이다.]

페르세포네는 말없이 웃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페르세포네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 묘한 시선과 마주하는 순간, 머릿속에서 ‘멸살법’의 페이지들이 넘어갔다. 나는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유중혁을 내려다보였다.

······설마, 그랬던 거였나.

갑자기 여러 가지가 이해되었다.
그러고 보면 ‘멸살법’의 481회차에서, 유중혁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한 하데스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짐은 그대를 명왕(冥王)의 후계로 삼고 싶다.”」

생각해 보면 <명계>는 유독 나와 유중혁― 즉, <김독자 컴퍼니> 일행들에게 친절한 편이었다. 그 냉담하고 차가운 부부가 그럴 턱이 없는데도 말이다.
만약 명계가 이번 회차의 유중혁을 자신의 후계로 삼을 생각이었다면, 모든 게 이해되는 상황이었다.
나와 유중혁을 ‘별자리의 연회’에 데려갔던 것도, 그리고 ‘미식협’에 나를 초대해주었던 것도, 거기에 내 억지 부탁을 들어주거나, 파천검성을 <타르타로스>에 몰래 침입시켜 주었던 것까지······.

한데······.
생각해 보니 혜택을 더 많이 받은 건 난데?

그리고 다음 순간, 세상의 어둠이 내게 말을 건넸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당신을 <명왕>의 후계로 삼고 싶어 합니다.]





< Episode 63. 신화의 종말 (2) > 끝

< Episode 63. 신화의 종말 (3) >





······뭐?
나는 멍한 눈으로 메시지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방금 뭐라고?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구원의 마왕’을 <명왕>의 후계로 삼고 싶어 합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멀리서 이쪽을 향해 싱긋 웃는 페르세포네의 모습이 보였다.

본래 <명계>의 후계로 지목받아야 할 유중혁 대신, 내가 그 후계로 지목받아버렸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왜 나를?
포세이돈이 말했다.

[······미쳤군, 신혈을 잇지 않은 존재를 후계로 삼겠다는 건가?]
[고리타분한 적통을 따질 시기는 지나지 않았나요?]
[후계를 위한 과업조차 수행하지 않은 존재가······.]
[그는 ‘과업’을 수행했어요.]

페르세포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었다.
내가 ‘후계’를 위한 과업을 수행했다고?
별안간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당신에게 ‘과업’을 내리겠어요.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여준다면서요? 성공한다면 당신이 원하는 영혼을 찾아주도록 하죠.
―당신의 과업은 뱀의 머리를 베어오는 거예요.

분명 그런 적이 있었다.
41회차의 신유승, 비유의 영혼을 되찾아오기 위해 치렀던 시험.
그때 나는 분명 페르세포네의 ‘과업’으로 야마타노 오로치의 머리를 베어 왔었다.
그런데 그게, 단순한 시험이 아니라 ‘후계’를 위한 과업이었다고?
그렇다면 이 여왕님은 대체 언제부터······.

[하데스! 진심인가? 저 하찮은 성좌를 너의 후계로 삼겠다고?]

포세이돈의 사나운 외침에 하데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면, 하데스 또한 언제나 내게 호의적이었다.

부유한 밤의 아버지.

그는 겉으로 엄격하고 무서운 것 같아도, 단 한 번도 내게 해가 될 일을 한 적은 없었다.
원작에서 <명계>에 갔던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당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페르세포네의 눈빛이 깊어졌다.

―구원의 마왕,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명계>의 후계가 되는 것. 그것은 앞으로의 모든 시나리오에서 <명계>의 개연성을 일부 빌려올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나아가서는, 하데스의 승계를 받아 <명계>의 주인이 될 자격을 갖추는 일이기도 했다.

「김독자는 감탄했다.」

여기서 내가 저 제안을 받아들이면 <명계>는 정식으로 <기간토마키아>에 참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대가로 <기간토마키아>의 거대 설화 일부를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후계 제안을 거절하면, <명계>는 엄청난 손실을 입고 다시금 지하로 잠겨 들게 되겠지.
그것으로, 나와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될 것이다.

······정말 영리하시군, 명계의 여왕.

<명계>는 <기간토마키아>의 참전권을 얻고.
나는, <올림포스>의 전복을 준비한다.

내가 이 제안을 거절하면 이득을 보는 쪽은 포세이돈뿐.
그런 상황에서 내가 뭘 더 고민하겠는가.
최대한 빨리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저는 <명계>의 후계가 되겠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재빨리 내 조건을 말했다.
적어도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나는 이 후계 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당신의 조건을 받아들였습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명계>의 후계가 되었습니다!]

내 선언과 동시에,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움직였다. 수많은 별들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누군가는 나를 질시했고, 누군가는 감탄했으며, 또 누군가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그리고 명왕이 말했다.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여.]

내가 본 그 어떤 목소리보다 두텁고.

[우리는 <명계>의 ‘차기 후계자’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왔다.]

믿음직스러운 음색이었다.
정말로 내게 그런 아버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스타 스트림>이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제시한 ‘명분’을 납득합니다.]
[<스타 스트림>이 ‘부유한 밤의 아버지’의 강림에 개연성이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거대한 저울이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규모의 저울이었다.
두 명의 신화급 성좌가 각각의 저울대에 올라섰고, 자신의 ‘격’을 마음껏 방출하며 시나리오 전체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었다.

[<관리국>이 시나리오의 파괴를 방지하기 위해 개연성의 벽을 구축합니다!]

츠츠츠츠츳!

[다수의 성좌들이 두 신화급 성좌들의 충돌에 주목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의 수식언을 외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부유한 밤의 아버지’의 수식언을 외칩니다!]
.
.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자신의 적수들을 유심히 관찰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간만의 ‘진짜 대결’에 흥분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묵묵히 상황을 지켜봅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대결을 성사시킨 ‘구원의 마왕’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700,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그제야 실감이 난다.
지금 내가 저지른 일이, 이 <스타 스트림>에서도 얼마나 큰일인지.
디오니소스가 허탈한 웃음으로 말했다.

[너는 진짜······ 네가 무슨 짓을 벌인 건지 모를 거야.]

“아뇨, 압니다.”

그리고 두 성좌가 움직였다.
거대한 산을 연상시키는 어둠 속에서 새카만 낫이 나타났고,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파도 속에서 트리아이나가 나타났다.
정면으로 부딪치는 격의 파동에, 주변의 파도와 공기가 핵폭발을 연상시키는 먼지구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하데스의 몸이 사라졌다.
포세이돈이 외쳤다.

[빌어먹을, ‘퀴네에’로구나!]

포세이돈에게 성유물 ‘트리아이나’가 있다면, 하데스에게는 황금 투구 ‘퀴네에’가 있다. <올림포스>의 퀴클롭스 삼형제가 만든 성유물이자, 쓰는 순간 세상의 모든 시선으로부터 ‘존재’를 감출 수 있는 투구.

[비겁한 전투 방식은 여전하구나, 동생아!]
[······아직도 네가 형이라는 전승을 주장하려는 모양이군.]

바람이 스칠 때마다 부연 물안개가 일대를 휩쓸었고, 포세이돈을 대신해 죽어간 물고기 떼가 피거품이 되어 흩날렸다. 분노한 포세이돈은 하데스가 있을 법한 방위를 향해 모조리 트리아이나를 찔러댔다.
파도의 폭풍이 어둠을 삼켰고, 다시 어둠이 그런 파도를 부수고 튀어나왔다.
신화의 자존심을 건 한 판 승부.
그 어느 쪽도 물러서지 않는 ‘신화급 성좌’들의 결투였다.

[거대 설화, ‘명계’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거대 설화, ‘대해의 패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주력이 되는 거대 설화가 부딪치자, 디오니소스가 필사적으로 보호하던 해안 동굴의 초입마저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

하나의 신화가 탄생부터 지금까지 쌓아온 이야기들이 부딪치고 있었다.
그 경쾌한 신화의 충돌 속에 어떤 문장은 사라지고, 어떤 문장은 태어났다.
살아 있는 포세이돈과 하데스의 설화가 지금 이 자리에서 새로이 쓰이고 있었다.
마치 소설 속의 한 장면을 읽듯,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밤과 바다가 맞닿은 곳에서 새로운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멸살법’ 속에서도 보지 못했던 장면.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전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절경이었고, 전율적이었으며, 심지어는 경이롭기까지했다.

나는 검을 꺼내 쥐었다.
놀란 디오니소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보고만 계실 건 아니시지 않습니까.”

만약 저 둘의 싸움이 계속된다면, 이곳의 모든 존재는 후폭풍으로 인해 절멸할 것이다. 그리고 <기간토마키아>의 거대 설화는 저 둘의 영향을 중심으로 지분이 재구성되겠지.
게다가 지금은 승세가 비슷해도, 이곳의 무대가 ‘바다’라는 것을 감안하면 승리의 신이 어느 쪽의 편을 들어줄지는 사실상 뻔한 이야기였다.

“하데스를 도와야 합니다. ‘고래잡이’를 해보죠.”

[방금 아테나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거 못 봤어? 너 같은 게 저기에 휩쓸리면 골로 간다고.]

“‘아비 고래’를 잡으려고 하니까 그렇죠. 하지만 ‘새끼 고래’라면 어떻습니까.”

내가 가리킨 곳에 테세우스가 있었다.
포세이돈의 강림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는 그리스의 대영웅이, 파도의 결계에 휩싸인 채 설화를 토해내고 있었다.

「멈춰······.」
「이제, 그만, 제발······.」

디오니소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테세우스를 제압해서, 포세이돈을 귀환시키자?]

“비겁하지만 지금으로선 그 방법이 최선입니다.”

[비겁의 문제가 아냐. 저 생선 아저씨가 그걸 허락하게 둘 것 같아? 저 파도 결계를 부수는 건 설화급 성좌라도 무리야.]

“단 하나의 설화로만 승부하려 한다면 그렇겠죠. 하지만 ‘횃불’을 드는 게 혼자는 아니잖습니까.”

그 순간, 디오니소스의 표정이 변했다.

[설마······ 「성화」라도 만들어 보자는 거냐? 설화를 모아서 생선 아저씨의 결계를 뚫겠다고?]

“비슷하죠.”

성화(聖火).
수많은 존재들이 힘을 모아, 자신의 설화를 태워 만드는 불꽃.
디오니소스가 물었다.

[그 불을 누가 봉송할 건데? 네가?]

“일단 방화복부터 입어야겠죠.”

나는 해안 동굴의 근처에 너부러져 있는 거신병 플루토를 바라보았다.
플루토는 아레스와의 일전으로 인해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나는 품속에서 [헌집 두꺼비]를 꺼냈다. 두꺼비가 노래를 불렀다.

“뀌룩, 헌 집 주 면 새 집 주 지.”
“헌것 두 개 줄게. 대신 이건 새것으로 고쳐줘.”
“좋 아.”

[헌집 두꺼비]의 진짜 능력은, 단순히 헌 아이템을 새 아이템으로 교환해주는 것이 아니다. 이 녀석은, 제물만 있다면 망가진 아이템을 똑같은 ‘새 아이템’으로 교체해주는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다.
경매장에서 안나 크로프트가 이 두꺼비를 원했던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는 방금의 전투로 얻은 하급 성유물과, 플루토의 거체를 두꺼비에게 먹였다.
두꺼비는 비정상적으로 입을 크게 벌리더니 야금야금 플루토의 거체를 먹어 치웠다. 그리고 잠시 후, 꺼어어억 하는 소리와 함께 플루토를 토해냈다.

[우왓, 시바. 뭐야. 나 살아 있었어?]

2미터 남짓 크기로 작아진 플루토가 끈적한 체액과 함께 튀어나왔다. 흠집 하나 없는 완벽한 모습이었다.
디오니소스는 다소 놀란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어두운 표정이었다.

[‘성화’는 어떻게 만들 건데? 다른 12신좌들이 널 도와줄 것 같아? 게다가 ‘성화’는 반드시 태양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문제고, 지금은 그보다 급한 일이 있었다.
스스슷, 하는 소리와 함께 디오니소스의 옆에서 누군가가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무시무시한 눈빛을 빛내는 녀석.

“일어났냐?”
“······포세이돈은?”

두통이 이는 듯 머리를 쥔 유중혁이 인상을 썼다.
다행히, 큰 타격을 입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저기서 싸우고 있어.”
“······상대는 하데스인가.”

유중혁은 단번에 전황을 읽어냈다.
신화급 성좌의 대전쟁. 불안하게 진동하는 개연성.
아마, 녀석은 지금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올림포스>에게 한 방 먹여줄 절호의 기회야. 알지?”
“······지금 쳐야 한다.”
“그런데 그러려면, 네가 싫어하는 여자의 협력이 필요해.”
“내가 싫어하는 여자?”

나는 말없이 해안 동굴의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깊은 동굴의 안쪽에서, 하나둘 횃불 같은 것이 켜졌다.
그 불빛 사이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여자.
새초롬한 얼굴의 그녀를 향해, 나는 웃으며 물었다.

“안나 크로프트, 도와주실 겁니까?”





< Episode 63. 신화의 종말 (3) > 끝

< Episode 63. 신화의 종말 (4) >





“내가 왜 당신들을 도와야 하죠?”
“아니면 그쪽도 죽을 테니까요.”

어둠 속에 비치는 인영의 숫자는 열 명 남짓. 안나 크로프트와 셀레나 킴, 그리고 그녀의 일행들이었다.
예상대로 그들 또한 <기간토마키아>에 참전한 것이다.

“우리는 휘말리기 전에 빠져나갈 수 있어요.”
“그럼 손해를 볼 텐데요. 기왕 시나리오에 참전한 김에 끝까지 클리어 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 아니겠습니까?”

안나 크로프트가 내 진의를 시험하기라도 하듯 노려보았다.

“진짜로 원하는 게 뭐죠?”
“[리코메데스 왕의 가죽 장갑]. 당신이 갖고 있지? 경매장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안 보이더라고.”

안나 크로프트는 [미래시]를 쓸 수 있는 존재.
아마 그 아이템의 가치를 미리 알고 구매해둔 상태일 것이다.
그제야 내 의도를 읽어낸 안나 크로프트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그건 줄 수 없어요. 내 거신병에 쓸 재료니까.”
“「무대화」가 가능한 기종을 만들려는 거겠지? 당신들 힘만으로는 무리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그건 해봐야 알겠죠.”

안나 크로프트의 일행들이 적의를 보이며 한 걸음을 다가왔다.
그러자 유중혁이 그에 맞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말로 할 것 없다.”

스르릉, 하고 맑은 검명이 울려 퍼졌다.

“어차피 죽여야 할 여자니까.”

초월좌의 ‘격’이 동굴을 가득 채우자, 저쪽에도 긴장감이 역력해졌다.
유중혁을 이용해 아이템을 빼앗는 방법도 있겠지만, 문제는 상대가 ‘안나 크로프트’다.
내가 유중혁을 제지하기 위해 손을 들자, 유중혁이 무시무시한 눈길로 나를 노려보았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삼인(三忍) Lv.10’을 발동 중입니다.]

참을 인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
설마 유중혁이 저 스킬을 쓰는 걸 눈앞에서 볼 줄이야.
안나에 대한 유중혁의 원한이 어느 정도인지, ‘멸살법’을 읽은 나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고민하던 내가 결정을 내리려는 순간, 내 말을 가로챈 이가 있었다.

“안나, 저분들께 장갑을 내주세요. 지금은 우리가 양보해야 할 때에요.”

셀레나 킴의 담담한 목소리에 안나 크로프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고개를 돌린 셀레나 킴이 나를 향해 목례를 하며 전음을 보내왔다.

―지난번에는 감사했습니다, 구원의 마왕님.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나는 경매장에서 안나 크로프트와의 내기를 통해 셀레나 킴에게 걸린 ‘주종 서약’을 풀어준 적이 있다.
즉, 셀레나 킴은 더이상 안나 크로프트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가장 큰 전력이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자, 안나 크로프트의 표정도 볼만해졌다.
셀레나 킴이 수를 던졌으니, 이제 마무리는 내 차례였다.

“공짜로 달라는 건 아닙니다.”
“······그럼?”
“코인으로 사겠습니다.”

코인이라는 말에, 안나 크로프트가 멈칫했다.

“50만 코인이면 어떻습니까? 아마 경매장에서 잃은 코인 때문에 꽤 손해를 봤을 텐데요.”

안나 크로프트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누구 때문에 입은 손해인데, 하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잠시 후 안나 크로프트가 입을 열었다.

“100만 코인이라면 생각해 보죠.”
“원래 20만 코인짜린데, 너무 비싸게 올려치는 거 아닙니까? 60만 코인.”
“90만 코인.”
“70만 코인. 더이상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80만 코인까진 봐 드릴게요.”

역시, 만만치 않은 여자다.
80만 코인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이번 거래는 반드시 성사되어야만 했다.
[리코메데스 왕의 가죽 장갑]은 이번 ‘고래잡이’에 반드시 필요한 아이템이니까.

[‘리코메데스 왕의 가죽 장갑’을 획득하였습니다.]
[화신 ‘안나 크로프트’에게 80만 코인을 지불했습니다.]

거래가 끝나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걸로 서로 손해는 없는 셈이군요.”
“서로 손해가 없다고요? 나한테 100만 코인 뜯어갔던 건 벌써 잊었나요? 아직 이쪽이 20만 코인이나······.”
“나중에 한국에 한 번 놀러 오시죠. 20만 원짜리 코스 요리 정도는 대접해드릴 수 있으니까.”

물론 20만 코인과 20만 원이 같을 턱이 없다.
분한 듯, 안나 크로프트가 이를 까득 갈았다.

“정말로 포세이돈과 싸울 셈인가요?”
“미래시로 봤으니 아실 텐데요.”
“그건······.”

물론, 그녀가 미래를 모를 거라는 걸 알고 한 말이었다.
그녀의 [미래시]로는 나와 관련된 미래를 볼 수 없을 테니까.
나는 그녀를 스쳐가며,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마 이번엔 꽤 재밌을 겁니다. 당신도 읽을 수 없는 미래가 올 테니까.”

부르르 떠는 안나 크로프트의 작은 머리통을 보며, 나는 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왜 이 사람만 만나면 유독 괴롭히고 싶어지는지 모르겠다.

“당신의 오기가 개죽음으로 끝나지 않길 바라죠.”
“정말 그런 걸 바란다면 <아스가르드>한테 개연성이나 보태 달라고 해줘요.”

말을 마친 뒤, 나는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안나 크로프트를 노려보고 있는 녀석은 당장에라도 칼을 휘두를 듯한 기세였다.
재빨리 [한낮의 밀회]를 날리려는 순간, 뜻밖에도 돌아선 유중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여자의 목을 베는 것은 나다. 그게 언제가 되든.
―맘대로 해.

물론 그때가 되면 나도 말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안나 크로프트는 우리에게 필요한 인물이었다.
디오니소스가 손을 들었다.

[그럼 난 뭘 하면 되지?]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뭐?]

벙찐 디오니소스를 내버려 두고, 나는 거신병을 돌아보았다.
플루토가 바닷물 속에서 자신의 거체를 일으켰다.
나는 유중혁 쪽을 턱짓하며 물었다.

“두 명도 태울 수 있지?”

[하나도 기분 나쁜데 둘이나?]

“할 수 있어, 없어?”

[······못 한다고 하면 안 탈 거냐?]


*


신화급 성좌들이 충돌하는 와중에도, 까마득한 상공에서는 성좌들의 진언이 오가고 있었다. 잠시 싸움을 멈춘 그들은, 서로를 향해 창을 겨누는 대신 현상황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는 중이었다.

[설마 여기서 하데스가 나타날 줄이야······.]
[저들을 어떻게 말리죠? 아테나, 네가 예전에 포세이돈 아저씨랑 싸워서 이긴 적 있지 않아?]
[또 그 얘기야? 올리브 나무 하나 심어줬다가 별 얘길 다 듣네······ 내가 신화급을 어떻게 이겨?]
[‘번개의 좌’나, ‘대지의 어머니’라도 나타나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12신좌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최상위 시나리오에 진출한 뒤 성운의 일에 무심해진 ‘번개의 좌’도, <올림포스>를 증오하는 ‘대지의 어머니’도, 이 사건에 끼어들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헤르메스, <올림포스>의 ‘거대 설화’를 사용하면 어떨까요?]
[저 둘이 우리 쪽 ‘거대 설화’의 최고 담화자들인데, 그게 씨알이나 먹히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군요.]

여기저기서 의견이 난립했지만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 성좌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이설화가 곁에 있던 이현성의 귓가에 속삭였다.

“······설화급 성좌들은 뭔가 대단할 줄 알았는데, 말하는 걸 보니 생각보단 평범하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저나, 우린 이제 어쩌죠? 성좌들도 저렇게 나올 정도면······.”

이설화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그동안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은 노력했다. 스스로도 자부할 수 있을만큼 수련하고 또 수련해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상대해야 할 존재는 ‘위인급 성좌’도, ‘설화급 성좌’도 아니었다. 그들이 쌓아온 설화로는, 발끝에도 비빌 수 없을 어마어마한 격의 존재들.
신유승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난번에 저 ‘태양 아저씨’ 쓰러트릴 때도 엄청 힘들었잖아요······.”

두 눈을 감은 수르야는 이마의 [제3의 눈]을 통해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최강의 태양신이라는 수르야조차 이번 일에는 끼어들지 않은 채 침묵을 유지했다. 그도 신화급 성좌와는 대결할 수 없는 것이다.

쿠구구구구!

다시 한번 번져오는 충격파.
포세이돈과 하데스의 충돌이 잦아질수록, 하늘에도 희미한 균열이 번지고 있었다. 격의 충돌에 공간 자체가 무너지고 있었다.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이거, 하데스 아저씨가 지겠는데.]
[어쩔 수 없지. 무대가 ‘바다’니까.]

12주신들의 표정에 복잡한 계산이 스쳐갔다.
포세이돈이냐, 하데스냐.
어느 쪽이 이기든 <올림포스>가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들게 될 것은 뻔했다.
줄곧 눈을 감고 있던 수르야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오는군.]

무언가가 창공을 뚫고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새카만 블랙 드래곤의 가죽으로 만든 거신병이었다.
화색이 된 이길영이 외쳤다.

“독자 형!”

슈우우우, 하는 배기음과 함께 거신병이 멈춰 섰다.
플루토의 안쪽에서 튀어나온 김독자가 말했다.

“여러분. 시간이 없으니 짧게 설명하겠습니다.”

김독자는 천천히, 모든 성좌들과 화신들을 바라보았다.

“저는 ‘성화’를 만들 겁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여러분들 모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갑작스런 말에, 12신좌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진언들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성화 봉송!]
[그렇군,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여기저기서 난립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김독자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12신좌님들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뭐? 그게 무슨 말인가?]

“여러분들은 <올림포스> 소속이라 포세이돈이 거대 설화를 풀면 저항할 방법이 없습니다. 괜히 성화에 참여했다가, 자칫 역효과만 날 수도 있어요.”

김독자의 말은 사실이었기에 몇몇 성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돕지 않는다면 어떻게 「성화」를 켤 셈인가?]

애초에 성화는 ‘태양’에서 비롯된 빛. 신성한 빛을 시작하려면, 반드시 태양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수르야가 조용히 일어섰다.
김독자가 그를 보며 말했다.

“수르야께서도 앉아 계십시오.”

수르야가 다시 앉았다.

[태양 없이 어떻게 ‘성화’를 만들겠다는 거지?]

“‘성화’는 ‘신성한 불길’입니다. 꼭 태양만이 켤 수 있는 건 아니죠.”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어깨를 으쓱합니다.]

뒤를 돌아보자, [강철화]를 발동한 이현성의 몸을 정희원이 꽉 끌어안고 있었다. 이현성의 볼은, 부끄러움 때문인지 [지옥염화]의 불길 때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무 너무나 뜨겁습니다아아아아!”
“미안해요. 조금만 참으세요.”

그 광경을 보던 수르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덴>의 불꽃이라면 태양열을 대체하기에는 충분하겠군. 하지만 그 정도의 ‘성화’로 포세이돈의 파도를 뚫기는 무리일 텐데.]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나설 타이밍이십니다.”

수르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재미있겠군.]


*


이현성이 불길에 충분히 달구어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기 때문에, 나는 거신병의 어깨에 걸터앉아 일행들에게 몇 가지 지침들을 일러주었다.
문득 곁을 돌아보니, 한수영이 다리를 달랑거리며 사탕을 빨아먹고 있었다.
나는 그런 한수영을 향해 핀잔을 주었다.

“······맛있냐?”
“요즘 이상하게 단 게 땡겨. 너도 먹을래?”

한수영은 내 답은 듣지도 않고 쥐고 있던 사탕을 내 입에 쑤셔 넣었다.
레몬맛이었다.
내가 태연히 사탕을 먹자, 한수영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근데, 그거 내가 먹던 건데.”
“그래서?”
“······재미없네, 진짜.”

야호, 하며 비명을 지른 한수영이 거신병의 어깨를 미끄럼틀처럼 타고 내려가 손바닥에 착지했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일행들도 다들 입에 사탕 하나씩을 물고 있었다.
심지어는 저 유중혁까지도. 이설화가 말했다.

“수영 씨가 나눠준 거예요. 긴장을 푸는 효과가 있다던데요.”

그래서 다들 하나씩 물고 있었던 거구만.
내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이설화가 물었다.

“우리, 이길 수 있을까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설화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설화도 나를 바라보았다.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어서, 나는 그냥 빙긋 웃고 말았다.
우리가 이길 수 없을까. 그런 것은 모른다. 다만.

“아무도 죽지 않을 겁니다.”

마침내 ‘성화’의 예열이 끝난 ‘강철검제’가 플루토의 손에 쥐어졌다.
나는 플루토에 탑승한 채 입을 열었다.

[다들 모여주세요.]

하나둘, 흩어져 있던 일행들이 모인다.
모두 다른 장소, 다른 시각에서 태어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그렇게, 하나의 별자리가 된 사람들이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담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독자(獨者)로부터 시작된 설화」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고독한 사내가 검을 쥐자」
「지옥의 염화를 품은 강철의 검이, 드높은 창공을 향해 치솟았다」

우리가 고스란히 쌓아온 역사가, 하나둘 「성화」의 불길 속에 모이고 있었다.
우리의 설화는 <올림포스>의 바깥에서 온 거대 설화이기에, 아무리 포세이돈이라고 해도 이 힘에 타격을 받지 않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멀리서, 기별을 눈치챈 포세이돈이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비웃듯 파도를 방벽처럼 둘러 허공을 덮어버렸다. 뚫을 수 있다면 뚫어 보라는 듯, 자신감으로 만들어진 신화급 성좌의 방벽.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지금 <김독자 컴퍼니>의 전력을 다해도, 우리는 저 방벽 하나조차 뚫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겐 더 강력한 힘이, 빠른 속도가 필요했다.
저 벽을 뚫어낼, 강력한 추진력이.

그리고 마침 우리에겐, 그 추진력을 제공할 조력자가 있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의 이야기가 확장됩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열차의 경적.

[「무대화」가 발생합니다!]

「그리하여, 환하게 빛나는 태양이 그들의 길을 밝혔으니」

한때는 우리의 적이었던 그 열차가, 이제 우리를 태우기 위해 창공을 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눈부신 황금빛 오오라를 흘리는 태양 열차를, 일행들은 황홀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가능하다.
저것이라면, 분명 가능하다.

“갑시다, <김독자 컴퍼니>.”





< Episode 63. 신화의 종말 (4) > 끝

< Episode 63. 신화의 종말 (5) >





그 시각, 60번 시나리오에 설치된 <임시 관리국>의 모두는 같은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신화급 성좌의 전투.
하급 도깨비부터 상급 도깨비에 이르기까지, 계급을 가리지 않고 모여든 도깨비들은 지역별로 흩어져 있는 자신의 채널들조차 잊은 채 시나리오에 몰두했다.

하데스 대 포세이돈.

지난 몇 년간, 이만한 성좌들이 혈투를 벌인 적은 손에 꼽았다.
물론 강력한 성좌들이 부딪친 일을 꼽자면 더러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렇듯 그 전투의 서사였다.

자신의 후계를 지키기 위한 전투.

거기에 무려 수천 년 동안이나 자신의 후계를 발표하지 않았던 하데스의 기습 선언이 이어지며, 성좌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절대다수의 성좌들이 해당 전투의 정경에 열광합니다!]

절대다수.
상급 도깨비인 비형조차도, 그런 성좌 군집 단위는 처음 보았다.

[마왕,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해당 전투에 열광합니다!]
[마왕, ‘강령의 마신’이 시나리오 참가 의욕을 불태웁니다.]
[성좌, ‘타락의 구원자’가 광기에 찬 눈으로 전투를 지켜봅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참담한 눈으로 전장을 바라봅니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서, 성좌들은 절대 악과 절대 선을 가리지 않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성좌, ‘흙으로 사람을 빚은 대모신’이 전장을 지켜봅니다.]
[성좌, ‘뇌전의 신왕(神王)’이 <올림포스>의 전쟁에 흥미로워합니다.]
[성좌, ‘환생자들의 시조’가 즐거워합니다.]

성운 <황제>에 <베다>, 거기다 <여신의 섬>까지.
중국과 인도, 아일랜드 신화를 가릴 것 없이 모여든 성좌들이 신화급 성좌들의 전장을 관람하고 있었다.
채널의 구독좌들이 급증하자, <관리국> 또한 잔여 개연성을 끌어와 시나리오를 지탱하고 채널을 유지하기에 바빴다. 이런 호재를 <관리국>이 놓칠 턱이 없었다.
승세가 조금씩 기울어감에 따라, 성좌들의 반응도 더욱 뜨거워졌다.

드디어 이곳에서, 하나의 신화가 저물 것을 예감한 것이다.

하나의 신화가 쓰러진 자리에는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설화가 만년설 위의 꽃처럼 피어나리라.
흥분과 격정에 찬 다른 도깨비들과는 달리, 비형은 불안한 상태였다.

‘······저 자식들, 대체 뭘 하는 거지?’

화면 속에서 김독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불에 달아 새하얗게 익어버린 강철검제와, 그 검을 쥔 거신병 플루토. 고대 그리스 시대의 태양처럼 빛나는 강철검은 꼭 거대한 횃불처럼 보였다.
독각이 말했다.

“미쳤군. 저놈들, 「성화 봉송」을 하려는 거다.”

모든 도깨비는 곧 이야기꾼.
호기심이 생긴 한 도깨비가 독각에게 물었다.

“성화 봉송? 그게 뭔가?”
“성화가 설화를 태워 만든 불꽃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알고 있네.”
“성화 봉송은 ‘평화’와 ‘승전보’의 의식이다. 저놈들은 저 불길을 통해 이 전쟁을 끝내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독각의 말에 도깨비들이 입을 벌렸다.

“미쳤군. 지금 저 전장에 끼어들겠다고······.”

‘구원의 마왕’은 도깨비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신생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주인.
대천사의 사랑을 받는 마왕이자, 73번째 마계의 지배자.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과 싸워 살아남은 존재이자, ‘이계의 신격’의 가호를 받으며, 심지어는 다른 세계선을 건너 돌아온 ‘귀환자’.

“아무리 저자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무모한 만용이다.”

모두가 혀를 차는 와중에, 홀로 웃는 도깨비가 있었다.

“하핫, 하하하······.”

비형이었다.

몇몇 도깨비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비형은 계속해서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마 이곳의 도깨비들 중 누구도,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고오오오오!

혁명의 성화를 치켜든 채 낙하하는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
누가 보아도 그들은 불꽃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들이었다.
하지만 비형은 그들이 쌓아온 설화를 알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 주어졌던 난관은, 크기만 달랐을 뿐 언제나 ‘불가능’의 영역에 있었다.

“그래, 그래야 김독자답지!”

<김독자 컴퍼니>가 그리는 별자리를 보며, 비형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역사를 떠올렸다.
그 지하철에서, 처음으로 김독자를 만났던던 순간.
유약했지만 침착했던 김독자와, 처음으로 ‘독점 계약’을 맺었던 순간들.

설화들은 눈송이처럼 쌓여갔다.
믿을 수 없는 것도 있었고.
처음 보는 것도 있었다.

하찮은 인간이 설화를 쌓아 성좌가 되고, 마침내 얻은 거대 설화를 통해 ‘단 하나의 설화’의 출발점에 도달하기까지······.

이야기꾼 비형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아 왔다.

독각이 말했다.

“이번에는 실패할 거다.”
“그럴지도 모르지.”
“냉정하군. 네놈과 계약한 성좌가 아니었나?”
“그랬었지만, 이젠 아니야.”

비형이 웃었다.
비형도, 김독자의 저 전략이 성공할지 아닐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야기꾼의 예감이 있었다.
김독자의 설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을 거란 예감이.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확장됩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도깨비들의 눈이 커졌다.
창공을 뚫고 날아오는 황금빛 열차.
수르야의 황금 열차였다.

“저것은······!”

고작 60번 시나리오에서 저런 일이 벌어질 거라 말했다면, 누가 믿었을까.

“저것이라면. 어쩌면······!”

신과 인간의 합작.
단 하나의 설화, 그 두 번째인 승(承)을 향한 성화의 길.
마치 하강하는 황룡(黃龍)처럼 추락하는 열차를 보며, 도깨비들은 숨을 삼켰다.

왜일까.

무모하고, 터무니없고, 심지어는 불가능하기까지 한 저 도전을 보며.
어째서 이야기꾼인 그들은 이토록 심장이 타는 것일까.

어쩌면 독각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저 공격은 실패할 수도 있고, 이대로 저 성운은 <스타 스트림>의 먼지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도깨비 ‘하롱’이 60번 시나리오를 지켜봅니다.]
[대도깨비 ‘호롱’이 60번 시나리오에 집중합니다.]
[대도깨비 ‘바람’이 60번 시나리오의 결말을 주시합니다.]

그 순간, 모든 도깨비들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도, 저런 시나리오를 만들고 싶다.」

시나리오의 터전 위에 성좌들의 설화가 자라난다.
그 설화를 먹고 자란 성좌들이 또 다른 설화를 꿈꾼다.
그것이 바로 <스타 스트림>의 동력.
가슴이 벅차오른 비형이 외쳤다.

“쟤들! 내가 키운 녀석들이야! 다들 알지?”

어떤 설화가 좋은 설화인가.
어떤 시나리오가, 좋은 시나리오인가.
그곳에 그 답을 아는 도깨비는 아무도 없었다.
그걸 알았더라면 진즉에 ‘도깨비 왕’이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 도깨비들도 하나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지금 저 이야기를, 아마 그들의 ‘왕’ 또한 보고 있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


콰콰콰콰콰콰!

낙하하는 열차의 첨단이 마침내 파도와 충돌했다.
놀란 포세이돈의 눈이 커졌다.
설화급 성좌인 ‘수르야’의 격이, 포세이돈의 파도를 깎아내며 전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도의 벽은 여전히 험준하고 두터웠다.

“다음은 나야.”

「또 다른 종막을 꿈꾸는 여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니」

한수영이 푼 붕대에서 불타오른 [흑염]이 열차의 첨단을 따라 출격했다.
한수영의 [흑염]은 투박하지만 용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이제 녀석도 벌써 그런 경지에 올라선 것이다.

콰드드드득!

고깃덩이를 찢듯 파도의 살점을 뜯어 먹으며 전진하는 흑염룡의 형상.
뒤따라 이지혜가 나섰다.

「상처받은 검귀가, 자신의 인연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다.」

지휘관처럼 치켜든 이지혜의 검집에서 키링이 반짝였다.
거의 동시에, 파도의 벽을 타고 나타난 함대가 있었다.

콰아아앙!

‘유령 함대’가 흑염룡이 만든 통로를 향해 일제 포격을 개시했다.
파도가 메워지는 것을 방해하는 충무공의 포격에, 포세이돈이 기함했다.
그러나 포세이돈은 이쪽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기세를 회복한 하데스가, 저승의 낫으로 그의 목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아아아아!

그리고 터져 나가는 폭격 속, 열차의 후미에서 스프린트 자세를 취하고 있던 거신병 플루토가 있었다.
신유승이 외쳤다.

“출발해요, 아저씨!”

열차의 관성에, 플루토의 속도가 더해진다.
거기에 [키메라 드래곤]의 풍속성 브레스가 작렬하며 가속도를 증폭시킨다.

“가요, 독자 형!”

이길영의 응원과 함께, 플루토가 돌진을 시작했다.
양손으로 강철검제를 쥔 채, 그리고 그 안에서 [지옥염화]를 공급하는 정희원을 보호한 채로.

“하아아아앗!”

이현성의 기합과 함께, 플루토의 거체가 하늘을 날았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거대 설화 ‘대해의 패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설화와 설화가 부딪치며, 플루토의 장갑이 뜯겨 나갔다.
김남운은 고통 속에서도 즐거운 비명을 내질렀다.

「지옥에서 돌아온 강철의 거신이 검을 휘두르니」
「멸악과 강철의 염화가 불타올랐다」

[지옥염화]로 불씨를 피웠고, 다른 모든 일행들의 설화가 깃든 검.
성화의 불꽃에 수많은 파도의 벽들이 일제히 기화하고 있었다.

쩌저저저저저적!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을 것 같던 신화급의 방벽이 깨져 나가고 있었다.
부서진 파도의 결계 너머로, 무방비 상태의 테세우스가 보였다.

그러나 눈앞에 승기를 둔 상황에서, 플루토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이 반전된 것처럼 흔들렸고, 나는 플루토의 안에서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찰나의 사이, 포세이돈이 던진 트리아이나의 창극이 플루토의 허리를 베고 지나갔던 것이다.
스친 곳은 하필 내가 타고 있던 자리였다.

“독자 씨!”

희미하게 들려오는 정희원의 목소리.

[성유물 ‘트리아이나’의 힘이 당신의 화신체에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당신의 격이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닙니다!]
[거신병 ‘플루토’가 당신의 충격을 일부 상쇄합니다.]

이것이 ‘신화급 성좌’의 위용이다.
나 같은 수준의 ‘설화급’은, 그저 벌레처럼 짓밟아 버릴 수 있는 힘.

파도의 결계는 뚫었으나 성화의 불꽃은 식어가고 있었다. 강철검제 이현성은 기절한 듯했고, 정희원의 마력도 거의 다했다. 파도의 결계는 다시 회복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포세이돈은 하데스를 상대하면서도 여유로워 보였다.
희미한 미소. 아마,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런 포세이돈을 향해, 나도 마주 웃었다.

언제나 그렇듯, 주인공은 마지막에 출격하는 법이다.

“유중혁!”

꺼진 성화 속에서, 모두의 설화를 등에 업은 검은 코트의 사내가 달린다.
놀란 포세이돈이 수창(水槍)을 퍼부었지만, 날쌘 [주작신보]가 창의 일부를 흘려보냈다.
미처 막아내지 못한 창 몇 개가 유중혁의 허벅지와 어깨를 스쳤다.

[아이템, ‘거신갑(巨神鉀)’이 효력을 발휘합니다!]

거신의 힘이 담긴 방호구가 가까스로 신의 창으로부터 유중혁을 지켰다.
한 발, 두 발, 세 발.
꽂히는 창날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거신갑]도 부서지기 시작했다.

파스스스.

기어코 부서진 갑옷.
이제 열 걸음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포세이돈의 격이 막대한 스크류를 형성하며 유중혁을 향해 쇄도했다.
유중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3회차의 회귀자가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테세우스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

「김독자.」

유중혁을 보는 내 의식도 조금씩 흐릿해져 갔다.
무리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3회차의 유중혁은 테세우스가 있는 곳까지 갈 수 없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하지만, 녀석이 ‘3회차’가 아니라면 어떨까.

[흐려진 의식이 육체의 구속에서 일부 해방됩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강제로 활성화됩니다.]

다시 한번 뒤바뀌는 시야와 함께, 내가 보는 풍경이 바뀌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 발동합니다!]

유중혁이 보는, 바로 그 풍경이었다.

「김독자?」

의아한 듯한 유중혁의 사념.
날아오는 포세이돈의 창.
순간 유속이 느려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나는 머릿속에서 오래된 ‘멸살법’의 페이지를 넘겼다.
‘3회차’는 할 수 없는 일.
하지만 언젠가는 가능해질 일을, 간절히 상상한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4회차, 5회차, 6회차······ 41회차······ 56회차······.

[해당 회차는 당신의 ‘독해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울컥, 하고 핏덩이가 넘어왔고 충혈된 두 눈이 깨질듯 아파왔다.
폭발적인 서사의 향연에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당신의 정신을 보호합니다.]
[당신의 ‘독해력’이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당신이 독해할 수 없던 페이지들이 펼쳐집니다!]

우리를 보는 무수한 시선들이 있었다. 성좌들은 아니었다.
유중혁이 중얼거렸다.

「이건······.」

다른 회차의 ‘유중혁’들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부러운 듯이, 누군가는 침울한 얼굴로.
그리고 누군가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재미있군.」

좀처럼 넘어가지 않는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며, 나는 지금의 내가 넘길 수 있는 최대의 페이지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다가올 미래를 앞당겨 사용했다.

[당신이 독해할 수 있는 최대 회차에 도달하였습니다.]
[당신이 독해 가능한 ‘유중혁’의 최대 회차는 ‘362회차’입니다.]

362회차의 유중혁.
그것이 내가 꺼낼 수 있는 최후의 패였다.

고오오오오오!

362회차의 유중혁은 포세이돈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는 않다.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최소한 회귀 회차가 1700번은 넘겨야 한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향으로 해당 회차의 ‘유중혁’의 재능이 타인에게 전이됩니다.]
[362회차 ‘유중혁’의 재능이 화신 ‘유중혁’에게 깃듭니다.]

하지만 362회차의 유중혁도 충분히 강하다.
왜냐하면 362회차의 유중혁은,

「“오랜만이구나 포세이돈.”」

저 포세이돈과 처음으로 맞서 싸웠던 유중혁이었으니까.

「“그때도 네놈의 아들을 죽였지.”」

분노한 포세이돈의 포효가 들려온다.
362회차의 유중혁이, 3회차의 유중혁을 움직였다.
백만 번, 천만 번도 더 취했던 권(拳)의 자세.

「“이 권장(拳掌)으로.”」

유중혁의 [파천붕권]이, 최후의 결계를 부수고 테세우스의 화신체를 꿰뚫었다.





< Episode 63. 신화의 종말 (5) > 끝

< Episode 63. 신화의 종말 (6) >





[등장인물 ‘유중혁’이 ‘파천붕권 Lv.???’을 발동합니다!]
[해당 스킬의 레벨 수치를 일시적으로 표기할 수 없습니다!]
[설화의 힘으로 인해 스킬이 비정상적으로 강화됩니다!]

유중혁의 [파천붕권]에 파괴된 테세우스의 오른팔이 수중을 부유했다.
테세우스가 멍한 얼굴로 이쪽을 보았다.
잘못이 없는 그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포세이돈이 테세우스의 몸에 강림한 이상, 테세우스를 해치우는 것만이 저 ‘신화급 성좌’를 시나리오에서 퇴거시킬 유일한 방도였다.
유중혁의 전신에서 스파크가 튄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일부 도깨비들이 해당 설화의 개연성을 의심합니다!]
[등장인물의 화신체가 해당 스킬의 숙련도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역시, 아무리 362회차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지금의 유중혁은 3회차의 몸. 포세이돈의 결계를 부수고 테세우스의 화신체를 멸하기엔 부족했다.

[아이템, ‘리코메데스 왕의 가죽 장갑’의 권능이 발동합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을 메워줄 아이템.
‘안나 크로프트’에게서 구매했던 바로 그 아이템이었다.

[‘리코메데스 왕의 가죽 장갑’의 효과로 「무대화」가 발동합니다!]

‘리코메데스 왕’은 신화 속에서 ‘테세우스’의 살해자로 알려진 인물.
성유물을 확인한 테세우스의 안색이 변했다.
그럼에도 테세우스는, 굴하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양팔을 펼친 채, 마치 자신을 죽여 달라 간청하듯이.

[······테세우스!]

분노한 포세이돈의 진언과 동시에, 유중혁의 [파천붕권]이 다시 한 번 작렬했다.

[성좌, ‘버려진 미로의 연인’이 슬퍼합니다.]

뻥 뚫린 자신의 심장을 내려다보던 테세우스가 유중혁을, 아니 어쩌면 그 안에 깃들어 있을 나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순간, 테세우스의 표정에는 안도하는 듯한 미소가 스쳤다.

[성좌, ‘미궁의 영웅’의 화신체가 완전히 소멸했습니다.]

그저 화신체의 사망이니,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테세우스의 진체도 당분간은 시나리오 활동을 전혀 할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입었으리라.
테세우스는 그 모든 것을 감안하고 이 시나리오의 완성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것이다.

[<올림포스> 측의 ‘수장’이 모두 사망하였습니다!]
[시나리오 클리어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개별 화신 및 성좌의 공헌도를 산정합니다!]
.
.
[‘1인칭 주인공 시점’이 해제되었습니다.]

울컥 입으로 피를 쏟아내며, 나는 다시 나의 몸으로 돌아왔다.
망가진 플루토의 내부.
김남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나 그만 불러······ 메뚜기남. 안녕······.]

소환 시간이 끝난 플루토가 <명계>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테세우스의 화신체가 소멸한 일대에 어마어마한 수중 폭풍이 몰아쳤다.

쿠구구구구구!

테세우스의 화신체에 강림해 있던 포세이돈이 폭주하고 있었다.
몰아치는 물보라 속에서 호흡이 버거워진 화신들이 몸부림쳤다.
쏟아진 포세이돈의 격 일부가 무방비 상태의 유중혁을 향해 쇄도했다.
이미 중상을 입고, 362회차의 재능까지 끌어다 쓰며 넝마가 된 유중혁이 피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나는 외쳤다.

[하데스!]
[알겠다.]

‘퀴네에’와 함께 허공에서 나타난 하데스가 유중혁을 품에 끌어안았다.
포세이돈의 창은 애꿎은 심해의 바닥만을 부쉈다.
그러나 위기는 끝이 아니었다.
해역의 바닥을 찍은 트리아이나를 중심으로 균열이 급격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슈우우우우우!

균열은 곧 진공청소기처럼 주변의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청소의 대상에는 나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상세가 위중한 내 화신체는 흡입 기류에 저항할 힘이 없었다. 급류에 휩쓸린 채, 공허하게 뻗는 손.
그러나 내 손을 잡아줄 이는 없었다.

······없다고 생각했다.

「독자 씨!」
「이 멍청아!」

수중에서 아름답게 흩어지는 머리카락. 인어처럼 헤엄쳐온 이설화가 내 왼쪽 팔을 잡았고, 함께 따라온 한수영이 내 오른쪽 팔을 붙잡았다. 내 상처를 점혈한 두 사람이 전력을 다해 나를 끌어올렸다.
심해의 균열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헤엄치는 한수영의 옆얼굴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곧 수면 밖으로 무사히 빠져나왔다.

“푸하아!”
“김독자 이 미친놈!”

[메인 시나리오가 곧 종료됩니다!]

나는 한수영에게 대꾸하는 대신 해류의 흐름을 살폈다.
내 예상이 맞다면, 강림할 화신체를 잃은 포세이돈은 이제 귀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좌,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 포효합니다!]

그런데 사태는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츠츠츠츠츠츳!

분명 약해져야 할 포세이돈의 힘이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어째서?”

뭔가 잘못된 것을 감지한 것은 일행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관리국>이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에게 철수를 권고합니다!]

<관리국>의 권고에도 포세이돈의 격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상황은 명백했다.
이미 끝난 시나리오에서, 명분도 없이 부리는 행패.

[<관리국>이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에 대한 제재를 준비합니다.]

다행히, <관리국>도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바닷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격의 낌새를 살폈다.
문제는 본격적인 제재가 들어가기 전까지 포세이돈이 무슨 짓을 하느냐인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데스와 페르세포네가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을 비난합니다!]

[닥―쳐―라!]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될 듯한 진언파(眞言派).
멀리서, 쓰나미 같은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수백 미터 높이에 달하는 파도였다.

“미친! 저거 뭐야!”
“포세이돈이 미쳤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화신들이 달아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거신들을 비롯한 일부가 첫 물결파에 휩쓸렸다.
그 누구도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바다의 격.
나는 하데스를 바라보았지만, 하데스는 나서지 않고 있었다.
그가 나서지 않는 이유는 뻔했다.
하데스는, 지금 나와 정확히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별을 헤아리는 부자(父子)처럼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아무리 <올림포스>에 관심이 없어도, 이번만큼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겠지.」

[<관리국>이 누군가에게 개연성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늘의 색이 변했다.
방금전까지 푸르던 하늘에 시각과 청각마저 마비시키는 빛이 번뜩였다.

세상이 사라지는 듯한 빛이었다.

그것이 아주 커다란 벼락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조금 후의 일이었다.
파도를 찢어발기는 벼락.
바다를 두 쪽으로 쪼개버리고, 저 깊은 심해 속의 지면마저 까맣게 태워버릴 정도로 강력한 번개.
단말마와 같은 포세이돈의 마지막 포효가 들려왔다.

그아아아아아······!

[성좌,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 시나리오에서 퇴장하였습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성좌, ‘번개의 좌’가 <올림포스>를 내려다봅니다.]

그 어떤 12신좌들이라 해도, 감히 마주 볼 수 없을 격.
간접 메시지가 떠오르는 순간, <올림포스>의 모든 신들이 그 자리에 굳었다.
저 시건방진 디오니소스도, 고결한 아테나와 아르테미스조차.
천천히 움직인 하늘의 시선이, 이번엔 명계의 왕을 향했다.

「지하와 하늘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것으로 대화는 충분했다는 듯, ‘퀴네에’를 쓴 하데스가 시나리오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시나리오에서 퇴장하였습니다.]

페르세포네가 함께 사라지며 내게 윙크를 했다.

[곧 다시 만나죠, 우리 귀여운 아들.]

순식간에 3주신 중 둘이 사라졌으나, 긴장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세상의 천칭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개연성의 저울대가 다시 한번 기울고 있었다.
이로써 <관리국>이 개연성을 부여한 존재가 누구인지는 명백해졌다.

올림포스의 왕, 제우스.
대성운 <올림포스>에서, 유일하게 ‘마지막 시나리오’에 도달한 존재.

포세이돈을 퇴장시키고, 다른 성좌들의 반응도 불러오기엔 제우스만한 성좌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비유의 채널은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관리국>의 대도깨비들이 ‘번개의 좌’에게 허용된 개연성을 회수합니다.]
[<관리국>의 대도깨비들이 ‘번개의 좌’에게 철수를 권고합니다!]

하지만 축제는 짧기에 ‘축제’인 법.
제우스 급의 존재가 하위 시나리오에 오래 머무르면 <스타 스트림>의 균형을 해치게 된다. 자칫하면 지난번처럼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 따위의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러나 제우스는, 제우스답게 안하무인이었다.

[재촉하지 마라. 난 네놈들 부탁 때문에 온 게 아니다. 내 씨앗들을 보러온 거지.]

그 말과 함께, <올림포스>의 하늘이 12신좌들을 내려다보았다.
세상을 오시하던 12신좌들 조차, 제우스의 시선 앞에서는 모두 긴장한 모습들이었다.

[그런데 여전히······ 쓰레기 같은 놈들뿐이군.]

제우스의 한마디에 12신좌들은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주저앉았다.
파르르 떨리는 디오니소스의 어깨가 보였다. ‘설화급 성좌’이니 간단한 저항 정도는 할 수 있을 텐데도, 디오니소스는 조금도 저항하지 못했다.

어떤 ‘이야기’란 그런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쌓이고 축적되어, 끝내는 저항하지 못하게 되는 것.

하늘의 구름이 걷히며 제우스의 격이 흐릿해졌다.
농부가 척박한 땅에 등을 돌리듯, 제우스가 시나리오를 떠나고 있었다.
12신좌들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자식조차 아니었던가······.]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휘이익!

하늘을 향해, 작은 돌멩이 하나가 날아갔다.
내가 던진 돌이었다.

츠츠츠츠츠츳!

돌멩이는, 허공에서 개연성의 스파크를 맞아 소멸했다.

[성좌, ‘번개의 좌’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순간 강력한 ‘격’이 내 전신을 옥죄어 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오히려 눈에 힘을 팍 준 채 하늘을 노려보았다.
어차피 제우스에게 허용된 개연성은 저게 끝이다.

[성좌, ‘번개의 좌’가 시나리오에서 퇴장합니다.]

나는 12신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왜 저딴 말을 듣고만 있습니까?”

[······넌 대체.]

어이없다는 듯 디오니소스가 입을 떼려는 순간, 하늘에서 메시지들이 쏟아졌다.
아니, 그것은 메시지가 아니었다.
뭔가 말을 하려던 디오니소스도, 12신좌들도, 그리고 나도. 제우스가 사라진 하늘을 함께 올려다보았다.

별처럼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늘을 다스리는 제우스와는 관계없는 눈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제우스보다도 더 오래전에 존재했던 성좌의 힘.
<올림포스>가 만들어지기도 전, 최초의 하늘을 다스렸던 존재의 빛이었다.
외로운 섬처럼 바다에 우뚝 선 브리아레오스와 기간테스들이 떨어지는 눈을 보며 울부짖었다.

[메인 시나리오 #60 ― ‘기간토마키아’가 종료되었습니다.]
[히든 시나리오 ― ‘신화 전복’을 완수하였습니다.]
[보상 정산이 시작됩니다.]

세상의 성좌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주요 4인방 성좌들을 제외하고도,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성좌들과 잘 모르고 있던 성좌들까지.
디오니소스가 말했다.

[······네가 이겼구나, 김독자.]

파천검성과 거신들이 자신들의 커다란 몸을 배처럼 띄워 우리를 태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유중혁과 한수영이 각각 다른 하늘의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희원과 이현성이 서로를 부축했고, 이설화가 자신의 양손을 꼭 쥐었다. 신유승과 이길영을 안은 이지혜가 눈물을 닦고 있었다.
아마 그들도, 자신의 시스템 메시지를 듣고 있을지 모른다.

[새로운 ‘거대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새로운 설화 3개를 추가로 획득하였습니다!]

정말 오랫동안 준비한 계획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이미 결말이 정해진 소설을 읽듯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훤히 알 수 있었다.

[당신의 두 번째 거대 설화가 ‘승(承)’을 완성하였습니다!]
[히든 시나리오 ― ‘단 하나의 설화’의 두 번째 조건이 완수되었습니다!]

마침내, 기다렸던 ‘승(承)’이 나를 맞이할 것이고.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명성이 <스타 스트림>에 널리 알려집니다.]

우리의 승리를 축하하는 시스템 메시지가 우주에 널리 울려 퍼질 것이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여의봉을 치켜듭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해방의 붕대를 휘날립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자랑스러워합니다.]

내 채널의 사인방도, 나를 축하해주겠지.

[‘마지막 시나리오’의 일부 성좌들이 당신을 주목합니다.]

그리고 제우스와 같은 ‘마지막 시나리오’의 존재들이 나를 주목하기 시작할 것이다.

[마계의 마왕들이 당신의 행보에 주목합니다.]
[<에덴>의 대천사들이 당신을 주목합니다.]
[알려지지 않은 이계의 신격들이 당신의 존재를 응시합니다.]
[‘종말의 구도자’들이 당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얀 눈이 내린 바다의 한가운데에서 선과 악, 그리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존재들이 이야기를 지켜볼 것이다.
오랜 세월 이 세계를 지배했던, 한 신화의 종말을.
그리고 나와 함께 그 이야기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나를 찾을 것이다.

“김독자.”

하지만 그때.

“······김독자?”

나는, 이미 그곳에 없을 것이다.





< Episode 63. 신화의 종말 (6) > 끝

< Episode 64. 길이 아닌 길 (1) >





Episode 64. 길이 아닌 길


<올림포스>의 <기간토마키아>가 붕괴한 직후, 거신들에게 걸려 있던 제약은 사라졌다. 그들은 이제 오랜 설화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시나리오의 참가자로 거듭날 것이다.

[선대의 싸움을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동의하는가?]
[동의합니다.]

그렇게 거신들의 리더인 브리아레오스와, 12신좌들의 임시 대표인 디오니소스는 60번 시나리오의 종료를 코앞에 두고 극적인 타결에 성공했다.

[<스타 스트림>이 ‘신화 붕괴’를 인정합니다.]
[60번 시나리오에 새로운 설화가 피어납니다.]

사실 싸우려면 더 싸울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기간토마키아>를 통해 <올림포스>의 전력은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많은 영웅들과 거신들이 죽었고, ‘포세이돈’의 행방이 불분명해졌으며, 침묵하던 ‘명왕’이 자신의 후계를 발표했다.
그런 상황에서 남은 12신좌들과 거신들이 대립해봐야, 성운의 존립만 위태로워질 뿐이었다.

거대 성운 <올림포스>의 몰락.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의 중심에, 한 작은 성운이 있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김독자 컴퍼니’의 이름을 연호합니다!]

한 작은 성좌의 분투로 시작되었던 그 이야기가, 마침내 하나의 ‘거대 설화’의 끝을 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해당 성운의 구성원들은 ‘거대 설화’의 끝이 고하는 여운을 음미할 틈도 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독자 씨! 독자 씨!”
“형! 장난치지 마요! 어디 숨은 거죠!”

정희원, 이현성, 이지혜, 신유승, 이길영······.
그들은 거신들이 만든 작은 섬 위에서 김독자를 찾고 있었다.
누군가는 불안한 목소리로, 또 누군가는 불신 가득한 표정으로.

모두가 혼란한 와중에 유일하게 침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무표정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한 사내뿐이었다.
한수영은 그 사내를 유심히 노려보다가 물었다.

“유중혁, 넌 뭔가 알고 있지?”
“······.”
“대답해. 애들 걱정하잖아.”

유중혁의 고개가 천천히 한수영을 향했다.
뭔가를 눈치챈 일행들이 한수영의 뒤쪽으로 모여들었다.

“뭐예요, 사부! 뭔가 알아요?”
“독자 씨한테 또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죠?”

유중혁은 잠시간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

“김독자는 지구로 돌아갔을 거다.”
“뭐야, 우리만 빼 놓고?”

뒤늦게 뭔가를 눈치챈 이지혜가 작게 입을 벌렸다.

“아······ 설마?”

생각해 보면, <기간토마키아>는 그들의 진짜 목적이 아니었다. 애초에 <기간토마키아>의 참여는 과정이었을 뿐. 모두가 승리의 기쁨에 취해 들떠 있을 때, 오직 김독자만이 이번 일의 진짜 목적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풀어낸 정희원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혼자만 잽싸게 돌아간 건 좀 따져야겠는데요.”
“우리도 얼른 돌아가요!”

그때,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해당 시나리오의 안정화를 위해 1시간 동안 지역 이탈이 제한됩니다.]

놀란 이설화가 눈을 크게 뜬 채 물었다.

“······독자 씨는 대체 어떻게 나간 거죠?”
“아마 특수한 방법을 사용했겠지.”
“특수한 방법이요?”
“자세한 건 나도 모른다.”

유중혁은 그렇게 답하며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공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쨍한 여름 날씨에 흩날리는 눈. 지구로 치자면 8월의 날씨에 눈이 오고 있는 셈이었다.
그 눈을 바라보던 한수영이, 유중혁에게 물었다.

“······김독자가 먼저 돌아간 거, 유상아 때문이지?”

당연한 것을 굳이 물을 때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유중혁의 대답이 돌아온 것은, 기적처럼 흩날리던 눈이 태양 볕에 모두 녹은 후였다.

“가 보면 알 수 있겠지.”


*


차원로(次元路)를 달리는 차량 속에서, 나는 짧은 생각에 잠겼다.
처음 <기간토마키아>를 전복시킬 계획을 세울 무렵, 나는 여러 성좌들에게 연락을 했다. 아마 나와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는 성좌들은 모두 내 연락을 한 번씩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올림포스>와 특수한 관계에 놓여 있거나, 60번 시나리오로의 참가가 어려운 처지였다.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성좌라고, <올림포스> 같은 거대 성운과 적대 관계에 놓이고 싶겠는가.
그런데 개중에 한 명, 특이한 제안을 한 존재가 있었다.

―<기간토마키아>를 도와줄 수는 없네. 하지만 자네가 실패했을 때 도망갈 길을 열어줄 수는 있지. 단, 자네 혼자만 가능하네.

그리고 그 제안을 한 존재는, 지금 운전석에 앉아 느긋하게 핸들을 잡고 있었다.

[······설마 그 제안을 이런 식으로 활용할 줄은 몰랐구만.]

자력 개연성으로 ‘시나리오’의 포탈을 주파할 수 있는 존재이자, 차원로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스페셜 페라르기니]의 소유자.
‘양산형 제작자’가 웃으며 말했다.

[원래 자네는 다른 이에게 좀처럼 도움을 청하지 않는 타입이었는데.]

“다른 세계선에 다녀와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지더군요.”

나는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거기다 실수로 [X급 페라르기니]를 두고 왔거든요. 아직 할부도 안 끝났는데, 요즘도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납니다.”

[하하, 나한테 샀던 그 차 말인가?]

“그래서 앞으로는 자차 몰지 않고 남의 차에 얻어 타기로 했습니다.”

[저런, 판매자 입장에서는 아쉬운 결정이로군. 이번에 신형 모델이 나와서 자네에게 한 대 쯤 공짜로 주려고 했었는데.]

“······공짜로요?”

[거짓말일세.]

······그럴 줄 알았다. 저 능구렁이 같은 성좌가 자기가 손해 보는 일을 자초할 리가 없지.
‘양산형 제작자’는 굵은 궐련을 입에 문 채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흩날린 연기는 조수석에 앉은 내게 다가오기도 전에 글로브 박스 앞쪽에 설치된 환풍구로 빨려 나갔다.

[자네 성운과 ‘계약’을 맺고 싶네.]

“계약이요?”

[자네들이, 이번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나?]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의 설맥(說脈)을 타고 흐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내가 저지른 일의 ‘결과’가 내 전신의 혈관을 타고 흐르고 있었으니까.

「신화를 삼킨 성화」.

이 설화는 내가 본래 얻고자 했던 「신의 지문을 지우는 자」나 「신화의 문을 닫는 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본질은 비슷했다. 거대 성운과 맞서 싸우고, 신화를 전복시키며 얻은 설화. 이 설화는 앞으로 내가 싸우게 될 무수한 성운들에 대한 카운터가 되어줄 것이다.

[이번 일로 많은 성좌들이 <김독자 컴퍼니>를 알게 되었네.]

“그렇겠죠.”

[심지어 그들 중 몇몇은, 자네의 성운을 <12대 성운>의 하나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12대 성운이라. 벌써 그 이야기를 들을 만한 위치에 왔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3강(强), 4중(中), 5약(弱)으로 이루어진, <스타 스트림>을 지배하는 열두 개의 성운들. 개중 3강과 4중의 사이를 왔다갔다 하던 <올림포스>가 이번에 크게 화를 당했으니, 누군가는 그 빈칸을 채우려 들 법도 했다.

“성급한 별들이 많군요.”

[호사가들이야 늘 그렇지.]

“그리고 ‘양산형 제작자’께서는 그 호기를 틈타 저희 성운과 계약을 맺고 싶다는 말씀이시고요.”

[바로 그렇다네.]

양산형 제작자의 대답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번 신제품 광고를 자네 성운에게 맡길까 하는데, 어떤가?]

“저야 좋죠. 성운 사람들에게도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좋지. 개인적으로 출연해줬으면 하는 화신은······.]

나는 ‘양산형 제작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페라르기니]의 창밖으로 스쳐 가는 정경을 응시했다. 스쳐가는 풍광 속으로 무수한 이야기의 계절이 흐르고 있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그리고 가을로.
그렇다. 어느새······.

“······빠르군요.”

무심코 그 말을 하며, 나는 품속에 담긴 성유액 병을 움켜쥐었다.
지금껏 나는 원작의 그 어떤 회차보다도 빠르게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그 빠름 또한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속도일 뿐. 이것이 ‘충분히’ 빠른 것인지 어떤지, 나는 알지 못했다.
‘양산형 제작자’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번 신제품이 좀 빠르긴 하지. 자네도 직접 운전해 보면 알게 되겠지만, 주행감이 아주······.]

“주행 속도에 비해 시간이 너무 지체되네요. 계약 얘기 때문에 일부러 돌아가고 계신 건 아니죠?”

[험, 무슨 소린가. 가장 빠른 길로 가고 있는 걸세. 보게, 벌써 마지막 교차로야.]

‘양산형 제작자’의 말대로, 새카만 차원로의 건너편으로 세 개의 포탈이 하얀빛을 뿜고 있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양산형 제작자’가 설명하듯 덧붙였다.

[하나는 지구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내 ‘별자리의 맥락’으로 통하는 길이네.]

“나머지 하나는 뭐죠?”

[‘길처럼 보이는 길’.]

양산형 제작자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른 포탈보다 훨씬 어둡고, 음습한 기운을 풍기는 포탈.

[저 끝에 뭐가 있는지 아나?]

물론, 나는 알지 못했다.
아무리 ‘멸살법’이라고 해도 차원로의 모든 포탈에 대한 설명을 써놓은 것은 아니니까. 말하자면 저 ‘포탈’은, ‘멸살법’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길일 것이다.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네. 그냥 막힌 길이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돌아오는 대답.
내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양산형 제작자’가 말을 이었다.

[어떤 길들의 끝은 그래. 다른 길들과는 달라 보여서, 혹은 누구도 걷지 않은 길인 것 같아서 걸었던 그 길들은, 사실 그냥 길조차 아니었던 경우가 많아.]

[페라르기니]가 속도를 내며 음습한 포탈을 지나쳤다. 반짝이는 내비게이션에 지구로 가는 경로가 표시되고 있었다.
화면 속에, 방금 지나친 포탈은 ‘길 없음’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그런 길들은 대개 애매한 곳에서 끊어져 버리지. 그리고 그 길을 선택해 걸어간 사람들은, 그것이 끝이라 믿으며 살아가야 해.]

“······말씀의 저의가 뭡니까?”

[부디 길을 잘 선택하게.]

어느새 궐련의 불을 꺼뜨린 ‘양산형 제작자’가, 특유의 젠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때론 길처럼 보였던 것이, 길이 아니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다음 순간, 차원의 정경이 바뀌었다. 푸른 행성의 외양이 언뜻 보인다 싶은 순간, 나는 어느새 지상에 착륙해 있었다.
‘양산형 제작자’가 말했다.

[도착했네. 이번엔 다행히 잘 온 모양이구만.]


*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향한 곳은, 말할 필요도 없이 [공장]이었다. 그중에서도, 환자들이 입원한 병동.
내가 병동으로 발을 디디자마자, 어디선가 [진언]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느냐.]

그것은 [진언]처럼 들렸지만, [진언]이 아니었다. 초월좌의 위엄이 느껴지는 목소리.
허공에서 푸르스름하게 튀는 백청의 마력.
······역시, 어떤 스승이든 제자 앞에서 보이고 싶은 모습은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불초 제자가 인사드립니다.”

[시간이 없으니, 인사는 나중에 받겠다. 가거라.]

‘귀환 전쟁’의 여파인지, 키리오스는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혈마와 천마는······.”

[내가 죽였다. 잔말 말고 빨리 가거라.]

그 담담한 선언에,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전생의 파천검성조차 당해내지 못했던 혈마와 천마를 단신으로 상대하고서, 심지어 살아남았다니. 이번 회차의 내 스승이 얼마나 강해진 것인지,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멀리서 나를 발견한 아일렌이 달려오고 있었다. [공장]을 지키는 유일한 설화 전문가. 그녀가 없었더라면, 이미 일행들 중 두엇은 죽어 나갔을 것이다.
나는 품에서 꺼낸 성유액을 흔들며 외쳤다.

“성유액을 가져왔습니다!”
“그게,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상황은 알고 있습니다.”

멀리서, 붉은빛을 띤 두 개의 병실이 보였다.
하나는 유상아의 병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는 좀 어떻습니까?”
“유상아 씨랑 증상이 거의 비슷해요.”
“증상의 정도는?”
“더하면 더했지 덜한 수준은······.”

어머니가 평소 무리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본래 ‘거대 미래’를 예지하는 성흔들은 사용자에게 큰 부담을 준다. 더군다나 성운 자체와 애매한 형태로 계약을 맺은 유상아나, 배후성이 힘을 거의 잃어버린 어머니의 경우라면 그 부담은 훨씬 더했겠지.
내게서 성유액을 받아든 아일렌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론 부족할 것 같아요.”
“그래서 두 병을 구해왔습니다. 종류도 다릅니다.”

내가 가져온 성유액은 하나가 아니었다. 본래 받기로 되어있었던 수르야의 [소마]에 더불어, 디오니소스에게 빼앗은 [넥타르]까지.
두 병의 성유액을 받은 아일렌의 표정에, 일순 화색이 돌았다.

“······의료진!”

그녀의 신호에 달려온 의원들이 두 개의 병실을 향해 일제히 이동했다. 누군가 내 곁을 툭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포세이돈에게 맞은 옆구리가 몹시 욱신거렸다. 시야가 잠깐 흐려졌다가 되돌아왔다.

······이거, 나도 치료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하긴, 신화급 성좌의 공격을 맞았는데 멀쩡한 게 오히려 이상하지.

상처의 고통을 감추기 위해 애써 호흡을 골랐다. 의식이 불안정해서일까. 의원들이 들어가는 병실의 문이, 꼭 ‘양산형 제작자’가 내게 보여주었던 포탈의 입구처럼 보였다.

[괜찮으냐?]

허공을 날아온 키리오스가 내게 물었다. 나는 괜찮습니다, 라고 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답했던 것도 같고, 잠깐 의식을 잃었던 것도 같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병동의 의자에 누워 있었다.
내 눈앞에는 아일렌이 서 있었다.
나는 고통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어떻게 됐습니까?”

나는 흐려지는 의식을 바로잡으며 물었다.
그런데 아일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부족해요.”
“부족하다고요? 뭐가요?”
“두 분의 병세가 생각보다 너무 빨리 악화되어서, 성유액 두 개를 다 써야 간신히 한 분을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아일렌의 말은 머나먼 외계의 말처럼, 말하자면 이계의 신격의 헛소리처럼 들렸다.

“그게······ 무슨 말이죠?”
“구원의 마왕님.”

아일렌이 나를 수식언으로 부르는 것은 간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그렇게 부를 때는, 오직 내 명령을 필요로 하는 순간뿐이었다.
두 개의 병실이, 나를 기다리는 포탈처럼 활짝 열려 있었다.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입니다.”





< Episode 64. 길이 아닌 길 (1) > 끝

< Episode 64. 길이 아닌 길 (2) >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제4의 벽’이 격렬하게 흔들립니다.]

두 개의 문이 그곳에 있었고, 누군가가 내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들어갈 거면 들어가도 좋다.
하지만 하나를 선택하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포기해야 한다.

······그럴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구원의 마왕님.”
“······예.”
“여기서 더 지체하시면, 둘 중 어느 쪽도 살릴 수 없어요.”

들려오는 아일렌의 목소리에 현실감이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어지러운 시야 속에서, 두 개의 병실을 가로지르는 병동 복도가 보였다.
‘양산형 제작자’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아무것도 없네. 그냥 막힌 길이지.

복도의 끝은 어둑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저 복도의 끝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도록 만들어진 복도.

「김독자는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다.」

침착하자. 방법은 있다.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누굴 살리고, 누군 죽이라고?
그럴 수는 없다.

[‘제4의 벽’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하 지만 선 택한 적도 있 잖 아」

순간, 머릿속으로 ‘첫 번째 시나리오’의 광경이 스쳐 갔다. 흔들리는 지하철. 죽어 엎어진 사람들의 모습. 어쩌면, 모두 살릴 수 있었던.

「그 러니 까 이번 에 도 선택 할 수 있 어」

······그때랑 지금은 달라.

「뭐 가 다 르지?」

나는 [제4의 벽]에게 대답하는 대신, 아일렌을 향해 물었다.

“남은 시간은 어느 정도죠?”
“앞으로 20분 정도······ 이수경 씨 쪽이 좀 더 위중해요.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더는······.”

20분.
짧지만, 이것저것 시도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직 포기하긴 너무 이르다.

“만약 성유액이 더 있다면 둘 다 살릴 수 있습니까?”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아요.”

나는 곧바로 [헌집 두꺼비]를 꺼냈다.
이내 뀌룩, 하는 소리와 함께 두꺼비가 말했다.

―헌 것 주 면 새 것 주 지

나는 [넥타르]가 반쯤 들어있는 병을 가리키며 물었다.

“혹시 이것도 ‘새것’으로 바꿔줄 수 있어?”

그러나 [헌집 두꺼비]는 고개를 저었다.

―그 건 헌 것 도 새 것 도 아 냐

“이거 내가 반쯤 먹은 거야. 그러니 헌 게 됐잖아. 다른 아이템 줄 테니 이것도 새 병으로 채워주면······.”

―궤 변 이 군······ 그 건 내 가 들 어 줄 수 있 는 게 아 냐

역시나, 성유액 정도 되는 아이템은 이런 식의 꼼수가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피 곤 하 니 부 르 지 마

아까 ‘거신병’을 새것으로 삼키며 피로해졌던 것인지, [헌집 두꺼비]는 그렇게 말하고는 곯아떨어졌다.
나는 녀석을 품속에 회수한 후, 두 번째 방법을 시도하기로 했다.
복제할 수 없다면, 새로 얻는 수밖에 없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츠츠츠츳!

[간접 메시지 사용이 취소되었습니다.]
[현재 특정 시나리오의 점검 및 수복으로 인해 간접 메시지 기능이 비활성화 되어 있습니다.]

······뭐?

[점검 중인 시나리오는 ‘60번 시나리오’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우연이었다. 설마 60번 시나리오의 격전이 여기까지 여파를 미쳤을 줄이야······.
하지만 새 성유액을 얻기 위해선, 반드시 다른 성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장하영!”

내 외침에, 아일렌의 시선이 어딘가로 움직였다.
장하영이 입원한 병실은 하필 유상아의 병실이었다. 응급등이 켜진 병실의 문턱에 서는 순간, 뒷덜미에 서늘한 감각이 맴돌았다.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누군가가 내게 외쳤다.
유상아가 누워 있는 방향에서 흩어지는 설화 파편들이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나는 애써 그쪽을 외면하며, 의원들을 제치고 장하영을 찾았다.
장하영은 병실의 오른쪽 귀퉁이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장하영! 일어나! 빨리!”
“잠깐만요! 그분도 중환잡니다!”

의원들이 달려와 나를 뜯어말렸다.
자세히 보니, 장하영도 전신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다량의 설화팩을 투여받고 있었다. ‘귀환전쟁’의 여파로 이 녀석도 큰 부상을 입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장하영이 가진 스킬이 꼭 필요했다.

[‘정체불명의 벽’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제4의 벽’이 ‘정체불명의 벽’을 마주봅니다.]

눈앞에서 스파크가 튀며 무기질적인 벽의 시선이 느껴졌다.
협조의 의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냉막함.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나는 [책갈피]를 열었다.

‘정체불명의 벽’도 결국은 ‘스킬’이다.
아직 ‘장하영’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약간의 운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나는 [책갈피]의 목록에서 ‘장하영’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내 행동에서 꺼림칙함을 느꼈는지, ‘정체불명의 벽’이 경고하듯 말했다.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넌 내 주인이 아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네 도움이 필요해.”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만큼 일분일초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네 주인을 깨워야만 해.”

벽은 잠시 답이 없었다. 마치, 뭔가 생각이라도 하는 듯한 침묵.
잠시 후 벽의 건너편에서 메시지가 돌아왔다.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도와주마.’]

그 말과 동시에, 내 주변으로 작은 파티션으로 막힌 공간이 만들어졌다. 오래전, 미노 소프트 인턴 시절의 사무실을 연상시키는 공간이었다.
전방에 생성된 커다란 패널과, 그 밑으로 보이는 익숙한 형태의 입력 장치.
아마 장하영은 이 협소한 벽 안에서 무수한 성좌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으리라. 오직, 이 작은 벽에만 쓸 수 있는 낙서 같은 이야기들을 듣고, 듣고 또 들었을 장하영······.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그러게 평소에 좀 잘해주든가.’]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잠든 장하영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일단 지금은 급한 불부터 끄는 게 먼저다.

[‘정체불명의 벽’이 당신에게 일시적으로 ‘사용권’을 허락하였습니다.]
[메시지를 보낼 대상을 입력하십시오.]

제일 먼저 떠오른 성좌는 디오니소스였다.

[해당 성좌에겐 메시지를 보낼 수 없습니다.]
[현재 성운 <올림포스>와의 모든 통신이 마비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나는 재빨리 메시지의 수신좌를 바꾸었다.
그러자 곧바로 답장이 돌아왔다.

―소마가 더 필요하다고? 미안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소마는 그대에게 넘겨준 것이 전부다.

답장은 수르야의 것이었다.
역시, 이쪽도 상황은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성운에 추가로 요청하시는 건 어렵습니까?
―나는 <베다>에서 탈퇴하면서 소마의 생산권을 빼앗겼어.
―혹시 디오니소스가 곁에 있습니까?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잠시 후 수르야의 대답이 돌아왔다.

―최근 <올림포스>도 설화 기근에 시달리고 있어서 ‘넥타르’의 공급이 끊겼다는군. 그대에게 줄 만한 양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 유감이다.
―아닙니다.

이미 수르야에겐 <기간토마키아>를 치르며 도움을 많이 받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이상 무언가를 요청하는 것은 무리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멸살법’에 등장하는 각종 성유액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넥타르]와 [소마]를 대체할 수 있는 것 중, 당장 구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문 채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치료가 불가능하다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된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에게 메시지를 발송합니다.]

페르세포네와 하데스는 <올림포스>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정체불명의 벽’을 통해 통신이 가능했다. 이 방법만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찬물 더운물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페르세포네로부터 돌아온 대답 또한, 그다지 긍정적이진 않았다.

―아들, 알고 있겠지만 「의식의 흐름」을 통해 부서진 존재는······.

이 세계의 모든 영혼은 ‘명계’로 간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혼이 멀쩡할 경우의 이야기다.

―······역시, 그렇습니까.

사실 조금은 예상하고 있었다.
「의식의 흐름」은 영혼을 이루던 이야기가 깨어져 나가는 현상.
저 병증을 앓는 영혼체는 <명계>로 가지 않는다.
정확히는,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그냥 거기서 끝나는 것이다. 잘못된 길의 종착점에 다다른 이가 주저앉듯, 그 자리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
페르세포네가 말했다.

―아들.
―아직 제대로 ‘후계’를 계승한 상황도 아닙니다. 지금은 절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나는 빠르게 응대한 뒤 통신을 끊었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열어 ‘멸살법’의 파일을 열었다.
아직 방법은 있다. 분명 있을 것이다.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너는 너무 많은 개연성을 해쳤다.’]

······닥쳐.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해친 개연성은, 반드시 다시 돌아오게 되어있다. 그것이 이 세계의 법칙이니까.’]

“닥치라고 했지.”

나는 빠르게 ‘멸살법’을 읽어 나갔다.
찾아보니, ‘멸살법’의 유중혁도 나와 비슷한 난관에 부딪친 적이 몇 번 있었다.

가령 161회차와 275회차.

그 회차에서, 유중혁은 두 명의 동료 중 하나만을 살릴 수 있는 상황에 처한다.
이설화와 이지혜 중 하나만 살릴 수 있다는 말에, 유중혁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둘 다 살린다.”」

275회차도 마찬가지였다.
이현성과 신유승. 둘 중 하나만을 구할 수 있는 상황에서, 유중혁은 이렇게 선언했다.

「“내가 둘 다 구하겠다.”」

실로 유중혁다운 대답이었다.
그렇게, 161회차와 275회차의 유중혁은 실패한다.
그는 이설화도, 이지혜도, 이현성도, 신유승도 구해내지 못한다.
그리고 끝내는 자기 자신도.
그럼에도 매번 유중혁은 같은 선택을 하고, 또 같은 선택을 했다.
화면을 쥔 오른손이 불안하게 떨려서, 나는 오른손을 꾹 붙들었다.

「하 지 만 김독 자는 유 중 혁이 아니 지」

유중혁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녀석이 회귀자였기 때문이었다.
나와는 다른 회귀자. 몇 번이나 삶을 반복할 수 있는 존재.

하지만 내 삶은 이번 한 번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이 삶은 내게 실수를 허락하지 않는다.
내가 실수하면 누군가가 죽는다.
그래서 나는 실수하지 않았다.
흐름을 비틀고, 뒤틀린 개연성을 감수하면서도 여기까지 왔다.

여기까지, 잘 왔다고 생각했다.

브리아레오스는 말했다.

―진짜 ‘운명’은 피할 수도 없고, 그것을 피해간다면 개연성은 반드시 왜곡된다. 그리고 뒤틀린 개연성은, 반드시 누군가가 대신 해소해야만 하지.

안다. 나도 들어서 알고 있다.
단지, 내가 불만인 것은.

왜.

「······자 씨.」

왜······ 그걸 해소하는 게 이들이어야 하냐는 것이다.

「독자 씨.」

한 방울, 두 방울.
단단한 화강암을 꿰뚫는 물방울처럼 나를 건드리는 목소리.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독자 씨, 난 괜찮아요.」

유상아가 누워 있는 병실 커튼 사이로, 깨진 설화의 파편들이 넘실거리며 흘러나와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수경 씨를 살리세요.」

반쯤 벌어진 입에서,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유상아는 내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대답했다.

「전 살아날 방법이 있어요. 이미 ‘헤르메스 시스템’으로 살펴둔 방법이 있거든요.」

[전용 스킬 ‘거짓 간파 Lv.7’을 발동합니다!]
[당신은 해당 발언이 거짓임을 확인했습니다.]

“유상······.”

「독자 씨.」

그것은 나를 부르기 위해 꺼낸 말이 아니었다.
유상아의 말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호한 어조.
언젠가, 유상아와 함께 팀을 이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유상아는 그랬다.
특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을 주장할 때, 유상아는 결코 자신을 굽히는 법이 없었다. 유상아는 차분하지만 강인한 어조로,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마치, 패닉에 빠진 어린아이를 달래기라도 하는 것처럼.

「독자 씨, 얼타지 말고 잘 들어요.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하세요.」

왜일까. 유상아의 그 말이 익숙하게 들리는 것은.

「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어요. 하지만 수경 씨는 지금 살리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게 돼요.」

왜 내가 앉은 이 자리가 언젠가의 지하철 좌석처럼 느껴지고, 어째서 떨리는 이 손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이건 게임 퀘스트 같은 거예요. 미리 짜여진 동선이 있고, 그 동선에 맞게 행동해야만 제대로 클리어할 수 있는 퀘스트.」

“······유상아 씨.”

「그리고 독자 씨는, 지금 알맞은 선행 퀘스트를 수행해야 할 때예요.」

나는 유상아의 그 말을 이해했다.
아마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말을 하는 유상아의 마음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평생이 걸려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 따위가 감히 이해한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제4의 벽’이 두께를 늘립니다.]

지하철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던 유상아처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일렌.”

내 의도를 알아챈 아일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상아의 곁에 붙어 있던 의원들이 우르르 반대편 병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나 역시 반대편 병실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차마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걱정 마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커튼 너머로 보이는 유상아의 실루엣은 이미 많이 흩어져 있었다.
어쩌면, 저 너머의 인물은 이미 내가 아는 ‘유상아’가 아닐지도 모른다.
찢겨 나가고 흩어져서, 더이상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사라지고 있는 유상아의 환청을 듣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유상아 씨.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사람의 목숨을 선별했습니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유상아를 향해 말을 계속했다.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만 살게 두었습니다. 그땐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야, 이 세계의 결말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었거든요.”

「······독자 씨.」

“하지만 이번에도 그렇게 해야만 ‘이야기의 결말’을 볼 수 있다면, 저는 차라리 결말을 보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는 죽여야 하는 것.

“목숨을 두고 선택지 따위가 존재한다면, 애초에 그건 잘못된 이야기인 겁니다.”

내 대답을 두고, ‘양산형 제작자’는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건 ‘길이 없는 길’이라고.

[‘제4의 벽’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택이 아니다.
처음부터 내게 길은 하나 뿐이었으니까.

[마왕, ‘구원의 마왕’이 ‘제4의 벽’을 바라봅니다.]

나는 유중혁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문제에 관한 한, 그 녀석과 내 대답은 똑같다.

“저는 그 ‘이야기’를 부술 겁니다. 그러니까 유상아 씨는 죽지 않습니다. 제 어머니도요.”

새카만 어둠으로 덮인 막다른 벽이 눈앞에 있었다.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을 것처럼 단단하고, 두터운 벽.
나는 천천히, 그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 Episode 64. 길이 아닌 길 (2) > 끝

< Episode 64. 길이 아닌 길 (3) >





유중혁과 일행들이 지구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후였다. 유중혁, 한수영, 이지혜, 정희원, 이현성, 신유승, 이길영, 이설화까지.
포탈을 통해 무사히 하위 시나리오로 내려온 그들이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공단]의 중심지에서 번쩍이는 스파크였다.

츠츠츠츠츳!

마치 번개라도 치는 듯, [공장]의 한가운데로 내려꽂히는 개연성의 스파크.
이지혜가 물었다.

“······대체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그러나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키메라 드래곤이 날갯짓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들은 [공장]에 도착했다. 흉벽 위로 뛰어내린 일행들은 곧장 병실을 향해 달렸다.
막무가내로 뛰어 들어온 일행들을 본 비천호리가 손을 흔들었다.

“허, 벌써들 돌아오셨소?”

정희원이 물었다.

“독자 씨······ 아니, 유상아 씨 어딨어요?”
“그분은 저쪽에― 그보다 여러분도 치료를 받으셔야 할 것 같소만······.”
“우린 멀쩡해요. 일단 현성 씨만 부탁해요.”
“자, 잠깐만요! 저도 피부만 좀 탔지 멀쩡―”
“닥치고 누워 있어요.”

정희원과 일행들은 새까맣게 타버린 이현성을 침대차에 내던진 뒤, 유상아의 병실을 찾아갔다.
분명, 김독자라면 제일 먼저 그곳으로 향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독자 씨! 상아 씨!”
“여, 여러분! 그렇게 막 들어오시면······!”

그러나 도착한 곳에서 일행들이 마주한 것은 전혀 뜻밖의 광경이었다.
한수영이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이야?”

유상아의 병실에는 최소한의 의원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여전히 부서지고 있는 유상아의 영혼. 김독자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쿠구구구구.

한수영의 몸에서 새카만 격이 흘러나왔다.

“묻잖아. 이게 무슨 상황이야?”

그 위압감에 의원들이 묻지도 않은 말까지 줄줄이 모두 토해냈다. ‘귀환전쟁’에서 있었던 일부터, 김독자가 돌아온 후의 일까지.

“······그래서, 이수경 씨 먼저 처치에 들어갔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거의 마지막 단계로―”

그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한수영의 신형이 움직였다. 누구도 말리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였다.
근처의 의자 위로 뛰어오른 한수영은, 자신보다 키가 큰 사내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이 개자식. 넌 다 알고 있었지?”
“······.”
“왜 제대로 이야기 안 했어? 이런 줄 알았으면―”
“말했다면, 네가 바꿀 수 있었나?”

유중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병실을 울렸다.
굳어진 한수영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알았다면 바꿀 수 있었는가?

모른다. 한수영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유중혁이 다시 한번 물었다.

“너 따위가, 바꿀 수 있냐고 물었다.”
“이 개새······!”

이번에는 유중혁도 양보하지 않았다.
허공에서 부딪친 두 사람의 격이 주변을 황폐화시키려는 그 순간.
정희원이 두 사람을 막아섰다.

“둘 다 멈춰요! 지금 여기 유상아 씨 안 보여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분노합니다!]

유중혁은 한수영의 손을 뿌리치며 의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김독자는 어디냐.”

그 물음에, 한수영도 의원 쪽을 돌아보았다.
의원들은 대답 대신 일제히 한 곳을 바라보았다. 시선 끝에는 이수경의 수술이 진행 중인 병실이 있었다.
한수영이 물었다.

“저 방에 김독자도 같이 있어?”
“그렇습니다. 아일렌 님께서 필요하다고 하셔서······.”

일행들은 수술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수술실 문으로 다가갔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병실 안쪽에서 수술을 진행하는 아일렌과 김독자가 보였다. 조명의 역광 때문에 김독자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수척한 것만은 확실했다.
떨리는 김독자의 손과, 조금씩 낮아지는 시선.
먼저 입을 연 것은 신유승이었다.

“······아저씨 상태가 좀 이상해요.”


*


수술이 시작된 후, 집도의를 맡은 아일렌이 제일 먼저 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함께 들어와 주셔야 합니다.”
“······제가 도울 일이 있습니까?”
“네.”

병실에 들어서자, 부서진 어머니의 파편들이 보였다.
풍백을 강림시켜 귀환자들을 물리친 어머니는, 모든 설화의 맥이 끊어진 상태였다.

「······독자야.」

어디선가, 그런 말이 들려온 것도 같았다. 어쩌면 어머니의 설화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듯 생각했다.

‘걱정마세요. 난 누굴 택한 게 아니니까.’

최대한 빠르게 정확하게 어머니의 영혼을 수복해야 한다. 그래야, 유상아를 살릴 시간을 벌 수 있다.
지금부터는 집도의를 맡은 아일렌의 시간이었다.

“의원들은 마력 공급을 시작하세요.”

아일렌은 품속에서 작은 붓을 꺼내든 뒤, 허공에 떠다니는 설화 파편들을 하나둘 모으기 시작했다.
수술 자체는 간단했다. 흩어진 설화 파편들을 모으고, 그 설화들을 맥락에 맞게 이어 붙이는 것.

맥락에서 빠져, 그 의미를 잃어버린 문장들에게 제자리를 되찾아주는 일.

말은 쉽지만, ‘멸살법’ 전체를 뒤져도 이 정도의 대수술을 행할 수 있는 존재는 손에 꼽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가 바로 내 옆에 있는 ‘설화전문가’ 아일렌 메이크필드였다.

[설화, ‘이야기를 수선하는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손끝에 닿는 모든 단어가 제자리를 되찾으니」

설화를 이어 붙이는 것도 결국은 설화의 몫이다.
아일렌의 붓이 움직일 때마다, 부서진 설화들이 하나둘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 설화들의 접착을 담당하는 것은, 내가 구해온 성유액들이었다.

[아이템, ‘소마’가 효력을 발휘합니다!]
[아이템, ‘넥타르’가 효력을 발휘합니다!]

집도 시간이 사십여 분을 넘어서자, 아일렌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멸살법’에서도 아일렌의 집도 장면은 등장하지만, 이것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살짝 감탄했다.
전반적인 설화의 수복이 끝나자, 아일렌은 선반에 놓인 물 한 모금으로 입을 축였다.
나는 그런 아일렌을 향해 물었다.

“······저 파편은 맥락에 안 맞는 것 같은데, 괜찮은 겁니까?”

보는 내내 내가 조마조마했던 것은, 아일렌이 이어 붙인 설화의 파편들이 완벽하게 정갈하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입술을 가볍게 닦은 아일렌이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그게 인간이란 것이니까.”

확실히,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개 인간은 생각도 기억도 정연하지 못한 존재니까.
그런데, 아일렌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제대로 붙이지 않으면 큰일 나는 문장들도 있어요. 예를 들면, 저런 부위들.”

아일렌이 어머니의 영혼체를 가리켰다.
수복된 다른 부위와는 달리, 반쯤 무너진 심장은 아직 시술이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다.

“사실 수경 씨는 회복시키기에 좀 늦었어요. 벌써 ‘테마’가 손상된 상태라.”
“테마요?”

물으면서도, 언뜻 ‘멸살법’의 내용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사람의 영혼은 모두 이야기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 알고 계신가요?”
“들은 적이 있습니다.”

페르세포네에게도 들은 이야기였다. 아일렌이 계속해서 말했다.

“모든 영혼에는 그 영혼을 꿰뚫는 ‘핵심 테마’가 존재해요. 그 영혼의 본질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

뒤늦게, ‘멸살법’의 문장이 명료하게 떠올랐다.

「모든 이야기는 ‘테마(Thema)’가 있다. 심지어 테마가 없는 이야기조차, ‘테마가 없다’는 것이 테마가 된다.」

“이 영혼을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만이, 테마를 건드릴 수 있어요.”

나는 순간 멈칫했다.

“설마 제가 함께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맞아요.”

아일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테마’는, 저 영혼을 가장 잘 아는 사람만이 수복할 수 있어요. 저건 마왕님이 직접 하셔야 해요. 제가 설화를 공유해 드릴 테니······.”

아일렌의 뒷말은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설화, ‘이야기를 수선하는 자’가 일시적으로 당신의 손 끝에 깃듭니다.]

내가, 직접해야 한다고?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요. 당장 시작해야 합니다. 의원들, 마력 공급 준비하세요!”

나는 멍하니 붓을 쥔 채, 어머니를 영혼체를 바라보았다.
수의를 입고 영면에 든 사람처럼, 고요히 눈을 감은 어머니.
못 본 사이 늘어난 주름과, 내가 모르는 상처들.
강직한 눈썹과, 마른 볼우물.
아일렌이 말했다.

“책이라고 생각하세요. 눈앞의 설화들이, 전부 한 권의 책에서 나온 거라 생각해보세요.”

눈앞을 부유하는 난해한 문장들을 보며, 나는 상상력을 발휘하기 위해 애썼다. 어릴 적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듯, 나는 눈을 감은 채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그래, 그 책이 읽고 싶니?”」

보얗게 쌓인 먼지를 치우고 커버를 열었을 때, 부서질 것처럼 낡아버린 첫 페이지. 다시 눈을 뜨자, 둥둥 떠 다니던 설화들이 내 손 끝으로 모여 있었다.

「“독자야.”」

한 문장씩, 파편들이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천천히 붓을 움직인다. 어머니를 떠올린다.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
퀴퀴한 곰팡이가 피어 있던 그 말들을, 오래된 기억의 우물 속에서 하나둘 길어 올린다.

「“독자야, 너는 어떤 인물이 제일 좋았니?”」

기억난다. 처음으로 어머니와 함께 읽었던 책들.
나는 무의식 중에 붓을 움직였다.
흘러넘친 문장들이, 내 붓을 통해 이어져 간다.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해피 엔딩일 수는 없단다.”」

내가 책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만들어 준 사람.
내가 저지른 죄를 대신해 치렀고, 감옥에 갔던 사람. 우리의 이야기로 책을 쓴 사람.
보고 싶었던 사람. 원망했던 사람.
내 어머니였지만, 오히려 내게서 가장 멀리 있었던 사람.

「“독자야.”」

거실에 낭자한 피, 떨어지는 칼의 감촉. 이어지는 어머니의 말.

「“다시 읽어보렴.”」

그리고 거기까지 완성한 순간, 나는 붓을 멈췄다.
여전히 어머니의 ‘테마’는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구원의 마왕님?”

내가 아는 ‘어머니’의 이야기도, 여기까지였다.

「“······죄라. 그것도 죄라면 죄겠지.”」

「“수감자들은 모두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가?”」

「“우습구나, 세상의 정의라는 것이.”」

여전히 무수한 설화 파편들이 내 주변을 떠돌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더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맥락에서 온 파편들이었다. 내가 듣지 못했기에, 알 수 없는 문장들이었다.
나는 갑자기 처음 읽는 책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것처럼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알고 있는 ‘이수경’은, ‘내 어머니’로서의 ‘이수경’뿐이었다.
붓을 쥔 손이 떨린다. 그 떨림이, 나를 대신해 말하고 있었다.

할 수 없다고.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뒤늦은 후회가 파도처럼 범람했다.

더 이야기했어야 한다.
더 말했어야 했고.
더 많은 것을, 나눴어야 했다.

붓을 쥔 손의 고도가 점차 낮아지고 있었다.
다시 무너져 가는 어머니의 설화들이 보였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어머니의 설화들이, 나를 조롱이라도 하듯 떠돌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단 한 사람조차.」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나도 아일렌도 아닌 누군가가, 작은 붓을 쥔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건 나한테 했던 말이군.”

하늘색 수감복 위로 멋드러진 정장을 걸친 중년 여인이 그곳에 있었다.
조선제일술사를 배후성으로 둔 조영란이었다.
그녀의 옆으로도 또 다른 이가 붓을 쥐고 있었다.

“흘흘, 설마 빵에 있던 시절을 그리워할 줄은.”

피스 랜드에서 함께 했던 이복순이 웃었다.
병실 안으로 몇몇 방랑자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붓을 쥐고, 성유액을 바른 뒤 문장들을 이어 붙이기 시작했다.
내게는 어려웠던 이야기들이, 그녀들에겐 자유롭게 흘러들고 있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채워지는 퍼즐들.

모든 방랑자들이 ‘이수경’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쩐지 시야가 흐려져서,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눈앞에서 내가 몰랐던 어머니의 삶이 그려지고 있었다.
내가 알아야 했지만, 알지 못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그 ‘방랑자들’조차도 모든 ‘테마’를 완성하지는 못했다.

여전히 남아 있는, 주인을 찾아가지 못한 몇 개의 파편들.
곁에서 누군가가 내 손을 잡은 것은 그때였다. 붓을 쥔 내 손이 멋대로 움직이더니 내가 모르는 문장을 이어 붙였다.
당황한 내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손의 주인이 내 말을 잘랐다.

“김독자, 넌 네가 무슨 신인 줄 알지.”

투덜거리는 목소리에서 레몬 사탕 향이 났다.
답답하다는 듯 내 손에서 붓을 빼앗은 한수영이 말했다.

“세상엔 네가 모르는 것도 있어, 멍청아.”





< Episode 64. 길이 아닌 길 (3) > 끝

< Episode 64. 길이 아닌 길 (4) >





츠츠츠츠츠······!

망가졌던 영혼에 스파크가 튀며, 어머니의 영혼체에 조금씩 활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방랑자들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까다로운 감식안으로 어머니의 설화 파편들을 이어 붙였다.

“이건 그때네. 다들 기억하지?”

다수의 사람들이 그려내는 단 하나의 초상(肖像).
그 광경은 단 하나의 완전한 예술품을 조각하기 위해 모인 장인들의 연회처럼 보였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내 어머니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어떤 시선은 존재를 죽인다.

시나리오가 시작된 후, 많은 성좌들의 시선 앞에 화신들은 죽어갔다. 노출당하고, 관음당하고, 욕망을 강요당하면서.

하지만 누군가를 살리는 시선도 있다.

“······아, 이때 그립네.”
“수경 씨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그치?”

그립다는 듯 중얼거리는 방랑자들의 목소리.
어쩌면 우리는 평생을 살며 한두 사람에게는 기억의 대가(大家)가 되는지도 모른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켜켜이 쌓이는 설화의 정경에 순수하게 감탄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크게 기뻐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알 듯 모를듯한 표정으로 머리털을 뽑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투덜거리며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채널의 점검이 끝난 모양인지, 성좌들이 비유의 채널로 모여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 속에 내 어머니가 완성되고 있었다.

어머니였던 이수경.
방랑자들의 왕이었던 이수경.
수감소의 혁명가였던 이수경.
에세이 작가였던 이수경.

그 많은 ‘이수경’들이 모여 ‘이수경’이라는 전체를 이루어 갔다.
내가 어정쩡하게 서 있자, 한수영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방해되니까 나가 있어.”

······확실히, 한수영도 지난 3년간 어머니와 함께 있었던 만큼 어머니의 설화에 지분이 있는 거겠지.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병실을 빠져나왔다.
어차피 설화의 수복은 거의 끝나가는 상황이었고, 나는 더 도울 일이 없어 보였다.
조금 불안하지만, 그래도 저 녀석도 작가니까······ 어머니를 망쳐놓진 않겠지.
뒤쪽으로 낮게 읊조리는 한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이때 말했던 건가? 모르겠다. 맞겠지, 뭐.”

······제발 괜찮아야 할 텐데.
병실 밖으로 나오자, 일행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저씨!”
“독자 형!”

나는 달려드는 두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일행들을 둘러 보았다.
정희원도, 이지혜도, 침대차에 묶인 이현성도······. 모두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따로 뭔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상황을 알고 있는 듯했다. 내게 매달린 신유승이 물었다.

“할머니는요? 수경 할머니는 괜찮으세요?”
“아마 괜찮을 것 같아. 거의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거든.”

내 대답에 일행들의 표정에 한줄기 안도가 스쳤다. 무거운 짐 하나는 던 얼굴들이었다.

“야, 독자 형 엄마가 왜 네 할머니냐?”
“아저씨 엄마니까 나한텐 할머니지.”
“독자 형은 네 아빠 아니거든?”

나는 재빨리 녀석들의 등을 토닥였다.

“자자, 싸우지 말고. 둘 다 할머니라고 하면 되잖아.”
“진짜요? 그래도 돼요?”
“그럼.”

얼굴이 발갛게 물든 이길영과 신유승을 보며, 나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이 아이들에게, 지난 3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나 없이 수십 개의 시나리오를 헤쳐 오면서, 이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어떤 이야기를 살았을까.

“······형?”

내가 한참이나 이길영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자, 이길영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노려보던 신유승이 내 손을 빼앗아 자신의 머리 위로 얹었다.
나는 두 아이를 가만히 품에 안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네? 뭐가요?”
“그냥, 다.”

지금 당장 무슨 이야기를 해도 용서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어쩌면 어머니의 설화가, 내게 영향을 끼친 것인지도 모른다. 제 때에 말하지 못해서 생긴 비극들을, 더이상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입술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고생했다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괜찮아요.”

신유승이, 먼저 말했다.

“우린 괜찮아요, 아저씨.”

고개를 든 신유승이 나를 보고 있었다.
위로해야 할 사람은 이쪽인데, 괜찮냐고 물어야 할 사람은 이쪽인데.

“아저씨도······ 괜찮은 거죠?”

차마 그 말에 답할 수가 없어서, 나는 신유승의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들자, 일행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지혜는 울컥한 얼굴이었고, 정희원은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는 애써 입술을 움직여 웃었다.

“왜들 그렇게 보세요? 저 괜찮습니다. 어머니도 회복됐고요.”
“진짜 괜찮은 거예요?”
“정말 괜찮습니다. 그리고······.”

나는 일행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몸 곳곳에 남은 상처에서 그들이 달려온 시간이 느껴졌다. 거대 설화 <기간토마키아>가 끝나자마자, 이들은 제일 먼저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 승리의 여운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한 채로.

“<기간토마키아>······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여러분.”

내 표정이 뭔가 우스웠는지, 정희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로 보너스는 다 퉁치는 거예요? 독자 씬 진짜······ 우리가 착하니까 여기서 일해주는 거지······.”

곁에서 이지혜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희원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왜 또 혼자 도망갔어요? 진짜 죽고 싶어요? 아니면 또 감금당할래요?”
“그게, ‘양산형 제작자’께서―”
“변명은 됐고요.”

나는 일단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다. 해명 같은 건 나중에 해도 되니까. 허리를 숙이자 눈에 띄는 낡은 배틀 부츠가 보였다. 부츠를 따라 올라가자, 뿌연 흙먼지가 묻은 검정색 코트의 사내가 보였다.
갑자기 기분이 새삼스러웠다.
내가 아는 그 ‘유중혁’이, 이곳에 속해 있다는 것이.

“유중혁, 너도 고생―”
“한심한 이야기나 늘어놓을 시간은 없다. 아직 다 끝난 것도 아니니까.”

유중혁은 특유의 무시무시한 눈길로 이쪽을 일별하고는 병동 반대편 복도를 향해 걸어가 버렸다.
역시 유중혁은 어디 있든 유중혁인 모양이다.

“다들 한가해 보인다? 야유회 왔어?”

병실의 문을 열고 한수영이 등장했다. 꽤 마력을 많이 소모한 모양인지, 녀석의 표정에는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

“어머니는?”
“화신체가 깨어나려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병증은 완전히 치유됐어. 나머지는 시간에 맡겨야지.”
“고생했다.”
“유상아는?”
“의원들이 경과 지켜보고 있어. 아일렌 나오면 바로 처치 시작해야지. 성유액 조금 남았지?”

아일렌은 말했다.
이번에 살릴 수 있는 건 한 명뿐이라고.

“바로 이동하죠.”

뒤따라 나온 아일렌이 의료팀을 데리고 곧장 병실을 옮겼다.
그런데 유상아의 침실에서, 우리는 낯선 광경과 마주했다.

“······설화 씨?”

어쩐지 이설화가 보이지 않는다 싶었는데, 하얀 가운을 입은 그녀가 유상아를 돌보고 있었다. 착각일까. 유상아의 설화 파편이 부서져 가는 속도가 미미하게나마 줄어든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된 거죠?”
“중혁 씨가 준 약을 좀 써봤어요.”
“유중혁이 약을 줬다고요?”

이설화는 말없이 탁자 위에 놓인 작은 병을 내려다보았다. 이전에는 없었던 병이었다. 유리병에 손을 대는 순간, 아이템 정보가 눈앞에 떠올랐다.

“······공청석유(空淸石乳)?”

나는 깜짝 놀랐다. 이 공청석유가 내가 아는 ‘공청석유’가 맞다면, 그건 적어도 성유액에도 비할 수 있는 희귀 아이템이었다. 존재 자체가 베일에 싸인 <제 0무림>에서 흘러나왔다는, 무림 최고의 영약(靈藥)중 하나.
한꺼번에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올라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런 걸 어디서 구했답니까?”
“파천검성님께 받았다고 해요.”

파천검성은 아직 지구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간만에 자신의 동족들과 재회했으니 늦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파천검성이 공청석유를 갖고 있었다는 건······ 설마 ‘그 섬’에 갔던 건가?
유상아의 상세를 살피던 아일렌이 말했다.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었네요.”
“어느 정도나?”
“삼십 분 정도요.”
“지금이라도 다른 성유액을 더 획득한다면······.”
“이미 성유액으로 회복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에요. 임계점을 넘겼어요. ······솔직히 아직까지 테마가 손상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에요. 정말 이분의 정신력은······.”

이어진 아일렌의 말에, 일행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요, 무슨 소리예요?”
“상아 언니가 죽는다고요?”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한 일행들이 의원들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창백해진 정희원과, 안색이 새파래진 아이들.
이지혜는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아저씨, 거짓말이지? 그치?”
“······.”
“상아 언니가 죽는다고······ 방법이 없는 거야? 진짜로? 전혀? 그럼 우리가 지금까지 뭐 때문에······.”

유령처럼 비틀거리며 다가온 이지혜가 나를 흔들며 말했다.

“아저씨는 몇 번이나 죽었다 살아났잖아! 지금이라도 그런 특성을 얻는다든가―”

지금 그런 특성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런 이지혜를 뒤에서 안아 말린 정희원이 내게 물었다.

“혹시······ 그때 썼던 방법은 불가능한가요?”

그때 썼던 방법.
누구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허공의 비유를 보고 있었다.

“어렵습니다.”
“이번에 명계의 후예가 됐다면서요. 그쪽의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는 건가요?”
“이미 해봤습니다.”

그 와중에도, 허공에서 몇 번인가 간접 메시지가 들려왔다.
이 상황을 이용하고 싶은 몇몇 성좌들의 메시지였다.

[성좌, ‘불사를 꿈꾼 시황제’가 당신에게 제안합니다.]
[성좌, ‘불사를 꿈꾼 시황제’가 자신과 계약하면 지금 당장 ‘불로초’를 제공하겠다고 말합니다.]

불사를 꿈꾼 시황제······ 중국의 그 ‘왕’인가.
‘불로초’라면 확실히 성유액이나 성유과에도 비견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저걸 쓴다고 해도 유상아는 이제 회복될 수 없다.

「괜한 짓 말아요.」

그 순간,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손을 빌리면, 반드시 여러분들께 말도 안 되는 대가를 요구할 거예요.」

유상아가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화신체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모두가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테마만을 남겨둔 채 이미 절반 이상이 흩어진 영혼이, 일행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보고 있었다.

「여러분.」

유상아가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저 괜찮아요. 그러니까······.」

오늘 하루만 괜찮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듣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괜찮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에게, 대체 어떤 시간을 거쳐서 나온 말인지.

「길영아, 누나 괜찮아. 울지 마. 유승이도.」

유상아가, 일행들에게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나는 욱신거리는 심장을 안고 벽에 기대어 섰다.
정희원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희원 씨. 난 희원 씨가 참 좋아요. 알죠?」

「그리고 지혜야······.」

후두둑 후두둑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지혜가 서럽게 울며 침대보를 그러쥐었다. 붉어진 눈동자가 나를 간절히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서, 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독자. ‘이계의 신격’과 계약해.”

내 팔을 붙든 한수영이 말했다.

“그러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니, 내가 계약하겠어. 내가―”

「한수영 씨.」

한수영의 입술이 덜덜덜 떨렸다.

「이제 안 그러기로 했잖아요.」

내 팔을 놓은 한수영의 고개가 떨어졌다. 듣기 싫다는 듯, 문을 박차고 나가는 한수영. 유상아는 계속해서 말했다. 마치 남은 말들을 모두 쏟아내려는 사람처럼.

「현성 씨나 중혁 씨한테도······ 해줄 말이 있는데······ 이제 힘이 별로 남질 않았네요.」

「아직, 하고 싶은 말, 이 남았는데······.」

그리고 유상아가 나를 바라보았다.
기대선 벽에서 몸을 떼자, 화신체에 난 상처들이 욱신거렸다.
휘청, 세계가 흔들렸다.
하지만, 이제는 일어서야 했다.

“다들.”

그 말을 하는 순간, 머릿속에 지끈 통증이 일었다.

[‘제4의 벽’이 당신에게 경고합니다.]

「안 돼」

나는 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다들, 잠시 나가주십시오.”

모두 영혼을 잃은 사람들 같았다. 죽어가는 것은 오히려 유상아인데도.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정희원이었다. 나와 잠시 시선을 교환하던 정희원이 이지혜를 일으켰고, 그녀의 독려 하에 사람들이 하나둘 방을 빠져 나갔다. 마지막으로 신유승과 이길영까지 빠져나가자, 방에는 나와 유상아만이 남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입을 열었다.

“유상아 씨. 언젠가 지하철에서 했던 말들······ 기억하십니까?”

유상아는 대답이 없었다.

“책 읽는 거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나는 답 없는 유상아에게 계속해서 말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레이먼드 카버, 한강······.”

유상아가 좋아한다고 말한 작가들의 이름을 읊었다.
유상아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는 게 느껴진다. 어쩌면 사라져가는 먼 기억을 더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그런 작가들 말고, 다른 책도 읽으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한순간, 유상아의 영혼에 빛이 돌아왔다.

「······어떤 책이요?」

“「반지의 제왕」 같은 책이라든가.”

유상아의 영혼체가 쿡쿡 웃었다. 마치 오래된 추억을 소환하듯, 희미하게 미소짓는 유상아의 영혼이 말했다.

「······좋아요. 읽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다시······.」

그 소중한 말을, 나는 한 음절도 빠짐없이 모두 기억했다.

「다시 살아서, 그 모든 이야기를 읽을 수만 있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법이 통할지 아닐지는 모른다.
원작에서 이런 일은 시도된 적조차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츠츠츠츠츳!

엄청난 스파크와 함께, 허공에 ‘벽’이 나타났다.
나는 막다른 길목의 너머를 바라보듯 [제4의 벽]을 응시했다.
누구라도 이런 벽을 길의 끝에서 마주하게 된다면 절망하게 될 것이다.

“제4의 벽.”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을 것 같은 두터운 벽.
세상에 ‘벽’만큼 인위적인 축조물은 없다. 누군가가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만든 물건.
이 벽이 정확히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최초의 ‘벽’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내가 입을 여는 순간, [제4의 벽]도 동시에 입을 벌렸다.

“삼켜. 단 한 문장도 빼놓지 말고.”





< Episode 64. 길이 아닌 길 (4) > 끝

< Episode 64. 길이 아닌 길 (5) >





[제4의 벽]에게 유상아의 영혼을 먹이는 것.
이 방법은, 과거 어머니가 ‘꿈을 먹는 자’와의 혈투에서 [제4의 벽]에게 먹혔던 사건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영혼체가 손상된 상태에서 벽에게 먹혔고, 다시 뱉어졌을 때는 오히려 영혼의 일부가 수복되어 있었다.
거기다 [제4의 벽]의 내부에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시도해 볼 만한 모험이었다.

「싫 어」

그러나 내 의도를 읽은 [제4의 벽]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흩어지는 유상아를 보며, [제4의 벽]이 격하게 반응했다.

「저 건 안 먹 어」

“먹어.”

츠츠츠츠츠츳!

온몸이 저릿저릿해지는 충격.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안 먹으면 스킬 끈다.”

이것이 내 마지막 협박이었다. 어쨌든 [제4의 벽]은 스킬이고, 나는 언제든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녀석을 꺼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몇몇 사건으로 미루어 봤을 때, [제4의 벽]은 그걸 정말로 싫어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할 수있 으 면 해 보든 가」

마치, 내가 그렇게 할 수 없을 거라는 걸 확신하는 말투.

「날 꺼버 리 면 어차 피 저 여자 는 살 수 없 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리고 나를 끄 면 성좌 들이 네 정보 를 보게 될 거 야」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이 가진 ‘벽’의 존재에 의구심을 품습니다.]

[제4의 벽]은 내가 정보의 노출을 꺼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나는 [제4의 벽]을 제외하고는 쓸만한 정신 방벽이 전무한 상태.
격이 높은 성좌가 벽이 사라진 찰나를 노려 나를 들여다본다면, 나는 벌거벗은 아기처럼 무력한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벽을 잠시 노려보다가 말했다.

“그럼 부순다.”

「뭐?」

“벽의 일부를 부숴서, 강제로 먹게 하겠어.”

본래 [제4의 벽]은 실체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나는 ‘벽’을 두들길 수 있었다.
불끈 주먹을 쥔 채, 나는 눈앞의 벽을 향해 격을 발산했다.

쿠드드드드!

둔중한 충격과 함께 병실 전체가 흔들렸다. 바깥에서 짧은 비명과 함께 일행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벽에는 여전히 흠집도 가지 않았다.

「소용 없 어 김독 자」

“······.”

「유 상아 를 살 리 는 건 지나친 개 연성 위반 이 야」

나는 생각했다. 앞서 말했듯, [제4의 벽]은 실체가 아니다. 내가 구현한 ‘스킬’일 뿐. 그렇다면······.

츠츠츠츠츳!

나는 ‘벽’의 한곳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병실 전체에 스파크가 범람하며,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지혜가 튕겨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안 돼!」

[제4의 벽]의 귀퉁이에 작은 금이 가고 있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나는 지금까지 스킬을 켜거나 끄는 것만을 생각해왔다.

하지만, 어쩌면 ‘스킬’이라는 것에도 적정한 중간 상태가 있을지 모른다.
말하자면.

츠츠츠츠츠!

스킬의 ‘일부’만을 끌 수 있다면 어떨까.

쩌저저저적!

급속도로 갈라지는 벽과 함께, 일순간 아주 작은 틈새가 발생했다.
무엇이든 삼켜버릴 수 있을듯한 심연.
곧이어 틈새는 블랙홀처럼 주변의 설화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유상아의 설화들이, 작은 소용돌이를 이루며 순식간에 벽의 너머로 빨려 들어갔다.

「멈 춰······!」

엄청난 스파크가 전신에 직격했고, 나는 끔찍한 신음을 토했다.
병실 전체에 개연성의 후폭풍이 불고 있었다.
나를 향해 달려오는 일행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곧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


어둠 속에서, 유상아는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새카만 어둠뿐. 한점의 빛조차 허락하지 않는 그 무기질적인 정경 속에서, 유상아는 불현듯 뭔가를 깨달았다.

난······ 죽은 건가?

마지막으로 보였던 풍경이 머릿속을 언뜻 스쳐갔다. 자신을 살리려는 김독자의 외침과, 개연성의 후폭풍. 그리고 어딘가로 빨려 들어간 기억······.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유상아는 자신의 감각을 점검했다. 눈, 입술, 혀, 귀, 손, 발, 무릎······ 감각이 느껴지는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마치 전신에 마비가 온 것처럼, 움직임의 감각은 그녀의 안에서 완전히 소멸한 상태였다.

······혹시 영혼만 남아버린 건가?

유상아는 침착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하루키 소설에서는 사람이 관념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흔하니까, 이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죽은 사람이 영혼이 되는 것쯤이야······.

······무섭네.

하지만 역시, 어둠 속에 혼자 있는 건 무섭다. 거기에 감각이라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 상태라니. 이래서야 자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가 아닌가.
유상아는 사고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 애쓰며, 철학의 오래된 명제를 떠올렸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것은 르네 데카르트의 격언이었다. 이젠 너무 유명해서 그 말을 인용하는 것이 어쩐지 부끄러워진 격언. 하지만 지금 유상아에겐 그 말만이 구원의 동아줄이었다. 적어도 생각을 이어 나가는 동안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생각은 유상아를 무섭게 만들었다.
그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이 어둠 속에서 생각마저 멈춰버리면.

그래서 유상아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 지워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지나간 일들을 떠올렸다.

「“상아야.”」

그러자 목소리가 떠올랐고, 이어서 얼굴들이 떠올랐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세계에 ‘시나리오’가 도래하기 전부터 있었던 그녀의 가족들.
판사인 아버지와, 의사인 오빠들.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어머니.

「“남들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마라.”」
「“사람들은 네가 아니라, 네가 가진 것들을 볼 거야.”」
「“웬 4개 국어? 넌 귀여운 막내딸 노릇만 하면 되잖아.”」

흘러가는 말들을 보며, 유상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확히는, 지었다고 생각했다.

「“······게임 회사에 들어가겠다고? 게임 회사 사장이랑 결혼하는 게 아니고?”」

어쩌면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부터, 그녀는 ‘시나리오’를 살고 있었다. 그걸 시나리오라 부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녀에겐 그것이 시나리오였다.
만약 도깨비가 그 시나리오의 이름을 붙였다면, 아마 <독립 선언>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신입사원 유상아입니다.”」

게임 회사에 들어가고 집에서 독립하면서, 그녀의 삶은 조금 변했다.
흥미로운 사람도 하나 만났다.

「“유상아 씨. 혹시 휴대폰 충전기 있으십니까?”」

허여멀건 얼굴로, 그녀의 충전기를 빌려가던 사람.

「“7시에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배터리가 다 되어 가서요.”」

그녀와 함께 신입 면접을 봤던, 회사의 모든 것에 비협조적이던 인간.

「“회식은 참석하겠지만, 7시엔 들어가야 합니다.”」

할 말은 할 말대로 하면서도, 회사가 끝나면 제일 먼저 퇴근하던 사람.

「“야유회 참여 안 합니다. 등산을 제일 싫어해서.”」

남들의 시선 따윈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유령처럼 쏘다니며 자신의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던 사내.

「“······유중혁 이 자식 또 죽겠네 이거.”」

그래서 그녀도 이상한 짓을 하나둘 해봤던 것인지도 모른다.
부하의 프로젝트를 빼앗아가는 상사를 골탕 먹이거나,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부장들의 원두에 후추를 섞거나.

「“우웩! 뭐야! 커피 맛이 왜 이래!”」

훗날 ‘탕비실 사건’이라 이름 붙여진 미노 소프트의 역사적인 사건 또한 그렇게 탄생했다.
곱게 갈아둔 원두에 몇 번이고 후추를 쏟아부으며, 유상아는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발칵 뒤집힌 회사. 심지어 감시 직원이 있었는데도 잡히지 않는 범인.

「유상아는 지금도 기억한다.」

모두가 퇴근한 회사.
탕비실의 캐비닛 사이로 은은히 흘러나오던 스마트폰 불빛.

「그곳에, 분명 김독자가 있었다.」

자신이 후추를 타든 소금을 타든, 그 불빛은 그저 그곳에 존재하며 그녀의 행동을 묵인했다.
마치 그 캐비닛 바깥의 일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처럼.

「어쩌면, 그때 말을 걸어 보아야 했던 것은 아닐까.」

당신은 왜 그 캐비닛 안에서 침묵해주었는지.
왜 내가 저지르는 일을 보고서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라고 말했는지.
어째서 탕비실로 가는 CCTV의 방향을 돌려주었는지.

왜 당신은······ 항상 스마트폰을 보고 있을 때만 다양한 표정을 짓는지.

츠츠츠츠츳!

사위가 밝아지며, 그녀의 감각이 차츰 돌아오기 시작했다.

[강력한 존재의 ‘격’이 당신의 ‘설화’가 흐트러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정돈된 것을 좋아하는 누군가가 당신의 설화를 못 마땅해합니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봐라, 역시 이건 ‘썸’이란 것이다.)」
「(아닙니다. 지구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영화를 섭렵한 제가 생각하기로는······.)」
「(결국은 모두 하나가 되기 위한 욕망 아닌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유상아는 자신을 둘러싼 세 존재를 발견했다.

안경을 쓴 오징어 같은 생명체.
회백색 머리에 등이 굽은 노인.
그리고 성별을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인(美人).

마지막 존재를 본 순간, 유상아는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당신은······?)」
「(정신 차렸군, 신입 사서.)」

중성의 미인, 니르바나가 빙긋 웃었다.
유상아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왜 이 사람이 이곳에 있는 거지?
흠, 하고 그녀를 들여다보던 니르바나가 말했다.

「(설명하자면 길어. 곧 알게 될 거다. 너는 아주 운이 좋은 편이야. 겨우 너 정도의 세월을 살고 이 ‘도서관’에 들어온 존재는 네가 처음이니까.)」

세 존재의 뒤쪽 허공에서 활자 조합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신입 사서 유상아를 환영합니다.]

유상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슴푸레한 칸델라의 불빛이 곳곳의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도서관······.

엄청나게 많은 책들과, 끝이 보이지 않은 서가. 이만한 크기의 도서관에 들어와 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김독자의 말이 떠올랐다. 다시 살아나면, 그녀가 읽던 작가들의 책 말고 다른 책도 읽을 의향이 있느냐고.

······그것이 이런 의미였을까?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모른다.
김독자가 어떤 원리로 그녀를 이곳에 보냈는지,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예감이 들었다.
지금 저 책들을 읽으면, 그동안 궁금했던 수많은 의문들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예감.

「(읽을 건가?)」
「(네?)」
「(읽으면, 후회하게 될 수도 있는데 말이지. 네가 감당하지 못할 진실일 수도 있으니까.)」

장정을 향해 다가가던 유상아의 손끝이 멈칫했다. 니르바나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서가 되지 않을 거야.”

김독자가 그곳에 있었다.


*


「(······독자 씨?)」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유상아를 보는 순간, 깊은 안도가 밀려왔다.

성공했다.

어떻게든, 유상아의 영혼을 보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아직 영혼체의 곳곳이 손상되어 있긴 했지만, 희미하게 흐르는 도서관의 힘이 그녀의 영혼을 수복시키고 있었다.
나는 유상아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누추한 곳으로 모셔서 죄송합니다. 조금만 견뎌주세요. 제가 금방 꺼내드릴 게요.”

「(누추한 곳이라니? 어리석은 인간이 진리의 영성을 알지 못하는군.)」

“오랜만이다, 니르바나.”

「(어떻게 이곳에 들어온 거지? ‘벽’이 허락지 않았을 텐데.)」

“꼼수를 찾았거든.”

니르바나는 탐탁찮은 표정이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정말 좋지 않은 판단이었어. ‘벽’이 안 된다고 할 때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렇겠지.”

츠츠츠츠츳!

지금은 내게 말을 걸고 있지 않지만, [제4의 벽]은 종전의 일로 인해 내게 단단히 화가 났을 것이다.
피부에 와 닿는 이 뾰족한 기류만으로도, 녀석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저 녀석이 마음만 먹으면, 사서 한둘쯤은 이야기의 먼지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어.)」

“말했잖아. 사서로 만들지 않을 거라고.”

「(무슨 헛소리지? 여기에 들여보냈다면 당연히······.)」

“다시 밖으로 꺼낼 거야.”

니르바나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릴 들었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벽’이 허락해줄 것 같나? 그리고 설령 그게 가능하더라도, 저 여자의 육신은 이미 죽었어. 육신이 죽은 이상 돌아갈 곳은 없다.)」

나는 말없이 니르바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니르바나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설마, 너······.)」

녀석도 이제 [제4의 벽]의 일부가 되었으니, 내 생각을 읽은 것인지도 모른다. 부들부들 입술을 떨던 니르바나가 소리쳤다.

「(안 돼! 설령 ‘벽’이 허락하더라도, 그건 안 된다.)」

“니르바나.”

니르바나는 알고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특성’들이 있지만, ‘완벽한 불사의 특성’은 단 둘뿐이라는 것을.
하나는 회귀자 유중혁, 그리고 다른 하나는······.

“너의 배후성, ‘만다라의 수호자’는 지금 어디 있지?”

최초의 환생자.
이제, 이 이야기의 세 번째 주인공을 만나러 갈 때가 왔다.




< Episode 64. 길이 아닌 길 (5) > 끝

< Episode 65. 선과 악 (1) >





Episode 65. 선과 악


‘만다라의 수호자’는 신비한 성좌다.
다른 성좌들과는 달리 채널에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입장하더라도 메시지를 보내는 일은 드물다.
그는 일정한 주기를 두고 ‘화신’을 선택하며, 선택한 화신에게 ‘환생자’의 특성을 부여한다.
눈앞의 니르바나 또한 그렇게 탄생한 환생자들 중 하나였다.

「(네놈은 환생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른다. 더 이상의 환생자는 만들어져선 안 돼.)」

“그건 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냐.”

나와 니르바나는 동시에 유상아를 바라보았다.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그녀는, 멍하니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아마 머릿속으로 지금 돌아가는 대화의 맥락을 열심히 읽어가는 중일 것이다.

「(······저 여자에겐 이미 배후성이 있을 텐데?)」

“이제 없어. <기간토마키아>에 참전했을 때 디오니소스에게 부탁해서 연결을 끊었으니까.”

「(그 ‘올림포스’가 순순히? 막대한 개연성은 어떻게 부담한 거지?)」

나는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어차피 <올림포스> 전의 자세한 내막이나 디오니소스와의 거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여유는 없었다.

“나중에 ‘벽’을 통해 읽어 봐. 어차피 내가 벌이는 사건들은 전부 읽고 있을 거 아냐. 그보다 빨리 내 질문에나 답해. 네 배후성 지금 어디 있어?”

「(나도 ‘벽’에 흡수당하면서 그와의 인연이 끊어졌다.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니르바나가 흘기듯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넌 이미 예상하고 있을 것 같은데?)」

사실 그 말은 맞았다.
내가 니르바나에게 한 질문은, 어디까지나 내 추측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유상아 씨. 너무 걱정 마세요. 저 녀석들, 보기만큼 나쁜 놈들은 아니―”

나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쿠구구구구!

공간 전제가 쪼그라드는 느낌과 함께, 내 몸이 도서관 밖으로 퇴출당하고 있었다. 놀란 유상아가 이쪽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미 내 몸은 스파크 속에서 흩어지는 중이었다.

「건 방 진김 독 자」

그리고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


「“······독자 씨는 아직인가요?”」
「“네.”」
「“벌써 사흘째인데······.”」

먼 곳에서부터 일렁이는 목소리에, 조금씩 의식이 깨어났다.
잘 표현할 수 없는 불편한 감각들도 한꺼번에 밀려왔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전기 고문을 당하고 있는 느낌이랄지.

「“전기 뱀장어도 아니고······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상아 언니는 어떻게 된 걸까요? 갑자기 화신체까지 통째로 사라졌는데······.”」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내가 대충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인지 조금씩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설마 사흘째 기절해 있었던 건가.

의식은 돌아왔지만 몸은 전혀 움직이질 않았다.

츠츠츠츠츳!

[동료의 죽음을 막기 위한 당신의 행동이 ‘개연성 적합 심사’에 적발되었습니다.]
[당신은 현재 ‘개연성 폭풍’의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총 5일 동안 당신의 거의 모든 행동이 제약됩니다.]
[남은 제약 기간 : 2일 3시간 31분]

그렇게 피해가려고 애썼는데, 기어코 개연성 폭풍에 휘말리고 만 모양이었다. 그나마 이 정도의 피해에서 그친 것이 지금으로서는 기적이었다.

[‘도깨비 통신’을 통해 당신에게 도착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비형에게 온 메시지였다.

―김독자 이 미친놈아.
―또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한테 먹히고 싶은 거냐?
―내가 미리 제동 안 걸었으면 지구로 재앙이 밀려왔을 거라고. 너 계속 운 좋게 넘어가니까 개연성이 무슨 개똥인 줄 알지?

비형의 메시지는 그 후로도 한동안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시나리오의 결말에 잘 도달하려면 개연성을 착실하게 잘 쌓아야 한다는 둥, <스타 스트림>에게 미움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둥, 뻔한 잔소리였다. 언제부터 이 녀석이 이렇게 바가지 긁는 캐릭터가 된 건지.

―하여간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은 조심해. <스타 스트림>의 의지가 이번 사태로 널 굉장히 주목하고 있어.

강제로 [제4의 벽]의 일부를 뜯어내고 유상아를 들여보낸 것이 이만한 후폭풍을 불러올 줄은 몰랐다. 하긴, 성좌들 입장에서야 황당할 것이다. 무대 위의 배우가 무대 세트를 부수고 사라진 느낌일지도 모른다.

[현재 ‘제4의 벽’이 자신을 수복 중입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이 저지른 행위의 개연성을 의심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정체를 엿보지 못해 아쉬워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이 ‘최후의 벽의 파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그나마도 [제4의 벽]이 재빠르게 대응해서 피해는 최소화한 모양이었다.
비록 며칠 동안 발이 묶이긴 했지만, 어머니도 살렸고 유상아도 구했으니 그 대가로는 싼값이었다.
물론 유상아의 경우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기에,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유상아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는, 모든 ‘환생자들의 왕’이자 ‘최초의 환생자’인 그 성좌를 만나야만 한다.

시기가 조금 이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이른 시기도 아니었다.
‘마계의 봄’부터 ‘신화를 삼킨 성화’까지.
기(起)와 승(承)을 맺으며, 나는 ‘단 하나의 설화’의 절반을 완성했다.

나와 <김독자 컴퍼니>의 등장으로 인해 총체적인 시나리오 전개는 가속화되었을 것이고, 본래 원작에서는 훨씬 후에 등장했어야 할 소재들도 속속들이 출현하게 될 것이다.
본래 전(轉)으로 얻을 ‘거대 설화’의 후보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예를 들면 성운 <아스가르드>의 <라그나로크>라든가, 성운 <황제>가 가진 몇몇 거대 설화들도 후보에 있었다.

기와 승과는 달리, 전(轉)은 ‘단 하나의 설화’의 절정을 소화할 규모가 되어야 한다. 이제껏 있었던 설화들을 바탕으로 한, 차원이 다른 규모의 시나리오. 그런 수준의 무대가 아니면, 절대로 내가 원하는 ‘결’에는 도달할 수 없다.
어쩌면 세 번째 ‘거대 설화’의 발판으로, 최초의 환생자가 머무르고 있을 ‘그 섬’은 괜찮은 무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츠츠츠츠츳.

그나저나, 이래서야 언제쯤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기절한 동안 사흘이 지나긴 했어도, 아직 이틀이나 더 이 꼴로 있어야 하다니······. 지루한 시간을 어떻게 때워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거대 설화’ 일부를 조금 희생한다면 후폭풍의 여파를 잠재울 수 있겠지만, 간신히 모은 설화를 고작 여기서 희생하기엔 아까웠다.
······‘멸살법’이라도 읽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김 독자」

‘······제4의 벽?’

「너계 속 그 럴 거야?」

어쩐지 심통 난 어린애 같은 말투.
기회다 싶은 생각에, 나는 재빨리 답했다.

‘이젠 안 그럴게.’

「거 짓 말」

음절 하나하나에 나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박혀 있었다.
녀석이 이렇게까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처음 보았기 때문에, 나는 조금이지만 진심으로 미안해졌다.

‘믿어줘, 정말이야.’

「흥」

‘······유상아 씨는 어떻게 됐어? 잘 있는 거지?’

아무리 명석하고 적응이 빠른 유상아라도, 저 도서관 안에 있는 존재는 죄다 인간과는 거리가 먼 족속들이다.
하나는 이계의 신격, 하나는 성좌의 창작품, 나머지 하나는 환생자였던 존재다.
게다가 도서관의 주인인 [제4의 벽]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유상아 씨한테 너무 박하게 대하지 말아줘. 좋은 사람이야.’

「그 건 유상 아 가 하기 에 달 렸 어」

지금으로선 유상아를 믿는 수밖에 없다.
나처럼 ‘멸살법’ 같은 치트가 없어도 여기까지 잘 버텨낸 사람이다. 그러니, 도서관 안에서도 분명 잘 해낼 것이다.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

「안 돼」

‘그러지 말고 이야기라도 들어줘.’

「안 돼」

‘······우리 예전엔 꽤 친했잖아. 마계 막 도착했을 때 생각해 보라고. 그때 서로 얘기도 많이 했었잖아.’

「그 때뿐 이 었잖 아」

‘앞으로도 얘기 많이 하면 되지.’

「김독 자 내 가 말 해도 별 관 심 없다」

어쩐지 뼈가 느껴지는 말이라, 나는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언제나 [제4의 벽]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개중에는 ‘멸살법’의 문체를 빌린 서술도 있었고, [제4의 벽] 특유의 빈정거림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내가 녀석에게 제대로 반응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김독 자 말 도 못하 는 도깨 비 더좋 아 해」

‘비유를 말하는 거야?’

[제4의 벽]은 대답이 없었다.
나로서는 조금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너······.’

이 녀석도 외로움을 느낄까.
기쁨이나 슬픔, 고통을 느낄까.
한 번도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갑자기 낯선 기분이 되었다.

‘······앞으로는 자주 말을 걸게. 미안해.’

「흥」

‘화 풀어. 약속할게.’

「정말 이 지」

‘정말이야.’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제4의 벽]이 말했다.

「하지 만 김독 자 하 나로 는 부 족해」

‘뭐?’

「내 친구 들 을 모 아줘」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친구라니, 대체 어떻게 ‘벽’에게 친구를 만들어 준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설마?
그 느낌을 증명하듯, [제4의 벽]이 입을 열었다.

「김 독자 는 ‘최 후 의 벽’을 모 아 야해.」


*


‘설화를 더 모아야 한다.’

멍하니 하늘을 보던 유중혁은, 강박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레몬 사탕을 으드득 씹었다. 그는 사탕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딱히 대체제가 없는 지금으로서는 별 수 없는 선택이었다. 무림 만두라도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한가한 취향을 누릴 때가 아니었다.

‘······아니, 이미 설화가 모이는 속도는 충분히 빨라. 중요한 것은 설화 자체를 단련하는 거다.’

어쩌면 이제 ‘그 섬’에 가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키리오스가 다녀왔고, 그의 스승이 다녀왔던 섬.
유중혁은 자신의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며, 앞으로의 계획들을 구상했다.

[당신의 배후성이 최근 당신의 행보에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득 고개를 들자, 어렴풋한 배후성의 시선이 느껴졌다.
최근 그의 배후성은 저런 감정을 표출하는 일이 잦아졌다. 지난 3회차의 회귀 동안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유중혁은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뭐가 불만이라는 거냐.”

[당신의 배후성은 당신이 주도적으로 행동하길 바랍니다.]

그 말은 유중혁의 뇌리 깊은 곳 어딘가를 건드렸다. 확실히 지난 회차와 비교했을 때 그의 삶은 많이 변했다. 말할 것도 없이 김독자를 만난 이후부터였다.

‘······그놈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심지어 그 정체도 모를 놈과 성운까지 창설했다.

‘예언자는 아니라고 했지.’

유중혁은 미뤄 두었던 숙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듯 사고에 몰두했다.

‘그런데도 미래의 정보들을 알고 있고.’

생각할수록 이상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 녀석이 왜 지난 회차에서는 없었던 걸까. 처음에야 그러려니 넘어갔지만, 지금 생각하면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침착하고 치밀한 녀석이, 지난 회차에서는 ‘첫 번째 시나리오’조차 통과하지 못했다고?
의심은 한 번 불어나기 시작하자 둑을 타고 넘쳐 흘렀다.

[알 수 없는 힘이 당신의 상상력에 제동을 가합니다.]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유중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김독자에 대한 생각을 할 때면 유중혁은 머리가 아파왔다. 특히, 녀석의 정체에 대해 몰두할 때면 더욱.

“유중혁, 뭐하냐?”

돌아보자, 입에 레몬 사탕을 물고 있는 한수영이 보였다.
유중혁이 물었다.

“김독자는 아직인가?”
“아직.”
“게으른 놈이군.”
“······개연성 후폭풍 터졌는데 저놈이라고 별수 있나. 지금까지 안 터진 게 이상했던 거지.”

두 사람은 한가롭게 서서 [공단]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처럼 찾아온, 평화 아닌 평화였다.
한 사람이 쓰러졌고, 다른 한 사람은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 [공단]에 이런 시간은 흔치 않았다.
유중혁은 반쯤 눈을 내리깐 채 먼 곳을 응시하는 한수영을 일별했다.
그답지 않게 불쑥 뭔가를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솟았다.

‘이 녀석이라면 내가 궁금한 것을 알고 있지 않을까?’

김독자와 마찬가지로 이번 회차의 변수로 나타난 존재.
가끔 김독자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면, 이 여자는 김독자가 어떤 존재인지― 섬뜩한 감각이 뒷덜미를 훑은 것은 그때였다.

“유중혁.”

한수영의 말과 거의 동시에, 유중혁은 등에 차고 있던 [흑천마도]를 빼들었다. 옆에 있던 한수영도 손의 붕대를 풀고 있었다.
먼 하늘에서, 빠른 속도로 뭔가가 날아오고 있었다.
원하지 않는 손님의 기척이었다.
창공에 어두운 빛살을 남기며 날아온 존재가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긴장한 유중혁의 오른손에 거친 마력이 흘렀다.

“아스모데우스. 여긴 무슨 일이지?”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웃었다.

[‘구원의 마왕’을 만나러 왔습니다. 어디 있죠?]

“녀석은 왜 찾지?”

[긴히 전할 말이 있거든요. ‘종말의 구도자’로서.]

“······종말의 구도자? 나한테 말하고 꺼져라.”

[아, 정말 귀찮게······.]

비록 잠깐 아군이 된 적은 있었지만, 유중혁은 근본적으로 아스모데우스를 믿지 않았다.
더군다나, 저 마왕에겐 지난 회차에서의 은원(恩怨)도 있었다.

쿠구구구구!

험악한 기류가 발생하자, 유중혁의 격과 아스모데우스의 격이 용오름을 형성하며 부딪쳤다.

[음? 이 정도로 강해졌을 줄은 몰랐는데······.]

자신을 상대로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유중혁의 격에, 아스모데우스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장난스러운 표정 이면에 깔린 명백한 악의.

[회귀자 유중혁.]

악마 같은 미소를 지은 아스모데우스가 유중혁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붉게 그려진 마왕의 입술이, 금기를 범하듯 입을 열었다.

[혹시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 Episode 65. 선과 악 (1) > 끝

< Episode 65. 선과 악 (2) >





아스모데우스는 계속해서 물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화신들 사이에서는 아마 ‘계시록’이라 알려졌던 이야기일 텐데······ 들어본 적 없습니까?]

아스모데우스의 말에, 얼굴이 창백해진 한수영이 앞으로 나섰다.

“너! 뭔 헛소릴 하러 온 거야?”

그러나 아스모데우스는 한수영은 신경도 쓰지 않고 유중혁의 표정을 살폈다.

츠츠츠츠츳!

[알 수 없는 힘이 화신 ‘유중혁’의 상상력에 제동을 가합니다.]

유중혁의 주변에 다시 한번 스파크가 쳤다.
실제로 아스모데우스의 말은, 유중혁에게는 이런 느낌으로 들렸다.

[멸■■ ■■■■ 살■■■ 세■■ ■법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지끈거리는 두통 속에서 유중혁이 물었다.

“······뭘 들어봤냐고?”

아스모데우스가 탄식했다.

[흐음, 아직 그대에겐 허락되지 않는 것인가······.]

“······대체 무슨 소리냐?”

[뭐, 별 얘긴 아닙니다. 그보다······ 상황을 보니 우리 ‘구원의 마왕’께서는 아직 잠들어 계신 모양이군요.]

싱긋 웃어 보인 아스모데우스는 [공장] 쪽을 일별하며 말했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서 돌아가겠어요. ‘구원의 마왕’께 전해주십시오. 당신이 벌이는 일들로 인하여, 선과 악의 균형이 흔들리고 있다고. 그리고 그 불균형을 틈탄 승냥이들이 등장할 것이라고.]

“잠깐, 기다려라!”

관자놀이를 짚은 유중혁이 돌아서는 아스모데우스를 불렀다.
아스모데우스는 돌아서지 않은 채 대답했다.

[회귀자 유중혁. 세계의 진실을 알고 싶습니까?]

“······진실?”

[알고 싶다면, 언제든 ‘종말의 구도자’를 찾아오십시오.]

그 말만을 남기고, 아스모데우스의 화신체는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비틀거리는 유중혁을 향해 한수영이 재빨리 다가갔다.

“유중혁. 괜찮냐?”
“······.”
“유중혁?”

유중혁은 대답이 없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고, 큰 고뇌에 빠져 멍해져 버린 것 같기도 했다. 잠시 허공을 노려보던 유중혁은 이내 한수영을 뿌리치고 어딘가로 비척비척 걸어가기 시작했다.

“야! 어디 가는 거야!”

한수영의 고함에도 유중혁은 대답이 없었다. 한수영이 다시 한 번 외쳤다.

“김독자 아직 안 깨어났어!”
“······그놈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유중혁은 그 말만을 남기고 [주작신보]를 발동해 사라졌다.
졸지에 [공장]의 입구에 남은 것은 한수영 하나뿐.
휑해진 주변을 멀거니 바라보던 한수영은 사탕 막대를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슬슬 필터링들이 해금될 시기이긴 하지만, ‘멸살법’에 관한 정보마저 필터링이 풀리기 시작했다고?’

하필 김독자도 없는 시점에 이런 일이 벌어졌기에, 한수영은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만약 유중혁이 ‘멸살법’에 관한 정보를 알게 된다면, 어떤 참사가 벌어질지 지금으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걸리는 점은 과연 ‘마왕들이 어떤 경로로 멸살법의 존재를 알았는가’하는 것이었다.
가만히 남쪽 하늘을 바라보던 한수영이 사탕 막대를 바닥에 뱉었다.
김독자가 깨어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생겼다.


*


유상아는 모처럼 ‘신입’이 된 기분을 한껏 만끽하며 도서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지난 이틀간, 유상아는 세 명의 선임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이 ‘도서관’이 어떤 곳인지부터, 그녀의 선임이 어떤 존재인지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정리 하시오. 어차피 김독자가 쓸데없는 생각하기 시작하면 잔뜩 어지럽혀지니까.)」

극장 던전의 주인 ‘시뮬라시옹’.

「(손이 두 개라 정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겠군. 후임은 손이 많은 녀석이 왔으면 했는데.)」

이계의 신격 ‘꿈을 먹는 자’.

「(내가 [천수관음] 가르쳐 줄까?)」

환생자 ‘니르바나 뫼비우스’까지.

선임들은 모두 조금씩 이상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그녀에게 친절했다. 미노 소프트의 인사팀이 이 정도만 되었어도 좋았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책으로 덮인 서가.
모두 김독자가 읽거나, 잊은 책들의 나열이었다.
그리고 그 책의 대부분은 어떤 ‘소설’이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책을 좋아했던 유상아답게,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새로 얻은 직장의 프로세스를 빠르게 파악했다. 이 장소가 김독자에게 어떤 장소고, 이 이야기가 김독자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유상아는 희미한 절망감과 동정심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유상아는 내색하지 않았다.
내색하지 않는 것이, 때로는 상처 받은 이를 돌보는 방법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대신 그녀는 다른 일에 관해 생각했다.

‘만약 원작의 전개 대로 라면······.’

다음에 벌어질 지구의 시나리오는 몇 가지로 함축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가능성이 높은 것은······.

「열심 히 하 네 유 상아」

허공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유상아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렴 열심히 해야죠.)」

셋방살이 신세가 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는 게 어디랴.
그나마도 저 귀여운 보스가 이곳의 총 책임자라는 것이, 유상아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취직시켜 주셔서 감사해요. 전 여기가 정말 마음에 들어요.)」

「흥」

「(진심이에요.)」

「유상 아 책좋 아?」

「(굉장히 좋아해요.)」

「어 떤 책」

「(예를 들면······ ‘반지의 제왕’도 좋아하고······.)」

「호 오」

다행히, 귀여운 보스께서는 그녀에게 제법 흥미가 있는 듯했다.
유상아는 이 틈을 타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기로 했다.

「(저, 질문 하나만 해도 되나요?)」

「뭔 데」

「(‘제4의 벽’님은 정확히 어떤 일을 하시는 건가요?)」

킥킥킥킥 거리는 웃음소리가 도서관 전체를 떠돌았다.

「나 는 김독 자를 지 켜」

「(지킨다고요?)」

「김 독자 나 없 으면 죽 어」

굳건한 확신으로 가득 찬 목소리.

「그 런데 도 나 한테 함 부로 대 해 멍청 한 김독 자」

도서관 전체가 희미하게 떨렸다.

「최근 에는 많이 힘들 어 다 너때 문 이 야」

「(······저 때문이요?)」

「내 일 부가 새어 나갔 어」

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스파크가 도서관의 일정한 방향을 가리켰다. [제4의 벽]이 가리킨 곳에는, 유상아의 주먹보다 조금 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막 아도 제대 로안막 혀 김독 자가 부 숴놔 서」

구멍을 막고 있는 것은 낡은 책의 표지였다. 급한 대로 임시로 취한 조치인 듯했다. 유상아는 책의 표지를 조심스레 들춰 보며 물었다.

「(이 구멍, 혹시 밖으로 통하는 건가요?)」

「응」

잠시 후, 구멍을 곰곰이 들여다보던 유상아가 장난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4의 벽’님. 저한테 좋은 생각이 하나 있는데요.)」


*


나는 모처럼 푹 잠을 잤다. 언젠가 강제로 감금당했을 때만큼이나 깊은 잠이었다. 아주 푹신한 깃털 같은 것이 머리를 포근하게 감싸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누군가가 내 머릿속에 들어와 불편한 걱정들을 깨끗하게 정돈해준 느낌이랄까.

「(독자 씨, 큰일 났어요. 독자 씨.)」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울려퍼졌을 때, 나는 깜짝 놀라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무도 없는 병실. 스파크로 인해 그을린 피부 곳곳이 쓰라렸다.

“으······.”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침상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감금이니 뭐니 들들 볶던 일행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날 깨운 건 누구지?

일단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아직 미약한 개연성의 여파가 남아 있긴 했지만, 움직일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병동의 복도에 불온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어떤 일이 터지기 직전의 예감. [공장] 바깥이 소란스럽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조금 후였다.
복도의 창문을 열자 사람들의 함성이 귀를 찔렀다.

“서울을 해방해라!”

······뭐?

“우리는 더이상 ‘마왕’ 따위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
“[공장]의 독재자는 물러나라! 모든 성흔과 스킬을 대중에게 개방하라!”

[공장]의 흉벽 너머로 까마득한 인파가 몰려와 있었다. 서울 및 인근 지역의 화신들이었다. 몰려온 세력의 구성을 보아하니, 어떤 종류의 사람들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은 시나리오에 실패한 사람들.
그리고 몇몇 핵심 인물들은 ‘연합’의 인간들이었다.

“이것은 정당한 투쟁이다! 시나리오를 선점하고 자본을 독점하는 ‘구원의 마왕’과 악덕 기업 <김독자 컴퍼니>는 각성하라!”

자본 독점에 시나리오 선점이라······.
나와 일행들이 얼마나 힘들게 시나리오를 헤쳐왔는지 안다면 그런 말은 못 할 텐데.
흉벽 안쪽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의 일행들이 모여 있었다.
스킬로 청각을 키우자, 제일 먼저 들려온 것은 공필두의 목소리였다.

“그냥 포를 쏴버릴까?”
“아저씨 미쳤어? 쟤들 대부분 초보 화신이야!”
“여러분! 이러지 마십시오! 오해입니다!”

이지혜와 이현성이 나서서 사람들에게 뭐라뭐라 소리를 쳤지만, 애초에 그들의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닥쳐라! 성문을 개방해! 아이템을 나눠라!”
“아이템 같은 거 없어요!”
“코인을 나눠라!”
“이 무슨 깡패들도 아니고······.”

이런 규모의 ‘선동’은 보통의 인간들이 모여 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반도의 각 연합은 내 일행들이 떠맡고 있었고, 가장 걸림돌이 되던 경기 연합은 얼마 전 유중혁에 의해 박살이 났으니까.
그런데도 이만한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었다는 건······ 외부 존재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건데.

그나저나 유중혁이랑 한수영은 어디 있지?
[공장]이 이 사단이 났는데, 대체······.
아무래도 이틀간 내가 모르는 일들이 많이 벌어진 것 같았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공단’에서 벌어지는 일에 흥미를 갖습니다.]

이거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막아야겠는데.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계산하던 내가 슬그머니 일행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허공에서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혁명······! 민주주의를 제창하시는 여러분들답군요!]

불길한 서두였다.

[이 정도 규모의 개연성이 모였다면, 시나리오를 열어드려야 인지상정이겠죠?]

+

<서브 시나리오 ― ‘서울 혁명’>

분류 : 서브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현재 서울은 <김독자 컴퍼니>의 슬하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운의 지배권에 반발하는 화신들이 대거 등장했습니다. 서울의 지배권을 놓고, 다수의 성좌들은 두 그룹이 한 판 붙기를 원합니다.
제한시간 : 없음
보상 : 300,000코인
실패시 : ―

+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 불쾌한 예감이 더해졌다.
지난 격전으로 인해 두 개의 ‘거대 설화’을 쌓은 <김독자 컴퍼니>는 이제 제법 <스타 스트림>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런데 마침 성운의 대표인 나와 유중혁은 부재중인 상태.

누군가가, 다 된 밥을 노리고 의도적인 깽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실패 조건이 없어! 해 볼만 하겠는데?”
“30만 코인이다! 우리도 돈 좀 벌어보자!”

이지혜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바보 같은······ 모두 나누면 얼마 되지도 않을 금액 때문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순간, 앞으로 나선 이가 있었다.
정희원이었다.
[확성] 스킬을 사용한 정희원이, 무지막지한 패기가 담긴 목소리로 고함을 내질렀다.

“그쪽 대표는 숨어 있지 말고 나와!”

정희원의 말에 성벽을 타고오르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떨어졌다.

“여기서 전쟁을 벌여 봐야 무의미한 희생만 낳을 뿐이야. 그럴 바에는 수장끼리 대결을 펼쳐 승부를 가리는 편이 낫지 않겠어?”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정희원은 계속해서 말했다.

“만약 우리가 진다면, 그쪽 소원대로 [공장]을 넘겨 줄게!”
“희원 씨! 왜 그런 약속을······!”

당황한 이현성을 보며, 정희원이 침착하게 말했다.

“저 사람들, 대부분 아직 10번 시나리오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이에요. 여기서 진짜 전쟁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정희원의 말에 이현성이 입을 다물었다.
일행들은 말을 거드는 대신 침묵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희원 씨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현성도, 이지혜도, 신유승도, 이길영도.
공필두는 영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시민들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이 방법이 최선이라는 걸 모두가 은연중에 합의한 것이다.
허공에서 일의 진행을 보던 도깨비가 헛웃음을 흘렸다.

[······좋습니다. 그럼 이번 이벤트는 ‘대표전’으로 가도 되겠습니까?]

정희원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서브 시나리오의 내용이 바뀌었다.

[서브 시나리오 ― ‘서울 혁명’의 내용 일부가 갱신됩니다!]
[양 세력의 대표전을 통해, ‘서울’의 주인이 결정됩니다!]

정희원이 흉벽 너머의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자, 그쪽 대표도 이제 올라와. 이쪽은 준비가 됐으니까.”

자신만만한 미소.
어쩌면 정희원의 저 결의는, 그동안 보냈던 충실한 시간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방금전까지 혁명이니 서울의 봄이니 떠들던 사람들은, 정희원이 그렇게 당당하게 나오자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웅성거림만이 커져갔다.

“대, 대표! 어디 있어! 빨리 나가!”
“싸워서 이겨라! 우리의 권리를 찾아줘!”

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굳이 군중을 일으켰다는 건 비이성적인 선동 상황을 이용하고 싶었다는 것. 그런데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면 의미가 없어진다.
답답해진 화신들이 외쳤다.

“누가 좀······!”

대열을 이탈한 군중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나는 약간 감격했다.
내가 없던 3년 간 일행들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아마 정희원은, 처음부터 이것을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정의를 지키면서도 실리를 잃지 않는 법을 배웠다.

이쪽은 이미 ‘서울 최강’의 멤버들.

일대일의 화신전이라면, 절대로 질 턱이 없었다.
허공에서 턱을 쓰다듬던 도깨비가 물었다.

[<김독자 컴퍼니> 측은 대표 두 분이 모두 부재중이신데, 누가 나서시렵니까?]

일행들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 하지만 가장 먼저 나선 이는 정희원이었다.

“제가 할게요.”
“희원 씨.”
“걱정 마세요. 저 강한 거 알잖아요.”

확실히 정희원은 우리 성운에서 나와 유중혁을 제외하면 거의 최강의 전력이라 봐도 무방했다.
이현성도, 이길영도, 신유승도, 공필두도······ 단일 전투력으로는 누구도 정희원을 능가할 수 없다.

게다가, 아무래도 정희원은 뭔가를 눈치챈 듯한 낌새였다.
일행들 중 정희원이 ‘대표’로 나서야만 하는 이유.

「······내가 가야 해.」

그 이유가, 지금 군중을 가르고 다가오는 세 명의 ‘화신’에게 있었다.
개중 한 녀석의 얼굴이 특히 익숙했다.

······저 녀석.

한달음에 흉벽을 넘어온 녀석이 입을 열었다.

“내가 대표로 상대하지.”





< Episode 65. 선과 악 (2) > 끝

< Episode 65. 선과 악 (3) >





위풍당당한 보무로 다가온 사내는, 이번 회차에 나와 부딪친 적이 있는 녀석이었다. 지난번 ‘감금 사건’ 때 내게 혼쭐이 나서 달아난 적이 있는 녀석.

‘경기 연합’의 수장, 십악 조진철.

이번 회차에서는 우리 일행들이 너무 강해져서 나부랭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용케도 다시 돌아온 모양이었다.
정희원이 피식 웃으며 검을 빼 들었다.

“당신이?”

하지만 그 말을 하면서도, 정희원은 전혀 방심한 표정이 아니었다.
조진철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심상치 않은 기도를 그녀도 읽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기(魔氣)였다.

굳어진 정희원의 표정에 살기가 머물렀다.
[암흑성]을 클리어했고, 이름 뿐이지만 그래도 ‘마왕’을 죽이며 열 번째 시나리오를 클리어했던 그녀다. 그러니, 모를 수가 없었다.

“너······ ‘마왕’에게 먹혔구나.”

다른 누구도 아닌, ‘마왕’의 기운을.
짧게 헛웃음을 흘린 조진철은, 이미 조진철 본인이 아니었다.
새카만 마기에 집어 삼켜진 권속.

[마왕, ‘뱀지옥의 군주’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뱀지옥의 군주.
지고한 마계의 72마왕 중 하나.
녀석은 ‘72번째 마계’의 주인인 ‘안드로말리우스’였다.
게다가 다른 두 명의 화신체도 비슷한 마기를 내뿜고 있었다.

[마왕, ‘거짓과 비밀의 사색가’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마왕, ‘연주하는 일각공’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무려 세 명의 마왕이, 자신의 권속을 통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마왕이라는 것을 안 후에도 정희원은 태연했다.

“일대일로 붙는 거겠지?”

[물론 일대일로 붙을 것이다. 겁 없는 화신이여.]

격이 담긴 진언에 솜털이 바짝 서는 상황에서도, 정희원은 웃었다.

“그래, 언젠가 꼭 한번 상대해보고 싶었어. 그 잘난 ‘마왕’이라는 거 말이야.”

말투에 깊은 분노가 담겨 있었다.
우리엘의 영향일 수도 있고, 아니면······ 평소 나한테 분노가 쌓여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간 정희원은 오히려 잘 됐다는 표정이었다.

[대전이 시작됩니다!]

사실 이해 못 할 자신감도 아니었다.
아무리 상대가 마왕이라도, 정희원이 물러설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저쪽은 대리 권속을 통해 빙의한 상태. 여기서 물러선다면 대천사의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쿠구구구구!

정희원의 눈동자에서 붉은 귀화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심판자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물처럼 허공을 수놓는 검의 궤적.

스가가각!

피할 틈도 없이 조진철의 왼팔이 허공을 날았다.

[감히······!]

놀란 안드로말리우스가 노호성을 터트렸으나, 정희원은 검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그 무지막지한 패기에 안드로말리우스가 당황하고 있었다. 사정을 봐주지 않는, 오직 살해를 목적으로 닦인 검도(劍道). 그녀의 검은 평범한 시나리오를 겪어온 화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거걱!

다시 한 번 핏줄기가 쏟아지며 조진철의 오른쪽 허벅지가 깊은 검상을 입었다. 너무나 압도적인 실력의 격차. 명백해진 승세에 군중들이 입을 벌렸고, 일행들은 감탄했다.
저것이 ‘멸악의 심판자’ 정희원의 진짜 힘이었다.

[등장인물 ‘정희원’이 ‘심판의 시간’의 발동을 요청합니다!]

마무리를 위해, 정희원이 힘을 모으고 있었다.
[심판의 시간]이 연이은 [지옥염화]의 콤보.
정희원은 이 ‘대표전’을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눌러버리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동조율을 높인 ‘안드로말리우스’의 격이 본격적으로 조진철에게 강림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잘려 나간 조진철의 팔에 새카만 마기로 빚어진 팔이 솟았고, 난자 당한 상처가 흘러 넘치는 마력으로 회복되고 있었다. 72번째 마왕의 권능.

[장난은 여기까지다.]

번개처럼 튀어 나간 주먹이 정희원의 칼날을 때렸다. [심판자의 검]이 휘청이며 정희원이 순식간에 열발자국을 물러났다. 조진철은 멀어지는 정희원을 곧바로 쫓아가 계속해서 연격을 퍼부었다.

퍼버버벅!

화신체와 개연성의 손상을 각오하고, 강림 상태에 가깝게 동조율을 높인 안드로말리우스. 조진철의 전신에서 위협적인 격을 뿜어져 나왔다. 아무리 정희원이 강하다고 해도, 우리엘 없이 마왕 본인과 대적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힘싸움에서 밀린 정희원이 허공에서 튕겨져나갔다.

“큿, 빌어먹을······!”

나는 그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안드로말리우스가 저런 선택을 했다는 것부터 이상했다.

마왕이라고 해서 모두 동급은 아니다.

저런 짓을 하면 개연성의 저울이 움직이고, 대천사 우리엘이 개입할 개연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강림하면, 겨우 저 정도 순위권의 마왕들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들이 정희원을 본격적으로 상대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었다.

[‘심판의 시간’의 발동이 강제로 취소되었습니다.]

믿는 구석이 무엇이었는지는, 금방 밝혀졌다.

“······우리엘?”

우리엘이 응답하지 않고 있었다. [심판의 시간]도, [지옥염화]도 제대로 발동하지 않는다. [지옥염화]야 그렇다 쳐도, [심판의 시간]까지 발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 이상했다.
우리엘 뿐만 아니라 다른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에게도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다.

······설마?

순간, 나는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갑자기 왜 이 ‘마왕’들이 이런 난장을 피우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놈들이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에 내 ‘마계’에 방문한 것인지.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멀리서 허공에 둥둥 뜬 키리오스가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마주보았다.
내가 언제든 끼어들 수 있었음에도 움직이지 않은 것은, 그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키리오스는 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네가 나서야 할 일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가능하면 힘을 일찍 드러내고 싶지 않다.
기와 승을 얻었다고 해서 그 힘을 만천하에 함부로 공개했다간, 도로 역풍을 맞는 수가 있으니까.
키리오스가 말을 이었다.

―힘을 보여줘야 할 때 보여주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다.

······어쩌면, 그 말도 맞다.
지금 <김독자 컴퍼니>는 한창 상승세에 있고, 지금 저 마왕들은 그런 우리 성운의 기세를 꺾기 위해 손수 찾아온 녀석들이었다.
지금 제대로 힘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우리 성운은 더 별 볼 일 없는 녀석들에게까지 얕잡히겠지.

한숨을 쉬며 허공을 올려다보자, 비형이 웃고 있었다.

처음부터 시나리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
아마 비형 녀석도 여러 가지를 계산하고 있었겠지.
굳이 내가 깨어난 후에야 이 ‘시나리오’를 연 것부터가 그렇다.
······정말, 빌어먹을 정도로 영악한 도깨비놈이다.

―어서 가보라고. 마왕에도 격이 있다는 걸 보여줘라.

나는 가볍게 [공장]에서 뛰어내려 대전장에 난입했다.
놀란 일행들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나는 뒤에서 정희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희원 씨.”
“······독자 씨?”
“여기서 싸울 필요 없습니다. 당신이 약해서 말리는 게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정희원을 뒤로 한 채 앞으로 나섰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격’을 방출합니다!]

세 명의 마왕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진언을 사용했다.

[마왕 여러분. 놀이터를 잘못 정하신 것 아닙니까? 아마 제게 전할 말이 있을 텐데, 그것만 전하고 꺼지시죠.]

내가 뿜어낸 진언에, 안드로말리우스의 표정이 무참히 구겨졌다.

[소문대로 건방진 놈이군.]
[우리가 온 이유를 알고 있느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마왕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명백했다.
지구의 화신들이 60번대 시나리오를 돌파했으니, 시기상으로도 슬슬 ‘그 이벤트’가 열릴 때가 됐지.
아마 녀석들은 나를 그곳에 초대하기 위해 나타난 것일 터다.
정희원이 우리엘의 힘을 쓸 수 없는 것도 그 일과 관계되어 있을 것이고.
마치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유희였다는 듯, 마왕들이 낄낄거렸다.

[너 같은 말단을 위해 선배님들이 친히 방문한 것을 영광으로 알도록 하라.]
[너는 우리와 함께 간다. 지금 바로 채비하도록. 곧장 떠날 터이니.]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시러 오셨다는데, 가긴 가야지. 그런데 말이야.]

나는 뒤쪽에서 쓱 코피를 닦는 정희원과, 아픈 몸을 이끌고 나온 일행들을 둘러 보았다. 아직 <기간토마키아>의 여파가 남아 충분히 쉬지도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냥 보내주긴 힘들 것 같아.]
[무슨 헛소리지?]
[마왕쯤 됐으면 그에 걸맞은 격을 갖춰야지. 안 그래?]

[성운 <김독자 컴퍼니>가 ‘대표전’의 대표 변경을 요구합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새로운 ‘대표’가 되었습니다.]

내 의도를 깨달은 마왕들이 경악했다.

[지금 우리와 싸우겠다고? 네놈······ 마왕과 마왕이 싸우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
[알지. 아주 잘.]

나는 마왕들 하나하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마왕 승격전’을 신청하였습니다.]

마왕 승격전.
그것은 순위가 매겨진 ‘마왕’들이, 자신의 순위와 명예를 걸고 겨루는 지고한 결투였다.

[승격전이라니! 네놈, 미친 것이냐?]

이 정도면 많이 참았다.
마왕이든 성좌든, 저런 놈들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것도 이제 지친다.

[받아들일 거야 말 거야? 다들 보고 있다고.]

[마왕,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이 아랫것들의 전투에 흥미를 품습니다.]
[마왕, ‘예제공’이 역시 싸움은 조빱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마왕, ‘별과 논리학의 군주’가 ‘예제공’의 맞춤법을 지적합니다.]
[마왕, ‘정욕과 격노의 마신’이 흥미로운 표정을 짓습니다.]

대체 언제들 몰려온 것인지 무수한 마왕들이 이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73좌의 마왕들 중 최하위인 ‘73번째 마왕’.
그런 내 도전을 거부한다면, 대대로 놀림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

쿠구구구구!

세 마왕이 가공할 격을 일으키고 있음에도, 나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보며 한없이 침착한 마음이 될 뿐이었다.

「언젠가의 유중혁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치욕스런 표정의 안드로말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도전을 받아들이지.]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넌 빠져. 너한테 신청한 거 아니니까.]
[뭐라?]
[안드로말리우스 넌 72위잖아.]

나는 손가락으로 녀석의 뒤에 있는 또 다른 마왕을 가리켰다.

[난 저기 있는 67위, ‘연주하는 일각공’ 암두시아스한테 신청한 거야.]

어차피 싸울 거면, 조금이라도 랭킹이 높은 녀석을 죽이는 편이 낫지.
내 말에 얼굴이 붉게 변한 안드로말리우스의 화신체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72번째 마계의 가공할 설화가 집약된 주먹이, 나를 향해 격을 내뿜었다.

[설화, ‘천년을 웅크린 뱀’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확실히, 순위는 낮아도 오래 살아온 만큼 나쁘지 않은 설화다.
하지만 녀석들은 모른다.
나는 너희보다 훨씬 짧은 역사를 살았지만.
훨씬 치열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웅크린 이빨을 드러냅니다.]

다음 순간, 백청의 전격이 주변을 까마득하게 물들였다.

[책갈피]를 통한 [전인화].
간만에 방출하는 백청의 마력이 아주 찌릿찌릿했다.
멀리서 희미한 미소를 짓는 키리오스의 모습이 보였다.

[해당 등장인물과 당신의 수준 격차가 크지 않습니다.]
[등장인물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스킬을 크게 강화시킵니다!]
[전용 스킬, ‘전인화(電人化) Lv.23(+13)’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소형화] 없이 [전인화]를 사용하는 것은 정말 간만의 일이었다.

[현재 당신의 육체 구성이 해당 등장인물의 육체 구성과 상이합니다.]
[당신의 ‘격’이 육체 조건의 패널티를 극복합니다.]

안드로말리우스의 주먹은 내 코앞에서 멈춰있었다.
경악한 눈으로 나를 보던 녀석의 시선이, 천천히 자신의 뱃가죽을 향했다.
처참하게 찢겨나간 녀석의 몸통은 절반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녀석의 몸에 박힌 검을 뽑으며 말했다.

[일단 72위.]





< Episode 65. 선과 악 (3) > 끝

< Episode 65. 선과 악 (4) >





[마왕 ‘뱀지옥의 군주’가 치명상을 입고 시나리오에서 퇴장합니다.]
[당신은 ‘마왕승격전’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당신의 마계 등급이 조정됩니다!]
[당신은 ‘72번째 마계의 마왕’이 되었습니다!]

나는 잿더미로 스러지는 조진철을 지나치며 곁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두 명의 마왕들이 있었다.

하긴, 놀랄 법도 하겠지.

서열 최하위의 마왕이 일격에 72위를 끝장내버렸으니까.
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일부 마왕들이 당신의 힘에 놀랍니다.]
[마왕, ‘안락과 흉폭의 마신’이 당신의 격에 침음합니다.]
[마왕, ‘무가치한 암흑’이 당신의 격에 위협을 느낍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마왕들의 반응을 조롱합니다.]

모든 성좌들이 ‘거대 설화’를 얻는 것은 아니다.
거대 설화를 얻더라도 대개는 그 쓸모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며, 지분도 형편없을 정도로 낮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내 모든 ‘거대 설화’는 누군가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일행들과 함께 만든 ‘역사’였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거대 설화’는, 하나일 때와 둘일 때 완전히 다른 차원의 힘을 보여준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마왕들을 탐욕스런 눈길로 바라봅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검극에, 포세이돈과 맞섰던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나는 멀거니 있는 마왕들을 향해 검을 겨눴다.

[마왕, ‘거짓과 비밀의 사색가’가 시나리오 이탈을 준비합니다.]

마왕 서열 71위 단탈리온. 과연 눈치 빠르기로 소문난 악마답다.

[어딜 도망갑니까?]

나는 [전인화]와 [바람의 길]을 동시에 발동해 녀석을 붙잡았다.

츠츠츠츠츠츳!

이번에는 비형도 나를 도왔다.

[‘관리국’이 ‘거짓과 비밀의 사색가’의 시나리오 이탈 제안을 거부합니다.]

[승부는 끝까지 보셔야죠, 마왕님들.]

설마 도깨비가 내 편을 들 줄은 몰랐는지, 단탈리온의 눈동자가 커졌다.
안드로말리우스의 패배가 충격이었던 것일까, 나를 뿌리치고 뒷걸음질 치는 마왕의 모습에는 조금의 품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70위권 밖의 마왕들은 죄다 고만고만하다.
운 좋게 마왕이 되어, 간신히 최하위권에 매달린 채 ‘마왕’의 직위를 남용하는 떨거지들.

스가가각!

솟아오르는 핏줄기와 함께, 방심하고 있던 화신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71위.]

[마왕, ‘거짓과 비밀의 사색가’가 치명상을 입고 시나리오에서 퇴장합니다.]
[당신은 ‘마왕승격전’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당신의 마계 등급이 조정됩니다!]
[당신은 ‘71번째 마계의 마왕’이 되었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연주하는 일각공’ 암두시아스를 바라보았다.
암두시아스가 물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왜요, 겁먹으셨습니까?]
[······나를 안드로말리우스나 단탈리온과 같은 급으로 보는가?]

대기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앞서 내게 패배한 두 명의 마왕들과는 달리, 암두시아스에게는 싸움을 준비할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화신의 머리 위로 일각공의 상징인 외뿔이 자라나 있었다.

[마왕, ‘연주하는 일각공’이 성유물 ‘지옥 나팔’을 소환합니다.]

60위권부터는 마왕들의 수준이 조금 올라간다.

[전용 스킬, ‘독해력’이 발동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도 느껴지는 설화의 두께감이 달랐다.
하지만 32위의 마왕인 아스모데우스를 이미 만나본 나였기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아스모데우스 녀석, 아마 지금은 순위가 훨씬 올라갔을 것이다. 마왕들 중에도 유독 가파르게 성장하는 녀석들이 있고, 아스모데우스 또한 그중의 하나니까.
반면 아래쪽 순위권에서 고여버린 마왕들은, 좀처럼 위로 올라갈 기회를 잡지 못한다.

[당신의 격이 크게 상승하여 스킬 ‘독해력’이 강화됩니다!]
[당신의 스킬이 해당 설화의 구성을 파악합니다!]

암두시아스에게서 느껴지는 설화는, 아주 음울하고 낡아 있었다.

[설화, ‘지옥의 연주자’가 하품을 하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더이상 뒷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을 정도로 지루하고 긴 설화.
저것이 ‘연주하는 일각공’ 암두시아스의 중추를 형성하는 이야기였다.
암두시아스가 물었다.

[뭘 보고 있는 것이냐?]

아까, 나는 내가 쌓은 시간이 저들보다 치열하다고 말했다.
사실 그건 틀린 말이었다.
어떤 설화든 치열했던 순간은 있고, 치열함의 비교는 애초에 무의미하다.
이 빌어먹을 <스타 스트림>에서, 마지막에 이기는 것은 시간뿐이니까.

[······그냥, 싸울 수는 있는 건가 싶어서.]

수백 년의 시간 속에서 방부 처리된 성좌들은, 언젠가 시나리오의 자극에 둔해진다. 점차 그들은 새로운 설화를 찾거나 탐구하는 대신, 이미 획득한 설화의 흐름에 자신을 맡겨버리게 된다. 생각하길 그만두는 것이다.

[설화, ‘지옥의 연주자’가 마왕 ‘암두시아스’의 의지를 움직입니다.]

자신이 쌓은 설화의 주인이었던 그들은, 마침내 자신의 설화에 의해 지배당하게 된다.

쿠구구구구!

[고작 백 년도 살지 않은 존재가, 감히 나를 조롱해?]

암두시아스는 알까.
지금 자신이 일으키는 분노가, 온전히 자신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설화, ‘지옥의 연주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마침내 지옥의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67번째 마계의 충만한 마력으로 채워진 음파가 허공을 덮었다.

“아아아아악!”

연주를 들은 서울시의 화신들이 칠공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일각공의 연주는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지옥의 오케스트라’라더니, ‘멸살법’이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암두시아스는 강하지만 지금의 내가 꺾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강력한 연주의 파동에 어깨와 옆구리에 상처가 났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전진했다.
나와 일행들이 쌓아 올린 설화가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신을 삼킨 인간이 자신의 불꽃을 피워냈으니」

[부러지지 않는 신념]에서 성화의 불길이 피어올랐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거친 포효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다른 설화들에게 지배권을 행사합니다!]

내가 가진 설화들이 성화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동요합니다.]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거대 설화’를 두려워합니다.]
[설화, ‘거신의 해방자’가 성화의 불길을 따릅니다.]

츠츠츠츠츠츳!

서울 전체를 환하게 밝히는 새하얀 불꽃.
전신을 파고드는 개연성의 스파크와 함께, 폭주하는 설화가 검극에서 용솟음치며 뻗어 나갔다.

콰아아아아아아!

어둠을 가르며 질주한 성화의 불꽃은, 밀려오는 음파의 해일을 장난감처럼 부수고 암두시아스의 화신을 쓸어버렸다. 힘의 약동이 얼마나 거세었던지, 검을 쥔 내 손이 파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의 ‘격’에 실망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더 거센 질주를 원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신화를 삼킨 성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본래 ‘거대 설화’는 다른 설화들이랑은 본질적으로 다른 구석이 있다.
강력한 설화는 주인을 선택하고, 막대한 영향을 끼치며, 최후에는 그 주인 자체가 되려고 한다.
특히나 이번에 얻은 ‘신화를 삼킨 성화’는 유독 호전적인 데가 있었다.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이 녀석은 망설이지 않고 나를 자신의 불길로 먹어치울 것이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탐욕이 가득한 눈으로 당신을 노려봅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마칩니다.]

······그 전에, 빨리 이 녀석의 고삐를 조여야 할 텐데.
계획을 서두르지 않으면 나 역시 암두시아스와 같은 꼴이 될지 모른다.

스으으으으······.

성화의 불길이 지나간 곳에 쓸쓸한 연주회의 흔적이 잿더미로 남아 있었다. 어디에서도 마왕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큼이나 압도적인 힘의 격차였던 것이다.

[마왕 ‘연주하는 일각공’이 치명상을 입고 시나리오에서 퇴장합니다.]
[당신은 ‘마왕승격전’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당신의 마계 등급이 조정됩니다!]
[당신은 ‘67번째 마계의 마왕’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명성이 마계 전체에 널리 알려집니다!]
[소수의 마왕들이 당신의 힘에 경악합니다.]

허공에서 도깨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대표전의 승자가 정해졌군요.]

[서브 시나리오 ― ‘서울 혁명’이 종료되었습니다.]
[보상으로 <김독자 컴퍼니>에게 300,000코인이 차등 분배됩니다.]

이어서 간접 메시지들도 쏟아졌다.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이 당신의 전투에 100,000코인을 후원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투쟁을 좋아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성장에 뿌듯해합니다.]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일부 마왕들이 당신에게 친선을 제의합니다.]

쏟아지는 메시지 사이로, 흉벽 아래 인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암두시아스의 공격에 운 좋게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자신들이 무엇에 이용당했는지조차 제대로 모르는 표정들.
나는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여러분. 제가 바로 ‘구원의 마왕’입니다.]

등 뒤로 마왕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머리 위로 마왕의 뿔이 솟았다.
히끅, 놀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흉벽을 개방하세요.]

쿠구구구, 하는 소리와 함께 [공장]의 흉벽이 강제로 개방되었다.
그토록 넘어오려고 애썼던 장벽이 너무나 허망하게 열리자, 사람들은 오히려 당황한 눈치였다.

“무, 무슨······.”

[이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신 것 아닙니까? 얼마든지 들어오십시오.]

“······몰아 놓고 죽이려는 거지?”
“죽일 거야! 분명 우릴 죽일 거라고!”

공포에 젖은 몇몇 화신들은 이미 내 진언에 소변을 지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마왕’이지만, 한 번도 불합리한 이유로 화신들을 핍박한 적은 없습니다. <김독자 컴퍼니>가 한 번도 서울을 독점한 적 없듯이.]

사실, [공장]의 문은 늘 열려 있었다.
우리에게 먼저 거리를 둔 것은 시민들이었고, 공포심을 가진 것도 시민들이었다.

[‘공장’은 당신들을 받아들일 겁니다. 시나리오를 하나씩 올라갈 수 있도록 지원도 아끼지 않을 겁니다. 당신들이 노력한만큼, 자신의 설화를 쌓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겁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에, 사람들의 눈빛이 몽롱해져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도 있었고, 거세게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마, 맞아! 이미 당신들은 너무 강해. 그리고 성좌들은······!”

그 감정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어떤 격차는 경외심을 갖게 만들지만, 어떤 격차는 절망을 품게 만든다.
그리고 방금 전 화신들은 평생이 걸려도 따라갈 수 없을 아득한 설화를 쌓은 존재들을 목격했다.

[늦게 시작했다고 해서 계속 뒤처져 있을 거란 보장은 없습니다.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속도는 모두 다르니까요. 저도 몇 년 전까지는 당신들과 같은 처지였습니다.]

하늘의 성좌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시나리오를 시작할 적만 해도 까마득히 멀리 있었던 존재들.

[저 성좌들에 비하면 수백 수천 년이나 뒤처져 있던, 배후성조차 없던 화신이었죠. 그래도 어느덧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 존재들이, 이제는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다.
나는 뿔과 날개를 거두며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제 모습을 똑바로 보십시오. 제가 특별해 보이십니까?]

사람들이 멍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내 외양에서 태생적인 특별함의 증거라도 찾아내려는 것처럼. 이윽고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다고?”

[어떤 시나리오도, 끝나기 전에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마십시오.]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돌아섰다.

[정문은 열어 놓겠습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언제든 와서 도움과 조언을 구하십시오.]

이것은 가짜 희망일지도 모른다.
아마 저들 중 대부분은 별의 자리에 오르기는커녕, 별빛을 마주하는 순간 그 황홀함에 취해 절명하고 말 테니까.

그럼에도 지금 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가짜 희망이었다.

누군가가 내 수식언을 중얼거린 것은 그때였다.

“구원의 마왕······.”

씁쓸한 입맛이 혀끝을 맴돌았다.

[마왕, ‘정욕과 격노의 마신’이 당신의 기만을 좋아합니다.]
[성좌, ‘타락의 구원자’가 당신에게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구원의 마왕’이라니.
아무래도 <스타 스트림>은 나만큼이나 작명에 재능이 없는 것이 틀림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기를 바라지만, 나는 박애주의자는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만 아낄 뿐이니까.

“독자 씨!”

멀리서 정희원을 비롯한 일행들이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허공에서 반짝이는 시스템 메시지가 보였다.

[73번째 마계의 주인, <김독자 컴퍼니> 대표 귀하.]

메시지를 건드리려는 순간, 뒤쪽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그거 읽을 필요 없어요. 이 몸이 직접 왔으니까.]

익숙한 파장의 진언.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녀석을 노려보았다.

[아스모데우스.]
[오랜만이군요, 김독자.]
[그쪽도 순위를 내주러 온 건가?]
[그보단 깊은 전우애를 나누러 온 거죠. 우리, ‘거대 설화’ 지분도 공유하는 동료 아니었던가요?]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실제로 ‘마계의 봄’의 소수 지분은 녀석에게 있으니까.

[제가 온 이유는 이미 알고 계시겠죠?]

물론 알고 있었다.
아마 ‘아스모데우스’는 앞서 내가 해치운 마왕들과 같은 목적으로 이곳에 왔을 것이다.

[내가 꼭 참석해야만 하나?]
[어리석은 질문이군요. ‘종말’과 누구보다 가까운 당신이라면 당연히 답을 알고 있을 텐데.]

난 침묵하며 아스모데우스의 고요한 눈을 마주보았다.
아스모데우스가 말했다.

[곧 ‘선악의 이중주’가 시작됩니다. 이제 당신도 ‘편’을 택할 때가 왔다는 이야기지요.]

나를 보는 그 시선이 묻고 있었다.

너는 ‘선’인가.
아니면 ‘악’인가.

아스모데우스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중심으로 밤하늘의 별들이 일제히 갈라지고 있었다.
한쪽은 밝은 빛으로, 한쪽은 우중충한 빛으로.
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선악의 이중주.
이 시나리오가 시작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간단했다.

「이 세계선의 멸망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무너진 선악의 균형 속에, 밤하늘의 별들은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거대 성운’들조차 피해갈 수 없는 치명적인 멸망.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멸망의 첫 희생양은.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대천사들의 성운, <에덴>이 될 것이다.





< Episode 65. 선과 악 (4) > 끝

< Episode 65. 선과 악 (5) >





‘선악의 이중주’ 는 ‘메인 시나리오’ 가 아니다.
분류는 히든 시나리오에 속하고, 엄밀히 따지면······ 시나리오라기보다 차라리 ‘이벤트’ 에 가깝다.
나는 아스모데우스를 잠시 제쳐두고 일단 일행들을 맞이했다.
무턱대고 시나리오부터 진행하기엔,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형! 이제 괜찮아요?”

일행들은 제각기 다른 얼굴들이었지만 표정에 묻은 염려는 모두 같았다.
아마 궁금한 것이 많겠지.
나는 기절하기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일행들에게 일의 자초지종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어머니를 살리고, 유상아 씨까지 살려낸 대가로 개연성의 후폭풍을 맞은 일까지.
차분히 이야기를 다 들은 정희원이 물었다.

“······유상아 씨 영혼을 독자 씨 안에 가뒀다고요?”
“쉽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런 방법이 있었으면 왜 진작······.”
“저도 성공을 확신하진 못했거든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정희원이 허리를 숙인 채 무릎을 짚었다.

“나, 진짜 상아 씨가 죽은 줄로만······.”
“그럼 상아 언니 살아 있는 거야?”

이지혜가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고 되물으며.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 신유승과 이길영. 그 옆에는 곰처럼 우뚝 선 이현성도 있었다.

“살아 있어. 그리고······.”

나는 이지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살려낼 거야.”

유상아는 분명 살았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살아도 살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정희원이 물었다.

“어떻게요? 혹시 비유처럼······.”
“환생시킬 생각은 맞지만, 도깨비로 만들진 않을 겁니다. 애초에 도깨비가 될 수 있는 존재는 정해져 있어요. ‘범람의 재앙’ 은 특별한 경우였습니다.”

41회차의 신유승에겐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스타 스트림>을 떠돌며 쌓은 격이 있었다. 하지만 유상아에겐 그런 격이 없다.

“유상아 씨를 살리려면 어떤 ‘별’ 에 가야 합니다. 초월좌들 사이에서는 ‘섬’ 이라 불리는 곳이죠.”

‘섬’ 이라는 말에 멀리서 키리오스가 이쪽을 향해 작은 귀를 여는 것이 보였다.
아마 키리오스는 그 섬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없는 동안, 그는 이미 그 섬에 다녀왔을 테니까.

“······문제는, 지금 당장 그곳에 갈 수 없다는 겁니다.”

정희원이 뒤쪽에서 [공장]을 두리번거리는 아스모데우스를 일별하며 소곤거렸다.

“저 마왕이 가져온 초대장 때문이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유상아를 살리러 ‘섬’ 에도 가야 하고, ‘선악의 이중주’ 에도 참가해야 한다.
당장 더 급한 쪽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가 당신의 도움을 청합니다.]

생각이 복잡해진다.
설마, 그 우리엘이 이렇게 말할 줄이야.
<에덴>의 상황이 그 정도로 안 좋은 건가?
하지만 ‘선악의 이중주’ 에 참석하면 유상아의 환생은······.

「(독자 씨, 말했잖아요. 퀘스트는 언제나 선행 퀘스트부터 해야 한다고.)」

······어?

‘유상아 씨?’

「(네.)」

‘혹시 아까 절 깨운 게 유상아 씨 였습니까?’

「(맞아요.)」

놀라운 일이었다.
어떻게 유상아가 [제4의 벽]을 넘어 나한테 말을 걸었지?
이건 니르바나 녀석도 함부로 못 하는 일인데······.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당면한 문제부터 집중해요. 본론부터 말할게요. 독자 씨는 ‘선악의 이중주’ 에 참석해야만 해요.)」

‘하지만······.’

유상아는 [제4의 벽] 안에서 ‘멸살법’을 읽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멸살법’을 통해 내 계획들을 미리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제 환생은 늦어져도 상관없어요. 모르시겠지만 이 도서관도 꽤 편안한 곳이거든요.)」

‘하지만······.’

「(그리고 제 생각엔, 오히려 ‘선악의 이중주’ 에 참석해야 다음 메인 시나리오로 향하는 텀을 당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유상아의 말은 맞았다.

‘조금만 견뎌주세요, 유상아 씨. 금방 다시 살려드리겠습니다.’

희미하게 웃는 유상아의 미소가 아른거렸다.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현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아직 지난 시나리오의 여파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새로운 일을 벌여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는 꼭 참가해야 합니다.”

내 말을 들은 이현성이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독자 씨, 저는 상관없습니다. 이미 쉴 만큼 쉬어서, 빨리 몸을 움직이고 싶습니다.”
“그건 현성 아저씨나 그렇겠죠. 난 모처럼 쉬나 싶었는데······.”
“우리 전부 가는 건가요?”
“설화 씨와 공필두는 두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공단]을 관리할 최소한의 인원은 필요해서요.”

그리고 다음 순간, 허공에서 빛살이 번뜩였다.

[‘선악의 이중주’ 가 당신을 부릅니다.]

“······아무래도, 시작된 것 같군요.”

메시지와 함께, 나와 일행들의 몸이 빛살에 휩싸였다.
시나리오의 강제 전송이 시작된 것이다.


*


‘선악의 이중주’는 말 그대로 선과 악의 연회다.

하나의 긴 시나리오 시즌이 끝나고, 그간 있었던 시나리오들의 ‘선악’을 판별하는 연회.
대체 그런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지만, 어떤 성좌들에게 그 ‘판별’ 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선악의 총체적인 판별 결과에 따라, 다음 분기에 이어질 절대 선과 절대 악의 위상이 달라지는 까닭이다.

[이만한 규모의 연회는 오랜만이군요.]

“그쪽은 자주 와 봤을 텐데?”

[나도 늘 참석했던 것은 아닌지라. 이번에는 좀 이례적일 정도로 규모가 크군요.]

성대한 연회장의 외경을 바라보며, 아스모데우스가 떨떠름한 웃음을 흘렸다.
실제로 연회는 규모뿐만 아니라 입장부터 심상치 않았다. 우리가 소환됨과 동시에, 성채의 도개교가 내려오며 무수한 인파가 내비쳤던 것이다.
도개교를 지나는 성좌와 화신들을 성류 방송에 내보내기 위해 대기 중인 도깨비들.
거기다 <스타 스트림>의 독립 언론사에 소속된 성좌들까지.
아스모데우스가 말했다.

[그럼, 나 먼저 입장하죠. 너무 불편하게만 생각지 말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그대는 올해의 ‘유력한 수상 후보’ 니까.]

······수상 후보?

내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손가락을 튕긴 아스모데우스의 의상이 화려한 검정색 프릴 드레스로 바뀌었다.
녀석은 우아한 걸음걸이로 도개교를 넘어 연회장으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정욕과 격노의 마신!]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왔다!]

쏟아지는 셔터 소리와 함께 도개교가 환한 빛으로 물들였다.
도깨비들을 향해 눈웃음을 흘린 아스모데우스가 매혹적인 얼굴로 내 쪽을 돌아보았다.

새삼, 아스모데우스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실감이 났다.

아스모데우스의 걸음마다, 녀석이 싸운 전장의 영상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녀석의 승격전들.

<마왕 ‘정욕과 격노의 마신’ 一 현재 마왕 서열 13위>

얼마 전까지만 해도 32위였던 녀석은, 어느새 순위권 피라미드의 최상위권에 올라가 있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승격인 셈이었다.

“우리도 입장하죠.”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일행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아저씨. 우리도 들어가도 괜찮은 거야······?”
“도, 독자 씨. 저, 이런 곳인 줄은 모르고 아까 그런 호언을······.”

그나마 <에덴>을 방문한 적이 있는 정희원은 심호흡을 하며 평정을 찾고 있었지만, 다른 일행들의 상태가 자못 심각했다.
이지혜는 불안한지 손톱을 뜯고 있었고, 이현성은 소변이 급한 큰 곰처럼 어깨를 떨고 있었다. 내 양손을 꼭 쥔 신유승과 이길영의 기척도 느껴졌다.

“괜찮습니다. 우리도 초대를 받았으니까요.”

나도 긴장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일행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웃으며 말했다.

“주눅 들지 마세요. 우리 그동안 열심히 싸워왔잖아요. 저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쌓았는가가 더 중요하죠.”
“독자 씨 말이 맞아요. 까짓거, 저게 뭐라고. 우리도 빨리 입장해요.”

정희원의 박력에 다른 일행들도 정신을 차리는 듯 보였다.
볼이 발갛게 물든 이지혜가 손으로 자신의 뺨을 탁탁 쳤다.
대강의 준비가 끝나자, 나는 일행들과 함께 도개교를 향해 곧장 걸어갔다.
흑요석과 다이아몬드를 비롯해 휘황한 광물들로 뒤덮인 보석의 길. 그리고 그 도개교의 아래를 흐르는 설화의 강.
아스모데우스를 비롯한 유명 성좌들이 막 지나간 후였기 때문에, 우리가 나타났음에도 인파들은 우리에게 별다른 주목을 쏟지 않는 눈치였다.
정확히는, 그랬으면 싶었다.

[앗, 저 자는······!]
[‘구원의 마왕’ 이다!]

이제 내 수식언이 제법 알려진 까닭인지, 몇몇 성좌들이 나를 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방송을 진행하던 도깨비들이 동시에 이쪽을 돌아보았다.
탄성은 작은 박수처럼 시작해서, 이내 도개교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올림포스>의 대적자!]
[<김독자 컴퍼니>가 왔다!]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마어마한 시선이 한꺼번에 쏟아지자, 간신히 걸음을 이어가던 일행들도 무척 당황한 눈치였다. 심지어 몇몇 성좌들은 도개교 사이로 끼어들어 손을 내밀기도 했다.
곳곳에서 쏟아지는 메시지와 함께, 플래카드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잘 생겼다 김독자!]
[9158 FOREVER]

가능하면 일행들이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으면 했지만, 기어코 정희원이 내게 한마디를 던졌다.

“독자 씨, 완전 아이돌인데요?”
“그러는 희원 씨도 저 못지않으십니다만.”

一멸악의 심판자! 네 시나리오 잘 보고 있어!
一희원 언니 너무 멋져요!
一강철검제의 사랑을 응원합니다!

깜짝 놀란 이현성이 질겁하며 말했다.

“도, 독자 씨! 제 얘기도 있습니다.”

一‘한국 역사 보존 전우회’ 는 충무공의 후예 이지혜를 응원한다.

이지혜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 아저씨들은 뭐야······.”

一신유승 ☆ 이길영 ‘베스트 케미상’ 기원!

내 손을 잡은 신유승의 손바닥에 강한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아저씨, 저거 엄청 기분 나빠요.”
“왜 내가 신유승이랑······.”

지난번 <기간토마키아>로 인해 우리 성운의 인지도가 올라간 건 알고 있었다. 실제로 ‘양산형 제작자’ 도 그렇게 말했었고.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반응을 불러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구원의 마왕’, 한 말씀 해주시죠!]
[올해의 유력한 수상 후보로 지목되셨는데, 기분이 어떠십니까?]

여기저기서 들이대는 마이크 때문에 나는 공황장애가 올 지경이었다.
생각해 보면, 살면서 이만한 주목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 도깨비들로 난처해진 나를 구해준 이가 있었다.

[■■, 다들 안 꺼져?]

특유의 화려한 백금발이 허공에 퍼져 나가며,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서슬 퍼런 격을 발했다.

[도, 도망가!]
[미친 천사다!]

갈라지는 도깨비들 사이로, 검은 실크 드레스의 대천사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김독자! 어서 와!]

우리엘이 와락 안겨들며 품에 볼을 부볐다.
나는 반가움과 민망함을 동시에 느끼며 우리엘을 떼어냈다.

“우리엘, 오랜만입니다.”

[응응!]

반짝이는 우리엘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반가워 해주다니······ 고맙긴 한데.

······<에덴>이 위험에 처했다고 날 부른 거 아니었나?

“······저기요? 여기, 자기 화신은 안 보이시나요?”

[희, 희원아! 하하핫! 물론 희원이도 반갑지이! 자아, 입장하자고!]

어설프게 말을 돌린 우리엘이 가로막는 인파들을 치워버리고 우리를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홀 내부로 들어서며 펼쳐진 정경에는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쿠구구구.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히 격을 헤아릴 수 없는 마왕과 성좌들이, 두 개의 롱 테이블을 중심으로 앉아 있었다.
왼쪽에는 72좌 마왕들一이젠 73좌겠지만一을 비롯한 절대 악의 성좌들이, 오른쪽에는 <에덴>의 대천사들을 비롯한 절대 선 계통의 성좌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입장과 함께, 그곳의 모든 존재가 나에게 집중했다.

마치, 내게 두 테이블 중 어느 쪽에 앉을 것이냐고 묻는 듯한 시선들.

[마왕, ‘별과 논리학의 군주’ 가 당신의 선택에 주목합니다.]
[마왕, ‘검은 갈기의 사자’ 가 당신의 선택을 궁금해합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 이 당신을 지켜봅니다.]
[성좌, ‘새벽별의 여신’ 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안타깝게도, 이번만큼은 다른 선택지가 없어 보였다.





< Episode 65. 선과 악 (5) > 끝

< Episode 65. 선과 악 (6) >





가볍게 한숨을 내쉰 나는 생각했다.
딱히 어느 쪽을 선택할 생각은 없지만, 일단 지금 나는 ‘마왕’ 이다.
그러니, 자연히 앉아야 할 테이블은······.

꾸욱.

[자자, 이리로 와. 내가 미리 자리 깔아 놨어.]

내게 팔짱을 낀 우리엘이 나와 일행들을 데리고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당혹감을 느끼며 우리엘에게 질질 끌려갔다.
아주 자연스럽게 대천사들이 있는 테이블로 나를 이끌어 가는 우리엘.
반대편 테이블에서, 마왕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잠깐만요. 우리엘. 저는······.”

나는 얼떨결에 우리엘 옆 좌석에 앉았고, 일행들은 내 뒤쪽의 좌석에 차례대로 앉았다.
내 앞쪽에 앉아 있던 라파엘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님 마왕 아니심?]

“저, 그게······.”

그러거나 말거나 내 왼편에 앉은 우리엘은 희희낙락한 모습이었다.

[좋아, 좋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오른쪽을 돌아보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그곳에 있었다.

“뭐야, 네가 왜 여깄어?”

대체 언제 온 것인지, 유중혁이 특유의 무시무시한 살기를 풍기며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메타트론도 있었다.
자리 배치를 보아하니 유중혁은 메타트론이 데려온 듯한데······.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기분 탓일까?

나를 일별한 메타트론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우리엘을 타박했다.

[우리엘, 그대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구원의 마왕’ 은 ‘마왕’입니다.]
[얘가 어딜 봐서 마왕이에요, 서기관.]
[수식언부터 마왕입니다. 돌려보내세요.]
[싫어요.]

우리엘과 메타트론이 투닥거림과 동시에, 홀의 중앙에서 사회를 맡은 도깨비가 나타났다. 뿔의 개수와 크기를 보아하니 상급 도깨비인 듯했다.

[자, 지금부터 식순을······.]

도깨비의 시선이, 정확히 나에게 멈춰 있었다.

[흠, 앞서 공지를 드렸는데 지키지 않는 분이 계시는군요. 성좌 및 마왕님들은 ‘전용 좌석’을 지켜 앉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무심코 내 자리에 적힌 수식언을 확인했다.

[이 자리는 ‘타락의 구원자’ 전용 좌석입니다.]

······하필 앉아도 이 자식 자리였나. 미카엘은 참석하지 않은 모양이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뒤쪽의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분은 그냥 이쪽에 계십시오. 그게 더 안전할 겁니다.”
“그럼 독자 씨는요?”
“전 괜찮습니다. 다들 너무 긴장하지 말고, 연말 시상식 같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다들 그동안 고생했으니 가끔은 이런 시나리오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행들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여전히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원작의 전개대로라면, 이번 ‘선악의 이중주’를 계기로 선악의 균형은 흐트러지게 되니까.
나는 ‘히잉’ 하며 나를 올려다보는 우리엘에게 미소를 지어준 후,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홀의 중심을 혼자서 건너갔다.

[마왕, ‘예제공’ 이 당신을 덜떨어진 마왕이라 생각합니다.]
[성좌, ‘새벽별의 여신’ 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젓습니다.]
[마왕, ‘강령의 마신’ 이 당신의 품격을 의심합니다.]

입학식 때 혼자 다른 반에 가서 앉아 있었던 때 뒤로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은 정말 간만이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 이 당신의 멍청함을 좋아합니다.]

······심연의 흑염룡? 이 자식도 와 있는 건가?
잠시 후, 나는 간신히 내 지정 좌석을 찾아냈다.

[이거 우연이군요, 또 짝꿍이 되다니.]

마침 내 옆자리는 아스모데우스였다.

“기분 나쁜 소리 하지 마.”

그리고 연회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순서는 간단한 다과와 함께 특별 게스트의 공연을 보는 것이었다. 식순만 보자면 정말로 연말 시상식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나는 눈앞의 접시에 놓인 스테이크를 내려다보았다.

「필레산 최고급 소드마스터의 절규」

하여간 취향들은 여전하시구만.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번쩍거리는 무대를 바라보았다.
특별 게스트의 공연이라······, 또 무슨 화신들이라도 섭외한 모양이었다.

[오늘 무대는 매우 특별합니다. 평소 섭외하기 위해 부단히 애써왔지만, 한 번도 응해주시지 않던 분들이시거든요.]

누구길래?

[소개합니다! ‘술과 황홀경의 신’! 그리고 ‘사랑과 미의 여신’!]

······뭐?

화려한 조명과 함께, 무대 위에는 수트를 입고 다이아몬드 장갑을 낀 디오니소스와 블랙 점프 수트를 입은 아프로디테가 등장했다.
그리고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뒤쪽을 보니 오르페우스의 대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워~ 화려한 조명은 나만의 것.]

노래를 시작하는 디오니소스.
노래는 계속되었다.

[너희는 절대 흥을 깨선 안돼- 안되지 안돼]

당최 무슨 노래인지 모르겠다.
성좌들은 뜻밖의 이벤트에 신난 듯했다. 특히 아프로디테와 그녀의 화신들이 보여준 박력 넘치는 군무 댄스에는 모두가 환호하는 눈치였다.
몇몇 성좌들이 디오니소스를 향해 포크를 던지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기간토마키아>가 끝난 뒤 디오니소스가 그런 말을 했었다.

一······너네 때문에 당분간 우리 <올림포스> 고생 좀 하겠다.

설마 그게 이런 의미였을 줄은 몰랐다.
아마 이번 게스트 출연료로 디오니소스와 아프로디테는 막대한 코인을 받을 것이다.
<올림포스> 성좌들의 드높은 자존심을 생각하면 얼마를 받든 수치스러운 건 마찬가지겠지만.

[워어! 흥을 깨지마! 흥을······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우리 <바쿠스와 여신도단> 많이 사랑해 주세요!]

한동안 음식물 세례를 얻어 맞던 디오니소스가 머리에 스파게티를 얹은 채 웃으며 퇴장했다.
저렇게 신나게 웃고 있다니······ 연기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무대 공연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주변에 앉은 마왕들을 관찰했다.
물론, 관찰당하고 있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하위권의 마왕들이 극성이었다.

[마왕, ‘시체를 철학하는 군주’ 가 당신을 경계합니다.]
[마왕, ‘금단을 보는 눈동자’ 가 당신을 견제합니다.]

하루 만에 순위가 73위에서 67위로 격상되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녀석들은 언제 내가 ‘승격전’을 요청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을 것이다.

[자, 그러면 슬슬 올해의 시상식을 진행하겠습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무래도 지금부터가 진짜인 듯했다.

[좋은 설화란 성좌와 화신 사이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죠. 그런데 올해는 성좌와 화신뿐만 아니라, 화신과 화신 간에도 훌륭한 케미를 보여주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을 위한 ‘작은 시상’을 준비했습니다.]

성좌들의 환호가 홀을 가득 채웠다.
원작에 이런 내용도 있었나?

[올해의 ‘베스트 케미’ 상 후보들입니다!]

그와 동시에 영상들이 떠올랐다.
후보군들 중 몇몇 인물들이 무척 익숙했다.

一무리야, 저건 절대로 안 된다고.
一어차피 이대로면 죽어.

화면에 떠오른 것은 두 아이였다.

[첫 번째 후보, 화신 ‘신유승’ 과 화신 ‘이길영’!]

갑작스레 쏟아진 스포트라이트에, 휘둥그레 커진 신유승과 이길영의 눈이 보였다.
······이건 나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도개교 넘을 때 베스트 케미 상 어쩌구 하는 플래카드를 본 거 같았다.
화면에 소개된 영상은 언젠가 [암흑성]에서 ‘키메라 드래곤’을 길들일 때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괴수들의 파도를 헤치고, 용기를 내어 드래곤을 향해 나아가는 두 아이의 모습.
어쩐지 내가 뭉클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후보 소개는 계속되었다.

[두 번째 후보, 화신 ‘정희원’ 과 화신 ‘이현성’ !]

······또 우리 성운?

一희원 씨,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자료 화면은 언젠가 이현성이 [강철화]를 익혔던 순간의 영상인 듯했다. 니르바나에 의해 폭주하는 정희원의 [지옥염화]를 소화(消火)하기 위해, 몸 바쳐 자신을 희생했던 이현성의 모습.
테이블 건너편으로 얼굴이 새빨개진 이현성과 이마를 짚은 정희원이 보였다.
저렇게 보니, 둘이 제법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어서 세 번째 후보입니다!]

잠시 후 화면에 떠오른 장면을 목격한 나는 경악했다.
······뭐야 저거?

一김독자, 기회는 한 번뿐이다.
一내겐 늘 한 번뿐이었어.

자료 화면이 나오자, 우리엘과 에덴의 대천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화면에 나온 두 사람은, 나와 유중혁이었다.
아무래도 ‘헤라클래스’를 해치우기 위해 함께 창을 던지던 순간인 것 같았다.
도깨비가 웃으며 말했다.

[최근 가장 떠오르는 세 번째 후보, 성좌 ‘구원의 마왕’ 과 화신 ‘유중혁’ 입니다!]

테이블 건너편에서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긴 유중혁이 보였다.
······저 자식이, 나도 싫거든?
나와 시선이 마주친 이지혜와 정희원은 뭐가 웃긴지 깔깔거리다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자, 그럼 시상의 주인공을 발표하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기도했다.
3번은 안 된다. 3번은 안 돼.

두구두구두구!

[올해의 베스트 케미는 화신 ‘신유승’ 과 ‘이길영’ 커플입니다!]

터지는 폭죽과 함께 발표되는 이름.
다행히 성좌들은 올바른 판단을 내려주었다.
천사들의 탄식과 함께, 이길영과 신유승이 우물쭈물하며 무대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에, 어. 그러니까······ 이런 상을 주셔서······ 감사하고요······.”

엄청나게 긴장한 신유승이 말을 더듬으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마이크를 빼앗은 것은 이길영이었다.

“독자 형 사랑해요!”
“사랑해요 아저씨!”
“<김독자 컴퍼니> 최고!”

대천사들은 그런 아이들이 귀엽다는 듯 박수를 보냈다.
사이좋게 상금과 상패를 받은 아이들은 투닥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험험. 그럼 계속해서 시상에 들어가도록 하죠.]

‘베스트 케미’ 시상이 특별했을 뿐, 사실 ‘선악의 이중주’에서 주어지는 대부분의 상들은 ‘거대 설화’ 에 주어지는 것이었다.
때문에 올해 괜찮은 ‘거대 설화’를 얻은 주요 후보들은 무척 긴장한 모습이었다.
상금도 상금이지만, 이곳에서 받은 ‘상패’ 는 모두 격을 높여주는 성유물들이다.
그러니 성좌들이 환장하지 않을 수 있나.
곁에 있던 아스모데우스가 눈웃음을 치며 속삭였다.

[기대되지 않나요? 당신이 무슨 상을 받게 될지.]

“내가 받을 턱이 없잖아.”

받아봤자 고작 신인상이겠지.
애초에 이런 시상식에서 신인 마왕인 내게 큰 상을 줄 턱이 없었다.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어지는 시상을 지켜보았다.
수상 여부는 둘째 치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애초에 ‘선악의 이중주’ 는 단순한 ‘시상식’ 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악의 이중주.
시나리오의 선악을 판단하는 선과 악의 연회.

말이 연회지, 사실 이 이벤트는 일정한 주기를 간격으로 펼쳐지는 ‘절대 선’ 과 ‘절대 악’ 의 자존심 대결이었다.
우주 각지에서 펼쳐진 ‘거대 설화’ 의 정경이 허공에 떠오르고 있었다.

[신악상(新惡賞) 수상작은 거대 설화, 「치우의 후예」 입니다!]

치우의 후예. <황제> 쪽에서 발생한 거대 설화였다.
아마 화신 ‘페이후’ 가 참가했던 설화일 것이다.

지금부터 수상할 ‘거대 설화’ 들은, 모두 ‘선’ 과 ‘악’ 의 구도로 나누어진다.
즉, ‘선’에서 주는 상과 ‘악’에서 주는 상이 다른 것이다.
페이후는 악인으로 판단되었고, 때문에 마왕들이 주는 상을 받은 거겠지.

[신선상(新善賞) 수상작은 거대 설화, 「스핑크스의 수호자」 입니다!]

스핑크스의 수호자. <베다>의 거대 설화다.
아마 ‘란비르 칸’ 이 받았겠군.
란비르 칸은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베푸는 선인인 만큼, 절대 선 계통의 지지를 받은 듯했다.

[수상자들은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시상 대표로 나온 페이후와 란비르 칸이 간단한 수상 소감을 말했다.

일대일 격투의 달인인 페이후.
그리고 대군 전투의 귀재인 란비르 칸.

지금쯤 거대 설화 시나리오에 돌입했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벌써 저런 대단한 설화들을 모았다니 놀라웠다.
역시 ‘원작’ 의 등장인물들은 다르다.

[자, 다음 순서는······.]

신인상의 순서가 지나가고, 각 분야의 우수상 시상이 이어졌다.
한 번은 악이, 한 번은 선이. 마치 나눠 갖기라도 하듯 주어지는 상들.
아마 저 상들 중 몇 개는 일부 성좌들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갔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이 선과 악의 균형을 맞추는 방식이니까.

[먼저 이 상을 주신 절대 악 계통의 성좌 및 마왕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성에 계신 배후성님, 채널을 운영해주신 도깨비님, 그리고······.]

기나긴 우수상 수상 소감까지 끝나자, 나는 기분이 조금씩 이상해졌다.
당연히 이쯤에서 상 하나 정도는 받을 줄 알았는데, 순서가 훌쩍 지나가 버린 까닭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김독자 컴퍼니> 정도면 신인상 정도는 줄만하지 않나? 그래도 우리가 만든 설화가 있는데······.

[올해의 최우수상 수상작은, 거대 설화······.]

최우수상을 받은 것은 안나 크로프트의 ‘차라투스트라’ 였다.
사정상 참석을 못했는지, 대신 수상 소감을 읊은 것은 셀레나 킴이었다.
생각해 보니 원작에서도 이 연회의 최우수상은 안나 크로프트였지.

어느새 남은 것은 대상뿐.
그쯤 되자 나는 뭔가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선악의 이중주’ 는 ‘대상’ 의 발표를 통해 그 해의 ‘선악 균형’ 이 가려진다.」

사실 이 연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 이다.
오직 ‘대상’ 의 수상에 따라, 선과 악의 권력 위상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올해의 가장 위대한 ‘설화’ 는 선인가, 아니면 악인가.

주변을 둘러보니, 웃고 떠들던 마왕들과 천사들의 표정이 긴장으로 물들어 있었다.

[올해의 대상 수상작은-]

그리고 도깨비의 입술이 열렸다.
녀석이 토해내는 음절들을 들으며, 세상의 현실감이 조금씩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의 균형이 삐거덕거리고 있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입니다.]





< Episode 65. 선과 악 (6) > 끝

< Episode 66. 선악의 저편 (1) >





Episode 66. 선악의 저편


처음에는 잘못 들은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왕들의 시선이 쏟아지고, 아스모데우스가 내게 박수를 치고, 얼떨떨한 일행들의 표정을 보며― 나는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김독자 컴퍼니>가 대상을 받았다.

하지만 기쁜 마음보다는 불길한 마음이 앞섰다.
대상이라고? 우리가?
다른 곳도 아니고 이 ‘선악의 이중주’에서?
불길함의 정체는 곧 밝혀졌다.

[올해의 수상작은, 아직 선악이 판별되지 않았습니다.]

선악이 판별되지 않았다는 메시지에, 몇몇 마왕들과 성좌들이 동시에 술렁였다.

[선악이 판별되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도깨비가 곧바로 대답했다.

[역대 ‘대상’ 수상작들은 대도깨비들과 절대 선, 절대 악의 성좌들이 함께 합의해 정하게 되어 있었죠. 그런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결론이 나질 않았습니다.]
[······결론을 내지 못했다고? 그 ‘대도깨비’들이?]

성좌들과 마왕들은 모두 당황한 얼굴들이었다.
‘절대 선’이나 ‘절대 악’에 속한 성좌들이야 당연히 팔이 안으로 굽을 게 당연했지만, 대도깨비들까지 합의점이 나지 않았다니.

[‘선악의 이중주’가 만들어진 이래 그런 적은 한 번도 없네. 아니, 성마대전(聖魔大戰)이 종료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야!]
[판별할 수 없다니? 그런 이야기가 있을 리 없다. 선악의 저울은 어느 쪽으로든 기울 수밖에 없어!]

흥분한 성좌와 마왕들의 고성이 오갔다.
그들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거대 설화 시나리오는 성운들의 합의나 조작으로 승자가 결정된다.
<기간토마키아>가 일종의 관광상품으로 팔려나갔던 것처럼, 다른 거대 설화 시나리오 또한 우선주(優先株)가 팔려나가듯 선악의 승패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간토마키아>를 무너뜨리고 만들어진 우리의 설화는, 그 탄생 경위가 완전히 달랐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올림포스>에서 시행하는 거대 설화 시나리오가 무너지며 탄생한 설화.
애초에 예정에 없던 설화였으니 선악을 미리 결정할 수도 없었다.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도깨비가 웃었다.

[뭐, 대도깨비님들의 의견을 저 같은 것이 어찌 알겠습니까? 아무튼 이번 대상은 이 자리에서 ‘선악’의 판별을 직접 내리게 되었습니다.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손들어 발표해 주십시오.]

그제야 도깨비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 망할 자식들이.

애초에, 이 녀석들에게 <김독자 컴퍼니>의 수상 여부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쌓은 설화의 선악 여부였고, 그로 인해 달라질 자신들의 위상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 설화는 ‘악’이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서열 50위의 마왕인 ‘예제공’이었다.
예제공. 그의 진명은 50번째 마계의 주인인 ‘푸르카스’다.

[‘구원의 마왕’은 ‘마왕’이지. 덜떨어진 마왕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는 마계의 주인이고, 고로 그의 모든 행동은 악할 수밖에 없다.]

과연, 맞춤법도 제대로 못 지키는 예제공 답게 한심한 논리였다.
그러자 반대편 진영에서 누군가 손을 들었다.

[그 의견엔 이의가 있심.]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 라파엘이었다. 라파엘은 쯧쯧, 하며 손가락을 내젓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령 물건을 훔치고 악인이 된 사람이 있다고 쳐보셈. 세상 모두가 그를 악인으로 불렀고, 그렇기에 그는 악인이 되었음. 그런데 이 악인이 알고 보니 훔친 돈으로 사람들을 구한 거임. 가난한 사람에겐 빵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겐 물을 주며 수많은 사람들을 살렸다면?]

나는 라파엘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 사람은 계속 ‘악인’인 거임? 한 번 ‘악인’으로 규정되었으니까?]
[글쎄, 그건······ 그러니까.]

말을 잘 못하는 예제공은 라파엘의 논리에 말려들고 말았다.
그때, 내 곁에 있던 마왕이 손을 들어 예제공을 도왔다.

[지금 이곳에서 ‘선한 악인의 역설’을 논해보자는 것인가요?]

아스모데우스의 붉게 물든 동공이 격앙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스모데우스는 라파엘에게 빚이 있었지.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못할 것도 없심.]

구름 침대에 엎드린 라파엘이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무대의 대형 스크린에서, 나와 일행들이 <기간토마키아>를 수행하는 장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화면을 보며 라파엘이 말을 이었다.

[결국 존재란 설화로 만들어지는 것이고, 설화는 존재가 행한 사건들의 총체로 만들어지는 것임.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 설화에 누적된 사건에서는 악을 찾아보기는 힘듦.]

「선한 악인의 역설」.

이 역설은 모든 존재의 ‘선악’은 곧 그 존재가 쌓은 이야기로 규정된다는 함의를 품고 있다.
라파엘은 분할 화면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첫 번째 화면은, 내가 명계에 방문해 거신들을 해방시키는 장면이었다.

[‘구원의 마왕’은 부당하게 억압받고 있던 시나리오의 약자들을 해방시켰음.]

두 번째 화면은, 일행들이 파천검성과 함께 관광지로 변한 <기간토마키아>에 저항하는 장면이었다.

[<김독자 컴퍼니>의 구성원들은, <기간토마키아>의 불합리한 시나리오 구성에 반발했음.]

마지막 화면은, 역시나 나와 일행들이 성화를 불태워 신화급 성좌인 포세이돈과 대적하는 장면이었다.

[그들은 거대 성운의 지배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해 불가항력의 대상과 맞서 싸웠음. 보셈.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의 어느 구석에서 ‘악’을 찾을 수 있다는 거심?]

장면의 디테일을 들어 조목조목 설명하는 라파엘의 화법에, 다수의 성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마왕들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정확히는, 아스모데우스만을 제외하면 그랬다.

[재미있군요. 이토록 천사들의 비호를 받으니, 어쩌면 ‘구원의 마왕’은 정말로 ‘선한 마왕’일지도 모르겠어.]
[인정하는 거임?]
[아뇨. 당신의 말에는 허점이 있으니까. 일단 당신의 말대로 ‘존재는 설화’고, 설화란 곧 ‘사건의 총체’라 치죠.]

아스모데우스가 싱긋 웃으며 나를 일별했다.

[아시다시피 설화라는 것은 결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설화는 반드시 다른 설화와 관계되어 있고, 그에 영향을 미칩니다. 「신화를 먹는 성화」도 마찬가지죠.]

그와 동시에, 전방의 스크린에서 다른 화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언젠가 있었던 첫 번째 시나리오의 장면이었다.
화면에는 내 손에 의해 터져 나간, 수태한 메뚜기의 알들이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구원의 마왕’은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말이죠.]

몇몇 천사들이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스모데우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런 일은 또 있었습니다.]

뒤이어 화면에 떠오른 것은 ‘여덟 번째 시나리오’였다.
서울 최강의 화신이 희생하면, 모든 사람이 살 수 있었던 시나리오.
화면에는 특성 효과로 ‘여덟 개의 목숨’을 가진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아스모데우스가 말했다.

[‘구원의 마왕’은 여분의 목숨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최강의 희생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더 커다란 희생이 생기기 전에 얼마든지 시나리오를 끝낼 수 있었다는 거죠.]

성좌들의 웅성거림은 한층 더 심해졌다.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원하는 사람은 살리고, 원하지 않는 생명은 방관하는 자. ‘구원의 마왕’은 그런 존재입니다. 그는 당신들이 싫어하는 차별을 행하는 마왕입니다. 이 <스타 스트림>에서 가장 끔찍한 죄인 ‘차별’ 말입니다.]

승리를 선언하듯, 아스모데우스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묻겠습니다, <에덴>. 그대들은 아직도 ‘구원의 마왕’을 ‘선한 마왕’이라 생각하는 것인가?]

순간 좌중이 잠잠해졌다.
천사들 중 일부는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고, 마왕들 중 다수는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한 성좌가 있었다.

[■■, 그딴 모순은 누구나 가지고 있어.]

우리엘이었다.

[중요한 것은 죄의 누적이 아니라, 그 사건들을 통해 변화하는 방향이야. 그리고 ‘구원의 마왕’은 정의로운 방향으로 향해가고 있었다고!]
[요즘 천사들은 선악의 정의에 대해 굉장히 관대하군요. 최근 당신이 마왕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뭐?]
[흐음, 사실인가 보군요. 지난번에 봤을 때도 혹시나 싶었지만―]

우리엘이 벌떡 일어섰다.

[이 ■같은 ■■가 지금······!]

파츠츠츠츠······!

양 테이블을 중심으로 엄청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대천사들과 마왕들의 욕설이 난무하고, 곧이어 여기저기서 의견들이 난립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제 타깃은 나만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정희원의 살인을 공격했고.
다른 누군가는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이현성의 비겁함을 공격했으며.
이지혜가 자신의 친구를 죽인 것을 물고 늘어지는 이도 있었다.

우리의 생(生)이, 우리가 쌓아온 역사가,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빨을 드러냅니다.]

일행들의 표정이 점차 창백해지고 있었다.
이미 감당하기 힘든 상처를 받아온 사람들.
삶이 관음되고, 성좌들의 유희 거리가 되는 것을 감수하고 어떻게든 여기까지 버텨온 사람들이었다.

[잠깐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뒤늦게 뭔가를 눈치챈 우리엘이 소리쳤으나, 이미 성좌들과 마왕들은 <김독자 컴퍼니>의 상처를 헤집기에 여념이 없었다.
결국 그들은 신유승과 이길영의 과거마저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나선 것은 마침내 이길영의 트라우마와 배후성이 언급된 순간이었다.

“그만들 하시죠.”

내 말에, 순간적으로 좌중이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잘못 발언하면 위험해진다는 것은 안다.
지금 <김독자 컴퍼니>는 두 개의 거대한 조류 사이에 놓인 돛단배나 다름없었다. 언제든, 조류를 잘못 타면 침몰할 수 있는 작은 배.

하지만, 아무리 작은 배라도 자신이 어디로 갈 것인지 정도는 선택할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나는 그 배의 선장이었다.

“이쯤 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결론이 나지 않는다는 건 충분히 아셨을 텐데요?”

내가 지금껏 개입하지 않은 것은, 성좌와 마왕들이 스스로 모순에 빠지길 기다렸기 때문이다.

“대도깨비들도 판단하지 못한 일을, 당신들이 여기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김독자 컴퍼니>는 선도 악도 아니다.
애초에 남들이 정한 ‘선악’의 개념에 놀아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그의 말이 맞다.]

뜻밖에도 그 말을 한 것은 서열 5위의 마왕인 ‘검은 갈기의 사자’, 마르바스였다. 그는 나를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확실히, 여기서 우리가 떠들어 봐야 무용한 일이다. 불필요한 논쟁은 그만두지.]
[마르바스! 하지만······.]
[애초에, 본인에게 물어보면 되는 일이다.]

등골이 삐걱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본인이 직접 정하게 하지. 이 ‘설화’가 선인지, 아니면 악인지. 그러려고 이 자리를 만든 게 아니었나?]

그 말과 함께 모든 마왕과 성좌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며 서늘한 감각이 스쳤다.
곧이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은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에 대한 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해당 설화의 선악을 판별해 주십시오.]

만약 내가 여기서 선악을 선택한다면, 나는 이들이 주장하는 ‘선’과 ‘악’ 중 하나의 편을 드는 셈이 된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곤란했다.
<김독자 컴퍼니>의 행보만이 문제가 아니라, 여기서 우리가 선악을 선택하게 되면 앞으로의 시나리오에 끔찍한 미래가 도래할 수도 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성좌들이나 마왕들의 지탄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는―”
“선(善)이다.”

나는 멍하니 그 말을 한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이제껏 어떤 말도 없이 침묵을 지키던 검은 코트의 사내.
유중혁이 말하고 있었다.

“이 설화는, 선이다.”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던 나머지 입만 뻐끔거렸다.
유중혁이 미친 걸까 싶기도 했고, 저 녀석이 뭔가 함정에 빠진 걸까 싶기도 했다.
유중혁의 곁에 앉은 메타트론이 나를 향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팔뚝에 서서히 소름이 돋았다.
설마, 메타트론이 유중혁을 데려온 이유는······.

[해당 ‘거대 설화’의 지분을 가진 존재들은 ‘선악’의 판별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뒤이어 떠오른 메시지에 성좌와 마왕들의 입이 희미하게 벌어졌다.

[화신 ‘유중혁’은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에 대해 22.8%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화신 ‘유중혁’의 선언으로 인해 해당 설화는 ‘선’의 방향으로 기울었습니다.]

지금 이 설화를 ‘선’ 또는 ‘악’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나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김독자 컴퍼니>의 모두는 이 설화에 대한 지분이 있으니까.

[해당 설화를 ‘선’으로 승인하시겠습니까?]

유중혁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듯이.

―미친놈아! 대체 무슨 생각이야!

[한낮의 밀회]를 통해 녀석에게 말을 걸었지만, 유중혁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녀석을 노려보다가 스킬을 발동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현재 해당 인물이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감정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뭐?

[만약 다른 담화자의 반론이 없을 시, 해당 설화는 ‘선’으로 확정됩니다.]
[확정 완료까지 30초 남았습니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줄어드는 숫자와 함께, 마왕들이 고성을 질러대는 것이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란 일행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희원, 이현성, 신유승, 이길영······.

이 세계의 끝까지 반드시 데려가고 싶은 사람들.

나는 으드득 주먹을 쥐었다.

결코, 우리의 설화는 성좌들 기준의 선이나 악으로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나는 이 세계의 올바른 결말에 도달할 수 없다.
유중혁이 ‘선’을 선언했으니, 이제 판결을 뒤집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어깻죽지를 뚫고 나오는 검은 깃털 날개와, 머리 위로 돋아난 작은 뿔.
강렬한 스파크와 함께 웅성거리던 소음이 한꺼번에 가라앉았다.
천천히 숨을 들이켠 내가, 유중혁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 설화는 악(惡)이다.]





< Episode 66. 선악의 저편 (1) > 끝

< Episode 66. 선악의 저편 (2) >





내 선언과 함께, 허공의 시스템 메시지가 깜빡거렸다.

[당신은 현재 해당 설화의 최고 담화자입니다.]
[당신은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에 대한 33.7%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선언으로 해당 설화는 '악'의 방향으로 기울었습니다.]

당황한 일행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일행들을 안심시키듯 손을 들었다. 그리고 유중혁에게 [한낮의 밀회]를 전했다.

-유중혁, 이대로 가면 우리 설화는 '악'으로 확정되게 돼. 그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신화를 삼킨 성화]에 대한 내 지분율은 33.7%
그리고 유중혁의 지분율은 22.8%
내가 10.9%나 앞서 있는 상황이었다.

[현재 두 담화자의 의견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담화자들은 합의를 통해 선악을 판결해 주십시오.]
[제한시간내에 합의가 이행되지 않을 시 판결은 지분이 더 높은 쪽의 선택을 따릅니다.]
[판결 종료까지 10분이 연장되었습니다.]

유중혁은 답이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메시지를 보냈다.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여기서 '선악'이 결정되어서는 안 돼. 빨리 선언을 철회해. 그럼 나도 철회할 테니까.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마왕, '정욕과 격노의 마신'이 당신의 판단에 즐거워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판단에 당황합니다.]

우리엘에겐 미안하지만, 여기서 절대로 선악이 결정되어선 안 된다.


[마왕,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당신에게 호감을 갖습니다.]

마왕들의 최상석.
2번째 마계의 주인,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흐믓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악'의 편을 들기 위해 나선 것이 아니었다.
조급해진 내가 다시 한번 외쳤다.

-야! 내 말 안 들려?

그리고 유중혁이 움직였다.
테이블을 넘어 무대로 걸어 나온 유중혁이 스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을 뽑았다.

[화신 '유중혁'이 당신과의 합의를 거절합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녀석의 칼날을 피했다.
테이블이 쪼개지고 무대가 난장판이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놀란 마왕들의 고성과 동시에, 나 역시 품에서 검을 꺼내 쥐었다.
유중혁의 [흑천마도]와 내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충돌하며 파찰음을 터트렸다. 욱신거리는 손목.

"이런 미친...."


놀란 우리엘이 이쪽으로 달려오려고 했지만, 무대에 설치된 푸른 막이 성좌들의 움직임을 막았다.

츠츠츠츠츳!

[현재 '선악의 이중주'에 참여한 성좌 및 마왕들은 서로 적대할 수 없습니다!]
[지분 판결에 관한 타성좌들의 조력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대도깨비 '바람'이 당신의 선택을 기대합니다.]
[대도깨비 '하롱'이 당신의 결정을 지켜봅니다.]

심지어 대도깨비까지 자신의 존재를 노출했다.
관리국도 우리 설화의 '선악' 판결을 주목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지금 이곳의 시나리오는 또다른 채널을 통해 성류방송에 중계되고 있을 것이다.

고오오오오!

나는 점점 격을 키우는 유중혁을 노려보았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
유중혁이 왜 갑자기 이런 짓을 벌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3회차 녀석에게 양보할 수는 없었다.

-유중혁, 지금 당장은 이해 못하겠지만 내 말 잘 들어.

어떻게든, 이 녀석을 설득해야 했다.

-만약 여기서 우리 설화가 선이나 악으로 고정되면, 무시무시한 재앙이 발생해.

원작에 따르면 절대 선과 절대 악의 자존심 싸움은 이번 시즌으로 분수령을 맞게 된다.
'선악의 이중주'는 지난 몇 개의 시즌을 거치며 줄곧 '선'쪽이 대상을 받아왔다.
그 말은 즉, 이번 '선악의 이중주'의 결과에 마왕들이 칼을 갈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만약 여기서 선이 이기면, '제2차 성마대전'이 발발할 거야.
반대로 악이 이기면, <에덴>의 입지가 좁아져 멸망이 가속화될 거고.

나는 아직 성마대전을 대비할 만한 수준의 서로하는 쌓지 못했다.
그렇다고 '악'이 승리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도 않았다.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해줄 테니까, 지금은 내 말을....

"그건 너의 '예언'인가?"

이글거리는 유중혁의 눈빛에 깊은 불신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예언.
그러고 보면 처음 유중혁을 만났을때, 나를 '예언자'라고 소개했었다.

아직도 그걸 믿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차라리 이런 상황이면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유중혁이 다시 물었다.

"아니면, 그 '멸살법'이라는 책에 나오는 정보인가?"
"뭐?"

갑자기 심장이 크게 뛰었다.

......어떻게?

어떻게, 유중혁이 '멸살법'아ㅔ 대해 알고 있는 거지?

[화신 '유중혁'의 배후성이 이 상황을 못마땅해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들의 싸움을 원하지 않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예상 밖의 상황에 혼란을 느낍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결정을 지켜봅니다.]

유중혁의 전신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녀석은 두통이 오는 듯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어떤 의지에 거역하기라도 하듯, 유중혁은 계속해서 말했다.

"네놈의 말대로 하면, 이번 시나리오도 무사히 종료되는 건가?"
"유중혁, 너 지금...."
"그것이, 미래 회차의 내가 사용한 방법이니까?"

쿠구구구구구!


"왜냐하면 그것이,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니까?"

갑자기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제4의 벽'이 흔들립니다.]

사위가 흔들렸고, 몸속 깊은 곳에서 작은 진동이 일어났다. 떨림은 진앙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나는 격렬하게 떨리는 내 오른손을 붙잡았다.
고개를 들자 유중혁은 어깨너머의 일행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은 알고 있나?

유중혁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대답해라, 김독자.

[흑천마도]에서 흘러나오는 격의 반향이 강해졌다.
초월자의 힘을 개방하는 유중혁.
지금부터 정말로 봐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거대 설화'를 움직입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뜻대로 둘 수는 없다.

[당신은 해당 설화의 최고 담화자입니다.]
[당신의 억제력이 설화를 통제합니다.]

[거대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의 '격'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거대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의 지배를 거부합니다.]

....뭐?
높은 지분율에도 불구하고 설화는 내 말을 듣지 않았따.
포세이돈의 결계를 부쉈던 우리의 성화가, 유중혁의 [흑천마도]에 휘감기고 있었다.
그 새하얀 불꽃이 한걸음씩 나를 삼키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독자 씨, 정신 차려요!)]

유상아의 말과 함께, 나는 격을 방출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당신을 보호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함께 쌓았던 두 개의 설화가 공중에서 뒤엉키며 부딪혔다.
신화를 삼킨 성화 가 사나운 맹수처럼 마계의 봄 을 물어뜯고 찢었다. 뜯나간 문자열들이 피처럼 허공에 흩날렸다.

"지금 둘 다 뭐하는 거에요! 미쳤어요?"

[화신 '정희원'이 '거대 설화'의 판결에 난입합니다!]

"사부! 갑자기 왜 그래! 아저씨는 또 왜 '악'을 거른 건데!"

[화신 '이지혜'가 '거대 설화'의 판결에 난입합니다!]

"독자 씨! 유중혁 씨! 둘 다 그만두십시오!"

[화신 '이현성'이 '거대 설화'의 판결에 난입합니다!]

"우리 형 괴롭히지 마, 시커먼 놈아!"

[화신 '이길영'이 '거대 설화'의 판결에 난입합니다!]

"아저씨! 피해요!"

[화신 '신유승'이 '거대 설화'의 판결에 난입합니다!]

차라리 지금으로서는 반가운 도움이었다.
신화를 삼킨 성화 는 우리 모두의 설화.
즉, 이 설화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나와 유중혁뿐만이 아니었다.

[판결에 난입한 담화자들은 선악을 분별해 주십시오.]
[선악을 선택하지 않으면 대결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일행들은 혼란에 빠진 모습이었다.
갑자기 선악을 선택하라니, 당황스러울 법도 했다.
혼란 속에서 이길영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난 무조건 독자형 편이야."


[화신 '이길영'은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에 대해 3.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화신 '이길영'의 선언으로 해당 설화는 '악'의 방향으로 기울었습니다.]

나는 재빨리 외쳤다.
"더이상 '악'을 선택하면 안 돼! 다들 '선을 골라요!"
"네?"
"내 말대로 해요! 빨리!"

만약 유중혁의 선언을 철회하지 못한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 빌어먹을 선악의 저울을 완벽하게 평형으로 맞추는 것.
현재 차이는 14.2%.
나머지 네 사람의 지분을 합친다면....

"한 사람씩 천천히 선택해! 유승이부터!"
"네"

[화신 '신유승'은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에 대해 3.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화신 '정희원'은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에 대해 6.7%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화신 '이현성'은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에 대해 7.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세명의 담화자가 '선'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만!"

내 외침을 마지막으로 선택하려던 이지혜가 멈칫했다.

[저울대가 '선'으로 3.1%만큼 더 기울었습니다!]
[앞으로 5분 안에 합의에 실패할 시 '신화를 삼킨 성화'는 '선'으로 확정됩니다.]

내 예상보다 일행들이 가지고 있는 설화의 지분이 컸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이지혜뿐이었다.

"아저씨! 나는 5.8%야!"

선과 악의 차이는 3.1%
그리고 이지혜가 가진 지분은 5.8%.
이지혜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저울대의 평형을 맞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굴렸다.
....만약 여기서 다른 일행들이 가진 '지분'을 일부만 내쪽으로 가져올 수 있다면?

[선악 판결에 참가 중인 담화자끼리는 '지분 증여'가 불가능합니다.]

젠장, 역시 이런 편리한 방법은 안 통하는 건가.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다시 내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멈추라니까!"

결투에 끼어들 수 있게 된 정희원이 나를 대신해 유중혁의 검을 막았다. 달려든 이현성이 유중혁의 몸을 뒤에서 껴안았고, 아이들이 나를 보호하듯 둘러섰다. 이제혜는 중간에 서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대체 둘이 왜 싸우는 건데! 하필이면 지금....!"

유중혁의 두 눈이 나와 일행들을 번갈아 보았다.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은 것 같기도했다.
아니, 사실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너희는 속고 있다

파르르 떨리는 녀석의 동공이 나를 향해 분노를 토하고 있었다.

저 녀석은, 우리 모두를 기만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생각했다.
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했다.

"모두 꺼져라"

자신의 격을 증폭시킨 유중혁은 이현성을 날려버리고, 이지혜를 쓰러트린후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정희원과 유중혁이 검을 부짖쳤다.
하지만 [심판의 시간]을 발동할 수 없는 정희원이 유중혁을 상대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아이들을 뒤로 물리고 앞으로 나섰다.

[마왕, '별과 논리학의 군주'가 당신을 응원합니다.]
[마왕, '강령의 마신'이 당신의 승리를 원합니다.]
[성좌, '새벽별의 여신'이 선의 승리를 원합니다.]
[다수의 성좌와 마왕들이 <김독자 컴퍼니>를 지켜봅니다.]

걸음을 내딛는 나를 관음하는 성좌들의 메시지.
이들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선'과 '악'에 집착하는 것일까.

[전용 스킬 '독해력'이 발동합니다!]

.....어쩌면,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설화, '권선징악의 실천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설화, '백악(百惡)의 수호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설화, '악보다 더 큰 악'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설화, '적당한 선'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


성좌들과 마왕들의 눈동자에 무사한 문자열들이 벌레처럼 들끓고 있었다.
그들이 가진 설화들. 그들을 조종하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들은 더이상 '성좌'나 '마왕'이 아니었다.

오직 이 세계에 '선'과 '악'을 실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
그들 중 대부분은 오래된 '설화'들이 자신을 전파하기 위해 이용하는 번식도구일 뿌니엉ㅆ다.
마침내 그 설화들은 우리 성운의 설화마저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앞으로 2분 안에 합의를 실패할 시 '신화를 삼킨 성화'는 '선'으로 확정됩니다.]

그렇게 둘 수는 없다.
나는 재빨리 판단을 마친 뒤 외쳤다.

"지혜야! '선'을 선택해!"
"어? 하지만....."
"빨리!"

이지혜는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이미 '선'이 우세한 상황인데, 그쪽을 선택하라고 했으니 이상하기도 하겠지. 이지혜는 곧바로 선택했다.

[저울대가 '선'으로 8.9%만큼 더 기울었습니다!]
[앞으로 40초 안에 합의에 실패할 시 '신화를 삼킨 성화'는 '선'으로 확정됩니다.]

아까보다 더욱 벌어진 차이.
8.9%..... 그래, 역시 이게 최선이다.
나는 쓰읍 숨을 들이켠 후 온 힘을 다해 어떤 존재의 수식언을 불렀다.

[심연의 흑염룡!]

녀석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곳의 풍경을 놈의 화신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을 유일한 사람.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광기 어린 웃음을 짓습니다.]

초월좌의 격이 휘감긴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내 목덜미를 노리고 쏘아졌다. 어떻게도 피할 수 없는 일격.
홀의 천장에 쩌저적 금이 가더니 폭음이 터진 것은 그때였다. 흠칫 놀란 유중혁이 천장을 올려다보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콰아아아아!

달려오던 유중혁은 통째로 쏟아진 천장 무더기에 깔렸다.
큼지막한 덩어리 몇 개는 피했지만, 쏟아지는 돌의 양이 너무 많았다. 뽀얗게 피어오른 먼지 사이에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허겁지겁 달려온 모양인지 땀에 젖은 머리카락. 반쯤 풀린 왼손의 붕대가 바람에 흩날렸다.
흙먼지 속에서, 유중혁을 짓밟고 올라선 녀석이 인상을 찌푸린 채 웃고 있었다.

"하여간 너넨 나 없으면 안 된다니까."

[화신, '한수영'이 '거대 설화'의 판결에 난입합니다!]





< Episode 66. 선악의 저편 (2) > 끝

< Episode 66. 선악의 저편 (3) >





돌무더기 밑으로 유중혁의 손이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한수영은 그런 유중혁을 내려다보며 이죽거렸다.

“자식, 맨날 남들 깔아뭉개면서 등장하더니······ 막상 깔리니까 기분 별로지?”

[화신 ‘한수영’은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에 대해 8.9%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역시, 한수영이라면 정확한 ‘지분’을 가지고 와줄 줄 알았다.
시스템은 ‘판결에 참가 중인 담화자끼리는 지분 증여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 말은 곧, 아직 참가하지 않은 담화자끼리는 지분 증여가 가능하다는 뜻.
나를 흘겨본 한수영이 [한낮의 밀회]로 투덜거렸다.

―너 때문에 이설화한테 0.1% 뺏겼잖아.

아마 한수영은 이곳의 정보를 알게 된 즉시 이설화와 보유 지분을 조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곧장 이곳으로 왔겠지.
주변의 성좌들을 향해 돌아선 한수영이 으르렁거리며 선언했다.

“나는 ‘악’이다. 그리고 저기 멀거니 선 빌어먹을 김독자도 확실히 ‘악’이고.”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나를 악으로 만들어버린 한수영은 이어서 돌무더기에 깔린 유중혁을, 그리고 다른 일행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김독자 컴퍼니>는 선도 악도 아니야.”

짧은 단발을 흩날리며 외치는 녀석의 모습이 너무 굉장해서, 그 순간만큼은 유중혁이 아니라 한수영이 주인공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제한시간이 종료되어 설화의 선악 판결이 종료되었습니다.]
[판결에 참가한 선악의 참여 지분은 총 91.8%입니다.]
[선악의 참여 비율은 45.9% : 45.9% 입니다.]
[선악의 저울이 완전한 평형을 이루었습니다.]

경악한 성좌와 마왕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우리는 당신들의 ‘정의’에 정의되지 않을 겁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는 선악을 판별할 수 없는 설화입니다.]

쐐기를 박는 메시지. 사회를 맡은 도깨비가 웃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혹은 이런 결말을 줄곧 바랐다는 듯한 표정. 관리국으로서는 신이 나기도 하겠지.
왜냐하면 지금 내 귓가로도 엄청난 양의 간접 메시지가 쏟아지고 있으니까.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판단에 만족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당신의 패기를 기꺼워합니다.]
[다수의 중립 계통 성좌들이 당신의 성운에 호감을 보입니다.]
[중립 계통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281,0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중립 계통의 성좌들이 좋아할 것은 예상했다.
어떤 선택은 주어진 선택지들을 거부하면서 발생하니까.

[누군가가 당신의 설화를 <스타 스트림>에 추천하였습니다.]
[새로운 설화를 입수하였습니다.]

물론, 모든 성좌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당신의 선택이 ‘절대 선’과 ‘절대 악’에 속한 일부 성좌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츠츠츠츠츳!

[무슨······?]
[대상의 ‘선악’이 판별이 안 되었다고?]

성좌들과 마왕들의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었다.

[‘절대 선’ 계통의 성좌들이 해당 판결에 반대합니다.]
[‘절대 악’ 계통의 성좌들이 해당 판결에 반대합니다.]

당장이라도 폭동이 일어날 것처럼, 두 테이블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격의 흐름이 감지되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관리국은 다시 한번 판결하라!]
[이게 대체 무슨 농간이지?]

최상위권의 마왕들부터 대천사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참석자들의 시선이 도깨비를 향해 꽂혔다.
위기감을 느낀 상급 도깨비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불가합니다. 이미 판결이 내려진 설화는 누구도 결과를 뒤집을 수 없습니다. 그게 규칙이니까요.]

다행히 관리국은 원칙을 지켰다.
하지만 원칙을 지키는 것이 항상 좋은 결과만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시즌까지만 두고 보려 했었다.]

쿠구구구구구!

상황이 예상 밖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중하위권 서열의 마왕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들의 격을 방출했다.

[‘대상’으로 선악의 위상을 결정할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결정을 내려야겠지.]

마왕들이 움직이자, 대천사들도 지지 않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다수의 마왕들이 ‘절대 선’ 계통의 천사들에게 적대감을 표출합니다!]
[다수의 대천사들이 마왕들을 향해 경계심을 드러냅니다.]
[선악의 저울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츠츠츠츠츳!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두 진영이 서로를 향해 대치했다.
나와 일행들은 서로에게 바짝 붙어선 채 상황을 살폈다.
내 곁에서 [심판자의 검]을 꺼내 쥔 정희원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독자 씨.”
“괜찮습니다.”

나는 안심하라는 듯 일행들을 보호하며 섰다.
설령 ‘성마대전’이 벌어지더라도, 그런 초대형 이벤트는 이런 장소에서는 벌어지지 않는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대천사들을 만류합니다.]
[성좌,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마왕들을 물립니다.]

아마 ‘하늘의 서기관’ 메타트론도, ‘지옥 동부의 지배자’ 아가레스도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선’이 있어야 ‘악’이 존재할 수 있다.

만약 여기서 시나리오가 발동하면, 두 진영은 공멸의 파국으로 치달을 뿐이다.
그리고 내 생각이 맞다면, 그 사실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저 빌어먹을 <관리국>의 도깨비들일 것이다.

[대도깨비 ‘바람’이 무대에 존재를 드러냅니다.]

기다렸다는 듯 허공에 모습을 드러낸 대도깨비가 웅장한 격을 내뿜고 있었다.
대도깨비 바람.
나도 원작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그만들 두시죠. 이곳에서 싸워 봐야 해결나지 않을 문제라는 건 잘 알고 계실 텐데요.]

그 딱딱한 목소리에, 마왕들과 성좌들이 반발했다.

[아무리 <관리국>이라도 이 싸움에는 개입할 수 없다!]
[이대로 끝내라는 말인가?]

이곳에 모인 성좌나 마왕들 중에는 신화급에 육박하는 존재도 있었다. 그러니 ‘대도깨비’가 직접 왔다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도깨비 왕’이 직접 왔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겠지만······.
곳곳에서 불만이 속출하자, 바람이 말했다.

[판결에 번복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적대 행위도 허락할 수 없습니다.]

단호한 선언과 함께, 허공에 튀는 스파크가 ‘절대 선’과 ‘절대 악’의 기류를 차단했다.
반발한 성좌들이 다시 난동을 부리려는 찰나, 바람이 말을 이었다.

[여러분의 불만은 ‘선악’의 위상이 가려지지 않는 것이겠지요. 단순히 그런 문제라면, ‘거대 설화 시나리오’를 하나 더 진행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이번 시즌의 ‘선악’의 위상을 가릴, 역대급 규모의 시나리오를 여는 겁니다.]

이어진 대도깨비의 말에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저 녀석, 지금 무슨······.

[<스타 스트림>의 의지가 ‘대도깨비’의 판단에 동의합니다.]
[‘선악의 이중주’가 선악의 위상을 가릴 새로운 시나리오를 원합니다.]

쿠구구구구.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움직이고 있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향해, 은하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만한 개연성이 움직일만한 시나리오는, <스타 스트림> 전체를 뒤져도 손에 꼽는다.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물었다.

[지금 ‘성마대전’ 시나리오를 개방하겠다는 뜻인가?]
[원하신다면요.]

바람의 선언에 다수의 성좌들이 웅성거렸다.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바람이, 나를 보며 말했다.

[단, 시나리오의 무대는 여러분이 직접 정하십시오.]


*


휴회로 주어진 막간 동안, 성좌들과 마왕들은 제각기 새로운 ‘성마대전’의 무대를 어디로 정할지를 떠들어댔다. 다행히 도깨비들의 개입으로 우리에게 쏟아졌던 적대적인 시선은 한결 가신 듯 보였다.
갑작스런 사태에 지친 일행들은 제각기 탈진해 주저앉아 있었다.
곁으로 다가온 한수영이 아직도 돌무더기에 깔린 유중혁의 손을 툭툭 걷어찼다.

“뭐야 이거? 왜 아직도 안 나와?”

유중혁은 죽은 듯 반응이 없었다.
파묻힌 녀석의 손을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저 손을 잡아 끌어올리는 것이 두려웠다. 마지막으로 녀석이 남긴 말이 귓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 ‘멸살법’이라는 책에 나오는 정보인가?

유중혁은 대체 어디서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일까. 필터링은 어디까지 해제된 거고, ‘멸살법’에 대해선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나와 한수영은 합심해서 유중혁을 꺼냈다.
유중혁은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돌무더기에 깔렸다고 이놈이 기절할 턱이 없는데.

“······이 자식 상태가 왜 이래?”

자세히 보니, 유중혁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어디를 다녀온 것인지,몸의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덮여 있었다. 뭔가를 죽이고 벤 흔적들. 지난 이틀간 유중혁은 내가 알지 못하는 시나리오를 헤매다 돌아온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를 향한 분노를 이기지 못해 격을 끌어 올리다 커다란 내상을 입은 것이다.
곧바로 [한낮의 밀회]를 발동한 한수영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유중혁이 ‘멸살법’의 존재를 눈치챘어.
―알고 있어. 너 오기 전에 유중혁이 나한테 말했으니까.

나는 유중혁이 했던 말들을 간략하게 전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한수영의 눈썹이 크게 휘어졌다.

―······이 자식, 어디서 그런 얘길 들은 거야?
―나도 몰라. 넌 어디 있다가 온 거야?
―남은 선지자들 죽이고 왔어. 혹시나 거기서 정보가 유출됐나 싶어서.
―그래서 뭔가 알아냈어?
―아니.

그럴 것이다.
슬슬 선지자들은 가진 정보가 다 떨어져서 ‘등장인물’로 변하고 있을 테니까.

―선지자들 쪽에서 유출된 정보가 아닐 거야. 내 생각에는······.

나는 멀리서 대천사들과 논의를 진행하는 메타트론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유중혁이 ‘멸살법’을 알게 된 것은 메타트론과 관계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한수영이 말했다.

―아스모데우스도 ‘멸살법’의 존재를 알고 있었어. 어쩌면 최상위권의 성좌들은 거의 다 알게 된 걸지도 몰라.

최상위권 성좌들이라······.
슬슬 ‘종말의 구도자’도 활동할 시기가 된 모양이었다.
드디어 이 기나긴 시나리오의 여정도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쓰러진 유중혁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한수영이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김독자, 지금 중요한 것부터 생각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들자 대도깨비 바람이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도 ‘성마대전’에 참가해야 해.
―미쳤어? 지금 우리 수준에 진입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아니잖아.

한수영의 말이 맞았다.
본래 ‘성마대전’은 80번대의 메인 시나리오니까.
나도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위험한 시나리오는 가능하면 피해 가는 편이 좋다. 하지만 ‘성마대전’은 아니다. 일어나지 않는다면 모를까, 일어난다면 절대로 피해 가서는 안 되는 시나리오.

―상위 시나리오라도 상관없어. 문제는 개전(開戰) 장소야.
―그게 무슨······.

멀리서 바람이 박수를 쳤다.
성좌들이 제자리에 착석하자 바람이 입을 열었다.

[휴회를 끝내겠습니다. 성좌 및 마왕님들은 시나리오의 무대를 선택해주십시오.]

기다렸다는 듯, 성좌와 마왕들이 기립하며 외쳤다.

[‘성마대전’의 무대로 우리 ‘14번째 마계’의―]
[우리 <수호의 나무>에 꽤 괜찮은 ‘거대 설화’의 무대가 있어요.]
[무슨 헛소리냐! 그 무대는······!]

역시나, 모두 자기들이 유리한 곳을 무대로 삼으려 했다.
그리고 나 역시 무대로 삼고 싶은 장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발언한다고 해서, 저들이 나를 지지할 턱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독자 씨, ‘그 섬’을 무대로 삼고 싶으신 거죠?)」

머릿속으로 유상아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예?’

「(제가 벽 안에서 재미있는 걸 하나 찾았거든요.)」

‘재미있는 거요?’

유상아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머릿속에서 뭔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후, 떠들썩하던 홀에 조금씩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몇몇 성좌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들어온 정보인데······.]
[뭐? 그게 정말인가?]

나는 녀석들의 속삭임에 주목했다.

······저 녀석들은 ‘계시’와 관련된 능력을 가진 성좌들인데?

분위기가 묘해지고 있었다. 속삭임은 파도처럼 번졌고, 5분 정도가 더 흐른 뒤에는 메타트론조차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싸우던 성좌들과 마왕들의 목소리가 하나둘 잦아들고, 잠시 후에는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치열한 눈치 싸움에 먼저 수를 던진 것은 마왕들 쪽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잠깐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네.]
[나도! 나도 마찬가지야.]

갑작스레 손을 든 일부 마왕들이 자리에서 이탈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몇몇은 ‘종말의 구도자’와 관련된 놈들이었다.

[죄송하지만, 저도 잠깐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군요.]

성운 <수호의 나무>의 ‘새벽별의 여신’마저 그런 발언을 하자, 사태는 일파만파로 번져갔다.

[저도 잠깐 일이 생겨서─]

이탈자가 점점 많아지자, 가벼운 한숨을 내쉰 메타트론이 바람을 보았다.

[아무래도 대도깨비께서 직접 결정을 내려주셔야 할 것 같군요.]

대도깨비 바람이 허공을 더듬듯 눈을 게슴츠레 떴다.

[······흥미롭군요. 하필 이 타이밍에 ‘계시’가?]

‘계시’라는 말에, 눈치를 보던 성좌들이 움찔했다. 바람이 웃었다.

[······좋습니다. 다들 말씀은 안 하셔도, 이미 무대는 정해진 것 같으니―]

이어지는 대도깨비의 말을 들으며, 나는 멍한 기분에 휩싸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그리고 별안간 머릿속에서 찌릿, 하는 통증이 일었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당신을 의심합니다!]

무시무시한 시선이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의심스러운 뭔가를 찾듯이 나를 훑어보는 시선.
시선은 잠시간 계속되더니, 이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에게서 시선을 돌립니다.]

식은땀을 닦은 나는 조심스레 유상아를 불렀다.

‘유상아 씨? 대체 뭘 하신 겁니까?’

유상아는 잠시 설명할 말을 찾는 듯 침묵했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독자 씨는 성좌들이 미래를 읽는 방식을 알고 계신가요?)」

‘······알고 있습니다.’

성좌들이 미래를 읽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헤르메스 시스템]처럼 데이터를 모아 미래를 계측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모이라이 3자매나 <에덴>, 그리고 일부 마왕들처럼 신묘한 ‘계시’를 받는 방식이었다. 속설에는 ‘신의 계시’라고 불리는 힘.
잠시 말을 찾던 유상아가 쑥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저, 아무래도 ‘신’이 된 것 같아요.)」





< Episode 66. 선악의 저편 (3) > 끝

< Episode 66. 선악의 저편 (4) >





그 시각, 관리국의 비형은 ‘선악의 이중주’의 시나리오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제2차 성마대전’의 무대는 암흑 단층에 위치한 ‘환생자들의 섬’입니다.]

대도깨비의 선언이 흘러나오는 순간, 관리국의 모든 도깨비들은 대경했다.

“아니, 갑자기 왜 ‘그 섬’을······?”

“대도깨비께서는 무슨 생각이신 거지?”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대도깨비라도 독단으로 80번 메인 시나리오의 무대를 정하는 경우는 없었다.

하다못해 <스타 스트림>의 의지라도 움직이지 않는 이상······.

[<스타 스트림>의 의지가 80번 메인 시나리오를 개방합니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생성되었습니다.]

이어진 시스템 메시지에 비형은 깜짝 놀랐다.

“정말로 <스타 스트림>이 움직였다고?”

잇따라 들려오는 충격적인 시나리오 격변에 비형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비형 님! 방금 들어온 ‘계시’입니다!”

“······계시?”

잠시 후, 새로운 패널에 어떤 화면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아직 화면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비형은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계시의 판’인가.”

오직 ‘계시’ 관련 능력을 입수한 성좌나 마왕들만이 볼 수 있다는 미지의 ‘석판’. 정확히 어떤 물질인지, 그리고 세계선의 시공간 좌표조차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관리국에서도 그저 관측만이 가능할 뿐인 미지의 대상.

각 성운의 계시 능력좌들은 이 ‘판’을 모두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신의 계시, 단 하나의 말씀, 가장 늙은 악마의 속삭임······.

미래의 정보를 토해내는 정체불명의 물체인 만큼 관리국으로서는 귀추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이 미래를 읽어내는 방식은 간단했다.

가끔 저 ‘계시의 판’에 항문 같은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을 통해서 일련의 설화 파편들이 떨어져 나온다. 마치 배설물처럼 쏟아진 설화 파편들은 ‘미래’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알아챈 성좌들과 마왕들은 이 배설물 같은 단어들을 조합해 미래를 예언하거나 운수를 읽어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성흔이 바로 ‘계시’였다.

말이 계시지, 사실은 배설물의 재구성이나 다름없었다.

비형이 물었다.

“계시의 판에 또 이변이 발생한 건가?”

“그게, 몇 년 전에 흔들림이 발생한 직후부터 계속 말썽입니다.”

본래 ‘계시의 판’은 미래 정보를 토해내긴 하지만 관리국의 시나리오 개연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계시를 통해 재구성된 미래는 불확실하고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 ‘판’에 균열이 발생했고, 그 균열을 통해 온전한 미래 정보들이 넘어오는 경우가 있었다.

“며칠 전에는 이상한 구멍까지 뚫리더니······.”

심지어 며칠 전에 뚫린 구멍은 <스타 스트림>으로서도 간과할 수 없는 몰개연성을 초래했다.

부서진 구멍 너머로, 넘어와서는 안 되는 정보가 손상 없이 넘어왔기 때문이다.

비형은 지금도 그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골치가 아팠다.

뚫린 구멍 너머로 한동안 보였던, 이상한 문자열.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마치 책의 표제처럼 생긴 그 이름에,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란 무엇인가?

―‘멸망’이란 모든 시나리오의 ■■를 의미하는가?

그동안 시나리오를 등한시하고 여유를 부리던 성좌들조차 이 ‘계시’가 풀린 뒤부터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굴기 시작했다.

오래된 종말론이 퍼졌고, <스타 스트림>의 끝을 예고하는 낭설들이 오갔다.

“화면 준비 끝났습니다!”

새카맣게 일렁이는 화면을 보며, 비형은 긴장했다.

구멍 너머로 몇 마디 문자열이 넘어온 것만으로도 <스타 스트림> 전체가 흔들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무슨 ‘계시’가 넘어왔단 말인가?

잠시 후, 화면에 ‘계시의 판’이 나타났다.

그리고 판의 중심에 돋아난 아주 작은 구멍이 보였다.

“아무 변화도······ 응?”

다음 순간, 구멍 안쪽에서 나타난 희끄무레한 물체에 도깨비들이 경악했다.

그것은 누군가의 입이었다.

―아, 아······ 그러니까, 음······ 마이크 테스트?

도깨비들이 외쳤다.

“······저게 뭐야?”

<관리국>이 대혼란에 빠진 사이, 입은 계속해서 떠들었다.

―들리세요? 지금부터 여러분께 계시를 드릴 거예요. 아주 잠깐만 보여드릴 테니까, 잘 보고 기억하세요!

또렷하고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페이지를 넘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구멍 사이로 설화 파편들이 넘어왔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 그 세 번째.」

너무나 선명하게 넘어온 계시.

그것은 정말로 ‘신의 계시’ 같았다.

「그 방법은, ‘환생자들의 섬’에 있다.」

일렁이는 설화 파편들이 허공에 흩어지자, 목소리가 말했다.

―다들 보셨죠? 자, 그럼 안녕!

이윽고 구멍이 닫히며, 목소리의 주인도 사라졌다.

비형이 중얼거렸다.

“······맙소사.”

충격 속에, <관리국>의 도깨비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곳곳에서 울리는 벨. 성좌들의 쉴 새 없는 문의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쪽 패널에서는, 여전히 ‘선악의 이중주’의 정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시 한번 알려 드립니다.]

대도깨비 바람의 목소리가 <스타 스트림> 전역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제2차 성마대전’의 무대는 암흑 단층에 위치한 ‘환생자들의 섬’입니다.]


*


‘선악의 이중주’가 끝난 뒤, 우리 일행은 곧장 지구로 귀환했다.

[공단]으로 돌아가는 내내 일행들은 들뜬 모습이었다.

특히 정희원과 이지혜는 우리가 받은 상패를 이리저리 돌려 보며 그 성능을 확인하고 있었다.

[‘선악의 이중주’ 대상패(大賞牌)]

본래 <스타 스트림>에서 ‘격’은 오직 설화의 축적으로만 상승한다.

하지만 극히 희귀한 성유물들 중에는 설화의 축적 없이도 격을 올려주는 것들이 있다. ‘선악의 이중주’에서 하사하는 상패들이 그러했다.

“칼이 더 가벼워진 것 같기도 하고······ 이 정도면 현성 아저씨도 가볍게 휘두를 수 있겠는데요?”

이지혜의 중얼거림에 이현성이 흠칫 몸을 떨었다.

확실히, 대상패 정도면 준신화급 설화 둘을 얻은 것 이상의 효과가 있을 것이다.

내가 얻은 준신화급 설화들이 죄다 죽을 고생을 하고 얻은 것인 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상승 효과였다.

[5,000,000 코인 교환권]

거기다 상금 500만 코인 교환권까지.

“하, 독자 씨······ 우리 이제 부자예요······.”

“한동안 코인 걱정은 없겠군요.”

“얘들아, 너흰 얼마나 받았어?”

정희원이 묻기 바쁘게, ‘베스트 케미상’을 받은 아이들이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었다.

“신유승, 솔직히 내가 조금 더 활약했잖아. 10만 코인 더 내놔.”

“뭔 헛소리야! 당연히 반띵이지. 설화 지분율도 똑같은 게.”

이현성이 그런 아이들을 말렸다.

일행들은 각자의 이유로 기분이 좋아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모두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사실은, 모두가 묻지 않은 질문이 있다.」

나와 유중혁은 왜 싸웠는가.

분명 일행들은 두 눈으로 그 정경을 보았음에도, 누구도 내게 먼저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화제를 피해간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내가 먼저 말해주길 기다리는 일행들 나름의 배려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의식이 없는 유중혁을 업은 채, 머릿속으로 유상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4의 벽]에 난 구멍을 통해 멸살법의 내용을 흘려보냈단 말씀이시죠?’

「(네.)」

‘성좌들은 그걸 [계시]로 받아들였고요?’

「(맞아요.)」

얼핏 생각해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4의 벽] 밖으로 내보낸 정보가 성좌들에게 ‘계시’로 바뀌었다고? 애초에 원작에서 ‘계시’의 역할을 담당하던 것은······ 아니, 잠깐만.

‘설마?’

머릿속에서 맞춰지는 아귀들이 있었다.

유상아가 물었다.

「(독자 씨, ‘제4의 벽’이 원래 존재하는 말이라는 건 아시죠?)」

‘네. 정확한 의미로 아는 건 아니지만······.’

「(본래 ‘제4의 벽’은 무대 용어에요. 극과 무대를 분리하는 벽. 극중 등장인물들은 절대로 ‘제4의 벽’을 인식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들에게 ‘무대 바깥’이란 존재하지 않는 장소니까.)」

무대의 바깥. 그곳은 내가 살았던 ‘현실’이었다.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정말로 [제4의 벽]이라는 이름이 유상아의 설명과 같은 의미에 연원을 두었다면, 이 벽 안쪽에 ‘멸살법’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왜냐하면 ‘멸살법’의 내용은 현실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

즉, ‘계시’란 현실에서 소설 속으로 흘러들어온 ‘스포일러’인 셈이었다.

하나 그 연원을 찾을 수 없으니, 등장인물들 입장에서는 ‘신의 계시’일 수밖에.

유상아가 말을 이었다.

「(줄곧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성좌들에게 필터링되어 있던 ‘멸살법’에 대한 정보가 갑자기 풀린 게······ 그런데 그 시기가 하필 제가 ‘제4의 벽’에 들어온 시기랑 겹치더라고요.)」

‘······겹쳤다고요?’

「(네, 게다가 제가 들어온 구멍을 막고 있었던 책이 바로 ‘멸살법’이었거든요. 그것도 제목이 아주 잘 보이는 형태로······.)」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갑자기 마왕들과 성좌들이 ‘멸살법’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이유.

어쩐지, 원작에 없던 전개가 갑자기 펼쳐졌다 했다.

그들이 알게 된 정보는, 모두 [제4의 벽]에 뚫린 구멍 사이로 새나간 정보였던 것이다.

‘조금 일이 복잡해지긴 했지만, 오히려 잘 됐군요.’

「(그렇죠?)」

유상아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그녀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근데 자주 쓸 순 없을 것 같아요. 눈치도 엄청 보이고······ 앗, 죄송해요. 선임들이 불러서, 잠깐 가볼게요.)」

그 말과 함께 유상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아무래도 도서관 막내다 보니 눈치가 많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유상아의 활약으로 인해 우리는 새로운 카드를 쥐게 되었다.

[제4의 벽]을 통해 성좌들이 받을 ‘계시’를 조작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가짜 계시’인 것이 밝혀지기 전까지, 우리는 그 정보를 이용해 성좌들을 선동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내 곁을 걷던 한수영이 말을 걸었다.

“······너 아까부터 말이 없다?”

“잠깐 혼자 생각 좀 하느라.”

“생각이 많으시기도 하겠지.”

입술을 비죽인 한수영이 [한낮의 밀회]를 걸어왔다.

―이제 어쩔 거야?

―어쩌긴. 다음 시나리오 준비해야지. ‘성마대전’은 80번 시나리오고, 한 달 뒤부터 시작한다고 했으니 지금부터 빠듯하게 준비하면······.

―그거 말고.

한수영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녀석은 내 등에 업힌 유중혁을 보고 있었다.

―이대로 유중혁 일어나면 어떻게 될지 알지?

유중혁은 ‘멸살법’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녀석이 뭘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이 알게 된 이상 모든 정보를 계속해서 숨길 수만은 없었다.

많은 충격을 받을 것이고, 끔찍한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참고로 나는 반대야.

―뭐가.

―너 말하려는 거.

이미 내 생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한수영이 선수를 쳤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땅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 성격에 지금까지 숨겨왔던 게 이상한 일이지.

아무래도 한수영은 나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좀 더 잘 숨길 수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더 숨겼을 것이다.

가능하면, 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라도.

한수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최대한 숨기는 편이 좋아. 그냥 모른척 해.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예언자인 척 하라고.

―그런다고 믿을 것 같아? 이젠 이야기해야 해. 유중혁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행들에게도.

내 말에 한수영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무슨 헛소리야? 그걸 저 사람들한테 왜 말해?

―저들도 알 자격이 있으니까.

―······예전에 나도 해봤어. 근데 ‘등장인물’들은 ‘멸살법’에 관한 걸 못 알아들어. 그냥 장난이라고 생각한다고.

―지금은 다를지도 몰라. ‘필터링’이 풀렸으니까.

작게 입을 벌렸던 한수영이 도로 입을 다물었다. 녀석은 나를 다그치는 대신, 아무것도 모르는 일행들의 얼굴을 살폈다.

선명한 한수영의 동공에 나를 향한 희미한 경멸이 엿보였다.

―그건 널 위한 거냐, 아니면 저 사람들을 위한 거냐?

―······.

―이미 너는 저 사람들을 기만했어. 그런데 이제 와서 용서받겠다는 거야?

―용서받겠다는 게 아냐.

한수영이 보았던 얼굴들을, 나 역시 하나하나 살폈다.

강인하지만 섬세한 정희원.

성실하고 순박한 이현성.

까탈스럽지만 정이 많은 이지혜.

어른스럽지만 순수한 신유승.

그 모든 이들의 얼굴을 보며, 나는 내가 알고 있던 ‘묘사’들을 떠올렸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묘사’에 없었고, 어떤 이는 ‘묘사’와 달라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알지만 모르는 얼굴들.

문득 뒤를 돌아본 신유승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아이에게 마주 손을 흔들며 말했다.

―······진짜 동료가 되고 싶은 거야.

한수영은 오랫동안 말이 없더니, 그저 조용히 등을 돌려 [공장]을 향해 훌쩍 사라졌다. 멀리서, 녀석이 보낸 메시지가 메아리처럼 되돌아왔다.

―난 분명히 말했다? 반대라고.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장]에 도착했고, 각자 여독을 풀었다.

그날 저녁, 나는 쓰러진 유중혁을 제외한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일행들을 한곳에 불러 모았다.

비유를 불러 미리 채널을 차단했고, 다른 성좌들이 듣지 못하도록 두터운 방벽을 깔았다.

이윽고 준비를 끝마친 뒤,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입을 떼자, 쉽사리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장난이라도 친다고 생각했는지, 이지혜가 너스레를 떨었다.

“뭐야, 아저씨 갑자기 왜 그래? 사람 무섭게.”

나는 그런 이지혜를 보며 애써 웃었다.

오랫동안 고민했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이현성과 신유승도 걱정스럽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먼저 걱정하는 일행들을 보며, 나는 입술을 짓씹듯 말했다.

“여러분들 중의 일부는.”

흔들리는 일행들의 눈빛.

이를 질끈 깨문 한수영이 돌아서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방아쇠를 당기듯 말을 이었다.

“어떤 ‘이야기’의 ‘등장인물’입니다.”





< Episode 66. 선악의 저편 (4) > 끝

< Episode 66. 선악의 저편 (5) >





내 발언에 일행들의 표정이 변했다.
정희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고, 이지혜는 저게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이현성은 커다란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그리고 신유승은······.

「김 독자 잘못 된 생각 이 야」

머릿속으로 [제4의 벽]의 말이 들려 왔다.

「늦 지 않았 어 지금 이라 도」

그것이 [제4의 벽]의 의지인지, 아니면 내 마음의 약한 부분인지는 모르겠다. [제4의 벽]은 내 감정을 어느 정도 반영하니, 둘 다 진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이번만큼은 나도 결단을 내렸다.

“제 말을 잘 이해하기 힘드시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일행들에게 해야만 한다.

“천천히, 처음부터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이야기를 해본 것은 간만이었다.

어느 날 내가 읽던 소설이 현실이 되었고.
그곳에서, 내가 당신들을 만나게 되었던 이야기.

시간상 모든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다.

일행들을 만나기 전부터 일행들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
내가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않았던 것.
혼자만 정보를 독점한 채, 일행들을 기만했던 것.

나는 그 모든 이야기들을 토해냈다.
마치 묵은 어둠을 꺼내듯이.
일행들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수영이 이마를 짚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심정은 이해한다.
1863번째 회차의 한수영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나는 한수영처럼 살아갈 수는 없었다.

이 이야기는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대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이야기는 반드시 전해져야만 한다.
언젠가······ 유중혁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회귀자다.”」

어쩌면 유중혁 또한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미래를 알고 있고, 몇 번이고 같은 이야기를 겪었으며, 이미 무수한 회차에서 일행들을 만났다는 것.

그들을······ 떠나보냈다는 것.

어떤 요령도 없이 묵묵히 그 이야기를 털어놓던 유중혁의 심정을, 나는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그리고 내 이야기는 끝났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내 이야기를 못 알아들어서는 아닐 것이다. 충분히 긴 이야기였고, 어린아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일행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습니다. 이제야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알고 싶었다. 일행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하지만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스킬을 사용해 그들의 내면을 읽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짜 기만이니까.
이번만큼은 스킬을 쓰지 않고 내 스스로의 힘으로 부딪치고 싶었다.
그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것을 느끼든, 그들이 직접 선택하고 결정한 행동이 진짜 그들의 것이라 믿고 싶었다.

서서히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이지혜와 눈이 마주쳤다.
눈시울이 붉어진 이지혜. 그 일렁이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나는 불현듯 깨닫고 말았다.
나는 이미 저 눈동자를 알고 있다.

「“그럼 사부가 미래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건, 전부······.”」

왜냐하면, 그 눈은 유중혁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이지혜와 정확히 같은 것이었으니까.
천천히, 이지혜의 입이 열렸다.

“그럼 지금까지 아저씨가 미래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게, 전부······.”

마치 원작의 등장인물이 주어진 각본을 읽듯, 이지혜가 말했다.
나 역시 각본처럼 그에 대답했다.

「“그렇다.”」

“그래.”

으드득 이를 간 이지혜가 나를 향해 말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한테 그 이야길 하는 이유가 뭐야?”

상처받은 검귀가 분노하고 있었다.
이미 원작을 읽었기에, 나는 그녀의 이어질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당신한테 우린 대체 뭐였는데?”」

고개를 숙인 이지혜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이어질 상황이 물 흐르듯 떠올랐다.

이지혜는 칼을 뽑을 것이고, 분을 이기지 못해 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원작에서도 그런 일은 몇 번이나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지혜가 선택한 것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방법이었다.

“아저씨가 미래를 알고 있었다고 쳐.”
“······.”
“그 모든 게 계획되어 있었고, 아저씨 목적을 위해서 우릴 이용했던 거라고 쳐. 우리가, 그 빌어먹을 ‘멸살법’이란 소설의 등장인물들이고, 모든 것이 다 정해져 있었다고 치자고!”

이지혜는 울면서, 파랗게 질린 입술을 깨문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럼······ 아저씨는 왜 우릴 위해서 몇 번이나 목숨을 던졌던 거야?”

볼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을 보며, 나는 몇 번이고 입을 열기 위해 애썼다.
생각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예상에 없었기에,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고······.

“대답해! 우리가 정말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면, 아저씨는 지금까지 왜 우릴 위해서 몇 번이고 죽었던 거냐고!”

내가 읽어온 ‘멸살법’에는, 해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제4의 벽’이 강하게 흔들립니다.]

분하다는 듯 두 눈을 닦은 이지혜가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황급히 뒤따라 일어선 정희원이 그녀를 쫓아가며 말했다.

“······독자 씨, 우리 조금 있다가 이야기해요.”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의 신유승이 나를 향해 머뭇거리며 손을 뻗다가 정희원을 쫓아 나갔고, 나사가 빠진 사람처럼 멍한 눈을 하고 있던 이현성도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갔다.
남은 사람은 이제 한수영과 이설화, 그리고 이길영뿐이었다.
이길영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고, 이설화는 충격을 받았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 이설화의 등을 토닥여주던 한수영이 내게 쏘아붙였다.

“김독자, 잠시 나갔다 와.”


*


고적한 병실. 나는 잠든 어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일행들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기에, 막간을 이용해 방문한 병실이었다.
얼마 전 있었던 대수술이 끝난 이후, 어머니는 온종일 지금처럼 잠을 잤다. 수척한 뺨에 그늘진 눈가. 파리한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언젠가 구치소로 면회를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을 방문해 온종일 소설 이야기를 떠드는 아들을 보며, 어머니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굴이 어두워 보이는구나.”
“······깨셨어요?”
“네가 들어올 때부터.”

아직 기력이 온전치 않은 목소리였다.
나는 헝클어진 담요를 끌어와 어머니의 목을 덮어 주었다.
어머니가 희미하게 웃었다.

“멸망이 좋구나. 아들한테 보살핌을 다 받고.”
“빨리 낫기나 하세요.”
“말해보렴. 뭐라도 좋으니.”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멸살법’ 154회차에서 유중혁이 일행들에게 회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일행들에게 ‘멸살법’에 대해 이야기한 모양이구나.”
“······어떻게 아셨어요?”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가, 앙상한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저를 욕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들을 기만하고, 정보를 숨긴 이유를 캐물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해! 우리가 정말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면······ 아저씨는 왜 지금까지 우릴 위해서 몇 번이고 죽었던 거냐고!

귓가에 맴도는 이지혜의 목소리.
어머니가 말했다.

“그것이 ‘용서’의 문제인지 아닌지는 네가 결정할 게 아니란다.”
“그러면······.”
“아마 네 뒤에 있는 사람이 알려줄 수 있을 것 같구나.”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병실 문 앞에 정희원이 서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병실을 나갔다.
정희원이 볼을 긁으며 물었다.

“잠시 걸을까요?”

우리는 병동의 복도를 걸었다. 어떤 장식도 찾을 수 없는 심플한 복도. 보아하니 유중혁의 취향 같은데······ 이 녀석, 지난 3년 동안 [공장]을 제멋대로 뜯어고쳐 놓은 모양이었다. 실제로 이 병동 복도의 끝에는 유중혁이 입원한 병실이 있었다.
잠시 창밖을 보던 정희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정희원이 그 이야기를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표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창밖으로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길영과 투닥대는 신유승, 이지혜를 위로하는 이현성과 이설화의 모습도 있었다.

“다들 괜찮을 거예요. 지혜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희원 씨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희원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평소처럼 빙긋 웃는 얼굴. 내가 입을 다물자 정희원이 물었다.

“너무 멀쩡해서 놀랐어요?”
“아닙니다.”
“아니긴요.”

정희원은 내가 ‘미래 정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마도, ‘등장인물’들 중에서는 나에 관해 제일 많이 알고 있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정희원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별일도 아닌데요 뭐. 몬스터도 나오고 도깨비도 존재하는 세상인데······, 소설이 현실이 된 게 뭐 특별한 일이라고.”
“······.”
“그나저나 이제 이해가 가네요. 독자 씨가 ‘본래의 미래’에는 내가 없다고 했던 말. 그거, 독자 씨가 말한 소설에는 내가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었죠?”
“······그렇습니다.”

구름처럼 동동 뜬 비유가 신유승의 머리 위에서 찰떡처럼 몸을 퉁기고 있었다.
정희원이 말했다.

“그럼 난 독자 씨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네요.”
“저기, 희원 씨―”
“고마워요, 날 발견해줘서. 비꼬는 거 아니고, 진심으로 말하는 거예요.”

알고 있다. 정희원이 나를 놀릴 때 쓰는 말투는 이미 익숙하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괜히 혼자 또 침울해져서 기운 잃지 말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기왕이면 승진도 좀 빨리빨리 시켜주고. 자, 이건 힘내자는 뜻에서 하는 악수.”

내 손을 끌어당긴 정희원이 강한 힘으로 내 손을 움켜잡았다.
갑작스레 파고든 그 온기에, 속에서 울컥 뭔가가 올라왔다.
나는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정희원이라고, 그저 괜찮을 턱이 없는데.」

굳게 쥔 정희원의 손에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도 슬플 것이다. 그녀도 괴로울 것이고, 그녀도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잠시 내 손을 꽉 잡고 있던 정희원이 머쓱한 듯 웃으며 손을 놓았다. 그리고 물었다.

“독자 씨, 근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예, 물어보세요.”
“이 세계가 ‘소설’이라면, 어딘가엔 주인공도 있다는 뜻이잖아요.”

······역시, 정희원은 날카로웠다.
나는 ‘멸살법’에 관한 이야기를 일행들에게 했지만,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정희원은 이미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정희원의 시선이 병동의 끝을 어림했다.

“그래서 싸웠던 건가요?”
“아직 정확히 얘길 나눠본 건 아니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이왕 시작한 일이니까, 제대로 끝은 봐야 해요. 알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쉽지 않을 거예요.”

알고 있다.
하지만 피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


그 후 이틀 동안, 나는 종일 유중혁의 병실에 있었다.
다른 일행들과는 거의 마주치지 못했다. 걱정은 되었지만, 그래도 마음을 차분히 갖기로 했다.
일행들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믿었다. 일행들이 준비가 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해도 늦지 않으니까.
유중혁은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육체의 상처는 거의 회복되었는데, 아무래도 정신의 문제인 것 같아요.”
“정신의 문제요?”
“본인이 깨어나길 거부하는 것 같달까······ 어쩌면 심한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아일렌은 그렇게만 이야기했다.
그녀가 설화 팩을 교환한 후 자리를 비우자, 병실에는 나와 유중혁만 남았다.
둥둥 떠다니는 먼지가 녀석의 코에 앉았다. 나는 그런 유중혁을 보다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

“네가 먼저 내 멱살 잡고 다리 아래로 던졌잖아.”

녀석이 듣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뭔가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만 이 손 놓고 꺼져, 빌어먹을 새끼야.”
“믿겠다. 확실히 너는 예언자가 맞군.”」

다리에서 처음 녀석과 조우했던 그날의 일.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솔직히 넌 나보고 뭐라고 말할 처진 아니잖아. 너도 회귀자면서······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많이 죽을 뻔 했는지 아냐?”

한 번 말문이 열리자, 기억은 폭포처럼 쏟아졌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건드리기라도 한 것처럼 쏟아지는 기억들. 새삼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어느새, 이 녀석과 정말 많은 시간을 헤쳐온 것이다.

“누구보다 널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잘 모르겠다. ‘범람의 재앙’ 때는 왜 그런 거냐?”

「“······그 녀석은 나의 동료다.”」

“너 왜 나보고 ‘동료’라고 했던 거냐? 평소엔 절대 그런 말 안 하는 놈이······. 그래놓고 암흑성에선 나 찔러 죽이고. ······그땐 내가 죽이라고 하긴 했지만.”

「“김독자! 안 된다! 김독자!”」

하나하나 기억을 돌이킬 때마다 무수한 감정들이 나타났다가 사그라졌다.
그때는 정말 심각했었던 시나리오들이, 지나고 나니 이야기가 되었다.
우리가 쌓은, 설화로 남았다.

“그래도, ‘혁명가 게임’ 땐 고마웠다. 그땐 덕분에 살았어. 근데 그때도 이상해. 너 왜 내 이름 팔아서 엉뚱한 공단 친 거냐? 뭐······ 보나마나 나 엿 먹이려고 그랬던 거겠지만······.”

이런저런 일들을 생각하다 보니 서서히 졸음이 쏟아졌다.
나도 그동안 잠을 제대로 못잤으니······.
불투명한 의식 속에서도 하소연은 계속되었다.
녀석과 함께 싸웠던 시간들이, 마치 ‘멸살법’을 읽듯 스쳐 지나갔다.

질문의 재앙.
최강의 희생양.
피스 랜드.
시나리오의 무덤.
마왕 선발전과 기간토마키아······.

녀석과 함께 싸우지 않은 전장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였다.
그 시간들을 돌이키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괜찮지 않을까.’

내가 아는 유중혁이라면.
어떻게든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한 번도 우리는 제대로 이야기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시간을 들여서, 차근차근 설명을 한다면 어떨까.
다른 사람도 아닌 녀석이라면······.
멀리서 어렴풋이 뒤돌아선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이것이 꿈인 것도 잊고,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유중혁.’

그 순간, 찌릿하는 통증과 함께 머릿속을 스치는 말이 있었다.
그것은 ‘멸살법’의 한 장면이었다. 안나 크로프트에게 배신당해, 오래도록 비참하게 살았던 유중혁.
그런 유중혁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

「“나는 너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뒤돌아선 유중혁이, 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녀석의 손에 쥐어진 [흑천마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

「“김독자.”」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드는 순간, 나는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땀에 젖은 채로 한참을 헐떡인 후에야, 나는 그것이 꿈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창밖으로 어슴푸레한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휑한 병실.
나는 천천히 눈을 비볐다.
그리고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중혁?”

텅 빈 침대. 병실 어디에도 유중혁이 보이지 않았다. 뽑힌 링거가 덩그러니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다급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유중혁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침대 위엔, 익숙한 디자인의 회중시계가 남아 있었다.

‘성마대전’까지 남은 시간은 26일.
그날, 유중혁은 <김독자 컴퍼니>를 떠났다.





< Episode 66. 선악의 저편 (5) > 끝

< Episode 67. 시나리오의 망자 (1) >





Episode 67. 시나리오의 망자


유중혁이 사라지고 어느새 일주일.
그동안 <김독자 컴퍼니>의 분위기는 조금 바뀌었다.
사람들은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고, 뭔가를 표현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대신 묵묵히 자신의 수련에 열중했다.
정희원도 그중 하나였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스킬을 수련하거나, 육체를 단련하거나······ 하는 척하면서, 정확히는 어떤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 나 더이상 못 참겠네 진짜! 언제까지 이런 분위기로 있을 거예요?”

정희원의 말에 지면을 상대로 [태산 밀기]를 하던 이현성이 흠칫 놀랐고, [상급 다종교감]을 수련하던 신유승이 어깨를 떨었다. 가장 놀란 사람은 [검도]를 훈련하던 이지혜였다.
정희원이 다그쳤다.

“지혜 너! 이제 독자 씨랑 말 안 할 거야?”
“······몰라요.”
“아직도 화 안 풀렸어? 뭐가 됐든, 대화를 해야 할 것 아냐.”

욱한 이지혜가 소리쳤다.

“화난 거 아니에요! 생각해 보면 별일도 아니었고······ 사실 비슷한 일이야 선지자들 때도 있었잖아요. 나도 아저씨 좋은 사람인 거 알아요. ······그냥 ‘등장인물’이라는 단어가 맘에 안 들었을 뿐이라고요!”

김독자가 일행들에게 폭탄을 터뜨린 것도 어느덧 일주일.
일행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김독자의 말에 관해 생각했다.
요약하자면 이런 느낌이었다.

첫째 날, 일행들은 모두 충격에 빠졌고.
둘째 날, 생각해 보니 그런 일은 이미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정희원, “생각해 보면 성좌들이 있는 한 이러나 저러나 같은 걸요, 뭐.”).
셋째 날, 좀 더 생각해 보니 소설에 자신이 나온 게 신기하다는 사람이 등장했으며(이설화, “전 비중이 얼마나 됐을까요?”).
넷째 날, 역시 그런 소설을 읽었다면 김독자는 이 세계의 신이 아닐까 말하는 이가 출현했고(이길영, “역시 형은 신일 줄 알았어.”).
다섯째 날, 급기야 지금 위로를 받아야 할 건 우리가 아니라 김독자라고 주장하는 이가 나타났다(신유승, “어쩌면 지금 제일 힘든 건 아저씨일지도 몰라요.”).

이야기를 줄곧 듣던 이현성이 말했다.

“확실히 지금 독자 씨 심정이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엔 중혁 씨까지 사라졌으니······.”

이현성의 말에 동의하듯 일행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결국, 시선은 다시 이지혜에게 집중되었다.

“지혜야.”

얼굴이 붉어진 이지혜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 그러니까! 아저씨 완전 죽을상이던데 내가 어떻게 말을 걸어요.”
“그래도.”
“그러게 독자 아저씨는 왜 괜히 그런 말을 해서······. 그냥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우릴 속이고······.”
“지혜야.”

정희원의 부름에 이지혜가 흠칫 고개를 숙였다.
정희원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독자 씨 선택을 무시하면 안 돼. 잘은 모르지만, 독자 씨에게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을 거야. 독자 씨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을 거라고.”
“······언니도 우리가 그냥 ‘등장인물’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나도 모르지. 다만······ 이미 ‘시나리오’를 살고 있는 판국에 등장인물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그런 소설이 존재했다는 게 독자 씨 잘못도 아니잖아.”

맞는 말이었다.
김독자가 세계를 이렇게 만든 것도 아니고, 그는 그저 우연히 그 소설을 읽은 유일한 독자였을 뿐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이 빌어먹을 시나리오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이미 그들은 성좌들의 광대였는데.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그다지 실감이 나지도 않았다.
한참이나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던 이지혜가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가서 말할게요. 대신 유승이랑 현성 아저씨도 같이 가.”

이지혜의 말에 이현성과 신유승이 서로를 보며 미적거렸다.

“어, 음. 사실 난 어제 저녁에 다녀와서······.”
“저는 사흘 전에 아저씨랑 말했어요.”

일행들을 쓱 둘러본 이지혜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뭐야, 그럼 나만 안 갔어?”


*


하나씩 찾아오는 일행들을 맞으며, 나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한밤중에 갑자기 나타난 이설화가 멀쩡한 내 팔에 설화 팩을 꽂는 일이 있는가 하면,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방문 앞에 거대한 괴수종과 충왕종의 뒷다리 같은 것들이 놓여 있기도 했다.
잘못한 것은 나인데 오히려 일행들이 이쪽을 챙겨주니, 나로서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우리가 등장인물이라면, 독자 씨는 그런 등장인물들을 위해 몇 번이나 자신을 던진 거예요. 나도 다른 사람들도, 그것만 기억할 거예요.

정희원은 그렇게 말했다.

―아저씨, 전 어려서 아저씨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진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지금 아저씨가 무척 힘들다는 건 알겠어요.

신유승과 이길영은 이렇게 말했고.

―독자 씨, 제 매뉴얼에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법은 없습니다. 그러니 절 너무 곤란하게 하지 마시고 평소처럼 돌아와 주십시오.

이현성은, 언제나처럼 이현성이었다.

―난 사과나 위로 같은 거 잘 못 해. 그 소설에 정말 내가 나온다면 아저씨도 알겠지?

그리고 이지혜까지······.

어떤 위로는 봄의 빗방울처럼 따스하게 쌓인다.
그것이 위로라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성벽 아래로 눈이 쌓이고 있었다. 어느덧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
나는 제설 작업에 한창인 시민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상이 뒤바뀌고 괴수들이 난립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제설은 해야 했다. 제때 치우지 않은 눈들은, 결국 단단한 얼음이 되어 골칫덩이가 되고 마니까.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느냐?”

곁을 돌아보자, 키리오스가 허공에 가부좌를 튼 채 둥둥 떠 있었다. 완연히 기세를 회복한 키리오스는 최근 일행들의 무공 교육을 전담하고 있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곧 있을 ‘성마대전’은 80번 시나리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별자리의 맥락’을 통해 진출할 수 있는 최대 시나리오는 65번이었다.
즉, 우리는 남은 기간 동안 충분한 설화를 쌓아 65번 시나리오를 돌파하고 두 번째 별자리의 맥락으로 진출해야 했다. 그 후에야, 우리 <김독자 컴퍼니> 또한 80번 시나리오의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설화는 착실히 쌓고 있고, 시나리오 공략도 순조롭습니다. 어차피 60번대 시나리오는 <기간토마키아>를 제외하면 난이도가 엇비슷하니까요.”

「마계의 봄」에 「신화를 삼킨 성화」까지.
전과는 다른 개연성을 확보한 우리는 파죽지세로 시나리오를 클리어했고, 60번대 시나리오에서는 상대할 성운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의 고공행진을 하고 있었다.
더불어 ‘양산형 제작자’와 약속한 광고까지 시작하면서, <김독자 컴퍼니>의 주가는 날이 다르게 치솟고 있었다.
때마침 허공의 패널에서 ‘양산형 제작자’의 광고가 흘러나왔다.

―시나리오, 그 무수한 길들.

독백조로 흐르는 내 목소리와 함께, 화면 속 차원로를 질주하는 몇 대의 차들이 포탈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개중에서 유일하게 포탈을 택하지 않는 차가 있었으니, 바로 한수영이 탑승한 [X급 페라르기니]였다.

―모두, 자신만의 길이 있다.

제각기 흩어지는 차들을 가로질러, 그대로 어둠 속을 달려나가는 [X급 페라르기니].
눈물점이 도드라지는 한수영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녀석의 입술이 내 목소리에 맞춰 립싱크된다.

―하지만 길이 없는 길을 달리는 것이 진짜 강자다.

검게 물드는 화면과 함께 떠오르는 ‘양산형 제작자’의 로고.
입안으로 쓴맛이 느껴졌다.
하여간 영감이 보통이 아니다. 나한테 겁줄 때는 언제고 저걸 광고 문구로 쓰다니.
저딴 광고가 성좌들에게 먹힐 턱이······.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해당 광고를 좋아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X급 페라르기니’를 갖고 싶어 합니다.]
[당신의 광고가 일부 성좌들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였습니다.]

······있네.

곁에서 함께 광고를 보던 키리오스가 혀를 찼다. 무림 출신의 초월좌께서는 아무래도 현대 문명의 이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저딴 기계를 타느니, 무공을 쓰면 훨씬 빨리 달릴 수 있는데.”
“그건 그렇죠.”
“파천의 제자 놈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지?”

갑작스런 질문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파천검성의 제자 중 ‘놈’이라 칭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그 녀석이야 혼자서도 제 살길 잘 찾는 녀석이니 걱정하지 않습니다.”

걱정된다.
어디서 또 개복치 짓거리를 하고 있지는 않을지.
또 갑자기 우울증이 도져서 회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지.
한편으로 지금의 유중혁을 건드릴 수 있는 존재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덮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믿는 수밖에 없었다.
녀석을 활자로만 알았던 그 시절에 줄곧 그러했던 것처럼.

“다음 시나리오 지역으로 가면 또 어디선가 짠하고 나타날 겁니다. 원래 그런 놈이니까요.”
“‘환생자들의 섬’은 쉽지 않을 거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키리오스는 초월좌고, 이미 ‘환생자들의 섬’을 방문한 이력도 있다.
키리오스의 시선이 흉벽 아래를 향했다. 일행들과 살짝 떨어진 곳에서 홀로 묵묵히 정권을 내지르는 장하영의 모습이 보였다.

“이번 여정에는 하영이를 함께 데려가라. 저 녀석 또한 파천의 진전을 이었다. 짐이 되진 않을 것이다.”
“안 그래도 데려가려 했습니다.”

장하영은 이번 시나리오에 꼭 필요한 인물이다. 원작에서 녀석이 ‘초월좌들의 왕’이라는 이름을 얻는 장소도 ‘환생자들의 섬’이니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더니, 이쪽을 보던 장하영이 이내 홱 고개를 돌렸다.

다시 먼 하늘을 본다.
소매 안에서 째깍거리는 시곗바늘의 진동이 느껴졌다.

······성마대전까지 앞으로 21일.

나는 조용히 스마트폰을 켜 ‘멸살법’의 파일을 열었다.
이 소설 때문에 일행들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이 있었기에 일행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모순된 감정 속에서, ‘성마대전’ 부분을 열어 읽기 시작했다.
‘성마대전’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마침내, 이 세계에도 멸망의 계절이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


성운 <에덴>.
평소였다면 인기가 없었을 연무장의 입구에, 웬일로 천사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아, 저 화신이 바로······.]
[······저게 인간의 몸이라고?]

천사들이 엿보는 연무장 안에는, 상반신을 탈의한 한 사내가 검을 쥔 채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얼핏 보면 그저 검을 쥐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는 검으로 허공을 베는 중이었다. 눈이 좋은 천사라면 칼날이 아주 미세한 속도로 아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유중혁이 시간을 잊고 싶을 때 반복하는 수련이었다.
찰나의 시간을 길게 늘려, 그 시간에 올올이 깃든 영원을 감각하는 것.

엄격한 절도가 묻어 나오는 동작에 주변의 공기가 거칠게 요동쳤다. 웅크린 용처럼 절제된 격. 하지만 뭔가가 절제되어 있다는 말은 거꾸로 말하면 분출하지 않은 뭔가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단하군요, 지금의 당신이라면 어지간한 설화급 성좌들도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겠어요.]

인상을 찌푸린 유중혁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창백한 얼굴의 대천사가 있었다.
<에덴>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자.
여긴 왜 왔느냐고 묻는 듯한 유중혁의 시선에 메타트론이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충고를 하러 왔습니다. 수련을 할 때마다 상의 탈의를 계속하실 거라면, 장소를 다른 곳으로······.]

“이 수련을 진행하기엔 <에덴>의 개연성 밀도가 제일 알맞다.”

[그건 그쪽 사정이고, 당신의 풍기문란으로 말미암아 어린 천사들에게······.]

“메타트론, 왜 내게 그 ‘계시’를 보여줬던 거지?”

상대방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화법에, 메타트론이 입맛을 다시며 말을 바꾸었다.

[그건 거래였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당신이 ‘선악의 이중주’에서 ‘선’의 편을 드는 대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김독자 컴퍼니>를 분열시키려는 게 아니라?”

[<에덴>이 뭐하러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너희가 김독자에게 유독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녀석의 세력이 커지는 걸 견제하려는 속셈이겠지.”

[이곳에서 상의까지 탈의하고 시위를 벌이는 이유가 그것입니까?]

“말이 전혀 통하질 않는군.”

말이 통하지 않는 게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다는 듯 메타트론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중혁은 여전히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아주 천천히, 가상의 적수에게 검을 박아 숨통을 끊듯이.

[계속 불법 시위를 하실 거라면, <김독자 컴퍼니>를 정식으로 탈퇴하고 <에덴>에 가입하십시오. 그럼 상의 탈의까지는 허용을―]

“‘계시’의 다음 장을 내놔라. 네가 가지고 있던 정보는 그게 전부인가?”

[내가 거짓 정보를 줄 거라곤 생각하지 않습니까?]

“대놓고 거짓말을 해대는 마왕놈들보다야 낫겠지.”

[······그래서 아스모데우스를 따라가는 대신 우리 <에덴>에 쳐들어 온 겁니까?]

“마왕들이 알고 있는 정보라면 너 역시 알고 있을 테니까.”

[허······.]

유중혁이 홀로 <에덴>에 쳐들어왔던 그 날의 일을, 메타트론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었다.
능천사와 역천사가 지키는 대결계의 입구에서 진상을 부리다니. 그런 짓은 마왕들도 하지 않는다. 실제로 메타트론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날 유중혁은 미카엘의 손에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유중혁이 말했다.

“잔말 말고 계시를 내놔라. 여기까지 네놈들의 목적대로 놀아나 줬으면 충분한 것 아닌가?”

메타트론의 입가가 쓰게 일그러졌다. 유중혁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메타트론의 두 눈에, 서늘한 안광이 스쳤다.

[화신 유중혁. 내가 알려준 정보는 엄밀히 따지면 ‘계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특별한 존재에서 받은 정보였지요.]

“특별한 존재?”

[정말 알고 싶습니까?]

잠시 유중혁을 응시하던 메타트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중혁 또한 따라서 고개를 들었다.
한순간 <에덴>의 하늘이 새카맣게 일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연무장 주변에 몰려와 있던 몇몇 천사들이 작은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유중혁은 본능적으로 [흑천마도]를 움켜쥐었다.

······마왕? 아니다.
그것은 마(魔)라기 보다는 차라리 혼돈에 가까운 무엇이었다.

[당신의 배후성이 이질적인 존재에게 불편함을 느낍니다.]

다시 눈을 깜박였을 때, 주변의 정경이 변해 있었다.
<스타 스트림>의 한복판. 새카만 우주 속에 무형의 어둠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초월좌인 유중혁조차 응시하는 것이 버거운 대존재(大存在).
유중혁이 물었다.

“너는 누구지?”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화신 ‘유중혁’을 바라봅니다.]

어둠이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여.】





< Episode 67. 시나리오의 망자 (1) > 끝

< Episode 67. 시나리오의 망자 (2) >





겨울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65번 시나리오까지 쾌속 클리어를 마친 <김독자 컴퍼니>는 일주일 전, 두 번째 ‘별자리의 맥락’에 도달했다.
마침내 ‘80번 시나리오’의 최소 도전 조건을 충족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양산형 제작자’로부터 광고비가 도착했습니다.]
[2,500,000코인을 받았습니다.]

성운의 잔고도 빠르게 쌓였다. 광고 한방에 250만 코인. [X급 페라르기니]가 꽤 호황인 모양이었다.
판매 수익의 일부를 꾸준히 지급받기로 했으니, 앞으로도 수입은 더 들어올 것이다.

“슬슬 때가 됐군요.”

그리고 마침내 시나리오 당일.
나는 채비를 마친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이현성, 정희원, 이지혜, 신유승과 이길영. 거기다 장하영까지······.

“독자 씨, 진짜 이대로 출발해도 괜찮겠습니까?”

뭔가가 불안한 듯, 이현성이 말했다.
이해는 간다. 정확히 일주일 전 내가 내린 지침이 ‘80번 시나리오’가 열릴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강이 해이해진 채로······.”

기강 해이라.
탄피에 안전핀까지 잃어버린 전적이 있는 참군인의 말이었다.

“어차피 지금 뭘 해도 최상위격 성좌들을 따라잡는 건 무리에요. 중요한 건 여기서 뭘 하느냐가 아니라, 그곳에서 뭘 하느냐입니다. ······그나저나, 한 사람이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수영 씨는 먼저 갔습니다. 자긴 명령 따윈 듣지 않는다고······.”

하여간 이 회사는 말 잘 듣는 직원이 하나도 없군.
뭐, 한수영이라면 알아서 잘 살아남겠지.
고개를 돌리자 어머니를 비롯한 방랑자들이 [공단]의 정문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몸조심하렴.”

서울의 치안은 어머니와 방랑자들에게 맡겼다. 모두 후반부 시나리오에는 큰 욕심이 없는 사람들.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대신, 각자의 방식대로 삶을 꾸리고자 결심한 이들이었다.
최근 몰려든 화신들을 관리 감독하기로 한 이설화와 공필두도 서울에 남기로 했다.

“서울을 잘 부탁합니다.”

이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광장 건너편에서 초반부 시나리오를 공략 중인 화신들에게 둘러싸인 공필두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좋은 자리를 선점하는 거다. 무조건 남들보다 먼저 좋은 땅을 차지해야 한다 이거야! 알겠냐?”

······괜찮아야 할 텐데.

―나와 파천검성은 나중에 합류하지. 먼저 가거라.

멀리서 이쪽을 바라보는 키리오스에게 마주 고개를 끄덕인 후, 나는 허공에 신호를 보냈다.
곧 시나리오 전송을 담당하는 하급 도깨비가 나타났다.

[<김독자 컴퍼니>. 준비는 끝나셨습니까?]

“전송 시작해.”

하급 도깨비의 읊조림과 함께 우리는 발밑의 포탈로 빨려 들어갔다.
꽤 고급 포탈인 모양인지, 시공간이 바뀌는 와중에도 현기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80번 시나리오 대기실에 진입하였습니다.]

평화로웠던 광화문의 풍경 대신 창백한 대리석이 깔린 대기실이 나타났다. 대기실은 미리 도착해 있던 성좌와 화신들의 열기로 들끓고 있었다.

[시나리오는 언제 시작하는 거지?]
[빨리 열어! 시간 없으니까!]

성좌들 중에는 내가 익히 얼굴을 아는 녀석들도 있었다.
성급한 늪의 포식자. ‘마왕 선발전’ 이후로 보이지 않길래 죽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살아 있었던 모양이다.
뒤쪽에서 정희원이 중얼거렸다.

“쟁쟁한 성좌들이 많은 것 같네요.”
“아저씨, 저기 란비르 칸이랑 페이후도 왔어요!”
“<파피루스>와 <탐라>도 보이는군요.”

추위를 견디는 펭귄들처럼 내 뒤에 바짝 붙어 있는 <김독자 컴퍼니> 일행들. 서울에 막 상경한 시골 사람들 같기도 하다.
이지혜가 입술을 비죽이며 쏘아붙였다.

“아저씨, 뭘 그리 실실대?”
“너도 웃을 수 있을 때 웃어둬.”

멀리서 <올림포스> 출신의 몇몇 성좌들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디오니소스와 아프로디테. 설마 이번에도 공연을 하러 온 건 아니겠지.
그 뒤로는 <베다> 출신의 몇몇 성좌들과 ‘지고한 빛의 신’ 수르야의 모습도 보였다.
어쩌면 안나 크로프트나 유중혁도 저들 중에 섞여 있을 것이다.

[마왕, ‘예제공’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마왕, ‘금단을 보는 눈동자’가 당신을 견제합니다.]

······역시, 이 녀석들도 왔군.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합니다.]
[성좌, ‘타락의 구원자’가 당신을 향해 사나운 기세를 드러냅니다.]

거기다 <에덴>의 대천사들까지.
확실히 80번 시나리오쯤 되면 규모 자체가 다르다.
우리는 이제 저 무시무시한 설화급 성좌들과 경쟁해야만 한다.
대광장의 중심에서 도깨비 하나가 두둥실 떠올랐다. 비형이었다.

[다들 모이셨군요. 저는 이번 시나리오의 진행을 맡은 도깨비 비형이라고 합니다.]

보통 이만한 규모의 시나리오는 대도깨비가 주최하는 게 보통인데, 비형이 나온 걸 보면 [관리국] 내부에서 녀석의 위상이 꽤 올라간 모양이었다.

[본래 ‘성마대전’의 무대는 다른 곳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만, 이번에는 특수한 사정으로 ‘환생자들의 섬’이 시나리오 지역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뭐, 우리 윗 대가리들께서 하시는 일이 다 그렇잖아요?]

몇몇 성좌들이 킬킬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서든 <스타 스트림>이나 [관리국]을 욕하는 유머는 잘 듣는 법.
비형 자식, 개연성이 무섭지도 않은 모양이다.

[어떤 성좌님들은 이 무대가 낯설게 여겨지실지도 모릅니다. 워낙 오래된 장소인데다, 이젠 거의 사용되지 않는 곳이니까요. 시대의 흐름에 도태되었다고나 할까······.]

비형의 말과 함께, 하늘의 스크린에서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곧 시작될 시나리오의 무대인 ‘환생자들의 섬’이었다.

[우린 ‘성마대전’에 참가하러 온 거다. 무대 따윈 어디든 상관 없어!]
[별로 기대도 안 돼. 보나마나 또 소드마스터나 대마법사 같은 놈들을 잔뜩 풀어 놓은 세계관이겠지.]

벌써 시나리오를 체험하기라도 한 것처럼 성좌들이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비형이 말했다.

[소드마스터라······ 이번에는 그런 걱정은 고이 접어두셔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번 세계관은 좀 특별하니까요.]

비형의 말에 성좌들이 웅성거렸다.
비형은 계속해서 말했다.

[애초에 ‘이 섬’이 막 열리던 시절에는 소드마스터도 대마법사도, 심지어는 서클의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오래된 섬이죠.]

비형의 말에, 다수의 성좌들이 귀를 기울였다.
개중에서도 특히 관심을 쏟는 이들은 ‘미식협’의 회원들이었다.
아마 그들은, 이 섬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뭐, 자세한 건 직접 겪어보면 아실 테죠. 일단 시나리오에 필요한 설명부터 하겠습니다. ‘성마대전’의 무대가 될 ‘본섬’에 진출하기 전, 여러분들은 튜토리얼 지역을 먼저 경험하시게 될 겁니다.]

곧이어 영상에 떠오른 것은 섬의 약도였다.
우주의 한복판에 떠 있는 거대한 섬과, 그 주변을 에워싼 작은 섬의 군도(群島).
비형은 군도에서 가장 바깥에 있는 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섬의 가장자리인 ‘소섬’에서 시작하시게 됩니다. 이곳의 튜토리얼을 통해 여러분은 섬의 적응법을 배우고, 추후 ‘성마대전’의 주요 무대인 ‘본섬’으로 진출할 시나리오를 받으시게 되는 거죠.]

설명을 들어 보니 기존 ‘환생자들의 섬’의 규칙과 같은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물론, 다른 성좌들은 아니었다.

[튜토리얼? 우린 성좌다. 지금 장난치는 건가?]
[아휴, 물론 말이 튜토리얼이지, 반드시 수행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곧장 ‘본섬’으로 진출할 방법도 얼마든지 있으니 너무 화내시지 마세요.]

보통 도깨비가 저딴 식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튜토리얼을 진행하지 않으면 시나리오가 엿같이 굴러갈 것이란 뜻이다.
실제로 저 섬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안다면 아마 이곳의 성좌들 중 절반 정도는 참가 신청을 철회할 텐데.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비형이 이쪽을 보며 윙크를 했다.

[원래 시나리오는 설명 없이 시작해야 참맛인데, 제 사설이 너무 길었군요. 그럼 다들 시작할 ‘소섬’을 골라주시기 바랍니다. 같은 섬에서 시작하고 싶으신 분들은, 같은 섬을 고르셔도 됩니다.]

비형의 맺음말과 함께, 성좌들이 자신의 출발지를 고르기 시작했다.
나와 일행들은 같은 섬을 골랐다. 함께 갈 수 있다는데 굳이 떨어질 필요는 없었으니까.
몇몇 성좌들이 눈치를 보다가 내가 고르는 섬을 따라 선택하는 것이 보였다.

······처음부터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나는 일행들을 보며 말했다.

“다들 어제 제가 한 말 기억하시죠?”

정희원이 대답했다.

“시나리오가 시작되면 섬의 중앙으로 달려가라고 했던 것 말이죠?”
“예. 절대 다른 녀석들과 싸울 생각 말고, 무조건 섬 중앙의 마을을 찾아 달리십시오.”

이번 시나리오는 지금껏 우리가 겪었던 시나리오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평범한 형태로 튜토리얼에 임해서는, 아무리 일행들이라도 살아남을 수 없다.
내가 ‘멸살법’을 읽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인지, 이제 일행들은 내 제안에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뭔가 씁쓸한 배덕감이 들었다.

모든 성좌들의 준비가 끝나자, 비형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이제 시나리오 전송을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품속에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았다.
이번 시나리오는 검을 뽑는 일 분 일 초까지 중요하다.

“모두, 마을에서 만납시다.”

동시에 일행들과 내 몸이 동시에 빛무리로 바뀌었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 #80 ― ‘환생자들의 섬’이 시작되었습니다.]

쏟아지는 메시지와 함께, 어둠으로 물들었던 사위가 밝게 개었다.
코를 찌르는 풀숲의 냄새. 나는 섬의 삼림지대에 내던져져 있었다. 주변에 일행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모두 섬의 다른 장소로 전송되었을 것이다.

[현재 당신은 ‘531번 섬’의 탐험지대에 있습니다. 안내원이 있는 마을을 찾으세요.]
[히든 시나리오― ‘생존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하늘에서 쏟아지는 도깨비의 메시지.

[이대로는 재미가 없겠죠? 시작은 서바이벌이 제맛이니까요. 성좌님들,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모처럼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을 마음껏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

<히든 시나리오 ― 생존 게임>

분류 : 히든
난이도 : SSS
클리어 조건 : 함께 진입한 경쟁자들을 피해 섬의 마을로 진입하거나, 경쟁자들을 살해하세요.
제한시간 : 24시간
보상 : 50,000코인, 튜토리얼 지역 클리어.
실패시 : 사망

+

내 이럴 줄 알았지.
굳이 이 섬을 무대로 택한 도깨비들이 그냥 넘어갈 턱이 없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주변에서 불길한 기척이 느껴졌다. 모습을 숨기기엔 너무 늦은 타이밍이었다.

[마왕, ‘기하학의 마공작’이 당신을 향해 적의를 드러냅니다!]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존재. 녀석은 나를 쫓아온 마왕들 중 하나였다.
서열 65위의 마왕, ‘기하학의 마공작’ 안드레알푸스.

[구원의 마왕. 마왕 암두시아스를 해치웠다지?]

화려한 깃털로 덮인 녀석의 손아귀에서 짙푸른 청염의 마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안드레알푸스는 모든 종류의 마법을 극성으로 익혔다고 알려진 마왕이었다.

[종마 하나를 해치운 정도로 기고만장하지 마라.]

공작새처럼 생긴 녀석은 뾰족한 부리로 말을 도도도 내뱉고는 마법 주문을 영창하며 나를 향해 달려왔다. 아마 첫 사냥감을 나로 정한 모양.
나 역시 녀석을 향해 마주 달려갔다.
안드레알푸스가 중얼거렸다.

[보법도 형편없고, 스킬 숙련도도 터무니없군. 평범한 인간 수준이야. 고작 그 정도로 암두시아스를 꺾었단 말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열심히 달려갔다. [바람의 길]도 사용하지 않아 평소보다 훨씬 느린 발걸음이었다.
안드레알푸스가 조소했다.

[죽어라.]

녀석이 발동한 마법은 9서클 마법인 [헬파이어]. 말 그대로 지옥의 불길을 빌려오는, 직격으로 맞는다면 나조차도 무사할 수 없는 대마법이었다.
그런데 녀석이 마법을 발동한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푸슈슛.

삼림 전체를 불태워야 할 헬파이어가, 작은 불꽃을 만들더니 힘없이 꺼져버렸던 것이다.

[섬의 개연성이 마법 ‘헬파이어’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당황한 안드레알푸스가 퍼뜩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제 녀석의 코앞에 있었다.

“이 섬에는 소드마스터도 대마법사도 없다고 했잖아.”

경악한 안드레알푸스의 눈이 커졌다.

“그러니 ‘헬파이어’도 당연히 없지 않겠어?”

믿어지지 않겠지.
하지만 이게 이 섬의 법칙이다.
<스타 스트림>에서 가장 강력한 개연성이 지배하는 곳.

[이 섬에는 강력한 개연성의 힘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섬에서는 ‘특성창’을 사용할 수 없으며, 시스템 데이터로 환산되는 모든 종류의 종합 능력치가 초기화됩니다.]

이 섬에서는 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고.

[이 섬에서는 1세대 이후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스킬’ 사용이 제한됩니다.]
[이 섬에서는 ‘성흔’ 및 ‘설화’의 숙련치가 초기화됩니다.]

지금껏 얻은 모든 전투 기술들이 무용해진다.
뒤늦게 방호 스킬을 외우려던 안드레알푸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아무런 기교도 없이 무식하게 검을 내질렀다.
어떤 스킬도 성흔도 담겨 있지 않은 일격에, 마왕 안드레알푸스의 가슴이 허망하게 꿰뚫렸다.
평소보다 몇 배는 무거운 [부러지지 않는 신념].
칼을 쥔 손아귀가 덜덜 떨렸다.
종합 능력치의 혜택이 사라진 것은 녀석만이 아니었다.
무더운 삼림 속에서, 뜨거운 볕이 내 피부를 태우고 있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죽은 마왕의 화신체에서 검을 빼냈다. 빈약한 근육 때문인지, 검을 쥐는 것조차 버거웠다.

“······이래서 내가 옛날이야기를 안 좋아한다니까.”

소드마스터도, 대마법사도, 시스템도 특성창도 없는 세계.

[오래된 설화들이 당신의 시선에 반응합니다.]

환생자들의 섬.
이곳은 별들의 흐름 속에 도태된 ‘1세대 설화’들의 무덤이었다.





< Episode 67. 시나리오의 망자 (2) > 끝

< Episode 67. 시나리오의 망자 (3) >





이현성은 생각했다.
언젠가 베트남전에 참전했다던 외할아버지의 기분이 이런 것이었을까.
무성한 잎으로 우거진 삼림. 비정상적인 크기의 밑동을 자랑하는 나무들 사이에 숨으면서, 이현성은 서바이벌 훈련을 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인근 지역의 갈대숲까지 낮은 포복으로 이동한다.’

낮은 포복과 높은 포복을 번갈아 사용하며, 이현성은 천천히 삼림지대를 이동해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벌판 쪽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쪽으로 이동하는 성좌들의 무리가 적지 않았다.
퍼뜩 풀숲을 헤쳐오는 기척에, 이현성은 재빠르게 나무 밑동에 숨어 숨을 죽였다.

[구원의 마왕이 분명 이 섬을 택하는 걸 봤는데······.]
[놈을 사냥하면 분배는 어떻게 할 거지?]
[목을 따는 놈이 절반을 갖기로 하지.]

웅성거리는 성좌들의 기척. 모두 김독자를 노리는 녀석들이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놈들의 목을 효수하고 싶었다.

一무조건 섬의 중앙을 향해 달리십시오.

김독자는 말했다.
그래야만 이 빌어먹을 서바이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이 세계의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의 전언이었다.

순간 김독자에게 ‘멸살법’에 관해 더 자세하게 물어볼 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매뉴얼에 관한 정보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미래의 자신은 어떻게 되는지,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이현성은 양손을 들어 뺨을 찰싹찰싹 쳤다.

김독자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지금은 상황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부스럭.


가까운 곳에서 다시 한번 기척이 들려왔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신중한 움직임.
은엄폐의 기본을 어느 정도 꿰고 있는 자였다. 소리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부스럭.

저쪽에서 먼저 방향을 틀지 않는다면, 조만간 들킬 수밖에 없는 위치.

이현성은 긴장하며 품속에서 단도를 꺼냈다.
김독자는 무조건 전투를 피하라고 했지만, 항상 그럴 수는 없다.


‘피해갈 수 없다면 선공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각혈을 토하는 수련을 거치며, 이현성은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이제 그는 첫 번째 시나리오의 ‘불의를 외면한 군인’이 아니었다.

마침내 적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성긴 갈대 사이로 언뜻 보이는 특전복의 무늬.
이현성은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희원 씨?”
“으와앗!”

풀숲을 불쑥 뚫고 나온 [심판자의 검]. 이현성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여 그 검을 피해냈다.
잠시 후, 풀숲 사이로 정희원이 고개를 내밀었다.

“현성 씨? 이런, 미안해요.”
“아닙니다. 괜찮으십니까?”

안 그래도 절박하던 상황에 동료와 조우하게 되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한숨을 돌리고 보니, 정희원의 허리춤에 두 아이가 찰싹 붙어 있었다.
신유승과 이길영.

이현성은 핼쑥한 두 아이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애들 상태가 왜 이렇습니까?”
“······저도 확실히는 몰라요. 방금 만난 거라. 뭔가 충격적인 광경을 봤나 봐요.”

충격적인 광경.
확실히 이 섬은 기묘한 데가 있긴 했다.
이현성은 아까부터 등에 찬 [헤라클레스의 방패]가 몹시 무겁게 느껴졌다.
평소였다면 무게조차 못 느낄 아이템이었는데······.

이현성은 한 손으로 신유승을 업으며 말했다.

“일단 섬 중앙으로 가서 독자 씨와 조우하는 게 먼저일 것 같습니다.”
“어디가 중앙일까요?”
“연기가 피어오르는 방향이라고 들었으니······."

슬쩍 고개를 들어 방위를 살피자 커다란 나무 사이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 자락이 보였다.
그리 멀지 않은 위치.
이현성은 정희원과 함께 포복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든든한 동료와 함께하기 때문인지, 군번줄을 통해 느껴지는 심박이 아까와는 다른 박자로 뛰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기었을까.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삼림 지대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눈앞으로 펼쳐진 것은 너른 벌판지대.
이제 연기의 발화 지점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문제는, 그 벌판을 가로막은 일련의 무리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정희원이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릴 쫓아온 녀석들인 것 같죠?”

제각기 병장기와 성유물들로 무장한 채, 벌판 인근을 기웃거리며 수색하는 성좌들.
개중에는 아까 이현성이 일별했던 무리도 있었다.

“싸우지 말고 달리라고 했으니, 피해서 가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

이대로 벌판에 진출하면 반드시 저들의 눈에 띄게 된다.
삼림지대를 돌아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러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장담할 수 없었다.
등 뒤에 업힌 신유승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아저씨, 저기······.”

푸들거리는 신유승의 손가락이 벌판 건너편에 있는 반대쪽 숲을 가리켰다.

뭔가가 달려 나오고 있었다.
거칠고 포악한 울음소리.
삼림을 헤치고 나온 그 괴수종은, 이현성도 익히 알고 있는 괴수였다.
왜냐하면 저 괴수는, 수많은 판타지 만화와 소설에서 단골로 출연하는 몬스터였으니까.
정희원이 물었다.

“저거 ‘오크’ 아니에요? 80번대 시나리오에 있기엔 너무 약한 녀석인데······.”

오크.
수많은 판타지 장르에서 ‘초반 몬스터’의 대표격으로 등장하는 괴물.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오크’와 싸운 적은 없군요.”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오크는 너무 유명해서 일반인들도 모두 알고 있는 괴물이었다.
그런데 시나리오가 80번이 되도록, 그들은 한 번도 오크와 마주친 적이 없었다.
벌판 지대에서 성좌들이 일갈을 터뜨렸다.

[우릴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겨우 저런 쓰레기를 풀어 놓은 건가?]

그들 역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병기를 쓸 필요도 없다는 듯, 성좌 하나가 귀찮은 얼굴로 달려오는 오크를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평소였다면 그 주먹 한 방에 전신이 터져 나갔어야 할 괴물.
그런데 다음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빠가각!

오크가 휘두른 돌도끼에, 성좌의 주먹이 부서졌다.
당황한 성좌가 뭐라고 외치려는 순간, 어디선가 또 다른 돌도끼가 날아왔다.

퍼거걱!

그대로 터져버린 성좌의 머리통.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한지 인지조차 못한 듯, 멍청하게 쓰러지는 성좌의 화신체.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린 오크와 포효와 함께, 벌판은 끔찍한 학살장으로 뒤바뀌었다.

[끄아아아아악!]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가른다는 무시무시한 성좌들.
그 성좌들이, 고작 단 두 마리의 오크에 의해 머리가 터지고 몸통이 찢어지며 죽어가고 있었다.
정희원도 이현성도 얼이 빠졌다.
현실감 없는 정경이었다.

저렇게 쉽게 죽었다고? 성좌들이?
······‘오크’에게?

순식간에 열댓 명의 성좌들을 찢어버린 오크들이, 이쪽 삼림지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부디 오크만 만나지 않기를.

나는 무성한 삼림을 헤치며 머릿속으로 그 생각을 반복했다.

더위 속에 숨이 간헐적으로 차올랐고, 발걸음은 무거웠다.
별로 오래 걷지도 않았는데 전신에서 흘러내린 땀으로 탈진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종합 능력치의 부재가 이렇게나 클 줄은 몰랐다.
역시 태생 체력 1은 어쩔 수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어깨까지 좁아진 듯한 느낌.
착각이라 믿고 싶지만 이게 ‘섬’의 현실이었다.

환생자들의 섬.
<스타 스트림>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들이 모여있는 곳.

여기서는 바깥에서 데이터로 쌓아온 모든 능력치 버프가 해제된다.
즉, 순수한 육체 본연의 능력이 주가 되는 장소라는 뜻이다.

내가 서열 65위의 마왕을 손쉽게 쓰러트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성좌위에 올느 대부분의 성좌들은 육체의 수련을 게을리하고, 때문에 이 섬에 막 진입했을 때 자신의 정확한 전투력을 오판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나마도 육체파가 아닌 ‘안드레알푸스’ 였기에 망정이지······.

[당신은 현재까지 1명의 경쟁자를 살해하였습니다.]
[안전 지역으로 진입할 시 추가 보상을 횓득할 수 있습니다.]

간간이 들려오는 메시지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나는 무성한 나무들이 만든 그늘을 골라 이동을 계속했다.
탈수를 방지하기 위해 드문드문 발견되는 개울에 코를 박고 벌컥벌컥 물을 마시기도 했다.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맑고 차가운 물이었다.

“······1세대 물 참 맑네.”

사실 나라고 무조건 옛날 이야기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독자로서 말하자면, 나는 오히려 오래된 이야기들을 더 좋아했다.
꿈과 모험으로 가득한 영웅들의 이야기.
잊혀진 산맥의 드래곤과 싸운다거나, 아름다운 엘프, 용맹한 난쟁이들과 함께 전설의 검을 찾아 떠난다거나······.

문제는 지금 내가 그 ‘옛날 이야기’ 속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특성창의 힘도 못 쓰고, 어떤 편의 기능도 없는 세계.
이곳에서 위험은 괴수뿐만이 아니었다.
스킬의 효과를 받을 수 없으니 자연히 면역도 떨어지고, 추위나 질병도 조심해야 했다.
원작에서는 전염병에 걸린 성좌들이 몰살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멸살법’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특성창과 시스템이 주는 편의에 익숙해져 있던 성좌들은, 그들의 감수성으로 읽어낼 수 없는 세계를 맞닥뜨리자 제대로 된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한 채 무력하게 죽어갔다.」

<스타 스트림>의 권좌에 군림하며 강력한 위상을 빛내던 성좌들은 고작 전염병이나 오크 ᄄᆞ위를 이겨내지 못해 죽어갔다.
개중 어떤 성좌들은 그 치욕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861번 섬의 참가자들이 전멸하였습니다.]
[1896번 섬의 참가자들이 전멸하였습니다.]

······시작됐군.
아마 지금쯤, ‘소섬’ 전역은 끔찍한 비극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동안 무시했던 하급 괴수종들에게 죽어 나가는 성좌들······.

[다수의 성좌들이 ‘환생자들의 섬’의 난이도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관리국’에 항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항의해도 소용없다.
이 섬은 원래 그런 섬이다.
마왕이든, 대천사든······ 누구든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목이 떨어지는 곳.

뀌룩.

근처의 수풀에서 들려오는 울음에 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죽였다.
이 섬에서 저런 식으로 우는 괴수는 내가 알기로 하나바껭 없다.
연녹색 피부를 가진, 내 키의 반 정도 되는 난쟁이 괴수.

······‘고블린’ 인가.

나는 가까스로 안도의 숨을 토해냈다.
오크가 아니라 고블린이라면, 정신만 바짝 차리면 해볼 만하다.

퀴에에에에!

귀청이 찢어지는 고성.
나는 반사적으로 울음이 들려온 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다.
형편없는 근력 때문인지 내 몸은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휘둘러진 방향을 향해 쭉 끌려갔다.

푸슈슛!

운이 좋게도 펄쩍 뛰어오른 첫 번째 녀석이 눈먼 칼날에 맞아 바닥을 뒹굴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1세대의 법칙 하나. 고블린들은 절대 혼자서 움직이지 않는다.」

다친 고블린을 밟고 도약한 두 마리의 고블린들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가시 곤봉을 휘둘러왔다.

찌이이익!

개중 한 녀석이 휘두른 곤봉에 허벅지 바깥쪽에 긴 찰과상이 남았다.
빌어먹을······ 여기선 마왕보다 고블린이 더 무섭다더니.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합니다!]

그나마도 [제4의 벽]이 없었더라면, 나 역시 고블린들의 난타에 허둥대다 다른 성좌들처럼 죽어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길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섬의 관리자’가 당신이 사용 중인 스킬의 불공정성을 염려합니다.]
[‘섬의 관리자’가 이곳에서 해당 스킬은 사용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관리자의 항의에 동의합니다.]

츠츠츠츳······!

[‘제4의 벽’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김독 자 미 안」

‘응?’

「이 섬에 서 는 힘 이 빠 져」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내 정신을 감싸던 장벽의 일부가 희미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들어 있던 감각이 활성화되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나는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를 깨달았다.

[‘제4의 벽’의 두께가 얇아집니다.]
[‘제4의 벽’을 통해 강화된 당신의 정신력이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제4의 벽’을 통해 경감되던 육체적 고통이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이런 망할.





< Episode 67. 시나리오의 망자 (3) > 끝

< Episode 67. 시나리오의 망자 (4) >





나는 치밀어오르는 욕지거리를 삼켰다.
하필 이럴 때 [제4의 벽]이 얇아지다니······.
전투에 몰입하느라 잊고 있었던 생경한 고통이 찾아왔다. 정강이와 팔뚝에 난 생채기들이 쓰라렸다. 땀에 젖은 셔츠의 찝찝함이 더욱 생생해졌고, 삼림을 데우는 열기에 현기증이 밀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운동을 좀 더 해둘 걸.

쐐애애액!

내 머리통을 부수기 위해 날아드는 가시 곤봉.
나는 거의 몸을 구르다시피 하며 고블린의 공격을 피했다.

퀴에에에에!

성급하게 움직인 관절들이 삐걱거렸다.
내 회피 경로를 따라온 고블린들이 두더지 잡기라도 하듯 곤봉을 두들겨댔다.
가시 곤봉에 묻은 혈향에 손등의 솜털이 비죽 솟았다. 분명 지금껏 맡았던 냄새였는데도, 낯설게 느껴졌다.

[‘제4의 벽’이 매우 얇아집니다.]
[‘제4의 벽’이 위태롭게 흔들립니다.]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고쳐 잡았다.
동료를 잃은 두 마리의 고블린이 붉은 눈을 빛내며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언제든 내 빈틈을 노리고 달려들겠다는 살기. 그 욕망을 읽어내는 순간 새삼스럽게도 죽음의 공포가 찾아왔다.
살얼음처럼 얇아진 [제4의 벽] 너머로, 내가 외면해왔던 감정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내가 보던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던가.
나는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싸워야 한다. 싸울 수 있다.
다른 일행들도 모두 이런 두려움과 맞서 싸워왔다.
오직 나만이, 벽을 통해 비겁하게 고통을 회피해 왔다.

「김독자는 떨리는 손으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쥐었다.」

생각하자. 지금 내 몸으로 고블린들을 해치울 방법.
스킬은 쓸 수 없다. 하지만 성흔은 사용할 수 있다.
숙련치는 초기화되었지만, 분명 성흔 사용은 가능하다.
문제는 그 성흔이 어떤 식으로 적용될 것이냐는 거지만.
나는 다가오는 고블린을 보며 [칼의 노래]를 발동했다.

[해당 성흔은 당신의 성흔이 아닙니다.]
[해당 성흔의 효과가 최소치로 고정됩니다.]

「초 2일. 맑음. 일찍 나가서 무기를 점검하였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은 희미한 광채를 내뿜더니 이내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불화살이라도 나왔다면 좋았을 텐데, 제길.
그나마 검이 조금 가벼워진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위안이었다.

퀴이익?

내 저항을 비웃은 고블린들이 곧장 가시 곤봉을 휘둘러왔다. 곤봉과 검이 부딪치자 손목이 꺾이는 것 같았다.
보기엔 허접하지만 힘은 인간 이상의 녀석들이다. 이 섬의 생존에 최적화된 괴물들.
이어서 두 번째 곤봉이 내 허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검으로 막기엔 늦었다.

퍼어억!

나는 발을 휘둘러 곤봉을 걷어찼다. 발바닥을 꿰뚫는 가시의 감각. 끔찍한 고통에 입술을 깨물었다. 피냄새를 맡자 성이 난 고블린들이 울부짖었다.
성흔으로 해결이 안 된다면, 두 번째 방법을 써야 한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당신의 의지에 반응합니다.]

이 섬에서 스킬은 봉쇄되고 성흔의 숙련치는 모두 초기화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의 의지에 반응합니다.]

서클도, 강기도 없는 1세대에도 분명 존재하는 것.
그것은 바로 ‘설화’였다.

[현재 당신의 힘으로 해당 설화들의 통제권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설화들이 당신의 지배를 거부합니다.]

문제는, 내 힘이 대폭 깎이며 설화들이 내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는 것.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당신을 안쓰럽게 바라봅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의 약해진 육체를 탐합니다.]

오히려 날뛰는 기혈 때문에 속에서 핏물이 올라왔다.
고블린들은 내게서 느껴지는 설화의 힘에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으나, 이내 기세를 회복하고 달려들었다.
성흔도 막혔고, 설화도 말을 듣지 않는다.

나는 다가오는 고블린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결국, 마지막 방법뿐이다.
가능하면 이건 만약의 만약까지 안 쓰려고 했는데.
굳게 마음을 먹은 내가 마력을 일으키는 순간.

푸슈슉!

풀숲을 꿰뚫고 날아온 단도가 고블린의 머리를 꿰뚫었다. 철푸덕 앞으로 쓰러지는 고블린. 이어서 달려온 인형이 환상적인 칼놀림으로 다른 고블린의 목을 날려버렸다.
캡 아래로 흩날리는 소녀의 포니테일을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 괜찮아?”

머리와 얼굴에 진흙을 잔뜩 뒤집어쓴 이지혜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사실 [칼의 노래]를 사용한 것은 고블린에 맞서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시스템 메시지처럼 [칼의 노래]는 내 성흔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 것이 아닌 성흔을 사용하면, 반드시 해당 성흔의 원주인은 내 존재를 깨닫게 되어있다.

“······휴, 진짜 아저씨라 다행이네.”

이지혜가 개울물에 세수를 하며 말했다.
꼴을 보아하니 이지혜도 어지간히 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뭐 이딴 곳이 다 있어? 스킬이랑 성흔들은 죄다 쓸모없고. 키리오스 할아버지한테 훈련 안 받았으면 진즉에 뒈졌을 거야.”
“다친 덴 없고?”
“없어. 잘 숨어다녔거든. 근데 아저씬 왜 그 모양이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나는 얼버무리며 이설화에게 미리 받아둔 [금창약]을 상처에 발랐다.
겨우 고블린이랑 싸우는데 이 정도 상처를 입다니. 앞으로의 여정이 얼마나 험난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나를 보던 이지혜가 답답하다는 듯 금창약을 빼앗았다.

“줘봐. 어깨 뒤쪽에 덜 발렸어.”

이지혜가 야무진 손으로 내 상처에 금창약을 치덕치덕 발랐다.

“살살 발라. 세게 누르면 나 죽을 수도 있으니까.”
“엄살은. 근데 아저씨 원래 이렇게 왜소했나?”
“근육량이 조금 줄어든 것뿐이야.”
“어깨가 나랑 비슷한 것 같은데?”

순간 자존심이 상해서 나는 도로 금창약을 빼앗았다. 아니, 빼앗으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이지혜가 나보다 힘이 더 셌기 때문이다.
이지혜가 경고하듯 말했다.

“움직이면 어깨 부러진다.”

이렇게 무력한 기분은 또 오랜만이었다.

“자, 다 됐다.”

이설화의 금창약은 ‘1세대’의 개연성에도 불구하고 효과가 꽤 좋았다. 드라마틱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금창약이 스며든 상처가 빠르게 아물고 있었다.
하긴, 1세대라고 해도 마법이나 무공은 있다.

이지혜와 나는 상처를 추스른 후 삼림지대를 계속해서 걸어갔다.

다행히 더이상의 괴수는 나오지 않았지만, 어느덧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섬의 중심부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가늠하던 이지혜가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노숙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하면 밤중에도 이동할 수는 있지만, [야간시] 스킬도 사용할 수 없는 판국에 잘못하면 고블린보다 훨씬 끔찍한 녀석들을 만나는 수가 있었다.

[섬의 밤이 찾아왔습니다.]
[밤에는 시스템의 기능이 일부 회복됩니다.]
[‘도깨비 보따리’ 기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곧바로 ‘도깨비 보따리’를 열어 노숙에 필요한 아이템들을 구매했다. 1인용 휴대 숙소 두 개와 주변 경계를 위한 안전장치들. 만약을 위해 상비용 회복 아이템들도 쟁였다.
내게서 아이템들을 받아든 이지혜가 눈을 끔뻑였다.

“뭐야, 1세대니 뭐니 하더니 이런 건 또 살 수 있어?”
“결국 코인 벌이용 시나리오라는 건 변함 없으니까.”

1세대든 2세대든 3세대든 시나리오의 본질은 돈벌이다. 그러니 ‘도깨비 보따리’의 사용이 허가되는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퉁탕퉁탕 텐트를 설치하던 이지혜가 나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물었다.

“아저씨 군대 갔다 왔다며. 텐트 설치할 줄 몰라?”
“제대한지가 언젠데. 넌 왜 그렇게 잘하냐?”
“초등학생 때 걸스카우트였어.”

······그러고 보니 이지혜에겐 그런 설정도 있었지.
근력 감소 패널티로 낑낑대는 나를 보던 이지혜가 내 텐트까지 뚝딱 설치해 주었다.
숲의 밤은 추웠다. 우리는 주변의 잔가지를 모아 불을 피웠다. 타오르는 모닥불을 쬐며, 이지혜도 나도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웅크린 이지혜가 뭔가를 참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꽃을 향해 마른 나뭇가지를 집어 던지던 이지혜가 마침내 용기를 냈다.

“아저씨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물어 봐.”
“그 소설이란 거,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왠지 그런 질문이 나올 것 같긴 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10년도 더 전부터.”

기억이 조금 가물하긴 하지만, ‘멸살법’을 처음 클릭하던 그 시절의 일을 나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 소설에서 난 어떻게 나와?”

궁금한 게 정상이었다. 내가 이지혜의 입장이었더라도 그게 궁금할 테니까.
나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이지혜에 관한 묘사를 떠올렸다.

해상제독 이지혜.
일행들을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서 검을 뽑는 소녀.
자존심은 강하지만 사실 누구보다 정이 많고, 겉으로는 강한 척해도 속으로는 가장 많이 곪아 있는 인물.

나는 이지혜의 상처를 가능한 건드리지 않으려 애쓰며, 최대한 섬세한 표현을 골라서 이야기해주었다.
내 이야기를 듣던 이지혜가 수상쩍은 점괘라도 본 듯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너무 잘 맞아서 기분 나쁠 정도인데······ 그렇게 자세하게 나온다고?”
“소설이 좀 길거든.”
“아무리 그래도. 아저씬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기억해?”
“열심히 읽었으니까.”
“그렇더라도 너무 꼼꼼히 기억하는데······. 기분 나쁘게.”

이게, 기껏 대답해줬더니.

“그때 난 중학생이었고, 취미라곤 그 소설 읽는 게 전부였어.”
“아저씨가 중학생? 푸하핫, 그럼 그거 처음 읽었을 땐 나보다 어렸단 얘기야? 말도 안 돼.”
“누구나 열다섯 살이던 시절은 있어.”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고개를 주억거립니다.]
이지혜는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었다는 것처럼 킬킬거리며 웃었다.

“하긴 맞아. 나도 한때는 열다섯이었지.”

이지혜는 그리운 눈으로 자신의 칼집을 내려다보았다.
칼집의 끄트머리에 매달린 작은 키링.

‘멸살법’을 읽은 나는, 물론 그 키링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괜찮냐?”
“······이 키링에 대해서도 알아?”
“조금은.”
“이건 뭐 사생활이란 게 없네.”

이지혜가 늘 가지고 다니는 저 키링은,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죽은 그녀의 친구가 선물해준 것이었다.
오래된 ‘멸살법’의 문장들이, 머릿속을 흘러갔다.

「“지혜야. 날 죽여. 괜찮아.”」

여전히 이지혜는 ‘상처받은 검귀’다.
언젠가 그녀의 특성명이 바뀌어도,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지혜는 자신이 저지른 죗값에 대해서는 결코 잊지 않는 인물이니까.

“있잖아, 그 소설의 끝에서 나는 어떻게 돼?”

이지혜의 말에, 오랫동안 의식적으로 잊고 있었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쳤다.
내가 알고 있는 ‘멸살법’의 결말.

짤랑.

귓가에 방울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미리 설치해 둔 안전장치로부터 울려 퍼지는 신호였다.
방울 소리는 이내 귀청을 찢을 듯 공포스러운 박자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짤랑. 짤랑. 짤랑. 짤랑.
짤랑. 짤랑. 짤랑. 짤랑.

“아저씨.”

뭔가가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울려 퍼지는 방울의 간격으로 봐서 고블린이나 오크는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강력한 괴물.
나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방향을 가늠하며 말했다.

“너는 끝까지 살아남아서 행복해질거야. 소설 속에서도 그랬으니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소설이란 애초에 ‘거짓말’이고.
나는 내 거짓말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지금껏 살아왔다.

“마을 쪽으로 달려. 내가 시간을 끌게.”
“싫어! 아저씨나 얼른 도망쳐! 여기선 아저씨가 나보다 약하잖아?”
“너라도 저 괴물은 상대할 수 없어. 우리 둘이 힘을 합쳐도 무리야.”

현재 이지혜의 실력으로 상대할 수 있는 것은 고블린까지다.
나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빨리 마을에 가서 도움을 청해. 그래야 너도 나도 살아남을 수 있어. 네가 나보다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얼른 가! 나는 어떻게든 피할 방법이 있으니까!”
“······정말이지?”
“당연하지. 내가 누군지 잊었어?”
그제야 안심한 듯 이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버텨! 금방 다른 일행들 데려올게!”

이지혜가 사라진 후 십여 초도 채 지나지 않아, 풀숲 사이로 거대한 초록빛의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삼 미터가 넘는 체고에 흉악한 기세를 내뿜는 괴수.

······망할, 오크도 아니고 무려 ‘트롤’인가.

피할 방법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설령 일행들을 데려오더라도, 트롤은 상대할 수 없다.
전멸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르르르······.

나를 발견한 트롤이 끔찍한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이미 무수한 성좌들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오는 길인지, 트롤의 철몽둥이에는 성좌들의 파편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검을 움켜쥐었다.
아마 나는 저 몽둥이에 한 방만 맞아도 그대로 즉사하고 말 것이다.

나를 도와줄 존재가 전혀 없다면 말이다.

그르르르르!

애초에 이 섬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공략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불가능한 시나리오에는 숨겨진 히든 피스가 존재하는 법이다.

원작대로라면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트롤의 몽둥이가 하늘 높이 치솟은 순간, 어디선가 살점을 꿰뚫는 소리가 들려왔다.

푸우욱!

익숙한 칼날이 트롤의 뱃가죽을 뚫고 나와 있었다. 이지혜였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 거짓말쟁이야.”

「해상제독은,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이 작전은 처음부터 그런 이지혜를 믿었기에 가능했다.
분노한 트롤이 손으로 장도를 뽑으며 괴성을 질렀다. 순식간에 아무는 상처.
장도를 내버리고 내 곁에 선 이지혜가 웃으며 말했다.

“죽어도 같이 죽자고, 아저씨.”

트롤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며, 나 역시 웃었다.
이지혜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굴하지 않고 살아온 역사가, 결국 그녀를 살릴 테니까.
트롤의 몽둥이가 떨어지는 것과 숲속에서 기척이 들려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왔다.

어둠을 가르는 은빛 장검.
그리고 나는 똑똑히 보았다.
검강도, 에테르 블레이드도 사용하지 않은 순수한 칼날이 저 무시무시한 트롤의 목을 장난감처럼 잘라내는 모습을.

「1세대의 망자(忘者)들이 가장 좋아하는 테마는 ‘사랑’과 ‘우정’, 그리고 ‘낭만’이다.」

1세대. <스타 스트림>에서 가장 오래된 설화들 중 하나.
그 설화의 주인이 말하고 있었다.

“······동료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이런 경우는 381년 만에 처음인데.”

자세히 보니, 나타난 인물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게 내가 말했지 않은가. 그런 친구들이라고.”
“정말이었군. 바깥에도 아직 쓸 만한 이야기가 남아 있었어.”

호탕하게 퍼지는 웃음소리. 뭔가가 이상했다. 이건 원작에는 없던 일인데? 뒤이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존재의 얼굴이 보였다.

“오랜만이군, 후인이여. 바깥 세계 시간으로는 3년만인가?”

놀랍게도, 그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존재였다.





< Episode 67. 시나리오의 망자 (4) > 끝

< Episode 67. 시나리오의 망자 (5) >





보기 좋게 기른 수염과 호기 어린 눈썹.
특유의 강직한 성품을 드러내는 두터운 입술까지.
어둠 속에서 나타난 사내는, 내가 3년 전에 만났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고려제일검?”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군, 김독자.”

한반도의 성좌인 척준경이, 환생자들의 섬에 있었다.


*


척준경에겐 신세를 진 일이 많았다. [암흑성]에서부터 [마왕 선발전]에 이르기까지.
나는 치솟는 반가움을 삼켰다. 척준경은 좋은 성좌지만, 이곳에 있는 목적이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 일단은 상대의 목적을 알아볼 때였다. 만약 그의 목적이 나와 충돌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해질 테니까.

“그동안 간접 메시지를 사용하지 않으셔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한동안 ‘성류방송’을 자제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척준경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기파가 전보다 훨씬 정제되어 있었다.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시나리오 시작 전부터 이 섬에 와 계셨던 겁니까?”
“벌써 15년쯤 됐지.”

······15년?
순간 떠오르는 ‘멸살법’의 문장이 있었다.

「‘환생자들의 섬’은 <스타 스트림>의 암흑 단층에 위치해 있다.」

지구 시간 기준으로는 3년이지만, 암흑 단층 안에서는 시간이 몇 배로 빠르게 흐른다. 실제로 그 때문에 키리오스나 파천검성도 이곳을 애용했던 것이고.
현재 이 섬의 시간 밀도는 지구와 대략 다섯 배 정도 차이가 나는 모양이었다.

“혹시 이곳에 계셨던 이유가······.”

척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이계의 신격’이라곤 하나, 고작 분신 하나 당해내지 못했다.”

머릿속을 스치는 장면이 있었다.
3년 전, 73번째 마계가 멸망하던 그 날.

재앙을 상대한 척준경은 자신의 화신체를 잃었다.

자존심이 강한 척준경은, 자신이 벨 수 없는 아득함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놀라웠다. 다른 성좌들은 대면한 것만으로도 자아가 무너지는 재앙을 상대하고서, 척준경은 여전히 그 재앙을 찢어 죽일 생각만 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고려제일검이라는 성좌의 테마인 것이겠지.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다시 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섬은 그런 수련에 아주 적합한 곳이지.”

척준경은 그 말을 하며 앞쪽에서 수풀을 베는 인물들을 바라보았다.
덥고 끈적한 삼림 속에서도 가뿐한 몸놀림을 보이는 이들.
그들은 아마 이 섬의 망자들일 것이다.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그들 중 하나가 말을 걸었다.

“용케도 살아남았군. 보통 바깥에서 온 성좌들은 한 시간도 안 돼서 목이 달아나는 게 보통인데. 아, 물론 저기있는 ‘괴물 척’은 제외하고 말이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김독자라고 합니다.”

나는 일부러 수식언을 말하지 않았다.
1세대의 망자들 중에는 수식언을 허세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다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내가 싱긋 웃었다.

“난 이름 같은 건 잊은 지 오래야. 이곳에 있으면 다들 그렇게 되거든.”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 훌쩍 앞서 나아갔다.
망자. 수많은 환생 끝에 자신의 이름을 잊은 자들.
하지만 저들은 정말로 이름을 잊은 것이 아니다. 단지, 지나간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진 것뿐이다.
성큼성큼 길을 트는 망자들의 전신에서 오래된 향취가 느껴졌다. 아주 강건하고, 곡진하게 단련된 설화.
이지혜가 소곤거렸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강해?”

의아하기도 할 것이다.
망자들에게서 느껴지는 격 자체는 대단하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가 고전했던 트롤을 단 한 방의 칼질로 해치웠다.

“설화의 양이나 질도 우리가 더 위인 것 같은데······.”
“아무리 좋은 설화를 많이 가지고 있어도 그걸 제대로 활용 못 하면 잡설이나 마찬가지야.”

이지혜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말을 이으려는 순간, 척준경이 끼어들었다.

“그의 말이 맞다. 열 자루의 명검이 있어도 인간이 제대로 쥘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두 자루뿐이니까.”

과연 고려제일검. 몸도 검, 마음도 검, 비유도 검이다.
뭔가 심오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이지혜가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사이 척준경이 심유한 눈빛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그동안 훌륭한 설화들을 많이 모았군. 이제 격으로만 따지면 상위격 성좌들에게도 밀리지 않겠어.”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이 쌓였어. 지금 그대가 어떤 상태인지는 알고 있겠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에, 지금 나는 무척 위태로운 상태일 것이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의 화신체를 노리고 있습니다.]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당신의 자격을 의심합니다!]
[설화, ‘이계의 신격을 살해한 자’가 당신에게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실제로도 그랬다. 아까도 거대 설화를 잘못 끌어 올렸다가, 오히려 설화들에게 정신을 빼앗길 뻔했으니까.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나는 ‘선악의 이중주’에서 만났던 성좌들과 똑같은 꼴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후인이여, 잊지 마라. 존재가 설화를 만든 후엔, 설화가 존재를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도 그것을 알기에, 이 섬에 온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마을에 도착했다.

[첫 번째 안전 지역에 도착하였습니다!]
[당신은 133번째로 ‘소섬’의 메인 시나리오 클리어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히든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력한 경쟁자를 살해하여 추가 보상자 목록에 올랐습니다.]
[추가 보상 내역을 준비 중입니다.]

마을의 정경은 평화로웠다. 정문을 통과하자,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화로를 중심으로 제법 야무지게 조성된 생활상이 보였다.
꾀죄죄한 옷을 걸친 아낙이 소여물을 먹이고 있었고,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장한은 한창 빨래를 걷고 있었다. 길영이나 유승이보다 어려 보이는 아이들도 보였다.
1세대의 망자들이 살아가는 마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적한 시골의 풍경.

「(······여기 정말 굉장하네요.)」

‘유상아 씨?’

「(앗, 미안해요. 갑자기 말해서 놀랐죠?)」

‘아닙니다. 이제 말씀하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네, 잠깐 쉬는 시간이거든요. 사벽이도 바쁜 모양이고.)」

왠지 평소보다 유상아의 목소리가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제4의 벽]이 얇아졌으니 그녀의 활동도 더 편리해졌을지 모른다.

「(이 마을······ 수많은 장인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그린 벽화 같달까······.)」

정확한 말을 찾으려 애쓰는 유상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심 감탄했다.
겉보기엔 평범하지만, 유상아의 말처럼 이 마을의 실체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내가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처럼 생활을 이어 나가는 주민들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런 광경 따윈, 수백 수천 번도 더 봤다는 듯 따분한 눈길들.

[시벌, 뒈질 뻔했군.]
[이런 미친 섬이······ 그게 정말 오크라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진언에 고개를 돌리자, 마을 반대쪽 입구에서 성좌들의 무리가 진입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빠르게 무리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아쉽게도 이번 진입자들 중 일행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달갑지 않은 녀석이 보였다.

[마왕, ‘금단을 보는 눈동자’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흑표범의 외형에 불타는 눈동자를 가진 마왕.
언젠가 1863회차를 방문했을 때 본 적이 있는 녀석이었다.

64번째 마계의 주인.
금단을 보는 눈동자, 플라우로스.

······아마 1863회차에선 유중혁의 주먹에 맞아 죽은 녀석이었지.
저 마왕도 나를 따라 이 섬을 선택했던 모양이다.
묘한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던 플라우로스가 이내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돌렸다.
애써 읽지 않아도 속이 빤한 얼굴이었다.
아마 이곳은 자신이 싸우기에 유리한 장소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겠지.
내 옆에 있는 척준경의 눈치도 제법 보였을 것이고.
나는 내 곁을 지키는 척준경을 흘끗 보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참으로 훌륭하고 듬직한 어깨다. 부럽구만.

[이번 시나리오는 이게 끝인가? 어이, NPC들. 안내해 봐!]

성좌들이 하나둘씩 들어오자 마을은 조금씩 번잡해지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난동에, 주민들 중 하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소섬은 여기가 끝이다.”

[말투가 영 성의 없네. 하긴, 도깨비 새끼들이 만든 시나리오가 다 그렇지.]

이제 괴수는 없다고 안심한 것인지, 성좌들의 기세가 다시 기고만장해지고 있었다.

[설화,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하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사이한 성좌들의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설화의 목소리.
······역시, 척준경의 말이 맞다.
성좌든 화신이든, 몇 년의 세월을 살아왔든 예외란 없다.
우리가 제대로 설화를 살지 않으면, 설화가 우리를 살게 되는 것이다.

[여긴 뭐 추가 보상 같은 거 없어?]
[아무 집이나 뒤져 볼까? 어쩌면 히든 피스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잖아.]

뭔가 피곤해질 기미를 느낀 주민들이 귀찮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 건 없다. 소섬 시나리오는 끝났으니, 다음 시나리오로 가고 싶은 녀석들은 마을 중앙의 화로로 들어가. 저기가 포탈이다.”

그 차가운 말투에 몇몇 성좌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 마왕 플라우로스가 앞으로 나섰다.

[NPC 주제에 시끄럽군. 언제 이곳을 떠날지를 선택하는 것은 본좌의 의지다.]

분풀이한 상대를 찾고 있었던 모양인지, 녀석은 어느새 슬그머니 격을 끌어 올려 진언을 발하고 있었다.

[모처럼 마을을 찾았으니, 잠깐 쉬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거기, 술과 음식을 내와라! 이 몸은 무척 시장한 상태니까.]

폭력적인 격이 담긴 그 말에, 십수 명의 성좌들이 킬킬대며 웃었다.
인상을 찌푸린 이지혜가 앞으로 나섰다.

“저게―”
“기다려.”

아마 이 싸움에 우리가 끼어들 여지 따윈 없을 것이다.
실제로 마을 사람들은 마왕의 위협에도 조금도 주눅든 기색이 아니었다.
따분한 듯 하품을 하며 빨래를 널던 사내가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말끝마다 NPC, NPC······. 요즘 어린 놈들은 삶이 게임인 줄 안다더니.”

지게를 짊어진 노인도 말했다.

“허구한 날 기연만 찾지······. 하여간 열정이 없어 열정이······.”

소에게 여물을 주던 아낙도 한 마디를 보탰다.

“카악, 퉤. 이래서 내가 우리 섬 개방하는 거 반대했다고. 아무리 코인이 급해도 그렇지, 저런 찌끄러기들이 굴러들어오는 걸 내 눈으로 봐야겠어? 소 몇 마리나 더 키우는 게 낫지.”

흘러가는 말투였지만, 너무나 명료하게 들리는 목소리.
사태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성좌들도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플라우로스가 일갈을 터트렸다.

[이 버러지들이, 지금 단체로 무슨······?]

그러자 그의 코앞에서 사탕을 빨던 꼬맹이가 말했다.

“버러지는 너고, 아직 천 년도 안 산 애송아.”

플라우로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무려 64번째 마왕으로서 군림하던 그였으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생전 처음 받는 모욕이었겠지.
한순간 플라우로스의 표정에 사악한 미소가 스쳤다.

[······시나리오에 NPC를 죽이지 말라는 내용은 없었지.]

마왕이 뿜어낸 강대한 적의. 녀석이 으르렁거리며 송곳니를 드러낸 순간, 마을의 모든 주민이 일제히 플라우로스를 쳐다보았다.

빨래를 하던 사내도.
여물을 주던 아낙도.
지게를 짊어진 노인도.

마치 세상이 통째로 얼어붙는 것 같은 시선.
뭔가 기묘한 기류를 눈치챈 성좌들이 주춤거렸다.
플라우로스도 마찬가지였다. 녀석도 꽤 짬이 있는 마왕이니,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슬슬 알아챘을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놈들은 대체 뭐지?」

하지만 녀석이 여기서 물러날 리는 없었다.
겨우 작은 마을의 주민들에게 눌리는 것은, 마왕으로서의 자존심이 용납지 않을 테니까.
결국 플라우로스가 선택한 것은, 가장 약해 보이는 녀석을 본보기로 삼는 것이었다.

[죽어라!]

눈앞에서 사탕을 물고 있던 꼬맹이를 향해, 플라우로스의 발톱이 쇄도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완전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주먹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뭔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폭죽처럼 허공에 흩뿌려지는 화신체의 파편들.
머리를 잃은 플라우로스의 화신체가,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왕 ‘금단을 보는 눈동자’가 시나리오에서 탈락하였습니다.]

코앞에서 마왕의 죽음을 목격한 성좌들이 부들부들 떨며 물러섰다.

[뭐, 뭐야. 이게.]

성좌들의 경악에도 주민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벌레에 장례를 치르는 사람은 없다는 듯, 평온한 분위기였다. 장한은 다시 빨래를 시작했고, 아낙은 소에게 여물을 주었다.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나무를 시작했다.
사탕을 빨던 아이가 말했다.

“모두 꺼져라. 꼴도 보기 싫으니까.”

창백하게 질린 화신들과 성좌들이 부리나케 포탈로 달아났다.
어차피 ‘소섬’ 시나리오는 종료된 상황. 더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하나둘 포탈 너머로 사라진 후, 남은 성좌들은 열도 채 되지 않았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이 다음 시나리오로 이동하기를 원합니다!]

아이를 마주한 순간부터, 내 거대 설화가 격렬한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마, 녀석도 뭔가를 눈치챈 것일 테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마왕의 머리를 터트린 아이에게 다가갔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을 위협합니다!]

플라우로스가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이렇게 찾는 수고를 덜게 되었으니까.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더이상 그에게 다가가면 당신의 화신체를 붕괴시키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다가갔다. 날뛰는 거대 설화가 위협적인 기류를 주변에 발산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도발이라 생각했는지, 나를 보는 아이의 표정에 짜증이 스쳤다.

“뭐야? 방금 그놈처럼 되고 싶은 거냐?”
“일권무적(一拳無敵) 유호성. 파천검성과 키리오스를 가르쳤던 실력은 여전하시군요.”

아이의 표정이 변했다.
이곳의 주민들은 모두 ‘환생자’들. 외양으로는 나이를 읽어낼 수 없었다.
눈앞의 아이 또한, 적어도 만 년 이상의 세월을 살아온 환생자였다.
눈을 가늘게 뜬 아이가 나를 향해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 아이들과 무슨 관계지?”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눈앞의 존재에게 이빨을 드러냅니다.]

내가 ‘환생자들의 섬’에 온 또 하나의 이유.
앞으로 있을 신화급 성좌들과의 전투를 감안하면, 나는 반드시 이곳에서 얻어가야 할 것이 있었다.
나는 올라오는 핏물을 삼키며, 충혈된 목소리로 말했다.

“일권무적, 제게 ‘설화 통제법’을 알려주십시오.”





< Episode 67. 시나리오의 망자 (5) > 끝

< Episode 68. 들리지 않는 말 (1) >





Episode 68. 들리지 않는 말


소섬의 정글 숲을 헤치며, 장하영은 김독자의 말을 떠올렸다.

―너는 이번 시나리오의 히든 카드야.

시나리오가 시작하기 전, 김독자는 장하영을 따로 불러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갑자기 그런 말을 들어봐야, 장하영으로서는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지금까지 관심도 없던 게.’

섭섭했다. 아무리 다른 일행들과 지내온 시간의 깊이가 다르다곤 해도, 김독자는 지금껏 너무 소홀했다. [혁명가 게임] 시나리오나 [마왕 선발전] 시나리오가 끝난 이후 3년. 장하영은 줄곧 소외감을 느껴왔다.
뭐랄까, 주요 시나리오에서 계속해서 배척당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난 왜 <김독자 컴퍼니>에 가입하라고 안 해?

그중에서도 가장 섭섭한 건 그것이었다.
묻고 싶었다.
왜 김독자는 자신에게 성운 가입을 권유하지 않는 것인지.
설마, 잊고 있는 것은······.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김독자를 너무 믿지 마.’]

“시끄러워.”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그 녀석은 그냥 널 이용할 뿐이야.’]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김독자는 장하영이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실리적인 인간이니까.
그럼에도 장하영은 이렇게 대꾸했다.

“김독자는 그런 사람 아냐. 넌 왜 그렇게 김독자를 싫어해?”

[‘정체불명의 벽’이 묻습니다. ‘넌 그 녀석과 친해지고 싶은 건가?’]

“친해지면 좋기야 하겠지······. 요즘 말도 많이 못 해 봤으니까.”

[‘정체불명의 벽’이 묻습니다. ‘왜지? 그 녀석을 좋아하는 거냐?’]

“좋아하긴 누가 좋아해.”

퉁명스럽게 대꾸한 장하영이 입술을 비죽였다.

“내가 좋아하는 건 ‘구원의 마왕’이라고.”

[‘정체불명의 벽’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그놈이 그놈이잖아.’]

“달라! 아무튼, 나는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고 싶은 것뿐이야.”

[‘정체불명의 벽’이 한숨을 내쉽니다. ‘언젠가 그 녀석이 너를 죽이더라도?’]

“왜 그런 불길한 소릴 하는 건데?”

그러고 보면 [정체불명의 벽]은 언제나 김독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김독자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너 자꾸 방해 좀 하지 마. 지난번에도 너 때문에 나만 ‘거대 설화’ 못 얻었어.”

<기간토마키아>를 승전보로 장식한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
그 광경을 화면을 통해 지켜보며, 장하영은 벅차올랐고, 감동했으며, 끝내는 홀로 서글퍼졌다.

자신도 저곳에 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저 타오르는 불꽃 위에, 자신도 몸을 던졌어야 한다고.
그 거대한 설화의 일부가 되었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사람을 믿어봤자 또 실망하게 될 뿐이야. 지난 삶을 통해 충분히 겪었잖아.’]

자신이 없었다.
만약 그녀가 뛰어들었을 때, 성화가 꺼지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개입으로 ‘거대 설화’가 망쳐지기라도 한다면?
······김독자가, 자신의 개입을 원치 않는다면?

장하영은 다른 일행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마계의 주민으로서 지구로 넘어온 존재였고, 김독자와 함께 첫 번째 시나리오부터 함께 싸워온 동료가 아니었다.

그래서 함께 가고 싶다 말하지 못했다.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그들 사이에 있었으니까. 아무리 다가가려고 해도 다가갈 수 없는 벽. 장하영에겐 그들이 공유하는 역사가 없다.

“이쪽이에요! 조금만 더 달리면 돼요!”
“희원 씨, 길영일 제게 주십시오. 제가 들겠습니다.”
“됐어요! 아직 그 정도 체력은 남아 있어요.”

먼 수풀 사이로 들려오는 목소리. 장하영은 반사적으로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상처투성이가 된 남녀가, 각각 아이를 하나씩 업은 채 달리고 있었다. 장하영도 아는 인물들이었다.

정희원과 이현성.

둘은 괴수에게 쫓기고 있었다. 달려오는 대여섯 마리의 오크족과, 다시 그 뒤를 잇는 두 마리의 트롤.
방향을 보아하니, 그들은 벌판을 가로질러 연기의 발생지로 이동하려는 듯했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방향에는, 오크나 트롤 이상의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있었으니까.

이대로면 일행들은 전멸이다.

장하영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그러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확히는, 일어나려 했다.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저들을 구하지 마라.’]

“뭐? 무슨 개소리야?”

[‘정체불명의 벽’이 말합니다. ‘저들이 여기서 죽으면, 너는 김독자의 유일한 동료가 될 수 있다.’]

그 말과 거의 동시에, 달려가던 정희원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바닥을 나뒹구는 이길영과 정희원. 바로 뒤를 쫓던 오크들이 히죽거리며 글레이브를 쳐들었다. 피하기엔 늦었다.
정희원이 외쳤다.

“길영아! 달려!”

떨어지는 글레이브를 보며, 장하영은 생각했다.

어쩌면 [정체불명의 벽]의 말이 맞다.
만약, 여기서 저들이 죽는다면······.

―고마워.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친 것은, 이곳에 오기 직전 김독자와 나눈 대화였다.

―뭐가?
―그때 네가 해줬던 말.

김독자는, 평소처럼 허여멀건 얼굴로 중얼거렸다.

―네가 그랬잖아. 벽 너머의 상대방이 들을 수 없더라도······ 그래도 벽에 뭔가를 남겨 보라고.

장하영은 의아했다.
자신이 그런 말을 했던가? 언제?
······술에 취하기라도 했었나?
김독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고 있어. 언젠가 네 말처럼, 누군가는 그 벽의 흔적을 들여다볼지도 모르니까.

떨어지는 글레이브 아래서, 눈을 질끈 감는 정희원의 모습이 보인다.
고함을 치는 이현성과, 정희원을 덮는 이길영.
정신을 차렸을 때, 장하영은 이미 달리고 있었다.

[당신의 새로운 특성이 개화를 준비합니다.]

그녀의 주먹이 섬전처럼 뻗어 나갔다.
초월좌의 주먹에 오크의 글레이브가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갔다.
눈을 크게 뜬 정희원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장하영은 생각했다.

‘바보 같이······.’

자신의 감정을 김독자는 알아주지 않을 것이다.
‘구원의 마왕’은 마왕이지 신이 아니니까, 그녀가 무슨 행동을 어떻게 하는지 아무런 관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해지지 못한다 하여, 그 마음이 모두 없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행들을 지키듯 선 채, 장하영이 말했다.

“여기서부턴 나한테 맡겨요.”

역사 같은 건 지금부터 만들어도 늦지 않다.
아직, 자신에겐 시간이 많이 있으니까.


*


나는 숨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종료되었습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을 종료합니다.]

다행히 장하영은 일행들을 만났다. 혹시나 시일이 늦춰지면 어쩌나 싶어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계획대로 흘러갔다.
장하영을 만났으니, 이제 일행들은 안전할 것이다.
나는 뻐근한 몸을 일으키며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들을 재차 확인했다.

[당신은 ‘히든 시나리오’ 클리어 보상으로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의 사용권을 획득하였습니다.]

본래 ‘환생자들의 섬’에서는 스킬 사용이 불가하다. 하지만 ‘히든 시나리오―생존 게임’을 완수하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의 레벨 수치가 최저치로 고정됩니다.]
[시스템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해당 스킬에는 레벨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해당 스킬은 ‘1세대 개연성’의 영향을 받지 않는 스킬입니다.]

처음에는 [책갈피]의 사용권을 받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책갈피]는 어차피 다른 인물의 스킬을 빌려오는 스킬이었다.
즉, 사용권을 얻더라도 다른 인물의 스킬에 대한 사용권을 추가로 얻지 않으면 어차피 [책갈피]는 무용지물인 것이다.

정말이지 제약이 많은 섬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이번 섬에서 얻어야 할 것은 스킬보다 더 중요한 것이니까.
멀리서 이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대사부우!”

벌써 이틀째.
이지혜는 일권무적 유호성을 졸졸 쫓아다니고 있었다.

“대대사부! 그 설화 좀 알려주세요!”

유호성이 소여물을 줄 때도.

“한 구절만요! 저 진짜 잘 배울 수 있어요.”

빨래를 하거나, 나무를 할 때도 이지혜는 유호성을 괴롭혔다.

“어제 그거 어떻게 한 거예요? 주먹 쑥 뻗었더니 걔들 머리 다 터졌잖아요!”

물론 유호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화 통제법’을 쉽게 배울 수 없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 키리오스나 파천검성도, 그에게 이 기술을 사사하는 데 오랜 시일이 걸렸으니까.

설화 통제법.

그것은 스킬이나 성흔이 아닌, 순수한 기술의 이름이었다. ‘멸살법’에서도 여러 가지 설명이 나오긴 하지만, 사실 좀 뜬구름 잡는 소리가 많아서 나도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으르렁거립니다.]

······이 자식을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유호성이 처음으로 짜증을 낸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그만 쫓아 다녀라. 내가 왜 니 대대사부냐?”
“그야······ 우리 사부의 사부의 사부잖아요!”

해맑게 웃는 이지혜의 말을 들으며, 그것도 맞는 말이다 싶었다.
이지혜의 사부는 유중혁이고, 유중혁의 사부는 파천검성이고, 파천검성의 사부는 일권무적 유호성이니까.
이지혜를 노려보던 유호성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건 알려준다고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야. 너희처럼 시스템에 익숙해진 놈들은 백날 수련해도 효과를 보지 못해.”
“하지만 대사부들한테는 알려 주셨잖아요!”
“그놈들은 배후성이 없는 초월좌들이었어. 너희와는 달라.”

냉정한 거절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그 자세부터가 잘못되었어. ‘시키는 대로’해서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이틀 동안 나를 따라다니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거냐?”

유중혁의 대사부답게 유호성은 재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심지어 성씨도 같다).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유호성이 내내 우리를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너희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듣지 못하였느냐?”

그 말에, 이지혜와 나는 동시에 주변 정경을 바라보았다.
돼지의 똥을 치우던 장한이 뭘 보느냐며 나를 마주 노려보고 있었다.

[설화, ‘배변 치우기의 달인’이 오늘 하루도 즐겁게 살자고 다짐합니다.]

농작물을 수확하던 아낙이 막걸리를 마시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고.

[설화, ‘노동요의 달인’이 흥얼거리며 주인의 일을 돕습니다.]

도끼질을 하던 노인이 한숨을 푹푹 쉬며 지게에 걸터앉았다.

[설화, ‘천년의 나무꾼’이 요즘 젊은 놈들은 어른 공경을 모른다고 말합니다.]

딱히 대단한 설화들은 아니었다.
고작해야 동물들 똥을 치우거나, 노동요를 부르거나, 나무를 하며 만들어진 설화들. 그럼에도 그 설화들은 내가 아는 다른 설화들과는 궤가 달랐다.
그 설화들에겐 기묘한 조화(造化)가 느껴졌다.
그저 강력한 힘을 추구하는 설화들이나, 주인을 지배하려 드는 설화들과는 다른 느낌. 하나의 존재와 하나의 설화가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만들어진 앙상블.
유호성이 말했다.

“10년을, 100년을, 1000년을 수련해야 비로소 한 문장을 얻을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진짜 설화’다.”

진짜 설화라.
재미있는 표현이었다.

“너희도 설화를 가지고 있겠지? 그거나 잘 단련하도록 해라. 이제 와서 다른 설화들을 배우려 애써봤자 소용 없다.”
“하지만······ 이걸로는 대대사부처럼 강해질 수 없잖아요.”
“그거야 네놈들이 하기에 달렸지. 중요한 건 설화를 정확히 들여다보는 거니까.”
“정확히 들여다본다고요?”
“너무 커다란 이야기는 오히려 그 이야기의 향방을 알 수 없게 만드는 법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저런 아리송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언제였더라, 리카온에게 [바람의 길]을 배울 때였던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바람의 길]도 못 배운 내가, 설화통제법을 제대로 익힐 수 있을까?
또 재능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얘기를 들으면 곤란한데.
한숨을 내쉰 유호성이 재차 입을 열었다.

“에휴, 빌어먹을 애새끼들. 딱 한 번만 알려주마.”

그 말에 이지혜가 얌전한 학생처럼 그의 앞에 앉았다.
나 역시 슬그머니 근처로 다가가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너흰 ‘설화’를 뭐라고 생각하느냐?”

이지혜가 눈을 굴리다가 대답했다.

“음······ 이야기?”
“한심하긴.”
“구박만 하지 말고 제대로 알려줘요!”
“기초부터 설명하는 수밖에 없겠군.”

유호성이 쯧쯧 혀를 차며 자신의 왼손을 들었다.

“이건 뭐라 부르지?”
“······왼손?”

유호성은 반대쪽 손을 들었다.

“그럼 이쪽은?”
“오른손이요.”
“그럼 이 둘을 묶으면 뭐가 되지?”

곰곰이 생각하던 이지혜가 답했다.

“······양손?”

그러자 유호성을 대신해 설화가 대답했다.

[설화, ‘양손잡이 권투사’가 즐거워합니다.]

“그래, 이것은 ‘양손’이라는 말로 이어져 있다. 많은 존재가 그렇게 부르고, 그렇게 인식하고, 비슷한 형태로 납득할 수 있는 ‘관계’지.”

이지혜가 멍한 얼굴을 했다.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호성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엔 뭐라고 부를까?”

유호성은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왼손으로 쥐며 물었다.

“하나는 왼손이고, 하나는 나뭇가지지. 이 둘을 묶어 뭐라 부르면 좋겠느냐?”
“음······ 나뭇가지를 쥔 왼손? 아니면······ 왼손과 나뭇가지······.”

뭐라고 불러도 시원찮은 느낌이었다.

“부르는 게 쉽지 않지. 왜 그런지 알겠느냐?”

이지혜가 고개를 저었다.
유호성이 말했다.

“이 둘 사이에는 제대로 된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왼손과 나뭇가지든, 나뭇가지를 쥔 왼손이든, 뭔가 딱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 들지. 서로가 어색하기 때문이다.”

유호성은 나뭇가지를 다트처럼 들고서, 멀리 떨어진 나무를 향해 던졌다. 쾌속하게 날아간 나뭇가지가 나무 둥치에 박혔다. 원래부터 그 나무의 가지였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 어색한 거리감을 좁히는 것이 바로 ‘설화’다. 세상의 가장 먼 것들을 이어주는 것. 설화를 통제하고 싶다면, 설화부터 제대로 이해하도록 해라.”

알 듯 모를 듯한 설명이었다. 나무에 꽂힌 나뭇가지를 보던 이지혜가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나는 바닥을 굴러다니는 돌을 조심스레 주워들었다.
세상의 가장 먼 것들을 연결해주는 힘이라······ 어렵다.
내 행동을 보던 유호성이 혀를 차며 말했다.

“멍청한 놈. 방금 나는 예시를 든 것뿐이다. 그렇게 아무거나 쥔다고 관계가 만들어지고 설화가 발생하는 게 아냐! 오랜 세월을 쌓아 소재와 나 사이의 거리를 좁힌 후에야······!”

그리고 다음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츠츠츠츠츳!

[1세대의 충만한 개연성이 당신의 행동에 반응합니다.]
[설화의 소재가 당신에게 친근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손에 쥐어진 돌멩이가 즐거운 듯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설화, ‘돌멩이와 나’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망연한 얼굴로 나를 보던 유호성이, 입술을 푸들푸들 떨며 물었다.

“네놈, 대체 뭐냐?”





< Episode 68. 들리지 않는 말 (1) > 끝

< Episode 68. 들리지 않는 말 (2) >





돌멩이는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내 손 위에서 부르르 떨었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돌멩이와 나’가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어합니다.]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냥 돌멩이를 만졌는데 설화가 발생했다고?
머릿속으로 온갖 복잡한 가설들이 스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해답은 없었다.

[1세대의 개연성이 당신의 주변을 감돌고 있습니다.]
[현재 ‘제4의 벽’이 매우 얇아진 상태입니다.]

그나마 의심이 가는 건 저 두 줄의 시스템 메시지인데.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유호성이 말했다.

“······그렇군, 네놈도 환생자로군. 그렇지?”

그사이 나에 관해 엉뚱한 가설을 세운 모양이었다.

“전생에 돌팔매에 맞아 죽기라도 한 모양이구나? 그래서 저 돌이······.”
“아닙니다만.”
“오호라, 네놈 돌머리로구나. 그래서 하필 돌멩이가―”

나는 말 없이 유호성이 내던진 나뭇가지를 집어들었다.

[설화의 소재가 당신에게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설화, ‘나뭇가지 같은 김독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는 유호성을 향해, 겸손한 무림의 후기지수처럼 말해보았다.

“말씀드리기 외람되오나, 제 머리가 그리 나쁜 편은 아닙니다.”

옆에서 이지혜가 나를 재수 없다는 듯 노려보았다.
눈을 부릅 뜬 유호성이 외쳤다.

“어디, 이것도 쥐어 보아라!”

나는 유호성이 건넨 꽃을 받아들었다.

[설화의 소재가 당신에게 호감을 갖습니다.]
[설화, ‘꽃을 든 김독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유호성은 계속해서 내게 설화 소재가 될 만한 것을 건넸고, 나는 그것을 족족 받아 들었다.

[설화의 소재가 당신에게 호기심을 품습니다!]
[설화의 소재가 당신에게 호기심을 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유호성이 결단을 내린 것은 내 주변이 노래하는 꽃과 돌멩이들로 가득해졌을 무렵이었다.

“······나를 쥐어라.”
“어딜 말입니까?”
“여기, 내 어깰 잡아 보란 말이다.”

이글거리는 유호성의 눈빛.
그의 분노는 이해가 갔다. 말마따나 십 년, 백 년, 천 년을 쌓아야 한 줄을 이룰 수 있다는 ‘진짜 설화’가 내게서 너무도 쉽게 봉오리를 틔웠으니······ 열 받을 수밖에 없겠지.

“정 그러시다면······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유호성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무슨 어린애 어깨가 이렇게 단단하지?
유호성이 말했다.

“별다른 변화는 없군. 무생물에 한정인가? 흠······.”

[등장인물 ‘유호성’이 당신에게 미미한 호감을 갖습니다.]

흠칫 놀란 유호성이 내 손을 뿌리치며 물러났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그리고 다음 순간, 내 귓가에 메시지가 들려왔다.

[설화, ‘만물의 사랑을 받는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


유호성이 충격에 빠진 사이, 내게 관심을 보인 것은 마을의 다른 주민들이었다.

“이런 미친 재능은 간만이군.”
“허, 보기 드문 친구일세······ 바깥에서 온 자가 맞나?.”
“혹시 소여물에도 관심이 있니?”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아낙이 건넨 소여물을 받아들었다.
인간 김독자.
근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어영부영 살면서, 이렇듯 좋은 일로 관심을 받아본 것은 처음인 것 같다.
내가······ 재능이 있다고?

「(독자 씨는 확실히 재능이 있어요. ······이런 소설을 10년이 넘도록 완독하셨잖아요.)」

최근 사서 일이 고된 모양인지, 유상아는 살짝 지친 목소리였다.

‘······역시 소설을 읽은 것과 관련이 있을까요?’

「(그렇게 밖엔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동안은 이런 일이 있었던 적이······.’

생각해 보니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등장인물 중에는 나를 보자마자 호감을 가졌던 이들도 있었으니까.

「(어쩌면 ‘벽’이 얇아진 것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유상아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확한 연유는 모르겠지만, [제4의 벽]의 기능이 떨어진 것이 세계와 나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럼 이 능력은 어디까지 적용되는 거지?

곁을 돌아보니 어쩐지 자존심이 상한 듯한 이지혜가 손에 나뭇가지를 꼭 그러쥔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녀석의 팔을 쿡 찔렀다.

“으엑!”

깜짝 놀란 이지혜가 성질을 냈다.

“아저씨 미쳤어? 어디서 똥 묻은 손가락으로······!”

일단 얘는 안 먹히는 것 같고. 그럼, 어디 보자······.
나는 역시나 바로 곁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척준경의 어깨를 콕 찔러 보았다.

“도전인가?”
“아닙니다.”

······이쪽도 적용이 안 되는군.
그럼 대체 무슨 원리로 작동하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재능의 작용 원리를 알 수가 없었다.

“정말 빌어먹을 재능이로군. 그렇게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 말을 한 것은, 한참이나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유호성이었다.
말간 유호성의 얼굴에 흉흉한 분노가 배어 있었다.
유호성은 아이의 보폭으로 나를 향해 성큼 다가오더니 말했다.

“네놈은 모르겠지만, 나는 세상에서 기연을 제일 싫어한다. 특히 너처럼 노력도 안 하고 쉽게 뭔갈 얻는 녀석을 제일 증오하지.”

일권무적 유호성은 그런 사람이다.
악바리처럼 덤비는 사람을 좋아하고, 극복할 수 없는 재능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아끼는 무인.
그런 유호성의 눈에, 나 같은 녀석은 재능빨로 1세대를 능멸하는 대역죄인처럼 보이겠지.

“······오늘 처음으로 내 신념을 어기게 되는군.”

응?

“네놈에게 ‘설화 통제법’을 가르쳐 주겠다.”

*


왜 유호성이 변심한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가 내게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마치 일생일대의 제자라도 남기려는 듯, 유호성은 그날부터 밤낮으로 나를 괴롭혔다.

“현상과 진리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설화를 제대로 사용한다는 것은 곧 현상을 자신의 언어로 이해한다는 뜻이다.”
“추상으로 도약하기 위한 단단한 지반. 그것이 바로 네가 쌓아야 할 설화의 세부(細部)다.”

······등등.
이건 뭐 ‘멸살법’을 다시 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였다.
나는 마을 주민이 가져다 준 귤을 하나 까먹으며 일단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멍청한 놈.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로군.”
“송구스럽네요.”
“모르겠으면 굳이 이해하려 들 필요 없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통제법을 체득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럼 어쩌란 말씀이신지.”

나는 딱밤을 맞았다.

“고얀 놈. 너는 일단 말버릇부터가 문제다. 연장자에 대한 공경이 부족하단 말이다.”
“······.”
“너는 일단 듣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이보다 더 잘 듣고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네가 가진 설화의 말에 귀를 기울이란 뜻이다!”

······설화의 말?
‘멸살법’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던가?

“너는 이미 설화와 소통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감정과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재능 말이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랬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설화들이 가지는 의사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치 그들이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저는 설화를 통제하고 싶은 거지, 잡담을 나누고 싶은 게 아닙니다.”
“설화는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설화 통제법을 가르치는 사람의 말이었다.

“너는 네 생각을 통제할 수 있느냐?”
“그야 당연히 제 생각이니······.”
“그럼 지금부터 5분간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 보아라.”

나는 그쯤이야 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빌어먹을, 이건 ‘생각하지 말자’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잖아.

나는 열심히 내 상상을 피해 달아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5분도 채 안 되는 사이, 내 머릿속에서는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다.
가령 개연성 없는 원인으로 인해 미소녀가 되어버린 유중혁이 마왕들을 썰어 죽인다거나, 역시나 원인 불명의 정신 착란에 걸린 한수영이 “김독자님 역시 그때 표절해서 죄송합니다”라고 선언한다거나······.
나는 솔직하게 양손을 들고 항복했다.

“······안 되네요.”
“얼빠진 놈.”

[설화, ‘구원의 마왕’이 당신을 향해 히죽거리며 웃습니다.]

“오늘부터 네가 할 일은 그것이다. 설화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라. 아무리 거대한 설화라도, 결국은 네가 쌓은 설화들이니까.”

그 말을 하며 돌아서는 유호성은, 처음으로 스승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화는 우리를 지배하려 들기도 하지만, 때로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기도 하는 법이다.”

그날부터 나는 ‘설화 통제’의 수련을 시작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설화의 목소리를 듣는 연습이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의 관심을 귀찮아합니다.]

설화들은 그런 내 모습을 낯설어했지만,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자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귀를 기울였을까, 지금껏 감정 표현을 자제하던 설화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그땐 참 즐거웠다고 말합니다.]

설화는 이야기를 하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다.
이야기는, 다시 우리가 쌓은 기억이 된다.
하늘을 수놓은 사인참사검의 별빛과, [절대왕좌]를 부수던 쾌감의 순간.
맞아, 그때 정말 즐거웠지.
네가 내 ‘첫 번째 설화’였으니까.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그 귀환자는 정말 골치 아팠다고 말합니다.]

맞아, 명일상 그 자식은 정말 까다로웠어.
유중혁이랑 한수영이 같이 있었는데도 죽을 뻔했지.

[설화, ‘재앙의 왕을 사냥한 자’가 뱀술의 맛을 그리워합니다.]
[설화, ‘이계의 신격을 살해한 자’가 혹시 이것도 기억하냐고 묻습니다.]

그렇게 한 마디 한 마디가 늘어갈 때마다, 나는 설익은 추억에 잠겨갔다.
한편으로는 여기서 너무 시간을 지체하면 곤란하다는 조급함도 있었다.

한수영, 유중혁, 안나 크로프트······.

나와는 다른 결말을 추구할 그들은, 이미 다음 시나리오의 문을 두드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설화, ‘구원의 마왕’이 너는 더이상 도망가선 안 된다고 말합니다.]

나는 다시 이야기에 집중했다.
어느 순간부터 쏟아지는 설화들의 목소리가 늘어나며, 나는 현실과 가상을 구별하기가 어려워졌다. 시공간의 감각이 흐려지고 있었다. 내가 지금 설화들 속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현실에서 설화의 이
야기를 듣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화, ‘은막의 혁명가’가 새로운 혁명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래, 미안해.
내가 너희를 너무 오랫동안 방치했구나.

[설화, ‘미식협의 이단아’가 배고픔을 호소합니다!]
[설화, ‘기적의 도박사’가 또 한 판 크게 벌이자고 말합니다.]

중간중간, 꿈 같은 정경이 스쳐 가기도 했다.

―독자 씨. 우리 진짜 죽을 뻔했어요. 알아요?
―아저씨이!

어디선가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일행들의 목소리.

―······와, 치사하게. 혼자만 먼저 수련하고 있었다고?
―우리도 얼른 배워요! 누구한테 가면 배울 수 있는 거죠?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한다.
이게 정말 꿈이라면, 정말 달콤한 꿈이구나.

―······난 왜 설화 안 생기지? 독자 형은 이렇게 하면 설화 생겼다며.
―그 손 떼라 이길영.
―너나 떨어져 신유승.

꿈결 속에서, 아이들이 “아저씨와 나”라거나 “독자 형과 이길영” 따위를 열심히 중얼거리는 것이 들려왔다.
그런 설화를 가져서 어디 쓰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당신의 이야기를 함께 바라봅니다.]

왜일까. 아이들의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포근한 마음이 되었다. 몽롱한 시야 속에서, 무수한 설화들이 나와 함께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화, ‘대천사의 사랑을 받는 자’가 당신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봅니다.]
[설화, ‘거신의 해방자’가 애틋한 눈으로 일행들을 바라봅니다.]

이 모든 설화는 나를 닮았고, 나는 다시 그 모든 설화들을 닮는다.
그렇다면 저기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저 녀석도, 분명 우리의 일부일 것이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을 외면합니다.]

나는 말한다.

‘그만 심통 부리고 이리와.’

그러나 녀석은 대답이 없었다.
산만한 덩치로 다른 설화들을 위협하던 녀석은, 몸을 웅크린 채 등을 돌리고 있었다.
뭔가를 읽고 있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인 채로.
어쩌면 나는 저 등을 알고 있다. 자신만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는 작은 아이.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설화’는 혼자서만 존재할 수는 없다.
나는 녀석의 등 뒤로 조심스레 다가가 말했다.

‘재미있어 보이네.’

흠칫 놀란 「신화를 삼킨 성화」가 나를 돌아보며 몸을 키웠다.

「너······!」

어마어마하게 커진 몸으로, 설화가 나를 노려보았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런 녀석이 두렵지 않았다.
녀석은 설화다. 그리고 모든 설화는, 어딘가로 흘러간다.

‘네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야?’

녀석은 내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한 채 입만 뻐끔거렸다.
아마 대답할 수 없겠지. 그 마음을 안다.

‘나와 함께 가자.’

「······어디로?」

천천히 입을 열어 이야기한다.
내가 원하는, 내 모든 이야기의 ■■.
설화가 묻는다.

「그 모든 이야기의 끝엔 뭐가 있지?」

‘나도 몰라. 하지만 적어도 혼자는 아닐 거야.’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잠시 후, 설화들이 내 손끝에 감겨드는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의 파도 속에 떠밀리던 몸이 점차 무거워지고,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리가 저려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길영과 신유승이 내 무릎에 기대어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이건 설화가 아니었다. 진짜 육신을 가진 아이들.
나는 그런 아이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마침내, 다음 시나리오로 떠날 준비가 끝났다.


*


그 시각, 331번째 섬의 유일한 생존자가 다음 시나리오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당신은 섬의 모든 참가자를 학살하였습니다.]
[당신은 331번째 섬의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다음 시나리오의 진입 자격을 얻었습니다.]

흩날리는 검정색 코트와, 등 뒤에서 빛나는 [흑천마도].
다음 시나리오로 향하는 포탈을 바라보며, 유중혁은 이곳에 오기 직전 만났던 음험한 존재를 떠올렸다. 3회차를 살아온 그조차 정체를 알지 못하는 이계의 신격.

―계시의 내용 전부를 알려줄 수는 없다. 아무리 나라도 그건 ‘개연성’에 지나치게 위반되니까. 하지만······ 이 정도는 내줄 수 있겠지. 그래야 제법 공평한 싸움이 될 테니까.

스마트폰을 켜자, 텍스트 파일이 나타났다.

『한수영― 1863회차의 기록 (上).』

포탈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유중혁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의 첫 장을 넘겼다.





< Episode 68. 들리지 않는 말 (2) > 끝

< Episode 68. 들리지 않는 말 (3) >





마을에 도착한 지 이주일이 지났다.
설화들이 제자리에 안착한 후, 나는 곧장 다음 시나리오 준비를 시작했다.

「‘환생자들의 섬’은 크게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1세대 설화의 개연성이 작동하는 ‘소섬’. 그리고 2세대 설화의 개연성이 작동하는 ‘중섬’. 마지막으로 3세대 설화의 개연성이 작동하는 ‘본섬’······.」

‘소섬’과는 달리 ‘중섬’에서부턴 본격적으로 성좌들과 부딪쳐야만 한다.
이 현실적인 1세대의 개연성을 뚫고 살아난 존재들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재촉합니다.]

여전히 한 녀석이 성깔을 부려댔지만, 이 정도로 고삐를 잡았으면 됐다 싶었다.
유호성은 말했다. 설화는 사용자를 지배하려 들기도 하지만 나아갈 길을 알려주기도 한다고.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당신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이 녀석들은, 앞으로도 나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함께 이야기를 만들고 그것을 또 다른 설화로 빚어낼 것이다.

“희원 씨,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인사 레퍼토리 좀 바꾸면 안 돼요? 이번엔 진짜 죽을 뻔했다고요.”

일행들이 도착한 것은 내가 설화 통제 수련을 시작한 후 일주일이 지날 무렵이었다고 한다. 섬의 외곽 쪽에서 길을 잃는 바람에 도착하는 데에 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다고.
나는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다른 일행들은요?”
“전부 훈련받고 있어요.”

얼마간 걷자 제각기 가부좌를 틀고 앉은 아이들과 이현성, 장하영의 모습이 보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수련이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설화 통제 훈련은 짧게 잡아도 두 달은 걸린다. 원작의 유중혁도 그 엄청난 재능으로 3주일이나 시간을 허비해야 했으니······.
나는 일행들의 설화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설화, ‘김독자 컴퍼니 행동강령’이 고통스럽게 몸을 꿈틀거립니다.]
[설화, ‘괴수의 목소리를 듣는 자’가 신음합니다.]
[설화, ‘동료의 신의를 갈망하는 자’가 고통스러워합니다.]

내가 얻은 설화들이 있듯, 일행들 또한 쌓아온 설화들이 있다.
같은 시나리오를 겪었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설화를 얻지는 않는다.
모두가 지닌 감수성이 다르기에, 쌓이는 이야기도 다르다.

“이곳은 다른 섬보다 시간 배율이 느리니, 천천히 훈련하셔도 됩니다. 급하게 마음 먹지 마세요. 통제 훈련을 완전히 마쳐야 성마대전에서 제대로 싸울 수 있습니다.”
“알겠어요.”

[설화, ‘마왕의 광신도’가 노래를 부릅니다.]

「오오 그때 독자 형은 말했다네에 나는 세상의 신이다 나를 따라오면 세상의 진실을 알게 되리」

“······그리고 길영이 깨면 꼭 말해주세요. 왜곡된 설화를 쌓으면 큰일 난다고.”

정희원이 키득거리며 웃어서, 나는 조금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장난이 아닙니다.”
“저도 장난 아니에요. 독자 씨는 스스로의 위치를 좀 제대로 자각할 필요가 있어요. 저 아이들에게 독자 씨가 어떤 존재인지 말이에요.”
“······.”
“독자 씨가 없었다면 아이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나는 훈련 중에도 서로의 손등을 꼬집고 있는 신유승과 이길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를 믿고, 불완전한 이야기를 함께 이야기하며 여기까지 와준 아이들.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설화가 당신에게 발아합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이는 장하영이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맺힌 채로, 그녀는 자신의 설화와 분투하고 있었다.

「듣고 싶지 않아. 사실은, 듣고 싶지 않아.」
「들어야 해. 그래도 들어야 해.」

흘러넘친 설화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도 들려왔다.
장하영이 무슨 설화를 보고 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이 섬에서, 장하영은 새로운 특성을 개화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특성으로 말미암아 ‘초월좌들의 왕’이 될 초석을 닦겠지.

“독자 씨.”
“예.”
“하영 씨한테 유독 무신경한 거 알죠?”
“본의는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우리한테 해준 이야기, 하영 씨에겐 해줬어요?”

일행들에겐 해준 이야기.
정희원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분명했다.

「이 세계는 소설을 기초로 구성되어 있고. 나는 그 소설을 읽은 유일한 독자다.」

나는 그 이야기를, 소수의 일행들에게만 전한 상태였다. 키리오스나 파천검성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 사실을 모르고, 장하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허리를 숙여 장하영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짙은 쌍꺼풀에 곱슬거리는 금발. [습도 보존]이 없어도 새하얗고 뽀송한 피부. 살짝 도톰한 볼과, 웃을 때는 매력적으로 들어가는 보조개. 묘하게 중성적인 분위기 때문에 쉽게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얼굴.」

‘멸살법’의 묘사들이, 과거의 내가 남겼던 댓글들이 이제 나에게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내가 그렸던 상상과 너무도 똑같은 그 모습이, 나에게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된다.

“어디까지 솔직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네?”

장하영에겐 사실을 말할 수가 없다.
내가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너를 만든 것은 나라고.
너는, 내가 단 댓글 때문에 태어난 존재라고······.

“최근 그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어쩌면 제가 읽던 소설이 현실이 된 게 아니라, 그 소설이 그냥 이 세계를 기록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어쩌면 그것은 내 바람일 것이다.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의 김독자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정희원을 향해, 나는 싱겁게 웃어 주었다.

“저는 희원 씨를 좋아합니다.”
“어, 저도요.”
“그리고 다른 일행들도요. 지금은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기적이라 죄송합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정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요. 독자 씨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죠. 이해해요.”
“감사합니다. 참, 일행들 일어나면 이걸 전해주세요.”
“이건······?”
“다음 시나리오에 대한 정보입니다.”

정희원에게 건넨 수첩은, 다음 시나리오인 ‘중섬’의 정보를 담은 것이었다.

“잠깐, 독자 씨 또······!”

그리고 눈치 빠른 정희원은, 내가 왜 지금 그것을 건네주는지 이미 깨달은 눈치였다.


*


“오늘쯤 올 줄 알았다.”

소섬을 떠나기 전, 나는 유호성을 찾아갔다. 어쨌든 설화 통제법을 알려준 것은 그였으니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라는 것은 거짓말이고, 사실은 목적이 있었다.

“왜 우리 일행들을 받아 주신 겁니까?”

대뜸 던진 내 질문에, 유호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늙은이의 변덕이다.”

열 살 남짓한 외형의 아이가 자신을 ‘늙은이’라 칭하는 모습은 무척 기이했지만, 몰개연적인 광경은 아니었다. 일권무적 유호성은 어지간한 마왕이나 대천사보다도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니까.
전설로만 알려진 <제 0무림>.
그 무림의 천하제일고수였던 사람이 바로 유호성이다.

“질문이 끝났다면 썩 꺼져라. 꼴도 보기 싫으니.”

처음과 같은 축객령이었다.

“같이 가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무슨 헛소리냐?”
“소섬 시나리오가 종료되면, 당신도 다음 시나리오에 진출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번 ‘성마대전’은 그런 시나리오니까요.”

유호성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원작에서도, 이곳 환생자들의 섬에서 ‘성마대전’이 일어난 회차가 있었다.

「신新과 구舊의 만남. 1세대와의 퓨전 시나리오!」

아마 지금도 바깥에선 그딴 슬로건을 내걸고 시나리오를 홍보 중일 것이다. 관리국의 의도였다. 말로만 듣던 1세대의 설화들을 시나리오의 홍보 소재로 사용하기 위한 수작.
하지만 관리국의 돈벌이는 때로 시대에 떠밀려 잊힌 망자들에겐 기회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이 기회에 섬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환생자들의 섬. <스타 스트림>의 살아있는 박물관. 이곳의 환생자들은 섬 안에서 영겁의 생을 사는 대신, 이 섬의 바깥으로는 나갈 수 없는 저주를 받는다.
그것이 ‘섬의 주인’과 그들 사이의 계약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지나간 시대의 성유물처럼 박제되어 있으실 겁니까?”

유호성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치 화를 참는 듯한 기색이었다.

“우리가 나가서······ 뭘 어쩌란 얘기지? 망자들이 강한 것은 섬 안에서의 이야기일 뿐이다. 1세대는 저물었어. 아무도 그런 이야기는 원하지 않아.”

확실히, 그의 말은 맞다.
대부분의 환생자들은 ‘1세대의 개연성’이 깃든 섬을 벗어나면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니까.
강기와 마법이 난무하고, 시스템의 지배를 받는 바깥 세계에서 1세대의 망자들은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당신에게 사사한 초월좌들은 바깥에서도 활약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만든 설화들을 그리워하는 존재들도 분명 있단 말입니다.”
“있겠지. 하지만 대세가 될 수는 없어.”
“꼭 대세가 되어야 합니까?”
“뭐?”
“대세가 되어야만 좋은 설화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당신이 언제부터 그런 것을 신경썼습니까?”

눈을 뜬 유호성의 눈에 불길이 일고 있었다.

“이제 와서 다시 성좌들의 노리개가 되라는 뜻이냐?”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내딛으면 나는 다른 마왕들처럼 머리가 터져 나갈 것이다. 그러니 한 발짝을 내딛을 수는 없다.
내가 내딛을 것은, 반 발짝이다.

“당신은 오랫동안 설화의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정확히 반 발짝 만큼, 나는 이 사람을 흔들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나머지 반 발짝을 본인이 내딛을 수 있을 테니까.

“이제 직접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으십니까?”

눈을 크게 뜬 유호성의 동공에 파문이 번지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미소만 지어준 후, 그대로 돌아섰다.

[설화, ‘돌멩이와 나’가 키득거리며 웃습니다.]

돌은 제대로 던졌으니, 이후의 일은 이제 내 몫이 아니다.
저 무시무시한 초월좌를 움직일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


“정말 인사도 없이 갈 거예요?”
“다들 집중하고 있는데 방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금방 또 만날 거고요. 먼저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나는 일행들에게 따로 작별 인사를 고하지 않고 정희원에게만 인사를 했다. 정희원은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이내 내 선택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꼭 살아남아요.”
“다시 만납시다.”

우리는 가볍게 주먹을 부딪쳤다.
떠나기 직전, 마을 주민들이 나를 마중했다.

“빵 좀 가져가겠나? 아침에 막 구운 건데.”
“돌을 좋아하는 것 같길래, 내가 모은 돌을 좀 가지고 왔네.”

그동안 친해진 몇몇 주민들이 나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었다. 멀어지는 마을 사람들 사이로 유호성의 모습이 보였다.
그 역시 뭔가가 바뀌길 바라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나와 일행들을 가르치기로 한 것이겠지.
그가 가르친 기술이 섬을 변화시키고, ‘성마대전’을 바꾸고, 마침내는 <스타 스트림>을 바꾸기를 염원하면서.

[설화, ‘만년의 환생자’가 이별을 노래합니다.]
[설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농부’가 당신을 배웅합니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는다.
세상에서 가장 먼 것들이 만나고 멀어지는 그 순간을, 설화는 기억한다.
그것이 이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돌아서는 순간 유호성의 전음이 들려왔다.

―‘섬의 주인’이 네게 관심을 가질지도 모른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나는 그저 가볍게 웃어 보였다.
눈앞엔 아까부터 같은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섬의 주인’이 당신에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마을의 화로 쪽으로 다가가자, 척준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가지.”
“좋습니다.”

어차피 중섬으로 전송되는 와중에 헤어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입장이라도 같이 한다니 뭔가 든든하다.

“다음 시나리오 말입니다만······.”

중섬의 시나리오는 본섬에서 있을 ‘성마대전’의 예비 시나리오였다.
내 말을 어떻게 오해했는지, 척준경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대는 마왕이었지. 좋다. 만약 그대와 싸우게 된다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하지.”
“아니, 그게 아니라······.”
“본좌는 진정한 대결을 할 때 사사로운 연에 얽매이지 않으니, 그대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아니, 제발 사사로운 인연에 얽매여주셨으면.
다음 시나리오에서 척준경의 표적이 내가 아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튜토리얼 시나리오를 종료하였습니다!]
[중섬으로의 전송을 시작합니다!]
[메인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갱신 메시지와 함께, 주변의 정경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당신은 3번 중섬에 도착했습니다.]

다행히 주변에 척준경은 보이지 않았다.
전송이 완료됨과 동시에 코끝을 찌르는 피비린내가 났다. 이미 죽은 성좌 및 화신들의 시체가 깔린 벌판.
주눅이 들 법한 광경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안도했다.
이번 시나리오는 늦게 시작하는 편이 더 유리하다. 미리 진출해 있던 강력한 성좌들과 마주칠 확률이 더 낮기 때문이다.

[해당 지역에는 ‘2세대 개연성’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가진 스킬들 중 일부가 개방됩니다.]
[당신의 종합 능력치 일부가 복원됩니다.]

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가 미미하게 넓어지고 키가 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정말 답답했는데, 이제야 조금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새로운 히든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나는 곧바로 시나리오 창을 열었다.

+

<히든 시나리오 ― 수식언 뺏기>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표적으로 지정된 적의 ‘수식언 목걸이’를 빼앗으시오(해당 참가자의 수식언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 진명으로 대체됩니다).
제한시간 : ―
보상 : 표적의 설화 하나를 랜덤으로 획득, 본섬으로의 진출 티켓 획득.
실패시 : ???

+

이번 시나리오는 ‘본섬’으로 진출하기 전 마지막 관문.
시나리오 내용은 간단했다. 표적으로 지정된 존재의 수식언 표식을 빼앗는 것.
내 목에도 어느새 은빛으로 빛나는 작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구원의 마왕]

수식언이 적힌 목걸이였다.

[현재 3번 중섬의 생존자는 262명입니다.]

262명. 내 예상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하지만 계획이 틀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강한 성좌들은 죄다 본섬으로 진출했을 테니까.
중요한 것은 내 표적이 누구냐인데, 어차피 강한 놈들은 죄다 사라졌으니 보나마나······.

[당신의 ‘주요 표적’이 결정되었습니다.]
[‘주요 표적’의 수식언은······.]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멀리서 달려오는 성좌들의 떼를 발견했다.
뭔가에 쫓기듯 허겁지겁 달아나는 무리들.
대지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파도가 갈라지듯 일군의 무리가 핏덩이가 되어 쪼개졌다. 피어 오르는 먼지 구름 사이로, 달아나는 성좌들을 쫓는 이가 보였다.

······이런 제기랄.
왜 저 자식이 아직도 여기 있어?





< Episode 68. 들리지 않는 말 (3) > 끝

< Episode 68. 들리지 않는 말 (4) >





빌어먹을, 저 자식이랑은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폭풍처럼 몰아치는 마력의 파랑을 보며 재빨리 시체의 산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허겁지겁 달아나는 무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미친 괴물이······!]
[으아아아악!]

처참하게 짓밟힌 성좌들이 단말마와 함께 사망했다. 너부러진 사체 조각 사이로 설화들이 마구 쏟아졌고, 화신들이 흘린 피가 대지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튀어! 빨리!]

그 뒤로 이 끔찍한 정경을 만들어 낸 학살자가 도착했다.
높게 쌓인 시체의 산 너머로도 보일 정도의 보랏빛 아우라.
나는 숨도 쉬지 못한 채 그 광경을 응시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으르렁거립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몸을 움츠립니다.]

내 설화들도 영향을 받을 만큼 엄청난 격의 소유자.

[설화, ‘멸마의 불꽃’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멸마의 불꽃. 악성향의 성좌들을 상대할 때 최강의 위력을 발휘하는 설화 중 하나.
나는 그 설화의 주인을 잘 알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백금발에 보랏빛 눈동자. 등 뒤로 펼쳐진 환한 대천사의 날개.」

<에덴>의 대천사들 중, 유일하게 내게 적대감을 보이는 존재.

[성좌, ‘타락의 구원자’가 구원의 심판을 행합니다.]

타락의 구원자, 대천사 미카엘.
나와 마찬가지로 ‘구원’의 수식언을 가진 존재.

쿠구구구구구!

대천사 미카엘이 든 [구원자의 검]이 세계를 갈랐다. 칼날에 깃든 보랏빛 안개가 산란했고, 퍼진 안개는 이내 불꽃으로 화해 대기를 통째로 태우기 시작했다. 불꽃은 순식간에 허공을 가로질러 달아난 성좌들에게 도달했다.

[아아아아아악!]

달아나던 대여섯 명의 성좌들이 비명을 지르며 무너졌다.
보랏빛 화염 속에 재가 되어 흩어지는 설화들.
죽은 성좌들의 자리에 남은 것은 은빛으로 빛나는 수식언 목걸이뿐이었다.
미카엘이 허공을 날아 떨어진 목걸이들을 확인했다.

[이번에도 없군.]

뭔가를 찾는 모습이었다.
미카엘은 기이한 안광을 발하며 주변을 살폈다.

[쥐새끼 한 마리가 있는 것 같은데······.]

만약 여기서 미카엘과 싸운다면, 내게 승산이 있을까?
설화 통제법을 익혀 꽤 강해졌지만, 아직 미카엘과 싸울 자신은 없었다.
미카엘은 <에덴> 최강의 전투 천사이자 신화급 성좌에 육박하는 존재.
본신의 힘을 전부 드러낸다면 <기간토마키아>에서 싸웠던 포세이돈에게도 밀리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내가 ‘멸살법’을 통해 녀석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다고 해도······.

고오오오!

미카엘의 두 눈에 은빛 안광이 떠올랐다.

[대천사의 눈].

마(魔)를 탐색하는, 대천사 고유의 스킬 중 하나. 2세대의 개연성이 풀리면서 해당 스킬의 사용이 가능해진 모양이었다.
도깨비불처럼 타오르는 녀석의 눈동자가 주변을 살폈다. 천천히 돌아간 녀석의 시야각이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심장이 조금씩 빨리 뛰기 시작했다.

달아나야 하나?

그 순간, 주민들이 건넨 돌멩이가 품속에서 꿈틀거렸다.

[설화, ‘돌멩이와 나’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설화의 효과로 당신의 존재감이 ‘돌멩이’와 흡사해집니다.]
[당신이 발산하는 마기가 주변의 자연에 동화됩니다.]

미카엘은 내가 숨어 있는 시체의 산을 아무렇지 않게 훑어보더니, 이내 눈길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착각이었나?]

미카엘은 거친 음색으로 불평하며 신형을 띄웠다.

[서기관은 괜히 쓸데없는 명령을 내려서······.]

활짝 펼쳐진 녀석의 날개. 미카엘의 신형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녀석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나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화, ‘돌멩이와 나’가 칭찬해달라고 조릅니다.]

“잘했어, 고마워.”

[설화, ‘돌멩이와 나’가 가륵가륵 웃습니다.]

이 설화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나 자신을 ‘돌멩이’ 같은 존재감으로 만드는 설화라니······.
기분은 좀 그렇지만 앞으로도 요긴하게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폐허가 된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재 3번 중섬의 생존자는 224명입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무려 38명이 학살을 당했다. 대부분은 위인급 성좌들이나 화신들이었지만, 희생자들 중에는 설화급 성좌도 섞여 있었다.
마치 재해가 휩쓸고 지나간 듯한 풍경.

이것이 ‘대천사’들의 진짜 힘이다.
고위급의 마왕들도 이 정도 힘을 가지고 있겠지.

「(큰일 날 뻔했네요. 여차하면 제가 ‘계시’라도 풀어볼까 했는데.)」

‘보고 계셨습니까?’

「(네, 쉬는 시간이라서요.)」

맑은 유상아의 목소리를 듣자, 조금 기운이 났다.
싸워야 할 적들이 아무리 강대하다고 해도, 나 역시 여러 장의 히든 카드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시체들 상태가 조금 이상하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늘어진 시체들을 내려다 보았다.
정확히는 시체들이 아니라, 시체들의 ‘수식언 목걸이’가 이상했다.
시체들의 수식언 목걸이는 대개 사라진 상태거나, 아니면 수식언의 일부가 훼손되어 있었다.
유상아가 물었다.

「(목걸이가 사라진 경우는 표적 사냥을 당한 거라 쳐도······ 수식언 일부만 사라진 건 뭘까요?)」

[오래된 □□□]
[늙은 □□□]
[□과 □□□의 □□]

몇몇 수식언들은 군데군데 글씨가 빠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그 글자만을 훔쳐 가기라도 한 것처럼.

‘편법을 쓰는 녀석들이 있는 겁니다.’

「(편법이요?)」

‘이번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을 기억하십니까?’

「(표적으로 지정된 상대방의 [수식언 목걸이]를 빼앗으시오,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런데 사실 꼭 표적을 사냥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수식언 목걸이]를 손에 넣는 거니까요.’

유상아가 깜짝 목소리로 말했다.

「(아, 설마······.)」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허공에서 메시지가 들려왔다.

[해당 지역에서는 ‘수식언 음절’의 수집이 가능합니다.]
[당신은 수집한 음절들로 새로운 목걸이를 제작할 수 있습니다.]

‘다른 성좌들의 수식언을 훔쳐, 표적의 [수식언 목걸이]를 만들어 내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수식언’이란 글자들의 조합이다.
가령 내 [구원의 마왕]이라는 수식언만 해도, [구] [원] [의] [마] [왕] 이라는 다섯 음절로 이루어져 있다.
말인 즉, 꼭 내 목걸이를 빼앗지 않아도 이 다섯 글자만 어떻게든 손에 넣는다면 같은 목걸이를 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왜 이런 편법을 관리국에서 허락했을까요?)」

‘정해진 표적에게서 목걸이를 빼앗으라는 조건은 시나리오 전개를 느리게 만드니까요. 벌써 표적이 시나리오에서 이탈했을 가능성도 있고. 그러면 일이 복잡해지겠죠.’

성좌들은 느린 것을 질색하고, 빠른 전개와 몰아치는 사이다를 선호한다.

「(그럼 이 자들은 전부 글자 하나 때문에 희생당한 거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강력한 성좌들은, 하위격의 성좌들을 학살해 표적의 수식언을 조합했을 것이다.
달아나는 표적을 찾는 것보다 그게 더 빠를 테니까.
나는 죽은 이들을 애도하는 대신, 이가 빠진 옥수수처럼 굴러다니는 수식언 목걸이들을 뒤졌다.
유상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식언 음절, ‘의’를 습득했습니다.]

쓸만한 글자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대부분은 흔한 조사들뿐. 아마 필요한 글자들은 다른 성좌들이 벌써 조합 재료로 수집해 갔을 것이다.
나는 미카엘이 휩쓸고 간 시체 더미를 뒤져 쓸만한 아이템 몇 개를 구했다.
역시 미카엘쯤 되는 성좌라면, 성유물이 아닌 아이템들은 버리는 모양이군.
과연 씀씀이가 다른 녀석이다. 그나저나······.

“······슬슬 밖으로 나오지 그래? 미카엘은 이미 멀어졌다고.”

텅 빈 폐허에 내 목소리가 조용히 퍼져 나갔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좋게 말할 때 그만 나오지?”

시체들 사이에, 나 말고도 숨어 있는 녀석이 하나 더 있었다. 완벽하게 기척을 감추고 있었지만, 나는 확신했다. 왜냐하면 아까 녀석이 숨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부스스, 하는 소리와 함께 시체 더미의 한쪽이 무너지며 누군가가 일어났다. 용케도 [대천사의 눈]에 걸리지 않은 화신이 그곳에 있었다.

“······구원의 마왕.”

상처투성이가 된 금발의 여인이 나를 노려보았다. 찢어진 팔뚝과 복부에 난 상처에서 끊임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다. 겉보기에도 위중한 상처였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 잘 안 풀리는 모양이네, 안나 크로프트.”


*


안나 크로프트가 처음 ‘멸살법’에 등장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아스가르드의 예언자.
[미래시]와 [과거시]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그녀는, 회귀자인 유중혁의 카운터 스킬을 갖춘 등장인물이었다.
때문에 ‘멸살법’의 후반부에 그녀는 유중혁의 주요한 라이벌로 등장한다.

······본래의 전개대로라면, 그렇다.

대의를 위해서는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여자. 최강의 화신 중 하나이자, 훗날 성좌들조차 두려워하는 ‘차라투스트라’의 주인이 되는 인물.

그런 인물이, 지금 무력한 상태로 내 눈앞에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미리 구매해뒀던 [대환단] 하나를 으깨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안나 크로프트가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약 30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나를 발견한 안나 크로프트는 거의 경기를 일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아직 상세가 위중하니까.”

안나 크로프트는 자신의 손발이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뒤, 나를 경계하며 뒤로 물러났다.

“왜 나를 구했죠?”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내가 왜 당신 질문에 답할 거라 생각하죠?”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내가 아는 침착한 ‘예언자’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왜 ‘성마대전’에 참가한 거지?”
“당연히 거대 설화를 얻기 위해서죠. 다른 이유가 있나요?”
“너는 본래 다른 ‘거대 설화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할 텐데. 아닌가?”

내 물음에, 안나 크로프트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원작대로라면 안나 크로프트는 성마대전에 참가하지 않아야 했다.
왜냐하면 또 다른 거대 설화 시나리오인 ‘라그나로크’에 참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건······.”

안나 크로프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는 이미 안나 크로프트의 대답을 들은 셈이었다.

“성운에서 버려졌군.”
“당신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야.”

으드득 이를 가는 목소리.
그 말에 담긴 분노를 나는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그동안 나는 몇 번인가 안나 크로프트와 충돌한 적이 있었고, 그 때문에 그녀가 살아갈 원작의 미래는 바뀌었다.
‘미식협’에서도, <기간토마키아>에서도, 그녀는 별다른 업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반복된 실패가 누적되며, 성운 <아스가르드>는 쓸모를 잃은 그녀를 홀로 <성마대전>에 내던진 것이다.

······나 때문인가.

내가 바꾼 미래는, 유중혁과 일행들만 변화시킨 것이 아니었다.
나는 경멸 가득한 눈길을 보내는 안나 크로프트를 향해 말했다.

“네가 여기서 ‘신화급 설화’를 얻어간다면 어때?”
“······뭐라고요?”
“그러면 아스가르드도 너를 재평가하지 않을까?”

신화급 설화. 그 말에 안나 크로프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죠?”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무슨 속셈이냐고 물었어요.”
“속셈 같은 건 없어. 나는 너랑 ‘차라투스트라’가 잘 성장하길 바라거든. 그뿐이야.”

[등장인물 ‘안나 크로프트’가 ‘거짓 간파 Lv.8’를 발동합니다.]
[등장인물 ‘안나 크로프트’가 해당 발언이 사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경악으로 물들었던 안나 크로프트의 표정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침착한 예언자의 눈빛이었다.

“······조건이 뭐죠?”

역시, 예언자는 얘기가 빨라서 좋다.

“나한테 능력을 좀 빌려줘.”

아마 안나 크로프트는 모를 것이다.
중섬에서 처음으로 만난 존재가 그녀라는 것을, 내가 얼마나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


섬의 고지대. 드높은 고목 나무 위에서, 아스모데우스는 턱을 매만지며 자신이 얻은 수식언 목걸이를 보고 있었다.

[□한의 사냥꾼]

본래 아스모데우스의 표적 수식언은 [원한의 사냥꾼]이었다.
그런데 다른 경쟁자들이 그의 표적을 먼저 사냥했고, 덕분에 아스모데우스는 [□□의 사냥□]이라는 누더기 목걸이를 얻게 되었다.

‘[한]이랑 [꾼]은 구했고······ 이제 [원]만 구하면 되는데······.’

문제는 이제 [원]의 음절을 수식언으로 가진 성좌가, 이 섬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권속들을 챙기느라 너무 늦게 참가한 영향이 크군.’

아스모데우스는 나무 꼭대기에서 섬의 곳곳을 조망하며 남은 성좌들을 탐색했다. 북쪽 숲에서 들려오는 폭발음. 아마 이 정도 규모라면 범인이 누구일지는 뻔했다. 또 ‘청소’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저쪽에 끼어드는 것도 재미있긴 하겠지만······.
그때, 아스모데우스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래시]에 따르면, 그자는 이 근처에 있어요.”
“그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이 활짝 피었다.
나무에서 펄쩍 뛰어내린 아스모데우스는 엄청난 가속으로 목소리의 주인공 앞에 내려섰다.
흰 코트의 사내와 백금발의 여인.
아스모데우스가 웃었다.

[구원의 마왕, 우린 결국 이렇게 만날 운명이었나 보군요.]

구[원]의 마왕.
그가 찾던 [원]의 주인이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사내는 전혀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난 싸우러 온 게 아냐, 아스모데우스.”

[그건 그대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음절 [원]이 필요하지?”

[······!]

“나를 죽이고 [원]을 얻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 하지만 그보다 훨씬 흥미로운 제안이 하나 있는데, 들어보겠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아스모데우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내게 제안을 한다는 것도 재미있는데, 흥미롭기까지 하다니. 얼른 들어보고 싶군요.]

아스모데우스의 목소리가 흥분와 광기로 얼룩져 있었다. 눈앞의 맛있는 먹이와, 더 맛있을지도 모르는 가상의 먹이를 놓고 경중을 가늠하는 표정.
아스모데우스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제안이 흥미롭지 않다면 당신은─]

“지금 이 섬에 음절 [원]을 가지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야.”

또 다른 [원]의 주인.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이 변했다.

[설마······.]

“‘성마대전’에 참가했다면, 좀 더 진지하게 임해야지. 안 그래?”

그 순간 아스모데우스의 눈에 비친 김독자는, 정말로 마왕처럼 웃고 있었다.

“‘대천사 사냥’, 혹시 관심 없어?”





< Episode 68. 들리지 않는 말 (4) > 끝

< Episode 69. 대천사 사냥 (1) >





Episode 69. 대천사 사냥


‘반항하는 녀석들이 없으니 재미도 없군.’

너부러진 전장의 시체들을 보며, 미카엘은 연초를 태우고 있었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잿빛 연기. 2세대의 장인들이 만든 담배. 미카엘이 악마 사냥이나 외유를 즐기는 것은 그가 좋아하는 담배를 마음껏 태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에덴에서 담배는 ‘악’이다.

그 자리에서 몇 대를 줄기차게 피워댄 미카엘은, 시체들의 살점에 담배를 비벼 끄며 생각했다.

‘너무 오래된 건가.’

「오래되긴. 이제 시작인데.」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미카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닥쳐.’

「어서, 날 깨워. 날 해방시키라고.」

미카엘은 새 담배를 꺼내 들었다.
오래 전부터 그에게 들려오는 설화의 목소리. 저 목소리를 들을 때면, 미카엘은 연초를 태우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은 때가 아냐.’

미카엘은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성운, <에덴>으로부터 새로운 계시가 내려왔습니다.]


*


[대천사 사냥이라, 꽤 흥미롭군요.]

내 이야기를 들은 아스모데우스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거기다 다른 대천사도 아닌 ‘타락의 구원자’라······ 진심입니까?]

“물론.”

[하지만 당신은 <에덴>과 친하지 않습니까? 그런 짓을 벌이면 그들과 적이 될 텐데요.]

“상관 없어. 어차피 난 ‘마왕’이고.”

여기서는 말이라도 이렇게 해야 했다. 다른 녀석도 아니고 아스모데우스를 설득해야 하니까.
실제로 아스모데우스는 꽤 고뇌하는 눈치였다.

“잘 생각해 봐. 글자 [원]이 필요하잖아? 덤으로 대천사의 설화도 얻을 수 있을 거고. 「위대한 대천사를 사냥한 자」.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않아?”

그러나 아스모데우스는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내 의중을 탐색하는 듯한 시선.
나는 이쯤에서 더 큰 수를 던지기로 했다.

“실망이네. ‘미식협’의 회원인 당신이라면 다른 성좌들과는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내 말에 아스모데우스의 아미가 크게 꿈틀거렸다.

[마왕 ‘아스모데우스’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해당 인물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상당히 높습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를 발동합니다!]

처음으로 듣는 메시지였다.
드디어, 일부 성좌들의 내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전지적 독자 시점’의 숙련치가 쌓인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스모데우스의 속마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주 건방지기 짝이 없어, 구원의 마왕.」

마치 끈적끈적한 늪 같은 내면.
그윽한 눈길로 나를 보는 녀석의 생각을 듣고 있자니, 영 속이 거북했다.
생각은 이어졌다.

「이토록 빠져주고픈 함정이라······.」

역시 아스모데우스가 괜히 ‘차기 대마왕 후보’에 올라간 것이 아니다.
녀석은 이미 내 제안이 함정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아마 구원의 마왕의 표적은 ‘타락의 구원자’겠지.」
「나와 다른 성좌들을 이용해 미카엘을 사냥한 후 수식언 목걸이를 얻으려는 것이고.」
「제법 머리를 쓰는 것이 가상하긴 한데, 그냥 넘어가 주긴 좀 괘씸하단 말이지.」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이 점차 싸늘하게 변해갔다.
역시 이 정도 설득으론 무리였던 모양이다.

「미카엘은 상대하기 까다로운 천사야. 아무리 2세대의 개연성 제약을 받는다 해도······.」

충돌하던 아스모데우스의 사고가 마침내 방향을 정하고 있었다. 아스모데우스의 긴 손톱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살기.
내 곁에 있던 안나 크로프트가 긴장하며 전투태세를 취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미래시]를 통해 뭔가를 본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슬슬 그녀의 [미래시]로는 관측 불가능한 일이 벌어질 때가 됐으니까.
그리고 다음 순간,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음?」

잠깐 굳어 있던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하고 있었다. 텅빈 허공 위에서 뭔가를 읽어내는 듯한 눈빛.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무수한 감정이 교차하던 아스모데우스의 눈이 나를 향했다.

[후후, 이것 참······ <스타 스트림>의 의지란 알 수가 없다니까.]

“······무슨 말이지?”

[그냥 혼잣말입니다. 좋아요.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천사 사냥’ 한번 해보죠.]

아스모데우스의 선언에, 곁에 있던 안나 크로프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입맛을 다신 아스모데우스는 누군가를 향해 열심히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아마 다른 ‘종말의 구도자’들과 통신 중이겠지.
그리고 내 머릿속에도, 누군가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저 잘했죠?)」

‘네, 고맙습니다. 상아 씨.’

아스모데우스가 변심한 이유.
아마 아스모데우스는 방금 ‘계시’를 읽었을 것이다.
정확히는, 나와 유상아가 위조하여 퍼트린 ‘가짜 계시’를.

「타락한 대천사는, 늙은 망자들의 섬에서 ‘소드 마스터’의 검에 죽게 될 것이다.」


*


“······또 계시가 내려왔다고?”

새로운 계시의 소식에 뒤집어진 것은 관리국도 마찬가지였다.
제일 먼저 영향을 받은 것은 판매 부서였다.

“갑자기 ‘소드 마스터’ 관련 스킬들의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스킬 재고 보충해! 관련 하청 업체한테 연락 돌려서, 양산 성흔들의 스킬 전환을 가속하라고 말해!”
“그, 그래도 재고가 부족합니다!”
“제길······ 설화 제작자들 다 어디 갔어? 아! 그 누구냐, ‘양산형 제작자’한테 부탁하면―”

비형은 그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곁에 있던 대도깨비 ‘바람’이 말했다.

[비형, 새로운 시나리오를 열게.]

“······이미 열었습니다.”

탁 트인 시나리오의 감시 화면에,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서브 시나리오 ― ‘대천사 사냥’이 시작되었습니다!]

숲과 벌판 곳곳에 숨어 있던 성좌들이 어딘가로 몰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방금 [도깨비 보따리]를 통해 ‘소드 마스터’ 관련 설화를 구매한 자들이었다.

“이런 시나리오를 열어도 괜찮은 겁니까? <에덴>에서 반발할 텐데요.”

[서기관의 승낙은 이미 받았다. 상관없다더군. 보수는 이미 지불했으니 거리낄 것도 없어.]

“자기네 천사를 시나리오 소재로 허가하다니······ 절대 선의 수장답지 않군요.”

[‘절대 선’은 원래 그런 법일세. 더 커다란 선을 위해, 보다 작은 선을 짓밟기도 하지.]

“그건 알고 있지만, 요즘 들어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무엇이 말인가?]

“<에덴>과 마계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이제 와서 ‘성마대전’ 시나리오에 동의한 것도 그렇고······ 그런 짓을 하면 모두 공멸하는 것 아닙니까?”

바람은 알 수 없는 눈길로 비형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런 말이 있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지구인들의 말이군요.”

[그래. 이야기의 영원성을 경배하는 말이지. 그러나 자네도 알겠지만, 그건 거짓말이야. 아무리 대단한 설화도 언젠가는 죽어. 단지 설화의 수명에 비해, 인간의 삶이란 것이 터무니없이 짧을 뿐이지.]

바람의 말투에는 깊은 세월의 회한이 담겨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성좌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말해온 도깨비의 목소리.

[알고 있는가? 한때 이 <스타 스트림>에 ‘선악’의 구도가 없는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았네.]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가?]

화면 속에서 미카엘의 검에 죽어 나가는 성좌들의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그 전투를 관음하는 성좌들이 있었다.
누군가를 후원하거나, 욕설을 내뱉거나, 즐거워하는 성좌들. 코인들이 오고 갔고, 쾌락과 절망의 비명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 정경 속에서, 누구도 선악을 논하지 않았다.

“아······.”

그 짧은 탄식 속에, 비형은 비로소 대도깨비의 지혜에 도달했다. 바람이 말했다.

[이것은 사라지지 않기 위한 전쟁일세.]


*


이틀 동안 나는 안나 크로프트와 사냥 준비를 했다.
아스모데우스는 우리와 함께 행동하지 않았다.

[이틀 뒤 자정. 사냥터에서 만나죠.]

그 말만 남기고 떠났을 뿐. 아마 녀석도 나름대로 천사 사냥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약속한 ‘대천사 사냥’의 장소는 섬의 북쪽에 위치한 ‘풍요의 숲’이었다.
숲에 도착하기 직전, 안나 크로프트가 물었다.

“정말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당신이 도와줄 거잖아.”
“나라고 모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당신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텐데요.”
“지금은 단기 미래만 읽어도 충분해.”

내가 피해가야 할 것은 단기적인 변수들뿐.
그리고 ‘안나 크로프트’의 [미래시]는, 그런 변수들을 피해가기에 적합한 스킬이었다.

“······내가 배신하면 어쩌려고 그러죠? 만약 내 ‘표적’이 당신이라면―”
“아닌 거 알고 있어.”

애초에 안나 크로프트의 표적은 내가 될 수 없다.
그녀는 나보다 먼저 시나리오에 투입됐으니까.
안나 크로프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제게 반말을 하기로 한 거죠?”
“그러고 보니 그러네. ······다시 존댓말 해드릴까요?”
“가증스러우니 그만두시죠.”
“참, 오늘 [미래시]는 몇 번이나 더 쓸 수 있습니까?”

어이없다는 듯 나를 노려보던 안나 크로프트가 대답했다.

“세 번이요.”
“함부로 쓰지 말고, 내가 신호하면 사용해줘요.”
“내가 왜 당신 말을―”
“내 말을 들어야, 이 빌어먹을 시나리오가 끝날 테니까.”

멀리서 성좌들과 화신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벌써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끔찍한 폭음과 함께, 고고한 대천사의 진언이 숲 전체를 진동시켰다.

[감히 나를 ‘시나리오’의 소재로 쓰겠다고?]

나와 안나 크로프트는 인근의 풀숲에 숨어서 전장을 훔쳐보았다.
아직 아스모데우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3번 섬에 남은 거의 모든 참가자들이 ‘풍요의 숲’으로 몰려와 있었다.
대부분 ‘악’ 또는 ‘중립’ 계통의 성좌들이었다. 위인급 성좌들 다수에, 하위격의 마왕도 눈에 띄었다.

68번째 마계의 ‘무가치한 암흑’ 벨리알.

아마 아스모데우스의 부름을 받고 온 모양이었다.
녀석을 비롯해 성좌들의 손에는 죄다 2세대의 롱소드가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

[쳐라!]

벨리알을 필두로 달려드는 성좌들의 모습에, 미카엘이 노기를 터뜨렸다.

[고작 하위격의 마왕 따위가······ 단체로 돌아버린 모양이구나.]

미카엘은 가공할 풍압으로 벨리알을 날려버린 후, 자신의 격을 발동해 바람의 결계를 발동했다.
그런데 결계를 가르고 달려드는 이들이 있었다.

[성좌, ‘노력 전문가’가 스킬 ‘양산형 검강’을 발동합니다!]

참가자들이 쥔 롱소드에서, 일제히 같은 스킬이 발동했다.
샛노란, 혹은 새파란 아우라를 이루는 검강의 물결이 미카엘의 격을 헤치고 진격했다.
미카엘이 조소했다.

[······에테르 블레이드? 미친놈들이군.]

내가 유상아를 통해 흘린 계시는 위조된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어떤 ‘소드 마스터’라 해도 저 대천사 미카엘을 죽일 수 있을 턱이 없다.
하지만 가짜 계시라고 해서, 아주 가능성이 없는 헛소리는 또 아니었다.

츠츠츠츠츳!

[2세대의 개연성이 특정 스킬에 강력한 버프 효과를 부여합니다!]

지금은 초월좌들만의 전유물로 천대받는 [검강].
하지만 한때 2세대의 세계관에서, 검강은 최강의 스킬이었다.

[효과가 있다! 계속 베어라!]

치이이이익!

미카엘이 만든 바람의 결계가 검강의 세례에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당황한 미카엘이 새로운 설화를 발동하려는 순간, 허공에서 새카만 에테르의 섬광이 그어졌다.

스가가각!

마치 공간을 통째로 잘라내는 듯한 마법 같은 선분.
으스러지는 결계 사이로 마왕의 긴 손톱 자국이 남았다.

[늘 궁금했었죠. 날개가 사라진 대천사는 과연 날 수 있을까, 없을까?]

찢어진 미카엘의 한쪽 날개가 허공에서 힘겹게 움직였다.
흩날리는 깃털들 사이로 아스모데우스가 웃었다.

[오늘 그 답을 알게 됐군요. 날개의 유무는, 대천사들의 비행 능력과 무관하다.]
[······아스모데우스!]

광기에 휩싸인 미카엘이 아스모데우스를 향해 마력을 퍼부었다. 하지만 화신체의 결손으로 인해 균형을 잃은 미카엘은 정확한 타격점을 찾지 못하고 힘을 낭비하기 시작했다.
반면 아스모데우스는 성좌들을 이용해 미카엘에게 착실히 데미지를 누적시키고 있었다.

역시 아스모데우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전투였다.

“가세하죠. 이대로면 저 마왕에게 신화급 설화를 빼앗기고 말 거예요.”
“아직은 아닙니다.”

내 태연한 목소리에 안나 크로프트는 당황한 눈치였다.
아직 금일분의 [미래시]를 사용하지 않은 그녀는 모를 것이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이 어떤 것인지 말이다.

[설화, ‘악을 멸하는 악’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미카엘의 전신에 새카만 아우라가 봉오리처럼 모여들었다.
대천사의 것이라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탁기.

「그 선(善)은, 악을 멸하기 위해 악의 길을 택했으니.」

뭔가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성좌들이 맹공을 퍼부었으나, 검은 봉오리에는 약간의 흠집도 나지 않았다.
마치 양분을 받아먹듯 힘을 흡수한 봉오리가, 천천히 개화하기 시작했다.

[대천사 미카엘이 타락합니다!]

그 압도적인 정경을 보며, 나는 ‘멸살법’의 문장을 떠올렸다.

「이 세계의 성좌들이 모두 ‘성좌’와 ‘마왕’으로만 구별되지는 않는다. 오직 딱 하나. 성좌와 마왕의 힘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

오래된 <에덴>의 역사 속, 처음으로 성유과를 먹은 존재.

「그의 진체를 본 악마는,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으니.」

쿠구구구구구!

“······맙소사.”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새카만 날개, 마왕을 상징하는 뿔.

[마왕, ‘타락한 천사들의 왕’이 전장을 응시합니다.]

타락한 천사들의 왕.
그것은 마왕이 된 대천사 미카엘의 수식언이었다.

콰아아아아!

간단한 손짓 한 번에, 악계통의 성좌들이 모조리 쓸려나갔다.
같은 마(魔)라고 해도 급이 다르다. 저것이 바로, 신화급 대천사인 ‘미카엘’의 진짜 힘.
심지어 저 아스모데우스조차 굳어진 표정이었다.

[이건······ 계시에 없던 일인데.]

이어서 미카엘의 격이 쏟아졌고 몇몇 마왕들이 나가떨어졌다.
아스모데우스의 화신체도 커다란 충격을 받았는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입니다.”
“지금 돌입하자고요?”
“네.”
“······방금 못 봤어요? 아무리 당신 표적이 저 대천사라지만―”
“왜 내 표적이 ‘대천사’라고 생각합니까?”

내 말에, 안나 크로프트가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대악마의 눈동자]가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설마······?”

멀리서 실이 끊어진 연처럼 나가떨어지는 아스모데우스의 신형이 보였다.
처음부터, 타락한 대천사를 상대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신화급 설화를 가지고 있는 것은, 대천사만이 아니다.

[당신의 표적 수식언은 ‘정욕과 격노의 마신’입니다.]

허공에 떠오르는 메시지와 함께, 내가 검을 뽑으며 말했다.

“자, 신화급 설화를 얻으러 가보죠.”





< Episode 69. 대천사 사냥 (1) > 끝

< Episode 69. 대천사 사냥 (2) >





나는 안나 크로프트와 함께 곧장 전장으로 움직였다.
광기에 휩싸인 미카엘은 주변의 성좌와 화신들을 아예 찢어 죽이고 있었다.
오직 악을 멸하기 위해 태어난 악.
타락 천사가 된 미카엘은, 순수한 전투 능력만 따지면 포세이돈이나 하데스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3번 중섬’의 상황에 주목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걱정스레 바라봅니다.]

이미 본섬에 진출했거나, 아직 ‘성마대전’에 참가하지 않은 성좌들이 하나둘 이쪽을 주목했다.
슬슬 미카엘의 사정권 안으로 들어갔을 무렵, 안나 크로프트가 말했다.

“더이상 다가가면 위험해요. 내 [기도비닉] 스킬로는······.”

나는 안나 크로프트의 손목을 붙잡았다.

[설화, ‘돌멩이와 나’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돌멩이와 나’가 ‘안나 크로프트’의 존재를 의아해합니다.]

“이 여자도 부탁해.”

[설화, ‘돌멩이와 나’가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설화, ‘돌멩이와 나’가 ‘안나 크로프트’에게 자신의 효과를 공유했습니다.]

우리는 당당히 전장을 활보했다.
미카엘이나 다른 성좌들은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그들의 눈에는 돌멩이 두 개가 바닥을 굴러다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안나 크로프트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이 설화는 뭐죠?”
“돌멩이가 되는 설화.”

설명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만 말했다.
전장의 길목마다 성좌들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간혹 살아 있는 놈도 보였다.

68번째 마계의 마왕, ‘무가치한 암흑’ 벨리알.

미카엘의 공격에 당한 녀석은 설화를 줄줄 흘리며 겨우 몸을 가누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나를 노리고 있었지.

푸슉!

나는 태연히 녀석의 몸에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찔러 넣었다.

[당신은 68번째 마계의 마왕을 처치했습니다!]
[해당 마왕은 당신보다 서열이 낮아 서열 변동이 없습니다.]
[수식언 목걸이, ‘무가치한 암흑’을 획득하였습니다.]
[당신은 다섯 개의 마왕 화신체를 살해하였습니다.]
[당신에게 새로운 특성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당신 마왕이잖아요. 그렇게 막 죽여도 돼요?”
“마왕 그만두죠 뭐.”

태연자약하게 지껄이는 나를 보며 안나 크로프트는 황당하다는 얼굴이었다.

쿠구구구구!

뒤쪽에서 미카엘의 격이 폭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2세대의 개연성이 조금만 더 약했어도, 숲 전체가 날아가 버렸을 힘이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움직이죠. 아스모데우스도 비슷한 상태일 겁니다.”

숲길의 지척으로 마왕의 설화 파편들이 떨어져 있었다. 벨리알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고위급 마왕의 흔적. 누구의 것인지는 명백했다.
얼마간 풀숲을 헤치자, 커다란 고목나무 아래에 기대어 있는 신형이 보였다.

[······역시 왔군요.]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 아스모데우스는 웃고 있었다.
화신체의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잘려나가고, 흉부가 완전히 으깨어진 녀석은 그야말로 간신히 살아있는 상태였다.

[미카엘이 설마 ‘타락’의 권능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그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죠?]

아스모데우스는, 이제야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젠 내 목걸이를 가져갈 거고요.]

“그래.”

아스모데우스의 수식언 목걸이가 뒤집힌 채 반짝이고 있었다. 만약 이 목걸이의 모든 글자를 내가 소유하게 된다면, 아스모데우스는 이번 ‘성마대전’에서 탈락하게 될 것이다.

[그럼 얼른 끝내시죠.]

아스모데우스의 화신체는 열여섯쯤 되어 보이는 체구의 소녀였다. 이 화신체를 죽이더라도 아스모데우스의 진체는 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화신체는 확실히 죽는다.
그리고 이 화신체는 한명오 부장의 딸이었다.

“안 죽여. 대신 거래를 하지.”

[거래? 이제 와서 무슨 거래를?]

“내게 신화급 설화 하나를 양도해. 그러면 널 시나리오에서 탈락시키지 않을게.”

아스모데우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입에서 울컥 피가 쏟아졌다.

[아주 재미있는 발상이군요.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겁니까?]

“맞아.”

찰나간 아스모데우스와 나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나를 쏘아보던 아스모데우스의 눈빛에 희미한 탄식이 흘렀다.

[그대는 이제 완벽한 ‘마왕’이 되었군요. 72좌의 누구도, 그대가 마왕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겠어.]

“칭찬 고맙군.”

[하지만 당신의 제안엔 문제가 있어요. 당신 표적은 나인데, 무슨 수로 나를 탈락시키지 않겠다는 거죠?]

“모든 글자를 빼앗기지만 않으면 시나리오에서 탈락하지 않아. 네게 글자 하나를 남겨 주겠어.”

내가 남겨 주려는 글자는 [의]였다. 마침 내가 여분으로 가지고 있는 글자. 아스모데우스가 말했다.

[그것참 눈물나게 고맙군요.]

나는 녀석의 수식언 목걸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스모데우스의 목걸이에서, 하나씩 음절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수식언 음절, ‘정’을 습득했습니다.]
[수식언 음절, ‘욕’을 습득했습니다.]
[수식언 음절, ‘과’를 습득했습니다.]
[수식언 음절, ‘격’을 습득했습니다.]
······.

음절이 반쯤 넘어왔을 무렵, 아스모데우스가 내 수식언을 보며 말했다. 정확히는 내 수식언의 [원]을 보고 있을 것이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탐나는 수식언이군요.]

나는 수식언 목걸이를 옷 안으로 감추며 말했다.

“미카엘을 죽이려 하지 말고, 녀석에게서 글자 하나만 빼앗아 봐. 당신이라면 그 정도는 가능하잖아?”

[글자 하나라······ 혹시 이걸 말하는 건가요?]

순간, 녀석의 멀쩡한 한쪽 손에 쥐어진 목걸이가 보였다.

[원한의 사냥꾼].

모든 글자가 모인 녀석의 ‘표적 목걸이’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왕 ‘정욕과 격노의 마신’이 시나리오 클리어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시나리오 전송이 시작됩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내 수식언 목걸이를 살폈다.
[구원의 마왕].
즉, 저건 내가 가진 [원]이 아니었다.

[미카엘이 타락한 순간 알았어요. 이건 함정이라는 걸.]

······설마, 그 짧은 사이에?
시나리오 전송이 시작된 아스모데우스의 화신체가 흩어지고 있었다.

[그런 내가, 이런 상황을 대비하지 않았을 것 같나요?]

아스모데우스는, 처음부터 [원]만을 획득할 생각으로 미카엘과 싸웠던 것이다.
뒤늦게 녀석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아스모데우스는 이미 내가 간섭 불가능한 상태였다.

[행운을 빌죠, 구원의 마왕. 그대도 이제 ‘한 글자’만 더 모으면 되니까.]

휘황한 빛무리와 함께 아스모데우스의 몸이 사라졌다. 그리고 내게 남은 것은, 녀석이 남긴 수식언 글자들뿐이었다.

[정욕과 격노의 마□]

빌어먹을, 하필 ‘신’이······.
아스모데우스를 너무 얕봤다.
고개를 돌리자, 안나 크로프트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랑 한 약속은―.”
“쉿.”

나는 반사적으로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뭔가가 이상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 풀숲은 아비규환의 비명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지금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마치 주변에 있던 모든 생명이 사멸하기라도 한 것처럼.
인근의 풀잎이 일제히 일어서는 순간, 내 솜털도 함께 일어섰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외쳤다.

“[미래시]를 발동해!”

붉게 빛나는 [대악마의 눈]. 안나 크로프트의 신형이 나를 붙든 채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백여 미터를 달린 안나 크로프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 역시 같은 광경을 보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

우리가 방금 전까지 있던 바로 그 지역에서, 엄청난 대폭발이 발생하고 있었다. 결계처럼 만들어진 보랏빛 반원이, 순식간에 찌그러들며 그 안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었다.

[저지먼트 필드(Judgement field)].

오직 ‘타락’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멸마의 공능.
안나 크로프트가 절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이즈가 너무 많아서 미래가 보이질 않아요!”
“다 읽을 필요 없으니까, 미카엘의 공격 패턴만 읽어 봐요.”
“아직도 싸울 생각이에요? 그 돌멩이가 되자인가 뭔가 하는 설화 써서 도망가면―”
“방금 저 녀석이 돌멩이도 공격하는 거 못 봤습니까?”

보랏빛 연기가 피어오르는 분화구 속에서, 나를 죽일 대천사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선악과]로 인해 촉발된 미카엘의 설화가, 녀석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타락한 대천사는 이미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구··· 원···의 ···마왕.]

그저 멀리서 들은 것만으로도 오싹한 진언.

“······역시 제정신이 아니네.”
“망할, 당신 때문에 다 틀렸어!”
“두 번째 플랜으로 가죠.”
“두 번째? 그런 건 말해준 적 없잖아요!”
“지금부터 만들어 봅······.”

내 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몰아친 광풍이 안나 크로프트의 신형을 저만치 날려버렸다.
멀리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미카엘의 거구가 보였다.

[‘마왕화’를 발동합니다!]

쩌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솟아오르는 검은색 날개와 마왕의 뿔.
2세대의 개연성만큼, 내 격도 더 강해져 있었다. 물론, 이 정도 격만으로 부딪쳤다간 개죽음이다.

[특성, ‘시나리오의 해석자’가 발동합니다.]

하지만 녀석과 부딪칠 것은 내가 아니라.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내가 쌓아온 ‘설화’들이었다.

콰아아아아앙!

내 왼손에 실린 「마계의 봄」이 미카엘의 왼손과 충돌했다. 거의 동시에 [부러지지 않는 신념]에 담긴 성화의 불꽃이 미카엘의 몸체를 노렸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즐거운 비명을 지릅니다!]

순간 놀란 미카엘이 몸을 뒤틀며 물러났다.
‘거대 설화’의 힘은 대단했다. 아무리 2세대의 개연성 제약을 받고 있다고 해도, 저 괴물을 맞상대할 수 있을 정도라니. 유호성에게 받은 수련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설화, ‘악을 멸하는 악’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에덴의 악마’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강력한 설화를 가진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쿠구구구구!

미카엘을 중심으로 흘러나오는 엄청난 압력에 내 모든 설화들이 신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녀석을 정면으로 상대하기엔, 내가 가진 격이 조금 모자랐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분한 듯 포효합니다!]

미안하다. 내가 조금 더 강했더라면, 네가 참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뒤이어 쏟아지는 맹공에, 나는 속이 뒤집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을 지킵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당신을 지킵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당신을 지킵니다.]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당신을 지킵니다.]
······.

나를 대신해서 내 설화들이 녀석의 공격을 감당하고 있었다.
짧은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들이 있었다.

[영원불멸의 지옥도]를 쓴다면?
[전인화]와 [바람의 길]을 동시에 발동한다면?
[책갈피]를 활성화해 다른 인물들을 불러온다면?

어느 계책으로도 뾰족한 방도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방법은 그것뿐인가.
또 그런 꼴이 되고 싶진 않았는데.

피를 한 바가지 토하며 물러서는 나에게, 미카엘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마무리를 결심한 모양인지, 녀석의 한쪽 손에서 보랏빛 아우라가 흘러나왔다.
내 주변으로 보랏빛 결계의 반원이 생성되었다. 한 번 발동하면,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성흔. 모든 악을 처벌하는 심판장, [저지먼트 필드]가 펼쳐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처형은 압착형(壓搾刑)인 모양이었다.

“······미카엘.”

그런데 미카엘은 알까.
녀석이 저 성흔을 발동하기를, 나는 줄곧 기다렸다는 것을.

“아니, ······타락 천사 ‘루시퍼’.”

[마왕, ‘타락 천사들의 왕’이 그 이름을 싫어합니다!]

본래 루시퍼는 본래의 <성마대전>을 파멸로 이끌 인물 중 하나였다.

「세상의 그 어떤 악도, ‘타락 천사들의 왕’을 꺾을 수는 없다.」

악을 상대할 때 더욱 강해지는 악. 그리하여, 끝내는 모든 악을 집어삼키는 괴물. 설령 서열 10위권의 고위급 마왕이라고 해도 이 녀석을 죽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녀석은, 악을 상대할 때만큼은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도 강력해지니까.

「하지만, 그 대상이 ‘악’이 아니라면 어떨까.」

모든 강력한 힘에는 대가가 있다.
이제 십여 미터도 채 남지 않은 저지먼트 필드를 보며, 나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내가 꺼낸 것은, 한 알의 사과였다.
<기간토마키아>가 일어나기 직전, ‘하늘의 서기관’으로부터 받은 <에덴>의 성유과.

“이 맛이 그립지 않아?”

미카엘의 눈빛이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아마 이 사과를 알아보겠지.
왜냐하면 그 역시, 이 사과를 먹은 적이 있을 테니까.

“천사가 [선악과]를 먹으면 ‘마왕화’가 진행되지. 그런데, ‘마왕’이 ‘선악과’를 먹으면 어떻게 될까?”

당황한 미카엘이 황급히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저지먼트 필드]가 내 몸을 우그러뜨리는 바로 그 순간.

아삭,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이빨이 [선악과]를 깨물었다.





< Episode 69. 대천사 사냥 (2) > 끝

< Episode 69. 대천사 사냥 (3) >





그것은 오래된 기억이다.

―서기관, 난 언제까지 이 전쟁을 반복해야 하지? 결국 승자도 없는 전쟁을······.

그 질문을 던진 것이 언제였는지, 몇 번째였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미카엘. 깊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억 속에서 메타트론은 늘 그렇게 미소할 뿐이었다.
몇백 년을, 어쩌면 몇천 년을.
자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시간의 저편에서부터, 메타트론은 줄곧 그런 미소로 존재했다.

―눈앞의 악을 증오하는 데 집중하십시오. 그게 당신의 ‘시나리오’입니다.

······내 시나리오.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악마를 사냥해왔더라.
미카엘은 오래전, 자신의 탄생을 잊었다.

[‘선악과’의 힘이 폭주합니다.]

기억은 늘 부정확하다.
떠오르는 것은, 그가 죽인 마왕들의 마지막 말들.

―통탄스럽구나, 가엾은 <에덴>의 사도여. 정녕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21번째 마계의 주인이었던 이.

―으하하하핫! 너는 우리와 같다! 드디어 메타트론이 미쳤구나!

9번째 마계의 주인이었던 이.

―너는 ‘몇 번째’ 미카엘이냐?

4번째 마계의 주인이었던 이.
이름을 잊은 마왕들의 얼굴 너머로, 자신의 곁에서 죽어간 동료 대천사들이 보인다.

―미카엘, 정신 차려. 제발······. 이건 아니야.

천사와 마왕.
파편처럼 조각난 얼굴들은 이내 수만 피스의 퍼즐들로 흩어져, 다시 하나의 거대한 상(狀)을 이룬다.
억겁의 세월 동안 대적해온 선과 악.
그 세월을 고스란히 견뎌낸 메타트론의 얼굴이, 수천 년 전과 똑같은 표정으로 미소짓고 있었다.

―한 가지만 주의하십시오. 이 힘을 쓸 때는, 절대로······.

[‘선악과’의 힘이 폭주합니다!]

기억이 한꺼번에 쓸려나가며, 미카엘은 머리가 잘근잘근 찢어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휩싸였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세상의 모든 선이 절규하고 있었다.
들풀도, 나무도, 벌레들도, 만물에 깃든 모든 종류의 선(善)이 슬픔에 젖어 비탄의 울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절대 선에 속한 대상에게 죽음에 이르는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설화, ‘악을 멸하는 악’이 비통하게 울부짖습니다!]
[당신은 금기를 범했습니다!]
[당신에게 끔찍한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피투성이가 된 잿빛의 천사가, 미카엘을 향해 웃고 있었다.


*


[선악과]를 깨문 순간, 세상의 정경이 변했다.

[당신은 금단의 성유과를 섭취하였습니다.]
[당신은 ‘마왕’입니다.]
[‘선악과’의 힘이 당신에게 ‘절대 선’의 비밀을 속삭입니다.]

엄청난 마력의 폭풍과 함께, 귓가에 들려오는 메시지.

[당신은 선악(善惡)의 모든 국면을 경험하였습니다!]
[당신은 불가능한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새로운 설화의 가능성을 획득하였습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업적에 놀랍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두 번째 수식언을 고민합니다.]

마왕이 된 이후,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성좌의 감각.

[‘마왕화’를 해제합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별자리를 온전히 복원합니다.]

새카만 하늘 속에서 찬연하게 빛나는 별이 보였다.
나의 별이었다.

[‘천사화’를 발동합니다.]

별빛을 받은 내 몸이 환하게 빛났다. 검게 물들어 있던 깃털 날개가 새하얗게 탈색되고, 머리 위로 자랐던 악마의 뿔이 사그라들었다. 온화하고 청명한 에너지가 내 화신체 전체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내게 ‘천사의 격’을 향유할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내 몸집만큼 쪼그라든 [저지먼트 필드]가, 내 전신을 우그러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꽈드드드드득!

끔찍한 통증과 함께, 막 돋아난 날개가 구겨진다.
공간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팔이, 다리가 형편없이 우그러든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을 보호합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당신을 보호합니다.]

당장이라도 찌그러들 것 같은 그 거력을, 나는 거대 설화의 힘으로 겨우 버텨냈다.

[‘제4의 벽’이 당신의 정신을 보호합니다!]
[2세대의 개연성이 ‘제4의 벽’의 능력을 약화시킵니다!]

머릿속에 몇 번이나 번개가 쳤다.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 같았고, 시야가 어둑해졌다가 되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견뎠다. 견뎌야만 했다.
그래야, 곧 찾아올 단 한 번의 기회를 붙잡을 수 있으니까.

「‘타락한 천사들의 왕’은 악에게 강한 대신, 하나의 약점을 지닌다.」

내 몸을 쥐어짜는 [저지먼트 필드]의 힘이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절대 악을 멸하는 저 무시무시한 괴물의 유일한 약점.

「‘타락한 천사들의 왕’은, 선 성향의 대상을 공격할 수 없다.」

만약, 녀석이 이 규칙을 깨고 선을 공격한다면······.

쩌저저저저적!

마왕조차 짜부라트리는 절대의 성흔, [저지먼트 필드]가 깨지고 있었다.
나는 번데기에서 탈출하는 나방처럼 결계를 부수며 날개를 펼쳤다.
바닥에 주저앉은 미카엘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마왕, ‘타락한 천사들의 왕’이 고통 속에 몸부림칩니다!]

기회는 지금뿐.

“안나 크로프트!”

내 말과 함께, 미카엘의 배후로 금발의 여인이 달려갔다.
붉게 달아오른 눈동자. [미래시]를 통해 뭔가를 읽어낸 그녀가, 자신의 모든 격을 방출하며 돌진하고 있었다.
나는 남은 모든 힘을 두 다리에 모아 앞으로 넘어지듯 쏘아져 나갔다.
평소였다면 미카엘이 아무리 무력해졌다 해도 이 전력으로 녀석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섬이라면 다르다.

[등장인물, ‘안나 크로프트’가 ‘검강 Lv.9’을 발동합니다!]

약속이나 한 듯 단검의 끝으로 줄기차게 강기 다발을 뽑아내는 안나 크로프트.
나는 넝마가 된 오른팔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았다.

[설화 파편, ‘불쌍한 소드 마스터의 오른팔’이 발동합니다!]

언젠가 [라마르크의 기린] 특성을 통해 획득해둔 설화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2세대의 개연성이 당신의 재능을 강화시킵니다!]

폭발하는 [백청강기]의 마력이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끄트머리에서 십여 미터나 솟아났다.
간신히 수평으로 쥔 검이, 미카엘의 왼쪽 목으로 반쯤 파고든다.
그와 거의 동시에 안나 크로프트의 단검이 미카엘의 오른쪽 목덜미를 갈랐다.

하늘 위로 솟구치는 선혈.
미카엘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당신은 ‘타락한 천사들의 왕’의 176번째 화신체를 처치하였습니다.]
[당신은 신화급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업적에 놀랐습니다!]
[당신은 ‘가짜 계시’를 실현하였습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등급 표기가 불가능한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계시의 설계자’를 획득하였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의식이 흩어졌다.


*


눈을 뜨자, 나는 새하얀 공간 속에 내던져져 있었다.
허공에서 한 줄의 문장이 떠올랐다.

「선악과를 먹은 존재는, 자신이 외면하고 있던 진실을 보게 된다.」

······여긴 어디지?
물을 틈도 없이, 왼쪽의 벽면 위로 영상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멸살법’의 장면들이었다.
유중혁과 일행들이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모습.
아직은 내가 없던 ‘멸살법’의 세계. 온갖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적을 도륙하는 일행들이 그곳에 있었다.

[‘선악과’가 말합니다. ‘저 이야기는 네 삶이었어.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이야기는 나의 삶이었다.
나는 저것을 읽으며 자랐다.

[‘선악과’가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분명 너의 삶이었지.’]

오른쪽 벽면이 물결치며 새로운 화면이 떠올랐다.
열다섯쯤 되어 보이는 소년. 소년은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로 뭔가를 입력하고 있었다.

―중혁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설마 또 죽는 거 아니죠?

유중혁의 164회차.
중학교 3학년. 이지혜를 동경하던 내가 댓글을 쓰고 있었다.

―아... 진짜... 고구마 그만 먹고 싶어요.

유중혁의 488회차.
고등학교 2학년. 김남운의 나이가 된 내가 댓글을 쓰고 있었다.

.
.
.

유중혁의 회차가 넘어갈 때마다, 나도 자라났다.
녀석의 죽음을 보며 수염이 자랐고, 녀석의 희생을 보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다시, 녀석의 이야기를 보며······.

―이번 회차에서는 그냥 쟤 죽이면 안 될까요?

······내가 저런 댓글도 썼다고?

―이야기가 산으로 가는데, 이쯤에서 회귀 ㄱㄱ

유중혁의 862회차.
대학생이 된 내가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중혁이는 죽겠죠?

내가 저지른 말들이 그곳에 전시되고 있었다.
삶에 치이고, 생활에 지쳤다는 핑계로, 내가 내뱉었던 말들이 고스란히 머릿속에 떠올랐다.

―초반 시나리오는 이제 스킵해 주세요. 지겨워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악과’가 말합니다. ‘저것이, 네 삶의 전부인 것처럼 말했던 이야기의 가치야.’]

손끝이 떨려온다.
왼쪽 벽면에서는 유중혁의 싸움이, 오른쪽 벽면에서는 그런 유중혁을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그리고 중앙의 벽면에서,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구경할 테면 얼마든지 구경해보라지. 네놈들이 낼 관람료는 결국 네놈들의 목숨이 될 테니까.”」

[‘선악과’가 말합니다. ‘정말로 네가 ■■를 이야기할 자격이 있을까?’]

화면 위로, 내 말들이 계속해서 떠오르고 있었다.

「“유중혁, 나는 ‘네가 모르는 미래’를 알고 있다.”」

「“중혁아, 우린 세계를 구할 수 있다. 알지?”」

「“내가 너의 이야기를 끝내 줄게.”」

뻔뻔하고,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목소리.

[‘선악과’가 말합니다. ‘혼자만 알고 있는 이야기로 그 모든 세계를 철저하게 기만하며 살아온 네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을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제4의 벽’이 ‘선악과’를 노려봅니다!]
[‘선악과’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립니다.]

츠츠츠츠츳!

주변을 뒤덮는 개연성의 폭풍.
비틀거리는 나를 향해, 누군가가 말을 외쳤다.

「(······독자 씨! 어서 움직여야 해요. 아직 미카엘은―)」


*


눈을 떴을 때, 나는 동굴의 벽면에 기대어 있었다.

“1분이 지나도 안 깨면 두고 갈 생각이었어요.”

금발의 여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복부와 흉부는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고, 관통상을 입은 허벅지는 짓이긴 약초에 감싸여 있었다.
입안으로 따뜻한 액체가 흘러들어왔다. 씁쓸하고 비린 맛.
불현듯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그 액체의 정체를 깨닫고 소스라쳤다.
자신의 손바닥을 베어 상처를 낸 안나 크로프트가 내게 자신의 피를 먹이고 있었다.

“무슨······!”

한 손으로 나를 진정시킨 안나 크로프트는 조금의 당혹감도 없이 설명했다.

“나는 [영약 제조사]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요. 내 피는 지금껏 내가 먹은 영약들의 악효를 품고 있죠.”
“······이 피를 많이 먹게 되면 당신 권속이 되잖아.”
“그건 그쪽이 나보다 격이 낮을 때고요.”

안나 크로프트가 손바닥의 상처를 지혈하며 고개를 돌렸다.
주변은 밤이었다. 느껴지는 기척은 아무것도 없다.
천천히 심호흡을 한 뒤, 나는 물었다.

“미카엘은 어떻게 됐습니까?”
“······죽었어요. 아니, 죽었다고 해야 할지······.”
“혹시 녀석의 화신체가 검은 안개로 덮였습니까?”
“······어떻게 알았죠?”

설명해 주고 싶었지만, 머리를 짓누르는 통증 때문에 ‘멸살법’의 내용을 떠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
아마 미카엘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정확히는 죽었지만, 다시 되살아 날 것이다.

동굴 밖으로, 2세대 설화의 상징인 ‘두 개의 달’이 떠 있었다.

내게 꽤 많은 피를 먹인 모양인지, 어슴푸레한 달빛에 물든 안나 크로프트의 얼굴이 창백했다.

“버려두고 그냥 가지 그랬습니까.”
“혹시 살려 놓으면 「은혜 갚은 예언자」따위의 설화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을 뿐이에요.”

그런 종류의 설화가 그리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건, 안나 크로프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불쑥 반발감이 일었다. 내가 아는 안나 크로프트는 이렇지 않았다. 그녀는 대의를 위해 소중한 동료를 희생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철저한 냉혈한이다.
분명 그래야 할진대······.

“이제 몇 시간만 있으면 움직일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내가 아는 정보가, 안나 크로프트의 전부였을까?

「안나 크로프트는 ‘절대 선’의 화신이다.」

······왜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선악과]를 먹어서 생각이 많아진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한숨처럼 말했다.

“이쯤에서 헤어지죠. 당신도 수식언 글자는 다 모았을 테니까.”
“나야 상관없지만, 괜찮겠어요?”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모르겠군요. 딱히 돌봐주지 않았어도, 저는 죽지 않았을 겁니다. 죽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어요.”
“아뇨, 당신은 그대로 두면 죽었어요.”

‘죽었을 거예요’가 아니라 ‘죽었어요’였다.
안나 크로프트가 저런 식으로 말할 때가 언제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당신은 내 미래를 읽을 수 없을 텐데.”
“······얼마 전까진 그랬죠.”

[전용 스킬, ‘거짓 간파 Lv.7’을 발동합니다!]
[당신은 해당 발언이 사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어제부터, 갑자기 당신 미래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어요. 희미한 벽 너머로 뭔가가······.”

······내 미래를 볼 수 있다고?

“무슨 미래를 본 겁니까?”
“······모르는 편이 좋을 텐데요.”
“말해.”

안나의 [대악마의 눈동자]가 불길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안나 크로프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지금으로부터 12시간 뒤 패왕 유중혁에게 죽게 돼요.”





< Episode 69. 대천사 사냥 (3) > 끝

< Episode 69. 대천사 사냥 (4) >





[당신은 ‘1회차’ 회귀자입니다.]

처음 회귀를 선택했을 때, 그는 자신이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시나리오에서 살아남을 기회.

[당신은 ‘2회차’ 회귀자입니다.]

두 번째 회귀를 선택했을 때, 그는 이 삶이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몇 번이고,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면서.
사랑하는 연인을 잃으면서.

그는 앞으로 자신이 몇 번이나 이 일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는 대가로, 그는 자신의 소중한 동료들을 몇 번이고 더 잃게 될 것이었다.

[당신은 ‘3회차’ 회귀자입니다.]

세 번째 회귀, 그는 이것이 저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몇 번이나 더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는 이 모든 시나리오의 끝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그는 ‘유중혁’이 아니라, ‘회귀자’가 되기로 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어쩌면 그가 계속 살았을지도 모를 날들.
그런 그의 회귀를 멈춘 것은, 예상치 못한 누군가의 말이었다.

―언제든 회귀할 수 있다는 건 ‘죽음’에 의미가 없다는 것일 테지. 하지만 죽음의 의미가 없다는 것은, 삶의 가치 또한 사라진다는 거야.
―유중혁, 정신 차려라. 몇 번을 반복하면 나아질 거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얘기다.

그래서 유중혁은 다음 회차로 가지 않았다.
몇 번이고 다시 살 수 있었던, 더 유리한 고지에서 더 유리한 정보를 가지고 시작할 수 있었던 삶을 포기했다.

[당신은 ‘3번 중섬’에 진출하였습니다!]

눈부신 빛살과 함께 도착한 3번 중섬.
그와 함께 섬에 도착한 참가자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뭐야 여긴?]
[바로 ‘본섬’으로 가는 게 아니었나?]

유중혁은 칼을 뽑아 들었다.

[히든 시나리오 ― ‘수식언 뺏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도륙이 시작되었다. 몰아치는 핏빛 검풍에 성좌들의 목이 달아났다. 유중혁의 검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화신체의 심장을 도려냈고, 달아나는 성좌들의 뒤통수를 작살냈다.

[성좌, ‘우중충한 밤바다의 까마귀’의 수식언 음절을 획득하였습니다.]
[성좌, ‘해변의 전술가’의 수식언 음절을 획득하였습니다.]

힘든 적들도 있었다.
본래의 3회차였다면, 쉬이 상대하기 까다로웠을 적들.
그러나 그런 적들을, 유중혁은 아주 간단히 해치웠다.

「‘자작나무의 전갈’은 꼬리 아래가 약점이다.」
「‘초승달의 군주’는 머리의 별빛이 사라질 때 공격해야 한다.」

본래의 유중혁이라면 알지 못할 정보들이었다.
4회차, 5회차, 100회차, 다시 1000회차를 거쳐야 알 수 있었던 정보들.

[성좌, ‘자작나무의 전갈’의 수식언 음절을 획득하였습니다.]
[성좌, ‘초승달의 군주’의 수식언 음절을 획득하였습니다.]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의 정보를, 3회차의 유중혁은 알고 있었다.

『한수영― 1863회차의 기록 (上).』
『한수영― 1863회차의 기록 (下).』

아주 먼 미래, 그가 본래대로 살았다면 맞이했을지 모르는 1863회차의 기록.

후우우우우―

그로부터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유중혁의 주변은 조용해졌다.

푸슈슉!

그는 마지막 성좌의 숨통을 끊은 뒤,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단순히 시나리오를 서두르기 위함이 아니었다.
얼마간 걸음을 옮기자, 피로 물든 전장이 나타났다.

[풍요의 숲].

무수한 화신체들의 시체. 마치, 누군가에 의해 학살당한 듯한 풍경.
유중혁은 자신에게 필요한 ‘수식언 음절’들을 모으며, 학살자의 향방을 좇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으로 휩싸인 커다란 고치를 발견했다.
유중혁은 그 고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에덴>이 만든 괴물이군.”

미카엘의 고치. ‘마왕화’가 진행된 미카엘이 누군가에게 죽었을 때 나타나는 고치였다. 이 고치 안에서, 미카엘은 새로운 생명을 얻어 태어날 것이다.
마치 유중혁이 매번 죽음 후 다음 ‘회차’를 시작하듯이.
차이가 있다면, 미카엘은 되살아날 때마다 기억의 일부를 잃는다는 것이었다.

악을 배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악.
미카엘의 존재는, 그가 결코 <에덴>을 좋아할 수 없는 이유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유중혁은 고치의 주변을 살폈다.
미카엘이 이 꼴이 되었다는 건 누군가가 미카엘을 해치웠다는 뜻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중혁은 강력한 마왕의 설화 파편들을 발견했다. 누군가가 미카엘과 싸웠고, 심하게 다쳤다.
흐릿한 비안개 속에 하얗게 빛나는 설화의 흔적들. 그것은, 유중혁이 잘 아는 존재의 자취였다.

움찔.

미카엘의 고치가 들썩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음습한 기운과 함께 고치의 꼭대기가 열리고 있었다.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벌써?’

보랏빛 안개 사이로 빠르게 스며드는 어두운 감정. 새로운 화신체로 빚어진 미카엘의 나신이 고치 사이로 드러나고 있었다.
유중혁은 자리를 피할 준비를 했다.

[구······원···의 마왕······!]

그 말만 하지 않았더라도, 유중혁은 그대로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유중혁이, 반쯤 열린 고치 사이로 다가갔다. 아직 온전히 깨어나지 못한 미카엘이 무방비한 상태로 고치 안에 잠들어 있었다.
번뜩. 미카엘이 눈을 뜨는 순간, 유중혁의 검이 움직였다.

“좀 더 자고 있는 편이 좋겠군.”

푸우욱!

[파천강기]가 미카엘의 심장을 꿰뚫었다.
아직 [마왕화]도 [천사화]도 발동하지 않은 연약한 화신체가 2세대의 개연성에 힘없이 부스러졌다.

그아아아아아아!

[당신은 ‘타락한 천사들의 왕’의 177번째 화신체를 처치하였습니다.]

미카엘의 고치는 급격하게 쪼그라들더니, 다시 본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아마 녀석은 178번째 화신체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성운 <에덴>이 당신의 행위에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쏟아지는 하늘의 시선을 받으며 유중혁이 말했다.

“······말했을 텐데? 김독자를 죽이는 것은 나라고.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하늘은 더이상 대답이 없었다.
검을 거둔 유중혁은, 숲에 흩뿌려진 파편을 따라 길을 재촉했다.


*


유중혁의 모습이 숲길 사이로 사라진 후, 미카엘의 고치 곁으로 작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새카만 우의 사이로 흔들리는 짧은 단발.
주변에 한가득 떨어진 아이템을 본 그림자의 주인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원래 버스는 주인공 버스가 제맛이지.”

한수영은 주변의 아이템들을 허겁지겁 주머니에 넣으며 희희낙락거렸다.

“하여간, 저 회귀자 자식 아이템 소중한 줄을 몰라요······.”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바닥에 떨어진 설화 파편을 물끄러미 내려다봅니다.]

“뭐 보냐?”

한수영은 흑염룡이 가리킨 파편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뻣뻣하게 굳었다.

[설화 파편,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을 획득하였습니다.]

“이거 설마······.”

<스타 스트림>에는 무수한 종류의 설화들이 있지만, 이런 이름의 설화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녀가 알기로 한 명밖에 없다.
그녀는 주워들었던 아이템을 내팽개치고, 이내 유중혁이 사라진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


내가 유중혁에게 죽게 된다.

「(독자 씨.)」

앞으로 세 시간 뒤, 유중혁에게 나는 죽게 된다.

「(독자 씨!)」

나는 퍼뜩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예, 유상아 씨.’

「(언제까지 얼빠져 있을 거예요? 독자 씨 답지 않잖아요.)」

‘얼빠져 있는 게 아닙니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생각요?)」

‘녀석을 설득할 방법이요.’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지금 나를 죽이러 오는 유중혁은, 내가 십여 년의 세월 동안 읽어온 ‘멸살법’의 유중혁이 아니었다.
지금 나를 찾아올 유중혁은 자신이 ‘등장인물임을 알게 된 유중혁’이다.
1863회차의 유중혁처럼.

「(죄책감 때문인가요······?)」

종종 유상아는, 내 속을 훤히 알고 있는 사람 같다.
······지금은 정말로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아닙니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서 그렇습니다.”

[‘선악과’의 힘이 당신의 죄책감을 부추깁니다.]

어쩌면 이 감정은 [선악과] 때문에 강제로 촉발된 것. 즉, 나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곁에서 나를 부축하던 안나 크로프트가 말했다.

“곧 섬의 중심에 도착할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섬의 중심.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가는 포탈이 있는 장소이자, 내가 세 시간 뒤 유중혁을 만나게 될 장소.

“당신이 선택한 미래에 참견하고 싶진 않지만······ 내 [미래시]는 어지간해선 바뀌지 않아요.”
“······저주하는 겁니까?”
“그냥 사실을 말해주는 거예요.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음절 ‘신’을 찾아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가는 게 좋을 테니까.”
“일부러 안 가는 겁니다. 그 녀석과는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어서요.”

그동안 미루어 왔던 이야기.
하지만, 반드시 나눠야만 할 이야기였다.

“이야기라······. 패왕이 그런 것도 할 줄 알던가요?”
“할 줄 모르면 할 줄 알게 만들어야죠.”

안나 크로프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녀의 눈이 검푸른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몇몇 성좌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도 알겠지만, 항상 모두를 설득할 수는 없어요.”

안나 크로프트는 예언자다. 아마, 나와 비슷한 상황을 몇 번이나 겪었겠지. 셀레나 킴을 속이고, 이리스를 속이며, 그녀는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그런 말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만큼의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법이에요.”

멀리서 섬의 중심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음 시나리오로 떠나는 커다란 포탈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나를 부축하는 안나 크로프트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그럼, 여기까지군요.”

수식언 음절을 모두 모은 안나 크로프트는, 이제 저 문을 넘어설 자격을 얻었다. 그녀는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내가 등을 돌리는 순간, 안나 크로프트가 나를 불렀다.

“김독자.”

성좌 ‘구원의 마왕’이 아닌, ‘김독자’. 그녀는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내 목표는, 이 <스타 스트림>의 주인을 바꾸는 거예요.”

그 순간, 나는 무척 곤란한 느낌을 받았다.
이어질 말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목적은 뭐죠?”

······역시나.

“내가 대답해야 합니까?”
“그걸 들어야 당신을 계속 살려 놓을지 말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녀는 나를 저울대에 올려놓은 셈이었다. 내가 자신의 목적에 도움이 될지, 아니면 방해가 될지.
만약 자신에게 방해가 된다면, 그녀는 가차 없이 나를 여기서 탈락시킬 것이다.
나는 안나 크로프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 여자에게 말해도 될까.
이 세계에서,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예언자인 그녀라면,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러나 내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녀석의 목적은 어떤 하찮은 이야기의 끝을 보는 것이다.”

서늘한 분노가 배인 목소리.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 Episode 69. 대천사 사냥 (4) > 끝

< Episode 70. 전할 수 없는 이야기 (1) >





Episode 70. 전할 수 없는 이야기


표정이 굳어진 안나 크로프트가 슬그머니 등 뒤로 단검을 뽑아 들었다.

“······패왕.”

그러거나 말거나, 유중혁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끼리끼리 잘 다니는군.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동질감이라도 느끼는 모양이지?”
“······미래의 정보를 아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내가 겪은 건 미래가 아니야.”

쿠구구구구!

“그건 모두 ‘있었던 일들’이다. 과거지.”

있었던 일들.
내가 본 그 이야기를, 유중혁은 자신의 몸으로 직접 살았다.
수천 번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유중혁의 손에 쥐어진 [흑천마도]가 그 세월에 감응하듯 거칠게 울었다.
안나 크로프트가 내 쪽을 흘끗 돌아보았다.
내가 말했다.

“가세요. 저 녀석은 날 만나러 온 거니까.”
“다음번엔 당신의 입으로 직접 목적을 들을 수 있길 바라죠.”

안나 크로프트는 그 말을 남기고 포탈 속으로 훌쩍 사라져버렸다.
확실히, 그녀가 지금 이곳에 남을 이유는 없다. 지금껏 나를 도와준 것만으로도 그녀는 자신의 빚을 충분히 갚았으니까.
유중혁은 떠나는 안나를 잡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집요하게 뒤를 쫓아 안나 크로프트의 목을 베었을 텐데도, 그러지 않았다.

“유중혁.”

나는 유중혁을 불렀다. 유중혁은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텅 빈 포탈의 입구를 가만히 들여다볼 뿐.
나는 다시 한번 녀석을 불렀다.

“들어줘. 그래도 한때는 날 동료라 불렀잖아.”

유중혁이 나를 돌아보며 천천히 칼을 빼들었다.

“한때는.”

그 차가운 목소리에 깃든 분노를 나는 헤아릴 수 없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한번 전지(全知)의 저주로 발을 내딛는다.

[해당 인물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부족합니다!]

하지만 유중혁의 내면은 나를 허락하지 않았다.
눈앞의 인물은 지금껏 내가 알아 왔던 인물이 아니라는 듯이.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는 알고 있다. 그 책에 관한 이야기겠지.”
“······.”
“너는 그 이야기를 통해 내 삶을 들여다보았고, 내 삶을 유희 거리로 삼았다. 내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나?”

나는 변명하지 못했다. 그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내가 한 짓은, 성좌들이 한 짓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나는······.”

안다.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게 저 녀석이 느낀 배신감의 전부일까.

[해당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씩 상승합니다!]

유중혁은 나를 기다려주었다. 마치, 자신이 끝내 찾아내지 못한 어떤 누명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재판관처럼.
하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통해 흘러들어온 유중혁의 감정이, 내 머릿속을 까마득하게 채워가고 있었다.
내가 알아 왔던 문장들이, 내가 모르는 문장들로 덮여가고 있었다.
내가 해야 했던 말들도, 하고 싶었던 말들도 그 칠흑 같은 감정의 파도에 묻혀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유중혁의 검이 움직였다.

그 순간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녀석이 정말 나를 죽일 것이라는 게. 지금까지 쌓아왔던 그 수많은 시간들을 뒤로하고, 녀석이 나를 죽일 것이라는 게.

[‘선악과’가 당신의 감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제4의 벽’이 격렬하게 흔들립니다!]

코앞까지 날아오는 검극을 본 순간, 죄책감과 함께 억울함이 치솟았다.

[‘선악과’가 당신의 어두운 감정들을 이끌어 냅니다!]

나는 제법 열심히 했다.
시나리오가 시작된 후, 정말 열심히 살았다.

내가 읽어온 것들을,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실천했다.

유중혁이나 일행들을 상처 입힐 생각은 없었다.
내가 생각한 것은 그저 시나리오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온전한 결말에 안정적으로 도달할 수 있을까.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것뿐이었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걸까?

까아아앙!

파찰음과 함께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뭘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어 멍청아!”

한수영이 그곳에 있었다.


*


한수영이 3번 중섬에 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소섬 시나리오를 진행하던 중, 그녀는 꿈을 꾸었다.

백색의 코트를 걸친 사내가, 검은 코트의 사내에게 죽는 꿈.

아주 오래된 개꿈이었기 때문에, 한수영은 그 꿈을 꾸면서 ‘또 그 꿈이구만’하고 중얼거렸다.
결국 꿈은 꿈일 뿐이고, 꿈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는다.
마치 소설이 현실이 될 수 없는 것처럼.

―3회차의 나는 좀 덜떨어졌네. 몇 번이고 같은 장면을 보여줘도 못 알아듣는 걸 보면······.

‘뭐야?’

한수영은 소스라치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검은 코트를 입은 여자가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체구. 마치 누군가가 고의로 지우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얼굴.
그 얼굴이,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대로 가면 그쪽 회차 망할 것 같은데······.

한수영은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며 두어 걸음을 물러섰다. 하지만 이곳은 그녀의 꿈. 어떤 인간도 자신의 꿈속에서 도망갈 수는 없다.

―난 말이야. 다른 녀석의 모략을 부수는 게 참 좋아.

꿈속의 인물이 손을 뻗는 순간, 알 수 없는 정보들이 한수영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예상 표절’의 힘이 당신의 안에서 깨어납니다!]

그리고 한수영은 잠에서 깨어났다.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정보들이 떠돌았고, 제멋대로 움직인 의식이 그 정보들을 연역적으로 잇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한수영의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타났다.

―유중혁은 3번 중섬으로 향할 것이다.

왜 그런 문장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다만 한수영은 그 문장을 한 번 따라가 보기로 했다. 이 정체불명의 꿈이 무엇인지, 그 안에 등장했던 인물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수영은 이곳에 도달했다.

“비켜라. 네겐 볼 일 없다.”

무시무시한 눈길로 자신을 노려보는 유중혁.
얼빠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김독자.
한수영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꿈이 자신에게 무엇을 보여주고자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한수영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평소대로 껄렁한 웃음을 지으며, 한수영이 말했다.

“내가 너 언젠가 사고 칠 줄 알았어. 그 ‘유중혁’이 그리 쉽게 변할 턱이 없지.”
“비키지 않으면······.”
“왜, 죽이기라도 하게? 그런 짓을 해서, 네가 얻는 건 뭐지? 지금까지 네가 속은 시간들을 보상받을 수 있기라도 한 거냐?”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검극이 사라졌다.
허공을 격하고 쏘아지는 유중혁의 검을, 한수영이 피식 웃으며 받아냈다.

“······하여간 사람 말 안 듣는 건 너나 김독자나 똑같아.”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포효합니다!]

전신에 깃든 [흑염]의 힘이 유중혁의 검극과 부딪쳤다.
2세대의 힘을 업은 유중혁의 검격은 무거웠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채, 한수영은 자신의 힘을 개방했다.
유중혁은 강하다. 하지만 그녀라고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설화, ‘전설적인 소드마스터의 제자’가 빛을 발합니다!]

이곳에 오기 전, 온갖 용을 써서 간신히 얻어낸 설화.
소드마스터의 힘이 그녀의 전신에 감돌며 용솟음쳤다.

츠츠츠츠츠츳!

다른 곳에선 몰라도 이곳에서라면.

“사람이 말을 하면······.”

짙푸른 스파크 사이로 강기화 된 [흑염]이 유중혁을 향해 쇄도했다.

“말을! 좀! 들어!”

끊어지는 음절에 맞춰 쏟아지는 강기의 다발.
뜻밖의 거센 저항에 유중혁의 눈동자가 동요했다.
한수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고함을 질렀다.

“김독자는 그냥 소설 하나 읽었을 뿐이야! 지지리 재미없고 긴 소설!”

조금씩 밀리는 유중혁을 보며, 한수영은 자신이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어려운 갈등이 아니다. 사람이 만든 말로 인해 빚어진 오해.
그러니, 말로 풀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대화를 해! 서로 터놓고 이야기를 하라고! 다른 사람들처럼!”

집요하게 움직이는 [흑염]의 불꽃이 유중혁의 검으로 옮겨붙고 있었다.
유중혁은 냉랭히 그 불꽃을 떨쳐 내며 말했다.

“너는 모른다.”
“나도 알아.”

냉정히 자신을 배제하는 그 말투에, 한수영이 으르렁거렸다.

“뭐가 그렇게 분해? 김독자가 네 정보를 알고 접근한 거? 너도 똑같잖아. 저놈이랑 똑같이 정보를 선점하고 다른 사람을 기만해왔잖아.”

그 말이 불씨가 된 것일까, 유중혁의 눈동자에도 분노가 깃들었다.
허공에서 다시 한번 검이 부딪쳤다.

“물론 네가 진심이었던 건 알아. 그 사람들 살리기 위해서, 더 나은 세계로 도달하기 위해서 그랬던 거 안다고. ······김독자는 어땠을 것 같아?”
“······.”
“대체 어떤 인간이 등장인물이 죽는다고 자기 목숨을 던지냐고!”

유중혁의 검이 멈칫하는 것을 보며, 한수영은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다.

“지금까지 김독자가 어떻게 해왔는지 잊었어? 그 노잼 소설 좀 읽었다고, 3회차에서 쌓아온 모든 걸 부정해버릴 셈이야?”

유중혁의 격이 움츠러들고 있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한수영은 느낄 수 있었다.
한 마디만 더하면, 이 불필요한 싸움을 멈출 수 있다.

“침착하게 잘 생각해.”

하지만 마지막 순간, 한수영은 한 발을 잘못 내딛고 말았다.

“넌 그런 캐릭터 아니니까.”
“······캐릭터?”

유중혁의 표정이 변하고 있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너도 똑같군.”

맞댄 검과 검의 사이에 막대한 마력파가 번지기 시작했다.
한수영의 검이 고통스럽게 울음을 토했다. [흑염]의 기파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포효합니다!]

유중혁이 쌓은 [거대 설화]가 폭주하고 있었다.

“1863회차의 네가 한 짓을 보았다.”
“1863회차? 뭔 소릴―”

순간, 한수영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멸살법 1863회차의 세계선. ······아, 거기 너도 있더라. 어느 쪽이 본체인진 모르겠지만.

분명 김독자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설마?’

머릿속에서 합쳐지는 정보들.
1863회차에도 자신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은 또 다른 회차를 살고 있다.
그렇다면 꿈속에서 본 그 존재는······.

한수영이 자신의 해답에 도달하는 순간, 찰나의 빈틈이 생겼다.
유중혁의 검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


왜 움직일 수 없었을까.
어째서, 한수영과 같이 싸우지 않았을까.
나를 대신해 이야기하는 한수영을 보며, 왜 같이 목소리를 내지 못한 것일까.

“넌······ 네 이야기 잘 못하잖아.”

나는 쓰러진 채 나를 올려다보는 한수영을 안아 들었다.
그녀의 허리에서 울컥거리며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생생하고 붉은 피.
그 피를 흘리며, 한수영이 말하고 있었다.

“김독자. 난 네가 바라는 결말을 알아.”

여느 때처럼 장난스러운 미소.
내 뺨에 묻은 피를 닦듯, 한수영의 손이 내 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불쌍한 놈······.”

나는 한수영의 피를 지혈하며 허겁지겁 약재를 꺼냈다.
내상이 너무 심각했다. 무자비한 상처였다.
2세대의 검강에 의해, 그녀의 내부는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

살릴 수 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다면.
제대로 된 의원을 찾고, 치료를 한다면.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내 뺨에 닿아 있던 한수영의 손이 툭 떨어졌다.
나는 한수영의 이름을 불렀다. 몇 번이고, 다시 몇 번이고.
하지만 한수영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들려온 것은 유중혁의 목소리였다.

“일어나라, 김독자.”

조금의 죄책감도, 동요도 느낄 수 없는 목소리.
그 순간 내 안에서도 뭔가가 툭 끊어졌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중혁.]

머릿속에서 설화들이 들끓고 있었다.

―너무 커서 제대로 읽기 버거운 설화들이 있지. 중심을 잘 잡지 않으면, 언제든 설화에 휩쓸리게 될 거다.

유호성은 그렇게 말했다.
나도 잘 알고 있다. 설화가 커질수록, 내가 짊어질 부담도 늘어난다.
그렇기에 나는 동료를 만들었다. 함께 역사를 쌓았고, 설화를 만들었다.
원작의 유중혁과는 다른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내가 계속 읽어 나가야 할까.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모두가 함께 도달할 마지막을 상상해왔다.
그런 이야기가 분명 가능할 것이라 믿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지금껏 내가 쌓은 시간들이, 완전히 무용한 것이었다면.

[‘마왕화’를 발동합니다.]

내가 꿈꾸는 결말은, 더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너를 죽이겠다, 유중혁.]





< Episode 70. 전할 수 없는 이야기 (1) > 끝

< Episode 70. 전할 수 없는 이야기 (2) >





「“너를 죽이겠다, 유중혁.”」

도서관의 모두가, 그 문장을 보고 있었다.

「(······잘못하면 우리 모두 죽을 수도 있겠군.)」

[‘제4의 벽’이 격렬하게 진동합니다!]

도서관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던 책들이 쏟아지며 엉망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정리하는 사서는 아무도 없었다.

「(답답하군. 왜 서로 대화하지 않는 거지? 역시 하나가 되려는 욕망이 부족한 놈들이야.)」
「(우리 수영이는 또 무슨 죄야······.)」

오징어가 자신의 다리로 동그란 눈을 콕콕 찍었다.
문장은 계속된다.
유중혁과 김독자의 검이 부딪칠 때마다, 니르바나의 이빨에서 딱딱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이 신입, 네 생각은 어때?)」

그말에, 머리 위를 날아가는 책을 하나씩 잡아채던 유상아가 사서들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김독자의 기억들이 한가득 쥐어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도, 그녀가 읽던 책이었다.

「(음, 제 의견은 두 가지에요.)」
「(두가지나 있어?)」
「(하나, 수영 씬 안 죽었어요. 내가 그 사람 잘 알아요. 이런 일로 자기 목숨 걸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 말에 눈물을 짜던 오징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하지만 너도 봤잖아.)」
「(아직 뭘 모르는구만. 히로인이 저기서 손을 툭 떨어트리며 의식을 잃는다. 그리고 남 주인공의 각성! 자고로 내가 본 모든 영화에서는―)」

오징어와 시뮬라시옹이 뭐라 떠들든, 유상아는 묵묵히 말을 이었다.

「(둘, 두 사람은 대화하고 있어요.)」

유상아가 쌓여가는 문장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상 누구도 저걸 ‘대화’라 부르진 않겠지만 말이에요.)」


*


갈라진 팔에서 설화의 파편들이 쏟아진다.
우리가 쌓아온 설화였다.

[설화, ‘마계의 봄’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으르렁거립니다!]

용과 호랑이가 드잡이질을 하듯, 설화와 설화가 부딪친다.
나와 똑같은 ‘거대 설화’를 가진 유중혁이, 똑같은 힘으로 내게 대응하고 있었다.

[해당 설화에 관한 당신의 지분이 더 높습니다!]

더 높은 설화 지분에도 유중혁이 가진 설화 지분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마 유중혁이 쌓아온 세월 때문인지도 모른다. 녀석은 <스타 스트림>의 누구보다도 더 치열하게 이야기를 계속해왔으니까.

츠츠츠츠츳!

2세대의 개연성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억눌러지지 않는 것도 있었다.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일갈합니다!]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노호성을 터뜨립니다!]

같은 역사를 쌓으며 만들어진 같은 설화가 충돌했다.

[‘섬의 주인’이 당신에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전투를 지켜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귓가에서 성좌들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일 각오로 검을 휘두른다.
필사적으로 휘두른 내 검이 유중혁의 허리께를 스치고, 곧바로 반격해온 유중혁의 검이 내 어깨를 찔러온다.
전투 감각은 녀석이 위다. 하지만 ‘격’에 있어서는 내가 위였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당신을 보호합니다!]

두터운 격을 꿰뚫고 날아드는 초월좌의 예기. 그 검기에서 녀석의 진심을 읽는다. 놈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지를.
녀석은 묻지 않았고,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 설화들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설화, ‘절망의 낙원’이 맹수처럼 달려듭니다!]

낙원의 기억.

[설화, ‘재앙의 왕을 사냥한 자’가 포효합니다!]

[피스랜드]의 흔적.

[설화, ‘공단의 해방자’가 슬퍼합니다.]

혁명의 시간들.

「그것은 ‘멸살법’ 어디에도 없는 문장들이었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은, 내가 읽어온 그 어떤 페이지와도 같지 않았다.

[‘천사화’를 발동합니다!]

어깻죽지를 뚫고 나온 날개. 순간적으로 증폭된 격이 [부러지지 않는 신념]에 깃들었다.
굉음과 함께, 충격을 이기지 못한 유중혁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제대로 덤벼, 유중혁. 나도 그럴 테니까.”

유중혁의 눈빛이 변했다. 녀석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격의 모양새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공간을 일그러트릴 정도의 격. 고단계의 초월좌가 가진 진짜 힘이 개방되고 있었다.
황금빛 휘광을 몸에 두른 유중혁의 신형이 사라졌다.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가 발동 중입니다.]

내 눈으로 쫓아갈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로, 유중혁의 검이 움직였다.

까가가가강!

일 검, 그리고 일 검. 파찰음이 더해질 때마다 손목이 무거워졌다. 내 허벅지에서 설화가 쏟아졌고, 유중혁의 어깻죽지에서 설화가 흘러내렸다.
자연히, 녀석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제4의 벽’이 반발하듯 강하게 발동합니다!]

유중혁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너는······.」

나는 그다음에 이어질 문장을 상상한다.
분명 나를 탓하겠지.
한수영의 말처럼, 너는 그런 인물이니까.

「왜 네놈은, 그 회차에 남기로 했던 거지?」

1863회차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나는 3회차로 돌아가지 않겠다. 여기 남아서, 이곳의 사람들과 함께 결말을 보겠어.”」

내가 결정했던 선택이, 다시 내게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까드드득 갈려 나가는 소리를 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1863회차에서 결말을 본 후, 3회차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만약 그때, 1863회차의 유중혁이 나를 돕지 않았다면.
1863회차의 한수영이, 내게 살의를 품었다면.
나는, 이 세계로 무사히 되돌아올 수 있었을까.
누구보다 시나리오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실은 그저 운이 좋아 살아남았던 것은 아닐까.

「네놈의 동료는 이곳에 있었다.」

유중혁의 일검에 어깻죽지가 찢어졌고.

「네놈의 세계선은 이곳이었다.」

이검에, 팔꿈치가 갈라졌다.

「너는 사람들에게 이 세계를 살라고 말했다.」

삼검에 날갯죽지에 구멍이 뚫렸다.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유중혁의 말에 담긴 분노와 실망이었다.

「화신 ‘유중혁’이 회귀를 거부합니다.」

나로 인해 회귀를 포기했던, 그리하여 3회차를 살기로 결심했던 유중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이 세계를 사랑했고, 그렇기에 이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존재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네놈은.」

어떤 분노는, 어떤 배신감은 말로써 서술되지 못한다.
그 어떤 전지한 독자라도 읽어내지 못한다.
유호성은 말했다.

―설화는 얼핏 보면 대단치 않아 보이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려는 사람에게는 미로와 같은 심연을 보여주지. 아무리 작은 설화라도 마찬가지야.

지금 내가 보는 것은 유중혁의 전부가 아닐 것이다.
유중혁이 화를 내는 이유를, 나는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이유가 될 수 있었고, 그 어떤 것도 이유가 될 수 없을 테니까.

확실한 것은 유중혁이 더이상 휘둘리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그 자신에게.
어쩌면 이 와중에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저 빌어먹을 성좌들에게.

「대답해라 김독자.」

쏟아지는 검격을 받으며, 나는 비틀거렸다.
아마 유중혁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도 자신을 읽고 있다는 것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녀석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대답해.」

내가 이 벽 너머로 녀석을 보아왔듯, 녀석 또한 이 벽 너머에서 뭔가를 끊임없이 쓰고 있었다.
언젠가, 반드시 누군가는 그 벽을 보아줄 것이라 기대하면서.

하지만 나는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대답하면

[‘제4의 벽’이 두꺼워집니다.]

너는, 등장인물이 되기 때문이다.

[‘제4의 벽’이 더욱 두꺼워집니다.]

너는, 등장인물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쿠구구구구!

특유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는 유중혁.
그곳에 유중혁이 존재하고 있었다.
자신이 등장인물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나를 부수고 있었다.

「그런가.」

벽 위에 유중혁의 말이 떠올랐다.

「그것이 너의 선택이로군.」

[‘제4의 벽’이 더욱 두꺼워집니다.]

「이번 회차에도, 동료 같은 건 없었군.」

내가 어떤 대답이라도 한다면, 유중혁은 나를 용서할지도 모른다.
기적이 일어나 나를 납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수영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서로에게 입혔던 상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동료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유중혁도 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제4의 벽’이 더욱 두꺼워집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검을 쥔 채 서로에게 달려가는 것이다.

[‘제4의 벽’이 더욱 두꺼워집니다.]

전력과 전력이 부딪치며 굉음이 일었다. 부연 먼지가 피어올랐고, 녀석과 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바닥에 너부러졌다.
먼저 일어난 것은 나였다.
나는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유중혁에게 비척거리며 다가가 검을 겨누었다.
유중혁은 저항하지 않고 나를 보며 말했다.

“······이번 회차에 너무 오래 머물렀군. 그만 끝내라.”

유중혁은 한수영을 죽였다.
돌이킬 수 있는 선은, 이미 넘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검극이 떨렸다.
검을 쳐든 순간, 1863회차의 한수영의 말이 떠올랐다.

―내 소설이 멸살법의 표절이라면, 너는 무엇의 표절이지?

그 질문의 대답이, 내 눈앞에 있었다.

「김독자는 이 사내에게서 삶을 배웠다.」

이 사내는 나의 아버지였고.
나의 형이었으며.
나의 오래된 친구였다.

[‘제4의 벽’이 두께를 키웁니다.]

이 두꺼운 벽 너머로, 오랫동안 녀석을 지켜 보아왔다.
몇 번이나 녀석에게 구원받았고.
녀석의 이야기를 보며, 살아남았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녀석을 죽일 수도, 잘못을 빌 수도 없다.
그렇게 비겁해지는 법을, 나는 배운 적이 없다.

내가 배운 것은 자신이 치른 일에 대가를 치루는 것.

유중혁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나 역시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곳에 있다.」

알고 있어.

「그럼에도 너는 읽기만 할 뿐이군.」

이게 우리의 방식이니까.
너는 행동하고, 나는 그런 너를 읽는 것.

「네놈이 하지 않는다면, 내가 하겠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유중혁이 자신의 검을 움켜쥐었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는 소리가 들린다.
‘양산형 제작자’는 말했다. 어떤 설화는, ■■의 근처에 가보지도 못하고 끝난다고.

하지만 만약 이곳이 모든 이야기의 끝이라면.
어차피 여기서 죽을 것이라면, 나도 한 마디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유중혁.”

내 말에 유중혁의 움직임이 멎었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예언자가 아냐. 오히려 그런 것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사람이지.”

동호대교에서 처음 싸웠던 그 날부터,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내 소개를 한 적이 없었다.
유중혁에게 나는 예언자였고, 정체 모를 놈이었다.

“나는 구원의 마왕도 아니고.”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멈춥니다.]

“왕이 없는 세계의 왕도 아냐.”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이야기를 멈춥니다.]

하나씩, 설화들이 이야기를 멈췄다.
내 이야기를 제외한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내 이름은 김독자.”

등에 돋아났던 날개가 사라졌고, 부풀어 있던 근육이 줄어들었다.

“스물여덟······ 아니, 스물여덟 살이었고, 게임 회사의 직원이었어. 취미는 웹소설 읽기······.”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하듯,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시시하지? 그냥, 이게 나야. ······유중혁, 너는 누구지?”

나에게 유중혁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혼자서 읽고 있었던 사람.

그러므로 나는 한 번도 녀석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유중혁의 입이 열렸다.

“나는 유중혁.”

천천히 움직인 유중혁의 칼날이, 나를 베었다.

“회귀자였던, 유중혁이다.”





< Episode 70. 전할 수 없는 이야기 (2) > 끝

< Episode 70. 전할 수 없는 이야기 (3) >





한수영은 눈을 뜨자마자 피를 토해냈다.
새카만 피가 바닥을 한가득 메운 후에야, 한수영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보이는 것은 깊은 숲속. 방금전까지 유중혁과 싸우던 전장은 아니었다.

“진짜로 뒈질 뻔했네. 유중혁 이 개새끼······.”

마지막 순간 근처에 세워두었던 더미 아바타로 기억을 전송하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죽었을 것이다.

[금일 할당된 ‘기억 전송’의 권능을 모두 소진하였습니다.]
[지금부터 해당 아바타가 당신의 본체가 됩니다.]

모두 예상했던 일이었다.

[설화, ‘예상표절’이 머뭇머뭇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설화 「예상표절」.
그 정체불명의 꿈을 꾸고 나서 얻게 된 설화.
한수영은 그 「예상표절」을 통해 몇 가지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자신의 선택지에 따라 달라질 예상 미래들.
김독자의 죽음, 혹은 유중혁의 죽음.
그 끔찍한 선택지들을 피해 도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미래.

[‘기억 전송’의 페널티로 당신의 육체 능력이 크게 약화됩니다.]

“누구 한 놈 죽어 있기만 해봐라.”

한수영은 투덜거리면서 주변의 기파를 읽었다. 어서 녀석들이 있는 방향을 찾아내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감각에 강대한 두 개의 격이 걸려들었다.
한수영은 그 방향을 향해 달렸다.

이것만이, 그녀가 읽은 미래들 중 ‘유일하게 제대로 된 미래’였다.
김독자는 죽지 않고, 두 사람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한다.

한수영의 [예상표절]은 그렇게 예상했고, 그래서 한수영은 마지막 순간 유중혁의 검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니 김독자는 분명 살아있을 것이다.

멀리서 검격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아직도 싸우고 있는 건가?
이 자식들, 대화 좀 하라고 죽어주기까지 했더니······.
아무래도 한마디 쏘아 붙여주지 않고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리고 풀숲을 헤치고 나선 순간, 한수영은 드러난 광경에 경악했다.

콰아아앙! 콰아아앙!

유중혁이, 바닥에 쓰러진 김독자를 검으로 난자하고 있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


‘······안 되는 건가?’
유중혁은 바닥에 쓰러진 김독자를 내려다보았다.
혼절한 김독자의 가슴팍에는 그의 [흑천마도]가 남긴 얇은 자상이 새겨져 있었다.

‘분명 보인 것 같았는데.’

유중혁은 다시 한번 검을 쥔 채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김독자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어두운 기운을 눈치챘다.
그것은 벽이었다. 김독자를 볼 때마다 느꼈던 이질감의 정체.

‘보인다.’

무수한 텍스트로 이루어진, 새카만 벽.
유중혁은 검을 곧추세워 다시 한번 그 벽을 강타했다.
초월좌의 설화가 벽을 두들기자, 벽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제4의 벽’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노려보거나 말거나, 유중혁은 벽을 내리쳤다.

‘이 벽 너머에 어쩌면.’

열리지 않으면 열릴 때까지. 부서지지 않으면, 부서질 때까지. 계속해서.
그리고 다음 순간,

“미친놈아! 돌았어?”

새된 목소리와 함께 뒤통수에 강한 충격이 일었다. 주륵 흐른 피가 시야를 가렸다.
붉게 물든 사위로 김독자를 굽어보는 한수영이 있었다.

“야! 김독자! 정신차려! 정신······ 뭐야, 죽은 거 아니네?”

유중혁은 인상을 찌푸린 채 비틀거렸다.

“한수영, 진짜로 죽고 싶은 건가?”
“이미 한 번 죽였잖아 새끼야.”
“안 죽을 줄 알고 있었다.”
“거짓말하지 마. 내 연기가 얼마나 완벽했는데.”

한수영이 으르렁거리며 여전히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는 자신의 화신체(조금 전까지 진체였던)를 가리켰다.
힘을 잃고 부스러지는 화신체에는, 분명 피를 흘린 흔적이 있었다. [아바타]라면 흘리지 않을 피였다.
유중혁이 말했다.

“[아바타]는 일정량 이상의 기억을 가지게 되면 진체처럼 피를 흘리지.”
“어쭈,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
“네가 쓴 기록에서 봤다. 정확히는 1863회차의 네가.”
“그 회차의 난 별 걸 다 썼네. 빌어먹을.”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한수영은 구태여 묻지 않았다.
대신 쓰러진 김독자의 볼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그래도 이 자식은 감쪽같이 속은 모양이네.”
“그런 것 같더군.”
“어떻디?”
“미쳐서 덤벼들었다.”

피식 웃은 한수영이 김독자가 기특하다는 듯 볼을 꼬집었다.

“얘 가슴팍은 왜 이래?”
“내게 흙을 먹인 죄다.”
“······흙?”
“그런 게 있다.”

한수영은 쭉 늘어나는 김독자의 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사실, 살아만 있다뿐이지 김독자의 몸은 성한 곳이 거의 없었다. 주변의 숲이 완전히 쓸려나갈 정도로 싸웠는데 몸이 멀쩡하면 그것도 이상했다.
그 모든 파괴의 정경. 이것이 바로 김독자와 유중혁이 나눈 대화의 증거라는 것을 한수영은 이해했다.

“그래서, 원하는 대답은 들었냐?”

유중혁은 잠깐의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조금은.”

조금은, 이라는 말에 실린 감정의 골을 한수영은 온전히 읽어낼 수 없었다. 그것은 온전히 김독자와 유중혁의 것이었다. 한수영은 그것이 섭섭했고, 조금은 외로웠다.

“<김독자 컴퍼니>로 다시 돌아올 거지?”

유중혁은 다시 잠시 생각하더니, 이미 할 말은 끝났다는 듯 뒤돌아섰다.
한수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야. 대답 똑바로 해! 기껏 도와줬더니!”
“이제 ‘성마대전’이 코앞이다.”

유중혁은 그대로 걸음을 옮겨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다시 한번 한수영이 뭔가를 외치려는 순간.

츠츠츠츠츳!

김독자의 몸에서, 스파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중혁 씨, 지금 그깟 시나리오가 문제가 아니잖아요.)」

놀란 유중혁이 검을 빼들었다.
김독자를 감싼 가상의 벽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벽 너머로, 누군가가 말하고 있었다.

「(혼자만 그렇게 잔뜩 얘기하고 돌아서면 단가요?)」

아니, 정확히는 벽이 아니라―

「(당신도 한번 느껴봐요. ‘독자의 기분’이란 게, 대체 어떤 건지.)」

츠츠츠츠츳!

아무리 때려도 부서지지 않던 벽 한쪽에 작은 구멍이 뚫리며, 누군가의 손이 튀어나왔다. 가볍게 유중혁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손은, 그대로 유중혁의 머리를 벽에 처박았다.


*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새카만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죽은 건가?
······유중혁은?

몰아치는 생각과 함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돌아봐도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때, 바로 눈앞에서 환한 칸델라의 불빛이 켜졌다.

「(독자 씨, 이런 데 누워 계셨네요.)」
‘유상아 씨?’

「(괜찮으세요?)」

‘여긴······.’

「(도서관이에요.)」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나는 의식을 잃으며 또 [제4의 벽] 속으로 빨려 들어온 것 같았다.

‘······그런데 원래 이렇게 어두웠던가요?’

「(지금 도서관 상태가 말이 아니라 그래요. 이번 전투 여파로 등불이 죄다 깨지고 서가가 한바탕 엎어졌거든요. 지금 그거 고친다고 다들 정신없어요.)」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군요.’

유상아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뭐 도울 일이라도······.’

「(아니에요. 그냥 여기 누워 계세요. 저도 잠깐 앉아서 쉬게요.)」

유상아는 읏차, 하며 내 곁에 가볍게 앉았다.
어슴푸레한 칸델라의 불빛 사이로 비치는 유상아의 얼굴은, 내가 기억하는 유상아의 모습 그대로였다.

「(정말 잘하셨어요.)」

‘······뭐 말입니까?’

「(말씀하신 거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상아는 [제4의 벽] 안에서, 바깥의 광경을 모두 보았을 것이다.

「(제대로 된 관계는 서로를 소개하는 것부터 시작하잖아요. 이제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그다지 기대는 하지 않는다. 솔직히 유중혁이 화만 풀려도 다행이라는 생각이니까. 내가 무슨 이야길 하든, 녀석이 느낀 배신감을 누그러뜨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바닥에는 떨어진 책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그 책들 중 하나를 집었다.

『김독자, 15세의 기록 # 25권』

나는 슬그머니 책을 덮고 어둠 속 깊은 곳으로 던졌다.

「(저, 독자 씨.)」

‘예.’

「(사실 좀 읽었어요. 그거.)」

‘······얼마나요?’

「(······실은 거의 다 읽었어요. 전 ‘멸살법’ 보다 이쪽이 더 재미있어서······ 죄송해요.)」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이미 읽어버린 걸 무를 수도 없다.

‘괜찮습니다. 좀 부끄럽긴 합니다만.’

어차피 유상아가 도서관 안에 들어간 이상, 이런 기억들을 들킬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다.
유상아는 바닥을 굴러다니는 책들을 한 권 한 권 먼지를 털며 주워 모았다.

모두 나의 기억들이었다.

어둠에 물든 유상아의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얼마나 곤란해하고 있을지는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유상아를 위로하듯, 그녀가 모은 책 중 한 권을 집었다.

‘······간만이네요, 정말.’

쌓인 책들은 모두 내 이야기였다.
15세의 김독자. 18세의 김독자. 23세의 김독자. 28세의 김독자······.

나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아버지가 없었던 김독자.
친구가 없었던 김독자.
어머니를 잃었던 김독자.

항상 뭔가가 없거나, 없어지기만 했던 삶.

「혼자인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김독자는 항상 혼자였다. 그렇기에 독자(獨子)였고, 김독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서럽게도 타당한 문장이었다.

「그런 김독자가 유일하게 존재하는 순간이 있었으니, 그것은 독자(獨子)가 독자(讀者)가 되는 순간이었다.」

마치 한 권의 책에 대한 긴 독후감 같은 인생. 그것이 나의 삶이었다.
나는 ‘멸살법’과 함께 청소년기를 보냈고, ‘멸살법’이 만들어 준 벽 뒤에 숨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피했다.

「그는 ‘멸살법’을 읽을 때에 비로소 살아있었다.」

곁에서 나를 지켜보는 유상아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상아만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어쩌면 어둠 속에 숨은 사서들도, 함께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펼쳐진 페이지에서 뜻밖의 문장이 나타났다.

「오늘 면접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 이름은 유상아다.」

그 부분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책을 덮었다.
······설마 유상아 씨, 이것도 읽었을까.

「(독자 씨는 그런 생각 해본 적 있어요?)」

‘네? 무슨······.’

「(만약, ‘시나리오’가 시작되지 않았다면 우린 어떻게 됐을까요?)」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만약, 그때 ‘멸살법’이 현실이 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멸살법’이 완결되고 시간이 흘렀더라면, 지금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아직 살아있을까?
계속 살아나갈 수 있었을까?

「(우리, 계속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을까요?)」

‘전 계약 연장이 안 되었으니······ 아마 다른 회사 알아보러 다니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렇게 쉽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끔씩 죽고 싶다는 생각도 할 것이고, 간밤에 ‘멸살법’을 재탕하다가 잠에 곯아떨어지는 날들도 많았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쉽게 죽진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나갔을 것이다.

‘그런 세계였다면, 유상아 씨랑도 친해지지 못했겠네요. 회사가 바뀌고, 연락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래도, 가끔 연락하지 않았을까요?)」

‘글쎄요······.’

「(그랬을 거예요. 독자 씨가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도, 계속 독자 씨 생각이 났을 거예요. 독자 씨 정말 이상한 사람이니까.)」

‘······복수인가요?’

유상아는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늘 독자 씨가 궁금했을 거예요. 잘 지내고 있을까? 어디 아픈 데는 없을까? 취직은 잘 했을까? 결혼은······.)」

‘전 결혼은 안 했을 것 같네요. 제 앞가림도 못하는 처지라.’

「(결혼이란 게 꼭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저도 혼자 사는 게 더 편하거든요.)」

‘상아 씨도요?’

「(네. 거봐요, 분명 친해졌을 거라니까요.)」

‘······그랬을까요?’

「(그럼요. 저랑 스페인어 스터디도 같이 하고, 자전거 동아리에 들어서 자전거도 같이 타고.)」

‘노후 대비하면서 서로 적금이나 펀드도 추천해주고.’

「(늙어서 힘 없으면 같이 부축해 병원도 다니고요.)」

‘서로 근처에 살았을 수도 있겠네요.’

「(그럼요. 어쩌면 바로 옆집이었을지도 모르죠.)」

우리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제, 결코 일어날 리 없는 이야기.
마치, 내게 한때 ‘멸살법’이 그랬던 것처럼.
유상아의 말이 이어졌다.

「(희원 씨랑, 현성 씨랑, 지혜랑······ 다른 아이들도 근처에 살면 좋겠어요. ······수영 씨도요.)」

만약 그런 세계가 있더라도, 그들이 같이 있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소설 속 인물들이니까. 그들은······.

‘······그러면 정말 좋겠네요.’

「(아, 중혁 씨도요. 성격은 나빠도 요리는 잘하니까, 친해지면 좋을 것 같아요.)」

갑자기 속에서 울컥 뭔가가 올라왔다.

「(희원 씨랑 현성 씨는······. 후후, 아무튼. 그래서······ 다들 조금씩 늙어 가는 거예요. 시나리오도, 성좌도, 도깨비도 없는 그런 세계에서.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맛있는 걸 나눠 먹으면서.)」

‘은밀한 모략가’와 함께 보았던 수많은 세계선들이 떠올랐다.
그토록 많은 세계선이 있으니, 어쩌면 단 하나쯤은.

「(어딘가, 그런 세계가 있으면 참 좋겠어요. 그쵸?)」

‘있을지도 모릅니다.’

「(독자 씨.)」

‘예.’

「(독자 씨를 만나서 정말 즐거웠어요.)」

‘······.’

「(슬슬 갈 시간이 된 거 같아요.)」

‘유상아 씨.’

사실, 조금 전부터 깨닫고 있었다.
유상아가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섬의 주인’이 화신 ‘유상아’를 부르고 있습니다.]

[제4의 벽]이 약해진 틈을 타, 이 섬의 주인이 유상아를 부르고 있었다.
······환생자들의 왕.
드디어 우리가 기다리던 순간이 온 것이다.
우리가, 환생자들의 섬에 온 이유 중 하나.

「이 도서관, 너무 따뜻하고 좋은 공간이지만······ 그래도 여기 계속 있을 수는 없어요.」

‘잠깐만요, 상아 씨. 그렇게 급하게―’

유상아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멸살법’을 읽었듯, 그녀 또한 ‘멸살법’을 읽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들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어요. 여기 있는 한, 저는 그저 ‘독자’로 남게 되니까요.」

나는 의연한 얼굴의 유상아를 올려보며 입을 다물었다.
붙잡고 싶었다. 조금만 더, 이야기를 나누면 안 되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붙잡을 수 없었다.

「(독자 씨가 말한 적이 있죠. 독자 씨의 회차는 이번뿐이라고. 우리가 살아야 할 세계는 바로 여기뿐이라고. 그러니······ 저는 이렇게 말할게요.)」

하얀빛에 휩싸인 유상아가, 내 머리에 손을 폭 얹으며 웃었다.

「(우리, 다음 생애 또 만나요.)」





< Episode 70. 전할 수 없는 이야기 (3) > 끝

< Episode 70. 전할 수 없는 이야기 (4) >





의식을 완전히 회복하는 동안, 나는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했다.

「그러니까, 4번 중섬의 공략법은······.」

마침내 ‘설화 통제법’을 얻은 정희원이, 중섬 시나리오에 참가해 다른 참가자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모르겠다. 덤비면 다 죽여버리지 뭐.」
「우리 장군님도 설화급이거든? 얕보지 말라고!」

[심판의 시간]을 발동한 정희원과 [귀살]을 발동한 이지혜가 날뛰는 사이,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중섬 시나리오를 공략해나가고 있었다.

「‘투명 위습’을 테이밍해뒀어. 이 녀석으로 쟤 수식언만 훔치자.」
「그냥 벌레들 보내면 되잖아?」

내가 딱히 도움을 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영리한 공략법이었다.

「크윽, 크윽, 우으으윽.」

홀로 외딴 중섬에 떨어진 이현성은 성좌들과 화신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있었다.
웅크린 이현성은 서러운 눈길로 적들을 바라보더니 커다란 곰처럼 울었다.

「혼자 다른 곳에 떨어진 것보다 더 서러운 것은, 혼자 두들겨 맞는 겁니다!」

이현성의 화신체에서 엄청난 빛살이 터지며 주변의 참가자들이 우수수 터져 나갔다.
나는 그 기술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강철의 주인]이 가진 특기 중 하나. 쌓인 대미지를 한꺼번에 해방시키는 성흔인 [충격 해방]이었다.
역시 원작의 등장인물들이 사기는 사기다.
아무튼 이현성도 강해진 건 확실해 보였다.

「[등장인물 ‘장하영’이 ‘파천붕권’을 발동합니다!]」

그리고 장하영은, 누구보다 압도적인 힘을 선보이며 시나리오를 수행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재능이 있었고 타인의 기술을 빠르게 흡수하는 그녀는, 이제 자신이 가진 ‘벽’의 진짜 주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정체불명의 벽’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훨씬 안정된 장하영의 ‘벽’. 벽을 통해 다른 초월좌와 소통하고, 그 재능을 배우고 이해하는 장하영. 어떤 의미에서 그런 장하영의 방식은 내가 책을 읽는 것과 닮은 부분이 있었다.

「[‘정체불명의 벽’이 당신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순간 화면에 노이즈가 일었다.

[‘정체불명의 벽’이 ‘제4의 벽’을 바라봅니다.]
[‘제4의 벽’이 ‘정체불명의 벽’을 바라봅니다.]

두 개의 벽이 서로를 마주 본 순간, 갑자기 화면이 흐릿해졌다.

【······세계선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

무너지는 시야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독자, 그들이 너를 찾아갈 것이다.】


*


우우웅.

의식을 되찾자마자 스마트폰 진동이 느껴졌다.
무심코 화면 켜자 오늘의 날짜가 떠올랐다.

2월 15일······.

지구가 아니었기 때문에 날씨 정보는 떠오르지 않았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날짜뿐. 그나마 이 날짜도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차원선을 제멋대로 이동하면서 시공간의 지표는 무너졌으니까.
<스타 스트림>의 모두는 전부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그런데······.
2월 15일이라.

나는 잠시 그것에 관해 생각하다가 이내 그만두고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머릿속이 뒤숭숭했고, 화신체 곳곳이 쓰리듯 아파 왔다.
끔뻑거리며 상반신을 내려다보자, 흉부 전체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여긴 어디지?

천천히 주변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말끔한 흰색의 침대보에, 오리엔트풍의 우아한 장식물들로 꾸며진 방.
창가에 기대어 밖을 보던 누군가가 물었다.

“일어났냐?”
“너······!”

녀석의 눈이 장난스러운 곡선을 그렸다.

“아, 이게 죽었다 깨어나는 맛이구만.”
“너, 죽은 거 아니었―”
“내가?”

실실 웃는 한수영을 보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광경이 떠올랐다. 유중혁의 검에 한수영이 죽고, 내가 유중혁과 싸우고, 유중혁의 검에 기절하고, 도서관에서 만나 유상아와 이야기했던 일련의 과정들······.
어느새 성큼 다가온 한수영이 내 볼을 꼬집었다.

“하여간 김독자, 귀여울 때가 있다니까.”

그제야 녀석이 나를 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세히 보니 한수영의 팔에도 작은 링거 팩 하나가 꽂혀 있었다.

“······여긴 어디야?”
“본섬 대기실. ‘그 녀석’의 성이 있는 곳이야.”

순간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섬의 주인’이 화신 ‘유상아’를 부르고 있습니다.]

녀석이 유상아를 데려가던 그때, 내 눈앞에도 메시지가 떴었다.

[‘섬의 주인’이 당신을 초대합니다.]

환생자들의 왕.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그 책의 세 번째 주인공이, 자신의 영토로 우릴 부른 것이다.

“하지만 난 아직 시나리오를 클리어 못 했을 텐데? 이곳으로 오려면 중섬 시나리오를 클리어해야······.
“너 클리어했어.”

나는 메시지 로그를 확인했다.

[히든 시나리오― ‘수식언 뺏기’를 클리어하였습니다!]
[현재 보상 수령 대기 중입니다.]

정말이었다.

“뭐지? 난 아직 음절 ‘신’을 모으지 못했······.”

한수영은 말없이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가리켰다.

[정욕과 격노의 마신].

완성된 수식언 목걸이가 빛나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내 목걸이는 마지막 한 글자가 비어 있어야 했으니까.
한수영이 말했다.

“유중혁이 남는 글자라면서 주고 갔어.”

······유중혁이?
대체 왜?

머릿속이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마지막 순간, 녀석이 했던 말이 귓가에 생생히 떠올랐다.

―회귀자였던, 유중혁이다.

회귀자인 유중혁이 아니라, 회귀자였던 유중혁.
녀석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유중혁 어딨어?”
“다음 시나리오로 갔어.”

그 말에, 허탈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스쳤다.
녀석은 이번에도 시나리오를 위해 앞서 떠난 것이다.

“······그놈 표적은 누구였대?”
“깨어나자마자 질문 되게 많네, 귀찮게.”

멍청하게 눈을 끔뻑이는 내게, 한수영이 내 가슴팍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내 목에 걸려 있는 수식언 목걸이는 두 개였다. 하나는 아스모데우스의 수식언인 [정욕과 격노의 마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의 □□]

내 수식언이 있어야 할 자리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었다.

“설마?”
“그래.”

그래도 ‘의’는 남겨줬네. 개자식.

“이제 나도 질문 좀 하자. 유상아는 아직 네 안에 있어?”
“······환생자들의 왕이 데려갔어.”
“······마지막에 뭐 남긴 말은 없었고?”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한수영과 나란히 선 채, 도시의 경관을 내려다보았다.
중국풍의 도시 속을 거니는 환생자들의 모습.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들이 그곳에 있었다. 이름도, 얼굴도 달라진 채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선택한 존재들.

“다음 생에서 만나자더라.”

내겐 이번 생이지만, 유상아가 나를 보는 것은 다음 생일 것이다.
그녀는 ‘환생자들의 왕’의 권능으로 새로운 육신을 얻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다시, 이 세계에 태어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한수영과 나는 말없이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그 거리 어딘가에 유상아가 있기라도 할 것처럼.
한수영이 문득 중얼거렸다.

“눈이다.”

조금씩 눈송이가 내려오고 있었다.
본래 이 세계는 눈이 오지 않는 땅이었다.
그럼에도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별빛처럼 쏟아지는 눈. 눈이 나리는 까마득한 하늘의 꼭대기에서, 성좌들이 내 이야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간접 메시지도 도착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조금씩 모은 개연성이 하늘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한수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 수식언 목걸이를 쥔 한수영이 웃었다.

“이제 너 [구원]도 [마왕]도 아니네. 수식언 새로 받아야 하는 거 아냐?”

나는 한수영의 말을 들으며 내가 ‘구원의 마왕’이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간들.
그럼에도 내 생애 가장 빛났던 시간들.
어룽거리는 시야 속에서 한수영이 키득대고 웃었다.

“이참에 내가 새로 지어 줄까? 음······ 뭐가 좋으려나. ‘툭하면 기절맨’ 어떠냐? 아니면 ‘기적의 주둥아리’······ 어? 야, 너······ 울어?”

놀란 녀석의 눈동자 위에 내 얼굴이 비친다.

작가인 녀석에게 묻고 싶었다.
이야기를 쓰는 너라면, 혹시 알겠느냐고.

나는 지금까지 잘해 온 것인지.
잘못된 선택을 하지는 않았는지.
이 모든 이야기의 끝에 도달하면, 나는 내가 원하는 결말을 볼 수 있을지.

“야, 뭘 울고 그래. 알았어, 알았어. 뚝.”

혼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수영은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입속에 무언가 달콤하고 시큼한 것이 쏙 들어왔다.

“이렇게 좋은 날 왜 울어. 모처럼 눈도 내리는데······. 내가 나중에 더 좋은 수식언 지어줄게.”

그렇게 말하는 한수영은 내 시선을 피한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2월 15일.
스마트폰의 날짜는 그랬다. 이곳의 시간과 지구의 시간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표기는 그저 ‘오류’일 뿐일 것이다. 아무 의미도 없는, 그저 우연히 매겨진 날짜.
그럼에도 만약, 어떤 기적이 일어나 저 날짜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오늘은, 나의 생일이었다.

한수영이 눈을 슥슥 부비며 말했다.

“사람들 보고 싶네.”

나는 온 힘을 다해 대답했다.

“······나도.”

그리고 그 말을 신호처럼,

[수정본의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보낸 선물이 도착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최종본).TXT


*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유중혁은 ‘환생자들의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김독자는 깨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유상아는, 섬의 주인을 만나 환생 절차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 여자.’

유중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며칠 전, 그 정체 모를 벽에 머리를 박았던 순간을 유중혁은 잊을 수 없었다. 끔찍한 개연성의 스파크 속에서 강제로 들여다보았던 ‘벽’의 내부. 그곳에서, 유중혁은 자신이 알지 못하던 이야기의 파편들을 목격했다.

어떤 것은 예상했던 이야기였고.
어떤 것은 알지 못한 이야기였다.
완전히 뜻밖의 이야기도 있었다.

찰나였지만, 유중혁은 그 벽에서 자신이 찾던 정보를 얻었고, 나름대로의 해답을 얻었다. 그리고 지금, 유중혁은 자신이 그 해답을 실천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은밀한 모략가.”

고개를 들자, 음험한 성좌의 시선이 그에게 쏘아졌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은밀한 모략가.
이 회차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성좌.
그리고 1863회차까지의 세계 중 어디에도, 그 정보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정체불명의 존재.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네놈 계략엔 충분히 놀아나 준 것 같은데. 내게도 질문 하나 정도는 할 자격이 있겠지.”

은밀한 모략가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늘의 일부가 새카맣게 물들더니 유중혁을 향해 검은빛이 떨어졌다.

츠츠츠츠츳!

개연성의 스파크와 함께, 주변의 시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곳은 ‘섬의 주인’이 지배하는 공간. 그 어떤 최상위격의 성좌라도 이만한 개연성을 행사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은밀한 모략가는 그게 가능한 존재였다.
어둠 속에서 새카만 그림자가 솟아났다.

【궁금한 게 뭐지?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여.】

“어째서 내게 그 책을 준 거냐?”

은밀한 모략가의 그림자가 조소하듯 흔들렸다.
유중혁은 계속해서 물었다.

“내가 절망하기를 바랐나? 그래서, 그 책을 읽고 김독자를 죽이기를 원했나?”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왜 그런 짓을 꾸민 거지?”

【네가 듣는다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네깟 것이 듣는다고 이해할 수 없다는 확신이 담긴 오만함.
유중혁이 다시 물었다.

“너는 왜 김독자를 1863회차에 보냈던 거냐. 왜, 그곳의 ‘나’를 죽이도록 시켰던 거지?”

【그런 시나리오가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고 해두지.】

그림자가 실소하듯 흔들렸다. 유중혁은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네 모략은 모두 김독자를 파괴하는 것들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내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나?】

“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아주 확실한 이유가.”

김독자에게 알 수 없는 분노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김독자와 마찬가지로 이 세계의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는 성좌.
유중혁은 오랫동안 이 성좌에 대해 추적해왔다.
그리고 유중혁은, 지금 막 그 추적의 해답에 도달했다.

“은밀한 모략가. 너는, 미래에서 온 ‘김독자’인가?”





< Episode 70. 전할 수 없는 이야기 (4) > 끝

< Episode 71. 50년 후 (1) >





Episode 71. 50년 후


‘환생자들의 성’에 방문한 지 나흘이 지났다.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다른 일행들도 중섬 시나리오를 마치고 다음 시나리오의 돌입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 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최종본).TXT

어쩌면 이 파일의 끝에는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야기의 ‘에필로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뿐인가? 운이 좋다면 이번 3회차에 대한 정보가 더 있을 수도 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수행해야 안전한 결말에 도달할 것인지 알려주는 지침들이.
하지만······.

「그 이야기 의 마지 막 이 비 극이 라 면?」

만약에, ‘최종본’이라는 것의 의미가 ‘더이상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라면?

「네 가 그걸 바 꿀수 있 을 까?」

내가 이것을 읽음으로써, 오히려 모든 미래가 확정되어버린다면?

“김독자.”

고개를 들자 왼손에 붕대를 동여맨 한수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나를 제외하면 거의 유일하게 ‘멸살법’을 읽은 존재.
한수영이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녀가 나였다면, 이 파일을 열어보았을까?

“뭘 그렇게 봐?”
“아냐, 아무것도.”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껐다.
언젠가 이 이야기를 읽고 싶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가 읽고 싶은 ‘에필로그’는, 아마도 이 파일 안에는 없을 것이다.

장비 손질을 끝낸 한수영은 걸터앉은 침대에서 풀썩 내려오며 말했다.

“슬슬 출발하자. 계속 꾸물대다간 유중혁 그 자식이 앞서 가버릴 거라고.”
“떠나기 전에 만나야 할 존재가 있어.”
“누구?”
“마침 온 것 같네.”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굵은 갈색의 목염주. 회색 승복 사이로 언뜻언뜻 엿보이는 단단한 잔근육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고련을 거듭한 무승(武僧)이었다.

“모시러 왔습니다, 시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신들의 왕에게 안내하십시오.”


*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멸살법’의 최고 권위자인 내 해석에 따르면, 제목에서 뜻하는 ‘세 가지 방법’이란 ‘멸살법’에 등장하는 세 명의 주인공을 뜻한다.

첫 번째는 회귀자 유중혁.
두 번째는 귀환자 장하영.

그리고 세 번째는······.

―주인공이 또 있다고?

내 이야기를 들은 한수영이 [한낮의 밀회]로 반문해왔다.
그러고 보면 한수영은 이런 정보들까지는 모르겠구나 싶었다.
녀석이 읽은 것은 고작해야 100편 남짓이니까······.

―하긴, 3천편이나 쓰려면 주인공 하나로는 우려먹기 힘들었겠네.

······쓸데없이 날카롭기는.

―그나저나 주인공이 셋이나 되다니, 역시 망하는 소설의 지름길을 가네.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 망한 소설은 이제 우리네 현실까지 망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성의 주인이 ‘세 번째’인 거지?
―맞아.
―‘멸살법’에서 비중은 어느 정도야? 유중혁급?
―그렇지는 않아. 어디까지나 메인은 유중혁이니까.

실제로 3천 편이 넘는 이야기 중 대부분은 유중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다른 두 인물을 ‘주인공’이라 칭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작중 서술을 따른 것일 뿐이고.

―하지만 다른 둘도 유중혁 못지 않은 괴물이지. 특히 현시점에서, ‘세 번째 주인공’은 유중혁보다 더 강력한 존재야.
―······그 유중혁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텅 빈 명상실을 둘러보았다.
이 방은 환생자들의 고행장이었다. 수많은 윤회를 반복하며, 지치고 고된 정신을 달래기 위한 방.
곳곳에서 경전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어디에도 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환생자들의 왕은 어디에 있습니까?”
“왕은 이미 와 계십니다.”
“온통 땡중들 뿐인데?”

한수영의 말에 무승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분은 어디에나 계시고, 어디에도 없습니다.”
“말장난하자고 부른 건 아닐 테고.”
“그분은 자신을 볼 자격이 없는 존재와는 이야기하지 않으십니다.”
“재밌네. 지금 우리한테 화두 던지는 거야?”

한수영이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웃었다.
나는 현묘한 무승의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왕이 정말 어디에나 있다면, 누구든 ‘왕’이 될 수 있다는 뜻이겠죠.”

기이이이잉!

내 손에 쥐어진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울어 젖힌 것과, 검극이 무승의 목젖을 향해 쏘아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츠츠츠츠츳!

강맹한 마력을 흩뿌리던 검극이 무승의 코앞에서 멈췄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무승이 웃고 있었다.

[무척 도발적인 해결책이로군요. 맞습니다. 깨달은 자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죠.]

공간 전체를 울리는 진언.
나는 검을 회수하며 무승을 바라보았다. 무승의 전신에서 영묘한 아우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새하얗게 물든 동공 속에 역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만다라의 그림자.
아마 이 무승은 환생자들의 왕이 가진 무수한 화신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시나리오를 이어갈 수는 없을 겁니다. 구원의 무게를 짊어진 ■■의 사도여.]

“내 방식을 모두 아는 듯 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제 ‘멸살법’을 그저 소설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내 일행들을 단순한 ‘등장인물’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결심이, 내가 알고 있는 정보들을 활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은 아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만다라의 수호자.”

[제4의 벽]을 발동 중인데도 상당한 중압감이 느껴졌다.
눈앞에서 일렁이는 온화한 격의 준동. 무승의 배후에 드리워진 위대한 정신의 실체가 눈앞에 낱낱이 펼쳐지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암흑 단층을 지배하는 자.

<에덴>의 메타트론이나 마계의 최고위급 마왕들이라 해도, 이 섬 안에서는 이 자에게 대적할 수 없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제4의 벽’이 존재하지 않는 눈썹을 꿈틀거립니다.]
[‘윤회를 결정하는 벽’이 당신에게 호기심을 보입니다.]

츠츠츠츠츳!

장하영의 [정체불명의 벽], 메타트론의 [선악을 가르는 벽]에 이은 세 번째 벽.
만다라의 수호자는 [윤회를 결정하는 벽]의 소유자였다.

[‘최후의 벽의 파편’이로군요. 니르바나도 그 안에 갇혀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좋은 보살이 될 수 있는 아이였는데, 하필 그대를 만나 자신의 불도를 벗어나고 말았죠.]

“뭐, 본인은 만족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한수영이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잠깐만. ······그쪽 설마 부처님이야?”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부처가 있고, 저도 그중 하나입니다.]

한수영은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하긴, 자기가 부처님이라 주장하는 성좌가 등장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온화한 미소를 띤 부처님께서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아주 오래전부터 보살들의 이야기를 지켜보아 왔습니다.]

“당신에게 후원을 받은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굳이 자신의 시선을 드러내 권력을 휘두르는 성좌가 있는가 하면,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성좌도 있습니다. 모름지기 진정한 보시란 후원이 아니라 우직한 관조에서 오는 법입니다.]

“공짜 방송 본다는 얘길 길게도 하시는군요. 그래서, 제게 원하는 게 뭡니까?”

[원하는 것? 이 몸이 보살에게 원하는 게 있다 생각합니까?]

나는 명상실의 중심에 놓인 거대한 종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재질로 만들어진 종 안에는 눈부신 빛으로 감싸인 작은 영혼이 있었다.
나는 그 영혼이 누구의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유상아 씨를 환생시켜 주기로 하셨지요. 제가 부탁드린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

“당신은 우리를 이곳에 초대해 묵게 해 주었습니다. 역시나, 제가 부탁드린 적도 없는데 말이지요.”

[불과(佛果)의 일부였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성좌들을 상대하며 얻은 교훈이 있죠. 대가 없이 호의를 베푸는 성좌는 없다.”

[보살의 판단은 섣부르군요. 모든 것의 예외를 믿을 수 있는 존재만이 시나리오의 마지막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나는 무승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명상실 중앙의 종을 일별하며 말했다.

“화신 유상아를 이 섬에 귀속시키지 마십시오. 그녀는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이 섬에서 환생한 모든 존재는 이 섬에 귀속됩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방금 말씀처럼, 모든 것엔 예외가 있지 않습니까? 그녀는 니르바나의 뒤를 이을 수 있습니다. 화신 유상아를 당신의 [아라한]으로 삼으십시오.”

아라한(阿羅漢).
‘환생자들의 섬’에 종속되지 않고, 시나리오의 세계를 누비며 환생을 거듭하는 구도자들.

“그렇게 해준다면 당신과 거래하겠습니다.”

[거래라. 이 몸이 원하는 것이 무어라 생각하는지요?]

“성마대전을 막고 싶은 것 아닙니까?”

[헛되도다. 이 몸은 선과 악 같은 모순투성이 설화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모순투성이 설화가 당신의 섬을 엉망으로 만들 텐데도 말입니까?”

흥미롭다는 듯, 무승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만다라의 수호자는 선도 악도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공(空)에 더 가까운 존재. 그런 그의 영토에서 선악의 위세가 커지는 것은 ‘만다라의 수호자’도 달가울 리 없었다.

“제가 ‘성마대전’을 막아 보겠습니다.”

[그대의 힘으로 가능하다 생각합니까?]

나를 대신해 대답한 것은 설화들이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포효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으르렁거립니다!]

두 개의 거대 설화가 발동하자 일대의 대기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내 짐작이 맞다면, 만다라의 수호자는 내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 만다라의 수호자는 이번 ‘성마대전’에 직접 뛰어들 수 없기 때문이다.
선도 악도 아닌 그가 이 싸움에 뛰어들 명분은 없으니까.

[······‘유상아’라는 화신을 이 몸의 ‘아라한’으로 거두어주는 것. 그것이 보살이 원하는 전부입니까?]

“하나 더.”

[욕심이 많은 보살이군요.]

“제 성운이 원하는 지역에서 ‘성마대전’을 시작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섬의 주인인 당신이라면 그 정도 간섭은 가능하겠지요.”

순간 사원 전체에서 희미한 마력의 태동이 느껴졌다.
마치 내게 경고라도 하는 듯한 격의 향연. 위협적이거나 살벌한 기세는 아니었지만, 어딘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깃든 격이었다.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윤회를 결정하는 벽’이 입맛을 다십니다.]

이윽고 만다라의 수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살의 조건을 승낙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대의 성운 전체가 원하는 본섬 지역에서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화신 이길영과 화신 신유승만이라도 부탁드립니다.”

[흐음······ 그들을 어디로 보내주길 원합니까?]

“넥스트 시티.”

[넥스트 시티라······ 이런, 보살이여, 설마······.]

만다라의 수호자라면 내 의도를 눈치챘을 것이다.
‘환생자들의 섬’의 본섬은 잊힌 3세대의 설화들이 박제된 장소.
3세대의 설화들은 1, 2세대보다 훨씬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만큼, 출발 장소에 따라 생각지도 못한 설화를 얻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두아이들은 반드시 ‘넥스트 시티’에서 시작하게 만들어야 한다.

[······대신 보살의 나머지 일행들은 이 몸이 원하는 장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내 대답에,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한수영이 눈짓을 보냈다.

―야, 저 땡중이 이상한 곳으로 보내면 어쩌려고?

투닥거리는 우리를 보며, 무승의 입가에 기묘한 미소가 걸렸다.

[보살이여, 이 몸은 그대의 이야기를 아주 좋아하지만······ 아직 그대가 쌓은 설화는, 성마대전에 참가한 다른 성운들과 맞서기엔 역부족입니다.]

역부족이란 말이 심기를 거스른 걸까. 한수영이 이죽거렸다.

“······우리가 <올림포스> 깨부순 얘긴 못 들으셨나봐?”

[보살들이 쌓은 설화는 독보적이지만, 아직 시간의 풍파를 겪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와 한수영의 몸이 갑작스런 빛에 휩싸였다.

[성좌, ‘만다라의 수호자’가 시나리오 전송에 동의하였습니다.]
[시나리오 전송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갑자기?
나는 조금 놀랐지만, 금방 마음을 다잡았다.
드디어, 전(轉)을 완성할 세 번째 거대 설화 지역으로 가는 것이다.
아마 중섬의 다른 일행들도, 나와 함께 전송되고 있을 것이다.
고개를 돌리자 한수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김독자.”

나는 반사적으로 한수영을 향해 손을 뻗으며 대답했다.

“잘 하고 있어. 내가 금방 찾아갈게.”
“······퍽이나.”

한수영의 주먹이 내 손을 치는 순간, 그녀의 몸이 빛살로 화했다.
사라지는 한수영의 잔상을 보며, 새삼 녀석과 동료가 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유중혁이 그랬던 것처럼, 한수영 또한 이제 내 결말에 필요한 존재가 된 것이다.

지금껏 녀석에겐 신세를 많이 졌다.
그러니, 이번에는 내가 갚아야 할 차례였다.

「하지만 그때의 김독자는 알지 못했다.」

스마트폰의 액정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내가 모르는 페이지의 문장들이, 불길한 복선이 깔리듯 한 줄씩 눈앞에 떠오르고 있었다.

「김독자가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는······.」

아니, 잠깐만.

「이미 5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라는 사실을.」

······뭐?





< Episode 71. 50년 후 (1) > 끝

< Episode 71. 50년 후 (2) >





50년이라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무승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보였다.

―보살이여, 시간을 견뎌 보십시오.

[본섬으로 전송을 시작합니다!]
[‘윤회를 결정하는 벽’이 당신의 설화 정보를 조사합니다!]
[조사가 끝났습니다.]
[당신과 동료들의 시나리오 지역이 결정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들은 것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였다.

[서브 시나리오― ‘장르 선택’이 시작됩니다!]


*


투명한 컵 안에 담긴 새카만 액체를 들여다보며, 리카르도는 오래전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50년을 수련해도 궁정 마법사가 되기는 무리일 겁니다.”」

처음으로 마법을 배웠을 때.

「“현사가 되기에 적합한 체질은 아니군요.”」

카이제닉스 제도 제일의 현자에게 수업을 들었을 때.

「“검을 잡기에는 불리한 손입니다.”」

그리고 왕정 검술 훈련소에서, 처음으로 검을 잡았을 때도.

「“어떤 인생은 그런 법이다. 중요한 것은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나아가는 거야.”」

리카르도의 아버지, 베르첸 폰 카이제닉스는 그렇게 말했다.
그건 위로가 안 되었다. 재능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는 사람이 그런 말을 듣는다고 무슨 위안을 받겠는가.
재능이 없어도 꿋꿋이 나아가라고? 그렇게 살아서 결국 뭐가 될 수 있는데?
리카르도는 매일 술을 마셨다. 제도의 불한당들과 몰려다니며 마약을 하고, 도박에 빠져 가문의 자산을 탕진했다.

사랑도 했다. 한때는.

제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상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 여인이 그의 큰 형과 결혼하면서 사랑도 끝났다.
잔 속의 액체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리카르도가 중얼거렸다.

“죽자.”

그것은 생애 처음으로 낸 용기였다.
가볍게 잔을 쥐고, 포도주를 삼키듯 잔을 말끔히 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효과가 나타났다. 안색이 거무죽죽하게 물들고, 리카르도의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정확히 네 시간 뒤.
누군가가 리카르도의 몸으로 눈을 떴다.


*


나는 ‘멸살법’ 외에도 제법 많은 이야기들을 읽었다. 어렸을 적엔 어머니가 추천해 준 양서들을 읽었고, 조금 머리가 큰 후에는 내가 직접 책들을 골라 읽었다.
참고로 내가 처음으로 읽은 웹소설은 주인공이 자신의 불행을 조잘거리며 죽었다 깨어나면서 시작한다.
바로 지금처럼.

“웨에에에엑!”
“리카르도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누군가가 내 등을 두드렸고, 나는 한참이나 토사물을 게워냈다.
입을 닦고 고개를 들자 거울이 있었다.
전면에 보이는 창백하고 훤칠한, 잘생긴 얼굴.

······분명 내 얼굴인데, 뭔가 낯설었다.

나는 누구지?
······리카르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예언자가 아냐. 오히려 그런 것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사람이지.”」

나는.

「“나는 구원의 마왕도 아니고. 왕이 없는 세계의 왕도 아냐.”」

······나는?

「“스물여덟······ 아니, 스물여덟 살이었고, 게임 회사의 직원이었어. 취미는 웹소설 읽기······.”」

[당신의 설화들이 세계관을 이루는 거대 설화에 저항합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자, 세계가 분리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4의 벽’이 당신의 인물 몰입을 저해합니다.]
[‘제4의 벽’의 효과로 당신의 자아가 온전히 보존됩니다.]
[섬의 개연성이 당신의 특혜를 의심합니다.]

낯선 신체의 감각.
이것은 나의 몸이 아니다.

「나는 김독자다.」

정신이 훅 돌아오며, 일련의 기억들이 정리되었다.
나는 ‘성마대전’ 시나리오에 참가했고, 이제 막 본섬에 진입했다.
본섬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3세대의 설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설화들은 모두 다른 장르의 세계관을 이루는데, 그렇다면 지금 내가 보는 이 광경은······.

“······빙의물.”

츠츠츠츠츠츳!

[세계관에 맞지 않는 발언이 적발되었습니다!]
[제재가 시작됩니다!]

내가 다시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 후의 일이었다.


*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흐릿한 시야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저, 물 좀 주세요.”

[세계관에 맞지 않는 언어를 사용하였습니다!]
[페널티가 부과······.]

“물 좀 주시오.”
“여기 있습니다.”

벌컥벌컥 냉수를 마시자 조금씩 이성이 돌아왔다.
드문드문 밀려오는 타인의 기억들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이미 30년이나 살아온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본섬’의 일부 지역에서는 해당 세계관에 맞지 않는 발언이 금지된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멸살법’의 내용들이 있었다. 지나가듯 서술된 회차였지만, 분명 ‘멸살법’에도 이런 시나리오에 대한 언급이 분명 있었다.

소위 ‘빙의 시나리오’.

나는 ‘성마대전’에서 이 인물의 시점으로 시나리오를 진행해야 하는 것이다.

[해당 지역에서는 도깨비의 호출이 불가능합니다.]
[해당 지역에서는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거기다 이상한 제약들까지 걸려 있다.
본래 내가 알고 있는 ‘성마대전’과는 다른 전개였다.

“······일단 정보부터 좀 수집해야겠는데.”

[인물 특성에 알맞은 행위를 하였습니다.]
[해당 인물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나는 곧바로 ‘멸살법’의 기억을 뒤지기 시작했다.

「카이제닉스 제도. 성마도시대를 이끈 영웅들의 섬.」

별달리 참고할 만한 정보는 떠오르지 않았다.
하필이면 ‘멸살법’에도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 지역.
그렇다고 완전히 낯선 장소도 아닌 것 같은데······.
빙의 인물의 기억이 내게 흘러들어왔기 때문일까?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하였습니다!]

본래 나는 내 특성창은 볼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빙의한 대상의 특성창이라면······.

+

<인물 정보>

이름 : 리카르도 폰 카이제닉스 (김독자)
나이 : 31세
배후성(背後星) : 없음(현재 1개의 성좌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용 특성 : 천부적 불한당
전용 스킬 : [왕족의 외모 Lv.3], [독백 Lv.6], [역할극 Lv.5]
성흔 : 없음
종합 능력치 : [체력Lv.10], [근력Lv.10], [민첩Lv.10], [마력Lv.10]
종합 평가 : 당신이 빙의한 인물은 카이제닉스 제도의 제4 왕자입니다. 안타깝게도 검술, 마법 및 모든 종류의 전투 재능에 자질이 없습니다.

* 현재 상태 이상 ‘빙의’에 걸려 있습니다.

+

······왜 하필 이런 인물에 빙의를 한 걸까.

분명 시나리오 메시지는 내가 ‘나와 관련이 있는 인물’에 이입을 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와 망나니 왕자 사이에 대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 자식은 태생 체근민이 10이나 된다.
그나마 비슷한 것은 나이 정도인데······.

“왕자님, 또 역할극에 몰입하신 겁니까?”
“역할극이라니?”
“지난번엔 초대 가주님 흉내를 내시더니······ 이번엔 처음 보는 복장이군요. 꼭 지구 연대기의 인물들처럼 입으셨습니다.”

무심코 거울을 보자 익숙한 복색이 보였다. 특이하게도 나는 빙의와 동시에 내가 가진 장비들을 통째로 전송받은 채였다. 나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어떤 마왕의 복장일세.”
“······마왕이요?”

코트의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자, 다행히 내가 소유 중이던 장비들이 그대로 만져졌다.
먼저 품속의 스마트폰을 꺼냈다. 일단 이곳의 정보를 알아내려면, ‘멸살법’의 내용을 다시 확인할 필요성이······.

츠츠츠츳!

[해당 아이템은 세계관과 맞지 않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망할 페널티가.
내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집사가 말했다.

“하긴, 마지막으로 여흥을 즐기시는 것도 좋겠지요. 곧 폐하의 부름이 있을 겁니다. 그럼.”

집사는 그 말만을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나는 작은 방 안에 휑하니 남겨졌다.

「김독 자 는 외 로워」

그래, 너라도 있으니 다행이네. 다른 일행들은 어떻게 됐으려나······.
마지막으로 들은 메시지대로라면, 다른 일행들도 나와 같은 지역으로 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일단 시나리오 창을 열었다. 밀렸던 메시지들이 우르르 떠올랐다.

[당신은 ‘본섬’의 ‘카이제닉스 제도’에 진입하였습니다.]
[‘카이제닉스 제도’는 ‘성마대전’의 분쟁 지역과 현재 시공간적으로 단절되어 있습니다.]
[해당 지역의 서브 시나리오를 해결하면, ‘성마대전’에 진출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마 이 지역에서 군벌을 일으켜 성마대전에 참가해야 할 것이다.
즉, 이곳은 전쟁에 참가하기 위한 토대가 될 지역인 셈이다.

[당신은 아직 시나리오 정보를 열람할 수 없습니다.]
[해당 시나리오는 당신이 선택한 루트에 따라 전개가 달라집니다.]

내가 선택한 루트?
아니, 그래도 시나리오 실패 조건 정도는 알아야······.

[해당 시나리오는 당신이 죽지 않는 한 실패하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어쨌든 이번 시나리오는 내가 죽지 않는 한 실패하지는 않는다 이건가.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차분히 생각을 가다듬었다.

이 세계관에서 내 이름은 리카르도 폰 카이제닉스.

이 시나리오가 ‘빙의’를 기반으로 진행되는 만큼, 나는 이곳에서 철저히 왕자 행세를 해야 한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김독자 컴퍼니>의 다른 멤버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아마 나처럼 다른 인물에 빙의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먼저 그들을 찾아낸 후에······.

“왕자님, 계십니까? 기사 빌스턴입니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기사 빌스턴 프레이머.
리카르도의 기억이 맞다면, 그는 나의 호위 기사였다.

“왕께서 찾으십니다.”

그런데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나는 기이한 기분에 휩싸였다.
하얀 콧수염을 단 40대 초로의 기사. 분명 눈앞의 사내는 내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당신의 설화들이 해당 인물에게 반응합니다!]
[전용 특성, ‘시나리오의 해석자’가 효과를 발휘합니다!]

사내의 얼굴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자씨.”」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오래된 듯 그리운 목소리였다.

「“예전에 군대에서 탄피를 분실한 적이 있습니다.”」

사내에게 깃든 설화들이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기력을 잃은 문장들이, 필사적으로 나를 향해 뭔가를 호소하고 있었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 설화의 주인을 안다.

“······현성 씨?”

그러자 이현성이 나를 보았다.

[해당 인물이 당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현성 씨 맞죠?”

[해당 인물이 당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해당 세계관이 당신에게 정확한 배역을 연기할 것을 권고합니다.]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던 이현성이 이내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현―성? 하하, 또 역할극 중이신 겁니까? 뭘 흉내내신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현성은 전혀 나를 알아보지 못한 눈치였다.
마치, 나 같은 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표정.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빌스턴 경.”
“예.”
“이 옷이 뭔지 모르겠습니까?”
“음······ 악마 사냥꾼들의 복장입니까? 아니면 혁명단원의······.”

비록 얼굴은 다르지만, 내 옷은 내가 줄곧 입던 흰 코트였다.
정말 이 사내가 이현성이라면, 나를 못 알아볼 턱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빌스턴 프레이머 (???)
나이 : 43세
배후성(背後星) : 없음
전용 특성 : 충신, 명예로운 기사
전용 스킬 : [대기조 Lv.8], [제도 왕가 검술 Lv.8]······.
성흔 : 없음
종합 능력치 : [체력Lv.80], [근력Lv.80], [민첩Lv.80], [마력Lv.80]
종합 평가 : 한때 이 육신에는 두 개의 영혼이 살았습니다. 그는 왕국의 기사였고, 동시에 누군가의 방패였습니다. 방패는 자신의 주인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마침내 그 방패의 주인이 나타났으나, 이제 방패는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

특성창의 설명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으며, 나는 일권무적 유호성의 경고를 떠올렸다.

―본섬에 가게 되면, ‘거대 설화’를 조심해라.
―거대 설화라면 이제 다룰 수 있는데요.
―그런 뜻이 아니다. 그곳에서 너는 거대 설화 그 자체와 싸우게 될 것이다.

이제야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것 같았다.
고개를 들자, 제도 전체를 감싼 거대한 개연성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곳에서 뭔가가 나를 보고 있었다. 성좌도, 마왕도 아닌 무언가가.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당신을 탐욕스럽게 바라봅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현성이 계속해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흠, 혁명단원도 아니라면 혹시 다른 제국의······.”

내가 알던 이현성은, 이미 이 세계에 먹혀 사라진 뒤였다.





< Episode 71. 50년 후 (2) > 끝

< Episode 71. 50년 후 (3) >





알현실로 이동하는 내내, 나는 빌스턴에게 말을 걸었다.

“빌스턴 경. 혹시 뭔갈 자주 잃어버리시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탄피······.”
“예?”

[세계관에 맞지 않는 언어를 사용하여······.]

“그러니까, 휴대용 마법 폭탄을 잃어버렸다든가······.”
“제가 그런 한심한 얼간이로 보이십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저 경직된 걸음걸이나 탄탄한 흉근, 얼빵한 표정을 보면 이현성이 분명한데······ 그럼에도 ‘등장인물 일람’에 따르면 이 자는 이현성이 아니라 이 세계관의 인물인 ‘빌스턴 프레이머’였다.
나는 등장인물 일람의 ‘종합 평가’ 항목을 다시 읽어 보았다.

―한때 이 육신에는 두 개의 영혼이 살았습니다. 그는 왕국의 기사였고, 동시에 누군가의 방패였습니다.

‘왕국의 기사’는 본래 몸의 주인인 ‘빌스턴 프레이머’를 말하는 것일 테고, ‘방패’는 분명 이현성을 가리키는 것일 터였다.

―방패는 자신의 주인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마침내 그 방패의 주인이 나타났으나, 이제 방패는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대목이다. 이현성이 다른 일행들을 기다렸다는 것은 알겠다.
문제는 숫자다. 종합 평가의 ‘오랜 시간’이라는 건,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을 말하는 것일까.

“왕자님?”

둔한 눈으로 나를 보는 사내를 보며, 나는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현재 상황에서 내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둘뿐이었다.

하나, 이현성은 나보다 먼저 시나리오에 투입되었다.
둘, 이현성은 이 세계의 거대 설화에 먹혀 자아가 사라졌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당신을 향해 입맛을 다십니다.]
[‘제4의 벽’이 ‘카이제닉스 제도’를 노려봅니다.]

그렇다면, [제4의 벽]을 가지지 않은 다른 인물들은 모두 이현성처럼 되어버린 것인가?

“왕자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나는 빌스턴의 큼지막한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 인물은 분명 이현성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이현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미안합니다, 빌스턴 경.”
“예? 갑자기 무슨······.”
“그간 너무 고생만 시킨 것 같습니다. 절 지키시느라 힘드셨던 것 알고 있습니다.”

이건 빌스턴 프레이머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챙겨드리지 못했지요. 몇 번이나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말입니다.”

이번 시나리오까지 오는 내내, 이현성에겐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았다. 그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시나리오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순번이 늘 밀려났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함께 싸운 설화들이 우리를 대신 증명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빌스턴은 내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코를 훔치며 회랑 바깥의 정경을 내다보았다.

“왕자님은 정말 마음이 따뜻하시군요.”

[등장인물 ‘빌스턴 프레이머’가 당신에게 감동합니다.]

······내가 감동시키고 싶은 건 그쪽이 아닌데 말이지.
우리는 말없이 회랑을 거닐었다.
회랑의 통로에는 역대 왕의 초상들이 차례로 걸려 있었다. 개중에서도 눈에 띈 것은, 폭풍 속에서 부러진 검을 치켜든 한 사내의 모습이었다.

―초대 가주, 폭풍왕 율리시즈 카이제닉스 1세.

나는 잠시 멈춰 서서 그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저도, 평생 왕자님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빌스턴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멀찍이 보이는 성채의 흉벽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기억하십니까? 왕자님이 아직 7살이시던 무렵, 저는 왕자님을 잃을 뻔했습니다.”
“······음?”
“성채 흉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계셨던 왕자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합니다. 어디 그뿐인 줄 아십니까? 왕자님이 13살이 되셨을 때 뒷간에 가셨다가······.”

아니 이 양반······ 이현성이랑 너무 비슷하잖아.

“그런데 왕자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미천한 이몸을 걱정하시니······.”
“마지막 순간이라뇨?”

빌스턴은 슬픈 눈으로 나를 보더니, 이내 내 시선을 피했다.

“······도착했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어느새 알현실의 문이 눈앞에 있었다. 문이 열리자, 로드 카펫을 중심으로 도열한 근위대가 우리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근위대의 중심에, 은빛의 크레스트를 쓴 근위대장이 서 있었다.

“빌스턴 경, 왜 이렇게 늦었나?”
“왕자님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눴소이다.”

대화에 태클을 걸고 싶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분위기 때문에 좀체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눈시울을 붉히던 빌스턴이 근엄한 기사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근위대장이 말했다.

“작별 인사라. 대역죄인 주제에 사치를 누리는구나.”
“말조심하시오.”

두 사람이 동시에 전투태세를 취했다.
빌스턴은 바스타드 소드를 꺼냈고, 근위대장은······ 어?

······왜 저 사람이 저 칼을 가지고 있지?

근위대장이 쥔 검은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검이었다.
왜냐하면 그 검은, 내가 손수 재료를 모아 누군가에게 만들어 준 검이었으니까.

[심판자의 검].

“빌스턴 경. 왕자와 함께 형장의 이슬이 되고 싶은 건가?”

투구 너머로 일렁이는 근위대장의 붉은 눈동자.

「“왕이시여······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소서······.”」
「“독자 씨, 또 혼자 하려고 하네······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요.”」

나는 저 사람을 알고 있다.

“멈추십시오!”

내 외침에 기세를 끌어 올리던 빌스턴이 물러서자, 살벌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근위대장이 자신의 투구를 벗었다.
근위대장은 정희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에리히 스트라이커 (???)
나이 : 37세
배후성(背後星) : 없음
전용 특성 : 충신, 소드마스터
전용 스킬 : [귀살 Lv.10], [제도 왕가 검술 Lv.10]······.
성흔 : 없음
종합 능력치 : [체력Lv.75], [근력Lv.80], [민첩Lv.90], [마력Lv.70]
종합 평가 : 한때 이 육신에는 두 개의 영혼이 살았습니다. 그는 왕국의 근위대장이었고, 누군가의 검이었습니다. 검은 방패와 함께 오랜 세월 누군가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검은 마침내 자신이 기다리던 이를 만났으나, 이제 검은 그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

빌어먹을, 정희원마저 이런 상태인 건가.
고요한 눈으로 나를 보던 근위대장이 말했다.

“왕자가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군. 근위병들은 죄인을 포박해라.”

······포박?
나는 반항할 틈도 없이 근위병들에게 붙잡혔다. 애초에 평균 능력치 10의 몸으로 저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렬한 근위병들의 너머로 단두대가 보였다. 그제야 나는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깨달았다.

아무래도 이 시나리오는, 나의 사형식으로 시작하는 모양이다.


*


한때 내가 읽은 소설 중에는, 소위 ‘불한당물’이라는 장르가 있었다.
왕가나 귀족가의 불한당 막내로 태어난 주인공이 온갖 기연을 얻게 되며 개과천선하게 된다는 식의 이야기.
보통 그런 이야기는 시작이 비슷하다.

「카이제닉스 왕가는 몰락했다.」

시작부터 가문이 몰락하거나.

「제도의 왕은 자신이 아끼던 각료의 검에 찔려 사망했다.」

부모와 친지가 죽으며 위기에 빠진다.

「검술에 능했던 둘째 왕자와 마법에 능했던 셋째 왕자는, 찬탈자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아니, 그런 중요한 기억이 이제야 떠오르면 어쩌자는 건데.

“죄인을 인도하겠다.”

덕분에, 나는 멍청하게 제 발로 사형장까지 찾아온 꼴이 되었다.
머릿속으로 온갖 상념들이 떠올랐다.

이 망나니가 왜 자살을 했나 했더니. 사형당하기 싫어서 그런 거였나?

근위대에게 붙잡힌 빌스턴이 나를 애타게 불렀다.

“왕자님! 리카르도 왕자님!”

나는 근위대장에게 머리채를 붙잡힌 채 사형대를 향해 질질 끌려갔다.
정희원이 의식이 있었더라면 굉장히 재미있는 광경이었을 텐데.
내 목에 딱 알맞게 설계된 받침대가 보인다.
이제 조금 후면 나는 저 사형대에 올라 목이 잘리겠지.
그리고 내가 죽으면, 이번 시나리오는 실패할 것이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나는 근위대장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정말 이럴 겁니까?”

근위대장이 피식 웃었다.

“이제 와 죽는 게 두려워진 모양이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제 검이 되어주기로 하셨잖습니까.”

근위대장의 표정에 희미한 당혹감이 어렸다.

“무슨 헛소리지?”
“벌써 맹세를 잊으신 겁니까? 저와 함께 이 모든 시나리오의 끝을 보겠다는 말들은, 모두 거짓이었습니까?”

[등장인물 ‘에리히 스트라이커’가 당신에게 미약한 혼란을 느낍니다.]

“죽을 때가 되니 헛소리를 하는군.”

이현성과 마찬가지로, 정희원의 자아 또한 쉽게 되돌아오지 않았다.
차가운 나무 받침의 감촉이 내 목젖을 감쌌다. 그리고 누군가가 외쳤다.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휘장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적막이 내려앉은 알현실을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고고하고 가볍지만, 묵직한 걸음걸이. 그 걸음을 반주 삼아, 리카르도의 기억이 노래처럼 들려왔다.

「아버지와 형들의 원수.」
「제도 카이제닉스의 검은 마법사.」
「왕 살해자.」
「그리고······.」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내가, 사랑했던 여인.」

“죄인은 고개를 들라.”

천천히 고개를 들자, 그곳에 키 작은 왕이 서 있었다. 은색의 자수가 놓인 중세풍의 검정색 클로크에 말끔한 타이츠.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느냐?”

나는 멍하니 왕을 바라보다가 입속으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해당 인물의 정보가 일부만 출력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
나이 : 50세
종합 평가 : 해당 인물?에 대한? 종합 평가?가 준비 중?입니다.

+

왕의 정보는 제대로 출력되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20대 초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외모.
표기된 인물 정보에 표기된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왕의 얼굴을, 나는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이현성이나 정희원은 본래부터 ‘멸살법’의 등장인물이었다.
하지만, 등장인물이 아닌 존재라면 어떨까.
나처럼 소설의 등장인물이 아니었던 존재라면.
나는 그런 기대를 했었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느냐 물었다.”

그 녀석이라면, 나를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김독자가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는, 이미 5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라는 사실을.」

시나리오에 진입하기 직전, 눈앞에 떠올랐던 최종본의 글귀.
그건 이런 의미였던 건가.

“있습니다.”
“죄인은 말하라.”
“내가······.”

나는 억지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 수영아.”

츠츠츠츠츳!

세계관의 개연성에 맞지 않는 발언에 강렬한 스파크가 내 전신을 휘감았다. 그래도 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한수영은 내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미동도 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동자. 그 아래로 보이는 눈물점. 늘 장난처럼 나를 놀리던 입술이 이윽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형을 집행하라.”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졌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물론 이유는 있다.

「본섬의 모든 시나리오는 ‘3세대 설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내 생각이 맞다면, ‘리카르도 폰 카이제닉스’는 결코 이런 식으로 죽지 않을 것이다.

콰아아아앙!

궁의 한쪽 벽면이 폭발한 것과 내리꽂히던 단두대가 작살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뿌연 먼지 속에서 부서진 길로틴의 칼날이 보였다.

“혁명단이다!”
“모두 폐하를 보호하라!”

소란 속에서 근위대의 고함이 들려왔다. 알현실은 순식간에 신음과 비명이 뒤섞인 아비규환이 되었다.

“망할! 1왕자다!”
“막아! 놈을 막아라!”

제도 카이제닉스의 제 1왕자.
리카르도의 친형이자, 검술과 마법, 지식에 모두 능통한 인물.

“내 동생을 구하러 왔다.”

벅차오르는 고양감.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검격이 알현실을 수놓자, 달려들던 근위병들이 부러진 수수깡처럼 쓰러졌다.

세계관이 변하고, 시나리오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인물도 있다.
이 세계선을 모두 뒤져도 아마 하나뿐일 것이다.

나는 반쯤 열리던 입을 도로 다물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피 끓는 전투를 좋아합니다.]

내 동료들은 모두 나를 잊었다.
아마 저 녀석도 마찬가지겠지.
어쩌면 그에겐 더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 순간, 1왕자의 눈이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메시지가 들려왔다.

―네놈, 김독자로군.





< Episode 71. 50년 후 (3) > 끝

< Episode 71. 50년 후 (4) >





―잡아라! 1왕자부터 잡아!
―놈들이 4왕자를 데려간다!

화면 속, 성이 난 환생자들이 화살과 검격을 퍼붓고 있었다.
뿌연 폭연 속을 달리는 두 사내. 유중혁과 김독자였다.

[바앗, 바아아앗!]

허공에서 비유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찹쌀떡처럼 방방 뛰었다.
김독자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화살들. 몇 개의 화살이 정확히 김독자의 등을 노리고 날아들었으나, 1왕자가 재빨리 검을 휘둘러 화살을 막아냈다.

―후퇴하라!

일제히 물러가는 혁명단원들.
그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는 성좌들이 있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카이제닉스 제도’를 응시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명계의 후계자를 바라봅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답답함에 포효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메시지는 채널 속의 화신들에게 닿지 않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제발 한마디만 전해달라고 호소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간접 메시지 발송 허가를 내줄 것을······.]

[바앗. 바아앗.]

비유가 슬픈 눈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채널의 중계 설정권을 가지는 것은 도깨비들이었지만, 이번 ‘환생자들의 섬’은 경우가 특이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만다라의 수호자’를 노려봅니다.]

이번 ‘성마대전’의 시나리오 무대를 제공한 것은 ‘환생자들의 섬’의 주인인 만다라의 수호자.
만다라의 수호자는 직접 시나리오에 참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번 ‘성마대전’에 한해서, 다른 고위급 도깨비들과 동일한 수준의 시나리오 간섭권을 가진 상태였다.

[어린 천사여, 그것은 불가합니다. 이참에 불교에 귀의한다면 모를까.]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심통을 부립니다.]

[화를 조심하십시오. 화가 많은 이는 후에 그 화에 먹히게 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분통을 터트립니다!]

성좌들이 분통을 터트리든 말든, 만다라의 수호자는 고적한 눈으로 화면 속의 김독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얼굴에서 어떤 심오한 화두라도 탐색하려는 것처럼.

[인근의 채널이 일시적으로 동결됩니다!]

츠츠츠츠츳······.

급작스런 스파크와 함께 허공에서 누군가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만다라의 수호자가 무심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몸이 관리국 도깨비의 출입 허가를 내줬던가요?]
[이번엔 사안이 사안인지라 직접 나왔습니다, 환생자들의 왕이시여.]

나타난 이는 상급 도깨비 비형이었다.
비형은 예의 바르게 불가의 예를 취한 뒤, 곧장 질문을 시작했다.

[부처에겐 열 가지 이름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세존, 석존, 석가, 여래, 불타, 붓다······ 그대는 그중 누구입니까?]

비형의 말에 만다라의 수호자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만다라의 수호자.
그는 자신이 가진 이름에 따라 다른 존재로 화한다.

[이 몸은 석존(釋尊)입니다.]
[석존, <김독자 컴퍼니>에 적용된 비정상적인 시나리오의 발동을 취소해주십시오.]
[약속과 다르군요. 이 몸에게 예비 시나리오의 통제권을 넘기지 않았습니까?]
[불가는 이번 성마대전에서 중립이 요구되어 있을 텐데요.]

비형의 예리한 시선이 석존을 향했다. 시선에 가만히 대응하던 무승의 동공 속에서 만다라의 회전 방향이 뒤바뀌었다.

[글쎄, 중립을 어긴 쪽은 이 몸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무슨 말씀이신지.]
[최근 특정 성운의 화신들을 편애하는 상급 도깨비가 있다더군요.]

석존의 의뭉스런 말투에, 통 튀어 오른 비유가 말랑말랑한 배를 비형의 머리 위에 걸쳤다.

[당신이 이곳에 온 것은 관리국의 의사입니까, 본인의 의사입니까?]

슬그머니 입술을 깨문 비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화면 속에서 폭연을 뚫고 달아나는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저들에게 내준 시련은 과합니다. 성좌들 기준에서는 찰나이지만, 인간의 기준에서는 생애에 달하는 시간이란 말입니다.]
[이 몸 역시 한때는 인간이었습니다. 이것은 필요한 시나리오입니다. 저들이 정말로 ■■에 도달하고 싶다면 말이지요.]
[······석존.]
[도깨비여, 곧 최후의 축제가 시작될 겁니다.]

석존의 동공 속에서 만다라가 회전했다. 회전하는 만다라 위로, 김독자와 유중혁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당신은 어떤 ■■에 투표할 겁니까?]


*


나는 유중혁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알현실을 탈출했다. 근위대의 추격은 집요했으나, 혁명단원 몇 명의 희생 끝에 나는 유중혁과 안전한 피난처로 대피할 수 있었다.
유중혁은 기절한 빌스턴― 그러니까 이현성의 빙의체를 바닥에 내던지며 입을 열었다.

“네놈은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지?”
“늦고 싶어서 늦은 게 아니야.”

[세계관이 당신들의 대화를 의심합니다.]
[‘한낮의 밀회’를 발동합니다!]

유중혁은 특유의 살벌한 눈빛으로 나를 잠시 노려보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2년 전이다.

나는 차분히 유중혁의 이야기를 들었다.

갑자기 제도 카이제닉스의 제1 왕자가 되었고.
역시나 갑작스런 왕위 찬탈이 발생했다.
그리고 유중혁은, 그 폭동의 한가운데에 갑작스레 내던져져 생존 활동을 시작했다.
왕성을 탈출하고, 혁명단을 꾸렸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을 찾아다녔다.

―내가 왔을 때 이현성과 정희원, 그리고 한수영은 이미 저런 상태였다.
―그 셋이 전부야? 다른 사람들은?
―발견하지 못했다. 아마 이곳으로 소환된 일행은 저들이 전부다.

유중혁은 [현자의 눈]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 [등장인물 일람]보다 더 상세한 정보를 엿볼 수 있는 스킬. 녀석은 그 스킬로 지금껏 일행들을 찾아왔을 것이다. 나를 발견한 것도 비슷한 이치였겠지. 나는 [현자의 눈]에 탐색되지 않으니까.

나는 쓰러진 이현성을 내려다보았다.

유중혁은 2년 전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현성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세계관에 갇혀 있었던 것일까.

―다들 거대 설화에 먹힌 거겠지?
―아마도.
―넌 아무렇지도 않냐?
―겨우 몇 년의 세월로 나를 무너트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새삼 유중혁이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지 깨닫는다.
그 든든한 이현성도, 독한 정희원도, 심지어는 저 한수영까지 무너졌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화신 ‘유중혁’을 못마땅하게 쏘아봅니다.]

그런데 유중혁은 끄떡도 없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세계관의 ‘거대 설화’가 우리를 무너트리는 방식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유중혁은 이 세계의 누구보다 시간에 대한 저항력이 강한 존재였다. 그는 이미 수백 년의 암흑 단층 속에서 고련을 거듭한 적도 있으니까.

[세계관이 당신들의 오랜 침묵에 의아함을 표합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시나리오는 세계관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다.
아마 유중혁도, 이제부터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눈치챈 듯했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입을 열었다.

“형.”

유중혁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딴 표정 짓지 마. 이번 시나리오 한정이니까. 나라고 뭐 좋은 줄 아냐?

용암처럼 이글거리던 유중혁의 동공이 간신히 가라앉았다.
자식, 고생 좀 할거다.
리카르도의 기억이 맞다면 본래 1왕자의 설정은 ‘다정하고 온화한 큰형’이니까.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말해라. 리카르도.”
“이제 어떡할 거야? 보아하니 혁명도 실패한 거 같은데. 아니, 애초에 사형장엔 왜 나타난 거야?”
“왕을 죽일 생각이었다.”

[등장인물 ‘리카르도 폰 카이제닉스’가 동요합니다.]

아마 저건 진심일 것이다. 내가 아는 유중혁이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시도할 법도 하니까.
하지만 그것은 나의 방식이 아니다.

“그런 짓 해도 돼? 원래 형의 아내였잖아.”
“정확히는 그럴 예정이었던 여자지. 왕위 찬탈이 발생한 것은 결혼식 첫날이었으니까.”

그렇군. 그런 식의 전개였나. 조금 마음이 놓였다.
한수영과 유중혁이 커플이라니, <김독자 컴퍼니>는 아직 사내 연애를 허용한 적 없다고.
뜻밖의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세계관이 당신들의 발언을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해당 시나리오의 장르가 ‘로맨스 판타지’ 쪽으로 약간 기울었습니다.]

······장르가 기울어?
유중혁이 계속해서 말했다.

“어차피 구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녀석은 타락한 마법에 물들어 본래 자신의 인격을 잃었다.”

어쭈?

[세계관이 화신 유중혁의 발언을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해당 시나리오의 장르가 ‘판타지’ 쪽으로 미세하게 기울었습니다.]

나는 유중혁을 향해 눈짓을 주었다.

―너도 들리지?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네놈도 나도 너무 늦었다. 모두를 구할 수는 없어.”
“아직 늦지 않았어. 어쨌든 우리 편이 둘은 있잖아.”

나는 여전히 곯아떨어져 있는 빌스턴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셋.”
“그 셋이 전부다.”
“혹시 알아? 더 있을지도. 어쩌면 기적이 일어나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존재가 우리를 도와줄지도 모르잖아.”

[세계관이 당신의 발언을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해당 시나리오의 장르가 ‘퓨전 판타지’의 가능성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앞에 시나리오 메시지가 떠올랐다.

[서브 시나리오― ‘장르 선택’의 선택 분기가 발생하였습니다!]
[시나리오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시나리오를 확인했다.

+

<서브 시나리오 ―장르 선택>

분류 : 서브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당신이 소환된 세계관은 ‘성마대전’에 참가할 수 있는 세계관입니다. 당신이 속한 세계관의 ‘장르’를 선택하여 세계관의 결말을 유도하십시오. 결말을 본 세계관은 ‘성마대전’의 참전권을 획득합니다.
제한시간 : 없음
보상 : 성마대전 참전, 300,000코인, ???
실패시 : ‘환생자들의 섬’에 존재 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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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선택 가능한 장르 목록>

1. 로맨스 판타지
2. 판타지
3. 퓨전 판타지

* 해당 장르에 어울리는 행동을 지속할수록 장르의 속성이 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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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이었군.”

고개를 들자 유중혁도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대충 어떤 식으로 시나리오를 전개해야 할지 감이 온다.
문제는, 어떤 ‘장르’가 옳은 방향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정보가 너무 없어. 이 세계의 본래 전개가 어땠는지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떤 세계관을 택했을 때 어떤 결말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모든 일행을 살려서 다음 시나리오로 떠나는 것.
만약, 내가 어떤 장르를 택한 대가로 누군가가 죽어버린다면?
유중혁이 물었다.

―네놈의 잘난 책에도 나오지 않는 모양이지?

나는 움찔했다가 대답했다.

―회귀자인 너도 모르는 걸 내가 알겠냐.
―나는 안다.
―뭐? 알긴 뭘 알아?
―이 시나리오의 전개.

나는 깜짝 놀라 녀석을 바라보았다.
유중혁이 이 시나리오의 전개를 알고 있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3회차의 유중혁은 이 시나리오를 겪은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책을 읽었다.
―무슨 책?

순간 ‘멸살법’을 얘기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럴 리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멸살법’에도, 이 시나리오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는 없다.

―1863회차의 한수영이 쓴 일기를 읽었다. 그 회차의 한수영도 이 시나리오를 거친 적이 있다.
―1863회차의 한수영이? 네가 그 일기를 왜 가지고 있는데?
―특수한 방법을 통해 손에 넣었다.

나는 유중혁을 잠시 노려보았다.
이거, 뭔가 좀 복잡한 배신감이 느껴지는데.

1863회차의 한수영은, 이 시나리오에 대한 정보를 내게 말해준 적이 없었다.
왜일까. 내가 이 시나리오에 대해 알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나 엿 먹어보라고?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버렸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그런 정보를 갖고 있으면 진작에 말을 했어야지 인마. 그래서, 1863회차의 한수영은 여길 어떻게 클리어했대?

어쨌거나 이 시나리오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정보가 있다는 것은, 정해진 공략 루트가 있다는 것이니까.
그러나 유중혁의 표정은 어두웠다.

―이미 이 세계는 본래의 공략 루트에서 벗어났다.
―무슨 소리야?
―본래 이 세계에 ‘왕위 찬탈’ 같은 사건은 없었다. 지금의 왕이 ‘왕’이 되는 사건 같은 건, 일어난 적이 없다는 얘기다.
―그럼······.
―우리가 이 세계에 오기도 전에, 누군가가 이야기의 전개를 바꿨다.

당혹스러웠다.
회귀자인 유중혁도, ‘멸살법’의 독자인 나도 앞의 전개를 알 수 없는 상황. 지금까지도 ‘멸살법’의 전개와 어긋난 적은 종종 있었지만, 이처럼 앞이 짐작되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내가 아는 ‘멸살법’에는 이런 시나리오에 대한 해법이 나오지 않는다.

「역 시 최종 본을 읽 어야 했 나」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린 것은 그때였다.

“들어오라.”

유중혁의 말과 동시에 벌컥 열린 문으로 혁명단원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늙수그레한 한 사내를 포박하고 있었다.

“왕의 밀사입니다. 단장님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사내는 내가 처음으로 빙의했을 때 물을 건넸던 집사였다.
바들바들 콧수염을 떨던 집사가 우리에게 읍을 하며 말했다.

“1왕자님, 그리고 4왕자님······. 폐, 폐하께서 전하시라 한 물건이 있습니다. 정확히는······ 40년 전의 폐하께서······.”

······40년 전?
유중혁과 나는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집사는 품속을 뒤져 우리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그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폭망한 시나리오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 한수영 著』





< Episode 71. 50년 후 (4) > 끝

< Episode 72. 세 가지 방법 (1) >





Episode 72. 세 가지 방법


나는 책을 받아들고 멍하니 있다가, 집사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이 책을 주신 게 언제라고?”
“처음 원고를 주신 건 40년 전입니다. 그 뒤로도 10년 정도 제게 꾸준히 원고를 주셨습니다. 제가 한 일은 그걸 책으로 엮은 것뿐입니다.”
“내용을 읽었나?”
“맹세코 단 한 줄도 읽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그저 장정 편집만 도맡았을 뿐입니다.”

나는 책을 펼쳤다.
그러자, 말끔하게 정리된 책의 목차가 나타났다.

······.

Episode 13. 반격의 왕자들
Episode 14. 1왕자의 난
Episode 15. 세 가지 방법

······.

나는 책의 페이지를 정신없이 넘겼다.
두꺼운 장정이었지만, 특성 효과를 받는 내겐 읽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내 속독에 불만을 갖는 녀석도 있었다.

“지나치게 빨리 읽는군.”
“형이 느린 거겠지.”
“무슨 내용이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장정을 넘기는 내내, 묘한 탈력감이 밀려왔다. 페이지마다 묻어 있는 세월의 피로감과 절박감. 그것이 한수영의 의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한수영은 내가 자신의 책을 읽게 되는 순간이 올 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읽던 페이지를 잠시 멈춰두고 장정의 맨 마지막 부분을 펼쳤다.

그곳에는 <작가 후기>가 있었다.

「하여간, 꼭 책 읽으면 작가 후기부터 펼쳐보는 인간들이 있어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를 맞이하는 문장들. 그럴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아마 네가 이 책을 읽을 때 쯤이면 나는······.」

나는 비감 어린 마음으로 다음 문장을 읽었다.

「여전히 잘 살아 있겠지. 하하, 쫄았냐?」

이 자식이.

「그나저나, 내 예상이 맞다면 지금 이 글을 읽는 너는 김독자겠지. 왕자 김독자라. 그 꼴을 구경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네.」

한수영 특유의 비아냥거림이, 그녀가 쓴 문장 사이사이에 선명하게 배어 있었다.

「너인 줄 어떻게 알았냐고? 뭐······ 사실 나도 확신하는 건 아냐. 내 예상 창작도 한계란 게 있으니까. 다만 네가 이 세계에 왔을 때의 경우의 수와 클리셰 조건들이 있고, 나는 그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을 짐작했을 뿐이야. 아, 물론 내 예상이 틀릴 수도 있겠지.」

장난치듯 서술된 문장들.
하지만 그 문장에 서술된 내용까지 장난은 아니었다.

「사실은 틀렸으면 좋겠어. 내가 몇십 년이나 누굴 기다리다니······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냐 미친놈아.」

한수영의 <작가 후기>는 한 번에 쓰인 것이 아니었다. 아마 한수영은 이 세계에 빙의된 그 순간부터, 조금씩 이 기록들을 모아 왔을 것이다. 그리고 직접 글을 쓸 수 있게 된 후부터 기록들을 축적했겠지.
한수영의 기록은 계속되었다.

「예상했겠지만, 나는 이 여자 몸으로 태어났어. 처음에는 내가 환생한 줄 알았다니까······. 첫 1년 정도는 답답해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 머릿속 [아바타]를 활용해서 기억 정리를 하지 않았더라면 진즉에 맛이 가버렸을 거야. 그나마 네 살이 되면서 글을 쓸 수 있게 되니까 상황이 좀 나아지더라. 빌어먹게도, 나도 글쟁이라고 이런 순간까지 글을 쓰며 구원을 받고 싶었나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채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묵묵히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전부였다.

「처음에는 늦어도 3년쯤 지나면 올 줄 알았어. 전에도 3년 만에 돌아왔었잖아. 그런데 3년이 지나고, 4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니까······(이렇게 서술한다고 해서 시간이 금방 간 거라고 착각하진 마라) 생각이 달라지더라. 그리고 어느 순간 납득하게 됐어.」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조금씩 힘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김독자는 당분간 오지 않는구나.」

한수영의 필체가,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기다리라 해놓고 오질 않는구나.」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지만 그게, 김독자의 잘못은 아니겠구나.」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한들 이 글을 쓰던 순간의 한수영에게 닿기나 할까.

「미안, 너도 이런 거 읽기는 싫을 텐데. 근데 말야, 여기선 징징대지 않는 게 쉽지가 않아.」

한수영의 문장은 계속되었다.

「내가 소설로 쓸 때는 몰랐는데, 여기서 살다 보면 진짜 생각지도 못한 불편한 디테일들이 많아. 샤워 시설도 불편하고, 침실에서는 주먹만한 벌레들이 기어 다니고, 음식은······ 말을 말자.」

6년째도.

「요즘 나도 말투가 이상해지는 거 알아? 무슨 중세시대 귀부인처럼 말한다니까.」

7년째도.

「김독자 경. 대체 언제쯤 오시렵니까?」

8년째도.

「우웩.」

9년째도.

「장난 같아. 인간의 삶이 이렇게 빨리 지나갈 수 있다는 게.」

그때부터, 기록은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시간 순서가 일정하지 않았고, 나중에 추가한 듯한 기록들도 군데군데 발견되었다.

「시발」
「김독자 개새끼야」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거지 같은 도깨비 새끼들아」

.
.

「슬슬 내가 이곳에서 살아온 시간이, 지구에서 살았던 시간이랑 맞먹어 가.」

「······그러니까 다음에 보면 누나라고 불러라 알겠냐?」

한수영의 필체가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한수영의 것에서, 마치 한수영이 아닌 다른 것이 되어가는 느낌으로.

「사실 이 글을 쓰는 건, 내 미래가 어떨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야. 그리고 어쩌면, 이 세계관의 미래도 말이지.」

수십 년은, 성좌들의 입장에서는 짧은 세월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그렇지 않다.
한수영은, 이곳에서 하나의 생을 견뎌내야 했다.

「아마 이 시나리오는 ‘멸살법’에는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도 그럴 게, 우리가 바꾼 이야기가 너무 많잖아.」

우리.
그 오랜 세월을 홀로 겪고도, 너는 아직 나를 그렇게 불러주는 건가.

「나마저 손 놓고 있으면 한심한 너랑 유중혁이 이것저것 삽질만 하다가 시나리오 망칠 게 뻔하니까······ 그러니까」

순간 눈앞에 한수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평소처럼 당당하고 야무진 그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거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내 유일한 독자여. 이 이야기는, 망한 시나리오 속에서 살아남은 한 여자의 이야기다.」

목덜미 끝에서부터 서서히 소름이 올라온다.
한수영이 살았던 세월과.
그 분노와, 원한과, 기다림이 맺혀 만들어진 문장.

「네가 이 ‘세 가지 방법’에 알맞은 인물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할 거야.」

그 문장은, 내가 아는 어떤 문장과 몹시도 닮아 있었다.

「이 이야기를 읽은 너는,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라는 것.」

한수영의 후기는 거기서 끝이 났다.
나는 한참이나 마침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리카르도.”

돌아보자, 유중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여자에게도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힘이 있었나?”
“······아마도.”

본래 [예상표절]은 1863회차 한수영의 힘이었다.
이 책을 쓴 이번 회차의 한수영 또한, 그 힘을 손에 넣은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었다.
멸살법을 잃은 내게 주어진 새로운 이정표.

[세계관이 당신들의 대화에 주목합니다.]
[해당 시나리오의 장르가 ‘퓨전 판타지’ 쪽으로 미세하게 기울었습니다.]

나는 책의 페이지를 처음으로 되돌렸다.
지금부터는 필요한 정보를 꼼꼼하게 정독해야 할 시간.
문득, 아까는 대충 넘겨 읽었던 문장이 눈에 띄었다.

「추신. 이 소설은 ‘멸살법’의 2차 창작으로, 어떤 종류의 영리적 목적도 추구하지 않았음.」

피식 웃음이 나온다.

「Episode 1. SSS급 환생자의 탄생」

나는 한수영이 정성껏 쓴 그 문장들을 읽고 또 읽었다.
마치 취기에 홀려 다른 세계로 걸어 들어가듯, 그 문장들을 게걸스럽게 탐미했다. 오직 그것만이, 독자인 내가 이 이야기의 작가에 대해 갖출 수 있는 유일한 예우였으니까.

재밌다, 빌어먹게도.
어떤 대목에서는 ‘멸살법’보다도 더.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내가 고개를 들었다.


*


한수영은 말했다.
이 시나리오에는 세 가지 공략법이 있다고.

「세 가지 공략법은, 각자의 장르를 표방한다.」

판타지, 로맨스 판타지, 그리고 퓨전 판타지.

「‘역성혁명’ 루트는 ‘판타지’ 장르의 주요 전개다. 만약 이 루트를 택하게 된다면······.」

모든 루트에는 장단점이 있고, 뭔가를 얻으면 반대로 잃는 것들도 있다.
그리고 어떤 루트를 택하든 공통적으로 잃게 되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가장 먼저 잃어버리게 될 것은.

“사, 살려주십시오! 왕자님! 살려주십시오!”

이현성의 인권이다.

“좌로 굴러.”
“으윽, 크으윽!”
“우로 굴러.”
“왕자님······!”
“내가 언제 말대꾸를 명했지?”

유중혁은 군대의 교관처럼 이현성에게 얼차려를 시키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대, 대체 왜 제게 이런 걸 시키시는 겁니까! 4왕자님, 좀 말려주십시오!”
“혹시 뭔가 기억나는 거 없으십니까?”
“으, 으으······ 허리가 너무 아픕니다. 저는 노병이란 말입니다.”

한수영이 [예상표절]로 예상한 루트들을 밟기 위해서는, 이현성의 기억을 되돌려 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어떤 기억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더 잘 기억하는 법이다.

「아마 이현성에게는 잔혹한 일이 되겠지만.」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한수영의 책에도, 이현성의 시점에서 빌스턴이 살았던 시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현성이 어떤 삶을 살다가 세계에 먹혔는지를 알지 못하는 만큼, 우리가 이현성을 깨우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 또한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뭔가 기분이 이상합니다.”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있던 이현성이, 갑자기 헛소리를 시작했다.

“기분이 점점 편안해집니다.”

[등장인물 ‘빌스턴’이 심각한 혼란을 느낍니다.]
[등장인물 ‘이현성’의 자아가 꿈틀거립니다.]

나와 유중혁은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본래라면, 이 정도의 자극으로 이현성의 자아를 깨우는 것은 무리였을 터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내가 있고, 유중혁이 있다.

[당신과 같은 설화를 공유하는 존재들이 가까이에 있습니다.]
[설화 간의 결속력이 강해집니다!]

지금 이 자리에, <김독자 컴퍼니>는 셋이나 모여 있는 것이다.
옛말에 그런 말이 있다.
삼인성호(三人成虎).
사람 셋이 모이면 호랑이도 만든다.
우리는 호랑이는 만들지 못하겠지만, 다른 일은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성운이 가진 설화들이 ‘세계관’에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가령, 이 세계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기억을 불러온다든가.

[등장인물 ‘이현성’의 자아가 서서히 눈을 뜹니다.]

이현성의 몸에서 희미한 빛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당신들을 노려봅니다!]

한수영은 말했다. 결국 이 시나리오는 저 ‘거대 설화’의 통제하에 놓인 세계라고. 그러니 설화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자아를 되찾는 일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으, 으어, 어······.”

천천히 눈을 깜빡인 이현성이, 옹알이를 하듯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도, 독자 씨?”

[세계관이 개연성이 맞지 않는 발언을 제재합니다!]

츠츠츠츠츳!

“우와아아아악!”

스파크에 감전된 이현성이 몸부림을 쳤다.
고개를 돌리자 전투태세를 마친 유중혁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 필요한 준비는 모두 끝난 것이다.

[흑천마도]를 꺼내든 유중혁이 물었다.

―어떤 루트로 갈 거지?
―늘 우리가 하던 루트.

이번 시나리오의 작가는 한수영이다.
하지만 작가가 훌륭하다고, 작품이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공략을 시작하자, 유중혁.

결국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라 ‘등장인물’이니까.

[당신의 성운에 새로운 ‘거대 설화’가 발아합니다.]





< Episode 72. 세 가지 방법 (1) > 끝

< Episode 72. 세 가지 방법 (2) >





제도 카이제닉스의 근위대장 에리히 스트라이커.
명실공히 제도 최강의 기사이자, 왕의 첫 번째 검.
그런 그녀를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만든 것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 수련이었다.

슈아악!

침묵이 내려앉은 연무장의 밤을, 에리히는 베고 또 베었다.
후두둑 땀방울이 떨어졌다. 떨어진 땀방울을 보며, 에리히는 그것이 누군가의 핏방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놓쳤다. 그것도 폐하가 보는 앞에서.’

1왕자의 난.
그저께 있었던 알현실 습격 사건을, 호사가들은 벌써 멋대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노래를 지어 부르는 음유시인도 있었다. 대부분은 1왕자를 칭송하는 내용이었다.

「오오 위대한 혁명가 슈바이첸 폰 카이제닉스」
「그 드넓은 어깨와 등을 보라」

환한 빛살이 검무장의 어둠을 갈랐다. 1왕자와 함께 달아나던 4왕자의 얄미운 얼굴이 떠올랐다. 어둠을 베고 또 베어내도 사라지지 않는 얼굴.
기묘한 것은, 그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무척 미묘한 감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멀어지는 1왕자 슈바이첸과 4왕자 리카르도, 그리고 빌스턴 프레이머의 뒷모습. 그 셋의 뒷모습을 본 순간, 에리히는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그 감정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에리히는 검을 휘둘렀다.
늘 그랬듯,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러 상념을 털어버리고자 애썼다.

하지만 오늘의 수련은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습격인가.’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호리호리한 그림자.
에리히는 허리에 차고 있던 진검을 곧장 뽑아 들었다. 수상한 낌새를 보이는 순간 바로 베어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저쪽에서 먼저 인기척을 드러냈다.

“검을 넣으시지요, 저는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희미하게 비치는 달빛 사이로, 호리호리한 체구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리카르도 폰 카이제닉스, 이 제도의 4왕자.
에리히가 외쳤다.

“제정신인가? 무슨 배짱으로 여길 찾아온 거지?”
“세계가 바뀌어도 여전히 검을 좋아하시는군요.”

살벌한 기세를 풍긴 에리히가 검을 곧추세우자, 4왕자는 자신의 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에리히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꿍꿍이지?”
“어차피 10분만 지나면 근위병들이 달려와서 저를 포위할 테고, 또 경의 실력이라면 저를 제압하는 것쯤 힘든 일도 아니겠지요.”
“그래서?”
“순순히 항복하겠습니다. 경에게 체포되어, 사형장으로 가겠다는 얘기입니다.”

평소 4왕자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예상하지 못했다.
1왕자의 도움으로 탈출한 것이 바로 엊그제인데, 제 발로 들어와서 사형을 당하겠다고?
에리히는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 4왕자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4왕자는 정말로 비무장 상태였다. 에리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4왕자를 포박했다.
달빛을 받아 천진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그녀를 마주 보았다.

“대신, 10분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죽을 사람 부탁인데, 들어주지 않으시면 나중에 찜찜하실 겁니다.”

에리히는 복잡한 얼굴로 4왕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대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라면 듣지 않겠다.”

4왕자의 죄가 없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이제 제도의 왕은 바뀌었고, 에리히는 새로운 왕을 모시는 근위대장이었다.
4왕자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럼?”
“솔직히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내가 아는 당신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짐작도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런 그 서두에, 당황한 에리히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은 새로운 종류의 수작인가?
4왕자가 교묘한 말솜씨로 여인들을 꾄다는 것은 제도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오래전,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4왕자의 이야기는 시작되고 있었다.

“검도를 좋아해서 구 대표로 대회에도 참가할 정도로 재능이 있었던 여인이었지요.”

희미한 통증과 함께, 알 수 없는 감각이 머릿속을 쿡쿡 찔렀다.

“그 검으로, 그녀는 소중한 전우들을 몇 번이나 구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무엇.

“시나리오의 불의에 맞서 몇 번이고 검을 휘둘렀고, 그 검으로 저를 지켜주기도 했죠.”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나는 오직 폐하의 검이다.”

4왕자가 애석하다는 듯 에리히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시는군요.”

어둠 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리카르도 왕자님. 제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4왕자를 포박하던 에리히가 흠칫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언제부터였을까. 어둠 속에 두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에리히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역시 함정이었군.”
“함정이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사내는 빌스턴 프레이머였다.
이 제도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기사.

“에리히 경.”

빌스턴이 그녀를 향해 한 발짝 다가왔다. 깜짝 놀란 에리히가 경고했다.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4왕자의 목을 베겠다.”

이것은 함정이다. 달아나야만 한다.
에리히는 그런 생각을 하며 검무장의 출구를 살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당신과 관계된 설화들이 일제히 날뛰기 시작합니다!]

마치 굳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당신의 설화들이 ‘카이제닉스 제도’의 통제에 반발합니다!]

“우리, 잊지 않기로 했잖습니까.”

슬픈 눈으로 그녀를 보는 빌스턴.
아니······ 그의 이름은······.

[당신과 관계된 설화들이 오래된 기억들을 반추합니다.]

“희원 씨.”

[잊힌 설화들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 순간, 세계가 무너졌다.
흘러내린 설화가 에리히의 기억을 덮었다.
그것은 사라진 10년의 이야기.
아직 에리히가 에리히가 아니고, 빌스턴이 빌스턴이 아닌 시절의 이야기였다.


*


이현성과 정희원이 이 세계에 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이었다.

“현성 씨! 역시 현성 씨 맞죠?”
“엇, 희원 씨?”

츠츠츠츠츳······!

비슷한 시기에 이 세계로 빙의한 두 사람은, 운 좋게 일찍이 서로를 알아보았다.

―여기서는 [전음]을 써야 할 것 같아요.

둘은 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차근차근 모아갔다.

이곳이 ‘성마대전’에 참가하기 위한 마지막 예비 무대라는 것.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은 시차를 두고 이곳에 소환되는 중이라는 것.
그리고, 정해진 배역이 모두 모이기 전에 시나리오는 발동하지 않는다는 것.

―그나저나, 현성 씨는 비슷한 사람한테 빙의했네요.
―희원 씨도 무척 잘 어울리십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 세계는 그들의 자아를 갉아 먹는다는 것.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당신의 행위를 감시합니다.]
[세계의 개연성이 당신의 배역을 강요합니다.]

거대 설화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둘은 설화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배역을 연기해야 했다.

―아무래도 수영 씨는 다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우리도 언젠가 저렇게 되는 걸까요?
―분명 그 전에 독자 씨가 올 거라 믿습니다.

그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지혜랑 아이들은 잘 있을까요?
―그 아이들이라면 괜찮을 겁니다.

세상에 의지할 사람은 단 둘뿐.

[설화, ‘가장 순수한 전우애’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누구도 그들의 이야기를 모르는 곳에서, 둘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눠야만 했다.

까가강!

“에리히 경! 해치워버리십시오!”
“갑시다! 빌스턴 경!”

두 사람이 배역상의 라이벌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발로였다.
서로 붙어 있을 기회를 늘려야, [전음]을 사용할 기회도 늘어나는 까닭이었다.

―검술이 많이 느셨네요. ‘강철검제’라는 이름에 딱인데요?
―돌아가면 독자 씨에게 검을 하나 사달라고 해야겠습니다.

검이 마주칠 때마다 전음이 오간다.

―이러다 독자 씨 올 때쯤이면 소드마스터 되어 있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성향에 따라 다른 소속을 갖게 되었다.

이현성은 4왕자 리카르도의 파벌로.
정희원은 ‘검은 마법사’의 휘하로.

소속이 달라지자 겪는 환경도 달라졌다.
둘은 전처럼 자주 검을 나눌 수 없게 되었고, 정희원이나 이현성이 아닌 ‘에리히 스트라이커’나 ‘빌스턴 프레이머’로 살아야 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에리히 스트라이커처럼 밥을 먹고, 빌스턴 프레이머처럼 말했다. 자신과 다른 것들이 쌓여가는 과정에서, 이현성과 정희원은 조금씩 뭔가를 잊어갔다.

둘은, 조금씩 ‘제도 카이제닉스’의 등장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 번은, 술을 마신 정희원이 이현성을 찾아와 말했다.

―난 끔찍한 인간이에요 현성 씨.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그래서 벌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동안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금호역에서 모녀······, 기억해요? 우리랑 같이 철두파에 맞서 싸웠던.
―······기억합니다. 암흑성에서도 만났었지요.

이현성은 금호역의 모녀를 떠올렸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엄마와, 그런 엄마의 손을 잡고 있던 작은 여자아이.
암흑성에서 아이의 어머니는 목숨을 잃었고, 홀로 남은 여자아이는 방랑자들의 손에 맡겨졌다.

―둘 다 살 수도 있었어요. 내가 ‘낙원’의 정체를 더 빨리 깨달았더라면······
―희원 씨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가 막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보다 더 작은 설화들도 있었잖아요. 어쩌면, 설화조차 되지 못한 설화들이.

취한 정희원이 웃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맺힌 설화의 잔재들이 하얗게 빛났다. 모두, 그녀가 쌓아온 이야기였다. <김독자 컴퍼니>의 일원으로, 위대한 성좌들과 맞서 싸우며 만들어 온 이야기.
정희원은 그 이야기를 자랑스러워했고, 자신의 삶에 떳떳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가 모아온 설화들은, 전부 그런 작은 설화들을 짓밟고 만들어진 게 아닐까요.
―희원 씨.
―그리고, 이젠 우리 차례가 된 건지도 몰라요.

4년, 그리고 5년이 지났다.
정희원과 이현성은 포기하지 않았다.

―근데 유승이랑 길영이 성씨가 뭐였죠?
―이유승, 신길영······ 아닙니까?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기억들은 조금씩 사라져갔다.
그렇게 6년이 지났고.

―독자 씨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요?
―제 생각엔 올해 안에 오실 것 같습니다.

7년이 지났다.

―7년이나 임금을 체불하다니, 완전 악덕 기업 아니에요?
―나중에 꼭 노조를 설립합시다.
―꼭 그렇게 해요. 잊지 말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던 약속은 한 달에 한 번이 되었고, 이내는 두 달에 한 번이 되었다.
만나서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 날들도 많아졌다.
그리고 8년이 되던 어느 날, 정희원은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뭔가 기다리고 있지 않았나요?

이현성은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있잖아요, 현성 씨. 만약 내가 현성 씨를 잊게 되면.
―제가 기억하겠습니다.
―날 죽여줘요.

그리고 그것이 정희원과 이현성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얼마 후, ‘검은 마법사’가 혁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현성은 옛 왕조의 편에 서서 정희원을 맞이하게 되었다.

―희원 씨.

허공에서 몇 번이고 둘의 검이 부딪쳤다.
눈부신 검광 속에서 이현성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갔다. 검술 대련과는 확연히 다른 궤적들. 명백하게 이현성을 죽이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검격.

―희원 씨.

반복된 [전음]에도, 정희원은 대답이 없었다.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마치 이제까지는 봐주고 있었다는 것처럼, 에리히의 무자비한 검이 이현성을 갈랐다. 까마득해지는 시야. 이현성은 비틀거리면서도 그가 기억하는 정희원을 향해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마침내 가까워진 정희원의 두 눈을 보며, 이현성은 오랫동안 자신이 하지 못했던 말을, 그리고 앞으로도 할 수 없을 말을 처음으로 건넸다.

―좋아합니다, 희원 씨.


*


[설화, ‘가장 순수한 전우애’가 이야기를 마칩니다.]

나는 묵묵히 설화를 읽었다.
어떤 문장은 잔잔히 슬펐고, 어떤 부분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등장인물 ‘정희원’의 자아가 조금씩 깨어납니다.]

빌스턴과 에리히의 몸 위로 희미한 빛이 떠돌고 있었다. 두 사람의 영혼이 설화에 공명하는 것이 느껴졌다.
쓰러진 채 미소를 짓고 있는 이현성.
나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사내 규정을 바꿔야 할 것 같은데······.”

어쨌든, 이걸로 두 번째 목적도 달성했다. 이제 다음은······.

“저쪽이다!”
“에리히 경이 위험하다!”

유중혁이 쓰러진 정희원과 이현성을 양팔에 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채 달아나기도 전에, 검무장의 문이 열리며 근위대가 들이닥쳤다.
그런데 근위대만 온 것이 아니었다.
도열한 근위대를 가르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카이제닉스 제도 최초의 트리플 마스터」
「만 18세의 나이로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천재」
「최연소 9서클 대마법사」
「사악한 검은 용을 부리는 제도의 왕」

현시점의 카이제닉스 제도에서, 저 녀석을 당해낼 이는 아무도 없다.
은빛의 크라운을 쓴 왕이 고요히 웃었다.

“감히 짐의 기사를 훔쳐 가려 하는가?”

근위대가 일제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표정이 굳어진 유중혁이 메시지를 보냈다.

―계획과는 달라졌군.
―차라리 잘 됐어.

어차피, 우리의 다음 목표는 한수영이다.
이곳의 <김독자 컴퍼니>는 넷.
성운의 설화는, 성운의 구성원들이 많이 모일수록 강해진다.
나는 왕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 저희는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분명 저 왕의 안에는, 한수영의 자아가 잠들어 있을 것이다.
나는 저 등장인물로부터 한수영의 자아를 돌려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우리의 설화를 이용해······.

“알고 있다. 이야기를 들려주러 온 것이겠지.”

나는 흠칫 놀라 녀석을 바라보았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당신을 향해 조소합니다.]

“뭘 그렇게 놀라지? 짐도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짐은 듣는 것보다는 이야기하는 쪽을 더 좋아하지. 그러니 귀를 열고 잘 듣거라. 리카르도 폰 카이제닉스.”

활짝 팔을 벌린 왕이, 나를 향해 웃었다.

“아니, ‘구원의 마왕’ 김독자.”





< Episode 72. 세 가지 방법 (2) > 끝

< Episode 72. 세 가지 방법 (3) >





나는 한수영의 얼굴을 한 왕을 바라보았다.
저자는 분명 한수영이 아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일까.
왕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어떻게 그대의 이름을 아는지 궁금하겠지.”

왕은 이 세계관의 등장인물이고, ‘거대 설화’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 존재가 나를 ‘리카르도’가 아닌 ‘김독자’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심지어 세계관 밖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개연성의 스파크는 왕을 억압하지 않았다.

[세계관이 장르의 확장 가능성을 고려합니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상황을 묵인합니다.]
[특정 발언에 관한 개연성의 규제가 완화됩니다.]
[세계관에 대한 메타적 발언이 인정됩니다!]

나는 왕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스킬을 발동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
나이 : 50세
종합 평가 : 해당 인물은 당신에게 증오를 품고 있습니다.

+

여전히 왕의 정보는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한수영 때문이라 생각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지 않은 존재인 한수영이 빙의함으로써, 빙의체인 왕의 정보까지 불확실해진 것이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너는 한수영인가?”
“한때는 그런 이름으로 불리었지.”
“무슨 뜻이지?”

천천히 눈을 깜빡인 왕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헛된 희망에 기대어 수십 년의 세월을 버텨온, 한 여자의 이야기를 아는가?”
“비슷한 남자의 이야기는 잘 알고 있지.”

그 말을 한 것은 [흑천마도]를 꺼내든 유중혁이었다.
왕이 웃으며 말했다.

“가엾은 정인이여, 죽을 자리를 찾아왔구나.”
“약혼은 파했을 텐데. 한 번만 더 그딴 식으로 부르면 목을 날려버리겠다.”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의 신형이 사라졌다.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두 존재가 격돌했다. 검무장의 천장이 파괴되어 날아올랐고, 검풍과 마력파의 충돌이 하늘에서 용오름을 형성했다. 얼핏 보기에는 막상막하의 대결이었지만, 전투의 세부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았다.
순식간에 전개된 십여 합의 끝에, 유중혁은 왼팔에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왕은 약간의 생채기도 보이지 않았다.

유중혁이 밀린다.

저 강력한 유중혁도, 이 세계관의 왕을 당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왕의 왼팔에서는 한수영의 특기인 [흑염]의 아우라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독자 씨! 피하십시오!”

달려오는 근위대들에 맞서 이현성이 나를 보호했다.

“······독자 씨?”

정희원도 간신히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백중세였던 전투는 유중혁에게 급격하게 불리해졌다.
애초에 저쪽은 무려 ‘트리플 마스터’의 빙의체다.

“한수영! 정신 차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거대 설화’의 힘을 끌어왔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힘껏 허공으로 쏘아 보낸 설화가 일시적으로 전투에 공백을 만들었다.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왕이 웃으며 팔을 벌렸다.

“구원의 마왕이여. 네가 찾는 여자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웃기지 마. 한수영은 그딴 식으로 말 안 해.”
“50년이라는 세월이 한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네가 알고 있느냐?”

모른다.
나는 그만한 시간을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세계가 꿈틀거리며, 이 세계를 살아온 한수영의 모습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것은 한수영의 설화였다.
이 세계에서 살아온 한수영의 역사.
정확히는, 한수영의 빙의체인 ‘유리 디 아리스텔’이 겪어야 했던 역사.

「아름다운 백작가의 영애」
「오직 왕비가 되기 위해 키워진 여식」
「“너는 18살이 되었을 때 입궁하게 될 거란다.”」

난잡하게 떠오르는 문장들 속에 내가 아는 한수영이 있었다.

「“좋아, 그럼 18세까지는 소드마스터가 되어 볼까.”」

세계와 맞서 싸우는 한수영. 분명한 얼굴로 이 세계를 살아가는 한수영.
내가 모르는 표정으로, 이 세계를 살아낸 한수영.

「“어째서 여자아이가 검을 다루는 것이냐.”」
「“마법은 단지 눈속임일 뿐이다.”」

어떤 클리셰는 클리셰라는 변명으로 인물에게 구속이 된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수영은, 누구보다 클리셰를 싫어하는 존재였다.

「“씨발, 그까짓 결혼 한다고, 해! 나보다 강한 놈 있으면 해줄게!”」

아름다운 백작가의 영애를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내들이 나섰다.
그들 중에는 제도의 기사도 있었고, 유명한 마법사도 있었다.

한수영은 다가오는 구혼자들을 자신의 손으로 물리치기 위해 강해졌다.

피나는 고련 끝에 소드마스터가 되었고.
9서클의 대마법사가 되었으며.
사악한 용의 힘을 다루는 공포의 주인이 되었다.

소드마스터의 힘은 그녀의 육체를 젊게 만들었고, 사악한 흑염의 아우라는 그녀의 신비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모순적이게도 그녀가 강해질수록, 세계는 그녀를 더욱더 욕망하게 되었다.

한수영은 그런 세계와 싸웠다.

지구에서보다 더 긴 세월을 이곳에서 보냈고.
그 세월을, 충실하게 견뎠다.

설화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었다.
외로웠다. 반발감이 들었다. 분명 한수영이 이 세계에 함께 있음에도

그녀가 너무나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긴 한수영의 세계가 아니야.”
“왜 그걸 네가 결정하지? 네가 한수영을 알아 온 시간은 고작해야 4년도 되지 않을 텐데. 함께 있었던 시간만을 따지면 1년도 채 되지 않을 거고.”

사실이었다.

“너는 한수영에 대해 뭘 알지?”

나는 내가 아는 한수영을 떠올렸다.

자존심이 강해서 좀처럼 사과할 줄도, 주장을 굽힐 줄도 모르는 사람.
누구보다 효율을 추구하지만, 일행들을 위해 때로 그 효율을 포기하기도 하는 사람.
이기적인 것처럼 굴면서도, 언제든 “너흰 나 없인 안 된다니까”를 중얼거리며 자신의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

······한수영은, 어떤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더라.
내가 아는 한수영은, 정말로 ‘한수영’일까.
한수영은 아직도 내가 아는 이야기 속에 있는 것일까.

“네가 알던 한수영은 이제 없다. 50년의 시간은, 그녀를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만들었다. 그게 바로 나다.”

왕의 등 뒤로 밀려온 거대 설화가 우리를 향해 강대한 패기를 내뿜었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당신들의 존재를 배척합니다.]

50년의 시간 앞에서, 나와 한수영이 함께한 짧은 기억들은 조금씩 초라해졌다.
그 기억을 더 초라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나는 웃으며 입을 열어야 했다.

“역시 너는 한수영이 아니야. 그 녀석은 너처럼 진지하지 않거든.”

왕의 표정에 희미한 동요가 일었다.
그 동요로 인해, 나는 눈앞의 왕이 누구인지 확신했다. 분명 녀석은 한없이 한수영에 가까운 존재다.
하지만, 결코 한수영이 될 수 없는 자다.

“너는 오랫동안 한수영의 삶을 지켜본 백작가의 영애, ‘유리 디 아리스텔’이야. 보나마나 한수영이 거대 설화에게 먹힌 틈을 타서 몸을 빼앗은 거겠지.”
“······.”
“말해. 진짜 한수영은 어디에 있지?”

대답 대신, 왕의 전신에서 가공할 격이 뿜어져 나왔다.

콰드드드드!

마치 지금까지의 격전이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왕의 몸에서 해방된 격의 파도가 우리의 몸을 옭아맸다.
유중혁도, 이현성도, 정희원도, 그리고 나도.
움직임이 봉쇄당한 우리를 향해, 왕이 다가왔다.
나는 물었다.

“우릴 죽일 건가?”
“죽여?”

왕의 입가에 비웃음이 감돌았다.

“아직도 이 시나리오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이군. 여기까지 살아남았으니 너희는 죽지 않는다. 짐도······ 한수영도 그것을 원하고.”
“하지만 처음엔 날 사형시키려 했잖아?”
“정해진 역경이었지. 거기선 1왕자가 널 구하게 되어 있었다.”

왕은, 마치 한수영처럼 웃었다.

“이제 이 시나리오의 끝이 다가왔다.”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며 시나리오 메시지가 들려왔다.

[장르 선택의 분기가 다가왔습니다!]
[이 세계관의 장르를 선택하십시오!]

왕이 허공을 보며 말했다.

“이 세계의 끝은 항상 똑같지.”

오랜 세월 정제된 황폐함이 그녀의 표정을 스쳐 갔다.

환생자들의 섬은 죽은 설화들이 박제되는 섬.
다른 시나리오에 무대를 제공하며 생을 연명하는 설화들의 무덤.

나는 그녀가 살아온 삶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도 카이제닉스는 수백 번이나 ‘빙의 시나리오’를 제공했을 것이고, 수백 명의 리카르도와 슈바이첸이 이 시나리오를 각자의 방식으로 수행했을 것이다.

“온갖 위험과 역경을 헤치고 자라난 주인공은, 마침내 부와 명예와 사랑을 얻고 해피엔딩으로 향하게 된다. 이번 시나리오의 전개는 조금 특이했지만······ 결국, 마지막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그만 끝내지.”

지겹다는 듯한 말투. 왕이 내게 명령했다.

“나와 결혼해라, 리카르도 폰 카이제닉스.”

얼빠진 유중혁의 표정이 보였다. 경악한 이현성과 정희원이 이쪽을 향해 뭐라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태연히 되물었다.

“그게 이 시나리오의 결말인가?”
“그렇다.”
“당신과 결혼하면 우릴 다음 시나리오로 보내줄 건가?”
“맞아,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한 사람.
왕의 눈동자에서 뿌리 깊은 탐욕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한수영은 이 세계에 남아야 한다. 나는 그녀가 무척 마음에 들었거든. 그리고 너희는, 시나리오 속에서 헤어진 비운의 연인이 되겠지.”

[해당 시나리오의 장르가 ‘로맨스 판타지’ 쪽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장르 확정과 동시에 시나리오 클리어 조건이 완수될 것입니다.]

이 세계가, 우리에게 거래를 요청하고 있었다.
한수영을 버리라고.

“그녀는 본래의 세계보다, 이 섬에서 살아가는 게 더 어울린다.”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김독자 컴퍼니>의 ‘한수영’보다, ‘카이제닉스 제도’의 ‘한수영’이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오만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왕이 자신의 왼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서 입을 맞춰라. 그리고 너의 오랜 동료에게 작별 인사를 하도록 해라.”

하얀 손이었다.
그 손으로, 한수영은 이 세계와 싸워왔을 것이다.
새하얀 손등에는 수십 개의 생채기와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한수영은, 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싸웠던 것일까.
품속에 들어있는 한수영의 책을 떠올리며, 나는 말했다.

“······네 말대로 나는 한수영을 몰라.”
“그래, 이제야 인정하는 모양이군.”
“그러니까 녀석을 여기서 놓아줄 수는 없어.”
“뭐라?”
“아직 녀석에게 이 이야기의 결말을 듣지 못했거든.”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 이 세계의 설화에 저항하면서.

츠츠츠츠츳!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포효합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표정이 변한 왕이 나를 노려보았다.

“다 된 시나리오를 망치는구나.”
“아니, 이게 제대로 가는 거야.”
“······뭐?”
“난 처음부터 궁금했어. 왜 하고 많은 시나리오들 중에, 하필 이 ‘카이제닉스 제도’로 오게 되었을까 말이야. 그런데 생각보다 이유는 간단하더라고.”

나는 품속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건, 내가 이 시나리오의 적법한 왕이기 때문이다.”

환하게 빛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눈부신 백광의 빛을 내뿜었다.

[세계관이 성유물 ‘부러지지 않는 신념’에게 반응합니다!]
[해당 성유물은 이 세계관의 것입니다.]
[성유물 본연의 능력이 크게 증폭됩니다!]

카이제닉스 제도의 초대 가주.
전설 속의 폭풍왕, 율리시즈 카이제닉스의 검.

“저, 저 검은······!”
“폭풍왕의 검이다!”

검을 알아본 근위대들이 일제히 자리에 주저앉고 있었다. 당황한 왕은 나를 향해 강기와 마력을 퍼부어댔다.
그러나 소드마스터의 힘도, 대마법사의 힘도 ‘부러지지 않는 신념’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성유물,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울음을 토합니다!]

이것이 ‘성유물’의 진짜 힘이었다.
그것의 탄생 설화 속에서는, 거의 무적의 힘을 발휘하는 아이템.
검을 쥔 손이 벌벌 떨렸다. 성유물은 강하지만, ‘리카르도 폰 카이제닉스’에겐 이 검을 오랫동안 다룰 힘이 없다.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나는 왕의 마력파를 쳐내며, 한 걸음씩 그녀에게 다가갔다.
왕은 주저앉아 있었다.
내 검을 보는 순간, 그녀는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이었다.

[당신은 ‘역성혁명’ 루트를 택하였습니다.]
[왕을 죽이십시오.]
[해당 시나리오의 장르가 ‘판타지’ 쪽으로 기울기 시작······.]

한수영은, 자신의 책에서 이 시나리오를 완수할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책에서 가장 중요한 ‘세 번째 방법’은 알려주지 않았다.

여기서 왕을 죽이면 한수영도 함께 죽는다.
그렇다고 왕과 결혼하면, 한수영은 이곳에 남게 된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어떻게 완결되어야 할까.
한수영이 원하는 이 시나리오의 끝은 무엇이었을까.

왕이 말했다.

“어서 죽여라.”
“그러면 나는 진짜 왕이 될 수 있겠지. 시나리오는 여기서 끝날 테고.”

한수영은 내게 정답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 정도는, 내가 직접 상상해보기라도 하라는 듯이.
그래서 나는 내가 생각한 정답을 실천하기로 했다.

왕을 죽이지 않고, 왕위를 찬탈하며, 한수영도 살려낼 방법.

“그런데 말이야, 나는 이미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거든.”
“뭐?”
“게다가 김독자 컴퍼니의 대표에, 명계의 후계자이기도 하고.”

나는 왕의 상처투성이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수영은 저 손으로 소드마스터가 되었고, 대마법사가 되었다.
내가 아는 한수영은, 이 세계에서 고작 ‘생존’ 따위를 목표로 할 만한 위인이 아니다. 그녀는 보다 큰 그림을 그리는 작가니까.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왕좌는 지긋지긋해.”

[당신은 한 번도 이루어진 적 없는 전개를 선택하였습니다.]
[세계관이 당신의 선택에 당황합니다.]

나는 왕의 손을 잡고 천천히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 손에 입을 맞추는 대신, 내가 쥐고 있던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쥐어 주었다.

“무슨 짓이지? 지금······.”
“오해하지 마. 너한테 왕위를 주려는 게 아니니까.”
“뭐?”
“왕이 되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내 동료.”

커지는 왕의 눈을 보며, 나는 말을 맺었다.

“<김독자 컴퍼니>의 한수영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앞에서 시나리오 메시지가 폭발했다.

[시나리오 선택지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장르 선택지 ‘판타지’가 붕괴합니다!]
[장르 선택지 ‘퓨전 판타지’가 붕괴합니다!]
[장르 선택지 ‘로맨스 판타지’가 붕괴합니다!]
[당신은 어떤 장르 선택지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숨겨진 선택지, ‘장르 : 김독자 컴퍼니’가 발동합니다!]

.
.
.

그리고,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용케도 알아냈네, 김독자.」





< Episode 72. 세 가지 방법 (3) > 끝

< Episode 72. 세 가지 방법 (4) >





“······한수영?”

언뜻 한수영의 목소리가 들려온 듯했으나, 기운은 금방 사그라졌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당신의 선택을 납득하지 못합니다!]
[세계관이 이상 반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엉겁결에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쥔 유리 디 아리스텔이 몸을 떨며 외쳤다.

“감히,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

[당신은 그룬시아드 제도의 적법한 왕위 계승자입니다.]
[당신의 왕위가 등장인물 ‘한수영’에게 이양됩니다.]
[세계관이 당신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유리 디 아리스텔의 몸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것이 아닌 설화. 내가 잘 알고 있는 한수영의 설화였다.
유리 디 아리스텔은 그 설화를 하나라도 놓지 않으려는 듯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대로 수영이를 빼앗길 수는 없어!”

츠츳, 츠츠츳!

“가만히 있어! 내가 다 책임진다고 했잖아!”

그것은 내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런 전개를 원했던 게 아냐! 나는, 나는 그저 네가 계속 이 섬에 머물렀으면······!”

유리 디 아리스텔이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알 것 같았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이 활성화 중입니다.]

유리 디 아리스텔과 한수영이 보낸 시간들이 파편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같이 있어 주겠다고 했잖아! 내 수호령이 되어 주겠다며! 나는 네가 보여준 시나리오가 좋아. 이대로 너를 보내줄 수는 없다고! 나는······!”」
「“미안, 유리.”」

꾸르륵 피거품을 문 유리 디 아리스텔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나는 황급히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마 지금쯤 그녀의 안에서는 한수영과 유리 디 아리스텔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그녀의 몸을 차지하기 위해 거대 설화들이 싸우고 있었다.
느닷없는 혼란에 빠진 것은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왕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그러니까 지금, 적법한 왕이 나타났다는 건가?”

근위대와 백성들이 복잡한 눈으로 서로를 보며 수군거렸다.

“그럼 우리 세계의 장르는 어떻게 되는······.”
“쉿, 그런 발언은 금지인 거 잊었나? 자네 배역에나 충실하게!”

하긴, 나라도 갑자기 이 세계의 장르가 [김독자 컴퍼니]라는 말을 들으면 저런 표정을 짓게 될 것이다.
내 곁에선 유중혁이 말했다.

“김독자, 너무 서둘렀다.”
“알아.”
“이 제도는 아직 한수영을 왕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한수영이 지반을 잘 다져 놨길래 가능할 줄 알았어. 얼마 전까지 이 녀석이 왕이었잖아.”
“적법한 왕은 아니었지. 그녀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있기에 ‘혁명단’이 존재하는 것이다.”

강제적인 정권 교체는 반드시 진통을 유발하게 되어 있다. 심지어 이번 시나리오에서 발생한 유리 디 아리스텔의 ‘왕위 찬탈’은 본래의 ‘카이제닉스 제도’ 시나리오에는 없었던 일.
왕의 돌발행동에 이어진 우리의 돌발행동은 똑같은 시나리오를 무수히 반복해 온 ‘카이제닉스 제도’의 환생자들에겐 낯선 것이었다.

[장르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해당 장르의 클리어 조건 충족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 세계는, 아직 우리가 만든 새로운 장르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다.


*


[<스타 스트림>이 해당 시나리오의 클리어 여부를 논의 중입니다.]

“곤란하게 됐군.”

유중혁과 나는 호화스러운 침대 위에 놓인 한수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왕성 바깥에서는 아까부터 소란스러운 폭음이 연신 울려 퍼지고 있었다. 새로운 왕에 찬성하는 세력과, 새로운 왕을 거부하는 백성들이 혈투를 벌이는 소리였다.

“어차피 유리 디 아리스텔의 왕권은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유중혁은 힐난하는 목소리였다.

“먼저 제도 곳곳의 유력 가문에 흩어진 왕의 기수들을 모았어야 했어. 그다음에 서서히 왕권을 무너뜨리고, 마지막에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선보였어도 될 일이었다. 그랬으면 지금처럼 제도가 혼란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게 최선이었겠지.”
“그걸 잘 아는 놈이―”
“하지만 그 계획대로 진행했다면.”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한수영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의 50년이, 더 길어졌을 거야.”
“······.”
“녀석의 50년을 1분이라도 더 늘리고 싶지 않았어.”

진심이었다.
처음 이 세계로 빙의되고, 한수영의 50년을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줄곧 한 가지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또, 나 때문에 누군가가 희생되었다.

50년의 세월을 견딘 한수영은, 과연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녀는 정말 내가 알던 한수영의 자아를 유지하고 있을까.

“모두, 내가 ‘환생자들의 왕’과 거래했기 때문이야.”

「차 라리 내가 희 생하 는 편 이더 나았 어」

고개를 돌리자 유중혁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녀석은 몇 번인가 나를 향해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화를 참는 듯 눈을 꾹 감은 채 구석의 소파에 등을 완전히 기대었다.

“한마디하고 싶지만, 다른 녀석이 대신 해줄 것 같군.”
“뭐?”

다음 순간, 화끈한 통증이 내 뒤통수를 물들였다.

“야, 김독자.”

돌아보자, 익숙한 미소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 때문에 다 망했잖아!”

부스스 머리를 털며 일어난 한수영이 다시 한 번 내 머리통을 갈겼다.


*


한수영이 깨어난 후, 우리는 긴급회의에 돌입했다.
한수영은, 안색이 파리한 것만 빼면 무척 괄괄한 상태였다.

“내가 쓰라고 적어둔 방법 있었잖아. 너흰 어떻게 된 게 매뉴얼대로 하라는 것도 못하냐? 너넨 이현성 보다 못해! 알겠어?”

정희원과 함께 방의 문을 지키고 있던 이현성이 문 사이로 머리를 빼꼼 내미는 것이 보였다.

“김독자. 내가 써둔 세 가지 방법 읊어봐.”
“첫 번째 방법, ‘퓨전 판타지’ 루트.”
“내용은?”
“이계의 신격의 힘을 빌려서 시나리오를 클리어······ 야, 애초에 이건 말도 안 되는 방법이잖아.”
“그래서, 두 번째는?”

나는 알 수 없는 억울함 속에서, 교과서를 읽듯 한수영의 책을 읽었다.

“두 번째 방법, ‘판타지’.”
“내용은?”
“역성혁명을 일으켜 왕을 살해한다. 아니, 왜 내가 이걸 읽어야 하는······.”

한수영의 손바닥이 다시 한 번 내 뒤통수를 갈겼다.
제기랄, 이 자식이.

“세 번째 방법, ‘로맨스’.”
“내용은?”
“유리 디 아리스텔과 결혼한다.”
“그래서 네가 택한 건 뭐지?”
“세 번째 방법.”
“너 나랑 결혼했어?”
“아니.”
“왜!”

나는 날아오는 한수영의 손바닥을 피하며 외쳤다.

“야, 이딴 게 진짜 제대로 된 방법일 턱이 없잖아. 이걸 진짜 실천하라고 써둔 거냐?”
“그럼 감상하라고 써놨겠냐!”

한수영은 씩씩거리며 손가락질했다.

“네가 혼인을 받아들였으면 다 해결됐을 거라고! 네 적법성과 유리 디 아리스텔의 무력이 혼인을 통해 결합했다면, 제도가 지금처럼 분열될 일은 없었단 말이야!”
“하지만 그런 짓을 하면 넌 이곳에 남게 되는―”
“유리는 내가 설득할 수 있었어! 내 본래 계획은 너와 유리가 결혼한 다음에 이어지는 거였다고!”
“······아깐 용케도 방법을 찾았다고 칭찬하지 않았냐?”
“네 빌어먹을 오독에 감탄한 거지.”

젠장, 그런 거였나.
한수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어쩔 거야.”

혁명단과 근위대.
어느 쪽 편을 들더라도, 사태는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다.

[시나리오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세계관이 해당 시나리오의 결말을 납득하지 못합니다.]
[세계관이 등장인물 ‘한수영’에게 왕의 자격이 있는지 의심합니다.]
[<스타 스트림>이 해당 시나리오의 클리어 여부를 논의 중입니다.]

백성들은 싸우고 있고, 우리는 시나리오에서 나가지 못하고 있다.
나는 한수영을 보며 말했다.

“내가 또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

한수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길었지, 50년.”

나는 그 태연함에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내 짐을 덜어주려는 듯 한수영이 말을 이었다.

“사실 잘 기억도 안나.”
“그럴 리가 없잖아.”
“넌 내가 진짜 50년을 살았을 거라 생각해?”
“그럼?”
“대부분은 잊었어. 정확히는 일부러 지웠지.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으면 나도 미쳐버렸을걸.”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녀석에겐 [아바타] 스킬이 있다.
그리고 [아바타] 스킬은, 사용하기에 따라서 자신이 가진 기억을 소거하기에 유용한 스킬이다.

“그 책을 남겨 둔 건 내가 잊은 것들을 기록해두기 위함이었어.”
“현명한 선택이었네.”
“비겁한 방법이지. 그리 칭찬받을 만한 건 아냐.”

한수영이 방의 한쪽 구석을 흘끗거리며 말했다.

“세상에는 나보다 더 긴 세월을 살아도, 아무것도 잊지 않는 괴물도 있으니까.”

그게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과장스러운 제스처로 입을 열었다.

“자, 그보다 지금부터 해결책을 생각해보자고. 독자의 입장에서 말하건대, 다음 전개는―”

내 의도를 눈치챈 한수영도 끼어들었다.

“아니지, 작가의 입장에서 판단하건대,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수영과 나는 나오는 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도깨비를 불러서 항의해보자든가, 만만한 하위격의 이계의 신격을 불러 보자든가, 그냥 시나리오고 뭐고 다 때려 부수고 여기서 탈출하자든가······.

“모두 닥쳐라.”

유중혁의 말에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녀석의 눈치를 살피던 한수영이 내 쪽으로 붙으며 중얼거렸다.

“가끔은 주인공의 직감을 믿어보는 것도 괜찮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오늘 오후에 제도의 기수들이 왕성으로 모일 것이다. 그때, 승부를 본다.”
“정공법이군.”
“방법은 그것뿐이다.”

유중혁의 말이 맞다.
때로는, 정공만이 최선의 방책일 때도 있다.


*


밤은 금방 찾아왔다. 유력한 가문의 귀족들이 모두 알현실로 모였고, 우리도 알현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제도 전체가 알 수 없는 적의로 들끓고 있었다.

적법한 왕을 가리자는 세력.
검은 마법사에 동조하는 세력.
그리고 우리 일행 모두에게 적의를 보이는 세력까지.

흉흉한 기세가 느껴지는 회랑을 돌며, 정희원이 중얼거렸다.

“······아이들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확실히 테이밍 스킬을 가진 아이들이나, 대군 전투 능력을 보유한 이지혜가 있었다면 이 정도로 압박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애들은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쯤 다른 시나리오를 진행하고 있을 거예요.”
“하영 씨는 어떻게 됐죠?”
“하영이는 엄밀히 따지면 <김독자 컴퍼니>의 소속원이 아니라서, 같은 시나리오로 소환되지 않았을 겁니다.”

원작대로라면 장하영도 지금쯤 자신의 역할을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없는 영역이었다.
나는 정희원과 이현성의 호위를 받은 채 회랑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내 앞쪽으로는 마치 경보라도 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한수영과 유중혁이 있었다. 황새와 뱁새의 대결을 보는 느낌이었다.
나와 같은 광경을 보던 정희원이 슬그머니 내게 귓속말을 했다.

“독자 씨.”
“네?”
“괜한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독자 씨가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뭘 말입니까?”

정희원이 앞서가는 유중혁과 한수영의 뒷모습을 보며 은근히 목소리를 더 낮췄다.

“저 두 사람 관계에 대해서요.”





< Episode 72. 세 가지 방법 (4) > 끝

< Episode 72. 세 가지 방법 (5) >





“저 두 사람, 약혼했어요.”
“예?”

그 어마어마한 뒷북에 나는 입을 쩍 벌리고 있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이현성 쪽을 바라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이현성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유중혁과 한수영.
제도 카이제닉스의 1왕자와 백작가의 영애.

키 차이가 좀 심하긴 한데······ 계속 보니까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둘이 성격은 잘 안 맞겠지만 은근히 닮은 점도 많으니까.
나는 불쑥 치밀어 오른 장난기에 입을 열었다.

“어이, 너네 그렇게 보니 흑곰과 아기 새 같기도―”

그와 동시에 무시무시한 살기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죽여버린다.”
“한 마디만 더하면 입을 찢어버리겠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정희원이 내게 속닥거렸다.

“도발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그렇겠군요. 그런데······ 뭔 일이 있었던 건 희원 씨 쪽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네?”

나는 어리둥절하는 정희원에게 씩 웃어 준 뒤 유중혁과 한수영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내 장난에 기분이 상했는지 둘 다 얼굴이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한수영. 네 역할이 중요해. 알지? 네가 먼저 잘 말해야―”

한수영은 대답이 없었다.

“한수영?”

츠츠츠츠츳!

한수영의 몸에서 기이한 스파크가 튀었다.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곧바로 눈치챘다.
유리 디 아리스텔의 자아가, 한수영을 밀어내고 있었다.

「널 보내주지 않을 거야.」

유리 디 아리스텔이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고 있었다.

「이곳을 떠나면, 언젠가 너희들은 후회하게 될 거야!」
「너희가 가진 설화들은 언젠가 인적이 끊어진 유적지처럼 낡아버릴 것이고, 누구도 너희의 설화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야.」
「그래서 결국엔, 이 섬에 박제되지도 못한 채 소멸해갈 거라고!」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뭐?」

유리 디 아리스텔이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나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유리 디 아리스텔.
이 시나리오의, 본래 주인공.
본래의 시나리오였다면 그녀는 지금쯤 평범한 여식으로 자라나 왕의 여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 세계에 남아 있으면 너희는 안전해.」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그녀를 이해하지만 그걸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녀와 같은 설화를 살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읽어도, 어쩌면 그건 그냥 읽은 것일 뿐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건방진 설득이 아니라 상상이다.

한수영이라면 나라면, 어떻게 말해줬을까.

「내가 ‘환생자들의 왕’에게 청할게. 그냥 다 함께 이곳에 남아. 그리고 윤회의 벽에 몸을 맡겨. 그러면―」

“매번 똑같은 시나리오를 수행하며 살아가게 되겠지.”

「뭐?」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유리 디 아리스텔. 처음으로 왕이 된 기분이 어땠어?”

유리 디 아리스텔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나는······!」

‘환생자들의 섬’은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진 낡은 설화들의 박물관.
이 세계의 근간은 오래된 3세대의 중세 판타지 중 하나였다.
그리고 유리 디 아리스텔은, 이 거대 설화의 양식에 알맞은 배역과 행동만을 수행하며 삶을 반복해왔을 것이다.
한수영은 그것을 알았기에, 유리에게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을 알려주고 싶었겠지.

우리는, 설화에 지배당하는 노예가 아니라고.

「나는, 그저······!」

아마 유리 디 아리스텔도 이미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한수영은 뛰어난 작가니까.

“한수영을 좋아하지?”

「······.」

“그러면 한수영을 믿어봐. 그 녀석은, 절대 너를 버리지 않을 거야.”

유리 디 아리스텔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츠츠츳, 하고 가볍게 스파크가 튀며 하얗게 물들었던 한수영의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현기증이 나는지 가볍게 휘청거린 한수영이 감탄했다는 듯 나를 보며 말했다.

“······김독자, 제법인데?”
“너한테 배웠다.”
“유리가 진짜 너랑 결혼하고 싶어할지도······.”
“헛소리 말고 준비해. 이제 진입할 거니까.”

우리는 곧장 알현실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위협적인 기세가 알현실의 양 옆에서 쏟아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정희원이 내 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그땐 미안했어요, 독자 씨.”

뭐가 미안했다는 건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대신 이번엔 잘 지켜줄게요.”
“믿겠습니다.”

이현성과 정희원이 내 양옆에 서자, 내게 쏟아지던 기세가 한결 누그러졌다. 최고의 검과 방패가 한자리에 모이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나는 알현실의 양 옆으로 도열한 인파들을 살폈다.

한쪽에는 혁명단의 대표가.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귀족들과 그 기수들이 서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지나쳐 왕좌를 향해 걸어갔다. 왕좌를 코앞에 둔 순간, 도열한 인파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왕은 누구입니까?”

왕은 누구인가.
그 물음을 확인하기 위해, 이들은 이곳에 모였다.

“소문대로 검은 마법사가 왕이 된 것인가?”
“적법한 왕을 가려내시오!”
“왕자들이여! 진실을 알려 주십시오!”

그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깨닫는다.
이들은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들을 이곳으로 부른 것은, 이 세계의 설화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적개심을 드러냅니다.]

나와 유중혁은 동시에 한수영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한수영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제도 카이제닉스의 왕이다.”

군중들이 들고 일어났다.

“감히!”
“카이제닉스의 정통 계승자는 어디에 있는가!”
“저 여자를 죽여라!”

한수영은 당황하지 않고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이 검이 바로, 왕의 증거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눈부신 백광을 토해냈다. 그 검을 알아본 몇몇 군중들이 무릎을 꿇었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불신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중혁이 나섰다.

“그녀가 제도의 왕이 맞다.”

1왕자가 나서자, 1왕자의 지지자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혁명단에서 곧장 거센 항의가 튀어나왔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이런 일은 한 번도 벌어진 적이 없소!”
“뭐든 처음이 있는 법이지.”
“우리 가문은 이런 결과를 인정할 수······!”

급기야, 자신의 역할을 벗어난 발언을 하는 존재도 나타났다.

“당신들의 선택은 이 세계관에 맞지 않소이다!”
“우리 세계관은 그저―”

나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당신들의 세계관? 그게 뭐지?”

사람들이 도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말없이 허공의 메시지를 올려다보았다.

[해당 시나리오의 장르는 ‘김독자 컴퍼니’입니다.]

김독자 컴퍼니. 세상에 그런 장르는 없다. 하지만 그런 장르가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김독자 컴퍼니>는 어떤 장르도 아니야.”

유중혁도 한마디를 덧붙였다.

“<김독자 컴퍼니>는, 그냥 <김독자 컴퍼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치켜든 한수영이 그것을 그대로 바닥에 꽂았다.

“<카이제닉스 제도>가, 그저 <카이제닉스 제도>인 것처럼.”

[성유물,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특수 효과가 발동합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은 세 가지 속성의 에테르를 사용하는 검.

[에테르 속성이 ‘불’로 변환됩니다.]

한수영이 쥔 칼날의 끝에서 새하얀 홍염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나는 한수영이 쥔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에테르 속성 ‘어둠’이 중첩 발동합니다.]

그 위에, 다시 유중혁의 손이 겹쳐진다.

[에테르 속성 ‘신성’이 중첩 발동합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세 가지 속성. 불, 어둠, 빛의 에테르가 한꺼번에 타올랐다. 그런 기적을 본 적이 없는 제도의 백성들은, 마치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한수영이 말했다.

“왕? 왕이 되고 싶다면 얼마든지 와서 해 봐. 이 검을 쥘 자신이 있다면 말이지.”

누구도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그곳의 군중 모두가 알았던 것이다.
이 영롱한 빛에 손을 대는 순간, 자신의 몸은 먼지처럼 스러져버린다는 것을. 압도된 좌중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도 물어왔다.

“당신들, 대체 이러는 의도가 뭡니까?”
“······이 제도를 어쩔 셈입니까?”

이제껏 없었던 전개. 그들은 이제 이 세계의 끝이 두려워졌다.
그에 대답한 것은 유중혁이었다.

“우리는 겨우 ‘카이제닉스 제도’ 따위를 차지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해방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덧붙인 내 말에 몇몇 군중들이 중얼거렸다.

“그게, 그게 무슨······.”

「다들 무슨 말인지 알고 있잖아요.」

그 말을 한 것은 나도 한수영도 유중혁도 아니었다.

「우리도 언제까지 같은 시나리오만을 반복할 수는 없어요.」

유리 디 아리스텔이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이 시나리오의 결말을, 그녀는 눈치챈 것이다.

「나는······ 이들과 함께 가보려고 합니다.」

유리 디 아리스텔의 말에, 군중들은 충격에 빠진 얼굴이었다.
하지만 결심을 한 것은 유리만이 아니었다.
순간 심장이 강하게 뛴다 싶더니, 누군가가 내 입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함께한다면, 나 역시 그럴 것이다.」

그것은, 내 빙의체인 4왕자 리카르도의 말이었다.
뒤이어 유중혁에게서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약한 동생을 혼자 보낼 수는 없지.」

1왕자 슈바이첸.
뒤를 이어 이현성과 정희원 쪽에서도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자님이 가는 곳에, 저의 검이 있을 것입니다.」
「폐하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빌스턴 프레이머와, 에리히 스트라이커까지.
우리의 이야기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유리 디 아리스텔만이 아니었다.
이 세계를 살던 원래의 주인공들 또한, 우리의 이야기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포효합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세계를 바라봅니다.]

“우리는 성마대전에 참가할 겁니다.”

모든 군중들이 <김독자 컴퍼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컴퍼니의 대표로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섬의 모든 존재를, ‘환생’으로부터 해방할 겁니다.”

하나둘, 군중들이 무릎을 꿇었다.
오랫동안 거대 설화의 시나리오에 종속되어 있었던 군중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함께 갑시다.”

그 말과 동시에 세계에 거친 진동이 일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였고.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울부짖습니다!]

하나의 거대 설화가, 쓰러지는 소리였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제도의 모든 백성들에게 통제권을 발동합니다!]

커다란 이야기는 존재를 소비하여 자신의 생을 연명한다.
하지만 결국 그런 거대 설화를 만드는 것은.

[제도 ‘카이제닉스’의 모든 환생자들이 거대 설화의 통제를 거부합니다.]

바로 존재들이다.

[세계관이 당신의 대답을 납득합니다.]
[시나리오 클리어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서브 시나리오 ―‘장르 선택’이 종료되었습니다.]
[시나리오 클리어 보상을 정산 중입니다.]
[해당 시나리오 지역에 ‘성마대전’의 시공간에 동기화됩니다.]
[‘성마대전’의 포탈을 개방합니다!]

허공에 눈부신 빛을 흩날리는 광대한 포탈이 만들어졌다.

성마대전으로 가는 문이었다.

“먼저 가겠다.”

제일 먼저 유중혁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 유중혁을 따라, 결심을 마친 환생자들이 포탈 안을 기웃거렸다.
누군가는 내게 이렇게 묻기도 했다.

“우리가 정말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오?”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솔직하군.”

머쓱하게 웃은 환생자가 포탈 속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밀려 나가는 인파들. 나와 한수영은 그 대열의 끝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한수영이 말했다.

“너 먼저 들어가.”

아마 한수영은 이 세계에 꽤나 애정이 남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에게 여운을 즐길 시간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런데 내가 포탈 안으로 발을 들이미는 순간, 한수영이 나를 붙잡았다.

“야, 김독자.”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은 눈이었다. 잠시 녀석을 보고 있자, 한수영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손사래 쳤다.

“됐어, 아무것도 아냐.”
“뭔데 그래.”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한수영이 투덜거리며 내 시선을 피했다.
뭔가 불안해진 나는 한숨을 쉬며 포탈에서 발을 빼냈다.

“그냥 말해. 전에도 이런 식으로 의미심장하게 헤어져서 뭔가 불길하니까.”
“별 거 아냐.”
“그럼 말해도 되잖아.”
“······집요하네 진짜.”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언젠가.”

바닥을 보던 녀석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언젠가 이 모든 시나리오가 끝나면, 다시 소설을 쓰고 싶어질지도 몰라.”

한수영이 그렇게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 것은 처음이어서, 나는 조금 놀랐다.
한수영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때, 내 소설을 읽어줘.”
“네 소설을?”

한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먼저 읽을 기회를 주는 거야.”
“난 그렇게 좋은 독자는 아닌데.”
“토 달지 말고 읽으라면 읽어.”
“알았어. 읽을게.”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뭐, 읽어준다고 나쁠 것도 없지.
난 소설 좋아하기도 하고.
하지만 한수영은 내 반응이 의외였는지, 재차 물어왔다.

“······진짜로?”
“진짜로.”

한수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어쩌면 3천 편 넘을지도 몰라.”
“딱 내 취향이겠네.”
“재미 없을지도 몰라.”
“네가 쓰는데 재미가 없겠냐?”

내 말에 한수영이 눈을 크게 떴다.
뭔가 머쓱해진 내가 말을 덧붙였다.

“무슨 장르로 쓸 건데?”
“그건 그때 봐서······.”
“로맨스는 어때?”
“······로맨스를 어떻게 3천 편이나 쓰냐?”

우리는 그런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포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포탈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이현성과 정희원이 있었다. 뭔가 미묘하게 어색한 기류가 느껴지는 것이 보기 좋았다.

“저쪽은 3천 편 정도 걸릴 것 같은데.”

그 순간, 하늘에서 반가운 메시지가 들려왔다.

[간접 메시지 제한이 해제되었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기쁨의 환호성을 지릅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훈훈한 분위기를 좋아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경악합니다!]

아무래도 시나리오가 종료되며 채널이 다시 활성화된 모양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화신을 보호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성좌 ‘강철의 주인’을 경계합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억울해합니다.]

피식 웃은 한수영이 중얼거렸다.

“로맨스라······.”

나는 한수영과 함께 포탈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멀리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성좌들의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왔군, <김독자 컴퍼니>.]

마침내, 성마대전의 개막이었다.





< Episode 72. 세 가지 방법 (5) > 끝

< Episode 73.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 (1) >





Episode 73.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


눈부신 헤드라이트에 신유승은 눈을 떴다. 허공을 누비는 새하얀 불빛들. 떠다니던 드론 한 기가 신유승의 얼굴 근처에서 팽그르 돌더니 검은 하늘 속으로 멀어졌다.

“으, 머리야······.”

어질어질한 현기증 속에서, 신유승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고철 폐기물 더미뿐.
함께 있었던 일행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혼자 외따로 떨어진 건가?

“신유승?”

폐기물 더미 속에서 소년이 꼴뚜기처럼 머리를 내밀었다.

“이길영?”

신유승이 반가움에 그쪽을 바라보는 순간, 그런 이길영의 머리통을 짓누르고 폐기물 더미 속에서 솟아난 한 여인이 있었다.

“비켜! 냄새나잖아!”
“지혜 언니!”

대충 누구와 함께 오게 된 건지는 알 것 같았다.
일행들은 몸에 덕지덕지 묻어 있던 폐기물을 털어내며 일어섰다.

“뭐야, 우리뿐이야?”
“그런 거 같아요.”
“부산 연합 재결성이네.”

이지혜는 약간 신이 난 듯한 목소리였지만, 신유승은 그렇지 않았다.
하필 이지혜와 이길영이라니.
이지혜와 이길영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신유승은 속으로 결심했다.

‘여기서 어른은 나뿐이야. 내가 잘해야 돼.’

그런 신유승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지혜와 이길영은 서로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서열 정리를 시작했다.

“흠흠, 얘들아 늘 그랬듯 대장을 정해야지?”
“부산 연합 땐 누나가 했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나야.”
“야, 내가 유치원 입학했을 때 넌 태어나지도 않았어.”
“아 그게 뭔 상관인데.”
“쉿. 둘 다 조용해요!”

신유승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반사적으로 담벼락에 붙었다.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허공에서 벌레처럼 날아다니던 드론이 방금 전까지 그들이 서 있던 골목을 비추었다.

기이이이잉······.

드론은 잠시 그 자리를 맴돌더니, 이내 센서를 기우뚱하며 골목 바깥으로 사라졌다. 이지혜가 긴장하며 물었다.

“저거 드론 아냐?”

그때, 허공에서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시나리오 시스템에 누군가가 개입하였습니다!]
[당신들은 미증유의 힘에 의해 ‘본섬’의 ‘넥스트 시티’로 강제 소환되었습니다!]
[‘넥스트 시티’는 현재 ‘성마대전’의 분쟁 지역과 시공간적으로 단절되어 있습니다.]
[해당 지역의 서브 시나리오를 해결하면, ‘성마대전’에 진출할 수 있습니다.]

“넥스트 시티?”

이길영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얼른 가보자!”
“애처럼 굴지마 이길영. 이거 게임 아니라고.”

신유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길영은 달려나갔다.
다행히 근처에 드론은 보이지 않았고, 그들이 숨어 있던 담은 생각보다 고지대에 있었다.

“와, 이거······.”

도시가 한눈에 보이는 절경. 밤거리를 휘황하게 밝히는 광전자. 머리에서 푸른 빛을 내뿜는 안드로이드들이 마치 시위대의 행렬처럼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어떤 세계관인지 단번에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었다.
이길영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여기서 겁나 쎄져서 독자 형 깜짝 놀라게 해줘야지.”
“네가 여기서 죽으면 제일 놀랄 걸.”
“······누나 나 왜 그렇게 싫어해?”

티격태격하는 이지혜와 이길영을 내버려둔 채, 신유승은 도시 아래의 전경을 관찰했다.
시위로 인한 약간의 소요를 제외하면, 도시는 정연한 시스템에 따라 체계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수준의 질서가 갖춰진 SF 세계관.
환생자들의 섬은 쇠락한 설화들의 무덤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이런 세계가 멸망한 걸까.
물론 신유승이 그런 고민을 하거나 말거나, 이지혜와 이길영은 신나서 떠들기 바빴다.

“혹시 광선검 같은 것도 있나?”
“하여간 도검 오타쿠······.”
“시끄러워.”
“어, 저기 쟤들 진짜 광선검 같은 거 차고 있는데?”
“뭐? 어디?”

도시를 순찰하는 가드들이 인근 지역을 배회하는 것이 보였다. 세계관의 영향일까. 그들을 자세히 관찰하자 정보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Lv.12 순찰용 안드로이드]
[해당 유닛은 지금의 당신보다 약 4배 강합니다.]

기겁한 이지혜가 중얼거렸다.

“뭐야, 쟤들 왜 저렇게 세?”
“우리가 약해진 것 같은데요.”

실제로 이 세계관으로 들어온 뒤, 주변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해당 세계관에서 당신들의 주요 능력치는 초기화됩니다.]
[이 세계관은 ‘레벨 시스템’의 보정을 받습니다.]

“빌어먹을, 이쪽으로 온다!”

어떻게 눈치챈 것일까. 갑자기 이쪽을 향해 가드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허공을 올려다 보니 몇 기의 드론들이 그들의 위를 배회하는 중이었다.

[설화 에너지 반응 탐지!]
[설화 에너지 반응 탐지!]

경고성과 함께, 가속도를 붙인 가드들이 등에서 부스터를 뿜으며 일제히 날아들었다.
이지혜와 신유승, 그리고 이길영은 제각기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망할, 여기 벌레도 없는데······ 신유승, 키메라 드래곤 소환할 수 있어?”
“아직 쿨타임 안 돌아왔어.”

[현재 당신의 레벨은 1입니다.]
[레벨이 낮은 적을 사냥하여 경험치를 쌓으세요.]

이지혜는 죽을상을 하며 장도를 꺼내 들었다. 일행들 중 근접전에 특화된 것은 이지혜뿐.
재빨리 [귀살]과 [귀신 걸음걸이]를 발동한 그녀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가드와 맞섰다. 가드의 광선검이 그녀의 장도와 충돌하려는 바로 그 순간.

기이이이잉!

광선검이, 이지혜의 검을 그대로 흘려보내며 그녀의 팔뚝을 베었다.

“아아악!”

[안드로이드 ‘이지혜’가 중상을 입었습니다!]
[생존을 위해 설화 에너지를 투여하세요.]

이지혜가 뒷걸음질을 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비켜요!”

이지혜를 밀치며 끼어든 것은 신유승이었다. 안색이 파랗게 질린 이지혜가 그녀를 향해 소리를 질렀고, 이길영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광선검은 이미 신유승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히는 중이었다.

‘아저씨.’

그 순간, 신유승은 자신의 짧은 생을 반추했다. 고작 이런 곳에서 끝나게 된다는 억울함. 그럼에도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는 만족감.
신유승은 생각했다.
이것이, ‘구원의 마왕’의 화신다운 최후라고.

그리고 다음 순간.

[해당 공격은 당신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츠츠츠츳, 튀는 스파크와 함께, 무형의 벽에 막히기라도 한 듯 가드의 광선검이 코앞에 멈췄다.

“어?”

연달아 허공에 떠오르는 메시지.

[시나리오 시스템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거대 설화 ‘넥스트 시티’가 화신 ‘신유승’의 존재에 의문을 표합니다.]

상황은 이길영 쪽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에게 공격을 시도하던 광선검의 전원이 일제히 꺼지고 있었다.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던 이길영이 중얼거렸다.

“······뭐지?”

시야의 오른쪽 상단에 옅은 회색으로 빛나는 폰트가 보였다.

[이 시나리오는 18세 이용가입니다.]
[해당 세계관은 심의에 따라 아동 및 청소년 유닛에 대한 살해 행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신유승과 이길영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개 이득인데?’

어떻게 그들이 이곳에 소환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런 세계관이라면.
뒤쪽에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이지혜를 향해, 이길영이 씩 웃었다.

“누나, 공짜 쩔 받을 준비해.”

가드의 대퇴부에 단검을 박아 넣는 이길영을 보며, 신유승은 생각했다.

‘어쩌면, 조금만 더 어린애로 있는 것도······.’

이 시나리오의 끝에 무엇이 기다릴지 신유승은 아직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것도 하나 있었다.
이 시나리오가 끝나면, 아마 그들은 김독자가 깜짝 놀랄 만큼 강해져 있을 것이다.


*


포탈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성좌들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얼핏 세어봐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설마, 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던 건가?

“독자 씨.”

긴장한 이현성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중혁, 한수영, 이현성, 정희원. 그리고 나를 포함한 다섯 일행은 하나의 별자리처럼 뭉쳐 섰다.
곧이어 시나리오 메시지가 떠올랐다.

[메인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성운은 ‘성마대전’의 중립 지대에 입장하였습니다!]
[당신은 ‘성마대전’의 진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뒤이어 하늘을 오색으로 물들이는 알림 메시지도 있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가 ‘성마대전’에 참전하였습니다!]

보나마나 도깨비 놈들 짓이겠지.
오자마자 동네방네 홍보를 다 하는군.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일부 성운들이 당신들의 행보를 주목합니다!]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건너편에서 우리를 보는 성좌들을 마주 보았다. 꽤 쟁쟁한 격을 뿜어대는 성좌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성좌도 보였다.

[후인이여, 너무 늦었군.]

이쪽을 향해 중후한 미소를 짓는 사내. 나는 반가운 마음에 외쳤다.

“고려제일검!”

그는 ‘중섬 시나리오’에서 우리와 이별했던 척준경이었다.
과연 설화급에 오른 성좌답게, 그는 무난히 본섬으로 진입한 모양이었다.

[제법 장대한 시나리오를 수행한 모양이지? 일행이 많아졌군.]

척준경의 시선이 우리를 따라 포탈에서 나온 환생자들을 응시했다.
나와 함께 본섬으로 건너온 ‘카이제닉스 제도’의 사람들이었다.

“‘성마대전’을 함께할 사람들입니다.”

척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력은 많을수록 도움이 되겠지. 그보다······ 후인은 뭔가가 달라진 것 같군.]

마치 탐색이라도 하듯, 척준경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대들의 설화에서 묘한 깊이가 느껴진다.]

“······그렇습니까?”

척준경의 시선이 나를 지나쳐 한수영을 향했다. 한수영은 뭘 보냐는 듯 불경한 시선으로 척준경을 마주 보았다.
척준경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과연.]

문득 ‘만다라의 수호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보살이여, 시간을 견뎌 보십시오.

카이제닉스 제도를 클리어한 뒤 우리 성운의 설화들은 모종의 변화를 겪었다.
이현성, 정희원, 특히 한수영. 그들이 카이제닉스에서 견뎌낸 시간들은, 결코 허투루 보낸 세월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설화로 기록되고, 그 설화는 다시 우리의 격을 키운다.

척준경의 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뒤쪽에서 우리를 염탐하던 성좌들이 한층 더 노골적으로 우리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성좌, ‘양다리 전문가’가 당신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성좌, ‘신궁왕’이 당신을 흥미롭게 지켜봅니다.]
[성좌, ‘입은 셋 머리는 하나’가 ‘카이제닉스 제도’의 환생자들을 비웃습니다.]

그 격의 향연에 ‘카이제닉스 제도’ 출신의 환생자들이 뒷걸음질 쳤다.
‘카이제닉스 제도’ 바깥으로 벗어난 그들은, 이제 세계관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으르렁거립니다!]

환생자들을 보호하듯 나선 것은 한수영이었다. 대기가 꿈틀거리며, 한수영의 배후로 흑염룡의 기세가 떠올랐다. ‘카이제닉스 제도’의 환생자들은 그런 그녀를 보며 존경의 염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과연, 저게 바로 왕의 면모라는 거겠지.

하지만 성좌들은 그런 한수영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성좌들의 기세가 흉흉해진 것은 삽시간이었다.

쿠구구구구!

[감히 소성운의 화신이······!]

어쩐지 귀찮은 마음에, 나는 이쯤에서 흐름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성좌들을 노려봅니다!]

거대 설화의 준동에 성좌들이 흠칫 놀라며 몇 발짝을 물러섰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척준경을 향해 물었다.

“그쯤 해두고, 저희를 기다리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척준경은 조금 곤란한듯한 표정이었다. 그것을 말해도 될지 아닐지를 그 스스로 가늠하는 눈빛.
몇 가지 떠오르는 가정이 있었고, 나는 그중 하나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이곳은 중립 지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려제일검께서는 성마대전의 진영을 결정하셨습니까?”

[아직이다.]

······그렇군. 아직도 편을 고르지 않았다?
척준경이 말을 이었다.

[그대도 알다시피, 성좌들의 선악(善惡)이란 필멸자의 그것과 같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둘 중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다.]

나처럼 필멸자로 시작해 혼자만의 힘으로 성좌위에 오른 척준경은, 대천사나 마왕들이 주장하는 선악의 개념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그러니 그의 고민도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척준경에 한정된 이야기.
나는 뒤쪽의 성좌들을 일별하며 물었다.

“저분들도 편을 고르지 않은 상태겠군요.”

척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척준경의 뒤쪽으로, 드넓은 평원 곳곳에 천막을 치고 흩어져 있는 성좌들의 무리가 보였다.

[현재 전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대충 알아본 바로는······.]

곳곳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진언들.
나는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아직까지 자신의 진영을 결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 속이 뻔한 일이었다.

이곳 중립 지대의 성좌들은, 눈치를 보며 때를 기다리다가 유리한 편을 골라 ‘성마대전’에 참전하려는 것이다.
유중혁과 한수영이 동시에 [한낮의 밀회]를 걸어왔다.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것 같군.
―이 새끼들 지금 그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영을 선택하지 않은 ‘중립’의 힘이 강해질수록, 진영을 선택했을 때 얻을 이득도 커진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중립 지대의 성좌들을 경멸합니다.]
[성좌, ‘지옥의 필경사’가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에게 예약되어 있음을······.]

선이든 악이든, 이들은 때가 되었을 때 자신들의 세력을 최상의 거래 조건하에 팔아 치울 생각인 것이다.
한수영이 피식 웃었다.

―목적이 뻔하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척준경이 한숨처럼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그대를 만나고 싶어하는 이가 있다.]
[누굽니까?]
[성운 <홍익>의 고위급 성좌다.]

역시나.
아무래도 척준경은 지금 우리들을 포섭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듯했다.
나는 옅은 실망감을 감추며 물었다.

“<홍익>의 고위급 성좌들은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분명, 오래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한 번은 ‘별자리의 연회’에서.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암흑성]에서 ‘시조의 어머니’를 상대하면서.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바로 너의 앞에 있으니.]

고고한 격이 담긴 진언. 성좌들의 대열이 갈라지며, 새하얀 섭선을 쥔 신선(神仙)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걸음걸이마다 느껴지는 웅혼한 바람의 힘.
······이거, 누구신지 알 것 같은데.

[무릎을 꿇고 예를 보여라, 반도의 후예여.]





< Episode 73.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 (1) > 끝

< Episode 73.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 (2) >





갑자기 나타나선 대뜸 무릎을 꿇으라니······.
곁에 있던 한수영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고, 유중혁은 벌써 칼자루로 손이 가고 있었다.
이마를 짚은 척준경은, 아무래도 이런 사태가 일어날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미안하다, 후인이여. 어떻게든 말려 보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하긴, 저 양반이 이런 상황을 좋아할 리가 없지.
척준경은 <홍익>에 빚진 게 있으니 이 자리 주선을 거부하지도 못했을 테고······.

―그대의 뜻에 맡기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인 쪽을 바라보았다.

[반도의 바람을 지배하는 성좌가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성좌, ‘천제의 풍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천제의 풍신. 그는 천왕(天王)과 함께 <홍익>을 창시한 성좌.
우리에겐 바람의 신으로 익숙한 ‘풍백(風伯)’이 바로 그의 진명이었다.

쿠구구구구!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낸 성좌의 격. 거대한 봉황이 날갯짓을 하듯 가공할 강풍이 주변을 휩쓸었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바깥의 환생자들이 이쪽을 향해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가 내 주변의 소리를 모두 끊어버린 것이다.
지금부터 할 대화를 알리고 싶지 않다는 제스처겠지.

[반도의 후예여, 너의 용맹은 익히 들어왔다. 그대의 명성이 널리 울려 퍼지며 반도의 위상도 올라갔다. 본신은 그런 상황을 무척 흡족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나는 기세를 끌어올리는 유중혁에게 눈짓을 했다.
잠깐만, 일단은 좀 들어보자고.

[그런데 최근, 그대가 타국의 성좌들과 부적절한 연대를 쌓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더군.]

······계속 들어야 할까 싶기는 한데.

[대천사나 마왕은 반도나 동아시아에 유래를 둔 성좌들이 아니다. 즉, 그들은 외세(外勢)라는 이야기다.]

한수영이 눈치를 주었다.

―야, 저거 두고 볼 거야?
―내가 베겠다.
―뭐야, 혼선인가? 왜 유중혁 목소리가 들리지?
―내가 밀회방 통합했어.

내 말에 한수영과 유중혁의 메시지가 폭발했다.

―야, 장난쳐? 이제 머릿속에서까지 저 건방진 말투를 들으라고?
―내가 할 말이군.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그만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우리가 단톡방으로 싸우는 와중에도 풍백의 따분한 훈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즉, 후예의 친외세적인 행동은 반도의 명예에 큰 누를 끼쳤으며, 본신은 그것을 심각한 죄악이라 여기는 바이다. 하지만 만약 후예가 그 일을 깊이 뉘우치고 반성하여······]

심지어는 그의 말에 동의하는 성좌도 등장했다.

[성좌, ‘쇄국정책의 창시자’가 ‘천제의 풍신’의 말에 일부 동의합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 작은 반도에는 놀라울만치 다양한 성좌들이 있으니까.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자신의 머리를 닦습니다.]
[성좌, ‘조선제일술사’가 혀를 찹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하품을 합니다.]
[한반도의 일부 성좌들이 ‘천제의 풍신’의 발언을 고리타분하게 생각합니다.]

[누가 감히 익명의 수식언 뒤에 숨어 입을 놀리는가!]

쩌렁쩌렁 울리는 풍백의 진언과 함께, 하늘의 기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 가공할 위세에 눌린 몇몇 성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그는 반도의 조상신에 가까운 존재.
각자 정도는 다르지만 <홍익>의 수혜를 받아온 반도의 성좌들은, 그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저 척준경조차도.

[그런데 그대는 왜 아직도 서 있는 것이냐?]

그리고 풍백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지금까지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무릎을 꿇으라 했을 텐데?]

거대한 압력이 나를 내리눌렀다. 나뿐만 아니라, <김독자 컴퍼니> 전체를 내리누르는 압력이었다.

[성운 <홍익>의 설화들이 <김독자 컴퍼니>를 응시합니다!]

늙은 거목이 허리를 숙여 이쪽을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다.
막 자라난 새싹의 양분을 탐하는 거목.
나는 그런 시선을 가만히 마주 보다가 대답했다.

“싫은데요.”

[그래, 싫······ 무어라?]

“싫다고 했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태도를 좋아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일단 원펀치를 먹이고 시작하라 종용합니다.]

“저는 ‘성마대전’에 참가하러 온 거지, 당신에게 무릎을 꿇으러 온 게 아닙니다.”

[아주 오만하구나. 내 너의 용맹함을 높이 사 지은 죄를 용서해주려 했거늘―]

“용서해준 다음에는요?”

내 언사에 풍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홍익>의 권위로 <김독자 컴퍼니>를 흡수 합병하려는 생각이셨겠죠. 아닙니까?”

정곡을 찔렸는지, 저 고고한 성좌의 표정에도 감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너희가 <홍익>의 휘하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째서죠?”

[태초에 <홍익>이 힘을 쓰지 않았더라면, 너희 성운은 태어나지도 못했다.]

마치 자식에게 배반이라도 당한 부모처럼, 풍백이 나를 향해 외쳤다.

[<홍익>은 반도의 창시자다! 우리가 너희를 낳았고, 너희가 따를 뜻을 정하고 규율을 입법했다. 지금 너희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정한 것이다. <홍익>의 설화가 있었기에 너희가 존재하고, 그 설화를 통해 너희는 살아남을 수―]

“지구 시간으로 4년 전, 한반도에 ‘시나리오’가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풍백의 말을 끊어버렸다.

“반도가 위기에 빠졌을 때 <홍익>은 무얼 하셨습니까?”

[······!]

“한반도 시나리오가 시작되고, [절대 왕좌]가 나타나고, 이계의 신격들과 재앙들이 강림하고, 그래서 반도의 화신들과 성좌들이 일제히 힘을 모았을 때―”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었다.
누구에게도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이 모여 극복한 시나리오들.
눈먼 왕좌를 향해 내리 꽂히는 [사인참사검]과, 그 검에 개연성을 빌려준 반도의 성좌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천제의 풍신’을 노려봅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가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은 [절대 왕좌]의 붕괴와 함께 태어난 설화였다.
나는 설화를 이야기하고, 설화는 나를 통해 자신을 말한다.

“그때 당신과 <홍익>은, 그 잘난 성좌들은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지?”

츠츠츠츠츳······!

[네놈!]

피라도 토할 것 같은 얼굴로 풍백이 나를 보고 있었다.

“물론 당신과 <홍익>이 초창기 반도를 이롭게 만드는 데 힘썼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설화가 가진 가치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반도의 모두가 당신에게 충성해야 할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풍백의 콧수염을 보며, 나는 말을 마쳤다.

“각자 ‘시나리오’를 수행하는 방식이 있는 겁니다. 당신이 반도의 최상위격 성좌라 해서 <김독자 컴퍼니>의 행사에 간섭할 수는 없습니다.”

내 맹랑한 말투에 척준경은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풍백이 이런 식으로 당하는 모습은, 아마 그로서도 처음 보는 것일 터다.

[감히, 감히―]

말문이 막힌 풍백을 대신해, 그의 뒤에서 떠오른 것은 설화의 기백이었다.

[성운, <홍익>의 거대 설화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운, <홍익>이 <김독자 컴퍼니>를 향해 뿌리를 뻗습니다!]

하나둘 떠오르는 <홍익>의 거대 설화들이 하늘을 향해 가지처럼 솟아오르더니, 이내 거대한 나무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하늘과 땅을 잇는 나무이자, <홍익>이 실천하는 설화들의 총체, 그 모든 설화들을 지탱하는 단 하나의 설화.」
「설화목(說話木) 신단수(神壇樹).」

<홍익>의 모든 설화는, 바로 저 나무와 함께 시작되었다.
신성한 기운을 흩뿌리며 설화의 가지를 뻗어오는 신단수.
훈화만으로는 안 되니, 이제 실력 행사라는 거겠지. 씁쓸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말 씁쓸했던 것은―

“확실히 <홍익>의 최상위 신격들이 사라진 게 맞나 보군요.”

[······무슨 뜻이냐?]

신단수는 내가 아는 그것과는 달리 훨씬 남루하고 조그만 소체에 가까웠다. 게다가 우리를 향해 뻗어오는 신단수의 뿌리는, 모두 그 끝이 흉측하게 상해 있었다. 오래도록 양분을 빨아들이지 못해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는 거대 설화들. 심지어 그 뿌리를 통해 돋아난 가지와 나무들은 대부분 말라 있었다.
저것이 지금의 <홍익>이 가진 전부였다.

“당신이 안타까워서 하는 말입니다.”

내가 알고 있던 원작의 ‘풍백’은 이런 꼬장꼬장한 노인네는 아니었다.
그는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훨씬 품격 있고 정의로운 성좌였다.
그런데 <홍익>에 무언가 일이 발생했고, 성운의 세력이 급격하게 축소되었다.
풍백이 이처럼 구차해진 것은, 분명 그 일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감히 본신을 능멸하려는 것이냐?]

괴성을 지른 풍백이 바람의 힘을 발산하자, 주변에 거대한 폭풍의 기운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일대를 압박하는 엄청난 격에, ‘카이제닉스 제도’ 출신의 환생자들이 고통스러운 듯 몸을 뒤틀었다.
한수영이 다시 한번 채근했다.

―김독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홍익>의 모습이 안타깝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저쪽 사정이었다.
내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자 곁에 있던 유중혁이 검을 뽑아 들었고, 한수영이 왼팔의 붕대를 풀었다. 그리고.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억눌렀던 ‘거대 설화’들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심지어는.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못마땅한 듯 이야기를 거듭니다.]

우리의 ‘거대 설화’가 아닌 거대 설화까지도 함께.

쐐애애애액!

우리를 향해 날아들던 거목의 뿌리가 설화들이 일으킨 파랑에 부서지고 있었다.

[거대 설화, ‘신단수’의 소체가 고통스러워합니다!]

우리를 당장이라도 삼킬 듯 뻗어오던 뿌리들이 주춤거리며 흩어지고 있었다. 삼킬 수 없는 이야기에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멀쩡한 뿌리들이 뒤늦게 되돌아갔고, 말라비틀어진 앙상한 가지들이 비명을 질렀다.

[거대 설화, ‘신단수’의 소체가 ‘천제의 풍신’의 명을 거부합니다.]

[이런······?]

뿌리를 거둔 신단수의 형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우리가 가진 거대 설화의 격이 그 정도일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지, 경악한 풍백이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중립 지대에서 벌어진 소요 사태에, 곳곳에 흩어져 있던 성좌들이 놀라 이쪽을 보는 것이 느껴졌다.

[바앗!]

기다렸다는 듯 내 머리 위에 나타난 비유. 그와 동시에 비유의 채널이 활짝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다수의 성좌들이 채널에 입장합니다!]

비유의 채널은 비형의 중계 채널과 연결되어 있다.
비형 녀석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녀석이 무슨 의도로 이런 상황을 유도했는지는 뻔하다.
내키지는 않지만, 분명 언젠가 해야 할 일이기는 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의 목소리에 주목합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마왕,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당신을 지켜봅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과 악과 중립 계통의 성좌들이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무수히 떠오르는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
나는 풍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홍익>에게 하는 경고가 아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정의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아갈 선택지는 우리 스스로 정할 겁니다.”

세상의 성좌들을 향해, 나는 선언했다.

“누구도, 그 선택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 Episode 73.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 (2) > 끝

< Episode 73.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 (3) >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시선이 쏟아졌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의 말에 동의합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연한 걸 뭘 두 번 말하느냐 중얼거립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꼰대에게 빨리 원펀치를 갈기라고 종용합니다.]

심연의 흑염룡의 말에 풍백이 어이없다는 듯 하늘을 쏘아보았다.
뭐라고 말을 붙이려던 그가 흠칫 몸을 떤 것은, 이어진 간접 메시지 때문이었다.

[성좌, ‘고려제일검’이 ‘구원의 마왕’의 말이 옳다 여깁니다.]

풍백의 고개가 척준경 쪽을 향해 홱 돌아갔다.

[준경, 너마저······!]

척준경은 민망한 듯 그의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의외였다.

아무리 몰락하고 있다고 해도, <홍익>은 여전히 한반도의 주력 성운이다.
그런 상황에서, 척준경이 <홍익>의 뜻에 항거하여 내 편을 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수의 성좌들이 <김독자 컴퍼니>와 <홍익>의 충돌에 관심을 가집니다!]

척준경의 선언 때문인지 성좌들이 나를 주목하는 것이 느껴졌다. 중립 지대에 불어오는 새로운 바람에 나를 경계하는 이들도 보였다.
나는 풍백을 보았다.

“계속하실 겁니까?”

풍백의 눈꺼풀이 격렬하게 떨리는 것을 보며, 솔직히 나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아까는 <홍익>을 비난하듯 말했지만, 사실 풍백이라고 한반도 시나리오를 완전히 손놓고 있었던 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귀환전쟁’이 벌어졌을 때 내 어머니에게 손을 빌려준 성좌가 바로 풍백이었기 때문이다.

빌어먹게도 그 일로 내 어머니의 수명을 죄다 앗아가긴 했지만.

사실 이렇게나 열 받는 건 그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바람은 오늘의 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

한참이나 나를 노려보던 풍백은 섭선을 탁 접으며 먼지처럼 사라졌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기개에 감탄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김독자 컴퍼니>의 이름이 허명이 아님을 기억합니다.]
[<스타 스트림>의 호사가들이 해당 사건을 기록합니다.]

유중혁, 한수영, 정희원, 이현성.
모두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누구의 표정에도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남들이 우리 성운을 어떻게 보고 무어라 판단하는지는 상관없다.
그저, 우리가 옳다고 믿는 이야기를 향해 나아갈 뿐.

[후인 다운 선택이로군.]

우리를 지켜보던 척준경이 말했다.

[후인의 그런 면모에 어떤 성좌들은 그대를 좋아하고 따르겠지. 실제로 한반도의 많은 성좌들은 이제 <홍익>보다 후인을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그대를 적대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새삼 주변의 시선들이 새롭게 의식되었다.
어떤 성좌들은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고, 어떤 성좌들은 우리를 부러워하듯 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성좌들은, 결국 너희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라는 듯한 눈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우리도, 한때는 너와 같았다.」

성좌들이 겪어온 설화들이 마치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느껴졌다.

[오래된 거대 설화들이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설화는 곧 시나리오를 극복해 낸 흔적들이다.
한때는 누군가의 유희거리였던 시간들.
이곳까지 온 모든 설화들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꺾여왔다. <스타 스트림>의 현실과 타협하고, 성좌와 도깨비들의 요구를 승낙하며 자신을 연명해온 시간. 그리하여 마침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 시간을 대표하듯, 척준경이 말했다.

[<스타 스트림>은 꺾이지 않는 이야기를 싫어하지. 그대들처럼 순수한 이야기는 더욱.]

꺾이지 않는 순수······.
그 말을 듣고 웃음이 났다.
세상이 우릴 그렇게 보고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왜냐하면 그 말은, 지금껏 우리가 걸어온 모든 길을 부정하는 말이니까.

“우린 이미 수십 번도 더 꺾였습니다.”

<김독자 컴퍼니>는 처음부터 두 발로 서 있지 않았다.
한반도 시나리오가 시작되고, 성좌들의 농락과 근본 모를 증오를 견디며 여기까지 왔다. 다른 무수한 설화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다시 일어났고,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런 우리에게 ‘순수하다’라는 말은, 차라리 모욕이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침착하게 당신을 바라봅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거친 울음을 삼킵니다.]

마치 내 말에 동조하듯 두 개의 거대 설화가 반응했다.

“앞으로도,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날 겁니다.”

[발아 중인 세 번째 ‘거대 설화’가 태동합니다.]

거기다 곧 깨어날 세 번째 거대 설화까지.

우리를 보던 척준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이야기를 지켜보겠다.]

그 말과 함께 척준경이 돌아섰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한반도의 성좌들도 우리 쪽을 흘끔거리며 사라졌다.

척준경은 이제 위인급을 넘어서 설화급에 도달했다.
게다가 성좌로서의 연식이 나보다 훨씬 오래되었고, 타고난 싸움꾼인 만큼 같은 편으로 들일 수만 있다면 최고의 아군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같은 편에서 싸울 수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내가 너무 오래 폼을 잡고 있었는지, 곁에서 나를 보던 한수영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야, 누가 보면 니가 주인공인줄 알겠어.

머쓱한 마음에 유중혁 쪽을 바라보았더니, 유중혁은 내가 아니라 지평선의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작됐다.”

[시나리오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해당 지역의 인근에서 ‘성마대전’의 국지전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어진 시스템 메시지에 곳곳에 막사를 치고 있던 중립 성좌 및 화신들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분쟁 지역에 개입할 시 진영 선택지가 발생합니다!]

멀리서, 강대한 두 개의 세력이 진격하는 것이 보였다.
눈부신 갑주를 입은 새하얀 날개의 천사들이, 화신들과 환생자들을 이끌고 벌판을 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탁기와 마기로 물든 마왕들이 자신의 권속들을 이끌고 진격해오고 있었다.

[갱신된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메인 시나리오 # 80 ―‘성마대전’>

분류 : 메인
난이도 : 측정 불가
클리어 조건 : 절대선 또는 절대악의 진영 중 하나를 선택하여 성마대전에 참가하십시오. 소속 진영이 시나리오에서 승리를 누적할수록 진영별 ‘선악 수치’가 증가하며, 특정 진영의 수치가 100을 넘게 되면 전쟁의 승패가 결정됩니다.
제한시간 : 해당 시나리오의 제한시간은 ‘혼돈 수치’의 영향을 받습니다.
보상 : ‘성마대전’과 관계된 거대 설화, ???
실패시 : 사망

+

[성마대전 진행 현황]

절대선 수치 : 56
절대악 수치 : 56
혼돈 수치 : 51

[성마대전의 진행 기간이 길어질수록 혼돈 수치가 증가합니다.]

+

[해당 전장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영을 선택해야 합니다.]
[진영 선택 시기가 빨라질수록 시나리오 보상이 커집니다.]

우리는 시나리오 내용을 읽으며 잠시 침묵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한수영이었다.

“김독자, 어쩔까? 또 늘 하던 대로?”

[성좌, ‘지옥의 필경사’가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에게 예약되어 있음을······.]

“저 양반은 저거 자기가 한 말도 아니면서 종알종알 시끄럽네 진짜.”

[성좌, ‘지옥의 필경사’가 흠칫 놀라 입을 다뭅니다.]

‘지옥의 필경사’는 『신곡』의 저자인 단테였다. 그리고 단테의 저 유명한 말은, 사실 후대의 정치가에 의해 각색된 것이었다. 어쨌든 본인의 유명세를 키워준 대사니 단테는 그것을 자신의 설화로 받아들였겠지.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에게 예비되어 있다.」

듣기론 멋진 말이다. 도덕적 선택조차 누군가의 유희가 되는 세계에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우리도 선택해야 돼. 언제까지 요령 좋게 빠져나가긴 힘들어.”

어쨌거나 단테의 말과는 무관하게, 우리도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성마대전’은, 선악 중 어느 한쪽을 택하지 않으면 애초에 참가할 수 없게 되어 있으니까.
메시지를 보던 유중혁이 말했다.

“1863회차의 ‘성마대전’은 악의 승리로 끝났다. 한수영이 악의 편을 들었지.”
“왜 또 나야? 그리고 여긴 1863회차 아니거든?”

한수영의 말이 맞다.
이곳은 1863회차가 아니다.
이곳은 3회차, <김독자 컴퍼니>의 세계다.

“가자.”

멀리서 두 개의 선악이 부딪치는 격전지가 보인다.
이 드넓은 ‘성마대전’의 전장 중 하나가, 지금 막 개막한 것이다.

[‘성마대전’의 113번째 국지전이 발생합니다!]

[해당 국지전의 참가자 명단이 공개됩니다.]

그리고 그 성마대전의 최전선에, 내가 잘 아는 성좌 하나가 서 있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해당 시나리오에 참가 중입니다.]


*


“살려, 살려 주세요.”

푸우욱!

“대천사님, 제발······!”

곳곳에서 들려오는 신음.
양자택일의 선택지에서 악을 선택한 화신들이 대천사들의 검에 목이 달아나고 있었다.

이것이 설화의 전쟁이다.

어느 한쪽의 설화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 다른 한쪽에겐 완전히 배제되어야 하는 것.
쓰러진 화신들을 뒤로 하고, 우리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전장을 응시했다.

대천사 우리엘은 한때 그들을 동정했다.

거대 서사에 휩쓸려 소모되는 화신들을 안타까워했고, 그들이 겪는 불행에 분노했다. 꽤 오랫동안 그랬다. 그 일만이 그녀가 가진 삶의 전부였을 때도 있었다.

‘······밀린 성류방송 봐야 되는데.’

밀려오는 마왕군의 인파를 보며, 우리엘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선을 전파하기 위해 태어났다 해서, 그것만을 행하며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다.
성좌를 갉아먹는 것은 사실 육체적 위협이 아니라 정신의 마모다.
억겁의 세월 동안 지속된 감정 노동은 그녀에게 세상 자체에 대한 뿌리 깊은 환멸과 깊은 광기를 불러왔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의 영혼이 불완전하게 흔들립니다.]

강한 성좌든 약한 성좌든, 시나리오 속에서 안심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시나리오란 애초에 그런 시스템이니까.

고오오오오!

자신들이 시나리오 속에 소모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그리고 다시 하루를 더 살아가기 위해, 성좌들은 또 다른 설화들을 소비한다. 시나리오를 관음하고, 누군가의 상황에 분노하거나, 비난을 퍼붓거나, 동경하거나 감동한다.
그것은 대천사인 우리엘 또한 마찬가지였다.

[■■■■■ 꺼져! 너희 때문에 본방 놓쳤다고!]

우리엘의 검신에서 뻗어 나온 [지옥염화]에 마왕의 권속들이 잿더미가 되어 불타올랐다. 급한 마음에 내갈긴 힘은 제대로 조절되지 않았다. 허겁지겁 진체의 절반만을 소환해 참전한 영향도 컸다.

[국지전에 참가 중인 마왕들이 대천사의 힘에 경악합니다!]

물론 반신이라 해도 무려 대천사 우리엘의 반신이다.
그러니, 어지간한 마왕들은 그녀에게 상대도 되지 않았다.

[마왕, ‘별과 논리학의 군주’가 자신의 격을 발산합니다!]
[마왕, ‘용과 악취의 대공작’이 거대 설화를 개방합니다!]
[마왕, ‘음속의 마왕’이 핏빛 울음을 토합니다!]
[마왕, ‘예제공’이 흥분과 광기에 휩싸입니다!]

문제는, 이번에 참전한 마왕들 또한 어지간한 놈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우리엘은 자신의 [지옥염화]를 헤치고 다가오는 마왕들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미친 대천사가 코앞에 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 마왕 부에르가 너희와 함께한다!]

본래 이번 국지전에 참전 예정인 마왕들은 저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왕군 측에서 전력 편성을 변경했고, 졸지에 우리엘은 혼자서 그 마왕들을 감당해야 할 상황이었다.

[■■■들아! 꺼져!]

마기를 품은 화살들이 빼곡하게 전장을 덮었고, 우리엘은 [지옥염화]를 배리어처럼 발동해 그것들을 막았다.
허겁지겁 후퇴하는 하급 천사들을 보살피는 동안, 어느새 우리엘의 몸 곳곳에도 화살이 박혀 있었다.

[우습군. 천사들이여, 달아나는 건가?]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의 명성이 아깝구나.]
[닥쳐! 내가 진체 전부만 강림할 수 있었더라도 니들은 죄다 죽었어.]

쏟아지는 공격에도 우리엘은 신음하나 흘리지 않은 채 씩씩거렸다.

[비겁하게 다구리치지 말고 일대일로 붙어 ■■들아! ■발! 내가 일대일이었으면 아가레스든 가미긴이든 마르바스든 다 조질 수 있거든?]

흥분한 우리엘의 외침에 마왕들은 조소했다. 우리엘이 강한 것은 알고 있다. 알고 있었기에, 대천사 하나를 잡겠다고 무려 네 명의 마왕이 몰려온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마왕들은 치밀했다.

[이것이 전쟁이다, 천사여.]

피칠갑을 한 우리엘의 [지옥염화]가 마왕들과 격돌했다.
대천사 우리엘은 강했다.
고작 반신의 힘만으로 ‘별과 논리학의 군주’의 팔을 잘라냈고, ‘용과 악취의 대공작’이 아끼던 애완용을 으깨버렸다. 심지어 ‘음속의 마왕’은 두 다리를 잃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스산한 느낌과 함께 뒤를 돌아본 순간, 투명한 예제공의 단도가 우리엘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오늘은 대천사의 설화를 먹겠구나.]

아차 싶었던 우리엘이 뒤늦게 검을 휘둘렀지만, 상처를 입어 둔해진 화신체로는 대응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다음 순간.

푸슈슉!

새하얗게 빛나는 검신이, 예제공의 가슴을 뒤쪽에서 꿰뚫었다.
후두둑 떨어지는 검은 피.
검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예제공의 등을 찔렀다. 설화 파편이 그로테스크하게 튀어나오고, 망가진 화신체의 숨통이 철저하게 끊어질 때까지.
그리고 이어서 날아든 한줄기 백광검이 예제공의 목을 날려버렸다.

[누군가가 마왕 ‘예제공’을 사살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엘은, 쓰러진 예제공의 뒤에 서 있던 두 사람을 보았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알아볼 수 있는 이들이 그토록 가까이 있었다.

“내 성좌가 그렇게 맞고 있는 꼴은 못 봐.”

이 세상에 하나뿐인 그녀의 화신.
그리고.

[마왕 ‘구원의 마왕’이 ‘마왕승격전’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마계 등급이 조정됩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50번째 마계의 마왕’이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지켜봤던 이야기의 주인공이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우리엘.”

[마왕,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소속 진영을 결정하였습니다.]





< Episode 73.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 (3) > 끝

< Episode 73.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 (4) >





누군가의 표정이 날것 그대로 느껴질 때가 있다.
저게 바로 저 사람이 갖고 있던 진짜 표정이구나, 하고 느껴지는 순간.

[김독자―!]

지금의 우리엘의 모습이, 바로 내겐 그랬다.
힘껏 팔을 뻗은 우리엘은 정희원과 나를 부둥켜안은 채 한참이나 뺨을 비벼댔다. 결국 정희원이 핀잔을 줬다.

“우리엘, 숨 막혀요.”

[미, 미안.]

당황하며 물러서면서도 반짝이는 눈동자. 이런 푼수 대천사가 어떻게 ‘악마 같다’는 수식언을 받게 되었는지, 가끔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응? ‘카이제닉스 제도’ 시나리오는 잘 끝났어? 나도 간신히 몇몇 부분 보긴 했는데 볼 시간이 많지가 않아서······ 진짜 미안해! 후원 안 해줘서 기분 상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표정만이 아니라 나오는 대사도 전부 날것 그대로다.
우리엘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정희원과 서로 마주 보았다. 내 기분을 아마 정희원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세련된 표현도 곡진한 퇴고도 없는 말들.
하지만 어떤 말은, 날것 그대로일 때 가장 큰 감동을 준다.

“우리엘.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게 좋겠습니다.”

[응? 앗, 맞아. 이럴 때가 아니었지.]

나를 보던 우리엘의 시선이, 건너편에서 우리를 노려보는 마왕군을 향해 꽂혔다.
순식간에 식어버린 그녀의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내 생각이 기우였음을 깨닫는다.

이 천사는, 틀림없는 ‘악마 같은 불의 대천사’다.

[마왕, ‘별과 논리학의 군주’가 당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런 대천사와 맞서 대적하는 마왕들이 있었다.

마왕 서열 10위, 별과 논리학의 군주 ‘부에르’.
마왕 서열 18위, 음속의 마왕 ‘바신’.
마왕 서열 29위, 용과 악취의 대공작 ‘아스타로트’.

내 손에 명을 달리한 예제공을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마왕은 셋이나 남아 있었다. 하나하나가 상대하기 쉽지 않은 적이었다.
특히 ‘별과 논리학의 군주’나 ‘음속의 마왕’은 더욱.
만약 부에르의 양팔이나 바신의 양다리가 멀쩡했더라면, 나는 이 자리에서 목숨을 걸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구원의 마왕!]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어째서 같은 마왕을 대적하는 것인가.]

나는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둘러댔다.

“전 그냥 승격전을 한 것뿐인데요.”

[그게 지금 말이 되는 변명이라고······.]

“‘성마대전’이 진행 중이라고 해서 마왕 승격전을 시도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습니까? 실제로 ‘1차 성마대전’에서도 그런 일은 빈번히 있었고요.”

[무슨······!]

내 말에 격분한 바신이 당장이라도 내 목을 따버리려는 듯 흉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두 다리가 사라진 그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당신은 ‘1차 성마대전’의 일부를 재현하였습니다!]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당신의 돌발행동에 흥미를 보입니다.]

실제로 내가 한 짓은, 1차 성마대전에서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저지른 짓과 똑같은 것이었다.
표정을 굳힌 ‘별과 논리학의 군주’ 부에르가 물었다.

[이런 짓을 하고도 괜찮을 거라 생각하나?]

“물론 안 괜찮겠죠.”

나는 마왕들의 기세에 전혀 주눅 들지 않은 채 격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지금 걱정해야 할 쪽은 제가 아닐 겁니다.”

[마왕의 격을 해방합니다!]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5번 책갈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전용 스킬, ‘전인화(電人化) Lv.23(+13)’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현재 당신의 육체 구성이 해당 등장인물의 육체 구성과 상이합니다.]
[당신의 ‘격’이 육체 조건의 패널티를 극복합니다.]

피부를 뚫고 나온 날개의 감각에 어깨가 간지러웠다.
그에 더해 전인화의 짜릿한 감각까지 겹치면서, 내 몸은 하나의 전격으로 뒤덮였다.
급격하게 치솟는 내 ‘격’에, 세 마왕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별과 논리학의 군주’는 한쪽 팔을 잃었고.
‘용과 악취의 대공작’은 애완용을 잃고 상처투성이였으며.
‘음속의 마왕’은 두 다리를 잃은 상태니 이미 전력에서 논외인 상태.

곁에 있던 정희원이 [심판자의 검]을 꺼내며 [귀살]을 발동했다.

“안 그래도 전에 마왕이랑 붙다가 말아서 아쉬웠는데······.”

마왕들이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하자, 금세 의기양양해진 우리엘이 입을 열었다.

[이 ■■들, 아깐 잘 나불댔잖아? 어디 또 지껄여 보시지?]

“······.”

[독자야, 희원아. 가자! 저 마왕 ■■들 다 조져버리자고······!]

나는 분기탱천한 채 망가진 화신체를 이끌고 나아가는 우리엘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무나 연약해진 어깨. 내 손에 힘없이 붙들린 우리엘이 토끼 눈을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우리엘, 뒤로 물러나십시오.”

[응? 아······ 나 걱정하는 거야? 괜찮아. 나 우리엘이야!]

우리엘은 감동한 표정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조금 서글퍼서, 나는 가만히 미소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

[마왕,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소속 진영을 결정하였습니다.]

허공에, 나의 참전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아마 우리엘은 저 메시지를 제대로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이윽고 의아해하던 우리엘의 몸이 뻣뻣이 굳기 시작했다. 천천히 커지는 우리엘의 눈동자.
나는 그런 우리엘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가만히 계십시오 우리엘. 금방 끝날 겁니다.”

어쩌면 우리엘도, 지금쯤 내가 보고 있는 메시지를 읽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선택한 진영은 악(惡)입니다.]


*


“김독자가 또 김독자했네.”

멀리서 전장의 풍경을 지켜보던 한수영이 중얼거렸다.
소강상태로 접어들던 전장은 김독자의 갑작스런 개입으로 인해 혼돈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마왕을 죽인 마왕. 그럼에도 자신이 ‘악’임을 숨기지 않는 마왕.
김독자를 포위하는 하급 천사들의 움직임과 함께 곤란해하는 정희원의 얼굴도 보였다.
걱정되었는지, 이현성이 물었다.

“정말 저래도 괜찮은 겁니까?”
“안 괜찮으면? 이제와서 <에덴> 편 들라고 할까? 김독자는 태생이 마왕이야.”

한수영은 투덜대며 유중혁 쪽을 보았다.

“그냥 두고 볼 거 아니지?”
“물론.”
“물어보나 마나, 나는 악(惡)이야.”

한수영의 배후성은 ‘심연의 흑염룡’.
애초에 그다지 선택지가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넌 어쩔 거야 유중혁.”
“······.”
“네 배후성은 어떻게 하래? 답 없냐?”

유중혁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전장에 너부러진 화신체들을 바라보았다. 개중에는 천사와 마왕의 시체들도 보였지만, 기실 대부분의 시체는 인간─ 즉, 환생자들이었다.

“아는 얼굴이라도 있어?”

유중혁은 말없이 쓰러진 환생자들을 내려다보았다. 꿈틀거리는 환생자 몇몇이 유중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상세가 심각해 구하기엔 너무 늦어버린 이들. 유중혁은 허리를 숙여 그들의 목에 단검을 꽂았다. 그러자 그들은, 이내 평안한 얼굴로 잠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유리 디 아리스텔이 말했다.

「수영.」

‘걱정마, 유리. 널 저렇게 만들진 않을 거야.’

죽은 환생자들의 영혼이 흩어지는 것이 보인다.
만다라의 굴레에 갇힌 환생자들은 이 섬에서 죽어도 다시 살아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불멸한다고 해서, 그들이 죽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름을 잃은 거대 설화가 소멸합니다.]

다른 시나리오에 동원될 때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잃어간다. 본래의 그들이 살았던 삶을 잊고, 이내는 죽음마저 잊는다.

[가장 오래된 선(善)이 환생자들에게 선을 종용합니다.]
[가장 오래된 악(惡)이 환생자들에게 택일을 강요합니다.]

죽은 이들 중 대부분은 선악이라는 거대한 개념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자들일 것이다.
한수영은 죽은 환생자의 눈꺼풀을 감겨주었다. 눈을 감은 환생자의 얼굴은, 당연한 말이지만 선도 악도 아니었다.

[해당 전장에 개입하기 위해선 진영을 선택해야 합니다!]

“진영을 선택하겠다.”

유중혁이 입을 여는 순간, 한수영이 실눈을 뜨고 물었다.

“너 혹시 딴 생각하는 거 아니지? 카이제닉스 제도 가기 전에 너네 대판 싸웠었잖아.”

유중혁은 대답없이 한수영을 응시했다. 그 답답한 표정에 드러나는 생각이 뭔지 알 것 같았던 한수영이 빽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유중혁이 대답했다.

“이 전쟁은 ‘성마대전’이 아니라 우리의 싸움이 되어야 한다. 이곳이 다른 이들의 전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성마대전이 아닌 김독자 컴퍼니의 싸움.
그게 무슨 의미인지, 한수영은 바로 눈치챘다.

“그래야 선도 악도 승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김독자가 원하는 전개일 거다.”
“무슨 말인진 알겠는데, 그건 아주 힘든 길이야.”

한수영은 곧장 태클을 걸었다.

“그렇게 되면 우린 마계와 에덴을 동시에 적으로 돌리게 된다고.”
“이곳이 1863회차가 아니라고 말한 것은 너다.”

한수영은 한 방 먹은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였다.

“김독자······ 진짜 지독한 놈. 이런 상황에서 저딴 방법을 해결책이랍시고 제시하는 녀석은 저놈뿐이겠지.”
“저놈은 원래 그런 놈이다.”
“너도 마찬가지고. 둘이 아주 똑같아.”

그 말에, 유중혁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도 그리 달라 보이지는 않는군.”
“뭐래, 난 너희 같은 멍청이들이랑은 달라. 그만 떠들고 슬슬 움직이자.”

멀리서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김독자가 두들겨 맞는 모습이 보였다. 하긴, 저 진영에서 갑자기 악을 선언했으니 <에덴>의 천사들이 배신감에 몸을 떨 법도 하다.
유중혁이 선언했다.

“대충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 뭐래? 나도 수틀리면 너 죽일 생각인데?”
“좋군, 그 정도는 되어야 싸울 맛이 나겠지.”
“카이제닉스에서 못다한 승부를 여기서 보자고.”

두 사람의 신형이 동시에 전장을 향해 사라졌고, 졸지에 홀로 남겨진 이현성이 울부짖었다.

“자, 잠깐만요! 수영 씨! 중혁 씨! 저는 어떡합니까!”
“알아서 해!”

[화신, ‘한수영’이 자신의 소속 진영을 결정하였습니다.]
[화신, ‘유중혁’이 자신의 소속 진영을 결정하였습니다.]

[화신, ‘한수영’이 선택한 진영은 악(惡)입니다.]
[화신, ‘유중혁’이 선택한 진영은 선(善)입니다.]

마침내, 그들의 ‘성마대전’이 시작되었다.


*


천계의 모든 병력이 집결된 본섬의 대평원.
천계(天界)의 수장인 메타트론은 자신의 집무실을 본따 만든 막사 안에서 다른 주천사들의 현황 보고를 듣고 있었다.

―<올림포스> 쪽에서 참가 의사를 밝혔습니다.
―<베다>도 참가하겠다고 타전해왔습니다.
―<파피루스>도 일부 성좌들을 보내겠답니다.
―<아스가르드>도 참전 선언을 했습니다. 이쪽은 자기들 거대 설화 때문에 다수 성좌가 참전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직 연락은 없었지만, <황제> 쪽에서도 움직임이 보입니다. 이쪽이야 예전부터 화전양면을 펼치기로 유명하니······.
―‘지옥의 필경사’가 중립 지대에서 성실히 활동 중입니다. 덕분에 성좌와 환생자를 막론하고 참여율이 부쩍 올라가고 있다 합니다.

메타트론은 그러한 보고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메모한 뒤, 그에 적당한 응대를 덧붙여 송신했다.
이번 ‘성마대전’ 시나리오는 말 그대로 선악의 명운을 건 전쟁.
그런 만큼 메타트론은 이번 시나리오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현재 해당 진영의 절대선 수치는 56입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전쟁은 무난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딱 하나, 이번 ‘성마대전’ 한정으로 특수하게 따라붙은 제약을 제외하면.

[현재 혼돈 수치는 51입니다.]

혼돈 수치. 이것에 관해 물었을 때 대도깨비는 이렇게 대답했다.

―낡은 거대 설화의 대립에 이만한 규모의 무대를 제공하는 경우는 무척 드뭅니다. 그러니 개연성에 의거하여 마땅한 위험 부담도 있어야겠죠.
―무슨 뜻이지?
―자세한 설명을 드리면 재미없으니 길게 말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명심하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혼돈 수치를 100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대도깨비들이야 성운의 명운 따위엔 관심이 없다. 오직 더 자극적인 시나리오를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자들. 혼돈 수치는 그처럼 사악한 구상의 발로일 것이다.

[지루하군, 서기관.]

그 말을 한 것은 막사의 구석에서 검을 갈던 미카엘이었다.

[내가 아가레스의 목을 따오겠다. 날 내보내줘.]

중섬 시나리오에서 김독자와 유중혁에게 당해 두 번이나 치욕을 맛보았던 미카엘은, 부활의 권능을 통해 화신체를 복원, 본섬 시나리오에 진출한 상태였다. 메타트론은 의지를 불태우는 미카엘을 향해 옅게 웃어주었다.

[그러면 전쟁이 너무 빨리 끝나버립니다.]
[지루한 전쟁이야 빨리 끝날수록 좋은 거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전쟁은 지금껏 존재했던 그 어떤 시나리오보다 더 길고 처절해야 합니다.]

메타트론은 각지에서 전송되어온 화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선택으로 선 또는 악을 선택한 이들이 서로를 향해 무기를 들이대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용병으로 전쟁에 참전한 자들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양상이 달라지리라는 것을 메타트론은 알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선(善)이 위대한 성전을 독려합니다.]

이 전쟁에 참전한 성좌들은 언젠가 선악의 이름으로 서로를 증오하게 될 것이고, 그 증오는 다시 불타올라 후대의 설화를 만들게 되리라.
전황을 지켜보던 미카엘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면 <김독자 컴퍼니> 녀석들이라도 해치우게 해주든가. 놈들에겐 갚아야 할 빚이 있어.]

메타트론이 고개를 저었다. <김독자 컴퍼니>는 이 시나리오의 중요한 변수. 이용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이용해야 할 세력이었다.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안 됩니다. 그들은 따로 쓸 곳이 있습니다. 미카엘이 나서버리면―]

시나리오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성마대전’의 113번째 국지전이 강제 종료되었습니다.]

메타트론은 메시지에 첨부된 내용을 확인했다.
113번째 국지전은 우리엘이 참전한 전장이었다.

[······강제 종료되었다?]

지금껏 그런 메시지가 뜬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혼돈 수치가 5만큼 증가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는 56입니다.]
[경고합니다! 혼돈 수치가 55를 넘었습니다!]
.
.
.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에서 무언가가 몸을 뒤틉니다.]
[모든 것의 종말을 결정하는 묵시록의 재앙이 태동하기 시작합니다.]





< Episode 73.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 (4) > 끝

< Episode 74. 성마대전 (1) >





Episode 74. 성마대전


허공에서 푸른 빛 전류가 튀어 오르며, 달려들던 마지막 안드로이드가 주저앉았다.

푸슈슉.

잘린 케이블 사이에서 검을 뽑아낸 이지혜가 이마를 닦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곁에서 그 광경을 보던 이길영이 코를 후비며 말했다.

“누나 이제 꽤 하네?”

그 하늘을 찌르는 건방에 이지혜는 꿀밤을 한 대 갈겨 주려다가 말았다.

[대상은 공격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이 세계관에서, 저 꼬맹이들은 무적이다. 괜히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이지혜는 이길영과 신유승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니들 지금 몇 렙이야?”
“난 84.”
“전 87이요.”
“뭐? 너 며칠 전까지 83이었잖아!”
“거짓말이지 멍청아.”

투닥거리는 두 아이를 보며 이지혜는 한숨처럼 대답했다.

“난 79인데······.”

그래도 두 아이 덕분에 그녀는 빠르게 레벨 업을 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쩔을 받는 듯한 광속의 레벨 업이었고, 덕분에 그들은 넥스트 시티의 수배자 명단에도 올랐다.

[안드로이드 이지혜 - 1888G]

정확히는 그녀 혼자 올랐다. 애초에 아이들은 공격 자체가 불가능한 대상이니 수배 명단에도 오르지 않는다.

“슬슬 이 세계관에서 탈출할 때가 된 거 같은데.”
“아마 저걸 무너뜨리면 끝날 거 같아요.”

신유승의 손끝이 가리킨 곳에, 넥스트 시티의 중심부를 차지한 거대한 탑이 있었다. 그 탑의 꼭대기에는 전함 한 기가 부유하고 있었는데, 그 전함을 볼 때마다 이지혜는 배후성의 메시지를 받곤 했다.

[성좌, ‘해상전신’이 저 성유물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웬일이래. 검소하신 우리 장군님께서.”

[성좌, ‘해상전신’이 헛기침을 합니다.]

하지만 이지혜도 그런 배후성의 심정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전함의 생김새를 보면 아마 누구라도 그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왜 저런 게 저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저걸 가져갈 수 있다면, 이 모든 세계의 하늘은 해상전신의 바다가 되겠지.
칼자루를 불끈 쥔 이지혜가 말했다.

“아저씨랑 사부랑 깜짝 놀라게 해주는 것도 재밌겠네. 얘들아, 이제 그만 클리어할까?”
“좋아, 슬슬 버그 쓰는 것도 지겨워지던 참이라.”
“그렇게 해요.”

뜻밖의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의기투합한 세 사람이 탑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긴급 패치가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금일 자정을 기점으로 해당 시나리오에 셧다운(shutdown) 제도가 도입됩니다.]
[앞으로 0시부터 6시 사이에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은 해당 시나리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올망졸망 잘 뛰어가던 이길영과 신유승이 휘청거렸다.
이길영이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나, 나 졸려―”
“언니, 도망······!”

두 아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풀썩 쓰러지며 잠들었다.
코에 손을 가져다 대보니 죽은 것은 아니었다.

[해당 플레이어는 현재 셧다운 상태입니다.]

이지혜로서는 어이가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 세계관 18금 아니었어? 셧다운제는 왜 도입되는데?”

하지만 한가롭게 그런 불평을 늘어놓고 있을 틈은 없었다. 활짝 열린 탑에서, 그녀를 잡기 위한 수백 기의 드론이 일제히 출격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시발.”

아무래도 오늘은 유독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


[113번째 국지전이 종료되었습니다.]
[해당 국지전은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전쟁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중상을 입은 마왕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물러났고, 패닉에 빠진 우리엘도 하급 천사들에게 떠밀려 사라졌다. 텅 빈 전장에 남은 것은 패잔병처럼 늘어진 환생자들과, 그런 환생자들 사이에서 함께 너부러진 다섯 명의 남녀뿐.

“······이게 될 줄은 몰랐네.”

한수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국지전에 참가한 <김독자 컴퍼니>가 한 일은 간단했다.
선악의 전장에 참가해, 그들을 제외한 모든 참가자들을 제압하는 것.
그리고 승부가 나지 않는 전쟁을 남은 사람들끼리 계속하는 것.

[해당 전장의 승패를 가릴 수 없습니다.]
[해당 전장의 참가자들에게 전투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김독자 컴퍼니>의 대결은 사투가 아닌 놀이였고, 대련이었으며, 승자나 패자가 존재하지 않는 게임이었다. 그랬기에 이것은 선악의 전쟁이 아니었으며, 자연히 성마대전도 아니었다.

[해당 국지전은 ‘성마대전’의 분류에서 제외됩니다.]
[새로운 113번째 국지전이 생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강제로 하나의 전장을 해체해버리는 무력.
그것이 바로 지금의 <김독자 컴퍼니>가 가진 힘이었다.

“······제 배후성이 꽤 섭섭해하겠는데요.”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희원 씨.”
“가능하면 우리엘이랑은 싸우고 싶지 않아요.”
“저도 마찬가집니다.”

살짝 씁쓸한 표정을 지은 정희원이 이현성과 함께 전장의 환생자들을 살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 환생의 굴레로 되돌아갔지만, 아직 살아 남은 이들도 있었다.
정희원과 이현성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엘라인 숲의 정기]를 쪼개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김독자 또한 주변의 환생자들을 하나씩 부축하여 [점혈]로 상처를 지혈했다.
그런 김독자를 보던 한수영이 말했다.

“이번엔 생각하고 저지른 거 맞지?”
“난 늘 생각하고 저질렀어.”
“그럼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버틸 수 없을 거란 것도 알겠네.”

이번에야 전장에 난입하는 타이밍이 좋았다지만, 다음번에도 지금처럼 운이 좋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선이나 악에 속한 성좌나 마왕들 중에는 <김독자 컴퍼니>의 힘만으로 당해낼 수 없는 존재도 분명 있을 것이고, 전력의 격차가 심한 전장에 뛰어들었다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김독자는 침착한 표정이었다.

―오래 버틸 필요 없으니 괜찮아.

자연스러운 밀회의 전환에, 한수영도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그럼?
―혼돈 수치가 90을 돌파할 때까지만 버티면 돼.

[현재 혼돈 수치는 56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를 한수영은 유심히 노려보았다.

―이 수치는 뭐야? 선악 수치랑은 다른 거 같은데?
―맞아.

김독자는 혼돈 수치에 관해 짧게 설명해주었다.
선이나 악, 둘 중 누구도 승리하지 않았을 때. 그리하여 이 세상의 질서가 무너졌을 때 상승하는 것이 바로 이 ‘혼돈 수치’라고.

―이거 꽉 차면 어떻게 돼?
―묵시록의 재앙이 발생하지.
―묵시록의 재앙? ······잠깐만, 설마 ‘묵시룡’ 말하는 거야?

묵시록의 파멸룡, 혹은 묵시록의 최후룡.
소위 ‘묵시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
1863회차의 95번 시나리오에 재림해, 꼬리짓 한 번으로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을 휩쓸어버렸던 대재앙.
김독자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잘 아네?
―······그걸 알고도 혼돈 수치를 올리겠다고? 너 미친놈이냐? 묵시룡이 부활하면 어쩌게? 1863회차에서 어떻게 됐는지 잊었어?

만약 묵시룡이 이 시나리오에서 깨어난다면, 그것은 ‘성마대전’ 자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대파멸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하지만 김독자의 표정은 단호했다.

―부활 안 할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한수영의 물음에, 김독자는 그저 어깨만 으쓱이고 돌아섰다. 발끈한 한수영이 뭐라고 외치려는 순간,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작가라더니, 상상력이 부족하군.”
“뭐 이 자식아?”

유중혁은 한수영의 작은 주먹을 가볍게 받아냈다.
한수영이 으르렁거렸다.

“왜 남의 대화에 끼어들어?”
“네가 한심한 소리를 하고 있길래 참을 수 없었던 것뿐이다.”
“뭔 개소리야?”
“1863회차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있는 건 저놈만이 아니다.”

한수영은 유중혁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김독자는 혼자서 1863회차에 다녀온 것이 아니었다. 두 명의 대천사와 함께 떠났고, 돌아올 때도 한 명의 대천사가 함께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뜻하는 바는······.

“······<에덴>도 그곳의 일을 알고 있겠네. 그리고 저 녀석은 그걸 이용하고 있는 거고.”

김독자의 의도는 명백했다.
혼돈 게이지가 100이 되면 묵시룡이 해방된다.
그리고 <에덴>은, 이미 1863회차의 정보를 들어 묵시룡이 해방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는 상황이다.
<에덴>이 멸망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성마대전’을 중지하라는 것.
그게 바로 김독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인 셈이었다.
태연자약한 얼굴로 환생자들을 다독이는 김독자를 보며, 한수영은 살짝 어이가 없었다.
세상 그 어느 누가, 대성운을 상대로 그런 협박전을 펼칠까.

“저 사악한 자식······ 다 같이 살거나, 다 같이 죽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거잖아.”
“잘만 된다면 그렇겠지. 우리만 죽는 미래가 올 수도 있다.”

표정을 굳힌 채 [흑천마도]를 닦는 유중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한 표정이었다.
한수영은 그 표정에서 유중혁의 각오를 읽을 수 있었다. 아마 지금쯤 유중혁의 머릿속에서는 최악의 가설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김독자의 계획이 실패하고.
이곳에서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이 전멸하며.
그가, 다시 한 번 회귀하게 되는 것.

한수영이 투덜거렸다.

“끔찍한 미래만 떠올리는 건 회귀자 특유의 버릇이냐?”
“최악을 가정해야 최악 이후도 가정할 수 있는 법이다.”
“누가 들으면 1만 번쯤 회귀한 줄 알겠네.”
“어떤 우주에서는 그럴지도 모르지.”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아냐?”

한수영은 피식 웃으며 멀찍이 떨어진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비실비실대는 꼴이 흐느적거리는 바람 인형 같았다.
텅 빈 바람 인형의 속을 읽을 수 없듯, 한수영은 김독자의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가끔 알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건 대개 인형에서 새어 나온 바람 같은 것이었다.

저런 걸 뭘 믿고.

어쩌면 정말 알 수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왜 자신은 김독자와 함께 싸우고 있는 것인가.
[예상 표절]을 돌리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수영은 구태여 그러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돌아보니 유중혁도 자신과 같은 광경을 보고 있었다.

“야, 물어볼 거 있어.”
“내가 순순히 대답해주리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군.”
“하긴, 너 지독하긴 하더라. ‘카이제닉스 제도’에서 그렇게나 고문을 당하고도 신음 한 번 안 흘린 걸 보면.”

유중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역시 네놈이 시킨 짓이었나?”
“내가 시킨 건 아니고, 착한 우리 유리가 내 마음을 알아준 거지.”

[설화, ‘카이제닉스의 왕’이 고개를 주억입니다.]

유중혁은 그 지독한 유리의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정체나 관련된 정보들을 밝히지 않았다. 툭툭 엉덩이를 털며 일어난 한수영이 물었다.

“아무튼, 너 이제 진짜 괜찮은 거냐? 전엔 김독자 죽이려고 했었잖아.”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너 같은 녀석이 그렇게 생각이 빨리 바뀔 리는 없고. 생각이 바뀐 게 아니라면 원래부터 저놈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얘긴데······.”
“······.”
“그때 널 부추겼던 게 누구야? 메타트론?”

메타트론의 이름에 유중혁의 굵은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흐음, 관계가 있긴 한가 보네.”
“······뒷조사라도 한 모양이지?”
“그딴 걸 할 시간이 어딨냐? 네가 갑자기 <에덴> 이야기를 하니까 떠봤을 뿐이야. ······그런데 반응을 보니, ‘메타트론’이 핵심은 아닌 것 같네.”

한수영의 추리력에, 이번에는 유중혁의 양쪽 눈썹이 동시에 꿈틀거렸다.

“흐음, 누굴까나. 우리 귀한 회귀자님의 속내를 들쑤신 분이.”
“네놈 따위가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역시, ‘은밀한 모략가’냐?”

유중혁이 한수영을 올려다보았다.
한수영이 뭘 그렇게 놀라냐는 듯 입술을 실룩였다.

“나 바보 아니거든? 네가 생각하는 것 정도는 나도 생각할 수 있어.”

[화신, ‘한수영’이 ‘예상표절’을 발동 중입니다.]

“정확히는 ‘나들’이지만.”

수백, 수천, 어쩌면 수만 명의 한수영이 모여 다음 전개를 예상하는 설화.
이번엔 유중혁이 물었다.

“넌 은밀한 모략가에 대해 알고 있나?”
“아주 강력한 이계의 신격.”

유중혁은 잠깐 실망스런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납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가 수천 명 모인다고 천재가 되는 건 아닌 모양이군.”
“죽을래? 그러는 넌 녀석이 누군지 알아?”
“짐작 가는 존재는 있다.”
“호오? 누군데?”

유중혁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녀석은 내가 살아온 모든 역사를 알고 있었다. 0회차부터, 내가 아직 겪지 않은 먼 미래의 회차까지.”
“흐음······.”
“내 예상이 맞다면, 그런 존재는 이 모든 세계선을 통틀어 하나뿐이다.”

그러자 한수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네. 제일 가능성이 높은 건 하나뿐이야.”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동시에 자신의 해답을 말했다.
그런데.

“······누구라고?”
“무슨 헛소리지?”

두 사람의 대답이 달랐다.





< Episode 74. 성마대전 (1) > 끝

< Episode 74. 성마대전 (2) >





먼저 따진 것은 한수영이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회귀자가 되면 머리가 점점 나빠지나?”
“내가 할 소리군. 작가가 그런 불쾌한 상상력을 발휘할 줄이야.”

한수영과 유중혁은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먼저 양보한 쪽은 한수영이었다.

“후······ 세 번쯤 회귀하다 보면 정신이 나가서 이상한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 그래······ 은밀한 모략가가 ‘미래의 김독자’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 뭐,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네. <스타 스트림>이야 별일이 다 일어나는 곳이고, 또······.”

한수영은 “소설이 현실이 되어버리는 게 이 세상이니까”라고 말하려다 뒷말을 삼켰다. 그게 사실이라도 유중혁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신 한수영은 다른 말을 했다.

“은밀한 모략가한테 확인해보는 게 제일 빠를 텐데. 확인은 해 봤어?”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과 계약을 했었다. 내가 녀석의 부탁을 들어주면, 녀석도 내가 원하는 질문에 대답을 해주기로.”
“무슨 질문인데?”
“은밀한 모략가의 정체가 미래에서 온 김독자인지 물었다.”
“그래서?”
“아니라고 하더군.”
“근데 왜 넌―”
“정확히 말하지. ‘한때는 무언가였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한때는 무언가였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다.
한수영은 그 말의 허점을 깨달았다.
은밀한 모략가의 대답은, 그가 ‘미래의 김독자’라는 것을 부정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대답은 ‘김독자였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라는 뜻에 더 가까웠다.
그렇게 생각하면 유중혁이 자신의 추리를 굽히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한수영이 재차 물었다.

“들은 건 그게 다야?”
“놈은 내가 살아온 모든 회차를 알고 있다고 했다.”

한때는 무언가였으나 지금은 그저 ‘은밀한 모략가’일 뿐인 자.
그리고 유중혁이 살아온 모든 회차를 알고 있는 존재.

“그거 말곤?”
“없다.”
“장난쳐? 죽을둥살둥 싸우고 고작 그거 물어본 거야?”

한수영이 씩씩대며 소리쳤다.

“전 회차에는 없었던 놈이잖아?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으면 다른 정보라도 많이 알아 왔어야지!”
“······그놈 목적도 듣긴 했다.”
“뭐라디?”
“바꾸고 싶은 게 있다고 하더군. 그리고, 죽이고 싶은 존재도 있다고 했다.”

들을수록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죽이고 싶은 존재’라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아직 죽일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은밀한 모략가’ 정도 되는 신격에게 그런 존재가 있단 말인가.

“내가 들은 것은 그게 전부다. 내게 허용된 질문권도 그게 전부였고.”
“조금 더 정보를 캐낼 수는 없어?”
“그러면 다시 녀석과 계약해야 한다. 그런 짓을 하면 지난번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

유중혁은 그렇게만 말하고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한수영도 함께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한낮의 밀회]가 발동했다.

―놈이 보고 있어?
―시선은 느껴지지 않는다.

약간은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대놓고 들으라고 떠들어 본 건데, 아무래도 당사자는 이 광경을 지켜보지 않는 듯했다. ‘은밀한 모략가’ 답지 않은 일이랄까. 한수영이 말했다.

―곤란하네. 만약 그 정도 신격이 중요한 순간에 개입하면 우리가 아무리 치밀한 계획을 세워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이번 ‘성마대전’처럼 중요한 무대라면 더욱 그렇다. 작은 변수 하나가 판 전체를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유중혁의 생각은 달랐다.

“놈은 직접 나서지 않을 거다.”
“왜 그렇게 생각해?”
“김독자나 나를 종용해 일을 꾸미는 것 자체가 증거다. 직접 움직일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그랬겠지. 그 녀석쯤 되는 존재라면 스스로 움직이는 것 자체로 엄청난 개연성을 소모할 것이다.”
“······그것도 그러네. 빌어먹을 개연성에 감사하는 순간이 올 줄이야.”
“나도 묻고 싶은 것이 있군.”
“응?”
“네놈의 불쾌한 상상력의 근거를 아직 듣지 않았다. 네놈은 왜 ‘은밀한 모략가’가 ‘그 녀석’이라고······.”

유중혁의 질문에 한수영이 피식 웃었다.

“뭐야, 관심 없는 줄 알았더니, 신경 쓰이냐?”
“단 한 번도 토를 달지 않는 순간이 없군.”

유중혁이 차가운 칼자루를 쥐려는 순간,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이 사이가 좋네?”

두 사람의 살벌한 시선이 동시에 김독자에게 꽂혔다.
쓴웃음을 지은 김독자가 손사래를 치며 물러나는 차, 허공에 시나리오 메시지가 떠올랐다.

[113번째 국지전의 새로운 좌표가 설정되었습니다.]

일행들의 시선이 김독자에게 꽂혔다.
드디어, 다시 움직일 시간이 된 것이다.

“슬슬 또 한바탕 해보자고.”

기다렸다는 듯,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들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마왕 ‘구원의 마왕’에게 새로운 설화가 발아합니다!]
[‘구원의 마왕’의 두 번째 수식언 후보 목록이 생성되었습니다.]


*


마계의 2인자는 다양한 수식언으로 불린다.
지옥 동부의 지배자. 마계의 대수(代手). 존엄의 파괴자.
그토록 다양한 이름이 있음에도, 그의 진명은 하나다.

제 2마계의 주인, 아가레스.

제 1마계의 주인이 홀연히 사라진 뒤, 아가레스는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마계를 지켜왔다. 영역을 넘보는 대천사들의 목을 베고, 악이 악으로서 존립하기 위한 설화들을 수호해왔다.
악의 자격을 시험하고, 규제하고, 통치하며 그는 오직 단 하나의 의문에 몰두했다.

악이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하나의 생명을 찢을 때마다 그는 언제나 그 의문에 몰두했다. 그것이 정말 해결 가능한 의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그 의문이 그를 살게 만들었다.

[113번째 국지전이 강제 종료되었습니다.]
[114번째 국지전이 강제 종료되었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아득한 세월을 살면서도, 이런 광경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들 조금만 더 힘내요!
―거의 다 제압했습니다!

아비규환의 전장 속에서 환생자들을 구하는 자들이 있었다.
위대한 선악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그저 그곳에서 희생되던 소모품들이, 누군가에 의해 구원받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그것은 [선]에 해당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일을 행하는 존재가 [마왕]이라는 것이었다.

[혼돈 수치가 4만큼 상승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는 60입니다.]
[경고합니다! 혼돈 수치가 60을 넘었습니다!]

혼돈.
그것은 선도 악도 아닌 것.
세계의 개연성과 질서의 바깥에 있는 무엇.

[혼돈 수치를 늘려서 ‘성마대전’을 막겠다?]

깊게 눌러 쓴 아가레스의 페도라 사이로 붉은 뿔이 자라났다. 그것은 아가레스가 뭔가에 흥미를 보일 때마다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더 큰 멸망을 구실로 작은 멸망을 막는다. 구원의 마왕이나 할 법한 발상이지요.]

그 말을 한 것은 ‘격노와 정욕의 마신’ 아스모데우스였다.
아가레스가 옥좌를 짚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물었다.

[왜 그는 ‘악’의 편을 들지 않는 것이지? 이쪽에 붙는다 한들 전혀 손해 볼 일이 없을 텐데.]
[이번 성마대전이 종료되면 그의 ‘전(轉)’이 완성됩니다. 그가 추구하는 ■■가 악의 길은 아니라는 뜻이겠죠.]
[그렇다고 선의 ■■을 추구하려는 것 같지도 않군.]

오히려 선이나 악, 둘 중 한쪽 편에 붙은 것보다 더 난처한 상황이었다.
아가레스가 재차 물었다.

[그대의 생각은?]
[우리가 나서기 전에 메타트론이 먼저 움직일 겁니다. 누구보다 오래 이 전쟁을 열망해 온 늙은 천사가, 자신의 판이 망쳐지는 걸 두고 볼 리 없죠.]

그 말이 흘러나오기 무섭게, 마왕 측 통신으로 한 줄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가레스. 전할 말이 있어서 연락했습니다.

아가레스가 찢어진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메타트론. 우리가 한가하게 대담을 나눌 사이는 아닐 텐데?

현 마계와 에덴의 최강자가 화면을 통해 대면했다. 오가는 시선의 교환만으로 강렬한 개연성의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장단을 맞춰 주고 싶지만, 이번에는 잠깐 힘을 빌려야 할 것 같군요.
―선과 악이 손을 잡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나?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악의 이야기는 흔한 편이지요.

비아냥대는 아가레스의 목소리에도 메타트론은 침착했다.

―치기 어린 성운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들이 이 세계의 중심이라 믿는 어린 후배들이죠.

그게 누구의 이야기인지는 명백했다. 아가레스가 웃었다.

―겨우 작은 성운 하나 짓밟자고 핫라인까지 열다니, 우습군.
―자칫하면 작은 성운으로 말미암아 ‘성마대전’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스타 스트림>의 선배된 입장에서 군기라도 잡고 싶은 모양이지? 꼰대 기질은 여전하군.
―세상의 참된 이치를 알려주고픈 마음이라 해두죠.
―거절하겠다. 네놈 따위와 손잡지 않아도 그런 성운 하나 뭉개는 건 일도 아니니까.
―손을 잡자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메타트론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손 위에 작은 십자가 하나를 띄웠다. 허공에 뜬 십자가는 제자리에서 뱅뱅 돌고 있었다.

―<김독자 컴퍼니>가 전장을 망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비등한 힘의 균형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지만, 처음부터 힘의 균형이 무너진 전장이라면 어떨까요.

메타트론은 십자가에 바람을 불었다. 그러자, 십자가의 회전축이 슬그머니 무너지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가레스가 불쾌하다는 듯 물었다.

―처음부터 한쪽이 불리한 전장을 열자는 얘긴가?
―그렇습니다.

양측의 전력이 비등한 경우라면 모를까, 어느 한쪽으로 균형이 무너진 상황이라면 <김독자 컴퍼니>도 그만큼 무게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무게가 악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선 쪽으로, 선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악 쪽으로.
이것을 역으로 이용한다면, <김독자 컴퍼니>를 몰살시킬 국지전을 설계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어느 측에 불리한 전장을 열자는 것이지?
―이런 일은 공평하게 해야겠죠. 악 측에 불리한 국지전장이 하나 열린다면, 선 측에 불리한 국지전장도 하나 열도록 하겠습니다.
―재미있군. 천사들을 희생해서라도 놈들을 잡고 싶은 모양이지?
―혼돈 수치가 쌓이는 걸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국지전을 여러 개 열어야, <김독자 컴퍼니>를 분산시킬 수 있습니다.
―그들이 도발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럼 그것으로도 충분한 것 아니겠습니까?

화면 너머로 비치는 메타트론의 눈이 하얗게 빛났다.

―그들이 응하지 않는다면, 어차피 이 전쟁의 승자는 선악(善惡)이 될 테니까.


*


[115번 국지전으로 가는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116번 국지전으로 가는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117번 국지전으로 가는 게이트가······!]

실시간으로 허공을 뒤덮는 게이트들을 바라보며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역시, 메타트론이나 아가레스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턱이 없지.
실시간으로 생겼다 사라지는 포탈들을 보며 정희원이 물었다.

“독자 씨, 저게 어떻게 된 거죠?”
“놈들이 국지전을 한꺼번에 열었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어요?”
“본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국지전이라고 해도 저렇게 빨리 생겨났다 사라지진 않거든요.”

[115번 국지전이 종료되었습니다!]
[116번 국지전이 종료되었습니다!]

실시간으로 종료되는 전장과 함께, 시나리오 메시지도 떠올랐다.

+

[성마대전 진행 현황]

절대선 수치 : 57
절대악 수치 : 57
혼돈 수치 : 60

+

우리가 쌓은 혼돈 수치에 대항하듯, 선악 수치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결국 벌떡 일어난 것은 이현성이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현성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을 이었다.

“저 전장에도 희생되는 환생자들이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겠지. 근데 저기 들어가면 우리도 죽어.”

한수영이 손톱을 잘근 깨물며 말했다.

“······예?”
“모르겠어? 함정이라고 저거. 쟤들 지금 우리 족치겠다고 작당한 거야.”

멍하니 나를 보는 이현성의 시선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수영의 말이 맞습니다. 아마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공격부터 받을 겁니다.”
“들어가지 않아도 끝장인 것은 마찬가지다.”

유중혁의 말에 일행들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김독자 컴퍼니>는 선과 악으로 소속이 찢어진 상황.
만약 이대로 성마대전의 승자가 결정된다면, 패한 쪽은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될 것이다. 화신체의 소멸은 당연한 얘기고, 운 좋게 영혼이 되더라도 지옥의 염열에 속에 시달리며 자아를 파괴당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저 전장에 참가할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군요.”

때론 함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걸어 들어가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나는 재빨리 일행들을 분류했다.

“정희원 씨와 이현성 씨는 117번 국지전에 참가하세요. 그리고 한수영이랑 유중혁은 119번 게이트로―”
“아니 잠깐만, 그럼 넌?”
“난 혼자 121번 게이트로 갈 거야.”

나를 노려보던 유중혁이 말없이 칼자루를 쥐길래, 나는 재빨리 항변했다.

“아니, 그렇다고 진짜 혼자서 가겠다는 얘기는 아니고.”
“누구랑 가겠다는 거지?”
“우리 편이 되어 줄 사람.”

그러자 한수영이 태클을 걸었다.

“누구? 지금 상황에서 누가 우리 편이 되어 주는데?”

보통은 아무도 이쪽 편을 들지 않겠지.
하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 적어도 딱 하나. 아니 둘은.

[성운, <명계>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 부모님.”





< Episode 74. 성마대전 (2) > 끝

< Episode 74. 성마대전 (3) >





나는 일행들과 간단한 작별 인사를 마친 뒤 곧장 <명계>를 향해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은 금방 돌아왔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당신의 출입을 허락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의 출입을 허락합니다.]
[성운 <명계>가 당신을 소환하는 포탈을 개방합니다.]

츠츠츠츠츳!

본래 이런 대규모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와중에는 시나리오 외부로 이탈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명계>는 나를 위해 기꺼이 막대한 개연성을 지불 해준 것이다.
고마운 일이었다.
말이 후계지, 사실 그때 도움받은 이후로 변변찮은 인사도 못했는데······.
생각해보니 조금 찝찝했다. 혹시 흔쾌히 승낙한 게 이제껏 <명계>를 방문하지 않았던 나를 조지기 위해서라면?

―김독자.

급작스레 들려온 메시지에 놀라 허공을 바라보았다. [한낮의 밀회]는 아니었다. 그럼 메시지를 보낼 만한 녀석은 하나뿐.

―뭐야, 지부장 되고 바쁜 줄 알았는데 아직 여기 신경써 줄 여력이 있냐?
―없어. 짬 내서 만드는 거지.

비형이 허공에서 잎담배를 물고 투덜거렸다. 자식이, 요즘 지부장 되더니 꽤 일이 피로해진 모양이다. 비형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주변 채널의 송수신이 차단되는 것이 느껴졌다.

―너 지금 위험한 짓 벌이는 거다.
―언제는 안 그랬냐?
―전이랑은 달라. 이번엔 <스타 스트림> 전체가 네가 벌이는 일을 주목하고 있다고.
―그것도 골백번도 더 들은 소리 같은데.
―이대로면 조만간 네가 쌓은 개연성의 업보가 폭발할 거야. 무슨 뜻인지 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틀린 개연성이 폭발하면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지는 지난 ‘마왕 선발전’ 때 똑똑히 보아서 알고 있다.
실제로 요즘 나는 블록이 많이 빠진 젠가 위에 올라타 있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조심해. 언제까지 운이 좋을 수는 없어. 아무리 네가 대도깨비나 외신들의 가호를 받고 있다 해도······.
―누구의 가호?
―······됐다. 쓸데없는 말을 했네.

비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허공에 가볍게 연기를 뿌렸다. 그러자 연기를 중심으로 동결된 채널이 해제되기 시작했다.

―잘 다녀와라. 죽지 말고.
―그게 저승 가는 사람한테 할 말이냐?

말은 안 하지만, 아마 비형은 관리국 쪽의 방해 공작을 막아주고 있을 것이다. 처음 만날 때만 해도 하급 도깨비였던 녀석인데, 벌써 이렇게나 큰 도움을 받게 되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시공간 전송이 시작됩니다.]

눈앞에서 지각 정보가 분해되더니,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새카맣게 말라붙은 저승의 땅이 나를 맞이했다. <명계>였다. 본래라면 뱃사공 카론을 통해 강을 건너야 했지만, 이번에는 그런 절차가 생략되었다.
메마른 강가의 자갈밭을 지나 하데스의 궁을 향해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외성에 발을 내딛는 순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수만 명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저승의 삼대 심판관을 위시한 어마어마한 숫자의 영혼. 사나운 공기의 움직임으로 봐서, 결코 호의적인 시선 같지는 않았다.

[저승의 심판관들이 당신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역시, 날 이곳에 부른 것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나?

스스슷.

모든 산 것들을 미라로 만들어버릴 듯한 격을 풍기며, 저승의 삼대 심판관이 나를 향해 미끄러지듯 다가오고 있었다.
삼대 심판관은 모두 설화급에 해당하는 성좌.
나는 재빨리 허리춤에 찬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움켜쥐었다.
내가 아무리 강해졌다 해도 <명계>에서라면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제일 앞에 있던 심판관의 눈높이가 낮아진 것은 그때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두 번째 심판관, 세 번째 심판관의 눈높이가 낮아졌다. 심판관들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

그 뒤로 심판관을 따르던 <명계>의 군대가 마치 낮게 휘몰아치는 파도처럼 주저앉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사납게 들끓던 열기는 내가 짐작한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저승의 심판관들이 나를 보며 자신의 눈을 찍어 닦고 있었다. 마치 뭔가에 감동이라도 한 것처럼.

쿠구구구구!

<명계> 전체가, 나에게 무릎을 꿇으며 길을 내고 있었다.
궁의 내전으로 통하는 길.
이제껏 오직 단 두 명의 성좌만이 걸어갈 수 있었던 길이었다.

[밤의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명계>의 후계시여!]

심판관의 말과 함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현재 당신은 <명계>의 왕자입니다.]


*


나는 궁 내부로 이동하는 내내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명계의 후계자’가 된 순간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수직적인 신분 상승을 겪고 나니 정신이 말랑해지는 기분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융숭한 대접이었다.
게다가 음산하고 치렁치렁한 이 의복은 뭐란 말인가.

[등장인물 ‘리카르도 폰 카이제닉스’가 설마 당신도 왕자였냐고 묻습니다.]

나와 시야를 공유하는 카이제닉스의 4왕자도 한 마디를 보탰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는데, 그런 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심판관이 말을 걸었다.

[저, 왕자님.]

“예.”

[지난번에는 죄송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아저씨, 신유승의 영혼을 되찾으러 명계에 왔을 때 나를 맞이했던 심판관이었다. ‘야마타노 오로치의 뱀술’을 처먹고 내 부탁을 몰래 들어 줬던······ 수식언이 뭐였더라?

“아닙니다. 잘 해결되었으니 그걸로 된 거죠. 그때는 제가 감사했습니다.”

심판관은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더니, 이내 알현실로 가는 문을 활짝 열었다.

[명왕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긴장하며 심판관들과 함께 문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곁을 지키는 심판관의 든든한 격에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명계>의 주인이 되면 이런 성좌들을 모두 부릴 수 있다는 거겠지.

[······후후, 그래. 그랬구나.]

상념을 깬 것은 어둠 속에서 들려온 페르세포네의 목소리였다. 페르세포네는 옥좌 위에서 자신의 손끝에 앉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앗, 바앗. 아바아앗!]
[흐음, 그때도 그랬다고?]
[바앗, 바앗!]

방방거리며 뛰어오르는 찹쌀떡.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명백했다. 내가 소리치기도 전에, 나를 발견한 비유가 화색을 하며 소리쳤다.

[아바앗! 아바앗!]
[우리 작은 후계자가 왔구나.]

왜 비유가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비유의 재롱잔치 덕에 페르세포네는 무척 즐거워 보였으니까.
하데스의 무기질적인 시선과 페르세포네의 온화한 시선이 동시에 내게 꽂혔다. 찌릿찌릿한 느낌과 함께 전신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역시 신화급 성좌에겐 시선만으로도 모든 존재를 압도하는 힘이 있다.
나는 포세이돈과 대격전을 벌이던 하데스를 떠올리며, 간단히 반배(半拜)를 올렸다.

“간만에 뵙겠습니다. ‘부유한 밤의 아버지’, 그리고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시여.”

[오랜만이구나 아들아. 그간 별고는 없었니?]

“어······ 예. 그렇습니다. 여왕께서는?”

[후후, 우리도 무탈했단다. 하나뿐인 자식이 너무 늦게 찾아와서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말이야.]

오가는 대화가 무슨 명절 분위기 같았다. 애초에 이런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무슨 말로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너른 옥좌에 앉은 하데스는 여전히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페르세포네는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네가 없는 동안 작은 손녀딸이 적적함을 달래 주었단다. 말년에 도깨비 손녀라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지.]

바앗바앗 거리는 비유가 마음에 들었는지, 페르세포네는 자신의 손등에 앉은 비유를 보드랍게 쓸어 주며 말했다.

[아이는 얻었는데, 짝은 없구나. 배필은 언제 데려올 셈이니?]

“아, 그건 생각을 좀······.”

명절에 제일 듣기 싫은 질문 중 하나를 곧바로 들었다.
그때, 잠자코 있던 심판관들이 앞으로 나섰다.

[저희가 조사한 결과, 몇 명의 후보가 있사옵니다.]
[호오, 그래요?]
[여기, 올림포스 인연 매칭 시스템 『큐피드 쏠까연』과 『도와듀오 비너스』를 통해 조사한 결과입니다.]
[심판관들이 간만에 제대로 된 일을 했군요.]

······아니 잠깐만, 심판관이란 작자들이 왜 내 사생활을 조사하고 다녀?
그러나 내가 만류할 틈도 없이 허공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일단, 후보 1번입니다.]

떠오른 것은 영상 자료였다.

―독자에겐 독자의 삶이 있으니까요.
―독자의 삶······ 독자 씨는 정말 좋은 말씀을 하시네요.

아니 왜 자료 화면을 가져와도 하필 저런 흑역사를 가지고 오는 건데.
심판관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후보 1번은 사려가 깊은 여인입니다. 왕자께서 가지고 계신 특수한 감수성을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품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온화한 성정과 타고난 결단력을 동시에 갖추어 지와 미모를 동시에 겸비한, 사실상 왕자님께는 과분하다 할 수 있는 수준의······.]

들을수록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다음으로, 후보 2번입니다.]

이어서 새침한 눈매에 인상적인 눈물점을 가진, 레몬 사탕을 문 여인이 등장했다.

―멍청이.
―이렇게 좋은 날 왜 울어. 모처럼 눈도 내리는데······. 내가 나중에 더 좋은 수식언 지어줄게.

영상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은 심판관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후보 2번은 성격이 날카롭고 독설을 자주 하긴 하지만, 왕자님과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는 여인입니다. 그녀는 왕자님의 음침한 취미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며, 심지어 그 취미에 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는,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특별한······.]

<올림포스>의 매칭 시스템도 단단히 맛이 갔구나.
3번 후보의 얼굴이 나오기 직전, 나는 안간힘을 다해 소리쳤다.

“아니, 잠깐만요! 저는 아직 결혼 생각 같은 건 없습니다!”

심판관이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왕자께서 아직 준비가 안 되신 듯하니 그럼 다음 후보는 나중에 따로······.]
[흠······ 저 고집불통 왕자님을 누가 데려갈는지.]

페르세포네는 진짜 우리 어머니 같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뭐, 여차하면 이 아이를 낳은 도깨비를 배필로 데려와도 좋단다. 나와 하데스는 인간들의 사사로운 고정관념 따위엔 얽매이지 않으니······.]

비형과 결혼하라니, 차라리 뒈지는 게 낫지.

[나와 하데스는 네가 ‘자신의 무지를 아는 자’나 ‘이데아의 철인’ 같은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어도 전혀 개의치 않을―]

[명계의 심판관들이 당신의 선택에 귀추를 주목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취향에 관심을 갖습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귀를 기울입니다.]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켠 뒤, 곧바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

내 말에, 페르세포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뭐라고······.]

“제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명계>의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고 해도, 이곳에서 오래 지체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내가 이곳에 방문한 목적은 하나뿐이니까.

“제게 <명계>의 군대를 빌려주십시오.”

그 말에,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하데스가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너는 알고 있느냐?]

마치 세상이 어둠 속으로 내려앉는 듯한 목소리가 궁의 전부를 짓눌렀다.
명계에서 군대를 이끌 수 있는 존재.
그것은, 이 명계의 주인인 명왕(冥王)뿐이다.

“알고 있습니다.”

[정식으로 후계의 자리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왕이 된다면 이 모든 시나리오가 끝난 뒤 너는 이곳을 통치해야 한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느냐?]

“특별한 개연이 없다면 이승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명계>를 순순히 계승해 여생을 지하에 갇히겠다는 말이냐?]

“예.”

내 순순한 대답에, 하데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오시했다.
지금의 내가 아무리 강해졌다고 해도 하데스에게 대적하는 것은 무리다. 긴장 때문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기왕 하는 거 끝까지 해야 했다.
성마대전에 승리하기 위해서, <명계>의 힘은 반드시 필요하다.

“저는 명계의 정식 후계자가 되겠습니다.”





< Episode 74. 성마대전 (3) > 끝

< Episode 74. 성마대전 (4) >





명계의 정식 후계자가 된다.
스스로 그 말을 하고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내 말을 의심했던 것은 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모든 밤을 지배하는 타르타로스의 명왕, 하데스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명계>에서 거짓을 고하였습니다.]

발끝이 얼어붙는 차가운 감각과 함께, 죽음이 나를 마주 보았다.

[자식이 되자마자 부모를 속이는 법만 배워 왔구나.]

서늘한 목소리로 나를 일별한 하데스는 옥좌에서 일어나더니 곧장 내게 다가왔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신화급 성좌의 격이, 내 전신을 옥죄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사달은 나지 않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하데스는 유유히 나를 지나쳐 대전 밖으로 나가 버렸다.
가까스로 한숨을 돌린 뒤 고개를 들자, 페르세포네가 턱을 매만지며 웃고 있었다.

[흐으음. 말로만 듣던 부자지간의 갈등······?]

곤란한 얼굴치고는 무척 즐거워 보이는 듯한 말투였다.

[어머니를 사이에 둔 아버지와 아들의 유구한 혈투······.]

······뭔가 지극히 올림포스적으로 오염된 서사다.
페르세포네는 걱정말라는 듯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그러자 하데스의 격으로 굳어 있던 전신의 근육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심려치 말거라. 네 아비는 원래 저런 성격이란다.]

“······.”

[하지만 먼저 거짓을 고한 네 잘못도 크구나. 너는 애초에 <명계>에 남을 생각 따윈 없지 않느냐?]

너무 정곡이었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나는 하데스를 이어 이곳의 왕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명계의 힘이지 명왕의 자리가 아니니까.
아마도 하데스는 그런 내 속셈을 진즉에 눈치챘을 것이다.

[저치의 화가 풀릴 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구나.]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은 없다. 어차피 네가 이곳에 남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하데스도 나도 알고 있던 사실이니까.]

페르세포네의 눈이 고운 초승달을 그렸다.

[괜찮다면 잠깐 이 어미와 식사라도 하자꾸나.]


*


간만에 마주한 페르세포네의 식탁은 여전했다. 먹음직스레 구워진 스테이크와 대접 위로 켜켜이 쌓인 샐러드. 겉보기엔 흔히 먹는 음식들처럼 보이지만, 저것이 평범한 음식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강호를 평정한 검후의 용기]
[평생을 서가에서 보낸 3서클 마법사의 지혜]
[검기도 검강도 쓰지 못하는 소드마스터의 의지]

나는 뭔가 잘못 본 건가 싶어서 다시 한번 메뉴들을 읽어 보았다.

[어서 들거라.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너도 성좌가 되었으니 제대로 된 설화들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들이 먹는 음식만으로는 충분한 영양을 섭취할 수가 없어. 어른이 되어서까지 편식하는 버릇을 못 고친 건 아니겠지?]

저렇게 말하니 진짜 엄마 같다.

[네 어머니가 너를 많이 걱정하고 있다. 밥은 제때 먹고 다니는지, 잠은 잘 자고 있는지.]

그 말에 포크로 가던 손이 멈칫했다.

“제 어머니를 만나 보셨습니까?”

[후후, 가끔 연락하는 사이란다.]

페르세포네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심지어 내 눈앞에 놓인 푸아그라는 다음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자식을 떠나보낸 어머니의 마음]

······설마 이게 우리 어머니의 마음은 아니겠지.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말했다.

“예전에 드시던 것들과는 음식의 종류가 달라지셨군요. 전에는 소드마스터나 대마법사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요.”

[‘환생자들의 섬’이 열렸으니, 모처럼 별식을 즐겨 보아야 하지 않겠니? 이래 봬도 미식협의 일원인데 늘 같은 음식만 먹을 수는 없지.]

페르세포네가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였다. 가볍게 잘린 설화들이 육즙을 뿜으며 향긋한 문장들을 토해냈고, 페르세포네는 우아한 손짓으로 그 음식들을 입안 가득 머금었다. 방금 그녀가 먹은 것은 [검기도 검강도 쓰지 못하는 소드마스터의 의지]였다.

[그리고 어떤 설화들은, 애써 소비하지 않으면 사라지게 된단다.]

죽어가는 설화들이 포크 끝에서 부스러졌다.
오랫동안 누구도 찾지 않았던 설화들은, 먹히는 그 순간까지도 페르세포네의 혀끝에서 황홀한 문장들을 토해냈다.
복잡한 심경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를 보며, 페르세포네가 웃었다.

[네가 성좌들의 식성에 불만이 많다는 건 알고 있단다. 화신들의 희로애락을 너무나 쉽게 소비하는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겠지.]

“······.”

[하지만 우주의 모든 사건은 설화로 남을 수밖에 없어. 너도, 나도. 그리고 다른 모든 화신들과 성좌들도. 결국 무언가에 의해 소비되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란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삶은 <스타 스트림>에서 이야기가 된다.

[어차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면, 최대한 다양한 설화의 스펙트럼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 성좌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다양한 설화들을 남기고, 다양한 이야기를 보존한다.
어쩌면 페르세포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의 원칙을 가지고 <스타 스트림>에서의 정의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그녀가 ‘미식협’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것 또한 그러한 이유 때문이겠지.
하지만 자신의 설화 철학을 말해주기 위해, 나를 이 자리에 초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게 정말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뭔가요?”

[사실 하데스는 네가 이곳에 남기를 원하지 않는단다.]

“······제게 후계를 넘겨주길 원하지 않는단 말씀이십니까?”

[그것과는 달라. 굳이 말하자면······.]

페르세포네는 중간에 있는 음식 접시에서 음식을 잘라내며 말했다.

[하데스, 그리고 나는······ 네가 ‘명왕’에서 끝나기를 바라지 않는단다.]

“그 말씀은······.”

[올림포스는 몰락했고, 명계 또한 예전의 위상을 잃었다. 이제 와서 ‘명왕’의 자리에 만족하는 것은, 스러져가는 설화의 끄트머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는 일에 지나지 않아.]

“명계는 좋은 설화입니다.”

[또한 몰락해가는 설화지.]

실제로 <명계>를 둘러싼 힘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낡고 오래된 설화. 회자 횟수가 줄어든 이야기는, <스타 스트림>에서 그 힘을 조금씩 잃게 된다.
묘한 눈으로 음식들을 내려다보는 페르세포네의 눈에는 깊은 우울이 담겨 있었다. 여러 설화들을 향유하면서, 어쩌면 페르세포네는 늘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와 그녀의 <명계> 또한, 시간의 뒤안길에 묻혀 ‘환생자들의 섬’에 박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스타 스트림>에서 살아가는 이상 그것은 당연한 세월의 섭리겠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불가해하리만치 지독한 슬픔을 느꼈다. 그것은 이제껏 느껴본 적 없었던 종류의 슬픔이었다.
페르세포네와 하데스가 사라진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나의 기억 속에서. 그들이 쌓아온 이야기가 영원히 사라진다.
나는 성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이 행하는 일들이 싫고, 그들이 세상을 관음하는 방식이 싫다. 그런데 왜 나는

페르세포네와 하데스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인지, 나도 모르게 거친 목소리가 나왔다.

“왜 제게 잘해주시는 겁니까?”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들을 이용하려 여기에 온 겁니다.”

<명계>의 힘을 얻지 못하면 <김독자 컴퍼니>는 ‘환생자들의 섬’에서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말했다. 어쩌면 <김독자 컴퍼니>가 아닌 인간 ‘김독자’로서, 뭔가를 확인받고 싶었기 때문에.

[‘제4의 벽’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선악과’가 당신의 죄책감을 자극합니다.]

설령 그 확인이, 아주 부질없는 일에 불과할지라도.

페르세포네는 나를 잠시간 바라보더니, 냅킨으로 가볍게 입을 닦은 후 내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주 부드럽고 온화한, 조금의 적의도 보이지 않는 친절한 눈빛. 당황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페르세포네의 격이 내 어깨에 닿았다.

[아주 오래전, 우리 부부는 ‘운명의 세 여신’에게 계시를 받은 적이 있단다.]

“······계시요?”

[「오래된 신화를 끝낼, 가장 어두운 밤의 후예가 나타날 것이다.」]

문득, 언젠가 디오니소스가 내게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와 몇몇 성좌들은, 네가 ■■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라 믿는다.

어쩌면 그때 말한 ‘몇몇 성좌’는 페르세포네와 하데스를 지칭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페르세포네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처음 그 신탁을 받았을 때, 나는 화가 났단다.]

······화?

[왜냐하면,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설화’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페르세포네에게 그런 전승이 이어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설마 지금까지 아이를 갖지 못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페르세포네의 손길이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넘겼다.

[처음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어쩌면 이번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해줄, 어여쁜 아이가 생기지 않을까. 비록 이곳에 있는 것은 어둠과 지옥과 감옥뿐이지만, 그런 우리에게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올림포스> 12신들 중 누구보다도, 더 아이를 잘 키워낼 자신이 있었다. 아이에게 다른 존재의 어둠을 이해하는 법을 가르치고, 타자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지옥을 알려주고, 세계의 정의를 짓밟는 악을 엄벌할 감옥을 보여주겠노라고.]

“······.”

[수백 년 동안, 그런 착각 속에 살았었다.]

페르세포네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의 의미를 나는 감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단어 하나하나에 담긴 고통을, <올림포스>에 대한 증오를, 나는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간신히 숨을 내쉰 페르세포네가 말을 이었다.

[하데스와 나는 오랫동안 둘이서 모든 것을 헤쳐왔단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걸 알아도, 우리는 불행하지 않았어. 명계가 설령 우리 세대에서 끝나고, 우리가 살아왔던 설화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다른 12신들과는 다르다고, 자신의 설화를 자식에게 억지로 떠넘기는, 그런 부모들과는 다르다고. 우리는 그저 우리로서 오롯하다고.]

“······.”

[그런데 어느 날, 네가 나타나고 말았구나.]

페르세포네의 두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사실 너를 먼저 발견한 것은 그이였단다.]

마치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페르세포네는 말을 이었다.

[지하철에서 네가 살아남던 순간부터, 그이는 줄곧 너의 역사를 지켜보아 왔단다. 처음에는 너와 같은 아이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제 이 세계에 그런 설화는 끝났다고 생각했으니까. 내게 신나서 떠들던 그이의 목소리가 지금도 잊히지 않아.]

“······.”

[외로이 자란 작은 설화가 세상과 싸우는 모습을 우리는 줄곧 지켜보아 왔단다. 쟁쟁한 성좌들과 겨루고, 이계의 신격과 맞서고, 도깨비의 시나리오에 저항하며······ 기어코 다섯 개의 설화를 쌓아 하나의 별자리로 태어난 작은 성좌를.]

오래전, 처음으로 <김독자 컴퍼니>를 만들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페르세포네는 나를 지지했던 다섯 명의 성좌들 중 하나였다.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너의 부모가 되어주고 싶다고.]

울컥하는 뭔가를 나는 간신히 삼켜냈다.
페르세포네가 지금껏 내게 보내왔던 애정의 형태가, 이제야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이해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데스와 나는 네가 명왕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네가 우리에게 구속되길 바라지도 않고, 우리가 살아온 삶이, 우리가 살아온 역사가 너의 삶을 규정짓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너는 지금까지 네가 살아온 대로 모든 시나리오의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면 된다.]

“저는······ 저는, <명계>의······.”

[너는 우리의 아들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 마음에 보답할 수 있는 무엇도 나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어떤 보장도 없는, 아직 쓰이지도 않은 미래뿐이었다.

“제가 이 모든 시나리오의 ■■에 도달했을 때······ 반드시, 당신들의 이야기도 함께할 겁니다.”

페르세포네가 희미하게 웃었다.

[테라스로 가보거라. 네 아비가 너를 기다린다.]


*


내게 아버지에 대해 좋은 기억은 조금도 없다.
술에 취해 나를 때리던 아버지. 방언처럼 늘어놓는 세상에 대한 불만과 나를 향한 알 수 없는 적대감들.
내가 견디며 살아야 했던 기억들뿐이다.

“저······.”

테라스의 끄트머리에, 숭고한 밤의 그림자를 품은 하데스가 서 있었다. 하데스는 궁의 저편으로 드리워진 명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하염없이 전경만을 바라보았다.
지옥의 강이 흐르는 지류와, 그 지류의 건너편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영혼들이 있었다.

[보고 있느냐?]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그곳에 있었다. 슬픔이 있었고, 애환이 있었다. 끝내 이루지 못한 숙원들이 강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저것이 명계다.]

성좌들이 시나리오에서 자신들의 욕망을 추구하는 동안, 그 욕망에 희생된 영혼들은 이곳으로 떠밀려 내려온다. 시나리오에서 버림받고, 상처받고, 무너진 자들의 세계. 저것이 바로 명계였다.
나는 하데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저 어둠을 이해했고, 명왕이 되었다.

이승으로부터 떠밀려오는 슬픔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 영혼들을 하나하나 구제하면서. 수천 년, 어쩌면 수만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직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서.
그 순간, 나는 어쩐지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

하데스는 대답이 없었다. 어쩌면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데스가 말했다.

[군대를 데려가라.]

나는 놀라서 하데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둠이 포효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흉벽 근처의 영혼들이 일제히 궁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어떤 영혼들은 결연한 모습이었고, 또 어떤 영혼들은 비장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영혼들의 앞에, 세 명의 심판관이 서 있었다.
파도처럼 밀려든 막대한 군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대군의 격에, 나는 심장이 떨리는 것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명계>를 위하여!]

첫 번째 심판관이 외쳤고.

[<명계>의 왕자를 위하여!]

두 번째 심판관이 부복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세 번째 심판관의 창이 하늘을 찌름과 동시에, 모든 영혼들이 함께 부르짖었다.

[모든 시나리오의 영원과 종장을 위하여!]

그 함성 속에서, 명왕이 말했다.

[가거라.]

하데스는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언제나, 나를 보고 있었다.

[<명계>는 지금부터 너의 편이다.]





< Episode 74. 성마대전 (4) > 끝

< Episode 74. 성마대전 (5) >





둥. 둥. 둥.

게이트 너머로 들려오는 전장의 북소리. 119번 국지전으로 향하는 게이트 앞에 서서, 한수영은 뒤를 돌아보았다.

“준비됐지?”

이번 전장은 유중혁과 함께였다. 성격은 좀 안 맞지만, 같은 편일 때는 이만큼 든든한 아군이 없다.
문제는, 그런 유중혁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는 것이다.

“유중혁?”

유중혁은 119번 게이트로 돌입하는 대신 새로 열린 123번 게이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유중혁을 부르려는 순간, 갑자기 유중혁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강한 척력이 한수영의 등을 밀쳤다.

[119번 게이트에 진입합니다.]

“······어?”

마지막으로 그녀가 본 것은, 유중혁의 메마른 표정이었다.

“거긴 너 혼자 가라. 나는 가야 할 전장이 있다.”
“야! 그걸 왜 네 멋대로―”

갑작스런 선언에 한수영이 뭐라고 외치기도 전에, 주변의 공간이 휘몰아치며 새로운 전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런 씨······.”

[화신 ‘한수영’이 119번 국지전에 진입했습니다.]
[화신 ‘한수영’의 소속 진영은 ‘악’입니다.]

이미 게이트를 통과해버려서 돌아갈 수도 없는 판.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이 전장을 끝내는 수밖에 없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을 주목합니다!]

허허벌판처럼 탁 트인 ‘악’의 진영에 남겨진 것은 한수영 혼자뿐이었다.
반면, 반대편 진영에서는 무시무시한 성좌들의 시선들이 연달아 쏟아지고 있었다.

[성좌, ‘방주의 주인’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새벽별의 여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신과 마주하는 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한수영은 그 시선의 주인들을 확인하며 침음했다.
‘방주의 주인’ 노아는 그렇다 쳐도,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 대천사 라파엘에 <수호의 나무>의 여신인 바카리네. ‘신과 마주하는 자’ 대천사 카마엘과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대천사 우리엘까지······.
거기다 그들 뒤로 빼곡하게 늘어선 발키리들의 향연.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함정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전력 격차가 나는 전장이라니. 아니, 애초에 이건 전장조차 아니지 않은가.

“······김독자가 내 장례식은 챙겨주려나 모르겠네.”

[작은 악이여.]

새벽별의 여신의 진언을 듣는 순간, 한수영은 진짜로 이 상황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수의 선이 당신을 심판하길 원합니다!]

입술을 꾹 깨문 한수영이 왼손의 붕대를 푸는 순간, 그녀의 곁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누군가가 악의 진영에 참가합니다!]

······이런 불리한 전장에 참가했다고?
누가?

[원래는 구경만 하려고 했는데······ 저도 빚을 갚아야 할 상대가 있어서 말이죠.]

특유의 재수 없는 목소리.
한수영은 그게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챘다.

“아스모데우스?”

[오랜만이군요. 흑염룡의 화신.]

순간, 언젠가 김독자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라파엘이랑 아스모데우스는 서로 은원 관계야. 혹시 전장에서 둘을 마주친다면, 그걸 잘 이용해보도록 해.

자신의 클로를 꺼내든 아스모데우스는, 딱히 한수영이 자극하지 않아도 이미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라파엘. 드디어 지난 전쟁의 빚을 갚을 때가 되었습니다!]

흑빛 잔영을 남기며 달려가는 아스모데우스와 함께, 두 개의 강대한 마력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믿을 수 없는 놈인 건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같은 편에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좀 나았다.

콰아아아아!

한수영은 폭발을 피해 위쪽으로 솟구쳤다. 위쪽에서 내려다본 전장의 풍경은 말 그대로 까마득했다. 아스모데우스가 라파엘을 상대한다고 해도, 남은 성좌들의 숫자는 여전히 많았다.

‘빌어먹을 김독자! 빌어먹을 유중혁!’

저 정도의 병력을 상대하려면, 결국 아껴두었던 카드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나 흑염의 주인 한수영이 오래된 봉인의 용을 깨우노니! 어둠보다 더 어두운 성좌여, 흐르는 밤보다 더 깊은 심연이여―”

죽어도 외우기 싫었던 주문이었지만, 상황이 이러니 입에서 저절로 술술 외워졌다.
그녀의 주문에 반응한 왼팔이 꿈틀거리며, 어디선가 용의 포효가 들려왔다.

“지금,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라!”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반신강림(半神降臨)을 준비합니다.]


*


한편, 홀로 123번 게이트로 진입한 유중혁은 흩날리는 수풀로 덮인 전장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틀림없다. 그 녀석의 기운이다.’

김독자의 부탁마저 거절한 유중혁이 무리하며 123번 게이트로 진입한 이유. 그 이유가 바로, 지금 그의 눈앞에 있었다.

―유중혁, 나의 동료가 되어주세요.

오래전 처음으로 그 말을 들었던 순간을 유중혁은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선이 고운 코와 가지런히 정돈된 금발. 세상 모든 것을 조롱하는 듯 불길한 적색으로 소용돌이치는 눈.

“안나 크로프트.”

그녀는, 유중혁이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왔군요, 유중혁.”

[화신 ‘유중혁’이 123번 국지전에 진입했습니다.]
[화신 ‘유중혁’의 소속 진영은 ‘선’입니다.]

유중혁이 123번 전장에 참가한 것은, 이 전장에 ‘안나 크로프트’가 참전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알려준 성좌는······.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기묘한 웃음을 머금습니다.]

유중혁은 이를 으드득 깨문 채 말했다.

“2회차의 은원을 갚을 때가 되었다.”

고요히 뽑아 쥔 [흑천마도]가 새카만 울음을 토했다.
오래도록 기다려온 복수의 순간.
평온히 선 안나 크로프트를 향해 유중혁이 검을 겨누었다.

“무기를 꺼내라.”
“나는 당신과 싸울 마음이 없어요.”
“그럼 이대로 죽어라.”

성큼 다가간 위협에도 안나 크로프트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2회차의 복수를 하러 온 건가요?”
“······.”
“당신의 복수는 무의미해요. 2회차의 ‘안나 크로프트’는 제가 아니라는 걸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요.”
“어제의 너는 네가 아닌가?”
“무슨 말이죠?”
“너는 2회차의 ‘안나 크로프트’의 기억과 의지를 계승했다. 너는 그 녀석과 같은 이상, 같은 목적을 가졌다. 너는 틀림없는 ‘안나 크로프트’다.”
“······하나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그 존재가 가진 설화다. 당신의 사상은 2회차나 지금이나 여전하군요.”

다가오는 유중혁의 검을 보면서도, 안나 크로프트는 여전히 무방비한 상태였다. 반쯤 체념한 그 눈빛을 보며 유중혁이 표정을 굳혔다.

“‘차라투스트라’들은 어디에 있지?”
“그들은 이곳에 없어요.”
“웃기지 마라. 네가 혼자 이곳에 왔을 리 없다.”
“당신이 아는 ‘안나 크로프트’라면 그렇겠죠.”

성큼 다가온 유중혁의 격에 안나 크로프트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훤히 드러난 그녀의 얼굴 곳곳은 상처로 가득했다. 제일 눈에 띄었던 것은 [대악마의 눈동자]를 둘러싼 상흔.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도려내려 했던 것 같은 흔적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많은 일이 있었죠.”

유중혁의 손을 뿌리치며, 안나 크로프트가 쏘아붙였다.

“당신이 아는 그 잘난 안나 크로프트는, 이미 오래전에 몰락했다는 뜻이에요.”

그 말과 동시에, 전장의 반대쪽에서 뭔가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악’의 진영을 택한 성좌들이, 자신의 격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전장을 질주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안나 크로프트를 인질로 잡기 위해 움직였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성운, <아스가르드>의 일부 성좌들이 해당 국지전에 참전했습니다!]
[성운, <베다>의 일부 성좌들이 해당 국지전에 참전했습니다!]
[성운, <파피루스>의 일부 성좌들이 해당 국지전에 참전했습니다!]

자신의 목을 겨눈 검을 보며, 안나 크로프트가 웃고 있었다.

“멍청한 짓 마시죠 유중혁. 우린 같은 편이니까.”

[화신 ‘안나 크로프트’의 소속 진영은 ‘선’입니다.]

“······아스가르드는 네 배후 성운이 아니었나?”
“당신의 원한은 이해하지만, 복수는 다음으로 미뤄주겠어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들은 서로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는 누구보다 과거를 잘 이해하는 회귀자였고, 다른 하나는 줄곧 그런 회귀자와 맞서 싸워온 예언자였으니까.
검을 거둔 유중혁이 말했다.

“네게 걸맞은 최후로군, 예언자.”
“그 최후에 당신도 함께하게 되겠군요.”

쿠구구구구······.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온 <아스가르드>의 대군이 멈춰섰다.

[성좌, ‘공정함과 친절함의 신’이 상황을 안타깝게 바라봅니다.]
[성좌, ‘무스펠하임의 불꽃’이 전장의 모든 것을 태우고 싶어합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화신 ‘유중혁’을 바라봅니다.]

마치 최후의 배려라도 되는 듯 진군을 멈춘 병력의 선두에는 셀레나 킴과 이리스가 있었다.
유중혁은 그들의 얼굴에 적힌 여러 감정들을 읽어냈다.

“최후의 배려인가 보군.”

하지만 그들이 멈추었다 해서, 다른 모든 성좌들도 그런 것은 아니었다.

“피해요.”

안나 크로프트의 말과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동시에 사라졌다. 전장을 뒤덮는 굉음. 가공할 크기의 크레이터가 그들이 있었던 자리를 잠식했다.

콰르르르릉!

허공을 잠식하는 전격의 기류.
음습한 성좌들의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성좌, ‘검은 늑대 사신’이 ‘악’의 진영을 택합니다.]
[성좌, ‘뇌전의 신왕’이 ‘악’의 진영을 택합니다.]

성좌들의 수식언을 확인한 안나 크로프트의 안색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검은 늑대 사신’은 <파피루스>의 강력한 성좌인 ‘아누비스’였다.
그리고 ‘뇌전의 신왕’은······.

“맙소사, ‘인드라’가······.”

<올림포스>에 12신좌가 있다면, 성운 <베다>에는 여덟 명의 로카팔라들이 있다.
그리고 그 여덟 로카팔라의 왕으로 군림하는 단 하나의 성좌가 있으니.

[성좌, ‘뇌전의 신왕’이 전격의 비를 소환합니다.]

그가 바로 ‘뇌전의 신왕(神王)’ 인드라였다.

[다수의 성좌들이 ‘뇌전의 신왕’의 개입에 불공평을 호소합니다!]

비난이 있을 법도 했다. 인드라는 한낱 국지전에 나타날 법한 수준의 성좌가 아니었으니까. 인드라는 <베다>에서 ‘3대 주신’을 제외하고는 제일 강력하다해도 무방한 존재였다.

[성좌, ‘뇌전의 신왕’은 현재 ‘반신강림’ 상태입니다.]

게다가 화신체도 아닌 반신체의 강림.
하늘에서 떨어지는 우레의 비를 피해내며, 안나 크로프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그녀가 뛰어나다고 해도, 그리고 유중혁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지금 저 성좌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유중혁이 물었다.

“왜 날 배신했었지?”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땐가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안나 크로프트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게 최선이었어요. 그렇게 해야, 내가 생각하는 결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그 결말에 도달했나?”

안나 크로프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멸살법’에도, 그리고 1863회차의 기록에도, 2회차의 안나 크로프트가 몇 번째 시나리오까지 갔는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그녀의 결과를 아는 것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안나 크로프트가 분한 듯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이미 다 알면서 뭘 물어보는 거죠?”

‘검은 늑대 사신’이 움직였다. 새카만 자칼의 마스크를 쓰고 검은 창을 휘두르는 설화급 성좌, 아누비스. 아누비스의 창은 정확히 뇌전의 비를 꿰뚫고 안나 크로프트의 심장을 노렸다. 그리고.

쿠드드드득!

“그 녀석을 죽이는 것은 나다.”

그 창을 맨손으로 쥔 유중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좌, ‘검은 늑대 사신’이 경악합니다.]

유중혁의 몸에서 강력한 격이 발출되었다. 초월좌의 격. 황금빛으로 덮인 유중혁의 몸에서 마력이 들끓자, 아누비스의 창이 경련이라도 하는 듯 진동을 일으켰다.
그 힘에 반발하듯, 아누비스가 선언했다.

[죽음에 저항하는 자여, 나는 사신 아누비스다. 이곳에서 너의 삶을 거두겠다.]

“사신?”

유중혁이 말했다.

“너는 사신이 아니야.”

그와 동시에 유중혁의 오른팔에서 푸른 섬광이 터져 나왔다.
아누비스가 비명을 흘리며 물러서는 순간, 그의 손에 깃든 [흑천마도]가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진짜 사신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유중혁이 지금껏 숨겨온 기술 중 하나였다.





< Episode 74. 성마대전 (5) > 끝

< Episode 74. 성마대전 (6) >



유중혁의 동공 속에서, 그리 오래되지 않은 해안가의 전장이 스쳐갔다.

「그날,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 부유한 밤과 부딪쳤다.」

언젠가 보았던 <기간토마키아>의 전장. 그곳에서 유중혁은 거대한 바다와 아득한 밤이 겨루는 것을 보았다.
포세이돈과 하데스.
눈앞에서 펼쳐지던 신화급 성좌의 격돌.
이 드넓은 <스타 스트림>의 꼭대기에 군림하는 성좌들이 가진 어마어마한 격의 향연.
그 사투를 보며 유중혁은 전율했고, 감동했고, 절망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났다. 그 아득한 적을 뛰어넘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했다.
이 일검은, 아직은 뛰어넘지 못하는 그 적을 모방하여 만든 기술이었다.

파천검도(破天劍道).
오의(奧義).
암해참(暗海斬).

마치 새카만 바다가 갈라지는 듯한 환영과 함께 유중혁의 검이 움직였다.
해역의 창과 부딪치던 하데스의 낫을 흉내낸 검. 새파랗게 타오른 에테르 블레이드의 빛깔이 한순간 까맣게 물들었고, 폭발한 초월좌의 마력이 <명계>의 어둠을 대신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중혁의 [파천강기]가 아누비스의 몸통을 베었다.

그아아아아아아!

그 가공할 검격에 몸이 찢어진 아누비스가 비명을 지르며 낙하했다.
아무리 80번대 시나리오라고 해도, 설화급 성좌를 쓰러트릴 정도의 힘.

[다수의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의 신위에 경악합니다!]

마침내 성좌를 넘어선 한 인간의 힘에, 성좌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한꺼번에 덤벼라!]
[쏴라! 해치워버려!]

누군가가 외쳤고, 그것을 신호로 폭격이 시작되었다. 강력한 마력이 깃든 화살비가 쏟아졌다. 유중혁은 정면에서 그것을 받아냈다.

푸슛! 푸슈슛!

옆구리와 어깨, 허벅지에 화살이 꽂히면서도, 그는 안나 크로프트의 앞에 서서 그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안나 크로프트가 물었다.

“······왜죠?”
“너는 죽을 거다.”
“그럼 죽게 내버려 두시죠.”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그건, 김독자의 계획에 없으니까.”

안나 크로프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김독자. 안나 크로프트도 그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대체 뭐길래. 그 존재가 대체 무엇이길래, 이 자존심 강한 사내가 자신의 신념조차 굽히는 것인가.
마치 그녀의 의문에 대답하듯, 유중혁이 중얼거렸다.

“아주 먼 미래 회차의 기억을 엿본 적이 있다.”

아주 먼 미래.
안나 크로프트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유중혁이 말을 이었다.

“정말 많은 일들이 벌어졌더군.”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엿본 모양이군요. 3회차의 결말도 봤나요?”
“그건 보지 못했다. 하지만 미래의 네가 어떻게 되는진 보았지.”

흠칫 놀란 안나 크로프트가 어깨를 떨었다.
그녀는 [미래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엿볼 수 있는 것은 단편적인 미래뿐. 세계선을 넘어갈 정도의 먼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중혁이 물었다.

“알고 싶나?”
“전혀요.”

그런 안나의 말을 무시하고, 유중혁은 입을 열었다.

“지금의 네가 2회차의 기억을 계승했듯, 다음 회차의 너는 3회차의 기억을 계승하게 된다. 그렇게 끊임없이 전회차의 기억 일부를 [과거시]로 엿보며, 너는 조금씩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마치 지금의 내가 그러고 있듯이.”
“뻔한 소리군요. 그 정도는 미래를 보지 않은 사람도 말할 수 있겠어요.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안나 크로프트가 피식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유중혁의 표정이 묘했다.

“700회차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정말 많은 것이 변했다. 너도, 나도. 지난 회차를 기억한다는 저주 속에서, 우리는 약해지게 된다.”
“······‘우리’는? 아니, 잠깐만요.”
“다시 900회차, 그리고 1000회차를 넘긴 후, 어느 날 너는 내게 그런 말을 하더군.”

유중혁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1863회차의 기록에서 읽었던 구절을 떠올렸다.

「유중혁, 나는 다음 회차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전송하지 않을 거예요.」
「더이상은 안 되겠어요. 나는 당신과 달라서, 이 모든 걸 짊어지고 계속해서 싸울 수는 없어요.」
「이제 당신은 혼자가 되겠죠.」
「그 모든 걸, 감당할 자신 있나요?」

정색한 안나 크로프트가 외쳤다.

“그건 내가 아냐. 나는 무너지지 않아! 나는······!”
“너는 변한다.”

마치 예언처럼 파고든 그 말이, 안나 크로프트를 흔들었다. 텅 빈 안나 크로프트의 눈동자가 떨렸다. 하지만 그녀가 무슨 말인가를 하기도 전에, 유중혁이 먼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네가 변하지 않으면 좋겠다.”

안나 크로프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나는 너를 계속 증오하고 싶다. 네가 내게 저질렀던 모든 일들을 기억하고, 너를 영원히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파르르 경련하는 안나 크로프트를 뒤로한 채, 유중혁은 자신의 격을 방출하며 앞으로 나섰다.

“너는 다음 회차로 가서는 안 된다.”

끝없는 화살비를 헤치며 나아간 평원에, 한 명의 성좌가 서 있었다.
이 전장에서 가장 강력한 성좌.

[모두 물러나라, 저 인간은 내가 상대한다.]

뇌전의 신왕, 인드라. <베다>의 격을 상징하는 그 무력 앞에서, 수많은 성좌들이 전율했다.

쿠구구구구!

[성좌, ‘목요일의 천둥’이 ‘뇌전의 신왕’을 경계합니다.]

같은 번개를 상징하는 성좌인 ‘목요일의 천둥’은 유난히 전의를 불태우는 듯했다.

“유중혁, 멈춰! 아무리 당신이라도―”

유중혁은 안나 크로프트의 말을 무시하고 뇌전의 신왕을 향해 달려갔다.
인드라의 격은 유중혁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맞서 싸웠던 수르야조차 뛰어넘는 힘. 하지만 물러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부족해.’

인드라는 유중혁의 목표가 아니었다.
그가 싸워야 할 신화급 성좌들이나 이계의 신격들에 비하면 인드라의 존재는 그저 지나쳐야 할 건널목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유중혁이 무엇보다 넘고 싶은 존재는······.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투지에 감탄합니다.]
[5,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유중혁의 신형이 인드라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오만한······!]

뇌전의 신왕이 쏘아 보낸 전격이 대지를 갈랐다. 마치 해일이 갈라지듯 찢어지는 평원 사이로 잿빛의 전류가 튀었다. 튀어오른 전류가, 유중혁의 팔을 찢었다. 다리를 찢고, 배를 꿰뚫었다. 허공 속에서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유중혁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다시 살아갈 세월을 생각했다.

41회차.

362회차.

김독자가 보여주었던 시간들. 그리고

1863회차.

‘은밀한 모략가’를 통해 엿보았던 미래가 유중혁의 머릿속을 흘러갔다.
유중혁에게 이것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경지들. 그 시간들을 넘어서기 위해 발버둥치고, 또 발버둥친 3회차의 자신.

콰콰콰콰콰!

그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그리고 살아갔을 모든 가능성을 빌려 쓰듯이 유중혁은 앞으로 나아갔다.

파천검도(破天劍道).

파천검성은 말했다. 하늘이 네 위에 존재하는 것을 허락지 말라고. 그 모든 것을 부수고, 파괴하고, 능멸하라고.
하지만 그렇게 부순 하늘 위에, 또다른 무엇이 있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비전오의(秘傳悟意).

[성좌, ‘뇌전의 신왕’이 당신을 비웃습니다.]

하늘 바깥에서 화신들을 내려다보는 성좌들.
이 일검은, 그 성좌들을 베기 위해 만들어졌다.

[흑천마도]에 흐르는 마력을 느끼며, 유중혁은 척준경의 검을 떠올렸다.

한 자루의 검으로 산을 베고, 바다를 벨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검.
한 자루의 검이 별을 베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투콰아앙!

허공에서 유중혁의 다리 한쪽이 터져 나갔다. 인드라가 쏜 뇌전 때문이 아니었다. 무지막지하게 뭉친 유중혁의 근육이 폭발하는 소리. 그 근섬유에 올올이 담긴 설화가 폭발하며 발생한, 추진력이 만든 굉음이었다.

[멈춰라! 네놈······!]

경악한 인드라의 눈동자.
유중혁은 일대의 시간이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시간이 느려진 것이 아니었다. 그가 빨라진 것이었다.

「하나의 별을 파괴하기 위해선, 그 스스로가 별이 되어야 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그가 성좌에게 도달하기 위한 해답.
하나의 생명체가 버틸 수 없는 속도가 유중혁의 전신을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그것이 별이 아닌 자가 별이 되는 대가였다.
흑색의 초신성처럼 쏘아진 유중혁의 몸은 순식간에 뇌전의 격을 꿰뚫고, 그를 막는 성좌들을 모조리 깨부수며, 마침내 인드라의 심장에 도달했다.

유성참(流星斬).

[흑천마도]의 끝에 확실한 감각이 있었다.
갈라지는 별의 목소리. 아득히 먼 우주에서 무엇인가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유중혁은 자신의 몸이 추락하는 것을 느꼈다. 두 눈의 시야가 흐려져 그는 베어진 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사지의 근육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의 전신에는 단 한 방울의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 흐릿한 오감을 통해 누군가가 자신을 받아내는 것만은 느꼈다.
그가 제일 증오하는 이가, 그를 안고 달리고 있었다.

“유중혁, 당신은 진짜 미쳤어.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꺽꺽거리는 피를 토해내며,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인드라는?”
“죽었을 거예요. 반신체 그대로 폭발했으니까, 살아도 산 게 아니겠죠.”

그 말을 하는 안나 크로프트의 목소리가 묘한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말투에서 전해지는 감정만으로, 유중혁은 자신이 한 일을 이해했다.
별을 부쉈다.
고작 작은 인간이, <로카팔라>의 가장 빛나는 여덟별 중 하나를 파괴한 것이다.

[성운 <베다>의 모든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에게 진노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늘에 별은 많았다.

“방금 내가 구해주지 않았으면 당신은 거기서 죽었어요.”

그 말이 사실일 것을 안다.
안나 크로프트는 [미래시]로 유중혁의 죽음을 보았을 것이다.

“기껏 구했어도 그 시간을 늘린 것에 불과하지만······.”

뚫린 옆구리에서 하염없이 피가 쏟아져 나왔다. 다리 한쪽은 잃어버렸고, 검을 쥘 힘도 없다.
그리고 마침내 안나 크로프트의 걸음이 멈췄다. 눈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유중혁은 그 행동의 의미를 알았다.

이제, 이 전장 어디에도 그들이 달아날 곳은 없다.

안나 크로프트가 말했다.

“······유중혁, 나는 당신과 700회차까지 살아갈 생각은 없어요.”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빌어먹게도, 4회차까진 같이 살아야 할 것 같네요.”
“그럴 일은 없다. 나는, 여기서 죽지 않는다.”

유중혁에게는 안나 크로프트와 같은 [미래시]가 없다. 그렇기에, 그는 이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럼에도 유중혁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꺼져가는 목소리였지만, 결코 죽음을 결심한 자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먼 허공의 건너편에서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인드라의 뇌전이 아니었다. 시공간이 일그러지며, 거대한 게이트의 너머로 뭔가가 넘어오는 소리.
유중혁은 그 광경을 볼 수 없었다. 그를 대신해서 그 광경을 목격한 것은 안나 크로프트였다.

새카만 어둠으로 휩싸인 군대.
오랜 신화 속에 묻혀 있던 하나의 세계가 이곳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유중혁, 이 새끼야!

그 군대의 선두에서 소리치는 목소리를 들으며, 유중혁이 말했다.

“이번 회차에는, 배신하지 않는 동료가 있으니까.”

[성운, <명계>가 ‘성마대전’에 참전하였습니다.]





< Episode 74. 성마대전 (6) > 끝

< Episode 74. 성마대전 (7) >





<명계>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121번 국지전에 진출한 <명계>의 병력은 해당 국지전에 참가한 선과 악의 전력을 쓸어버리고, 전장의 모든 선악을 무(無)로 돌려놓았다.

[진격하라!]

전장을 잠식하는 저승의 군대에, 121번 국지전에 참가했던 성좌들은 모두 달아나거나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

[121번 국지전이 강제 종료되었습니다.]
[해당 국지전은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해당 전장의 참가자들에게 전투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해당 국지전은 ‘성마대전’의 분류에서 제외됩니다.]

정리된 전장을 일별한 나는,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다음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현재 117번 게이트가 활성화 중입니다.]
[현재 119번 게이트가 활성화 중입니다.]
[현재 123번 게이트가 활성화 중입니다.]

예정대로라면 117번과 119번에서 남은 일행들이 흩어져 난전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117번은 정희원과 이현성이, 그리고 119번은 한수영과 유중혁이 있겠지.
그렇다면 아무래도 119번 보다는 117번부터 도와야······.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당신은 123번 게이트로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123번?
거긴 아무도 없을 텐데?
나는 게이트 너머로 희끄무레하게 비치는 전장의 광경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이런 개······.”

나는 곧장 진격 명령을 내렸다.

“모든 병력은 123번 게이트로 향한다!”

내 명령과 동시에 3만에 달하는 명계의 군사가 게이트로 돌입했다.
새카만 먹구름을 탄 명계의 대군이, 게이트를 넘어 123번 국지전의 창공에 상륙하고 있었다.

“유중혁 이 새끼야!”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유중혁. 그리고 그런 유중혁을 업은 안나 크로프트의 모습.
왜 저 빌어먹을 녀석이 작전을 깨고 이곳에 참가한 것인지, 나는 조금 알 것 같았다.

“구원의 마왕!”

안나 크로프트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그녀와 유중혁을 쫓아오는 적들이 보였다.
분노한 <베다>와 <파피루스>의 성좌들. 대개는 위인급이었고, 종종 설화급도 있었다.

[당신의 소속 진영은 ‘악’입니다.]

유중혁과 안나 크로프트의 소속 진영은 ‘선’이었다.
말인즉, 지금 그들을 쫓고 있는 적들은 ‘악’이라는 이야기. 이것이 본래의 ‘성마대전’이었다면 그들은 내 아군이었을 것이다.

“모두 죽여라.”

하지만 이 전장에서 내 아군은 ‘선’도 ‘악’도 아니다.

[<명계>를 위하여!]

거대한 함성과 함께, 불타는 지옥마를 탄 세 명의 심판관이 적군을 향해 돌진했다.

자비와 정의의 아이아코스.
지혜와 입법의 미노스.
엄정과 강직의 라다만티스.

살아생전 왕의 길을 걸었고, 이제 저승의 심판관이 된 그들은 설화급 성좌의 위용을 뽐내며 다가서는 적들의 수급을 베어버리고 있었다.

[어째서 <명계>가······!]
[크아아아악!]

설화를 토해내며 죽어가는 적들을 보며, 나는 유중혁과 안나 크로프트의 곁에 내려섰다.
유중혁의 전신은 깊은 화상으로 뒤덮여 있었다. 강력한 내구도를 가진 유중혁의 코트조차 고열을 견디지 못해 절반 이상 녹아내린 상태였고, 숨소리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사라진 녀석의 왼쪽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내부의 팽창력으로 인해 사라진 흔적.

······이 자식, ‘유성참’을 썼구나.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가히 놀라울 정도의 성장력이었다.
본래 ‘유성참’은 유중혁이 천 번 이상의 회귀를 거듭해야 간신히 익힐 수 있는 비기였다. 그런데 이 녀석은 고작 3회차에 그만한 경지에 오른 것이다.

“아직 숨은 붙어 있어요.”
“어쩌다 이렇게 된 겁니까?”
“절 구하려다가······.”
“유중혁이 당신을?”

나를 가만히 들여보던 안나 크로프트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더니 씁쓸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당신의 계획에, 내 죽음은 없다고 말하더군요.”

아주 잠깐, 망연한 기분이 들었다.

유중혁 이 자식은 대체······.

나는 안나 크로프트에게서 유중혁을 넘겨받았다. 혈도를 짚어 출혈을 막고, 자리에 눕힌 뒤 상세를 살폈다.
유성참은 지금의 녀석이 감당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추진력을 견뎌낸 왼쪽 다리는 회생불능이었다. 사지 절단은 [엘라인 숲의 정기]를 사용해도 쉽게 치유할 수 없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품속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냈다.
아이템은 거무튀튀한 오징어의 다리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오징어 김독자의 일곱 번째 다리 조각]

안나 크로프트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아이템을 보았다.

“그건 뭐죠?”
“얼마 전에 받은 겁니다.”
“받았다고요? ······그걸?”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사실 이 아이템은 ‘성마대전’이 열리기 전 ‘양산형 제작자’의 《김독자 컴퍼니 콜라보레이션》 이벤트에서 비매품으로 제공한 것이었다.
아마 신형 [페라르기니]를 구매한 이들에게 선착순으로 지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양산형 제작자’와 나누었던 대화가 지금도 선명했다.

―고맙네. 자네 덕분에 이번 시즌은 아주 대박이야. 오징어 김독자 다리는 1분 만에 전부 소진됐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다리를 얻기 위해 [페라르기니]를 구입한 성좌들이 있다고?
‘양산형 제작자’가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왜, 누군지 알고 싶나?
―······아뇨. 그보다 제 다리 조각은 어떻게 입수하신 겁니까?
―엥? 진짜 자네 다리일 리가 없잖은가. 이건 [크라켄의 다리]일세. 여기 자네도 하나 기념으로 가지게.

안나 크로프트에게 그런 사정을 설명하기 귀찮았던 나는, 그냥 아이템을 그녀에게 건네며 의문을 일축했다. 그러자 안나 크로프트의 눈이 더욱 미심쩍게 변했다.

“왜 [크라켄의 다리]에 당신 이름이 붙어 있는 거죠?”
“자세한 건 알 거 없고, [영약 제조사] 특성이나 사용하세요. 당신 피랑 이걸 섞어서 녀석에게 먹여요.”

[크라켄의 다리]에는 사지 절단에 준하는 중상을 치유하고 사용자의 기초 회복력을 극대화시키는 효능이 담겨 있다. 거기에 안나 크로프트의 피에도 영약의 효과가 있으니, 두 재료를 잘 섞는다면 그 어떤 중상이라도 빠른 치유가 가능할 것이었다.
하지만 안나 크로프트는 망설이는 눈치였다.

“하지만 제 피를 먹으면―”
“권속화는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언젠가 말한 것 같지만, 안나 크로프트의 피에는 피를 먹은 대상을 자신의 권속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지금의 유중혁은 당신보다 격이 높으니까.”

그 말에 안나 크로프트가 몸을 움찔했다.
나는 의식을 잃고 잠든 유중혁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유중혁은 안나 크로프트의 부하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기사회생]의 사용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마지막까지 그 힘은 아껴둘 생각인 것 같았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여기서 [기사회생]을 잘못 사용하면, 정말 필요할 때 녀석의 힘을 빌릴 수 없게 된다.

“······하여간 개복치 자식.”

투덜거리며 돌아서자, 밀물처럼 적들을 쓸어버리는 <명계>의 병사들이 보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전열의 파도가 주춤거리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댐에 가로막힌 것처럼 무너지는 첨단. 그 첨단의 중심부에서 가공할 스파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성좌, ‘뇌전의 신왕’이 분노의 일갈을 터트립니다!]

······뇌전의 신왕?

안나 크로프트가 표정을 굳힌 채 말했다.

“그럴 리가······ 분명 반신체가 무너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는데?”

대강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유중혁이 잘라낸 ‘별’은 저 녀석인 모양이다.

“인드라는 화신체를 꽤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개연성을 감수하고 새로운 화신체를 불러들인 것이겠죠.”

인드라는 <베다>의 성좌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많은 화신체를 보유하고 있다.
<베다>의 삼신들이 인드라에게 “너는 몇 번째 인드라냐?”라고 물은 것은, 지금까지도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성좌, ‘뇌전의 신왕’이 성유물 ‘금강저’를 소환합니다!]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명계>의 선두가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
금강저. 가공할 마력을 담은 번개를 쏘는 인드라의 주력 무기.
나는 날아든 번개를 손으로 잡아챘다.

츠츠츠츠츠츳!

그리곤 잡은 번개를 도로 던져버렸다.
놀란 인드라의 표정이 보였다. 하지만 놀라긴 아직 이르다.

[네가 구원의 마왕이군.]

“넌 인드라로군.”

[왜 <명계>가 그대를 돕는 것이지?]

“당신한테 설명할 이유는 없지 않나?”

인드라는 신기한 생물을 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악’이다. 시나리오에 걸맞은 행동을 해라. 다른 마왕들을 봐서 이번 결례는 넘어가 줄 터이니―]

“내 동료를 저렇게 만든 건 당신이야. 그렇지?”

[그게 뭐 어떻다는 거냐? 건방진 인간이 성좌에게 대항한 대가다. 저 인간의 복수라도 할 셈인가?]

복수라.

“저놈은 남이 대신 복수해 주는 걸 싫어해. 자신의 원한은 곧 죽어도 자신이 갚아야 하는 놈이지. 그러니까 내가 지금 너를 죽이려는 것은 유중혁 때문이 아니야.”

[혓바닥이 긴 마왕이로군.]

콰아아아아앙!

눈부신 전격의 빛살이 하늘을 덮으며 나에게 내리꽂혔다. 몇 개는 튕겨냈고, 몇 개는 받아냈다. 몇 개는 맞았다. 하지만 견딜 만했다.
인드라는 많은 화신체를 갖고 있지만, 그만큼 힘의 분산도 크다.
더군다나 반신체인 상태로 유중혁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했으니, 지금의 녀석은 평소 실력의 절반도 내기 힘들겠지.
그런데, 인드라가 웃고 있었다.

[어리석은 마왕이여, 후회할 것이다!]

[성운 <베다>가 ‘뇌전의 신왕’에게 가호를 내립니다!]

성운이 내린 개연성.
뇌전의 신왕을 감싸는 힘이 충만해지고 있었다. 인드라의 화신체가 급격한 변이를 일으키더니, 이내 녀석의 전신이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거대해진 몸 곳곳에서 인드라가 가진 천 개의 눈이 하나둘 뜨이고 있었다.

“저대로 둬선 안 돼요!”

[미래시]로 뭔가를 본 듯, 안나 크로프트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거, 아무래도 인드라와 <베다>가 제대로 결심을 한 모양이다.

[성좌, ‘뇌전의 신왕’이 성흔 ‘모든 것을 감시하는 눈’을 발동합니다!]

저 눈들이 모두 뜨이면, 인드라는 화신체를 통해 자신의 진체가 가진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지금 뜬 눈의 개수는 약 절반 정도.

쿠구구구구구!

이대로 두면, 123번 시나리오에 참가한 모든 화신들이 범람한 전격에 쓸려나가고 말 것이다.
<베다>의 개연성이 충만하게 담긴 그 전격을 보며, 나는 오히려 즐거워졌다.

“나는 당신의 성운에 빚이 있어. 그것도 아주 큰 빚이.”

나는 성운 <베다>가 내게 저질렀던 일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지독한 일을 당하면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꺼내 쥐며 나는 말을 이었다.

“당신들 때문에 나는 ‘마왕’이 되어야 했지.”

[암흑성]의 마지막 시나리오.
그곳에서 나는 73번째 마왕이 되었다.

“내 동료들에게, 나를 죽이도록 명령해야 했고, 그들에게 끔찍한 기억을 안겨 주어야만 했어.”

[‘마왕화’를 발동합니다.]

마왕이 되며 얻은 격이 내 심장을 중심으로 범람했다. 어깻죽지를 찢고 나온 검은 날개와, 머리를 뚫고 나온 뿔.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동료들의 검에 목숨을 잃고, 시나리오의 지평선으로 추방되었을 때.
나는 하늘을 보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그 빌어먹을 하늘에서 너희들을 모두 떨어트려 줄 테니까.」

그 어떤 설화를 쌓아도 오를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하늘의 별들.
너무나 아득하여 절망적이었던 거리.
이제 그 드높았던 별들의 자리가 보인다.
나는 진언을 발했다.

[그때는 정말 높아 보였는데······.]

웃으며, 인드라를 본다.

[너희들, 생각보다 낮은 곳에 걸려 있었구나.]





< Episode 74. 성마대전 (7) > 끝

< Episode 74. 성마대전 (8) >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인드라의 전신에서 황금빛 기류가 뿜어져 나왔다. 수르야도 그렇고, <베다> 쪽은 유독 황금빛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콰아아아아아아!

범람한 격의 파장이 인드라를 중심으로 복잡한 방사를 이루었다. 전격의 파도가 내 몸을 덮쳐왔고, 인드라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어떤 성좌도 감히 대적하기 힘든 위력이었다.
전신을 갈기갈기 찢고, 분쇄하고, 으깨버릴 폭력.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는, 그것을 버텨내고 있었다.
허공에 불똥처럼 튀는 스파크.
전격의 급류를 헤치고 한 걸음, 다시 한 걸음을 다가간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격’에 깜짝 놀랍니다.]

전장 건너편의 성좌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5번 책갈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전용 스킬, ‘전인화(電人化) Lv.23(+13)’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현재 당신의 육체 구성이 해당 등장인물의 육체 구성과 상이합니다.]
[당신의 ‘격’이 육체 조건의 패널티를 극복합니다.]

눈부신 섬광이 번뜩이며, 나는 어느새 인드라의 눈앞에 있었다.

[크어어어억!]

힘껏 갈긴 발차기에 녀석의 배에 돋아난 눈들이 터져 나갔다.
이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듯 경악한 눈동자.
그렇겠지. 고작해야 작은 성운의 초짜 설화급이 이런 격을 가지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실제로 내가 모은 두 개의 거대 설화만으로 이 정도 힘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당신을 조력합니다.]
[거대 설화, ‘명계’가 당신에게 개연성을 제공합니다.]
[당신이 모은 ‘단 하나의 이야기’가 ‘전(轉)’에 거의 근접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다르다.
내가 쌓아온 두 개의 설화에 카이제닉스 제도의 설화, 그리고 <명계>의 거대 설화가 함께 한다면― 적어도 이 ‘성마대전’에 한정해서, 나는 전(轉)을 완성한 성좌에 가까운 힘을 낼 수 있다.

[어떻게 그런 개연성을······ 네놈은······!]

지금의 나라면, 상위격의 ‘설화급 성좌’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나는 제석천(帝釋天)! 여덟 <로카팔라>의 수장이자 <베다>의 왕이다!]

그것이, 설령 저 신들의 왕이라고 해도.

[성좌, ‘뇌전의 신왕’이 성흔 ‘천지뇌우(天地雷雨)’를 발동합니다!]

인드라를 둘러싼 눈들이 일제히 빛을 내뿜으며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다. 하늘 전체가 벼락 속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뇌우의 풍경을 향해 나는 달려나갔다.

[당신이 사용한 개연성이 한계치를 한참이나 넘어섰습니다.]
[성운 <명계>의 가호가 당신의 화신체를 보호합니다!]

금강저와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부딪쳤다. 인드라의 전격과 [전인화]의 격이 서로 반발하며 잿빛 스파크를 토해냈다. <베다>의 격에 밀려난 내 검이 튀어 오르며 하늘을 날았다.
회심의 미소를 짓는 인드라.
하지만 애초에 검은 미끼였다. 나는 검이 솟아오르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녀석의 다리를 강하게 찍었다.

[크억······!]

인드라의 거구가 무너지는 순간, 나는 녀석의 멱살을 쥐고 바닥을 향해 던졌다. 머리부터 내려꽂힌 인드라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나는 균형을 잃은 녀석의 위로 올라타, 양손으로 녀석의 안면을 연타했다. 살점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인드라의 입에서 설화 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고작 <명계> 따위가, <올림포스>의 하위 성운 따위가······!]
[고작 <명계>? 집안 건드리기 있냐?]

<명계>에 실질적으로 소속된 성좌는 열을 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성좌들이 <명계>를 두려워하는 이유.

[성운, <명계>가 진노의 가호를 내립니다!]

[내 부모님, 화나면 엄청 무섭거든?]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의 가호가 당신을 보호합니다.]

마지막 발악인지, 인드라의 몸에서 전격의 세례가 폭발했다. 피부의 표피가 까맣게 타들어갔고, 감전당한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시야가 고장난 형광등처럼 깜빡거렸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깟 번개, 키리오스에게 당하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허공을 향해 손을 뻗자, 첫 충돌로 날아갔던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나를 향해 돌아왔다. 나는 백청의 마력이 휘감긴 그 칼날을, 있는 힘껏 인드라의 심장에 찔러 넣었다.
푸슈슉, 하는 소리와 함께 인드라의 화신체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부르르 몸을 떨던 인드라의 화신체가 축 늘어졌다.
나는 녀석의 귓가에 댄 채 속삭였다.

[몇 번이고 살아나 봐. 또 죽여줄 테니까.]

그리고 메시지가 들려왔다.

[성좌, ‘뇌전의 신왕’이 진체에 끔찍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성좌, ‘뇌전의 신왕’이 더 이상 화신체를 소환하지 않습니다!]
[성좌, ‘뇌전의 신왕’이 해당 시나리오를 포기합니다!]
[성좌, ‘뇌전의 신왕’의 설화에 또 다른 패배가 기록됩니다.]
[당신은 ‘뇌전의 신왕’의 천적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스타 스트림>의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업적을 경외합니다.]
.
.
.
[성운, <베다>가 끔찍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성운, <베다>가 개연성의 후폭풍에 휘말립니다!]

하나의 성운이 눈앞에서 패배하는 것을 보며, 전장의 모든 성좌들이 침묵했다.

[당신은 믿을 수 없는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당신에게 ‘성운’과 관련된 새로운 설화가 발아합니다!]

인드라의 시신에서 몸을 일으키자, 전열을 지휘하던 심판관들과 명계의 병사들이 나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당신의 화신체에 심각한 손상이 발생했습니다!]

당장이라도 자리에 엎어지고 싶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생각하니 유중혁 저 자식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다.
녀석은 <명계>의 가호도 없이 반신체의 인드라를 한 번 끝장냈던 것이다.
나도 질 수는 없지.

[또 <명계> 구경하고 싶은 놈 있어?]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적들은 여전히 남아 있고, 나는 <명계>의 왕자다.

[전장의 성좌들이 당신에게 두려움을 느낍니다!]

<명계>와 대치하던 성좌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저 높은 하늘에서 나를 깔보던 성좌들이, 이제 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베다>와 <파피루스>의 성좌들과 달리, <아스가르드>의 세력은 여전히 건재했다.

[성좌, ‘공정함과 친절함의 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무스펠하임의 불꽃’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모두 쟁쟁한 성좌들이었다.
‘공정함과 친절함의 신’이라면 분명 빛의 신인 발두르일 것이고, ‘무스펠하임의 불꽃’이라면 보나마나 불의 거인인 수르트겠지.
그리고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는······.

“구원의 마왕.”

<아스가르드>의 화신들을 대표해서 나온 것은 내가 잘 아는 화신이었다.

[셀레나 킴.]

“우리는 당신과 싸울 의사가 없습니다.”

[그건 화신들의 뜻입니까, 아니면 성좌들의 뜻입니까?]

내 말에 셀레나 킴은 난처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성좌 ‘공정함과 친절함의 신’이 자신이 ‘악’의 진영에 소속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성좌, ‘무스펠하임의 불꽃’이 불꽃 튀는 전투를 원합니다.]

사실 나야 저쪽에서 먼저 물러서 준다면 고마운 상황이었다. 여기서 <아스가르드>와 싸워봤자 이쪽도 좋을 것은 없으니까.
어찌됐든 지금 저쪽에는 강력한 성좌들이 제법 참가한 상태였고, 그들과 싸우면 <명계>도 필연적으로 타격을 입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다른 국지전에도 참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히 흘러가진 않았다.

[성운 <아스가르드>의 일부 성좌들이 ‘구원의 마왕’의 존재를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성운 <아스가르드>의 일부 성좌들이 ‘구원의 마왕’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역시, 거대 성운쯤 되면 어쩔 수 없는 건가.
성좌든 인간이든 다수가 되면······.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가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을 타이릅니다.]

······응?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가 교묘한 화술로 이 싸움은 서로에게 좋을 것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가?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이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놀란 것은 셀레나 킴과 이리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전장의 허공은 한동안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로 들끓었다.

[성좌, ‘무스펠하임의 불꽃’이 성별 바꾸기나 좋아하는 놈의 말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성좌, ‘공정함과 친절함의 신’이 성좌의 취향과 신용은 서로 분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좌, ‘목요일의 천둥’이 저놈은 근본적으로 사기꾼이지만 가끔 그럴듯한 소리도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스가르드>의 일부 성좌들이 그의 말을 믿었다가 <아스가르드>가 도탄에 빠졌던 것을 잊었냐고 주장합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가 자신의 이름값과는 관계없이 이 전장은 <아스가르드> 측에 손해라고 주장합니다.]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그나저나, 상황이 돌아가는 꼴을 보니 저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좌, ‘사랑과 고양이의 여신’이 이 전장에서 이탈하면 ‘성마대전’의 거대 설화를 손해 보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가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렇게 설왕설래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이 판단을 내립니다.]

잠시 후, 반대편 진영에 서 있던 셀레나 킴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셀레나 킴이 입을 열었다.

“성좌님들도 동의하신다고 합니다. <아스가르드>는 당신 및 <명계>와 대적할 의향이 없습니다.”

[성운 <아스가르드>가 당신과 싸울 이유가 없음을 천명합니다.]

저 성좌가 <아스가르드>의 꼬장꼬장한 성좌들을 대체 어떻게 설득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친선을 위한 제안은 나쁠 것이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명계>와 <아스가르드>에 소속되어 있던 성좌들이 일제히 자신의 격을 거두었다. 나 역시, [마왕화]를 해제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가 자신의 공을 치하합니다.]

······확실히, 저 성좌가 없었더라면 불필요한 싸움이 벌어졌겠지.
나는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가 보상을 원합니다.]

“······코인이라도 원하시는 겁니까?”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가 아주 작은 부탁이 있다고 말합니다.]

“부탁이요?”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가 별거 아닌 부탁이라고 첨언합니다.]

별거 아닌 부탁이라. 오히려 불안해졌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김독자 컴퍼니>에 해를 끼치는 부탁이라면 들어줄 수 없습니다.”

나는 간접 메시지에 들러붙은 수식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성별을 바꾸는 것도 안 됩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가 그런 부탁은 절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런 부탁이 아니라면, 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허공에서 히죽거리는 아이의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123번 국지전의 모든 존재가 전투 의사를 보이지 않습니다.]

<베다>의 성좌들은 전의를 잃었고, <파피루스>의 성좌들은 애초부터 소수만이 참가한 데다 유중혁에 의해 전투 불능이 된 상황. 거기다 <아스가르드>와 <명계>는 더 이상 대적 의사가 없는 상태.

[123번 국지전이 강제 종료됩니다.]
[해당 국지전은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해당 전장의 참가자들에게 전투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해당 국지전은 ‘성마대전’의 분류에서 제외됩니다.]

이것으로, 123번 국지전도 마무리되었다.

[혼돈 수치가 5 상승했습니다.]
[경고합니다! 혼돈 수치가 70을 넘었습니다!]

어느새 혼돈 수치는 70을 돌파했다.
이걸로 메타트론과 아가레스도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1863회차에서 <에덴>의 멸망을 본 메타트론이라면 더욱.
나는 일행들이 있을 다른 국지전에 참가하기 위해 허공의 게이트를 올려다보았다.

[현재 117번 게이트가 활성화 중입니다.]
[현재 119번 게이트가 활성화 중입니다.]

한쪽은 정희원과 이현성이 참가한 게이트.
그리고 다른 한쪽은, 한수영이 참가한 게이트.
나는 두 게이트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한쪽을 선택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해당 게이트는 진입할 수 없습니다.]

진입할 수 없다고? 왜?

[해당 게이트의 국지전은 종료된 상태입니다.]

······벌써 전투가 끝났다니.
돌아보자, 안나 크로프트가 멍한 눈으로 게이트를 보고 있었다.

“김독자.”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심장이 서늘해졌다.
이번 ‘성마대전’에서 선악의 승패가 가려지지 않은 국지전은 무효처리가 되며 ‘강제 종료’ 시퀀스에 돌입하게 된다.
그런데 저 국지전은, 그저 ‘종료’되었을 뿐이다. 즉.

[해당 국지전의 승자가 판별되었습니다.]

저 게이트로 들어간 <김독자 컴퍼니>는, 자신의 임무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국지전에서 패배한 참가자에게 사망 패널티가 발동합니다.]





< Episode 74. 성마대전 (8) > 끝

< Episode 75. 어떤 마음 (1) >





Episode 75. 어떤 마음


“······그러니 숭고하고 장엄한 흑운의 주인 흑염룡이여······ 빌어먹을 뭔 주문이 이렇게 길어? 야, 진짜 이거 맞아?”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한수영은 욕설을 내뱉으며 날아오는 빛의 창들을 피했다.
푸슛,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에서 피가 터졌다.

[성좌, ‘방주의 주인’이 히죽 웃습니다.]

한수영이 휘두른 [흑염]에 근처의 발키리 몇 명이 한꺼번에 산화했다.
그 사악한 힘에 놀란 발키리들이 외쳤다.

[죽여라!]
[절대악은 절대로 살려둬선 안 된다!]
[녀석이 주문을 모두 외우게 둬선 안 돼!]

근처로 밀려드는 발키리들을 쳐내며 한수영이 중얼거렸다.

“변신할 때는 원래 안 건드리는 게 예의 아니냐?”

밀려드는 발키리의 대군을 보며 한수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평소였더라면 하위격의 위인급 화신체를 처리하는 것 따위 그녀에겐 일도 아니다.
문제는 저 발키리들이 가진 스킬이었다.

[성운 <에덴>이 ‘징죄의 시간’을 발동 중입니다.]

[징죄의 시간]. 그것은 정희원이 사용하는 [심판의 시간]과 무척 흡사한 기술이었다. [심판의 시간] 급의 버프 효과는 아니었지만, 악을 상대로는 강력한 전투력 상승을 일으키는 스킬.
그런 스킬의 가호를 받는 발키리가 하나둘도 아니고 수백이 넘는다.

[라파엘, 실력이 많이 녹슬었군요!]

전장의 한쪽에서는 미친듯이 웃어대는 아스모데우스가 자신의 클로를 허공에 휘둘러대고 있었다.
허공에서 마기와 신성이 충돌하며 폭연이 피어올랐다. 그 위로 구름 한 조각이 떠올랐다.
라파엘이 탄 구름이었다.

[깝치지 마셈. 그러다 또 주둥이 털리심.]
[아하하하핫! 입담은 여전하군요!]

말투는 장난스럽지만, 그에 담긴 격의 파랑까지 장난은 아니었다.
한수영은 묵묵히 인상을 구겼다.
아무리 봐도 저 미친 마왕은 자신을 도와줄 여유가 없어 보인다.

[성좌, ‘새벽별의 여신’이 참전을 고민합니다.]
[성좌, ‘신과 마주하는 자’가 ‘심연의 흑염룡’의 마기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초조한 눈으로 다른 곳을 일별합니다.]

거기다 아직도 ‘선’ 측의 대성좌는 셋이나 남았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걱정 말고 주문이나 외우라고 말합니다.]

“······어둠의 다크, 전설의 레전드, 위대한 용중의 용, 흑염룡의 가호가 이 몸과 함께할― 빌어먹을,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더 이상은 못해!”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히죽 웃으며 이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한수영의 몸 안에서 거대한 마기가 폭발했다.
몸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아득한 격을 느끼며, 한수영은 눈을 감았다. 서서히 잠식된 그녀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것들이 끊어지고 있었다.
이 전장을 무효화시켜야 한다든가, <김독자 컴퍼니>는 선도 악도 아니라는 애매한 윤리 감각이 마비되는 소리.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반신강림’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화신 ‘한수영’의 정신이 마기에 오염됩니다!]

“큭, 큭. 큭큭······.”

보랏빛 마기로 들끓는 눈동자.
손으로 반쯤 얼굴을 가린 한수영이 자신의 뺨에 묻은 피를 닦았다. 손등에 묻은 선혈을 핥은 한수영이 물었다.

“우습군. 이것이 너희의 한계인가?”

그 미지의 아우라에, 발키리들이 어깨를 떨며 물러났다.
한수영이 광소하며 외쳤다.

“꿇어라! 이것이 너와 나의 격의 차이······, 야! 내 입으로 헛소리 지껄이지 마!”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진짜 힘을 쓰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아니, 말을 하려면 좀 제대로 된― 오라! 나의 다크 섀도우 피닉······! 아니 이런 거 말고!”

주문은 엉망이었지만 효과가 있긴 한 모양인지, 한수영의 발밑에 큼지막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지축 전체를 흔들며 자라난 그림자는 이윽고 용의 형상에 가까워졌다.
몇 번인가 한수영은 이런 현상을 본 적이 있었다.
[피스 랜드]와 [암흑성]에서, 그는 성좌들이 힘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성좌의 그림자. 별빛의 이면에 드리워진 성좌의 어둠.
어느새 한수영은 체고가 수십 미터가 넘는 검은 용의 등에 타고 있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포효합니다!]

지금까지는 개연성의 제약으로 사용할 수 없었던 힘.
흑염룡의 그림자가 그녀를 태운 채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하늘을 덮은 새카만 그림자와 함께, 용이 지상을 향해 불을 뿜었다.

콰아아아아아아!

전장 전체가 휩쓸려 나가는 충격파. 달아나던 발키리들이 산화했다.
[징죄의 시간]도, 성운의 가호도 무의미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힘.

[으, 으어, 으아아아아!]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방주의 주인’은 어깨를 끌어안고 떨고 있었다. 그럴 법도 하다. <에덴>의 성좌라면 누구나 묵시룡에 두려움을 품고 있으니까.
그리고 ‘심연의 흑염룡’은 강력한 묵시록의 최후룡 후보 중 하나였다.

이것이 바로 ‘심연의 흑염룡’의 진짜 힘.

차오르는 개연성의 억압 속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한수영은 환희와 전율에 젖었다.
잘했다. ‘심연의 흑염룡’을 배후성으로 택하길, 정말 잘했다.

“하하하하하!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씨발, 그만해!”

정신 분열이라도 앓는 사람처럼 한수영의 입에서 두 가지 말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당신의 정신이 마기에 오염됩니다.]

흑염룡의 힘은 강력하지만, 남용할 수 없다. 이 힘을 사용할수록 화신의 자아는 ‘흑염룡’에게 동화된다.

‘이대로 몇 년만 지나면 나도 김남운처럼 되겠어.’

그러거나 말거나 흑염룡의 그림자는 이미 전장의 절반 이상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었는지 누군가가 움직였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지축이 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흑염룡의 브레스가 처음으로 막혔다. 새하얗게 타오르는 불꽃의 정수가 세계의 어둠을 잘라내고 있었다.

[업화의 불꽃].

지옥의 가장 순수한 불로 빚어진 우리엘의 성유물.
하늘을 뒤덮은 흑염룡이 웃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언제고 승부를 내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표정을 굳힙니다.]

두 성좌의 대립이 시작되자, 인근의 시공간이 새파란 스파크로 뒤덮였다. 격의 충돌을 견뎌내지 못한 발키리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가장 오래된 선이 이 국지전을 좋아합니다.]
[가장 오래된 악이 이 국지전을 좋아합니다.]

거대한 선악이, 자신의 대표로 두 성좌를 선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스파크에 까맣게 익혀지고 있는 한수영이 있었다.

“큭큭큭. 죽어라! 멍청한 대천······ 야! 이건 안 돼!”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왜 그러냐고 묻습니다.]

“멍청아! 지금 여기서 우리엘이랑 붙으면 모두 끝장이야!”

얼굴 곳곳에 검댕이 묻은 한수영이 바락바락 악을 써댔다.
조금 전까지야 분위기에 휩쓸려 하마터면 싸울 뻔했지만, 정말 그런 짓을 벌였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

“야, 대천사! 너라도 정신 차려봐! 진짜 나랑 싸울 거야?”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
우리엘의 눈빛에 깊은 수심이 어려 있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곤란한 표정을 짓습니다.]

“너도 싸우기 싫잖아? 알고 있어. 이쯤하고 여기서 끝내자고. 하는 김에 네 친구들도 좀 설득해주고!”

한수영의 말에, 우리엘의 수심이 한층 더 깊어졌다.
그러나 표정과는 별개로 발동한 [지옥염화]는 집요하게 한수영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한수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엘이 굳이 이 전장에 참가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설화, ‘예상표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우리엘은 이게 <김독자 컴퍼니>를 죽일 함정이란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본인이 직접 온 것이겠지.」

하필이면 우리엘이 담당한 전장에 온 게 ‘심연의 흑염룡’과 자신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그래도 자신 역시 <김독자 컴퍼니>다.
한수영은 아껴뒀던 치트키를 쓰기로 했다.

“내가 죽으면 김독자가 널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

우리엘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한수영은 한 방을 더 먹였다.

“날 죽인 후에도, 떳떳한 마음으로 김독자를 볼 자신 있냐고.”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과 당신의 배후성은 ‘악’이라고 말합니다.]

“제기랄! 선이니 악이니 그딴 게 뭐가 중요해! 그런 건 니들 멋대로 정한 거잖아!”

[업화의 불꽃]이 흑염룡의 날갯죽지를 스쳤다. 흔들리는 사위 속에서도, 한수영은 간절한 눈으로 우리엘을 내려다보았다. 우리엘의 검세가 이전보다 훨씬 소극적으로 변해 있었다.
조금만 더, 한 방만 더 먹이면 되는데.

[성좌, ‘구원의 마왕’이 전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간접 메시지에, 한수영은 소름이 돋았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를 바라봅니다.]

······김독자 이 무서운 새끼.
그 와중에 이쪽도 보고 있었어?

[성좌, ‘구원의 마왕’이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를 바라봅니다.]

김독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와달라는 말도, 부탁한다는 말도 없이 그저 바라보는 시선.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움직임을 멈춥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혼란에 빠집니다.]

한수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지금쯤 우리엘의 마음속에서는 양가감정이 충돌하고 있을 것이다.

<김독자 컴퍼니>를 구하고 싶은 마음과.
‘성마대전’에서 승리하고 싶은 마음.

우리엘의 주변에서 희미한 스파크가 연이어 튀어 올랐다.
우리엘을 구성하는 설화들이 충돌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설화와, 그녀가 살아온 설화가 부딪치고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김독자 컴퍼니>냐.
그녀가 몸담고 있는 <에덴>이냐.

[우리엘! 뭘 멍청하게 서 있는 건가요?]

그러자 그런 상황을 보다 못한 성좌들이 나섰다.

[성좌, ‘새벽별의 여신’이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성좌, ‘신을 마주보는 자’가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한수영은 턱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뱉어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의 화신체가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사실 우리엘을 설득하려 했던 것은, 단순히 우리엘과 싸우기 싫어서만은 아니었다.
[반신강림]의 부작용이 벌써부터 밀려오고 있었다. 뼈마디와 관절이 마비되고 있었고, 당장이라도 각혈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것을 애써 눌러 참고 있는 것은, 성좌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함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멍한 얼굴의 우리엘을 대신해 앞으로 나선 카마엘이 말했다.

[내 동료가 힘들어하는 듯하니, 그만 끝내는 게 좋겠습니다.]
[심연의 흑염룡이라길래 기대했는데······ 수식언에 비하면 별 볼 일 없군요.]

별빛을 담은 바카리네의 수정 지팡이가 빛나자, 창공에서 무수한 별빛의 광선이 쏟아졌다. 빛에 닿은 흑염룡의 그림자가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분노의 일갈을 내지릅니다!]

흑염룡의 그림자가 쏟아낸 브레스가 바카리네의 머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삽시간에 밀려오는 어둠의 에테르에, 바카리네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그것을 대신 받아낸 것은 카마엘이었다.

[그 정도론 어림도 없습니다!]

대검을 뽑아든 카마엘이 브레스를 베어내며 앞으로 전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어둠의 다크! 전설의 레전드! 홍염의 파이어!”

한수영이 헛소리를 시작하자, 급격하게 증폭된 흑염룡의 브레스가 바카리네와 카마엘을 밀어냈다.
안색이 희게 질린 바카리네의 외투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치욕이군요! 이런 우스꽝스런 기술에······!]
[우리엘! 뭐하는 겁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카마엘의 진언이 닿은 것일까. 우리엘이 퍼뜩 정신을 차리는 것이 보였다. 줄줄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한수영은 흐릿해지는 시야를 다잡았다.
여기서 우리엘이 진심으로 덤벼들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어떻게든, 그 전에······.

[······그래, 너희들 말이 맞아. 이런 ■같은 전쟁은 빨리 끝내야 돼.]

그리고 우리엘이 움직였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전장을 물들이는 눈부신 대천사의 격. 우리엘의 모든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산란하는 백금발 위로 붉은 루비가 박힌 크라운이 빛났다.
세상을 오시하는 에메랄드 빛 눈동자.
진체를 해방시켜버린 우리엘은 엄청난 개연성의 후폭풍을 견디며 걸어 나왔다. 그 어마어마한 격 앞에, 한수영은 흑염룡의 가호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저것이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의 진짜 모습.

수만의 악마를 베어내고, 마왕들을 살해하고, 악을 척결하며 살아온 염화의 대천사. 그 눈과 마주하는 순간, 한수영은 자신이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악마 같은’ 존재 앞에서는, 그 어떤 악도 기꺼이 목을 내놓아야만 할 것이다.

‘미안, 김독자.’

높게 치솟은 [업화의 불꽃]이 하늘을 가르고, 한수영은 하나의 끝을 예감했다.

[설화, ‘예상표절’이 다음을 그려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페이지.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죽어버린 건가?
슬그머니 눈을 떴을 때, 한수영은 예상 밖의 광경과 마주했다.
분명 그녀를 향해 움직였던 [업화의 불꽃]이, 고리형으로 형상을 변환한 채 지상에서 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너네 움직이면 그대로 뒈질 줄 알아.]

정확히는, 바라키네와 카마엘의 몸통을 묶은 채로.

[내 불이 좀 뜨겁거든? 장난 아니고 움직이면 진짜로 뒈질 거야.]

그 갑작스런 상황에, 바카리네가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엘······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면 서기관께서······!]

카마엘의 말에 우리엘이 투덜거렸다.

[■발, 그깟 징계 좀 받고 말지. 지금 그게 중요해?]
[이건 징계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지금 당신이 한 행동은―]
[시끄러워! 그깟 혼돈 수치 좀 오르라고 하지 뭐!]

우리엘의 진언을 듣고서야, 카마엘은 자신의 동료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은, 대체······.]

그제야 한수영은 우리엘이 왜 진체의 힘을 드러냈는지 깨달았다.
동급의 대천사와 상위격 성좌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려면, 그녀도 진짜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개연성의 후폭풍 속에 고통스러워하는 우리엘. 그런 우리엘의 검은 레이스에 희미한 마기가 감돌고 있었다.

타락.

신성한 명령을 거부한 그녀에게 주어지는, 가장 가혹한 형벌.
한수영이 그녀에게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우리엘이 선수를 쳤다.

[이것저것 설명할 시간 없어. 빨리 국지전 무효화시키고 끝내자!]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다급해 보였다.
그 순간, 한수영의 머릿속에도 뭔가가 스쳤다.
아무리 우리엘이 결심을 했다 한들, 이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대천사가 이런 큰 피해를 감수하고서까지 일을 벌였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서두르게 만들었을까?

답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우리 희원이가 위험하단 말이야!]





< Episode 75. 어떤 마음 (1) > 끝

< Episode 75. 어떤 마음 (2) >





“할 수 있어요. 싸워보기 전엔 모르는 거니까.”

지금으로부터 3시간 전, 정희원은 그렇게 말했다.

“마왕이든 뭐든 덤벼 보라고 해요. 우리 이제 그렇게 약하지 않잖아요.”

그 말을 듣는 이들은 환생자들이었다.
이제껏 헤쳐온 국지전에서 ‘선’을 택했던 이들. 그리고 <김독자 컴퍼니>에 의해 무효화된 전장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
자신의 세계관을, 잃어버린 이들.

[117번째 국지전이 시작됩니다!]
[당신의 소속 진영은 ‘선’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오지 말 걸 그랬어······”
“······본래 세계로 돌아갈 순 없을까요?”

몇몇 사람들이 겁에 질린 채 중얼거리자, 파란은 순식간에 번졌다.

“저, 저런 거랑 어떻게 싸우라고!”
“아, 아아아아······.”

‘악’의 함선이 밀려오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분명, 강력한 기능을 장착한 설화 병기임에 틀림 없었다.

기에에에에엑―!

배를 받치고 밀려오는 파도는, 7급 악마종인 ‘어둠 투사’의 대군이었다. 수를 세기도 버거운 숫자. 족히 수만은 되어 보이는 대군.
도저히 ‘국지전’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장관이었다.

“으아아아아아―!”

공포에 젖은 환생자들의 눈동자를 보며, 정희원은 생각했다.

모두에게 용기를 강요할 수는 없다.

이들의 두려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평생 자신의 세계관에 갇혀 살다가, 외부에서 나타난 침략자들에게 이용당하는 자들. 그런 피해자들에게는 용기를 강요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다.
정희원은 그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굳이 싸우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긴 어떻게든 자신이 해결해보겠다고.

“다들 뒤쪽에 숨어 계십시오.”

그런 그녀의 심경을 대신한 사내가 있었다.

“제가 막겠습니다.”

이현성이었다.
그녀의 가장 오래된 동료이자,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역경을 제일 앞에서 맞아왔던 사내.

“혼자 막을 수 있겠어요?”
“물론 혼자선 무리죠.”

넉넉하게 웃는 이현성의 얼굴을 보자, 그래도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예전에는 손끝만 닿아도 경기를 일으키던 이현성이었는데, 이제 정말 친해지긴 친해졌구나 싶었다.

“포지션을 하나씩 담당합시다. 모든 공격은 제가 맞겠습니다. 희원 씨는―”
“공격하면 되는 거죠? 카이제닉스에서 처럼.”

두 사람은 카이제닉스 제도에서도 지금처럼 함께 싸웠던 적이 있었다.
몰려오는 침공군에 맞서서 싸웠던 기억.
<김독자 컴퍼니>의 가장 단단한 방패와, 가장 날카로운 검.
단순하지만 가장 서로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전략.

“갑시다.”

[설화, ‘검과 방패’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먼저 달려간 것은 이현성이었다.

“하아아아아압!”

기합이 클수록 힘이 세진다는 미신을 믿는 사람답게, 이현성은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파도를 맞았다.

[화신 이현성이 성흔 ‘강철화 Lv.10’을 발동합니다!]

이제 완숙한 경지에 오른 강철의 갑각이 그의 전신을 덮었다. 눈부신 백광을 띤 강철의 표피와 충돌한 ‘어둠 투사’들이 마치 볼링핀처럼 넘어지며 짓이겨졌다.

[화신 이현성이 성흔 ‘태산 부수기 Lv.10’을 발동합니다!]

하늘을 향해 솟구친 강철의 주먹이 바닥을 찍자, ‘어둠 투사’가 만들던 파랑이 위태롭게 흔들리며 쇄도하던 배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 기세를 놓치지 않고, 이현성은 마지막 성흔까지 발동했다.

[화신 이현성이 성흔 ‘태산 밀기 Lv.10’을 발동합니다!]

처음에는 닫힌 지하철 문을 여는 게 고작이었던 성흔.
그 성흔이, 이제 전함 규모의 배를 받아내고 있었다.

츠츠츠츠츠츠츳―!

[강철화]를 발동한 양손이 새카맣게 물들며, 피부를 덮고 있던 강각(鋼殼) 일부가 벗겨졌다. 하지만 이현성은 더 커다란 기합으로 고통을 이겨냈다.

“하아아아아아압!”

범람하는 스파크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파고든 뒷발이 바닥에 푹 패인 이현성은 바닥에 박힌 작은 못처럼 보였다. 그 작은 못이, 전함의 움직임을 막아서고 있었다.
강철과 강철이 부딪치는 기분 나쁜 파찰음. 그리고 굉음의 끝에서, 마침내 전함의 움직임이 멎었다.

“머, 멈췄다!”
“이현성 님이 전함을 멈췄어!”

믿을 수 없는 기적 앞에 환생자들이 환호했다.
하지만 승부는 지금부터였다. 방패가 자신의 일을 다했으니, 이젠 검이 움직일 때다.
이현성의 어깨를 밟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 정희원은, 그대로 배의 갑판으로 뛰어올라 [심판자의 검]을 휘둘렀다.

[크아아아악!]

[귀살]과 [지옥염화]의 콤보. 처음부터 힘을 아끼지 않은 공격에 방심하고 있던 위인급 성좌 하나가 화신체 통째로 도살당했다.
푸른 귀화를 흩뿌리며 순백의 섬광을 터트리는 정희원의 모습은, 그 자체로 고결했다.

[일부 성좌들이 ‘검과 방패’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까가가가각!

하지만 그녀의 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막혔다.
거무튀튀한 흑빛으로 덮인 손. 음침한 웃음을 흘린 한 존재가, 그녀의 검을 잡고 정희원을 창공으로 내던져버렸다.
정희원은 허공을 밟으며 몸을 회전시켜 다시 갑판 위로 착지했다.
어느새, 전열을 갖춘 성좌들이 그곳에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아니, 성좌가 아니었다.

[빌어먹을 성흔을 보아하니, 네가 바로 그 ‘대천사’의 화신이구나.]
[함정이란 걸 알고 있었을 텐데······ 어리석구나. 제 발로 죽음을 향해 걸어 들어오다니.]

시커먼 마기를 전신에 둘둘 감은 존재들. <스타 스트림>의 하늘에서 어둠을 차지한 존재들.
정희원은 자신의 눈앞에 선 다섯 명의 마왕들을 살폈다.

―이건 희원 씨가 싸워볼 만한 존재와, 절대로 싸워서는 안 되는 존재들의 명단입니다. 이들의 인상착의를 꼭 외워두세요.

정희원은 김독자가 설명해 준 내용들을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제일 먼저 시선이 간 것은 불타는 창과 인간의 머리를 쥔 마왕이었다.

―얘는 싸워 볼만 해요. 지금의 희원 씨라면, [심판의 시간]만 발동한다면 문제없을 겁니다.

58번째 마계의 주인, ‘불의 총통’ 아미.

―얘까지도······ 괜찮습니다. 근데 갑자기 뿔 세워서 달려들면 위험하니까 무조건 선빵 때리세요.

48번째 마계의 주인, ‘황금 뿔의 수소’ 하겐티.

―이놈부터는 위험해요. 컨디션이 괜찮을 때, 그리고 일대일로 싸울 수 있을 때만 붙으세요.

36번째 마계의 주인, ‘은색 발톱의 올빼미’ 스토라스.
흘러나오는 격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상대할 법하다.

문제는 그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두 존재였다.
먼저 붉은 갑옷을 입고, 다리를 절뚝이며 그녀를 보는 훤칠한 마왕.

―10위권대로 진입하면 솔직히 승산이 낮습니다. 우리엘이 반신강림이라도 해준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16번째 마계의 주인, ‘유혹과 불모의 마왕’ 제파르.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무조건 피하셔야 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섯 마왕의 제일 끝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존재.
저 마왕은, 지금의 그녀가 절대로 이길 수 없다.

8번째 마계의 주인, ‘무자비한 역천의 사냥꾼’ 바르바토스.

웨스턴 스타일의 모자에 장총. 흘러내린 금발을 가진 마왕이 그녀를 향해 웃었다.

[가장 맛있는 절망은 ‘불가능한 희망’이지.]

정희원은 투지를 불태우며 칼날을 굳게 쥐었다.
이미 마왕들과는 한 번 싸워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본실력을 내기 힘든 상태였지만······ 지금은 어떨까.

[전용 스킬, ‘심판의 시간’의 발동을 준비합니다!]

그녀의 특성은 ‘멸악의 심판자’.
과거 ‘성마대전’에서 싸웠던 발키리들의 수장, 대천사가 사용하던 힘.
아무리 상대가 강력하다고 해도, 그 존재가 ‘악’인 한 그녀는 지지 않는다.
그런데.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 중 대다수가 스킬 발동에 반대했습니다.]
[스킬 발동이 취소되었습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고 있는 모양인지, 바르바토스가 웃었다.

[어리석구나, 우리엘의 화신아. 아직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냐?]

김독자는 말했다. 이 ‘국지전’들은 함정이라고.
우리는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 이곳에 참전해야 한다고.

[천사들은 유독 ‘희생양’이라는 개념을 좋아하지. 이번에는 그게 너인 것 같구나.]

<에덴>의 목표는 ‘성마대전’에 승리하는 것.
그리고 그 일을 도모하기 위해, <김독자 컴퍼니>는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정희원이 ‘선’이든 ‘악’이든, 그쪽 입장에서는 그저 배제해야 할 존재일 뿐인 것이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른 천사들은 몰라도, 우리엘마저 나를 배신했다고?

[편히 보내주마.]

바르바토스의 장총이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정희원은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과 동시에, 배 바깥으로 몸을 내던졌다.

콰아아아아아아!

하늘을 향해 쏘아진 탄환이, 시공간을 찢어버리며 창공에 검은 구멍을 내었다.
검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저런 괴물을 상대로, 방금 자신은 싸우려 했던 것이다.

―절대로, 10위권의 마왕과 일대일로 싸워서는 안 됩니다. 무조건 도망치세요. 그리고 다른 일행을 기다리세요.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평소였다면 김독자의 그 말에 반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현성 씨!”

선두 아래쪽에서 어둠 투사들을 쳐죽이던 이현성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오고 가는 것만으로도 이현성은 전장의 상황을 이해했다.
조롱하는 마왕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하하! 현명한 선택이다.]
[전장은 넓지. 하지만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허공에서 마기의 폭풍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검과 방패는 달렸다.
맞설 수 없는 적과는 싸울 수 없다. 그리고 여기서 죽을 수도 없다.

“독자 씨와 유중혁 씨가 올 겁니다. 그때까지만 버팁시다.”

정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일행이 모두 모인다면 이길 수 있다. 이보다 더한 전장도 헤쳐온 그들이다. <김독자 컴퍼니>는 여기서 무너지지 않는다.
두 사람은 다친 환생자들을 챙기며, 그리고 달려드는 ‘어둠 투사’들을 뭉개며 계속해서 전열을 물렸다.

[배후성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엘의 가호까지 약해졌다. 좋지 않은 생각이 들었지만, 정희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 우리엘도 다른 국지전에서 싸우고 있을 것이다. 우리엘이, 자신을 배신할 리가 없다.
마왕의 광포한 진언이 전장을 휩쓸었다.

[비켜라, 쓰레기들.]

달아날 타이밍을 놓친 환생자들이 곳곳에서 학살을 당했다.
용기 있게 달려드는 환생자들은 제일 먼저 목이 달아났고, 두려움에 뒷걸음치던 환생자들은 심장이 꿰뚫렸다.
하지만 마왕의 힘을 견디고 맞서 싸우는 이들도 있었다.

[호오, 소드마스터? 제법 싸우는 놈이구나.]

누군가가 하겐티의 황금 뿔을 받아내고 있었다.
검신에 흐르는 에테르 블레이드.
검을 쥔 노인은 정희원도 아는 이였다.

“······카일?”

카일 베르트.
그는 ‘카이제닉스 제도’에서 자신을 수행하던 수석 근위 기사였다.

「대장님, 당신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사실 저는 바깥 세계로 나가기엔 너무 늙었습니다만.」
「이 미력한 힘이, 그곳에서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카일은 잘 싸웠다. 그는 마왕 하겐티의 뿔을 몇 번이나 받아냈고, 심지어 수소의 팔뚝에 작은 생채기도 남겼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소드마스터의 검은 부러졌고, 무릎은 꺾였다.
애초에 늙은 소드마스터가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목줄을 잡힌 카일의 몸이 장난감처럼 들어 올려졌다.

[등장인물 ‘에리히 스트라이커’가 동요합니다.]

정희원의 안에서, 에리히가 감정을 드러냈다.
저대로면 카일은 죽는다.
정희원의 사고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김독자 컴퍼니>의 이름들이 머릿속을 스쳐 가고 있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유중혁이었다.

「“어차피 환생자들은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

유중혁은 카일을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환생자들의 섬’은 죽음을 허락하지 않으니까. 기억을 잃고, 다른 존재가 된다고 해도 어쨌든 영혼은 살아남으니까. 그는, 더 큰 목적을 위해 카일을 죽게 내버려뒀을 것이다.
이어서 떠오른 것은 김독자였다.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면 희원 씨가 죽게 될 겁니다.」

김독자는 올바른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녀의 목숨을 걱정하기에 카일을 외면했을 것이다.

「뭘 고민해? 그놈을 이용해서 마왕을 쳐 죽여버려야지.」

한수영이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녀는 애초에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엔 큰 관심이 없으니까.
최악의 상황을 최고의 효율로 끌어올리기 위해, 한수영은 곧바로 마왕의 목줄을 노렸을 것이다.
그리고, 죽어가는 카일의 입이 말하고 있었다.

‘도망치십시오.’

하지만 카일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희원 씨.”

이현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희원과 이현성은 <김독자 컴퍼니>의 누구보다도 닮았다.
가진 성격도 융통성도 다르지만, 적어도 단 하나의 상황에 한해서, 그들은 늘 똑같은 결정을 내린다.

[전용 스킬, ‘지옥염화 Lv.10’을 발동합니다!]

망설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또한, 그렇게 구해졌으니까.





< Episode 75. 어떤 마음 (2) > 끝

< Episode 75. 어떤 마음 (3) >





찰나,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마왕을 상대하는 법, 다들 기억하고 계시잖아요.”」

그들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고, 같은 상처를 안고 살아왔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동료를 잃었다.

「“이제 마지막 시나리오를 시작해 봅시다.”」

몇 번이나 그 동료를 구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절대로 자신의 앞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들이 살아온 삶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가십시오!”

가볍게 뛰어오른 정희원이 이현성의 손바닥에 안착했고, 이현성이 그런 정희원을 힘껏 내던졌다.
빛살처럼 쏘아진 정희원이 전장을 가로질렀다. [지옥염화]의 불길이 화려한 곡선을 그리며 쇄도하자, 마왕 하겐티가 신음을 흘렸다.
가죽 일부를 잘라내 불을 끈 하겐티가 거친 울음으로 화답했다.

[거기 숨어 있었구나!]

지체없이 돌진하는 하겐티가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압!”

이현성이 하겐티의 뿔을 잡고 막아내는 사이, 정희원은 쓰러진 카일을 흔들었다.

“카일! 정신 차려! 카일!”

마치 다시 한번 에리히 스트라이커가 된 것처럼, 정희원은 애타게 카일의 이름을 불렀다. 코끝에 손을 가져다 대보니, 다행히 숨은 붙어 있었다.

「“다시 한번 시나리오를······.”」

그녀의 말을 듣고, <김독자 컴퍼니>의 말을 듣고 여기까지 온 존재들. 자신의 이야기를 찾기 위해 그녀를 따라온 이들이었다.
그러니 절대 여기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마침 다가온 근위 기사 중 하나가 카일을 들쳐 업었다.

“부탁해요.”
“맡겨 두십시오.”

근엄하게 고개를 대답한 기사는 곧장 후방을 향해 달려나갔다. 정희원은 이현성을 돕기 위해 다시 검을 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섬뜩한 예감이 그녀의 전신을 흘렀다.
지금껏 몇 번 겪어본 적 없던 예감이었다.
[암흑성]에서 김독자를 잃었을 때, [73번째 마계]에서 다시 한번 김독자를 잃었을 때. 그리고······.

“희원 씨, 엎드리십시오!”

그 말과 동시에, 이현성이 그녀를 안고 굴렀다. 섬광이 정희원의 팔뚝을 훑고 지나갔다. 자신의 입에서 그토록 끔찍한 비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정희원은 처음 알았다.

바르바토스의 탄환.

이현성의 안색이 푸르죽죽하게 변해 있었다. 괜찮냐고 물어볼 틈도 없이, 이현성이 말했다.

“가십시오. 제가 시간을 끌어 보겠습니다.”

달려드는 하겐티의 뿔을 양손으로 받아내고, 멀리서 날린 아미의 불타는 창날을 이빨로 깨물어 막았다. 혀가 녹아내리고 안구가 익는 열기 속에서도 이현성은 불굴의 극기로 모든 것을 견뎌냈다.

―어서!

전음이었다. ‘카이제닉스 제도’에서 함께 있던 시절. 그녀와 이현성을 연결해주었던 스킬. 그 기술로, 이현성이 말하고 있었다.

―전 버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희원 씨를 지키면서 버티는 건 무립니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이현성은 늘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정희원은 도망칠 수 없었다.
날아드는 마왕 스토라스의 은색 발톱을 쳐내며 정희원은 이를 악물었다. [지옥염화]의 불길이 약해지고, 이현성의 강각에 균열이 커져가고 있었다.
‘유혹과 불모의 마왕’ 제파르가 웃었다.

[아주 슬픈 연인이구나. 나는 그런 비극이 좋다.]

“닥쳐.”

[몇몇 성좌들이 화신들의 이야기에 눈시울을 붉힙니다.]

정희원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들의 삶이 이야깃거리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달아나던 환생자들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 정희원과 이현성은 싸웠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습니다.]
[‘성마대전’의 기틀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여유롭던 마왕들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더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군.]

그리고 다시 한번, 어두운 섬광이 불을 뿜었다. 공간을 찢어발기며 날아드는 탄환. 바르바토스의 특기인 [멸성탄]이었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었다.
정희원이 몸을 웅크리며 피해 면적을 최대한 줄이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몸을 덮었다. 둔중한 충격과 함께, 뭔가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퍼걱!

탄환은 한 발로 그치지 않았다.

퍼거거걱!

한 번, 두 번, 세 번. 연달아 쏘아진 탄환에 뭔가가 터지고, 부서지고, 망가지고 있었다.

[설화, ‘가장 순수한 전우애’가 동요합니다.]

정희원은 몸부림치며 그것을 안고 굴렀다. 탄환에 의해 넝마가 되어버린 신체. 피투성이가 된 얼굴이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무어라 말을 하다가, 천천히, 눈을 감고 있었다.

[설화, ‘검과 방패’가 이야기를 멈춥니다.]

“현성 씨?”

[성좌, ‘강철의 주인’이 막대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현성 씨. 일어나요.”

막간의 여흥처럼 포화가 그쳤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뚝 끊어졌다. 정희원은 다시 한번 이현성을 흔들었다.

“현성 씨.”

이현성의 눈은 뜨이지 않았다. 그의 입은 아무 말도 뱉어내지 못했고, 코는 숨을 쉬지 못했다. 그의 귀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일어나!”

아직, 대답하지 못했는데.

“일어나! 일어나라고!”

그리고 마왕들이 다시 움직였다.
정희원은 이현성의 커다란 몸을 들쳐 업고 달렸다. 이제껏 내본 적 없는, 가장 빠른 속도였다. 다리의 근력이 터지도록, 심장이 부서지도록 그녀는 달렸다. 포화가 이어졌고, 상흔이 늘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달아났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나고 있었다.

김독자라면, 김독자라면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김독자는 신유승도 살려냈고, 유상아도 살려냈다. 그러니 이현성도 반드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죽음은

아무것도 갈라놓지 못한다.

정희원은 울음을 토해내며 달렸다. 고작 시간을 버티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 시간을 버텨야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었다.
그렇게 달리고, 또 달리고. 얼마나 달렸을까. 흐려진 시야 속에서 정희원은 흙탕물 속으로 엎어졌다. 환생자들의 시취로 들끓는 대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현성의 심장 박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엘의 화신. 어디에 숨었느냐?]

다가오는 마왕들의 기척 속에서, 정희원은 숨을 죽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의 격은 형편없을 정도로 망가져서, 환생자들과 구별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나오지 않겠다면 그대로 죽이는 수밖에.]

마왕 아미가 웃으며 불의 창을 흔들었다.
주변에는 아직 환생자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정희원이 살려야 할 사람들이었다. 살려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정희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해요.’

자신의 알량한 정의는 여기까지다.

폭염이 타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정희원은 자신이 눈을 떴을 때 보게 될 광경을 알 수 있었다.
불길 속에서 타오르고, 부서지고, 터져 나간 환생자들의 모습. 자신을 원망하는 그 얼굴들.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달아날, 그 표정들.

정희원은 기도했다. 부디, 한 사람이라도 더 멀리 달아나길.
조금이라도 더 먼 곳에서, 김독자가 올 때까지 버텨주기를.

“여기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말했다.

“내가 우리엘의 화신 정희원이다!”

정희원은 눈을 떴다. 그곳에 있는 이는, 그녀도 아는 사람이었다.
방금 전, 그녀가 구했던 기사 카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카일을 업고 달리던 기사도 보였다.

“아니, 내가 정희원이다!”
“아니다! 나다! 나를 죽여라!”

[······네놈들, 돌아버린 것이냐?]

환생자들이 달아나지 않고 있었다.
‘카이제닉스 제도’에서 함께 따라왔던 이들. 국지전을 거치며 그녀가 구해냈던 이들이, 그녀의 곁에 서서 외치고 있었다.

“내가 정희원이다!”
“내가 이현성이다!”

일어난 환생자들이 그녀의 이름을, 그리고 이현성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 짓을 하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

“내가 유중혁이다!”

모두가, 자신의 죽음을 마주보고 있었다.

“내가 김독자다!”
“내가 한수영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해준 이들의 이름을, <김독자 컴퍼니>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정희원이다!”

그것이, 마치 자신들이 지키는 정의이기라도 한 양.
혹은, 그들을 구해줄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으아아아아!”

그녀의 이름을 외친 카일이 마왕을 향해 달려갔다. 반대쪽을 향해 달려가던 환생자들도 되돌아오고 있었다.
누군가는 울면서, 누군가는 분노하고 절규하면서.

[해당 시나리오에서 <김독자 컴퍼니>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집니다!]

당황한 마왕들이 자신의 격을 발출했다.

[이런 미친 놈들이―]

눈앞에서 환생자들이 찢겨 나가고 있었다.
마왕의 가벼운 한 방조차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연호는 그치지 않았다. 누군가는 정희원을, 누군가는 이현성을, 또 누군가는 김독자를 외치면서. 그들은 죽음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아비규환의 전장에서, 정희원은 몸을 떨었다.

어째서 저들이 죽어야 하는가.

그녀는 쓰러진 이현성을 내려다보았고, 어두운 <스타 스트림>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수한 별들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하늘에 저토록 많은 별이 있음에도.

누구도 그들을 구하러 오지 않는다.

정희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그리고 마왕들을 향해 달려갔다.

“내가, 정희원이다!”

[거기 있었느냐?]

날아온 발톱이 그녀의 등을 긁고 지나갔다.

[전용 스킬, ‘심판의 시간’의 발동을 요청합니다!]

단 한 번만, 누구라도 좋으니 단 한 번만 내게 힘을 준다면.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 중 대다수가 스킬 발동에 반대했습니다.]
[스킬 발동이 취소되었습니다.]

어째서, 그토록 원하는 대상은 심판할 수 없는가.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뭐가 ‘절대선’이야.”

어째서 그것을 너희들 마음대로 정하고.
왜 나는, 그것에 따라야 하는가.

날아오는 바르바토스의 탄환.
닳아버린 감정들이 불쏘시개가 되어 타오르고 있었다.

[당신의 모든 설화가 당신의 불행에 반응합니다.]

그녀의 모든 감정이, 오직 단 하나의 감정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당신의 모든 설화가 당신의 의지에 반응합니다.]

그것은 복수였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설화를 바라봅니다.]

「저들을 심판하고 싶다.」

[당신에게 새로운 설화가 발아합니다!]

다음 순간, 정희원의 전신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 어마어마한 빛의 폭발에 [멸성탄]의 궤도가 뒤틀렸고, 근처에 있던 마왕들이 동시에 물러섰다.
그리고 정희원은 자신의 귓가에 들려오는 메시지를 들었다.

[화신 ‘정희원’의 특성 진화가 임박하였습니다.]
[특성 진화의 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한때 ‘웅크렸던 자’는, 악을 심판하기 위해 ‘멸악의 심판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선’에게 배신당한 심판자는, 무엇이 되는가.

[전설급 특성을 획득하였습니다.]

영롱한 흰빛의 아우라가 그녀의 검에서 터져 나왔다. 전신에서 끓어 오르는 설화의 활력. 마왕을 보는 정희원의 눈동자에 혼돈의 고리가 떠올랐다.

[당신은 ‘멸망의 심판자’가 되었습니다.]





< Episode 75. 어떤 마음 (3) > 끝

< Episode 75. 어떤 마음 (4) >





[특성 진화로 인해 스킬이 진화합니다.]
[전용 스킬 ‘귀살’이 ‘신살(神殺)’로 진화합니다!]
[전용 스킬, ‘심판의 시간’의 발동 효과가 변경됩니다!]

정희원은 아우라로 덮인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한 손은 눈부신 백색, 그리고 다른 한 손은 검은색으로 물들어가는 모습.

[‘환생자들의 섬’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지금 그녀를 응원하는 이는 성좌들이 아니었다.

[‘환생자들의 섬’의 구성원들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녀가 지켜온 자들이었다.
마왕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정희원을 노려보았다.

[······특성 진화?]
[제법이군. 시나리오의 가호가 네게 깃들었구나.]

그러나 당황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봤자 정희원은 화신일 뿐. 우리엘의 힘도, <에덴>의 가호도 빌리지 못하는 존재다.
하지만 정희원은 그런 마왕들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전용 스킬, ‘심판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정희원의 행동을 눈치챈 마왕 하겐티가 비웃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네 특성이 무엇으로 진화하든, 대천사들은 네게 힘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

절대선의 개연성을 빌리는 스킬인 [심판의 시간]은, 해당 성좌들이 허가하지 않으면 절대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심판의 시간’이 더 이상 절대 선 계통의 성좌들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습니다.]
[‘심판의 시간’이 더 이상 절대 선 계통의 성운들에게 개연성을 빌리지 않습니다.]
[절대 선 계통의 성좌들이 화신 정희원의 변화에 크게 당황합니다.]

“이제 그들 동의 따윈 구하지 않아.”

이젠 선도 악도 아닌 정희원이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심판할 대상은 우리가 정해.”

[심판자의 검]을 쥔 정희원의 몸에서 스파크가 몰아쳤다.
그 심상치 않은 기색에 마왕 하겐티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무슨······?]

[전용 스킬, ‘심판의 시간’이 <김독자 컴퍼니>의 가호를 받습니다.]
[<김독자 컴퍼니>의 인원들에게 투표권이 부여됩니다.]
[일부 인원은 현재 투표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투표 가능한 인원만이 투표에 참가합니다.]

그리고 표결이 시작되었다.

[화신 ‘이지혜’가 심판에 찬성합니다.]
[화신 ‘신유승’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화신 ‘이길영’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화신 ‘정희원’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현재 투표 가능한 모든 인원이 당신의 심판에 찬성하였습니다.]

정희원은 쓰러진 이현성을 내려다보았다. 차갑게 식은 이현성의 몸.
이것은 그를 위한 심판이었다.

츠츠츠츠츳!

[‘심판의 시간’이 발동합니다!]
[충분한 인원이 참석하지 않아 스킬 사용 시간이 제한됩니다.]
[4분간, 당신의 신체 능력이 시나리오의 개연성을 초월합니다!]
[4분간, 당신의 모든 설화가 시나리오의 개연성을 초월합니다!]

그리고 정희원의 검이 움직였다.
마왕조차 볼 수 없는 빠르기로, 오직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심판하기 위해.
그 순간 정희원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멈춘 듯 보였다.

겨우 이런 속도로, 너희는 별을 자칭하고 있었나.

믿을 수 없다는 듯 끔뻑이는 마왕 하겐티의 눈동자.
과도한 개연성의 소진으로 허공에 그려진 스파크가, 정희원의 검이 무언가를 심판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 으, 컥······?]

도려내진 그의 심장이 [심판자의 검]의 검극에서 펄떡거리고 있었다.
허공에 흩뿌려지는 마왕의 피를 뒤집어쓴 채, 정희원이 입을 열었다.

“너흰 살아 돌아갈 수 없어.”

주어진 시간은 4분.
그 4분은 정희원에게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치솟은 핏줄기와 함께, 하겐티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마왕, ‘황금 뿔의 수소’가 사망했습니다.]
[마왕, ‘황금 뿔의 수소’가 국지전에서 패배하였습니다.]

경악한 ‘불의 총통’ 아미가 중얼거렸다.

[······하겐티?]

48위 마왕을 일격에 즉살시키는 힘.
어떤 마왕도, 고작 화신 하나가 그런 이적을 행사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미친 개연성이 가능할 리가······!]

충격에 빠진 마왕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쪽의 비극은 다른 한쪽에 희극이 된다.
마왕들의 폭력에 위축되어 있던 환생자들이 눈앞의 이적에 몸을 싣고 있었다.

“가자!”
“이길 수 있다! 우리도 가세하자!”
“정희원 님을 보호해라!”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환생자들을 보며 마왕들이 고함을 내질렀다.
어느새 정희원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마법처럼 나타난 검의 잔영이, 아미의 창을 부쉈다.

빠가각!

지금껏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었던 불의 창날이 망가진 모습에 아미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 부릅뜬 눈 그대로, 아미의 세상이 일격에 부서졌다.

[마왕, ‘불의 총통’이 사망하였습니다.]
[마왕, ‘불의 총통’이 국지전에서 패배하였습니다.]

당연한 결과였다. 48위의 하겐티마저 일격에 당한 마당에, 그보다 서열이 낮은 아미가 정희원을 감당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환생자들의 기세는 더욱 높아졌고, 전장의 사기는 더욱 올라갔다.

웅웅.

정희원은 눈이 타버릴 것 같은 통증 속에서 내달렸다. 달려드는 ‘어둠 투사’들을 베고, 또 베며 오직 마왕의 목만을 노리며.

[화신이여, 정말 어리석구나. 지금 너는 단순히 ‘성운’의 힘만을 빌리고 있는 것이 아니야!]

36번째 마계의 주인, ‘은빛 발톱의 올빼미’ 스토라스. 그는 전투력 자체는 그리 강하지 않지만, 마계에서 가장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마왕 중의 하나였다.
그는 정희원의 눈동자에 떠오른 혼돈의 고리를 포착하며 외쳤다.

[그것은 혼돈의 힘이다. 선도 악도 아닌 태초에서 비롯된, 시나리오의 바깥에서 온 힘이란 말이다! 그 힘을 사용하면―]

“닥쳐.”

허공을 향해 뛰어오른 정희원이 스토라스의 날갯죽지를 찢었다. 스토라스가 포효했고, 은빛 발톱이 정희원의 허벅지와 어깨를 찔러댔다. 자신의 몸을 도외시하는 그 격전에 부서진 살점이 허공을 날았고, 망가진 설화가 핏물처럼 바닥에 흩어졌다.
하지만 정희원은 아랑곳 않고 검을 휘둘렀다. 내장이 흐르든, 뺨이 뜯기든 상관하지 않고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저 눈앞의 마왕의 골격을 박살내고, 목줄기를 끊는 것만이 그녀가 생각하는 전부였다.
그렇게 순식간에 오십여 합의 검을 휘둘렀을 때, 그녀의 손에는 죽은 올빼미의 머리가 쥐어져 있었다.

[마왕, ‘은빛 발톱의 올빼미’가 사망하였습니다.]
[마왕, ‘은빛 발톱의 올빼미’가 국지전에서 패배하였습니다.]

“허억, 허억······.”

단신의 힘으로 세 명의 마왕을 격살시킨 전투력.

[다수의 성좌들이 화신 ‘정희원’의 힘에 경악합니다!]
[절대 선 계통의 성좌들이 화신 ‘정희원’을 불길하게 여깁니다!]
[절대 악 계통의 성좌들이 화신 ‘정희원’에게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늘을 양분한 선과 악의 별들.
그리고 그 균열의 너머로, 그녀를 보는 또 다른 시선들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존재들이었다.

[이계의 신격들이 화신 ‘정희원’에게 눈독을 들입니다.]

무수한 별들의 시선을 받으며, 정희원은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남은 마왕은 둘.

[······미안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은 좋아하지 않아서, 이만.]

그 말을 한 것은 정희원이 각성한 그 순간부터 긴 주문을 영창하던 마왕이었다.

[마왕, ‘유혹과 불모의 마왕’이 막대한 개연성을 지불하고 국지전에서 이탈합니다.]

뒤늦게 정희원이 검을 내던졌지만, ‘유혹과 불모의 마왕’ 제파르는 이미 자리에서 사라진 뒤였다.
으드득 이를 간 정희원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남은 마왕은 하나.

[16번째 마계의 주인이란 놈이 화신에게 꽁무니를 빼다니, 한심하군.]

이현성을 죽인 마왕.
8번째 마계의 주인, ‘무자비한 역천의 사냥꾼’ 바르바토스.
비정상적인 정희원의 활약에도, 바르바토스는 달아나지 않았다.

[마왕, ‘무지비한 역천의 사냥꾼’이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바르바토스는 [심판의 시간]을 발동한 정희원의 움직임을 따라왔다. 그녀와 똑같은 속도로 판단하고, 그녀와 똑같은 속도로 공격을 가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노련하고 파괴적인 공방.

정희원은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즐기는 듯, 바르바토스가 웃었다.

[파괴적으로 아름다운 설화군.]

공방이 이어질수록 정희원은 바르바토스의 강함을 깨달았다.
마왕은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무엇을 어떻게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세월의 격차.

터진 옆구리에서 피가 쏟아졌다. 정희원은 [지옥염화]의 불길로 상처를 지졌다. 빈틈을 놓치지 않은 바르바토스가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
입으로 한바탕 피를 게워내며, 정희원은 간신히 버티고 섰다.

[‘심판의 시간’의 지속 시간이 1분 남았습니다.]

정희원은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손으로 검을 고쳐 잡았다.
내가 살아온 시간으로는, 무리인가.

[<김독자 컴퍼니>의 가호가 강화됩니다!]

무언가가, 그런 정희원에게 힘을 보탰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녀가 살아온 역사들이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녀가 사랑한 것을 함께 사랑한 이들.

까가가가각!

정희원은 양손으로 검을 쥔 채 바르바토스의 총검술을 받아냈다.
총검술. 그녀가 아는 사내도, 총검술에 능숙했다.

「군대에서는 힘들수록 더 큰 소리를 지릅니다. 매일 아침 한껏 소리를 지르고 나면, 어떻게든 그날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아아아아압!”

정희원은 이현성처럼 기합을 터트렸다. 바르바토스의 총검이 정희원의 옆구리를 찔렀다. 하지만 정희원은 오히려 그 총검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쥐었다.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총검이 그녀의 옆구리를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정희원은 한발짝을 더 내딛었다.

「······저도 일단 지르고 볼 때가 있습니다. 항상 모든 걸 계산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김독자처럼 용기를 냈고.

「그렇게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유중혁처럼, 검을 휘둘렀다.

스팟!

[심판자의 검]이 바르바토스의 팔뚝을 베어냈다.

[······아?]

붉게 물든 설화 파편이 튀어 오르는 것을 보며, 바르바토스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언뜻 한수영의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알지? 어차피 마지막에 웃는 놈이 승자야.」

그런 한수영처럼, 정희원이 말했다.

“뼈를 원한다면 뼈를 주고, 심장을 원한다면 심장을 주겠어.”

자신이 무슨 공격을 받든 상관없다는 태도.
오직, 상대방을 함께 파멸시키기 위한 전투법.

“하지만, 너도 네 설화의 절반은 걸어야 할 거야.”

한계까지 끌어낸 설화의 모든 국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당황한 바르바토스가 물러나며 [멸성탄]의 포화를 퍼부었다. 하지만 정희원은 가볍게 그 탄환들을 피했다. 탄환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는 정희원을 따라오지 못했다. 서서히 밀려온 개연성의 후폭풍이 그녀의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정희원의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세었다. 자신의 격을 뛰어넘는 힘을 쓴 대가였다. 그럼에도 정희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직 저 마왕을 죽이는 것이, 그녀가 바라는 전부였다.

섬광처럼 움직인 정희원의 검이, 바르바토스의 왼쪽 손목을 베어냈다.

총을 받칠 수 없게 된 바르바토스가 신음을 토했다.
그는 자신이 몰고 온 전함의 갑판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죽여주마. 흔적도 없이 소멸시켜 주겠다.]

바르바토스의 전함이 새파란 빛을 뿜으며 장전을 시작했다.
그런 바르바토스를 올려다보며 정희원은 웃었다.
저 [설화 병기]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그녀를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 자체가, 이미 바르바토스의 패배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지, 바르바토스는 격노한 표정이었다.

[사라져라.]

정희원은 검을 바닥에 꽂은 채 섰다.
할 수만 있다면, 저 배도 부수고 싶다.

[‘심판의 시간’의 발동이 종료되었습니다.]

하지만 정희원에겐 이제 남은 시간이 없었다.
전함의 독수리상이 녹빛으로 물들며 포신이 불을 뿜는 것이 보였다. 이 국지전장 전체를 쓸어버릴 수 있을 법한 위력.
정희원은 바닥에 늘어져 있는 이현성의 몸을 끌어안았다.

현성 씨.
나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이제는 정말 한 줌의 여한도 없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여기서 내 모든 시나리오가 끝나더라도.

나는, 제대로 이 순간을 살아냈다.

느려진 지각 속도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정희원은 마력탄이 쏟아지는 전장을, 고개를 돌리지 않고 바라보았다.

자꾸만 시야가 흐려져 앞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것일까.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정희원은 분통함에 울음을 터트렸다.

여한이, 없을 리가 있는가.

“우리 성운 사람들은 왜 다 이 모양이지?”

누군가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성좌, ‘해상전신’이 분노합니다!]

익숙한 성좌의 간접 메시지에 놀란 정희원이 시야를 닦았다. 눈을 감지 않았기에, 그녀는 눈앞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쿠구구구구!

바르바토스의 함선보다도 더 큰 함선이 전장의 하늘을 장악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117번째 국지전에 참여하였습니다!]

미래 세대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북 형태의 등. 그 함선의 선수상(船首像)에, 그녀가 사랑하는 세 사람이 타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

때맞춰 바르바토스의 포화가 날아들었다. 다급해진 정희원이 손을 뻗으며 외쳤다.

“피해!”

정희원의 외침은 포성에 묻혀 사라졌다.
전장 전체를 삼키는 파열음에 정희원은 주저앉았다.

부연 연기가 걷힌 자리에, 전함은 상처 하나 없이 버티고 있었다.

[해당 시나리오에서 <김독자 컴퍼니>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집니다!]

매캐한 전장의 포연 속에서 이지혜와 아이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미동도 없는 표정으로, 이지혜가 검을 치켜들었다.

“장전.”





< Episode 75. 어떤 마음 (4) > 끝

< Episode 75. 어떤 마음 (5) >





멀리서 경악한 마왕의 표정이 보였다.
바르바토스가 쏜 [멸성탄]의 포화에도 끄떡없는 선체.
별조차 지워버리는 탄환도 거북의 딱딱한 등껍질을 뚫지 못했다.

[화신 ‘이지혜’가 지휘를 시작합니다.]
[화신 ‘이지혜’가 성흔 ‘유령함대 Lv.10’을 발동합니다!]

열두 척의 유령함대가 밀려든 ‘어툼 투사’들을 파도 삼아 떠올랐다.
일제히 포격을 시작한 유령함대의 포신들.
갑작스런 폭격에 바르바토스가 이를 갈며 외쳤다.

[고작 그 정도로······!]

바르바토스의 함선 [나이트 호크]는 단단했다. 미래 기술의 집합체는 아니었지만, 나름 마계의 설화들을 정교하게 모아서 만든 병기. [유령함대]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적이었다.
하지만 이지혜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한 표정으로 적을 응시할 뿐이었다.

쿠구구구!

[유령함대]가 포격을 이어갈 때마다, 하늘을 덮은 함선의 용 머리 선수상이 붉게 충전되고 있었다.

[거대 설화, ‘넥스트 시티’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정희원은 그런 이지혜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이지혜가 대체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는지, 어떤 세계관을 겪고 여기까지 왔는지 정희원은 알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녀가 ‘카이제닉스 제도’에서 겪었던 비극만큼, 저 아이들도 무언가를 겪어 이겨냈다는 것.

[조잡한 설화로 만들어진 배 따위가······!]

에너지 축적을 끝낸 바르바토스 쪽이 먼저 발포했다.

콰아아아아아!

아까보다 두어 배는 강력해진 격발. 이지혜의 함선이 아무리 튼튼하다 한들, 이번만큼은 [멸성탄]을 견뎌내기 쉽지 않아 보였다.
선두에 나가 있던 [유령함대] 너덧 척이 포화의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소멸했다.
그러나 이지혜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느릿하지만 확실한 속도로 밀려오는 저 포화가, 함선의 코앞에 닥칠 때까지.
조금 더. 조금만 더.

[성좌, ‘해상전신’이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흩날리는 설화의 부스러기가 이지혜의 뺨을 스쳤다.
연이어 궤멸당한 [유령함대]의 설화가 새하얀 포말처럼 일행들을 덮치는, 바로 그 순간.
이지혜가 검을 내렸다.

“발사!”

그리고 사방이 빛살로 물들었다. 광폭한 반동이 선체를 휩쓸었다. 강풍에 풀어 헤쳐진 이지혜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용 머리에서 뿜어져 나온 설화의 에너지가 사위의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고 있었다. 전방을 까맣게 물들였던 [멸성탄]의 포화는 이미 소멸하고 없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해당 ‘설화 병기’의 개연성을 의심합니다!]

설화 병기 [터틀 드래곤].

그것은 오래전, ‘해상전신’이 넥스트 시티를 방문했을 때 제작을 의뢰했으나 미처 회수하지 못한 병기의 이름이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입을 벌린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굉음과 함께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고, 마왕의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지혜는 다시 한번 말했다.

“발사!”

쌓아둔 울분을 토해내듯이,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다시금 떠오른 [유령함대]가 일제 포격을 개시했고, [터틀 드래곤]의 메인 포신이 불을 내뿜었다.

“발사!”

전장 건너편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바르바토스의 함선도, 어둠 투사들도.
정희원과 이현성의 이야기를 비극으로 소비하던 모든 것들에게, 이지혜가 분노하고 있었다.

우리의 설화는 너희들의 유희가 아니라고.

연이은 포화에 이지혜의 신형도 조금씩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바다를 두려워하던 소녀가 아니라, 이 배의 지휘관이었다.

“발사!”

콰아아아아아아!

포화가 만들어 낸 에너지의 폭발 속에서 바르바토스의 격이 지워져 가고 있었다.
마왕의 설화가 단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이지혜는 포격을 지시하고 또 지시했다.
정희원은 그 광경을 올려다보았다.

저 아이는 지금 무리하고 있다.

츠츠츠츠츳!

전장을 뒤덮은 스파크. 연달아 터지는 굉음을 뚫고 두 아이가 허공에서 내려왔다. 신유승과 이길영이었다.

“희원 언니······ 괜찮으세요?”
“누나!”

정희원은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 이현성을 함선으로 옮겼다. 그리고 선상에서 여전히 포격을 지시하는 이지혜에게 다가갔다.

“지혜야······.”

[성좌, ‘해상전신’이 남은 자신의 진력을 한계까지 소진합니다.]

상대는 최상위권의 마왕이었다. 아무리 [설화 병기]를 손에 넣었다고 해도, <김독자 컴퍼니>의 개연성을 빌렸다고 해도, ‘해상전신’이 설화급 성좌에 도달했다고 해도······.
이런 이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가 필요하다.

“지혜야, 이제 괜찮아.”

정희원은 이지혜가 무엇에 분노했는지 안다.
전장에 나타난 순간, 이지혜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힘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유령함대’가 귀환합니다.]

멀리서 시나리오 메시지가 들려왔다.

[마왕, ‘무자비한 역천의 사냥꾼’이 사망하였습니다.]
[마왕, ‘무자비한 역천의 사냥꾼’이 국지전에서 패배하였습니다.]

고작 세 명의 화신이 이루어낸 쾌거.
서열 8위의 마왕을 비롯한 네 명의 마왕이, 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쏟아지는 환생자들의 환호 속에서, 간접 메시지들이 날아들었다.

[절대 악 계통의 성좌들이 믿을 수 없는 결과에 눈을 떼지 못합니다.]
[절대 선 계통의 성좌들이 복잡한 표정을 짓습니다.]
[중립 계통의 성좌들이 불가능한 전투에 환호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불가능한 시나리오에 대가를 지불합니다.]
[후원계의 큰 손이 거액의 후원금을 지불합니다.]
[1,100,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주륵, 흘러나온 코피를 닦은 이지혜가 배시시 웃었다.
웃으면서도, 울고 있었다.

“언니.”

[117번째 국지전이 종료됩니다.]
[117번째 국지전의 정산이 시작됩니다.]
[117번째 국지전은 승자와 패자가 존재합니다.]

정희원은 멍한 눈으로 그 메시지를 올려다보았다.

[해당 국지전은 ‘선’의 승리입니다.]

+

[성마대전 진행 현황]

절대선 수치 : 68
절대악 수치 : 67
혼돈 수치 : 70

+

117번 국지전은 <김독자 컴퍼니>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뒤늦게 전장에 참가한 이지혜는 <김독자 컴퍼니>의 ‘성마대전’ 계획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획이 완전히 실패한 것도 아니었다.

[해당 전장에 ‘혼돈’의 힘이 개입했습니다.]
[혼돈 수치가 5만큼 상승합니다.]
[혼돈 수치가 75를 넘겼습니다.]
[혼돈 수치의 증가 속도가 빨라집니다!]
[음침한 이계의 신격들이 화신 ‘정희원’을 부릅니다.]
[은하 너머의 외신들이 화신 ‘정희원’의 격에 주목합니다.]

정희원은 자신의 양손등에 나타난 무한대의 심볼을 내려다보았다.
새로운 특성인 ‘멸망의 심판자’를 각성하며 얻은 심볼이었다.
김독자도 이 표식에 대한 이야기는 해준 적이 없었다.

“······현성이 형?”

늘어진 이현성의 맥박을 짚던 이길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깜짝 놀란 신유승도 이현성의 가슴에 귀를 대어보았다.
정희원은 그 모습을 보며 참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성 씨는······.”

죽었어.
하지만 말을 끝까지 맺을 수 없었다.
그 말을 해버리면, 그 말이 정말로 현실이 될 것만 같았기 때문에.

[모든 국지전장이 종료되었습니다.]
[시나리오의 혼돈 수치가 지나치게 높아 메인 시나리오가 갱신됩니다.]
[시나리오 점핑이 발생합니다.]
[연계 시나리오가 발동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애도의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스타 스트림>의 세계에서, 시나리오는 결코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메인 시나리오 # 84 ― ‘성마결전’>

분류 : 메인
난이도 : 측정 불가
클리어 조건 :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아닌 누군가가 전장의 선악을 불분명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선’과 ‘가장 오래된 악’은 확실한 승패를 원합니다. 그들은 단 하나의 ‘대전장’에 승부의 향방을 걸기로 결정했습니다. 거대 설화의 끝을 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대전장’에 참가하십시오.
제한시간 : ―
보상 : ‘성마대전’과 관계된 거대 설화, ???
실패시 : 사망

+

[성마대전의 ‘대전장’이 열립니다!]
[이 ‘대전장’의 승자는 30포인트의 선악 수치를 획득하게 됩니다.]

“······뭐야?”

이지혜의 중얼거림과 함께, 국지전장 전체에 둔중한 땅 울림이 퍼졌다.
츠츠츳, 하며 튀어 오르는 스파크 속에서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간 작은 전장에서 노느라 심심하셨죠? 지금부터가 진짜 ‘성마대전’입니다!]

하늘과 땅이 격변하며 찢어져 있던 시공간이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정희원과 아이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대평원에 도착해 있었다.
어둑한 하늘. 붉은 벌판에는 오래전 삭아버린 천사와 악마들의 설화 파편과 두개골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곳은, 1차 성마대전의 최종 결전이 펼쳐졌던 장소.

각자 다른 국지전장에 참가해 있던 성좌와 화신들도 모이기 시작했다.

[성운, <파피루스>가 대전장에 참가했습니다!]
[성운, <탐라>가 대전장에 참가했습니다!]
[성운, <홍익>이 대전장에 참가했습니다!]
[성운, <수호의 나무>가 대전장에 참가했습니다!]

“······야, 신유승. 저거······.”
“괜찮아. 우리 레벨업 열심히 했잖아.”

[거대 설화, ‘넥스트 시티’가 아이들을 보호합니다.]

그저 벌판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기가 죽을 정도의 격. 대체 얼마나 많은 성좌들이 이 대전장에 참가한 것인지, 정희원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김독자 컴퍼니>에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실체화된 시선은 그것 자체로도 위협이 된다.
정희원은 가누기 힘든 몸으로 선체의 정면에 섰다. 그녀는 <김독자 컴퍼니>다. 그러니, 저런 성운들 앞에서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그녀를 향해 가공할 격의 파랑이 다시금 밀려들려는 순간.

“정희원.”

누군가가, 그녀의 등을 떠받쳤다.

[화신, ‘한수영’이 대전장에 참가했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대전장의 성좌들을 위협합니다!]

“꼴이 말이 아니네. 머리는 또 왜 그래?”
“남 말할 처지는 아닐 텐데 말이지.”

건조하게 웃는 정희원을 향해, 얼굴 곳곳에 검댕을 묻힌 한수영이 눈을 부라렸다. 정희원은 한수영의 뒤를 따라온 성좌를 바라보았다.

“우리엘······.”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상처투성이의 우리엘이 정희원을 보고 있었다. 희미한 탁기가 낀 날개.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정희원은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는 느낌이었다.
우리엘은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의 교환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괜찮아요, 우리엘.”

우리엘은 입을 다물었다. 정희원은 잠시 우리엘을 바라본 뒤, 말없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성좌와 화신. 서로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고통스럽게 눈을 감습니다.]

반대편 전장에서도 거대한 게이트가 열렸다.
이제껏 열린 게이트와는 차원이 다른 크기였다.

[성운 <에덴>이 대전장에 참가했습니다!]

황금빛 뿔 나팔과 함께 전장에 입장하는 대천사와 발키리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화신 ‘정희원’을 바라봅니다.]
[성좌, ‘정의와 화목의 친구’가 화신 ‘정희원’을 동정합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화신 ‘정희원’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

순간, 눈을 내리깔았던 정희원의 동공이 다시금 불타올랐다.

동정이라고?
역겹다.
당신들이 ‘심판의 시간’에 동의만 해주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대전장에 입장합니다!]

눈부신 광휘와 함께 입장하는 <에덴>의 수장.
정희원은 [심판자의 검]을 꾹 쥔 채 메타트론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다른 한쪽의 게이트에서도 입장을 시작했다.

[마왕,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대전장에 참가했습니다!]

서열 2위의 대마왕, 아가레스와 다른 마왕들이었다.

[마왕, ‘검은 갈기의 사자’가 대전장에 참가했습니다!]
[마왕,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이 대전장에 참가했습니다!]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대전장에 참가했습니다!]

대천사들의 기세에 전혀 꿀리지 않는 최상위권의 마왕들. 그들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정희원과 아이들의 안색도 어두워졌다.
그제야 이 전장이 어떤 곳인지 실감이 났다. 그들이 상대하는 <성운>들이 어떤 곳인지.
그리고 <김독자 컴퍼니>가 아직 얼마나 작은 곳인지.

[대전장의 성좌와 마왕들이 <김독자 컴퍼니>를 노려봅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강적들.
<김독자 컴퍼니>를 겁박하는 성좌들의 기세에, 점점 가빠오는 동료들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성운 <아스가르드>가 대전장에 참가합니다!]
[화신 ‘안나 크로프트’가 대전장에 참가합니다.]

흠칫 놀란 정희원이 뒤를 돌아보자, 안나 크로프트가 양손을 든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습니다. 지금은 적이 아니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는 순간.

[화신 ‘유중혁’이 전장에 참가했습니다.]

하늘의 한쪽이 무너지며 검은 코트의 사내가 등장했다.
오연하게 버티어 선 등.
사납게 울부짖는 [흑천마도]의 검극이 성좌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한수영이 한쪽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말했다.

“또, 또 주인공 행세하네.”
“사부!”

단지 한 사람이 나타났을 뿐인데 전장의 분위기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일행들을 돌아본 유중혁이 말했다.

“한 놈 빼고 모두 모였군.”
“아니, 모두 모였어.”

모두가 기다린 목소리. 울컥 올라오는 그 마음을 어쩌지 못한 채, 정희원은 그 방향을 돌아보았다.
말하고 싶었다. 저 빌어먹을 성좌들이 이곳에서,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희원 씨.”

하얀 코트의 김독자가, 쓰러진 이현성을 고요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대전장에 참가했습니다.]





< Episode 75. 어떤 마음 (5) > 끝

< Episode 76. 묵시록 (1) >





Episode 76. 묵시록


―쿠구구구구!

화면 속 선과 악의 성좌들이 서로를 향해 매서운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언제든 끊어져 버릴 듯 고무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 그 균형을 지키는 것은 가장 작지만 밝게 빛나고 있는 한 성운이었다.

[선악이 모두 모인 것을 보는 건 정말 간만이군요······.]

화면을 보는 만다라의 수호자, 석존은 묘한 표정이었다. 그의 동공에 아주 오래된 기억이 흘러가고 있었다.
시나리오 이전의 시나리오, 선과 악, 그리고 중립이 모두 함께했던 시절.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모두가 함께 멸망의 용과 맞섰던 이야기······.

―저도 일행들을 돕고 싶어요.

그 말에, 석존의 시선이 곁에 놓인 작은 수조로 향했다. 그 수조 안에서, 희게 빛나는 영혼의 소체가 웅웅거리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전 언제쯤 환생할 수 있는 거죠?

[저곳은 아해의 전장이 아닙니다. 아해는 더 커다란 의미를 수행할 존재로 환생할 것입니다.]

―저들이 내 의미에요.

영혼이 되어서도, 유상아의 목소리는 결연했다.

―여기서 저들을 살리지 못하면 제 환생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해요.

[의미라······.]

석존은 고개를 돌려 수조 맞은 편에 놓인 또 다른 수조를 응시했다.
수조 안에는 법의를 갖춰 입은 여인의 화신체가 담겨 있었다.

[그대는 내가 아끼던 아해의 몸에 깃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간다고요? 환생하는 게 아니었나요?

[그 몸을 화신체 삼아 환생하는 것입니다.]

―그럼 본래 그 몸의 주인은요?

석존은 대답하지 않았다.
부처에게도 슬픔이 있을까?
유상아는 순간 뭔가를 깨달았다.

―저 사람이 당신의 ‘의미’인가요?

석존은 말없이 법의를 입은 수조 속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우주의 섭리로 되돌아간 것뿐입니다. 모든 것이 수레바퀴의 공허한 회전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싶으세요? 당신이 아끼던 사람이었잖아요.

[아해도 곧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환생자가 된다는 건 그런 것이니.]

―전 아직 환생자가 아니에요.

[그런 굴레에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대에게 소중했던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남을 저주하시는 게 취미이신가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해여.]

석존은 화면 속의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주 오래 살아온 성좌들이 있었다.

[성좌들은 평생을 불면에 시달립니다. 그들은 시나리오 없이는 잠들지 못하고, 꿈에서조차 다른 이들의 설화를 탐식합니다. 그 탐식을 통해 자신이 처한 시나리오를 지우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늘 불안해하지요. 자신들이 왜 불안한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그들 중 누구보다 오래된 성좌인 석존이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영원한 백일몽을 꾸듯 시나리오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죽음을 외면하기에 죽음을 모르고, 죽음을 모르기에 시나리오의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지요. 자신을 구원할 단 하나의 이야기가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화면 속에서 <김독자 컴퍼니>를 후원하거나 적대하는 성좌들이 무수한 간접 메시지를 띄우고 있었다.
석존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런 화면의 가장자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환생자는 다릅니다.]

그곳에, 이 섬의 환생자들이 있었다.
<김독자 컴퍼니>를 따라온 환생자들. 그리고 여전히 선과 악의 한쪽 측에 가담하여 거대 설화에 부려지고 있는 환생자들······.
석존은 그들을 보며 말했다.

[환생자는 성좌처럼 영원을 살아가지만, 죽고 다시 태어납니다. 죽음을 알기에 깨어남을 알고, 깨어남을 알기에 자신이 시나리오 속의 일개 부속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환생이란 시나리오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격이 낮은 환생자들은 죽음과 함께 기억을 잃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니르바나처럼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다양한 종으로, 다양한 성별로 환생하여 시나리오를 계속했다.

인간으로. 개구리로. 오크로. 엘프로. 개미로······.

아마 저것은, 무수한 환생의 끝에 그들이 얻은 표정일 것이다.

―다들 체념한 얼굴이에요.

[누가 이기든 바뀌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시나리오는 바꿀 수 있어요. 우린 늘 그래왔어요.

[하지만 그것이 ‘시나리오’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포기하는 건가요? 뭘 해도 시나리오는 시나리오니까? 그건 도망치는 거예요. 싸워보지도 않고서 패배를 인정하는 거라고요.

[아해여, 그건 환생자들의 삶을 모욕하는 말입니다. 환생자들은 무수한 삶을 시나리오와 투쟁하며―]

―단 한 번의 삶도 포기 않고, 다 바쳐서 싸워보셨나요?

그 말에 석존이 입을 다물었다.
단 한 번의 삶도 포기하지 않았는가.
석존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상아가 말을 이었다.

―1800번이 넘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싸웠던 사람도 있어요.

유상아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검은 코트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 모든 삶을 함께 지켜본 사람도 있고요.

그리고 그 옆에 선 흰 코트의 사내가, 일행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쓰러진 이현성이었다.

[숫자를 헤아리기엔, 이 몸은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헤아릴 수 있는 숫자도 있군요.]

석존이 이현성을 보며 말했다.

[이 섬에 늘어날 환생자가 하나.]


*


“아직 아닙니다.”

나는 쓰러진 이현성의 맥박을 짚었다. 맥박은 뛰지 않았다. 코는 숨을 쉬지 않았고, 까뒤집은 눈은 흰자위만 보였다.

“······정말이에요?”

정희원은 기적이라도 믿고 싶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얗게 탈색된 그녀의 머리칼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했다.

“확실히, 안 죽었습니다.”

일행들은 복잡한 얼굴들이었다. 이지혜는 내가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눈빛이었고, 이길영은 내 말이 거짓이라도 기꺼이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한수영이 물었다.

“이제 죽음의 정의까지 바꿔버리기로 한 거냐?”
“현성 씨가 죽었다면, 강철의 주인도 시나리오에서 퇴장했을 거야.”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간접 메시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아직 강철의 주인은 시나리오에서 퇴장하지 않았다.
정희원이 다급히 내 팔을 붙들었다.

“그럼 현성 씨는 대체―”
“희원 씨가 각성하셨듯, 현성 씨도 각성한 겁니다.”

나는 이현성의 피부를 흘러 다니는 희미한 설화 파편들을 바라보았다.
강철의 설화.
겉으로는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지금 이현성의 내부는 강철의 설화로 충만하게 차올라 있을 것이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특성 진화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현성이 괜히 원작에서 ‘최강의 방패’라 불리었던 게 아니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 누군가를 지켜냈을 때, ‘강철검제’는 강철화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다시 의식이 깨어났을 때, 이현성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방패가 되어있을 것이다.
정희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그럼 살아있는 거죠?”
“예.”
“정말이죠? 거짓말 아니죠?”

무너진 정희원의 볼 아래로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이현성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뛰지 않는 심장. 그 무심한 침묵을 느끼며, 정희원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이렇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네?”

나는 이현성을 내려다보았다.
순도 백 퍼센트의 강철처럼 굳어버린 이현성의 심장. 이제 이현성의 심장은 다시는 뛰지 않을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지금의 정희원은 알지 못하겠지······.

“하지만 현성 씨는 분명 살아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쨌든 지금 당장은 도움이 안 되겠군.”

격을 개방한 유중혁이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슬퍼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쿠구구구구!

전장의 건너편에서, 우리 성운을 노려보는 두 세력이 보였다.
한쪽은 선, 그리고 한쪽은 악. 우리에겐 그저 적일 뿐인 존재들.
양 세력의 중심에는 ‘하늘의 서기관’ 메타트론과, ‘지옥 동부의 지배자’ 아가레스가 있었다.

[바르바토스를 쓰러트린 게 누구냐?]

그 물음에 전장 사이로 웅성거림이 퍼졌다.
마왕 서열 8위 바르바토스가 죽었다.
하지만 마왕들은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표정들이었다.

[‘성마대전’을 건드리다니, 제정신이 아닌 녀석들이구나.]

우리 일행을 보는 녀석들의 시선에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네깟 것들이 지금까진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지만, 앞으로는 그럴 수 없을 거란 확신이 담긴 조소.

그들의 짐작대로, 지금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은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유중혁은 인드라와의 싸움으로 마력이 거의 고갈된 상태였고, 한수영도 대천사들과의 전투로 몹시 지쳐 있었다.
쓰러진 이현성이나 탈진한 정희원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도움이 될 만한 쪽은 ‘넥스트 시티’에 다녀온 아이들이었다.

“아저씨, 걱정 마. 내가 다 쓸어버릴게.”

가슴을 탕탕 치며 말하는 이지혜와 고개를 끄덕이는 신유승은 무척이나 믿음직스러웠다. 내 예상대로, 아이들은 ‘넥스트 시티’에서 가공할 성장을 거듭해 돌아온 모양이었다. 이길영도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고 있었다.

“형, 누구부터 죽일까요? 누가 경험치 제일 많이 줘요?”

압도적으로 불리한 이 상황에도, 마치 게임이라도 즐기는 듯한 말투.

[화신, ‘이길영’의 배후성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된다. 아직, 이길영을 쓸 때가 아니다. 그리고 쓴다고 해도, 승산을 확신할 수도 없다.
곁에 있던 안나 크로프트가 물었다.

“정말 싸울 생각인가요? 승산이 없다는 건 알고 있죠?”

그렇게 묻는 안나 크로프트의 노림수는 뻔했다.
그녀는 이미 ‘선’의 진영에 소속된 상황. 여차하면 내 뒤통수를 까버린 뒤 그쪽에 편승하는 것이 최선이겠지.

“승산이야 늘 없었죠. 싸울 생각은 있고요. 이길 자신도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그쪽이 배신하지 않을 때의 이야기지만.”

배신이라는 말에 안나 크로프트가 눈을 흘기며 한쪽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뒤쪽에 도열해 있던 셀레나 킴과 이리스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성운, <아스가르드>가 <김독자 컴퍼니>를 지지합니다.]

대경한 성좌들과 마왕들이 고함쳤다.

[아스가르드, 제정신인가?]
[망치의 신이 드디어 자기 머리를 깨버린 모양이군.]
[장난의 신이여! 설마 여기서도 난동을 부릴 생각인가?]

진언들이 난립하는 와중에도, 오히려 일이 흥미롭게 돌아간다는 듯 히죽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서열 5위의 마왕, ‘검은 갈기의 사자’ 마르바스였다.

[어리석은 선택이다, <아스가르드>여. 그대들의 성운은 강력하지만 참가한 성좌들의 숫자는 적어. 전장을 흔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성운 하나가 아니야.”

[그럼 또 누가 있지? <김독자 컴퍼니>? 성좌라고는 그대 하나뿐인 작은 동아리를 ‘성운’이라 칭하고 싶은 것인가?]

마왕들 사이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성좌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합니다.]
[성운 <명계>가 <김독자 컴퍼니>를 지지합니다.]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명계>?]
[<올림포스>여!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저쪽은 그대들의 하위 성운 아닌가!]

그 말과 함께 전장 한쪽이 개방되며 <올림포스>가 나타났다.
역시, 저들도 이 시나리오에 참전했었던 모양.
선두에 선 이는 우리에겐 익숙한 성좌였다.

[으음, 이거 곤란한데······. 여기서 <기간토마키아>를 재현할 수도 없고.]

참으로 난처하다는 듯 나를 보며 웃는 ‘술과 황홀경의 신’인 디오니소스.

“디오니소스. 우리와 싸우실 겁니까?”

[후, 술 땡기게 하네 진짜.]

품속에서 병을 꺼낸 디오니소스가 벌컥벌컥 포도주를 들이켰다.

[아 몰라. 일단 좀 취한 다음 생각하지 뭐. 구원의 마왕, 너도 와서 한잔해. 우리 할 얘기가 많잖아. 안 그래?]
“감사한 제안이지만, 지금은 조금 곤란할 것 같군요.”

피식 웃은 디오니소스가 나를 향해 건배를 했다. 그것으로 <올림포스>는 충분한 대답을 한 셈이었다.
우리를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에게 적의를 보이지도 않는다.
거대 성운 하나가 갑자기 참전을 보류하자, 선악의 진영에서 당혹스러운 분위기가 번져갔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대충 선수 소개는 끝난 것 같으니, 슬슬 싸워보자고.”

내 도발에, 양 세력의 성좌와 마왕들이 분노를 토해냈다.
설마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는지, 곁에 있던 안나 크로프트가 제정신이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수영이 말했다.

“예언자가 생각보다 눈치가 없네. 가만히 보기나 해.”

한수영의 핀잔에 안나 크로프트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마왕 하나가 새카만 칼을 뽑으며 앞으로 나왔다.
그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도 아가레스와 메타트론은 침묵할 뿐이었다.

[다수의 마왕이 당신에게 강렬한 적의를 보입니다!]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마왕의 검이 나를 향해 움직인 순간, 메시지가 들려왔다.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혼돈 수치의 상승이 가속화됩니다!]
[혼돈 수치가 1 올랐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76]

놀란 마왕이 눈을 끔뻑였다.
멀리서 표정이 굳어진 메타트론과 아가레스의 표정이 보였다. 그들은 <스타 스트림>의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아마 그들은 눈치챘을 것이다.
나는 성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진언을 발했다.

[지금 너희가 싸우려는 대상은, 선도 악도 아니야.]

<김독자 컴퍼니>에는 선과 악, 둘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 우리 성운에 적의를 드러내는 것은, 선과 악의 전쟁인 ‘성마대전’의 본질에 위배되는 것.

[우릴 죽이려 든다면 죽일 수는 있겠지. 하지만 너희들은 어떻게 될까?]

하늘 저편에서 혼돈의 기운을 품은 구름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혼돈 수치가 80을 넘기면, 이제 멸망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치킨 게임인 셈이다.

[가장 오래된 선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가장 오래된 악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먼저 겁을 먹고 물러나는 쪽이, 확실히 패배하는 게임.

[우리가 다 죽는 게 빠를까, 아니면 너희가 묵시룡에게 멸망하는 게 빠를까? 궁금하지 않아?]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아 들며 웃었다.

[나는 몹시 궁금한데.]





< Episode 76. 묵시록 (1) > 끝

< Episode 76. 묵시록 (2) >





내 선언을 해석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를 죽이면, 너희도 반드시 죽는다.

성좌들은 처음에는 동요했고, 그다음에는 웅성거렸으며, 마지막으로 침묵했다. 누군가는 아가레스를, 누군가는 메타트론을 바라보았다. 이 전장의 가장 큰 결정권자들. 하지만 결정권자들은 그저 알 수 없는 눈으로 침묵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떤 명령도 떨어지지 않자, 뜻밖에도 전운은 가장자리에서부터 천천히 감돌기 시작했다.

[<김독자 컴퍼니>. 너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알겠다.]

진언을 터트린 것은 <파피루스> 쪽 성좌였다.

[그런데 우린 너희들에게 빚이 있어.]

“글쎄, 빚이 있는 게 대체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군.”

내 대꾸와 함께, <파피루스>의 성좌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들었다.

[너희는 선도 악도 아니라고 했지. 하지만 그 말은, 선이기도 하고 악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성운 <파피루스>는 소속 진영으로 ‘악’을 택했다.

[적어도, ‘선’을 택한 놈들은 모두 죽여주마.]

현명한 선택이었다. 혼돈 수치가 오르는 것은 선이 선과 싸울 때, 그리고 악이 악과 싸울 때뿐이니까. 지금 <파피루스>는 이 전장의 규칙에 위배되지 않고 우리를 심판할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가장 오래된 악이 당신을 배제하길 원합니다.]
[가장 오래된 선이 당신을 배제하길 원합니다.]

이 ‘성마대전’에서, 우리는 그저 바이러스에 불과하다.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을 훼방 놓고, 병균을 퍼뜨리는 숙주.
<파피루스>를 중심으로 모여든 선악의 파도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서로를 향해 반감을 불태우던 성좌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적의를 돌리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경직된 일행들의 표정. 유중혁이 태세를 바꾸며 말했다.

“김독자.”

유중혁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명계>와 <아스가르드>가 함께하고,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이 한데 모였다 한들.

저들과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우리 중 누군가는 반드시 죽는다.

순간 인지 능력이 가속화되며, 시간이 미미하게 느려졌다.

「생각보다 밀려드는 속도가 빠르다.」
「다수의 성좌들이 너무 빨리 결정을 내렸어.」
「혼돈 수치 80을 먼저 찍었어야 했나.」

머릿속으로 스쳐가는 무수한 문장들.
나는 ‘멸살법’을 떠올렸다.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을까?

<명계>에 있을 양부모님?
아직 참전하지 않은 제천대성?
아니면, 이계의 신격인 은밀한 모략가?
척준경과 한반도의 성좌들?

스승님들과 장하영의 얼굴도 떠올랐다.
특히 장하영.

도움이 절실하긴 하지만, 장하영은 안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악과’가 당신의 죄책감을 자극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책임감인지도 모른다.
나 때문에 이 세계에 태어난 장하영이 시나리오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오롯이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이야기를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
장하영에게 <김독자 컴퍼니>를 권유하거나 미래 정보를 좀처럼 제공하지 않는 것은 그런 양가감정 때문이었다.

“아아아아악!”

최전방에서 적을 맞이한 환생자들의 대열이 무너지고 있었다. 쓰나미에 휩쓸려버린 환생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찢어졌다.

[죽어라!]

진부한 대사들을 늘어놓으며 달려드는 성좌와 마왕들을 보며, 한수영이 긴장한 표정으로 웃었다.

“우리가 이겼네. 원래 저런 대사 먼저 지껄이는 쪽이 빨리 뒈지거든.”

한수영의 농담에 일행들이 힘껏 입꼬리를 움직였다.

“온다.”

대사는 진부했으나, 그들의 격까지 진부한 것은 아니었다.
선악은 이 세계에서 가장 진부한 설화지만, 가장 강력한 설화 중 하나였다.
피부를 통해 전해지는 긴장감은 지금껏 겪었던 어떤 전장과도 달랐다.
이것은 실제다.
이것이 성마대전이고, 성좌들의 진짜 힘이다.

콰콰콰콰콰!

대전장을 덮어버릴 선악의 격. 격의 해일은 순식간에 우리의 코앞까지 밀려왔다.

300미터.

200미터.

100미터.

유중혁이 말했다.

“지금.”

모두 자신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김독자 컴퍼니>가 동시에 격을 발출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담화자가 모였습니다.]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마계의 봄」이 우리를 보호하듯 감쌌고,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다가오는 모든 것을 물어뜯을 기세로 포효했다. 이것만으로 저들을 막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같은 ‘거대 설화’라고 해도 쌓아온 세월이 다르다. 카이제닉스의 50년만으로는 메울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격차.
그럼에도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였다.

30미터.

포신의 장전을 마친 이지혜가 검을 치켜들었다.
해상전신의 가호와 함께, 용머리 선수상이 붉게 달아오른 바로 그 순간.

“잠깐!”

내가 이지혜를 말렸다. 놀란 이지혜가 입을 벌렸고, 나는 허공에서 헤매는 그녀의 칼을 움켜쥐었다. 발사 직전의 포신이 에너지를 회수했다.

“무슨 짓이야 아저씨!”

기행에 놀란 것은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죽을 둥 살 둥 싸워도 죽을 판에, 갑자기 방해라니.
나는 그에 대답하는 대신 반대편을 가리켰다.

“어?”

정확히 10미터를 남겨놓고, 거짓말처럼 선악의 파도가 멈춰 있었다.

츠츠츠츠츳!

마치, 무언가에게 강력한 통제를 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씨근덕대는 성좌들, 욕설을 지껄이는 마왕들의 얼굴이 가까이서 보였다. 누군가는 불만스런 얼굴이었고, 누군가는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왜 갑자기?”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굳어버린 해일의 꼭대기로, 하나의 성좌와 하나의 마왕이 떠오르고 있었다.
메타트론과 아가레스.
이 전장에서 가장 강력한 두 존재가, 처음으로 진언을 발했다.

[모든 성좌들은 적의를 거두고 자신의 위치로 돌아오라!]
[전투를 잠시 중단한다.]

갑작스런 휴전 선언에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그 휴전의 이유가 새겨져 있었다.

[혼돈 수치가 80을 넘어섰습니다.]
[멸망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됩니다.]


*


혼돈 수치 80.
정말이지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우리를 구한 것은 성좌들도, 마왕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이 전쟁에서 가장 영향력이 약했던 이들이었다.

“아마 전방의 환생자들이 죽는 과정에서 같은 진영끼리의 충돌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약한 선도 선이고. 약한 악도 악이다.
우리를 죽이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있던 선악은, 그런 ‘약자’를 경시한 대가로 멸망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부터 30분에 1포인트씩, 혼돈 수치가 상승합니다.]

혼돈 수치는 80을 넘기는 순간부터 증가 속도가 빨라진다. 지금부터는 아무 충돌이 없더라도 혼돈 수치가 오르게 되고, 정확히 10시간이 경과한 후에는 임계점에 도달한다.
즉, 묵시룡의 부활이 확정된다.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오래된 재앙들이 즐거워합니다.]

<스타 스트림> 역대 최악의 재앙 중 하나, 묵시룡.
선이든 악이든 묵시룡을 부활시키고 싶은 쪽은 없었다.
묵시룡이 부활하면,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 중 사분의 일은 죽어 나갈 테니까. 이 전장의 누구든 그 사분의 일에 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성마대전’의 대전장이 일시적으로 동결됩니다.]
[현재 선과 악의 대표들이 긴급 회담 중입니다.]

그러니 지금 허공에 떠 있는 저 메시지는,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는 선과 악의 발버둥이었다.

[당신은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당신에게 신화급 설화가 발아 중입니다!]
[당신의 새로운 수식언에 이 설화가 반영될 것입니다.]

“칫,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나는 투덜거리는 이길영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일행들은 함선 [터틀 드래곤]의 선실에 모여 앉아 있었다. 정희원과 신유승이 죽은 듯 누워 있는 이현성을 간호하고 있었고, 이지혜는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진짜 이게 끝이야? 우리 아직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이지혜는 안도한 표정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성공을 축하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에게 미안함을 가집니다.]

“······우리엘? 진언으로 말씀해 주셔도 되는데요.”

선실의 모퉁이에 쪼그려 있던 우리엘이 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그런 우리엘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지금 우리엘은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성운이 <김독자 컴퍼니>를 공격한 것. 그리고, ‘절대 선’이라 자칭하는 작자들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서.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당신을 올려다봅니다.]

“걱정 마세요, 우리엘. 당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에덴>도······ 솔직히 별생각 없습니다. 지금껏 도움을 받기도 했고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정말이냐고 묻습니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증오를 드러내 봤자, 우리엘은 상처만 입을 뿐이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서기관은 사실 그렇게 나쁜 존재는 아니라고 말······.]

“저도 압니다. 메타트론이 어떤 성좌인지는. 조금 쉬고 계십시오.”

나는 그렇게 말한 후 선실 밖으로 나왔다.

[30분이 경과했습니다.]
[혼돈 수치가 1만큼 상승합니다.]
[현재 혼돈 수치 : 82]

들려오는 메시지와 함께, 전장의 창공에 회색빛의 거대한 구체가 떠 있었다.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는 구체. 아마 저 구체 안에, 최상위권의 마왕들과 대천사들이 모조리 들어가 회담을 진행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선과 악이 한마음 한뜻으로 <김독자 컴퍼니>와 ‘구원의 마왕’의 뒷담을 까고 있겠지.

“김독자.”

흠칫 돌아보자, 한수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요즘은 네가 내 이름 부르면 겁부터 나. 또 뭔가 사고 쳤을까봐.”
“사고는 네가 치겠지.”

투덜거린 한수영이 허공의 구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
“뭐가.”
“너무 순순히 전개되잖아.”
“자기들도 죽기 싫으니까 그렇겠지.”
“정말 그게 전부라고 생각해?”

한수영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노려보았다.

[설화, ‘예상표절’이 이야기를 지속합니다.]

하얗게 떠다니는 설화의 파편들을 보니, 아무래도 한수영은 저 회담이 시작될 무렵부터 줄곧 「예상표절」을 가동 중인 모양이었다. 내가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떤데?”
“쟤들 너무 조용해. 아무리 묵시룡이 두렵다고 해도······ 뭔가가 찜찜하다고.”

확실히 작가의 감이란 날카로운 데가 있다.
사실 나도 한수영에 말에 동의했다.
선과 악의 회담. 말은 좋다. 하지만······ 내가 아는 메타트론은, 절대로 이런 타이밍에 물러날 존재가 아니었다. 절대 선의 온전한 실천을 위해서는 그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는 존재가 바로 그였으니까.
나는 회색 구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쪽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아낼 방법은 있지.”
“뭔데?”

나는 한수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수영의 입이 딱 벌어졌다.

“빌어먹을, 그런 방법이 있었지 참.”

회담이든 전쟁이든 결국 앞으로 9시간 안에 결판이 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단기 미래라면, 이 세계에서 누구보다 잘 읽어낼 수 있는 존재를 우리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후미 쪽의 선실로 달려갔다. 우리가 찾는 존재는, 이미 우리와 함께 있었으니까.

“야, 예언자!”

문을 박차고 들어서자, 뜻밖에도 선객이 있었다.
사나운 얼굴의 유중혁이 안나 크로프트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그게 무슨 개소리지?”
“말 그대로예요.”

놀란 한수영이 외쳤다.

“미친놈아! 지금 뭐하는 거야?”

유중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더니 멱살을 놓았다.
우리를 발견한 안나 크로프트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살려줘서 고마워요. 역시 ‘구원의 마왕’이군요.”
“뭐, 딱히 구해 드리려던 건 아니었지만······.”
“그쪽도 같은 이유로 저를 찾아온 거겠죠?”

한수영과 내가 유중혁을 쳐다보았다. 뭘 보느냐는 듯 마주 노려보는 유중혁.
역시 유중혁이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간다. 저 녀석은 우리보다 빠르게 이 상황의 해결책을 찾아냈던 것이다. 한수영이 분하다는 듯 이를 갈았다. 하지만 유중혁은 전혀 승리자의 표정이 아니었다.
안나 크로프트가 말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래는 읽을 수 없었어요.”
“무슨 말이야?”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안나 크로프트는 나와 관련된 미래는 좀처럼 예지하지 못했다. 아마 [제4의 벽] 때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뭐랬더라, 누군가가 낙서를 한 것처럼 미래에 노이즈가 꼈다고 그랬던가.
그런데 안나 크로프트가 고개를 흔들었다.

“미래에 노이즈가 낀 게 아니라, 아예 읽을 수가 없어요. 누군가가 페이지에 낙서를 한 게 아니라, 낙서한 페이지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한수영과 내가 서로를 돌아보았다.
아주 천천히 밀려오는 불길한 예감.

“김독자, 이거······.”

페이지에 낙서를 한 게 아니라, 페이지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종류의 미래는 하나뿐이다.

“······설마?”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허공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혼돈 수치가 1만큼 상승합니다.]
[현재 혼돈 수치 : 83]

“아직 30분 안 지났는데?”
“시간이 경과해서 오른 게 아니다.”

굳어진 유중혁의 목소리.
시간이 안 지났는데도 혼돈 수치가 오른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84]

누군가가, 이 세계를 멸망시키려 하고 있었다.





< Episode 76. 묵시록 (2) > 끝

< Episode 76. 묵시록 (3) >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85]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보며 우리는 동시에 망연해졌다.

“······대체 누구야?”

쥐어짜 내듯 던져진 한수영의 물음.
그러나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 애들이 사고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걔들이 넌 줄 아냐.”

아무리 애들이라고 해도, 상황이 상황인데 그렇게 경거망동할 리 없었다.
길영이가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나는 안나 크로프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나 크로프트.”
“찾고 있어요.”

아무리 미래의 페이지가 찢어졌다고 해도, 그 페이지가 사라지기 이전까지의 일들은 남아 있을 것이다. 파본으로 인쇄된 책이라고 해도 폐기되기까지 딜레이가 반드시 존재하는 것처럼.

[혼돈 수치가 상승하고 있습니다!]

“한가하게 기다릴 시간 없다.”

먼저 몸을 날린 것은 유중혁이었다.
송골송골 이마에 땀이 맺힌 안나 크로프트는 열심히 미래의 페이지들을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결국, 나와 한수영도 움직이기로 했다.

“안나, 알게 되면 전음으로 알려 줘요.”

우리는 안나 크로프트를 뒤로 하고 선실 밖으로 몸을 날렸다.
갑판에는 이미 이상 징후를 느끼고 바깥으로 나온 일행들이 있었다.

“독자 씨, 무슨 일이죠?”

정희원의 물음에 나는 최대한 간결하게 상황을 전달했다.

“같은 진영을 공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엥? 왜 그런 짓을 해?”

이지혜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서 혼돈 수치 더 올리면 다 죽는다며? 그래서 천사랑 마왕들도 저기 들어간 거고······.”
“우리랑 같은 목적을 가진 이들이 있는 걸까요?”
“같은 목적이었다면, 하필 지금 혼돈 수치를 올리지는 않겠죠.”

내가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일행들은 벌써 해답을 찾은 듯했다.

“그럼 설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합니다. 못 막으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예요.”
“어떤 미친놈들이······ 아니, 대체 왜?”

어째서 세계에 멸망을 초래하려 드는가.
나는 그에 적확한 대답을 내놓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스타 스트림>에는 모든 불가해한 상황에 만능적으로 쓰일 수 있는 대답이 하나 존재한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종류의 ‘설화’가 있으니까요.”

이 세계에는 ‘선악’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선도 악도 아닌 <김독자 컴퍼니>가 존재하듯, 세상에는 우리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설화를 추구하는 자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멸망을 막기 위해 살아가지만, 어떤 이들은 멸망을 위해 살아간다.

츠츠츠츠츠츠······!

허공의 개연성이 불안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장 곳곳에서 튀어 오르는 스파크.
이미 선수상에 올라 있던 유중혁은 개중 제일 큰 스파크의 위치를 감지한 모양이었다.

“총 다섯 군데다. 흩어져.”

말을 마친 유중혁의 신형이 북쪽을 향해 사라졌다.
나는 일행들에게 지시했다.

“한수영은 동쪽. 유승이랑 지혜, 길영이는 남쪽으로. 희원 씨는 혹시 모르니 함선을 맡아주세요.”
“독자 씨는요?”
“저는 서쪽으로 갑니다.”

스파크는 모든 방위에서 터지고 있었다. 북쪽에 한 개, 동쪽에 한 개, 서쪽에 한 개, 그리고 남쪽에 두 개.

“혼란을 일으킨 게 어느 쪽 진영인지 모릅니다. 만약 같은 진영의 소속원이 저지른 짓이라면, 절대 싸우지 말고 다른 일행들을 부르세요.”

이제 상황이 거꾸로 되어버렸다.
지금까지는 ‘선’에 ‘선’으로, ‘악’에 ‘악’으로 대처해서 혼돈 수치를 키웠다면, 이젠 ‘선’에 ‘악’으로, ‘악’에는 ‘선’으로 대처해야 한다.
‘성마대전’ 본래의 규칙을 지켜야만, 더 이상의 혼돈 수치가 상승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젠장, 상황이 바뀌니까 갑자기 짜증나네. 성좌들 열받을 만도 해.”
“출발할게요!”

이지혜와 아이들이 먼저 출발했고, 나와 한수영도 움직였다.
흑염을 흩뿌리며 도약하는 한수영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많이 나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향해 말했다.

“조심해.”

슬며시 인상을 찌푸린 한수영이 동쪽을 향해 날아갔다.
자식이, 걱정을 해줘도.

―너나 조심해, 멍청아.

한 박자 늦게 날아오는 [한낮의 밀회]에 기분이 묘해진다.
유중혁도 한수영도 많이 변한 것 같다고 생각하면, 내가 오버하는 걸까.

[혼돈 수치가 상승하고 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86]

나는 [바람의 길]을 발동해 허공을 주파했다.
[마왕화]를 발동한 상태였기 때문에 스킬의 가속력은 굉장했다. 순식간에 창공을 가르고 스파크의 근원점에 도착한 나는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숨어 있군.

전장 곳곳에는 환생자들의 시신이 너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시신들을 보며 공포에 질린 환생자 몇이 주저앉아 있었다.
분명 누군가가 여기서 같은 편 학살을 벌인 것이다.

[전용 스킬, ‘독해력’이 발동합니다!]
[특성, ‘시나리오의 해석자’가 발동합니다!]
[사건 정황을 수집해 상황을 진단하는 통찰력이 상승합니다!]

나는 주변에 떨어진 설화 파편들을 읽었다.
학살이 있었던 건 맞다.
하지만 도주의 흔적은 감지되지 않는다.

“사, 살려 주세요. 마왕님!”

무릎을 꿇은 여섯 명의 환생자들이 바닥에 부복한 채 엎드렸다.
나는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여섯 명의 환생자들은 대부분 전투에서 중경상을 입고 피와 설화를 질질 쏟고 있었다.
그런데 단 하나, 설화가 매우 안정된 녀석이 있었다.

“너.”

천천히 고개를 드는 남성의 눈에 사이한 빛이 떠올랐다.
나는 그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종말의 구도자’냐?”

순간, 사내가 나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대비하고 있었던 나는 가볍게 녀석의 공격을 피하며 목을 틀어쥐었다.

“컥, 커헉······!”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예상대로, 이 녀석이 내가 찾던 범인이었다.
마왕의 권속.
굳이 특성창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 녀석도 아니었다.

“벌써 활동을 시작한 건가? 아직은 때가 아닐 텐데?”

내게 목을 틀어 잡힌 사내가 기분 나쁜 웃음을 발했다.

“위, 위대한 종말이 온다. 이미 모든 시나리오는 정해져 있다. 숭고한 절대 설화가 실현될 것이다!”

광신도처럼 번뜩이는 눈동자를 보며 나는 살짝 질리는 기분이었다.
맞다. 원작에서도 ‘종말의 구도자’의 대다수는 이런 녀석들이었다.
이 세계를 지탱하는 단 하나의 ‘절대 설화’가 이미 만들어져 있으며, 모든 시나리오는 그 설화의 의지가 실현되는 것이라 믿는 녀석들.

「킥 킥킥」

머릿속에서 [제4의 벽]이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종말의 구도자들은 모를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설화가, 내가 읽었던 한 권의 소설이란 것을.

「원 래다 멸 망 할 운명 인 건 맞 지」

‘운명 같은 건 없어.’

머릿속에, 유중혁이 살았던 수많은 회차들이 스쳐간다.
수백 번이나 반복되어온 ‘성마대전’.
그리고 그 ‘성마대전’의 마지막은 항상 비슷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원작’일 뿐이다.

“말해. 몇 명이나 ‘성마대전’에 참가한 거지?”

그륵, 그르륵.
사내의 입에서 거품이 흘러나왔다.

“묵시룡을 해방할 셈인 거냐? 그런 짓을 하면 모든 게 끝장난다. 너희가 생각하는 설화의 결말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그냥 설화 자체가 끝장나버린다고.”

사내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낄낄거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격의 파동에 주변의 환생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내 격을 정면에서 받아낸 사내가 부르르 떨더니 칠공에서 피를 쏟았다.
나는 입을 열지 않고 말했다.

[전장에 참가한 녀석들의 명단을 읊어라.]

아득한 격의 위협에도, 사내는 공포에 질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구, 원의, 마, 왕······.”

쾌락과 환희에 젖은 표정. 입으로 피를 질질 흘리는 녀석은 마치 구원이라도 받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여, 죽여줘! 죽여줘어!”

이 미친놈들은 대체 머릿속이 어떻게 되어있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더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명단을 알아낼 수 없다면 직접 몸으로 뛰어 찾는 수밖에.
망설임 없이 녀석의 머리를 내리치려는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
[현재 혼돈 수치 : 87]

아차, 이 녀석은 ‘악’이었지.
재빨리 목줄을 틀어쥔 손을 뗀 찰나, 녀석의 칠공에서 흘러나오는 설화가 급격하게 늘어나며 몸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괴이쩍게 웃는 사내의 얼굴.

······자폭 시퀀스.
피하기엔 늦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디선가 섬광이 날아와 사내의 몸을 일직선으로 꿰뚫었다.

콰지지지직!

마치 태양을 깎은 듯 눈부신 섬광으로 만든 창.
환한 빛살 속에서, 종말의 구도자는 감전이라도 된 양 몸을 떨었다. 외부로 팽창하던 폭발의 힘이 섬광의 창을 통해 흡수되고 있었다.
순식간에 생기를 잃어버린 종말의 구도자는 새까만 재가 되어 사멸했다.
나는 사방으로 흩뿌려진 빛의 설화를 바라보았다.
······이거 익숙한 설화인데?

[이런 축제에 나를 부르지 않다니. 섭섭하군, 구원의 마왕.]

진언을 듣는 순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수르야!”

‘지고한 빛의 신’ 수르야.
그는 한때 <베다>의 성좌였으나, 지난 올림포스 전을 계기로 우리와 ‘거대 설화’를 공유하게 된 성좌였다.

[못 본 사이 대단한 격을 이루었구나. 그대가 인드라를 해치웠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얼빠진 인드라가 가끔 동네북처럼 여겨지긴 하지만, 운만으로 이길 수 있는 녀석은 아니지.]

<베다>를 탈퇴했기 때문인지, 수르야는 인드라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다지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멸한 종말의 구도자의 파편을 살피며 말했다.

[거대 설화 상태가 좀 묘하다 싶었더니, ‘종말의 구도자’가 벌써 여기까지 온 모양이군.]

“이들을 알고 계십니까?”

[<베다>에도 이 녀석들이 침투했었다.]

······<베다>에도?
그러고 보니 베다 안에서도 내분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어쩌면 그게 종말의 구도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츠츳, 츠츠츳.

전장 곳곳에서 번쩍이던 스파크가 급속도로 잦아드는 것이 보였다.
아마 다른 일행들도, 무사히 진압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대충 정리는 된 것 같군요. 생각보다 침투한 녀석들이 많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종말의 구도자가 나타난 것치고는 싱거운 결말이었다.
그런데.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88]

······뭐?

나는 황급히 전장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전장 어디에도, 스파크가 튀는 곳은 없었다.
같은 진영이고 다른 진영이고 할 것 없이, 전투 자체가 없었다.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89]

그런데도 혼돈 수치는 계속해서 증가했다.
등줄기로 서늘한 감각이 밀려들었다.
잠깐만, 이거 설마.

[아래쪽이 아니다.]

수르야의 말과 함께, 나는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위에 떠오른 회색 빛 구체. 대천사와 마왕들이 회담을 위해 들어가 있던 그 구체가, 무지막지한 스파크를 뿜어대며 진동하고 있었다.

······‘종말의 구도자’가 저 안에 있다고?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90]

혼돈 수치는 오직 같은 진영끼리의 전투가 벌어졌을 때만 상승한다.
그런데 저 안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려면······.

[대전장의 기후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하늘에 모여든 구름들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에서 재앙의 기운이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빌어먹을.

쿠구구구구!

수르야도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어쩌면 오늘 내 무덤을 찾아온 것인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차마 보고 싶지 않았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혼돈 수치가 90을 넘어섰습니다!]
[종말의 거대 설화가 준동합니다.]
[거대 설화, ‘묵시록의 최후룡’이 이야기의 시작을 준비합니다!]

대전장 전체를 뒤흔드는 지진.
95번 시나리오에서 느꼈던 아득한 절망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 Episode 76. 묵시록 (3) > 끝

< Episode 76. 묵시록 (4) >





[<스타 스트림>의 모든 성좌들이 재앙의 존재를 감지했습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공포에 질립니다!]

격변하는 기후 속에서, 휴전 중이던 성좌들이 고함과 진언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당황하는 이들. 재앙의 격을 느끼고 겁에 질려버린 이들. 어떻게든 이 시나리오에서 탈출하기 위해 관리국으로 문의를 넣는 성좌들까지. 살아남기 위한 별들의 발악으로 인해 전장은 아비규환이 되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의 「관리국」이 비상사태에 대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관리국이 나섰다.
성좌들의 메시지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것으로 보아, 관리국 쪽에서도 이번 사태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스타 스트림의 「관리국」이 해당 사안을 두고 회담을 진행 중입니다.]

설마 ‘성마대전’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관리국도 몰랐을 것이다.
애초에 ‘혼돈 수치’는 성마대전의 빠른 진행을 위한 양념으로 뿌린 장치였으니까. 그런데 그 수치가 선악 수치를 앞질러버렸고, 심지어는 묵시룡을 깨우려 하고 있다.
묵시룡이 깨어나면 무수한 성좌들이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관리국의 고객들이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란 얘기가 된다.

[관리국이 나선다 해도 깨어나는 재앙을 없었던 것으로 할 수는 없다.]

나도 수르야의 말에 동의했다.
이것은 80번대의 메인 시나리오다. 아무리 관리국이라고 해도, 이미 발생한 ‘거대 설화’를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러니 지금은 관리국의 대처를 믿을 때가 아니었다.

“묵시룡이 깨어나려면 혼돈 수치 10이 더 필요합니다.”

약간이지만 아직 시간은 있었다.
만약 묵시룡의 해방을 막지 못하면, 여기서 일행들은 높은 확률로 전멸한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막을 수 있는가.

당장 생각나는 방법은 물론 있었다.
혼돈 수치를 올리는 원인을 제거하는 것.
문제는, 그 원인이 저 ‘구체’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츠츠츠츠츳······!

“아무리 ‘종말의 구도자’라고 해도 저 안에서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겁니다.”

나는 ‘멸살법’을 통해 ‘종말의 구도자’의 리스트를 알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라 해도, 저 구체의 안에서 오랜 시간을 버틸 수는 없다.
저 안에는 무려 메타트론과 아가레스를 비롯하여 이 세계의 최상위격 성좌들이 들어가 있으니까.
아무리 늦어도 지금쯤이면, 대천사와 마왕들이 ‘종말의 구도자’를 알아서 정리했을 것이다. 그러면 혼돈 수치의 상승도 멈출 것이고······.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91]

허공에서 스파크가 내리친 것은 그때였다. 진동하던 구체의 일부가 희미하게 벌어지며, 뭔가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찢어진 여섯 장의 날개. 내가 알고 있는 대천사였다.

나는 [바람의 길]을 발동해 몸을 날렸다.

안아 든 대천사의 몸은 가벼웠다.
물씬 풍겨오는 푸른 향기. 등줄기를 가른 깊은 상처에서 설화들이 꽃잎처럼 떨어졌다.

“가브리엘.”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대천사 가브리엘, 그녀는 나와 함께 1863회차를 겪고 돌아온 대천사였다.
미래에 자신이 <에덴>을 배신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큰 충격에 빠졌던 성좌.
얼핏 그녀가 이번 사안의 핵심이 아닐까 하는 추리를 해 보았지만, 그럴 턱이 없었다. 애초에 원작에서도 가브리엘의 배신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고, 엄밀히 말해 그건 배신이라 부르기도 어려웠다.
가브리엘의 입술이 힘겹게 움직였다.
목소리는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채근했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가브리엘은 지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뭔가를 내게 건넸다.

가브리엘의 설화였다.

떨리는 입술을 움직이는 가브리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그 입이 전하는 말을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에덴을 구해줘.」

가브리엘의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


메타트론은 자신의 곁에 정렬한 천사들과, 맞은 편에 도열한 마왕들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다들 초조한 기색이었다. 어쩌다가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들.
그 얼굴들의 중심에, 메타트론의 오랜 라이벌이 있었다.

[고작 성운 하나 때문에 이런 자리까지 오게 되다니, 어이가 없군.]

2번째 마계의 주인, ‘지옥 동부의 지배자’.
아가레스가 두꺼운 궐련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승패 결정은 어떻게 할 셈이지? 3차 성마대전을 따로 열 건가? 솔직히 나는 반대다. 다시 이만한 개연성을 모으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테니까.]

이번 성마대전을 개최하기 위해 <에덴>과 <마계>는 모두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성마대전’은 스타 스트림의 ‘거대 설화’ 중에서도 역대급의 스케일. 만약 이 시나리오가 무화된다면, 간신히 그러모은 선악의 설화가 흐트러져 선악 모두가 사멸의 길을 걸어갈 수도 있었다.
메타트론은 회색 구체의 바깥으로 흐릿하게 비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길하게 몰려든 먹구름 너머로 드문드문 천둥이 쳤다. 세기말적인 분위기 때문일까, 메타트론은 문득 오래 전의 일을 떠올렸다.

[아가레스, 첫 번째 마계의 주인이 승천한지도 벌써 수천 년이나 지났군요.]
[한가로운 추억이나 나눌 시간은 없다.]
[그날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이 빌어먹을 ‘벽’을 넘겨받은 날인데, 잊을 턱이 있나.]

[‘선악을 가르는 벽’이 으르렁거립니다.]

아가레스의 화신체에서 불길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그러자 메타트론의 화신체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발생했다.

[‘선악을 가르는 벽’이 추억에 잠깁니다.]

그것은 둘이자 하나인 벽.
세상의 선악을 결정하는, 최후의 벽의 파편.
그 벽을 사이에 두고, <에덴>과 <마계>의 대표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오랫동안, 당신과 내가 줄곧 이 세계의 ‘선악’을 결정해왔지요.]

무엇이 선(善)인가.
<에덴>의 수장인 메타트론조차 그것은 알지 못한다. 선은 그저 무수한 설화들의 집합체였을 뿐이니까.
메타트론은 선대의 설화들을 읽고 이해하며 선을 배웠다. 그리고 그 선들은, 스스로를 설명하는 대신 다른 설화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것은 선이 아니다.」

그렇게 악(惡)이 만들어졌다.
정의(正義)가 정의(定義)되었고, 분노가 발명되었다.

「고로 우리는 악이 아니다.」

그렇게, 선이 만들어졌다.

그 간단한 이분법이 <스타 스트림>을 반으로 찢어 놓았다.
단순하고 확고한 원칙일수록 파급력도 강하다. 수많은 성좌들이 선악의 원칙에 편승했다.

[네놈은 모를 거다. 이 세계에 ‘악’으로 존재한다는 게 얼마나 지루한 일인지.]

아가레스가 궐련의 연기를 뿜으며 말을 이었다.

[‘선악’을 이렇게 만든 것은 결국 네놈이다. 악의 세부를 지우고, 빌어먹을 ‘권선징악’을 유행병처럼 퍼뜨린 네놈이야말로 선악의 설화를 망가뜨린 원흉이란 말이다.]

시나리오에 어떤 세부가 존재했든, 어떤 슬픔과 고통이 존재했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마지막이었다.

선이 악을 징벌했다. 그것이면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쳤다.
분명 그런 시절도 있었다.

메타트론이 말했다.

[당신도 찬성했던 이야기 아닙니까.]
[그때는 그것만이 살아남을 방법이었으니까.]

선은 악을 처벌함으로써 살아남았고, 악은 선에 대항함으로써 연명했다.
그렇게 수만 년의 세월. 선악은 희미해졌고, 정의는 사라졌다. 선과 악은 지루한 늙은이들의 관념이 되었다.
이제 아무도, 권선징악 따위엔 환호하지 않는다.
툭, 아가레스가 피우던 궐련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벌레를 터트리듯 꽁초를 짓이겼다.

[시나리오의 반복 속에 선은 따분한 권태가 되었고, 악은 고루한 클리셰가 되었다. 이제 이 짓도 그만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군.]

아가레스의 말에 마왕들이 일제히 병기를 빼들었다.
메타트론이 말했다.

[여기서 싸우면 공멸하게 될 겁니다.]
[악은 언제나 선보다 쉽다. 너희가 사라져도, 우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선을 잊었다고 해서, 나도 선을 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럼 증명해봐라.]

아가레스의 눈동자가 불타올랐다.

[이젠 같잖은 ‘권선징악’에 놀아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악’이다. 태생부터 ‘악’이었고, 너희를 증명하는 것이 나의 존재 이유였다. 그리고 오늘부로, 나는 그 이유에서 벗어날 것이다.]

마왕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당장이라도 대천사들을 쓸어버릴 것처럼 범람하는 격.
그런데 바로 그때.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83]

시스템 메시지가 허공을 덮었다.
갑작스레 상승하는 혼돈 수치에 대천사들이 놀란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바깥이다! 바깥에서 누군가가 같은 진영을 학살하고 있어!]

아가레스와 마왕들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런 혼란의 중심에서, 오직 메타트론만이 침착하게 웃고 있었다.

[오랫동안 생각해봤지만, 역시 방법은 이것뿐인가 봅니다.]
[무슨······.]
[싸움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싸워드리지요. 하지만 여기서 우리끼리 싸워 성마대전을 끝낸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런 작은 구체 안에서 조악하게 멸망해 간 선악을, 대체 누가 기억해줄 거라 생각하십니까?]

메타트론의 목소리는 기묘한 광기에 젖어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아가레스가 외쳤다.

[메타트론!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이런 생각입니다.]

메타트론의 말과 함께, 대천사들의 선두에 있던 미카엘이 검을 뽑았다.
최강의 대천사가 검을 뽑자 마왕들도 기합을 내지르며 격을 방출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미카엘의 검이 누군가를 찔렀다.

[······미, 카엘?]

믿을 수 없다는 듯 파르르 떨리는 눈꼬리.
미카엘이 찌른 존재는 마왕이 아니었다. 미카엘이 웃었다.

[아쉽군. 우리엘을 제일 먼저 죽이고 싶었는데.]

믿을 수 없다는 듯 도리질을 반복하던 대천사 라구엘이, 설화를 쏟아내며 그대로 절명했다.
동족을 살해한 미카엘의 전신에서 마기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타락 천사의 권능은 같은 대천사를 죽임으로써 더욱 강고해진다.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87]

신화급 성좌에 육박하는 격이 폭발했고, 도륙이 시작되었다. 달아날 곳을 잃은 천사들이 황급히 격을 발출했으나, 그들은 제대로 된 싸움조차 해 보지 못하고 죽어갔다. 본래 미카엘에겐 같은 절대선의 천사를 공격할 수 없는 금제가 걸려 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가능했다는 것은─

[서기관, 어째서······!]

새하얀 빛을 내뿜는 메타트론의 책.
이 학살은, ‘하늘의 서기관’의 묵인하에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88]

천사가 천사를 살해하는 지옥도.
강 건너 불구경을 하듯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왕들이 공포에 떨며 물러나고 있었다.
환한 미소를 지은 미카엘이, 뺨에 묻은 천사들의 피를 닦으며 말했다.

[이제, ‘선’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가장 오래된 선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성마전쟁은 결국 설화들의 전쟁. 그리고 설화들은, 어떻게 해야 자신들이 기억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대노한 아가레스가 외쳤다.

[설마 네놈들, 묵시룡을······!]

아가레스가 황급히 격을 발출하려는 순간, 뭔가가 그의 등을 파고들었다.
자신의 격을 위협하는 은밀한 마기.

[가장 오래된 악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휘청거리며, 아가레스가 돌아보았다.

[······네놈이 왜?]
[당신이 말했잖습니까.]

심장을 도려내는 날카로운 클로의 느낌.
종말의 구도자, 아스모데우스가 웃고 있었다.

[악은 언제나 선보다 쉽다고.]


*


가브리엘의 설화는 아주 짧았다. 짧았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기엔 충분했다.
저 구체 안에서는 이미 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달아나, 가브리엘. 녀석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그리고 라파엘을 비롯한 소수의 대천사들은, 마지막 순간 자신의 격을 희생해 가브리엘을 구체 밖으로 내보냈다.

[선과 악의 정의가 격변하고 있습니다!]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92]

“김독자.”

어느새 유중혁과 한수영이 곁에 와 있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
나는 구질구질한 설명을 보태는 대신 본론만 말했다.

“메타트론이야. 녀석은 처음부터 ‘묵시룡’을 깨울 작정이었어.”

이미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고 있는 듯, 한수영이 인상을 썼다.

“그 자식, 1863회차에 대해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1863회차에서 <에덴>은 묵시룡에 의해 멸망한다.
그리고 메타트론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멸망하지 않을 방법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 말을 한 것은 유중혁이었다.

“묵시룡이 깨어나면, 적어도 이번 ‘성마대전’은 <스타 스트림>이 멸망할 때까지 잊히지 않는 설화가 될 테니까.”
“아니, 다 뒈져버리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야?”
“다 죽지는 않는다. 적어도 살아남은 녀석들은 선악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 테니까.”

에덴과 마계가 멸망해도, 선악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모든 것이 멸망해도, 그 정신은 계승되니까.
무수한 성좌들과 화신들이 죽겠지만, 묵시룡은 ‘악’으로 명명될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그 재앙과 대적하기 위해 싸울 것이다.
<에덴>과 <마계>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 아득한 의지에 한수영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저 미친 새끼들이······.”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93]

올라가는 혼돈 수치를 보며 조금씩 암담함이 밀려왔다.
이 모든 것이 메타트론의 시나리오였다.

“김독자. 이제 어쩔 거야?”

멀리서 다른 일행들과 우리엘이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츠츠츠츠츳!

허공에서 스파크가 내리치며 포탈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도깨비?”

[대도깨비, ‘허주(虛主)’가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대도깨비, ‘허체(虛體)’가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각각 검은색과 흰색 정장을 갖춰 입은 대도깨비들이 위엄 있는 격을 흩뿌리며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급하게 온 듯, 구겨진 와이셔츠와 넥타이가 강풍에 펄럭거렸다.
그들은 곧장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구원의 마왕, 이 ‘암흑 단층’은 곧 소멸한다. 그리고 너는 매우 높은 확률로 사망할 것이다.]

슬슬 관리국이 나설 거라 생각은 했다.
하지만 대도깨비들이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멸망을 예고하러 오신 거라면 좀 늦으셨군요. 벌써 시스템이 한창 떠들어대고 있으니까요.”

내 태연한 대답에 놀란 듯, 대도깨비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소문대로 혓바닥이 긴 녀석이군.]
[그래서 왕께서도 관심을 가지시는 거겠지.]

그게 대체 뭔 소리냐고 물으려는 순간, 대도깨비가 미소를 지었다.
마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겠다는 듯이.

[마왕이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성마대전’을 포기해라.]

즐거운 듯 웃는 대도깨비가, 쓰러진 가브리엘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너를 ‘마지막 시나리오’에 데려가 주겠다.]





< Episode 76. 묵시록 (4) > 끝

< Episode 76. 묵시록 (5) >





마지막 시나리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 흑백이 대조되는 정장을 입은 두 도깨비가 나를 채근했다.

[지금 결정해라. 여기서 죽을 것인지, 아니면 우리와 함께 마지막 시나리오로 떠날 것인지.]

대도깨비 허주와 허체.
이 대도깨비 형제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는 바가 있었다. ‘멸살법’의 후반부에서도 제법 빈번하게 등장하는 녀석들이니까.
그나저나 자신들의 입으로 ‘마지막 시나리오’를 언급하다니······ 드디어 도깨비들도 이 세계의 끝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성좌나 화신들이 생존을 위한 투쟁을 반복하듯, 이야기꾼에게도 반드시 전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 대도깨비들은 그 최후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시나리오? 쟤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한수영은 모르는 눈치였다.
1863회차의 한수영이 마지막 시나리오에 대해선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지.
나는 나와 같은 백색 코트를 입은 한수영을 떠올렸다. 그 꼼꼼한 녀석이 빠뜨렸을 리는 없으니, 아마 일부러 알려주지 않은 것일 터다.

―지금 설명하려면 길어.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알려주지 않는 편이, 3회차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겠지.
간만에 떠올린 1863회차의 한수영 생각에 기분이 묘해졌다.
내가 방문한 1863회차는 최종전을 앞두고 있었다. 그 최종전에서 한수영은 살아남았을까. 살아남았다면, 지금 어떤 존재가 되었을까.
고개를 돌리자 유중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제안을 받아들일 건가?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유중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재미없다는 듯한 표정. 만약 내가 받아들인다고 했다면 이 자리에서 목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대도깨비들은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정은?]

“뭐, 예상하셨겠지만······ 안 합니다.”

[어째서지?]

“수상하니까요.”

[수상하다?]

“애초에 제안 내용부터가 이상합니다. ‘성마대전’을 포기하면 마지막 시나리오에 데려가주겠다······ 여기서 뭐가 빠진 것인지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이야기꾼이시면서 제 설화에 대한 이해도가 굉장히 낮으시군요.”

대도깨비 허체가 어이없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대도깨비 허주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허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곳에 있는 <김독자 컴퍼니>들은 모두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

뜻밖의 선언에 유중혁과 한수영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이곳의 <김독자 컴퍼니>를 모두 살리면서, 마지막 시나리오로 갈 방법.

“아무리 관리국이라도 멋대로 그런 일을 벌이면 개연성의 저울이 기울어질 텐데요.”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다.]

어쩌면 이것은 다시 없을 기회였다.
모두를 살리고 마지막 시나리오에 도달할 기회.
너무나 탐스러워서, 거부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그런 제안.
그럼에도 내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차가웠다.

“당신들도 이제 똥줄이 타는 모양이군요. 그쪽 제안은 내가 ‘성마대전’을 그만두는 게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

“당신들과 ‘스트림 계약’을 맺는 것이 그 대가겠죠. 아닙니까?”

스트림 계약. 그것은 언젠가 비형과 내가 맺었던 계약이었다.
놀란 대도깨비들의 표정이 보였다. 나는 한 방을 더 먹였다.

“‘최후의 이야기꾼’이 되기 위해, 제 설화를 당신들의 것으로 가져다 쓰려는 거잖습니까.”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지?]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여기서 죽는다.]

“그건 모르는 일이죠. 그쪽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매우 높은 확률’이라고. 그러면 매우 낮은 확률로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겠죠.”

[다른 세계선에서 재앙을 보고 온 것 아니었나?]

이번에는 내가 놀랄 차례였다.
이제 대도깨비들도 1863회차의 일을 어느 정도 알게 된 모양이지.

[묵시룡은 일개 성좌나 성운이 막아낼 수 있는 재앙이 아니다.]

나도 알고 있다. 그 끔찍한 묵시룡의 격을. 미래의 세계선에서 직접 느껴보았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웃었다.

“재미있는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이 도깨비의 본분 아닙니까? 중계 준비나 잘 하시죠.”

내 말에 반응하듯, 허공에서 짠하고 비유가 나타났다.

[바앗!]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에 경악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이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킬킬 웃습니다.]
[후원계의 큰 손이 당신의 패기에 300,0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역시 건수가 커서 그런지 들어오는 후원 액수도 크다.
대도깨비는 알 수 없는 눈길로 잠시간 나를 노려보더니, 이내 스르르 자취를 감추었다.

[후회하게 될 것이다.]

연기처럼 흩어지는 대도깨비의 신형.
이걸로, 모든 일행이 확실하게 살아남을 방법 하나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대의 판단은 매번 나를 놀라게 하는군.]

이번만큼은 수르야도 감탄했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나는 내 품에서 의식을 잃은 가브리엘을 내려다보았다.
함께 그녀를 응시하던 한수영이 물었다.

“김독자.”
“왜. 또. 뭐.”
“······오래 생각하고 한 판단 맞지? 같잖은 동정심이라든가, 순간적인 충동 아닌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한수영의 말투에서는 희미한 원망이 느껴졌다.
내가 말했다.

“화내도 돼. 난 방금 엄청난 기회를 걷어찬 거니까.”
“······.”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뭐, 그래. 이유가 있겠지. 솔직히 나도 네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
“뭐? 왜?”

한숨을 푹푹 쉬며 대답하는 한수영의 말을 받은 것은 유중혁이었다.

“그게 네놈이 살아가는 방식이니까.”

평소와 같은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는 유중혁을 보며, 나는 이 두 사람이 내게 무엇을 양보한 것인지 깨달았다.
맞다.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수영이나 유중혁의 방식은 아니다.

“······빌어먹을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엔 이런 방식이 어울리긴 하지. 오늘 일 나중에 꼭 회고록에 쓸 거야. 물론 여기서 살아남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지금부터 어떻게 할 것인지나 생각하지.”

한수영과 유중혁. 너무나 다른 두 사람.
새삼 깨닫게 된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이 둘이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내 의견을 존중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생각했다. 이 두 사람이 있다면, 아직 해 볼 만하다고.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96]

하늘에서는 여전히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회색 구체 안의 전투도 마무리 되어가고 있을 것이다.
이 세계를 파멸로 몰아가는 대가로 살아남을 선과 악이, 저 안에서 곧 모습을 드러내겠지.
한수영이 물었다.

“저거 막을 거야?”

유중혁이 고개를 저었다.

“저 구체는 바깥에서는 침투가 불가능하다.”
“그럼?”
“혼돈 수치가 100이 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묵시룡은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아마 ‘최초의 꼬리짓’이 시작되겠지.”

최초의 꼬리짓.
유중혁도 그 재앙에 관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멸살법’에 등장하는 묵시룡의 예언을 떠올렸다.

「가장 뜨거운 지옥의 중심에서,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인 용이 깨어날 것이다.」
「그는 용 중의 용. 혼돈의 중심에서 태어난 모든 용들의 수장이자 세계에서 가장 늙은 증오.」
「그 용은 하늘을 한 번, 땅을 한 번 보고 꼬리를 내리칠 것이다. 그 한 번의 꼬리짓에 별들이 추락하고 세계의 한 방위(傍位)가 사라지리라.」

1863회차에서는 그 ‘꼬리짓’을 보지 못했다.
그곳의 묵시룡은 완전 해방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유중혁이 결연하게 주장했다.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시발······ 그딴 소리 할 줄 알았어.”

한수영은 허탈한 목소리였다.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98]

이제 남은 혼돈 수치는 2.
멀리서 일행들이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독자 형!”

신유승과 이길영. 그리고 함선을 이끌고 다가오는 이지혜와 정희원도 보였다. 착잡한 표정의 우리엘도 있었다.
그녀는 내 품에 안긴 가브리엘을 발견하고 대경했다.

[······가브리엘!]

나는 그녀에게 가브리엘을 넘겨주었다. 자세한 설명을 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일행들을 먼저 돌아보았다.

“아저씨, 진짜 묵시룡이 깨어나는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군기라도 잡듯이 한수영이 다그쳤다.

“다들 각오해. 이번엔 진짜 장난 아니니까.”
“언제는 장난이었어요?”

이지혜의 대답과 함께 일행들도 준비를 마쳤다.
한수영도, 유중혁도, 신유승도, 이길영도, 정희원도, 이지혜도. 모두 굳은 각오를 마친 얼굴들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쓰러진 이현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99]

그리고 묵시룡의 부활이 임박했다.

[다수의 성좌들이 공포에 질렸습니다!]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이 혼돈에 빠집니다.]
[성운 <올림포스>가 재앙을 대비합니다!]
[성운 <베다>가 재앙을 대비합니다!]
[성운 <홍익>이······.]

쿠구구구구!

섬의 깊은 곳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며 세상천지가 뒤흔들렸다. 모든 것이 거대한 날갯짓으로 뒤덮인 느낌. 주변의 정경들이 잘못 끼운 블록처럼 위태롭게 느껴졌다. 작은 설화들이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지금껏 존재했던 모든 ‘재앙’의 이름을 박탈하듯, 어마어마한 설화가 깨어나고 있었다.

“김독자. 묵시룡이 깨어나면 제일 위험한 것은 성좌들이다.”
“예언대로라면 그렇지.”
“그리고 너는 성좌다.”

최초의 꼬리짓은 하늘의 방위를 부순다.
그것은 즉 해당 방위에 위치한 모든 별들과 수식언의 맥락이 파괴될 것이란 이야기였다. 한수영이 이죽거렸다.

“김독자 넌 어느 방위에 있냐? 동쪽? 아니면 서쪽? 재수 없으면 네가 제일 먼저 죽겠네?”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죽기 전에 살려달라고 좀 빌어보려고.”
“······뭔 개소리야? 설마 너 묵시룡이랑도 아는 사이야?”

말투는 아니꼬웠지만 한수영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해주기로 했다.

“‘묵시룡’은 본래 ‘특정한 용’을 지칭하는 게 아냐. ‘가장 오래된 선’이나 ‘가장 오래된 악’이 특정 성좌를 칭하는 게 아닌 것처럼. ‘묵시록의 최후룡’은 거대 설화 그 자체를 말한다고.”
“잠깐, 그러면······.”
“아직 이 시점에서 ‘누가 묵시룡이 되느냐’는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지.”

한수영의 입이 희미하게 벌어졌다.

[현재 혼돈 수치 : 100]
[혼돈 수치가 한계점에 도달했습니다!]

등골이 오싹한 느낌과 함께, 세상이 새카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지반을 뚫고 올라온 불온한 아우라가 섬 전체를 잠식하고 있었다.

[가장 뜨거운 지옥에서 ‘마룡전(魔龍殿)’이 개방됩니다!]

눈부신 빛살과 함께, 공간이 부서져 나갔다.
그리고 그 공간을 부수고 나타난 거대한 그림자들이 있었다.
이 세계에는 성좌나 초월좌, 이계의 신격들을 제하고도 그들의 힘에 육박하는 괴물들이 있다.
세상 모든 괴수종들의 정점.

그오오오오오오―!

심신을 얼어붙게 만드는 드래곤 하울링. 멸망한 도시의 그림자들이 스쳐가며, 오랜 세월 속에 잊힌 고대의 용왕종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악!]

용들의 브레스에 맞은 성좌들이 비명을 흘리며 산화했다. 허공을 뒤덮은 수백 개의 그림자. 그 아득한 격의 파랑 속에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이 경악했다.
하나하나가 성좌의 힘에 육박하는 용왕종.
그 무수한 용들이, 이 세계를 파멸시킬 단 하나의 묵시룡을 뽑기 위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거대 설화, ‘묵시록의 최후룡’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묵시록의 최후룡’이 재앙의 용을 선별합니다!]

나는 그 압도적인 풍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마침 우리한테도 용이 하나 있지.”

내 말에 신유승이 내 쪽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곁에는, 전신에 두터운 철갑을 덧댄 드래곤이 앉아 있었다.

1급 용왕종, 키메라 드래곤.

신유승의 착실한 성장으로 인해 [키메라 드래곤]은 이제 어지간한 성좌들에게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해졌다.
마계의 낙원에서 태어난 용이, 하늘을 향해 거센 포효를 터트렸다.
허공을 향해 날아오르는 키메라 드래곤을 보며, 한수영이 물었다.

“저 녀석이 ‘왕’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키메라 드래곤은 굉장한 성장력을 가진 개체지만, 아직 묵시룡의 후보가 되기엔 무리였다.

“그럼 대체 뭘 믿고―”
“아직 한 마리가 더 있잖아.”
“뭐? 어디―”

한수영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오른손이 뭔가에 반응하듯 격렬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공이 갈라지며 새카만 어둠이 폭발했다.
근방에 있던 수십 마리의 용들이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하늘이 암전되듯 깜빡였고, 새카만 천둥이 지면을 내리쳤다.
심연 사이로, 뭔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흑요석으로 빚은 듯, 고귀한 비늘을 가진 용.

다른 고대룡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격. 홍옥처럼 빛나는 눈동자. 세상의 어둠을 깎아 만든 날개가 움직일 때마다 황홀한 흑염이 창공을 뒤덮었다.
나는 그 아름다운 유선형의 생명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부디 네 배후성이 승리하기를 빌자고.”

현시점에서 누구보다 묵시룡에 가까운 존재.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시나리오에 현현(顯現)했습니다!]





< Episode 76. 묵시록 (5) > 끝

< Episode 77. 최후룡 (1) >





Episode 77. 최후룡


메타트론은 폐허가 된 회담장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병장기를 쥐고 있었던 마왕들과 대천사들이 모조리 누워 있었다.
흩어지는 선악의 설화.
임계점을 넘어선 혼돈 수치의 영향이, 회색 구체 안까지 침범하고 있었다.
아직 의식이 있는 천사 중 하나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서기관······.]

퍼거걱, 하는 소리와 함께 미카엘의 뒷발이 천사의 머리를 으깼다. 미카엘은 절명한 천사를 걷어찬 후, 품속에 감추고 있던 어린아이 크기의 대천사를 끄집어냈다.
혼절한 대천사는 미카엘의 손아귀에 대롱대롱 붙잡혀 올라왔다.

[라파엘도 죽일까? 이렇게 보내긴 조금 아까운데······.]
[원한다면 살려둬도 상관없습니다. 혼돈 수치는 모두 채웠으니까요.]
[그럼, 저 마왕은?]

메타트론은 여전히 치열한 공방이 오가는 구체의 가장자리를 바라보았다. 전신이 넝마가 된 아가레스가 그곳에 있었다.
아스모데우스를 비롯하여 ‘종말의 구도자’들이 합동 공격을 퍼붓고 있었지만, 마왕 아가레스는 여전히 쓰러지지 않았다. 전신에서 설화를 줄줄 흘리며, 악귀 같은 원한을 두 눈동자에 새긴 채로.
치열한 전투 속에서도 아가레스는 여전히 궐련을 입에 물고 있었다. 심지어 하나도 아니라 여러 개를.

[성흔, ‘괴력의 한 개비 Lv.???’가 발동 중입니다.]
[성흔, ‘민첩의 한 개비 Lv.???’가 발동 중입니다.]
[성흔, ‘마력의 한 개비 Lv.???’가 발동 중입니다.]

그것은 아가레스의 성흔인 [만능 궐련]이었다.
오랫동안 골초로 살아온 아가레스의 주특기. 화신체의 성능을 오버클로킹시키는 설화가 잠재된, 오직 아가레스만의 성흔.
무려 대여섯 명의 마왕에게 합공을 받고서도 여전히 버티는 아가레스를 보며, 아스모데우스가 말했다.

[과연, ‘지옥 동부의 지배자’의 명성이 헛것이 아니었군요.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버틸 수 있을까요?]

아가레스는 대꾸도 않은 채 새로운 궐련을 꺼내 불을 붙였다.
정리된 전장을 가로질러 메타트론과 미카엘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가레스가 말했다.

[메타트론. 다시 생각해라. 이런 식으로는 선악을 지킬 수 없다. 모두가 절멸한 후 기억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기억되기만 한다면 언젠가 다시 부활할 수도 있을 겁니다.]
[부활? 저 빌어먹을 타천사처럼 말인가?]

미카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왕, ‘타락 천사들의 왕’이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폭풍처럼 밀려오는 미카엘의 격에 아가레스가 설화를 쏟으며 물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시선은 메타트론을 향해 있었다.

[그런 식으로 연명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지? 그건 우리가 아니다. 그렇게 되살아난 우리는 ‘메타트론’이나 ‘아가레스’가 아니라, ‘하늘의 서기관’과 ‘지옥 동부의 지배자’일 뿐이다!]
[그것이 우리입니다. 지옥 동부의 지배자여.]

메타트론의 등 뒤로 유구한 설화가 흐르고 있었다.
그가 읽고, 그가 살고, 그가 믿어온 설화들이었다.

[가장 오래된 선이 미소를 짓습니다.]

그것이 ‘하늘의 서기관’이었다.
이 세계의 선을 기록하는 자.
무엇이 선인지를 정하고, 그 기준이 되는 존재.
자신의 오랜 숙적을 바라보며, 아가레스 또한 자신의 곁을 유유히 흐르는 설화를 느꼈다.

[가장 오래된 악이 고개를 갸웃합니다.]

그것은 그가 추종해 온 기나긴 악의 역사였다.
선에게 맞서고, 배제되고, 징벌된 역사.
그 순간, 아가레스는 자신의 수천 년이 하나의 쉼표로 집약되는 것을 느꼈다.

이 흐름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살아있고, ‘하늘의 서기관’이 있는 한. 그들이 맞서 싸우고, 전쟁을 반복하는 한.
메타트론과 아가레스가 죽어도 또 다른 누군가가 ‘하늘의 서기관’이 되고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그딴 것이 선악이라면······.]

퉤, 하고 바닥에 가래침을 뱉은 아가레스가 쓰게 웃었다.

[나는, 이제 악을 그만두겠다.]

아가레스의 손끝에서 궐련이 튀어 올랐다.
허공을 회전하며 연기를 그리는 궐련.
아스모데우스가 다급히 외쳤다.

[막아!]

소용돌이치는 연기가 아가레스의 전신을 휘감았다.

[성흔, ‘비겁의 한 개비 Lv.???’가 발동합니다!]

희뿌연 연기가 폭발하며, 공격이 쏟아졌다.
이윽고 연기가 걷힌 자리에 남은 것은 바닥을 구르는 궐련 한 개비뿐이었다. 종말의 구도자들이 허탈하게 병장기를 회수했다.
메타트론은 바닥의 궐련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꺼지지 않은 매캐한 연기가 허공을 감돌았다.

적수는 떠났고, 이제 선은 홀로 남았다.

이것은 외로움일까, 아니면 일종의 해방감일까. 메타트론은 알 수 없었다.
누군가가 너부러진 꽁초를 짓밟아 껐다.

[가장 오래된 악이 새로운 악을 눈여겨봅니다.]

고개를 들자 아스모데우스가 새침하게 웃고 있었다.

[아쉽게 됐군요. 아가레스의 ‘벽’은 제가 가질 생각이었는데.]

그런 아스모데우스를 보며, 메타트론이 말했다.

[곧 가지게 될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것으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현재 혼돈 수치 : 100]

혼돈 수치는 모두 차올랐고, 묵시룡은 부활 시퀀스에 돌입했다.
그리고 곧, 멸망이 시작될 것이다.

[회담장이 붕괴됩니다.]

회담장을 감싸던 회색 구체가 조금씩 무너지면서, 대천사의 시체들이 바닥을 향해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이 즐거웠는지, 아스모데우스가 물었다.

[그런데, 진짜로 괜찮은 건가요?]

메타트론은 침묵했다. 무엇이 괜찮다 안 괜찮다를 논할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났다. 추락하는 천사들을 보며, 메타트론은 가장 교과서적인 답변을 꺼냈다.

[모든 것이 선의 뜻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에 도달하기 위한······.]

■■.
모든 성좌들의 염원이자, 별의 이야기가 끝나는 곳.
아스모데우스가 말했다.

[■■라······ 그런 것을 추구하는 성좌들은 결국 비슷해지는 모양이군요. 당신은 내가 아는 누군가와 정말 닮았습니다. 성향은 완전히 반대지만.]

그게 누구냐고 물으려는 순간, 메타트론은 창공을 찢는 용의 하울링을 들었다.

그아아아아아―!

수천 마리는 족히 되어 보이는 용들이 하늘을 쏘다니며 격전을 펼치고 있었다. 끊임없이 터지는 폭음. 날개가 찢어진 용들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메타트론이 기대하던 정경은 아니었다.

······아직 묵시룡이 부활하지 않았다고?

[뭘 그렇게 놀랍니까? ■■를 추구하는 건 우리만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이쪽을 올려다보는 한 사내를 마주 보며, 아스모데우스가 웃었다.


*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포효합니다!]

심연의 흑염룡은 강했다.
천공을 뒤덮은 수십 마리의 용들을 단숨에 찢어발기며 급부상한 녀석은, 그야말로 패도적인 격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역시 ‘멸살법’ 최강의 성좌들 중 하나다웠다.
자신의 배후성이 활약하자 신이 난 한수영은 붕대를 흔들며 외쳤다.

“처음으로 자랑스럽네, 흑염룡! 다 죽여버려!”
“힘내, 키메라 드래곤!”

양손을 꼭 잡은 신유승도 간절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심연의 흑염룡’의 존재감이 강해집니다!]
[‘키메라 드래곤’의 존재감이 강해집니다!]

심연의 흑염룡과 키메라 드래곤이 다른 용들을 쓰러트릴 때마다 그들의 위상도 상승하고 있었다. 그 장렬한 전투를 보고 있자니, 나까지 심장이 거칠게 뛰는 느낌이었다.
나는 용들을 보다가 유중혁에게 눈짓했다.

“알겠다.”

내 눈짓을 받은 유중혁은 일행들과 함께 움직였다.
녀석이 맡은 일은 묵시룡이 움직이기 전까지 주변의 성운들과 접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게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허공의 용들을 하나하나 관찰하며 생각했다.

묵시룡의 부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아마 저 용들 가운데, 지난번의 ‘묵시룡’도 있을 것이다.

[몇몇 용왕종들이 당신의 존재를 인식하였습니다.]

“이런.”

콰아아아아아!

나는 반사적으로 [전인화]를 발동해 브레스를 막아냈다. 몇몇 용왕종들이 나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날아갔다. 마치, 뭔가 이상한 것이라도 본 것처럼.

······왜들 저러지? 난 드래곤도 아닌데.

그리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은 ‘용의 제전’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뭐?

[‘용의 제전’에 참가하시겠습니까?]

갑작스레 떠오른 메시지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난 성좌이긴 해도 용은 아닌데 왜 이런 메시지가······.

“그대는 왜 참가하지 않는가?”

······대체 언제 곁에 다가온 거지?
나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성별을 알 수 없는 미형의 인간이 서 있었다. 환하게 빛나는 붉은 머리카락. 강력한 격은 느껴지지 않지만, 어딘가 신비한 기운이 감도는 외모였다.

······환생자인가?
그럴 수도 있다.

이 섬에는 일권무적 유호성처럼 실력을 숨긴 극소수의 강자들이 있으니까.

“그대는 왜 참가하지 않는지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왜지? 그대도 용의 심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 말을 듣고서야 퍼뜩 깨달았다.

[설화 파편, ‘어린 골드 드래곤의 망가진 심장’이 약동합니다!]

그러고 보니 내 심장은 골드 드래곤의 것이었다.
언젠가 ‘이야기의 지평선’에서 흡수한 설화 파편.

[설화 파편, ‘어린 골드 드래곤의 망가진 심장’이 용의 제전에 참가하고 싶어합니다.]

아까부터 심장이 거칠게 뛰는 게 이상하다 싶었더니······ 그래서였나.
환생자가 물었다.

“그대가 진정 용이라면, 마땅히 이 상황에 분노해야 한다.”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요?”
“위대한 용들이 한낱 시나리오의 소재 거리로 쓰이는 상황이지.”

거칠게 뛰던 심장이, 아주 천천히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환생자는 말을 계속했다.

“선악, 소통, 윤회······ <스타 스트림>의 거대한 테마들 속에서, 용들은 끊임없이 이용당해왔다. 그대도 용이라면 제전에 참가하라. 묵시를 실천할 최후룡이 되어, 세상의 멸망에 기여하라. 그대에게서 존재를 박탈한 시나리오의 최후를 목도하라.”

나는 환생자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선악, 소통, 윤회······ 아주 오래 살아온 환생자라면, <스타 스트림>의 그 테마들을 모두 겪었을 수 있다.

정말,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환생자라면.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시나리오의 모든 이야기가 꼭 불행으로만 점철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나리오가 존재하기에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있습니다. 환생자들의 섬에만 있어서 모르시겠지만, 시나리오는 분명 변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하는 내가 싫었지만, 그럼에도 절반 정도는 진심이었다.
멀리서 성좌들과 접선한 유중혁과 동료들이 보였다.
환생자가 나와 같은 광경을 보며 말했다.

“변하고 있다? 시나리오가 어떻게 변했지? 이제 용이나 괴수들도 설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건가?”
“그런 설화는 이미 있습니다.”
“하지만 인기가 없을 텐데?”
“인기 있는 설화도 있습니다. 과거에도 있었고요. 당신도 알잖습니까? 「니벨룽겐의 노래」라든가, 「성 제오르지오 전설」에서도······.”
“거기서 용들은 주인공이 아니었어.”

허공에서 몇몇 용들이 길을 잃고 부딪치며 추락했다.
환생자가 말을 이었다.

“용들은 항상 사냥당하는 존재였을 뿐이야. 만악의 근원으로 불리며, 인간의 공주를 납치하거나 황금 따윌 모으는 볼품 없는 악당이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야. 용이 왜 금이나 다른 종족의 암컷 따위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
“그런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세상에 나와 유희를 즐기는 드래곤들이 활약하는 시나리오들도 많습니다. 가령―”
“‘미형의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드래곤’. 그게 정말 순수한 드래곤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환생자가 말했다.

“수만 년 전에도 용들의 쓰임새는 한결같았지. 결국 그것들은 다른 종족을 위한, 성좌들을 위한 시나리오들이었다.”

목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환생자의 목소리에 심상치 않은 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용을 용으로 대우한 시나리오는 하나도 없었다. 용은 늘 소비되었고, 규정되었고, 시나리오의 공략 대상이 되었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금씩, 숨을 쉬는 것이 버거워졌다. 주변의 공기가 달라지고 있었다.
설화급 성좌인 나를 옭맬 정도의 격. 하늘에서 포효하는 심연의 흑염룡이,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런 흑염룡을 보며 내가 말했다.

“제가 바꿀 겁니다.”
“그대가? 어떻게?”
“다신 용들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별들의 시선이 모이고 있었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곁을 보며 경악합니다!]

환생자가 무표정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흥미롭군.”

환생자의 외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폴리모프(Polymorph).
유희를 즐기는 드래곤들이 즐겨 쓰는 마법.

“수만 년 전에도 내게 똑같은 제안을 한 도깨비가 있었지. 용이 시나리오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다. 오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둑해진 시야가 정신없이 흔들렸고, 코에서는 설화가 주룩주룩 쏟아졌다.
응원하던 신유승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한수영도 입과 코에서 피를 쏟아내며 나를 보고 있었다.
고막이 터질 듯한 이명 속에서 한수영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김, 독자, 이게, 무슨 일······.

손발이 벌벌 떨렸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어떻게든 고개를 들려고 애썼다.

이런 것을 ‘격’이라 부를 수 있는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에게 도망치라고 말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다급한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아득한 용언(龍言)이 나의 귓가로 밀려들었다.

[나를 속였던 그 도깨비는 「도깨비 왕」이 되었다.]

태양이 사라지고, 세상이 누군가의 그림자로 덮이고 있었다.
종말의 용. 묵시록의 최후룡이 마침내 재앙의 날개를 펼쳤다.





< Episode 77. 최후룡 (1) > 끝

< Episode 77. 최후룡 (2) >





[‘제4의 벽’이 격렬하게 반응합니다!]

전대의 묵시룡이 날아오르며 설화의 폭풍이 발생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시야 속에, 나는 고정대를 잃은 허수아비처럼 흔들렸다.
순식간에 창공까지 날아오른 용이 울음을 토하자, 세상의 모든 소리가 잠들었다. 화신체들은 머리가 터져버렸고, 전장의 성좌들은 귀를 막은 채 설화를 쏟아냈다.

츠츠츠츠츠츠······.

묵시룡이 지나간 하늘에 새카만 구멍이 뚫려 있었다.
우왕좌왕하는 용족들이 겁에 질려 달아났고, 분수를 모르고 덤벼들던 용들은 묵시룡의 날개에 스쳐 핏덩이가 되었다.
그 하늘의 중심에서 심연의 흑염룡이 묵시룡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적수를 바라봅니다.]

포효한 흑염룡이 묵시룡을 향해 달려들었다.
두 용이 뒤엉키며 허공에서 격전이 펼쳐졌다.
사실 격전이라기보다는 어른과 열다섯 살의 싸움에 가까웠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분노합니다!]

흑염룡도 다른 용들보다 몇 배는 커다란 몸집인데, 묵시룡 앞에서는 그런 흑염룡이 헤츨링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지지 마! 지면 나한테 죽는다!”

자신의 배후성을 응원하는 한수영의 몸에서도 설화들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거대 설화들이, 자신의 배후성을 위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파멸의 아포칼립스! 심연의 어비스! 이런 거 몇 번이고 말해줄 테니까 지지 마! 제발!”

그녀의 말에 부응하듯, 심연의 흑염룡이 브레스를 뿜어냈다.
브레스에 맞은 용들이 불에 타는 연처럼 떨어졌다. 하늘 전체가 검은 불꽃으로 뒤덮이는 듯했다.

[강한 용이구나. 내가 잠들기 전에는 너와 같은 존재가 없었지.]
[주접 떨지 마 늙은이. 그런 꼰대 같은 소리나 들으려고 현현한 게 아니니까.]
[버릇을 고쳐줄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

날갯짓으로 브레스를 피해낸 묵시룡이 브레스로 반격했다. 피할 틈도 없는 카운터였다.

슈우우우우―

일격을 피해낸 것은 흑염룡의 기지였다. 순간적으로 15살 소년으로 변신한 흑염룡이 용언 마법으로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사용했다.
떨어지는 운석 조각에 맞은 묵시룡이 분노했다.

[······폴리모프? 네놈도 결국 똑같구나.]
[지랄! 늙은이 너도 아까 폴리모프 했잖아.]
[그건 순수한 용이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

으르렁거리며 다시 본체의 모습으로 돌아간 흑염룡이 외쳤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하며 살 거야! 인간이 되든, 오크가 되든, 내 맘이야!]
[모든 용을 대표하기엔 부족한 놈이구나.]

물고 할퀴는 격전에 튀는 스파크.
흑염룡의 공격을 묵묵히 받아내던 묵시룡이 천천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 흑염룡도 곧장 브레스를 모았다.
브레스와 브레스의 대결.
짙은 흑염의 숨결과 묵시룡의 붉은 홍염이 부딪쳤다.

다음 순간, 하늘의 색깔이 일제히 바뀌었다.

눈앞에 태양이 있는 듯한 열기.
장관이었지만 그것을 보고 감탄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열기를 견디지 못한 환생자들은 그 황홀한 불꽃을 눈에 새긴 채 잿더미가 되었다.

[거대 설화, ‘묵시록의 최후룡’이 ‘최후룡’을 정했습니다.]

심연의 흑염룡은 이 자리에서 가장 ‘묵시록의 최후룡’에 가까운 후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아직 ‘최후룡’은 아니란 뜻이었다.

[‘용의 제전’의 승자가 가려졌습니다.]

붉은 구름 아래로, 뭔가가 힘없이 추락했다.

“흑염룡!”

날개의 외피가 불타오르고, 동체 곳곳이 찢긴 흑염룡.
분하다는 듯, 추락하는 흑염룡의 눈이 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아아, 한 손만으로 싸우는 건 무리였나······. 뒤는 너에게 맡긴다, 보이.」

전개는 내가 알고 있던 원작과 마찬가지였다.
전대의 묵시룡은 원숙한 신화급 성좌의 힘을 가진 존재.
그리고 이제 저 용은 그 격마저 아득히 뛰어넘는 재앙으로 다시 한번 진화할 것이다.
입에서 한 사발 피를 토해낸 한수영이 다그쳤다.

“씨발······ 김독자! 이거 뭔데! 네 계획이랑 다르잖아!”
“원작대로야.”
“무슨 뜻인데? 잘 되고 있다는 거야 안 되고 있다는 거야?”

뒤쪽에서 유중혁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부를 수 있는 녀석들은 모두 불렀다, 김독자.

유중혁의 배후로 성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망연한 표정으로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세상의 빛을 삼킨 용의 거체에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모이고 있었다.

[저건 대체······.]

묵시룡의 부활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시나리오에는 사건이 필요하고, ‘묵시룡’은 사건 그 자체다. <스타 스트림>의 의지가 사건을 원하는 한, 묵시룡의 부활은 정해진 것이다.
원작에서도 이 부활을 막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여기서 얼쩡거리며 전대의 묵시룡을 찾아 헤맨 것. 용의 설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것. 그리고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격을 희생하며 질 싸움을 이어간 것, 그것은 모두······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거대 설화, ‘묵시록의 최후룡’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품속의 스마트폰이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에서 묵시록의 재앙이 눈을 떴으니」

tls123이 보낸 최종본에도, 묵시룡의 부활은 예정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지난한 설화 속에서 삶을 잃은 용들이 포효하고」
「바야흐로 붉은 종말의 계절이 찾아오리라」

추락한 용들이 처절한 울음을 토했다. 설화 속에 희생되고, 자신의 넋마저 빼앗긴 채 이름으로 박제된 무수한 용들이 자신들의 왕을 향해 경배하고 있었다.
하늘의 건너편에서 메타트론과 아스모데우스의 모습이 보였다. 회담장의 전투도 이제 막 끝난 모양이었다.
메타트론이 묵시룡의 거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왔는가. 하르마게돈의 악룡이여······.]

거대 설화 「하르마게돈」의 악룡. 한때는 악의 표상이었으나, 가장 오래된 악조차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던 태초의 악.
그 악룡이, 선악의 성좌들을 오연히 내려다보았다.

[늙은 설화들이여. 이제 멸망의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다.]

공기가 거칠게 폭발하며, 묵시룡의 거체가 대기권을 관통했다.
묵시룡이 사라진 하늘의 바깥에서 어마어마한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메인 시나리오가 갱신 중입니다!]
[재앙의 개연성이 시나리오의 한계치를 초과했습니다.]
[시나리오의 난이도가 자동 조정됩니다.]
[재앙의 난이도에 알맞은 시나리오가 재할당됩니다.]

그럴 줄 알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원작에서 ‘묵시룡’은 85번 메인 시나리오의 재앙이다. 그리고 ‘성마대전’은 80번 메인 시나리오다.

[시나리오 도약이 발생하였습니다!]
[재앙의 난이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습니다.]
[과도한 시나리오 도약으로 화신체에 이상이 발생하였습니다.]
.
.
.
[89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

<메인 시나리오 # 89 ― 묵시록의 최후룡>

분류 : 메인
난이도 : 측정 불가
클리어 조건 : ‘묵시록의 재앙’을 막아내십시오.
제한시간 : 해당 시나리오는 제한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상 : ‘묵시록의 최후룡’과 관계된 거대 설화, ???
실패 시 : <스타 스트림>의 멸망이 가속화됩니다.

* 이 시나리오는 페이즈가 구분되어 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를 참고하여 재앙에 대비하세요.

+

나는 침중한 마음으로 시나리오 메시지를 읽었다.
······89번 시나리오라.
시나리오 번호가 원작보다도 더 후반부였다.
시나리오는 후반부로 치달을수록 허용되는 개연성이 커진다.
즉, 지금부터 강림할 묵시룡은 원작보다도 더 강력하다는 뜻이었다.

[<스타 스트림>의 전역에 재앙 경고가 울려 퍼집니다!]
[곧 부활한 묵시룡이 활동을 시작할 것입니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지역이 89번 시나리오의 대상이 됩니다.]

“독자 씨. 모두 데려왔어요.”

뒤를 돌아보자 정희원과 <김독자 컴퍼니>, 그리고 우리를 따르는 성좌들의 모습이 보였다.
몇 시간 전까지 치고받으며 싸우던 이들. 나와 흑염룡이 시간을 버는 동안 유중혁이 규합해 온 아군들이었다.

[미안하다. 생각보다 많이 모아오진 못했어.]

디오니소스가 민망한 얼굴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의 뒤쪽으로 <올림포스>의 신좌들이 도열해있었다.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흉포의 군신, 아레스.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 아테나.
하늘 걸음의 주인, 헤르메스.
화산의 대장장이, 헤파이스토스.
순결한 달빛의 사냥꾼, 아르테미스······.

모두, 우리와 함께 <기간토마키아>를 만들었던 장본인들이었다.

[아버지나 생선 아찌한테도 연락은 해봤는데······.]

‘번개의 좌’ 제우스나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 포세이돈은 참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기간토마키아>에서 신화급 성좌들이 보여줬던 위용을 생각하자면 아쉬운 일이었다.

[이걸론 부족하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올림포스>는 강력했지만, 이들만으로 묵시룡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최초의 꼬리짓’이 원작의 묘사 그대로라면, 지금의 전력만으로는 꼬리짓의 첫 번째 충격파를 견뎌내는 것도 힘들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진언이 들려왔다.

[내 옛 동료들도 돕겠다는군, 구원의 마왕.]

북쪽의 하늘에서 눈부신 빛이 일었다.

[성운 <베다>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황홀한 불길과 함께, 먹구름을 꿰뚫고 나타난 성좌들이 있었다. 그들의 외양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멸살법’의 페이지들이 넘어갔다.
언젠가 만날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은 몰랐던 존재들.

‘야차신왕(夜叉神王)’, 쿠베라.
‘정화의 불꽃’, 아그니.
거기다 ‘그치지 않는 폭풍’, 바유까지.

모두 ‘지고한 빛의 신’ 수르야와 함께 <베다>의 ‘로카팔라’에 소속되어 있던 설화급 성좌들이었다.

[묵시룡이란 녀석은 어디에 있지?]
[간만에 괜찮은 설화를 얻을 기회로군.]
[인드라 녀석은 부상이 심해서 오지 못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성운 <파피루스>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동쪽의 하늘에서.

[성운 <수호의 나무>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다시 서쪽의 하늘에서.

[성운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성운 <십이지>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

한때의 적이었던 성좌들이 <스타 스트림>의 재앙 앞에 하나둘 모이고 있었다.
그 눈부신 별들의 현현에 유중혁과 한수영을 비롯한 <김독자 컴퍼니>의 동료들이 내 곁에 붙어섰다. 다들 긴장한 얼굴들이었다.

“주눅들 필요 없습니다. 우리도 이제 저들 중 하나니까.”

실제로 우리를 보는 성좌들의 시선은 예전과는 달랐다. 처음 <김독자 컴퍼니>가 만들어졌을 때 우리에게 쏟아진 시선이 경멸이나 멸시에 가까웠다면, 이제 그들의 눈빛은 시기에 가까웠다.

<김독자 컴퍼니>는 자신들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다시 스스로의 힘으로, ‘마지막 시나리오’까지 나아갈 것이다.

아직까지 대전장에 합류하지 않고 있던 국지전장의 성좌들까지 합류하자, 이제 모여든 숫자들은 오백이 훌쩍 넘었다.
그런데, 새로 합류한 녀석들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다.

[고작 용 한 마리에 무려 거대 설화라니. 한참이나 남는 장사로군.]
[모두 꺼져라. 묵시룡은 우리 성운에서 사냥하겠다.]
[아뇨, 저 묵시룡은 우리 <수호의 나무>가 사냥하겠습니다.]
[수르야, 우릴 저 묵시룡까지 태워주겠어요?]

그 이야기를 들은 수르야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친놈들이군.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지 못한 건가?]
[아아, 봤죠. 그 이상한 시나리오 연출.]

그 말을 한 것은 국지전장에서 막 합류한 ‘새벽별의 여신’ 바카리네였다.

[고작 일개 괴수종이 그런 격을 가질 턱이 없잖아요, 수르야. <베다>에서 탈퇴하더니 코인이 궁했던 모양이죠?]
[그건 연기가 아니었―]
[열차 기관장께선 겁먹으신 것 같으니 우리끼리 공략 들어가죠.]

<스타 스트림>의 모든 성좌들이 묵시룡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묵시룡이 부활한 것은 이미 수만 년도 더 전의 이야기였으니까.

어떤 신화는, 성좌들에게도 까마득한 옛날의 일인 것이다.

재앙을 겪었던 이도, 재앙 후에 태어난 이도. 모두 재앙을 잊기에 충분한 시간.
메타트론이 경고하듯 입을 열었다.

[다들 진정하십시오. 독단적인 행동은 곤란합니다. 저 묵시룡은―]
[당신은 찌그러져 있어. 당신이 한 짓 때문에 ‘성마대전’의 설화가 통째로 날아갔으니까.]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묵시록의 최후룡’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 Episode 77. 최후룡 (2) > 끝

< Episode 77. 최후룡 (3) >





+

<첫 번째 페이즈 경보>

―3분 뒤 ‘최초의 꼬리짓’이 시작됩니다.
―‘최초의 꼬리짓’은 묵시룡의 부활재해(復活災害)입니다.
―‘최초의 꼬리짓’은 <스타 스트림>의 4분의 1을 궤멸시킬 것입니다.

+

<스타 스트림>의 4분의 1이 궤멸한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페이즈 정보였다.
그런데 시나리오 메시지를 읽은 성좌들은 여전히 긴가민가 하는 투였다.

[4분의 1이 죽어? 관리국도 농담을 할 줄 아는군.]
[도깨비놈들도 뻥카가 늘었다니까.]

이곳의 성좌들 대부분은 시나리오를 진행하기보다는 시나리오를 관람하는 데 익숙한 자들이었다.
자신의 삶을 위로받기 위해 다른 이의 이야기를 착취하는 존재들.
그들은 도깨비들의 고객이었고, 그렇기에 관리국이 그들 모두를 절멸시킬 시나리오를 만들 턱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 세계의 어떤 이야기는, 관객조차도 시나리오의 대상으로 만든다는 것을.

대기권 너머에서 힘을 비축하는 묵시룡을 향해, 성좌들이 일제히 도약했다.

[거대 설화는 우리 것이다!]

성좌들의 눈동자에서 탐욕이 내비쳤다.
「묵시록의 최후룡」은 ‘성마대전’을 대체하는 시나리오.
만약 여기서 ‘묵시룡’을 쓰러트릴 수만 있다면, 그들은 최강의 ‘거대 설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 움직임에 조급해졌는지, 기존 성운의 성좌들도 일제히 대기권으로 도약했다.

[성좌, ‘새벽 별의 여신’이 자신의 격을 해방합니다!]
[성좌, ‘야차신왕’이 자신의 격을 해방합니다!]

가장 먼저 나선 이들은 ‘새벽별의 여신’ 바카리네와 ‘야차신왕’ 쿠베라였다.

[성운, <수호의 나무>가 소속 성좌들에게 개연성을 할당합니다!]
[성운, <베다>가 소속 성좌들에게 개연성을 할당합니다!]

멀어지는 성좌들을 보며 일행들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우리도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절대로 안 됩니다.”

나는 신신당부하듯 말했다. 부나방처럼 뛰어든 성좌들을 제외하고, 연식이 오래된 대부분의 성좌들은 우리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이 싸움의 결과를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시치미를 뚝 뗀 채 상황을 지켜보는 메타트론에게 물었다.

“메타트론. ‘묵시룡의 봉인구’를 만들 겁니까?”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메타트론이 온화하게 웃었다.

[물론 그럴 겁니다. 1863회차에서도 그랬으니까요. 세상에 악이 도래했으니 이제 모두를 구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몇 시간 전까지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대치했던 건 까맣게 잊었는지, 메타트론의 눈빛은 거의 성스러운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예전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끼긴 했는데, 이렇게 보니 진짜로 미친 것 같다.

“그 계획이 성공하면 당신도 목숨을 잃을 텐데요. 그러면 세상에 ‘선’은 사라질 겁니다.”

[제가 사라지는 것이지, 선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벽창호와 얘기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섰다.
뒤쪽에서 비유만큼 작아진 ‘심연의 흑염룡’과 그런 흑염룡을 쓰다듬고 있는 한수영이 보였다. 지친 흑염룡이 허공을 향해 작은 불길을 토했다.
한수영이 말했다.

“김독자.”
“왜.”
“너 뭐 얘기 안 한 거 있지?”

나는 잠깐 멈칫했다가 되물었다.

“뭔 소리야?”
“아니, 수상하잖아. 평소의 너라면 정보부터 다 공유하고 시작했을 텐데······ 너 이번 시나리오에 대해선 왜 정확히 말을 안 해?”

눈을 가늘게 뜬 한수영이 나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이길 방법이 있기는 한 거지?”
“있어.”
“확신할 수 있어? 또 이상한 방법 쓰려는 건 아니고?”
“이상한 방법이 뭔데?”

한수영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홱 그었다.
내가 웃으며 답했다.

“걱정마. 안 그럴 거야.”

하지만 한수영은 전혀 납득한 얼굴이 아니었다. 말을 보탠 것은 신유승이었다.

“아저씨, 그럼 저 성흔은 왜 켜놓은 거예요?”

[성흔, ‘희생의지 Lv.8’이 발동중입니다!]

내가 만든 유일한 성흔이, 허공에서 메시지를 띄우며 일행들의 몸에 힘을 불어넣고 있었다. 정희원이 말했다.

“······그거 이제 끄면 안 되나? 아까부터 계속 거슬리는데.”
“게다가 성흔 레벨은 또 왜 이렇게 높담······.”

이지혜도 투덜거렸다. 나는 변명하듯 말했다.

“이건 그냥 여러분들의 힘을 증폭시키려고 켜둔 것뿐이에요. 진짜로 이상한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자 이길영이 끼어들었다.

“근데 그 성흔, 동료를 위해 희생하려 할 때만 발동하는 거잖아요.”
“아저씨 지금 우리 속이려는 거지?”
“설마 독자 씨 또······.”

일행들에게서 일어나는 무시무시한 격에, 주변의 성좌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유중혁이 칼을 뽑고 있었다.
나는 다급히 묵시룡 쪽을 가리켰다.

“잠깐만요. 지금 그런 거 신경 쓰실 때가 아닙니다. 저기 재밌는 구경거리 있으니까 다들 저거 보세요.”

유성처럼 뻗어 나간 성좌들의 꼬리가, 마침내 묵시룡의 지척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제 저 친구들, 다 죽을 거예요.”
“다들 준비해라. 곧 시작된다.”

유중혁도 [흑천마도]를 뽑으며 말을 이었다.

“놈의 꼬리짓은 총 3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강력한 재앙인만큼, 세 번에 걸친 충격파가 날아올 거다.”
“세 번이나 온다고요?”

이지혜의 물음에 내가 대신 첨언했다.

“충격파는 시발점에서 가까울수록 상쇄가 쉬워. 그리고 처음 두 번은 죽어라 노력하면 버틸만한 정도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중요한 것은 ‘세 번째 충격파’다.
그리고 그것을 막아내지 못하면, 우리는 모두 죽고 <스타 스트림>의 4분의 1이 날아갈 것이다.
멀리서 성좌들과 묵시룡이 충돌하는 것이 보였다. 바카리네가 쏘아 보낸 빛의 파랑이 묵시룡에게 직격했고, 쿠베라의 거환도가 묵시룡의 등을 베었다. 묵시룡의 꼬리가 움직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최초의 꼬리짓’이 시작됩니다!]
[‘첫 번째 충격파’가 발현합니다!]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멀리서 새파란 빛이 터졌다. 그것이 고도로 응축된 스파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차후의 일이었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을 너무나 끌어쓴 까닭에, 후폭풍 그 자체가 되어버린 파멸의 전격.

저것이 바로, 묵시룡의 꼬리가 만든 ‘첫 번째 충격파’였다.

[이깟 것, 이깟 것 따위―]

반항하는 쿠베라가 소리쳤고, 놀란 바카리네가 소리를 질렀다. 묵시룡에게 도전한 수십 명의 성좌들이 동시에 자신의 격을 방출했다 그리고.

뭔가가 부서졌다.

[성좌, ‘새벽별의 여신’이 소멸했습니다.]
[성좌, ‘야차신왕’이 소멸했습니다.]
[성좌, ‘깊은 밤의 늑대’가 소멸했습니다.]
[성좌······.]

빗발처럼 쏟아지는 간접 메시지들.
일대의 별들이 대폭발을 일으키며 동시에 산화하고 있었다.
이지혜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게 버틸만하다고?”

나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나 역시 실제로 꼬리짓을 목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성좌들을 불태우며 체구를 더욱 불린 전격파는 이제 <스타 스트림> 전역으로 뻗어 나갈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그 시작점에 우리가 있었다.

[미친, 달아나!]

겁에 질린 몇몇 성좌들이 몸을 틀었다.
하지만 지금 달아난다고 달아날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나는 진언으로 소리쳤다.

[모두 진정하세요. 막아낼 방법은 있습니다.]
[미친 소리 하지마! 저거 못 봤어?]
[꼬리짓이 만든 충격파는 같은 속성의 격으로 흡수하거나, 반대 속성의 격으로 무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걸 버틸 개연성만 있다면 말입니다.]

번져오는 전격파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가속이 붙은 전격파가 이내 우리를 삼켜버리겠다는 듯 탐욕스런 이빨을 드러냈다.

[모두 비켜라.]

그리고 앞으로 나온 성좌가 있었다.
전신에 눈부신 번개를 두른 그 성좌는 자신의 성유물인 거대한 망치를 하늘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나는 오딘의 아들, 목요일의 천둥.]

그는 언젠가 미식협에서 만났던 ‘목요일의 천둥’, 토르였다.

[이곳에서 묵시룡의 천둥을 묻겠다!]

성유물 묠니르에 내리치는 벼락이 꽂혔다. 바이킹 같은 기상으로 달려나간 그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묵시룡의 전격파에 몸을 던졌다.

츠츠츠츠츠츳!

놀랍게도 그는 전격파를 견뎌냈다.
몰려오던 전격파의 대부분이 그의 망치 묠니르에 쏠리고 있었다. 번개를 받는 피뢰침처럼 그의 몸이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아스가르드>의 모든 성좌들이 토르에게 개연성을 빌려주고 있었다.

[오오오오오오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르는 전신의 혈관이 불거지고 충혈된 눈이 튀어나왔다. 조각 같던 근육이 전격으로 새카맣게 물들고 있었다. 첫 번째 충격파는 꼬리짓 자체가 아니라 꼬리짓에서 비롯된 부산물에 불과했다. 그런데 고작 그 부산물만으로, 설화급 성좌가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견디지 못한 토르가 마침내 망치를 놓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 망치를 함께 잡았다.

[······북유럽 신화에는 별 흥미가 없었는데, 제법이군.]

그는 전혀 뜻밖의 성좌였다. 토르가 경악하며 외쳤다.

[놔라! 네놈 따위가 잡을 수 있는 망치가 아니다! 네놈은 번개를 다룰 수도 없지 않느냐!]
[나도 조금은 할 수 있어. 아버지가 번개의 신이거든.]

번개의 좌의 계승자.
제우스가 떠난 후 디오니소스가 <올림포스>의 계승자가 된 게 맞는 모양이었다. <올림포스>에서 번개의 격을 계승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제우스의 후계 뿐이니까.

[설화, ‘번개의 사육제’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언젠가 내가 물려받을 수도 있었던 그 설화가, 디오니소스의 전신에서 용솟음쳤다. 허리춤에 찬 포도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디오니소스가 짜릿한 비명을 질러댔다.

[끄아아아아― 좋다!]

번갯불에 지져지면서도 디오니소스는 웃었다. <아스가르드>와 <올림포스>의 합작. 동료 성좌들이 몰아준 설화의 힘으로 그들은 버텼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범람하는 묵시룡의 격은 이내 두 성운을 합한 것보다도 더 커졌다. 수르야가 침음했다.

[이럴 때 인드라가 있었다면······ 그 동네북이 그리워질 줄이야.]

원작에서도 첫 번째 충격파는 번개의 삼신에 의해 중화된다.
그런데 하필 <김독자 컴퍼니>가 인드라를 쓰러트리는 바람에, 그 삼신 중 하나였던 인드라의 자리가 공석이 되고 말았다.

[번개를 다룰 수 있는 성좌는 더 없는가!]

본래 여기서 나설 생각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제가 돕겠습니다.”

[‘마왕화’를 발동합니다!]

나는 번개의 성좌는 아니다. 하지만, 비슷한 걸 사용할 수는 있다.

[5번 책갈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전용 스킬, ‘전인화(電人化) Lv.23(+13)’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현재 당신의 육체 구성이 해당 등장인물의 육체 구성과 상이합니다.]
[당신의 ‘격’이 육체 조건의 패널티를 극복합니다.]

전신을 휘감은 백청의 무공. 나는 눈부신 전운을 흩뿌리며 토르와 디오니소스의 곁에 합류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두 개의 거대 설화가 나를 지지했고, 전격의 폭풍이 나를 덮쳤다.
이걸 짜릿하다고 말하다니, 디오니소스는 제정신이 아니다.

[한 잔 하면 버틸 만 해. 마실래?]

그렇게 말하는 디오니소스는 이미 하반신 전체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이미 숯검댕이가 되어버린 토르가 낄낄 웃었다.

[구원의 마왕, 여기서 같이 죽게 생겼군.]
[너랑 같이 죽는다면 그것도 괜찮은 이야기가 되겠어. 다 같이 널리 남는 구전 설화가 되자고.]
[흠, 그럼 그건 <아스가르드>의 설화인가, 아니면 <올림포스>의 설화인가?]
[헛소리들 그만하시고 집중하시죠.]

손바닥부터 아득한 고통이 밀려왔다.
나는 토르, 그리고 디오니소스와 함께 밀려오는 전격을 둑처럼 막아섰다.
이윽고 첫 번째 충격파의 속도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이것만 버티면 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지만 충격파가 줄어드는 속도보다 우리가 밀리는 속도가 더 빨랐다.
디오니소스 소리쳤다.

[빌어먹을, 넘친다―!]

여기서 전력이 방전되면, 뒤쪽의 동료들은 모두 끝장나고 만다.
그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막을 방법이 없었다. 동료들에게 피하라고 외치려는 바로 그때.

누군가의 손이 무너지려는 우리의 둑을 받쳤다.

······전격의 신이 또 남아 있었나?

세계 광포 설화에는 전격을 다루는 존재가 제법 있으니······ 하지만 당장 떠오르는 이름은 없었다. 심지어 전격을 흡수하는 속도가 나는 물론이고 토르와 디오니소스의 그것을 상회하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성좌가······.

[수련을 게을리 한 모양이구나. 아직 이 정도 전격도 받아내지 못하는 수준이라니.]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놀란 토르가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너 같은 성좌는 처음 보는데.]

그 말에 고고한 격이 물결치며 분노를 토해냈다.
보통 미남은 얼굴이 작다고들 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세계에 이 사내보다 미남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성좌가 아니다.]

멍청하게도, 잊고 있었다.
이 <스타 스트림>에서 가장 전격을 잘 다룰 수 있는 존재는 성좌가 아니라 바로 이 사내라는 것을. 허공에 흐트러진 하늘빛 머리카락에서 영롱한 백청의 전격이 폭발했다.

[나는 키리오스 로드그라임. 이 게으른 제자 녀석의 스승이다.]





< Episode 77. 최후룡 (3) > 끝

< Episode 77. 최후룡 (4) >





키리오스의 합류와 함께 첫 번째 충격파는 점차 상쇄되어 갔다. 번개의 성좌가 셋인 것과 넷인 것은 편차가 컸다.
더군다나 키리오스 이후에 합류한 일부 성좌들이 개연성을 빌려주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성좌들의 개연성이 묵시룡의 충격파를 넘어서는 순간이 찾아왔다.

[우오오오오오오―!]

전격파에 그을려 새카맣게 변한 토르와 디오니소스가 반쯤 돌아버린 소리를 냈다. 디오니소스는 얼마나 포도주를 마셔댔는지 까맣게 탄 몸에 얼굴만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술이 넘어 간다 쭉쭉쭉쭉쭉!]
[<올림포스> 산 술맛이 궁금하군. 나도 좀 줘보게!]

그렇게 첫 번째 충격파의 후폭풍이 꺼질 즈음, 두 성좌는 완전히 고주망태가 되어있었다. 한심한 눈길로 그들을 보던 키리오스가 물었다.

[제자여, 저놈들도 네 동료들인가?]

“남입니다.”

[첫 번째 페이즈가 종료됩니다.]
[축하합니다. ‘최초의 꼬리짓’의 첫 번째 충격파를 무사히 견뎌냈습니다!]

······해냈다. 저 빌어먹을 ‘꼬리짓’의 첫 번째를 견뎌낸 것이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황폐해진 전장의 곳곳에 전격파에 탄 시체들이 강을 이루고 있었다. 누군가는 우리가 막아내지 못한 전격에 휩쓸렸고, 누군가는 인근의 후폭풍을 감당한 것만으로 화신체가 터져버렸다.
오백은 족히 넘던 숫자의 성좌들이, 방금의 일전으로 인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거짓말 같은 죽음이었다.

······이걸 버텼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겨우 첫 번째에서 이 정도인데,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어떨 것인가.
고개를 들자, 발광하듯 밤하늘을 밝히는 별들의 메시지가 보였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의 난이도에 경악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관리국에 해당 시나리오의 개연성을 항의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시나리오라고 주장합니다!]
[다수의 성운들이 시나리오 취소를 요청합니다!]

시나리오 취소라.
아직도 그런 망상을 하는 녀석들이 있다니 우스운 노릇이었다.

[해당 시나리오는 취소되지 않습니다.]
[시나리오 지역 내의 모든 성좌들은 다음 페이즈에 대비하기 바랍니다.]

멸망은 계속된다.
경악하는 성좌들의 메시지가 이어지는 한편, 반대쪽 하늘에서는 여전히 후원 세례가 이어지고 있었다.

[성좌, ‘번개의 좌’가 당신을 들여다봅니다.]
[성좌,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성좌, ‘흙으로 사람을 빚은 대모신’이 당신이 얻을 설화에 관심을 가집니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성좌들이 당신을 주목합니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성좌들이 당신의 활약에 흥미로워합니다.]
[3,000,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번개의 좌’ 제우스,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 포세이돈, 거기다 ‘흙으로 사람을 빚은 대모신’ 여와를 비롯한 ‘마지막 시나리오’의 성좌들.
시나리오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애초에 이번 사태로 위협을 느끼지도 않는 <스타 스트림>의 최정상에 군림하는 존재들이 그곳에 있었다.
<스타 스트림>의 최종 시나리오 지역은 이번 ‘최초의 꼬리짓’의 파괴 구역에서 배제된다.
이 세계의 ‘결’을 앞둔 그들에겐 동료 성좌들의 파멸조차 일개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10분 뒤, 두 번째 페이즈가 시작됩니다!]

막간의 10분.
나는 한숨을 놓으며 키리오스를 돌아보았다.
예전보다 훨씬 웅장해진 키리오스의 격.

“그간 또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셨나 봅니다.”

[그걸 알아볼 정도는 된 모양이구나.]

투덜거리는 키리오스의 말투에 가시가 돋쳤다.
얼굴만 유중혁 뺨치는 게 아니라 말투도 유중혁 뺨친다.
냅다 뛰어온 이지혜가 내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아저씨! 전기 오징어구이 되는 줄 알았잖아!”

얘는 꼭 비유를 해도······.

“키리오스 할아버지! 우리 대사부는요? 같이 안 오셨어요?”

[파천검성은 일이 있어서 늦을 것이다.]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한 키리오스가 내 쪽을 흘겨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지금쯤 내 제자놈이 반쯤 죽어있을 것 같아서 서둘렀다. 그런데 생각보단 멀쩡하구나.]

아쉽다는 건지 다행이라는 건지 모를 말투였다.

“조금 더 늦게 오셨다면 반쯤 죽은 게 아니라 그냥 죽었을 겁니다. 그보다, 이제 두 번째 페이즈를 대비해야 합니다.”

내 말과 함께 유중혁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하르마게돈」의 구전에 따르면 ‘두 번째 충격파’의 속성은 염열(炎熱)이다.”

멀찍이 보이는 묵시룡의 꼬리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저 꼬리는 엄청난 속도로 진동하고 있었다.
시공간의 축을 비틀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마찰열.
새카맣게 익은 내 손목을 잡으며 신유승이 입을 열었다.

“아저씨. 다음 페이즈에는······.”

신유승과 이길영. 아이들의 결연한 눈을 보는 순간, 그들이 무슨 말을 할지 나는 깨달았다. 유중혁이 끼어들었다.

“너희 둘은 안 된다.”

그 냉정한 선포에 아이들이 즉각 반발했다.

“왜요? 우리도 <김독자 컴퍼니>에요!”
“네가 뭘 알아 시커먼 놈아! 너한테 물어본 것도 아니거든?”

이길영의 도발에도 유중혁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답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효율의 문제다. 너희는 ‘화염’ 속성을 가진 성흔이나 스킬이 없다.”

충격파를 상쇄하기 위해서는 같은 속성의 ‘격’이 필요하다. 하지만 신유승이나 이길영에겐 화염 계통 스킬이 없었다.
분한 듯 어깨를 떨던 이길영이 외쳤다.

“그럼 너도 못 싸우겠네! 너도 그런 거 없잖아!”
“나는 있다.”

유중혁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의 검을 들었다.
다음 순간 [흑천마도]의 칼날 위에 불꽃 강기가 덧씌워졌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열화신검 Lv.???’을 발동 중입니다.]

“이, 이······!”

나는 울먹거리는 이길영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원작에서도 명시되어 있듯, 유중혁이 가지지 못한 속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 자식, 생각해 보니 전격 속성도 가지고 있었는데 왜 처음부터 도와주지 않은 거지?
유중혁이 나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네놈이 돕지 말라고 징징댔던 건 잊었나?”
“아, 그랬지 참.”

말하고 나서 흠칫했다.
이 자식,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내 속내를 읽었지?

“다음 페이즈에 참가할 성좌들을 발표하겠다.”

어느새 성좌들의 중심에 선 유중혁이 선별을 시작했다.


*


<스타 스트림>에 역대급의 재앙이 찾아왔고, 성좌들은 처음으로 온전한 죽음에 노출되었다.
유중혁의 지휘 아래, 자존심 강한 성좌들이 하나둘 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대는 회귀자라고 들었다. 이 상황에 대한 정보도 알고 있는 건가?]

“물론 알고 있다.”

성좌들의 동공에 희미한 신뢰가 감돌고 있었다. 위급한 상황일수록 정보는 권력이 된다. 성좌들 사이에서 알려져 있던 유중혁에 대한 소문들이, 이번에는 유중혁의 지도력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순식간에 전력 배치를 끝낸 유중혁이 전선의 중심에 섰다.
그런 유중혁을 보며, 한수영이 중얼거렸다.

“······패왕은 패왕이네.”

곁에서 검을 닦던 정희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지.”
“분하지만 <한수영 코퍼레이션> 다음으로 우리 성운에 어울리는 이름은 <유중혁 컴퍼니>일지도 모르겠어.”
“대표가 바뀌기 전에 일단 노조부터 설립해야겠는데.”
“노조라······.”

한수영이 피식 웃으며 정희원을 보았다.
이번 ‘염열파’의 선발대에는 두 사람도 함께였다.
흑염룡의 [흑염]에는 홍염의 격이 담겨 있고, 우리엘의 [지옥염화]에도 지옥불의 힘이 새겨져 있다. 그러니 두 사람은 이번 전선의 최고 주력인 셈이었다.

“너랑 같이 싸우게 될 줄은 몰랐네.”
“피차 마찬가지야.”

정희원이 [심판자의 검]에 붙은 잔여 먼지를 후후 불어 털었다.
무광택의 단단한 칼날. 한수영은 오래전 ‘별의 증명’의 무대에서 저 검과 맞섰던 적이 있었다.
그후 정희원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서로 딱히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런 종류의 말재간에는 재능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한수영도, 이번만큼은 정희원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근데 그건 왜 짊어지고 다니는 거야?”
“아, 이거.”

정희원은 자신의 등에 매달린 거대한 짐덩이를 보다가 쓰게 웃었다.
철골로 만든 십자가 위에, 둘둘 묶인 이현성이 매달려 있었다.

“이렇게 해둬야 보호할 수 있어.”
“······이미 성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보이는데? 십자가는 어디서 난 거야?”
“내 배후성.”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뭔가 신성 모독적인 비주얼인데. 우리엘 진짜 천사 맞아?”
“뭐, 마왕도 저 모양이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전열의 뒤쪽을 향했다.
전열 밖 성좌들의 무리 속에 김독자가 있었다. 김독자는 음울한 얼굴로 바닥에 손가락을 대고 있었는데,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는 눈치였다.
한수영이 말했다.

“유서라도 쓰는 건가?”
“그럴지도 몰라. 저거 죽기 직전에 짓는 표정이잖아.”

끔찍하다는 듯, 정희원이 이를 갈았다.

“또 그런 일이 벌어지면 이번엔 진짜─”

[‘최초의 꼬리짓’이 재개됩니다!]

그리고 전방에서 커다란 빛이 터져 나왔다.

“준비.”

유중혁의 신호와 함께, 성좌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그러쥐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경고합니다!]

환하게 작열하는 염열파의 파랑. 하늘과 땅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불태워버리는 그 자욱한 홍염에 한수영은 질린 기색이었다.

“제기랄, 염룡이 자식이 지지만 않았더라도······.”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놈을 너무 얕봤다고 말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처음부터 양손으로 싸웠다면······.]

“닥쳐!”

그리고 염열파가 성좌들을 삼켰다.

쿠구구구구구구.

범람하는 염열파의 중심에서 한수영은 필사적으로 [흑염]을 발동했다. 흑염룡의 격이 그녀의 전신에 깃들며, 염열파의 열기가 그녀의 몸속으로 빨려들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지금껏 쌓아왔던 설화들이 녹아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김독자가 이런 걸 버텼다고?

그나마 위안이 있다면 그녀의 곁에 정희원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정희원뿐만이 아니라 불에 관해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성좌들이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이가 바로 전방에서 불꽃을 받아내는 ‘정화의 불꽃’ 아그니였다.
아그니는 신화급 삼신을 제외하면 <베다> 최강의 성좌 중 하나였다.
강력한 성좌답게 얼마나 힘을 쏟고 있는지, 아그니는 아예 전신이 불꽃으로 화해 염열파를 견뎌내는 중이었다. 심지어는 눈이 하얗게 돌아가면서······.

“······저 자식 불타고 있잖아!”

타닷, 하는 소리와 함께 아그니의 몸이 잿더미로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기점으로 곳곳에서 성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끄아아아아악―!]

라인이 밀리고 있었다. 전격파를 상대할 때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였다. 염열파에 녹아내린 성좌들이 몸부림치며 고통을 호소했고, 불길은 그런 성좌들을 장작 삼아 더욱 강렬한 화마를 일으켰다.

밀린다.

격으로 보호하고 있던 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 코앞까지 밀려온 열기에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어느새 염열파는 한수영의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정희원이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우리엘!”

우리엘과 흑염룡의 힘이 더해지며 일시적인 방어벽을 구축했다. 염열파는 한순간 주춤거리는 듯했지만, 이내 조금씩 격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한수영과 정희원은 어깨를 맞댄 채 버텼다. 흑염룡도 우리엘도 조금씩 힘이 빠지고 있었다.
애초에 흑염룡은 ‘용의 제전’에서 힘을 많이 소비한 상태였고, <에덴>의 반파로 개연성을 나눠 받지 못한 우리엘도 상황은 비슷했다.

[성운 <베다>가 개연성의 일부를 회수합니다.]
[성운 <파피루스>가 개연성의 일부를 회수합니다.]

개연성을 공급하던 성운들도 하나둘 철수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가진 거대 설화 이상의 개연성을 사용하게 되면, 성운들은 이번 거대 설화를 얻어도 남는 것이 없다.
묵시룡에 의해 멸망하든 개연성의 후폭풍으로 멸망하든 성운들의 입장에서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핏자국 속에 말라비틀어진 입술. 한수영이 말했다.

“젠장, 김독자 걱정할 때가 아니었네.”
“내 걱정?”

한순간 청량감이 흐른다 싶더니, 익숙한 힘이 둘의 등을 감싸왔다.
한수영이 투덜거렸다.

“유서는 다 쓴 거냐?”
“······뭔 소리야?”

[성운, <김독자 컴퍼니>가 개연성을 제공합니다.]

<스타 스트림>에서 개연성은 곧 바람이다. 모든 이들이 포기한 이야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음.
아직 이 시나리오를 포기하지 않은 소수의 소망이 그들을 지탱하고 있었다.
한수영이 쓰게 웃었다.

“미련하긴······ 다들 그냥 도망가지 그랬어?”
“가긴 어딜 가겠어요.”

이지혜의 [터틀 드래곤]이 화포를 쏘며 전진했다. 미래 기술이 집약된 [터틀 드래곤]의 철갑이 무너지는 정희원과 한수영을 대신해 염열파를 받아냈다.

[거대 설화, ‘넥스트 시티’가 부서지고 있습니다.]

홀로 불길을 견디는 이지혜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아무리 [터틀 드래곤]이 강력한 설화병기라 해도, 이런 상황을 위해 제작된 전함은 아니었다.
한수영이 절망적으로 외쳤다.

“망할! 아무라도 좋으니까 빨리 와서 도와! 불 속성 가진 놈들 많잖아!”

하지만 밤하늘에서는 아무도 응답하는 이들이 없었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성운 <김독자 컴퍼니>를 응시합니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염열파로부터 대피합니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성좌들이 시나리오를 지켜봅니다.]

약한 성좌들은 두려움에 달아나기 바빴고, 고강한 성좌들은 이 구경거리를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진짜 우리뿐이야?”

[터틀 드래곤]의 외피가 녹았고, 열화신검을 발동한 유중혁이 쓰러진 이지혜를 업었다.
주변의 모든 것을 태워버린 염열파가 다시 한번 범람했다. 이번에는 막아낼 수 없는 크기였다.
우리엘도, 흑염룡도, 해상전신도, 심지어는 키리오스나 저 유중혁이라 해도······.

“버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김독자가 말했다.

“이제 괜찮습니다. 좀 헷갈렸어요. 저도 처음 해보는 거라.”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는 순간, 뒤쪽의 바닥에서 뭔가가 솟아났다. 아까 김독자가 쪼그려 앉아 있던 자리였다. 바닥에 넓게 펼쳐진 어둠의 육망성. 그 육망성 너머로 뭔가가 소환되고 있었다.

콰콰콰콰콰콰!

밀려드는 염열파를 그대로 받아내는 거체. 한수영이 눈을 크게 떴다.

“······플루토?”

그것은 거신병 플루토였다. 그런데 그냥 플루토가 아니었다. 아무리 플루토라고 해도, 단신으로 저 염열파를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콰아아아아아!

플루토의 안에 탑승한 누군가가, 설화급 성좌들조차 견디지 못한 염열파를 단신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플루토에 쥐어진 서슬 퍼런 낫을 보는 순간, 한수영은 그게 누군지 깨달았다.

설화병기 플루토는, 본래 김독자의 것이 아니었다.

[거대 설화, ‘명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오직 소수만이 바라는 이야기라 해도, 그 소수가 누구냐에 따라 개연성의 크기는 달라진다. 그리고 지금 나타난 존재는, 그런 개연성을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였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올림포스>의 가장 뜨거운 지옥을 지키는 성좌.
신화급 성좌 하데스가, <명계>를 이끌고 전장에 강림했다.





< Episode 77. 최후룡 (4) > 끝

< Episode 77. 최후룡 (5) >





우리의 뒤쪽에서 어둡지만 따뜻한 기류가 다가왔다.
그 격이 누구의 것인지 아는 나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소환 개연성을 <명계>에 부담하다니······.]

“아직은 부모님께 의지하고 싶은 나이라서요.”

[한반도의 젊은이들은 일찍 독립한다고 들었는데, 잘못 알고 있었군요.]

처음으로 친척집에서 나와 고시원에 들어갔던 날이 생각났다.
열일곱 살의 일이었다. 나는 짐짓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저 같은 젊은이도 있어야 균형이 맞는 법이잖아요.”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시나리오에 현현합니다!]

문득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아직 학생이었던 시절, 학교 행사가 열릴 때면 늘 비어 있었던 부모님의 자리.
나는 늘 친구들의 마음이 궁금했다. 저 자리가 채워져 있다는 것은, 부르면 달려와 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이제, 나도 그 심정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내 곁에 선 페르세포네가 염열파를 견뎌내는 하데스를 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플루토에 타기로 했었잖아요. 하여간 성격 급하기는.]

하데스가 막아낸 뜨거운 열기의 잔재가 허공에 잿가루처럼 퍼지고 있었다. 강력한 상대가 나타난 걸 알았는지, 묵시룡도 기세를 올렸다.

콰아아아아아!

최전방에서 염열을 감당하던 플루토가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데스는 지금 자신의 격을 온전히 드러낸 상태가 아니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주춤거리며 자신의 아내를 돌아봅니다.]

[내가 혼자선 안 될 거라고 했죠?]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불행한 얼굴로 자신의 아내를 돌아봅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대충 어떻게 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하데스가 탄 플루토의 장갑에서, 설화들이 옴지락거리며 요동치고 있었다.

[설화, ‘아내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한숨을 푹 내쉰 페르세포네가 지휘라도 하듯 허공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손끝에서 작은 음표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클래식 음악의 서두처럼, 설화가 열리고 있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명계>의 개연성을 움직입니다!]

<명계>는 하데스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페르세포네는 저승의 ‘왕비’가 아니라 ‘여왕’이다.
즉, 둘은 성운 <명계>에서 동등한 지분을 가진 부부라는 뜻이다.

하데스의 속성은 어둠과 불.

<올림포스>의 밤과 지옥을 수호하는 그의 진정한 격이 깨어나고 있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순간적으로 전신을 구타당한 것처럼 막대한 충격이 찾아왔다. 어질어질한 시야 속에 비틀거리며 고개를 들자, 어둠과 불의 화신처럼 그곳에 서 있는 플루토가 보였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성좌들이 몹시 불쾌해합니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성좌들이 ‘부유한 밤의 아버지’를 견제합니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성좌들이 <명계>의 참견을 탓합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부유한 밤의 아버지’의 참전에 감탄합니다!]

콰콰콰콰콰콰!

<베다>의 아그니가 죽었고, <아스가르드>나 <황제>에서 불을 담당하던 성좌들은 이미 꽁무니를 빼버린 상황이었다. 그나마 자신의 빛으로 유사 불꽃을 생성한 수르야가 분투 중이었지만, 그 역시 전신의 설화가 반파된 상태였다. 수백 명이 넘는 성좌들이 달려들어도 막을 수 없었던 재앙.

그 재앙을, 하데스가 단신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하데스, 이렇게 날뛰는 건 오랜만이죠?]

하데스의 포효에 맞춰 힘차게 지휘를 이어가는 페르세포네. 그녀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설화들이 플루토의 전신에 깃들고 있었다.
<올림포스>의 오랜 그늘 속에 가려져 있던 <명계>의 힘. 그들이 자신의 힘을 증명하고 있었다.

[설화병기 ‘플루토’가 성유물 ‘이지스의 방패’를 사용합니다!]

<올림포스>의 성좌들도 그에 힘을 보탰다. 아테나는 자신의 방패를 내주었고, 다른 성좌들 또한 본연의 거대 설화 개연성까지 희생해 힘을 빌려주고 있었다.
지금껏 한 번도 밤하늘의 성좌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그 생각이 바뀔 것 같았다.

[다수의 성좌들이 명왕의 현현에 감사해합니다.]
[절대다수의 성좌들이 ‘부유한 밤의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절대다수의 성좌들이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을 찬양합니다!]

세상의 파멸을 막아내는 하데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처음으로 신화라는 게 무엇인지 실감이 났다.
세계의 명운 앞에서 자신의 목숨조차 아끼지 않는 마음. 어쩌면 저것이, 1세대의 도깨비들이 성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영웅 서사였을 것이다.

“뭘 그렇게 넋 놓고 있는 거지? 아직 끝난 것도 아니니 정신 차려라.”

돌아보니 유중혁이 딱딱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유중혁도 마찬가지다.
저 하데스를 보면서, 유중혁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하하, 지하철 메뚜기남! 이게 진짜 내 힘이라고! 큭큭, 큭큭큭큭!]

플루토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김남운의 목소리.
쟤도 있었지, 참.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플루토의 광기를 좋아합니다.]

누가 원작 짝꿍 아니랄까봐······.

[곧 두 번째 페이즈가 종료됩니다.]

어쨌거나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염열파의 불길은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하데스는 잘 버티고 있었다. 플루토의 내구도는 충분했고, 개연성을 보태는 성좌들의 숫자도 조금씩 늘어났다.
그렇게 얼마나 더 지났을까. 마침내, 염열파의 불길이 멎었다.

[두 번째 페이즈가 종료됩니다.]
[축하합니다. ‘최초의 꼬리짓’의 두 번째 충격파를 무사히 견뎌냈습니다!]

이번 페이즈를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모두의 협력 덕분이었다.
정희원과 한수영이 힘내주지 않았더라면, 이지혜가 자신의 함선을 돌격하지 않았더라면, 명계의 부부가 제때 와주지 않았더라면······.
그중 하나라도 빠졌다면, 절대 막을 수 없었다.

[절대다수의 성좌들이 이 ‘거대 설화’를 좋아합니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성좌들이 이 ‘거대 설화’를 불편해합니다.]

마침내 세 개의 페이즈 중, 두 개를 버텨냈다.
‘최초의 꼬리짓’의 모든 페이즈는 초반에 진압해야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원작이었다면 지금쯤 이미 수십 개의 성운이 작살나고 하늘의 팔분의 일이 무너진 상태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다시 페이즈 준비 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쿠구구구구구!

“독자 씨! 저기!”

정희원의 목소리와 함께 뒤를 돌아보자, 묵시룡의 꼬리에서 뭔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분명 염열파 페이즈는 끝났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생각을 대신해서 말한 것은 메타트론이었다.

[예상보다 너무 빠르군요.]

[신화급 성좌의 개입에 시나리오 개연성을 조정됩니다.]
[시나리오의 개연성이 페이즈의 진행 속도를 올립니다.]
[30초 뒤, ‘세 번째 페이즈’가 시작됩니다!]

페이즈 시작을 막아 보려는 듯, 하데스가 자신의 격으로 묵시룡을 압박했다. 페르세포네도, 그 외의 성좌들도 모두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들.]

지금 세 번째 페이즈가 시작되면, 하데스라고 해도 막아낼 수 없다.
하데스의 속성은 불과 어둠.
그는 세 번째 충격파를 막아내기에 적합한 성좌가 아니었다.
나는 메타트론을 향해 물었다.

“봉인은 얼마나 더 걸립니까?”

[제시간 안에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메타트론의 표정에도 희미한 절망이 머물고 있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슬슬 깨닫는 중일 것이다.

[내가 시간을 벌지.]

그 말을 한 것은 줄곧 격을 비축하고 있던 미카엘이었다.
하데스의 활약을 보며 자극을 받았는지, 그는 전신의 격을 해방하며 날개를 퍼덕였다.
절반의 선과 절반의 악.
미카엘의 얼굴에 머무르는 설화들을 보며, 메타트론이 말했다.

[구원의 마왕, 이미 알고 있겠지만 세 번째 충격파는 오직 ‘혼돈’의 힘을 가진 존재만이 막아낼 수 있습니다.]

멀리서 충격파의 준동이 시작되었다.
지금껏 겪었던 두 번의 충격파는 엄밀히 말하면 충격파가 아니라 ‘세 번째’의 전조일 뿐이었다. 지금부터 우리가 상대할 충격파야 말로, ‘최초의 꼬리짓’의 본질인 것이다.
메타트론이 물었다.

[당신 쪽에도 ‘혼돈’의 힘을 가진 존재가 있습니까?]

나는 일행들과 성좌들을 돌아보았다.
사실 돌아보나 마나였다. 저 유중혁조차 혼돈 속성은 사용할 수 없다.
혼돈은 속성이 아니라 반속성이니까.
본래 ‘혼돈’은 성좌들이나 마왕들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었다.

[‘선악과’의 힘이 당신의 내면에서 꿈틀거립니다.]

그리고, 나는 성좌이자 마왕이었다.
둘 중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는 존재.
선악과를 먹은 마왕.

[당신은 가능하겠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돈의 본질은 반질서다. 두 개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나라면, 혼돈의 힘에 대응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저도 가능해요.”
“희원 씨?”

정희원의 눈동자에 혼돈의 고리가 보였다. 새하얗게 탈색된 그녀의 머리카락이 신비하고 불길한 아우라 속에 떠올랐다.
순간 나는 그녀가 무엇으로 각성한 것인지 깨달았다.

“좋습니다. 해봅시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실 아까 전부터 밤하늘에서 찾고 있는 성좌의 기척이 있었는데, 보이질 않았다. 그 성좌가 도와준다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텐데. 거기에 맞춰 계획을 세워두었었는데─

[‘세 번째 페이즈’가 시작됩니다!]

아무래도, 이번엔 너무 늦은 모양이었다.

[마왕, ‘타락 천사들의 왕’이 자신의 격을 해방합니다!]
[성좌, ‘타락의 구원자’가 자신의 격을 해방합니다!]

하나의 존재가 가진 두 개의 수식언.
미카엘이 진정한 힘을 선보이며 전방을 향해 달려나갔다.
과연, 자신감을 발휘할만한 격이었다.

[저지먼트 필드].

한때 나를 쥐어 터트리던 그의 주특기가 혼돈의 충격파를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다. 신의 은총이 내린 절대적인 심판의 벽.

콰콰콰콰콰!

무적의 필드는, 너무도 쉽게 부서졌다. 막아내기는커녕 시간조차 벌지 못했다. 유리창처럼 깨지는 [저지먼트 필드]를 보며 미카엘이 비명을 질렀다.
89번 시나리오의 재앙. 원작의 그것조차 넘어선 혼돈의 충격파는, 그대로 미카엘의 몸을 짓이기며 터트려갔다.
뒤쪽에서 유중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해라!”

아마 유중혁도 뭔가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번 충격파는 앞서 있었던 두 번의 충격파와는 차원이 다르다.
결심을 마친 내가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정희원이 내 앞을 막았다.

“희원 씨.”
“닥쳐요.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마치 내가 무슨 일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 그녀는 등을 보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등에는 이현성의 거구가 매달려 있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강철의 잠에 빠져든 사람의 얼굴.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희원 씨. 만약에 누군가가 목숨을 걸어야만―”
“낌새 보이지 말아요. 나 진짜 미쳐버리니까.”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 감정에 동조하듯 두 개의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두, 비슷한 일을 겪으며 얻어낸 설화들.

[성흔, ‘희생의지 Lv.8’이 발동 중입니다!]

비슷한 일을 겪으며 얻은 성흔이었다.
이 성흔이 정희원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말해야 했다.

“여기서 저걸 못 막으면 현성 씨는 정말 죽습니다.”

누구보다 잔인해져야 했다.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희원 씨가 저였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듣기 싫으니까, 제발!”

돌아선 정희원의 눈이 붉어져 있었다.

“또 뭔가 방법이 있겠죠! 알아요! 독자 씨 그런 사람이니까. 자기만 알고 있는 빌어처먹을 방법이 있고, 그 방법을 쓰면 본인이 죽겠죠!”
“뭔가 오해하시는 거 같은데, 저 안 죽습니다.”

그녀에겐 [거짓 간파]가 없다.

“전이랑 지금은 다릅니다. 희원 씨도, 다른 일행들도 그때랑은 다르잖아요. 이건 여러분을 믿기 때문에 하는 선택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를 꼭 구해주세요, 희원 씨.”

[바람의 길]과 [전인화]의 힘이 그녀를 뒤쪽으로 날려버렸다.

“김독―”

코앞까지 밀려온 충격파를 마주한 순간, 나는 온 힘을 다해 진언을 터트렸다.

[수르야!]

내 외침과 함께, 뒤쪽에서 달려온 열차가 나를 태웠다. 급조한 열차였기에 선두만이 존재하는 기묘한 형태였다.

[가지.]

전신의 흐름을 떠받드는 수르야의 격을 느끼며, 열차가 출발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를 연료로 삼아 열차가 출진했다.
설화의 파편을 넘어, 혼돈의 충격파 속으로.

꽈드드드드득!

몸 전체가 부서지는 듯한 충격과 함께 열차 파편이 날아다녔다.
폭풍 속에서 반쯤 부서진 미카엘의 화신체가 나를 보고 있었다.

[네놈―]

나는 녀석을 지나쳐 계속해서 달렸다. 정신이 까마득해지는 느낌이었다. [제4의 벽]이 경고성을 발했고, 내가 가진 모든 설화들이 절규했다.
이건 버틸 수 없다. 반드시 죽는다고, 모든 설화들이 입을 모아 외치고 있었다.
존재를 무화시키는 충격파의 너머로 묵시룡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대는 막을 수 없다」

그 시선을 느끼며 나는 웃었다.
맞아. 나는 당신을 못 막는다. 당신은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재앙’ 그 자체니까. 성좌와 마왕조차 아득히 뛰어넘는 무엇.
그런 재앙에게 일개 성좌인 내가 대적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나는 저런 재앙을 또 알고 있다.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이 당신의 속셈을 깨닫고 경악합니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성좌들이 당신의 생각에 대경합니다!]
[관리국의 모든 도깨비들이 시나리오의 개연성을······.]

무시무시한 스파크가 허공에 몰아쳤다. 그저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였다. 성좌들이 몰아준 모든 개연성을 허공에 폭발시키며, 나는 다시 한번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그 진명을 알더라도, 누구도 시나리오로 초대하지 않는 존재.

[오라! ■■■■■!]

충격파의 하늘 너머로 <스타 스트림>의 우주가 보였다.
어긋난 개연성이 자아낸 후폭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거대한 암무(暗霧)의 진격 속에 별과 성운들이 지워지고 있었다. 뇌리를 뒤덮는 전율. 끝을 알 수 없는 안개의 저편에서 거대한 눈이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언젠가 73번째 마계에서, 나는 저 녀석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녀석의 분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 ‘묵시록의 최후룡’을 내려다봅니다.]

혼돈에서 태어난 이계의 신격.
나의 마계를 멸망시켰던 대재앙이 환생자들의 섬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Episode 77. 최후룡 (5) > 끝

< Episode 78. 전(轉) (1) >





Episode 78. 전(轉)


전신의 근육이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저렸다.
순간적으로 사라졌던 의식이 되돌아왔고, 나는 새카만 공허 속에서 설화를 토하며 눈을 떴다.
주변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 당신을 일별합니다.]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 더 네임리스 미스트(The nameless mist).
나는 73번째 마계에서 이 녀석의 분체를 마주한 적이 있었다.
고작 분체의 힘만으로도 내 마계를 멸절시키고, 설화급 성좌와 초월좌들을 거꾸러뜨린 녀석.
나는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재앙의 아가리 속에 들어와 있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이것만이 묵시룡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래, 네가 왜 가만히 있나 했지.

「세계의 재앙을 막기 위해 또 다른 재앙을 불러온다. 그런 건 회귀자 유중혁이나 할 만한 발상이었다.」

허공에 떠오르는 [제4의 벽]의 메시지를 보며 나는 쓰게 웃었다.

「그럼에도, 김독자는 이렇게 해야만 했다.」

주변을 흐르는 후폭풍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너는 지나치게 많은 개연성을 어그러트렸다.
―이대로면 조만간 네가 쌓은 개연성의 업보가 폭발할 거야. 무슨 뜻인지 알지?

이것은 지금껏 내가 쌓아온 개연성의 업보였다.
성좌들이 경고했고, 도깨비들이 말했던 바로 그 업보.

「소중한 것을 잃지 않는 설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타 스트림>의 위대한 설화들은 모두 상실의 설화다.
영웅은 각성을 위해 무언가를 희생하고, 연인과 친구는 사랑과 우정의 완성을 위해 어느 한쪽을 잃어야만 한다.
존재는 무언가를 잃고, 설화는 그것으로 완성된다.

「김독자는 그게 싫었다.」

아무것도 잃지 않는 대가를, 언젠가 치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비틀고, 개연성을 어그러트린 대가를 받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그래서 김독자는,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츠츠츠츠츳!

입에서 설화 덩어리가 쏟아졌다.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 나를 공격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를 공격하는 것은 뒤틀린 개연성이었다. 이계의 신격을 불러내기 위해 축적한 세계의 뒤틀림이, 시나리오에서 나를 배제하려 하고 있었다.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설화들 덕분이었다.
내 귓가에 이야기를 속삭이는 설화들.
너는 구원의 마왕이다.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
마치 메타트론과 아가레스에게 그랬듯, 설화들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진동하는 암무 속에서, 나는 바깥의 정경을 감각할 수 있었다.

[‘묵시록의 최후룡’이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 움직입니다.]

다행히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를 먹어치우러 왔다가 더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을 발견한 이계의 신격은, 이제 ‘묵시록의 최후룡’을 노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재앙과 재앙의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묵시록의 최후룡 대 더 네임리스 미스트.

녀석들의 공멸은 다른 모든 존재의 희망이 될 것이다.
중요한 건 시간을 버는 것이다.
성좌들이 다시 모일 수 있도록, 저 빌어먹을 별들이 그 이름에 걸맞게 다시 한번 별자리를 맺을 수 있도록 시간을 버는 것.

[화신체의 손상이 심각합니다!]
[아득한 존재의 격이 당신의 ‘수식언의 맥락’을 갉아먹습니다.]
[설화와 설화 사이의 결속이 느슨해집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경이로운 업적에 놀랍니다.]
[당신을 위한 거대 설화가 깨어나고 있습니다.]

멀리서 어슴푸레한 노래 같은 것이 들렸다.
아주 오래전 들었던 멜로디. 그것이 어머니의 것이었는지, 동료들의 것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희미한 노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


쿠구구구구!

세계와 세계가 충돌하고 있었다. 묵시룡의 충격파에 정면으로 노출되어 있던 김독자에게 새카만 암무가 덧씌워졌다.
이제 충격파를 감당하는 것은 김독자가 아니라 저 끔찍한 이계의 신격이었다.
혼돈에서 태어난 두 힘이 부딪치자, 주변의 모든 것들이 공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성좌, ‘만다라의 수호자’가 침음합니다.]

다행히 그 충돌 지점이 생각보다 멀었기 때문에, 지상의 일행들은 무사했다.
묵시룡에 이어 이계의 신격까지 목도한 성좌들은 대부분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물들어 있었다.
천공에서 왕처럼 누비던 세월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설화급 성좌들조차 감당할 수 없는 재앙들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제야 밤하늘의 성좌들은 절감하고 있었다.
세계의 멸망이, 정말로 코앞에 와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세계의 멸망보다 한 존재의 희생이 더 커다란 비극이었다.

“아저씨이이이이―!”

처절한 고함을 내지른 이지혜가 암무를 향해 포화를 쏘았다. 물론 포연은 더 네임리스 미스트의 본체에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애초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몸통인지조차 알 수 없는 대상.
하지만 일행들은 폭주하는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같은 말을 반복하는 병에 걸린 것처럼, 신유승은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 감정에 동조하듯 키메라 드래곤이 허공을 향해 브레스를 쏘아 올렸다.
그 옆에 있던 이길영도 동공이 반쯤 풀려 있었다. 부르르 떠는 소년의 전신에서 심상치 않은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계약······ 한다······ 안 한다······ 한다······.”

그런 세 사람의 앞으로, 또 다른 세 사람이 나왔다. 자신이 생각하던 가장 끔찍한 재앙 앞에서, 일행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광기를 앓았다. 누군가는 밀려오는 감정 앞에 이성을 놓았고, 누군가는 정교하게 망가진 이성을 지켰다.

초월형을 개방한 유중혁.
흑염룡을 두른 한수영.
신살(神殺)의 눈을 뜬 정희원.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세 사람은 동시에 앞으로 나왔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들의 앞을 막았다.
안나 크로프트였다.

“다들 멈추세요! 전장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성운, <아스가르드>가 전장을 통제합니다.]

안나 크로프트의 목소리와 함께 <아스가르드>의 거대 설화가 세 사람을 제자리에 묶었다. 유중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꺼져라.”
“이건 구원의 마왕이 바라는 게 아니잖아요!”
“‘구원의 마왕이 바라는 것?’”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한수영의 왼손에 흑염이 맺혔다.
안나 크로프트가 말했다.

“미래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녀의 [대악마의 눈동자]에 설화들이 흐르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해낸 건지도 모른단 뜻입니다.”

안나 크로프트는 진심으로 감탄한 기색이었다.
그녀는 머나먼 창공에서 벌어지는 두 재앙의 격전을 보며 말했다.

“그는 정말 이 세계를 구하려고······.”
“씨발! 세계 멸망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야. 우리는―”
“그의 희생은 숭고해요. 정말로 그 의미를 모르겠습니까?”
“아가리 안 닥쳐?”

폭발한 한수영이 쏘아붙였다. 그 무시무시한 기파에, 안나 크로프트도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김독자가 왜 세계를 구해야돼? 그 새끼가 왜 지 목숨을 희생해서 헛짓거릴 해야 되냐고! 이딴 세계에 그럴 가치가 있어?”

한수영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있었다. 분노를 참고 참고 또 참아온 사람의 목소리. 그런 한수영의 얼굴을 보고 또 말을 들으며, 예언자는 오래전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구원의 마왕도 언젠가 당신과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이 세계가 과연 지킬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두고봐야 알겠지.

아마 미식협 때였던가. 구원의 마왕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안나 크로프트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이 세계는 도깨비와 성좌들이 지배하는 세계. 그녀 또한 그런 세계를 바꾸기 위해, ‘차라투스트라’를 만들었으니까.
안나 크로프트는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원의 마왕이 지금도 세계에 대한 질문을 거듭하고 있는지, 예언자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리고 그는 지금 저기에 있습니다.”

어떤 설화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증명되는 법이다.

“이런 세계에서 당신들이 만났잖습니까.”

그 말에, 처음으로 세 사람의 얼굴이 같은 표정이 되었다.
안나 크로프트가 신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예언자인 제 말을 믿으세요. 힘을 비축해야 합니다. 두 재앙이 서로 싸워 공멸하는 순간을 노려야 해요. 그렇게 해야만 우리 모두 생존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 미래를 아는 게 너뿐인 줄 알아?”

그제야 안나 크로프트는 뭔가를 깨달았다.
한수영의 주변에서 [예상표절]의 설화가 흐르고 있었다. 회귀자 유중혁 또한 [현자의 눈]을 통해 끊임없이 상황을 통찰하고 있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예언자만이 아니다. 이들 또한, 누구보다 미래에 대해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김독자를 구하는 것을 택했다.
검을 뽑아든 정희원이 말했다.

“난 미래 같은 건 몰라. 하지만 하나는 알아. 당신은 세계를 구하고 싶어한다고 했지? 나도 마찬가지야.”

그녀의 의지가, [심판자의 검]에서 새하얀 불꽃을 토했다.

“그 사람이, 내가 구하고 싶은 세계야.”

그 말과 함께, 세 사람이 허공을 향해 도약했다. 거대 설화의 개연성도, 성운의 억압도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안나 크로프트가 다급히 손을 뻗었지만, 이미 그들은 천공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막은 것은 성운도 개연성도 아니었다.
‘그것’을 제일 먼저 발견한 건 한수영이었다.

“뭐야? 미친―”

쿠구구구구구!

재앙과 재앙의 사투 속에 하늘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었다.
문제는 무너진 균형의 추가 이쪽으로 넘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것은······.]

성좌들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하늘을 뒤덮은 암무 속에서 뭔가가 움지럭거리며 분열하고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 더 네임리스 미스트가 묵시룡을 압박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분체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 아아. 아아아······.”

암무 사이로 드러난 샛노란 공포의 눈동자. 예전의 악몽이 떠오르는 듯, 신유승의 어깨가 덜덜 떨렸다.
신유승은 저 눈을 본 적이 있었다. 저 눈을 본 화신들은 모두 정신을 지탱하지 못해 이계의 생명체로 변한다.
그날, [공단]의 모든 존재는 저 재앙 앞에서 너무나 무력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날의 기억을, 전혀 다르게 각인하고 있었다.

[그때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군.]

척준경이었다.





< Episode 78. 전(轉) (1) > 끝

< Episode 78. 전(轉) (2) >





척준경은 자신의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다. ‘환생자들의 섬’에서 다져진 그의 설화들이 그의 몸을 감싼 채 근육처럼 꿈틀거렸다.

[가지, 작은 초월좌여.]

척준경의 어깨에 키리오스가 올라섰다. 두 사람은 전에도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을 상대하며 합을 맞춘 적이 있었다.
허공을 향해 도약한 척준경의 검 위로 키리오스의 [전인화]가 흘렀다.
환한 백청의 기류가 척준경의 몸을 감싸자 그는 번개의 신처럼 번쩍였다.

[나 척준경은 오로지 이날만을 기다려 왔다!]

호기로운 격이 기세를 드러냈다.
산을 베고, 바다를 베었던 그의 검이 베지 못했던 적이 눈앞에 있었다.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그는 미완성이었던 사검(四劒)을 수련해왔다. 측량할 수조차 없는, 저 막막한 공허에 대적할 단 하나의 검식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쌓아왔다.

그리고 이것이 그 결과였다.

꾹꾹 눌러 담은 척준경의 설화가 발화했고, 주변을 키리오스의 전격이 맹렬히 회전했다.
지상의 성좌들이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하나의 성좌와 하나의 초월좌.
그 둘의 격이 우습다는 듯,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의 분체가 그들을 향해 입을 벌렸다. 그 암무의 주둥이가 별의 빛을 삼키려는 순간.

제 사식(四式).

척준경의 검이, 빛을 뿜었다.

사검참허(四劍斬虛).

안개의 중심부가 천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짐승의 뱃가죽이 갈라지듯, 그 중심부에서 뭔가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암무 속에 도드라진 노란 눈동자가 설화를 토해내며 붕괴하기 시작했다.

[다수의 성좌들이 ‘고려제일검’의 무위에 눈을 떼지 못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벌립니다!]

지상의 모든 성좌들이 경악했다.
아무리 분체라고는 해도, 상대는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었다. <스타 스트림>의 청소부이자, 뒤틀린 개연성을 잡아먹는 재앙.
누구도 상대할 수 없다고 알려져있는 그 재앙을, 척준경이 베었다.
심지어는, 그 검식의 형태조차 제대로 본 이가 없었다.
오직 유중혁만이 그 검을 알아보았다.
별을 베었던 유중혁조차 그 순간만큼은 놀란 얼굴이었다.

“의형검(意形劍)······.”

자신의 의지만으로 세계를 베는 힘. 무공을 통해 도달할 수 있다는 최고의 경지. 척준경은 성좌가 되어서야 그 고절한 경지에 오른 것이었다.

[나의 검이 벨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터지는 빛살 속에서 무력하게 흩어지는 안개를 보며, 척준경 또한 해방감을 느꼈다.

저것을 베기 위해 인내한 시간이 얼마였던가.

무상(無想)의 경지에 올라, 자신의 의지가 곧 검이 되던 순간의 희열. 사검식 ‘사검참허’는 그가 통찰한 무공의 정화였다. 그는 유중혁 쪽을 보며 외쳤다.

[가거라, 후인들이여! 가서 김독자를―]

그러나 척준경은 그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뒤쪽에서 전해진 엄청난 충격이 그의 화신체 전체를 망가트렸던 것이다.
낙하한 척준경은 운석처럼 떨어져 땅바닥에 틀어박혔다.
흔들리는 사위 속에서 간신히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척준경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깨달았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맙소사······ <스타 스트림>이 멸망하겠군.]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척준경은 자신의 화신체가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대체 어떻게?
방금, 내가 베었는데.

마치 조금 전의 일이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하늘에서 거대한 눈동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체는, 하나가 아니었다.

하늘을 까마득히 덮을 만큼 많은 분체들. 족히 수십 개체는 되어 보이는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의 분체들이, 지상의 산 것들을 먹어 치우기 위해 강하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악!]

공포에 질린 위인급 성좌들이 지평선 너머로 달아났다. 하지만 그쪽에서도 재앙은 몰려왔다.

쩌저저저저적!

안개 사이로 돋아난 이빨에 성좌들의 화신체가 연약한 과육처럼 으깨졌다. 피할 곳도, 달아날 곳도 없었다. 묵시룡의 충격파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이쪽도 절망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모두 침착해. 방금 봤잖아. 싸울 수 있는 존재라고!]

디오니소스가 목청이 터져라 외쳤지만, 성좌들은 규합이 되지 않았다.

[이런 제길······.]

앞서 두 번의 충격파를 견디며 상당량의 격을 소모한 <올림포스>의 성좌들은 충분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고, 개연성을 지나치게 소모한 <명계>도 설화를 고르고 있었다. 그나마 선전하는 것은 우리엘과 흑염룡이었다.

“꺼져! 꺼지라고, 이 새끼들아!”

유중혁과 한수영, 그리고 정희원은 서로의 등을 맞댄 채 격을 방출했다.
밀려오는 암무에 맞서며,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김독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던질 계획이었다. 하지만 틈이 보이질 않았다. 이대로는 김독자를 구하기도 전에 일행들이 전멸할 판이었다.

“빌어먹을! 또 누구 없어? 김독자 친구 또 없냐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을 도와줄 만한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흑염룡의 격도, 우리엘의 격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하늘의 서기관’을 노려봅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아직 ‘파멸공허의 오른손’은 쓸 수 없다고 말합······.]

환생자들의 섬을 덮은 암무는, 이제 섬을 삼키기 위한 준비 운동을 마친 상태였다.
멀리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같은 것이 비친 것은 그때였다.
끼이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폭연을 뚫고 뭔가가 도착했다.
부연 먼지 속에서 드러난 차는 <김독자 컴퍼니>에겐 익숙한 것이었다.

[흐음. 여기서 다치면 곤란하다네. 자넨 찍어야 할 광고가 세 개나 더 남아있어.]

[X급 페라르기니]의 문이 열리며 머리가 희끗한 중년인이 방긋 손을 흔들었다. 파인애플이 그려진 분홍색 폴로 셔츠에 찢어진 청바지. 전쟁터에 어울리지 않는 그 어마어마한 패션감각에 한수영이 입을 벌렸다.

“······양산형 제작자?”

그러자 주변에서 재앙에 맞서던 몇몇 성좌들이 중얼거렸다.

[양산형 제작자? 강한 성좌인가?]
[아니, 별 도움은 안 되는 영감이다.]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군. 코인에 눈이 멀어 쓰레기 같은 설화들을 찍어낸다는······.]

한수영은 그런 ‘양산형 제작자’를 바라보았다.
양산형 제작자는 설화급 성좌다. 하지만 그 급수에 비해, 느껴지는 격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양산형 제작자가 허허롭게 웃었다.

[허허, 내가 어지간히 믿음직스럽지 않은 모양이로군.]

그 여유로운 발언에 입으로 포도주를 쏟아 붓던 토르가 외쳤다.

[어이, 꾸준좌! 왔으면 빨리 손이나 보태라고! 지금은 늙은이 손도 급하니까!]
[흐음, 난 싸우러 온 건 아닐세.]
[그럼 왜 왔어!]
[코인이나 좀 보태주려고.]
[이 미친 늙은이가······ 지금 그딴 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성좌들이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외쳤다.

[그딴 소리 할 거면 꺼져! 코인에 눈먼 늙은이가······!]

하지만 양산형 제작자는 주눅 든 기색이 아니었다.
순간, 한수영은 언젠가 김독자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녹음실 너머로 도깨비들과 대화를 나누는 ‘양산형 제작자’를 보며, 한수영은 물었다.

―김독자. 저 성좌 뭔데? 별로 강해 보이지도 않는데······ 왜 도깨비들이 빌빌 기지?

그 물음에, 김독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코인이 많잖아.

그때의 김독자처럼, 지금의 양산형 제작자도 웃고 있었다.

[나는 젊은 친구들이 이해가 안 돼. 어째서 코인을 무시하는 건가?]
[그깟 소모품 따위―]

팽그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양산형 제작자의 손바닥 위에 코인이 떠올랐다. 1코인이었다.

[자세히 보게. 정말 이게 그저 ‘소모품’으로만 보이나? 왜 저 <스타 스트림>이 굳이 이 ‘코인’을 거래의 단위로 사용하는 것인지,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나?]
[무슨 개소릴 하고 싶은 거야!]

이제 코앞까지 밀려온 분체들을 응시하며, 양산형 제작자가 말했다.

[힌트를 주지. <스타 스트림>의 모든 것은 ‘설화’로 이루어져 있어. 그렇다면 ‘코인’은 어떨 것 같은가?]
[······노망이라도 든 거냐? 바쁘니까 말 걸지 마!]

성좌들은 그딴 헛소리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허공을 향해 마력을 분출하기 바빴다.
하지만 한수영은, 급박한 와중에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소름이 돋았다.
양산형 제작자의 말 그대로였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것은 설화다.
그런데, 왜 <스타 스트림>의 거래 단위는 ‘설화’가 아니라 ‘코인’이었을까?

츠츠츠츠츳!

양산형 제작자의 주변으로 어마어마한 개연성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개연성의 영향 속에, 양산형 제작자의 격이 증폭되고 있었다.
그의 격은 순식간에 위인급을, 다시 설화급을 넘었다.
가공할 격의 증폭에 깜짝 놀란 선과 악의 성좌들이 동시에 양산형 제작자를 돌아보았다.

[아주 오래된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양산형 제작자. 그 역시 자신만의 ‘단 하나의 이야기’를 추구하는 성좌였다.
그렇다면 그가 추구하는 ■■는 무엇일까.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선도 악도 아니야. 자본(資本)이지.]

양산형 제작자가 하늘 높이 코인을 던졌다.
유중혁도, 한수영도, 그리고 정희원도 그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 코인에 얼마가 적혀 있는지는 누구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이 <스타 스트림>의 누구보다도 코인이 많다네.]

정확히는, 얼마가 적혀 있더라도 믿을 것 같았다.
코인으로 저런 기적을 보이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코인을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

[누군가가 대량의 코인을 사용하였습니다!]
[설화, ‘황금만능주의(黃金萬能主義)’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잠시 후, 코인이 사라진 하늘 저편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쩌저적,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소용돌이치는 문이 열리고 있었다. 게이트였다.

[편도 게이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도깨비와 관리국만이 열 수 있었던 게이트를, 고작 성좌 하나가 열어낸 것이었다.

[<스타 스트림>의 관리국이 해당 설화의 개연성을······.]
[소환이 시작됩니다!]

게이트 너머로 언뜻 보이는 인형(人形)들이 있었다.
휴양이라도 온 듯 한가한 얼굴로, ‘양산형 제작자’가 어깨를 으쓱 들었다.

[참, 자네들 말이 맞는 것도 하나 있어. 나는 싸움을 잘 못해.]

게이트 너머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양산형 제작자가 선글라스를 꺼내 쓰며 말을 이었다.

[대신, 이걸로 싸움을 잘하는 친구들을 데려올 수는 있지.]

게이트를 넘어서 전장에 초환되는 이들.
그들의 정체를 제일 먼저 알아본 이는 유중혁이었다.

“······사부님?”

파천검성과 초월좌들이 게이트를 건너 날아오고 있었다.
초월좌들 중에는 파천검성을 제외하고도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일권무적 유호성.

‘환생자들의 섬’의 최강자인 그 또한, 이번 시나리오를 돕기 위해 참전했던 것이다. 아마 파천검성이 늦게 온 이유는 저들을 설득하기 위함이었던 듯했다. 하지만 유중혁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저들만으로 막을 수 있을까?

설화급 성좌들조차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의 분체가 수십여 체에 달한다. 아무리 파천검성과 유호성이 강하다 한들, 초월좌들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그런데 초월좌들의 후미에 익숙한 얼굴이 하나 더 있었다.

“와 씨, 진작에 이렇게 오게 해주지!”

장하영이었다.
몇몇 일행들이 소리치며 장하영을 불렀다.
장하영도 쑥스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너무 늦어서 미안! 누굴 좀 설득하느라.”

······설득?

장하영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새로운 강자들의 등장에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의 분체들이 대거 방향을 틀었던 까닭이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계의 신격을 보며, 장하영의 표정도 긴장으로 물들었다.
장하영도 그것들을 마계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으로는, 분체 하나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힘만으로는.

다음 순간, 장하영의 몸에서 황금빛 아우라가 폭발했다.
막대한 격이 장하영의 몸을 중심으로 해방되고 있었다.
장하영의 금발이 물결처럼 퍼지며, 하얀 이마 위로 작은 금테가 자라났다. 아름다운 황금빛 털옷이 전신을 가죽처럼 덮었다.
천천히 눈을 뜬 장하영의 두 눈에서 화안금정(火眼金睛)의 요기가 소용돌이쳤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눈을 가늘게 뜹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깜짝 놀랍니다.]
[성좌, ‘고려제일검’이 탄식합니다.]
[중립 계통의 모든 성좌들이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그곳의 모두가 그 격의 정체를 알아봤다. 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공으로 뻗은 장하영의 손에,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봉이 쥐어져 있었다.
한없이 오만하고 고고한 눈동자가 창공을 응시하자, 세계의 모든 구름들이 일제히 몸을 떨었다.

[김독자를 구하러 가라.]

그 말을 하는 이는 장하영이 아니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 Episode 78. 전(轉) (2) > 끝

< Episode 78. 전(轉) (3) >





‘환생자들의 섬’을 탐험하는 동안, 장하영은 몇 번인가 ‘정체불명의 벽’을 사용했다. ‘정체불명의 벽’의 1단계 기능인 ‘채팅 시스템’을 사용해 성좌들에게 말을 걸어본 것이다.

―구원의 마왕님.
―······너 왜 그렇게 부르냐?

언젠가부턴 제법 뻔뻔하게, 김독자에게 말을 걸 수도 있게 되었다.
한동안 ‘구원의 마왕=김독자’설을 부정하고 싶어서 자아분열이 온 적도 있었지만, 이젠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장하영이 좋아하는 구원의 마왕은 김독자고, 얼간이 김독자는 구원의 마왕이다. 장하영은 그 사실을 간신히 받아들였다. 물론 전부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저는 구원의 마왕님께 말건 거예요 그러니 김독자는 대답하지 마세요.
―······.
―어쩔 수 없어. 닥치고 넌 내가 원하는 대답만 해.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데?

막상 김독자가 그렇게 묻자, 꾹 감추고 있었던 설움이 폭발했다.

―나는 왜 ‘김독자 컴퍼니’에 안 끼워주는데?

늘 묻고 싶던 말이었다. 모든 동료들이 ‘별자리의 맥락’을 통해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가는 것을 보며, 장하영은 스승들과 함께 시나리오의 뒤편에 남겨졌다. 함께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저 별자리 중의 하나였으면 좋겠다고.

내겐 자격이 없기 때문일까.
나는, 처음부터 김독자와 시나리오를 함께해온 것이 아니니까.

마계에서 혁명을 함께하고, 마왕 선발전을 겪어냈던 시간들을 장하영은 모두 기억했다. 그것은 장하영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희열이었고, 이제는 자신을 구성하는 일부였다.
그래서, 장하영은 이제 자신도 김독자의 동료가 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모두 혼자만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네가 자유로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돌아온 대답을 보며, 장하영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이제와서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런데

―강제로 차원 이동된 것도, 마계에서의 삶도 전부 네 의지가 아니었잖아.

따질 수가 없었다. 마치 숨이 멎은 것처럼, 장하영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어지는 메시지를 읽는 것이 전부였다.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 하영아.

그것은 ‘구원의 마왕’의 말이었다.
누군가를 구해내는 설화에 취해, 자기 자신의 생명마저 등한시하는 저 고고한 성좌의 말이었다.
그랬기에 그것은 장하영의 친구 ‘김독자’의 말은 아니었다.

「그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

‘정체불명의 벽’이 말하고 있었다. 이 세상 그 어떤 존재와도 즉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이 벽으로도, 김독자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그녀가 부탁한 것처럼 그는 철저한 ‘구원의 마왕’일 뿐이었다.

‘아니, 그딴 식으로 말하면 내가 어떻게 하겠냐고.’

그랬기에, 장하영은 김독자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정체불명의 벽’이 자신의 이름을 갖습니다!]

그것을 위해, 장하영은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었다.

[‘정체불명의 벽’이 ‘불가능한 소통의 벽’으로 진화합니다!]
[‘불가능한 소통의 벽’의 2단계 기능이 개방됩니다!]

새로운 벽의 힘을 개방하고, <김독자 컴퍼니>를 도울 수 있는 성좌를 설득해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츠츠츠츠츠츳!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김독자 컴퍼니>의 얼굴들이 보였다. 장하영은 차오르는 격에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외쳐댔다.

“다들 정신 차리고 빨리 움직여! 난 그렇게 오래 못 버틴다고!”

의식이 점차 잦아드는 것을 느끼며, 장하영은 그렇게 외쳤다.
성좌의 존재감이 장하영의 화신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불가능한 소통의 벽’이 ‘불가능의 희구 Lv.1’을 활성화 중입니다!]

불가능의 희구. 그것은 ‘불가능한 소통의 벽’이 가진 공능으로, 배후성이 없는 장하영이 한시적으로 누군가와 ‘배후 계약’을 맺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힘이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자신의 화신체를 내려다봅니다.]

‘긴고아의 죄수’, 제천대성 손오공.
김독자의 말에 따르면 이 <스타 스트림>에서 최강에 손꼽히는 성좌 중 하나.
그 위대한 성좌는 오만한 시선으로 세계를 훑어보더니, 고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막상 나오니까 너무 귀찮군.]

그 말에 어이가 없어진 장하영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아, 도와준다면서요! 내가 고민도 들어줬잖아? 빨리 움직여요!”

장하영으로서는 황당한 노릇이었지만, 사실 제천대성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아까부터 자신의 몸에 현현한 제천대성의 상태가 이상했다.

즈즈즈즛.

마치 여러 존재가 일시적으로 ‘하나’가 된 것처럼, 제천대성의 위상이 불안정했다. 어쩌면 그가 말한 ‘귀찮음’은 바로 저 현상과 관련되어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그쪽 사정이다.

“빨리 약속 안 지키면 머리카락을······!”

[해. 한다니까?]

불평 가득한 목소리로 제천대성이 재차 여의봉을 움켜쥐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격에 몇몇 성좌들이 호기심을 보였다.

[제천대성. 지금 저들을 올려보내는 것은 자살 행위다.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넌 누구냐?]
[······나는 척준경이다.]

제천대성의 격에 대항하듯, 척준경이 가슴을 폈다. 제천대성은 그런 척준경의 눈동자에 새겨진 감정을 가만히 읽더니 물었다.

[네놈은 손 선생을 알고 있느냐?]

척준경은 잠시 생각한 후에야 ‘손 선생’이 제천대성 본인을 칭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대가 한때 유명했던 성좌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하긴, 이 몸이 시나리오에서 제대로 활동한 지 너무 오래되긴 했지.]

하품을 한 제천대성이 여의봉을 축소시켜 자신의 귀를 팠다.
그 오만함에 척준경이 화를 내려는 순간.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척준경을 비롯한 성좌들의 화신체가 허공을 날았다. 놀란 척준경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단지 격을 개방한 것만으로 주변의 성좌들을 위축시킬 정도의 존재감.

[스파크가······!]

성좌들 중 일부가 진저리를 치며 외쳤다. 제천대성이 현현한 장하영의 몸이 엄청난 스파크로 물들고 있었다. 성좌들이 격을 개방할 때 개연성의 스파크가 발생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 시나리오 지역이 89번 시나리오 지역이라는 것이었다. 어지간한 개연성은 모두 감당할 수 있는 이 지역에서, 저토록 눈부신 스파크라니······.

[보아라.]

제천대성의 동서남북으로 팔괘의 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건(乾)·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
문자들은 제천대성의 여의금고봉(如意金箍棒) 주변을 맹렬히 회전하며 금빛 격류를 토해냈다.
그런 제천대성의 기세를 감지한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의 분체들이 밀려들었다.

츠츠츠츠츳!

개연성 스파크는 곧 후폭풍의 전조. 탐나는 먹잇감을 향해 달려들듯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의 분체들이 제천대성을 향해 아가리를 벌렸다. 달려드는 분체의 숫자는 대여섯체.
설화급 성좌는 물론이고 신화급 성좌라도 상대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제천대성은 물러서지 않았다.

까마득한 암무가 제천대성의 전신을 덮는 순간, 그의 몸이 금빛 섬광으로 화했다.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와 함께, 여의금고봉이 아가리처럼 벌어진 암무를 꿰뚫었다.

쿠드드드드드······!

고작 성유물 하나에 얻어맞았다고 해서,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 타격을 입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불어난 여의금고봉의 궤적이 수백 갈래로 변해 분체를 가격하자, 놀랍게도 분체들의 입에서 괴이쩍은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르르르르륵······!

심지어 어떤 분체는 여의금고봉을 피하려는 듯한 낌새까지 보였다.
창공을 호화스레 물들이며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에 대적하는 제천대성의 격에 전장의 모든 성좌들이 눈을 떼지 못했다.
디오니소스도, 수르야도, 척준경도.
심지어는 신화급 성좌인 하데스도 감탄한 표정이었다.

[혼돈의 술(術)이로군.]

하데스는 제천대성의 여의금고봉에 깃든 불온한 힘을 정확히 읽어냈다. 그것은 선도 악도 아닌 힘.
독특한 설화를 쌓아온 제천대성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유의 신선술(神仙術)이었다.

미후왕(獼猴王).
제천대성(齊天大聖).
투전승불(鬪戰勝佛).

무수한 이름으로 존재해 온 ‘긴고아의 죄수’, 손오공이 싸우고 있었다.
척준경이 전력을 다해 간신히 하나를 쓰러트릴 수 있었던 저 공허의 재앙들과, 다대일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에 질 수 없다는 듯, 두 명의 성좌가 가세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진력을 짜냅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질 수 없다는 듯 포효합니다!]

제천대성의 격 위로 두 성좌의 격이 실리고 있었다. 흑염룡의 [흑염]과 우리엘의 [지옥염화]가 뒤섞이며 제천대성의 여의금고봉이 비정상적인 크기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에 잊힌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선과 악, 중립의 별들이 마침내 한자리에 모였으니」

세 가지 격이 뒤섞이며 눈이 멀 듯한 섬광이 터졌다.

고오오오오!

창공을 향해 휘두른 여의봉이 엄청난 부피로 하늘을 강타했다. 천지가 뒤흔들리며 광대한 충격파가 시공간을 비틀었다.
비명을 내지른 성좌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암무로 뒤덮여 있던 하늘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제천대성이 말했다.

[가라.]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세 인물이 움직였다. 허공답보를 사용한 유중혁이 달렸고, 흑염룡의 분신을 탄 한수영과 대천사의 날개를 빌린 정희원의 몸이 수직으로 솟구쳤다.
세 사람의 몸은 순식간에 암무를 관통해 벌어진 하늘의 균열을 지나쳤다.
대기권을 지나치는 순간 세 사람의 몸은 급격하게 둔해졌다.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과 ‘묵시록의 최후룡’의 충돌이 만들어 낸 우주적 공간에서 엄청난 설화들의 교환이 오가고 있었다.

“큽······.”

그 가공할 설화의 밀도에 한수영의 입에서도 주륵 피가 흘러나왔다. 그저 설화를 감각하는 것만으로도 존재가 부스러져 버릴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이 공간의 어딘가에, 김독자가 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은 빵 부스러기처럼 흩뿌려진 김독자의 흔적을 찾아냈다.

「이렇게 해야만 제대로 된 전(轉)을 얻을 수 있다.」

부서진 김독자의 파편이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먼저 손을 뻗은 것은 정희원이었다. 마치 작고 연약한 새를 감싸듯, 정희원은 그 파편을 양손으로 조심스레 품었다.
착각일까. 순간 문장에 찍힌 마침표의 너머로 김독자가 바라는 아득한 세계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이 문장을 붙잡고, 다시 그 다음 문장을 붙잡고······. 마치 구름사다리를 건너듯 그렇게 계속해서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그들은 저 결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한수영이 말했다.

“너도 성좌는 성좌구나, 김독자.”

모든 성좌는 설화에 취해 있고, 자신이 추구하는 ‘단 하나의 설화’에 도달하기 위해 다른 모든 설화를 탐닉한다.
때문에 성좌들에게는 진정한 타자가 없다.
결국 성좌들은 모든 설화를 자기 자신으로 만들 뿐이니까.

「그 어떤 성운에도 대항할 수 있는 설화를, 일행들이 얻게 될 것이다.」

설령 그 설화가, 다른 존재들을 위한 것이라 한들.

“씨발, 내가 언제 이런 이야기 보여달래?”

그들을 발견한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의 분체들이 몰려들었다.
한수영의 손에서 [흑염]이 불을 뿜었고, 정희원의 [심판자의 검]이 [지옥염화]를 발동했다. 유중혁의 [파천검도]가 공허를 비집고 길을 열었다.
본래였다면 맞설 수 없는 재앙. 그럼에도 그들이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이 길의 끝에 존재하는 별 때문이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성흔 ‘희생의지 Lv.9’를 발동 중입니다!]

희생의지. 자신의 목숨을 걸어 동료들의 전투력을 격상시킬 수 있는 필살의 성흔.
그 별빛에 힘입어 유중혁은 검을 휘둘렀고, 정희원은 염화를 방출했으며, 한수영은 주먹을 내질렀다.
그리고 희미하게, 김독자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죽어가는 사람의 숨소리처럼 약해진 설화들이 그들에게 김독자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츠츠츠츳······!

우리엘과 흑염룡의 격이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로 한계치에 다다른 것이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경고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화장실이 급해서 힘을 쓰기 어렵겠다고······.]

짙은 암무의 까마득한 건너편. 마침내 희끄무레한 별 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중혁도, 한수영도 그 별을 보았다. 이제야 간신히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별.
하지만 그 별로 가는 길은 너무나도 험했다. 밀려오는 분체는 점점 많아지고 있었고, 주변의 격압은 급격하게 높아지고 있었다.
연료 따윈 고려하지 않고 날아온 편도 로켓처럼, 세 사람의 몸 안에 남은 마력은 이제 많지 않았다.

쿠구구구구!

분체들과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만약 셋 모두가 저 분체들을 뚫고 돌진한다면, 김독자는 물론이거니와 그들도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세 사람에게 남은 편도행 마력을 모두 한 사람에게 모은다면 어떨까.

“······방법은 하나뿐이다.”

세 사람 모두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김독자를 구할 수는 없다.

그러니, 저 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 Episode 78. 전(轉) (3) > 끝

< Episode 78. 전(轉) (4) >





시야를 덮는 안개 속에서 유중혁이 말했다.

“놈을 구하는 것은 나다.”

그의 손에 쥐어진 [흑천마도]가 새파란 빛을 내뿜었다.

“너희는 모두 지쳤다. 그러니 내가 가는 것이 맞다. 남은 마력을 모두 내게 모아라.”

그러자 [심판자의 검]을 뽑아든 정희원도 말했다.

“당신도 몸 상태가 엉망인 건 마찬가지잖아. 이번에는 내가 가겠어요.”

유중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껏 정희원이 이처럼 강경하게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둘 다 안 비켜? 나 하나로도 충분하거든?”

거기에 한수영까지 끼어들었다.
대치 중이던 두 사람의 시선이 한수영에게 쏠렸다. “우린 그렇다 치고, 넌 또 왜?”라는 느낌의 시선이었기에, 한수영의 입술이 비죽 튀어나왔다.

“뭘 그렇게 봐? 난 김독자 구하면 안 되냐?”
“독자 씨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아 물론 그 자식 좋아하진 않지.”

보통이라면 이런 귀찮은 일은 유중혁에게 떠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한수영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김독자가 수르야의 열차를 타고 돌진하던 순간, 그녀에게 날아온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야, 구해줄 거지?

······그 말만 듣지 않았어도.
투덜거린 한수영이 재차 입을 열려는 순간, 정희원이 말을 빼앗았다.

“미안하지만 독자 씨가 나한테 직접 구해달라고 했어. 그러니까 이번엔 너나 저 양반한테 양보 못 해.”
“뭔 개소리야? 김독잔 나한테 구해달랬거든?”
“거짓말 마. 그 인간이 너한테 구해달라고 할 리가 없잖아?”
“아 그랬다니까! 작가라고 입만 열면 거짓부렁인줄 아냐?”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리고 그 순간, 한수영은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처음에는 정희원이 저 얼치기를 구하려 거짓말을 하고 있다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정희원은 그런 것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불현듯 고개를 돌리자, 유중혁이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야, 너······.”

어마어마한 분노가 깃든 얼굴로, 유중혁이 먼 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한수영은 뭔가를 깨달았다.
······잠깐, 이거 혹시?

“설마 김독자 이 새끼가?”

멀리서 희미하게 빛나는 별.
히죽 웃는 김독자의 얼굴이 언뜻 보이는 것도 같았다.


*


쿠구구구구······.

제천대성이 뚫어 놓은 하늘의 구멍이 조금씩 메워지고 있었다. 겁에 질린 듯 주춤거리던 분체들은 다시금 세를 회복하고 있었고, 세계는 다시 암무로 뒤덮이고 있었다.
묵시룡의 충격파가 만들어 낸 소리가 파도처럼 들려왔다. 화들짝 정신을 차린 성좌들이 제천대성을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두 번은 못 해. 지금 이것도 규약 위반이거든.]

귀찮다는 듯 여의봉을 휘휘 돌린 제천대성이 여의봉을 귓속에 집어넣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에게 성운 <황제>의 ‘약속’이 발동합니다!]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을 압박했던 제천대성의 모습이 흩어지고 있었다. 마치 몸이 여러 개로 찢어지듯, 현현했던 제천대성의 격이 부서지며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

[너네 그렇게 멍하니 있으면 다 뒈진다.]
[몰아붙여! 지금 밀리면 다 뒈지는 거야!]

기력을 되찾은 디오니소스와 <올림포스>의 성좌들이 허공을 향해 격을 발산했다. 힘을 비축하고 있던 <명계>의 성좌들도 움직였다. 한반도의 성좌들이 이지혜에게 힘을 모았고, [터틀 드래곤]의 포신에서 눈부신 포화가 이어졌다. 누군가는 싸웠고, 누군가는 저항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유성처럼,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달아나던 <베다>와 <파피루스>의 성좌들. 수식언이 알려졌거나, 수식언조차 알려지지 않은 무수한 별들이 묵시룡과 이계의 신격의 패권 다툼에 휘말려 추락하고 있었다. 이제 별들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처럼.
메타트론은 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 요피엘.
그녀가 1863회차에서 보내준 정보에는 이런 내용이 없었다.

그의 양손에는 묵시룡을 봉인하기 위한 봉인구가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에덴>과 절대선의 모든 설화를 끌어모아 만든 봉인구.
요피엘은 말했다.

―서기관은 죽게 되겠지만, 세계는 ‘선’을 기억하게 될 겁니다.

분명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대상은 봉인이 불가능합니다.]

봉인구가 거의 완성되었음에도, 묵시룡은 가둘 수 없었다. 왜인지는 모른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묵시룡을 너무 일찍 깨운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 끼어들었기 때문일까.
역시 ‘구원의 마왕’이 문제였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요피엘이?

시야의 끝에 화신체의 절반을 잃고 죽어가는 미카엘이 있었다. <에덴>이 있는 한 미카엘은 다시 태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에덴>은 사라질 것이다. <에덴>뿐만 아니라, 곧 <스타 스트림> 전역의 붕괴가 시작될 것이다.

[벌써 포기할 셈인가? 네놈답지 않군.]

뒤를 돌아보는 순간 메타트론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를 죽이러 왔습니까?]
[그냥 내버려 둬도 죽을 텐데, 뭐하러?]

지옥 동부의 지배자, 아가레스가 킬킬 웃으며 인상을 썼다.

[가장 오래된 악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것으로 메타트론은 아가레스가 왜 되돌아온 것인지를 깨달았다.
메타트론이 말했다.

[······잠깐이지만 당신을 부러워했습니다. ‘악’의 설화를 그토록 쉽게 내버리고 떠난 당신을 말입니다.]
[거짓말은 ‘악’의 미덕이야. 잊었나?]

아가레스가 진저리난다는 듯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메타트론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선과 악. 그들은 이 세상의 대척점에 있지만, 이 세상의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이 ‘설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설화는, 이미 그들 자신이니까.

[가장 오래된 선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가장 오래된 악이······!]

[시끄러워. 그 빌어처먹을 이야기는 대체 언제까지 ‘시작하는’ 거냐.]

피어오르는 설화들을 보며, 아가레스가 인상을 썼다.

[가장 오래된 악이 ‘지옥 동부의 지배자’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품속에 손을 넣은 아가레스가 궐련을 꺼냈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궐련에 불이 붙으며 연기가 허공으로 퍼져 나갔다. 추락하는 별들의 개수는 점점 많아졌고,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의 분체들은 추락한 성좌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멀리서 묵시룡의 울음이 들렸다.

[장관이로군. 이 긴 싸움을 마무리하기엔 딱인 무대야.]

선과 악의 수장이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이곳의 모든 비극은 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뒤쪽에서 괴이쩍은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은밀하게 다가온 분체 하나가, 메타트론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마왕,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쿠드드드드!

당장이라도 대천사를 찢어 삼킬 듯 덤비던 분체가 움직임을 멈췄다. 아가레스의 양손이 닫히는 분체의 아가리를 붙들고 있었다.
그 역시 서열 2위의 마왕이다.
현 마계의 마왕들 중 유일하게 ‘신화급 성좌’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존재. 아가레스가 궐련을 씹으며 말했다.

[뭘 멀뚱히 보고 있는 거냐? 여기서 순교라도 할 셈이냐?]
[잠깐이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네놈이 벌린 일이면 제대로 끝을 내라. 잘난 ‘하늘의 서기관’으로서, 제대로 ‘성마대전’의 마무리를 지으란 얘기다.]
[무립니다. 예상보다 묵시룡의 힘이 너무 강합니다.]
[‘벽’의 힘을 사용한다면 가능할 거다.]
[‘벽’의 힘을 사용해도 묵시룡은 봉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여기 있는 녀석들을 살릴 수는 있다. ‘벽’은 본래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 말에 메타트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너는 늘 두 번 말해야 알아듣지.]

분체를 향해 거센 격을 쏟아내는 아가레스가 그곳에 있었다.
메타트론은 오랜 세월 저 마왕과 싸워왔다.
그럼에도 지금 아가레스의 표정은, 그가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 순간 선과 악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마왕의 눈동자가 죽어가는 마왕들과 대천사들을 응시했다.

[지금 저놈들을 살려야, 다음 세대에도 ‘선악’이 이어질 것 아닌가?]
[마왕인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다니, 이상하군요.]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너도 그다지 대천사처럼 보이진 않아.]

아가레스의 부루퉁한 목소리를 들으며 메타트론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토록 오래 싸워온 악마가 어째서 이처럼 가깝게 여겨지는 것인지.
지금 그들의 행동은 선행인지, 아니면 악행인지.
메타트론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가장 오래된 선악의 설화가 당신들을 바라봅니다.]

설령 그들이 설화 그 자체라 한들.
이것은, 설화들이 원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 혼자로는 무립니다.]
[알고 있어.]

[‘선악을 가르는 벽’이 거칠게 흔들립니다!]

하나의 벽을 사이에 두고, 선과 악의 대표가 서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여기서 이들을 살린다고 종말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도 알고 있어.]

메타트론이 만든 봉인구의 위에, 아가레스가 손을 올렸다.

[근데 그건 우리가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대천사와 마왕이 손을 잡았다. 그러자 봉인구가 눈부신 빛을 터트리며 급격하게 커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제 구라기보다는 한 척의 배처럼 보였다.

쿠구구구구!

그것은 한때 세계의 멸망에 맞서 지상의 존재들을 보호했던 방주였다.
대홍수 속에서 종을 보호하기 위해 현현했던 신화 속의 배.
메타트론이 말했다.

[성좌들을 대피시키십시오.]
[알겠습니다, 서기관.]

메타트론의 말에 성좌들 사이에 섞여 있던 ‘방주의 주인’이 배를 이끌었다. 하나둘, 살아남은 발키리들이 주변의 성좌들과 화신들을 방주에 태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방주의 설화를 지탱해야 하는 메타트론과 아가레스는 그 배에 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것은 메타트론과 아가레스만이 아니었다.

[멍청한 짓을 하셨군요, 지옥 동부의 지배자.]
[아스모데우스.]

말을 섞을 틈도 없이, 아스모데우스의 클로가 아가레스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러나 죽음에 직면한 아가레스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불쾌하다는 듯, 아스모데우스가 말했다.

[그만 ‘벽’을 내놓으시죠. 당신에겐 ‘악’을 대표할 자격이 없습니다.]

꾸드득 파고든 클로가 아가레스의 내부를 헤집었다. 새카만 설화를 흘리며 아가레스가 말했다.

[너도 집요한 녀석이구나. 어째서 그렇게 ‘벽’을 원하는 것이냐? ‘벽’을 가지면 신이라도 될 수 있다 착각하는 거냐?]
[그걸 가진다고 신이 될 수는 없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적어도, ‘마지막 시나리오’의 비겁자들중 하나는 될 수 있겠죠.]
[그렇군. 마지막 시나리오에 대해 알고 있었나······.]

씁쓸하게 웃던 아가레스의 두 눈에 광기가 스쳤다.

[미안하지만, 너는 ‘벽’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건 당신이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어차피 당신이 죽으면 당신의 ‘벽’은―]
[내 ‘벽’은 이미 다른 녀석에게 넘겼거든.]
[그런······.]

순간 아스모데우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마왕의 본능으로, 아스모데우스는 아가레스의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대체 누구에게?]
[그건 네가 알아내야지.]

괴성을 지른 아스모데우스의 클로가 아가레스의 목을 꿰뚫었다. 피처럼 쏟아지는 설화 파편 속에서, 아가레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름답지 않나, 메타트론? 이것이 우리의 종말이다.]

희미하게 이어지는 선악의 이중주가 멸망하는 밤하늘을 흘렀다.
떨어지는 유성우를 보며, 아가레스가 웃었다.


*


[성좌, ‘구원의 마왕’이 ‘희생의지 Lv.9’를 발동 중입니다!]

“저거 열 받네 진짜. 끌 수도 없고.”

한수영은 씩씩거리며 외쳤다. 점점 불어나는 암무 속에서, 세 사람은 늘어나는 분체들과 싸우고 있었다.
저 너머에 김독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셋 중 누구도 혼자의 마력으로는 저 암무를 뚫을 수 없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한 사람을 선택해 마력을 몰아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럼에도 세 사람 중 누구도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단순히 이것이 김독자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누가 가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희끄무레하게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세 사람은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저 별을 향해 가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죽을 것이다.

암무는 시시각각으로 짙어지고 있었고, 묵시룡의 충격파는 더욱더 거세지고 있었다.
김독자는 아직 살아있다. 하지만 구할 수 있을 확률은 낮다. 설령 김독자를 구해낸다 하더라도, 김독자와 함께 죽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이것은 누군가를 구하기 위한 다툼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죽을 사람을 뽑는 자리였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죽지 않는다.”

그것은 유중혁의 말이었다. 그 ‘죽지 않음’이 무엇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아는 정희원은 화를 내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수영이 더 빨랐다.

“잘 생각해 정희원. 넌 혼자 죽는 것도 아니야.”

순간, 정희원은 자신의 등에 동여맨 십자가의 무게를 느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여기서 그녀가 죽으면, 그녀의 등 뒤에 매달린 사람도 죽는다.

“그럼 네가 대신 현성 씨 좀―”
“정희원! 뒤!”

정희원은 한수영의 외침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차, 싶었던 순간 뭔가가 그녀의 등을 밀쳤고, 정희원은 비틀거리며 지상으로 낙하했다.
대천사의 날개를 펼쳐 간신히 멈춰섰을 때, 유중혁과 한수영의 신형은 이미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망할! 이게 무슨─ 멈춰!”

마력조차 받지 않고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정희원은 그들이 무슨 결심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그것을 알았기에, 치솟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김독자는 그녀에게 구해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독자를 구하기 위해서, 그녀는 그들을 쫓아가서는 안 되었다.

“우리엘.”

뜨거운 감정을 씹어 삼키며, 정희원은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뻗어 나온 대천사의 마력이, 어둠을 뚫고 날아가는 두 사람의 등 뒤에 눈부신 날개를 만들었다.
그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강한 약동이 느껴졌다. 그것은 누군가의 심장 소리였다. 마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 거세게 뛰는 진동. 정희원이 입을 열었다.

“저도요, 현성 씨.”

우주를 향해 멀어지는 두 개의 빛살을 보며, 그리고 그 너머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연약한 별을 바라보며, 정희원은 무언가를 참아내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데 이번엔 우리 차례가 아닌가 봐요.”





< Episode 78. 전(轉) (4) > 끝

< Episode 78. 전(轉) (5) >





뭉그러진 의식 속에서 설화들이 낱말을 흘려보낸다.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그래, 아직 듣고 있어.
잠들지 않았다고.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당신을 지탱합니다.]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새처럼, 나는 내가 살아온 설화들을 먹으며 견뎌냈다. 피부와 뼈마디에 감각이 사라진 후부터는 시간이 멈춘 듯했다. 내 안의 균형을 담당하던 시계 같은 것이 부서진 느낌이었다.

[‘묵시록의 최후룡’이 거센 포효를 터트립니다!]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 ‘묵시록의 최후룡’을 노려봅니다.]

힘겨루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재앙과 재앙의 대결.
멀리서 퍼져 나오는 충격파의 진동을 안개 내부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강력한 격이었지만, 조금씩 그 진동의 크기는 줄어들고 있었다. 예상대로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묵시룡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강하지만, 이제 막 봉인에서 깨어난 재앙이다. 오래전부터 <스타 스트림>을 부유해온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에 대적하기는 조금 부족할 터.
그러니 힘의 균형은, 천천히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 쪽으로 넘어올 것이다.
문제는 녀석의 분체들이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발동합니다!]

본래 동료들에게는 이 힘을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츠츠츠츠츳!

머리가 짜부라지는 느낌과 함께, 눈앞에 어렴풋한 영상이 떠올랐다. 설화의 손상이 삼한 까닭인지 노이즈가 심했지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김독자를 구하러 가라.”」

아비규환의 전장. 그 전장의 하늘을 뒤흔드는 여의봉의 모습이 보였다.

와 줬구나.

황홀하게 흩날리는 금빛 세모(細毛). 제천대성의 강림을 견뎌내는 장하영이 창공을 향해 격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런 장하영을 돕는 흑염룡과 우리엘의 뒤로, 다시 키리오스와 파천검성의 모습도 보였다.
분체들로부터 일행을 지키는 <명계>의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X급 페라르기니]로 쓰러진 성좌들을 태우는 ‘양산형 제작자’······.
이윽고 전장의 중심에서 퍼진 폭음과 함께, 거대한 배가 등장했다.

「내가 나와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에덴>이 빚은 방주의 설화가 전장을 물들였다.
아무래도 메타트론이 결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역시, 묵시룡을 봉인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겠지.

「“아저씨······.”」

방주에 올라탄 신유승과 이지혜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신유승은 혼절한 이길영을 부축하고 있었다. 폭주하는 길영이를 막는 것이 신유승의 임무였고, 다행히 나의 화신은 임무를 잘 수행해 낸 모양이었다.
성좌와 화신들이 방주로 대피하고, 섬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성좌, ‘만다라의 수호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희끄무레한 염주 같은 것이 눈앞에 나타난다 싶더니, 진언이 들려왔다.

[아해여,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나는 그를 향해 힘겹게 웃어 보였다.

‘이미 알고 계셨지 않습니까.’

눈앞에 떠오른 백팔 개의 염주알이 신묘한 빛을 뿜고 있었다.
석존은 이미 내가 나타나던 그 순간부터 이 시간을 예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원이다. 정확한 미래를 알지는 못하더라도, 그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읽어낼 수 있다.

[섬의 역사도 여기까지군요. 이제 바빠지겠습니다.]

그가 왜 바빠지는 것인지, 나는 ‘멸살법’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일제히 진동하는 염주알들이 새하얗게 탈색되고 있었다. 이 섬은 곧 닫힐 것이다. 그리고 수만 년 전에 그랬듯, 섬은 다시 한번 묵시룡을 봉인하게 되겠지.
이 섬은 묵시룡을 담을 하나의 거대한 염주가 될 것이다.

‘방주에 탄 일행들을 섬에서 탈출시켜 주십시오.’

염주가 희미한 빛을 내뿜었다. 동의의 표시였다.

[하지만 아해는 구할 수 없습니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나는 지금 묵시룡과 더 네임리스 미스트의 한복판에 있으니까.

[부디 아해에게 이야기의······.]

진언은 충격파와 암무의 파도에 휩쓸려 지워졌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조각조각 떨어진 설화들이 분해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나는 몸을 웅크렸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이것만 버텨내면 <김독자 컴퍼니>는 새로운 거대 설화를 얻는다.
마지막 시나리오를 향해 나아갈, 전(轉)을 채울 수 있게 된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이야기를 멈춥니다.]

그리고 설화가 하나둘 끊어지기 시작했다.

[설화, ‘귀환자의 제자’가 이야기를 멈춥니다.]
[설화, ‘미식협의 이단아’가 이야기를 멈춥니다.]

호흡이 곤란해지며 눈앞이 캄캄해져 갔다.

[설화, ‘대천사의 사랑을 받는 자’가 이야기를 멈춥니다.]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모든 게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설화, ‘재앙의 왕을 사냥한 자’가 몸을 웅크립니다.]
[설화, ‘이계의 신격을 살해한 자’가 저항합니다.]

그랬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의식을 이어갔다.
자꾸만 아득해지는 머릿속을, 내가 잘 아는 문장들로 채웠다.

그래, 멸살법 생각을 하자.

그러나 엉뚱하게도,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멸살법’의 내용이 아니라 중학생 시절의 나였다. 사촌 형들 몰래 컴퓨터로 ‘멸살법’을 읽고, 학교의 교과서 귀퉁이에 낙서를 하던 기억들.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던 ‘멸살법’의 내용을 공책에 필사하고, 등장인물들의 파워 밸런스 도표를 만들던 기억들.

―독자는 나중에 작가가 되고 싶은 거니?

내 낙서를 보고 그렇게 물어준 선생님도 있었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아니라 독자예요. 그렇게 말하자, 선생님은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어 보였다.

―그것도 좋구나. 결국 작품은 독자가 있어야 완성되니까.

그 말을 해준 선생님은 사흘 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생이란 그런 것이다.
나도 알고 있다. 삶은 이야기가 아니니까.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멈춥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나는 이 삶이 차라리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살고 싶다.’

뻗은 손에 감각이 없다.
아주 먼 곳에서, 묵시룡과 이계의 신격이 대치하는 전장 속을 헤치고 뭔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나 어슴푸레한 인형이었지만, 나는 그게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놀라운 업적을 인정합니다.]
[당신은 새로운 ‘거대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어디선가 흘러온 따뜻한 빛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무어라 말을 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살리고 싶다.
반드시, 살리고 싶다.

한수영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생존의지 Lv.1’을 발동 중입니다.]

저 메시지를 듣는다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김독자가.

“아직 늦지 않았다.”

유중혁의 말에, 한수영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쓱 닦으며 웃었다.

“난 살면서 한 번도 누구한테 뭘 양보해본 적이 없어.”
“이미 한계라는 걸 알고 있다.”
“남 말하시네.”
“너보다는 오래 버틸 수 있다.”

이제 김독자는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시간도, 상황도 여의치 않았다.
정희원이 달아준 추진력으로는 여기까지가 한계다. 남은 힘으로는 분체들을 상대할 수도, 저 두터운 암무를 뚫을 수도 없었다.

쿠구구구구구······.

풀어헤친 한수영의 붕대에서 피와 설화가 뒤섞여 쏟아지고 있었다.
과할 정도로 창백해진 얼굴. 유중혁이 말했다.

“여기서 개죽음 당할 셈인가?”
“널 백 퍼센트 신뢰할 수가 없어서 말이지.”

유중혁의 눈동자에 차가운 뭔가가 스쳤다. 한수영이 물었다.

“나 거짓 간파 있는 거 알지?”
“물론.”
“너 진짜 김독자를 동료로 여기는 거 맞아?”
“불필요한 질문이군.”
“너희가 시나리오로 지지고 볶으면서 미운 정이 좀 들었다는 건 알아. 그런데 그거랑 별개로, 납득이 안 가는 점도 있거든.”

말과는 다르게, 한수영은 [거짓 간파]를 켜지 않은 채로 말했다.

“넌 원래 동료고 뭐고 없는 놈이잖아. 그런데 이번 회차에 들어와서 너무 많이 변했다 이거지.”
“······.”
“그래서 나는 너를 믿을 수 없어. 대의를 위해 동료들을 저버렸던 네가, 왜 김독자는 구하려는 건데?”

유중혁의 시선이 한수영과 마주쳤다.
그토록 깊은 어둠을 마주한 것은 간만이었기에, 한수영은 자기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어쩌면 건드려서는 안 될 역린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한수영은 유중혁의 ‘회차’에 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으니까.
유중혁이 대답했다.

“이 모든 시나리오가 끝났을 때, 김독자에게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아무 감정도, 생각도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절망 같기도 했고, 분노 같기도 했고, 지독한 외로움 같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 모든 감정은 유중혁이 아니라 한수영 자신의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니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랬기에, 한수영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때까지는 살려둘 거라 이거지?”

그 말을 하는 한수영이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새카맣게 타오르는 [흑염]. 그녀의 마지막 마력이 그 손바닥에 깃들고 있었다.

“약속 꼭 지켜라. 만약 못 구하면―”

이글거리는 한수영의 눈빛이 유중혁을 보았다. 한수영의 작은 손이 유중혁의 등에 맞닿으며, 가공할 마력의 폭풍이 발생했다.

“그냥 다음 회차로 꺼져버려!”

한수영의 팔에서 뻗어 나온 흑염룡의 가호가 일시적으로 유중혁에게 깃들었다. 정희원이 전해준 마력과 한수영이 전해준 마력이 일시적으로 결합하며, 검은 코트의 너머로 빛과 어둠의 날개가 펼쳐졌다.

콰아아아아아!

광막한 공허를 누비며, 유중혁은 [흑천마도]를 거세게 움켜쥐었다.
혼자의 힘만으로는 넘지 못했던 암무를, 유중혁은 정희원과 한수영의 힘으로 넘어섰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의 가호가 당신에게 깃듭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의 가호가 당신에게 깃듭니다.]

그럼에도 마력은 점차 떨어져 갔다. 암무의 밀도가 짙어질수록 별빛은 흐려졌다. 유중혁은 이를 악물었다.
더 뾰족하고 더 정확하고 더 날카로운, 그런 이야기가 필요했다.

저 재앙의 안개를 뚫어낼 수 있는 설화가······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그곳에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모든 공허의 길목에, 그와 김독자가 걸어온 시간이 은하수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유중혁은 그 길을 달려갔다.

[설화, ‘이계의 신격을 살해한 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하나의 설화를 달리고.

[설화, ‘거신의 해방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또 하나의 설화를 달리며, 유중혁의 화신체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은은한 황금빛으로 뒤덮였다. 초월형 2단계, 그리고 3단계······ 4단계를 넘는 순간 유중혁의 몸이 일시적으로 바뀌었다.

으드드드득.

온몸의 뼈가 비명을 지르며, 환골탈태(換骨奪胎)라도 하듯 체형이 더욱 날렵하게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초월형 5단계.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멀리서, 홀로 죽어가는 별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성좌처럼 보이지 않았다.

김독자.

아직 늦지 않았다.
그들이 기억하는 설화들이 남아 있고, 김독자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살아 있다.
김독자가 그토록 만들고 싶어했던 이야기가, 아직 이 세상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설화, ‘김독자 컴퍼니’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너도,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된다.

[화신체의 내구도가 한계치에 달했습니다!]
[‘방주’가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뒤쪽에서 그를 잡아당기는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그 인력이 김독자에게 다가가는 그를 막아서고 있었다.

[성좌, ‘만다라의 수호자’가 당신을 호출합니다.]

“시끄럽다!”

유중혁은 그 모든 힘을 거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김독자는 코앞에 있었다. 열 걸음, 아홉 걸음, 여덟 걸음······ 전신을 찢어발기는 스파크를 견디며, 유중혁은 앞으로 나아갔다.
다섯 걸음, 네 걸음······.

손을 뻗었다.

공허 속을 부유하는 김독자의 옷깃. 그 끄트머리에 손이 닿으려는 바로 그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느낌과 함께 사위가 흔들렸다. 기절을 하거나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유중혁은 누군가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 굳센 손이 그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무척이나 익숙한 손이었다.

[화신 ‘유중혁’의 배후성이 동요합니다.]

세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묵시룡과 이계의 신격이 충돌하는 소리. 섬의 차원이 붕괴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유중혁이 본 것은 그런 멸망의 정경보다도 더 충격적인 것이었다.
한없이 불길한, 그 끝을 잴 수조차 없는 혼돈 너머로 김독자의 것과 똑같은 백색의 코트가 펄럭이고 있었다.

혼절한 김독자를 허리에 낀 존재.

새카만 어둠 속에서, 심연과 같은 두 눈이 그를 보고 있었다.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전율이 올라왔고, 붙잡힌 손목이 미친듯이 떨렸다. 유중혁은 눈앞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는, 미래에서 온 ‘김독자’인가?

언젠가, 유중혁은 누군가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1863회차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아는 존재는 김독자뿐이라고 생각했고, 그랬기에 던질 수 있었던 물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멍청한 질문이었다.

1863회차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는 존재.

어떤 이야기에 관해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는 그것을 읽은 ‘독자’가 아니라 직접 그 이야기를 살아간 ‘등장인물’인 법이다.

【돌아가라. 너는 아무것도 구할 수 없다.】





< Episode 78. 전(轉) (5) > 끝

< Episode 78. 전(轉) (6) >





묵시룡과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의 대결.
재앙과 재앙의 충돌에 별들이 추락했고, 그 멸망의 정경은 <스타 스트림> 전역에 방송되고 있었다.

[이 섬의 끝이 다가오는군요.]

만다라의 수호자 역시, 패널을 통해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환생자들의 섬’이 부서지기 시작하며, 그의 화신체에도 조금씩 노이즈가 끼고 있었다.
그런 만다라의 수호자를 향해, 수조 속의 유상아가 말했다.

―이미 알고 계셨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유상아의 영혼이 말없이 빛을 뿜었다. 그녀의 화신체는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제가 ‘도서관’에서 본 당신은······.

[그 이야기는 아껴두십시오.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원 전체에 무거운 진동이 일었다. 불온하고 탁한 공기가 근방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르르르, 하는 짐승의 울음 같은 것이 들려왔다. 사방 공간의 모서리가 만들어 낸 그림자에서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불길한 기운에 유상아의 영혼체도 불안하게 떨렸다. 수조 속에서 일어나는 기포가 많아지자 석존이 나섰다.

[틴달로스의 사냥개들이여. 사냥감을 잘못 찾아온 모양이군요.]

석존이 가볍게 염불을 외우자, 주변을 배회하던 그림자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다른 사냥감을 찾아 떠나는 들짐승들처럼.
유상아는 그 그림자들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방금 그건······.

[아해여. 이제 마지막 시나리오의 문이 가까워졌습니다.]

석존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쿠구구구구.

그의 목에서 발열하는 염주들이 일제히 허공에 떠올랐다.
그가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알고 있는 유상아가 물었다.

―저는 되살아나지 못하는 건가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이 섬이 끝나면 당신도 죽을 테니까요. 그럼 저도 부활할 수 없겠죠.

[아해여, 우리는 거래를 했습니다. 아해는 나의 부탁을 들어주고, 이 몸은 아해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 그리하여 이 세계의 평형을 맞추는 것.]

석존은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 아해는 무사히 환생할 겁니다. 아직 화신체의 업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기에 당장 활동하진 못하겠지만, ‘마지막 시나리오’에서 그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니······.]

유상아는 그게 무슨 뜻인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을 채 묻기도 전에,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잠깐 쉬고 계시지요.]

유상아의 영혼이 잠들자, 석존은 수조에서 그녀의 화신체를 꺼내어 어딘가로 전송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하는 소리와 함께 사원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어느새 패널 화면이 바뀌어 있었다. 똑같은 얼굴을 가진 두 사내가, 각각 흑과 백의 코트를 입은 채 서로를 마주 보는 장면.

[마침내 당신이 움직이는군요. 수레의 끝에 선 존재여.]

잠시 그 광경을 보던 석존이 아쉽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슬슬 이쪽도 준비를 해야겠지요.]


*


대체 어떻게.

유중혁은 그 말을 싫어했다. 회귀자로 살다 보면 가장 자주 듣는 말이 그것이었다. 레파토리의 변용도 뻔했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에서부터 “대체 어떻게 네놈이?”에 이르기까지. 그 말을 듣는 것이 지겨웠던 유중혁은 제일 먼저 그 대사를 던질 인물부터 죽인 적도 많았다.
그런데 지금 유중혁은

“······대체 어떻게?”

스스로의 입으로 그 말을 꺼내고 있었다.
그것이, 상대에게 비웃음을 살 행동임을 잘 알면서도.

츠츠츠츠츠······.

휘몰아치는 개연성의 폭풍 속에 그가 잘 아는 얼굴이 있었다. 이곳에 있을 수 없는 얼굴이었고, 이곳에 있어서도 안 될 존재였다.

[해당 지역의 혼돈 수치가 급격하게 높아지고 있습니다!]
[시나리오의 균형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비틀거리면서도, 유중혁은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장 난 시계가 미뤄왔던 시간을 한꺼번에 돌리듯 그의 안에서 무수한 가설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

「녀석은 김독자여야 했다」
「하지만 김독자가 아니었다」
「1863.」
「하지만 어떻게?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내가 그 말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마치 그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눈앞의 존재가 답했다.
유중혁은 다시 한번 그 얼굴을 마주 보았다.
환한 스파크 속에서 빛나는 흰색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
뻥 뚫린 어둠이 있어야 할 두 눈의 자리에 그와 같은 크기의 동공이 있었다. 눈만이 아니었다. 코도, 입도, 턱선과 체격도. 마치 거울을 보는 듯 자신과 흡사한 외형. 차이점이 있다면, 그 존재의 뺨에는 커다란 흉터가 있다는 것.
유중혁은 발작적으로 말했다.

“네놈은 내가 아니다.”

【맞아. 나는 네가 아니지.】

새카만 어둠을 담은 눈동자가 허리에 매달린 김독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성좌 ‘구원의 마왕’을 응시합니다.]

마치 확인사살처럼 내려앉은 메시지에 유중혁은 몸을 떨었다.

“은밀한 모략가······.”

눈앞의 존재가, 정말 그 ‘은밀한 모략가’라고?
김독자를 1863회차에 보내고, 자신에게 김독자의 비밀을 알려 혼란에 빠지게 만들었던, 그 무수한 ‘간접 메시지’를 보내왔던······

그 ‘은밀한 모략가’가, 1863번의 회귀를 거듭한 자기 자신이라고?

멀리서 들려온 폭음에 유중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것은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김독자를 내놔라.”

상대는 ‘은밀한 모략가’다.
혼돈에서 태어난 이계의 신격.
예측불허의 행동을 반복해온 놈의 패턴을 생각하면, 저 모습은 얼마든지 가짜일 수······.

【그렇게 둔한 머리로 용케 지금까지 살아남았군.】

“닥치고 김독자를 내놔라.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코앞에서 흘러나오는 격에, 유중혁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의 유중혁은 최상위격의 설화급 성좌인 인드라와도 맞서 싸울 수 있었고, 심지어는 커다란 상처를 입힐 수도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존재에겐······.

【네놈이 뭘 할 수 있지?】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유중혁은 숨을 몰아쉬었다.
심지어 놈이 나타난 후로는, 주변을 억압하던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의 분체들이 슬금슬금 물러나는 기미까지 보였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시나리오의 부조리에 화가 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개연성을 허락한 <스타 스트림>에 증오가 일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하는 순간, 머릿속이 환해졌다.

「지금까지 은밀한 모략가가 행한 일들을 생각한다면, 놈이 지금 이곳에 현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은밀한 모략가는 제천대성이나 우리엘, 흑염룡과는 다르다. 놈은 이계의 신격이고, 강림에 어마어마한 개연성을 필요로 하는 존재다.

츠츠츠츠츳······!

실제로 시간이 지날수록 ‘은밀한 모략가’의 전신은 강한 후폭풍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 어떤 존재라 해도, 개연성의 후폭풍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아주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김독자였다면.」

마치 김독자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유중혁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 지금까지는 가만히 있었으면서, 왜 이제 와서 갑자기 개입한 거지?”

【이제 때가 되었으니까.】

“······때가 되었다?”

그 물음과 함께 공허의 저편에서 굉음이 발생했다. 묵시룡과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의 싸움이 이제 절정에 이른 것이었다.
가공할 폭발 속에, 일대의 공간에 거대한 왜곡장이 발생했다. 은하계를 통째로 뭉그러뜨리는 그 풍경에, 유중혁은 정말 <스타 스트림>이 멸망하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확실히 저런 개연성이라면 이제 뭐가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저 ‘은밀한 모략가’는, 줄곧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이다.

쿠구구구구구!

상공에서 [그레이트 홀]들이 열리고 있었다. 그렇게나 많은 [그레이트 홀]이 동시에 열린 것은 처음이었다.
단 하나만 열려도 세계를 멸망시킨다는 재앙의 구멍. 그 아득한 구멍들을 통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촉수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오오오오오오!】
【■■■······■■■■■■】
【위대한 모략이시여!】
【사라진 섬들의 융기가 시작될 것이다······!】

······.

괴기스러운 울음들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탁기로 물드는 진언들.
그 진언들에 반응하듯, 김독자를 낚아 챈 ‘은밀한 모략가’의 몸이 천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그레이트 홀]이 있는 방향이었다.
유중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잠깐, 기다려라!”

아무런 확신도 없는 채로, 유중혁은 ‘은밀한 모략가’가 향하는 길목을 막아섰다. 그저 길을 막은 것뿐인데 코에서 주륵 피가 흘러내렸다. 시야가 흔들렸고, 검을 쥔 손이 떨렸다. 그럼에도 유중혁은 말했다.

“너는 갈 수 없다.”

그런 유중혁을 보며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마라. 회귀가 항상 온전한 다음 생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니까.】

유중혁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했다.
하나의 생은 그 생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나간 생들은, 언제나 다음 회차의 저주로 남는다.
검을 으스러져라 쥔 유중혁이 말했다.

“나는 다음 회차로 가지 않는다.”

【······그래?】

다음 순간, 유중혁은 전신이 우그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 어떤 기척도, 전조도 없는 공격. 그저 시선의 움직임만으로, 유중혁의 전신은 압착기에 들어간 것처럼 쪼그라들고 있었다. 피를 토한 유중혁이 외쳤다.

“얕보지 마라!”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의 기운이 전신을 감싸자, 몸을 억압하던 격의 위세가 일순 주춤했다.
지금은 김독자의 의식이 없으니, <김독자 컴퍼니>가 가진 ‘거대 설화’의 최고 담화자는 유중혁이었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움직였다.

모든 마력을 투사한 [흑천마도]에 파천의 결이 실렸다.
하늘을 부수고, 별을 베었던 칼.
그 칼이, 이제 자기 자신을 베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 어떤 기교도 부리지 않은 순수한 기습.
하지만 칼은 날카로운 파찰음과 함께 정지했다. 금속성의 무언가가 그의 칼을 받아냈던 것이다. 유중혁의 동공이 커졌다.

[진천패도].

그의 세계인 3회차에서는 오래전에 부러진 그 칼이, ‘은밀한 모략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두 자루의 칼이 다시 한 번 부딪치며 불꽃 섞인 광풍이 일었다. 유중혁의 코와 입에서 후두둑 피가 쏟아졌다. 그저 검을 맞대는 것만으로도 까마득한 우주 너머로 영혼이 추락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단 한 번의 충돌로 오른팔이 박살나고 늑골이 부서졌다.
그 끔찍한 통증을 내색하지 않은 채, 유중혁은 계속해서 자신의 격을 끌어 올렸다.

적어도 죽지는 않았다.
그렇다는 건, 해 볼 만하다는 뜻이었다.

“네놈도 불구인 것은 마찬가지다.”

예상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은밀한 모략가’의 위상은 불안해지고 있었다. 존재에 끼는 스파크가 점점 심해졌고, 코트와 화신체를 유지하던 설화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마치 서로 융합할 수 없는 설화들이 뒤섞이기라도 한 것처럼.

「분명 놈은 무리하고 있다. 시간만 끌면 돼.」

게다가 ‘은밀한 모략가’는 아까부터 뭔가를 신경 쓰는 것처럼 보였다. 표정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유중혁은 느낄 수 있었다.
놈의 격은 무언가를 꺼리고 있다. 즉, 녀석은 지금 마음 놓고 이곳에 존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시간 끌기라······ 너에겐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군. 김독자에게 배운 건가?】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이 많아졌다는 것은, 저쪽도 초조해졌다는 증거.

【너는 아직 3회차에 불과하다. 그러니 지금의 네 목적과 김독자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이다. 어째서 김독자에게 집착하는 거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김독자의 존재가 필요하다.】

“그럼 나도 마찬가지라고 대답하면 되겠군.”

순간 ‘은밀한 모략가’의 눈가에 희미한 감정 같은 것이 스쳤다.
마치, 유중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한 눈빛.

【너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 회차의 마지막 시나리오는 김독자도 모르는 형태일 테니까.】

“그놈 혼자라면 그렇겠지.”

【우습군. 아무것도 모르는 3회차 주제에······.】

“3회차지만.”

유중혁의 전신에서 설화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네놈이 모르는 3회차를 살았다.”

3회차에서 새로이 얻은 설화들이 유중혁의 일부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어떤 문장들은 구슬프게 흘렀고, 또 어떤 문장들은 한없이 유려하고 아름답게 흘렀다. 지금까지의 생에서는 없었던 설화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의 삶에서도 없을 설화들이었다.
그 설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아니, 나도 알고 있는 삶이다.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여.】





< Episode 78. 전(轉) (6) > 끝

< Episode 78. 전(轉) (7) >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
몇 번이나 들은 그 말에,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또 꼭두각시 타령이군. 그게 대체 무슨 뜻이지?”

【그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니 네가 아직 3회차인 것이다.】

“잘난 듯 떠들지 마라. 네가 이 회차에 대해 뭘 안다는 거냐?”

【네놈보다는 훨씬 더 잘 알고 있지.】

순간, 발끈한 유중혁의 오른쪽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전용 스킬, ‘현자의 눈 Lv.???’을 발동합니다!]

지금의 유중혁은 초월좌였고, 설화급 성좌들과도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격의 상승을 거듭한 상태.
[현자의 눈]이 사용자의 격에 비례해 식별 수준이 상승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는 이제 성좌의 파편화된 정보도 읽을 수 있어야 했다.

츠츠츠츠츳!

지금껏 그의 [현자의 눈]을 완벽히 방어해낸 인물은 둘이었다. 하나는 예언자인 안나 크로프트. 그리고 다른 하나는 김독자.
하지만 유중혁의 생각이 맞다면, 그가 절대로 읽을 수 없는 존재는 하나 더 있었다.

【3회차 답게 판단도 둔하군.】

‘은밀한 모략가’의 오른쪽 눈동자에서 유중혁의 그것과 똑같은 찬연한 황금빛이 감돌고 있었다.
오른쪽 시야가 일순간 붉게 물들며, 흘러내린 피눈물이 유중혁의 뺨을 적셨다.

[전용 스킬, ‘현자의 눈’이 ‘현자의 눈’에 의해 완벽히 방어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화신 ‘유중혁’을 바라봅니다.]

“네놈 따위가 ‘유중혁’일 리가 없다.”

인정할 수 없었다.

“어떤 회차의 ‘유중혁’이라 해도, 다른 존재의 ‘시나리오’를 유희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확신이었다.
설령 그가 다른 회차에 존재한다 해도, 몇 번의 회귀를 거친다 해도 변하지 않을 신념에 대한 확신.
‘은밀한 모략가’의 눈동자가 고요히 빛났다.

【네놈 말이 맞다. 지금의 나는 그저 ‘은밀한 모략가’일 뿐이니까.】

그저 은밀한 모략가일 뿐. 그것은 ‘은밀한 모략가’가 몇 번이고 주워섬겨온 말이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3회차의 ‘유중혁’은 <스타 스트림>을 부수기 위해 존재했지.】

“······잘 아는군.”

강맹한 울음을 터트리는 [흑천마도]를 보며, ‘은밀한 모략가’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것은 미소라기보다는 차라리 ‘사이한 입술의 움직임’이라고 표현해야 할 법한 것이었다.

【<스타 스트림>을 부수면 모든 성좌들은 추락한다. 그렇다는 것은, 이 녀석도 죽게 된다는 뜻이지.】

‘은밀한 모략가’의 시선 끝에 축 늘어진 김독자가 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흔들리는 그 모습에, 유중혁이 달려들었다.

까아아아앙!

[진천패도]와 [흑천마도]가 교차하며 검고 푸른 불꽃이 튀었다. 유중혁의 입에서 선혈이 흘렀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포효합니다!]

그것을 닦지도 않은 채 유중혁은 다시 한번 칼을 휘둘렀다. 불필요한 생각을 덜어내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사고의 프로세스를 단순하게 만들고, 눈앞의 목표에만 집중하기 위한 발악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이미 그런 유중혁의 속내를 짐작하고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놀리듯이 [흑천마도]를 피해내며 물었다.

【왜 김독자를 구하려 하지? 이 녀석도 결국은 네가 그토록 증오하는 ‘성좌’가 아닌가?】

[흑천마도]의 칼날이 희미하게 동요했다.
유중혁이 발산하던 거대 설화의 격이 흔들리자, ‘은밀한 모략가’가 빈틈을 노리지 않고 한 걸음을 내딛었다.

【네 신념대로라면, 이 녀석은 진즉에 죽었어야 한다. 세상에 좋은 성좌 따윈 존재하지 않으니까.】

성좌. <스타 스트림>의 시나리오를 탐하고, 화신들을 관음하며, 세상 모든 것을 설화의 소재로 탐식하는 존재. 엄밀히 말하면 ‘구원의 마왕’은 그런 성좌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리고 유중혁의 목적은, 그 모든 성좌들을 파멸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중혁은 성좌가 된 김독자를 죽이지 않았다.

「왜?」

섣불리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렇기에, 줄곧 미뤄왔던 질문이기도 했다.

「왜 유중혁은 김독자를 죽이지 않는가?」

김독자를 둘러싼 무수한 관계들이 유중혁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신유승과 김독자. 이길영과 김독자. 성좌들과 싸우는 김독자.
동료들을 위해 목숨을 거는 김독자.
그래서, 결국 저런 꼴이 되어 죽어가는 김독자······.

“김독자는······.”

김독자의 주변에 떠오른 설화의 파편들이 ‘구원의 마왕’으로 살아온 ‘김독자’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유중혁도 물론 알고 있는 설화들이었다.

그가, 함께 살아온 설화들이었다.

[바아앗······.]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비유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으며,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구원의 마왕’은 성좌지만.”

세상에 좋은 성좌는 없다. 그것은 0회차부터 3회차까지 4번의 삶을 살아온 유중혁의 변하지 않는 기치였다.
좋은 별은 추락한 별뿐이고, 좋은 도깨비는 죽은 도깨비뿐이며, 좋은 시나리오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유중혁은, 지금 그런 자신의 신념을 배반하고 있었다.

“‘김독자’는······ 성좌가 아니다. 그놈은 그냥 인간일 뿐이야.”

그것이, 말이 안 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륵.

그리고 어둠 속에서 뭔가가 울었다. 그륵. 그륵그륵그륵. 마치 어둠 그 자체가 울고 있는 것 같은 소리. 아니, 어쩌면 웃고 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 어둠의 중심에 ‘은밀한 모략가’가 있었다.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여. 너는 ‘김독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은밀한 모략가’의 손에 쥐어진 [진천패도]가 고독한 울음을 터트렸다. 지금껏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삶을 살아온 자만이 품을 수 있는 검명(劒鳴)이었다. 유중혁은 지지 않겠다는 듯 기세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네놈은 뭔갈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라.”

‘은밀한 모략가’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기절한 김독자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울음을 참고 있던 아이가 눈물을 쏟아내듯 김독자의 몸에서 설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유중혁이다.”」

그 말을 되뇌는 어린 시절의 김독자가 있었다.
사촌의 집에서 나와, 최저 시급보다 못한 알바비를 받는 김독자의 모습.

「“나는 유중혁이다.”」

초라하고 뻔한 이야기였다.
흔한 가난, 흔한 불행.
너무나 흔해서 소설로조차 남지 못 할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살아가는 김독자가 그곳에 있었다.

「“······나는 유중혁이다.”」

그 말을 되뇌며 고등학교를, 대학교를, 군대를, 회사를 전전하는 한 등장인물이 그곳에 있었다.
웹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에 이입하며, 그 이야기로부터 힘을 얻으며, 감동하거나 분노하거나 슬퍼하며.

「“나는······.”」

김독자는 그렇게 살았다.
유중혁의 ‘설화’를 읽으며, 별 볼 일 없는 일생을 살아남았다.
자신의 불행 대신 유중혁의 불행을 소비하고. 자신의 불행 대신 유중혁의 죽음을 소비하며. 댓글을 쓰고. 이야기에 간섭하며.

「“작가님. 혹시 다음 에피소드는······.”」

【김독자는 태생부터 성좌였다.】

‘은밀한 모략가’의 위상이 불안해지고 있었다. 마치 깊은 어둠에 감화되기라도 하듯, 하얀 코트의 끝자락이 새카맣게 흩어지고 있었다.
그 코트의 끝자락을 따라, 김독자의 삶도 함께 부서져 나갔다.

【다른 존재의 삶을 소비해, 자신을 연명하는 성좌였지.】

유중혁도 그런 김독자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설화들이었다. 유상아가 강제로 끌어들인 ‘도서관’이라는 곳에서, 유중혁은 저 기억의 파편들을 보았다.

【······3회차. 네놈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과거의 김독자가 어떻게 살아남았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다.”

유중혁의 몸에서 황금빛 아우라가 흘러나왔다. 마치 지금껏 ‘은밀한 모략가’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서였다는 듯이.
천천히 눈을 뜬 유중혁의 전신이 완연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초월형 5단계의 격이 유중혁의 내부에서 충만한 격을 방출하고 있었다.

“중요한 건 이 세계의 끝을 보기 위해 놈이 필요하다는 것.”

[흑천마도]에 실린 파천의 결이 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놈을 죽여야만 한다면, 그건 내가 될 거라는 것이다.”

유중혁의 [허공답보]가 우주를 내딛었다.

[‘방주’가 화신 ‘유중혁’을 부르고 있습니다!]
[성좌, ‘만다라의 수호자’가 화신 ‘유중혁’을 호출합니다!]

이제 시간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두 개의 거대 설화가 그의 칼날에 깃들었다. 그 위로 그가 잘 아는 빛과 어둠의 격이 함께하고 있었다. 한수영과 정희원이 전한 마력.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화신 ‘유중혁’에게 가호를 내립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화신 ‘유중혁’에게 가호를 내립니다.]

그 순간 유중혁은 혼자가 아니었다.
상극의 격이 하나의 칼날에 깃들자 [흑천마도]의 영롱한 빛이 파괴적인 설화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그 칼날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달렸다. 그 길의 곳곳에 <김독자 컴퍼니>가 살아온 시간의 모든 국면들이 배어 있었다.

파천검뢰(破天劒雷).

새파란 전격이 유중혁의 칼날을 휘어 감았다. 묵시룡의 전격파가 밀려왔을 때도 줄곧 아껴두고 있었던 파천검도의 오의.
거기에, 유중혁이 전심전력으로 단련해 온 비전이 더해졌다.

파천검도(破天劍道).
비전오의(秘傳奧義).
유성참(流星斬).

저 강력한 <베다>의 로카팔라인 인드라조차 격침시킨 기술.
황홀할 정도로 파멸적인 선을 그리는 그 검격이, 하나의 별을 베어내기 위해 움직였다.
그것은 유중혁의 3회차 전부가 걸린 일격이었다.

【말을 전혀 못 알아듣는군.】

그리고 다음 순간, 유중혁은 보았다.
주변의 시공간이 왜곡되며, 어떤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네놈들을 반드시 죽일 것이다.”」

그것은 유중혁도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하늘을 향한 증오의 목소리.

「“몇 번이고.”」

0회차부터 1863회차까지.
총 1864번의 삶이 만들어 낸 설화.

「“다시, 몇 번이고 되살아나서.”」

그것은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지옥(地獄).

「“네놈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순간, 유중혁은 자신이 지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압도를 넘어 차라리 경외를 느낄 정도의 격차.
유중혁은 그 설화의 면면에 새겨진 절망을, 후회를, 슬픔을, 증오를 이해했다. 이해

할 수 없었다.

그 까마득한 감정의 깊이를, 유중혁은 가늠

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유중혁은 무수한 설화 속의 유중혁들처럼 절망했다.
그 설화 앞에서, 그는 ‘은밀한 모략가’의 말처럼 그저 ‘3회차’의 유중혁이었다.

대체 무엇을 더해야, 저 아득한 시간을.

정신을 차렸을 때, 유중혁은 허공을 날고 있었다. 정희원과 한수영이 내준 날개들은 찢어졌다. 반토막난 그의 [흑천마도]는 부서진 그의 삶처럼 회전하며 추락하고 있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진천패도]가 그의 심장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혼돈 수치가 급격하게 상승합니다!]
[누군가가 ‘은밀한 모략가’의 존재를 경계합니다!]
[‘심연을 좇는 사냥개’가 등장합니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휘어진 공간의 각도로부터, ‘이계의 신격’만큼이나 불길한 괴생물체들이 등장했다. 마치 훈련된 사냥개처럼 울음을 토한 녀석들은, 마치 가속이라도 한 것처럼 시공간의 법칙을 무시한 채 ‘은밀한 모략가’를 향해 달려들었다.

츠츠츠츠츳······!

【귀찮은 사냥개들이······.】

유중혁을 향해 떨어지던 [진천패도]가 방향을 틀어 사냥개들을 쳐냈다. 하지만 모두 막아내지는 못했다.
유중혁은 그 사냥개가 바로 ‘은밀한 모략가’가 꺼리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냥개에 물린 ‘은밀한 모략가’는 서둘러 [그레이트 홀]을 향해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쥐어진 김독자도 함께.
유중혁은 힘없이 손을 뻗었지만, 이미 별은 까마득히 먼 곳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에겐 이제 별을 향해 나아갈 기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꺾인 두 장의 날개가 모래처럼 바스러졌고, 유중혁은 그대로 지상의 어둠을 향해 추락했다.


*


[이제 출발해야 합니다.]

“기다려! 아직 사부랑 아저씨가 안 왔다고!”

강짜를 부리는 이지혜를 보며, ‘방주의 주인’은 곤란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렸다.

[89번 시나리오― ‘묵시록의 최후룡’의 종료가 임박했습니다.]

이제 섬의 폐쇄까지 남은 시간은 30초. 아무리 늦어도 20초 안에 이 섬을 떠나야만 한다. 결국 결단을 내린 ‘방주의 주인’이 노를 저으려는 순간.

“저기 온다!”

허공에서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유중혁!”

넝마가 된 코트. 의식을 잃은 유중혁이 지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사부! 어떻게 된 거야?”

이지혜가 추락하는 유중혁을 받아 방주로 되돌아왔다. 한수영과 정희원이 다가와 유중혁을 흔들었다.

“유중혁! 뭐야, 왜 혼잔데? 김독자는······!”
“독자 씨는 어딨죠?”

유중혁은 대답이 없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정희원과 한수영이 허공을 올려다보는 순간, 방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아직 한 사람 안 왔어!”
“멈추라고, 씨발!”

그러나 일행들의 말은 밀려온 충격파와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의 암무에 휩쓸려 사라져버렸다.

[시나리오 지역이 폐쇄됩니다!]
[워프가 시작됩니다!]

성좌들의 비명. 추락하는 유성우들 속에, 하나의 세계가 저물고 있었다.
거대한 멸망을 막기 위한 작은 멸망.
그 정경 속에, ‘환생자들의 섬’이 영원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안돼! 멈춰! 멈추라니까!”

선명한 빛줄기 속으로 사라지는 방주. 그 방주 안에서 사람들이 손을 뻗었다.
누군가는 주저앉았다. 누군가는 울부짖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김독자―!”

[시나리오 정산 보상을 획득하였습니다.]
[<스타 스트림>의 누군가가 ‘전(轉)’을 완성하였습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원하지 않던 이야기만이, 그곳에 남았다.





< Episode 78. 전(轉) (7) > 끝

< Episode 79. 은밀한 모략가 (1) >





‘성마대전’이 끝난 후 이틀이 지났다.
악몽으로 가득했던 ‘환생자들의 섬’은 이제 보이지 않았고, 성좌들은 슬슬 자신들의 별자리를 찾아 방주를 떠나고 있었다.

―이번 역은 <올림포스>입니다.

선내의 메시지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이들은 <올림포스>의 성좌들이었다. 대표로 선 디오니소스가 정희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힘들 텐데 먼저 가서 미안하군.]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마. 다른 성좌도 아니고 그 녀석이잖아. 분명 살아 있을 거야.]

정희원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디오니소스가 성좌들을 이끌고 암흑차원 너머로 사라졌다. 정희원은 성좌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가 방주의 뱃머리에서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한수영이었다.

“디오니소스는?”
“갔어.”
“척준경이랑 <명계>도?”
“그쪽은 아마 조금 있다가 떠날 것 같아.”
“우리엘은?”

한수영은 계속해서 물었고, 정희원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대개는 소소한 정보들이었다.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우리엘. 척준경의 거처에 관해서. 누가 떠나고 누가 머무르는지. 그리고 누가 그들과 함께하는지······ 어떤 것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는 정보였다. 그러나 누가 뭘 알고 있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하영이는 완전히 탈진해서 스승님들이 추궁과혈을 돕고 있어.” 
“지혜는?”
“후미에서 부서진 전함 고치고 있어.”
“이현성은?”

누군가는 묻고, 누군가는 대답하는 것. 두 사람은 방주의 복도를 걸으며 그것만을 반복했다. 마치 그것을 하지 않으면 한순간이라도 버틸 수 없을 것처럼.

“애들은?”
“애들은······.”

정희원이 말을 잇기도 전에, 복도 선실의안쪽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당장 어둠의 계약을 해서 형의 복수를······.
―복수는 뭔 복수야. 아저씬 분명 살아 있어. 느낄 수 있다고.
―······나도 알고 있거든? 독자 형이라면 반드시······!
―정신 똑바로 차려. 지금은 건실한 계획을 세워야 할 때야.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정희원과 한수영은 자리에 멈춰서서 아이들의 말을 들었다. 하루 전까지도 이성을 잃고 울부짖던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선실의 창 너머로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은······.

“······괜찮은 것 같네.”

그렇게 말하는 정희원을 향해, 한수영은 한 박자를 쉬고 물었다.

“너는?”

정희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떨어지는 시선. 한수영은 정희원을 바라보는 대신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을 함께 바라보았다. 정희원이 입을 열었다.

“구해달라고 말했어.”
“······.”
“나한테, 구해달라고 했다고.”

꾹 쥔 주먹. 서로를 보고 있지 않아도 공유할 수 있는 감각이 있었다. 어디선가 마른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한수영은 묵묵히 그 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이 많아.”
“······그래, 알아.”

소매로 얼굴을 문지른 정희원이 힘없이 웃어 보였다.

“일단 서울로 가야겠지?”
“그래야지.”
“독자 씨가 사라진 틈을 타서 서울을 노리는 녀석들이 분명 있을 거야. 가면 치안 정리도 해야 할 거고.”
“이수경한텐 누가 말할래?”
“그건······.”

두 사람은 말을 멈춘 채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한수영이었다.

“이럴 때 유상아가 있어야 하는데.”
“······상아 씨 보고 싶네.”

그들은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고개를 돌리자 선실의 창밖으로 암흑차원의 정경이 지나가고 있었다. 먼 은하의 너머로 반짝이는 별들이 보였다.

별 하나가 사라졌다고 해서 갑자기 우주가 멸망하지는 않는다.
우주에는 무수한 별들이 있고, 빛은 여전히 존재하니까.

하지만 어떤 행성에 사는 이들에게, 그 별은 그들이 아는 빛의 전부였다.

한수영은 창문에 비치는 정희원의 얼굴을 애써 외면했다. 정희원이 중얼거렸다.

“독자 씨는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한수영은 대답하지 않고 앞장서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의 끝방이 나왔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전신에 붕대를 두른 유중혁이 누워 있었다. 한수영은 뒤적뒤적 품을 뒤져 레몬 사탕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이 녀석이 깨어나면 알 수 있겠지.”


*


그것은 한창 ‘멸살법’을 읽던 시절의 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하루 치 일과를 해치운 것에 만족하며 스크롤을 내리는데, [작가의 말] 칸에 뭔가가 쓰여 있었다.

―독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게 무엇에 관한 질문이었는지는 잊었다. 전개에 관한 것이었을 수도 있고, 작중 떡밥에 관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내가 떠올리기도 전에 어린 나의 손가락이 키보드를 눌렀다.

―음. 그런 단순한 반전은 조금······.
―역시 그렇죠?

기억을 들여다보며 새삼 놀랐다. 이런 일도 있었나. ‘멸살법’에 대해서는 그렇게 잘 기억하면서, 왜 이런 기억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맞아. 생각해 보면 ‘멸살법’의 작가는 가끔 내게 말을 걸어왔었지.

그리고 나 역시, 종종 댓글을 쓰며 작가에게 말을 걸기도 했고. 보통은 응원 메시지나 다음 회차에 관한 질문이었지만, 때로는 태클을 걸 때도 있었다. 
아마 유중혁의 인생이 600회차를 막 넘긴 시점이었던 것 같다.
소설을 읽은 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던 나는, 작가에게 결국 댓글로 따졌다.

―작가님. 오타 아닌가요? 중혁이가 ‘방긋’ 웃다뇨.

tls123이 대답했다.

―600번쯤 회귀하면 누구나 그렇게 되죠.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아서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유중혁의 회귀 횟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600번의 회귀라. 그런 생을 거듭하는 인물에게, 삶이란 대체 어떤 의미일까.

「김 독 자 정 신차 려」

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느낌과 함께, 의식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전신이 찌뿌드드했고, 화신체 곳곳에서 심각한 통증이 느껴졌다. 간신히 눈을 뜨자 희미한 빛살이 망막을 찔렀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깨어난 모양이군.”

역시 양반은 못 되시는구만.
나는 피식 웃으며 눈을 그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네놈이 김독자인가?”

눈을 떴을 때, 나는 무수한 유중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


내가 제정신을 차리기까지는 그로부터 10여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잠깐 다시 기절했던 나는, 곧바로 눈을 뜨는 대신 어떻게든 지금 내게 일어난 일들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우선 상황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하나, 성마대전은 끝났다.

그건 확실해 보였다.
무엇보다, 지금 내 로그에 남아 있는 메시지가 그 증거였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을 획득하였습니다!]
[당신의 세 번째 거대 설화가 ‘전(轉)’을 완성하였습니다!]
[히든 시나리오 ― ‘단 하나의 설화’의 세 번째 조건이 완수되었습니다!]
[최후의 설화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타 스트림> 전체가 당신의 업적에 들썩입니다!]
[<스타 스트림>의 다수 성운들이 당신의성운을 주목합니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설화를······.]

나는 마침내 ‘단 하나의 설화’의 전(轉)을 완성한 것이다.
어마어마한 설화의 에너지가 내 안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

나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거대 설화였다. 그도 그럴 게, 더 네임리스 미스트와 묵시룡을 충돌시키는 것 자체가 원작에서는 일어난 적 없는 일이었으니까······ 아마 이것을 계기로 세계선 전체의 격변이 시작될 것이다. 
멸망의 흐름이 가속화되었으니, 시나리오 전체의 흐름도 가속화될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둘, 나는 누군가에게 구출되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대체 누가 나를 구했는가?

“기절한 척 해봤자 소용없다.”

참고로 내가 맨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나를 구하러 온 유중혁의 모습이었다. 그러니 눈앞에 유중혁의 얼굴이 보이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문제는······.

“생긴 것만 멍청한 게 아니라 머리도 멍청한 모양이군.”
“과연 듣던 대로다.”

대체 왜 그 ‘유중혁’이 여럿이냐는 것이다.
심지어는······.
나는 멍한 눈으로 침대 위에 올라와 있는 대여섯 마리의 ‘꼬마 유중혁’을 보았다. 분명 유중혁은 유중혁인데, 죄다 가분수의체형인 데다 키는 키리오스랑 비슷한 수준이었다. 

······꿈인가?

역시 꿈을 꾸는 게 틀림없었다. 평소 그놈에게 받은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게 쌓여서 이런 끔찍한 망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내가 뺨을 철썩철썩 때리자 꼬마 유중혁들이 입을 열었다.

“꿈인줄 아는 모양이군. 멍청하게도.”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귀찮은 놈이군. 꼭 기다려 줘야 하나?”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방의 정경을 둘러 보았다.
커다란 원형의 방이었다. 탁자도, 의자도, 소품을 비롯해 심지어는 내가 앉아 있는 침대도 동그랗게 생겼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이렇게 특별한 내실이라면 생각날 법도 한데, ‘멸살법’에서도 본 기억이 나질 않았다. 
혹시 새로운 시나리오 지역인가 싶어 시나리오 창을 호출했더니, 설상가상으로 이런 메시지까지 떠올랐다. 

[현재 <스타 스트림>의 시나리오 시스템이 점검 중입니다.]

결국, 지금 상태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충 상황 파악이 끝난 모양이다.”
“다시 묻지. 네가 김독자인가?”

부리부리하게 생긴 꼬마 유중혁이 물었다. 자세히 보니 꼬마 유중혁들은 가슴팍에 제각기 다른 숫자표가 붙어 있었는데, 방금 내게 물은 녀석은 [999]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나는 일단 대답해보기로 했다.

“맞아. 내가 김독자야.”

그러자 유중혁들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들이, 조그맣게 생긴 주제에 하는 짓은 진짜 유중혁이랑 똑같다.

“제대로 데려오긴 한 모양이군.”

심지어 목소리도······.
영문은 알 수 없지만, 이쯤 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알 수 없는 개연성의 변덕으로 인해 꼬마 유중혁들이 모여 사는 환상의 왕국에 오게 된 것 것이다. 

“너희는 누구야?”

나는 일단 물어보기로 했다. 이 녀석들이 정말 유중혁이라면 내 질문에 곧이곧대로 대답해 줄 턱이 없지만. 꼬마 유중혁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한심하군. 보면 모르는 건가.”

역시나. 기왕 이런 곳에 올 거라면 상냥한 꼬마 유상아들이 사는 세계에 오고 싶었다. 어떻게 도발하면 이 자식들에게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데, 가슴팍에 [888]이란 숫자가 적힌 유중혁이 뜻밖의 말을 했다.

“네놈 머리로는 백날 생각해도 모를 것 같으니 알려주지. 우리는 ‘위대한 모략’의 일부다.”

······위대한 모략? 설마?
순간 스산한 감각이 뇌리를 스쳐 갔다.
내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가슴팍에 [777]이라 적힌 유중혁이 비웃듯 말했다.

“네놈의 한심한 지능으로는 이해할 수 없겠지.”

그래, 유중혁이다.
이놈들은 유중혁이 확실하다.

“정신 차렸다면 움직이지. 네놈을 기다리는 존재가 있다.”
“누가 날 기다리는데?”
“가 보면 안다.”

나는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을 따라 움직였다. 동그란 문이 열리고, 커다란 복도가 나타났다. 가장 앞선 것은 꼬마 유중혁 [999]였다. 나는 [999]를 따라 움직였다. 그러자 그런 내 뒤를 올망졸망 쫓아오는 꼬마 유중혁들의 무리가 있었다. 내가 물었다.

“여긴 어디야?”

그러자 뒤쪽에서 나를 따라오던 유중혁이 말했다.

“eun gui ei soup.”
“뭔 소리야.”
“‘은가이의 숲’이란 뜻이다. 예언자 주제에 그런 것도 모르는 건가.”

아니 그걸 왜 외국어처럼 말하냐고.
가슴팍에 [666]이라 적힌 꼬마 유중혁은 한심하다는 듯 나를 노려보더니 핏 고개를 돌렸다.
문득 저 숫자가 유중혁의 ‘회귀 회차’를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중혁의 666회차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혹시 심연의 흑염룡과 같이 다녔던 회차인가?

복도에 난 창으로 은빛 숲의 정경이 비쳤다. ‘은가이의 숲’이라.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장소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멸살법’에 등장하는 무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복도의 맞은편에서 한 무리가 걸어온 것은 그때였다.

【모략께서 데려온 게 그 자인가?】

아니, 그것을 ‘걸어왔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솜털이 비죽 서는 느낌과 함께 나도 모르게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손잡이를 쥐었다.

맞은 편에서 ‘이계의 신격’의 무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성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온한 아우라를 뿜어대는 존재들. 말의 머리를 하고, 몸 곳곳이 기분 나쁜 촉수로 뒤덮인 괴물들이었다. 허공으로 뻗어 나온 촉수들은 잠깐 고개를 갸웃하더니 슬금슬금 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누가 보아도 호의로 보이지는 않는 움직임.
그런 촉수들을 막아선 것은, 뜻밖에도 꼬마 유중혁 [999]였다.

“우리 쪽 손님이다.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 ”

【이야기하는 것 정도는 상관없을 텐데.】

“내가 허락하지 않았다.”

꼬마 유중혁 [999]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등에서 미니 버전의 [진천패도]를 뽑아 들었다.
이어서 꼬마 유중혁 [888]도, 꼬마 유중혁 [777]도, 꼬마 유중혁 [666]도. 모두 자신들의 등과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이 녀석들, 싸울 수도 있는 건가?
아무리 봐도 그냥 피규어처럼 생겼는데.

실제로 저쪽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이쪽을 향해 집요한 적의를 내비치기 시작했다.

【감히······ 너희가 ‘위대한 모략’의 권속이라 하여······.】

촉수들과 꼬마 유중혁들이 충돌하려는 일촉즉발의 순간. 숲의 어디선가 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촉수를 꿈틀대던 ‘이계의 신격’들이 모조리 주저앉았다. 
일어선 것은 나를 향해 적의를 보이던 말머리뿐이었다.

【■■■······!】

그리고 다시 한번 더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말머리마저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이것은 단순한 지진파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이들을 어마어마한 격으로 겁박하고 있는 것이다.

【우우우······.】

신음을 흘린 이계의 신격들이 일제히 길을 비켰다. 그러자 그 길의 끝에 거대한 홀의 입구가 나타났다. 드넓은 원형의 천장 사이사이로 무수한 나무 덩굴들이 자라난 개방형 홀. 나는 꼬마 유중혁들과 함께 그 홀로 걸어 들어갔다. 
실낱같이 들어오는 볕이 홀의 중심에 놓인 오래된 왕좌를 비추고 있었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저 존재가, 바로 이 숲의 왕이다.

심지어 나는 녀석을 알고 있었다.
옅은 볕의 그늘 속에 드러난 얼굴의 흉터. 나와 똑같은 백색의 코트.
내가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믿었던 존재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군, 김독자.】





< Episode 79. 은밀한 모략가 (1) > 끝

< Episode 79. 은밀한 모략가 (2) >





나는 눈앞의 존재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뭔가가 건드려서는 안 될 기억의 상자를 건드렸고, 어둠 깊숙이 묻어뒀던 상자에서 말들이 흘러나왔다.

「“‘아론다이트’는 어디 있지? 네놈이 가지고 있나?”」

그것이 녀석과 내가 처음으로 대면한 순간이었다. 
내 멱살을 틀어쥔 채, 놈은 그렇게 물었다.

「“대답할 생각이 없다면 강제로 알아내는 수밖에.”」

그때와 똑같이 빛나는 황금색 [현자의 눈]이 그곳에 있었다. 
머릿속이 지끈거리며 시야가 추상화처럼 뭉그러졌다.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네가 보여준 ‘그 세계’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
.
.

「해당 인물은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잊고 싶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이 있고, 어쩌면 내게 그 회차의 기억은 그런 것이었다. 
나는 그 회차의 유중혁을 구하지 못했다. 백색의 코트를 입고 새로운 회차를 향해 떠나던 유중혁. 
1863회차의 한수영과 나를 남겨둔 채, 환한 빛으로 자유로이 떠나던 그 뒷모습을 나는 단 한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다.

“너는······.”

나는 한참이나 넋을 잃은 채 왕좌의 유중혁을 올려다보았다.
뺨의 흉터도, 마른 볼도,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도.
모두 내가 기억하는 1863회차의 유중혁이었다.
그런데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은밀한 모략가?
그 순간에야, 나는 유중혁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불길하고 사악한 기운을 눈치챘다. 마왕들의 그것과는 다른 악(惡). 그것은 <스타 스트림>의 선악으로는 정의되지 않는 혼돈이었다. 
입을 떼려는 순간, 내 품에서 뭔가가 환한 빛을 내뿜었다.

[전용 특성, ‘시나리오의 해석자’가 발동합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당신의 특성에 반응합니다.]

기다렸다는 듯, 설화가 말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두 명의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돌아가라. 너는 아무것도 구할 수 없다.】」
「“······은밀한 모략가?”」

빨리 감기 중인 화면처럼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단편적인 정보들이었지만, 내가 상황을 이해하기엔 충분한 정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된 거였나.
조금씩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갔다.

이어서 추락하는 유중혁의 모습, 그런 유중혁을 받아내는 이지혜, 섬을 떠나는 방주의 모습이 차례로 흘러갔다. 다행히 <김독자 컴퍼니>는 무사히 ‘환생자들의 섬’을 탈출한 모양이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이야기를 멈춥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돌린 뒤 왕좌 위의 존재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은밀한 모략가’도 나를 내려다보았다.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심장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이성이 조금씩 되돌아 왔다.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그 모습으로 날 당황 시키려는 전략이었다면 대성공이라고 말해주지.”

【전에는 존댓말을 쓰지 않았나?】

“유중혁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그에 걸맞게 대우해주는 것뿐이야.”

그의 기세에 전혀 꿀리지 않는 내 모습에 ‘은밀한 모략가’가 재미있다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을 계속했다.

“은밀한 모략가. ‘신성한 삼문답’을 제안한다.”

【왜 내가 그걸 받아들여야 하지?】

“당신이 ‘1863회차’의 유중혁일 리 없어. 그건 불가능해.”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알고 싶어? 참고로 이유는 세 가지나 있는데 말이지.”

‘은밀한 모략가’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할 거야, 말 거야?”

【무척 흥미롭지만 공평하지는 않은 제안이군.】

‘은밀한 모략가’는 고요한 눈으로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눈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은밀한 모략가’의 왼쪽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순간 ‘멸살법’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심각한 결심을 했을 때, 유중혁은 왼쪽 눈썹을 꿈틀거린다.」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조건을 하나 걸겠다.】

“무슨 조건이지?”

【내가 왜 이곳에 너를 데려왔는지 궁금하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궁금하다.

【하지만 너는 그것을 내게 질문할 수 없다. 알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해답은, 스스로 질문을 찾아내야만 해결할 수 있다.】

“그건 뭔 석존 같은 소리야?”

【‘신성한 삼문답’을 받아 주겠다. 너는 지금부터 내게 세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단, “너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에 관해서는 질문할 수 없다.】

“그게 조건이야?”

【하나 더, 삼문답을 모두 사용했을 때, 너는 ‘네가 이곳에 와야만 했던 이유’를 알아내야 한다.】

그건 정말이지 예상 밖의 말이었기에, 나는 순간 당황했다.

“알아내지 못하면?”

‘은밀한 모략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긴 손가락을 천천히 들어 팔걸이 위에 툭 올려놓았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지금이라면 이길 수 있을까?」

나는 내가 가진 설화들을 하나씩 점검해 보았다. 
전설급 설화에서부터 거대 설화에 이르기까지······.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는 편이 좋아.”

그 말을 한 것은 내 곁에 있던 꼬마 유중혁 [999]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걱정해주는 거냐?”
“시체를 치우는 게 귀찮을 뿐이다.”
“······너넨 대체 뭐야?”

【질문권을 사용하는 건가? 좋다.】

“아니, 잠깐―”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신성한 삼문답(三問答)이 시작됩니다.
―양측은 세 가지 질문과 대답을 교환할 수 있습니다. 
―양측은 각자 한 번씩, 문답의 대답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질문과 대답이 온전히 교환되기 전까지, 문답은 끝나지 않습니다.
―첫 번째 질문권을 사용합니다.

곁에 있던 꼬마 유중혁 [666]이 비릿하게 웃는 것이 보였다.
망할 자식들이.
하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이 이야길 듣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었다.

【그 녀석들은 나의 권속이다.】

“진짜 그 정도만 알려주고 끝내려는 건 아니겠지. 기왕 알려주는 거 좀 더 알려주면 좋겠는데. 대체 뭔 권속이라는 거야. [아바타] 같은 건지, 아니면 마왕들이 가진 권속 같은 건지 제대로 확실히 말해주면 고맙겠는데.”

나는 그게 두 번째 질문처럼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며 지껄였다.
그러자 꼬마 유중혁 [777]이 탄식하며 말했다.

“어지간히 말이 많은 놈이군.”
“너한테 물은 거 아니다.”

【그들은 내 기억을 받은 존재들이다.】

―첫 번째 대답을 얻었습니다.

“[아바타] 스킬 같은 거란 뜻이네.”

【내 차례로군. 내가 ‘1863회차의 유중혁’이 아닌 첫 번째 이유를 말해라.】

“당신이 정말 1863회차에서 온 유중혁이라면, 그 ‘백색 코트’를 입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왜지?】

“성흔 ‘회귀’는 영혼을 과거로 전송시킬 뿐, 보유 중인 아이템을 함께 전송하진 않아. 내가 준 코트는 1863회차의 유중혁이 회귀하면서 소멸됐어. 그러니 당신이 정말 1863회차라면 그걸 입고 있을 턱이 없지.”

【흥미롭군. 하지만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구한 아이템일뿐이다.】

“유중혁은 흰색 잘 안 입어.”

【······두 번째 질문을 말해라.】

―두 번째 질문권을 사용합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질문. 당신은 ‘1863회차의 유중혁’인가?”

내 물음에, ‘은밀한 모략가’의 안색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장난치자는 건가?】

“아니, 진지하게 묻는 건데.”

【나는 1863회차를 겪은 유중혁이었다.】

“과거형이네.”

【지금은 그저 ‘은밀한 모략가’일 뿐이니까.】

―두 번째 대답을 얻었습니다.

‘신성한 삼문답’은 예외 조항을 두지 않는 한, 반드시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개연성의 후폭풍에 휘말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밀한 모략가’에게서 딱히 후폭풍의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1863회차의 유중혁’이 아닌 두 번째 이유를 말해라.】

“그쪽이 1863회차의 유중혁이라기엔 모순된 게 너무 많아.”

【무엇이 모순되었다는 거지?】

“당신이 정말 1863회차의 유중혁이라면, 왜 나를 1863회차로 보내 자신을 죽이도록 시킨 거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그래야만 내가 만들어질 수 있었으니까. 간단한 타임 패러독스다. 나는 1863회차의 유중혁이었고, 그곳에서 네가 나를 죽여야만 나는 ‘은밀한 모략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꽤 오랫동안 준비한 대답인가봐? 엄청 자연스럽네. 근데 당신 말이 맞다고 쳐도, 내가 임무에 성공한 뒤 그쪽 반응이 영 신통찮던데? 굉장히 놀라는 것 같았다고.”

【······다음 질문을 해라.】

“아니, 이번엔 당신이 먼저 해. 나는 마지막에 하겠어.”

‘은밀한 모략가’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좋다. 내가 ‘1863회차의 유중혁’이 아닌 마지막 이유는 뭐지?】

“나만 알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있어. 나한텐 상대방의 내면을 읽는 스킬이 하나 있거든.”

【그래서?】

“그런데 1863회차의 유중혁은, 내가 읽을 수 없는 존재가 됐어.”

나는 1863회차의 유중혁이 다음 회차로 떠나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한다. ‘등장인물’에서 벗어나며, 내 전용 스킬인 [전지적 독자 시점]에 읽히지 않던 그 모습을.

【그 말은, 내 속내는 읽을 수 있다는 건가?】

“아니, 당신도 읽을 수 없어.”

【그러면?】

“그런데 읽을 수 없는 이유가 달라.”

[‘전지적 독자 시점’의 스킬 발동이 취소됩니다!]
[해당 존재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해당 존재의 격을 당신의 이해도가 도저히 따라가지 못합니다!]

나는 허공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은밀한 모략가’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것은 이유로 납득할 수 없다. 너는―】

“마지막 질문을 하지.”

나는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살았던 행성에는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라는 소설이 있어.”

순간,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은밀한 모략가’의 표정이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나를 도륙할 듯 냉정한 눈빛. 
나는 그 기세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말을 이었다.

줄곧, 너무나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은밀한 모략가. 당신은 그 소설의 에필로그를 아는 존재인가?”


*


유중혁은 꿈을 꾸었다.
아주 오래되고 낡은 꿈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꿈속에서 그는 하얀 코트를 입고 있었다.

손에 딱 들어맞는 [진천패도]. 그 묵직한 칼을 쥔 채, 그는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눈앞의 존재는 그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검은 코트를 입은 유중혁.

왜 이런 꿈을 꾸는 것인지는 모른다.

‘1863회차.’

어쩌면, 놈을 만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꿈을 꾸는 것이다.
유중혁은 이를 악물었다. 은밀한 모략가와 격돌하던 순간 느꼈던 압도적인 격의 차이가 지금도 그의 뇌리에 생생했다.

유중혁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기억은 그에게 천천히 스며들어왔다. 그는 1863회차의 유중혁이 되어 검을 휘둘렀다.

「나는 죽는다.」
「나는 회귀한다.」

검이 부딪칠 때마다 유중혁은 1863회차의 절망과 고독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감정이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푸우욱!

마침내 두 개의 검이 서로의 배를 파고들었다.

「이 이야기는 이곳에서 끝난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그 모든 것은 처음부터 시작된다.」

검정 코트의 유중혁이 먼저 흩어졌고, 이어서 그의 몸도 흩어지기 시작했다. 기억들이 산개하며, 그가 간신히 이해한 감정들이 그를 떠나가고 있었다. 유중혁은 마지막 힘을 다해 뒤를 돌아보았다. 
시야가 흐려져 그곳에 있는 게 무엇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아주 밝고, 눈부신 별을 본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세계의 ■■가 궁금해졌다.”」
「“다음 회차에서는······.”」

삐이이이― 하는 소리와 함께, 유중혁은 번쩍 눈을 떴다.
헐떡거리는 숨소리. 하얀 병실의 천장이 보였다. 
이어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잠자는 숲속의 왕자님께서 깨어나셨군.”

고개를 돌리자, 한수영과 정희원의 모습이 보였다. 까드득, 하고 사탕을 깨문 한수영이 퉤, 하고 바닥에 막대를 뱉으며 으르렁거렸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보실까, 회귀자 나으리.”





< Episode 79. 은밀한 모략가 (2) > 끝

< Episode 79. 은밀한 모략가 (3) >





한수영의 재촉에 유중혁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는 횡설수설했고 중언부언했다. 그렇게 십 여분쯤 흘렀을까.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그만. 너 지금 제정신 아닌 거 같으니까 내가 정리할게. 넌 맞는지 아닌지만 대답해.” 

평소였다면 그런 폭력적인 정리에 반발할 법도 한데, 유중혁은 그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일 따름이었다. 한수영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는 김독자를 구하러 갔어. 그런데 너보다 빨리 김독자를 낚아챈 놈이 있었지. 그놈은 우리가 아는 ‘은밀한 모략가’였고.”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놈이 너랑 똑같은 얼굴에 백색 코트를 입고 있었단 거지.” 

“그렇다.” 

“가짜일 가능성은? 그놈이야 워낙 믿을 수 없잖아. 어쩌면 ‘은밀한 모략가’가 너로 변장한 것일 수도 있고.” 

“가짜일 리 없다.” 

“왜?” 

“1863회차의 내가 가지고 있던 설화를 사용했다.” 

“······그 영원 뭐시기 하는 중2병 설화 말이지?” 

한수영이 과연,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의 동공이 미미하게 팽창되며, 설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화, ‘예상표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홀로 소외되어 있던 정희원이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체 뭔 얘길 하는 거야? ‘은밀한 모략가’가 중혁 씨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한수영은 정희원을 잠시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쉽게 말해주자면, 지금 이 세계선에는 유중혁이 둘이야.” 

“······그럴 수가 있어?” 

“불가능할 것도 없지. 다른 세계선의 유중혁이 이 세계선으로 넘어왔다면.” 

“그게 가능하다고?” 

“김독자도 비슷한 방식으로 다른 세계선에 다녀왔으니까. 문제는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존재면 대체 얼마나 강력할까 하는 것인데······.” 

<에덴>이나 <파피루스>의 최고위급 성좌들도 자력으로 세계선을 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은밀한 모략가’는, 혼자서 그 모든 개연성을 감당할 정도의 강자인 것이다. 

정희원이 입을 벌린 채 중얼거렸다. 

“대체 어떤 세계선에서······.” 

“제일 가능성 있는 세계선은 사실 하나뿐이야. 김독자가 다녀왔던 1863회차의 세계선.” 

1863회차.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에 등장했던 유중혁의 마지막 세계선. 유중혁이 한수영을 향해 물었다.

“그 세계선의 일을 알고 있나?” 

“대충은.” 

“그 세계의 마지막에서, 1863회차의 나는 둘로 나누어져서 싸웠다. 한쪽은 죽었고, 다른 한쪽은 회귀했지.” 

“알아. 나도 꿈에서 몇 번 봤으니까.” 

“······꿈에서?” 

한수영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런 이야기까지 자세히 할 시간은 없고, 아무튼 너는 지금 ‘은밀한 모략가’가 그 1863회차의 너라고 생각한다는 거잖아. 그렇지?” 

유중혁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몇 가지 걸리는 점들이 있으니까.” 

“뭔데?” 

“‘은밀한 모략가’의 강함은 기록에서 읽었던 ‘1863회차의 나’ 이상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한참이나 입술을 짓씹던 유중혁이 말했다. 

“······놈이 뭔가를 속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면 그 백색 코트.” 

“백색 코트?” 

“내 성흔인 ‘회귀’는 보유 중인 아이템까지 회귀시키지는 않는다. 놈이 그런 백색 코트를 입고 있을 이유가 없단 얘기다.” 

“흰색을 좋아하나 보지.” 

“나는 흰색을 싫어한다.” 

“취향이 바뀌었을 수도 있잖아.” 

“그렇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건······.” 

“느낌의 문제라는 거냐?”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마치 나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조롱?” 

“일부러 그 코트를 입고 온 것 같았다는 뜻이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유중혁의 머릿속으로 ‘은밀한 모략가’가 남긴 말이 스쳐갔다. 

【······3회차. 네놈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수영은 턱을 만지며 뭔가를 골몰했고, 정희원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이윽고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좋아. 요약해보자. 논리적으로 보자면 ‘은밀한 모략가’는 ‘1863회차의 유중혁’인데, 느낌적으로 보자면 아니다. 그런 거지?” 

“······.” 

“그럼 일단 이렇게 가정하고 시작하자고. ‘1863회차의 유중혁은 은밀한 모략가가 아니다’. 즉, ‘은밀한 모략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유중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겨우 내 느낌일 뿐이다. 그걸 믿겠다는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느낌이니까. 자기 자신은 자기가 제일 잘 아는 법이잖아?” 

빙긋 웃는 한수영을 보며, 유중혁은 의심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답을 말해라, 한수영.” 

“음? 무슨 소리실까.” 

“너는 ‘은밀한 모략가’가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다. 아닌가?” 

이번에는 한수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흐음, 언제부터 그렇게 눈치가 빨라지셨지?” 

“······네놈이 내 느낌을 믿는다는 게 말이 안 되니까.” 

짧은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그리고 그 시선의 교환으로, 두 사람은 서로가 어떤 장면을 떠올리고 있는지 눈치챘다. 

둘은 예전에도 ‘은밀한 모략가’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유중혁은 ‘은밀한 모략가’가 ‘미래의 김독자’라고 말했고, 한수영은······. 

“아 언제까지 두 사람끼리 이야기할 거야? 그래서 ‘은밀한 모략가’가 대체 누군데?” 

정희원의 채근에 한수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그냥 가설일 뿐이야.” 

“가설이든 뭐든 빨리 말해봐. 답답하다고!” 

“나는 굉장히 오랫동안 궁금했던 게 하나 있어.” 

“궁금했던 거?” 

“만약 ‘멸살법’이 현실이 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이 우주 어딘가에 나나 김독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멸살법’의 세계가 있다면 어떨까.” 

한수영은 계속해서 말했다. 

“<한수영 코퍼레이션>도, <김독자 컴퍼니>도 없는 그런 세계에서, 동료를 잃고 무한한 회귀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미련한 ‘유중혁’이 있다면.” 

“······잠깐, 네놈.” 

“그 유중혁이 무수한 상실 끝에 결국 모든 것의 결(結)에 도달했다면······, 순수한 자신의 노력으로 마침내 이 <스타 스트림>의 마지막을 본 유중혁이 이 우주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찰나의 텀을 두고, 한수영은 유중혁을 보았다. 

깊게 흔들리는 유중혁의 외눈에 한수영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 녀석은, 과연 지금의 ‘3회차’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은밀한 모략가’. 

‘멸살법’의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 성좌. 

그럼에도 내가 지금껏 만난 그 어떤 성좌보다도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 

―은밀한 모략가. 당신은 그 소설의 에필로그를 아는 존재인가?

내가 그 질문을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만약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은밀한 모략가’의 정체를 특정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은밀한 모략가’가 입을 열었다. 

【그 질문엔 대답하지 않겠다.】 

“뭐? 잠깐만.”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세 번째 질문의 ‘거절권’을 사용하였습니다. 

빌어먹을, 깜빡 잊고 있었다. 이 ‘신성한 삼문답’은 양측에게 단 한 번씩 ‘거절권’의 사용을 허용한다는 것을. 

‘은밀한 모략가’는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잠깐이지만, 그의 코트 주변이 희미한 개연성의 스파크로 뒤덮이는 것이 보였다. 

【조금 피곤하군. 그만 물러가라.】 

“잠깐만! 아직 삼문답 안 끝났―”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공간이 접혀 들어가는 느낌이 들더니, 나는 어느새 홀 밖으로 쫓겨나 있었다. 

굳건히 닫힌 홀의 문을 보자 허탈함이 몰려왔다. 

―‘신성한 삼문답’이 일시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당신에게 한 번의 질문권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본래 ‘신성한 삼문답’은 어느 한쪽의 의사로 보류시킬 수 있는 의식이 아니다. 그런데 ‘은밀한 모략가’는 그것을 해냈다. 대체 얼마나 강력한 격을 가지고 있어야 이런 부조리한 일이 가능한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홀의 문을 쾅쾅 두드리며 외쳤다. 

“문 열어! 이건 약속이랑 다르잖아! 난 내 동료들한테 돌아가야 한다고!” 

순간 문에서 강력한 격이 일렁이며 내 화신체를 튕겨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격의 방출을 준비했다. 

그런 나를 만류한 것은 곁에 있던 꼬마 유중혁 [999]였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끼며, 나는 황급히 격을 거두었다. 확실히 꼬마 유중혁의 말이 맞았다. 지금 나는 화신체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고, 상대는 지금의 나로서는 끝을 짐작할 수조차 없는 강력한 존재다. 

“또 기회가 있을 것이다, 김독자.” 

“······그게 언젠데?” 

꼬마 유중혁들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보더니 말했다. 

“따라와라. 숙소로 돌아간다.” 

또 그 동그라미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암담함이 밀려왔지만,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회랑의 곳곳에서 이쪽을 보는 ‘이계의 신격’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다행히 나는 지금 ‘은밀한 모략가’의 손님으로 와 있는 상황. 

만약, 내가 탈출을 감행해서 ‘불청객’ 신분이 된다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고오오오오······. 

······역시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게다가 아주 수확이 없는 상황도 아니고. 

[‘제4의 벽’이 희미하게 진동합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많군. 샨타크의 족속들인가.)」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목소리는 [제4의 벽]의 메시지를 통해 들려오고 있었다. 

말투로 보아하니······. 

‘······꿈을 먹는 자?’ 

「(그렇다.)」 

그러고 보니 내 안에도 ‘이계의 신격’ 중 하나가 있었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쩌면 녀석에게 이번 상황에 대한 도움을 좀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네게 호감을 보이는 것 같군.)」 

‘호감? 저것들이?’ 

나는 멀리서 내 쪽을 향해 사납게 촉수를 세우고 있는 ‘이계의 신격’들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거대한 촉수의 끄트머리에서 끔찍한 모양의 꽃이 활짝 피었다. 

「(너를 궁금해하고 있다. 이계의 신격들에겐 드문 일이군.)」 

나는 나를 향해 구애라도 하듯 팔랑이는 봉오리를 바라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저것들이랑 친해지긴 힘들어.’ 

「(힘들다? 왜지?)」 

‘당신도 도서관에서 이것저것 읽었다면 알고 있을 텐데.’ 

음울한 아우라를 뿜어대는 ‘이계의 신격’들을 지나치며, 나는 ‘멸살법’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생각했다. 

「<스타 스트림>의 최후의 전쟁은, 저 ‘이계의 신격’들과 관계되어 있다.」 

원작의 유중혁은 그 전쟁에서 자신에게 남은 모든 것을 잃었다. 그를 도와준 화신들은 모두 그 전쟁에서 죽었다. 세상에 파멸을 몰고 온 저 혼돈의 괴물들에 의해서. 

그런데 ‘꿈을 먹는 자’가 뜻밖의 말을 했다. 

「(이계의 신격들이 왜 재앙이 되었는지 너는 알고 있느냐?)」 

‘그건······.’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불현듯 기묘한 감상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일이었다. 저 설명 가득한 ‘멸살법’에도, 이계의 신격들의 유래에 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 

문득 어떤 예감이 들었다. 

‘은밀한 모략가’의 정체와 ‘이계의 신격’의 유래. 

어쩌면 둘 사이에 뭔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에 관해 내가 무어라 물어보려던 찰나, 먼저 말을 건 녀석이 있었다. 

“너는 소설이라는 것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꼬마 유중혁 [999]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해. 왜?” 

“네놈이 원한다면 짧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줄 수도 있다.” 

“이야기?” 

순간, 꼬마 유중혁 [666], [777], 그리고 [888]이 당혹스런 얼굴로 [999]를 쳐다보았다. 아마도,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 대답과는 상관없이, 꼬마 유중혁 [999]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아주 오랫동안, 외로운 싸움을 거듭해 온 늑대가 있었다. 그는 추구하는 목표가 있었고, 원하는 질문이 있었다. 그는 그 질문의 해답을 위해 싸웠다.” 

“우화(寓話)야?” 

“늑대는 계속해서 싸웠다. 수백 년, 수천 년, 어쩌면 수만 년을.” 

늑대는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늑대는 마침내 싸움의 끝에 도달해 ‘늑대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해답을 얻었다. 그 대가로 자신의 무리를 모두 잃었지만, 어쨌든 왕은 그 해답을 납득했다. 그것이 이 세계가 그에게 내놓은 최선의 해답이었기 때문이다. 그 해답을 품에 안은 채, 왕은 세계를 주유했다.” 

그것은 묘하게 추상적인 이야기였다. 

“그런데 어느 날, 왕은 또 다른 ‘무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어딘가 한없이 친숙한 이야기였다. 

“그 무리에도 자신과 같은 늑대가 있었다. 그 늑대는 그와 같은 대의를 가지고, 그와 같은 목적을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마치 홀린 듯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뭔가가 달랐다. 그 무리의 ‘늑대’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지금 이 녀석은, 내게 ‘은밀한 모략가’가 대답하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먹이를 구하는 것도, 무리를 지키는 것도. 그가 갈망했던 아득한 목표들을, 그 늑대는 최소한의 고통만으로 이뤄내고 있었다. 무엇도 잃지 않은 채로. 그 광경을 보며, 왕은 문득 생각했다.” 

천천히,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만약 저 이야기가 끝까지 완성된다면, 지금껏 내가 살아온 삶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유중혁이 나를 향해 묻고 있었다. 

“김독자. 너는 그런 삶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 Episode 79. 은밀한 모략가 (3) > 끝

< Episode 79. 은밀한 모략가 (4) >





머릿속으로 온갖 복잡한 생각들이 흘러갔다. 

“나는―”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징을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밀려온 메슥거림에 입을 막았다. 휘청거리는 나를 꼬마 유중혁들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김독자는 이들을 알고 있었다.」 

품속에서 환한 문장을 토해내는 ‘멸살법’의 최종본. 

「알고 있었지만, 모르고 싶었다.」 

“김독자?” 

내 이상을 눈치챈 꼬마 유중혁들이 나를 불렀다. 

생각을 멈춰야 했다. 

[‘제4의 벽’이 흔들립니다.] 

생각을. 

[‘제4의 벽’이 격심하게 흔들립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낱장의 페이지들이 넘어가고 있었다. 폭풍이라도 치듯, 페이지들이 동시에 날아올라 내 모든 의식을 덮고 있었다. 

“······이봐?” 

이윽고 시야가 캄캄하게 물들었다. 

* 

“그가 알게 된 것 같군.” 

꼬마 유중혁 [41]이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의 곁에는 낡은 왕좌에 앉은 ‘은밀한 모략가’가 있었다. 

“혹시 일부러 힌트를 준 건가?”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소품까지 준비하며 연기한 보람이 없는 것 같은데.” 

꼬마 유중혁 [41]이 ‘은밀한 모략가’의 백색 코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1863회차의 유중혁이 입고 있었던 백색 코트. 

시선을 느낀 ‘은밀한 모략가’가 코트를 벗으며 입을 열었다. 

【연기는 아니지. 1863회차의 그 녀석은 본래 내 일부가 되었어야 했다. 너희처럼.】 

“하지만 멋대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지. 이 코트만 남긴 채 말이야.” 

꼬마 유중혁 [41]이 하얀 코트를 받아 들었다. 마치 금기에 대해 이야기하기라도 한 듯, 둘 사이에 가벼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은밀한 모략가’는 말없이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낡은 왕좌의 곁에 동그란 테이블이 나타났다. 동그란 테이블 위에는 레드 와인이 채워진 와인글라스가 놓여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와인 글라스를 가볍게 쥐었다. 

【시나리오가 빨리 진행되긴 한 모양이군. 숙성도가 형편없어.】 

“김독자 녀석 때문이지.” 

【도깨비 왕은 움직였나?】 

꼬마 유중혁 [41]이 허공에서 메시지 로그를 넘겼다. 

“아직. 하지만 대도깨비들의 준동이 시작됐어. 혹부리 쪽에서도 연락이 왔다.” 

【곧 시작되겠군.】 

“그렇겠지.” 

두 유중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원형으로 만들어진 궁. 갈라진 벽의 균열 사이로 음습한 울음 같은 것이 들려왔다. 그들을 찾는 이계의 사냥개들이 울부짖는 소리였다. ‘은밀한 모략가’가 입을 열었다. 

【41회차. 너는 나와 가장 비슷한 ‘유중혁’이다.】 

“그것 참 영광이군.” 

【너는 죽게 될 것이다.】 

“그걸 위해 여기까지 온 것 아니었나?” 

두 사람은 다시 말이 없어졌다. 허공에 희뿌연 빛이 어리더니, 이윽고 성류 방송의 화면이 나타났다. 무료한 듯 그 화면을 넘기며,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긴 이야기의 끝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 

* 

눈을 떴을 때, 나는 도서관에 있었다. 

「김독 자 귀찮 아」 

희미한 벽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미안.’ 

희끄무레한 어둠을 밝히는 칸델라의 불빛. 나는 아무래도 다시 [제4의 벽]의 내부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무너지려는 정신을 이번에도 [제4의 벽]이 지켜주었던 것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짧게 심호흡을 했다. 머릿속이 맑아지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혼잡했던 머릿속에는 한 줄의 명료한 문장만이 남았다. 

「은밀한 모략가는, ‘멸살법’ 원작의 유중혁이다.」 

녀석은 내가 1863회차에서 만났던 유중혁도 아니고. 

나와 함께 3회차를 살아온 유중혁도 아니다. 

그는 내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유중혁. 

지금의 ‘3회차’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스타 스트림>의 결말을 본 유중혁이다. 

―잠깐만요, 작가님! 중혁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러면······. 

마지막으로 달았던 ‘멸살법’의 댓글들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에필로그로 넘긴 채 끝나버렸던 이야기. 내가 궁금했던 질문의 대답······.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의 장서들을 두리번거렸다. 

[유중혁, 4회차 8권의 기록] 

은은한 불빛 속에 드러난 장정을 보며, 나는 멍하니 섰다. 

내가 읽으며 자라온 이야기들이 그곳에 있었다. 

천천히 장정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장정의 끝에 닿은 손가락이 희미하게 떨렸다. 읽고, 읽고, 또 읽었던 이야기. 그 한 문장 한 문장은 내 생이었고, 내 피였고, 내 살이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일까. 

나는 그 기분을 떨쳐 내기 위해 억지로 책을 집었다. 언제 어느 페이지를 읽더라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가 나를 배신할 리 없었다. 읽으면, 나아질 것이다. 지금껏 그랬듯 분명. 

공교롭게도 펼쳐진 장면은 안나 크로프트와 유중혁의 대치 장면이었다. 

소설 속에서, 유중혁이 말하고 있었다. 

「“네놈 때문이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떨렸다. 

다음 페이지를 볼 용기가 없었다. 어쩌면, 자격도 없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 즐거웠나? 

누군가의 불행과 고통을 읽는 것이 내 삶이었나? 

그렇다면 나는 저 빌어먹을 하늘의 성좌들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어떻게 할 거냐?)」 

돌아본 곳엔 니르바나가 있었다. 

「(이 세계의 ‘유중혁’은 둘이다.)」 

도서관 사서들이 모여있었다. 나를 안쓰럽게 보는 세 쌍의 눈. 니르바나, 시뮬라시옹, 그리고 꿈을 먹는 자. 

나는 그들의 눈을 마주 보며 물었다. 

‘······당신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지금 이 몸의 의견을 구하는 건가?)」 

니르바나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정답이 있다는 듯 당당한 목소리. 

「(고민할 필요도 없다. 세상 만물은 모두 태초의 하나에서 시작한 것이니까.)」 

“또 ‘하나’ 타령이냐?” 

「어차피 모든 게 하나였으니, 유중혁이 둘이든 셋이든 무슨 상관인가? 모든 유중혁과 하나가 되는 것은 지극한 우주의 섭리······!」 

저런 놈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극장 던전의 주인, 시뮬라시옹이 나를 보고 있었다. 

「(죄책감을 느끼는 모양이군.)」 

죄책감. 이것을 그런 감정으로 뭉뚱그려도 되는 것일까. 

장정을 쥔 손이 떨리자, 책의 페이지들도 떨렸다. 

「(무엇에 대한 죄책감이지? 그의 불행이 너를 괴롭게 만드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너는 어차피 그를 구할 수 없다. 그는 그런 삶을 살았고, 너는 그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것이 사실의 전부다.)」 

현기 어린 그의 말투에는 오랜 세월 이야기를 읽어온 노인의 지혜가 담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말한 것은 ‘꿈을 먹는 자’였다. 그는 오징어 다리 같은 촉수로 안경을 쓱 밀어 올리더니 비웃듯 말했다. 

「(성좌여. 위대한 모략이 너에게 동정 따윌 바랄 것 같은가?)」 

그 말을 듣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기분이 가라앉았다. 

맞다. 

이 감정은, 어쩌면 내가 읽어온 모든 이야기를 모독하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하찮은 감정놀음에 빠질 때도 아니었다. 

니르바나가 이죽거렸다. 

「(정신을 좀 차린 모양이군.)」 

지금은, 보다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해야만 한다. 

‘동료들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여기서 나갈 방법이 없어.’ 

‘꿈을 먹는 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은가이의 숲’에서는 그가 곧 신이나 다름없으니까.)」 

‘혹시 뭔가 아시는 게 있습니까?’ 

「(있긴 하지만 설명해봤자 그다지 의미는 없다. 어차피 ‘이계의 신격’에 관해서는 설명할수록 본질에서 더 멀어질 뿐이니까. ‘공포의 기록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공포의 기록자······ 언젠가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꿈을 먹는 자’가 계속해서 말했다. 

「(입구와 출구는 결국 같은 곳이다. ‘당기시오’라고 쓰여 있는 문은 대개 밀어도 열리게 마련이니까. 너는 네가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그러면 출구는 자연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듣자 ‘은밀한 모략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삼문답을 모두 사용했을 때, 너는 ‘네가 이곳에 와야만 했던 이유’를 알아내야 한다. 

내가 이곳에 와야만 했던 이유. 

생각해 보니 ‘신성한 삼문답’이 취소된 것은 내 입장에서도 다행스러운 일일지 몰랐다. 

나는 ‘은밀한 모략가’의 정체를 유추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녀석이 나를 데려온 이유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했으니까. 

녀석은, 대체 왜 나를 이곳에 데려온 것일까? 

「(그는 한 세계의 끝을 본 존재다.)」 

그런 내 의문을 알고 있다는 듯, ‘꿈을 먹는 자’가 말을 이었다. 

「(이미 ■■를 알고 있는 그가, 무엇이 아쉬워서 다시 거대한 수레 속으로 몸을 던졌을까······?)」 

순간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었다.

어머니와 마주 앉아, 무릎 위에 책을 놓고 읽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 

―독자야. 다시 읽어보렴. 

모든 이야기를 아는 존재가 그것을 ‘다시’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 나 가 김독 자」 

다음 순간 시야가 깨지며 나는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장서관의 모든 정경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팽그르 돌며 의식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약간의 신음과 약간의 두통, 그리고 약간의 현기증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현재 화신체 회복률 : 34%] 

설화 팩에 꽂힌 링거로 잔여 설화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허공의 디스플레이 위로 떠오르는 화신체의 정보들. 

[현재 근원 설화의 손상이 심각해 치료제 투여가 불가합니다.] 

[자연 회복을 추천합니다.] 

[현재 영약에 대한 내성이 높은 상태입니다.] 

[새로운 영약의 섭취를 통해 회복을 가속할 수 있습니다.] 

낑낑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몸 곳곳이 쑤셨지만, 이전보다는 관절의 움직임이 원활했다. 

“비유.” 

예상대로 비유의 답은 없었다. 대신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현재 당신은 임시 채널에 접속해 있습니다.] 

임시 채널. 즉, 이곳은 <스타 스트림>의 정식 시나리오 지역은 아니라는 뜻이다. 

“접속 총원.” 

[현재 임시 채널에 접속 중인 성좌 : 2] 

말이 2지, 이건 뭐 멸살법 조회수만큼이나 투명한 숫자였다. 

나는 생각했다. 

어쨌거나,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은밀한 모략가’와 다시 대면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녀석은 쉽게 만나줄 생각을 하지 않고.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성좌 ‘은밀한 모략가’를 부릅니다.] 

놈이 안 만나준다면. 

[성좌, ‘구원의 마왕’이 성좌 ‘은밀한 모략가’를 바라봅니다.] 

놈이 나를 바라볼 때까지. 

[성좌, ‘구원의 마왕’이 성좌 ‘은밀한 모략가’에게 진상을 부립니다.] 

계속해서 귀찮게 굴면 된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예상대로, 반응이 돌아왔다. 그런데 내가 다시 메시지를 보내려는 순간, 방의 문이 활짝 열렸다. 

“미친놈. 시끄럽게 무슨 짓이냐?” 

“왔냐?” 

꼬마 유중혁 [666]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용건이 있다면 나를 부르면 된다. 시끄럽게 간접 메시지 터트리지 말고.” 

꼬마 유중혁들은 ‘은밀한 모략가’의 권속이니, 내 간접 메시지를 들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저 [666]이 오늘 내 간병 담당인 모양이었다. 놀랍게도 녀석은 스마트 폰처럼 보이는 물건을 손으로 꾹 붙들고 있었다. 미니 사이즈 주제에 스마트 폰은 빅 사이즈다. 

“그건 왜 보고 있어? 폰 게임이라도 하냐?” 

성큼 일어난 나는 방심하고 있던 녀석에게서 스마트 폰을 빼앗았다. 

유중혁은 어쨌든 본업이 ‘프로게이머’였으니, 게임을 하고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 

어? 

“당장 내놓아라!” 

튀어 올라 내 옆구리를 퍽 친 [666]이 험악한 고함을 질러댔다. 나는 멍한 얼굴로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이거 게임이 아니잖아? 

[현재 2개의 채널에 접속 중입니다.] 

[현재 시나리오 권외 지역에 있습니다. 프록시 채널을 경유 해 정식 채널에 접속합니다.] 

스마트 폰의 화면으로 익숙한 배경이 보였다. 

「“독자 아저씬 괜찮아요. 분명 살아 있으니까. 내가 알 수 있어요.”」 

[LIVE]라는 표식 아래로, 내가 잘 알고 있는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가 채팅방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김독자 컴퍼니> 일행들을 위로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그 채팅방의 아래쪽에 있었다. 

[성좌명 : 은밀한 모략가] 

[당신은 현재 VIP 구독좌입니다.] 

[VIP 특전으로 간접 메시지 비용 부담이 면제됩니다.] 

―표현할 감정을 선택해주세요. 

[현재 (힘내)을/를 선택하셨습니다.] 

―후원할 코인 액수를 입력해주세요(해당 채널은 최소 50코인부터 후원이 가능합니다). 

[(현재 입력값 없음) C] 

―간접 메시지로 전달할 말을 입력하세요. 

[그런놈따윈잊어버리고새로운리더를(입력 길이를 초과하였습니다)] 

거기까지 읽던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꼬마 유중혁 [666]을 내려다보았다. 

“야,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 

“설마 지금까지 간접 메시지 쓴 게―” 

“오늘이 내 차례였을 뿐이다! 빨리 내놓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김독자.” 

꼬마 유중혁 [666]이 붉어진 얼굴로 [진천패도]를 쥔 채 씩씩거렸다. 그제야 풀리지 않던 뭔가가 이해가 갈 것 같았다. 

지금껏 ‘은밀한 모략가’가 보냈던 무수한 간접 메시지들은, 모두 이 꼬마 녀석들의 짓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돌아오면 그냥 관짝에 넣고 묻어 버리자. 시나리오 다 끝나면 꺼내 주는 게 좋겠어.”」 

무시무시한 발언을 하는 이지혜의 목소리. 화면 너머로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기습이라도 당한 것처럼 가슴이 쓰라렸다. 

헤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다시 저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이미 ‘묵시룡’ 시나리오까지 풀린 상황이니, 얼른 돌아가지 않으면― 

츠츠츠츠츳! 

화면 속에서 개연성의 스파크가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서울 상공에 하나둘 도깨비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개중에는 비형의 모습도 보였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빌어먹을······ 벌써? 

화면 속의 비형이 말하고 있었다. 

「[<김독자 컴퍼니>. 이제 마지막 시나리오로 떠날 시간이다.]」





< Episode 79. 은밀한 모략가 (4) > 끝

< Episode 79. 은밀한 모략가 (5) >





“······마지막 시나리오?” 

정희원은 허공에서 깜빡이는 메시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마지막 시나리오’가 열린다고? 

묵시룡의 시나리오는 89번 시나리오였다. 

그럼 90번 시나리오가 마지막인가? 

혼란스러운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방주’에 타고 있었던 다른 성좌들도 서로를 돌아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게 무슨 소리지?] 

[벌써 99번 시나리오가 열렸단 말인가?] 

개중에는 도깨비 비형에게 항의하는 이들도 있었다. 

[무슨 수작이지? 아직 마지막 시나리오가 열릴 시간이 되지도 않았―] 

[<김독자 컴퍼니>만 따로 데려가겠다는 거냐?] 

비형은 그런 성좌들의 반응을 살피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마지막 시나리오 초청은 얼마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는 여러분들이 ‘묵시룡’을 깨운 그 시점부터 말이지요.] 

그 발언에 성좌들이 웅성거렸다. 몇몇 성좌들은 뭔가를 눈치챈 듯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며 외쳤다. 

[그, 그럼 우리도 마지막 시나리오에 보내줘!] 

[맞아! 우리에게도 자격이 있다!] 

비형은 그런 성좌들을 달래듯 말했다. 

[여러분은 제 관할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자격이 있다면, 곧 여러분을 모시고 떠날 도깨비가 찾아올 것이니 걱정 마세요.] 

그러나, 전처럼 친절한 말투는 아니었다. 

[물론, 여러분들에게 자격이 있을 때의 얘기지만 말이죠.] 

성좌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곧이어 방주에서 방송이 흘러나왔다. 

―다음 역은 8612 행성계입니다. 

8612 행성계. <김독자 컴퍼니>의 고향인 지구가 있는 곳. 

비형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듯, <김독자 컴퍼니>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자, <김독자 컴퍼니> 여러분은 모여주시죠.] 

그 말에 한수영이 나섰다. 

“아니 잠깐만. 우리 지난 시나리오 끝낸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거든?” 

“우릴 지구로 보내줘요. 아직 다음 시나리오로 떠날 준비가 안 됐다고요.” 

정희원도 가세했다. 하나둘 일행들이 모이고 있었다. 신유승도, 이길영도, 이지혜도······ 혼란스러운 얼굴인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비형이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김독자가 없으니 불편하군. 그놈이 있어야 한 번에 말귀를 알아듣는데.]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뭔데?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비형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였다. 

―입장권이 몇 장 안 남았어. 빨리 가서 선점해야 한다고. 

그 말은 ‘도깨비 통신’을 통해 전달되었다.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은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저 도깨비가 비밀스레 메시지를 보내왔다는 것은, 다른 성좌들에게 이 이야기를 알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입장권’이라니? 

다음 시나리오엔 그런 게 필요하단 말인가? 

머뭇거리는 일행들의 뒤에서 유중혁이 불쑥 나타났다. 

“출발하지.” 

“잠깐만요!” 

정희원의 제지에도 유중혁은 완강했다. 

“마지막 시나리오는 지역에 진입한다고 곧바로 시작되는 게 아냐. 지금은 저 녀석 말을 듣는 게 맞다.” 

“그럼 현성 씨는······.” 

“스승님께 맡겨 두었다.” 

정희원이 다급히 한수영을 돌아보았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한수영이 정희원의 어깨를 짚었다. 

“······일단 가 보자. 저 녀석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이유가 있는 거니까. 어쩌면 김독자도 미리 가 있을지 몰라. 확인해 볼 가치는 있겠지.” 

‘김독자’라는 말에 일행들의 얼굴에도 굳은 결심이 섰다. 

“저는 찬성이에요.” 

“나도! 나도!” 

신유승도, 이길영도, 이지혜도. 의결은 금방 끝났다. 

정희원은 끝까지 이현성이 걸리는 듯했지만, 이어진 유중혁의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시나리오 지역에 간다면 ‘강철검제’를 빨리 회복시킬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럼 망설일 것 없어요.” 

[자, 출발합니다.] 

비형의 목소리와 함께 <김독자 컴퍼니>를 둘러싼 주변의 정경이 일제히 빛으로 화했다. 

[시나리오 전송이 시작됩니다!] 

상급 도깨비의 권한이 사용되었기 때문인지, 포탈 이동 시간은 안락하고 짧았다. 

눈 깜빡할 사이에 일행들은 새카만 우주의 한가운데에 와 있었다. 

정확히는, 그 우주를 내려다볼 수 있는 반투명한 원반 위였다. 

“여긴······.” 

돔 형의 방어막으로 보호되고 있는 원반은 하나의 출입구와 이어져 있었고, 그 앞엔 몇몇 도깨비들이 서 있었다. 

유중혁은 그런 도깨비들을 한 번, 출구 쪽을 한 번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게이트 오브 스타 스트림>이다.” 

“여기 알아?” 

한수영의 질문에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국의 본청이 있는 곳이다. 여기를 지나야 마지막 시나리오 지역으로 돌입할 수 있다.” 

“와본 적 있나 보지? 「개연성 적합 심사」라도 걸렸던 거냐?” 

“아니, 나도 처음이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 1863회차의 기록에 나왔냐?” 

“그건······.” 

순간, 유중혁은 관자놀이를 쥔 채 비틀거렸다. 

‘은밀한 모략가’를 통해 알 수 있었던 1863회차의 기록. 하지만 그 기록에, 이 시나리오와 관련된 정보는 나오지 않는다. 김독자가 따로 말해준 적도 없다. 

그렇다면 자신은 대체 어떻게 이 정보를 알고 있는가? 

츠츠츳······. 

희미한 스파크가 유중혁의 코트 위로 튀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이지혜가 유중혁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게이트의 인근에서 눈부신 빛살이 퍼지며 또 다른 성좌들과 도깨비들이 워프해왔다. 

[성좌님들, 이쪽입니다.] 

대도깨비들의 지휘 아래, 성좌와 화신들이 일사불란하게 그들을 스쳐 게이트로 나아가고 있었다. 

<김독자 컴퍼니>를 지나친 대도깨비 중에는 얼마 전 그들에게 제안을 했던 ‘허체’의 얼굴도 보였다. 

[내가 말했지 않은가. 후회하게 될 거라고.] 

스쳐가는 대도깨비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수영과 유중혁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손쉽게 게이트를 통과하는 대도깨비의 일행들과는 달리, <김독자 컴퍼니>는 아직도 게이트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출입구에 선 비형이 문지기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뭡니까? 수속 절차는 모두 밟았을 텐데요. 이들은 ‘마지막 시나리오’에 입장할 자격이 있는 화신들입니다. 비켜 주시죠.] 

영롱한 빛을 뿜어낸 게이트가 대도깨비 일행들을 모두 삼키는 순간, 대도깨비가 문지기 대장에게 뭐라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결국 참지 못한 비형이 앞으로 나서는데, 문지기 대장이 입을 열었다. 

[상급 도깨비 비형. 당신과 <김독자 컴퍼니>는 마지막 시나리오로 진입할 수 없습니다.] 

* 

어렸을 적, 나는 자주 유중혁이 되는 꿈을 꾸었다. 

내겐 슈퍼맨이나 배트맨이 있어야 할 자리에 유중혁이 있었으니까. 

심지어 꿈에서 깨어나서도 여전히 유중혁인 것처럼 행동할 때가 많았다. 그것 때문에 맞은 적도 있고, 괴로운 일을 겪은 적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유중혁’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대장, 빨리 다음 시나리오로 가자!”」 

물론, 꿈에 등장한 것이 유중혁만은 아니었다. 

꿈속에서 나는 용감한 이지혜와 함께였고. 

「“장구류 준비 끝났습니다, 중혁 씨.”」 

든든한 이현성과 함께였으며. 

「“대장, 괜찮으세요? 안색이 나쁜 것 같은데······.”」 

사려 깊은 신유승과 함께였다. 

아마도, 그들이 내 가족이었다. 

유중혁이 나의 부모였다면 이현성은 나의 형이었고, 지혜는 나의 누나였으며, 유승이는 나의 친구였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들의 싸움을 응원했고, 그들의 불행을 관음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변명이 될 수는 없음을 알지만, 

그들이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랐다. 

지금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유중혁의 얼굴이었다. 

「“네놈 때문이다.”」 

한순간 시야가 팽그르 돌더니, 나는 신음을 뱉으며 눈을 떴다. 

“안색이 나쁘군. 괜찮은 건가?” 

어쩐지 가슴이 무겁다 싶었는데, 꼬마 유중혁 [999]가 나를 짓밟고 서 있었다. 녀석은 자신의 [진천패도]로 테이블의 컵을 낚아 내게 건넸다. 

“마셔라.” 

“······고맙다.” 

차가운 물을 조금 마시고 나자 천천히 정신이 들었다. 

[현재 화신체 회복률 : 36%] 

미미하지만, 화신체는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김독자 컴퍼니>. 이제 마지막 시나리오로 떠날 시간이다. 

어젯밤 [666]의 스마트폰으로 본 정경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벌써 일행들에게 마지막 시나리오의 제안이 들어왔다. 여기서 미적거릴 시간 따윈 없었다. 

“네놈은 언제든 나갈 수 있다. 스스로 해답만 찾아낸다면.” 

“또 그 소리냐.”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꼬마 유중혁 [999]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싫어하는 음식을 말해라.” 

“갑자기 왜?” 

“닥치고 질문에 대답해.” 

순간 조그만 녀석의 박력에 압도되어버렸다. 

“······토마토.” 

녀석은 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더니 단정한 글씨로 ‘토마토’라고 썼다. 

저건 대체 왜 적는 걸까. 

“좋아하는 음식은?” 

“······무림 만두랑 닭 국물.” 

내 대답에 [999]의 표정이 바뀌었다. 

“혀는 제법 쓸 만한 모양이군.” 

확실히 세 치 혀로 지금까지 살아남긴 했지. 

“요리 담당은 81회차다. 검술은 형편 없지만 요리엔 꽤 재능이 있지. 기대해도 좋을 거다.” 

그러고 보니 81회차의 유중혁은 요리 스킬을 유독 많이 배웠다. 이곳에서 요리를 담당하는 유중혁도 아마 그 녀석인 모양이었다. 

메모를 마친 [999]는 훌쩍 침대에서 뛰어 내리더니 나를 일별했다.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라. 멍청한 손님이라도 어쨌든 손님이니까.” 

“묻고 싶은 게 있어.” 

“불필요한 질문만 아니라면.” 

“유중혁은 왜 ‘이계의 신격’이 된 거냐?” 

꼬마 유중혁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나는 질문을 계속했다. 

“심지어는 ‘은밀한 모략가’라는 이름으로 성좌 활동까지 하고······ 내가 아는 ‘유중혁’이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 녀석은―” 

이곳에 있으면서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꼬마 유중혁들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툭하면 시비 걸기 일쑤였고, 질문을 해도 제대로 된 답변을 받는 경우도 드물었다. 

하지만 저 [999]라는 녀석은 달랐다. 지난번에 늑대 이야기도 그렇고, 저 녀석은 내게 뭔가를 알려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내 예감은 틀리지 않은 듯했다. 

“네가 아는 유중혁은 대체 뭐지?” 

미묘한 경멸이 담긴 목소리.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아직도 몇 편의 글줄로,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대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런 나를 가만히 보던 [999]는 한심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더니, 테이블에 붙은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던졌다. 

“네놈이 그렇게 책을 좋아한다니, 그걸 읽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그 책은 네놈처럼 멍청한 인간들이 미지의 공포를 이해하기 위해 쓴 것이니까.” 

[999]가 던진 것은 몇 권의 책이었다. 

나는 그 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이계의 신격에 관한 소고(小考)― ‘은밀한 모략가’와 ‘가장 오래된 꿈’에 관하여』.





< Episode 79. 은밀한 모략가 (5) > 끝

< Episode 79. 은밀한 모략가 (6) >





그것은 ‘공포의 기록자’가 쓴 글이었다. 

공포의 기록자. 이계의 신격을 만난 최초의 인류이자, 그들의 존재를 전파한 작가들. 

[전용 스킬, ‘독해력’이 발동합니다!] 

[전용 특성, ‘시나리오의 해석자’가 발동합니다!] 

제목을 보는 순간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은밀한 모략가와 가장 오래된 꿈에 관한 이야기라니. 

‘가장 오래된 꿈’은 은밀한 모략가가 자주 되뇐 만큼, 그에 관해 알아낼 주요한 기회인지도 몰랐다. 

나는 [999]가 사라진 것도 잊고, 책에 몰두했다. 

* 

그로부터 정확히 여덟 시간 뒤, 나는 멍한 얼굴로 책의 장정을 덮었다. 

“이건······.” 

나는 이런 종류의 책을 표현할 정확한 문장을 알고 있다. 

“‘멸살법’ 보다 재미가 없는데······.” 

이 책의 작가가 누구인진 몰라도, 21세기의 플랫폼에 연재가 되었다면 ‘멸살법’만큼이나 망했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심지어 재미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어렵기까지 했다. 

“······대체 뭔 소리야?” 

그나마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하나 있긴 했다. 

예를 들면, 위대한 [그레이트 홀]에는 다섯 명의 위대한 ‘이계의 신격’이 있다는 것. 

「동쪽에서 떠오르는 ‘살아 있는 불꽃’.」 

「서쪽 세계의 재앙 ‘가라앉은 섬의 주인’.」 

「북쪽 우주의 지배자 ‘위대한 심연의 군주’.」 

「남쪽 성간을 다스리는 ‘은빛 심장의 왕’.」 

「그리고 무엇도 아닌 곳에서 기어오는 ‘위대한 모략’.」 

“······멸살법 뺨치는 설정집이네.” 

맥락상으로 보아 저 ‘위대한 모략’이 바로 ‘은밀한 모략가’를 상징하는 말인 것 같았다. 

실제로 ‘은밀한 모략가’와 관련된 구절들 중에는 흥미로운 부분들이 있었다. 

「‘위대한 모략’과 마주한 몇몇 공포의 기록자들은, 그가 ‘가장 오래된 꿈’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략)··· 운이 좋은 공포의 기록자들은 위대한 모략에게 ‘가장 오래된 꿈’의 정체를 물을 수 있었다.」 

「【그것은 이 우주의 시작이자, 거대한 수레바퀴의 주인. 나의 오래된 원수이자 나의 부모. 모든 것의 마지막을 정하는 자.】」 

「몇몇 공포의 기록자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위대한 모략’의 표정을 보았고,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 그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내지 못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기록이라니. 

그래서 이 책의 공저가 ‘공포의 기록자’라고만 되어있는 걸까. 

‘은밀한 모략가’나 ‘가장 오래된 꿈’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읽어 보고 싶었지만, 책의 대부분은 그들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그저 ‘이계의 신격’ 전반을 다룬 재미없는 일화들이었다. 

심지어는 전개도 들쑥날쑥했다. 

이야기가 조금 흥미 있어지려 하면 뜬금없이 끝나버리거나, 한 작품 안에서도 시간 순서가 뒤엉키며 앞뒤가 맞지 않는 전개가 되어버리기가 일쑤였다. 

하나도 아니고 모든 종류의 일화가 그딴 식이었으니, 몰입이 될 수가 없었다. 

「(흥미로운 이야기로군.)」 

끼어든 것은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이었다. 

‘······뭐가 흥미롭습니까?’ 

「(이 책은 일부러 이렇게 설계된 것이다.)」 

‘일부러 재미없게 썼다고요?’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분명한 이야기로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으면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썼어야죠.’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은 이해할 수 없다’고 쓴 것이다.)」 

‘예?’ 

가벼운 한숨 소리 같은 것이 들리더니, 눈앞에서 작은 스파크가 흘렀다. 

[제4의 벽]에서 흘러나온 힘이, 책의 페이지를 넘기며 문장을 추출하기 시작했다. 

각각 다른 단편에서 뽑아낸 문장들을 연결하니 다음과 같은 글줄이 되었다. 

「아득한 우주로부터 오는 감정. 그것은 필멸자가 결코 쫓아갈 수 없는 태고의 흐름이었다. 우리는 겁에 질렸다.」 

「그것들은 우리가 모르는 우주에서 온 괴물 같았다.」 

「예상 가능한 것에서 오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오는 ‘공포’였다.」 

「우리는 그 공포에 하나하나 힘겹게 이름을 붙였다. 미지의 대상에 이름을 붙여, 그것을 이해 가능한 것처럼 꾸미고 싶었다.」 

그제야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드러나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시도가 얼마나 의미가 있었는지는, 그대가 판단할 일이다.」 

그 체념 어린 문장을 읽고 나자, 어째서 ‘이계의 신격’들이 ‘공포의 기록자’들을 그토록 힐난했는지 이해할 것도 같았다. 

‘이계의 신격’에게 붙은 수식언들은, 엄밀히 따지면 그들의 본질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들을 만난다면 기억하라.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는, 미쳐버리거나 심연 그 자체가 되는 수밖에 없음을.」 

복습까지 끝낸 나는 허탈한 심경으로 책장을 덮었다. 

“······소득이 너무 없는데.” 

결국 이 책을 통해 내가 이해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이계의 신격’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무책임한 말이었다. 

그런 문장은 ‘이계의 신격’이 아니라 다른 누구를 넣어도 말이 되니까. 

「‘유중혁’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한수영’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라고 표현해도 그 맥락은 결국 같다. 

비단 ‘이계의 신격’이 아니라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도, 찰나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언젠가 장하영과도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묵묵히 내 생각을 듣던 ‘꿈을 먹는 자’가 킬킬 웃었다. 

「(맞다. 그것이 이 책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우리는 모두는 결국 서로에게 ‘이계의 신격’이라는 것.)」 

나는 책을 덮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동그란 방은 창도 동그란 형태였다. 

희미하게 비치는 햇살. 울창한 숲의 사이사이로 일광욕을 즐기는 ‘이계의 신격’들이 보였다. 개중 몇몇이 나를 발견하고 촉수를 흔들었다. 괴기스러운 동화의 한 장면을 보듯, 나는 잠시 그 촉수들을 바라보았다. 저 형태는 어쩌면 저들의 본질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세히 보니 촉수들의 움직임이 제법 우아한 것 같기도 했다. 

「(손을 뻗는 자만이 진실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책을 읽을 필요 따윈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곳에 널린 것이 바로 ‘이계의 신격’들이었으니까. 

나는 주변의 눈치를 흘끗 살피다가 [소형화]를 사용해 창문을 빠져나갔다. 

두둥실 몸을 날려 ‘이계의 신격’을 향해 다가가자, ‘이계의 신격’도 나를 향해 촉수를 뻗어왔다. 딱히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후 회해 도 몰 라」 

[제4의 벽]의 경고에도, 나는 촉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후회는 늘 해왔다. 

하지만 저지른 일보다는,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가 더 컸다. 

[전용 스킬, ‘독해력’이 발동합니다!] 

이 <스타 스트림>의 최종 시나리오는, ‘이계의 신격’과의 대전쟁이다. 

그리고 ‘이계의 신격’은 그 전쟁을 끝으로 세상에서 사라진다. 

‘멸살법’에서 유일하게 설명되지 않는 존재들. 

나는 묻고 싶었다. 

너희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 

무엇을 위해, 이 <스타 스트림>과 맞서 싸운 것인지. 

작중에서 ‘이계의 신격’들은 한 번도 대답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울부짖거나,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성좌들과 맞서 싸울 따름이었다. 

츠츠츠츠츠······. 

[‘제4의 벽’이 당신에게 경고합니다!] 

나는 ‘이계의 신격’의 촉수를 쥐었다. 내 손끝에 감응하듯, 촉수들은 나무 넝쿨처럼 손끝을 감았다. 

공포의 기록자들은 말했다. 

‘이계의 신격’은 불가해한 존재들이라고.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 정체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고. 

그들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지금의 내 행동은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일 수도 있다. 

우리는 원작에서 그랬듯 싸우게 될 것이고. 

처참한 폐허와 멸망만을 가져오게 될 수도 있다. 

다음 순간 주변의 정경이 느릿한 멜로디로 뒤덮였다. 찬연한 햇살 속에서, ‘이계의 신격’들이 하나둘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설화, ‘만물의 사랑을 받는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자신이 숨겨온 소중한 것을 내어주듯, ‘이계의 신격’들이 뻗은 덩굴의 끝에 작은 꽃들이 맺혔다. 꽃에서 향기가 흘러나왔다. 향기는 곧 노랫말이 되었고, 이야기가 되었다. 

「“대장.”」 

그것은 아주 오래된 기억의 파편. 

「“유중혁 씨.”」 

나는 마치 홀린 사람처럼 그 목소리들을 들었다. 모두 다른 목소리였지만, 나는 그 목소리들이 누구의 것인지 눈을 감고도 맞출 수 있었다.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만약 ‘은밀한 모략가’가 원작의 유중혁이라면, 그리고 그가 보여준 것처럼 ‘멸살법’의 무수한 세계선이 존재한다면······. 

그 무수한 회차에서 실패한 이야기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다음 생애에는 반드시.”」 

「“몇 번을 회귀하더라도, 대장과 함께······.”」 

밀려오는 기억의 파도가 순식간에 내 의식을 휩쓸었다. 

그 기억에는 두서가 없었고, 서로 일관적으로 연결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이을 수 있었다. 마치 이어지지 않는 별자리를 잇듯이. 

어쩌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그것들을 연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이해했다. 

‘이계의 신격’이 무엇인지, 원작의 유중혁은 왜 스스로 ‘이계의 신격’이 되었는지. 

왜, ‘은밀한 모략가’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수만 년, 수십 만년, 어쩌면 수백 만년에 달하는 고통의 이야기. 세계선에서 버려져, ‘설화’로 인정받지 못한 이야기. 세계의 무의식이 되어, 먼 우주를 떠돌며 오래된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실패한 설화의 파편들. 끝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목소리들. 

【오오오오오오오오오······.】 

내 주변을 정원처럼 덮은 ‘이계의 신격’의 가지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나는 기억의 파도에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그 기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릴 기억해줘요.”」 

나는 손끝에서 부스러지는 그 설화들을 붙잡은 채 울었다. 

그것들이 너무나 소중하고, 이젠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 그것들이 가엾어서.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 

그때도 지금도, 그것을 ‘읽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계의 신격’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우릴알아우릴알아우릴알아우릴알아우릴알아우릴알아】 

【너누구너누구누너누구너누구너누구너누구】 

점점 더 나를 조여드는 넝쿨들. ‘이계의 신격’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한 소리. 

먼 우주 저편에서부터 들려오는 태고의 울음. 

「그 러지 말 라고했 잖 아」 

주변으로 몰려든 ‘이계의 신격’들이 까마득한 숲을 이루었다. 자라난 넝쿨들이 나를 삼키려는 듯 옥죄어왔다. 나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려는 듯이. 이대로, 영원히 자신과 함께하자는 것처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넝쿨을 헤치며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넝쿨은 더욱 조여들었다. 

【가 지 마】 

【어 째 서】 

여기서 먹히면 안 된다. 

정말 이들을 위한다면, 나는 여기서 정신을 놓아서는 안 된다. 

【못 가】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꺼내 들기도 전에 양팔이 봉쇄되었다. 

그렇게 꼼짝없이 넝쿨의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가려는 순간, 눈부신 빛살이 넝쿨을 갈랐다. 

희미한 볕과 함께 보이는 작은 [진천패도]. 고개를 들자 꼬마 유중혁 [999]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 Episode 79. 은밀한 모략가 (6) > 끝

< Episode 79. 은밀한 모략가 (7) >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데?” 

한수영의 말에, 비형의 고개가 축 처졌다. 

“큰소리 뻥뻥 치더니 입구 컷이라니······ 어이 도깨비, 대답 좀 해보라니까?” 

[그게······ 후······.] 

결론부터 말하면, <김독자 컴퍼니>는 ‘마지막 시나리오’로 가지 못하고 지구로 되돌아왔다. 이유는 ‘자격이 부족하다’는 것. 

[아무래도 대도깨비들이 손을 쓴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다야? 시간 낭비한 우리 입장은 뭐가 돼?” 

[······보상금은 줄 테니 너무 채근하지 마시죠.] 

투덜거리는 비형이 주머니를 뒤지는 동안, 한수영은 한숨을 내쉬며 일행들을 둘러 보았다. 

우여곡절 끝에 지구로 되돌아오긴 했지만,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번엔 진짜로 죽었을지도 몰라······ 미안해요 형······ 내가······ 내가 자격이 없어서······ 계약을 안 해서······.” 

이길영은 아까부터 몸을 웅크린 채 이상한 말들을 중얼거리고 있었고, 신유승은 명상이라도 하듯 눈을 감은 채 관자놀이에 양손 검지를 대고 있었다. 이지혜와 정희원은 [공단]의 아일렌에게 이현성을 데려가느라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집은 그대로네. 아줌만 청소도 안 하나.” 

한수영은 낡은 소파 위의 먼지를 쓸어내며 중얼거렸다. 

이 집은 한때 그녀와 유상아, 이수경이 함께 머물렀던 집이었다. 김독자가 없던 3년 동안 살았던 장소······. 

그녀의 짧은 상념은 이어서 들려온 벨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흑염]을 움직여 원격으로 문을 연 한수영이 피식 웃었다. 

“······혹시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도 설화로 있나?” 

“오랜만이다, 수영아.” 

이수경은 어지러운 집안 꼴을 살펴 보더니 고개를 휘휘 저었다. 

“너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구나. 사람이 환기는 하고 살아야지.” 

“나 지금 막 돌아왔거든? 그것도 몇 년 만에······.” 

한수영은 거기까지 말하다 흠칫했다. 그녀는 ‘환생자들의 섬’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보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섬 내부의 시간이었다. 바깥에서는 정확히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이수경은 간단한 손짓으로 집안의 모든 창문을 열어젖힌 뒤 퀴퀴한 먼지들을 집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눈은 거실 바닥에 늘어진 일행들을 훑고 있었다. 

슬그머니 일행들을 가린 한수영이 흠흠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저, 혹시 정희원이 말했어?” 

“뭘 말이니?” 

한수영은 슬그머니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게, 여기 지금 김독자가 없잖아?” 

“흐음, 그렇구나. 방금 알았네.” 

괜히 말 꺼냈다 싶었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한수영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말했다. 

“왜 김독자가 여기 없냐면······ 나랑 유중혁이랑 정희원이 아줌마 아들을 구해보려고 영혼의 한타를 했는데······.” 

“요점만 말하렴.” 

“응, 사실 아줌마 아들이 누구랑 어딜 좀 갔어. 근데 그게······.” 

“혹시 저걸 말하는 거니?” 

한수영은 이수경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벽걸이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새카만 하늘 위에 떠 있는 흰 코트의 사내와, 그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김독자의 모습. 

―특보! <김독자 컴퍼니> 대표이사 납치! 

한수영은 입을 딱 벌린 채 중얼거렸다. 

“······뭐야 저거?”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지구의 언론들이 벌써 이 일을 알고 있었다. 

여전히 한가로운 표정으로 화면을 보던 이수경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녀석, 인기가 많네.” 

“아줌마. 지금 저거 되게 심각한 거거든?” 

“저거 유중혁 군인 것 같은데. 뭐가 심각하다는 거니?” 

“저게 유중혁이 아니니까 문제지.” 

한수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데 텔레비전 화면이 갑자기 멋대로 되감기더니, 똑같은 장면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특보! <김독자 컴퍼니> 대표이사 납치! 

이건 또 뭔가 싶어 돌아보니, 넋이 나간 채 리모콘을 꾹꾹 누르는 유중혁이 보였다. 몇 번이고 뒤로 감기를 눌러서 같은 장면을 반복하고 있는 유중혁의 모습. 한수영이 물었다. 

“······너 괜찮냐?” 

“······.” 

“그거 돌려도 회귀 안 되거든? 이제 회귀하는 법도 잊어버린 거냐?” 

유중혁은 한수영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은밀한 모략가’의 모습을 각인하려는 것처럼 이글거리는 유중혁의 동공.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는 회귀자의 격이 스멀스멀 흘러나와 거실 공기를 후텁지근하게 만들었다. 한수영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제기랄, 저 영상은 대체 어떤 놈이 뿌린 거지······.” 

[험험.] 

고개를 돌리자 헛기침을 하는 비형이 있었다. 

“······아직 안 갔냐?” 

[여기 보상금.] 

그러고 보니 보상금을 받는 것을 잊고 있었다. 한수영이 손을 내밀자, 비형의 자그마한 손이 500코인을 올려놓았다. 

“지금 장난치냐?” 

[그게 요즘 서울 관리국 재정 상태가 안 좋아서······ 그리고 신경 써야 할 일이 워낙 많다 보니······.] 

비형은 휘파람을 불며 하늘 저편을 향해 흘끗 눈길을 보냈다. 

맑아야 할 서울의 하늘이 불길한 황색과 적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새카맣게 소용돌이치는 [그레이트 홀]과 벼락처럼 내리치는 개연성의 스파크. 

한수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서울에 무슨 일 있어?” 

“얼마 전부터 하늘이 저꼴이야.” 

이제 서울은 주력 메인 시나리오 지역이 아니다. 그런데도 저런 세기말적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은······. 

[묵시룡의 영향입니다.] 

비형은 씁쓸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더니 품속에서 길쭉한 곰방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 모습이 같잖았는지 한수영이 곰방대를 빼앗으며 다그쳤다. 

“그건 뭔 개소리야? 묵시룡의 영향이 왜 여기까지 와?” 

[모르는 겁니까? 김독자가 당연히 알려줬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놈은 제일 중요한 정보는 안 알려줘.” 

품속에서 자연스럽게 두 번째 곰방대를 꺼낸 비형이 곰방대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묵시룡의 부활은 대멸망의 첫 번째 단추입니다. 일단 녀석이 깨어나면 세계선은 끝을 향해 달려가는 거라고 볼 수 있죠. ······이래서 내가 ‘마지막 시나리오’로 빨리 가자고 했던 건데.] 

“······마지막 시나리오로 못 가면 어떻게 되는데?” 

[말 그대로 멸망하는 겁니다. 당신들도, 나도, 이 세계도.] 

그 담담한 선언에, 한수영이 어이없다는 듯 쏘아붙였다. 

“아니 뭐 그런······ 이 세계가 멸망하면 ‘마지막 시나리오’가 대체 무슨 소용이 있어? 왜 그딴 시나리오를 짜는 건데!” 

[대멸망은 도깨비가 짜는 시나리오가 아닙니다. 그저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죠. 그리고 대멸망이 존재하기에, ‘마지막 시나리오’도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비형은 회한 가득한 얼굴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황급히 어딘가로 향하는 성단의 움직임. 하늘의 별들이 유성처럼 멀어지고 있었다. 

* 

【오오오오오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계의 신격’들이 새카만 격을 발산하자, 은가이의 숲은 완연한 칠흑에 휩싸였다. 

넝쿨 속에서 나를 꺼낸 꼬마 유중혁들이 전후좌우로 나를 둘러쌌다. 꼬마 유중혁 [999]가 말했다. 

“김독자를 지켜라.” 

“내가 누누이 말했지. 이놈 사고 칠줄 알았다.” 

“역시 처음에 죽여 없앴어야 했다.”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으면서도, 모든 유중혁들은 일제히 [진천패도]를 쥔 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다가오는 촉수들을 베어내면서, 유중혁들은 조금씩 전진했다. 

충격적인 것들을 본 직후라서 그런지 전신에 냉기가 감돌았다. 꼬마 유중혁 [999]가 자신의 검은색 코트를 내게 덮어주었다. 

“내가 책을 읽으랬지, 언제 이 녀석들을 건드리라고 했나?”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999]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놈.” 

【오오오오오오오!】 

포효하는 ‘이계의 신격’들의 진언이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숲의 벌레들이 진액을 토하며 죽어갔고, 심지어는 자기들끼리도 상잔이 일어나는 중이었다. [999]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도록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자들이다. 너는 그들을 건드렸어.” 

‘이계의 신격’들이 폭주하고 있었다. 

【내놔내놔내놔내놔내놔】 

【김독자김독자김독자김독자김독자】 

더욱 심각한 것은, 모든 ‘이계의 신격’들이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내 존재를 눈치챈 일부 상위 신격들은 나를 향해 거침없는 적의를 발산해댔다. 

【빌 어 먹을 성 좌 가 우 릴 엿 보 았 다】 

【죽 여 없 애 라】 

【모 략 의 손 님 이 라 도 용 서 치 않 는 다】 

“물러나라, 샨타크의 족속들이여!” 

“다가오면 모두 베어버리겠다.” 

꼬마 유중혁들이 일제히 격을 발출하며 저항했지만, ‘이계의 신격’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한 걸음씩 다가오며 아득한 격을 내뿜는 신격들이 포효하듯 소리쳤다. 

【모 략 이여! 우 리는 더 이상 기다 릴 수 없 다!】 

【언 제까 지 기다려 야 하는가. 세 계선의 끝이 다 가오 고 있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 세계선의 끝. 

그들 역시 ‘마지막 시나리오’를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 계는 우리를 이 해 해 야 한다.】 

“물러나라!” 

다가오는 촉수들의 기세가 더욱 강맹해졌다. 이윽고 그 격이 꼬마 유중혁들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숲이 갈라지며, 녀석이 나타났다. 

누구도 막아내지 못한 촉수들을 가로지르며 걸어오는 존재. 그 걸음걸음에 영겁의 고독과 1863회차의 세월이 묻어 있었다. 

한때 그의 이름은 유중혁이었고. 

이제는 ‘은밀한 모략가’였다. 

모든 세계선의 슬픔을 아는 존재. 

그 압도적인 숭고 앞에 이계의 신격들이 무릎을 꿇었다. 

【위 대 한 모 략 이 시 여.】 

하지만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가 무화되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의견을 굽히지 않는 신격들이 있었다. 

【위 대 한 모 략 이 여 이 제 우 리 는 기 다 릴 수 없 습 니 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자들이 통곡하고 있었다. 분노하고, 슬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분노와 슬픔은 이해되지 못했다. 그것들은 이 세계선의 것이 아니었고, 기존의 ‘설화’로는 이야기되지 않았다. 

그들의 분노를, 슬픔을, 비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했다. 

【우 리 는 이해 받 고 싶 습 니 다.】 

【우 리 도 설 화 가 되 고 싶 습 니 다.】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이야기는 설화가 될 수 없다. 

자신을 내던져야만 느낄 수 있는 이야기는, 소비되지 못한다. 

‘은밀한 모략가’가 입을 열었다. 

【너희는 이해받지 못할 것이다.】 

그들 하나하나를 섬세한 눈길로 돌아보며, 그 모든 존재들을 살피며 잔혹한 진실을 전하고 있었다. 

【이 <스타 스트림>이 너희를 ‘공포’라 부르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너희를 질서를 무너뜨리는 혼돈으로, 무엇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재앙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야, ‘은밀한 모략가’가 이들의 편에 선 이유를 이해하고 있었다. 

「이미 모든 결말을 아는 존재가, 어째서 그 모든 이야기를 다시 한번 반복하는가?」 

생각해 보면 의문의 해답은 간단했다. 

「자신이 본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원작에서 유중혁은 성좌들과 함께 ‘이계의 신격’들을 물리쳤다. 

그는 시나리오의 끝에 도달했고, <스타 스트림>을 부쉈다. 

【너희는 성좌들과 같은 하늘에서 빛날 수 없다. 이 세계의 주역이 될 수도 없다. <스타 스트림>이 존재하는 한, 너희는 언제나 ‘이계의 신격’일 뿐이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은밀한 모략가’가 된 유중혁은, 다시 한번 같은 전장에 섰다. 

【멸망의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별이 떨어지고, 세계가 무너지며, 모든 설화들이 소멸하는 최후의 멸망이 시작될 것이다.】 

멀리서 나를 보는 ‘은밀한 모략가’의 눈이 보였다. 

새카만 동공 속에서 회전하는 [현자의 눈]. 

【위대한 모략이시여······!】 

【오오오오오오오!】 

원작의 전개대로라면 이들은 패배할 것이다. 

「김독자가 원하는 결말을 위해서, 그들은 패배해야만 했다.」 

<스타 스트림>은 폐허가 될 것이고, 하늘의 별들과 고독한 외신들은 기억되지 못한 채 죽어갈 것이다. 

패자는 비통하게 죽어갈 것이고, 승자는 승리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은밀한 모략가’를 향해 걸어갔다. 

“······김독자?” 

[999]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소형화]를 해제하자 세계의 눈높이가 달라졌다. [999]가 내게 걸어준 검은색 코트가 내 걸음걸이에 맞추어 흔들렸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거대한 메인 시나리오의 흐름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덩굴이 걷힌 숲의 하늘로 <스타 스트림>의 은하가 보였다. 

한쪽 하늘에는 별들이 환한 빛을 내뿜고 있었고, 다른 쪽 하늘에는 [그레이트 홀]과 불길한 은하가 흐르고 있었다. 

절반의 빛과 절반의 어둠. 

곧 최후의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그들 중 한쪽 편에 서서 세계의 결말을 보아야만 할 것이다. 

[당신의 두 번째 수식언이 결정되었습니다.] 

하늘의 건너편에서 작은 별빛이 반짝였다. 나는 그 별빛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천천히 지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계의 신격’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마주 보며, 내가 설 자리를 택했다. 

[당신의 두 번째 수식언은 ‘빛과 어둠의 감시자’입니다.]





< Episode 79. 은밀한 모략가 (7) > 끝


< Episode 80. 최강의 우리 편 (1) >





【죽 여 라.】 

【김독자김독자김독자김독자김독자!】 

나는 ‘이계의 신격’들을 향해 걸어갔다. 

‘은밀한 모략가’는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것처럼. 

나는 한 걸음을 더 내딛었다. 그러자 덩굴들의 움직임은 더욱 격렬해졌다. 순식간에 뻗어온 덩굴들이 내 양팔을 붙들었다. 

【우릴알아우릴알아우릴알아우릴알아】 

“맞아, 나는 너희들을 알고 있어.” 

나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어떻게어떻게어떻게어떻게어떻게】 

어떻게.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넝쿨들이 내게 보이는 적의가 짙어졌다. 급기야 머뭇거리던 촉수 하나가 날아들어 내 어깻죽지를 꿰뚫었다. 몹시 고통스러웠지만, 진짜 고통은 어깨의 통증이 아니었다. 

촉수의 끝에서부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기 싫어.”」 

환상일까. 

순간 어깨를 꿰뚫은 촉수가 검처럼 보였다. 

······쌍룡검. 나는 그 검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끝내고 싶진 않았다고.”」 

이지혜가 울고 있었다. 뒤늦게 손을 뻗었지만, 어느덧 이지혜의 얼굴은 사라지고 없었다. 서서히 스러지는 이지혜의 얼굴. 파편화되고 부서져서, 단편만이 남은 목소리. 

‘이름 없는 것들’. 

“······알아.” 

고통을 눌러 참으며,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또 다른 촉수가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뒤쪽에서 꼬마 유중혁 [999]가 소리를 질렀다. 살이 꿰뚫리는 피육음과 함께, 이번에도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중혁 씨, 나는 당신에게 몇 번째 이현성입니까?”」 

세상 누구보다 단단한 강철의 화신. 이번에도 내가 손을 뻗는 순간, 이현성의 모습은 거품처럼 흩어졌다. 텅 빈 허공을 헤매는 손. 그 너머에서 이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이 시나리오에 끝이 있습니까?”」 

“있어.” 

입술을 꾹 깨문 채 걸음을 딛는다. 

한 걸음. 그리고 다시 한 걸음을. 

그때마다 잊힌 세계선의 파편들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좀 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심장을 꿰뚫린 채 죽어가는 이설화. 

「“원망하지 않아요. 그래도 딱 하나, 아쉬운 건······.”」 

희미하게 웃으며 흩어지는 신유승. 

「“멍청하긴. 대장, 나 김남운이야. 여기서 뒈질 것 같아? 나 안 죽어. 안 죽는다고. 살아남고 또 살아 남아서, 다음 시나리오를 볼 거야. 반드시, 다음 시나리오를―”」 

눈을 뜬 채 절명한 김남운이, 있었다. 

어느 회차인지조차 알 수 없는 기억들. 

그것은 그저 실패한 세계관의 부산물이었고, 의미를 잃은 기억의 집합이었다. 

유중혁이 ‘은밀한 모략가’가 되면서까지 지켜온, 소중한 무엇. 

「“다음 회차에선 네놈 편 안 한다. 날 찾지 마.”」 

공필두. 

「“또 혼자 남게 되겠군요, 유중혁.”」 

안나 크로프트. 

「“함께 싸울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패왕.”」 

셀레나 킴. 

한때 성좌였던 존재들의 기억도 스쳐갔다. 

고려제일검, 척준경. 

술과 황홀경의 신, 디오니소스······. 

내가 걸음을 멈춘 것은, 오른쪽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불길 때문이었다. 

내 팔을 붙잡은 촉수가 불타오르며 내게 말하고 있었다. 

「“아직 더 불태울 수 있어.”」 

······우리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아.” 

[‘이계의 신격’들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안다. 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한다. 

나는 너희가 아니니까. 

그렇기에,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아직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 

[‘이계의 신격’들이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아직 이야기할 것들이 남았잖아.” 

나는 ‘이계의 신격’들을 올려다보았다. 

두족류와 촉수 괴물로만 묘사되는 이들. 이 세계선에 필요하지 않기에, 이 세계선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형태를 부여받은 존재들.

나는 그들을 향해 이야기했다. 

“내가 너희들을 이야기하겠어.” 

순간, 주변에서 광풍이 몰아쳤다. 

【정말정말정말정말정말】 

【그게무슨뜻그게무슨뜻그게무슨뜻】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나를 향한 사나운 적의가 쏟아졌다. 

【거 짓 말!】 

【두 번 이 나 속 을 것 같 은 가?】 

상위 신격들이 나를 향해 기세를 뿜어댔다. 

나는 울컥 솟아오르는 핏물을 삼키면서 그들을 보았다. 그들이 왜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반응하는지 안다. 이들은, 줄곧 ‘시나리오’에서 이용당해왔기 때문이다. 

【도 깨 비 들 도 그 랬 다】 

그들의 존재를 일찍이 깨닫고, 그들을 이용한 것은 ‘관리국’이었다. 시나리오에 편입시켜준다는 명목하에 그들의 힘과 개연성을 착취하고, 그들을 이 세계의 ‘악’으로 만든 이야기꾼들. 

나는 진언을 발출했다. 

[나는 도깨비가 아냐.] 

【너 는 성 좌 다.】 

[나는 관리국 소속도 아니고, 도깨비들에게 부역하는 존재도 아냐.] 

【성 좌 는 모 두 똑 같 다.】 

그 말은 비수처럼 내 가슴을 후벼팠다. 

맞다. 나 역시 설화를 탐하고 이야기를 관음해온 성좌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성좌이기에,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최후의 전쟁’이 발발하면, 너희는 반드시 파멸하고 말아. 너희가 어떻게 싸우든, 너희는 결국 지게 될 거다.] 

【건 방 진 놈 그 건 해 보 지 않 으 면······!】 

[해보지 않아도 알아. 나는 너희가 싸운 모든 세계선을 봤으니까. 그리고 나는 너희가 이번에도 그렇게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아.] 

내 말에 ‘이계의 신격’들의 가지가 흔들렸다. 

【그 게 무 슨 뜻.】 

[너희는 이해받고 싶다고 했지. 내가 너희를 설화로 만들어주겠다.] 

그 순간, 주변의 시공간이 뒤틀렸다. 희미한 촉수들의 떨림. 

나는 그 떨림을 느끼며 계속해서 말했다. 

[너희가, 저 하늘의 별들과 동등한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해주겠다. 누구도 너희를 오해하지도, 경멸하지 않을 설화를 만들어주겠다고.] 

동요는 서서히 번져갔다. 마치 폭풍의 전조처럼, 거대한 기류가 ‘은가이의 숲’을 휩쓸고 있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최후의 전쟁’은 일어날 필요가 없어. 너희는 더 이상 <스타 스트림>의 악이 될 필요가 없―] 

【닥 쳐 라】 

【너 따 위 가 감 히!】 

나는 결국 핏물을 토했다. 내 육체를 부수고 정신을 침식시킬 상위 외신들이 강림하고 있었다. 

【김독자위험해김독자위험해】 

【공격하지마공격하지마공격하지마】 

나를 감싸는 덩굴들. 

강대한 상위 신격의 기운에 맞서, ‘이름 없는 것들’이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자 아 도 없 는 하 찮 은 것 들 이.】 

쿠구구구구구! 

진언 한 번에 수십 개의 줄기들이 찢어져나갔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흘리면서도, 작은 ‘이계의 신격’들은 나를 지켰다. 

그리고 그런 내 앞을 꼬마 유중혁들이 막아서고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그들을 말리거나 제지하지 않았다. 다만,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마치, 그는 이번 선택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처럼. 

이윽고 상위 신격들의 격이 임계점에 이르렀을 때.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길하게 소용돌이치는 포탈 너머로 걸어오는 누군가가 말하고 있었다. 

[가엾은 세계선의 사생아들아. 그의 말이 맞다.] 

【너, 는?】 

[너희는 다시 설화가 되어, 별들의 흐름 속에 이야기될 수 있다. 단, 저 불행한 성좌가 너희를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 

노인은 무척 작은 몸집이었지만, 커다란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다. 

커다란 그림자의 볼엔 두 개의 혹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 평 선 의 악 마······.】 

나 역시, 저 종족을 알고 있었다. 

처음 마계로 갔을 때, 나는 저 종족 중 하나와 거래를 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존재는 그때 내가 만났던 ‘혹부리’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세상에 수많은 혹부리들이 있지만, 그들 중 ‘두 개’의 혹을 가진 노인은 하나뿐이다. 

[오래된 도서관의 주인이여.] 

고개를 들자, 혹부리 왕이 사악한 호기심을 띤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았다. 

[그대는 정말로 이 폐기물들을 위해 <스타 스트림>의 적이 될 셈인가?] 

* 

멀리서 숲의 동그란 출구가 열리는 것이 보였다. 

내 등 뒤로, 무수한 이계의 신격들이 몰려와 나를 배웅하고 있었다. 거대한 갈대 숲처럼 흐느적거리는 촉수들. 

【김독자김독자김독자김독자】 

【잘가잘가잘가잘가잘가】 

대부분 같은 외양이었지만 이제 나는 그들을 어렴풋이 구별할 수 있었다. 

저기 왼쪽에 붙어 있는 녀석은 12회차 신유승의 기억이 손톱 만큼 들어간 착한 녀석이고, 저기 오른 쪽에 있는 녀석은 44회차의 김남운이 상당량 들어간······ 아까 저 자식이 내 허벅지 찔렀던 거 같은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내 어깨에 올라탄 꼬마 유중혁 [999]가 말했다. 

“혹부리 왕과의 계약은 절대적이다. 이런 짓을 하면, 너는 반드시―” 

“안 죽으니까 걱정 마. 근데 너도 같이 가는 거냐?” 

내 말에 꼬마 유중혁 [999]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약속대로 감시 역할이다. 네가 <김독자 컴퍼니>의 다른 녀석들과 접촉해 흉계를 꾸미면 곤란하니까.” 

“접촉 안 한다고 존재 맹세까지 했는데······ 하여간 유중혁이란 놈들은.” 

계약을 완수할 때까지 <김독자 컴퍼니>와 접촉하거나, 그들에게 내 존재를 드러내지 말 것. 그것이 바로 혹부리 왕, 그리고 이계의 신격들과의 첫 번째 약속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약속은······. 

[당신의 행동으로 인해 <스타 스트림>에 새로운 시나리오 분기가 촉발되었습니다!] 

[히든 시나리오가 발생했습니다!] 

시나리오를 읽으며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런 것까지 시나리오가 되다니······ 역시 <스타 스트림> 답다. 

하긴, 스스로의 멸망조차 이야기로 만들어버릴 세계니까. 

+ 

<히든 시나리오 ― 약속 증명> 

분류 : 히든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스타 스트림>의 주요 거대 설화에 ‘이계의 신격’들을 등장시키시오. 단, 기존처럼 ‘이계의 신격’ 역할로 등장해서는 안 됩니다. 

제한시간 : 100일 

보상 : ‘이계의 신격’의 신뢰, ??? 

실패시 : 당신은 모든 기억을 잃고 ‘이계의 신격’으로 변화합니다. 

+ 

‘이계의 신격’에게 ‘이계의 신격’이 아닌 역할을 주어라······. 

원작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나리오였다. 

‘이계의 신격’들을 설득하고, ‘혹부리 왕’과 계약하면서 얻은 시나리오. 

만약 이 시나리오에 실패하면, 나는 저들과 같은 ‘이계의 신격’이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이 ‘혹부리 왕’과의 계약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에 성공하면, ‘이계의 신격’들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은가이의 숲’의 출구를 보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그런 내가 못미덥다는 듯 [999]가 물었다. 

“어디로 갈 셈이지? 이제 남은 ‘거대 설화’ 시나리오는 거의 없을 텐데.” 

사실이다. 

이제 <스타 스트림>의 거대 설화는 대부분 종막을 맞이했다. 

하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강력한 ‘거대 설화’가 아직 하나 남아 있다. 

나는 [999]에게 넌지시 물었다. 

“혹시 너도 1863회차의 이야기를 알고 있어?” 

“위대한 모략에게 들었다.” 

“이대로 ‘최후의 전쟁’에 돌입하면, 너희는 반드시 패배할 거야. 설령 기적적으로 이긴다고 해도 살아남는 존재는 거의 없을 거고.” 

“지금 저주하는 건가?” 

“아니, 사실을 말하는 거야.” 

아무리 ‘은밀한 모략가’와 ‘이계의 신격’들의 세력이 강성하다고 해도, <스타 스트림> 전체와 맞서 싸울 수는 없다. 어쨌든 지금 이 우주의 지배자는 저 <스타 스트림>의 성운들과 빌어먹을 ‘관리국’이니까. 

“전쟁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 같은 걸 해봤자 손해라는 걸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것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넌 ‘최후의 전쟁’에서 가장 많은 ‘이계의 신격’을 학살했던 성좌가 누군지 알아?” 

내 질문에 [999]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어쩐지 자존심이 살짝 상한 듯한 얼굴이었다. 

“모른다.” 

“지닌 격이 너무나 강대해서, 평소에는 존재가 여럿으로 분리되어 있는 놈이야. 뭐, 굳이 따지면 ‘은밀한 모략가’랑 비슷하지.” 

“······위대한 모략과 비슷하다고?” 

“그래. 만약 그 녀석이 <스타 스트림>의 편에 서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수만 마리의 외신들과 동귀어진 하지 않았더라면······ 1863회차의 향방은 많이 달라졌을 거야.” 

내 말에 유중혁 [999]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아마도, 내가 말하는 성좌가 누구인지 눈치챈 듯했다. 

“······설마?” 

‘멸살법’ 최후의 전쟁에서 무수한 외신들과 함께 동귀어진했던 성좌. 

애초에 그런 존재는 하나밖에 없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맞아. 그 녀석을 우리 편으로 만들러 갈 거야.”





< Episode 80. 최강의 우리 편 (1) > 끝

< Episode 80. 최강의 우리 편 (2) >





새카만 어둠 속에서 순백의 신형이 떠올랐다. 

유중혁은 그를 향해 몇 번이나 검을 휘둘렀다. 파천검뢰부터 유성참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그 검격들 중 어느 하나도 적의 그림자조차 스치지 못했다. 

이어진 설화의 충돌. 유중혁은 소스라치는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해가 진 수련실 안. 긴 그림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파천검성이었다. 

“놈이 강했느냐?” 

허리를 숙인 채 쭈그려 앉은 스승의 눈은 제자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유중혁이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강했습니다.” 

“얼마나?” 

“초월형 5단계를 개방해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초월형 5단계는 지금의 유중혁이 도달한 한계였다. 

파천검성은 고요한 눈으로 유중혁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초월형 6단계를 넘어서면, 너의 [파천검도]는 성별에 구애받지 않게 될 것이다.” 

본래 [파천검도]는 여성을 위한 무공. 하지만 모든 무공이 그러하듯, 일정한 경지를 넘어서면 탈경계(脫境界)에 이르게 된다. 

그 무수한 경계를 끊임없이 탈주하는 것이, 바로 초월좌들의 수련 과정이었다. 

“6단계에 오른다고 해서 놈을 이길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놈은 저입니다.” 

그토록 강인하던 유중혁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희미한 두려움이 어리고 있었다. 

“그놈은, 1863번이나 회귀한 후의 저란 말입니다. 그런 녀석을 제가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완연한 절망감. 

‘은밀한 모략가’와 맞서는 순간 유중혁은 무엇을 해도 넘을 수 없을 거대한 벽을 보았다. 고작 3회차의 회귀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세월. 그의 적은 그 세월을 넘어 이 세계선에 도달해 있었다. 파천검성이 말했다. 

“그놈은 네가 아니다.” 

“······그놈도 유중혁입니다.” 

“그놈과 너는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걷지 않을 것이다.” 

제자의 눈동자에 어린 절망을 닦아내듯, 파천검성의 커다란 손이 유중혁의 뺨을 덮었다. 파천검성은 계속해서 말했다. 

“초월형 몇 단계에 올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설화를 쌓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너는 겨우 세 번 회귀한 애송이일 뿐이지만, 그놈이 모르는 설화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그 말을 들으며, 유중혁은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은밀한 모략가’에겐 닿지 못했던 주먹이었다. 천천히 펼친 주먹에서 설화가 흘러나왔다. 

그가 쌓아온 설화. ‘은밀한 모략가’는 모르는 설화. 그리고. 

“초월의 길은 모두 다르다. 그놈을 따라잡으려 하지 말고, 너만이 갈 수 있는 길을 찾아라.” 

유중혁은 말없이 자신의 주먹을 그러쥐었다. 

마치, 그 설화들 중 하나라도 빠져나가는 것을 허락지 않겠다는 것처럼. 

“······새로 들어온 소식은 없습니까?” 

파천검성이 고개를 저었다. 

김독자가 행방불명된 것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하지만 그의 행방도, ‘은밀한 모략가’의 위치도 특정되지 않았다. 

“그 녀석은 다른 세계선에서 온 너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놈의 목적이 뭔지는 모르지만, 굳이 이 시점에 이 세계선으로 넘어왔다면, ‘마지막 시나리오’와 관계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 

유중혁도 파천검성의 말에 동의했다. 

즉, 마지막 시나리오 지역으로 가면 ‘은밀한 모략가’를 만날 확률이 높다. 

“그러나, <김독자 컴퍼니>는 현재 ‘마지막 시나리오’로 갈 수 없지.”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시나리오’를 허락하기엔 당신들이 쌓은 설화가 부족합니다. 

마지막 시나리오에 진입하지 못했던 그 날. <관리국> 측에서는 그렇게 일방적인 통보를 해왔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생 성운에 불과하고, 쌓은 설화의 숫자도 적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쌓은 설화들의 등급을 생각하면 마냥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특히 마지막에 얻은 거대 설화인 「빛과 어둠의 계절」은 <스타 스트림>의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당신네 성운 대표는 어디 있습니까? 

결국, 모든 것은 김독자의 부재 때문이었다. 

성운에서 가장 많은 설화 지분을 가지고 있던 김독자가 일행에서 이탈하면서, 성운 전체의 설화 총량이 부족해진 것이었다. 

유중혁은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천천히 몸을 일으킨 유중혁은 [흑천마도]를 칼집에 꽂아 넣은 뒤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어딜 가는 게냐?” 

“새로운 거대 설화를 얻으러 가겠습니다.” 

김독자의 지분이 없어도 마지막 시나리오로 넘어갈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김독자 컴퍼니>는 김독자의 사병도 아니고, 수하도 아니다. 그들은 김독자가 없어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하고, 설령 김독자를 잃더라도······ 

마지막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수 있어야 한다. 

[바앗······.] 

허공에서 비유가 구슬픈 소리를 냈다. 유중혁은 그런 비유를 잠시 올려다보다가, [현자의 눈]을 발동해 자신이 아는 정보들을 되짚었다. 

현시점에서 손쉽게 ‘거대 설화’를 획득할 수 있는 지역은 이제 거의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아직까지 남은 ‘거대 설화’들이 그만큼 강력한 이야기라는 뜻이기도 했다. 

이미 「빛과 어둠의 계절」이라는 강력한 거대 설화를 얻은 상황. 

여기다 만약 ‘그 설화’까지 얻을 수 있다면, 저 ‘은밀한 모략가’와 한 판 붙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멀어지는 유중혁을 향해, 파천검성이 물었다. 

“혼자서 갈 것이냐?” 

“저는 항상 혼자였습니다.” 

“그 길은 이미 다른 네가 걸어간 길이다.” 

스승의 말에 유중혁의 신형이 멈칫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수련장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유중혁 어디 있어! 이제 출발해야 돼!” 

눈부신 빛과 함께, <김독자 컴퍼니> 일행들이 수련장의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신유승, 이길영, 이지혜, 한수영······. 

대체 언제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건지, <김독자 컴퍼니>의 모두가 그곳에 모여있었다. 파천검성이 말했다. 

“저들이 바로 너의 설화다, 중혁아.” 

‘은밀한 모략가’에게는 없는 것. 

멍하니 돌아보는 유중혁을 향해, 파천검성이 말했다. 

“이번 회차의 너는 혼자 싸울 필요가 없다.” 

* 

새로운 ‘거대 설화’ 지역까지는 나흘 거리였다. 도깨비들의 힘을 빌린다면 훨씬 빨리 도착할 수 있겠지만, 이번만큼은 그게 허락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대는 친분이 있는 도깨비들의 힘을 빌릴 수 없다. 

―그대가 ‘김독자’라는 사실을, 결코 알려서는 안 된다. 

빌어먹을 ‘혹부리 왕’과의 계약 때문이었다. 

저 계약 때문에 나는 비유의 채널에 가입할 수도, <김독자 컴퍼니>에게 내 안부를 전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양산형 제작자’에게 구입한 [X급 페라르기니]를 직접 운전해 목적지까지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내 어깨 위에서 [진천패도]를 닦던 유중혁 [999]가 중얼거렸다. 

“운전이 서툴군.” 

“그럼 네가 하든가. 설마 너 계속 그런 모습으로 있을 거냐?” 

앞으로 시나리오 지역에 돌입하면 우리를 알아보는 성좌들이 분명 나타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꼬마 유중혁의 존재는 너무 눈에 띈다. 

이미 유중혁 본인이 그렇게 유명하니······. 

“하긴, 이 상태로는 너무 눈에 띄겠지.” 

뭔가를 고민하던 꼬마 유중혁 [999]는 몸을 움찔거리더니 잠시 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무림 만두의 형태로 변했다. 

깜짝 놀란 나를 향해 [999]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하면 되겠군. 

“······어깨에 만두를 얹고 다니면 눈에 더 띄잖아.” 

―네놈도 한심한 외형을 바꿔라. 

꼬마 유중혁이 유중혁의 모습을 유지해서는 안 되듯, 나 역시 내가 ‘김독자’라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된다. 

무림 만두로 변한 유중혁은 마치 분칠이라도 하듯 내 얼굴에다가 만두피를 거칠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삐걱대며 내 얼굴의 설화가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때, 나는 그야말로 경악하고 말았다. 

거울을 보며 눈만 끔뻑이는 나를 항해 유중혁 [999]가 말했다. 

―됐군. 

맙소사, 이 정도면 유중혁 뺨을 한 대 갈길 정도는 아니더라도······ 갈길까 말까 고민할 정도는 되겠는데. 

나는 조각 같은 내 얼굴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이거 영원히 지속시킬 수는 없냐?” 

―그런 짓을 하면 개연성 후폭풍을 맞게 된다. 

마치 불결한 것에 닿기라도 했다는 듯, [999]는 만두가 된 자신의 몸을 열심히 털어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거울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언젠가 ‘복상사한 카사노바’의 설화 파편을 흡수했을 때도 잘생겨지긴 했었지만, 이건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나는 감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999회차가 대단하긴 하네. 3회차는 이런 기술 없는데.” 

―······3회차? 

“아, 몰랐던 거냐? 여기 유중혁은 3회차야. 여긴 3회차 세계선이고.” 

꼬마 유중혁 [999]는 그 말에 잠시 나를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왜긴······.” 

“그야 ‘멸살법’의 시작이 3회차니까”라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나는 조금 표현을 순화하기로 했다. 

“······그야 시작이 3회차니까.” 

―왜 3회차가 시작이지? 숫자를 모르는 건가? 시작은 0회차다. 

녀석의 말이 맞다. 

‘멸살법’의 1화는 유중혁의 3회차에서 시작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유중혁의 0회차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왜 나는 유중혁의 ‘3회차’로 온 것일까? 

어차피 3회차의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지도 않는 상황에, 소설의 도입부가 3회차라고 해서 꼭 3회차에서 시작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모르겠다. 어차피 지금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세계선의 유중혁이 자기가 ‘3회차’라고 했어. 그러니까 여긴 3회차야.” 

그리고 내가 [등장인물 일람]으로 본 정보도 정확히 그것이었고. 

그러자 [999]가 말했다. 

―그런 정보를 곧이곧대로 믿다니, 순진하군. 

“뭐?” 

―됐고, 도착한 모양이다. 

눈부신 빛과 함께 긴 차원 터널이 끝났다. 

뒤이어 나타난 것은 새로운 시나리오 지역으로 가는 거대한 게이트였다. 

게이트의 입구에는 입장을 기다리는 인파가 있었다. 나는 [X급 페라르기니]를 회수한 뒤 대기열에 합류했다. 

시나리오 지역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것은 도깨비가 아니라 한 성좌였다.그도 그럴 것이, 이번 ‘거대 설화’ 시나리오 또한 주최가 성운이기 때문이었다. 

초거대 성운 중 하나이지만, 지금까지는 나와 거의 동선이 겹치지 않았던 성운. 

[다음.] 

한 손에는 거대한 삼지창을 쥔 채, 붉은 관과 오래된 갑옷을 쓴 성좌. 

전신에서 느껴지는 패도적인 격이 그가 범상치 않은 격을 지닌 설화급 성좌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불법(佛法)의 수호자, 증장천왕(增長天王). 

그는 성운 <황제>의 본거지인 <천궁>의 입구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 중 하나였다.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차례가 돌아왔다. 

증장천왕은 내 얼굴에서 뭔가 수상한 점이라도 찾으려는 듯 유심히 나를 노려보더니, 이내 첫 질문을 던졌다. 

[방문 목적은?] 

[거대 설화에 참가하기 위해 왔습니다.] 

[수식언.] 

여기서 ‘구원의 마왕’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내겐 이번에 새로 얻은 수식언이 있었다. 

[‘빛과 어둠의 감시자’입니다.]





< Episode 80. 최강의 우리 편 (2) > 끝

< Episode 80. 최강의 우리 편 (3) >





내 말에 뒤쪽에 줄을 서 있던 몇몇 성좌들이 웅성거렸다. 

혹시나 내 수식언이 벌써 곳곳에 알려진 건가 싶었지만, 다행히 그런 건 아닌 듯했다. 

[분명 관리국 작명소에서 개명한 거겠지? 그거 요즘도 해주나?]

[저런 수식언은 ‘심연의 흑염룡’을 능가할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쯧, 요즘 젊은것들 수식언은 왜 다 저 모양인지.] 

······대충 뭔 얘기들을 하시는지 알 것 같구만. 

증장천왕은 간단한 수색 절차를 밟은 뒤 내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그 만두는 뭐지?] 

[제 점심입니다.] 

[······특이하군. 어젠 솜사탕을 든 녀석이 지나가더니.] 

솜사탕? 

[다음.] 

다행히 증장천왕은 무사히 나를 통과시켜 주었다. 

[시나리오 지역을 총괄하는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게이트에 진입하자, 화려한 무지개빛 오로라가 몰아치더니 안내 메시지와 영상이 흘러나왔다. 

[성운 <황제>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역시 진입 영상부터 다르구만. 

눈을 깜빡였을 때 나는 흰 구름 위에 올라서 있었다. 

구름은 나를 태운 채 빠르게 날았다. 곁을 돌아보자 나와 함께 허공을 날아가는 잘생긴 금빛 원숭이 한 마리가 있었다. 

「“가자고, 친구.”」 

원숭이는 나를 향해 찡긋 윙크를 하더니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거대한 여의봉을 휘둘렀다. 그러자 창공의 화면이 뒤바뀌며 수많은 요괴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이것이 가짜 영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사시.] 

왜냐하면 이것은 성운 <황제>가 가진 가장 유명한 거대 설화였기 때문이다. 

수많은 요괴들과 맞서 싸우는 제천대성 손오공의 모습.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천군들이 보였다. 

[당신을 그 장대한 모험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영상이 끝나자, 나는 어느새 광장의 바닥에 서 있었다. 

내 어깨 위의 만두가 말했다. 

―요란한 상술이로군. 

“말하지 마. 넌 만두잖아.” 

나는 조금 두근거렸던 것이 민망해서 괜히 투덜거렸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자, <천궁>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아한 고궁들로 가득 찬 광장. 찬란한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문명의 자취. 별과 별이 모이고, 그들이 서로의 설화를 쌓아 만들어진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다른 성운들의 주둔지도 가보았지만, 이처럼 엄청난 인파가 몰려든 세계관은 또 처음이었다. 

나는 일단 주변을 좀 더 탐사해보기로 했다. 

그때, 광장의 전광판을 흘러가는 홀로그램 영상이 보였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 전원 종적 묘연! 

―새로운 거대 설화 시나리오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김독자 컴퍼니>의 다음 목적지는 어디인가? 

눈부신 게이트를 넘어가는 유중혁과 동료들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잠시 멈춰서서 환한 빛을 넘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제4의 벽’이 더욱 강하게 발동합니다!] 

······새로운 ‘거대 설화’.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지금쯤 일행들은 새로운 거대 설화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김독자 컴퍼니>에서 이탈하는 바람에 ‘마지막 시나리오’로 갈 설화 지분이 부족할 테니까. 

고개를 돌리자 유중혁 [999]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섣부른 행동은 하지 않길 바란다. 

“······알고 있어. 걱정하지 마.” 

당장이라도 일행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지금 나는 그들 중 누구에게도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상태였다. 

―네가 아니라 네 동료들을 위해서다. 

“알아.” 

설령 계약 때문이 아니더라도, 당분간 내가 걸어갈 길은 누구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는 가시밭길이었다. 섣불리 잘못 연락을 취했다가는, 일행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거대 설화 시나리오 구역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나리오 진행 구역을 자동 안내를 시작합니다.] 

역시 편의성의 끝판왕을 추구하는 성운답게, 내 다리가 자동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내 곁에도 나와 같은 자세로 자동 달리기 중인 몇몇 화신들이 보였다. 

우리는 머쓱하게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자동 안내가 종료됩니다.] 

내가 도착한 곳은 광장의 서쪽에 설치된 거대한 홀로그램 패널 앞이었다. 

이미 패널 앞에는 많은 성좌들과 화신들이 모여 있었는데, 밀려든 인파 곁으로 불쑥 솟아 있는 황금빛 동상들이 보였다. 

그 중심을 차지한 동상은 내가 잘 알고 있는 성좌였다. 

황금빛 머리털에, 거대한 여의금고봉(如意金箍棒)을 쥔 긴고아의 죄수. 

제천대성 손오공을 위시한 서유기(西遊記) 주인공들의 동상. 

역시나, <황제>도 자기네 세계관에서 제일 유명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잘 아는 모양이었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시나리오는, 바로 그 ‘유명한 이야기’와 관계되어 있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시나리오 창을 열어보았다. 

+ 

<메인 시나리오 # 94 ―서유기 리메이크>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다른 성좌 또는 화신들과 함께 ‘설화방’을 만들어 서유기를 리메이크하십시오. 리메이크된 서유기는 실시간으로 심사위원들과 관객들을 통해 평가되며, ‘인기도’, ‘원작 반영도’, ‘참신함’ 등의 평가항목을 통해 총점이 매겨집니다. 최종적으로 가장 많은 득표수를 획득한 설화가 시나리오의 우승자가 됩니다. 

제한시간 : ― 

보상 : ‘서유기’와 관련된 거대 설화, 성운 <황제>의 호의, 3,000,000코인, ??? 

실패시 : ― 

* 재구성된 설화들의 저작권은 성운 <황제>와 참가자가 공동 소유합니다. 

* 심사위원 득표수에 따라 ‘전설급’ 또는 ‘역사급’의 설화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 참가자 1인당 하나의 역할만을 맡을 수 있습니다(엑스트라 제외). 

* 순위 별로 추가 코인이 지급됩니다. 

+ 

과연 <황제>는 스케일이 다르다. 

자신들의 거대 설화를 각색하는 것을 시나리오로 내놓다니······.

저 설명이 맞다면, 설령 시나리오 클리어에 실패하더라도 참가자들은 전설급 또는 역사급의 설화를 획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꼬마 만두 유중혁은 뭔가 혼란스러운 듯했다. 

―서유기를 리메이크 하라고? 

“······아, 네 회차에서는 여기 안 왔겠구나. 그래도 앞선 회차에서 온 적이 있을 텐데.” 

―나는 모든 회차의 기억을 다 가지고 있진 않다. 

“뭐, 설명 그대로야. 좀 더 쉽게 말하면, 이 시나리오 참가자들은 ‘서유기’의 배역 중 하나를 골라서 서유기를 플레이할 수 있어.” 

―그런 짓을 하면 서로 비중 있는 배역을 하려고 하지 않나? 

“맞아. 그래서 있는 게 저 ‘설화방’들이지.” 

―설화방? 

나는 설명하는 대신 곳곳에서 광고판을 띄운 성좌들을 가리켰다. 

[같이 설화방 여실 분 구합니다!] 

[손오공, 삼장법사, 사오정, 저팔계 역 빼고 다 가능합니다! 시나리오 라이터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같이 엄청 재밌는 설화 만들어 봐요!] 

설화방. 

이곳의 모든 참가자는 저 ‘설화방’을 구성해서 시나리오에 참가하게 되어있었다. 

―그렇군. 저런 식으로 팀을 나눠서 경쟁하는 건가. 

“맞아. 저렇게 해야 설화의 다양성이 보장되니까.” 

―다양성? 

“결국 이 이벤트의 주요 목적은 ‘서유기’의 파급력을 높이는 거야. 재미있는 버전의 서유기가 늘어날수록 원작의 힘도 세지고, <황제>의 입지도 공고해지는 거니까.” 

―의외로 박식하군, 멍청인 줄 알았는데.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사실 방금 내가 한 말은 ‘멸살법’ 1287회차의 유중혁이 한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늙수그레한 성좌들의 불평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요즘 <황제>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구만. 장강의 뒷물이 앞 물을 밀어내는가, 허······.] 

[아무리 시대의 흐름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건 원작 모독이 아닌가?] 

하긴, 오래된 성좌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이 계속 바뀌어 가는 것을 어쩌겠는가. 

실제로 대부분의 성좌들은 이미 바뀐 흐름에 적응한 상태였다. 

[현재 5412개의 ‘방’이 서유기를 리메이크 중입니다.] 

······벌써 방이 5412개나 되다니. 

이 ‘거대 설화’에 얼마나 많은 성좌와 화신들이 몰려든 것인지 새삼 실감이 났다. 하긴, 마지막 시나리오가 열린 마당이니 다른 성좌들도 조급해졌을 것이다. ‘서유기’의 거대 설화는 그들에게 있어서도 절호의 기회일 테니까. 

“문제는 나 혼자서는 시나리오에 참가할 수 없다는 건데······.” 

결국 나도 다른 성좌들처럼 ‘설화방’을 만들어서 시나리오에 참가해야 했다. 

주변을 둘러보자, 이제 막 방을 팠거나 새로운 충원 멤버를 구하는 이들이 왕왕 보였다. 

[‘홍해아’ 역할 맡을 성좌 구함. 설화급 성좌의 화신이면 OK.] 

[‘금각대왕’ 역할 구함. 위인급 이상만.] 

저런 경우 이미 주연 배역은 캐스팅이 끝났다는 거겠지. 

역시 주연 배역보다는 악당 배역을 구하는 방들이 많았다. ‘거대 설화’를 획득했을 때의 지분 나눔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빌런 보다는 주연이 많은 지분을 갖게 되니까. 

[‘황포노괴’ 배역 구함. 코인 분배 7:3, 설화 지분 X. 격 안봄.] 

그런데 기분 탓일지는 모르겠지만······. 

[엑스트라 멀티맨 구함. 격 안봄. 설화 지분 X. 출연 1회당 1000코인.] 

[어이, 거기 형씨! 이쪽으로 와! 잘해줄게!] 

전후좌우 어딜 둘러 보아도 왠지 사기꾼들만 있는 것 같다. 

혹시나 싶었지만 아는 성좌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쟁쟁한 성좌들은 설화방에 참가했을 테니, 당연한 일일지도······. 

나는 일단 패널 쪽으로 다가가 ‘설화방’의 목록을 띄워 보았다. 

목록은 자동으로 ‘랭킹순’으로 정렬되었다. 놀랍게도 최상단에 있는 방은 내가 알고 있는 녀석의 것이었다. 

+ 

[진(眞) 서유기] 

―현재 득표수 : 8651 

―소개말 : 우리가 알지 못했던 진정한 서유기의 비밀이 공개된다. 

―현재 남는 배역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이다], [회귀], [시스템]······. 

―현재 랭킹 : 1위 

+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설화방은 성운 <황제>의 ‘페이후’의 것이다. 

그리고 굉장히 많은 회차에서, 페이후의 설화는 이 ‘거대 설화’의 우승 설화가 되었다. 

오죽했으면 공모 경쟁이 끝나기도 전에 “어차피 우승은 페이후”라는 말이 돌기도 했으니······. 

―빨리빨리 결정해라. 

“기다려 봐.” 

이래 봬도 장르 소설 독자 경력 10년을 훌쩍 넘어서는 몸이다. 

제목만 봐도······ 아니, 소개 글만 봐도 어떤 설화가 뜰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이 말씀이야. 

나는 목록 정렬을 ‘최신순’으로 바꾼 후 설화방을 찾기 시작했다. 

“요즘은 주인공을 바꾸는 게 대세야.” 

―주인공을 바꾼다고? 

“예를 들면, 대부분 서유기의 주인공을 손오공이라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알고 보니······ 오, 이거 뜨겠는데.” 

+ 

[서유기의 막내 제자로 환생했다?!] 

―현재 득표수 : 3313 

―소개말 : 언제까지 손오공이 주인공이냐. 이젠 사오정의 시대가 온다. 

―엑스트라 상시 모집중. 

―[환생], [빙의], [치유]······. 

―현재 랭킹 : 8위 

+ 

―이미 뜬 거로군. 

“젠장.” 

나는 다시 스크롤을 굴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훌륭한 방제들을 발견했다. 

+ 

[내가 먹여 살린 제자들] 

―현재 득표수 : 3310 

―소개말 : 최강의 제자들을 키운 삼장법사가 온다! 

―[빙의], [양육], [힐링]······. 

―현재 랭킹 : 9위 

[서유기의 엑스트라] 

―현재 득표수 : 3221 

―소개말 : 서유기 속에 들어왔다. 그런데······ 삼장법사의 말(馬)이 되었다. 

―[엑스트라], [시스템], [동물]······. 

―현재 랭킹 : 11위 

+ 

······젠장, 인기 있을 만한 설화방은 이미 전부 풀방이었다. 

―꾸물대더니 이미 망한 것 같군.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런 거 같았다. 

어지간한 상위 랭킹의 방들은 전부 주연 배역 선정이 끝나 있는 데다 설화가 진행 중이라 끼어들기도 뭐했다. 

이렇게 된 거 엑스트라 역할이라도 맡아야 되나 싶었지만, 그렇게 작은 비중으로는 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가 없었다. 

[곧 4차 설화방 목록이 마감됩니다!] 

[마감 이후에는 엑스트라 배역을 제외한 추가 배역의 등록이 불가합니다!] 

설상가상으로 방들의 마감 시간도 끝나가고 있었다. 

어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무심코 내린 방의 홍보글들 중, 심상치 않은 것이 있었다. 

―(급구)버스 타실 손오공 배역 구함. 다른 배역 다 준비되어 있음. 몸만 오면 됨. 

······손오공을 구한다고? 

아니, 다른 배역도 아니고 ‘손오공’을?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 

뭔가 어디서 많이 본 개수의 S인데. 

나는 속는 줄 알면서도 무심코 그 방제를 눌러 보았다. 

그리고, 그 소개말을 보고야 말았다. 

―소개말 : 오직 나만이, 서유기의 결말을 알고 있다.





< Episode 80. 최강의 우리 편 (3) > 끝

< Episode 80. 최강의 우리 편 (4) >





······오직 나만이 서유기의 결말을 알고 있다? 

뭔가 어디서 본 듯한 소개말이었다. 

나는 일단 입장해서 방의 상태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플레이어8’님께서 6731 설화방 대기실에 입장하셨습니다.] 

다행히 아직 설화는 시작하지 않은 듯했다. 

하긴, 손오공 배역이 없는 마당에 설화를 시작할 수 있을 턱이 없지. 

방에 입장하자 주변의 정경이 바뀌며 커다란 원형의 데스크가 나타났다. 

데스크의 의자에는 사람 대신 네모난 창이 하나씩 띄워져 있었다. 배역 별 선정 인원을 명시한 창이었다. 

[현재 플레이어1이 ‘저팔계’ 배역을 선택한 상태입니다.] 

[현재 플레이어2가 ‘사오정’ 배역을 선택한 상태입니다.] 

[현재 플레이어6이 ‘삼장법사의 백마’ 배역을 선택한 상태입니다.] 

플레이어의 얼굴들은 전부 물음표로 표시되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실제 플레이어의 신상 정보를 보호하기 위함인 듯했다. 

그나저나······ 저 많은 플레이어가 있는데 ‘손오공’을 선택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플레이어8 : 다들 안녕하세요. 

다들 잠수 중인 건지 내가 입장했는데도 채팅방에는 아무도 메시지를 띄우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시나리오 마스터 : ㅎㅇ? 

―시나리오 마스터 : 무슨 배역하러 오셨? 

나는 중앙의 채팅방에 곧바로 메시지를 입력했다. 

―플레이어8 : 손오공 배역 아직 비었습니까? 

―시나리오 마스터 : ㅇ비었음 

―플레이어8 : 특이하네요 

―시나리오 마스터 : 원래 하려던 사람이 있었는데 늦는대서.. 손오공 하실? 

이 녀석, 말을 끝까지 안 하는 버릇이 있군. 

이런 녀석을 시나리오 마스터로 믿고 맡겨도 될까 고민이 되던 찰나, 역시나 내 속을 읽기라도 한 양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나리오 마스터 : 저 장르 잘 알. 시나리오 퀄은 걱정 안 해도 됨. 

통 신뢰가 안 가는 말투였다. 나는 일단 몇 가지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플레이어8 : 방제 말인데요.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 

―시나리오 마스터 : ㅇ 내가 지음 

―플레이어8 : 왜 S가 다섯 개나 되죠? 

―시나리오 마스터 : 그 정도는 붙여야 어그로 끌림. 

······뭘 좀 아는 녀석인가? 

중간중간 반말을 하는 게 좀 거슬리긴 하지만. 

나는 질문을 계속했다. 

―플레이어8 : 손오공이 주인공 맞죠? 

―시나리오 마스터 : ㅇㅇ맞음 

―플레이어8 : 원작 주인공을 그대로 계승하는 건 식상하지 않나요? 요즘은 조연이나 엑스트라를 주인공으로 만드는 게 트렌드일 텐데 

나름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했는데, 마스터의 응수는 침착했다. 

―시나리오 마스터 : 오 시장 조사 좀 하셨나 보네 

―플레이어8 : 좀 훑어본 정도입니다. 

―시나리오 마스터 : 님 말대로 엑스트라물이 대세이긴 함. 근데 어차피 1등 하려면 손오공이 주인공이 되어야 됨. 님이 서유기 심사위원이라 생각해보시길 

―플레이어8 : 흠... 

―시나리오 마스터 : 중요한 건 누가 주인공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낯선 캐릭터’이냐임. 그리고 지금 엑스트라물 너무 많아 

······요 녀석 봐라? 

되는대로 지껄이는 것 같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럴 때일수록 의외로 1등은 정통파 주인공이 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페이후의 [진 서유기]도 손오공이 주인공이고. 

―플레이어8 : 그래서 ‘은퇴한 손오공’을 주인공으로 하신 건가요? 

―시나리오 마스터 : ㅇㅇ 

―플레이어8 : 은퇴한 손오공이 뭘 한단 거죠? 

―시나리오 마스터 : 아무것도 안 해 

―플레이어8 : ?? 

―시나리오 마스터 : 아 지금 미리 말하면 스포임. 그래서 할 거임 안 할 거임? 

고민이 되었다. 

―시나리오 마스터 : 안 할거면 빨리 나가고. 어차피 지금 시간도 없음. 5초 안에 대답 안 하면 강퇴 

은퇴한 손오공이 주인공이라니 뭔가 궁금하기도 하고······. 

[5분 뒤 4차 설화방 목록이 마감됩니다!] 

이제 와서 다른 방을 선택하기에도 시간이 촉박하다. 

젠장, 어쩔 수 없지. 

시나리오야 어떻든, 내가 잘하면 되는 거니까. 

―플레이어8 : 하겠습니다. 

―시나리오 마스터 : 흠, 그럼 저도 질문 좀 

―플레이어8 : 뭐를요? 

[시나리오 마스터가 당신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공개할 정보를 선택하십시오.] 

내 정보를 보겠다고? 

―플레이어8 : 꼭 보셔야 합니까? 

―시나리오마스터 : 그냥 이름만 볼 거임. 

······이름이라. 

나는 일부 정보를 공개했다. 

[플레이어8님은 ‘성좌’입니다.] 

[플레이어8님의 수식언은 ‘빛과 어둠의 감시자’입니다.] 

[해당 정보는 ‘시나리오 마스터’에게만 공개됩니다.] 

시나리오 마스터는 잠시 말이 없었다. 

자식, 충격이라도 받은 모양이지. 

―시나리오 마스터 : 엥? 님 성좌였음? 왜 이런 후진 방에??? 

나는 재빨리 답했다. 

―플레이어8 : 제가 이래 봬도 싸움 좀 합니다. 은퇴한 손오공 꼭 하고 싶습니다! 

―시나리오 마스터 : 뭔가 좀 수상한디 

―플레이어8 : 인기 없는 설화를 처음부터 키우는 게 진짜 재미 아니겠습니까. 

―시나리오 마스터 : 근데 그 만두는 뭐임? 

······만두? 

[현재 애완용 ‘무림만두’가 당신과 동행중입니다.] 

젠장, 그러고 보니 이 자식도 있었지. 

―시나리오 마스터 : 펫은 배역 못 주는데? 

―플레이어8 : 그냥 만두입니다. 펫도 뭐도 아니에요. 

―시나리오 마스터 : 흠, 곤란한데. 님들 생각은 어떠심?? 

놀랍게도 시나리오 마스터는 다른 플레이어들의 의견을 구했다. 

[플레이어1 님께서 ‘무림만두라면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플레이어4 님께서 ‘마스터 마음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플레이어3 님께서 ‘빨리 게임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다행히 다른 플레이어들의 반발은 없었다. 

―시나리오 마스터 : ㅇㅋ 기왕 하는 거 무림 쪽 PPL 좀 알아보겠음 

―플레이어8 : 감사합니다. 

―시나리오 마스터 : ㄱㄱ 

그리고 잠시 후,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5, 4, 3, 2, 1······. 

[설화방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설화방의 전개는 시나리오 마스터의 플롯을 따릅니다.] 

[설화방의 주요 전개에 심사위원이나 관객들의 간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서유기 리메이크’가 시작됩니다!] 

환한 빛살과 함께, 시야가 잿빛으로 물들었다. 

《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 》 

어둠 속에서 화려하게 등장하는 폰트. 

이제 나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손오공’이 되어 본격적인 플레이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솔직히 조금 두근거렸다. 

내가 진짜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다니······. 

「김 독 자김 칫 국」 

[제4의 벽]의 목소리와 함께, 뒤이어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프롤로그가 시작됩니다.] 

[프롤로그는 회상 장면으로 처리됩니다.] 

[해당 구간에서 인물들은 정해진 대사만을 말할 수 있습니다.] 

[시나리오 마스터의 내레이션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삼장 일행과의 오랜 여행 끝에, 손오공은 결국 서방 세계에 도착해 경전을 얻는 것에 성공한다.) 

오, 시작인가. 

실제로 화면이 바뀌더니, 내 몸은 어느새 손오공의 그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주변에 일행으로 보이는 이들이 있었지만, 회상이라 그런지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 입이 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드디어 은퇴인가······ 정말 긴 여정이었다.” 

동시에 손오공의 기억들이 눈앞에 스쳐갔다. 

삼장법사에게 쫓겨나거나, 저팔계에게 뒤통수를 맞거나, 사오정에게 버려지거나. 도움이라곤 쥐뿔도 안 되는 오합지졸 일행들을 이끌고 혼자서 요괴들과 싸우고 피투성이가 된 기억들······. 

이렇게 보고 있자니 뭔가 짠한 느낌이 들었다. 

손오공 시점에서의 서유기란 이런 느낌이구나. 

그런데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여기서 끝낼 셈이냐?】 

내려다보니 경전이 말을 하고 있었다. 

【정말 너는 이런 이야기에 만족한 것이냐?】 

나는 조금 감탄했다.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인가. 

경전 위에 계속해서 문장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억울하지 않으냐? 너는 비합리적인 이유로 몇 번이나 삼장에게 추방을 당하고 박해를 당했다.】 

【어디 그뿐이냐? 너는 네가 짓지 않은 죄 때문에 긴고아로 고문을 당했고.】 

【근두운을 타면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는 곳임에도, 불법을 수행한다는 이유로 삼장법사를 지키며 힘겨운 여정을 계속해야 했다.】 

확실히 서유기가 손오공에게 좀 가혹한 면이 있기는 하지. 

【그런 고행의 결과가 고작 ‘극락세계’로 귀의하는 것이라니, 너는 정말로 억울하지 않은 것이냐?】 

듣고 보니 좀 억울한 것 같기도 하다. 

【너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다시?” 

【이 여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단 말이다.】 

그쯤에서 나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시발, 이거 회귀물이었나? 

내 입이 또 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니,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 고생을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고생하지 마라.】 

“뭐?” 

【철저히 동료들을 이용하고, 누구도 구원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마왕’이 되는 것이다.】 

그 순간, 경전에서 눈부신 빛이 퍼져 나왔다. 

[회상 장면이 종료되었습니다.] 

[본격적인 플레이가 시작됩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가 이야기의 프롤로그였던 모양이다. 지금부터가 제대로 된 에피소드라는 거겠지. 기다렸다는 듯, 에피소드 1의 폰트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경악했다. 

~ Episode 1. 구원의 마왕 ~ 

······뭐?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내레이션이 시작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사실 손오공은 한때 ‘구원의 마왕’이라 불리었다.)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었지만, 나는 일단 들어 보기로 했다. 

(이 작은 돌원숭이는 멋대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남을 구원하는 취미가 있었고, 그 원치 않은 구원으로 많은 존재들은 심적 고통을 받았다.) 

(하늘의 뭇 신령 및 보살들이 그를 지탄했으나, 그럼에도 이 돌대가리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 남을 구원하고 또 구원했다.) 

아니, 잠깐만. 

(하늘의 옥황과 부처는 그러한 손오공의 만행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여겨, 손오공을 오행산 밑 돌 궤짝 속에 가두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는,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심사위원 ‘돌원숭이의 왕’이 이 전사(前事)를 좋아합니다.] 

[일부 심사위원이 최근 트렌드를 반영한 전개에 가산점을 부여합니다.] 

[2점을 획득하였습니다.] 

‘최근 트렌드를 반영’했다는 메시지에 눈길이 갔다. 

아, 설마 이것 때문에? 

[첫 번째 에피소드가 시작됩니다.] 

[자유 대사 구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의 배역에 맞는 발언으로 흥미진진한 설화를 꾸며보세요.]

나는 부르르 몸을 떨며 정신을 차렸다. 몸 곳곳이 으슬으슬 추웠고, 등이 뻐개질 것처럼 아팠다. 새카만 흙이 주변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고개만 간신히 산 밖으로 내민 상태였다. 

[현재 당신은 오행산(五行山)에 봉인된 상태입니다.] 

아무래도, 나는 오행산 밑에 깔린 모양이었다. 

[관객들이 당신의 반응을 궁금해합니다.] 

(시나리오 마스터가 당신의 대사를 재촉합니다.) 

주인공이 막 회귀한 후의 첫 장면. 

소설을 볼 때마다 자주 나온 상황이라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그 상황이 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일단 뭐라도 말해보기로 했다. 

“여긴 어디지? 난 분명 경전을 가지고 돌아가고 있었는데?” 

평범한 사람이 이딴 혼잣말을 할 리가 없었다. 

“······오행산? 맙소사, 설마 회귀한 건가?” 

그런데도 이딴 대사를 잘도 지껄이고 있는 내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관객들이 당신의 상황을 이해했습니다.] 

(시나리오 마스터가 당신의 대사 감각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시나리오 마스터가 당신을 인정합니다.) 

빌어먹을,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일부 관객들이 다음 상황을 기대합니다.] 

나는 서유기의 다음 내용을 떠올렸다. 

원작에 따르면, 손오공은 오행산 밑에서 오백 년의 세월을 기다리게 된다. 그렇게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났다. 

······에이, 설마? 

(멀리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목소리에, 손오공은 귀를 기울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작대로라면, 손오공이 처음으로 만나게 될 이는 삼장법사일 것이다. 

(눈앞에 다가오는 익숙한 인물들을 보며, 손오공은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두 명의 아이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귀여운 법의를 갖춰 입고, 장난감 같은 관을 쓴 두 아이. 

(처음으로 삼장을 만났던, 그날의 기억.) 

(손오공은 오래된 추억에 젖었다.) 

천천히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희미하게 느꼈던 기시감들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웅웅거리는 [제4의 벽]이 묻고 있었다. 

「정 말 몰 랐 어 ?」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다섯 개의 S를 처음 본 순간 스쳤던 예감.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기대하고 있었던 그 마음. 

나는 이를 악문 채 흐려지려는 시야를 간신히 바로잡았다. 

“아, 저기 있다. 저 아저씬가 보네.” 

“내가 물어볼게.” 

세상에서 가장 작은 두 명의 삼장. 

내 머리채를 잡은 이길영이 나를 향해 묻고 있었다. 

“네놈이 ‘구원의 마왕’ 손오공이냐?”





< Episode 80. 최강의 우리 편 (4) > 끝

< Episode 80. 최강의 우리 편 (5) >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다만 아이들을 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메시지가 들려왔다. 

[경고합니다! 당신은 <김독자 컴퍼니>의 멤버 중 일부와 조우했습니다!] 

[당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혼돈이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 

[심사위원 ‘돌원숭이의 왕’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이번 공모전은 볼 만한 게 없군.] 

전신에 황금빛이 감도는 미모(美毛)가 자라난 어린 원숭이는 금빛 갈기를 벅벅 긁더니 패널 속의 화면을 보며 하품을 연발했다. 

그 꼴을 보던 카우보이 복장의 원숭이가 핀잔을 주었다. 

[심사위원 ‘천계의 마구간 관리자’가 ‘돌원숭이의 왕’을 질책합니다.] 

[미후왕(美猴王) 너는 인내심이 없다. 뭐든 찬찬히 살펴보다 보면 한두 개쯤은 괜찮은 게 있는 법인데.] 

[흥, 필마온(弼馬溫) 네놈은 그 잘난 인내심으로 보름이나 말똥을 치워댄 거냐?] 

[······여기서는 고상한 이야기만 하고 싶군.] 

[네놈 취향이야 뻔하지. 어차피 마구간 이야기만 안 나오면 고득점을 줄 테니까.] 

[그러는 너도 화과산 이야기만 나오면 환장하는 건 마찬가지 아니냐.] 

[어이, 제천대성! 넌 어떻게 생각하냐? 볼 만한 거 좀 찾았어?] 

그 질문에, 여의봉에 턱을 괸 채 하품을 하던 백금발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올해는 확실히 참신한 게 없긴 하다.] 

[그렇지.] 

[예전에는 상상력이 기발한 것들이 더러 있었는데 말이지. 우리가 사실은 죽을 고비를 넘길수록 강해지는 전투 종족이라든가······.] 

[흠, 확실히 그건 재미있었지. 근데 우릴 인간처럼 묘사한 게 아쉬웠다.] 

필마온의 말에 제천대성이 피식 웃었다. 

[이봐, 너넨 원숭이지만 난 거의 인간이라고.] 

[······너도 그 설화의 영향으로 변한거잖아.] 

미후왕, 필마온, 그리고 제천대성. 

이들은 ‘손오공’이라는 하나의 진명을 이루는 손오공의 다른 설화체들이었다. 처음에는 하나의 존재였지만, 각기 다른 분기의 설화들이 발달하면서 인격이 쪼개진 것이다. 

[페이후 녀석 성장세가 굉장한데······ 이번에 잘하면 새로운 ‘손오공’이 나올 수도 있겠어.] 

[수천 년 동안 없었던 일인데 퍽이나 그러겠다.] 

널따란 심사위원실에 모인 세 명의 손오공은 패널 너머로 흘러가는 ‘서유기 리메이크’의 설화들을 감상했다. 지루한 것도 있었고, 흥미로운 것도 있었다. 개중 낯선 것에는 ‘좋아요’를 눌러주고, 평점을 매기기도 하며 세 존재는 왁자지껄 떠들었다. 

미후왕이 물었다. 

[제천대성,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걔넨 어떻게 됐냐?] 

[누구.] 

[왜, 네가 도와달라 해서 나랑 필마온이랑 힘 빌려줬잖아.] 

[아, ‘성마대전’? 잘 해결됐지. 근데 거기 대표가 행방불명됐어.] 

그 말에 필마온이 비꼬았다. 

[네가 졸졸 쫓아다녔지만 결국 배후성으로 안 골라준 그놈 말인가?] 

[······졸졸 쫓아다니진 않았다. 놈의 간청에 한 두 번 응답해줬을 뿐.] 

[그런 것치곤 몇 가닥 없는 머리털도 주던데.] 

[닥쳐라.] 

제천대성이 여의봉으로 거칠게 귀를 파내며 말을 돌렸다. 

[근데 투전승불(鬪戰勝佛) 그놈은 아직 안 왔나? 손오공 다 모이는 자린데 왜 그놈만 없어?] 

[그 샌님이야 늘 늦잖아.] 

[팔계랑 오정은?] 

[천궁 쪽이랑 접선하러 갔다.] 

[······옥황 녀석, 이번에도 심사에 개입할 셈인가?] 

[우리 의견만 안 흩어지면 그쪽이 간섭해도 소용 없어.] 

[우리 의견이 모인 적이 없으니까 하는 말이지.]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심사위원실 문이 열리며 저팔계와 사오정이 등장했다. 

[저, 형님들. 윗선에서 슬슬 올해의 유력 후보작을 발표하셔야 한다고······.] 

[닥쳐, 지금 보고 있잖아.] 

미후왕의 위협에 저팔계와 사오정이 찔끔 놀라며 물러섰다. 

제천대성이 물었다. 

[그런데 너희 뒤에 선 아낙은 누구냐?]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심사위원입니다. 석존의 후계자라는군요.] 

[······석가에게 후계가 있었나?] 

누군가 차분한 발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고운 법의와 작은 관을 쓴 여인을 본 순간, 제천대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낌새를 눈치 챈 필마온이 물었다. 

[아는 얼굴인가?] 

제천대성은 대답하지 않은 채 가만히 여인의 얼굴만을 볼 뿐이었다. 

여인은 손오공들을 마주보는 대신, 테이블을 가로질러 설화들이 재생되는 패널을 향했다. 

필마온이 턱짓을 하며 말했다. 

[마침 잘 됐군. 신입 의견을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거기 석존의 후계는 어떤 설화가 마음에 드는가?] 

바삐 흔들리던 여인의 법의가 마침내 한 자리에 멈춰 섰다. 

석존의 후계자는 고요한 눈으로 화면 속의 이야기를 보고 있었다. 천천히 뻗은 하얀 손끝이 화면에 닿자, 그리움처럼 화면에 물결이 번졌다. 

[저는 이 설화가 마음에 드는군요.] 

* 

「알 고 있 었 잖 아 김 독 자」 

[제4의 벽]의 말이 맞았다. 어쩌면, 나는 예상하고 있었다. 

이 설화방의 인물들이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일지도 모른다고. 

[혹부리 왕과의 약속이 위험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런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럼에도 나는 이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과 접촉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어깨 위에 앉은 [999]가 나를 향해 속삭였다. 

단지 아이들을 만난 것만으로, 내 화신체의 변화가 발생하고 있었다. 

[약속 조건이 위태로워져 이계의 신격으로의 변이가 가속화됩니다.] 

‘아직 약속 안 어겼어. 엄밀히 따지면 계약 내용은 [김독자 컴퍼니에게 내 정체를 드러내지 말 것]이잖아.’ 

―그들이 알게 되는 순간 모든 게 끝장이다. 

‘알고 있으니까 걱정 마.’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3%] 

아마 저 진행률을 다 채우게 되면, 나는 ‘은밀한 모략가’처럼 이계의 신격이 되고 말겠지. 

그 전에 약속을 지키기만 하면 되니까, 솔직히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지금은 도란도란 내 앞에서 걸어가는 저 아이들을 보는 것이 좋았다. 

[소수의 관객들이 삼장이 어떻게 두 명일 수 있냐며 항의합니다.] 

흘러나오는 메시지를 들으며, 나는 앞서가는 아이들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더니, 예전보다 부쩍 커진 키를 보니 새삼 실감이 났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것도 무척 오래되었다. 

나는 이길영이나 신유승이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시나리오 마스터의 말대로다. 나는 이 아이들을 멋대로 구해 놓고, 그 뒤는 책임지지 않은 채 내버려 두었다. 

한때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 아이들은 줄곧 방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이, 구원의 마왕.” 

“예.” 

······그러니 이것은 내가 받는 필벌인 셈이다. 

지켜보던 신유승이 한마디했다. 

“모르는 사람한테 반말하지 마.” 

“수영 누나가 이렇게 하라고 했거든?” 

“그래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지.” 

역시 내 화신이다.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훑어보던 신유승이 [성운 채팅]으로 이길영에게 귓속말을 했다. 

물론, 같은 성운 소속인 나는 그 메시지를 그대로 들을 수 있었다. 

―이래야 우릴 믿는다고 멍청아. 쟤가 깽판치면 어쩌려고 그래?

소름이 돋았다. 

―······넌 저런 게 무섭냐? 저놈 꼴을 보라고. 

실제로 지금 나는 <황제>에서 판매하는 [제천대성 아바타 세트]를 구매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려 500년이나 된 기본 복장을 입고 있었다. 

신유승은 내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주며 공손히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좌님.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보다 두 분을 어떻게 호칭하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이길영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나는 현(玄) 법사. 그리고 이 녀석은 장(奘) 법사다. 앞으로 그렇게 부르거라.” 

마치 게임이라도 하듯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이길영은 현 법사. 그리고 신유승은 장 법사인가. 

설마 현장(玄奘) 법사의 이름을 둘로 쪼개어 가질 줄이야. 정말 귀여운 발상이었다. 

[일부 관객들이 두 삼장이 귀엽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심사위원들이 ‘두 명의 삼장’ 설정에 흥미를 느낍니다.] 

[가산점 4점을 획득하였습니다.] 

새로운 설정에 취해 있는 이길영이 자신에 대해 떠들어대는 사이, 신유승이 귓속말을 속삭였다. 

“이상한 설정들이 많아서 좀 당황하셨죠? 죄송해요. 저희 쪽 시나리오 마스터가 좀 괴짜셔서······.” 

“아닙니다.” 

시나리오 마스터가 누군지는 짐작이 갔다. 

이런 막 나가는 스토리를 짤 만한 녀석은 <김독자 컴퍼니>에 하나뿐이니까. 

“그치만 걱정마세요. 저희가 잘 돌봐드릴게요. 성좌님은 그냥 잘 따라오시면서 버스만 타시면 돼요.” 

그 친절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아이들을 위로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챙겨지고 있다니. 

부끄러운 노릇이었다. 

(손오공은 이번 생에도 삼장을 지킬 것을 결심했다.) 

맞다. 나는 이 아이들을 지킬 것이다. 

지금까진 제 역할을 못했지만, 적어도 지금부터는― 

“쿠구구구구구구!” 

어디선가 들려온 폭음. 나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쿠드드드드드!” 

폭음도 폭음이지만, 뭔가가 이상했다. 분명 뭔가가 터지는 소리인데, 왜 누가 입으로 외친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잽싸게 내 곁으로 다가온 신유승이 속삭였다. 

“당황하지 마세요. 원작 설정을 반영한 거예요.” 

“······예?” 

“원작에서는 의성어들을 전부 큰따옴표에 묶어서 표기했대요.” 

[일부 심사위원들이 뜻밖의 원작 반영에 감탄합니다!] 

[가산점 10점이 추가되었습니다!] 

아니, 이건 양산형 판타지 소설에만 나오는 실수인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원작 고증에 당황할 틈도 없이, 나는 아이들을 뒤로 물리고 앞으로 나섰다. 

보아하니 폭음은 전방에 드리워진 거대한 협곡으로부터 나는 소리였다. 

(손오공은 눈앞에 드리워진 사반산(蛇盤山) 응수간(膺愁澗) 협곡을 응시했다. 이미 인생 2회차인 손오공은, 저 협곡에서 나올 존재가 뭔지 알고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서유기 원작에서 일행이 두 번째로 조우하는 것은······. 

(서해 용왕 오윤의 셋째 태자 옥룡.) 

······맞다. 바로 그놈이다. 그리고 그놈이 바로. 

(녀석은 삼장법사의 백마로 환생할 존재였다.) 

내레이션이 다 해주니 따로 할 말이 없군. 

나는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두 분께서는 어딘가 숨어 계십시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내 기억이 맞다면, 플레이어 중에는 ‘삼장법사의 백마’ 역할을 맡은 이가 있었다. 아마 그가 바로 이 사태의 원흉이겠지. 

아이들이 이 설화방에 참여한 걸로 봐서 나머지 사람들도 대부분 <김독자 컴퍼니>겠지만, 혹시나 이들에게 악의를 가진 존재가 끼어 있다면······. 

“······그냥 버스만 타시라고요.” 

작지만 강한 악력이 느껴지는 손이 내 어깨를 잡았다. 

뒤를 돌아보자 신유승이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옷도 제대로 안 걸친 게. 뒤로 빠져!” 

주먹 관절을 꺾은 이길영도 앞으로 나섰다. 

나는 다급히 아이들을 쫓으려 했으나, 이미 협곡을 향해 달려간 아이들이 날아오른 청룡과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쿠콰콰콰콰콰콰!” 

이길영이 입으로 의성어를 내뱉으며 달려들자, 협곡에서 뛰쳐나온 청룡이 마주 울부짖었다. 나는 그 용이 누군지 바로 깨달았다. 

······키메라 드래곤? 

아이들은 허공에서 청룡과 춤을 추듯 사투를 벌였고, [길들이기]를 사용해 순식간에 용을 제압했다. 

[관객들이 꼬마 삼장의 무위에 감탄합니다!] 

[소수의 관객들이 삼장이 너무 강한 거 아니냐며 항의합니다.] 

[일부 심사위원이 뜻밖의 전개에 놀랍니다!] 

그리고 잠시 후. 

[‘플레이어6’님께서 일행에 합류하였습니다!] 

현장의 백마로 화한 키메라 드래곤이 낑낑거리며 아이들에게 끌려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해결된 사건을 보며, 나는 시나리오 마스터와 나눴던 말을 떠올렸다. 

―은퇴한 손오공이 뭘 한단 거죠? 

―아무것도 안 해. 

이제야, 그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이 이야기는, 애초에 이렇게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익숙한 성좌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설화의 전개에 흥미를 갖습니다.] 

[가산점 10점이 추가되었습니다.] 

*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나는 조금씩 이 설화방의 정체를 깨달아가고 있었다. 

“메뚜기다. 먹어라.” 

“구원의 마왕님. 혹시 다리 아프신가요?” 

「이 설화는 ‘손오공을 위한 설화’다.」 

(손오공은 편안했다.) 

지금껏 시나리오가 시작된 이래, 이렇게까지 한가한 적은 처음이었다. 

뇌가 안락함에 절어 마비되는 느낌이다. 

[당신에게 새로운 설화가 발아합니다!] 

[설화, ‘손 안 대고 코풀기’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한수영이 왜 이런 시나리오를 짠 것인지는 대충 예상이 갔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이 전개를 좋아합니다.] 

‘서유기’는 손오공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였다. 심지어 이후에 변주된 이야기들도 대개 구성이 비슷했다. 

그런데 만약, ‘손오공을 위로하는 설화’가 나타난다면 어떨까.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부러워합니다.] 

[심사위원, ‘천계의 마구간 관리자’가 당신을 부러워합니다.] 

[득표수 : 312] 

역시 한수영이 인기 작가가 맞긴 한 모양이었다. 

설화의 득표수는 벌써 300개를 넘어서며 순조로운 항해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런 전개는 일행들에게도 나쁠 것이 없었다. 

명목상의 주인공은 손오공이지만, 실제 전투는 다른 일행들이 도맡으니 최종적인 설화 지분은 자연히 <김독자 컴퍼니>의 것이 될 터. 득표수도 얻고 설화 지분도 챙기고, 참으로 치밀한 설계가 아닐 수 없다. 

“아, 폰게임 하고 싶다.” 

“여기 들어오기 전에 많이 했잖아.” 

아이들은 티격태격하면서도 나를 먹이고, 재우고, 심지어는 내 머리털을 다듬어 주기까지 했다. 이길영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넌 원래 뭐하는 놈이냐?” 

“사생활 묻는 건 실례잖아 멍청아.” 

마찬가지로 곁에서 내 새치를 뽑던 신유승이 태클을 걸었다. 

나는 이런 메타적인 대화가 허용이 될지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일단 말해보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아이들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으니까. 

“저는 그냥 소설 읽는 걸 좋아합니다.” 

“소설? 오, 나도 좋아하는데.” 

이길영이 소설 읽는 걸 좋아한다고? 이건 의외의 정보였다. 

신이 난 이길영이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하나 추천해줄까?” 

장르 독자 경력 10년이 넘는 내게 감히 추천을 하다니, 어디 들어나 보자. 

“[SSSSS급 무한회귀자]. 개꿀잼이니까 꼭 읽어라.” 

나도 모르게 제2의 자아가 튀어나왔다. 

“그건 희대의 망작입니다만.” 

“망작? 그거 인기 많았다던데. 보는 눈이 없네~” 

한수영 이 자식, 애들한테 자기 소설을 자랑한 건가.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신유승도 끼어들었다. 

“저도 소설 좋아해요!” 

“그러십니까? 어떤 소설을 좋아하시죠?” 

나는 조금 기대했다. 그래, 유승이라면― 

“네! 레, 레이먼드 카버, 무라카미 하루키······!” 

······어디서 많이 듣던 작가 라인업. 

내가 없는 사이 아이들 교육을 누가 담당했는지 알 것 같았다. 

유상아 씨, 지금쯤이면 무사히 환생했겠지. 

내 어깨의 만두를 본 신유승이 물었다. 

“그런데 무림 만두를 좋아하시나 봐요?” 

“예, 좋아합니다.” 

“······제가 아는 아저씨도 그거 무척 좋아하는데.” 

누가 그걸 좋아하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이길영도 배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아, 만두 먹고 싶다.” 

어깨에 얹혀 있던 무림 만두가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된 식사를 한 지가 너무 오래됐다. 

(그러자 갑자기, 어디선가 만두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서유기의 사건들 중 대부분은 이렇듯 ‘갑자기’ 시작된다. 

우리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이 환상적인 냄새의 진원지를 따라갔다. 

그렇게 오솔길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우리 눈앞에는 거대한 공장 단지가 나타났다. 

“······이 시대에 이런 게 있을리가?” 

한수영의 서유기는 스팀 펑크 세계관인 건가 하고 생각할 찰나, 공장 단지 안에서 몇 명의 인파가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으으, 모두 달아나!” 

그러나 달아나던 무리들은 전부 무형의 힘에 이끌리듯 붙잡혀 공장으로 되돌아갔다. 

“안돼에에에에!” 

저게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 싶어, 우리는 공장 인근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수천 명에 이르는 노예들이 컨베이어 벨트에 붙어 뭔가를 조물딱거리며 만드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저거 설마······.” 

내 어깨 위의 만두 [999]가 말했다. 

―[무림 만두]로군. 

수천 개의 무림 만두가 컨테이너 벨트 위에 실려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하염없이 흘러가는 만두의 강을 보며, 이번에 우리가 만날 인물에 관해 생각했다. 

(‘서유기’에서 이렇게 먹을 것을 탐하는 인물은 하나뿐이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우리에게 말을 건 사내가 있었다.





< Episode 80. 최강의 우리 편 (5) > 끝

< Episode 81. 만두의 추억 (1) >





“이보게! 자네들 외지인인가?” 

사내는 늙수그레한 중년인이었다. 

그러자 예의 바른 신유승이 먼저 앞으로 나서며 인사했다. 

“저희는 서방 세계로 부처님을 찾아가는 길이랍니다.” 

“호, 부처? 보기완 다르게 고승이셨구려!” 

감탄하는 중년인을 보며 이길영이 엣헴, 하고 뒷짐을 지고 섰다.

노인은 묘한 눈으로 두 아이를 바라보더니 이내 내쪽을 돌아보았다. 

“그럼 옆에 계신 훤칠한 분도······ 히익!” 

중년인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내 어깨 위의 무림 만두를 보고 있었다. 

“그, 그건 무림 만두······!” 

“아, 그냥 인형입니다. 제가 만두를 좋아해서.” 

“······그렇소? 깜짝 놀랐구려.” 

중년인은 식겁했다는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깨에 찬 완장으로 보아, 아무래도 그가 이곳 공장의 작업반장인 듯했다. 

우리는 마침 잘 됐다 싶어서 물어보기로 했다. 

“이 공장은 대체 뭡니까? 왜 여기서 만두를 잔뜩 만들고 있는 거죠?” 

“······설마 아무것도 모르고 오신 게요?” 

중년인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우리를 보더니, 이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이게 다 무시무시한 요괴의 짓이요.” 

“요괴라고요?” 

“그렇소. 원래 이곳은 공장 단지가 아니었소.” 

중년인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본래 평화로운 촌락이 있던 곳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장신에 피부가 시커멓고 우락부락한 돼지 요괴가 나타나서, 마을의 여자들을 모두 납치하고 남자들은 노예로 부려 이 공장을 만들었다고 했다. 

“놈은 내 딸과 마누라를 모두 첩으로 삼은 뒤 우릴 이곳에 가두었소! 보면 알겠지만 이 공장에는 특수한 신통력이 감돌고 있어서 노예들이 함부로 나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오. 게다가, 그 요괴 놈 어찌나 많이 먹어대는지······ 하루 종일 만두를 만들어도 손이 모자랄 지경이오.” 

[공장의 생산 시스템이 ‘작업반장’을 찾습니다!] 

“이, 이런! 이만 가봐야겠소.” 

중년인은 허겁지겁 위생 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착용하더니 이내 컨베이어 벨트 쪽으로 향했다. 

내가 나서서 뭐라 말하려는 순간, 신유승이 먼저 중년인을 붙잡았다. 

“아저씨들이 이런 노역을 하는 건 부당한 일이에요. 게다가 그 요괴가 여자들까지 납치해갔다면서요.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역시 내 화신이다. 

사실 이래야 이야기가 전개되니까 한 행동이었겠지만······.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그 요괴는 어디에 있죠?” 

“아무리 스님들이라 해도 그 요괴는······ 정말 도와주실 거요?” 

“그럼요.” 

중년인은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더니 이내 요괴가 있는 방향을 설명했다. 

“그럼 부탁하오! 꼭 그 요괴를 퇴치해주시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 뒤 중년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움직였다. 

(만두 요괴는, 이 「만두의 길」의 끝에 있다.) 

우리는 컨베이어 벨트로 이어진 만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었는지, 이길영은 중간중간 만두를 집어 먹었다. 

“······이거 맛있다!” 

당연하다. 이건 무려 [무림 만두]니까. 

그런데 [무림 만두]의 권위자께서는 조금 생각이 다르신 듯했다. 

―향이 이상하군. 

‘뭐?’ 

―만두 하나를 줘 봐라. 

나는 아이들을 뒤따르며 만두 하나를 조심스레 집어 어깨 위의 만두에게 건넸다. 만두가 만두를 맛보는 광경은 무척 그로테스크했다. 

―재료 배합이 틀렸다. [무림 만두]에 통달한 녀석은 아닌 것 같군. 

무림 만두 [999]는 뭔가 못마땅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내게 이것저것을 명령하기 시작했다. 

―저기 녹색 통에 담긴 것을 반 스푼 더 넣어 보아라. 

어차피 갈 길이 멀었기 때문에, 나는 녀석의 명령을 따라 만두피에 재료들을 넣어 보았다. 

―삼매진화의 불길에 익혀야 한다. 노란 불꽃이 중심에 오도록 찜통을 놓고 가열해라. 

어쩌면 이건 꿈인지도 모른다. 

내가 만두의 길을 걸으면서 만두에게 만두 제작법을 교습받고 있다니. 

그렇게 몽환적인 길을 얼마나 더 걸었을까. 

나는 길의 끝에서 먹음직스런 무림만두 한 팩을 얻을 수 있었다.

의기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999]를 보며, 나는 내가 뭔 짓을 한 건가 싶었다. 

“아무래도 저기가 도착지인 것 같아요.” 

나는 신유승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컨베이어 벨트의 끝에는 거대한 돌담벽과 새로운 거주지로 가는 통로가 있었고, 몇몇 인부들이 포장된 만두를 거주지 안으로 운송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곳이 만두의 소비 지역인 모양이었다. 

우리가 다가가자 경비병이 다가왔다. 

“누구냐?” 

그러자 신유승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소승들은 서천 땅으로 부처님을 찾아뵙고 경전을 얻으러 가는 길인데, 우연히 이 길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괜찮다면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혹시 말로만 듣던 ‘당나라 스님 일행’이십니까?” 

“맞습니다.” 

그 대화를 듣던 나는 어이가 없었다. 

여정을 시작한 게 며칠 전인데 여기까지 우리 소문이 날 턱이 없다. 

[설화, ‘발보다 빠른 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신유승이 내게 속삭였다. 

“원작에서도 늘 이랬대요.” 

······아, 그런 것이었나. 

[일부 심사위원들이 시나리오 마스터의 고증 능력에 감탄합니다.] 

[뛰어난 원작 반영으로 가산점 10점이 추가되었습니다!] 

원작의 몰개연성을 답습한 것까지 고증으로 치다니······ 놀랍군.

문지기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우리 마을은 외부인들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발걸음하신 수고는 죄송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 켁!” 

문지기의 말이 너무 길었던 모양인지, 이길영이 문지기의 배때기를 두들겨 기절시켰다. 이길영이 변명처럼 말했다. 

“그냥 그 요괴 놈이나 얼른 잡아 해치우자. 수영 누나가 그랬어. 빨리빨리 전개시켜야 관객들이 좋아한다고.” 

한수영 그 자식 차암 좋은 것 가르쳤다. 

[일부 관객들이 삼장 법사의 판단에 만족합니다.] 

[추가 가산점 1점을 획득하였습니다!] 

나는 신유승과 이길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들어가 봅시다.” 

“아니, 아저씨는 여기 가만히 계세요.” 

“예?” 

“여기서 손오공은 버스만 타는 거라니까요.” 

“하지만······.” 

“하아······. 웬만하면 안 하려고 했는데, 진짜.” 

신유승이 염주를 쥐며 뭔가를 외기 시작했다. 

“마하반야바라밀다김독자. 헛짓거리하지말고가만히있심경······.” 

······뭐? 

[삼장 법사가 ‘긴고주(緊箍咒)’를 외웠습니다!] 

[아이템 ‘긴고아(緊箍兒)’가 반응합니다!] 

나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그대로 기절했다. 

* 

······이게 말로만 듣던 ‘긴고주’인가. 

다시 깨어났을 때 신유승과 이길영은 이미 마을 안쪽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옆을 보자 만두 녀석이 나를 비웃듯 바라보고 있었다. 

―어쩔 거지? 

‘······쫓아가야지.’ 

보통이라면 두 아이에게 맡겨 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녀석들은 이제 내 도움이 없어도 충분히 강한 화신들이니까. 

하지만, 뭔가 찜찜한 예감이 들었다. 

(손오공의 예상이 맞다면 이번에 만날 존재는 정해져 있었다.) 

무림 만두라면 떠오르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녀석이 노예를 부려 공장을 돌리고 여자들을 납치하는 악당이 되었다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손오공을 발견했다.) 

“꺅! 요괴다!” 

돌아본 곳엔 몇몇 여인들이 있었다. 

(손오공의 외양을 본 여인들은 깜짝 놀랐다.) 

여인들은 금빛 머리칼 사이로 자라난 내 원숭이 귀를 가리키며 물러섰다. 그러다 내 어깨에 놓인 만두를 발견했는지, 알은체를 했다. 

“무림 만두를 좋아하나 봐······.” 

“······그럼 착한 요괴인가?” 

대체 왜 그런 논리 회로가 성립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잘 됐다 싶었다. 

“혹시 납치된 분들이십니까?” 

내 질문에 여인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서로를 돌아보았다. 

“······납치? 그런 거 당한 적 없어요.” 

“하지만 시커먼 돼지를 닮은 요괴 하나가 당신들을 납치했다고 들었는데요.” 

“돼지? 설마······ 팔계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팔계님? 

“우리 팔계님 피부가 좀 타시긴 했지. 하지만 새카맣다고 할 정도는······.” 

“어떤 부분은 돼지를 닮으셨긴 해. 우람한 팔뚝이라든가, 단단한 허벅지라든가. 하지만 돼지와는 다르지······.”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때마침 마을의 중심에서 커다란 소란이 일어서, 나는 그쪽을 향해 달려갔다. 소란의 주범이 누구인지는 뻔한 일이었다. 

“멈춰라!”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아이의 목소리. 여인들의 인파 사이로 들어가자, 마을의 광장 중심에 커다란 가마와 그 앞을 가로막은 두 아이가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길영과 신유승이었다. 

꼬마 장군처럼 앞으로 나선 이길영이 외쳤다. 

“네가 바로 마을의 뭇 여인들을 납치하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만두 공장을 만든 요괴렸다!” 

[일부 관객들이 삼장 법사의 귀여움을 찬양합니다!] 

[심사위원, ‘석가의 후계’가 가산점 5점을 추가합니다.] 

······정말 귀엽다. 

저 가마 안에 있는 게 누구든 간에, 저런 대사를 듣고서 아이와 싸울 수는 없을 것······ 아니지, 그놈이라면 또 모른다. 

그리고 다음 순간, 휘장으로 막힌 가마 안에서 무시무시한 격이 휘몰아쳤다. 

“가마를 내려라.” 

가마의 안에서 들려온 무거운 톤의 목소리. 한 마디만으로도 주변 전체의 분위기를 바꾸는 놀라운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아이들의 뒤로 다가갔다. 

“······위험하니까 뒤에 있으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절 버리고 가시면 그게 더 위험합니다.” 

가마의 휘장이 천천히 걷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마 안에서, 문제의 요괴가 등장했다. 

(손오공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천봉원수(天蓬元帥) 저팔계.) 

신유승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저팔계······ 라고요?” 

(손오공은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가 기억하던 저팔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순간 이 세계가 가지고 있던 미(美)의 추(錘)가 기우는 느낌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환호성이 쏟아졌다. 

“오오오오! 저팔계님!” 

확실히, 저런 것을 두고 ‘요괴’라고 부른다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저런 외모를 가졌다는 게 말이 안 되니까. 

저명한 화가가 일필휘지로 그린 듯한 눈썹. 조잡한 인간의 각도기로는 감히 잴 수 없을 듯 완벽한 각도로 뻗은 콧선과 턱선. 세상 모든 불행을 모아 그것을 아름다운 보석으로 깎아 만든 것 같은 눈동자. 

저런 외모를 보고 매료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게 비정상일 것이다. 

실제로 마을의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찬사를 퍼붓고 있었다. 

“저팔계님 만세!” 

“무림 만두의 창시자시여!” 

반쯤 열린 검은색 조끼에, 흑청색 청바지를 입은 저팔계가 가마에서 내리고 있었다. 

“드디어 승부를 가릴 때가 왔구나! 이 시커먼 놈!” 

이길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이길영은 조그만 주먹을 쥐불놀이하듯 휘두르며 저팔계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통할 턱이 없었다. 

“이것 놔! 이 돼지야!” 

이길영의 뒷덜미를 가볍게 잡고 들어 올린 저팔계는 신유승을 슬쩍 일별하고는 이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네놈이 손오공인가?”





< Episode 81. 만두의 추억 (1) > 끝

< Episode 81. 만두의 추억 (2) >





그래, 처음부터 이 녀석이 저팔계일 거라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이 녀석의 대체 어디가 ‘저팔계’란 말인가. 

[소수의 관객들이 저팔계의 외모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소수의 관객들이 이것은 원전 모독이라며 항의합니다!] 

[심사위원 ‘미후왕’이 저건 말도 안 된다고 합니다!] 

실제로 나와 생각이 같은 관객들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다수의 관객들이 저팔계의 배역 선정에 환호합니다!] 

······응? 

[득표수가 크게 증가합니다!] 

[설화방 랭킹이 크게 상승하였습니다!] 

······설마? 

[심사위원, ‘정단사자(浄壇使者)’가 자신의 외모에 흡족해합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정단사자’는 저팔계의 수식언이다. 

[심사위원, ‘정단사자’가 자신의 배역 캐스팅에 크게 만족합니다.] 

[추가 가산점 15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특유의 위협적인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유중혁의 모습과 함께, 커다란 폰트가 눈앞에 떠올랐다. 

~ Episode 2. 패왕 저팔계 ~ 

* 

[축하합니다! 당신의 설화방이 랭킹 100위권에 진입하였습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한수영은 씁쓸한 미소로 페이지를 넘겼다. 

패널 화면에서는 그녀가 꾸민 플롯대로 인물들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한수영은 렌즈가 없는 뿔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애들 발연기 때문에 쫄려 뒈지겠네, 진짜.” 

하지만, 그녀의 설화방은 벌써 득표수 1000을 돌파하고 상위권에 진입한 상태였다. 

뒤쪽에서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이수경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과일 좀 깎아왔다.” 

“노크를 했으면 대답을 듣고 들어오든지, 노크를 하지 말든지.” 

“일은 잘 돼가니?” 

“······보통이지 뭐. 페이후 녀석 순위가 높아서 따라가는 게 쉽지가 않네.” 

어깨 너머로 한수영의 설화방 랭킹을 확인한 이수경이 말했다. 

“며칠 안 됐는데 이런 상승세라니 대단하구나.” 

“내 전성기 때에 비하면 이 정도 성적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아직 어떻게 될지 몰라.” 

불끈 의지를 다진 한수영이 사과를 아삭 깨물었다. 

홀로그램 패널 너머로 얼빵한 얼굴을 한 손오공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부턴 이 손오공 녀석이 얼마나 잘 해주는가가 관건인데.” 

* 

“맞습니다. 제가 손오공입니다.” 

내 대답에, 유중혁이 의심스럽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녀석의 오른쪽 눈이 황금빛으로 빛났다. 

[해당 시나리오 지역에서는 ‘탐색 스킬’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세계관의 제약으로 녀석의 [현자의 눈]은 발동하지 않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나는 놀라지 않았다. 

“눈에서 레이저 같은 것을 쏘시는군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었다. 

어차피 원작 전개대로라면 저팔계는 내 사제로 들어올 운명이었다. 

“신유승! 뭘 가만히 서 있어! 빨리 이 자식 해치워!”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이길영이 악을 썼다. 

신유승은 자기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이길영을 흘끗 보더니, 저팔계를 향해 물었다. 

“아무리 무림 만두가 좋아도 그렇지. 공장을 세우고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다뇨! 대체 여자들은 왜 납치한 거죠?” 

나는 신유승의 이야기를 들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유기’의 원작에서, 저팔계는 색욕과 식욕의 마왕이다.」 

사실 원작의 특징을 감안하면 불가능한 에피소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한수영이, 아무리 유중혁이 밉다 해도 원작을 그대로 답습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멸살법’도 그렇게 치밀하게 바꾼 녀석인데. 

게다가, 한수영이 그런 시나리오를 썼다 한들 그 유중혁이 고분고분 따를 리가······. 

“여성들은 납치하지 않았다.” 

유중혁의 말에 주변의 여인들이 외쳤다. 

“맞아. 우린 납치 당한 게 아니라고!” 

나는 여인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들 중 누구도 현혹된 눈빛은 아니었다. 

이길영이 외쳤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네가 먹으려고 마을 사람들을 잡아다가 만두를 잔뜩 만들게 했잖아!” 

맞다. 분명 공장의 노예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게 하나 있었다. 

유중혁은 ‘무림 만두’를 좋아한다. 아니, 그것은 거의 집착에 가깝다. 

그런 유중혁이 과연 저런 공장에서 나온 것을 먹을까? 

「“나는 타인이 만든 건 먹지 않는다.”」 

그런 말까지 했던 유중혁이, 고작 공장제 만두를 먹기 위해 노예들을 동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그것을 증명하듯, 유중혁이 약간 슬픈 어조로 말했다. 

“나는 ‘무림 만두’를 먹지 않았다.” 

“뭔 소리야! 이 만두 싸이코! 신유승 빨리 어떻게 하라니까!” 

유중혁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둘러싼 인파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십 채의 집들이 골목을 따라 모여 있었다. 그리고 배송된 무림 만두는, 그 집들의 입구에 잔뜩 쌓여 있었다.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이 마당에 한가득 쌓인 만두를 까먹으며 행복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혹시?” 

마을 전체에 경고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만두 공장’에서 혁명이 발생했습니다!] 

문지기가 지키던 마을의 입구가 무너지며, 공장의 노예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노역하지 않겠다!” 

“여기도 만두, 저기도 만두, 전부 만두뿐이야!” 

“죽여라! 저 돼지 놈을 죽여!” 

각각 괭이와 갈퀴를 쥔 노예들의 눈동자에서 사악한 빛이 번뜩였다. 

대경한 여인들이 외쳤다. 

“저 요괴 녀석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요괴들? 요괴는 이 녀석이잖아!”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이길영이 외쳤다. 

어느새 바닥에 이길영을 내려놓은 유중혁의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역시 처음부터 죽였어야 했나.” 

그 순간, 나는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의 나는 손오공이 된 상태. 

그러니, 손오공의 힘을 빌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밀려오는 요괴들을 보며 두 눈에 힘을 주었다. 

[성흔, ‘화안금정(火眼金睛) Lv.???’이 발동합니다!] 

화안금정. 요괴와 악마를 식별해낼 수 있는 제천대성 고유의 성흔. 

천천히 세상의 색깔이 뒤바뀌며, 달려오는 인간들의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뒤틀린 외양, 살기 가득한 눈동자. 역시나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저팔계는 적이 아닙니다.” 

내 말을 들은 이길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쉬운 얼굴이었다.

“뭐어? 씨······.” 

“저팔계는 이 마을을 지배한 게 아니라 오히려 해방한 겁니다. 이 마을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던 건 저들이에요. 저들은 인간이 아니라, 이 마을을 지배하고 있던 요괴들입니다.” 

본색을 드러낸 노예 요괴들이 자신의 격을 분출하며 마을을 파괴하고 있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이길영과 신유승이 사람들을 통제했다. 

“모두 뒤로 빠지세요!” 

······공장 노예들의 혁명이라. 

일전의 [마계 혁명]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이번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해방이 아니라 진압이었으니까. 

유중혁이 먼저 나서며 허리춤에서 [흑천마도]를 뽑아들······ 아니, 저건? 

[일부 관객들이 저팔계의 무기에 의아해합니다.] 

[몇몇 심사위원이 어째서 저팔계가 ‘칼’을 사용하는지 궁금해합니다.] 

[심사위원, ‘정단사자’가 자신의 ‘상보심금파(上寶沁金鈀)’는 어디 갔냐고 항의합니다!] 

원작에 따르면 저팔계가 사용하는 것은 칼이 아니라 [상보심금파]라는 쇠스랑이었다. 

[다수의 관객들이 ‘패왕 저팔계’의 패기에 압도됩니다!] 

[일부 관객들이 잘생긴 저팔계의 매력에 흠뻑 빠집니다!] 

[일부 심사위원들이 대중성을 반영한 무기 변경을 납득합니다.]

[심사위원, ‘정단사자’가 헛기침을 하며 멋있으니 봐준다고 말합니다.] 

[가산점 5점을 획득하였습니다!] 

제기랄, 얼굴이 개연성인 것인가. 

앞으로 나선 유중혁은 [흑천마도]를 갑자기 내게 겨누더니 내 주변에 작고 동그란 원을 그렸다. 

“네놈은 그 안에서 나오지 마라.” 

“예?”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죽여버릴 것이다.” 

그리고 요괴들의 목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검술이었다. 

대체 얼마나 자신을 깎아내야 그만한 경지에 오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예전보다도 더 진일보한 검술. 

“잘한다, 돼지!” 

“힘내세요!” 

어느새 이길영과 신유승도 이쪽에 붙어 응원하고 있었다. 

우리는 홀로 요괴의 대군을 물리치는 유중혁을 구경했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통쾌하고 안락한 전개에 편안해합니다.] 

이제야 나도 한수영 작가님의 지엄한 뜻을 이해하고 있었다. 

은퇴한 손오공은 정말 좋은 이야기구나. 

[심사위원 ‘정단사자’가 자신의 멋있음에 취합니다.] 

[심사위원 ‘미후왕’이 멋있는 저팔계의 모습에 조금 불만을 가집니다.] 

[추가 가산점 3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하늘에서 신령스런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잠깐! 멈춰라!] 

반쯤 죽어 나가던 요괴들이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마을의 하늘이 열리며, 신선의 복장을 한 성좌가 등장했다. 

복장으로 보건대, 태상노군(太上老君)이 틀림없었다. 

[패왕 저팔계여, 지금 그대가 죽이는 요물들은 내 도솔궁에서 키우던 돼지들이다. 천궁의 상에 오를 것이 두려워 탈출한 돼지들이니, 그대는 이를 긍휼히 여겨 이들을 내게 돌려주도록 하라.] 

드디어 저 패턴이 나왔구만. 

‘서유기’의 모든 전개는 이런 식이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그 사건의 진범인 요괴가 드러나고, 요괴를 해치우고 나면 웬 신선이 나타나 “사실 그 요괴는 내가 키우던 아무개였다” 같은 말을 하며 요괴를 데려가버리는 것. 

[일부 심사위원들이 원작을 반영한 전개에 가산점을 부여합니다!] 

[가산점 30점이 추가되었습니다!] 

물론 심성이 배배 꼬인 나는 그런 전개에는 한마디 해주지 않고는 못 배긴다. 

“그런 식으로 데려갈 거였으면 처음부터 도와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미안하네. 내가 좀 바빠서······.] 

사실은 귀찮았기 때문이겠지. 

실제로 <황제>의 많은 성좌들은 시나리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화신을 도와주는 법이 없다. 

“데려가라.” 

[고맙네.] 

유중혁의 허락과 함께 태상노군이 자신의 돼지들과 함께 하늘로 승천했다. 

(태상노군이 자신의 돼지들을 거둬 가자, 마을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보통의 이야기라면 거기서 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내 [화안금정]이 따끔거리며 태상노군과 함께 떠나는 요괴들의 모습이 크게 흔들렸다. 

【······고 싶······ 않아.】 

【······대체 언제까지······.】 

요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익숙한 음색들. 운 좋게 죽음을 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뭐랄까. 

그들은 오히려, 이곳에서 죽기를 바랐던 것 같은 표정이었다. 

* 

“이제 마을은 너희 것이다. 비록 공장은 직접 돌려야 하겠지만, 전처럼 배를 곯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유중혁은 우리 일행에 합류했다. 

떠나는 우리 일행을 향해 마을의 주민들이 눈물의 환송회를 열었다. 

정확히는 우리가 아니라 유중혁이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 같았지만······. 

“칫, 때려잡아서 데려가려 했는데.” 

환송회가 끝난 후 이길영과 신유승이 다시 길을 나섰고, 나도 아이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유중혁은 일행들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따라왔다. 

어색한 분위기였다. 

그러고 보면 나는 내가 없는 곳에서 유중혁과 동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괜스레 유중혁이 신경쓰여 한마디했다. 

“사제, 좀 더 가까이서 걸으시지 그러십니까.” 

“······누가 네놈의 사제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녀석에게, 차마 더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사이, 내 곁으로 온 아이들이 즐거운 듯 떠들었다. 

“구원의 마왕, 너 제법이더라.” 

“제자님께서 요괴들을 밝혀주지 않으셨더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사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요괴들을 죽인 것은 유중혁이었고, 마을을 구한 것도 유중혁이었다. 나는 그저 구경하며 몇 마디 말만 얹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유중혁 보다 나를 칭찬하기에 바빴다. 

나는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유중혁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자신의 [흑천마도]를 닦고 있었다. 

「그 순간 김독자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내가 없는 시간 동안, 유중혁은 일행들 속에서 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밤이 되었다. 

모아온 장작으로 화톳불을 쐬며, 우리는 동그랗게 장작 사이로 둘러앉았다. 캠핑이라도 온 기분이었다. 

그런 온화한 분위기에 난데없이 찬물을 끼얹은 것은 유중혁이었다. 

“앞으로 나는 따로 행동하겠다.” 

마치 검을 닦아내듯 무심한 목소리여서,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차피 천축에 가서 ‘경전’만 가져오면 끝나는 일 아닌가?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 내가 그곳에 가서―” 

“그러시면 안 됩니다!” 

사실 구름 술법을 사용한 저팔계라면, 그리고 근두운을 탄 나라면 천축까지 순식간에 주파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작중의 손오공이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도 있고, 어릴 적의 나 역시 그런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왜 손오공은 자기가 직접 경전을 가져오지 않는가?」 

나는 그 이유를 이제 아주 조금은 이해한다. 

“그런 짓을 하면 이 이야기의 의미가 사라집니다.” 

하룻밤에도 다녀갈 수 있는 거리를, 14년에 걸쳐 조금씩 나아가는 것. 

그것은, ‘서유기’가 완성되기 위해 비로소 존재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유중혁의 생각은 달랐다. 

“내겐 시간이 없다.” 

“이번 여정은 그리 길지 않을 겁니다. 14년이나 걸리지는 않을 테니, 조금만 참으시지요. 한 사람 한 사람 일행들을 만나며 여정을 진행하는 것도 썩 나쁘지 않은 경험일 겁니다.” 

그 말을 한 것이 의외였는지, 유중혁이 물끄러미 나를 보며 말했다. 

“네놈은 내 일행이 아니다.” 

그렇겠지. 

그 의심 많은 유중혁이, 나를 믿을 턱이 없다. 

“압니다.” 

일행들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길영은 말없이 화톳불 속에 돌멩이를 던져 넣었고, 신유승은 나와 유중혁의 눈치를 보며 손가락으로 흙바닥을 깨작대고 있었다. 

꼬르륵, 하는 소리가 울려퍼진 것은 그때였다. 이길영이 울상을 지은 채 배를 만졌다. 

“배고파······.” 

나는 빙긋 웃으며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만두, 하나 드시겠습니까?” 

그것은 아까 ‘만두의 길’에서 완성한 내 비장의 만두였다. 

이길영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내게서 만두를 받아 들더니, 이내 한 입 베어 물었다. 화등잔처럼 이길영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뭐야! 공장에서 먹은 것보다 훨씬 맛있어!” 

그야, 당연히 맛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부 관객들이 ‘무림 만두’의 맛을 몹시 궁금해합니다!] 

어깨 쪽에서 유중혁 [999]가 작게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신유승과 유중혁에게도 만두를 건넸다. 

유중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타인이 만든 것은 먹지 않는다.” 

“타인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유중혁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아마 유중혁은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유중혁은 자신의 바로 앞에 놓인 무림 만두를 수상하게 노려보더니, 뭔가를 결심한 것처럼 조심스레 손에 들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마치 적을 탐색하듯이 만두를 코로 가져갔다. 

“······이 냄새는?” 

그래, 그 만두를 먹어라 이 자식아. 

유중혁은 몇 번이나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더니, 천천히 만두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마치 적장의 목을 뜯듯이, 작게 한 입을 베어 물었다. 

나와 이길영, 신유승은 모두 긴장한 표정으로 유중혁이 만두를 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심지어는 내 어깨 위의 요리사 [999]도 경직된 상태로 녀석의 반응을 기다렸다. 

꿀꺽. 

마침내 한입을 모두 삼킨 유중혁이 다음 한입을 머금었다. 아주 천천히, 유중혁의 미간에 주름이 사라지고 있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입술. 

조금씩 만두를 먹는 녀석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두입, 세입······. 

마침내, 유중혁의 손이 두 번째 만두를 향해 움직였다. 도중에 움직임을 멈춘 유중혁이 나를 노려보았다. 

“뭘 보는 거지?” 

나는 녀석을 슬쩍 외면한 채 함께 만두를 먹기 시작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썼다면 훨씬 더 재미있는 것들을 들을 수 있었겠지만, 이제 녀석에게는 사용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럭저럭 먹어줄 만하군.” 

작게 중얼거리는 유중혁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멸망 따윈 먼 세계의 이야기라는 듯, 하늘에서 빛나는 별자리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만두를 먹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 이야기가, 조금은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 

[깊은 밤이 찾아왔습니다.] 

[‘서유기 리메이크’ 시스템이 1시간 동안 점검에 들어갑니다.] 

까맣게 내려앉은 어둠. 모두가 잠든 밤이었다. 

스스로 팔베개를 한 손오공은 코를 골며 잠들었고, 두 삼장도 피곤했던 모양인지 손오공의 다리 한짝씩을 베개로 삼은 채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관객들과 심사위원들의 메시지가 사라진 야음을 틈타, 조용히 일어나는 그림자가 있었다. 

유중혁이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조용히 [흑천마도]를 꺼내어 손오공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그 예리한 날 끝을 손오공을 향해 겨누었다.





< Episode 81. 만두의 추억 (2) > 끝

< Episode 81. 만두의 추억 (3) >


날끝을 손오공에게 겨눈 유중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마기를 풀풀 날리고 있으면, 내가 어떻게 반응할 거라 생각한 거지?

[전음]은 특정인을 대상으로 전하는 말이다. 하지만 손오공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 말에 반응한 것은 손오공의 어깨 위에 있던 무림 만두였다.

-[흑천마도]는 좋은 칼이지.

목소리에 묻어나는 세월의 깊이에, 유중혁의 칼날에 희미한 강기가 더해졌다.

눈을 뜬 무림 만두가 초월의 힘이 어린 [흑천마도]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하지만 그런 부러진 칼로 나를 벨 수 있을까?

실제로 [흑천마도]의 중심에는 희미한 실금이 가 있었다.

[도깨비 보따리]에서 판매하는 수리 도구로 때워 놓기는 했지만, 말 그대로 임시 조치에 불과한 수준. 한 번 부러졌던 [흑천마도]는 이제 본래 기량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유중혁이 말했다.

-지금 당장 확인해 볼 수도 있겠지.

-그런 식이니 '은밀한 모략가'에게 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은밀한 모략가'라는 말에 유중혁의 짙은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어둠 속에서 무림 만두의 형상이 조금씩 뭉개지며, 유중혁 [999]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작은 미니어쳐처럼 생긴 유중혁 [999].

유중혁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너는 그놈의 권속인가? 무슨 목적으로 온 거지?

-지금의 너는 결코 '은밀한 모략가'를 꺾을 수 없다.

-그딴 헛소리를 전하러 온 거라면…….

-몇백 번을 시도해도 마찬가지다. 마치 네놈의 한심한 회귀와 같지. 알고 있을 텐데?

[흑천마도]의 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어쩌면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한수영과 정희원의 힘을 이어받고도 꺾지 못했던 적. 다시 만난다고 해서,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마치 그 심경을 이해한다는 듯, 유중혁 [999]가 말했다.

-3회차의 유중혁. 네놈은 '은밀한 모략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


오래된 잠.

그것은 아직 그가 유중혁(劉衆赫)이라 불리던 시절의 꿈이었다.

0회차부터 1863회차까지.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로서, 수없는 목숨을 반복하며 싸우고 또 싸웠던 시절의 이야기.

[……어리석은 꼭두각시여. 네놈은, 아무것도, 구할 수, 없다.]

마침내 도달한 1863회차에서, 유중혁은 모든 동료를 잃었다.

해상전신 이지혜.

비스트 로드 신유승.

강철검제 이현성.

의선 이설화.

망상악귀 김남운.

은둔한 그림자의 왕, 한동훈.

파천검성 남궁민영.

……여동생, 유미아.

많은 동료만큼이나 많은 적들이 있었다.

십악 공필두, 안나 크로프트, 란비르 칸, 페이후…….

"말했잖아. 네놈 편은 안 한다고. 그렇지만……."

어떤 적들은 끝까지 그와 대적했고.

"어쩌면 이번 회차가 그대의 마지막이 되겠군요."

어떤 적들은, 그의 성공을 깨닫고 축복해주었다.

그리고 최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철혈의 패왕'이여.]

그와 맹우로 싸워주었던 '긴고아의 죄수' 제천대성.

[내가 그대를 돕는 것은 <스타 스트림>이 더 큰 악이기 때문이다.]

마지막만큼은 그의 동맹이 되어주었던 '악마 같은 물의 심판자' 우리엘.

[……본좌는 화신의 복수를 하는 것뿐이다.]

김남운의 복수를 위해 그의 편에 서 주었던 '심연의 흑염룡'.

【어 리 석 은 성 좌 들 아 …….】

몰아치는 이계의 신격들의 파도를 꿰뚫으며, 그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달려드는 촉수의 무리를 베고, 외신들이 내뿜는 어마어마한 격에 맞섰다.

하늘의 별들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위대한 성운의 빛무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올림포스>, <베다>, <아스가르드>……. 하나의 시대가 끝나가는 소리와 함께, <스타 스트림>의 하늘은 추락하는 유성우로 뒤덥였다.

한반도의 성좌들도 죽어갔다. 고려제일검과 해상전신이 마지막까지 분투했으나, 그들 역시 죽음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유중혁의 전우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스운 삶이구나.]

가장 먼저 '심연의 흑염룡'의 목이 잘렸고.

[……가브리엘……미안하다.]

이어서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의 날개가 꺾였다.

하지만 그즈음에 이르러서는 '이계의 신격'또한 다수가 절멸한 상태였다.

마지막 결졍타를 날린 것은 제천대성이었다.

[저곳이 모든 이야기의 끝이로군.]

거대한 여의봉. 수만 개의 분신으로 화한 제천대성은 자신의 모든 설화를 걸어 길을 뚫었다. 황금빛 설화로 흩어지며 제천대성이 말했다.

[너의 이야기를 완성해라. 패왕 유중혁.]

그 길을 달리던 순간을 유중혁은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0회차부터 쉴 새 없이 달려왔던 자신의 삶이 완성되는 순간.

스걱.

외신의 머리가 허망히 떨어졌고.

【후 회 만 이 너 를 살 게 할 것 이 다.】

그 저주가, 유중혁의 '결'을 완성했다.

[새로운 거대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본연의 의미를 완성합니다!]

[당신의 마지막 거대 설화가 '결(結)'을 완성하였습니다!]

[히든 시나리오 - '단 하나의 설화'의 마지막 조건이 완수되었습니다!]

모든 존재가 사멸한 전장 위해, 남은 것은 유중혁분이었다.

모든 죽음을 거름삼아 도달한 결.

그 오랜 싸움 끝에 유중혁이 원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이 빌어먹을 회귀의 끝을 보는 것.'

오직 그것을 위해 그는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그 '너머'로 가는 것을 막아선 벽이 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이제 몇 개는 잊어버렸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것은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살아남을거란 사실이다.」

벽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곳에서 유중혁은 '도깨비 왕'을 만났다.

[불행한 꼭두각시여. 그대는 너무 빨리 왔습니다. 미안하지만 이 너머는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중혁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도깨비 왕을 협박해보기도 했지만, 도깨비 왕은 죽는 순간까지도 그 말의 뜻을 밝히지 않았다.

[당신은 이 우주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유중혁이 가진 어떤 힘으로도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벽.

유중혁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너머에, 내가 알고 싶었던 해답이 있다.'

하지만 하늘을 부수고 별을 부순 그의 [파천검도]로도, 그 벽을 부술 수 없었다. 마치 그 벽에는 '부서짐'이라는 속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유중혁은 절망했다.

모든 것을 잃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 벽 너머로 갈 수 없다고?

[당신의 '결'이 당신을 새로운 존재로 인도합니다.]

더 강해져야 했다.

더 많은 설화가 필요했다.

이 '벽'을 부수고, 그 너머로 나아갈 동력이 필요했다.

[당신은 '이계의 신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중혁은 '이계의 신격'이 되었다.

자신이 살아온 무수한 세계선을 부유하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유중혁이 아니게 되었다.

외신들은 이야기의 우주를 떠도는 그를 경외했고, 다른 세계선의 도깨비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흑부리들은 그를 좋아했다. 공포의 기록자들 중 하나가 그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벽을 넘어선 여정을 꿈꾸는 위대한 모략……. '은밀한 모략가'시여.

0회차. 1회차. 2회차…… 1863회차.

셀 수 없이 많은 세계선을 떠돌며, 그는 자신이 살아왔떤 이야기들을 되새겼다.

많은 설화들을 얻었지만, 세계선 여행에 지불한 개연성으로 인해 결국 힘은 원점이었다. 대신 그는 지금까지의 회귀만으로는 알지 못했던 무수한 정보들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회귀의 원흉인 그의 배후성.

'가장 오래된 꿈.'

'은밀한 모략가'.는 그 존재를 찾아 세계선을 헤매고 또 헤맸다.

한때는 <에덴>에서 그의 흔적 같은 것을 발견하기도 했고, 또 <베다>에서 그 기록을 발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의 실체는 찾을 수 없었다.

그랬기에 '은밀햔 모략가'는 확신했다.

그가 최종 시나리오에서 보았던 '최후의 벽', 그 벽 너머에, 분명 모든 것의 해답이 있다고.

하지만 그 많은 세계선을 뒤져도 벽을 넘어갈 방법은 찾을 수 없었다.

희망은 조금씩 메말라 갔다. 1863회차의 회구도 꺾지 못했던 그의 의지도 조금씩 흐려져 가고 있었다. 차라리 이대로 여원히 잠들기를 수도 없이 꿈꾸었다. 정말로 그럴 수만 있다면.

그토록 찾아왔던 안식을…… 구할 수만 있다면.

눈부시게 빛나는 하나의 행성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은밀한 모략가'도 알고 있는 행성이었다.

제 8612 행성계, 지구.

이 모든 시나리오가 시작된 비극의 장소.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세계선을 감싼 낯선 감각이 그의 뇌리를 찔러왔다.

'……이런 회차가 있었던가?'

그리고 그곳에서, '은밀한 모략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존재를 목격했다.


.
.
.



'은밀한 모략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서늘한 어둠으로 뒤덮인 '은가이의 숲'. 차갑게 식은 공기 사이로 '은밀한 모략가'의 새카만 호흡이 흘러나왔다.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 그의 곁에는 꼬마 유중혁 [41]이 있었다.

"악몽을 꾸었군. 이미 결을 본 그대조차 꿈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건가?"

【……나 역시 여전히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으니까.】

츠츳, 츠츠츳.

과도한 개연성 소모로 인한 휴유증일까. '은밀한 모략가'의 전신에 옅은 스파크가 감돌고 있었다.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던 [41]이 말했다.

"역시 1863회차의 이야기가 바뀐 것이 컸던 모양이군."

【……용건은?】

"[999]로부터 연락이 끊겼다."

그 말에 '은밀한 모략가'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뭔가를 읽고 있는 듯 심어한 빛이 그의 망막을 스쳐 가더니, 이내 입이 열렸다.

【[999]는 죽지 않았다.】

"그런데도 연락이 끊겼다는 것은……."

'은밀한 모략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41]이 희미한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녀셕을 보낸 게 잘못이었군. 차라리 나를 보내라. [999]는 너무 유약해."

【그는 약하지 않다.】

999회차의 일을 복기하는 듯, '은밀한 모략가'의 눈동자에 희미한 설화의 잔재가 스쳐 갔다.

【운이라곤 해도, [999]는 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결'의 언저리까지 다가갔었다. 그의 경험이 있었기에 나 또한 '결'을 볼 수 있었다.】

그러자 [41]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하지만 스스로 '결'을 포기했던 유중혁이기도 하지. 잘 생각해라. 놈이 이번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상관없다. 그 또한 유중혁이니까.】

'은밀한 모략가'의 심원한 눈동자가 '은가이의 숲'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동자.

【그에게도,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41]은 '은밀한 모략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은밀한 모략가.

이 모든 우주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온 유중혁.

<스타 스트림>의 그 누구도 그의 슬픔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이 그대가 원하는 바라면."

설령, 그것이 같은 유중혁이라 해도.


*


[5분 뒤 시나리오 점검이 종료됩니다.]

[곧 채널이 재개방됩니다.]

허공에서 울려 퍼지는 메세지를 들으며, 두 명의 유중혁이 대치하고 있었다. 먼저 씁쓸한 미소를 지은 것은 [999] 쪽이었다.

-보아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하긴, 당연한 일인가.

아무것도 모른다. 그 말이 유중혁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놈도, 저놈도 모두 하는 말이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유중혁.'

대체 그가 뭘 모른단 말인가.

분노를 삼키듯, [흑천마도]의 칼날이 손오공 쪽을 향해 미미하게 움직였다.

-꿍꿍이나 말해라. 여긴 왜 온거지? 저 손오공도 네놈과 한패인가?

그 위협에 손오공 쪽을 돌아보던 [999]가 말했다.

-이놈은 '이계의 신격'이 아냐. 그저 서로 이용하는 관계일 뿐이다.

-그럼 둘 다 죽여도 상관없겠군.

그러자 슬그머니 손오공을 가리듯 선 [999]가 말했다.

-이번 회차를 포기하고 싶다면 그래도 좋겠지.

-무슨 헛소리지?

-이 녀석과 함께 '서유기 리메이크'를 완성해라. 그러면 네게 '은밀한 모략가'를 이길 방법을 알려주마.

-그 말을 어떻게 믿고…….

그와 거의 동시에 [999]의 몸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존재 맹세].

유중혁의 눈동자가 동요로 흔들렸다.

-내가 수백 번을 회귀해도 이길 수 없을 거라 말한 건 네놈이다.

-수백 번을 '회귀'해서는 이길 수 없다는 뜻이다.

가볍게 뛰어오른 [999]가 [흑천마도]의 칼등에 올라섰다.

유중혁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999]가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넌 지금까지의 네 삶이 지옥 같다 여기고 있겠지. 늘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해야 했을 테니까.

흉흉한 설화가 순식간에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유중혁은 흠칫 몸을 떨며 그 설화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한 사람이 살아온 영원의 악몽.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 설화에 반응하듯, 광기를 머금은 [흑천마도]가 흔들렸다.

999번의 회귀를 거친 유중혁이 말하고 있었다.

-이 우주에 그런 지옥이 몇 개나 있을 거라 생각하지?





< Episode 81. 만두의 추억 (3) > 끝

< Episode 81. 만두의 추억 (4) >



이후의 시나리오는 무난하게 전개되었다.

아무래도 저팔계의 공이 컸다.

[현재 서유기 진행도 : 24%]

본래 『서유기』는 총 81개의 역경을 물리치는 14년에 달하는 여정이지만, 원작 자체가 구전으로 보태진 설정 위에 쌓아 올린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정도 변용은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직 사오정도 안 만났는데 이야기 진행 속도가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고 보니 사오정은 누굴까.

"크아악!"

마침 눈앞에서는 막간 이벤트로 나타난 산적들이 유중혁의 [흑천마도]에 목이 달아나고 있었다.

[일부 심사위원들이 '저팔계'의 잔학함에 불만을 갖습니다!]

[관객들이 서유기의 사이다에 맛을 들입니다!]

[가산점 10점이 추가됩니다.]

본래 '서유기'에서도 저팔계와 손오공은 인간형 악당들을 자주 죽인다. 그것 때문에 '삼장법사'에게 훈계를 듣기도 하고, 심하게는 파계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삼장법사의 꼬장꼬장함을 발암으로 여기는 독자들도 무척 많았다.

"중혁 아저씨, 저 사람들은 살려 주는 게……."

[일부 심사위원들이 원작의 반영에 만족합니다.]

[다수의 관객들이 삼장의 귀여움에 취합니다.]

[가산점 20점이 추가됩니다.]

역시 같은 역할도 누가 맡느냐에 따라 다른 모양이었다.

유중혁에게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은 산적 대장이 분한 듯 소리쳤다.

"크으윽! 저팔계 따위가 이렇게 강할 줄이야!"

놀랍게도 그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곁에서 아이들이 소곤거렸다.

"명오 아저씨 불쌍하다."

[외발 준족]을 발동하며 꽁무니가 빠져라 달아나는 한명오 부장이 이쪽을 보며 찡긋 윙크를 했다.

설마 그 '한명오'가 이곳에 참가한 플레이어 중 하나였을 줄이야.

아마도 한명오는 멀티맨 역할로 참가하여 잡졸 대장들의 역할로 출연하는 모양이었다. 멀어지는 한명오를 보며 신유승이 작게 중얼거렸다.

"희원 언니가 괜찮댔어."

가볍게 [흑천마도]를 닦으며 돌아오는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유독 칼의 중심부를 신경 써서 닦았다. 자세히 보니 그 위치에 실금이 가 있었다.

유중혁의 [흑천마도]는 지난 '성마대전'의 전장에서 부러졌다.

[진천패도]에 이어 벌써 두 번째로 부러진 검.

내색은 하지 않아도 속이 무척 쓰릴 것이다.

'서유기'에서 새로운 무기를 얻어가면 좋을 텐데…….

녀석에게 적합한 무기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손오공의 여의금고봉은 유중혁에게 익숙한 무기가 아니고, 저팔계의 상보심금파도 녀석의 취향이 아니다. 사오정의 항요보장은 말할 것도 없고…….

생각에 잠긴 내가 의심스러웠는지, 유중혁이 툭 던지듯 말했다.

"다행이 나대지는 않는군."

(해석 : 사형!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나는 허공의 내레이션을 노려보았다.

저건 또 뭐지?

"앞으로도 그렇게 가만히만 있어라. 그럼 죽이지는 않겠다."

(해석 : 후후, 사형. 걱정 마십시오. 이 한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당신을 지키고 말 테니까.)

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져서 하늘을 노려보았다.

아니, 진짜로 저딴 의미일 리가 없잖아.

그리고 유중혁은 '후후'하고 웃지 않는다고.

한수영 이 자식……

[상당수의 관객들이 저팔계의 속마음에 크게 감동합니다!]

[상당수의 관객들이 저팔계의 매력에 빠져듭니다!]

관객 하나가 코인을 후원하고 싶어합니다.]

[심사위원, '정단사자'가 크게 만족합니다!]

[가산점 5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훌륭한 작가 같으니라고.

(여정은 제법 평화로웠다. 손오공은 생각했다. 이것이 '은퇴한 삶'이라는 것인가.)

아무튼 유중혁과의 신경전을 제외하면 여정은 순탄했다/

간혹 나오는 요괴들이나 산적들은 내 눈에 띄기도 전에 아이들이나 유중혁이 해치워버렸다.

"어이, 구원의 마왕. 편하지?"

"예, 사부님 덕분입니다."

내가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구원의 마왕'타령을 듣는 것은 전부 한수영 때문이었다.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에는 손오공이 과거 '구원의 마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는 괴이한 설정이 있다. 대체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부 관객들이 '구원의 마왕'에게 함부로 대하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가산점 10점을 회득하였습니다.]

아니, 알 것도 같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시비걸지 마, 멍청아."

"그게 아니라, 쟤도 밥값은 해야지. 몸은 놀아도 머리는 열심히 굴려야 한다고 독자 형이 그랬어."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몸이 놀 때는 머리도 놀아야 한다.

이길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쓸 만한 정보 좀 뱉어 봐. 넌 설정상 인생 2년차 손오공이잖아. 숨겨진 영약 같은 거 아는 거 없어?"

"……음, 몇 가지 알고는 있습니다."

실제로 '서유기'에는 제법 쓸 만한 영약이 몇 가지 등장한다.

손오공이 먹은 [반도(蟠桃)]라든가, 여정 도중에 얻게 되는 [인삼과(人蔘果)] 또한 그 중 하나다.

"가장 좋은 영약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뭐? 어디?"

나는 말없이 이길영을 바라보았다.

"어디! 빨리 말해!"

내가 채 설명하기도 전에 내레이션이 시작되었다.

(본래 서유기에서 삼장법사는 요괴들에게 수십 번이나 납치를 당하는데, 그것은 삼장법사를 먹으면 천계로 승천할 수 있다는 전설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장법사는 무려 10번의 환생을 거친 부처님의 제자, 즉 금선자(金蟬子)의 환생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입이 점차 벌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설명을 덧붙였다.

"아마 사부님이 '서유기'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영약일 겁니다."

이길영과 신유승이 흠칫하며 서로에게 한 걸음씩 멀어졌다. 그러더니 서로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야 신유승, 넌 손가락 하나쯤 없어도……."

"넌 목 위가 없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으르렁거리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그런 내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어깨 위의 만두가 말을 걸었다.

-얼빠진 웃음이나 지을 때가 아니다. 영약이 필요한 건 저들이 아니라 네놈이니까.

그 말과 함께 눈앞에 창이 떠올랐다.

[이계의신격화 진행률 : 48%]

……소름 돋을 정도로 동화 속도가 빨랐다.

서유기의 진행 속도보다 이쪽이 더 빠를 줄이야.

-네놈의 화신체 회복률이 낮아 동화 속도가 빠른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없었잖아.'

-네놈이 몰래 <김독자 컴퍼니>와 협업하는 것도 예정에는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과연 흑부리 왕이 무섭긴 무섭다. 하긴, 평생을 도깨비 왕가 싸워온 녀석이니까. 어쩌면 놈은 여기까지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화신체를 눈여겨 보던 [999]가 말했다.

-남은 시간은 사흘 정도다. 너는 그 안에 약속을 완수해야 해.

'무리야. 약속을 지키려면 이 시나리오를 끝내야 하는데 시간이 부족하다고.'

흑부리 왕과의 약속은 '이계의 신격'이 포함된 거대 설화를 만드는 것.

나는 이번 거대 설화를 통해 그걸 완수할 계획이지만, 사흘이란 시간은 너무 촉박했다.

적어도, 이주일 이상은 필요했다.

-그러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군. 네놈의 허약한 화신체를 보강하는 수밖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화신체의 상태를 점검했다.

[현재 화신체 회복률 : 45%]

[현재 근원 설화의 손상이 심각합니다.]

[새로운 영약의 섭취를 통해 회복을 가속할 수 있습니다.]

이계의 신격화가 빨라지고 있는 것은 내 화신체가 아직 '성마대전'에서의 타격을 회복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설화 파편 '어린 골드 드래곤의 망가진 심장'이 현재 제 역할을 못 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설화 모으기에 급급하여 화신체의 내구력 향상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워낙 잘 죽어 나가서 반쯤 포기하고 있었던 것도 있고.

'어린 골드 드래곤의 망가진 심장'만 해도 구한 지 한참이나 된 설화 파편이었다.

하지만 일권무적 유호성이 말한 것처럼, 설화의 힘을 제대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신체의 단련이 필요했다.

설화가 '글자'라면, 화신체는 그 글자가 펼쳐질 수 있는 '종이'니까.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약들은 아마 레플리카 버전일 것이다. 그래도 안먹는 것보다는 낫겠지.

[득표수 : 2963]

[현재 다섯 명의 심사위원이 해당 설화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현재 다수의 관객들이 설화방의 성장세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해당 설화방의 랭킹은 31위입니다.]

짧은 시간 동안, 한수영이 만든 시나리오는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함께 '개연성'을 감당하는 이야기에는, 그만큼 강력한 힘이 발생한다.

[설화방의 랭킹이 상승할수록, 해당 설화방에서 얻을 수 있는 성유물 및 아이템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이 방의 랭킹이 상승할수록 이 방에서 나오는 모든 아이템들은 한없이 원작의 그것에 가까워지며, 우승을 한다면 원작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즉, 이 설화방에서 얻은 모든 것은 '진짜'가 되는 것이다.

만약 이대로 순조롭게 방의 랭킹이 올라간다면, 그리고 내가 무사히 영약들을 모으는데 성공한다면…….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잠들어 있습니다.]

[당신은 아직 해당 설화를 사용할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나는, 기껏 얻은 후 한 번도 개방하지 못했던 이 '거대 설화'의 힘을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빛과 어둠의 계절'을 두려워합니다.]

무려 「신화를 삼킨 성화」조차 두려워할 정도의 설화. 대체 이 설화의 힘이 어느 정도일지, 지금의 나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멈춰라."

앞서가던 유중혁의 걸음이 멈춘 것은 그때였다.

방금 전까지 맑게 개어 있던 하늘이 노랗게 물들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샛노란 안개가 전방의 땅과 하늘을 모조리 뒤덮고 있었다.

[황풍령 (黃風嶺) 황풍동(黃風洞)에 도착했습니다.]

황풍령이라.

이곳은 서유기의 빌런 중 하나인 '황풍망령'의 거처일 것이다.

내 예상대로라면, 이 인근에 내가 찾던 영약 중 하나가 있었다.

메세지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상당수의 플레이어들이 '설화방'에 참가합니다!]

본래 이 설화방의 플레이어 숫자는 8명이다. 그런데, 갑자기 추가 플레이어들이 유입된 것이었다.

이길영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왜 이제 와서?"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마감된 설화방에 추가적으로 유입된 플레이어들은, 모두 '엑스트라'의 역할을 맡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엑스트라 배역들은 그 설화방이 성공적으로 완수되더라도, 제대로 된 보상을 얻기 힘들다.

하무멸 탑 10급의 설화방도 그럴진대, 31위의 설화방에 참가할 이유가…… 있다.

[소수의 관객들이 6731번 설화방의 순위 상승을 경계합니다.]

[일부 관객들이 당신들의 파멸을 기대합니다.]

[다수의 관객들이 설화방의 격변에 주목합니다!]

지금 우리 설화방은 최하위권에서 단숨에 상위권으로 도약한 상황.

표정이 굳어진 유중혁이 말했다.

"시나리오를 망치려는 놈들이다."

누구의 사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예상이 가는 쪽은 있었다.

아마 이번 '서유기 리메이크'에 참가한 거대 성운들, 그리고 최상위권 설화방의 세작(細作)들일 것이다.

이번에도 <김독자 컴퍼니>가 '거대 설화'를 차지하게 된다면, 스타 스트림에 벌어질 일이 두려운 거겠지.

쿠구구구구!

순식간에 덮쳐온 안개가 일행들을 삼켰다.

뒤쪽을 돌아보며 경고성을 발한 유중혁의 신형이 먼저 안개에 덮였고, 놀란 신유승과 이길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자님! 내 뒤로 숨어요!"

"뒤로 멀러서서 다가오지 마! 알겠-"

대답할 틈도 없이, 아이들 역시 사라져버렸다.

안개는 아슬아슬하게 내 코앞에서 멈춰 섰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병장기 소리.

어깨 위의 만두가 물었다.

-안 들어갈 건가?

"들어가고 싶지만……."

나는 뒤쪽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며 말했다.

"……아무래도 목적은 나인 것 같은데."

돌아보자, 황풍령의 비탈길을 넘어오는 엑스트라들이 보였다.

황풍마왕의 수하로 분장한 성좌들이 이쪽을 향해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접근하고 있었다.

"저놈이 그 '손오공'인가?"

"느껴지는 격만 봐도 약골이로군."

"약골을 섭외해 놓고 '구원의 마왕'의 별명을 붙여 놓으면 무서워할 줄 알았던 모양이지?"

그제야 나는 이 녀석들의 진짜 목적을 알 것 같았다.

결국 「서유기」의 주인공은 '손오공'.

'손오공'이 죽으면, 서유기는 끝난다.

[일부 심사위원들이 당신의 안위를 걱정합니다.]

[일부 관객들이 당신의 안위를 걱정합니다.]

다가오는 성좌들을 보며 나는 복잡한 심경에 휩싸였다.

(은퇴한 손오공은 싸우기가 싫었다. 왜냐하면 귀찮았으니까.)

['은퇴 패널티'로 당신의 전의가 급감합니다.]

모두 저 빌어먹을 '은퇴' 설정 때문이었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귀찮은 듯 귀를 후빕니다.]

[심사위원, '필마온'이 고상한 얼굴로 책을 펼칩니다.]

[심사위원, '미후왕'이 따분한 듯 하품을 시작합니다.]

『서유기』의 본편에서 하드캐리에 지쳐버린 저 손오공들이, 이런 전개를 달가워할 턱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자비한 병장기를 빼든 엑스트라 성좌들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죽어라!"

(해석 : 하핫, 탈모 원숭이 죽어라)

"죽어라!"

(해석 : Fuc■! 천계의 똥이나 치우는 새■가)

"죽어라!"

(해석 : 돌■가리 원숭이)

저게 어떻게 저렇게 해석되냐고 태클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채널의 메세지가 폭발했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자신의 머리털을 쥔 채 분개합니다!]

[심사위원, '필마온'이 불결한 이야기에 진저리를 칩니다.]

[심사위원, '미후왕'이 저놈들의 목을 따버리길 원합니다.]

[일부 심사위원들이 설화방의 전개에 강력한 개연성을 제공합니다!]

[만약 이 이야기의 향방이 바뀐다면 대량의 가산점이 제공될 것입니다.]

……엥?

[시나리오 마스터의 개인 메세지가 도착했습니다.]

["너 싸움 좀 한댔지?"]

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내레이션이 시작되었다.

(몰려오는 요괴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분명 그는 '은퇴한 손오공'이다. 하지만.)

(그는, 힘을 숨기지 않는 손오공이다.)

밀려오는 메세지와 함께, 눈앞에 새로운 에피소드의 제목이 떠올랐다.


~ Episode 3. 구원의 마왕은 힘을 안 숨김 ~





< Episode 81. 만두의 추억 (4) > 끝

< Episode 82. 이계의 신격 (1) >





달려들던 성좌들은 허공에 떠오른 에피소드 제목을 보며 흠칫했다.

"……뭐야 이 에피소드는? 힘을 안 숨김?"

"그냥 죽여!"

나는 다가오는 병장기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한수영.

새삼 등장인물의 심경이란 게 이런 것일까 싶었다.

작가가 만드는 전개를 따라서, 주어진 역경을 헤쳐가야만 하는 등장인물.

유중혁은 이런 시련을 수십만 번이나 넘어서 왔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유중혁보다 유리한 점이 있다면, 나는 이 시나리오의 작가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쐐애애액!

눈앞에서 두 갈래의 검기가 찢어졌다.

나는 가뿐한 발놀림으로 그 공격을 피해내며 생각했다.

언젠가, 한수영과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작가가 있어. 모든 플롯을 계획해놓고 쓰는 노력파 작가. 그리고 계획 없이 그때그때의 감각에 맡기는 천재 미소녀 작가.

-넌 어느 쪽인데?

-멍청아, 진짜 몰라서 묻냐?

그래서, 지금 저 천재 작가님께서 이딴 시나리오를 쓰셨다는 건데.

[심사위원 '미후왕'이 맥주를 준비합니다.]

[심사위원 '필마온'이 드립 커피를 준비합니다.]

주 독자층의 취향을 한껏 반영해서, 나를 굴리시려고 말이지.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봐, 지금 이건 거래야. 알지?"

[시나리오 마스터가 당신의 말에 고개를 갸웃합니다.]

반응은 저래도 한수영이라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챘을 것이다.

한편, 어느새 성좌들은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버스 타고 왔으면 이제 그만 하차하시지."

하차라니… 이 녀석들 어디서 그런 무서운 말을 배워서는.

"어느 쪽이 하차할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여기서는 [전인화]나 [바람의 길]을 발동할 수 없다. 거기에 덤으로 [부러지지 않는 신념]도 사용할 수 없다.

다른 존재들에게 내가 '김독자'라는 사실이 알려져선 곤란하니까.

하지만 이 시점에서, 저 정도 급을 상대하는 데 굳이 내 주력을 가용할 필요도 없었다.

츠츠츠츠츳…….

왜냐하면 지금 나는 '손오공'이니까.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의 성흔이 일부 허락됩니다.]

내가 정말 평범한 성좌였다면 이 성흔을 감당하는 건 힘들었겟지.

하지만 나는 '설화급 성좌'고, 세 개의 '거대 설화'를 쌓은 존재다.

쿠구구구구구구!

누군가가 외치는 의성어가 아닌, 진짜 천둥이 치는 소리.

허공에서 뇌전이 번뜩이는 순간, 나는 한 줌의 머리털을 뽑아 그대로 허공에 훅 불었다.

[성흔, '신외신(身外身) 술법'을 발동합니다!]

신외신, 몸 밖의 몸.

이것은 쉽게 말하면 손오공의 [아바타] 스킬이었다.

"뭐, 뭐야!"

"크아아아앗!"

순식간에 불어난 분신 손오공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더니, 무지막지한 주먹을 휘둘러 성좌들을 패대기치기 시작했다.

날아간 분신들의 머리 위에 내레이션 말풍선이 떠올랐다.

("구원의 마왕은!")

("힘을!")

("안 숨김!")

아무래도 자기가 내레이션이란 걸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츠츠츠츠츠츠…….

겨우 술법 하나를 빌려 썼을 뿐인데, 나도 전신이 온전치 않았다. 하필 몸이 안 좋을 때라 더 그랬다.

……빌어먹을, 유중혁 이 자식은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당신의 화신체 회복이 지연됩니다!]

[화신체의 상태가 악화되고 있습니다!]

나는 여전히 뿌옇게 낀 안개 쪽을 보며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은퇴한 손오공은 무조건 강해 보여야 한다.

그리고 절대로 자신의 전력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나는 유중혁이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내가 아는 제일 멋있는 인간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빌어먹을…… 후퇴다!"

과연 작전이 먹혔는지, 위압감을 느낀 성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시나리오에서 이탈합니다!]

순식간에 주변에 남은 것은 성좌들이 벗어놓고 간 빈 껍데기들뿐이었다.

"으, 으으으……."

하지만 껍데기에도 자아는 있었다.

저들은 본래 이 세계의 '엑스트라' 요괴를 담당하는 존재들이었다.

순간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혼돈이 당신의 심장에서 꿈틀거립니다.]

[이계의 신격화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성흔, '화안금정 Lv.???'이 강제로 발동합니다!]

붉게 타오르는 시야화 함께, 쓰러진 요괴들의 모습이 보였다.

【여긴어디여긴어디여긴어디】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또야또야또야또야또야또야】

고통스러운 표정의 요괴들이 일제히 고개를 바닥에 처박은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다.

이미 '환생자들의 섬'에서도 나는 저들과 비슷한 존재들을 보았다.

그들은 이 『서유기 리메이크』의 설화방에서 이용되는, 소위 '부족한 개연성'을 채우기 위해 동원되는 존재들이었다. 다른 이야기의 엑스트라로 소비되는 삶을 영원히 반복해야만 하는 소모품들.

문제는, 저것들의 '진짜 정체'가 대체 뭐냐는 것이었다.

[당신의 심장에서 혼돈의 힘이 꿈틀거립니다!]

울컥, 하고 솟아오르는 통증.

나는 비틀거리며 요괴들 중 하나를 향해 다가갔다.

그 미끈한 몸피에 손을 대는 순간, 녀석의 형태가 변했다.

두족류의 촉수 괴물.

머릿속에서 '멸살법'의 페이지가 넘어갔다.

「일부 성운들은, 급이 낮은 '옛 존재'의 허물들을 일부러 양식하기도 한다.」

「그들을 제물로, 시나리오에 필요한 개연성을 감당하는 것이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분명, '멸살법'에 그런 문장이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끝내 그 '성운'이 어디인지는 나오지 않았었는데…….

설마, 그게 <황제> 였다고?

[손 행자는 멈추라!]

허공을 올려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천계의 성좌들 중 하나가 강림해 있었다. 이름은 잘 모르겠다. 또 태백금성이라든가 영길보살이라든가 하는 나부랭이일 것이다. <황제>에는 그런 비슷한 이름의 성좌들이 수백 명이나 있으니까.

[그 요괴들은 영취산 기슭에서 도를 닦던 짐승들이다! 그런데 부처께서 계신 대뇌음사 유리 밑의 기름들을 훔쳐 먹다 요괴가 되어버린 것이지. 그대는 선량한 마음으로 그들을 용서하여 내게 그들을…….]

그렇게 생각하니, <황제> 측에서 저 요괴들을 수거해가는 게 납득이 갔다.

<황제> 입장에서, 저들은 일종의 자원인 셈이다.

시나리오를 굴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자원.

[일부 심사위원들이 원작의 반영에 만족합니다.]

[가산점 5점을 획득합니다.]

[심사위원, '미후왕'이 지루한 듯 하품을 합니다.]

퇴치된 요괴가 죽거나 신선들의 소유로 돌아가는 것.

이것은 분명한 원작의 반영이었고, 수천 년이나 변하지 않은 흐름이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정당한 흐름이자 『서유기』의 법칙이라면.

【나는누구나는누구나는누구나는구누】

그러면, 저 요괴들의 삶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의아하게 바라봅니다.]

내가 한참이나 대답이 없자, 영길보살이 입을 열었다.

[흠흠, 아무튼 그런 고로…… 이 요괴들은 내가 받아가도 되겠지?]

결국 내레이션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손오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영길보살을 향해…….)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말했다.)

허공에서 시나리오 마스터의 무시무시한 시선이 느껴졌다. 대체 뭔 생각으로 그런 대답을 했냐는 듯한 질책의 시선.

놀란 것은 영길보살도 마찬가지였다.

[……무어라?]

"어차피 당신들은 이 녀석들을 제대로 돌봐주지도 않잖습니까."

[그, 그게 무슨 소리인가.]

"당신들은 또 이 요괴들을 다른 설화방의 엑스트라로 동원시킬 뿐이겠죠."

[심사위원, '미후왕'이 당신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심사위원, '필마온'이 읽던 책을 덮고 당신을 바라봅니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내 말에 당황한 영길보살이 소리쳤다.

[그냥 요괴들일세. 위대한 뜻을 좇는 그대가 어째하 하찮은 미물들의 행사에 신경을 쓰는가?]

"그들도 분명 '시나리오'를 수행하는 이들입니다. 부처의 화두나 우주의 진리를 논하며 참된 길을 좇는다는 당신들이, 어째서 인간 아닌 것들의 삶에 대해서는 그리 무심하십니까?"

그 말을 하며, 나는 한수영에 관해 생각했다.

한수영은 이 시나리오의 '결말'을 생각해 두었을까.

[다수의 관객들이 당신의 발언에 흥미를 갖습니다.]

한수영이 본인 입으로 말한 것처럼, 녀석은 그때그때의 감각에 의존해서 서사를 구성하는 '천재형 작가'다. 하지만 그렇다는 것은, 매번 독자들의 반응을 과도하게 의식하며 창작의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시나리오 마스터가 당신의 발언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마 급하게 시나리오에 참가한 한수영에겐 결말을 구성할 시간도, 테마를 확립할 시간도 모자랄 것이다.

그저, 관객들을 자극시킬 이야기를 짜는 것만도 버거울 테니까.

그런데 만약, 그런 한수영을 내가 돕는다면 어떨까.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요괴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이 녀석들은, 제가 대려가겠습니다."

경약한 영길 보살의 표정과, 혼란에 빠진 요괴들의 모습이 보였다.

세상에는 작가나 독자의 입장에서만 보이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등장인물이 되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호승심을 좋아합니다.]

[심사위원, '필마온'이 당신의 호승심을 좋아합니다.]

[심사위원,' 미후왕'이 당신의 호승심을 좋아합니다.]

[가산점 150점이 추가되었습니다!]

[해당 설화방의 테마가 격변하기 시작합니다!]

요괴들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새로운 '거대 설화'의 가능성이 발아합니다!]

[새로운 '거대 설화'에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이 발생했습니다!]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메세지는 끝이 아니었다.

[흑부리 왕과의 약속이 발동합니다!]

[약속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해당 설화에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을 30% 이상 늘려야 합니다.]

[현재 해당 설화에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0.003%입니다.]

……0.003%?

말도 안 되는 비율에 좌절하는 사이, 허공에서 영길보살이 소리쳤다.

[네 이놈! 정말 오만방자하구나! 네깟 놈이 정말 손 행자라도 되는 줄 아느냐?]

그새 자신의 역할을 잊어버렸는지, 영길보살이 나를 향해 강력한 격을 쏘아냈다. 하필 제천대성의 개연성을 감당한 직후라, 내겐 그 힘을 받아칠 만한 기력이 없었다.

뇌전처럼 쏘아진 격의 파장이 나를 향해 내리꽃히려는 순간.

"너 꼭 독자 아저씨처럼 말하네?"

목소리와 함께, 허공의 뇌전이 그대로 갈라졌다.

주변을 보니 어느새 모래바람이 가라앉아 있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일행들.

그리고 내 앞을 지키듯 가로막은 유중혁이 있었다. 하늘을 노려보던 유중혁이 차르르 전격을 훑어낸 [흑천마도]로 천공을 가리켰다.

"두 먼 말하진 않겠다. 꺼져라."

[이, 이놈들…… 이 치욕은 반드시…….]

기겁한 영길보살이 비지땀을 흘리며 사라지자, 유중혁이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흑천마도]는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헛짓거릴 하면 죽여버린다고 했을 텐데."

"어……, 죄송합니다."

"황풍마왕은 내가 쓰러트렸다."

"……잘하셨습니다."

나는 바닥에 쓰러진 요괴들을 하나둘 수습했다.

【당신누구당신누구당신누구】

그들은 나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내 손끝에 다가와 킁킁 냄새를 맡고는 부리나케 달아났다. 그리고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먼 나무 둥치에 숨은 채 이쪽을 훔쳐보았다.

[버림받은 일부 요괴들이 당신을 따릅니다.]

유중혁이 말했다.

"무의미한 짓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

"저들은 어차피 이 설화방이 끝나면 다시 <황제>로 회수된다."

"알고 있습니다."

"저들에겐 이미 수천 번이나 일어난 일이다. 네 호의는 저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다시 똑같은 시나리오에서 똑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저들은 너를 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에겐."

나는 유중혁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슬픔이 없는 것입니까?"

나를 보는 유중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그런 유중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느덧 94번 시나리오에 이르렀기 떄문일까. 유중혁의 얼굴에는 이제 제법 많은 흉터들이 생겼다.

"네놈……."

유중혁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아이들이 다가왔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일행이 하나 늘어 있었다.

"역시 우리 사부…… 아니, 여기선 사형이지 참. 아무튼 개 멋있어! 방금 기 기술 뭔데! 나도 알려줘 봐요!"

그 활기찬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심장이 아려왔다.

그렇구나, 네가 '사오정'이었구나.

['플레이어2'님께서 일행에 합류하였습니다!]

"하이, 손오공. 너 주둥이 좀 털더라?"

커다란 나비가 그려진 티셔츠에 풍선껌을 짝짝 씹는 이지혜가 내 어깨를 툭치며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마침내 『서유기 』의 주역들이 보였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런 이지혜를 향해 마주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갑자기 땅이 꺼지는 것처럼 상체가 추락했다.

"어? 이거 왜이래?"

쓰러지는 내 몸을 이지혜가 황급히 붙들었다.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마기와 함께, 사위가 급격하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당신의 화신체가 심하게 망가진 상태입니다!]

[이계의 신격화가 가속됩니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71%]

아무래도, 내 행복한 여정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




「"이 녀석들은, 내가 데려가겠습니다."」

패널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한수영은 입을 딱 벌렸다.

바닥을 데구르르 구르는 레몬 사탕.

마침 근처에서 청소를 하던 이수경이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이니?"

그때까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던 한수영이 입술을 뻐금거렸다.

"아니, 이 녀석……."

그녀는 홀로그램 창에 떠올라 있는 인물 목록을 들여다보았다.

[플레이어1, '유중혁'님께서 '저팔계'역할을 수행 중입니다.]

[플레이어2, '이지혜'님께서 '사오정'역할을 수행 중입니다.]

[플레이어3, '이길영'님꼐서 '삼장 법사'역할을 수행 중입니다.]

.

.

[플레이어8, '빛과 어둠의 감시자'님께서 '손오공'역할을 수행 중입니다.]

한참이나 그 목록을 들여다보던 한수영이, 갑자기 자신의 눈두덩을 문지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한수영이 "아아아아"소리를 지르더니 이내는 끅끅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이수경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염룡아 너니?"

"아니, 아니야. 나 한수영 맞아. 등신 같은 한수영."

다시 눈을 뜬 한수영의 뺨은 옅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떠오르는 홀로그램 메세지들.

[해당 인물의 발언에 다수 관객들이 환호합니다.]

[일부 심사위원이 '클레셰 비틀기'에 가산점을 부여합니다.]

[현재 해당 설화방의 랭킹은 25위입니다.]

"건방진 자식, 누가 도와달래?"

키패널을 누르는 한수영의 손가락이 묘하게 경쾌해 보였다.

"1등은 내가 제일 잘하는 거야, 멍청아."





< Episode 82. 이계의 신격 (1) > 끝

< Episode 82. 이계의 신격 (2) >





홍삼을 달인 것 같은 깊은 씁쓸함이 입안 가득히 퍼졌다. 
나도 모르게 냠냠 입맛을 다시자,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정신 차릴 것 같은데? 이것도 좀 넣어 봐요.” 
누군가가 내 눈꺼풀을 강제로 벌리더니 안약 같은 것을 넣었다. 
싸아한 느낌이 안구 가득히 번지며, 갑자기 정신이 번쩍 깨었다. 
[새로운 영약의 섭취로 화신체의 회복이 빨라집니다.] 
시야가 돌아왔을 때, 나는 말의 배 위에 누워 있었다. 
푸르릉, 하고 거친 숨을 뱉어내는 삼장 법사의 백마― 키메라 드래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 일어났다!” 
걱정스럽던 이길영과 신유승의 얼굴이 밝게 펴지는 것이 보였다. 내 눈꺼풀을 강제로 벌리고 있던 이지혜도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버스도 못 탈 만큼 허약하면 어떡해?” 
“흠흠, 스승을 보필해야 할 녀석이 이렇게 약골이어서야 되겠느냐?” 
이길영이 허리춤에 손을 척 얹은 채 헛기침을 했다. 
쓴웃음을 지으며 상체를 일으키는데, 신유승이 나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갑자기 쓰러지셔서······.” 
“덕분에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 영약들은······.” 
나는 주변에 놓인 영약의 잔재들을 바라보았다. 
몇 개는 낯설었지만, 내가 아는 것도 있었다. 
붉은 병에 든 안약. 그것은 삼화구자고(三花九子膏)라는 안약으로, 황풍마왕과의 격전에서만 얻을 수 있는 서유기의 보물이었다. 
나는 조금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물었다. 
“······이걸 제게 쓰신 겁니까?” 
생긋 웃는 신유승의 표정에서 한순간 유상아가 보였다. 
삼화구자고. 그저 눈에 넣는 것만으로도 전신의 활력을 돋구고 안력을 확장시키는 영약. 
[일부 심사위원들이 원작의 반영에 만족합니다!] 
[가산점 10점이 추가되었습니다!] 
실제로 원작에서도 이 ‘삼화구자고’를 사용하는 것은 손오공이다. 
하지만······ 본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굳이 나에게 주다니. 어쩐지 죄책감이 밀려왔다. 
문득 오른쪽 손목이 저려와서 돌아보니 그곳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약해 빠진 건 그놈과 똑같군. 화신체가 왜 이 모양인 거지?” 
유중혁이 내 오른 손목을 터트려버릴 듯 쥔 채 맥을 짚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설화를 제외하면 이 녀석이 제일 의술에 뛰어나긴 하다. 
유중혁은 인상을 잔뜩 쓴 채 나를 진단했다. 
“오장육부의 혈도가 멀쩡한 게 하나도 없군. 시나리오에 참가한 게 용한 상태다.” 
“······그렇습니까.” 
“성좌가 이런 꼴이 되는 것은 드물 텐데. 네놈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건가?” 
나는 놀라서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내가 걱정되어서 이런 질문을 할 턱은 없고······ 아까부터 한쪽 손으로 [흑천마도]의 손잡이를 꾹 쥐고 있는 걸 보니 목적은 명백해 보였다.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이번 ‘거대 설화’가 급해서 미처 화신체를 돌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일행들에게 짐이 되면 그 자리에서 참할 것이다.” 
유중혁이 내 손목을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까운 영약만 버렸군.” 
성큼성큼 멀어진 유중혁은 인근의 바위에 앉아 다시 [흑천마도]를 닦기 시작했다. 한 번 부러진 칼이다 보니 금세 내구도 손상이 상당히 진행된 듯했다. 
그 모습을 보던 이지혜가 말했다. 
“우리 사부 아니, 사형 멋있지? 말은 저렇게 해도 당신한테 영약 주자고 한 사람이 저 사람이야.” 
······저 유중혁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놈은 내가 ‘빛과 어둠의 감시자’가 아니라 ‘김독자’였다고 해도······. 
―저놈도 네놈 생각만큼 냉혈한은 아니다. 
귓가로 들려오는 만두 [999]의 목소리. 
「“아직도 몇 편의 글줄로,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또한 [999]의 말이었다. 
그 말이 맞다.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몇 번이고 다시 그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한 사람의 삶은 언제나 그의 이야기보다 크다는 것을. 
「유중혁은 언제나 동료들의 뒤에 있었다.」 
‘멸살법’엔 수많은 문장들이 있지만, 그것이 유중혁이 보낸 시간의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3회차, 4회차, 5회차······ 유중혁은 언제나 저만큼 떨어진 자리에서 동료들을 보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을 보호했고, 적들과 맞섰다. 
「“유중혁, 지키고 싶었던 것들은 모두 지켰나?”」 
언제나,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했다. 
그럼에도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 
그의 다짐이 어떤 것인지, 아마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칼을 가는 유중혁에게 신유승이 다가갔다. 
“중혁 아저씨.” 
유중혁이 특유의 무심한 눈길로 고개를 들자, 아이의 작은 손이 유중혁의 뺨에 닿았다. 자세히 보니, 유중혁의 볼에 투명한 크림 제형의 연고가 발려 있었다. 
“······무슨 짓이지.” 
“덧나니까 가만히 있어요. 아, 고개 돌리지 마세요!” 
“이런 것 따위 바르지 않아도······.” 
간지럽힘이라도 당하는 맹수처럼 유중혁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녀석을 제지한 것은 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설화 언니가 꼭 부탁했어요. 아저씬 이런 거 신경 안 쓰니까 옆에서 챙겨 줘야 된다고.” 
이설화의 이름에 유중혁의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한참이나 망설이던 유중혁은 어정쩡한 자세로 다시 엉덩이를 바위에 붙이더니,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10초 안에 끝내라.” 
생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인 신유승은 신나서 연고를 문질러대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입술을 열심히 움찔거리면서도 딱히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신유승의 손이 스친 곳마다 유중혁의 상처들이 빠르게 아물고 있었다. 
역시 이설화의 연고가 대단하긴 하다. 원작에서는 [양산형 제작자]가 저 연고를 수입해 아예 화장품으로 판매하기도 했다. 이름이 뭐였더라. 순백 설화 크림이었나. 
“이글이글.” 
오랜만에 의태어가 곁에서 들려오길래 돌아보니, 말 그대로 이글거리는 눈빛의 이길영이 그곳에 서 있었다. 
이길영의 눈동자가 사시라도 생긴 것처럼 유중혁과 신유승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오호라. 
이윽고 뭔가를 결심한 듯, 이길영이 거친 걸음걸이로 유중혁과 신유승을 향해 다가갔다. 
“야, 신유승!” 
그 외침에 유중혁과 신유승이 동시에 이길영을 올려다보았다. 
내 곁에 붙어선 이지혜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래, 길영아. 드디어 각성했구나.” 
[심사위원, ‘석가의 후계’가 어린 삼장들을 좋아합니다.] 
[일부 관객들이 귀여운 삼장들의 모습을 좋아합니다.] 
[가산점 20점이 추가되었습니다.]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이길영은 쏟아지는 시선 앞에서 입술만 뻐끔거렸다. 막상 저지르긴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얼굴이 빨개진 이길영이 결국 빽 소리를 질렀다. 
“독자 형 연고는 내가 발라줄 거다!” 
그제야 자신이 할 말을 깨달았다는 듯, 이길영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지금 넌 저 시커먼 놈 줄 잡은 거야!” 
어느새 달려간 이지혜가 이길영의 뒤통수를 갈겼고, 이길영은 그대로 바닥에 코를 박고 엎어졌다. 
“거기서 김독자가 왜 나와 멍청아!” 
이지혜가 이길영의 귀를 잡아끌고 훈계를 시작했다. 
그런 이길영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연고를 바르는 신유승. 
그리고 뺨에 묻은 연고가 어색한 듯 몇 번이나 뺨을 문지르는 유중혁······. 
「김독자는 그 모든 풍경을 가만히 웃으며 바라보았다.」 
[‘제4의 벽’이 조금씩 두꺼워집니다.] 
「마치, 먼 곳의 정경을 바라보듯이.」 
품속에서 꺼낸 스마트폰이 멋대로 문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위로 떠오르는 문장들, 그리고 일행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나는. 
「어쩌면 그 순간, 김독자는 처음으로 뭔가를 결심했다.」 
* 
이계의 신격화는 점점 더 빨라졌다. 71%였던 것이 어느덧 75%가 되었고, 다시 80%를 넘어서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런데 85%를 넘어설 즈음에 이르러, 상승 속도는 갑자기 정체되기 시작했다. 
모두, 일행들이 챙겨준 영약 덕분이었다. 
“자, 이것도 먹고. 그리고 이것도.” 
내 감염 속도에 반비례하듯, 일행들의 클리어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과연, 역시 94번 시나리오의 유중혁과 이지혜 콤비는 대단했다. 
“사형 저쪽!” 
“아래다.” 
[파천검도]의 사제 관계 답게, 둘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대부분의 적들은 채 접근하거나 흉계를 꾸미기도 전에 아작이 났고, 심지어는 원작의 상성을 뛰어넘는 힘으로 찍어 눌러 버릴 때도 있었다. 
[현재 서유기 진행도 : 43%] 
[설화방 랭킹이 상승했습니다!] 
[현재 해당 설화방의 랭킹은 21위입니다.] 
[다수의 관객들이 ‘패왕 저팔계’를 연호합니다!] 
[심사위원 ‘금신나한’이 미소녀 검객이 된 자신의 모습을 흐뭇해합니다.] 
졸지에 나처럼 할 일이 없어진 신유승이 중얼거렸다. 
“희원 언니랑 현성 아저씨도 같이 왔음 좋았을 텐데.” 
정희원과 이현성은 함께 오지 못한 듯했다. 
아직 이현성은 깨어나지 못했겠지. [강철화]의 최종 국면에 접어들었으니 꽤 오래 잠들어 있을 법도 했다. 하지만 목숨에 지장은 없을 것이다. 
진짜 문제는 깨어난 다음부터니까. 
여하튼, 이 기세라면 열흘도 안 돼서 시나리오가 끝날 수도 있겠는데.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다. 
[현재 서유기 진행도 : 64%] 
[현재 해당 설화방의 랭킹은 15위입니다.] 
[상당수의 경쟁자들이 해당 설화방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사이 내가 한 일은 버스를 타고, 늘어지게 잠을 자고, 일행들과 잡담을 나누고, 영약을 엄청나게 처먹은 것이 전부였다. 
[당신의 화신체가 눈에 띄게 회복되었습니다!] 
[당신의 화신체에 조금씩 활력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볼에 살이 좀 오른 것 같았다.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내 모습을, 이지혜와 신유승 그리고 이길영이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포동포동하게 자라난 돼지를 보며 기뻐하는 농부들처럼. 
“이것도! 이것도 먹어!” 
“여기 더 드세요.” 
······대체 내가 먹는 걸 왜 저렇게 기뻐하는 걸까. 
곁에서 이지혜가 푸념하며 웃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잘 먹는 거 보니까 보기는 좋네. 그 인간도 당신처럼 잘 먹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시간은 또다시 흘러갔다. 
“크윽! 두고 보자 저팔계!” 
몇 번인가 다른 배역으로 등장한 한명오를 만나기도 했고. 
신선처럼 수염을 기른 정체불명의 조력자를 만나기도 했다. 
[흠흠, 나는 이 산의 신령이다. 그대들이 천축을 향한 숭고한 여정에 올랐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그대들을 기다렸다가 약간의 도움을 주기 위해······.] 
환한 금발 머리에 덕지덕지 수염을 붙인 녀석을 향해, 아이들이 외쳤다. 
“하영 언니!” 
“하영이 형!”





< Episode 82. 이계의 신격 (2) > 끝

< Episode 82. 이계의 신격 (3) >





[어험, 나는 하영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주변을 지나가던······ 젠장, 거기 손 행자. 이리 와서 영약이나 가져가게.] 
연기를 포기한 금발 신선이 불평과 함께 나를 불렀다. 
서유기엔 이딴 설정이 많다. 
[일부 심사위원들이 뭐 이런 것까지 반영하냐며 불평합니다.] 
[가산점 1점이 추가되었습니다!] 
어디선가 나타난 신령이 일행들을 도와주고, 모든 것이 부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 몰개연성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지나칠 정도여서, 어쩌면 서유기야말로 최초의 ‘기연 몰아주기 소설’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나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매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라니까 할뿐.] 
장하영은 누굴 생각하는지 원망스런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넌 진짜 운 좋은 줄 알거라. ······진짜 내가 늦게 오지만 않았어도 ‘구원의 마왕’ 역은 내가······.]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인데, 아무래도 이 자리는 본래 장하영의 것이었던 모양이다. 
“······왜 그런 게 되고 싶으셨습니까?” 
장하영은 아련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피식 고개를 저었다. 
[뭐, 너 같은 건 당연히 모르겠지. ‘구원의 마왕’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스스로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아 이렇게 말해보았다. 
“저도 구원의 마왕이 참 좋습니다.” 
[오, 그래? 뭐 들은 설화 있어?] 
“예를 들면 마계에서 얻은 ‘공단의 해방자’라든지.” 
[오옷?] 
그게 스위치가 되었는지, 장하영은 갑자기 장광설을 떠들기 시작했다. 
대충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 내가 죽어가던 ‘구원의 마왕’을 구해냈거덩? 그러니까 따지면 난 구원의 마왕의 구원자라는 거지. 어때, 재밌지? 재미없어? ······아무튼, 우리는 어둠 뿌리 밑에서 의기투합하여 형제의 맹세를 했지. 함께 힘을 모아서 저 악마 공작으로부터 [공단]을 해방시키자고······!] 
······대충 내용은 맞는데 왜 소설을 듣는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군. 
[그때 ‘구원의 마왕’이 우수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지. “그대여, 기꺼이 나를 위해 싸우는 투사가 되어라.”] 
이런 엉뚱한 이야기를 마구 떠들어도 괜찮은 건가 싶었는데, 허공에 메시지가 잔뜩 떠올라 있었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신선의 헛소리를 비난합니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마계에서 제일 활약한 것은 자신이라고 주장합니다!] 
[심사위원, ‘미후왕’이 ‘긴고아의 죄수’를 비웃습니다.] 
[다수의 관객들이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에 관심을 갖습니다.] 
이쯤 되니 이게 『서유기』인지 『김독자 컴퍼니의 얼렁뚱땅 대모험』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한수영이 노리는 것도 그것일지 모른다.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들이 강해질수록, 「서유기 리메이크」를 통해 얻게 되는 우리의 ‘거대 설화’도 더욱 강고해질 테니까.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들이 <스타 스트림>에 입소문을 타고 번집니다.] 
뭐, 그게 올바른 판단일지는 좀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지혜가 지루한 듯 하품을 하며 말했다. 
“아, 그만하고 빨리 영약 줘요.” 
[······여기.] 
* 
그렇게 일주일이 더 흘렀다. 
우리는 무수한 요괴들을 물리쳤고, 다시 그 요괴들을 회수하기 위해 나타난 <황제>의 성좌들과 마주쳤다. 
[방금 그대들이 해치운 요괴들은 내가 뒤뜰에서 키우던······.] 
“꺼져라.” 
유중혁은 나를 대신해 그들을 퇴치했다. 패왕 저팔계와 맞서고 싶지는 않았는지, <황제>의 성좌들은 불만을 표시하면서도 순순히 돌아갔다. 왜 유중혁이 저 역할을 자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5%] 
[현재 이계의 신격화 속도가 둔화된 상태입니다.] 
그동안 내 이계의 신격화 진척은 크지 않았다. 
반면, 일행들의 서유기 진행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현재 서유기 진행도 : 94%] 
마침내 90%대를 돌파한 진행도. 
이지혜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와, 진짜 힘드네.” 
“오늘은 특히 그렇군요.” 
“뭔 소리야, 넌 버스만 탔잖아.” 
나는 이지혜의 핀잔을 무시하고 설화방 랭킹을 확인했다. 
[현재 해당 설화방의 랭킹은 4위입니다.] 
[득표수 : 21912] 
[다수의 관객들이 해당 설화방의 놀라운 성장력에 경탄합니다.] 
열흘도 채 안 되어 그 쟁쟁한 방들을 제치고 무려 4위에 랭크되다니. 
인정하기는 싫지만 한수영의 재능이 존경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재 랭킹 1위는 『진(眞) 서유기』입니다.] 
[득표수 : 30408] 
이런 속도라면 압도적인 1위로 달리고 있는 페이후를 따라잡는 것도 불가능은 아닐 듯했다. 
하지만 김칫국을 마시기엔 일렀다. 만약 우리가 페이후의 방을 제치고 1등을 한다고 해도, 승부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결국 최종 우승은 총 득표수와 심사위원들의 판단이 맞물리며 결정되기 때문이다. 
나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은 익명의 ‘관객’으로 표시될 뿐인 성좌들. 
[일부 관객들이 당신에게 적의를 품고 있습니다.] 
분명 <황제>는 우리의 랭킹 상승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황제>는 자신들의 거대 설화에 대한 자부심이 어마어마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대 설화’를 약소 성운이 계승하는 일을 절대 용납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녀석들에겐 우리에게 불만을 가질 이유가 충분했다. 
예를 들면. 
“엄청 많네요.” 
지금 우리를 따라오고 있는 저 ‘요괴’의 무리들. 
산의 오솔길을 가득히 메운 ‘요괴’의 대열은, 이제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모두, 우리가 살려준 요괴들이었다. 
[혹부리 왕과의 약속이 진행 중입니다.] 
[약속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해당 설화에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을 30% 이상 늘려야 합니다.] 
[현재 해당 설화에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15.772%입니다.] 
서유기가 끝나가는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이계의 신격’들의 지분은 낮았다. 
저렇게 많은 요괴들을 구했는데도 15%대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들은 숫자만 많지, 우리 이야기에서 큰 비중은 없었다. 
아직 ‘서유기’의 본질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로 무대에 참가하고 있을 뿐이니까. 
그나마 저들의 지분이 15%까지 상승할 수 있었던 것은 다수의 관객들이 저 기현상에 관심을 기울여준 덕분이었다. 
[다수의 관객들이 ‘순례의 길’을 감탄하며 바라봅니다.] 
[일부 심사위원들이 새로운 서유기의 가능성에 주목합니다.] 
[소수의 심사위원들이 원작의 왜곡을 우려하며······.] 
심지어 저 긴 요괴의 행렬에는 별명까지 붙었다. 
순례의 길. 
무수한 요괴들이 존재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나선 천축으로의 여정. 
[일부 관객들이 ‘순례의 길’을 관람하기 위해 해당 시나리오에 참가합니다!] 
심지어 ‘서유기’의 추천 게시판에는 우리 설화방의 추천글도 등장했다. 
[멋진 저팔계와 사오정, 귀여운 삼장법사, 연약한 손오공] 
작성자 : uri9158 
―추천평 : 저팔계는 멋있고 삼장들이 귀여움. 
[은퇴한 SSSSS급이 되었다, 양산형 설화인 줄 알았던 수작] 
작성자 : 비양산형 제작자 
―추천평 : 사실 서유기의 진짜 주인공은 ‘요괴’다. 손오공도, 저팔계도, 사오정도 모두 ‘요괴’다. 그럼에도 서유기의 테마는 인본주의에 가까운데, 그것은 원작의 모든 요괴들이 지극히 인간적인 방식으로 인간화(人間化)되어있기 때문이다. 즉, 기존 서유기의 요괴들은 요괴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인간으로 살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뭔가 작성자들의 이름들이 익숙한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아무튼 영문 모를 추천도 많이 받았다. 
“쟤들, 계속 따라오네요······.” 
나와 함께 일행의 후미에서 걷던 신유승은 요괴들이 신경 쓰이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망설이던 신유승이 발치에서 강아지처럼 쫄랑거리는 요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안녕?” 
혹시나 요괴가 신유승을 공격할까봐 조금 긴장했는데,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웅크린 요괴가 신유승의 손끝에 코를 비볐다. 
녀석은 더 이상 내가 알고 있던 무시무시한 ‘이계의 신격’이 아니었다. 
【따뜻해따뜻해따뜻해따뜻해따뜻해】 
그들은 신유승이 테이밍할 수 있는 ‘괴수종’이 아니었다. ‘이계의 신격’에겐 그런 친절한 생물 계통이 지정되지 않으니까. 그들은 그저 시나리오의 바깥에서, 쓸모를 잃어버린 무엇이었다. 
그럼에도 신유승은 그들을 향해 진지한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유승유승유승유승유승유승】 
【나도이름나도이름나도이름나도이름】 
이 아이는 저 말들을 들을까. 
저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고, 저들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무섭지 않으십니까?” 
“전혀요. 계속 보니까 귀여운 거 같기도 해요. 그리고······.” 
문어처럼 작은 촉수들이 신유승의 손등을 강아지풀처럼 간지럽혔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도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적이 있거든요.” 
순간 찡, 하고 짧은 두통과 현기증이 동시에 몰려왔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가 강제로 발동합니다!] 
「어쩌면, 혹시 이번에도 있을지 모르니까.」 
결연한 눈으로 요괴들의 대열을 보는 신유승을 보며,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시나리오를 진행 중이신 성좌님들께 알립니다.] 
갑작스런 방송이 흘러나왔다. 
주변의 대기가 흔들리고, 요괴들이 불안한 기색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 
【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 
곳곳에서 끓어 오르는 ‘이계의 신격’의 비명들. 
허공에 투명한 형태로 강림한 대도깨비의 모습이 송출되고 있었다. 
[슬슬 「서유기 리메이크」 시나리오도 종막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상위권과 중위권의 점수 차이가 많이 벌어진 상태라, 많은 성좌님들께서 시나리오를 반쯤 포기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불길한 서두였다. 
[<스타 스트림>의 기회는 공평합니다. 노력하는 미꾸라지는 용이 될 수 있고, 창공을 지배하던 드래곤도 추락할 수 있습니다.] 
잠깐이지만, 대도깨비의 시선이 우리를 향한 것도 같았다. 
[그러니 이대로 끝내기엔, 역시 조금 아쉽죠.] 
“어? 뭐야!” 
이지혜의 외침과 함께, 주변의 정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환한 빛살과 함께, 일행들과 요괴들은 어느새 거대한 강변 앞에 도착해 있었다. 
[설화방이 통합됩니다!]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가 ‘거대 설화’에 포함됩니다.] 
(손오공은 이 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통천하(通天河)의 서쪽 기슭. 이곳은 천축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대도깨비가 웃었다. 
[단순히 득표수만으로 1등을 결정하는 것은 재미가 없지요. 어떤 ‘설화’가 더 강한지를 가리는 것은, <스타 스트림>의 당연한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다수의 관객들이 환호하며 동의합니다!] 
[소수의 관객들이 입맛을 다십니다!] 
[일부 심사위원들이 도깨비의 개입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메시지와 함께 강변의 곳곳에서 거대한 빛줄기가 번쩍였다. 
[421번 설화방이 통합되었습니다!] 
[『내 손오공은 어디서부터인지 잘못되었음』이 ‘거대 설화’에 포함됩니다.] 
그곳에, 우리와 같은 일행들이 서 있었다. 
깜짝 놀란 이길영이 외쳤다. 
“뭐야 저것들은!” 
손오공, 삼장법사, 저팔계, 사오정, 그리고 용마로 구성된 일행들.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설화방에서 온 서유기 원정대였다. 
[7133번 설화방이 통합되었습니다!] 
[『손오공인 줄 알았는데 평범한 원숭이였다』가 ‘거대 설화’에 포함됩니다.] 
[6523번 설화방이 통합되었습니다!] 
[『전지적 손오공 여의봉 시점』이 ‘거대 설화’에 포함됩니다.] 
쏟아지는 빛줄기와 함께 무수한 ‘손오공’들이 강변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격이 약한 이들도 있었고, 강한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1번 설화방이 통합되었습니다!] 
[『진(眞) 서유기』가 ‘거대 설화’에 포함됩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격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초정예 성좌들로 구성된 설화방. 
눈에서 새파란 귀화(鬼火)를 흩뿌리는 랭킹 1위의 손오공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역시 이렇게 되는군.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다. 
이대로라면, 페이후 쪽은 우리에게 득표수에서 밀리게 될 테니까. 
[일부 심사위원들이 당신의 안위를 걱정합니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전개에 분개합니다!] 
[심사위원, ‘필마온’이 시나리오의 결말을 궁금해합니다.] 
[심사위원, ‘미후왕’이 다 쓸어버리라고 명령합니다!] 
심지어는 주요 심사위원들도 우리 측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상황. 
저쪽에서도 사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수를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메인 시나리오의 내용이 갱신되었습니다!] 
대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유기 리메이크」의 마지막 이벤트를 시작합니다.]





< Episode 82. 이계의 신격 (3) > 끝

< Episode 82. 이계의 신격 (4) >





[「서유기 리메이크」의 마지막 이벤트를 시작합니다.] 

허공의 패널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정희원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도 저곳에 있고 싶었다. 일행들과 함께 싸우고 싶었다. 

“······현성 씨.” 

하지만 그녀가 갈 수 없었던 이유는, 지금 침대에 누운 채 잠들어 있는 사내 때문이었다. 

전신이 강철로 덮인 채, 심장 박동이 사라진 이현성. 

그는 ‘성마대전’의 충격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다. 

곁에 놓인 거울에 반쯤 은빛으로 덮인 정희원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성마대전’의 후유증이었다. 

―넌 그냥 여기서 쉬어. 어차피 줄 배역도 없다고. 

그것이 한수영과 일행들의 배려라는 것을 정희원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 

정희원은 ‘성마대전’에서 너무 큰 상처를 입었다. 몸도, 마음도 모두 폐허였다. 김독자를 또 구하지 못했고, 그녀를 지키려던 사내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김독자 컴퍼니>의 가장 날카로운 검은 그렇게 무디어졌다. 

침상 한쪽 구석에 놓인 [심판자의 검]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근처에 ‘악’이 있을 때만 떨리는 검. 김독자가 선물해준 검이었다. 

검의 칼날은 정확히 패널의 화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쩌면 검도 아는 것이다. 지금 그녀가 있을 자리는 이곳이 아니라는 것을. 

정희원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달래듯 검의 손잡이를 감싸 쥐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안타까운 눈으로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성마대전의 결과로 <에덴>과 <마계>는 붕괴했다. 

많은 대천사들과 마왕들이 죽었고, 정희원이 믿었던 어떤 정의도 그곳엔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검을 휘둘러야 했다. 

침대에서 가벼운 기척이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현성 씨!”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이현성이 눈을 뜨고 패널 화면을 보고 있었다. 

달싹이는 이현성의 입술이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네?” 

가까이 다가갔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움직이는 이현성의 입술. 정희원은 그 입술의 모양을 알아들었다. 

또 

잃어버릴 

수는 

불끈 쥔 주먹이 떨렸다. 화가 난다. 이 사람은 대체 왜, 자기 몸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어서까지도.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던 정희원이 이현성의 손을 붙드는 순간, 갑자기 이현성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눈부신 은빛을 내뿜은 이현성은 순식간에 쪼그라들더니, 이내 한 자루의 검이 되었다. 

“이게 무슨······!” 

너무 놀란 정희원이 엉겁결에 이현성을 놓쳤다. 

침대 위에서, 검이 된 이현성이 울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라는 듯이. 

망연히 주저앉은 정희원은 푹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당신은 대체······.” 

병실 문이 벌컥 열린 것은 그때였다. 

돌아보자, 분명 ‘시나리오 마스터’를 플레이하고 있었을 한수영이 그곳에 있었다. 

“정희원.”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정희원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침대 위에서 부르르 떨리고 있는 강철의 검. 그 검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정희원은 잘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세계를 견뎌내는 방식이 있다. 

천천히 손을 뻗은 정희원이 강철검의 손잡이를 굳게 쥐며 말했다. 

“아직 남은 배역 있어?” 

* 

대도깨비의 목소리와 함께, 허공에 시나리오 창이 떠올랐다. 

[연계된 메인 시나리오가 발동합니다!] 

+ 

<메인 시나리오 # 95 ― 『서유기』의 주인> 

분류 : 메인 

난이도 : 측정불가 

클리어 조건 : 요괴의 무리를 뚫고 통천하의 건너편에 있는 「경전」을 손에 넣으십시오. 

제한시간 : 2시간 

보상 : ‘서유기’와 관련된 거대 설화, 5,000,000코인, ??? 

실패시 : ― 

* 해당 시나리오에는 히든 피스가 숨겨져 있습니다. 

+ 

그와 동시에, 통천하의 수위가 급격하게 높아지기 시작했다. 쓰나미처럼 넘어온 물살들은 순식간에 우리 주변을 채워버렸다. 

이어서 하늘을 까마득히 덮는 요괴들의 울음이 뒤따랐다. 

【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지금껏 우리를 따라온 요괴의 총량보다도 더 많은 숫자였다. 

[현재 해당 설화에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15.872%입니다.] 

혹부리 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남은 ‘이계의 신격’ 지분은 14.128%. 

즉, 나는 이번 이벤트에서 남은 지분을 모두 채워야 했다. 

【우우우우우······.】 

뒤를 돌아보자, 우리와 함께 ‘순례의 길’을 만들어 온 요괴들이 하늘을 향해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그럼, 멋진 시나리오의 피날레를 기대하지요.] 

대도깨비가 사라지고, 빛줄기와 함께 다른 서유기 주인공들이 대거 등장했다. 

“가자!” 

“경전은 우리가 갖는다!” 

통합된 설화방에 참가한 인파들이 통천하의 물살을 가르고 나아가고 있었다. 

“진짜 손오공은 나다!” 

어떤 이들은 근두운에 탑승했고, 어떤 이들은 술법으로 통천하의 물길 위를 날았다. 아무래도 활공으로 강을 건너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서유기’가 맞다면, 저건 완전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해당 시나리오에서는 ‘비행’ 관련 스킬 및 성흔들이 제한됩니다.] 

허공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튀어 오르더니, 날아가던 이들이 비명과 함께 강으로 추락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물에 빠진 다른 서유기의 팀원들이 허공의 대도깨비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하지만 허공의 대도깨비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 광경을 보던 내가 말했다. 

“날아서 가도 된다면, 처음부터 이 여정은 의미가 없었을 겁니다.” 

그러자 곁의 유중혁이 짓씹듯 중얼거렸다. 

“······이 모든 것이 설화가 되는 거로군.” 

“맞습니다.” 

결국 『서유기』란 힘든 길을 어렵게 가는 이야기이다. 

똑같은 길을 가더라도 어떤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진다. 근두운을 타면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거리를, 14년에 걸쳐 여행하며 온갖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는 것. 그러한 ‘설화’가 존재했기에, 이 모든 여정의 끝에 있을 경전도 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이야기의 마지막 관문이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레이션을 들은 이길영이 작게 투덜거렸다. 

“······나 수영 잘 못하는데.” 

통천하의 강물은 드넓었다. 

삼장법사의 용마에 모두가 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모두 수영으로 강을 건너야 할 판이었다. 

실제로 몇몇 팀들은 이미 물속에 뛰어들어 열심히 자맥질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허름한 나룻배를 젓거나, 통나무 따위에 탑승해 바람의 술법을 사용하는 이들도 보였다. 

그 광경을 보던 이지혜가 이길영의 어깨를 툭 치며 앞으로 나섰다. 

“걱정 마. 우린 안 저래도 돼.” 

그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메시지가 들려왔다. 

[관객 하나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군. 

“와라, 거북선!” 

[거대 설화, ‘넥스트 시티’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허공을 향해 높이 솟은 이지혜의 쌍룡검. 

눈앞의 물살이 갈라지며, 거대한 전함의 선체가 웅장한 빛과 함께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여파에 휩쓸린 몇몇 화신들이 고함을 질러댔다. 

“미친, 저게 뭐야!” 

거북의 등에 용의 머리를 가진 전함, [터틀 드래곤]. 

이지혜와 아이들이 ‘넥스트 시티’를 클리어하고 얻은 성유물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저걸 타고 가도 될까 싶었다. 왜냐하면 서유기에는······. 

[성유물, ‘터틀 드래곤’이 「서유기 리메이크」에 조응합니다!] 

(위기에 빠진 일행들이 전전긍긍하자, 거대한 흰 자라 요괴가 나타나 그들을 태워주었다.) 

[일부 심사위원들이 깨알 같은 원작의 반영에 만족합니다.] 

[가산점 2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서유기에 그런 내용도 있었다니, 그것 참 절묘하군. 

우리는 곧바로 전함 위로 뛰어 올라갔다. 

“출항!” 

이지혜의 외침과 함께 전함이 물살을 가르고 쾌속 전진을 시작했다. 

앞서서 자맥질을 하던 팀들이 허망한 얼굴로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한 일이지만, 저들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저······ 언니, 최대한 요괴들은 건드리지 말고 가요.” 

“걱정 마.” 

대체 어디서 배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지혜는 신출귀몰한 운전솜씨로 달려드는 요괴들의 무리를 요령 좋게 피해냈다. 

뿐만 아니라 적의를 가지고 공격하던 요괴들도, 우리 배에 탑승한 다른 요괴들을 보며 멈칫했다, 

【너 흰 뭐 지?】 

‘순례의 길’에 동참했던 요괴들 중 일부는 전함에 매달려 있었고, 나머지는 전함의 꽁무니를 따라 강물을 건너오고 있었다. 

그런 요괴들이 방해됐는지, 다른 설화방의 손오공들이 여의봉을 휘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저 새끼가······!” 

분노한 이지혜가 주먹을 쥐었지만, 모두를 구해줄 수는 없었다. 

요괴들의 죽음은 이미 통천하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아아아아아악!】 

다른 설화방의 팀원들은 앞을 가리는 요괴들을 마구잡이로 때려잡으며 전진하고 있었다. 곳곳에서 요괴들의 피가 튀었고, 살점이 터져 나갔다. 

[상당수의 관객들이 학살의 정경에 환호합니다!] 

요괴들은 계속해서 죽어 나갔다. 

설화를 쌓지 못했기에 의미를 얻지 못한 괴물들. 

그들은 이 『서유기』를 완성하기 위한 제물이었다. 

서유기. 인간의 초탈을 위한 긴 여정. 

그 설화를 지켜보는 관객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요괴들은 이곳 통천하에 수장되어야 했다. 

“죽여, 다 죽여 버려!” 

깨달음의 길을 걷는 ‘서유기’의 주인공들이 죽은 요괴들을 교두보 삼아 통천하를 건너고 있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요괴들이 발판이 되었고, 간혹 죽어 나간 다른 설화방의 주인공들도, 역시나 함께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그 발판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우 리 의 이 야 기 는】 

【계 속 하 고 싶 었 지 만】 

그러나 살아만 있다면. 

그래서 이 ‘거대 설화’의 주역이 될 수 있다면. 

“명오 아저씨. 가만히 좀 붙어 있어! 여긴 안전하다니까.” 

“안전하긴 쥐뿔! 내가 한두 번 속는 줄 아냐?” 

[성흔, ‘외발 준족 Lv.???’이 발동 준비 중입니다.] 

다리가 잘리든, 팔이 떨어지든······ 그 존재는 이 세계에 기억된다. 

[7133번 설화방의 모든 등장인물이 전멸했습니다.] 

[487번 설화방의 모든 등장인물이 전멸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탈하는 설화방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숫자에 비례하듯, 추락하는 요괴들의 숫자도 급증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구해줘구해줘구해줘구해줘】 

[현재 해당 설화에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15.773%입니다.] 

힘들게 쌓아 올린 ‘이계의 신격’의 지분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저렇게나 많은 요괴들이 남아 있는데도······. 

[현재 해당 설화에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14.973%입니다.] 

‘이계의 신격’들이 차지하는 지분은, 급속도로 떨어져 갔다. 

[현재 해당 설화에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14.473%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결국 저들은 이 세계에서 퇴치되어야 할 악당이고, 주인공이 아니니까.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유중혁이 말했다. 

“······네놈도 알겠지만,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 

그 말이 더 아프게 느껴진 것은 그것이 유중혁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네놈 말처럼, 이것은 ‘설화’이기 때문이다.” 

유중혁의 두 눈이 수면 아래에서 죽어가는 요괴들을 응시했다. 

이것이 설화이기 때문에,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세계의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 Episode 82. 이계의 신격 (4) > 끝

< Episode 82. 이계의 신격 (5) >





엑스트라는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이계의 신격’들은 엑스트라조차 되지 못했기에 ‘설화’ 밖으로 떠밀려 났다. 

죽어가는 요괴들이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도할수있어나도할수있어】 

【대장대장대장대장대장대장】 

【나누구나누구나누구나누구나누구】 

유중혁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다행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네놈이 할 수 있는 건 저들도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전하는 게 전부다.” 

안개 낀 통천하 너머를 응시하는 유중혁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네놈은 해야 할 일을 모두 한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 

우리의 이야기에 반응하듯, 내레이션이 말을 시작했다. 

(그들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그곳에 요괴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아마 한수영도, 내가 느끼는 비감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 

비가 내리는 통천하의 강물에 요괴들의 사체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다수의 관객들이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의 테마에 동요합니다.] 

[일부 심사위원들이 비통한 마음을 갖습니다.] 

엑스트라는 엑스트라고, 주인공은 주인공이다.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이야기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나도 알고 있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머리털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합니다.] 

[심사위원, ‘필마온’이 요괴들의 삶에 관해 고찰합니다.] 

[심사위원, ‘미후왕’이 잘 모르겠지만 모두 살릴 수는 없는 거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이 급속도로 하락하고 있습니다.] 

[현재 해당 설화에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13.473%입니다.] 

정말로, 여기서 만족하고 모든 것을 끝낼 수는 없었다. 

[시나리오 마스터가 당신을 응시합니다.] 

아마 한수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자라다! 자라를 빼앗아!” 

[터틀 드래곤]의 선측을 타고 올라온 불청객들이 외쳤다. 

우리의 전함을 부러워한 다른 팀원들이었다. 

“해치워! 이놈들만 죽이면―” 

하지만 그들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스가각! 

이지혜의 쌍룡검이 갑판을 타고 올라오던 손오공의 머리를 잘라버렸다. 

[심사위원, ‘미후왕’이 서늘한 표정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어루만집니다.] 

비명도 없이 머리가 떨어진 손오공이 강물 속으로 추락했다. 

경악한 사오정과 저팔계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갑판 위로 올라왔다. 

“건방진 놈들이······!” 

“대사 읊는 거 보니까 너넨 우승하기 틀렸어.” 

사정없이 휘몰아친 이지혜의 [검도]가 허공을 가르고, 그 옆으로 달려나간 이길영과 신유승이 노련한 권각으로 다른 화신들을 갑판 아래로 떨어트렸다. 용마로 화한 키메라 드래곤은 날갯짓을 하며 강풍을 만들었다. 

“네까짓 놈들이―” 

어느새 유중혁은 선체의 가장 높은 곳으로 도약해 있었다. 냉막한 표정으로 검을 뽑은 유중혁. [흑천마도]의 표면에 거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파천검뢰(破天劒雷). 

하늘을 부수는 유중혁의 검이, 낙뢰처럼 통천하의 강물에 꽂혔다. 

“크아아아악!” 

새파란 파천의 검격에 통구이가 된 화신체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화신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외쳤다. 

“무슨 저팔계가 저렇게 강해!” 

“서, 설마 저 저팔계는······?” 

“이놈들이다! 이놈들이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의 등장인물들이야!” 

······아무래도 우리 정체가 드러난 것 같았다. 

[시나리오의 숨겨진 정보가 공개됩니다!] 

[랭킹 순위가 높은 팀의 인물들을 쓰러트리면, 설화방의 순위가 상승합니다!] 

“경전을 못 얻어도 저놈들을 죽이면 순위권에 오를 수 있어!” 

그리고 순위권에만 오르면, 우승은 못하더라도 상당한 수준의 보상을 얻을 수 있다. 

“죽여! 저팔계부터 사냥해!” 

몰려든 수십 명의 배역들이 요괴들의 시체 더미를 밟고 전함을 향해 도약했다. 개중에는 강력한 화신도 있었고, 성좌들도 있었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일행들을 돌아보았지만, 일행들은 그다지 당황한 얼굴이 아니었다. 

“이제 좀 재밌겠네.” 

“손오공, 뒤로 빠져 있어.” 

싱긋 웃은 이지혜가 자신의 격을 발출했다. 

[거대 설화, ‘넥스트 시티’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이길영과 신유승의 통제에, 용마가 청룡의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쿠오오오오오! 

그와 동시에, 일행들의 화신체에서 강렬한 설화의 힘이 폭발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허공에서 불을 뿜는 키메라 드래곤이 통천하의 강물을 녹였고, 기화하는 강물의 수증기 사이를 유중혁이 달렸다. 

스가각! 스가각! 

흑빛 섬광이 움직일 때마다 이름 모를 손오공과 저팔계들이 죽어 나갔다. 

전율이 일었다. 우리 일행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강해졌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지금껏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를 소화해 온 결과였다. 

“크아아아악!” 

같은 95번 시나리오라고 해서, 모두의 수준이 같은 것은 아니다. 

마치 『서유기』와 같았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식은 모두가 다르다. 누군가는 편하게 날아서, 또 누군가는 편한 길만을 골라서 가기도 하겠지. 

하지만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은 달랐다. 

(그들은, 가장 어려운 방식으로 이곳까지 도착했다.) 

그들은 날지도 못했고, 편한 길을 골라 걷지도 못했다. 자기 자신의 다리로, 걷고 또 걸어야 했다. 

불합리한 역경과 고난을 헤치며, 불행을 견뎌내고 비탄을 삼켜내면서.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눈부신 ‘거대 설화’의 가호를 받는 저들이야말로,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들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1863회차의 그곳도, 95번 시나리오였다.」 

1863회차의 한수영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말해주고 싶었다. 

네가 그곳에서 증명한 것처럼, 이곳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고. 

「이것이, 네가 모르는 3회차의 이야기라고.」 

내 어깨에 앉은 유중혁 [999] 또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의 회차를 잃고 이 세계선에 온 999회차의 유중혁은, 이 광경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설화방 랭킹이 상승했습니다!] 

[득표수 : 25912] 

[현재 해당 설화방의 랭킹은 3위입니다.] 

[다수의 관객들과 심사위원들이 가산점을 부여합니다!] 

설화방 랭킹은 빠르게 올랐다. 

우리를 습격한 인물들 중에는, 우리보다 높은 랭킹의 설화방 배역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설화방 랭킹이 상승했습니다!] 

[득표수 : 26412] 

[현재 해당 설화방의 랭킹은 2위입니다.] 

드디어 2위. 

수천 개의 방을 제치고, 마침내 우리는 우승의 목전까지 도달했다. 

그쯤 되자 나 역시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현재 해당 설화에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13.142%입니다.] 

주인공들이 활약하는 동안에도, 엑스트라로 전락한 이들의 죽음은 그치지 않는다.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혹부리 왕과의 약속을 지키려면,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30%가 넘어야 한다. 

설령 이 ‘거대 설화’ 이벤트에서 우리가 우승하더라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콰아아앙! 

전함의 선체가 갸우뚱 흔들린 것은 그때였다. 

강력한 마력포가 전방의 안개 너머에서 이쪽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뭐야! 어떤 새끼들이······!” 

이지혜가 자세를 고쳐 잡으며 성흔을 발동했다. 

[등장인물, ‘이지혜’가 ‘유령함대 Lv.10’을 발동합니다!] 

[터틀 드래곤]의 좌우로 솟아난 열두 척의 유령함대가 발포를 개시했다. 

아득한 포화의 교환 속에 주변의 화신들과 요괴들은 비명조차 남기지 못하고 산화했다. 

발포가 멈추고, 뿌연 포연 사이로 수십 척의 전함들이 나타났다. 

[성좌, ‘해상전신’이 침음합니다.] 

쿠구구구구구. 

학익진처럼 우리의 전함을 포위한 배들. 

아무리 ‘해상전신’이 해상전에 뛰어난 성좌라고 해도, 이번에는 상대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페이후.” 

유중혁의 무거운 목소리와 함께, 건너편의 뱃전에 선 인물이 보였다. 

설화방 랭킹 1위, 『진 서유기』의 주인공이 그곳에 있었다. 

저쪽 녀석들도 미리 전함을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 게다가 그 숫자는 우리보다 훨씬 더 많았다. 

“쟤들 설화급 성좌들 아냐?” 

『진 서유기』의 다른 멤버들도 보였다. 

저팔계와 사오정은, 예상대로 모두 <황제>의 성좌들이었다. 

저팔계 역은 ‘삼첨창의 주인’인 이랑진군. 

그리고 사오정은 비사문천(毘沙門天)의 셋째 아들, ‘나타 태자’인가. 

그들은 서유기 원작의 등장인물들이자, 손오공의 숙적들이었다. 

괜히 원작에서 ‘어차피 우승은 페이후’라는 말이 돌았던 게 아니다. 

서유기의 실제 성좌들이 페이후의 멤버로 등장했으니, 다른 방의 성좌들이 싸워 이길 수 없었던 건 당연한 결과였다. 

[일부 관객들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성운 <황제>의 성좌들이 ‘페이후’의 전장을 응시합니다.] 

게다가 그들의 뒤쪽에서 일렁이는 <황제>의 이십팔수 별자리들까지. 

언제든 전장에 개입하겠다는 듯 이쪽을 보는 시선은, 그곳에 존재하는 것 자체로 커다란 압박이었다. 

전장을 살피던 유중혁이 말했다. 

“삼장이 없군.” 

그러고 보니 저쪽의 ‘삼장법사’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서유기에서 경전을 얻는 존재는 삼장이다. 그런 상황에서 삼장을 하구에 두고 왔을 리가······ 잠깐, 경전을 얻는 게 삼장이라면. 

“저기 뭐가 도망가는데?” 

이길영이 가리킨 곳에서 부리나케 멀어지는 전함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일부는 이곳에서 뒤를 막고, 남은 이들은 ‘경전’을 향해 움직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저 전함들 사이에 페이후 측의 삼장법사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시간을 끄는 사이 ‘경전’을 획득할 속셈이다.” 

이지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젠장! 여긴 내가 맡을 테니까 먼저 가요!” 

이지혜의 외침과 함께, [터틀 드래곤]의 장전이 시작되었다. 

곁으로 붙어선 [유령 함대] 하나가 나와 유중혁, 그리고 이길영과 신유승을 태운 후 질주를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 

이지혜의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어엿한 ‘해상제독’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전장이 물 위인 한, 이지혜는 설령 이기지 못하더라도 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저쪽이다. 

멀리서 움직인 전함 한 대가, 정확히 우리의 진로를 가로막으며 붙어서고 있었다. 

페이후와 동료들이 탄 전함이었다. 

“너희들이 <김독자 컴퍼니>로군.” 

새파란 눈동자의 손오공. 

페이후가 마치 신기한 동물이라도 보듯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흑천마도]를 뽑아든 유중혁이 경계하듯 앞을 막고 섰다. 

[성좌, ‘삼첨창의 주인’이 자신의 격을 방출합니다!] 

[성좌, ‘비사문천의 셋째 아들’이 자신의 격을 방출합니다!] 

이미 배역 본연의 모습은 포기한 모양인지, 이랑진군과 나타는 처음부터 위협적인 경고성을 보내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운, <황제>의 이십팔수(二十八宿) 별자리들이 강림을 준비합니다.] 

[성운, <황제>의 구요성관(九曜星官)이 강림을 준비합니다!] 

······이런 빌어먹을. 

나는 비꼬듯 말했다. 

“성운의 도움이 없으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모양이지?” 

“<황제>는 나고, 나는 곧 <황제>다. 가진 것을 활용하지 않는 것이 더 어리석은 일이지.” 

제아무리 유중혁이라고 해도, ‘이십팔수의 별자리’와 붙박이 아홉별인 ‘구요성관’마저 모조리 강림하면 당해낼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본래 ‘서유기’의 등장인물들이니 강림 개연성을 크게 소모하지도 않는다. 

빌어먹게도, 이곳은 저 <황제>의 앞마당 놀이터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여의봉을 뽑아든 페이후가 이쪽을 향해 본연의 격을 방출했다. 

‘멸살법’ 최강의 화신 후보 페이후. 

지금껏 몇 번인가 페이후를 본 적은 있었지만, 한 번도 그와 대결한 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황제>가 제일 감싸고 도는 금수저 화신이셨으니까. 

[거대 설화, ‘천궁의 계승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정사대전의 생존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페이후는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착실하게 거대 설화를 쌓아왔다. 

그것도,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지원을 받으면서. 

[거대 설화, ‘치우의 후예’가 이야기를······!] 

그 설화들을 보던 신유승이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치우는 한국 설화 아니에요?” 

그 말이 거슬렸는지, 인상을 찌푸린 페이후가 이쪽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그것을 막아낸 것은 유중혁이었다. 쩌저정, 하는 소리와 함께 유중혁의 [흑천마도]에 난 금이 짙어졌다. 

페이후의 눈동자에 흥미로운 빛이 스쳤다. 

“제법이군. 네가 저팔계인가?” 

페이후는 강하다. 하지만 아무리 놈이 강해도, 지금의 유중혁이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였다. 

문제는 [흑천마도]였다. 검이 부러진 유중혁은, 평소 기량의 칠십 퍼센트도 내기 힘들 것이다. 

“한국 최강의 화신이 <김독자 컴퍼니>에 있다고 들었지. 그게 네놈이로군?” 

기다렸다는 듯 유중혁이 앞으로 나섰다. 

유중혁 대 페이후. 

세기의 대결이 성사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버스 타며 구경이나 할 수는 없었다. 

저쪽에는 아직 이랑진군과 나타 태자도 있으니까. 

[현재 화신체 회복률 : 71%]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6%] 

[현재 이계의 신격화 속도가 둔화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내 몸 상태로는, 결코 저 둘을 상대할 수 없었다. 

스르릉. 

먼저 움직인 것은 페이후 측이었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나타 태자의 보패들이 빛을 뿜었고, 페이후의 전신에서 강력한 격이 발출되었다. 

허공에서 빛이 일렁인 것은 그때였다. 

[플레이어 9님께서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에 ‘엑스트라’ 배역으로 참가하셨습니다!] 

······이제 와서 새로운 배역이라고? 

쿠구구구구! 

내리치는 천둥과 함께, 유령함대의 선실 위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어둑한 하늘 사이로, 벼락의 빛이 긴 그림자를 드러냈다. 호리호리한 인형이 그곳에 서 있었다. 

인형의 머리 위로 솟아오른 커다란 두 개의 뿔. 

[플레이어 9님의 배역은 ‘우마왕’입니다.] 

······우마왕. 

그러고 보니 그런 배역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제천대성 손오공의 전우이자 의형제. 

원작에서는 적으로 싸운 적도 있었지만, 우리 설화방인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에서는 아직까지 등장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저 배역으로······. 

[<김독자 컴퍼니>의 인원들에게 투표권이 부여됩니다.] 

[일부 인원은 현재 투표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투표 가능한 인원만이 투표에 참가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화신 ‘이지혜’가 심판에 찬성합니다.] 

[화신 ‘신유승’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화신 ‘이길영’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화신 ‘정희원’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화신 ‘한수영’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화신 ‘유중혁’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연이어 떠오르는 메시지들을 보며,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눈앞의 창만을 바라보았다.

[‘심판의 시간’의 투표권을 행사하시겠습니까?] 

내리는 빗속에 선 일행들의 표정이 보인다. 

너무나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 말할 수 없었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순간, 일행들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득한 침묵이 통천하의 강 위를 흘렀다. 

다시 한번 벼락이 쳤고, 선실 위쪽에서 정희원이 뛰어내렸다. 

갑판에 착지한 정희원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리는 듯하더니,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현재 투표 가능한 모든 인원이 심판에 찬성하였습니다.] 

[‘심판의 시간’이 발동합니다!] 

이윽고 고개를 든 정희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싸울 수 있어.”





< Episode 82. 이계의 신격 (5) > 끝

< Episode 82. 이계의 신격 (6) >





아직 싸울 수 있다. 

그 말을 한 정희원이 고요한 격을 발산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귓가에 들려오는 [성운 채팅]의 메시지. 

―독자 형이 살아 있어. 

이길영의 말이었다. 

―여긴 없지만, 어딘가에서 우릴 보고 있다고. 

신유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내 머릿속에서는 경고 메시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6.1%] 

. 

. 

.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6.3%] 

진행률의 퍼센트가 급상승하고 있었다. 

[혹부리 왕이 당신과의 약속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내가 곧바로 ‘이계의 신격’으로 변모하지 않은 것은, 일행들이 ‘구원의 마왕’이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것은 알아도, 손오공인 내가 ‘구원의 마왕’임은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혹부리 왕과 한 약속은 어디까지나 <김독자 컴퍼니>에게 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7.1%] 

유중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희원은 그런 유중혁의 어깨에 손을 툭 얹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유중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혼자선 무리다.” 

“아니, 충분해.” 

빙긋 웃는 정희원의 미소가 믿음직스러웠다. 

[전용 스킬, ‘심판의 시간’이 <김독자 컴퍼니>의 가호를 받습니다.] 

더 이상 <에덴>과 절대선 계통의 영향을 받지 않는 [심판의 시간]. 

오직 <김독자 컴퍼니>의 개연성만을 빌려서 사용하는 정희원의 칼날이, 심판의 대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성운, <황제>가 해당 배역의 난입에 분개합니다!] 

갑작스런 정희원의 난입에, <황제>의 일원들은 당황하는 눈치였다. 

페이후가 고개를 갸웃하며 정희원을 바라보았다. 

“너는 누구지?” 

“너냐?” 

“······?” 

“한국 최강의 화신을 찾던 거.” 

그 말과 함께, 정희원의 신형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당황한 페이후가 여의봉을 들어 정희원의 검격을 막아냈다. 콰드득, 하고 울려 퍼지는 파찰음이 묵직했다. 

인상을 찌푸린 페이후가 뒤쪽으로 쭉 밀려나며 물었다. 

“무거운 검이군. 그건 ‘우마왕’의 병기가 아닐 텐데?” 

“맞아.” 

정희원의 손에는, 이제껏 본 적이 없었던 강철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우마왕의 병기도, 정희원의 [심판자의 검]도 아니었다. 

[플레이어 10님께서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에 ‘엑스트라’ 배역으로 참가하셨습니다!] 

······응? 

[플레이어 10님의 배역은 ‘여의금고봉’입니다.] 

그런 배역이 가능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찰나, 정희원의 검이 비정상적으로 길어졌다. 마치 1만 3천 5백근의 여의금고봉이 자라나는 듯했다. 

“무슨······!” 

정희원의 검은 계속해서 길어졌다. 십 미터, 이십 미터, 삼십 미터, 사십 미터······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크기로 길어진 그 검을, 정희원은 양손으로 쥐었다. 

[전용 스킬, ‘신살(神殺) Lv.3’이 발동합니다!] 

신살. 정희원이 ‘멸망의 심판자’로 진화하며 얻은 ‘귀살’의 상위 스킬. 

거친 혼돈의 힘이 수백여 미터에 이르는 강철검을 타고 흘렀다. 세계가 느릿하게 진동하더니, 정희원의 손이 좌에서 우로 움직였다. 

순간 불길한 예감을 느낀 페이후와 성좌들이 외쳤다. 

“모두 달아나라!” 

반사적으로 몸을 피한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드넓은 강의 수평에 은빛의 실선이 그어졌고, 인근의 전함들이 굉음을 일으키며 터져 나갔다. 

[성운, <황제>가 ‘우마왕’의 힘에 경악합니다!] 

일대의 수면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리는 가공할 위력. 

그것은 정희원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정희원의 손에서 진동하는 강철검. 나는 그 검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강철화]의 무기화 상태에 돌입해 소통은 불가능했지만, 그는 틀림없는 이현성이었다. 

불타는 강 위를 내달리며 정희원이 외쳤다. 

“가! 여긴 나한테 맡기고!” 

정희원은 페이후뿐만 아니라 이랑진군과 나타 태자의 길목까지 막아섰다. 그녀의 전신에서 범람하는 어마어마한 투기를 느끼며,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갑시다.” 

확실히 지금의 정희원이라면, 이 전장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부탁해, 누나!” 

“여차하면 도망치세요!” 

이지혜의 유령함선이 출발했다. 

뒤쪽에 정희원과 함께 남겨진 페이후가 분노의 사자후를 터뜨리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통천하의 안개 속을 나아갔다. 멀리서 조급하게 달아나는 페이후 측의 삼장법사가 보였다. 

[경전의 위치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보는 관객들과 심사위원들의 시선이 있었다, 

[다수의 관객들이 당신들의 설화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조금만 힘을 내 보라고 말합니다.] 

[심사위원, ‘정단사자’가 자신의 삼겹살을 출렁이며 응원합니다.] 

[가산점 10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이지혜와 정희원의 활약 덕분인지, 이제 페이후 방과의 점수 격차도 거의 없어졌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경전’을 얻기만 한다면, 「서유기 리메이크」의 승자는 우리가 될 것이다. 

동서남북의 하늘이 일그러진 것은 그때였다. 

[성운, <황제>의 이십팔수(二十八宿) 별자리들이 강림합니다!] 

새카맣게 물든 하늘의 모든 방위에서, 스물여덟 개의 별들이 유성처럼 우리를 향해 낙하했다. 

“피해라!” 

유중혁과 나는 이길영과 신유승을 안은 채 동시에 강으로 몸을 날렸다. 통천하 전체가 폭발하는 굉음과 함께, 반파된 유령함선이 뒤집혔다. 

우리는 강물 위를 떠다니는 부유물 중 하나를 간신히 붙잡았다. 

“우웩! 나 혼자 살 수 있으니까 이거 놔!” 

발버둥 치는 이길영의 목소리. 

우리는 각자 부유물 위에 올라섰다. 

앞길을 막은 스물여덟 개의 별자리가 그곳에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자들이로군.] 

[어찌 위대한 이야기를 요괴들의 피로 더럽히는가?] 

[그대들은 이 ‘거대 설화’를 완성할 자격이 없다.] 

대놓고 우리를 방해하겠다고 외치는 녀석들.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황제>가 진짜 이런 식으로 나오니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일부 관객들이 <황제>의 성좌들에게 불공평함을 호소합니다!] 

호소해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어쨌든 ‘서유기’는 <황제>의 거대 설화였고, 그들은 이 설화를 다른 성운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을 테니까. 

처음부터 이 이벤트는 <황제>의 화신인 페이후를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다른 화신과 성좌들을 참가하게 해준 것은 설화 전체의 격을 높이고 이벤트를 시나리오화 하기 위한 명분일 뿐. 

어차피 우승은 페이후로 정해진 게임이었다. 

이에 뒤따르는 다른 성좌 및 성운들의 다량의 불만은 코인과 적당한 수준의 설화 제공으로 잠재우는 것. 그것이 <황제>가 계획한 「서유기 리메이크」의 실체였고, 다른 성좌들 역시 말은 안 해도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어차피 참가해도 너희가 우승은 못 한다. 하지만 적당한 수준의 보상은 주겠다. 

[어째서 그대들은 시나리오의 질서를 어지럽히는가? 이미 2등의 자리에 올랐는데도 그 득표수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황제>가 그어놓은 암묵적인 선을 넘어버린 셈이었다. 

[지금이라도 물러나라. 그렇게 한다면 그대들이 쌓은 설화는 거둬가지 않을 것이다.] 

이십팔수 별자리의 한 축인 ‘동방 청룡 7수’인 각수(角宿), 항수(亢宿), 저수(氐宿), 방수(房宿), 심수(心宿), 미수(尾宿), 기수(箕宿)가 제각기 앞으로 나오며 격을 발출했다. 

개별적인 성좌의 힘은 하위격의 설화급이나 위인급 정도였지만, 문제는 저들이 모두 모였을 때였다. 

동방청룡 7수. 

북방현무 7수. 

서방백호 7수. 

남방주작 7수. 

<황제>의 방위를 담당하는 수호성들이자, 옥황의 토벌군들. 

그들은 『서유기』의 본편에서 제천대성과도 맞서 싸운 전례가 있었다. 

[‘이십팔수 별자리’들이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스물여덟 개의 별들이 동시에 광휘를 발산하자, 그야말로 눈부신 격의 파동이 전해져왔다. 

아무리 저들이 위인급이라도, 이 정도 기세라면······. 

스르릉.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선 것은 유중혁이었다. 

녀석은 나를 일별하며 앞으로 나섰다. 

“아이들을 데리고 경전을 얻어라.” 

그러자 이길영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누가 누굴 데려 가! 내가―” 

뒤이어 흘러나온 유중혁의 격에, 이길영이 입을 다물었다. 

유중혁의 새카만 코트가 흔들렸다. 작은 블랙홀이라도 된 것처럼, 이십팔수 별자리 전원의 빛을 받아내며 선 등. 줄곧 누군가를 지켜온 사람의 등이었다. 

그 모습에 압도된 듯 주춤하던 이길영이 중얼거렸다. 

“······가자.” 

상대가 이십팔수 별자리 전원이라면, 아무리 유중혁이라고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유중혁은 저 <로카팔라>의 최강자인 인드라와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탁합니다.” 

“가라!” 

강과 하늘이 만나는 접경에서,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길을 뚫었다. 

파천검도(破天劍道). 

오의(奧義). 

암해참(暗海斬). 

밤의 바다를 베어내는 일격. 모세의 기적처럼 강물들이 비산하며, 전방의 길목이 모조리 갈라져 나갔다. 

미처 검격을 피하지 못한 몇몇 별자리가 강물로 추락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격이······!] 

[네놈!] 

경악한 이십팔수 별자리들이 고성을 토하며 흩어졌다. 

그사이에도 유중혁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파천검뢰(破天劒雷). 

유중혁의 전격이 만든 그 길을, 부유물들을 모아 임시로 만든 뗏목이 달렸다. 

“키메라 드래곤!” 

용마가 뗏목 뒤쪽으로 힘찬 날갯짓을 했다. 가공할 강풍과 함께 나와 이길영, 그리고 신유승을 태운 뗏목이 급항을 시작했다. 인원은 줄었지만 키메라 드래곤의 격이 소모되는 만큼 쾌속한 항행. 페이후 측 삼장법사와의 거리는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어느덧 그들을 추월하는 우리를 발견한 삼장법사가 이쪽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이길영은 그들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날렸다. 

“이거나 먹어라!” 

[성운, <황제>의 구요성관(九曜星官)들이 강림합니다!] 

“젠장! 또 뭐야 치사하게!” 

<황제>가 괜히 거대 성운이 아니다. 

단순히 ‘성좌’의 숫자만을 놓고 본다면, <황제>는 <스타 스트림> 최강의 성운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눈앞의 천공이 빛과 함께 쪼개지더니, 뚜렷한 디테일이 없는 아홉 개의 인형이 나타났다. 단지 각기 다른 색깔로만 구별할 수 있는 인형체들. 

구요성관. 

<황제>의 무인 전략 병기인 그들은, 농축된 설화들로 빚어진 존재들이었다. 제각기 태양,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에 황번성과 표미성을 포함한 아홉 천체들을 의인화한, 말 그대로 ‘성좌급’의 전투력을 가진 병기들. 

콰콰콰콰콰콰콰! 

병기들의 입에서 쏟아지는 입자포가 통천하의 한쪽을 불태우고, 다른 한쪽은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아차 싶었던 순간, 짙은 수증기 사이로 한줄기 섬광이 날아들었다. 

“신유승!” 

용마를 컨트롤하느라 미처 공격을 피하지 못한 신유승의 신형이 하늘을 날았다. 이길영과 내가 동시에 손을 뻗어 신유승을 붙잡아 용마에 태웠다. 급소를 맞았는지 신유승의 의식이 없었다. 

“저 개자식들이······!” 

용마의 통제권을 넘겨받은 이길영이 자신의 격을 발출했다. 하지만 구요성관은 여전히 건재했고, 심지어 저것이 전부도 아니었다. 

[성운 <황제>의 열두 원신(元辰)이 강림을 준비합니다!] 

[성운 <황제>의 사해 용왕(龍王)이 강림을 준비합니다!] 

그로서 나는 깨달았다. 

<황제>는 이번 ‘거대 설화’에 진심이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8.1%] 

다시 우리를 앞질러 나가는 적의 전함. 

[다수의 관객들이 심장을 졸이며 당신을 지켜봅니다!] 

[현재 랭킹 1위와의 득표수 격차가 미미합니다!] 

만약 여기서 패한다면, 거대 설화는 페이후의 것이 된다. 

나는 이길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현 법사님.” 

“바쁘니까 말 시키지마!” 

“여기서 장 법사님을 지키십시오. 제가 저들을 뚫고 경전을 가져 오겠습니다.” 

“뭐? 너 무슨―”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이길영이 뭐라고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나는 아이의 머리 위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알았지? 길영아.”





< Episode 82. 이계의 신격 (6) > 끝

< Episode 82. 이계의 신격 (7) >





순간 이길영의 입술이 뻐끔거렸다. 

아이의 맑은 눈망울에 급격하게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너, 너―” 

나는 이길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가까이 있는 부유물들을 끌어왔다. 

(손오공은 뒤쪽을 향해 바람의 술법을 사용했다.) 

[전용 스킬, ‘바람의 길 Lv.10’이 발동합니다!] 

돌풍과 함께, 나를 태운 부유물 뗏목이 쾌속 항진을 시작했다. 

뒤쪽에서 이길영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바람 소리에 묻혀 스러졌다. 

[<김독자 컴퍼니>의 누군가가 당신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혹부리 왕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구요성관들이 내 움직임을 눈치채고 집요하게 쫓아오고 있었다. 

몇몇 구요성관은 나를 쫓는 대신 나를 앞질러 날아갔다. 

멀리서 ‘경전’의 위치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신비한 안개로 둘러싸인 작은 섬 위에, 아름다운 광채를 뿜어내는 단 하나의 책. 

그리고 어느새 구요성관과 <황제>의 성좌들이 그 앞을 막아섰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8.3%] 

[당신의 화신체 손상도가 심각합니다.]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다. 

순간, 내 어깨 위에서 줄곧 침묵하던 유중혁 [999]가 말했다. 

―멍청한 짓이다. ‘이계의 신격’이 되고 싶은 것인가? 

나는 씩 웃었다. 

‘겁나냐?’ 

―여기서 더 무리하면 너는 정말로 ‘이계의 신격’이 된다. 그러면 시나리오도 실패하게 될 것이다. 

나는 시나리오 창을 열어 목표를 확인했다. 

+ 

<히든 시나리오 ― 약속 증명> 

분류 : 히든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스타 스트림>의 주요 거대 설화에 ‘이계의 신격’들을 등장시키시오. 단, 기존처럼 ‘이계의 신격’ 역할로 등장해서는 안 됩니다. 

제한시간 : 100일 

보상 : ‘이계의 신격’의 신뢰, ??? 

실패시 : 당신은 모든 기억을 잃고 ‘이계의 신격’으로 변화합니다. 

* 해당 시나리오의 수행 도중 당신은 <김독자 컴퍼니>에게 접촉하여 정체를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이 조건을 어길 시, ‘이계의 신격’으로의 변이가 가속됩니다. 

* 경고! 현재 당신의 정체가 노출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 현재 화신체의 상태 악화로 이계의 신격화 속도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 

역시, 다시 읽어 봐도 내 짐작이 맞다. 

‘이계의 신격이 된다고 해서 시나리오에 실패하는 건 아냐. 이계의 신격이 되는 것은 시나리오의 ‘실패 대가’지 ‘실패 조건’은 아니거든.’ 

―그거나 그거나 다를 게 없는······. 

‘달라. 이건 내가 시나리오에 실패하기 전에 먼저 ‘이계의 신격’이 되는 거니까.’ 

내가 혹부리 왕에게 받은 ‘히든 시나리오’의 제한시간은 100일. 

즉, 나는 그 안에 임무만 완수하면 된다. 

문제는 ‘이계의 신격화’에 관련된 부분. 

‘내가 이계의 신격으로 빠르게 변하고 있는 건 시나리오에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 화신체의 상태가 나쁘기 때문이야. 즉······.’ 

―네놈이 ‘이계의 신격’이 되어도 시나리오에 실패하진 않는다는 거로군.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방을 응시했다. 

이제 [999]도 내 목적이 무엇인지 깨달은 듯했다. 

[현재 해당 설화에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12.171%입니다.] 

[시나리오를 완수하기 위해선 ‘이계의 신격’의 지분을 30% 이상 확보해야 합니다.] 

이대로는 경전을 획득해 거대 설화를 손에 넣더라도,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채울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이계의 신격’이 된다면. 

[해당 설화에서 당신의 배역은 ‘손오공’입니다.] 

[현재 해당 설화에서 당신의 지분은 22.51%입니다.] 

최강의 요괴인 ‘손오공’의 역할을 ‘이계의 신격’이 담당하게 된다면. 

그리하여, 저 남은 지분을 채울 수 있다면. 

―너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왜라니?’ 

―‘은밀한 모략가’와 ‘이계의 신격’들을 내버려 두어도, 너에겐 아무것도 손해 볼 것이 없다. 

‘손해라······.’ 

―설마 ‘은밀한 모략가’를 동정하는 것인가? 그는 네놈의 동정 따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겠지. 그놈도 유중혁이니까.’ 

―유중혁? 웃기지 마라. 그는 네가 아는 ‘유중혁’이 아니다. 이미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무엇이란 말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달려오는 <황제>의 성좌들을 보며, [999]가 계속해서 말했다. 

―너는 ‘이계의 신격’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른다. ‘이계의 신격’이 되면 살아온 기억들을 급격하게 상실하게 된다. 저 ‘은밀한 모략가’조차도 우리와 같은 단말을 만들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 

역시, 그 많은 ‘꼬마 유중혁’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나.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대가는 알고 있어.’ 

―그걸 아는 놈이 대체 왜······! 

‘이렇게 해야만 하니까.’ 

나는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짧은 어둠 속에서 ‘이계의 신격’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아아아아아아아】 

【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 

【기억이기억이기억이기억이기억이】 

이계의 신격. 

유중혁이 실패한 무수한 세계선에서 만들어진 존재들. 

지금껏 나를 살게 했던.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세계의 흔적들. 

‘그런 걸 보고, 어떻게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있겠어.’ 

심지어 지금도, 내 귓가에 이렇게 선명하게 들리고 있는데. 

콰아아아아아! 

쏟아지는 포화에 내가 타고 있던 뗏목이 부서졌다. 

나는 흩어진 부유물들을 짓밟고 강 위를 달렸다. 

[‘바람의 길’이 더욱 가속합니다.] 

[극한에 이른 속도에 ‘바람의 길’이 진화합니다.] 

다리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져서, 나는 이윽고 부유물들 없이도 강 위를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은 등평도수(登萍渡水)의 경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과한 격의 사용에 화신체의 손상이 심화됩니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8.6%] 

심장이 불길한 박자로 뛰고 있었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8.7%]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어가는 소리였다. 

[999]가 뭐라고 말을 걸어왔으나, 폭발하는 강의 정경 속에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들려온 것은, 내 안의 목소리였다. 

「김독 자」 

[제4의 벽]이 말하고 있었다. 

「미 친짓 이 야」 

역시, 녀석도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당연한 일이겠지. 

「전 부다 잊 게될 거 야」 

「김 독자 더이 상 김독 자 아 니게 된 다」 

[제4의 벽]의 말은 맞았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9.1%] 

‘이계의 신격’이 되면, 나는 지금껏 쌓아온 모든 기억을 잃게 될 것이다. 

「김독자는 무서웠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지금껏 쌓아온 모든 기억들이, 사라진다는 게.」 

나는 벽 위에 떠오르는 문장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네가 모두 기억하고 있잖아.’ 

「뭐 ?」 

‘네가 나를 모두 기록하고 있으니까, 난 절대로 잊지 않아.’ 

본래의 나였다면, 이런 모험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다니, 그런 일은 절대 겪고 싶지 않으니까. 

[‘제4의 벽’이 크게 동요합니다!] 

하지만 내겐 [제4의 벽]이 있다. 어떻게 습득한 스킬인지조차 알지 못하지만, 이 이야기가 시작되던 첫 순간부터 모든 것을 기록해 온 벽. 

나는 벽 안의 정경을 떠올렸다. 고적하고 아늑한 어둠이 들어찬 도서관과, 그 도서관을 아끼는 사서들. 

그곳에는 유중혁의 모든 회차를 담은, ‘멸살법’의 숭고한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고······. 

하찮은 ‘김독자’의 삶도 적혀 있다. 

「그 도서관은 지금도 김독자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었다.」 

「김독자의 숨소리부터, 김독자의 생김새, 김독자의 웃음과, 김독자의 말투.」 

「김독자가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 종종 흥얼거리던 노래. 김독자가 슬플 때와 기쁠 때 짓는 표정. 자신이 없을 때 괜히 중얼거리는 말버릇과 뒤따라오는 자조.」 

「아이들을 생각할 때 고개를 기울이는 버릇.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을 감을 때 생기는 떨림. 유상아와 이야기할 때 짓는 미소. 한수영을 놀릴 때 휘어지는 눈썹과 입가의 짓궂은 주름. 이현성을 생각할 때의 죄책감.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이야기를 떠올릴 때의 눈빛까지.」 

그렇기에 나는 말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읽으면 돼.’ 

「하 지 만」 

‘지하철이 도착했던 그 순간부터, 서유기에 온 지금까지. 모두 다시 읽으면 되는 거야.’ 

멀리서 쏘아진 섬광의 탄환이 내 발치에 떨어졌다. 

나는 빛의 폭발에 휩쓸려 강에 빠졌다. 허우적거리며, 주변의 부유물을 붙잡았다. 

[화신체의 손상이 심각합니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9.3%] 

나는 다시 일어나서 달렸다. 

이제, 정말 조금 남았다. 

‘나는 세상에서 읽는 걸 제일 좋아하니까.’ 

차오른 숨이 버거웠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9.4%] 

벌써 기억이 조금씩 흩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구요성관 중 하나가 쏘아 보낸 창에 어깻죽지가 스쳤다. 그 고통조차 내 것이 아닌 느낌. 

문득, 오래전 커뮤니티에 올렸던 글이 떠올랐다. 

―아직 멸살법 안 읽은 눈 삽니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완결에 다가가는 것이 너무나 아쉬워서, 나는 그렇게 말했었다. 실웃음이 났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까먹고 다시 읽을 수 있다니, 내겐 오히려 행운이라고.’ 

「김독 자는 멍 청 이」 

분하다는 듯, [제4의 벽]이 소리쳤다. 

「난 아 무것 도안 들려 줄 거 야」 

말은 저렇게 해도, 도와줄 것을 알고 있다. 

「잊 어버 리는 거용서 못 한 다」 

쏟아지는 포화 속에 피부가 벗겨지고, 허리가 끊어질 듯한 통증이 발생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그런 통증을, [제4의 벽]이 막아주고 있었다. 

달려드는 구요성관들을 향해 주먹을 휘두른다. 단단한 강철을 두드린 것처럼 주먹이 쓰라렸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의 설정이 발동합니다.] 

[‘은퇴 패널티’로 당신의 전의가 감소합니다.] 

[‘은퇴 패널티’로 당신은 전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망할 설정을 잊고 있었군. 

전신에 감돌던 설화의 힘이 급격하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막아라!] 

[놈이 경전에 도착하게 해선 안 돼!] 

‘경전’이 보관된 유적이 코앞에 있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섬.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보물. 

삼장과 일행들이 14년에 걸친 여정으로 얻은 해답. 

[다수의 관객들이 당신의 설화를 지켜봅니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선택을 지켜봅니다.] 

[심사위원, ‘미후왕’이 당신의 해답을 기대합니다.] 

[심사위원, ‘필마온’이 당신의 설화를 응시합니다.] 

[심사위원, ‘석가의 후예’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와 함께한 모든 존재들이, 이 순간을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9.7%] 

구요성관들은 필사적으로 나를 막아섰다. 페이후 측의 삼장이 허겁지겁 경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한다면, <황제> 측의 성좌들이 더 몰려올 것이고 나는 경전을 얻지 못할 것이다. 

[득표수 : 50412] 

[현재 해당 설화방의 랭킹은 1위입니다.]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시나리오 마스터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상하게도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 녀석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일행들에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는지. 

모두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시나리오 마스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발.)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씩 웃었다. 

나를 향해 달려오는 성좌들과 함께 내레이션이 시작되고 있었다. 

(손오공은 자신의 적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전생에도 싸운 적이 있는 적들이었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9.8%] 

(지긋지긋한 전쟁.) 

(그는 은퇴한 몸이었고, 이제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나는 정성스레 쓴 편지처럼 들려오는 그 내레이션을 들으며 눈을 깜빡였다. 

그래, 너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았어. 

이 이야기의 마지막이 어떻게 끝나야 하는지. 

(천천히 그러쥔 주먹에서 오래된 힘이 솟구쳤다.) 

[당신의 ‘은퇴 페널티’가 완전히 해제됩니다.] 

(제천(齊天). 천공의 먹구름과 전격을 조종하는 힘.) 

[5번 책갈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전용 스킬, ‘전인화(電人化) Lv.23(+13)’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당신의 ‘격’이 육체 조건의 페널티를 극복합니다.] 

백청의 강기. 

[전인화]의 전격이 창공을 찢으며, 구요성관의 별들을 파괴했다. 

(그는 그 주먹으로 많은 이들을 구했기에 ‘구원’이라 불리었고, 많은 산 것들을 죽였기에 ‘마왕’이라 불리었다.) 

어깨를 찢고 자라난 흑빛 날개. 

(그렇기에, 그는 ‘구원의 마왕’이었다.) 

(모두 오래전의 기억이었다.) 

시선을 돌리자, 통천하의 강을 물들인 ‘이계의 신격’의 시신들이 보였다. 

(‘요괴’들의 정점에서 군림하던 시절.) 

(그는 요괴들을 통치했고, 싸웠고, 패했다.) 

(오랜 여행이 그를 변하게 만들었고, 그는 깨달음을 얻어 보살이 되었다.) 

모두, 이 시나리오의 소모품으로 죽어간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 깨달음의 결과였다.) 

머리에 쓴 긴고아가 아팠다. 그 통증 속에서,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강림한 <황제>의 성좌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막아라!] 

[절대로 놈이 경전을 획득해서는―!] 

(죽어간 모든 요괴들을 위해) 

(그는, 다시 한번 ‘구원의 마왕’이 되기로 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눈부신 폭발과 함께 눈앞의 성좌들이 흩어졌다. 

그 빛을 넘어서자, 눈앞에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나는 경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9.9%] 

[당신의 존재가 ‘이계의 신격’으로 진화합니다.]





< Episode 82. 이계의 신격 (7) > 끝

< Episode 83. 독자의 화신 (1) >





들끓는 혼돈의 힘이 전신의 모세혈관을 잠식하고 있었다. 

파고드는 혼돈의 힘에 맞서 설화들이 연이어 반발을 일으켰다.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기적을 꿈꿉니다.] 

[설화, ‘이계의 신격을 살해한 자’가 당신의 변화에 저항합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당신을 보호합니다!] 

흐려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은 채, 나는 경전을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 

이계의 신격화의 부작용일까. 어디선가 말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의식이 분절되며 멋대로 [전지적 독자 시점]이 발동한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치 한꺼번에 여러 사람의 시점을 감각하는 것처럼, 목소리는 동시에 들려왔다. 

「······알고 있었다.」 

유중혁. 

「애초에 너무 티나잖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이지혜. 

「먼저 말하지 않았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니까.」 

신유승. 

「사, 사실 나도 예상했거든? 독자형! 독자형!」 

이길영. 

「······독자 씨?」 

정희원. 

말하지 않아도 이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 그들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척 강한 손오공이군······ 대체 누구지?」 

······이현성.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현성은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다. 

슬슬 기억이 무너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계의 신격화가 끝나면, 내 기억은 우주의 먼지로 흩어질 것이다. 

「김독자는 두려웠다.」 

[제4의 벽]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내 호언은 모두 겁쟁이의 선언이다. 

「기억을 모두 잃은 후의 내가, 정말 ‘나’일까.」 

지금까지 몇 번이나 죽었지만, 기억을 통째로 잃은 적은 없었다. 

지금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정말로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다시 읽는다고, 이 모든 감정을 그대로 가질 수 있을까.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설화, ‘재앙의 왕을 사냥한 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설화, ‘거신의 해방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 소중한 이야기들을 쌓으며 겪었던 것을, 정말로 다시 감각할 수 있을까. 

「그리고 김독자의 눈앞에 경전이 있었다.」 

『서유기 리메이크』. 

저 경전은 ‘거대 설화’ 그 자체였다. 

내가 저것을 쥐는 순간, 이번 ‘거대 설화’는 <김독자 컴퍼니>와 이계의 신격의 것으로 돌아갈 것이다. 

「김독자는 경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것으로, 우리의 『서유기』는 완성될 것이다. 

츠츠츠츠츠······.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은 그때였다. 

[시나리오 이변으로 인해 이계의 신격화가 지연되고 있습니다.] 

······지연된다고? 

주변의 스파크가 급격하게 짙어지며, 성좌들의 고함이 멀어지고 있었다. 시공간의 흐름이 기묘하게 꺾이고 있었다. 등줄기를 적시는 소름에 오한이 들 정도로 강력한 개연성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스타 스트림> 전체가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 

왜곡된 공간을 뚫고, 누군가가 시나리오에 개입하고 있었다. 

[대도깨비, ‘허주’가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대도깨비, ‘허체’가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대도깨비, ‘하롱’이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대도깨비, ‘하람’이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대도깨비, ‘해솔’이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대도깨비들의 현현. 

츠츠츠츠츠츳! 

경전을 향해 다가가는 내 손끝이 석화된 것처럼 굳어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너는 그 이야기를 가질 수 없다.] 

도깨비들은 메인 시나리오에 개입할 수 없다. 

아니, 지금까지도 간접적으로 시비를 걸어오긴 했지만 무려 대도깨비씩이나 되는 존재가 직접적으로 시나리오를 틀어버린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들이, 자기 자신의 개연성까지 내걸고 시나리오에 개입했다. 

[<스타 스트림>이 격동하고 있습니다!] 

대도깨비들 또한 <스타 스트림>의 일부. 

시스템을 관장하는 그들이라고 해도, 비정상적인 개연성의 운용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 때문인지 대도깨비들의 몸에서도 강렬한 스파크가 튀어 오르고 있었다. 

[잊힌 것들은 잊힌 대로 두어야 한다.] 

그들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나는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만약 내가 이 경전을 손에 넣고, ‘거대 설화’를 얻게 된다면. 

【아아아아아아아아】 

【오오오오오오오오오······!】 

그들이 줄곧 이야기에서 배제해온 ‘이계의 신격’들이, 정식으로 ‘거대 설화’에 편입되게 된다. 

이계의 신격은 그들의 시스템만으로는 온전한 통제가 불가능한 힘. 중하급의 [옛 존재]도 아닌 외신 급의 이계의 신격이 마구잡이로 시나리오에 합류하기 시작한다면, <스타 스트림>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일을 완수해야만 했다. 

[그만 두어라.] 

대도깨비들의 격이 내 전신을 사슬처럼 옥죄어 왔고, 경전을 향해 뻗어지던 손은 한 뼘을 남기고 멈춰 섰다.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대도깨비들이 개연성을 어기고 나타났으니, 어그러진 개연성의 저울눈을 맞출 다른 존재도 나타날 것이다. 

쿠구구구구구구! 

생각하기가 무섭게 하늘에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레이트 홀]. 그 너머로 나타난 존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경전을 쥐어라, ■■의 사도여.] 

그는 은가이의 숲에서 만났던 혹부리 왕이었다. 

혹부리를 발견한 대도깨비들이 대경하며 외쳤다. 

[감히······!] 

[지평선의 악마여, 이곳이 어디라고 온 것인가!] 

[이 시나리오에 네가 나타날 개연성은 없다.] 

혹부리 왕이 비웃었다. 

[그건 네놈들도 마찬가지지.] 

대도깨비와 혹부리 왕의 격이 충돌하며, 구속되었던 내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한 뼘이 움직였다. 

[이계의 신격화가 재개됩니다.] 

혹부리 왕이 환하게 웃었다. 

[<스타 스트림>이여, 너희가 지운 세계들이 도래할 것이다.] 

손끝이 경전에 닿는 순간, 환한 전류 속에 내 의식도 사라져 갔다.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나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뒤쪽을 돌아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 믿을 것은······.」 

* 

먼 창공에서 벌어지는 빛의 산란. 

구요성관도, 이십팔수 별자리들도, 그 순간만큼은 그 폭발을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운, <황제>의 모든 성좌들이 경악합니다!] 

구요성관들의 공격을 피해 달아나던 이길영이 용마를 멈춰 세웠다. 

“······신유승?” 

말의 안장에서 깨어난 신유승이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신유승은 이길영과 함께 서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뭔가가 잘못 됐다. 잔챙이들은 빨리 해치우고 어서―] 

잠시 주춤하던 구요성관들과 <황제>의 위인급 성좌들이 다시금 이길영과 신유승을 향해 쇄도했다. 

여전히 서쪽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이길영이 말했다. 

“내가 뚫을 테니까. 가.”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는데도 알 수 있었다. 

저곳에 그들이 찾던 이야기가 있다. 

“가서 독자 형을 구하라고!” 

저곳에, 김독자가 있다. 

신유승 또한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이곳의 그 누구보다도 더. 

용마에서 뛰어내린 이길영이 자신의 격을 개방하는 순간, 신유승이 용마를 달음박질했다. 청룡으로 화한 용마가 고속정처럼 강 위를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멀리서, 그리운 설화의 냄새가 났다. 

오래도록 자신을 지켜준 배후성의 별빛이 보였다. 

저토록 분명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왜, 확신하지 못했던 걸까. 

무수한 의문들이 머릿속을 소용돌이치며 흘러갔다. 

왜 김독자가 이곳에 있는 것인가. 

어째서, 그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것인가. 

신유승은 그런 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저곳에서 김독자를 잃어버리면.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콰콰콰콰콰! 

구요성관들이 쏘아 보낸 섬광포에 용마가 맞았다. 신유승은 비명과 함께 강물에 빠졌다. 

그런 신유승을 끌어 올려준 존재들이 있었다. 

【김독자김독자김독자김독자김독자】 

【우리우리우리우리우리우리】 

언제부터였을까. 강 위를 떠 다니던 요괴들이 무리를 이루어 강을 건너고 있었다. 

신유승은 얼떨결에 그 무리 위에 올라탔다. 요괴들은 징검다리처럼 떠올라 길을 만들고 있었다. 

【구해줘구해줘구해줘구해줘구해줘구해줘】 

그런 요괴들의 위를 달리며, 신유승은 깨달았다. 

「아저씨가 지금 저기에 있는 것은, 이들을 위해서다.」 

그걸 깨닫는 순간 울컥하고 뭔가가 치솟았다. 

눈부신 빛 속에서 흐트러지는 김독자의 설화가 보였다.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지금의 김독자가 위험한 상황이라는 건 명백했다. 

「왜, 아저씨는 늘 혼자서.」 

가장 먼저 치솟은 감정은 원망이었다. 

어째서 김독자는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가. 

「청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겠지.」 

알고 있지만. 

「저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을 거야.」 

그래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암흑성에서도 그랬고, 마계에서도 그랬다. 거기다 성마대전까지. 

그들의 긴 시나리오는, 줄곧 김독자가 희생해 온 역사였다. 

「그렇기에 이 원망은, 사실 김독자가 아니라 신유승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김독자의 화신이었기에 알 수 있는 슬픔. 

지금 자신이 겪는 고통은, 김독자의 결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분명 김독자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유승아, 슬픔에 경중은 없어.”」 

신유승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슬픔에 경중은 있다. 

목숨을 걸어 누군가를 구하는 사람의 절망과, 그걸 지켜보는 무력감에 절망해야 하는 사람의 비탄이 같을 리가 없다. 

결국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이 제일 소중하다. 

그리고 김독자는, 언제나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왔다. 

눈앞에서 강물이 폭발한 것은 그때였다. 

<황제>의 성좌들이 설화를 토하며 낙하하고 있었다. 

[오너라, 사라진 이야기들이여!] 

세계가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와 함께, 세계의 정경이 변화하고 있었다. 

하늘 곳곳에서 [그레이트 홀]이 열렸고, 상상도 못할 격을 가진 존재들이 넘어오고 있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이계의 신격’들이 아니었다. 

[■?■?■■이 ‘엑스트라’ 배역으로 참여합니다!] 

[■■?■이 ‘엑스트라’ 배역으로 참여합니다!] 

그것들은, 서유기의 요괴들이었다. 

(경전의 주인을 놓고 벌어지는 최후의 전쟁.) 

(긴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장식할 음마(陰魔)의 무리가 몰려오고 있었다.) 

마치 세계가 멸망하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그 멸망의 중심에서, 두 눈이 풀린 김독자가 요괴들 사이로 걸어가고 있었다. 

착각일까. 그 순간 김독자는 더 이상 김독자가 아니라 요괴들의 일부처럼 보였다. 

‘내가 막아야 해.’ 

끊어진 요괴의 길 위에서, 신유승은 자신의 작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른들보다도 더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래왔던 손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신유승은 자신의 손이 그저 아이의 것처럼 느껴졌다. 

【■■■■■■■■■■■■■■······!】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으깨졌다. 통천하의 강물이 통째로 뒤집히며 강 위의 산 것들이 피와 설화를 쏟으며 죽어갔다. 

[심사위원, ‘석가의 후예’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시선과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유승아, 네가 해야 해.] 

신유승이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상아 언니?” 

[이대로면 독자 씨는 돌이킬 수 없게 돼. 막을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 의문을 던질 시간이 없었다. 신유승은 필요한 질문부터 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해요?” 

유상아는 곧바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대신, 화두를 던지는 부처처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 배역을 잊지 마.] 

신유승은 잠시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김독자가 있는 방향을 보았다. 

손오공의 머리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금테. 

신유승은 다시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그것은 아이의 주먹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삼장법사’의 주먹이었다. 

“······할 수 있을까요?” 

말끝이 떨렸다. 

멀리서 흔들리는 김독자의 신형.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기어코,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 

“저게 아저씨가 원하는 일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 아이에게, 유상아가 말했다. 

[아주 오래도록 혼자였던 사람이야.] 

김독자(金獨子). 

[그런 사람에게, 혼자가 아니라고 한두 번 말해준다고 갑자기 바뀌지는 않아.] 

자신은 그런 김독자의 화신이었다. 

[말해주고, 곁에 있어 주고, 확신을 줘야 해.] 

신유승은 울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 사람이 정말로 자기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때까지.] 

신유승은 자신의 모든 격을 끌어모아 도움닫기를 했다. [바람의 길]을 사용하는 김독자처럼, 신유승은 전력을 다해 강 위를 달렸다. 

조금씩 가라앉는 수면을 디디며, 신유승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아저씨!” 

김독자는 듣고 있지 않았다. 요괴들과 성좌들의 싸움이 벌어지는 한복판에서, 요괴가 되어가는 김독자가 텅 빈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몸이 변해가고 있었다. 김독자가, 흩어지고 있었다. 

“가지마요! 제발! 가지 말라고요!” 

자신의 배후성이 사라지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신유승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차라리 비명처럼 들렸다. 말로는, 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새로운 설화가 당신에게서 발아합니다!] 

모두가 특별한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할 수는 없고, 그렇기에 비로소 설화가 존재한다. 

전해지지 못한 말들은, 이야기가 된다. 

긴고주(緊箍咒)의 금빛 활자들이 설화가 되어 빛나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을 거야. 아저씨가 날 몇 번이고 구해냈듯이―」 

쏟아지는 유성 속에서, 신유승은 자신의 별을 정확히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나도, 당신을 구할 거야.」





< Episode 83. 독자의 화신 (1) > 끝

< Episode 83. 독자의 화신 (2) >





전장의 중심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인근의 공기가 달라지고 있었다. 

몰려가는 요괴들의 대열과 강림하는 <황제>의 성좌들. 

페이후는 그 대열을 눈으로 좇다가, 자신의 앞을 막은 적수에 눈을 돌렸다. 

“······정말 강하군. 한국에는 너 같은 화신들이 많은가?” 

정희원의 전신은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그녀의 격은 여전히 건재했고, 투지는 들끓고 있었다. 

페이후는 그녀의 강철검에 잘려나간 자신의 가슴팍과 옆구리를 내려다보았다. 

페이후는 혼자 싸우는 게 아니었다. 이랑진군에 나타 태자, 거기다 성운의 지원까지 받고 있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다른 설화방의 ‘우마왕’으로 강림한 화신 하나를 이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잔말 말고 덤벼.” 

이글거리는 정희원의 눈동자를 보던 페이후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겨우 한 명을 상대로 이토록 고전했다는 것부터가 이미 우리의 패배다.” 

페이후는 더 싸울 의사가 없다는 듯 자신의 병장기를 집어넣고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진짜 전장은 여기가 아닌 것 같으니.” 

그 말과 함께 페이후는 이랑진군, 그리고 나타 태자와 함께 경전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정희원이 다급히 반응하려는 순간, 소환된 함선이 그들을 태우고 쾌속하게 멀어졌다. 

[‘심판의 시간’의 발동이 종료됩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조금만 더 싸움이 지속되었더라면, 패배한 것은 그녀였을 것이다. 

과연 페이후. 

괜히 <황제>의 전속 화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전장의 중심을 걱정스레 살핍니다.] 

정희원의 양쪽 어깨에서 대천사의 날개가 자라났다. 

그녀는 반쯤 날듯이 물 위를 달려갔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곳곳에서 다른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었기에, 정희원은 어느 쪽으로 먼저 달려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황제>의 함선들을 상대하는 이지혜. 이십팔수 별자리들과 싸우는 유중혁. 구요성관과 맞서는 이길영······. 

창공에서는 수십 개의 [그레이트 홀]이 열리고 있었고, 홀을 통해 넘어온 이계의 신격들은 요괴로 변하여 성좌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유승아!” 

별을 향해 손을 뻗는, 한 소녀가 있었다. 

* 

신유승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황제>의 성좌들을 응시했다. 

[성운 <황제>의 열두 원신(元辰)이 강림합니다!] 

[성운 <황제>의 사해 용왕(龍王)이 강림합니다!] 

(하나둘, 손오공의 숙적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삼장이 경전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된다!] 

[군을 나눈다. 한쪽은 놈에게서 경전을 빼앗아라. 그리고 다른 한쪽은 삼장을 제압해!] 

신유승은 청룡으로 화한 키메라 드래곤의 갈기를 붙들었다. 그녀를 향해 황제의 주요 전력들이 달려들었다. 

김독자는 너무 멀리 있었다. 

[<황제>의 ‘열두 원신’들이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콰아아아앙! 

눈앞에서 빛이 폭발했다. 

키메라 드래곤이 몸을 감싸 그녀를 보호했다. 화끈한 열기가 전신을 관통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폭발이 연이어 작렬하고, 키메라 드래곤이 비명을 질러댔다. 이를 악문 신유승이 키메라 드래곤의 등을 밟고 도약했다. 

[배후성의 가호가 당신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당신의 놀라운 재능이 개화합니다!] 

[당신은 스스로 ‘바람의 길’을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 순간, 신유승은 강 위를 달리고 있었다. [바람의 길]의 가호가 그녀의 발끝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발끝이 닿은 자리마다 황금빛 파문이 번졌다. 

「신유승은, 김독자처럼 달렸다.」 

그것이 그녀의 배후성이 달리는 방식이었다. 

허공에서 검과 창이 뒤섞인 날붙이들이 날아들었다. 

왼쪽에 셋, 오른쪽에 하나. 

아래쪽에 둘. 

신유승은 아슬아슬하게 그 칼날들을 피해냈다. 하지만 피할수록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수백개의 날붙이들이 위협적인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마치 수백 개의 이빨을 가진 괴물이 입을 벌린 듯한 풍경. 

그 괴물 앞에서, 신유승은 품속의 단도를 꺼내 들었다. 

「신유승은 유중혁처럼 판단했다.」 

언젠가 유중혁에게 배웠던 것. 

[설화, ‘패왕의 제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너는 언젠가 ‘비스트 로드’가 된다. 무수한 괴수종들이 너의 발밑에 군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괴수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김독자가 없었던 3년의 시간. 

유중혁은 신유승에게 사냥을 가르쳤다. 

덩치가 큰 괴수종을 상대하는 법. 표피가 단단한 괴수종을 사냥하는 법과, 접근전이 힘든 괴수종을 죽이는 법. 

「“죽일 수밖에 없을 때는 망설이지 말고 숨통을 끊어라.”」 

「“그렇지 않으면 죽는 건 네가 될 테니까.”」 

호흡을 멈춘 순간, 날붙이들 사이로 틈이 보였다. 

바람이 진 폭풍의 눈. 

신유승은 자신의 모든 격을 발출하며 그 틈을 향해 단도를 던졌다. 

콰콰콰콰콰콰콰! 

바람이 결이 흩어지며 그녀를 향해 날아오던 날붙이들이 일제히 산개했다. 

하지만 모든 날붙이들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아이의 작은 몸을 스치는 검극과 창날. 소녀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신유승은 이현성처럼 엎드렸다.」 

부유물의 뒤에 엎드린 신유승의 머릿속으로 이현성의 얼굴이 스쳐갔다. 

「“이렇게 숨는 거야. 항상 주변의 엄폐물을 먼저 파악하는 걸 잊지 마.”」 

늘 곤란하다는 듯한 웃음을 띤 채, 곰 같은 몸을 움직여 포복 자세를 취하던 아저씨. 그런 이현성의 말에 한마디를 얹던 정희원의 목소리까지. 

「“적들이 너무 많을 때는 숨을 곳이 없을 수도 있어.”」 

「“음, 맞는 말씀입니다.”」 

사해 용왕의 힘이 강을 통제하고 있었다. 

물로 만들어진 뾰족한 창들이 신유승의 사방을 노리고 급습했다. 부유물들이 연이어 파괴되며, 더 이상 강 위에는 그녀가 숨을 곳이 없었다. 

「“그럴 때는 적들을 이용해. 이렇게.”」 

엎드린 이현성의 머리를 척 들어 올리며 말하던 한수영의 모습. 그런 한수영을 노려보던 정희원과, 킬킬 웃던 이길영의 목소리. 

그 모든 풍경을 떠올리며, 신유승은 그녀를 공격하던 화신 하나를 붙잡아 방패로 삼았다. 

“무, 무슨······ 크아아악!” 

「신유승은 한수영처럼 비정해졌다.」 

비참하게 꿰뚫린 화신체를 내버리며, 신유승은 계속해서 달려나갔다. 

[약삭빠른 꼬마로군.] 

[놓치지 마라!] 

이제 김독자와의 거리가 제법 가까워졌다. 

“아저씨!” 

신유승의 말을 들은 듯, 김독자의 신형이 멈칫했다. 

그 텅 빈 동공을 보며, 신유승은 유상아의 말을 떠올렸다. 

「“이런 세계라서 우리가 미안해.”」 

하나둘 모여든 일행들의 모습이 보인다. 

「“상처받게 해서 미안해. 네게 의존해야 하는 무력한 어른이라서. 그래도 하나는 약속할게. 우린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네가 이런 기술들을 쓰지 않아도 되도록 최선을 다할 거야.”」 

그 말을, 신유승은 기억한다. 

「“네가 어떤 존재인지, 잊지 않도록.”」 

스팟! 

긴 창날 하나가 신유승의 뺨을 스쳤다. 무의식중에 만진 뺨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주변 어디에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일행들을 지키던 유중혁의 등도, 언제든 의지가 되던 정희원의 검도 없다. 

방심을 뚫고 날아든 긴 팔뚝이 신유승의 멱살을 잡아챘다. <황제>의 열두 원신들이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 꼬마였을 줄은.] 

[고작 어린애에게 이런 배역을 맡긴 건가?] 

항거할 수 없는 <황제>의 격이 전신을 내리눌렀다. 

평소였다면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적이었다. 달아나는 것이 당연했고, 동료들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럼에도 신유승은 도망가지 않았다. 

[축적된 설화가 이상 현상을 일으킵니다!] 

천천히 눈을 깜빡인 신유승이 눈을 떴다.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차분해졌다. 신유승의 두 눈에서 서슬 퍼런빛이 흘러나왔다. 

[화신 ‘신유승’의 특성 진화가 임박하였습니다.] 

[특성 진화의 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나는 그냥 어린애가 아냐.” 

[····뭐?] 

신유승이 원신의 왼손을 붙잡았다. 아이의 손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악력에, 원신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내 이름은 신유승.” 

[전설급 특성을 획득하였습니다.] 

[당신은 ‘비스트 로드’가 되었습니다.] 

“<김독자 컴퍼니>의, 신유승이다.” 

눈처럼 흰 순백의 격이 강 위를 몰아쳤다. 

비명을 지른 원신들이 성큼 물러났을 때, 그들의 눈앞에는 흰 코트를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야수왕의 감수성]. 

41회차의 신유승이 사용했던 ‘비스트 로드’ 최강의 방어 스킬. 

주변의 강물이 범람하며 그 안에 서식하던 모든 요괴와 괴수종들이 한꺼번에 뛰쳐나오고 있었다. 

그오오오오오오! 

마치, 그들의 왕을 경배하듯이. 

[미친······ 어디서 이런 것들이······!] 

[쳐라! 저 짐승들부터 죽여!] 

<황제>의 성좌들이 포격을 개시했다. 

솟아 오른 괴수들이 그녀를 보호했다. 

“키메라 드래곤!” 

그아아아아아―! 

그녀의 특성에 영향을 받은 [키메라 드래곤]의 몸집이 더욱 커졌다. 이무기처럼 강 속을 헤집은 키메라 드래곤이 원신들을 집어삼키며 포효성을 터트렸다. 그 날카로운 송곳니에 찢겨 나간 원신들이 소리쳤다. 

[빌어먹을 도마뱀이······!] 

신유승은 그런 원신들을 무시하고 달렸다. 

【오오오오오오오】 

【유승유승유승유승유승유승】 

요괴들이 그녀를 위해 길을 터주었다. 

이제, 별은 코앞에 있었다. 

“아저씨!” 

김독자를 향해 외친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김독자는 미동도 없었다. 

대도깨비들과 대적하던 혹부리 왕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늦었다. 그는 이제 ‘위대한 모략’의 것이니까.] 

그 말을 기점으로, 창공의 하늘이 크게 흔들렸다. 

츠츠츠츠츠츳!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의 [그레이트 홀]이 열리고 있었다. 

강 위의 대요괴들이 일제히 몸을 웅크렸다. [야수왕의 감수성]의 털코트가 솜털처럼 비죽 솟아오르고 있었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지금 강림하는 것은, <황제>의 성좌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존재다. 

그리고 김독자는, 이제 저 존재의 소유다. 

“그렇게는 안 돼.” 

[삼장 법사가 ‘긴고주(緊箍咒)’를 외웠습니다!] 

신유승이 스킬을 발동하는 순간, 김독자의 머리 위의 금테가 빛나기 시작했다. 

[아이템 ‘긴고아(緊箍兒)’가 반응합니다!] 

긴고아는 손오공을 억제하는 보패. 

요괴화든 뭐든, 긴고주를 읊는 동안 손오공의 모든 변화는 일시적으로 멈춘다. 

[어리석은 짓이다······!] 

혹부리 왕의 격이 신유승의 전신을 압박해왔다. 입안 깊은 곳에서 핏물이 느껴졌다. [야수왕의 감수성]으로 빚어낸 코트가 미친듯이 펄럭거렸다. 신유승은 김독자를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다가가고, 또 다가갔다. 

엉망이 된 김독자의 얼굴. 수척한 뺨. 고요히 눈을 감은 그의 배후성. 

“아저씨!” 

[당신의 새로운 설화가 발아하고 있습니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섭섭했던 것들을 이야기할 것이고. 

지금의 아저씨는 엉망이라고 말할 것이다. 

처음으로, 솔직하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것이다. 

“제발, 제발 내 목소리 좀 들어요!” 

모두 함께 PC방에 가고 싶다고 말할 것이고. 

피자랑 콜라를 잔뜩 사 들고 한강에 가자고 조를 것이다. 

이제 많은 것이 불가능해진 세계에서, 불가능한 소원들을 이야기하며 

행복해질 것이다. 

시야가 흔들렸고, 눈물이 쉴 새 없이 흩날렸다. 

마침내, 신유승의 손이 김독자의 손끝에 닿았다. 

상처로 덮인 손이, 역시나 상처로 덮인 손을 감쌌다. 상처와 상처가 닿은 자리가 쓰라렸다. 그럼에도 신유승은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준신화급 설화, ‘별의 구원자’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별의 구원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직 못 말해준 게 얼마나 많은데!” 

상아 언니와 역사를 공부하던 시간. 

중혁 아저씨와 사냥감을 요리하던 시간. 

희원 언니에게 검술을 배우고. 

지혜 언니와 스케이트 보드를 연습하고. 

현성 아저씨를 이용해 비행기를 타고. 

이길영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젠 영영 다음 권이 나오지 않을 만화책을 읽던. 

“내가 얼마나······.” 

그 풍경에, 아저씨도 있었으면 했다고.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 라는 말은 끝내 할 수 없다. 

세계의 개연성이, 빌어먹을 <스타 스트림>이 그걸 용납지 않으니까. 

“그냥, 평범하게······.” 

하늘의 별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별들이 제각각의 설화를 노래하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수의 관객들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실은 알고 있다. 

이 세계에서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행복은 아무런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것을. 

그렇기에 평범한 행복은. 

멸망한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사치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대가를 지불하고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그럼에도 누군가가 이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성좌, ‘고려제일검’이······.] 

신유승은 연이어 들려오는 간접 메시지를 들으며 김독자의 손을 더 강하게 쥐었다. 

또렷한 간접 메시지 한 줄이 귀에 꽂힌 것은 그때였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붙잡은 김독자의 손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손오공의 금테로부터 눈부신 황금빛 격류가 솟아오르더니, 어마어마한 개연성의 스파크가 몰아쳤다. 

<황제>의 성좌들이 경악하며 외쳤다. 

[서, 설마? 말도 안 되는······!] 

창공의 곳곳에서 뇌전 같은 격류가 김독자의 전신을 향해 모여들었다. 

[심사위원, ‘필마온’이 당신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서유기의 역사에서 한 번도 없었던 일이 벌어졌다.) 

[심사위원, ‘미후왕’이 당신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은퇴한 손오공이,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고쳐먹었다.) 

[심사위원, ‘투전승불’이 당신의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 Episode 83. 독자의 화신 (2) > 끝

< Episode 83. 독자의 화신 (3) >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발동 중입니다!] 

흐릿한 의식.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제일 먼저 들려온 것은 [제4의 벽]을 통해 넘어온 문장들이었다. 

「그 순간, 이지혜는 전장을 바라보았다.」 

이지혜의 전장이 그곳에 있었다. 

통천하의 강을 덮은 수십 척의 배. 

사격을 준비하는 <황제>의 화신들과, 수뇌부를 맡은 위인급 성좌들. 

「“발포하라!”」 

[터틀 드래곤]을 둘러싼 <황제>의 전함들이 일제히 포격을 개시했다. 

이지혜는 난파된 배의 흔적들을 헤치며 나아갔다. 어떤 포격은 받아내고, 어떤 포격은 흘려 내면서. 

「“장전.”」 

한편의 오케스트라 같은 광경이었다. 가히 해신의 경지에 이른 군함 통제력이 그녀의 [터틀 드래곤]과 유령함대를 움직이고 있었다. 

「“발사.”」 

해상제독 이지혜의 함대가 발포를 시작했다. 이지혜의 지휘에 맞춰 전열을 재편성한 유령함대는 정확히 치고 빠지는 히트 앤 런을 반복했고, 적군의 함대는 순식간에 대파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압도적인 열세를 이겨내는 지휘 능력. 멸살법 최강의 화신 중 하나인 ‘해상제독’의 진가가 비로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성좌, ‘해상전신’이 자신의 화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원작 후반부의 이지혜는 자신의 배후성을 넘어서게 된다. 

어쩌면 이번 회차에서도 그 광경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전술을 바꾼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황제>의 선단들이 일제히 돌격을 시작했다. 철갑선을 앞세운 돌진. 포격전에서 불리해지니 백병전으로 유도할 생각인 듯했다. 그런데 녀석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 이거 독자 아저씨 만나면 한 방 먹여주려고 만든 기술인데.”」 

해상제독 이지혜는, 백병전에도 능하다. 

웅크린 발도 자세를 취한 이지혜를 보며, 나는 그녀가 뭘 사용하려는 것인지 깨달았다. 

「순살(瞬殺).」 

‘멸살법’ 최강의 대인 스킬 중 하나인 그것을, 드디어 이지혜가 터득한 모양이었다. 

콰아아아아! 

뱃전을 꿰뚫는 폭음 속에, 이지혜의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베고, 베고, 또 베고. 검귀의 칼날이 물살을 가로지르며 적장의 목을 날렸다. 

그렇게 얼마나 더 베었을까. 붉게 풀어진 설화들로 덮인 통천하의 전장 가운데, 모든 적을 베고 탈진한 이지혜가 드러누웠다. 

어둑해진 창공을 올려다보며, 이지혜는 마치 내게 말을 걸듯이 물었다. 

「······아저씨, 괜찮은 거지?」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현재 당신의 ‘전지적 독자 시점’ 숙련도가 매우 높습니다.] 

[인물 시점 분할이 가능해졌습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에 등장인물 ‘정희원’의 시점이 추가됩니다.] 

두 번째로 보인 것은 정희원의 모습이었다. 

「“비켜! 비켜! 비켜!”」 

페이후의 뒤를 쫓는 정희원. 그녀의 손에 쥐어진 이현성의 검극에서 [지옥염화]의 불길이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녀가 지나간 길마다 잿가루가 흩날렸다. 

대충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 것 같았다. 저 ‘페이후’가 싸움을 포기하다니······. 정말 한국 최고의 화신은 정희원일지도 모른다. 

[‘3인칭 관찰자 시점’에 등장인물 ‘장하영’의 시점이 추가됩니다.] 

가짜 턱수염을 붙인 장하영이 한명오를 한쪽 옆구리에 낀 채 강을 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 끝에, 구요성관들과 격전을 벌이는 이길영이 있었다. 

「“야, 꼬맹아! 물러서!”」 

<황제>의 정예군 중 하나인 구요성관. 

장하영은 그들을 향해 [파천붕권]의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길영이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방해하지 마요 하영이 형.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멀리 전장의 중심을 응시하던 이길영이 이를 갈 듯 말했다. 

「“······신유승한테 질 수는 없다고.”」 

어둠이 철철 흘러내리는 이길영의 말투에 불길한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길영의 전신에서 황색의 폭풍이 몰아쳤다. 

아니, 잠깐만. 저거 설마······.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화면이 뒤바뀌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에 등장인물 ‘유중혁’의 시점이 추가됩니다.] 

혼자서 이십팔수 별자리를 상대하는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결국은 약소 성운의 화신!”」 

「“겨우 네놈 혼자서 별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이미 유중혁의 손아귀에는 잘려나간 별들의 머리가 걸려 있었다. 이십팔수 별자리의 합공을 받아 코트는 넝마가 되었고, 팔뚝에도 상처들이 남아 있었지만, 유중혁은 굳건했다. 

「“별자리(星座)라면 이미 수도 없이 베어봤다.”」 

피가 흘러내리는 이마. 성좌들의 설화로 젖은 머리카락을 흔들며, 유중혁은 악귀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너희도 추락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면이 전환되었다. 

「“아저씨.”」 

나의 화신이었다. 

「“제발, 제발 내 목소리 좀 들어요!”」 

전신이 흐느끼듯 떨려왔다. 

아이의 손이 꾹 쥔 나의 손이 보였다. 힘없이 늘어진 손은 아이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아이의 말은 간헐적으로 끊어졌고, 말해야 할 것과 들어야 할 것들은 모두 맥락 사이로 사라졌다. 

[설화, ‘별의 구원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몸을······ 움직이고 싶다.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 무릎을 꿇고, 아이를 안은 채 말해주고 싶다. 너의 소원은 

줄곧, 나의 소원이기도 했다고. 

츠츠츠츠츳. 

기억이, 무너지고 있었다. 

주변을 떠다니는 활자들. 어둠 속에서 내 존재가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텅 빈 심연의 저편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 휘몰아치는 [그레이트 홀] 같은 것이 보였다. 천천히, 영혼이 그쪽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약 속 을 지 킬 시 간 이 다】 

무섭다. 

이 모든 것을 잊게 된다면······ 이 감정들은,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 

[제4의 벽]은 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기억해줄까. 

[바앗, 바아아앗!] 

빨려 들어가던 내 영혼을 붙잡은 것은 비유였다. 

비유는 안간힘을 쓰며 나의 영혼체를 붙들고 있었다. 

[바아아아앗!] 

어쩔 줄 모른 채로 그런 비유를 바라보았다. 

나도 저기로 가고 싶지 않다. 

【위 대 한 모 략 의 곁 으 로 오 라】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저쪽으로 가려는 건가?] 

츠츠츠츠,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기류가 변했다. 흩어지던 활자들이 멈췄고, 영혼체를 끌어당기던 인력이 사라졌다. 

누군가가 자신의 격으로 내 소멸을 억제하고 있었다. 

[이 손 선생이 물었다.] 

돌아본 곳에, 익숙한 성좌가 있었다. 

은은하게 흐트러진 백금발에 빛나는 긴고아. 

“······제천대성.” 

장난스럽게 웃는 제천대성이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손 오 공 너 무많 아」 

[저게 말로만 듣던 ‘최후의 벽의 파편’인가? 시끄러운 녀석이군.] 

[흠······ 흥미로운 심상 세계인데.] 

카우보이 복장을 한 잘생긴 원숭이와, 호랑이 가죽 팬티에 손을 넣고 벅벅 긁고 있는 나른한 표정의 원숭이······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곧바로 깨달았다. 

“······필마온과 미후왕이십니까?” 

그리고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허공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원 숭 이 의 왕 이 여】 

【우 리를 방 해 할 셈 인 가】 

[닥쳐.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중이잖아.] 

짜증난다는 듯 미후왕이 힘을 발출하자, ‘이계의 신격’들의 파장이 한순간 사라져버렸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격이었다. 

[구원의 마왕,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다.] 

그 질문을 한 것은 제천대성도, 미후왕도, 필마온도 아니었다. 

처음 보는 존재가 있었다. 이국적인 외모. 성별이 불분명한 신비함이 감도는 얼굴. 짧게 깎은 검은 머리카락과 고아한 법복. 

손오공만이 가질 수 있는 여의금고봉을 가진 것으로 봐서, 그 또한 틀림없는 손오공이었다.

이상한 것은, 그의 머리 위에는 손오공의 긴고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김독자가 알기로, 그런 ‘손오공’은 세상에 하나뿐이었다.」 

“투전승불(鬪戰勝佛).” 

츠츠츠츠츳! 

내 말에 반응하듯, 허공에서 옅은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무표정한 얼굴의 투전승불이 물었다. 

[너의 이야기를 줄곧 지켜보았다.] 

“······송구스럽습니다.” 

[의미 있는 설화더군. 무수한 ‘서유기’가 반복되는 동안에도, 죽어가는 요괴들의 고통에 주목한 설화는 없었다.]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미후왕이 “또 설법쟁이 성격 나오시는군”하고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투전승불은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고통은 당연한 것이다.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너는 모든 요괴들이 피해자인 것처럼 말했지만, 그들 모두가 억울한 것은 아니다. 요괴들 중에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이도 있고, 악의를 가지고 다른 생명을 해치는 이도 있다. 그런 요괴들이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맞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억울한 이들도 분명 있습니다. 아니, 사실은 꽤 많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에 무수한 설화들이 있는 것이다. 거대 설화만이 좋은 설화는 아니다. 거대 설화의 규모에서는 한낱 미물인 자들도, 다른 설화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맞는 말이었다. 

정말로, 맞는 말이었지만. 

“그건 설화에 참가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겠죠.” 

이 세계에는, 그 ‘설화’에 참가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오직 설화의 소모품으로만 쓰이며, 단 1퍼센트의 지분도 나눠 받지 못하는 자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오라오라오라오라오라오라】 

“실패한 이들에게도, 설화는 허락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존재조차 잊은 이들은, 이제 시나리오의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한다. 

<스타 스트림>이 그들의 입을 틀어 막고, 그들의 언어를 불가해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진심인가?] 

여전히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투전승불이 나를 보며 물었다. 정확히는, 내 몸 전체에서 일렁이는 혼돈의 힘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그대는, 자신의 몸을 바쳐 ‘이계의 신격’이 되겠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곁에서 따분한 표정으로 하품을 하던 제천대성이 말했다. 

[확인 끝났냐? 말했잖아. 진짜로 이런 놈이라니까.] 

[······그렇군.] 

[하여간 보살 놈 설득하는 게 제일 힘들어.] 

대체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를 흘끗 본 네 명의 손오공이 떠들고 있었다. 

[그럼 누가 할 거야?] 

[내가 하지. 어차피 나는 보살이 되며 기억을 대부분 잃었으니까.] 

[······네가 땡중인 게 이럴 때 도움이 되는구만.] 

다음 순간, 주변에서 환한 빛이 일렁이더니 흩어지던 나의 기억들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개연성의 스파크와 함께, 전신이 감전된 것처럼 빛났다. 

[누군가가 당신을 대신해 ‘이계의 신격화’의 페널티를 감당합니다.] 

······뭐? 

[구원의 마왕, 너의 생각엔 한 가지 틀린 것이 있다.] 

혼돈의 힘을 내뿜는 투전승불이 말하고 있었다. 

[네가 ‘요괴’가 된다고 해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네겐 그들을 대표할 자격이 없다.] 

그의 말은 맞았다. 

나는 서유기의 요괴로 고통받아온 ‘이계의 신격’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 

나는 그저 배역 손오공일 뿐이니까. 미후왕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네놈의 주제를 알아야지.] 

그에 필마온이 덧붙였다. 

[네 주제(主題)가 있는 곳은 여기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말한 것은 제천대성이었다. 

[요괴들의 일은 요괴들에게 맡겨라. 그리고 너는 네 설화를 살아라.] 

그제야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인지 깨달았다. 

[거대 설화, ‘서유기’가 당신을 위해 이야기합니다.] 

대체 왜? 대체 왜 이들이 나를 위해서? 

씩 웃으며, 제천대성이 말했다. 

[네놈의 설화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뿐이다.] 

멀리서 외신들의 고함이 들려오는 듯했다. 

이계의 신격의 힘이 점차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그는그는그는그는】 

【우리거야우리거야우리거야우리거야】 

[미안하지만 이 녀석은 줄 수 없다.] 

【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 

【왕이온다왕이온다왕이온다왕이】 

어둠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그레이트 홀]. 

무언가가 이 세계로 강림하고 있었다. 

저 모든 ‘이계의 신격’들의 왕.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긴고아의 죄수’를 노려봅니다.] 

그 메시지에, 제천대성이 환히 웃었다. 

[그래, 언젠가 네놈과는 붙어 보고 싶었지.] 

네 명의 손오공이 나를 둘러싼 채 섰다. 

[메인은 누가 할 거지?] 

[당연히 나, 제천대성이다.] 

[멍청한 손오공이 탄생하겠군.] 

[야, 손가락 그렇게 들지 마. 이게 퓨전인 줄 아냐?] 

다음 순간, 나를 둘러싼 손오공들이 서로의 손을 붙잡았다. 

[<스타 스트림>이여! 우리는 ‘구원의 마왕’을 우리의 ‘다섯 번째’로 받아들이겠다.]





< Episode 83. 독자의 화신 (3) > 끝

< Episode 83. 독자의 화신 (4) >





“아저씨!” 

김독자의 전신에서 강렬한 빛이 뻗어 나온 것과, <황제>의 거대 설화가 담긴 마력파가 덮쳐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신유승은 반사적으로 김독자의 몸을 감쌌다. 이미 수많은 공격을 받아낸 [야수왕의 감수성]은 내구도가 심각하게 떨어져 있었지만, 달리 막아낼 수단도 없었다. 

신유승이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웅크리는 순간. 눈부신 빛의 폭풍과 함께, 후방을 덮던 설화의 격이 씻은 듯 사라졌다. 

“······아?” 

허공에 번쩍 들려졌던 아이의 몸이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방금 전까지 김독자가 서 있던 자리에, 훤칠한 키의 사내가 서 있었다. 

눈부신 백금발. 강철 같은 근육과 붉게 타오르는 화안금정. 

<황제>의 성좌들이 경악했다. 

[마,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마어마한 격의 출현에 놀란 것은 외신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요괴에 빙의한 ‘이계의 신격’들은 사내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가공할 혼돈의 격에 당혹감을 표출했다. 

【누구누구누구누구누구누구】 

사내가 웃었다. 

[나를 모르다니, 은퇴가 너무 길었나 보군.] 

신유승은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 김독자의 기운이 느껴지긴 하는데, 김독자는 아니다. 

그럼 이 자는 대체 누구인가. 

“아저씨······?” 

[네가 삼장인가.]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던 제천대성이, 신유승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두 존재의 시선이 같은 높이에서 마주쳤다. 

[김독자는 무사하다.] 

화안금정에서 물씬 흘러나오는 고독한 그리움. 

신유승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머리의 차가운 금테에 손이 닿는 순간.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신유승의 손이 떨렸다. 

너무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존재의 안에 김독자가 살아 숨 쉬고 있다. 불가해한 무언가로 변하지 않은 채, 신유승이 알고 있는 김독자 본연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유승아!” 

멀리서 달려온 정희원이 신유승을 안아 들며, 경계하듯 제천대성을 노려보았다. 제천대성은 그런 정희원에게 싱긋 웃어주고는 창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황제>의 일부 성좌들과 대도깨비, 그리고 혹부리 왕이 있었다. 

[다들 왜 그런 표정이지? 아깐 『서유기』 주인공인 나를 빼놓고 잘도 떠들더니.] 

서유기의 주인공, 제천대성. 

대도깨비들 중 하나가 물었다. 

[어째서 그대가 나선 것이지? 그대는 분명 <황제>와의 약조를 맺었을 텐데.] 

[약조는 안 어겼어. 약조 내용이 뭔지나 알고 묻는 건가?] 

대도깨비가 말을 잇기도 전에 혹부리 왕의 진언이 떨어졌다. 

[원숭이 왕! 제정신인가? ‘구원의 마왕’은 우리 것이다. 이제 그는 ‘이계의 신격’이란 말이다. 그것이 신성한 약속이다!] 

[그놈은 이제 내 형제야. 그리고······.] 

제천대성의 화안금정이 환한 빛을 뿜었다. 

[이제, 나도 ‘이계의 신격’이거든.] 

투전승불의 ‘이계의 신격화’로 인해, 손오공의 전신에 혼돈의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현재 해당 설화에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35.333%입니다.] 

[히든 시나리오― ‘약속 증명’이 완료되었습니다!] 

[거대 설화의 힘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시나리오, 「서유기 리메이크」가 최종 페이즈에 돌입합니다!] 

(그리고 손오공은 자신의 오랜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혼란에 빠진 요괴들이 제천대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시나리오의 소모품으로 쓰이던 ‘이계의 신격’. 

방금 전까지 왕을 찾던 그들은 당혹스런 모습으로 고개를 흔들어 댔다. 

【왕은왕은왕은왕은】 

【어느쪽어느쪽어느쪽어느쪽어느쪽】 

요괴들은 새로운 ‘이계의 신격’으로 등장한 제천대성 손오공과, 본래 그들이 따르던 ‘은밀한 모략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런 요괴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제천대성이 말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친구들.] 

(아주 긴 이야기를, 그와 함께해 온 요괴들이었다.) 

[너희들이 당한 시련들을 알고 있다. 나는 요괴로 태어났지만 인간의 영향을 받았고, 그들의 사상과 관습을 받아들였다. 그들이 정한 방식으로 정의를 실천했고, 그들이 말하는 도를 쌓았다.] 

(때로는 적이었고, 때로는 동료였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요괴들은 희생되고, 무의미한 깨달음만이 반복된다. 이제 「서유기」는 뻔한 가르침을 설파하고 성운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설화였고, 무대 위의 연극에 지나지 않았다.) 

[그 모든 시간을 속죄할 수는 없겠지. 다만, 그럼에도 너희가 나를 용서해준다면······.] 

(오래된 요괴들의 왕. 한때 천계와 맞서 싸웠던 그들의 왕이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해 싸우겠다.] 

하나둘 요괴들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정말정말정말정말정말】 

제천대성이 대답했다. 

[나의 진명을 걸고 약속한다.] 

요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둘 모여든 요괴는 열이 되었고, 백이 되었고, 천을 넘었다. 강 속에 숨어 있던 요괴들도, 창공의 구름 사이에 몸을 감추고 있던 요괴들도 나타났다. 구름처럼 모여든 요괴들이 무리를 이루기 시작했다. 오래 전, 그들이 모시던 하나의 왕을 받들 듯이. 

[오래된 ‘거대 설화’가 깨어납니다.] 

[잠깐, 멈춰라!] 

[그대는 심사위원이다! 심사위원이 진행 설화에 개입할 수는―!] 

다급히 대도깨비들이 제재에 나섰으나, 이번만큼은 소용이 없었다. 

[<스타 스트림>이 95번 메인 시나리오의 개연성을 납득합니다.] 

[「서유기 리메이크」의 메인 테마가 격변합니다!] 

아무리 대도깨비라고 해도, <스타 스트림>의 거대한 흐름을 거역할 수는 없다. 혹부리 왕도 잠시 사태를 관망하려는 듯 뒤로 훌쩍 물러났다. 

어차피 그의 목적은 ‘이계의 신격’을 시나리오에 투입하는 것이었으니 이걸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문제는, 

저 ‘이계의 신격’들을 이끄는 주체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쿠구구구구구구! 

허공의 [그레이트 홀]에서 낙뢰가 이어지더니, 뭔가가 심연을 뚫고 강림하고 있었다. 

[저 자는······!] 

지금껏 나타났던 외신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강대한 격. 

제천대성도, 혹부리 왕도, 대도깨비들도. 그곳의 모두가 그 존재의 현현을 지켜보았다. 

제천대성이 웃었다. 

[드디어 오셨군.]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시나리오 지역에 현현했습니다!] 

[누군가가 ‘혼세마왕’의 배역으로 시나리오에 참가했습니다!] 

새카만 그림자로 일렁이는 ‘은밀한 모략가’가, 요괴의 배역을 받아 시나리오에 참전한 것이었다. 

제대로 된 절차를 밟지 않았기 때문인지, ‘은밀한 모략가’의 전신이 휘황한 스파크에 둘러싸여 있었다. 제천대성이 물었다. 

[이 손 선생을 방해하러 온 건가?] 

【그건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겠지.】 

[예상대로 음침한 목소리구나, ‘은밀한 모략가’.] 

두 존재가 실제로 대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비형과 비유의 채널에서 김독자를 지켜보았던 두 성좌의 대면. 

제천대성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간접 메시지로는 점잖은 척 굴더니, 결국 이렇게 성깔을 드러내시는군.] 

‘은밀한 모략가’가 제천대성을 고요히 응시했다. 

【그러는 그대는 간접 메시지대로 방정맞군.】 

가공할 격을 일으킨 손오공이 여의금고봉을 쥔 채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긴말은 됐고, 왔으면 한판 붙지. 어차피 네놈을 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인 것 같으니까.] 

‘은밀한 모략가’의 등장과 함께, 주변의 요괴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두 명의 절대자 중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요괴들의 왕인 제천대성에게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이계의 신격’의 왕인 은밀한 모략가에게 복종할 것인가. 

갑작스런 두 성좌의 대결 구도에 대도깨비들도, 혹부리 왕도, 허공의 성좌들도 긴장한 모습이었다. 

한쪽은 <스타 스트림>의 절멸을 꿈꾸는 이계의 신격, 다른 한쪽은 <스타 스트림> 최강의 성좌 중 하나. 

지금껏 벌어진 적 없던 전장이 열리려 하고 있었다. 

투기를 불태운 손오공이 여의봉을 하늘 높이 치켜드는 순간. 

【미안하지만, 그대의 상대는 내가 아니다.】 

그 말과 동시에, 창공이 갈라지며 대량의 스파크가 발생했다. 

[성운 <황제>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에 강림합니다!] 

지금까지 넘어온 <황제>의 군세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물량. 반파된 이십팔수 별자리들과 몇 남지 않은 구요성관들. 사해 용왕에 이어 무수한 숫자의 신선과 투선들이 시나리오에 현현하고 있었다. 

[성좌, ‘반도원의 주인’이 시나리오에 현현합니다!] 

[성좌, ‘천계지자(天界智者)’가 시나리오에 현현합니다!] 

[수식언을 밝히지 않은 다수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에 현현합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지상과 산악, 하천을 다스리는 신령들과 천궁을 지키는 은하수군까지. 도합 10만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군세가 시나리오의 하늘을 덮기 시작했다. 

[탁탑천왕에 나타 태자, 이랑진군이라. 그리운 조합이구나. 게다가 천궁의 엉덩이 무거운 노친네들까지······.] 

(오래전, 그와 맞서 싸웠던 천궁의 적수들이 그곳에 있었다.) 

[제천대성,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페이후와 함께 정희원을 압박했던 나타 태자의 전신에서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설화가 넘실대고 있었다. 이제 설화방의 일개 배역이 아닌 ‘나타 태자’ 본인으로 등장한 까닭이었다. 

[뭔 짓이긴. 이제 시나리오를 끝내려는 거지.] 

제천대성의 퉁명스런 대답에 <황제>의 성좌들이 반발했다. 

[그대 마음대로 끝을 결정할 수는 없다!] 

[이런 짓을 하면 약소 성운에 「서유기」가 넘어가게 된다는 걸 모르는 건가!] 

[어서 경전을 내놓게!] 

제천대성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경전을 내려다보다가, 곁의 신유승을 흘끗 돌아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아 좀 넘어갈 수도 있지 뭘 그래. 널리 알려지면 좋잖아.] 

[이것은 약조 위반이다!] 

[위반 아냐. 내가 너흴 돕는 건 ‘네 명의 손오공이 같은 설화를 택할 때까지’였잖아. 그날이 온 것뿐이다.] 

제천대성의 진의를 깨달은 <황제>의 성좌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성운, <황제>가 ‘긴고아의 죄수’에게 격노합니다!] 

성운을 대표해서 나온 것은 이랑진군이었다. 

[제천대성,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겠지? 설마 여기서 ‘천계대전(天界大戰)’이라도 벌일 셈인가?] 

[흠? 그럴 생각은 없었다만. 설마 싸우고 싶은 거냐?] 

쿠구구구구! 

제천대성의 화신체에서 흘러나오는 어마어마한 기류에, <황제>의 성좌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천계를 휩쓸었던 그의 설화가 시나리오에 풀려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랑진군의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그대의 강함은 인정한다. <황제>의 누구도 단신으로 그대와 맞서 싸울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대는 이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 설화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츠츠츠츠츳······! 

「무대화」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설화와 설화가 부딪치며, 오래된 시절이 재현되고 있었다. 

요괴들의 왕인 제천대성과 <황제>의 대전쟁. 

제천대성이 말했다. 

[확실히 그땐 내가 졌었지. 하지만 그건 내가 그저 ‘제천대성’일 때의 이야기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황제>가 먼저 움직였다. 

[놈이 도술을 사용한다! 지금 포박해라!] 

[태상노군이시여! 금강탁을······!] 

[오라, 매산 육형제여!] 

달려드는 천계의 군사들을 보며, 제천대성이 근두운을 불렀다. 새카맣게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들이 손오공의 설화에 맞춰 모여들고 있었다. 

[거대 설화, ‘서유기’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제천대성이 입을 열었다. 

[내 진명은 손오공.] 

​ 

「제천대성」 

「미후왕」 

「필마온」 

「투전승불」 

그리고 

「구원의 마왕」 

통천하의 강 위에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내리치는 우레. 그 폭풍우의 중심에서, 제천대성이 주먹을 그러쥐었다. 

* 

눈부신 낙뢰가 전장을 휩쓰는 사이, 유중혁은 전장에 도착했다. 

통천하의 중심에서 성좌들을 우수수 떨어트리는 제천대성의 신위는 그야말로 가공할 것이었다. 

‘······김독자는 저 녀석 안에 있는 건가.’ 

황금빛으로 물든 [현자의 눈] 덕분에, 유중혁은 쉽게 김독자의 생사를 확인했다. 다행히 김독자는 무사한 듯했다. 거기다 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강력한 ‘제천대성’이 직접 현현하여 자신의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정희원과 신유승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요괴들과 성좌들의 대격전에 끼어 몸을 사리고 있었는데, 실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이길영과 이지혜, 장하영은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슬슬 시나리오를 끝내야 한다.’ 

이미 그들의 설화방은 랭킹 1위를 달성했고, 경전은 삼장 역할인 신유승에게 넘어왔다. 

[현재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 설화방이 ‘경전’을 획득한 상황입니다.] 

[경전을 1시간 동안 수호하면 시나리오는 자동 종료됩니다.] 

[현재 시나리오 종료까지 54분 남았습니다.] 

심지어 시나리오 종료 페이즈까지 발동한 상황. 이제 시간만 끌어도 서유기의 거대 설화는 <김독자 컴퍼니>의 것이 된다. 

다만,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쿠구구구구······. 

창공의 중심에서 전장을 응시하는 저 존재였다. 

‘은밀한 모략가.’ 

‘은밀한 모략가’는 전장에 참가하지 않은 채 제천대성과 <황제>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의도인지는 짐작이 갔다. 아마 제천대성의 힘이 빠질 때를 기다렸다가 그를 습격하려는 속셈이겠지. 

현현한 ‘은밀한 모략가’의 위세는 일전과 같지 않았다. 

―개연성을 많이 소모했군. 그는 이번 회차에 지나치게 많은 투자를 했다. 

그 말을 한 것은 유중혁 [999]였다. 대체 언제부터였는지, 녀석은 유중혁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었다. 

유중혁은 무심한 눈으로 그런 [999]를 일별하더니, 조용히 [흑천마도]를 뽑았다. 

“놈을 죽일 기회라는 뜻이지.” 

‘은밀한 모략가’가 정확히 그를 응시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저 시선이 마주친 것만으로, 유중혁은 굳어버렸다.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몸을 움츠립니다.] 

[설화, ‘재앙의 왕을 사냥한 자’가 전투를 거부합니다.] 

그의 설화들이 공포에 떨고 있었다. 

약화된 것이, 저런 상태란 말인가. 

흘러나온 패배의 기억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날 부러진 것은 [흑천마도]만이 아닌지도 모른다. 

[999]가 물었다. 

―두려운 모양이군. 

인정하기 싫었지만, 사실이었다. 

―확실히, 지금의 네놈은 ‘위대한 모략’을 이길 수 없다. 

자신이 가진 그 어떤 역사를 걸어도 넘을 수 없는 절망. 

유중혁은 그때 압도적인 시간의 벽을 보았다. 

그것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 

“뭐?” 

유중혁의 어깨에서 뛰어내린 [999]의 외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무림만두가 유중혁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키가 자라난 [999]는, 정확히 유중혁과 똑같은 모습이 되었다. 

스멀거리며 흘러나오는 초월좌 특유의 격. 등을 돌린 또 다른 자신을 보며, 유중혁은 그가 누구인지 절감했다. 

999회차의 유중혁. 

검은 코트를 흩날리며, [999]가 말했다. 

“기억해내라. 진짜 네가 누구인지. 네가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지를 말이다.” 

천천히 품속의 검을 뽑는 [999]. 

놀랍게도 그가 뽑은 검은 [진천패도]가 아니었다. 

[흑천마도]. 

3회차의 유중혁이 가진 것과 정확히 같은 병기. 

[999]가 말했다. 

“999회차의 전투를 네게 보여주마.”





< Episode 83. 독자의 화신 (4) > 끝

< Episode 83. 독자의 화신 (5) >





누구나 한 번쯤 손오공의 이야기를 읽는다. 

내 경우 ‘손오공’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멸살법’의 묘사였다. 

「하늘을 부수는 여의금고봉.」 

「홀로 하나의 성운을 상대할 수 있는 신외신(身外身)의 술법.」 

「세계의 별들을 추락시킬 뇌운(雷雲).」 

‘멸살법’ 최강의 성좌 중 하나인 제천대성 손오공. 

[거대 설화, ‘서유기’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지금, 나는 그 손오공이 된 상태였다. 

쿠구구구구구! 

손오공의 주먹이 창공의 한 점을 가리킬 때마다, <황제>의 별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 압도적인 힘을 1인칭 시점에서 목도하게 되니, 나도 모르게 숨이 막혔다. 

제천대성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막내야, 뭘 시시덕대는 거냐.’ 

머릿속으로 미후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나를 비롯한 다섯 명의 손오공은 제천대성의 깽판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는 모양이었다. 

‘형님들의 강함에 놀랐느냐?’ 

‘······솔직히 감탄했습니다.’ 

콰콰콰콰콰콰! 

[크아아아악!] 

방금 날아간 저 거인은 설화급 성좌다. 

아니, 뇌전 한 방에 설화급이 날아가 버리는 게 말이 되냐고. 

미후왕이 조소하듯 말했다. 

‘흥, 거령신인가? 겨우 설화급 따위가 우리와 맞붙겠다고 나선 게 잘못이다.’ 

‘‘긴고아의 죄수’도 설화급 아닙니까······?’ 

그 말에 대답한 것은 필마온이었다. 

‘우리가 각각 혼자라면 그렇겠지. 이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맞다. 이제야 나도 확실히 실감이 났다. 

서유기의 주인공인 손오공은, 결국 네 명의 손오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렴동을 지배하던 원숭이 왕 ‘미후왕’. 

도술의 힘을 인정받아 옥황에게 관직을 받았던 ‘필마온’. 

자신을 능멸한 천계와 맞붙었던 ‘제천대성’. 

그리고······ 서유기의 여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투전승불’까지. 

그 모든 ‘손오공’의 설화들이 하나로 모였을 때, 진정한 손오공의 힘이 발현되는 것이다. 

필마온이 중얼거렸다. 

‘대성 녀석, 아주 신났군. 이렇게 날뛰어보는 것도 오랜만이겠지.’ 

실제로 제천대성의 진언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 

[천계도 많이 약해졌구나!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냐?] 

십여 합도 채 견뎌내지 못하고 나가떨어진 설화급 성좌들이 그대로 통천하의 강물에 처박혔다. 

[쳐라!] 

하지만 <황제>의 군세는 여전히 강대했다. <스타 스트림>에서 가장 많은 숫자의 별을 보유한 성운. 이 정도 타격으로는 끄떡도 없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제천대성의 설화도 이제 시작이었다. 

【오오오오오오오!】 

이계의 신격들이 일제히 포효함과 동시에, 하늘의 뇌전이 손오공의 여의봉에 떨어졌다. 황금의 격류가 폭발하더니, 손오공이 그대로 자신의 여의봉을 천공으로 내던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여의봉의 뇌격이 흉포한 기세로 천공을 불태우며 돌진했다. 어마어마한 광풍이 밀어닥쳤다. 

마침내 비산한 물보라가 가라앉았을 때, 물에 빠진 생쥐처럼 젖은 성좌 하나가 중얼거렸다.

[이, 이게 무슨······.] 

하늘의 한쪽 방위가 비어 있었다. 

그 일격에, 밀려들던 수천 명의 신령들이 한꺼번에 전멸해버린 것이다. 

[이것이 제천대성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 위압적인 광경에도, <황제>의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다. 

[두려워할 것 없다! 놈의 설화에도 한계는 있다!] 

[밀어붙여라! 어차피 놈은 혼자다!] 

순식간에 늘어난 신령들이 다시 빈 자리를 채웠다. 

이것이 <황제>의 전쟁.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이쪽이 강하다고 해도, 저쪽의 물량에는 끝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먼저 지치는 것은······. 

‘흥, 벌써부터 기죽을 것 없다. 아직 그놈의 힘은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그놈이요?’ 

‘투전승불 말이다.’ 

투전승불. 그러고 보니 아까 나를 대신해 ‘이계의 신격화’의 패널티를 감수한 게 바로 그였다. 

‘그분은 괜찮으신 겁니까?’ 

‘넷째는 괜찮다. 고집멸도(苦集滅道)를 깨달은 녀석에게 속세의 기억 따윈 무의미해. 모든 것이 곧 공(空)이니까.’ 

그러자 필마온이 태클을 걸었다. 

‘언제부터 투전승불이 넷째가 된 거지?’ 

‘그놈이 순서상 네 번째로 등장했으니까 넷째지. 당연히 연대로 따지는 게 정상 아니겠느냐?’ 

‘그딴 식이라면······.’ 

‘물론, 손오공의 시작은 나였으니까 당연히 내가 첫째다. 축하한다. 네놈은 유명세도 약한 주제에 둘째구나.’ 

‘멍청한 원숭이답게 제 얼굴에 침을 뱉고 있군. 동굴의 원숭이 왕 따윌 누가 기억이나 해줄 것 같나?’ 

‘마구간 똥이나 치우던 네놈보다야 낫지.’ 

두 손오공의 말다툼 때문일까, 제천대성의 설화 구성이 일순간 흔들리더니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 

본체가 크게 흔들리자 제천대성이 기어코 짜증을 냈다. 

[모두 닥쳐라! 집중이 안 되잖아!] 

그러면서 의기양양하게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연히 제일 유명한 내가 첫째다!] 

미후왕과 필마온이 동시에 불만을 터트렸다. 

까마득하게 몰려오는 별들의 파도에 맞서, 제천대성이 처음으로 수세를 취했다. 

여기서 밀리면 이번 전쟁에서는 이길 수 없다. 그걸 알았는지 미후왕과 필마온도 사담을 멈추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쾅! 콰앙! 콰아앙! 

전장의 한쪽 구석이 무너지면서 거대한 전함이 등장한 것은 그때였다. 

“아저씨! 내가 간다―!” 

<황제>의 배를 부수고 진격해오는 이지혜가 그곳에 있었다. 홀로 싸우는 손오공을 지원하기 위해,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좌, ‘금신나한’이 시나리오에 현현합니다!] 

제천대성의 진짜 동료들도 하나둘 시나리오에 끼기 시작했다. 

허공에 화신체로 현현한 금신나한 사오정이 이지혜를 내려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대가 내 역할을 수행한 자인가?] 

“······뭐야 이 괴물은?” 

[성좌, ‘정단사자’가 시나리오에 현현합니다!] 

이어서 나타난 것은 상보심금파의 주인이었다. 출렁이는 뱃살 아래 거적같은 하의를 펄럭이며 저팔계가 외쳤다. 

[패왕 저팔계 유중혁은 어디에 있느냐! 하하하! 마음에 들었다! 나의 배역이여!] 

아무래도 정단사자는 유중혁에게 꽂혀버린 모양이었다. 

현현한 저팔계와 사오정을 향해 제천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왔는가, 사제들. 너무 늦었구만.] 

[딱히 사형을 도와주러 온 것은 아니요. 내 배역 녀석이 궁금해서 온 것뿐이니 오해는 마시게.] 

새침데기 같은 변명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저팔계, 그리고 어쩐지 상처를 받은 듯한 표정의 사오정이 손오공의 곁에 섰다. 

항요보장과 상보심금파가 여의봉의 곁에서 격을 뿜어대자, 비로소 『서유기』의 삼인방이 모였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거대 설화, ‘서유기’가 본래의 격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이에 긴장한 <황제>의 성좌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심사위원들이여, 지금 제천대성의 편에 서겠다는 것인가?] 

[그들뿐만이 아니다.] 

서유기 삼인방의 배후에 여섯 인형(人形)들이 서 있었다. 

원숭이를 닮은 요괴도 있었고, 상어나 사자, 대붕을 닮은 자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곧장 깨달았다. 

복해대성 교마왕 (覆海大聖 蛟魔王). 

혼천대성 붕마왕 (混天大聖 鵬魔王). 

이산대성 사타왕 (移山大聖 獅駝王). 

통풍대성 미후왕 (通風大聖 獼猴王). 

구신대성 우융왕 (驅神大聖 䟹狨王). 

마지막 한 사람은 요괴가 아니라 정희원이었다. 

“······이거, 재밌게 됐네.” 

평천대성(平天大聖) 우마왕의 가호와 함께, 그의 배역을 맡은 정희원의 격이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었다. 

[우리도 함께다, 제천대성.] 

제천대성과 함께 천계대전을 치렀던 칠대성(七大聖)이 한자리에 모이는 순간이었다. 

『서유기』 본편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여 존재감이 크지 않았던 요괴들. 그들 또한 자신의 비통함을 풀기 위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하필 내 별명도 ‘미후왕’이어서 억울했지. 그 한을 오늘 풀어주마!] 

칠대성이 함께 전장에 뛰어들자, 전장의 분위기는 급변했다. 

그때까지 미적거리며 ‘은밀한 모략가’의 눈치를 보던 이계의 신격들도 함께 싸우기 시작했다. 

전황을 지켜보던 미후왕이 중얼거렸다. 

‘그 패왕 저팔계란 놈은 어디로 갔지?’ 

그러고 보니 유중혁이 보이지 않았다. 

녀석이라면 분명 이십팔수 별자리와 싸우고 있었는데······.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허공에서 시나리오의 최후를 지켜보는 혹부리 왕과 대도깨비들이 보였다. 

[가라! 물러서지 말고 싸워! 결국 최후에 승리하는 것은 <황제>다!] 

<황제>의 성좌들이 우렁찬 포효와 함께 진군해왔다. 

제일 선두에서 앞장선 것은 천궁의 사대천왕이었다.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 

거기에 탁탑천왕과 나타 태자까지. 저쪽도 이제 필사적인 모양이었다. 

서왕모와 금강탁의 주인인 태상노군. 거기다 태백금성······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성좌들이 모조리 강림해 자신의 설화를 풀어 놓고 있었다. 

바야흐로, 천계대전이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성운 <황제>가 자신의 거대 설화들을 개방합니다!] 

이것이 ‘거대 성운’의 힘. 

그럼에도 제천대성은 물러서지 않았다. 

[다수의 관객들이 갑작스런 구경거리에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여기서 지면 ‘긴고아의 죄수’는 자신의 라이벌이 아니라 선언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긴고아의 죄수’를 응원합니다!] 

[성좌, ‘고려제일검’이 ‘긴고아의 죄수’의 무위에 경의를 표합니다.] 

제일 먼저 지국천왕이 꺾였고, 그다음은 증장천왕이 무릎을 꿇었다. 

여의봉이 향하는 곳마다 천궁의 군세가 부러지고 있었다. 

입신(入神)의 무공. 

이것이 바로 최강의 성좌, 손오공의 힘이었다. 

그런 제천대성이 처음으로 멈춰 선 것은, 어디선가 들려온 불경 소리 때문이었다. 

츠츠츠츠츠츠······! 

나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괴로운 것은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미후왕도 필마온도 한껏 짜증이 난 목소리였다. 

‘이런 망할······!’ 

‘······그 땡중이다.’ 

제천대성의 머리를 조여오는 긴고아. 

한쪽 손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쥔 제천대성이 경고하듯 말했다. 

[관세음보살. 방해하지 마시오!] 

그 말과 함께 구름 사이로 연화대가 나타났다. 

관세음보살은 그 연화대의 중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오공. 지난 일들은 모두 잊은 것이냐?] 

[······뭘 말이오!] 

[그만두어라. 이것은 옳지 못하다.] 

[싫다면?] 

[지금껏 내게 도움을 받지 않았느냐. 그걸 봐서라도 이만 물러날 수 없겠느냐?] 

[······당신의 도움?] 

제천대성의 눈썹이 크게 휘었다. 

[그 잘난 도움 덕에, 고생만 잔뜩 했지.] 

밀려온 울화를 풀어내듯, 제천대성이 외쳤다. 

[우리가 겪었던 많은 역경들은 당신의 관음(觀淫)에서 비롯되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어 알 수 있는 자. 

제천대성의 기억이 흐르고 있었다. 

「“불문에서는 구구 팔십일의 수효를 모두 채워야 귀진(歸眞)할 수 있다. 그들은 아직 ‘팔십 번의 재난’을 겪었을 뿐 아직 한 차례가 모자라다. 오방 게체들은 그들을 좇아가 마지막 재난을 일으키도록 하라!”」 

서유기 최후의 재난. 

그것을 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저 관세음보살이었다. 

[음마의 무리를 일으키고, 요괴들을 선동하고, 세상에 재앙을 가져온 것도 모두 당신과 <황제>였다!] 

[······모두 필요한 역경이었다. 그만 진정하거라.] 

제천대성이 흥분하자, 관세음보살이 다시 긴고주를 외기 시작했다. 

[그런 긴고주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은가?] 

파츠츠츠츠츳! 

제천대성이 일으킨 격에 긴고주의 힘이 끊어졌다. 

놀란 관세음보살이 연화대와 함께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그의 힘이 너무 강해졌군. 나 혼자서는 무리겠어.] 

탁탑천왕이 입술을 깨물었다. 

[장기전으로 가면 이길 수는 있겠지만······.] 

이제 시나리오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30분도 채 되지 않는다. 

장기전에서 이기더라도 시나리오에서 패배하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부처!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결국, <황제>의 마지막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다섯 개의 기둥」만 있으면 된다! 그 설화만 있다면 저 원숭이 놈을 잡는 것 따윈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섯 개의 기둥」은 부처의 다섯 손가락을 뜻하는 말이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손오공이라도, 부처의 손바닥에 제압당한 설화가 존재하는 한 「무대화」의 영향력을 피해갈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이 세계에는, 부처의 분체 중 하나인 석존이 있었다. 

그때, 곁에 있던 나타 태자가 속삭였다. 

[잊으셨습니까? 석존은 지난 ‘성마대전’때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아마······ 환생자들의 섬을 봉인하며 사멸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석존이 죽었다고? 그럼 저놈을 제압할 방법은······!] 

[걱정 마십시오. 우리에겐 그의 후계가 있습니다.] 

그 말과 함께, <황제>의 군세가 갈라졌다. 

[오시게, 석가의 후계여!] 

갈라진 군세 사이로 <황제>의 최상위격 성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올림포스> 12신에 못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들. 

그리고 그 중심을 걷는 하늘하늘한 법복을 보며, 나는 조용히 동요했다. 

「유상아가 그곳에 있었다.」 

석존과의 약속으로 환생한 유상아. 결국 그녀는, 석존의 후예가 되어 윤회의 고리를 통해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제천대성?’ 

제천대성의 몸이 굳어졌다. 그의 내부에서 엄청난 감정의 격류가 느껴졌다. 

미후왕과 필마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군. 그래서 저 여자를 처음 봤을 때······.’ 

‘설마 저 화신체였단 말인가.’ 

순간, 밀려오는 제천대성의 기억이 있었다. 까마득한 서유기의 여정이 순식간에 축약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유상아는 단순히 석존의 후예로 환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화신체는, 매우 특별한 이의 것이었다. 

「“삼장이여.”」 

삼장법사(三藏法師). 

이 세계에서 가장 긴고주에 정통한 존재이자, 그저 말 한마디로 손오공을 강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황제>의 성좌들이 외쳤다. 

[어서 놈을 제압하게! 석가의 후계여!] 

성큼성큼 다가온 유상아의 모습을 보면서도, 제천대성은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추억에 잠기기라도 한 것처럼. 

‘제천대성! 어서 움직여라! 뭘 하는 거냐!’ 

‘이대로면 당한다!’ 

그 말을 듣고 있자니 나 역시 조금 불안해졌다. 

지금 눈앞의 유상아는 정말 내가 아는 유상아일까. 환생한 신유승이 자신의 기억을 잃었듯, 유상아도 만약 그런 거라면. 

내가 알던 존재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 거라면. 

천천히 뻗은 유상아의 손이 손오공의 긴고아에 닿았다. 

[무척 아파 보이네요. 힘들겠어요.] 

그녀의 맑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이다. 

삼장법사도, 석가의 후예도 아닌.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동료, 유상아다. 

[이건 이제 당신보다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 

천천히 움직인 그녀의 손이, 손오공의 긴고아를 벗겼다. 

제천대성의 머리를 옥죄던 긴고아가 너무도 허무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후왕도, 필마온도, 제천대성도. 모두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황제>의 성좌들이 대경하며 달려들었으나, 이미 늦었다. 

쏟아지는 성좌들의 고함 속에서, 가장 오래된 감옥의 죄수가 비로소 해방되고 있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의 각성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투전승불’의 설화가 해금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의 수식언이 진화합니다!] 

휘황한 빛살 속에서, ‘긴고아의 죄수’가 천천히 눈을 떴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봉인에서 깨어났습니다.]





< Episode 83. 독자의 화신 (5) > 끝

< Episode 83. 독자의 화신 (6) >





봉인에서 깨어난 제천대성은 그야말로 야차에 가까웠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경악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멍하니 전장을 응시합니다.] 

[성좌,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 눈을 부릅뜹니다.] 

[성좌, ‘흙으로 사람을 빚은 대모신’이 눈을 떼지 못합니다.] 

최상위격 설화급 성좌들은 물론이거니와, 신화급 성좌들까지도 주목할 수밖에 없는 힘. 

신외신을 통해 불어난 손오공의 분신들은 수백, 수천으로 불어나 성운의 대군을 감당하고 있었다. 주먹에서 날아간 우레에 일대의 위인급 성좌들이 격멸당했고, 휘두른 여의봉에 얻어맞은 십여 개체의 설화급 성좌가 추락했다. 

통천하 전체가 그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울부짖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 

이것이 장대한 ‘서유기’의 결말을 완성한 손오공의 힘이었다. 

츠츠츠츠츳! 

전신에 쉴 새 없는 스파크가 튀었다. 이곳이 그의 설화 영역인 ‘서유기’인데도, <스타 스트림>이 그의 힘을 억제하고 있었다. 어긋난 개연성은 손오공들과 내게 고스란히 돌아왔고, 그로 인해 나는 거의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과도한 개연성의 뒤틀림이 당신의 정신을 침식합니다!] 

‘막내가 감당하긴 힘들어 보이는군.’ 

‘내보낸다.’ 

[네 명의 손오공이 ‘구원의 마왕’을 분리시키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출아(出芽)하듯 자라난 내 몸이 허공에서 추락하기 시작했다. 

웨에에엑― 하고 올라오는 헛구역질과 함께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통천하의 부유물 위에 늘어져 있었다. 

창공에서는 방금전까지 내가 들어있었던 손오공이 <황제>의 성좌들을 상대로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 

“아저씨!”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 이어서 크고 작은 인형 같은 것들이 내 품으로 부딪쳐 왔다. 

[바앗! 바아아아앗!]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자, 내게 매달린 신유승과 비유가 보였다. 

요괴들의 피와 살점으로 더럽혀진 내 팔을 껴안은 채 신유승이 울고 있었다. 나는 피 묻은 손을 외투에 닦은 뒤, 아이를 조심스레 안아주었다. 

[제4의 벽]이 있었음에도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것이다. 

“독자 씨.” 

고개를 들자, 새하얀 법복을 입은 유상아가 그곳에 있었다. 

삼장의 화신체로 부활한 유상아. 

화신체가 달라졌음에도, 그녀의 외형은 내가 아는 유상아 그대로였다. 

나는 그녀를 향해 힘겹게 웃었다. 

“돌아오셨군요.” 

“내가 없는 사이 독자 씨가 한 일들, 잘 봤어요.” 

나도 모르게 흠칫 어깨가 떨렸다. 혼나려나 싶었는데, 유상아는 인자하게 웃었다. 

“힘들었죠?” 

내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유상아가 말했다. 

“그럼 조금만 더 힘들어 봐요.” 

응? 

내가 입을 열려는 찰나, 살포시 손을 뻗은 유상아가 내 머리 위에 뭔가를 씌웠다. 

[당신은 ‘긴고아’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긴고아’의 효과로 당신에게 새로운 수식언이 발생합니다.] 

[당신은 ‘긴고아의 죄수’가 되었습니다!] 

나는 눈앞에서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흐음, 이걸 어떻게 할까.” 

내 이마에 대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유상아의 모습에 나는 희미한 공포를 느꼈다. 긴고아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제, 제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나중에, 제대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지금은······.” 

“지금은, 저쪽이 우선이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본 곳의 하늘에 [그레이트 홀]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홀의 중심에서, 일생일대의 격전을 벌이는 두 명의 유중혁이 있었다. 

* 

[흑천마도]를 쥔 유중혁 [999]가 초월좌의 격을 흩뿌리며 천공으로 도약했다. 

그리고 그곳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모든 유중혁의 ‘왕’이 있었다. 

【결국 그런 선택을 한 것인가.】 

이 우주에서 가장 오래된 유중혁. 

1863번의 회귀를 뚫고, 마침내 자신의 결을 본 유중혁. 

[999]는 그런 ‘은밀한 모략가’를 마주 보며 오래된 자신의 기억을 떠올렸다. 

■■. 

모든 존재에게 단 한 번만 찾아오는 끝. 

[999]에게도 그만의 결말이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보았던 ‘결’과는 달랐지만, 그 역시 그 편린을 목격한 존재였다. 

999회차는, 다른 그 어떤 회차와도 달랐다. 

한 사람이 천 번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대부분의 인간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999]는 천 번의 삶을 살았고, 앞으로도 다시 그만한 세월을 살 수 있는 존재였다. 그랬기에 그는 

「“······이번 회차는 너희를 위해 살겠다.”」 

자신의 999회차를, 자신의 일행들을 위해 바쳤다. 

「“대장, 날 버려! 그냥 꺼지라고!”」 

38번 시나리오에서 그는 이지혜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왼팔을 잃었고. 

「“중혁 씨! 안 됩니다! 중혁 씨!”」 

55번 시나리오에서 이현성을 위해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왜, 왜 나 같은 걸 위해서······.”」 

74번 시나리오에서, 신유승을 각성시키기 위해 자신의 두 눈을 희생했다. 

「“너희도 그랬으니까. 그뿐이다.”」 

그것이 지난 생에 대한 속죄였는지, 아니면 천 번의 삶에 한 번쯤 찾아오는 변덕이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999]회차의 유중혁은 진심으로 그렇게 살았다. 그는 처음으로 ‘결말’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포기했다. 대신 그가 바란 것은 

「“나는 너희가 이 세계의 끝을 보길 바란다.”」 

자신이 아니라도 좋으니,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스타 스트림>의 끝을 보는 것. 

999회차의 유중혁은 그것을 위해 자신의 기억과 영혼까지 바쳤다. 일행들이 강해질 수 있다면 ‘이계의 언약’조차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끝에. 

「“대장, 이제 곧 마지막 시나리오야.”」 

아주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중혁 씨!”」 

그는 이제 혼자의 힘으로는 걸을 수 없었다. 검을 휘두를 손이 없었고, 세계를 볼 눈도 없었으며, 혈류가 모두 뒤틀려 스킬을 발동할 수도 없는 몸이었다. 

하지만 그의 희생을 대가로, 일행들은 최종 시나리오의 근처까지 갈 수 있었다. 

「“정신 차리세요, 제발. 제발!”」 

하지만, 끝내 그는 시나리오의 끝을 볼 수 없었다. 마지막 시나리오를 앞두고, ‘이계의 언약’이 그의 목숨을 거둬 간 까닭이었다. 

그런 [999]를 보며,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999회차의 유중혁이여. 나는 너의 삶을 존중한다. 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결’의 근처까지 갔던 존재니까.】 

조용히 [흑천마도]를 겨누는 [999]. 

그런 [999]를 향해, ‘은밀한 모략가’의 전신에서 다른 유중혁들의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진심인가? 

―정말로 위대한 모략에게 대적할 셈이냐? 

―정신 차려라, [999]! 

【하지만 너는 내 일부다. 네가 아무리 많은 역사를 끌어다 써도, 결코 나를 이길 수는 없다.】 

“네가 나라면 잘 알 텐데. 나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도.” 

【네가 겪은 삶은 나의 절반에 불과하다. 그나마 기억도 온전치 않지. 그런데도 나와 대적하겠다는 것인가?】 

[999]는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기세를 키웠다. 

그런 [999]에게서 뭔가를 읽었는지, ‘은밀한 모략가’의 태세가 변했다. 

【네가 진심이라면.】 

뭉게뭉게 피어오른 검은 연기가 ‘은밀한 모략가’의 외피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연기 속에서 한 사내의 형상이 빚어지고 있었다. 

이 우주에서 가장 고독한 왕. 

하얀 코트를 입은 1863회차의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나 역시, 하찮은 연기를 할 필요는 없겠지.】 

그 말과 함께 ‘은밀한 모략가’가 자신의 코트를 벗어 던졌다. 흰 코트가 바람에 흩날려 통천하의 강 위에 떨어졌다. 

새카만 어둠이 그의 어깨에 걸쳐진다 싶더니, 어느새 검정색 코트가 그의 전신을 덮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와 1863번의 회귀를 함께해온 코트. 

‘은밀한 모략가’의 손에서 [진천패도]가 불길한 아우라를 뿜었다. 

그와 동시에, 두 유중혁의 몸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콰콰콰콰콰콰! 

두 개의 검이 부딪치는 무수한 파찰음만이 그곳의 격전을 알려줄 따름이었다. 흉포한 격의 충돌에 연이어 터지는 스파크가 하늘을 새파란 빛으로 물들였다. 

난데없이 벌어진 대결에 줄곧 제천대성에 주목하던 관객들의 시선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유중혁 또한, 통천하의 강 위에서 그 결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999회차와 1863회차의 대결. 

불끈 쥔 주먹이 떨리며 힘이 들어갔다. 

어느 쪽도, 지금의 그가 맞서기엔 벅찬 상대였다. 

착실하게 생을 쌓았다면 언젠가는 도달했을 경지. 

유중혁은 눈을 부릅뜬 채 시선을 고정했다. [999]와 ‘은밀한 모략가’의 모든 것을 흡수하려는 것처럼 그들의 설화를 읽고 또 읽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득한 설화의 지옥도. 그 지옥도의 절반을 걸어온 유중혁과 지옥도의 끝을 본 유중혁이 부딪치고 있었다. 

두 개의 [파천검도]가 유성처럼 궤적을 그렸다. 하나는 [진천패도]. 그리고 다른 하나는 [흑천마도]. 두 자루의 검이 초신성처럼 환하게 불타올랐다. 

【그러고 보니 너는 진천패도를 주력으로 쓰지 않았지.】 

[999]회차에서, 그의 [진천패도]를 물려 받은 것은 이지혜였다. 

‘은밀한 모략가’가 펼친 파천유성결이 [999]의 전신을 꿰뚫고 지나갔다. 

【겨우 그런 검술로는 나를 이길 수 없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순식간에 상처투성이가 된 [999]는 물러서지 않고 검을 쥐었다. 

순간 ‘은밀한 모략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주 잠깐 사라진 [999]가, 어느새 그의 코앞에 있었다. 그것은 [파천검도]가 아니었다. 

순살(瞬殺). 

“적어도, 내가 살아온 역사를 보여줄 수는 있겠지.” 

그것은 이지혜의 기술이었다. 

【겨우 이런―】 

간발의 차이로 튕겨 나간 [흑천마도]가 유연하게 [검도]의 곡선을 그렸다. 

츠츠츠츠츳! 

[999]의 눈에서 [귀살]의 빛이 번뜩였다. 

999회차의 이지혜가 살아온 삶이, [999]의 손끝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이현성처럼 단단한 발차기. 이설화처럼 날카로운 조법(爪法). 신유승의 타고난 감응력과 김남운의 전투 센스까지. 

[999]가 몸으로 느낀 역사가 그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순간 [999]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가 살려낸 모든 동료들의 기술들이, 그의 몸을 통해 재현되고 있었다. 

[검도]가 [파천검도]를 부쉈고, [흑화]와 [귀살]의 콤보가 [주작신보]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이설화의 [천령독]이 ‘은밀한 모략가’의 심장을 노리는 순간. 

【잡기 따위로.】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999]의 설화가 무너지고 있었다. 이현성의 방어가 무너지고, 이설화의 손톱이 부러졌다. 김남운과 이지혜가 쓰러졌고, 신유승이 무릎을 꿇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흑천마도]가 그의 손을 떠나 통천하의 강 위로 떨어졌다. 

[999]는 언제나처럼 혼자 남았다. 

【999. 너는 실패했다.】 

한 사람이 살아낸 아득한 생 앞에, 모든 동료들의 삶이 부서졌다. 

[999]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았다. 

“······어떤 우주에서는 다를지도 모르지.” 

[999]의 시선이 통천하의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제천대성과 <김독자 컴퍼니>가 만든 전장. 

이제껏,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던 우주의 사건들. 

【······너까지 이런 곳에서 실없는 희망을 본 모양이군.】 

“남 얘기처럼 말하는군, 위대한 모략.” 

[999]는 비틀거리면서도 말을 이었다. 

“우리는 실패했다. 어떤 일행도 살리지 못했고, 혼자서 결을 보았지. 그게 정말 우리가 원하던 끝이었나?” 

【헛된 감상이군.】 

“이 우주는 다르다.” 

【애초에 있어서는 안 되는 우주였다.】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은밀한 모략가’의 신형이 움직였다. 

【결과가 원인에 간섭해 만들어진 우주다. 존재 자체로 개연성의 붕괴를 초래하는 우주다.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되는, ‘가장 오래된 꿈’의 장난―】 

“위대한 모략이여, 실은 알고 있지 않은가? 잘난 ‘원작’의 닫힌 우주에서, 우리가 바랐던 이야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당신도―” 

처음으로, ‘은밀한 모략가’의 신형이 주춤거렸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가볍게 휘두른 [진천패도]가 [999]의 몸통에 꽂혔다. 

【돌아와라, [999]. 내겐 네가 필요하다.】 

푹 꽂힌 [진천패도]가 [999]의 기억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분체로 나뉘었던 그의 자아가 회수되고 있었다. 

흐려지는 [999]의 눈빛이 통천하의 강 위를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 누가 있는지를 아는 ‘은밀한 모략가’가 조소하듯 말했다. 

【그는 이미 내게 패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가, 나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유중혁, 검을 쥐어라!” 

처절한 목소리가 통천하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닿은 곳에, [999]도, ‘은밀한 모략가’도 아닌 유중혁이 있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창공을 올려다보고, 강의 부유물들 위에 떨어진 두 개의 아이템들을 바라보았다. 

[999]의 [흑천마도]. 

그리고 ‘은밀한 모략가’가 벗어 던진 흰 코트. 

「“살고 싶다.”」 

「“만약 기회가 있다면, 내가 본 그 세계처럼······.”」 

머리를 찌르는 통증. 알 수 없는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당신의 설화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네가 누군지 기억해내라!” 

마치 홀리기라도 한 듯, 유중혁은 [흑천마도]를 쥐었다. 오래전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감각. 그는 이어서 바닥에 떨어진 코트를 주웠다. 그가 싫어하는 흰색이었다. 

―너는 ‘3회차’의 유중혁이 아니다. 

그날, [999]는 그렇게 말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나? 아무리 김독자가 있다고 해도, 겨우 ‘3회차’에 네가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 게 정상적으로 보이나? 

익숙한 기시감 속에서, 그는 천천히 흰 코트를 입었다. 

마치 언젠가 입어본 것처럼 꼭 맞는 코트. 

―개소리 마라. 나는 3회차다. 나는······. 

한 번도 의심 해보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그는, 정말로 ‘3회차’의 유중혁일까. 

―······설령 내가 ‘3회차’가 아니라도, 내가 기억하는 것은 고작 ‘3회차’의 기억뿐이다. 

천천히 고개를 든 유중혁이 창공을 올려다보았다. 

사라지는 [999]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네겐 동료가 있지 않나? 

거울에서조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 

―너보다도, 너의 삶을 잘 기억하는 동료가. 

‘은밀한 모략가’의 [진천패도]가 움직였다. 우주조차 갈라버리는 새카만 격이 그를 겨누는 순간, 유중혁은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리고.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발동하였습니다!] 

배후성이 강림하듯, 익숙한 별의 힘이 그에게 현현했다. 

「가자.」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Episode 83. 독자의 화신 (6) > 끝

< Episode 84. 1864 (1) >





“독자 아저씨?” 

멀리서 격전을 펼치는 유중혁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현재 화신체의 상태가 불안정합니다!] 

지금의 몸 상태로 달려가 봤자, 도움이 될 턱이 만무했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싸우고 있는 것은 [999]와 ‘은밀한 모략가’였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999]가 우리 편을 들기로 한 모양이었다.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전지적 독자 시점]. 

니르바나 전에서 그랬고, 포세이돈 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막내야, 무엇을 망설이는 것이냐. 

제천대성이었다. 천공의 격전을 이어가는 중에도, 내 심경을 느낀 모양이다. 

나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는 이제 읽는 것이 조금 두렵습니다.” 

아마도 ‘환생자들의 섬’에서 유중혁과 대결한 후부터였을 것이다. 

더 최근으로는 [999]의 말을 들은 직후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몇 편의 글줄로,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까지 나는 이 모든 이야기의 ‘독자’였다. 

하지만 언제까지, 내가 그런 독자로 있어도 괜찮은 것일까. 

―그렇군. 네겐 타자를 읽는 힘이 있지. 

그는 내 능력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다. 

‘긴고아의 죄수’로 오랫동안 내 채널에 있었으니 그 정도를 알아채는 것은 힘든 일도 아니었을 터. 

―나 역시, 누군가를 알고 싶었던 적이 있다. 

제천대성의 시선이 유상아에게 닿는 것이 느껴졌다. 정확히는, 유상아가 아닌 유상아의 ‘화신체’에게. 그는 지금 저 화신체의 ‘전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왜 삼장이 나를 두 번이나 쫓아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서유기』의 원전에서, 손오공은 두 번이나 파면을 당한다. 

―하지만 한 번도 삼장에게 제대로 따져본 적은 없었지. 하찮은 자존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저 혼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때 녀석은 왜 그랬을까.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 왜 그렇게 완고해야 했던 것일까. 내가 대체 뭘 잘못했고, 어디서부터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여정이 끝난 후까지도, 그 질문은 내 안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제천대성에게도, 제천대성만의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용기를 냈을 때, 기회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제천대성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풀죽어 있었다. 

『서유기』 이후의 이야기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의 슬픔을 짐작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유상아가 ‘삼장’의 화신체로 환생했다는 것. 그리고 진짜 ‘삼장’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 질문의 대답을 알기 위해, 「서유기 리메이크」를 반복해왔다. 혹시나 내가 알지 못했던, 내가 읽지 못했던 것을, 다른 누군가가 대신 이야기해주길 기대했다. 

그제야 나는 제천대성이 이 시나리오 이벤트에 참가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문득 궁금증이 솟았다. 그래서, 그는 답을 얻었을까. 

―답은 얻지 못했다. 다만······ 작은 위안은 받았지. 

제천대성의 시선이 신유승을 향하고 있었다. <황제>의 쏟아지는 공격들을 받아내며, 제천대성이 말하고 있었다. 

―그 위안이, 내게 가르쳐 주었다. 

[거대 설화, ‘서유기’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어떤 것은 영영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영원히 닿지 못할 수도 있고,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설화를 읽어야 한다. 그것이 이 하늘의 별이 되어 ‘성좌’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다. 

제천대성은 삼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제천대성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니 너도 읽어라. 

‘하지만 저 혼자서는······.’ 

―왜 혼자라고 생각하지? 

제천대성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너처럼은 아니겠지만, 누구나 서로를 읽고 있다. 그러니 너도 읽기를 멈추지 마라. 

어쩌면 그것은 정확한 조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 역시 무언가를 느꼈다. 아주 작은 깃털이 쌓이는 듯한 느낌. 아마도 이것이, 제천대성이 우리의 이야기를 지켜보며 얻은 위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상아 씨.” 

나의 말에, 유상아가 기다렸다는 듯 돌아보았다. 

“괜찮겠어요?” 

“네. 그런데, 가능하면 살살―” 

고개를 끄덕인 유상아가 나를 향해 긴고주를 외웠다. 

퓨즈가 꺼지듯 육체가 푹 고꾸라졌다. 그 찰나 빠져나온 내 의식은, 정확히 가야 할 곳으로 향했다.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발동합니다!] 

[현재 해당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습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 발동합니다!] 

천천히 제자리를 찾는 시야와 함께, 전신에서 강맹한 힘이 넘치기 시작했다. 유중혁의 힘이었다. 

잠시 후, 눈앞에 드러난 적의 외형이 보였다. 어마어마한 격의 아우라에 둘러싸여 우리를 오시하는 존재. 

은밀한 모략가. 

제천대성의 말이 맞다. 

저 존재는, 결코 혼자서는 이길 수 없다. 

「가자.」 

전신에 몰아치는 초월좌의 격.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격을 유중혁에게 보탰다. 

[초월좌의 격이 마왕의 격과 조우합니다!] 

그간 얻었던 힘이 유중혁의 힘과 맞물리며 용솟음치고 있었다. 환골탈태라도 한 듯 전신의 혈류에 활력이 돌았다. 

황금빛 안광과 함께 천천히 눈을 뜬 유중혁이 말했다. 

‘늦었군.’ 

유중혁은 내게 화를 내거나 타박하는 대신, 그저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내가 손오공 배역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도······. 

「미안하다.」 

‘쓸데없는 말은 나중에 해라. 지금은 놈을 쓰러트리는 것이 급선무다.’ 

콰아아아아아아! 

가볍게 휘두른 ‘은밀한 모략가’의 [진천패도]가 통천하를 갈랐고, 우리는 간발의 차이로 그 공격을 피했다. 우연히 근처에 있던 성좌들과 화신들이 한꺼번에 휩쓸려 비명으로 화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공격력이었다. 

【헛된 노력이다. 설령 기억을 되찾는다고 해도, 너는 내게 이길 수 없다. 결국 너는 내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저 녀석이 뭐라는 거야?」 

강 위를 달리던 유중혁이 귀찮다는 듯 말했다. 

‘저쪽의 주장에 따르면, 나는 3회차의 유중혁이 아니다.’ 

「뭐? 그럼?」 

무심코 되물었지만, 사실 이미 어지러이 떠도는 가설들이 내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쌓여왔던 의문이었다. 

「‘3회차의 유중혁이 이런 정보를 알고 있을 리가 없는데?’」 

[그린 존] 시나리오에서도.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빠른 성장 속도다.’」 

······그리고 [극장 던전]에서도. 

유중혁의 [등장인물 일람]을 확인할 때마다 내가 은연중 느껴왔던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증식하고 있었다. 

[999]와 나누었던 대화도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이 세계선의 유중혁이 자기가 ‘3회차’라고 했어. 그러니까 여긴 3회차야.”」 

「“그런 정보를 곧이곧대로 믿다니, 순진하군.”」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느새 [등장인물 일람]을 가동하고 있었다. 

[해당 인물의 관련 정보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이 ‘요약 일람’으로 변환됩니다.] 

[사용자의 편의에 따라 임의로 지정한 항목들만 표시됩니다.] 

+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유중혁 

전용 특성 : 회귀자 <3회차> (신화), 유희의 지배자(전설)······. 

+ 

3회차. 이 녀석은 분명 3회차다. 

그렇다면 녀석들의 말은 대체······. 

「김독 자 정 말몰 라 ?」 

기억의 페이지들이 넘어가고 있었다.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던 기억들이었다. 

「“네가 보여준 그 ‘세계’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해당 인물은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정신차려라, 김독자!’ 

유중혁의 외침에 화들짝 정신이 깨어났다.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허공을 부유하는 ‘은밀한 모략가’의 격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보아하니 아직 제대로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 모양이군.】 

“······이번엔 쉽게 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격에 반발하듯, 유중혁도 자신의 힘을 끌어올렸다. [주작신보]의 보법과 [파천검도]의 힘이 극한까지 끌어 올려졌다. 파천검뢰가 [흑천마도]를 덮었다. 

지난번에도, 유중혁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싸운 적이 있었다. 그리고 패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5번 책갈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전용 스킬, ‘전인화(電人化) Lv.23(+13)’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전용 스킬, ‘바람의 길 Lv.18(+8)’을 발동합니다!] 

[‘마왕화’를 발동합니다!] 

유중혁의 [주작신보]에 [바람의 길]의 공능이 깃들었고, [파천검뢰]에 [전인화]의 전격이 깃들었으며, ‘초월좌’의 힘에 ‘마왕’의 힘이 더해졌다. 

두 배, 세 배, 네 배······ 순식간에 불어난 유중혁의 격이 통천하의 일대에 위협적으로 퍼졌다. 

츠츠츠츠츳! 

스파크가 튀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은밀한 모략가’를 향해 달려들었다. [흑천마도]에 깃든 [전인화]와 [파천검뢰]. 키리오스와 파천검성의 비전이 동시에 빛을 발하자,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강기의 폭풍이 밀어닥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산을 가르고, 바다를 녹여버릴 정도의 힘이었다. 

하지만 그런 힘 앞에서, ‘은밀한 모략가’는 태연했다. 파찰음을 내며 부딪치는 두 자루의 검. 유중혁과 고스란히 감각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나는 손아귀가 찢어질 듯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이쪽은 양손이고 저쪽은 한 손이다. 그런데도 

【안타까운 일이구나. 유중혁.】 

우리는 ‘은밀한 모략가’를 벨 수 없었다. 

츠츳, 츠츠츳. 

그의 주변에서 튀는 스파크는 그가 전력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렇게나 전투력의 차이가 큰 것일까.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주변이 그의 무대로 덮이고 있었다. 1863번에 달하는 회귀의 지옥. 불구덩이 속에서 신음하는 ‘이계의 신격’들과 별들의 시체. 

【닫힌 우주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꿈꾼 대가로, 자기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되다니. 그것이 정말 네가 바라던 세계인가?】 

지옥도 속에서 악귀처럼 들려오는 목소리. 

혼란스러웠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닫힌 우주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꿈꾼 유중혁. 

내가 알기로, 그런 유중혁은 하나밖에 없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로, 내가 아는 유중혁이 그 ‘유중혁’이라면. 

[‘제4의 벽’이 두께를 더욱 키웁니다.] 

‘김독자, 네놈이 묘수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유중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난번에 사용했던 설화를 써라.’ 

그 지난번이 언제를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영원불멸의 지옥도」. 

일전에, 포세이돈과 맞서 싸우며 사용했던 설화. 

그때 우리는 362회차 유중혁의 기억을 빌려 테세우스를 죽였다. 

나는 ‘은밀한 모략가’의 저변을 흐르는 암흑의 설화를 보며 침음했다. 

「솔직히 그걸 써도 이길 수 있을진 모르겠다.」 

내가 전력을 다해 읽어낸 회차는, 고작해야 362회차였다. 지금이라면 그때보다는 낫겠지만, 눈앞의 녀석을 이길 수 있을지는 전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리고······.」 

망설여지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362회차 이상의 유중혁의 힘을 빌리는 데 성공하면, 유중혁도 나와 함께 기억을 읽게 된다. 

성좌들이 화신들의 설화를 읽듯, 나는 유중혁의 ‘멸살법’을 읽어왔다. 

내가 여기서 「영원불멸의 지옥도」를 사용하게 되면, 유중혁은 내 오해로 얼룩진 독해를 함께 겪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읽었던 ‘멸살법’. 내 멋대로 기억하는 역사. 

그 역사 속에서 유중혁은 일방적으로 왜곡되거나 과장되었으며, 문제적이거나 우상화된 모습일뿐이었다. 

「······제기랄.」 

그럼에도 나는, 그 폭력을 행사해야만 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깊은 무력감 속에서 페이지를 넘긴다. 멸망 이전에도 멸망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전부다. 

눈앞에서 무수한 유중혁의 회차가 지나갔다. 

3회차, 4회차, 5회차······ 41회차······ 182회차······. 

기억들이 흘러갔다. 

무수한 유중혁들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362회차······ 598회차······ 724회차······. 

[당신의 ‘독해력’이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당신이 독해할 수 없던 페이지들이 펼쳐집니다!] 

862회차······ 999회차······. 

속에서 핏물이 올라왔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왔다. 

[999]. 내가 좋아했던 회차. 

유중혁의 대사들이 천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한계였다. 

[당신이 독해할 수 있는 최대 회차에 도달하였습니다.] 

[당신이 독해 가능한 ‘유중혁’의 최대 회차는 ‘999회차’입니다.] 

독후감에 매겨진 점수처럼 나타난 메세지.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읽는다는 것이 이렇게나 수치스럽고 죄스러운 일이었나. 

유중혁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네놈이 어떻게 읽었든, 판단하는 것은 나다. 그러니 네놈은 계속해서 읽어라.’ 

날아드는 ‘은밀한 모략가’의 공격을 받아내고, 상처투성이가 된 채 말하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듣고 무엇을 기억할지는 내 자유다.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나다.’ 

내가 잘 알고 있는 목소리로,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네놈은, 혼자 읽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안에서 뭔가가 깨어났다. 

그것은 ‘멸살법’의 기억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어머니와 나눈 대화였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를 왜 다시 읽어요?”」 

다시 읽어도 마찬가지인 이야기도 있다. 보는 사람이 달라지지 않으니, 이야기도 달라지지 않는다. 

내 물음에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같이 읽어 볼까?”」 

같이 읽는다. 

[당신의 ‘독해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됩니다!]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머릿속으로, 나 혼자서는 넘길 수 없었던 페이지들이 넘어가고 있었다. 

1146회차······ 1398회차······ 1561회차······ 1733회차······. 

내가 이 세계에서 만난 사람들이, 나와 함께 그 페이지를 넘겨주고 있었다. 

어떤 것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고, 어떤 것은 그제서야 납득이 되었다. 

그리고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문장들도 있었다. 

【―!】 

‘은밀한 모략가’가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식이 자꾸만 가물거렸다. 나는 졸음을 참아내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기고 또 넘겼다. 피를 쏟으며, 무지막지한 스파크를 참아내며. 

나는 여전히 유중혁을 잘 모른다. 

「“너는 내가 죽어야만 그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겠지?”」 

「“이곳에 있으면, 너는 그 세계를 구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아 올린 이 오해가 기적처럼, 아주 희미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면. 

「“나는 그 세계의 ■■가 궁금해졌다.”」 

나는 다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독해 가능한 ‘유중혁’의 최대 회차는 ‘1863회차’입니다.] 

날아든 ‘은밀한 모략가’의 격이 [흑천마도]에 닿아 흐트러졌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덧씌운 활자들이 벗겨지듯 [등장인물 일람]이 변하고 있었다. 3이라 적혀 있던 숫자가 벗겨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숫자가 새겨지고 있었다. 

눈부신 백지 위로, 내가 한 번도 읽지 못한 페이지가 펼쳐지고 있었다. 

+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유중혁 

전용 특성 : 회귀자 <1864회차> (신화)······. 

+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였다.





< Episode 84. 1864 (1) > 끝

< Episode 84. 1864 (2) >





1864회차. 

이곳은 3회차가 아니라, 1864회차의 세계선이었다. 

특성창을 본 순간, 지금 당장 소화하기엔 벅찰 정도의 깨달음이 덮쳐왔다. 

「······이 ‘유중혁’이 1863회차에서 사라졌던 그 ‘유중혁’이라고?」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지?」 

「하지만 그 유중혁은 [등장인물]에서 벗어났는데?」 

「1863회차의 유중혁이 등장인물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3회차가 있었기 때문이야. 그런데 녀석이 처음부터 3회차의 유중혁이었다는 것은 대체······.」 

무수한 의문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와중,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tls123와의 대화였다. 

「독자님한텐 감사의 인사로 특별한 선물을 좀 보내드릴까 해요.」 

그때 작가가 말한 ‘선물’이란, 어쩌면······. 

콰콰콰콰콰콰! 

넘치는 설화의 힘. 지옥도의 전경이 변화하고 있었다. 세계가 절규하고, 비탄에 젖은 이계의 신격들이 울부짖었다. 

그 절망의 무대 위에 아주 작은, 실낱같지만 명백한 한 줄기의 빛이 있었다. [흑천마도]의 검극이었다. 

【기억을 되찾은 건가?】 

‘은밀한 모략가’가 물었다. 하지만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이유를,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폭발적인 기억들이 유중혁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독해는 완전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읽었더라도, 그리고 유중혁이 그걸 함께 했더라도, ‘1863회차의 유중혁’을 온전히 복원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비틀거리던 유중혁의 머릿속으로 기억의 잔재가 흘러갔다. 

「“흙을 먹어라, 유중혁.”」 

「“행복한 기억! 행복한 기억!”」 

「“유중혁, 앉아.”」 

“이 자식······.” 

「지금 그딴 거 생각할 때 아냐 멍청아!」 

나는 황급히 유중혁을 일깨웠다. 코앞에서 지옥도의 격을 담은 [진천패도]가 짓쳐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까가강,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자루의 검이 다시 한 번 부딪쳤다. 

여전히 무거운 일격이었다. 

하지만 이전만큼 무겁지는 않았다. 

【······너와 싸워보고 싶었다.】 

시종일관 고요하던 ‘은밀한 모략가’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감정의 빛이 번지고 있었다. 내가 읽은 ‘원작’을 살았고, 마침내 그 끝을 보았던 유중혁― ‘은밀한 모략가’가 말하고 있었다. 

【네놈은 아무 말도 없이 그 ‘너머’로 사라졌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유중혁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허겁지겁 읽어낸 독해는 불안정했고, 때문에 유중혁의 기억에는 구멍이 많았다. 

유중혁이 짓씹듯 말했다. 

“이해할 수 있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야겠군.”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우리가 가진 설화들이 동시에 [흑천마도]에 실렸다. 이어진 연격이 다시 한 번 [진천패도]와 부딪쳤다. 두 개의 지옥도가 부딪치는 충돌의 순간, 그 사이에서 우주가 열렸다. 

기억의 빅뱅이었다. 

[지나치게 유사한 두 존재가 충돌합니다.] 

[‘끊어진 필름 이론’이 발동합니다!] 

우주의 정경을 보는 순간, 나는 무슨 현상이 벌어지려는 것인지 깨달았다. 

이것은 [끊어진 필름 이론]이었다. 

서로 다른 세계선의 두 신유승이 만났을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새로운 세계선이라고?】」 

한없이 유사한, 그러나 완전히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두 유중혁이 부딪치며 불러낸 기억. 

「【이런 세계선이 있을 리 없다.】」 

그것은, ‘은밀한 모략가’의 기억이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이 3회차를 발견했던 그 날의 일. 

. 

. 

. 

【흥미롭군. 이게 3회차라고······?】 

눈앞에서 펼쳐지는 3회차의 이야기에, ‘은밀한 모략가’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가 모르는 인물이, 3회차의 자신과 함께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성공은 불가능하겠지만.】 

어떤 것은 그가 아는 방식이었고, 어떤 것은 그조차 생각해 보지 못한 방식이었다. 가끔은 무모해보였고, 가끔은 운이 좋았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설화. 은밀한 모략가는 마치 빨려들 듯 그 세계선의 설화를 들여다 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그들의 설화를 들여다보고 있었을까. 

‘은밀한 모략가’는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성좌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흡수한 유중혁들이 말하고 있었다. 

―잊었는가? 위대한 모략이여. 

―우리는 ‘죽음’을 원한다. 

―어차피 저 회차의 성공은 불가능할 것이다. 

죽음. 그것은 회귀의 저주에 걸린 모든 유중혁의 소망이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오직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존재했다. 

―‘가장 오래된 꿈’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다시 회귀하게 된다. 

―죽음이 불가능하더라도, 한없이 그것에 가까워진다면 어떨까. 

한수영의 아바타를 1863회차로 보낸 것은 그 때문이었다. 

3회차에서 발견한 이레귤러를 이용해, 죽음을 완수하는 것. 

그는 [끊어진 필름 이론]을 이용해 모든 유중혁의 봉인을 계획했다. 1863회차의 유중혁과 하나가 되어, 끝도 없는 영원한 잠에 빠져드는 것. 

그러나 그 계획의 완수를 앞두고, 심경의 변화가 발생했다. 

「“저는 ‘종장(終章)’을 향해 가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을 찾은, 한 성좌 때문이었다. 

종장. 그가 그토록 원했으나 단 한 번도 얻지 못했던 ■■의 이름. 

[41회차의 ‘유중혁’이 경악합니다.] 

[416회차의 ‘유중혁’이 경악합니다.] 

[967회차의 ‘유중혁’이 경악합니다.] 

[1472회차의 ‘유중혁’이 경악합니다.] 

······. 

그의 안에 있는 모든 회차의 유중혁들도 그 광경을 보았다. 

어떤 유중혁은 경탄했고, 어떤 유중혁은 절망했다. 그리고 어떤 유중혁은, 분노했다. 

‘은밀한 모략가’는 그중 마지막 유중혁이었다. 

【······또 다른 종장이 존재할 리가 없다.】 

이미 그의 세계는 끝났다. 1863회차의 시행착오를 거쳐 도달한 ‘결’. 그는 모든 것을 잃었고, 시나리오의 마지막을 보았다. 벽에 도달했다. 

그는 틀리지 않았다. 그것을 인정받고 싶었다. 

【너의 방식으로 모든 것의 마지막에 도달해 세계를 구한다고 치자. 그러면 ‘다른 세계’는 어쩔 셈이지?】 

【네가 구원하지 못한 그 세계들은 모두 어떻게 되는 것이냐?】 

그래서 ‘은밀한 모략가’는 김독자를 1863회차로 보냈다. 

그곳에서 이야기의 마지막을 보게 만들었다. 

이것이 진짜 ‘원작’이라고.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내가 정한 세계의 마지막이라고. 

「“내가 너의 이야기를 끝내줄게.”」 

하지만 김독자는 

「“나는 3회차로 돌아가지 않겠다. 여기 남아서, 이곳의 사람들과 함께 결말을 보겠어.”」 

그것을 바꾸었다. 

츠츠츠츠츠츠츳! 

유중혁의 봉인은 실패했고, 정해져 있던 이야기의 방향은 틀어졌다. 

[1863회차의 유중혁이 당신과의 합의를 거부합니다.] 

「“나는 살고 싶다.”」 

봉인되었어야 했던 유중혁이 ‘회귀’를 선택했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갔다. 

‘은밀한 모략가’는 죽은 유중혁의 기억들을 수거한 뒤, 황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눈부신 세계선의 별빛을 지나, 기억들을 흩트리며 나아가는 백색 코트의 유중혁을 쫓았다. 

[등장인물]의 탈을 벗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유중혁. 

【멈춰라! 너는 다음으로 갈 수 없다!】 

오직 ‘은밀한 모략가’만이 이 세계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1863회차는 이 모든 ‘이야기의 끝’이다. 이 다음은. 

「나는 ‘그 세계’를 보고 싶다.」 

【돌아와라.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다! 너는―】 

은밀한 모략가는 외쳤다. 설령 ‘가장 오래된 꿈’이 저 회귀를 허락한다 한들, 결국 유중혁은 악몽을 반복하게 될 뿐이다. 심지어 기억까지 잃은 채로 시나리오를 처음부터 플레이해봤자······. 

「놈이 분명히 말했다. 그곳은 존재하는 우주라고.」 

[‘가장 오래된 꿈’이 그 이야기를 궁금해합니다.] 

유중혁이 손을 뻗고 있었다. 상상하고 있었다. 그곳은 아주 먼 세계. ‘멸살법’의 우주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 

간발의 차이로 ‘은밀한 모략가’가 유중혁의 영혼체를 붙잡았다. 하지만 그가 붙든 것은 흰 코트뿐. 이미 유중혁의 몸은 사라지고 없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멍청한······.】 

기억을 잃은 유중혁은 결국 회귀에 성공했다. 

이미 시작과 끝이 정해진 부질없는 이야기. 

그곳에서 또다시 영겁의 악몽을 반복하게 된 것이다. 

‘은밀한 모략가’는 세계선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 잘난 녀석이, 기억까지 잃으며 사라진 세계선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처참하게 망가져, 후회 속에서 시나리오를 이어 나가는 그 모습을 봐야 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리고 ‘은밀한 모략가’는 그 세계선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그 세계선은, 이미 그가 알고 있는 세계선이었다. 

【······이럴 리가 없다.】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고 있었다. 

그가 알지 못했던 세계선이 갑자기 나타났던 이유. 

3회차가 있어야 할 자리에, 전혀 다른 세계선이 존재했던 이유. 

그가 살아온 모든 회차를 제물로 만들어진 ‘벽 위의 세계선’. 

[‘가장 오래된 꿈’이 최후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결과가 원인에 간섭하여 만들어진 불가능한 세계선. 

그의 우주가 흔들리고 있었다. 

. 

. 

. 

폭음과 함께 유중혁과 ‘은밀한 모략가’의 신형이 떨어졌다. 우리는 [흑천마도]를 고쳐 쥔 채 눈앞의 적을 노려보았다.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이젠 알았겠지. 존재해선 안 되는 우주였다.】 

이제는 ‘은밀한 모략가’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이 세계선이 탄생하게 되었는지.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863회차의 유중혁이 회귀하면서 선택했던 ‘너머’. 

그곳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회차였다. 

【잔혹한 일이다. 간신히 악몽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난 네가 선택한 일이, 또다시 꼭두각시가 되는 것이라니.】 

짙은 비감이 어린 말투. ‘은밀한 모략가’의 목소리에 내가 짐작할 수 없는 깊이의 원한이 담겨 있었다. 

【같은 책을 수백 번 읽으면, 해석은 바뀔지도 모르지. 하지만 문장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미 끝난 일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은밀한 모략가’의 [진천패도]가 허공에 궤적을 새기고 있었다. 

1863회차의 무게가 담긴 궤적이었다. 

한때 유중혁이었고, 이제 ‘은밀한 모략가’로 살아가는 자. 

세상 모든 유중혁의 ‘죽음’을 꿈꾸는 존재. 

그가 말하고 있었다. 

【너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내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존재가, 자신의 역사를 휘두르고 있었다. 

【너희는 지하철에서, 극장 던전에서 죽었어야 했다. 니르바나에게 죽었어야 했고, 암흑성에서 죽었어야 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마계에서 죽었어야 했다. ‘기간토마키아’에서 죽었어야 했고, ‘성마대전’에서, ‘서유기’에서 몇십 번이고 몇백 번이고 죽었어야 했다.】 

그의 삶이 없었다면, 그의 실패가 없었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살아남을 수 없었다. 

【어째서 살아남은 것이지?】 

그가 우리에게 묻고 있었다. 

【어째서, 내가 아니라 너희들인 것이지?】





< Episode 84. 1864 (2) > 끝

< Episode 84. 1864 (3) >





처음 1863회차에 방문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곳에서 1863회차의 유중혁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 나는 그 유중혁이 내가 알던 ‘원작의 유중혁’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유년을 함께했던, 내 삶을 지탱했던 주인공. 

그런데 아니었다. 

나를 버티게 해주었던 유중혁은, 이미 오래전에 그 이야기를 끝낸 뒤였다. 그는 1863회차의 결말에 도달해 세계의 끝을 보고, 끔찍한 세계선의 심연을 떠돌았다. 수천 년, 어쩌면 수만 년을. 

그가 얼마나 많은 세월을 그렇게 보냈는지 나는 모른다. 확실한 것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남았고, 그 시절을 모두 기억하고 있으며 

이제, 나를 적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너희에겐 ■■를 볼 자격이 없다.】 

그 말은 맞았다. 

내가 지금껏 시나리오를 헤쳐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은밀한 모략가’의 삶이 선행했기 때문이니까. 

‘은밀한 모략가’의 격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주변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계의 신격’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오오오오오오······.】 

뭉게뭉게 피어오른 아우라가 [진천패도]를 잠식하고 있다. 

저것이 그가 1863회차를 살아오며, 그리고 그 이후의 세계선을 거닐며 얻은 힘이었다.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무수한 ‘유중혁’들이 그의 안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41회차의 ‘유중혁’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362회차의 ‘유중혁’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666회차의 ‘유중혁’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999회차의 ‘유중혁’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쌓은 역사가, 죄업이 그곳에 있었다. 

요피엘의 [죄업의 눈동자]로도 그 끝을 알 수 없었던 죄업 수치. 

그는 <스타 스트림>이 ‘공포’로 규정하는 존재였다. 악의 범주를 넘어서, 이 세계에 불가해(不可解) 선언을 당한 존재. 이계의 신격의 왕. 

하지만 그의 본질은 악도, 공포도 아니었다. 

그가 <스타 스트림>에서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정의가 너무나 완고하기 때문이었다. 

「“스타 스트림을 부수겠다.”」 

조금의 융통성도 없는 정의를 <스타 스트림>은 좋아하지 않는다. 

정의는 굽혀져야 하고, 양보해야 하고, 때로는 무너져야 한다. 하지만 ‘은밀한 모략가’의 정의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고, 결국 ‘은밀한 모략가’가 되었다. 

「“이 이야기를 시작한 존재를, 반드시 이 손으로 없애겠다.”」 

그것이 그가 바라는 이 세계의 ‘멸망’. 

모든 유중혁들이 바라는 ‘회귀의 끝’.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은밀한 모략가’는 지극히 타당했다. 

그에게는 누구보다······ 이 모든 이야기의 끝을 볼 자격이 있었다. 

해온 것이라곤 ‘멸살법’을 읽는 것밖에 없었던 나 따위보단, 훨씬 더― 

‘엉뚱한 생각 하지 마라. 멋대로 공감하지도 말고.’ 

유중혁이 말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다른 녀석에게 양보할 셈인가? 네놈이 쌓은 설화는 순전히 저놈의 삶을 베껴서 이루어진 것이었나?’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놈의 말에 순응하는 것은, 너와 함께 싸운 다른 동료들의 시간을 부정하는 것이다.’ 

분명 처음에는 ‘멸살법’에 의존해 위험을 피해간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 후에는 달랐다. 원작에서 벌어지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났고, 원작에는 없었던 위험들이 찾아왔다. 그 위험들을 동료들과 함께 이겨냈다. 

설화가 쌓이며 ‘멸살법’과의 괴리는 커졌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원작을 참고하지 않게 되었다. 최종본을 끝내 읽지 않았던 것도 그와 같은 이유였다. 

이미 이 세계는, ‘은밀한 모략가’가 살았던 ‘멸살법’의 세계가 아니었다. 

유중혁이 계속해서 말했다. 

‘놈이 옳을 수도 있다. 놈의 정의가 타당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네놈이 양보해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우리도 옳기 때문이다.’ 

1863회차의 비극을 견딘 유중혁이 말하고 있었다. 

분명, 그 또한 ‘유중혁’이었다. 

‘아직 실감은 나지 않지만, 정말로 내가 1864번의 회귀를 겪은 것이 맞다면.’ 

[흑천마도]를 쥔 유중혁의 시선이, 아주 잠깐 통천하의 일행들을 향했다. 

이지혜의 [전함]이 사격을 계속하고 있었고, 신유승의 [키메라 드래곤]이 브레스를 흩뿌리고 있었다. 정희원, 그리고 정희원의 손에 쥐어진 이현성도 분전하고 있었다. 이길영을 업은 장하영이 달리고 있었다. 

아무도 죽지 않은 채, 모두가 힘을 내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세계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서. 

‘아마도 나는, 이 풍경을 보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흑천마도]와 [진천패도]가 재차 충돌했다. 꺾이지 않는 두 자루의 검이 서로의 신념을 품은 채 울부짖고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외쳤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건가? 네가 아무리 기억을 되찾았다 한들―】 

“끈질기군. 대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거지?” 

【······뭐?】 

“패배를 인정하기를 원하는 건가? 아니면, 네놈의 삶을 이해해주길 원하는 건가?” 

【이해? 너희들의 이해 따위는―】 

“필요 없겠지.” 

유중혁이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오직, 유중혁이기에 할 수 있는 말. 

“나 또한 네게 이해받길 원하지 않는다.” 

이미 서로를 이해하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파찰음이 튀었다. 격과 격이 사납게 충돌하고 있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포효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지옥도가 뒤얽힌 전장. 

분하게도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유중혁을 바라보는 것뿐. 이 빌어먹을 페이지를, 어떻게든 넘기는 것뿐이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승패는 쉽게 정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은밀한 모략가’는 여유로웠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쪽은 이제 막 ‘1863회차’의 힘을 쓸 수 있게 된 상태에 불과하니까. 숙련도도, 적응도도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이미 승리를 확신하는 듯, ‘은밀한 모략가’가 물었다. 

【궁금해지는군.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여, 네가 보고 싶은 결말은 뭐지?】 

“내가 왜 네놈에게 그걸 대답해야 하지?” 

【설마 저 ‘구원의 마왕’이 바라는 결말과 같은가? 정말로 저 녀석을 믿는 것인가?】 

허공에서 충돌한 두 개의 칼이 커다란 충격파를 만들었다. 

입가의 피를 닦으며, 유중혁이 한 걸음을 물러났다. 

【너는 알지 못한다. 네가 믿는 잘난 ‘동료’가, 얼마나 한심한 존재인지. 너는 저놈이 바라는 이 세계의 ‘결말’이 무엇인지 모른다.】 

[파천검도]를 몰아치며, ‘은밀한 모략가’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처음 이 세계선이 열렸을 때, 김독자의 목표는 ‘생존’이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유상아를 보았다. 아마 이 여자는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검과 검의 틈새에서, 내가 살아왔던 설화들이 숨 쉬고 있었다. 

【그다음의 목표는······ 너를 이용해 강해지는 것이었지.】 

「“나를 동료로 삼아. 난 당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어.”」 

「앞으로 남은 무수한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기 위해, 유중혁은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다.」 

마치 페이지가 넘어가듯, 내가 살아왔던 설화들이 눈앞에서 영사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멈추려는 듯 유중혁이 거칠게 검을 휘둘렀지만, ‘은밀한 모략가’의 [진천패도] 앞에 모든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은밀한 모략가’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다음에는, 그래. 조금 여유가 생긴 후엔 감히 ‘이 세계의 결말’까지 꿈꾸게 되었다.】 

「“형은 소원 안 빌어요?” 

나는 그런 이길영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대답했다. 

“어떤 소설의 에필로그를 보게 해달라고 빌었어.”」 

제천대성은 말했다. 누군가를 읽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고. 내가 다른 사람들을 읽었듯, 다른 이들도 나를 읽고 있을 것이라고. 

그 말이 맞았다. 

내가 ‘멸살법’을 읽는 동안, ‘은밀한 모략가’ 또한 내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내가 살아온 모든 삶을, 그가 지켜보고 있었다. 

【김독자는 내가 한때 꿈꿨던 것들을 꿈꾸게 되었다. 하늘의 <스타 스트림>을 부수고, 내가 넘지 못했던 ‘벽’ 이후의 세계를 부수길 원하게 되었다. 모든 동료들을 살리기를 원했고, 심지어는······.】 

「까만 밤하늘의 중심에 성운의 무리들이 보였다. <베다>. <올림포스>. <파피루스>······ 나는 네놈들이 한 짓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 

「“나는,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설화’를 만들 겁니다.”」 

눈앞에서 기억들이 흘러간다.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도 있었고, 비틀리거나 왜곡된 것들도 있었다. 온전한 ‘설화’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김독자’라는 이야기에 대한 ‘은밀한 모략가’의 독해였다. 

「이것이, ‘은밀한 모략가’의 기분이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김독자는 이제 그 목표를 이룰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이룰 수 없게 되었지.】 

나는 묻고 싶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냐고. 

[‘제4의 벽’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설화는 허구일 수는 있어도 거짓을 말하지는 않는다.】 

‘은밀한 모략가’의 왼손이 유중혁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반사적으로 휘두른 [흑천마도]가 ‘은밀한 모략가’의 손을 쳐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설화, ‘대천사의 사랑을 받는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막 태어난 아기처럼 내가 가진 설화들이 울고 있었다. 

개중에는 내게 익숙한 설화도 있었고. 

[설화, ‘다섯 번째 손오공’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얻은 지 얼마 안 된 설화도 있었으며. 

[설화, ‘용이 인정한 적수’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해신의 전우’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고려제이검’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대체 언제 얻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설화들도 있었다. 

그 모든 설화들이 한꺼번에 말하고 있었다. 

【구원의 마왕이여, 너는 <스타 스트림>을 파괴할 수 없다.】 

하늘의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내가 증오했던 별들이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스타 스트림>의 세계를 관음하는 절대자들. 

화신들의 삶을 유희로 삼는 존재들.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줄곧 지켜 보아준.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나의, 아주 오래된 적들. 

【너는 이제 성좌들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은밀한 모략가’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성좌들을 증오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들을 떨어트리는 것이 나의 목표 중 하나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빌어먹게도 나는 이제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저 하늘의 별들이, 모두 똑같은 빛을 발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성좌, ‘고려제일검’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절대 왕좌’ 시나리오에서도, ‘마계’에서도······. 

그들이 모아준 개연성이 없었다면,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모든 설화는, 그들이 함께 만들어 준 것이었다. 

【너는 이 세계선의 어떤 ‘상실’도 원하지 않는다. 너는, 이 이야기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너는】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듯, ‘은밀한 모략가’가 선언했다. 

【절대로, 이 세계의 ■■을 볼 수 없다.】 

하늘에서 천둥이 쳤다. 

제천대성과 <황제>의 싸움이 격화되고 있었다. 

[다수의 관객들이 당신의 전장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성좌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나를 동정했고, 누군가는 나를 대신해 분노했다. 무수한 간접 메시지들이 몰아쳤다. 

유중혁은 말이 없었다. 통천하를 적시는 빗물이 쏟아지는 말들을 대신했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가 내 말을 빼앗았다.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유중혁이었다. 

“김독자에겐 자격이 없으니, 네놈이 대신해서 이 세계의 ■■을 보겠다는 건가?” 

‘은밀한 모략가’의 미간에 희미한 실선이 생겼다. 

【정상적인 판단이 안 되는 모양이군. 네가 동료로 생각하는 저 녀석은, 네가 증오하는 성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저놈은―】 

“한심한 놈이지.” 

유중혁이 말을 받았다. 

“보잘것없는 게임 회사의 계약직이었고, 소설을 읽는 것이 취미의 전부였던 녀석이다.” 

초라한 자기소개처럼 울려 퍼지는 말들. 

언젠가 내가 유중혁에게 했던 말들이었다. 

“시건방지게 떠드는 것이 특기고, 대책 없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 상황을 타개하는 버릇이 있는 녀석이다.” 

내가 모르는 나를, 유중혁이 말하고 있었다. 

“그런 녀석이, 일행들을 여기까지 이끌었다.” 

까가가각, 하는 소리와 함께 [흑천마도]가 [진천패도]를 밀어냈다. 싸움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유중혁이 집중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의 표정이 흔들렸다. 유중혁의 검격이, 처음으로 ‘은밀한 모략가’의 방어를 파고들고 있었다. 

“찾아올 결말이 무엇이든, 녀석이 없었다면 이 세계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 

【너는 아무것도―!】 

“오히려 정상적인 판단이 안 되는 건 네놈인 것 같군. 네놈은 왜 이 세계선을 방해하는 거지?” 

분연한 [파천검도]가 어둠을 베어낸다. ‘은밀한 모략가’의 신형이 크게 흔들리며 뒤쪽으로 밀려났다. 

그 짧은 찰나를 놓치지 않고, 유중혁의 검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네놈의 목적은 대체 뭐지? 김독자가 그렇게 거슬렸다면, 왜 김독자를 진즉에 죽이지 않았나? 김독자가 네 삶을 이용해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나 역겨웠다면―” 

[흑천마도]가 ‘은밀한 모략가’의 목을 겨누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화신 ‘유중혁’을 노려봅니다.] 

두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유중혁이 물었다. 

“왜, 아직도 이 이야기를 지켜보는 것이지?”





< Episode 84. 1864 (3) > 끝

< Episode 84. 1864 (4) >





어째서 ‘은밀한 모략가’는 지금까지 우리의 설화를 지켜본 것인가.
“대답해라.”
그는 이계의 신격의 왕이었고, 자신의 ‘결’을 본 존재였다.
나를 제거하고 싶었다면, 막대한 개연성을 희생해서라도 나를 죽일 힘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유중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너무나 깊고 광활해서 내가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쓴다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나는 ‘은밀한 모략가’를 이해할 것 같았다.
―내 소설이 멸살법의 표절이라면, 너는 무엇의 표절이지?
1863회차의 한수영은 내게 그렇게 물었다.
나는 그 물음의 답을 알면서도 대답하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1863회차에서 한수영이 만든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살아온 회차보다도 완전했다. 원작의 모든 일행들이 생존했고, 서울은 최종 시나리오에 대항할 인프라를 갖추었다.
그 그림에 유일하게 없었던 것은 ‘유중혁’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주인공을 배제하고, 원작을 베껴 만들어진 세계가 올바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복제는, 원작을 능가한다.」
그럼에도 나는 한수영이 만든 세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것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이야기에, 내가 목표로 했던 것들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삶에도 저작권이란 것이 존재할까.
하나의 삶을 저작(著作)이라 표현해도 좋은 것일까.
【구원의 마왕.】
다른 세계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준 존재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결말’을 볼 자격이 있는 사내.
그럼에도 원하던 결말을 볼 수 없었던 이가, 유중혁의 [흑천마도]를 손으로 붙잡은 채 말했다.
【제대로 된 ‘결’을 맺지 못한 이야기는, 실패한 이야기인가?】
날에 베인 손가락에서 설화가 흘러내렸다. 내가 잘 아는 설화들이었다.
내가 십여 년에 걸쳐 읽어 온 이야기.
【정말로, 세상에 ‘제대로 된 결말’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유중혁이 [흑천마도]를 재차 휘두르자, ‘은밀한 모략가’의 신형이 훌쩍 멀어졌다.
‘정신 차려라, 김독자. 이번엔 제대로 온다.’
[특성, ‘마왕살해자’가 발동합니다!]
[특성, ‘별들의 공포’가 발동합니다!]
마왕과 성좌를 베기 위해 만들어진 검이 울부짖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울부짖습니다!]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오직 자기 자신의 삶으로 ‘거대 설화’를 완성한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까가가가가가각!
우리는 다가오는 설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물에 젖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통천하의 물길이 뒤집히며 강의 바닥이 드러났다.
우리는 강의 바닥을 지지대로 삼은 채,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파천검도(破天劍道).
절기(絶技).
파천유성결(破天流星決).
하늘을 찌르는 낙뢰가 [흑천마도]의 끝에서 솟구쳤다. 마왕의 격과 성좌의 격, 그리고 초월좌의 격이 더해진 검강의 다발이 산개하는 유성우처럼 허공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쪽에서도, [진천패도]가 움직였다.
콰콰콰콰콰!
이쪽이 가지고 있는 기술은 저쪽도 가지고 있다. 똑같은 모양의 유성우가 허공에서 부딪치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기술이 똑같을 때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숙련도, 그리고 설화의 격이다.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이야기를 회상합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우리는 어느 쪽도 앞서지 못한 상태였다.
‘김독자!’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영원불멸의 지옥도」를 운용하는 동시에, 다른 설화들을 방출했다.
[설화, ‘이계의 신격을 살해한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저쪽이 격의 우세를 점하고 있는 것은 ‘마왕살해자’와 ‘별들의 공포’의 특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쪽도, ‘이계의 신격’에 대항할 수 있는 설화들을 풀면 된다.
쿠구구구구구구!
격과 격이 충돌했다. 유중혁의 코에서 주륵 피가 쏟아졌다. 하지만 유중혁은 물러서지 않았다.
유중혁뿐만이 아니라, 설화들도 알고 있는 듯했다. 여기서 이야기를 멈추면, 모든 이야기가 끝나버린다는 것을.
【소용없다.】
‘은밀한 모략가’의 격이 움직였다. 막연한 파형으로 존재하던 ‘거대 설화’의 기세가 변화하고 있었다. 거신의 형상을 이룬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우리를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유중혁이 반발하듯 외쳤다.
“이쪽에도 거대 설화는 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눈앞에 거대 설화의 정경들이 흘러갔다.
마왕 선발전, 수르야와 맞서 싸웠던 「마계의 봄」.
‘기간토마키아’를 겪으며 얻은 「신화를 삼킨 성화」.
거대한 사자와 용의 형상을 띤 두 개의 거대 설화가, 거신의 손바닥을 물어뜯으며 저항했다.
[41회차의 ‘유중혁’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666회차의 ‘유중혁’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999회차의 ‘유중혁’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은밀한 모략가’의 안에서, 수많은 유중혁들이 이 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666]과 [999]를 떠올렸다. 그들도 저 안에 있을 것이다. ‘은밀한 모략가’와 함께, 이 세계선의 처음부터 나를 지켜봐 준 녀석들.
그들이 두 유중혁의 결투를 보며 동요하고 있었다.
[「무대화」가 발동합니다!]
하늘이 갈라지며, 빛과 어둠이 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빛과 어둠의 계절」은 우리의 ‘거대 설화’였다. 하지만 동시에, ‘은밀한 모략가’의 거대 설화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거대 설화에서, 유중혁은 ‘은밀한 모략가’에게 패했다.
【너희는 이길 수 없다.】
「무대화」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패한 역사는 또다시 패한 역사를 만들 뿐이다.
「백색 코트의 사내가 창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흑색 코트의 사내가, 그 시선을 마주했다.」
‘은밀한 모략가’의 동공이 흔들렸다.
분명 그때와 같은 ‘유중혁’의 싸움이었음에도, 뭔가가 달랐다. ‘은밀한 모략가’가 자신의 코트를 내려다보았다.
흑색 코트.
그때와는 코트의 색깔이 정반대가 되었다.
「빛과 어둠이 충돌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의 감시자만이, 그 모든 이야기를 지켜보았다.」
유중혁의 오른팔에 거대한 격이 모여들고 있었다. 녀석이 사용하려는 기술은 명백했다.
지금의 유중혁이 사용할 수 있는 최강의 기술.
유성참(流星斬).
묵시룡 전(戰)에서, 유중혁은 이 기술로 ‘은밀한 모략가’를 꺾지 못했다.
[화신 ‘정희원’이 자신의 거대 설화 지분을 일시적으로 양도합니다.]
멀지 않은 전장에서, <김독자 컴퍼니> 모두가 우리에게 힘을 보태고 있었다. 거대 설화에 지분을 가진 모든 존재가, 이 전장에 동참하고 있었다.
[화신 ‘한수영’이 자신의 거대 설화 지분을 일시적으로 양도합니다.]
[화신 ‘신유승’이 자신의 거대 설화 지분을 일시적으로 양도합니다.]
[화신 ‘이길영’이 자신의 거대 설화 지분을 일시적으로 양도합니다.]
유중혁의 [흑천마도]에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설화가 모여들었다.
점점 더 불어나는 유중혁의 설화를 보며, ‘은밀한 모략가’가 자신의 격을 쏟아부었다.
똑같은 유중혁이었지만, 두 사람이 만든 설화는 전혀 달랐다.
「유중혁은 누구인가.」
그들이 가진 설화가, 그 질문의 대답이었다.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은밀한 모략가’의 설화는 1회차, 2회차, 다시 100회차와 1000회차의 유중혁이었다. 오직 한 사람의 존재가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설화.
「모든 비극이 무료해지고, 오직 하나의 존재만이 비대해졌다.」
휘두르는 [흑천마도]의 검격이 그 설화에 대항했다.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이것이, 유중혁의 대답이었다.
[설화, ‘과거와 미래의 아이’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유중혁은 신유승이었다.
[설화, ‘멸망의 심판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정희원이었고.
[설화, ‘거짓 구원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한수영이었으며.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나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유성참이 ‘은밀한 모략가’의 거대 설화와 부딪쳤다. 그야말로 백중지세의 싸움이었다. 잠깐의 방심이 승패를 가를 수 있는 전장. 우리가 가진 모든 설화들이 몰아쳤다. 그리고
[666회차의 ‘유중혁’이······.]
그 전장의 틈새에서, 아주 작은 변화가 있었다.
[362회차의 ‘유중혁’이······.]
귀가 멀 듯한 굉음이 터졌고, 폭발한 강물이 희뿌연 안개를 이루었다. 밀려온 강물이 비틀거리는 유중혁의 몸을 휩쓸었다. 유중혁의 정신이 흐려지고 있었다.
나는 유중혁 대신 화신체를 움직여 근처의 부유물로 몸을 끌어 올렸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부유물이 아니라, 죽은 ‘이계의 신격’들이 쌓여 만들어진 작은 섬이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와 나의 차이는 하나뿐이다.】
뿌옇게 피어오른 강물의 안개가 사라지자, 시체들의 섬 위에 주저앉은 ‘은밀한 모략가’의 모습이 보였다.
【너는 운이 좋았고, 나는 운이 없었다.】
츠츳, 츠츠츳.
엉망으로 찢어진 흑색 코트.
그의 전신에서 스파크가 튀어 오르고 있었다.
[1562회차의 ‘유중혁’이······.]
[1321회차의 ‘유중혁’이······.]
그의 안에서 ‘유중혁’들이 반발하고 있었다. 그들이 ‘은밀한 모략가’의 뜻을 거부하고 있었다.
[999회차의 ‘유중혁’이, 1864회차의 끝을 보고 싶어 합니다.]
‘은밀한 모략가’의 격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그의 몸이,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부풀어 있던 근육이 작아지고, 키가 줄어든다.
격을 상실한 ‘은밀한 모략가’는, 어느새 소년의 모습으로 변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유중혁의 몸을 일으켰다.
“너······.”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절대 다수의 관객들이 당신의 결투에 전율합니다!]
[일부 관객들이······.]
우리가 이겼다.
머릿속으로 무수한 간접 메시지들이 날아들었지만, 그중 어느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홀로 섬 위에 주저앉은 ‘은밀한 모략가’.
바닥에 꽂힌 [진천패도]만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나는 [흑천마도]를 꾹 쥔 채 녀석에게 다가갔다.
어째서, 같은 유중혁임에도 이토록 다른 생을 살아야 했는가.
왜 저 녀석은, 홀로 이 모든 비극을 겪어내야 했는가.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이야기를 더듬거립니다.]
그에게는 동료가 없었기 때문인가.
동료······.
[41회차의 ‘유중혁’이 당신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없지 않았다.
그에게도 동료는 있었다.
하나둘,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꼬마 유중혁’들이 그곳에 있었다.
【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
그의 주변을 둘러싼 꼬마 유중혁들. 그리고 다시 그 꼬마 유중혁들의 주변을 둘러싼 ‘이계의 신격’들이 보였다.
【하나뿐하나뿐하나뿐】
‘은밀한 모략가’가 살아온 역사.
그가 살아온 ‘멸살법’의 모든 것이,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죽이지마죽이지마죽이지마죽이지마】
‘결’에 도달하지 못해 버려진 이야기들.
나는 유중혁의 몸을 움직여 그들을 향해 자세를 낮추었다. 손을 뻗자, 작은 ‘이계의 신격’들 중 하나가 유중혁의 손끝을 물었다. 새빨간 피가 손가락 끝에 맺혀 떨어졌다.
이 세계선이 새로운 이야기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여전히 유중혁의 이야기는― ‘멸살법’은 끝나지 않았다.
‘김독자.’
정신이 들었는지, 유중혁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유중혁에게 대답하지 않은 채, ‘이계의 신격’들을 헤치며 ‘은밀한 모략가’를 향해 다가갔다.
소년이 된 ‘은밀한 모략가’가, 이계의 신격들에게 둘러싸인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흑천마도]를 그러쥐는 나를 보며, 유중혁이 말했다.
‘후회할 거다.’
「후회 안 해.」
들어 올린 [흑천마도]를, 나는 천천히 칼집에 집어넣었다.
「너도 안 죽일 거잖아.」
유중혁의 대답은 조금 늦게 돌아왔다.
‘······죽여봤자, 놈은 다시 회귀할 뿐이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유중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명백했다.
비극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선택은 설화를 쌓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것이 1864번에 달하는 삶의 티끌조차 위로하지 못함을 안다.
하지만.
“은밀한 모략가.”
내 부름에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 세계가 원작과 달라졌다고 해도, 이 세계가 더 이상 소설이 아니라 해도······ 녀석이 살아온 이야기가 없었더라면 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김독자도 이 자리에 없다.」
나는 분명 그에게 빚을 졌다.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빚이었다.
“한 번 쓴 문장은 바뀌지 않는다고 했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문장은 바뀔 수 있다.
‘멸살법’에도 수정본이 존재하는 것처럼.
【내 설화는 이미 끝났다.】
“······그리고?”
【······그다음은 없다. 끝이란 그런 거니까.】
“어떤 이야기는 끝이 나야 비로소 새롭게 시작하기도 해. 내가 살던 세계에서는 매년 올해가 완결입니다, 라고 해놓고 10년 넘게 같은 이야기를 연재한 사람도 있었어.”
그 이야기가, 나를 살게 만들었다.
“분명 500화 완결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어느새 1000화를, 2000화를 넘긴 이야기였지.”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지?】
“그 이야기는 3149화까지 쓰였고······ 3150화는 쓰이지 않았어.”
마침표를 찍어도 다음 문장을 쓰는 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은밀한 모략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이야기를 계속해 온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지금도 난 그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는 기분이 들어. 그리고 어쩌면, 정말 계속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네놈은―】
“왜냐하면 난 성좌니까.”
굳어진 ‘은밀한 모략가’의 표정을 보며, 나는 서늘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성좌는 그런 존재거든.”
이것이 내가 선택한 대답이었다.
놈을 상처입혀도, 놈을 기만하지 않을 방법이었다.
‘은밀한 모략가’의 두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놈이 본 그 이야기가.】
이글거리는 목소리가, 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결국 너를 죽이게 될 것이다. 네게 최악의 결말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너의 성운을―】
“상관없어.”
이것이 무책임한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안다. 내 알량한 속죄가, 다른 모든 이들에게 커다란 불행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이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때마다, 나도 최선을 다해 맞서 싸울 테니까.”
‘은밀한 모략가’의 표정이 변하고 있었다. 나는 지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먼 우주의 끝을 가늠하는 표정. 그런 표정으로, ‘은밀한 모략가’가 전장을 돌아보고 있었다.
전장의 비가 그치고, 제천대성이 불러온 먹구름이 물러가고 있었다.
‘천계대전’이 끝나가고 있었다.
쓰러진 <황제>의 성좌들이 제천대성과 요괴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짙은 패배감만이, 이 전장의 승패를 대변했다.
[현재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 설화방이 ‘경전’을 획득한 상황입니다.]
[경전을 1시간 동안 수호하면 시나리오는 자동 종료됩니다.]
[현재 시나리오 종료까지 10초 남았습니다.]
마침내, 길었던 시나리오가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부신 <스타 스트림>의 창공. 그곳에서 마지막 시나리오를 관장할 ‘대도깨비’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나리오가 종료되었습니다!]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 설화방이 시나리오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눈부신 메시지와 함께, 어마어마한 보상들과 성좌들의 축하 메시지가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멀리서 비유를 머리에 얹고, 경전을 흔들며 달려오는 신유승이 보였다.
신유승이 쥔 경전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
“아저씨!”
[해당 시나리오에 ‘이계의 신격’의 지분이 막대합니다!]
[<스타 스트림>이 ‘이계의 신격’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이계의 신격’들이 정식으로 시나리오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눈부신 빛살과 함께, 요괴들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손오공을 중심으로 모여든 요괴들은 마치 하나의 군체처럼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나는 그들의 울음을 들었다.
(그것은, 낯선 나라의 노래처럼 들렸다.)
내 화신체를 업고 손을 흔드는 정희원의 모습이 보였다. 잘못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드디어 붙잡았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리도 들렸다.
석존의 후예가 된 유상아와, 탈진한 이길영을 업은 장하영도 보였다.
곁을 돌아보자, ‘은밀한 모략가’가 나와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유기를 여기서 끝마친다.)
하나의 시나리오가 끝나도, 여전히 이야기는 계속된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도 반드시 결말은 있다.
[새로운 ‘거대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히든 시나리오 ― ‘단 하나의 설화’의 네 번째 조건이 일부 완수되었습니다!]
그렇게 아주 조용히.
[당신의 거대 설화가 ‘결(結)’의 전반부를 완성하였습니다!]
이 세계의 끝을 예고하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당신의 성운이 ‘마지막 시나리오’의 자격을 획득하였습니다.]





< Episode 84. 1864 (4) > 끝

< Episode 85. 최후의 벽 (1) >





[95번 메인 시나리오가 종료되었습니다!] 

시나리오가 종료된 후, 제천대성과 ‘이계의 신격’들은 통천하의 중심에 모여 축연을 벌였다.

[거대 설화 「서유기」가 엑스트라들의 신분을 해방합니다.] 

<관리국>과 <황제>의 억압 속에서 시나리오의 노예가 되었던 이계의 신격들이 풀려나고 있었다. 

【오오오오오오오오】 

【원숭이왕원숭이왕원숭이왕】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은밀한 모략가’를 따르다가 뒤늦게 시나리오에 참전한 쪽이었다. ‘은밀한 모략가’의 격이 약해지며, 새로운 외신으로 등극한 제천대성 쪽으로 자연히 넘어온 이들. 

[보상 분배가 시작됩니다!] 

허공에서 내려오는 95번 시나리오의 보상품들을 보며 화신들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들의 시선은 어마어마한 보상품을 받는 화신들의 무리를 향했다. 

“와, 저건······.” 

“나도 저 설화방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이었다. 인당 무려 일백만 코인에 달하는 개별 보상에 이어, <황제>의 성유물을 획득한 이들도 보였다. 

모두 절차에 맞게 분배되고 있었기에 항의할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성운, <황제>가 관리국에 시나리오의 공정성을 항의합니다!] 

아니, 있긴 했다. 바로 주최측인 <황제>였다. 

기껏 꾸린 대형 시나리오의 보상이 통째로 소성운에게 넘어가버렸으니, 그들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스타 스트림>이 <황제>의 항의를 묵살합니다.] 

분기를 이기지 못한 <황제>의 일부 성좌들이 자신의 격을 발출하려는 순간, 뜻밖의 존재들이 그들을 막았다. 

“그만들 하십시오. 우리가 졌습니다.” 

<황제> 최강의 화신, 페이후. 

“신화급 성좌들께서 지금의 우리를 본다면 뭐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이번 서유기 시나리오에 <황제>의 신화급 성좌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마지막 시나리오에서 이 모든 것을 관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각자의 명예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십시오.” 

단호한 화신의 목소리에 <황제>의 성좌들도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정희원과 이지혜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의외네요.” 

“그러네.” 

지금껏 만났던 거대 성운의 실세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쪽의 시선을 깨달았는지, 페이후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화신 정희원.” 

정희원은 긴장하며 강철검을 쥐었다. 페이후는 지금껏 그녀가 상대한 적들 중 손에 꼽을 정도의 강자였다. 

페이후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신 정희원, 이번 승부는 아주 인상적이었소.” 

“······아, 네.” 

“기회가 된다면, 꼭 그대를 중국으로 초청하여 식사를 함께하고 싶소.” 

자세히 보니 페이후의 구레나룻 사이로 희미한 홍조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이지혜가 [전음]으로 감탄했다. 

―······와, 세상이 멸망하는데도 이런 사람이 남아 있네. 

정희원은 멍한 얼굴로 페이후를 마주보았다. 자신과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페이후. 

이지혜가 정희원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언니, 뭐해요? 그래도 지금까지 우리가 본 남자들 중엔 제일 낫다고요. 얼굴이야 우리 사부보다 한참 못하지만······. 

“죄송하지만.” 

정희원은 무림의 고수처럼 공손한 목소리로 응대했다. 

“전 검과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몸이라.” 

“나도 마찬가지요.” 

“······네?” 

“내 꼭 그대를 중국으로 초대하여 밤새도록 깊은 검무를 나눠보고 싶소.” 

뜨거운 눈빛을 불태우며 장광설을 늘어놓는 페이후를 보며, 정희원은 살짝 질리는 느낌이었다. 곁을 돌아보니 눈을 빛내며 응원하던 이지혜도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혹시나 이 모든 게 기우면 다행이겠지만, 아니라면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츠츠츠츳······. 

보다 못한 그녀의 배후성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됐어요, 우리엘. 가만히 계세요.’ 

괜히 여기서 우리엘까지 나서면 꺼져가던 전쟁의 불씨가 활활 타오를 염려가 있었다. 맘 같아서야 지금 당장 일대일로 붙어서 꺾어버리고 싶지만, 주변 성좌들의 시선도 있고······. 

“죄송하지만, 저는 이미······.” 

거기까지 말하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쥔 강철검이 파르르 떨렸다. 이현성이 변신한 강철검. 정희원은 괜스레 원망스러운 기분이었다. 

왜 이 검은 말도 못하는 검이란 말인가. 

“뭐야 이건, 비켜!” 

그런 정희원을 도와준 것은 한수영이었다. 대체 언제 시나리오에 진입한 것인지, 페이후를 밀치고 나타난 한수영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김독자 어딨어?” 

······김독자? 

정희원은 지금껏 자신이 업고 있던 사내의 화신체를 돌아보았다. 

도중에 끼어든 한수영을 불만스럽게 바라보는 페이후. 그런 페이후와 김독자의 화신체를 번갈아 보던 정희원의 머릿속에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주군!” 

마치 ‘깃발 쟁탈전’을 회고하듯, 김독자를 품에 안은 정희원이 열정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허여멀건 김독자의 화신체가 정희원의 품에서 흐느적거리며 흔들렸다. 

“왕이시여!” 

모두가 정희원을 보고 있었다. 이지혜는 입을 딱 벌린 채, 그리고 한수영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리고 페이후는. 

“아······.”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렇군요, 화신 정희원. 그런 것이었습니까······?” 

페이후의 시선이 정희원을, 한수영을, 그리고 이지혜를 돌아보더니 마지막으로 김독자의 얼굴을 향했다. 슬그머니 깨무는 입술. 선택받은 주인공을 부러워하는 비운의 엑스트라처럼 천천히 고개를 숙인 페이후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이지혜가 정희원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됐어요, 언니. 이제 갔어요. 뭔가 재수 없는 오해를 한 것 같지만. 

하지만 정희원은 그만두지 않았다. 

“주군! 일어나보십시오! 주군! 일어나지 않으면 죽이겠습니다!” 

찰싹! 찰싹! 찰싹! 찰싹! 

정희원의 손바닥에 맞은 김독자의 왼쪽 뺨이 탱탱 붓기 시작했다. 

한수영은 그런 정희원을 한심한 얼굴로 내려다보더니 물었다. 

“······너 지금 뭐하냐?” 

“복수.” 

한수영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정희원을 대신해서 김독자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었다. 

“야.” 

“······.” 

“내가 새 수식언 지어준다고 했잖아. 근데 그새를 못 참고 새 수식언을 얻어?” 

“······.” 

“내가 쓴 내레이션은 들었냐? 마지막 지문 들었어? 어땠어? 솔직히 말해도 돼 인마. 감동했잖아. 그치?” 

하지만 김독자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인상을 찌푸린 한수영이 아직 붓지 않은 다른 쪽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신유승이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다들 대체 뭐하는 거예요!” 

“걱정 마. 숨은 붙어 있어. 안 죽었다고.” 

소란에도 불구하고 김독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일행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 

“분명 일부러 안 일어나는 거야. 자기가 지은 죄가 있으니까.” 

“하긴. 그럼 참지 못할 정도의 고통을 줘 보는 게······.” 

“다들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 상황에서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의식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일행들의 표정도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뭐지?” 

결국 일행들은 이 사태를 대신 설명해 줄 인물을 찾아냈다. 

김독자의 바로 곁에서 기절해 있던 유중혁이었다. 

“야, 유중혁! 정신 좀 차려봐! 김독자 이 자식 왜 안 깨어나는데?” 

찰싹! 찰싹! 찰싹! 찰싹! 

단단한 유중혁의 뺨은 김독자처럼 쉽게 부풀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유중혁이 희미하게 실눈을 떴다. 

“나는 유중혁이다······.” 

“빌어먹을, 이 자식은 또 왜이래.” 

유중혁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같은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뒤늦게 나타난 유상아가 한수영을 말렸다. 

“중혁 씨 채근하는 건 그만두세요. 설화 때문에 기억 혼선이 와서 제정신이 아닐 테니까.” 

“상아 언니!” 

뒤늦게 재회의 기쁨을 누리게 된 일행들이 유상아를 향해 모여들었다. 

무사히 환생한 유상아의 전신에서는 예전과는 또 다른 기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한수영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석존의 후예라더니, 빡빡머리가 아니네?” 

“요즘 종교들은 제법 트렌디하거든요.” 

“잘 돌아왔어. 좀 늦었지만.” 

“당신이 말썽부릴 참에 맞춰 오느라 힘들었어요.” 

“······말썽부리는 건 내가 아니라 얘라고.” 

어깨를 으쓱한 유상아는 기절해 있는 김독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김독자의 머리에 씌워진 ‘긴고아’가 환한 금빛을 발했다. 

정희원이 만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 씌워놨네요. 이제 어디 도망은 못 가겠다.” 

“······안타깝게도, 이미 도망간 것 같네요.” 

“네?” 

“영혼체가 돌아오지 않았어요.” 

김독자에게 채워진 긴고아로부터 창공을 향해 희미한 실선이 뻗어 나갔다. 어디론가 이어진 실선. 유상아가 그 실선의 끝을 가늠하며 말했다. 

“걱정마요. 멀리는 못 갔으니까. 그리고 자의로 떠난 것 같지도 않고요.” 

자의로 떠난 것이 아니다. 그 말의 의미는 명료했다. 

주변을 황급히 돌아보던 한수영이 물었다. 

“‘은밀한 모략가’ 어디 갔어?” 

* 

차원 통로의 전경이 빠르게 곁을 스쳐 가고 있었다. 

모든 것은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해제하는 순간 무언가가 내 영혼체를 붙잡았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은밀한 모략가’와 함께 포탈을 넘어가고 있었다. 

보통이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좀 케이스가 특별했다. 

[당신은 ‘존재 맹세’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영혼체가 일시적으로 존재 맹세의 계약에 묶입니다.] 

[당신의 계약자가 24시간 동안 당신의 영혼체에 대한 소유권을 가집니다.] 

허공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나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존재맹세]에 이런 활용법이 있는 줄은 몰랐네. 

[존재 맹세].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동안 <김독자 컴퍼니>에게 접촉하여 정체를 밝히지 말 것. 

이 시나리오에서 내가 유일하게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이었다. 

도중에 시나리오 내용이 변경된 만큼 이견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스타 스트림>은 내가 맹세를 어겼다고 판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날 죽일 거냐? 

소년의 모습이 된 ‘은밀한 모략가’의 전신에서는 여전히 강렬한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그의 설화 속에서 수많은 유중혁들이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적의가 느껴지는 설화는 아니었다. 

나를 죽일 생각이 아니라는 건 명백했다. 

앞서 유중혁이 말했듯, 그가 나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기회는 이미 몇 번이나 있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포탈은 닫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내게 익숙한 장소였다. 무성한 어둠으로 뒤덮인 숲. 

‘은밀한 모략가’의 거처인 ‘은가이의 숲’이었다. 

【들어가라.】 

그 말과 함께, 내 영혼체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눈을 끔뻑이자 눈이 움직였다. 하지만 팔도 다리도 없는 상태. 대체 뭐로 변한 건가 싶어 근처를 돌아보자, 벽면의 유리에 내 모습이 비쳤다. 

······나는 작은 무림 만두가 되어있었다. 

아무래도 [999]가 사용하던 상징체인 것 같았다. 

“만두가 되니 기분이 어떠냐!” 

대체 언제 튀어나온 것인지 달려온 꼬마 유중혁들이 나를 발로 걷어차며 린치를 가했다. 겨우 꼬마 유중혁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아프지는 않았다. 

나는 만두피가 터지지 않도록 몸을 웅크리며 외쳤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너는 나를 막을 수 없어. 어차피 24시간만 지나면 나는 다시 화신체로 돌아가게 되어있다고. 날 죽이고 싶다면 지금 죽여버리는 게 좋을걸? 

물론 정말 나를 죽이기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나는 옥좌에 앉은 ‘은밀한 모략가’를 향해 물었다. 

―‘은밀한 모략가’. 네 목적은 뭐지? 대체 왜 날 살려두는 거냐? 

내 질문에 꼬마 유중혁들도 움직임을 멈췄다.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강한 외신이자 성좌. 모든 유중혁들 중 가장 강한 유중혁. 

―네가 전력을 다했다면, 우릴 이길 수 있었다는 걸 알고 있어. 

아무리 1864회차의 기억을 되찾은 유중혁과 내가 힘을 합쳤다 해도, 순수한 설화의 격으로 ‘은밀한 모략가’를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0회차부터 1863회차까지의 모든 역사의 총합이었고, 심지어는 그 이후로도 아득한 세월을 견딘 유중혁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은밀한 모략가’는 우리는 죽이는 대신 패배를 택했다. 

“네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말을 한 것은 이야기를 듣던 [41]이었다. 

“네놈이, ‘최후의 벽’의 마지막 파편을 가진 인간이니까.”





< Episode 85. 최후의 벽 (1) > 끝

< Episode 85. 최후의 벽 (2) >





비형은 몹시 들떠 있었다. 눈앞의 화면에서 펼쳐진 시나리오를 직접 목격한 도깨비라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나도 최선을 다해 맞서 싸울 테니까.

김독자의 목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시나리오 종료 메시지. 수많은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가 폭발하고, <스타 스트림> 전체가 진동하고 있었다.

거대 설화 『서유기』의 새로운 주인이 가려졌다.

‘해냈다. 김독자 그 녀석이 해냈어.’

이야기꾼은 공정성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어떤 심판이든 속으로는 응원하는 팀이 있게 마련이고, 비형 또한 마찬가지였다.

장성한 자식을 보는 부모처럼, 비형은 감동한 얼굴로 화면의 얼굴들을 쓸었다.

[축하드립니다, 비형 국장님.]

주변의 부하 도깨비들이 비형을 향해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그들 역시 비형이 오랫동안 <김독자 컴퍼니>를 지켜보아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도 그들이 해낼 줄 알았습니다.]

[저, 저도. 저도요······!]

심지어 그와 함께 <김독자 컴퍼니>를 응원해온 도깨비들도 있었다. 실제로 몇몇 도깨비들의 표정은 비형만큼이나 상기되어 있었다.

오직 자극만을 소재로 좇는 도깨비들이 무언가에 이토록 진심이 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얘들 내 거다. 넘보지 마라.]

[하핫! 그야 당연히······.]

긴급 소식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국장님, 대도깨비 ‘바람’께서······.]

[승격입니다!]

······승격이라고?

[비형 국장님, 정말 축하드립니다!]

[관리국이 모처럼 제대로 일을 하려나 봅니다!]

쏟아지는 메시지 속에서 비형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신은 ‘상급 도깨비’인데다 서울 지부의 국장이었다. 이미 노력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대치까지 올라온 상황.

그런데 여기서 또 승격을 한다는 것은······.

[······국님?]

분명, 이것은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일까?

[대도깨비께서 기다리십니다.]

비형은 하급 도깨비들의 안내를 받아 포탈을 탔다.

뿌연 안개가 걷히며, 회색빛 통로에서 그를 기다리는 대도깨비 바람의 모습이 보였다.

[왔는가, 비형.]

[바람님.]

그는 수고했다는 듯 비형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축하하네. 자네의 승격이 결정됐네.]

[······예?]

[얼빠진 표정 좀 어떻게 해보게. 실감이 안나는 건가? 자네를 마지막 ‘대도깨비’로 뽑자는 결정이 났단 말일세.]

대도깨비. 모든 이야기꾼이 갈망하는 궁극의 명예. 막연하게 상상하고만 있던 상상이 실제가 되자 비형은 얼떨떨했다.

[······대도깨비? 제가 말입니까?]

[그렇다네. <스타 스트림>의 역사 어디에도 없는 전무후무한 승격이지.]

바람은 흘흘 웃으며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비형은 어디로 향하는지 영문도 모르는 채 그를 따라갔다. 묻고 싶은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이곳은 대체 어디고, 또······.

[곧 대도깨비가 될 테니, 이제 그분을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 마음을 안다는 듯 바람이 웃었다.

[그분이라 하심은······.]

되물으면서도, 비형은 그게 누구일지 예상하고 있었다.

주변의 공기가 뒤틀리고, 대기 중에 들끓는 희미한 스파크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스파크는 모두 활자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 앞에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껏,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존재가.

[다 왔네.]

회랑을 돌아 안개의 통로를 지나치자, 커다란 전당이 나타났다.

아니, 그것을 전당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 크기를 측량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홀이었다. 홀에는 널따란 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벽 또한 처음과 끝을 잴 수 없는 너비였다.

벽의 표면에는 활자들이 들끓고 있었고, 곳곳에는 금이 가거나 크고 작은 손상이 있었다.

순간, 비형은 저 벽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계시의 판?]

계시의 판. 틀림없었다. 그 모양은 달랐지만, 성좌들이 ‘계시’를 얻는 그 벽 또한 저런 형태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시의 판’이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게다가 저 크기는······.

[모두 모였군.]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비형은 자기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동안 무수한 성좌들과 마주한 비형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긴장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격의 끝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곁을 돌아보자, 바람을 비롯한 모든 대도깨비들도 앞을 향해 부복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계시의 판’ 앞에 서 있었다.

비형은 떨림을 감추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비형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런가······ 그렇구나.

저 존재가 바로 이 <관리국>을 지배하고 <스타 스트림>을 통제하는 단 하나의 절대자.

‘이야기의 왕’.

길고 흰 손으로 부서진 벽면을 어루만지던 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음 세계를 결정할 ‘단 하나의 설화’를 뽑겠다.]

*

“내가 ‘최후의 벽’의 마지막 파편을 가졌다고?”

“그렇다.”

[41]의 목소리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대충 무슨 말인지는 짐작이 갔다. ‘최후의 벽’. 이번 회차를 진행하는 내내, 나는 그것에 관한 정보들을 수집해왔다. ‘멸살법’의 원작에서는 끝까지 풀리지 않았던 소재. 아마도 그 ‘벽’이, 이번 회차의 마지막을 결정할 단서일 거라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녀석들이 말하는 ‘마지막 파편’이란······.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김 독 자」

걱정 마. 녀석에게 절대 너를 넘기지는 않을 테니까.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집중했다.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격을 많이 상실했다곤 해도, 여전히 눈앞의 존재는 내가 아는 최강의 성좌이자 ‘이계의 신격’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은가이의 숲’에 왔던 날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일전에 그런 이야길 했었지. ‘신성한 삼문답’이 끝났을 때, 나는 내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알아내야 한다고.”

【그렇다.】

“너는 사실 이 세계의 끝을 보고 싶은 거야. 그렇지? 말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너 역시 이 세계선에 희망을 걸고 있는 거라고.”

‘은밀한 모략가’의 눈썹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가 아무리 자신이 유중혁임을 부정해도, 유중혁의 버릇까지 버리진 못했다.

“그리고 그걸 위해 내가 가진 [제4의 벽]을 필요로 하는 거고. 너는 그래서 나를 지금까지 살려뒀던 거다. 맞나?”

‘은밀한 모략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오겠다면 내게도 생각은 있다.

츠츠츠츠츳.

“그때 마지막 ‘삼문답’을 듣지 못했어.”

[‘신성한 삼문답’이 재개됩니다!]

[당신에게 하나의 질문권이 남아 있습니다.]

그때, 나는 ‘은밀한 모략가’에게 물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은밀한 모략가. 당신은 그 소설의 에필로그를 아는 존재인가?

“은밀한 모략가. 당신이 보았던 ‘결말’은 대체 뭐였지?”

내가 본 ‘멸살법’은 3149화가 끝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지 못했음에도 ‘은밀한 모략가’는 그 이후를 살았다. 기록되지 않은 시간을, 그는 살아남아 자신만의 결말에 도달했다.

그는 그곳에서 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무엇을 보았기에, ‘이계의 신격’이 되어 이 세계선에 나타나게 된 것일까.

내 질문에 먼저 나선 것은 [41]이었다. 그는 약간 화난 얼굴로 나를 향해 외쳤다.

“그 질문은······!”

【41.】

‘은밀한 모략가’의 제지에, 다른 꼬마 유중혁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소년의 모습을 한 유중혁.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보고 있었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멸살법’의 어디에도, 유중혁의 소년 시절은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저, 회상의 형태로만 간간이 묘사될 뿐이다.

하지만 그려지지 않았다고 해서, 없었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마치 ‘멸살법’의 3150화와 같았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유중혁은 태어났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멸살법’의 주인공이 되었다.

【네가 읽은 책에서는 내 행적이 어디까지 묘사되지?】

내가 모르는 얼굴의 주인공이, 묻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네가 도깨비 왕에게 가는 순간까지.”

나는 ‘멸살법’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도깨비 왕을 죽이기 위한 여정. ‘최후의 안개’를 헤쳐나가며, 유중혁의 이야기는 마지막 페이즈로 돌입한다. 그 뒤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가 그 후 무엇을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없었다.

당시 연재분을 읽다가 당황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설마하니 열린 결말인가 싶어 두려웠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지?】

뜻밖의 질문에 나는 당황했다.

설마하니, 이런 것들을 물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건 왜······.”

【성공한 것처럼 보였나? 그 끝에서,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갑갑함이 찾아왔다.

어째서 ‘은밀한 모략가’가 저런 질문을 내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어떻게 대답하든, ‘은밀한 모략가’에게 그 일들은 모두 이미 일어난 것이었다.

거기에서 내 감상은 조금도 중요치 않았다. 조금도······.

······정말, 중요치 않을까?

“너는······.”

나는 간신히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는 이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도 대답해야만 했다.

「그 순간, 그녀는 그 세계가 완전히 자신의 손을 떠났음을 깨달았다.」

[피스 랜드]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의 세계를 떠나보내던 만화가 아스카 렌의 표정. 하나의 세계를 만든 사람의 책무.

나는 그녀처럼 ‘멸살법’을 만든 작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독자님 덕분이니까요.」

그 이야기를, 끝까지 지켜본 사람이었다.

“넌 성공했어. 최선을 다했으니까.”

이 대답은 그 이야기를 끝까지 지켜본 사람의 의무였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모든 문장들을 찬찬히, 성실하게 떠올렸다.

“어느 회차였든 마찬가지야. 너는 항상 최선의 선택을 했어. 네가 도달한 결말이 무엇인진 모르지만, 그건 틀리지 않았어.”

유중혁의 모든 회차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유중혁이 얻은 것들, 그리고 잃은 것들.

“네 동료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홀로 남아, 최종장에 도달한 그 뒷모습까지.

“하지만······.”

내가 이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모르겠다.

“네 마지막 모습은, 왜인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어.”

지금도, 내가 읽었던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모든 것을 잃은 유중혁이 안개를 바라보았다. 그가 찾아온 공허한 해답이, 저 안개의 너머에 있었다.」

그 장면에 드러난 묘사와 정확히 같은 얼굴의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렇군.】

“······갑자기 그건 왜 물은 거지?”

【궁금했다. 너만이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존재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부여한 내 삶의 의미가 궁금했다. 그것뿐이다.】





< Episode 85. 최후의 벽 (2) > 끝

< Episode 85. 최후의 벽 (3) >





‘은밀한 모략가’의 말은 모든 의미를 상실한 존재의 그것처럼 공허했다. 그 공허감에 반발하듯, 나는 말했다.

“······네 삶은 누군가를 살렸어.”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린 녀석에게, 이름도 모르는 소년을 살렸다는 것은 아무런 위안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 소년은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년은 그의 동료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살아온 생은, 녀석을 구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던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처음 네놈을 보았을 때, 나는 너를 거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둔다. 문득 녀석을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

<배후(背後) 선택>

―당신의 배후를 선택하세요.

―선택한 배후는 당신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줄 것입니다.

1. 심연의 흑염룡

2.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3. 은밀한 모략가

4. 긴고아의 죄수

+

······생각난다.

분명 그랬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내 첫 배후 선택의 세 번째 선택지에 있었다. 그때 녀석은 나의 배후성이 되려고 했었다.

【그 후로도 쭉, 이 세계선을 지켜보았다. 놀랄 때도 있었다. 그 놀라움이 놀라웠지. 나는 오랫동안 놀란 적이 없었으니까.】

나도 알고 있었다. 이 세계선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은밀한 모략가’는 다양한 간접 메시지를 보내며 우리를 지켜보았다. 지금도 메시지 로그를 뒤지면 그가 보낸 간접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선택에 흥미로워 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호구력에 감탄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경솔한 발언에 실망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계획에 눈을 반짝입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계책을 궁금해합니다.]

······.

이것 때문에 처음 녀석과 마주했을 때는 몹시 낯설었다.

지금이야 [666]을 비롯한 다른 유중혁들이 대신 쓴 간접 메시지라는 걸 알지만······.

【결정해야 했다. 이 뒤틀린 세계를 지켜봐야 할지, 아니면 부숴야 할지.】

“······그래서 날 1863회차에 보냈던 거냐?”

‘은밀한 모략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선택은, 다시 이 ‘세계선’의 시작이 되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이 회차의 유중혁에게 1863회차의 정보를 준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다. 시험할 필요가 있었다. 네놈과 이 회차의 유중혁 중, 어느 쪽이 결말을 보기에 적합한 쪽인지.】

“그래서 판단은?”

‘은밀한 모략가’의 대답 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 세계의 끝에는 아주 거대한 벽이 있다. 모든 열쇠를 모아야만, 열 수 있는 ‘최후의 벽’이.】

―당신은 모든 질문의 해답을 얻었습니다.

―‘신성한 삼문답’이 종료됩니다.

순간 깨달았다.

방금 녀석의 대답은, 내 ‘삼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은밀한 모략가’의 곁을 맴도는 스파크가 거세어졌다. 어떤 정보는 그것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큰 개연성을 소모한다. 그것이 이 세계의 끝과 관련된 정보라면, 개연성의 값도 큰 것이 당연할 것이다.

‘최후의 벽’.

그것이 바로, ‘은밀한 모략가’가 자신의 에필로그에서 마주한 결말이었던 것이다.

【네가 가진 ‘파편’이 내가 찾던 마지막 열쇠다.】

나는 긴장하며 물러섰다. [무림 만두] 상태였기 때문에 뒷걸음치는 것이 어려웠지만, 어떻게든 거리를 확보해야 했다.

만약 내가 가진 [제4의 벽]이 ‘은밀한 모략가’의 목적이라면, 녀석은······.

천천히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는 ‘은밀한 모략가’의 손이 묘하게 공포스러웠다.

다른 꼬마 유중혁들도, 긴장한 눈으로 ‘은밀한 모략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세계선은 너무 많은 것을 뒤틀어 만들어졌다. 너를 내버려 두는 것이 올바른 일일지 아닐지, 나는 판단할 수가 없다. 】

뒤틀린 세계선. 망가진 개연성.

이미 수도 없이 들은 말이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나는 아무 말이나 던졌다. 중요한 건 시간을 끄는 것이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서,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 결과가 원인을 잡아먹었느니 어쩌니 하는 어려운 이야기는 잘 모르겠다고. 하지만 어떻게 되든 나와 동료들은 죽을 힘을 다해 여기까지 왔어. 이제 결말이 코앞이라고.”

이제 볼 수 있다.

적혀 있지 않았던 이야기의 결말을.

【결말을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결말을 만드는 것이니까.】

“올바른 결말? 그걸 결정하는 건······.”

【개연성이 뒤틀린 이야기는 결국 재앙을 만든다.】

마치 도깨비들이나 할 법한 그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너 답지 않은 말이네. 아직 본 적도 없는 걸 두고―”

지진이 발생한 것은 그때였다. 쿵, 하고 뭔가가 쓰러지는 소리.

원형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와인잔이 쏟아졌다. 숲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결코 자연적인 지진이 아니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천천히 옥좌에서 일어나 나를 지나쳤다. 그의 텅 빈 눈동자가 숲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친 화마에 휩싸인 ‘은가이의 숲’.

그의 숲이 불타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던 나무들이 재를 날리며 타올랐다. 숲속에 숨어 있던 ‘이계의 신격’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어마어마한 화력에 전당의 온도가 급격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단순한 방화가 아니었다.

이건 나라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어마어마한 격을 지닌 존재가 이곳을 공격하고 있다.

하지만 대체 누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은밀한 모략가’의 성역이다. 대체 누가 감히 이곳을 침공한단 말인가.

혹시 거대 성운의 짓인가?

<베다>? <올림포스>? 아니면······ <아스가르드>?

나는 ‘불’과 관련된 성좌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쉬이 떠오르는 수식언은 없었다.

광활한 숲 전체를 불태우는 열기.

······원작에, 이만한 힘을 가진 존재가 또 있었다고?

【왕이시여왕이시여왕이시여】

【피해피해피해피해피해피해피해】

조그마한 ‘이계의 신격’들이 ‘은밀한 모략가’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많은 ‘이계의 신격’이 그를 떠났지만, 여전히 남은 존재들도 많았다. 왕국의 몰락을 예감하는 백성들처럼 자신의 왕을 지키는 이들.

자신의 백성들을 내려다보던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향해 말했다.

【구원의 마왕. 나 역시, 너와 같은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숲이 불타는 급박한 상황에도, 그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마치 이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것처럼.

【어리석게도, 정해진 과거를 바꾸려 했었지.】

“······갑자기 무슨 소리지? 41회차의 이야기냐?”

만약 그렇다면, 나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41회차의 유중혁은 ‘지평선의 악마’와 계약하여 신유승을 3회차로 보냈다. 그 대가로 신유승은 3회차의 재앙이 되었다.

만약 ‘은밀한 모략가’가 걱정하는 ‘재앙’이 그런 것이라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곁의 [41]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내 회차의 이야기가 아니다.”

“뭐? 그럼······.”

[41]은 대답하지 않고 ‘은밀한 모략가’를 바라볼 뿐이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알기로 ‘멸살법’에서 정해진 과거에 간섭했던 회차는 41회차뿐이다.

······그런데, 그런 회차가 또 있었다고?

대체 언제지? 원작 밖의 이야기인가?

뻥 뚫린 전당의 하늘에, 불꽃에 휩싸인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태양은 수르야의 것도, 아폴론의 것도 아니었다. 작렬하는 태양의 중심부에 불길한 모양의 흑점들이 커지고 있었다. 내가 아는 그 어떤 성좌도, 저런 끔찍한 태양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저것은, 내가 모르는 존재의 힘이었다.

[999회차의 ‘유중혁’이 태양을 향해 탄식합니다.]

······999회차?

순간,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999회차의 유중혁이여. 나는 너의 삶을 존중한다. 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결’의 근처까지 갔던 존재니까.」

하나는 ‘은밀한 모략가’의 말이었고.

「“내가 회귀해도, 이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세계가 리셋되거나 하는 일은 없다는 소리다.”」

다른 하나는 유중혁의 말이었다.

유중혁이 죽어도,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가 회귀한 후에도, 여전히 세계는 남아 있다.

「만약, ‘결’을 본 것이 ‘은밀한 모략가’ 하나가 아니라면 어떨까.」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이야기가 또 있다면.」

「유중혁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그 세계에 남아 시나리오를 계속한 존재가 있다면. 그렇게 싸우고 또 싸워서.」

검게 타오르는 태양이 알 껍질처럼 갈라지며 눈부신 섬광이 뻗어 나왔다.

「이 세계의 끝에 도달해 자신의 ‘결’을 본 존재가 또 있다면?」

섬광의 중심에, 숲을 불태운 방화범이 있었다. 그저 방화범이라 칭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아름다운 실루엣이 흔들렸다.

‘은밀한 모략가’에 준하는 힘을 가진 존재. 그 존재가 내 눈앞에서 새하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그 존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살아있는 불꽃’.】

살아있는 불꽃.

‘공포의 기록자’의 기록에, 분명 그런 이름이 있었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살아있는 불꽃’.」

‘은밀한 모략가’와 함께 ‘이계의 신격’을 다스리는 왕들 중 하나.

하지만 그 왕들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온 존재인지 나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멍청했다.

모든 ‘이계의 신격’은 ‘멸살법’의 버려진 회차에서 온 존재들. 그렇다면 다른 왕들 또한, 당연히 ‘멸살법’에서 온 존재들이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쿠구구구구.

손끝이 미친 듯이 떨렸다.

인과를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처럼, 끔찍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납득하고 싶지 않았다.

특유의 무심한 목소리로,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이제 알았겠지. 이것이 세계선을 뒤튼 대가다.】

‘은밀한 모략가’의 목소리와 함께, 불타는 광휘에 휩싸인 검이 이쪽을 겨누었다.

그것은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대천사의 검이었다.

왜 알지 못했을까. 실은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이 불길이 이토록 뜨겁고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을.

악마를 태운 불길은, 다른 것도 태울 수 있다는 것을.

[지옥염화]에 둘러싸인 [업화의 불꽃]이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검의 주인이 웃고 있었다.

내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공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고 있었다.

【너를 찾는데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 1863회차의 유중혁.】

모든 것을 심판해 온 대천사의 눈이 새카맣게 타올랐다.

【나의 세계를 망친 외신(外神)이여.】

우리엘.





< Episode 85. 최후의 벽 (3) > 끝

< Episode 85. 최후의 벽 (4) >





그 눈빛, 그 살기. 

내가 아는 대천사의 그것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저것이 진짜 ‘우리엘’의 모습이었다. 

냉혹하고 잔인한 심판자. 

정의를 위해 [업화의 불꽃]에 걸리는 모든 적들을 태워버리는 존재. 

「그런 우리엘이 자신의 ‘결’에 도달했고.」 

[<스타 스트림>이 새로운 ‘이계의 신격’의 출현을 응시합니다.] 

[<스타 스트림>이 대상의 개연성 여부를 판별합니다!] 

「‘은밀한 모략가’를 죽이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오오오오오오오오】 

【왕이둘왕이둘왕이둘왕이둘】 

‘은밀한 모략가’에 준하는 격을 가진 외신의 출현에, ‘이계의 신격’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성좌, ‘고려제일검’이 ‘이계의 신격’의 존재에 경악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머리를 닦는 것도 잊은 채 전장을 응시합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눈을 부릅뜹니다!] 

놀란 것은 성좌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본래라면 이곳은 방송 불가 지역일 텐데. 

아무래도, 숲이 불타면서 채널 방벽이 제거된 모양이었다. 

[<관리국>이 ‘은가이의 숲’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엘의 손에서 [업화의 불꽃]이 움직였다. 숲 전체를 녹여버린 일검이 창공에서 날아드는 순간, ‘은밀한 모략가’가 가볍게 고개를 틀었다. 그를 스쳐간 일검이 전당의 절반을 날려버리며 불타올랐다. 

【가아아아아아아아】 

흉포한 파괴에 놀란 ‘이계의 신격’들이 비명을 질렀다. 

다시 한번 [업화의 불꽃]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전당 전체를 충분히 날려버릴 수 있는 격. 전신의 솜털이 비죽 솟았다. 원작에서 지구를 날려버렸던 265회차의 수르야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콰아아아아아! 

[업화의 불꽃]의 끝에서, 거대한 유성이 낙하하고 있었다. 이 숲 전체를 날려버리고, 어쩌면 이 공간 자체를 지워버릴 수 있는 힘. 

나는 영혼체에 깃든 힘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제대로 된 화신체도 없는 마당에 저런 공격을 막을 수 있을 턱이 없다. 애초에 저런 것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결국 ‘은밀한 모략가’가 나섰다. 휘두른 [진천패도]의 끝에서 새카만 흑빛의 입자들이 쏘아졌다. 거대 설화의 힘. 장벽처럼 펼쳐진 새카만 격이 유성의 충격을 받아냈다. 

콰아아아아앙! 

숲의 저변에 광풍이 몰아쳤고 뿌리가 뽑힌 나무들이 허공을 배회했다. 불꽃의 소용돌이가 주변의 모든 것들을 궤멸시키고 있었다. 

이만한 대결을 보는 것은 정말 간만의 일이었다. <기간토마키아>에서 하데스와 포세이돈이 붙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거대 성운들이 두 존재의 대결에 주목합니다.] 

츠츠츠츠······! 

격과 격이 부딪치는 중심에서 스파크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뻗은 [진천패도]가 떨렸다. ‘은밀한 모략가’가 밀리고 있었다. 나와 유중혁과의 대결로 인해, 격이 줄어든 탓이었다. 

이것이 ‘결’을 본 우리엘의 힘. 

이대로라면, 나와 ‘은밀한 모략가’는 은가이의 숲과 함께 <스타 스트림>에서 소멸하게 될 것이다. 

[현재 당신의 영혼체는 ‘은밀한 모략가’에게 일시적으로 귀속된 상태입니다.] 

[영혼체 귀환까지 20시간 31분 20초 남았습니다.] 

영혼체가 귀환하기까지는 아직 20시간도 넘게 남았다. 단순히 시간을 끈다고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어 보이진 않았으니까.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나는 일단 상황부터 파악하기로 했다. 

“이봐! 저 우리엘이 왜 널 공격하는 건데?” 

애초에 저 ‘우리엘’은 대체 어떤 세계선에서 온 존재란 말인가. 

그리고 왜, ‘은밀한 모략가’를 공격하는 것인가. 

[999회차의 ‘유중혁’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살아있는 불꽃’을 응시합니다.]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설마? 

내가 가장 좋아했던 회차.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가장 완벽했던 회차이자, 역시나 ‘결’의 코앞까지 다가갔던 회차. 

우리엘이 말하고 있었다. 

【외신이여, 999회차의 일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기억하고 있다.】 

【다행이군.】 

분노한 우리엘의 검격에 그녀가 쌓아온 설화가 담겨 있었다. 

[거대 설화, ‘영겁의 불꽃’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활활 타오르는 우리엘의 거대 설화.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야기가 그곳에 있었다. 

「“사부, 이제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이지혜의 목소리. 

활자들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중혁 씨. 조금만 버티십시오. 거의 다 왔습니다!”」 

왼팔을 잃고, 오른쪽 다리를 잃고, 자신의 두 눈을 잃은 999회차의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오직 일행들을 위해 살았던 유중혁. 

어둠 속에 물든 그의 세계에, 한줄기 빛살 같은 목소리가 있었다. 

「[패왕, 정신 차려라.]」 

맞다. 999회차에는 우리엘이 있었다. 

그녀는 유중혁의 동료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싸우는 유중혁을 위해, 기꺼이 그의 편이 되어준 대천사. 

「[이 세계의 결말이 눈앞에 있다.]」 

다시 돌이켜 보아도 999회차는 기적이었다. 

아무리 운이 좋았다고 해도 고작 999회차에 결말의 근처까지 가다니.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운’만은 아니었다. 

「999회차의 유중혁은, ‘이계의 신격’과 계약했다.」 

내가 [절대 왕좌]를 얻지 않았던 것, 그리고 가능하면 ‘이계의 언약’을 맺지 않으려 했던 것은 모두 ‘999회차’의 결말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름조차 모를 미지의 신격. 그리고 그 신격과 맺은 ‘이계의 언약’이, 결국 유중혁의 목숨을 앗아갔다.」 

원작에서는 그 ‘이계의 신격’이 누구인지 서술되지 않았다. 

개연성을 희생하면서까지 999회차의 유중혁에게 가공할 힘과 기연을 내준 존재.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구원의 마왕. 나 역시, 너와 같은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어리석게도, 정해진 과거를 바꾸려 했었지. 

그 ‘이계의 신격’이 바로, ‘은밀한 모략가’였다. 

―이제 알았겠지. 이것이 세계선을 뒤튼 대가다. 

그는, 이미 원작에서 과거의 세계선에 개입해 개연성을 뒤튼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999회차의 결말을 본 우리엘은 이곳으로 왔다. 

【내 세계선의 원한을 이곳에서 갚겠다.】 

그때의 외신에게, 동료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 

【네가 나의 소중한 것을 빼앗았듯, 나 또한 그럴 것이다.】 

한없이 정당한 분노가 새겨진 그 진언에, 나는 힘이 쭉 빠졌다. 

우리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999회차의 유중혁이 죽던 순간을 나 역시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작가님. 설마 이제 완결인가요? 이대로는 중혁이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999회차의 유중혁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동료들을 결말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 자신은 세계의 결말을 볼 수 없었다. 

빌어먹을 ‘이계의 언약’ 때문이었다. 폭주한 개연성이 그의 목숨을 앗아가버린 까닭이었다.

―그냥 되살리면 안 되나요? 명계라든가, 환생이라든가. 방법은 많잖아요. 아니, ‘이계의 신격’이 대체 뭐길래······. 

나는 작가를 원망했고, ‘이계의 신격’을 원망했다. 

결말을 눈앞에 두고 죽어가는 유중혁을 보며 절망했다. 

그 충격이 너무 커서 다음 날 연재분을 읽기를 망설였을 정도였다. 

궁금했다. 

왜 ‘은밀한 모략가’는, 999회차에서 그런 짓을 했는가. 

【바꾸고 싶었다.】 

······뭐? 

【제대로 된 결말을 보고 싶었다. 설령 그것이 다른 세계선이라 해도.】 

‘은밀한 모략가’는 말했다. 

개연성을 조심해야 한다고. 올바른 결말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런데 그렇게 말을 하는 ‘은밀한 모략가’조차, 사실은 과거를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이 회차를 바꾸고 싶었듯, ‘은밀한 모략가’ 또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결과가 원인을 삼키든.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무너지든. 

한번은 제대로 된 결말에 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모든 동료와 함께 도달한 결말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한심하다고 생각하겠지. 내가, 네놈과 같은 실수를 했다는 것이.】 

‘은밀한 모략가’의 격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의 몸이,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다. 그의 안에 잠재되어 있던 무수한 유중혁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비명을 대변하듯 

【이 모든 비극을 만든 존재를 찾고 싶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말하고 있었다. 

【이 세계를 만든 존재. 나를 회귀하게 하고, 시나리오를 반복시킨 존재. 내 목적은 ‘벽’의 너머에 있을 그 존재를 죽이는 것이다.】 

그것이 ‘은밀한 모략가’의 진짜 목적이었다. 

회귀를 멈추는 것도. 

이계의 신격들을 구하는 것도. 

최후의 벽을 여는 것도. 

모두, 그 목적을 중심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녀석의 손짓과 함께 [무림 만두]에서 내 영혼체가 빠져나왔다. 

나는 긴장했다. 녀석의 속셈을 알 수 없었다. 

나는 재빨리 말했다. 

―지금의 넌 저 우리엘조차 막지 못해. 하지만 내가, 우리 일행이 돕는다면······.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가?】 

―알아. 

임기응변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진심이었다. 

저쪽의 목적을 들었으니, 이제 내가 답할 차례였다. 

―애초에 누군가의 삶을 멋대로 관음하고 탐식하는 세계는 잘못된 거야. 

<스타 스트림>은 잘못되었다. 

유중혁의 회귀는 잘못되었고. 

시나리오가 만든 이야기는, 부조리했다. 

―그러니 이대로 두지 않을 거야. 결말을 보겠어. 너는 안 된다고 했지만, 나는 결말을 볼 거야. 동료들과 함께 네가 넘지 못했던 벽을 넘고, 그 너머에 있는 존재를 반드시······. 

‘은밀한 모략가’가 나의 마지막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이겠어. 너의 ‘가장 오래된 꿈’을 끝내겠다. 

우리엘의 격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전당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듯 은가이의 숲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계의 신격’들이 최후를 예감한 듯 ‘은밀한 모략가’의 곁에 더욱 달라붙었다. ‘은밀한 모략가’의 입이 열렸다. 

【너는 내 이야기로 살아남았다 했지.】 

“······.” 

【그렇다면 빚을 갚아라.】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순간, 유중혁의 설화들이 흘러나왔다.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울부짖습니다!] 

[거대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은밀한 모략가’의 기억들이, 설화들이 내게 깃들고 있었다. 

내가 알지 못했던 기억들. 

그가 1863회차를 산 이후 알아낸 정보들이, 내게 흘러오고 있었다. 

―너······! 

내 뒤쪽으로 포탈이 발생했다. ‘이계의 신격’의 힘으로 열어젖힌 포탈. 그 포탈이 조금씩 나를 빨아들였다. 

―아니, 잠깐만. 기다려! 너 대체 무슨 짓을······! 

【네게 이 세계의 결말을 맡기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순간, ‘은밀한 모략가’는 더 이상 ‘은밀한 모략가’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회귀할 것이다.】 

그는, ‘유중혁’처럼 보였다. 

【나의 1864회차를, 1865회차를 살 것이다. 그 회차를 살아서, 다시 결을 보고, 또다시 이계의 신격이 되어서.】 

마침내 전당이 무너졌다. 환한 빛살 속에서 모든 것이 녹아내렸다. 

1863회차에 달하는 두터운 역사를 베어낸 우리엘의 검이, ‘은밀한 모략가’를 향해 쇄도했다. 

【이 세계선의 결말을 보기 위해, 되돌아올 것이다.】 

힘없이 꿰뚫리는 ‘은밀한 모략가’. 나는 그 광경을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업화의 불꽃]에 베인 ‘은밀한 모략가’의 설화가 흩어지고 있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성흔 ‘회귀 Lv.???’을 발동합니다!] 

‘이계의 신격’이 되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회귀자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그의 회귀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는 1864회차의 지하철에서 다시 깨어나, 또다시 끔찍한 세계선을 만들어낼 것이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그렇게 둘 수는 없다.’」 

내가 영혼체에 깃든 설화들을 발출하려는 그 순간, 우리엘이 나보다 먼저 움직였다. 

【너는 다음 회차로 달아날 수 없다.】 

우리엘의 하얀 손아귀가 ‘은밀한 모략가’의 목줄을 틀어쥐었다. 손에서 뻗어나온 검은 빛이, 설화의 붕괴를 막고 있었다. 서서히 퍼져 나간 빛은 이내 ‘은밀한 모략가’의 전신을 덮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빛은 작은 구(球)의 형태를 이루었다. 

나는 저 구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1863회차에서 ‘묵시룡’을 봉인했던 [봉인구]였다.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이계의 신격’이 된 우리엘이라면, 유중혁이나 ‘은밀한 모략가’의 능력에 대해서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영원의 회귀를 거듭하며, 결코 죽지 않는 존재라는 것도. 

점점 더 죄어드는 손아귀. 새카만 봉인구가 이내 창백한 빛을 띄었다. 

【너는 영원히 봉인될 것이다.】





< Episode 85. 최후의 벽 (4) > 끝

< Episode 85. 최후의 벽 (5) >





[묵시룡의 봉인구]를 이용한 봉인. 

그것은 1863회차에서 한수영이 계획한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이곳의 시간은 멈추고, 지구는 묵시룡과 함께 봉인되겠지. 영원히 95번 시나리오에 고정된 채 말이야.”」 

「“그리고 그것이, 네가 유중혁을 죽이는 방법이다.”」 

유중혁을 영원의 시간 속에 봉인하여 회귀를 멈추는 것. 

나는 반사적으로 ‘은밀한 모략가’를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괜찮으니 도망치라고 말하고 싶었다. 저기에 봉인되면 아무리 ‘은밀한 모략가’라도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웃고 있는 것인가.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자신의 ■■를 바라봅니다.] 

그는 1863번의 생애를 모두 살아낼 만큼이나 강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언제든 무너질 수 있을 만큼이나 지쳐 있었다. 

영원한 잠.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그가 평생에 걸쳐 바라던 일이었다. 

―잠깐! 우리엘! 멈춰! 

내 말에, 처음으로 우리엘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하찮은 것이 자신의 진명을 불렀다는 사실에 놀란 듯, 우리엘이 입을 열었다. 

【이 영혼체는 뭐지? 이 세계선의 존재?】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은밀한 모략가’가 선수를 쳤다. 

【그놈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보내라.】 

순간 ‘은밀한 모략가’의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답지 않게 명료한 감정이 새겨진 눈이었다. 

녀석은, 정말로 내가 탈출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나빴다. 포탈은 우리엘의 힘으로 강제로 닫히고 있었다. 

나와 ‘은밀한 모략가’를 번갈아 보며 기묘한 시선을 보내던 우리엘이 말했다. 

【너의 회차를 그르치고 다른 이의 세계선조차 망쳐버린 후에도, 지키고 싶은 것이 남아 있는가?】 

순식간에 뻗어 나온 우리엘의 힘이 나를 포박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좋다. 이 녀석을 네놈과 함께 봉인해주마. 영원의 꿈 속에서, 네 동료와 함께 잠들어라.】

―아니 잠깐만! 내 얘기도 들어봐야 하는 거 아냐? 

무슨 당치찮은 소리냐는 듯 우리엘이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지지 않고 외쳤다. 

―당신 마음은 알겠어. 당신의 세계선이 뒤틀려서 억울하다는 것도 알겠고, 화가 났다는 것도 알겠어.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여긴 당신 세계선이 아니라고. 지금 당신이 하는 짓은 당신이 증오하는 ‘은밀한 모략가’와 똑같은 행동이야. 

말을 내뱉으며, 이마에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채워져 있지 않은 머리가 아파왔다. 긴고아의 감각이 강해지고 있었다. 

―우리 이러지 말자고. 다 같이 힘을 모아서 <스타 스트림>을 부숴도 모자랄 판에, 대체 왜 서로 싸워야 하는 건데. 진짜 적이 누군지 몰라서 그래? 이 비극을 초래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러는······. 

【<스타 스트림>을 부숴? 왜 그런 짓을 하지?】 

뜻밖의 물음이었다. 

―그야 당연히, <스타 스트림>의 세계는······. 

【<스타 스트림>이 사라지면, 우주는 혼돈으로 변한다.】 

순간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나는 은연중 모든 일행들이 보고 싶은 결말이 같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면? 

유중혁이 죽고 난 뒤, 999회차의 일행들은 마지막 시나리오에 도착했고, 그것을 클리어했을 것이다. 

그 후, 그들이 도달한 세계의 끝은 무엇이었을까. 

【그런 세계선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악(惡)이다.】 

우리엘의 선언과 함께 그녀의 격이 나를 옥죄기 시작했다. 

―······그럼 별수 없네. 싸우는 수밖에. 

【싸워? 화신체도 없는 존재가―】 

―싸우는 건 내가 아니고. 

허공을 올려다 보던 내가 씩 웃으며 말했다. 

―내 동료들이야. 

눈앞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깨질 것처럼 머리가 죄어들더니 시야가 뭉그러졌다. 뭔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하반야······독자······ 헛짓거리······ 가만히있심경······.」 

······왔다. 

[바아아앗!] 

비유의 울음소리와 함께, 창공에서 포탈이 열렸다. 새카만 흑염룡의 브레스가 쏟아졌다. 그 가공할 격류에 나를 내던진 우리엘이 뒤로 훌쩍 빠졌다. 

거의 동시에, 누군가가 내 영혼체를 낚아채며 날아올랐다. 

“도대체 가는 곳마다 이게 뭔······ 넌 또 왜 이 꼴이냐?” 

한수영. 

“긴고아 하나로는 부족한 모양이네요.” 

그리고 유상아. 

그녀의 등에는 족쇄처럼 긴고아가 채워진 내 화신체가 있었다. 유상아는 내 상태를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현재 ‘존재 맹세’의 구속력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내 화신체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시야가 한바탕 뭉그러지며, 신체의 감각이 돌아왔다. 

화신체는 정상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렴풋한 시야 속에서 [지옥염화]를 발동하는 우리엘의 모습이 보였다. 

곁에서 한수영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야, 저거 무슨―” 

“설명할 시간 없어. 빨리 탈출해야 해.” 

한수영, 그리고 ‘석존의 후계’가 된 유상아는 강하다. 

하지만 적 또한 너무 강하다. 이들만으로는······. 

콰아아아아아! 

기다렸다는 듯, [지옥염화]의 불길이 일행들을 덮쳐왔다. 

“미친!” 

어디로도 피할 길 없는 강력한 염열의 파도. 한수영의 [흑염]만으로는 막아내기 버거운 격이었다. 그때, 한수영이 타고 온 포탈 너머에서 강력한 홍염의 격이 흘러들어왔다. 저쪽의 파도와 정확히 같은 색깔의 염화. 불과 불이 부딪치며, 격렬한 불꽃의 폭풍이 발생했다. 

[■발, 뭐야? 어떤 새■야?] 

매캐한 불꽃 속에서,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나타난 존재가 있었다. 

한손으로 밀려드는 연기를 걷어내는 대천사. 

검은색 드레스에 금빛 발찌. 

내가 너무나 잘 아는 대천사가, 뺨에 검댕을 묻힌 채 그곳에 있었다. 

[응? 감히 어떤 새■가 내 김독자를······.] 

[지옥염화]의 반대쪽을 바라본 우리엘의 눈빛이 멍하게 변했다. 

입이 딱 벌어진 우리엘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 ■끼?] 

······설마 지원군으로 우리엘이 올 줄은 몰랐다. 이러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하필 지금 여기서 두 우리엘이 만날 줄이야. 

【······너는?】 

놀란 것은 저쪽 우리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렇군, 네가 바로 이 세계선의―】 

두 우리엘이 서로를 응시하는 순간, 허공에서 거친 스파크가 튀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쪽이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이쪽 우리엘도 강하긴 하지만, 저쪽 우리엘은 무려 한 세계선의 끝을 본 존재였다. 

기회를 봐서 재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츠츠츠츠츠츳! 

그리고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스타 스트림>이 두 존재의 조우에 흥미로워합니다.] 

[‘끊어진 필름 이론’이 발동합니다!] 

허공에서 만난 두 개의 설화가 얽혀들며, 거대한 기억의 환류(還流)가 발생했다. 

「[일어나라, 유중혁. 어서!]」 

999회차의 기억이 넘어오고 있었다. 

갑작스런 기억의 침범에 우리엘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뭐야, 뭔데 이거?] 

낯선 기억의 파도가 범람하고 있었다. 유중혁과 등을 맞대고 싸우는 999회차의 우리엘이 그곳에 있었다. 그야말로 진짜 전우애였다. 

흘러드는 기억 속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우리엘이 비틀거렸다. 

저 빌어먹을 이론이 또······ 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 이론을 통한 설화 교환은 쌍뱡항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었다. 그 증거로, 비틀거리다 못해 바닥에 주저앉은 999회차의 우리엘이 보였다. 

「[김독자! 여기야! 내 옆에 앉아!]」 

확실히. 

「9158FOREVER」 

「[아이디가 너무 튀면 안 되니까······ 그렇지. 적당히 uri9158로······ 좋아, 전혀 티가 나지 않아.」 

「[······트, 특전으로 ‘오징어 김독자 다리’를 준다고?]」 

충격을 받을 만도 한 설화들이었다. 

【이게 대체, 대체, 무슨······.】 

999회차의 우리엘이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우리엘을 부축한 한수영이 말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잘 됐다. 빨리 튀자. 저거 척 봐도 엄청 세 보이는데.” 

확실히 그 판단이 옳다. 

그런데, 하나 빠뜨린 것이 있었다. 

“잠깐만. 쟤도 데려가자.” 

나는 바닥에 늘어져 있는 ‘은밀한 모략가’를 가리켰다. 

이 세계선의 기억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던 모양인지, 우리엘이 형성하던 봉인구가 상당 부분 망가져 있었다. 

한수영이 뭔 헛소리냐는 듯 말했다. 

“돌았어? 쟬 왜 데려가?” 

“저 녀석도 데려가야 해. 그래야 올바른 ‘결말’에 도달할 수 있어.” 

“그건 또 뭔 개똥 같은―” 

실제로 개똥 같은 소리였다. 이건 내 아집이었고, 말도 안 되는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저 녀석은 여기서 죽어선 안 돼. 저 녀석은 결말을 볼 자격이 있어.” 

「이 모든 세계가 오직 ‘유중혁’만을 탓하고 있었다.」 

999회차의 우리엘도, 이 세계선의 모두도. 평생에 걸쳐 자신의 ‘결’에 도달한 유중혁은 그 대가로 모든 세계선의 적이 되었다. 

「1863번의 회귀 중, 한 번이라도 녀석에게 행복한 회차가 있었던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달리고 있었다. 

조금씩 의식을 회복하는 999회차 우리엘이 [지옥염화]를 재차 끌어올리는 것이 보였다. 

한수영이 외쳤다. 

“미친놈아! 그럴 시간 없다고!” 

나는 전력을 다해 [바람의 길]을 발동했다. [지옥염화]의 불길이 다시금 밀려들기 시작했다. 허공에 튀는 불꽃들이, 내겐 오래된 활자처럼 보였다. 

―······작가님. 한 번 정도는 괜찮잖아요. 

그게 언제의 기억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회차가 있는데, 한 번 정도는······. 

······내가 그런 말도 했었던가. 기억은 명료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키보드를 두들기고 스페이스 바를 누르듯, 바닥을 박차고 달리는 것이었다. 

―행복해도 괜찮잖아요. 

어쩌면 그것은, 이런 세계를 만든 신에 대한 투정이었을까. 

―제가 쓴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그러자, 신이 대답했다. 

―그럼 독자님은 어떤 결말을 보고 싶으신가요? 어떤 결말이, 주인공에게 행복한 결말인가요?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내게 그 대답은 확실하지 않다. 내겐 타인의 행복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으니까. 

하지만 자격이 없는 나라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저건 행복한 결말이 아니다.」 

밀려드는 [지옥염화]의 열기에 ‘은밀한 모략가’의 몸이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간발의 차이로 녀석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안색이 창백해진 한수영이 [X급 페라르기니]를 소환하고 있었다. 유상아가 외쳤다. 

“독자 씨! 더 빨리!” 

【안 돼】 

나는 밀려드는 염열을 피해내며 바닥의 ‘은밀한 모략가’를 업었다. 발이 미친듯이 뜨거웠다. 그 열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아, 시발······ 모르겠다. 빨리 타!” 

한수영이 내게 손을 뻗었고, 나는 간신히 차에 올라탔다. 뒷좌석에서 몸을 부르르 떠는 우리엘이 보였다. 홍염의 해일이 우리를 덮쳐들고 있었다. 

【멈춰!】 

속으로 ‘양산형 제작자’를 향해 기도했다. 

제발 이 차의 성능은, 양산형이 아니기를.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빙긋 웃습니다.] 

폭발적인 가속으로 [X급 페라르기니]가 발진했다. 거의 동시에 비유가 포탈을 열었고, 우리는 곧장 차원 통로로 뛰어들었다. 

뒤쪽에서 999회차 우리엘이 내지른 끔찍한 포효가 들려왔다. 혹시나 우릴 쫓아오면 어쩌나 싶었다. 이대로 지구로 무사히 도망친다고 해도, 저 우리엘이 쫓아와 깽판을 친다면······. 

츠츠츠츠츠츳! 

몰아치는 스파크 속에서, 쫓아오던 999회차 우리엘의 움직임이 멈췄다.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스타 스트림>이 ‘살아있는 불꽃’을 주시합니다.] 

아무래도 그녀는 이 포탈을 사용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강력한 개연성의 후폭풍이 그녀를 구속하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저렇게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는 <스타 스트림>에서 오히려 자유롭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걸리는 것은 한 가지다. 

그토록 자유롭지 않은 그녀가 이 타이밍에 ‘은가이의 숲’에 나타날 수 있었는가. 

마치 누군가 사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주? 

[대도깨비 ‘허주’가 당신의 행적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순간, 아주 어렴풋한 가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만약 저 ‘우리엘’이 나타난 것이 우연이 아니라면? 

[대도깨비 ‘허체’가 당신의 행적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대도깨비 ‘바람’이 당신의 행적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 <스타 스트림>의 누군가가 그걸 원했고. 

그래서, 그들을 이 세계선으로 불러낸 것이라면? 

이 세계에서, 그만한 개연성을 움직일 수 있는 집단은 거의 없다. 

[<관리국>이 당신의 행적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창문 너머로 불타는 ‘은가이의 숲’이 비치고 있었다. 

멸망한 세계선에서 온 ‘이계의 신격’들이 소멸하고 있었다. 

작은 왕국의 백성들이, 그들의 왕을 작별하고 있었다. 

【살아살아살아살아살아살아······.】 

‘이계의 신격’의 왕은 하나가 아니다. 

999회차의 우리엘이 이 세계선에 나타났듯, 다른 왕들도 나타나겠지. 

내가 원하는 결말을 방해하려는 존재들이, 그들을 부를 것이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고개를 들자 내가 맞서 싸워야 할 세계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아주 힘들고, 험난한 싸움일 것이다. 

인사이드 미러로 나를 본 한수영이 뭐라고 투덜거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상아가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혼절한 ‘은밀한 모략가’와 망연한 우리엘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 우주의 누구도, 우리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멀리서 포탈의 끝이 보였다. 

[당신의 선택이 ■■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당신의 ■■이 「영원」으로 기울어집니다.] 

마침내, 이 세계의 최종장을 준비해야 할 때가 왔다.





< Episode 85. 최후의 벽 (5) > 끝

< Episode 86. 네모난 원 (1) >





차원로를 달리는 내내, 한수영과 유상아는 거의 말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창밖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 그리고 하고 싶은 것들. 

곁에는 시종일관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중얼거리던 우리엘이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그런 우리엘에게 반쯤 몸을 기댄 은밀한 모략가도 여전히 혼절한 채였다. 

내 채널에서 가장 오래된 두 존재가 이처럼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는 꼴을 보자니 기분이 무척 이상했다. 

인사이드 미러로 나를 살피던 한수영이 말했다. 

“뭘 쪼개? 돌아가서 제대로 설명할 준비나 해.” 

설명. 뭘 설명해야 할 것인지는 분명했다. 

“기회는 한 번뿐이에요.” 

빙긋 웃는 유상아의 모습이 공포스러웠다. 

“도착했어.” 

얼마 지나지 않아 페라르기니의 움직임이 멈췄다. 

서울이었다. 

* 

그로부터 잠시 후, 나는 일행들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운 얼굴들. 보고 싶었던 얼굴들이 그곳에 있었다. 

함께 시나리오를 겪었던 이길영, 신유승, 정희원, 이지혜를 포함한 <김독자 컴퍼니>.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 서울을 지켜준 이설화와 공필두. 그보다 조금 더 멀찍이 떨어진 응접실의 끝에는 어머니와 방랑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일행들의 얼굴을 한 번씩 훑어본 나는 일단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뭐가요?” 

“제가 벌인 일들, 모두 죄송합니다.” 

“흐음······ 뭐, 그래요.” 

······뭐지? 나한테 화가 난 게 아닌가?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명해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여러분께 몇 가지 설명을······.” 

“일단 저게 누구 애인지부터 말해라.” 

쏘아붙인 것은 공필두였다. 시선을 따라가자, 투명한 구에 감싸인 ‘은밀한 모략가’가 내곁에 둥둥 떠 있었다. 

[현재 대상의 설화가 불안정합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니, 과한 개연성의 사용으로 인해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즉, 본인이 직접 해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 내가 대답이 없자 공필두의 눈빛이 분노로 물들었다. 

“나서서 시나리오를 깬다길래 서울을 지켜줬더니, 감히 애를 만들어서 돌아온 거냐?” 

태생을 기러기 아빠로 살아온 자의 한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게, 무슨 오해를 하시는지 알겠지만.” 

“어느 쪽이냐?” 

공필두가 두려운 눈빛으로 유상아 쪽을 흘끗거렸다. 

“······설마?” 

빙긋 웃는 유상아와 눈이 마주친 공필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그럴 리 없지. 역시 저쪽인가?” 

“뒈지고 싶냐?” 

한수영이 으르렁거리자 공필두가 주춤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아니, 애초에 누가 낳은 애라고 생각하는 게 무리 아닙니까? 이 녀석이 어딜 봐서 아기처럼 보입니까?” 

“한명오가 낳았던 애도 순식간에 자랐다.” 

그 말을 들은 한명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얘긴 좀 불편하네만.” 

“그보다 더 신경쓰이는 것은 저 꼬맹이 얼굴이 저 재수탱이와 똑같다는 것이다.” 

공필두는 그 말을 하며 응접실의 가장자리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전신에 붕대를 칭칭 감고 다리를 꼰 채 눈을 부릅뜬 유중혁이 있었다. 녀석은 특유의 무시무시한 눈길로 나를 노려보았다. 

―김독자,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녀석이 저 재수탱이와 똑같이 생긴 것은 당연합니다. 이 녀석이 바로 그 재수탱이니까요.” 

순간 응접실에 정적이 흘렀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눈빛으로 공필두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았다. 

“이 세계의 유중혁은 여러 명입니다.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군요.” 

* 

나는 ‘성마대전’의 마지막에 있었던 일부터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묵시룡을 막기 위해 마계를 멸망시켰던 이계의 신격, ‘더 네임리스 미스트’를 부른 일(공필두, “미친놈인가.”). 

그 와중에 ‘은밀한 모략가’와 조우하고 녀석에게 납치를 당한 일(이설화, “어머.”). 

알고 보니 그 ‘은밀한 모략가’가 1863회차를 살아온 유중혁이었던 일(장하영, “······그게 무슨 소리야?”). 

녀석과 ‘이계의 신격’에 관한 계약을 맺었던 일(신유승, “······그럴 거 같았어요, 아저씨.”). 

일행들 몰래 거대 설화 「서유기」에 참전했던 일(이지혜, “아저씬 배우 체질은 아니더라.”). 

1863회차의 유중혁과 999회차의 유중혁이 싸웠던 일(정희원, “대체 유중혁 씨는 총 몇 명인 거죠?”). 

인생 3회차 인줄 알았던 이 세계선의 유중혁이 사실은 인생 1864회차였던 일(한명오, “자네 혹시, 본인도 설명할 수 없어서 대충 둘러대는 건가?”). 

일행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서유기」를 클리어했으나 또 ‘은밀한 모략가’에게 납치를 당한 일(유상아, 말없이 한숨). 

그리고 그곳에서, ‘이계의 신격’이 된 999회차의 우리엘과 만난 일까지······. 

거기까지 말하고 보니 대체 내가 뭔 소릴 하고 있나 싶었다. 

고개를 들자, 일행들이 다들 비슷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한명오였다. 

“험험, 그렇게 된 거였군. 모두 이해했네.” 

······그럴 리가 없는데? 

일행들 모두가 한명오를 보고 있었다. 그러자 한명오가 덧붙였다. 

“자네는 죽거나 납치당하는 것을 좋아하는군.” 

“······저, 나만 이해 못한 거 아니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에요? 사부가 세 명이나 있고, 1864회차란 건 또 뭐고······.” 

역시, 이해 못하는 게 당연했다. 

애초에 1863회차가 둘로 갈라졌다는 것부터 복잡했다. 

원작의 1863회차를 살았던 유중혁이 ‘은밀한 모략가’가 되었고. 

뒤바뀐 1863회차를 살았던 유중혁이 회귀하여 우리가 아는 유중혁이 되었다. 

나야 ‘멸살법’을 다 읽었으니 이해할 수 있지만, 일행들에겐 불가해한 것이 당연했다. 머리를 싸매던 정희원이 물었다. 

“대체 뭔 소리예요? 그래서 지금 중혁 씨는 3회차에요, 1864회차에요?” 

그러자 침대차에 걸터앉아 있던 유중혁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나도 잘 모른다.” 

“네?”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 

나는 [등장인물 일람]을 가동해 유중혁의 정보를 확인했다. 

+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유중혁 

전용 특성 : 회귀자 <3회차> (신화)······. 

+ 

놀랍게도, 유중혁의 특성은 다시 ‘3회차’로 표기되어 있었다. 

“기억은 김독자의 설화를 잠깐 빌려올 때만 떠오를 뿐이다. 마치 타인의 역사를 보는 것처럼.” 

······설마 그런 것이었을 줄은 몰랐다. 

유중혁은 계속해서 말했다. 

“내 생각은 이렇다. 본래 이 세계선은 3회차가 맞고, 나 또한 3회차의 유중혁이다. 다만 세계선의 어느 지점에서 1864회차를 살았던 내 기억이 덮어 씌워진 것이다.” 

잠자코 듣던 이설화가 한마디를 거들었다.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요? 3회차가 1863회차에 영향을 끼치고, 동시에 1863회차가 3회차에 영향을 끼쳤다는 건데······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되지.” 

결국 한수영이 나섰다. 

“이건 오직 문장의 형태로만 성립하는 거야. 이 세계가 본래 ‘소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고.” 

한수영은 투명한 구에 둘러싸인 ‘은밀한 모략가’를 바라보았다. 

“‘네모난 원’이라든가 ‘내각의 합이 720도인 삼각형’과 똑같은 거야.” 

이설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그런 건 존재할 수 없잖아요?” 

“상상할 수 없다, 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 거지. 하지만 문장으로는 존재할 수 있어. 지금 일어나는 일들도 마찬가지야. 우리한테야 타임 패러독스지만, 소설 속 문장으로는 가능한 이야기라고. 그냥 그렇다고 치면 되는 거니까. 이해가 아니라 납득의 문제인 거지. 그냥 쉽게 생각해. 우린 지금 망한 소설 속에 들어온 거야. 원작부터가 개판이었으니 결국 이렇게 된 거고.” 

이 와중에도 반박하고 싶었지만 사실이라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작가였으면 세계선 꼬기는 한두 번만 하고 말았을 거야. 독자들은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는 안 좋아한다고. 성좌들도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를걸?”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화신은 똑똑하다고 말합니다.] 

“개연성이 망가진 세계는 스스로를 망가뜨려. 나는 그런 식으로 끝난 이야기를 많이 알아. 작가마저 포기해버린 세계.” 

작가였던 한수영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어쩌면, 한수영 역시도 그런 식으로 포기해 본 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실을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멸살법’의 작가인 tls123이 만든 세계가 현실이 되었다. 

―그럼 독자님은 어떤 결말을 보고 싶으신가요? 어떤 결말이, 주인공에게 행복한 결말인가요? 

어쩌면, 작가는 정말로 자신이 완성하지 못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맡겨버린 것은 아닐까. 

정희원이 뺨을 긁으며 물었다. 

“그래서 한수영 네 결론은 뭔데?” 

“우릴 이딴 세계에서 굴러먹게 하는 놈들이랑 싸워야지. 작가든, 이계의 신격이든, 도깨비든.” 

“결국 평소랑 같네.” 

“원작이야 어떻게 됐든 개나 주라고 하고, 우린 우리끼리 결말을 봐야 하니까. 언제까지 빌어 처먹을 시나리오 똥통에 있을 수는 없어.” 

맞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이계의 신격의 왕이든, <관리국>이든 상관없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별자리가 빛을 발합니다.] 

적이 누가 됐든,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싸워서 이기고, 우리의 해답에 도달하는 것. 

“독자 씨?” 

언제부턴가, 일행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말해주기를 바라는 눈빛들이었다.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것들을 준비해야 할지를 기다리는 표정들. 물론 생각해 둔 바는 있었다. 

하지만 쉽사리 첫 마디가 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을 앞두고 있다는 긴장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자칫 내 오판으로 인해 모든 일을 그르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원작’에는 없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부담감. 

나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그런 내 말을 막은 것은 유상아였다. 

“오늘은 조금 쉬고, 내일 다시 이야기해요. 다들, 시나리오에서 막 돌아왔잖아요.” 

* 

그날, 나는 밤새도록 계획을 짰다. 

몇 번인가 ‘멸살법’의 최종본을 읽으면 어떨까 하는 유혹이 들었지만, 끝내 읽지는 않았다. 이유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어떤 예감이 들었다. 

저걸 읽는 순간, 저 이야기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 

······. 

언제 잠들었는지 알 수도 없게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마지막 기억은 흐릿했다. 책을 읽다가 잠든 것 같기도 하고, 도중에 이길영이 가져다 준 따뜻한 차를 마신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모처럼 달콤한 잠이었다. 

잠깐 행복한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다. 

언젠가 유상아와 나누었던 이야기 같은 꿈. 모든 시나리오가 종료된 세계. 일행들이 일상적인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다. 평화로웠다. 너무 평화로워서, 그것이 평화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해맑게 웃는 신유승과 이길영을 보는 순간, 나는 기이하게도 깨닫고 말았다. 

「이것은 꿈이구나.」 

입술을 꾹 깨물자 꿈의 정경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몽롱한 의식 속에 나는 천천히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뭐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게다가 꿈에서 느꼈던 희미한 지진도 계속되고 있었다. 

간신히 눈을 뜨자, 침침한 어둠 속에서 주변 정경이 드러났다. 등과 뒤통수를 감싸는 푹신한 가죽의 촉감. 

“야, 김독자 일어나려고 하는데?” 

“다시 재워.” 

누군가가 내 머리통을 후려치는 느낌과 함께, 다시 의식이 희미해졌다.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동자 혁명이다, 이 자식아.”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외딴 산속에 있었다.





< Episode 86. 네모난 원 (1) > 끝

< Episode 86. 네모난 원 (2) >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생각했다.

하나, 나는 꽁꽁 묶여있고.

둘, 내가 모르는 산속에 내던져져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론은 납치였지만, 대체 누가 감히 <김독자 컴퍼니>에 침투해 나를 납치하겠는가. 그렇다면 역시······.

“······는······.”

“······독자······ 풀어줬······?”

“앗? ······.”

희미하게 들려오는 대화 소리.

낑낑대며 포승줄을 푼 나는 비척대며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갔다. 짙은 산세를 헤치고 30초쯤 나아가자, 널따란 야영지와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 저기 알아서 오네.”

실실 웃는 한수영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뭘 봐? 노동자 파업 처음 보냐?”

“아니, 지금······.”

“공기 조오타. 독자 씨도 여기 좀 누워 봐요.”

한수영의 옆으로 하늘을 향해 대짜로 드러누운 정희원이 있었다. 정희원이 날갯짓 하듯 팔을 움직이자, 싱그러운 풀들이 드러누웠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한수영이 경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오.”

“정희원도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잘하는데?”

갑작스런 시 낭송 대회와 그에 맞장구를 치는 정희원을 보며, 나는 얼떨떨한 심경으로 물었다.

“지금 대체 뭐하는······.”

“노동자 혁명의 시다, 자식아.”

“그러니까 아까부터 노동자 혁명이니 뭐니······.”

“아, 좀 쉬자고. 넌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듣냐?”

한수영의 핀잔에 나는 인상을 구겼다.

쉬러 왔다고?

“뭔 소리야? 지금 시기가 어느 땐데.”

“어느 땐데?”

그렇게 되물으니 할 말이 없었다. 지금이 어떤 시기냐고?

[현재 성운 <김독자 컴퍼니>는 마지막 시나리오의 자격을 획득한 상태입니다.]

[시나리오 입장 잔여 시간은 28일 12시간 15분 7초입니다.]

나는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도록 침착하게 대꾸했다.

“이럴 시간 없어. 마지막 시나리오가 코앞에 있다고.”

“그러니까 지금 쉬어야지. 언제 또 이렇게 쉬겠냐?”

한수영이 한숨을 푹푹 쉬며 말했다.

“주변을 좀 둘러봐라. 스마트 폰에만 코 박고 살지 말고. 넌 이런 곳까지 와서 일하고 싶냐?”

그 말에 나는 처음으로 주변의 산세를 살폈다.

풍요로운 녹음이 우거진 산속. 어느 산인지는 모르겠다. 지리산인지, 설악산인지, 한라산인지······ 아무튼 아름다운 산이었다. 햇볕은 강하지 않았고, 바람은 서늘하다. 한 마디로 캠핑하기 좋은 날씨였다.

나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 물론 쉬지 말란 게 아니라······ 쉬는 건 좋은데 할 건 하고 쉬자는 거지. 우린 지금······.”

“우와, 독자 씨 진짜 꼰대 마인드다. 대표이사는 다 저런가?”

정희원이 내 정강이를 툭툭 치며 말했다.

“쉴 땐 그냥 쉬는 거예요, 대표님.”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가 계속 대답하지 않자, 나를 노려보던 한수영이 시큰둥한 목소리를 냈다.

“그래, 네 말도 맞다. 모두 쉬면 안 되니까 한 사람은 시나리오 해야지. 그럼 네가 일해.”

“뭐?”

“네가 좋아하는 시나리오나 하라고.”

한수영의 말에 문득 허공을 보자, 진짜로 시나리오 창이 떠 있었다.

[서브 시나리오― ‘노동자의 휴일’이 발생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시나리오였다.

나는 시나리오 창을 열어 보았다.

+

<서브 시나리오 ― 노동자의 휴일>

분류 : 서브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당신은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대표입니다. 당신의 오랜 착취와 가혹행위로 인해, <김독자 컴퍼니>의 직원들은 몹시 지친 상태입니다. 그들은 성운의 대표인 당신에게 큰 불만이 쌓여 노동쟁의를 벌이는 중입니다. 성운의 대표로서 그들의 불만을 들어주고 달래십시오. 당신의 빈약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고려해, 불만 해결 목표치는 5명입니다.

제한시간 : 12시간

보상 : <김독자 컴퍼니> 직원들의 신뢰.

실패시 : 사망(?)

+

사망? 아니, 무슨 이딴 시나리오가······.

허공을 올려다보자, 비유가 “바앗”하며 울었다.

한수영이 나를 향해 투덜거렸다.

“하여간 저 자식은 시나리오로 알려줘야 이해한다니까.”

*

나는 초조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행들은 즐거워 보였다. 패러디 시들을 줄줄이 읊던 한수영과 정희원은 동산에 누워 잠들어 있었고, 이길영과 신유승은 코를 맞댄 채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야, 신유승. 내기하자. 누가 저녁밥 더 큰 걸로 잡아오나.”

“이기면 뭐 주는데?”

“지는 사람이 소원 들어주기, 어때?”

“콜.”

부리나케 숲속으로 뛰어가는 아이들에게, 유상아가 “조심해야 해”라고 당부했다.

야영장 한쪽에는 작은 계곡도 보였는데, 낚시 의자를 가져온 공필두가 하품을 하며 찌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옆에 앉은 한명오도 뭐라뭐라 중얼거렸다.

“내가 바다에만 나갔다 하면 이만한 감성돔을······.”

시원한 계곡의 물소리와,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무성한 산의 녹음이 한꺼번에 뭉그러지는 듯했다.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 애틋함이 내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벌써, 이런 순간을 겪어도 좋은 것일까.

나는 유중혁을 찾았다.

역시 이래서는 안 된다. 놈이라면 내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보나마나 어디선가 일행들을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지금은 네놈들은······!”으로 시작하는 꼬장꼬장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을 것이다.

나는 금방 유중혁을 찾았다.

손을 들어 녀석을 부르려는데, 뭔가가 이상했다.

치이이익.

유중혁은, 그곳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커다란 불판 앞에서, 현란하게 손을 움직이며 고기를 굽고 있었다. 야채들이 프라이팬 위에서 파르르 날아올랐다. 하늘을 부수는 [파천검도]가 야채와 고기들을 조각내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부르는 것도 잊고,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다음 순간, 유중혁의 눈이 나를 향했다. 역시나 특유의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쓰지 않아도 알겠다. 저 눈빛은 분명

「그렇게 봐도 네놈에게 줄 건 없다」

라는 뜻이다.

녀석의 옆에는 유미아와 이지혜가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내며 서 있었다.

“지금이야.”

유미아가 입을 벌리자, 유중혁이 무심한 얼굴로 젓가락을 움직였다. 어미새처럼 고기를 한 점씩 집어 입어 넣어주는 유중혁. 유미아가 방긋 웃었다.

“역시 맛있어.”

그러자 멀뚱멀뚱 옆에 서 있던 이지혜도 입을 벌렸다. 유중혁은 그쪽을 잠깐 보더니 다시 유미아의 입 속으로 고기를 넣어주었다. 그러기를 너덧 번. 이지혜가 입을 앙다물었다.

“사부, 진짜 너무한다.”

참다못한 이지혜가 직접 젓가락을 움직이자, 유중혁의 프라이팬이 [주작신보]의 신묘한 궤적을 따라 움직이며 그녀의 손을 피해갔다. 울상을 짓던 이지혜가 결국 뿔이 났다.

“지금 해보자 이거지?”

내가 정말 ‘멸살법’의 세계에 들어온 것인지, 아니면 『냉혹미남 회귀자 유중혁이 이럴 리가 없어』에 들어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지혜의 젓가락을 피해내며 유미아에게 고기를 먹이는 유중혁은, 여전히 눈썹 하나 깜짝 하지 않는 무표정이었다. 하지만 무표정에서 읽을 수 있는 것도 있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유중혁은, 진심으로 이 자리에 임하고 있다.

「왜 이런 시기에, 유중혁은 이런 걸 허락했을까」

<김독자 컴퍼니>의 대표이사는 나만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유중혁은 나보다도 훨씬 더 완고한 인간이었고, 심지어 이런 집단을 운용해 본 경험도 풍부한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이 캠핑에 순순히 참여했다.

「정 말 몰라 김독 자」

[제4의 벽]의 목소리와 함께, 눈앞에 문장들이 펼쳐졌다.

「작가님, 이번 회차에선 바다에 한 번 가면 어떨까요?」

그것은 언젠가 내가 달았던 댓글이었다.

‘멸살법’은 그토록 잘 기억하면서, 내가 달았던 댓글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토록 많은 회귀를 반복하면서도 유중혁이 좀처럼 빠뜨리지 않았던 이벤트가 있었다.

「“오늘은 휴식이다.”」

그것은 휴식이었다.

‘멸살법’의 원작에는 있었지만, 이 세계에는 없었던 것.

그는 중요한 고비를 넘길 때마다 일행들을 데리고 다른 행성의 관광지역에 방문했다. 물론 본인은 시나리오에 필요한 구성품을 구한다는 명목이었지만, 다른 일행들에게까지 그걸 강요하지는 않았다.

「“사부도 이리 와서 같이 놀아요!”」

「“여어, 이지혜. 큭큭. 내 복근을 좀 보라고. 내 흑염룡도 극찬한······.”」

「“오늘 중혁 씨 요리 먹는 거야?”」

그 유중혁조차 그랬는데, 나는 어땠을까.

「······다음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합니다.」

항상 쫓기듯 움직였고, 여유는 없었다. 시나리오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런 경향은 더욱 짙어졌다. 늘 코앞의 목표가 있었다. 그걸 해결하지 않으면 시나리오 전체가 망가질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걸 당장 하지 않더라도 시나리오가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야, 이길영! 여기선 스킬 안 쓰기로 했잖아!”

“내가 언제! 항상 최선을 다해야지!”

멀리서 사냥감을 가지고 돌아오는 아이들의 목소리.

뒤이어 계곡을 쩌렁쩌렁 울리는 한수영의 목소리도 들렸다.

“자, 보물 찾기 이벤트 시작한다! 상품은 흑염룡의 성유물이야!”

“뭐야, 진짜? 그 ‘흑염룡’의?”

“계곡 속에 숨겨놨으니까 먼저 찾는 사람이 임자야. 아, 스킬 사용은 금지인 거 알지? 그 외에도 자잘한 상품들이―”

“성유물은 내거다!”

낚싯대를 내던진 한명오 부장이 계곡 속에 뛰어들었고, 잠시 후 정희원에게 머리채가 잡혀 하늘을 날았다. 어느새 이지혜도,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도 계곡 속에 뛰어들었다.

“잠깐만, 지혜 누나! 그거 [유령함대]잖아! 작게 소환하면 모를 줄 알아?”

“이길영! 치사하게 물방개 길들이기냐?”

“둘 다 실격!”

일행들이 다 같이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만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처음인지도 모른다. 시나리오의 끝이 오지 않아도 그들은 웃을 수 있었다. 저렇게 즐겁게 떠들 수 있었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며, 김독자는 이상하게 외로워졌다.」

어쩌면 나는 지금껏 ‘멸살법’에 대해― 아니, 우리 일행들에 대해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결말을 보겠다는 환상에 취해서, 정작 결말로 가기 위해 읽어야 할 무수한 문장들을 모조리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현재 당신이 해결한 불만은 0건입니다.]

별거 아닌 것처럼 여겨졌던 시나리오가, 갑자기 ‘거대 설화’ 만큼이나 어렵게 느껴졌다.

파라솔 위에 걸터앉은 내가 쭈뼛거리며 서 있자, 누군가가 내 어깨를 톡톡 쳤다.

“시나리오 해결은 잘 되어 가요?”

싱긋 웃는 유상아가 그곳에 있었다. 내가 힘없이 웃자, 유상아가 말을 이었다.

“독자 씨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니까요. 회사 다닐 때부터 그랬잖아요.”

“······그랬습니까?”

“아예 다른 사람들이랑 말을 잘 안 했으니까요.”

무자비한 팩트 폭격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친구 하나 없는 인생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도 잘 모르고, 회식 자리도 도망칠 궁리만 했다. 차라리 그 시간이 있으면 ‘멸살법’ 정주행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김 독자 이 제친 구있 다」

그리고 자기가 친구라고 주장하는 약 올리는 무생물 하나.

파라솔에 걸터앉은 유상아가 느긋한 시선으로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캠핑 분위기를 내기 위함인지 오늘은 유상아도 법복 대신 캐주얼한 원피스에 챙이 긴 밀짚모자를 썼다. 어디서든 분위기를 잘 맞추는 유상아. 한심한 리더가 운영하는 <김독자 컴퍼니>에 있기는 아까운 사람이었다.

“상아 씨는 혹시, 그날 지하철에 탔던 걸 후회하십니까?”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도 생생한 첫 번째 시나리오의 정경.

「그날, 유상아의 자전거가 도둑맞지 않았더라면.」

만약 다른 곳에서 시작했다면, 그녀는 <올림포스>의 화신이 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환생의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아뇨.”

그토록 단호한 얼굴의 유상아는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독자 씨도 후회하지 마세요.”

“예? 어떤 걸······.”

“그냥. 전부 다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폐가 될 것 같은 기분. ‘멸살법’은 내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려 주지 않았다.

유상아는 그런 내 마음을 안다는 듯 생긋 웃고는 누군가를 가리켰다.

“먼저 저 사람한테 말을 걸어 보는 게 좋겠네요.”





< Episode 86. 네모난 원 (2) > 끝

< Episode 86. 네모난 원 (3) >





“고민이요?”

“예, 그러니까······ 회사 생활에 어떤 불만이 있으시다거나······.”

내가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은 이설화였다. 수색용 연구복을 입고, 작은 돋보기를 낀 그녀는 정체불명의 약초라도 발견한 듯 내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더니 말했다.

“음, 딱히 없는데요.”

말은 저렇게 해도, 불만이 없을 턱이 없다.

“회사 대표로서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 제가 없는 동안 서울을 잘 보살펴주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흐음.”

“무척 힘드셨을 거라는 것도······.”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요? 사실은 서울에 있는 게 더 편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고?”

날카로운 말투에,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네. 은근히 비꼰 거죠?”

“아닙니다. 절대로.”

“다른 일행들이 위험한 시나리오에 뛰어들었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울에 있었던 게 편했던 건 결코 아니에요.”

이설화는 고개를 숙인 채 다시 수풀 속에서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이쯤에 있을 텐데······.”

「이설화는 단 하루도 편히 쉬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설화가 그녀를 대신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행들이 사라진 [공단]에서, 이설화는 홀로 병동을 관리하며 환자들을 받았다. 매일 같이 다친 화신들이 밀려왔다. 그들의 죽음을 보았고, 그들의 죽음을 보며 일행들을 생각했다.」

“나는 후반부 시나리오에서 큰 도움이 못 될 거예요. 내 잠재력은 내가 잘 알고 있고, 내 성좌도 위인급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어요.”

확실히, 이설화의 주변을 떠도는 격의 강도가 달라져 있었다. 다른 일행들처럼 전투력이 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뭐랄까. 스킬의 조예 같은 것이 훨씬 깊어진 느낌이었다.

“<김독자 컴퍼니>의 누구든, 숨만 붙어 있다면 난 반드시 살려낼 거예요. 누구도 죽지 않도록 만들 수 있다고요.”

실제로 이설화의 성장세는 원작의 그 어떤 회차에도 못지 않았다. 내 짐작이 맞다면, 이설화는 곧 생사신의(生死神醫)의 경지에 오를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내가 꿈꾸는 엔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다.

“독자 씨가 읽은 책에서, 나는 어떤 인물이었어요?”

훅 들어온 질문에 나는 잠깐 당황하고 말았다.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로?”

이설화는 ‘멸살법’의 히로인이었다. 하지만 유중혁의 과거 연인이었다고 실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유중혁도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그것이 정말 ‘이설화’에 대한 온당한 설명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어떤 인물이었나.

“그건······.”

내가 말을 이으려는 순간, 이설화가 반색하며 외쳤다.

“앗, 찾았다!”

그녀의 손에 작은 꽃이 쥐어져 있었다. 아마도, 그가 찾던 약초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백린화(白燐華). 생사환(生死丸)의 마지막 재료.」

겉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들풀인데다, 그냥 먹어서는 아무런 효과도 없는 약초. 하지만 그 약초가 없으면, 기적의 묘약인 생사단은 결코 만들어질 수 없었다.

어린애처럼 환히 웃는 이설화. ‘멸살법’의 어떤 문장도 가지지 못한 생동감이 눈앞에 있었다.

「이것이 이설화다.」

그래서 나는 ‘멸살법’의 문장을 떠올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나의 허접한 언어로 말했다.

“당신은 내가 아는 최고의 의사입니다.”

어린애가 만들어 낸 칭찬도 그것보단 낫겠다 싶었다. 그럼에도 이설화는 빙긋 웃었다.

“고마워요, 빈말이라도.”

“빈말이 아닌······.”

“기다려요. 그 빈말, 내가 진짜로 만들 거니까.”

또 다른 약초를 찾아 자리를 뜨는 이설화를 보며, 나는 깨달았다. 애초에 그녀가 정말 궁금했던 것은 ‘멸살법’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와는 달리, 그녀는 그런 소설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현재 당신이 해결한 불만은 0건입니다.]

시나리오에는 진척이 없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쉽지 않죠?”

돌아보자, 이번에도 유상아가 있었다.

“······예. 쉽지 않습니다.”

“당연한 거예요. 지금껏 미뤄왔던 대화를 무슨 이벤트 처리하듯 타파하면 그게 소설이지 현실이겠어요.”

“그렇죠.”

“그래도 계속하셔야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누가 좋을까요?”

“이번엔 직접 찾았으면 싶지만, 딱 한 번만 더 도와줄게요.”

짐짓 손으로 차양막을 친 유상아가 일행들을 살폈다.

그 순간, 메시지가 들려왔다.

[현재 <김독자 컴퍼니>의 계약직 직원들의 불만이 쌓여 있습니다.]

······계약직 직원? 우리 성운에 그런 게 있었나?

그리고 유상아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번엔 저쪽으로 가봐요.”

그곳을 본 순간, 나는 ‘계약직 직원’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

잠시 후, 나는 내 앞에 도열한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바쁘니까 빨리 말하게. 난 지금 ‘흑염룡의 성유물’을 구하러 가야한단 말일세!”

한명오가 재촉하듯 소리쳤다. 그 옆으로는 시큰둥한 얼굴의 공필두와 입술을 실룩이는 장하영이 서 있었다. 함께 불려온 것이 영 못마땅한 눈치였다.

우리와 함께 시나리오를 계속해왔으나, 아직 <김독자 컴퍼니>에는 정식으로 가입하지 않은 이들.

“먼저,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일단 이들이 모르는 이야기부터 꺼내기로 했다.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은 알고 있지만 이들은 모르는 정보. 바로 ‘멸살법’에 관한 것이었다.

내 딴에는 큰맘 먹고 꺼낸 이야기였는데, 예상 밖으로 공필두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나도 한때는 땅값 찌라시들을 믿을 때가 있었지. 네놈은 아직 순진하구만.”

“예?”

“젊은 것들이란······.”

아무래도 공필두는 내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은 것 같았다.

반면 한명오는 나름대로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자, 자네 설마 그 모든 걸 알고도 내가 그 꼴이 되도록 방치한 건가?”

장하영도, 역시나 다른 의미로 놀란 표정이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마계에서도 그렇게 잘 알았던 거야······.”

다행히 일행들의 반응은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하긴, 이미 회귀자에 환생자까지 나온 마당에 내 이야기는 그렇게 대단하게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하납니다. 여러분을 <김독자 컴퍼니>에 가입시키고 싶습니다.”

내 말에 세 일행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공필두가 말했다.

“누구 맘대로?”

[화신 ‘공필두’가 <김독자 컴퍼니>에 가입했습니다.]

······혹시 새침데기란 말은 저 아저씨를 두고 존재하는 건가?

이어서 한명오가 질문했다.

“부장직은 보전해주는 건가?”

“뭐. 그런 직급이 없긴 한데 원하면 만들어 드리죠.”

“급여 처리도 확실하게 해주게. 육아 휴직이랑 야근 수당은······.”

[화신 ‘한명오’가 <김독자 컴퍼니>에 가입했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장하영을 바라보았다.

[화신, ‘장하영’이 <김독자 컴퍼니>에 가입했습니다.]

“······그러니까 염룡아,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면······.”

장하영은 자신의 ‘벽’을 활용해 여기저기 취업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녀석의 <스타 스트림> 친구들이 보낸 축하 메시지가 연이어 들어오고 있었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그 모습을 보며, 새삼 기분이 복잡해졌다.

저렇게 기뻐할 줄 알았다면, 진즉에 가입시켰을 텐데.

“근데 김독자. 왜 갑자기 날 가입시킨 거야?”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장하영이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하영을 <김독자 컴퍼니>에 가입시키지 않은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냥 그런 이유들을 미뤄두고 싶었다. 나는 장하영이 필요하다. 하지만, 녀석을 <김독자 컴퍼니>에 영입한 것은 단순히 녀석이 결말에 필요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너랑 같이 시나리오의 끝을 보고 싶어서야.”

내 말을 들은 장하영이 눈을 크게 떴다.

처연한 뺨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다 안타까웠다. 역시 유중혁의 뺨을 두 대 갈기는 외모의 소유자다웠다.

커다란 눈망울을 끔뻑이며, 장하영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나, 진짜로 열심히 할게!”

주먹을 불끈 쥔 장하영은 다시 타이핑을 시작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계약직 직원의 불만을 해결했습니다!]

[현재 당신이 해결한 불만은 1건입니다.]

드디어 한 건 성공했다.

대표이사란 정말 힘든 자리구나.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소문이 사실이냐고 묻습니다.]

뭔 소문?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정말로 장하영에게 고백했냐고 묻습니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막내 손오공에게······.]

······대체 뭔 소문이 퍼지고 있는 거지?

뭘 그렇게 열심히 쓰고 있는 건지, 열심히 가상 키보드를 두드려대는 장하영의 모습이 보였다.

“야, 저녁밥들 먹어!”

멀리서 한수영의 외침이 들려왔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에 일행들이 하나둘 모여들자, 한수영이 당연하다는 듯 유중혁을 쳐다보았다.

“자, 그 잘나신 요리 맛 좀 볼까?”

“······내가 왜 내 요리를 나눠줘야 하지?”

험악한 눈길로 일행들을 노려본 유중혁은, 돌아서며 툭 던지듯 말을 남겼다.

“······저기에 먹다 남긴 것들이 있으니, 저거라도 먹던지.”

우리는 유중혁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행들은 모두 말을 잃었다.

「그들은 요리의 정수를 보고 있었다.」

일행들은 피리 소리에 홀린 생쥐처럼 얌전히 식탁에 앉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비볐다.

이길영과 신유승이 잡아온 괴수들과, 이설화가 뽑아온 약초들로 만든 요리. 아니······ 어떻게 그걸로 이런 진수성찬을 만들지?

장담컨대, ‘불사를 꿈꾼 시황제’의 식탁도 이것보단 덜 화려했을 것이다.

“와, 내 장례식 때 꼭 요리해줘 사부.”

“왜 장례식이야? 불길한 소리한다, 진짜.”

일행들은 요리를 허겁지겁 삼키기 시작했다. 정희원도, 이지혜도, 한명오도, 공필두도, 장하영도······ 모두 정신없이 음식을 먹고 있었다.

심지어 저 한수영과 유상아조차,

“잠깐, 그건 내 거야.”

“양은 충분하잖아요? 왜 그렇게 욕심을 부리죠?”

요리를 두고 싸우고 있었다.

“아저씨, 이것도 먹어봐요!”

“형, 이것도!”

내 양옆에 앉은 이길영과 신유승이 내 입속으로 허겁지겁 숟가락을 쑤셔 넣었다. 나는 햄스터처럼 볼을 부풀린 채 밥을 씹으며 아이들에게도 반찬을 먹여주었다. 맛있다. 진짜로 맛있다. 너무 맛있어서, 순간 ‘멸살법’이 현실이 된 것이 감사할 지경이었다.

눈망울을 굴리며 고기를 먹던 신유승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학여행 온 기분이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멸살법이 현실이 되어서 감사하다고 생각한 나를 쳐 죽이고 싶었다.

수학여행. 이 세계에서, 아이들이 잃어버린 것들 중 하나.

나는 두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맞아, 수학여행.”

이 여행으로 뭔가를 수학(修學)하고 있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나였지만.

“아저씨는 시나리오 다 끝나면 뭐하고 싶어요?”

“형은 나랑 같이 살 거야.”

“너한테 안 물었거든?”

시나리오가 다 끝나면 하고 싶은 것. 보통이라면 그냥 웃고 넘어갔겠지만, 왜일까. 나는 무심결에 한마디를 하고 말았다.

“아주 커다란 집을 사서, 다 같이 살면 좋겠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떠들썩하던 주변이 조용해져 있었다. 이지혜도, 정희원도, 공필두도······ 심지어는 한수영까지 입을 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희원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그럼 집은 당연히 독자 씨가 사는 거죠?”

······응?

“아저씨 부자니까, 강남에 집 살 수 있겠다.”

“내 땅을 팔지.”

“기왕이면 애들 학교랑 가까운 쪽으로······.”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이렇게 큰 파장을 불러올 줄은 몰랐다.

그렇게 저녁 식사 내내, 일행들은 내가 돈을 낼 집에 대해 떠들었다. 인테리어는 어떻게 한다는 둥, 방은 몇 개가 필요하다는 둥······.

설거지는 가위바위보에서 진 나와 정희원 담당이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하면 무조건 이길 수 있었지만, 이런 여행에서까지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양심에 털을 뽑은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그래, 설화도 얻고 좋구만.

뽀득거리며 그릇을 닦고 있는데, 먼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유성우였다. 긴 꼬리를 남기며 스러지는 별들.

아마 저것은, 정말로 추락하고 있는 별들일 것이다.

<스타 스트림>이 멸망하고 있는 것이다.

곁에서 나와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던 정희원이 말했다.

“[극장 던전] 때 생각나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때와 비슷하긴 하다. 그때도 던전의 옥상에서 우리는 함께 있었다. 떨어지는 유성우를 보며, 소원을 빌었었다.

“독자 씨는 저한테 검이 되어달라 했었죠.”

그곳에서 나는, 정희원에게 동료가 되어달라 말했다. 그리고 정희원은 더할 나위 없이 최고의 동료가 되어주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근데 진짜로 검이 되어버린 건 다른 사람이네요.”

그 말에, 나는 바닥에 고이 놓여 있는 [강철검]을 보았다. 모두가 쉬고 있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이 행사에 참가하지 못한 일행이 그곳에 있었다. 심장이 뛰지 않는 이현성. 잠깐씩 의식이 돌아오는 듯한 순간도 있었지만, 여전히 그는 검이 된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다음 시나리오로 가기 전에 반드시 현성 씨를 깨울 겁니다.”

“방법이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단 이현성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더 커다란 세력이 필요했다.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관리국>. 그리고 <스타 스트림> 전체와 맞서기 위해서는, 슬슬 우리 편을 들어줄 성좌를 모을 필요가 있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현성의 배후성은, 그 첫 번째가 될 것이다.

내 의기양양한 표정이 무척 인상 깊었는지, 정희원이 말했다.

“근데 독자 씨.”

“네.”

“여기서 그렇게 폼 잡고 있어도 돼요? 독자 씨 지금 시나리오 중이잖아요. 진짜 납치당하는 거랑 죽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죠?”

“어······.”

정희원의 말과 함께, 눈앞에 시나리오 창이 떠올랐다.

[하루가 저물고 있습니다.]

[현재 당신이 해결한 불만은 1건입니다.]

나는 서브 시나리오의 실패 대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

실패시 : 사망(?)

+

나는 하늘의 유성우를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여기가 제 마지막 시나리오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 Episode 86. 네모난 원 (3) > 끝

< Episode 86. 네모난 원 (4) >





시나리오 제한시간은 금일 자정까지였다. 

지금이 벌써 9시니, 이제 3시간 남짓 남은 셈. 

······대체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거지? 

행복한 시간은 빨리 지나간다더니, 진짜였던 건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불만은 4개. 그리고 남은 시간은 세 시간.」 

아무리 생각해도 빠듯했다. 애초에 하루 안에 저 힘든 일을 다섯 개나 해결하라는 것부터 무리였다. 

결국 내가 선택한 해답은 다음과 같았다. 

“비유야.” 

서브 시나리오는 도깨비의 관할로 통제가 가능하다. 

게다가 실패 대가도 ‘사망’이 아니라 ‘사망(?)’이기 때문에, 설마 날 죽이진 않을 거라 생각하고 싶지만······ 비유가 대답이 없었다. 

“우리 비유 어디 있니.”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불행에 킬킬 웃습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시나리오에 정직하게 임할 것을······.] 

채널이 열려 있는 걸 보면 분명 비유가 근처에 있는 건 확실한데. 

나는 비장의 수법을 쓰기로 했다. 

“바앗.” 

그러자 허공이 꿈틀, 하고 움직이더니 작은 뿔과 솜뭉치 같은 것이 솟아났다. 

[아바앗.] 

뿅, 하고 머리 위에 나타난 비유가 까르륵 웃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비유야, 미안한데 시나리오 취소 좀······.” 

[에오바앗.] 

에바라는 건지 오바라는 건지 모르겠다. 

[해당 시나리오의 개연성에 동의한 성좌들이 시나리오 취소를 거부합니다.] 

······이거 혹시 현상금 시나리오였나?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이 시나리오는 당신에게 꼭 필요한 시나리오라 주장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비겁한 수 쓰지 말라며 당신을 타박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이 진정한 동료라면 의기와 근성으로······.] 

[성좌, ‘고려제일검’이 그냥 취소를 거부합니다.] 

······이럴 때는 아주 죽이 잘들 맞으시는군. 

“······예에. 알겠습니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막내를 응원합니다.] 

제천대성은 수식언이 바뀌고 나서부터 뭔가 적응이 안 되었다. 

서유기 시나리오가 끝나고 곧장 헤어졌는데, 아마 조만간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아무튼······ 누구냐. 누구한테 먼저 말을 걸어야 하지? 당연히 나한테 불만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 먼저겠지? 

나는 저녁을 다 먹고 한가롭게 모여있는 일행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러자 곧장 [한낮의 밀회]가 날아왔다. 

―뭘 봐? 

일단 한수영은 제끼고. 

어차피 쟤 고민은 내가 해결 가능한 게 아닐 거야. 

―씹냐? 

나는 다음 후보를 계속해서 물색했다. 그다음으로 눈에 띈 것은 유승이와 길영이었다. 볼록 솟은 배를 두들기며 나란히 누워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선악과]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애들 고민이라면 편하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비겁한 이유를 제외하고라도, 사실 길영이와는 이야기를 좀 나눌 필요가 있었다. 

[화신 ‘이길영’의 배후성이 당신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겉보기엔 평소와 같은 모습이지만, 이길영의 격에 희미한 마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게 좋을까? 하지만 이곳은 너무 개방되어 있었다. 

[성좌, ‘하늘 걸음의 주인’이 당신의 행동을 관찰합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당신에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성좌들도 보고 있고. 지금 내가 섣불리 저쪽과 접선했다가, 채널의 성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말을 걸어보긴 해야······. 

[현재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가 발동 중입니다.] 

······찌릿, 하고 머리가 울리더니 또 강제로 스킬이 발동되었다. 

최근 들어 이런 일이 잦았다. ‘멸살법’을 자주 읽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그리고,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독자 형이 와서 말 걸어주겠지?」 

「지금 오시려나?」 

······응? 

「어마어마한 고민을 말해야지」 

「진짜 엄청난 걸 말해야겠다」 

「······신유승이 나보다 심각한 거 말하면 어쩌지?」 

「무조건 이길영보단 더 엄청난 거 말해야지.」 

나는 걸음을 멈췄다. ······결단코 아이들이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아무튼, 나는 그 옆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보고 싶네.」 

처연한 얼굴로 먼 하늘을 보는 이지혜가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늘 재잘대며 떠들던 녀석이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은 간만이었다. 

그녀가 ‘보고 싶다’고 말할 법한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안다. 

모두에게 첫 번째 시나리오는 악몽이지만, 그녀에겐 특히 그럴 것이다. 

아무리 <김독자 컴퍼니>가 있다고 해도, 인간은 다른 인간을 대체할 수 없다. 

말없이 다가간 내가 녀석의 어깨를 콕 찌르자, 이지혜가 돌아봤다. 

“엇, 뭐야, 아저씨. 설거지 다 했어?” 

“그래.” 

“흐음······ 혹시 시나리오 때문에 온 거야?” 

“딱히 그런 건 아니고.” 

“난 고민 없으니까 안 들어줘도 돼. 다른 사람한테 가봐.” 

이런 와중에도 다른 사람을 배려한다. 아무리 아파도, 다른 사람의 고통을 먼저 생각한다. 

충무로의 이지혜는 그렇게 자랐다.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언제든 말해도 돼. 나한테 말하고 싶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라도 좋아. 하지만 웅크려 놓고 혼자 썩히지는 마.” 

내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이지혜가 눈을 깜빡였다. 

“아저씨, 잘난 척하지 마.” 

피식 웃은 이지혜가 주먹으로 내 정강이를 갈겼다. 

아무래도 부러진 것 같았다. 

[현재 당신이 해결한 불만은 1건입니다.] 

겨우 이런 대화로 이지혜의 고민은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맥주잔을 흔들던 이지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으쌰. 그럼 배도 부르겠다 몸 좀 풀러 가볼까.” 

“술 먹고 운동하는 거 아니다.” 

“난 괜찮거든?” 

휘휘 검을 휘두르는 꼴이, 그 사부에 그 제자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나한테 제일 불만이 많을 인간이 하나 있었지. 

나는 재빨리 야영장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그놈이 보이질 않았다. 

“야, 귀 먹었냐? 사람이 부르면 말을······.”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갈겼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한수영······.” 

“왜.” 

“유중혁 어디 갔어?” 

“유중혁? 방금 전까지······ 어?” 

한수영도 그제야 눈치챈 모양이었다. 사실 유중혁이야 본래 혼자서 행동하는 놈이고, 시도 때도 없이 사라지는 녀석이니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놈 혼자 없어진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활짝 열린 [X급 페라르기니]의 뒷좌석을 바라본 한수영이 말했다. 

“······‘은밀한 모략가’도 없어.” 

* 

투명한 봉인구에 휩싸인 ‘은밀한 모략가’가 거친 흙바닥을 나뒹굴었다. 여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유중혁은 그런 ‘은밀한 모략가’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조용히 [흑천마도]를 뽑으며 말했다. 

“깨어 있다는 거 알고 있다.” 

그러자, ‘은밀한 모략가’가 천천히 눈을 떴다. 희미한 스파크와 함께 ‘은밀한 모략가’의 전신에 설화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일시적으로 설화들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짧은 평화를 즐길 줄 모르는 녀석이군.】 

“적과 함께 평화를 즐기는 취미는 없다.” 

【나를 죽일 셈인가?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그런 짓을 해도 진짜로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텐데.】 

사실이었다. ‘은밀한 모략가’ 또한 유중혁. 

그를 죽이는 것은 그저 또 다른 세계선을 만들어내는 행위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유중혁은 [흑천마도]를 놓지 않았다. 

“네가 이 세계선을 망치는 것을 두고 보는 것보단 낫겠지.” 

‘은밀한 모략가’가 웃었다. 그들은 유중혁이었다.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분명 같은 본질의 유중혁이었고, 그렇기에 누구보다 서로의 생각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너의 힘만으로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지금의 너는 김독자의 설화 없이 ‘이계의 신격’과 싸울 수 없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놈을 죽이는 건 간단하다. 그 [봉인구]만 부수면 되니까.” 

그 말에 ‘은밀한 모략가’의 표정에 희미한 동요가 스쳤다. 

지금 ‘은밀한 모략가’는 999회차의 우리엘이 시전한 불완전한 [묵시록의 봉인구]에 들어 있는 상태였다. 

“네놈은 일부러 [봉인구]를 해제하지 않고 있겠지. 그걸 부수면, 시공간의 틈새에서 ‘심연을 좇는 사냥개’들이 나타날 테니까.” 

잠깐이지만 「영원불멸의 지옥도」에 새겨진 1864회차의 기억을 훔쳐보게 되면서, 유중혁은 ‘이계의 신격’에 대한 일부 정보들을 알게 되었다. 심연을 좇는 사냥개― 틴달로스의 사냥개에 대한 것도 그때 알았다. 

세계선의 뒤틀림을 감지하는 청소부들. 

“녀석들은 90도 이하의 각도가 존재하는 곳에서만 출몰할 수 있지. 보통의 네놈이라면 사냥개 따윈 문제가 안 되겠지만, 지금처럼 약해진 상태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흑천마도]에 실린 격의 흐름이 짙어졌다. 유중혁 또한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은밀한 모략가’와의 전면전은 무리였다. 

하지만 저 봉인구를 깨는 것 정도라면 문제 없었다. 

유중혁의 진심을 읽었는지, ‘은밀한 모략가’의 표정도 변했다. 

뭔가를 받아들인 듯한 얼굴. 

그렇게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움직이려는 순간, 

“오빠.” 

수풀 사이로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놀란 유중혁이 그쪽을 돌아보며 외쳤다. 

“유미아! 이쪽으로 오지 마!” 

유중혁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은밀한 모략가’에게 모든 기감을 집중한 까닭에,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일행들에게 돌아가 있어! 여긴 위험하다!” 

“싫어.” 

지금껏 한 번도 내지 않았던, 냉정한 목소리. 

유중혁이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 

“지구에 잘 오지도 않으면서 잔소리하지 마. 요 며칠 동안은 같이 있어 주기로 했잖아? 수경 아줌마랑 경란 아줌마는 항상 바쁘단 말야. 복순 할머니 옛날이야기 듣는 것도 지겹고!” 

따박따박 말을 쏟아내며 성큼성큼 걸어온 유미아의 모습에, 유중혁은 일순간 판단력이 흐려졌다. 

그 틈을 타서 유미아가 ‘은밀한 모략가’의 앞으로 달려왔다. 

“근데 얘 오빠랑 똑같이 생겼네? 누구야, 너?” 

어느새 유미아는 ‘은밀한 모략가’의 지척에 있었다. 유중혁은 초조해졌다. 당장이라도 검을 휘둘러 [봉인구]를 깨버리고 싶었지만 여기서 자칫 잘못했다간 유미아까지 격류에 휩쓸리게 된다. 

그가 고민하는 사이, 유미아는 어느새 투명한 [봉인구]의 위로 손을 가져다 대며 천진하게 묻고 있었다. 

“여기 갇혔어? 꺼내줄까?” 

유중혁은 당장이라도 움직여 동생을 떼어 내고 싶었다. 

하지만 왜일까. 그럴 수가 없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유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깊은 동요로 흔들리는 눈동자. 저토록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은밀한 모략가’도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에 유중혁은 놀랐다. 

유미아가 채근했다. 

“얘, 대답 좀 해봐.”





< Episode 86. 네모난 원 (4) > 끝

< Episode 86. 네모난 원 (5) >





허튼짓을 하면 당장이라도 [흑천마도]를 휘두를 생각이었는데, 뜻밖에도 ‘은밀한 모략가’는 순순히 대답했다. 심지어 진언조차 쓰지 않았다. 

“그래. 나는 여기 갇혔어.” 

처음으로 들어본, ‘은밀한 모략가’의 순수한 목소리였다. 

그러자 유미아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우리 오빠한테 풀어달라고 하자. 우리 오빠 엄청 세거든.” 

그 순진한 목소리에, ‘은밀한 모략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 

“뭐? 왜?” 

‘은밀한 모략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우리 오빠가 너한테 무슨 짓 했어? 뭐라고 나쁜 말로 협박한 거지?” 

“······아니다.” 

“그럼?” 

‘은밀한 모략가’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채로, 가만히 유미아를 들여다보았다. 이제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 미소를 보며, 유중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떠드는 유미아의 목소리와, 그런 유미아를 가만히 바라보는 ‘은밀한 모략가’가 그곳에 있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은밀한 모략가’가,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유미아와 손을 겹쳤다. 비슷한 크기의 손. 시공간을 초월해 겹쳐진, 하지만 결코 만날 수는 없는 손바닥이었다. 

“어? 어······.” 

눈을 깜빡이던 유미아의 몸이 흔들린 것은 그때였다. 

“왜 졸리지······.” 

유미아의 몸이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지자, 달려간 유중혁이 유미아를 품에 안았다. 

“네놈, 무슨 짓을······!” 

【······그냥 좋은 꿈을 꾸게 해준 것뿐이다.】 

유중혁은 잠든 유미아를 내려다보았다. 실제로 유미아의 화신체에는 아무런 이상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비치발리볼”이라든가 “오징어 파티” 따위의 알 수 없는 잠꼬대를 중얼거리며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을 뿐. 

유중혁은 복잡한 눈으로 ‘은밀한 모략가’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약해진 ‘은밀한 모략가’라도, 유미아를 이용한다면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만, 잠든 유미아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네놈의 세계에서, 미아는 어떻게 됐지?” 

【살아남았다.】 

즉답이었다. 

【그리고 죽었다.】 

그 또한 즉답이었다. 

“그게 무슨······.” 

입을 여는 동시에, 유중혁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바로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입을 다물었다. 

가늘게 흐느끼는 듯한 스파크. [끊어진 필름 이론]의 맥락 속에서 두 존재의 기억이 진동하며 설화가 움직이고 있었다. 

「어떤 세계선에서, 유미아는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심지어는 그가 죽은 후에도.」 

1864번을 살아온 자의 세계란, 대체 어떤 곳일까. 

「하지만 어떤 세계선에서, 유미아는 죽었다.」 

회귀자는 누구보다 더 많은 ‘현재’를 살아가지만, 사실은 과거의 망령일 뿐이다. 과거를 바꾸지 못했기에 다음 회차를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 

0회차, 1회차, 2회차, 3회차, 4회차······ 1863회차. 

눈앞의 존재는 그 어떤 회차의 유중혁도 아니었다. 

그는 그 모든 세계에 속한 유중혁이자, 모든 세계를 부채로 짊어진 유중혁. 

그렇기에 누구보다 유중혁인 유중혁이었다. 

【나를 동정하는군.】 

“누가 네놈 따윌······.”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일까. 유중혁은 알 수 없었다. 그러쥔 [흑천마도]의 칼날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엇을 망설이는가. 대체, 이제와서 무엇을 망설인단 말인가. 고작 녀석의 과거사 좀 들었다고······. 

은밀한 모략가’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는가? 네가 타고 있던 지하철 앞칸에는 모든 회차에서 죽는 소년이 있다.】 

뜻밖의 물음. 유중혁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지하철의 풍경이 떠올랐다. 첫 번째 시나리오. 그가 매번 겪어야 하는 지옥의 첫인상. 

하지만 유중혁은 그런 소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 죽어간 사람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회귀하며 그 죽음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 

【어린 소년이었다. 신유승보다도, 이길영보다도 어렸지. 그런데 그런 아이가, 강제로 ‘자격 증명’을 해야 했다. 무려 1863번의 삶 동안. 그 아이는 싸움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죽었다. 죽고, 죽고, 또 죽었다.】 

유중혁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물었다. 

【1863번을 회귀한 사람과, 1863번의 삶 동안 기억도 없이 죽음만을 반복한 아이 중, 어느 쪽이 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그건······.” 

‘은밀한 모략가’는 말하고 있었다. 너의 동정은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다고. 

그럼에도 유중혁은 그 말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분명 불행의 경중을 비교하는 것에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행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스타 스트림>은 모든 존재의 삶을 기승전결로 만들려고 하지. 하지만 본래 삶이란 기승전결이 아니다. 기에서도, 승에서도, 전에서도. 언제든 끝날 수 있는 부조리한 것이지. 그러니 이곳에서 내 삶이 끝나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지하철의 그 소년도,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유중혁은 알지 못했다. 

고요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은밀한 모략가’. 

한참이나 그 눈을 들여다보던 유중혁이, 시선을 피하며 [흑천마도]를 내렸다. 

“······이번에 다시 회귀하면 너는 1864번째로 그 아이의 죽음을 보게 되겠군.” 

결국, 그의 [흑천마도]가 다시 칼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것이 잘못된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유중혁은 결정했다. 

그 선택이 의외였는지, ‘은밀한 모략가’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너는 김독자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군.】 

“닥쳐라. 네놈 따윈 언제든 죽일 수―” 

사람들의 기척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유중혁을 찾는 소리. 김독자와 한수영, 그리고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의 목소리. 

【인정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세계선은, 지금껏 내가 살아온 그 어떤 회차와도 다르다. 어쩌면 이 세계선에서 너희는 정말 ‘벽’ 너머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네가 원하는 결말일 거라 기대하지는 마라. 그리고 그것이 네가 원하지 않는 결말이라 해도―】 

‘은밀한 모략가’의 진언이 다시 흐릿해져 갔다. 서서히 감기는 눈꺼풀. ‘은밀한 모략가’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이 보였다. 

풀숲을 헤치고 나타난 김독자의 모습과 함께, ‘은밀한 모략가’가 말을 맺었다. 

【이 세계가, 실패한 회차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 

“비치발리볼 했다니까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는 질문에, 유미아는 그렇게 대답했다. 

“오징어도 구워 먹고, 오빠랑 비치발리볼 하면서 놀았다니까? 혹시 못 생기면 이해력도 떨어지나?” 

우선 그 문장에는 틀린 점이 세 군데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일단 여긴 바다가 아니고, 나는 그렇게 못생기지 않았고, 이해력도······. 

“······뭐, 어쨌든 별일은 없었던 모양이네.” 

한수영이 한숨 놓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딱히 유중혁이 사고 친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은밀한 모략가’도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나는 ‘은밀한 모략가’를 [X급 페라르기니] 안에 다시 넣어두었다. 찜찜한 점이 몇 가지 있었지만 지금 당장 따져 물을 계제는 아니었다. 

“자자, 다들 모여요! 캠프파이어 할 거야!” 

캄캄한 산의 어둠을 밝히는 야영장의 모닥불이 매캐하게 피어올랐다. 어느덧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제야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잠깐만요! 나 아직 시나리오 안 끝났······!” 

제기랄, 유중혁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머리 위에서 비유가 “바앗바앗”거리며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나리오 제한 시간이 모두 경과했습니다!] 

진짜 이렇게 죽어버리는 건가. 

[서브 시나리오― ‘노동자의 휴일’이 종료되었습니다!] 

[당신이 해결해야 하는 불만 사항은 총 5개입니다.] 

[당신이 해결한 불만은 총 1건입니다.] 

[당신은 직원들의 모든 불만 사항을 해결하였습니다.] 

[<김독자 컴퍼니>와 관련된 새로운 설화가 발아하고 있습니다.] 

······어? 

“하여간 넌 눈치를 땅에 흘리고 다니는 건지······.” 

한수영이 내 옆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피식피식 웃는 일행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일행들에게 말을 걸 때마다 돌아왔던 대답이 떠올랐다. 

―딱히 불만 같은 거 없는데요. 

그게 진짜였다고? 

“여기서 너 탓할 사람 아무도 없어.” 

무심한 듯 울려 퍼지는 한수영의 목소리. 일행들은 말없이 화톳불을 쬐었다. 그 침묵에 담긴 마음을 알 것 같아서, 나는 괜스레 울컥하고 말았다. 

정희원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뭐, 굳이 하고 싶은 말을 찾으라면 찾을 수는 있겠지만, 그건 ‘불만 사항’이 아니라······.” 

뜨끈한 화톳불이 눈앞에 있는데도 뒤가 으슬으슬 추워지는 것은 왜일까. 

“아무튼, 모처럼 푹 쉬었네요. 누군 제대로 못 쉰 것 같지만.” 

유상아의 말에 이지혜가 끼어들었다. 

“근데 이제 다 끝난 거예요? 촛불 들고 울거나 롤링 페이퍼 쓰는 건 안 해요?” 

“진짜 수학여행도 아니고 그런 걸 왜 해? 그리고 종이도······.” 

한수영의 핀잔을 들으며 잠깐 생각했다. 

한수영이 써준 롤링 페이퍼라······ 그거 제법 재밌을지도. 

갑자기 말을 멈춘 한수영이 나를 보며 물었다. 

“써주리?” 

“됐어, 애들도 아니고 무슨.” 

“그러고 보니 너 친구도 없었고 MT도 안 갔다며. 그런 거 받아본 적 없겠다.” 

이번 여행으로 내 정신력의 총량이 급감한다면 그것은 모두 한수영 때문이다. 

추진력 강한 <김독자 컴퍼니>의 몇몇 일행들은 벌써 [도깨비 보따리]를 통해 커다란 종이와 펜을 구입한 상태였다. 하여간 도깨비 자식들 이딴 걸로도 코인을 받아먹다니······. 

불길의 맞은 편에 앉은 유중혁도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나는 이딴 건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화가 난 이유는 나와 다른 것 같지만. 

아무튼 옹기종기 모인 일행들이 바닥에 제각기 글자를 쓰는 걸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친구 없는 불쌍한 김독자를 위한 글짓기 모임 같았다. 

그렇게 각자 종이에 자기 이름을 쓰고 돌리는 동안, 이길영이 손을 들었다. 

“형, [도깨비 보따리]에서 이거 샀는데, 한 번 쏴 봐도 돼요?” 

이길영의 손에 쥐어진 장난감을 발견한 신유승이 반색했다. 

“어? 그거 한강에서 사람들이 날리던 거 아냐?” 

“안 그래도 그거 생각나서 샀어.” 

“나도 하나 쏴보자!” 

“싫어. 네가 사. 2000코인짜리란 말야.” 

이길영의 손에는 낙하산 헬리콥터가 쥐어져 있었다. 나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다. 줄을 힘껏 당겼다가 놓으면 하늘로 치솟으며 불빛을 발하는 장난감. 

이길영의 장난감이 특이했던 것은, 네 장의 날개가 커다란 네모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나저나 저딴 게 2000코인이라니. 

“자, 쏜다!” 

이길영이 허공을 향해 낙하산 헬리콥터를 쐈다. 그러자 순식간에 솟구친 헬리콥터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주변을 불빛으로 물들였다. 꼭 불꽃놀이라도 하듯 밤하늘에 퍼지는 빛의 산란. 이보다 더 화려한 광경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음에도, 일행들은 감탄한 표정들이었다. 

네모였던 헬리콥터의 날개가, 빠르게 회전하며 원의 형태가 되었다. 

그것은 꼭 포탈처럼 보였다. 우리가 살았던 세계로 통하는 포탈.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지만, 분명 그 자리에 있었던 세계에 대한 향수. 

허공에서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화신 ‘이길영’이 아이템 ‘낙하산 헬리콥터(초대형 광학 스크린)’를 사용하였습니다!] 

회전하는 헬리콥터의 날개가 점점 커지더니, 이내 스크린으로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지혜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저거 홀로그램 패널이었어? 여기서까지 시나리오 봐야 돼?” 

“이길영, 너 사용설명서는 제대로 읽고······.” 

“아니 난 그냥 헬리콥터라길래······.” 

이길영이 한 마디하는 순간, 주변에 가벼운 지진이 일었다. 

일행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건 또 뭔 지랄이야······.” 

한수영의 말과 동시에, 일행들이 허공의 스크린을 응시했다. 

스크린을 보는 순간, 모두가 지진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 지진은 한반도의 것이 아니었다. 

광학 스크린에 아메리카 대륙이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서, 그 아메리카 대륙이 통째로 사라지고 있었다. 

지구의 아주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거대한 섬. 

그 섬의 출현과 함께, 미대륙이 통째로 지도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해당 세계관의 개연성이 임계점에 도달하였습니다!] 

[잊힌 섬들의 융기가 시작됩니다!] 

표정이 굳어진 유중혁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멸망이 시작됐군.”





< Episode 86. 네모난 원 (5) > 끝

< Episode 87. 강철의 심장 (1) >





우리는 곧장 서울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점검한 것은 [공단]의 안전이었다. 

“이후 별다른 이상 징후는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중앙 상황실을 맡고 있던 아일렌이 말했다. 

상황실의 패널에는 태평양 인근을 촬영한 영상들이 중계되고 있었다. 

미대륙과 인접한 태평양에 떠오른 거대한 섬.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재앙’ 중의 하나였다. 

‘멸살법’ 본편에서 저 섬의 주인은 강력한 외신이었다. 문제는 이번에도 같은 존재일 것이냐는 건데. 

“어머니는?” 

“동해안에 계십니다.” 

“······동해안?” 

[잊힌 섬의 융기가 시작됩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먼 태평양 건너편에서 밀려오는 파도가 보였다. 저만한 수준의 지각 변동이 초래되었으니, 엄청난 양의 해일이 세계 각지로 밀려들었을 것이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물론 미국이었다. 

―콰가가가각! 

화신들의 처참한 비명과 함께, 뉴욕의 시가지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쓰나미가 전부가 아니었다. 그 쓰나미의 저변으로 이계의 신격의 하급 개체인 ‘이름 없는 것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이계의 신격의 하급 개체들이, 마구잡이로 범람하며 미국 본토를 모조리 갉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구호를 요청할 틈도 없었다. 재난 발발 삼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본토의 절반이 사라졌고, 한 시간이 지났을 때 미국은 새카만 아우라로 뒤덮여 있었다. 

서울에 나타났던 [암흑성]이나 [범람의 재앙]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의 재앙이었다. 

“혹시 어머니가······.” 

아일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다행······ 이라고 말씀드려야 할진 모르겠습니다만.” 

다음 순간 패널 화면이 전환되며, 한반도의 동해안이 포착되었다. 예상대로 쓰나미는 여기까지 밀려왔다. 미국 본토를 덮친 것에 비하면 파도의 높이가 낮았고 ‘이름 없는 것들’도 보이지 않았지만, 쓰나미는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자연재해였다. 

―천제의 풍신이여! 

어머니의 외침과 함께, 손끝의 쥘부채에서 강렬한 바람이 폭발했다. ‘성마대전’때는 꼬장꼬장하게 굴었던 풍백이, 이번에는 제대로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어머니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조영란도 맹활약 중이었다. 

[거대 설화, ‘신단수’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홍익>에서도 이번 사태를 주목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바다에 뿌리를 박은 [신단수]의 설화가 한반도의 개연성을 이용해 재해를 막아내고 있었다. 

십 년 감수했다는 듯 한수영이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미국이면, 그 여자가 있는 곳이잖아?” 

한수영이 그 여자라고 말할 만한 인물은 하나밖에 없었다. 

“저건 미래시로 예견 못 한 건가?” 

“안 그래도 그것과 관련해 드릴 말씀이······.” 

아일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황실 한쪽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등장했다. 그 인물을 확인한 유중혁이 곧바로 [흑천마도]로 손을 옮겼다.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칼은 집어넣으시죠, 패왕.” 

환하게 요동치는 [대악마의 눈동자]. 

예언자 안나 크로프트와, 그녀가 이끄는 ‘차라투스트라’가 그곳에 있었다. 

* 

“다섯 시간 전 경보령을 내렸어요. 대부분은 세계 각지로 탈출했지만, 못 나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왜 우리한테 도움을 청하지 않았죠?” 

“그만한 여력조차 없었어요. 애초에 미래시 정보를 확신할 수도 없었고요. 이렇게 갑자기 대규모 미래 정보가 격변한 건 처음 있는 일이라······.” 

안나 크로프트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대규모의 미래 정보 격변. 아마 ‘마지막 시나리오’에 한해서는 안나 크로프트의 미래시도 큰 메리트를 가지지 못한다는 증거일 것이다. 

한수영이 따지듯 물었다. 

“<아스가르드>는? ‘성마대전’을 성공적으로 끝냈으니, 다시 당신에게 지원을 시작했을 텐데.” 

입술을 꾹 깨문 안나 크로프트가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미국을 버리라고 하더군요.” 

곧 마지막 시나리오가 시작된다. 

아마 <아스가르드>도 고작 일개 행성의 대륙 하나에 연연할 만큼의 여유는 없는 것이리라.

실제로 멸망이 발생하는 행성은 지구뿐만이 아닐테니까. 

쿠구구구, 하는 소리와 함께 패널 속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가가가가가가가각】 

【우리는우리는우리는우리는】 

미대륙의 해안지대를 점령한 ‘이계의 신격’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1863회차에서 겪었던 95번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그쪽 세계선에서는 우리보다 빠르게 이계의 신격의 침습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도 이제 그와 비슷한 꼴이 되겠지. 그것이 저 빌어먹을 관리국이 원하는 이야기니까. 

“······한국은 뭔가 대책이 있나요?” 

“생각 중입니다.” 

“이계의 신격의 왕과 접선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아마 ‘은밀한 모략가’를 이야기하는 듯했다. 

“정확히는 포획한 상태입니다.” 

내 말에 안나 크로프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거기까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혹시 그를 통해서 이번 재앙을 막아낼 수는······.” 

“이미 개연성을 많이 소진한 상태라 무립니다. 게다가 그는 이번 재앙과 관련이 없습니다.” 

“당신, 뭔가 알고 있군요?”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안나 크로프트를 마주보았다.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자기가 아는 것을 토해내는 것이 먼저다. 그것이 정보 교환의 기본이니까. 

내 의중을 눈치챈 듯, 안나 크로프트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줄 수 있는 정보는 그다지 많지 않아요.” 

“그거라도 말해보시죠.” 

“······하나, 현재 ‘대멸망 시나리오’가 발동한 지역은 태평양 일부와 미대륙까지예요.”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다. 

[현재 해당 지역은 대멸망이 진행 중입니다.] 

나는 투명한 돔이 미대륙과 태평양 전체에 걸쳐져 형성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름 없는 것들’은 아직 저 돔벽 바깥으로는 나가지 못하는 듯했다. 아마 저기까지가 현재 ‘이름 없는 것들’에게 허용된 개연성일 것이다. 

“둘, ‘이름 없는 것들’은 평범한 병기로는 사냥할 수 없어요. 기존의 병기 체계가 듣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하위 시나리오의 성유물들도 좀처럼 먹히질 않아요.” 

실제로 화면에서는 ‘이름 없는 것들’과 악전고투를 벌이는 몇몇 화신들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개중에는 꽤 이름 있는 성유물의 소유자도 있었는데, 그의 도끼는 ‘이름 없는 것들’의 살갗을 제대로 베어내지 못했다. 

―어째서······! 

날카로운 이빨에 찢긴 화신체의 살점이 패널을 덮자, 이지혜가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피하지 않고 그 장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전용 스킬, ‘독해력’이 발동합니다!] 

‘이름 없는 것들’의 동체를 둘러싼 갑각. 그 표면에 희미한 활자들이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유중혁이 말했다. 

“성흔이군.” 

“단순한 성흔이 아니야. 저렇게 상시 활성화가 가능한 수준이라면 이미 형상설화(形像說話)의 단계라고.” 

형상설화. 슬슬 그 정도의 개연성이 허락될 단계도 됐다. 

유중혁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저 ‘이름 없는 것들’의 왕은 아주 강력한 방어 능력을 지닌 존재일 것이다.” 

왕의 권속들은 자연히 왕의 설화를 따른다. ‘은밀한 모략가’의 권속인 꼬마 유중혁들이 그랬던 것처럼. 

태평양에 섬을 융기시킨 ‘이계의 신격’은, 아마 공포의 기록자들이 남긴 책에 적혀 있었던 다섯 왕 중 하나일 것이다. 

「서쪽 세계의 재앙, ‘가라앉은 섬의 주인’.」 

나는 일행들을 안심시키듯 말했다.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상위격의 성좌들이라면 저들을 죽일 수 있는 병기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성좌들은 아무도 참전하지 않았어요.” 

확실히, 화면 어디에도 성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물며 그 흔한 위인급 성좌조차도. 

“지금부터 모아 봐야죠.” 

나는 진언을 발동하기 위해 비유를 흘끗 보았다. 채널이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분명 모두가 저 광경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메시지가 없다? 

······어쩌면, 저 심해 깊숙한 곳에서 아직 나오지 않고 있는 ‘왕’을 두려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장하영.” 

나와 눈이 마주친 장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채널을 통해 성좌들과 의사 교환이 어려운 상태라면, 장하영의 힘을 빌리는 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아무도 답장이 없는데.” 

“아무도?” 

그럴 리가 없었다. 이 <스타 스트림>에 성좌가 얼마나 많은데. 

“흑염룡이 유일하게 답장을 주긴 했는데······ 지금 조금 바빠서 대답하기 어렵다고······.” 

“<올림포스>에도 연락해 봤어? <명계>는?” 

“맨 처음에. 근데 답장이 없어.” 

뭔가가 이상했다. 

<올림포스>는 그렇다 쳐도, <명계>라면 당연히 반응할 법도 한데. 

하물며 우리엘이나 제천대성은······. 

곁에서 혀를 차던 한수영이 말했다. 

“당연한 거야. 이게 성좌란 족속들의 본질인 거지.” 

지금껏 우리를 응원해준 성좌들의 수식언 하나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간다. 그 많은 성좌들이 있었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한수영이 계속해서 말했다. 

“많은 성좌들이 우리 설화를 봤지. 누군가는 응원하고, 누군가는 시기하고. 다양한 반응들이 있었고, 많은 코인을 벌었어. 하지만 거기까지야.” 

“······.” 

“세상이 우리 이야기에 동하기라도 한 줄 알았냐? 네가 정말 <스타 스트림>을 바꿨다고 생각했어?” 

“그렇게까지 순진한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차피 성좌들은 자기 입맛에 맞는 채널만 구독하는 법이야. 이제 흥미가 떨어졌으니, 다른 채널으로 옮겨간 것뿐이라고.” 

한수영의 말이 사실일지 어떨지는 모른다. 

[다음 대멸망 시나리오 지역은 ‘동북아시아’입니다.] 

[대멸망 시나리오 시작까지 14일 12시간 7분 남았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들의 외면으로 자칫하면 지구가 통째로 날아가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정희원이 물었다. 

“이제 어쩌죠?” 

“······뭐, 아주 상정하지 못한 상황도 아닙니다.” 

내 말에 한수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 방법이라도 있어?” 

“저쪽에서 만나러 오지 않겠다면, 우리 쪽에서 먼저 만나러 가야지.” 

“어디부터 갈 건데? 역시 만만한 <명계>인가?” 

“<명계>를 만만하다고 말하는 건 아마 너뿐일 거다.” 

이죽거리는 한수영을 뒤로하고, 정희원을 바라보았다. 

<명계>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급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것이 있다. 남은 시간은 14일. 최소한의 동선으로 최대의 효율을 내야만 한다. 

“잃어버린 동료부터 되찾아야지.” 

내가 바라본 것은 정희원의 허리춤에 매달린 강철검이었다. 

[등장인물 ‘이현성’의 영혼이 잠들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강철화 5단계의 후유증이 내 생각보다 심각한 모양이었다. 

“‘강철의 주인’을 만나러 간다.” 

“강철의 주인? 그런 녀석이 도움이 되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철의 주인은 강력한 성좌야. 신화급은 아니지만, 지금의 우리에겐 신화급 성좌보다 더 필요한 성좌라고.” 

“왜?” 

“자세한 거 설명할 시간 없어. 일단 움직이자.” 

긴급 연락책과 최소한의 방어 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장하영과 공필두, 그리고 이설화는 공단에 남았다. 또 남기고 가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들의 표정을 보니 오히려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이 더 큰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이설화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얼른 다녀와, 여긴 맡겨 두고.” 

서울에 남겨진다고 해서 이들의 임무가 더 쉬운 것은 아니다. 

이야기되지 않는 것들이 있기에, 비로소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처럼. 

* 

우리는 곧장 [X급 페라르기니]를 타고 차원로로 진입했다. 

좌표는 OZ-7611. 찬연한 <스타 스트림>의 별들이 스쳐 가자, 일행들의 표정도 긴장으로 물들었다. 

“다들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놀러 간다고······ 그 노동자 혁명인가 뭔가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세요.” 

“······지금은 근무 시간이잖아요.” 

“그렇게 무서운 곳은 아니니까 하는 말입니다.” 

“어디로 가는 건데요?” 

“음, 말씀드렸다시피 ‘강철의 주인’의 본거지로······.” 

“그놈 정체가 뭔데?” 

결국 답답해진 한수영이 물었다. 

“다른 성좌들은 수식언으로 대충 유추가 가능하잖아. 긴고아의 죄수는 손오공이고, 술과 황홀경의 신은 디오니소스고. 그런데 그 녀석은 전혀 예측이 안 돼. 내가 읽은 부분까지도 정보가 안 나왔고.” 

“궁금하면 [예상표절]로 맞춰보든가.” 

“그런 하찮은 것에 내 능력을 쓰라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행들 표정을 보아하니, 한수영뿐만 아니라 다들 ‘강철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한 얼굴들이었다. 

정희원이 물었다. 

“우리가 아는 신화 속 인물이에요?” 

“신화 속 인물은 아니지만, 엄청 유명한 성좌긴 하죠. 실제로 이 성좌의 설화를 토대로 만들어진 이야기도 있어요. 그런데······ 애들은 잘 모를 것 같기도 하고.” 

내 말에 신유승과 이길영이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뒤쪽에서 굉음이 들려온 것은 내가 말을 이으려던 찰나였다. 

“······저 새끼들이?” 

운전대를 잡고 있던 한수영이 경악하며 외쳤다. 

백미러에 비치는 전함의 그림자. 한두 척이 아니었다. 족히 수십여 척은 되는 우주 전함들이 에테르 입자를 흩뿌리며 우리를 추격하고 있었다. 

신유승이 물었다. 

“저거 성운들 아니에요? 왜 우릴 공격해요?” 

확실하진 않지만 <베다>나 <파피루스> 같은 거대 성운들의 설화 병기로 보였다. 이지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거북선 소환할까?” 

“아냐. 싸울 시간 없어. 밟아 한수영!” 

어차피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가속한 [X급 페라르기니]가 전율적인 속도로 차원로를 주파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가 떠올랐다. 

[좌표 ‘OZ-1900’에 도착했습니다!] 

끼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차가 멈춰 섰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정거장이었다. 

정거장에는 작은 나무집이 있었다. 나는 외쳤다. 

“빨리 내리세요! 그리고 저 집으로 들어가요!” 

모든 일행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X급 페라르기니]의 차체가 폭발했다. 

······젠장, 아직 몇 번 타보지도 못했는데. 

나는 일행을 모두 확인한 뒤 현관문을 닫았다. 곧 집의 주변에 가공할 태풍이 일더니, 떠오른 집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외쳤다. 

“창문을 전부 잠가주세요!” 

“저게 창문 잠근다고 막아지냐?” 

한수영은 태클을 걸면서도 열심히 창문을 걸어 잠갔다. 우릴 쫓던 성운들이 멀리서 탄환을 장전하는 것이 보였다. 수십 척의 전함이 한꺼번에 광자포를 충전하는 광경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아마 저 공격이라면, 한반도 전체를 날려버리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지혜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저씨! 지금이라도―” 

“걱정 마, 여긴 안전해.” 

집 전체가 기하학적 변형을 일으켰다. 집의 내관이 급격하게 팽창하더니, 거대한 금속음과 함께 집 전체로 배관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뭐야? 나무집 아니었어?” 

[선체 도킹을 시작합니다!] 

허공에 붕 떠올라 있던 집이 장착음과 함께 어딘가에 고정되었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서 격발된 포화가 우리를 향해 쏟아졌다. 대륙 하나를 날려버릴 수 있을 만한 화력이었다. 

그 순간, 시끄러운 배기음과 함께 행성 일대에 아득한 크기의 강철막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날아든 포화는 그 막에 가로막혀 그대로 소멸했다. 

그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방호벽에, 일행들은 기가 질린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우리가 착륙한 행성의 외연이 비쳤다. 

은빛의 도시. 마치 수축기의 심장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행성. 

[강철의 심장, <오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강철의 심장 <오즈>. 

이곳은, <스타 스트림>에서 가장 단단한 금속이 자라나는 행성이다.





< Episode 87. 강철의 심장 (1) > 끝

< Episode 87. 강철의 심장 (2) > 





[선체가 안정화 작업에 돌입합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시스템 메시지를 들으며, 일행들이 멍한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토네이도에 휩쓸린 집, 새로운 세계······ 슬슬 다른 일행들도 이곳이 어디인지 눈치챘을 것이다. 

“······아저씨, 이거 그거지? 『오즈의 마법사』.” 

그 말을 먼저 한 건 뜻밖에도 이지혜였다. 

“알아?” 

“응, 옛날에 친구가 이거랑 관련된 뮤지컬을 좋아했거든.” 

으스대던 이지혜의 표정이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그걸 눈치챈 정희원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근데 『오즈의 마법사』라면 비교적 최근 작품 아닌가요?” 

“제 기억이 맞다면 1900년에 만들어진 작품이에요.” 

“역시 상아 언니, 모르는 게 없다니까.” 

이지혜가 엄지를 들었다. 정희원이 다시 말했다. 

“근데 그럼 뭔가 말이 안 되잖아요. 고작해야 백 년밖에 안 된 세계인데······ 현성 씨한텐 ‘강철의 주인’이 그보다 더 오래된 성좌라고 들었거든요.” 

“희원 씨 말이 맞습니다.” 

타당한 의문이었다. 모든 설화는 곧 존재를 구성한다. 그런데 그 존재를 구성하는 설화의 연식이 짧으니 의문이 들 수밖에. 

“혹시 『서유기』에서는 어떠셨습니까?” 

“네?” 

“『서유기』가 먼저 존재했을까요, 아니면 제천대성이 먼저 존재했을까요?” 

그 말에 일행들이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강철의 주인’도 이야기되기 전부터 존재했을 거란 뜻이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뭐야 그게.” 

말 그대로다. 

일단 설화화가 되어버린 존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연식이 조금씩 불투명해진다. 

비록 성좌의 시작이 근원 설화였다 해도, 그 근원 설화조차 시간의 경과와 함께 조금씩 변화하기 때문이다. 

[선체 안정화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입구를 개방합니다.] 

“뭐, 자세한 건 나가보면 알겠지.” 

그 말을 한 한수영이 제일 먼저 폴짝 뛰어내렸다. 신이 난 이지혜와 아이들도 녀석을 뒤따라갔다. 

“우리도 가죠.”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머지 일행들이 선체에서 하차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곳 <오즈>에서 얻게 될 시나리오는 원작의 모험을 그대로 따라간다. 토네이도에 날아온 집이 <오즈>라는 이계에 도착하고, 하필 그 집이 깔아뭉갠 대상이 못된 마녀고······. 

“뭐야 이거!” 

그리고 이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집 밑에 깔린 마녀를 발견한 것이겠지. 그런데. 

“······가짜잖아?” 

집 밑에 누가 깔려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마녀가 아니라, 마녀의 모양을 한 모형이었다. 마녀라고 우기기도 어려운, 지저분한 상태의 모형. 

한수영이 부러진 마네킹 다리를 들며 물었다. 

“이거 뭔데?” 

나는 그 다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전개가 원작과 달라졌다.」 

‘멸살법’에 등장한 행성 <오즈>는 일종의 테마파크였다. 

방문객들은 『오즈의 마법사』 원작과 같은 루트를 따라 난쟁이 ‘먼치킨’들을 만나고, 각자 하나씩 배역을 부여받아 에메랄드 성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난쟁이 ‘먼치킨’들이 보이지 않는다.」 

유중혁이 중얼거렸다. 

“스승님께 듣던 것과는 좀 다르군.” 

동감이었다. 이 광경은 뭘까. 

살풍경한 바람이 부는 은빛 도시에는, 생명체의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삭막한데요. 동화 속 세계인데······.” 

‘멸살법’을 전부 읽은 나도 <오즈>에 관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지는 않았다. 

작중에서 <오즈>가 정확히 소개되는 것은 단 한 번, 유중혁의 999회차에서였다(후반부로 갈수록 ‘멸살법’도 스킵 장면이 늘어나서, 나중에는 “오즈에 가서 병장기를 강화할 설화 금속을 얻었다” 정도로 서술되고 만다). 

「슬픈 곳이군요. 좀 더 즐거운 전승이 깃들어도 좋을 텐데.」 

999회차의 이현성이 한 그 말이, 지금도 기억 속에 명료하게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 이현성은 자신의 힘을 각성하고, ‘강철의 주인’의 격과 의지를 계승하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지금 이 광경은 원작과는 완전히 달랐다. 

왜일까. 우리가 원작을 많이 바꿨기 때문인가? 

하지만 이곳은 <오즈>다. <김독자 컴퍼니>가 바꾼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행성은 아니었다. 

“요정 같은 애들이 몰려와서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면서 우리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니냐? 요정은커녕 파리 한 마리도 없네.” 

부서진 테마파크의 알림판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마치 폐장한 놀이공원 같은 분위기였다. 

아이들은 그마저도 신나는 모양인지 내 곁에 찰싹 달라붙어 중얼거렸다. 

“약간 흉가 체험 같아요.” 

우리는 일단 바닥에 표시된 노란 길을 따라 가보기로 했다. 원작에 따르면 이 길의 끝에는 에메랄드 성이 있다. 

실제로 얼마간 걸음을 옮기자, 높다랗게 솟아오른 녹색 탑이 보였다. 그리고 그 탑의 주변으로 자그마한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모든 여정이 저문 곳에 낡은 성을 하나 지었으니」 

「그대들은 기꺼이 방문하여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해주기 바란다」 

도시의 입구에, 어쩐지 감상적인 느낌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유중혁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나는 여기서부터 따로 행동한다.” 

“뭐? 왜?” 

“이곳의 난쟁이들 중에는 뛰어난 대장장이가 있다.” 

그 말에 떠오르는 문장이 있었다. 

「오즈의 금속에는 가장 오래된 마법이 깃들었으니」 

<오즈>는 이 <스타 스트림>에서 가장 오래된 설화가 깃든 금속의 원산지였다. 본래 원작 유중혁의 무기는 이곳의 강철로 강화된다. 

<오즈>의 금속과 유중혁의 설화를 뒤섞어 성유물로 거듭난 최강의 패도. 

그것이 바로 후반부의 유중혁이 사용하는 성유물 [진천패도]였다. 

물론 그건 원작의 이야기고, 이번에 강화할 건 아마 [흑천마도]가 되겠지만. 

“오즈의 강철은 <스타 스트림>에서 제일 단단하다. 지금은 병기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렇게 선언한 유중혁은 허락조차 구하지 않고 떠났다. 그냥 둬도 괜찮냐는 듯 일행들이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어차피 <오즈>에 온 목적이 한 가지가 아니었으니, 일행을 나눌 필요는 있었다. 이현성을 구하는데 모든 일행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나는 곁에서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있는 이지혜를 향해 말했다. 

“너도 따라가. 전함 업그레이드해야 되잖아.” 

“아싸!” 

신이 난 이지혜가 총총걸음으로 달려갔다. 

나는 유상아를 보며 말했다. 

“유상아 씨도 몰래 따라 가주시겠어요? 저 둘만 보내긴 불안해서. 그리고 애들도······ 아마 꽤 구경할 만한 것들이 있을 거예요.” 

“얼른 가요! 얼른!” 

유상아의 손을 한쪽씩 붙잡은 아이들이 번화가 쪽으로 사라졌다. 시끌벅적하던 일행들이 흩어지자, 약간 허전한 기분이 되었다. 

이제 남은 일행은 나와 정희원, 그리고 한수영뿐. 

한수영이 중얼거렸다. 

“도로시와 똑똑한 허수아비, 겁쟁이 사자가 남았네.” 

『오즈의 마법사』에서 주요 구성원은 총 넷이다. 주인공인 도로시, 양철 나무꾼, 똑똑한 허수아비, 그리고 겁쟁이 사자. 

내가 물었다. 

“굳이 ‘똑똑한 허수아비’라고 한 걸 보면 그게 너겠지.” 

“정답이야.” 

“나머지는 굳이 묻지 않으마.” 

“넌 겁쟁이 사자야.” 

“고맙다.” 

우리는 시시덕거리며 도심으로 진입했다. 

만약 이곳이 여전히 테마파크였다면, 정말 그런 일행 구성이 되는 것도 재미있었을 것이다.

우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정희원이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몇몇 원숭이 무리가 도시 곳곳에 숨어 우리를 흘끗거리고 있었다. 

환영하는 분위기 같지는 않았다. 환영도 마중도 없는 세계. 동화라기보다는 호러 소설이 어울리는 분위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에메랄드 탑 앞에 도착했다. 한수영이 말했다. 

“꼭 마탑처럼 생겼네.” 

“실제로 마법사가 사는 탑이니까.” 

지금도 살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탑의 입구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딱딱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건을 말하라. 

“‘강철의 주인’을 뵈러 왔습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굳게 닫힌 문. 

아무래도 잘못 말한 모양이었다. 나는 ‘멸살법’을 떠올렸다. 999회차에서는 뭐라고 말했더라? 

내가 생각하는 사이, 정희원이 검을 뽑아 들었다. 

“현성 씨 영혼 돌려줘. 탑 쪼개버리기 전에.” 

그녀의 전신에서 일어나는 대천사의 격. 강렬한 [지옥염화]의 불길이 그녀의 강철검 위에서 활활 타오르는 순간, 머뭇거리며 문이 열렸다. 

[에메랄드 성이 당신들을 환영합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어차피 시간도 없으니 잘됐다 싶었다. 

기회를 잡은 한수영이 감탄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역시 도로시.” 

“닥쳐. 나 여기 장난치러 온 거 아냐.” 

슬그머니 내 쪽으로 붙은 한수영이 [한낮의 밀회]로 속삭였다. 

―겁나 무섭네. 저게 사랑의 힘인가? 

허공에 강철검을 휘휘 그으며 전진하는 정희원. 본래도 타고난 패기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보니 그 기세가 정말 대단했다. 

―그런가 보다. 

탑의 내부는 심심했다. 딱히 눈에 띄는 장식물도 없었고, 말 그대로 필요한 것들만 배치되어 있는 정경이었다. 마치 이현성의 군용 배낭 속 같았다. 

그렇게 5분쯤 더 걷자, 알현실로 보이는 방이 등장했다. 우리는 바로 열고 들어갔다. 화려한 조명이 켜지며, 알현실의 중앙에 커다란 은빛 마스크가 떠올랐다. 우리 쪽을 응시하는 텅 빈 두 눈이 그곳에 있었다. 

[<김독자 컴퍼니>인가.] 

알현실 전체에 울려 퍼지는 강철의 진언.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저 자가 바로 이현성의 배후성인 설화급 성좌 ‘강철의 주인’이다. 아마도 상징체겠지. 

“그렇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쪽이 ‘구원의 마왕’이로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다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 은빛 마스크가 말했다. 

[방문한 목적이 뭐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건가.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현성의 영혼을 돌려주십시오. 소유권이 당신에게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왜죠?” 

[그의 영혼은 이 행성의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 

이건 예상 밖의 말이었다. 돌아보니 정희원이 나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배후성 계약이 원래 그딴 식이란 건 알고 있습니다만, 현성 씨는 우리 동료입니다. 당신도 우리 이야기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요.” 

[······.] 

“그리고, <오즈>는 이미 충분히 많은 거대 설화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현성 씨의 영혼을 동력으로 사용할 이유가 없을 텐데요?” 

『오즈의 마법사』는 지구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유명한 설화다. 요즘에야 많이 시들해졌다지만, 한때는 전 지구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야기. 

지구에서도 그 정도인데, <스타 스트림>에선 오죽할까. 결코, 동력이 부족할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강철의 주인’은 완고했다. 

[돌아가라. 영혼은 돌려줄 수 없다.]





< Episode 87. 강철의 심장 (2) > 끝

< Episode 87. 강철의 심장 (3) > 





“정 동력이 필요하다면 저희 쪽 설화와 교환하시죠. 동력으로 쓸만한 설화들을 공급해드리겠습니다.” 

[돌아가라고 했다.] 

역시, 뭔가 이상했다. 단순히 이현성을 동력으로 사용하려는 거라면, 내 제안에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미안하지만 영혼은 반드시 받아가야 하겠습니다. 곧 마지막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당신의 안위만 챙길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내가 격을 개방하자 ‘강철의 주인’은 당황한 듯했다. 

[감히 이곳 <오즈>에서 나와 대적하겠다는 것인가?] 

츠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알현실의 허공에 스파크가 튀었다. ‘강철의 주인’은 설화급 성좌다. 

그리고 원작에 따르면 이곳 <오즈>에 한해서 그의 격은, 

[그대들을 들여준 것만으로도 호의를 베풀었거늘······!] 

가히 신화급 성좌에 맞먹는다. 

쿠드드드드! 

행성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심장처럼 거칠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한수영이 창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김독자, 돌았어? 여기서 싸우면 어쩌자는······. 

나는 설화들을 개방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주력 거대 설화들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알현실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나는 거친 울림을 딛고 앞으로 나아갔다. ‘강철의 주인’이 외쳤다. 

[물러서라! 물러서지 않으면······!] 

역시나. 

나를 제압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있었는데도, ‘강철의 주인’은 경고만을 반복할 뿐 딱히 아무런 제재도 취하지 않았다. 

마치 겁쟁이 사자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대로 마스크를 관통해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알현실 뒤쪽의 벽면에 도달했다. ‘강철의 주인’이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벽면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다음 순간 허공에 홀로그램처럼 떠 있던 은빛 마스크가 사라졌다. 

“이봐, 원숭이.” 

뻥 뚫린 벽의 구멍 너머로, 겁에 질린 채 덜덜 떨고 있는 원숭이 한 마리가 보였다. 

“진짜 ‘강철의 주인’은 어디에 있지?” 

* 

잠시 후, 우리는 원숭이에게서 정보를 얻어냈다. 한수영이 말했다. 

“그러니까 ‘강철의 주인’은 여기 없다는 거네.” 

[이, 이런 짓을 하면 ‘강철의 주인’께서 네놈들을 용서······.] 

“진언 스위치 꺼. 진언 같지도 않으니까.” 

“······하실 것 같습니다.” 

시무룩해진 원숭이가 말했다. 

아마 이 원숭이는 ‘강철의 주인’의 심복일 것이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그는 성좌 행세를 하며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의 간접 메시지도 다 네놈이 보낸 거냐?” 

“그, 그렇습니다. 그래도 ‘강철의 주인’님의 의사를 적극 반영했습니다.” 

“의사를 반영해?” 

내 물음에 원숭이의 시선이 알현실의 가장자리를 향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강철검이 십자가처럼 꽂힌 제단이 있었다. 

나는 그 검의 외관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본래는 저 제단을 통해 주인님의 의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갑자기 소식이 끊어지면서······.” 

나는 제단의 강철검을 향해 손을 가져다 대었다. 찌릿, 하고 올라오는 느낌이 있었다. 그 느낌은 일전에도 겪은 적이 있었다. 

아주 희미하지만, 이것은 분명 다른 세계선과 맞닿아 있는 감각이다. 

그렇다면 ‘강철의 주인’은 다른 세계선의 존재란 뜻이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내가 알기로 ‘강철의 주인’은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양철 나무꾼’인데······ 혹시 다른 누군가가 ‘강철의 주인’의 성좌명을 약탈한 건가?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한수영이 물었다. 

“너네 행성이 이 모양이 된 것도 그거랑 상관있는 거냐?” 

“······그렇기도 하고, 관리 소홀 문제도 있습니다. 모든 설화들은 언젠가 쇠락하기 마련이니까요. <오즈>에 마법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이곳의 설화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알고는 계신 겁니까?” 

“몰라.” 

“<오즈>에는 이제 관광객이 오지 않습니다. 월평균 관광객 두 자리 수를 찍은 게 벌써 삼 년 전의 일이란 말입니다.” 

원숭이의 눈빛이 아련하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한때의 영광을 되새기는 것처럼. 

“한때 <오즈>는 <스타 스트림> 제일의 테마파크 중 하나로······.” 

정희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얘기 듣고 싶은 게 아냐. 그래서 현성 씨 영혼은 돌려줄 거야 말 거야?” 

“그, 그건 좀······.” 

“왜!” 

“그나마 관광객 두 자리 수가 유지되는 게 바로 그 ‘이현성’ 덕분이기 때문입니다.” 

“대체 뭔 소리야?” 

한참을 망설이던 원숭이가 말했다. 

“최근 들어 오래된 거대 설화들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 아십니까?” 

“거대 설화들의 영향력이 약해져······?” 

“<오즈>뿐만이 아닙니다. 기존에 거대 설화를 구성하고 있던 다수 설화들이, <오즈>와 비슷한 쇠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 

“왜지?” 

“최근에 떠오른 어떤 설화가, 다른 설화들의 지분을 잡아먹기 시작했으니까요.” 

고개를 든 원숭이가, 원망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당신들의 설화 말입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에메랄드 성에서 얻은 수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원숭이는 이렇게 말했다. 

―이현성을 데리고 가셔도 좋습니다. 대신, <오즈>의 홍보를 도와주십시오. 

어떻게 도와주면 되냐는 말에, 원숭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이현성이 있는 곳에 가 보시면 압니다.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였다. 

멀리서 더 이상 돌아가지 않는 관람차와 낡아 빠진 회전목마가 보였다. 완전히 망해버린 테마파크의 전형이었다. 

《오즈에는 마법사가 없다》 

본래 이게 테마파크의 이름이었나 보다. 제법 멋들어진 이름이었다. 

문제는 그 밑에 붙어 있는 부제였다. 

《하지만 이현성은 있다》 

―이현성 ‘기억 체험관’ 전격 오픈! 

―체험관 어딘가에 숨어 있는 이현성의 영혼을 찾아내시는 분께 소정의 상품을 드립니다. 

······이건 대체 뭐지? 

매표소로 향하자 우리를 기다리는 가격표가 있었다. 

* 입장권 4000코인 

* 자유이용권(50% 할인) 3000코인 

이건 그냥 자유이용권을 사라는 뜻이다. 

매표소 직원이 물었다. 

―몇 명 입장하십니까? 

“셋이요.” 

―화신은 한 사람당 3000코인. 성좌는 6만 코인입니다. 

······내가 방금 잘못 들었나? 

처음 당한 무자비한 차별에 넋이 나간 사이, 정희원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건 회사 돈으로 비용 처리 되죠? 임무잖아요.” 

“······물론입니다.” 

“화신 한 장 주세요.” 

가볍게 회사 카드를 긁어버린 정희원이 ‘기억 체험관’으로 입장했다. 내가 멍하니 있는 사이, 한수영도 앞으로 나섰다. 

“여기 화신 한 장―” 

“잠깐만.” 

“뭐야, 왜?” 

“할인 요금제가 있어.” 

나는 가격표의 옆에 작게 붙어 있는 문구를 가리켰다. 

* 성좌 X 화신 커플 할인권 출시! 

* 자신의 화신과 함께 방문한 배후성을 위한 커플 할인권입니다! 화신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을 쌓으며 달콤하고 아늑한 시간을 보내세요! 

문구를 모두 읽은 한수영이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수영이 물었다. 

“돌았냐?” 

“아무리 코인이 많아도 여기 쓸 코인은 없어.” 

이글거리며 나를 노려보던 한수영은 속으로 뭔가를 계산하는 듯 손가락을 셈하더니, 이내 가격표와 나를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뭐 줄 건데?” 

. 

. 

. 

“······두 사람 지금 뭐하는 짓이죠?” 

한수영과 나를 발견한 정희원이 말했다. 그럴 법도 한 게, 지금 우리는 똑같은 모양의 늑대 귀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해당 아이템은 ‘기억 체험관’에 머무르는 동안 벗을 수 없습니다.] 

[다른 성좌들에게 당신과 화신의 돈독한 관계를 과시하세요!] 

한수영이 뻔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데이트 알바 중이야.” 

“일단 현성 씨부터 찾죠.” 

원숭이의 말이 맞다면, 이 ‘기억 체험관’ 어딘가에 이현성의 영혼이 방목되고 있을 것이다. 대체 왜 이런 곳을 돌아다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시간도 있겠다. 우리는 차분한 마음으로 ‘기억 체험관’을 돌아다녔다. 

기억 체험관이란 게 대체 뭔가 싶었는데 곧 알 수 있었다. 

[이현성, 5.4kg의 초대형 우량아로 태어나다!] 

[5세 이현성, 왕따 당하던 친구를 구하다!] 

이곳은 이현성의 삶을 체험하는 곳이었다. 

[‘자유이용권’ 소지자만 입장할 수 있습니다.] 

[입장 시 빙의 체험이 시작됩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여기 들어가면 우량아의 기분을 알 수 있는 건가? 누가 이딴 걸 돈 주고 체험해?” 

테마파크는 놀이공원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우리는 각 체험관에 들어가 이현성 또는 이현성의 주변 인물에 이입하여 삶을 체험할 수 있었다. 정희원이 말했다. 

“우리가 유명해지긴 한 모양이네요. 이런 게 다 만들어지고.” 

“······저거 궁금한데?” 

우리는 어느새 홀린 듯 이현성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진짜로 성좌가 된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니 난 정말 성좌다. 

[17세 이현성, 콩닥두근 첫사랑에 실패하다!] 

정희원은 오랫동안 그 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들어가 보시려고요?” 

“아뇨.” 

우리는 계속해서 이현성을 찾아다녔다. 

이현성의 영혼은 특유의 설화 반응이 있다. 분명 근처에서 반응이 느껴지는 건 확실한데······. 

[이현성, 멸악의 심판자와 조우하다!] 

계속 돌아다니다 보니, 체험관 중에는 <김독자 컴퍼니>와 관련된 것들도 있었다. 

[순정강철 이현성! 멸악의 심판자를······.] 

정희원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우리는 열심히 정희원의 뒤를 쫓아갔다. 하지만 이현성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체험관 한 줄을 다 확인한 뒤 돌아서는데, 누군가가 그곳에 있었다. 이현성은 아니었다. 

“어? 아저씨?” 

여우 귀 머리띠를 쓴 이지혜였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내 질문에, 이지혜가 간단히 설명을 시작했다. 

유중혁과 유상아, 아이들을 데리고 대장간에 갔는데 설화금속이 다 떨어져 있었다는 이야기. 

허탈한 마음을 안고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이곳을 찾았다는 이야기. 

아이들의 보챔에 어쩔 수 없이 ‘가족 할인’을 받아 입장했다는 이야기까지······ 가족 할인? 

“네놈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돌아보니, 역시나 여우 머리띠를 쓰고 있는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유중혁은 나와 한수영을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 

“이현성의 영혼은 되찾았나?” 

“지금 찾으러 온 거야. 너야말로 설화 금속 안 찾고 여기서 뭐하는 거냐?” 

“대장간은 휴업 중이었다. 설화 금속이 다 떨어졌다더군.”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것도 같았다. 어쩌면 그것도, <오즈>의 거대 설화가 약화된 것과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멀리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유상아의 모습. 그리고 잠자리 날개를 연상시키는 머리띠를 쓴 신유승과 이길영의 모습도 보였다. 

“언니, 다음에는 저기 들어가 봐요! 저기!” 

“어머, 저긴 18세 이용가야.” 

졸지에 일행들이 다 모인 셈이 됐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다 같이 이현성을 찾는 편이 수고를 덜 수 있을 것이다. 

정희원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다들 이쪽으로 와봐요!” 

우리는 곧바로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 

그곳에, 다른 체험관보다 주의 사항이 유독 많은 체험관이 있었다. 

* 이 체험관은 만 18세 이상만 이용 가능합니다. 

* 가혹행위로 인한 빙의 체험자의 심적 고통이 뒤따를 수 있습니다. 

* 한국 출신 남성체 화신의 이용에 주의를 요합니다. 

나는 기억 체험관의 이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찾은 것 같군요.” 

틀림없다. 이현성 특유의 둔하고 느릿한 설화가, 이 체험관으로부터 분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 안에, 이현성이 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체험관의 이름을 확인했다. 

[실수로 탄피를 잃어버렸습니다]





< Episode 87. 강철의 심장 (3) > 끝

< Episode 87. 강철의 심장 (4) >





“현성이는 잘 할거야.”

“야,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페트병 다리에 묶고 3층에서 뛰어내려.”

“남들 다 가는 건데, 뭐. 사람 되어서 와라. ”

입대를 앞둔 누구나가 듣는, 그의 인생처럼 흔한 말이었다.

남들이 하는 대로 늘 따라가기 바쁘던 삶.

그는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이등병의 편지’를 불렀고, 훈련소까지 배웅해 줄 베프나 여자 친구도 없이 홀로 입대했다.

“53번 훈련병.”

“53번 훈련병 이현성!”

입대 초기까지만 해도 이현성의 군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큰 키와 잘 다져진 근육 덕분에, 대대장 훈련병으로 추천도 받았다. 대대장 선서를 계속 틀리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표창을 받고 훈련소를 수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훈련병은 조교 말이 장난 같습니까?”

어릴 적부터 자신이 둔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무얼 해도 남들보다 배우는 것이 늦었고, 상황 파악도 빠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럭저럭 이제껏 잘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태평하면서도 우직한 모습을 좋아해 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대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

“하필 저 새끼랑 같은 전우조야······.”

“덩치만 존나 커서는······.”

이런저런 모욕 속에서 이현성은 훈련병 생활을 견뎌냈다.

그렇게 훈련소를 수료했을 때, 그는 5분 안에 샤워를 끝내거나 1분 안에 침구류를 정리할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 되어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대 배치를 받는 순간이 찾아왔다.

입대 이후 줄곧 이현성이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입대하시는 분들께 꿀팁 드림. 자대 배치받으시면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Hot!) [812]

행군 때 쓸 깔창부터, 자대 배치를 받은 후 선임들의 사랑을 받는 방법까지. 입대 전날 인터넷에서 숙독한 군대 꿀팁은 그의 희망이었다.

동기 훈련병들이 하나둘 자대를 향해 떠났다.

마지막 남은 그를 데리러 온 사람은, ‘정 중사’라는 인물이었다. 작업모를 깊이 눌러 쓴 정 중사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넌 나랑 같이 간다.”

털털거리는 군용 트럭에 실려 어딘가로 향하는 동안, 이현성은 자신의 인생에 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앞으로 그가 보내야 할 2년 남짓한 시간과, 찾아올 시련들을 생각했다.

부대는 작은 산의 중턱에 있었다. 드디어, 본격적인 군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간부의 안내를 받아 간단한 신병 등록 절차를 마치고 생활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생활관의 문이 활짝 열리는 순간.

―무조건 이렇게 하셔야 됩니다.

이현성은, 인터넷에서 읽은 꿀팁을 실천했다.

“신병 받아라―!”

.

.

.

보통의 군대였다면 이현성의 군생활은 거기서 끝이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보통의 군대였다면.

이현성이 더플백을 허공에 던진 순간, 슬로우 모션처럼 주변의 모든 것이 느려졌다. 허공에서 천천히 풀려나는 더플백. 꼬질꼬질한 보급 속옷과 휴지, 훈련소에서 쓰던 비누 따위가 연발탄처럼 아주 천천히 산개하고 있었다. 거기다 자대 생활에 대한 희망에 부푼 이현성의 의기양양한 얼굴까지······.

마치 비극을 앞둔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씬 속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어떡하죠?

그러자 누군가가 대답했다.

―어쩔 수 없죠. 이게 현성 씨에요. 아무튼, 우리도 현실을 받아들입시다. 지난번엔 가혹행위 버전으로 실패했으니까, 이번 분기는 약속한 대로 선진병영 컨셉을······.

―시끄럽고 빨리 시작해라, 김독자.

―······그럼 다시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시 장면이 움직였다.

.

.

.

철퍼덕!

대포처럼 쏘아진 그의 더플백이 생활관의 바닥에 포탄처럼 터졌다.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은 분위기. 뒤늦게 그를 향해 꽂히는 선임들의 시선.

이현성의 등줄기로 서서히 식은땀이 맺혔다. 설마······ 뭔가 잘못된 건가?

그리고 다음 순간.

그를 데려온 정 중사가 빙긋 웃으며 박수를 쳤다.

“웃음 체조 시작! 하하하하하! 와아, 재밌다! 이렇게 신선한 데뷔는 처음인데!”

그러자 생활관 안의 선임들이 기다렸다는 듯 기립박수를 쳤다.

“신병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대단하군.”

드문드문 쏟아지는 박수 속에서, 이현성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다시 의기양양해졌다. 해냈다. 꿀팁이 옳았던 것이다. 정 중사가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중혁이 네가 맞선임이니까 잘 좀 챙겨줘.”

“······알겠습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 이현성은 자신을 대신해 바닥의 물건들을 정리하는 한 선임을 발견했다.

칼같이 각 잡힌 군복.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에 조각 같은 외모.

그의 가슴팍에는 일병의 약장과 ‘유중혁’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이 사람이 내 맞선임이구나.

그 순간, 맞선임의 무시무시한 눈빛이 그를 향했다.

“이, 이병 이현성!”

“네 자리는 이쪽이다.”

어느새 정리가 끝난 그의 짐들이 관물대 위에 놓여 있었다.

선임들이 그럴 줄 알았다며 감탄했다.

“신병 너 잘 보고 배워라. 중혁이가 우리 부대 에이스거든.”

선임들의 분위기만 봐도, 그의 맞선임이 어떤 존재인지는 잘 알 수 있었다. 각 잡힌 베레모와 침구류. 닿는 곳마다 빛이 나는 것 같다. 이 사람처럼 군 생활을 할 수만 있다면······.

“뭐야, 신병 들어왔어?”

입구 쪽에서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인지 땀에 젖은 얼굴. 얼핏 스쳐 간 병장 약장을 확인한 이현성이 황급히 경례를 올렸다.

“충성!”

“아, 너무 긴장하지 마. 됐어.”

이현성의 얼굴을 살피던 병장은 빙긋 웃더니 유중혁 일병 쪽을 돌아보았다.

“우리 중혁이 군생활 개 풀렸네? 벌써 맞후임 들어오고.”

이죽거리는 사내의 표정은 군인이라기엔 지나치게 희멀건 얼굴이었다.

왜일까. 그런 그를 보는 순간, 이현성은 가슴 한쪽 깊은 곳이 욱신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병사들이 소리쳤다.

“김독자 병장님! 근무 다녀오셨습니까!”

“오냐. 근데 중혁이는 왜 인사가 없냐.”

“······다녀······오셨습······.”

부들부들 떠는 유중혁 일병의 표정이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무서워서 그렇다기보단 분노로 일그러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유중혁 일병을 보며 어깨를 으쓱한 김독자 병장이 말했다.

“우리 분대에 온 걸 환영한다. 이현성.”

“이병 이현성!”

그것이 이현성과 분대장 김독자의 첫 만남이었다.

······어디까지나, 이현성의 기억 속에서는 그랬다는 뜻이다.

*

자대 배치 후 어느덧 2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이현성은 이 부대에 관한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가령 그가 소속된 분대의 실권을 가진 김독자 병장.

“알겠지? 유중혁 그 자식이 부조리하면 나한테 바로 말해.”

“이, 이병 이현성! 그런 일 없습니다!”

“아니, 그런 일 있을 거야. 너 이미 많이 당했다고.”

“······잘못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바로 옆에서 항상 솔선수범하며, 시도 때도 없이 김독자 병장을 노려보는 유중혁 일병.

“군화는 이렇게 닦아라.”

“이, 이병 이현성!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는 건 의미가 없다. 잘하는 게 중요하지.”

가끔 건강검진을 나온다는 간호장교 유 중위.

“음, 다리에 멍이 들었네요. ······의병제대 시켜버릴까?”

“이, 이병 이현성! 끄떡없습니다!”

“그럼 꿰매줄까요? 나 실 잘 다루는데.”

무심한 듯 꼼꼼한, 그러면서도 가끔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정 중사.

“······할 만해?”

“이, 이병 이현성!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돼. 늘 최선을 다하니까.”

모두, 어딘가 이상한 데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부대는 선진병영 문화를 이룩하기 위해!”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사람이 있다면.

“모든 병사는 개인 정비 시간에 반드시 웹 소설을 읽어야 한다. 웹 소설 읽기야 말로 개인 정비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바로 중대장 한 대위였다.

“이상! 곧 개인 정비 시간이다! 모두 웹 소설을 읽어라.”

“충! 성!”

그렇게 이현성의 꿈같은 군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현성은 모르고 있었다.

[현재 <김독자 컴퍼니>가 기억 체험관 ‘실수로 탄피를 잃어버렸습니다’에 도전중입니다.]

[해당 체험관의 난이도는 극상(極上)입니다.]

[현재까지 클리어 시도 횟수는 3회입니다.]

사실 그의 군 생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이 시나리오에 참가한 이는 총 다섯 명.

나, 유중혁, 유상아, 정희원, 그리고 한수영이었다.

참고로 우리가 받은 히든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았다.

+

<히든 시나리오 ― 탄피를 잃어버렸습니다>

분류 : 히든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화신 ‘이현성’이 자신의 기억 속에 갇혔습니다. 그의 트라우마를 해결하고 기억 속에서 그를 구출하십시오.

제한시간 : ???

보상 : 이현성 복귀, <오즈>의 인지도 강화로 인한 주요 보상품 수령 가능.

실패시 : <오즈> 멸망 가속화.

+

황당한 시나리오였다. 제한시간이 물음표로 표시된 것도 난감한데, 클리어 조건과 실패 대가는 더욱 당혹스러웠다.

정희원 중사님께서······ 아니, 정희원이 물었다.

“김독자 병장.”

“예.”

“다른 건 그렇다고 쳐요. 근데 대체 왜 우리가 실패하면 <오즈>가 멸망한다는 거예요?”

“가설은 둘입니다. 하나는 <오즈>의 인지도가 그만큼 떨어졌다는 거고······ 둘은, 어떤 물리적인 위기를 뜻하는 거겠죠.”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천공의 저편에서 가는 진동 같은 것이 울려 퍼졌다. 나는 이곳까지 우리를 쫓아오던 성운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녀석들이 본격적으로 침공을 시작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진동음을 들었는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이현성이 멀리서 뛰어오고 있었다.

“김 병장님!”

“어, 현성아.”

“북한의 습격인 것 같습니다!”

“괜찮아. 가서 쉬어.”

“충성!”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헤매던 이현성은, 이내 부대의 구석으로 가서 아직 외우지 못한 국군 도수 체조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런 이현성을 보던 정희원이 중얼거렸다.

“현성 씨 진짜 돌아올 수 있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노력해봐야죠.”

이미 3회차 시도였다.

1회차 때는 군대에 대해 잘 모르는 일행이 많았기에 실패했고(일행 중 군필자는 나뿐이었다), 2회차 때는 유중혁의 가혹행위로 인해 실패했다.

곁에서 인상을 쓰고 있던 유중혁이 말했다.

“답답하군. 이현성은 굴려야 빨리 깨어난다. 카이제닉스 때의 경험을 잊었나?”

“2회차 때 해봤잖아.”

“다시 하면 더 잘할 수 있다.”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을 텐데.”

“······.”

“누군가를 구한다는 게 그렇게 쉽게 될 리 없다는 거, 너도 알고 있잖아.”

3회차······ 어쩌면 1864회차나 되는 생을 거듭한 유중혁이다. 그러니, 사실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현성! 체조 순서가 틀렸다!”

······어쩌면 잘 모를 수도 있고.

질겁하는 이현성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는 유중혁.

나는 나란히 국군 도수 체조를 하는 두 사람을 보며 정희원에게 말했다.

“여기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되겠습니다. 유중혁도 상태가 이상해요.”

“······이상하다뇨?”

“군대도 안 가본 놈이 군대에 너무 잘 적응합니다.”

나는 광기에 가까운 절도로 도수 체조를 하는 유중혁을 보았다.

144회차의 유중혁은 이현성에게 ‘군대 설화’를 잘못 수혈받아 돌아버린 적이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 또 「미친 군인 유중혁」 따위의 설화가 만들어진다면······ 정희원이 말했다.

“적응 잘하면 좋은 거잖아요.”

“적응은 잘하는데, 선임인 저한테는 함부로 대하니까 문제죠. 요즘 군대 참 좋아졌습니다. 저 때만 해도······.”

“독자 씨는 그냥 중혁 씨가 군대 안 간 게 억울한 거죠? 중혁 씨는 면제였으니까.”

나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아무튼 그걸 제외하면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성 <오즈>의 인지도가 오르고 있으니까요.”

[현재 다수의 성좌들이 해당 시나리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독자 컴퍼니>가 또 기괴한 설화를 만들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비유의 채널에 입장객이 늘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행성의 바깥에서 우리를 노리는 성운들도 이 장면을 보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노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이 상황 자체를 이용하는 편이 나았다.

[해당 채널에 다수의 성좌들이 입장했습니다!]

[행성 <오즈>의 명성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화신 ‘이현성’과 관계된 새로운 설화가 발아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점은, 새로 입장한 성좌들은 내가 알던 성좌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우리엘, 제천대성, 심연의 흑염룡, 고려제일검······ 반가운 수식언들은 마치 썰물이라도 빠져나간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들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일부 성좌들이 화신 ‘이현성’의 복귀를 기대합니다!]

빨리 이 시나리오를 해결해야, 뭐든 알아볼 수 있을 텐데.

“꼭 해결할 필요가 있을까요.”

“예?”

정희원은 대꾸하지 않고 이현성 쪽을 바라보았다. 유중혁의 지도를 받는 이현성이 땀을 뻘뻘 흘리며 체조를 계속하고 있었다. 순서대로 잘 해냈는지, 끄덕이는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기뻐하는 이현성의 얼굴.

[등장인물 ‘이현성’이 행복해합니다!]

“늘 매뉴얼이니 어쩌니 해서, 난 현성 씨가 천생 군인인 줄로만 알았어요.”

나 역시 동감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멸살법’에서도, 이현성의 전사는 그렇게까지 상세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매뉴얼에 죽고 매뉴얼에 사는 사내 이현성. 그런 이현성이, 사실은 누구보다도 매뉴얼과 먼 사람이었다는 것.

이곳은, 이현성의 매뉴얼이 탄생한 세계였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이곳을 좋아합니다.]

힘없이 웃은 정희원이 서글픈 목소리를 냈다.

“저 사람 데려가려는 거, 어쩌면 우리 욕심인지도 몰라요.”

어쩌면 이현성은 <오즈>에 있는 게 더 행복할 수도 있다.

지옥 같은 시나리오를 헤매는 것보다, 그의 기억 속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쿠구구구·····.

다시 한번 굉음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정희원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채널 메시지가 연이어 떠올랐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채널에 입장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채널에 입장합니다!]

[성좌, ‘고려제일검’이 채널에 입장합니다!]

사라졌던 성좌들이 한꺼번에 채널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으려는 순간.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에게 위험 신호를······!]

츠츠츠츠츳.

[채널 내의 모든 간접 메시지 사용이 통제됩니다.]

간접 메시지가 끊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비유가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비유가 한 짓은 아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다시 한번 굉음이 울려 퍼졌다. 아득히 먼 곳에서 거대한 북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창공에 금이 가고 있었다.

쩌저저저적.

“······독자 씨.”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 Episode 87. 강철의 심장 (4) > 끝

< Episode 88. 신화급 성좌 (1) >





우리엘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우리 비유 어디 있니. 

성류 방송을 통해 <김독자 컴퍼니>의 지나간 설화들이 흘러나오고 있었음에도, 그것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근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낙천적인 우리엘의 머릿속도 복잡해졌다. 

특히 999회차 세계선에서 온 자기 자신을 만나고, 그 기억의 일부를 받은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나는 너의 유일한 동료다, 유중혁. 반드시 시나리오를 끝내고 네 원수를 갚겠다.」 

다른 세계선에도 자신이 존재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만 있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이 이렇게 다를 줄은 몰랐다. 

999회차의 세계선. 

그곳의 자신에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 짜증나네. 내가 궁금한 건 다른 세계선 얘기가 아니라고. 지금 우리 애들 설화 따라가기도 벅찬데.] 

우리엘이 머리를 감싼 채 투덜거렸다. 

안 그래도 최근 <스타 스트림>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마지막 시나리오가 다가올수록, 성좌들 사이에도 묘한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심지어 관리국이 이 세계선을 포기했다는 낭설까지 돌 정도였다. 

[<관리국>에서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님을 소환합니다!] 

[소환에 응하시겠습니까?] 

돌연 들려온 메시지에 우리엘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 

잠시 고민하던 우리엘은 일단 확인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눈부신 빛과 함께 그녀의 몸이 어딘가로 이동했다. 

[전송이 완료되었습니다.] 

전송된 곳은 낯선 공터였다. 

공터에는 그녀를 포함해 몇몇 성좌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뭐야, 가브리엘. 너도 왔어?] 

[관리국은 이런 거 거절하면 스팸 메시지로 계속 귀찮게 구니까.] 

주변을 보니 벌써 수십 명에 달하는 성좌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엘처럼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아무리 관리국이 깡패라곤 해도, 아무 이유도 없이 이들을 호출할 리가 없다. 

심지어 그들 중엔 익숙한 얼굴들도 있었다. 작은 키에 한쪽 팔에 칭칭 감은 붕대······. 

[오구오구, 우리 염룡이 아니야!] 

단박에 달려간 우리엘이 심연의 흑염룡의 머리에 헤드락을 걸었다. 

[큭! 적의 기습인가!] 

[나야 나. 대천사 누님.] 

[이것 놔!] 

우리엘의 품에서 버둥거리는 심연의 흑염룡이 기함을 했다. 

그 꼴을 보던 가브리엘이 중얼거렸다. 

[······우리엘, 그 녀석은 ‘절대악’이야.] 

[알 게 뭐야. 이제 <에덴>도 망해버렸는데. 다들 친하게 지내야지.] 

지난 ‘성마대전’을 마지막으로, 성운 <에덴>은 거의 멸절당했다. 강대한 대천사들의 군대는 대부분 전멸했고, 현재 활동 가능한 대천사는 우리엘과 가브리엘뿐이었다. 

우리엘은 씁쓸한 감상을 접어두고 다시 주변을 살폈다. 

[저거 고려제일검이잖아?] 

‘대머리 의병장’과 ‘조선제일술사’, ‘황산벌의 마지막 영웅’을 비롯한 한반도의 성좌들. 그리고 <올림포스>를 비롯한 다른 성운들의 성좌들과 수르야의 모습도 보였다. 

우리엘의 눈이 더욱 분주하게 움직였다. 

안면 있는 성좌들의 얼굴이 늘어날 때마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이곳에 모인 성좌들에게는,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간신히 우리엘에게서 벗어난 흑염룡이 중얼거렸다. 

[······모두 김독자의 채널에 있던 녀석들이군.] 

그 말이 맞았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파츠츳. 

그때, 우리엘의 기감에 위협적인 격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누군가가 이 공터 일대를 포위하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설화급 성좌에 육박할 만큼 강력한 격을 지닌 자들. 

눈치 빠른 우리엘은 금방 그들의 정체를 간파했다. 

[······<파피루스>에 <베다>, 그리고 <황제>라. 무슨 생각들이시지? 사이 안 좋은 당신들이 뭉치다니.] 

우리엘은 약간 긴장하면서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이렇게 많은 설화급 성좌들을 상대로 대적하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엉덩이 무거운 늙은이까지······. ‘마지막 시나리오’의 존재께서 웬일로?] 

틀림없었다. 아까부터 팔뚝에 오소소 돋은 소름이, 이 주변 어딘가에 있을 초강자의 존재감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무리 <스타 스트림>이 넓다고 해도 이만한 수준의 격을 지닌 존재는 손에 꼽았다. 곁을 보니 ‘심연의 흑염룡’의 표정도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틀림없었다. 이 존재는 

[모두 모였나?] 

완전한, 신화급 성좌. 

츠츠츠츠츠츠츳! 

진언이 들려온 순간, 주변의 공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허공을 떠돌던 산소가 모조리 발화하는 느낌이었다. 

주변의 성좌들이 비틀거렸고, 화염 저항력이 강한 우리엘조차 순간 얼굴을 찌푸릴 정도였다. 

······‘신화급 성좌’가 대체 왜 이곳에? 

명왕이나 메타트론, 제천대성과 같은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신화급 성좌’는 하위 시나리오에 간섭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결’을 완성하고 ‘단 하나의 설화’ 후보에 이름을 올린 자들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시나리오에 도착해, 자신의 설화를 보장받은 자들. 

[원숭이 놈과 명왕이 오지 않았군. 하지만 더 늦출 수는 없으니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잠깐만!] 

[성좌, ‘정오의 태양’이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를 응시합니다.]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엘은 그 진언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스타 스트림>에는 무수히 많은 ‘태양’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 중, 이 우주의 중심을 차지한 태양은 극히 드물다. 

특히나 시간의 중심인 ‘정오’를 차지하는 존재라면― 

[태양신 라. 당신이 우릴 부른 건가?] 

라. 그는 바로 거대 성운 <파피루스>의 최고 성좌였다. 

[그렇다.] 

[이상하네. 우릴 부른 건 ‘관리국’인줄 알았는데?] 

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기척 중에는 대도깨비의 것도 있었다. 

우리엘은 침착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만약 저쪽이 정말로 개연성 손실을 감수하고 관리국과 붙어먹었다면, 상황이 정말 좋지 않다. 

[그래, 관리국과의 유착관계를 드러낼 만큼 중요한 일이 뭔지 들어나 보실까?] 

[내가 너희를 부른 것은 ‘마지막 시나리오’ 때문이다. 곧 ‘단 하나의 설화’가 가려진다. 이 세계선을 대표할 단 하나의 이야기가 정해진다는 뜻이지.] 

단 하나의 설화. 

이곳에 있는 성좌들 중 그걸 모르는 이는 없다. 

왜냐하면 이들이 지켜본 <김독자 컴퍼니> 또한, ‘단 하나의 설화’를 만들어가는 성운이었으니까. 

[그래서?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너희들 중 대부분은 ‘마지막 시나리오’의 자격을 얻지 못했지. 하지만 나와 함께라면 다르다. 내가 너희를 ‘마지막 시나리오’에 함께 데려가 주겠다. 너희에게도, ‘단 하나의 설화’에 수식언을 올릴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다.] 

그 제안에 몇몇 성좌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주로 소속이 없는 위인급 성좌들이었다. 

가만히 라를 바라보던 우리엘이 피식 웃었다. 

[뭐야, 난 또 뭐라고. 일 없으니 됐어. 얘기 끝났으면 이만 간다.] 

그러나 돌아선 우리엘은 발을 내딛지 못했다. 

무언가, 아주 강력한 격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무슨 짓이지?] 

[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들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데.] 

우리엘의 진언에 뾰족한 날이 서 있었다. 

하필 다른 채널도 아니고, 채널 BY-9158의 성좌들만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을 부른 이는, 다른 곳도 아닌 <파피루스>의 최고 성좌. 

[지금, 우리보고 <김독자 컴퍼니>를 치자고 제안하려는 거잖아.] 

순간,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다. 라가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왜냐하면 그들은 ‘마지막 시나리오’의 자격을 갖췄으니까. 그리고 그들을 해치우면, 자연히 ‘단 하나의 설화’의 유력 후보 하나가 줄어들 테니까.] 

성좌들 사이에 파란이 일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싼 성좌들의 격이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엘이 코웃음을 쳤다. 

[성좌란 족속들은 정말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는구나. 그리고 라, 당신은 이미 마지막 시나리오에 도달한 주제에 하위 시나리오에 끼어드는 건 작작해. 제우스나 당신이나······.] 

[······.] 

[혹시 당신의 아이들이 걱정되는 거야? 당신의 설화를 이어받은 아이들이, 고작 신생 성운 하나 당해내지 못해서 ‘단 하나의 설화’ 후보에 들어가지 못한 게 화가 나는 거―] 

엄청난 폭발과 함께, 우리엘의 신형이 땅속 깊은 곳으로 처박혔다. 

욕설을 내뱉는 우리엘을 향해 라의 진언이 들려왔다. 

[■발, 무슨···.] 

[그래, 네 말이 맞다. 이것은 자식을 잘못 키운 부모의 분노다. 종막을 포기한 한심한 패배자들과 십 년도 채 되지 않은 애송이 성운 때문에, 자식들이 미래를 망치는 것을 볼 수 없는 부모의 정당한 분노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우리엘이 마주 외쳐댔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시네. 미안하지만, 여기 네 자식들 편들어 줄 성좌는 아무도 없어. 우리가 누구 채널을 보는 구독좌들인지 잘 모르는 모양이네.] 

흑염룡과 가브리엘이 손을 뻗어 우리엘을 구덩이에서 꺼내주었다. 

그 뒤로 고려제일검과 대머리 의병장을 비롯한 한반도의 성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 성좌들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우리엘은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지금 이곳에는 누군가의 설화를 한마음으로 응원하는 존재들이 모여있었다. 

첫 번째 시나리오였던 ‘자격 증명’에서부터 시작해 세계선의 운명을 결정할 ‘마지막 시나리오’에 이르기까지. 

이곳의 모두가 우리엘 자신과 같은 마음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이들 중 누군가는, 자신의 설화보다도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를 더 사랑할 것이다. 그녀가 그런 것처럼. 

[그래서 너희들이 패배자들인 것이다.] 

[뭐?] 

[관음에 정신이 팔려서 너희들 또한 시나리오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은 것이냐?] 

다음 순간, 허공에 강렬한 개연성의 폭풍과 함께 누군가가 나타났다. 

츠츠츠츠츳! 

강철의 외관을 가진 인형. 상처투성이의 설화급 성좌가 단단한 빛의 고리에 갇혀 있었다. 

[이 녀석은, 너희처럼 멍청한 설화를 응원했다.] 

우리엘은 멍하니 그 성좌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었던 성좌. 그럼에도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우리엘은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심지어 우리엘은 그와 몇 번인가 간접 메시지를 교환한 적도 있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고통에 몸을 움츠립니다.] 

강철의 주인. 

그는 화신 ‘이현성’의 배후성이었다. 

라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즈>에 가만히 있었다면 안전했을 것을, 이 녀석은 멍청한 설화를 돕겠다고 다른 세계선의 존재와 접촉했지.] 

[지금 무슨 짓을―!] 

[너희에게 선택지는 없다. 우리를 도와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를 끝장내든가, 아니면······.] 

그 말과 함께, 강철의 주인의 전신을 죄던 빛의 고리가 좁아지기 시작했다.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강철의 주인이 우리엘을 보았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자신을 죽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자신의 설화와 수식언은 이미 다른 존재에게 계승했다고 외칩니다!] 

점점 더, 고리가 좁아지고 있었다. 우리엘이 움직였다. 

그리고 

[성좌, ‘강철의 주인’이 이야기를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말합니다.] 

꽈드드득! 

맥없이 쪼그라든 강철의 주인의 몸에서 설화들이 터져 나왔다. 

설화급 성좌의 허무한 죽음. 

채널의 모두가 얼어붙은 것처럼 그 광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별의 죽음 앞에서, 라가 말하고 있었다. 

[아니면, 이처럼 죽든가.] 

광기 어린 외침과 함께, 우리엘이 자신의 격을 개방했다.





< Episode 88. 신화급 성좌 (1) > 끝

< Episode 88. 신화급 성좌 (2) >





쿠구구구구! 

깨진 유리처럼 하늘 곳곳에 검은 선이 갈라져 있었다. 

이현성은 여기저기 균열이 번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김독자 병장님, 정말 괜찮은 겁니까?” 

“······.” 

그 말에, 나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이유는 명백했다. 누군가가 바깥에서 <오즈>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존재들이. 

뒤를 돌아보자 일행들도 나를 보고 있었다. 유중혁, 한수영, 유상아, 정희원······. 

말하지 않아도, 우리의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괜찮아. 내가 괜히 병장인 줄 아냐? 넌 아무 걱정 하지 마.” 

* 

하늘이 부서지고 있다. 어떻게 이런 것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현성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군대라는 것은 원래 이런 곳인가? 

「김독자는 그저 가만히 미소했다.」 

정연한 문장처럼 떠오르는 미소. 

김독자 병장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중대장님도 괜찮다고 하실 걸.” 

실제로 얼마 뒤, 중대장은 연병장에 병사들을 모아 놓고 중대 발표를 실시했다. 

작은 체구에도 카리스마가 넘치는 그녀는, 특유의 표정으로 병사들을 둘러 보더니 입을 열었다. 

“중대장은 너희에게 몹시 실망했다.” 

뜻밖의 서두에 병사들이 긴장했다. 

“너희는 개인 정비 시간에 웹소설을 읽지 않았다.” 

이현성은 속으로 찔끔했다. 사실이었다. 어제만 해도, 그는 개인 정비 시간에 웹소설을 읽는 대신 유중혁과 국군 도수 체조를 연습했으니까. 

“그래서 중대장은 이만 이 부대를 떠나려고 한다.” 

뜻밖의 탈영 선언에 이현성은 망연해졌다. 

······떠난다고? 곳곳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현성.” 

정신을 차리자, 중대장이 그의 어깨에 손을 짚고 있었다. 

“이병 이현성!” 

중대장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반듯한 군복 위로 중대장의 관등성명이 적혀 있었다. 

대위 한수영. 그것이 그녀의 직책과 이름이었다. 

「“언제까지 얼빠져 있을 거야? 빨리 안 움직여? 김독자 뒈지는 거 보고 싶냐?”」 

왜일까. 순간 찌릿한 느낌과 함께 이상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뭐지? 방금 그건······. 

“또또 얼빠져 있네.” 

“이, 이병 이현성!” 

중대장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이현성을 바라보더니, 뺨을 탁탁 두들기며 말했다. 

“책 열심히 읽어. 넌 바보라서 책 많이 봐야 돼. 그래야 오래 살아.”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후, 한수영 중대장은 부대를 떠났다. 

* 

한수영 중대장이 떠난 후 이틀이 지났다. 

하늘의 균열은 여전히 커져 가고 있었다. 마치 멸망하는 세계의 전조라도 보는 것 같았다. 

“이현성. 체조는 다 외웠나?” 

돌아본 곳에 맞선임 유중혁 일병이 있었다. 

“이병 이현성! 완벽하게 외웠습니다!” 

“생활관 물통은 채워 뒀고?” 

“2L 딱 맞춰서 채웠습니다!” 

사나운 유중혁의 눈빛 앞에서, 이현성은 괜스레 주눅이 들었다. 

실수한 게 없는데도 그랬다. 

“병영 생활 행동강령은?” 

“이, 이병 이현성! 그건 아직······!” 

말해놓고서 아차 싶었다. 또 혼나겠구나 싶었다. 침을 꿀꺽 삼킨 이현성이 질끈 눈을 감는 순간, 유중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방 외울 수 있을 거다. 짧으니까.” 

“······예? 아, 잘못 들었습니까? 아니, 다!” 

이건 무슨 상황일까. 무려 두 번이나 연속으로 실수했음에도, 유중혁은 그를 질책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보는 유중혁의 눈동자는 더 이상 사납지 않았다. 

“나는 내일부로 전출을 간다.” 

“······잘못 들었습니다?” 

“이현성, 모든 것을 매뉴얼화 할 수는 없다. 언제나 너를 도와줄 맞선임이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 

왜일까. 

돌아선 유중혁 일병의 등이 왜 이렇게 익숙한 것일까. 

“매뉴얼이 없어도 선택해야만 할 때도 있다.” 

그것이 유중혁 일병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 

중대의 인원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었다. 한수영 중대장, 유중혁 일병, 유상아 중위가 차례로 사라졌고, 어느새 정신을 차렸을 때 중대의 최고 지휘관은 부사관인 정희원 중사가 되어있었다(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이현성은 긴급 상황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점호를 마친 이현성의 일과는 정희원 중사와 부대의 시설물들을 관리하거나, 김독자 병장과 병영 문고에 가는 것이었다. 

“요즘 군대에도 무협지가 있네. 와, 이거 진짜 오래된 책인데.” 

김독자는 책을 좋아했다. 사실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하루 종일 책만 보는 인간이었다. 

이현성은 그런 김독자의 옆에 앉아 신나게 페이지를 넘기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너도 읽을래?” 

“어, 저, 저는······.” 

채 답변을 하기도 전에, 다시 한번 하늘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김독자의 표정이 희미하게 굳어졌다. 

나흘 전 저 굉음이 처음 들려왔을 때 한수영 대위가 사라졌고, 이틀 전 두 번째로 굉음이 들려왔을 때 유중혁 일병이 사라졌다. 

이현성은 불안해졌다. 

“김독자 병장님.” 

“응.” 

“혹시 김독자 병장님도 떠나실 겁니까?” 

사람들은 그를 떠난다. 

그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어 버린다. 

김독자가 이현성을 향해 싱긋 웃었다. 

“그렇겠지. 난 병장이잖아. 빨리 전역해야지. 말뚝 박을 생각은 전혀 없어.” 

“······그렇습니다.” 

“너도 얼른 나가고 싶지?” 

나가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려던 이현성의 눈에, 돌연 창밖의 철조망이 눈에 들어왔다. 무척이나 튼튼하고 위험해 보이는 철조망. 

왜일까, 이제는 저 철조망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무서웠다. 

“저는······.” 

저걸 함부로 넘다가는 분명 다치고 말겠지. 하지만 안에만 있다면, 저 철조망은 그를 지켜주는 보호막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현성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무너지는 하늘. 저 밖에는 그가 모르는 세계가 있다. 

그곳에는 병영 생활 행동 강령이나 국군 도수 체조가 무의미한 세계가 있다. 

고개를 들자 김독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를 달싹이던 김독자가 다시 한번 능청스럽게 웃었다. 

“나가고 싶으면 책 봐, 책.” 

“······책을 많이 읽으면 복무 기간이 줄어듭니까?” 

그 말에 김독자가 입술을 비죽이더니 말했다. 

“책 보고 독후감 쓰면 휴가 정도는 탈 수 있지.” 

독후감? 

“이번에 사단에서 독후감 공모전 하잖아. 그거 읽고 응모해. 당선되면 포상 휴가라고.” 

김독자가 가리킨 게시판에 병영 공모전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이현성은 그런 것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그렇구나. 독후감. 그런 것을 쓰면, 포상 휴가를 나갈 수가 있구나. 

“다 쓰면, 나한테도 꼭 들려주고.” 

김독자 병장이 사라진 것은, 다음 날 아침 점호가 끝난 직후였다. 

* 

“우리 둘만 남았는데 일과는 무슨 일과야.” 

투덜거리는 정희원 중사의 목소리. 

이현성은 머쓱하게 웃으며 부대 인근의 잡초들을 뽑았다. 

“혹시나 모르잖습니까. 중대장님이 돌아오실 수도 있고······.” 

정희원은 벤치에 앉아 턱을 괸 채, 신기한 짐승이라도 관찰하듯 이현성을 바라보았다. 

“넌 여기가 좋아?” 

평소의 정희원 중사라면 쓰지 않았을 말투. 그럼에도 그 말투는, 이현성에게 묘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곧바로 솔직해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좋지도 싫지도 않습니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곳. 

그곳이 바로 ‘군대’에 관한 이현성의 정확한 감상이었다. 

“다만, 여기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맞다. 

그래서 그는 군대를 택했던 것이다. 

이곳에 있는 동안 그는 세계를 잊을 수 있었다. 취업이나 학업, 타인들의 시선이나 세속적인 문제들, 집안사, 그가 무슨 짓을 해도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고민들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최근에는 사실, 조금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이 좋았던 것일까. 잘 표현할 수가 없었다. 

「“좋아합니다.”」 

어째서, 이렇게나 가슴이 아픈 것일까. 

그를 마주보던 정희원 중사가 말했다. 

“그럼 여기에 있어, 이현성.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잘못 들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잘못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네 세계를 지켜줄게.”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눈부신 빛이 허공에서 쏟아졌고. 

정희원 중사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쿠드드드. 

어느새 하늘의 균열은 하늘의 절반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렇게 이현성은 혼자 남았다. 

* 

이게 뭘 하는 짓일까. 

정말 여기가 군대가 맞는 걸까. 

내가 아는 군대는······. 

아무도 없는 부대를 지키며, 이현성은 하던 일과를 반복했다. 정해진 시간에 눈을 뜨고, 구보를 하고, 국군 도수 체조를 했다. 그리고 홀로 정신교육을 마친 뒤 일과를 시작했다. 

하지만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어제부로 부대 내의 잡초도 다 뽑아 버렸다. 

“···독후감.” 

뒤늦게 이현성은 김독자의 말을 떠올렸다. 

독후감을 쓰라고 했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라고. 

이현성은 병영 문고로 올라갔다. 한때 그곳에 김독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 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이현성은 묘한 감정의 반향 속에 더미의 제일 위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익숙한 책이었다. 

『오즈의 마법사. ver 999』 

언젠가 제목을 들어본 적이 있는 책. 

그러나 한 번도 제대로 읽어 본 적은 없는 책이었다. 

이현성은 일단 책을 펼쳐 첫 문장을 읽었다. 

「양철 군인은 마음을 갖는 것이 두려웠다.」 

양철 군인이라. 오즈의 마법사의 주인공인가 보군. 

이현성은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겼다. 

「양철 군인이 처음 만난 동료는 아주 무서운 사내였다. 양철 군인은 그 사내를 ‘대장’이라고 불렀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대장? 

「양철 군인은 아름다운 천사와 동료가 되었다. 그 천사는 화가 날 때면 종종 악마로 변하곤 했다.」 

어째서인지 그 문장을 보는 순간 가슴이 아렸다. 

「양철 군인은 두터운 갑옷을 입은 무사와 동료가 되었다. 무사는 자신의 검으로 양철 군인의 강도를 종종 시험하곤 했다.」 

왜, 당장이라도 눈앞에 그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을까. 

「양철 군인은 무서운 불을 뿜는 용을 동료로 맞이했다. 용은 가끔 천덕꾸러기 같았다.」 

나는 한 번도 이런 존재들을 만난 적이 없는데. 

「그리고 다른 세계에서 온 마왕이, 그들의 소중한 것을 앗아갔다.」 

문장을 넘길 때마다 아비규환과 비명의 정경이 스쳐 갔다. 잘 알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럼에도 이현성은 전신이 떨려왔다. 

모르겠다. 이 이야기가 뭔지.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이 뭔지, 전혀 모르겠다. 

그럼에도 왜 눈물이 날 것 같은지, 그것도 모르겠다. 

「이야기의 끝에서, 양철 군인은 자신의 마음이 아픔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아픔이, 곧 그의 심장이 되었다.」 

그 문장을 떠올리는 순간, 이현성은 떠올렸다. 

내게도 분명 이런 전우들이 있었다. 

「“이 모든 비극이 끝난 후 우리의 이야기가 더 이상 시나리오가 아니게 될 때, 현성 씨의 이야기를 꼭 듣고 싶군요.”」 

첫 번째 전우는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모두가 그를 따랐다. 

「“그때까지 아무도 다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해요.”」 

두 번째 전우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모두가 그녀의 말이 옳다고 믿었다. 

「“아니, 한 사람 죽더라도 모두가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하지. 물론 그 ‘한 사람’은 김독자여야 돼. 어차피 그놈은 어떻게든 살아날 테니까.”」 

세 번째 전우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모두 그녀가 짠 작전이 성공할 거라 생각했다. 

「“아무도 죽는 사람은 없다. 여긴 내게 맡기고 가라.”」 

네 번째 전우는 강인한 사람이었다. 모두가 그에게 등을 맡길 수 있었다. 

「“있잖아요, 현성 씨. 만약 내가 현성 씨를 잊게 되면.”」 

그리고 다섯 번째 전우는······. 

「“날 죽여줘요.”」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심장이 뛰고 있었다. 느릿하지만 분명한 감각으로, 내가 그렇게 아프다고, 그곳에 그런 아픔이 존재한다고 역설하듯 한 번 한 번 최선을 다해 뛰고 있었다. 

어떻게 이들을 잊을 수 있을까. 

주먹을 불끈 쥔 이현성의 몸이 떨렸다. 이곳에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현성은 창밖의 하늘을 보았다. 이제 하늘의 균열은 창공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일행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명백했다. 

그들은 자신이 존재하는 이 세계를 지키러 간 것이다. 

북한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재앙과 맞서면서. 

「이현성은 생각했다. ‘내게도 그런 힘이 있을까.’」 

[성좌, ‘강철의 주인’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의 배후성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츠츳, 츠츠츳. 

그런데, 뭔가가 평소와 달랐다. 

분명 그의 배후성일진대, 이제껏 그가 느끼던 시선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아프냐고 묻습니다.] 

이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감정을, 이 마음을 지키고 싶다.」 

두려웠다. 이 순간을 또 잊게 될까 봐. 또 자신의 심장이 멈출까 봐. 모든 것이 차가운 은빛 속에서 얼어붙게 될까 봐. 

그러자 그의 배후성이 말했다. 

【너는 지킬 수 있다.】 

마치, 수만 년의 세월 동안 담금질한 강철 같은 목소리. 

【하지만 지키지 못한 대가로, 영원을 고통 속에 살아갈 수도 있다.】 

“그래도 좋습니다. 지킬 기회조차 없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이미 잃어버리는 것엔 익숙하다. 

중요한 것은, 다시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네 이름은 강철검제다.】 

멀리서 철조망이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그가 지켜온 매뉴얼의 세계가 스러지고 있었다. 

이현성은 자신의 이야기를 향해 걸어 나갔다. 

* 

“독자 씨.” 

우리는 부서지는 <오즈>를 지키고 있었다. 

강철의 주인, 그리고 『오즈의 마법사』의 설화가 쇠퇴하면서 <오즈>의 대공 방어 체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오즈를 둘러싼 수백 척의 전함이 보였다. 일행들은 체력을 분배해가며 구멍 뚫린 행성을 지켰다. 

하지만 이제 슬슬 그것도 한계였다. 

저쪽은 전함을 통한 장거리 공격이 주력. 그에 가장 효율적으로 대비할 방법은 이지혜의 [터틀 드래곤]과 신유승의 [키메라 드래곤]이 전부였다. 

문제는 이지혜의 함선도 신유승의 [키메라 드래곤]도 아직 ‘성마대전’에서 부서진 채 온전히 수리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인데. 

“곧 대공 방어가 무력화 돼요!” 

우리는 마지막 결전을 준비했다. 

정희원이 물었다. 

“다른 성좌들은 아직도 연락이 없나요?” 

“아무래도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를 습격한 저들과 관계되어 있을 수도 있다. 

한수영이 투덜거렸다. 

“진짜로 후회 안 하냐? 우리 이래도 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늘 최전방에서 검을 받아낸 건 이현성이었어. 이제 우리가 갚을 차례야.” 

다른 일행들도 동의했다. 

유중혁은 이미 행성의 가장 높은 고층 빌딩에 올라가 있었고, 정희원은 누구보다 강대한 격을 내뿜으며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이현성을 믿는다.」 

우리가 얼마나 시간을 벌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 시간이 이현성에게 충분한 시간이길 바랄 뿐이다. 

“온다!” 

콰아아아아앙! 

멀리서 수백 척의 전함이 동시에 불을 뿜었다. 행성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양의 마력탄. 

우리는 모두 설화를 전개했다. 어떻게든 이번 일격을 견뎌내야 한다. 

모든 마력을 모아―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아득한 은빛이, 세계를 덮었다. 

천공에 펼쳐진 드넓은 설화 금속의 방벽. 반투명한 장벽의 너머로 무력화된 함선의 포화가 터져 나가고 있었다. 

“그런 곳에 혼자 남겨지는 건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오즈의 마법사』의 설화가 아니었다. 

어딘가 근원 부터가 다른, 새로운 종류의 설화. 

「그 세계에서 그는 강철검제라 불리었다.」 

콰콰콰콰콰!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행성 전체를 덮은 증기. 마치 거대한 나무가 가지를 뻗듯 자라난 금속들이 행성의 표면을 덮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 저 무시무시한 신화급 성좌들의 병장기를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설화금속. 

[다수의 성좌들이 설화의 스케일에 경악합니다!] 

그 금속으로, 행성 전체를 덮을 정도의 성흔. 

저것이 바로 행성 <오즈>가 자랑하는 대공 방어 체계, [최후의 강철]이었다. 

“대괴수 특작 사령부 산하, 대위 이현성.” 

유중혁보다도 더 큰 키. 

내가 아는, 가장 단단한 몸집의 사내. 

“금일,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창공의 별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성운 <파피루스>의 성좌들이 ‘강철의 주인’의 생존에 경악합니다!] 

바야흐로, 반격의 시간이었다.





< Episode 88. 신화급 성좌 (2) > 끝

< Episode 88. 신화급 성좌 (3) >





[당신은 대도깨비가 되었습니다.] 

[대도깨비의 ‘최종 투표’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메시지를 보며, 비형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도깨비 왕을 만난 직후 비형의 모습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는 이제 바람처럼 완전한 인간형의 모습이었다. 어깨를 덮은 백호의 가죽과 노랗게 돋아난 세 개의 뿔에서 느껴지는 설화의 힘. 

그는 이제, 완연한 ‘대도깨비’가 되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바람님.] 

[그들에게 갈 셈이겠지?] 

비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이 말했다. 

[모든 도깨비는 최후의 때가 오면 자신의 마지막 이야기를 선택해야 하지. 설령 그 이야기를 이야기하다가, 자신이 죽게 되더라도 말이야.] 

[······.] 

[자네가 택할 그 ‘이야기’는 승리할 확률이 매우 낮아.] 

[압니다.] 

[심지어 그들은 다수의 대도깨비와 관리국을 적으로 돌려버렸네.] 

[그것도 압니다.] 

이 <스타 스트림>에서 관리국의 적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도깨비는 없다. 

[그래도, 저는 그 이야기로 세계의 마지막을 보고 싶습니다.] 

비형은 자신의 마지막 설화를 선택했다. 

* 

“독자 씨.” 

“포상 휴가 나오신 겁니까?” 

“짓궂으십니다. 휴가가 아니라 전역이라 말씀드렸는데.” 

“진짜 전역이요?” 

“예.” 

이현성이 환히 웃었다. 

“이제 저 군인 안 할 겁니다.” 

나는 이현성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은빛 설화를 지켜보았다. 

어떤 소설은 첫 문단만 읽어봐도 감이 오는 것처럼, 설화도 그렇다. 

「결연한 은빛. 오랜 세월에 걸쳐 단련된 견고한 의지.」 

‘환생자들의 섬’에서 일권무적 유호성은 말했다. 어떤 설화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 설화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하지만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설화를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각자 나름의 해석을 내놓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저것이 바로, 이현성이 내놓은 해답일 것이다. 

[설화, ‘강철의 지배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강철의 주인’이 가진 핵심적인 설화. 마침내 저 설화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드디어 이현성이 [강철화]의 최종 단계에 도달했다는 뜻이었다. 

“독후감은 못 썼지만, 독자 씨가 책을 읽어보라고 한 이유는 이해했습니다.” 

이현성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건 혹시 999회차 세계선의 이야기입니까?” 

나는 조금 놀랐다. 설마 이현성이 거기까지 생각할 줄이야.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오즈의 마법사』로 둔갑해 있었다는 건······.” 

내가 알기로 <오즈>의 근원 설화는 『오즈의 마법사』다. 

그런데, 그 근원을 이루는 설화가 바뀌었다. 

그것도, 999회차의 이야기로.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불분명했지만, 짐작이 가는 것은 있었다. 어떤 설화의 근원이 바뀌었다는 게 뜻하는 바는 명백하니까. 

[화신 ‘이현성’의 배후성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전이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미묘하게 바뀐 시선. 

내가 알던 ‘강철의 주인’의 아우라가 아니었다. 

나는 제단이 있는 에메랄드 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의 알현실에서 본 거대한 강철검을 떠올렸다. 

“현성 아저씨!” 

탑 아래쪽에서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일행들이 달려왔다. 

“현성 아저씨! 괜찮으세요?” 

방방거리는 신유승과 이길영이 이현성의 손을 꼭 붙잡았다. 

한발 늦게 달려온 유중혁이 중얼거렸다. 

“무사히 전역한 모양이군.” 

유상아와 한수영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전역 축하해요.” 

“중대장 또 필요하면 불러.” 

마지막으로 달려온 이는, 가장 멀리서 적의 공습에 대비하고 있던 정희원이었다. 십여 미터 정도 남겨 두고 멈춰선 정희원은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며 이쪽을 보고 서 있었다. 

이현성이 미소지었다. 

“희원 씨.” 

나는 이쯤에서 자리를 피해줘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거기! 감동적인 해후는 나중에 해! 아직 끝난 게 아니란 말야!” 

창공에서 [터틀 드래곤]을 소환한 이지혜가 외쳤다. 

이지혜의 말이 맞았다. 아직 행성 외부의 성운들은 전열을 물리지 않았다. 아니, 물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은 전함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개중에는 행성 파괴, 성운전을 목적으로 제작된 대전함들도 보였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그냥 두지 않습니다.” 

든든한 이현성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실제로 지금도 외부 폭격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오즈>의 방벽은 끄떡도 없었다. 이미 말했다시피 <오즈>에서 ‘강철의 주인’의 설화 역량은 신화급 성좌에 준하는······. 

치이이익······. 

어디선가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가 타는 듯 고약한 냄새가 났다. 

고개를 들자, 불투명한 강철막의 한쪽 방위가 용접이라도 하는 듯 눈부시게 발광하고 있었다. 

무언가가, 이현성의 강철을 녹이고 있었다. 

[성좌, ‘정오의 태양’이 행성 <오즈>를 응시합니다.] 

순간 이현성의 몸이 빳빳이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우리를 대신해 행성 전체를 감싼 그는, 저 시선의 격에 그대로 노출된 것이다. 

신화급 성좌에 준한다고 해서, 정말 신화급 성좌와 같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이현성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성운의 개연성을 나눠 받은 이현성의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조금 강해졌다고 해서 혼자 싸워서는 안 된다. 

저들이 성운이듯, 우리 또한 성운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거물이 직접 왕래한 것 같군요.” 

‘정오의 태양’이라면 나도 알고 있는 수식언이었다. 본래라면, 이곳에 절대 올 수 없는 존재. 그는 무려 성운 <파피루스>의 최고 성좌였다. 

그리고 그가 직접 이곳에 왔다는 것은, 

[성좌, ‘정오의 태양’이 자신의 의지를 <스타 스트림>에 드러냅니다.] 

더이상 그들의 속내를 숨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성운 <파피루스>가 성운 <김독자 컴퍼니>에게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단 하나의 설화’ 후보에 등재된 두 성운이 충돌합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메시지에, 일행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뭔가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성운 <파피루스>가 성운 <김독자 컴퍼니>에 성운전을 선포합니다.] 

<스타 스트림>에서 거대 성운이 공식 전쟁을 선포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왜냐하면 성운전은 서로에게 좋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공식 전쟁을 선포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제한된 메인 시나리오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해당 시나리오는 ‘단 하나의 설화’ 후보에 등재된 성운들에게만 발송됩니다.] 

+ 

<메인 시나리오 # 98 ― 후보 결정전 (제한)>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단 하나의 설화’에 등재된 모든 성운들은 지금부터 자유로운 성운전이 가능해집니다. 패널티 없는 선전포고 및 전쟁 선포가 가능해지며, 성운 간의 자유로운 동맹 및 지원 또한 허용됩니다. 

후보 결정전에 승리할 경우 <스타 스트림>의 주목을 받게 되며, ‘단 하나의 설화’에 선출될 가능성이 상승합니다. 

제한시간 : ― 

보상 : 성운 인지도 상승. 성운전과 관련된 신화급 설화 획득. 

실패시 : 성운 인지도 감소. 최종 시나리오 자격 박탈. 

+ 

······역시나. 

[현재 당신의 성운은 <파피루스>와 전쟁 중입니다!] 

[적대 세력의 수장을 물리치십시오.] 

[해당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승점이 적립됩니다.] 

긴장한 일행들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강대한 적의가 행성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성운 <파피루스>를 노려봅니다.] 

지금껏 우리는 몇 번이나 다른 거대 성운들과 싸워본 적이 있었다. 

<기간토마키아>에서는 <올림포스>와 싸웠고. 

『서유기 리메이크』에서는 <황제>와 대적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기간토마키아> 때는 개연성 제약이 커서 성좌들이 제힘을 발휘할 수 없었고. 

『서유기 리메이크』때는 ‘제천대성’과 심사위원들이 우리에게 힘과 개연성을 빌려주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지금, 우리를 도와줄 성운은 있는가.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일행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모두 결심을 마친 얼굴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제부터 우리가 싸울 전장이 어디인지를 너무나 잘 아는 눈빛들이었다. 

“갑시다.” 

누구도 우릴 도와주지 않아도 좋다. 

나는 창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린 이제 약하지 않습니다. 하늘을 열어주세요, 현성 씨.” 

이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신 ‘정희원’이 ‘심판의 시간’의 발동을 요청합니다!] 

정희원이 먼저 칼을 빼 들었다. [심판자의 검]에 신살의 기운이 감돌았다. 

[화신, ‘이현성’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일행들의 병장기 위로 이현성의 강철이 덧입혀졌다. 

일행들을 지키기 위한,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맹세. 

[화신 ‘이지혜’가 심판에 찬성합니다.] 

이지혜의 [터틀 드래곤]위로 은빛의 설화 금속이 내려앉았다. 

[화신 ‘신유승’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화신 ‘이길영’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역시나 은빛으로 물든 키메라 드래곤이 포효하며, 두 아이가 날아올랐다. 

[화신 ‘유상아’가 심판에 찬성합니다.] 

유상아의 주변으로 은빛 강철을 머금은 연화대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화신, ‘한수영’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어느새 붕대를 풀어헤친 한수영이, 붕대 끈으로 자신의 머리를 묶었다. 

[화신 ‘유중혁’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초월좌의 격이 담긴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차가운 검광을 발했고. 

[성좌, ‘구원의 마왕’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았다. 

. 

. 

. 

[‘심판의 시간’이 발동합니다!] 

새카만 밤하늘이 열리는 순간, 일행은 이지혜의 함선을 타고 창공으로 도약했다. 

가까워지는 적의 함대. 적어도 육백 척 이상은 되어 보이는 함대 앞에서, 우리는 각자 병장기를 쥐었다. 

「그것은 김독자가 아주 오랫동안 그려온 정경이었다.」 

제일 먼저 뛰쳐나간 정희원의 검격이 쏟아졌다. 

멸망의 심판자 정희원. 

내가 아는 가장 강력한 혼돈의 검사. 

쿠구구구구구! 

콕핏부터 엔진까지 정면으로 꿰뚫린 대함선에서 폭음이 일었다. 곧이어 선체 곳곳에서 크고 작은 폭발이 일더니 그대로 균열이 번졌다. 탑승한 성좌들이 탈출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지혜의 [터틀 드래곤]이 강습을 시도했다. 

콰아아아앙! 

폭발을 정면으로 돌파한 함선에는 상처 하나 남지 않았다. 이현성의 설화 금속이 모두를 보호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지혜가 앞으로 나섰다. 단 한 척으로 백여 척의 함대를 거꾸러뜨릴 수 있는 대군전 최강의 화신. 

해상제독 이지혜가 발포를 명령했다. 

“아저씨, 가요!” 

그 포화의 꼬리를 물고 신유승의 [키메라 드래곤]이 나섰다. 

이 전쟁은 수장을 쓰러뜨려야만 끝난다. 그러니 구성원의 숫자가 적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속전속결. 

비스트 로드 신유승. 

충왕 이길영. 

내가 아는 가장 완벽한 테이머들이 길을 뚫었다. 신유승의 통제를 받는 [키메라 드래곤]의 브레스가 중형 함선들을 격추시켰고, 틈새를 비집고 날아드는 수십 척의 소형 함선들을 이길영의 벌레들이 상대했다. 

“어딜!” 

소형 함선의 엔진으로 기어들어간 벌레들이 대폭발을 일으키자, 한순간 전장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더이상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설화급 성좌들이 하나둘 전함에서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화신, ‘유상아’가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설화, ‘만다라의 시간’이 발동합니다!] 

유상아가 설화를 발동하는 순간, 적측 성좌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나는 깜짝 놀랐다. 유상아가 석존의 힘을 일부 계승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권능이 가능할 줄은 몰랐다. ······무려 시공간의 흐름을 통제하는 능력이라니. 

“오래는 못 끌어요.”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유상아가 벌어준 시간을 딛고, 나와 유중혁, 그리고 한수영이 밤하늘을 달렸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김독자 컴퍼니>를 지켜 준 두 개의 거대 설화. 

지금까지 우리는 이 두 설화를 주력으로 싸워왔다. 

설화의 아우라가 유성우의 꼬리처럼 남았다. 우리가 지나간 우주로 별자리들이 새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적들도 만만치 않았다. 수백 척의 전함들을 지나쳤음에도, 여전히 수백의 성좌들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주눅들면 그들의 격에 압살 되어버릴 게 분명한 싸움. 

[성운 ‘파피루스’가 거대 설화의 격을 개방합니다!] 

이것이 성운 대 성운의 싸움이었다. 

“이제 내 차례야.” 

본래 한수영의 자리는 망상악귀 김남운이 있어야 할 자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사라진 녀석의 몫을 충분히 해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마침내 우리의 세 번째 거대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디선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묵시룡의 울음. 

성마대전에 참가했던 <파피루스>의 성좌들이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이, 이건······!] 

「무대화」와 함께 하늘이 빛과 어둠의 세계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세계의 중심을 꿰뚫고 한수영의 신형이 날아올랐다. 

등 뒤에 활짝 펼쳐진 ‘심연의 흑염룡’의 날개. 

나를 구하기 위해 날아왔던 그때처럼, 한수영의 양손에서 빛과 어둠의 폭풍이 몰아쳤다. 

콰아아아아아! 

우리는 그 설화의 폭풍 위에 올라타 진격했다. 설화급 성좌들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압도적인 거대 설화의 위용. 

묵시룡의 충격파처럼 돌진하는 우리를 막아선 것은, 거대한 하나의 태양이었다. 

[성좌, ‘정오의 태양’이 <김독자 컴퍼니>를 응시합니다.] 

눈부신 광원의 중심에 검은 인형이 있었다. 

바로 태양신 ‘라’의 진체였다. 

[너희는 이곳에서 죽는다.]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거친 울음을 터트렸다. 

우리가 가진 모든 설화가 울부짖고 있었다. 아무리 나와 유중혁이라도 완전체의 신화급 성좌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은 무리였다. 

우리는 고작 3회차였으니까. ······3회차?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한때는, 그랬었다. 

[‘함께 읽기’를 시작합니다.] 

스르르 넘어가는 페이지의 잔영. 주변을 물들이는 지옥도의 풍경과 함께 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수한 활자로 이루어진 길, 자신의 오래된 생을 유중혁이 달려갔다. 

「41회차의 유중혁이 창을 던졌고.」 

「362회차의 유중혁이 권장을 뻗었다.」 

「999회차의 유중혁이, 자신의 마도를 휘둘렀다.」 

츠츠츠츠츳! 

강렬한 스파크가 내 몸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당신의 격이 당신의 독해력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서유기에서 나는 잠깐이지만 1863회차의 독해에 도달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천대성과 이계의 신격들이 내게 개연성을 빌려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이 신화다.] 

쏟아지는 유중혁의 [파천검도]에도, 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희는 신화를 넘을 수 없다.] 

신화급 성좌를 쓰러트리기 위해 필요한 유중혁의 최소 회차는 1700회차. 

힘이 부족했고, 격이 부족했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넘을 수 있어.” 

왜냐하면, 우리에겐 아직 설화 하나가 더 남았기 때문이다. 

『서유기 리메이크』를 클리어하고 얻었던, 우리의 네 번째 거대 설화.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다음 순간, 풍부한 설화의 개연성이 내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제천대성, 그리고 이계의 신격과 함께했던 그 설화가 나의 별을, <김독자 컴퍼니>의 맥락 위를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격에 크게 놀랍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격을 재평가 중입니다.]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적셨다. 죽은 이계의 신격의 사체들로 붉게 물든 통천하의 강. 

나를 잠식하던 스파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지옥도의 페이지가 다시 넘어가고 있었다. 

······1321회차. 

······1582회차. 

. 

. 

. 

그리고, 1701회차. 

유중혁이 움직였다. 1701회차의 힘을 품은 [흑천마도]. 

바다를 베고, 태양을 부수고, 신화급 성좌인 포세이돈의 심장을 도려냈던 그날의 유중혁이 눈을 뜨고 있었다. 

「그것은, 김독자가 아주 오랫동안 그려왔던 풍경.」 

경악한 라가 뒤늦게 자신의 거대 설화를 방출하는 것이 보였다. 라의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녀석의 입이 묻고 있었다. ‘어떻게’. 

나는 웃었다. 

“어떻게는.” 

신화급 성좌를 죽이기 위해서는, 신화급 성좌에 맞먹는 힘이 필요하다. 

신화급 성좌. ‘단 하나의 설화’를 시작해 자신의 ‘결’을 얻었거나, 막대한 거대 설화를 쌓아 ‘결’의 코앞에 도달한 존재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격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거대 성운의 성좌들이 당신의 격에······!] 

그러니까, 마치 나처럼.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격을 발표합니다.] 

[당신의 격은 ‘신화급’입니다.] 

가공할 폭음과 함께,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라의 태양을 베었다.





< Episode 88. 신화급 성좌 (3) > 끝

< Episode 88. 신화급 성좌 (4) >





[다수의 성운들이 당신의 격에 경악합니다!] 

[일부 성운들이 새로운 신화급 성좌의 출몰에 경악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관리국’에 「개연성 적합 심사」를 요청합니다!] 

츠츠츠츠츳! 

[개연성 적합 심사 요청이 거부되었습니다.] 

[해당 시나리오는 <관리국>의 임의 개입이 불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볕이 부서지는 광경. 나는 숨도 쉬지 못한 채 전투에 집중했다. 

[흑천마도]에 베인 라의 동체가 발광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엄청난 열의 폭풍과 함께, 한순간 시야가 자욱한 증기로 들어찼다.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었다. 

“유중혁! 멈추지 마!” 

나는 그렇게 외치며 필사적으로 설화를 읽어갔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설화 효과를 증폭시킵니다!] 

내가 읽었던 유중혁의 1701회차를 떠올렸다. 포세이돈과 일대일로 맞서 싸우던 유중혁. 

「바다의 경계가 맞닿는 접경에서, 철혈의 패왕이 검을 빼 들었다.」 

「“포세이돈. 오늘은 네놈이 죽는 날이다.”」 

「1700번에 달하는 생. 그 생이 빚어낸 검술이 광휘를 토했다.」 

그 전투를 재현하듯, 유중혁의 검이 움직였다. 점점 더 빨라지는 검이 라의 태양을 망가트리고 있었다. 

[성좌, ‘정오의 태양’이 고통스럽게 분노합니다!] 

콰가가가가가가가! 

내가 읽어낸 무대 위에서 유중혁의 검이 춤을 췄다. 막대한 개연성의 후폭풍이 나를 짓눌렀지만, 네 개의 거대 설화가 서로 호응하며 그 여파를 견뎌냈다. 

입안에서 쇠맛이 났다. 갑작스레 상승한 격의 상승을 화신체가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운 <베다>가 당신의 전장을 지켜봅니다.] 

[성운 <탐라>가 당신의 전장을 지켜봅니다.] 

[성운 <올림포스>가 당신의 전장을 지켜봅니다.] 

[성운 <아스가르드>가 당신의 전장을 지켜봅니다.] 

볼 테면 봐라. 

어차피 네놈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싸움이니까. 

[채널의 간접 메시지 통제가 해제됩니다!] 

지금도 많은 성좌들은 우리의 힘을 무시하고 있을 것이다. 

운이 좋아서, 혹은 다른 성좌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다수의 성좌들이 채널에 추가로 입장합니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전장을 지켜봅니다!] 

하지만 이제 증명할 시간이 왔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포효합니다!] 

<김독자 컴퍼니>는 일방적 후원의 대상이 아닌 너희의 경쟁자이며, 거대 성운 하나쯤은 스스로의 힘만으로 꺾을 수 있는 성운이다. 

콰드드득! 

라를 몰아붙이는 유중혁의 검격. 떨어져 나가는 태양의 빛살에서 살점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때, 허공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대도깨비 ‘녹수’가 당신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대도깨비 녹수. 중하급도 아니고 대도깨비인 녀석이라면, 시나리오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쯤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98번 시나리오만큼은 녀석들도 함부로 개입할 수가 없다. 

츠츠츠츳······. 

지금부터의 시나리오는 저 ‘대도깨비’들에게도 중요한 시나리오이기 때문이다. 

[해당 시나리오에는 도깨비와 성운이 함께 참가하고 있습니다.] 

[모든 도깨비는 자신이 이야기할 ‘후보’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현재 대도깨비 ‘녹수’는 <파피루스>를 선택한 상태입니다.] 

언젠가 ‘성마대전’을 앞두고 대도깨비 허주와 허체가 우리를 찾아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대도깨비들은 말했다. 

「지금 결정해라. 여기서 죽을 것인지, 아니면 우리와 함께 마지막 시나리오로 떠날 것인지.」 

아마 그 말은, 이 순간을 위한 제안이었을 것이다. 

최종막을 앞둔 대도깨비들은 자신의 명예와 안목, 그리고 설화를 걸고 ‘단 하나의 설화’ 후보를 선택하게 된다. 

아마 저 녹수란 녀석은 그 후보로 <파피루스>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파피루스>에는 세 개의 태양이 있지.] 

내 진언과 함께 유중혁의 화신체가 움직였다. 

세상 그 어떤 화신보다 더 빠른 속도로, 영원불멸의 저주가 쌓인 검을 휘둘렀다. [흑천마도]의 검격이 라의 표피를 파고들었다. 어떤 금속도 녹여버리는 그 열기를, 이현성의 설화 금속이 견뎌내고 있었다. 

울컥, 하고 라의 심장이 설화를 토해냈다. 저 지고한 신화급 성좌가, 우리 앞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우릴 정말 꺾고 싶었다면, 네 존재 전부가 모두 강림했어야지.] 

신화급 성좌 ‘라’. 이미 자신의 ‘결’을 달성하고, 마지막 시나리오의 무대에서 오랫동안 동면에 빠져 있었던 성좌. 

[지금껏 냉동고에 틀어박혀 있던 네가, 태양 하나만으로 우릴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나?] 

[성좌, ‘정오의 태양’이 고통 속에 울부짖습니다!] 

[성좌, ‘정오의 태양’이 성급한 눈길로 주변을 둘러봅니다!] 

[언제까지 구경만 하고 있을 것인가!] 

‘라’의 외침과 함께 창공의 별들이 반짝였다. 

[베다! 올림포스! 네놈들도 함께하기로 한 것 아니었나?] 

······뭐? 

그 말과 함께, 어디선가 불길한 기운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늘이 요동치고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새카만 창공의 한쪽 복판이 갈라지며 막대한 격류가 떨어졌다. 

우리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그 격의 파형을 피해냈다. 

[누군가가 성운 <파피루스>에 대한 지지를 선언합니다.] 

[누군가가 시나리오에 현현하고 있습니다!] 

뒷덜미가 서늘해질 정도로 강력한 격의 소유자. 눈앞의 ‘라’와 맞먹는 누군가가 이 세계로 강림하고 있었다. 

[한심하군, ‘라’. 혼자서도 충분하다더니.] 

거친 해일을 연상시키는 목소리. 놀랍게도 그곳에 강림한 존재는 1701회차의 유중혁이 필사적으로 맞서 싸웠던 적수였다. 

[성좌,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 시나리오에 현현합니다!] 

포세이돈의 등장과 함께, 허공에서 별들의 군대가 먹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베다>의 설화급 성좌들, 그리고 <로카팔라>들이었다. 심지어 개중에는, 거의 신화급 성좌에 육박한다 알려진 이들도 있었다. 

[성운 <탐라>가 <베다>의 개입을 비난합니다!] 

[성운 <홍익>이 <올림포스>의 개입을 비난합니다!] 

비난이 폭주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포세이돈은 자신의 트라이아나로 이쪽을 겨냥했다. 

[너희 따위가 감히 이 <스타 스트림>의 종막을 보려고 하는 것이냐?] 

<스타 스트림>의 종막. 이 모든 세계의 끝을 결정할 에필로그. 

맞다, 나는 오랫동안 그것을 보기 위해 살아왔다. 

그랬었다. 

[나는 그저 ‘종막’을 보고 싶은 게 아냐.] 

사실, 내가 정말 보고 싶은 것은. 

“아저씨!” 

어느새 동료들이 주변으로 몰려와 있었다. 

정희원, 유상아, 이지혜, 이현성, 이길영, 신유승. 

우리가 만든 설화들이 밤하늘의 창공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득한 은하 너머로, 우리가 움직여 온 설화의 궤적이 보였다. 

이 우주가 아무리 드넓고 광활하다 해도, 나는 어디서든 저 별자리를 찾아낼 자신이 있다. 

[설화, ‘구원의 마왕’이 환하게 빛납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환하게 빛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환하게 빛납니다.] 

나는 벅차는 마음을 숨긴 채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그가 염원했던 설화가 있었다.」 

강력한 격을 발출하는 포세이돈이 우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시끄러운 마침표로군. 그만 사라져라.] 

밀려오는 <베다>의 군대. 

긴장한 일행들이 내 곁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그런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저는 여러분과 같이 만든 설화가 좋습니다. 슬픈 일도, 고통스러운 일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지금 유언하는 거 아니죠?” 

내 표정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는지 정희원이 물어왔다. 

나는 다만 빙긋 웃었다. 

밀려오는 성운의 군세 너머로 텅 빈 창공을 올려다보았다. 

언젠가,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아주 오랫동안 어떤 이야기를 보아온 사람은, 마침내 그 이야기를 닮아간다고. 

어쩌면 그것은 저 별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죽어라!] 

밀려든 <베다>의 군대가 우리를 덮쳐오는 바로 그 순간.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시나리오에 현현합니다!] 

밤하늘이 갈라지며, 염화의 폭포가 쏟아졌다. 그 폭포 위로 올라선 한 성좌가 불타는 검을 든 채 성좌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천사가 그곳에 있었다. 

[■발! ■같은 놈들아!] 

거친 폭언 너머로 경악하는 성좌들의 진언이 들려왔다. 

[······어떻게? 너희는 분명 그곳에서······.] 

[■발. 나 우리엘이야. 겨우 그 정도 숫자로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이어서 하늘을 불태우는 보랏빛 염화.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시나리오에 현현합니다!] 

[······큭큭, 내 양손을 다 쓰게 만들 줄이야. 제법 하네, <파피루스>.] 

날아오르는 거대한 용의 날개가 성좌들을 찢어발겼다. 

그런 ‘심연의 흑염룡’을 겨냥한 <베다>의 전함들이 일제 사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수십 척의 전함이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폭발 사이로 언뜻 보이는 금빛의 여의봉. 

[정말이지 귀찮게 하는군.] 

연무가 걷힌 곳에, 따분하다는 듯 귀를 파고 있는 백금발의 사내가 있었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시나리오에 현현합니다!] 

우리엘, 흑염룡, 제천대성. 

세 성좌의 등장에 일대에 파란이 일었다. 

[······제천대성! 무슨 짓이냐?] 

[이것은 성운전이다! 지금 네놈들이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성좌들의 진언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배후에 현현했다. 

[그대들처럼 우리 또한 지지하는 설화가 있을 뿐이에요.] 

그 목소리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새카맣고 부드러운 어둠이 우리를 감싸며, 내 어깨에 다정한 손길이 닿았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시나리오에 현현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왔다는 것은.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시나리오에 현현합니다!] 

명왕의 형형한 눈길이 전장을 응시했다. 모든 별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죽음의 사신. 

제천대성에 이어 명왕까지, 연이은 신화급 성좌의 등장에 적측의 성좌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성운 <명계>가 <김독자 컴퍼니>를 지지합니다.] 

덤빌 테면 얼마든지 덤벼 보라는 듯 두 진영이 격을 뿜어내며 대치했다. 

멀리서 일그러진 포세이돈과 라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쪽 진영의 성좌들이 말없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성좌,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 시나리오에서 이탈합니다.] 

하나둘 사라지는 적측의 성좌들. 믿었던 신화급 성좌마저 사라지자 이탈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당황한 <파피루스>의 성좌들이 우왕좌왕하며 라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성운 <파피루스>의 성좌들이 철수를 선언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쯤 뭉개진 태양만이 남았다. 까드득 이를 가는 라가 우리를 노려보더니, 잠시 후 볕이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성좌, ‘정오의 태양’이 시나리오에서 이탈합니다.] 

밀려오는 노을과 함께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마침내, 시나리오의 승자가 가려진 것이다. 

「그것은 김독자가 아주 오랫동안 그려왔던 광경이었다.」 

그 노을 속에서,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어떤 것은 그가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았고.」 

스러지는 노을빛을 응시하며, 유중혁이 [흑천마도]를 쥐고 있었다. 

「어떤 것은 그의 의도보다 잘 흘러갔다.」 

입술을 실룩이던 한수영이 “아야야” 소리를 내며 붕대를 되감았다. 

「의도와는 무관하게 운이 좋았던 경우도 있었다.」 

가벼운 한숨을 내쉬던 유상아가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들이 모여, 결국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가 성운전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보상 내역을 준비 중입니다.] 

일행들도 나도 말이 없었다. 

처음 이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첫 승리였다. 

우리는 한참이나 아무 말도 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겼다. 

우리가 정말로, ‘성운’에게 이긴 것이다. 

[대도깨비 ‘허주’가 당신의 설화에 침음합니다.] 

[대도깨비 ‘가랑’이 당신의 설화에 투표하고 싶어합니다.] 

[대도깨비 ‘해솔’이 당신의 설화에······.] 

텅 빈 허공에 시스템 메시지만이 들려왔다. 

[대도깨비, ‘비형’이 당신의 설화에 투표했습니다.] 

[중급 도깨비, ‘비유’가 당신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노을 너머로 비치는 두 도깨비의 그림자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나는 일행들을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렸다. 그들을 보며, 나는 무언가 말을 해보려 했다. 

일행들은 이미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나를 대신해 정희원이 말했다. 

“함께 이 세계의 결말을 보러 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Episode 88. 신화급 성좌 (4) > 끝

< Episode 89. 대멸망 (1) >





[당신의 ■■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귓가에 들려오는 시스템 메시지.

며칠 전부터 내 귓가에 줄곧 반복해서 들려온 메시지였다.

“이제 얼마 안 남은 모양이구나.”

“예.”

나와 어머니는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공단]의 응접실에 설치된 패널을 잠시 바라보았다.

―아메리카 대륙 멸망! ‘이계의 신격’의 다음 목표는?

―동북아시아 지역에 긴급 대피령 발발!

―성운들이 지구를 버렸다. “어디로 달아나도 도망칠 곳 없어.”

뉴스가 마지막으로 비춘 곳은 한반도였다.

세계 곳곳에서 밀려든 난민들로 한반도 전체가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기대하고 이곳까지 왔는지는 잘 알고 있다.

[다음 대멸망 시나리오 지역은 ‘동북아시아’입니다.]

[대멸망 시나리오 시작까지 6일 8시간 24분 남았습니다.]

화면 속의 어머니가 나를 대신해 [공단] 대표로서 발언하고 있었다.

[공단]은 새로운 공민을 막지 않는다. 다만······.

어머니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보기 민망하네.”

“잘 어울리세요. 대통령 같으신데요.”

실제로 지금 [공단]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어머니라 봐도 무방했다. 이곳의 시민들도, 나보다는 어머니를 더 잘 따를 것이다.

“떠나기 전에 서울 사람들에게 얼굴 한번 비춰주거라. 네가 간단히 인사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큰 힘이 될 거야.”

실제로 [공단] 바깥에서 확성기로 외치는 기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원의 마왕님! 돌아오셨다는 게 사실입니까?

―구원의 마왕님! 멸망을 막을 대책에 대해 한말씀해주십시오!

······대책이라.

나는 어머니처럼 쓰게 웃었다.

“그게 마스코트의 임무라면야.”

그리고 우리는 차를 홀짝였다.

어둡고 침침한 하늘. 당장 벼락이 떨어져 반도가 두 쪽으로 쪼개져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평화롭구나.”

“그러게요.”

그럼에도 우리는 그렇게 말했다.

찻잔 속에서 찻잎이 흔들렸다. 이토록 한가한 티타임이라니. 30년에 달하는 우리 모자의 역사 속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토록 원했던 시간이, 모든 것의 멸망을 앞둔 지금에서야 찾아왔다.

어머니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내가 이 이야기의 끝에서 무엇을 구하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것이 어머니의 방식임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천제의 풍신’께서 너를 찾으신다. 출발 전에 꼭 한 번 더 들르거라.”

······풍백? 그자가 왜 또 나를 찾는 거지?

성마대전에서 있었던 안 좋은 일이 떠올랐다. 마지막 시나리오를 앞두고 또 한바탕 해보자는 건가. 나는 일단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밖으로 나왔다.

바깥엔 나를 기다리던 존재가 있었다.

[용케 여기까지 왔네, 김독자.]

대도깨비가 된 후 신수가 훤해진 비형이었다. 백호의 퍼로 만들어진 롱코트가 제법 잘 어울렸다.

나는 비꼬는 투로 물었다.

“웬일로 기다렸냐?”

[너희 모자지간의 상봉은 구독좌들 사이에서도 인기 있는 설화야. 흐름을 끊을 수는 없지.]

어깨를 으쓱한 비형 녀석이 지껄였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눈을 콕콕 찍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투덜거리며 손수건을 건넵니다.]

그걸 또 방송으로 내보내고 있었던 모양이군, 망할 자식.

[이제 마지막 시나리오가 코앞이다.]

“알아.”

[어련하실까. 너도 알겠지만 마지막 시나리오는······.]

“비형.”

내 말에 비형이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왜 우릴 선택한 거냐?”

비형의 눈동자에 희미한 파문이 일었다.

지금 녀석의 눈앞에 떠올라 있을 시나리오 창이 무엇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

<메인 시나리오 # 98 ―후보 투표>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단 하나의 설화’의 최종 후보를 선택하세요.

제한시간 : ―

보상 : ???

실패시 : 사망

+

<스타 스트림>의 시나리오는 성좌나 화신들뿐만 아니라 이야기꾼인 도깨비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리고 시나리오의 종막을 결정할 ‘후보 투표’는, 도깨비들에게도 무척 중요한 시나리오였다. 자신의 존재를 건 시나리오.

그런 시나리오에서, 비형은 우리를 선택한 것이다.

[대도깨비 ‘비형’은 현재 <김독자 컴퍼니>에 투표한 상태입니다.]

처음 비형을 만났을 때, 녀석은 거의 축구공만했다.

오직 채널의 구독좌를 늘리기 위해 무분별하게 사람들을 학살하고, 잔인한 시나리오를 양산하던 천공의 도깨비.

우리가 만든 설화를 먹고 자라난 그 도깨비는 인간처럼 변했다. 인간의 키에, 인간이 입는 옷을 입고, 인간의 표정을 지었다.

그 도깨비가, 이제 나와 같은 눈높이에서 나를 마주 보며 말하고 있었다.

[나와 계약해라. 그럼 내가 너를 도깨비들의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

“······?”

[어룡의 입속에서 네가 내게 했던 말이다.]

분명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설마 진짜 그딴 말을 믿고 날 선택한 건 아니지? 우리가 이길 확률은 낮아.”

[지금은 그렇지만도 않아. 네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모르는 모양이군.]

비형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단]의 광장 앞에 파피루스 전을 함께 치렀던 성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우리엘에게 제압당해 방석처럼 깔린 흑염룡. 티 테이블을 가져와 차를 홀짝이는 페르세포네와 하데스. 파천검성에게 곰방대 같은 담배를 빌려 연기를 뿜는 제천대성.

그들은 실시간으로 흘러나오는 성류 방송을 시청하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의 호사가들 사이에서 새로운 ‘12대 성운’ 목록이 떠돌아······.

―일부 설화급 성좌들은 <김독자 컴퍼니>의 수준이 이미 3강(强)급에 육박한다고 추정하며······.

······3강이라. 지난 싸움의 여파가 크긴 했던 모양이다. 후한 평가야 고마운 일이지만, 방심하긴 일렀다. 아직 후보 결정전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비형의 판단은 조금 다른 듯했다.

[아마 당분간은 괜찮을 거다. 네가 <파피루스>를 쓰러트린 지도 이틀이 지났어. 그동안 <김독자 컴퍼니>에 성운전을 신청해 온 다른 성운이 있었나?]

“······없었어.”

「후보 결정전에서 큰 성과를 거둔 성운은, ‘단 하나의 설화’로 추대될 가능성이 크게 높아진다.」

단 한 번의 전장으로 우리가 3강의 자리에 오른 것처럼, 다른 성운들도 성운전을 통해 얼마든지 순위 변동을 노릴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한창 선전포고와 전쟁 선포 메시지가 빗발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선전포고는커녕 도발해오는 성운도 없었다.

지구는, 놀라울 정도로 잠잠했다.

“왜지? 우리 설화가 그렇게까지 놀라웠던 건 아닐 테고.”

[가만히 내버려 둬도 멸망하기 때문이지.]

심장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성좌들의 패널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이 보였다.

[성좌들은 네가 지구를 포기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후보 결정전’과 별개로, 현재 지구는 대멸망 시퀀스에 돌입해 있다.

북아메리카가 멸망했고, 다음은 동북아시아 지역이다.

원작의 최종 시나리오에서도 외신들을 비롯한 이계의 지배자들이 이 세계를 침습하기 시작한다.

[잊힌 섬들의 융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계선의 끝에서, 잊힌 존재들의 침식이 시작되리라.」

본래의 원작이었다면, 여기서 성운들은 나와 함께 싸웠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성운들은 다른 결정을 내린 것이다. 지구를 포기하고, <김독자 컴퍼니>를 제거하는 것. 그것이 ‘마지막 시나리오’를 앞둔 성운들의 결정이었다.

“빌어먹을 놈들이······.”

[일부 성운들이 당신의 판단을 비웃습니다.]

최악의 상황이라 봐도 무방했다.

심지어 지금 이 세계에서 몰려온 이계의 신격들은, 내가 아는 원작은 녀석들과는 다른 녀석들이었다.

나는 얼마 전 ‘은가이의 숲’에서 보았던 999회차의 우리엘을 떠올렸다.

「대멸망 시나리오가 시작되면, 왕들의 습격이 시작된다.」

내 예상이 맞다면, 곧 시작될 대멸망에서 찾아올 왕들은 모두 999회차에서 ‘결’을 본 존재들이다. 그리고 <김독자 컴퍼니>는 이제 그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왕들을 소환한 건 누구지? 너희 관리국이냐?”

[내가 공개할 수 있는 정보는 없어. 다만······.]

굳은 결의가 어린 얼굴로, 비형이 말을 맺었다.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나는 너희들을 이야기할 것이다.]

*

“참가하지 않으실 분은, 지금 떠나셔도 괜찮습니다.”

우습지만, 그게 내가 일행들을 향해 한 첫 마디였다.

“다가올 시나리오는 지금까지 겪었던 결전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끔찍한 것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성운에서 이탈할 분이 계시다면······.”

몇몇 일행들이 지루한 미사를 듣듯 하품을 하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눈앞의 일행들은 모두 수십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기며 여기까지 왔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죽는 건 매한가지. 이제 와서 빠질 거였다면 진즉에 빠졌겠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음에도 뻔한 질문을 하는 것은.

“저.”

저렇게, 빠지고자 하는 이가 실제로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빠지겠네.”

그는 한명오였다. 아주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한명오가 말을 이었다.

“아주 이탈하겠다는 말은 아닐세. 다만, 마지막으로 다녀올 곳이 좀 있네.”

곁에서 이지혜가 핀잔을 주었다.

“에휴, 아저씬 그냥 빠져. 어차피 도움도 안 되잖아. 또 전투 시작되면 열나게 튈 거면서.”

“······내가 지금은 이래도 왕년에는 마계 백작으로······.”

본래였다면 저 레퍼토리에 들어갈 말은 ‘마계 백작’이 아니라 ‘미노 소프트 부장’이었을 텐데.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자 쓴웃음이 나왔다. 사실 나는 한명오가 어딜 가려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환생자들의 섬’이 있었던 곳에 가시려는 겁니까?”

내 질문에 한명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봉인되었다곤 해도, 그곳엔 아직 묵시룡과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의 여파가 남아 있습니다. 가시는 건 위험할 겁니다.”

“그래도 다녀오고 싶네.”

성마대전이 벌어졌던 ‘환생자들의 섬’. 지금도 그 암흑차원의 저변에는 죽은 별과 이계의 신격의 시체들이 떠돌고 있을 것이다. 미처 방주에 탑승하지 못하고 죽어버린 존재들.

······어쩌면 개중에는, 마왕 ‘아스모데우스’도 있으리라.

“그 아이만이 내가 이 세계에서 얻은 전부일세.”

한명오의 눈빛에 비장함이 깃들어 있었다.

성마대전 이후, 한명오는 줄곧 우리의 메인 시나리오에 열심히 참여해 왔다. 미노 소프트에서 승진을 위해 부하 직원들의 프로젝트를 빼돌릴 때보다도 훨씬 열심이었다.

실제로 그는 노력의 대가를 받았다. 거대 설화의 지분도 약간이지만 얻었고, 쓸만한 성유물들도 다수 확보했으니까.

모두, 자신의 딸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지금의 그라면, ‘환생자들의 섬’ 인근에 가더라도 혼돈의 여파를 며칠은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다녀오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한명오가 채비를 마치고 일어섰다. 이미 단단히 마음을 먹고 온 모양이었다. 일행들 모두가 그를 배웅했다.

‘단 하나의 설화’의 시나리오를 받지 못한다고 해서, ‘단 하나의 설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건 누구에게나 있다. 모두가 각자의 ■■를 찾아 떠날 수 있는 것처럼.

덜덜 떨면서도 포탈을 넘어가는 한명오를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당신의 ■■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결’이 어디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스타 스트림>이 아니다.

돌아보자 일행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회의를 계속하겠습니다.”

*

[대멸망 시나리오 시작까지 11시간 8분 남았습니다.]

대멸망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반나절. 저 대멸망을 견뎌내야만, 우리는 마지막 시나리오로 향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원작의 정보들을 모두 점검했고, 한반도를 비롯해 지구 곳곳에 남은 쓸만한 성유물 및 스킬들의 수거를 부탁했다. 일행들은 흔쾌히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한수영이 물었다.

“넌 뭐하게?”

물론 나도 할 일이 있었다.

예를 들면, 저 꼬장꼬장한 녀석과 함께 필살기를 연구한다거나.

“네놈도 알겠지만, 지금의 우리가 대멸망에 맞서 싸울 방법은 하나뿐이다.”

[흑천마도]의 날을 가다듬으며, 유중혁이 말했다.

우리엘이나 흑염룡, 제천대성을 비롯한 성좌들이 도움을 주기로 약속했지만, 그들만을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앞으로 나타날 이계의 신격의 왕은 ‘은밀한 모략가’를 제외하고도 넷. 그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면, 제천대성이나 명왕 같은 신화급 성좌가 있다 해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맞서 싸울 방법이 하나 있었다.

「영원불멸의 지옥도」

1863회차의 보상으로 ‘은밀한 모략가’를 통해 받은 신화급 설화.

이 설화를 통해 나는 유중혁의 기억을 재현할 수 있었고, 유중혁은 그 기억의 무대를 공유 받아 1863회차의 힘을 끌어 쓸 수 있었다.

문제는.

[독해가 실패했습니다!]

[당신이 독해 가능한 ‘유중혁’의 최대 회차는 ‘978회차’입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당신을 한심하게 바라봅니다.]

······내 독해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독해가 실패했습니다!]

[당신이 독해 가능한 ‘유중혁’의 최대 회차는 ‘778회차’입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당신의 난독을 의심합니다.]

이젠 하다못해 설화까지 나를 무시하고 있다.

며칠째 그런 일이 반복되자, 결국 참다못한 유중혁이 역정을 냈다.

“한심하군. 평생 책만 읽었다고 하지 않았나?”

“······평생은 아냐. 아무튼 이건 좀 다른 문제야.”

나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이제 와서?

“이럴 거면 설화를 내놔라. 내가 직접 쓰는 것이 훨씬 낫겠군.”

“그렇게 줄 수 있는 거면 진작 줬지.”

안 그래도 이미 ‘은밀한 모략가’에게 방법을 물어보기도 했었다. 무시당했을 뿐이지만.

“차라리 지난번처럼 빙의 스킬을 써라. 그걸 쓰고 설화를 쓰면 동화율이 훨씬 올라간다.”

아마 [전지적 독자 시점]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가능하면 안 쓰려고.”

확실히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쓴다면, 설화의 사용은 훨씬 간편해질 것이다. 그 스킬을 쓰면 마치 배후성이 화신을 통제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스킬을 쓰면 내 화신체가 무방비해져. 가능하면 안 쓰고 이기는 게 최선이야.”

“한심하군. 평소에 수련을 게을리하니 그런 꼴이 된 거다.”

“······모두가 너처럼 무식한 수련을 소화하는 게 가능한 줄 아냐?”

나를 잠시 노려보던 유중혁은 더 이상 가타부타하지 않고 다시 설화에 열중했다.

어쩌면 유중혁 녀석도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쓰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다는 것을.

「얼마 전부터, [전지적 독자 시점]이 김독자의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가 원하지 않을 때도 멋대로 스킬이 발동하거나, 사람의 속을 읽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누군가를 들여다보는 것이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보다 친절한 문장으로 적힌 그의 내면을 읽는 것이 더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독해에 실패했습니다.]

어쩌면, 지금 내게 난독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제대로 집중해라 김독자.”

유중혁의 말과 함께, 나는 다시금 설화를 발동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차분히 생각을 점검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내가 아는 유중혁에 관한 정보들은 잊자.

나는 유중혁을 전혀 모른다.

이놈은 내가 전혀 모르는 놈이다.

유중혁은 미친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꽉 막힌 벽창호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머릿속이 조금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거기서부터 출발하자. 마치 ‘멸살법’을 처음 읽었던 그 순간처럼.

츠츠츠츠츠츳!

이상 현상이 벌어진 것은 그때였다.

[당신의 독해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갑자기 유중혁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김독자! 네놈, 무슨 짓을······!”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유중혁의 눈동자에 빛이 사라졌다.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야, 괜찮냐?”

물어도 답이 없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의 자아가 충돌하고 있습니다!]

자아가 충돌해?

나는 급한 마음에 녀석의 상태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등장인물 일람’의 발동이 실패했습니다.]

이어서 떠오른 문장은, 내가 아주 오래전에 들은 적이 있는 문장이었다.

[해당 인물은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 Episode 89. 대멸망 (1) > 끝

< Episode 89. 대멸망 (2) >





쓰러진 유중혁은 네 시간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았다. 

“야! 미친놈아! 정신 차려!” 

나와 한수영은 번갈아 가며 유중혁의 뺨을 때렸다. 하지만 녀석은 전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찰싹! 찰싹! 찰싹! 찰싹! 

게다가 얼마나 뺨이 단단한지, 한참을 때려도 부풀어 오르기는커녕 손바닥이 아플 지경이었다. 한수영이 진지하게 감탄하며 말했다. 

“이거 좀 재미있는데?” 

“······그딴 소리 할 때가 아냐.” 

[대멸망 시나리오 시작까지 5시간 12분 남았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은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곧 ‘대멸망’이 시작되고, 확장된 개연성으로 인해 이계의 신격들의 침습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유중혁이 이 모양 이 꼴이다.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내 [전지적 독자 시점]과 관련된 문제인가? 

[‘등장인물 일람’의 발동이 실패했습니다.] 

[해당 인물은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등장인물 일람]을 다시 사용해 보았지만, 여전히 떠오르는 메시지는 같았다. 

이 우주에는 정말 많은 유중혁이 있지만, 지금껏 저 메시지가 떠올랐던 유중혁은 하나뿐이었다. 1863회차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향해 사라졌던 그 유중혁······. 

그러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설마? 

곁에서 우릴 지켜보던 이설화가 물었다. 

“[생사단]을 먹여 볼까요?” 

얼마 전, 이설화는 드디어 궁극의 회복약인 [생사단]을 완성했다. 일단 먹이기만 하면 어떤 치명적인 중상이라도 회복할 수 있다는 비약. 

“벌써 양산 가능한 단계입니까?” 

“아뇨. 아직 몇 개 못 만들었어요. 재료가 부족해서······.” 

나는 침음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생사단]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의 자아가 충돌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생사단]이라고 해도, 자아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공단 전체에 가벼운 진동이 울려 퍼진 것은 그때였다. 

“독자 씨. 움직임이 포착됐습니다.” 

다급히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이현성. 

나와 한수영은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급히 켠 패널 화면 위로 태평양의 정경이 나타났다. 

쿠구구구구! 

미대륙을 집어삼킨 파도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대한 파도는 투명한 돔의 벽에 가로막혀서 수위만을 높이고 있었다. 

아직은 개연성 제약을 받고 있는 까닭이었다. 

츠츠츠츠츳! 

하지만 개연성의 벽은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태평양을 가로지르며 점점 그 너비를 키우는 접경. 높아진 파도 사이로 ‘이계의 신격’들이 꿈틀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5시간 후면 저 경계는 한반도까지 도달할 것이고, 그날로 이 땅은 지구에서 사라질 것이다.

“······김독자, 작전은?” 

“있어.” 

나는 쓰러진 유중혁을 흘끗 보며 덧붙였다. 

“좀 바꿔야 할 것 같긴 하지만.” 

“사람 불안하게 하지 말고. 원작에선 저거 어떻게 막았어?” 

“성운들이 죄다 달려들어서. 저거 막는다고 성좌들 대부분이 다 갈려 나갔지.” 

“그 잘난 성좌들은 다 어디 있는데?” 

“어디 있긴.” 

[다수의 성운들이 당신의 판단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마 저기서, 우리의 멸망을 구경하고 있겠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스타 스트림>의 정의는 모두 죽은 것이냐며 성좌들을 힐난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흔듭니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대성운의 성좌들을 한심하게 여깁니다.] 

우리측 성좌들의 도발에도, 저쪽은 태연했다. 

[일부 성좌들이 모든 것은 <김독자 컴퍼니>가 초래한 일이라 주장합니다.] 

심지어는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녀석들도 있었다. 

[소수의 성좌들이 자신들의 몫을 먼저 앗아간 것은 <김독자 컴퍼니>라고 주장합니다.] 

본래였다면 그 어처구니없는 주장에 분개했겠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마음이 평온했다. 녀석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즈>에 방문했을 때, 나는 원숭이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기존에 거대 설화를 구성하고 있던 다수 설화들이, <오즈>와 비슷한 쇠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최근에 떠오른 어떤 설화가 다른 설화들의 지분을 잡아먹기 시작했으니까요······ 당신들의 설화 말입니다. 

본래 이 무대를 이끌어야 할 주역들은 오랜 신화를 쌓아온 성운들이었다. 하지만 그 성운들 중 다수는 우리에게 주요 설화를 빼앗기거나 파괴당했다. 그런 와중에 <스타 스트림>이 우리를 3강급 성운으로 치켜세우기까지 했으니, 기존의 별들이 느낄 박탈감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 별들이 옳은 짓을 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던 한수영이 물었다. 

“그냥 지구 포기하는 게 낫지 않겠냐? 다 같이 ‘마지막 시나리오’로 튈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게······.” 

“안 되는 거 알잖아.” 

마지막 시나리오로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허락된 이들뿐이다. 

설령 지구의 모두를 <김독자 컴퍼니>에 가입시킨다 한들,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 점프로 인한 개연성의 후폭풍에 휘말려 사멸하게 될 것이다. 

“젠장······.” 

한수영의 머릿속에서 [예상표절]이 팽팽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계의 신격의 왕’들은 999회차의 녀석들이랬지. 몇이나 돼?” 

“내가 알기로는 ‘은밀한 모략가’를 제외하고 넷.” 

“······넷 전부랑 싸워야 돼?” 

나는 고개를 저으며 내가 기억하는 ‘이계의 신격의 왕’의 목록을 떠올렸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살아있는 불꽃’.」 

「서쪽 세계의 재앙 ‘가라앉은 섬의 주인’.」 

「북쪽 우주의 지배자 ‘위대한 심연의 군주’.」 

「남쪽 성간을 다스리는 ‘은빛 심장의 왕’.」 

999회차의 ‘결’을 보고 ‘이계의 신격의 왕’이 된 존재들. 

하지만 아무리 <관리국>이라고 해도, 모든 ‘왕’을 투입시켰을 것 같지는 않았다. 관리국은 통제 불가능한 시나리오를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이미 태평양에 나타난 게 하나. 그리고 우리 전력이 움직이게 되면 아마 하나가 더 움직일 거야. 그럼 총 둘이지.” 

“하나는 태평양의 저 녀석이고, 다른 하나는 999회차의 우리엘인가?” 

“맞아.” 

“그 녀석들은 얼마나 강해? 그때 보긴 했는데 너무 잠깐 봐서······.” 

“‘은밀한 모략가’가 저 꼴 된 게 999회차 우리엘 때문이야.” 

“······미친, 그런 것들이 부하까지 이끌고 온다고?” 

묵시룡전에서 ‘은밀한 모략가’가 보여준 힘을 한수영은 똑똑히 목격했다. 그러니 저런 반응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우리 채널 성좌들이 도와주는 건 확실하지?” 

“성좌들이 도와도 승리를 확신할 수는 없어. 무엇보다 유중혁이 없는 상태에서는 전력 구성도 맞질 않고.” 

본래 내 계획은 일행을 두 무리로 나눠서 ‘이계의 신격의 왕’들을 각개격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요 전투원인 유중혁이 빠지게 된다면, 우리는 1863회차의 힘을 빌려 쓸 수가 없다.

콰콰콰콰콰! 

패널 화면 너머로, 점차 그 세력을 넓혀 가는 파도가 보였다. 

저 대멸망의 영역이 한반도에 닿을 때 방어를 시작하면 그때는 이미 늦는다. 

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판단을 마쳤다. 

“움직이자. 해야 할 일들을 알려줄게.” 

남은 시간은 5시간. 

그 안에 모든 준비를 끝마쳐야 했다. 

* 

한수영이 일행들에게 작전을 하달하는 동안, 나는 이길영을 만났다. 내 호출에 이길영은 환한 표정을 지으며 응접실로 냅다 달려왔다. 

“형! 저 불렀어요? 왜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앉아 볼래?” 

역시나 냅다 소파에 앉은 이길영은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기대된다는 듯 눈망울을 반짝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런 이길영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이 세상을 게임처럼 여겼던 아이.」 

처음 이길영을 만났던 순간이 지금도 머릿속에 선연했다. 깜빡거리는 지하철의 조명, 허공을 향해 튀어 오르는 메뚜기의 악몽. 그때 이길영이 잡은 메뚜기가 없었더라면 죽는 것은 나였을 것이다. 

「어머니를 잃은 곤충 채집 소년은 이제 중학생 나이가 되었다.」 

나는 이길영의 어머니를 살리지 않았다. 그날 만약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가령, 내 인간 혐오가 조금만 덜했더라면. 메뚜기를 집으며 아이의 팔에서 눈에 띄는 상처들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몇 가지 단서만으로 사람의 역사를 지레짐작하는 버릇이 없었더라면. 

내가 ‘멸살법’을 읽지 않았더라면. 

내가, 김독자가 아니었더라면― 

“······했어요.” 

응? 

“······잘못했어요, 형.” 

고개를 숙인 이길영의 모습. 마치 끔찍한 벌을 앞둔 아이처럼 불안하게 떨리는 어깨. 

내 눈빛이 무서웠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이었을까. 

이길영이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고요······ 제가 그때 계약을 하지 않았다면 신유승이······.”

그제야, 이길영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소년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악마와 계약했다.」 

눈앞을 스치는 『서유기』의 전경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똑똑히 보았다. 구요성관에게 둘러싸인 이길영이 황색의 폭풍을 발출하는 것을. 

지금 이길영은 그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 형이 배후성 힘쓰지 말라고 한 거 똑똑히 기억해요! 절대로 일부러 약속 어긴 게 아니에요. 저는, 저는 진짜······!” 

나는 횡설수설하는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잘했어.” 

“네?” 

커다랗게 벌어지는 아이의 눈동자를 보며, 힘을 주어 말을 이었다. 

“잘했다, 길영아. 그때 네가 아니었으면 우린 다 죽었을 거야.” 

이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고 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일행들을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의 설움이란 게 뭔지, 나 역시 잘 알고 있으니까. 이길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또 그러면 곤란해. 알지? 지금의 네 힘으론······.” 

“······싫어요.” 

“뭐?” 

“만약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똑같을 거예요. 또 그 힘을 쓸 거예요. 신유승이랑······, 일행들을 지킬 거예요.” 

“길영아.” 

잠시 망설이던 이길영이 내 손을 쓱 피했다. 고개를 든 아이의 눈동자로 여러 가지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건 나만이 아니었나 보다. 

“혼내시려고 부른 거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도 이 말 하러 왔어요. 저 이제 어린애 아니에요, 형. 나도 자격이 있어요. 나도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이, 시나리오 모두 헤치며 여기까지 왔다고요.” 

나는 속으로 침음했다. 

나도 잘 알고 있다. 알고는 있지만······. 

그런 내 상념이 한심하다는 듯, [제4의 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 취 급하 지 마네 가 더애 같 아」 

‘길영이는 애야.’ 

「어 차 피 저애 없 으 면 못 싸 워」 

「김 독자 좋 은사 람인 척 구는 거 어 울리 지 않 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걱 정마 내친 구 가 도 와준 다」 

······친구? 

그 순간, 츠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이길영의 주변에 투명한 벽 같은 것이 일렁거렸다. 

[‘제4의 벽’이 자신의 친구에게 호응하고 있습니다.] 

나는 허공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곳에, 뭔가가 있었다.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벽의 감촉이었다. 하지만 아직 불완전한 벽. 

머릿속으로 갑자기 여러 가지가 이해되었다. 

······그런가. 그때 그 ‘벽’은 이 아이에게······. 

“혀, 형이 아무리 말려도······!” 

허공을 향해 뻗은 손에 위압감을 느꼈는지, 이길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손을 재빨리 내려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을 굳게 잡은 채, 한참이나 있었다. 마침내, 아이의 떨림이 천천히 잦아들 때까지. 

“네 말이 맞다, 길영아.” 

“······형?” 

“나는······ 우리는, 네 도움 없이는 결말을 볼 수 없어. 우리가 가는 시나리오에 네 역할은 꼭 필요해.”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이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상처받은 아이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을 나도 인정해야만 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자라난 마음을, 아이가 먼저 꺼내든 용기를 소중히 해야만 했다. 

그 용기에 보답할 수 있게, 나 역시 솔직해져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 혼자서 맞서 싸우게 두지는 않아. 이게 내 욕심이고, 내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거야. 이해해 줄 수 있겠니, 길영아?” 

이길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을 닦으며 배시시 웃기도 했다. 

이 아이와 함께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것에 새삼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제 선택해야 할 시간이었다. 

“네 배후성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 

내 말에, 이길영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형, 이 녀석은······.” 

“걱정 마.” 

지금껏 이길영의 배후성을 기용하지 않았던 이유. 

그것은, 녀석이 너무나 위험했기 때문이다. 

「“···정말 나와 같이 가지 않을 테냐? 저놈보다, 나랑 같이 다니는 게 훨씬 빨리 강해질 수 있다. 그래도 안 갈 테냐?”」 

아마 유중혁 녀석도, 그걸 잘 알기에 이길영을 데려가려 했던 것이겠지. 

여우 같은 자식. 

나는 걱정하는 이길영의 어깨를 가볍게 쥔 채 말했다. 

“형 이제 신화급 성좌야.” 

며칠 전까지였다면, 나도 가능하면 이 선택은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켠 뒤, 허공을 올려다보며 진언을 발출했다. 

[보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 나와.] 

내 말투가 변하는 순간, 주변에 둔중한 울림이 퍼졌다. 응접실 안을 가득 채우는 스파크와 함께, 이길영의 표정이 변하고 있었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이길영의 눈자위가 하얗게 변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인지를 깨달은 내가, 후폭풍을 뚫고 아이의 어깨를 굳게 쥐었다. 

[강림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츠츠츠츠츳! 

후폭풍의 여파가 순식간에 줄어들며 내 팔로 통증이 몰려왔다. 나는 통증을 견뎌냈다. 이 정도 쇼맨십은 보여주지 않으면, 녀석과 제대로 딜을 할 수 없었다. 

[당신의 격이 국지적인 후폭풍의 여파를 억제합니다!] 

급격하게 평온해지는 이길영의 표정. 

그리고 다음 순간, 텅 빈 어둠이 깔린 이길영의 입을 통해 곤충의 날갯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나는 기다림에 익숙하지만 너는 너무 오래 걸리는군.] 

마치, 수백만 마리의 메뚜기 떼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 Episode 89. 대멸망 (2) > 끝

< Episode 89. 대멸망 (3) >





창밖이 어둑해져 있었다. 해가 지는 건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창문에 들러붙은 벌레떼 때문이었다. 빠르게 기어 다니며 더듬이를 움직이는 메뚜기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메뚜기떼를 일별하며 말했다. 

[지금껏 기다린 것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었을 텐데 엄살이군.] 

[네가······ 기다림에 대해······ 무엇을 알지?] 

녀석의 말은 뚝뚝 끊어졌다. 내가 가늠할 수 없는 공허 아래에서 메아리치는 듯한 진언. 주변의 대기가 새카만 격으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기운을 조절하며 말했다. 

[적어도 네가 ‘잊힌 악’이라는 건 알고 있지.] 

하얗게 뜬 이길영의 눈썹이 꿈틀대는 것이 보였다. 주변에 서늘한 한파가 번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견디며 말을 이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별들이 잊어버린 ‘악’. 같은 ‘악’에게조차 외면당해, 저 마계의 아득한 지하에 봉인되었던 ‘악’.] 

흔히 지옥의 가장 깊은 자리는 ‘묵시룡’의 자리라고들 말한다. ‘성마대전’은 묵시룡이 불태운 <하르마게돈> 편이 가장 유명한 까닭이었다. 

그런데 사실 초기 ‘성마대전’의 재앙에는 묵시룡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색 충운(蟲雲)으로 세상을 휩쓸었던 별들의 재앙. 

이제는 사라진 이름들 중, 분명 그런 이름의 재앙이 있었다. 

[황충들의 왕. ‘무저갱의 지배자’여.] 

내 말에, 허공에서 거센 폭풍과 함께 메시지가 드러났다. 

[등장인물 ‘이길영’의 배후성이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성좌, ‘무저갱의 지배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무저갱의 지배자, 아바돈. 

그는 성마대전의 주역들과 마찬가지로 ‘신화급’에 이른 존재였다. 

하지만 ‘선악을 가르는 벽’의 주인들은 자신들의 싸움을 위해 그를 ‘악’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마계의 ‘72마왕’에도 끼워주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존재는 ‘이계의 신격’이나 다름없었다. 한때 은하를 벌레떼로 물들였던 거악이었음에도, 그는 망각의 감옥에서 수만 년을 지새웠다. 

재앙의 시대가 열릴 때 깨워주겠다는 헛된 약속을 믿은 채, 그는 같은 악마들에게조차 배반당했다. 

「어느 날, 한 인간이 ‘메뚜기’를 시나리오의 클리어 요소로 사용하기 전까지는.」 

[설화, ‘메뚜기 채집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우리의 시나리오에서 발아한 이길영의 설화가, 늙은 악마의 잠을 깨웠던 것이다. 

[날 부른 이유를······ 말하라. 건방진······ 성좌여.] 

깊은 증오가 깃든 목소리에서, 악마가 받은 상처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자신의 적수였던 ‘선’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자신의 동료였던 ‘악’으로부터 배신당한 악마. 

[왜 불렀겠어? 어린애랑 계약해서 등 처먹는 짓은 그만두라고 부른 거지.] 

[······.] 

[계약을 하고 싶으면 나랑 하자고. 그래야 공평하잖아?] 

[너의 건방짐을······ 용서하는 것은······ 네가······ 성마대전을 망쳤기 때문이다······.] 

희미하게 일그러진 이길영의 입술이 웃고 있었다. 녀석은 거악의 자격을 갖췄음에도 끝까지 ‘성마대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마치 그곳에 없는 존재인 것처럼 굴었다. 

이해는 갔다. 이제 그 거대 설화는 그의 축제가 아닌 것이다. 

[묵시룡과 에덴······ 마계가······ 패망하는 것은······ 무척 즐거웠지.] 

[그래서. 그걸로 끝이냐?] 

[끝······?] 

[아바돈. 너는 여전히 ‘악’이다.] 

내 말에 이길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성마······대전은······ 이미 끝났다······.] 

[지금은 끝났지.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열릴 거야. 그때는 네가 재앙이 되는 시나리오가 만들어질 수도 있어. 모두가 네 수식언을 기억하고, 네 이름 앞에 전율하게 되겠지.]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달콤한 간언이라도 들은 것처럼, 아바돈이 웃었다. 

나는 곧장 본론을 말했다. 

[긴 말 안 한다. 힘 비축하는 건 그쯤 하고, 우리를 도와라.] 

[내······ 가······ 왜?] 

[그렇지 않으면 너도 멸망할 테니까. 우리 없이 네놈 혼자 살아나 봐야, 다른 성좌들이 널 받아줄 리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나는, 오래된, 악······.] 

[절대 악 계통의 성좌들은 너를 다음 세대의 ‘가장 오래된 악’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다. 누구도 네 편을 들지 않겠지. 잊은 모양이다만, 아직 ‘마지막 시나리오’에는 ‘바알’ 같은 괴물도 남아 있다.] 

[바, 알······!] 

아바돈의 목소리가 발작하듯 떨렸다. 

마계 서열 1위의 마왕. 마계에서 유일하게 ‘마지막 시나리오’ 지역으로 넘어간 존재이자, ‘아바돈’의 존재를 무저갱에 유폐시켜버린 마왕. 

[우릴 도와 ‘대멸망’을 막는다면, 녀석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겠다.] 

주변의 대기가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대기에 흐르는 격을 그대로 감내하며 말했다. 

[‘무저갱의 지배자’여. 우리가 만들 세계의 ‘가장 오래된 악’이 되어라.] 

악마와 손을 잡기로 했다면 이 정도 먹이는 내줘야 한다. 

이번 재앙을 막기 위해 아바돈의 힘은 반드시 필요했다. 

* 

[대멸망 시나리오 시작까지 1시간 5분 남았습니다.] 

마침내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나는 광장 한쪽에 위치한 일행들을 보며 물었다. 

“유중혁은 깨어났습니까?” 

“······아직이에요.” 

이설화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유중혁이 깨어나지 않았다면, 역시 플랜 B가 최선이다. 

“여러분을 믿겠습니다. 이 방법밖엔 없습니다.” 

작전 내용 자체는 플랜 A와 똑같았다. 조를 두 개로 나누어, 다가올 ‘이계의 신격의 왕’들을 하나씩 상대하는 것. 

다만 플랜 A와 다른 점이 있다면, 팀의 구성이 상이하다는 것이었다. 

“1조가 상대할 ‘이계의 신격’은 ‘살아있는 불꽃’입니다.” 

살아있는 불꽃. 

999회차를 살았던 우리엘의 신명. 

“지금 태평양에 나타난 존재는 ‘가라앉은 섬의 주인’이지만, 대멸망이 시작되면 ‘살아있는 불꽃’도 반드시 나타날 겁니다. 그녀는 ‘은밀한 모략가’를 노리고 있으니까요.” 

나는 여전히 봉인구에 갇혀 잠든 ‘은밀한 모략가’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명단부터 알려 드리겠습니다.” 

일행들이 긴장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정희원, 이길영, 신유승, 이설화, 공필두, 유상아, 한수영······.” 

현재 일행들 중 메인 딜러는 정희원이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공간 통제 능력을 보유한 것은 유상아였고, 누구보다 뛰어난 전황 지휘 능력을 가진 것은 한수영이었다. 이 세 사람이 팀의 메인이어야 했다. 

물론,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우리엘, 심연의 흑염룡, 제천대성······.” 

내 말에 허공에서 한바탕 스파크가 튀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명령하지 말라며 투덜거립니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당신의 의중을 가늠합니다.] 

상대가 999회차 우리엘인 만큼, 이쪽에서도 반드시 우리엘을 내보내야 했다. 운이 좋다면 지난번처럼 [끊어진 필름 이론]의 효과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상성인 흑염룡도 큰 도움이 될 것이고, 신화급 성좌가 된 제천대성은 더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여기에 파천검성, 키리오스, 장하영······ 초월좌 분들께서도 백업 지원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맡겨둬!” 

드디어 본격적인 임무에 신이 난 장하영이 외쳤다. 하지만 막상 가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파천검성과 키리오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데스, 페르세포네. 두 분께서도 1조와 함께 가주셨으면 합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을 걱정스레 바라봅니다.] 

듣고만 있던 일행들도 그쯤 되자 표정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정희원이었다. 

“잠깐만요, 그렇게까지 1조에 인원이 편중될 필요가 있어요? 그냥 다 1조인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럼 2조는 누군데요?” 

“저랑 이지혜, 그리고 이현성 씨가 2조입니다.” 

“성좌들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희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또 그럴듯한 자살 계획을······.” 

곁에 있던 유상아가 온화하게 미소짓는 것이 보였다. 그래, 유상아 씨라면 내 편을 들어줄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긴고주’의 주문을······.] 

그녀의 온화한 입술이 뭔가 끔찍한 것을 외고 있었다. 멀리서 한수영이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흔드는 게 보였다. 

‘그러게 내가 안 될 거라고 했잖아.’ 

나는 다급히 외쳤다. 

“잠깐만요! 자살 계획이 아닙니다. 진짜 제대로 된 작전이에요. 그래서 지혜랑 현성 씨도 데리고 가는 거고요.” 

“흐음······.” 

“저 이제 신화급 성좌입니다. 제가 얼마나 센지 다들 보셨잖아요.” 

“중혁 씨 뒤에 숨어서 응원하는 건 잘 봤죠.” 

“절 믿어주세요. 신화급 성좌가 어떤 존재인지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신화급 성좌! 포세이돈! 제우스! 제천대성! 그리고 구원의 마왕!” 

“뭔가 이상한 게 하나 끼어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신화급이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자 일행들도 조금씩 긴가민가하는 느낌이었다. 역시 가장 효과적인 세뇌는 반복이다. 

하늘에서 천둥이 내리친 것은 그때였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개연성을 사용하여 화신체를 실체화한 제천대성이 화려한 뇌운과 함께 등장했다. 근두운 위로 흩날리는 휘황한 백금발. 

[막내야, 제정신이냐?] 

“그냥 간접 메시지로 하셔도 되는데······ 개연성을 아끼셔야······.” 

[신화급이라고 다 같은 ‘신화’는 아니다. 너는 이제 막 신화의 영역에 발을 들인 애송이일 뿐이야.] 

제천대성이 그토록 강경하게 말하는 것은 처음 보았기 때문에 조금 당혹스러웠다. 고민하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사실을 실토했다. 

“······저도 2조 전력으로 왕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인데요, 그럼!” 

“이번 작전의 핵심은 속전속결입니다.” 

본래 2조의 핵심이어야 할 유중혁이 없는 상황. 1863회차의 힘을 빌려 쓸 수 없다면, 일행을 어떻게 나눠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자칫하면 각개격파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각개격파를 당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모두가 살아남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2조의 생존은 1조 여러분께 달렸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살아있는 불꽃’을 제압하고 태평양으로 와주세요. 저랑 지혜, 그리고 현성 씨는 여러분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것이, 내가 세운 작전의 첫 단계였다. 

* 

그로부터 30분 뒤, 나와 이지혜 그리고 이현성은 태평양으로 출항했다. 

출항 직전까지 일행들은 제발 다시 생각해 보라며 만류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라앉은 섬의 주인’은 강림만으로 미대륙을 날려버렸다. 

만약 녀석이 한반도 근처까지 오길 기다리게 된다면,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 인근의 섬들은 모조리 날아 가버릴 것이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나가서 맞이하는 게 최선책이다. 

[성좌, ‘해상전신’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물길을 읽습니다.] 

이지혜도 이현성도 모두 긴장한 표정이었다. 

특히 간만에 시나리오로 복귀한 이현성은 평소보다 훨씬 더 비장한 눈을 하고 있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자신의 머리를 닦습니다.] 

[성좌, ‘흥무대왕’이 한반도의 운명을 슬퍼합니다.] 

물살을 가르는 [터틀 드래곤]이 마침 울릉도와 독도를 지나쳤다. 

그 섬의 정경에 무슨 감명을 받았는지, 갑자기 가슴에 손을 얹은 이현성이 외쳤다. 

“······우리 땅은 우리가 지킨다!” 

[성좌, ‘황산벌의 마지막 영웅’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 엄숙한 선서를 보기 힘들었던 내가 태클을 걸었다. 

“······현성 씨 이제 군인 안 한다면서요.” 

“군인만 나라를 지키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이현성이 슬픈 눈으로 자신의 인식표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일행들과 헤어지기 직전, 정희원은 저 인식표를 한참이나 매만지더니 이현성을 놓아주었다. 

―꼭 살아있어요, 알겠죠? 

이현성이 주인을 기다리는 청순한 소 같은 얼굴로 허공을 향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꼴을 보던 이지혜가 내게 귓속말을 했다. 

“아저씨, 왠지 우리 사망 플래그 선 거 같아.” 

“······우린 괜찮을 거야. 죽어도 현성 씨만 죽겠지.” 

“근데 진짜 나랑 현성 아저씨만으로 충분해?” 

“응.” 

나는 배의 갑판에 천을 벌려 놓으며 말했다. 방금 전 [도깨비 보따리]를 통해 구매한 DIY 상품이었다. 적과 조우하기 전까지 완성하는 게 목표였다. 

“이해가 안 돼. 현성 아저씨는 그렇다 쳐도 나는 왜? 바다라서?” 

“비슷해.” 

“하지만 내 배후성은 위인급······ 아니, 설화급이라고. 다가오는 녀석은 신화급이라도 막을 수 없다면서?” 

확실히 그녀의 말이 맞았다. 해상전신은 뛰어난 성좌인 건 맞지만, <스타 스트림> 최상위격의 성좌라 말하기는 어려웠다. 

“장군님이 아니라 널 믿는 거야.” 

“······어?” 

“성좌가 설화급이라고, 화신도 설화급은 아니니까.” 

이지혜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눈을 끔뻑이더니 피식 웃었다. 

“뭔 소리야. 난 성좌도 아닌데.” 

지금은 그렇지. 

이지혜는 아직 자신의 가능성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읽었던 원작에서 그녀가 어디까지 나아갔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어쩌면 장군님은 이미 아실지도 모르겠군. 

혼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찍던 이현성이 다가왔다. 

“그런데 독자 씨는 아까부터 뭘 만들고 계신 겁니까?” 

“아, 이거요?” 

나는 만들던 아이템을 들어 보여주었다. 

그러자 곧바로 설명이 떠올랐다. 

+ 

<아이템 정보> 

이름 : 완벽한 항복의 백기 

등급 : SSS 

설명 :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적이 당신의 항복을 알아챌 수 있는 놀라운 아이템입니다. 아군들에게 들키지 않게 사용하세요. 

+ 

이현성은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인가 싶은 표정으로 몇 번이나 눈을 비비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빙긋 웃었다. 

“말했잖아요. 죽을 생각 없다고.” 

“아니, 하지만 이건······.” 

“보이면 바로 항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화를 유도해요. 아시겠죠? 싸우면 절대로 시간 못 끌어요. 나타나는 순간 즉시―” 

“아저씨! 뭔가 온다!” 

이지혜의 외침과 동시에, 수평선 건너편에서 거대한 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백 미터 높이에 이르는 파도의 벽. 그 벽이, 우리를 덮쳐오고 있었다. 

[‘대멸망 시나리오’ 지역에 조기 진입하였습니다!] 

[시나리오 지역에서 당장 이탈할 것을 권고합니다!] 

[이탈하지 않을 시, ‘대멸망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당연히 이탈할 생각은 없었다. 

[히든 시나리오― ‘대멸망’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계의 신격’의 침습이 시작됩니다!] 

[재앙으로부터 살아남으세요!] 

시나리오 설명과 함께, 거대한 격의 파랑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신화급 성좌’가 된 지금도 전신의 솜털이 바짝 일어설 정도의 격. 

「별들조차 당해낼 수 없었던 재앙. 이것이 ‘대멸망’이었다.」 

하나의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한, ‘이계의 신격’의 진군.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는 일행들을 보호하기 위해 적당한 설화를 방출하며 파도의 벽을 올려다보았다. 어디선가 ‘이계의 신격’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파도 사이사이로 ‘이계의 신격’들이 단층처럼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벽의 최정상에, 군림하듯 올라선 한 척의 전함. 익숙한 모양의 배였다. 배의 용머리 선수상에서 흉폭한 불길이 쏟아져 나왔다. 

[터틀 드래곤]. 

그것은 틀림없이 [터틀 드래곤]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쪽 [터틀 드래곤]보다 족히 스무 배는 더 커 보인다는 것. 

“아, 아저씨······.” 

겁에 질린 이지혜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이 모든 걸 알고 있었냐고 묻는 듯한 얼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까지는 아니지만, 예상한 바였다. 999회차에서 살아남은 일행들의 명단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서쪽 세계의 재앙 ‘가라앉은 섬의 주인’.」 

갈라지는 파도 너머로, 999회차의 ‘결’을 본 소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장전.】





< Episode 89. 대멸망 (3) > 끝

< Episode 89. 대멸망 (4) >





포격이 시작되는 순간, 나는 이지혜를 붙잡았다. 마치 세계 전체가 우리를 향해 조준경을 들이댄 느낌. 

이지혜가 배의 선두를 틀었다. 그저 늦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발사.】 

콰아아아아아! 

귀청이 찢어질 정도의 포격음과 함께 대양이 이명으로 뒤덮였다. 인근의 포말 전체가 수증기로 기화하고 있었다. 거의 간발의 차이로, [터틀 드래곤]의 선체가 선회했다. 그나마도 온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현성 씨!” 

매캐한 탄내와 함께 설화 금속이 가지를 뻗어 갑판 전체를 뒤덮었다. 선체를 감싼 강철이 하얗게 백열하고 있었다. 피부가 익어버릴 정도의 열기. 외판의 충격이 줄어들었을 무렵, 이현성이 [강철화]를 해제했다. 시야가 열린 곳에서, 땅이 꺼진 것처럼 배가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나는 [마왕화]의 날개를 펼치며 외쳤다. 

“이지혜!” 

황급히 키를 잡은 이지혜가 선체의 움직임을 조절했다. 선체 아래쪽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며 [터틀 드래곤]이 비행을 시작했다. 

균형이 안정된 후에야 우리는 주변을 점검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그리고 김독자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바다의 한 가운데에 있던 배가 갑자기 추락했다. 그렇다는 것은 즉, 선체를 떠받치던 바닷물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쿠구구구구구! 

두 쪽으로 갈라진 대양이 시커먼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펄떡거리며 뛰는 해수종들이 고통스럽게 몸을 뒤척였고, 그런 해수종들을 뜯어 먹는 ‘이계의 신격’의 무리가 보였다. 

【갸아아아아아아아아!】 

심해의 바닥을 달리는 ‘이계의 신격’의 떼가 꾸물거리며 몰려오고 있었다. 마른 대양의 양쪽에선 다시금 해일이 밀려들었다. 

“움직여! 빨리!” 

내 말에 이지혜가 급히 배를 돌렸다. 

【장전.】 

그리고 두 번째 장전음이 울려 퍼졌다. 그저 진언을 들은 것만으로도 공포가 스멀스멀 뼛속까지 스며들 지경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이현성도 땀을 폭포처럼 쏟고 있었다. 제아무리 [설화 금속]이라도 저런 수준의 공격을 몇 번이나 견뎌내지는 못한다. 

“아저씨! 어떻게 좀 해봐!” 

안 그래도 어떻게 할 참이었다. 

나는 조금 전까지 깨작거리며 만들던 [완벽한 항복의 백기]를 힘껏 치켜들었다. 

[아이템, ‘완벽한 항복의 백기’를 발동합니다!] 

[이제 당신의 적들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당신의 완벽한 항복을 눈치챌 것입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행동에 깜짝 놀랍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비겁함을 손가락질합니다!] 

비겁하긴 뭐가. 전장에도 안 나온 자식들이. 

나는 온 힘을 다해 백기를 흔들었다. 

“이지혜! 이쪽이다!” 

내 외침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태클을 건 것은 오히려 이쪽의 이지혜였다. 

“아저씨 돌았어?” 

“이래 봬도 SSS급 아이템이야.” 

“항복한다고 살려줄 리가 없잖아!” 

“저쪽 이지혜는 착할 수도 있잖아. 믿어보자.” 

“지금 상황에 농담이 나와?” 

아쉽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마침내 장전이 끝난 포신이 환한 빛을 발하려는 바로 그 순간, 나는 열심히 백기를 흔들며 준비된 대사를 날렸다. 

“어이 이지혜! 네 사부는 백기를 든 상대를 공격하라고 가르쳤냐?” 

쿠구······. 

그 순간, 처음으로 저쪽의 움직임이 멎었다. 장전이 끝난 포신이 사격 직전에 멈춰서 있었다. 희뿌옇게 흩어지는 수증기 사이로 갑판에 선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계의 신격, ‘가라앉은 섬의 주인’. 

999회차의 이지혜가, 긴 머리를 흩날리며 그곳에 있었다. 

아득한 세월을 살았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20대의 모습이었다. 마치, 그녀의 시간은 999회차의 ‘결’에서 한 걸음도 채 흘러가지 않았다는 것처럼. 

그 세월의 공백을 헤아리듯, 이지혜의 입술이 열리고 있었다. 

【깃발······.】 

“그래, 이 깃발. 기억나지?” 

오래된 페이지들이 내 안에서 넘어갔다. 999회차의 장면이 재현되고 있었다. 지독한 피냄새. 으슥한 지하철의 어둠. 

[전용 스킬, ‘독해력’이 발동합니다!] 

[특성, ‘시나리오의 해석자’가 발동합니다!] 

[당신의 말이 대상의 오래된 설화를 깨웠습니다!] 

「그 어둠 속에, 유중혁이 서 있었다.」 

깨진 열차의 헤드라이트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간간이 비치는 시야 속에서, 괴수들을 학살한 유중혁의 검이 빛나고 있었다. 

「그날, 상처받은 검귀와 패왕이 만났다.」 

자신이 고전한 적들을 너무도 쉽게 해치운 검을 보며, 검귀가 몸을 떨었다. 무심히 사라지는 검의 궤적을 따라가며 이지혜는 외쳤다. 

「“당신을 따라가면 강해질 수 있어? 그럼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냐고!”」 

츠츠츠츠츠츠츳! 

눈앞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일대에 몰아치는 개연성의 후폭풍으로 인해 사위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우리를 노리고 달려들던 해수종들과 ‘이계의 신격’들이 스파크에 휘말려 몸부림쳤다. 

【무슨일무슨일무슨일무슨일무슨일】 

‘이계의 신격’들이 그들의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왕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먼 기억을 헤매는 듯, 999회차의 이지혜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사······ 부.】 

·····예상대로였다. 

처음 ‘은밀한 모략가’를 만났을 때도 그랬고, 999회차의 우리엘을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이들은 제정신이 아니다. 

[등장인물, ‘가라앉은 섬의 주인’이 고통스럽게 이빨을 드러냅니다.] 

보통 ‘이계의 신격’이 된 존재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다. 자신이 살아온 기억들을 잃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의 ‘이계의 신격’들의 이야기고, 이 ‘왕’들은 다르다. 

그들에게는 생전의 기억과 감정이 남아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자신의 설화를 회차별로 분리해서 저장했고, ‘살아있는 불꽃’은 복수에 대한 집착 속에 자신의 자아를 구겨 넣었다. 

그렇다면 ‘가라앉은 섬의 주인’은 어떨까.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까. 

“이지혜! 네가 누구였는지 떠올려!” 

999회차의 이지혜가 왜 ‘이계의 신격’이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짐작 가는 것이 하나 있기는 했다. 

“이 ‘세계선’을 파괴하지 마! 이곳도 네가 살았던 세계와 같아! 유중혁이 있고, 이현성이 있고, 이지혜가 있다고!” 

츠츠츠츠츠츳!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행동을 주시합니다.] 

[일부 대도깨비들이 당신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눈앞에서 999회차의 설화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눈을 감지 마! 네가 누구를 죽이는지 똑똑히 봐!” 

「“눈을 감지 마라. 네 검이 누구를 죽이는지 똑똑히 기억해라.”」 

999회차의 이지혜가 기억하는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그녀에게 검도를 가르치고, 생존방법을 가르쳐 준 유중혁. [깃발 쟁탈전]이 시작되고, 충무로 역을 점거한 유중혁이 말하고 있었다. 

「“네가 죽인 이의 죽음을 기억해라. 그것이 네가 상처받을지언정, 검귀가 되지 않을 방법이다.”」 

아직 흰색이었던 유중혁의 깃발이, 그곳에서 찬연히 흔들리고 있었다. 적색이 되고, 흑색이 되었던 깃발. 이지혜는 사내의 등에서 오연하게 빛나는 그 깃발을 보며 생각했다.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 

나 역시, 아주 많이 했던 생각이었다. 

[등장인물, ‘가라앉은 섬의 주인’의 설화가 격렬하게 흔들립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속사포처럼 쏘아붙였다. 내가 기억하는 999회차의 기억을, 서슴없이 토해냈다. 

“그때 유중혁이 말했던 거, 모두 잊었어? ‘미리 항복하는 녀석들은 살려주도록 해라! 꿍꿍이가 있는 녀석들은 보통 머리가 좋다! 인력이 부족하니 그런 녀석들도 활용해야 한다!’” 

곁에서 나를 보는 이지혜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설마 내가 이런 식으로 적을 설득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비겁한 방법이라고 욕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원작의 기억을 자극해서라도, 지금은 시간을 버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심지어는 그것마저도 잘 된다는 보장조차 없었다. 

【발사.】 

······빌어먹을, 역시 이 정도로는 안 되나. 

콰아아아아아! 

두 번째 사격이 시작되었다. 

아까보다는 확연히 위력이 줄어든 포격이었지만, 역시나 정면에서 맞상대하기는 힘든 파괴력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번에는 ‘커다란 한 방’이 아니라 산탄이라는 점. 

대양을 가르며 날아드는 포탄을 보며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현성 씨!” 

“······아직 준비가 덜 끝났습니다!” 

다른 일행들에게도 [설화 금속]을 빌려주었기 때문일까, 이현성의 마력 회복은 무척 더디었다. 선체를 덮은 강철은 아까의 절반. 

결국 이번 턴은 [강철화]의 도움 없이 버텨내야 했다. 

떨어지는 산탄을 피해 [터틀 드래곤]의 선체가 전력으로 후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배의 움직임과는 반대로, 이지혜는 나와 이현성을 보호한 채 앞으로 나섰다. 

“아저씨들은 뒤로 빠져. 여긴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뜻밖의 말에 나는 이지혜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빛으로, 이지혜가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싸움은 내 싸움이야.” 

무엇이 그녀를 움직인 것일까.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지혜가 자신의 전장을 선택했다는 것이었다. 

“999회차가 뭔지,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잘 몰라. 다만, 다른 회차의 비극을 이유로 이 세계를 파괴하려는 ‘내’가 있다면.” 

굳은 결심을 마친 이지혜의 눈에서 귀화가 피어올랐다. 

“나는, 그런 나를 용서할 수가 없어.” 

[성좌, ‘해상전신’이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나는 그런 이지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바다는 그녀에게 최고의 전장. 

지금 당장 믿을 것은 이지혜와 그녀의 전함뿐이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개연성이 화신 ‘이지혜’에게 깃듭니다!] 

내가 가진 거대 설화들이 일제히 그녀에게 격을 몰아주었다. 

눈부신 황금빛 아우라가 이지혜를 덮었다. 

눈을 커다랗게 뜬 이지혜가 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고마워, 아저씨.” 

이지혜의 전함이 출발했다. 

날아드는 산탄의 궤적을 피하며, [터틀 드래곤]의 선수상이 불을 뿜었다. 

“전군 전진하라!”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기염을 토합니다!] 

작은 용머리 선수상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이, 저쪽의 탄환과 맞부딪치며 산화했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가 설화가 되어, 999회차의 설화와 부딪치고 있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화신 이지혜를 돕습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의 파급력만이라면, 이쪽도 어지간한 성운에 밀리지 않는다. 

[성좌, ‘해상전신’이 자신의 화신에게 지휘권을 양도합니다.] 

[등장인물 ‘이지혜’가 ‘유령함대 Lv.???’를 발동합니다!] 

그녀의 주특기인 유령함대가 대양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순양함 급을 넘어서, 이제 거의 항공모함 급에 육박하는 거대한 전함들. 

그 전함들이 일제히 불을 뿜으며 [터틀 드래곤]을 호위했다. 

“장전!” 

이지혜의 유령함대가 쾌속 전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저쪽의 포격이 먼저였다. 

일대의 바다에 불꽃의 해일이 밀려들었다. 해일을 향해 함대가 돌진했다. 앞을 막아서는 거대한 파도의 벽. 그녀는 오직 한 점만을 바라보았다. 

“발사!” 

집중 사격에 파도 벽의 한쪽이 터져 나갔다. 그 작은 공동을 파고들며, 함대는 전진을 계속했다. 일자를 이룬 대형이 전방위에 포격을 개시했다. 

탄환에 맞은 ‘이계의 신격’들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그 비명들을 짓밟은 채 이지혜는 앞으로,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과도한 마력의 사용에 피를 토하면서도, 자신이 잡은 키를 놓지 않았다. 

「단 한 발이라도.」 

섬뜩한 빛을 띤 이지혜의 눈동자가 여전히 한 점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저 두터운 파도의 벽. 그 너머에 존재하는 한 척의 전함. 

【장전.】 

“장전!”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화신 ‘이지혜’를 응원합니다.] 

[성좌, ‘흥무대왕’이 화신 ‘이지혜’를 응원합니다.] 

[성좌, ‘조선제일술사’가 화신 ‘이지혜’를 응원합니다.] 

[성좌, ‘황산벌의 마지막 영웅’이 화신 ‘이지혜’를 응원합니다.] 

[성좌, ‘외눈 미륵’이 화신 ‘이지혜’를 응원합니다.] 

[성좌, ‘서애일필’이 화신 ‘이지혜’를 응원합니다.] 

한반도의 성좌들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황 속에서도 길을 뚫어가는 그녀를 보며, 나 역시 오래된 원작의 한 페이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등장인물 ‘이지혜’의 특성 진화가 임박했습니다!] 

원작에서도 겪었던 그녀의 마지막 특성 진화가 이제 막 눈앞에서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오직 지금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반도의 성좌들이 보내온 개연성.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쌓은 설화. 그리고 죽음조차 불사하는 이지혜의 각오가 합쳐진 기적. 

[성좌, ‘해상전신’이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드높은 하늘에서 이지혜의 배후성인 해상전신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이지혜를 지키고 보필해 온 성좌.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같은 별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감각. 

그는 지금 오직 극소수의 성좌들만이 겪는 이벤트를 겪고 있었다. 

「화신이, 배후성의 격을 앞지르는 것.」 

그렇게 해상전신은 깨닫고 있을 것이다.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왔음을. 

지금이 바로, 자신의 화신을 품에서 놓아줘야 할 때임을. 

「그리하여, 바다는 거센 폭풍을 다스릴 단 하나의 군주를 원했으니.」 

마치 첫 활공을 시작하는 젊은 새를 위한 축사처럼, 해상전신이 설화를 읊고 있었다. 

「그것은, 이 대양에 두 명의 군주가 필요 없음이라.」 

[등장인물 ‘이지혜’의 특성이 진화합니다!] 

[등장인물 ‘이지혜’가 전설급 특성을 획득하였습니다!] 

마침내, 상처받은 검귀가 자신의 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등장인물 ‘이지혜’의 특성이 ‘대해의 군주’로 진화합니다!] 

【발사.】 

“발사!” 

아득한 포격음과 함께, 눈앞의 모든 것이 섬광으로 뒤덮였다.





< Episode 89. 대멸망 (4) > 끝

< Episode 89. 대멸망 (5) >





【해······상전······신.】

자신의 배후성을 기억하는지, 999회차의 이지혜가 반응하고 있었다.

「999회차에서, ‘해상전신’은 이지혜를 살리기 위해 죽었다.」

이 회차에서 일어난 일을 부정하려는 듯, 강렬한 함포 사격이 이어졌다.

그러자 이쪽의 이지혜도 대응했다.

「한반도의 모든 성좌들이 이지혜와 함께하고 있었다.」

대해(大海)의 군주.

1800회차를 넘어선 ‘멸살법’의 극후반에야 이지혜가 도달하는 경지.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최정상의 위치에서, 자신의 배후성조차 뛰어넘은 이지혜는 마침내 바다의 신이 된다.

「적어도 바다에서만큼은, 그 어떤 신화급 성좌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것은 실제로 이지혜가 한 말이었고, 실천된 말이기도 했다. 원작의 그녀는 바다에서만큼은 신화급 성좌인 포세이돈과 비등한 전투를 펼친 적도 있었다.

“발사!”

[특성, ‘대해의 군주’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이지혜의 배후에서 폭풍이 불어닥쳤다. 그녀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해일이 갈라지며 불바람이 쏟아졌다. 그녀의 함선을 호위라도 하듯 몰아치는 광풍.

이지혜는 그 바람의 선두에 서서 사격을 이어 나갔다.

[전용 스킬, ‘유령함대 Lv.???’가 응전을 계속합니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해일의 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대 해 의 군 주】

【둘둘둘둘둘둘둘둘둘】

저쪽을 따르던 ‘이계의 신격’들까지 당황하는 모양새였다.

「대해의 군주는 바다에서는 패배하지 않는다.」

그것이 ‘멸살법’의 정설이었다. 나도 그 문장을 믿었고, 그랬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하지만.

“큭······.”

푸슈슉, 하는 소리와 함께 이지혜의 코와 입에서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과도하게 끓어오른 마력이 역류하고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특성, ‘대해의 군주’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이쪽의 격이 자아낸 메시지가 아니었다.

뭔가가 달려든다 싶더니, 한순간 불어닥친 역풍이 시야를 뒤집었다. 거대한 해일에 휘말린 [유령함대]와 [터틀 드래곤]이 포말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지혜야!”

나는 실이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는 이지혜의 손목을 붙잡았다.

내 마력에 정신을 차린 이지혜가 공중제비를 돌며 갑판에 착지했다.

으드득 이를 간 이지혜가 키를 잡으며 외쳤다.

“도망가라니까!”

“그럴 순 없어.”

지금의 이지혜 혼자서는 무리였다. 아무리 ‘대해의 군주’가 되었다고 해도, 저쪽은 이미 오래전에 ‘대해의 군주’의 격을 달성하고 이계의 신격이 된 존재였다.

츠츠츠츠츳!

대멸망 시나리오의 가호로 신화급 성좌조차 넘어서는 재앙. 그게 지금 우리가 싸우는 상대였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습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신화에 대항합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세 개의 ‘거대 설화’가 한꺼번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1조가 사용 중인 ‘거대 설화’ 지분이 있었기 때문에, 지분 전체를 끌어 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저쪽을 도발하기엔 충분했다.

【너희들은······.】

백기로 기억을 자극한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진언에 실린 감정 양상이 아까와는 달라졌다.

츠츠츠츠츳!

[등장인물, ‘가라앉은 섬의 주인’이 거대 설화를 응시합니다.]

[‘끊어진 필름 이론’이 발동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원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두 명의 이지혜가 쌓아 올린 설화가 충돌하며 끊어진 필름이 이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계획대로라면 이 현상을 통해 우리는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눈앞의 정경이 변한 것은 그때였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것은 독자(獨子)의 설화.」

「[살아주세요.]」

「“아저씨! 안돼! 멈추라고! 멈춰―!”」

처음으로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과 맞섰던 순간의 기억.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듯, 이지혜가 시선을 돌렸다.

······그때 이지혜는 저런 표정을 하고 있었구나.

나 역시 저 때의 기억이 생생했다.

나는 멸망하는 [공단]을 통째로 옮기기 위해, ‘은밀한 모략가’와 계약해 저 재앙을 막아냈었다.

【너는······.】

그런데,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999회차의 이지혜도 마찬가지였다. 이어서 우리 눈앞에 또 다른 설화가 펼쳐졌다.

[거대 설화, ‘영원한 수평선의 방랑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것은 999회차의 이지혜가 가진 설화였다.

성운들의 습격으로 망가진 서울의 정경. 쓰러진 일행들. 부서져 나가는 성채의 흉벽.

그 흉벽의 꼭대기에서, 한쪽 팔을 잃어버린 유중혁이 외눈으로 전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방법은 이것뿐이다.”」

유중혁의 몸에서 피어오른 새카만 혼돈의 아우라.

「“사부! 멈춰! 멈추라고!”」

나는 그것이 어떤 장면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999회차 유중혁이 죽는 모습이었다.

외신과 맺은 반복된 ‘이계의 언약’으로 넝마가 되어버린 그의 영혼이 마지막 거래를 하고 있었다.

깊은 바닷속으로 침전하는 서울. 유중혁이 말했다.

「“살아남아라.”」

부연 포말 너머로 999회차의 기억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가라앉은 섬의 주인’. 무표정한 그녀의 두 눈에서 뭔가가 흐르고 있었다.

영겁의 세월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설화.

그 설화가, 저 존재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것이다.

“아저씨, 이거―”

돌아보자 이쪽의 이지혜도 울고 있었다.

“너무, 비슷하잖아······.”

[두 개의 ‘거대 설화’가 서로에게 호응합니다.]

비슷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김독자가 생각한 가장 완벽한 회차는 ‘999’회차였고.」

저 회차는, 내가 모티브로 삼은 회차였으니까.

「그 회차만이, 어떤 회차보다도 올바른 결말에 가까운 회차였다.」

모두를 살리면서, 결말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회차.

츠츠츠츠츳!

폭주하는 후폭풍 속에서 999회차의 이지혜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는 거리.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저씨, 물러서!”

위험을 직감한 이지혜가 쌍룡검을 뽑아 들며 달려갔다.

[순살]. 이지혜가 가진 최강의 대인 기술. 하지만 뻗어 나간 섬광은 강한 파찰음과 함께 허공에서 튕겨져 나갔다. 피를 흩뿌리는 이지혜의 몸이 갑판 위를 날았다.

“지혜야!”

대기하고 있던 이현성이 이지혜를 안아 들었다.

한숨을 돌리는 순간, 999회차의 이지혜가 내 코앞에 있었다.

격을 발출하기 위해 설화를 풀어내는 찰나, 희고 단단한 오른손이 내 멱살을 틀어쥐었다.

【당신은······ 누구야?】

······누구 제자 아니랄까봐.

나는 쓰게 웃었다.

어찌됐든 대화가 가능해졌다는 것은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내 이름은 김독자다. 네 사부의 절친이지.”

【······절친?】

999회차의 이지혜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녀는 내 주변을 떠도는 설화를 보고 있었다.

「“놈들과 격돌하기 직전, 왼쪽 벽면을 꼭 살피세요. 그럼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게 될 겁니다.”」

「“그건 28번 시나리오의 ‘사스콰치’들을 상대하라고 알려드린 겁니다.”」

내 설화들이 999회차의 이지혜에게 읽히고 있었다.

【어떻게 너는······.】

「“나는 유중혁이다.”」

【······사부?】

혼란이 찾아오는 듯 999회차의 이지혜가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감쌌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쿠드드드드드!

멱살을 잡은 이지혜의 악력이 강해지고 있었다. 전신을 옥죄어오는 격의 파형에 조금씩 숨이 막혀왔다.

“잠깐만, 일단 이것 좀 놓고······!”

【사부사부사부사부사부사부사부사부】

폭주하는 이계의 신격들이 그녀의 말을 따라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구슬픈 언어로 999회차의 이지혜를 대신해 울부짖고 있었다.

목청이 터질 것처럼. 존재가 스러질 것처럼.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이 발동합니다!]

[당신의 모든 설화가 해당 인물에게 동조하고 있습니다.]

[해당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급격하게 상승합니다!]

그녀의 동공에 우리가 살아온 순간들이 스쳐가고 있었다.

<마왕 선발전>, <기간토마키아>, <성마대전>과 <서유기>. 그리고.

[설화, ‘네모난 원’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언제든 말해도 돼. 나한테 말하고 싶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라도 좋아. 하지만 웅크려 놓고 혼자 썩히지는 마.”」

깊은 슬픔으로 일그러진 999회차 이지혜의 얼굴이 보였다.

왜 이 순간, 나는 ‘은밀한 모략가’가 떠오르는 것일까.

「【어째서, 내가 아니라 너희들인 것이지?】」

999회차의 이지혜― ‘가라앉은 섬의 주인’에게,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일까.

그녀도 역시 나를 증오할까.

그들의 역사를 읽고 쌓은 이 세계선의 삶을―

「부러워」

······뭐?

츠츠츠츠츳!

한없이 그리운 무언가를 보듯, 999회차의 이지혜가 내 뺨을 향해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대었다.

같은 이야기를 읽어도, 감상은 저마다 다른 법이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이야기를 보고 절망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한없이 닮은 슬픔을 보며 위로를 받는 존재도 있다.

문제는, 그 위로의 방향이었다.

「가지고 싶다」

오랜 슬픔에 젖은 그녀의 눈동자에 광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999회차의 이지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쓰러진 이지혜를 보고 있었다.

「나도, 이런 삶을 살고 싶다」

나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끊어진 필름 이론]이 요동치고 있었다. 999회차 이지혜가 손을 뻗자, 흘러나온 격류가 쓰러진 이지혜를 감싸 안았다. 위험했다.

[두 존재의 설화가 공명을 시작합니다!]

으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999회차의 설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999회차의 설화가, 이 세계선의 설화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나는 기함하며 격을 발출했다.

막아야 한다. 절대로, 999회차가 이지혜를 먹어 치우도록 두어선―

콰드드드드드!

순식간에 배의 갑판을 뚫고 자라난 강철이 이지혜와 나를 보호했다. 이현성이었다. 그런데, 그의 강철에서 느껴지는 설화의 기운이 뭔가 달랐다. 나는 이현성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이현성이었지만, 이현성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이현성의 몸을 빌려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화신 ‘이현성’의 배후성이 당신을 보호합니다!]

‘가라앉은 섬의 주인’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의 격.

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강철벽을 헤집고 999회차의 이지혜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의 표정은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이현성의 배후성이었다.

【지혜야. 우리의 이야기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

이계의 신격의 진언.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

그 시각, 한명오는 김독자에게 빌린 코인으로 구매한 [X급 페라르기니]를 타고 차원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목적지는 봉인된 ‘환생자들의 섬’.

“다름아! 아빠 목소리 들리면 대답해! 다름아!”

한다름. 그것이 한명오가 자신의 딸에게 붙인 이름이었다.

한명오는 암흑 단층의 곳곳을 헤매며 그 이름을 불렀다.

“다름아!”

일그러진 암흑의 틈새에서, 한명오는 익숙한 모양의 손을 발견했다.

못 알아볼 수가 없는 손. 마왕에게 빼앗기기 전까지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던 손이었다. 한명오는 그 손을 꾹 쥐었다. 그리고 단층 사이에서 딸의 몸을 빼내기 시작했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딸을 구하기 위해 빌린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딸의 몸이 조금씩 단층 사이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딸의 화신체는 무사했다. 하지만 심장이 뛰질 않았다. 다행히 그에게는 이설화에게 받은 [생사단] 한 알이 있었다.

“다름아! 정신 차려! 아빠야! 아빠가 왔어!”

한명오가 눈물을 쏟으며 외쳤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한다름이 눈을 떴다. 슬그머니 흘러나오는 붉은 안광.

[······잘했습니다, 나의 권속이여.]

눈을 뜬 것은, 한다름이 아니었다.

[······하마터면 ‘종말의 인도’가 성마대전에서 끝날 뻔했군요.]

스산한 마왕의 격. 아스모데우스의 광소에 한명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내, 내 딸을 돌려줘! 내 딸을―”

[딸? 흐음······ 미안하지만 그건 곤란해요. 내겐 이 화신체가 꼭 필요하거든요. 대신, 선물로 좋은 것을 주겠어요.]

그 말과 함께, 아스모데우스가 품속에서 새카만 안대를 꺼냈다.

[이 세계선의 종말을 함께 지켜볼 자격을.]

그것은 ‘종말의 인도자’ 사이에서 전해지는 오래된 아이템이었다.

오직 마지막 시나리오의 코앞에 도달했을 때만 사용 가능한 아이템.

[아이템, ‘심연의 유물’을 발동합니다!]

심연에 깃든 이계의 신격― ‘999의 악마’를 불러오는 ‘이계의 주문’.

일대의 차원이 뭉그러지는 것을 보며, 아스모데우스가 광소를 터트렸다.

[메타트론! 아가레스! 구원의 마왕! 이 이야기는 당신들의 생각대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이 이야기는―]

【뭐야 이건?】

언제부터였을까. 아스모데우스의 뒤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시커먼 아우라로 덮인 채, 한쪽 팔에는 붕대를 감은 사내.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보던 한명오가 몸을 떨었다. 사내는, 한명오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런 한명오와 시선이 마주친 사내가 웃었다.

【······네가 날 부른 거냐? 흠······ 뭐야. 마왕도 있어? 아하, 알겠다. 이 마왕이 널 괴롭히고 있는 거지? 그래서 살려달라고 날 불렀구나?】

[종말이시여! 아닙니다! 당신을 소환한 것은 바로 저 아스모데우스―]

쐐애액,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투명한 손이 아스모데우스의 뒷덜미를 붙들었다. 잠시 후, 사내의 손엔 아스모데우스의 영혼체가 붙잡혀 있었다.

[커헉······?]

【난 남의 몸에 숨은 놈 말은 안 믿어.】

푸화학, 하는 소리와 함께 아스모데우스의 영혼체가 찢어졌다. 발악할 틈도 없는 일격. 넝마가 된 마왕의 설화를 핥은 사내가 웃었다.

【난 마왕 놈들이 제일 싫어. 날 따라하거든. 이것 봐! 이 자식, 내가 잃어버린 안대도 가지고 있잖아.】

혼자서 중얼거린 사내가 아스모데우스의 눈에서 새카만 안대를 벗겨 자기가 썼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만족스러운 듯 사내가 싱긋 웃었다. 부들부들 떠는 한명오가 쓰러진 자신의 딸을 안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이 어이, 걱정 마. 내가 좀 무섭긴 하지만 알고 보면 괜찮은 남자거든.】

자신의 붕대를 탕탕 두드린 사내가 말했다.

【그럼 어디······ 우리 지혜부터 찾아볼까?】





< Episode 89. 대멸망 (5) > 끝

< Episode 90. 한 사람 (1) >





자라난 강철이 나와 이지혜를 보호하고 있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이현성의 배후성은 본래 ‘강철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강철의 주인’은 지난 <오즈> 사태 때 소멸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수식언을 넘겼다.

【은빛 심장의 왕.】

은빛 심장의 왕. 그가 바로 새로운 ‘강철의 주인’이었다.

‘가라앉은 섬의 주인’과 마찬가지로 999회차의 결을 본 존재.

999회차의 결을 본 이현성.

【같잖은 배후성 행세는 집어치워. 지금 뭐하는 거야?】

같은 ‘왕’을 대면했기 때문일까. 999회차의 이지혜가 이성을 되찾고 있었다.

【왜 우리가 부를 때는 침묵하다가 이제야 나타난 건데?】

‘가라앉은 섬의 주인’이 말하고 있었다.

【원칙을 따르자고 한 것은 당신이었잖아. 다른 세계의 멸망이 되어서라도,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되찾자고 약속했잖아. <스타 스트림>에게 우리의 시나리오를 돌려받자고······, 그렇게 말했었잖아.】

그들의 곁에 흐르는 설화가 그들의 삶을 짐작하게 했다.

「지혜야. 원칙을 지켜야 한다. ‘이계의 신격’이 되더라도, 그 원칙을 잊지 마.」

「세계가 너를 상처 입힐 때, 그 원칙만이 너를 지켜줄 거다.」

「네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너를 대신해 말해줄 거다.」

모든 회차의 이지혜가 이지혜이듯, 모든 회차의 이현성 또한 이현성이다.

심지어 ‘이계의 신격’이 되어서조차, 그들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은빛 심장의 왕’이 나를 바라보았다.

감정을 헤아릴 수 없는 시선이었다.

【이것이 나의 원칙이다, 지혜야. 999회차의 비극을 재현하지 않는 것.】

【무슨 헛소리야? 당신 멋대로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 있는 게 원칙이야?】

【이 세계선에 살았던 내 배후성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어쩌면······, 이 세계선이야 말로 우리가 찾던 세계선인지도 모른다.】

‘은빛 심장의 왕’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모든 것의 ‘끝’을 볼 수 있는 세계선.】

그 말에, 999회차의 이지혜가 멈칫했다.

【그런 세계선이 존재할 리 없어. 어차피 이 세계선은 끝이야. 당신이 막아도, 내가 멈추더라도―】

아무래도 ‘은빛 심장의 왕’은 이 ‘대멸망’에서 재앙이 되기를 선택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우리를 해칠 생각이었다면 <오즈>에서 나섰을 테니까.

실제로 그것을 알기에 이현성을 데려온 것이었다. 정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마지막 카드로.

【이들은 그리 약하지 않다. 우리엘 혼자로는 무리다.】

‘은빛 심장의 왕’이 말하자, ‘가라앉은 섬의 주인’이 대답했다. 먼 수평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허무가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눈빛에 생기가 돌아왔다. 마치 불쾌한 뭔가를 보기라도 한 듯한 표정.

【혼자가 아니라면?】

그리고 다음 순간, 수평선 너머가 새카만 어둠으로 뒤덮였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무언가가, 저 너머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은 독도 인근 해역에 자리를 잡은 채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독자가 태평양 쪽으로 사라진 후, 수평선 너머에서 먼 북소리 같은 것이 간간이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일행들의 몸이 한 번씩 움찔거렸다. 그 간헐적인 멈칫거림에 대해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김독자를 도우러 가고 싶다.’

하지만 일행들은 참았다. 그것이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섣불리 움직였다간 김독자를 구하기는커녕 모든 것을 다 잃을 수도 있었다. 무조건 작전대로 가야 한다. 작전대로, 이곳에서······.

쿠구구구구구.

창공에서 열기가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해역 전체를 뒤덮는 폭염.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들은 믿기지 않는 장면을 보았다.

김독자의 말이 맞았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바다 한가운데로 떨어지고 있었다.」

컨트롤 타워를 맡은 한수영이, 공필두의 성채 꼭대기에서 외쳤다.

“전투 준비!”

영혼마저 녹아내릴 것 같은 열기.

그 지독한 홍염 속에 날개를 단 999회차의 우리엘이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어디에 있지?】

「이계의 신격의 왕, 동쪽에서 떠오르는 ‘살아있는 불꽃’.」

한수영은 눈앞에서 풍겨오는 어마어마한 격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정확히는 삼키려 했다. 하지만 입속의 침조차 말라버렸는지 조금의 물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메마른 목을 가다듬으며, 한수영이 말했다.

“지금부터 ‘불꽃 진화’를 시작한다.”

불꽃 진화. 그것이 이들, ‘1조’가 맡은 임무였다.

한수영은 떠나던 김독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떠올렸다.

―죽이지 마. 그 존재도 ‘우리엘’이야.

······빌어먹을 김독자. 저런 걸 죽이지 말고 제압하라고?

침묵의 시위 속에 ‘살아있는 불꽃’이 가늘게 눈을 떴다.

【대답하지 않겠다면―】

“유상아!”

신호와 함께 유상아가 손을 뻗었다. 하늘거리는 법복 사이로, 거대한 만다라가 회전하더니 곧장 태양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지금의 <김독자 컴퍼니>가 가진 최강의 디버프 스킬이 발동했다.

[설화, ‘만다라의 시간’이 발동합니다!]

그리고 아주 약간이지만, 태양의 활동이 희미하게 둔해졌다.

999회차의 우리엘이 중얼거렸다.

【······시공간 간섭? 이곳에 석존이 있는 건가? 그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데.】

쿠드드드드드!

그녀가 주먹을 쥐자 일대의 시공간 전체가 깨어질 듯 흔들렸다.

유상아의 입술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이게 최선이에요!”

“정희원! 신유승!”

한수영의 명령을 받은 두 사람이 달려나갔다.

999회차 우리엘이 먼저 발견한 것은 신유승이었다.

바다에 드리워진 거대한 용의 그림자. 포이즌 브레스가 태양의 겁화를 뒤덮었다.

【이 세계선의 ‘비스트 로드’인가.】

브레스에 닿은 우리엘의 화신체가 일부 변색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피부는 순식간에 수복되었다.

“어디 이것도 막아보시지!”

바로 곁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999회차의 우리엘이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까가가가가각!

[업화의 불꽃]과 [심판자의 검]이 충돌했다.

단 한 번의 충돌로 정희원이 피를 토하며 물러났다.

[화신 ‘정희원’이 ‘심판의 시간’을 발동 중입니다!]

【‘심판의 시간’? 어떻게 나를 상대로 그 기술을 썼지?】

“글쎄, 어떻게 일까?”

정희원의 검을 뒤덮은 [지옥염화]. 그리고 그녀의 등 뒤로 뻗어 나온 대천사의 날개를 확인한 999회차 우리엘이 표정을 굳히며 격을 발출했다.

【······내 화신이었군.】

그에 대항하듯, 정희원의 몸에도 성좌의 힘이 현현했다.

[희원이는 네 화신이 아니라 내 화신이거든?]

두 명의 우리엘이 마주 격을 발산하며 충돌했다.

한 번, 두 번. 충돌이 잦아질 때마다 정희원의 안색이 급격하게 질려갔다.

“무슨 힘이······!”

【지난번처럼 우스꽝스런 기억에 당하지는 않는다.】

순식간에 정희원이 수세에 몰리자, 우리엘이 다급하게 외쳤다.

[■바! 너네 뭘 구경만 하고 있어!]

동시에 999회차 우리엘의 등을 습격한 새카만 불꽃이 있었다.

눈살을 찌푸린 ‘살아있는 불꽃’이 말했다.

【흑염룡.】

양쪽 손의 붕대를 모두 푼 흑염룡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큭큭, 맛이 어떠냐 망할 천사!]

절대 선과 절대 악. 한때 숙적이었던 두 설화급 성좌가 재앙을 막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었다.

[지옥염화]와 [흑염]이 태양의 군세에 작렬한다. 눈부신 빛의 폭풍 속에서, 한수영은 고요히 전율했다.

‘······강하다.’

‘살아있는 불꽃’은 한 손만으로 저 강력한 두 성좌를 상대하고 있었다. 둘의 힘을 합했는데도 밀어붙일 수 없는 상대.

【이번 회차의 나는 겨우 이 정도인가? <에덴>은 어디에 있지? 너는 왜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냐?】

[에덴 망했어 시■!]

【······<에덴>이 없다? 성운의 가호도 없이 나와 맞서겠단 건가?】

더 이상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살아있는 불꽃’이 고개를 돌렸다.

태양의 빛이 더욱 강해진다 싶더니, 뜨거운 열기 속에서 뭔가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를 따르는 ‘이계의 신격’. 수천에 이르는 군세가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라. ‘은밀한 모략가’를 찾아라.】

진군이 시작되었다. 불타는 날개를 가진 무수한 ‘이름 없는 것들’이 지상으로 강하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한반도까지 휩쓸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화신 ‘신유승’이 ‘최상급 다종교감 Lv.???’을 발동합니다!]

신유승이 움직였다.

바다를 가르고 나타난 무수한 해수종들이 뛰어올라 ‘이름 없는 것들’의 발목을 물고 늘어졌다.

거기에 무장성주 공필두도 가세했다. 흉벽 전체에 설치된 자동 포탑들이 불을 뿜자 벌집이 된 ‘이름 없는 것들’이 고통스레 비명을 질렀다. 999회차의 우리엘이 말했다.

【저런 악독한 인간까지 동료로 받은 건가? 한심하기는.】

공필두의 성채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이름 없는 것들’. 마침내 외신들의 공격에 흉벽의 한쪽이 무너지려는 순간, 한수영이 외쳤다.

“이길영!”

기다렸다는 듯, 이길영이 흉벽 사이에서 나타났다. 새카만 격을 몸에 두른 이길영이 창공을 향해 포효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황색 구름이 밀려와 하늘을 덮었다. 한순간이지만 저 뜨거운 볕조차 가릴 정도의 군세였다.

[성좌, ‘무저갱의 지배자’가 하얀 이빨을 드러냅니다.]

【······마신 아바돈? 네놈이 왜 이런 곳에?】

뜻밖의 적에 놀란 999회차의 우리엘이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신유승에 공필두, 거기다 이길영까지 합세하자 전황은 비등해지기 시작했다.

아바돈이 부리는 황색의 메뚜기 떼가 자신들의 몸을 던져 ‘이름 없는 것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가아아아아아!】

고통스레 몸부림치는 ‘이름 없는 것들’. 눈살을 찌푸린 999회차의 우리엘이 한쪽 손으로 우리엘과 흑염룡의 공세를 가볍게 방어해내며, 다른 한쪽 손에 마력을 집중했다. [지옥염화]로 포위를 뚫어 버리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을 먼저 읽어낸 이가 있었다.

“지금이야! 쳐!”

한수영이 신호에 깊은 바다의 수면 위로 길쭉한 낫이 튀어나왔다.

스각, 하는 소리와 함께 대천사의 날개에 커다란 자상이 남았다.

흰 깃털이 날리며 쏟아지는 이계의 설화.

【<명계>의 왕······!】

처음으로, 999회차 우리엘이 표정이 완전히 굳어져 있었다.

[성운 <명계>가 비축한 설화를 개방합니다!]

하데스와 함께 <명계>의 정예군 일부가 포탈을 타고 넘어왔다. 세 명의 심판관과 페르세포네까지.

태양을 호위하던 ‘이름 없는 것들’이 무너졌고, <명계>의 격이 999회차의 우리엘을 압박해왔다.

하지만 999회차 우리엘은 버티고 있었다.

석존과 우리엘의 화신에, 심연의 흑염룡. 거기다 신화급 성좌인 하데스까지. 기습으로 인해 한쪽 날개가 찢어진 상황에서 어지간한 성운 하나 급의 전력이 가세했는데도 그녀는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역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듯했다.

“뭘 꾸물대고 있어! 빨리 가세해!”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귀찮다는 듯 몸을 움직입니다.]

쿠구구구구!

하늘을 덮은 황운 위로 몰려든 먹구름. 불길한 빛을 뿜은 뇌운이 한순간 푸른 빛을 띠더니 바다를 향해 사정없이 전격을 쏟아부었다.

쉴 새 없이 점멸하는 하늘. 스쳐 간 번갯불 사이로 드러난 모습을 드러낸 고고한 성좌가 있었다.

흐트러진 백금발.

특유의 오만한 입꼬리를 가진 신화급 성좌.

999회차의 우리엘이 크게 눈을 뜬 순간, 시야를 가득히 메운 여의금고봉이 그녀의 몸을 후려쳤다.

그 무지막지한 충격을 견디지 못한 그녀의 화신체가 굉음을 내며 바닷속에 처박혔다.





< Episode 90. 한 사람 (1) > 끝

< Episode 90. 한 사람 (2) > 





“잘한다 손오공!”

신이 난 한수영이 소리쳤다.

꾸르륵, 소리와 함께 바다 위로 피거품이 올라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999회차의 우리엘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의 해수종들을 모조리 찢어 죽이고 올라왔는지, 그녀의 전신은 완연한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덮은 것은 배신감이라기보다는 경이로움이었다.

【······믿을 수가 없군. 제천대성. 그대까지 이들의 편을 드는가?】

이윽고 그 경이로움은 잠깐의 그리움으로 변했다.

그 변화를 감지한 제천대성이 물었다.

[넌 뭔데 날 아는 척하는 거냐?]

【그저, 잃어버린 옛 전우를 잠깐 떠올렸다. 나는 그대와 싸울 생각이 없다. 비켜라. 내가 원하는 것은 ‘은밀한 모략가’뿐이다.】

실제로 전의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제천대성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 음침한 녀석이 싫은 건 마찬가지지만.]

무심히 웃는 제천대성의 몸에서 가공할 기운이 터져 나왔다.

[그 녀석이 죽으면, 우리 막내가 곤란해할 것 같단 말이지.]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긴고아에 속박된 격을 해방하고, ‘이계의 신격화’까지 일부 진행되며 외신의 힘까지 손에 넣은 존재.

『서유기 리메이크』를 함께했던 요괴들이 포탈을 너머 태평양에 강림하고 있었다.

【원숭이왕원숭이왕원숭이왕원숭이왕】

서로 다른 왕을 숭배하는 ‘이계의 신격’들이 드잡이질을 벌였다. 피에 젖은 바다가 격랑으로 뒤덮였고, 999회차의 우리엘이 기함했다.

그리고 마침내, 비등했던 천칭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됐다. 밀어붙여!”

한수영의 목소리와 함께 <김독자 컴퍼니>의 거대 설화들이 일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비록 주요 담화자인 김독자와 유중혁이 부재중이었지만, 다른 인원들도 만만치 않은 거대 설화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는 이들이 있었다.

[하늘의 태양은 하나면 충분하지.]

자신의 열차와 함께 나타난 수르야. 그리고.

[이제 이계의 신격을 베는 것도 익숙하군.]

[합공하지, 파천검성.]

“저도 갑니다!”

그리고 파천검성과 키리오스, 그리고 장하영까지 가세했다.

수세에 몰린 999회차의 우리엘.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당혹감으로 물들고 있었다.

【어떻게······ 그대들이 모두 함께 있지? 이 세계선은 대체―】

밀려드는 거대 설화에 그녀는 당황하고 있었다.

설화의 크기도 크기지만, 내용이 문제였다. 어떻게 이런 설화가 가능하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열차를 탄 세 명의 초월좌들이 태양의 열막을 꿰뚫었다. 하늘을 부수는 [파천검도]와 [전인화]. 거기에 [파천붕권]의 가공할 파괴력이 어우러진 일격.

그 일격이 우리엘의 빈틈을 강타하려는 순간.

아주 서늘한 감각이, 한수영의 뒷덜미를 엄습했다.

“잠깐만!”

[설화, ‘예상표절’이 다급하게 이야기를 수정합니다!]

이 세계에서 오직 그녀만이 느낄 수 있는 강렬한 감각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일대의 시공간 전체를 쥐어짜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꽈드드드드득.

한수영은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뭐야, 이 회차의 ‘나’는 어디 갔어? 설마 뒈졌나?】

마치 심연의 일부를 떼다 빚은 듯 불온한 목소리.

최후의 일격을 먹이기 위해 배후로 접근하던 초월좌들이 부서진 열차와 함께 추락하고 있었다. 새카만 [흑염]의 불길이 그들의 옷깃을 태우고 있었다.

천공의 먹구름 사이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한수영도 알고 있는 존재였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에게 위험을 경고합니다!]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쳇, 이렇게 날뛰는 ‘격’은 당연히 지혜일 줄 알았는데. 간만이라 착각해버렸네.】

‘살아있는 불꽃’의 태양이 눈부신 빛을 발했다. 그러나 사내의 어둠은 빛이 강해질수록 더욱 짙어지는 그림자처럼 더욱 두터워질 뿐이었다.

999회차 우리엘이 말했다.

【‘위대한 심연의 군주’. 누가 너 같은 놈을 이 세계선에 불렀지?】

한수영의 목덜미가 차가워졌다.

김독자에게 들은 기억이 났다.

북쪽 우주의 지배자, ‘위대한 심연의 군주’.

【하핫. 이제야 날 그렇게 불러주네. 그나저나 힘들어 보이는데, 내가 좀 도와줄까?】

경기를 일으키듯, 태양의 코로나가 튀어 올랐다.

【필요 없다. 네까짓 잡배의 도움 따위―】

【왜 이래, 같은 회차의 ‘동료’끼리.】

이죽거리는 사내.

그는 999회차의 ‘결’을 본 망상악귀 김남운이었다.

김남운의 시선이 움직이는 순간, 한수영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나도 간만에 흑염룡 얼굴 좀 보고 싶다고.】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김남운이 흉흉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유중혁은 자신이 어둠 속을 부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것은 김독자와 필살기를 연구하던 기억.

도중에 무엇인가가 잘못되었고, 자신은 의식을 잃었다······.

[현재 당신의 영혼체가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난독에 빠진 상태입니다.]

「유중혁 녀석 생일이 언제였더라.」

드문드문 기억들이 흐르고 있었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아니, 목소리라기보단 오히려 활자에 가까운 무엇.

그것이 누구의 말투인지, 유중혁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처음으로 언급된 회차가······.」

사람을 열 받게 만드는 건들건들한 말투. 저딴 식으로 말하는 놈은 세상에 김독자 하나뿐이었다.

「이야, 이때 진짜 재밌었지.」

김독자가 읽던 페이지의 문장들이 눈앞을 스쳐간다. 그곳에는 성좌들과 맞서 싸우는 유중혁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1회차, 41회차, 666회차······.」

활자를 읽던 김독자의 손가락이 멈췄다.

오래도록 머무른 손가락 사이로, 회차의 정보가 보였다.

「999회차.」

유중혁도 이제 그 회차의 일을 알고 있었다. 김독자가 읽은 문장들이,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그 회차를 읽는 김독자가 중얼거리는 것도 같았다.

「“내가 유중혁이다······.”」

그 어설픈 외침 하나로 버텨낸 삶에 대해 유중혁은 알지 못했다.

김독자가 읽은 유중혁.

그 페이지의 맥락 사이사이로 김독자의 역사가 그을림처럼 남아 있었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임금을 체불하는 사장에게 고통받고, 발바닥이 까지는 행군을 하는 동안. 김독자는 스스로를 유중혁이라 부르며 견뎠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버텨낸 시간들이, 전혀 다른 세상의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다. 누군가의 싸움을 보고 함께 용기를 낼 수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심지어 그의 눈에는 활자 속에 비치는 자기 자신의 모습조차 낯설어 보였다.

「“아직 싸울 수 있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말했던 것일까.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나는 네놈들을 죽이기 위해 다시 태어날 것이다.”」

자신은, 정말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인물인 것인가.

무수한 활자들 사이로 그를 신뢰하는 일행들의 목소리가 있었다.

「대장.」

「당신만 믿어.」

「다음 회차에선, 반드시 세계를 구해줘.」

세계선이 사라지고, 그에게 남은 것은 문장들뿐이었다.

그를 괴롭게 만들던 문장들의 부피가 늘어날수록, 삶의 가치는 초라해졌다.

그들은 대체 자신의 무엇을 믿고 함께 싸워주었는가.

‘나는 누구인가.’

그의 이해 밖에서 존재하는 문장들을 보며, 유중혁은 공허에 휩싸였다.

1864번의 삶.

자신이 어떤 세계를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 유중혁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정말 이 기억들만이, 그의 전부인 것인가.」

유중혁은 궁금했다.

만약 자신이 정말로 김독자의 말처럼 ‘등장인물’이라면,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 것인가.

김독자가 읽지 않은 페이지의 자신은, 어디에 있는가.

아니면 그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가?

[당신의 배후성이 당신을 들여다봅니다.]

자신의 생은,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존재했다’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츠츠츠츳······.

서늘한 느낌이 든 것은 그 순간. 유중혁은 반사적으로 공허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있었다.

【자아성찰이라도 하는 건가? 그렇게 한가하게 있을 시간이 없다.】

유중혁은, 그게 누구인지 곧바로 깨달았다.

‘네놈은 움직일 수 없을 텐데.’

유중혁이 ‘은밀한 모략가’를 노려보았다. 버릇처럼 [흑천마도]에 손을 가져갔지만, 칼자루가 잡히지 않았다.

이곳은 그의 심상세계. 아이템은 존재하지 않는다.

‘은밀한 모략가’가 그런 유중혁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라면 너의 동료들은 전멸할 것이다.】

‘전멸해?’

등골로 서늘한 감각이 스쳤다.

일행들은 ‘이계의 신격의 왕’과의 격전을 앞두고 있었다. 확실히 주변을 흐르는 불길한 기운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깨어나야 한다. 여기서 나가서······.

【지금 상태로는 가더라도 소용없다. 1863회차의 힘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지금의 너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유중혁의 사나운 말투에도 ‘은밀한 모략가’는 침착했다.

【네가 1863회차의 힘을 쓸 수 있는 방법이 또 있다.】

순간 유중혁은 그게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

그가 1863회차의 힘을 잠깐이나마 되찾을 수 있는 것은 김독자에게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설화를 김독자에게 준 이는······.

유중혁이 이를 갈며 물었다.

‘네놈을 어떻게 믿고? 왜 우리를 돕기로 한 거지?’

【부탁을 받았다.】

‘······부탁?’

【힘을 빌려주는 것은 이번뿐이다. 네가 배우는 것이 있기를 바라지.】

다음 순간, 어둠 속에서 ‘은밀한 모략가’가 손을 뻗었다.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이마에 닿는 소년의 차가운 손바닥. 그리고.

[‘끊어진 필름 이론’이 발동합니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드는 듯한 고통 속에, 거대한 설화가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이미 알고 있던 기억. 하지만 이해하진 못했던 시간들이었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은밀한 모략가’의 모든 설화들이 그의 혈맥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1회차, 2회차, 3회차, 4회차····· 1863회차.

수많은 유중혁들이 그의 안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그 모든 존재가 유중혁이었다. 각각의 유중혁. 하지만 동시에, 그 유중혁은 한 사람이었다.

1864회차의 삶을 온전히 살아낸, 단 한 사람의 유중혁.

하나씩 기억이 난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설화들이 그의 저변을 떠돌고 있었다. 설화 속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근데 대장은 생일이 언제예요?”」

그러자 김독자가 말했다.

「아, 찾았다. 여기 있네. 8월 3일.」

맞다. 그는 여름에 태어났다.

지옥처럼 무덥고, 끔찍한 폭풍이 몰아치던 여름에.

모든 것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한 번도 챙겨본 적도, 축하받아본 적도 없는 생일.

1864번의 생을 거치면서, 의미를 잃어버린 기념일들.

유중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전신에 충만한 설화의 기운. 3회차를 살아가는 내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고개를 들자 어디선가 뜨거운 볕이 느껴졌다.

멀리서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저 먼 수평선 너머에서 그를 부르는 ‘이계의 신격’의 존재. 그러나 유중혁은 두렵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화신체의 상태를 점검했다. 화신체의 모든 부위가 완벽에 가깝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모든 근섬유 속에, 그가 쌓아 올린 설화들이 배어 있었다.

「그 순간 유중혁은 마치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온전한 격을 회복하였습니다.]

이것이 본래의 그가 가진 진짜 힘.

세계의 최종 회차에 도달해, 홀로 ‘벽’을 볼 수 있었던 존재의 격.

[‘끊어진 필름 이론’이 비정상적인 형태로 발동 중입니다.]

[필름들의 연결이 불완전합니다!]

[이 연결을 계속해서 유지할 시 필름 전체가 소멸할 수도 있습니다.]

이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잠깐뿐.

하지만 그에게는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유중혁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울부짖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쏟아지는 천둥 번개 사이로 그의 얼굴에 새겨진 흉터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특성, ‘별들의 공포’가 발동합니다!]

그의 시선에 겁에 질린 별들이 달아나고 있었다.

잠시 그 별들을 바라보던 유중혁의 신형이, 먼 곳의 태양을 향해 움직였다.





< Episode 90. 한 사람 (2) > 끝

< Episode 90. 한 사람 (3) >





한수영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믿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초월좌들이 추락했고, 명계의 심판관들이 줄줄이 나가떨어졌다. 

“물러나 한수영!” 

까가강, 하는 소리와 함께 앞을 막았던 정희원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짓궂은 미소를 띤 사내가 장난이라도 치듯 자신의 설화를 뭉게뭉게 발출하고 있었다. 

[거대 설화, ‘망상설계(妄想設計)’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위대한 심연의 군주. 999회차의 김남운의 전신에서 [흑염]의 아우라가 뻗어 나왔다. 

아우라는 곧 머리가 여럿 달린 용의 형상을 이루었다. 형상의 아가리가 벌어지더니, 뒤이어 파괴적인 격류가 모든 방위를 뒤덮었다. 

콰아아아아아아! 

“유승아! 길영아!” 

폭발하는 [흑염]의 연쇄에 아이들이 휘말렸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간 유상아가 전장에서 이탈하면서, 999회차의 우리엘을 구속하고 있던 시공간 디버프가 약해졌다. 

고오오오오! 

잠깐이나마 위축되어 있던 999회차의 우리엘이 힘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999회차의 김남운이 킬킬 웃었다. 

【이거, 내가 안 도와줬으면 어쩔 뻔?】 

【닥쳐라. ‘은밀한 모략가’를 찾으면 다음은 네놈 차례다.】 

무시무시한 눈길로 김남운을 쏘아본 999회차의 우리엘이 전장을 향해 [업화의 불꽃]을 휘둘렀다. 

그녀를 맞상대하는 것은 제천대성이었다. 화려하게 움직이는 여의금고봉이 그녀의 검세를 받아내고 있었다. 무려 ‘이계의 신격의 왕’과 대등한 격전을 펼치는 제천대성을 보며 김남운이 감탄했다. 

특히 그의 주목을 끈 것은 제천대성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새카만 기운이었다. 

【혼돈의 격? 저 녀석도 ‘이계의 신격’이 된 건가?】 

【······정확히는 그의 분체 중 하나가 이계의 신격화된 것 같다.】 

【하하하, 뭐야 이거. 뭐 어떻게 된 세계선이야?】 

【그는 내가 상대한다. 네놈은 잡배들과 명왕을 맡아라.】 

【쳇, 나도 모처럼 대성이랑 한번 싸워보고 싶은데 말이지.】 

들려오는 헛소리에 분개했는지, 제천대성이 기합과 함께 자신의 마력을 퍼부었다. 허공을 뒤덮는 황금빛 아우라가 한순간 [흑염]의 공세를 걷어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의 전신에 치명적인 후폭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제길, 미후왕! 제대로 해라!] 

아무래도 일시적으로 합쳐진 제천대성의 설화들이 충돌을 일으키는 모양이었다. 

퍼붓는 999회차 우리엘의 공격에 조금씩 물러서는 제천대성. 

마지막 보루였던 신화급 성좌들이 밀리고 있었다. 심지어 하데스 쪽은 상황이 더 나빴다. 

콰과과과과! 

<올림포스>의 견제 때문인지 아니면 <명계> 내부의 사정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데스의 전투는 어딘가 신통치 않은 데가 있었다. 

【하하하! 무려 올림포스의 삼신인 ‘명왕’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인상을 쓴 채 묵묵히 사이드를 휘두르는 하데스가 수세에 몰리자, 그의 뒤에서 거대 설화를 이야기하던 페르세포네가 끼어들었다. 

[그거 알고 있나요? 이 세계선의 당신 영혼은 명계에 갇혀 있어요.] 

【뭔 헛소리야? 내가 명계에 왜 갇혀?】 

짜증을 부린 999회차의 김남운이 대량의 [흑염]을 퍼부었다. 공간마저 녹여버리는 공격에 타격을 입은 하데스의 거체가 바닷속으로 추락했다. 

한수영은 몸을 떨었다. 분명 저건 그녀가 알고 있는 [흑염]의 일종이었다. 하지만 대체, 어떤 수련을 얼마만큼 해야 [흑염]을 저런 식으로 다룰 수 있단 말인가. 

【이상하네. 흑염룡이 너 같은 걸 화신으로 선택했다고?】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새 999회차의 김남운이 눈앞에 있었다. 

흠칫 놀란 한수영이 몸을 빼기도 전에 김남운의 손바닥이 다가왔다. 피하기엔 늦었다 싶었던 순간,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더니 김남운의 손끝이 튕겨 나갔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으르렁거립니다.] 

【······어이. 뭐야. 내가 진짜잖아, 염룡아.】 

마치 귀여운 강아지라도 대하듯, 김남운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네놈은 내 화신이 아니라 선언합니다.] 

【아하, 여기서는 번듯한 새 차 뽑으셨다?】 

김남운의 눈동자에 차가운 광기가 스쳐갔다. 

【그럼, 폐차부터 시키는 게 먼저겠네.】 

콰아아아아아앙! 

코앞에서 터진 폭음에 한수영의 몸이 뒤쪽으로 날아갔다. 몸을 웅크린 채 충격을 최소화했음에도 입에서 울컥 피가 쏟아졌다. 일격에 즉사하지 않은 것은 그녀의 배후성 덕분이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달아나라고 외칩니다!] 

허공에 직접 현현한 ‘심연의 흑염룡’이 그녀를 보호하듯 감싸고 있었다. 

흑요석을 빚은 듯 고귀한 자태의 거룡. 홍옥을 깎은 듯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세상을 향해 거칠게 포효했다. 

【하하하하핫!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내 흑염룡이지!】 

두 존재의 전투가 시작되자 일대의 바다가 폭격이라도 맞은 듯 들썩였다. 섬의 파편들이 공중을 날아다녔고, 흑염룡의 브레스가 바다를 뒤엎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아무리 흑염룡이라고 해도, ‘이계의 신격’이 된 김남운을 막기는 어려워 보였다. 

애초에 저쪽은 재앙으로 강림한 존재. 사용할 수 있는 개연성의 총량부터가 달랐다. 

한수영은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저 말도 안 되는 존재를 막을 수 있을까. 

「김독자라면, 어떻게 했을까.」 

[설화, ‘예상표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머릿속이 찌릿, 하고 울리더니 주변에 옅은 스파크가 발생한 것은 그때였다. 

「한심하네. 이런 상황에서도 그 녀석을 찾는 거야?」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아직 ‘환생자들의 섬’을 진행하던 무렵 꾸었던 꿈. 

백색 코트의 사내가, 검은 코트의 사내에게 죽는 꿈에서, 한수영은 분명 이 존재의 목소리를 들었다. 

「네가 이 모양이니 내 회차에서도 그 녀석이 그렇게 기고만장했지.」 

설화가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너는······.’ 

「이젠 간섭 안 하려고 했는데······ 딱 한 번만 더 도와준다.」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목소리.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인지 능력이 확장되고 있었다. 무수한 한수영들이 머릿속에서 깨어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세계의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난 일. 놀라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치 미래와 연결되기라도 한 듯 강렬한 감각이 뇌리를 사로잡았다. 

무수한 클리셰와 패턴, 주어진 정보의 조합으로 자신이 알 수 없는 세계를 창조하는 능력. 

그녀가 읽은 ‘멸살법’의 기억과 김독자에게 들은 정보들, 그리고 그녀가 개인적으로 얻은 정보들이 연역적으로 맞물리며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웃었다. 

「그래, 그게 바로 진짜 [예상표절]이야.」 

그리고 한수영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깨달았다. 

[설화, ‘예상표절’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이게 먹힐지 안 먹힐지는 모른다. 하지만. 

‘······김독자라면, 했겠지.’ 

「또, 또······!」 

흑염룡의 거친 울음소리가 창공을 뒤덮었다. 잠깐의 전투로 흑염룡의 고고한 동체 곳곳에 크고 작은 손상이 가 있었다. 찢어진 날개를 펼친 흑염룡이 재차 브레스를 퍼부으려는 순간. 

“이제 됐어, 염룡아.”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이건 내가 알아서 할게. 나 믿고 뒤로 빠져.” 

마치 자신의 배후성을 보호하듯 앞으로 나서는 한수영을 보며, 흑염룡의 동공이 혼란으로 뒤덮였다. 

한수영은 흑염룡에게 설명하는 대신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섰다. 

【호오, 직접 싸우시겠다? 그 밤톨만한 몸으로?】 

막강한 기류를 발출하는 999회차의 김남운. 언제든 한수영을 난도질할 준비가 되어있는 거대 설화 「망상설계」가 날카로운 연삭기처럼 칼날을 갈고 있었다. 

하지만 한수영은 조금도 겁먹은 얼굴이 아니었다. 

“김남운. 넌 이계의 신격이 되어도 변하는 게 없네.” 

【뭐야, 날 아는 것처럼 말하네?】 

“아주 잘 알지. 무려 외신이 되어서까지 짝사랑을 못 이루고 여자애 꽁무니나 졸졸 쫓아다니는 놈.” 

999회차 김남운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이계의 신격’들은 모두 기억이 소실되었거나 불완전하다.」 

「그런데 어떻게, ‘왕’들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 기억이, 그들에게 그만큼 소중한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정작 기회가 생겨도 제대로 된 고백 한번 못하는 주제에, 혹시나 싶어서 팬티는 언제나 거대 로봇이 그려진 걸 입었지.” 

【······너, 너 뭐야! 어떻게 대장도 모르는 걸―】 

“늘 한쪽 손에 붕대를 감고 다니는 것은 사실 손목의 자상을 숨기고 싶어서겠지. 이지혜에게 그걸 들키기 싫어서 말이야.” 

한순간 당혹감에 물들었던 김남운이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왜 이지혜를 좋아하지?” 

[설화, ‘4만년의 짝사랑’이 동요합니다.] 

【······그건, 지혜가 예쁘니까―】 

“아냐. 넌 쓰레기지만 여자를 밝히는 설정은 아니거든.” 

【설정? 너 지금 무슨―】 

“네가 이지혜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지혜가 유중혁을 믿고 따르기 때문이야.” 

【뭔 개소리를―】 

“너는 이지혜에게 인정받고 싶은 거지. 네가 유중혁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라고.” 

[거대 설화, ‘망상설계’가 크게 동요합니다!] 

“너는 사실, 유중혁이 되고 싶은 것뿐이야.” 

한수영은 차갑게 굳어지는 999회차 김남운의 눈동자를 보았다. 

【재미있는······ 이야기네. 그런데 말야. 내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 더 헛소릴 들어줄 시간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한수영은 알 수 없었다. 

아니, 실은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수영은 이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이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그녀는 

“그렇게 해서라도 너는, 이지혜에게 용서받고 싶었던 거다.” 

다른 세계의 상처를, 난도질해야만 했다. 

“네가 실수하지만 않았더라도, 999회차의 유중혁은 죽지 않았을 테니까.” 

츠츠츠츠츠츳! 

순간, 999회차 김남운의 전신에서 스파크가 몰아쳤다. 뭔가가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근본을 형성하는 근원 설화들이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기억이 망가지는 소리였다. 

【너······.】 

분개하는 김남운이 혼란에 빠진 자신의 설화를 수습하며 고함을 질렀다. 녀석의 눈빛이 흐려졌다 깊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한수영은 그런 김남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예상표절]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과열된 머리가 불에 덴 듯 뜨거웠다. 

그녀는 김독자처럼 ‘멸살법’을 모두 읽지도 않았고, 유중혁처럼 실제로 999회차를 살지도 않았다. 

하지만 굳이 듣거나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도 있다. 

그것이 상상의 힘이었다. 

이야기의 세부를 알지 못하더라도, 맥락을 유추할 수 있는 힘. 

주어진 상황이 있고, 예정된 전개가 있고, 이 세계에 ‘개연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그녀의 예상 표절은 거의 전지(全知)에 가까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김남운.” 

한 걸음씩, 한수영이 허공을 거닐며 다가갔다. 비틀거리는 김남운이 자신의 설화를 끌어안은 채 상처 입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한수영은 그런 김남운의 설화를 바라보았다.」 

유중혁도 그랬고, 성좌들도 그랬다.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들은 모두 비슷하다. 그들의 강함이 그들의 역사에서 비롯되듯, 그들의 약점 또한 그들의 역사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이야기하고 이야기되는 존재들의 숙명인 것이다. 

한수영은 펜을 그어 필요 없는 부분을 지우는 작가처럼, 김남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치, 김독자가 1863회차의 유중혁을 굴복시켰던 때처럼.」 

“그때로 돌아가고 싶겠지. 하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겠지.” 

【너, 계속 지껄이면―】 

“그런데 너는 이제 알아야 해. 네가 살아간 세계선은 끝났고, 네가 사랑했던 이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너 따위는 유중혁이 될 수 없어. 누구를 구원할 수도, 속죄할 수도 없어.” 

김남운의 뺨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999회차의 ‘결’을 보고, ‘이계의 신격의 왕’이 된 존재의 기틀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모든 설화가 빠져나간 것 같은 표정. 그 순간 김남운은 처음으로 세상에 내던져진 열일곱 살 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수만 년을 이어온 그의 설화가, 그가 다져온 견고한 망상이 그저 말 몇 마디에 붕괴하고 있었다. 

【아, 아냐. 나는, 나는―】 

한수영은 그 자그마한 균열에 마침표를 찍듯 말했다. 

“너는, 이 빌어먹을 <스타 스트림>에 갇혀 영원한 죄인으로 살아가야 할 뿐이다.” 

파츠츠츠츠츳! 

【김남운!】 

999회차 우리엘의 진언과 동시에, 흐려졌던 김남운의 의식이 다시 깨어났다. 

[설화, ‘결사의 동료’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부서진 설화를 다시 잇는 것 또한 설화뿐. 간신히 헝클어트렸던 김남운의 설화가 다시금 본래의 형태를 회복하고 있었다. 김남운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한수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빌어먹을. 잘 되나 싶었는데. 그래도 조금은 타격을 입혔나?’ 

김남운의 눈동자가 깊은 분노에 물들어 있었다. 

【······하핫, 당할 뻔했어. 역시 흑염룡이 선택한 데엔 다 이유가 있는 건가.】 

강렬한 죽음의 예감이 찾아왔다. 팽팽 돌아가던 [예상표절]이 끊어진 테이프처럼 늘어지고 있었다. 어디로도 피할 수 없다는 참담한 예감. 

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여기까지면 되겠군. 주인공이 오셨으니까.」 

미래와 연결된 듯한 감각이 급격하게 흐려졌다. 허공을 향해 불쑥 치켜 올라갔던 김남운의 주먹이 멈춰서 있었다. 전장의 모두가 그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뭔가, 엄청난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존재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절멸로 이끌 수 있는 ‘격’.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999회차의 우리엘이었다. 

【녀석이다!】 

허공을 향해 끔찍한 포효를 내뱉은 그녀가, 전장에서 이탈하며 격의 방향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김남운 또한 그쪽을 바라보았다. 

【너······ 아주 운이 좋아. 다음에 보면 꼭······.】 

한수영과 흑염룡을 보며 잠시 머뭇거리던 999회차 김남운의 신형 또한, 999회차 우리엘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사라졌다. 

긴장이 빠진 한수영이 흑염룡의 거체 위로 주저앉았다. 두 존재가 사라진 수평선 너머를 보며, 한수영은 김독자가 마지막으로 해준 말을 떠올렸다. 

―한수영, 진짜 만약에, 혹시나 일이 잘못되면······. 

―그딴 불길한 복선 깔지 말아줄래?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떻게든 그 자식이 올 때까지만 버텨. 

“새끼, 겁나 멋있게 등장하네.” 

멀리서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옥염화]와 [흑염]의 아우라로 얼룩진 밤하늘. 

종말의 창천에 오래된 얼굴의 사내가 강림하고 있었다.





< Episode 90. 한 사람 (3) > 끝

< Episode 90. 한 사람 (4) >





강풍에 흩날리는 코트. [흑천마도]에서 줄기차게 흘러나오는 아득한 격. 

한수영은 분명 그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왜일까. 그 순간 한수영의 눈에 그는 완전히 다른 존재처럼 보였다. 

“······유중혁 맞아?” 

유중혁은 이쪽을 흘끗 보더니 태평양 쪽으로 굉음을 내며 돌아섰다. 당황한 한수영이 외쳤다. 

“야! 어디가!” 

【쫓아라!】 

그런 유중혁의 뒤를 999회차의 우리엘과 김남운이 쫓았다. 

한수영은 유중혁의 의도를 깨달았다. 

유중혁은 지금 저 ‘이계의 신격’들을 일행들로부터 떨어트리려는 것이었다. 

“저 미친 자식이······.” 

“수영 씨. 괜찮아요?” 

다가온 유상아가 한수영을 부축했다. 그 어깨에 기대는 순간, 한수영은 역류한 피를 한 사발 토해냈다. 

“웨에엑!” 

머릿속의 모든 혈관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뜨거웠다. 전두엽을 지져버릴 듯 타오르는 스파크. 한수영은 고통을 참아내며 외쳤다. 

“제천대성! 하데스! 우리엘! 빨리 유중혁 쫓아가! 여긴 나머지로 막을 테니까, 빨리! 저놈 혼자 상대하게 두면 안 돼!”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설화를 감지합니다.] 

[당신은 개연성에 어긋나는 힘을 사용했습니다!] 

“컥······.” 

시야가 한바탕 어지럽게 흔들렸다. 내장이 모조리 뒤집힌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당신의 화신체가 후폭풍에 휘말립니다!] 

자신의 내부에서 강대한 힘이 폭발하려는 것을 감지한 한수영이 외쳤다. 

“유상아! 떨어져!” 

하지만 유상아는 오히려 한수영의 어깨를 꾹 쥔 채 고개를 흔들었다. 

어깨에 맞닿은 손으로 유상아가 계승한 석존의 힘이 전해지고 있었다. 시공간이 뒤틀리며, 후폭풍의 성장세가 조금 늦춰졌다. 

“버텨. 할 수 있어. 나도 이겨낸 적 있으니까.” 

“빌어먹을······.” 

전신의 근육이 신음하고 있었다. 끔찍한 통증 속에서 희미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지금껏 개연성을 조심한다고 입버릇처럼 중얼거린 주제에, 이제와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김독자 같은 녀석도 살아남았으니 이 정도는 어떻게든 될 거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츠츠츠츠츳! 

······이대로 죽는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설화, ‘예상표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후폭풍의 기미가 조금씩 줄어든 것은 그때였다. 

한수영은 자신의 화신체가 활자들로 덮이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썼던 문장들이었다. 김독자나 유중혁에게 들키지 않도록 그녀가 수첩에 남몰래 기록해 둔 문장들. 그 문장들이, 팔랑거리는 수첩의 페이지 너머로 흘러나와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런데 개중에는 그녀가 쓰지 않은 문장도 있었다. 

「너도 나라고 글솜씨는 봐 줄 만하네.」 

절반의 조소와 절반의 만족감이 뒤섞인 목소리. 

[설화, ‘예상표절’이 당신의 후폭풍을 대신 감내합니다.] 

츠츳, 츠츠츳······. 

개연성의 후폭풍이 줄어드는 만큼, 활자들이 빠르게 흩어지고 있었다. 

한수영은 묻고 싶었다. 이 문장들은, 너는 대체 뭔지. 

하지만 한수영에겐 질문을 던질만한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까진가. 김독자에게 전해.」 

[당신의 설화에 깃들어 있던 다른 세계선의 잔재가 소멸하기 시작합니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그녀의 설화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녀석이 바라는 ‘결말’에 있는 것은······.」 

* 

나는 이지혜를 부축한 채 두 명의 ‘이계의 신격의 왕’을 바라보았다. 

같은 회차를 살았고, 똑같은 세계의 끝을 보았음에도 서로 다른 존재가 된 두 사람. 

[거대 설화, ‘영원한 수평선의 방랑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슬픔을 봉인한 심장’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허공에서 튀는 스파크 사이로 설화의 절단면이 내비쳤다. 

그들의 피로 한 줄 한 줄 쌓아 올린 이야기. 내가 몇 번이고 읽었던, 가장 좋아하는 회차의 이야기였다. 

「“유중혁 대장. 당신이 회귀자여서 다행입니다.”」 

‘은빛 심장의 왕’이 흘끗 내 쪽을 돌아보았다. 

999회차의 이현성. 그의 설화가 가둔 슬픔이 [독해력]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슬퍼하지 않아도 괜찮겠지요? 당신은 죽지 않잖습니까. 죽어도, 다음 회차에서 다시 우리를 만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곳에서 당신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고······ 당신은 다시 한번 그 여정을 시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강철의 설화가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이현성.”」 

가르륵, 거리며 돋아난 강철들이 그의 말을 삼켰다. 은빛으로 물든 그의 동공이 흘러야 할 눈물을 굳히고 있었다.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대장보다 먼저 결말을 볼 테니까요. 당신이 보고 싶었던 끝도, 지키지 못한 약속도, 하나도 빠짐없이 제가 안고 갈 겁니다.”」 

999회차의 이현성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아는 이현성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분명 이현성이었다. 

―당신은 그를 몹시 닮았습니다. 내 배후성에게 이야기를 들은 것보다도 더.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999회차 이현성의 목소리.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그가 온화하게 웃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저런 비극을 겪으며 생을 견뎌낸 사람이, 어떻게 아직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그러니 당신을 죽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가 우리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우리 편을 들어줄 거라는 생각까진 하지 못했다. 

‘강철의 주인’은 소멸하며 그에게 대체 어떤 설화를 전한 것일까. 

【현성 아저씨.】 

흐름을 끊은 것은 999회차의 이지혜였다. 

【나를 그렇게 불러주는 건 오랜만이구나.】 

【여기서 당신을 해치고 싶은 생각은 없어. 비켜.】 

유구한 두 개의 설화가 얽힌다. 늙은 추억을 회상하듯 이현성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대체 왜 막는 거야? 아저씨는 ‘재앙’으로 소환되길 거부했잖아. 이쪽 세계선의 관리국과 협상한 건 당신이 아니라 우리라고.】 

······999회차의 존재들을 재앙으로 부른 것은 역시 관리국이었나. 

잠시 침묵하던 이현성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스타 스트림>과는 협상하지 않는다. 그게 우리의 맹세였지.】 

【그래서, 그 맹세의 결과로 우리가 어떻게 됐는데?】 

【······.】 

【관리국을 부수고, 도깨비 왕과 싸우고. ‘최후의 벽’에 부딪쳐서······ 우리가 어떻게 됐냐고.】 

최후의 벽. 이들 역시 그 벽을 본 모양이었다. 

원작의 유중혁이 도달했던 바로 그 ‘벽’을. 

부르르 떨던 999회차의 이지혜가 말했다. 

【당신 말대로 우리 이야기는 끝났어. 우리가 살던 세계선은 멸망했고, 그 멸망을 견디고 ‘이계의 신격’이 된 것은 우리 넷뿐이야.】 

【시나리오 밖의 존재가 되어서라도, ‘최후의 벽’을 넘기로 했었지.】 

【그건 우리가 넘을 수 없는 벽이야.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 

【이 세계선에서는―】 

【이 세계선 타령도 그만둬! 이 세계선이 뭐가 특별하지? 여기도 우리가 살던 곳과 같아. 멸망할 세계선이라고.】 

내가 부축하던 이 세계선의 이지혜가 비틀거렸다. 그녀의 입술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가라앉은 섬의 주인’이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에게 접선한 대도깨비 놈들도 말했어. 이 세계선도 버릴 거라고. 재활용해서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으로 쓸 거라고.】 

그 말에 ‘은빛 심장의 왕’의 표정도 변했다. 이제껏 온화하던 기류가 흐트러지며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번져왔다. 

강철의 입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관리국과 무슨 거래를 한 거지?】 

【이곳도 어차피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버릴 세계라면, 우리가 직접 멸망시켜도 상관없는 거잖아.】 

【지혜야.】 

999회차의 이지혜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을 정말 ‘웃고 있다’고 쓸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이곳의 ‘도깨비 왕’이 약속했어. 이 세계선만 멸망시키면, 우리 세계선을 다시 재생시켜 주겠다고. ‘가장 오래된 꿈’과 접촉해서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이지혜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나 역시, 그 떨림을 공유하고 있었다. 

저것이 999회차의 존재들이 이 세계로 온 이유였다. 다른 세계를 파괴하면서까지, 그들이 되찾고자 하는 것이었다. 

‘은빛 심장의 왕’이 말했다. 

【우리의 사명은 우리의 세계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비극의 진짜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다.】 

【찾아내면 뭐가 달라져?】 

【대장의 뜻을 이루려면―】 

【비극의 원인을 제거해도,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아. 죽은 동료들은 돌아오지 않아. 우리가 살았던 세계는 돌아오지 않아. ······그곳에서 죽은 999회차의 유중혁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쿠구구구구. 

멀리서 수평선을 찢으며 무언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라앉은 섬의 주인’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모두 끝내고,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어.】 

한풀 꺾였던 해일의 기세가 다시 상승하고 있었다. 

황급히 [강철화]를 전개한 999회차의 이현성이 자신의 금속으로 우리를 보호했다. 

하지만 해일의 세력은 강철이 자라나는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당신은 막을 수 없어. 말했잖아. 나 혼자 온 게 아니라고.】 

콰콰콰콰콰! 

뒤쪽에서 붉게 물든 석양이 하늘을 불태우고 있었다. 

999회차의 우리엘. ‘살아있는 불꽃’의 힘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것은······. 

“아저씨. 설마······!” 

이지혜가 내 옷깃을 붙잡았다. 

나는 그런 이지혜의 눈을 바라보며 말해주었다. 

“걱정 마. 네가 걱정하는 일은 절대 없어.” 

그것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우리 이야기는 그렇게 약하지 않아.” 

[성좌,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성좌, ‘빛과 어둠의 감시자’가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구원의 마왕과 빛과 어둠의 감시자. 거기에 긴고아를 착용하게 되며 얻은 세 번째 수식언까지. 내 모든 설화들이 동시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우리 앞을 막아선 이현성에게 다가갔다.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무리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위험합니다. 제 뒤로 숨지 않으시면―】 

“여긴 999회차가 아닙니다.” 

앞쪽에는 ‘가라앉은 섬의 주인’. 뒤쪽에는 ‘살아있는 불꽃’. 이제 우리가 달아날 곳은 없었다. 

거대한 전함의 그림자가 눈앞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 해일의 꼭대기에서, 999회차의 이지혜가 방언처럼 중얼거렸다. 

【모두 돌아가는 거야. 대장이 그랬듯이, 우리도 그때로 회귀하는 거야.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서, 모든 걸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야. 그러면―】 

밀려온 해일이 우리를 덮쳤다. 나는 ‘거대 설화’의 힘으로 그 격을 받아냈다. 해일을 받아낸 양손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넘실대는 포화의 전경 너머로 태양과 바다가 만나는 수평선이 보였다. 

아무리 달려가도 결코 닿을 수 없는 경계. 

콰아아아아아! 

그 경계가 눈앞에서 갈라졌다. 한 자루의 검이 경계를 베고 있었다. 

파도의 권좌에서 추락하는 999회차의 이지혜가 이쪽을 보았다. 

정확히는, 내 곁에 선 사내를. 

“회귀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그걸 깨닫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 Episode 90. 한 사람 (4) > 끝

< Episode 90. 한 사람 (5) > 





유중혁의 전신에서 방대한 설화의 힘이 느껴졌다.

[<스타 스트림>이 화신 ‘유중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세계의 의지가 그에게 주목하고 있었다.

[시나리오를 방관하던 절대다수의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의 존재에 감각을 곤두세웁니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의 설화에 경악합니다!]

[관리국의 일부 대도깨비들이 「개연성 적합 심사」를 요구합니다!]

[‘이야기의 왕’이 요구를 거절합니다.]

[해당 시나리오에서 「개연성 적합 심사」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내가 아는 모든 유중혁의 설화들이 충만하게 느껴졌다. 단순히 강해졌다고 표현할 수 있는 느낌이 아니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유중혁’은 지금껏 내가 본 어떤 존재와도 달랐다.

나는 약간 긴장하며 물었다.

“일행들은?”

“무사하다.”

“네가 여기 왔다는 건 ‘은밀한 모략가’가 내 부탁을 들어줬다는 거겠지.”

잠든 유중혁을 깨우는 것은, 내 플랜 B가 실패했을 경우의 마지막 대안이었다.

[화신 ‘유중혁’이 ‘끊어진 필름 이론’을 비정상적인 형태로 발동 중입니다.]

츠츳······.

[필름들의 연결이 불완전합니다!]

[이 연결을 계속해서 유지할 시 필름 전체가 소멸할 수도 있습니다.]

가능하면 실현되지 않았으면 했지만, 그럼에도 방법이 없다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 우리가 가진 최강의 카드.

[모든 회차의 ‘유중혁’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의 안에서 느껴지는 아득한 시선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만약, 이 유중혁이 내가 아는 ‘유중혁’이 아니라면.

“이봐, 너는 몇 회차의 유중혁이지?”

그러자 유중혁이 나를 바라보았다. 뺨에 새겨진 짙은 흉터가 보였다. 3회차의 유중혁에게는 없던 상처였다. 나는 재차 물으려 했다. 하지만 내 말문을 막듯 그의 전신에서 문장들이 흘러나왔다.

「모든 별들의 공포」

「스타 스트림 사상 최강의 화신」

「철혈의 패왕」

「시나리오의 찬탈자」

그가 살아온 날들이 거칠고 투박한 ‘멸살법’의 문장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문장들이 모여 설화가 되었고, 이야기는 곧 눈앞의 사내가 되었다.

1864번의 삶을 헤쳐온 존재.

“나는 유중혁이다.”

그는 어떤 회차의 유중혁도 아니었다. 0회차도, 1회차도, 1863회차도 아니었다.

그는 그 모든 회차의 유중혁이었다.

【······대장?】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뜬 두 눈. 999회차의 이지혜가 멍하니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또 다른 이지혜가 외쳤다.

“사부! 가! 해치워버려! 쟤가 우리 세계선을 다 망치려고 해!”

바락바락 악을 쓰는 목소리.

나 역시 한마디를 보태려 했다. 하지만 유중혁의 옆모습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은 홀연히 흩어졌다. 유중혁은 아무런 공세도 취하지 않은 채, 두 명의 ‘이계의 신격’을 바라보고 있었다.

[등장인물 ‘가라앉은 섬의 주인’이 등장인물 ‘유중혁’을 응시합니다.]

[등장인물 ‘은빛 심장의 왕’이 등장인물 ‘유중혁’을 응시합니다.]

999회차의 두 사람 또한, 유중혁을 보고 있었다.

이현성은 동요하는 눈빛이었다.

【이 설화는······ 하지만 그럴 리가······ 정말로······?】

내가 유중혁에게서 내가 기억하는 유중혁을 찾으려 했듯, 그들 역시 유중혁에게서 자신이 아는 유중혁을 보고 있었다.

[‘3회차의 유중혁’이 침묵합니다.]

[‘41회차의 유중혁’이 침묵합니다.]

[‘362회차의 유중혁’이 침묵합니다.]

[‘666회차의 유중혁’이 침묵합니다.]

기껏 하나가 된 보람도 없이, 시선 속에서 유중혁들이 찢겨 나가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이 아는 유중혁을 찾기 위해 다른 유중혁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유중혁’들을 배제하고, 자신이 아는 ‘유중혁’만을 찾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999회차의 유중혁’이 천천히 눈을 뜹니다.]

그 ‘유중혁’의 편린들 속에서 뭔가를 발견한 이가 있었다.

【대ㅈ······!】

‘가라앉은 섬의 주인’이 성큼 다가오는 순간, 창공이 한 줄기 빛살로 갈라졌다. 후끈한 열기와 함께 섬광이 벼락처럼 쏟아졌다.

가볍게 [흑천마도]를 휘두른 유중혁이 그 섬광을 막아냈다.

【그는 네가 아는 ‘유중혁’이 아니다.】

누구인지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우리의 ‘유중혁’을 앗아갔던 ‘외신’이다!】

‘살아있는 불꽃’. 999회차의 우리엘이 외쳤다.

오직 ‘은밀한 모략가’를 죽이기 위해 살아온 존재. 그녀가, 드디어 자신의 원한을 갚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다.

[업화의 불꽃]에 감긴 염열이 더욱 드세어졌다.

그녀를 말린 것은 ‘가라앉은 섬의 주인’이었다.

【잠깐만. 멈춰 우리엘. 저 ‘대장’은―!】

【속지 마라. 놈에게 ‘은밀한 모략가’가 깃들었다. 저놈이 바로 우리가 찾던 그 원수란 말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미친, 저게 이 세계선의 대장이야? 간만에 봐도 역시 겁나 쩌는데······.】

마침내 마지막 ‘왕’이 도착했다.

그는 전장을 슥 훑어보더니 두 눈이 튀어나올 듯한 얼굴로 말했다.

【지, 지혜가 둘?!】

······‘위대한 심연의 군주’.

999회차의 김남운이었다.

[모든 ‘이계의 신격의 왕’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성좌들이 전장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성운들이 멸망한 존재들의 강림을 두려워합니다.]

[상당 수의 성좌들이 강렬한 적의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별들이 무어라 하든, 그들은 서로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살아있는 불꽃’.」

「서쪽 세계의 재앙 ‘가라앉은 섬의 주인’.」

「북쪽 우주의 지배자 ‘위대한 심연의 군주’.」

「남쪽 성간을 다스리는 ‘은빛 심장의 왕’.」

「그리고 무엇도 아닌 곳에서 기어오는 ‘위대한 모략’.」

‘공포의 기록자’들이 남긴 책에서 처음 그 이름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정체를 짐작하기 시작하던 순간부터 조금씩 세워왔던 계획.

나는 유중혁을 흘끗 보았다.

내가 짠 본래의 플랜 A는, 여기서부터가 시작이었다.

―유중혁.

내 신호와 함께 유중혁이 앞으로 나섰다.

이계의 신격의 혼돈을 휘감은 그가, 자신의 입으로 진언을 토했다.

【모두 모였구나.】

그 한 마디에, 나로서는 읽을 수 없는 감정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누군가는 그 감정을 읽어냈다.

혼란 속에서 ‘가라앉은 섬의 주인’의 설화가 흔들리고 있었다. 벅차오르는 목소리가 그녀의 진언을 통해 쏟아졌다.

【대장. 역시 대장 맞는 거지? 어떻게―】

【어디서 간교한 수작을······!】

[업화의 불꽃]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초월좌의 힘이 담긴 [흑천마도]가 칼날을 세워 불꽃을 막아냈다.

마력파가 뒤얽힌 파찰음 속에서 유중혁이 재차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우리엘. 나의 오래된 전우.】

【닥쳐라! 너는 유중혁이 아니다. 너는―!】

마치 능멸이라도 당한 것처럼, 999회차의 우리엘이 소리를 질렀다.

사방으로 뻗어 나간 염화가 공기 중의 산소를 불태웠다. 숨조차 쉬기 힘든 그 초열 지옥 속에서 우리엘이 말을 이었다.

【내가 알던 유중혁은 그곳에서 죽었다.】

그녀의 설화들이 상처받은 늑대처럼 으르렁거렸다. 너무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 그 표정으로, 우리엘이 검을 겨누었다.

【네놈이 죽였다.】

그녀의 설화가 외치고 있었다.

「[죽인다. 죽일 것이다. 반드시, 네놈을 죽이고 말겠다.]」

‘이계의 언약’에 의해 소멸하는 유중혁의 화신체를 붙든 채, 999회차의 우리엘이 오열하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계선을 건너서라도, 반드시 이 원한을 갚을 것이다. 설령, 내가 선을 저버리고 악이 된다 할지라도!]」

그렇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는 ‘살아있는 불꽃’이 되었다. 오직 자신의 복수만을 위해 ‘이계의 신격’이 된 대천사. 그것이 지금 그녀가 이곳에 있는 이유였다.

【‘유중혁’은 죽지 않는다. 다만 회귀할 뿐이지.】

【닥쳐라! 그런 말로―】

깊은 분노로 얼룩진 불꽃을 튕겨내며, 유중혁이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깨어난 그는 1000회차를 살았다. 죽었고, 다시 1001회차를 살았다. 그렇게 살고, 살고 또 살아남았다.】

나 역시 그 삶을 알고 있었다.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고,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던 생.

유중혁은 혼자서 그 삶을 계속해서 살아왔다.

【그렇게, 내가 되었다.】

들어선 안 될 말을 들은 사람처럼 우리엘이 달려들었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업화의 불꽃]이 유중혁의 허리를 베고, 어깨를 베었다. 순식간에 선회한 [업화의 불꽃]은 이내 유중혁의 목을 노렸다. 그것이 마땅히 감내할 벌이라는 듯, 유중혁은 그것을 막지 않았다. 그리고

마법처럼, 우리엘의 검격이 멈췄다.

【너는, 너, 너는······.】

아마 우리엘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복수는,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녀의 가장 소중한 전우를 앗아간 존재는, 바로 그 전우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유중혁이 말했다.

【원한다면 나를 죽여라. 네 세계선을 빼앗아간 ‘은밀한 모략가’는 바로 나니까.】

괴성을 지른 우리엘이 울부짖듯 포효했다.

다시금 그녀의 검이 움직이는 바로 그 순간, “꽈아앙”하는 소리와 함께 바닷물이 폭발했다.

우리엘의 검이 허공을 날았다. 푹, 하고 바다에 꽂힌 그녀의 업화가 바닷물을 기화시키며 침잠했다.

유중혁이 한 짓이 아니었다.

슈우우우우······.

해일의 건너편에서 피어오르는 포연. 999회차 이지혜가 쏜 탄환이었다.

【이제 그만해, 우리엘.】

이지혜의 목소리가 환희와 광기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 알고 있었어. 모두 알고 있었다고······.】

비척거리는 999회차의 이지혜가, 바다 위를 걸어 이쪽으로 다가왔다.

유중혁은 그 창백한 손을 피하지 않았다.

【대장. 그 안에 있는 거지? 지금은 다른 뭔가가 되어있지만, 분명 그 안에 계속해서 남아 있는 거지? 그렇지? 역시 살아있었던 거지?】

이지혜의 눈에서 눈물 대신 혼돈이 쏟아졌다. 새카만 어둠을 곱게 빚은 듯한 가루였다. 유중혁은 그런 이지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999회차의 유중혁’이 자신의 오랜 동료를 바라봅니다.]

999회차의 이지혜가 유중혁의 옷깃을 붙잡은 채 천천히 무너졌다.

나는 유중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는 뒷모습.

「유중혁이 여럿이 된 것은, 세계선의 장난 때문이었다.」

0회차를 살았던 유중혁은 1회차의 유중혁이 되었고, 다시 2회차의 유중혁이 되었다. 2회차의 유중혁은 3회차가, 3회차의 유중혁은 4회차가 되었다.

과거와 미래가 서로를 간섭하는 비정상적인 일들이 만연해서 그 당연한 사실을 잠깐 잊고 있었지만, 그것이 진실이었다.

「회귀자는 사실 회귀하지 않는다. 회귀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를 제외한 모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간은 거꾸로 돌아가도, 그의 시간은 늘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비록 세계선이 갈라지며 누군가는 1864회차의 유중혁이 되었고, 또 누군가는 ‘은밀한 모략가’가 되었지만―

「애초에 그는 이어진 길을 줄곧 걸어온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저들이, 정말로 그 진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살아왔고.」

불꽃을 태우는 우리엘.

「누군가는 그의 뜻을 잇기 위해 살아왔다.」

이제는 울 수 없게 된 이현성.

「누군가는 그와 다시 한번 싸우기 위해 살아왔고.」

삐딱하게 허공에 선 채 이쪽을 노려보는 김남운.

「누군가는, 그와 함께했던 모든 시간들을 되살리기 위해 살아왔다.」

눈앞에서 망연히 무너진 이지혜.

유중혁은 말했다. ‘회귀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의 회귀는 누군가의 생을 바꿨다.

이들에게 ‘유중혁’은 하나의 세계였다.

자신들의 세계선이 멸망한 후에도 그들을 살게 만들었던 세계.

「김독자의 계획은 바로 그 ‘세계’에 있었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면.

그래서 이 ‘유중혁’을 그들의 대장으로 다시 받아들인다면.

「그렇다면, 이 싸움은 지속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정말 대장이라면······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알겠네.】

999회차의 이지혜가 해맑게 웃었다.

【돌아가자, 대장. 모두 다시 시작하는 거야.】

유중혁의 손목을 그러쥔 그녀가 말하고 있었다.

【같이 이 세계선을 부수자. 응? 도깨비 왕이랑 약속도 했어. 이 세계선만 멸망시키면, 우릴 그때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대장의 배후성인 ‘가장 오래된 꿈’과 접선해서―】

나는 황급히 유중혁 쪽을 바라보았다.

―유중혁.

여기서는 결코 저쪽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 최대한 좋은 말로 구슬릴 필요가 있었다. 그녀의 뜻에 거짓 동조하는 척을 하더라도 지금은―

“이지혜.”

유중혁이 이지혜를 보며 말했다. 진언이 아니라 자신의 육성이었다.

그 시선 앞에, 999회차의 이지혜가 어깨를 움츠렸다. 마치, 사부에게 처음으로 검을 배웠던 그날처럼.

“그게 정말 네가 원하는 것인가?”

【······.】

“모두가 그때로 돌아가면, 정말로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내가 아는 대장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

입술을 깨문 999회차의 이지혜가 유중혁의 손을 놓았다.

【그는, 그는 999번이나 회귀를 반복한 사람이야. 그 무수한 세월 앞에서도 쓰러지지 않았던 사람이야. 그 사람은, 절대로 약한 소리를―】

“999번의 회귀를 반복한 인간도, 1000번째에는 지칠 수 있다.”

유중혁이 말하고 있었다. 나조차도 놀랄 정도의 솔직한 목소리.

“설령 1000번의 삶을 견뎠다 한들, 1001번째 삶에서는 포기할 수도 있다.”

그 아득한 피로감이 배인 음색 앞에서, 나조차 망연해질 지경이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아는 대장은―】

“포기하지 않지. 하지만 그게 네가 기억하던 ‘유중혁’의 전부라면―”

나는 말해야 했다. 지금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유중혁은 죽었다.”

그것이 유중혁의 본심이었다. 1864번의 생을 살아온 인간이, 단 한 번도 털어놓은 적 없는 내면이었다.

이지혜가 절규하듯 외쳤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그는 더 이상 회귀하지 않는다.”

먼 하늘에서 뭔가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별들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다급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봅니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막내의 안위를 묻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이번에야 말로 자신의 양손을 다 쓰겠다고 선언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의 이야기를 보아온 별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별들 너머로 일행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한수영, 유상아, 정희원······ 우리와 함께 이 세계를 살아온 <김독자 컴퍼니>의 사람들.

지는 석양의 어둠 속에서 그들의 모습은 하나의 거대한 별자리처럼 보였다.

그 모든 정경을 눈에 담은 채, 한 사람의 유중혁이 말했다.

“나는 돌아갈 수 없다. 내 마지막 회차는 이곳이다.”





< Episode 90. 한 사람 (5) > 끝

< Episode 91. 단 하나의 설화 (1) >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담담히 선언하는 유중혁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본래 작전은 이런 게 아니었다. 유중혁은 999회차의 기억을 이용해 시간을 끌어야 했다. 

‘이계의 신격’들을 적당히 자극해서, 그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내게 다음 회차는 없다.” 

눈앞에서 내 작전을 송두리째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녀석을 보면서도,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회귀자였던, 유중혁이다.”」 

이제야, 그때 유중혁이 했던 그 말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지금껏 이번 회차의 유중혁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 내가 준 정보나 다른 변수들의 개입 때문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유중혁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설화들이 그 증거였다. 필사가 아니라 필생의 의지가 담긴 설화들. 

「유중혁은 이 회차에 모든 것을 걸었다.」 

자신의 모든 연료를 쏟아부어 질주하는 열차처럼, 유중혁은 온 힘을 다해 살고 있었다. 

이 회차는 그의 다음 생을 위한 재료가 아니었다. 

【······대장, 거짓말이지? 응? 지금 농담하는 거지?】 

이지혜의 표정이 삐거덕거렸다. 단순히 믿었던 신념에 배반당한 표정이 아니었다.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자신이 좇아온 마지막 지푸라기를 향해 손을 뻗는 모습. 

하지만 유중혁은 그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이지혜. 내가 네게 거짓말을 한 적이 있나?” 

【······왜.】 

이지혜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기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999회차의 역사들이 폭주하는 것이 느껴졌다. 

【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

설화들이 묻고 있었다. 어째서 999회차가 아니라 이곳이냐고. 그들이 살아왔던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냐고.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유중혁이 제지했다. 

“물러서라.” 

고통스럽게 떨리는 뺨. 아무리 감정을 숨기려 애써도, 특유의 버릇까지 지워내지는 못한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어차피 이제 물러설 곳도 없어. 

―미안하군. 

―됐어. 네가 선택한 거야. 

얼핏 현실주의자인 것 같은 유중혁은, 사실 누구보다도 이상주의자다. 애초에 이상을 좇지 않는 녀석이 회귀를 거듭할 리가 없으니까. 그러니 그런 녀석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현실주의자가 되어야만 했다. 

분개하여 밀려드는 ‘이계의 신격’의 파도를 보며, 나는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갔다. 

[유중혁은 당신들의 세계선을 선택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온 힘을 다한 진언에, 패닉에 빠져 있던 ‘이계의 신격의 왕’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999회차의 이지혜, 이현성, 김남운, 우리엘······. 

[잊었습니까? 그는 언제나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당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언제나 회귀를 반복해왔지만, 유중혁은 한 번도 진심으로 회귀를 원해본 적은 없었다. 

3회차를 버리고 4회차를, 4회차를 버리고 5회차를 선택하면서도, 사실 그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회귀는 그의 선택이 아니라 그의 운명이었고, 선택한 것은 유중혁이 아니라 유중혁의 회귀를 원하는 ‘이야기’였다. 

[우린 서로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왜, 비극과 비극이 서로의 불행을 겨뤄야 합니까?] 

이 말이 먹힐지 아닐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반드시 말해야 했다. 

[우리는 당신들을 배제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들을 재앙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껏 목격한 적 없는 아득한 시선의 세례에 시야가 아찔했지만, 나는 그 시선들을 피하지 않았다. 

유중혁이 더 이상 0회차의 유중혁이 아니듯, 나 역시 1번 시나리오의 김독자가 아니다. 

[당신들과 함께, 저 하늘과 맞서기를 원합니다.] 

하늘 너머로, 별들이 미친듯이 발광하고 있었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관리국의 대도깨비들이 당신의 생각에 경악합니다!] 

간접 메시지가 별빛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전이었다면 그 메시지를 읽는 것에 급급했겠지만, 이제는 안다. 

저 하늘의 별빛들은 사실, 그곳에 어둠이 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장식일 뿐이다. 

[‘이야기의 왕’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주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어이, 그게 무슨 뜻인진 알고 있는 거야? <스타 스트림>을 부수자는 거야 지금?】 

이죽거리는 목소리. 999회차의 김남운이었다. 

【우리라고 그걸 안 해본 줄 알아?】 

목소리에 담긴 감정의 골이 깊었다.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정말로 웃는 것이 아니었다. 

과장된 웃음의 내부에 침투한 체념. 

【우리도 해봤어. 성좌들을 모두 떨어트리고, 우리 세계선의 도깨비 왕도 죽여봤다고. 그랬더니 어떻게 된 줄 알아?】 

바다를 뚜벅뚜벅 걸어온 김남운이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달콤한 절망을 전해주려는 듯, 녀석이 속삭였다. 

【그냥, 세계가 사라져 버렸어.】 

나는 그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분명 시나리오도 제대로 클리어했고, 조건도 완수했는데······ 우리는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을 모두 잃었어. 어떤 기적도 보상도 없이.】 

머릿속으로 999회차 우리엘의 말이 떠올랐다. 

「<스타 스트림>이 사라지면 우주는 혼돈으로 변한다. 그런 세계선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악(惡)이다.」 

<스타 스트림>을 부수겠다는 내 말에, 999회차의 우리엘은 그렇게 말했었다. 

김남운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 세계의 끝에서, 우리가 뭘 봤는지 알아?】 

[아주 거대한 벽을 봤겠지. 처음과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이 모든 세계를 둘러싼 거대한 벽.] 

【······네가 어떻게 그걸 알지?】 

[우리의 목표도 거기에 있으니까.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스타 스트림>을 부수는 게 아냐.] 

나는 ‘은밀한 모략가’가 전해준 말을, 나의 목소리로 반복했다. 

[‘최후의 벽’ 너머에 있을, 이 모든 비극의 원흉을 없애는 거다.] 

999회차의 김남운이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녀석이 고함을 쳤다. 

【‘최후의 벽’은 누구도 넘어갈 수 없어! 그건―】 

【남운아, 이들은 ‘최후의 벽’의 너머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마지막 열쇠’를 가지고 있다.】 

이현성의 말이었다. 

999회차의 김남운이 혼란스런 표정으로 나와 이현성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999회차의 이현성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계의 신격의 왕’들이 당신의 말에 동요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선언으로 인해 ‘98번 시나리오’가 격변하고 있습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에 분개합니다!] 

별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지 못해도 좋다. 어떤 성운도 우리 편을 들어주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이들이 우리 편을 들어준다면. 

999회차를 살아온 ‘왕’들이, 우리와 함께 세계선에 남아 싸워준다면― 

【······네가 그런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치자고.】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등줄기에 서늘한 한기가 스쳤다. 

【그렇다면 내가 그 ‘열쇠’를 빼앗지 않을 이유가 있나?】 

순식간에 다가온 김남운의 단검이 내 목줄을 노리는 순간. 

카아앙! 

눈앞을 흐르는 검은 궤적이 녀석의 단검을 받아냈다. 

묵직한 충격에 유중혁과 김남운이 동시에 두어 걸음을 물러났다. 

【하하하! 그래! 이 감각이야!】 

[흑천마도]와 부딪친 ‘위대한 심연의 군주’의 손등에서 피가 흘렀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알아? 당신과 다시 한번 겨루기 위해서, 얼마나 오랜 세월을 헤맸는지 아냐고!】 

‘위대한 심연의 군주’. 

자신이 동경했던 상대를 다시 한번 부활시키기 위해 그 먼 세월을 여행해 온 존재. 

[거대 설화, ‘망상설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비틀거리는 이지혜를 부축한 우리엘도 어느새 전투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가 내게 말했었지. 혹시나 그가, 그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된다면 내 손으로 자신을 죽여 달라고.】 

눈부신 폭음과 함께, 허공의 태양이 다시금 빛을 내뿜었다. 

【아무래도 지금이 그때인 것 같군.】 

쏟아지는 섬열을 받아낸 것은 시야를 가득히 채운 강철이었다. 

―피하십시오. 저 혼자서는 막아낼 수 없습니다. 

999회차의 이현성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재앙’으로 소환되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즉, 저들과는 다르게 ‘시나리오의 가호’를 받지 않고 있다는 뜻. 

“김독자!” 

그와 거의 동시에 일행들이 도착했다. 

흑염룡을 타고 날아온 한수영이 제일 먼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보는 대로.” 

한수영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정희원을, 신유승을, 이길영을, 이지혜를, 유상아를. 

“여기가 마지막 고비입니다.” 

아마 일행들도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부탁합니다. 누구도 죽지 마십시오.” 

이번 싸움만큼은, 나조차도 일행들을 지켜줄 수가 없다. 

콰아아아아아!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충격과 함께, 거센 해일과 일광이 교차했다. 하얗게 시야를 메운 포말 사이로 교차하는 칼날이 보였다. 

바다를 가르는 묵빛 섬광. 

유중혁이 싸우고 있었다. 999회차 김남운과 999회차 우리엘의 합공을 견뎌내며, 놀라울 정도의 무위를 펼치고 있었다.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무려 두 명의 ‘왕’을 상대할 정도의 저력. 

저것이 바로 유중혁의 진짜 힘이었다. 

그가 쌓아온 모든 설화들이 일거에 폭발하고 있었다. 

[‘끊어진 필름 이론’의 연결이 불완전합니다!] 

[설화의 연속성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균형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독자 씨.” 

고개를 돌리자 정희원이 그곳에 있었다. 눈부신 대천사의 날개가 그녀의 등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비스트 로드 신유승, 해상제독 이지혜, 강철검제 이현성. 

원작과는 다른 삶을 살았고, 그렇기에 다른 해답을 향해 나아가는 동료들. 

우리는 서로를 일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혁 씨는 내가 도울 테니까 나머지는 저쪽을 맡아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날개를 펼친 정희원이 우리엘의 가호를 받아 유중혁을 향해 날아갔다. 

아마도 우리엘의 선택인 것 같았다. ‘이계의 신격의 왕’이 먼 미래의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말했을 텐데. 성운의 가호 없이 나를 상대할 수는 없을 거라고.】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업화의 불꽃]이 바다를 향해 떨어졌다. 

하지만 정희원을 걱정할 틈은 없었다. 이쪽으로 방대한 격을 쏟아내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터져 나가는 파도 사이로, 999회차의 이지혜가 텅 빈 눈동자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모두 피해요!” 

앞으로 나선 유상아가 시공간을 비틀었다. 하지만 석존의 능력은 저 ‘이계의 신격의 왕’의 진심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쩌저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뒤틀린 공간이 강제로 펼쳐졌다. 

999회차 이지혜의 전함이 바닷속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가라앉은 섬의 주인’. 그녀의 [터틀 드래곤]은 말 그대로 전함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섬처럼 보였다. 

“아저씨!” 

위험을 느낀 신유승이 [키메라 드래곤]으로 브레스를 뿌렸다. 그러자 바닷속에 숨어 있던 모든 해수종들이 밀려 나왔다. 

갸오오오오오! 

거친 울음을 내뱉은 괴수들이 전함의 외피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막아내기에 섬은 너무나 거대했다. 쿠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괴수들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대의 바다가 둔중하게 흔들리며 해일이 밀려오고 있었다. 

“형, 물러나요! 빨리!” 

“김독자, 뒤로 꺼져!” 

나를 보호하듯 둘러싼 일행들이 필사적으로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모두, 모두 없애면 돼.】 

해일 너머로, 999회차의 이지혜가 외치고 있었다. 

【전부, 새로 만들 수 있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럼 대장도 알게 될 거야. 얼마든지 부술 수 있는 세계라고. 대체 가능한 거라고. 우리가 살았던 세계가 진짜라고······!】 

콰콰콰콰콰콰! 

바다 전체를 날려버릴 듯한 포격과 함께 쓰나미가 밀려오고 있었다.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크기의 해일. 

저것이 그대로 밀려온다면, 아무리 어머니가 있다고 해도 한반도는 끝장이었다.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정색한 한수영이 소리를 질렀다. 

“김독자! 또 허튼 짓 했다간―!” 

“걱정 마.” 

나는 한수영의 어깨를 툭 치며 앞으로 나섰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나리오의 정경들이 눈앞을 스쳐 갔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들이 만들어질 때마다, 나는 매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믿었고, 그것이 옳은 방법이라 믿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긴고아가 머리를 단단히 죄어왔다. 

일행들이 직접 내게 채운 족쇄. 

이 거대 설화를 얻을 때, 나는 죽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의 마음이라는 것을 잘 안다. 

콰아아아아아! 

다가오는 해일. 신화급 성좌조차 막을 수 없는 힘이었다. 

「하지만 김독자는 저 해일과 대적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원작의 마지막 회차. 유중혁이 ‘이계의 신격’들과 최후의 전쟁을 벌였을 때도 이와 비슷한 순간이 있었다. 

그때, 유중혁의 곁에는 한 성좌가 있었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하나의 ‘신화급 성좌’만으로는 ‘대멸망’을 감당할 수 없다. 

하지만, 둘이라면 어떨까. 

[성좌, ‘구원의 마왕’이 ‘가장 오래된 해방자’를 바라봅니다.] 

이제 나는 희생하지 않을 것이다. 일행들을 두고 떠나지도 않을 것이다. 

유중혁이 이번 생을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나 역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내가 가진 ‘거대 설화’ 중 유일하게, ‘이계의 신격의 왕’과 대적할 수 있는 힘. 

이 거대 설화의 가장 큰 지분을 가진 것은 내가 아니었다. 

“제천대성!” 

머릿속에서 네 개의 고리가 이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미후왕’이 당신의 요청에 동의합니다.] 

[‘필마온’이 당신의 요청에 동의합니다.] 

[‘투전승불’이 당신의 요청에 동의합니다.] 

과도하게 흐르는 설화가 내 화신체를 변형시키고 있었다. 

[‘제천대성’이 요청에 동의합니다.] 

순식간에 자라난 머리카락이 백금빛으로 덮였다. 전신의 혈관을 타고 아득한 설화의 기운이 급류처럼 몰아쳤다. 

한 손에 잡히는 여의금고봉의 충만한 감각. 

[당신의 화신체에 다섯 ‘손오공’의 힘이 현현합니다!] 

외투에 내려 앉은 황금빛 설화의 격. 인근의 바다에 통천하의 전장이 재림하고 있었다. 

천둥이 내리치는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자, 막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Episode 91. 단 하나의 설화 (1) > 끝

< Episode 91. 단 하나의 설화 (2) >





콰아아아아! 

전신을 휘감는 제천대성의 격이 오른손의 [여의금고봉]에 집중되었다. 통천하에서 성좌들을 상대했던 그날처럼.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내가 온전히 그 ‘손오공’의 힘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당신에게 온전히 깃듭니다!] 

“제가 길을 뚫겠습니다.” 

[여의금고봉]을 휘두르자, 밀려오던 해일의 중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하지만 구멍은 순식간에 메워졌다. 

【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 

999회차의 이지혜가 융기시킨 섬에서 ‘이름 없는 것들’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숫자였지만, 제천대성은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부숴라.] 

허공으로 들어 올린 팔이 저릿하다 싶더니, 창공이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뇌운을 품은 근두운들이 몇 번인가 하늘을 울렸다. 이내 눈부신 푸른 빛이 바다에 산란했다. 

콰아아아아앙! 

내리친 뇌전 다발이 바다의 모든 것들을 찢어발기며 길을 내었다. 몇 번이고 다시 내리치는 뇌전. 어마어마한 격이었다. 

이게 바로 마지막 시나리오에 다다른 제천대성, 최강의 성좌라 불리는 이의 힘. 

【가각 가가가가가가가각?】 

하지만 몰아치는 뇌전에도 근근이 버티는 녀석들이 있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크기가 큰 개체들이었다. 

【죽 인 다 성 좌】 

【모 든 별 들 의 파 멸 이 다 가 온 다】 

보다 정확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계의 신격’들. 상위의 개체들이 해저의 터널을 지나 수면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미친―” 

곁에 있던 한수영이 소리쳤다. 

쿠구구구구구구! 

바다의 지반 전체가 흔들리며 해저에서 용암이 끓어 올랐다. 

“모두 물러나!” 

우리는 이지혜의 [터틀 드래곤]에 올라타 허공으로 솟구쳤다. 

희뿌옇게 물든 해수면엔 꿈틀대는 것들이 가득했다. 

【세 계 선 의 멸 망 이 찾 아 올 것 이 다】 

세기말적인 대사를 늘어놓으며 강림하는 ‘이계의 신격’들. 

언젠가 우리는 저런 존재와 마주한 적이 있었다. 

시나리오 초기, [암흑성]의 전장에서였다. 

[‘제4의 벽’이 희미하게 술렁입니다.] 

어쩌면 벽 안의 사서가 된 [꿈을 먹는 자] 또한 지금 이 광경을 보고 있을 것이다. 

“저런 것들을 어떻게 잡으란 거야?” 

이를 악문 한수영이 양손으로 [흑염]을 발출했다. 

무려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촉수들이 한꺼번에 바다 위를 솟구치자, 용암 범벅이 된 해일이 산맥처럼 커져갔다. 

문득 ‘멸살법’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융기한 섬에서 흘러나온 재앙은 마침내 지표면의 모든 것을 덮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이 세계선의 지구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제천대성!” 

나는 제천대성의 힘을 빌려 다가오는 해일들과 맞섰다. 

순식간에 자라난 여의봉이 다가오는 ‘이름 없는 것들’을 쳐냈다. 빌딩만한 파도를 부수고, 날아드는 촉수를 작살 냈다. 그래도 끝이 없었다. 

「해일은 점점 더 커져갈 뿐이었다.」 

하나의 해일을 이겨내면 두 번째 해일이 오고, 두 번째 해일을 부수면 세 번째 해일이 덮쳐온다. 

그리고 그 모든 해일의 중심엔 ‘가라앉은 섬의 주인’과 다른 ‘이계의 신격의 왕’들이 있었다.

[······이번엔 쉽지 않겠군.] 

제천대성조차 그렇게 말할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저들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우리가 당할 판이다. 

“저걸 뚫을 방법이 없습니까?” 

[시간이 필요하다.] 

그 말을 남긴 제천대성이 격을 모으기 시작했다. 심장 어귀가 급속도로 따뜻해지더니 전신의 설맥이 빠르게 돌았다. 

그가 무엇을 준비하는 것인지 알았던 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내 생각이 맞다면, 제천대성은 지금 ‘멸살법’의 최종장에 나왔던 그 기술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그때까지 나와 일행들이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시간을 벌려면 힘을 합쳐야 한다.」 

우리엘과 심연의 흑염룡이 제아무리 뛰어난 성좌라고 해도, 그들만으로는 버티기가 어렵다. 게다가 저쪽에는 ‘왕’이 넷이나 있다. 

······넷? 

콰르르르르르! 

날아드는 촉수 다발을 쳐내는 강철의 방패. 

내 앞을 가로막은 커다란 어깨를 보며 나는 말했다. 

“현성 씨.” 

999회차의 이현성이 나를 돌아보았다. 반쯤은 걱정스런 얼굴로, 반쯤은 혼란으로 뒤덮인 얼굴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재앙을 막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던 이현성이 물었다. 

【약속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 약속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킬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다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잠시 나를 보던 이현성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현성의 눈이 은빛으로 발했다. 

【그대의 설화를 믿겠습니다.】 

콰콰콰콰콰콰콰! 

뱃전에서 거대한 강철의 가지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자라난 가지는 이내 사면의 벽을 만들더니, 해일과 ‘이름 없는 것들’과 부딪치며 쾌속 생장을 거듭했다. 

잠시 후, 눈앞에는 가운데가 뚫린 정사각형의 통로가 만들어졌다. 

질주하는 강철의 벽이 만든 통로였다. 

【가십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통로를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통로 끝에 익숙한 인물이 보였다. 

“희원 씨!” 

‘이름 없는 것들’의 한가운데에서 정희원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나와 동료들은 통로를 가로질러 그녀를 도왔다. 

“미안해요, 도저히 뚫을 수가 없어요.” 

입술을 꾹 깨문 정희원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절망감 어린 목소리. 

그녀는 999회차의 우리엘에게 다가가지도 못한 채 허공에서 날아드는 ‘이름 없는 것들’을 베어내기에 급급했다. 

【갸아아아아아아】 

쿠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강철의 벽이 둔중하게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우리를 집어삼킬 것처럼 달려드는 ‘이계의 신격’들. 

이 통로에서 한발짝만 나가도, 몰려든 녀석들은 피라냐처럼 우리를 뜯어 먹을 것이다. 

콰드득, 콰드드득. 

‘이름 없는 것들’이 금속 벽을 갉아 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위험······!” 

통로의 출구 쪽에서 ‘이름 없는 것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혀를 빼문 채 광견처럼 달려드는 녀석들. 

【아아아아아아!】 

하늘에서 섬광 같은 것이 떨어지며 눈앞의 것들이 모조리 잘려나간 것은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누군가가 바깥에서 우리가 서 있던 통로를 잘라낸 것이다. 

잘려나간 통로 너머로 대멸망의 전장이 보였다. 

죽어 나간 ‘이름 없는 것들’이 시체의 섬을 이루고 있었다. 잊힌 설화들이 비참하게 죽어간 그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헛구역질을 했다. 

나 역시 잠시 말을 잊고 그 전장을 내다보았다. 

누군가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이것이 ‘대멸망’이었다. 원작의 유중혁이 헤쳐나갔던 시나리오. 

실제로 그 유중혁은 지금도 이 대전장의 중심에서 ‘이계의 신격의 왕’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마른하늘의 한쪽에서 섬광이 튀는 듯하더니 어느새 건너편에서 굉음이 울렸다. 눈으로 좇기도 힘들 정도로 빠른 움직임. 우리가 서 있던 통로를 자른 이들이 싸우고 있었다. 

나는 이곳이 전장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그 전경에 잠시 압도당했다. 

[거대 설화, ‘망상설계’가 기염을 토합니다!] 

[거대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잊혀진 세계선의 최강자들이 설화를 겨루고 있었다. 몰아치는 [파천검도]와 대항하는 [지옥염화]. 거기에 [흑염]의 잔류가 뒤섞여 용오름을 만들고 있었다. 

먹구름 사이로 검강의 격류가 충돌을 일으켰고, 오래된 설화들이 늙은 용처럼 울부짖었다. 하늘이 떠나갈 듯 설화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눈앞에서 살아있는 역사들이 부딪치고, 소멸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있었다. 

유중혁이 번 시간을 허투루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나는 전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해일의 원인은 ‘가라앉은 섬’ 그 자체입니다.” 

먼지구름처럼 몰려든 ‘이름 없는 것들’. 그 뒤에서 해일을 일으키는 상위격의 외신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있는 ‘가라앉은 섬’까지. 

아마 저 섬의 중앙에 999회차의 이지혜가 있을 것이다. 

“섬을 침몰시키는 것이 먼저입니다. 가장 좋은 건 999회차의 이지혜를 제압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밀려드는 해일 세례 너머를 헤아렸다. 

이 ‘대멸망’을 일으킨 원흉. ‘가라앉은 섬의 주인’인 999회차의 이지혜를 제압하면 재해는 잦아들겠지만, 문제는 거기까지 가는 방법이었다. 

한수영이 말했다. 

“저쪽엔 999회차의 김남운과 우리엘도 있어. 우리엘이야 유중혁이 상대하고 있다고 쳐도 김남운은 어떡할 거야?” 

“걱정 마. 나한테도 생각이 있어.” 

여전히 전력은 이쪽이 불리했다. 이미 앞선 전투로 인해 전력의 상당 부분을 소실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마냥 불리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길영아, 유승아. 벌레들과 괴수들을 풀어서 외신들의 움직임을 최대한 막아. 유상아 씨, 기회를 봐서 이지혜에게 한 번만 더 디버프를 걸어주십시오. 한수영 너는 우리 배후에서 다가오는 ‘이름 없는 것들’을 처리해줘.” 

“너는?” 

“난 길을 뚫을 거야. 희원 씨는 저랑 같이 가시죠.” 

정희원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나는 격을 개방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타이밍 좋게 전신을 감싸오는 이현성의 설화가 느껴졌다. 

[강철화]가 만든 외피가 피부 위로 자라나고 있었다. 확실히, <오즈>에 다녀온 보람이 있었다. 

저 ‘이름 없는 것들’의 외피를 효율적으로 부수기 위해서는, 이현성의 [설화 금속]이 반드시 필요했다. 

“지금입니다!” 

우리는 동시에 허공의 철벽에서 뛰어올라 해일을 향해 강하했다. 

이쪽의 움직임을 눈치챈 ‘이계의 신격’들이 동시에 괴성을 질렀다. 

두두두두두두두! 

멀리서 [설화 금속]이 덧입혀진 공필두의 포탄이 날아들었다. ‘이름 없는 것들’의 외피를 꿰뚫는 탄환들. 그의 포성을 간주 삼아, 우리는 해일 위를 달렸다. 

피할 곳 없이 날아드는 촉수를 불태운 것은 한수영이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포효합니다!] 

[흑염]의 불꽃에 외신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나와 정희원이 그 길 위를 달렸다. 섬 주변의 시공간이 희미하게 뒤틀리는 것이 느껴졌다. 유상아가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독자 씨, 저기!” 

멀리서 섬의 최상부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터틀 드래곤]이 보였다. 

그 선수상 위에서 999회차의 해상제독이 ‘이계의 신격’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하하핫, 어딜 가시려고!】 

기다렸다는 듯 999회차의 김남운이 나타났다. 

【우리 지혜는 내가 지킨다!】 

유중혁과 맞서 싸우는 와중에도 끼어들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유중혁 녀석의 상태가 위중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정희원에게 신호를 보냈다. 

“제 걱정은 마시고 유중혁 쪽을 도와주세요. 슬슬 녀석도 한계일 겁니다.” 

“죽지 말아요, 알겠죠?” 

정희원이 곧장 날개를 펼쳐 유중혁을 돕기 위해 사라졌다. 

【애틋한데? 걱정 마. 순식간에 둘 다 보내줄 테니까!】 

김남운의 신형이 스르르 움직였다. 

수백 개로 갈라진 녀석의 그림자에서 무수한 신형이 튀어나왔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이건 피할 수 없다.」 

수백, 아니 족히 수천은 되어 보이는 단검들이 일제히 내 전신을 노리고 있었다. 살아있는 듯 움직이는 단검들. 김남운이 터득한 나이프 파이팅의 정수가 그 단검 하나하나에 실려 있었다. 하나하나가 치명상을 입히기에 충분한 공격. 그럼에도 나는 가만히 웃었다. 

“널 처음 봤을 때도 내게 칼을 휘둘렀었지.” 

【난 너 처음 보는데?】 

“김남운, 이 세계의 네가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 말에, 김남운의 신형들 중 하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깟 놈 어떻게 뒈졌는지 내가 알 게 뭐야!】 

나는 날아드는 단검을 [여의금고봉]으로 막아냈다. 몇 개의 단검이 내 허벅지와 어깨를 깊이 그었지만, 다행히 이현성의 [설화 금속]이 녀석의 공격을 대신 받아 주었다. 

그러나 거센 빗발처럼 부딪쳐오는 공격에 이현성의 강철에도 금이 가고 있었다. 

나는 착실하게 기억을 재현하듯, 날아드는 공격들을 피해냈다. 

「오른쪽 옆구리」 

「오른쪽 눈」 

「왼쪽 대퇴부」 

츠츳, 츠츠츳. 

희미하게 튀는 스파크. 

나는 단검 두어 개를 더 맞은 채 물러섰다. 

“이 세계선의 너는 쓰레기였어. 힘없는 노인을 죽여서 첫 번째 시나리오를 깨려는 양아치가 너였지.” 

【첫 번째 시나리오는 원래 그런 거야. 그딴 건 안 궁금―】 

“너는 지금처럼 단검을 휘두르다가, 볼썽사납게 무릎을 꿇은 채 살려달라 빌었어. 그리고 비참하게 머리가 터져서 죽었지.” 

처음으로 김남운의 움직임이 멎었다. 

장난스런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녀석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널 그렇게 죽인 놈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 

단검이 내 왼쪽 눈을 노리고 날아왔다. 

“잠자는 거신을 베기 위해 버려진 검이여. 지금 이곳에 강림하라!”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후폭풍과 함께, 눈앞의 모든 것이 이지러졌다. 

차원을 건너 소환된 강철의 거신이 그곳에 있었다. 

[타르타로스] 최강의 설화 병기, 플루토. 

콕핏에서 김남운의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핫! 메뚜기 남, 오랜만······.]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사용할 방법은, 녀석에겐 지독히 잔인한 방법이었던 까닭이다. 

[응? 뭐야 이건.] 

자신의 코앞에 둥둥 떠 있는 작은 뭔가를 발견한 김남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저쪽의 김남운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거대 로봇?】 

[우와아아아아악!] 

츠츠츠츠츠츳! 

[서로 다른 세계선의 동일 존재가 처음으로 조우했습니다!] 

999회차의 김남운에게는 나와 싸웠던 설화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끊어진 필름 이론’이 발동합니다!] 

기억이 이어진다. 서로 다른 세계선의 두 존재가 만나며, 이어지지 않던 설화가 일시적으로 하나가 된다. 

눈을 부릅뜬 999회차의 김남운, ‘위대한 심연의 군주’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녀석도 모든 것을 알았을 것이다. 

【너······.】 

“맞아. 이 세계선의 너를 죽인 건.” 

일대의 시공간이 바뀌고 있었다. 첫 번째 시나리오의 지하철. 

내가 김남운을 죽였던 장소. 

나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무대화’가 발동합니다!] 

“바로 나야.”





< Episode 91. 단 하나의 설화 (2) > 끝

< Episode 91. 단 하나의 설화 (3) >





[설화, ‘강철의 지배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999회차의 이현성이 만든 강철의 벽이 주변을 덮으며 자라나기 시작했다. 

<오즈>에서는 무려 행성 하나를 방어할 수 있었던 힘이었다. 

콰콰콰콰콰! 

자라난 강철은 이내 「무대화」와 어우러지며 지하철의 격벽을 이루기 시작했다. 

내겐 한없이 익숙한 무대.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한 첫 번째 시나리오의 객실. 

[신화급 성좌의 ‘무대’가 발생했습니다!] 

츠츠츠츠츳! 

본래 「무대화」는 일종의 증강 현실에 가깝다. 즉, 무대화가 발생한다고 해서 실제로 주변의 지형지물이 바뀌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경우가 좀 달랐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무대’에 주목합니다.] 

[절대다수의 성좌들이 ‘무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대도깨비들이 당신의 ‘무대’를 질투합니다.] 

[다수의 시선으로 ‘무대화’의 무대 등급이 상승합니다!] 

<스타 스트림>에서 개연성은 곧 시선의 숫자와 직결된다. 

많은 이들이 관음하는 시나리오는 강력한 설화를 발생시키고,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무대는 파급력이 발생한다. 

무수한 시선에 깃든 기대감이 개연성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날, 망상악귀와 구원의 마왕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조우했다.」 

그리고 움직인 개연성은, 때로 ‘가짜’를 ‘진짜’로 만든다. 

[‘끊어진 필름 이론’의 영향으로 ‘무대화’의 구현이 불완전합니다!] 

[해당 무대에서 등장인물 ‘김남운’과 등장인물 ‘위대한 심연의 군주’는 동일 인물로 취급됩니다.] 

[‘위대한 심연의 군주’의 무대 적합도는 87.351% 입니다!] 

[갑작스런 폐막의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가짜가 진짜가 될 수 있는 것은 무대에서도 잠깐뿐. 

모두가 집중하는 이 순간, 무대의 신비가 해체되기 전에 나는 모든 것을 끝내야만 했다. 

【너······!】 

나는 망설이지 않고 김남운을 향해 다가갔다. 무대화의 영향에도 딱히 강해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다만 자신감이 차올랐다. 마치 늑대가 토끼를 사냥할 때 갖는 확신 같은 것. 

【무슨 개 같은 짓이야!】 

분개한 999회차의 김남운이 달려들었다. 「무대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녀석의 몸놀림은 심각할 정도로 둔해져 있었다. 마치,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평균 능력치가 10도 되지 않던 그 김남운 같았다. 

문제는 내 육체도 첫 번째 시나리오의 그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휘이익! 

나는 고개를 숙여 단검을 피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통해 공격 방향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회피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해당 ‘무대’에 ‘첫 번째 시나리오’의 규칙이 적용됩니다!] 

[하나의 생명을 살해할 때마다 ‘무대’의 화신체가 강화됩니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들. 

맞다.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우리는 그렇게 싸웠다. 

고작 100코인의 생존비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100코인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를 죽였다. 

우리는 그런 세계에서 살아남았다. 

[다수의 성좌들이 자신의 ‘첫 번째 시나리오’를 떠올립니다.] 

두통이 오는지,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다 댄 999회차의 김남운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하하······ 이렇게 나오시겠다? 꽤 재밌네.】 

“전혀 재밌는 표정이 아니신데?” 

김남운의 시선에서 찌릿한 살기가 느껴졌다. 

[‘위대한 심연의 군주’의 무대 적합도가 미세하게 감소합니다!] 

아무리 「무대화」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 해도, 이 「무대화」는 꼼수를 통해 구현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999회차의 김남운과 3회차의 김남운 사이의 연결은 약해져 갈 것이다. 

[뭐야, 메뚜기 남! 이거 뭔데, 어떻게 된 건데?] 

한쪽 구석에서 몸을 일으킨 3회차의 김남운이 보였다. 

「무대화」의 영향으로 작은 장난감 로봇으로 변한 녀석이 엉거주춤 내 다리에 붙어섰다. 

그 꼴을 본 999회차의 김남운이 중얼거렸다. 

【한심하군. 저런 녀석에게 죽어서 깡통 로봇이 되었을 줄이야.】 

[뭐라는 거야. 뒈지고 싶냐? 야, 메뚜기 남! 저 새끼 죽여버려!] 

내 정강이를 붙든 김남운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앞으로 5분 안에 살해 행위가 발생하지 않을 시 객실 안의 모든 화신체가 절멸합니다!] 

「무대화」가 이렇게 강력한 제약을 거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메인 시나리오 수준인데. 

【죽어!】 

공기를 가르며 단검이 날아왔다. 나는 지형지물을 이용해 공격을 피해냈다. 화신체의 움직임이 둔하다곤 해도, 나 역시 그때의 김독자는 아니었다. 

김남운의 공격은 지하철의 철문과 바닥을 긁었다. 쿵쿵 내리찍는 녀석의 힘이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희미하게 올라오는 혼돈의 기운. 벌써 「무대화」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승세는 녀석을 향해 기울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999회차의 김남운은 오히려 초조한 기색이었다. 

[등장인물, ‘위대한 심연의 군주’가 동요합니다.] 

[등장인물, ‘위대한 심연의 군주’가 다급히 주변을 둘러봅니다.] 

왜일까. 녀석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녀석의 뺨과 목덜미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등장인물, ‘위대한 심연의 군주’가 이 공간을 싫어합니다.] 

【쥐새끼 같은 놈이······!】 

[일부 성좌들이 ‘이계의 신격의 왕’의 격을 의심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잡배 같은 대사를 경멸합니다.] 

초조함 때문인지 999회차 김남운의 움직임이 점점 더 단순해지고 있었다. 

[앞으로 3분 안에 살해 행위가 발생하지 않을 시 객실 안의 모든 화신체가 절멸합니다!] 

이제 남은 시간은 3분. 

“독자 씨? 이게 무슨······.”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나와 김남운의 고개가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곳에 그들의 싸움을 목격한 이가 있었다.」 

잊고 있었다. 

「그날, 3807칸에서 가장 정의로웠던 사람.」 

그때, 지하철에 있었던 것은 나와 김남운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하하하하하하하!】 

광소를 터트린 김남운이 나를 내팽개치고 유상아를 향해 달려갔다. 

「무대화」의 영향 때문인지 유상아 또한 첫 번째 시나리오의 그 날과 같은 불편한 복장이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김남운의 단검이 유상아를 향해 쇄도했다. 

쐐애액, 하고 그어지는 날붙이. 

파스슷!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허공을 날았다. 표정을 굳힌 유상아가 유연한 동작으로 김남운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나보다도 더 날쌘 움직임이었다. 

【제법인데!】 

[등장인물 ‘위대한 심연의 군주’가 ‘흑화’ 효과를 받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김남운의 움직임은 더 빨라질 것이었다. 

「그날, 망상악귀는 자신의 세계를 깨달았다.」 

무대화의 영향이 거세어지고 있었다. 

「새로운 세계에는, 새로운 법칙이 필요한 법이라고.」 

파리하게 질려가는 유상아의 얼굴이 보였다. 

시간이 없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어떻게든― 

“형.” 

내 옷깃을 붙잡는 작은 손. 

「그날, 그 소년이 곤충을 잡지 않았더라면.」 

이길영이 그곳에 있었다. 

아직 자라지 않은 앳된 얼굴. 첫 번째 시나리오 속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부모를 잃고도 절망하지 않았던 그 아이가, 단호한 얼굴로 내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성좌, ‘무저갱의 지배자’가 음흉하게 웃습니다.] 

샛노란 메뚜기 몇 마리가 소년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고맙다.” 

나는 메뚜기를 쥔 채 달렸다. 

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나가는 메뚜기들. 

[생명체를 살해했습니다.] 

[무대화의 효과로 화신체가 강화됩니다!] 

[생명체를 살해했습니다.] 

[무대화의 효과로 화신체가 강화됩니다!] 

······. 

폭발적으로 증가한 근력과 함께, 객실을 달렸다. 

미친놈처럼 웃어대는 김남운의 뒤통수가 코앞에 보였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엇!】 

나는 녀석의 덜미를 잡아 그대로 지하철의 바닥에 처박았다. 짓밟힌 벌레처럼 김남운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이런 개―】 

잽싸게 내 손아귀에서 벗어난 김남운이 나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나는 그 단검을 피하지 않았다. 

카가가가각! 

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이프는 계속해서 생채기만을 남겼다. 핏줄기는 흘렀지만, 칼날은 살가죽 아래를 헤집지 못했다.」 

첫 번째 시나리오의 마지막 장면이 오버랩되듯 스쳐 지나갔다. 

김남운의 공격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지만, 녀석의 공격은 강화된 이현성의 [강철화]를 뚫지 못했다. 

【이게, 이게 무슨······.】 

999회차의 김남운이 욕설을 내뱉으며 단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아무리 휘둘러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이 ‘무대’의 끝은 정해졌으니까. 

“이제 2분 남았네.” 

【으아아아아아아!】 

일그러진 김남운이 마구잡이로 단검을 내리그었다. 애꿎은 날붙이만이 뚝 부러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1분 30초, 1분 20초······ 줄어드는 시간 앞에서 김남운의 신형이 천천히 무너졌다. 

단순히 힘이 빠져서는 아니었다. 녀석을 공격하는 것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죄였다. 

「망상악귀 김남운의 근원 설화」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던 객실 바닥에 피가 번지고 있었다. 

우리가 흘린 피가 아니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벌벌 떠는 999회차의 김남운이 자리에 주저 앉았다. 

[거대 설화, ‘망상설계’가 폭주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녀석의 설화인 ‘망상설계’가 발아했다. 

[비정상적인 적응력]을 통해 자신이 살아갈 새로운 세계를 만들었던 김남운. 

하지만 그 ‘세계’의 끝을 본 지금, 김남운에게 그 세계는 어떤 의미일까. 

【이, 이따위. 이따위 것들······!】 

바닥의 시체들이 눈을 부릅뜬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지키지 못했던 이들. 머리가 잘리거나 심장이 뚫린 이들. 

피를 토하며 죽어간 이들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김남운의 얼굴이 발작하듯 흔들렸다. 녀석에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제 와서 죄책감이라도 드나?” 

부들거리며 나를 올려다보는 999회차의 김남운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맞아, 난 쓰레기야. 그래서 뭐?”」 

초반 회차의 김남운이라면, 분명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김남운도, 999회차에서는 다르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나도 가끔은 생각해. 그곳에서 죽는 건 나였어야 했다고. 대장도 그렇게 생각하지?”」 

사이코패스 망상악귀 김남운. 

원작을 다 읽은 이후에도, 녀석에 대한 내 평가는 변하지 않았다. 

[전용 스킬, ‘독해력’이 발동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김남운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내가 읽은 ‘멸살법’은 세계의 티끌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그러니 내가 모르는 김남운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한 세계의 끝을 볼 수 있는 김남운. 

누군가를 사랑하여 4만 년을 방황할 수 있는 김남운. 

동료들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김남운. 

만약, 그런 김남운이 세상 어디엔가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김남운이, 999회차의 끝을 본 녀석이라면. 

【난, 나는······ 나는······.】 

녀석의 망상이 녀석을 좀먹고 있었다. 

인격을 교체하며 버텼던 세월들. 가면의 아래에 자리 잡고 있던 청일고교 2학년 김남운의 자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내가 죽였어······ 그래, 내가······.】 

부들부들 떠는 김남운이 부러진 단검을 쥔 채 울고 있었다. 

“맞아. 네가 죽였어.” 

나는 그 말을 하며 지하철의 뒤칸을 돌아보았다. 

「무대화」와 어우러진 이현성의 강철 통로가 보였다. 끝없이 이어진 그 통로가 빼곡한 시체들로 뒤덮여 있었다. 

이제는 이름조차 잊어버린, ‘이름 없는 것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구하지 않은 사람들이야.” 

「새로운 세계에는,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단 하나의 설화’가 완성되기 위한 대가. 

그 알량한 기승전결의 완성을 위해 우리는 살아왔다. 

[당신의 ‘히든 시나리오’가 완성을 앞두고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설화들이 당신의 ‘결’을 원합니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성좌들이 당신의 ‘결’이 가까워졌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빌어먹을 이야기의 끝을 보아야만 한다. 

【아, 아아, 아아아······!】 

눈의 초점이 흐려진 김남운이 부러진 단검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무대화’의 규칙 적용까지 15초 남았습니다.] 

[시간이 모두 경과하면 규칙을 지키지 않은 모든 화신은 절멸합니다.] 

유상아와 이길영이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장난감 로봇이 된 3회차의 김남운도 나를 보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시간이 경과하면 999회차의 김남운은 무대 위에서 죽게 될 것이다. 이 무대는 가짜지만, 이곳에 투입된 녀석의 설화는 모두 진짜다. 

그는 이곳에서 죽는다. 

그가 죽였던 이들처럼. 혹은 그가 3회차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삶을 받아들인 채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된다면 ‘끊어진 필름 이론’으로 연결된 3회차의 김남운까지 소멸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무대화’가 해제됩니다!] 

주변의 경관이 바뀌며, 무대가 사라졌다. [끊어진 필름 이론]으로 이어졌던 기억이 흐려지고 있었다. 지하철이 흩어지고, 배우들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999회차의 김남운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였다. 

어떤 이야기는 가짜라도 진짜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무대는 끝났지만, 원죄는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황폐하게 너덜거리는 녀석의 설화가 흩어지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녀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녀석이 쥔 단검을 발로 툭 찼다. 

“김남운, 너는 구원받을 수 없어.” 

그리고 품속에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꺼내 들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백청의 강기가 울부짖었다. 나는 일부러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그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스타 스트림>의 모든 성좌들이 ‘이계의 신격의 왕’의 죽음을 고대합니다!] 

【안돼!】 

어디선가 들려오는 끔찍한 절규와 함께,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무언가를 베었다.





< Episode 91. 단 하나의 설화 (3) > 끝

< Episode 91. 단 하나의 설화 (4) > 





파스슷.

[부러지지 않는 신념]에 설화의 잔흔이 묻었다.

매캐한 연기를 내며 타오르는 설화.

한때 누군가의 역사였던 것이 재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피에 젖은 김남운의 하얀 머리카락이 칼끝에 걸려 있었다.

「그것이 김독자의 선택이었다.」

나는 잿빛 속에 하늘하늘 흩어지는 녀석의 머리카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난 네가 무지 싫었어.”

한창 ‘멸살법’을 읽던 시절, 김남운은 내가 유일하게 정을 줄 수 없던 인물이었다. ‘멸살법’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나의 형이고, 아버지이고, 동생이고, 누나였다면.

등장인물 ‘김남운’은 나의 반면교사였다.

“네 정의에는 품위가 없었고, 네 살인에는 기준이 없었지.”

비정상적인 세계에 누구보다 빨리 적응한 18살 청년. 오만함과 방만함으로 칼을 휘두르며 자신의 본성을 어둠에 내맡긴 화신.

망설임 없는 악행과 유치한 대사들.

그러한 특징들이 너무나 명백했기에, 어렸던 나는 마음 놓고 녀석을 미워할 수 있었다.

「마음껏 미워하고 증오할 수 있도록 조형된 악.」

그것이 김남운이었다.

“너는 악인이야.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

나는 마치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칼날에 묻은 설화들이 핏물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어른이 된 김독자는, 다시 한번 김남운을 바라본다.」

‘멸살법’의 인물들이 시나리오 속에서 바뀌었듯, 그 이야기를 읽는 나 역시 변했다.

나는 이제 그가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헤아리는 나이가 되었다.

「김남운이 악인이 된 것은, 어쩌면 김독자 자신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때 ‘멸살법’을 봤기 때문에.

작가에게 의견을 제시하고, 성좌들이 으레 그러하듯 그를 평가하고 판단했기 때문에.

―작가님. 이번에도 꼭 김남운을 동료로 데려가야 하나요?

그가 살아있는 인물이 아니라, 작가가 만든 ‘등장인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김남운을 미워한 이유는 단순했다.

“유중혁은 언제나 널 동료로 영입했지.”

김남운은 ‘멸살법’의 어떤 인물보다도 나를 닮았다.

“네가 나쁜 놈이라는 걸 알면서, 또 악행을 저지를 것을 알면서도······. 그런 너를 데려갔어.”

만약 내가 김남운이라면 어땠을까.

청일고교 2학년 김남운.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와 부모님과의 갈등 속에서 살아가던 평범한 고교생.

그런 고교생이, 보호자도 없이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는 극한의 환경 속에 홀로 내던져진다면.

“처음엔 유중혁이 실리를 따진 거라 생각했어. 너는 잠재력이 높은 화신이니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너 정도로 성장할 수 있는 인물들은 또 있었어. 그런데도 유중혁은 매 회차가 시작될 때마다 널 동료로 영입했지.”

나라면 김남운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1회차를, 2회차를, 3회차를······ 999회차를 거듭하면서 그때의 ‘김남운’과 다른 선택을 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실리’를 추구한 건 유중혁이 아니라 나였는지도 몰라.”

내가 ‘멸살법’을 처음 읽었던 그때부터 유중혁은 줄곧 ‘28살’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어른인 유중혁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은 선택의 누적이고, 그 무수한 선택이 쌓여 한 사람분의 설화가 된다는 것을.

태초부터 악(惡)으로 조형된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1회차와 2회차가 다르듯 998회차와 999회차가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그가 회귀를 반복하는 진짜 이유임을.

허공에 멈춰선 칼날.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넋을 잃은 김남운의 경동맥을 희미하게 파고든 채 멈춰 서 있었다.

나는 반쯤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네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야.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김남운!】

뒤쪽에서 밀려오는 어마어마한 격의 표현.

거친 포연의 바다를 헤치고 탱크처럼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이가 있었다.

999회차의 이지혜였다.

단지 김남운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만으로, 자신의 ‘섬’을 내던진 그녀가 포화를 뚫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김독자 컴퍼니>의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 온몸이 넝마가 되어가면서.

“복 받았네. 저렇게 생각해 주는 ‘동료’도 있고.”

‘동료’라는 말에 김남운의 텅 빈 동공이 흔들렸다.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은 이지혜뿐만이 아니었다.

등줄기가 후끈하다 싶더니, 내 뒷덜미를 위협하는 감각이 있었다.

[업화의 불꽃]이었다.

【무슨 꿍꿍이지?】

방금전까지 유중혁과 싸우고 있었던 999회차의 우리엘이 어느새 내 등 뒤에 서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급하게 전장을 이탈한 까닭인지 그녀의 순백색 날개가 찢어져 있었다. 곳곳에 남은 깊은 상처들. 한눈에 보기에도 치명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원한과 증오, 승패조차 도외시하고 김남운의 위기에 이곳으로 날아온 것이었다.

이계의 신격이 된 후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다.

‘단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동료들.

그런 그들이었기에, 유중혁이 없는 999회차의 끝을 볼 수 있었던 것이리라.

“꿍꿍이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가벼운 착지음과 함께 999회차 우리엘의 뒤를 점한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의 [흑천마도]가 우리엘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유중혁의 눈빛은 복잡했다. 나를 질책하는 것 같기도 했고, 내 선택에 공감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 어쩌면 양쪽 다일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내가 원하는 대로 해보라는 눈빛.

재촉하지 않아도 그리할 참이었다.

“당신과 ‘이계의 신격의 왕’들은, 마음만 먹으면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었어.”

내 말에 999회차 우리엘의 동공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현재 ‘대멸망 시나리오’가 진행 중입니다!]

다른 시나리오도 아니고, 무려 98번 시나리오 지역에서 시행되는 ‘대멸망’이었다.

저 하늘의 성좌들조차 영멸을 두려워해 감히 참가하지 못하는 시나리오.

적어도 이 시나리오에서 재앙으로 강림한 ‘이계의 신격’들은 성좌들을 능멸할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손짓에 태평양 일대의 모든 섬들이 궤멸당했다.」

원작에 쓰여 있었던 그 문장을 나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외우주의 유성을 불러내 충돌시킬 수도 있는 게 바로 저 ‘왕’들이었다.

재앙으로 강림한 이상 얼마든지 더 커다란 개연성을 끌어다 쓸 수도 있는 존재들.

“왜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은 거지?”

그리고 내 모든 계획은, 바로 그 의문에서부터 출발했다.

어째서 그들은 곧바로 지구를 터트리지 않았는가.

999회차의 우리엘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것은.】

사실 대답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원작에 등장한 ‘이계의 신격’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설령 다른 세계선에서 왔다 한들, 그들은 ‘지구’에서 시작해 시나리오를 클리어한 이들이다.」

지구는 그들의 고향이었다.

그들의 설화가 시작되었고, 그들의 삶이 끝난 곳.

그들은 비극이 되어 살아남았다. 다른 세계선에서 온 외신에게 그들의 소중한 이를 약탈당했다.

이미 다른 세계선의 침공에는 신물이 난 존재들.

그런 그들이······ 정말로 자신들의 목적만을 위해 다른 세계선 전부를 멸할 수 있을까.

“당신들은 우릴 죽일 생각이 없어.”

999회차의 이지혜는 말했다. 이 세계선을 제물로 삼아 자신들의 시나리오를 부활시킬 것이라고.

하지만 정말일까.

이미 <스타 스트림>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찬 그녀가, 대도깨비들과의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고 그렇게 행동했을까.

그리고 999회차의 우리엘이, 정말 그것에 동의했을까.

“애초에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니까. 이 싸움은 처음부터 당신들이 진 거야.”

이것이 내가 내린 해답이었다.

[절대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판단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999회차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회차를 지켜낼 방법.

담담한 내 선언에, 999회차 우리엘이 복잡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곁으로 비척거리며 다가온 999회차의 이지혜가 김남운의 머리 위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던 김남운의 고개가 돌아갔다.

김남운이 울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꾸역꾸역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999회차의 우리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합시다.】

그 말을 한 것은, 다가온 이현성이었다.

【뭘 그만하자는 거지?】

【당신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엘.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그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지?】

우리엘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닳은 절망이 갖게 되는 목소리였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와 약속한 대로 세계의 끝을 보았고, 그럼에도 아무것도 구해내지 못했다. 이계의 신격이 되었고, 복수를 꿈꾸며 살았다. 사실 그 복수에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부정하며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또 무얼 포기하란 것이지? 말해보라, ‘은빛 심장의 왕’.】

【저는 그 대답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보여줄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여기까지 와서, 이제 와 우리가 무엇을 더 볼 수 있단 말이지?】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예감이 듭니다. 999회차의 우리가 지금껏 ‘이계의 신격’이 되어 살아남았던 것은, 이 순간을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당신도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999회차의 우리엘이 창공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울고 있었다. 별들이 함부로 반짝이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이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온 설화의 결말을 재촉합니다.]

주변을 둘러보자 어느새 일행들이 도착해 있었다.

한수영, 유상아, 정희원, 이지혜, 신유승, 이길영······.

포위하듯 ‘이계의 신격’을 둘러싼 그들은, 임전 태세를 갖춘 채 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999회차의 우리엘이 물었다.

【왜 이들은 가능하고, 우리는 안 되는 것이지?】

거칠게 타오르는 [업화의 불꽃]이 울부짖었다.

【······왜, 우리는 실패한 것이지?】

그때, 감히 입을 연 존재가 있었다.

“왜 네가 실패했다 생각하지?”

유중혁이었다.

여전히 [흑천마도]로 우리엘의 목을 겨눈 채, 유중혁이 물었다.

“네가 원하지 않았던 결말은, 모두 실패한 결말인가?”

놀랍게도 나는 그 대사가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설령 이 세계의 끝이 비극이라고 해도······ 너희들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그것은, 999회차의 유중혁이 죽기 전 일행들에게 했던 말이었다.

999회차의 우리엘이 몸을 떨었다. 아득한 좌절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희열.

떨리는 목소리로, 우리엘이 유중혁을 향해 다가갔다.

【너는 정말로······ 내가 아는 ‘유중혁’인 것인가?】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다. 그를 불러 다오! 단 한 번이라도,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 묻고 싶다. 그리고―】

999회차의 우리엘이 애원하듯 유중혁의 손을 붙잡았다. 이제 그녀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저 ‘유중혁’의 안에는, 그녀가 사랑했던 999회차의 유중혁도 있다는 것을.

실제로 이 계획을 세우던 당시, 나는 제일 먼저 ‘은밀한 모략가’에게 999회차의 유중혁을 불러 달라고 말했었다.

저 ‘이계의 신격의 왕’들이 의지하는 것은 999회차의 유중혁.

그러니 그에게 도움을 구할 수만 있다면 저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안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은밀한 모략가’는 내 부탁을 거절했다.

마치, 지금의 유중혁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 녀석을 불러서 어쩌겠다는 거지?”

【그건······.】

“녀석이 항복하라고 하면 그렇게 할 셈인가? 우리 말을 들으라고 하면, 순순히 녀석의 말을 따를 것인가?”

한 마디가 더해질 때마다 999회차 우리엘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만 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유중혁은 멈추지 않았다. 무자비한 검격처럼 쏟아지는 말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부탁을 거절한 것은 ‘유중혁’도, ‘은밀한 모략가’도 아니었다.

[999회차의 ‘유중혁’이 침묵합니다.]

나타나길 거부한 것은 999회차 유중혁 본인이었다.

그 순간,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이렇게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너희는 그 녀석이 없으면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될 것 같았다. 왜 그가 내 부탁을 거절했는지.

어째서 999회차의 유중혁은 자신의 일행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인지.

「999회차의 이야기는 유중혁의 부재를 통해 완성되었다.」

그의 동료들은 오직 그를 되살리기 위해, 다시 만나기 위해, 그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만 살아왔다.

오직 그것을 삶의 이유로 삼으며 견뎌왔다.

「그렇다면, 만약 그 이유가 사라진 후 그들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파도가 만들어 낸 포말이 발치를 적셨다. 가라앉은 대양. 아주 먼 곳에서 흘러든 이방인처럼 낯선 바다였다. 그 바다의 중심에서, 섬을 이룬 ‘이계의 신격’들이 숨을 멈춘 채로 자신들의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왕이 말하고 있었다.

【······그런가.】

아주 오랜 세월동안 망망대해를 항해한 끝에, 마침내 목적지를 발견한 배처럼.

【그것이 너의 뜻인가, 유중혁.】

999회차의 우리엘의 떨림이, 서서히 멈추었다.





< Episode 91. 단 하나의 설화 (4) > 끝

< Episode 91. 단 하나의 설화 (5) >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계의 신격의 왕’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우리는 당신들과 싸울 의사가 없습니다. 당신들이 정말로 이 세계를 멸망시킬 생각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당신들도 나도 비극에는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세계선에 슬픔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시나리오가 소강상태에 들어섰습니다!] 

[<스타 스트림>이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 전개에 놀랍니다!] 

나는 긴장하며 그들의 반응을 살폈다. 

‘이계의 신격’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내 말을 들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거기까지는, 모두 김독자의 계획대로였다.」 

999회차의 기억을 이용하고, 그들에게 ‘유중혁’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것. 

「애초에 이 승부는 전면전으로는 이길 수가 없다.」 

저들이 정말로 온 힘을 다해 재앙의 개연성을 발동했다면, 이 시나리오는 시작과 동시에 끝나버렸을 것이다. 원작에서도 ‘대멸망’에 어수룩하게 대처하다가 멸망해버린 행성들이 있었다. 

[당신을 싫어하는 다수의 성좌들이 이 상황에 불만을 갖습니다!] 

[일부 성좌들이 불합리한 시나리오 전개에 반발합니다!] 

아마 성좌들이 기대한 것도 그런 광경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증오하는 <김독자 컴퍼니>가 지구와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 

하지만 ‘이계의 신격의 왕’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김독자. 이 다음은 뭔데? 

내 오른쪽에 붙어선 한수영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몰라. 

―뭐? 

―내가 생각한 건 여기까지야. 

그게 뭔 헛소리냐는 듯 한수영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너 지금······. 

―지금은 믿는 수밖에 없어. 

무책임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다른 방안은 없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최선이었고, 올바른 결론으로 향할 유일한 길이었다. 

나는 문득 1863회차 한수영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만든 등장인물들을 믿었어. 그게 다야.”」 

그녀의 심정을 나 또한 이해할 것 같았다. 

그렇기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읽었고, 나를 가르쳤던 그 인물들을 믿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나는 ‘멸살법’을 믿는다. 

그것을 쓴 작가가 아니라, 그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믿는다. 

[‘살아있는 불꽃’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정의로운 우리엘. 

[‘은빛 심장의 왕’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선하고 우직한 이현성. 

[‘가라앉은 섬의 주인’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정이 많은 이지혜.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어떤 부조리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았던 유중혁. 

그들을 믿는다. 어린 나를 키운 그 사람들의 시간을 믿는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훼손되지 않는 가치는 있다고. 

999회차의 우리엘이 입을 열었다. 

나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 

【이현성, 너는 이 세계선에서 우리가 보지 못한 끝을 볼 수 있을 거라 말했지.】 

【그렇습니다, 우리엘.】 

【여전히,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건가?】 

이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천천히 고개를 돌린 999회차의 우리엘이 나를 바라보았다. 태양의 코로나처럼 그녀의 눈동자가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구원의 마왕’이라고 했나.】 

내 정의를 시험하는 듯한 그 시선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선의 나로부터 너와 관련된 설화들을 보았다.】 

순간 근처에 있던 정희원의 몸이 움찔했다. 정확히는 정희원이 아니라, 우리엘이 움찔한 것이겠지만.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이어진 ‘살아있는 불꽃’의 말은 전연 뜻밖의 것이었다. 

【너의 설화들은 내가 아는 ‘유중혁’의 그것과 몹시 비슷하더군.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방식도, 일행들을 돌보는 방식도.】 

“······.” 

【이 세계선은 우리의 세계선과 몹시 닮았다.】 

999회차의 이지혜의 표정에 복잡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이들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는지 깨달았다. 

이들은 단순히 이 세계가 그들의 고향이어서 동요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세계선에서 있었던 일들을 아는가?】 

나는 말을 망설였다. 쉬이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부족한 말주변을 대신해 내 설화들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내가 가진 설화의 일부가 손끝을 통해 999회차의 존재들을 향했다.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재앙의 왕을 사냥한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는 내 설화를 읽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다채로운 표정들. 그들이 내 설화를 무엇에 겹쳐보고 있는지는 명백했다. 

······‘멸살법’을 처음 읽을 때의 나도 저런 얼굴이었을까. 

나로서는 영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이런······.】 

이변이 발생한 것은 그때였다. 설화를 묵묵히 읽던 999회차의 우리엘의 격이, 내 설화를 타고 내 정신계로 침투해왔다. 

마치, 내 존재의 연원을 알아내려는 것처럼.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합니다!] 

츠츠츠츳! 

눈부신 스파크가 튀며, 예상대로 ‘벽’이 움직였다. 

[‘제4의 벽’이 ‘살아있는 불꽃’을 노려봅니다!] 

반발하듯 튕겨 나간 ‘살아있는 불꽃’의 왼손이 희미하게 그을려 있었다. 

놀란 얼굴로 나를 보는 그녀의 눈빛에 희미한 이해가 깃들었다. 

【그렇군. 그랬던 건가. 너는······.】 

내 기억을 읽었을 때보다도 더 놀란 목소리. 

【최후의 벽의 마지막 파편이라······. 그래서 저 ‘은밀한 모략가’가 네게 집착하고 있는 건가.】 

“결정하십시오. 이제 시나리오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현재 ‘대멸망 시나리오’가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빠졌습니다.] 

[현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될 시, 세계의 뒤틀림이 가속화됩니다.] 

일단 저들이 ‘재앙’으로 강림한 이상, 시나리오는 반드시 종료시켜야 한다. 

지금으로서 최선의 방책은 저쪽에서 ‘재앙’을 포기해주길 바라는 것. 

‘살아있는 불꽃’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가진 가능성을 인정한다. 분한 일이지만, 내 복수를 미루는 것에도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 무수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너희가 세계의 끝에 도달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작 다른 세계선의 설화를 답습한 존재가, 제대로 된 결말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잠깐만―” 

【이 시나리오가 끝나면 너는 ‘결’에 도달하게 되겠지.】 

단 하나의 설화의 마지막, 결(結). 

999회차 우리엘을 중심으로 가공할 열풍이 응축되고 있었다. 기화한 바닷바람 때문에 코끝에 소금기가 맴돌았다. 

무지막지한 격의 변화에, 나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유중혁!” 

그와 동시에 앞으로 나선 유중혁이 [흑천마도]로 열풍을 베어냈다. 하지만 그 열기에 녀석의 손등도 익어갔다. 

불규칙적인 호흡. [끊어진 필름 이론]의 효과가 거의 다한 것이다. 

쿠구구구구구! 

999회차의 거대 설화가 일제히 준동하고 있었다. 왜인지, 이번만큼은 999회차의 이현성도 우리엘을 막지 않았다. 

나는 다급히 외쳤다. 

“대체 왜······ 이럴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999회차의 우리엘은 말없이 이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긴장한 일행들이 일제히 마주 격을 발출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우리의 설화를 오시하며 다가오는 ‘살아있는 불꽃’. 

다른 모든 ‘이계의 신격’의 격을 건네받은 그녀가 [업화의 불꽃]을 치켜들었다. 

나는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이계의 신격’의 힘을 두려워합니다!] 

[다수의 대도깨비들이 ‘이계의 신격’의 설화를 혐오합니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것은 곧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성좌들도 도깨비들도 원하지 않는 이런 이야기가, 대체 왜 필요한 것일까. 

모두가 한없는 슬픔에 빠질 뿐인 이 이야기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너는 늘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해 설화를 꾸미는가?】 

999회차의 우리엘이 말하고 있었다. 

놀랍도록 정제된 [업화의 불꽃]이 시나리오 바깥의 시간을 말하고 있었다. 

【너희들이 쌓아온 설화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그 진언을 들으며, 나는 그녀의 의중을 깨달았다. 

누구도 후원하지 않는 이야기. 

그럼에도 그녀는 이 시나리오의 끝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살아있는 불꽃’이 택한 대답이었다.」 

그녀가 이 시나리오를 계속하고자 하는 것은 성좌들에게 동의해서도, <스타 스트림>에 편승해서도 아니었다. 

【너희의 ‘결’을 보여다오. 너희가 다른 어떤 세계선과도 다른 결말에 도달할 수 있음을, 내게 증명해 봐라.】 

하늘의 별들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이 이야기를 보아온 별들. 나는 그 무수한 별빛들을, 다시 그 너머에 있을 이 모든 세계의 끝을 상상했다. 

내가 아주 오랫동안 그려온 이 이야기의 결말을 상상했다. 

“김독자!” 

눈앞을 메워오는 염열의 파도. 타오르는 유황 냄새에 얽혀, 999회차 우리엘의 [지옥염화]가 용암의 해일을 만들었다. 닿는 즉시 모든 것을 녹여버릴 어마어마한 격의 파랑이었다. 

승부는 단판. 

저걸 막으면, 우리는 이길 수 있다. 

“모두 거대 설화에 집중해!” 

재앙 앞에서 하찮은 잔재주는 소용없다. 

일행들은 자신의 특기 대신 거대 설화의 운용을 도왔다. 

신유승도, 이길영도, 유상아도. 모두가 허공에 양손을 뻗은 채로 거대 설화의 지분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묵시룡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다음 순간, 한수영 쪽에서 거친 포효가 쏘아졌다. 

쿠오오오오오오! 

최후의 묵시룡 후보자였던 ‘심연의 흑염룡’이 브레스를 발사하고 있었다. 

거친 [흑염]의 역풍을 타고, 정희원이 내달렸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두 명의 대천사가 정희원과 함께하고 있었다. 

하늘 높이 치켜든 [심판자의 검]이 그대로 해일을 내리그었다. 

콰아아아아아! 

두 천사의 합공 때문이었을까. 일순간 해일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은 유중혁이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흑천마도]에서 뻗어 나온 무수한 회차의 잔영들. 

녀석의 격이 산개하며 밀려드는 파도를 부숴 나갔다. 

―부족하다. 

하지만 유중혁의 분전은 오래가지 못했다. 녀석의 전신에 튀는 스파크가 심해지고 있었다. 드디어 [끊어진 필름 이론]이 효력을 다한 것이었다. 

녀석의 격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바로 그 순간, 유중혁이 파도의 중심부에 일격을 날렸다. 

파천검도(破天劍道). 

오의(奧義). 

암해참(暗海斬). 

녀석의 오의가 만들어 낸 아주 작은 틈새.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막내야, 준비 끝났다.] 

그리고 내가 기다렸던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의 구름이 나를 감싸듯 모여들었다. 뇌전을 잔뜩 품은 근두운이 내 근처를 둘러쌌다. 하늘의 모든 벼락을 끌어 모든 것처럼 전신이 떨렸다. 

[쓸 수 있는 건 한 번뿐이다.] 

나는 구름을 박차고 좁아지는 용암의 틈새를 달렸다. 

[마왕화]로 구현한 날개에 불이 붙었고, 끔찍한 열기에 눈앞의 시야가 익어버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모든 동료가 열어준 이 길을, 내겐 지켜야만 할 의무가 있었다. 

「우리의 삶을 증명해 줄 단 하나의 이야기.」 

점점 더 가속한 내 발은 이내 빛이 되었다.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화신체를 [전인화]의 힘으로 버텨낸다.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마치, 나 자신이 한 줄기 벼락이 된 것처럼. 

쿠르르르르르! 

양손에서 완충된 번개가 들끓었다. 

<스타 스트림>의 무수한 별들을 으깨고, 저 <황제>의 천궁을 반파시켰던 벼락. 

나는 온 힘을 다해 여의봉을 던졌다. 

「하늘의 별들이 떨었고, 성운들이 몸을 움츠렸다. 하늘에 드리워진 먹구름만이 그들의 절망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제천대성의 모든 힘이 응축된 일격이었다. 

「그의 마지막 전장에서 그러했듯이.」 

밀려드는 용암들을 모조리 부수며 전진하는 벼락. 

콰콰콰콰콰콰! 

폭발한 해일이 통째로 산화했다. 줄기차게 뻗어 나가는 전격이 갈라진 해일 위에 길을 만들고 있었다. 

줄곧 우리가 걸어온 설화의 길. 나는 그 길을 달렸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당신의 ‘결’을 안배합니다.] 

마계의 기(起).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씩씩대며 당신을 인도합니다.] 

올림포스의 승(承).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당신의 곁에서 함께합니다.] 

성마대전의 전(轉). 그리고―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마지막 설화를 꿈꿉니다.] 

메우지 못한 마지막 한 점. 

콰아아아아아아! 

우리가 겪어온 모든 설화들이 한데 얽히며 눈부신 빛을 발했다. 눈이 멀어버릴 듯한 섬광의 폭풍이 모든 것을 뒤덮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용암의 화산재가 하늘에 흩날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폐허가 된 하늘. 별들의 시선을 가린 낙진이 눈발처럼 흩날려 바다를 덮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 앞에 누군가가 주저앉아 있었다. 

부러진 대천사의 날개. 처음부터 그녀는 우리에게 이길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두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것으로 무언가가 증명되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것이 지금의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999회차의 우리엘이 검극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지나간 마지막 문장을 되풀이해서 곱씹듯이. 그 뾰족한 검극이, 그녀의 모든 설화를 끝낼 마침표라도 되는 것처럼. 

검극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우리엘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먼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수평선의 건너편. 

「그곳에 이 세계선의 끝이 있었다.」 

우리엘의 표정에 희미한 떨림이 스쳤다. 

999회차의 이지혜도, 이현성도, 심지어는 얼이 빠져 있던 김남운도 그쪽을 바라보았다. 

희뿌연 낙진의 너머에서 어슴푸레하게 무언가가 비쳐왔다. 

‘이계의 신격’들의 표정에 공포가 어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깨달았다. 

999회차에서 그들이 이미 한 번 도달했던 장소. 

이 ‘설화’의 세계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한, 결코 넘을 수 없는 ‘최후의 벽’. 

[‘대멸망 시나리오’의 재앙들이 재앙의 권리를 포기합니다.] 

[‘대멸망 시나리오’가 종료 시퀀스에 돌입합니다!] 

[당신의 마지막 ‘거대 설화’가 개화합니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마지막 설화가 깨어나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그 벽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히든 시나리오― ‘단 하나의 설화’가 ‘결’을 맞이했습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마지막 설화명을 고심합니다.] 

[당신은 <스타 스트림>의 모든 별들이 경외할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당신은 오직 극소수의 별들만이 도달한 대서사시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내가 기다렸던 메시지가 나타났다. 

[당신과 당신의 성운은 ‘모든 것의 ■■’를 볼 자격을 얻었습니다.] 

[‘이야기의 왕’이 당신을 호출합니다.]





< Episode 91. 단 하나의 설화 (5) > 끝

< Episode 92. 마지막 시나리오 (1) >





‘대멸망 시나리오’가 끝난 후 이틀이 지났다. 

그 이틀 동안, 미적거리던 98번 시나리오도 덤으로 종료되었다. 

[98번 시나리오 ― ‘후보 결정전’이 자동 종료되었습니다.] 

[누구도 당신의 성운에 도전하지 않았습니다.] 

[현재까지 승리 횟수 : 1회] 

[현재 보상 내역을 점검 중입니다.] 

[‘대멸망 시나리오’의 클리어와 연계하여 보상 내역을 논의 중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성운들끼리 서로 싸우는 동안, 우리는 무려 ‘대멸망 시나리오’를 이겨냈다. 저 아득한 ‘이계의 신격’들과 싸우고, 지구를 지켜냈다. 그것도 단일 성운의 힘만으로.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과 당신의 성운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명성이 <스타 스트림> 전체에 널리 알려집니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모든 성좌들이 당신의 성운을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모든 성좌들이 당신의 ‘결’을 궁금해합니다.] 

이제 이 <스타 스트림>에 우리를 모르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대표님! 김독자 대표님! 한 마디만 해주십시오! 

[공단] 너머로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홀로그램 패널을 켜든 텔레비전을 켜든 어딜 가나 우리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지상파와 케이블을 포함한 모든 방송사가 실시간으로 [공단]의 앞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우리 공단원들을 인터뷰한 영상도 반복 송출되고 있었다. 

―‘멸망의 심판자’님! 앞으로 <김독자 컴퍼니>의 계획은······. 

―공석에선 그냥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한수영이나 그런 거 좋아하지 전 싫어요. 

―정희원, 뒈질래? 

······저 ‘뒈질래’만 벌써 몇 번을 들은 건지 모르겠다. 

―김독자 컴퍼니의 실세, ‘흑염마황 한수영’. 알고 보니 멸망 이전에는 유명 작가였던 것으로 밝혀져······. 

[천재 작가의 통찰로 마지막 시나리오를 파훼한다!]라는 자막을 읽고 있자니, 새삼 내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정오의 태양’을 쓰러트릴 때 대표님께서 ‘신화급 성좌’가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전면으로 나서는 ‘신화급 성좌’가 생긴 겁니까? 

―이번 전투의 마지막 영상을 두고 화신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는데요, 대체 그 ‘이계의 신격’들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김독자 대표님은 왜 갑자기 금발이 되신 겁니까? 

우리가 싸웠던 시간들은 <스타 스트림> 뿐만이 아니라 지구 전체에 방송되었다. 유중혁이 ‘라’를 격퇴하던 모습부터, 999회차의 이계의 신격들이 만들어 낸 용암 해일에 맞서는 장면까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랑스러워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콧대를 세웁니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입술을 실룩입니다.] 

그리고 꼭 그런 장면의 뒤에는, 인터뷰가 하나씩 따라붙었다. 

―내가 말이야, 그 친구 회사 다닐 때부터 알아봤다는 거지. 응? 대체 어떤 신입사원이 입사하자마자 1등으로 칼퇴를······. 

······한명오 부장, 내가 분명히 인터뷰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싱글벙글 웃는 한명오는 왼손으로 딸아이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다행히 무사히 딸을 구해낸 모양이었다. 

―그냥 평범한 친구였어요. 음, 왜 그런 애들 있잖아요. 어느 반에나 한 명씩 꼭 있는 친구. 

시간이 지나며 내 동창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등장했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긴 있었구나, 싶었다. 

이젠 이름도 떠오르지 않는 얼굴들. 

―착하고, 조용하고, 책 읽는 거 좋아하고······. 

딱히 틀린 설명이 아니었지만, 맞는 설명도 아니었다. 

세상에는 편리한 단어들이 있고, 편리하기에 무엇도 설명하지 못하는 말들이 있다. 

한참이나 뻔한 말을 떠들어 대던 동창은 카메라가 부담스러웠는지 말을 더듬으며 물러났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던 것이겠지. 

―지구의 구원자, ‘구원의 마왕’에 관하여. 

구슬픈 음악과 함께 이어진 프로그램은 아예 특집으로 편성된 다큐였다. 

[성좌, ‘고려제일검’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을 자랑스러워합니다.] 

흘러나오는 영상들을 보며, 나는 멸망 이전의 시간들에 관해 생각했다. 내가 꿈꾸었던 것들, 중요하다고 믿었던 것들. 

어느새 저 모든 시간이 아득한 기억이 되었다는 게, 몹시 낯설었다. 

물론 모든 게 낯설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렸을 적 가정 폭력으로 얼룩진 아픈 시간을 이겨내고······. 

누군가가 뚝, 하고 텔레비전을 껐다. 

“독자야.” 

응접실의 입구에 어머니가 있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보며 가볍게 미소했다. 

“오셨어요.”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접실을 메운 침묵. 우리는 그 침묵 속에서 한동안 꺼진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았다. 검은 화면에 어머니와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코끝을 스치는 가벼운 향수와 함께, 문득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한때는 세상에서 내가 유일하게 이해할 수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쓰지 않아도, 나는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저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희미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구나.” 

“어머니께서 잘못하신 일이 아닌데요.” 

“이번 일은······.” 

“인터뷰 요청 많이 와 있죠?” 

“모두 거절했다. 네가 굳이 나설 필요 없는 일이야. 네가 세계를 구하든 멸망시키든, 그런 건 저들에게 중요한 게 아냐.” 

멀리서 들려오는 확성기 소리. 

어머니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고, 무엇을 미안해하는지 잘 알고 있다. 

“저도 그때의 김독자는 아니에요.” 

창가의 커튼을 젖히자, 광장 쪽 카메라가 일제히 이쪽을 향해 움직였다. 

예전엔 저 카메라가 무서웠다. 누군가가 나를 보는 것이 무섭고,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낯선 언어로 나에 대해 떠드는 것이 두려웠다. 

“인터뷰할게요.” 

“······진심이니?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저들도 알 권리가 있으니까요.” 

나는 다시 텔레비전을 켰다. 화면 위로 뉴스 헤드라인이 보였다. 

―<김독자 컴퍼니>의 목적은 무엇인가? 

―[공단]은 마지막 시나리오의 정체에 관해 밝힐 것을······. 

[일부 성운들이 당신의 동향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결’을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대도깨비들이 당신을 ‘마지막 시나리오’ 지역으로 호출하고 있습니다.] 

[일부 성운들이 당신의 성운과 동맹을 맺기를······.] 

“오늘 밤 8시에. 도깨비들이랑 성좌들 쪽에도 연락해주세요.” 

* 

나는 간만에 ‘멸살법’의 최초 버전을 찾아 읽었다. 

아직 작가가 수정을 하기 전, 완전히 순정 상태였던 ‘멸살법’. 

[현재 당신과 당신의 성운은 ‘마지막 시나리오’의 자격을 획득한 상태입니다.] 

[언제든 ‘마지막 시나리오’ 지역으로 입장이 가능합니다.] 

‘멸살법’의 마지막 시나리오는 ‘이계의 신격’들과의 대전쟁이었다. 

원작의 유중혁은 그 시나리오에서 외신왕의 목을 베어내고 자신의 ‘결’을 완성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이미 ‘대멸망 시나리오’를 통해 겪었던 시나리오와도 흡사했다. 

실제로 우리가 대멸망을 막아내는데 실패했다면, 대멸망은 마지막 시나리오의 전초전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재앙이 되었어야 할 ‘이계의 신격’들은 봉인되었다.」 

나는 [공장] 중심에 위치한 세 개의 봉인구를 바라보았다. 

이 세계선에 강림했던 모든 ‘왕’들이 잠들어 있었다. 

‘살아있는 불꽃’, ‘가라앉은 섬의 주인’, 그리고 ‘위대한 심연의 군주’까지. 

봉인되지 않은 것은 재앙으로 강림하지 않았던 ‘은빛 심장의 왕’뿐이었다. 

―너의 설화를 끝까지 지켜보겠다. 

마지막 순간, 999회차의 우리엘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과 동료들을 [묵시룡의 봉인구]에 봉인했다. 스스로 관리국과의 협정을 어기고 재앙의 권리를 포기하였으니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찾아들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당신은 ‘대멸망 시나리오’를 비정상적인 형태로 종료하였습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시나리오 진행 방식에 불만을 표합니다!] 

[일부 대도깨비들이 당신에게 알 수 없는 적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수의 대도깨비들이 ‘이계의 신격’을 설득한 당신의 공로를 인정합니다.] 

[현재 다수의 혹부리들이 당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수한 메시지 로그들이 지금도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히든 시나리오― ‘단 하나의 설화’가 완료 직전입니다.] 

[결(結)의 후반부로 충분한 ‘거대 설화’가 완성되었습니다.] 

[<스타 스트림>이 최종 설화의 설화명을 제안합니다.] 

[거대 설화의 이름을 고르십시오.] 

[당신이 고른 선택지에 따라 당신의 ‘결’이 정해질 것입니다.] 

나는 아직 <스타 스트림>이 제안한 선택지를 고르지 않은 상태였다. 

“김독자.” 

삐그덕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수영이 나타났다. 

“일행들 상태는 어때?” 

“똑같지 뭐. 유중혁이 좀 다치긴 했는데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야. [생사단] 효력 장난 아니더라.” 

한수영은 한 알 더 얻어 왔다며 답지 않게 너스레를 떨고는, 내 손에 그 한 알을 쥐어 주었다. 

“혹시 뒈질 것 같으면 먹어.” 

“고운 말로 주면 더 감동했을 텐데 말이지.” 

한수영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벼운 어둠이 우리 사이에 안개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999회차 우리엘의 봉인구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 빛에, 한수영의 얼굴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작에선 어땠어? 마지막 시나리오는······. 아니, 됐다. 어차피 이제 원작이랑도 완전히 달라졌을 거 아냐.” 

맞다. 

원작의 시나리오에서 겪어야 할 ‘이계의 신격’과의 전쟁을 우리는 이미 끝냈다. 

아마 우리에게 주어질 ‘마지막 시나리오’는, 원작의 그것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결’을 완성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아마 이야기의 왕을 만나겠지.” 

“도깨비 왕 말이지.” 

한수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만날 거야?” 

“만나야지. 당장은 아니지만.” 

“뭔 소리야? 불안하게.” 

똑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희미한 바람이 일었다. 

한수영이 문을 열고 들어온 틈새 사이로 공단원 중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대표님. 방문객입니다.” 

방문객? 

[오랜만이군, 후예여.] 

예스러운 말투. 나를 찾아온 이는 전혀 뜻밖의 존재였다. 

“······풍백?” 

* 

천제의 풍신, ‘풍백’. 

그러고 보니 어머니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마지막 시나리오’에 돌입하기 전에 풍백을 만나라고 했었지. 

[후예의 선택은 무모했다. ‘이계의 신격’들을 살려두다니, 그대는 재앙을 스스로 품에 떠안은 것이다.] 

······또 꼰대 같은 소릴 하러 온 건가. 

풍백은 내가 하는 짓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요즘 젊은 것들은 시나리오를 너무 얕본다는 둥, 시나리오에 통 진지하지 않다는 둥······. 

“저기요, 할아버지.” 

[긴말을 늘어놓을 시간은 없으니 본론부터 전하겠다. 마지막 시나리오에서 후예는 큰 위기에 처할 것이다.] 

“위기요?” 

[후예의 방식을 아주 오랫동안 지켜봐 왔으니 하는 말이다.] 

마치, 내 앞으로의 행보에 관해 빤히 알고 있다는 투였다. 옆에서 한수영이 재미있다는 듯 킥킥거렸다. 나는 녀석을 노려봐준 뒤 물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러 온 겁니까?” 

[<홍익>이 후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나도 모르게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보아하니 뭐 때문에 온 건지 알 것 같았다. 이 양반은 마지막까지······. 

“필요 없습니다. 보나 마나 또 말도 안 되는 대가를 요구하면서······.” 

[대가 같은 건 필요 없다. 한반도에 새로운 ‘신화급 성좌’가 탄생하는 걸 본 것만으로도 대가는 충분히 받았으니까.]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신화급 성좌들 중에는 <홍익>의 창조신들도 있다.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라. 그대가 진심으로 응한다면 그들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걸 말해주러 오신 겁니까?” 

풍백은 무표정한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다.] 

“조금 감동인데요.” 

가볍게 헛기침을 한 풍백의 몸이 바람으로 흩어졌다. 

[할 말은 모두 전했다. 마지막 시나리오에서 만나지.] 

순식간에 썰렁한 바람만이 남았다. 한수영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완전 새침데기네. 귀여운데.” 

“뭐, 원작에서는 좋은 성좌였으니까.” 

“그래도 같은 편이 약간은 있네. 너 아주 헛살진 않았다.” 

그랬으면 좋겠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기도 있다고 말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진정한 동료란 악우(惡友)라 주장하며······.]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씩 웃었다. 한수영이 말했다. 

“또 또 재수 없게 웃는다. 곧 8시니까 준비해. 사람들 기다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장]의 상층부로 향했다. 내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온갖 언론사들과 도깨비들, 그리고 성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견장에 입장하기 직전, 공단원이 나를 붙잡았다. 

“대표님, 잠깐만요. 준비가 덜 끝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 [공단]에서 날 그렇게 부른 거지? 

원래는 마왕이라고 불렀던 거 같은데. 

“내가 저렇게 부르라고 시켰어. 마왕님 마왕님 하니까 우리가 세기의 악당이 된 거 같잖아.”

“뭐, 그것도 그런데······. 근데 설화 씨, 이거 꼭 해야 됩니까?” 

얼떨결에 자리에 착석한 나는 뺨을 간지럽히는 브러쉬의 감각에 입술을 실룩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색칠하던 이설화가 말했다. 

“그래도 명색이 대표인데 사람처럼 만들어서 내보내야죠.” 

“그거 여러 가지로 상처받는 말인데요.” 

근처에서 일행들이 재미난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이쪽을 관찰하고 있었다. 동물원 원숭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뒤쪽에서 한수영이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근데 너 머리카락은 계속 금발인 거야?” 

“제천대성의 격이 스며들어서 그래. 좀 있으면 색 빠질 거야.” 

“머릿결 되게 곱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자신의 머릿결은 고단한 훈련으로 단련된······.] 

“끝났어요.” 

순식간에 내 얼굴에 색칠을 끝낸 이설화가 거울을 들어 보여주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유중혁의 뺨을 칠까 말까 고민해도 될 정도로 굉장한 미남이 그곳에 있었다. 

흘끗 곁을 보았지만 일행들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한심하다는 듯 이쪽을 노려보는 유중혁이 있었다. 

“김독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투를 걸치고,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허리에 찼다. 안쪽에 정장을 입은 것을 빼면 평소의 전투 복장 그대로였다. 

“가자.” 

우리는 회견장으로 입장했다. 탁 트인 야외 회견장에는 무수한 별들과 카메라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공에서 내려오는 눈부신 스포트라이트들. 거대한 홀로그램 전광판에 나와 일행들의 모습이 영사되고 있었다. 

공민들의 환호 소리. 쏟아지는 함성과 함께 나를 기다리는 이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에 이목을 집중합니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마지막 설화명을 궁금해합니다!] 

한반도의 안위를 챙기는 이들, 지구의 존망을 궁금해하는 성좌들. 

마지막 시나리오에 무엇이 있을지를 두려워하고, 자신의 생존을 걱정하는 이들. 

우리가 가진 힘을 우려하고 그것을 빼앗으려 하는 존재들. 

왜 이제야 나타났냐고 말하는 이들과 자신들 모두를 ‘마지막 시나리오’로 보내 달라고 말하는 화신들까지······. 

[성좌,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쏟아지는 수많은 질문들 앞에서, 내 설화가 움직였다. 하늘이 울렁이고 땅이 뒤집혔다. 신화급 성좌의 격이 해방되자, 한반도 전체가 침묵에 잠겼다. 내 대답을 기다렸던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당신들을 구할 생각이 없습니다.]





< Episode 92. 마지막 시나리오 (1) > 끝

< Episode 92. 마지막 시나리오 (2) >





내 선언에 군중들이 들썩였다. 기자들은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렀고, 각종 채널에 이 상황을 보도하던 하급 및 중급 도깨비들도 경악한 얼굴들이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발언을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대도깨비들이 당신의 발언을 경청합니다.] 

[<관리국>의 모든 도깨비들이 당신의 언행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김독자 대표님! 

성좌와 화신, 그리고 도깨비들이 모두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는 건 그야말로 굉장한 일이었다. 

나는 친절한 미소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당신들을 구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습니다.] 

―지금 한국을 버리겠다는 겁니까? 

―그럼 지금껏 당신을 지지해준 화신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지지라. 

[어떻게 지지해주셨는데요?] 

파란은 순식간에 번졌다. 내 의뭉스런 말투에 기자들이 너도나도 일어서서 소리쳤다. 과연, 언론의 힘은 ‘신화급 성좌’의 격에 대항할 만큼 대단했다. 

―<김독자 컴퍼니>의 독재를 묵인해준 게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지금까지 모두가 당신의 뜻에 따랐지 않습니까? 

독재를 묵인한다······.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먼저 반응한 것은 성좌들이었다. 

[일부 성좌들이 기자들의 발언을 비웃습니다.] 

[한반도의 오래된 성좌들이 개탄합니다!] 

[성좌, ‘고려제일검’이 후예들을 노려봅니다.] 

이게 독재인지 아닌지는 둘째 치고, 뭘 묵인해준 적이 있는지나 모르겠다. 지금도 폐허가 된 여의도에서 매일같이 <김독자 컴퍼니> 반대 시위가 벌어진다는데. 

나는 여기저기서 소리치는 기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제 뜻이 뭔데요?] 

―그건······! 

[지금까지 제가 한 번이라도 뭘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까?] 

순간 기자들이 입을 다물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도깨비들은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이것조차도 재미있는 설화일 것이다. 저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땅을 버리는 장면일 테니까. 

한순간 혼란에 빠진 기자들을 구한 것은 [공단] 한 측에 대기하고 있던 화신의 무리였다. 

―강한 힘을 가진 자에게는 필연적으로 의무가 발생하는 법이네. 자넨 지금 그 의무를 땅바닥에 내던진 거야. 

대뜸 앞으로 나선 노인은 후줄근한 모자를 덮어쓴 채 그렇게 말했다. 구부정한 챙 아래로 빛나는 음습한 눈동자. 기억이 바로 떠오르진 않았지만, ‘멸살법’에서도 나오는 조연이었다. 뒤쪽에서 이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저 할배가 여기까지 나타나?” 

보아하니 부산 쪽 연합원인 모양이었다. 우리가 한반도를 떠나 있던 사이 새로 연합을 장악한 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뒤쪽으로 보이는 전우회의 깃발과 파란색 헤어밴드를 쓴 무리들. 그 무리의 좌우로 늘어서 있던 지방 연합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구원의 마왕, 당신에게는 강자의 의무가 있다. 당신은 한반도에서 활동 중인 유일한 ‘신화급 성좌’ 아닌가? 

누군가는 내 의무를 역설했고. 

―부디 한반도를 버리지 말아 주시게! 당신이 그렇게 나오면 이 땅의 불쌍한 국민들은 대체 어쩌란 말인가! 

누군가는 내 동정심에 호소했다. 

―마지막 시나리오를 우리와 함께해주게! 지금까지 살아남은 모두가 마땅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어! 

―이들 중 누구도 ‘시나리오’를 원한 사람은 없어! 당신은 무고한 이들 모두를 버리겠다는 건가? 그러고도 네가 한반도의 성좌라 할 수 있는 거냐!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말은 옳았다. 

우리 중 누구도 시나리오를 원한 사람은 없었다. 

처음에는 그랬었다. 

[연합의 수장분들도 와 계시니 마침 잘 됐군요.] 

그런데, 지금도 그럴까. 

[제가 묻고 싶습니다. ‘마지막 시나리오’가 올 때까지, 당신들은 대체 어디서 뭘 한 겁니까?] 

그 말에 연합원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당신이 없는 한반도를 보호하고······! 

―연합의 노고를 무시하는 건가? 당신이 없는 동안 한반도를 지킨 건 우리야! 

나는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을지 안다. 몇몇 연합원들이 기자들과 시선을 교환하는 것이 보였다. 

「기사 내보내. ‘구원의 마왕’ 한반도 포기 선언.」 

아마 그들은 여론을 선동하고 있었을 것이다. 

「‘구원의 마왕’, 마왕의 본색을 드러내다.」 

물어보지 않아도 떠오르는 헤드라인들.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는 알고 있다. 

「쫄 필요 없어. 구원의 마왕도 결국 인간이야. 그냥 한국인이라고.」 

「이곳에서 태어난 이상, 거역할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지.」 

「아무리 강한 힘과 명성을 가져도······.」 

그들은 시스템을 믿는다. 인류가 오랫동안 유지해 온 「민주주의」라는 이야기를, 혹은 「합리주의」나 「제도」, 「다수결」이라는 설화를 믿는 것이다. 

[오래된 설화들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제는 보인다.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누구도 갖지 못한 설화들. <스타 스트림>이 도래하기 전에도 지구는 거대 설화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설화를 믿는 이들은, 이번에도 자신들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연합원들이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다. 

―애초에 시나리오를 독점한 건 <김독자 컴퍼니> 아닌가! 이런 불공정경쟁에서 우리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공단’은 늘 열려 있었을 텐데요. 우리가 얻은 스킬이나 설화들은 모두 공개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먼저 시나리오에 진출했기 때문에······! 

[해외에는 시나리오에 늦게 뛰어든 이들이 많습니다. 페이후나 란비르 칸의 사단 중에는 고작 몇 달 전 시나리오에 뛰어들어 후반부 시나리오에 진입한 이들도 많아요.] 

―그건 해외 사정이고, 이쪽은 상황이 다르잖아! 

[그들에겐 ‘공단’이 없었습니다. 지원도 극소수에게만 집중되었고요. 하지만 서울은 어땠습니까?]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비유가 패널을 만들었다. 거대한 패널에 [공단]의 내부 정경을 찍은 화면이 떠올랐다. 

[하위 시나리오의 공략법도 공개했고, ‘거대 설화 시나리오’의 목록들도 공지했습니다. 시나리오에 열심히 참가하는 이들에게는 특별 지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성별, 나이, 인종. 어떤 것에도 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원한 건 우리와 함께 싸워 줄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으니까요.] 

화면 속에서 훈련을 반복하는 화신들이 보였다. 그들을 통제하는 어머니의 모습. 교관으로 활동하는 조영란과 이복순의 얼굴도 보였다. 

그렇게 필사의 훈련을 마치고, 설화를 얻어 이 자리에 온 이들. 

[바로 당신들 눈앞에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나를 둘러싼 회견장의 중심부를 지키고 있는, 강건한 기세와 웅혼한 격을 가진 화신들. 바로 어머니가 키운 ‘방랑자들’이었다. 어머니를 도와 동해의 해일을 막아냈던 영웅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여러분들 중 이들보다 못한 지원을 받은 이가 있습니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코앞에서 뿜어내는 ‘방랑자들’의 패기에 모두 압도되어버린 것이다. 

주춤거리며 입술을 깨물던 사람들이 외쳤다. 

―우리라고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야!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제도와 시설을 정비하고, 그리고 당신이 시나리오를 끝내고 오면 다시 제대로 국가를 꾸릴 준비를······. 

[왜 그런 준비를 했죠? 앞으로 다가올 ‘결말’이 뭔지 알고?] 

―뭐? 

[이 세계의 ‘결말’이 왜 평화로울 거라 생각하지?] 

이 세계는 ‘멸살법’의 그것과는 많이 바뀌었다. 유중혁도, 이현성도, 이지혜도, 신유승도. 모두가 내가 알던 이들과는 조금씩 달라졌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유중혁이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길 바랐다.」

사람들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고 있었다. 끝끝내 믿었던 희망에게 배신당한 얼굴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정말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길 바라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군중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의 평화가 아니라 ‘각자의 평화’였다. 

그들은 분명 지옥 같은 시나리오를 겪었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런 시나리오를 겪은 사람은 절대로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길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겪어온 지옥조차 이제 그들의 이야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시나리오만 끝나면 돼. 이젠 나도 힘이 있어. 적어도 화신들 사이에서는 이제 갑이 될 수 있는 위치라고.」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내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는데······.」 

「<김독자 컴퍼니>만 없으면······.」 

무수하게 들끓는 욕망 속에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회견장의 가장자리를 보았다. 

연합원들, 그리고 기자들보다 더 먼 곳에서 이쪽을 올려다보는 이들이 있었다. 꾀죄죄한 옷과 장비. 전신에 흙먼지를 묻힌 평범한 화신들이 그곳에 있었다. 

작은 소녀의 모습도 보였다. 시나리오 초기의 신유승 정도나 될법한 키.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라 여겨질 정도로 어린 소녀. 카메라도 채널도 외면한 그곳에서, 소녀가 오직 나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럼······ 우리는 이제 다 죽는 거예요?」 

쏟아지는 셔터 사이로, 나는 그 어린 소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는 영웅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당신들 모두를 살릴 생각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은 없습니다. 하지만―]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다른 ‘대표’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죠.] 

그곳에 유중혁이 있었다. 

* 

잠시 후, 나와 한수영은 무대 뒤에서 유중혁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녀석이 생각하는 결말이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내게도 내가 생각하는 세계의 결말은 있다. 

평소에는 “죽인다 김독자” 정도의 말만 지껄이는 놈이지만, 막상 말을 시작하면 그럴싸한 연설을 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유중혁이 괜히 주인공은 아니니까. 

레몬 사탕을 문 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한수영. 나는 변명하듯 말했다. 

“언제까지 내가 전면에 나서서 모든 걸 통제할 수는 없잖아. 저런 건 유중혁이 더 잘 어울려. 원작에서도 그랬고.” 

실소하는 한수영을 보며 나는 덧붙였다. 

“보다 확실한 구심점이 필요해. 저런 건 내 역할이 아니야.” 

“네가 할 수도 있었지.” 

“이제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지. 난 주인공이 아니라 독자잖아.” 

“얼씨구, 이제 와서?” 

나는 등 뒤로 손을 감춘 채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역시 성좌가 된 김독자도 김독자이긴 한 모양인지,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했다. 언제든 카메라 앞에 선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저게 네가 생각한 ‘제대로 된 결말’이야?” 

“그 시작이지.” 

“이다음은 뭔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야.” 

성큼 다가온 한수영이 까치발을 들고 내 멱살을 틀어쥐었다. 

“너 내 소설 읽어주기로 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어?” 

“약속했잖아. 잊었어?” 

이글거리는 녀석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언젠가 나눴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맞다. ‘카이제닉스 제도’를 나오며, 한수영이 그런 말을 했었다. 

이 모든 시나리오가 끝나면 소설을 쓰고 싶다고. 

그때, 자신의 소설을 읽어달라고. 

“그거 진심이었냐?” 

“그럼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해?”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 눈이 좀 까다로운데, 괜찮겠어?” 

“눈이 까다로운 놈이 멸살법 같은 걸 10년이나 읽어?” 

“악플 같은 거 달 수도 있어. 개연성 없다고 지적할지도 모르고, 하차한다고 댓글 쓸지도 몰라.” 

“해 봐. 어떻게 되나.” 

나는 한수영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나를 보는 견고한 눈빛. 맞다. 한수영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맨날 연참하라고 독촉할 수도 있어.” 

“아무 문제 없어. 하루에 열 편씩 쓴 적도 있으니까.” 

그렇게 멱살을 잡은 채 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자니, 어쩐지 현실감이 옅어졌다. 처음 이 녀석을 보았을 때만 해도, 동료가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 했다. 한수영. ‘선지자들의 왕’이었던 사람. 

―살려야 할 사람과 죽어도 괜찮은 사람을 구별하던 적이 있었다. 

유중혁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누구는 죽어야 하고, 누구는 살아야 하고. 줄곧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것이 이 세계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연설을 들으며, 한수영도 나도 말을 멈췄다. 한 번도 직접 밝힌 적이 없던 유중혁의 속마음. ‘멸살법’에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던 녀석의 내면을 들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멸살법’의 주인공이 말하고 있었다. 

녀석의 등 뒤로, 우리가 살아온 회차의 설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지나간 세계를 잊지 않는 존재. 

아득한 과거에 배신당하고 상처받아온 주인공. 

―지난 생에서는 악이라 믿었던 자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아스모데우스와 싸우는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2회차에서 치열한 싸움 끝에 죽음을 맞이하는 유중혁. 

―나를 배신했던 이와, 또다시 같은 전선에서 싸우기도 했다. 

묵시룡에 맞서며 우리를 돕는 안나 크로프트. 

유중혁은 한참이나 그 설화들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들을 용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생을 통해 그들에게 복수할 생각도 없다. 이번 생은 나의 지난 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더 이상 너희들이 알고 있는 세계가 아닌 것처럼. 

사람들이 유중혁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들은 회귀자도 주인공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뭔가를 이해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살아남았다 하여 모든 것이 너희에게 허락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너희에겐 책임이 있다. 살아남은 죄.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짓밟고 살아남은 죄. 다른 이들의 설화를 비료로, 감히 줄기를 피우고 싹을 틔운 죄. 그러니 살아남았다면 그 죄에 책임을 져라. 

그 말을 이해하는 이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도 모두 압도된 얼굴들이었다. 

시나리오의 최전선에서 성좌들을 베며 살아온 인간의 말. 

친절한 위로도 따스한 격려도 아닌 말이었지만, 분명하게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말이었다. 

나 같은 성좌의 진언보다 훨씬 더 진정성 있는 목소리였다. 

―모두를 살리겠다는 약속 같은 건 할 수 없다. 나는 그저 내 시나리오를 살아갈 뿐이고, 너희의 시나리오를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니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하나 뿐이다. 

저곳이, 유중혁의 자리였다. 

―너희 모두의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나 역시 죽거나 회귀하지 않겠다.





< Episode 92. 마지막 시나리오 (2) > 끝

< Episode 92. 마지막 시나리오 (3) >





유중혁의 어마어마한 선언에 군중들은 침묵했다.

언변에 넘어가지 않은 몇몇 연합 세력원들이 눈빛을 주고 받았지만, 이미 군중들의 열기는 그들이 통제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었다.

“패왕······.”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렸고, 이어서 기자들이 멋대로 헤드라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패왕 유중혁, 결사 항전 선언!」

「<김독자 컴퍼니> 공동대표 유중혁, “마지막까지 시나리오 포기하지 않을 것”」

그가 회귀자라는 소문을 들었던 화신들은 더욱 흥분하는 눈치였다. 누군가가 크게 소리를 질렀고 [공장]은 순식간에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패왕 유중혁!”

“유중혁! 유중혁!”

모든 이들이 유중혁의 이름을 연호했다.

조금 전까지 <김독자 컴퍼니>를 두고 빈정거리던 이들도 어느새 그 분위기에 휩쓸려 유중혁을 보고 있었다.

이걸로 모든 것이 괜찮아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초석은 닦은 셈이었다. 이제 ‘시나리오 이후’의 세계는 유중혁을 중심으로 뭉치게 될 것이다.

아마 똑같은 말을 했어도 나는 저만한 환호를 못 받았겠지.

내 멱살을 놓은 한수영이 유중혁 쪽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도 저렇게 좀 하지.”

동감이다. 하지만 저게 저 녀석 성격이니까.

한 번 시작된 연호는 끊이질 않았다. 유중혁의 이름부터 시작된 환호는 정희원으로, 이현성으로, 다시 이지혜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구원의 마왕’을 제외한 모두의 이름이 불리는 와중에, 일행들이 불편한 기색으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저들은 저런 환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이윽고 연호는 한수영까지 왔다.

“흑염마황 한수영!”

객석의 군중들이 무대 뒤의 한수영을 찾았다. 내가 말했다.

“네 차례야. 나가봐.”

한수영이 고개를 저었다.

“난 저런 거 질색이야.”

“관심받는 거 좋아하잖아. 아니냐?”

“그건 작가로서고, 한수영으로서는 아니라고.”

발꿈치로 바닥을 툭툭 치는 한수영은 시선을 아래로 고정한 채 인상을 찌푸렸다. 한수영이 계속해서 나타나지 않자, 연호는 신유승의 이름으로 자연스레 넘어갔다.

커튼 너머의 회견장에서 손을 흔드는 일행들은 화려한 무대의 배우들처럼 보였다.

[한반도의 성좌들이 <김독자 컴퍼니>를 자랑스러워합니다!]

나는 그런 일행들을 보며 무심코 입을 열었다.

“한수영.”

“왜.”

“만약 이 세계가 소설이라면, 지금 우린 몇 권쯤 와 있을까?”

한수영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답했다.

“글쎄, 그건 쓰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지.”

하긴, 그렇겠지.

누군가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로 한 권을 쓰지만, 누군가는 100년 동안 있었던 일을 한 줄로 쓰기도 한다.

한수영이 말을 이었다.

“나라면, 못해도 지금쯤 20권을 돌파했을 거 같은데.”

“······기네.”

“길지.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길었다. 분명 긴 시간이었다.

20권이면, 분량으로 따져도 어지간한 대하소설급이다.

회견장의 하늘로 뉘엿뉘엿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왜인지 오늘은 해가 유독 빨리 저무는 것 같았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 것처럼 한수영이 말했다.

“근데, 20권 정도면 하루아침에 다 읽을 수 있는 사람도 있어.”

순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묻고 싶었다. 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적당한 속도로 읽어온 걸까.

소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고 제대로 읽어왔다 말할 수 있을까.

“김독자.”

“왜.”

“넌 이 세계의 주인공도, 멋있는 등장인물도 아닐지 몰라.”

“······.”

“하지만 넌 열심히 읽었어. 내가 알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네가 읽은 사람들이 지금 저곳에 있는 거야.”

한수영이 회견장의 인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그들을 바라보았다. 무대 커튼만 넘기면 닿을 수 있는 자리에 내가 아끼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이, 저 커튼 너머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군중들을 노려보는 유중혁이, 빙긋 웃는 정희원이, 방방 뛰는 이지혜가, 내쪽으로 손을 흔드는 신유승이······.

누군가가 저들의 이야기를 썼다.

내가 그것을 읽었다.

이 모든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출발했다.

나는 신유승을 향해 마주 손을 흔들어 주며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에 마지막 시나리오 지역으로 출발할 거야.”

*

기자 회견이 끝난 후, 일행들은 응접실에 모였다.

정희원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패널에 나오는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에이, 난 카메라 발은 진짜 안 받네.”

<김독자 컴퍼니>의 기자 회견으로 인해 한반도 뿐만이 아니라 <스타 스트림> 들썩이고 있었다.

―저는 당신들을 구할 생각이 없습니다.

화면 속에서 환한 얼굴로 선언하는 김독자를 본 정희원이 혀를 찼다.

“하여간 미움 받는 짓은 자처한다니까.”

“그래도 누가 좀 만져주니까 그럴듯해 보이네요.”

김독자의 메이크업을 담당한 이설화가 만족한 듯 주억거렸다.

이지혜가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 독자 아저씨 인상이 좀 강해진 것 같지 않아요? 원래는 뭔가 뿌옇고 수제비 반죽 같은 느낌이었는데.”

“엇,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몇몇 사람들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와 지금의 김독자는 많은 것이 다르다.

비단 인상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오랜 예전을 회상하듯 정희원이 중얼거렸다.

“솔직히 첨엔 말만 잘하는 쫌생이 같았는데.”

첫 번째 시나리오의 김독자와 마지막 시나리오의 김독자는 얼마나 다른 사람인 것일까.

일행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희원은 화면 속 김독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준비한 연설을 떠들 때면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나, 씩 웃을 때 묘하게 움직이는 입꼬리 같은 것.

그 모든 것들이, 그가 분명히 저곳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새삼스레 그 표정들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정희원은 김독자의 설화에 관해 생각했다. 어쩌면 그들이 함께 만든 설화가 저 사람을 조금은 바꾼 것이 아닐까. 그런 거라면 정말 좋겠다. 저 사람이 우리를 바꾼 것처럼, 우리의 이야기도 그를 바꾼 것이라면.

“근데 독자 씨는 어디 있죠?”

“아마 마지막 시나리오 관련해서 준비하고 있을 거예요.”

“아저씨 설마 또 혼자 이상한 짓 꾸미는 건 아니겠지?”

이지혜의 말에 일행들의 표정에 한순간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런 분위기를 쇄신한 것은 아이들을 양팔에 안은 채 빙긋 웃는 유상아였다.

“안 그런다고 약속했으니까, 이번엔 믿어보죠.”

화면 속의 김독자가 뭔가를 열심히 떠들더니 욕을 먹고 있었다. 한참이나 그 광경을 들여다보던 정희원이 패널 화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패널의 미지근한 감촉.

“······믿어도 되려나.”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것을 듣지 못한 이는 없었다.

그럼에도 일행들 중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신유승이 중얼거렸다.

“아저씨 피부 좋네요.”

충분히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김독자의 얼굴은 멀어 보였다.

*

나는 밤새도록 마지막 시나리오에 관해 생각했다.

‘멸살법’의 필요한 부분들을 발췌독으로 읽으며, 한수영과 [한낮의 밀회]를 나누기도 했다. [예상 표절]을 통해 우리에게 일어날 다음 전개를 예상하기 위함이었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는 유중혁을 통해 ‘은밀한 모략가’와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은밀한 모략가’는 결말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듯했다.

【네가 걸어가려는 길은 누구도 끝까지 가보지 않은 길이다. 다른 세계선을 참고하는 것이 지금의 네겐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녀석의 말을 이해했기에, 나는 그 이상 녀석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안나 크로프트는?”

“어제 한반도에서 ‘차라투스트라’들과 함께 철수했습니다.”

가능하면 ‘미래시’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기회를 놓친 듯했다.

쐐애액!

허공을 가르는 [흑천마도]의 칼날. 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서 유중혁이 훈련을 거듭하고 있었다. 매번 똑같은 자세로 보이는데도 녀석은 그 동작 하나하나에 큰 의미가 있는 양 검을 휘둘러댔다. 나로선 못 할 짓이었다. 어쩌면 저런 일이 가능했기에, 녀석은 그토록 많은 생을 거듭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젠장, 이런 망할 전개가······.”

한수영도 한수영 나름대로 마지막 시나리오의 전개를 알아내기 위해 내 옆에서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로서도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듯했다.

아무리 [예상 표절]의 능력이 있다고 해도, 정말 전지(全知)한 것은 아니다. 그랬더라면 1863회차의 한수영도 그 고생을 하지 않았겠지.

나는 그런 한수영을 잠시 바라보다가 스마트폰을 켰다. 액정에 파일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멸살법’의 순정 버전부터, 가장 마지막에 받은 ‘최종본’에 이르기까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최종본).TXT

나는 한참이나 최종본 파일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스마트폰을 껐다.

지금까지 잘 지켜온 결심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김 독자」

고개를 들자, [제4의 벽]이 나를 불렀다.

‘왜.’

「힘 들어?」

뜬금없는 문장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녀석을 잊고 있었다. 어쩌면 이 세계에서 나와 가장 오래 함께한 녀석은 바로 이 ‘벽’일 텐데.

‘안 힘들어. 네가 있잖아.’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제4의 벽] 덕분이었다.

녀석이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내 정신 충격을 완화해주지 않았더라면, 무수한 위기 속에서 육체적 고통을 경감시켜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진즉에 시나리오의 고혼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츠츳, 츠츠츳.

마치 작은 아이가 몸을 들썩이는 것처럼 허공에 스파크가 튀었다.

짧은 순간 스파크 위로 의기양양한 어린애의 표정 같은 것이 떠올랐다.

「엣 헴, 혹 시특 성창 보고 싶 어?」

이 녀석은 내가 시도 때도 없이 특성창만 보고 싶어하는 줄 아나.

‘아냐. 지금은 됐어.’

그걸 본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보다, 하나 궁금한 게 있어.’

「뭔 데?」

사실은 오래전부터 물어봐야 했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 못했기에 나 혼자서 이렇게 저렇게 가설을 쌓아 놓고 있던 질문.

「‘최후의 벽’이라는 건 정확히 뭐지?」

[제4의 벽]은 잠시 말이 없었다. 어쩌면 또 말을 돌리거나 필터링을 시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모 든 이야 기 가 쓰 여있 는 벽」

······‘마지막 시나리오’가 코앞이기 때문일까.

여전히 아리송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제 [제4의 벽]도 내게 정보를 숨길 생각은 없는 듯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질문을 바꿀게. 너는 대체 뭐지? 벽의 파편이란 건 대체 왜 존재하는 거야?’

「소 중한 테 마를지 키는 것 그게 벽 의 임 무」

순간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장하영을 지키던 ‘불가능한 소통의 벽’. 생각해 보면 장하영뿐만이 아니었다.

‘멸살법’에서 중요한 인물들은 늘 그런 ‘벽’을 가지고 있었다.

석존에게는 ‘윤회의 벽’이 있었고, 아가레스와 메타트론에게는 ‘선악을 가르는 벽’이 있었다.

「테 마는 하나 가 아니 니 까」

「하 나 의 설 화는 수 많 은 이 야기 의 집 합」

[제4의 벽]은 ‘최후의 벽’의 파편이었다. 그리고 파편이라는 것은, 다시 끼워 맞출 수 있는 조각을 의미한다.

순간, 머릿속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만약 정말 그런 것이라면. ‘벽’이라는 것이, ‘설화’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츠츠츠츠······.

눈앞의 허공에 [제4의 벽]의 모습이 일렁이고 있었다. 수많은 책장으로 이루어진 도서관이 어른거렸다. 허공을 향해 손을 뻗자, 책들의 활자가 흩어졌다.

대신 그곳에 나타난 것은 아주 오래되고 낡은 벽이었다. 선사시대의 암벽 동굴을 연상시키는 ‘최초의 벽’.

나는 그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추위로부터, 고통으로부터, 트라우마로부터 나를 보호해준 벽.

예로부터 벽이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마 지막 설 화를 준비 해 야해 김독 자」

인간은 언젠가부터 그 벽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것은 설화(說話)가 되었다.

「네가, 그 마지막이야.」





< Episode 92. 마지막 시나리오 (3) > 끝

< Episode 92. 마지막 시나리오 (4) > 끝





“다들 준비 끝나셨죠?” 

평소와 같은 아침이었다. 공기는 맑고 상쾌했고, 일행들의 표정도 어둡지 않았다. 그들의 복장이 전투복이 아니었다면, 어디 소풍 간다고 해도 믿을 만한 얼굴들이었다. 

「그랬기에, 김독자는 순수하게 기뻤다.」 

“준비야 진즉에 끝났죠. 그보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건 독자 씨 같은데.”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정희원이 내게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내가 잠시 생각하며 입술을 달싹이는 동안, 이지혜가 끼어들었다. 

“난 그냥 안 들을래. 보나 마나 또 위험하니까 안 가도 된다는 둥 어쩐다는 둥 할 거잖아.” 

“그러게, 언제는 안 위험했다고.” 

“이번에는 진짜입니다. 진짜로 위험하다고요······!” 

내 성대모사라도 하는 듯, 이지혜가 나긋나긋 소리쳤다. 

아니, 내가 언제 저런 식으로 말했다고······.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이번엔 진짜로······.” 

“저 봐, 내가 저럴 줄 알았다니까. 백 코인 내놔요, 언니.” 

침울한 얼굴로 동전을 내미는 정희원. 

그 광경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한수영이 말했다. 

“넌 학습이라는 걸 좀 해야 해.” 

“뭔 학습.” 

“그런 식으로 일행들한테 다짐받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번 그러면 사람들이 뭔 생각할 것 같냐? 아, 저 인간은 우리가 맹세한 것들을 아주 싸구려로 생각했구나. 지금껏 우리가 다짐했던 것들을 모두 거짓부렁으로 봤구나!” 

“그런 생각으로 말한 건 아니었어. 여러분, 혹시나 오해하셨다면 진심으로 죄송······.” 

이지혜에게 백 코인을 넘겨준 정희원이 물었다. 

“근데 작전은 뭐예요? 어제 수영이랑 한참 짜는 거 같던데.” 

“딱히 없습니다.” 

그 말에 정희원이 의심스럽다는 듯 재차 고개를 들이밀었다. 

“진짜?” 

“지금까지와는 다르니까요. 이번에 있을 마지막 시나리오가 무엇일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이상한데. 뭔가 숨기는 거 있죠?” 

“없는데요.” 

[등장인물 ‘정희원’이 ‘거짓 간파 Lv.5’를 발동합니다!] 

[당신의 발언이 거짓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어쭈, 이제 막 거짓말까지 하네.” 

······[거짓 간파]는 또 언제 배운 거지, 젠장. 

나는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당장 자세한 이야기를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말을 하면 뭔가가 틀어져 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여러분들은 평소처럼만 하시면 됩니다. 어떤 시나리오가 찾아오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선택해주세요. 성공하기만 하면, 우리 모두 살아남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우리 모두’에는 독자 씨도 포함되는 건가요?” 

나는 유상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시나리오 다 끝나고 큰 집에서 다 같이 살 수도 있는 거고요?” 

“그렇습니다.” 

“나 아직 졸업식 못했는데, 다 같이 졸업식도 와줄 수 있는 거지.” 

“맞아.” 

“형, 그럼 저랑 같이 PC방······!” 

“갈게.” 

[등장인물 ‘정희원’이 ‘거짓 간파 Lv.5’를 발동합니다!] 

[당신의 발언이 사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의 표정에 안도가 스쳤다. 

나는 일행들의 얼굴을 하나씩 돌아보았다. 

유상아, 정희원, 이현성, 이지혜, 이길영, 신유승, 이설화, 공필두, 장하영, 한수영······. 

“끝났으면 출발하지.” 

그리고 유중혁까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모두 다른 이야기들이 있었다. 

여전히, 내가 모두 읽지 못한 이야기들이었다. 

“출발해 아저씨. 아직 시나리오 진입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비장해질 필요 없잖아.” 

이지혜의 말에 나 역시 동감이었다. 아직 마지막 시나리오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들자, 창공의 높은 곳에서 포탈이 나타났다. 

[‘99번 시나리오’로 통하는 포탈이 생성되었습니다!] 

비형이 만든 포탈이었다. 

“갑시다.” 

우리는 포탈로 발을 내밀었다. 순식간에 주변의 경계가 무너지더니, 주변의 풍경이 재생성되었다. 

뒤로는 드넓은 <스타 스트림>의 장관이, 앞으로는 우리를 기다리는 도깨비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 여기 전에 왔던 곳인데.” 

‘게이트 오브 스타스트림’. 최종 관문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자, 모든 도깨비들의 총본산인 <관리국>의 본거지. 

[<김독자 컴퍼니>. 입장 자격 확인되었습니다.] 

“······이번엔 직통이네.” 

도깨비들은 딱히 복잡한 절차도 없이 우리를 통과시켰다. 

[절대다수의 성좌들이 당신들의 ‘마지막 시나리오’ 입장을 지켜봅니다!] 

[다수의 성운들이 당신들의 업적을 몹시 부러워합니다!] 

우주의 암흑 사이로 성좌들과 성운들이 우리를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성좌들이 <김독자 컴퍼니>의 등장에 긴장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성운이 최종 시나리오 지역에 입장하였습니다!] 

다시 눈을 뜨자, 소용돌이치는 은하의 정경이 보였다. 

수많은 별들이 환류를 거듭하며 오로라를 발생시키고 있었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성좌들이었다. 

오래전 ‘신화급’에 도달한 별들, 혹은 그 존재의 가호를 받는 무리들. 

그러나 별들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대신, 멀찍이 떨어진 고궁의 하늘 위를 소용돌이칠 뿐이었다. 

“저거······.” 

별들이 춤추는 거대한 고궁. 그 너머로 끝을 모르는 아득한 벽이 펼쳐져 있었다. 

“저게 ‘최후의 벽’이에요?” 

나는 그 벽을 응시했다. 

오만한 벽이 마치 여기까지가 이 세계선의 끝이라는 듯, 모든 것의 전경으로 펼쳐져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곳에 기록되기 위해 존재했다.」 

[‘이야기의 왕’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왕’이 당신을 호출합니다.] 

전신의 솜털을 곤두세우는 찌릿한 감각. 느낄 수 있었다. 저 ‘벽’의 중심에, <스타 스트림>이라는 거대한 설화를 움직이는 존재가 있었다. 

일행들도 그것을 느꼈는지 긴장한 얼굴들이었다. 

시종일관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는 것은 유중혁뿐이었다. 

“성좌들이 보이지 않는군.” 

유중혁의 말대로였다. 천공에 맴도는 별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직접 모습을 현현한 성좌는 단 하나도 없었다. 마치 우리가 올 줄 알고 모두 어딘가로 도망가기라도 한 것처럼. 

대신 우리를 맞이한 것은 대도깨비들이었다. 

[대도깨비 ‘허체’가 시나리오에 현현하였습니다!] 

[대도깨비 ‘하롱’이 시나리오에 현현하였습니다!] 

[대도깨비 ‘하람’이 시나리오에 현현하였습니다!] 

[대도깨비 ‘호롱’이 시나리오에 현현하였습니다!] 

[대도깨비 ‘녹수’가 시나리오에 현현하였습니다!] 

하나하나가 드높은 격을 지닌 도깨비들이 한꺼번에 나타나자, 나로서도 중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왔는가, <김독자 컴퍼니>.] 

일전에 우리를 영입하기 위해 <성마대전>에 난입했던 대도깨비 허체였다. 

그는 굉장히 아니꼬운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너희는 ‘마지막 시나리오’의 자격을 얻었다. 시험은 필요 없으니 ‘방주’로 들어가면 된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다음에 하지.] 

“······방주?” 

내 물음이 떨어지기도 전에 고궁의 중심에서 거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고궁의 중심부가 열리며 궁의 기저에서 뭔가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거대한 배.」 

그 배를 보는 순간, 기시감이 뇌리를 스쳤다. 

「성마대전에서 본 적이 있는 배였다.」 

<성마대전>에서 우리를 구했던 배. 

묵시룡과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의 격전에서 우리를 대피시킨 <에덴>의 방주도 저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 본 방주보다 훨씬 더 크고 견고해 보인다는 것. 

마치 부서진 벽의 조각을 깎아낸 듯한 선체가, 희고 검은빛을 동시에 내뿜고 있었다. 

그 선체를 보며 대도깨비 허체가 말했다. 

[본래 이 세계선은 ‘최후의 세계선’으로 선택되었다. 하지만 도중에 일이 꼬이기 시작했고, 이번 세계선의 뒤틀림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었다. 이 세계의 결말로는 ‘최후의 벽’을 열 수 없다. ‘가장 오래된 꿈’이 만족할 대서사시를 맺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무슨 헛소리지?” 

[너희들은 ‘씨앗’이 될 것이다.] 

씨앗. ‘멸살법’에서도 들어본 적 있는 말이었다. 

그것은 ‘단 하나의 설화’의 모든 후보군을 총칭하는 단어였다. 

먼 우주의 하늘에서 간헐적인 스파크가 거센 불꽃을 튀겼다. 뒤틀린 세계선의 최후를 암시하듯 불길한 소리였다. 

굉음에 일부 휘말린 별들이 산화하며 흩어지더니, 이내 유성으로 떨어졌다. 

그 유성을 보며 도깨비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영광으로 생각해라. 세계선을 망친 네놈을 ‘씨앗’으로 선택한 것은 ‘이야기의 왕’의 뜻이다. 너희는 ‘방주’에 탑승하여 새로운 세계선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계관을 구성할 핵심 ‘설화’로 거듭날 것이다. 지난 세계에서 넘어온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제야 그들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녀석들은 우리에게 탈출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너희는······ 그렇게 쉽게 이 세계를 포기하는 건가? 이 세계선을 버리고 모두 함께 떠나자고?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렇게 정색할 필요는 없을 텐데. 너희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니까. 네 목적은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결말이 아닌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너는 성공했다 ‘구원의 마왕’. 너와 네 일행은, 이 세계선을 떠나 모두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 

먼 하늘의 건너편에서 우레 섞인 폭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관리국>이 지키는 개연성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으며 뒤늦게 여러 가지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왜 주변에 성좌들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관리국>은, 세계가 시작될 때부터 이토록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집단일 수 있었는지. 

“······너희는 몇 번이나 이런 일을 반복해 온 거지?” 

[그게 중요한 일인가?] 

“방주에 타지 못한 이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선택받지 못한 존재들은, 모두 어떻게 되는 거냐?” 

[묻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허체는 턱짓으로 우리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이지혜가 미리 소환해두었던 [터틀 드래곤]이 있었다. [터틀 드래곤]의 갑판 위에서 둥근 네 개의 봉인구가 반짝이며 빛을 토하고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를 비롯한 이계의 신격들. 

나는 봉인구 속에 잠든 원작의 인물들을 바라보았다. 

시나리오에서 배제당한 존재는, 모두 죽거나 이계의 신격이 된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메인 시나리오 # 99 ― 탈주>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성운의 동료들과 함께 ‘방주’에 탑승하시오. 

제한시간 : 2시간 

보상 : 당신들은 ‘방주’에 탑승해 다른 세계선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당신들의 ‘설화’는 새롭게 시작될 것이며, 당신들이 쌓아온 설화는 <스타 스트림>의 ‘최후의 벽’에 기록되어 영원히 전승될 것입니다. 

실패시 : 당신은 멸망하는 세계에 남아 죽게 될 것입니다. 





< Episode 92. 마지막 시나리오 (4) > 끝

< Episode 92. 마지막 시나리오 (5) >





시나리오를 확인한 일행들은 얼빠진 얼굴들이었다. 

너무나 쉬운 클리어 조건이었다. 지금껏 우리가 겪어온 어떤 시나리오보다도 더 쉬웠다. 

우리는 그저 대도깨비의 말에 따라 방주에 탑승해, 이 세계선을 떠나기만 하면 된다. 

“독자 씨······.” 

[무엇을 망설이는 거지? 그대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시나리오는 없다.] 

허공에서 떠들어대는 대도깨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지어 많은 성좌들은 너희를 ‘씨앗’으로 선택하는 것을 반대했지. 그 별들의 흐름을 거슬러, 우리가 너희들을 선택한 것이다.] 

파랗게 질린 입술을 깨문 비형이 그들의 사이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야기의 왕’은 왜 갑자기 이런 시나리오를 제시한 것일까. 지금의 나로서는 잘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저들의 말을 들으면 일행들의 생존이 보장된다는 것이었다.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는 ‘최후의 벽’에 기록될 것이다. 그들이 증오했던 다른 설화들과 함께.」 

고개를 돌리자 일행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여러분.” 

말문을 열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쉬운 방법이 눈앞에 있었다. 이 방법을 선택하면, 내 작전은 필요 없을 수도 있다. 

일행들은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계의 신격’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저 배를 타고 다른 세계선으로 넘어가서, 아무것도 없었던 일처럼 새로운 이야기를 살아가면 된다. 

우리의 설화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선의 지배자가 되면 된다. 

<올림포스>와 <아스가르드>의 최고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편안하게 시나리오의 향락을 누리며,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독자 씨.” 

눈이 마주친 유상아가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우리가 흔쾌히 큰 집을 살 수 있을까.」 

이지혜가 [쌍룡검]에 매달린 키링을 굳게 쥐었고. 

「웃으며 지혜의 졸업식을 축하해줄 수 있을까.」 

신유승과 이길영이, 서로의 옷깃을 붙들었다. 

「길영이와 PC방에 가서 게임을 하고.」 

「유승이와 함께, 한강에 가서 피자를 먹을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유중혁이 나를 보았다. 

「마치 벽에 적힌 낙서를 지우듯, 우리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처럼 굴 수 있을까.」 

이미 멸망은 일어났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죽은 아가레스와 메타트론이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선택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선택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묵시룡의 재림을 없었던 일로 할 수 없고, 

유중혁의 지나간 회차를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이 모든 세계는, 이미 우리의 일부였다.」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김독자, 뭘 망설여?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잖아.” 

어느새 다가온 이현성도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는 것처럼. 

“제 생각도 독자 씨와 같습니다.” 

우리가 쌓아온 설화들이 우리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남겨질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구의 사람들. 어머니와 ‘방랑자들’. 우리의 이야기를 함께 했지만, 지금 이곳에 있지는 않은 존재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설화들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제4의 벽’이 강하게 진동합니다!] 

언젠가 ‘은밀한 모략가’는 말했다. 

【다시 만날 때는, 네가 그 ‘벽’의 제대로 된 주인이 되어있길 바라지.】 

장하영에게는 ‘불가능한 소통의 벽’이 있고, 유상아에게는 석존에게 물려 받은 ‘윤회의 벽’이 있다. 

아가레스와 메타트론은 ‘선악을 가르는 벽’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벽’은, 그 벽에 쓰여질 설화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제4의 벽]에 쓰여야 할 설화는 무엇인가.」 

[제4의 벽]은 말했다. 

내가 바로 ‘최후의 벽’의 마지막이라고. 

「이 모든 설화의 대미(大尾).」 

말문을 떼며 마지막으로 일행들을 보았다. 

이것이 혹시나 틀린 선택이 아닌지 점검한다. 

모른다. 그런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독자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아저씨, 죽을 때는 같이 죽는 거야. 알지?」 

「부끄러운 연명보다는 정의로운 최후가 낫습니다.」 

일행들의 목소리가 내게 용기를 주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 끓어 오른 설화가, 내게 진언을 허락했다. 

[우리는 방주에 타지 않겠다.] 

아주 오랫동안 고민했던 이야기의 마침표가 어렴풋이 보일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도깨비들이 경직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세계선의 모든 성좌들이 오직 나 하나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시선들을 하나하나 감각하며 나는 아득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김독자는 ‘멸살법’에서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나는 ‘멸살법’의 모든 회차를 읽었다. 그 모든 이야기를 기억했다. 

하지만 그런 나도, 유일하게 읽지 못한 것이 있었다. 

「에필로그」. 

0회차부터 1863회차까지. 

내가 읽어 온 모든 설화들이 모이고 있었다. 

하늘을 흐르는 성류들의 이야기가 이 세계선으로 집약되고 있었다. 멀리서 준동하는 성좌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무언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그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대도깨비들이 묻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것 같은 얼굴도 있었고, 당황한 얼굴도 있었다. 

사실 어느 쪽이든 중요하진 않을 것이다. 그들에겐 모든 것이 그저 ‘설화’일 테니까. 

이 모든 것이 그들에겐 <스타 스트림>의 뜻일 테니까.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마지막 ‘거대 설화명’을 제시합니다.] 

[당신은 제시한 ‘결’들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 

1. 멸망한 세계선의 방랑자 

2. 절망한 별빛의 지배자 

······. 

+ 

우리가 완성한 마지막 ‘거대 설화’의 이름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내게 주어진 ‘결’의 선택지들을 바라보았다. 

하나 같이 거창한 이름의 선택지였다. 

「그리고 어떤 것도 그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담을 수 없었다.」 

[나는 너희가 제시한 설화명은 받아들이지 않아.] 

[성좌, ‘구원의 마왕’이 <스타 스트림>의 모든 선택지를 거부하였습니다.] 

츠츠츠츠츳! 

[나는 너희들이 말하는 ‘결’은 완성하지 않겠다.] 

허리춤에서 천천히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았다. 

아마도 이 검을 처음 쥐었을 때부터 이 순간은 예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설화들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유중혁이 [흑천마도]를 뽑았고, 한수영이 왼손의 붕대를 풀었다. 

정희원이 [심판자의 검]을 들자 이지혜가 [쌍룡검]을 겹쳐 쥐었다. 

유상아가 연화대를 펼쳤고, 신유승의 키메라 드래곤이 울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무장성채]를 펼친 공필두와, 그 성채의 꼭대기에서 초월좌의 격을 발산하는 장하영이 보였다. 

모두를 보호하듯, 이현성이 내 앞에 섰다. 

그들이 행동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나는 이야기할 수 있었다. 

[너희들 중 누구도 이 세계선을 버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 너희가 만든 이야기의 멸망을 제대로 봐라. 너희가 만든 세계가 어떤 끝을 맞이하게 되는지······ 똑똑히, 봐라.] 

전신에서 폭발한 설화의 격이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타고 뻗어 나갔다. 

[멈춰라!] 

대경한 대도깨비들이 움직여 내 격을 받아냈다. 

나는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설화의 파동을 날려 보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들의 행동에 반응합니다.] 

[<관리국>의 개연성이 발동합니다!] 

몸 전체를 옥죄어오는 강렬한 스파크에도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화신체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우리가 만든 모든 설화들이 포효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직 이름이 없는 당신의 거대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야기의 ‘결’을 결정하는 것은 그전까지 쌓아온 기와 승과 전이었다. 

그것이 아닌 다른 무엇도, ‘결’을 결정할 수는 없다. 

나는 눈앞의 스파크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눈부신 후폭풍의 파형 속에 던져 넣었다. 

[당신의 행동에 <스타 스트림>이······.] 

[정해진 ‘결’의 가능성이······.] 

[■?■■······■?■■?] 

내 눈앞에서 정해진 활자들이 부서지고 있었다. 읽을 수 있었던 문장들이 부옇게 낀 먼지처럼 읽을 수 없는 것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마침내 그 먼지들이 걷혔을 때, 내가 본 것은 파괴된 방주의 선두였다. 

콰아아아아아! 

나도 알고 있었다. 

이런 짓을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야기의 왕’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혹부리들의 왕이 당신의 행동에 즐거워합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내가 내린 최선의 답이었다. 

「원작에는 없었던 ‘결’을 찾을 방법.」 

「뒤틀린 개연성을 해소하면서, 모두를 살려낼 방법.」 

정해진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조로는 이 세계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 

결국 기승전결이란 정해진 ‘끝’의 양식이다. 

그것은 ‘최후의 벽’을 넘어설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김독자는 주어진 ‘결’을 거부했다.」 

세계에 거대한 파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당신의 행동으로 정해진 ‘시나리오’의 규칙이 붕괴합니다.] 

[<스타 스트림>의 일부 플롯들이 붕괴합니다!] 

[<스타 스트림>의 긴급 시퀀스가 발동합니다!] 

주변의 풍광이 변하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이 나를 자신의 ‘결’에 끼워 넣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 느껴졌다. 

「결국 모든 것은 다시 시나리오가 된다.」 

아마 대도깨비들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혹은 알면서도 저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 거대한 ‘시나리오’ 안에서는 이야기꾼조차 그저 시나리오의 일부일 뿐이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행동을 기꺼이 여깁니다.] 

[<스타 스트림> 최후의 설화가 깨어납니다!] 

시나리오에 벗어나는 시나리오도 결국은 시나리오인 것처럼. 

하지만 모든 것이 결국 시나리오일 뿐이라면, 어떤 시나리오를 살아갈 것인지는 내가 선택할 것이다. 

그러니까······ 잘 봐라. 

[메인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독자 씨!” 

주변에 서 있던 동료들이 나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찌릿거리며 변화하는 화신체. 

내 화신체 위로 자라나는 불길한 배제의 감각. 

나는 이것이 무슨 시나리오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막내야.] 

눈앞에서 펼쳐지는 전장의 풍광. 

우리의 맞은 편으로 성좌들이 소환되고 있었다. 우리의 적들, 우리와 함께 싸웠던 동료들도 보였다. 

안나 크로프트. 중국의 페이후. 인도의 란비르 칸. 일본 연합의 아스카 렌. <올림포스>와 <아스가르드>, <황제>를 비롯한 거대 성운의 성좌들이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 아래에 현현하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성좌들이 모이고 있었다.」 

모이고 또 모인 별들이 우주 전체를 밝힐 듯 타오르고 있었다. 

이 광활한 우주에 한점의 어둠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나를 비추고 있었다. 

「그것은 <스타 스트림> 최후의 전장.」 

츠츠츠츠츠츠츳! 

이곳은 바로 1863회차의 유중혁이 싸웠던 그 ‘무대’였다. 

들끓는 이계의 신격들, 그리고 ‘외신왕’과 맞섰던.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 싸울 적은, ‘외신왕’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성좌, ‘고려제일검’이······!] 

깜빡이는 별들 속에서, 간접 메시지들이 들려왔다. 

우리엘과, 흑염룡의 진언. 일행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눈자위를 가득히 채우는 혼돈의 감각에 현기증이 일었다. 먹먹해진 귀를 막으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메인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 

<메인 시나리오 # 99 ― 이야기의 적> 

분류 : 메인 

난이도 : 측정불가?■ 

■?■?■?!■?■?■■■■■■······. 

+ 

시나리오 메시지가 실시간으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내용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모두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시나리오에 실패하면 <스타 스트림>은 멸망한다는 것을. 

그리고 잠시 후, 모두가 기다린 ‘클리어 조건’이 떠올랐다. 

눈앞에 천천히 떠오르는 그 조건을 읽어 나가는 순간, 왜인지 모르게 ‘멸살법’의 문장이 떠올랐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일행들이 무어라 외치며 나를 보고 있었다. 

멸살법의 작가는 말했다. 이 끔찍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세 가지 방법. 

나는 생각한다. 

「방법이 세 가지라고 해서, 세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일행들을 보며, 나는 빙긋 웃어주었다. 

+ 

클리어 조건 : ‘이야기의 적’, 외신왕 김독자를 살해하시오. 

+ 

마침내, 이 세계의 에필로그가 시작되었다.





< Episode 92. 마지막 시나리오 (5) > 끝

< Episode 93. 전지적 작가 시점 (1) >





"저는 작가입니다."

작품을 집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한수영은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그렇게 소개하곤 했다.

친구의 간곡한 부탁으로 나간 소개팅 자리에서도 그랬다.

"아, 작가님이셨군요!"

이미 듣고 나왔을 텐데, 호들갑은.

남자는 눈동자를 재빠르게 굴리더니 웃으며 물었다.

"그럼 신춘문예 같은 걸로 등단하신 건가요?"

"아뇨."

"예? 그럼···."

"웹소설 써요."

"웹소설요?"

언제나 이즈음부터가 문제다.

사내의 눈동자가 자신의 후줄근한 후드티를 훑는 것이 보였다.

"아하, 그러니까··· 그건가요? 인터넷 소설? 이모티콘 많이 들어가는 그런 거···?"

"아, 예~. 그겁니다요."

"요즘 신기한 직업들 참 많아요. 유튜버, 인터넷 작가···."

남자는 빙긋 웃으며 바로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쭉 빨았다. 찬 시계를 보니 꽤 고가의 브랜드였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상황인데.

"요즘은 다들 돈을 쉽게 벌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쵸?"

"어렵고 힘들게 돈 벌고 싶은 사람도 있나요?"

"저도 연 1억쯤 버는데, 이게 쉬운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 보면 참 한숨 나와요. 어디서 남의 돈 쉽게 받아먹으려고···."

말하는 본새를 보니 이미 이 자리가 소개팅이라는 것 따윈 잊은 모양이었다. 약간 화가 난 기색으로, 남자의 눈이 테이블 위에 놓인 차키로 향했다. 나이에 비해 제법 가격대가 있는 외제차였다.

한수영은 남자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스마트폰을 켰다. 새로운 댓글 알림이 잔뜩 떠올라 있었다.

-작가님 너무 고구마 아닙니까?

-흠... 담편에는 사이다로 시작하는 거죠? 아니면 하차합니다.

"어릴 때 공부도 열심히 안 한 사람들이 운 좋게 얻어걸려서는···."

문득, 사람들이 왜 웹 소설을 읽는지 알 것 같았다.

친구 자식이 왜 이런 나부랭이를 소개해줬는지도 이해가 됐다. 만나면 알게 될 거라더니, 뭘 바라고 자길 이곳에 보냈는지 아주 훤히 보였다.

보통이라면 귀찮아서 그냥 넘겼겠지만···.

"그래서·· 듣고 계신가요?"

"아 예, 연봉이···?"

그제야 남자의 눈이 반짝였다. 그걸 다시 물을 줄 알았다는 듯 활짝 펴지는 남자의 어깨.

"세후 1억입니다."

"흠, 저랑 비슷하시네."

"예?"

남자가 피식 웃었다.

"작가신데 연봉이 1억이시라구요?"

한수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신형 포르셰. 남자의 것보다 정확히 세배 더 비싼 모델이었다. 그나마도 귀찮아서 잘 몰고 다니지도 않지만.

키의 흔들림을 따라 남자의 눈동자도 흔들리고 있었다. 이어서 어색하게 떠오르는 미소.

"하하, 근데·· 작가들은 수입이 불규칙해서 '연봉'이라는 개념은 없지 않나요? 수입도 일정치 않으니까요."

종알거리는 사내의 입술이 뻔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다음 회차에 잠깐 등장시킬 악당의 대사로 쓰면 딱인 수준. 그럼 주인공은 이렇게 말하면 된다.

"연봉이라곤 안 했는데."

"예? 아, 그럼 평생 버신 금액인가요?"

"이번 달 중순까지 수입만 1억이고, 흠·· 아직 이번 달이 2주가 더 남았으니까···."

"··예?"

그제야 뭔가를 눈치챈 듯, 사내의 표정이 급격하게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친구 녀석이 원하는 대로 된 셈이었다.

소설로 썼다면 사이다였겠지만 실제로 해보니 그렇게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허둥지둥 어딘가로 톡을 보내는 남자의 모습, 아마 소개팅을 주선한 친구에게 이것저것 묻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기, 혹시 쓰신 작품 제목이···."

얘한테 제목 알려주고 싶진 않은데, 생각할 찰나.

한수영의 스마트폰에 다시 알람이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저는 웹소설을 좋아하는 한 독자입니다. 운연한 기회에 작가님의 작품을 읽게 되어···.

웬 장문의 메세지인가 싶었다. 무심결에 알람을 눌렀다. 말투는 젖ㅇ중하고 고리타분했고, 심지어는 약간의 순박함까지 느껴졌다.

-작가님이 쓰신 작품이 제가 정말 좋아하는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가지 방법'이란 작품과 지나치게 흡사합니다.

···이 자식은 뭐야?

「그것이 한수영과 김독자의 첫 만남이었다.」

김독자.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며, 한수영은 그때의 기억을 반추했다.」

아바타를 만들면서 기억의 일부를 잃는 바람에 그때의 일들은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분명 그때의 자신이 '멸살법'이라는 소설을 읽기는 했다는 것이다.

다름 아닌 그 '김독자'라는 닉네임을 가진 녀석 때문에.

-작가님! 오늘도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한수영쯤 되면 몇 편만 읽어도 이게 뜰 글인지 아닌지 안다.

그런데 그녀가 보기에 '멸살법'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뜰 글이었다.

-이거 진짜 흥미로운 시작이네요.

시작부터 개노잼이었고.

-작가님, 그럼 유중혁은 그 많은 걸 다 기억하고 있는 건가요? 그럼 72회차에서는···.

지나치게 설명조였으며.

-크, 아깝다! 다음 회차엔 중혁이도 정신 좀 차리겠죠? 오늘도 꿀잼이었습니다.

주인공은 그저 외모 출중에 무쌍을 찍는 무개성 남주였다. 게다가,

-작가님! 2000회 달성 축하드립니다! 기왕 하시는거 천 편만 더 연재해주셨으면···.

편수도 지나치게 길었다.

'···이게 재밌다고? 정신 나간 놈인가?'

짜증이 나서 녀석이 쓴 댓글을 따라가며 비추천을 누루기도 했다.

한수영은 소설이 아니라 김독자가 쓴 댓글만을 홀린 듯 탐독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는 드디어 지혜가 각성하나요?

-작가님! 7페이지에 오타 하나 발견했습니다! 제 부족한 소견으로 여기 맞춤법은··· 아, 찾아보니 제가 틀렸네요. 죄송합니다. 오늘 하나 배워갑니다.

-중혁이 자식 뒤통수 좀 때려 주세요 제발···.

수천 편의 소설에 한 편도 빠짐없이 달린 댓글들, 그 모든 댓글들에 작가가 만든 세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담겨 있었다.

「한수영은 그것이 부러웠다.」

고작 이 따위 소설에 이런 독자가 있을 리 없다고, 당연히 작가의 자작이라 믿었다. 아이디를 두 개 파서 스스로 글을 쓰고 댓글을 달고 추천글까지 쓰는 것이라 생각했다.

-본인 추천 금지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김독자에게 유중혁이 가상의 인물이었듯, 한수영에게 김독자 또한 그랬다.」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텍스트 속의 인물이 지금 한수영의 눈앞에 있었다.

"독자 씨-!"

삐이이이, 하고 들리는 이명. 곳곳에서 터지는 폭음들.

한수영은 폭풍처럼 몰아치는 전장의 중심에서, 김독자가 별들의 격류를 헤쳐나가는 것을 보았다. 화신들이 비명을 질렀고, 별들이 포효를 터트렸다. 허공의 도깨비들이 웃고 있었다.

【■■■■■■■■■■■■■■■■■■■■■■■■■】

김독자가 외치고 있었다. 그것이 비명인지, 선포인지, 아니면 절규인지 한수영은 들을 수 없었다. 외신으로 변한 김독자의 목소리는 시나리오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 내용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갸아아아아아아아아아!

다만 그를 따르는 외신들이 있었다. 수많은 세계선에서 버려진 잔재들이 김독자의 곁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하늘에서 신화급 성좌들이 그런 김독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야 시작이군.]

<올림포스>의 왕이자 12신좌들의 지배자인 '번개의 좌', 제우스가 그곳에 있었다.

[세계선의 '마지막 시나리오'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모든 존재가 시나리오 참여권을 획득합니다!]

['이야기의 적', 김독자를 살해하십시오.]

잇따라 떠오르는 시나리오 메세지. 그곳의 모두가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제우스의 입이 열렸다.

[쓸어버려라.]

천공을 무너뜨리는 소리와 함께 제우스의 전격이 쏟아졌다. 퍽, 하고 뭔가가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한수영의 뺨에도 피가 튀었다. 이름 없는 것들이 검은 피를 내뿜으며 죽어가고 있었다.

【살려살려살려살려살···.】

무시무시한 '이계의 신격'들조차 신화급 성좌들이 일제히 내뿜는 격 앞에서는 물풍선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자비하게 터져 나가는 '이계의 신격'들이 버려진 설화들을 울컥거리며 토해냈다.

눈부신 번개의 광휘. 폐허의 중심에서 김독자가 제우스의 전격을 버텨내고 있었다.

왜, 김독자는 저런 선택을 한 것일까.

[날개를 찢어라! 반경을 봉쇄해!]

성좌들의 포효와 함께 어마어마한 별들의 군세가 들이닥쳤다. 지옥 같은 시나리오를 뚫고 여기까지 온 성좌와 화신들이, 오직 '김독자'를 제거하겠다는 일념하게 하나가 되어 밀려들고 있었다.

그런 김독자를 구한 것은 그와 혼연일체가 된 제천대성이었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창공을 도도하게 흐르는 전격. 제우스의 전격을 밀어낸 제천대성의 전격이 창공을 북처럼 찢어발겼다.

순간 성좌들의 기세가 주춤하더니, 이내 독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천대성이다!]

[물러서지 마! 저놈만 죽으면 시나리오도 끝이다!]

[이 세계선의 마지막 시나리오야!]

드디어, 모든 것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기대감.

개중에는 지나가듯 얼굴을 본 성좌나 화신들도 있었다.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저놈 스스로 선택한 거라고!"

<올림포스>, <베다>, <파피루스>, <수호의 나무>, <십이지>, <황제>···.

어지간하면 한 번씩 이름을 들어본 성운의 성좌와 화신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곳에 김독자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모두가 김독자를 죽이기 위해 검을 들었다.」

찢어진 검정 코트 사이로 드러난 흰 코트, 어울리지 않는 배역을 맡은 김독자가 그곳에 있었다.

넝마가 된 채, 찢어진 흑과 백의 날개를 펼치고 마왕의 뿔을 단 김독자.

외신들의 선두에서 적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김독자.

순간 시야가 희뿌옇게 흐려진다 싶더니, 이내 김독자의 모습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두족류 특유의 이질적인 눈빛, 음습함이 느껴지는 외피.

김독자가 있었던 곳에, 세상 모든 괴생물의 특징을 섞어 놓은 듯한 거대한 외신왕이 있었다.

「이야기의 적」

작가인 한수영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만약 이 세계가 소설이라면, 지금 김독자는 '최종 보스'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저 '김독자'가 죽어야만 끝난다.

"한수영!"

누군가가 그의 몸을 끌어냈다. 전격의 급류가 코앞을 휑하게 스쳤다.

"물러나! 빨리!"

유상아였다. 오직 유상아만이 이 번잡한 아수라장 속에서 제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다들 정신 차려요! 지금 독자 시까···!"

김독자는 죽을 것이다.

"독자 씨랑 약속했잖아요! 다들 잊었어요?"

김독자는 거짓말쟁이다.

"정말로 독자 씨가 또 같은 짓을 할 리가···!"

사람의 선의를 믿는 사람. 그게 바로 유상아였다. 그런 유상아였기에, 누구 보다 사람을 믿는 유상아였기에 이 상황에서도 흔들리자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언제나 한수영과 부딪쳐 왔던 것이다.

유상아의 외침에도 일행들의 표정은 공허했다. 풀린 눈으로, 각자의 사색에 잠겨 있었다. 그들을 붙잡은 질문은 동일했다.

「김독자는 대체 왜 저런 선택을 했는가?」

약속했으면서. 다시는 저런 식으로 희생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면서.

「대체 왜?」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요."

유상아의 말은 틀렸다. 이미 이야기의 방향은 결정되었따. 김독자는 '이야기의 적'이 되었고, 이 빌어먹을 시나리오는, 김독자가 죽어야만 끝날 것이다.

이 모든 비극을 쓴 작가가, 이미 그렇게 결정한 것이다.

···작가?

【■■■■■■■■■■!】

처절하게 울려 퍼지는 김독자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언젠가의 기억이 되어 돌아왔다.

-한수영, 넌 작가지?

한수영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작가는 자기가 쓴 글 속에서 정말 전지전능한 걸까?

-갑자기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아니, 그냥 궁금해서. 너는 글을 쓰면서 모든 걸 통체하는 거야? 이 인물은 이렇게 움직이고, 저 인물은 저렇게 행동하고···.

-그야 당연히···.

자신만만하게, 한수영은 선언했다.

-통제 못하지.

-왜? 작가잖아.

-작가가 진짜 신인 줄 아냐?

-이야기 속의 모든 건 작가가 만드는 거잖아. 상황도, 인물도···.

뭘 모르는 소리를 하는구만, 하고 한수영이 중얼거렸다.

-등장인물은 만들어 놓는 순간 제 맘대로 움직여. 작가는 그냥 무대를 제시할 뿐이야. 그 사건에 어떻게 반응하고 움직일지를 선택하는 건 등장인물 들이라고.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진짜로.

-너 글 되게 편하게 쓴다.

-뒤질래?

복부를 얻어맞으며 허리를 꺾던 김독자.

그때 김독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재밌네. 작가도 이야기의 신은 아니라···. 그럼 '시나리오'라는 건 대체 누가 결정할 수 있는 걸까?

서서히 발끝에서 소름이 올라왔다. 어쩌면 저곳에 있는 김독자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인지도 모른다.

츠츠츠츠츳!

어쩌면 김독자는 생각한 것이다.

이 완고한 시나리오의 세계에서, 결말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대도깨비들의 개연성의 범람에 당황합니다!]

[<스타 스트림>이 흔들리는 개연성의 향방에 주목합니다!]

시나리오는 완벽하지 않다.

['마지막 시나리오'가 격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분명 작가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살아가는 것은 등장인물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한반도의 성좌들이 '구원의 마왕'을 응원합니다!]

[<에덴>의 성좌들이 '구원의 마왕'을 응원합니다!]

[<명계>의 성좌들이 '구원의 마왕'을 응원합니다!]

[이름 모를 행성의 성좌들이 '구원의 마왕'을 응원합니다!]

[수많은 성좌들이 코인을 후원합니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구원의 마왕'의 마지막 싸움을 지켜봅니다!]

그 이야기를 지켜보는 이들이다.

츠츠츠츠츳!

[다수의 성좌들이 '구원의 마왕'이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시나리오'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존재들.

김독자는 이곳에서 죽기 위해 '이야기의 적'이 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일행들을 배신하려고 희생을 택한 것이 아니었다.

「'멸살법'은 유중혁의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지금 이 세계는, 누구의 이야기일까.」

흔들리는 세계의 개연성을 보며, 한수영이 쓰게 중얼거렸다.


"···그렇지. 주인공이 죽길 바라는 독자는 아무도 없지."

이 세계에서, 김독자와 <김독자 컴퍼니>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김독자가 마지막 시나리오의 대상이 된 것이 그 증거였다.

성좌들은 좋든 싫든 김독자의 설화를 보았고, 공감하거나 질투했다. 김독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세계의 모든 별들은 이제 그의 이야기를 보고 있었다. 아마 김독자도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주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등장인물'이 된 김독자가 건 최후의 도박이었다.」

멀리서 김독자가 이쪽을 돌아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너라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이는 듯.

여기서부터,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듯.

「그는 희생하지 않기 위헤 희생한 것이었다.」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영영 닿지 못할 결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김독자가 내린 '누구도 희생하지 않을 방법'이었다.

그러니 지금 한수영이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었다.

'저 녀석 혼자서는 안 돼.'

한수영은 뒤를 돌아보았다. 일행들에게 알려줘야 했다. 지금 김독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지만, 혼자만의 이해에 고취되어 있던 한수영이 알지 못한 것이 있었다.

[설화, '예상표절'이 등장인물의 심리를 예측합니다.]

그것은, 이곳의 모두가 작가는 아니라는 것.

모두가 이 사태를 그렇게 객관적으로 보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한수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일행들 중 누군가가 튀어 나갔다.

검격에 깃든 맹렬한 적의.

검극이 향한 곳을 본 순간, 한수영은 소스라쳤다.

"잠깐! 기다려! 저 녀석은 지금-"

누구의 검인지 알았기에, 믿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김독자를 아주 깊이 원망하게 된 사람.」

오래도록 김독자를 지켜온 김독자의 가장 단단한 검.

그 검이, 이 시나리오를 끝내기 위해 움직였다.





< Episode 93. 전지적 작가 시점 (1) > 끝

< Episode 93. 전지적 작가 시점 (2) >





[당신의 ■■은 ■■입니다.]

처음 그 메세지를 들었을 때, 정희원은 떨떠름했다. 언젠가 김독자가 한 말도 떠올랐다. 모든 존재에게는 각자 다른 종막이 있다고. 그렇다면 자신에게도 그런 것이 있으리라 생각은 했다.

하지만…… ■■이라고?

정희원은 그 단어가 훨씬 잘 어울리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싸워온 사람.

그의 검이 되기를 망설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

동료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 언제나 자신을 가장 먼저 희생하는 사람.

「그렇기에 원망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

정희원은 '이름 없는 것들'의 파도를 헤치며 달렸다. 인근에서 터진 독액이 정강이를 적시자 살점이 검게 부풀었다. 품속에서 일서화가 준 단창약을 급하게 꺼내 바르고, 다시 달렸다. 양옆에서 공세를 퍼붓는 성좌들의 방해를 뿌리치고, 김독자의 주변을 호위하듯 감싼 이름 없는 것들을 짓밟고 뛰어올랐다.


멀리서 뭔가가 보였다.

한때는 '김독자'였던 것.

【■■■■■!】

그리고 이제는 「이야기의 적」이 된 존재.

"희원 씨!"

가까스로 달려온 이현성이 정희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만-"

이현성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메세지가 떠올랐다.

[최종 시나리오의 전 지역 스트리밍이 시작됩니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채널이 개방되고 있었다.

츠츳, 츠츠츳……!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나리오 메세지.

[다들 당황하지 마시고 시나리오에 집중하십시오. 이번 시나리오가 여러분들의 마지막 시나리오입니다. 외신왕을 사냥하면, 여러분들의 긴 여정도 끝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최후의 벽'에 기록되고, 별들의 여정은 '대서사시'로 남아 영원히 전승될 것이다!]

탐욕스레 외치는 대도깨비들.

그들의 눈동자가 최후의 벽에 자신들이 인솔한 설화를 남기겠다는 욕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거대 설화, '늙은 새벽의 강휘'가 최후의 이야기를 꿈꿉니다!]

[거대 설화, '아스가르드의 주인'이 최후의 이야기를 꿈꿉니다!]

거대 설화들도 요동치고 있었다.

'단 하나의 설화'로 남기 위해서, 거대 설화들은 성좌와 화신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성좌,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 자신의 병기를 꺼내 듭니다!]

[성좌, '아비도스의 주인'이 시나리오에 강림합니다!]

[성좌, '나일강의 괴조'가 거친 포효를 터트립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 독려에 이끌리는 것은 아니었다.

제 1신좌인 제우스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디오니소스를 비롯한 몇몇 <올림포스>의 신좌들은 공격을 망설이고 있었다. 화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저 사람을 정말 죽여야만 하나요?"

그 말을 꺼낸 것은 일본 화신인 '아스카 렌'이었다.

"내가 본 '김독자'는 악인이 아니었어요."

"맞다! 김도게자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피스 랜드] 당시 재앙을 선택했던 다른 일본인들과 맞서 싸우며, 김독자 일행들에게 도움을 받았던 이들.

그 외에도 <황제>와 <올림포스>에 소속된 몇몇 화신들이 동조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화신들의 의견에 동조합니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동요합니다!]

개연성에 심상치 않은 방향이 감지되자, 대도깨비들이 재차 나섰다.

[잊지 마십시오. 그는 '시나리오의 적'입니다.]

[그대들은 모르겠지만, '김독자'는 처음부터 이 세계선을 망치기 위해 시나리오를 클리어해 왔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저 오만한 대도깨비들이 공손한 말투로 서사를 시작아고 있었다.

광활한 천공 위에 투사되는 설화의 영상들, 도깨비들의 특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이 세계선을 배신하고 '이계의 신격'들과 거래했습니다.]

화면 속에서 김독자와 '은밀한 모략가'가 거래를 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기에 김독자의 표정은 더욱 음험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껏 김독자가 해왔던 모든 일들이 만천하에 공개되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구하지 않고 메뚜기를 풀어버린 일.

금호역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으나 방치했던 일…….

누군가의 가장 악한 부분만을 모은 집합이, 세상에 새로운 김독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가 뜻을 이룬다면, 이 세계는 멸망할 뿐입니다.]

이윽고 화면은 「서유기」로 전환되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

이계의 신격들에게 둘러싸인 김독자가 시나리오에 갇혀 있던 '이름 없는 것들'을 해방하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도깨비들의 연출 때문인지 더이상 설화 속의 김독자는 성스러워보이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이 세계를 부수기 위해 악마들을 해방하는 이단의 교주처럼 보였다.

[그는 모종의 방식으로 미래의 지식을 알아냈고, 그것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스마트폰을 쥔 김독자가, 일행들에게 뭔가를 명령하고 있었다.

[그가 '구원의 마왕'이 되었던 것도, '빛과 어둠의 감시자'가 되었던 것도. 모두 계획 속에 이루어진 일일 뿐입니다.]

합심한 이야기꾼들이, 김독자의 지위를 '주인공'에서 악당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그의 설화를 야비하고 비겁한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움직입니다!]

그것은 분명 이야기꾼의 본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대도깨비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이야기꾼 또한 그들이 원하는 ■■이 있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이계의 신격'의 군주가 되어 이 세계를 멸망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츠츠츠츠츳!

<스타 스트림>의 여론이 급변하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아스카 렌,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안나 크로프트가 무심히 그녀의 곁을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이미 늦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들이 돌격을 시작했고, 망설이던 성좌들도 전장에 합류했다.

갸아아아아아아아아아!

고통스런 비명을 흘리는 '이름 없는 것들'과 성좌들의 선두가 부딪쳤다.

「김독자와 관계된 모든 존재들이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정희원은 그 전장 한가운데에서 김독자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김독자를 돕지 않아도, 김독자의 곁에서 싸우는 '이계의 신격'들은 많았다. 커다란 두족류의 괴물들, 아기의 몸통에 거대한 꽃을 머리로 단 외신들.

정희원이 우리엘의 힘을 빌어 전력을 다한다 해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들 사이에서, 김독자는 정말로 이 세계선을 끝낼 대재앙처럼 보였다.

「정희원은 김독자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정희원은 김독자가 정말로 원하는 결말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고 생각해왔다. 자신이 원하는 세계의 끝을 김독자 역시 원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저게 진짜로 그가 원하는 끝은 아닐까.」

어쩌면 그에게 동료 같은 건 없었던 건 아닐까.

[성좌, '악마 같은 심판자'가……!]

알고 있다. 우리엘이 하려는 말을, 정희원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김독자가 동료를 아낀다는 것도, 너무나 아끼기 때문에 저런 행동을 벌였다는 것도 알고 있다.

김독자는 스스로의 생명을 희생해 일행들을 세계의 끝으로 보내려는 속셈일 것이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다.」

마치 눈앞에 거대한 벽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벽이, 김독자에게 다가가는 것을 막고 있는 듯했다.

"대체……."

원하던 결말을 갈구하기에, 정희원은 이제 너무 지쳐버렸는지도 모른다.

「김독자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다.」

천천히 그러쥔 검의 그립이 차가웠따. 김독자가 직접 만들어주고, 손에 쥐어줬던 검. [낙원]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신념이 되어주었던 검.

['심판자의 검'이 울음을 터트립니다!]

'악'이 근처에 있을 때만 우는 검이,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대도깨비들이 조롱하듯 선언했다.

[이것이, 이야기의 적 '김독자'의 알려지지 않은 진실입니다.]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로 당신은 내가 아는 '김독자'가 맞는지.

그리고 만약 당신이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과 같지 않다면.

「내 손으로, 정말 당신을 끝내도 되는지.」

"희원 씨."

마치 그녀의 마음을 안다는 듯, 이현성이 그곳에 있었다.

"함께 가겠습니다."

말 그대로 강철의 방패가 된 이현성이 길을 뚫고 달렸다.

별들의 파도를, 이름 없는 것들의 폭풍을 뚫고 나아갔다. 정희원이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듯 이현성 또한 그럴 것이다.

몇 번이고, 다시 몇 번이고 확인해야만 하는 무언가가.

콰콰콰콰콰!

두 사람은 파도를 타듯 날아올라 순식간에 김독자의 후미까지 접근했다.

다른 외신들이 모두 전방에 몰려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희원 씨!"

그녀의 손등에 그려진 혼돈의 고리 때문일까. '이름 없는 것들'은 그녀를 발견하고서도 본체만체 앞으로 밀려갈 뿐이었다.

거대한 빌딩처럼 우뚝 선 김독자가 그곳에 있었다. 새카만 진액이 뚝뚝 떨어지는 거체.

정희원은 자기도 모르게, 그 외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낯설었다.

언젠가 잠든 김독자의 손을 꾹 잡아본 적이 있었다.

귀환자로 돌아와, 일행들이 마련한 방에서 종일 기절해 있던 김독자의 손.

그 손의 감촉이 어땠던가.

그녀의 기척을 느낀 듯, 외신왕이 거대한 머리를 움직여 뒤를 돌아보았다.

쿠구구구구구구…….

거대한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새하얀 입김.

"김독……."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희원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거대한 아가리가 그녀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시나리오의 개연성이 움직입니다!]

[당신의 모든 설화들이 경고합니다!]

거대한 외신왕의 검은 눈에 그녀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저런 표정은 짓고 싶지 않았다. 김독자를, 저런 눈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와는 다르게 이미 손은 움직이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심판자의 검]이 다가오는 촉수를 베어냈다. 불구대천의 적이라도 된 것처럼, 그녀의 검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울컥, 하고 터져 나오는 촉수에서 설화가 흘러내렸다.

「"독자씨, 그때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죠?"

"……그때보다 지금이 더 낫냐는 이야기라면, 그렇습니다.」

그녀도 잘 아는 설화였다.

「"저도 그래요."」

비틀거리며 그 이야기를 듣는다. 세상에서 김독자와 정희원만이 기억하는 그 이야기가, 그녀의 정신을 붙잡았다.

흐려진 눈앞을 걷어내며 주변의 정경이 보였다. 꽤 많은 촉수들을 베어냈다고 생각했는데, 별다른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김독자는 더욱 더 자라나 있었다. 이것이 고작 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김독자는 홀로 광할히 존재하는 하나의 벽 같았다.

【■■■■■■■■■■■■■■■■■■■■■■■■■……】

그 어떤 문장을 써넣어도 채울 수 없는 하나의 벽. 그 벽앞에서 정희원은 절망했다.

[최후의 벽]이 다 무엇인가. 그녀는 겨우 한 사람의 벽조차 넘지 못하는데.

멀리서 이쪽을 향해 소리치며 다가오는 한수영이 보였다.

한수영이라면, 이 벽을 넘을 수 있을까.

-넌 작가라서 좋겠다.

<김독자 컴퍼니>의 휴일.

산 중턱에 드러누운 정희원은 한수영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좋기는.

-아니, 왜. 글 잘 쓰는 사람은 말도 조리 있게 잘 하잖아.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현성한테 연애편지라도 쓰게?

-그게 아니라.

정희원은 말없이 김독자 쪽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만으로도, 한수영은 정희원이 무얼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는 듯했다.

동료들 앞에서 쩔쩔매는 김독자. [노동자들의 휴일]이라는 장난 같은 시나리오를 미련하게 수행하고 있는 사내를 보며, 한수영은 이렇게 말했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어.

정희원은 다시 고개를 들어 한때 김독자였던 것을 바라보았다.

정희원은 한수영처럼 작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김독자처럼 성실한 독자도 아니었따. 그렇기에 한수영처럼 쓸 수도, 김독자처럼 읽을 수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희원이 아무것도 쓰지도 읽지도 못하는 건 아니었다.

-잘 쓰지 못하면 어때, 네 말마따나 넌 소설을 쓰는 사람도 아니잖아.

분명 이 세계는 '멸살법'이라는 소설일지도 모른다. 어딘가의 작가가 쓰고, 누군가가 읽는 소설 속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 소설은 삶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에겐 이 세계의 다음 문장을 쓸 자격이 있었다.」

천천히 검을 내린 정희원이 물었다.

"……독자 씨, 그때 기억하죠?"

김독자가 듣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다만 정희원은, 광활한 벽 위에 그녀가 낸 아주 작은 흠집 위로 손을 올렸다. 그 흠집 사이로 정희원과 김독자가 함께 거닐던 풍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장을 입고, 천국의 계단을 오르던 두 사람이 있었다.

"난 그때 되게 좋았어요. 같이 백화점 가서 옷도 사고, 멋지게 <에덴> 방문 했을 때."

그녀는 이 세계가 좋았다. 모든 게 멸망하고 있었고, 보이는 것은 폐허뿐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세계였기에, 정희원은 자신의 가치를 찾았다.

"……당신이 그렇게 말했잖아. 이 세계가 더 좋다고. 우린 그럼 사람들이잖아."

김독자의 대답을 돌아오지 않았다.

정화원은 촉수에 난 상처를 벌렸다. 그 상처를 잊지 말라는 듯, 그 상처만큼의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듯.

"그래서, 당신은 이렇게밖에 못하는 사람인 거야. 그렇지?"

정희원은 김독자를 이해했다.

「그녀가 김독자를 죽이지 않으면, 이 세계는 멸망한다.」

거대한 외신왕의 눈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뜻에 동조하듯 고개가 움직이는 것도 같았다. 정희원은 그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죽여."

흐려진 시야를 그대로 둔 채, 몸을 떨었다.

김독자의 구원은 잔혹하다. 갈끝으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것처럼, 그에게 구명 받은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웃기지 말라고 해…… 이게 무슨 구원이야……."

정희원의 몸이 벽 앞에 기대듯 비틀거렸다.

아무도 서로를 구하지 않는 세계, 오직 피해자만이 존재하는, 심지어는 그 피해자들의 상처가 전시되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녀에게 건네진 상처투성이의 손.

「김독자는 언제나 그곳에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손을 내미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손을 잡는 사람에게도 용기는 필요하다.

상처투성이의 손을 잡을 용기. 포기하지 않을 용기.

그것으로 자신이 치유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 손을 잡으면 더 커다란 상처를 입을 것을 알면서도, 다시 한번 살아가기 위해 그 손을 붙잡을 용기.

「어떤 구원은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이에 의해 완성된다.」

꾹 짚은 외신의 표면에 정희원의 손바닥이 남았다.

정희원은 그 자국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자신의 검을 쥐었다.

그러자, 정희원의 귓가에 메세지가 들려왔다.

[화신 '정희원'의 ■■이 완성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녀는 마치 손을 잡듯 자신의 검을 굳게 쥐었다.

[당신의 ■■는 '구원'입니다.]





< Episode 93. 전지적 작가 시점 (2) > 끝

< Episode 93. 전지적 작가 시점 (3) >





달려가는 정희원의 모습이 보인다.

칼날 위를 미끄러지는 달빛처럼 ‘이름 없는 것들’ 사이를 미끄러져 나가는 정희원.

그녀가 찾은 해답이 그곳에 있었다.

[화신, 정희원의 ■■은 ‘구원’입니다.]

모두에겐 각자의 ■■이 있다.

마침내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도, 각자의 결말을 선택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정희원!”

화려하게 궤적을 긋는 [심판자의 검]. 일행들은 그 검격을 보며 정희원의 뒤를 쫓았다.

유상아와 함께 하늘로 도약하려던 이길영이 문득 멈춰선 것은 뒤에 남겨진 소녀 때문이었다.

“신유승······.”

우뚝 선 신유승이 울고 있었다. 제자리에 서서, 어디로도 가지 않은 채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신유승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는 명백했다.

[설화, ‘별의 구원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오직 신유승만이 가지고 있는 설화.

저 빛나는 별빛으로 연결된 성좌와 화신. 그 설화가 내뿜는 빛이 너무나 아름답고 찬란해서, 이길영은 저도 모르게 신유승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길영은 신유승이 부러웠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이해’라는 말을 이해하기에도 벅찬 나이였다. 그것 때문에 박탈감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나이가 변명이 되는 것이 좋았다.

「아직은 네가 모를 수도 있어. 그건 괜찮은 거야.」

「네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야. 너한테 의지해서 미안하다, 길영아······.」

「야 꼬맹이, 까불지 말고 뒤로 가.」

안심했다. 심지어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이런 세계여서, 내가 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의지할 수 있고, 어리광 피울 수 있고, 내가 어린애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유승이 있었다.」

어리광 피우지 않는 어린아이가 그곳에 있었다. 항상 별을 바라보는 소녀였다. 이길영 역시 별을 바라보았다. 이길영도 좋아하는 별이었다. 그 별이 얼마나 슬픈 빛을 가지고 있는지, 마음을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려고 할 때 어떤 색깔로 변하는지 이길영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유승처럼 잘 알지는 못했다.」

“언제까지 멍하게 있을 거야? 가자.”

멍하니 고개를 돌린 신유승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 보며, 이길영이 신유승의 손을 잡아챘다.

두 아이는 달리기 시작했다. 꽉 잡은 작은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나는 신유승만큼 독자형을 이해할 수는 없어.’

신유승은 성좌 ‘구원의 마왕’의 화신이다.

그 누구도 그 사이를 갈라놓을 수도, 개입할 수도 없다.

“너만 형 걱정하는 줄 알아? 너만 슬픈 줄 아냐고.”

끌려오는 신유승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이길영은 외쳤다.

이길영은 늘 신유승보다 어려 보이는 게 싫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다.

“난 한강 싫어. 바다가 더 좋아. 그리고 피자보다 치킨이 더 좋아.”

자신 또한, 저 별에게 구해졌기 때문이다.

“PC방이랑! 폰 게임이랑! 그리고······!”

멀리서 그가 좋아하는 별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것은 별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저 하늘을 지배하는 성좌들의 질투와 시기를 받은 그 별은.

【■■■■■■■■■■■······.】

즐겨 보던 웹툰에서 나오던, 무서운 대악마처럼 보였다.

촉수가 흐물거리는 머리가 이쪽을 바라보는 순간, 달리던 이길영의 다리도 굳었다.

고층 빌딩보다 더 큰 높이로 자라난 이계의 왕.

이야기의 적.

이 세계를 파멸시킬 악당.

「신유승에겐, 저 악마가 김독자로 보일까.」

“나도······.”

떨림을 이겨내며 이길영은 중얼거렸다. 저것이 자신이 아는 김독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공포.

[모두 속지 마라!]

[저자는 이 세계를 파멸시킬 것이다!]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존재입니다. 그에게 당신들의 생존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사실은 그가 보고 있던 김독자는 틀렸고.

「“형은 혹시 신인가요?”

“······뭐?”

“아니면 ‘주인공’인가요?”」

저 도깨비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난 신도 주인공도 아냐. 오히려 늘 주인공을 부러워했었지.”」

가까스로 떨림을 멈춘 이길영이 용기를 내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득한 외신의 눈동자가 소년을 마주하고 있었다.

김독자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저 외신에게서 김독자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은 것은 믿음뿐이었다.

―길영아, 관계라는 건 한 가지 방식으로만 맺을 수 있는 게 아냐.

언젠가 유상아에게 신유승과 관련된 고민 상담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유상아는 읽던 책을 덮으며 이렇게 말했다.

―같은 문장을 읽어도 모두 그걸 다르게 이해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이길영은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어서 그 비유가 와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이길영 또한 누군가와 소통하는 스킬이 있었다.

―사마귀나 바퀴벌레도 교감할 때의 느낌이 모두 다르거든요.

[다종 교감]은 그런 스킬이었다. 자신과 완전히 태생이 다른 존재와 교감하는 스킬. 하지만 소년에겐 사람을 이해하는 스킬은 없었다.

김독자는 어떤 사람인가. 잘 모르겠다.

다만 김독자라는 사람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있었다. 머리나 몸통이 터진 사람들의 모습.

「“잠깐 실례 좀 할게.”」

그의 손에 메뚜기 한 마리를 쥐어 주던 김독자의 얼굴.

[설화, ‘벌레의 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순간, 주변의 정경이 흔들리며 소년의 안에서 설화가 깨어나고 있었다.

[성좌, ‘무저갱의 지배자’가 음험하게 웃습니다.]

어디선가 날아든 황충의 무리가 소용돌이치며 세상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날, 이길영은 그대로 열차가 뒤집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손안에서 죽어간 메뚜기처럼.」

그 가공할 격의 향연에 ‘이계의 신격’들이 비명을 질렀다.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이 메시지를 퍼붓기 시작했다.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이 ‘무저갱의 지배자’에게 경고합니다!]

[일부 마왕들이 화신의 힘에 경악합니다!]

맹렬하게 흐르는 설화가 성좌들의 시선을 아랑곳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것은 어른들에게도 말한 적 없는 이야기였다.

같은 [다종 교감]을 가진 신유승만이,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

「“돈도 없으면서 자식을 낳길 왜 낳아······.”」

지독한 갈탄의 냄새. 죽은 바퀴벌레처럼 누워 있던 아빠와 엄마의 모습. 차가워진 살갗을 쿡쿡 눌러보던 기억.

영정사진도 없는 장례식이 끝나고, 자신을 보던 친척들의 눈동자.

「“영미 그 계집애 그럴 줄 알았어. 내가 그 놈팽이는 안 된다고······.”」

「“그래서 쟤는 누가 맡을 거야. 첫째 형네 집은······.”」

「“우리 집은 안 된다. 애가 셋이야.”」

아주 어린 나이부터 거절당해온 삶에 대해, 이길영은 이야기할 언어를 아직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상처인지 설명하고 표현할 능력이 없었다. 상처는 드러나지도 아물지도 못한 채 썩었다.

「“시설 찾아봐. 저런 애들 돌봐주는 곳 있어.”」

이모의 손에 이끌려 서울행 열차를 타고, 개미굴 같은 서울의 지하철 노선도를 마주하며 이길영은 어지러웠다. 세상의 복잡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나 많은 굴들이 있는데, 자신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채집망의 메뚜기들이 길 잃은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얘. 그거 버려! 빨리! 어차피 오래 살지도 못해. 징그럽게!”」

만약 그날 시나리오가 시작되지 않았다면 자신은 어떻게 됐을까.

“독자 형!”

이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독자 형! 저 여기 있어요!”

이길영은 목이 터지도록 부르짖었다.

목소리가 닿지 못해도 좋다. 김독자의 화신이 아니라도 좋다.

「“길영아. 이야기할 수 없으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하나만 기억해줘.”」

다만 말해주고 싶었다.

「“네가 말하고 싶어졌을 때, 형이 옆에 있을게.”」

독자 형은 악당 같은 게 아니라고.

그냥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구해준, 평범한 사람이라고.

[죽여!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된다!]

[다른 세계선의 실패자들이야! 무시하고 밀어붙여! 지금 죽여야 끝난다!]

선두에서 싸우던 ‘이계의 신격’의 열이 밀리고 있었다. 한쪽 방위가 뚫린다 싶더니, 신화급 성좌들을 필두로 한 화신들의 무리가 김독자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막아야 했다.

츠츠츠츠츳!

[해당 행동은 「관리국」의 개연성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비호하려는 대상은 「이야기의 적」입니다.]

설득해야 한다. 독자 형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떻게 해야.

쿠구구구구구······.

밀려오는 적 앞에서도 김독자는 벽처럼 서 있을 따름이었다. 가끔 뭔가를 말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저 말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무력하게 벽에 기대어 있는 것이 싫었다. 김독자의 편에 서고 싶었다.

이런 세계 따위 멸망해도 좋다. 김독자가 이야기의 적이라면, 그 역시 이야기의 적이 되겠다.

하지만 그가 이해하기에 김독자는 너무 어려웠다.

자신이 어린아이라는 것이 싫었다. 어른이었다면. 한수영이었다면, 유중혁이었다면, 정희원이었다면······.

······신유승이었다면.

꾹 쥔 손에 감각이 느껴졌다. 신유승이 그곳에 있었다.

“······바보야. 정신 차려.”

주변을 날아다니는 황충의 무리가 가라앉았다. 신유승이 말하고 있었다.

“나도 아저씨 이해 못 해.”

[전용 스킬, ‘최상급 다종 교감’이 발동합니다!]

“그냥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거야.”

키메라 드래곤을 함께 다루던 두 아이의 스킬이 동시에 발동했다. 서로를 가장 가깝게 이해할 수 있는 상태.

이길영은 김독자는 읽을 수 없다.

하지만, 신유승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두 사람이 함께 읽는 설화에 세계가 흔들렸다. 아주 어렴풋이, 김독자의 얼굴이 보일 것도 같았다. 자신이 아는 김독자의 모습이, 보일 것도 같았다.

[설화, ‘별의 구원자’가 설화 ‘벌레의 왕’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꼬맹이들.”

한수영이 아이들의 곁을 지키듯 섰다. 그 옆을 이현성이, 정희원이, 다시 유상아가 지켰다.

「아이들의 세계를 함께 바라보는 어른들이 있었다.」

창공에서 이지혜의 전함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전함의 포신 곁에 공필두와 이설화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든 포격 준비가 되었다는 듯, 이지혜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대도깨비 온새가 물었다.

[지금 그를 비호하겠다는 겁니까? 그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알면서도? 이미 저 자는 당신들이 알던 ‘김독자’가 아닙니다. 이미 모든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웃기지 마. 그게 뭐가 진실이야. 진실이 그렇게 단순해? 니들이 보여준 건 그냥 편집한 영상일 뿐이잖아. 너흰 늘 그딴 식으로 시나리오를 만들었지.”

한수영은 다가오는 성좌들을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이야기의 적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그놈은 우리 동료야. 그러니까 건드리지 마. 알겠냐?”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포효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전격을 충전합니다!]

“건드리면 다 죽여 버릴 거니까.”

<김독자 컴퍼니>를 비호하는 성좌들이 움직이자, 저 강대한 성좌들의 흐름이 일순간 정체되었다.

츠츠츠츠츳!

[일부 성좌들이 화신 ‘한수영’의 말에 동조하며······!]

개연성의 흔들림을 감지한 대도깨비 하롱이 메시지를 끊었다.

[우습군. 그를 지키겠다고? 그의 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너희들이?]

[<스타 스트림>이 대도깨비의 시나리오 개입을 경고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시나리오가 답답하다는 듯, 후폭풍을 견디는 대도깨비가 묻고 있었다.

[지금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가?]

김독자에게 다가왔던 화신들이 몸을 움츠리며 물러나고 있었다. 김독자에게 호의를 갖고 있던 화신들도, 적의를 갖고 있던 화신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까마득한 천공에 닿은 외신. 심연이 담긴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모두가 몸을 떨며 주저앉았다.

[너희는 그가 무엇을 느끼는지, 무엇을 욕망하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너희는 고작 인간이기 때문이다. 한평생을 바쳐도, 하나의 존재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일행들이 김독자를 올려다보았다.

대도깨비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김독자를 이해할 수 없다.

[당신이 비호하려는 대상은 「이야기의 적」입니다.]

자신의 역할을 잊은 등장인물들을 일깨우듯, 대도깨비가 외쳤다.

[너희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를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이 시나리오는 끝나지 않는다!]

[‘이야기의 왕’이 마지막 시나리오의 향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꾼이, 그 모든 정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행들과 함께, 한수영은 고개를 들었다. 이 모든 시나리오를 총괄한 ‘이야기의 왕’이 존재하는 곳. 한수영은 아득하게 펼쳐진 [최후의 벽]을 바라보았다.

「저 벽이, 그들의 이야기가 남겨질 곳이었다.」

“시나리오가 끝나지 않는다? 좋네. 그거, 모든 독자들의 소원이잖아.”

[화신, ‘한수영’이 자신의 ■■에 근접했습니다.]

한수영은 김독자를 올려다보았다. 두족류의 거대한 머리통을 계속 노려보고 있자니, 김독자를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쓰는 이야기에는 김독자 저 자식이 꼭 필요해.”

마음에 들지 않는 원고지를 뜯는 작가처럼, 한수영이 거칠게 붕대를 풀었다. [흑염]으로 물든 그녀의 설화가 새카만 잉크가 풀어지듯 허공에 번지고 있었다.

마치, 언제까지라도 쓸 수 있다는 듯이.

[<스타 스트림>이 화신 ‘한수영’의 결정에 놀랍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화신 ‘한수영’의 ■■에 경악하며······.]

[당신이 비호하려는 대상은 「이야기의 적」······.]

[해당 행동은 「관리국」의 개연성으로 금지······.]

츠츠츠츠츠······!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화신을 자랑스러워합니다.]

한수영이 씩 웃었다.

“영원히 시나리오를 끝내지 말자고.”

[화신, ‘한수영’의 ■■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 Episode 93. 전지적 작가 시점 (3) > 끝

< Episode 93. 전지적 작가 시점 (4) >





모든 도깨비는 ‘대도깨비’를 꿈꾼다. <스타 스트림>의 도깨비가 올라갈 수 있는 이야기의 정상.

그리고 정상에 오른 자들도 여전히 꿈을 꾼다.

비형은 거대한 방주의 전경을 차지한 [최후의 벽]을 바라보았다. 그렇게나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벽의 대부분은 여백이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비형의 역정에 대도깨비들의 통신 라인이 조용해졌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하늘에서, 비형은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외신왕이 된 김독자의 모습.

그날의 지하철에서부터 마지막 시나리오에 이르기까지. 김독자가 ‘구원의 마왕’이 되고, ‘빛과 어둠의 감시자’가 되는 동안 비형은 상급 도깨비가 되었으며, 마침내는 대도깨비가 되었다.

「시나리오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것은 이야기꾼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실수다.」

도깨비의 본분은 많은 성좌들의 시선을 이끌어 ‘최후의 벽’에 새겨질 이야기를 남기는 것.

때문에 도깨비는 결코 시나리오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 그곳에서 피어나는 설화들에 현혹되어서는 안 되고, 화신들의 고통에 이입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럼에도 비형은 그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그들의 설화를 보며 오래전에 잊었던 몇 가지 감각을 깨우쳤다. 하나의 설화가 끝나고 다음 설화가 찾아오는 순간의 설렘. 자신이 짠 시나리오 안에서 성좌들이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을 볼 때의 벅참.

비형은 김독자에게 ‘시나리오’를 배웠다.

[저들은 시나리오를 잘못 수행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애초에 시나리오라는 건 가역적인 흐름입니다. 많은 별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흐름이란 말입니다. <스타 스트림>의 다른 성좌들도―]

[자네가 키운 설화라고 애지중지하는 모양인데, 더 큰 이야기의 흐름이란 게 있네.]

비형은 소리를 지르려다가 참았다. 모든 대도깨비들이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어먹게도, 지금 비형은 그 대도깨비들의 막내였다.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대도깨비 ‘가랑’이 입을 열었다.

[자네처럼 젊은 도깨비는 저런 결말이 신선하게 보이겠지. 하지만 나는 저런 설화들을 많이 보아왔네. 먼 우주의 역사에 <스타 스트림>을 원망하고 부수려 했던 자가 하나뿐이었는 줄 아는가?]

대도깨비 가랑.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깨비 중 하나이자, 누구보다 ‘도깨비 왕’에 가까운 도깨비.

[무수한 멸망이 있었다네.]

그 어조에서 새어나오는 회한을, 비형은 제대로 헤아릴 수 없었다.

[모든 멸망이 같은 멸망은 아닙니다.]

몇몇 대도깨비들이 경고하듯 비형을 노려보았다. 비형은 움츠러들지 않으려 노력하며 가랑의 시선을 마주보았다. 현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가랑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래, 저들이 꿈꾸는 ■■는 다른 설화들과는 조금 다르지.]

그 발언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지켜보던 대도깨비 온새가 끼어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가랑은 손을 들어 그를 막으며 말을 이었다.

[그 다름이 위험한 걸세. 모든 설화가 반드시 다음 설화의 토대가 되는 것은 아니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떤 설화는 시나리오 전체를 망가뜨리기도 한다네.]

가아아아아아아!

‘이름 없는 것들’의 비명.

한때는 모두 다른 시나리오의 참가자였던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절규하며 성좌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 ‘이계의 신격’을 이끄는 외신왕 김독자가 있었다.

「이야기의 적」.

비형이 알기로, 어떤 재앙에도 그런 호칭이 붙은 적은 없었다. 그런 호칭이 붙을 거라는 언질조차 듣지 못했다.

김독자의 저항을 보며 가랑이 말을 이었다.

[모든 시나리오의 시작에서 주인공은 세계의 일탈을 겪지. 나타난 적과 싸우고, 갈등을 겪고, 무언가를 희생하며 승리를 쟁취한 후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 보상을 받아.]

비형도 알고 있는 이론이었다.

모든 하급 도깨비들이 제일 먼저 듣게 되는 시나리오의 낡은 법칙.

[고루하지만 그것이 시나리오의 핵심이야. 그 순환을 지켜야 다음 시나리오가 만들어질 수 있고, 다시 그다음 세계선이 열릴 수 있는 것일세. 갈등은 봉합되고, 상처는 치유되고, 세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사해야 하네.]

먼 산등성이의 자락이 무너지며 폭발하고 있었다. 모여드는 성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비형도 알고 있었다. 본래, 이 ‘마지막 시나리오’는 예정되어 있던 것이었다.

「세계의 멸망이 찾아오고, 그것을 이겨내는 것.」

저 ‘외신왕’이라는 가상의 적은 오직 그것을 위해 존재했다. 서로 반목하던 별들은 강력한 대적의 강림에 힘을 합치고, 그에 맞서 싸운다.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겠지만 갈등은 해결된다. 세계는 평화로워진다. 호사가들은 그 역사를 노래하고 전승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변하는 것은 없다. <스타 스트림>은 계속된다.」

그것이 바로 도깨비들이 추구하는 ‘시나리오’의 정체였다.

시나리오는 순환되고 반복되어야만 한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최후의 시나리오’에 열광합니다!]

<스타 스트림>이 무엇인지, 시나리오가 어째서 계속되는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도록, 성좌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공급받아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정해진 전개를 거부합니다!]

그들에게 정해진 시나리오를 거부하는 자들.

그리하여 <스타 스트림>의 존재 자체를 무너뜨리려 하는 이들.

[화신, ‘한수영’의 ■■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

끝을 끝이라 말하지 않는 모순의 ■■이 그곳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주의 이야기꾼이 아닌 인간 작가가 정한 결말이었다.

<스타 스트림>의 순환을 거부하고, 영원한 싸움을 택한 존재들.

콰아아아아아아아!

폭음 속에서, 마침내 대도깨비 가랑이 선언했다.

[이번 세계선은 여기서 판을 접도록 하지.]

그때까지 침묵을 고수하던 대도깨비들도, 서로 눈치만 보고 있던 대도깨비들도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형이 뭐라고 나서기도 전에, 곁에 있던 바람이 말했다.

[비형, 미안하지만 일이 이렇게 됐네. 이번은 자네가 참아야 해.]

바람의 표정을 본 순간, 비형은 깨달았다. 이곳에 모인 대도깨비들은 우주 제일의 이야기꾼들이었다. 시나리오를 지배하고, 별들을 농락하며 이 세계관을 관장해 온 지배자들.

그런데 이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이 만든 ‘이야기’가 두려워진 것이었다.

[메인 시나리오 강제 집행에 남은 개연성을 모두 사용하겠습니다.]

시나리오 강제 집행은 도깨비들이 행사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스타 스트림>의 흐름을 강제로 제어하는 만큼 말도 안 되는 개연성이 필요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일종.

특히나 그것이 마지막 시나리오에 행사되는 만큼, 그 양은 상상을 불허했다.

츠츠츠츠츠츠츠!

관리국의 개연성이 움직이자, <스타 스트림>의 모든 하늘이 눈부신 스파크로 뒤덮였다. 세계선의 어디에도 어둠이 발을 붙일 곳은 보이지 않았다.

[저들은 ‘악’으로 끝나야 합니다.]

대도깨비들의 뜻에 동조하는 거대 설화들이 그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거대 설화, ‘멸망한 신화의 성전’이 관리국의 의지에 따릅니다!]

[거대 설화, ‘신새벽의 도래’가 흐름에 동조합니다!]

[거대 설화, ‘불멸의 올림포스’가 관리국의 뜻을 존중합니다!]

비형은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대도깨비들이 써 내려가는 최종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든 대도깨비들의 당신에게 의결을 강요합니다!]

그는 아직 이 결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비형!]

바람의 외침에도 비형은 대답이 없었다.

[<스타 스트림>이 대도깨비들의 개입에 반발합니다!]

허공의 스파크는 곧 대도깨비들에게도 전이되었다. 가공할 후폭풍이 밀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대도깨비들이라고 해도, 시나리오에 개입하는 것은 이만큼이나 큰 대가를 요구한다.

[나 ‘대도깨비 가랑’은 정식으로 시나리오에 관여할 것을 선언한다!]

가랑의 발언을 시작으로 대도깨비들이 선언을 이어갔다.

[나 ‘대도깨비 녹수’는 정식으로 시나리오에······]

[나 ‘대도깨비 하람’은······.]

열 명이 넘는 대도깨비들이 모두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정식으로 시나리오에 개입한다는 것. 그것은 그들이 ‘이야기꾼’의 방관자적 직위를 내려놓겠다는 의미였다.

잠시 후, 허공에서 메시지가 들려왔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대격변을 일으킵니다!]

[<스타 스트림>이 메타적인 개입을 용인합니다.]

[이제부터 ‘이야기꾼’은 시나리오의 방관자가 아닙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대도깨비’들의 선택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일부 성좌들이 ‘대도깨비’들의 만행에 강한 질타를······!]

비형은 그런 대도깨비들을 바라보았다. 반발하는 성좌들의 메시지들을 무시하면서까지, 이 세계를 종결지으려는 그들의 의지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시나리오’를 써왔는지도 모른다.

멀리서, 그런 대도깨비들을 응시하는 시선이 있었다.

비형은 그 시선과 마주했다.

외신왕이 되고, 「이야기의 적」이 된 김독자. 시나리오 외부의 존재가 된 그의 말은, 이제 비형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왜일까. 비형은 그 순간 김독자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대도깨비들은 아직도 저 녀석을 잘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독자가 어떤 존재인지.

시나리오에 정식으로 개입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등장인물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비형은 묵묵히 그 시선을 받으며 걸음을 내딛었다.

[당신의 ■■이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마침내 비형도 자신의 ■■를 결정할 차례였다.

*

대도깨비들의 개입과 함께, 시나리오의 균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당신이 비호하려는 대상은 「이야기의 적」입니다.]

[관리국의 개연성이 당신의 행동을 억제합니다!]

한수영을 비롯한 일행 모두가 개연성의 후폭풍에 휘말리고 있었다.

새파란 스파크가 일행들의 전신을 족쇄처럼 휘감았다.

“수영 씨, 이거!”

“이 개자식들이······. 이대로 시나리오를 끝낼 속셈이야.”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고요히 분노합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김독자 컴퍼니>의 거대 설화들이 관리국에 저항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들의 상대는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거대 설화’였다.

[지금이다! 머리를 공격해!]

이름 없는 것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성좌들이 마침내 김독자를 향해 포화를 쏘기 시작했다.

“김독자!”

한수영이 외쳤지만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당신은 대상을 비호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비호하려는 대상은 당신이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씨발, 개소리 하지마.”

대도깨비가 남긴 말이 저주처럼 떠올렸다.

인간은 한평생을 바쳐도 하나의 존재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수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현성이, 정희원이, 이지혜가, 다시 신유승과 이길영이, 마지막으로 전함 위의 동료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들 중에 김독자가 아닌 이들은 없다. 이곳의 모두는, 적어도 한움큼씩은 김독자의 생에 대한 지분이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부족했다.

‘이 자식 어디 갔어?’

한수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아아아아아아아!”

몸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정희원이 움직였다. 후폭풍이 그녀의 근육을 파열시키고, 혈관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피칠갑이 된 몸을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심판자의 검]을 굳게 쥔 채, 한 걸음 한 걸음 김독자를 향해 나아갔다. 김독자를 베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카가가가가각!

날아드는 성좌의 날붙이를 튕겨낸 정희원이 울컥 피를 토했다.

그의 뒤를 이현성이 따랐다.

쿠드드드드!

외신이 된 김독자가 후폭풍 속에서 성좌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런 김독자를, 동료들이 스파크 속에 넝마가 되어가며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김독자를 지킬 수 없다고?”

[설화, ‘예상 표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별의 구원자’가 ‘구원의 마왕’을 찾습니다.]

[설화, ‘벌레의 왕’이 ‘구원의 마왕’을 찾습니다.]

[설화, ‘멸망의 심판자’가 ‘구원의 마왕’을 찾습니다.]

그 모든 설화들이 김독자에게 감응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는 김독자를 부르짖고 있었다.

[설화, ‘예상표절’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이해를 못해서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지켜줄 수 없는 것이라면······.

[다수의 성좌들이 <김독자 컴퍼니>의 비극에 탄식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관리국의 농간에 항의하며······!]

한수영의 입가에 피가 맺혔다. 과열된 머리에 현기증이 일고 의식이 가물거렸다.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짚은 것은 그때였다.

곱슬거리는 금발이 눈앞을 지나친다 싶더니, 뭔가가 일행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마치 투명한 벽이 그들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불가능한 소통의 벽’이 <김독자 컴퍼니>를 보호합니다!]

벽을 각성한 장하영이, 한수영을 부축하며 김독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기, 나보다 구원의 마왕 좋아한 사람 있어?”

츠츠츠츠츳!

「독자 씨, 이제 잃어버린 물건 이야긴 안 하겠습니다. 지겨우신 것 같아서······.」

「형, 나 여기에 있어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걱정 마요, 아저씨 두고는 아무 데도 안 갈 거니까.」

뿔뿔이 흩어진 문장들.

<김독자 컴퍼니>가 쌓아온 설화들이, 하나의 테마로 엮이고 있었다.

[대도깨비들의 ‘최후의 벽’의 조각이 출현한 것에 경악합니다!]

[‘불가능한 소통의 벽’이 자신의 조각을 끼워 맞춥니다.]

한수영은 장하영에게 의지한 채 외신왕이 된 김독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벽의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고 무뚝뚝한 벽.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첫 번째 ‘테마’가 깨어납니다!]

그 벽은 그 너머에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곳에 있었다. 이 세상엔 벽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서로가 다치지 않고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한수영은 불가능의 벽 위에 자신의 첫 문장을 썼다.

「멍청아.」

자신이 썼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멍청한 한 마디였다. 하지만 한수영에겐 다음 문장을 쓸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벽이 흔들린 것은 그때였다.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벽 위로 그녀가 쓰지 않은 다음 문장이 떠올랐다.

「■■■······ 한수영.」





< Episode 93. 전지적 작가 시점 (4) > 끝

< Episode 93. 전지적 작가 시점 (5) >





김독자다. 이건 분명 김독자의 문장이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한수영은 다음 문장을 썼다. 

「뭐야, 멀쩡하네.」 

작가라고 자신의 문장을 모두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한수영은 그렇게 밖에 쓸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김독자는 읽어낼 것이다. 

김독자는 그녀가 아는 최고의 독자니까. 

툭. 

가볍게 부딪치는 노크 소리가 김독자의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곳곳에서 부딪치는 병장기 소리에 귀가 아팠다. 일행들이 분투하고 있다. 여유를 부리고 있을 새는 없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 

「······■■■■■」 

벽에 적힌 문장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까의 소통이 그저 희박한 확률의 우연이었던 것처럼. 

「야! 알아볼 수 있게 적어!」 

장하영의 도움이 있었음에도, 김독자의 메시지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불가능한 소통의 벽’이 자신의 힘을 개방합니다!] 

츠츠츠츠츳! 

너무 많은 문장들이 맥락 없이 벽 위를 떠돌고 있었다. 

모두 자신과 일행들이 김독자에게 한 말들이었다. 어떤 문장은 또렷하게 보였고, 어떤 문장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수영아.” 

“······알아.” 

한수영은 장하영의 말을 들으며 다시 한번 손을 벽에 가져다 댔다. 

떠도는 문장들을 조합해 어떻게든 김독자의 메시지를 찾아내기 위해 애썼다. 

[설화, ‘예상 표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대상은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활자와 활자를 잇는 것은 맥락이다. 맥락이 없는 바다에 펼쳐진 활자들은 마치 처음부터 읽지 못하게 만들어진 책 같았다. 

「“퇴근하겠습니다.”」 

「“등산 가면 보조 배터리 주신다고요?”」 

한수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맥락 없는 문장들을 어떻게든 연결해보는 것이 전부였다. 

말이 안 되는 문장에 맥락을 부여해 의미를 만든다. 전개가 아닌 것을 전개처럼 보이게 배치한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이어도 언제나 의미가 빈 부분이 있었다. 

“김독자! 말해! 계획이 뭐냐고! 지금부터 우리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건데!”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포효하는 외신왕이 성좌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피를 흘리는 일행들이 후폭풍 속에서 스러져 갔다. 

한수영은 이를 악물었다. 김독자가 말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으로도 좋다. 중요한 것은 김독자의 의도를 읽는 것이다. 

일행들에게 계획을 전하지 않은 채 움직인 의도. 

외신왕을 택한 김독자의 생각을, 알아내는 것이다. 

그러자 하나둘, 단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만약 멸살법이 유료였으면 나는 지금까지 얼마를 쓴 거지?」 

「통장에 2천만 원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방이 두 개면 나머지 방에는 보통 뭘 넣는 거지?」 

“······넌 바깥에서 만났으면 절대 친구 안 했어.” 

메모처럼 내던져진 단어들. 한수영은 단어와 문장들을 모았다. 

훌륭한 작가는 먼저 훌륭한 독자여야 한다. 

한수영은 그런 것을 읽는 법을 알고 있었다. 

「돈은 대체 어떻게 버는 거지」 

때로는 자신이 읽어낼 수 없는 문장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저 페이지를 넘기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언젠가 다시 그 페이지로 돌아왔을 때 그 문장을 다시 읽을 수 있도록. 

[대상은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페이지를 넘기고 또 넘겨서, 다음 장을 넘기고 또 넘겨서, 그 이해 불가능한 문장에 대한 단서를 필사적으로 그러모으는 수밖에 없다. 

「내 인생에는 돈 벌 개연성이 없나?」 

츠츠츠츠츠······! 

멀리서 정희원이 무릎을 꿇는 것이 보였다. 달려온 이설화가 그녀를 부축했고, 유상아와 이현성이 그녀를 향해 날아드는 병장기를 막아섰다. 

[관리국의 개연성이 당신의 시나리오 개입을 억제하고 있습니다!] 

김독자의 말이 맞다. 모든 게 다 개연성 때문이다. 

김독자가 가난했던 것도, 그들이 이런 꼴이 된 것도. 

[관리국의 개연성이 당신의 몸을 구속합니다!] 

츠츠츠츠츳! 

이 세계에서 개연성은 곧 힘이다. 더 그럴듯한 개연성을 가진 쪽으로 시나리오는 흘러간다. 

[당신의 성운은 지나치게 많은 개연성을 위반하였습니다.] 

한수영도 알고 있었다. 이 후폭풍은, 그동안 운 좋게 넘겨왔던 위기들의 대가였다. 이렇게나 많은 일행들이 있었음에도, 아무도 잃지 않고 마지막 시나리오까지 왔다. 

반면, 이곳까지 온 다른 화신들은 그들보다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어째서 저들만······.」 

「이건 불공평해.」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김독자 컴퍼니>는 지나치게 많은 개연성을 어겨왔다. 

희생이 필요한 모든 곳에 희생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오직 한 사람만이 반복해서 희생해왔다. 

“김독자.” 

그는 몇 번이나 죽었고, 다시 살아났다. 

죽었어야 할 존재를 살리기도 했다. 부활 특성을 이용해서, 혹은 명계를 방문하면서. 미래를 바꾸면서. 

「그래서 김독자는 이야기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김독자 컴퍼니>가 쌓아온 거대 설화에는, 개연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한수영이 벽을 긁듯 문장을 그러쥐었다. 

새로운 문장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당분간 성운 금고는 네가 맡아.”」 

그것은 얼마 전 한수영과 김독자가 나눈 대화였다. 

「“······뭐야, 다 써버려도 난 모른다?”」 

시스템을 통해 받은 금고 관리 권한. 

짠돌이 김독자가 웬일인가 싶었다. 

그때는 돈 관리가 귀찮으니 떠넘기는 것이라 생각했다. 

[성운의 잔고를 확인하시겠습니까?] 

하지만, 김독자가 정말 그런 이유로 누군가에게 ‘금고’를 넘길까. 

한수영은 홀린 듯 금고를 열었다. 

「“많이도 모았네. 쪼잔한 자식. 이렇게 아껴서 뭐 하려고?”」 

「“다 쓸 곳이 있어.”」 

금고 속에 쌓인 막대한 코인들. 세상의 모든 별들이 탐낼 금은보화가 그곳에 있었다. 이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후원 단위이자, 시나리오를 움직이는 동력.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설화 중 하나는 [코인]이다.」 

하지만 이제는 코인으로 화신체를 강화하는 것도, [도깨비 보따리]를 통해 살 만한 것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늘 궁금했다. 녀석이 악착같이 코인을 모았던 이유가. 

[코인을 ‘거대 설화’의 성장에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이제야 한수영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사용한다.” 

[성운에 비축되어 있던 143,245,199코인을 개연성으로 지불합니다!] 

쿠구구구구구구! 

그녀의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살코기를 탐하는 맹수처럼 주변 설화들이 달려들었다. 황홀한 금빛이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코인의 설화를 탐식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몸집을 불립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의 대비가 더욱 뚜렷해집니다!] 

자본을 먹은 거대 설화는 더 강력한 힘을 가진다. 

설화의 세부를 더욱 충실하고 강력하게, 화려하게 구현한다. 

쿠구구구구구구! 

거대 설화의 저력이 관리국의 개연성에 저항하기 시작하자, 대도깨비들과 성좌들도 당황한 모습이었다. 

정희원의 검이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었고, 이현성의 방패가 더욱 단단해지고 있었다. 신유승과 이길영이 소환한 괴수종과 충왕종들이 몰려오며 후미의 성좌들을 물어뜯었다. 

“발사!” 

이지혜의 전함이 발포를 시작하자 달려들던 전방의 화신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승산이 보이던 것도 잠시뿐이었다. 

[관리국의 개연성이 제재의 수위를 높입니다!] 

과도한 개연성의 사용에 천공에 새카만 균열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시나리오 무대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몇몇 대도깨비들의 입에서 설화가 흘러내렸다. 이번 싸움은 저들에게도 생사를 건 사투인 것이다. 

자신들이 원하는 결말을 만들기 위해, 도깨비들은 이 시나리오에 직접 뛰어들어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다. 

츠츠츠츠츳! 

“흑염룡!” 

거친 [흑염]이 한수영의 주변을 감쌌다. 날아드는 공격들을 걷어내며, 전방을 향해 [흑염]을 쏘아 올렸다. 바로 곁에서는 장하영이 무림의 스킬들로 한수영의 등을 지키고 있었다. 

왜 김독자는 이 역할을 자신에게 맡겼을까. 

자신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었다.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 

그런데 김독자는 자신에게 이 역할을 맡겼다. 

스스스스스······. 

장하영의 벽이 다시 흩어지고 있었다. 힘을 모두 소진하여 다시 돌아가는 벽. 

관리국의 제재에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잠깐 닿은 듯하던 김독자는 다시 멀어져갔다. 이야기의 흐름은 대도깨비들에게 다시 넘어가고 있었다. 한수영이 소리를 내질렀다. 

[당신의 ■■은 ‘끝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도 잃지 않는 이야기. 

모든 시나리오의 끝에서, 커다란 집에 모두가 함께 모여 사는 이야기. 

그 소박한 꿈을 위해 일행들은 싸웠다. 

하지만 개연성이 부족해서,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그 순간, 한수영의 머릿속에 빛이 번쩍였다. 

부족한 개연성. 

「김독자가, 자신도 유중혁도 아닌 한수영에게 이 역할을 맡긴 이유」 

[성좌, ‘해상전신’이 화신 ‘한수영’을 바라봅니다.] 

투두둑······. 

자상을 입은 어깨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한수영은 어깨를 붕대로 대충 감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리치는 스파크 너머로 드리워진 아득한 <스타 스트림>의 별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성좌들이 이 세계의 마지막을 보고 있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의 진행에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관리국과 신화급 성좌들의 횡포를······!] 

한수영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래, 너흰 성좌들이니까······.” 

김독자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녀석도 성좌니까. 

어떻게 해야 시나리오가 더 재미있어지는지, 어떻게 해야 더 긴장감이 생기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독자니까. 

「그래서 김독자는 일행들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수영은 손을 꾹 쥐었다. 모든 코인을 사용했기에 그녀는 빈손이었다. 

하지만 김독자가 그녀에게 남긴 것은 코인이 아니었다. 

“······첫 번째 시나리오가 시작될 때 너희가 말했지. 우리보고 공짜로 살아왔다고. 그러니 앞으로는 대가를 지불하라고.” 

김독자가 남긴 것은.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화신 ‘한수영’의 말에 집중합니다.] 

[성좌, ‘외눈 미륵’이 화신 ‘한수영’의 말에 집중합니다.] 

그들이 살아온 삶 전체였다. 

“그 말, 너희에게 돌려줄게.” 

한수영의 신호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 비유가 채널을 차단했다. 

성좌들의 채널이 암전되었다. 

[채널 BY-9158의 모든 송신화면이 차단됩니다.] 

[성좌, ‘천제의 풍신’이 갑작스런 암전에 당황합니다!] 

[성좌, ‘조선제일술사’가 다음 장면을 보고 싶어합니다!] 

세계가 암흑에 빠지자, 다른 시나리오 지역에서 채널을 보고 있던 성좌들이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김독자 컴퍼니> 채널의 구독좌들은, 모두 비유의 채널을 경유해야만 한다. 다른 채널에 소속되어 있던 구독좌들도, 이 순간만큼은 비유의 채널을 통해서만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이야기는 이제 유료야.”





< Episode 93. 전지적 작가 시점 (5) > 끝

< Episode 93. 전지적 작가 시점 (6) >





유료화 선언과 함께 채널에는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캄캄한 암전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한수영의 가쁜 숨소리뿐이었다.

“이 비극을 계속 보고 싶으면―”

지금 <김독자 컴퍼니>에게 부족한 것은 ‘개연성’이었다.

개연성. 이야기의 자연스럽고 그럴듯한 흐름.

오직 수많은 성좌들의 시선과, 그들이 후원한 코인으로만 바꿀 수 있는 법칙.

“너희도 대가를 지불해.”

이제야 그녀는 김독자의 모든 계획을 이해했다. 이해했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일행들을 살리기 위해 그가 살아온 비극 전체를 파는 것. 마치 언젠가 그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김독자는 <김독자 컴퍼니>가 만든 비극을 팔아, 이 시나리오를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크게 동요합니다!]

한수영의 선언에 성좌들은 망설이고 있었다.

한수영은 언젠가 처음으로 자신의 소설이 유료화됐던 기억을 떠올렸다.

「작가님, 내일부터입니다.」

그날도, 지금 같은 기분이었다. 앞으로의 미래를 전혀 알 수 없는 기분.

내 글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읽어줄까.

이 이야기를 팔아서, 내가 얼마나 살아갈 수 있을까.

‘빌어먹을 김독자. 나한테 이런 역할을 맡겼다 이거지.’

지금 그녀가 팔아야 하는 것은, 소설이 아니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다음 이야기를 하고 싶어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다음 이야기를 하고 싶어합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다음 이야기를 하고 싶어합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다음 이야기를 하고 싶어합니다!]

<김독자 컴퍼니>의 피와 눈물로 쓰인 문장들.

그녀가 팔아야 하는 것은 그들의 삶이었다. 함부로 고칠 수도, 농담처럼 이야기할 수도 없는 설화들.

그럼에도 한수영은 그 설화들을 성좌들 앞에 내놓았다.

비유가 허공에서 우려 섞인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수영은 안심하라는 듯 씩 웃었다.

“아무도 없어? 아쉽네. 이제부터 엄청 재밌어지려는 참인데.”

이것은 오직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김독자 컴퍼니>에서 악역을 담당해야 하는 한수영만이, 팔 수 있는 이야기.

그녀에게 동조하듯 외신왕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슬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습군. 너희들의 이야기 따위 누가 궁금해한다는 거지?]

침묵을 깬 것은 신화급 성좌 포세이돈이었다.

멀리서 다른 신화급 성좌들의 모습도 보였다. 모두 한수영을 비웃고 있었다.

[너희들의 ‘설화’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대도깨비들도 마찬가지였다. 최후를 앞둔 한수영의 선택을 실책이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츠츠츠츠츳!

성좌들이 빠져나가자 채널의 규모는 줄어들었다. 기회를 틈타 난립하는 채널들도 있었다. <김독자 컴퍼니>를 적대시하는 도깨비들이 만든 채널들.

[끝내라.]

뒤쪽에서 제자리를 지키던 성좌들이 움직였다. 신화급, 또는 그에 거의 준하는 최상격의 설화급 성좌들이었다.

[성좌, ‘우주의 순환을 책임지는 자’가 시나리오의 전장을 관망합니다!]

[성좌, ‘연기 나는 거울’이 시나리오의 전장에 현현합니다!]

[성좌, ‘천둥과 전쟁의 주인’이 시나리오의 전장에 현현합니다!]

인도 신화의 브라흐마.

아즈텍 신화의 테스카틀리포카.

슬라브 신화의 페룬까지.

줄곧 하위 시나리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다른 거대 성운들의 성좌들.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 또한 ‘설화’였다.

거대 설화들의 준동이 시작되자, 전장을 압박하는 흐름이 더욱 거세졌다.

가아아아아― 퍼거걱!

김독자를 향해 다가오는 성좌들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던 ‘이름 없는 것들’이 무차별적으로 터져 나가고 있었다.

신화급 성좌들은 각 성운의 ‘거대 설화’에 큰 지분을 가진 존재들. 그들이 개연성을 움직이자 전황은 순식간에 성좌들의 쪽으로 기울었다.

한수영은 다가오는 별들의 파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희가 보지 않는 곳에서도 우린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화면은 꺼졌지만, 여전히 음성은 남아 있었다.

지금 그녀의 목소리는 채널의 모든 성좌들에게 들리고 있을 것이다.

「한수영도 알고 있었다. 모든 성좌들이 그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김독자 컴퍼니>에게는 적이 많았다. 누군가는 그들의 설화를 응원했지만, 누군가는 그들을 질투하거나 심지어는 증오했다. 근본을 찾을 수 없는 악의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희로애락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어떤 설화를 오래도록 보아온 자들이라는 것.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한 이야기는, 이윽고 그의 일부가 된다.」

마치, ‘멸살법’과 김독자처럼.

“하지만 너희가 눈을 감는 순간, 니들이 보아온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

청자를 정하지 않은 말. 그렇기에, 실은 모두를 향한 선언이었다.

이윽고 ‘이계의 신격’들의 앞 열을 전멸시킨 성좌들이 밀려들었다.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이 그들을 막아섰다.

콰아아아아아!

포세이돈의 파도 위로 제우스의 전격이 더해진 격의 세례가 밀려오고 있었다. 전기구이처럼 타버린 이계의 신격들이 죽어갔다. 아무리 <김독자 컴퍼니>라도, 지금 같은 몸상태로는 저 파도를 받아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한수영은 동료들을 믿었다.

“난 죽어도 연중은 안 해.”

한수영이 온 힘을 다해 [흑염]을 쏘았다. 개연성의 억제력에 의해 [흑염]의 파괴력은 평소의 사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이윽고 코앞까지 밀려온 포세이돈의 파도가 그들을 덮치는 순간.

「아주 잠깐 세상이 멈추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미세한 붓으로 덧칠되듯이, 이 세계를 이루는 근본적인 뭔가가 변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정지했던 세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시나리오에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포세이돈의 파도와 제우스의 전격이 그녀와 <김독자 컴퍼니>를 덮쳤다.

콰드드드드드!

정확히는, 그들의 바로 앞을 막은 보호막을 덮쳤다.

탄탄하고 광활한 강철의 벽. 이현성의 설화였다. <오즈>에서 행성 전체를 감쌌던 그의 설화가 일행들을 지키고 있었다.

여전히 이현성은 관리국이 건 제약을 받는다. 그런데 어떻게?

“수영 씨.”

이현성의 전신에 가공할 스파크가 흐르고 있었다

이현성뿐만이 아니었다. 관리국의 제재로 녹초가 되어가던 <김독자 컴퍼니>의 모두에게서 새파란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옥죄던 근육이 자유로워지고, 구속된 마력이 해방되고 있었다.

[채널 내의 후원 지급 오류가 정상화되었습니다.]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밀려 있던 후원금이 일시 지급됩니다!]

허공에서 작게 우는 비유의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양의 간접 메시지가 한수영은 귓전을 때렸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이 가진 코인의 절반을 기쁘게 후원합니다!]

거의 신화급에 다다른 성좌가 모은 코인의 절반이란 대체 어느 정도일까. 한수영은 그 액수를 짐작할 수 없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투덜거리며 막대한 양의 코인을 지불합니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수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성운의 금고에 빠른 속도로 잔고가 쌓여갔다.

[성운 금고 총액 : 83,112,540 C]

[성운 금고 총액 : 162,423,800 C]

.

.

.

[성운 금고 총액 : 1,041,512,080 C]

코인의 총액은 1억을, 다시 10억을 돌파했다.

이제 한수영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그 후원액을, 모조리 개연성에 지불하는 것.

츠츠츠츠츠츳!

“모두 버텨!”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빙긋 웃습니다.]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후원 상한을 초월한 양의 코인을 후원했습니다!]

파인애플 티셔츠를 입은 영감.

언젠가 한수영은 [페라르기니] 광고를 찍으러 갔을 때 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정말 이런 광고로 차가 팔릴 거라 생각해?」

한수영의 말에, 양산형 제작자는 기묘한 대답을 남겼다.

「팔려고 광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팔릴 물건을 광고하는 거라네.」

이제 한수영은, 그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성좌, ‘조선제일술사’가 5,000코인을 후원합니다!]

[성좌, ‘미염공 장목후’가 5,100코인을 후원합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자신의 모든 비자금을 후원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명계 잔고의 절반을 후원합니다!]

[성좌, ‘지고한 빛의 신’이 2,100,000코인을 후원합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1,500,000코인을 후원합니다!]

익히 수식언을 알고 있던 성좌들.

[성좌, ‘절름발이 사기꾼’이 15,000코인을 후원합니다.]

[성좌, ‘잡배의 군주’가 450,000코인을 후원합니다.]

[성좌, ‘달걀을 세우는 모험가’가 18,000코인을 후원합니다!]

[성좌, ‘이천일류의 달인’이 4,000코인을 후원합니다!]

[북두성군의 모든 별들이 300,000코인을 후원합니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300코인을 후원합니다!]

알고 있었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성좌들.

[수식언을 밝히지 않은 다수의 성좌들이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개연성에 힘을 보탭니다!]

그리고, 그들이 몰랐던 성좌들까지.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를 함께했던 모든 성좌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후원하고 있었다.

꺼져 있던 채널에 빛이 돌아오고, 중계가 시작된다.

[채널, BY-9158의 중계가 재개됩니다!]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모든 코인 속에 성좌들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 설화의 끝을 보고 싶다는 마음.」

한수영 역시 그 마음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 못 하는 자들도 있었다.

[대체 무슨 짓들을 하시는 겁니까. 설마 저 화신들을 동정하는 겁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이야기의 적」들을? 다들 정신 차리십시오! 당신들이 누구인지 잊었습니까? 성좌들이여, 더러운 이야기에 눈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터져 나오는 대도깨비의 고함. 그러자 누군가가 답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은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을 차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츠츠츠츠츠츠······!

가공할 개연성의 폭풍이 밀려나고, 포세이돈의 파도가 가라앉는다.

한수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람이 흐르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의 의지가 새로운 개연성의 흐름을 받아들입니다.]

뭔가가, 변하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이 시나리오의 규칙 변경을 고려합니다.]

그녀와 일행들을 짓누르던 관리국의 모든 개연성이 사라지고 있었다. 불균형하게 맞춰져 있던 시나리오의 균형이 평형을 되찾고 있었다.

[당신은 여전히 ‘이야기의 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김독자는 어렵다.

[‘이야기의 적’은 당신에게 이해받길 원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시나리오의 규칙이 변경됩니다.]

[지금부터 모든 성좌들은 최종 시나리오에서 자신의 진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한수영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세계의 껍질이 한 꺼풀 벗겨지듯, 주변 정경이 변하고 있었다.

【■■■■■■······ 가! 싸워! 여기가 우리의 전장이다!】

말을 탄 사내 하나가 한수영의 곁을 지나쳤다. 분명, 방금전까지 이계의 신격이었던 존재. ‘이름 없는 것들’이었던 존재였다. 촉수와 끈적한 진액으로 뒤덮여 있던,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불러일으키던 미지의 괴물들.

【이길 수 있어! 끝까지 포기하지 마!】

그들의 모습이 바뀌고 있었다. 누군가는 사람으로, 누군가는 난쟁이로. 각기 다른 종족이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이형의 존재가 아니었다.

【범각! 움직여! 이곳이 우리가 꿈꾸던 마지막 시나리오다!】

【마르크!】

‘이름 없는 것들’이었던 모두가, 그곳에서는 이름이 있었다.

[당신은 ‘이야기의 적’의 편이 되었습니다.]

황혼이 내리는 전장에서, 성좌들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들. 그들이 대열을 이루며 성좌들을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그들 중에는 이현성을 닮은 사내도 있었고, 신유승을 닮은 아이도 보였다. 정희원이나 이길영, 이지혜를 닮은 이들도 있었다.

【제법이네, 이번 세계선에선 여기까지 왔다 이거지.】

얼핏, 한수영 자신을 닮은 소녀도 보였다. 그들 모두가, 「이야기의 적」의 편에서 싸우고 있었다.

한수영은 멍한 눈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좇았다.

「버려진 모든 세계선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녀가 문장으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세계.

오직, 독자의 눈으로만 상상할 수 있었기에 [예상 표절]로도 읽지 못했던 세계.

「이것이 김독자가 꿈꾸던 세계였다.」

한수영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방금전까지 외신왕이 있었던 장소. 너무나 커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던 심연이 드리워져 있던 그곳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한수영, 엑스트라가 주목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

찢어진 검정색 코트 사이로, 연약하게 드러난 흰색 코트.

「“엑스트라는 주목을 못 받으니까 엑스트라지.”」

한수영은 비틀거리듯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

「“딱히 뭐 방법이 없어. 보통은 희생하면서 주목을 끌거나, 아니면······.”」

걷고, 걷고, 또 걸어서 마침내 사내의 앞에 도착했다.

「“그들에게도, 이야기를 줘야지.”」

사내는 가만히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수영은 그런 김독자의 앞에 우뚝 섰다. 답지 않게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시야가 흐려져서 얼굴이 똑바로 보이지 않았다.

“고생했어.”

그곳에 김독자가 있었다.





< Episode 93. 전지적 작가 시점 (6) > 끝

< Episode 94. 끝의 시작 (1) >





저렇듯 뻔뻔하게 웃는 낯짝이라니. 독한 말을 쏟아붓고 싶었다. 또다시 이런 짓을 벌이면 죽여버리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한수영.”

그럴 수가 없었다.

고개를 떨구니 김독자의 발목이 보였다. 양산형 제작자가 만들어 준 전투용 정장이 넝마가 되어있었다.

외신왕이 되어 성좌들과 싸운 김독자의 전신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처투성이였다.

“······괜찮아?”

이 와중에도 자신을 걱정하는 김독자를 보며, 한수영은 이 감정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봐,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의 답에 만족합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

하늘에서 빛나는 별들의 시선. 들끓는 간접 메시지를 들으면서도 한수영은 아직 등줄기가 서늘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암전되어 있었던 채널이 눈앞에 선연했다.

「만약, 조금만 실수했더라도」

성좌들이 도와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녀가 생각했던대로 개연성이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일행들이 버티지 못할 수도 있었다.

방금까지 그녀가 떠안고 있던 것은 수정 가능한 원고가 아니었다.

한 발짝이라도 잘못 딛으면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부담감.

김독자는, 언제나 이런 기분 속에서 시나리오를 수행해 왔던 것이다.

[당신의 뇌에 심각한 과부하가 걸린 상태입니다!]

반쯤 비틀거리는 한수영을 김독자가 부축했다. 한수영은 그 손을 쳐내려다가 대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시는 나한테 이런 거 시키지 마.”

“너만 할 수 있는 일이었어.”

그 말을 들으며, 한수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넌 독자가 원하는 게 뭔지 잘 알잖아.”

「김독자가 원하는 ‘끝’은 무엇일까.」

모든 세계를 적으로 앞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한수영이 생각했던 것은 그 질문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 그녀는 그 질문의 답에 도달한 것이리라.

“이게 네가 생각하던 끝이야?”

“그 끝의 시작이지.”

그들을 지나쳐 전장을 달려가는 이들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이계의 신격’이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갖게 된 존재들.

【모두 밀어붙여!】

【개 같은 성좌 새끼들!】

알 것 같은 얼굴도 있었고, 전혀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김남운을 닮은 이도 있고, 이지혜를 닮은 얼굴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김남운도 이지혜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끝나버린 이야기의 엑스트라였다.

「그 모든 존재들이, 이 세계선의 결말을 바꾸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0회차부터 1863회차까지. 버려진 세계선의 모두가 여기에 모였다.

【가! 모두!】

그들의 진군을 보며 한수영 역시 가슴이 벅차올랐다.

정해진 결말에 항거하기 위해 모인 그들 모두가, <김독자 컴퍼니>의 편이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 전원이 ‘이야기의 적’이 되었습니다!]

일행들이 뒤쪽에서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그들 또한, 마침내 김독자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설화, ‘예상 표절’이 <김독자 컴퍼니> 전원에게 자신의 이해를 공유합니다!]

[설화, ‘별의 구원자’가 <김독자 컴퍼니> 전원에게 자신의 생각을 나눕니다.]

모든 설화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행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계의 신격들이 뒤집어쓰고 있던 끔찍한 마스크가 흘러 내리는 것을, 그들 또한 보고 있을 것이다.

한수영은 그런 일행 하나하나를 살피다가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 한 사람.

“이 자식은 어디 간 거야?”

그러고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누구보다 성좌들에 대한 분노를 불태우는 녀석. 일행들 중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던 녀석이, 아까부터 전장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김독자가 말했다.

“저기.”

“뭐?”

그 말에, 한수영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콰아아아앙!

전방에서 폭음이 일어나며 짙은 먼지구름이 퍼졌다.

아스가르드 측 성좌들이 이계의 신격들을 짓뭉개고 있었다.

[······징그러운 놈들이.]

성좌들이 전장을 가로지를 때마다 수십 개체의 ‘이름 없는 것들’이 죽었다.

이전이었다면 괴물이 죽어가는 것으로 보였을 광경이, 이제는 구체적인 인간의 죽음으로 보였다.

팔을 잃고, 다리가 잘리고, 내장을 흘리는 ‘이름 없는 것들’.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김독자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이계의 신격’들은 하급 개체들이 대다수. 가끔 상급 개체인 녀석들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신화급 성좌들의 집중 포화를 받고 이미 쓰러진 상태였다. 지금의 전력만으로는 성좌들의 전력을 막아낼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저토록 압도적인 전력 격차에도, 이들은 아직까지 버티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계의 신격’들의 최전선에 뭔가가 있었다.

츠츠츠츠츳!

전장을 휩쓰는 검푸른 검격.

검의 궤적이 지나간 자리마다 황금빛 잔상이 남았다.

[크아아아악!]

방금전까지 ‘이계의 신격’을 짓밟던 성좌 하나의 목이 날아갔다.

이어서 둘, 다시 셋. 핏줄기 대신 솟구치는 설화의 세례를 맞으며, 새카만 신형이 연이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저거······!”

최전방에서 싸우는 ‘이계의 신격’들 중 아주 강력한 개체가 하나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역시 마지막 시나리오니까 강력한 놈들이 나오는구나’라고만 생각했다.

날카로운 꼬리를 휘두르며 성좌들을 종잇장처럼 베어버리는 ‘이계의 신격’.

그런데 알고 보니 녀석이 휘두른 것은 꼬리가 아니라 새카만 도검이었다.

[특성, ‘철혈의 패왕’이 발동합니다!]

성좌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산의 꼭대기엔 피의 옥좌가 있었다.

옥좌의 주인이, 세상의 모든 별들을 오시하고 있었다.

“비키시죠, 유중혁!”

안나 크로프트가 이를 갈며 검강을 발출했다.

안나 크로프트, 전술 싸움에서는 결코 패하지 않는다는 미국 최강의 화신.

“대륙 최강은 나다!”

이어서 페이후의 긴 창이 허공을 격하고 날아들었다.

페이후, 일대일 격투의 달인이자 중국 최강의 화신.

“직접 싸우는 것은 처음이군요. 하지만 제가 이깁니다.”

마지막으로 란비르 칸의 수장(手掌)이 움직였다.

칼리의 손이 움직이듯 현란한 그림자를 남긴 그의 손바닥에서 이내 백여 갈래의 파형이 쏟아졌다.

콰아아아아아아―!

다시 한번 전장에 폭음이 터졌다.

그 폭음 너머에서도 설화들은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생과 사의 동료’의 특수 효과로 일부 설화가 공유 중입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도검이 난무하고 배가 갈라진 성좌들과 이계의 신격들이 드러눕는 정경 속에서, 한수영은 호사가들의 오래된 물음을 떠올렸다.

세계 최강의 화신은 누구인가.

[모두 저놈부터 죽여! 저놈만 죽이면 뚫린다!]

이제 한수영은 확실하게 그 답을 말할 수 있었다.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세계 최강의 화신은, 유중혁이다.」

자존심 따윈 내팽개친 성좌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깨가 갈라지고 허벅지가 터져도, 유중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얼굴로 최전방에서 밀려드는 성좌들의 군세를 막고 있었다.

지난 과거의 일부를 기억해 낸 유중혁이었기에 가능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있었다.

[화신 유중혁은 현재 ‘이야기의 적’입니다.]

“어떻게 저 자식이 먼저······.”

유중혁은 어떻게 한수영이나 다른 일행들보다 먼저 김독자에게 가담할 수 있었을까.

신화급 성좌들의 가세와 함께 유중혁의 전장이 밀려나고 있었다. 유중혁의 모습이 가까워질수록, 녀석의 주변을 둘러싼 혼돈의 탁기도 명확히 보였다. ‘이계의 신격’들에게서 보이는 혼돈의 힘.

「유중혁은 ‘은밀한 모략가’와 하나가 된 적이 있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유중혁이, 누구보다 빠르게 김독자의 편이 될 수 있었던 이유.

한수영이 분통을 터트렸다.

“개자식들이, 나한테는 말도 없이―”

「유중혁도, 김독자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깊은 증오는 때로 깊은 이해와 맞닿는다.

「이 비극은 등장인물들이 서로를 속여야만 성립할 수 있었다.」

유중혁은 누구보다 성좌들을 증오해왔기에, 김독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망설임 없이 행동했던 것이다.

「그래야, 성좌들에게 이것이 ‘이야기’임을 감출 수 있으니까.」

파츠츠츠츳!

어느새 근처까지 물러선 유중혁이 검을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더 이상은 버티기 어렵다.”

무심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던 유중혁의 눈이, 한수영과 마주쳤다.

유중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늦었군.”

“닥쳐.”

세 사람이 나란히 섰다.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거센 울음을 터트렸고, 김독자의 검은 날개가 두 사람을 보호하듯 활짝 펼쳐졌다.

한수영은 [흑염]을 충전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말했다.

“······왜 이렇게 오랜만인 것 같은지 모르겠네.”

그들의 뒤로 일행들이 달려왔다.

“독자 씨! 수영 씨!”

“형아―!”

무릎을 꿇은 이현성이 방패로 일행들을 보호했고, 그 옆에서 정희원이 검을 바로 잡았다.

신유승과 이길영을 태운 키메라 드래곤이 포효했다. 유상아의 연화대가 회전하며 일행들의 곁을 감쌌다. 이지혜의 전함이 일행의 창공을 지켰다.

“장전!”

포신이 전함 끄트머리에서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전함 위에 요새를 구축한 공필두가, 맡겨 두라는 듯 지상으로 포대를 겨누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별자리가 환하게 빛을 발합니다!]

스파크 속에서 푸른 태양처럼 빛나는 비유가, 땀을 뻘뻘 흘리며 <김독자 컴퍼니>를 향해 쏟아지는 코인을 받고 있었다.

충만하게 빛나는 개연성이 그들을 가호하고 있었다.

말없이 곁을 지키는 일행들을 향해, 김독자가 입을 열었다.

“모두 고맙습니다.”

그 한 마디에, 일행 모두의 표정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정희원은 입술을 꽉 깨물었고, 이현성이 그렁그렁한 눈을 닦았다.

한수영도 느끼고 있었다.

「처음부터 김독자는 희생할 생각 따윈 없었다.」

아마 김독자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이다.

이 세계의 결말에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그가 혼자서 희생할 때 일행들이 겪을 상처를 알았을 것이고.

모두가 함께 싸우는 대가로 그들이 겪을 파멸을 읽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김독자는 이 시나리오를 택했다.

시나리오를 바꾸는 시나리오. 정해진 결말을 따르지 않는 시나리오. 모두가 함께 종막에 도달할 수 있는 시나리오.

한수영은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도 좋다고 생각했다.

언어에 배인 모든 감정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김독자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모든 것의 끝에 다다른 이제야, 김독자는 마음을 연 것이다.

「그렇기에, 한수영은 이게 끝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야긴 나중에 하고.”

장하영이 입을 열었고.

“다들 마음 놓고 싸워요. 내가 아무도 안 죽일 거니까.”

이설화가 말을 맺었다.

“온다!”

성좌들의 진군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숫자가 조금 늘었을 뿐이다! 당황하지 마!]

[일개 소수 성운에 불과하다!]

시나리오의 격변 속에서,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

다만 한수영은 주먹을 휘둘렀다. 권장에서 뻗어 나간 [흑염]이 화신들의 정수리를 꿰뚫었다. 유중혁의 [파천검도]가 안나 크로프트와 페이후의 검격을 받아냈고, 장하영의 [파천붕권]이 곁에서 밀려오던 성좌들의 무리를 밀어냈다.

[‘심판의 시간’이 발동합니다!]

정희원의 [지옥염화]가 전방에서 밀려오는 별들을 불태웠다. 허공을 격하고 날아드는 암기를 막아내는 것은 이현성의 강철 방패였다.

“모두 숙여요!”

충전을 끝낸 이지혜의 거북선이 불을 뿜었다. 눈부신 폭발과 함께 전방의 적들이 쓸려나갔다.

“저 함선부터 떨어트려!”

주변에서 기회를 보고 있던 화신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러자 공필두의 포탑이 굉음을 뿜었다.

“크아아아악!”

[한심한 놈들!]

몇몇 성좌들이 추락하는 화신들을 딛고 날아올랐다. 거북선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올라선 성좌들은, 충전한 마력을 거북선을 향해 쏘았다.

[죽······!]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성좌의 화신체가 절반으로 찢어졌다.

키메라 드래곤이 포효하며 거대한 아가리로 성좌의 몸통을 뜯었다.

“형! 뒤!”

이길영의 황충들이 날아드는 성좌들을 막아섰다.

일행들은 조금씩 전진했다. 그들이 걸어온 세월처럼 아주 조금씩, 별들의 빛이 닿지 않는 길을 걸어 나갔다.

한수영은 생각했다.

아마 다른 모든 별들의 눈에, 그들은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괴물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오히려 그쪽이 더 신나는 일이니까.

“김독자! 방주를 부숴!”

구름처럼 몰려든 성좌들의 너머로 그들이 지키는 방주가 보였다. 지금도, 부서진 방주의 선두에서 성좌들이 밀려 나오고 있었다.

모두 이 세계선을 떠나기 위해 [방주] 속에 잠들어 있던 별들이었다.

[‘이야기의 적’이 방주를 향해 다가가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적’은 세상의 모든 설화를 파멸시킬 것입니다!]

저 방주를 부숴야만, 성좌들의 유입을 끊을 수 있었다.

“빨리!”

[개연성의 충돌로 시나리오가 격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스타 스트림>이 마지막 시나리오의 조건을 수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방주의 앞을 막아선 성좌들이 있었다.

[성좌, ‘우주의 순환을 책임지는 자’가 전장에 개입합니다!]

[성좌, ‘연기 나는 거울’이 시나리오에 개입합니다!]

[성좌, ‘천둥과 전쟁의 주인’이 시나리오에 개입합니다!]

지금껏 사태를 관망하던 신화급 성좌들이었다. 그들을 넘어야만 방주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개개인의 힘은 충분했지만 총전력이 밀렸다.

[성좌,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 격노합니다!]

전방에서 ‘이름 없는 것들’을 도륙하던 포세이돈과 제우스가 가세하자, 어느새 일행들은 동그랗게 포위된 채였다.

쿠드드드드드!

시체들의 바다를 가르고 회수되는 창을 보며, 유중혁이 짓씹듯 말했다.

“······포세이돈.”

아무리 <김독자 컴퍼니>라고 해도 저들 모두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대도깨비들의 표정에도 아직 여유가 있었다.

분했다. 이토록 충만한 개연성이 있음에도, 왜 저들을 넘을 수 없는가.

한수영은 외쳤다.

“야! 우리 쪽 성좌들은 언제 와!”

오기로 했던 이들이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엘도, 자신의 배후성도, 명계 부부도, 그리고······.

김독자가 물었다.

“꼭 성좌여야 돼?”

“뭐?”

김독자가 씩 웃었다. 한수영이 싫어하는 그 미소였다.

“이제 이 전장엔 성좌들만 올 수 있는 게 아냐. 누구 덕분에 개연성이 생겼거든.”

그 순간, 한수영은 뒷덜미가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김독자 컴퍼니>에게 투입되었던 어마어마한 개연성이 한꺼번에 빠져 나가고 있었다. 이만한 개연성을 한꺼번에 사용해야만 불러올 수 있는 뭔가가 오고 있었다.

「모든 성좌들이 두려워하는 존재.」

바닥에 끌리는 염화의 불길.

억겁의 설화를 불태운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그 어떤 별도 감히 비견할 수 없는 밝기의 ‘살아 있는 불꽃’.」

비명을 지르며 타오르는 별들의 반대편에서, 새파란 바다가 밀려왔다.

서쪽의 파도. ‘가라앉은 섬’이 떠오르고 있었다.

「서쪽 세계의 재앙, ‘가라앉은 섬의 주인’.」

[크아아아악!]

파도에 휩쓸린 성좌들이 순식간에 설화 더미로 해체되었다.

이어서 북쪽의 하늘이 새카맣게 암전되더니, 그곳에서 성좌들이 소나기처럼 추락했다.

「북쪽 우주의 지배자, ‘위대한 심연의 군주’.」

날뛰는 악동처럼 별들의 머리를 터트리며 ‘이계의 신격의 왕’이 웃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후폭풍을 막아낸 것은 이현성에게 강림한 존재였다.

「남쪽 성간을 다스리는 ‘은빛 심장의 왕.’」

그리고 무엇도 아닌 곳에서 다가오는 존재가 있었다.

그의 걸음걸음마다, 거대한 [진천패도]의 칼날이 밤하늘을 긁으며 천공의 별들을 떨어트렸다.

【오랜만이구나, 포세이돈.】

유중혁과 똑같이 생긴, 얼굴에 긴 상흔이 남은 사내.

태연히 다가가 포세이돈의 목을 틀어쥔 ‘은밀한 모략가’가 웃었다.

【널 죽이는 것은 이번이 스물여섯 번째다.】





< Episode 94. 끝의 시작 (1) > 끝

< Episode 94. 끝의 시작 (2) >





마침내 외신왕이 되었을 때,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당신은 ‘이야기의 적’이 되었습니다.]

전신의 설화가 산산이 조각나는 듯한 감각.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언젠가 시나리오에서 추방되어 ‘이야기의 지평선’으로 떨어졌을 때도 그랬으니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형의 존재가 되었어도 시나리오 바깥으로 추방되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당신은 최종 시나리오의 보스 몬스터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영원히 혼자가 될 것입니다.]

[이 세계관의 누구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순간 느꼈던 고독감을 기억한다. 이 우주에서 오직 나만이 외따로 떨어진 기분. 영원히 이해하지도 이해받지도 못하는 괴물이 되어버린 느낌.

하지만 그 느낌 역시, 처음 마주한 감정은 아니었다.

「“······일보 기자입니다. 잠깐 시간 있으신가요?”」

「“쟤가 걔야. 살인자 아들.”」

그러니, 이 역할은 내가 맡아야 했다.

이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나였으니까.

그것이 ‘멸살법’이란 이야기의 결말을 읽은 대가니까.

「【네 일행들은 네 선택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마치 내 계획을 안다는 듯, ‘은밀한 모략가’는 그렇게 말했다.

녀석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는 이해했다.

「“그건 해봐야 알지.”」

그도 나도 틀리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쌓아온 설화가 다를 뿐이다.

콰콰콰콰콰콰!

눈앞에 펼쳐지는 설화의 해일. 해일 위로 번지는 눈부신 개연성의 스파크들. 그 위로 성좌들의 시선이 흐르고 있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의 설화를 지켜봅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당신의 설화를 지켜봅니다.]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당신의 설화를 지켜봅니다.]

······.

혼자서 실현할 수 있는 도박이 아니었다. 내가 외신왕이 되는 것은, 그저 최종장의 시작이었다.

유중혁이 싸워주었고, 일행들이 버텨주었고, 한수영이 성좌들을 끌었다.

그리고 우리를 믿는 성좌들이, 선택해주었다.

「그리고 계획은 성공했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살아있는 불꽃’.

서쪽 세계의 재앙 ‘가라앉은 섬의 주인’.

북쪽 우주의 지배자 ‘위대한 심연의 군주’.

남쪽 성간을 다스리는 ‘은빛 심장의 왕’.

그리고 무엇도 아닌 곳에서 기어오는 ‘위대한 모략’.

다섯 명의 ‘왕’이 모이자, 시나리오의 부피가 급격히 팽창하고 있었다. 그들의 격을 감당하지 못한 위인급 성좌들이 무릎을 꿇은 채 설화들을 토하고 있었다.

지금껏 시나리오에서 배제된 재앙의 왕들. 충만한 개연성에 의해 ‘심연을 좇는 사냥개’에게서 벗어난 그들이, 시나리오에 직접 강림했다.

‘은밀한 모략가’가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들의 무대가 열릴 차례였다.」

[으, 으어어어어―!]

공포에 질린 몇몇 성좌들이 체통조차 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런 성좌의 뒷덜미를 붙잡은 ‘위대한 심연의 군주’― 999회차의 김남운이 웃고 있었다.

【벌써 가면 곤란하지. 지금부터 시작인데.】

이번 개연성 범람으로 인해 어느덧 기운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흘끗 나를 본 녀석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너, 착각 마. 널 도와주러 모인 건 아니니까.】

그러자 내 곁에 선 ‘은빛 심장의 왕’이 말했다.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알고 있어요.”

역시 이현성은 몇 회차를 살아도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다.

‘가라앉은 섬의 주인’, 999회차의 이지혜도 움직였다.

양쪽에서 달려든 설화급 성좌들이 어떻게든 그들을 막아보려 안간힘을 썼으나 무리였다.

[서, 섬이 움직인다―!]

녹빛 이끼로 덮인 섬의 선두에서 은빛의 포신이 번뜩였다.

세계선에서 가장 커다란 전함. 완전형의 [터틀 드래곤]이 세계를 향해 불을 뿜었다.

콰아아아아아아!

전장의 한쪽이 통째로 쓸려나가는 압도적인 정경 속에서 나도, 한수영도, 심지어는 유중혁조차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선의 최전방에서, 두 ‘왕’이 신화급 성좌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함께 싸웠던 두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지옥염화]의 코로나를 전신에 두른 999회차의 우리엘. 그리고 1863번의 지옥도를 헤치며 살아남아 ‘이계의 신격’이 된 유중혁이었다.

「순간, 김독자는 오래된 전장을 떠올렸다.」

유중혁의 999회차.

성좌들의 대전장에서 유중혁과 우리엘은 등을 맞대고 싸웠었다. 두 눈을 잃은 채 포효하던 유중혁과, 그런 유중혁을 지켰던 우리엘. ‘멸살법’ 전체를 통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 그 장면이, 지금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설화, ‘영웅과 불꽃의 전장’이 오랜 잠에서 깨어납니다!]

아주 오래전에 사라졌던 설화가 두 왕의 사이를 잇고 있었다.

【······<올림포스>를 맡기겠다.】

999회차의 우리엘이 먼저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녀의 격이 개방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성좌들이 달려들었다.

<파피루스>와 <베다>의 최상급 성좌들. 우리와 ‘마왕 선발전’에서 겨뤘던 성좌들도 보였다. ‘최후의 파라오’와 ‘우레를 먹는 새’ 같은 존재들.

[설화, ‘절멸의 불꽃’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999회차 우리엘의 검이 움직인 순간, 달려들던 위인급 성좌들의 첫 대대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창백하게 질린 화신들이 등을 돌렸고, 설화급 성좌들이 악을 쓰며 외쳤다.

[저 검을 막아! 절대 휘두르지 못하게 해!]

그리고 그런 우리엘이 뚫어준 길을 따라, ‘은밀한 모략가’가 움직였다. 그의 발치마다 우주의 역사가 흐르는 것 같았다.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그 걸음을, 누구도 감히 막아설 수 없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모든 세계선에서 가장 지독한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사내의 발걸음이 떨어진 곳마다 멸망한 세계가 울었다. 그림자처럼 들러붙은 세계의 원죄가 사내를 집요하게 좇고 있었다.

「그 어떤 성좌도 그를 막아설 수 없고, 그 어떤 설화도 그를 구원하지는 못한다.」

적이든 아군이든, 설화를 좋아하는 성좌라면 누구라도 그의 이야기에 홀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득한 경이로 얼룩진 슬픔에서 불현듯 정신을 차렸을 때, 사내는 어느새 포세이돈의 목을 틀어쥐고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포세이돈이 황급히 ‘은밀한 모략가’의 손아귀를 뿌리치며 포효했다.

[성좌,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 대노합니다!]

<올림포스>의 거대 설화가 준동하고 있었다. 포세이돈의 [트라이아나]가 가공할 설화를 두른 채 포악한 이빨을 드러냈다. 누구나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신화급 성좌의 위용이었다.

하지만 같은 신화급 성좌인 나는, 포세이돈의 그런 행동이 다르게 보였다.

「포세이돈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헛되이 허공을 베는 포세이돈의 창은 전처럼 날카롭지 않았다.

오만한 신화급 성좌답지 않은 움직임에 곁에 있던 제우스가 경호성을 발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푸슈슈슈슉!

뭔가가 포세이돈의 몸통을 베었고, 푸른색 비늘로 덮여 있던 그의 가슴에 길고 새카만 상흔이 남았다. 상흔 사이로, 거대 설화들이 줄기차게 흘러나왔다.

[커허어어억······!]

포세이돈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트라이아나]를 휘둘렀다.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 그의 [트라이아나]가 선을 긋는 어디든 그곳은 바다가 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던 그의 창극이, 처음으로 겨눌 곳을 찾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바다가 범접할 수 없는 곳.」

포세이돈의 두 눈이 새카만 심연으로 물들었다.

아마 지금 그는, 이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설화를 보고 있을 것이다.

중력의 영향이 닿지 않기에, 땅도 바다도 하늘도 무의미한 우주. 모든 것이 멸망했기에 어떤 소중한 것도 남아 있지 않은 폐허.

그 폐허의 주인이, <올림포스>의 별자리를 올려다보았다.

【어느 세계선에서도 너희는 변치 않는구나.】

슬퍼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안심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스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진천패도]의 칼날이 밤하늘에 닿았다.

[닥쳐라―!]

간신히 공포를 이겨낸 포세이돈이 재차 [트라이아나]를 휘둘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진천패도]가 움직였다.

언젠가 유중혁이 저와 비슷한 기술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각고의 노력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 초월좌가 별을 베기 위해 고안한 기술.

그런데 뭔가가 달랐다. 저것은 마치―

「한 인간이 세계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검술 같았다.」

파천검도(破天劍道).

초월오의(超越奧義).

은하참(銀河斬)

이제야 실감이 났다. 「서유기」의 격전에서, ‘은밀한 모략가’가 보여주었던 힘든 그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지금까지 본 그 어떤 검격보다도 아름다운 궤적.

그의 일 검에 세계가 갈라지고 있었다.

콰드드드드!

하나의 성운을 통째로 쪼개버리는 일검에, 별가루들이 흩날렸다. 그리고 그 마법 같은 빛살 끝에, 포세이돈이 있었다. 푸가각, 소리와 함께 포세이돈의 팔과 다리가 동시에 잘려나갔다.

[포세이돈!]

경악한 제우스가 외쳤다.

‘은밀한 모략가’의 전신에서 폭발하는 설화들이 전장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가 시나리오를 살아오며 느껴온 공허가 팽창하고 있었다.

츠츠츠츠츠츠츳!

설화를 울컥 토한 포세이돈이 무릎을 꿇자, <올림포스>의 12 신좌들이 달려들었다. 아레스와 헤파이스토스가 포효하며 검과 망치를 휘둘러왔다. 그러나 그들 역시 [진천패도]의 검격 앞에 어린아이처럼 튕겨 나갔다.

제우스가 악을 쓰듯이 외쳤다.

[위대한 모략이여! 건방 떨지 마라! 아직 너는 <올림포스>가 이룬 신화의 파편조차 보지 못했다!]

그 말과 함께, 제우스는 어느새 신형을 뒤로 물리고 있었다.

뻔했다. 그가 향하는 곳엔 방주가 있었다.

[아버지!]

그에게 버려진 <올림포스>의 신좌들이 온몸에서 설화를 내뿜으며 ‘이름 없는 것들’에게 갉아 먹히고 있었다.

원망 어린 표정의 디오니소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나는 그런 신좌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한수영과 유중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우스를 막아야 돼.”

제우스가 향한 방주 안에는 <올림포스>뿐만 아니라 수많은 신화의 거대 설화들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를 내버려 두면, 이 시나리오는 다시 우리에게 불리해지게 된다.

우리는 죽은 별과 신격들의 설화로 뒤덮인 무대를 온 힘을 향해 달려나갔다.

한수영이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근데 저 자식은······.”

포세이돈을 벤 ‘은밀한 모략가’가 멍하니 자리에 서서 어딘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눈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은밀한 모략가’가 제우스를 쫓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애초에 그의 목적은 겨우 <올림포스>의 절멸도, 방주의 파괴도 아니었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그보다 훨씬 먼 곳에 걸린 무엇.

「최후의 벽」.

이번에야말로 그 너머를 보고야 말겠다는 듯, 그의 눈 안에서 끝없는 페이지들이 넘어가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격변합니다!]

예상치 못한 개연성의 뒤틀림에 대도깨비들이 외치고 있었다.

[잠깐! 이것은······!]

[가장 오래된 꿈이시여······!]

[<스타 스트림>의 격변으로 인해 시나리오 내용이 갱신됩니다!]

[해당 시나리오는 선택한 진영에 따라 클리어 조건이 달라집니다.]

나는 갱신된 시나리오를 확인했다.

+

<메인 시나리오 # 99 ― ■■■>

+

처음으로 메인 시나리오의 제목이 사라졌다.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시나리오.

대도깨비들조차 모르는 시나리오가 시작된 것이다.

+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방주를 파괴하고 대도깨비들의 계획을 저지하시오.

+

경악하는 대도깨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기꾼’을 포기하고 이 세계의 등장인물이 된 대가를, 이제 그들도 치르게 된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모습도 변하고 있었다. 마치 세계가 우리를 허락하는 듯했다.

“당신······!”

경악한 아스카 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그녀의 눈에도 이제 내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튀는 스파크 속에서,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었던 ‘이계의 신격’들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시나리오 바깥의 존재가 아니었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들의 설화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든 시나리오가, 정식으로 이 세계에 태어난 것이다.

[‘가장 오래된 꿈’이 당신의 존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마 이 메시지를, ‘은밀한 모략가’도 듣고 있겠지.

정확히는 내 눈앞에 떠오른 이 메시지를 말이다.

+

보상 : 최후의 벽.

+





< Episode 94. 끝의 시작 (2) > 끝

< Episode 94. 끝의 시작 (3) >





“······형, 보상 내용이 ‘최후의 벽’이래요.”

의문을 던진 건 뒤쫓아온 이길영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확실하게 아는 건 없었다.

보상이 [최후의 벽]이라······.

저렇게만 써 놓으니 최후의 벽에 도달하는 것이 보상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시나리오가 끝나면 최후의 벽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인지 그 의미가 모호하게 들렸다.

애초에 저 벽이 누군가가 가질 수 있는 개념이기는 한 걸까.

지금으로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확실한 것은, 이 시나리오를 끝내면 우리는 이 세계의 진실에 도달하리라는 것뿐이었다.

【가십시오.】

999회차의 이현성의 엄호를 받아 일행들이 달려갔다.

뒤를 쫓는 성좌들을 ‘은밀한 모략가’와 다른 이계의 신격들이 막아서고 있었다.

이제 방주가 눈앞이었다. 저 방주만 부수면, 우리는 이 모든 시나리오의 끝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막아라―!]

그리고 다시 한번 밤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졌다. 이렇게나 많은 별들이 있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모를 성좌들이었다.

[외신왕이다! 잡아!]

내게 병장기를 겨눈 채 달려드는 성좌들. 거대 성운의 하수인으로 살아오며 제대로 시나리오도 클리어하지 않은 채, ‘마지막 시나리오’의 진출권을 획득한 이들이었다.

놀랍게도 그들 중 일부는 한때 내 채널의 구독좌였거나 여전히 구독중인 이었다. 간간이 후원을 하며 내 행동을 부추겼던 이들. 강렬한 사이다를 원하고, 내게 자극적인 전개를 종용했던 자들.

그들은 이제 나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죽여버려!]

몇몇 일행들도 우리를 적대시하는 그들의 모습에 놀란 모양이었다.

한수영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너네 아직도 하차 안 했냐?”

순간, 떠오른 것은 ‘만다라의 수호자’가 환생자들의 섬에서 했던 말이었다.

「아무리 조악한 이야기라도, 그걸 오래도록 듣고 본 존재는 그 이야기를 사랑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성마대전]이라는 시나리오의 비극을 ‘만다라의 수호자’는 그렇게 보고 있구나, 하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건 [성마대전]의 이야기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피스 랜드]에서 우리가 상대했던 일본 측 출신의 성좌들이 하나둘 눈앞에 현현하고 있었다. ‘여덟 조각의 불꽃’인 카구츠치와 ‘밀물과 썰물의 조정자’인 해룡 류진도 보였다.

그들에게 맞선 것은 우리 일행의 창공을 지키는 존재였다.

[화신, ‘이지혜’가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드넓은 해상이 펼쳐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충만한 격이 주변의 무대를 잠식했다. 상대는 설화급 성좌들이었지만, 지금의 이지혜라면 저들에게 절대로 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지혜는 곧장 발포하는 대신 내 쪽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나 역시, 그 애가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가라! 도움이 안 되면 자폭이라도 해!]

화신들의 등을 떠미는 성좌들의 모습.

동공이 퀭하게 풀린 일본 측의 화신들이 우리를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칼을 뽑으려는 순간, 근처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모두 정신 차리세요! 지금 당신들이 누굴 상대하고 있는지 똑똑히 보라고!”

분명 내가 아는 목소리였다.

“이즈미도 죽었고, 히로시도 죽었어요.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정신을 차릴 거죠? [피스 랜드]에서 있었던 비극을 모두 잊은 건가요?”

아스카 렌이 그곳에 있었다.

[화신 ‘아스카 렌’은 ‘이야기의 적’이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이미 이쪽 진영을 선택한 상태였다.

[화신 ‘아스카 렌’의 특성 ‘만화가’가 활성화됩니다!]

아스카 렌의 검이 펜처럼 움직였다.

특성이 활성화되는 순간, 나를 비롯한 주변의 모든 ‘이름 없는 것들’의 설화가 움직였다. 우리의 부서진 설화들. 흩어진 문장들이 하나의 영상으로 직조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작가’ 특성을 가진 것은 한수영만이 아니었다. 한수영과는 다르지만, 아스카 렌 역시 비슷한 특성을 가진 화신이었다.

“제발, 이제 그만 해요. 당신들도 이들이 누군지 알잖아요. 이 사람들처럼 되고 싶었잖아요.”

「그것이 시작이었다.」

자신의 배후성들에게 반쯤 조종당한 채 우리를 공격하던 화신들이 하나 둘 병장기를 떨어트렸다. 그들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주저앉거나 비참한 울음을 터트렸다.

“못 해······ 더 이상은 못 한다고······.”

무릎을 꿇은 화신들이 자신의 머리를 부여쥔 채 중얼거렸다. 화신들이 명령을 거부하자 순식간에 위험에 노출된 성좌들이 다급하게 외쳤다.

[이, 일어나라! 어서!]

화신들은 누구보다 같은 화신의 고통을 잘 이해하고 있다.

너무나 오래 시나리오를 수행하는 바람에 흔해 빠진 악역이 된 성좌들과는 다른 것이다.

“지혜야.”

내가 말하기도 전에, 거북선의 함포가 발사되었다.

콰아아아아아!

격발음과 동시에 쓸려나가는 성좌들의 무리.

용케도 포화를 버텨낸 성좌들이 우리 일행과 부딪쳤다.

[으아아아아아아!]

방주의 선두에서 희미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방주에 잠들어 있는 신화급 성좌들이 더 깨어나게 둘 수는 없었다.

다행히 우리의 전진 속도는 느리지 않았다. 유중혁의 [파천검도]와 한수영의 [흑염]이 옆에서 나를 보조하며 착실하게 일행을 앞으로 인도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개연성이었다.

츠츠츠츠······.

성좌들의 코인으로 만들어진 개연성······.

하늘을 올려다보니 비유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채널을 통제하고 있었다.

도깨비가 된지 얼마 안 된 아이였으니, 이만한 코인을 개연성으로 교환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비유의 입에서도 설화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제 다 왔어!”

이변이 발생한 것은, 한수영의 목소리가 들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관리국이 BY-9158 채널에 통제권을 행사합니다!]

츠츠츠츠츳!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본래 개별 채널은 도깨비의 소유다.

하지만 [채널]이라는 시스템은 관리국이 가진 ‘거대 설화’에 기반하는 힘이었다.

[관리국이 채널 BY-9158의 코인 후원을 통제합니다!]

갑자기 몸의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주변의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순풍처럼 뒤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역풍으로 바뀌고 있었다.

멀리서 열 명의 대도깨비가 하늘을 향해 손을 모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빌어먹을 새끼들이······!”

한수영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바아아아아아아앗!]

비유가 감전된 것처럼 고통스러운 울음을 내뱉으며 추락하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달려간 유상아가 떨어지는 비유를 품에 안았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관리국의 비겁한 행동에 항의하며······!]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관리국의 처사에 격노하여······!]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같은 도깨비 새■들을······!]

······.

우리의 채널이 무너지고 있었다.

대도깨비 가랑이 말했다.

[너희들의 설화는 허락할 수 없다. ‘가장 오래된 꿈’에게 그런 설화를 바칠 수는 없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이 시나리오의 일부가 된 그들은, 관리국의 거대 설화를 행사하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후폭풍을 겪을 것이었다.

[호롱, 녹수. 그대들의 희생을 기억하겠다.]

두 명의 대도깨비가 허공에서 소멸하고 있었다.

가랑의 몸에서도 설화 파편이 떨어져 나오고 있었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저 빌어먹을 대도깨비들이 얼마나 큰 결심을 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다시 한번 격변합니다!]

주변에 범람하던 ‘이름 없는 것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개연성의 비호를 받아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던 이들의 얼굴이 다시 괴물의 그것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사냥개들이 온다.】

‘은밀한 모략가’의 목소리와 함께, 999회차의 왕들이 중앙으로 몰렸다.

큰 개연성을 소진하던 이들일수록 후원 중단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밀려오는 후폭풍 사이로 나타난 ‘심연을 좇는 사냥개’들이 왕의 다리와 팔을 물어뜯었다.

【아파 이 개새끼들아!】

999회차 김남운이 소리를 질렀다.

곁에서 달려드는 성좌들을 베어낸 유중혁이 외쳤다.

“김독자!”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창공의 기후가 심상치 않았다. 단순히 신화급 성좌가 기후를 조정하는 정도의 변화가 아니었다.

뭔가, 내가 지금껏 한 번도 겪지 못한 끔찍한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온새, 허체. 지금까지 수고 많았다.]

두 명의 대도깨비들이 추가로 소멸하고 있었다.

「대도깨비들은, 이곳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끝내려는 것이다.」

팔뚝의 모든 솜털이 오소소 섰다.

지금까지 시나리오를 수행하면서 이만한 두려움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가장 오래된 꿈’이시여!]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하늘이 아니라 벽이었다.

이 우주 전체를 감싸고 있는 [최후의 벽].

페이지가 찢어지듯 갈라진 벽의 틈새로, 뭔가가 넘어오고 있었다.

「순간, 김독자는 이 세계의 멸망을 직감했다.」

내가 가진 언어로는 그게 무엇인지 형용할 수 없었다.

저게 대체 뭘까.

마치 어린아이가 연필로 그린 조악한 낙서 같았다. 거대한 검 같기도 하고, 창 같기도 하고, 미사일 같기도 한 저것.

확실한 것은 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이쪽으로 낙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츠츠츠츠츠츠츠!

그 비정형의 덩어리를 내보내는 틈새 사이로, 아주 잠깐이지만 누군가의 손 같은 것이 보인 것 같기도 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확실한 것은 하나뿐. 저걸 맞으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

「김독자는 자신의 모든 격을 개방했다.」

내가 가진 모든 ‘거대 설화’들이 동시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시야가 하얗게 물들며 눈앞에서 개연성의 대폭발이 발생했다.

*

츠츠츠츠츠츳!

비형은 하나둘 시나리오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대도깨비들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이야기꾼들은 최종 시나리오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 비형의 주변에 크고 작은 하급 도깨비들이 몰려들었다.

[비형님! 이게 대체······.]

지금껏 중립을 지켰던 관리국이, 자신의 의지로 시나리오 양상 전체를 뒤바꾸고 있었다.

그 대가로 관리국의 지형도도 변하고 있었다. 설화들을 모아 둔 저장고들이 일시에 붕괴했고, 관리국의 감찰 하에 구속되어 있던 악명 높은 성좌들이 풀려나고 있었다.

그리고 비형은, 그 아수라장의 중심에서 한 성좌를 보고 있었다.

「추호도 자신이 주인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녀석.」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체근민 합이 10도 되지 않는 몸으로, 도깨비인 자신에게 절대 기죽지 않고 대들던 녀석. 언제나 여유 있는 척 씩 웃기나 하고, 함부로 뒈지기도 십상이던 녀석.

「이야기꾼인 그보다도, 다음 설화를 더 잘 알던 녀석.」

그 녀석의 설화 덕분에 비형은 빠르게 자신의 채널을 키울 수 있었고, 등급 심사에서 늘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의 설화가, 이제 종막을 앞두고 있었다.」

콰콰콰콰콰콰!

대도깨비가 된 비형은 창공을 가르고 떨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저것은 ‘벽’ 너머에서 온 것이었다. 이 세계를 가르고 있는 최초이자 최후의 벽 너머에서 날아든, 아득한 망상의 파편.

비상을 준비하는 방주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 남은 대도깨비들은 저 방주를 타고 탈출할 속셈일 것이다.

그리고 이 무대는, 저 파편의 추락으로 인해 끝장날 것이다.

「그 순간, 도깨비 비형은 결심했다.」

한데 모여 의식을 치르던 대도깨비들이 비형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가장 먼저 그를 붙잡은 것은 바람이었다.

[비형! 무슨 생각인가!]

비형은 대답하지 않고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지금껏 지켜 보아왔던 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언제나 분신체로 마주했던 화신들. 그들이 이제는 그와 같은 자리에 있다.

비형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때만 해도 작았던 그의 손바닥이, 지금은 성인 남성만큼이나 커졌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저 설화를 보아왔습니다.]

그들의 첫 만남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한쪽은 시나리오라는 비극을 파는 장본인이었고, 다른 한쪽은 목숨을 걸고 그 시나리오를 수행해야 하는 쪽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비형은 지금 움직여야 했다.

이 손으로 비극의 무대를 열었기에 해야만 하는 일.

이것은 그가 끝까지 ‘이야기꾼’으로 남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바람, 모든 도깨비에겐 ‘단 하나의 설화’를 선택할 순간이 온다고 하셨지요.]

[기다리게 비형! 이번엔 자네가 틀렸어. 저 설화는 아니야! 저 설화는―]

비형은 바람의 손을 놓으며 웃었다.

죽음을 앞두고도 늘 씩 웃는 녀석이 있었다. 늘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제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녀석은 정확히 이런 기분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나는 저 이야기를 사랑하게 된 모양입니다.]

비형은 관리국의 대도깨비들을 향해 자신의 격을 발출했다.

퍼거걱!

대도깨비들을 대표하여 관리국의 간섭력을 행사하던 가랑의 뿔이 부서졌다.

관리국이 컨트롤하던 개연성이 일제히 흩어지며 일대에 파란이 일어났다.

그 후폭풍은 비형에게도 고스란히 돌아왔다. 새카맣게 변한 설화를 토해내며, 비형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비형! 감히······!]

그는 정확히 지상을 향해 떨어지는 망상의 파편을 가로막고 섰다.

지금껏 그가 기록해 온 설화들이 울고 있었다.

이야기꾼을 지켜보는 성좌들이 그의 행동에 개연성을 실어주고 있었다.

후폭풍이 자신의 몸을 찢어발기는 고통 속에서 비형은 생각했다.

아마 그가 읽어온 설화의 주인공은 자신의 행동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은 언제나 모두를 살리고 싶어하니까.

그럼에도, 거스를 수 없는 법칙은 있다.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이야기는 없다.」

이야기를 지키기 위해, 개연성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벽」에 도달할 ‘단 하나의 설화’가 되기 위해. 이것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었다.

「도깨비 비형은 자신의 마침표를 정했다.」

파스슷, 하며 뭔가가 꿰뚫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잠깐이지만 김독자의 얼굴이 보인 것도 같았다.

[당신의 ■■은 ‘희생’입니다.]





< Episode 94. 끝의 시작 (3) > 끝

< Episode 94. 끝의 시작 (4) >





허공에서 거무튀튀한 비정형의 덩어리가 폭발하는 순간, 나는 근처에 있던 아이들을 덮은 채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이현성이 펼친 강철 방벽 위로, 거센 금속성의 파찰음이 귀를 긁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소리도, 촉각도 사라졌다.

[전송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알 수 없는 메시지.

전신의 근육이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허공을 덮었던 이현성의 방벽이 사라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나뿐이었다. 품속의 아이들도, 나를 감싸던 이현성과 정희원도, 허공으로 뛰어 오르며 검을 휘두르던 유중혁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드넓은 벌판뿐. 고개를 돌리자 하늘 끝까지 닿은 나무와 우거진 숲으로 이루어진 삼림 지대와 그 반대편을 차지한 유황 지대가 보였다.

「대도깨비들이 ‘관리국’의 힘을 행사해 시나리오에 개입했다.」

거기까지는 명료하게 기억이 났다. 뒤이어 관리국 측의 코인 제재가 시작되었고, 그것도 모자라서 녀석들이 괴이한 미사일 같은 것을 소환했던 것도.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 아. 잘 들리시나요? 이것 참, 한글 패치가 안 돼서 고생했네.]」

서늘한 느낌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설화.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설화였다.

「[이건 영화 촬영이 아닙니다.]」

연이어 무언가가 허공에 떠올랐다. 거무튀튀한 소환체가 폭발하던 바로 그 순간, 창공을 덮은 작은 그림자.

나는 분주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꿈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며, 당신들이 알던 ‘현실’도 아닙니다.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모두 닥치고 내 말을 들으세요.]」

분명 이 근처였다. 이 근처에 녀석이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벌판을 헤집었을까.

갈대숲 사이에 쓰러져 있는 녀석이 보였다.

“비형.”

나는 녀석을 안아 들었다. 대도깨비가 되며 성인 남성만큼이나 자랐던 녀석은, 이제 다시 아이처럼 작아져 있었다.

내가 녀석을 처음으로 지하철에서 만났던 그날처럼.

“비형!”

내 모든 비극의 시작.

이 녀석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평범한 미노 소프트의 계약직 사원이었을 것이다.

「[잠깐만. 지금 나랑 <스트림 계약>을 맺잔 말입니까?]」

그때 이 녀석과 빌어먹을 계약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비형의 몸에서 조금씩 설화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당신들이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에 대체 무슨 기여를 했습니까. 무슨 염치로 코인 수급에 관여하는 겁니까?”」

「“그런 이야기는 이제 지루하지 않습니까? 언제까지 관리국의 공식에 맞는 설화만을 찾아다닐 겁니까?”」

내가 모르는 비형의 설화들이 부서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비형을 흔들어 깨웠다. 녀석의 뺨을 마구 후려치기도 했다.

그러자 끊어질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프군. 그때 너한테 맞은 바울이 처음으로 불쌍하게 느껴져.”

눈을 뜬 비형이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진언이 아닌 흐트러진 육성. 오랜만에 듣는 도깨비 비형의 진짜 목소리였다.

내가 증오했던 목소리.

사람들을 화신으로 만들고, 시나리오를 세상에 퍼뜨려 이 세계를 관음의 왕국으로 만든 놈. 그렇기에,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나를 구한 거냐?”

비형이 이렇게 된 것은 건드리면 안 되는 개연성을 건드린 까닭이었다.

시나리오에 무리하게 간섭하여 소멸해버린 대도깨비들처럼, 비형 또한 자신이 막을 수 없는 후폭풍에 뛰어들어 이 꼴이 되었다.

「비형은 여기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진 설화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것은 나의 계획이 아니었다. 내가 원했던 설화가 아니었다.

[‘제4의 벽’이 격렬하게 흔들립니다!]

비형은 대답 대신 새카만 설화를 토했다.

녀석의 몸이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다.

“······잠깐 일어났으면 좋겠군.”

나는 비형을 일으켰다.

창백한 밤하늘 너머로, 별들의 운항이 보였다. 시나리오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흘러가는 별들. 아득한 성류의 흐름.

비형은 「스타 스트림」을 보고 있었다.

“네 동료들은 모두 전송했다. 그리고 인근에 있던 성좌와 화신들도 대부분 살아남았을 거다. 여긴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안전한 곳이야.”

“너······.”

“자세한 건 곧 알게 될 거다. 넌 똑똑한 놈이니까.”

하늘에서 몇 개의 별들이 추락하는 것이 보였다. 내가 할 말을 찾는 동안, 추락하는 별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아득히 ‘별자리의 맥락’에서 죽어가는 별들.

비형은 저 별들의 꿈을 꾸며 살아왔을 것이다.

“김독자. 너와 나는 동료가 아니다.”

별들의 설화를 좋아했을 것이고, 그들의 희비극을 함께 지켜보았을 것이다. 무수한 별들의 죽음을 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너는 시나리오의 화신이고, 나는 이야기꾼일 뿐이다.”

그런 별들의 죽음을 아름답다고 여겼을 것이다.

내가 비형을 증오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그 감정을 더 불태우려 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자신의 이야기꾼을 바라봅니다.]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자신의 이야기꾼을 슬퍼합니다.]

[설화, ‘재앙의 왕을 사냥한 자’가 자신의 이야기꾼을 애도합니다.]

비명처럼 흩날리는 내 설화들이, 비형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비형이 웃었다. 자랑스러운 얼굴로.

“네 설화를 끝까지 보고 싶었다.”

비형이 바라보는 하늘의 너머에 「최후의 벽」이 있었다.

비형이 꾸었던 꿈. 이 모든 시나리오의 왕인 ‘도깨비 왕’이 있는 곳.

나는 말하고 싶었다. 겨우 여기서 포기할 거냐고. 내가 그때, 약속하지 않았냐고.

「“도깨비 비형, 나와 계약해라. 그럼 내가 너를 도깨비들의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

아직 나는, 그 약속을 이뤄주지 못했다.

「그는 김독자가 쌓아온 설화의 첫 번째 독자였다.」

양손이 점점 가벼워졌다. 천천히 고개를 내렸을 때, 이미 비형은 그곳에 없었다. 빌어먹을 이야기꾼답게, 녀석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야기만을 남겨 놓고 떠난 것이다.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설화를 만들고 싶었다.」

[당신의 대서사시가 변화의 계기를 맞이했습니다!]

으스러지도록 쥔 주먹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내 모든 설화들이 절규하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을 향해, [최후의 벽]을 향해 외쳐대고 있었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김독자.」

그것은 죽은 비형의 설화였다. 녀석이 죽기 전에 남긴 설화가, 내 곁을 맴돌며 자신의 문장을 소진하고 있었다.

녀석은 죽었지만, 녀석이 남긴 설화는 아직도 살아있었다.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침착해야 한다. 비형이 나를 어디로 보냈는지, 일행들이 어디로 갔는지부터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츠츠츠츠츠츠······!

드넓은 벌판의 허공에서 개연성의 스파크가 내리치고 있었다. 그 스파크 너머로, 외부의 정경이 어슴푸레 드러났다.

폐허가 된 최종장의 무대. 죽은 성좌들과 화신들의 시체가 즐비한, 바로 조금 전까지 내가 있었던 전장.

그 정경을 보는 순간,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깨달았다.

[‘최후의 방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은 바로, 내가 부숴야 하는 바로 그 ‘배’의 내부였다.

[현재 ‘최후의 방주’가 이륙 프로세스에 진입한 상태입니다.]

[최종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

<메인 시나리오 # 99 ― ■■■■>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방주를 움직이는 설화핵을 파괴하고, 대도깨비와 신화급 성좌들의 세계선 이주 계획을 저지하시오.

제한시간 : 24시간

보상 : 최후의 벽

실패시 : 세계선 멸망.

+

······그런 것이었나.

이곳이 ‘최후의 방주’라면 배 안에 이만한 세계가 깃들어 있는 것도 이해가 갔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방주 안에 잠들어 있는 무수한 신화들이 시작된 태초의 땅이었다.

쿠구구구구.

그 땅의 건너편에서, 거친 진동이 들려왔다.

뭔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도망쳐라, 김독자.」

자신의 세계관을 등에 업고 본연의 힘을 되찾은 존재들.

신화급 성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

「방주는 일종의 ‘거대 설화 병기’다. 방주를 확실하게 부수려면 내부에 있는 설화핵을 박살 내야 해.」

나는 비형이 남긴 설화들을 읽으며 방주의 내부를 달리고 또 달렸다.

[현재 당신은 거주 선실 D-21에 진입한 상태입니다.]

[해당 지역에서는 다른 신화의 영향력이 너무 강합니다.]

[현재 성운 멤버들과 연락이 닿지 않는 상태입니다.]

다른 거대 설화들의 영향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일까, 일행들에게 연락이 닿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나와 같은 선실에 떨어진 일행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었다.

[같은 성운의 영향력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김독자!”

내가 손을 뻗으며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한수영이 외쳤다.

“닥치고 달려! 이쪽으로 오지 마!”

한수영의 뒤쪽에서 덤불 숲이 통째로 갈려 나갔다. 뭔가가 쫓아오고 있었다.

재빨리 품속에서 뭔가를 꺼낸 한수영이 뒤를 향해 연막탄을 던졌다.

[‘양산형 SSS급 연막탄’이 효력을 발휘합니다!]

[20초간 인근 지역의 시야각이 차단됩니다!]

혼란에 빠진 성좌들이 아우성을 벌이는 동안, 우리는 재빨리 덤불 지역을 벗어났다. 한수영은 이미 사태 파악을 끝낸 모양이었다.

“그 자식은 뒈졌어?”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숨을 헐떡인 한수영이 바닥에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빌어먹을 도깨비 자식, 이걸 마지막 선물이라고 주고 가냐.”

이걸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방주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방주 안에는, 아마 우리 말고도 무수한 ‘거대 설화’의 주인들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김독자.”

“비형의 설화에 따르면 설화핵은 방주의 중심부에 있어. 여긴 아마 선두 인근일 거야.”

내가 그 말을 뱉자마자, 연막탄 사이에서 성좌들의 진언이 울려 퍼졌다.

[쫓아라!]

[이 근처에 놈들이 있다. 놈들과 함께 다음 세계선으로 갈 수는 없어!]

한수영이 [한낮의 밀회]를 통해 말을 걸었다.

―그냥 다 죽여버릴까?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전장이 그리 좋지 않았다.

이 선실은 다른 성운의 세계관.

즉, 그들의 「무대화」가 적용되는 장소였다.

[거주 선실 D-21 지역은 우주수(宇宙樹) 이그드라실의 뿌리가 자라는 곳입니다.]

한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아스가르드>야.

[성좌, ‘하프와 호른의 신’이 멸망의 진혼곡을 연주합니다.]

[성좌, ‘멸망의 늑대에게 팔을 잃은 자’가 자신의 사라진 팔을 찾고 있습니다.]

[성좌, ‘목요일의 천둥’이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성좌들이 하늘을 떠다니며 우리를 찾고 있었다.

대부분은 설화급 성좌들이었다. 하지만.

―······토르가 저렇게 강했나?

묠니르에 번개를 응축한 ‘목요일의 천둥’이 새파란 눈으로 창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설화급 성좌인 토르. 그런 그도 이 무대에서는 제우스에 육박하는 수준의 격을 방출할 수 있었다.

나는 한수영을 향해 말했다.

―우리한테 유리한 무대를 찾아야 돼.

―이 안에 그런 무대가 있겠어?

이들과 달리 <김독자 컴퍼니>는 달리 세계관이라 칭할만한 것이 없었다.

―하나 있지.

그럼에도, 내 생각이 맞다면 이곳에는 우리가 싸울만한 무대가 하나 있었다. 그곳이라면, 다른 모든 일행들도 제힘을 충분히 낼 수 있을 것이었다.

문제는 그곳까지 어떻게 가느냐 하는 것인데.

[설화, ‘돌멩이와 나’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물론, 그것도 방법은 있었다. 한수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화, ‘돌멩이와 나’가 ‘우린 그저 돌멩이일뿐’을 이야기합니다!]

―뭐야 이거?

나는 한수영의 손목을 잡은 채, 굴러가는 돌멩이처럼 조심조심 성좌들의 앞으로 나섰다. 예상대로 성좌들은 우리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성좌, ‘사랑과 고양이의 여신’이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성좌, ‘큰 뿔 다리의 수호자’가 누군가를 찾고 있습니다.]

바로 앞을 지나치고 있는데도 발견하지 못하는 성좌들을 보며, 한수영이 입을 딱 벌렸다.

―미친, 개사기잖아.

사기는 사기지. 적어도 ‘돌멩이’는 그곳에 돌멩이가 있다는 사실을 애써 인지하기 전까지는 눈에 띄지 않으니까.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키득키득 웃고 있습니다.]

순간,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한수영도 표정이 비슷했다.

하지만 이제 조금 남았다. 설령 로키가 우리 존재를 눈치챘다고 해도, <아스가르드>의 주력 성좌들은 이미 저만치 멀어진 상태······.

“이번에도 그 방법으로 도망칠 셈인가요?”

설화 「돌멩이와 나」는, 그 설화의 실체를 간파한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나는 이미 이 설화를 누군가에게 사용한 적이 있었다.

천천히 등을 돌리자, 소용돌이치는 붉은 눈동자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 Episode 94. 끝의 시작 (4) > 끝

< Episode 95. 개천(開天) (1) >





[현재 BY-9158의 화면 송출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상태입니다.]

비유가 임의로 한 일일 것이다. 비형의 죽음 때문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방주로의 전송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도망 중인 지금의 우리에겐 잘 된 셈이었다.

눈앞의 사람만 없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안나 크로프트.”

나는 바람에 흩날리는 예언자의 금발을 바라보았다.

우거진 숲의 인근에서 추가로 기척이 느껴졌다. 아마 그녀의 직할 부대인 ‘차라투스트라’겠지.

―돌멩인가 자갈인가 왜 쟤한텐 안 통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환생자들의 섬’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었다.

한수영은 내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내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안나 크로프트를 노려보며 손가락을 겨누었다. 그 끝에 사나운 [흑염]의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비키든지 뒈지든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예상 표절]을 발동한 한수영의 동공에 새파란 귀기가 어리자, [대악마의 눈동자]를 가진 안나 크로프트의 눈에도 붉은 기운이 일렁였다. 미래를 읽는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자 희미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그 균형을 잠시 유지하던 안나 크로프트가 입을 열었다.

“김독자, 이 층을 빠져나가고 싶겠죠?”

한수영이 정색하며 으르렁거렸다.

“야, 나 무시하냐?”

“내가 당신을 도울 수 있어요.”

“아까 전엔 죽이겠다고 달려들더니?”

한수영의 말과 함께, 주변 성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주변 지형을 마구잡이로 파괴하며 우리를 찾는 녀석들도 있었다.

시간을 오래 벌기는 힘들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거기서 당신들 편을 들었다간 우리가 쓸려나갔을 테니까.”

“지금은 상황이 다른가?”

“이런 식으로 계속 시간을 끌 건가요? 지금 급한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일 텐데요.”

“그쪽을 신뢰할 근거가 있습니까?”

“근거를 제시하면 믿는 타입이었던가요?”

다른 상황이었다면 이 도움을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안나 크로프트는 성운 전체와 직계약을 맺은 존재였다.

“당신은 성운 <아스가르드>의 화신입니다.”

[성운 <아스가르드>의 거대 설화들이 오랜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리고 하필 이 층은,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이 머무는 선실이었다.

안나 크로프트는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나는 저들의 화신입니다. 그럼 더욱 이상하지 않습니까? 내가 당신들을 보고 있는데, 왜 저들이 달려오지 않는지.”

나 역시 인근에서 서성이는 성좌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우리의 대화를 듣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모종의 방식으로 성좌들의 시선을 차단한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이지?”

나는 안나 크로프트의 심유한 눈을 마주 보았다.

[전용 스킬, ‘독해력’이 발동합니다!]

「안나 크로프트는 누구보다 현실적인 대의를 중시하는 화신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세계의 가장 큰 올바름을 추구하는 이는 안나 크로프트였다.

유중혁의 대의가 분노와 증오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안나 크로프트의 대의는 정의로 만들어졌다.

절대 다수의 생존.

그녀의 목표는 자신이 태어난 라스베이거스를, 미국을, 나아가 지구 전체를 이 시나리오의 지옥 속에서 보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세계선에서 미국은 멸망했다.」

그녀의 고향은 대멸망이 일어났던 그날 사라졌다. 이제 남은 이들은 그녀를 따르는 소수의 ‘차라투스트라’뿐이다.

그럼에도 안나 크로프트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표정은 어떤 열의로 가득했다.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세계에 가까워진 사람의 표정.

배 전체에 울려 퍼지는 부드러운 진동을 느끼며, 나는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 방주를 차지할 생각이군.”

거의 동시에 나와 같은 해답에 도달한 듯, 곁의 한수영이 침음했다.

그러자 안나 크로프트가 빙긋 웃었다.

“역시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요.”

“성좌들을 몰아내고 방주를 차지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인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에요.”

안나 크로프트의 계획은 명백했다.

‘최후의 방주’는 다른 세계선으로 설화의 씨앗을 옮기는 거대 설화 병기.

성좌들을 물리치고 이 방주의 통제권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새로운 세계선으로 인류를 이송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단 하나의 성좌도 살려둘 순 없어요. 설령 그게 당신이라 해도.”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멸살법’의 오래된 문장을 떠올렸다.

「안나 크로프트의 ■■은 ‘완전한 밤’이다.」

그 어떤 별빛도 비추지 않는 암흑의 세계.

안나 크로프트는 인간이 다시 그 어둠 속에서 자유로워지길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꿈꾸는 세계라면, 내 일행들도 모두 살아남을 수 있겠지.

나는 조금은 외로운 느낌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한시적인 동맹이겠군요. 방주의 ‘핵’이 있는 곳까지만 동행하는 겁니다.”

“그때까진 내 [미래시]의 힘을 빌려주겠어요.”

곁에 있던 한수영이 나를 향해 메시지를 보냈다.

―거짓 간파로 계속 확인하고 있었는데, 거짓말은 없어. 딱히 포커페이스를 발동한 것 같지도 않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동맹을 받아들이겠습니다.”

*

나는 비형이 남긴 설화를 더듬으며 주변의 지형을 읽었다.

「삼림 지대의 바깥쪽. 창공에 닿은 가지 쪽 출구.」

안나 크로프트를 따라가는 동안 내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서 있는 장소는 벌판이 아니라 나무의 한 층위였다는 것이었다.

―세계관 구현을 제법 잘해놨네.

한수영이 감탄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교하게 구현된 <아스가르드>의 세계관을 보고 있자니, 최후의 방주가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된 물건인지 실감이 났다.

이것이 우주수 이그드라실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기껏해야 표본 정도겠지.

그럼에도 이 나무는 충분히 넓고 광대했다. 아마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은 이 설화를 기반으로 다음 세계선에서도 기득권의 지위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안나 크로프트는 그런 성좌들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 전방 탐색에 집중했다. 그런 안나 크로프트를 보던 한수영이 물었다.

―그런데 저 녀석 괜찮을까? 성운을 배신한 대가가 클 텐데.

내가 답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안나 크로프트였다.

“내 사정은 당신들이 상관할 바 아니에요.”

“······뭐야, 너 이런 것도 엿들을 수 있어?”

“오래 말이 없으니 밀회를 나누고 있을 거라 짐작했을 뿐이에요.”

“믿고 있는 뒷배라도 있나 봐?”

한수영의 말에, 안나 크로프트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무슨 소리죠?”

“일개 화신이 ‘성운’ 전체의 시야를 차단하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할까 싶어서 말이지.”

한수영의 말이 맞다. 그 어떤 화신이라 해도 그런 일을 해낼 수는 없다.

나는 안나 크로프트의 뒤쪽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전용 스킬, ‘독해력’의 집중도가 더욱 높아집니다!]

짐작 가는 것이라면 있었다.

그녀의 뒤쪽에서 부드럽게 뭉그러지는 혼돈의 기운.

그 너머에서, 안나 크로프트의 눈동자와 닮은 붉은 눈동자가 언뜻 보이는 것도 같았다.

애초에 성좌들이 보는 채널에 간섭할 수 있는 종족은 이 세계에서 둘뿐이다.

쿠구구구구!

허공에서 날벼락이 떨어진 것은 그때였다. 일대의 대지가 갈라지고, 주변의 기후가 심상치 않게 흔들렸다. 폭풍이 오는 소리였다.

[성좌, ‘외눈의 아버지’가 자신의 외눈을 천천히 깜빡입니다.]

츠츠츠츠츠츳!

안나 크로프트의 안색도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98번 시나리오에서 싸웠던 창조신 ‘라’도 저 정도의 박력은 아니었다.

아까 본 토르조차 능가하는 아득한 격.

이 세계관의 최강자가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오딘.”

우리는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김독자 컴퍼니>가 강해졌다고 해도, <아스가르드>의 땅에서 신화급 성좌인 오딘을 맞상대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성좌, ‘외눈의 아버지’가 자신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무시무시한 시선이 세계를 훑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가 우리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쪽이에요! 빨리!”

안나 크로프트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이그드라실의 상층부로 통하는 나무줄기가 나타났다. 우리는 그 줄기 위를 달려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바닥의 줄기들이 힘을 잃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더 빨리!”

나는 온 힘을 다해 달리며 바람을 움직였다.

[전용 스킬, ‘바람의 길 Lv.???’이 발동합니다!]

지금까지 모은 거대 설화의 영향으로 더욱 강력해진 바람의 길이 일행들에게 가속도를 붙였다. 가능하면 [마왕화]를 전개해 날개를 펼치고 싶었지만, 전송 직전 다친 한쪽 날개의 회복이 더딘 상태였다.

두두두두두두두!

뭔가가 우리의 뒤를 쫓고 있었다.

[성좌, ‘하프와 호른의 신’이 아버지의 명령을 듣습니다.]

[성좌, ‘사랑과 고양이의 여신’이 아버지의 명령에 따릅니다.]

[성좌, ‘멸망의 늑대에게 팔을 잃은 자’가 울부짖습니다!]

[성좌, ‘큰 뿔 다리의 수호자’가 누군가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이제 다 왔어요!”

말과 함께 돌아선 안나 크로프트가 뒤를 향해 양손을 뻗었다. 일순간 주변의 정경이 변하며 일대의 시야가 사라졌다. 안나 크로프트의 특기인 [환영 결계]였다. 한순간 주변이 암전된 성좌들이 기함을 했다.

츠츠츠츠츠츳!

안나 크로프트의 눈이 충혈되더니, 곧이어 그녀의 입과 귀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성운에 직접 대항한 대가였다. 안나 크로프트는 그런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외쳤다.

“이리스! 셀레나! 동료들을 데려가!”

우리보다 앞서 달리던 두 사람이 ‘차라투스트라’를 데리고 가지의 끝을 향해 나아갔다.

“달려요! 바로 앞이니까!”

피를 쏟는 안나 크로프트는 어느새 한쪽 무릎이 꺾이고 있었다. 도저히, 혼자서 달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한수영.”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한수영이 안나를 안고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가지의 끝에 도달했다. 무지개 빛이 감도는 신비한 다리가 그곳에 있었다.

「다른 층으로 통하는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트].」

신화 속에서나 나오던 환상의 다리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셀레나와 이리스 일행은 이미 다리를 절반 이상 건너간 상태였다.

나는 [전인화]를 발동해 추진력을 이용해 단번에 건너가려 했다. 그런데.

콰아아아아앙!

허공에서 빛이 번뜩인다 싶더니, [비프로스트]의 중심이 뚝 끊어졌다.

창공을 가르는 거대한 창이 회수되고 있었다.

나는 그 창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신왕(神王) 오딘의 무기, 궁니르(Gungnir).

그는 다른 세계로 통하는 다리를 직접 끊어버림으로써 우리를 제거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나는 뒤쪽에서 쫓아오는 성좌들의 무리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곳에서 오딘과 싸우면, 우리는 필패한다.

쿠구구구구!

결국 답은 다리를 건너가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끊어진 다리의 폭은 너무나 컸고, 그 사이에는 오딘이 생성한 폭풍이 불고 있었다. [바람의 길]이나 [전인화]를 전력으로 발동해도 저걸 건널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한수영이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빨리! 방법 없냐고!”

한수영에게 흔들리는 안나 크로프트가 피를 꾸역꾸역 토하며 말했다.

“내 미래시도······ 완전한 건 아니에요······ 다만 이번만큼은······ 확실히 봤어요. 이 다리에서······ 우리 네 사람이 건너는 걸······.”

······네 사람?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나치게 피를 많이 흘린 안나 크로프트는 어느덧 말이 없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그게 될까?’」

하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채널의 격변에 당황한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가 쏟아지고 있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채널 화면을 보고 싶어합니다!]

[성좌, ‘흥무대왕’이 갑작스런 채널 암전에 불평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사라진 김독자를 찾습니다!]

“비유! 화면을 틀어!”

“뭐? 돌았어?”

지금 채널을 열면 방주 안의 모든 성좌들은 내 위치를 눈치채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채널을 열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츠츠츠츠츠츳!

[다수의 성좌들이 펼쳐진 화면에 깜짝 놀랍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위기를 깨닫고 경악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이 상황에 대한 기시감을 느낍니다.]

성좌들이 말하는 기시감이 무엇인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그들은 끊어진 다리를 함께 건넌 적이 있었다.」

끊어진 동호대교 위로 발동했던 ‘데우스 엑스 마키나’.

[절대다수의 성좌들이 그때의 상황을 기억합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거대 설화들이 움직입니다!]

성좌들의 시선과 함께, 개연성이 요동쳤다.

[‘무대화’가 발동합니다!]

츠츠츠츠츠츠······!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발생합니다!]

그때 성좌들이 재현했던 바로 그 다리가,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

[데우스 엑스 마키나 ― 짝수 다리]

설명 : 성좌의 가호로 만들어진 빛의 다리. 오직 ‘짝수’의 인원만이 다리를 건너갈 수 있다. 홀수의 인원이 다리를 건너려 할 시, 다리는 즉시 소멸한다.

+

짝수 다리.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한수영! 안나를 데리고 달려!”

“뭐?”

“빨리!”

나는 한수영에게 [바람의 길]을 발동해 강제로 다리를 건너게 했다.

―야! 에이 씨, 모르겠다······!

나는 멀어지는 한수영의 뒷모습을 보며 등을 돌렸다.

어느새 안나 크로프트의 [환영 결계]를 빠져나온 성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격을 개방하며 생각했다.

「짝수 다리는, 반드시 짝수의 인원만이 건널 수 있다.」

멀리서 한수영의 목소리와 분노한 오딘의 포효가 번갈아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았다.

여기서 죽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안나 크로프트는 ‘네 명’이라고 했다.」

달려드는 성좌들을 향해 [전인화]의 전격을 방출하는 순간, 성좌들의 후미에서 폭발음이 들려 왔다.

누군가가 탱크처럼 성좌들을 깨부수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익숙한 설화. 방금 이 층으로 소환된 이가 있었다.

뿌옇게 차오른 설화의 안개 너머로 녀석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대로 달려라. 김독자.

적들을 모조리 쳐내고, 성좌들의 골통을 박살낸 놈이 흉흉한 눈빛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녀석이랑은 건너기 싫었는데.

―이번엔 던지지 마라, 개자식아.





< Episode 95. 개천(開天) (1) > 끝

< Episode 95. 개천(開天) (2) >





다리를 향해 달려오는 유중혁과, 뒤를 쫓는 <아스가르드> 측의 성좌들.

대머리 의병장이 외쳤다.

[힘내게 후손들이여!]

그러자 외눈 미륵이 중얼거렸다.

[머리에 땀 찼다, 너.]

[자네 머리나 신경 쓰게.]

[도우러 안 갈 거냐?]

[화신이 없는데 무슨 수로 가나?]

[직접 현현하면 되잖아.]

[여기에 너무 오래 갇혀 있어서 돌아버린 건가? 남은 코인으로는 상징체 현현도 불가능하네.]

투덜거린 대머리 의병장이 머리를 닦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단조로운 무채색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연무장이 있었다.

92층 시나리오 지역, ‘무한의 성소’.

총 10개의 미션을 클리어 해야만 탈출할 수 있는 이곳에, ‘대머리 의병장’을 포함한 다수의 위인급 성좌들은 벌써 몇십 년째 갇혀 있었다.

외눈 미륵이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척가놈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인지 모르겠군.]

<무한의 성소> 지역을 처음으로 찾아낸 이는 고려제일검이었다.

「진정한 무인이라면 당연히 가야 할 곳이지. 시련들도 아주 쉬우니 숨겨진 조청 같은 곳이라 할 수 있다.」

척준경 다음으로 시나리오를 클리어한 해상전신은 이렇게 말했다.

「해볼 만한 곳일세. 통과하기만 하면 대단한 성취를 이룰 수 있어.」

척준경과 이순신의 무위를 동경하던 위인급 성좌들은, 그 말에 모두 ‘무한의 성소’로 향했다.

그리고 지금 수십 년째 이 꼴이었다.

[우리가 척준경과 이순신이 아니란 걸 그땐 잠깐 잊고 있었네.]

어디서든 재능이 문제다.

대머리 의병장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연무장 중심에서 병장기의 파찰음이 반복해서 들려 왔다.

[저 치들은 아직도 싸우는 건가?]

외눈 미륵의 외눈이 향한 곳엔 드잡이질을 벌이는 두 노인이 있었다.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호랑이 같은 사내와 호리호리하고 단단한 근육을 가진 여우 같은 사내.

두 자루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치자 강한 스파크가 튀었다.

[김유신! 오늘은 반드시 승부를 내겠다!]

[계백, 자네는 아직 내 상대가 안 되네.]

그들의 주변부로 「무대화」가 발생하며 황산벌의 전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언젠가 김독자가 [간평의]를 이용해 만들었던 바로 그 전장이었다.

김유신의 용화향도들이 계백을 공격했고, 계백 또한 그에 웅혼한 격을 방출하며 귀신처럼 전장을 누볐다.

대단한 전투였지만, 다른 위인급 성좌들은 따분한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매금지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한남국 개국공은 혀를 쯧쯧 찼다.

외눈 미륵이 비웃었다.

[저렇게 폼 잡아 봤자 지들도 알아. 이제 여긴 황산벌이 아니라는 거.]

한때는 진심이었던 적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깊은 은원이 있었고, 죽음으로도 풀 수 없는 한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황산벌에서 싸웠다.

분명 그런 시절도 있었다.

[설화, ‘노을이 지는 황산벌’이 드문드문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성좌가 되고 난 후 가장 빨리 닳아버리는 것은 성좌 자신의 ‘설화’다. 자신의 이야기가 고갈되어 갈수록, 성좌들의 힘은 약해진다. 무료해지고, 따분해지며, 깊은 우울에 빠지거나 권태에 침식된다.

그런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좌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설화를 찾게 된다.

이 끔찍한 영원의 굴레에서 잠깐이나마 해방되기 위해, 또 새로운 비극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카가강!

병장기가 부딪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서애일필이 말했다.

[그래도 전보다는 힘이 좀 들어갔는데?]

[그때 ‘구원의 마왕’이 저들을 소환하고 나서부터 다시 불이 붙은 것 같아.]

매금지존의 말에 성좌들은 동시에 시나리오 채널을 향해 눈을 돌렸다.

다리를 건너가는 김독자와 유중혁의 모습.

이미 반대편에 도착한 한수영이 외치고 있었다.

―김독자! 더 빨리!

시끄럽던 병장기 소리가 멈췄다. 황산벌을 재현하던 김유신도, 계백도 어느덧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하나둘 건들거리며 패널 근처로 모여들었다.

몇몇이 김독자가 건너는 다리를 보며 알은체를 했다.

[잠깐, 저거 ‘짝수 다리’ 아닌가? 옛날 생각나는군.]

[뭔 헛소린가. 자넨 저 때 구독도 안 했지 않은가?]

[험······.]

오딘이 김독자와 유중혁을 쫓아오고 있었다. 결코 빗나가지 않는다는 신창 궁니르가 김독자의 등을 겨냥하고 있었다. 심지어 폭풍도 점점 거세어져 둘의 전진 속도는 느려지고 있었다.

외눈 미륵이 소리쳤다.

[아니! 오딘 저 자는 그래도 신화급 성좌의 위상이 있지―]

[독자군도 신화급 성좌일세.]

[신화급이라도 다 같은가! 우리 김독자는 아직 연약한 새내기 신화급이야!]

언제 다투었냐는 듯, 화면 앞에 나란히 앉은 김유신과 계백도 외쳤다.

[후손이 수련을 게을리했군.]

[간평의로 나를 부를지도 모르겠어. 준비를 해야······.]

[계백 그대를? 저런 상황에서라면 당연히 나를 소환하겠지.]

또다시 황산벌이 재현되려는 기미가 보이자, 외눈 미륵이 경고하듯 말했다.

[둘 다 닥치고 화면이나 보시지.]

[그나저나 저 자가 또 김독자를 던져버리는 건 아니겠죠?]

다리 위를 달리는 유중혁의 오른쪽 팔에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모든 성좌들이 우려하던 와중, 갑자기 유중혁이 그 팔로 김독자의 멱살을 잡았다.

[내 저럴 줄 알았네! 저럴 줄―]

유중혁은 김독자를 힘껏 앞으로 내던지며 김독자의 등을 발판 삼아 짓밟았다. 마치 서핑이라도 하는 듯 폭풍을 거슬러 나아가는 유중혁.

다음 순간, 오딘이 던진 궁니르가 광대한 빛살과 함께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아아!

빛이 걷혔을 때, 그곳에는 부서진 [비프로스트]의 다리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성공인가?]

이내 화면이 전환되며, 다음 칸으로 넘어간 김독자 일행이 나타났다.

[······오오, 성공이야!]

마치 자신들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반도의 성좌들이 서로를 마주 보며 기뻐했다. 심지어 계백과 김유신도 머쓱하게 서로를 보더니 가볍게 주먹을 맞댔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놈들을 쫓아라.

분노한 오딘의 일갈에 <아스가르드> 성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김독자 컴퍼니>는 오래 달아나지 못할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김독자라고 해도 저렇게 불리한 무대에서 거대 성운들로부터 오래 달아나지는 못한다.

게다가 채널이 공개되었으니, 곧 방주 내의 다른 성운들도 <김독자 컴퍼니>를 노리기 시작할 터였다.

깊게 내려앉은 침묵 사이로, 누군가가 체념조로 중얼거렸다.

[이번엔 힘들겠군······.]

[사실, 죽어도 한참 전에 죽었어야 했던 친구지.]

그 말에 몇몇 성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김독자의 생존은 기적의 연속이었다. 동호대교의 다리 아래로 떨어졌을 때도, [절대 왕좌]를 깨부술 때도, ‘구원의 마왕’이 되었을 때도, 1863회차에 다녀왔을 때도. 김독자는 몇 번이나 죽었어야 했다.

심지어 그가 ‘외신왕’이 되어 나타났을 때는, 모든 성좌들이 이제야말로 그가 죽을 거라 생각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보다 한참 하위 시나리오에 있던 화신.」

이제 성좌들은 자신들보다 앞선 시나리오를 나아가는 김독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부러운 눈으로, 누군가는 자조적인 눈으로. 모두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누구도 감히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입을 연 것은 계백이었다.

[신단수의 예언을 훔쳐 들은 적이 있네. 어쩌면 이 세계선이, 최후의 세계선이 될 수도 있다더군.]

누구도 <김독자 컴퍼니>의 끝이 어디인지는 모른다.

그들이 끝내 어디에 도달할 것인지, 어떤 ■■을 보게 될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이 세계의 끝에 도달조차 해보지 못하고 끝나버릴 수도 있다.

계백이 자신의 대도를 짚은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은 연무장의 중심에 있는 포탈을 향해 있었다. ‘무한의 성소’의 마지막 시련이 있는 장소.

김유신이 물었다.

[설마 다시 도전할 셈인가? 이번에는 죽을 수도 있네.]

[죽으면 여기가 나의 ■■겠지.]

계백의 말에, 김유신이 웃었다.

[우리의 ■■은 황산벌이다.]

목을 꺾으며 김유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번째로 일어난 것은 대머리 의병장이었다.

[나도 다시 한번 도전해보겠네.]

의기에 찬 그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러자 이어서 몇몇의 성좌들이 더 일어났다. 매금지존, 한남국 개국공, 서애일필······ 그리고.

[지난번 파티로 갔다가 몰살당할 뻔한 걸 다들 잊진 않았겠지.]

외눈 미륵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지금껏 이 시나리오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길 통과하지 않으면 저 치들을 도우러 갈 수가 없어.]

애초에 ‘무한의 성소’의 최종장은 이 정도의 인원만으로 클리어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일인병기인 척준경과 군함을 이끄는 이순신이 괴물인 것이다. 하다못해, 성좌 몇만 더 있었더라도―

성소의 한쪽 구석이 환하게 빛난 것은 그때였다.

[누군가가 ‘무한의 성소’ 10층에 입장하였습니다!]

외눈 미륵이 반색하며 외쳤다.

[오, 신입인가?]

빛살 속에서 나타난 이는 두 사람이었다.

잠시 후, 그들이 누구인지를 눈치 챈 외눈 미륵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주 큰 사람과, 아주 작은 사람.

먼저 입을 연 것은 작은 사람 쪽이었다.

[척준경 말대로군. 아직도 여기에 있었나? 한심한 놈들.]

사나운 패기를 흩날리며 키리오스가 말했다.

[네놈들이 미적거려서 내 제자가 죽게 생겼다.]

*

빛무리가 일제히 부서지는 광경과 함께, 나와 유중혁은 세계관의 출구로 빨려 나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유중혁에게 짓밟혀 있었다.

“던지지 말라니까!”

유중혁은 내 등을 밟은 것이 불결하다는 듯 가볍게 자신의 전투화를 털었다.

우릴 기다리고 있던 한수영이 다가왔다. 표정을 보니 또 한 마디 쏘아붙일 요량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안나 크로프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대화를 그런 식으로 사용할 줄은 몰랐군요. 솔직히 조금 감탄했습니다, 구원의 마왕.”

그러자 한수영이 안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넌 [미래시]로 다 본 거 아니었어?”

“다리를 건너는 건 보았지만 그게 저런 다리인 줄은 몰랐습니다.”

“완전 사이비네 이거.”

나는 그들의 다툼을 무시하고 주변의 정경을 살폈다. 줄기의 관다발처럼 생긴 통로들이 곳곳으로 뻗어 있었다.

아마 이곳이, 이 ‘최후의 방주’의 복도인 모양이었다.

우리보다 앞서 통로로 진입한 ‘차라투스트라’들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눈을 감고 뭔가를 느끼던 안나 크로프트가 말했다.

“아마 각자 다른 통로로 흩어진 것 같군요. 다행히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쪽 일행도 무사한 것 같군.”

유중혁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해당 지역에서는 타 신화의 영향력이 약해집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맥락이 다시 활성화됩니다!]

<아스가르드>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자, 일행들의 설화가 조금씩 감지되고 있었다. 곳곳에 흩어진 일행들이 느껴졌다.

[설화,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존재를 알립니다!]

나는 내 설화를 강하게 방출해 일행들이 한곳으로 모일 수 있도록 유도했다. 일행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콰아아앙!

우리가 닫고 나온 <아스가르드>의 출입구에서 연달아 폭음이 울려 퍼졌다.

누군가가, 닫힌 문을 열고 나오려 하고 있었다. 누구인지는 뻔했다.

“계속 움직이죠.”





< Episode 95. 개천(開天) (2) > 끝

< Episode 95. 개천(開天) (3) >





우리는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을 피해 복잡하게 배열된 통로를 달려나갔다. 

[성좌, ‘멸망한 늑대에게 팔을 잃은자’가 피냄새를 맡습니다.] 

[성좌, ‘하프와 호른의 신’의 음표들이 당신의 귓가에 아른거립니다.] 

[성좌, ‘환생자들의 시조’가 당신의 영혼을 추적합니다!] 

[성좌, ‘아비도스의 주인’이 당신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선언합니다!] 

채널을 통해 우리를 응원하는 성좌들이 있는가 하면, 그 채널의 시야를 통해 우리를 쫓아오고 있는 성좌들도 있었다. 

우리의 위치가 공개된 순간, 자신의 세계관 장벽을 넘어서 우리에게 살의를 드러낸 별들. 

그럼에도 우리가 아직 잡히지 않은 것은, 지금 모인 멤버가 바로 이 넷이었기 때문이다. 

“오른쪽으로 꺾으면 안 돼요. 좋지 않은 예감이 드니까.” 

안나 크로프트의 직감을 믿고 방향을 틀었다. 비록 적이지만 이럴 때는 가장 든든한 우군이었다. 

연이어 갈림길이 나타났다. 

[설화, ‘예상표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오른쪽으로 가면 죽을 확률 92%. 왼쪽으로 가면 죽을 확률 44%. 계속 직진!” 

머릿속으로 수많은 클리셰의 패턴을 읽어내며 한수영이 소리쳤다. 

“직진하면 살 확률이 얼만데?” 

“나도 몰라!” 

나를 쏘아본 한수영이 앞서 달려나갔다. 

“위에서 온다.” 

다른 누구도 아닌 주인공의 직감이었다. 유중혁이 [파천강기]를 줄기차게 발산했다. 선제공격에 당한 성좌들이 비명과 함께 복도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간간이 [파천검도]가 뭔가를 썰어대는 소리가 들려 왔다. 

“계속 달려라.” 

문득, 나는 우리 네 사람이 모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 넷은, 이 시나리오를 가장 안전하게 클리어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은 예언자, 한 사람은 작가, 또 한 사람은 회귀자.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멈춰.” 

내 말과 함께, 일행들의 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세 사람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흘끗 보고는, 앞의 선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안나 크로프트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설마 그 방으로 들어갈 생각은 아니겠죠?” 

유중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길 통과하는 게 유일한 방법입니다.” 

“지금 그 선실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안 보여?” 

아주 잘 보인다. 그리고 이 뒤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성좌들의 격도 아주 잘 느껴졌다. 

<올림포스>. 

「내가 원하는 장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올림포스>의 세계관을 지나가야만 한다.」 

비형이 남긴 설화에 따르면 다른 길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방주 밖에서 우리에게 치욕을 당한 제우스는 결코 길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뒤는 오딘, 앞은 제우스로군.” 

유중혁이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여기만 돌파하면 놈들에게 대적할 방법이 있는 건가?” 

“있어, 반드시.” 

바로 뒤쪽에서 쫓아오는 오딘의 격이 느껴졌다. 

한수영이 소리쳤다. 

“젠장, 그럼 빨리 열어! 저 새끼들 쫓아오니까!” 

우리는 <올림포스>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뭔가가 우리를 강하게 흡입한다 싶더니,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는 <올림포스>의 창공을 활공 중이었다. 

멀리서, 웅장한 <올림포스>의 하늘성이 보였다. 

[성운 <올림포스>의 성좌들이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했습니다!] 

대기가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삽시간에 몰려든 뇌운이 하늘을 뒤덮었다. 

[성좌, ‘번개의 좌’가 <올림포스> 전체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올림포스>의 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왕의 주변을 지키는 12신좌들. 

[성좌, ‘전능의 태양’이 자신의 마차를 움직입니다!] 

[성좌, ‘흉포의 군신’이 자신의 검을 집어듭니다!] 

[성좌, ‘순결한 달빛의 사냥꾼’이 활시위를 겨눕니다!] 

해역 아래로 우리를 기다리는 신화의 괴물들이 보였다. 

[성좌, ‘미궁의 괴물’이 당신을 향해 울부짖습니다!] 

[성좌, ‘죽음을 노래하는 요정’이 당신의 죽음을 노래합니다!] 

이 세계관 전체가, 우리의 적이었다. 

쿠르르르르르! 

“움직여!” 

내 [바람의 길]과 유중혁의 [허공답보]가 동시에 발동했다. 

안나 크로프트의 [질풍가도]와 한수영의 [흑운칠성]이 그 뒤를 이었다. 우리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우리는 창공을 질주하고 있었다. 

하늘의 뇌운이 점점 더 불길한 빛을 띠었다. 

[구원의 마왕!] 

12신좌들도 우리의 뒤를 바짝 쫓았다. 

허공을 가르고 날아드는 아레스의 거검.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휘둘러 가까스로 그 공격을 막아냈다. 꽈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관절의 마디마디가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중전차 아래에 깔린 듯한 느낌. 이것이 자신의 세계관을 등에 업은 12신좌의 진짜 힘이었다. 

나는 전신의 격을 개방하며 진언을 발출했다. 

[얕보지 마라, 아레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포효합니다!] 

다른 존재라면 모를까, 적어도 ‘아레스’에게는 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이 녀석에 대한 승리 설화가 있기 때문이다. 

[설화, ‘전쟁의 신을 패퇴시킨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난항이었다. 

[흑염]을 두른 한수영을 향해 ‘순결한 달빛의 사냥꾼’ 아르테미스가 달려들었고, 허공을 누비는 유중혁은 이미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 아테나와 격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가장 아래쪽에 있던 안나 크로프트를 <올림포스>의 하위 성좌들이 물고 늘어졌다. 

[나는 너를 응원했다, 김독자.] 

내 배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이 하늘에서는 누구보다도 빠른 성좌. 신발 끝에 달린 날개 무늬. 

[하지만 너는 이곳으로 오지 말았어야 했어.] 

‘하늘 걸음의 주인’, 헤르메스였다. 

그가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 몹시 분노하셨다.] 

그리고 새하얗게 백열하던 뇌운이 폭발했다. 모든 것이 슬로우모션처럼 움직였다. 하늘의 시야가 녹아버리듯 사라지고 있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뒤덮는 낙뢰. 세계관 안에 살아있는 그 어떤 존재도 제우스의 분노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이쪽을 보는 한수영이 뭐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말해주었다. 

‘괜찮아.’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 정신을 집중했다. 벌써 승부가 끝났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웃는 아레스가 보였다. 나는 녀석을 무시하고 하늘을 향해 피뢰침처럼 검을 들었다. 

콰아아아앙! 

하늘의 낙뢰가 나를 향해 모여들었다. 단번에 모든 설맥이 타버릴 정도의 격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버텨냈다. 정확히는, 내 손끝에서 일렁이는 어둠이 제우스의 낙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내 입에서 알 수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으르렁거립니다!] 

시야가 붉게 물들고, 입에서 설화가 꾸역꾸역 쏟아져 나왔다. 

파츠츠츠츠츠츠······! 

제우스가 더욱 강한 격을 방출했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었다. 힘이 빠진 몸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제 됐다.」 

[끝이다, 구원의 마왕. 아무리 네놈이라 해도 우리 ‘세계관’에서는―!] 

낙뢰를 맞고 하염없이 추락하던 내 몸이 허공에 멈춰 섰다. 놓치기 직전이었던 [부러지지 않는 신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딱딱하게 굳어진 아레스의 표정이 보였다. 그 어떤 공포에도 굴복하지 않는 전쟁의 신의 눈동자에 두려움의 감정이 번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김독자의 검을 함께 쥐고 있었다.」 

아주 크고 튼튼한 손. 고결한 밤을 깎는 듯한 진언이 울려 퍼졌다. 

[왜 이 세계관이 너희 것이라 생각하지?] 

추락하는 내 몸을 안아 든 온화하고 깊은 어둠.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아레스.] 

낙뢰를 삼키는 밤이 창공에 번지고 있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최후의 방주’에 현현했습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최후의 방주’에 현현했습니다!] 

<올림포스>의 신화는 제우스만의 것이 아니다. 

그들의 빛나는 낮이 ‘신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낮이라 불러 준 밤이 있었던 까닭이다. 

[‘명계’가 지상에 현현합니다!] 

지하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세계가 깨어나고 있었다. 

[하데스······!] 

나를 지상에 내려놓은 명계의 왕이 하늘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승부를 가릴 시간이 왔다, 늙은 형제여.] 

하늘을 향해 치켜든 하데스의 낫이 울자, 지하의 어둠이 폭포처럼 하늘을 향해 쏟아졌다. 

명계의 군세였다. 심판관들의 진군 명령이 떨어지자, <타르타로스>의 지하를 지키던 켈베로스가 울부짖었다. 

[지하의 천한 것들이―!] 

세계관의 영웅들이 병장기를 부딪쳤다. 아르고 호의 영웅들이 전장에 투입됐다. 

제우스와 12신좌의 군세는 막강했다. 심판관 아이아코스와 헤파이스토스가 충돌했고, 켈베로스와 미노타우로스가 서로를 물어뜯었다. 

아르테미스를 위시한 숲의 병사들이 몰려왔다. ‘현명한 점성술사’ 케이론의 말발굽이 명계의 군세를 짓밟았다. 

[그대들의 밤이 아무리 깊다 한들―!] 

그런 케이론의 머리통이 허공을 날았다. 

지하에서 기어 나온 괴물들이 거대한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통을 떼어 으적으적 씹어먹었다. 

[제―우―스―!] 

깊은 설움과 원한으로 얼룩진 목소리. 

나는 그들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올림포스> 최후의 <기간토마키아>가 시작되고 있었다.」 

거신족, 기간테스. 비통한 세월을 견디며 지하에 웅크리고 있던 모든 거신족이 <올림포스>의 밤 위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심지어 그런 기간테스보다 몇 배는 더 커다란 몸집을 가진 괴물들도 있었다. 언젠가 <명계>의 감옥에서 만난 적 있던 자들이었다. 

[연옥의 모든 거신들이 <올림포스>의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헤카톤케이레스 삼형제. 

그리고 <기간토마키아>에서 함께 싸웠던 백수거신 브리아레오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아이야.] 

브리아레오스의 손 중 하나가 내 머리 위를 가볍게 스쳤다. 

[이 전장은 너를 위한 것이다.] 

하늘의 권좌에 도전하는 거신들이 밤을 딛고 일어났다. 그들의 포효에 <올림포스>의 천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제우스의 옥좌를 위협할 정도의 격. 

전장의 중심에서 하데스와 격전을 벌이는 제우스의 모습이 보였다. 두 신화급 성좌의 충돌에 새카만 낮과 밤이 뒤섞이며 세계의 시공간이 뭉그러지고 있었다. 

명계의 병력들을 지휘하던 페르세포네가 나를 향해 말했다. 

[가거라.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라. 네가 원하는 끝을 보거라.]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휘청이는 몸을 일으켰다. 이설화가 준 [생사환]을 삼키자 타버린 신경들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살점이 부서지고 피가 튀는 전장을, 나는 비틀거리며 걸어 나갔다. 

아수라장을 헤쳐온 한수영과 유중혁, 그리고 안나 크로프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려온 한수영이 나를 부축했다. 뒤를 돌아보자, 눈을 부릅뜨고 죽어간 영웅들의 시체가 그곳에 있었다. 하늘에서 추락한 별들. 이제 더 이상 이야기되지 않을 설화들이, 원망스럽다는 듯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면, 명계가 움직일 것은 당연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를 위해 그 모든 설화를 이용한 것이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울음을 토합니다!] 

멀리, <올림포스>의 출구가 보였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막은 성좌가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물었다. 

“디오니소스. 우릴 막을 겁니까?” 

자신의 신도단을 이끈 ‘술과 황홀경의 신’ 디오니소스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이미 술을 몇 병이나 마신 듯 얼큰하게 뺨이 달아올라 있었다. 

취한 듯 몽롱한 눈길로 나를 보던 디오니소스가, 술병을 쥐며 말했다. 

[모두 비켜라.] 

주인의 말에, 바쿠스의 광신도들이 길을 비켰다. 우리는 그 길을 걸어 나갔다. 어디선가 세이렌의 노랫소리와 오르페우스의 연주가 들렸다. 내가 아는 누군가가 죽어가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김독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 사위 또한 취한 것처럼 흔들렸다. 

우리는 걷고, 다시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올림포스>의 출구에 도착했다. 

우리의 뒤엔 디오니소스가 있었다. 뒤를 돌아보면 슬픔으로 물든 그의 표정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몹시 좋아했던 성좌였다. 

[김독자. 네가 가는 결말에 우리 <올림포스>는 없겠지?]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야, 네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지.”」 

아주 오랫동안 내 설화를 지켜 보아준 이. 

몇 번이나, 나를 구해주었던 존재. 

「“나와 몇몇 성좌들은, 네가 ■■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라 믿는다.”」 

뒤를 돌아보려는 나를 향해, 디오니소스가 말했다. 

[그동안 즐거웠다, 위대한 별이여.] 

등 뒤로 하나의 세계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쉽게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이나 말없이 서 있는 나를 향해, 누군가가 말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우리는 불이 꺼진 방주의 어둠을 걸어 나갔다. 

이제 목적지가 눈앞이었다.





< Episode 95. 개천(開天) (3) > 끝

< Episode 95. 개천(開天) (4) >





<올림포스>를 통과한 후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달리거나 걷고, 또 달릴 뿐이었다. 별이 빈자리에 휑한 비명만이 들려 왔다. 

저 비명들도 설화로 남을까. 그리고 다시 누군가가 그것을 들을까. 얼마나 더 많은 설화들이 반복되어야, 이 세계가 끝나는 것일까. 

“김독자.” 

“알고 있어.” 

나를 부축한 한수영의 목소리에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마침내 내가 찾던 선실의 문이 멀찍이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다른 선실의 입구와는 달리 작고 누추한 문. 

우리가 지나온 복도가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다른 세력의 성좌들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었다. 

[‘소품 보관실’에 입장하셨습니다.] 

“뭐야? 이 누추한―” 

중얼거리던 한수영의 목소리는 방의 정경이 펼쳐진 순간 도로 들어갔다. 

흰색의 도료로 덮인, 그 크기를 한눈에 어림할 수 없는 방. 만약 이곳을 ‘소품 보관실’이라 말한다면 이 방은 세상에서 가장 큰 소품 보관실일 것이다. 

「‘시나리오의 모든 것’을 모아 놓은 선실.」 

비형의 설화가 들려 왔다. 

「이제껏 시나리오에 사용된 모든 소품들이 그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소모성 아이템부터, 시나리오의 주요 보상들이나 힘을 잃은 성운의 성유물들까지.」 

내가 어룡을 사냥할 때 사용했던 ‘망치 해마의 점액’과 ‘스톤호그의 가시’도 있었다. 

그땐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쁘지 않군. 아직 쓸 만한 것들이다.” 

어느새 소품들 사이로 뚜벅뚜벅 걸어간 유중혁이 장비를 교체하고 있었다. 놈은 [흑천마도]의 표면을 설화금속 스프레이로 코팅하고, 입고 있던 코트도 새것으로 교체하더니, 낡은 전투화를 내던지고 성유물을 집어 들었다. 

번뜩이는 눈동자를 보니 만족스러운 듯했다. 

“‘쓸 만한 정도’?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것들인데! 빨리 챙겨서 뜨자.” 

어느새 아이템 더미에 뛰어든 한수영도 착용할 물품들을 골라내기에 바빴다. 늘 성운의 풍족한 지원을 받아온 안나 크로프트조차, 허리를 숙이고 아이템들을 물색하고 있었다. 

우리는 시나리오의 히든 피스를 발견한 평범한 화신들처럼 아이템들을 찾고, 물품을 교체하고, 서로를 보며 빙긋 웃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 순간을 견뎌낼 수 없다는 것을.」 

방 밖에서 다시 한번 폭음이 울렸다. 

이번에는 매우 가까웠다. 

“······다음 방은 어디야?” 

피로 때문일까, 한수영은 잠시 [예상 표절]의 이야기를 중지한 상태였다. 

순간 시선이 마주친 한수영의 눈꼬리가 슬쩍 떨렸다. 

「“작가라고 항상 이야기하는 게 즐거운 줄 아냐?”」 

저 웃음의 의미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세계가 멸망해도, 시나리오가 비극으로 향해도, 녀석은 여전히 작가다. 그렇기에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서술되지 않은 아픔까지도 녀석의 머릿속엔 전부 존재하고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이 선택은 ‘독자’인 그만이 할 수 있었다.」 

“아니, 우린 여기서 싸울 거야.” 

「어떻게든 원하는 결말을 보고야 말겠다는 탐욕과 아집으로 가득 찬 그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한수영이 역정을 냈다. 

“내핵을 부수러 가는 거 아니고?” 

“내핵에 도달하려면 거대 성운의 세계관을 더 지나쳐야 해.” 

“잘 피해서 가면 되잖아! 저 문으로 나가면―” 

한수영은 그 말을 하며 한쪽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쪽은 <황제>로 통하는 문이야.” 

“그럼 저쪽으로―” 

“거긴 <베다>와 연결된 문이고.” 

“시발······.” 

기겁한 한수영이 문고리에서 떨어지며 선실의 잠금장치를 눌렀다. 

다시 한번 폭음이 울려 퍼졌다. 둔중한 진동과 함께, 누군가가 선실의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뭔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선실 벽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제 바로 앞까지 왔어요.” 

안나 크로프트가 말했다. 가뜩 인상을 찌푸린 한수영이 다시 이마를 짚었다. 

[설화, ‘예상 표절’이 이야기를 재개합니다!] 

결국 한수영이 다시 설화를 발동했다. 예상하고 싶지 않은 전개들이 녀석의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을 것이다. 

[미래시]를 가진 안나 크로프트도, 무수한 회차를 겪으며 패턴을 읽어온 유중혁도 슬슬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우린 여기서 싸워야만 해. 이곳이 우리가 이길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방이야.” 

‘최후의 방주’의 모든 선실에는 거대 성운들의 세계관이 구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 방주에서 유일하게, 그런 세계관이 만들어지지 않은 장소가 있었다.」 

바로, 이 ‘소품 보관실’이었다. 

시나리오에 사용될 아이템들을 비축해 놓은 장소. 

[해당 선실은 어떤 세계관의 영향도 받지 않는 곳입니다.] 

그것이 내가 이 방을 전장으로 택한 이유였다. 

“왔다.” 

유중혁이 [흑천마도]의 칼자루를 뽑는 순간, 보관실의 네 방위를 차지하고 있던 문이 한꺼번에 터졌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 성좌들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성좌, ‘12월 25일의 주인’이 방주에 현현했습니다!] 

[성좌, ‘우주의 순환을 책임지는 자’가 자신의 시종들과 함께 전장에 합류합니다!] 

<베다>. 

[성좌, ‘아비도스의 주인’이 분노와 함께 현현합니다!] 

[성좌, ‘지진과 화산의 관장자’가 오랜 잠에서 깨어납니다!] 

[성좌, ‘들숨과 날숨의 지배자’가 자신의 설화를 일깨웁니다!] 

<파피루스>. 

[성좌, ‘외눈의 아버지’가 자신의 창을 바로 잡습니다.] 

[성좌, ‘멸망의 늑대에게 팔을 잃은 자’가 당신을 발견합니다!] 

<아스가르드>. 

[성좌, ‘흙으로 사람을 빚은 대모신’이 방주에 현현했습니다!] 

[성좌, ‘대라천존’이 방주에 현현했습니다!] 

[성좌, ‘황천상제’가 자신의 옥좌에 올랐습니다!] 

[성좌, ‘삼첨창의 주인’이 자신의 보패를 모두 꺼냈습니다!] 

······<황제>까지. 

보관실의 모든 문이 개방되는 순간, 공간 전체의 설화들이 부딪치며 팽창했다. 서로 다른 세계관의 ‘거대 설화’들이 자신의 언성을 드높이고 있었다. 

한수영이 웃었다. 

“우리 싫어하는 놈들은 다 몰려왔네.” 

[저쪽이다!] 

누군가가 외치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뒤쪽으로 훌쩍 물러났다. 굉음과 함께 방금전까지 우리가 서 있었던 바닥에 새카만 재가 흩날렸다. 

[‘거대 설화’들이 새로운 선실을 발견했습니다!] 

[일부 설화들이 새로운 선실에 자신의 세계관을 이식하기 시작합니다!]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콰아아아앙! 

폭발음과 함께 우리는 제각기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나 역시 온갖 종류의 시나리오 소품들을 미리 챙겨둔 상황이었다. 

우리는 동서남북으로 등을 맞대고 선 채 다가오는 성좌들을 향해 격을 방출했다. 한수영이 [흑염]을 발출하며 전방으로 몸을 날렸다. 

“다 뒈져라!” 

한수영이 던진 새카만 구체가 허공을 날아 성좌들 사이에 떨어졌다. 뭔가 싶었는데, 다음 순간 구체에서 어마어마한 폭염이 끓어 올랐다. 

[크아아아아아아!] 

나는 그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것은 241회차 95번 시나리오 보상 아이템인 [악몽 폭염]이었다. <에덴>의 지옥에서 끌어올린 불길을 담은 그 아이템은, 범위 내 지역에 불꽃을 점화시켜 약 10년의 세월 동안 불태우는 지독한 설화 병기였다. 

[멸망한 성운의 불꽃 따위―] 

후우우우, 하는 소리와 함께 여와의 흙이 겁화의 중심에 길을 냈다. <황제>의 성좌들이 그 길을 달리며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때 서유기에서 우리와 맞서 싸웠던 이들도 있었다. 

한수영이 바락바락 이를 갈았다. 

“쟤들도 왔는데 넌 왜 아직이야 흑염룡!”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조금만 기다리라고 외칩니다!] 

문을 통해 넘어오는 성좌들의 수가 기백을 넘어섰다. 삼백, 사백, 오백······ 세계관 내에 흩어져 있던 모든 성좌들이 이 광활한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성좌들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그 성좌들을 중심으로 「무대화」가 발생하고 있었다. 무채색의 땅이 황폐한 사막으로 바뀌고, 거대한 피라미드가 솟아올랐다. 

‘아비도스의 주인’ 오시리스가 말했다. 

[나를 잠에서 깨운 게 누구인가 했더니.] 

이어서 하늘의 구름이 모여들며 천상계의 전경이 펼쳐졌다. 

‘흙으로 사람을 빚은 대모신’ 여와가 말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아이야. 내가 네게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다.] 

[누구 마음대로?] 

어디선가 코끼리 울음이 들린다 싶더니, 거대한 거북의 머리에 올라탄 ‘12월 25일의 주인’ 미트라가 말하고 있었다. 

[내 ‘부활의 축일’을 거부한 녀석에게 처할 형벌은 죽음뿐이다.] 

우주수의 가지 끝에 걸터앉은 오딘이, 세상의 삼라만상을 통찰하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리석은 별아, 너는 정말로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 있다 믿는 것이냐?]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이 안전한 ‘방주’에서 자신의 거대 설화를 보장받고 있던 모든 별들이 우리를 비웃고 있었다. 

[‘신화’조차 되지 못한 설화로 감히―] 

우리를 향해 껄렁한 목소리를 늘어놓던 ‘우레를 먹는 새’의 입이 푸슈슉, 소리와 함께 꿰뚫렸다. 

어느새 녀석의 배후를 점한 유중혁이 녀석의 목을 베어낸 것이었다. 

“말이 너무 많군.” 

[죽여라!] 

싸움이 시작되었다. 숫자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우리는 주변의 소품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싸웠다. 곳곳에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설화 병기들이 놓여 있었다. 

특히나 80번대 시나리오의 병기 창고는, 그야말로 유중혁의 전장이었다.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마왕 선발전’에서 이미 드러났던 유중혁의 재능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올라운더 유중혁. 1863회차의 세월을 거치며 모든 병장기에 숙달된 녀석이 대궁으로 성좌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저놈부터 죽여!] 

유중혁의 속사에 위인급 성좌들이 죽어 나가며 별들의 잔해로 이루어진 방호벽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그 사이를 달리며 싸웠다. 

[오른쪽으로 피해요!] 

안나의 경고와 함께, 신화급 성좌의 맹공이 발치를 휩쓸었다. 한 대만 맞아도 치명상을 피할 수 없는 일격들. 이설화의 [생사환]이 거의 다 떨어진 상황이었기에, 더 이상의 중상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아스가르드의 하위 성좌들이 안나 크로프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감히 우리 성운을 배신해?] 

퍼거걱! 

말을 잇던 성좌의 머리통이 그대로 터졌다. 

안나 크로프트의 배후에서 긴 혓바닥 같은 것이 튀어나와 성좌의 머리를 터트려버린 것이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이죽거립니다.] 

안나가 성운을 배신하도록 도운 배후가, 우리를 돕고 있었다. 

“김독자! 더 버티기 힘들어! 유중혁도 한계야!” 

신화급 성좌들의 시선이 유중혁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병장기 창고가 불에 타올랐고, 피칠갑을 한 유중혁이 거대한 해머를 휘둘러 성좌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김독자는 보관실을 뒤지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찾았다.” 

나는 [성유물] 카테고리의 가장 끄트머리에 놓여 있는 한 병의 시험관을 끄집어냈다. 그 시험관에는 다음과 같은 이름이 붙어 있었다. 

[신단수의 씨앗].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씨앗을 바닥에 풀었다. 그러자 바닥에 떨어진 씨앗이 곧 싹을 틔웠다. 싹은 순식간에 자라서 내 키만한 나무가 되었다. 그리고는 성장을 멈추었다. 

[거대 설화, ‘신단수’가 자신의 뿌리를 내립니다!] 

[거대 설화, ‘신단수’가 당신의 존재를 인식합니다.] 

[거대 설화, ‘신단수’가 개천(開天)을 위한 설화를 필요로 합니다!] 

보관실이 불타고 있었다. 

유중혁은 아직까지 잘 버티고 있었다. 독기 어린 유중혁과 눈이 마주친 성좌들이 질겁하며 외쳤다. 

[이곳은 ‘소품 보관실’이다! 아이템을 사용해 대적해라!] 

그들이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우리도 잘 아는 아이템이었다. 

[절대 왕좌]. 

네 번째 시나리오의 핵심 아이템이자, 획득하는 것만으로도 ‘이계의 신격’의 가호를 받을 수 있는 아이템. 

왕좌를 발견한 위인급 성좌들이 탐욕스런 눈으로 그쪽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그쪽을 향해 달려가려는 한수영을 막았다. 

“내버려 둬.” 

몰려가는 위인급 성좌들. 

[왕좌는 나의 차지다!] 

누군가가 [절대 왕좌]에 올라선 바로 그 순간, 나는 [신단수]의 잎사귀를 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녀석에게 먹일만한 설화는 이것뿐이었다.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일부 성좌들이 [절대 왕좌]를 향해 소리쳤다. 

[잠깐, 멈춰라!] 

[절대 왕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격이 이쪽을 향해 범람하는 순간,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단수’가 새로운 신화의 시작을 감지합니다!] 

「그 이야기는 왕좌를 부수며 시작되었다.」 

콰콰콰콰콰! 

설화를 먹어 치운 [신단수]가 폭발적인 개연을 얻어 자라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계관이 해당 지역에 뿌리를 내립니다!] 

「신단수」. 

거대 성운 <홍익>의 거대 설화. 

나는 성좌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 말대로 우리한텐 ‘신화’가 없어. 하지만 우리는, 늘 그 ‘신화’와 싸워왔다.”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어떤 신화도 그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다음 순간, 보관실의 천장까지 뻗어 나간 [신단수]가 굉음을 일으켰다. 방주의 천장이 무너지고 있었다. 

[개천(開天)이 시작됩니다!] 

가공할 소용돌이와 함께,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오래된 성운의 늙은 별들이 아득한 잠에서 깨어납니다!] 

눈부신 광휘와 함께 찢어진 하늘 사이로 만개한 가지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림자의 끝에 별들이 열매처럼 맺히기 시작했다. 

[그 왕좌, 오랜만이군.] 

가지 끝에 매달린 일곱 개의 별. 내가 [절대 왕좌]를 파괴할 때 도움을 주었던 북두성군들이 그곳에 있었다. 

무수한 성좌들이 하늘에서 유성처럼 낙하하기 시작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방주에 현현합니다!] 

[성좌, ‘흥무대왕’이 방주에 현현합니다!] 

[성좌, ‘매금지존’이 방주에 현현합니다!] 

[성좌, ‘천제의 풍신’이 방주에 현현합니다!] 

이 방주에서, 유일하게 우리의 편이 되어줄 별들. 

낙하하는 성좌들 사이로, 벼락같은 일검이 떨어지며 [절대 왕좌]가 폭발했다. 부서진 왕좌 위에서 가짜 왕을 짓밟은 성좌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잘했다, 후예여.] 

[성좌, ‘고려제일검’이 방주에 현현합니다!]





< Episode 95. 개천(開天) (4) > 끝

< Episode 96.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1) >





[‘최후의 방주’에 진입하였습니다!]

방주에 떨어지자마자, 정희원이 마주한 것은 성좌들의 무리였다.

[당신은 ‘팔열지옥(八熱地獄)’에 입장하였습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필 떨어져도 지옥에 떨어지다니, 전생에 잘못한 게 많았나.”

확실한 것은 눈앞에 그녀를 노리는 적들이 있다는 것뿐. 서로의 몸통을 밟고 산처럼 밀려오는 배불뚝이 아귀들을 바라보며, 정희원이 소리쳤다.

“우리엘!”

우리엘은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엘의 가호는 여전히 그녀에게 깃들어 있었다. 정희원의 등에서 흰색 날개가 돋아남과 동시에, 그녀의 전신에 붉은 코로나가 깃들었다.

[‘심판의 시간’이 발동합니다!]

검을 휘두르는 순간 전방의 아귀 떼가 모조리 휩쓸려 나갔다.

[악 성향의 성좌들이 당신의 냄새를 맡습니다.]

끝도 없이 몰려오는 적들. 이 「팔열지옥」이란 세계관에 기생하는 개체들인 것 같았다.

다행인 것은, 그녀가 혼자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희원 씨!”

어디선가 달려온 이현성이 정희원과 등을 맞대고 섰다.

“현성 씨도 잘못한 게 많은가 봐요?”

[마왕, ‘붉은 안개의 지배자’가 당신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마왕, ‘괴완공’이 당신을 향해 증오심을 드러냅니다!]

[성좌, ‘지옥 기생자’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성좌, ‘무스펠하임의 불꽃’이 인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아귀들을 상대하다가는 마력이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게다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지옥의 성좌와 마왕들도 있었다.

“뒤쪽입니다!”

어느새 그녀의 뒤로 접근한 아귀 떼가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었다. 그런 아귀를 향해 어디선가 날아든 탄환이 폭발했다.

“희원 언니!”

이지혜의 전함이었다. 화색이 된 정희원이 외쳤다.

“애들도 같이 있어?”

“애들은 상아 언니, 설화 언니랑 같이 근처에 떨어진 거 같아요! 그리고 필두 아저씨는―”

“그 아저씨까지 신경 쓸 시간 없어!”

갸아아아아아악!

지옥의 존재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암흑성]에서 상대했던 악마 백작부터, [마계]에서 조우했던 악마 공작급에 이르는 존재들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두, 다음 시나리오의 소재로 쓰이기 위해 지옥의 일부가 되어있던 자들이었다.

“대천사!”

“놈들을 죽이면 우리도 마왕위를 얻을 수 있다!”

그들을 향해 이지혜가 사격을 개시했다. [터틀 드래곤]의 모든 장탄이 불을 뿜자, 지옥이 지각 변동을 일으키며 곳곳에서 용암이 분사되었다. 용암 덩어리에 맞은 악마들이 녹아내렸다. 하지만 악마들의 개체수는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해당 세계관은 ‘악’의 지배구역입니다.]

죽었다고 생각한 개체들이 몇 분 뒤 자리에서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지혜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장군님! 대체 어디 계세요! 성좌들은 왜 안 와!”

하지만 그녀의 부름에 그 어떤 성좌도 응답하지 않았다.

우리엘도, 해상전신도, 999회차의 이현성도.

그들은 온전히 그들의 힘으로 싸워야 했다.

츠츠츠츠츳!

허공에서 스파크가 튄 것은 그때였다.

[바아아앗!]

동그란 포탈과 함께 비유가 나타났다.

“비유!”

축구공만했던 비유의 몸통은, 어느새 품을 벌려 안아도 모두 감쌀 수 없을 정도로 자라나 있었다.

「모든 도깨비는 설화를 먹고 자라난다.」

바아아앗, 하고 몸을 한껏 웅크린 비유의 전신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이내 그 스파크는 선실의 한쪽 벽면을 열어젖혔다.

두두두두두두!

열어젖힌 벽면에서 튀어나온 자동 포탑의 탄환들.

“모두 괜찮나!”

공필두의 ‘움직이는 성’이 그곳에 있었다. 성흔의 진화를 거듭해, 오롯한 전투 성채의 규모를 갖춘 공필두의 [무장요새].

그 요새의 꼭대기엔 유상아와 이설화, 그리고 두 아이들도 있었다.

“언니! 아저씨! 이쪽으로 올라오세요!”

정희원과 이현성이 이설화의 손을 잡고 요새 위쪽으로 뛰어올랐다.

요새의 벽면을 타고 무섭게 따라붙는 아귀 떼들을 향해 이지혜의 장도가 번뜩였다.

「어떤 별빛도 그들을 비추지 않는 세계에서, 오직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이 서로를 구해냈다.」

“시작하죠.”

[연화대]의 권능으로 유상아가 적들의 움직임을 제어하자, 이지혜와 공필두가 발포를 계속했다.

요새의 최첨단에 앉은 [키메라 드래곤]이 공중으로 접근하는 성좌들을 향해 브레스를 쏟아냈다.

그 아수라장을 뚫고 기어코 올라오는 적들에게 정희원의 검격이 쏟아졌다.

이현성의 [강철화]가 일행들의 피부를 보호했고, 일행들을 대신해 다친 이현성을 이설화가 치료했다.

「그 모든 조합은 아주 오래전부터 한 사람이 구상한 것이었다.」

그 속에는,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던 한 소년도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선악을 가르는 벽’이 자신의 권능을 발휘합니다!]

[성좌, ‘무저갱의 지배자’가 자신의 권속들을 불러들입니다!]

츠츠츠츠츠츠······!

새카만 황충들이 몰려와 지옥의 하늘을 덮었다. 황충들은 죽음에서 회복하던 악마들의 화신체에 달라붙어 그들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악!]

피부가 재생될 때마다 뜯어먹히기를 반복하며, 영원의 고통에 빠진 악마들이 절규했다.

조금씩 줄어가는 아귀들의 세력을 보며 정희원의 눈빛에도 희망이 감돌았다. 일방적으로 불리했던 전세가 조금씩 뒤바뀌고 있었다. 이 ‘팔열지옥’을 부수는 것은 무리겠지만, 적어도 시간을 끄는 것은 가능했다.

문제는, 아직까지 전장에 개입하지 않고 있는 성좌들이었다.

츠츠츠츠츠······!

그때, 지옥도의 하늘을 차지하던 별들이 한꺼번에 어딘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열지옥’의 내벽을 두드려 부순 성좌들이 모두 어딘가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성좌들의 빛이 사라지자 세계관 전체의 균형도 무너졌다. 아귀들은 더 이상 회복하지 못하고 지옥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간신히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일행들은 그제야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걸까요?”

이설화가 물음을 던졌으나,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확실한 것은, 저 별들이 이곳에 흥미를 잃을 만큼 어디선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행들의 시선이 공필두에게 꽂혔다. 이내 끙, 하고 소리를 낸 공필두가 [무장요새]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알겠으니까, 재촉하지 말라고.”

<김독자 컴퍼니> 또한 그 별들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후의 방주’ 곳곳에서 몰려온 성좌들이 블랙홀에 빨려들 듯 하나의 선실을 향해 쏘아져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별들이 움직이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정희원도, 이현성도, 유상아도······ 하늘의 모든 별들이 쏟아지는 듯한 그 압도적인 정경 속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광경은 아름다웠고, 전율적이었다.

「그리고 슬펐다.」

불현듯 정신을 차렸을 때, 그들은 그 모든 별들이 하나의 별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서진 내벽의 균열 사이로, 방의 정경이 드러나고 있었다.

하늘을 부순 [신단목].

그 나무를 중심에 두고 싸우는 김독자의 별들이 있었다.

[막아라! 여기가 우리의 황산벌이다!]

한반도의 성좌들이었다.

팔을 잃은 김유신이 외치자, 계백이 성좌들을 향해 거환도를 휘둘렀다.

대머리 의병장이 자신의 곤봉으로 적들을 격멸했고, 서애일필이 허공에 써 갈긴 붓으로 성좌들의 격을 강화했다.

거대한 호랑이로 변신한 조선제일술사가 미트라의 거북이와 맞섰고, 자신의 화랑을 모두 불러들인 매금지존이 <황제>의 세력을 막아내고 있었다.

개중에는 처음 보는 성좌도 있었다. 나무의 중심에서 눈을 감고 있는 별.

그를 중심으로 [신단목]의 설화가 용솟음치고 있었다.

[성좌, ‘선인왕검(仙人王儉)’이 창세신들의 개연성을 모으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가 한반도의 ‘창세신’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창세신의 가호가 김독자와 한반도의 성좌들을 감싸며 수호했다.

“······장군님?”

거북선을 타고 싸우는 성좌들도 보였다.

「무대화」로 넘실대는 바다의 정경. 그곳에 이지혜의 배후성이 있었다.

[노량(露梁)의 그날이 생각나는군. 함께 싸울 수 있어 영광이오, 준경.]

[나 또한 그러하다.]

으르렁거린 척준경의 검이 토르의 해머와 충돌했다.

하지만 그 둘만으로 막아서기에, <아스가르드>의 군세는 지나치게 많았다.

[성좌, ‘무스펠하임의 불꽃’이 자신의 거검을 소환합니다!]

이윽고 정희원과 같은 지옥에서 찾아온 성좌들까지 가세했다.

아무리 척준경과 이순신이 뛰어난 성좌들이라도, 저들 모두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신단목]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가지의 끝에 뭔가가 맺히기 시작했다. 열매처럼 낙하하는 빛살 속에, 일행들도 잘 아는 누군가가 있었다.

“대사부들!”

백청의 강기와 파천의 검격이 전장을 물들였다. 그들과 함께 장하영과 「무림」의 초월좌들이 전장을 누볐다.

마주 달려드는 일본 측의 요괴 성좌들이 보였다. 깃털 부채를 쥔 ‘텐구’들과, 물속에서 떠오른 ‘갓파’, ‘야마타노 오로치’의 권속들도 있었다.

[고작 일개 화신에 불과한 놈들이······!]

[신단목]에서 열매들이 끊임없이 떨어졌다.

전장을 물들이는 백청의 전격 사이로, 6번 시나리오에서 만났던 존재들이 나타났다.

“김 도게자를 위하여!”

[피스 랜드]의 소인들이었다. 재앙과 맞서 싸웠던 이들이, 이제 그들을 돕기 위해 이 전장에 강림하고 있었다.

[작은 행성의 작은 성좌가 필살 병기 ‘드래곤 니들’을 꺼내 듭니다.]

성좌들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소인들이 죽어 나갔다.

“아아, 아아아······!”

선실의 끔찍한 정경에, 누구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전장의 중심, 별들의 시체들로 이루어진 산의 중턱에 가장 빛나는 별 또한 말이 없었다.

「부서진 ‘절대 왕좌’의 꼭대기에서 김독자가 침묵하고 있었다.」

유중혁과, 한수영과, 안나 크로프트가 그곳에서 싸우고 있었다. 피를 토하고, 설화를 그러 모으며, 자신이 가진 모든 기지를 총동원해서 성좌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세계관의 충돌 속에 창공이 격변하고 있었다.」

<아스가르드>의 오딘, <파피루스>의 오시리스, <베다>의 시바, <황제>의 여와······ 그 외 이름도 잘 알지 못하는 성운들의 성좌들까지 가세해, 창공은 범람한 빛으로 밝게 물들었다.

「빛을 가리는 것은 어둠이 아니라 또 다른 빛이다.」

숨 막히도록 밝은 그 세계에서, 일행들은 자신이 부정당하는 것만 같았다.

성좌들의 별빛이 말하고 있었다.

그들이 쌓아온 역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정희원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일행들 모두가 덤벼들어도, 저들을 막아낼 수는 없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더 강한 설화가 필요했다. 저 눈부신 별들을 모두 격추시킬 수 있는 설화. 저 모든 별자리를 파멸 시킬 수 있는 힘.

그러나 정희원에게는 그런 힘이 없었다. [신살]로도, [지옥염화]로도 무리였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화신을 보고 있습니다.]

정희원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자신의 배후성이 그곳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배후성을 무척 좋아했다. 그렇기에, 함부로 부탁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김독자를······.”

그럼에도 정희원은 말했다.

“······구해줘요, 우리엘.”

그러자, 그녀의 배후성이 응답했다.

[그래.]

뜨거운 불꽃이 주변의 바닥을 덮었다. 바로 등 뒤에 우리엘이 서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특유의 고귀한 눈으로 자신이 보는 세계를 함께 보고 있을 것이다.

순간, 정희원은 덜컥 겁이 났다.

「만약, 이곳에서 우리엘이 죽는다면.」

우리엘은 ‘설화급 성좌’다. 아무리 그녀가 강하다고 해도, 신화급 성좌들과 대적해 이길 수는 없다.

그러자 어깨에 고운 손이 닿았다.

[걱정마, 희원아. 내가 어떻게든 해줄게.]

앞으로 나서는 우리엘의 등은 자신의 것보다 작았다. 정희원은 그 등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가장 오래된 선’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 등으로 펼쳐진 백색의 날개가 세상을 덮으며, 우리엘의 진언이 울려 퍼졌다.

[에덴이여.]

정희원은 자신의 내부에서 뭔가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조각 같은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성마대전’ 이후로, 그녀의 안에 줄곧 잠들어 있었던 무거운 파편.

[‘선악을 가르는 벽’이 본연의 힘을 되찾습니다!]

츠츠츠츠츳!

다음 순간, 주변에 하나둘 천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십, 백, 이내는 천을 훌쩍 넘긴 하급 천사와 중급 천사들.

개중에는 익히 알고 있는 얼굴들도 있었다. 대천사 가브리엘. 심지어는 ‘성마대전’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대천사들의 영령도 보였다.

[우리엘.]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 라파엘.

항상 졸린 눈으로 세계를 보던 그 천사가, 다른 모든 천사들과 함께 천천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에덴>을 계승할 텐가?]

우리엘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화신을 돌아보았다. 고고한 대천사의 표정에 희미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정희원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닿지 못했다. 우리엘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라파엘이 선언했다.

[우리엘, 그대가 이제 우리의 대선(大善)이다.]

츠츠츠츠츠츠츠······!

아득한 코로나가 우리엘의 전신을 덮었다.

찬연한 백금빛 플레이트 아머.

무수한 마왕의 머리를 베어내고 악마들의 공포로 군림했던 그 날처럼, 우리엘의 모든 격이 현현하고 있었다.

<에덴> 최강의 별.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검을 쥐는 순간, 모든 천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사들이여, 최후의 ‘성마대전’을 시작하자.]





< Episode 96.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1) > 끝

< Episode 96.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2) >





동쪽에 오딘, 서쪽에 여와, 남쪽에 오시리스·····. 

쉴 틈 없이 몰아치는 거대 설화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신의 화신체가 붕괴하고 있습니다!] 

저 메시지를 벌써 몇 번이나 들었는지도 잊었다. 바로 곁에 있는 유중혁의 몸도 정상이 아니었다. 한수영이나 나를 대신해서 오딘과 여와의 공격을 감당한 녀석의 전신은 이미 걸레짝이 되어있었다. 

눈이 마주친 유중혁은 뭘 보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삼켰다. 

[화신 ‘유중혁’이 ‘생사환’을 사용합니다!] 

결국, 이설화가 준 마지막 생사환까지 사용했다. 이제 남은 생사환은 없었다. 

[그아아아아아! 버텨라!] 

한반도의 성좌들이 야수처럼 울부짖으며 병장기를 휘둘렀다. 

김유신도, 계백도, 관창도. 한때는 서로 검을 맞댔던 모든 성좌들이 [신단수]를 사이에 두고 하나의 신화로 거듭나고 있었다. 

가장 선두에서 적들을 베어내는 척준경의 모습도 보였다. 

「[내가 이래서 이 땅을 저주하면서도 떠날 수가 없지. 몇 명만 뒈지면 되는 걸 다 같이 죽자고 덤벼들다니······.]」 

풍백도 그의 곁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사자후를 터트렸다. 

성마대전에서는 우리와 대립했던 그가, 이제는 우리를 위해 맞서고 있었다. 

「[<홍익>이 후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대가 같은 건 필요 없다.]」 

풍백의 바람이 요동치자 <홍익>의 성좌들이 일제히 바람을 타고 달려 나갔다. 

이순신의 [유령함대]가 발포를 계속했고, 견훤의 화살이 별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하지만 적들의 숫자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한반도는 어디에 있는 나라인가?] 

[고작해야 위인급 녀석들이······! 벌레 같은 놈들! 모두 쓸어버려라!] 

그럼에도 한반도의 성좌들은 잘 버티고 있었다. 

[거대 설화, ‘신단수’가 한반도의 모든 성좌들의 힘을 격상시킵니다!] 

적들에게 오딘이나 오시리스가 있다면, 이쪽에도 신화급 성좌는 있었다. 

[신단수]의 힘을 증폭시키는 신화급 성좌, ‘선인왕검’. 

[성좌, ‘선인왕검’이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라 말합니다.] 

다른 신화급 성좌들과 달리, ‘선인왕검’은 그 존재감이 희미했다. 아마 이번 세계선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홍익>은 이번 세계선에서 거의 활약을 하지 못했으니까. 

아마 <홍익>의 성좌들은 줄곧 다른 신화급 성좌들의 등살에 밀려 방주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등을 보이지 마라! 우리는 후퇴하지 않는다!] 

[설화, ‘배수의 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척준경이 검을 치켜들고, 이순신이 그들을 지휘했다. 

그 어떤 신화에도 굴하지 않는 신화적 역사의 주인공들이, 아득한 신화의 신들과 맞서 싸웠다. 

살점이 찢어지고 전신이 난자당하면서도 무릎 꿇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한반도의 면적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었다.」 

백호로 변신해 싸우던 전우치가 쓰러졌다. 서애일필의 붓이 부러졌고, 이순신의 유령함대가 하나둘 침몰했다. 천명을 베고, 산과 바다를 가르던 척준경의 검도 둔해지고 있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몇 번이고, 마음의 준비를 마친 일이었다. 

지금부터 써나갈 설화는, 별들의 피로 얼룩진 문장들이었다. 

[<스타 스트림> 최후의 거대 설화가 움트고 있습니다!] 

다음 순간, 척준경의 목을 향해 토르의 도끼가 날아들었다. 한반도 최고의 무장도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모든 격을 개방합니다!] 

그런 일격을 막아선 것은 전장에 강림한 우리엘이었다. 

“김독자! 대천사들이 왔어!” 

한수영이 외쳤다. 

눈부신 섬광과 함께 전장에 강림하는 대천사들. 그 중심에서 [업화의 불꽃]을 휘두르는 우리엘이 있었다. 

「[······저기, 나랑 가브리엘도 ‘김독자 컴퍼니’에 들어가고 싶은데.]」 

최종 시나리오로 진입하기 직전, 우리엘은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우리의 성운으로 와서, 우리의 힘이 되어주고 싶다고. 

「김독자가 아는 ‘원작’과 가장 많이 달라진 성좌.」 

나는 우리엘이 왜 우리 이야기를 좋아해 주는 것인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저희를 돕고 싶으십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비겁하게도 그녀의 선의를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에덴>에 새로운 ‘대선’이 등장했습니다!] 

화려하게 몰아치는 우리엘의 격. 

이제 그녀는 ‘설화급 성좌’ 우리엘이 아니었다. 

쿠구구구구! 

[······새로운 ‘대선’?] 

신화급 성좌들이 우리엘을 보며 경악하고 있었다. 

<에덴>의 새로운 대선이자, 신화급 성좌인 ‘메타트론’을 대체할 존재. 

우리엘은 <에덴>의 수장이 되어 우리를 돕기를 선택했다. 

[치천사들은 모두 돌진하라!] 

라파엘의 신호와 함께 대천사들이 <파피루스>와 <베다>의 설화급 성좌들과 충돌했다. 

[‘가장 오래된 선’이 자신의 적수를 찾습니다!] 

[멸망한 성운 따위가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 믿는가?] 

여전히 건재한 오딘이, 자신의 창으로 우리엘을 가리켰다. 무엇으로도 피할 수 없다는 신창 [궁니르]가 우리엘을 향해 쇄도했다. 

[꺼져.] 

[업화의 불꽃]이 [궁니르]의 격과 충돌했다. 

하늘을 찢어발기는 오딘의 벼락과 지옥을 불태우는 우리엘의 염화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격과 격의 대결. 한발짝도 물러나지 않는 두 신화급 성좌의 싸움에서 먼저 물러난 것은 놀랍게도 오딘이었다. 창을 회수한 오딘의 왼팔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한심하군, 오딘. 내가 돕지.] 

신화급 성좌는 누구보다 위험에 예민한 존재들이었다. 

변수를 싫어하는 이 세계의 가장 늙은 별들. 그렇기에 그들은 결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찰나에 시선을 주고받은 신화급 성좌들이 동시에 우리엘을 향해 포격을 개시했다. 

콰콰콰콰콰콰! 

아무리 <에덴>의 대선이라도 받아낼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엘은 물러서지 않았다. 날개의 깃털이 찢겨 나가고, 새하얀 뺨에 붉은 설화가 튀어 올라도 검을 물리지 않았다. 

[너희들은 나의 대적(大敵)이 아니야.] 

언제나 하늘 위에서 우리의 설화를 지켜보았던 우리엘. 그런 우리엘의 눈이, 이제 나를 향하고 있었다. 

[성운, <에덴>이 자신의 ‘거대 설화’를 준비합니다.] 

“독자 씨!” 

멀리서 정희원을 비롯한 일행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어쩌면 정희원은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엘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츠츠츠츠츳! 

<에덴>만으로 저 모든 거대 성운들을 상대할 수는 없다. 이 방주에 깃든 신화급 성좌들의 기량은 <스타 스트림> 전체와 맞먹으니까. 그러니 저 성좌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가공할 개연성의 ‘거대 설화’가 필요했다. 

[「무대화」가 발생합니다!] 

말하자면, 저 모든 신화를 멸망시킬 거대한 신화가. 

[나는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천천히 눈을 깜빡인 우리엘의 눈이, 그야말로 악귀처럼 불타고 있었다. 

[나는 나의 수식언을 성립시킬 ‘악’을 원한다.] 

그 말과 동시에, [업화의 불꽃]에서 뻗어 나온 불길이 천공의 별들을 불태웠다. 지옥의 건너편에서 뭔가가 요동치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선이 자신의 적수를 부르자,」 

바로 그 순간, 이길영의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어졌다. 

「지옥의 무저갱에서 몸을 웅크린 악마가 부름에 응답했다.」 

불타는 하늘의 저편에서 새카만 먹구름 같은 것이 밀려오고 있었다. 

<아스가르드>도, <베다>도, <파피루스>도 아닌 누군가가, 사악하고 음험한 기운을 품은 채 이쪽을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성좌, ‘무저갱의 지배자’가 ‘만마전(萬魔殿)’을 개방합니다!] 

불타는 지옥의 하늘에서 마귀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가장 오래된 악’이 자신의 적수를 찾습니다!] 

[‘선악을 가르는 벽’이 자신의 테마를 그려냅니다!] 

마왕들의 부재를 대신해, 억겁의 세월 동안 숨을 죽여왔던 만마의 주인이 자신의 힘을 드러냈다. 

신화급 성좌들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선악이 충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악의 대결을 지켜보던 오래된 존재가 있었다.」 

신유승의 곁에서 날갯짓을 하던 [키메라 드래곤]의 몸에서 빛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미 원작에서도 본 적 있는 광경이었다. 마침내 신유승의 드래곤이 ‘고대룡’으로 진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눈부신 황금빛 광채. 온전한 ‘에인션트 드래곤’의 격을 갖춘 [키메라 드래곤]이, 창공을 향해 포효했다. 

「드래곤 콜(Dragon call).」 

자신의 생을 바쳐 동족을 부르는 용왕종들의 하울링. 

그아아아아아아아! 

어두컴컴해진 하늘의 건너편에서, 드래곤의 포효가 들려왔다. 곳곳에서 튀는 전류와 불꽃의 잔흔들. 세계의 모든 드래곤들이 [키메라 드래곤]의 부름에 응답해 날아오고 있었다. 

[「무대화」의 재현율이 급격하게 높아집니다!] 

용족들은 별들을 물어뜯는 대신 서로 혈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내 화신체의 심장을 대신하는 [골드 드래곤의 심장]도 요동치고 있었다. 

언젠가 ‘성마대전’에서 이미 본 적이 있는 광경. 

「가장 뜨거운 지옥의 중심에서,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인 용이 깨어날 것이다.」 

「그는 용 중의 용. 혼돈의 중심에서 태어난 모든 용들의 수장이자 세계에서 가장 늙은 증오.」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에서 벌어지는 용들의 축제, ‘용의 제전’이 시작된 것이다. 

뒤늦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깨달은 신화급 성좌들이 대경했다. 

[이, 이 녀석들 설마······!] 

[놈들을 멈추게 해!] 

여기서 ‘성마대전’이 벌어지게 된다면, 어떤 재앙이 들이닥칠 것인지 모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감히, 감히 네놈들이!] 

비형의 희생으로 이제 몇 남지 않은 대도깨비들이 방주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뿔이 부러진 대도깨비 ‘가랑’이 외치고 있었다. 

[거대 설화의 개연성을 억제해라!] 

대도깨비들이 자신의 권능을 발동하자, 방주의 신화급 성좌들도 일제히 코인을 사용했다. 

[성좌, ‘12월 25일의 주인’이 ‘성마대전’을 원하지 않습니다!] 

[성좌, ‘흙으로 사람을 빚은 대모신’이 ‘성마대전’을 원하지 않습니다!] 

[성좌, ‘외눈의 아버지’가 ‘성마대전’을 원하지 않습니다!] 

[성좌, ‘아비도스의 주인’이 ‘성마대전’을 원하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코인이 한꺼번에 투입되자, 펼쳐지던 무대화의 개연성이 억제되기 시작했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은 다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코인을 지닌 존재들의 의지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어 보였다. 

「오직, 단 한 존재를 제외하고는.」 

뒤쪽에서 들려오는 가벼운 엔진 소리. 그리고 익숙한 궐련 냄새. 

“오셨습니까.” 

내 곁으로 척 다가선 ‘양산형 제작자’가 말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설화로군.] 

언젠가 미식협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비슷한 말을 했었다. 

이 세상 모든 설화를 사랑하는 성좌. 

눈앞에서 요동치는 ‘성마대전’의 설화를 보며, ‘양산형 제작자’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생을, SSS급 아이템들을 양산하며 살아온 성좌. 

[아주······ 오래 걸렸구먼.] 

“죄송합니다.” 

[처음 내 ■■을 들었을 때, 나는 솔직히 좀 의아했다네. 내게 그런 ■■이 찾아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든.] 

“지금은 생각이 다르십니까?” 

‘양산형 제작자’는 말없이 궐련을 비벼 껐다. 그는 나와 함께 ‘성마대전’의 설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가 싸워온 모든 시간들이 그곳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양산형 제작자’가 껄껄 웃었다. 

[적어도 하나는 알 것 같네. 어째서 나의 설화들이, 내가 이토록 많은 코인들을 모으도록 종용했던 것인지.] 

‘양산형 제작자’의 손끝에서 코인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내가 감히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양의 코인. 

[오직, ‘단 하나의 무대’를 완성시키기 위함이었나.] 

그의 생과 함께 축적된 코인들이 하늘을 향해 빨려 나가고 있었다. 그의 코인이, 무수한 성좌들의 의지와 충돌하고 있었다. 

성난 신화급 성좌들이 고함을 치자, ‘양산형 제작자’가 입을 열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권위를 가진 성좌가 말했다. 

[성좌들이여, 미안하지만 나는 이 무대를 볼 것이다.] 

그의 모든 코인이 창공의 개연성으로 투입되자, 방주 전체가 개연성의 폭풍으로 뒤덮였다. ‘양산형 제작자’의 육신이 급격하게 노쇠하기 시작했다. 

[성좌, ‘양산형 제작자’의 ■■는 ‘고갈’입니다.] 

[부족한 개연성이 충족되었습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무대 위에 완전히 재현됩니다!] 

츠츠츠츠츠츠츳! 

천공에서 끔찍한 굉음이 발생했다. 폭발음과 함께 용족들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나는 한수영과 안나 크로프트를 끌어당기며 유중혁과 함께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대피했다. 

마침내 이 모든 시나리오의 종장. 모든 성좌들의 멸망이 다가오고 있었다. 

[‘성마대전’ 따위에 말려들지 마라! 이깟 대멸망 따위, 우린 몇 번이나 이겨내고 또 이겨내며 여기까지 왔다!] 

신화급 성좌의 ‘거대 설화’들이 한꺼번에 깨어나고 있었다. ‘성마대전’의 스케일에 결코 압도되지 않겠다는 듯, 세상의 모든 ‘거대 설화’들이 포효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 용은 하늘을 한 번, 땅을 한 번 보고 꼬리를 내리칠 것이다. 그 한 번의 꼬리짓에 별들이 추락하고 세계의 한 방위(傍位)가 사라지리라.」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개의 눈동자. 

거친 용의 하울링이 들려오는 순간, 한수영이 소스라쳤다. 

“김독자! 설마······!” 

“맞아.” 

“미쳤어? 지금 그놈을 다시 깨우면―!” 

“우리가 깨우려는 건 그놈이 아냐.” 

나는 한쪽에서 가부좌를 튼 채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유상아를 보았다. 그녀의 이마 위로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윤회를 결정하는 벽’이 묵시룡의 봉인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석존의 후예인 그녀가 살아있는 한, 봉인된 묵시룡은 이곳으로 초환되지 못할 것이다. 

당황한 한수영이 되물었다. 

“그럼······.” 

“모르겠어?” 

하늘에서 추락하는 용족들을 보며 한수영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용의 제전’은 최강의 용을 가리는 의식. 그리고 그 의식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단 하나의 용이, ‘묵시록의 최후룡’이 된다. 

언제부터였을까. 한수영의 왼팔이,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새로운 ‘묵시록의 최후룡’이 선출되었습니다!] 

쿠오오오오오오! 

마침내, 방주의 부서진 천장 너머로 거대한 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지간한 거성들조차 손쉽게 찢어발길 정도의 크기. 

마지막 탈피를 마친, 새카만 유선형의 외피에 황홀한 흑염이 타오르고 있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최후의 방주’에 현현했습니다!] 

“녀석이, 이제 묵시룡이야.”





< Episode 96.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2) > 끝

< Episode 96.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3) >





묵시록의 최후룡. 

‘성마대전’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대재앙이자, <스타 스트림>의 가장 끔찍한 멸망. 

[「무대화」의 재현율이 한계치를 돌파했습니다!] 

먹구름 사이로 내리치는 천둥이 이전과는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아스가르드>의 오딘, <파피루스>의 오시리스도 입을 벌린 채 경악했다. 

“흑염룡!” 

묵시룡의 시선이 아주 짧게 한수영의 얼굴에 머물렀다. 

「원작과 다른 성좌는, 우리엘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원작에서는 망상악귀 김남운의 배후성이었던 녀석. 

‘절대악’을 대표하는 악룡들의 수장이자, 성운 <흑운>의 지배자. 

녀석이 고개를 들어 천공을 향해 울었다. 

이 세계의 최종장을 알리는 그 포효에, <스타 스트림> 전체가 흔들렸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의 ■■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원작에서 녀석의 ■■이 무엇인지 읽었다. 

1863회차에서 잠깐 유중혁의 편이 되었을 때, 녀석에 관한 서술이 나왔다. 

「이 <스타 스트림>에서 가장 지독한 우울을 앓는 악룡.」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을 15세라 믿는 이유는, 그렇게 믿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수천수만 년에 달하는 아득한 생이 고독한 용을 그렇게 만들었다. 

자신을 파멸시키지 않기 위해서, 녀석은 늙지 않았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화신들을 괴롭히거나 괴상한 장난들을 쳤다. 최후의 장난으로 ‘절대악’을 배신했다. 유중혁의 편에 서서, <스타 스트림>을 조롱하며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에 도달했습니다!] 

이번 세계선에서는 어떨까. 

녀석은 이 공허한 우주에서 자신의 ■■를 찾아냈을까. 

[성좌, ‘심연의 흑염룡’의 ■■는 ‘순수(純粹)’입니다!] 

‘심연의 흑염룡’이 나를 보며 웃었다. 

자신이 찾아낸 역할이 썩 마음에 든다는 듯, 흑염룡의 어린아이 같은 눈동자가 세계를 멸망의 밤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충만한 개연성이 최종 시나리오에 ‘묵시룡’을 재현하였습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시나리오와 완전한 합일을 이루었습니다!] 

묵시룡의 재현에 신화급 성좌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되는······!] 

묵시룡의 설화에 대해 모르는 성좌는 아무도 없다. 

‘최초의 꼬리짓’으로 <스타 스트림>의 한 방위를 날려버릴 대재앙. 

[막아라! 꼬리짓이 시작되기 전에 놈을 처치해!] 

대경한 신화급 성좌들이 허둥대며 명령했다. 

나도, 한수영도, 유중혁도 그 광경을 올려다보았다. 

「신화급 성좌들 중, 정말로 ‘묵시룡’을 제대로 겪어본 이는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때 함께 싸웠던 신화급 성좌들은,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방주’에 숨어, 묵시룡이 해방되던 그 순간에도 모든 것을 유희처럼 관망하던 놈들이었다. 그 공포를, 두려움을, 목숨을 건다는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던 놈들이었다. 

곁에 있던 유중혁이 물었다. 

“네놈은······ 줄곧 이 순간을 준비했던 건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처음 시나리오를 시작하던 순간부터 나는 줄곧 계산했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성좌들을 몰살하려면, 얼마만큼의 설화를 쌓아야 할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인간의 생은 짧았고, 별들은 불멸했다. 시작지점이 다르니 공평한 싸움이 될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나는 유중혁 같은 회귀자가 아니었다. 1863회차에 달하는 생을 쌓아, 놈들에게 대적할 수 없었다. 

“설화를 모아 대적하겠다는 생각 부터가 틀렸던 거야. 전설급이든 신화급이든, 아무리 많은 설화를 모아도 순수한 격으로 저들을 누를 수는 없어.” 

“그래서 생각해낸 게 이거란 거군.” 

나는 고개를 그덕이며 [신단목]을 등진 채 함께 싸우는 김유신과 계백을 보았다. 

「김독자는 ‘무대화’에서 싸움의 해답을 찾아냈다.」 

「무대화」. 비록 가상(假像)이지만 개연성이 커질수록 현실이 되는 힘. 

‘마왕선발전’에서 수르야를 물리쳤을 때 그 힘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기간토마키아’에서 <올림포스>를 물리쳤을 때 계획의 초안이 잡혔다. 

‘성마대전’을 겪고, ‘서유기’를 이겨내면서부터는 확신이 생겼다. 

「그들이 불가능한 시나리오를 이겨낼수록, 그들이 가진 ‘거대 설화’의 재현력은 더욱 강해진다.」 

그날의 공기. 그날의 감정.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며, 멸망을 마주한 인간들이 느꼈던 공포. 

「그날, 그들이 느꼈던 공포를 이제 성좌들이 느낄 차례였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묵시룡의 ‘최초의 꼬리짓’이 시작되었다. 

콰콰콰콰콰콰콰! 

묵시룡의 꼬리짓은 세 개의 충격파로 나뉘어진다. 

1단계 ‘전격파’, 2단계 ‘염열파’, 그리고 실질적인 꼬리짓이자 3단계인 ‘혼돈파’. 

[크아아아아아아― 내가 막겠다!] 

언젠가 나와 함께 전격파를 막아냈던 토르가 앞장섰다. 이전에도 함께 충격파를 감당한 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완전한 오판이었다. 

[토르―!] 

새카맣게 타버린 토르가 허공에서 추락했다. 

그때 토르가 전격파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나와 디오니소스, 그리고 스승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토르를 돕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으아아아아아―!] 

겁에 질린 성좌들이 등을 돌려 달아나는 순간, 모든 신화급 성좌들이 자신의 격을 개방했다. 어마어마한 후폭풍과 함께, 천공의 모든 별들이 일제히 점멸했다. 

폭발한 전격파가 고운 안개 입자처럼 사위를 덮었다. 

시야가 개었을 때, 묵시룡의 전격파는 상당 부분 상쇄되어 있었다. 

[······고작 이 정도인가?] 

츠츠츠츳······! 

전격파를 받아낸 것은 <아스가르드>의 수장, 오딘이었다. 그가 자랑하던 고풍스러운 수염이 새카맣게 그을려 있었다. 옷도 완전히 녹아내려 나신이 된 오딘은, 전격파로 흉측하게 일그러진 피부를 드러내며 웃었다. 

[겨우 이 정도로······!] 

스스스스슷······.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곁에 있던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이 먼지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충격파를 상쇄할 개연성을 감당하다가 생을 다한 성좌들. 

오딘의 눈이 커졌다. 허공에 하릴 없이 퍼지는 잿빛 가루. 

방금의 일격으로, <아스가르드>의 절반이 소멸했다. 

쿠오오오오오오오! 

<베다>도, <파피루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여와!] 

뒤늦게 상황을 눈치챈 오시리스가 뒤쪽을 돌아보며 외쳤다. 그곳에는 이미 <황제>의 세력을 이끌고 선실에서 철수하는 여와의 모습이 있었다. 전황이 불리함을 깨닫고, 그는 이미 퇴각을 준비했던 것이다. 

“공필두.” 

내 말과 함께, 공필두의 성채가 움직였다. 황제의 세계관으로 향하는 길목을 정확히 막아선 [무장요새]의 포탑이 불을 뿜었다. 

“너흰 못 가.” 

그와 동시에, 묵시룡의 두 번째 충격파가 터졌다.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서 끓어 오른 ‘염열파’의 불꽃이 창공의 성좌들을 녹이고 있었다. 

[관리국!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건가!] 

오딘의 비명에, 대도깨비 가랑이 설화를 꾸역꾸역 토하며 손을 위로 들었다. 

[······좋다. 네놈들이 ‘무대화’를 이용한다면.]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츠츠츠츠츠츠······! 

「무대화」의 권능이 발휘되고 있었다. 

강력한 스파크의 기운에 뒤를 돌아보자, 유상아가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상아 씨!” 

그녀의 곁에서 회전하던 연화대에 균열이 일었다. 

꾸역꾸역 피를 쏟는 유상아가 면목이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나는······ 나오지 못했지만······ 다른 하나의 일부가.” 

석존이 ‘환생자들의 섬’에 봉인한 대존재는 둘. 

하나는 전대의 묵시룡.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윤회를 결정하는 벽’이 거칠게 요동칩니다!] 

[‘윤회를 결정하는 벽’이 자신의 테마를 드러냅니다!] 

[이계의 존재가 ‘벽’의 봉인을 뚫고 세계에 재현됩니다!] 

츠츠츠츠츠츳! 

허공을 일그러뜨리며 검은 안개가 밀려오고 있었다. 

그 암무의 건너편으로 보이는 셀 수 없이 많은 눈들. 석존에게 봉인되어 영원의 암흑 속에 갇혀 있어야 했을 <스타 스트림>의 청소부. 

[■■■■■■■■!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이여!] 

나는 도깨비들이 하려는 짓을 깨달았다. 

저놈들은 내가 ‘성마대전’에서 묵시룡을 막았던 방법을 쓰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타 스트림>의 최악 최흉을 대변하는 두 개의 재앙이 부딪쳤으니」 

[하하, 하하하! 너희들은 결코 종장에 도달할 수 없다. 너희는 결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대도깨비들의 머리가 폭발했다. 

그들의 설화를 빨아들인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이 거칠게 요동쳤다. 

묵시의 힘을 얻은 흑염룡과, 대도깨비의 설화를 얻은 이계의 신격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세 번째 충격파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묵시룡의 꼬리가 움직였다. 아주 천천히, 느릿하지만 확실한 속도로 떨어지는 재앙. 

마음이 급해진 여와가 허공을 향해 고함쳤다. 

[대체 무엇들 하고 있는가! 복희! 신농! 제곡! 빌어먹을 삼황오제(三皇五帝)여, 언제까지 심연의 잠에 빠져 있을 셈인가!] 

쿠구구구구구! 

여와의 진언이 오래된 <황제>의 성좌들을 일깨우고 있었다. 

이제껏 나타나지 않았던 ‘신화급 성좌’들의 가호가 여와의 화신체 위로 덧씌워졌다. 

어마어마한 격의 증폭에 공필두의 [무장요새]가 밀려나고 있었다. 

막아야 했다. 

여기서, 저들을 자신의 세계관으로 돌아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거대 설화, ‘서유기’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성운 <황제>의 거대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거대한 이무기로 변한 여와가 자신의 불꽃을 입에 물었다. 

기세를 모아 <황제>의 성좌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바로 그 순간. 

쿠르르르릉! 

하늘에서 뇌전이 내리치며 여와가 비명을 질렀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통천하의 정경이 펼쳐지며, 황금빛 호랑이 가죽을 걸친 존재가 내 앞을 지켰다. 

콰콰콰콰콰······! 

황제의 아득한 신화급 성좌들에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최후의 방주’에 현현했습니다!] 

이제, 나의 형제가 된 별. 

[‘미후왕’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필마온’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투전승불’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모든 손오공들이 내게 말을 걸었다. 

[‘제천대성’이 당신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가거라, 막내야.] 

먼 하늘에서 묵시룡의 꼬리와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이 충돌하는 것이 보였다. 저 충돌로 인해 벌어질 결과를 알고 있었다. 

「모든 별들의 파멸을 꿈꾸었다. 정말 그리 되길 원했는가.」 

1863회차의 마지막 장면이 잊히지 않았다. 

돌아선 제천대성이 <황제>의 성좌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내가 손을 뻗기도 전에, 유중혁과 한수영이 나를 들고 달렸다. 

공필두가 뭐라 뭐라 외쳤고, 이설화가 품속에 들어있던 모든 환약들을 꺼냈다. 이현성의 강철이 우리들을 덮은 것이 먼저였는지, 새하얀 섬광이 세계를 덮은 것이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전신이 뜨거운 고열에 녹아버릴 것 같다 싶더니, 그다음에는 차가운 한파에 노출된 것처럼 추워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는 선실 바깥에 너부러져 있었다. 

붕괴한 내벽들 사이로 마구잡이로 흘러나온 설화들이 고통스럽게 별들의 최후를 노래했다. 

‘소품 보관실’의 문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반쯤 열린 그 문 너머로, 잿빛 가루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4의 벽’이 격렬하게 흔들립니다.] 

어쩌면, 저 안에 있는 모두는― 

스슷. 

작은 인기척과 함께, 한수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독자?” 

나는 문을 향해 기어갔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가까스로 문의 언저리에 도달했을 때, 나는 누군가가 그곳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찢어진 백색 깃털이 하늘하늘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입을 뻐끔거렸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다. 

입을 열려는 나를 대신해, 우리엘이 천천히 몸을 숙였다. 

[······독자······.] 

진언은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는 나를 향해 우리엘이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하얀 손이, 내 뺨과 눈가를 어루만지듯 스쳤다. 

망가진 우리엘의 날개 너머로, 적측 성좌들이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그 끔찍한 재앙 속에서도 기어이 살아남은 별들이 있었다. 

[‘무대화’가 종료되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의 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진 ‘심연의 흑염룡’의 거체가 보였다. 그 위로 달려드는 거대 성운의 성좌들과, 대천사들의 날개를 뜯는 악마들. 

수많은 적들이 우리엘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에······!” 

나는 문을 열고, 검을 쥐고 우리엘을 대신해 녀석들을 베려고 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맞은편에서, 단단히 문고리를 붙잡은 우리엘이 손을 놓지 않았다. 

비명에 가까운 정희원의 외침이 들렸다. 

“우리엘! 나와! 거기서 빨리 나와―!” 

[괜찮아.] 

이어질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우리엘이 나를 향해 미소지었다. 

[너희는, 이 이야기를 여기까지만 본 거야.] 

선실의 문이 닫혔다. 

[당신은 <스타 스트림>의 그 어떤 별도 이룩하지 못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문 너머의 이야기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고, 또 누군가가 절규했다. 방주가 기우뚱하더니 굉음을 내며 어딘가에 충돌했다. 나는 바닥을 엉망으로 나뒹굴었다. 현기증 속에서 바닥을 짚었을 때, 진동은 어느새 멎어 있었다. 

몸을 일으킬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부서진 격벽을 따라 이어진 곳엔 새로운 장소가 있었다. 

방주가 충돌한 무언가와, 방주의 내부가 연결되어 있었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별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 어떤 별들도, 우리를 보고 있지 않았다.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은 오직 한 존재뿐이었다. 

[‘이야기의 왕’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노란 광물 같은 것이 파괴된 방주의 경사를 따라 굴러떨어졌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 보석이야말로 우리가 방주에서 줄곧 찾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도 일행들도, 그 보석에 집중할 기력이 없었다. 

“······.” 

방주에서 내린 우리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이의 벽. 방주에서 흘러내린 설화들이 그 벽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김독자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 벽이, 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의 끝. ‘최후의 벽’이 눈앞에 있었다.」





< Episode 96.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3) > 끝

< Episode 97. 볼 수 없는 별 (1) >





웅웅, 하는 소리와 함께 코트 속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모든 이야기는 그가 그 소설을 읽은 순간 시작되었다.」 

스마트폰 위로 떠오르는 문장들. 

눈앞의 광활한 벽은 스마트폰의 액정과 몹시 닮아 있었다. 

유중혁의 3회차부터 1863회차까지. 아마도, 내가 아는 모든 이야기가 쓰여 있을 벽. 

「QA팀에 근무했던 시절, 김독자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만, 이 버그를 알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너······.” 

등을 돌리자 한수영이 그곳에 있었다.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정확히 말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쥐고 있던 왼손의 붕대가 점차 흩어지고 있었다. ‘심연의 흑염룡’의 가호가 담긴 붕대였다. 

나는 일행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폈다. 정희원은 무릎을 꿇은 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있었고, 이현성은 혼절한 이길영을 안고 있었다. 이설화와 공필두는 서로를 부축하며 방주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멀리서, 스승들과 함께 가까스로 선실을 탈출한 장하영의 모습이 보였다. 

“······아저씨.”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신유승의 모습. 나를 불렀다기보다는,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아이의 손에는 ‘키메라 드래곤’의 비늘 조각이 남겨져 있었다. 

그런 아이의 어깨에 유상아의 손이 닿았다. 흐느끼는 떨림을 느끼며, 유상아는 말없이 우리가 빠져나온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아는 별들이 저물었다.」 

현기증으로 시야가 흔들렸다. 별들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별들이 소멸했기 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이것은 그저 대도깨비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관리국의 모든 채널들이 커다란 타격을 받으며 이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비틀거리며 간신히 중심을 바로 잡자, 마지막으로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의 흑천마도에 죽은 대도깨비들의 시체가 꿰어 있었다. 죽은 성좌들의 설화가 녀석의 칼끝으로 뚝뚝 떨어졌다. 

평소와 똑같은 표정으로, 녀석은 나를 보고 있었다. 

「이것이 네가 원하던 결말인가.」 

[‘제4의 벽’이 격렬하게 흔들립니다!] 

[‘제4의 벽’이 더욱 강하게 발동합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최종 시나리오 완료가 임박했습니다.] 

눈앞에 내가 줄곧 찾아온 방주의 내핵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영롱한 노란 빛의 광물. 

이 세계선을 표류하는 무수한 ‘거대 설화’들의 힘이 응집된 정수. 

[방주의 내핵]. 

거대 설화 병기인 ‘최후의 방주’의 에너지원. 

저것을 부수면, 우리가 싸워온 99번 시나리오도 끝을 맺는다. 

[<스타 스트림> 최후의 설화가 완성을 앞두고 있습니다!] 

츠츠츠······! 

순간적으로 발걸음이 굳었다. 바닥에서 튀어나온 덩굴이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차라투스트라’들이 내게 제어 스킬을 걸고 있었다. 

송구스럽다는 듯 내 시선을 피한 셀레나 킴의 얼굴. 이어서 예언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수고를 덜었어요, 구원의 마왕.” 

어느새 방주의 내핵을 손에 쥔 안나 크로프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김독자와는 다른 결말을 꿈꾸는 인간의 영웅.」 

“별로 놀랍지는 않겠죠? 내핵은 내가 가져가겠어요.” 

나는 그녀가 꿈꾸는 세계를 이미 들었다. 

‘완전한 밤’. 모든 성좌들의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를 꿈꾸는 그녀의 꿈은, 이 세계선의 화신들과 함께 다른 세계선으로 무사히 이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방주는 부서졌어.” 

“다시 만들면 됩니다.” 

안나 크로프트는 부서진 방주를 돌아보았다. 

방주는 이미 재활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인간 화신들 중에도 설화 병기 제작에 능한 이들이 있습니다. 당신이 데리고 있는 아일렌도 그중 하나고요. 방해할 신화급 성좌도 이제 없으니―” 

“그 내핵 이리 내.” 

“······그렇군요. 아직 ‘신화급 성좌’가 하나 남아 있었죠.” 

안나 크로프트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대악마의 눈동자]. 이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읽어내는 그녀의 힘이 나를 옥죄기 시작했다. 이제 완연한 눈의 힘을 각성한 그녀는, 어지간한 설화급 성좌 이상의 격을 갖춘 상태였다. 

「모든 별들의 대적자.」 

원작과 똑같았다. 이 세상의 모든 성좌들을 증오하는 안나 크로프트. 그렇기에 별의 힘을 이용해 별을 파멸시키고자 맹세한 인물. 그녀는 자신의 밤을 완수하기 위해, 나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정말 원작과 같은 것이라면.」 

나를 가리킨 안나 크로프트의 검극이 뭔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김독자.” 

원작에서는 한 번도 없었던 일. 

곁에서 [흑천마도]의 손잡이를 움켜쥐던 유중혁이 희미하게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가볍게 숨을 들이켠 안나 크로프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당신이 꿈꾸는 결말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내 [미래시]로도 거기까지는 읽어낼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짐작 가는 것은 있어요. 내 [미래시]가 당신의 결말을 알 수 없다는 건, 아마 당신의 결말이 저 [최후의 벽]과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잘 생각하세요, 김독자. 그게 정말로 우리 모두를, 인류를 위한 길인지 말이에요.” 

그녀가 그토록 많은 말을 한꺼번에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나요? 당신은 이미 충분히 불행을 겪었어요. 많은 것들을 잃었고, 소중한 것을 조롱당했어요. 무엇이 기쁨이고 무엇이 슬픔인지 구별해낼 수 없을 만큼 닳아버렸고, 이야기에 지쳐버렸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아직도 이 세계의 ‘단 하나의 설화’가 궁금한가요? 고작 그런 것을 위해, 인류의 생존을 밀어내겠다는 건가요?” 

한 마디 한 마디에 절박함이 있었다. 자신의 정의를 역설하고, 나의 정의를 원망하는 말들. 

이내 그것은 설화가 되었다. ‘안나 크로프트’와 차라투스트라들을 감싸는 눈부신 설화. 그것은 성좌들의 것처럼 밝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굳건하고 아름다웠다. 그들이 쌓아온 설화의 모든 국면에 그들의 신념이 담겨 있었다. 

무수한 별들이 오래전에 잊은 감정. 저 마음을 잊지 않았기에, 그녀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김독자. 당신의 ■■를 포기하세요.” 

“······.” 

“부탁입니다. 당신도 내 ‘완전한 밤’으로 함께 가요.” 

그 말에 몇몇 차라투스트라들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 그녀의 제안은, 그녀의 신념을 정면으로 어기는 것이었다. 

지금 안나크로프트는 내게 새로운 세계의 밤을 밝힐 단 하나의 별이 되어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고마운 제안이었다. 그러나 

[나는 성좌입니다.] 

나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츠츠츠츠······. 

가볍게 일으킨 격에 내 손발을 구속하던 덩굴들이 일제히 떨어져 나갔다. 

그녀의 선의를 조롱하듯, 내 모든 설화들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마왕의 뿔이 머리에서 돋아났고.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포효합니다!] 

신을 죽인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거칠게 울었으며.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인간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대천사를 배신하여 얻은 날개가 펼쳐졌고.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스타 스트림>을 조롱합니다.] 

불길하고 사악한 혼돈의 아우라가 내 전신을 덮었다. 

안나 크로프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내 모습에서 한 줌의 인간성이라도 찾아내려는 듯 치열하게 움직이는 눈. 

하지만 나도 알고 그녀도 아는 사실이 있었다. 인간성을 애써 찾아야 하는 존재를, 어찌 평범한 인간이라 말할 수 있을까. 

“······당신도 결국은 똑같은 건가, 구원의 마왕.” 

안나 크로프트의 중얼거림에 깊은 비탄이 묻어 있었다. 담담한 사실의 토로라기보다는 어떤 결의가 서린 목소리였다. 

“당신을 여기서 죽이겠습니다.” 

안나 크로프트의 전신에서 가공할 격이 범람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그녀가 힘을 아끼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당신이 아무리 ‘신화급 성좌’라고 해도, 그런 몸 상태로 나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미 당신의 동료들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 

정희원도, 이현성도, 이길영도, 신유승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얼굴들이었다. 심지어는 한수영조차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항상 나를 믿어줬던 그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배후성들이 당하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본 이들이었다. 

“이만 끝내죠.” 

열댓 명의 차라투스트라들이 순식간에 유중혁을 향해 미끄러져 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섬광처럼 다가온 안나 크로프트의 단검이 내 목을 찔러왔다. 

나는 태연히 그 단검의 끝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장난은 그만둬, 로키.] 

그 말과 함께, 안나 크로프트의 움직임이 굳었다.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단검을 옆으로 치웠다. 

경악한 안나 크로프트가 중얼거렸다. 

“이, 이게 무슨······?”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킬킬 웃습니다.] 

“로키, 당신! 이건 약속과는 다른―!” 

엄청난 양의 격이 안나 크로프트와 차라투스트라들을 내리눌렀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성좌. <아스가르드> 최후의 별인 ‘로키’가 그곳에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들 중 누구도 로키의 힘에 저항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을 <아스가르드>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준 이가 바로 저 로키였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을 위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안나 크로프트가 혼절했다. 그녀의 손에서 떨어진 내핵이 바닥을 굴러 내 발치로 다가왔다. 나는 그것을 주워들었다. 

[그동안 정말 재미있었어, 구원의 마왕.] 

허리를 들자 눈앞에 사내가 있었다. 초록색 머리카락에 장난스러운 표정. 

[성좌, ‘자신의 존재를 바꾸는 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존재를 바꾸는 자. 

<아스가르드>의 최상위 성좌들 중 하나인 ‘로키’. 

여기까지 오는 내내 몇 번이고 우리를 도와주었던 성좌이자, 그 의중을 전혀 알 수 없는 성좌. 

그는 묵시룡의 재앙에서 무사히 벗어나 우리를 쫓아왔던 것이다. 

“도와줘서 고맙군.” 

[이제 세계의 결말이 코앞인데 하찮은 인간 때문에 모든 걸 망칠 수는 없지. ······그보다 이제 겁줄 대상도 사라졌으니, 그 무서운 모습은 해제해도 될 거 같은데.] 

나는 뿔과 날개를 해제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쪽도 그만 본모습을 드러내는 게 좋겠군.” 

[무슨 소리지?] 

“피차 연기는 그만두기로 한 거 아니었나?” 

내 말에, 아까부터 상황을 지켜보던 유중혁이 말을 걸어왔다. 

―김독자. 

―네 생각이 맞아. 

나는 로키를 노려보았다. 

성좌, ‘자신의 존재를 바꾸는 자’. 

내 생각이 맞다면, 이 자는 ‘성좌’가 아니었다. 

[성좌, ‘자신의 존재를 바꾸는 자’가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드러냅니다!] 

[성■좌,■ ‘자신■의 ??존재■를??’······.] 

눈부신 빛이 로키의 몸을 감싸더니, 이내 그의 외형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키가 조금 작아졌고, 얼굴의 주름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러더니 볼을 중심으로 두 개의 커다란 혹이 자라났다. 

「<스타 스트림>의 버그를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존재. 세상 모든 도깨비들의 숙적이자, ‘종말의 구도자’의 창시자.」 

그는 언젠가 나와 조우한 적이 있는 존재였다. 

서유기의 통천하에서, 그는 나를 방해하는 대도깨비들을 대신해서 상대해주었다. 

희미하게 일그러진 그의 입술에 불온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스타 스트림>의 종말을 꿈꾸는 것은 그대들만이 아니지.] 

“······혹부리 왕.” 

그의 정체를 알아본 유중혁이 망설임 없이 [흑천마도]를 뽑았다. 

[집어넣지. 나는 그대들과 싸울 생각이 없다.] 

혹부리 왕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하나뿐이야. 너희들이 찾아온 이 최후의 벽 너머에 있는 ‘무언가’. 그뿐이지. 그리고······.] 

고오오오오! 

[지금 그대들은 날 신경 쓸 처지가 아닌 것 같은데.] 

뒤를 돌아본 순간, 누군가가 내 멱살을 강하게 붙들었다. 이지혜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그녀의 화신체에서 흘러 나온 분노의 원망의 설화가 내 전신을 두들겨 패고 있었다. 

“······아저씨. 이거 뭔데. 응? 이것도 계획의 일부야?” 

이지혜에게서 느껴지던 바다의 기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 지하철에서 소녀와 마주했을 때 불어오던 은은한 소금향을, 이제는 맡을 수가 없었다. 

“김독자!” 

이지혜가 울면서 나를 흔들었다. 누구도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유상아도, 정희원도, 신유승도. 모두 고개를 숙인 채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김독자는 그 마음을 이해했다.」 

이 원망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이지혜.” 

「한수영이었다.」 

“이거 놔!” 

어깨를 잡는 한수영의 손길에 이지혜가 거칠게 반응했다. 하지만 한수영은 그녀의 어깨를 놓지 않았다. 완강한 손길로 이지혜의 앞머리를 넘기고, 그렁그렁한 눈물을 닦으면서, 한수영은 계속해서 말했다. 

“흑염룡도, 우리엘도, 해상전신도 안 죽었어.” 

“그걸, 그걸 어떻게 아는데.” 

“느낄 수 있어. 아주 희미하지만, 녀석들이 살아있다는 걸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고. 그리고.” 

차갑지만 다정하고, 정확하지만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 오직 한수영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였다. 

“눈물 닦고 똑바로 봐. 지금 네가 멱살 잡은 놈이 어떤 상태인지.” 

혼미한 눈으로 고개를 떨어트린 이지혜가, 그제야 천천히 눈을 들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머뭇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왜······?” 

이지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아저씨가 울어······?” 

내 멱살을 잡았던 손이 풀렸다. 그 틈을 파고든 한수영이 내 얼굴을 주먹으로 쳤다. 

“정신 차려, 멍청아! 제대로 설명해주라고. 너도 아무 생각 없이 여기까지 온 거 아닐 거 아냐!” 

그 말은 거꾸로 하면,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반드시 나를 죽여버리겠다는 엄포였다. 한수영이 물었다. 

“배후성들을 구할 방법이 있는 거지? 그치······?” 

「그런 방법 따윈 없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캄캄한 <스타 스트림>의 밤하늘. 많은 성좌들의 불빛이 꺼졌지만, 자세히 보면 여전히 반짝이는 것들이 있었다. 아주 오래 보아야만 어렴풋이 빛을 느낄 수 있는 별이었다. 

「김독자는 성좌들을 증오했다. 단 한순간도 그 감정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 내가.” 

「하지만 이 세계의 시나리오는, 그런 김독자조차 변하게 만들었다.」 

나는 [최후의 벽]을 바라보았다. 

이 세계의 모든 ‘설화’가 기록된 벽. 

모든 도깨비들의 소망인 ‘단 하나의 설화’를 기록하기 위해 존재하는 벽. 

“너무 늦었을 수도 있어.” 

이 모든 불행은, 저 벽에 기록되기 위해 존재한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저 벽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가능할 수도 있어.” 

이미 일어난 일들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영혼까지 소멸한 이들을 되살리고, 받은 상처를 없었던 일로 만드는 일 따위 가능할 턱이 없다. 이미 멸망해버린 세계선을 구원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이 세계의 빌어먹을 개연성은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까. 그런 것은 한수영이 말했던 ‘네모난 원’과 같은 이야기니까. 

「하지만 그런 게 가능하다면.」 

「‘네모난 원’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벽’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면.」 

나는 손안의 내핵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메인 시나리오 # 99 ― ‘이야기의 적’을 클리어하였습니다!] 

[완료 보상 정산이 시작됩니다.] 

[현재 보상 정산을 담당할 대도깨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상 정산이 지연됩니다.] 

. 

. 

. 

[당신은 ‘이야기의 왕’을 만날 자격을 얻었습니다.] 

눈부신 벽이, 우리를 향해 입을 벌렸다.





< Episode 97. 볼 수 없는 별 (1) > 끝

< Episode 97. 볼 수 없는 별 (2) >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마지막 설화에 이름을 짓고 싶어 합니다.]

[당신에게 최종 설화의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서사시가 ‘단 하나의 설화’ 최종 후보에 올랐습니다!]

[<스타 스트림>에 태어날 모든 별들이 당신의 설화를 칭송할 것입니다!]

연이어 떠오르는 메시지를 하나씩 읽으며, 나와 일행들은 상황을 점검했다. 다들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얼굴들이었지만, 여기서 멈출 때가 아니었다. 불현듯 공필두가 입을 열었다.

“······이걸로 메인 시나리오는 끝난 건가?”

평소와는 달리, 메인 시나리오가 끝났음에도 연계 시나리오는 발동하지 않았다. 대신 들려온 것은 시스템 메시지였다.

[<스타 스트림>의 메인 시나리오 시스템이 종료 시퀀스에 돌입합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메시지.

장대한 시나리오의 세계가 드디어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모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들이었다.

“이게 끝나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공필두가 허탈한 얼굴로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벽에 피어난 무수한 문장들이 그의 시선을 느낀 듯 흩어졌다 뭉치기를 반복했다. 그 문장들중에는 공필두에 관한 것도 있었다.

「시나리오의 시작과 함께 가족을 잃은 남자.」

그는 어딘가 지쳐 보였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눈에 뭔가가 고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망설이던 내가 입을 열었다.

“아직 이 모든 시나리오를 총괄한 존재가 남아 있습니다.”

“그 녀석도······ 해치워야 하나?”

“힘들다면 여기 계셔도 괜찮습니다.”

“이제와서?”

공필두의 표정에 분노가 떠올랐다.

“나는 그놈을 용서할 수 없어. 산산이 찢어 죽여도 모자라.”

그 눈을 보는 순간 나는 마치 내가 공격당하는 것 같았다.

그의 등 뒤로, 시나리오에서 죽어간 평범한 사람들의 설화가 비치는 것 같았다.

「그 모든 설화가, 김독자를 원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족을 빼앗고, 내 땅을 모두 빼앗은 놈이야. 나는, 나는 반드시······!”

거기까지 말하던 공필두가 피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잽싸게 그를 부축한 이설화가 공필두의 맥을 짚었다.

“······화신체 손상이 심해요.”

선실의 싸움에서 공필두는 이현성과 함께 일행들을 보호했다. 그가 자랑하던 [무장요새]는 엉망으로 망가졌다. 배후성인 디펜스 마스터의 격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그가 함께 싸우는 것은 여기까지일 것이다.

“제가 데리고 갈게요. 이 아저씨도 어쨌든 마지막을 볼 자격이 있으니까.”

“부탁합니다.”

자신의 특수 스킬인 [침대차]를 발동한 이설화가 마력 그물로 이루어진 침대 위에 공필두를 눕혔다.

그사이 기운을 되찾은 이지혜와 정희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요, 독자 씨. 뭐가 나오든 끝은 봐야지.”

그 말을 정희원이 했다는 사실에 면목이 없었다. 아마도 이 자리에서 나를 가장 원망하는 것은 그녀일 텐데.

툭, 하고 내 어깨를 치고 가는 손길.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요. 내 배후성이 말했잖아요. 우리가 본 이야기는 거기까지예요.”

“······.”

“이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서늘한 결의가 담긴 목소리에, 이길영을 업은 이현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희원 씨 말씀이 맞습니다.”

신유승도, 이지혜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일들이 있었음에도, 일행들은 여전히 김독자를 믿었다.」

일행들에게는 지금 저 문장이 보일까.

겨우 내가, 저런 문장을 읽어도 좋은 것일까.

츠츠츠츠츠······!

[‘최후의 벽’ 내부로 입장하시겠습니까?]

이윽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벽 위로 몰아치는 개연성의 스파크. 그 스파크를 중심으로 벽이 함몰되고 있었다. 새하얀 벽 위의 활자들이 일제히 물러가며, 벽 위에 우리가 들어갈 작은 출입구가 생성되었다.

한수영이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 너머에도 네 계획이 있는 거야?”

출입구의 안쪽은 희뿌연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안개였다.

몇 번이나 다시 읽어서, 이제는 외워버린 문장.

「마침내, 모든 것을 잃은 유중혁이 안개 너머를 바라보았다.」

저 통로는, 1863회차의 유중혁이 지나갔던 바로 그 통로였다.

“······이다음은 ‘멸살법’에도 안 나온다고 했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말 들어가는 일만 남았다. 마지막으로 걸리는 것은······.

“······가세요. ‘차라투스트라’는 여기까지예요. 우리는 입장 권한이 없다고 하네요.”

안나 크로프트와 달리, 그녀의 권속인 ‘차라투스트라’들은 <김독자 컴퍼니>와 연계된 거대 설화를 그리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잠시 침울한 눈으로 나를 보던 그들이, 묵묵히 몸을 비켜 우리가 걸어갈 길을 내주었다.

[화신, ‘셀레나 킴’이 자신의 ■■를 받아들입니다.]

[화신, ‘셀레나 킴’의 ■■는 ‘이룰 수 없는 꿈’입니다.]

―안나를 부탁해요.

전음을 통해 전해지는 셀레나 킴의 목소리.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렸다.

내 뒤로 일행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하나의 별자리가 된 일행들. 하지만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해 빛을 내지는 않는 이들.

“가죠.”

「그럼에도 이곳의 모두는, 반드시 확인하고 싶은 결말이 있었다.」

그 순간, 안개를 표류하듯 떠다니는 그림자가 우리 앞에 있었다.

허공에 퍼지는 안나 크로프트의 백금발.

하지만 그녀의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안나 크로프트가 아니었다.

유중혁은 [흑천마도]의 칼자루를 굳게 쥔 채 혹부리 왕의 동태에 이목을 집중했다.

“혹부리 왕을 믿는 건 아니겠지.”

아까부터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녀석은, 시도 때도 없이 혹부리 왕 쪽을 향해 살기를 방출하고 있었다.

나 역시 혹부리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비유를 납치하려 한 적도 있었고, 마계에서 나를 상대로 사기를 치려 한 적도 있었다.

“안 믿어. 임시로 동맹을 체결한 것뿐이야. 전에 계약을 하나 했거든.”

“계약?”

나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신 설명해 줄 이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나를 어지간히 믿지 못하는 모양이군, 회귀자.]

안나 크로프트의 입으로 말하는 혹부리 왕을 보고 있자니, 정말 최악의 조합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중혁이 싫어하는 둘을 합쳐 놓다니.

유중혁은 말없이 [흑천마도]를 향해 자신의 마력을 흘려보냈다. 여차하면 칼부림이라도 망설이지 않겠다는 투였다.

[다른 혹부리들에게 이야기는 들었다. 그대가 내 아이들의 혹을 잘라냈다더군.]

“네놈도 잘리길 원하는 건가?”

혹부리 왕은 즐겁다는 듯 킬킬 웃었다.

“뭐가 즐겁지?”

[그대의 불필요한 고고함이 좋다. 마계와 무림에서도 그랬지. 거기서 오랫동안 따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덕분에 아주 즐거웠어.]

“한 마디만 더하면 정말로 혹을 자르겠다.”

“어이, 유중혁.”

아무래도 평소보다 유중혁이 격앙된 것 같아서, 나는 유중혁을 제지했다. 여기서 혹부리와 드잡이질을 벌여서 좋을 것이 없었다.

왜일까. 흐트러진 기도가 평소의 유중혁과는 달랐다. 어쩌면 녀석도 마지막을 앞두고 생각이 복잡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나와 유중혁을 번갈아 보던 혹부리 왕이 말했다.

[그대들은 좋은 친구로 보이는군.]

유중혁이 다시 한번 눈을 부라리는 사이, 혹부리 왕이 말을 이었다.

[내게도 그런 이가 있었다. 저기 있는 ‘구원의 마왕’처럼 이야기를 무척 사랑하는 녀석이었지.]

“네놈의 이야기 따위 궁금하지 않다.”

[우리는 함께 시나리오를 수행했지.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고, 우리를 조롱하는 절대자들과 맞서 싸웠다. 설화를 쌓아 거대 설화를 만들고, 거대 설화를 쌓아 대서사시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대서사시로, 마침내 ‘최후의 벽’에 도달했다.]

······‘혹부리 왕’이 ‘최후의 벽’에 도달한 적이 있다고?

이것은 ‘멸살법’에도 나오지 않는 정보였다.

[들은 적 없는 이야기겠지. 이젠 설화로도 남지 않은 이야기니까. 반복된 세월 속에 미쳐버린 ‘묵시룡’ 정도나 간신히 기억하고 있을 거다.]

“······네놈 때도 <스타 스트림>이 있었나?”

[그땐 조금 다른 이름이었지. <스타 스트림>은 우리가 이 세계의 끝을 보고 난 후에 정해진 이름일 뿐이야.]

우리보다 앞서 ‘세계의 끝’을 본 존재.

그들의 ■■는 어땠을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는 ‘혹부리 왕’으로 남아 시나리오를 표류하게 된 것일까.

[지금 그 빌어먹을 녀석은 ‘이야기의 왕’이라 불리고 있지.]

안개 너머에서 우지끈, 하고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나는 너희의 최종장을 기대하고 있다. 궁금하구나. 너희들 중 누가 이 시나리오의 마지막 승자가 될지―]

츠츠츠츠츠······.

눈앞의 안개가 일제히 진동을 일으켰다.

[슬슬 내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시간이군.]

그 말과 함께 혹부리 왕의 잔영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어서 움직이는 게 좋을 거다. 모두 먹혀버리기 전에 말이지.]

······먹혀?

“아저씨!”

뒤쪽에서 우리를 따라오던 이지혜가 단말마와 함께 바닥 아래로 쑥 꺼졌다. 근처의 바닥과 벽면에서 손바닥 같은 게 나타나 우리의 팔과 다리를 잡아채고 있었다.

“지혜야!”

[등장인물 ‘이지혜’가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 이지혜를 향해 정희원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정희원의 몸 또한,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깊은 유사처럼 변한 벽이 정희원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등장인물 ‘정희원’이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희원 씨!”

정희원을 향해 달려가는 이현성을 보며, 나는 순간적으로 방향을 잃고 말았다.

‘멸살법’에서 이런 적이 있었던가? 대체, 이게 무슨―

「‘멸살법’에서 이 통로를 건넌 것은 유중혁 혼자였다.」

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한 번도, 유중혁은 이 통로를 여럿이서 건넌 적이 없었다.

“모두 이쪽으로 모이세요!”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현성도, 이설화도, 공필두도, 이어서 유상아와 아이들까지 벽의 손아귀에 붙잡혀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등장인물 ‘신유승’이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등장인물 ‘유상아’가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그 와중에 들려온 ‘등장인물’이라는 말이 더욱 내 신경을 거슬렀다.

“한수영! 유중혁!”

유중혁도 이미 바닥으로 반쯤 빨려 들어간 상태였다. 저항할 틈도 없었다.

“물러서라!”

유중혁이 쏘아 보낸 검풍이 나를 떠밀었다. 나는 가까스로 발목을 붙잡는 활자들을 피해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결국, 유중혁마저 당했다.

남은 것은 한수영뿐이었다. 그 한수영조차도, 한쪽 팔이 벽에 삼켜지는 중이었다.

“빨리 이쪽으로······!”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잡아당겼다.

[바람의 길]의 공능이 발끝에 깃들며, 폭발적인 추진력이 나를 휘감았다.

[‘최후의 벽’이 당신의 대서사시를 향해 탐욕을 드러냅니다!]

[‘최후의 벽’이 자신의 이야기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을 바라봅니다!]

츠츠츠츠츳······!

한수영의 몸이 발작하듯 떨리고 있었다.

「한수영은, 이제 그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등장인물’이 아닌 자였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발을 놀렸다. 하지만 벽의 추적은 집요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내가 어디로 달아나야 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앞, 뒤, 옆, 위. 둘러보아도 달아날 곳은 보이지 않는다.

쑥.

허공을 헛디디는 느낌과 함께, 바닥이 꺼졌다. 이지혜와 정희원이 당했던 방식. 벽이 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끝없는 공허로 추락하듯 한수영과 함께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친 숨으로 밀려드는 희뿌연 안개가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김독자는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두려웠다.」

엄청난 밀도의 텍스트가 호흡을 방해했다. 너무 많은 글자들이었기에 차마 알아볼 수도 없는 설화들. 말 그대로의 ‘거대 설화’가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그 설화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하지만 발버둥 칠수록, 막연한 공포감이 나를 파고들었다. 내 안의 모든 것이 텅 비어가는 느낌이었다.

내 손끝으로 문장들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를 구성하는 설화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때.

「너를 구성하는 설화들은, 네가 보고 겪고 느낌으로써 존재한다.」

그 하나의 문장이, 내 손끝에 걸렸다. 언젠가 ‘환생자들의 섬’에서 유호성이 알려준 ‘설화 통제법’이었다.

「그 녀석에게 네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라.」

나는 그 문장을 꾹 붙잡았다. 그러자 그 문장과 함께 설화를 구성하던 것들이 하나둘 머릿속에 떠올랐다.

「김독자는 침착하게 숨을 가다듬었다.」

막막한 문장의 우주에서, 나는 도망치는 것을 그만두었다. 설화들이 나를 집어삼킬 듯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네가 들여다보지 않으면, 존재조차 하지 못할 녀석들이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저것들은 그저 설화다.

츠츠츠츠츠······!

나는 밀려드는 단어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곳에서 너희들을 읽어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 문장들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다음 순간, 안개처럼 흩어져 있던 단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설화에 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독자’가 되어야 한다.」

자신들을 발견해 준 이에게 감사를 표하듯, 문장들이 내 발치를 떠돌았다. 그것들은 곧 내가 걸어갈 디딤돌이 되었다.

「설화를 사랑하되, 그것에 취하지 않고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자.」

「그때, 설화는 비로소 실체 없는 공허에 맞설 수단이 되어줄 것이다.」

추락이 멈추었다.

나는 발치에 쌓여가는 문장들을 사뿐히 밟아 보았다. 그것은 ‘멸살법’의 문장들이 아니었다.

「“저는 독자입니다.”」

「실제로 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하곤 하는데, 그러면 다음과 같은 오해를 받곤 한다.」

그럼에도 그것은 어딘가 익숙한 문장들이었다.

나는 그 문장들을 읽으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개중에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도 있었고, 잘 모르는 이야기도 있었으며, 이제는 기억이 희미해진 이야기도 있었다.

「어렸을 적, 김독자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어린 내가 노트에 뭔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멸살법’의 파워 밸런스 도표와 히든 피스들. 그리고,

「뭐야, 나라면 이렇게 안 했을 텐데.」

내 나름대로 작성한 ‘멸살법’의 공략.

「바보, 씨 커맨더는 이렇게 공략했어야지. 이때 필요한 아이템은―」

「극장 던전은 연구소에서 앰플을 얻는 게 공략의 핵심이고.」

「여기서 반드시 간평의를 얻어야 돼. 사인참사검보다 더 중요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시감이 더해졌다.

「성좌들을 모두 죽이는 수밖에 없어. 여기서는 그래야 해.」

「회귀하지 않고도 강해지려면······.」

「역시 최선의 루트는 이거지. 첫 번째 ‘거대 설화’는 마계에서 얻어야 해.」

어린 내가 써 내려가는 문장들이 나의 길을 밝히고 있었다.

그 문장들을 걸어 나가며, 나는 생각했다.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쩌면 이 길은, 내가 기억하기도 전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었을까.

뚝.

이윽고 문장이 끊겼다.

문장이 끊어진 곳에, 아주 작고 하얀 문이 있었다.

1863회차의 유중혁 또한 열었던, 바로 그 문이었다.

「그가 읽지 못한 모든 이야기의 [에필로그]가 이 너머에 있었다.」

나는 문의 손잡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고작, 이 손잡이의 문을 돌리기 위해.」

유중혁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그 모든 이야기가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오랫동안 품어왔으나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의문이 떠올랐다.

「tls123은, ‘멸살법’의 에필로그를 어떻게 그리고 싶었을까.」

문의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으며, 나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아득한 설화들로 이루어진 길. 멀리서 바라보자 그 길의 풍경은 기이하게 낯설었다.

「나는 오래도록 그 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 Episode 97. 볼 수 없는 별 (2) > 끝

< Episode 97. 볼 수 없는 별 (3) >





「태초의 우주는 ‘하나’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 그 문장이 있었다. 그것이 문장인지, 아니면 문장을 빙자한 기억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세계에서 ‘하나’는 전지전능했다. ‘하나’는 곧 우주였고, 우주는 곧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하나’는 완벽했다. 완벽하게 혼자였다.」

뒤이어 눈부신 폭발이 일어났다.

「그렇게 ‘하나’는 ‘둘’이 되었다.」

최초의 폭발. 훗날 사람들이 빅뱅이라 부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는 더 이상 전지전능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어마어마한 현기증과 함께 바닥을 짚었다.

이곳은 문의 안쪽이었다. ‘최후의 벽’의 가장 깊은 곳.

더 이상 벽은 나를 빨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미 빨려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곁을 돌아보자 한수영이 쓰러져 있었다. 나는 쓰러진 한수영을 업고 일어났다. 고개를 들자, 그곳에 안나 크로프트가 있었다.

[······최초의 설화를 본 모양이군.]

안나 크로프트에게 빙의한 혹부리 왕이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 나도 그대와 같은 표정이었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설왕설래를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일행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내 초조함을 읽었는지 혹부리 왕이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궁금하지 않은가? 왜 이 세계에 ‘설화’라는 것이 존재하게 되었는지.]

“······그런 이야기를 하러 여기까지 온 게 아니야.”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나도 그랬거든.]

등에 업힌 한수영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 숨이, 곧 설화가 되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세계가 일그러지며, 진열장처럼 장식된 복도가 눈앞에 나타났다.

「우주가 ‘둘’이 되어, ‘하나’는 외로워졌다.」

「‘하나’였을 때는 필요 없었던 것들이 생겨났다. 」

진열장 위에서, 피규어 같은 존재들이 싸우고 있었다.

지구를 비롯한 수많은 행성 위에서 시작된 ‘시나리오’의 역사가 그곳에 있었다.

「둘을 구별할 ‘선악’이 만들어졌고.」

아가레스와 메타트론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붉은 설화를 토하면서도 끝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천사와 악마의 ‘성마대전’.

「둘의 외로움을 달랠 ‘소통’이 발명되었으며.」

[공단]의 내벽을 사이에 두고 싸우는 공민들과 악마들. 그 흉벽의 사이에서 싸움을 만류하는 장하영의 모습이 보였다.

「다시 하나였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윤회’가 창조되었다.」

자신의 방에서 수조 속 화신체를 어루만지는 석존의 모습. 한때 석존이 사랑했던 존재, 죽은 삼장의 화신체였다.

「하지만 ‘둘’은 다시는 ‘하나’로 돌아갈 수 없었고.」

내가 읽어왔던 모든 설화들이 그곳에 전시되고 있었다.

정해진 결말 안에서 반복되는 싸움.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모양인지, 한수영의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둘’은 곧 갈라진 서로를 이어줄 무언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 모든 설화를 살아가며, 그들의 선악과, 소통과, 윤회를 대리해 줄 존재.」

나는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등장인물’.」

더 이상은 태연하게 지켜볼 수가 없었다.

곁에서 유령처럼 걷던 ‘혹부리 왕’이 말했다.

[아주 악질적인 농담이지. 그렇지 않은가?]

킬킬 웃던 혹부리 왕이 내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진열대 위에 떠오르는 인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프라모델처럼 전시된 이들도 있고, 아직 조형이 덜 끝난 것인지 얼굴만 내놓은 채로 벽 속에 갇혀 있는 이들도 있었다.

“······지혜! 유승아!”

내가 아는 얼굴들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그들을 꺼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안간힘을 쓸수록, 둘의 얼굴은 벽 안으로 더욱 빨려 들어갈 뿐이었다.

나는 진열대를 따라 달렸다. 이설화, 공필두, 이길영, 유상아······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유중혁.”

짙은 안개 속에서 유중혁의 모습이 나타났다. 녀석은 눈을 감은 채 동색 사슬에 전신을 구속당한 채였다.

유중혁의 아래쪽에 어렴풋한 인형이 보였다.

「그가 바로 ‘이야기의 왕’이었다.」

안개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당신은 ‘이야기의 왕’과 조우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의 끝이 다가왔습니다!]

‘멸살법’의 어디에도 도깨비 왕의 정보를 상세히 기술한 곳은 없었다. 하지만 ‘멸살법’에 없다고 해서 그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을 만났던 이들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들도, ‘도깨비 왕’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한 적은 없었다.」

‘최후의 안개’의 끝.

그곳에서, ‘이야기의 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기의 왕’이 당신을 향해 웃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4의 벽’이 격렬하게 흔들립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기억이었다.」

지끈거리는 어지럼증과 함께, 시야 전체가 흔들렸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일이, 가능할 턱이 없다.」

[드디어 만나게 되는군요. ■■의 사도······ 아니.]

눈앞에 작은 스파크가 튀더니, 필터링이 해제되었다.

[‘영원과 종장의 사도’여.]

「김독자는 벼락같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생각할 틈도 없었다. 나는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당장이라도 숨통을 조여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왜인지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키가 컸다. 항상 너무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 보았다.」

이곳에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항상 얼굴이 붉었던 사람. 늘 취한 채였고, 그래서 좀처럼 시선을 마주친 적이 없던 사람. 시선이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던 사람.」

[독자야, 김독자.]

「그와 시선이 마주치면, 세상은 악몽으로 바뀌었다.」

[내가 이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지었어.]

츠츠츠츠츠츳!

나는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토록 커 보였던 키는 이제 그와 비슷해졌고.」

시간의 유속이 느려지는 것 같았다.

「도드라진 혈관은 오히려 그를 앙상해 보이게 만들었다.」

츠츠츠츠츳!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는 무력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힘껏 내지른 주먹은 그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눈부시게 튀어 오르는 스파크가 남자의 얼굴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푸른 안광을 빛내며 악마처럼 웃는 ‘도깨비 왕’이 그곳에 있었다.

[무슨 짓이냐, 아버지에게.]

나는 고함을 질렀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다. [제4의 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김독자! 정신 차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등을 짚는 따뜻한 온기가 있었다. 한수영의 설화가 내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것은 독자(讀者)의 설화.」

나를 지켜준 이야기였다.

“제4의 벽! 뭐해! 일어나!”

[‘제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제4의 벽’이 철옹성처럼 두터워집니다!]

그 순간, 도깨비 왕의 표정이 바뀌었다.

[방해를 하네?]

그는 내가 아니라 내 안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최후의 벽의 마지막 파편. 이제 너의 임무는 끝났다.]

[‘제4의 벽’이 거칠게 으르렁거립니다!]

[너는 무사히 모든 이야기의 끝에 도달했다. 자격을 갖춘 계승자를 데리고 말이지.]

내 안에서 [제4의 벽]이 말하고 있었다.

「그 건 김독 자 가 결 정할 일」

그 말을 들으며 차츰 정신이 돌아왔다.

「눈앞의 존재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어머니와의 기억이 설화가 되어 눈앞을 흘러갔다.

[제4의 벽]에 삼켜졌던 어머니의 기억. 그 벽 위에 떠올랐던 어머니의 문장들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그날 죽었다.」

“······너는 내 아버지가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장난은 그만둬. 네가 내 ‘아버지’라는 건 개연적으로 불가능해.”

[개연적이라. 하하, 그런 말을 듣게 되다니 할 말이 없네. 이쯤에서 나오기에 누구보다 자연스러운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내게 멱살을 잡힌 도깨비 왕이 웃었다.

그의 얼굴이 변하고 있었다.

[아니면, 이 얼굴은 어떠냐?]

그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변했고.

[이 얼굴도 나쁘지 않지.]

그다음에는 페르세포네와 하데스의 얼굴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강렬한 스파크와 함께, 내 몸이 반대로 튕겨 나갔다.

“한 번만 더 그들의 얼굴을 보이면 죽여버리겠다.”

[후후, 장난이 과했던 모양이군. 미안.]

“지금 당장 모습을 바꿔! 본모습을 드러내!”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게 안 돼. 내 원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는 이미 오래전에 잊었어. 너무 많은 존재로 바뀌어 살아왔거든.]

그는 여전히 하데스의 모습을 유지한 채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그의 뒤쪽에서 설화들이 흘러나왔다. 어딘가 익숙한 설화들이었다.

「그날,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악마가 경외 속에 승천했다.」

[나는 한때 마계의 왕이었고.]

「<에덴>의 모든 대천사들이 그를 숭배하기 마지않았다.」

[대천사들의 메시아였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 설화들은 내가 익히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사라진 마계의 대마왕과, 에덴의 메시아. 그에게서는 다른 신화급 성운들의 창조 설화도 느껴졌다. <황제>의 반고, <올림포스>의 크로노스······ 전신에 오소소 솜털이 돋았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존재는, 내가 지금껏 상대했던 어떤 신화급 성좌와도 차원이 달랐다.

「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

나는 긴장을 놓지 않은 채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굳게 쥐었다.

“그 모든 게 당신이었단 건가? <에덴>도, <마계>도 너였다고?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내 말에 도깨비 왕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결국 모든 것은 지나간 이야기의 환생일 뿐이란 얘기지. 우리는 그저 거대한 이야기의 환생에 불과해. 너도, 나도.]

그는 먼 <스타 스트림>의 흐름을 보고 있었다. 별이 떨어진 하늘이 공허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하늘은 거대한 벽처럼 보였다.

끝없이 뻗어 나간 [최후의 벽].

이 세계는 결국 이 아득한 벽 속의 이야기였다. 쓰다 흘러내린 잉크처럼, 희미한 별들이 추락하는 것이 보였다. 그토록 많은 별들이 떨어졌음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별들이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별들. 나는 그 별들의 이름을 기억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을 되새겼다.

“내 일행들을 풀어 줘.”

[그들은 쓸모가 끝난 수단일 뿐이야. 그들을 풀어주는 것이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데?]

“······그 사람들은 내 전부야.”

도깨비 왕이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한수영이 [한낮의 밀회]를 통해 말을 걸며 내 곁에 다가섰다.

―김독자.

넝마가 된 붕대를 팔에 질끈 감으며, 녀석은 마지막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셋 센다. 신호하면 동시에 제압해. 하나, 둘······.

[눈앞에서 귓속말하지 마. 다 들리니까.]

우리는 빳빳이 굳은 채 시선을 교환했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설정들은 ‘도깨비 왕’의 손을 거친 것. 이 세계에 그가 읽을 수 없는 문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한수영도 나도 칼자루를 쥔 채 녀석을 노려보았다. 이미 수가 읽힌 상황에서 덤벼봤자 기습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도깨비 왕은 그런 우리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더니, 내게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야기의 후계자. 오직 너만이 정확한 시간에 맞춰 이곳까지 왔어.]

“······뭐? 시발, 난 보이지도 않는―”

츠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한수영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마치 수조 속에 갇힌 것처럼 한수영이 자신을 감싼 투명한 벽을 탕탕 내리치고 있었다.

[당신은 모든 메인 시나리오를 통과하였습니다.]

[당신은 범우주적인 <스타 스트림> 통합체에 기록될 것입니다.]

들려오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내 존재의 격이 격상되고 있었다.

[그토록 멋진 설화를 보여줘 놓고, 왜 아직도 낡은 인식의 틀에 갇혀 있는 거지? 숭고한 벽의 파편을 가졌음에도, 왜 이 세계를 떨어져서 바라보지 못하는 거냐고.]

나를 힐난하는 듯한 목소리. 그 목소리의 아득한 심층부에는 이 모든 이야기에 대한 경외가 묻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서 있던 벽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벽의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상상하는 듯했다.

[네가 가치를 둔 모든 것에는 의미가 없어. 이 세계는 오직 위대한 존재에게 헌정되기 위한 이야기에 불과해. 이 세계의 모든 것은, 그저 그 위대한 존재의 백일몽에 지나지 않아.]

위대한 존재의 백일몽.

“[최후의 벽]은 그 ‘존재’가 꾸는 꿈을 기록한 것인가?”

[맞아.]

나는 그 존재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이 모든 비극을 초래한 원흉.

나는 이곳에 들어오며 보았던 ‘최초의 설화’를 떠올렸다.

「태초의 우주는 ‘하나’였다.」

최초의 ‘하나’.

유중혁을 회귀시키고, 이 세계의 모든 ‘신화’를 탄생시킨 존재.

“그 녀석이, tls123인가?”





< Episode 97. 볼 수 없는 별 (3) > 끝

< Episode 97. 볼 수 없는 별 (4) >





[tls123?]

중얼거리는 도깨비 왕의 표정이 이상했다. 마치 렉이라도 걸린 것처럼 떨리는 녀석의 입술 위로, 파란 스파크가 튀었다.

나는 질문을 바꿨다.

“녀석이 이 세계를 만든 작가냐고 묻는 거다.”

도깨비 왕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가장 오래된 꿈’은 작가라기보다는 차라리 독자에 가깝지. 그는 누구를 위해 이야기를 쓰는 존재가 아니야. 게으르고 탐욕스러우니까.]

‘가장 오래된 꿈’이 ‘tls123’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내게 파일을 보낸 이는 누구란 말인가.

내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읽을 소설을 집필했던 작가는, 대체―

[너는 이 모든 것의 시작이 궁금한 모양이군. 하지만 그런 것을 추측하는 건 아무 의미 없어. 이 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든, 이 세계는 그것을 보는 이가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도깨비 왕은 <스타 스트림>의 우주를 바라보았다.

눈부신 설화 조각들이 은하의 흐름을 타며 흘러가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부스러기들은 의미를 만들었다 잃기를 반복했다.

나는 여전히 사슬에 구속되어 있는 유중혁을 올려다보았다. 유중혁의 등 뒤로, 아무것도 없는 <스타 스트림>의 우주가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도 있어.”

우주의 어둠은 너무나 넓고 광활하여, 빛의 속도로도 건널 수 없을 만큼 아득했다. 하지만 그 빛은 언젠가는 닿는다. 볼 수 없다고 해서 그곳에 없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없는 곳에서 빛을 내는 것도 있다.

「우주의 암흑 사이로 희미한 별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별들. 아직까지 자신을 잃지 않은 별들이었다. 그 별들의 빛은 설화가 되었고, 문장이 되었다.

그 문장들이 최후의 벽 위로 드리워지며, 이미 닫혀버린 이야기의 문을 열었다.

「전신에서 검은 피를 흘리며, 심연의 흑염룡이 몸을 일으켰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탄식이 흘러나왔다. 문장들은 곧 영상을 그려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폐허가 된 전장에서 몸을 일으키는 심연의 흑염룡이 보였다.

한수영의 말이 옳았다. 「무대화」가 사라지며 ‘묵시룡’의 힘은 잃었지만, 그는 여전히 흑염룡이었다.

「타천의 하늘에서 제천대성이 지친 눈을 떴고.」

번뜩이는 뇌운 사이로 살아남은 성좌들과 격전을 벌이는 제천대성.

「최후의 ‘대선’이, 선악의 종지부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우리엘.

[업화의 불꽃]을 휘두르며 <스타 스트림>의 꺼진 밤하늘을 밝히는······.

[아니, 보는 이가 없다면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언과 함께, 설화의 영상이 흩어졌다.

나는 허망하게 흩어지는 설화를 향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내 행동을 비웃듯 도깨비 왕이 말을 이었다.

[아무도 읽지 않는 이야기가 계속된다는 것만큼 허망한 일은 없지. 모든 것은 관측된 순간에 만들어지는 거다. 이 우주는 그렇게 구성되어 있어. 관측하는 이가 없을 때, 설화는 존재를 증명하지 않아.]

“······그들은 분명히 존재해.”

[아직도 그다음이 보고 싶은가?]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최후의 벽’이 당신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모든 세상이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나는 말을 망설였다.

투명한 벽 너머로 아우성치는 한수영의 모습이 보였다.

「이 설화가 계속되면, 내가 원하는 것을 볼 수 있을까.」

내 망설임을 안다는 듯 도깨비 왕이 웃었다.

‘최후의 벽’이 거칠게 준동했다. 벽 위로 문장들이 흐르고 있었다. 서비스라는 듯, 느릿하게 다시 재생되는 설화.

제천대성이, 심연의 흑염룡이, 우리엘이 다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염룡아. 누나 없다고 울지 마라!]」

「[큭큭, 포기가 빠르군 대천사! 내겐 아직 사용하지 않은 한쪽 팔이······!]」

「[그 팔은 벌써 잘려나간 것 같은데, 흑염룡.]」

「[이 몸은 팔 한 짝쯤 없어도 끄떡없다, 멍청한 원숭아!]」

선과 악, 그리고 선도 악도 아닌 성좌들이 한데 모여 최후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정경을 보며, 도깨비 왕이 말했다.

[너의 설화는 대단했다. 최고의 거대 설화인 <스타 스트림>이 네 편을 들 정도였으니까. 아직 서사시의 많은 부분이 비어 있지만, 새로운 세계의 ‘태초’가 될 토대로서는 충분해.]

“그딴 게 되려고 이야기를 계속해온 게 아냐.”

성좌들의 등 뒤로 설화들이 빛나고 있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우리의 거대 설화.

설화들은 <김독자 컴퍼니>의 것만이 아니었다.

어떤 이야기를 아주 오랫동안 보아온 이들은, 결국 그 이야기와 같은 빛을 띠게 된다.

우리의 이야기를 지켜 보아온 성좌들이, 같은 빛을 내고 있었다.

[저것이 네가 만든 이야기의 끝이다.]

「꼬리가 잘려나간 흑염룡이 거친 울음을 터트렸다.」

「우리엘의 부서진 업화가 잿가루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황제의 성좌들을 향해, 제천대성이 부러진 여의봉을 휘둘렀다.」

[최후의 벽] 위에 쓰인 문장들이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츠츠츠츠츠츳!

[당신은 ‘최후의 벽’에 간섭할 자격이 없습니다.]

손가락 끝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스파크에 새카맣게 타오른 손가락.

나는 이를 갈며 외쳤다.

“나는 이 이야기를 통제할 자격이 있어. 메인 시나리오를 전부 클리어했다고.”

마지막 시나리오의 보상은 [최후의 벽]이었다.

도깨비 왕이 웃었다.

[그래, 너에겐 자격이 있지. 하지만 저 이야기를 바꿀 권한은 없어. 그것은 ‘개연성’에 위배 돼.]

실시간으로 최후의 벽 위로 떠오르는 문장을 보며, 나는 진언을 개방했다.

[······저 이야기를 멈춰.]

내가 쌓아온 모든 설화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우리엘도, 흑염룡도, 제천대성도.

모두 살아있다.

「[하데스. 우리의 ■■가 다가왔어요.]」

지금이라면 바꿀 수 있다. 흘러가는 문장들을 고칠 수 있다.

끝나지 않은 문장의 끝을 잡아, 다른 문장을 쓸 수 있다.

[그들을 살리고 싶나?]

도깨비 왕이 물었다.

[나 역시, 한때 너와 같았지.]

도깨비 왕이 살아온 세계가 그의 등 뒤로 펼쳐졌다.

나는 잘 모르는 행성의 모습. 그 행성에서 시나리오가 흘러가고 있었다.

[나 또한 끔찍한 불행들을 겪었지. 하나의 존재가 감당할 수 없는 비극들을······. 그 비극이 더 이상 비극처럼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이곳에 도달했다.]

둑이 터지듯 벽의 일부가 나를 향해 쏟아졌다.

‘최후의 벽’이 품고 있던 막대한 이야기가 나를 향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츠츠츠츠츠츠츠······!

정신이 망가지는 것 같았다.

내가 알고 있던 이야기, 모르고 있던 이야기.

우주의 모든 설화가 내 영혼 속으로 축적되고 있었다.

[‘제4의 벽’이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제4의 벽’이 무너지는 당신의 정신을 보호합니다!]

내가 겪어왔던 죽음들과 내가 보아왔던 죽음들이 겹쳐지고 있었다.

[왜 네게, 그토록 많은 불행이 일어났을까?]

불행이라는 범주로 쉽게 변별되고 말 그 이야기들이, 내 머릿속을 짓눌렀다.

[설화에 취하지 마. 저것은 앞으로 네가 만들어나갈 무수한 세계선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니까.]

조금씩, 슬픔의 감정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비탄도, 절망도.

그 모든 비감들이 하나의 찰흙 덩어리처럼 뭉쳐지더니, 이내는 구별할 수 없는 것이 되어갔다.

「세상에 저렇게나 많은 불행들이 존재하는데, 그 모든 불행에 슬퍼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지나치게 많은 것은 결국 진부해진다.

[이 세계를 만든 작가가 누구냐고 물었지. 네가 그 존재가 될 수도 있어.]

도깨비 왕이 말하고 있었다.

[그들을 살리고 싶다면 네가 사랑하는 모든 것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 이미 쓰여진 설화들이 쉽게 고쳐질 수 있는 허상이라는 것을, 그들이 위대한 백일몽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도깨비 왕의 속삭임과 함께, 거대 설화의 개연성이 준동했다.

[다음 세대의 <스타 스트림>을 이끌 수 있도록, 새로운 세계의 설계자가 되어라.]

그야말로 가공할 유혹이었다.

만약, 도깨비 왕의 제안을 받아들여 <스타 스트림>의 새로운 설계자가 된다면 나는 모두를 구할 수 있다. 이 모든 설화를 고쳐 써서, 이 세계선을 구할 수 있다.

그 구원의 조건은, 하나뿐이었다.

「저 이야기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기만 한다면.」

그 순간, 누군가가 내 손을 붙잡았다.

뭔가를 한참이나 내리쳤는지 피에 젖은 손.

아주 오랫동안 글을 쓴 사람의 손이었다.

“······정신차려. 넌 작가가 아니야.”

대체 언제 막에서 탈출한 것일까.

입술로 북 찢은 붕대를 다시 묶으며 한수영이 말했다.

“내 소설을 가장 먼저 읽어주기로 한 독자라고.”

그 말과 함께, 한수영의 전신에서 설화가 폭발했다.

[설화, ‘예상표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츠츠츠츠츠츳!

[최후의 벽]에 쓰인 문장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화신 ‘한수영’의 특성이 발동합니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비극이 있어도 슬픈 건 슬픈 거야, 멍청아!”

한수영이 바닥을 찧는 순간, [최후의 벽]에 들러붙어 있던 설화 일부가 후두둑 떨어졌다. 도깨비 왕의 눈이 커졌다.

[······감히 벽을······!]

도깨비 왕의 말은 계속되지 못했다.

설화들이 떨어진 벽의 틈새로, 누군가의 손이 비집고 나왔다. 길고 새하얀 손. 내가 아는 그 어떤 손보다도 더 올곧고 강인한 사람의 손이었다.

“그 말이 맞아요. 슬픈 건 슬픈 거죠. 기쁜 건 기쁜 것처럼.”

[‘윤회를 결정하는 벽’이 ‘최후의 벽’의 틈새를 일그러뜨립니다.]

빙긋 웃는 유상아가 벽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 붙어 있는 신유승과 이길영도 보였다.

“아저씨!”

“형!”

유상아가 만든 균열은 점차 번지더니, 이윽고 반대쪽 벽면까지 타고 흘렀다. 그 벽 너머로, 내가 잘 아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가능한 소통의 벽’이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키웁니다.]

“구―원―의―마―와―앙!”

장하영의 목소리였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의 다른 쪽 틈새로 자그마한 것이 나타났다. 키리오스였다.

“한심한 놈. 고작 설화 따위에 먹힌 것이냐?”

곧이어 불도저가 바닥을 밀어내는 소리와 함께, 틈새에 사람만한 구멍이 생겼다.

[‘선악을 결정하는 벽’이 선악의 경계를 재설정합니다!]

“독자 씨! 찾으러 왔습니다!”

이현성과 정희원이었다.

일행들이 빠져나온 틈새는 순식간에 수복되었다. [최후의 벽]에 기록된 이야기들이 틈을 메꾸어버린 것이었다.

그 벽 위로, 다시 별들의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독자 씨? 이게 무슨······.”

“현성 씨, 저기!”

정희원의 목소리와 함께, 모든 일행들이 [최후의 벽]을 바라보았다.

닫힌 선실에서 여전히 싸우고 있는 성좌들의 이야기가 그곳에서 전시되고 있었다.

산 자 보다 죽은 자가 더 많은 지옥도.

우리엘이 무릎을 꿇었고, 심연의 흑염룡이 쓰러졌다.

제천대성이 최후의 최후까지 분전하며 그들을 지키고 있었다.

「[일어나라, 아직 막내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문장들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이대로 두면, 저들은 모두 죽는다. 우리엘도, 심연의 흑염룡도, 제천대성도. 모두 죽을 것이다.

나는 고통 속에서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영혼을 잠식하는 통증 때문에 목소리도 진언도 나오지 않았다.

「막 아」

[‘제4의 벽’이 당신을 대신해 이야기합니다.]

「저 이야 기 가 흘러 가 는 것을 막 아」

일행들이 [최후의 벽]을 향해 달려갔다.

말을 전하지 않아도, 이미 모두가 무엇을 해야 할 지 알고 있었다.

아직 저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다음 문장이 쓰여지는 것을 막을 수만 있다면―

츠츠츠츠츠츠!

거센 후폭풍과 함께 일행들의 몸이 타올랐다. 도깨비 왕의 힘이 그들을 억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행들은 멈추지 않았다. 눈부시게 튀어오르는 스파크를 견뎌내며,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속도에 맞춰 걸어갔다.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거대 설화들이 ‘최후의 벽’에 기록되기를 거부합니다!]

우리가 만든 설화들이 말하고 있었다.

도깨비 왕이 그에 응하듯 말했다.

[······그렇군, 아직 시나리오를 수행하고 싶나?]

도깨비 왕은 즐겁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과 마주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도깨비 왕은 이 세계선 최강의 존재. 그 어떤 신화급 성좌도, 이 도깨비 왕을 상대할 수는 없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것은, 그의 장난감에 지나지 않으니까.

도깨비 왕의 손짓과 함께, [최후의 벽] 위에 새로운 시나리오의 내용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타 스트림> 최후의 시나리오가 재설정됩니다!]

[<스타 스트림> 최후의 시나리오는······.]

콰가각!

흘러가던 문장이 멈추었다.

문장이 끊긴 곳엔 한 자루의 칼이 틀어박혀 있었다. 불온한 혼돈의 힘을 담은 아우라가, 문장의 질서를 어지럽혔다.

그리고 새로운 문장이 구성되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돌아, 유일하게 이 세계의 끝을 본 존재.」

허공에 끊어진 사슬이 흩날렸다. 수천 개의 잔상이 하나로 겹쳐지듯, 검은 코트 위로 무수한 회차의 그림자들이 덧씌워지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내 판단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있다, 한 사람.」

이미 도깨비 왕을 죽여 본 적이 있는 존재.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Episode 97. 볼 수 없는 별 (4) > 끝

< Episode 98. 지켜야 할 것은 모두 지켰나 (1) >





「유중혁이라는 한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0회차부터 1863회차까지.

유중혁이 쌓아온 세월이 코트 끝자락에 겹쳐져 일렁였다.

그의 설화를 대변하듯, [최후의 벽] 위에 유중혁의 대사가 떠올랐다.

「“나는 단 하나도 잊지 않는다.”」

[설화, ‘생과 사의 동료’의 특수 효과가 발동 중입니다!]

3회차 유중혁, 그리고 ‘은밀한 모략가’의 설화가 함께 공명하고 있었다.

굳게 쥔 [흑천마도]의 검극에서 무섭도록 찬연한 혼돈의 힘이 뻗어 나왔다. 무질서한 혼돈의 아우라에 벽 전체가 동요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이 벽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을 테니까.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의 주인공, 유중혁.

이 모든 세계는 애초에 유중혁이 아니었다면 시작될 수조차 없었다.

도깨비 왕이 비웃듯 입을 열었다.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 너의 필름은 참으로 길고도 아득하다.]

마치, 그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 누구도 너의 지루하고 비대한 이야기를 끝까지 함께할 수 없을 것이다. 설령 ‘가장 오래된 꿈’일지라도.]

츠츠츠츠츳!

유중혁이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현자의 눈]이 황금색으로 빛나며 개방되었다. 이 세계의 모든 별빛을 빨아들인 것처럼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

그 눈동자의 주인이 말했다.

【이번에도 내가 너무 일찍 왔나?】

‘은밀한 모략가’의 말을 듣는 순간, [끊어진 필름 이론]을 통해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1863회차의 세계선에서 그가 만났던 ‘도깨비 왕’의 기억.

「[불행한 꼭두각시여. 그대는 너무 빨리 왔습니다. 당신은 이 우주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그 기억을 실시간으로 전송받기라도 한 듯, 고개를 갸웃하던 도깨비 왕이 말했다.

[그렇군, 다른 세계선의 나는 그렇게 말했던 모양이지?]

【내가 본 녀석과는 말투가 다르군.】

[너의 모든 회차가 같지 않듯, 나 또한 마찬가지지.]

재미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도깨비 왕이 유중혁의 [흑천마도]를 뽑아 던졌다. 날아온 칼을, 유중혁이 맨손으로 받아 쥐었다.

칼이 뽑힌 [최후의 벽] 위에 커서처럼 칼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윽고 칼자국이 한 뼘씩 뒤로 밀려나며, 벽 위에 문장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 모든 세계선은 결국 같은 길로 향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 이야기가 몹시 자랑스럽다는 듯 도깨비 왕이 유중혁을 향해 말했다.

[위대한 세계의 완성이 눈앞에 있다. 너도 이제 자신의 숙원을 이룰 수 있을 거다.]

유중혁의 숙원이 무엇인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끔찍한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가 되는 것.

1863회차의 유중혁은 그 목표만을 위해 살아왔다.

「하지만 유중혁의 목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린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보고 있었다.

시선의 의미는 명백했다.

자신과 한 약속을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모든 세계의 원흉을 없앨 것이다.”」

[최후의 벽]에 떠오른 문장을 읽은 도깨비 왕이 말했다.

[없앤다······ 재미있네. 아직도 그런 게 가능할 거라고 믿어?]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그의 쌍수에 두 자루의 검이 쥐어졌다.

새카만 [흑천마도]의 칼날 위에 서슬 퍼런 [진천패도]의 칼날이 겹쳐졌다.

【먼저, 네놈이 없어져야겠지.】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스파크가 벽 전체를 부술듯 두들겼다. 연달아 폭발한 섬광 끝에 두 개의 신형이 허공에 겹쳐 있었다.

‘도깨비 왕’의 주변을 감싸는 단단한 설화의 장벽이 보였다.

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무기로 쓰는 존재.

[거대 설화, ‘최초의 메시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성운 <에덴>의 주인이 가지고 있던 바로 그 설화가,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단단하게 엉겨든 문장들이 신성한 광휘를 흩뿌렸다. 위대한 성좌의 빛이, 지상의 피조물들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그저 닿는 것만으로도 존재가 녹아서 사라질 게 분명한 격이었다.

“독자 씨!”

기겁한 이현성이 나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의 전신에서 뻗어 나온 강철이 나와 일행들을 보호하기 위해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현성 씨.”

“예?”

나는 대답하는 대신 앞을 가리켰다.

지끈거리는 두통 속에서도, 나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정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른 별들의 말이 맞다. 나 역시, 그저 성좌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아마도 나는 저 광경을 보기 위해 십수 년을 견뎌왔던 것이다.

[전용 특성, ‘별들의 공포’가 발동합니다!]

눈앞에서 도깨비 왕의 광휘가 흩어지고 있었다.

세상 모든 악을 멸하는 메시아의 빛을, 검은 코트의 사내가 두 개의 칼로 받아내고 있었다.

츠즈즈즈즈즈······!

빛에 닿은 벽의 설화들이 녹아내렸다.

‘은밀한 모략가’― 아니, 유중혁은 그 빛을 거스르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턱 아래로 송골송골 맺힌 땀이 떨어졌고, [흑천마도]와 [진천패도]의 칼날이 빛에 의해 무디어지고 있었지만,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쯤 되자 도깨비 왕도 조금씩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과연, 그럼 이건 어떨까?]

[거대 설화, ‘최초의 악’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최초의 악. 그것은 승천한 마계의 대마왕, ‘바알’의 설화였다.

이 세계의 어떤 선도 감히 상대할 수 없는 패도적인 힘.

마계 전체를 등에 업은 도깨비 왕이, 유중혁의 위로 새카만 낙뢰를 떨어트렸다. 그 어떤 대천사도 견뎌낼 수 없는 타천의 전격.

멀리서 이설화가 외쳤다.

“중혁 씨!”

유중혁은 날아드는 전격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뢰침처럼 검을 곧추세운 채 번개를 정면으로 받아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무대화」가 발동합니다!]

무대화를 통해 마왕의 영혼들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우리가 죽인 녀석들도 있었고, 묵시룡에 의해 사망한 놈들도 있었다. 그 모든 마왕들이 ‘최초의 악’에 의해 다시금 전장에 불려 나와 유중혁을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그아아아아아아―!

마왕들이 던진 병장기들이 사악한 마력에 휩싸여 보랏빛 낙뢰 폭풍을 만들어 냈다. 설령 신화급 성좌라고 해도 버텨낼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폭풍이었다.

범람하는 낙뢰 속에 유중혁의 하얀 얼굴이 악귀처럼 빛났다. 불온한 격의 폭풍 속에서도 유중혁은 침착했다.

마치, 오랫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한 사람처럼.

【모두 죽여본 놈들이군.】

[전용 특성, ‘마왕살해자’가 발동합니다!]

허공으로 도약한 유중혁이, 병장기들을 튕겨내며 전진했다. 그의 검이 궤적을 만드는 곳마다 악의 설화가 부서졌다.

파괴만을 위해 태어난 괴물처럼, 유중혁은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의 모든 검격에 그가 살았던 세계의 원한이 담겨 있었다.

츠츠츠츠츳!

타락한 마계의 하늘에 커다란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단신으로 「무대화」를 해체시키는 무력.

<스타 스트림>이 만든 괴물이, 이제 <스타 스트림>을 부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아아아아악!

[흑천마도]의 검이 되살아난 ‘검은 갈기의 사자’ 마르바스의 목을 베었고, [진천패도]의 궤적이 달려드는 ‘무자비한 역천의 사냥꾼’ 바르바토스의 심장을 꿰뚫었다.

어떤 마왕도, 그의 앞에서 자신이 왕임을 제창할 수 없었다.

위협감을 느꼈는지, 도깨비 왕이 으르렁거리며 외쳤다.

[오만한 꼭두각시······, 이 세계선의 주인공은 네가 아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지형이 다시 한번 변하기 시작했다.

[거대 설화, ‘스타 스트림 게임 시스템’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무대화」가 발동합니다!]

벽의 정경이 픽셀처럼 변하고 있었다.

유중혁의 몸이 작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다이달로스의 미궁’ 속에 갇힌 것처럼 유중혁이 나아가는 길이 미로로 변했다. 그의 뒤를 쫓아오는 거대한 입을 가진 괴물도 보였다. 곳곳에서 불쑥 튀어 오른 [자동 포탑]들이 사격을 개시했고, 그의 발이 닿는 지형은 깊은 수렁으로 뒤바뀌었다.

마치, 게임 속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유중혁은 웃고 있었다.」

[전용 특성, ‘유희의 지배자’가 발동합니다!]

아주 간단히 함정을 돌파한 유중혁의 몸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다가오는 괴물의 정수리를 찢어버리고, 미로의 벽면을 박살내고 있었다.

이 세계의 공략법 따위 진즉에 알고 있다는 것처럼, 단 한 번의 일격도 허용하지 않았다.

[해당 ‘무대’가 대상의 격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미로가 무너지고, 어느새 유중혁은 도깨비 왕의 코앞에 섰다.

도깨비 왕의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게 끝인가?】

‘은밀한 모략가’가 도깨비 왕에게 이길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의 모든 삶은 <스타 스트림>과 싸워 이기기 위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읽지 못했던 원작에서도, 유중혁은 저런 식으로 도깨비 왕을 죽였을 것이다.

뒷걸음질치는 도깨비 왕의 눈동자가 나를 일별했다.

「유중혁의 약점은 무엇인가.」

[최후의 벽]에 떠오르는 문장을 읽은 순간,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도깨비 왕의 눈동자에 다른 세계선의 정경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선의 기억이 그를 향해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해답을 찾았다는 듯, 나를 보던 도깨비 왕이 섬뜩한 미소로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꼭두각시여. 너의 정신력도 너의 검처럼 날카로울까?]

[‘이야기의 왕’이 당신의 설화를 강제로 재현합니다!]

[「무대화」가 임시 발동합니다!]

[인근의 지형의 유사함이 무대의 재현 수준을 격상시킵니다!]

죽은 마왕의 시체들이 곳곳에 늘어져 있었다. 죽은 성좌와 마왕들의 폐허 위로, 황폐한 얼굴의 유중혁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살았던 최후의 세계가, 그곳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가 그 세계를 모를 수는 없었다.

그곳으로 나를 보낸 것이 바로 ‘은밀한 모략가’였으니까.

「1863회차. ‘멸살법’의 마지막 세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유중혁을 향해, 도깨비 왕이 그림자처럼 다가왔다. 아니, 그는 더 이상 도깨비 왕이 아니었다. 그의 걸음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얼굴이, 체형이 변하고 있었다.

「창백한 뺨. 별처럼 빛나는 두 눈이 그를 보고 있었다.」

내 것과 똑같은 백색의 코트가 바람에 흩날렸다.

[기억나냐? 33회차. 40번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이지혜가 했던 말.]

나와 똑같은 목소리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허공에 튀어오르는 스파크와 함께, 유중혁의 몸이 빳빳이 굳고 있었다.

가볍게 손을 뻗은 도깨비 왕이 유중혁의 멱살을 쥐며 말을 이었다.

[생각해봐. 늘 불행했던 것만은 아니야. 그렇지? 그 모든 회차에는, 잠깐이지만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어.]

[진천패도]와 [흑천마도]가 거칠게 떨렸다.

떨림 속에서, 두 자루의 검이 무력하게 늘어지고 있었다.

「회귀 우울증.」

오랜 세월 동안 회귀를 반복해 온 유중혁의 유일한 약점.

[173회차. 너는 꽤 오랫동안 지구를 지켜냈어. 이지혜가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는 모습도 보았고, 이설화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안고 웃는 모습도 보았지.]

유중혁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유중혁을 무너트리는 것은 절망이 아니다.」

「녀석의 머릿속에 작은 깃털 같은 기억이 하나둘 내려앉고 있었다.」

내가 사용했던 바로 그 방법을, 도깨비 왕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숨이 막히고, 폐가 조여온다.」

「물에 빠진 인간은, 단지 깃털의 하나의 무게 때문에 더 깊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나는 유중혁을 향해 외쳤다. 정신 차리라고, 그런 허상에 넘어가지 말라고.

하지만 차폐막이라도 생긴 듯, 내 목소리는 그쪽으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 모든 이야기를 조롱하듯 도깨비 왕만이 웃고 있었다.

[유중혁. 지키고 싶었던 것은 모두 지켰나?]

천천히 유중혁의 무릎이 낮아지고 있었다.

나는 설화의 격을 끌어 올렸다.

당장이라도 저 「무대화」를 해체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꽉.

여전히 내 손을 굳게 쥔 손이 있었다. 한수영이었다.

“네가 낄 전장이 아니야.”

“하지만 저대로 내버려 두면―”

“······볼 수 없는 별도 빛나고 있다며.”

······볼 수 없는 별?

한수영의 말에, 나는 다시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낮아지던 유중혁의 시야가 멎어 있었다. 눈부신 스파크가 그의 전신을 잠식하고 있었다.

츠츠츠츠츠······.

무언가가, 꺼져가던 그의 정신을 깨우고 있었다.

[거대 설화, ‘멸망을 기억하는 자들’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설화였다.

서서히 잦아드는 스파크 속에서, 어렴풋한 인형들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유중혁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 네 인물이 서 있었다.

키가 큰 사내, 백발의 청년, 포니테일의 여성, 그리고―

【그는 단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그렇기에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다.】

눈부신 날개의 대천사.

대도깨비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멸망한 999회차의 설화가, 대천사의 검극에서 겁화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직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고 믿으니까.】





< Episode 98. 지켜야 할 것은 모두 지켰나 (1) > 끝

< Episode 98. 지켜야 할 것은 모두 지켰나 (2) >





도깨비 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눈앞에 드리워진 999회차의 설화들. 

<스타 스트림>에서 버림받은 설화들이, 하나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깊은 ‘회귀 우울증’으로부터 유중혁을 일깨우고 있었다. 

도깨비 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이곳에 온 거지? 너희는 나와 계약했을 텐데? 너희에겐 그를 도울 명분이 없어.] 

[최후의 벽] 위로 문장이 떠올랐다. 

「도깨비 왕이랑 약속도 했어. 이 세계선만 멸망시키면, 우릴 그때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대장의 배후성인 ‘가장 오래된 꿈’과 접선해서―」 

999회차 이지혜의 말이었다. 

도깨비 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를 이 세계로 불러온 것은 나다. 다시 세계선으로부터 버려지고 싶은 건가? 저 끔찍한 차원의 틈새를 방랑하며, 영원의 고통을 맛보고 싶은 거냐고.] 

협박하듯, 도깨비 왕의 말이 이어졌다. 

[저 ‘유중혁’은 바로 너희가 찾던 적이다. 너희 세계선을 멸망시켰고, 너희들의 설화를 도탄에 빠뜨린 장본인이란 말이다.] 

‘이계의 신격’들의 표정에 가벼운 동요가 일었다. 

도깨비 왕의 말이 맞았다. 유중혁이 그러했듯, 그들 또한 자신이 살았던 세계의 원한을 갚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그때,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뭔 개소리야. 우릴 이 게임에 빠뜨린 건 네놈이잖아. 애초에 시나리오 같은 게 시작되지 않았으면 내가 여기서 이 지랄하고 있겠냐?】 

건들거리는 999회차 김남운, ‘위대한 심연의 군주’였다. 

이미 결심을 마쳤는지 그의 전신에서 가공할 혼돈의 힘이 방출되고 있었다. 

[거대 설화, ‘망상설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크으, 다 같이 싸우는 거 진짜 오랜만이네.】 

김남운이 킬킬 웃으며 손의 붕대를 풀었다. 

자신의 배후성이었던 ‘심연의 흑염룡’조차 뛰어넘은 괴물. 한수영의 그것보다 훨씬 더 짙고 사악한 기운으로 충만한, 새카만 흑요석 같은 손이 <스타 스트림>의 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거대 설화, ‘슬픔을 봉인한 심장’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의 바로 뒤에서 거체를 일으키는 사내도 있었다. 999회차의 이현성이었다. 

‘은빛 심장의 왕’. 충만한 ‘설화 금속’의 장갑이 사내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도깨비 왕. 나는 너와 계약한 적이 없으니 해당 되는 바가 없다.】 

이어서 자신의 거대한 전함을 창공에 부유시키는 ‘가라앉은 섬의 주인’, 999회차의 이지혜가 있었다. 

[거대 설화, ‘영원한 수평선의 방랑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녀의 쌍룡검에서 대해의 기상이 느껴졌다. 

【······.】 

그녀는 말없이 검을 뽑으며 유중혁의 오른편을 지켰다. 

그것으로 왕들의 선택은 분명해졌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이 강제로 발동합니다!] 

그들의 생각과 결심이 온전히 내게 전달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은밀한 모략가’를 증오했다. 하지만 그 증오는, 결국 뿌리 깊은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어떤 우주에도, 그들만큼 ‘유중혁’이란 존재를 아끼는 이들은 없었다.」 

그들이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유중혁 덕분이었다. 

그들을 여기까지 보내기 위해 999회차의 유중혁은 모든 것을 희생했다. 

팔이 잘리고, 다리가 끊어지고, 두 눈을 잃고, 마침내는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다. 

「그들을 살린 것도, 죽인 것도 유중혁이었다.」 

오직 유중혁을 생각하며 살아온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유중혁을 잊을 수 있을까. 

가라앉은 섬에 스스로를 가둬야만 했던 분노, 심장을 강철로 덮어야 견딜 수 있었던 슬픔, 심연에 자신을 내던져야만 잊을 수 있는 아픔. 

[거대 설화, ‘영겁의 불꽃’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불태워야만 속죄할 수 있는 고통. 끊길 듯 끊어지지 않은 필름을 잇고 또 이어서, 그들은 마침내 이야기의 마지막 장에 도달했다. 

【비켜라, 도깨비 왕. 우리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다.】 

999회차의 우리엘, ‘살아있는 불꽃’이 말했다. 

【우리의 세계선에서 확인하지 못했던 ‘끝’을 이곳에서 보는 것.】 

그 말과 함께 [업화의 불꽃]이 움직였다. 

콰콰콰콰콰! 

은가이의 숲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지옥 염화]가, 벽의 내부를 불태웠다. 

그와 거의 동시에 999회차 김남운의 오른손이 도깨비 왕의 허벅다리를 찢었다. 

【하하하! 도깨비 한번 죽여 보자!】 

김남운의 광기 어린 성흔이 시공간을 베고 설화를 파괴하며 도깨비 왕의 몸통을 노렸다.

정확한 양의 설화를 주고받는 공수. 망상이 구현한 병장기들이 김남운의 오른팔에서 돋아났고, 도깨비 왕이 소환한 성유물들이 벽의 곳곳에서 나타나 그런 병장기들을 받아냈다. 

츠츠츠츠츳! 

[최후의 벽]은 도깨비 왕의 설화가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곳. 

아무래도 무대가 무대다 보니, 공방은 김남운에게 불리한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바다를 찢고 해안선의 경계를 긋는 창이여」 

「태양의 눈을 쏘아 떨어트린 화살이여」 

벽의 곳곳에서 흘러나온 문장들이 곧 실체가 되었다. 

슈슈슈슉! 

도깨비 왕의 수신호에 맞춰 날아든 성유물들이 ‘위대한 심연의 군주’의 전신을 벌집으로 만들고 있었다. 허벅지에 창이 꽂히고, 팔뚝에 화살이 박혔다. 새카만 설화를 뚝뚝 흘리면서 김남운은 웃었다. 

【가라! 태권 현성!】 

김남운의 외침과 동시에, 그의 배후를 점한 이가 있었다. 

꽈드드드드······. 

999회차 이현성이었다. 단단한 팔로 도깨비 왕을 구속한 그의 전신으로 공간을 점유하는 강철이 자라났다. 

막대한 스파크와 함께, 강철이 도깨비 왕의 팔과 다리를 구속했다. 

【지혜야!】 

999회차 이현성의 신호와 함께, ‘가라앉은 섬의 주인’이 움직였다. 

【장전.】 

방주의 충격으로 생겨난 틈새 사이로, 밤하늘에 띄워진 거대 전함의 모습이 보였다. 그 최전선에서 뭔가가 소용돌이치며 장전되고 있었다. 하나의 행성을 통째로 날리기에 충분한 양의 격. 자세히 보니, 거대한 포신에 장전된 것은 포탄이 아니었다. 

【발사!】 

굉음과 함께 전함에서 유성이 쏘아졌다. 

눈부신 꼬리와 함께 떨어지는 별. ‘살아있는 불꽃’. 

그녀가 스스로 탄환이 되어 도깨비 왕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들을 녹여버리며, 가공할 속도로 돌진하는 999회차의 우리엘. 그녀의 검극에 집약된 999회차의 설화가 거칠게 타올랐다. 

【패왕만이 너를 죽여본 것은 아니다.】 

「저것이, 999회차의 인물들이 최종장을 클리어 한 방법이었다.」 

백열하는 태양이 벽의 껍질을 까부수며 돌진했다. 최후의 벽에 들러붙어 있던 설화들이 그 열기에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이 세계선의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격. 

「그 일격을, 도깨비 왕이 받아내고 있었다.」 

그그그그그그그극― 

지옥 같은 열기 속에서 도깨비 왕이 형형한 눈을 빛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그의 전신에 새겨진 무수한 성흔들이 울부짖었다. [최후의 벽]에서 옮겨온 듯한 활자들이었다. 거대 설화들이 그들을 향해 경배하고 있었다. 

내가 가진 설화들도 동요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왕’이라는 수식언은, 그저 허울이 아니었다.」 

<스타 스트림>의 정점에 존재하는 ‘이야기의 왕’. 

그의 얼굴은 숭고했고, 사악했고, 아름다웠고, 슬퍼 보였다. 

「그는 한때 인간이었다.」 

[최후의 벽]에서 쏟아진 병장기들이 [업화의 불꽃]과 부딪쳤고. 

「악마였고.」 

도깨비 왕의 뿔에서 흘러나온 잿빛의 설화가 다가드는 우리엘의 움직임을 막아섰다. 

「구원자였으며.」 

흰 날개에서 뻗어 나온 신성한 빛이 도깨비 왕의 체력을 회복시켜주었고. 

「끝내는 도깨비가 된 존재.」 

끝나지 않는 설화들이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이 세계는 여기서 끝날 수 없다는 듯이. 

「이곳은, 999회차가 아니었다.」 

999회차의 인물들이 일제히 내 쪽을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움직여라.」 

「네가 마무리해야 한다.」 

「우리와의 약속을 잊지 않았겠지?」 

하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거대 설화, ‘세계의 수호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세계의 수호자’가 다음 수호자를 바라봅니다!] 

도깨비 왕의 설화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독자!] 

도깨비 왕이 나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네게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지 마라. 너는 이 세계의 누구보다 설화를 사랑하는 존재다. 나 또한 그랬지. 나는 이 세계의 누구보다, 네가 이 세계에 갖는 감정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의 전신에서 뻗어 나온 설화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곁에 있던 한수영이 나의 귀를 막으며 으르렁거렸다. 

“듣지 마. 들을 필요도 없는 이야기야.” 

정희원과 이현성이 내 앞으로 나섰고, 유상아와 신유승, 이길영이 지키듯 나를 보호하고 섰다. 등 뒤에서 이지혜의 검명이 울려 퍼졌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별자리가 환하게 빛납니다!] 

하지만 막으려 할수록 더욱 잘 보이는 것들이 있다. 

가리려 할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말들이 있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이 폭주합니다!] 

「[흑염룡! 흑염룡! 시발, 눈 안 뜨냐?]」 

「[김유신! 정신차려라! 아직 우리의 황산벌은―]」 

「[제천대성!]」 

[최후의 벽]을 흐르는 설화들. 

이곳보다 훨씬 더 열악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에서, 성좌들이 스러지고 있었다. 걸레짝이 된 제천대성의 몸에서 끊임없이 설화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양쪽 눈을 잃었는지, 눈부시던 화안금정의 빛이 꺼져 있었다. 

「[······막내가 보이질 않는다.]」 

그런 그를 우리엘이 부축했다. 양쪽 날개가 찢어진 대천사는 그의 손을 쥐고 밤의 정경을 쓰다듬었다. 

「[무사해. 저기 빛나고 있어.]」 

아비규환의 밤하늘 사이로, 끈덕지게 살아남은 성좌들이 그들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장면이 바뀌자, 쓰러진 하데스를 끌어안은 페르세포네의 모습이 보였다. 하데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페르세포네가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말아요, 나의 오래된 밤.]」 

그녀의 머리 위로 <올림포스>의 태양이 지고 있었다. 

그 모든 최후가 참담한 문장이 되어 벽의 위를 질주했다. 

오직 그들을 끝장내기 위해서 쓰여지는 문장들이었다. 

[저 별들을 살리고 싶지 않아?] 

울컥, 하고 몸속 깊은 곳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도깨비 왕이 외쳤다. 

[지금의 너는 저들을 살릴 수 없어. 이야기를 사랑하는 존재는, 결코 그 이야기를 바꿀 수 없다.] 

사랑하기에, 그것을 바꿀 수 없다. 

[오직 그 이야기에서 벗어난 존재만이, 그 모든 것의 하찮음을 이해하는 존재만이, 개연성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어.] 

까가가가각,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후폭풍이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조금씩, ‘도깨비 왕’에게서 흘러나오는 설화의 힘이 999회차 인물들의 그것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현성의 설화 금속을 찢어낸 도깨비 왕이 나를 향해 한쪽 손을 뻗었다. 

[네가 쌓은 ‘단 하나의 설화’는 <스타 스트림>의 자리를 계승하기에 충분해. 나의 손을 잡아라. 내가 원하는 것은 네가 원하는 것과 같아. 나는 저 별들의 이야기가 사라지길 원하지 않는다.] 

‘도깨비 왕’의 목소리는 간절하기까지 했다. 

그의 눈빛이, 설화가,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스타 스트림>의 설화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읽어온 이야기는, 결국 그의 일부가 된다.」 

그는 <스타 스트림> 그 자체였다. 

그는 정말로 이 이야기가 끝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계속······, 이 이야기를 계속해. 새로운 세계선의 주인공이 되어서, 네가 만든 설화와 함께, ‘가장 오래된 꿈’의 연회를 계속해. 너는 그러기 위해 태어난 존재야. 오직 그것만을 위해, 너는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말들을 들으며, 이제껏 내게 일어났던 행운들이 떠올랐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어째서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그토록 내게 관대했는가. 

도깨비 왕의 설화가 그 이유를 알려주고 있었다. 

눈앞에서 연속해서 섬광이 폭발했다. 

[네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잊지 마. 너는 ‘종장’이 아니야. 너는 ‘영원’이다!] 

도깨비 왕의 배후로, 성좌들의 설화가 흘러가고 있었다. 

맞다. 나는 저 이야기가 끝나길 원하지 않는다. 

「추락하는 운석을 보며, 제천대성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회귀 우울증’에서 거의 벗어난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텅 빈 유중혁의 동공이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끝나야만 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 Episode 98. 지켜야 할 것은 모두 지켰나 (2) > 끝

< Episode 98. 지켜야 할 것은 모두 지켰나 (3) >





그것은 아주 오래된 약속이었다. 

「“내가 너의 이야기를 끝내줄게.”」 

1863회차에서,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당신의 ■■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굳게 쥐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거의 모든 시나리오를 함께해 온 검의 단단한 칼자루가 느껴졌다. 

그 칼끝이 바닥과 닿으며 문장들이 떠올랐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장들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이 세계의 끝을 궁금해했고.」 

「누구보다 이 세계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나의 마지막 설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김독자?” 

나는 내 귀를 막은 한수영의 손을 풀었다. 

한수영의 두 눈이 흔들렸다. 한수영의 망막에 붉게 얼룩진 내 모습이 비쳤다. 뺨을 길게 가로 지른 상처. 찢어진 날개와 부러진 마왕의 뿔. 엉망진창이다. 

그 엉망진창의 인간을, 한수영은 지금까지 믿고 와주었다. 

[선택한 것인가?] 

스파크가 터져 나오는 중심에서 도깨비 왕이 물었다. 

999회차의 인물들, ‘이계의 신격의 왕’들이 안간힘을 쓰며 대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막상막하의 싸움이었지만, 개연성의 후폭풍이 부는 방향으로 보았을 때 결국 불리해지는 것은 999회차 쪽일 것이다. 

“그래.” 

나는 도깨비 왕을 향해 대답했다. 

“나는 ‘최후의 벽’을 넘겠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녀석을 만나겠어.” 

이 모든 비극의 원흉, ‘가장 오래된 꿈’. 

“놈을 만나, 세계의 모든 비극을 멈출 거야.” 

내 선택에 만족했다는 듯, 도깨비 왕이 웃었다. 

[그래, 좋다. 내 후계자가 된다면 가능한 일이지. 자, 이쪽으로 와라. 어서 <스타 스트림>의 의지를 계승하여―] 

“네놈 도움을 받겠다곤 안 했어.” 

나는 [바람의 길]과 [전인화]를 동시에 일으켰다. 

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보법 위에 백청의 전격이 휘감기며, 나의 몸이 하나의 빛무리로 바뀌었다.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나는 도깨비 왕과 이계의 신격들을 지나쳤다. 

내가 목표로 삼은 곳은 [최후의 벽]의 가장 깊은 곳. 

[너······!] 

놀란 도깨비 왕이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멀리서 [최후의 벽] 위를 질주하는 문장들이 보였다. 

「심연의 흑염룡의 마지막 비늘과, 우리엘의 마지막 깃털이 떨어지는 장소.」 

나는 기함하며 그 문장을 향해 달려갔다. 

「페르세포네의 마지막 눈물이 떨어지는 곳.」 

그 문장들이 끝나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설령 이 세계의 끝을 보더라도, 저 문장으로 끝맺어서는 안 된다. 

내 속셈을 눈치챘는지, 도깨비 왕이 대경하며 외쳤다. 

[그만둬! 너는 아직 허락받은 존재가 아니야. 너는 그 벽에 손을 댈 수도, 그 벽을 넘을 수도 없어!] 

츠츠츠츠츠츳! 

말이 떨어지기가 개연성의 후폭풍이 무섭게 내 전신을 옥죄었다. 

화신체를 분자 단위로 으깨어버릴 듯한 스파크에 일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최후의 벽’이 당신의 접근을 거부합니다!] 

벽이 나를 거부하고 있었다. 

내가 자신의 문장에 손대는 것을, 그 내용을 바꾸고 그 너머로 나아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마치 내가 그곳에 도달하는 일 자체가 허락될 수 없다는 듯이. 

순식간에 공간을 넓힌 벽의 문장들이 어느덧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그 문장은 김독자의 것이 아니었다.」 

밀려온 광풍이 나를 넘어트렸다. 나는 애먼 공백으로 내던져진 단어처럼 비참하게 바닥을 나뒹굴며 뒤쪽으로 밀려났다. 내 등 뒤에 뭔가가 쿵, 하고 부딪쳤다. 

“멍청아! 혼자 그렇게 돌진한다고 뭐가 되냐?” 

한수영이었다. 나는 씩 웃으며 대꾸했다. 

“혼자 돌진한 거 아니야.” 

그녀의 뒤로,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누구도 잃고 싶지 않다. 

잃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독자 씨! 계속 달려요!” 

[심판의 시간]을 발동한 정희원이 붉은 안광을 흩뿌리며 달려왔다. 

이현성과 이지혜가 정희원의 옆을 사수했고, 유상아와 아이들이 그 뒤를 따라왔다. 일행의 최후미를 따라오는 것은 장하영과 사부들이었다. 

“이거 가져가요! 마지막 생사환이에요!” 

공필두로 인해 쫓아올 수 없었던 이설화가, 우리를 향해 환단통을 던졌다. 곧바로 [생사환] 하나를 꺼내 삼켰다. 그러자 망가져 가던 화신체가 빠르게 수복되기 시작했다. 

[멈춰!] 

도깨비 왕의 외침과 함께, 벽에 기록된 문장의 맥락 사이로 이형의 존재들이 나타났다. ‘이계의 신격’들이었다. 아직 벽에 기록될만한 설화를 얻지 못한 존재들. 

【■■■! ■■■ ■■■ ■■■!】 

모든 이계의 신격들이 그들의 왕을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강한 힘을 갖추었음에도 도깨비 왕의 수족이 되어, 시나리오 부역자를 자처하는 존재들도 분명 있다. 

콰콰콰콰콰콰! 

[놈들을 막아! 그러면 너희들의 설화를 ‘최후의 벽’에 남겨주마!] 

사방에서 밀려오는 촉수를 발견한 사부들이 칼을 뽑았다. 

“여긴 우리에게 맡겨라.” 

파천검성의 [파천검도]와 키리오스의 [백청강기]가 하나의 빛살로 어우러지며 벽 위에 그들의 문장을 남겼다. 

[거대 설화, ‘제 1무림’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무림 최강의 두 고수가, 촉수들을 막아서며 악전고투를 펼쳤다. 

하지만 그들이 벌 수 있는 시간은 찰나뿐이었다. 

도깨비 왕이 연 ‘맥락’ 사이로 밀려오는 ‘이계의 신격’들이 너무 많았다.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설화들이 환한 빛을 발합니다!] 

사부들이 벌어준 시간을 헛되이 할 수는 없었다. 

우리엘과 제천대성의 설화를 기록하는 벽면은, 다시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답은 하나뿐. 멀어지는 속도보다 더 빨리 다가가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최후의 벽] 위에 어떤 문장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그린 존’이 벽면에 붙어 있다니······ 생각해 보면 그것을 ‘방’의 개념으로 받아들인 것은 애초에 인간들뿐이었다.」 

문득, 나는 내가 딛고 있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바닥 또한, 다른 방향에서는 또 하나의 벽이다. 

달려온 벽 위에 우리의 족적이 남아 있었다. 

족적 위로 우리가 쌓아온 설화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독자 씨는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계세요?”」 

「내 인생의 장르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객실에 남은 사람의 숫자는 열둘이야. 채집망에 남은 곤충은 세 마리고.”」 

「하나의 세계가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세계의 결말을 알고 있는 유일한 독자였다.」 

첫 번째 시나리오. 처음으로 지하철에서 탈출하던 그때. 

「당신의 배후를 선택하세요. 선택한 배후는 당신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줄 것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에게 실망하였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선택에 재미있어 합니다.]」 

배후 선택. 별빛이 우리의 발치를 밝혀주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설화들이, 우리가 달려갈 길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식량을 독점한다는 게 정말이에요?”」 

「“일어나요, 다들. 시나리오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니까.”」 

「“건방진 세입자가 오셨군.”」 

「“현성 씨, 지금입니다. 다 부숴버리세요.”」 

금호역과 충무로의 전투를 넘어서고. 

「“아홉 번째······ 하차자입니다.”」 

「“······죄송하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유중혁이다.”」 

‘깃발 뺏기’의 전장들과 선지자들과의 혈투를 기억한다. 

「“우스운 일이다. 이미 모든 역사가 저물었는데, 어째서 그대들은 또다시 이곳에 모인 것인가?”」 

「“폭군왕이라는 놈입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예쁘고 잘생기면 첩으로 삼고, 못생기면 죽이거나 노예로 부린다고 하더군요.”」 

「“독자 씨는 잡히면 노예네요.”」 

「서울 7왕 중 최강은, 당연히 패왕(霸王) 유중혁이다.」 

광화문에서 ‘왕들의 전쟁’을 맞이했고. 

「“그러니 나는 ‘절대 왕좌’에 앉지 않을 겁니다.”」 

[절대 왕좌]를 부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왕좌에 앉도록 허락하지도 않을 겁니다.”」 

모든 순간이 역경이었다. 

쉬운 시나리오는 하나도 없었고, 우리는 언제나 목숨을 걸고 맞서 싸워왔다. 

그 모든 비극들이, 결국엔 이야기가 되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달렸다. 

실타래처럼 하염없이 풀려 나온 설화들은 이내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형상은 곧 백호의 모습을 띄었다. 고귀한 수염과 무늬를 가진 백호가, 내 곁을 함께 달렸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당신의 길을 배웅합니다.] 

‘왕이 없는 세계의 왕’. 나의 탄생 설화가 나를 배웅하고 있었다. 

우리가 가는 길을 뚫은 백호가 우렁찬 울음을 터트리더니 어느 순간 멈춰섰다. 지금부터는 자신의 몫이 아니라는 듯. 하염없는 눈으로 내가 가는 길을 좇으면서.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당신의 길을 배웅합니다.] 

어느덧, 푸른 매의 형상을 한 나의 두 번째 설화가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질문의 재앙’으로 강림한 귀환자 명일상을 죽이고 얻은 설화. 

[설화, ‘이야기꾼을 능멸한 자’가 당신의 길을 배웅합니다.] 

우리의 모든 설화가 [최후의 벽] 위에서 우리를 달리게 했다. 

자신들의 설화가 나올 때마다 일행들의 표정도 변했다. 

이현성이 멈칫거리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고, 참지 못한 신유승이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이것이 그들이 살아온 길이었고, 그들이 끝내야 할 이야기였다.」 

[설화, ‘재앙의 왕을 사냥한 자’가 당신의 길을 배웅합니다.] 

[피스랜드]에서 ‘야마타노 오로치’의 그림자를 사냥하고 얻은 설화. 

거대한 뱀의 그림자가 우리가 달려가는 길을 떠받치고 있었다. 

하나하나, 소중하지 않은 이야기는 없었다. 그 모든 순간을 제대로 살았기에 우리가 이곳에 있었다. 

츠츠츠츠츠츳! 

후폭풍이 거세어질 때마다 우리의 설화들이 힘을 잃고 스러졌다. 

[설화, ‘이계의 신격을 살해한 자’가 당신을 배웅합니다.] 

거대한 오징어를 닮은 설화가 후폭풍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했다. 

[설화,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마지막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내질렀다. 

달려드는 ‘이계의 신격’들을 뿌리쳐내고, [최후의 벽]을 향해 달렸다. 

멀리서, 여전히 성좌들의 설화가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우리엘의 손에서 ‘업화의 불꽃’이 떨어졌다. 마지막 순간, 우리엘은 밤하늘에 빛나는 하나의 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직 늦지 않았다. 

우리엘도, 심연의 흑염룡도, 제천대성도 살아있다. 

이야기를, 바꿀 수 있다. 

[‘최후의 벽’이 당신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접근 방지 프로세스’가 실행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걸음이 멈췄다. 

눈앞에, 겹겹이 쌓인 얇고 투명한 벽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두터운 밀도로 만들어진 벽. 

몇 번이고 내리쳐 보았으나, 개별 설화들의 힘만으로 부술 수 있는 강도가 아니었다. 

사부들을 무시하고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이계의 신격’들이 보였다. 도깨비 왕이 안심했다는 듯 우리를 향해 뭐라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의 별들이 저물었으나, 모든 별들이 저문 것은 아니었다.」 

밤하늘의 어디선가 가는 진동 같은 것이 울려 퍼졌다. 

제일 먼저 상황을 눈치챈 한수영이 눈을 거칠게 부비며 말했다. 

“너무 늦었잖아!” 

멀리서 달려오는 열차의 선두가 보였다. 

수르야의 태양 열차가, 방주의 파편들을 튕겨내며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성좌, ‘지고한 빛의 신’이 마지막 시나리오의 전장에 현현했습니다!] 

[늦어서 미안하군, 구원의 마왕.] 

마침내 신화급의 격을 획득한 그가, 밤하늘을 가로질러 이 무대에 도착한 것이었다. 

“아뇨, 딱 맞춰 오셨습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마침내, 기(起)의 조건이 충족되었다. 

[‘무대화’가 발동합니다!]





< Episode 98. 지켜야 할 것은 모두 지켰나 (3) > 끝

< Episode 98. 지켜야 할 것은 모두 지켰나 (4) >





수르야의 태양빛으로, 밤하늘이 일순간 백야로 물들었다. 

‘마왕선발전’에서, 그리고 ‘기간토마키아’에서 함께 싸웠던 그날처럼, 수르야의 열차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차비는 나중에!” 

호기롭게 외친 한수영을 필두로, 우리는 수르야의 열차에 탑승했다. 

열차의 차륜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스파크가 튀었다. 폭연을 일으키며 허공에서 크게 한 번 선회한 열차는, 이내 후미에서 소닉붐을 일으키며 투명한 장벽을 향해 돌진했다. 이현성이 소리쳤다. 

“부서집니다!” 

쩌저저저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투명한 벽이 연달아 무너져 내렸다. 

우리는 겹겹이 쌓인 벽을 파괴하며 계속해서 달렸다. 성좌들의 설화가 기록되는 [최후의 벽]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깨비 왕의 고함소리와 999회차의 설화들이 난잡하게 뒤섞이고 있었다. 

[성좌, ‘지고한 빛의 신’이 자신의 모든 격을 방출합니다!] 

열차의 기관실에 앉은 수르야의 전신이 백열하는 태양처럼 눈부셨다. 그의 몸 곳곳에 난 상처들 사이로 설화가 떨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 역시도 이곳으로 오기 위해 이미 대가를 치른 상태인지도 모른다. 

[성좌, ‘지고한 빛의 신’의 ■■는 ‘최후의 기관장’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설화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어떤 내색도 없이, 스스로의 몸을 연료로 [태양 마차]를 달렸다. 마치 그것이 지금껏 ‘지고한 빛의 신’으로 살아온 자신의 사명이라는 것처럼.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당신의 길을 배웅합니다!] 

[출력이 부족하다!] 

그러나 혼신을 불사르는 그의 투지에도 불구하고, 열차의 속도는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최후의 벽]의 중심부로 갈수록 방호벽의 밀도가 점점 두꺼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활자의 그물 같은 벽이 열차의 선두와 부딪친 순간, 정희원이 움직였다. 

“나한테 맡겨요!” 

“희, 희원 씨! 엑!” 

정희원이 이현성의 목을 틀어쥐는 순간, 이현성의 몸이 급격히 수축하더니 이내 강철검의 형태로 변했다. 곧이어 강철검의 검신은 이내 [지옥염화]의 빛으로 새하얗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의 길을 배웅합니다!] 

승(承). 

<기간토마키아>의 전장을 밝혔던 성화가, 이제 [최후의 벽]을 불태우기 위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콰콰콰콰콰콰! 

열차의 선두에서 굉장한 화염이 방출되며, 선두의 표면이 지독한 열기로 휩싸였다. 

전신에서 [지옥염화]를 방출하는 정희원이, 용암처럼 이글거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설화고 나발이고 이제 다 끝이야!” 

그녀의 검신이 빛을 발할 때마다 활자의 그물이 찢어졌다. 

정희원은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후폭풍의 스파크에 전신이 난자당하면서도, 자신의 검도(劍道)를 개척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희원의 삶이 만들어 낸 길. 우리는 그 길 위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이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멀리서 [최후의 벽] 위로 문장이 전개되고 있었다. 

「최후의 순간, 우리엘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의 설화는 여기서 끝나지만」 

「이 이야기를 잊지 않는 별도 있으리라.」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당신의 길을 배웅합니다!] 

우리엘과 심연의 흑염룡의 설화가 벽을 넘어 전해지고 있었다. 

선악의 설화가 맹렬하게 부딪치며 우리를 비호하자, 열차의 양옆에 활자로 만들어진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포효하는 묵시룡처럼, 열차가 눈앞의 벽을 먹어치우며 돌진을 시작했다. 

[멈춰!] 

어느새, 우리를 쫓아오는 도깨비 왕의 모습이 보였다. 팔다리에서 설화를 쏟으며, 999회차의 인물들에게 쫓기는 도깨비 왕이 우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츠츠츠츠츠츠츳! 

바닥에서 뻗어 나온 개연성의 스파크가 열차의 중심축을 뒤흔들었다. 기우뚱, 하고 흔들린 열차가 균형을 잃으려는 순간. 다시 한번 [최후의 벽] 위로 문장이 떠올랐다.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는 뇌창을 보며, 제천대성이 말했다.」 

「멈추지 마라, 막내야.」 

자신의 최후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제천대성이, 그 문장 속에 있었다. 

그와 동시에 열차의 후미에 타고 있던 검은 코트의 사내가 일어섰다. 

“유중혁!” 

유중혁에게 빙의한 ‘은밀한 모략가’가 허공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바닥의 후폭풍 사이로, 무수한 ‘이계의 신격’들이 떠올랐다. 단순히 ‘이름 없는 것들’이 아니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당신의 길을 배웅합니다!] 

【가가가가가가가】 

【도움도움도움도움도움도움】 

【잊지않았어잊지않았어잊지앟았어】 

‘서유기’에서 우리를 도왔던, 또는 우리와 대적했던 ‘이름 없는 것들’이 흔들리는 열차를 떠받치고 있었다. 통천하의 급물살을 타는 배처럼, 그들이 우리의 열차를 [최후의 벽]으로 운반하고 있었다. 

[당신은 ‘최후의 벽’의 핵심에 근접하였습니다.] 

마침내, [최후의 벽]을 보호하던 모든 장벽이 무너졌다. 

기관차의 곳곳이 파괴되었고, 수르야는 정신을 잃었는지 더 이상 설화를 발출하지 않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최후의 벽]의 진체가 보였다. 지금껏 보아왔던 그 어떤 벽보다도 두껍고 광활한 벽. 

【내가 넘지 못했던 벽이다.】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이번에도 안 되는 건가.’ 그것이 58회차 유중혁의 최후였다.」 

「‘실수였다. 다음 회차에서는―’ 96회차 유중혁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벽 위로, 무수한 유중혁들의 최후가 흘러갔다. 

유중혁뿐만이 아니었다. 

「‘황산벌의 마지막 영웅’ 계백이 깨어나지 않는 자신의 숙적을 흔들었다.」 

「각자 하나씩 팔을 잃어버린 고려제일검과 해상전신이 등을 맞댄 채 최후의 격을 발산했다.」 

세상 모든 성좌들의 최후가 기록된 벽. 우리엘이나 제천대성을 포함한 모든 성좌들의 마지막이, 벽 위에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있었다. 

나와 일행들은 힘이 다한 기관차에서 내려 벽을 향해 달렸다. 

「저 문장들을 지울 수만 있다면. 그래서, 저 모든 비극을 멈출 수만 있다면.」 

[당신은 ‘최후의 벽’의 문장에 간섭할 수 없습니다.] 

[해당 문서는 덮어쓰기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코드를 해제하십시오.]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평범한 방식으로는 안 된다. 무력으로도 부딪쳐 봤지만, 벽을 부술 수는 없었다.】 

정희원이 외쳤다. 

“여기까지 왔는데 뭔가 방법을······!” 

【여기서부터는 그의 몫이다.】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 안에는 나와 함께 시나리오를 수행했던 3회차 유중혁의 것도 있었다. 

「네놈이 바라는 ‘결말’은 대체 무엇이지?」 

이것은 그 답을 알려주기 위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지혜가 입을 열었다. 

“1863회차를 살아도 할 수 없었다며. ······정말 아저씨가 할 수 있는 일이야?” 

그 말대로였다. 

나는 유중혁처럼 ‘주인공’도 아니고, 한수영처럼 ‘작가’도 아니다. 

하지만 주인공도 작가도 아니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주인공은 볼 수 없고, 작가도 잊고 있는 것을 기억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오랫동안 ‘멸살법’을 읽어온 그만이 할 수 있는 일.」 

나는 ‘최후의 벽’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의식을 완전히 집중한 상태에서, 그 벽의 표면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벽이 환한 빛을 발했다. 

마치, 언젠가의 내가 읽고 또 읽었던 화면처럼.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그 장대한 이야기의 모든 것들이 내 안에서 정립되고 있었다. 

아직 나는 ‘멸살법’의 최종본을 읽어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불행한 꼭두각시여. 그대는 너무 빨리 왔습니다. 미안하지만 이 너머는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은밀한 모략가’의 기억 속에서, 1863회차의 도깨비 왕은 그렇게 말했다. 

「실은, 이 모든 것이 아직 쓰여지지 않은 채 내게 넘어온 것이라면.」 

나는 일행들과 함께 벽을 향해 달려갔다. 

「누군가가, 이 이야기를 내가 완성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전용 스킬, ‘독해력’이 극한으로 발동합니다!] 

과열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나는 눈을 똑바로 뜬 채 벽을 노려보았다. 

[최후의 벽] 위로 적힌 설화들. 머릿속으로 그 설화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설화와 설화가 연결된 방식이 보였다. 설화 속에 교묘히 장치된 요소들이 보였고, 다시 그것을 둘러싼 맥락들이 보였다. 

「소설 속에 등장했지만, 끝내 사용되지 않은 것들.」 

그러자 그 자체로 완벽해 보이던 이야기의 틈새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것들. 언젠가 회수되어야 할 것들. 

오직 이 이야기의 ‘에필로그’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들. 

「김독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새로운 특성을 개화하였습니다!] 

[특성, ‘복선 회수자’가 발동합니다!] 

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의 입장에서 지켜본 나만이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의 빈 틈새. 

나는 광활한 벽 위에 놓인 ‘다섯 개의 틈새’를 바라보았다. 

“하영아.” 

“맡겨 둬.” 

제일 먼저 나선 것은 장하영이었다. 장하영은 내가 가리킨 벽의 틈새에, 정확히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불가능한 소통의 벽’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최후의 벽’의 첫 번째 테마가 완성되었습니다!] 

눈부신 빛살과 함께 벽의 조각이 끼워 맞춰지며, 문장이 흘러나왔다. 

「그 이야기는 ‘불가능한 소통’에 대한 이야기이다.」 

“희원 씨, 길영아!” 

고개를 끄덕인 정희원과 이길영이 각각 벽의 틈새를 향해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두 개로 나누어진 ‘선악을 가르는 벽’이 하나가 되었다. 

[‘선악을 가르는 벽’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최후의 벽’의 두 번째 테마가 완성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분별할 수 없는 ‘선악’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제 유상아의 차례였다. 

“유상아 씨.” 

천천히 다가간 유상아가, 자신의 자리를 찾아 손을 뻗었다. 

[‘윤회를 결정하는 벽’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최후의 벽’의 세 번째 테마가 완성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윤회하는 비극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네 개의 빈틈이 채워지자 마지막 빈틈이 남았다. 

나는 그 빈틈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최후의 벽]의 마지막 조각. 

그것은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 조각이었다. 

「김 독 자」 

[제4의 벽]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제4의 벽.” 

녀석도 나도, 서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내 손 위로, 눈부신 활자의 조각들이 떠올랐다. 그 활자가 말하고 있었다. 

「네 이야 기를 좋아 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벽을 향해 달려가 마지막 틈새에 녀석을 꽂았다. 

「그 이야기는 결말을 바꾸고 싶었던 독자의 이야기였다.」 

다음 순간, 벽에서 엄청난 스파크가 발생했다. 

[코드가 해제되었습니다.] 

벽의 권한이 나를 향해 열리고 있었다. 유중혁도 넘을 수 없었던 벽의 비밀이, 내게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성좌들의 문장이 떠올랐다. 내가 그토록 막고 싶었던, 제천대성과 우리엘의 마지막 문장. 

「날아드는 칼날이, 제천대성과 우리엘의 목을―」 

나는 그 문장을 힘껏 그러쥐었다. 

츠츠츠츠츠츳! 

손이 불타는 것 같았다. 칼날처럼 엉겨 붙은 설화들이 내 손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버텼다. 이 문장이 이대로 끝맺도록 둘 수는 없었다. 

[‘최후의 벽’이 당신의 행동을 의아해합니다.] 

[‘최후의 벽’이 당신에게 이 이야기를 원한 게 아니었느냐 묻습니다.] 

원하지 않는다. 

이런 결말을, 대체 누가 원한단 말인가. 

[멈춰! 당장 멈추라고!] 

집요하게 쫓아온 도깨비 왕이 설화를 뚝뚝 흘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녀석의 눈이 깊은 살의로 뒤덮여 있었다. 

[벽을 건드려서는 안 돼! 너는 후회하게 될 거다! 이 벽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네가 바라는 것도, 보고 싶은 광경도!] 

그 말은 틀렸다. 

이 벽 너머에는, ‘가장 오래된 꿈’이 있다. 

“혹부리!” 

내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혹부리 왕이 도깨비 왕의 몸을 구속했다. 

[드디어 만났구나, 나의 오랜 친우여.] 

[······혹부리 왕!] 

[일을 계속해라, 김독자. 약속을 지켜라.] 

나는 문장을 붙든 손을 놓지 않았다. 

「날아드는 칼날이, 제천대성과 우리엘의 목을 ㅂ」 

ㅂ를 붙든 채, 다음 모음의 발생을 막았다. 푸슈슉, 하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이 끊어졌다. 줄줄이 새어 나오는 설화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당신은 ‘도깨비 왕’이 아닙니다.] 

[당신은 해당 설화의 전개를 멈출 수 없습니다.] 

바앗, 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뭔가가 내 손등을 감싼 것은 그때였다. 

마치 지우개라도 되는 것처럼, 비유가 온 힘을 다해 그 문장에 몸을 부비적대고 있었다. 

「이야기꾼이, 독자의 편을 들었다.」 

나는 비유와 함께 온 힘을 다해 문장을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멈추지 않는 문장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칼을 꽂았다. 제발, 제발. 제발.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글자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미 쓰인 문장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결말이 바뀌고 있었다. 

「날드 아는 날 칼이, 우 리대 성과 제 천 ㅂ······.」 

부서진 글자들이 강렬한 스파크를 일으키더니, 일제히 내가 읽을 수 없는 것들로 바뀌기 시작했다. 

「■■칼■■■■우■■■■제■■■■■■■■■■■■■■■■■■······.」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무수한 ‘이계의 신격’들이 울부짖었다. 마치 위대한 신에게 경배를 올리듯, 경건한 울음이었다. 

나는 설화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붙든 채, 벽의 표면이 바뀌는 것을 보았다. 어느새 다가온 신유승이 내 손을 붙들고 있었다. 

“아저씨······.” 

[새로운 ‘거대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거대 설화, ‘최후의 벽을 부수는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거대 설화, ‘최후의 벽을 부수는 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길을 배웅합니다.] 

머릿속에서 폭발하는 메시지와 함께, 눈앞의 벽이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벽에 적힌 설화들과, 우리의 설화들이 한꺼번에 뒤섞이고 있었다. 무수한 ■들이 일제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것은 원처럼 보였다. 

새카만 원의 너머로, 뭔가가 보일 것 같았다. 

[하하하하! 그래, 이거야! 약속대로 ‘최후의 벽’ 너머를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나다!] 

도깨비 왕을 밀쳐버린 혹부리 왕이 새카만 원 속으로 뛰어들었다. 절규하는 도깨비 왕의 입을, [흑천마도]의 칼날이 꿰뚫었다. 

일행들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세계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최후의 벽]도, <스타 스트림>도, 모든 것이 붕괴하고 있었다. 

「부서진 벽이 일행들의 설화와 뒤섞이고 있었다.」 

「무엇이 설화였고, 무엇이 존재였는지 점차 알 수 없게 되어가고 있었다.」 

원의 너머에서 무언가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 역시 그쪽을 보았다. 

「······저게, 대체 뭐지?」 

조금씩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뭔가가 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최후의 벽] 위로 내가 겪고, 느끼고, 판단하는 모든 것들이 엉성한 문장으로 흐르고 있었다. 

「모」 

“두······!”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인지, 벽이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벽 위에서 나는 단지 서술되고 있었다. 

어떤 문장은 흐릿하게 보였고, 어떤 문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흐르던 문장이 일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렇게, 벽 위의 모든 문장들이 멈추었●.





< Episode 98. 지켜야 할 것은 모두 지켰나 (4) > 끝

< Episode 99. 가장 오래된 꿈 (1) >





온몸을 따스하게 감싸는 희미한 빛 속에서, 혹부리 왕은 태아라도 된 것처럼 몸을 웅크린 채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꿈. 그의 ■■가 정해지기도 전의 이야기.

그는 오염된 숲속에 누워 있었다.

―입실론! 조금만 더 가면 돼. 이제 곧 마왕성이라고!

그 이야기 속에서, 그는 마왕을 토벌하는 용사였다. 세계를 지키기 위해 마왕 원정을 떠난 용사.

하지만 그는 끝내 자신의 숙원을 이루지 못했다. 마왕 토벌 직전, 그는 자신의 친우를 보며 눈을 감았다.

―······길버트.

화면이 바뀌고, 이번 배경은 전쟁터였다.

그는 흑색의 야행복을 입은 무림인이었다.

―곽 사형! 마교 놈들의 본거지가 바로 저기요!

사위를 가득 채운 동료의 얼굴이 보였다. 물씬 그리움이 차올랐다.

그 생을 통틀어 그가 가장 사랑했던 한 사람.

―······난 이미 틀렸네. 사매, 먼저 가게.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소리와 함께, 다시 시야가 암전되었다.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범람하는 기억 속에서, 혹부리 왕의 자아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기억인가, 아니면 「최후의 벽」의 이야기인가.

이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가.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어린 헤츨링이었다.

이름 모를 괴수종이었으며.

무림의 고수거나, 중세의 기사였다.

그때마다 그는, 시나리오를 수행하는 화신이었다.

마지막으로 [최후의 벽] 앞에서 들려온 것은 이름 모를 그림자의 목소리였다.

―친우여, 다음 생도 나와 함께 해주게.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뜨자, 새카만 어둠이 눈에 스며들었다. 뒷덜미를 흥건히 적신 식은땀에 오한이 들었다.

‘나는 혹부리 왕.’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진짜 이름도 따로 있었으나,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아니, 그것이 그의 이름이 맞는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 혹부리 왕인가.’

새카맣게 소용돌이치는 진공 속에서, 혹부리 왕은 깊은 사색에 잠겼다.

필멸을 벗어난 이후 한 번도 떠올린 적 없는 사색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그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설화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자신을 되찾기 위해 기억을 반추했다.

「태초에 혹부리가 있었다.」

「그는 최초의 이야기꾼. 설화를 노래하는 인간.」

「그러던 어느 날, 세상에 도깨비가 나타났고.」

「도깨비는, 혹부리의 노래를 가져갔다.」

그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뿐이었다.

빌어먹을 도깨비들이, 혹부리의 노래를 가져갔다는 것. 탄생 설화를 빼앗김으로써, 그를 <스타 스트림>의 시나리오에서 추방시켰다는 것.

[혼란스러워 보이는군, 나의 오랜 친우여.]

들려온 진언에 혹부리 왕이 기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새카만 어둠 속에 도깨비 왕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도깨비 왕!]

혹부리 왕은 으르렁거리며 자신의 격을 방출했다.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에서, 그가 방출한 격은 그저 희미한 스파크만을 남길 뿐이었다.

도깨비 왕이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이곳에서는 싸울 수 없다. 우리가 가진 힘이 통용되지 않는 곳이니까.]

[······용케도 살아있었군. 꼭두각시의 검에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 그리고 또 죽게 될 테고.]

도깨비 왕의 시선이 닿는 곳에, 원형으로 소용돌이치는 빛의 출구가 보였다.

두 존재의 영혼체가 느릿한 속도로 출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혹부리 왕이 외쳤다.

[아니, 나의 설화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나는 이제 ‘최후의 벽’ 너머로 간다. 이 모든 세계를 상상한 나태한 신과 마주하고, 이 세계의 비밀을 아는 유일자가 될 것이다!]

[세계의 비밀이 그렇게 궁금한가?]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군. 자신의 탄생이 궁금하지 않은 존재는 없다.]

[존재가 불행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

자조하듯, 도깨비 왕이 말했다.

[왜 존재에게 ‘망각’이라는 고마운 능력이 생겼을 거라고 생각하나?]

어둠 속에서 설화의 파편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맥락을 잃어버린 이야기들이, 활자 더미가 되어 부서져 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누구도 읽을 수 없게 된 이야기들이었다.

그것들을 어루만지던 도깨비 왕이, 이내 설화를 으스러뜨렸다.

[이 우주엔 불필요한 이야기가 너무 많아. 그것들을 모두 없애고 최적화하기 위한 프로세스가 필요하지. 그게 ‘망각’이다.]

[헛소리! 우주는 무한하다. ‘최후의 벽’에 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벽의 여백이 아무리 많다 한들, 한낱 엑스트라에게 허용될 여백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도깨비 왕은 조금씩 부서져 가는 자신의 몸뚱이를 내려다보았다.

[불행하게도, ‘최후의 벽’이 선택한 주인공은 너나 내가 아니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너는 곧 네가 원하는 존재와 조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에 혹부리 왕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빛의 출구가 보였다. 황홀하고 휘황한 빛. 맹렬하게 회전하는 그 출구는 마치 어떤 세계의 마침표처럼 보였다.

혹부리 왕은 두려워졌다.

[네놈은 저 너머를 본 적이 있나?]

도깨비 왕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표 이후의 모든 문장에는 의미가 없다는 듯, 무료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사족을 덧붙였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뭐?]

[이 세계가 아득한 꿈의 편린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말이다.]

깊은 허망함이 담긴 말이었다.

혹부리 왕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빛이 점점 밝아지고 있음에도, 도깨비 왕의 표정은 점점 더 흐려지고 있었다.

이제 빛의 출구가 코앞이었다. 불안해진 혹부리 왕이 물었다.

[······네놈은 왜 지금까지 <스타 스트림>을 이어온 거지?]

그 질문이 뜻밖이었던 걸까. 도깨비 왕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그는 혹부리 왕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글쎄. 잊어버렸다.]

그 순간, 도깨비 왕의 얼굴에 여러 설화들이 겹쳐졌다.

그는 마왕을 토벌하는 용사처럼 보였고, 마교와 싸우는 무림맹의 고수처럼 보였으며, 창공을 향해 날갯짓하는 헤츨링처럼 보였다. 그는······.

[네놈―]

[김독자는 열지 말아야 할 문을 열었다. 이제 이 세계는 영원히 불행해질 것이다.]

그 말과 함께, 세계가 빛으로 휩싸였다. 마침내 출구에 도착한 것이었다.

혹부리 왕은 비틀거리며 그 빛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빛살을 헤치고, 조금씩 나아갔다.

이곳에 해답이 있다.

이 세계를 만든, ‘가장 오래된 꿈’이 있다.

하지만 혹부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어디선가 시끄러운 경적이 들려왔다. 코끝을 적시는 매캐한 냄새. 숨을 쉬기가 점점 버거워졌다. 빛살 속에서 그의 몸이 타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이 여백은 그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잖나, 너와 내 이야기가 아니라고.]

도깨비 왕의 목소리와 함께, 혹부리 왕의 몸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세계의 도구일 뿐이다.]

아, 아······.

다리가 녹고, 몸통이 녹아내리면서도 혹부리 왕은 눈앞의 광경에서 시선을 놓지 않았다.

저곳에 아주 오래된 꿈이 있다. 이 세계의 모든 비밀이 있다.

영원히 찾아 헤매던 뭔가가, 그곳에 있다.

혹부리 왕은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도깨비 왕이 한 말을 이해했다.

저것이, 저것이 정말로······.

혹부리 왕은 간절히 외치고 싶었다. 이쪽을 보아 달라고. 제발, 여기에 내가 있다고. 단 한 번만 눈을 마주쳐 달라고.

그러자 그것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하지만 그 시선이 마침내 혹부리 왕에게 도달했을 때, 이미 혹부리 왕은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다시 무언가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

쿨럭, 하는 소리와 함께 입안에서 까끌까끌한 감각이 느껴졌다. 차오른 숨을 토해내자, 벌레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활자였다.

감각이 되돌아오고, 시야가 점차 밝아졌다. 눈앞에서 새하얀 빛을 내뿜는 활자들이 보였다. 익숙한 내용이었다.

대체, 여기는······.

“독자 씨? 그러다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겠어요.”

순간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익숙한 목소리.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말. 끔찍한 상상력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최후의 벽]을 부수면, 어쩌면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파라락, 하고 찢어진 종이들이 눈앞을 날아다녔다.

자세히 보니 누군가가 내 눈앞에 책을 흔들고 있었다.

“······상아 씨.”

눈앞에 유상아가 있었다.

주변 광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너부러진 책 무덤과, 빼곡하게 들어찬 장서관의 정경.

희미한 칸델라의 불빛. 이곳은 지하철이 아니었다.

여기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장소였다.

유상아가 생긋 웃었다.

“이젠 아늑하게 느껴지네요, 여기.”

이곳은 [제4의 벽]의 안이었다.

“······어떻게 된 거죠?”

“저한테 물어보셔도······ 사실 저도 막 깨어났거든요. 사서 선배님들을 좀 찾아볼까요?”

유상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나는 내게 일어난 일들을 빠르게 점검했다.

「우리는 [최후의 벽]의 모든 조각을 모았고. 마침내 벽을 부쉈다.」

소용돌이치던 ‘네모난 원’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그리고? 그 다음엔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다른 일행들은?

「걱 정마 김 독 자」

다시는 들을 수 없을 줄 알았던 목소리.

나는 반가움에 소리쳤다.

“제4의 벽!”

「도 서 관에 서 는 조용 히」

저 능청까지, 틀림없이 내가 기억하는 [제4의 벽]이었다.

하지만 반가움과는 별개로, 의문은 더욱 커졌다.

대체 내가 왜 지금 [제4의 벽] 안에 있는 거지?

“독자 씨?”

어둠 속에서 하나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이었다.

“여긴 대체 어디에요?”

“······나 이상한 책 발견. 『김독자와 성의 신비』”

“그런 거 함부로 보면 안 돼, 지혜야.”

“그럼 이건요? 『그들에게 성경이 있다면 김독자에겐 멸살법이 있다』”

“그런 걸 읽고 싶니?”

정희원과 이지혜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린다 싶더니, 근처의 책 무덤에서 두더지처럼 조그만 머리통들이 불쑥 나타났다.

“아저씨!”

“형아!”

신유승과 이길영이었다. 어둑한 시야 속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한수영의 모습도 보였다.

“별게 다 있네. 여기가 유상아가 말하던 그 ‘도서관’인가?”

한수영은 책장에서 책을 한 권씩 뽑아서 뒤로 던지고 있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이현성이 그 책을 재빨리 낚아채 품속에 담았다.

“수, 수영 씨! 책을 그렇게 함부로 다루시면······ 이게 뭔지도 모르는데!”

“야, 이건 뭐야! 재밌겠네.”

그들의 뒤쪽으로는 기절한 공필두와 장하영, 안나 크로프트가 차례로 늘어져 있었다. 그런 그들의 맥을 짚는 이설화의 모습까지.

적어도 ‘마지막 시나리오’에 진입했던 일행들은 모두 모인 듯했다.

「모 두는 아니 야」

[제4의 벽]의 목소리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직, 보이지 않는 녀석이 있었다.

······설마?

「(하하하하! 유중혁! 어디선가 유중혁의 냄새가 난다! 드디어 나와 하나가 되러 온 것이냐!)」

깊은 어둠 속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목소리. 말할 것도 없이 니르바나의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잠해진 니르바나가 축 늘어진 채 바닥을 뒹굴었고, 그런 녀석의 머리를 짓밟은 새카만 전투화가 보였다.

“······불쾌한 공간이군.”

“유중혁.”

‘은밀한 모략가’와 아직 분리되지 않은 모양인지, 녀석에게선 여전히 희미한 스파크가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지 못했다는 이들은, 대체 누구일까.

“······성좌들이 없어요.”

“지구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죠?”

[제4의 벽]이 우릴 이곳으로 대피시켰다는 것은, 바깥 세상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산산이 부서져 나가던 [제4의 벽]과, 그 위에서 흩어지던 문장들이 떠오른다. 뭐가 잘못된 걸까? 내가 이야기를 바꾸려 하는 바람에,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한 걸까?

그러자, [제4의 벽]이 갑자기 엉뚱한 말을 했다.

「읽 지도 상상 하지 도않 기에 시간 이 흐르 지 않을 뿐」

그게 무슨 말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마침내 벽을 부쉈는가, 영원과 종장의 사도여.)」

「(······결국 이런 날이 오기는 하는군.)」

도서관의 사서인 ‘꿈을 먹는 자’와 ‘시뮬라시옹’이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제4의 벽]을 향해 말했다.

“나를 다시 내보내 줘.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

그러자 사서들이 답했다.

「(지금 바깥으로 나가면 너라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스타 스트림>은 없다. 그곳의 모든 것은 멈춰버렸어.)」

모든 것이 멈춰있다.

실제로 벽 위로 들려오던 설화들은 더이상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대신, 어디선가 거대한 태엽이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시계 초침 소리 같기도 하고, 아주 느릿하고 일정한 박자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럼 다시 초침을 돌려줄 녀석을 만나고 올게.”

「(······정말로 ‘가장 오래된 꿈’을 만나고 싶은가?)」

이 모든 이야기의 종착역에 그 존재가 있었다.

<스타 스트림>은 파괴되었지만, 해결해야 할 질문이 남아 있었다.

「어째서 이런 세계가 존재해야만 했는가.」

돌아보자, 일행들도 비슷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그들 역시 각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었고, 보고 싶은 종막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유상아가 말했다.

“같이 가요, 독자 씨.”

“나도, 나도 갈래!”

“아저씨가 보고 싶어 했던 에필로그가 뭔지 궁금해요.”

“자자,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진 말자고요. 의외로 착한 도깨비 같은 게 우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아니면 몇 대 때려서 그렇게 만들면 되고.”

그에 동조하듯 비유도 한마디를 했다.

[바앗!]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유중혁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그 전에, 놈을 만날 방법이 있나? 벽은 부서졌지만, 바깥 세계의 시간은 멈췄다. 시간이 멈추면 설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우리도 마찬가지겠지.”

「(시간이 멈추지 않은 곳도 있지.)」

니르바나가 웃으며 바닥을 가리켰다.

그렇다. 이 ‘도서관’의 시간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설마 놈이 이 도서관 안에 있는 건가?”

「(······그런 건 아냐. 이 도서관도 ‘벽’일 뿐이니까. 다만 너희들이 이야기를 완성해서, 통로 하나가 열렸다. 이제 저쪽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지.)」

니르바나는 그 말을 하며 우리를 안내했다.

왠지, 그가 어디를 향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도서관의 아래로 펼쳐져 있던 낭떠러지가 떠올랐다.

「이곳이 이 도서관의 끝. 모든 이야기의, 끝이었다.」

아득한 무저갱. 마치 심연처럼 드리워져 있던 계곡.

언젠가, [제4의 벽]에 처음 들어왔던 날 내가 발견한 장소였다.

“······그때 거기야.”

처음 이곳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뻔했었다.

그때 니르바나는 말했다. 저곳으로 떨어지면 죽는다고. 저곳이, 바로 벽의 너머라고.

니르바나가 물었다.

「(김독자, 정말 가고 싶은 거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니르바나가 허공에 늘어진 밧줄을 당겼다. 도르래 같은 것이 움직인다 싶더니, 작은 엘리베이터 같은 것이 천천히 올라왔다.

「(타.)」

우리는 엘리베이터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전용 특성, ‘심연을 들여다본 자’가 활성화됩니다.]

이제 정말로 내가 찾던 답이 눈앞에 있었다. 내 안에 남은 설화들도 동요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아래쪽으로 내려갔을까. 마침내 도르래 소리가 멎었다.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자, 어둠 속에서 곰팡이 냄새 같은 것이 났다. 바닥은 미끈하고 축축했다. 아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시설물의 흔적 같았다.

칸델라의 불빛을 앞으로 하자, 노란색 블록으로 만들어진 희미한 선이 나타났다.

“여기는······.”

정희원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노란 블록 너머의 어둠 속에서 뭔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전체가 불길하게 진동했다. 마치 괴물이 달려오는 것처럼 폭력적인 굉음이었다.

잠시 후, 통로 저편에서 희미한 괴물의 두 눈이 나타났다.

“······맙소사.”

중얼거린 정희원은 그 괴물을 보고서도 검을 잡지 않았다.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괴물이 무엇인지,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

지하철이었다.





< Episode 99. 가장 오래된 꿈 (1) > 끝

< Episode 99. 가장 오래된 꿈 (2) >





눈앞에 도착한 지하철이 천천히 정차하고, 이내 문이 열렸다.

확실했다.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지하철이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정희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하철이 대체 왜 여기에······.”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이길영이었다. 유상아가 외쳤다.

“길영아! 그렇게 함부로 타면―”

성큼 발을 내딛어 지하철에 올라탄 이길영이 우리 쪽을 돌아보았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소년의 어깨가 으쓱했다.

그 광경을 보던 이지혜가 신유승의 손을 잡고 움직였다.

“모르겠다. 일단 타 보자고요!”

그것을 시작으로 망설이던 다른 일행들도 하나둘 지하철에 탔다.

나 역시 그 뒤를 따랐다.

희미한 진동이 느껴지는 지하철의 바닥에 발을 디디는 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한때, 이곳은 김독자의 세계였다.」

그 말은 틀렸다. 이곳은 나의 세계가 아니었다.

「이곳은, 누구나의 세계였다.」

유상아도, 정희원도, 이현성도, 이지혜도······ 모두 각자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이 지하철을 타고 매일을 살았듯, 그들도 비슷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회사원이었고, 누군가는 학생이었고, 누군가는 군인이었지만······.

“지하철이라······. 그땐 정말 지겨웠는데 이젠 눈물나게 반갑네요.”

정희원의 말에 우리는 지하철 내부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시트는 새것이었고, 안전봉도 말끔히 닦여 있는 지하철. 바닥에도 오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런 것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근데 사람이 아무도 없네.”

지하철 안에는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를 제외한 그 무엇도 살아있지 않은 듯 무기질적인 공간. 이 지하철은 그런 비일상의 기묘함을 품고 있었다.

나는 아직 열차 바깥에 남은 사서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희는 안 가? 세계의 끝을 보고 싶어 했잖아.”

「(우린 갈 수 없어.)」

“왜?”

니르바나와 사서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쩐지 서글픈 눈으로 서로를 돌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우린 네가 결말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

[문이 닫힙니다.]

말은 끝까지 들려오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거대한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지하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였다. 창밖으로, 새카만 어둠의 정경이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한참이나 그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이 열차는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3호선이다.”

그 말을 한 것은 한수영이었다. 나 역시 노선표를 올려다보았다.

3호선. 내가 항상 출퇴근에 이용했던 호선이었다. 이상한 것은, 그 노선표의 끝부분이 망가져 있다는 것이었다. 역의 이름들도 지워져 있었다.

······.

열차는 계속해서 달렸다. 그로부터 몇 분이 더 지났지만 정차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열차는, 그대로 종착역까지 달릴 모양이었다.

한수영이 풀썩 소리를 내며 내 옆 좌석에 앉았다.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노선표를 노려보는 한수영. 내가 물었다.

“뭐야 그 표정은.”

“난 지하철 같은 거 안 타.”

“왜?”

불현듯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확실히, 이 녀석이라면 지하철은 탈 필요가 없었겠지. 그러나 한수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볼 게 없잖아. 안도 밖도.”

나는 녀석과 함께 망가진 노선표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지하철은 늘 같은 노선을 달린다. 정해진 시간에 정차한다. 늘 같은 풍경 속에, 비슷한 일들이 일어난다.

지하철을 싫어하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으니까.

“재미있으라고 지하철이 달리는 건 아니니까.”

“······어쭈? 성좌 ‘구원의 마왕’답지 않은 말이네.”

나는 쓰게 웃었다.

한수영과 나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일행들이 있었다. 나와 함께 멸망을 견디고, 99개의 시나리오를 클리어하여 이곳까지 와준 사람들.

“······음, 갑자기 첫 번째 시나리오로 돌아가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설마, 절대 안 돼요!”

“지금이라도 메뚜기 준비해 둘까요?”

결연한 얼굴로 주먹을 쥐는 이길영을 보며, 일행들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가장 끔찍했던 기억이 유머가 된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일행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 이야기에 미소를 짓는 것일까.

나는 한수영을 향해 말했다.

“저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가야 해.”

“그게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

“모든 이야기는 원래 그렇게 끝나는 거야.”

“언제부터 그런 전개를 좋아했다고?”

한수영이 비꼬듯이 쏘아붙였다.

“너 또 이상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나한테 또 뭐 숨기고 있는 거 아냐?”

“그러고 싶어도 이제 숨길 게 없어.”

사실이었다. 원작에서도 여기까지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은밀한 모략가’나 999회차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지하철을 탄 것은 우리가 최초였다.

나는 흐릿하게 지워진 노선표의 끝을 보며 말했다.

“한수영, 네 생각엔······.”

“역시 최종 보스가 있지 않을까요? 보통 그런 전개잖아요!”

정희원의 목소리였다. 나를 향해 한 말은 아니었다. 아마 일행들끼리 뭔가 토론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신유승도 거들었다.

“이따만한 드래곤이 있다거나.”

“하지만 드래곤에게 ‘가장 오래된 꿈’이라는 수식언이 붙을 거 같지는 않은데. 그만한 수식언이 붙으려면 아무래도······.”

“역시 ‘작가’가 아닐까요?”

“작가?”

“그, 왜······.”

그 말을 꺼낸 이길영의 눈동자가 내 쪽을 향하자, 일행들도 퍼뜩 생각났다는 것처럼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일행들도 이제, 그 소설을 알고 있었다.

그 소설이 이 세계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는 것도.

그리고, 오직 나만이 그 이야기를 끝까지 읽었다는 것도.

“······독자 씨 생각은 어때요?”

모든 소설은 작가가 쓰기 전에는 이야기되지 않는다.

만약 이 세계가 ‘멸살법’을 토대로 만들어진 거라면, 일행들의 추측은 타당성이 있었다.

역시 ‘가장 오래된 꿈’이 작가일 가능성이 높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왜일까······.

“‘가장 오래된 꿈’은 ‘멸살법’의 작가가 아닐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그런 느낌이 듭니다.”

나는 이 끝에 있는 존재가 tls123일 것 같지가 않았다.

도깨비 왕의 말이 떠올랐다.

「[‘가장 오래된 꿈’은 작가라기보다는 차라리 독자에 가깝지. 그는 누구를 위해 이야기를 쓰는 존재가 아니야. 게으르고 탐욕스러우니까.]」

애초에 이 모든 가정에 ‘작가’가 꼭 필요한 것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정말 tls123으로 인해서 이 세계가 시작된 것일까.

어쩌면 tls123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세계를 내게 알려주기만 한 것은 아닐까.

페이지에 기록되지 않은 ‘은밀한 모략가’나 999회차의 인물들이 홀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러고 보니 궁금한데, 독자 씨는 어쩌다 그 소설을 보게 된 거예요?”

“아, 나도 항상 궁금했는데.”

관심 없는 것처럼 [흑천마도]를 닦고 있던 유중혁도, 그 화제가 나오자 내 쪽을 바라보았다. 장하영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뭔가 운명적인 끌림이 있었나?”

“저도 그 느낌 압니다! 이병 시절 처음으로 수류탄을 쥐었을 때―”

“그냥 인터넷 검색하다가 우연히 보게 됐어요.”

내 대답에 일행들은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실망해도 어쩔 수 없다. 그게 사실이니까. 한수영이 핀잔을 주었다.

“뭘 검색했는데 이딴 소설이 나와?”

“그게······.”

나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이지혜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이제 와서 그런 게 뭐 중요하겠어요. 어쨌든 아저씨가 그 소설을 읽었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러게. 독자 씨가 그거 안 읽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싱글싱글 웃는 유상아를 보며,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겐 저 말을 들을 자격이 없었다.

「결국 별들은 떨어졌고, 세계의 시간은 정지했다.」

‘멸살법’의 누구도 다다르지 못한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지만, 이 결말의 끝에 내가 원하는 것이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들은 나 역시 알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만약, 그 소설을 끝까지 읽은 게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정의로운 정희원, 신의 있는 이현성, 올곧은 유상아가 그 소설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지금 이 세계는 훨씬 더 나은 모양이었을 것이다.

“고마워요, 아저씨. 그때 그 소설 읽어줘서.”

나와 눈높이를 맞춘 신유승이 미소짓고 있었다.

“맞아. 그 소설 재미도 없었다면서요? 진짜 독자 씨 아니었으면······.”

“나였으면 한 페이지도 다 못 읽었을 걸? 난 책 진짜 싫어하거든.”

“저도 <오즈>의 병영 문고에서 몇 권 읽어보긴 했는데······ 전 역시 독서와는 인연이······.”

머리를 긁는 이현성을 보며, 나는 벌렸던 입을 가까스로 다물었다.

‘멸살법’이 있었기에, 지금 눈앞의 인물들이 있다.

그 소설을 읽었기에, 이들이 위기에 빠졌을 때 구할 수 있었다.

“저는······.”

보잘 것 없는 내가, 사랑받을 수 있었다.

“형이 가르쳐 준 설화들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어요.”

아이들의 작은 손이 내 손을 꾹 쥐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흘러가는 지하철의 어둠이 보였다. 그 어둠 속으로, 우리가 살아온 설화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잠자코 그 설화들을 바라보았다. 설화들은 겨울밤의 은하수처럼 아름다웠고, 불꽃놀이처럼 허망했다. 이곳의 누구도 잊을 수 없지만, 언젠가는 잊힐 이야기들. 정희원이 입을 열었다.

“······독자 씨, 이제 물어봐도 될 거 같아서 그러는데.”

그녀가 물어볼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독자 씨가 바라던 ‘결말’은 대체 뭔가요?”

이제 우리를 보는 성좌들은 없다.

세계를 지배하던 <스타 스트림>도 없다.

내가 말하지 못할 이유도······ 아마도 없다.

“그중 하나는······ 이미 보았습니다.”

나는 일행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표정에는 어떤 문장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얼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내가 보고 싶었던 결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빚을 갚는 겁니다.”

“빚이요?”

고개를 돌리자, 유중혁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둔중한 떨림과 함께, 천천히 열차의 가속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끌벅적 떠들던 일행들도 하나씩 말수가 줄어들었다. 일행들의 표정에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출입문 쪽으로 다가갔다. 내 왼쪽에 정희원이, 오른쪽에는 유중혁이 섰다.

어둠 속에서 흘러가는 설화들의 유속이 느릿해지고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0회차가 있었고, 1회차도 있었다.」

2회차가 있었고, 3회차도 있었다.

「그렇게 1864개의 회차들이 모였고, 그 회차가 이 세계를 열었다.」

무수한 유중혁들이 그 회차를 살았다. 제대로 된 삶은 한 번도 없었지만, 잘못된 삶도 없었다.

삶의 윤리를 논하기에는 세계가 너무 가혹했고, 희망을 이야기하기엔 절망의 부피가 너무나 컸다. 다만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았기에 유중혁은 굳건했다.

「오직 이 세계의 끝을 보겠다는 마음.」

나 역시, 그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0회차부터 1864회차까지 1865명의 유중혁이 바라는 꿈이자.

내가 원하는 이 세계의 끝.

“······정말 길었네. 그렇지?”

그러자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유중혁이 쏘아붙였다.

“겨우 사 년이다, 김독자. 내가 겪어온 세월에 비하면······.”

“그래.”

사 년. 어느덧 우리가 함께 싸워온 시간이 그렇게 되었다.

“평생처럼 느껴지는 사 년이었어.”

그러자 내 왼쪽에 선 정희원이 칼자루로 나를 쿡 찔렀다.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건데 뭘 그렇게 비장하게 말해요? 걱정 마요. 어떤 괴물이 기다리고 있든 내가 끝장낼 테니까.”

나는 가만히 웃었다. 지하철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출입문의 새카만 유리창 위로,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유리창에 비친 내 뺨 위로 핏자국이 번져 있었다. 나는 뺨에 묻은 핏자국을 닦았다. 그리고 서늘한 기분이 되었다.

「유리창이 아니라, 정말로 뺨에 묻어 있던 피였다.」

“문이 열립니다!”

이현성의 외침과 함께, 모든 일행이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응?”

그러나 긴장하고 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우리를 맞이한 것은 휑한 지하철의 플랫폼이었다. 종종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였으나, 그다지 우리를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뭐야, 아무것도······.”

그 말을 중얼거린 정희원과 함께 플랫폼을 딛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발끝에 닿은 낯선 현실감. 희미한 스파크와 함께, 내 모든 설화가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하철의 벤치 위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이제 막 하교한 듯, 교과서가 잔뜩 들어가 있는 두툼한 책가방.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았더라면 초등학생이라고 생각했을 법한, 빼빼 마른 작은 키의 아이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영어 단어라도 외우는 듯, 소년은 자신의 노트 위에 도표 같은 것을 그리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와 함께,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떼었다.

「김독자는 약속했다. 이 세계를 만든 원흉을 끝내겠다고. 그것이, 그 어떤 존재라고 해도.」

어디서, 누구에게 맞기라도 한 것일까. 창백한 아이의 팔에 짙은 멍이 보였다. 어디서 든 멍인지, 잘 알 것 같은 멍. 다리에 힘이 풀려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읽지도 상상하지도 않기에 시간이 흐르지 않을 뿐」

이 모든 것이 꿈이고 거짓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사악한 <스타 스트림>이 만든 꿈일 수도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내 모든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저 아이가 바로, 이 모든 시나리오를 만든 원흉이라고.

「예 상하 고 있 었 잖아 김독 자」

가장 오래된 꿈, 세계의 누구보다 전지하며 무능한 신.

[‘제4의 벽’의 영향력이 점점 약해집니다.]

「김 독······.」

[‘제4의 벽’의 영향력이 극도로 약해집니다.]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바닥을 구르는 정희원의 검이 보였다.

“아, 아······.”

정희원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아이를 보고, 나를 보는 눈. 그 두 눈에 절망이 어려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이 모든 것이 거짓이었으면 좋겠다는 듯이.

[‘은밀한 모략가’와의 약속이 발동합니다.]

나는 몇 번이나 입을 떼었다 닫았다.

이것은, 징벌일지도 모른다.

내가 받은 구원에 대한 대가를, 나는 이제야 치르게 된 것이다.

[당신은 <스타 스트림>을 파괴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스타 스트림>은, ‘가장 오래된 꿈’이 끝나지 않는 한 파괴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아이.

그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가장 오래된 꿈’을 끝내시오.]





< Episode 99. 가장 오래된 꿈 (2) > 끝

< Episode 99. 가장 오래된 꿈 (3) >





자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만약 ‘멸살법’이 현실이라면 어떨까.」

그것이 나의 생각인지, 아니면 [최후의 벽]에 기록된 것인지, 혹은 그것도 아니라―

「내가, ‘멸살법’의 인물들과 함께 싸울 수 있는 세계가 있다면」

‘가장 오래된 꿈’의 상상인지, 나는 잘 알 수가 없었다.

무수한 기억들이 갑작스런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어린 소년의 머릿속에서 중구난방으로 퍼져 나가는 상상들이, 다른 세계에서는 이야기의 재료가 되었다. 살아있는 현실이, 비극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유중혁이 회귀한 후의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작가님한테 댓글로 물어봐야겠다.」

누구보다 ‘멸살법’을 잘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그 소설을 열심히 읽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왜 정작, 그 소설을 읽었던 ‘나’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나는.

[당신은 ‘등장인물’이 되었습니다.]

내 화신체 위로 스파크가 흘렀다. [제4의 벽]이 기능을 멈추고 있었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고, 황폐해진 머릿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명들이 울렸다. 떨리는 고개를 숙인 채, 가까스로 심호흡을 했다.

[제4의 벽]의 말이 맞다.

어쩌면, 나는 알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힌트가 있었다.

「그 세계에서 나는 너무나 운이 좋았고.」

「그 세계의 모든 것이 내게 편의적이었으며.」

「때로는 허술하기까지 했다.」

그 모든 것이, ‘가장 오래된 꿈’의 가호 때문이었다면.

「모든 세계선의 태초, 원형(原形)의 세계선.」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힘이 빠진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 [제4의 벽]은 없었지만, 마음은 차분했다. 차분해졌다 믿어야 했다.

오직 나만이, 이 세계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기이이이잉.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울었다. 나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소년이 노트에서 고개를 들고 나를 보고 있었다.

츠츠츠츠츠!

“······어?”

아무것도 모르는 눈.

나는 그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그저 어떻게든 하루를 살아남아야 했던, 이 세계에 의지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던 아이의 눈이었다.

마치 헛것이라도 본 듯이 눈을 비비며 그 아이가, 나를 보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가장 오래된 꿈’을 끝내야 한다.」

<스타 스트림>이 시작되었던 순간부터 다짐했고, ‘은밀한 모략가’와도 약속했다.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을 없애겠다고.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온 것이다.

[‘마왕화’를 발동합니다.]

찢어진 어깻죽지에서 새카만 날개가 펼쳐졌다. 나를 보는 아이의 눈도 커졌다.

“아, 아······?”

무척이나 오래된 목소리. 맞다. 나는 분명 저런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아이를 향해, 나는 한 걸음씩 다가갔다.

[‘천사화’를 발동합니다.]

아이의 얼굴이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것들이 보였다.

아이가 끼적이던 노트. ‘멸살법’의 파워 밸런스를 기입한 도표. 언젠가의 내가 작성했던, 바로 그 도표였다.

유중혁, 이현성, 신유승, 이지혜, 이설화, 김남운, 안나 크로프트······. 빼곡하게 적힌 이름들 옆으로 기록된 그들의 성흔들과 스킬들. 삐뚤빼뚤한 글씨를 덮듯이 가린 아이의 손등 위로 남은 멍.

나는 이 아이가 살아남은 시간과, 살아갈 세월을 알고 있었다.

아이의 미래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불행들이 녀석을 기다리고 있을 것인지.

「그 세월이,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을까.」

소년은 일진들에게 찍혀 왕따를 당할 것이다.

친척들에게 버림받아 이른 독립을 하게 될 것이며, 가는 곳마다 자신을 따라오는 기자들의 추적을 받게 될 것이다.

입시에 실수를 저질러 삼류 대학에 가게 될 것이다.

훈련소에서 난수 뽑기가 잘못되어 최전방에 배치를 받을 것이고.

편의점 삼각 김밥으로 매일 끼니를 때울 것이다.

그러다 어영부영 아무 회사에 턱걸이 입사하여, 생을 연명하게 될 것이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하나의 소설을 완독할 것이고.

그 소설을 읽고 살아남아, 결국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존재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소년은, 자라서 김독자가 될 것이다.

“괴, 괴물······.”

아이가 나를 보며 입을 열고 있었다.

“그래, 괴물이야.”

아이의 망막에 나의 모습이 비쳤다.

「그 괴물이 아이의 미래였다.」

괴물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지금뿐이었다.

모든 것은 찰나의 일이었다.

내가 검을 세우며 달려간 것도, 한수영이 주먹으로 내 얼굴을 갈긴 것도.

“――――!”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한수영이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붉게 물든 녀석의 눈이 울고 있었다. 내 가슴을 주먹으로 마구 두들겼고, 억센 손으로 내 어깨를 붙들었다.

“―독자!”

나는 한수영을 뿌리쳤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고작 몇 미터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음에도 쉬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내 모든 설화가 반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전신을 억압하는 강력한 스파크가 내 몸을 붙들었다. 발이 떼어지지 않았고,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를 보는 아이의 표정이 겁에 질렸다. 덜덜 떨리는 아이의 턱. 흔들리는 눈. 이것이 현실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눈이었다.

[‘가장 오래된 꿈’이 당신의 존재를 의심합니다.]

그 모든 세계를 꿈꾸는 존재.

녀석의 꿈속에서는 나 역시 등장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츠츠츠츠츠츳!

[‘가장 오래된 꿈’이 당신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현실을 부정하듯 아이가 머리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나, 나는 유중혁이다······ 나는······.”

수만 번도 더 외웠던 그 주문.

「내 주변에는 보호막이 있어.」

「아무도 나를 해치지 못하고.」

「어떤 것도 나를 건드리지 못해.」

일진들에게 두들겨 맞을 때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했던 생각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현실을 현실이 아니게 만드는 힘.

이제 그 힘이, 정반대로 작용하고 있었다.

“아저ㅆ······!”

아주 작은 절대자가, 이 모든 것을 자신의 망상이라 여기고 있었다.

아이의 몸을 중심으로 불투명한 막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새카만 공처럼 생긴 막. ‘가장 오래된 꿈’이 만들어 낸 가장 튼튼한 보호막.

나는 악귀처럼 울부짖으며 그 보호막을 향해 다가가 칼을 휘둘렀다. 세계와 세계가 충돌하며, 눈부신 섬광이 눈앞에서 터졌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칼날이 맥없이 부러져 하늘을 날았다.

나는 날아오르는 칼날 조각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죽일 수 없다」

죽일 방법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만약 이 모든 이야기가 어린 나의 꿈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 세계의 모든 법칙은 어린 나에게 달려 있었다.

어디선가 맹렬하게 불어온 바람이, 아이의 떨어진 노트를 거칠게 넘겼다. 이윽고 멈춰선 페이지에는, 어린 내가 기록한 ‘멸살법’의 설정이 적혀 있었다.

―끊어진 필름 이론 : ‘멸살법’의 세계선 겹침을 설명하는 이 이론은······.

희미하게 튀어 오르는 스파크 속에서, 나는 멍하니 그 내용을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허리를 숙여 부러진 칼을 집었다. 그리고 내 안에 남은 모든 설화를 공명시켰다.

나는 아이를 둘러싼 검은색 구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 너를 잘 알아.”

「괴롭히지마괴롭히지마괴롭히지마」

“괴롭히려는 게 아냐.”

「도망치고 싶어」

“알아.”

「하지만 어디로?」

아이의 이야기가 내게 전해져 왔고, 나의 이야기가 아이에게 전해져 갔다.

츠츠츠츠츠츳!

부러진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칼날은 이제 두 뼘도 채 남지 않았다. 하지만 내 계획을 실행하기엔, 그 두 뼘이면 충분했다.

「‘가장 오래된 꿈’을 끝낼 방법.」

[‘끊어진 필름 이론’이 발동합니다!]

[당신의 존재가 ‘가장 오래된 꿈’과 공명합니다!]

나는 있는 힘껏 나의 목을 향해 칼을 찔렀다.

푸욱, 하는 소리가 들렸다. 새빨간 피가 눈물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김독자.”

유중혁의 피였다. 칼은 목 바로 앞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칼날을 쥔 유중혁의 손아귀에 푸른 힘줄이 돋아 있었다.

“모두 꽉 잡아라!”

유중혁뿐만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 나를 제압하고 있었다.

“독자 씨. 이건 아닙니다!”

이현성이었다.

내 왼팔과 오른팔을 쥔 이들도 있었다. 정희원과 유상아였다.

“······제발!”

“다른 방법이 있어요, 분명히.”

허리를 껴안은 이지혜와, 내 다리를 한 짝씩 붙든 신유승과 이길영이 보였다.

나를 대신해 ‘가장 오래된 꿈’의 보호막을 두드리는 한수영도 보였다.

“이거 열어! 널 해치려고 온 게 아냐! 그냥, 그냥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럼에도 보호막은 점점 더 두꺼워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알 수 있다. 저것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칼자루를 다시 굳게 쥐었다.

“이 방법뿐입니다.”

장하영이 외쳤다.

“제발, 제발 그만둬! 아직 시간이 있잖아. 아직······.”

시간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를 둘러싼 스파크가 짙어지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꿈’이 당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아이는 끝내 우리를 부정할 것이다. 자신의 망상을 지울 것이다.

다른 세계의 현실을, 현실이 아닌 것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쿠구구구구······.

어디선가 짙은 안개가 깔리며, 불길한 혼돈의 힘이 느껴졌다.

칼날을 쥐고 있던 유중혁의 표정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네, 네놈······.”

비틀거리는 유중혁의 입에서 새카만 설화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설화는 꾸역꾸역 녀석의 입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려, 마침내는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새카만 코트 사이로 빛나는 [진천패도]의 칼날.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살아온 이가 그곳에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

무수한 회귀 끝에, 마침내 자신의 이름마저 잊어버린 존재.

오직 복수만을 위해 생을 거듭해 온 이가, 그곳에 있었다.

그는 내 쪽을 흘끗 바라보더니, 천천히 보호막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튀어 오르는 스파크를 가볍게 무시하며 걸어가는 ‘은밀한 모략가’.

그 순간, ‘가장 오래된 꿈’의 설화가 내게 흘러들어왔다.

「‘유중혁처럼 되고 싶다.’」

서서히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내 유년을 지배했던 기억이 무엇이었는지, 왜 잊고 있었을까.

「이 우주의 그 누구보다 강한 주인공.」

‘은밀한 모략가’가 스파크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강박처럼 계속된 상상 속에서, 나는 얼마나 많이 그런 생각을 했던가.

「어떤 인간도 모든 상상을 통제할 수는 없다.」

팔뚝과 허벅지에 멍이 생길 때마다, 입술이 터질 때마다, 얼마나 많이 그 이름을 외웠던가.

「그러니 이 꿈을 끝내기에 가장 적합한 이는 정해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칼자루를 떨어트렸다.

지금부터는, 나의 몫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정당한 복수를 내가 방해할 수는 없었다.

“은밀한 모략가!”

한수영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다. 정희원도, 이지혜도, 그리고 아이들도. 지금부터 그가 저지를 끔찍한 일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투명한 장벽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듯, 일행들은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직 ‘은밀한 모략가’만이, 플랫폼을 가로질러 아이가 있는 벤치에 도달했다.

그는 [파천강기]의 힘이 담긴 검을 휘둘러 새카만 원을 베어냈다. 그러자 그곳에, 아기 새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던 아이가 더욱 몸을 웅크렸다.

“나는 유중혁이다. 나는 유중혁이다. 나는······.”

희미하게 비치는 빛살 속에서, 아이가 몸을 떨었다.

【너는 유중혁이 아니다.】

억겁의 회귀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잊었던 회귀자.

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내가, 유중혁이다.”





< Episode 99. 가장 오래된 꿈 (3) > 끝


< Episode 99. 가장 오래된 꿈 (4) >





1864번의 삶을 살아온 유중혁의 진짜 목소리였다. 0회차부터 1863회차까지의 모든 세월을 증명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말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유중혁이라고. 그가 바로, ‘멸살법’의 주인공이라고.

“나, 나는, 나는······.”

아이는 벌벌 떨면서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 눈을 뜨는 순간, 자신의 모든 세계가 무너질 것을 아는 것처럼.

[‘가장 오래된 꿈’이 자신의 꿈을 부정합니다!]

「이건 환상이야 이건 환상이야 이건 환상이야」

“환상이 아니다.”

‘은밀한 모략가’가의 말과 함께, 아이의 주변으로 문장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이가 읽고 있으며, 동시에 내가 읽었던 ‘멸살법’의 문장들이었다.

나를 살렸고, 결국은 나를 죽이게 될 문장들.

그 문장들 속에서 한 사내가 말하고 있었다.

「“이현성. 아직 끝나지 않았다.”」

「“걱정 마라. 내가 반드시 <스타 스트림>을 끝내겠다.”」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신유승.”」

생생한 그 문장들은 곧 이야기가 되었다. 이야기는 상상이 되었고, 상상은 다른 세계선에서 현실로 재현되었다.

그것이 또 다른 현실임을 모른 채, 소년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욕망했다.

「“다음 회차에도, 그다음 회차에도.”」

소년은 살기 위해서, 상상했다.

친척들의 눈치를 받으며, 일진들의 괴롭힘을 당하며.

아프지 않기 위해서 다음 이야기를 생각했다.

「“반드시 살아서, 이 시나리오의 끝을 볼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주인공을 보며 위안을 받았고.

그 위안 속에서, 주인공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를 바랐다.

「작가님, 유중혁의 회귀는 언제까지 계속되는 건가요?」

그의 회귀행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츠츠츠······.

흘러나오는 소년의 기억을 보며, ‘은밀한 모략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0회차부터 1863회차까지 단 한 번도 잊지 않았던 결심들.

나와 일행들도 그것을 함께 보았다.

‘은밀한 모략가’가 빠져나간 뒤 쓰러진 유중혁이 밀려오는 기억 속에 신음하고 있었다. 신유승이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고, 이지혜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현성도, 정희원도 떨리는 어깨를 가까스로 서로에게 의지한 채 버티고 있었다.

이제 그들도 알게 되었다.

‘은밀한 모략가’의 생은, 보상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신유승이 방언처럼 중얼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부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알려달라는 듯이.

“은밀한 모략가! 멈춰! 멈추라고!”

오직 한수영만이 눈앞의 스파크에 저항하며 계속해서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은밀한 모략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는 자신의 순례행이 끝나는 장소에 도착했다.」

부러지고 또 부러지면서도 매번 다시 붙었던 [진천패도]가 고요히 울고 있었다.

「마침내 그의 배후성이 눈앞에 있었다.」

“너였군.”

악몽이라도 꾸는 듯, 아이의 어깨가 가냘프게 떨렸다.

「당장이라도, 베어 죽일 수 있는 연약한 생명체였다.」

그의 진천패도가 다시 한번 거칠게 울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성좌들을 베어온 칼이었다. 포세이돈도, 제우스도, 여와도, 심지어는 도깨비 왕도 그의 칼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어떤 별도 그와 대적해 살아남을 수 없었다.

1864번의 삶을 거치며 도달한 복수의 기회.

[진천패도]가 천천히 움직였다.

“은밀한 모략가! 아니, 유중혁―!”

한수영도 나도 막을 수 없다.

저것은 일어나야 하는 일이다.

내 손을 꼭 잡은 신유승이 울고 있었다.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꺽꺽거리며.

이제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나는 누구의 이야기도 소비하지 않아도 된다.

유중혁은 오랜 회귀행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런데 왜 저 검은,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 것일까.」

‘은밀한 모략가’의 [진천패도]는 여전히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소년의 몸을 베어낼 것 같던 검은, 그저 소년의 주변을 감쌌던 알껍질 같은 보호막을 걷어낼 뿐이었다.

「껍질이 부서졌지만, 어디로도 날아갈 수 없는 새.」

소년의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기분 나쁜 설화들이 아이의 주변을 맴돌았다.

「“야, 얘 또 노트에 뭐 그린다!”」

「“쯧쯧, 제 어미를 똑 닮아서······.”」

「“네가 김독자니? 혹시 어머니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니? 음······ 그렇구나. 어머니를 원망하지는 않니? 평소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니?”」

「“언제까지 입 다물고 있을 거야? 네가 말하지 않으면 세상은 너를 오해하게 될 텐데.”」

스걱.

허공을 헤매던 [진천패도]의 칼날이 정확히 그 기억의 문장을 잘랐다.

어깨를 부르르 떨던 소년의 떨림이 한결 잦아들었다.

「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진언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그 소년입니까.】

‘은밀한 모략가’의 그림자 속에서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일어섰다.

999회차의 이현성이 그곳에 서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 녀석이 나의 배후성이다.”

【열 받네. 겨우 이 꼬마가 원흉이었나?】

999회차의 김남운과 이지혜도 그곳에 있었다.

999회차를 견뎌낸 이계의 신격들. <스타 스트림>을 파괴하고, ‘가장 오래된 꿈’을 끝내고 싶었던 것은 유중혁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뭐? 그럼―】

‘은밀한 모략가’는 대답 대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리서 플랫폼의 열차를 타기 위해 밀려오고 다시 밀려 나가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우리가 타고 온 열차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평범한 세계에서, 사람들을 태워 어디론가 향할 대화행 열차.

마치 우리의 존재가 보이지도 않는 듯, 우리를 지나쳐 가는 사람들.

―이번 역은 대화······.

승객들이 하차하기도 전에 지하철에 올라타는 사람들. 서로를 밀치거나 욕설을 내뱉는 사람들. 할머니 하나가 내리는 인파에 떠밀려 넘어졌다. 사람들은 그녀를 붙잡아주지 않았다. 그녀를 가장 먼저 목도한 이는 임산부석에 앉아 있던 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품속에서 꺼낸 신문으로 자신의 시야를 덮었다. 그 신문 위로, 기사의 헤드라인이 보였다.

―범죄자의 에세이를 출간하다.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기사였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이야기했고, 잊어버린 기사.

「별거 아닌 비극이었다. 고작해야, 단 한 번의 생에서 일어난 비극.」

‘은밀한 모략가’와 이계의 신격들이 내 설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해야 십수 년도 채 되지 않는 길이의 비극을, 슬픈 눈으로 보고 있었다.

【······가엾은 아이.】

그 말에 나는 소스라치듯 몸을 떨었다.

내 비극은 그들의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내가 겪은 비극 때문에, 더 큰 비극을 만든 죄를 용서받아서는 안 된다.

【나의 신이여, 너를 만나기 위해 아주 오랜 세월을 견뎌왔건만.】

999회차의 우리엘이 어린 나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너는, 이 우주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구나.】

다시 한번 바르르 떨리는 아이의 몸.

나는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래서 우리를 필요로 했던 건가? 너무나 가혹한 구조 요청이군.】

【자신의 상상조차 제어하지 못하는 것인가.】

뭔가가 잘못되고 있었다. 칼, 칼을 찾아야 했다.

999회차 인물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999회차의 이지혜였다.

【나는 상관없어. 하지만 괜찮겠어? 당신은 이것을 위해 여기까지 왔잖아.】

그것이 누구를 향한 말인지는 명백했다.

‘은밀한 모략가’가 잠시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힘든 시간이었다.”

그런 한 마디로 일단락될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가 겪은 비극이 그런 식으로 정리되어서는 안 되었다.

“왜 나였을까 생각했다.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죽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은밀한 모략가’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를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의 증오심 어린 눈동자는 소년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소년의 설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999회차의 우리엘과 이현성이 무릎을 꿇어 아이의 몸을 안아 들었다. 이지혜와 김남운이 아이의 차가운 손을 잡아주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선언하듯 말했다.

“그만 눈을 떠라, 김독자.”

식은땀을 흘리는 아이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긴 악몽과 맞서 싸우듯, 아이의 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천천히 아이의 눈꺼풀이 열렸다.

“아, 아, 아······.”

아이의 눈이 세상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망상이라 믿었던 것을 보고 있었다. 자신을 감싼 대천사와 강철검제, 망상악귀와 해상제독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정말로······.”

그토록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이야기의 주인공이 눈앞에 있었다.

“그래. 꿈이 아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침묵 속에서, 뭔가가 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눈물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았기에, 그리고 지금 ‘은밀한 모략가’와 이계의 신격들이 해준 일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나는 한없이 괴로워졌다.

「저것이 진짜 그들의 선택일 리가 없다.」

아주 오랫동안 어떤 이야기와 함께 살아온 존재는, 결국 그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아가레스가 그랬고, 메타트론이 그랬고, 묵시룡과 도깨비 왕이 그랬던 것처럼, ‘이계의 신격’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지금의 모든 선택조차, 결국은 정해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절규하듯 외쳤다.

“그 녀석은 ‘가장 오래된 꿈’이야! 녀석을 죽여야 해. 죽이지 않으면, 네 비극은 끝나지 않아! 네 회귀는, <스타 스트림>은―”

너희는 그 ‘이야기’에 먹혀서는 안 된다.

동정은 필요 없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해당 인물은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전혀 모르는 눈동자. 내가 읽지 않은 이야기 속에서,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뿐만이 아니었다. 우리엘도, 이지혜도, 김남운도, 이현성도 마찬가지였다.

[해당 인물은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해당 인물은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해당 인물은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해당 인물은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나는 연이어 떠오르는 그 메시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정의로운 군인.」

「가장 숭고한 대천사.」

「불의를 참지 않는 장군.」

「세상을 향한 증오로 가득 찬 악귀.」

「<스타 스트림>이라는 시스템과 대적해 온 회귀자.」

‘은밀한 모략가’와 ‘이계의 신격’들이 아이의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는 악의로 가득 찬 세계.

그 세계의 설화를 노려보던 김남운이 중얼거렸다.

【<스타 스트림>이 없어도, 세상은 똑같구만.】

마치, 지금부터 그들이 싸워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이.

‘은밀한 모략가’와 이계의 신격들이 쌓아 올린 설화가, 아이를 둘러싼 현실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득한 순례행의 끝에서, 회귀자는 자신이 발견한 세계를 선택했다.」

이야기의 끝에 도달한 등장인물들이, 마침내 이야기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신을 안은 채 새로운 이야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며 그쪽을 향해 기어갔다.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약속했다. ‘가장 오래된 꿈’을, 이 비극을 끝내겠다고.

간신히 바닥을 더듬던 나의 손에 부러진 칼자루가 들어왔다.

됐다. 이것만 있으면―

【김독자.】

‘은밀한 모략가’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들자, 녀석이 말을 이었다.

【너의 첫 번째 시나리오를 기억하나?】

첫 번째 시나리오, ‘자격 증명’.

그 시나리오에서, ‘은밀한 모략가’와 성좌들은 처음으로 나를 보았다.

【그때 너는 사람들에게 말했었지.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은 ‘사람을 죽여라’가 아니라고.】

그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가장 오래된 꿈’을 끝내시오.

세계가 눈부신 빛으로 덮이며,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놀란 일행들이 내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당신은 ‘은밀한 모략가’와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강철검제와 대천사가 안아 든 어린 김독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오랜 꿈속에 젖어 있던 아이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꿈이 끝나는 것은 언제일까. 그것은.

「꿈이, 더 이상 꿈이 아니게 되었을 때.」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미 ‘멸살법’의 유중혁이 이곳에 도착한 순간, ‘가장 오래된 꿈’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멀리서 다음 열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자신의 ■■에 도달했습니다.]

‘은밀한 모략가’의 신호와 함께, 나와 일행들은 도착한 열차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곳이, 이 이야기의 에필로그다.”

나의 유년을 구한 인물들이, 문의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세계선으로 넘어갔던 1863회차의 유중혁처럼, 내가 모르는 세계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 빛살 속에서 유중혁의 희미한 미소가 보였다.

그는 자유로워 보였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의 ■■는 ‘가장 오래된 꿈’입니다.]





< Episode 99. 가장 오래된 꿈 (4) > 끝

< Episode 99. 가장 오래된 꿈 (5) >





[‘제4의 벽’이 다시 발동합니다!]

몇 번인가 세상의 빛이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내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고, 반쯤 흐려진 의식 속에서 열차 바퀴와 선로의 마찰음만이 머릿속을 메웠다.

인정할 수 없었다.

내가 인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

마지막 녀석의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진정 자신이 원하던 것을 이루지도 못했는데.

「‘은 밀한 모 략가’가 원하 는 게 뭔 데?」

머릿속으로 내가 기억하는 ‘은밀한 모략가’의 모습들이 흘러갔다.

오직 원작의 텍스트를 통해 내가 알고 있던 이야기. 그 아득한 세월을 견뎌오며, 유중혁은 이 끝에서 무엇을 보길 원했을까.

그가 정말로 기대했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네가 원하지 않는 결말이라 해도······ 이 세계가, 실패한 회차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오직 그 말만이 저주처럼 뇌리에 박혔다.

「김 독자」

‘제4의 벽’이 내 오만함을 응징하기라도 하듯, 딱딱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네 가 판단 할 수 있 는 문 제가 아 냐」

그 말이 맞았다. 나는 녀석이 떠난 후에도, 빌어먹을 ‘성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휘황한 빛살 속에서 999회차의 우리엘, 이현성, 김남운, 이지혜의 모습이 흩어져 갔다.

녀석은 정말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녀석이 직접 선택했으니, 그것이 녀석이 행복인 것일까.

비극 속에서 태어난 이는, 그것이 비극인지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어린 나와 ‘은밀한 모략가’의 설화들이 멀어지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이쪽을 돌아보는 녀석은 더 이상 ‘멸살법’의 유중혁이 아니었다.

「비 극 속 에서 태 어 났 기 에 비극을 끝 낼 수 도 있는 법」

「“이곳이, 이 이야기의 에필로그다.”」

내가 읽어온 오랜 이야기의 마지막은 그렇게 끝났다.

[당신은 모든 시나리오의 ■■에 도달했습니다.]

[당신은 세계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든 그 ‘이후의 이야기’를 살아가는 것이었다.

‘멸살법’이 내게 알려주지 않은 이야기.

[‘가장 오래된 꿈’이 끝났습니다.]

퍼뜩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상황에 떠밀려서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도깨비 왕은 말했다. 이 모든 세계는, 본래 ‘가장 오래된 꿈’의 꿈이라고.

「그렇다면, 꿈이 끝난 후 꿈속의 인물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999회차의 인물들이나, ‘은밀한 모략가’는 등장인물의 직위를 벗어나 스스로의 의지로 꿈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면,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꿈이 끝난 후에, 꿈속의 인물들은······.

[최종 시나리오 클리어 보상이 도착하였습니다.]

*

뺨을 찰싹찰싹 때리는 소리. 깜빡이는 지하철의 불빛 속에 김독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야, 정신 들어?”

거칠게 멱살을 잡은 한수영의 얼굴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묻고 싶어.”

두통이 오는 듯, 김독자는 머리를 감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긴?”

“지하철이야. 이제 집에 가야지 우리도.”

그 말을 한 한수영은 어딘가 개운한 표정이었다.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열차. 창 바깥으로 어둠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독자 씨, 괜찮아요?”

김독자를 발견하고 다가오는 일행들. 그곳엔 유상아도, 이현성도, 정희원도, 신유승도, 이길영도, 이지혜도, 장하영도······ 그리고 유중혁도 있었다.

「모두가 무사했다.」

김독자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열차 안에 다른 사람들의 인기척은 없었다. 아마도, 이것은 그들이 올 때 탔던 그 열차인 듯했다.

「우린 이제 정말 무사한 걸까.」

“상처는 치료했어요. [제4의 벽]으로 돌아가면 설화 씨한테 다시 한번 맡겨야 하겠지만······.”

김독자의 맥을 짚던 유상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일행들이 하나둘 다가왔다. 그러나 코앞의 김독자를 보고도, 누구도 선뜻 입을 열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뜻밖에도 먼저 입을 연 것은 유중혁이었다. 그는 김독자에게 다가오는 대신 지하철의 좌석에 삐뚜름하게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우주의 설화들이 풀려나가고 있었다. 엉킨 실타래가 한 올씩 먼지가 되어 날아가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이다.”

수많은 세계선에 존재하는 설화들이 일제히 환한 빛을 흩뿌리며 우주를 밝히고 있었다. 그들이 살아왔던 <스타 스트림>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이 저주하고 원망했던, 그러면서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세계가, 마지막으로 가장 환한 빛을 뿜으며 사라져가고 있었다.

멍한 눈으로 그 광경을 보는 김독자의 손을, 신유승이 꾹 잡았다.

“이제 다 끝났어요.”

뭔가가 벅차올랐는지, 갑자기 이현성이 울음을 터트렸다. 어떤 일이 있어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던 곰 같은 사내가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그런 이현성을 보며 코끝이 시큰해진 정희원이 입술을 깨물었고, 이지혜는 눈물을 떨구기 싫은지 고개를 들었다.

“정말, 끝났다.”

끝났다. 그토록 길고 장대했던 이야기가, 드디어 끝났다.

김독자는 멀어지는 유성우들을 바라보았다.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런 김독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듯, 한수영이 말했다.

“네가 읽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야. 넌 아무것도 몰랐잖아.”

일행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일행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김독자와, 김독자의 설화를 바라보았다.

「읽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던 세계.」

살기 위해 무언가를 읽어야만 했던 어린아이.

그 어린아이에게 그들은 몇 번이나 구해졌다.

「살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읽어야 했던 것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냥 읽기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독자 씨는 직접 그 이야기를 바꾸려 했잖아요. 나는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정희원의 말이었다.

‘멸살법’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세계의 끝에 도달하지 못했던 이.

그녀가 옅게 웃으며 김독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때요. 지금이 원하던 결말 맞아요?”

김독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흐려진 시야 속에서 몇 번이나 눈을 닦아야 했다.

「그가 이룬 세계의 정경을, 스스로 보기 위해서.」

천천히 눈을 뜬 김독자의 망막 위로, 지하철의 까만 유리창이 비쳤다.

그 유리창 위로 일행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치 우주를 배경으로 한 사진처럼.

「그토록 보고 싶었던 세계의 결말.」

“······지금, 보고 있습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신유승과 이길영이 김독자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김독자는 그런 신유승과 이길영을 힘껏 끌어안았다. 누군가가 물었다.

“행복해질 수 있겠죠?”

역을 떠난 열차의 진동만이, 침묵 속에서 간헐적으로 울려 퍼졌다.

아마도, 이 열차는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지나온 역을 다시는 방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 새로운 종착점으로 나아갈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감상에 빠져 있는 사이, 현실적인 질문을 던진 것은 뜻밖에도 이지혜였다.

“······그런데 우리가 살던 세계선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일행들의 시선에, 이지혜가 머쓱하게 볼을 긁으며 말했다.

“그게, 그렇잖아요. 도깨비 왕의 말이 맞다면 이 세계는 ‘가장 오래된 꿈’의 꿈인데, 그 꿈이 끝나버린 거면······.”

실제로 [최후의 벽]이 부서졌을 때, 그들이 살고 있던 세계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그렇다면, 다시 열차를 타고 그 세계로 돌아가도―

[괜찮아. 우리 세계는 정상이야.]

“아, 그렇구나. 역시······ 그럼 다행······ 엥?”

이지혜는 김독자를 보았고, 이현성을 보았으며, 정희원과 유상아를 보았다. 그러나 누구를 보든, 그들 또한 이지혜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대답한 거 누구죠?”

그리고 모두가 동시에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솜털 뭉치 하나가 동동 떠 있었다.

[바앗?]

일행들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에바앗.]

허공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비유는,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들 알고 있었으면서 뭘 놀라?]

*

일행들은 비유에게 설명을 들었다.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세계선은 아직 멸망하지 않았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멈춰 있던 세계의 시간이 다시 쓰여지기 시작했거든. 비록 거대 설화들이 한꺼번에 붕괴하며 세계관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이대로 두어도 자연스레 멸망하기까지 몇천 년은 더 걸릴 거야.]

지하철의 창밖으로, 그들이 살던 세계의 모습이 어렴풋이 비치고 있었다. 굳어 있었던 세계의 시간이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폐허 속에서, 우리엘이 천천히 눈을 떴다.」

「흑염룡이 자신의 꼬리를 만 채 잠들어 있었고.」

「근두운 속에 휘감겨 있던 제천대성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성좌들이 살아있었다.

해상전신도, 고려제일검도······ 모두, 살아 있었다.

비록 예전과 같은 광휘는 잃어버렸지만, 그들은 여전히 세계선 위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런 성좌들을 보며 비유가 말했다.

[<스타 스트림>은 아직 남아 있어. 채널 시스템은 붕괴했고, 성좌들도 예전처럼 강한 힘을 내지는 못하지만, 워낙 커다란 설화였으니까 완전히 부서지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릴 거야.]

몇몇 일행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한숨이었다. 이지혜가 다시 물었다.

“근데 꿈이 끝났는데, 어떻게 세계가 계속되고 있는 거야?”

[거기까진 나도 잘 모른다고 했잖아. 한 번 말하면 좀 알아들어.]

“······뭐, 다행이긴 한데. 근데 너 언제부터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거야? 게다가 버르장머리도 없네. 아저씨! 비유 봐! 저게 징그럽게 지금까지―”

김독자가 비유를 바라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비유가 다시 시치미를 뚝 떼며 입을 열었다.

[아바앗?]

일행들이 실웃음을 터트렸다. 이지혜가 씩씩거리며 뭐라고 외치려는 순간, 김독자가 손을 뻗어 비유를 말없이 안았다.

처음 시나리오가 시작될 때만 해도 작았던 솜털 뭉치는, 이제 한 품에 안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 광경을 보던 유중혁이 말했다.

“······어쩌면 마지막 기적인지도 모른다.”

기적이라니, 유중혁에겐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유중혁이 가장 믿지 않는 단어였으니까.

그럼에도 유중혁의 그 말로 인해, 일행들의 표정이 풀리고 있었다.

“그럼 진짜로 모든 게 해결된 거네요.”

“이제 다 같이 살 엄청나게 커다란 집만 사면 되겠다!”

아이들의 목소리에 한수영이 핀잔을 주었다.

“우리 성운 이제 거지야. 저놈이 마지막 시나리오에서 죄다 탕진했다고.”

“돈은 다시 모으면 되잖아요! 우리가 누군데!”

의기양양하게 외치는 이길영을 보며, 일행들도 웃었다. 그 웃음이 끊어질까봐 불안한 사람처럼, 누군가 재빠르게 물었다.

“다들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그 말에 신유승과 이길영이 서로를 바라보며 외쳤다.

“한강!”

“바다!”

“피자!”

“치킨!”

서로 드잡이질을 벌이는 아이들 사이로,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나, 예전에 살던 곳에 가보고 싶어.”

장하영의 말이었다.

“예전에 살던 곳······.”

그 말에 유상아의 표정이 흐려졌다. 유상아 뿐만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제, 그들이 살았던 곳은 남아 있지 않다. 멸망이 찾아오기 전 그들의 이야기를 간직하던 장소는, 모두 사라졌다.

그런데 마법일까. 갑자기 창밖으로 비치던 정경이 뒤바뀌었다. 우주의 풍경이 흩어지고, 대신 그것을 채운 것은.

“진짜 기적인 건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서울의 풍경이었다.

이름이 사라졌던 노선표 위에 다시 역의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음 역은 ‘홍제’입니다.]

장하영의 걸음이 문쪽으로 움직였다. 부서진 터미널의 정경 너머로, 그녀가 살았던 동네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지하철의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정희원이 물었다.

“아무것도 없을 텐데. 그래도 가볼 거야?”

장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희원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누구나 그렇듯, 결과를 알면서도 확인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그래, 그럼 이따 공단에서 다시 만나.”

열차의 문이 열리고, 장하영이 걸어나갔다. 현실감이 없는 표정으로 주변을 보던 장하영이 불현듯 할 말이 생각났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김독―”

그러나 장하영의 말이 들려오기도 전에, 열차는 다시 출발했다.

그다음으로 입을 연 것은 물끄러미 노선표를 보던 이지혜였다.

“나도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요.”

그녀가 가려는 곳이 어디인지 안다는 듯, 정희원이 물었다.

“언니가 같이 가줄까?”

“혼자 갈게요. 그러고 싶어요.”

싱긋 웃는 이지혜의 표정은 가벼웠다. 머쓱하게 올라갔던 정희원의 손이 다시 내려갔다.

“금방 다시 봐요.”

이지혜가 내렸다. 멀리서, 그녀가 다니던 학교의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다시 지하철의 문이 닫혔다. 정희원이 물었다.

“또 어디 가고 싶은 사람?”

그러나 더 이상 대답하는 일행들은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돌아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하지만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유상아가 물었다.

“나머지는 모두 같이 내릴 거죠?”

“이 열차 환승 안 되나? 종로에서 내려서 걸어가야겠네.”

한수영이 투덜거리며 노선표를 살폈다.

그들이 향할 곳은 광화문. [공단]이 있는 장소였다.

“사람들한테 할 이야기나 다들 생각해 둬. 정말 다 알려줄 수는 없잖아.”

[다음 역은 ‘종로3가’입니다.]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말했지만, 정말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돌아가면 그들은 새로운 일상과 마주해야 할 테니까.

「열차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아이들의 손을 잡은 유상아가 “으쌰” 하며 플랫폼 바닥을 내딛었다.

뒤를 돌아보자, 이현성과 정희원도 풀쩍 뛰어 안전선 밖에 섰다.

“뭐해요? 안 오고.”

그리고 세 사람이 남았다.

“김독자.”

한수영과 유중혁 둘 중 누가 먼저 그를 불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수영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말을 이었다.

“같이 내릴 거지?”

[누군가가 스킬 ‘거짓 간파 Lv.???’를 발동―]

그러자 김독자가 씩 웃었다.

“그럼. 내려야지.”

[‘거짓 간파’가 ‘김독자’의 말이 진실임을 확인했습니다.]

“가자.”

한 걸음 나아간 김독자가 둘의 등을 팡, 하고 쳤다. 그러자 두 사람이 동시에 주춤거리며 앞으로 밀려났다. 인상을 쓴 한수영이 김독자를 향해 뭐라고 중얼거렸고, 유중혁도 칼자루를 쥔 채 눈을 부라렸다. 김독자가 말했다.

“······이제 시나리오 끝난 거 알지? 지금부터 도검 휴대는 불법―”

“멍청한 소릴 하는군.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김독자.”

“맞아, 아직 tls123이 누군지도 알아내지 못했고―”

서서히 문이 닫히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목소리 사이로, 새로운 세계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 김독자가 즐거운 듯이 웃었고, 아이들이 떠들었다.

새로운 세계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

문이 닫히려는 마지막 순간, 한수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아직 그곳에 무언가를 남겨두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찜찜하고 묘한 얼굴로.

그러자 유중혁도 함께 뒤를 돌아보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김독자뿐이었다.

서로 눈이 마주친 한수영과 유중혁이 동시에 으르렁거렸다.

“뭘 보냐?”

“네놈이야 말로―”

그리고 문이 닫혔다. 침묵 속에서 지하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이야기를 맞이한 역을 떠나, 다시 무한의 궤도로 진입하고 있었다. 노선표에 적혀 있던 역들의 이름이 하나둘 사라져갔다.

멀리서, 투닥거리는 유중혁과 한수영의 모습이 보였다. 밝게 웃으며 김독자의 손을 잡는 아이들과, 차양막을 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유상아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정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4의 벽’이 물었다.

「정 말 괜 찮 겠 어?」

다음 순간, 허공에서 투명해져 있던 내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실체화된 내 몸이 이내 지하철 위에 완전히 드러났다.

[현재 당신이 보존한 기억은 ‘51.00%’입니다.]

나는 쓰게 웃었다.

“이 방법밖에 없었잖아.”

허공을 올려다보자, 밀려 있던 메시지 로그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당신은 ‘최종 시나리오’를 클리어했습니다.]

[당신은 이 세계의 비밀을 모두 아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현재 ‘가장 오래된 꿈’이 부재중입니다.]

[꿈이 계속되지 않으면 세계의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오직 나에게만 보이는 메시지였다.

[당신은 ‘가장 오래된 꿈’의 자리를 대신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꿈을 계속 이어가시겠습니까?]

이 꿈을 멈춘다면, 세계는 영원히 동결될 것이다.

「잔혹한 일이었다. 가까스로 행복해질 수 있게 된 세계가, 영원히 멈춰버리게 된다는 것은.」

비극으로 시작되었으나, 이미 태어난 우주였다.

그럼에도 그 우주에서 행복을 찾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은 마침내 자신들이 원하는 역에 도착했다.

「유 승이 와 길 영이 가 슬 퍼할 거 야」

“알아.”

「너 는 그 들을 기만했 어」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어.”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일부는, 분명 그들과 함께 내렸으니까.”

언젠가, 1863회차에 다녀오며 내가 ‘은밀한 모략가’에게 받았던 스킬.

「【스킬은 어떻게 하겠는가? 새로운 스킬은 획득하지 못했을 텐데.】」

「“스킬은 획득하지 못했습니다만······ 이런 형태의 보상 수령도 혹시 가능합니까?”」

「【가능하다.】」

그때 내가 받은 것은, 엄밀히 말하면 ‘스킬’은 아니었다.

[현재 ‘책갈피’ 스킬이 발동 중입니다.]

[‘가장 오래된 꿈’의 가호로 해당 스킬의 활성화 시간이 무제한으로 변경됩니다.]

[현재 6번 책갈피가 활성화 중입니다.]

[6번 책갈피에 등재된 등장인물은 ‘거짓 종막의 연출가’입니다.]

거짓 종막의 연출가, 1863회차의 한수영.

[해당 인물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상당히 높습니다!]

[전용 스킬 ‘아바타 Lv.???’를 활성화 중입니다!]

[당신은 49.00%의 기억을 사용해 아바타를 생성하였습니다.]

[현재 세계선의 영향으로 아바타와의 연결이 단절되어 있습니다.]

[해당 아바타는 자율적인 의사를 가지고 활동할 것입니다.]

“······이게 맞는 거야.”

나는 희미해진 기억의 일부를 더듬으며 비틀거렸다.

‘또 다른 나’는, 자신이 아바타인지 모르는 채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일행들과 함께 커다란 집에서 살아갈 것이다.

길영이와 바다를 가고, 유승이와 피자를 먹을 것이다. 이지혜가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볼 것이고, 이현성과 정희원에게 꽃다발을 안겨줄 것이다.

유상아와 함께 집을 고르고 다닐 것이고, 유중혁과 tls123을 찾아다닐 것이다.

한수영이 쓴 소설을 읽을 것이다.

나는 그것으로 구원을 받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나는 구원을 받는 쪽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그런 그들을 위한 나의 작은 속죄다.

「후 회 하 게 될 거 야 너 는 그 들을 다시 는 만날 수 없어」

나는 말 없이 웃었다.

“하지만 볼 수는 있잖아.”

아주 오래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거면 돼.”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열차의 후미를 바라보았다.

이제, 일행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항상 그 문장이 싫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누구보다 그 문장이 현실이기를 바랐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에 도달했습니다.]

[당신은 ‘가장 오래된 꿈’이 되었습니다.]

스러지는 먼 불빛이 나를 기억하는 성좌들처럼 보였다.

그렇게, 나의 끝나지 않는 항해가 시작되었다.

[당신의 ■■는 ‘영원’입니다.]





< Episode 99. 가장 오래된 꿈 (5) > 끝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싱숑입니다

오늘로 '전지적 독자 시점'의 본편이 끝났습니다.

물론 모든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고, 아직 에필로그가 남았습니다.

본래 에필로그는 바로 이어질 예정이었으나, 도저히 지금 상태로는 에필로그에 예정되어 있는 이야기들을 온전한 상태로 전달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때문에 한 달 정도의 요양 기간을 가지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조금이나마 회복된 심신으로, 더 좋은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사람으로 돌아오려 합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의 에필로그는 한 달 뒤인 12월 15일, 오후 7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신 독자님들께는 죄송하지만...에필로그는 유료입니다

독자님들이 계셨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Epilogue 1. 제로의 세계



새카만 창 너머로 은하의 정경이 비쳤다. 나는 차가운 창가에 이마를 기댄 채, 그 어두운 풍광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뒤를 돌아보면, 여전히 그 자리에 그들이 있을 것만 같았다.

「김독자는 마침내 울음을 그쳤다.」

“안 울었어, 자식아.”

「거짓말도 했다.」

“······그 내레이션 언제까지 할 건데? 이제 이야기는 다 끝났어.”

[제4의 벽]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약간의 힘을 얻어, 나는 창가의 후미를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이제 그곳에 내가 보고 싶은 것들은 비치지 않는다. 내가 살았던 지구는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그곳에 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바타’ 스킬이 활성화 상태입니다.]
[세계선 분리로 인해 ‘아바타’와의 연결이 해제되었습니다.]
[당신의 아바타는 임의의 자아 프로세스로 삶을 계속할 것입니다.]

49 퍼센트의 나.

[해당 아바타는 당신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입니다.]

녀석은 자신이 아바타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저 김독자로서 일행들과 이후의 삶을 살아가겠지.

「왜 4 9 퍼센트 야?」

“50퍼센트로 딱 나누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

「왜 4 9 퍼센트 야?」

똑같은 질문. [제4의 벽]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다.

“이미 알고 있잖아.”

「너 답 지 않 았 어」

“아니, 이게 나 다운거야.” 

한심하고, 철없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기적인 ‘김독자’다운 일.

「2%.」

그 숫자는 내가 일행들을 더 잘 기억하고 있다는 증명이었고, 내가 아바타보다 일행들이 기억하는 ‘김독자’에 가깝다는 기만이었다. 
누구도 이곳의 나를 알지 못하더라도, 그리하여 일행들의 이야기가 끝이 나더라도······ 적어도 나는, 영원히 그들을 잊지 않을 것이라는 맹세였다.

「후 회해?」

덜컹거리는 지하철의 가벼운 소음이 들려왔다. 휑한 지하철의 정경. 누구도 잡아주지 않는 손잡이들이 맥없이 흔들렸다. 

「쓸 쓸 해하 지 마」

“쓸쓸하지 않아.”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런 상황은 전에도 겪었다. ‘구원의 마왕’이 되고, 이야기의 지평선에 처음 떨어졌을 때도 그랬다. 어쩌면 그때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지금 나는 시나리오 이탈 패널티 따위는 입지 않으니까.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제, 다시는 일행들을 만날 수 없다.」

“······나는 계속 이 지하철에 머물러야 하는 거야?”

「머 물 러?」

“밖으로 나갈 수는 없는지 묻는 거야.”

[제4의 벽]은 그게 무슨 뜻인지 가늠하는 듯 잠시 침묵하더니 대답했다.

「이 곳에 ‘출입’의 개념은 없 어.」

“뭔 소리야?”

「여 긴 꿈 의 성소(聖所). ‘가장 오래된 꿈’이 잠드 는 곳.」

녀석의 말을 들으며, 나는 천천히 깨달았다.
‘멸살법’과 관계된 모든 세계선은 ‘가장 오래된 꿈’의 꿈이다.

「모든 세계는 이곳에서 태어난 꿈.」

스팟, 하고 지하철의 모든 창문이 일제히 화면으로 뒤바뀌었다.
처음에는 지하철의 특정 구간에 삽입된 타스 광고인 줄 알았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시나리오의 풍경들. 하지만 광고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츠츠츠츠츠······.

아득한 두통. 우주에 흩어진 세계선의 풍경이 흐르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비로소 실감이 났다.

「그는 ‘가장 오래된 꿈’이었다.」

나는 떨리는 걸음으로 창을 향해 다가갔다. 수면처럼 가볍게 떨리는 화면은 언제든 내가 망가뜨릴 수 있을 것처럼 연약해 보였다.

「김독자는 두려웠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세계의 모든 ‘이야기’는 독자가 읽기에 비로소 존재한다.

「그가 보지 않으면, 세계는 멈춘다.」

끊임없이 세계를 바라보고, 꿈을 꾸는 것.

「그것이 바로 ‘가장 오래된 꿈’이 짊어진 무게.」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모두 내가 선택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보다는, 볼 수 있는 쪽이 당연히 낫다.
게다가 나는 모든 세계선을 관음할 수 있는 궁극의 성좌가 된 셈이니까······.

“제4의 벽.”

「왜」

“‘가장 오래된 꿈’도 성좌의 역할을 할 수 있었잖아. 그치?”

전대의 ‘가장 오래된 꿈’은 내가 살았던 회차에 ‘성좌’의 자격으로 메시지를 보냈었다. 비록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무의식이었지만, 그 무의식이 시스템에 개입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맞 아」

“그럼 내가 살았던 세계선에 다시 ‘성좌’로 접선하는 것도······.”

「가 능할 거 라고 생 각 해?」

“안 되냐?”

「되고 안 되고 의 문 제가 아 니야」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잠시 생각하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 하면 안 되겠지. 알고 있어.”

나는 나와 일행들이 어떤 고생을 하며 이 결말까지 도달했는지를 떠올렸다.
성좌들을 없애기 위해서, 〈스타 스트림〉의 시스템을 없애기 위해서 우리는 싸워왔다. 그리고 해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다시 〈스타 스트림〉을 부활시킨다면······.

「다행 히 하 고 싶어 도 못 하는 상 태 야」

“왜? 나는 이제 ‘가장 오래된 꿈’이잖아. 내가 상상하면 그대로 실현되는 거 아냐?”

「가 장 오래 된 꿈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통 제 할 수는 없 어」

츠츠츳, 하고 가볍게 튀어 오르는 스파크. 
아무래도 지금의 ‘나’는 ‘가장 오래된 꿈’으로서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상태인 듯했다.

「아 직 너 는 꿈 에 대 한 장악 력이 부족 해」

······하긴. 그리 쉽게 통제할 수 있다면, ‘꿈’이라 불리지 않겠지.
언젠가는 가능해질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잠시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럼······ 보기만 하는 건?”

순간, 내 안에 깃든 뭔가가 꿈틀거렸다. 
내가 지배하지 못하는 ‘나’. 거대한 무의식이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무의식은 다른 세계선을 향해 뿌리를 뻗었고, 그 뿌리를 통해 세계의 이야기들을 길어 올렸다.
암전된 시야 속에 세계선의 풍경이 만화경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그가 너무나 그리워하는 세계의 정경.」

멀리서 [공단]의 불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곳으로 향하는 일행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누구의 얼굴에도 어둠은 보이지 않았다. 어깨를 나란히 한 사람들의 중심에, 흰 코트를 입은 또 다른 김독자가 서 있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호흡이 가빠왔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밀려오는 구토감을 참은 채로, 나는 고개를 흔들며 눈을 떴다. 
현기증 속에 바닥을 짚었을 때, 나는 홀로 지하철에 남아 있었다.

「왜 ? 보 기 싫 어?」

보고 싶었다.
일행들의 행복한 얼굴을, 마침내 시나리오의 지옥을 벗어난 그 표정들을. 
내가 너무나 원했던 그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하지만 볼 수가 없었다.
그걸 보고 나면, 나는 반드시 돌아가고 싶어질 것이다.

“······내가 봐야만 하는 거지? 내가 보지 않으면, 세계는 움직이지 않는 거지?”

「너 는 이 미 보 고 있 어」

“뭐?”

「의식 은 무 의식 의 일 각일 뿐. 너 는 이 미 대 부분 의 세계 선들 을 보고 있 어」

“그럼······.”

「무리 할 필요 없 어 김 독 자」

[제4의 벽]은 나를 향해 안쓰럽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 무 것도 하 지 않아 도 돼. 네 무의 식 이 이미 보고 있 으니 까」

그저, 모든 것을 잊고 눈을 감아도 된다. 어떤 죄책감도 없는 순수한 아이처럼, 꿈속에서 뛰어놀기만 해도 좋다. 비극을 다시 곱씹으며 상처를 받을 이유는 전혀 없다고, [제4의 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독자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럴 수는 없어.”

나는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저 모든 세계선은 나의 죄업이었다.
내가 만들었고, 내가 파멸시켰다.

“나는 봐야만 해.”

그리고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였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계선들이 창 위로 떠올랐다. 
‘멸살법’의 무수한 세계선들. 내가 읽어서 태어난 누군가의 비극들이 그곳에 전시되고 있었다.

······어쩌면, 일행들의 이야기보다 먼저 보아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지, [제4의 벽]이 말했다.

「아 주긴 밤이 될 거 야, 김독 자」

그렇겠지. 나는 웃었다.

“걱정 마. 잘할 수 있으니까. 이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거든. 죽을 때까지 즐겁게 볼 수 있어.”

「언 젠가 네가 제 일 좋아 하는 이 야기를 증 오하 게 될 지도 몰 라」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화면 속에 떠오르는 정경을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것이, 내가 치를 대가겠지.”

천천히 창을 누르자, 화면 위로 내 지문이 새겨졌다.

[세계가 당신의 시선을 받습니다.]
[당신의 의식에 하나의 세계선이 생명력을 얻습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몸은 바닥으로부터 한 뼘 반 정도 두둥실 떠올라 있다. 마치 유체이탈이라도 한듯한 느낌. 
웅성임에 깜짝 놀라 곁을 돌아보니,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내가 보이지 않는 듯 내 몸을 통과해서 지나갔다. 
하나 같이 피로에 젖은, 퇴근길 직장인들의 얼굴.

······이곳은.

주변을 둘러보자 주황색의 3호선 라인이 보였다. 놀랍게도, 나는 지하철의 플랫폼 위에 서 있었다. 천장에 설치된 LED 패널 위로 현재 시각과 지하철 정보가 떠오르고 있었다.

[PM 6:55]

시나리오 시작까지 정확히 5분 전.
곧이어 안내음과 함께 불광행 열차가 도착했다. 
하나둘 열차에 오르는 사람들.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을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을 말린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었다. 어디에 있든 시나리오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과 함께 지하철에 올라타 그 모든 비극을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곳에, 김독자가 아주 잘 아는 얼굴이 있었다.」

불광행 3434열차. 3707칸.
멍하니 지하철 창밖을 내다보는 사내가 그곳에 있었다. 
나는 잠시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모든 세계선은 결국 한 사람의 회귀를 통해 반복된다. 그러니 이야기의 시작에서 놈을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세계의 주인공.」

당연하게도, 유중혁은 나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무심한 눈길로 지하철 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곧 시나리오를 앞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침착한 얼굴. 그런 녀석을 보며 나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넌 정말 대단한 놈이구나.

이미 시나리오의 끝을 본 나도, 이 풍경에 다시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살이 떨릴 지경인데. 너는 이런 순간을 몇십 번, 몇백 번이나 견뎠겠지.
정차했던 지하철이 움직이고,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내가 알고 있는 대로라면, 곧 ‘그것’이 시작될 것이다.

「3회차에서, 유중혁은 칸 안의 모든 사람을 죽이고 시작한다.」

나는 내가 알고 있던 3회차의 시작을 떠올렸다. 여기가 몇 회차인지는 몰라도, 시작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주변을 관찰하자, 출입문 근처에서 수상한 거동을 보이는 한 사내가 포착되었다.

“흐, 흐으······.”

사내에게서 흘러나오는 간헐적인 신음에 몇몇 사람들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그러진 표정의 사내는 히죽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품속에 숨겨뒀던 수제 폭탄과 라이터를 꺼냈다.

「유료화가 시작되던 그 날. 유중혁이 타고 있던 3707칸에 함께 탄 이가 있었다.」

“···저거 뭐야?”
“이봐, 당신!”

「지하철 테러범, 최한규.」

깜짝 놀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사내의 손에서 탁탁 튀기는 불똥에 기겁한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리고 유중혁은, 그런 사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야, 뭐하는 거야. 빨리 저거 빼앗으라고.

내가 알고 있는 전개대로라면, 이미 유중혁은 지하철에 타는 순간 최한규를 제압하고 폭탄을 빼앗았어야 했다. 그런데 유중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일까, 침착하다고 생각했던 유중혁의 표정은 희게 질려 있었다.

끼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차가 암전된 것은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튀어오르는 불꽃을 보며, 사람들의 비명은 절규로 변했다.

뭔가가 잘못되고 있었다.

「왜, 유중혁이 움직이지 않지?」

잠깐, 설마 이거―

[PM 7:00]

틱, 하는 소리와 함께 세계의 법칙이 바뀌고 있었다.

[제 8612 행성계의 무료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되었습니다.]

테러범이 피운 환한 불꽃에 유중혁의 흰 얼굴이 비쳤다.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동공. 유중혁은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당황스럽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머릿속에서 멸살법의 페이지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건 몇 회차지?
900번대에서 맛이 갔을 때인가? 아니면 1200번대에서?
대체 어떤 회차에, 이런 얼빠진 유중혁이―

[#BI-7623 채널이 열렸습니다.]
[성좌(星座)들이 입장합니다.]

“흐, 흐흐, 흐으으······!”

폭탄을 쥔 채 주변을 노려보는 테러범의 모습에, 사람들이 다른 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화신 ‘최한규’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유중혁은, 여전히 가만히 있었다. 내가 아는 유중혁이 이렇게 행동할 리 없었다. 처음부터 완벽한 쇼맨십으로 상황을 제압하는 것이 바로 유중혁이었다. 그런데 테러범의 위협 앞에서, 유중혁은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한 번도······? 

뇌리에 번개가 내리치는 것 같았다.
그렇구나, 이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무수한 페이지들이 앞으로 넘어가더니, 이내 책이 덮였다. 
‘멸살법’ 내에서도 그저 회상으로 처리되었던 회차. 
어떤 이야기는, 쓰여지지 않은 곳에서 시작되었다.

“사, 살려······ 살려주세요!”
“아아아아악!”

「이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은 ‘멸살법’의 시작.」

이 세계선은, 내가 읽지 못한 유중혁의 0회차였다.	

===

유중혁은 곁의 남자가 누르는 포털 사이트의 기사를 보고 있었다.

―프로게이머 유중혁, 언제까지 잠적할 것인가?

팀 내의 불화와, 감독의 갑질로 인한 횡포. 남들은 알지 못하는 몇 가지 사정이 한꺼번에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이었고, 생각해봤자 답이 없는 일이었다. 

―집 주소를 찾았습니다.

스마트폰에 떠오른 문자 메시지. 얼마 전 흥신소에 의뢰했던 그의 부모님을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모처럼 밖에 나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유중혁은 자신의 근원을 알고 싶었다. 그를 낳은 것은 누구인지, 그를 버린 것은 누구인지. 성공가도를 달리는 그에게, 여동생을 떠맡긴 것은 누구인지.

유중혁은, 그것이 너무나 알고 싶었다.

―응? 여기 그런 사람들이 살았었나?
―에잉, 나도 몰라. 언제적 일인데.

막대한 돈을 써서 흥신소에 의뢰를 넣었지만, 돌아온 것은 빈 집의 주소뿐. 흥신소에서도 더 이상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했다. 
마치 이 세계에서 증발한 것처럼 사라진 그의 부모.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부모에 대한 기억도, 어린 시절의 마땅한 추억도 없이, 28세의 유중혁은 홀로 존재하고 있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성인으로 조형된 존재처럼. 
덜컹거리는 3호선 전철 안에서, 유중혁은 처음으로 철학적인 고민에 직면했다.

‘나는······ 대체 누구지?’

그것이 유중혁이 곧바로 행동하지 못한 이유였다.

“흐으······!”
“으아아아아아아!”

소란을 알아챈 것은 조금 후의 일이었다. 
꾀죄죄한 턱수염을 가진 거한. 그의 손에 쥐어진 수제 폭탄과, 틱틱거리는 라이터의 줄날 바퀴.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치고 지나간 후에야, 유중혁은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깨달았다.

「테러」.

지하철이 암전된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열차가 급정거하며, 주변이 어둠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유중혁은 팔뚝의 솜털이 비죽 솟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테러인가? 정말 말로만 듣던 테러가,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대피는 어디로?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아니면―

[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그런 유중혁의 고민은, 허공에서 나타난 작은 CG 덩어리와 함께 조심스레 소멸했다.

[이 인사도 매번 하려니까 지치는데······ 자, 이 상황은 영화 촬영도, 테러 사태도 아닌······ 응?]

훗날 ‘도깨비’라고 자신을 소개하게 되는 녀석들. 
그 미지의 존재가 허공에서 열차 안의 사태를 보며 대소하고 있었다.

[뭐야, 이거? 하하하핫! 성좌님들. 여기 좀 보세요! 시나리오도 안 나왔는데 이미 뭔가 재밌는 게 벌어지고 있네요!]

나른하고 잔혹한 목소리로 도깨비가 웃었다.

[이 칸은 아주 기대가 되는군요. 부디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여 주세요.]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메인 시나리오 # 1 ―가치 증명〉

분류 : 메인
난이도 : F
클리어 조건 : 하나 이상의 생명체를 죽이시오.
제한시간 : 30분
보상 : 300코인
실패시 : 사망

+

그리고 지옥이 시작되었다.


*


······비형 자식, 이땐 좀 귀엽네. 이런 적도 있었지.
열차 안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을 들으며, 나는 때아닌 감회에 젖어 있었다.

「지금 나랑 〈스트림 계약〉을 맺잔 말입니까?」

녀석을 처음으로 만나고, 전속 계약을 나눴던 때가 어제 일 같았다. 
그때는 정말 운이 좋았지. 그때 계약에 실패했다면······.

「“김독자. 너와 나는 동료가 아니다.”」

그날, 비형은 죽지 않았겠지.

「“네 설화를 끝까지 보고 싶었다.”」

아마 이 고통은, 저기서 떨고 있는 ‘유중혁’이 앞으로 천 번이 넘는 회귀를 겪으며 느끼게 될 감정일 것이다.

“······시나리오? 이게 대체 뭐야?”

첫 번째 시나리오를 받은 3707칸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허공의 패널에서 방영되는 다른 지역의 난투들. 서로를 죽이지 않으면 죽는 시나리오.

“게, 게임······ 이건 게임이다!”

테러범 최한규가 외치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테러범 최한규. 그에 관한 정보는 ‘멸살법’에서 유중혁의 회상을 통해 언급된 적이 있었다.

「최한규가 살아나면, 놈은 훗날 ‘폭살괴마’로 진화하게 된다.」

허리춤에서 망치를 꺼낸 최한규가, 바로 곁에 있던 중년인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허망하게 무릎이 꺾이는 중년인.

“이, 이렇게 하면······.”

[화신 ‘최한규’가 ‘최초의 살해’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눈앞에 쏟아지는 코인을 보며, 최한규가 각성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스타 스트림〉에 가장 빠르게 적응하는 것은 현실 세계의 부적응자들이었다.

“다, 다들 봤어? 바, 방금 내가.”
“으아아아! 살인! 살인이다!”

기겁하며 물러서는 사람들을 보며, 최한규의 고개가 갸웃했다.

“다, 다들 왜 가, 가만히 있어? 나, 나만 이상한 것 같, 같잖아.”
“오지마!”
“호, 혹시. 이, 이게 필요해?”

그는 사람들을 향해 히죽 웃더니, 자신의 허리춤에 걸려 있던 공구들을 사람들을 향해 던졌다. 그는 다시 한번 스패너를 휘둘러 이미 죽은 남자의 등을 푹푹 찍었다.

“쉬, 쉬워. 이, 이렇게. 이렇게 하면.”

남자의 등에서 흥건한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모두 부, 부자가 되는 거야.”

허공의 타이머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잔여 시간이 감소했습니다.]
[현재 남은 시간 10분.]

유중혁은 자신의 발치까지 굴러온 스패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최한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그냥 내가 다, 주, 죽여 줄까?”

그리고 잽싸게 손을 뻗은 사내 하나가, 최한규가 던진 망치를 손에 넣었다.

“시, 시발······ 나도 모르겠다!”
“아저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사내는 최한규가 던진 스패너를 쥐고 곁의 사람들을 무차별로 가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유중혁이 살아남았던 3707칸의 현장이었다.」

“미,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으아아아아아!”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속에, 사람들은 현실을 깨닫고 있었다.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서로를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해당 칸의 정경에 만족합니다!]
[극소수의 성좌들이 화신 ‘최한규’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수식언을 밝히지 않은 한 성좌가 화신 ‘최한규’에게 100코인을 후원합니다.]

사람들을 향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최한규. 
그리고 나는, 그런 최한규의 곁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김 독 자」

나는 최한규의 목덜미에서 천천히 손을 떼었다.

‘······알고 있으니까 걱정마.’

나는 이 이야기를 바꾸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허리를 숙인 유중혁이, 최한규의 품에서 떨어진 스패너를 주워들고 있었다.

유중혁의 표정에 어린 고뇌가 여실히 느껴졌다.

누군가를 죽이기로 마음먹은 사람의 표정.
하지만 왜일까, 그 표정은 내가 알고 있던 유중혁과는 달랐다. 내가 아는 유중혁은 누군가의 배신에 치를 떠는 녀석이었다. 사람을 쉽게 믿지 않고, 쉽게 동료를 만들지 않는 유중혁. 늘 최선의 길을 도모하고, 어차피 배신할 사람들이라면 미리 죽이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 유중혁.

「그랬기에, 3회차의 유중혁은 같은 칸의 사람들을 망설임 없이 몰살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유중혁은, 3회차가 아니었다. 
4회차도, 5회차도, 1863회차도 아니었다. 

「그는 0회차였다.」

0회차의 유중혁. 
그의 발이 달리기 시작했다. [주작신보]도 [바람의 길]도 사용할 수 없는 발.
타깃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바닥에 엎드려 몸을 떨고 있는 대학생, 노약자석 옆에 숨은 중년인. 다른 사람을 공격하느라 뒤돌아볼 틈이 없는 회사원. 
유중혁은 그 모든 이를 지나쳐 달렸다. 그리고

「이 칸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적을 타깃으로 삼았다.」

“으흐······ 흐?”

허공에서 날아드는 스패너를 보며, 최한규가 비릿하게 웃었다. 가뿐하게 물러선 최한규의 허리춤에서 날카로운 서바이벌 나이프가 튀어나왔다. 스팟, 하는 소리와 함께 유중혁은 간발의 차이로 칼날을 피했다.

「왜 유중혁은 그런 선택을 했는가.」

나는 모른다. 저토록 겁에 질린 녀석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최한규는 아직 여러 개의 연장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수제 폭탄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유중혁이 가진 것은 어린애 팔뚝만한 스패너 하나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0회차의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지만, 이곳에서 유중혁은 죽지 않는다. 
그 모든 비극을 겪기 전까지, 그리하여 마침내 저 아득한 회귀의 굴레로 들어가기 전까지, 유중혁은······ 죽지 않을 것이다.

[화신 ‘유중혁’이 특성 ‘프로게이머’를 개화합니다!]

녀석의 전용 특성이 개화하고 있었다. 나도 잘 알고 있는 특성이었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을 게임처럼 수치화해 판단하는 스킬. 마치 게임 아바타를 움직이듯, 자신의 몸을 통제하는 스킬.

유중혁의 스패너가 최한규의 팔목에 명중했다. 짧게 비명을 지른 최한규의 품에서 수제 폭탄이 굴러떨어졌다.
당황한 최한규의 목을 향해, 유중혁의 스패너가 움직였다.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유중혁의 재능으로 인해 계산된 완벽한 역습. 
하지만 그런 유중혁도, 단 하나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화신 ‘최한규’가 900코인을 ‘체력’에 투자합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세계의 시스템이었다.

“아, 아프, 네.”

최한규의 목은 검붉은 자국이 남았지만 부러지지 않았다. 
근육을 부풀린 최한규가 유중혁의 목덜미를 잡았다. 새파랗게 질린 유중혁의 몸이 허공에 매달렸다.
유중혁의 멱살을 틀어쥔 채, 최한규가 다른 손으로 망치를 꺼내 들었다. 

“죽, 어.”

그 순간, 유중혁은 바닥에 굴러떨어진 ‘수제 폭탄’을 바라보았다. 
나는 유중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달았다. 
유중혁이 손에 쥔 스패너를 던진 것과, 내가 움직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느릿하게 날아오는 스패너가, 정확히 수제 폭탄의 중심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폭탄이 터져도 유중혁은 죽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읽은 것이 맞다면,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왜 이렇게, 내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일까.

‘제4의 벽.’

허공에서 츠츠츳,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말을 이었다.

‘이 세계에 유중혁의 배후성은 존재하는 거야?’

「존 재 해」

이 세계에는 ‘가장 오래된 꿈’이 있다. 
나보다 더 오래전에 ‘가장 오래된 꿈’이 된 존재. 어린 시절의 나. 혹은 ‘어린 시절의 나’로 추정되는 무언가.

‘그런데 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

이상한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나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나리오의 모든 것. 단 하나의 화신에서부터, 저 하늘을 뒤덮은 모든 성좌들까지. 
그런데, 단 하나만은 느낄 수 없었다.

‘가장 오래된 꿈은 지금 어디 있는 거야?’

[제4의 벽]은 대답이 없었다. 
회전하며 날아온 유중혁의 스패너가, 이제 수제 폭탄의 바로 목전에 도달해 있었다.

‘설마······.’

「‘가장 오래된 꿈’은 어떻게 0회차의 유중혁과 계약할 수 있었는가.」

머릿속에서, 그동안 쌓아온 의문들이 폭발하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꿈’은 ‘멸살법’을 통해 꿈을 꾼다.」

어린 시절의 나는 ‘멸살법’을 읽고 이 세계를 상상했다.

「그리고 ‘멸살법’은, 유중혁의 3회차부터 시작하는 이야기였다.」

그 녀석이, ‘멸살법’의 0회차를 제대로 상상할 수 있었을까?
원작에는 없는 이야기를, 읽지 않은 세계를 그릴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유중혁의 0회차에 나타났던 ‘배후성’은 대체 누구인가.」

폭탄이 터졌다. 비산하는 조각들이 최한규의 등에 꽂혔고, 서로를 난도질하는 사람들의 육신에 꽂혔다. 굉음과 함께 지하철의 천장이 무너지고 있었다. 파편 조각 중 몇 개는, 정확히 유중혁의 심장과 목을 노리고 쇄도했다.

츠츠츠츠츳!

[당신은 ‘최후의 벽’의 주인입니다.]
[세계선에 간섭하기에 당신의 ‘장악력’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세계선의 개연성이 당신에게 대항합니다!]

나는 개연성을 무시하고 날아드는 파편 조각을 움켜쥐었다. 손끝에 감도는 맹렬한 열감과 함께, 조각이 손안에서 파스스 흩어졌다.

[세계선이 알지 못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발동합니다!]
[세계가 당신의 간섭을 눈치챘습니다!]

「그 순간, 유중혁이 고개를 들었다.」

쓰러진 최한규의 밑에서 빠져나온 유중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유중혁은 자신의 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누구······?”

[메인 시나리오 #1 – 가치 증명이 종료되었습니다.]
[기본 클리어 보상으로 3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채널 이용 수수료로 100코인이 감산되었습니다.]
[추가 보상 정산이 시작됩니다.]

시나리오 정산과 함께, 사람들의 머리가 폭발했다. 비산하는 혈흔 속에서, 나는 말없이 유중혁을 내려다보았다.
멀리서 신이 난 비형의 목소리와, [제4의 벽]의 경고성이 들려왔다. 개연성을 의심하는 성좌들의 메시지도 들렸다. 
그리고 유중혁은,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메시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후 선택’이 시작됩니다!]

+

〈배후(背後) 선택〉

―당신의 배후를 선택하세요.
―선택한 배후는 당신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줄 것입니다.

1. 술과 황홀경의 신
2. 손톱을 먹는 쥐
3. 심연의 흑염룡

+

[새로운 성좌가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새로운 성좌가 ‘배후 선택’에 참가합니다!]

+

4. 구원의 마왕

+

===

[현재 해당 회차에는 ‘덮어쓰기 제약’이 걸려 있습니다.]
[현재 해당 세계선의 저작권자가 부재중입니다.]
[당신은 ‘최후의 벽’의 주인으로서 저작권자를 대리할 수 있습니다.]
[‘덮어쓰기’를 실행하여 세계관에 간섭하시겠습니까?]

허공에 일제히 떠오른 경고 메시지. 
그와 거의 동시에 들려오는 [제4의 벽]의 목소리.

「김 독 자」

‘······알고 있으니까 자꾸 무섭게 부르지 마.’

[제4의 벽]이 무슨 말을 할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또 정해진 과거를 바꾸는 건 의미가 없다느니 하는 소릴 늘어놓겠지.

「······.」

허공에서 나를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애써 그것을 무시했다.
본래의 0회차가 정확히 어떤 전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제4의 벽]의 도서관에서 얼핏 읽은 0회차의 문단이 사실이라면······ 0회차의 유중혁은 후반까지 배후성을 갖지 않는다.

그는 이 회차에서 이설화를 잃고, 이지혜를 잃는다.
간신히 만난 소중한 이들을 잃고.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간절히 생각하게 된다.

「‘만약, 내게도 ‘배후성’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시스템 메시지를 읽는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이 회차를 통해서, 유중혁의 회귀는 시작될 것이다.
무수한 회귀를 반복하여 ‘영원불멸의 지옥도’를 걸어갈 것이다.

「이 회 차를 바꾼 다 고 해서······.」

‘은밀한 모략가가 살았던 과거가 사라지지는 않겠지. 알고 있어.’

내가 이 세계선을 바꾸어도 앞으로 예정된 비극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유중혁은 1회차를, 2회차를, 3회차를, 다시 1863회차를 살아갈 것이다. 
‘은밀한 모략가’가 될 것이고. 나를 증오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될지라도.

‘이 회차에서는, 내가 아닌 가장 오래된 꿈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아.’

아마도 그것은 어린 시절의 내가 유중혁의 0회차를 알지 못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적어도 이 세계선에 한하여 나는 그 녀석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세계선에서 유중혁의 배후성이 될 수 있다.

「그 녀석을 회 귀 시 킬 거 야?」

[제4의 벽]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이 녀석이 회귀하지 않도록 만들거야.’

「그 녀 석을 바 꿔 도 미 래는―」

‘그래. 그래서 더 안심이야.’

내가 바꾼 과거는 내가 알고 있는 유중혁을 부정하지 않는다.

「적어도 한 번쯤은, 유중혁에게도 불행하지 않은 회차가 있다면.」

나는 허공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덮어쓰기’를 실행합니다!]
[해당 세계관에 대한 간섭을 시작합니다!]
[당신의 꿈 장악력이 부족하여 적극적 간섭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츠츠츠츠츳, 하고 튀어 오르는 스파크와 함께, 연이어 메시지가 떠올랐다.

[‘구원의 마왕’이 당신의 임시 성좌명으로 등록됩니다.]
[당신은 현재 ‘배후 선택’의 성좌로 참가 중입니다.]
[〈스타 스트림〉 시스템이 당신의 자격 여부를 의심스러워합니다.]
[하급 도깨비 ‘비형’이 당신의 수식언을 낯설어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출현에 당황합니다!]

창백한 유중혁의 표정을 보며,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잘못된 선택일 수도 있다.
내가 이 세계선을 바꾸는 바람에, 유중혁은 더 불행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호오라, 구원의 마왕? 이거, 새로운 성좌님이 나타나셨군요!]

한 세계의 끝을 보고, 시나리오의 종장을 아는 ‘가장 오래된 꿈’이 된 김독자라면, 정해진 운명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후보가 늘어났으니 시간을 조금 연장해야겠군요.]

비형이 허공의 메시지를 갱신했다.

[배후 선택 대기 시간이 5분 연장됩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주변의 생존자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이게 대체 뭐죠?”
“배후 선택이라니······.”

나야 ‘멸살법’을 읽었기에 낯설지 않았지만, 생전 처음 이런 상황에 부딪친 이들이 얼마나 당혹스러울지는 짐작이 갔다.

[화신 ‘유중혁’의 특성이 발동합니다!]

그 와중에도, 유중혁은 홀로 제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녀석의 눈동자가 그것을 증명했다.
······어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한데.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Lv.???’이 활성화됩니다!]

심약한 0회차의 속을 들여다보는 게 좀 미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봐야만 했다. 만에 하나 녀석이 다른 배후성을 고르기라도 한다면―

[당신은 ‘가장 오래된 꿈’입니다.]
[대상에 대한 이해도와 무관하게 당신은 해당 스킬의 능력을 백 퍼센트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유중혁의 머릿속이 인체 해부도처럼 낱낱이 펼쳐졌다.

「미아는? 미아는 어떻게 됐을까.」
「미아를 구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눈앞의 선택지를 해결해야 한다.」
「배후 선택. 아마 후원자를 고르라는 것 같은데.」

나는 조금 긴장했다.
본래의 0회차에서 녀석은 초반 배후 선택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래의 이야기.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게 관심을 보인 것은 유중혁이 아니라 다른 성좌들이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에게 인사합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의 수식언이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디오니소스의 넉살은 어떤 회차든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만약 그가 최후의 방주에서 양보해주지 않았더라면, 전투는 더욱 힘들었겠지. 
나 역시 반갑게 인사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을 견제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놈도 있었지. 넌 옆 칸의 김남운도 보고 있을 텐데, 대체 몇 다리를 걸치고 있는 거냐.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이 자신의 수식언을 따라 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대체 어디가 비슷하냐고 물으려다가 참았다.

남은 선택시간은 3분.

괜히 쓸데없는 곳에 기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덧 유중혁의 본격적인 판단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

1. 술과 황홀경의 신

+

잠시 수식언을 바라보던 유중혁이 눈을 돌렸다.

「뭔가 난잡한 이름이군.」

이어서 유중혁의 눈이 2번 후보를 바라보았다.

+

2. 손톱을 먹는 쥐

+

유중혁이 제법 오랫동안 그 수식언을 들여다보았기에, 나는 초조해졌다.
정신 차려라, 유중혁. 차라리 흑염룡을 선택해.

「약해 보여.」

나는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긴장하게 만들지 말라고 자식아.
이어서 유중혁은 세 번째 후보로 눈길을 돌렸다.

+

3. 심연의 흑염룡

+

당연한 얘기지만, 유중혁이 3번을 택할 리 없었다. 유중혁은 겉으로야 제 잘난 맛에 사는 녀석이지만, 사실 저렇게 화려하고 겉멋든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꽤 강해 보이는 이름인데.」

······뭐? 아니······.

「어쩌면 상당히 강한 후원자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강한 건 사실이지만······ 그놈은 자기 화신에게 이상한 소환 주문을 외우게 하는 녀석이라고. 
중혁아, 제발 눈깔을 똑바로 뜨고 봐라.
그런 녀석을 감당할 수 있는 건 김남운 아니면 한수영뿐이란 말이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을 향해 으스댑니다.]
[배후 선택 종료까지 1분 남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유중혁의 눈이 4번 후보를 향했다.

+

4. 구원의 마왕

+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서, 유중혁의 뒤에서 배후 선택지를 함께 바라보았다. 
술과 황홀경의 신, 손톱을 먹는 쥐, 심연의 흑염룡, 구원의 마왕······.

‘제4의 벽. 네 생각은 어때?’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제4의 벽]이 뜸을 들였다.

‘그러니까, 네가 보기엔 누가 제일 세 보이냐?’

「그 야······.」

‘실제 무력 말고, 수식언만 보고 판단했을 때.’

금방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제4의 벽]은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는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이건 내가 「구원의 마왕」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고, 솔직히, 그래도 객관적으로······.’

아니, 객관적일 필요까지도 없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술과 황홀경의 신? 그냥 주정뱅이로 보일 뿐이다.

손톱을 먹는 쥐? 손톱깎이 대용도 아니고 그런 녀석을 어디다 쓰겠어.

심연의 흑염룡? 딱 봐도 절대 고르면 안 되는 선택지다.

0회차의 유중혁이 아무리 멍청해도 여기서 실수를 하진 않겠지. 
여기서 정상적인 수식언은 나밖에 없다. 
실제로 유중혁은 마치 나의 수식언에 감탄이라도 한 듯, 손가락을 들어 4번을 가리켰다. 그리고 생각했다.

「거만해 보이는 이름이군.」

······.

「약한 녀석들이 주로 이런 이름을 쓰지.」

내가 뭐라 외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난 유중혁이 말했다.

“결정했다. 나는―”

의기양양한 유중혁의 미소와 함께, 천천히 입술이 열렸다. 
나는 지하철의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츠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끝에 강한 열감이 맺혔다.

[세계선에 간섭합니다.]
[‘덮어쓰기’가 시작됩니다.]
[과도한 간섭은 세계선으로부터 강한 저항을 불러올 수······.]

나는 온 힘을 다해 유중혁의 뒤통수를 갈겼다.


*


“커헉!”

김독자는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강한 충격과 함께 일어났다.

“언제까지 쳐 잘 건데? 안 일어나냐?”

눈을 뜨자, 손을 탈탈 터는 한수영이 보였다.
김독자는 소파에 묻은 침자국을 닦으며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지? 내가 왜 여기 있어? 그러니까······.

“뭐해 빨리 준비 안 하고? 오늘 어디 가기로 했는지 잊었어?”

한수영의 곁에 특유의 포즈로 선 유중혁이 역시나 눈동자를 이글거리고 있었다.

“쓸데없이 기다리게 하는군.”

유중혁뿐만이 아니었다. 유중혁의 뒤로 고개를 쏙 내미는 정희원과, 그런 정희원의 곁에서 뭔가를 한 아름 들고 있는 이현성의 모습.

“이거 피자에요?”
“치킨이지, 멍청아.”

이현성이 든 비닐봉지를 보며 침을 삼키는 신유승과 이길영. 
그리고 그런 두 아이 옆에 선 이지혜까지.

“빨리 가자. 나 배고파!”

그 광경을 보며, 김독자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를 기억해냈다.

「세계의 시나리오는 끝났다.」

고개를 돌리자, [공단]의 창으로 환한 볕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김독자 컴퍼니〉가 처음으로 나들이를 가는 날이었다.」

.
.
.

목적지로 가는 내내, 한수영은 구시렁거렸다.

“야, 김독자.”
“왜.”
“오늘 무슨 날인지 진짜로 잊고 있었던 거 아니지?”
“무슨 날인데?”
“12월 25일이잖아. 무슨 날이겠냐?”

김독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미트라가 태어난 날?”
“그건 〈베다〉식 개그냐?”

그들은 실없는 소리를 하며 계속해서 걸었다. 가끔 유중혁이 거슬린다는 듯 앓는 소리를 냈다. 
붉은색 스포츠카 한 대가 굉음과 함께 길가에 멈춰선 것은 그때였다.

“상아 씨!”

유상아를 제일 먼저 알아본 정희원이 손을 번쩍 들었다. 흰색 롱패딩에 청바지를 입은 유상아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촬영 때문에 늦었어요.”

그런 유상아가 못마땅했는지 한수영이 태클을 걸었다.

“어쭈, 아주 연예인 다 되셨어.”
“그런데 이렇게 추운데 꼭 한강에서 먹어야 해요?” 
“여기 추위 내성 없는 사람도 있나? 아직 그 정도 스킬은 남아있을 거 아냐.”
“그냥 공단에서 먹어도 될 텐데. 크리스마스라 사람도 많을 거라고요.”
“애들이랑 약속했잖아.”

아웅다웅 말싸움을 벌이는 두 사람을 보며, 김독자는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짜르르 아파왔다. 
왜, 이 풍경이 이토록 그립게 느껴지는 것일까. 
시나리오가 모두 끝난 지 벌써 3개월이나 흘렀는데······.

“설화 씨랑 필두 씨는요? 한 부장님도 안 보이고.”
“곧 올 거야. 아, 저기 있네. 어이! 이설화!”

여의나루역 앞.
하얀 털옷을 입은 이설화가 해맑게 양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옆에는 심통맞은 얼굴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공필두도 있었다.

“너무 안 오길래 또 우릴 잊은 줄 알았어요.”

그 말에 뭔가가 찔렸는지, 정희원이 낼름 대답했다.

“에이, 설마 그러겠어요?”
“······그때도 우리 방치해놓고 [공단]으로 돌아가버렸잖아요.”
“흠흠, 결국 찾으러 갔잖아요.”
“찾으러 오긴 뭘 와요! 사서들이 우리 내보내 줘서 돌아온 건데. 정말이지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한명오는?”
“명오 씨는 못 왔어요. 크리스마스는 가족이랑 보내야 한다고······.”
“그 아저씨가 가족이 어딨어? 아······.”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일행은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김독자의 양팔을 하나씩 붙잡은 이길영과 신유승이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야, 자꾸 그쪽으로 당기지 마라.”
“너나.”
“아저씨, 근데 산타클로스도 성좌로 있을까요?”

일행은 마침내 한강 공원에 도달했다. 추운 날씨라 그런지 바깥에 사람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보이는 것은 무너진 한강의 대교들과 새카맣게 물든 하늘뿐. 이제 거의 남지 않은 극소수의 별들만이, 그곳에 〈스타 스트림〉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분명, 모든 것은 끝났다.」

일행은 돗자리를 깔고 아이들의 곁에 휴대용 난로를 설치했다. 난로의 옆에 간이 탁자를 설치한 유중혁은, 이지혜와 함께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김독자가 물었다.

“······뭐야, 여기서 만드는 거였어?”
“그럼, 치킨집도 피자집도 없는데. 직접 만들어야지.”

그러고 보니 그렇다. 시나리오가 끝난지 고작 3개월인데, 피자집과 치킨집이 벌써 부활했을 턱이 없다. 한수영이 말했다.

“만들어 줄 사람이 있는 것에 감사하라고.”

순식간에 해체된 닭다리가 허공을 날았고, 그 위로 유중혁의 특제 소스들이 영롱하게 튀어 올랐다. 칼자루 끝에서 맹렬하게 회전하는 도우. 피자를 만드는 것인지 치킨을 만드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단한 것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결국 이런 날이 오긴 오네요.”

돗자리 위에 무릎을 감싸고 앉은 유상아가 말했다. 깊은 감회에 젖은 듯, 그녀의 눈이 한강을 보고 있었다. 김독자가 물었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
“그냥······ 그래요. 처리할 일들이 많다 보니.”

시나리오가 끝난 지 고작 3개월. 아직 사회는 안정되지 않았다.
아직 시스템의 영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스킬이나 성흔을 보유한 범죄자들의 난립은 계속되고 있었다. 유상아는 그들을 퇴치하고 시민들을 보호하는 세계의 히어로였다.

“보기 좋네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정희원과 이현성이 나란히 서서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수영이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1년도 못 간다에 100코인 건다.”

그때, 멀리서 뭔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일행들이 본능적으로 병장기에 손을 가져갔다. 
자세히 보니, 소리의 정체는 먼 빌딩에서 쏘아 올린 폭죽이었다.

“······벌써 저런 걸 하는 사람이 있네.”

한수영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김독자는 새삼스레 그 광경을 보았다. 폭죽이라니. 살아서 다시 저런 것을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조금씩 요리가 익어가는 냄새가 났다.

“김독자.”
“응?”
“요즘 너 그거 잘 안 읽네.”
“뭐?”

김독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아, 그렇지. 읽어야 되는데.”

김독자가 황급히 스마트폰을 꺼냈다. 하지만 배터리가 방전되어 있어서 스마트폰은 켜지지 않았다. 새카만 액정 너머로 한수영의 모습이 비쳤다. 좀처럼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눈빛. 말없이 김독자를 들여다보던 한수영이 혼잣말로 뭔가를 중얼거리다니 으쌰, 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괜히 왔나. 이것저것 생각나서 머리만 복잡하네.”
“응?”
“그냥 혼잣말이야. 그보다 멸살법에서도 이런 적 있었는데, 기억나냐?”

······멸살법.

“왜, 유중혁 3회차에······ 다 같이 모여서, 한강에서, 땅강아쥐 다리 뜯으면서······.”

이어지는 한수영의 말을 듣던 김독자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비틀거리는 김독자를 향해 한수영이 손을 뻗었다.

“야, 왜 그래. 괜찮아? 어디 안 좋은 거 아냐?”
“그냥 갑자기 머리가 좀 아파서······”
“내가 아까 너무 세게 때렸나? 잠깐 좀 쉬는 게······.”
“아냐. 그보다······ 네 말이 맞아.” 
“무슨 말?”
“멸살법 말이야. 나도 그 장면 참 좋아해. 3회차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야.”

한수영은 김독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싱긋 웃었다.

“하여간 멸살법 오타쿠 새끼.”

멀리서 다시 한번 폭죽이 터졌다. 아까보다 훨씬 더 큰 폭죽이었다.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불꽃들을 보며,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것이, 오랫동안 그가 그리던 풍경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오랫동안.
한수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김독자.”
“응?”

언제부터였을까. 한수영의 얼굴이 부쩍 가까워져 있었다.
또렷한 이목구비. 새하얀 뺨. 반짝이는 눈동자 아래에 찍힌 눈물점.
코끝에서 느껴지는 레몬 향기에 당황한 김독자가 무슨 말을 꺼내려는 순간, 한수영이 먼저 다가왔다.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댄 한수영이 천천히, 아주 또렷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멸살법 3회차에는 그딴 거 안 나와.”

허공으로 흩어지는 폭죽과 함께, 어디선가 맹렬한 스파크가 내리치는 것 같았다. 시야가 한 바퀴 뒤집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김독자는 어느새 자신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야.”

냉막한 한수영의 두 눈이 바로 앞에 있었다.

「분명 모든 것이 끝났는데.」
「왜,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멀리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정희원과 이현성이 보였다. 그리고 표정 없는 유중혁의 얼굴도. 모든 이야기가 끝난 세계. 밤하늘을 물들인 불꽃 속에, 한수영의 서슬 퍼런 단도가 하얗게 빛났다.

“너, 대체 누구냐?”

===

지난 3개월간, 한수영은 매일매일을 기묘한 예감 속에서 살았다.
그 시작은 단출했다.

―유중혁. 그거 알아?
―뭐냐.
―저 녀석, 이제 토마토 잘 먹어.

처음에는 그저 소소한 변화라 여겼다. 이제 시나리오도 끝났으니, 녀석도 하나둘 바뀌는 모양이라고. 그렇게만 생각했다.

―야, 김독자. 요즘 왜 이렇게 얼빠져 있냐?
―어? 어······.
―근데 시나리오 진짜 끝난 거 맞아? 왜 시스템이 소멸하질 않지? 너도 아직 스킬 쓸 수 있지?
―음······ 아마 없어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모양이지.

시나리오는 끝났으나, 세계는 말끔하게 원상태로 돌아가진 않았다. 마치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처럼. 
여전히 사람들이 스킬이나 성흔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엄밀히 따지면, 그 소설을 쓴 ‘원작자’를 찾기 전까지는 모든 게 끝났다고 볼 수는 없겠지.

한수영도 유중혁의 말에 동의했다. 이 세계가 존재했던 것은 ‘가장 오래된 꿈’이 ‘멸살법’을 읽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 소설을 쓴 원작자가 있었다. 이 이야기는 결국 그 존재를 찾아야만 끝나는 것이다.

―tls123은 대체 누굴까? 지금까지 몇 가지 추론을 해봤지만 죄다 틀렸었잖아. 가장 유력했던 ‘가장 오래된 꿈’도 작가는 아닌 거 같고······ 김독자, 넌 어떻게 생각해?

이 의문을 해결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김독자였다.
3149편에 달하는 ‘멸살법’을 모두 읽은 독자.
그런데, 그 김독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 글쎄. 뭐, 이제 와서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 싶기도······.

다른 사람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김독자였다.
‘멸살법’을 끝까지 완주한 유일한 독자.
한수영이 아는 최고의 독자인, 김독자였다.

“말해. 너 누구냐고.”

그래서 한수영은 생각했다.

「만약 눈앞의 김독자가 가짜라면.」

“수영 씨! 대체 무슨―”

달려온 이현성의 고함과 동시에, 신유승이 한수영의 손목을 붙잡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누나.”

이길영도 마찬가지였다. 앞을 엉거주춤 막아선 소년이, 긴장한 눈으로 한수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단도의 칼날을 본 일행들의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었다.

“언니. 해명 가능해?”

어느새 식칼을 내려놓고 자신의 쌍룡검을 쥔 이지혜가 곁에 서 있었다. 
놀란 이설화와 눈을 가늘게 뜬 정희원. 그에 반해 침착하게 상황을 주시하는 유상아도 보였다. 
잠시 생각하던 한수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김독자의 멱살을 놓았다. 맥없이 엎어진 김독자가 죄인처럼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녀석은 김독자가 아냐. 다른 누구도 아니고, 김독자가 그걸 기억하지 못할 리 없어.”
“뭘 말야?”
“멸살법.”

그 말에 일행들이 동시에 김독자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늘 ‘멸살법’을 입에 달고 살던 김독자.
한수영은 골치 아픈 문제를 해설하는 강사처럼 머리를 짚더니, 일목요연하게 지난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방금 내가 말한 건 ‘멸살법’이 아니라 내가 썼던 소설에 나오는 내용이야. ‘멸살법’에는 일행들이 한강에서 오붓하게 식사를 하는 내용 따위 안 나온다고.”
“언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언니도 그 소설 봤어요?”
“초반부만. 적어도 3회차에 그런 내용이 없다는 건 확실해.”

그러자 정희원이 대거리했다.

“그 정도야 착각할 수도 있는 거잖아? 애초에 그렇게 긴 소설 내용을 전부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가능해, 김독자라면. 지금까지 너희가 어떻게 시나리오 헤쳐왔는지 다 잊어버렸어? 그 김독자가 진짜로 기억 못 할 거라 생각해?”

한수영은 으르렁거리며 김독자를 돌아보았다.

“야. 유중혁이 아스모데우스에게 죽은 게 총 몇 번인지 말해봐.”

한수영의 질문에, 김독자는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인상을 찌푸린 한수영이 다시 역정을 내려는 순간, 김독자의 입술이 열렸다.

“한수영.”

고저가 없는 목소리. 순간 한수영의 눈동자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스쳤다. 그리고.

“미안한데, 정말로 잘 기억이 나질 않아. 요즘 나도 ‘멸살법’을 안 읽어서······.”
“이거 봐! 이 자식은 김독자가 아닌······!”
“아저씨.”

단도를 쥔 채 앞으로 나서는 한수영을 막은 것은 신유승이었다. 양손으로 도자기를 빚듯 김독자의 손을 쥔 신유승이 물었다.

“내가 한강에 와서 뭐 먹고 싶다고 했는지 기억해요?”

얼마간 떨어진 곳에서, 묵묵히 요리를 만들던 유중혁의 손이 멈췄다. 아직 요리는 채 완성되지 않은 채였다. 김독자는 곧바로 답했다.

“피자랑 콜라잖아.”
“형! 저는, 저는요?”
“길영이는 바다에서 치킨 먹고 싶댔지. 미안, 바다는 다음에 꼭 가자.”

그렁그렁한 눈의 이길영과 신유승이 한수영을 노려보았다.
한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만. 문제가 너무 쉽잖아. 겨우 그 정도로―”

그러자 이번에는 정희원이 나섰다.

“독자 씨. 내 칼 이름이 뭐예요?”
“심판자의 검. 그거 재료 모은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독자 씨, 저한테 처음으로 주셨던 물건 기억하십니까?”
“낡은 철제 방패잖아요.”

일행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심지어 공필두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어이, 충무로 시나리오에서 나한테 냈던 벌금 기억하나?”
“안 냈잖아요.”
“개자식. 지금 당장 내지 않으면─”
“아저씨, 전에 나한테 그랬잖아. 지혜야, 솔직히 김컴 멤버 중에서 지혜 네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해.”
“그런 적 없는데.”

이지혜가 젠장, 하고 중얼거렸다.

“······독자 아저씨 맞는데?”

일행들의 표정에서 피어나는 묘한 안도감.
사태를 지켜보던 김독자가 말했다.

“갑자기 왜들 이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는 김독자가 맞습니다. 한수영 넌 또 왜―”
“야, 너 ‘멸살법’이 총 몇 회차였는지는 기억해?”
“수영아.”

결국 보다 못한 정희원이 나섰다.

“뭐 때문에 이러는 건진 모르겠지만, 모처럼 나왔는데 적당히 하자.”
“맞아요, 수영 씨.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오해?”

단도를 쥔 한수영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야, 유중혁! 넌 뭐 할 말 없어?”

그 말에, 묵묵히 채를 썰던 유중혁이 무심한 눈으로 한수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김독자를 한 번 보고, 일행들을 한 번 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도마로 시선을 돌렸다.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본 한수영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저게 진짜······.”

고개를 떨어트리자, 바닥을 구르는 맥주 캔이 보였다. 한수영은 그것을 주워 캔을 땄다. 그리고 그대로 원샷. 거칠게 입술을 닦은 한수영이 말했다.

“씨발······ 그래, 나 혼자 이상한 사람이다 이거지?” 

한 캔으로는 부족했는지, 한수영은 한 캔을 더 땄다.

“그래, 다들 시나리오 깨느라 힘들었던 거 알아. 생각하기도 지쳐버렸고, 이젠 쉬고 싶다는 것도 잘 안다고. 나라고 안 그런 줄 알아? 나도 쉬고 싶어.”

푸슈슛, 하는 소리와 함께 맥주 거품이 튀어 올랐다.

“근데 니들, 진짜로 저 김독자가 진짜라고 생각해?”
“한수영.”
“닥쳐. 내 이름 부르지 마.”

한수영의 뺨이 은은하게 붉어져 있었다.
한수영의 머릿속에서, [예상 표절]의 설화가 삐걱거리며 움직였다.

「어쩌면 일행들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녀가 틀렸고, 저 김독자는 진짜인지도 모른다.」

고작 멸살법의 몇몇 장면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김독자를 김독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수영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성급했다. 논리적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한수영은 자신의 감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왜 자신이 이토록 격렬하게 반응하는지도 잘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한수영은 중얼거렸다.

“내가 기억하는 김독자는······.”

재미도 없고 설정으로 가득한 소설.
무려 3천 편이나 되는 소설을 인내심 있게 읽을 수 있는 인간.

「“언젠가 이 모든 시나리오가 끝나면, 다시 소설을 쓰고 싶어질지도 몰라. 그때, 내 소설을 읽어줘.”」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

「“알았어. 읽을게.”
“어쩌면 3천 편 넘을지도 몰라.”
“딱 내 취향이겠네.”
“재미없을지도 몰라.”
“네가 쓰는 데 재미가 없겠냐?”」

그런 김독자가, 다른 걸 잊어도 ‘멸살법’을 잊을 리 없었다.
알코올 때문일까. 머릿속으로 점차 열기가 번지는 것 같았다.

「만약에 이 ‘김독자’가 가짜라고 한다면, 그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원작자인 tls123의 장난? 아니면······.

“한수영. 이제 그만하고······.”

일행들의 표정을 보며 떠오르는 가설들이 있었다. 
만약 도깨비 왕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세계는 결국 ‘가장 오래된 꿈’의 망상이다. ‘가장 오래된 꿈’이 꿈꾸고 있기에 이 세계는 존속된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꿈’은 이제 사라졌다. 은밀한 모략가와, 999회차의 등장인물들과 함께.

「그렇다면, 이 세계는 어째서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주 끔찍한 예감이었다.
결코 실현되어서는 안 되는 예감. 
그리고 어쩌면, 벌써 실현되었을지도 모르는 예감. 
손에 쥐고 있던 맥주 캔이 바닥을 굴렀다. 반쯤 남아있던 내용물이 새어 나왔다. 바닥을 구르는 똑같은 모양의 캔들. 내용물이 거의 남지 않은 캔을 보며, 한수영은 마치 홀린 듯이 말했다.

“만약, 저 김독자가 ‘아바타’라면.”
“수영 씨! 갑자기 왜 그런 소리를―”
“내가 괜히 이러는 거 같아?”

그 진지한 목소리에, 몇몇 일행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돌아본 일행들은 대개 비슷한 얼굴들이었다. 

한수영.

일행들 중 유일하게 [예상 표절]과 [아바타]를 가지고 있는 화신. 김독자가 없을 때마다 성운의 실질적인 브레인을 담당한 것은 그녀였다.
그리고 그런 한수영의 판단은, 거의 틀린 적이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이현성이 김독자를 돌아보았다. 그다음은 정희원. 이어서 이지혜. 하나둘 모여든 시선이 김독자를 보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한수영의 말이 맞다면.」

그들의 마음속에 희미한 균열이 번지고 있었다. 아주 작은 의심이 만들어 낸 빈틈. 한수영에겐 충분한 틈이었다.

“만약 저게 ‘아바타’라면, 아주 쉽게 확인할 방법이 있지.”

정희원이 불길함을 느꼈을 때, 한수영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한수영!”

벼락처럼 검을 뽑은 이지혜가 달려갔을 때 한수영은 이미 김독자의 몇 걸음 앞에 있었다. 주변에 가공할 기파가 몰아치며, 신유승이 드래곤 하울링을 터트렸다. 이길영의 벌레들이 한수영의 발목에 족쇄처럼 감겨들었고, 달려온 이현성이 김독자의 몸을 덮었다. 하지만 한수영은 멈추지 않았다.

“내 소설을 읽어 줄 녀석은―”

유상아가 손에서 뿜은 실이 한수영의 허리를 붙들었고, 뒤늦게 움직인 정희원이 가까스로 한수영을 뒤에서 잡아챘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났을 때, 한수영의 단도는 이미 그녀의 손에 없었다.

“네가 아니야.”

스팟, 하고 뭔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

한수영의 단도는 정확히 김독자의 어깻죽지를 스쳤다. 반사적으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 쥐는 김독자. 한수영은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아바타는 피를 흘리지 않는다.」

〈스타 스트림 시스템〉이 약화 되면서, 이젠 성좌들도 다치면 설화 대신 피를 쏟는다. 그러니 저 김독자가 진짜라면 반드시 피를 흘려야 했다.

“너 진짜 미쳤어? 이게 뭔 짓거리야!”
“아저씨!”

경악한 신유승이 김독자에게 다가갔다. 이현성도, 이지혜도. 
비틀거리는 김독자가 감싸쥔 왼쪽 어깨. 

「정말로 한수영의 말이 맞다면.」

그리고 아주 천천히, 김독자의 손바닥이 어깨에서 떨어졌다.

“저는 괜찮습니다. 걱정마세요.”

누가 먼저 숨을 삼켰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일행 모두는 똑똑히 보았다.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주 새빨간 선혈이.」

한수영도 그것을 보았다. 하지만.

“······잠깐만. 아직 끝난 거 아냐! 피를 흘리는 아바타도 있어.”

한수영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 또한 그런 [아바타]를 만들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기억을 투여받은 아바타는 피를 흘린다.」

멀리서 채를 써는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이쪽 일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입도 뻐끔거리지 않는 그의 모습이 한수영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녀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이었다.

“목을 잘라보면 알아. 아바타는 목을 잘라도 움직이니까.”
“지금 뭐라고 했어?”

서슬 퍼렇게 굳어진 정희원의 표정을 보고서야, 한수영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판자의 검]에 일렁이는 [지옥염화]의 기운. 시나리오가 끝난 후, 한 번도 발동하지 않았던 우리엘의 성흔. 정희원이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딴 짓을 하면 목이 잘리는 건 네 쪽이 될 거야.”

자신을 가리킨 [심판자의 검]을 보며, 한수영도 천천히 [흑염]의 기운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수영은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둘을 만류하는 이설화의 목소리. 정희원의 뒤쪽에서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신유승과 이길영의 표정을 보는 순간, 한수영의 안에서도 뭔가가 끊어졌다.

「어쩌면, 여기까지 함께 온 것이 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수영은 자신이 이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한때 ‘선지자들의 왕’이었고, ‘가짜 왕’이라 불리었다. 김독자가 만들어 낸 거창한 이야기의 악역에 불과했다.
한강에서 모두와 함께 피자를 먹고, 콜라를 마신다니.
애초에 이 모든 것은 한수영에게 어울리지 않는 결말이었다.

쿠구구구구!

두 개의 상반된 불꽃이 만들어 낸 대치상황이 계속되던 순간, 맑고 청량한 목소리가 흐름을 끊었다.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나 맥주 사왔는데.”

양손에 비닐봉지를 든 장하영이 그곳에 있었다.

“나 늦었다고 몰래카메라 하는 거야?”

그 목소리에 깃든 불안감에, 일행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마치 이곳에 처음으로 온 목적을 환기한 사람들처럼. 
그리고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사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들 하지.”

도마 위에 꽂힌 [흑천마도]에서 초월의 격이 산란했다. 그리고 공원 내를 지배하던 살기가 순식간에 씻은 듯 사라졌다.

“저녁 시간이다.”

대신 풍겨온 냄새가 잊었던 허기를 자극했다. 
일곱 판의 피자와 치킨들이 접시 위에 세팅되어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이지혜가 탄식했다. 

“사부는 진짜······.”

진지한 유중혁의 얼굴을 본 일행들은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음식을 향해 제일 먼저 달려간 것은 장하영이었다.

“다들 뭐해! 빨리 안 와?”

그 광경을 본 공필두가 실소를 흘렸다. 분위기가 조금 풀리려 하자, 김독자도 입을 열었다.

“전 괜찮습니다. 수영이가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해해요. 솔직히 저 최근에 좀 기억력이 나빠지긴 했거든요. 마치 중요한 기억이 통째로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아서······.”
“독자 씨, 이건 그렇게 넘어갈 일이······!”
“일단 먹고 이야기하죠. 유중혁이 누구한테 음식 만들어주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니까요.”

인상을 찌푸린 정희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행들은 하나둘 돗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기어코 정희원이 역정을 냈다.

“이게 진짜······.”

한수영이 보이지 않았다.


*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폭죽음. 화장실의 세면대 위로 쏟아지는 차가운 물줄기를 바라보며, 한수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실수했다.’

자신답지 않았다. 왜 그렇게까지 흥분했는지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돌아가 해명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일행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애초에 기억을 나눠준 아바타를 ‘가짜’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한 일일까.」

주머니에서 가는 진동음이 울렸다.

―수영 씨.

유상아가 보낸 톡이었다. 한수영은 다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진동이 울렸다.

―한수엿ㅇ.

“이게 진짜.”

―ㅎㅎ 오타에요.

답장하려는 순간, 누군가의 기척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심통 그만 부리고 돌아가요.”

어깨를 눌러 잡는 길고 흰 손가락. 한수영이 손을 떨쳐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됐어. 내가 가봤자 분위기만 망칠 텐데.”
“그렇지 않아요. 다들 이해할 거예요.”
“그러게 됐다니―”
“이렇게 말해주길 바라니?”

유상아의 눈매가 천천히 변했다. 한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개방된 틈으로, 멀리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광경을 지키듯 선 유상아를 보며, 한수영의 머릿속에 기이한 예감이 스쳤다.

“너······.”

자신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던 유상아의 표정. 어쩌면 유상아는······.

“언젠가 독자 씨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만약 이 세계의 원인이 ‘가장 오래된 꿈’이라면, 그 녀석을 없애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뭐?”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한수영은 유상아의 멱살을 잡은 채 벽에 밀어붙였다.

“너······ 알고 있는 거 전부 불어.”

여전히 차분한 유상아의 눈을 보며, 한수영은 점차 진실을 깨닫고 있었다.

「유상아는, [제4의 벽]의 사서로 활동한 적이 있다.」

일행들 중 유일하게 김독자의 내면에 들어갔던 사람. 
무수한 책들이 꽂혀 있는 그 장서관에서, 유상아는 무엇을 보았을까.

“말해! 거기서 뭘 본 거잖아! 그 자식, 대체 무슨 생각하고 있었던 건데!”
“······.”
“넌 왜 말리지 않았던 거야?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왜―”
“내게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유상아의 말에 한수영이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절반으로 나눠서 세계를 지키는 것. 하나는 세계를 지켜볼 ‘독자’가 되고, 다른 하나는 ‘등장인물’이 되는 것.”

한수영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저 ‘김독자’는, 그래서 피를 흘리는 것일지 모른다고. 
모두가 시나리오에서 해방되던 그 날, 여전히 다른 쪽의 김독자는 그 열차에 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이 돌아보고, 유중혁이 돌아보았던 그 날. 열차에서 내리지 않은 김독자가 이쪽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그게 이 세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 사람의 선택이라면.”
“왜 그딴 식으로 말해?”

덜덜 떨리는 손이 유상아의 멱살을 점점 더 강하게 틀어쥐었다. 
유상아는 가볍게 손을 올려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이게 나라는 사람의 선택이야.”
“너나 김독자나 똑같아.”
“수영아. 정말 다른 일행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해?”

한수영은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멸살법 이야기를 하지 않는 독자 씨를······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정말로?”
“그러면―”
“우리와 함께했던 기억 대부분은, 저곳의 ‘김독자’ 씨가 가지고 있어.”

돗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일행들이 보인다. 빙긋 웃는 정희원과 맥주를 따르는 이현성의 모습. 취한 공필두가 노래를 불렀고 이설화가 박수를 쳤다. 자리에서 일어난 장하영이 과장된 목소리로 떠들었다.

―그러니까, 그때 마계에서······.

모두가 기억하는 김독자는 다르다.
한수영에게 김독자가 ‘독자’라면, 신유승과 이길영에게 김독자는 ‘부모’였다. 이현성에게는 ‘탄피’였고, 유상아에게는 ‘회사 동료’였다. 이지혜에게도, 정희원에게도, 장하영에게도, 그리고 이설화나 공필두에게도······.

“저 사람도 독자 씨야. 얼마만큼의 독자 씨든, 저건 틀림없는 독자 씨야. 우리와 함께했던 독자 씨라고.”

멀리서 축제의 불꽃이 번지고 있었다. 반짝이는 아이들의 눈동자. 그들이 살았던 시간들이 스러지는 것이 보였다. 한수영은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일행들 사이에서 웃는 김독자의 얼굴. 
저것은 분명, 김독자가 바라던 풍경이었다.

「〈김독자 컴퍼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유상아의 말이 맞았다. 
김독자는 선택했고, 일행들도 그 선택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했다.
그들은 이미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고, 누구도 더 이상의 상처를 원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의 결말이었다.

유상아가 물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를 가리는 게 의미 있는 일일까?”

무수한 회차의 유중혁에게 ‘진짜’를 매기는 것이 의미 없는 것처럼, 반으로 갈라진 김독자 중 누가 ‘진짜’인지를 말하는 것도, 의미는 없다.
유상아의 멱살을 놓으며, 한수영은 입을 열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가리자는 게 아냐.”

유상아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흔들리는 망막 위에 한수영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자신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면서, 그 자신이, 이런 말을 한다는 사실에 동요하면서, 한수영은 말했다.

“거기에 아직 김독자가 남아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어쩌면 그 ‘김독자’를 필요로 하는 이는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멸살법’만 좋아할 뿐인 그 미치광이를 원하는 이는, 어디에도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한 사람은.

―아저씨!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일행들이 앉아있던 돗자리에서 소란이 일고 있었다. 어디선가 서늘한 피냄새가 느껴졌다.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유상아와 한수영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신유승이 피범벅이 된 손으로 울고 있었다.

“피가, 피가 멎질 않아요.”

조금 전까지 멀쩡하던 김독자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단도를 쥔 한수영의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설마······.

“아까의 상처 때문이 아니에요. 이건―”

김독자의 맥을 짚은 이설화의 낯빛이 굳었다. 김독자의 육신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피가 순식간에 거즈를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즈에 흡수된 피가 기화하기 시작했다.

파스스스······.

설화가 사라지듯 부서지는 핏방울. 이설화가 외쳤다.

“공단으로 데려가요. 빨리!”	

===

김독자가 쓰러진 것도 벌써 일주일 째.
일행들은 의식이 없는 김독자를 돌아가며 병간호했다.
이설화와 아일렌이 번갈아 가며 진료를 거듭했고, 저명한 치료 스킬을 가진 화신들도 다수 방문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김독자가 갑자기 저렇게 된 이유를 찾지 못했다.

―육체 구성이 불안해지고 있습니다.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어쩌면 〈스타 스트림 시스템〉이 약화 되고 있는 것과 관계가 있을지도······.

몇몇 화신들은 조심스레 [아바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아저씨.”

여전히 의식이 없는 김독자. 그런 김독자를 바라보며, 신유승은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김독자다. 내가 기억하는, 틀림없는 김독자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중얼거려 보아도 변치 않는 사실이 있었다.

「눈앞의 존재에게선, 전혀 ‘배후성’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포근하게 자신을 안아주던 그 설화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설화, ‘별의 구원자’가 이야기를 더듬거립니다.]

자신과 김독자를 이어주던 설화들도 이야기를 머뭇거리고 있었다. 마치, 눈앞의 존재가 이야기의 소재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것처럼. 신유승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현재 배후성과의 연결이 매우 희미한 상태입니다.]
[현재 배후성과의 통신 채널이 단절된 상태입니다.]

그녀와 김독자를 묶고 있는 ‘배후 계약’은 여전히 유효했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밤하늘의 별빛.

「그렇다면 저 별빛은, 대체 누구의 것일까.」

신유승은 여전히 아물지 않은 김독자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일행들을 지켜주었던 팔이었다. 그 팔로 김독자는 자신의 세계를 그렸다. 그 팔로 시나리오를 끝냈고, 최후의 벽을 부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김독자의 얼굴이 보인다. 서유기 시나리오에서 씌웠던 금테가, 아직도 김독자의 머리 위에 남아 있었다. 제천대성의 설화가 약화되며 이제는 그 힘을 잃어버린 긴고아. 신유승은 긴고아 사이로 헝클어진 김독자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걱정마, 유승아.”」

김독자는 약속을 지켰다.

「함께 가자고 했던 PC방.」
「한강에서 먹고 싶었던 피자와 콜라.」

마치 환상 같았던 그 풍경 속에, 분명 김독자는 있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생을 다해 건네준, 아주 연약한 풍경.
아득한 세월을 거치고 간신히 도착한 이 결말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침대에 엎드린 신유승은 울다 지쳐 그대로 잠이 들었다. 누군가 고요한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야, 교대 시간······.”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길영은 잠든 신유승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의자 곁에 놓인 얇은 담요를 털어 신유승의 어깨 위에 덮어주었다. 그리고 침대의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독자 형.”

이길영은 침대 밖으로 나와 있는 김독자의 손을 침대 안으로 넣어주었다. 상처로 가득한 손. 언젠가 소년에게 메뚜기를 쥐어 주었던 바로 그 손이었다.

「한때, 소년에게 김독자는 신이었다.」

한참이나 김독자를 내려다보던 이길영이 중얼거렸다.

“······형은 형이에요. 그렇죠?”

깊은 한숨을 내쉰 이길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커튼을 열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김독자가 살린 사람들. 김독자가 지킨 정경. 이길영은 오래도록 창가에 앉아 사람들의 수를 헤아렸다.


*


“······빌어먹을 자식. 아바타를 만들려면 좀 제대로 만들던가.”

투덜거리는 한수영이 공단을 걷고 있었다.
김독자가 쓰러진 후 일주일. 한수영은 판단을 내렸다.

「일행들에게 도움을 구할 수는 없다.」

유상아의 말은 맞다. 이곳의 김독자도, 자신이 그리워하는 김독자도 모두 김독자였다. 그러니 이것이 정말로 김독자가 바란 결말이고, 그래서 일행들이 그것을 받아들였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 사람은 생각이 다를 수도 있었다.

“야, 꼬맹이.”
“왜요, 흑염룡 아줌마.”
“니네 오빠 지금 어디 있냐?”
“알려주기 싫은데.”
“요게!”

쪼르르 달아난 유미아가 골목길 사이로 숨어들었다. 조그만 게 어찌나 빠른지 따라 잡았을 때는 이미 홀연히 자취를 감춘 뒤였다. 유미아가 이 곳에 있는 걸 보면, 유중혁도 분명 근처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한수영의 눈앞에 낯선 표지판이 나타났다.

[카이제닉스 구].

공단의 서쪽 일대를 중심으로 구성된 주거 단지가 그곳에 있었다. 중세 판타지 풍의 고풍스러운 건축 양식. 이수경에게 말로만 들었었는데, 생각보다 내실이 잘 갖춰진 도시의 풍경에 한수영은 내심 감탄했다.
놈을 찾으러 가는 김에, 눈요기나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던 찰나.

“수영아!”

그곳에, 뜻밖의 인물이 있었다.

“······유리?”

.
.
.

“여기서 살고 있다고?”
“좀 됐어. 바쁜 건 알지만 이제야 보러 오다니 좀 섭하다 야.”
“······완전 한국 사람처럼 말하네 이제.”

눈앞에서 차를 홀짝이는 유리를 보며, 한수영도 반가운 심정이었다.
유리 디 아리스텔.
제도 카이제닉스에서, 한수영은 저 인물에게 빙의해 시나리오를 수행했었다.
그러고 보면 카이제닉스에서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빌어먹을 김독자를 기다리다가 수십 년의 세월을 허비하기도 했고······.

“근데 누구 찾으러 여기까지 온 거야? 혹시 나 만나러?”
“미안, 그건 아니고······.”
“쳇, 그럼?”

한수영이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유리가 이해했다는 듯 박수를 쳤다.

“아, 네 약혼자 말이구나?”
“약혼자?”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한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거기서 결혼도 할 뻔했었다. 유리가 놀리듯 물었다.

“근데, 어느 쪽이 진짜 네 거야? 개인적으로 내 취향은 작은 쪽······.”
“됐고, 유중혁 지금 어딨는지 알아?”
“음? 그쪽이야?”
“대답이나 해.”
“그 바보라면······.”

······바보?

“마침 저기 지나가네.”

카페의 창가를 홱, 하고 지나가는 커다란 그림자. 한수영은 벌떡 일어나 카페를 뛰쳐나갔다.

“야! 계산!”
“미안, 다음에 내가 살게!”

앞서 달리는 덩치가 보인다. 트레이닝 복을 입은 채, 일정한 빠르기로 공단을 주파하는 유중혁. 주변에서 중얼거리는 공민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뛰네, 저 녀석.”
“스킬 쓰면 되는데, 왜 미련하게 저런 짓을 하지?”
“벌써 석 달 째야.”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사내의 뒤를 쫓으며, 한수영은 유중혁의 뒷모습을 관찰했다. 확실히 공민들의 말대로였다. 어떤 스킬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근력만으로 움직이는 육신. 
가볍게 숨을 몰아 쉰 한수영이 스킬을 발동해 유중혁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뭐하냐?”

땀으로 흠뻑 젖은 유중혁이 흘끗 한수영을 바라보곤 눈길을 돌렸다.

“마라톤 나가게? 하긴, 너도 새로운 세계에서 직업을 가지긴 해야 할 테니까―”

그녀의 도발에도 유중혁은 대답이 없었다.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해서 이 벽창호 입을 열어야 할까 생각하던 찰나, 지나가던 사람들이 중얼거렸다.

“······저기 봐, 바보가 하나 더 생겼어.”

저것들이 진짜.
한수영이 대거리를 하려는 순간,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달리고 싶어서 달린다.”
“왜. 속이 답답하냐?”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희미한 그림자가 그의 얼굴 위를 스쳤다. 한수영은 그 표정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너는 그 소설을 얼마나 읽었다 했었지?”

뜻밖의 질문에, 한수영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설마 유중혁이 그걸 물어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냥 초반만 조금.”
“그 세계에서, 본래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지? 예를 들면 0회차나, 1회차의 나는······.”
“갑자기 뭔 헛소리야. 그런 걸 왜 물어?”
“요즘 예전 일이 잘 기억 나질 않는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기억이 안 난다고?”
“아예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단편적이다.”
“회귀를 천 번도 넘게 했는데, 나라도 그러겠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한수영은 왜 유중혁의 기억이 불명확한지 알 것도 같았다. 
엄밀히 따지면, 유중혁은 ‘멸살법’이라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었다. 그의 모든 정보는 작가의 설정값이었고, 작가가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멸살법’은 유중혁의 3회차부터 시작하는 소설.
그러니 유중혁이 0회차부터 2회차까지의 기억을 온전하게 반추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의 네가 어땠는지가 중요해?”

그것이 설정값의 문제이든, 아니면 정말로 까먹은 것이든······ 어차피 지나간 시간은 지나간 시간일 뿐이다. 뻔한 조언이라해도 한수영은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부터 일어날 일들이라고. 하지만 유중혁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에겐 중요하다.”

정직한 규칙으로 숨을 몰아쉬는 유중혁. 어떤 스킬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육체를 혹사시키는 유중혁을 보며, 한수영은 갑자기 뭔가를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유중혁은, 이 세계에서 ‘시나리오’를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시나리오를 잘 클리어할 수 있었던 패왕은, 역설적이게도 시나리오가 끝나자 그 쓸모가 사라졌다.
시나리오가 끝난 세계에서, 유중혁은 이제 무엇이 되는 것일까.
한수영은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도 너는 유중혁이었겠지. 회귀자가 될 유중혁.”

언젠가 유중혁의 입으로 말했던 그 말을 돌려주는 것. 그것이 한수영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한수영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보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 너도 알겠지만 이 세계선의 김독자는―”
“아바타지. 알고 있다.”

역시 알고 있었군. 한수영은 곧바로 한 마디를 쏘아붙이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여기까지 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유중혁’에게, ‘멸살법’을 기억하는 김독자를 구하러 가자고 말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그 답을 알 수가 없어서, 한수영은 그저 혀끝에 맴도는 말을 삼킬 뿐이었다. 그런데 먼저 입을 연 것은 유중혁이었다.

“놈을 구하려면, ‘최후의 벽’ 너머에 있는 지하철로 다시 가야 한다. 문제는 평범하게 세계선을 넘는 방식으로는, 다시 그곳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잠시 동요하던 한수영이 곧바로 답했다.

“······다시 ‘최후의 벽’을 열면 그곳으로 갈 수 있어. 문을 열 ‘파편’들을 모아야 해. 이미 파편 하나는 있는 것 같은데.”

「라고 한수영은 말했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제4의 벽]의 메시지. 이제 한수영도 그것을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이 세계를 설명하듯 불규칙적으로 끼어드는 문장들. 아마도, 이 세계선의 김독자가 가진 [제4의 벽]에 기록되는 문장일 것이다.

“문제는 다른 파편들이야.”

유상아가 가지고 있던 ‘윤회를 결정하는 벽’.
정희원과 이길영이 가지고 있던 ‘선악을 가르는 벽’.
그리고 장하영이 가지고 있던 ‘불가능한 소통의 벽’.

그 벽들은, 최후의 벽을 열 때 함께 소멸해버렸다. 분명 다시 구할 방법이 있긴 할 텐데, 지금의 한수영으로서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수영.”
“왜.”
“지금까지 세 바퀴다.”

세 바퀴?
그 말을 들은 순간에야, 한수영은 눈앞에 아까와 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이 지역에 들어섰을 때 보았던 광경. 그들은 거대한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던 것이다.

“너는 뭘 보았지? 나는 탑 위의 새를 보았다.”

유중혁이 말하고 있었다.

“늘 이 시간이 되면 날아오는 새들이지.”
“······.”
“저 카페는 늘 이 시간이 되면 북적거리지.”
“너······.”
“카이제닉스의 첨탑의 시계를 본 적이 있나? 초침과 분침, 시침에는 각각 다른 사람의 얼굴이 양각되어 있지. 네 얼굴도 있다.”

유중혁의 문장을 따라, 한수영은 고개를 돌렸다. 유중혁이 사생한 그대로의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아마도, 유중혁은 몇 번이고 같은 원을 반복해서 돌며 이 광경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저딴 걸 왜 보고 있는데? 드디어 돌아버린 거냐?”

유중혁이 홀로 그리고 있었을 이 거대한 원이 안타까워서, 한수영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유중혁이 말했다.

“한 번 더 뛰면.”

어느새 멈춰선 유중혁이 묻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더 뛰면, 잘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한수영이 자리에 멈춰 섰다. 

[화신 ‘유중혁’의 성흔이 희미한 빛을 뿜습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아까 전부터, 이게 다 무슨 소리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른 척하고 싶었다. 
그 방법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

김독자를 구할 방법.
사라진 세 개의 ‘파편’을 다시 모을 방법.
오직, 유중혁만이 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은, 그 ‘벽’이 존재하는 세계로 돌아가는 것. 그리하여, 그 시나리오의 지옥도를 다시 한 번 걷는 것.」

“너 혼자 또 그 짓을 하겠다고?”

자신도, 김독자도 그런 것은 원하지 않는다.
게다가 유중혁이 아무리 대단해도, 혼자서는―

“혼자는 못 한다.” 

담담한 유중혁의 선언에, 한수영이 눈을 끔뻑였다.

“그래서 물은 것이다. 너는 뭘 보았냐고.”

꿈틀거리는 유중혁의 근육에서 초월의 격이 떠오르고 있었다. 성좌의 힘을 넘어선 그의 초월형이 진화하고 있었다.

[화신 ‘유중혁’의 성흔이 진화 중입니다.]

한수영은 자신이 지나온 거리를 돌아보았다. 첨탑의 시계들이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열심히 움직이는 초침 위로, 멍청한 자신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만약, 저 시간을 다시 한 번 달릴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러면, 더 잘 달릴 수 있을까.

어쩌면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철저하게 준비한다면.
그리고······ 이 세계를 함께 살았던 동료들이 함께할 수만 있다면.

돌아보자, 이미 그 거리를 무수히 달려본 회귀자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한수영.”

[성흔 ‘회귀’가 ‘집단 회귀’의 가능성을 획득합니다!]	

===

0회차에 지켜본 것도 어느새 두 달이 지났다.
그동안 깨달은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어떤 회차든 유중혁은 유중혁이라는 것이다.

“아무도 선택하지 않겠다.”

[화신 ‘유중혁’이 자신의 배후성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이걸로 벌써 두 번째 배후 선택이 끝났다.
중간에 있었던 돌발성 배후 선택 이벤트까지 합하면 총 세 번.
그 세 번 동안, 유중혁은 한 번도 자신의 배후성을 선택하지 않았다.
물론 그중 첫 번째는, 나 때문에 선택을 못 한 거지만.

츠츠츳······.

저 녀석의 뒤통수를 갈겼던 손바닥이 아직도 아프다. 초반 시나리오에 개입해 중요 이벤트에 돌입한 화신을 기절시켜버렸으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타격이 전무할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그때부터 유중혁은 ‘배후 선택’에 엄청난 경계심을 보이고 있었다.

「성좌······ 갑자기 나를 기절시킬 수 있는 놈들이다. 함부로 믿어서는 안 돼.」

내 입장에선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나 외에 다른 녀석들도 선택을 못 받는 건 마찬가지니, 그렇게 나쁠 건 없기도 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왜 자길 선택하지 않냐며 불평합니다.]
[성좌, ‘손톱을 먹는 쥐’가 화신 유중혁의 손톱을 탐합니다.]
[성좌, ‘인류의 시조’가 화신 유중혁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화신 유중혁의 행동에 의아해합니다.]

시일이 지나며 비형의 채널은 차츰 커졌고, 내가 아는 수식언의 숫자도 제법 늘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에게 인사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콧방귀를 뀝니다.]

우리엘······.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킬킬 웃습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긴고아의 죄수’에게 반갑게 인사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콧구멍을 파기 시작합니다.]

그래, 이게 ‘멸살법’이었지.
나한테 익숙한 성좌들의 모습만 떠올리다 보니 잠깐 잊고 있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다른 성좌들에게 ‘구원의 마왕’은 관종이니 조심하라 경고합니다.]

물론 그중에서도 제일 얄미운 건 저 자식이었다. 내가 코인 소모를 무릅쓰고 한 마디를 하려는 찰나, 비형이 입을 열었다.

[패왕 유중혁, 정말로 배후성을 선택하지 않을 겁니까? 잘 생각하는 게 좋을 텐데요.]

“안 한다.”

[흐흠, 자, 배후성에 지원하신 성좌님들. 이번에는 특별히 저 화신에게 어필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유중혁 덕분에 다수의 ‘화신 찾기’ 집단을 갖게 된 비형은 온종일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지금이 한탕할 기회라는 걸 깨달은 거겠지. 
잠시 후 내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도깨비 비형이 제공하는 특별 후원 기회!]
[당신이 원하는 화신에게 아이템을 후원하세요!]

나는 무심코 확인을 누르려다가 창 아래에 작게 표시된 경고문을 읽었다.

* 해당 상품 구매시 3500코인이 자동 차감됩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유 코인 : 500 C]

「바 보 김독 자」

마지막 시나리오를 깨며 〈김독자 컴퍼니〉의 금고를 탕진했기에, 남은 코인이 있을 리 없었다.
‘가장 오래된 꿈’의 권한으로 코인을 양산할 수는 없을까 고민도 해보았지만, 지금 내 힘으로는 효율이 떨어져 그것도 보류한 상태였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과 계약하면 당신의 흑염룡을 멋지게 만들어 줄 수······.]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자신과 계약하면 올림포스의 전설주를 특전으로······.]
[성좌, ‘매금지존’이 자신과 계약하면 중급 스타터팩을······.]

허공에서 쏟아지는 성좌들의 후원 메시지.
나조차 받지 못한 초반 특전들을 주겠다는 성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원작대로였다면 3회차의 유중혁도 이 정도의 초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런데 왜 고작 0회차가 이렇게 유명해졌냐고? 이유는 간단했다.

[화신 ‘유중혁’이 성좌들의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0회차 유중혁의 간덩이가 부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딴 걸 준다는 놈들은 많아. 히든 피스 정보들을 알려줄 녀석은 없나?”

[성좌, ‘매금지존’이 땀을 뻘뻘 흘리며 그런 건 잘 모른다고 말합니다.]

“미래의 계시 같은 걸 보여줄 수 있는 놈들도 없나?”

[성좌, ‘하늘 걸음의 주인’이 그걸 유출하는 건 불법이라고 말합니다.]

“구원의 마왕보다도 못한 놈들이군.”

[일부 성좌들이 ‘구원의 마왕’이 대체 누구인지 궁금해합니다!]

그렇게 ‘구원의 마왕’은 본인 의도와는 무관하게 0회차에 맹렬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구원의 마왕! 미래 계시의 유출자?
―〈올림포스〉, 계시 유출은 개연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밝혀······.
―마왕 협회, ‘구원의 마왕’이란 마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
―심연의 흑염룡, ‘구원의 마왕’은 예전에 자기가 쓰던 수식언이랑 비슷하다고 주장······.

〈일간 스타 스트림〉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들을 읽으며, 나는 새삼 성좌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자각하고 있었다.
화신에서 성좌가 되는 것과, 시나리오 시작부터 성좌인 것은 이토록 다르구나. 

[당신의 유명세가 〈스타 스트림〉에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일부 호사가들이 ‘사기꾼 구원의 마왕’의 노래를 지어 퍼트립니다.]
[유명세 상승으로 5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어쨌거나, 내게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헤헤. ‘구원의 마왕’님. 이번 달도 채널 구독 계속하실 겁니까?]

[성좌, ‘구원의 마왕’이 당연히 할 거라 대답합니다.]

[마왕님 덕에 이번 달 매출이 크게 올랐습니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마왕님의 진명이 어떻게 되시는지······ 솔직히 마왕님처럼 개연성을 쥐똥으로 아는 분은 처음 봤습니다. 아, 하하하. 이건 물론 칭찬입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진명은 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사실 저는 마왕님처럼 대단한 분이 제 채널에 쭉 계셔주시는 게 조금 의아하기도 합니다. 저는 딱히 대단한 뒷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자신 없는 표정의 비형.
나는 그런 비형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해주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자신은 빚을 갚는 것뿐이라 말합니다.]


*


한 번 읽은 책은 전보다 힘을 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전혀 뜻밖의 곳에서 애를 먹기도 한다.
내게 있어 0회차는 그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화신 ‘유중혁’이 자신의 배후성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유중혁의 0회차는 나의 세계선과 비슷했다.
정해진 전개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이야기.
······이쯤 왔으면, 이미 본래 0회차의 전개대로 돌아가긴 무리겠지.

“중혁 씨. 바리케이드는 여기 설치하면 되겠습니까?”

강철검제 이현성.

“어이 대장! 나한테도 검술 가르쳐주기로 했잖아!”

망상악귀 김남운.

“사부. 이번 시나리오 끝나고 아이템 파밍 좀 다녀와도 돼요?”

해상제독 이지혜.
그리고 여기에, 본래의 0회차에는 없었을 인물 하나가 추가되었다.

「금호역을 지날 때, 꼭 그 사람을 영입해.」

어쩌면 그것은 내 욕심이었다.
이 세계에는 유상아도, 이길영도, 나도 없지만······.
적어도 한 사람, 〈김독자 컴퍼니〉에서 영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현성 씨. 거기 비뚤어졌잖아요.”

멸악의 심판자, 정희원.
다른 일행들이 빠뜨린 사항들을 하나하나 점검하는 정희원을 보며, 나는 오래된 감회에 젖었다.

「“난 그때 되게 좋았어요. 같이 백화점 가서 옷도 사고, 멋지게 〈에덴〉 방문했을 때.”」

49%의 아바타 쪽에 많은 기억을 넘겼음에도, 여전히 내겐 많은 기억들이 남아 있었다. 폭풍처럼 밀려오는 기억의 페이지 위에서, 나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그래서, 당신은 이렇게밖에 못하는 사람인 거야. 그렇지?”」

내가 기억하는 정희원은, 잘 있을 것이다.

그 세계의 이야기는 무사히 끝났으니까. 그곳의 나와, 일행들과 함께. 한강에 가고, 바다에 가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세뇌하듯 중얼거리며 지금 눈앞의 당면한 세계에 집중하려 애썼다.

「이 곳 도 너의 세 계는 아 니야」

알아.

「이제 김독자의 세계는 어디에도 없다.」

모든 세계가 꿈인 존재에게, ‘단 하나의 현실’ 같은 것은 의미가 없다. 나는 그 사실을 잊기 위해 눈앞의 광경에 몰두했다. 차라리 생각 없는 성좌가 되는 편이 좋았다. 시나리오를 즐기고,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이야기의 탐식자가 되어버리면, 그 모든 것들을 잊을 수 있었다.

“오라버니! 이 미아가 해냈어요!”

그리고 다행히도, 이 이야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였다.

“남들 앞에서 그런 말투 쓰지 말라고 했잖아.”
“히잉.”

동생의 말투를 지적하는 유중혁을 보며 새삼 쓴웃음이 나왔다.
네 말투나 고쳐라 자식아.
아무리 프로게이머라지만 저놈도 사람이랑 대화라는 걸 했을 텐데. 어떻게 저딴 말투로 사회생활이 가능했던 걸까.
얼굴의 개연성인가?

“곧 네 번째 시나리오가 시작된다. 모두 준비해라.”

유중혁은 내가 전해준 정보를 통해 조금씩 성장했다.

「김남운이 엇나가지 않도록 잘 관리해. 그놈은 널 동경하니까 그걸 이용하면 편할 거야. 처음부터 악한 사람은 없다는 걸 명심해.」

막대한 개연성을 희생해서 매번 전해준 정보들.

「극장 던전에서는 까불지 말고 차분하게 진행해. 마지막 보스는 정신계 공격을 거는 놈이니까 가기 전에 꼭 이 스킬을―」

「공필두는 초반 시나리오에서 잘 묶어두면 유용하게 쓸 수 있어. 아주 못된 아저씨는 아니니까 잘 회개시켜 봐. 힌트는―」

처음에는 의심하던 유중혁도, 내 조언이 하나둘 맞아떨어지자 내게 차츰 신뢰를 보이기 시작했다.
하긴, 누구 덕에 여기까지 왔는데.
솔직히 아직도 ‘구원의 마왕’을 배후성으로 선택 안 한 걸 보면 좀 괘씸할 정도다.

“그런데 대장은 어떻게 그렇게 시나리오를 잘 알아요?”
“······도와주는 녀석이 하나 있다.”
“도와주는······?”

다행히 0회차의 유중혁은 아예 은혜를 모르는 녀석은 아니었다.

―다음 계시를 내놔라.

유중혁은 무려 30만 코인이라는 거금을 비형에게 지불하여 일대일 비밀 통신을 개설했다. 내가 주요 정보들을 제공하니 당연한 선택이었겠지만, 그래도 내심 기특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화신 ‘유중혁’에게 ‘계시의 편린’을 하사합니다.]

「네 번째 시나리오의 핵심은 ‘절대 왕좌’야. 명심해야 할 것은, 절대로······.」

츠츠츠츠츠······.

녀석에게 정보를 건네줄 때마다, 막대한 양의 개연성이 소진되고 있었다.
이 세계의 기본 단위는 ‘이야기’. 유중혁의 뒤통수를 갈기는 것보다 미래를 누설하는 것이 개연성을 더 많이 해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놈들이다!”

밀려오는 적들을 보며, 유중혁의 일행들이 동시에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이제 곧 네 번째 시나리오의 최종막이 시작될 것이었다.
[제4의 벽]이 말했다.

「네 가 무슨 짓을 하는 건 지 알지」

파스스스,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끝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나는 서울 7왕들과 맞서 싸우는 유중혁의 모습을 보았다. 녀석의 손에서 번뜩이는 [진천패도]가 용맹한 울음을 터트렸다.

「네 가 아무리 노력 해 도」

0회차의 이야기는, 본래의 원작과는 완전히 바뀌었다.
이 세계선에서, 유중혁은 다른 어떤 유중혁과도 다른 길을 걸을 것이다.

「저 녀 석 은 벽 의너머 를 볼 수 없어」

나는 [제4의 벽]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이 세계선에는 [제4의 벽]을 얻을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말은 즉, [최후의 벽]을 열 수 있는 마지막 열쇠가 없다는 뜻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0회차의 유중혁은 그 열쇠를 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녀석이 [최후의 벽]을 넘을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녀석의 불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내가 ‘가장 오래된 꿈’인 한, 시나리오가 끝나도 녀석의 세계선은 멸망하지 않을 테니까.

「어떤 진실은, 존재 자체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나는 녀석에게 ‘진실’을 보여줄 수는 없어도.
이 이야기의 온당한 ‘종막’은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축하합니다! 화신 ‘유중혁’은 ‘절대 왕좌’의 모든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마침내 서울 7왕을 모두 물리친 유중혁이 절대 왕좌의 앞에 섰다. 밤하늘이 빛을 토하고 있었다. 서울 돔의 모든 성좌들이, 그리고 광화문에 모인 모든 시민들이 유중혁의 행동을 주목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품속에서 천천히 한 자루의 칼을 뽑아 들었다.

[사인참사검].

나는 북두성군을 대신하여 녀석에게 힘을 보태주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화신 ‘유중혁’을 바라봅니다.]
 
하나둘 밝혀지기 시작하는 일곱 개의 별자리. 
유중혁이 쥔 [사인참사검]이 눈부신 광휘를 일으키며 성유물로 진화하고 있었다.

[외신들이 당신의 가공할 힘에 경악합니다!]
[북두성군들이 당신의 존재에 깜짝 놀라 기함합니다!]
[한반도의 모든 성좌들이······.]

“나는, 네놈들처럼 추한 인간들을 대표할 생각이 없다.”

유중혁이 말을 이었다.

“네놈들처럼 추잡한 성좌들의 노리개가 될 생각도 없고. ······나는 ‘절대 왕좌’에 앉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들었던 것도 같은 말들.
유중혁의 검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이 왕좌에 앉지 못하게 할 것이다.”

사인참사검. 성유물에 담긴 성좌의 연을 끊는 검. 
유중혁은 그 검을, [절대왕좌]를 향해 끊임없이 내리쳤다. 내리치고, 내리치고, 또 내리치고.

이내 쩌저저적,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타 스트림〉의 밤하늘이 백야처럼 밝아졌고, 범람하듯 메시지가 터져 나왔다. 시나리오의 뒤틀림으로 인한 개연성 후폭풍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손을 뻗어 범람하는 후폭풍을 막아냈다.

[세계선이 당신의 지나친 간섭에 불만을 갖습니다!]
[해당 ‘덮어쓰기’는 당신의 장악력을 넘어선 행위입니다!]
[당신의 설화 일부가 소실됩니다!]

지금의 유중혁은 0회차였다.
회귀자가 아니니 미래의 정보도 알지 못했고, [전승]을 통해 지난 회차에서 사용했던 기술들을 복원시킬 수도 없었다.
앞으로의 시나리오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녀석은 나처럼 [책갈피]를 쓰지도 못하고,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쓰지도 못한다.

「그렇기에 김독자는, 그 부족한 부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알고 있었다.」

유중혁은 회귀하지 않을 것이고.
‘은밀한 모략가’가 되지 않을 것이며.
세계선을 떠도는 불행한 순례자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 유중혁이 온당히 맞아야 할 끝을 볼 것이다.

[화신 ‘유중혁’이 최초의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화신 ‘유중혁’의 새로운 설화가 생성됩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유중혁. 그 유중혁의 배후에서 백호의 형상을 띤 설화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때 나를 지켜주었던, 바로 그 설화였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탄생하였습니다.]

부서져 나가는 오른손의 엄지 사이로, 환희에 찬 유중혁의 얼굴이 보였다.
이 이야기에 ‘김독자’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김독자가 정말로 만들고 싶었던 이야기.」

천천히 눈을 감자, 눈앞에 페이지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이미 누군가가 낙서처럼 흔적들을 남겨 놓은, 오래된 페이지.

「그 순간 김독자는 결심했다. 원작에는 없었던 그 이야기를, 자신이 직접 써보기로.」

나는 그 페이지 위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한 장, 두 장. 그리고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시간이 흘렀다.

5번, 6번, 7번, 8번······.

시나리오가 넘어갈 때마다 내 손가락이 하나씩 사라졌다. 
사라진 손가락은 시간이 지나며 다시 자라났으나, 예전보다 크기가 줄어 있었다. 나는 그 손가락으로 계시를 썼다. 원작의 유중혁이 원했던 끝. 내가 보고 싶었던 결말. 내가 실수했던 것과 새로이 알게 된 것들. 
그 모든 이야기들이 하나가 되어, 곧 설화가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마침내, 0회차의 유중혁은 시나리오의 최종장에 도달했다.」

===

유중혁의 [진천패도]가 허공을 갈랐다. 앞길을 가로막는 성좌들을 베었고, 그들의 수족이 된 화신들을 베었다. 

유중혁은 정말 열심히 싸웠다.

그의 뒤에는 함께 시나리오를 헤쳐온 일행들이 있었다. 이지혜, 이현성, 정희원, 신유승, 김남운, 이설화, 공필두······.

―시스템 오퍼레이션.

서울 7왕들도 함께 있었다. 은둔한 그림자의 왕 한동훈과, 미희왕 민지원.

―가, 유중혁!

초월좌들의 왕 장하영도 보였다.

―이쪽은 우리가 맡겠다, 패왕.

거기에 페이후나 란비르 칸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화신들. 
그의 숙적인 안나 크로프트조차 그를 도왔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화신 유중혁을 응원합니다!]
[성좌, ‘악마같은 불의 심판자’가 ]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그 어떤 회차도 그보다 완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진군한다, 파천맹.”

파천맹(破天盟). 그것이 유중혁이 만든 연합의 이름이었다. 
내가 완성했던 결말과, 1863회차의 한수영이 보여주었던 설계. 내가 알고 있는 ‘멸살법’의 모든 회차의 정수가 집약된 설화들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기염을 토합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들이,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어떻게, 벌써······? 너는 아직 이곳에 올 수 없는―]

마침내 부서진 방주 너머에서, 경악한 도깨비 왕의 표정이 보였다. 
유중혁과 파천맹의 일행들은 망설이지 않고 녀석을 향해 돌격했다.

[어리석은 화신들이여, 나를 죽이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스타 스트림〉이 멸망하면, 너희도 사라질 것이다. 사건이 종결된 세계선은 버려진다. 그런 세계선은 누구도 보려 하지 않는다!]

도깨비 왕은 몸부림쳤다. 자신의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그는 자신의 모든 설화를 동원해 싸웠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설화를 토하며 무릎을 꿇은 도깨비 왕은 주저앉으면서도 웃었다.

[너희는 끝이다. 곧 이 세계선의 멸망이 시작될 것이다. 그분께서, 이런 이야기를 원할 리······.]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멸망은 시작되지 않았다. 〈스타 스트림〉은 건재했다. 도깨비 왕이 눈을 부릅떴다.

[〈스타 스트림〉의 최종 시나리오가 종료되었습니다.]

[······설마······?]

마지막 순간 도깨비 왕은 자신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드넓은 [최후의 벽] 너머에서 자신을 보고 있을 누군가의 시선을 헤아리듯이. 
그리고 다음 순간, [최후의 벽] 위에 문장이 떠올랐다.

「〈스타 스트림〉의 전설, 패왕 유중혁.」

화면 위로 떠오르는 자막. 삑―하는 소리와 함께 패널이 꺼졌다. 검은 패널 위로 교실의 정경이 비치고 있었다. 옹기종기 앉은 아이들의 모습.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은, 패널 옆에서 강의를 준비하는 사내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유중혁이다.”

.
.
.

“아이들이 굉장히 좋아했어요, 중혁 씨. 역시 강의 잘 하시던데요.”
“······재미없는 이야기라 다들 지루해하더군.”

무뚝뚝한 유중혁의 목소리에 이설화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도 않아요.”

유중혁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코트를 걸쳤다.

「어느새, 0회차의 세계에서 시나리오가 종결된 것도 5년이 지났다.」

시나리오가 끝난 후, 유중혁과 동료들은 세계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한동훈은 정부 사람들과 접선해 체제를 만들었고, 이현성과 정희원은 범죄 단체의 테러를 제압했다. 
이지혜는 국경을 지키며 외국 화신들과의 국제 협약을 도왔고, 이설화와 신유승은 시나리오 속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구조했다.

시설, [별 헤는 밤] 또한 그렇게 만들어졌다.

시설을 나서며, 유중혁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어린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만든 고아들이었다. 이제 사라진 별들을 헤며 자라갈 아이들.

“그런데 아저씨.”

아이 중 하나가 유중혁의 옷깃을 잡았다. 유중혁이 돌아보자, 용기를 낸 아이가 손가락을 들어 유중혁의 머리를 가리켰다.

“흰 머리.”


*


시나리오가 끝나고 7년이 지났을 무렵, 유중혁은 결혼을 했다.
상대는 이설화였다.
눈물을 찍는 이지혜와, 주례를 보는 공필두. 부케를 받은 정희원······ 대학 수업을 제쳐두고 달려온 신유승이 축가를 불렀다.

아이는 갖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아이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이 세계에는 부모가 필요한 아이가 많아요.

그들은 시설을 세워 아이들을 돌보았다. 
두 사람 다운 선택이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10년, 15년······.」

결말을 읽기 위해 점점 빠르게 넘어가는 페이지처럼, 0회차의 시간은 흘러갔다. 유중혁은 정직하게 나이를 먹었다. 
정확히는, 오직 유중혁만이 나이를 먹었다.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며 유중혁이 얻은 특성 때문이었다.

전설급 특성, [전력의 삶].

수천 번의 회귀 속에서, 유중혁은 한 번도 그 스킬을 선택한 적이 없었다. 회귀자인 그는 선택할 필요가 없는 특성이었기 때문이다.

「정해진 수명을 사는 대신, 자신의 모든 재능을 폭발시키는 특성.」

하지만 지금의 그는 0회차였다. 회귀로 얻은 경험도, 재능도 부족한 상황. 그랬기에 그는 그 특성을 선택했다. 이 특성이 있어야만, 남은 시나리오를 모두 클리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부 올해 몇 살이죠?”
“나이 같은 건 잊었다.”
“음, 시나리오 끝난 지 20년이니까······ 맙소사. 벌써―”
“인간은 모두 늙다가 죽는다.”
“아 사부, 진짜······!”

〈스타 스트림〉의 시스템이 있는 한, 불사의 꿈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파천검성이나 키리오스처럼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을 살아가는 이들도 드물지 않았으니까. 뿐만 아니라 설화를 쌓아 성좌가 되면, 말 그대로 영원의 삶을 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유중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이야기는 없다.」

관리국이 멸절하고, 성좌들이 추락한 밤하늘. 
그 하늘을 바라보며, 유중혁은 세계의 낮과 밤을 살아갔다.

「그리고 25년.」

마침내 반백의 머리가 된 어느 날, 유중혁은 도시를 떠났다.

“대장, 진짜로 이런 촌구석에 틀어박혀 살 거예요?”
“나는 시끄러운 것은 질색이다.”
“설화 언니는 어쩌고요?”

유중혁은 말없이 [진천패도]를 닦았다. 
더 이상 벨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세계에서, 쓸모를 잃은 검을 수련하는 것. 그것이 유중혁이 자신에게 남은 삶을 쓰는 방식이었다.

“검 수련 같은 건 공단에서도 충분히······.”

그러나 신유승은 끝까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맑은 [진천패도]의 검면에 유중혁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누구도 그를 60대의 나이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중혁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그리고 혼자 남은 이설화는, 유중혁이 없는 아주 긴 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인 신유승이 뭐라고 입을 열려던 순간, 김남운이 끼어들었다.

“패왕, 이제 정말 다 늙어빠졌구만! 올해는 내가 이기겠는데?”

의기양양하게 외친 김남운이 붕대의 주먹을 풀며 유중혁에게 달려갔다.

“크아아아악! 팔! 팔! 아니, 눈!”

한 방에 나가떨어진 김남운이 끙끙거리며 바닥에 엎어졌다.
피식거리는 일행들의 웃음소리. 손을 잡은 정희원과 이현성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 이지혜와 신유승이 투닥거리는 모습. 
그 장면을 바라보며, 나는 그 위로 겹쳐지는 문장을 읽었다.

「어쩌면, 나 역시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었을까.」

아마도 조금은 다른 풍경이었을 것이다.
내가 살았던 세계는 〈스타 스트림〉이 멸망하고 시스템의 힘이 약화되고 있으니까.
내 세계의 사람들은 유중혁처럼 늙어갈 것이다. 그렇게 늙어가는 일행들 속에서, 나 역시 그들과 함께 늙어갈 수도 있었다.

떠나는 일행들을 보는 유중혁의 백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노인이 되었음에도 조금도 굽지 않은 등.
피부에는 여전히 탄력이 있었고, 팔의 근육도 굳건했다.
그럼에도 분명 유중혁의 눈에는 예전과 같은 총기가 없었다.

「김 독 자 너 무 오래 있 었 어」

[제4의 벽]이 말했다.

「하 나의 꿈 에 너무 오 래 있으 면 힘들 어 져」

그게 무슨 말인지 나도 알고 있었다.
나는 ‘가장 오래된 꿈’이고, 모든 세계를 공평하게 들여다보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쉽사리 0회차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면, 결국 모든 비극이 다시 시작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 이야기만 붙잡고 있으면―

“구원의 마왕.”

고개를 든 유중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아직도 이 이야기가 궁금한가?”

나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이 세계에는 이제 시나리오가 없다. 자극도, 파격도 없다. 그런데 너는 왜 아직, 이 이야기를 보려 하는 것인가?”

[성좌, ‘구원의 마왕’이 이것이 자신이 보고 싶었던 이야기이기 때문이라 답합니다.]

“너는 정말 이상한 녀석이다.”

유중혁의 등 뒤에서 설화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구원의 마왕’을 바라봅니다.]
[설화, ‘마계의 봄’이 ‘구원의 마왕’을 바라봅니다.]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구원의 마왕’을 바라봅니다.]

설화들이, 나를 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때의 내가 얻었던 설화들. 그 설화가 빚어낸 기억들이, 유중혁의 등 뒤로 펼쳐지고 있었다. 
내가 설계했고, 유중혁이 실천한 세계. 그리하여 완성된 0회차의 이야기.

“때로는 이 평화가 환상 같다는 생각을 한다. ······다른 이에 의해 삶이 완성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불행하다는 뜻은 아니다.”

유중혁이 희미하게 웃었다.
녀석이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기에, 나는 잠깐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늘 고민했었다.”

허공을 향해 가볍게 검을 휘두르며, 유중혁이 말을 이었다. 그의 검격에 그의 설화가 담겨 있었다. 정해진 법칙을 누구보다 잘 운용하는 화신. 평생에 걸쳐 시스템과 싸워온 유중혁은, 사실은 그 시스템이 있을 때 더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기지 못하는 싸움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과, 자신의 이해득실을 분별하는 능력. 전장의 유불리를 계산하는 재능.

“그런데 요즘은 가끔 궁금하군. 네가 돕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지. 이기지 못한 나는,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지.”

0회차를 실패한 유중혁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이후의 유중혁이 어떻게 되는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어떤 결말에 도달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네놈도 알고 있겠지. 이제 내 생은 얼마 남지 않았다.”

===

유중혁이 비틀거리며 바닥에 검을 짚었다. 그의 눈동자가 투명하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오랜 싸움에 지친 그의 눈이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네놈을 배후성으로 선택한다면, 네놈 모습을 볼 수 있는 건가?”

[성좌, ‘구원의 마왕’이 고개를 젓습니다.]

“네놈은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스타 스트림〉의 별들은 모두 떨어졌는데, 어디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지?”

유중혁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아니, 사실 나는 알고 있다. 너는······ 그 [벽] 너머에 있는 것이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설마 0회차의 유중혁이, 거기까지 눈치채고 있을 줄은 몰랐다. 유중혁은 계속해서 말했다.

“이 세계는 무언가 이상했다.”

유중혁에게서 처음 듣는 노회한 목소리였다.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이 세계에 존재하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세계에 존재하게 된 사내.

“어린 시절의 기억도 없이, 갑자기 세상에 내던져져 삶을 살았다. 불법 작업장을 전전했고, 운 좋게 실장의 눈에 들어 프로게이머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내 여동생이라는 아이를 내게 버렸다.”

편의적으로 만들어진 삶. 비극이 되기 위해 만들어진 역경.

“부모를 찾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대통령의 숨겨둔 자식도 찾아내는 이들조차, 내 부모를 찾지 못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것 따윈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성좌, ‘구원의 마왕’이······.]

“묻겠다, 구원의 마왕. 나는 누구지?”

심장이 울렁거렸다. 결국 유중혁이 그 의문에 도달하고 말았다는 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만 했다. 무슨 말이든―

“네가 있는 그 벽 너머에, 이 세계의 비밀도 있는 건가?”

[성좌, ‘구원의 마왕’이 지금 행복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행복하다.”

단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유중혁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 그 벽 너머가 궁금하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네가 내게 베푼 호의의 정체가 궁금하다. 내 삶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지, 나는 어디서부터 태어나 왜 이곳에 왔는지 궁금하다. 만약 한 번 더 기회가 있다면―”

어디선가 시곗바늘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김 독 자」

유중혁에게 [벽]의 너머를 보여줄 수는 없었다. 아무리 내가 ‘가장 오래된 꿈’이라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했다. 유중혁이 계속해서 말했다.

“언젠가 네놈이 말했지. 너와 배후 계약을 맺는다면, 내가 원하는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그때는 의심스러워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면······.”

허공을 헤매는 유중혁의 손가락이, 언젠가 그에게 도달한 로그 메시지를 찾아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당신의 배후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지금 너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밀려오는 현기증에, 사위의 흔들림이 심해졌다.
나는 [제4의 벽]을 불렀다.

‘제4의 벽.’

「안 돼」

녀석은 이미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유중혁이 [최후의 벽]을 넘기 위해 필요한 조건. 그것은 ‘최후의 벽의 파편’을 모두 모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4의 벽]은 유중혁에게 전이될 마음이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문 채 메시지를 전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그것은 들어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지?”

[성좌, ‘구원의 마왕’이 그것은 아주 힘든 길이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힘들다고?”

내가 유중혁에게 [제4의 벽]을 전해줄 수 없다면, 유중혁이 결말을 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네가 [벽]을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귀’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회귀?”

츠츠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전신이 개연성의 스파크로 물들었다. 
세계선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이것을 알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이것은, 지금의 유중혁이 알아서는 안 되는 정보라고. 
하지만 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세계선의 저항을 떨쳐냈다. 더 많은 개연성을 희생하더라도, 나는 녀석에게 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1864」

“1864? 무슨 의미지?”

[성좌, ‘구원의 마왕’이 네가 결말을 보기 위해 회귀하게 될 숫자라고 말합니다.]

내가 살아온 모든 기억들이, 설화가 되어 펼쳐지고 있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심지어 그 회귀를 모두 살아내더라도, 네가 결말을 볼 수 있을 확률은 극히 낮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지금의 유중혁은 ‘본래의 세계선’에서 벗어났다.
그는 이제 원작의 유중혁이 아니었다. 
시간 분기는 갈라졌고, 미래는 사라졌다.
설령 1864회차에 도달한다고 해도, 그가 [제4의 벽]을 가진 ‘김독자’를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은······.

「있 어」

뭐?

「이번 회 차의 기억을지 우면 돼」

순간 소름이 돋았다.

「만약, ‘원작’에 남아 있었던 0회차의 기억 단편을 주고, 유중혁을 다음 회차로 보낸다면 어떨까.」

그러면 세계선은 이 유중혁을 ‘원작의 유중혁’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는 다시 원작의 세계선에 편입될 것이고, 이 생의 기억을 잊은 채 다시 1회차와 2회차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유중혁은 다시 불행해지겠지.」

「네가 왜 그것 을 결 정 하 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중혁이 말하고 있었다.

“가능성이 낮아도 상관없다.”

[화신, ‘유중혁’이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다시 한번 생을 살 수 있다면. 그래서, 내 손으로 결말을 볼 수 있다면, 세계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다면―”

[화신, ‘유중혁’이 당신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별자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당신의 화신이 당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이제는 말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유중혁.]

오랜만에 발해 보는 진언이었다. 가공할 스파크가 주변에 불어닥쳤다. 기파를 최소한으로 억제했는데도 이 정도였다. 
커다랗게 눈을 뜬 유중혁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이 네 진짜 목소리인가?”

[그래.]

“······잘 들리는군.”

점점 귀가 먹어가는 유중혁이 중얼거렸다. 늙은 유중혁의 표정 위로 희미한 주름이 번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외면하며 말했다.

[너를 회귀시켜 줄 수 있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다음 회차부터는 너를 도울 수 없어.]

유중혁이 이 제안을 거절하게 할 방법.
그것은 진실을 말해주는 것뿐이었다.

[너는 순수하게 혼자만의 힘으로 시나리오를 헤쳐가야 할 거야. 그 시나리오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지독할 거고, ······끝내 도달한 결말에서, 네가 원하지 않는 것과 조우하게 될 수도 있어.]

나는 유중혁을 생각했다.
3회차의 슬픔을, 4회차의 비탄을, ‘은밀한 모략가’의 절망을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회귀’를 선택한다면······ 너는, 이 회차의 기억 대부분을 가지고 갈 수 없어.]

그 말에 유중혁이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아무리 결심이 굳다고 해도, 이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주 단편적인 시나리오의 기억들만이, 네게 남아있게 될 거야.]

“······.”

[네게 소중한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뜻이야. 네가 기억하는 이설화도, 이현성도, 이지혜도, 그 모든 것이 전부―]

“내가 잊는다고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분명히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분명히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각인처럼, 그 말은 내 뇌리의 어딘가를 치고 들어왔다. 
마치 거대한 운명이 나를 덮쳐오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김독자는 이것이 0회차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0회차에 ‘가장 오래된 꿈’의 흔적이 없었던 이유. 그럼에도 유중혁이 1회차와 2회차로 넘어갈 수 있었던 이유. 어쩌면 그것은.

[······빌어먹을 자식.]

나는 손을 모아 내게 모인 꿈 장악력을 사용했다. 
불어오는 개연성의 후폭풍에 한쪽 팔 전체가 비틀릴 것처럼 아파 왔다.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유중혁의 회차를 떠올렸다. 그가 살아갈 생애와, 내가 아는 설화를 모아 단 하나의 성흔을 빚어냈다. 
이 세계의 동력이자, 유중혁의 모든 비극을 일으킬 단 하나의 성흔.

[성흔, ‘회귀’가 생성되었습니다!]
[당신의 성흔이 당신의 화신에게 전해집니다!]

유중혁은 만족한 듯 그 성흔을 받아들였다. 

[성흔 ‘회귀 Lv.1’이 발동을 준비합니다.]

“아까 내가 기억을 잃게 될 거라 했지.”

[······그래.]

“혹시 네놈에 관한 것도 잊게 되는 건가?”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유중혁이 다시 물었다.

“네놈이 알려준 간편한 정보들도?”

[······그래.]

“그렇군.”

[후회되면 지금이라도―]

“다음 회차부터는 나를 돕지 않는다고 했지.”

[돕지 못해.]

“도와도 괜찮다.”

[도울 수 없다고.]

“화신뿐만 아니라 성좌에게도 시나리오는 있다고 들었다. 어쩌면 네놈도 그렇겠지.”

[······.]

“회귀를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네놈을 만날 수도 있는 건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 지껄이는 소리였다. 그 어떤 의미도, 미래도 헤아리지 못하는 멍청한 0회차의 말이었다.
말해지지 못한 언어와 함께, 유중혁의 귀는 사라지고 있었다.

「유중혁의 눈에 밤하늘이 비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태어난 근원을 궁금해하는 아이처럼, 유중혁은 [벽]이 있을 하늘을 어림하며 손을 뻗었다. 

그는 언젠가 ‘은밀한 모략가’가 될 것이고.
동시에 내가 알던 1864회차의 유중혁이 될 것이다.
나를 원망하게 될 것이며, 세계의 진실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성흔, ‘회귀 Lv.1’이 발동합니다!]
[당신은 성흔의 발동에 동의하였습니다.]

유중혁의 몸이,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팔, 다리, 그리고 몸통. 
마지막 순간, 유중혁이 나를 불렀다.

“구원의 마왕.”

무척이나 기이하고 신비로운 표정으로.

“너도 어디선가 계속 살아가길 바라지.”

은빛 가루로 흩날리는 유중혁의 화신체가 이 세계선을 떠나고 있었다.

[해당 세계선의 ‘덮어쓰기’가 등장인물 ‘유중혁’의 다음 회차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당신의 화신이 당신의 수식언을 잊습니다.]
[당신의 화신이 당신과 관련된 기억을 잊습니다.]
[당신의 모든 정보가 ‘???’로 처리됩니다.]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할 그의 기억은, 이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저 기억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나는 오래도록 그 반짝임을 바라보았다.


*


“야, 유중혁! 왜 대답이 없어!”

뒤통수를 빡, 하고 내리치는 충격에 유중혁은 비틀거렸다.
등을 돌리자, 그곳에 눈살을 찌푸린 한수영이 있었다.

“그래서, 그 ‘집단 회귀’라는 건 어떻게 하는 거냐고.”
“갑자기 기억이 났다.”
“뭐가?”

멍청한 얼굴로 돌아본 유중혁이, 한수영을 향해 중얼거렸다.

“0회차의 기억.”

===

Epilogue 2. 어디에도 없는



「병실, AM. 9:12.」

―내일 오후 7시까지 모두 공단 동쪽 입구에 모여. [최후의 벽] 너머로 김독자를 구하러 간다. 

정희원이 그 문자를 받은 것은 어젯밤의 일이었다. 발신인은 한수영. 언제나 그렇듯 건방진 문자였다.
문자를 받고서 정희원은 한참이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정희원은 다시 시나리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떤 화신보다도 열심히 싸웠던 그녀였다. 누구보다 김독자를 구하길 원했고, 시나리오를 끝내길 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곳까지 왔다.

「시나리오의 종장에서 보았던 최후의 벽.」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기억이 선연했다.
‘이야기의 적’이 된 김독자와 함께 싸우던 기억.
끔찍한 설화의 범람 속에서 무언가를 베고, 베고 또 베며 그녀는 살아남았다. 벽을 부수고, 자신의 종착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한수영은 다시 한번 그 열차를 타라 말하고 있었다.」

[최후의 벽]이 있었던 그곳으로 다시 한 번 가자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내렸던 그 열차에 두고 온 것이 있다고.

“희원 씨.”

커튼을 쥔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정희원은 그때야 깨달았다.

“현성 씨도 받았어요?”
“예.”
“어떻게 생각해요?”
“······우리가 기억하는 독자 씨는 이곳에 있습니다.”

그들이 기억하는 김독자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세상 모든 비극을 잊은 눈꺼풀. 정희원은 그런 김독자의 눈에 가만히 손을 덮어주었다. 
어떤 불행은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사라진다.

「이 김독자는 그들이 기억하는 김독자였다.」

함께 금호역을, 충무로를, 광화문을, 마계를, 올림포스와 서유기를, 최후의 벽을 이겨낸 김독자가 눈앞에 있었다. 그는 정희원의 검명을 기억했고, 이현성의 트라우마를 기억했다. 일행들과의 약속을 기억했다. 

정확히 이만큼이, 그들이 사랑하는 김독자였고.
그녀가 지키고 싶어하는 김독자였다.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히 나누어져도 좋은 것인가 싶었지만, 이것은 비단 ‘아바타’의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누군가를 좋아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의 일부를 좋아하는 것이니까. 

김독자의 상처에 묻은 혈흔이 파스스, 소리를 내며 연기로 화했다.
부서지는 설화들이 허공을 떠다니다 이내 창밖 하늘로 흩어졌다. 저 설화들이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정희원은 알 수 없었다. 영영 소멸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또 다른 김독자에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멸살법’을 기억하고, 하나의 이야기를 줄곧 사랑해온 김독자.」

정희원은 그런 김독자에 관해 알지 못한다.
누구도 잘 모르는 것을 사랑할 수는 없다.

“현성 씨.”
“예.”
“만약 독자 씨가 우리였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이현성은 오랫동안 대답이 없었다.


*


「병실, PM. 1:31.」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듯, 병실의 테이블 위에는 꽃과 선물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언젠가 김독자가 깨어났을 때를 대비한 선물들. 
장하영은 꽃잎을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김독자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넌 내가 기억하는 김독자야. 그렇지? 마계에서 날 구해줬던 김독자.”

머리맡에 놓인 시계가 움직이고 있었다. 
멈춰있던 73번째 마계의 시간을 흐르게 만든 사람. 
재능의 벽에 좌절했던 그녀를 움직이게 만든 사람.

구원의 마왕.

“사실 그때 지구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어.”

장하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엔 좋은 기억 하나도 없거든.”

그녀는 차원이동자였다. 
대부분의 차원이동자들이 그렇듯, 경위는 불가해했다. 평소처럼 회사에서 야근하던 어느 날, 그녀는 심장에 불현듯 통증을 느끼며 쓰러졌다. 숨이 멎는 순간 ‘너무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고, 다음 생이 있다면 ‘절대 열심히 살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눈을 떠 보니 마계였다.

점심을 먹으러 분주히 움직이는 공단 주민들을 보며, 장하영이 중얼거렸다.

“너 때문에 또 열심히 살아버렸잖아.”


*


「병실, PM. 6:24.」

“던져. 네 차례야.”

이길영의 말과 함께, 신유승이 백 원짜리 동전을 던졌다. 팽그르르 허공에서 회전하던 동전이 신유승의 손등 위에 탁 떨어졌다. 나온 것은 앞면.

“몇 번 던졌지?”
“99번.”
“그럼 49대 50이네.”

이길영이 손을 탁탁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보호자 침대에 앉아있던 이지혜가 물었다.

“너네 또 그 내기 하고 있어? 앞면 나오면 독자 아저씨가 살아 있니 어쩌니 하는?”
“무슨 소리에요? 아저씬 여기 살아 있잖아요.”
“그럼 무슨 내긴데?”

아이들은 말이 없었다. 이지혜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네 정말 그 말 믿는 거야?” 
“무슨 말이요?”
“우리가 모르는 독자 아저씨가 존재한다는 얘기. 아직도 그 열차에서 내리지 않고 있다는 그런······.”

두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멍하니 김독자를 내려다보던 이지혜가 벌떡 일어나 김독자를 가리켰다.

“이 아저씨가 내가 아는 독자 아저씨야.”
“······.”
“너흴 구해준 것도, 나를 구해준 것도 이 아저씨라고.”
“알아요.”
“그것뿐인 줄 알아?”

이지혜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 독자가 진짜 김독자인 이유. 
그런데 이상하게도, 말을 이어갈 때마다 이지혜는 김독자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지혜가 창백한 김독자의 손을 꽉 잡았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 손의 주인과 함께 간신히 자랐다. 소중한 사람의 상실을 배웠다. 지켜야만 할 가치를 알게 되었다. 엉망진창인 세계 위로, 간신히 숨통을 틔웠다.

김독자도, 누군가에게 그것을 배웠을 것이다.

신유승이 중얼거렸다.

“······아저씨도 어린 시절이 있었겠죠.”

〈스타 스트림〉에서 ‘구원의 마왕’의 탄생 설화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구원의 마왕’의 탄생 설화지, 김독자의 탄생 설화는 아니었다. 

「아마도, 인간 김독자의 탄생은 그리 거창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독자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기 위해, 김독자는 어떤 이야기를 살아와야 했을까.

“언니.”
“왜.”
“내일 갈 거예요?”
“안 가기로 했잖아.”
“하지만 갈 거죠?”
“안 가. 난 또 시나리오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어.”

이지혜는 어느덧 부쩍 커진 아이들의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그녀가 지켜야 할 아이들이었다. 
신유승과 이길영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올려다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누나도 던져볼래?”

이지혜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동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동전을 허공으로 띄웠다. 빙그르르 돌던 동전이 이지혜의 손안에 감겨들었다. 하지만 이지혜는 손바닥을 펴지 못했다.

“언니?”

손안에 들어온 동전의 감각. 앞면인지 뒷면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곳에는 분명히 동전이 있었다.

“괜찮아요?”

이지혜는 손안에 있는 동전의 감각을 오래도록 느꼈다. 


*


「병실, PM. 10:48.」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유상아였다.

“설화 수치가 점점 떨어지고 있어요.”

마치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날 생물 분해가 일시지간에 벌어지는 것처럼, 김독자의 피는 계속해서 증발했다. 이수경이 물었다.

“설화 씨,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우릴 살릴 때 사용했던 방법은 쓸 수 없나요? 설화 수선이라든가.”

가볍게 한숨을 내쉰 이설화가 유상아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수경 씨나 상아 씨에게 설화 수선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건 〈스타 스트림〉의 시스템이 건재했기 때문이에요.”

스킬과 성흔이 존재하는 세계. 세계의 모든 것이 이야기의 구성품이었던 세계. 그곳에서 치료란 곧 설화를 수선하는 것이었다.

“최근 스킬이나 설화가 예전처럼 작동하질 않아요. 저도, 아일렌 씨도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어요.”
“······〈스타 스트림〉의 영향력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인가요?”
“지금으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독자 씨의 상처가 낫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겠군요.”

눈앞의 김독자는 [아바타] 스킬을 통해 만들어진 존재였다.
그리고 [아바타]는, 〈스타 스트림〉의 시스템 스킬이었다.
이설화가 최종 진단을 내렸다.

“이곳에 있으면 독자 씨는 결국 소멸할 거예요.”

이수경은 말없이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김독자가 평생에 걸쳐 이룬 세계가, 이제 그를 죽이고 있었다.
마치, 이야기가 끝난 세계에 김독자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이수경은 잠든 김독자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때 너를 막을 걸 그랬구나.”

뺨이 손끝에 닿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서 설화가 피어났다. [암흑성]에서 싸웠던 두 사람. 이수경은 지금도 그때를 기억했다. 
[제4의 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던 얼굴. 두 사람 사이에는 항상 벽이 있었다. 하지만 김독자가 그 벽을 먼저 두드렸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다시 돌아가도,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막지 못할 것이다.

한참이나 김독자를 바라보던 이수경이 아들의 손을 잡았다. 항상 책을 좋아했던 손. 또 다른 김독자는 지금도 이 손으로, 지하철에 탄 채로, 어디선가 스크롤을 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네게 독자라는 이름을 주지 말 걸 그랬구나.”


*


「공단 동쪽 출입구, AM. 8:00.」

한수영과 유중혁은 키가 맞지 않는 나무처럼 서서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추운 겨울바람이 뺨을 적셨고, 입가에서는 따뜻한 입김이 흘러나왔다. 
파카 속에 손을 집어넣은 한수영이 투덜거렸다.

“······아무도 안 오네.”

어쩌면 이렇게 될지 모른다고 예상은 했다. 한수영이 팔꿈치로 유중혁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그냥 우리끼리 해도 되지 않냐? 내 천재적인 머리와 네 무식한 전투력이 힘을 합친다면―”
“둘로는 무리다.”
“아 왜. 지금까지 혼자서도 잘 해왔잖아. 이번엔 무려 둘이라고.”

유중혁은 대답 대신,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손위에, 투명한 고리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성흔, ‘회귀’가 진화 중입니다.]

그가 살아온 무수한 회차들이 그 고리 위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너는 내 ‘회귀’가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

유중혁이 손안의 고리를 천천히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내가 회귀를 반복할 때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너는 모른다.”

움켜쥔 주먹 안에서 설화들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벌레 알처럼 터져 나가는 문장들. 그의 삶 속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해 죽어간 이들의 비명이었다.

“완벽한 회차 같은 것은 없다. 무엇도 희생하지 않는 설화가 없는 것처럼. 만약 이번에 또 회귀하게 된다면······.”

어쩌면, 또 누군가를 잃게 될 것이다.
세계는 다시 비극으로 침잠할 것이다.
김독자를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계는, 누구도 구하지 못한 채 파멸할 수도 있다. 한수영이 말했다.

“나도 알아. 그리고······.”

그녀는 공단의 입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차가운 겨울의 볕 속에 긴 그림자들이 드리워져 있었다.

“저 사람들도, 모두 알아.”

===

한수영은 아주 정확한 언어로 계획을 설명했다.

하나, 김독자를 구하기 위해서는 [최후의 벽]을 넘어야 한다.
둘, [최후의 벽]을 넘기 위해서는 총 다섯 개의 [파편]이 필요하다.
셋, 현재 이 세계선에 남은 파편은 김독자의 아바타가 가진 [제4의 벽] 뿐이다.
넷, 남은 네 개의 파편을 얻기 위해, 그들을 ‘집단 회귀’를 통해 다른 세계선으로 갈 것이다.

그 명료한 계획을 들은 일행들은 약간 얼빠진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제일 먼저 물은 것은 이지혜였다.

“······그게 가능해요?”
“이 녀석이 가능하다고 했으니까 되겠지.”

한수영의 시선을 받은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 아직 성흔 진화가 끝나지 않아서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어차피 준비할 시간도 필요하니까.”
“······잠깐만요. 사부가 말하는 ‘회귀’는 정확히 원리가 뭔데요?”
“내가 회귀를 사용하면 나와 너희 모두는 시나리오가 시작하던 시점의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
“그럼 우리가 있는 세계는요?”
“이 세계와는 별개로 새로운 세계선이 만들어질 거다. 회차로 따지면······ 아마 1865번째 세계선이 되겠지.”

1865번째 세계선.
너무나 어안이 벙벙한 숫자였기 때문에, 일행들은 눈만 끔뻑였다.

“거기서 모든 걸 다시 해보자는 거군요.”

마치 예상이라도 하고 온 듯, 그렇게 말하는 정희원의 표정은 결의에 차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녀와 같은 생각은 아니었다.

“제가 알기로 당신의 이번 ‘회귀’는 좀 특별했을 텐데요.”

그 말을 한 것은 유상아였다.

“저도 독자 씨의 장서관에서 ‘회귀’에 대해 읽어서 알고 있어요. 지금까지 중혁 씨의 회귀는 ‘멸살법’이라는 세계관을 중심으로 계속됐어요. 그런데 이번 회차는 조금 특별했죠.”

그게 무슨 뜻인지, 다른 일행들도 어렴풋하게 눈치챈 듯했다.
지금 이 ‘세계선’은, 지난 유중혁의 회차들과는 달랐다.
이 세계선은 ‘끝’을 보고 싶다는 유중혁의 의지로 태어난 세계선.
[제4의 벽]의 일부가 무너지며 현실과 픽션이 합쳐진 세계였다.
그 증거로, 이번 회차에는 ‘멸살법’의 등장인물이 아닌 이들이 있었다.

“우리가 정말 다 같이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확신할 수 있어요?”

만약 유중혁의 ‘회귀’가 ‘멸살법’을 기준으로 발동한다면, 유상아나 이길영을 비롯한 몇몇 일행들은 그와 함께할 수 없었다. 
천천히 눈을 깜빡인 유중혁이 말했다.

“회귀는 내가 ‘회귀’를 발동한 세계선을 기준으로 발동한다.”
“그 말은, 이 ‘독자 씨’도 데려갈 수 있다는 거군요.”

유상아는 뒤쪽 병상에 누워 있는 김독자를 가리켰다. 
이곳의 김독자가 죽어가고 있는 것은 시스템의 힘이 옅어지고 있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 김독자를 [집단 회귀]를 통해 데리고 갈 수만 있다면, 그는 다시 〈스타 스트림〉의 시스템 아래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유중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럼 다들 정해진 거지? 반대하는 사람 손 들어봐.”

당연히 그런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한수영의 말투에, 신유승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아 넌 또 왜.”
“······이게 옳은 일인지 모르겠어요. 아저씨는 중혁 아저씨가 회귀하지 않길 바랐잖아요.”
“그놈도 우리가 원하는 거 별로 고려 안 해주잖아. 피장파장이지.”
“중혁 아저씨가 회귀하게 되면, 세상에는 또 시나리오가 시작될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죽겠죠. 사람들은 다시 비극 속에 던져질 거예요. 성좌들은 인간들을 노리개로 삼을 거예요. ······그리고 대부분은, 첫 번째 시나리오조차 클리어하지 못할 거예요.”

신유승의 말이 맞았다.
어쩌면, 일행 중 누구보다도 ‘김독자’의 생각을 잘 이해하고 있는 화신.
김독자는 그런 불행을 또 만드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수영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서, 우리가 회귀하지 않으면 그 ‘불행’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네?”

가볍게 한숨을 내쉰 한수영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야. 언제까지 구경만 할 거야?”

그 물음과 함께 허공에 뿅 하고 솜털 뭉치가 나타났다.

[바앗?]

순진한 눈망울을 굴리는 비유를 향해 한수영이 혀를 찼다.

“또 저게.”

그러자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비유.”

비유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너희가 회귀하든 회귀하지 않든, 또 다른 세계선은 계속해서 멸망할 거야.]

비유의 유창한 한국어에 신유승이 입을 쩍 벌렸다. 
비유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화를 나눈 것은 그때 지하철에서 본 이후 처음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이제 내가 ‘도깨비 왕’이 됐으니까.]

엣헴, 소리를 낸 비유가 작은 팔로 자신의 가슴을 팡팡 쳤다.
비유는 관리국 소속이 아닌 유일한 도깨비이자, 도깨비 왕의 〈스타 스트림〉을 고스란히 계승 받은 도깨비였다. 
그나마 〈스타 스트림〉의 힘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비유가 있기 때문이었고, 동시에 〈스타 스트림〉이 사라지고 있는 것도 도깨비가 비유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너희는 모르겠지만, 세계선은 매순간 태어나고 있어.] 

“······매순간?”

[그래, 세계 내의 존재가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계속해서 새로운 세계선들이 태어나고 있다고. 유승이 네가 동전을 던질 때조차 새로운 세계선은 태어나고 또 멸망하고 있어.]

세계선이란 곧 선택의 분기마다 갈라지는 나뭇가지와 같은 것이라고, 비유는 설명했다.

[‘회귀’는 보다 특별한 형태로 ‘세계선’을 선택하는 방법일 뿐이야. 이미 지나간 시간 분기로 되돌아가서, 그곳에서부터 새로운 가지를 뻗는 일이라는 얘기지.]

어안이 벙벙해지는 이야기였다.

“그럼 지금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세계가······.”

일행들의 아득한 절망을 읽은 듯, 비유가 입을 열었다.

[······그건 아버지만이 아시겠지.]

아버지.
비유가 아버지라고 말할 만한 존재는, 모든 세계선을 통틀어 하나뿐이었다.
〈김독자 컴퍼니〉를 만든 성좌.
그리고, 이 우주의 ‘가장 오래된 꿈’이 된 존재.

[너희가 바꿀 수 있는 건 그 수많은 세계선들 중 하나일 뿐이야.]


*


다음 날부터 일행들은 계획에 착수했다.
프로젝트 〈오징어 포획〉.
한수영이 지은 이름이었다.

“〈스타 스트림〉에서 인정하는 생물의 기준이 뭐라고요?”

다시 한번 ‘회귀’를 하기로 결심한 이상, 계획은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해야 했다.
일행들은 철저한 시나리오 공략을 위해 자주 토론을 나눴는데, 주로 의견 충돌이 잦았던 구간은 바로 ‘첫 번째 시나리오’였다.

“세균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세균도 생물이잖아요. 손에 염산 뿌리면 막 10만 코인씩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만약 그게 인정이 되면 가만히 있었던 사람도 살았겠지. 우리 몸은 실시간으로 세균을 죽인다고.”
“아무것도 안 죽였는데 살았다는 사람도 있어요.”
“운에 맡길 수는 없어. 뭔가 죽이긴 해야 돼.”
“전 메뚜기 죽이고 살았어요. 독자 형은 메뚜기 알까지 부숴서 코인 받았다고 들었고.”

의견을 곰곰이 듣던 한수영이 메모를 시작했다.

“어쨌든 〈스타 스트림〉 기준으로 알은 생물이라는 거네.” 
“세균은 왜 안 되는 걸까요?”
“아마 인지 가능한 살해를 기준으로 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 비유한테 좀 물어볼까?”

여기에 셀레나 킴과 이리스를 포함한 ‘안나 팀’이 합류하면서, 작전 회의는 더욱 심화되어 갔다.

“여기서는 이 루트가 제격이에요.”
“······아니, 이쪽이 더 나아. 내 [예상 표절]에 따르면―”

그들이 회귀할 다음 회차에는 김독자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유중혁에겐 ‘은밀한 모략가’에게 받은 1863회차의 기억이 있었고.
한수영에겐 [예상 표절]이 있었으며. 
유상아에겐 [제4의 벽]의 장서관에서 읽은 기록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모든 세계선에서 유일하게 [최후의 벽]을 넘은 존재들이었다.」

첫 번째 토의가 끝난 후 한수영은 한숨을 돌렸다. 이제 겨우 일주일. 유중혁의 말에 따르면 ‘집단 회귀’를 사용할 수 있는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한 달 뒤였다.
일행들은 시나리오 공략법을 두고 싸우기도 했다.

“「최강의 희생양」. 여기선 무조건······.”
“그때 독자 씨 죽었던 거 잊었어요? 이렇게 하면―”

누구보다 시나리오를 증오하는 일행들이었다.
그럼에도, 토론을 이어가는 일행들은 어딘가 들떠 보였다.
왜일까. 시나리오가 끝나고, 간신히 현실을 되찾은 그들은 왜 ‘시나리오’로 돌아가는 계획을 저토록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

「현실은 장소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 모두가 누군가를 잊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 끔찍한 비극을 누군가와 함께 이겨냈던 시간을 그들은 잊지 못하는 것이다. 

“[극장 던전]은 내가 잘 기억하고 있어요. 여기서 독자 씨가······.”

모든 일행이 합류한 장소는 달랐다. 
그들이 기억하는 시간도, 그들이 기억하는 김독자도 달랐다. 
그럼에도 유중혁의 수많은 회차가 모여 결국은 ‘한 사람’이 되듯, 김독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절대 왕좌]. 이때 독자 형 말로는······.”

모두가 좋아하는 김독자의 부분들이 모여 하나의 김독자가 되었고.

“······그립네요.”

그렇게 모인 김독자의 조각은 다시 그들이 모르는 김독자의 나머지 부분마저 사랑하게 만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한수영의 시야에, 가부좌를 튼 유중혁의 모습이 들어왔다. 여전히 성흔 진화를 위해 수련 중인 유중혁의 전신에 황금빛 고리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 유중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수영이 물었다.

“야, 궁금한 거 있는데.”
“집중해야 하니 방해하지 마라.”
“너 전에 0회차의 기억이 떠올랐다고 그랬잖아.”

회전하던 고리 하나가 비틀렸다. 희미한 스파크 속에서 유중혁이 실눈을 떴다. 한수영이 빙글거리며 물었다.

“무슨 기억이 떠올랐던 거야?”

한참이나 망설이던 유중혁이 말했다.

“거기 김독자가 있었다.”
“뭐? 진짜?”
“그래서 확신한 것이다. 김독자는 ‘가장 오래된 꿈’이 되어 살아 있다고.”
“그 자식 거기서 뭐하고 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인상을 찌푸린 유중혁이 자신의 [흑천마도]를 내려다보며 이글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뒤통수를 때렸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


털털거리는 열차의 진동을 느끼며 나는 눈을 떴다.

「더 자도 돼 김독 자」

“충분히 많이 잤어.”

찌뿌드드한 몸으로 기지개를 켜자, 전신에 천천히 활력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0회차를 지켜보는 동안 사용한 힘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 유중혁을 회귀시키기 위해 희생했던 오른쪽 팔도 거의 자라난 채였다. 
하지만 왜인지 육체가 전보다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몸의 크기가 전체적으로 줄어들었다고 말해야 할까.

「유중혁은 두 번째 삶을 시작했다.」

1회차를 살아가는 유중혁의 모습이 패널에 비치고 있었다.
나는 0회차를 떠나가던 유중혁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결말에 도달했음에도, 녀석은 회귀를 선택했다.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알기 위해.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하게 된 근원을 찾기 위해.

“제4의 벽.”

「응」

“만약 모든 존재가 누군가의 ‘읽기’로 태어나는 것이라면······ 나를 읽어주는 존재도 어딘가 있는 걸까?”

[제4의 벽]은 대답이 없었다. 아마도, [제4의 벽]도 모르는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또 다른 독자를 상상해보았다. 하지만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초대의 ‘가장 오래된 꿈’이 그러했듯, 신이란 어쩌면 한없이 무력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내가 아는 모습일 수도 있다.

어쩌면 〈김독자 컴퍼니〉의 동료들은 아닐까. 
그들이 나를 상상해주어, 나 역시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보 고싶 어?」

나는 유중혁의 1회차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나중에. 일단 봐야 할 세계선이 많으니까.”

지하철의 속도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꿈의 외곽 지역을 경유합니다.]

일부 패널이 꺼지며, 창밖으로 우주의 정경이 보였다.
내가 묻기도 전에, [제4의 벽]이 말했다.

「우 주의 외 곽 다 른차 원 과 의 접 경지 대」

우주의 새카만 밤사이로, 어슴푸레한 빛무리가 보였다.
분명 〈스타 스트림〉의 우주와는 달랐다.
그 우주는 휘어진 나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저긴 뭔데? 우주가 또 있었어?”

「스 타 스트 림 또 한 대우주 의 세계 관 중 하나 일 뿐」

[현재 ‘환상수(幻想樹)’ 외곽을 경유하고 있습니다.]
[현재 암흑 차원의 시간 단층을 통과하는 중입니다.]

환상수. 그것이 저 나무의 이름인 듯했다.
······착각인가? 어디서 들어본 느낌이 드는데.

“저기로도 갈 수 있어?”

「위 험 하니 가 지 않는 게 좋 아」

“저기도 ‘가장 오래된 꿈’이 있어?”

「있 어 이 름 은 다르 지 만」

아래쪽으로 뻗어 나간 무수한 뿌리들과, 수많은 영혼들의 군집으로 이루어진 줄기. 그 위로는 밤하늘의 어둠과 동화된 가지가 있었다. 뿌리와 가지는 먼 우주를 돌아 만나고 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거대한 눈 같은 것이 있었다. 이글거리는 불꽃으로 우주를 밝히는 단 하나의 눈동자. 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덜컹거리는 소음과 함께 지하철의 속도가 급격히 줄었다. 지하철 전체의 불빛이 갑작스레 점멸하더니 끼이이이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첫 번째 시나리오가 발생했던 그때와 같았다. 귓가에 이명이 퍼지더니, 이내 괴이쩍은 기계음 같은 것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뭔가가, 열차의 창가로 다가오고 있었다.

「김독 자 위 험」

그리고 나는 한줄기 빛살을 보았다. 

「다 른 차 원 의 절 대 자」

그 빛살의 끄트머리에 있는 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마치 우주 전체가 쪼개지는 듯, 암흑 단층을 가르며 날아드는 빛살. 나는 그 기술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찌르기였다.

콰아아앙, 하는 굉음과 함께 나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반사적으로 설화를 끌어 올리며 고개를 들었을 때 출입문을 뚫고 들어온 한 자루의 검이 보였다. 묵빛의 검. 그 검을 쥔, 벌거벗은 사내가 우뚝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놈이 《빅 브라더》인가?”

===

나는 형형한 눈을 빛내는 알몸남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네놈이 《빅 브라더》인지 물었다.”
“······아니, 잠깐만. 묻고 싶은 건 이쪽이야. 넌 누구야? 《빅 브라더》는 뭐고.”
“《빅 브라더》는 아닌 거 같군. 어떻게 시간 폭포를 뚫고 들어온 거냐? 이 열차는 또 뭐지? 지하철······ 악몽의 탑의 일종인가? 무슨 원리로 움직이는 거지?”

말이 안 통하는 놈이었다.
남의 열차를 부수고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자기 말만 늘어놓다니.
나는 곧장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했다.
그리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메시지를 목격했다.

[해당 인물은 당신이 모르는 세계관의 ‘등장인물’입니다.]

······내가 모르는 세계의 ‘등장인물’?
사내의 눈동자 위로 환한 빛이 뿜어진 것은 그때였다.

[누군가가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은 힘을 사용합니다!]

그의 망막에서 원이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타 차원의 존재가 당신의 본질을 염탐하고 있습니다!]
[경고합니다! ‘제4의 벽’으로 완벽하게 차단할 수 없는 힘입니다!]

······뭐?

츠츠츠츠츳!

눈앞에서 튀는 스파크와 함께, 마치 상대방의 힘에 대응하듯 내 안의 설화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개중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반응한 것은······.

[성흔 ‘회귀’의 본질이 꿈틀거립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빨을 드러냅니다!]

일순간 지하철의 내부가 유중혁이 살아온 지옥도의 정경으로 변했다. 핏빛으로 점철된 세계를 보며, 사내는 놀란 표정이었다.

“이 ‘고유 세계’는······ 설마 회귀자인가?”

······고유 세계?
그건 뭔 김남운 같은 소리냐고 태클을 걸려는 순간, 녀석의 묵빛 검에서 증오가 일렁였다.

“현재를 외면한 놈이군. 죽어라.”

검극에 맺힌 섬광이 나를 향해 움직이는 순간.

[열차가 정상 궤도로 진입합니다.]
[‘가장 오래된 꿈’의 권능이 발동합니다!]
[시스템 안의 불순물을 사출합니다!]

슈우욱― 하는 소리와 함께 내게 검을 겨누던 사내가 출입문 바깥쪽으로 빨려 나갔다.

“어딜!”

그러나 사내는 출입구에 검을 꽂은 채 지하철의 가속을 버티고 있었다.
내 몸이 지하철의 다른 칸으로 전송된 것은 그때였다.

[비상 전력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사출에 쓰인 지하철 한량을 폐기합니다.]

뒤를 돌아보니, 사내가 매달려 있던 지하철의 꼬리칸이 통째로 우주를 부유하고 있었다. 분노한 사내가 이쪽을 향해 도약하는 것이 보였다.
전신의 근육을 잔뜩 부풀리며 달려오는 놈의 모습에, 나는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빨리 움직여! 저놈 쫓아오잖아!”

「걱 정 마 저놈 은 시간 단 층을 벗어날 수 없 어」

사내는 엄청난 속력으로 지하철을 따라왔지만, 다시 열차에 탑승하지는 못했다. 마치 열차와 녀석 사이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궤도를 따라 열심히 달려오던 녀석은, 어느 순간 달음박질을 멈추고 이쪽을 멀거니 노려보았다.
녀석의 모습이 저만치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가까스로 한숨을 돌렸다.

“······저거 대체 뭔데?”

「군 주학 살 자 재 환」

······군주 학살자?

「시 간 단 층 에 서 수십억 년 이상 을 수 련 한 괴 물」

나는 잠깐 잘못 들었나 싶었다.

“몇 년?”

「나 도 정확 히 는 몰 라 내가 설 정 되기 전부 터 있 었으 니 까」

[제4의 벽]보다도 나이가 많은 녀석이라니. 그 어마어마한 세월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인간이 수십억 년이란 세월을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이미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지만.

“뭐 때문에 수십억 년이나 저기 갇혀 있는 건데?”

「그가 속한 우 주 의 시 스 템을 파괴 하 기 위해 서」

“저놈 또 만나진 않겠지?”

[제4의 벽]은 피곤한지 대답이 없었다. 아마 부서진 열차를 정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재환이란 놈의 검이 스쳐 간 외투를 탈탈 털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찌르기였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어떤 성좌나 초월좌들도 그런 찌르기를 할 수는 없었다. 

수십억 년의 시간은, 한 인간을 저런 꼴로 만들고 마는 것일까.

시스템 복원이 끝났는지, 다시 열차의 유리창에 세계선의 설화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하늘을 노려보는 1회차의 유중혁이 있었다. 나는 그런 유중혁을 잠시 마주 노려보다가, 갑자기 뭔가가 무서워졌다.

“제4의 벽.”

「왜」

“······유중혁이 지금 몇 살이지?”


*


“일주일 뒤 출발한다.”

마침내 유중혁의 성흔이 진화를 끝마쳤다. 프로젝트 〈오징어 포획〉에 참가하기로 한 사람들은 모두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아일렌 씨, 복순 씨, 영란 씨. 공단을 부탁합니다.”
“역시 자네도 가기로 한 건가.”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이수경이 희미하게 웃었다.

“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떠나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갈 수 없어요.”

‘안나 크로프트’를 위시한 소위 ‘안나 팀’은 이 세계선에 남기를 선택했다.

“시스템은 약해지고 있고, 내가 생각했던 결말에 가장 가까운 세계가 도래했어요. 그러니 우린 이 세계에 남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 팀 중에서도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녀를 받아 주겠어요?”

안나 팀에서 유일하게 〈오징어 포획〉에 합류한 것은 바로 ‘셀레나 킴’이었다. 그녀는 머쓱한 얼굴로 웃으며, 김독자에게 꼭 갚을 은혜가 있다고만 말할 뿐이었다. 한수영이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또 갈 사람 없어? 공단에선 이게 단가?”

눈치를 보다 손을 든 것은, 뜻밖에도 한명오였다.

“뭐야. 아저씨는 당연히 가는 거잖아.”
“안 간다고 손든 걸세.”
“······뭐?”

한명오와 김독자가 본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시나리오를 겪으며 조금은 정이 든 줄 알았는데······.

“나는 못 가.”

그 말을 듣고서야, 한수영은 한명오의 손을 잡고 선 소녀를 발견했다. 

「이 회귀에는, 절대 함께할 수 없는 이들이 있다.」

한수영은 소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겉으로는 10대 소녀로 보이는 외양이지만, 이 아이의 정신은 아직 5살도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시나리오가 시작된 이후에 태어난 이들은 회귀에 동참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시절에 이 아이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
한수영은 한명오의 늙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알았어. 아저씬 여기 남아.”
“독자 씨를 부탁하네.”
“당신 몸이나 잘 챙겨. 기왕 남는 거 공단 일도 좀 도와주고. 우리가 빠져서 일손이 많이 부족할 거야. 방구석에 처박혀서 게임이나 하고 있으면 세계선 넘어와서 다 조져버린다 진짜.”

멀리서 차량들이 몰려온 것은 그때였다. 검은 승용차에서 내린 인파들이 밀물처럼 이쪽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한수영 대표님! 인터뷰 좀 부탁드립니다!”

한수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회귀자와 함께 집단 회귀를 계획하고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광장의 패널 위로 한수영 자신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화면에 붙어 있는 생생한 LIVE 표시. 그녀의 마스크는 이미 전국에 멋대로 생중계 중이었다.

“김독자 대표님께서는 누구보다 현실을 중요시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그런 선택을 한 겁니까?”
“지금 세계선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 세계를 버리시겠다는 겁니까?”

마치 천하의 배신자라도 되는 양 자신을 몰아세우는 기자들을 보며, 한수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세계를 버려? 우리가? 세계가 무슨 우리 소유물이야?”
“대표님께서는 이 세계에 대한 책무가······!”
“이 세계에 아직도 우리가 필요해? 시나리오도 다 끝났는데?”

순간 기자들의 표정이 변했다. 특종을 잡았다는 양 빛나는 렌즈들이 한수영의 얼굴을 한껏 클로즈업했다. 한수영은 패널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며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가 있으면 뭐가 달라지는데? 또 이상한 법규 만들어서 우릴 규제할 뿐이잖아. 동훈이가 국회에서 법안 발의되는 거 죽어라 막고 있는 거 모르는 줄 알아? 너흰 우릴 필요로 하지 않아. 오히려 우릴 두려워하지.”
“하지만 언제 또 시나리오가 시작될지 모릅니다! 또다시 도깨비들이 세상에 나타난다면······!”

한수영이 싱긋 웃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쟤 같은 거 말이지?”

한수영의 시선을 따라간 그곳에는, 커다란 열기구처럼 뭔가가 두둥실 떠 있었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본 기자들이 까무러칠듯한 비명을 질렀다.

[나는 비유, 이 세계선의 ‘도깨비 왕’이다.]

마치 시나리오가 다시금 시작되는 듯한 박력.
이 세계에 멸망을 불러왔던, 공포의 시초.
그들의 두려움을 아는 듯 비유가 웃었다.

[태어난 것은 언젠가 다 멸망해. 근데 이 행성은 괜찮아. 핵전쟁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앞으로 몇만 년 정도는 끄떡없을 거야. 가끔 날아오는 운석만 잘 피한다면 말이지.]

도깨비의 입으로 그 말을 들은 기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진짜는 그다음이었다.

[너희들의 메인 시나리오는 끝났어. 하지만······ 내게 서브 시나리오 권한은 남아 있는 상태야.]

서브 시나리오라는 말에 기자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도, 도망쳐! 또 저 도깨비가―!”

그리고 눈앞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관리국의 붕괴 때문인지, 메시지창은 선명도가 좋지 못했다. 그럼에도 내용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 시나리오에는 어떤 강제성도 없어. 스스로 원하는 사람만을 받을 것이고, 자격을 갖춘 지원자만을 엄선할 거야.]

[해당 서브 시나리오는 자율 참가입니다.]

[〈스타 스트림〉이 멸망했기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보상은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만약 〈김독자 컴퍼니〉를 도와준다면.]

패널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는 듯, 비유가 웃었다.

[적어도, 너희가 후회했던 시간을 다시 살 수는 있을 거다.]


*


그리고 일주일의 시간이 지났다.

[서브 시나리오, ‘오징어 포획’에 새로운 지원자가 있습니다.]

가까스로 시나리오의 끝까지 생존한 이들.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던 이들이, 하나둘 서울로 모였다.
몰려든 인파를 보며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숫자가 너무 많아. 조금 힘들 수도 있겠군.”
“최대한 많이 데려가야 해. 그래야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어.”

언뜻 보이는 지원자의 숫자만 해도 오백이 넘었다.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은 꼼꼼한 면접 및 회차 분석을 통해 결격 사유가 있는 이들을 점검했다.
유중혁과 한수영이 주로 그들을 훈련시켰고, 필요한 기술들을 익히게 했다.
그렇게 추리고 추려서 남은 인원은 총 백.
그 백 명이, 이번 회귀에 데려갈 수 있는 인원의 전부였다.

“······정말,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

그 질문을 던진 이는 삼대 심판자 특성을 가진 율리우스였다. ‘최강의 100인’ 중 서열 52위. 이명은 ‘격노의 심판자’. 
고국에서 자신의 가족을 잃고, 친구와 동료들을 모두 잃은 그는 세상에 대한 울분과 분노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의 아스카 렌. 심지어는 중국의 페이후와 인도의 란비르 칸의 얼굴도 보였다. 시나리오에서 살아남은 최강의 화신들이, 모두 그곳에 모여있었다. 
율리우스가 다그쳤다.

“이제 말해주게! 지금까지 꾹 참고 모든 훈련을 견뎠지 않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게 진짜인가?”
“아니. 거짓말이다.”
“그게 무슨······ 그럼 우릴 이곳에 모은 건······.”
“너희들이 돌아가는 곳은 ‘과거’가 아니다. 그냥 다른 세계선이지. 인간은 무슨 짓을 어떻게 해도 과거로 갈 수 없다.”
“그런 당연한 소릴 들으려고 온 것이―”
“이미 일어난 일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너희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그 담담한 목소리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회귀’를 경험해본 인간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너희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너희와 함께 보냈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과 이야기할 때마다 너희는 너희가 살았던 시간이 결코 돌아오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한마디 한마디에 깊은 고통이 배어 있었다. 
오직 혼자서 사라진 세계를 기억하며 살아온 인간의 말이었다.

“너희는 더욱 외로워질 것이고, 끝내는 혼자가 될 것이다. 누구도 그런 너희의 고통을 이해해주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너희의 고통을 이해하는 대신 너희를 회귀자라 부르며, 누군가의 미래를 도둑질했다고 욕할 것이다. 너희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살아 있는 채로 죽어갈 것이다.”

그것이 회귀의 저주였다.

“그래도 너희는 회귀할 건가?”

그리고 이것이, 회귀자가 되기 위한 마지막 시험이었다.
회귀자가 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엄포에 질린 누군가는 뒷걸음질을 쳤고, 이미 결의를 굳히고 있던 누군가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아스카 렌이었다.

[피스 랜드]에서 〈김독자 컴퍼니〉와 함께 싸웠던 일본인.
그곳에서 누구보다 많은 동료를 잃은 사람.

“무슨 짓을 해도 내가 잃은 것들을 돌려받을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내가 회귀하면.”

자신의 카타나를 꾹 쥔 아스카 렌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적어도, 그 세계선은 구할 수 있겠죠.”

그러자 그녀의 곁으로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내 고통이 무의미해도 좋습니다. 설령 모든 것이 허상이라 해도.”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그들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이 그들의 의지였다.
누군가는 격정에 사로잡혀 있었고, 누군가는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결국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를 해 줄 수도 있었다. 반복된 회귀를 거치며, 그의 동료들이 그에게 해준 말을 전해줄 수도 있었다.

「“대장. 현재를 살아야 합니다.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전부 미망일 뿐이에요.”」

전 회차에서 죽었던 동료들이, 이번 회차에서는 그렇게 말한다.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유중혁은 묵묵히 자신의 검을 닦으며 견뎠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결코 현재를 살아갈 수 없는 이도 있다는 것을.

“우릴 데려가줘요, 패왕.”

그렇기에 회귀자 유중혁은 눈앞의 사람들을 이해했다.
오직 과거만이 그들이 선택한 현재였고, 누구도 그것을 틀렸다 말할 수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한 사람은 틀렸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 회차를 버린다고 다음 회차가 좋아질거라고 착각하지마. 어쩌면 네가 버리려고 하는 이 회차가, ‘인간’으로서 이 세계의 끝을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회차’일지도 모르니까.”」

유중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금이라면 김독자의 그 말에 대답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세상엔 ‘인간’을 포기하면서까지 어떤 이야기를 보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는 것.」

자리에서 일어난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출발한다. 성좌들을 불러.”

===

이수경은 가장 어두운 별의 앞에 서 있었다.

“같이 가주실 건가요?”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천천히 눈을 뜹니다.]

페르세포네가 묵고 있는 곳은 명계가 아니었다. 〈스타 스트림〉이 무너진 후 명계와의 통로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현재 공단의 별실에 머무르고 있었다. 온종일 밤하늘을 바라보며, 아주 오래된 설화들을 헤아리듯이.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적어도 내 ■■는 이곳이 아니었다는 뜻이겠죠.]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누군가가 남긴 온기. 이수경은 그것이 누구의 설화인지 알고 있었다. 

[설화, ‘가장 어두운 밤의 약속’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이 세상 끝까지라도 함께해주겠다던 명왕. 
그는 말 그대로 이 세상의 끝에서 페르세포네를 대신해 죽었다.

[가요. 그 애를 구해야죠.]


*


정희원은 공단 별실의 낡은 문을 두드렸다. 

“계세요?”

손잡이를 돌리자, 문은 쉽게 열렸다. 곧바로 보이는 것은 그녀를 환영하는 홀로그램 피규어였다.

『김독자, 어룡에서 탈출!』

어룡에서 탈출하는 순간의 김독자가 그곳에 있었다. 심지어 홀로그램 피규어의 아래쪽엔 대사도 떠올랐다.

「“자, 그럼 밖으로 나가 볼까.”」

정희원은 약간 얼빠진 얼굴로 그 기이한 조형물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그런 게 하나가 아니었다.

『김독자, 절대 왕좌 파괴!』
『김독자, 마계 해방!』

“······유승이나 길영이 방도 이 정도는 아닌데.”

정희원은 구경이라도 하듯, 그 피규어들을 둘러보았다. 연도순, 시나리오순으로 배치된 피규어들을 따라가고 있으니, 무릇 옛 생각들이 피어났다. 우리엘은 아마도 이 모든 순간의 김독자를 모두 보고 있었던 것이리라.
개중에는 특별 소장품으로 보이는 오징어 뒷다리 같은 것도 있었다.

『오징어 김독자의 마지막 다리 made by Yangsan.』

의심스런 눈으로 유리관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 누군가의 진언이 들려왔다.

[그거 잘못 건드리면 우리엘이 화낼 걸.]

언제부터였을까. 유리관 곁의 테이블에 수척한 얼굴의 대천사가 앉아있었다. 아니, 이제 그녀가 대천사임을 알아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먼저 말을 걸어온 주제에 쳐다보지도 않는, 묵묵히 책의 페이지만 넘기는 여인. 정희원은 그녀의 긴 속눈썹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가브리엘. 우리엘은 어디 있어요?”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그녀의 전신으로 물결처럼 번져가는 설화의 힘. 어쩌면 그것이 대천사의 마지막 자존심일지도 모른다.

[에덴의 마지막 화신이여.]

고요히 책을 덮은 가브리엘의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이미 정희원이 왜 이곳에 찾아왔는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세계선을 넘어본 적이 있어. 굉장히 아찔한 경험이었지. 그런데 너희가 하려는 짓은 그것보다도 더해. 결코 살아남지 못할 거야.]

“에덴식 저주인가요?”

[이곳이 너희의 현실이야. 도망가지 마. 기껏 〈스타 스트림〉을 무너뜨리고 얻은 결과를 다시 무로 돌릴 셈은 아니겠지?]

현실. 그 말의 무게가 괜스레 가슴을 짓눌렀다. 정희원은 대답 대신 방의 정경을 다시 훑어보았다. 우리엘과 가브리엘이 사용하는 이층 침대가 구석에 놓여 있었다. 그 위로 포스터처럼 붙어 있는 〈EDEN〉이라는 글씨.

「성운 ‘에덴’은 끝났다. 이곳에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현실을 만드는 건 풍경이나 장소가 아니에요.”

에덴이 끝났음에도, 누군가는 여전히 이곳을 에덴이라고 부른다.
이곳에 대천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단둘이라고 해도.」

“멋진 에덴이네요.”

고개를 돌리자 가브리엘이 흔들리는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우리엘은 어디에 있죠?”

[······뒤에.]

돌아보자, 그곳에 우리엘이 있었다.
군것질거리라도 한가득 사오는 길인지, 우리엘의 작은 품 안에 인스턴트 식품이 한 아름 안겨 있었다.
깜짝 놀란 듯 동그랗게 뜬 에메랄드빛 눈동자.

정희원은 오랫동안 자신의 배후성을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엘에게 대천사의 광휘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등 뒤로 자라났던 날개는 사라져 있었다. 옷도 바뀌었다. 즐겨 입던 검은색 드레스 대신, 회색 후드티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우리엘.

[희, 희원아.]

우리엘이 왜 저런 모습이 되었는지, 정희원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우리엘.”

「사실 우리엘은 이곳에 남는 게 더 행복하지 않을까.」

자신보다도 더 긴 시간 동안 시나리오를 수행해 온 대천사. 그런 그녀를, 다시 한번 지옥 속으로 데려가는 것이 옳은 일일까. 
정희원은 입을 여는 대신 자신의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희미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지옥염화].

자신의 배후성이 건네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불꽃.
그 불꽃이 피어오른 순간, 방의 희미한 어둠 속에서 똑같은 빛을 뿜는 조형물이 있었다. 정희원은 무심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얼굴의 인형. 이곳에는 김독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홀린 듯 다가간 정희원이 유리관 속을 바라보았다.
[심판자의 검]을 쥐고, 새하얀 [지옥염화]를 내뿜는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

『나의 하나뿐인 화신』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내리누른 채, 정희원이 입을 열었다.

“······우리엘.”

[희원아.]

그 따뜻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정희원은 깨닫는다.
이미 그녀의 배후성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때처럼, 다시 한번 내가 살아가는 걸 응원해줘요.”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우리엘은 슬프게 웃고 있었다. 정말로 괜찮겠냐는 듯이. 그런 우리엘을 향해, 정희원이 무릎을 꿇었다.

“다시 한번 나의 배후성이 되어줘요.”


*


“염룡이 이 자식 어디 갔어? 염룡아아!”
“장군님! 우리 장군님!”

각자의 성좌를 찾아 나서는 한수영과 이지혜의 목소리. 난잡한 군중들의 한가운데에서, 유중혁은 자신의 여동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딘가 심통이 난 듯 뾰로통한 얼굴. 유중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에 있으면 너는 안전하다.”
“······.”
“이 세계는 곧 안정될 거다. 이제 이 세계에는―”
“하지만 오빠가 없잖아.”

유미아가 반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유중혁은 그것에 대해 한마디를 하려다 말을 바꾸었다.

“다시 돌아올 거다.”
“언제요?”
“다른 세계선의 끝을 보고, 김독자를 구하면.”
“그게 언젠데요?”

유중혁은 답하지 못했다.

“위험할 거다. 너를 그곳으로 데려갈 수는 없다.”
“거짓말.”

유미아의 전신에서 희미한 초월형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초월좌의 격. 
지난 몇 달 간의 수련으로, 놀랍게도 유미아는 초월좌의 제1형을 각성했다. 역대 최연소 초월좌. 그야말로 놀라운 재능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와 그렇게 말할 거면 왜 내가 훈련하는 거 안 말렸어요? 나도 길영 오빠랑 유승 언니랑 같이 훈련받았다고요.”
“······.”
“솔직하게 말해줘요, 오빠.”

흔들림 없는 소녀의 눈동자를 보며, 유중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계획은 충분히 세웠다. 누구도 잃지 않도록.
그 어느 때보다 꼼꼼하고 완벽하게 만들어진 계획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변수는 있는 법이고, 유미아는 다시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시선을 낮춘 유중혁은 반쯤 무릎을 꿇은 채 유미아를 바라보았다.

“······네가 같이 갔으면 좋겠다.”

그것이, 유미아가 원하는 대답이었다.
작은 손이 유중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회귀하자마자 동료들이 바로 널 데리러 갈 거다.”
“나 없었으면 ‘깃발 쟁탈전’때 다 죽었을 거면서.”

유미아는 그 말을 하며 입을 와왕, 하고 벌렸다. 그 입안을 들여다본 유중혁이 인상을 쓰며 한마디를 하려는 순간.

“야, 다 찾았어!”

흑염룡에게 헤드락을 건 한수영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 뒤에는 해상전신과 고려제일검의 양팔에 매달린 이지혜가 보였다. 
유중혁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원숭이는?”

한수영은 말없이 턱짓했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거드름을 피웁니다.]

유중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히죽거리는 제천대성이 둥둥 떠 있었다.

“언제 온 거지?”

[준비가 너무 늦는 것 아닌가? 네놈 때문에 막내가 죽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사지를 찢겠다.]

역시 격이 떨어지고 〈스타 스트림〉이 멸망해도 신화급은 신화급인 모양이었다. 시스템이 사라진 와중에도 여전히 저런 기백을 내뿜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제천대성뿐이었으니까.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방해가 된다면 언제든 네놈을 베어버릴 것이다.”

그 말에 제천대성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다음 회차에서는 못다한 승부를 내도록 하지. 네놈이 과연 ‘은밀한 모략가’에 비할 수 있을지 반드시 시험해보겠―]

“자자, 다들 준비 끝났지?”

한수영의 목소리에, 대기 중이던 화신들이 하나둘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이번 회귀행에 참가하기로 한 〈김독자 컴퍼니〉들도 모두 모였다. 유상아, 정희원, 이현성, 신유승, 이길영, 이지혜, 이설화, 장하영. 거기에 이수경과 셀레나 킴까지.
그들을 배웅하며, 공단의 사람들이 인사를 건넸다.

“패왕, 내가 알려준 것들을 꼭 기억하세요.”
“페이후. 네게 대륙의 미래가 달렸다.”
“란비르 칸―”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둥둥 떠 있는 작은 도깨비 하나.

“비유.”

신유승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공단의 사람들과 함께 남은 비유는, 미묘하게 우울한 표정이었다.

「비유는 함께 갈 수 없다.」

한명오의 딸이 그러하듯, 비유 또한 이 세계의 멸망이 시작되고 난 후 태어난 존재. 지금부터 그들이 가는 길에 비유는 ‘이야기꾼’이 되어줄 수 없었다. 비유는 일행들을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슬퍼하지 마. 어느 세계선이든 너흴 응원할 테니까. 나는 ‘도깨비 왕’이야. 조금 더 열심히 수련하면, 그리고 혹부리들이 남긴 유산들을 찾으면 나도 세계선을 넘을 수 있을 거야. 그럼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어.]

“기다릴게. 몇만 년이라도.”

비유가 바앗― 하고 울었다. 공단 전체에 불꽃놀이처럼 폭죽이 터졌다.

“출발한다.”

[성흔, ‘집단 회귀 Lv.1’이 발동합니다!]

마침내 유중혁이 회귀를 시작했다. 성흔 발동과 동시에, 유중혁과 일행들의 전신이 황홀한 빛살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때.

“싸가지 없는 새끼들! 나는 데리러 오지도 않아―!”

멀리서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달려온 공필두가 회귀행의 빛살 속에 끼어들었다.

콰콰콰콰콰콰콰―!

세계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사라지는 세계를 바라보았다. 환히 웃는 비유의 표정이 일그러져 보였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영혼이 산산이 분해되는 듯한 고통이 뒤따랐다. 신유승이 이를 악물었다.

「유중혁은, 언제나 이런 순간을 홀로 견뎌온 것이다.」

다행인 것은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신유승은 자신이 먼 은하를 유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빠르게 멀어져 가는 배경들. 세계선마다 다른 모양의 〈스타 스트림〉. 그 이야기의 잿더미 속에서 버려진 신격들이 일행들을 부르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이리이리이리이리이리이리】

한수영이 신유승의 손을 단단히 붙잡은 채 말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 빨려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신유승이 몇 번이고 멀어져가는 이계의 신격들을 돌아보았다. 지난 회차에서 김독자는 ‘이계의 신격’들을 구했다. 잊힌 이야기들에게 다시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럼에도, 아직 이 우주에는 저렇게 많은 잊힌 것들이 남아 있었다. 한수영이 다시 말했다.

“우리는 김독자가 아니야. 저 모든 세계를 구할 수는 없어.”

신유승도, 일행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지금 그들은, 눈앞의 세계 하나를 구하기에도 급급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끝을 보지 못한 이야기들이 모두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었다.」

멀어진 이계의 신격들은 다시 아름다운 은하로 뒤바뀌었다. 모든 비극은, 멀리 있을 때는 저토록 아름답다. 한수영이 소리쳤다.

“야,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 제대로 가는 거 맞―”

어디선가 북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쩌저저저저적―!

[세계선이 ‘집단 회귀’의 발동을 감지합니다!]
[〈스타 스트림〉이 해당 성흔의 개연성을 지적합니다!]
[해당 성흔은 개연성의 한도치를 넘어선 힘입니다!]

뭔가가 잘못되었다.

츠츠츠츠츳!

한수영이 뭐라고 소리치는 순간, 시야가 어둠에 먹혀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한수영은 자신이 새하얀 설원 같은 곳에 내던져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뭐야! 여기 어딘데?”

일행들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멍청한 표정을 한 유중혁뿐이었다.

“······세계선이 엉켰다.”
“그게 뭔 개소리야! 제대로 준비한 거 아니었어?”

눈을 감은 채 뭔가를 가늠하던 유중혁이 말했다.

“준비는 제대로 했다. 그리고 나머지 일행들은······ 무사히 1865회차에 도착한 것 같군. 이곳에 온 건 우리뿐이다.”
“여기가 어딘데?”
“······아무래도 세계선의 틈새에 갇힌 것 같다.”

한수영은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하얀 설원의 사이사이로 새카맣고 거대한 구조물들이 둥둥 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설화를 모아 다시 성흔을 발동할 거다.”
“얼마나 걸려? 빨리하라고. 우리가 너무 늦게 도착하면 계획이고 뭐고 말짱 꽝이야!”

유중혁은 이미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모양인지 대답이 없었다.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난 한수영은 바로 근처의 구조물을 향해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마치 새카만 흑연 같은 것이 그녀의 손에 묻었다.

“뭐 이런 게······.”

다음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구조물의 전체적인 형상이 그려졌다.

「ㅁ」

틀림없었다. 이 구조물은 분명 그런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앞의 구조물은······.

「ㅓ」

천천히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구조물들을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그것은 곧 문장이 되었다.

「전지적 독자 시점」	

===

전지적 독자 시점. 
그 문장을 본 한수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김독자 스킬 이름인데?”

세계선의 틈새에 왜 이런 게 새겨져 있는 것일까.
문장들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어머니의 행동을 납득할 이유도, 이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영문 모를 에세이를 쓴 것도.」
「내가, 살인자의 아들이 되어야만 했던 것도.」

문장들은 일정한 속도로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과거에서 미래로 유창하게 뻗어가는 문장들. 그 순간 한수영은 깨달았다.

‘회귀’라는 것은 거슬러 올라간 세계선의 ‘어느 시점’에서 새로운 세계선을 뻗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세계선을 거스르던 중, 이 틈새에 걸린 것이라면 어떨까. 
그런 것이라면, 지금 이 문장들이 있는 이 시점은―

“유중혁! 이거―”

돌아보았을 때, 유중혁 또한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쾅, 콰앙―!

설원이 흔들렸다. 
누군가가 그들이 끼어있는 세계선의 틈새를 두드리고 있었다. 

「“뱉어! 뱉으라고!”」
「김독자는 울고 있었다.」

설마 이 상황은······.

「나는 미친 듯이 벽을 때리기 시작했다.」
「소름이 끼쳤다. 그 모든 것이 이야기가 되고 있다는 것이. 자신의 모든 행동이, 말들이 전부 시나리오가 되어 벽 위의 문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닥쳐! 이건 내 감정이야!”」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문장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한수영은 알 수 있었다. 이 글자들의 너머에 김독자가 있다. 멸살법의 3회차. 그 과거의 어딘가에서 싸우는 김독자.

「김독자는 알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이 벽을 부술 수 있을까? 설마, 이것이 ‘멸살법’을 읽은 대가일까. 그걸 읽어서, 내 모든 현실조차 소설이 되어버리고 있는 것일까.」

그 문장을 읽는 순간 한수영은 확신했다.

“[암흑성]의 그때야.”
“······암흑성?”
“김독자가 ‘꿈을 먹는 자’와 싸운 후의 상황이라고. 녀석이 언젠가 그때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어. 자기 스킬 안에 갇혀서······.”

최종 시나리오에 도전하기 직전, 한수영은 김독자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으로의 계획에 관한 것도 있었고, 지난 일들에 관한 것도 있었다. 혹시나 과거에 풀지 못한 사건들이 미래의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 좀 이상한 일이 있었어. 누가 날 불렀었는데······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거기서 꼼짝없이 망했을걸.

“야! 김독자!”
“한수영,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이미 기록된 과거다.”

틈새는 틈새로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나머지가 틈새가 아니게 된다.
그런데 이런 곳에도 문장이 있다는 것은, 사실은 그들이 읽지 못한 이야기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닐까.
한수영은 다시 한번 거대한 글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새까만 입자 같은 것이 묻어 나왔다.

그것은 흑연이 아니었다.
0과 1로 이루어진, 아주 작고 고운 까만색 입자.

한수영은 글씨를 보다 강하게 움켜쥐었다.
만약 이것이 기록된 이야기라면, 그 기록을 바꿀 수도 있는 것 아닐까.

[화신, ‘한수영’의 새로운 설화가 깨어납니다!]

츠츠츠츠츳!

엄청난 스파크가 터져 나와 그녀의 전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세계의 모든 문장들이 그녀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바보 같은······ 지금 그럴 때가―!”

[설화, ‘퇴고 전문가’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츠츠츠츠츳!

“야! 정신 똑바로 차려!”

문장을 쥐자 그 문장에 담긴 생이 전해졌다. 김독자의 생이었다. 이 문장을 [최후의 벽]에 써넣기 위해 살아왔던 김독자의 생. 
한수영은 [제4의 벽]과 씨름하는 김독자를 향해 외쳤다.

“이건 네 스킬이잖아! 네 스킬에, 네가 먹히지 말라고!”

기록된 문장을 수정하듯, 그 문장 전체의 기틀을 잡고 흔든다. 어쩌면 그녀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 김독자는 혼자서도 위기를 잘 이겨낼 것이고, 그녀의 목소리는 김독자에게 영영 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한수영은 [벽] 위에 그녀의 문장을 남겼다.

츠츠츠츠츠츳!

어쩌면, 벽 너머의 누군가가 들을지도 모르니까.

“한수영, 회귀가 시작된다!”
“닥쳐! 너도 빨리 한마디 해!”

환한 빛살 속에서 한수영과 유중혁의 모습이 다시 흩어지기 시작했다. 모습이 사라지기 직전, 인상을 한껏 찌푸린 유중혁이 한 마디를 남겼다.

“스킬을 해제해라, 김독자.”


*


유상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주변에 희미한 볕이 감돌고 있었다. 눈앞의 모니터가 일렁였다. 모니터에는 그녀가 열람하던 인사기록부가 띄워져 있었다.

“······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다시 한번 눈을 깜빡이자, 연약한 육신의 감각이 느껴졌다. 스킬과 성흔의 힘을 잃어버린, 시스템의 축복에서 벗어난 화신의 육체. 이것이 인간의 감각이었다.

돌아온 것이다.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들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회귀 시점을 확인할 것. 비상 연락망을 통해 일행들과 교신을 시도할 것. 그리고······.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를 쳐다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오래된 이름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김민우 대리와 장은영 부장. 그리고······.

“하하, 요즘 인사팀 어때? 상아 씨 할 만해?”

시비라도 걸러 온 것인지 껄렁거리며 다가오는 사내. 강영현 전무였다. 그리고 그 뒤를 굽신거리며 따라오는······ 재무팀의 한명오 부장도 보였다. 눈치를 살살 보던 한명오 부장이 그녀를 향해 헤실헤실 웃었다. 그는 지난 4년간 그녀가 알던 한명오가 아니었다. 그녀가 알던 한명오는, 이번 회차로 넘어오지 못했다.

“유상아 씨. 이번 바이어 건 아주 훌륭했······.”

유상아는 말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강 전무를 지나치고, 복도로 뛰어들었다. 갑자기 현실감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정말로 회귀는 성공한 것일까.

그녀가 한때 잘 알았던 세계의 정경이 흘러갔다.

그녀는 한때 이곳으로 정시에 출근했고, 때가 되면 퇴근했다.
그것이 이 세계의 규칙이었고, 그 규칙에 충실히 따랐다.

“아니 이봐! 유상아 씨!”

똑같은 모양의 사원증. 한때는 그것을 목에 걸기 위해 애썼던 적도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줄 무언가라도 되는 것처럼.

숨을 몰아쉬며 QA팀 부서에 도착했을 때, 유상아를 알아보는 직원들이 있었다.

“어? 유상아 씨?”

주머니에 넣은 휴대전화가 쉴 새 없이 울렸다. 그녀의 갑작스런 행동을 지적하는 톡들. 뒤쪽에서 울려 퍼지는 고함. 
유상아는 한 걸음 한 걸음 파티션을 향해 다가갔다.

「그곳에, 그녀가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헤드폰을 쓴 채 그녀를 올려다보는 사내.
파티션 구석에서 항상 충전 중이던 보조 배터리.

그곳에 그녀가 기억하는 김독자가 있었다.
시나리오가 시작하기 전의 김독자.
유상아는 자기도 모르게 김독자의 양 볼을 움켜쥐었다. 

“엇······?”

동그랗게 눈을 뜨는 김독자. 그녀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란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그녀가 듣고 있는 것은 그들의 말이 아니었다.

「“유상아. 왜 그렇게 냉정해? 이 김독자가 김독자인 것처럼, 그곳에 남겨진 김독자도 김독자야. 너는―”」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한수영의 말.
그때 자신은, 왜 그렇게 냉정하게 반응했던 것일까.

“독자 씨.”

이제는 안다. 김독자의 이 얼빠진 표정을 보고서도, 모를 수는 없다.

「“수영아. 나한테도 소중한 기억은 있어.”」

그녀는 한수영처럼 ‘작가’도 아니었고, 유중혁처럼 ‘주인공’도 아니었다. 
그녀는 유상아였다. 김독자의 회사 동료이자, 김독자의 친구인 유상아.
괜스레 차오른 눈물이 시야를 가렸음에도, 유상아는 환히 웃었다.

「이 김독자를 지키기 위해, 그녀는 돌아왔다.」

김독자의 입술이 뻐끔거린다. 그녀를 알아보는 듯, 김독자의 혼탁하던 눈동자에 조금씩 빛이 돌아온다. 눈동자 속에서 희미하게 튀어 오르는 스파크를 본 순간, 유상아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잊어버린 이야기를 찾으러 가요.”


*


유상아는 김독자를 이끌고 곧장 회사를 빠져나왔다. 혹시 몰라 사무실 복도를 달리며 사람들에게 외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회사 그만두시고, 메뚜기나 한 마리 잡아두세요!”

광화문역에 내렸을 때, 그들을 제일 먼저 맞은 것은 정희원이었다. 멀쩡한 세종대왕상과 이순신 상 아래에서 정희원이 손을 흔들었다.

“유상아 씨!”

반가움의 해후 겸 힘껏 포옹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직 도착한 것은 정희원뿐인 모양이었다.

“독자 씨 상태는 왜 그래요?”
“······기억 상태가 온전치 못한 모양이에요. 현실 인식에 혼란을 겪고 있어요.”

아무래도 아바타 상태라 그런 것이려니, 짐작만 할 뿐이었다.

“중혁 씨랑 수영 씨는요?”
“아직 연락이 안 돼요. 중혁 씬 몰라도 수영 씨는 제일 먼저 전화 돌릴 사람인데······.”

이미 회귀가 성공한 지도 몇 시간이 지난 상황.
전화를 빌려서라도 연락을 했을 사람에게 연락이 없다는 것은, 뭔가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다른 일행들은요?”
“길영이는 지방에 있고, 유승이랑 지혜는 조금 늦을 거 같대요. 그리고 현성 씨는―”
“헉! 헉! 희원 씨! 상아 씨!”

멀리서 양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커다란 곰이 보였다. 곰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엥? 군부대 안이라 못 나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탈영했습니다.”
“······그래도 되는 거예요?”
“곧 세계가 멸망하는데 그런 게 뭐가 중요합니까.”
“곧이라 말하기는 좀 시간이 남았는데요.”

정희원은 그 말을 하며 자신의 스마트폰에 표시된 일정 화면을 보여주었다.

「시나리오 시작까지 D-28」

이현성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시나리오 시작 하루 전으로 회귀하는 게 목표 아니었습니까?”
“차라리 잘 됐죠. 준비할 시간도 벌었으니 더 많이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우우웅.

미리 접속하기로 약속한 톡방으로 하나둘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희원은 번역기를 돌려 메시지들을 읽었다.

―중국의 페이후 나는 무사히 도착한. 미세먼지가 있다.
―인도의 란비르 칸, 잘 도착했습니다. 그리운 냄새와 함께.
―일본의 아스카 렌입니다. 익숙한 천장. 아무 문제 없습니다 (`・ω・´ ).

회귀에 성공한 세계선 최강의 100인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던 일행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을 시작하죠.”


*


「D-21」

―군부대에서 다수의 총기를 무단 탈취한 ‘이 중위’에 대한 수배 명령이 내려져······.
―최근 인터넷에서 번지기 시작한 갑작스런 ‘종말론’에 일부 전문가들은······.

「D-14」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던 ‘종말론’이 벌써 2주일째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종말론자 ‘셀레나 킴’은 2주 뒤 찾아올 격변에 대비하여 준비물을 언급하며······.
―재계의 일부 유명 인사들조차 종말론에 동조하여 대중들의 비난을······.

「D-7」

―굴지의 제약회사에서 연구 중이던 미생물 앰플이 대량으로 탈취당해······.
―최근 10대들 사이에서 개구리 알을 수집하는 열풍이······.

「D-1」

―마침내 종말론자 ‘셀레나 킴’이 공지한 ‘멸망의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D-DAY」

이설화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작은 앰플을 내려다보았다.

―앰플 안에 살아있는 벌레나 벌레 알들을 넣어 놨어요.
―최대한 많은 사람이 열람할 수 있도록, 인터넷에 비상 앰플 배치도 뿌렸어요.
―이제 행운을 빌어야죠.

「종말 4시간 전」

―인도 뉴델리, 준비 완료했습니다.
―중국 베이징, 준비 완료.
―미국 워싱턴, 준비 끝났습니다.

「종말 1시간 전」

―대한민국 서울, 준비 완료.

「종말 10분 전」

―신유승, 이길영 팀. 3호선 지역 배치 완료했습니다.

3호선 압구정역.
멀리서 달려오는 지하철 소리를 들으며, 신유승은 불현듯 입을 열었다.

“잘 되겠지?”
“당연하지. 너 개구리 알 몇 개 가지고 있어?”
“102개. 너는?”
“524개.”

신유승이 눈살을 찌푸리며 이길영의 페트병을 노려보았다.

“야, 너 혼자 그렇게 많이 가지면 다른 사람들은······.”
“아 다들 앰플 하나씩 있는데 뭐. 그 시커먼 놈보다 강해지려면 이번에는 부유하게 출발해야 돼! 이것만 있으면······!”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이길영의 손끝에서 페트병을 탈취했다. 
깜짝 놀라 돌아보자, 그곳에 익숙한 사내가 서 있었다.

“시커먼 놈!”
“중혁 아저씨? 언제 오신 거예요!”
“방금. 성흔에 문제가 생겨서 늦었다.”

숨을 헐떡이는 유중혁이 이마를 닦으며 페트병을 품에 넣었다.

“김독자는?”
“상태가 안 좋아서 설화 언니가 데리고 있어요. 아직 시나리오 이전이라 그런지 잠깐 괜찮았다가 또 의식불명이에요.”
“작전 준비는?”
“모두 끝났어요.”

신유승은 긴말 대신 유중혁에게 예비용 스마트폰 하나를 건넸다.
투덜거리던 이길영도 품속에서 페트병 하나를 더 꺼냈다.

“흥, 뺏어갈 줄 알고 미리 하나 더 만들어 놨거든?”

「PM 6:55」

멀리서 지하철이 달려오고 있었다. 세 사람은 나란히 지하철에 탑승했다. 평소와 똑같은 냄새의 3호선 지하철. 누구도 종말 따윈 생각하지 않는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흘러가는 터널의 어둠을 보며 이길영이 문득 중얼거렸다.

“······근데 정말 시나리오가 시작될까?”

이길영이 약간 자신 없는 표정으로 유중혁 쪽을 흘끔거렸다. 지난 28일 동안, 이길영은 일행 중 누구보다 열심히 종말을 준비해왔다. 그랬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이길영은 그 종말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 이길영을 향해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시작될 거다. 지금까지 1864번이나 그랬으니까.”

홀로 오랫동안 종말을 기다려온 사람의 말이었다. 유중혁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조용히 자신의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3분전, 2분전, 1분 전. 그리고.

「PM 7:00」

끼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철이 급정거를 시작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지하철의 어둠에 시민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 아비규환의 현장 속에, 오직 세 사람만이 평온한 얼굴로 서 있었다.
새카만 어둠을 밝히듯, 유중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작전명 〈오징어 포획〉, 시작한다.”

===

「다시, 종말 1시간 전.」

“······빌어먹을, 여기가 어디야.”

어질어질한 머리를 붙든 채, 한수영은 재빨리 시야를 살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본 것은 눈부신 빛살 속에서 사라지던 유중혁의 모습. 한수영은 재빨리 자신의 육체를 점검했다.

성공이다.

부쩍 얇아진 팔뚝과 탄력을 잃어버린 근육.
그동안 쌓아온 설화도, 단련한 스킬과 성흔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큰 문제는 아니었다. 시나리오만 다시 시작된다면, 그런 문제들에 대해선 대처법을 이미 생각해두었으니까. 문제는······.

“젠장, 시간 얼마 안 남았네.”

하필 스마트폰 배터리가 거의 다 떨어져서 일행들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톡방에 올라온 일행 배치도를 간신히 다운 받아 확인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자식들, 나 없이도 잘 준비했네.”

잠깐 살피는 것만으로도 작전 현황을 모두 읽어낼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전 전체를 총괄한 것이 바로 그녀였다. 
그런데 배치도를 읽던 한수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녀석······.”

한수영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아슬아슬하지만 시간은 충분할 것 같았다.


*


「종말 30분 전.」

멍하니 시계를 바라보는 이지혜의 눈앞에, 검은 머리통이 불쑥 나타났다.

“울찌, 오늘 야자해?”
“아니, 어, 응.”

벌써 돌아온 지 28일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별명이었다.

울찌.

그 별명을 언제 마지막으로 들었었나.
자신에게 또 다른 별명이 있었던 시절.
그 시절이, 다시 돌아왔다.

“진짜? 그냥 물어본 건데. 웬일로?”

웃는 듯한 눈매. 
이지혜는 지난 4년간 단 하루도 그 눈매를 잊은 적이 없었다. 자신보다 작은 체구에 창백한 피부. 단추 하나가 떨어진 교복 마이. 실밥이 뜯어진 명찰에 적힌 이름.

「눈을 뜨면, 핏빛으로 충혈된 눈동자가 그녀를 보고 있다.」

떨리는 오른손이 체육복 바지를 움켜쥐고 있었다. 

「“지혜야, 괜찮아.”」

이지혜는 필사적으로 그 손을 붙잡았다.

「“살아.”」

“이지혜?”

허공에서 다가오는 친구의 손. 이지혜는 거의 발작적으로 그 손을 피했다.

“······아, 미안. 뭐라고 했어?”
“어디 아파?”
“아냐, 괜찮아.”
“일곱시 쯤에 같이 튈까?”
“절대 안 돼!”

벌떡 일어나 저도 모르게 큰 목소리를 냈다. 주변에 앉아있던 반 친구들이 순간 이쪽을 돌아보았다. 이지혜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좀 있으면 고3이잖아. 공부해야지.”
“······울찌, 너 정말 어디 아파?”

「종말 20분 전.」

야자 1교시를 시작하는 벨소리가 울렸다. 이지혜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꼬깃꼬깃 포장된 작은 상자였다.

“보리야, 이거.”
“뭔데?”

상자를 발견한 친구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지혜는 상자를 넘겨주는 대신 단단히 엄포를 놓았다.

“절대 지금 열어보지 마. 6시 50분 되면, 그때 열어봐.”
“뭐 벌레 같은 거 넣은 거 아냐? 나 심장 약한 거 알지?”

그 말에, 이지혜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걱정 마. 절대로 널 죽게 두지 않을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지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교실 사물함 뒤쪽에 숨겨 놓았던 긴 장도를 꺼냈다. 놀란 친구가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어디가?”
“똥.”

이지혜는 그대로 교실 밖으로 나왔다. 마침 당직 교사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지혜. 뭐하냐? 들어가! 야자 시작했다! 너 등에 멘 그건 뭐―”
“선생님. 오늘 당직이세요?”

호리호리한 체격에 핼쑥한 눈매. 뿔테 안경을 쓴 윤리 교사.
적어도 이지혜의 기억 속에서,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선생님, 이따가 교무실 2번 캐비닛 꼭 열어 봐요!”

교사는 유유히 자신을 지나치는 이지혜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뭐? 너 어디······억, 애가 무슨 힘이, 야! 이지혜!”

이지혜는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계단을 주파하고, 교무실로 들어가 방송실 열쇠를 훔쳤다. 다시 곧바로 3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내내 이지혜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태풍여고’ 지역의 첫 번째 시나리오는 다른 지역보다 몇 분 일찍 시작했다.」

이지혜가 이곳에 미리 배치된 것 또한 그 때문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문을 따자 익숙한 방송실의 정경이 보였다. 태풍여고의 방송실은 제법 장비 품질이 훌륭했다. 그뿐만 아니라 유사시 지역 회선으로 방송을 송출할 수 있는 권한도 갖추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자신을 찾는 선생의 외침을 들으며, 이지혜는 미리 준비해 둔 예비 동력원을 꺼냈다. 그리고 침착하게 방송 장비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선을 연결하는 동안, 그녀의 머릿속에서 연결되는 기억들이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방송부원을 했었고, 점심시간이 되면 좋아하는 음악을 틀었다. 그것이 그녀의 삶이었다.

「적어도 멸망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살아있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이지혜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날 교실에서 살아남은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이지혜.”

깜짝 놀라 돌아보자, 그곳엔 예상 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수영 언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수영이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이지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했다.

“안색이 영 안 좋네.”
“괜찮아요.”

잠시 침묵하던 이지혜가 말했다.

“시나리오, 시작되는 거 맞겠죠? 아님 저 정학당할 수도 있어요.”
“시작될 거야. 근데 꼭 여기서 시작할 필요 없어. 지금 당장 다른 곳으로 가. 여긴 내가 맡을 테니까.”
“여기가 내가 시작해야 할 장소에요.”

이지혜가 웃었다.

“여기가 ‘상처받은 검귀’가 태어난 장소니까요.”

이지혜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이제 모든 장비 세팅은 끝났다.

「종말 10분 전.」

그리고 그것이 시작되었다.

쿠구구구, 하는 소리와 함께 세상의 형질이 뒤바뀌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북을 찢는 듯한 소리.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이런, 예정보다 일찍 채널을 열어버렸네. 아, 아, 잘 들리시나요?]

이지혜는 한수영을 돌아보았다. 한수영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았다. 우습게도, 그들은 이 순간만을 줄곧 기다리며 살았다.

[당황할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일단 먼저 말씀드리자면 이 상황은 영화 촬영이 아닙니다. 테러도 아니고,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지금 여러분은―]

그것은 그녀가 가장 증오해온 도깨비의 음성.
교실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들.

[메인 시나리오 #1 – 가치 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준비한 작전을 시작해도 된다는 신호였다.
이지혜는 마이크를 잡았다.

―지금부터 재난 방송을 시작합니다.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자신의 목소리.

―모두 잘 들으세요. 교실에 계신 분들은 청소용구함을, 교무실에 계신 분들은 2번 캐비닛을 열어보세요! 빨리!

이지혜는 알 수 있었다. 지금쯤 다른 일행들도 자신과 같은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모두, 이 광경을 도깨비가 띄운 패널 화면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서로를 죽일 필요가 없어요. 적어도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지혜는 일행들을 생각했다. 이 세계로 오기 전, 일행들과 한 약속을 떠올렸다.

「“······적어도 무엇을 죽일지는 스스로 선택할래요.”」

신유승은 강아지를 죽이고 시작하지 않을 것이며.

「“이모를 구할게.”」

이길영은,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을 살릴 것이다.

「“또 군대 가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이현성은 군대를 나올 것이며.

「“그때 그 할머니를 꼭 구하고 싶어요.”」

유상아는 구하지 못했던 이를 구할 것이다.

「“개연성이 허락하는 기회는 한 번뿐이다. 두 번이나 ‘집단 회귀’를 사용할 수는 없어.”」

유중혁은, 더 이상 회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회차에서 ‘상처받은 검귀’는 되지 않을래요.”」

학교 내의 웅성거림이 점차 잦아들 무렵, 이지혜가 입을 열었다.

―모두 하나씩 찾으셨죠?

마치, 한때의 김독자가 사람들을 향해 메뚜기를 던졌던 것처럼.

―그거, 힘껏 바닥으로 던져요!

그 말과 함께, 이지혜는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던 앰플을 터트렸다.

[당신은 총 133개체의 생명체를 학살하였습니다.]
[학살 내역 : 개구리 알 133개]
[저항력이 없는 생명체를 살해하였기에 획득 코인이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총 665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
.
.
[메인 시나리오 #1 – 가치 증명이 종료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그들은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를 만들 것이다.」

뒤늦게 사태를 눈치챈 담당 도깨비가 이지혜의 눈앞에 나타났다.

[무슨······ 이봐 당신! 대체 뭐야? 어떻게 이런 짓을······!]

그리고 다음 순간, 시나리오 전체에 개연성의 후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막대한 코인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지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았다.

츠츠츠츠츠츳!

[성좌님들! 오해십니다! 국장님··· 아닙니다! 이건 제 잘못이······ 관리국 재고는······ 으아아아!]

채널이 해체되는 소리와 함께, 하급 도깨비가 비명으로 스러졌다.

「PM 7:00」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방송실 창문 너머로 서울의 밤이 비치고 있었다.
하늘 저편에서 균열이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3호선의 지하철.」

“모두 침착하세요! 다들 이거 쥐고 던져요! 빨리!”

「광화문.」

“당황하지 말고, 모두 받은 병 바닥에 터트리세요! 살 수 있어요!”

「병원.」

“아직 앰플 못 받으신 분!”

서울의 모든 장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변이 발생하고 있었다.
예정된 시나리오가 변하고 있었다.

[시나리오 전 지역에서 믿을 수 없는 업적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습니다!]
[관리국에서 대량의 코인이 반출됩니다!]

폭발하는 코인들 속에서, 〈스타 스트림〉이 전율하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이 갑작스런 시나리오의 이변에 놀랍니다!]
[관리국의 도깨비들이 과도한 코인의 반출에 경악하며······!]
[한반도 시나리오를 감시하던 다수의 성좌들이······!]

허공에서 폭죽처럼 터지는 코인의 세례. 하나의 세계가 멸망하는 풍경이었다. 곁을 돌아보자 한수영도 같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마치, 저 밤하늘 어딘가에서 그들을 보고 있을 누군가를 찾듯이.

“가요, 아저씨 구하러.”

그들의 작전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


거친 숨을 토해내며, 다시금 의식이 깨어났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천천히 몸에 힘을 넣어 보았다. 팔, 다리, 어깨······ 예전과는 확실히 몸의 감각이 달라져 있었다.

「김 독자 많 이작 아 졌 다」

나는 쓰게 웃으며 작아진 손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손가락의 마디가 1cm는 더 짧아졌다. 나는 약간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몇 회차까지 봤더라?”

「7 8 6 회 차.」

무언가를 전력으로 읽는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유중혁과 동료들이 하나의 회차를 살 때 나 역시 하나의 회차를 살았다.
2회차를, 3회차를, 4회차를, 다시 5회차를······.

「그 것이 가장 오래 된 꿈 의 숙 명」

그 무수한 선택들이 만들어 낸 설화들을 읽고 또 읽었고, 다시 거기에서 파생된 세계선들을 보고 또 보았다.

「김독자는 먼 해안가를 걸어가듯이 세계를 읽었다.」

설화의 파도는 밀려오고 또 밀려 나갔고, 그럴 때마다 나는 점점이 뭔가를 잃어버렸다. 불현듯 무언가 생각나 돌아보면, 그곳에 발자국들이 있었다. 발자국은 밀려온 파도에 금세 지워졌고, 나는 그 흔적을 바라보다가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범람하는 설화 속에서 뭔가를 잊어가고 있다는 기억이 들 때면, 나는 내가 살았던 회차를 생각했다. 그곳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행복을 생각했다. 
그러면······.

“······어?”

손끝이 벌벌 떨렸다.
내가 살았던 것이 몇 회차였는지,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곳에 보이는 것은 유중혁의 지난 회차들뿐이었다.

「끝내 남는 것은, ‘다음 이야기’를 보고 싶다는 욕망뿐.」

나는 부쩍 작아진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긴 여정의 끝에 나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김독자는 마지막 시나리오에서 보았던 ‘가장 오래된 꿈’을 떠올렸다.」

결국 나는 내가 보았던 ‘가장 오래된 꿈’이 되는 것일까.
모든 기억을 잃고, 영원한 우주의 꿈을 꾸는 거대한 무의식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해내야 한다. 떠올려야 한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버릇처럼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있었다.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해질 때면 나를 지켜주었던 작은 세계. 
오래전에 배터리가 방전되어버린 새카만 창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간단히 설화를 조작해 스마트폰을 켰다. 그러자 익숙한 바탕화면이 떠올랐다. 그곳에, 이 모든 이야기를 시작한 한 편의 소설이 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최종본).TXT

그동안 나는 일부러 최종본을 읽지 않았다.
그것을 읽으면 무언가가 결정되어버릴까 두려웠다. 앞으로 동료들과 살아갈 날들이, 누군가가 먼저 쓴 이야기에 좌우되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

〈김독자 컴퍼니〉의 이야기는 끝났고, 나의 ■■은 정해졌다.

「이것을 읽으면, 내가 잊었던 것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아직도 tls123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작가는 ‘최종본’에 대체 무엇을 써두었을까.
작가가 낸 결말은 무엇이었을까.

본래 이 이야기는, 어디서 어떻게 끝나게 되어있었던 것일까.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파일을 향해 짧아진 손가락을 가져갔다.
마치 처음으로 ‘멸살법’을 읽었던 그 날처럼.

「그렇게, 김독자의 마지막 독서가 시작되었다.」

===

 Epilogue 3. 작가의 말

천천히 뻗은 엄지에 차가운 액정이 닿았다.
그 순간, 화면 위로 스파크 같은 것이 일렁였다.

[새로운 파일이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최종수정본).TXT

그 짧은 사이, 파일명이 바뀌어 있었다.

······최종 수정본?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파일을 넘겼다. 
그런데 왜일까. 스크롤이 파일의 거의 최하단에 있었다. 이제 막 편집을 끝낸 듯한 느낌이 드는 파일. 나는 무심코 스크롤을 더 내렸다.

내가 보지 못한 멸살법의 ‘에필로그’가 추가된 것일까?

본편이 끝난 지점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파일. 내가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나는 무심코 그것을 소리 내어 읽었다.



Epilogue 3. 작가의 말



모든 회차는 각자의 방식으로 결말을 맞이한다.
1863회차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신은 〈스타 스트림〉의 모든 시나리오를 클리어하였습니다.]

해냈다.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무수한 문장들.
눈앞에 쓰러진 ‘도깨비 왕’과, 그녀가 이끌고 온 1863회차의 일행들.

“대장! 우리가 이겼어!”

눈물을 질질 짜는 김남운.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다가오는 이현성을 보며, 한수영은 자신이 해냈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것이 1863회차의 끝이었다.」

긴 싸움이었다.
3회차에 있었던 자신이 갑자기 1863회차로 소환되고, 이 세계에서 나름대로의 끝을 맞이하기까지······.
도중에 몇 번인가 포기할 뻔도 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그때 ‘그 녀석’이 남긴 말 때문이었다.

「“영원히 잠드는 것보단 다음 시나리오로 가는 게 나아.”」

자신과 같은 3회차에서 온 녀석.
같은 코트에, 같은 무기를 쓰던 사내.

「“묵시룡이 해방되었다고 다 끝난 건 아니야. 너도 알잖아?”」

그녀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고, 묵시룡을 해방시키더니 끝내는 유중혁까지 시나리오에서 이탈시켜버린 녀석.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순간의 정경이 선연했다. 하나의 ‘등장인물’이 자신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는 모습······.

“대장, 해냈습니다. 우리가 해냈습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이현성을 향해, 한수영은 손에 든 담뱃불을 끄며 말했다.

“애들 부축해서 그만 돌아가.”
“대장은······.”
“나는 한 대 더 피우고 갈 거야. 먼저들 가.”
“······그럴 수 없습니다!”

······둔한 녀석이 눈치는 빨라가지고.
한수영은 이현성의 곁에 있던 대천사에게 눈짓했다.

“요피엘.”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 요피엘.
3회차의 그 녀석과 함께 이 세계선으로 넘어온 대천사.

[가자, 덩어리.]

“아니, 대장님!”

일행들을 데리고 지구로 귀환하는 대천사를 보며, 한수영은 마지막 남은 담배를 꺼냈다. 멀어지는 ‘멸살법’의 일행들. 모든 시나리오를 클리어했다는 충만감에 눈물을 흘리는 그들을 보며, 한수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날개를 펼친 요피엘이 멀어지며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홀로 갈 생각인가?

한수영은 대답 대신 담뱃불을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모든 일행들이 사라졌을 무렵, 한수영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최후의 벽.」

이 세계선의 끝을 저지하는 벽이자, 우주의 삼라만상을 기록한 벽.
한수영은 이 벽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심지어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열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3회차의 한수영과 연결되면서 얼핏 엿본 광경들도 있었고, 무엇보다 이 회차를 방문한 김독자를 통해 얻은 정보들이 결정적이었다.

[‘윤회를 결정하는 벽’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미리 모아뒀던 [벽]을, 한수영은 하나씩 끼우기 시작했다.

[‘선악을 가르는 벽’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불가능한 소통의 벽’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의 조각이 부족했다.
모든 우주를 통틀어 오직 단 한 녀석만이 가지고 있는 조각, [제4의 벽].
한수영은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벽의 홈을 향해 손을 가져다 댔다.

[설화, ‘예상표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자신에겐 그 [벽]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비슷한 조각은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설화, ‘궁극의 거짓’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한수영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설화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단 한 번, 그녀는 [제4의 벽]의 실체를 본 적이 있었다. [진실의 눈동자]를 사용했다가 [제4의 벽]에 가로막혔을 때, 분명 그 벽의 일부를 보았다.

[설화, ‘예상표절’이 한계치까지 발동합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한수영의 손가락이 설화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벽의 설화. 그 벽을 이루고 있을, 단 하나의 이야기.

츠츠츠츠츠츳······!

「“저는 독자입니다.”」
「김독자(金獨子). 아버지는 혼자서도 강한 남자가 되라고 내게 그런 이름을 지어주셨다.」

다음 순간, 한수영의 손끝이 벽 안으로 쑥 들어갔다. 
그다음은 팔이, 어깨가, 머리와 몸통이······ 그리고 마침내는 그녀의 모든 것이 벽 안으로 스며들었다.

[‘최후의 벽’의 시스템이 당신의 설화 정보에 놀라······.]
[시스템이 일시적인 오류를 일으켰습니다!]

올라오는 구토감을 참아내며, 한수영은 바닥을 더듬었다. 

성공했다. 

이 빌어먹을 벽의 안으로, 무사히 진입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고개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자그마한 방이었다. 그 방 안에는 바리바리 싸놓은 봇짐들과 자그마한 영상 패널 몇 개가 있었다. 
패널에서 흘러나오는 설화는 그녀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에 도달했습니다.」
「‘구원의 마왕’의 ■■는 ‘영원’입니다.」

3회차의 결말. 그 녀석도, 자신의 세계선에서 시나리오를 끝까지 수행한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세계의 유일한 독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시나리오가 없는 세계에서, 오직 다음 이야기를 보고 싶은 욕망만이 남은······ 무척이나 끔찍한 상상력을 가진, 어떤 아기.”」

그는 계속 작아져, 언젠가는 이 세계의 무의식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계속할 것이다.
1863회차의 한수영은 그것을 알았다. 어떻게 알았냐고 하면, 그냥 알았다.

‘나라도 그런 식으로 결말을 맺었을 테니까.’

이 세계는 이야기를 위한 세계. 
유중혁의 이야기도, 김독자의 이야기도, 결국엔 하나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일 뿐.
한수영은 화면 속에서 멀어지는 지하철을 바라보았다. 누구도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하는 세계로 나아가는, 이 우주의 신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몇 걸음 앞에서, 손수건에서 눈물을 콕콕 찍으며 화면을 바라보는 존재가 있었다.

[히익?]

“네가 진짜 ‘도깨비 왕’이냐?”

[······너는 대체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분명 그들이 죽였던 도깨비 왕이 눈앞에 멀쩡히 있었다. 
한수영은 품에서 [흑천마도]를 뽑으며 물었다.

“어쩐지 너무 약하다 했어. 왜 제대로 안 싸운 거지? 네놈은 여기서 뭘 하는 거냐?”

[어어, 잠깐만. 시나리오는 이미 끝났습니다. 나는 너와 싸울 마음이 없습니다.]

양손을 흔드는 도깨비 왕에게서는 정말로 전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한수영의 전신에서 가볍게 튀어 오르는 스파크를 보는 도깨비 왕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의 눈동자가, 오류를 일으킨 [최후의 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최후의 벽’을 복제해······? 어떻게 이런 놀라운 재능이······ 너는 대체 누굽니까? 너의 영혼은······ 마치 재능의 총화와도 같군.]

“무슨 생각으로 그런 허수아비를 세워둔 거지? 이 세계선을 얕보는 거냐?”

[허헛, 얕보다니요? 모든 세계선의 이야기는 소중하지요. 다만······ 이제 이 세계선은 별 의미가 없어졌을 뿐입니다. 가장 중요한 설화가 방금 끝이 났으니까요.]

도깨비 왕은 그 말을 하며 패널을 다시 돌아보았다.
한수영이 조용히 설화를 일으키자, 도깨비 왕이 샐쭉 웃었다.

[뭘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어차피 너희들의 이야기는 무사히 끝났지 않습니까?]

“이 세계선의 결말을 건드리지 마.”

그 말을 하는 순간, 패널 화면에 1863회차의 화면이 떠올랐다. 
서로를 부축하는 이현성과 김남운. 일행들의 뒷모습이 풀샷으로 보였다.

[아 물론입죠. 어차피 중요한 세계선도 아니고······.]

시큰둥하게 어깨를 으쓱하는 도깨비 왕을 보며, 한수영은 알 수 없는 허탈감을 느꼈다.
이렇게 이 회차의 이야기가 끝나는 것일까.
정말로 이렇게 끝나도 좋은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가장 오래된 꿈’께서는 그런 걸 보고 싶어 하지 않으실 테니.]

그 말에, 한수영은 자기도 모르게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가장 오래된 꿈’.
그녀가 알던 김독자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의 그 녀석이 이 광경을 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본다고 응답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너의 세계에도 신을 믿는 자들이 있었죠. 인간이 부른다고 해서 그 신이 일일이 응답해 주덥니까?]

“그거랑은 달라.”

[뭐······ 맘대로 생각하시죠. 그보다 이몸은 이만 ‘탈주’ 하려고 하는데, 가 봐도 되겠습니까?]

“어딜 가는데?”

[이 세계선의 이야기도 끝났으니 저도 다른 곳으로 가봐야지요. 그동안 일도 열심히 했겠다, 예전부터 꼭 가보고 싶던 곳이 있어서······.]

“시나리오 그렇게 대충 던져 놓고 내빼시겠다?”

[성실한 도깨비 왕이 있는 세계선에서 태어나지 그랬습니까?]

인상을 찌푸린 한수영이 다시 기파를 방출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클리어 보상 정도는 줘야 하는 거 아냐?”

‘도깨비 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 좋습니다. 소원 하나 들어드리는 것쯤이야.]

“······그 녀석을 만나고 싶어.”

순간, 한수영은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거기도 네가 있으니까.”」
「“3회차에 있는 널 믿었거든.”」

이 답답함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녀석을 다시 만나면 그 답답함이 뭔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깨비 왕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녀석이라 함은······.]

한수영이 화면을 향해 턱짓하자, 도깨비 왕이 대경하며 외쳤다.

[너는 눈깔이 삐었습니까? 그분은 이제 내가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다른 세계선의 녀석이라도 좋아. 끝을 본 녀석이 아니라도 좋아.” 

이제 화면 속에 김독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녀석을, 한 번만 더 만나고 싶어.”

[그분은 이 우주에 단 하나뿐입니다.]

도깨비 왕이 저렇게 강경하게 말한다면, 정말로 안 된다는 뜻이겠지.
낙담한 한수영을 보며, 도깨비 왕이 의뭉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뭐, 너의 소원을 들어줄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뭐?”

[본래는 출입 금지되어 있는 세계선인데, ‘가장 오래된 꿈’이 새로 즉위하실 때 제가 출입 좌표를 외워 두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가장 오래된 꿈’께서는 너를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한수영이 반색하며 물었다.

“거기가 어딘데?”

[제가 방문하려던 곳입니다. 이번 우주의 대서사시가 종료되면 꼭 그곳부터 가보고 싶었거든요.]

도깨비 왕은 그 말을 하며 양손을 하늘 높이 뻗었다. 고고한 〈스타 스트림〉의 우주가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숭엄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올려다보며, 도깨비 왕이 말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 우주는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인지. 이 교묘한 설화의 은하는 구축한 것은 누구인지. 이 세상에 ‘시나리오’라는 것을 만든 것은 누구인지. 결과가 원인을 만들고, 원인이 결과를 낳는 이 모순덩어리의 세계를 완성한 것은, 대체 누구인지!]

한수영은 도깨비 왕의 목적을 눈치챘다.
지금 저 녀석은, 이 우주가 시작한 세계선으로 향하려는 것이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 시작된 곳.」

“너······!”

「tls123이 있는 우주.」

[나는 지금 나의 신을 만나러 갑니다. 원한다면, 너도 그 여정에 끼워드리지요!]

츠츠츠츠츠츠츳!

굉음과 함께, 그녀와 도깨비 왕 사이에 개연성의 후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영혼 전체가 산산이 찢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언뜻 도깨비 왕의 미소가 보였다.

[무사히 살아남아서 만납시다.]

그것이, 한수영이 기억하는 1863회차의 마지막이었다.


*


헉,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새벽 두 시였다. 등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똑딱거리며 들려오는 시계 초침 소리.

······꿈이었나?

한수영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다리에 감겨오는 보드라운 이불의 감촉. 어쩐지 침상이 낯설었다. 협탁에 둔 자리끼를 마시고 침실에 연결된 화장실로 들어가 불을 켰다. 주황빛 백열등이 어둠을 밝히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어깨까지 자란 단발. 눈을 가늘게 뜰 때면 더욱 도드라지는 눈물점. 틀림없는 그녀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얼굴이었는데.

“······이거 뭐야?”

갑자기 심장이 갑갑해지는 느낌이었다.

[당신은 ‘최초의 세계선’에 진입하였습니다.]

화장대 위에 진열된 프라모델들과 만화책. 한수영은 화장실을 뛰쳐나왔다. 침상 옆에 놓인 익숙한 모양의 책가방. 이제 집안의 어둠이 낯설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책가방을 열자, 교과서가 나왔다. 교과서에는 단정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6학년 2반 2번 한수영.

한수영은 13살이 되었다.


===

갑자기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대체 왜?
새벽 내내, 한수영은 혼이 빠진 상태로 있었다.
처음에는 유중혁처럼 회귀라도 한 것인가 싶었다.

[자율 활동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다음 자율 활동 예정 시간은 약 14시간 후입니다.]
[육신의 통제권을 회수합니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떠오르고 육체의 통제권이 사라지자,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깨달았다.

[당신은 본체의 자아가 잠들었을 때만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에게 빙의한 것이었다.

‘······혹시 새로운 시나리오인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시나리오 메시지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부스스한 얼굴로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학교를 가는 어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정확히 14시간이 지난 뒤,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떴다.

[본체의 자아가 잠들었습니다.]
[자율 활동이 시작됩니다.]
[육체의 통제권을 이양받습니다.]

낮에는 종일 멍청한 13살짜리로 지내다가, 밤만 되면 귀신같이 육체의 통제권이 돌아온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절규하는 것이다.

“······나보고 뭘 어쩌란 건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만약 이것이 정말로 ‘최초의 세계선’이라면, 지금 그녀의 행동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세계선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한수영은 심호흡을 한 후 일단 주변 상황부터 살피기로 했다.

비싸고 심플한 가구들이 들어간 세 개의 방과 거실. 
한수영은 이 집을 알고 있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파출부와, 종종 출입자를 감시하는 게으른 경호원. 그리고 주말마다 낯선 차를 타고 번갈아 찾아오는 부모님.

국회의원 아버지와 배우 어머니.

한수영은 한 번도 그들이 가족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세상은 그녀의 존재를 모른다.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들도, 그녀의 존재가 밝혀지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다 그대로네.”

한수영은 13살의 책상 위로 한가득 쌓인 책들을 후루룩 넘겼다. 그녀가 좋아했던 책도 있었고,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책도 있었다. 희미한 기억은 아마 또 다른 자신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묻은 손때로 봐서 모두 그녀가 읽은 책이라는 것은 명백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생이 있다.」

별 시답잖은 글귀에 밑줄까지 쳐 놓은 것을 보고 있자니 소름이 돋았다.
이런 별거 아닌 문장이 쌓여서 인간 한수영이 된 거겠지.
현관에서 벨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이 시간에?

곧장 버튼을 눌러 현관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경호원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화면 너머로 경호원이 기절해 있었다. 중절모를 쓴 중년인이 이쪽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도깨비 왕입니다.


*


“넌 왜 그런 꼴인데?”
“여기로 왔더니 갑자기 인간이 되어버리더군요. 시스템 권한도 거의 몰수 당해서······ 너는 왜 어려졌습니까?”
“네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내가 그런 게 아닙니다. 심오한 개연성의 영향으로······ 뭐, 아무튼 잠깐 들어가겠습니다.”

한수영은 한숨을 쉬며 도깨비 왕을 안으로 안내했다.

“혼자 사시는 겁니까?”
“그래.”
“남는 방이 많군요.”
“······미리 말하지만 재워줄 거란 기대는 하지 마라.”

도깨비 왕이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간단히 티백을 우려 차를 내온 한수영이 물었다.

“그래서, 날 이 세계선으로 데려온 이유가 뭐야?”
“지금부터 함께 ‘창조주’를 찾는 거죠.”
“어떻게?”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온 거냐?”
“짐작 가는 건 물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 소설.”

한수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도깨비 왕은 역시 ‘멸살법’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소설을 쓴 사람이, 아마 이 우주를 설계한 ‘신’일 겁니다.”

tls123.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을 쓴 작가.

가볍게 한숨을 내쉰 한수영이 노트북을 가져왔다.

“안 그래도 벌써 찾아봤어.”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그 소설, 아직 업로드가 안 됐더라고.”
“······흠, 뭔가가 잘못된 겁니까?”
“우리가 너무 일찍 온 거겠지. 올해 연재가 시작되는 건 확실해.”
“그걸 어떻게 압니까?”
“내가 들은 게 맞다면 김독자가 처음 이 소설을 읽은 건 15살 때야. 내가 13살이니까, 그 녀석은 지금 15살이겠지.”

한수영은 언젠가 김독자가 주었던 꼬깃꼬깃한 수첩을 떠올렸다. 급했는지 별의별 정보를 다 적어놓고 갔던 녀석.

“15살의 그분이라······ 뭔가 귀여운······.”
“그보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뭡니까.”
“만약 이 세계에 ‘멸살법’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야?”
“예?”

그 질문에 주춤하던 도깨비 왕이 이내 말을 이었다.

“흠······ 그러면 그분께서는 소설을 읽지 못하시겠지요.”
“읽지 못하니, 자연히 ‘멸살법’도 현실이 되지 못하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적어도 여기서 파생될 세계선들은, ‘종말’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김독자가 ‘멸살법’을 읽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이 세계선의 멸망을 막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너의 생각은 대충 알겠군요. ‘멸살법’의 연재를 막으려는 것 아닙니까?”
“맞아.”

한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tls123이 인외의 존재가 아니라면, 자신의 힘으로 이 세계선의 멸망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도깨비 왕이 태클을 걸었다.

“재밌는 생각이군요. 하지만 작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그 소설 읽어본 적 있어?”
“아뇨, 없습니다. 너는 읽어본 적 있습니까?”
“어.”

한수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 소설 엄청 못 썼어.”
“······.”
“시작부터 설명투성이에 분량 조절도 제대로 안 되어 있고, 읽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하나도 안 되어 있는 글이야. 오직 김독자 하나만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어.”
“호, 역시 대단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도깨비 왕이 실눈을 떴다. 한수영이 말을 계속했다.

“자기 소설을 다시 읽지 않는 작가는 없어. 게다가 웹소설 특성상 퇴고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오타 수정 때문이라도 자기가 올린 글을 몇 번이고 다시 눌러봤을 거거든. 그런데······ 100화 이후로 그 소설의 조회수는 모두 1이었어.”

그제야 한수영의 말을 이해한 듯, 도깨비 왕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맞아. 그 녀석이 내가 생각하는 멸살법의 ‘작가’야. 왜 본인이 써놓고 아니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틀림없어.”

버릇처럼 노트북에 켜놓은 빈 한글창.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한수영이 말했다.

“김독자를 찾아. 녀석이 빌어먹을 ‘멸살법’을 시작하기 전에.”


*


문제는 그 ‘김독자’를 어떻게 찾아내는가 하는 것이었다.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모르십니까? 시스템 권한이 없어서 직접 찾아야 됩니다.”
“대충 서울 어딘가겠지.”
“······다른 특징 같은 건 없습니까?
“뭐 어디 숨어서 판타지 소설 열심히 보고 있을 거고······.”
“그걸로 대체 어떻게 찾습니까?”
“아 몰라.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난 겨우 초등학생이라고.”

그 말을 한 뒤 한수영은 곧장 기절했다. 다시 일어났을 때 도깨비 왕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러니까 맨날 학교에서 졸았지.”

어쩐지 학교만 가면 잠이 쏟아지더라니······ 설마 다른 자아가 깨어나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나.
도깨비 왕을 기다리는 것은 꽤 지루한 일이었기 때문에, 한수영은 새벽 시간마다 틈틈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주로 하는 일은 블로그 탐방이었다.

“그 녀석 분명 블로그 했을 거 같은데······.”

그러다 심심해질 때면 노트북 안에 비밀 폴더를 만들어 소설을 써보기도 했다. 주로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한 간단한 엽편들이었다. 그런데 그 엽편을 완성한 다음 날,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낮에 활동하는 그녀의 13살짜리 자아가 일을 쳐버린 것이었다.

“수영아. 언제부터 글을 이렇게 잘 썼니?”

갑작스레 주최된 학교 백일장에서 대상을 타버렸다.
심지어 내용은 자신이 새벽에 끼적인 엽편과 똑같았다.

“그냥 갑자기 파바박 써지던데요.”

생각해보면 그녀가 글깨나 쓴다는 소리를 듣기 시작한 것은 13살부터였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수영은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한수영은 13살의 자신을 구경하며 살아가는 것에 제법 재미를 붙였다.

아마 15살의 김독자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한수영은 어쩐지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그 재수 없는 자식을 만나서 제일 먼저 무슨 말을 해주면 좋을까.

시간은 빠르게 흘러 9월이 되었고, 10월이 되었다.

가끔 부모님이 집에 와서 그녀가 좋아하지도 않는 선물들을 놓고 갔다. 
그리고 마침내 12월. 한수영은 조금씩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왜, 아직도 tls123이 연재를 시작하지 않는 걸까. 자신이 무언가 잘못해서 미래가 바뀌어버린 것일까?
하지만 그럴 턱이 없었다. 그녀는 아직 김독자를 만나지도 못했다.

······만약 올해 안에 ‘멸살법’이 연재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 세계는 ‘멸살법’이 존재하지 않은 채로 존속하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세계일지도 모른다.
‘멸살법’만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계가 멸망을 맞을 일도 없어질 테니까. 그러면······.

전화벨 소리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보나마나 또 부모님이겠지 싶은 생각에 전화를 받은 순간.

―그분을 찾았습니다.

“뭐? 어디서? 아니, 지금 어딘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김독자를 찾았다. 드디어.
그런데 이어서 들려온 말은, [예상 표절]로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여기가, 그러니까······ 병원 응급실이란 곳입니다.


*


한수영은 경호원의 눈을 피해 새벽 택시를 탔다. 병원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새벽에도 분주하게 오고 가는 의사와 간호사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환자들의 비명. 빈 침대차 위로 뿌리 깊은 죽음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시나리오가 없는 곳에서도, 누군가는 계속해서 죽는다.

아주 작은 멸망들. 기록되지 못한 생이 스러지는 장소. 
한수영은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침대차들을 살폈다. 

“아―”

그곳에, 15살의 김독자가 누워 있었다. 핼쑥하게 질린 얼굴. 붕대를 감은 소년의 손목에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다.

“아니, 우리 잘못이 아니라니까! 애가 학교에서―”

김독자와 닮지 않은 얼굴. 사촌 격쯤 되어 보이는 부부가 짜증을 내며 의사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한수영은 그쪽을 바라보다 도깨비 왕을 다그쳤다.

“이 녀석 왜 이렇게 된 건데.”
“교실 창문에서 뛰어내렸다는군요.”

한수영은 천천히 손을 뻗어 김독자의 몸을 살폈다. 투박한 깁스와 붕대로 감긴 몸. 얼굴에 남은 짙은 피멍들. 근육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팔이 힘없이 놓여 있었다.

한수영은 소년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손만큼이나 작은 손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좀 해봐.”
“걱정마시죠. 죽을 상처는 아닙니다. 다행히 저층이었고, 나무에 부딪치면서······.”
“그런 말이 아니잖아!”

멀리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부부가 보였다. 한수영을 발견한 것인지 뭐라 고함을 치는 부부. 
하지만 한수영에겐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대체 왜.

「“아마 그 소설이 없었으면, 그때 난 죽었을걸.”」

그것이 자신의 기억인지, 아니면 3회차의 기억인지 알 수 없었다.

「“또또 오바 떤다.”」
「“진짜라니까.”」

먼 이명 속에서 낡은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도깨비 왕의 부축을 받아 병원을 나왔다. 의료진과 구급대원들이 새로운 환자를 응급실로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어쨌든 찾았지 않습니까.”
“······.”
“직접 보니 과연 명불허전이더군요. 그분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가공할 기운을 보셨습니까? 이제 그분이 자신의 세계를 열기만 하신다면―”

곧 이 세계선에 찾아올 종말이 기대된다는 듯, 도깨비 왕이 수다를 늘어놓았다. 한수영은 비틀거리며 중얼거렸다.

“김독자는 열다섯 살에 그 소설을 읽었다고 했어.”
“예, 그러니 곧―”
“만약, 그 녀석이 그 소설을 읽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예?”

‘멸살법’이 시작되지 않으면 세계는 멸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김독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저기요?”
“······.”
“지금 우는 겁니까?”

김독자의 비극은 흔한 것이었다. 아주 작은 시선들이 모인다면, 약간의 선의가 모인다면 극복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시선을, 선의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새벽에나 간신히 제정신을 차리는 13살짜리 초등학생이, 대체 누구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왜죠?”

그렇다고 저 도깨비 왕에게 맡길 수도 없었다. 
말투도 이상한 데다 시스템도 못 쓰고, 신원 보증도 되지 않은 백수 도깨비를 어떻게 믿고······.

한수영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소설이 날 살렸어. 그러니 주인공에게 빚을 갚아야지.”」

김독자를, 구할 수 있는 것.

“너 돈 있어?”
“예?”
“오천 원, 아니 만 원만 줘봐.”

한수영은 곧바로 도깨비 왕의 돈을 빼앗아 근처의 PC방으로 달려갔다. 
도깨비 왕이 비명을 지르며 쫓아왔다.

“그거 제 전 재산이란 말입니다!”

한수영은 졸고 있는 PC방 사장 몰래 후불 카드 하나를 집어 로그인을 하고 인터넷 창을 켰다. 항상 접속하던 웹소설 플랫폼의 주소를 입력한 뒤, 작가명을 검색했다.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여전히, tls123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 날이 가까워졌음에도 연재는 시작되지 않았다.

한수영은 잠시 화면을 노려보다가, 플랫폼의 [가입신청] 버튼을 눌렀다.
tls123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tls123이 김독자가 아니라면. 어쨌든 그 빌어먹을 소설을 쓴 게 다른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해당 닉네임을 사용 중인 이가 없습니다. 닉네임을 사용하시겠습니까?

그게 누구여도 상관없는 것은 아닐까.

마우스를 쥔 손이 벌벌 떨렸다.
비극의 버튼이 그녀의 손끝에 놓여 있었다. 이 버튼을 누르면······ 무수한 세계선의 멸망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이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예.

그녀가 본 ‘작은 세계’가, 사라질 것이다.

―tls123님. 가입을 축하드립니다!

한수영은 시간을 확인했다.

[자율 활동 시간이 3시간 남았습니다.]
[본체가 깨어나면 당신의 통제권이 강제로 회수됩니다.]

한글창을 연 그녀는, 곧장 뭔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마치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원고를 풀어내듯, 그녀의 손가락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조금의 오타도 보이지 않는 타이핑. 하나의 세계를 통째로 도려낸 듯 정교한 문장들. 그러나 읽는 이를 배려한 배치도, 몰입을 위한 장치도 없는 서술들. 그녀는 그런 재미없는 이야기를 쓰고 또 썼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은.
틀림없이, 이 이야기를 읽어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이것은 거짓이다.」

그녀의 손끝에서 수많은 세계가 멸망했고.
무수한 등장인물들이 죽어갔다.

「적어도, 이것이 진실이 되기 전까지는.」

[예상 표절]로 가늠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범람했다. 
어떤 것은 서사가 되었고, 어떤 것은 설정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한수영의 손가락이 멈췄다.

「자신을 덮친 까마득한 재앙 앞에서 유중혁은 말했다.」

모든 이야기를 [예상 표절]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나리오의 끝을 보기 전까지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유중혁이 정말로 그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그녀는 모른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가상의 이야기니까. 그녀가, 만들어 낸 것이니까. 그러니 그녀는 그 말을 쓰고 싶었다. 유중혁의 입을 빌려, 그 말을 써넣고 싶었다.

「“너도, 포기하지 마라.”」

깊은숨을 몰아쉰 한수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도깨비 왕이 황홀한 얼굴로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도깨비 왕.”

천천히 무릎을 꿇은 도깨비 왕이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나 잔다.”

[당신은 짧은 시간 동안 지나치게 많은 정신력을 소모하였습니다!]
[당신의 자아가 잠재의식으로 화하여······.]

.
.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침상 위였다.
밤 12시. 의식을 잃은 사이 벌써 하루의 사이클이 지나간 모양이었다.

······젠장,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한수영은 머리를 싸맨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자 위에 새파란 노트북의 바탕화면이 보였다. 무심코 인터넷 창을 켜 연재 플랫폼에 접속했다.
어제 새벽 올린 글에 벌써 몇 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대부분은 노잼이라는 둥, 설명충이라는 둥 하는 악플들이었다.

“겨우 두 시간 동안 급하게 쓴 글인데 당연히······ 그리고 최대한 ‘멸살법’이랑 비슷하게 쓰려고 그런 거거든?”

그런 댓글 중,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작가님. 정말 재밌습니다. 이거 연재 주기가 어떻게 되나요?

자신의 이름을 닉네임으로 쓴 터무니없을 정도의 순진함. 한수영은 그 이름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댓글이 하나 더 달려 있었다.

―혹시... 내일도 연재하시나요?

한수영은 몇 번이고 자신의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작은 손에 땀이 배어 있었다. 내가 이 말을 써도 될까.

그래도, 괜찮은 것일까.

한참을 망설이던 한수영이 댓글을 썼다.
이 모니터 너머에서 아직 살아있을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나는 유중혁이다’ 따위를 외치며, 어떻게든 자신의 멸망을 버티어 낼 한 소년을 생각하면서.
3149편에 달하는 회귀자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네. 내일도 연재합니다.	


===

한수영은 계속해서 글을 썼다. 
새벽마다 주어지는 짤막한 토막 시간. 그 시간을, 한수영은 온전히 김독자를 위해서 사용했다. 

“도깨비 왕.”
“예, 신이시여.”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말랬지. 앞으로 ‘멸살법’은 오후 7시에 연재될 거야. 아직 사이트에 예약 연재 기능이 없으니까, 네가 원고 가지고 있다가 그때 업로드해. 새벽에 올리면 애 잠 못 자고 기다릴 거 아냐.”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한수영은 한숨을 푹 쉬며 쓰던 원고를 바라보았다.

「유중혁은 지난 회차에서 있었던 일들을 점검했다.」

1863회차에 달하는 삶을 모조리 쓸 수는 없었다. 1863회의 삶을 담기에 3149회의 분량은 터무니없이 짧았다. 어떤 회차는 생략해야 했고, 어떤 회차는 줄여 써야 했다.
삶이 그런 식으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어떤 삶은 그렇게밖에 서술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일단 그것만 인정하고 나면 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1863회차의 유중혁에게 온전히 건네받은 삶이 있었고, 3회차의 김독자에게서 받은 정보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뛰어난 작가였다.

그녀가 쓰지 못한 여백은, 유중혁이 대신해서 살아갈 것이다.
활자의 맥락 속에서 숨을 쉬고, 새카만 활자들로 덮인 단단한 토지 위에 발을 디딜 유중혁.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유중혁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뿐.

한편의 글을 쓸 때마다, 김독자의 삶도 하루만큼 연장됐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쌓아갈 때마다 그녀의 시간도 흘렀다. 
13살의 한수영은 14살이, 다시 15살이 되었다.

「장장 십여 년을 넘는 긴 연재가 시작되고 있었다.」

힘들었다. 체력은 부족했고, 어린 그녀의 몸은 터무니없이 연약했다. 그럼에도 한수영은 버텼다. 모니터 너머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나이를 먹고 있을 김독자를 생각했다. 죽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버티어 나가고 있을 김독자.

―작가님. 오늘은 중혁이가······.

너는 이런 이야기가 정말 재미있는 것일까.
반신반의하면서도, 한수영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썼다.

「“언젠가 내가 전해준 정보들이 도움이 될 거야. 시간 날 때마다 들여다보라고.”」

누군가가 이야기를 읽는 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끝이라고만 생각했던 1863회차에서도 그랬다. 

―작가님. 제 생각인데, 이참에 새로운 인물을 만드는 편이······.

매일 김독자가 남긴 댓글을 확인했다. 거의 새벽에만 활동할 수 있었던 까닭에 실시간으로 소통하기는 어려웠지만, 필요한 질문에는 답장도 했다.

―주인공을 하나 더 만들까요?
―기왕이면 예쁜 여캐로...
―아하, 미소녀 말씀이시죠.

「유중혁의 뺨을 두 번 갈겨버릴 정도의 외모. 화려한 금발의 미소년이 유중혁을 노려보며 외쳤다. “야, 만두남.”」

―...작가님??

16살, 17살, 18살의 김독자. 
그는 이 이야기를 먹고 자라나, ‘가장 오래된 꿈’이 될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한수영은 지금의 시간을 즐겼다. 새하얀 설원 위에 활자들이 노니는 세계. 그 세계 위에 김독자가 있었고, 한수영이 있었다.

―작가님. 요즘 중혁이가 너무 불쌍한데요······.

가끔은 유중혁을 험하게 굴리기도 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사생하다 보니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렇게 글을 쓰다가 보면, 혼란에 빠질 때도 있었다.

정말 이 일은 이미 벌어진 일일까.
어쩌면 내가 써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한수영은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책임을 졌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그 작품을 온전히 지배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했다.

「유중혁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천공을 노려보았다.」

언젠가 그녀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유중혁은 저 김독자를 실제로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한수영은 가끔 미칠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공전의 히트작! 『SSSSS급 무한 회귀자』!

그 무렵부터 ‘낮의 자아’도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물론 자신의 재능을 고스란히 훔쳐다 썼기 때문에, 실패할 리 없는 작품이었다. 심지어 ‘낮의 자아’는 익명 계정으로 ‘멸살법’에 악플도 달았다.

―이걸 쓰고 계신 작가님의 인생이 걱정됩니다.

······더욱 황당했던 것은 김독자의 쪽지였다.

―작가님! SSSSS급 무한 회귀자란 소설 아시나요? 이 소설 설정이 멸살법이랑······.
 
한수영은 피식 웃으며 쪽지에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 쪽지까지 썼던 녀석이 1863회차에선 날 표절 작가로 몰았다 이거지.

―그래도 덕분에 조회수 올라서 좋네요.

그렇게 쪽지 답장까지 모두 끝내자, 창밖으로 희미하게 여명이 비치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잠에서 깨어나도 정신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그녀에게 할당된 시간을 다 쓰기 일쑤였고, 자율 활동 시간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피로감을 못 이겨 잠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는 기억력도 점차 감퇴하고 있었다. 
유중혁에게 들었던, 김독자에게 받았던 정보들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1863회차에서 있었던 일들이 조금씩 흐릿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의 설화가 소모되고 있습니다.]

그녀의 자율 활동 시간 역시,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고, 한수영은 거의 매일 글을 썼다.
가끔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하루를 통째로 날리기도 했다.
짙은 피로감에 김독자의 댓글을 읽지 못하는 날들도 많아졌다.

―작가님. 저 모레 군대갑니다. 최전방 걸릴 거 같아요.
―김독자입니다. 양구입니다.
―중혁아······ 넌 제설해봤냐?

20살, 21살, 22살······.

371회차, 621회차, 972회차······.

유중혁의 회차가 쌓여갈 때마다 김독자도 나이를 먹었다. 유중혁의 비극을 먹고 자란 김독자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대학생이 되었고, 군인이 되었다.
한수영은 그런 김독자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성인이 된 후 ‘낮의 자아’가 새벽 시간대에도 깨어 있기 시작하면서, 여유 시간은 더욱 줄어들었다. 글을 퇴고할 시간이 자연히 사라지자, 도깨비 왕의 역할이 커지기 시작했다.

“걱정 마십시오. 오타는 제가 수정하겠습니다.”
“맞춤법은 아냐?”
“압니다. 그걸로 먹고 살 생각입니다. 출판사에서 교정 알바를 구한다고 해서 자신 있게 지원했습니다.”

영 못 미더웠지만 당장 다른 도움을 구할 방법도 없었다. ‘낮의 자아’에게 도움을 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최근 기력도 많이 쇠하고 건망증도 심해져서, 김독자에게 답 댓글을 쓰는 것도 벅찬 상황이었다.

「그런 식으로 마법처럼 몇 년이 흘러갔다.」

그 문장을 쓰며, 한수영은 어쩌면 자신의 삶도 유중혁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때로 삶은 정말로 그렇게 생략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고 해서, 그 삶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눈앞에 쌓인 3천 편에 달하는 소설을 보며, 한수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완결을 앞둔 어느 날, 한수영은 모처럼 댓글을 달기 위해 플랫폼의 창을 열었다. 

―힘내세요, 독자님.

······내가 이런 댓글을 달았었나?
처음엔 비몽사몽 간에 쓰고 잊어버린 거라 여겼다. 그런데 기억에 없는 댓글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질문에 답변을 드리자면······.

대체 언제 이런 댓글을 썼었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댓글을 쓴 시간도 이상했다.

―그러니까, 그건 설정 오류라기보다는······.

한수영은 곧바로 도깨비 왕을 불렀다. 그러자 허공에서 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중절모를 쓴 도깨비 왕이 나타났다. 한수영이 물었다.

“이거 네가 쓴 거냐?”
“예.”
“누구 맘대로?”
“미리 허락을 구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많이 피곤해 보이셔서.”

한수영은 도깨비 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의 ‘신’을 찾아 이 세계에 온 존재. 그는 이제 자신의 창조주가 누구인지 알았다.

“넌 대체 목적이 뭐야?”
“저는 ‘이야기꾼’입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꾼’들이 그러하듯, 위대한 대서사시를 이야기하길 좋아하지요. 당신이 만든 세계 말입니다.”
“이 이야기의 독자는 하나뿐이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한수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쏘아붙였다.

“네 꿍꿍이는 이미 알고 있어. 내가 쓴 소설을 유료화시킬 셈이잖아.” 

이곳에 온 이후 줄곧, 한수영은 ‘그날’에 관해 생각했다.
그녀가 쓴 소설은 언젠가 우주를 멸망시킬 시나리오가 된다. 하지만 대체 누가,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했다. 
지금 이 세계선에서 그런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존재는 하나뿐이었으니까.

“넌 처음부터 그 목적으로 나를 이곳에 데려온 거야.”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제 역할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도깨비 왕의 몸 위로 희미한 스파크가 튀어 오르고 있었다. 시스템의 개연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야기꾼의 왕이었던 그의 힘이 점차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한수영은 그 스파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정말로 멸망이 시작된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사실 잘 이해가 가질 않아. 시간 순서도 말이 안 되잖아.” 
“······시간 순서?”
“지금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는 건, 앞서 유중혁이 삶을 살았고 김독자가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야. 그런데 그런 내가 다시 김독자가 읽을 소설을 쓴다는 게······.”
“타임 패러독스. 인간들은 그걸 그렇게 부르죠. 하지만 그런 식으로만 작동하는 우주도 있습니다. 미래가 과거보다 먼저 쓰이고, 결과를 위해 원인이 만들어지는 우주. 당신은 이미 그런 우주를 알고 있을 텐데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한수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빙긋 웃은 도깨비 왕이 모니터를 툭 건드렸다.

“당신도, 그렇게 쓰고 있지 않습니까.”

한수영이 던져 놓은 단상들과 활자의 파편들이 그 안에 있었다. 
시간의 바깥, 세계의 바깥에서 서로 연결되기를 기다리는 무수한 장면들. 
어떤 장면들은 먼저 쓰였음에도 미래가 되었고, 어떤 장면들은 늦게 쓰였음에도 과거가 되었다. 한수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우주가 하나의 소설이란 얘기냐?”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니터의 활자들이 일렁였다. 누군가의 사랑을 원하는 활자들이 모니터 밖으로 하나둘씩 짝을 맞춰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별처럼 반짝이는 문장들. 
어떤 문장은 다른 문장을 위해 기꺼이 어둠이 되었고, 어떤 문장은 그 문장을 통해 빛이 되었다. 어떤 문장은 다음 문장을 위해 존재했고, 다음 문장은 다시 최초의 문장이 있었기에 의미를 획득했다.

“이 우주에는 앞과 뒤가 없습니다. ‘최초의 세계선’이 가장 마지막에 완성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 물고 물리는 거대한 연쇄 속에서, 도깨비 왕이 황홀하게 웃었다.

“우주는 방금 전 만들어지기도 했고, 동시에 수억 년 동안 존재해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태초는, 종말이 찾아온 뒤에야 태어나기도 합니다.”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문장들. 
〈스타 스트림〉이 자신의 신을 향해 노래하고 있었다.

한수영이 멸살법을 썼기에 김독자가 그것을 읽었다.
김독자가 멸살법을 읽었기에 유중혁이 회귀를 시작했다.
유중혁이 회귀를 시작했기에, 한수영이 멸살법을 쓸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썼으나 그녀의 손을 떠나 완성된 말들이었다.

「누군가를 구하고, 파멸시키고, 살게 할 이야기.」

그 말들이 그리는 지독한 궤적을 응시하며, 한수영은 자신이 끝나지 않을 거대한 순환 속에 내던져졌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녀는 세계를 만든 작가였지만, 무력한 신이었다. 단 한 사람의 독자조차 제대로 구할 수 없는 신. 그저 이 아득한 이야기의 부속일 뿐인 신.

[〈스타 스트림〉이 당신을 향해 미소합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완벽한 이야기입니까.”

===

[〈스타 스트림〉이 자신의 창조주를 바라봅니다.]

피곤함에 젖은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왔다. 노곤한 의식 속에, 한수영은 도깨비 왕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만 주무십시오. 고결한 신이시여.”

다음 날, 마침내 ‘멸살법’의 마지막 화가 완성되었다.


*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이제 몇 개는 잊어버렸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것은······.」

마지막 문장의 타이핑을 끝낸 후, 한수영은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다. 하지만 정말로 그날이 찾아오자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녀의 길었던 연재가 마침내 끝났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예상대로 도깨비 왕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는 감동한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예.”
“유료화 안 하면 안 되냐?”
“신님, 제가 하지 않아도 시작될 이야기입니다.”

완고한 신도처럼 말하는 도깨비 왕을 보며, 한수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창밖으로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이제 저 해가 뜨고, 다시 저물기 시작할 무렵이면 세계에는 종말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김독자의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난 이제 사라질 운명이겠지?”

츠츳, 츠츠츳······.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설화들이 꿈틀거렸다. 뛰어나지도 특별하지도 않지만, 혼을 바쳐야만 완성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녀에게 ‘멸살법’ 또한 그런 소설이었다. 

[당신의 존재 설화가 위태로운 상태입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맞다면, 그녀의 자아는 본체의 까마득한 무의식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본체가 [아바타] 스킬을 익힌 후에야 간신히 약간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나겠지. 그리고 1863회차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내 삶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

한수영은 멍하니 창가로 다가갔다. 창백한 하늘 너머로 빛이 밝아오고, 별들이 물러가고 있었다.

【모든 것은 이미 쓰여있고, 동시에 쓰여지고 있다.】

그녀를 1863회차로 보냈던 ‘이계의 신격’은 그렇게 말했다. 순환을 반복하는 우주. 그곳에서 결과는 원인을 만들고 원인은 다시 결과가 된다. 
완전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결과는 원인을 부정하고, 원인은 결과를 잡아먹음으로써 존재한다. 그 아득한 법칙을 느낀 순간, 한수영은 이 세계가 마치 체스판 같다고 생각했다. 존재도 근원도 알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의지가 지배하는, 극도의 완결성만을 추구하는 체스판.

종말의 시나리오를 창조한 그녀조차, 우주의 체스판 위에서는 한 조각 ‘말’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밀려오는 수마를 느끼며,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의 정신력이 한계치에 이르렀습니다!]

한수영은 끔찍한 피로감을 견디며, 더듬거리며 옷을 입고 방을 빠져나왔다. 시간은 이른 새벽. 일찍 일어난 사람들은 출근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도깨비 왕이 그녀를 뒤따라 나왔다. 한수영은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동안 소설 편집한다고 고생했어.”
“지금 밖으로 나오면 당신은 죽습니다.”

알고 있다. 이제 해가 뜨고 있으니까.
한수영은 동이 튼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차피 이제 내 역할은 끝났어.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줄 거잖아. 정해진 시각에 녀석에게 파일을 주면 끝이야. 혹시 몰라서 전에 너랑 얘기한 수정 버전도 좀 써놨는데······ 그건 미완성이니까 네가 알아서 처리해.”
“하지만······.”
“10년이 넘는 세월이었어.”

한수영은 자신보다 몇 뼘은 더 큰 도깨비 왕을 노려보았다.

“한 번쯤은 내 마음대로 하면 안 되냐?”

그녀가 이 세계에 온 이유. 그것은, 1863회차에서 본 김독자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였다.
천천히 몸을 푼 그녀는 달리기 시작했다.

「한수영은 미노 소프트에 출근하고 있을 김독자를 상상했다.」

종종 도깨비 왕에게서 들은 소식들이 있었고, 김독자 스스로가 댓글로 전한 말들도 있었다. 그녀는 이제 김독자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작가님! 올해부터 저 자취합니다!
―저도 이 근처 사는데. 소설 속에서 보니 신기하네요.
―미노 소프트라고 아세요? 작가님 소설도 게임화되면 좋을 텐데. 제가 한 번 건의를······.

그가 언제 자신의 비극에서 독립했고, 어디에서 또 다른 비극을 마주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비극은 어떤 모양인지까지.

[본체의 자아가 잠에서 깨어나려 하고 있습니다!]
[경고합니다! 당신의 자율 행동 시간은 종료되었습니다!]
[더 이상 통제권을 행사하면 당신의 자아는······.]

한수영은 메시지를 무시하고 달렸다.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오직 김독자가 썼던 말들을 생각하며, 있는 힘껏 달렸다.

―작가님. 정말 몇 번이나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 말들을, 그녀는 잊게 될 것이다.

[당신의 행동이 개연성에 심각하게 위배됩니다.]

1863회차의 기억을 잊을 것이고.
자신이 어떤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잊을 것이다.

[당신의 설화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한 이야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 모든 것을 잊더라도······.

「한수영이, 천천히 달리기를 멈췄다.」

응급실에서 마지막으로 본 뒤, 오랜 세월 동안 텍스트로 존재해 온 사람.

「멀리서 김독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얼굴 그대로의 김독자였다.
그녀의 1863회차를 찾아왔던 사내.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던 사람. 특유의 알랑거림이 얄미웠던 사람.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 함께 거짓말을 하며 이죽거릴 수 있어, 즐거웠던 사람.

“―――.”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목이 메어서 그런 것인지, 점차 육체의 통제권을 상실해가고 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수영은 비척거리며 김독자를 향해 다가갔다. 곁을 지나치는 몇몇 사람들이 수상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김독자가 지하철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읽으며 내려가는 김독자.
그가 무엇을 읽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

가까스로 외친 목소리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필사적으로 김독자의 뒤를 쫓아갔다.

―작가님이 써준 이야기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어요.

유일한 독자의 말을 읽으며 한수영 또한 살 수 있었다.
유중혁의 다음 생을, 가까스로 쓸 수 있었다.
지루하고 따분한 10대를,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그 날들을 다시 한번 견딜 수 있었다.

―이번 열차는······행······.

플랫폼에 서서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김독자가 보였다. 활자가 만든 작은 세계에 숨어, 자신을 지키고 있는 한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곧 시작될 멸망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김독자.
장대한 ‘멸살법’의 세계를 살아갈 김독자.
자신이 동경하던 주인공을 만날 김독자.

‘구원의 마왕’이 될 김독자.

일행들을 위해 몇 번이나 자신을 희생하고.
그 결과로, 1863회차에 자신을 만나기 위해 찾아올 김독자.

어떤 이야기를 너무나 사랑한 대가로 ‘가장 오래된 꿈’이 될, 김독자.

[당신의 정신력이 붕괴합니다!]
[본체가 육체의 통제권을 되찾습니다.]
[당신의 설화가 소멸합니다.]

다리가 무거워지고, 팔이 잘 움직이질 않았다. 몸은 점점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럼에도, 한수영은 말해주고 싶었다.

「이 이야기가 태어난 것은 결코 네 잘못이 아니라고. 앞으로 네가 겪을 일들은 결코 너의 죄가 아니라고.」

왜냐하면 그녀의 13년은, 오직 그 말을 전해주기 위해 존재했으니까.

「너는 이 이야기를 읽고 자랐지만, 이 이야기가 될 필요는 없다고.」

간신히 뻗은 그녀의 손끝이 김독자의 어깨에 닿았다.

[당신의 자아가 ‘잠재의식’으로 화합니다.]

톡, 하고 어깨의 감촉을 느낀 김독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밀려든 출근길 인파에, 김독자는 휩쓸리듯 지하철에 탑승했다. 
인파가 빠져나간 휑한 플랫폼에 멍한 표정의 한수영만이 남아 있었다.

“······뭐야? 나 왜 여깄어?”

한수영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또 몽유병 도졌나?”하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그녀가 짜증을 냈다.

“아 시바, 오늘 연재분 아직 다 못 썼는데!”

.
.
.
.


[설화, ‘예상 표절’이 잃어버린 기억을 표절합니다!]

.
.
.
.

츠츠츠츠츠······.

“한수영?”

츠츠츠······.

“한수영!”

찢어지는 이명 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한수영!”

그리고 다음 순간, 한수영은 자신의 뒤통수에 느껴지는 강력한 충격와 함께 퍼뜩 정신을 차렸다. 뒤통수에 느껴지는 지독한 고통. 왜인지 때린 게 어떤 놈인지 알 것 같았다.

“중혁 씨! 그렇게 세게 때리면 어떡해요! 정신 차리자마자 죽겠어요!”

천천히 고개를 들자, 자신을 부축한 이설화와 인상을 찌푸린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도 있었다. 정희원, 이현성, 신유승, 이지혜······ 먼지투성이가 된 일행들. 
한수영은 그들 하나하나를 관찰하듯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네가 0회차가 떠올랐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이제 알겠네.”
“갑자기 무슨 헛소리지?”
“······기억났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한수영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자욱한 활자로 이루어진 안개 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그들이 방금 관통해 온 관문이었고, 그녀가 죽을 뻔한 관문이었다.
그녀의 안색을 살피던 이지혜가 물었다.

“언니, 괜찮은 거예요? 아까 무슨 작품 계약하러 가야 한다면서 헛소리하던데―”

[설화, ‘예상 표절’이 이야기를 멈춥니다.]

한수영은 떨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왜 지금에서야 이 기억이 되돌아온 것일까.
······아니, 이 기억이 사실이기는 한 것일까?

「한때, 이 손으로 어떤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다.」

희미하지만 생동감 넘치는 기억들.
한수영은 순차적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내가······ ‘멸살법’의―”

간신히 심호흡을 한 한수영이 다시 한번 입을 열려는 순간, 유중혁이 말을 끊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만 가지.”

그 목소리와 함께 한수영이 고개를 들었다. 

[메인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마지막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시나리오 메시지를 보며, 한수영은 다시 한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째서 저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르는 것인지 한수영은 잘 알고 있었다.

「일행들은, 다시 한번 99개의 시나리오를 헤쳐왔다.」

“······뭘 그렇게 얼빠져 있어요?”

그녀가 시작한 비극이었다. 그 비극을 정면으로 견뎌온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가요, 수영 씨.”

한수영의 등을 톡톡 두드린 유상아가 앞서 나갔다.
앞서 걸어가는 일행들의 등이 뿌옜다. 
불가능했다. 단순히 누군가를 위한다는 마음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해냈다.

저 멀리, 세계의 끝을 덮은 활자의 벽이 보였다.

‘최후의 벽.’

시선을 교환한 일행들이 하나둘 병장기를 뽑아 들자, 멀리서 성좌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유중혁도 [흑천마도]를 뽑았다.

“저 너머에, 녀석이 있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관리국의 도깨비들과, 최후의 벽을 수호하는 도깨비 왕의 모습. 천천히 숨을 들이켠 한수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긴 이야기였다. 드디어 그 이야기의 끝이 눈앞에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그녀가 쓴 결말에 도달했다.」

===

Epilogue 4. 전지적 독자 시점

처음으로 그 소설을 읽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갑갑한 병동. 로비에 비치되어 있던 단 하나의 PC.
컴퓨터를 하기 위해 줄을 섰을 때, 중절모를 쓴 신사가 나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모니터에는 마침 내가 좋아하는 소설 플랫폼이 띄워져 있었다. 
멍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다가 키워드를 입력했다. 세 개 정도를 입력했던 것 같은데, 뭐라고 입력했었는지는 잊어버렸다. 다만 그때 떠올렸던 장면들은 기억한다. 교실 바닥에 흩어져 있던 샤프심과, 창문 밖으로 펼쳐져 있던 쪽빛 하늘. 
확실한 것은 창문을 열었던 그 손으로 내가 무언가를 입력했고, 그 소설을 찾았다는 것뿐이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나는 그 이야기로 살아남았다.

「이 이야기가 태어난 것은 결코 네 잘못이 아니라고.」

속이 메슥거렸다. 어지럼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앞의 텍스트가 잘 보이지 않았다.

「한수영이 tls123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한참이나 자리에 누워 있었다. 머릿속에는 똑같은 질문만이 맴돌았다. 어째서. 왜?

「나 같은 것을 위해서」

한참이나 쓰러져 있었다. 울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울부짖고 소리쳐도 이미 쓰인 문장은 바뀌지 않았다. 한수영은 나를 위해 13년의 세월을 살았고, 자신을 깎아 만든 문장으로 나를 살렸다. 그리고 소멸했다.

「김 독 자」

[제4의 벽]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읽 어 야 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에 비친 꼴이 말이 아니었다. 더 이상 성인 남성의 육체라고 말하기엔 어려워 보였다. 키는 작아졌고 얼굴은 어려졌다. 입던 코트는,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그런 내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코트를 벗었다.

“······올해로 몇 년째지?”

「지 구의 시 간 은 아 무런 의미 도 없 어.」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었다. 
이 지하철은 ‘가장 오래된 꿈’이 꿈을 꾸는 장소. 다른 세계선의 시간으로는 이 지하철에서 흐르는 시간을 잴 수 없다. 
실제로 이 지하철에 온 뒤 나는 시간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래도 체감 시간이라는 게 있을 거 아냐.”

「대 충 21763년.」

“생각보다 오래 안 됐네. 아직 ‘은밀한 모략가’보다도 어린 거잖아.”

「아 직 애 송 이 지」

키득거리는 [제4의 벽]의 웃음이 들렸다. 그나마 저 녀석이 없었다면, 나는 진즉에 이곳에서 미쳐버렸을 것이다.
파스스스, 하는 소리와 함께 새끼손가락 끝이 줄어들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몸이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계속 작아지는 건가?”

나는 창밖으로 흘러나가는 설화의 부스러기들을 지켜보며 물었다.

“저 설화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거지?”

「우 주의 무의 식」

“거기가 어딘데?”

「네 가 의 식 하지 않 는 세계 선」

‘가장 오래된 꿈’의 임무는 모든 세계선을 상상하는 것. 내 의식이 움직이지 않아도, 내 무의식은 끊임없이 세계선을 지켜보고 있다.

「저 설화 들 은 또 다른 김 독자 로 태 어 날 거 야」

“김독자로?”

「비 유 하자 면 그렇 다는 거 야」

문득, [제4의 벽]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은하를 넘어 다른 세계선을 향해 흘러가는 설화들. 

저 설화들은 곧 ‘나’였다.

1864회차의 어딘가에 동료들과 남아 있을 49%의 나처럼, 저 파편들 또한 어딘가의 세계선에서 ‘김독자’로 태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우주는 그런 식으로 순환하고 있으니까.

“저 정도 양이면 ‘김독자’라고 부르긴 어렵겠는데. 저렇게 작은 파편으로는 날 닮지 않을 테니까.”

「그 렇 겠지」

나와는 이름도 얼굴도 다를 존재. 그럼에도 그 존재들은, 어딘가에서 태어나 우주를 상상할 것이다. 이야기를 읽으며 감동하고, 세계선을 지켜볼 것이다.
그렇게, 이 우주를 유지할 것이다.

“······그래.”

어쩐지 이 우주의 원리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는 창문을 향해 부서지는 손가락을 가져다 대어 보았다. 
그러자, 조금씩 그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런 짓을 하 면」

“이게 이 이야기에 대한 내 속죄야.”

손가락뿐만 아니라 어깨와 다리에서도 조금씩 설화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흩어진 설화들은 우주를 날아, 세계선의 어딘가에서 우주를 지탱할 문장이 될 것이다.

「너는 이 이야기를 읽고 자랐지만, 이 이야기가 될 필요는 없다고.」

‘멸살법’의 작가, 한수영은 그렇게 말했다.
분명하게 전달받은 말. 그럼에도 나는 그 말을 따를 수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보고서, 어떻게 내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눈을 감으면 우주의 전체상이 그려졌다.

한수영이 이야기를 썼고.
유중혁이 이 이야기를 살았으며.
내가 이 이야기를 읽었다.

그리하여 간신히 완성된 세계였다.

「“독자 씨.”」

이 비극이 있었기에 어떤 사람들은 만날 수 있었다.
누군가는, 구원받을 수 있었다.

「김독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우주를 바라보았다.」

이제 나는 내 미래를 알고 있었다. 무언가를 읽을 때마다 나는 부서질 것이다. 부서진 나의 설화들은 무수한 세계선으로 흩어져 이 우주를 지탱할 ‘시선’이 될 것이다. 
나는 기억을 잃고, 사랑하는 것들을 잃겠지. 그리고 종국에는 ‘다음 이야기’를 보고 싶다는 욕망만을 남기게 될 것이다.

그 욕망이 없다면, 이 우주는 계속될 수 없다.

누군가가 지켜보아야만 이야기를 계속하는 우주. 
이 우주에서 멈춰있는 것은 곧 죽음이다.

츠츠츠츠츠······.

입자로 나누어진 수많은 ‘나’가, 무수한 세계선으로 퍼져 나갔다. 설화가 흩어지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모든 걸 잊고 나면······ 고통스럽지도 않겠지?”

「너 는 기 억 하지 못 할 테니 까」

상실의 흔적조차 사라진 자에게, 상실은 없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스마트폰을 주우며 말했다.

“······한 번 정도는 더 읽을 시간이 있을까?”

‘멸살법’의 파일을 열고, 힘겹게 읽어낸 [작가의 말]을 아래로 내렸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나는 처음부터 소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유중혁의 3회차를 읽었다. 어떤 이야기는 알고 있는 것이었고, 어떤 이야기는 이제 새롭게 느껴졌다.
최종본은 내가 본래 알고 있던 원작 그대로였다.
그곳에 ‘김독자’는 없었다.

파스스스스······.

내 설화가 흩어지는 만큼, 다시 ‘멸살법’의 문장들이 내 안에 차오르고 있었다. 피곤할 때는 잠시 눈을 감고 쉬었고, 쉬고 나면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5회차, 6회차······ 64회차······ 129회차······.

672회차.

914회차.

1642회차······.

페이지가 내려갔고, 나는 몇 번인가 기뻐하거나 슬퍼했다. 
댓글을 달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다시 한번 한수영에게 이 감정을 전해주고 싶었다. 네가 전해준 이야기가 있어 여기까지 왔다고.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 너의 이야기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렇게 읽고, 읽고, 또 읽고.

얼마나 그 이야기를 읽었을까.

츠츠츠츠츠······.

「······」

마침내 에필로그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너무 소설을 많이 읽어서 눈이 멀어버린 것일까 싶었다.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천천히 시야가 되돌아왔다. 눈앞에 보인 것은 제대로 된 문장들이 아니었다. 문장과 문단들은 제각기 파편화되어 있었다. 
온전한 소설의 형태가 아닌 글.
그럼에도 왜인지 나는 그 글을 읽을 수 있었다.

「하나의 세계가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고 있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내가 아주 잘 아는 이야기가 그곳에 있었다.

「나는, 이 세계의 결말을 알고 있는 유일한 독자였다.」

그 이야기 속에는 내가 있었고.

「“나는 유중혁이다.”」

「“아, 그러고 보니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저는 한수영이라고 합니다. 그룹에서는 차상경 님의 보좌를 맡고 있고요.”」

그들이 있었다.

「“만약, ‘시나리오’가 시작되지 않았다면 우린 어떻게 됐을까요?”」

「“독자 씨 배후성이 혹시 ‘외눈 점쟁이’ 같은 건 아니죠?”」

「“독자 씨, 수류탄 던져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저씨는 좋아하는 음식 있어요?”」

그들과 함께 시나리오를 돌파했다.

「형은 혹시 신인가요?」

「“장전.”」

「“다들 마음 놓고 싸워요. 내가 아무도 안 죽일 거니까.”」

「“망할 놈들! 또 나만 빼놓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네가 아니라 구원의 마왕―”」

「[바앗!]」

그들과 함께, 삶을 살았다.

「“다음 시나리오는······.”」

시련을 겪었고,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에 봉착했다.
성좌들을 만났다.
몇 번이나 불가능한 시나리오를 돌파했고.
마침내, 지옥 같던 시나리오의 끝에 도달했다.

「[당신의 ■■는 ‘영원’입니다.]」

일행들은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무너진 PC방을 재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찢어진 게임 포스터를 다시 붙이는 사람들. 종말을 극복한 세계에서, 사람들은 다시 유희를 찾는다. 유중혁은 그 광경을 보며, 오랫동안 마우스를 쥐지 않았던 자신의 오른손을 조용히 움켜쥐었다.」

「신유승과 이길영은 임시 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아닌 말 그대로 ‘임시 학교’. 신유승은 세상에 그런 장소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부서진 ‘태풍여고’의 정경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이지혜가 운동장을 걸었다. 언젠가 친구들과 함께 뛰어다니던 바로 그 운동장. 이지혜는 닳아버린 운동장의 라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출발 자세를 취해 보았다.」

이어지는 일행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몇 번이나 눈을 닦았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엔딩.
일행들은 그곳에서 분명히 살아가고 있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곳에는 나도 있었다. 
49%의 나. 일행들에 대한 기억을 가진, ‘멸살법’을 알지 못하는 김독자·····.

「그리고 김독자는, 그 문장을 읽었다.」

그런데.

「“너, 대체 누구냐?”」

이게, 대체 뭘까.

「“말해. 너 누구냐고.”」

이렇게 될 리가 없었다.

「“틀림없어. 김독자는 아직도 거기에 있다고.”」

어째서.

「“다시 한번 더 뛰면, 잘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왜?

츠츠츠츠츠츠······.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끝나야 할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들이 ‘끝내지 않기로’ 선택했다.

「[성흔, ‘집단 회귀 Lv.1’이 발동합니다!]」

나는 반쯤 절규하듯 그 문장을 읽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절대로, 쓰여서는 안 되는 문장이었다. 
문장은 무심히 다음 문장으로 이어졌다.

「“명심해라, 기회는 한 번뿐이다.”」

일행들이 다시 한번 싸우고 있었다.
그 시나리오의 지옥은, 어떤 이유로든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일행들은 그곳으로 되돌아갔다.

「“꼬맹이, 이번엔 동전 안 던져?”
“던지든 말든 똑같으니까요.”
“왜?”
“100번을 던져서 한 번이 나와도, 단 1%의 형만이 그곳에 남아 있어도. 그래도 구하러 가야죠. 그 1%도 형이니까.”」

그리고 시작된 시나리오. 허공에서 터져 나가는 코인의 향연 속에, 〈스타 스트림〉의 도깨비들이 경악하고 있었다. 
성좌들의 폭발적인 관심 속에 일행들이 외치고 있었다.

「“야 아바돈! 날 선택해! 난 앞으로 저 시커먼 놈보다 무조건 백배 더 강해질 거야!”」
「“장군님! 계세요? 나 보고 있죠!”」
「“배후성은 필요 없으니 코인이나 주세요.”」
「“······흑염룡, 좋은 말할 때 메시지 그만 보내라. 이번엔 안 고른다고 했잖아.”」

미친 사람들이었다.

「“후후, 충무로까지 오는데 오래도 걸리는군. 그래서 그 비실이를 구할 수나 있겠나? 참고로 이 일대는 이미 이 몸의 영역······.”
“닥치고 깃발 내놔, 공필두.”」

미쳐버린 사람들이, 미친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클리어해대고 있었다.
몇 번이나 위기가 닥쳐왔지만, 일행들은 굴하지 않았다.

「[화신, ‘이지혜’가 성흔 ‘전승 Lv.1’을 발동합니다!」
「“이 시커먼 자식! 이런 걸 쓰니까 지 혼자만 강해졌지!”」

[전승]. 전생의 기억을 강하게 반추하는 것으로 스킬을 재습득하는, 회귀자 전용 스킬.

「“우리엘! 제천대성! 심연의 흑염룡!”」

거기에 성좌들의 조력까지 이어지며, 일행들은 일사천리로 시나리오를 클리어해 나갔다. 정말이지 가공할 속도였다.

「“여긴 아바타로 깨면 돼. 아무도 죽을 필요 없어.”」

하지만 항상 그들이 승승장구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패왕. 미안하지만 여기서 죽어줘야겠다.”」

그들이 함께 회귀한 이들 중에는, 배신자도 있었다.

「“당신이 본래의 힘을 찾는다면 우리 셋이 덤벼도 상대가 안 되겠지만.”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부터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회귀행에 동참한 자들.
그들은 하필이면 시나리오 초반, 유중혁이 유미아와 함께 있는 시점을 노렸다. 분명 저 때가 제일 약한 시기라고 판단한 것이겠지.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뭐?

「“미아야.”」

유중혁의 목소리와 동시에, 유미아의 입에서 긴 장도가 뽑혀 나왔다.

「흑천마도.」

중반부 시나리오에나 가야 얻을 수 있는 최상급 아이템이, 유중혁의 손에 쥐어졌다. 소름이 돋았다. 설마 유미아의 ‘인벤토리’를 저렇게 사용할 수 있을 줄은······ 가공할 살기를 내뿜은 유중혁이 선언했다.

「“잘 가라.”」

그 뒤로도 문장들은 드문드문 이어졌다.

「“이번 회차의 ‘구원의 마왕’은 나다!”
“아니, 내가 하기로 했잖아! 그 수식언 내 거야 누나!”」

일행들은 누구도 양보하지 않았고.

「다수의 성좌들이 ‘김독자 컴퍼니’의 화신들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그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았다.
김독자 없는 ‘김독자 컴퍼니’는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시나리오를 클리어했다. 
어떤 장면은 서술되어 있었고, 어떤 장면들은 생략되어 있었다. 뒤로 갈수록 장면 사이의 분절은 더욱 심해졌다. 마치 아이디어 스케치를 그대로 남겨 놓은 것 같았다.
20번 시나리오에 있던 일행들은 15번 시나리오에 있기도 했고, 다시 35번 시나리오에 있기도 했다. 하지만 일행들은 분명히 그곳에 있었다. 나는 그들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들은 빈 여백 위를 달렸다.」

시나리오의 설원을 달리는 일행들. 그들은 한 문장, 다시 한 문장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울었다 잠들기를 반복했다. 의식이 흐릿해질수록, 욕망은 더욱 또렷해졌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읽고 싶다.」

그렇게 끊어진 문장을 읽고, 다음 문장을 읽었다. 더듬거리듯, 그 문장과 문장의 사이를 상상했다.
작가가 통제할 수 없는, 그리고 독자가 예상할 수 없는 그 지점. 
문장으로 표기되지 않는 그 행간 속에서, 일행들은 시나리오를 조금씩 완성해갔다.

「누구도 그들의 생을 침범할 수 없는 행간 속에서, 그들은 이 이야기의 신(神)이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몇 번인가 정신을 잃었다. 읽는 속도는 점점 더 느려졌고, 내 설화도 조금씩 사라져갔다. 일행들의 문장은 착실하게 쌓여갔다. 98번 시나리오를, 다시 99번 시나리오를. 그들이 자신의 생으로 쓴 문장들이 정확히 한 문장씩 쌓여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마침내 그녀가 쓴 결말에 도달했다.」

마지막 문장이 찾아왔다. 그것이 ‘멸살법’의 끝이었다. 마치 쓰다만 듯한 이야기. 그리하여, 제대로 완결되지 못한 이야기. 
그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 너머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를 부르는 듯한 소리. 혹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스마트폰이 꺼지자 새카만 액정 위로 아이가 된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울고 있었다.

「김독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지하철의 진동. 언제부터였을까.

쿵―!

누군가가, 객실의 뒷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

“달려! 조금만 더 가면 돼!”

한수영은 일행들과 함께 성좌들의 파도를 뚫었다. 
부서지는 방주의 파편들과 멀찍이 드러난 [최후의 벽]. 
거대 설화의 가호가 일행들을 보호하듯 감싸고 있었다.

[거대 설화, ‘운명대적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번 회차에 들어서며 얻은 새로운 거대 설화.
이 설화가 없었더라면, 그들은 몇 번이고 죽었을 것이다.
멀리 그들을 향해 진격하는 성좌들의 모습이 보였다. 〈베다〉와 〈파피루스〉의 신화급 성좌들이 성난 짐승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지난 회차와는 달리, 이번엔 그들을 지원할 ‘이계의 신격’들이 없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군세. 그럼에도 밀리지 않는 것은, 그들을 지원하는 역대 최강의 회귀자 집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방을 맡은 것은 중국과 인도의 화신들이었다.
중국의 페이후가 신호하자, 그의 세력인 [아큐]의 화신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인도의 란비르 칸도 질 수 없다는 듯 합세했다. 그를 따르는 [트라무르티]의 화신들이 창을 꺼내들자, 일대에 모래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거기에 셀레나 킴이 이끄는 [저스티스]와, 함께 따라온 이리스가 지휘하는 [솔제니친]이 양 날개를 맡았다. 
하지만 여전히 전황은 불리했다.

[가거라, 여긴 내가 맡아주마.]
[내 제자를 구해오지 못한다면 네놈들의 목숨은 없다.]

키리오스와 파천검성. 그들 역시 100인의 회귀자들 중 하나였다. 두 사람의 병기가 전장을 휩쓸자, 무림 출신의 초월자들이 그 뒤를 보조하며 달려왔다. 

콰아아아아아아!

회귀를 통해 더욱 강해진 키리오스의 권격과 파천검성의 검격이 경쟁하듯 전장을 뒤흔들었다. 은빛 폭풍 속에서 찢겨 나간 성좌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벽]을 열어야 했다.

「이미 한 번 열었던 벽이다.」

마침내 도달한 장벽을 올려다보며,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장하영.”
“예압.”

기다렸다는 듯 장하영이 손을 뻗었다.
다시 한번 시나리오로 돌아온 그녀는, 이제 어엿한 ‘초월좌들의 왕’이었다.

[‘불가능한 소통의 벽’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그들의 거대 설화에 반응하듯, [최후의 벽]이 진동을 시작했다.

“유상아.”

고개를 끄덕인 유상아가 앞으로 나섰다.

[‘윤회를 결정하는 벽’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당신은······ 그런가······ 그 오랜 세월을 돌고 돌아 다시 여기까지 왔군요, 나의 아라한이여.]」

나지막이 들려오는 석존의 설화. 이 세계선의 석존은 유상아의 존재를 어렵지 않게 납득했다. 기나긴 윤회를 반복해온 그는, 이 우주의 법칙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희원, 이길영.”

‘메타트론’과 ‘아가레스’로부터 건네받은 [선악을 가르는 벽]. 
정희원이 먼저 자신의 손을 [최후의 벽] 위에 가져다 대었다.

「[······ 정말 당신들은 벽의 너머를 보고 온 것입니까?]」

이 세계선의 메타트론은 일행들의 존재에 경악했다. 그는 〈에덴〉의 멸망을 받아들였고, 그것이 바뀔 수 없는 결과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전 회차와는 조금 다른 결단을 내렸다. 화신들을 돕고 있는 〈에덴〉의 대천사들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런데 기이한 선택을 내린 것은 메타트론만이 아니었다.

「[재미있군. 마왕인 내게 감히 [벽]을 달라고 말하다니.]」

성마대전에서 서로를 찢어 죽일듯 싸웠던 마왕과 천사들이 이번에는 그들의 편에 섰다. 그저 각자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어쨌거나 〈김독자 컴퍼니〉에겐 커다란 도움이었다.

[‘선악을 가르는 벽’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김독자 컴퍼니〉를 향해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모든 성좌가 동료가 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스타 스트림〉의 절대다수는 그들의 적이었고, 그들을 돕는 성좌들은 소수였다. 
그럼에도 일행들은 무사히 여기까지 왔다. 몸 곳곳에 깊은 흉터가 남기도 했지만 누구도 잃지는 않았다. 

누구도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에, 그리고 모두의 목표가 같았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한수영은 마지막으로 이현성을 돌아보았다. 
이현성의 등에는 창백한 얼굴의 김독자가 업혀 있었다. 정확히는, 김독자가 남긴 아바타였다. 
한수영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와줘, 김독자.”

그 역시 분명한 김독자였다. 
1863회차의 한수영 또한 분명한 ‘한수영’이었던 것처럼. 

“또 다른 나는 이걸 원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 거야······.”

더듬거리며 말하는 김독자. 그는 이제 자신이 ‘김독자’의 아바타라는 것을 납득하고 있었다. 한수영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건 또 다른 너를 만나서 물어보자.”

그러자 김독자가 슬프게 웃었다. 그는 한수영을 보고, 일행들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이것이, 너희가 원하는 이야기라면······.”

창백한 손이 [최후의 벽]에 닿았다. 
최후의 벽의 마지막 파편은 [제4의 벽]. 
그리고 김독자의 아바타인 그 또한, 그 열쇠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었다.

츠츠츠츠츠······!

이 세계가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 김독자의 몸이 불안하게 떨렸다. 
이어서 쩌저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의 일부가 열렸다.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떨던 김독자가 그대로 기절했다. 그런 그를 이현성이 업었다. 
흑천마도의 날을 털어낸 유중혁이 말했다.

“전속력으로.”

신호와 함께 일행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다들 기운 내요! 이제 조금 남았어요!”
“아직 생사환 남았으니까 조금이라도 다친 사람 빨리 말해요!”

서로를 독려하는 일행들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으며 한수영도 달렸다. 눈앞에 새하얀 설원이 펼쳐졌다. 설원의 곳곳엔 눈처럼 쌓인 활자들이 보였다. 한수영은 활자들을 딛고 뛰어올랐다.

1863회차의 자신은 수정본에 이 이야기를 썼을까.
김독자의 이야기를, 그 이후의 에필로그를 생각했을까.
······모르겠다.
그것만큼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때, 뭔가가 한수영의 속눈썹에 내려앉았다.
무심코 눈을 문지르자, 손에 눈발 같은 것이 묻어 나왔다.

「······이 자식, 나한텐 가난한 문학 소녀였다며.」

허공에서 새하얀 활자의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분명 그곳에 존재하고 있으나, 순백에 가까운 색깔이어서 보이지 않는 문장들.

「한수영.」

한수영은 자신의 손에 떨어진 그 문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네 이야기를······.」

이것은 김독자의 문장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김독자가 스스로 써낸 감상들이었다. 한수영은 그 문장을 힘주어 쥐었다. 새벽에 밀려난 별빛처럼, 문장들은 그녀의 손 위에서 부스러졌다.

「걱정 마. 읽을게. 3천 편이 넘어도.」

그것은 그녀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문장들이었으나, 그녀의 것은 아니었다. 
밀려오는 기억들이 있었다. 또 다른 자신이 겪었던 감정들. 
한수영은 지금도 그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는 원망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번졌다.

「이 설원 너머에, 김독자가 있다.」

김독자를 김독자이게끔 만든 김독자. ‘멸살법’을 기억하는 김독자. 행복했던 기억들 대신, 자신이 쓴 책의 기억을 택한 김독자······.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녀였지만 그녀가 아닌 존재가 쓴 책. 그 책이 김독자를 구했고, 김독자를 파멸시켰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또 다른 자신이 만든 이 비극의 끝을 책임져야 했다.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드러난 것은 그때였다.

쿠구구구구구······.

아득한 설원 너머로 뭔가가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일행들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게 무엇인지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하철이었다.」

“키메라 드래곤!”

포효하며 소환된 키메라 드래곤이 일행들을 태우고 날았다. 순식간에 가속한 키메라 드래곤이 창공을 가르며 지하철의 후미를 향해 접근했다. 이제 조금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갸아아아아아아!]

갑자기 키메라 드래곤이 비명을 지르며 균형을 잃었다. 깜짝 놀란 신유승이 뒤를 돌아보자, 무언가가 키메라 드래곤의 꼬리를 물고 있었다.

【그르르르르르······!】

새카만 그림자를 닮은, 거대한 들개들이 드래곤의 꼬리와 날개를 물어뜯고 있었다. 창공에 열린 포탈을 통해 넘어온 들개들. 뜯겨 나간 키메라 드래곤의 살점이 새하얀 설원 속에 흩어지고 있었다.

“심연을 좇는 사냥개?”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와 999회차의 인물들을 공격하던 타차원의 사냥개들. 개연성에 위배되는 세계선의 방랑자들을 공격한다는 무시무시한 괴물들이었다. 
하지만 저 사냥개들이 왜 그들을 공격한단 말인가?
유중혁이 침음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집단 회귀’가 세계선에 위협이 된다 판단한 모양이군.”
“이런 제기랄······.”

포탈을 통해 넘어오는 사냥개의 숫자는 점차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덩치가 큰 사냥개들도 보였다. 이제껏 본 적 없는 강력한 기세. 설원을 울리는 포효와 함께, 사냥개들이 허공을 격하고 일제히 날아들었다. 
새카맣게 밀려든 사냥개들이 일행들을 덮치는 바로 그 순간.

쿠르르릉, 하며 천공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황금빛 전격이 몰아치며, 사냥개들이 나가떨어졌다. 그가 누구인지 제일 먼저 알아본 것은 유상아였다.

“제천대성!”

고고히 빛나는 금테. 여의봉의 주인이 씩 웃고 있었다.

[여긴 내게 맡겨라.]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제천대성뿐만이 아니었다.
일행들이 열어 놓은 [최후의 벽]의 통로로 뒤따라 들어온 이들이 있었다.

[이 몸이 양손을 쓰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줄 기회군!]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모든 봉인을 해제합니다!]

거기에, 숭고한 대천사의 불꽃이 사냥개들을 불태웠다.

[999회차의 나만큼은 아니지만······ 시간을 끄는 거라면 문제없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지옥의 불꽃을 일으킵니다!]

순백의 날개 사이로 화려하게 피어오르는 [지옥염화]의 불꽃. 옅은 미소와 함께 우리엘이 말했다.

[김독자를 부탁해, 희원아.]

성좌들이 벌어준 막간을 틈타, 마침내 키메라 드래곤이 지하철의 후미를 물었다. 하지만 단단한 지하철의 외부는 드래곤의 송곳니에도 부서지지 않았다.

“사부! 합공!”

양손에 검을 쥔 이지혜가 드래곤의 등을 타고 날아올랐다.
해상전신의 [쌍룡검]과, 고려제일검의 [무쌍검]. 두 자루의 검이 그녀의 양손에 쥐어졌다.

[성좌, ‘고려제일검’이 자신의 가호를 내립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자신의 화신을 응원합니다!]

제 사식(四式). 
사검참허(四劍斬虛).

언젠가 척준경이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을 상대하며 발동했던 바로 그 기술. 아직 미숙했지만, 이제 이지혜도 그 검격을 사용할 수 있었다. ‘환생자들의 섬’에서 쌓은 지독한 수련과 그녀의 놀라운 재능이 허락한 기적이었다.

콰콰콰콰콰콰!

드래곤의 송곳니에도 끄떡없었던 지하철의 외부가, 연속된 그녀의 검격에 조금씩 찌그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움직였다.

파천검도(破天劍道).
비전오의(秘傳奧義).
유성참(流星斬).

[흑천마도]가 그려낸 파멸의 궤적이 지하철의 후미를 강타했다. 
자욱한 먼지와 함께 시야가 걷혔을 때, 지하철의 후미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됐어! 모두 들어가!”

일행들은 신속하게 지하철 내부로 침투했다. 
정확히는, 단 두 사람만을 제외하고.

“유중혁! 뒤!”

【크르르르르!】

성좌들이 미처 막아내지 못한 사냥개들이 후미를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그들을 정면에서 막아낸 것은 초월형의 모든 힘을 개방한 유중혁이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친 검격으로 사냥개들을 쳐내며, 유중혁이 외쳤다.

“먼저 가라! 금방 따라 가겠다!”

한수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일행 중 최강인 유중혁이다. 신화급 성좌와도 겨룰 수 있을 정도가 된 그이니, 심연의 사냥개들에게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죽지 말라고.”

한수영은 그 말을 남기고 곧장 지하철 내부로 들어갔다. 내부는 그들이 기억하는 3호선의 모습 그대로였다. 

「김독자를 두고 갔던, 바로 그 지하철.」

한수영은 재빨리 열차 칸의 정보를 살폈다. 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열차 칸의 번호가 떠올랐다. 한수영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김독자는 3807칸에 있어! 모두 앞칸으로 가!”

언젠가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을 얻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일행들도 상황을 눈치챈 것 같았다.

“수르야와 맞서 싸웠을 때와 비슷하군요. 앞문은 제가 열겠습니다!”

냅다 달려간 이현성이 전신의 모든 근육을 팽창시키며 기합을 냈다.

“하아아아아압!”

숙련도의 한계치를 초월한 [태산 밀기]가 발동하자, 두터운 지하철의 문이 삐거덕거리며 열렸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무대화’가 발동합니다!]

모두의 역할이 있었기에 이룰 수 있었던 거대 설화. 그 거대 설화의 가호가 일행들을 돕고 있었다. 
이현성이 열 수 없는 문은 유상아가 버튼을 찾아냈고, 유상아도 열지 못한 문은 이길영이 벌레들을 동원해 부품을 마모시켜 열었다. 
그렇게 열고, 열고, 또 열고. 열리는 문의 개수가 늘어나는 만큼 일행들의 표정도 상기되고 있었다.

「저 너머에, 분명 김독자가 있다.」

일행들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새카만 문. 이 문이, 분명 [최후의 문]이다.

“······끄응, 제 성흔으로도 무리입니다.”

그러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저도 버튼을 찾을 수가 없어요.”
“벌레들도 구조를 알 수가 없대요.”
“내가 스킬로 부숴 볼까요?”

이지혜의 검격에 이현성의 [태산 부수기]까지 사용했음에도 지하철의 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일행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어째서, 이 문만은 열리지 않는 것일까.
유상아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잠깐만요. 이 문, 그때 유중혁 씨가 부순 문이랑 똑같아요.”
“유중혁이?”
“네, 3회차에서 중혁 씨가 이 문을 부수고 넘어온 적이―”

한수영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유중혁은 함께 오지 않았다. 그는 열차의 후미에서 ‘심연을 좇는 사냥개’를 상대하고 있을 것이었다. 
신유승이 소리친 것은 그때였다.

“사냥개들이 와요!”

어느새 그들이 부순 틈으로 슬글슬금 사냥개들이 기어 들어오고 있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유중혁은 어떻게 된 것일까. 설마 저 녀석들에게―

“뒤를 막아!”
“언니! 빨리!”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탱커처럼 달려간 이현성이 [강철화]로 사냥개들의 송곳니를 견뎌내자, 이지혜와 정희원이 검을 뽑아 들고 사냥개들을 쳐냈다. 
장하영이 외쳤다.

“한수영! 어떻게든 해봐!”

한수영은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가 문에 손을 가져다 대자, 희미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한수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결국 그 모든 문장은 그녀가 이 손으로 썼다. 설령 다른 ‘한수영’이라고 해도, 그 또한 분명 한수영이었다. 그러니 이 문 또한 이 손으로 열 수 있어야 했다.

츠츠츠츠츠츠―!

문장을 고쳐 쓰듯이, 한수영은 벽의 설화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나는 유중혁이다.”」

회귀자 유중혁은 그녀가 만들어 낸 인물이었다.
그러니 그녀도, 이 문을 열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한수영은 알지 못했다.」

츠츠츠츠츳!

「작가의 손을 떠난 이야기는, 이제 작가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한수영의 머릿속으로 ‘멸살법’의 우주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쓴 것, 그녀가 쓰지 않은 것. 그녀가 상상한 것과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그녀의 머릿속으로 역류해오고 있었다.

“큭······!”

눈에서,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기혈이 역류하며 새빨간 피가 지하철 바닥으로 쏟아졌다.
한수영은 붉게 물든 시야 속에서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점점이 흩어져 싸우는 일행들. 지하철의 통로 너머로, 그들이 달려온 발자국이 설화처럼 남아 있었다.

[당신에겐 ‘덮어 쓰기’의 권한이 없습니다!]

「이미 완성된 세계가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자신을 부르는 일행들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결과가 원인을 삼키고 다시 원인이 결과를 삼키는 세계. 모든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세계. 이야기 스스로가 이야기를 생산하는, 영원불멸의 완전한 서사.」

돌아보자, 스파크와 함께 눈앞의 공간이 이지러지고 있었다. 지하철의 네모난 문이 천천히 회전하며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납게 회전하는 문은 곧 새카만 원이 되었다.

그 어떤 외부의 틈입도 허락하지 않는 완벽한 원. 

비틀거리며 원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한수영은 원을 건드릴 수조차 수 없었다. 그 원은 하나의 마침표처럼 보였다. 이 이야기가 이로써 완전하다 선언하는 마침표. 

「t l s 1 2 3」

그 마침표가 그녀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너 는 이 이 야 기를 바 꿀 수 없 어」	

===

허공에 떠오르는 문장.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무시한 채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한수영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너는······?”

이 목소리에 관해 김독자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 그 녀석은 말도 한다고.
―······스킬이 말을 해?
―뭐, 좀 이상하게 하긴 하는데 알아들을 수는 있어.

설마, 그 목소리를 자신이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제4의 벽?”

그러자 소용돌이치는 원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너 희는 지나 갈 수 없 어 그 분이 원하 지 않 으니 까」

······그분?
어디선가 듣던 호칭이었다.

츠츠츠츠츠츳!

개연성의 스파크가 튀며 일행들이 비명을 질렀다.
강렬한 후폭풍은 ‘심연을 좇는 사냥개’들마저 지하철 밖으로 날려버렸다.

[‘최후의 벽’이 당신들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가장 오래된 꿈’을 만날 자격이 없습니다.]

몸이 잘게 분해되는 듯한 통증.
일행들을 지하철 밖으로 내보내려는 수작이었다.

「여 기가 종 착역 이 야」

한수영의 한쪽 무릎이 기형적으로 꺾였다. 하지만 한수영은 비명 하나 지르지 않고 눈앞의 검은 원을 노려보았다.

“내가 어디서 내릴지는 내가 결정해.”

「1865회차의 한수영은 ‘심연의 흑염룡’을 택하지 않았다.」

한수영의 전신에서 가공할 기파가 몰아쳤다.

「한수영은 스스로 성좌가 되었다.」

[성좌, ‘거짓 종막의 설계자’가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1863회차의 한수영이 얻었던 바로 그 수식언.
한수영은 아껴왔던 모든 설화를 방출했다. 새파란 광휘가 그녀의 한쪽 동공에 휘몰아쳤다.

[전용 스킬, ‘진실의 눈동자’가 발동합니다!]

1863회차에서, 이 스킬은 저 벽을 뚫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 회차의 한수영은 그때와는 달랐다.

[설화, ‘퇴고 전문가’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작가’와 관련된 설화들을 착실하게 쌓아왔다.

츠츠츠츠츠츠······!

다른 모든 인물의 근원이 문장이듯, [제4의 벽]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세계가 소설인 한, 이 벽도 어떤 단어와 문장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설령 그 근원을 알 수 없더라도, 근원을 추정할 수 있는 문장은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한수영의 속셈을 눈치챈 [제4의 벽]이 몸집을 부풀렸다.

「소 용 없 어」

[‘제4의 벽’이 자신의 두께를 더욱 키웁니다!]

회전하는 새카만 원이 더욱 견고해졌다. 
제4의 벽. ‘멸살법’에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정신 방어 스킬. 
한수영은 억지로 벽을 뚫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 벽을 가만히 응시했다.

[설화, ‘행간의 길잡이’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어떤 것은 감추려 할수록 더욱 선명해진다.」

한수영은 벽의 외관을 살폈다. 곳곳에 남은 스크래치와 균열들.
김독자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은 역사가 벽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분을 지켜야 해.」

어째서 이 벽은, 이 문장을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두었나.

「그것이 신에게서 받은 마지막 부탁.」

순간, 한수영의 입술이 떨렸다.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벽 위의 문장들이 그녀의 뇌리를 흘러갔다.

「“야.”
“예.”
“혹시나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말이야.”
“그런 말씀 마시지요.”
“날 정말로 ‘신’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중절모를 쓴 중년인이, 충성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저 녀석을 꼭 지켜줘.”」

원작자인 자신만큼이나 ‘멸살법’을 잘 알고 있는 존재.
자신보다도 이 세계의 비극에 무감하며.
오직 ‘이야기의 완성’만을 목표로 살아온 존재.

「이 세계에 ‘시나리오’를 열었고, 두 세계선을 하나로 이은 존재.」

덜덜 떨리는 한수영의 입술을 대신해, [제4의 벽]이 말했다.

「놀 랄 필요 없 어 나 도 방금 알 았으 니 까」

“뭐?”

「나 도 내가 누 구 인지 알지 못 했 다」

과거가 없는 채로 ‘그냥 존재’하다가 뒤늦게 자신의 과거를 취합해야만 했던 존재들이 있다. 작가가 서사를 부여해주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 

「나 는 너 로 인 해 완 성 되 었 어」

유료화가 시작되던 순간의 정경이 스쳐갔다. 현실과 허구. 두 개의 세계선이 하나가 되는 순간, 그 사이에 있었던 1863회차의 도깨비 왕.

「왜 세 계를 가르 는 벽 이 되 었 는 지」

도깨비 왕은, 세계를 나누는 벽이 되었다.

「어 째 서 내 가 김 독 자를 지켜 야 하는 지」

그리고, 자신의 ‘신’이 남긴 마지막 부탁을 지켜왔다.

「당 신 은 나를 기억 하 지 못 했 고」

오랫동안 하나의 이야기만을 반복하고, 그 이야기를 탐닉하고 갈구하며 살아온 존재. 
김독자보다도 먼저 ‘멸살법’을 읽은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 세계의 가장 오래된 독자.

「나 역시 당 신을 기억 하 지 못 했지」

그는 한수영이 떠난 빈자리를 채우고, 세계의 기록자가 되었다.

「이 이 야 기는 이제 나의 것 이 야」

그리고, 끝내 이야기를 완성시켰다.

“네게 부탁한 것은 나야. 이제 이런 짓은 그만둬.”

아주 오랫동안 그 명령만을 품고 살아온 존재는, 마침내 그 명령 그 자체가 되었다.

「너 는 이제 신 이 아니 야」

원작자의 자리를 박탈당한 그녀는, 이제 창조주가 아니었다.
한수영은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또 다른 그녀가 썼던 ‘멸살법’은 3149편의 소설이 되었다. 그 소설은 그녀의 손끝을 떠나 독자에게로 갔다.

“맞아, 이제 이 세계의 신은 내가 아니라 독자겠지.”

이 원 너머에서, 영원의 꿈을 꾸고 있을 김독자.

“그 신에게 물어보자고. 그가 정말로 이곳에 있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한수영은 [생사환]을 먹으며 부러진 무릎을 돌려 끼웠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우리와 함께 밖으로 나가길 원하는지.”

눈부신 불꽃이 그녀의 손끝에서 터졌다.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듯, 회전하는 원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그녀의 양손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설화조차 그녀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양손이 갈려 나가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한수영은 멈추지 않았다.

“김독자! 말해!”

구출되길 원해도 끝내 구해달라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한수영은 언제나 그런 사람을 위한 문장을 쓰고 싶었다. 말하지 못하는, 문장을 쓸 수 없는 그들을 대신해 문장을 쓰고 싶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가 쓸 수 있는 것은 문장뿐이었다.

그것으로 이 원의 너머로 갈 수만 있다면.
이 마침표를 없앨 수만 있다면.

 「장난으로 내민 레몬 사탕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먹던 녀석.」

“김독자!”

하지만 부족했다. 
그녀가 가진 문장만으로는, 이 벽의 너머까지 닿을 수가 없었다. 
그때, 또 다른 손이 한수영의 한쪽 손에 겹쳐졌다.

유상아였다. 

양쪽에 만다라를 펼친 그녀가 자신의 설화를 싣고 있었다. 주르륵 흐르는 코피를 닦으며, 힘겹게 웃고 있었다.

“독자 씨.”

「캐비닛에 숨어, 홀로 ‘멸살법’을 읽고 있던 사람.」

유상아의 문장들이 김독자를 부르고 있었다.
문의 손잡이를 붙잡듯, 두 사람의 손이 원을 붙들었다. 하지만 원의 가속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여전히, 문장이 부족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손 위에 다시 두 사람의 손이 겹쳐졌다.

“제가 안쪽을 잡겠습니다!”
“난 왼쪽!”

거친 기합을 내지른 이현성과 정희원이 원 위로 달라붙었다.

「재미없는 군대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던 사람.」

괴성을 지른 이현성이 설화를 개방하자, 정희원이 옆에서 합을 맞추었다.

「빌어먹을 고집불통 말썽꾸러기.」

“독자 씨! 대답해요! 듣고 있는 거죠!”

거기에 이설화와 공필두가 손을 보탰다.

「일행들을 위해 밤을 새서라도 필요한 약초들을 구해준 사람.」
「내 땅 다 뺏어간 놈.」

“아저씨!”
“형!”

아이들도 달려왔다. 신유승과 이길영의 작은 손이 한수영의 양손에 하나씩 붙었다.

「누군가를 안심시키기 위해 늘 거짓말을 하는 사람.」
「하지만, 거짓말을 잘하진 못하는 사람.」

그 뒤에서 검을 앞세운 이지혜가 자신의 주먹으로 원을 가격했다. 가격하고, 또 가격했다.

“난 오글거리는 말 못해! 빨리 나와!”

「오징어 아저씨.」

모두 다른 시간, 다른 기억. 그 모든 순간의 문장들이 모여 하나의 김독자를 염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행들의 부름에도, 마침표는 꼼짝하지 않았다. 일행들의 손만 피투성이가 될 뿐이었다.
일행들의 설화가 소멸하고 있었다. 마침표 위로 문장이 떠올랐다.

「그를 구하고 싶다는 것은 그저 우리 욕심이 아닐까.」

“닥쳐!”

「그는, 구원이 필요 없는 존재는 아닐까.」

일행들도 알고 있었다. 이것이 의미 없는 행동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래서 알고 싶었다.
묻고 싶었다.
손을 내밀어, 확인하고 싶었다.

“김독자! 거기 있는 거 알고 있어!”

장하영이 외쳤다.

“우리 같이 이야기했잖아. 닿을 수 없어도, 만날 수 없어도 끝까지 벽을 두드리자고. 그 벽이 결코 열리지 않더라도, 벽에 계속해서 뭔가를 써 놓자고!”

닿을 수 없어도, 만날 수 없어도 서로의 벽을 두드리자고.
그 벽이 결코 열리지 않더라도, 벽에 계속해서 뭔가를 써 놓자고.

“그러면 언젠가, 누군가가 그 문장을 볼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마침내 네가 그곳에서 나오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제발! 말해줘. 한 마디라도! 제발―”

그렇게, 장하영의 손바닥이 마침표 위에 부딪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불가능한 소통의 벽’이 자신의 힘을 드러냅니다!]

마침표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제4의 벽]의 기세가 바뀌었다.

「감 히」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유상아가 외쳤다.

“독자 씨! 다음 생에 다시 만나자고 했잖아요!”

[‘윤회를 결정하는 벽’이 자신의 역량을 드러냅니다!]

이길영도 지지 않겠다는 듯 외쳤다.

“형은 항상 자기만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그 말을 정희원이 받았다.

“난 독자 씨가 선이든 악이든 상관없어요. 세상의 잣대로 당신을 판단할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선악을 가르는 벽’이 자신의 테마를 드러냅니다!]

“제발, 이 문 좀 열어줘요!”

그리고 다음 순간, 문에서 터져 나온 강력한 반동이 일행들을 날려버렸다. 
터져 나온 굉음이 귓가를 덮었다. 이명이 사라졌을 때, 주변에는 차가운 고요만이 남았다.
다친 일행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현성이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한수영이 자신의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희미한 가랑비가 마른 땅을 적시듯, 조용한 소리가 들려왔다.

툭.

소리는 마침표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야기의 완결을 넘어선 곳. 
한수영이 그 소리를 가장 먼저 들었다.

툭, 툭······.

아주 약하고, 힘없는 소리였지만 분명 그곳에 자신이 있음을 알리는 말.

「있었다.」

신유승이 울음을 터트렸다.

「누군가가, 저 너머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한수영이 달려갔고, 유상아가 뒤를 이었다. 이현성과 정희원이 그 위에 손을 겹쳤다. 이설화가 일행들의 손을 치료했고, 공필두가 자신의 무게를 실었다. 반동을 막기 위해 이지혜가 바닥에 검을 꽂았고, 장하영이 한수영의 몸을 지탱했다. 신유승과 이길영의 설화가 한수영의 양손을 보호했다.

“힘을 한곳에 집중해!”

까가가가각, 소리와 함께 일행들의 손이 갈려 나갔다. 
마침표의 회전이 둔해지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마모된 마침표의 전면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설화가 부족했다.」

마침표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마치 그들의 틈입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줄어 들어가는 마침표. 그때, 지하철에 난입한 이가 있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현현합니다!]

줄곧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두 명의 〈김독자 컴퍼니〉.

[늦어서 미안하군요.]

명계의 여왕 페르세포네. 그리고―

“······독자야.”

이수경은 마침표를 바라보는 대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또 다른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멍하니 그녀를 마주 보던 김독자가, 입술을 깨물며 그 손을 잡았다.

이수경과 페르세포네에게서 설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에겐 두 명의 김독자가 있었다.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의 김독자와 시나리오가 시작된 후의 김독자.」

‘김독자’를 누구보다 오랫동안 지켜 보아온 두 존재가, 김독자의 아바타를 부축하며 마침표를 향해 다가갔다. 한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벽 안에 가둔 것은 김독자였다.」

“김독자.”

떨리는 김독자의 눈동자를 보며, 한수영도 깨닫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의 소설이 김독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김독자가 ‘멸살법’은 아니었다. 그녀가 아무리 ‘멸살법’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김독자를 이해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위해 문장을 쓸 수 있지만 그것을 대신해서 읽어줄 수는 없다. 그것을 읽는 것은, 새로운 세계의 신인 독자의 몫이다.

“······도와줘.”

김독자의 손이, 마침표에 닿았다.

츠츠츠츠츠츠······!

[‘제4의 벽’이 자신의 두께를 더욱 키웁니다!]

손 위에 손이 겹쳐진다. [제4의 벽]이 외치고 있었다.

「너 희 는 여기 서 실 패 해 야 해」
「이 미 그 렇게 완 성 된 이야 기 야」

이미 완성된 이야기는 바꾸면 안 되는 것인가. 
모든 우주가 불행으로 완성되었다고 해서, 단 하나의 우주가 감히 구원받아서는 안 되는가.
겹쳐진 김독자의 손을 감싸며, 한수영은 울었다. 1863회차의 기억이 요동치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순환할 것이다.」

또 다른 한수영은 그 순환 속에서 1863회차를 반복할 것이다. 
김독자와 한수영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싸울 것이다. 
유중혁은 회귀를 반복할 것이다. 
김독자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몇 번이고 ‘가장 오래된 꿈’이 될 것이다.
그 아득한 시간을 돌고 돌아 그들은 몇 번인가 서로 닿을 것이고, 또다시 헤어질 것이다.
무수한 세월을 버티며 만나고, 또 만나고, 이야기를 만들고.
그것으로 이 이야기는 완전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 그들은 언제쯤 행복해질 수 있는가.

「완전한 이야기가 아니라도 좋다.」

한수영의 손아귀가 원의 균열을 단단히 붙들었다.
붙잡은 원의 면이 찢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누군가가 행복할 수 있는 이야기라면.」

가공할 폭풍과 함께, 일행들의 설화가 무너졌다. 김독자의 코트가 찢어졌고, 그들의 병장기가 부서져 나갔다. 시야가 멀어버릴 듯 눈부신 광휘가 눈을 덮쳤다. 그 가공할 빛살 속에서 한수영은 생각했다. [제4의 벽]의 말이 맞았다. ‘멸살법’은 이제 끝났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결말을 냈다.

하지만 그것이, 김독자의 이야기가 끝났다는 뜻은 아니었다.

쿠구구구구······.

이윽고 폭풍이 가라앉았을 때, 넝마가 된 일행들의 손이 보였다. 마치 하나의 손처럼 겹쳐진 손들. 그 손이, 완성된 마침표를 파괴했다. 원의 귀퉁이를 쭉 찢듯이 내려간 균열.

「그것은 마치 쉼표처럼 보였다.」

문이 열렸다.

===

설원에 폭발음이 일었다. 
유중혁은 [흑천마도]를 휘둘러 ‘심연을 좇는 사냥개’를 쳐낸 후 열차의 지붕 위에 올라섰다. 
심상치 않은 폭음이었다. 열차 안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빌어먹을! 숫자가 너무 많잖아!]

사냥개들을 상대하던 심연의 흑염룡이 역정을 냈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사냥개들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고 전격을 내리쳐 사냥개들을 태워버리던 제천대성도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아직 999회차 녀석들에 견주기엔 역부족이군.]

다시 한번 지하철 안쪽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유중혁은 자기도 모르게 그쪽을 돌아보았다. 저건 뭘까. 지하철의 앞칸에서 설화 조각 같은 것이 바깥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쿠구구구, 하는 소리와 함께 열차의 구멍으로 뭔가가 튀어나온 것은 그때였다. 기겁한 우리엘이 소리쳤다.

[유중혁! 피해!]

다음 순간, 열차에서 방출된 사냥개들이 유중혁을 새카맣게 덮었다.


*


파스스, 흩어지는 검은 조각들. 쉼표 형태의 구멍을 중심으로 눈앞의 문이 사라지고 있었다.
한수영은 바닥을 짚고 일어나 앞을 보았다. 3807칸으로 넘어가는 객실 입구 근처에 활자들이 떨어져 있었다.

「나도」
「당신들과」

채 문장조차 되지 못한 그 말들을 보는 순간, 한수영은 반대쪽에서 문을 건드린 게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설화들이었다. 김독자의 아주 작은 파편들. 한수영의 눈이 점점이 떨어진 그 파편들을 따라갔다. 객실의 중심으로 향할수록 떨어진 설화의 조각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곳에 김독자가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작아진 김독자의 몸이 객실의 중앙에 붕 떠 있었다. 눈을 감은 김독자는 의식이 없는 듯했다. 황홀한 빛을 내뿜는 김독자의 몸에서 눈부신 설화 조각들이 흘러나왔다. 조각들은 지하철의 창을 투과해 어딘가로 떠나가고 있었다.

“아······?”

한수영의 곁에 있던 김독자의 아바타가 소리를 냈다. 충격을 받은 듯 흔들리는 눈동자. 아바타가 어린 김독자를 향해 다가갔다. 

“아······ 아, 나는······.”

그 말을 하는 순간, 강력한 힘이 김독자의 아바타를 끌어당겼다. 그를 부르는 힘. 아바타의 몸이 조금씩 분해되고 있었다. 분해된 조각들이, 그의 본체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돌아보는 눈동자가 한수영의 시선과 마주쳤다. 한수영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잡아!”

손은 닿지 않았다. 아바타가 분해되고 빨려 들어가는 속도는 더 빨라졌다. 손끝을 스치는 아바타의 조각들. 한수영의 손끝에 단어들이 걸려들었다.

「미안해」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인가. 환영처럼 잘게 흩어진 김독자의 아바타가 본체로 빨려 들어가며 밝은 빛을 토했다. 그러나 아바타의 설화를 온전히 흡수했음에도 김독자의 몸은 다시 자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몸에서 방출되는 설화의 양이 더욱 많아지고 있었다. 

“김독자!”

한수영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저걸 막아야 한다. 저걸 막지 못하면, 그들은 영원히 김독자를 잃게 될 것이다. 
힘껏 응축한 근육이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그렇게, 한수영이 허공의 김독자를 향해 다가가려는 순간.

콰아아아아아!

「더 이상 은 안 돼」

굉음과 함께 강풍이 불어닥치더니 김독자의 몸에서 뭔가가 폭발했다. 김독자의 설화들이 범람하고 있었다. 새카맣게 흘러나온 문장들은 이내 객실 전체를 뒤덮더니 한수영을 집어삼켰다.

“모두 조심해!”

살이 쓸리는 느낌과 함께 한수영의 몸이 마구 밀려났다. 김독자가 멀어지고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잡을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성좌의 격을 개방했고, 거대 설화들의 힘을 빌렸음에도 급류를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김독자! 멈ㅊ―!”

김독자의 몸에서 나온 문장들이 그녀의 전신을 할퀴고 지나갔다. 누군가가 평생을 견뎌온 문장들. 한 사람의 생이 만들어 낸 절망. 사위를 까마득히 덮은 활자의 파도는 마치 깊은 어둠 같았다. 
그녀가 이해하고 있는 김독자는 티끌에 불과했다. 일순간 압도되어버린 한수영은 말조차 잊은 채 속절없이 밀려났다.
그런 한수영의 등을 지탱한 것은 유상아였다. 

“정신 차려요!”

활자들의 틈새로 어렴풋이 보이는 김독자의 모습. 이지혜가 외쳤다.

“······애잖아? 아저씨 왜 저렇게 된 건데!”
“형아!”
“다들 뭉쳐요!”

일행들은 파도를 견뎌내기 위해 서로의 몸을 감쌌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역부족이었다. 밀려나고, 또 밀려나고. 이대로라면 객실 바깥으로 밀려나는 것도 모자라 열차 밖으로 방출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전신을 펼쳐 출입구를 막아섰다.

“흐아아아압! 제가 지탱하겠습니다!”

이현성이었다.
꽈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이현성의 [강철화]가 발동했다. 출입구의 금속 물질과 동화된 그의 팔다리가 네트처럼 일행들을 떠받쳤다. 이현성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스치는 김독자의 설화를 보았다.

「이현성에게 김독자는 너무 어려웠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결국 그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시작된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이현성이 소리쳤다.

“버틸 수 있는 건 조금뿐입니다! 빨리!”

무장성채의 포탑을 소환해 이현성의 뒤를 지탱한 공필두도 외쳤다. 

“내가 도우면 좀 더 버틸 수 있다! 빨리 놈을 구해!”

일행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서로 손을 붙잡아요!”

한팔로 이현성을 붙잡은 정희원이 손을 뻗었다. 

“모두 설화를 개방해요!”

그 손을 이설화가 잡았고, 다시 신유승과 이길영이 이설화의 손을 붙들었다. 아이들의 손은 이지혜와 연결되었고, 페르세포네와 이수경이 그 뒤를 이었다.

“김독자! 정신 차려!”

이수경의 손을 잡은 장하영이 외치자, 유상아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수영 씨!”

마지막으로 그 손을 붙잡은 것은 한수영이었다.

“······잡았어.”

[거대 설화, ‘운명대적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일행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거대 설화가 거친 폭풍에 저항하고 있었다.
폭풍 속의 부표처럼 한수영의 몸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그녀가 버틸 수 있는 것은 뒤의 일행들 덕분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내듯이, 일행들은 활자의 파랑 속에서 서로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어렴풋하게 보이는 김독자를 향해 정희원이 외쳤다.

“독자 씨! 우리 왔어요! 조금만 참아요!”

서로의 손을 맞잡은 일행들은, 마치 하나로 이어진 단단한 문단 같았다. 손으로 전해져 오는 온기를 느끼며 한수영도 깨닫고 있었다.
저 깊은 어둠을 표현하기 위해 말이란 것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어둠을 위로하기 위해, 이야기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김독자!”

문장과 문장이 서로를 떠받치듯 단단히 붙든 손. 그 손에 의지한 채, 한수영은 한 걸음 한 걸음 김독자를 향해 다가갔다. 어두운 활자에 가려진 김독자는 얼굴만이 간신히 드러난 상태였다.

「지 금 너희 가 하는 일 은 무의 미 해」

[제4의 벽]의 목소리와 함께 파랑이 점점 더 거세어졌다.

「김 독 자 는 하 나 야」

한수영도 알고 있었다. 지금 저 김독자가 작아지고 있는 이유. 어려진 김독자의 얼굴은 언젠가 보았던 ‘가장 오래된 꿈’을 닮아 있었다.
그는 일행들과 함께했던 기억을 잊고.
‘멸살법’을 읽었던 기억조차 잊어갈 것이다.
우주의 대순환 속으로 돌아가 가장 순수한 어린아이가 될 것이다. 
‘은밀한 모략가’에게 구원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들이 기억하는 ‘김독자’는 어떻게 되는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손끝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 한수영은 손을 내밀었다. 
김독자가 눈앞에 있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해 줄, 단 한 사람의 독자.」

그 김독자가 바로 저기에 있는데. 
고작 사 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한수영에겐 마치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무한의 여백처럼 보였다. 보이지 않는 벽이 자신과 김독자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개자식아! 내 소설 읽어주기로 했잖아!”

들려주고 싶었다. 네가 희생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는 세계가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자신이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누구보다 거짓말에 능숙한 사람이니까.

“‘멸살법’이 다 뭔데! 허구의 세계 정도는 몇십 개든, 몇백 개든 만들어 줄 수 있어!”

외치는 목소리에 점점 힘이 빠졌다. 
그토록 많은 문장을 썼지만, 단 한 사람조차 구할 수가 없다.
어지러운 사위 속에서 김독자의 모습이 흐려지고 있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강한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계획을 잘못 세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훨씬 더 강한 특성을 배웠어야 했다. 더 지독한 설화를 쌓았어야 했다. 
애초에 김독자를 내버려 두지 말았어야 했다. 좀 더 일찍 김독자의 계획을 눈치챘어야 했다. 아니, 어쩌면

‘멸살법’을 쓰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 이야기의 작가가 되지 말았어야 했다.

······작가.

순간 한수영은 고개를 들었다. 

「할 수 있을까」

모른다.

「할 수 있어」

누군가가 대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1863회차에서 온 기억들이 설화가 되어 요동치고 있었다. 한수영은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목탄처럼 까맣게 타들어 간 손가락.

그녀는 주인공이 아닌 작가였다.

펜을 쥔 듯 한수영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허공에 만들어지는 궤적. 그 궤적이 활자를 그렸고, 활자는 곧 단어가 되었다.

[당신의 특성이 극한까지 활성화됩니다!]
[경고합니다! 당신에겐 ‘덮어쓰기’의 권한이 없습니다!]

울컥 피를 토해내면서도 한수영은 멈추지 않았다.
작가가 독자에게 닿기 위한 방법은, 애초에 하나뿐이다.

「한수영은 상상했다. 언젠가, 또 다른 그녀가 상상했던 것처럼.」

그녀는 가장 힘 있고 곡진한 문장으로 사내의 손을, 팔을 다리를 그렸다.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 만들어 낸 인물.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고결한 정신을 가진 존재. 기나긴 회귀를 끝내기 위해 하늘의 모든 별을 떨어트리고, 결국에는 세계의 시스템조차 부숴버린 사내.

츠츠츠츠츠츠츠―!

모든 등장인물은 곧 작가의 화신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작가 본인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손끝을 떠난 등장인물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으니까.
그렇기에 지금 한수영은, 자신이 창조한 인물의 도움을 구해야 했다. 

[성좌, ‘거짓 종막의 설계자’가 자신의 모든 설화를 개방합니다!]
[당신의 새로운 성흔이 개화합니다!]

저 빈 여백을 메울 단 하나의 낱말.
한수영이 절규하듯 외쳤다.

“유중혁―!”

그리고 다음 순간, 눈앞의 활자들이 갈라졌다.

파천검도(破天劍道).
오의(奧義).
암해참(暗海斬).

새카만 밤바다를 가르는 한 자루의 검. 사내의 전신에서 피어오른 초월좌의 투기가 활자의 어둠을 밝혔다.

[성흔, ‘등장인물 소환’이 발동합니다!]

그녀가 썼지만, 그녀가 모르는 인물.

[등장인물, ‘유중혁’이 부름에 응답합니다!]

“꽉 잡아라.”

빛살과 함께 현현한 사내. 유중혁의 강인한 손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한수영은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참으며 마주 외쳤다.

“너나 꽉 잡아!”

이현성부터 유중혁까지. 일행들의 설화가 하얗게 빛났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그들은 많은 것을 잃었다.

“중혁 씨! 부탁합니다!”
“사부! 빨리!”

그러나 잃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유중혁이 손을 뻗었다. 

단 한 사람만큼의 거리.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없었다면 닿지 못했을 그 거리가 마침내 좁혀졌다. 
활자들을 헤치고 뻗어진 유중혁의 손. 김독자를 보호하던 문장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수천 번의 회귀를 거쳐온 손이, 오랜 기억을 꺼내듯 김독자의 멱살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만 돌아갈 시간이다, 김독자.”

그리고 다음 순간, 전원이 꺼지듯 세상의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

암막 커튼이 내려온 무대처럼 어두운 공간.
한수영은 그 속에서 눈을 떴다. [진실의 눈동자]가 팽창하며 희미한 푸른 빛을 내뿜자, 조금씩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당신은 세계선의 결정적인 개연성을 어그러뜨렸습니다!]
[당신의 행동이 ‘가장 오래된 꿈’의 ■■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장 오래된 꿈’의 ■■이 변화합니다!]

이어서 떠오르는 알 수 없는 메시지.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김독자를 구하는 것뿐. 
한수영은 앞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안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거무튀튀한 뭔가가 보였다.

“유중혁. 거기 있어?”
“있다.”

더듬거리며 다가간 한수영이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

“야! 애 멱살을 잡고 있으면 어떡해?”
“애가 아니다. 김독자다.”
“애가 된 김독자잖아!”

황급히 김독자를 빼앗아 든 한수영이 김독자의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아주 희미한 숨이 느껴졌다. 
하지만 왜일까. 뭔가 상태가 이상했다. 툭 건드리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이 느낌은 대체······.

“얘 상태가 왜 이래?”
“설화가 지나치게 손상됐다. 생사환도 먹여 보았는데······ 전혀 듣질 않는다.”

이설화가 필요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다른 일행들의 기척은 없다. 아공간에 갇힌 것은 유중혁과 자신, 그리고 김독자뿐이다. 
한수영이 적의에 찬 눈으로 주변을 노려보았다. 이런 짓을 할만한 범인은 하나뿐이었다.

“제4의 벽! 그만 내보내 줘!”

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중절모를 쓴 소년 도깨비가 서 있었다. 알 수 없는 슬픔과 무구함으로 가득 찬 소년의 얼굴. 한수영은 잠시 [제4의 벽]을 바라보다 물었다.

“······그게 네 본 모습이야?”

「그 래」

기억으로 엿보았던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 어디에서도 중년 도깨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제4의 벽]이 말했다.

「아 주 오 랜 세 월 이 지 났 어」

한수영은 생각했다. 어쩌면 [제4의 벽] 또한 김독자와 마찬가지인지도 모른다. 그 역시, 아득한 세월을 견디는 동안 모든 것을 잊고 아이처럼 변해버린 것은 아닐까. 한수영은 쓰러진 김독자의 옷깃을 고쳐주며 물었다.

“넌 내 명령을 받아서 김독자를 지키고 있었던 거지?”

「그 랬던 거 같 아」

“김독자에게 ‘멸살법’ 파일을 준 것도 너였지? 그 뒤에도 계속 김독자를 도왔잖아.”

[제4의 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추억을 헤집듯 아련한 눈빛으로 김독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한수영의 말투에 은은한 노기가 깃들었다.

“그런데 왜 김독자가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둔 거야?”

「······.」

“말해! 넌 대체 무슨 생각으로―”

「너희는 독자가 원하는 게 뭔지 몰라.」

[제4의 벽]은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았다.

「너희는, 정말로 아무것도 몰라.」

“······김독자를 데려가겠어. 이 녀석이 ‘가장 오래된 꿈’으로 살도록 놓아둘 수는 없어.”

항전이라도 불사하겠다는 듯한 태도에, [제4의 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긴장하며 주먹을 쥐는 한수영을 대신해 유중혁이 앞으로 나섰다.

“이 녀석을 우리가 데려가면, ‘가장 오래된 꿈’은 공석이 되는 건가?” 

한수영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김독자를 구하고 나면, ‘가장 오래된 꿈’은 누가 대신할 것인가.‘

이 세계는 ‘가장 오래된 꿈’이 꿈을 꾸기에 유지된다. 누군가의 희생으로만 굴러갈 수 있는 우주에서, 누군가는 꿈을 꾸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내가 대신하겠다.”
“뭐? 야! 갑자기 뭔 헛소리야!”
“내가 ‘가장 오래된 꿈’이 되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상상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네가 어떻게 그걸 해! 차라리 내가 할게. 난 김독자 이 자식보다도 잘할 수 있어. 그러니까―”

한수영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지껄였다. 어떻게 해서든 저 미친놈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제4의 벽]은 유중혁의 편이 아니었다.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 너는 가장 오래된 꿈이 될 수 없어. 너는 이 이야기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럼 역시 내가―”

「한수영, 너도 마찬가지야.」

“그럼 이 녀석 자린 누가 대신하는데? 미리 말해두지만 이 녀석은 반드시 데리고 나갈 거야. 아무리 너라도 우릴 막을 수는 없어.”

[제4의 벽]은 잠시 한수영과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데려가.」

“뭐?”

「그냥 데려가. ‘그 김독자’를 데려가도, 이제 이 우주는 멸망하지 않으니까.」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기에, 한수영은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 돌아보니 유중혁도 비슷한 상태였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그런 엔딩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정말, 이런 결말을 맞아도 괜찮은 것일까.

······그럴 리가 없었다.

이 〈스타 스트림〉은, 단 한 번도 그들에게 친절했던 적이 없었으니까. 
서서히 표정이 굳어진 한수영이 되물었다.

“왜 이 녀석을 데려가도 우주가 멸망하지 않는다는 거지?”

「너희가 아는 김독자는 이 우주 전체로 흩어졌어.」

“뭐?”

한수영은 멍하니 자신의 품에 안긴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한 팔에 감을 수 있을 만큼 조그맣고 연약한 체구.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느낌이었다. 설마, 김독자가 이렇게 된 이유는······.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한 짓이 아니야. 그가 스스로 원했던 거지. 그는 너희가 이럴 줄 알고 있었으니까.」

솜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 우주를 살리기 위해서, 누군가는 ‘가장 오래된 꿈’이 되어야만 한다.
김독자가 구해지면, 누군가는 그의 자리를 대신해야만 한다.
김독자가······ 그 김독자가, 과연 그걸 몰랐을까?

「너희는 멍청한 짓을 했어. 독자가 원하는 결말이 곧 결말이야. 왜 그 결말을 바꾸려고 했어?」

이쪽을 보는 [제4의 벽]의 표정이 섬뜩했다. 증오도, 원망도, 슬픔도 아닌 부정적인 감정이 그녀와 유중혁을 향하고 있었다.

「욕심을 부리지 말았어야지. 4 9 % 의 김 독 자를 가 진 것에 서 만 족 했 어 야 지」

서서히 부서지는 목소리와 함께, 주변의 시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정 말 너 희들 만 특 별 할 수 있다 고 생 각 했 어? 우 주의 법칙을 파 괴한 너 희에 게 제 대로 된 결 말이 존 재할 거라 믿 었 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주변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너 희는 결 말을 망쳤 고 불행 해 질 거 야」

.
.
.

다시 눈을 떴을 때, 한수영은 서울에 있었다. 1865회차의 광화문. 그들이 시나리오를 준비했던 장소. 모든 시나리오가 종료된 광화문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눈발을, 한수영은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내리자 자신의 팔에 안긴 작은 김독자의 모습이 보였다. 규칙적으로 새어 나오는 숨소리. 

“사부!”

멀리서 이지혜가 달려왔다. 바로 옆을 부리나케 뛰어오는 유상아와 정희원의 모습도 보였다. 일행들은 무사했다.

“수영 씨! 독자 씨는?”

한수영이 뭐라 말을 잇기도 전에, 장하영이 김독자를 안아 들었다.

“김독자! 애 손이 얼음장이야! 누구 장갑 없어?”

순식간에 김독자를 둘러싼 일행들. 모두가 각자의 감정에 취해 있었다. 
보얀 김독자의 뺨을 붙잡은 채 정희원이 울었고, 곰만한 덩치의 이현성이 김독자의 맨발을 조심스레 감쌌다. 유상아도 이번만큼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신유승과 이길영은 이미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그런 꼴이 같잖다는 듯 인근 벤치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공필두의 모습도 보였다.

“······독자는 잠든 거니?”

그렇게 묻는 이수경을 향해, 한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움직임이 지금의 한수영이 쥐어 짜낼 수 있는 에너지의 전부였다. 
차츰 감정을 다스린 일행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제일 먼저 나선 것은 팔을 걷어붙인 정희원이었다.

“이번엔 진짜 매달아 놓을 거야. 공단 앞에 매달아 놓을 거라고. 나 농담 아니니까 아무도 말리지 마.”
“그래도 지금 독자 씨는 어린앤데······.”
“근데 아저씨는 계속 이런 상태인 거예요?”
“형, 일어나 봐요! 사실 부끄러워서 잠든 척하는 거죠?”
“뭔가 부작용으로 어려진 건가요?”

잠시 머뭇거리던 이지혜가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좀 어려졌으면 어때. 우리가 키워주면 되잖아!”
“형이랑 같이 학교 다닐 수도 있을까?”
“야, 아저씨가 진짜 애가 된 줄 알아?”

그렇게 티격태격하길 몇 분. 
김독자의 이곳저곳을 진맥하던 이설화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 

“독자 아저씨 깨어나면 우리 기억하겠죠? 또 막 기억 다 잃어버린다거나 그런 거 아니겠지?”

「그런 일행들에게, 한수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수영은 떨리는 입술을 몇 번이나 더듬었다.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니까, 그 빌어먹을 벽의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두 사람, 아까부터 왜 그렇게 조용해요?”

유상아의 물음에, 한수영이 시선을 피했다.

“수영 씨?”

이어서 유상아의 시선이 유중혁을 향했다. 그리고 유상아는, 놀라운 광경을 목적했다.

“······유중혁 씨?”

유중혁의 표정이 창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정신 방벽이 맛이 가버린 것인지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도 같았다. 
유상아는 유중혁의 그런 모습을 이미 본 적이 있었다.

「73번째 마계에서, 김독자가 ‘이계의 신격’과 함께 소멸했을 때.」

일행들을 헤치고 다가간 유상아가 김독자의 손목을 붙들었다. 부러질 것처럼 연약한 손목. 옅은 맥박. 하지만 의사가 아닌 그녀가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유상아는 이설화에게 물었다.

“설화 씨, 지금 독자 씨는―”
“······영혼이 완전히 손상됐어요.”

영혼이 손상되었다.
순간 일행들의 표정에 비슷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지만 그림자는 오래가지 않았다. 정희원이 말했다.

“방법이 있겠죠? 예전에도 잘 고쳐냈잖아요.”

그들은 이미 비슷한 일들을 겪은 적이 있었다. 
영혼 손상은 곧 설화의 손상, 나아가 테마의 손상을 의미한다. 언젠가 이수경 또한 그런 병증에서 되살아난 적이 있었다. 
신유승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아무 문제 없는 거죠? 그때랑은 다르잖아요! 이 세계의 아일렌에게 도움을 구하면 돼요. 그리고 성유액도 미리 많이 확보해 놨잖아요!”

신유승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수많은 방법들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신유승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도리질을 반복하는 신유승의 어깨를, 유상아는 조심스레 감쌌다. 

“솔직하게 말해줘요, 설화 씨.”

고개를 푹 숙인 이설화가 김독자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김독자의 연약한 가슴팍에서 작은 설화 조각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이 마지막 남은 김독자의 설화였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새로운 자신의 ■■에 도달했습니다.]

아주 작은 글귀처럼 반짝이는, 그의 작은 설화.

[성좌, ‘구원의 마왕’의 ■■은 종장(終章)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누구도 쓰지 않은 에필로그에 도달했다.」

===

그들은 곧장 광화문의 본부로 김독자를 옮겼다. 
아일렌을 호출했고, ‘구암신의’ 같은 의료계 성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계획은 완벽했다. 실패할 리 없는 계획이었다.」

세계의 각지에 흩어진 모든 설화 전문가들을 불러들였다.

「실패해서는 안 되는 계획이었다.」

일주일이 넘는 기간 동안 수십 명의 명의들이 들러붙어 김독자를 치료했다. 어떻게든 남은 설화를 수습하여 영혼체를 복구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밤샘 작업으로 혼절한 이설화를 대신해, 러시아의 설화 전문가가 말했다.

―죽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살았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겁니다. 이 아이는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테니까요.

그럴 리가 없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 이야기의 끝이 그런 식일 리 없었다. 무너지는 일행들을 지탱한 것은 유상아였다.

“문제는 독자 씨의 영혼인거죠?”

그렇다면 영혼을 복구하면 된다. 
일행들은 그들 중 가장 영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성좌에게 도움을 구했다.

[이 아이의 영혼은 ‘명계’로 온 게 아니에요. 어떤 세계관의 저승에도 이 아이의 영혼은 오지 않았어요.]

명계의 여왕 페르세포네는, 슬픈 얼굴로 김독자의 이마를 쓸었다.

[······이것이 이 아이의 선택이군요.]

“선택? 웃기지 마요. 당신도 봤잖아요. 그 지하철에서, 독자 씨가 가지고 있던 설화들을 봤잖아요! 우리랑 있고 싶다고, 우리에게 구해달라고―”

[한 사람의 영혼에는 수많은 설화들이 있어요. 우리가 본 말들은 그중 일부일 뿐이죠.]

“그렇게······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세요.” 

정희원은 그렇게 외쳤다. 그렇게 외치지 않고는 견딜 방법이 없었다. 
선택이라고? 이게, 김독자의 선택이라고?

「일행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설화를 수선하는 것도, 영혼을 되찾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환생자들의 섬’의 주인, 석존이 자애로운 미소로 그들을 맞이했다.
마치, 그들이 올 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애석하게도 그는 이 몸이 환생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영혼 일부가 아직 남아 있어요. 우리가 가진 설화들을 나눠주면 돼요. 그때의 제가 그랬던 것처럼, 윤회의 힘을 이용하면­”

[나의 아라한이여. 당신의 슬픔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는 환생할 수 없습니다.]

안타깝다는 듯 유상아를 보던 석존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고요히 잠든 김독자를 보는 석존의 눈동자 위로 무수한 실선이 떠올랐다. 개수를 온전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숫자의 붉은 실. 유상아도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인연(因緣)의 실.

밤하늘을 뻗어 나가, 마침내 〈스타 스트림〉 조차 관통한 그 실선을 바라보며, 유상아는 김독자가 왜 환생할 수 없는지를 깨달았다.

“······그렇군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것이 사실이었다.

“이 사람의 영혼은······ 이미 다른 세계선에서 환생한 거군요.”

석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영혼들’이라고 해야겠지요.]


*


모두 앞에서, 한수영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김독자의 영혼은 우주 전체로 흩어졌어.”

암전된 방에서 [제4의 벽]과 마주했던 순간의 기억. 그 모든 대화를 낱말 하나 빠짐없이 온전히 일행들에게 전달했다. 누군가는 주저앉았고, 누군가는 절규했다. 이지혜가 외쳤다.

“다시 녀석을 찾아 가봐요. [제4의 벽]에게 가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독자 아저씨 영혼을 회수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 짓을 하면 다른 세계에서 환생한 김독자는? 걔도 거기서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을 텐데.”
“그건······.”

씩씩거리던 이지혜가 탁자 위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예요. [제4의 벽]은 뭐든 알고 있다면서요.”
“······놈을 다시 만날 방법이 없어. 벽을 열 때 파편을 모두 써버렸잖아.”

순식간에 나흘이 더 지났다. 일행들은 몹시 피폐해졌다. 끼니를 거르거나 잠을 자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흘렀을까. 정희원이 유중혁을 찾아갔다.

“중혁 씨.”

버릇처럼 [흑천마도]를 닦던 유중혁이 고개를 들었다. 볕이 눈부신 듯 잠깐 눈살을 찌푸리던 유중혁은 다시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닦아도 검에 묻은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다. 김독자의 활자를 베었던 그 얼룩이었다. 가만히 그 얼룩을 내려다보던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나흘이면 꽤 결심이 빠르군.”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유중혁은 무표정한 눈으로 그런 정희원을 마주 보았다. 그토록 많은 비극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불타오르는 눈동자. 언젠가의 그 역시,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할 수 있어요. 벌써 두 번이나 해냈고요. 그러니까―!”

유중혁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잘 만들어진 환상 같은 계획이었다.
이번만큼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설령 이 세계의 끝이 비극이라고 해도······ 너희들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그때의 그 녀석도 그랬을까. 유중혁이 말했다.

“그래, 우리는 해냈지.”
“제발, 한 번만 더 해봐요! 이번에는 틀림없이 제대로 할 수 있어요! 독자 씨를, 반드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서 이번 회차보다 더 나아질 거란 생각은 하지 마라.”

무심코 그 말을 내뱉고서 유중혁은 잠시 숨을 멈췄다.

“······왜 그런 말을 하죠? 이번 회차는 분명히 나아졌어요. 더 잘할 수 있다고요!”
“불가능하다.”
“왜, 해보지도 않고서―”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희원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당장이라도 협력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베어버리겠다는 듯 칼자루를 그러쥔 손. 하지만 정희원의 위협에도 유중혁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던 정희원의 표정에 뭔가가 떠올랐다.

“당신, 혹시······.”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정희원이 다그쳤다.

“정말이에요? 진짜로······.”

유중혁은 눈앞에 떠오른 자신의 특성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제 나는 회귀자가 아니다.”

그의 특성에는 이제 [회귀자]라는 항목이 존재하지 않았다. 성흔도 사라졌다. [회귀]도, [집단 회귀]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어떤 성흔도 없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을 맞으며, 유중혁은 〈스타 스트림〉의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항상 느껴지던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기감을 키워보아도,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단 하나의 독자가 사라지며, 그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회귀도.


*


“세계선을 넘으면 돼요.”

그리고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꼭 회귀가 아니어도 되잖아요. 세계선을 넘어서, 다른 시나리오 지역으로 가요. 거기서 다시 ‘최후의 벽’을 모아서 [제4의 벽]을 만나는 거예요.”

미친 계획이었다.
더욱 환장할 것은, 그 미친 계획을 제안한 것이 저 침착한 유상아라는 것이었다. 한수영이 말했다.

“그 녀석이 도와주지 않을 수도 있어.”
“그래도 해봐야죠. 안 해보는 것보단 낫잖아요.”

이미 한 번 해본 일, 두 번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왜일까, 한수영은 이게 올바른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만약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될까.
또 세계선을 넘으려 하지는 않을까.
그렇게 세계선을 넘고, 또 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그들은 999회차의 ‘이계의 신격’들과 다를 바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들의 삶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질지도 모른다.
비참한 것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 유혹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세계선은 어떻게 넘을 건데? 이제 회귀도 할 수 없잖아. 여긴 우릴 도와줄 ‘은밀한 모략가’도 없어.”
“잊었어요? 이 세계선은 1864회차와는 달라요.”

그 순간, 한수영의 뇌리에 뭔가가 스쳐갔다.

「방법이 하나 더 있었다.」

쿠구구구, 하는 소리와 함께 광화문에 거대한 그림자가 내려앉은 것은 그때였다. 거리 일대를 모조리 덮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비행체.

[후후, 다들 오랜만이야.]

그 비행체 위에 비형이 타고 있었다. 
관리국이 폭삭 망하고 이 세계의 도깨비 왕이 된 비형. 그는 이 망해버린 세계가 썩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래, 이게 필요하다 이거지?]

그곳에 ‘마지막 시나리오’의 전유물이 있었다.

「최후의 방주」.

한수영은 천천히 방주를 향해 다가갔다.
확실히 저걸 쓰면, 세계선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시나리오의 도깨비와 성좌들도 저걸 타고 다른 세계선으로 달아나려 했었으니까. 
유상아가 말했다.

“하지만 저걸 쓰면······ 우리도 결국 도깨비들과 똑같아지는 거겠죠.”
“그런 얘긴 집단 회귀 시작했을 때 했었어야지.”

한수영은 방주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비형이 경고하듯 말했다.

[미리 말해두는데, 이 방주는 보기보다 많이 낡아서 한 번 밖에 못 써.]

“상관없어.”

다른 세계선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은, 유중혁의 ‘회귀’와 흡사한 용도로 이 방주를 쓸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만약,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세계선 이동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유중혁의 ‘회귀’ 때보다 훨씬 효과적인 방식으로 세계선을 이동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수영은 재빨리 외쳤다.

“비형. 우리가 가고 싶은 세계선은······!”

그런데 한수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메시지가 돌아왔다.

[해당 세계선으로는 항해가 불가능합니다.]

비형의 표정이 기이해졌다.

[음? 이게 왜 이러지? 이런 적은 없었을 텐데?]

“뭐야. 고장 났어?”

[다른 세계선 불러봐.]

한수영은 다시 한번 말했다. 그러자 다시 메시지가 떠올랐다.

[해당 세계선으로는 항해가 불가능합니다.]

한수영은 몇 번이나 다른 세계선들을 말했다. 말하고, 또 말하고. 그러나 떠오르는 메시지는 언제나 같았다.

[해당 세계선으로는 항해가 불가능합니다.]
[해당 세계선으로는 항해가 불가능합니다.]
.
.
[해당 세계선으로는 항해가 불가능합니다.]

당황한 비형이 중얼거렸다.

[그 세계선들은 모두 통로가 닫혔어. 세계선 사이에 열려 있던 가능성이 완전히 닫혀버렸다는 얘기야.]

“못 간다고?”

[그런 것 같네. 허, 이런 경우도 있나?]

그녀가 기억하는 ‘멸살법’과 관련된 모든 세계선이 막혀 있었다.

“······그럼 갈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는 거야?”

[한 군데 있어.] 

“뭐? 어딘데?”

[근데 여긴 모든 시나리오가 종료된 세계선이야.]

비형은 입력된 항로를 보여주었다. 
놀랍게도, 항해의 목적지는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장소였다.

유중혁의 제 1864회차.
모든 시나리오가 종료된 이후의 8612 행성계.

그들이 떠나온 지구였다.	

===

1865회차의 끝은 그 어떤 세계선보다도 완벽했다.

‘마지막 시나리오’가 끝나고 어느새 한 달. 시나리오로 인한 피해는 빠르게 복구되었고, 회귀자들의 도움으로 각국은 빠르게 질서를 회복했다.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고, 직장인들은 출근을 시작했다. 거리에는 새로운 세계의 안녕을 위한 슬로건들이 잔뜩 붙었다. 
그 낯선 거리 위에서, 이지혜는 펜스 너머로 펼쳐진 운동장을 보고 있었다.

“저 애가 그 친구구나.”

정희원의 말에, 이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운동장에서 그녀의 친구가 달리고 있었다. 나보리. 그녀가 자신의 손으로 죽였던 친구. 그 친구가, 이 세계선에서는 살아있었다. 살아서 숨을 쉬고,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지혜야, 돌아가지 않아도 돼.”

이지혜의 눈이 보리의 뒷모습을 좇았다. 그토록 그리웠던 친구. 항상 꾸는 악몽에 등장했던 친구.
보리를 구하면, 악몽도 사라질 줄 알았다.
하지만 기억은 그렇게 간단히 소거되지 않는다. 오히려 악몽은 더욱 생생한 형태로 되살아났다. 그녀는 몇 번이고 같은 시나리오를 살았고, 꿈속의 보리를 죽였다. 그럴 때마다 이지혜는 다시금 깨달았다.

그녀가 구한 것은 죽은 보리가 아니었다는 것.
그저 다른 세계선의, 또 다른 보리였을 뿐이라는 것.

“지혜야.”

이지혜는 한참이나 운동장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비유랑 약속했으니까요.”
“······.”
“반드시, 다시 세계선을 넘어 그곳으로 돌아가겠다고. 그렇게 약속했으니까요.”

정희원은 그런 이지혜의 옆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조용히 어깨에 손을 얹었다. 

“돌아가면 쓸쓸하겠지. 거긴 이곳에 있는 것들이 없을 테니까.”

이지혜가 웃었다. 눈을 닦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쓸쓸하지 않아요. 이 안에 있으니까.”

그 말을 하는 이지혜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렇게 말해도 괜찮은 것일까.
정말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은 왜 여기까지 온 것일까.

“가자. 언니가 오늘 맛있는 거 쏠게.”


*


“오라버니.”

유미아가 오라버니라고 부를 때는, 무언가를 부탁하고 싶을 때다. 
오랜 회귀를 통해 유중혁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미아가 말했다.

“오라버니는 최선을 다했어요. 그 이상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유중혁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의자 위에 올라간 유미아가 유중혁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우리, 이제 그만 돌아가요.”


*


―그들이 살았던 이야기는 비극의 시나리오.
―세계는 멸망의 포연으로 덮였고, 그들은 소중한 것을 잃었네.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말에 한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장송곡이냐?”

[요즘 유행하는 노래야. 너희들을 칭송하는 이야기지.]

킬킬 웃은 비형이 방주의 문을 열었다.
설화 에너지가 충전된 방주가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나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회귀자들이 방주에 탑승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남기로 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는 공필두. 그의 뒤로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수영은 공필두가 회귀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당신은 남아. 여기도 지킬 사람이 있어야지.”

공필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또 남을 사람 없어?”

한수영이 차분히 목소릴 높였다.

“신중하게 생각해. 이제 가면 부모님이랑 연인, 친구······ 아무튼 기타 등등은 두 번 다시 못 봐. 괜찮겠어들? 잘 생각하라고······.”

한수영의 손을 신유승이 꼭 붙잡았다.

“여긴 우리 세계선이 아니잖아요. 독자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김독자 컴퍼니〉의 화신과 성좌들은 대부분 귀환을 선택했다. 
그들의 중심에 침대차에 실린 어린 김독자가 있었다.

[오― 페르세포네, 정말 떠날 셈이오?]

질척거리다 못해 구애의 댄스를 추고 있는 하데스를 보며 한수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하데스가 원래 저런 성격이었던가? 
그런 하데스를 향해 페르세포네가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미안해요, 하데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알던 ‘페르세포네’가 아니에요.]
[당신은 페르세포네요.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자 명계의 여왕.]

페르세포네가 작게 도리질을 했다.

[정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따라가겠소.]
[당신의 세계선은 이곳이에요. 당신은 명계의 왕이고요. 부디 체통을 지키세요.]
[내 세계는 당신이야, 페르세포네!]

비형이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한수영을 향해 물었다.

[물으나 마나겠지만······ 정말 갈 거냐? 이곳에 남으면 평생 대접받으며 살아갈 수 있어.]

“그런 것 때문에 이 세계선으로 온 게 아니야.”

한수영은 침대차에 누운 어린 김독자를 내려다보았다.
지난 몇 달간, 한수영과 동료들은 〈스타 스트림〉 전역을 뒤져 김독자를 살려낼 방법을 골몰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런 방법은 없었다. 그저 이렇게 죽은 듯 산 듯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비형, 굿바이 선물로 관리국 설화 좀 나눠줘.”

[······관리국 설화를?]

“우리 세계선의 시스템이 망했거든. 혹시 모르니 조금만 받아가자.”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인 비형이 설화의 일부를 한수영에게 계승했다. 
그때, 멀리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뛰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덥수룩한 턱수염이 자라난 덩치. 이현성이었다.

“빨리 출발해주십시오!”

자세히 보니, 이현성의 뒤를 쫓아오는 군용 차량들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아직도 수배 중이었지.”

쓰게 웃은 한수영이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출발한다.”

마침내 「최후의 방주」가 떠올랐다.

―〈김독자 컴퍼니〉의 영웅들이 떠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지켜보았다. 방송국 헬기들이 몰려들어 그들의 출항을 중계했다. 일행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기자들이 외쳤다.

―왜 울고 계십니까? 당신들이 이 세계선을 구했습니다!

지상의 정경이 서서히 멀어졌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우리,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던 걸까요.”

한편의 지독한 악몽처럼 세계가 멀어지고 있었다. 기억으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과거로 변하고 있었다. 한수영이 중얼거렸다.

“무엇 때문이긴······.”

방주의 가속과 함께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계선의 은하. 저 먼 세계선의 어딘가에는 환생한 김독자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한수영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지금이라도, 무리해서라도 항로를 튼다면 어떨까. 저 먼 별들 어딘가에서 태어난 김독자의 환생체를 만나러 떠난다면 어떨까. 그러면, 그럴 수만 있다면―

「하지만, 그게 정말로 김독자가 원하는 일일까.」

방주의 창문으로 곁에 선 유중혁과 유상아의 동시에 얼굴이 비쳤다. 그 둘 역시 자신과 같은 표정으로, 자신과 같은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았다. 그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이 계획은 영원히 실천될 수 없다는 것을.

방주가 덜컹거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새로운 세계선으로 진입합니다!]

“벌써? 이거 겁나게 빠른―”

마치 대기권으로 돌입하듯 방주가 급강하를 시작했다.
잠깐 중력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굉음과 함께 선체가 어딘가에 부딪쳤다. 내부가 일순간 암전되었다 되돌아왔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싼 채 한수영이 일행들을 살폈다.

“젠장, 낡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 고물이잖아, 이거. 모두 괜찮아?”
“전 괜찮아요! 다른 분들은······.”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한수영은 선체를 조작해 출입구를 열었다. 천천히 열린 문 아래로 계단이 내려갔다.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가 땅을 밟는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은 누구냐!”

어떻게 된 것일까. 무장 군인들이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이현성이 그녀의 뒤로 숨었다.

“수영 씨!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설마 여기서도 저를······.”
“그럴 리가 없잖아. 여긴 우리 고향이라고.”

이현성을 뒤로한 한수영이 말했다.

“환영 인사가 너무 거친데? 니들 나 누군지는 알아?”

껄렁거리며 앞으로 걸어가는 한수영을 향해 총구가 일제히 움직였다.

“경고하는데, 그거 당기면 니들 전부―”

그때, 한수영의 시야에 누군가의 얼굴이 들어왔다. 아는 듯 모르는 듯 묘한 기시감이 드는 중년의 얼굴. 어깨 아래까지 흩날리는 금발. 붉게 소용돌이치는 적안의 눈동자. 그 눈동자의 주인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

“······한수영?”

한수영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목소리.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중년인이 손으로 사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한수영······ 정말 당신이 맞습니까?”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한수영은 울컥 뭔가가 올라올 것 같았다.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간 한수영이 안나 크로프트를 마주 보았다. 무엇부터 물어보아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한수영은 나오는 대로 물었다.

“우리가 떠나고 몇 년이나 지난 거야?”
“······20년입니다.”

한수영이 떨리는 입술로 그 세월을 삼켰다. 현기증이 났다. 누가 이곳에서, 그 끔찍한 시나리오가 있었다는 것을 믿을까. 
서울은 더 이상 그녀가 기억하던 장소가 아니었다. 완벽하다 생각했던 1865회차만큼이나 완성된 도시. 가로수의 짙은 녹음과, 먼 공터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의 모습.

20년.

그렇구나. 우리가 없는 세계에서, 너는 이 세계를 살았구나.
그래서 이 세계를 이만큼이나 바꾸어냈구나.

“한수영?”

깜짝 놀란 안나 크로프트가 비틀거리는 한수영을 부축했다. 싫은 녀석의 품이었다. 그럼에도 그 어깨에 매달린 채, 한수영은 울음을 터트렸다.

마침내 다시 만난 1864회차.
그들이,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완수했던 세계.
누군가는 돌아왔고, 누군가는 돌아오지 못했다.
어떤 것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과거로 남았다.

멀찍이 펼쳐진 [공단]의 풍경.

색이 바래진 김독자의 동상이 그곳에 있었다. 어색한 듯 포즈를 취한 김독자의 옆으로, 거대한 오징어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김독자의 귀환을 기념하며」

그 괴상망측한 오징어를 보며 한수영은 끅끅거리며 울다가 웃기를 반복했다.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면 뭔가가 바뀔 것 같았기 때문에. 하지만 한수영은 이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작전은 실패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이 찾아낸 세계의 결말이었다.


*


일행들이 돌아온 지 2년이 지났다.
2년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고, 그렇기에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일어났다. 
이현성과 정희원이 공단을 떠난 일. 신유승과 이길영이 고등학교에 진학한 일. 이지혜가 첫 중간고사에서 F를 맞은 일, 등등. 
그리고 그런 수많은 사건들을 단 하나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김독자 컴퍼니〉는 해산했다.

===

일행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각자의 자리를 찾아 떠났다. 
누군가는 보안 업체를 세웠고, 누군가는 정부 소속이 되었다. 
한수영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무언가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웹소설로 현대 철학 읽기』

한수영은 센터에서 그런 이름의 강의를 했다. 
마지막 시나리오가 끝난 뒤, 현실과 환상은 다시 분리되었다.

“그래서 롤랑바르트의 ‘애도’를 이 소설에 적용해보면······.”

대부분의 수강생들은 저게 무슨 크로와상에 쌈장 찍어 먹는 소리냐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흥미를 갖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손을 번쩍 든 학생 하나가 물었다.

“교수님 관점은 무척 흥미로운데요. 저는 이견이 있습니다.” 

한수영이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게 정말 작가가 의도한 걸까요? 맞춤법도 틀리고 비문도 많은 이런 소설에, 그런 거창한 이론을 적용해서 읽는 게 알맞은 독서법일까요? 솔직히 작가가 거기까지 생각한 거 같지는 않은데요. 여기 과하게 쓰인 의성어와 의태어만 봐도―”

한수영은 자신이 예시로 가져온 소설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비문이 많은 소설이었다. 기어코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하는 듯, 학생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수영은 잠시 고민했다. 저 학생에게 낱낱이 말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수영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맞아. 진실은 작가만 알겠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너무 무책임한······.”
“누군가가 너라는 사람을 평가한다면 어떨까.”
“예?”
“그 누군가는 급하게 수업에 나오느라 제대로 씻지 않은 얼굴이나, 슬리퍼 바깥으로 삐죽 튀어나온 발톱 같은 걸 먼저 볼 거야. 그리고서 생각하겠지. 아, 저 녀석은 행색을 보아하니 게으를 거야. 게으른 녀석이 똑똑할 리 없지. 저런 놈 의견 따윈 들어볼 필요도 없어.”
“그게 무슨―”
“혹은. 아, 저 학생은 어젯밤 밤새도록 오늘 강의 내용을 미리 공부했나보다. 교수에게 저렇게 적극적인 태도로 질문하는 걸 보면 말야. 겉모습은 좀 꾀죄죄하지만, 아마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는 사람인가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흔들리는 학생의 눈을 보며, 한수영은 계속해서 말했다.

“네 말대로 이 글을 쓴 작가가 별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어. 하지만 결국 이 소설에서 무얼 찾아낼지 결정하는 건 읽는 너야. 네가 쓰레기 같은 것밖에 찾지 못했다면 이건 쓰레기로 끝날 거고, 아주 약간이라도 의미를 찾아준다면 그것만으로 이 작품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겠지.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건 네 마음이지만, 그래도 나는 네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하는 쪽을 택했으면 싶네. 그렇지 않으면 내 수업을 견디는 건 꽤 버거운 일이 될 테니까.”

학생은 입을 다물고 한수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을 이해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눈동자를 굴리던 학생이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그런데 교수님은 이제 신작 안 쓰시나요?”
“음?”
“전에 말씀하셨잖아요. 작가는 글을 쓰니까 작가다. 글을 쓰지 않으면 작가가 아니다, 라고.”

작가도 아닌 너한테 그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 대충 그런 뉘앙스가 스며있는 말이었다. 한수영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먼 허공을 가늠하는 듯 불투명해진 눈동자. 한수영은 무심히 중얼거렸다.

“그래, 난 이제 작가가 아니야.” 
“예?”
“내 글을 읽어 줄 독자는 이제 없거든.”

한수영의 다음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시계의 종이 울렸다. 빙긋 웃은 한수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자, 다음 강의에 읽어 올 소설은······.”

강의실을 떠나는 학생들을 배웅하며, 한수영은 교탁에 남았다. 펼쳐진 노트북의 바탕화면 위로 문서 파일 하나가 보였다. 얼마 전부터 시험 삼아 쓰기 시작한 소설. 한수영은 파일을 열어 자신이 쓴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뒤쪽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재미있는 수업이네요. 그 사람도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흠칫 화면을 끄며 돌아보자, 그곳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긴 손가락이 교탁 위에 흩뿌려진 수업 자료를 섬세하게 살피고 있었다.

“아, 이 강의도 재미있겠다. 부르디외로 시작하는 현대판타지 읽기, 버틀러와 함께하는 로맨스 판타지 해부······.”
“웹 소설 작가 무시하러 왔냐?”

살짝 고개를 기울인 유상아가 생긋 웃었다.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미소였다. 그녀는 한수영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갑자기 안경은 왜 썼어요? 그새 눈 나빠졌어요?”
“관심 꺼.”
“아하, 알겠다. 너무 어려 보여서 학생들이 무시했구나?”

눈살을 찌푸린 한수영이 까만 안경을 홱 벗자, 유상아가 놀리듯 덧붙였다.

“가요. 내가 한 잔 살게.”


*


각자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복숭아 스무디를 쪽쪽 빨아 마시며, 두 사람은 거리를 걸었다. 어색하게 떨어진 거리를 유리한 채, 그저 걷는 것에만 집중했다. 지나가듯 한수영이 물었다.

“정부 쪽 일은 어때. 재밌어?”
“재밌자고 하는 일인가요.”
“오늘 누구누구 온대?”
“현성 씨는 미국에 있어서 어려울 거 같고, 희원 씨는 올 거 같아요. 그리고 설화 씨는 아시다시피······.”
“애들은?”
“다 올 거예요. 한 번도 빠뜨린 적 없잖아요.”

얼마 지나지 않아 광화문 거리가 나왔다. 골목길로 들어가 얼마간 걷자, 이내 찾던 식당이 나왔다. 《마르크 앤 셀레나》. 한수영이 문을 벌컥 열었다.

“어서오세······ 와, 이게 누구야!”

능숙한 한국어로 그들을 반긴 이는 셀레나 킴이었다. 주방에서 피자를 돌리던 마르크가 휘파람을 불었다. 셀레나 킴이 그들을 안내하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요. 요리 금방 나올 거니까.”
“먼저 온 사람들은?”

셀레나 킴은 직접 확인해 보라는 듯 바테이블의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익숙한 뒤통수 세 개가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한수영은 어쩐지 간질간질한 느낌을 참으며, 슬그머니 그들의 뒤로 접근했다. 그렇게 바로 뒤까지 다가갔을 때, 잽싸게 손바닥을 휘둘러 뒤통수 세 개를 연속으로 두드렸다.

“와아악! 어떤 새끼야!”
“많이 컸네, 우리 꼬맹이들.”
“수영 언니! 상아 언니!”

무려 1년 만의 해후였기에, 그들은 짧은 소회를 나누었다. 음식이 나오기까지는 정말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뭐 시킨 거야? 요리 이름이 뭔데?”
“파멸 산장의 악마 곱창 볶음.”

요리를 내온 마르크가 씩 웃었다. 한수영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오징어 순대처럼 생긴 요리를 포크로 푹 찍었다.

“뭐야, 맛있잖아.”

과연 이름만큼이나 대단한 요리였다. 다른 일행들도 긴장을 풀고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가하게 요리를 먹어본 게 얼마만의 일이었더라. 세계선을 건너온 게 벌써 2년 전의 일이었음에도, 한수영은 그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워우워우워어어······!

바테이블의 상단에 설치된 패널에서는 콘서트장의 모습이 실황 중계되고 있었다. 요즘 인기 있는 아이돌 그룹이었다. 하나는 원숭이, 하나는 용, 하나는 대천사. 마이크를 붙잡은 제천대성이 바이브레이션이 한껏 들어간 사자후를 퍼붓자, 무대의 뒤쪽에서 우리엘이 화려한 조명과 함께 등장했다. 
오물오물 곱창을 씹던 유상아가 말했다.

“엄청 잘 나가네요.”
“나도 어제 팬클럽 가입했어. 우리엘 포스가 진짜······.”

이지혜의 말에 이길영이 태클을 걸었다.

“난 디오니소스 무대 본 이후로 쟤들 무대는 못 보겠던데. 특히 저기 쟤는······.”
“심연의 흑염룡? 왜? 귀엽잖아.”

신유승의 말에 흘기듯 눈을 뜬 이길영이 포크를 씹으며 말했다.

“저딴 게 무슨.”

패널에서는 성좌들의 신곡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안대를 쓴 심연의 흑염룡이 브레이크 댄스를 추며 속사포 랩을 시작했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설화! 시나리오가 노래하는 신화! 시간 속에 바래지는 한 인간의 진화!

“······저게 대체 뭔 소리야?”

흑염룡의 속사포랩이 쏟아지는 동안,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이 있었다. 이미 어디서 한 잔 걸치고 오는 길인지 묘하게 들뜬 얼굴들. 장하영과 정희원이었다.

“뭐야! 다들 벌써 왔네?”

한달음에 달려온 장하영이 한수영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잘 지냈냐?”

유상아와 가볍게 손바닥을 부딪친 정희원이 패널을 보며 한마디를 했다.

“아, 저 랩 시끄러워 죽겠어.”
“다들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좋네요.”
“오늘은 이 멤버가 다인가?”
“그런 거 같네요.”

정희원은 새로 이사한 집에 대해 떠들었다. 대충 역세권에서 벗어나서 좀 불편하다는 이야기와, 근처에 공원이 있어 운동하기 좋다는 이야기. 
그녀는 이제 광화문에 살지 않는다. 3호선의 근처에도 살지 않는다. 한수영이 물었다.

“그래서, 둘이 같이 살아?”

그 말에 일행들의 관심이 갑자기 집중되었다. 정희원이 쓰게 웃으며 음료수 잔을 흔들었다.

“아니, 따로.”
“왜?”
“같이 있으면 생각나잖아.”
“······뭐가 생각나는데요?”

눈을 반짝인 이지혜가 정희원을 다그쳤다. 그러나 정희원의 표정에는 별다른 웃음기가 없었다. 정희원은 말없이 음료수를 휘저었다. 이지혜가 벌어졌던 입을 닫았다.
패널에서는 다음 곡의 전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이름 없는 구원(Feat.대머리 의병장) – JUS

패널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한수영은 조금 늦게 덧붙였다.

“그래, 그렇겠네.”

그리고 일행들의 대화가 끊어졌다. 침묵은 늪처럼 그들의 발목을 감았다.
이것이, 그들이 자주 만나지 않은 이유였다.

―이것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이야기.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이야기.

그 시간이 이야기가 되기에, 2년은 충분한 시간이었을까.
한수영은 알고 싶었다.

“비유는 요즘도 소식 없지?”
“안나 씨한테 물어봤는데 따로 통신 들어온 것도 없대.”

일행들이 돌아오기 직전, 비유는 [암흑 단층]으로 수련행을 떠났다. 때문에 지난 2년간 그들은 비유의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다.

“공필두는?”
“충무로에서 또 혼자 술 마시고 있겠지. 그때 가족들이랑 헤어지고 나서 충격이 큰가 보더라.”
“그 인간은 그냥 1865회차 남으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기어코 같이 돌아와서는······.”
“명오 아저씬 어때? 그 아저씬 공단 사니까 한수영 네가 잘 알 거 아냐.”
“그 양반이야 늘 잘 있지.”
“시커먼 놈은 요즘 뭐 한대요? 전에 프로게이머 좀 하다가 그만뒀단 이야긴 들었는데.”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장하영이 마티니 잔을 척 들어 올렸다.

“에이, 모르겠다. 일단 마시자!”
“너 벌써 많이 마신 거 같은데.”
“말리지 마! 오늘 끝까지 달릴 거니까!”
“나도요. 나도 한 잔 주세요.”
“유승이 넌 아직 미성년자잖아.”
“회귀 전 나이부터 따지면 성인이거든요?”

입술을 비죽 내민 신유승이 조르는 사이, 자신의 잔에 소주를 콸콸 따른 이지혜가 안주도 없이 원샷을 했다.

“수영 언니 내 레포트 좀 대신 써줘요.”
“나한테 그딴 부탁하면 죽는다.”

2년의 시간. 날수로 쪼개면 약 730일.
지금의 대화는 그 730일을 필사적으로 살았기에 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학교를 다니고, 일을 하고, 이사를 가고. 그날로부터 한 걸음씩 멀어지기 위해 일행들은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그날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오히려 그날을 향해 다가간 사람도 있었다.

「김독자는 ‘멸살법’이라는 이야기로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우리를 살게 만든 건 무슨 이야기였을까.」

메모장에 뭔가를 쓰는 한수영을 보며, 정희원이 한마디를 했다.

“뭘 그렇게 메모해?”
“그냥 습관이야.”
“요즘도 글 써?”

메모를 쓰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대신 대답한 건 유상아였다.

“아까 보니까 쓰는 거 같던데요.”
“진짜요? 무슨 글? 소설이에요?”

한가득 새로 퍼온 안주를 으적으적 씹어먹던 이지혜가 물었다.

“······그냥 손풀기로 쓰는 거야.”
“진짜? 신작 내려고?”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할 찰나, 곁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여기 있으려나?”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자리를 비웠던 이길영이, 어느새 한수영의 노트북을 들고 희희낙락거리고 있었다. 몰래 한수영의 노트북으로 컴퓨터 게임을 한 적이 있었던 이길영은 자연스레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로그인을 했다. 신유승이 헛짓거리하지 말라며 눈을 부라렸다.

“이길영.”
“아 왜.”

몰래 몇 잔을 홀짝였는지, 이길영의 뺨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초조해진 신유승이 한수영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왜일까. 보통이었으면 역정을 내며 이길영의 뒤통수를 갈겼을 한수영이, 말없이 눈앞의 마티니를 홀짝이고 있었다. 마치, 봐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그것을 일종의 허락이라고 여겼는지, 이길영이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마티니 잔을 내려놓은 한수영이 물었다.

“꼬맹아.”
“······.”
“읽을 자신 있겠어?”

이길영의 안색이 점차 희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치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릴 것처럼 이야기를 읽어대는 이길영.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이길영은 계속해서 화면을 읽었다. 그리고 몇 분 뒤. 당장이라도 울음을 쏟을 것 같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거, 몇 편까지 있어요?”
“아직 많지는 않아. 2권 분량 좀 안 되는 분량이야.”
“조금 더······ 읽어도 돼요?”
“그래.”

이길영의 상태가 심상치 않자, 일행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뭔 내용이길래 그래?”
“수영 씨 신작이라니 나도 궁금한데······.”
“전 패스. 나중에 책으로 나오면 볼래요.”

그렇게 말하며 자작을 시작한 이지혜를 제외하고, 모든 일행이 이길영의 뒤로 모여들었다.
한수영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나둘, 일행들의 시선이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단순히 이야기가 흥미로워서는 아닐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한수영, 너······.”

흔들리는 정희원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수영은 자신이 기록한 문장을 떠올렸다.

「“회귀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그걸 깨닫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맞다. 회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날의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왜,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회귀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김독자는 ‘멸살법’이라는 이야기로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우리를 살게 만든 건 무슨 이야기였을까.」

사실 한수영은 그 질문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 녀석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이야기야.”

그들에게는 이야기가 남았다.
그들이 사랑한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

“······그냥 기록으로 남길 겸 썼어. 혹시 언젠가 김독자가 깨어날 수도 있잖아. 그럼 분명 모든 걸 다 잊은 후일 테니까.”

일행들은 한수영의 소설을 읽었다.
눈이 붉어진 신유승이 스크롤 좀 천천히 내리라며 타박을 했고, 이길영은 콧물을 훌쩍이며 마우스를 딸깍였다. 유상아와 정희원, 장하영은 파일을 복사해서 스마트폰으로 읽었다.
자신이 등장하는 장면을 읽던 유상아가 옅게 미소지었다.

“······내가 이런 말도 했었죠, 참.”

그립다는 듯, 유상아가 액정 위의 문장을 쓸었다. 그렇게 하면 정말로 김독자를 만질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병나발을 불던 이지혜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뭐야.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
“아, 누나!”

주정을 부리던 이지혜가 의자에서 이길영을 밀쳐내고 노트북을 차지했다. 뺨을 착착 두드린 이지혜가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화면에 집중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흐어어어엉! 이 소설 너무 슬프잖아!”
“······이제 겨우 1화 읽어 놓고 무슨.”

팽, 하고 코를 푼 이지혜가 이길영 쪽으로 휴지를 던졌다. 열 받은 이길영이 뭐라고 쏘아붙이든 말든, 이지혜는 막무가내였다. 특히 스크롤을 호로록 내려 자신이 등장하는 충무로 씬을 읽을 무렵, 이지혜의 흥분은 정점에 달했다.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입구에, 긴 장도를 쥔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드문드문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이지혜의 머리카락을 보며······  크으으, 나 진짜 개 멋있다!”
“아 진짜! 스크롤 다시 올려!”

이길영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이지혜는 계속해서 지껄였다. 

“그래서 이담엔 어떻게 돼요? 김독자 어떻게 되는데······.”

조잘대던 이지혜가 결국 취기를 못 이기고 테이블에 코를 박았다. 노트북을 빼앗은 신유승이 대신 스크롤을 내리며 물었다.

“······저도 나중에 나오나요?”
“안 나오는 사람은 없어. 비중은 좀 다르겠지만.”
“저, 정말 열심히 했어요.”
“알아. 네 이야기도 많이 나올 거야.”

그들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김독자가 어떻게 되는지, 일행들은 무슨 일을 겪는지. 그들이 꾸었던 꿈이 어떻게 부서지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신유승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읽었다.

정해진 끝을 향해 한 문장씩 나아갔다. 그들이 바꾸지 못한 이야기가 그곳에 있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는 듯, 신유승은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읽었다.

“······이거, 독자 아저씨가 읽었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요.”
“우리가 형한테 가서 읽어줄까?”

한수영은 이설화의 병원에서 잠들어 있을 김독자를 떠올렸다. 이 소설은 그 녀석을 위해서 썼다. 하지만, 그 녀석이 읽어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이 이야기의 완성은 아닐까.」

무언가를 잃은 자들의 온전한 마지막. 그것이 이 소설의 진짜 역할은 아닐까. 이들이야말로, 이 이야기의 진정한 독자는 아닐까.

“다른 세계선의 아저씨도 책을 좋아하겠죠?”

고작 이 이야기로, 일행들이 구원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이야기를 읽고 생각하는 동안만큼은, 삶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멸살법’을 읽던 김독자가 그랬던 것처럼.

“글쎄, 아마도.”
“거기서도 아저씨는 분명 아저씨일 거예요.”
“혹시 모르지 벌레가 됐을지도.”
“뒈지고 싶으면 계속 지껄여라, 이길영.”
“형이 벌레로 태어났으면 내가 키워줄 텐데. 책도 매일 읽어줄 거야.”

이길영의 헛소리를 들으며, 몇몇 어른들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유상아가 말했다.

“어디서 무엇으로 태어나 살아가든, 독자 씨는 독자 씨겠지.”

한수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의 세계에서, 김독자는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다. 거기서도 누군가가 쓴 이야기를 읽고, 기뻐하거나 슬퍼하고, 감동하며 살아갈 김독자. 

이곳의 사람들은, 그런 김독자의 이야기를 추억하며 살아갈 것이다.

부디 그 세계의 김독자가 불행하지 않기를. 
이곳에서 일행들이 그를 기억하는 만큼, 그가 행복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앞부분부터 다시 읽기를 반복하던 신유승이 한숨처럼 말했다.

“아까워서 못 읽겠어요. 너무 빨리 끝나버릴까봐.”
“그렇게 빨리 끝나진 않아.”
“다음 편도 계속 쓰실 거예요?”
“응.”
“다른 세계에도 이 소설을 보내줄 수 있다면 좋겠어요. 우리만 읽기엔 너무 아까워요.”

······다른 세계?
뜻밖의 말에 한수영은 잠깐 멍해졌다.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가능한 일도 아니었고.
잠시 생각하던 한수영이 뭐라 말하려던 그때, 뉴스에서 속보가 흘러나왔다.

―속보입니다. 광화문에 위치한 ‘시나리오 박물관’에 테러범이 침입하여······.

“테러범? 요즘 시대에?”

장하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차피 시스템의 영향력도 거의 사라진 세계여서, 성유물을 가진다고 해서 뭘 제대로 해볼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정희원의 폰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네, 당신의 안전을 지키는 보안 업체! 아이언캡스 대표 정희원입니······ 네? 어디요? 누가 왔다고요?”

당황한 얼굴의 정희원이 고개를 들어 패널을 보았다. 패널의 자막이 이어지고 있었다.

―테러범의 정체는 과거 ‘패왕’이라 불리었던 초월좌로 알려져······.

······패왕?
잠시 후, 화면 위에 테러범의 신상이 떠올랐다.

―테러범, 패왕 유중혁 (33, 무직)


*


“막아!”

출동한 전경들이 박물관을 봉쇄하며 다가오는 사내를 막아섰다. 하지만 사내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진압봉을 피했다. 새카만 코트가 흩날리며 사내의 손바닥이 움직이자, 달려오던 전경들이 파도처럼 흩어졌다.

“으아아아악!”
“시스템의 힘이다. 빨리 보안 업체에 연락해! 정부 소속 성좌들에게도―”

유중혁의 [주작신보]가 샛노란 불꽃을 튀기며 나아갔다. 걸음마다 새겨진 가공할 열기에 전경들이 기겁하며 물러났고, 유중혁은 어느새 [시나리오 박물관]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멸망한 시대의 성유물들을 보관하는 장소.

민간인들에게는 공개되어 있지 않은 귀중품들을 모아 놓은 장소가 그곳에 있었다. 유중혁의 뒤를 쫓던 전경이 외쳤다.

“어차피 전대의 초월좌일 뿐이다! 박물관 인근에는 북두의 성좌님들께서 합심해 만든 절진이―”

[‘칠성오행진(七星五行陣)’이 발동합니다!]

유중혁은 눈앞을 가로막은 진법의 구성을 살폈다. 칠성과 오행의 순리에 맞게 생문과 사문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무림 계통의 진법. 유중혁의 눈동자가 황금빛 광채를 토하며, 그의 [흑천마도]가 정확히 일곱의 점을 찍었다. 

쿠르르르릉!

“미친, 저게 무슨······!”

멸망의 시대를 잘 알지 못하는 젊은 전경들이 입을 벌렸다. 그들 역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

―20년 전에는, 저 하늘의 별들을 오시하는 인간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야기로만 들었을 뿐이었다. 성좌들과 맞먹는 인간이라니. 그런 인간이 존재했을 리 없다 믿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그 살아있는 증거가 있었다. 
붕괴한 진법 사이로 발을 내딛는 유중혁. 그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가 먼지구름 사이로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패왕,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당신은 성유물 따윌 훔칠 필요가 없을 텐데요.

정부 소속의 화신, 한동훈이었다. 직접 이야기하는 대신 상대의 눈앞에 메시지를 띄우는 것으로 유명한 화신. 
유중혁은 눈앞의 메시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박물관의 첨탑 쪽을 턱짓했다. 첨탑 위에는 작은 배가 상징물처럼 걸려 있었다.

“저 배가 필요하다.”

―저건 모형입니다. 날 수 없는 배에요.

“그건 사용해 보면 알 수 있겠지.”

―당신이 세계 정부에 정기 보고도 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세계 정부는 당신을 묵인했습니다. 멸망의 시대에 당신이 이룬 업적들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입니다.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이쪽에서도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을 한 한동훈의 전신에서 강렬한 투기가 터져 나왔다.
그 역시 시나리오 세대의 생존자.
시나리오가 종료된 무렵에는 ‘그림자의 왕’으로 이름을 알렸던 강자였다.

“나를 막겠다고?”

유중혁이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와 동시에 일대의 인간들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표정이 굳어진 한동훈이 수신호를 보냈다.

―전원 전투 준······!

메시지가 채 이어지기도 전에, 박물관의 지붕 위에 숨어 있던 그림자들이 죽은 매미처럼 떨어졌다.

투둑, 툭······.

추락한 대원들이 벌레처럼 몸을 비틀었다. 몸의 곳곳에 남은 점혈의 흔적. 함께 출동한 화신의 숫자는 물경 삼십을 넘었다. 그런데 그 삼십 명의 정예가, 눈치챌 틈도 없이 당했다.

“비켜라.”

한동훈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1864회차의 시나리오가 끝난 후 지난 20년 간, 그가 아는 최강의 화신은 예언자 안나 크로프트였다. 살아남은 화신들 중 유일하게 성좌에 비견되는 존재. 하지만 그녀가 온다고 해서, 저 괴물을 막을 수 있을까.

―한동훈, 응답하세요. ······한동훈?

달아나지 않으면 죽는다. 한동훈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발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어마어마한 살기가 그의 전신을 옥죄고 있었다. 대체 누가 저 초월좌를 막을 수 있을까. 지금쯤 다른 행성에 있을 무림계 초월좌들? 아니면 세계 투어 중인 성좌들? 아니, 설령 그들이라 해도 무리일 것이다.
눈앞의 괴물은 초월좌들 중에서도 최상격에 이른 존재. 〈스타 스트림〉이 무너진 후, 성좌들은 이제 예전과 같은 힘을 낼 수 없었다. 그러니―

“한동훈 대장! 피하십시오!”

유중혁의 검이 움직인 것과 한동훈이 눈을 질끈 감은 것, 그리고 귀청을 찢는 굉음이 터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무시무시한 마력파가 한동훈의 몸을 밀쳤다. 개연성 후폭풍이 일어날 정도의 충돌을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츠츠츠츠츠······.

부서진 바닥의 홈을 붙잡고 간신히 그 후폭풍을 견뎌냈을 때, 그는 믿을 수 없는 정경과 마주했다.

“시발, 오랜만에 힘쓰려니까 힘들어 죽겠네.”

누군가가, 패왕의 검을 막고 있었다.

[성좌, ‘거짓 종막의 설계자’가 자신의 힘을 개방합니다!]
[‘관리국’의 설화 파편들이 ‘거짓 종막의 설계자’를 지지합니다!]

이 세계에서, 괴물 유중혁을 막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초강자.
그녀의 전신에서 솟아난 보랏빛 마력이 주변을 불길하게 물들였다.

“유중혁, 대체 뭔 뻘짓을 하는 거냐?”

흑염마황 한수영.

“네놈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왜 신경 쓸 일이 아냐? 우리 옛 회귀자께서 무려 테러리스트가 되셨다는데.”
“······.”
“과거의 전우가 타락했으니, 그 갱생을 책임지는 것이 슈퍼히어로의 의무―”

콰아아아앙!

“빌어먹을, 뭐야? 대체 이게 뭔 지랄인데!”
“비켜라. 네놈과 말싸움할 생각 없다.”
“아니, 말을 해. 네놈은 옛날부터 그게 문제야. 2년 동안 멀쩡히 잘 지내다가 왜 갑자기 이러는······.”

쐐애애액!

품속에서 단검을 꺼낸 그녀가 이를 악문 채 유중혁의 공세를 막아냈다. 충만한 검강의 폭격에 그녀의 신형이 조금씩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한수영은 그녀가 밀려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시나리오 박물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저 유중혁이 이곳을 급습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성유물 한두 점 따위 가진다고 해서 더 강해질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그리고 저 유중혁이 탐낼만한 성유물이 이런 곳에 있을 리가······.

그때, 한수영의 눈에 들어온 무언가가 있었다.

“너. 설마.”

그녀의 머리카락이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은은하게 번져가는 불온한 기파. 한수영의 목소리에 차가운 분노가 어리고 있었다.

“저거 때문이냐?”

이글거리는 유중혁의 눈동자. 그 망막 위로 첨탑에 조형된 [최후의 방주]의 상이 맺혀 있었다.	

===

한수영이 외쳤다.

“멍청한 자식아! 잊었어? 이 세계선의 방주는 이미 옛날에―”

유중혁의 검세가 한수영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아차 하는 순간 쥐고 있던 단검이 허공을 날았다. 베인 찰과상에서 핏줄기가 솟았다. 
유중혁의 칼이 그녀의 목을 겨누었다.

“중혁 씨! 잠깐만요!”
“아니 사부! 돌았어? 이게 대체 뭔 난린데!”

뒤늦게 쫓아온 일행들이 싸움을 말리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유중혁은 그들 쪽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검을 그었다. [흑천마도]에서 뿜어져 나온 가공할 마력파가 접근하던 일행들의 한 걸음 앞에 불타는 선을 그렸다.

“아무도 넘어오지 마라. 넘어오면, 모두 벤······.”

콰득!

순식간에 올려 찬 한수영의 왼발이 유중혁의 손목에 적중했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흑천마도]가 궤적을 그리며 바닥에 꽂혔다. 한수영이 말했다.

“유중혁. 너도 알겠지만······ 나는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 흐리는 걸 정말 질색하거든.”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 기분이 꽤 괜찮았어. 정확히는 네가 이딴 짓을 저지르기 전까지는 말이야. ······근 2년간의 평화가 너무 달콤했나 봐. 네가 어떤 놈인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걸 보면.”

끓어오르는 분노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수영은 소설을 읽던 일행들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 이야기를 읽는 동안 안정을 찾아가던 얼굴들.
그녀도, 일행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도······ 이제야 간신히 그날로부터 한 걸음을 내딛을 용기를 얻은 참이었다. 
선을 넘어 다가오려는 정희원과 유상아를 향해, 한수영이 손바닥을 펼쳤다.

“다들 물러나 있어. 아무래도 오늘 이 녀석이랑 끝장을 봐야 할 거 같으니까.”

그 말과 함께 한수영과 유중혁의 신형이 사라졌다. 두 사람이 다시 나타난 곳은 지상으로부터 수십 미터 떨어진 창공이었다.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한수영과 유중혁의 주먹이 격돌했다.

쿠르르르릉!

한수영의 손날이 유중혁의 허리를 가격했고, 유중혁의 오른발이 한수영의 명치를 찼다. 성좌들의 안력으로도 따라가기 힘든 공방이 계속되고 있었다. 한수영의 입가에 피가 맺혔고, 가드를 올린 유중혁의 팔에 피멍이 들었다.
전투를 지켜보던 이지혜가 기어코 자신의 검에 손을 올렸다. 그것을 말린 것은 유상아였다.

“언니?”
“지금은 그냥 두자.”

무언가를 예감하고 있는 듯, 유상아는 일행들을 제지하며 자신의 연화대를 펼쳤다. 곧이어 찾아올 후폭풍으로부터 민간인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다음 순간, 창공의 기후가 변하기 시작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더듬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어둠 속에서 눈을 뜹니다.]

두 사람의 충돌에 오래된 설화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한수영은 온 힘을 다해 유중혁의 주먹을 까부수며 말했다.

“말해. 왜 오늘이야? 지난 2년 동안 가만히 있다가, 왜 하필 오늘 이런 뻘짓이냐고.”
“알 필요 없다.”
“아하, 그러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고집을 굽히지 않는 유중혁을 보고 있자니, 치밀어오르는 화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난 언제나 네가 싫었어. 항상 후회했어. 왜 너 같은 인간의 이야기를, 내 손으로 썼을까.”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
그럼에도 오늘의 한수영은 그 모든 말을 다 토해냈다.

“또 다른 나를 저주했어. 그 이야기가 없었다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누구도 죽지 않았을 거라고. 그리고 김독자도―”

찰나를 파고든 유중혁의 주먹이 말을 끊었다. 굳게 입술을 다문 채 묵묵히 전투를 계속하는 유중혁. 제대로 된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한수영은 왜 유중혁이 [최후의 방주]를 찾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우린 이미 실패했어. 실패하고 돌아왔으면 얌전히 그 사실을 받아들였어야지. 그때 [제4의 벽]이 했던 말 다 잊었어?”

그것을 알았기에 견딜 수 없었다.

「욕심을 부리지 말았어야지. 4 9 % 의 김 독 자를 가 진 것에 서 만 족 했 어 야 지」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제4의 벽]의 목소리.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패배자 같은 소리를 하는군. 너는 그저 포기했을 뿐이다.”

주먹이 부딪칠 때마다 마모된 설화들이 허공에 흩날렸다. 희미한 빛을 뿜는 파편들이 유중혁의 뺨에 내려앉았다.
뒤늦게 유중혁의 망가진 생김새가 눈에 들어왔다. 까치집을 지은 머리카락과 보기 흉하게 더럽혀진 얼굴. 
한수영은 짧은 순간 숨을 삼키며 물러났다. 스치는 기억들이 있었다. 갑자기 오빠가 사라졌다며 울던 유미아. 간신히 복귀한 프로게이머 직을 뿌리치고, 증발해버린 유중혁.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봤어야 했을까.」

유중혁의 오른손에 황금빛 아우라가 집약되고 있었다. [파천붕권]의 오의. 지금의 유중혁은 진심이었다. 한수영은 재빨리 자신의 오른손을 펼쳤다.

[성흔, ‘등장인물 소환’을 발동합니다!]

적어도 이 스킬을 이용해 멀리 날려버리는 거라면―

[해당 인물은 더 이상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뒤늦게 깨닫는다. 눈앞의 유중혁은, 이제 그녀가 썼던 ‘멸살법’의 인물이 아니었다. 
김독자의 종장이 찾아오고, ‘멸살법’의 이야기가 끝난 뒤 유중혁은 이제 ‘등장인물’의 직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허공을 격하고 황금빛 붕권이 날아들었다. 한수영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회피 스킬을 발동했다.
아슬아슬한 일격이 어깨를 스쳤다. 찌릿찌릿 울리는 강권의 후폭풍. 
유중혁이 중얼거렸다.

“······스킬의 힘을 거의 잃지 않았군. 시스템의 가호 덕분인가.”

한수영의 스킬들이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1865회차에서 비형에게 받은 관리국의 설화가 있기 때문이었다. 
무감각한 목소리로 유중혁이 물었다.

“이 세계에는 이제 시스템이 필요 없다. 너는 왜 그 설화를 받아온 거지?”
“당연히 김독자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지.”

그들이 [집단 회귀]를 시도했던 이유 중 하나는 김독자의 아바타가 쇠약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수영이 관리국의 설화를 받아온 것은, 혹시나 김독자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을 우려해서였다.

“뭐하러 그런 짓을 하지? 너도 알겠지만 놈은 다시는 깨어날 수 없다.”
“김독자는 아직 죽은 게―”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왜 나를 막는 거지?”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순식간에 배후를 점한 유중혁의 주먹이 한수영의 등을 내리쳤다. 지상으로 추락한 한수영이 바닥에서 거친 먼지를 토하며 일어났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외쳤다.

“······유중혁, 정신 차려! 네가 이러는 걸 김독자가 원할 것 같아? 김독자가 말했잖아. 이 세계를 버리지 말라고. 네놈도 동의했잖아!”
“그래서 회귀하지 않기로 했지.”
“웃기지 마. 회귀할 수 없게 된 거겠지. 회귀가 아직 존재했다면, 네놈은 또다시 돌아갔을 거잖아!”
“그랬을지도 모르지.”

뿌연 먼지 사이로 유중혁의 황금색 안광이 빛났다. 그 눈이 한수영에게 묻고 있었다.

“너는 다른가?”

한수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그녀의 손안에 남겨진 김독자의 설화들이 대답했다.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슬퍼합니다.]

미처 놓아주지 못한 말들이었다. 이 말들을 어딘가에 써넣으며 그녀는 삶을 견뎌왔다. 회귀하지 마라. 현재를 살아라. 그런 뻔한 과거의 말들을 복기하며, 한수영은 순간순간을 견뎠다. 그렇게 2년이었다.

“아무것도 잊지 못한 것은 너도 마찬가지로군.”
“닥쳐.”

순식간에 도약한 한수영의 주먹이 유중혁의 얼굴을 갈겼다. 두 사람의 주먹이 마주칠 때마다 그들이 공유하는, 함께 쌓아온 설화들이 요동쳤다.

[설화, ‘카이제닉스의 왕’이 동요합니다.]

열심히 견뎌왔다 믿었다. 써 내려간 문장만큼,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고 생각했다.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한수영은 그렇게 생존했다.

「회귀를 해야만 회귀자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한평생을 흘러간 과거 속에서 살아간다.」

주먹의 뼈가 으스러질 때마다 설화가 조금씩 흩어졌다. 어떤 퇴고도 없이 보존된 날것의 기억들. 한수영은 자기도 모르게 흩어지는 설화를 회수했다. 
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단 하나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그녀는 지난 2년간,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숨을 몰아쉬며 한수영이 말했다.

“이제 와서 이러면 뭐가 달라지는데.”
“······.”
“여길 떠나도 김독자는 찾을 수 없어. 그리고 갈 수도 없고.”
“······.”
“어차피 이 세계선의 [방주]는 박살 났어. 최후의 전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벌써 까먹었어? 저건 방주가 아냐. 우리는 이 세계선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두 사람의 힘이 다시 한 번 충돌했다. 쿠드드드,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마력이 폭풍을 만들어냈다. 그 폭풍의 중심에서 유중혁이 말했다.

“그토록 많은 설화들을 모았지만, 나는 아직도 나의 ■■이 무엇인지 모른다.”

허공에서 터져 나가는 맹렬한 설화. 소중한 설화들이 손상되는 것도 아랑곳없이, 유중혁은 주먹을 휘둘렀다.

“네가 나의 이야기를 썼다. 그렇다면 내 이야기가 끝나야 할 장소도 알고 있겠지.”

순간, 한수영의 머릿속에서 문장들이 흘러갔다.

「그 유중혁이, 정말로 [최후의 방주]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왔을까.」

뒤늦은 깨달음이 밀려왔다.
시나리오에 지쳐버린 회귀자는, 사실 시나리오가 있었기에 살아올 수 있었다.
자신의 모든 설화를 끌어모으는 유중혁. 마침내 회귀의 저주에서 벗어난 유중혁의 설화들이 한수영을 향해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전력을 다해라, 한수영.”

「이것이 유중혁의 마지막 싸움이었다.」

전신의 모든 세포들이 경종을 울렸다. 
오랜 삶을 반복해온 회귀자. 
수십 번이고 수백 번이고 묘사해온 눈동자 위에 떠오르는 감정. 한수영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았다.

유중혁은 이곳에서 죽기를 원하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첫 문장을 쓴 존재에게.

“씨발! 넌 한 번도 내 맘대로 움직여준 적 없잖아!”

콰아아아아아!

전력을 개방한 유중혁이 다시 한번 주먹을 휘둘러왔다. 위대한 설화들이 집약된 일격. 대결의 마지막 방점이 찍히려 하고 있었다. 한수영 또한 자신의 모든 설화를 방출했다. 그리고.

마치, 별이 폭발하는 것 같은 굉음이 터졌다.

전신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내지른 오른 주먹의 뼈가 모조리 부서졌다. 일행들의 외침과 사람들의 비명. 귀청이 찢어지는 통증 속에서, 한수영은 충격을 견뎠다. 온몸이 넝마가 되어있었다.

눈앞에, 유중혁이 쓰러져 있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유중혁?”

가볍게 떨리는 유중혁의 손끝. 천천히 눈을 뜬 유중혁이 한수영을 올려다보았다. 한수영은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말을 토했다.

“······암흑성 때랑은 좀 다르지?”

그렇게 말하는 순간, 한수영의 양다리가 푹 꺾였다. 대체 언제 맞은 것일까, 무릎의 뼈가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그렇지도 않은 것 같군.”
“개자식이······.”

두 사람은 나란히 바닥에 엎어졌다. 한수영은 기듯이 유중혁에게 다가갔다. 어떻게든 한 대를 더 때려주지 않으면 성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파들파들 떨리는 그녀의 손이 유중혁의 뒤통수를 가격하려는 순간, 역시나 부들부들 떨리는 유중혁의 오른팔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렇게 허공에서 한참이나 힘 싸움을 하던 두 사람의 팔이, 이내 엇갈리듯 축 늘어졌다. 이제, 정말 조금의 기력도 남지 않았다.

하늘 위로, 두 사람의 설화가 부딪치며 찢어진 상흔이 남았다. 흉측하게 찢어진 하늘 사이로 먼 〈스타 스트림〉의 정경이 비치고 있었다. 밤하늘에 몇 남지 않은 별들이 그들을 향해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한참이나 그 광경을 바라보던 유중혁이 지나가듯 입을 열었다.

“······김독자는 우주로 흩어졌다고 했다.”

잘게 흩어진 김독자의 영혼. 그 작은 파편들 속에는 얼마만큼의 김독자가 있는 것일까. 한수영도 그것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작은 김독자들은 그녀가 알지 못하는 세계선의 어귀에서 무언가로 태어났을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났을 수도 있다. 지구와 비슷한 곳일 수도 있다. 이번에는, 한반도가 아닌 다른 대륙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놈이, 행복해졌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 말을 듣는 순간, 한수영은 무엇인가가 끝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심장 어귀가 지독하게 아파왔다. 뭔가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를 한수영은 똑똑히 들었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는 소리. 그들의 길었던 애도가, 마침내 끝나는 소리. 오직 과거 안에서만 살아온 누군가가 마침내 그 과거를 놓아주는 소리였다. 그 순간 한수영은 기이한 배덕감에 사로잡혔다.

“김독자는······.”

「사실은 녀석이 포기하지 않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모두가 이 오랜 슬픔을 놓아주더라도, 한 사람만큼은 자신의 삶을 망쳐가며 빌어먹을 짓을 계속해주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쿨럭거리는 유중혁의 기침 소리를 들으며, 한수영은 자신이 해야 할 말을 했다.

“분명 잘 지내고 있겠지. 강한 녀석이니까.”
“······.”
“거기서도 나름대로 삶을 꾸리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을 거야. 또 이상한 책 같은 걸 읽고 있을지도 모르고.”
“놈을 찾아가도, 녀석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지.”

그들의 애도는 여기까지였다.
세계선을 넘는 일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설령 그 ‘김독자’를 찾아가더라도, 그들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에게 과거를 강요할 수도 없었다. 환생한 김독자는 김독자가 아니었다. 이제 이 우주 어디에도, 그들이 알던 김독자는 없다.
그럼에도, 한수영은 그 순간 이상한 말을 했다.

“그건 모르지. 녀석이 태어난 곳에도 ‘멸살법’이 있다면.”

순간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멸살법이······.”

그녀의 의지를 거부하듯, 그녀의 입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꿈’이 된 김독자는, 우주 전체로 흩어졌다.」

그녀의 머리가 혼란스러운 문장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 우주는 그런 ‘가장 오래된 꿈’의 상상으로 유지된다.」
「그렇다면, ‘가장 오래된 꿈’은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하지 않으려 했던 생각이었다. 

「“다른 세계선의 아저씨도 책을 좋아하겠죠?”」

정말로, 말도 안 되는 망상이었다.
그럼에도 한수영은 그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저 먼 우주의 건너편에서, 자신이 모르는 표정으로 누군가의 소설을 읽고 있을 김독자.

“그 녀석은······ 아직도 이 이야기의 결말을 궁금해할까?”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만약, 우주에 흩어진 무수한 ‘김독자’들이 동시에 어떤 이야기를 읽게 된다면······.”

「왜 성좌들은 자신의 설화를 널리 알리려 하는 것일까.」
「어째서, 이 세계의 기반은 ‘이야기’인가.」

“자신이 ‘가장 오래된 꿈’이란 걸 잊은 그 모든 김독자들이, 모두 같은 이야기를 꿈꾼다면.”

다른 세계선에서 환생한 김독자들의 삶을 망치지 않으면서, 김독자를 되찾을 방법. 
한수영은 몽롱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이 꿈꾸는 이야기가······ 우리가 원하는 이야기와 같다면······?”

상념이 깨진 것은 머리 위로 드리워진 새카만 그림자 때문이었다.

“공원을 만들 장소였는데, 두 사람 덕분에 난장판이 되어버렸군요.”

언제부터였을까, 안나 크로프트가 그곳에 서 있었다.

“또다시 세계선을 넘을 생각입니까?”

안나 크로프트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한수영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망상을 한 것인지 깨닫고 부끄러워졌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다른 세계선의 김독자들에게 자신이 쓴 소설을 꿈꾸게 만든다니, 헛소리도 그런 헛소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 세계에는 이제 세계선을 넘을 방법이 없다.
그런데 안나 크로프트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붉게 빛나는 안나 크로프트의 눈동자. 그녀의 시선이 박물관의 첨탑을 향해 있었다. 
[최후의 방주]의 모형. 
천천히 심장이 뛰었다.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가능할 리가 없는데······ 어째서.

쿠구구구구.

아주 천천히, 박물관 위의 모형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눈을 부릅뜬 유중혁이 어느새 몸을 일으켜 그쪽을 보고 있었다.

방주. 그 크기는 무척 작았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방주였다.

“혹시 몰라 20년 동안 부품을 모아서 고쳐봤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한 번은 당신들을 찾아가 보고 싶어서. 쓸 수 있는 부품이 많지 않아서 제대로 복원하진 못했지만······.”

천천히 부상한 방주가 캡슐처럼 열리더니 자신의 내부를 드러냈다. 혼자만이 간신히 탈 수 있을 듯한, 아주 작은 [최후의 방주].

“사용할 수는 있습니다. 단, 탑승할 수 있는 건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

Epilogue 5. 영원과 종장



한수영과 유중혁은 들것에 실려 김독자가 있는 병원에 입원했다. 
이설화의 잔소리를 한바탕 들으며, 한수영은 머릿속으로 생각한 계획들을 차분히 정리했다. 그리고 정확히 한 시간 뒤, 그녀는 가능한 정확한 단어와 비약 없는 문장으로 일행들에게 그것을 전달했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이 정확히 말한다고 해서 듣는 사람이 그걸 정확히 듣는다는 법은 없다. 고로 일행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뭘 하자고?”

정희원은 그렇게 되물었고, 신유승과 이길영은 자그맣게 입을 벌렸다. 
한수영이 말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지금 무슨 말 하는 건진 알고 있는 거지?”
“······어? 이해했냐?”
“또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어. 2년 전 기억을 벌써 잊었어? 집단 회귀 때 우리가 어떻게 됐는지······.”
“회귀하자는 게 아냐.”
“그거나, 그거나! 또 세계선을 넘게 되면―”
“다른 세계선의 미래를 뒤틀어버리자는 게 아니라고. 무슨 말인지 알고 있잖아. 그냥 그쪽에 소설 하나를 전해주자는 것뿐이야.”

묵묵히 대화를 듣던 이지혜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다른 세계선의 독자 아저씨한테 이쪽에서 쓴 소설을 보여주자는 거죠? 제가 이해한 게 맞아요?”
“그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

한수영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가장 오래된 꿈’은 김독자야. 그리고 그 김독자는 잘게 부서져서 세계선 전역으로 흩어져 다른 존재로 환생했어. 여기까진 이해하지?”
“······F 좀 받았다고 내가 진짜 바본 줄 알아요? 그래서요?”
“중요한 건 여기서부터야. 새롭게 환생한 김독자는 더 이상 ‘김독자’가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가장 오래된 꿈’도 아닌 건 아냐. 본인들은 모르겠지만, 그 영혼들은 여전히 이 우주를 유지하는 ‘가장 오래된 꿈’이야.”

그들이 마지막으로 [최후의 벽]에서 탈출했을 때, 지하철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주의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즉, ‘가장 오래된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때 김독자였던 영혼들은 이제 전 우주로 흩어져 환생했고, 환생한 곳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 우주들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유상아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상상력을 이용하자는 거군요.”
“가장 오래된 꿈의 상상은 곧 현실이니까.”
“환생한 독자 씨들에게 우리가 원하는 결말을 꿈꾸게 한다······.”
“맞아. 우리가 상상의 원천을 제공하는 거지. 이 세계의 결말을 그들이 꿈꿀 수 있게.” 

한수영은 일행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야. 다른 세계선에서 태어난 누구도 해치지 않을 거야. 그냥 우린, 그 녀석들이 어떤 이야기만 읽게 만들면 돼.”

세계선에 흩어진 수많은 김독자들을 상상한다.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태어났을 이들. 
그들을 만나는 것도, 그들을 데려오는 것도 이젠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 일행들이 바랄 수 있는 것은 오직 기적뿐이었다. 
그들이 기억하는 김독자를 다시 불러올 기적.
허구라도 좋으니,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그가 자기 자신의 행복을 상상해준다면.

그 수많은 ‘김독자’들이, 단 하나의 우주를 상상해준다면.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일행들의 얼굴에 비슷한 표정들이 떠올라 있었다. 
그런 계획이 실현 가능할 리가 없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불가능한 난관이 몇 개나 있었으니까. 
일행들을 대표해서 입을 연 것은, 30분 전 귀국한 이현성이었다.

“수영 씨.”

유중혁과 한수영의 소식을 듣고 황급히 한국으로 돌아온 이현성. 언제나 정의와 투지로 타오르던 그의 눈동자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는 지쳤습니다. 이제 희망이 두렵습니다.”

사람을 정말 지쳐버리게 만드는 것은 절망이 아니다. 이루어질 듯 말 듯, 끝까지 이루어지지 않는 희망이다. 
한수영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천천히 말아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알아. 그래서 부탁하는 거야.”

부탁이라는 말에 이현성의 눈가가 흔들렸다. 
한 번도, 한수영은 그에게 그런 표현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나도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건 알아. 그러니까 이건 그냥······ 일종의 의식이야. 지나간 일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 내가 남은 생을 어떻게든 잘 살아가기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이야.”

정희원이 물었다.

“······우리가 뭘 도와주면 되는데?”

한수영은 대답 대신 병실의 간이 책상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은 뒤 텍스트 파일 하나를 열었다. 일행들도 잘 알고 있는 파일이었다. 
아직 제목이 ‘무제’로 남아 있는 소설. 
한수영은 천천히, 그 소설의 제목을 타이핑했다.


*


그날부터 한수영은 일행들과 함께 집필에 착수했다. 한수영이라고 해서 모든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있지는 않았기에, 이야기의 완성을 위해서는 일행들의 기억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을 독자 아저씨한테 읽힌다······ 근데 어떻게 읽게 만들죠?”
“아무런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읽게 만들어야 해. 자신이 이 세계를 상상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엄청 재밌는 이야기를 써야겠네요.”
“독자 형은 재미없는 소설도 끝까지 다 읽었다며. 대충 써도 읽어주지 않을까?”

깐죽거리는 이길영을 보며, 한수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혹시 모르니 최선을 다해봐야지. 다른 세계의 김독자는 인내심이 별로 없을지도 모르니까.”
“저도 도울게요!”
“나도! 누나 요즘 10대들 어떻게 말하는지 모르지?”

소설은 주로 김독자의 병실에서 작성되었다. 한수영은 학교에서 강의를 한 후, 틈이 날 때마다 김독자의 병동을 찾았다. 다른 일행들 역시 돌아가며 병실을 찾아왔다.

“늦어서 미안해요. 내일 발표가 있어서―”
“끝나고 나서 도와줘도 돼.”
“안 돼요. 오늘 내 각성 장면이잖아요!”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였다. 이지혜는 한수영이 쓴 지난 원고를 살피며 계속해서 조잘댔다.

“와, 여기 진짜······ 하, 나 진짜 죽을 뻔했었는데.”
“······.”
“크으, 여기 다시 봐도 쩐다. 언니, 혹시 또 나 나오는 장면······.”
“자꾸 방해할 거면 그냥 가라 너.”
“아 왜 그렇게 쌀쌀맞아요? 나 설정 오류도 찾아왔는데.”
“오류? 어디?”
“나 이렇게 말 한 적 없어요!”

이지혜가 화면을 가리켰다. 곁눈으로 이지혜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본 한수영이 말했다. 자세히 보니 극장 던전에서 이지혜가 말하는 장면이었다.

“피치 못할 각색도 좀 있으니까 실제랑은 약간 다를 수도 있어. 근데 거긴······.”

「“네가 왜 혼자야? 우린 함께라고! 아니 잠깐만······ 네 곁엔 늘 내가 있잖아! 희망을 잃지 마! 우리 아이를 생각······!”」

“우리엘이 알려준 그대로 쓴 건데.”

하루, 이틀, 사흘. 문장은 착실하게 쌓여 갔다.
과거의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으면 잠든 김독자의 볼을 한 번씩 쭉 잡아당겨 보기도 했다. 그러다 괜스레 원망이 커질 때면, 이상한 내용을 소설에 적기도 했다.

「“못 생긴 왕을 찾아!”」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자기 이야기인 줄도 모를 테니까.
일행들은 고해성사라도 하듯 돌아가면서 병실을 찾아왔다.

“사실 이때 독자 씨 욕을 좀 했는데······.” 
“아, 방금 그건 쓰지 마. 알겠지? ······쓰지 말라니까.”

그들은 여전히 많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듯했고.

“아니, 누나! 내가 형을 존경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광신도처럼 표현해놓으면 어떡해?”

자신이 그 이야기를 아직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는 듯했다. 
종종 울거나, 앞으로 써야 할 이야기의 단상들을 모아놓은 메모들을 읽기도 했다. 
신유승이 물었다.

“근데 회귀는 왜 이렇게 부정적으로 표현한 거예요?”
“그 세계에서 김독자 인생은 한 번뿐이니까. 이거 보고 이상한 영향 받을 수도 있잖아. 아직 어린애일 수도 있는데.”

한수영의 말에 신유승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우린 회귀했잖아요. 그럼 이 부분은 사실과 다르게 쓰는 게 좋을까요?”
“아니, 그냥 쓸 거야.”
“네? 왜요?”
“인간은 누구나 회귀자거든.”

얼마 전 유중혁과 싸우다 떠올린 문장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신유승이 알아들을 거라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가만히 문장을 바라보던 신유승이 창밖의 풍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회귀는 이 세계선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어요. 가끔 생각하면 꼭 어젯밤의 꿈처럼 느껴져요. 현재를 바꾸지 못한 과거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망상은 차이가 뭘까요?”

조금 놀란 한수영이 떨떠름하게 입을 뻐끔거리자, 신유승이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했다.

“너무 어렵게 썼다가 독자 아저씨가 못 알아들으면 어떡해요?”
“······김독자는 알아들을 거야.”
“은근히 아저씨 믿으시네요.”
“방해할 거면 이제 그만 가.”
“저 그동안 있었던 일들 모두 정리해 왔어요! 전에 물어보셨던 ‘범람의 재앙’에 관해서도······.”

모두가 신유승처럼 협력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일행들은 글쓰기에 방해만 됐다. 예를 들면 장하영의 경우.

“야! 나 2부 주인공이라며! 비중 뭔데? 장난치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네가 진짜 주인공은 아니잖아.”
“아 그래도!”
“외전으로 써줄게. 분량 빵빵하게.”
“콜.”

침대차를 밀며 지나가던 이설화도 한마디를 했다.

“보통 이런 이야기에서 힐러들은 그냥 힐셔틀이더라구요.”
“······이설화 외전도.”

거기에 학교를 땡땡이치고 찾아온 이길영과 억울하다는 듯 아우성을 치는 이현성까지.

“내가 아바돈과 계약하면서 겪었던 일들이 다 생략됐잖아! 그리고 내 스킬이 얼마나 많은데 난 뭐 맨날 바퀴벌레만―”
“제 군생활 이야기가 완전히 편집됐습니다! 제가 이병때 일부터 열심히 설명해드렸는데······!”
“다들 그만 좀 해! 이건 김독자가 주인공인 이야기라고. 너희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야.”

한수영의 소식을 들은 성좌들도 하나둘 찾아왔다. 
예를 들면,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무장하고 정체불명의 문서를 한가득 안은 우리엘.

[이런 걸 쓰고 있었으면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줬어야지. 내가 이만큼이나 방대한 자료를 갖고 있는데!]

“······이 자료 믿을 수 있는 거 맞아? 이지혜가 말해준 거랑 다르던데?”

[아니, 뭐, 쪼오금 틀릴 수도 있지만, 이 우주는 넓고, 많은 세계선에 많은 김독자가 살고 있고―]

이어서 제천대성.

[내 설화에 관해 쓸 거라면 서유기 완역판 정도는 읽었겠지?]

“만화로 읽었어.”

[그럼 서유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겠군.]

“삼장법사 아니냐?”

심연의 흑염룡.

[실망이군. 내 진명은 까먹은 거냐? 왜 2부가 됐는데도 내 진명이―]

“알려준 적 없잖아. 그리고 알려주지도 마.”

그렇게 대략 250화가 넘는 분량의 초고를 완성했을 무렵, 한수영은 누적된 피로로 거의 탈진할 지경이 되었다. 이렇게 힘들게 소설을 쓰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많았고, 퇴고가 필요한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분량을 쌓는 것이 먼저였다. 왜냐하면······.

―한수영, 이번 주 토요일이에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

본래였다면 초고가 완성되는 시일은 길게 잡아 2년 남짓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선에는 그만한 여유가 없었다.

―시스템이 힘을 잃는 속도가 너무 빨라요. 이번 주를 넘기면 이제 방주를 쏘아 올릴 설득력이 부족해질 수 있어요.

결국, 한수영은 2부까지의 원고를 탈고한 시점에서 1차 전파를 시작하기로 했다. 
드디어 원고 발송이 시작된다는 이야기에, 일행들도 들뜬 분위기였다. 
유상아가 물었다.

“파일은 어떻게 담아갈 거죠? USB?”
“여러 수단을 준비하긴 할 건데······ 기본적으로는 설화의 형태로 가져가야 해.”
“전달은 누가 할 건데요?”
“당연히 나지.”
“안돼요. 수영 씨가 가면 이곳의 독자 씨는 어쩌고요?”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김독자라 해도, 그 역시 김독자다. 
만약 김독자에게 무슨 일인가 생겼을 때 관리국의 설화를 가지고 있는 한수영이 없다면, 그의 본체가 붕괴할 수도 있다. 유상아가 말했다.

“내가 갈게요. 나는 독자 씨가 환생한 세계선의 좌표를 알고 있어요.”

그러자 정희원이 만류하며 나섰다.

“상아 씨는 여기 지켜야지! 내가 갈게. 좌표 알려줘.”
“아냐! 형은 내가 만나러 가겠어!”
“당연히 아저씨의 화신인 내가 가야죠!”
“아니지, ‘구원의 마왕’에 관해서라면 제일의 권위자인 내가······!”

이길영과 신유승, 심지어 장하영까지 나서자 장내는 난장판이 되었다. 성좌들도, 화신들도 서로 자기가 가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런 일행들을 보며, 유상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쉽게 말할 일이 아니에요. 세계선을 넘는 게 위험한 일이란 건 다들 알고 계시죠?”
“그거야······.”
“제가 추적한 게 맞다면 세계선의 좌표는 우주의 최외곽 지대에 있어요.”
“최외곽 지대?”
“‘시나리오’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세계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김독자가 환생한 세계가 어떤 곳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곳의 지구와는 근본 체계부터가 다를 수도 있었다.

“시스템의 가호가 지금보다 훨씬 더 약해질 수도 있어요. 그럼 스킬이나 성흔의 힘도 자연히 약해지겠죠. 항해 거리도 만만치 않을 거고요.”

이야기를 듣던 안나 크로프트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는 허공에서 시험 비행 중인 방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1인용으로 만들어진 거라 설비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특히 암흑 단층을 지날 때 후폭풍을 견디는 게 만만치 않을 겁니다. 아주 강한 정신력을 가진 존재여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계의 신격’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이계의 신격. 그 말에 몇몇 일행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을 쫓아오던 ‘심연을 좇는 사냥개’들을 떠올린 것이다. 
심지어 안나 크로프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혼이 흩어진 세계선도 너무 많습니다. 적어도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 번 이상 세계선을 넘어야 할 수도 있는데······ 다들 그만한 각오는 된 겁니까?”

수십만 번. 하루에 세계선을 하나씩 넘는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따지면 몇백 년이 넘는 항해가 될 수도 있었다. 아무리 김독자를 위해서라고 해도, 그만한 세월을 미치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너희들은 무리다.”

시스템의 가호를 최소한으로 받아도 생존할 수 있는 사람.
아득한 시간의 격류 앞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사람.
그리하여, 일행들 중 이 미션을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

“내가 가겠다.”

탑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


마침내 최후의 방주의 이륙일이 다가왔다. 
한수영은 멀리서 한창 출발 준비 중인 유중혁을 보고 있었다.

“이딴 건 입지 않는다.”
“패왕, 입어야 합니다. 당신도 이제 예전과 달라요.”

5년 전의 김독자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광경이었다. 예언자가 회귀자를 챙기고 있다고 말하면, 그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할까.

“정말 귀찮게 하는군.”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만,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초월좌라고 해도 시스템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게 아닙니다. 초월좌는 시스템에 대립하며 성립하는 존재. 시스템이 사라지면 초월좌의 힘도 조금씩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유중혁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안나를 노려보다가, 이내 장비를 하나둘 걸치기 시작했다.

“전투에 불편한 복장이다.”
“싸우러 가는 게 아니잖습니까.”

두툼한 우주복을 입고 뚱뚱해진 유중혁의 모습은 그야말로 볼 만했다. 한수영이 놀리듯 말했다.

“잘 어울리네.”
“······시끄럽다.”
“잘 생각해. 진짜로 갈 거야?”

출항을 앞둔 이 시점까지도, 한수영은 여전히 확신이 없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 일은 아닐까.」

이번 항해는 지금까지의 회귀나 세계선 도약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과거를 바꾸지도 않을 것이고, 다른 세계선에서 [최후의 벽]을 열 재료를 탈취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번 여행은, 말하자면 순례행에 가까웠다. 그들이 그토록 찾아온 사람을 기리는 순례행.

“원고를 내놔라.”
“그놈의 말버릇은 회귀를 멈춰도 그대로네.”

한숨을 내쉰 한수영이 오른손을 펼쳤다. 그동안 그녀가 개발한 성흔의 힘이 그 손끝에 감돌고 있었다.

[성흔, ‘클라우드 시스템’이 발동 대기 중입니다.]

언젠가 [제4의 벽]이 김독자에게 파일을 줬던 것과 흡사한 방식. 
불확실하지만 세계선을 넘어 소통할 수 있는 [예상 표절]의 힘을 발전시켜 만들어 낸 성흔이었다.

“이 성흔을 가지고 있는 사람끼리는 원고 공유가 가능해. 몇 번이나 지구를 왕복하긴 힘들 테니까, 클라우드로 원고를 계속 보내줄게.”
“네놈의 고유 성흔을 배우란 거냐? 지금 그럴 시간이―”
“시간이 없지. 하지만 이 성흔은 금방 배울 방법이 있어. 너 지금 배후성 없지?”

순간, 유중혁은 한수영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깨달았다.

“네놈 지금―”
“나라고 좋아서 이러겠냐?”

유중혁은 인상을 찌푸린 채 자신의 특성창을 띄웠다.
그의 성흔인 [회귀]가 사라질 때, 그의 배후성도 함께 사라졌다.

+

배후성(背後星) : 없음

+

그는 이제, 완전한 자유의 몸이었다.

“나보다 나약한 놈을 배후성으로 삼으란 건가?”
“전에 내가 이겼잖아.”
“무슨 헛소리인지 모르겠군.”
“또 붙어 볼래?”

한 마디도 안 지겠다는 듯 다투면서도, 두 사람은 [배후 계약서]에 사인을 마쳤다. 이 방법이 최선이라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성좌 ‘거짓 종막의 설계자’가 화신 ‘유중혁’의 배후성이 되었습니다!]
[화신, ‘유중혁’이 성흔 ‘클라우드 시스템’을 계승했습니다.]
[두 존재의 가상 클라우드가 연결되었습니다!]

“살다 보니 이런 날이 다 오네. 김독자 그 자식한테 말해줘야 하는데.”
“귀환하게 되면 네놈을 죽이고 배후 계약부터 해지할 것이다.”
“그럴 수 있으면 한번 해 봐.”

그 말은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명심해. 절대 다른 세계선을 파괴하지 마. 그냥 이야기만 퍼뜨리면 돼. 그 세계의 김독자가 읽을 수 있게.”
“알고 있다.”
“죽지 마라.”
“금방 오겠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걸 구태여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오빠.”

울먹거리는 유미아가 유중혁의 우주복을 붙들었다.

“거짓말! 안 돌아올 거잖아! 못 돌아올 거잖아!”
“나는 너를 두고 죽지 않는다.”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는 유미아의 어깨를 한수영이 굳게 쥐었다. 천천히 허리를 숙여 동생과 눈을 맞춘 유중혁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한다.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돌아서는 유중혁이 한수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미아를 잘 부탁한다.

유중혁은 그 뒤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최후의 방주]에 탑승했다. 안나 크로프트의 신호와 함께, 방주의 시동이 걸렸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일행들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는 방주. 콕피트가 닫힌 방주 안으로 일행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헐떡거리며 달려온 이지혜가 이륙을 시작한 방주를 올려다보았다. 

“인사 안 해?”
“지금 인사하면 왠지 마지막 인사 같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이지혜의 눈은 이미 그렁그렁한 상태였다. 다른 일행들도 방주를 올려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상아가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은 소설 속에 모두 있으니까요. 중혁 씨도 언젠가 그걸 읽겠죠.”
“쟤가 읽는 게 뭐 중요해요. 형이 읽는 게 중요하지.”

이길영, 신유승, 정희원, 이현성, 장하영, 유상아, 이설화, 이수경, 공필두. 거기에 성좌들까지. 모두가 방주의 비행을 지켜보았다. 신유승이 물었다.

“독자 아저씨가 정말 우리 이야기를 읽어줄까요?”

모른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작전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고, 유중혁은 아무런 수확도 없이 돌아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그저 먼 우주의 먼지로 사라질 수도 있다.
떠나는 유중혁 역시 그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중혁은 떠났다. 유중혁 그 자신을 위해서. 혹은 일행들을 위해서.

“김독자라면 읽겠지.”

적어도 유중혁을 기다리는 동안, 이곳의 사람들은 그의 소식을 기다리며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나랑 약속했거든.”

은하를 향해 도약하는 방주의 불꽃. 다른 외계를 향해 쏘아져 나가는 탐험선을 보듯이, 일행들은 멀어지는 방주를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그들의 생으로 쓴 이야기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


[‘방주’가 대기권에 진입합니다.]
[사용자 유중혁의 목적지 설정을 기다립니다.]

유중혁은 유상아가 알려준 세계선의 좌표들을 입력했다. 가장 가까운 세계선 좌표조차 까마득하게 떨어진 곳이었다. 유상아의 말대로, 그곳에는 〈스타 스트림〉이 없을지도 모른다.

[차원 가속을 시작합니다.]
[필요한 에너지의 일부를 코인으로 대체합니다.]

다른 세계선에서 모아온 코인들이 에너지원으로 투입되었다. 시스템이 약화되면서 코인 또한 가치를 잃었지만, 그래도 한때는 이 세계에서 가장 강대했던 설화였다. 지구의 모습은 어느새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세계선 도약을 위해 암흑 단층을 통과합니다.]

유중혁은 유상아의 말을 떠올렸다.

―독자 씨가 환생한 세계선들은 굉장히 멀리 있어요. 평범한 방식으로 세계선 도약을 했다간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는 뜻이에요.

김독자가 환생한 세계는 ‘멸살법’의 바깥. 이 세계선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난 곳이었다.

―아마 세계선을 도약할 수 있는 ‘문’을 경유해야 할 거예요.

얼마나 지났을까. 전방에 하나둘 거품 같은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색의 거품들이 심상치 않은 기류 속에 부풀었다 줄어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불온한 감각. 유중혁은 이 감각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았다.

츠츠츠츠츠······.

‘이계의 신격’의 부왕(副王)이자, 세계선을 넘는 차원문의 주인. 언젠가 김독자에게 1863회차의 문을 열어주었던 존재. 유중혁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눈앞의 대상은, 시나리오를 모두 클리어 한 그조차도 긴장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너 는 ······ 모 략 이 아 니 군】

거품의 바다 사이로 거대한 눈동자가 보였다. 유중혁은 그 눈을 피하지 않은 채로 방주의 속도를 높였다. 최외곽지대의 세계선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길 지나쳐야 했다.

【그 곳 은 이 야 기 의 바 깥 이 다】

“상관없어. 비키지 않으면 베겠다.”

유중혁은 자신의 모든 설화를 갈아 넣으며 방주를 돌진시켰다. 부왕은 딱히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대신, 공허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따름이었다.

【꿈 의 바 깥 을 꿈 꾸 는 자 여 네 가 꾸 는 꿈 은 이 룰 수 없 다】

문과 충돌하는 순간 눈앞의 시야가 이지러졌다. 유중혁은 이를 악문 채 자신을 덮쳐오는 폭풍을 견뎌냈다.
맹폭한 스파크가 그의 전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유중혁은 전신이 산산이 으깨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비명을 참았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봐도 되냐?

어지러워진 머릿속으로, 한수영의 목소리가 흘러갔다.

―넌 왜 그렇게까지 김독자를 구하려 하는 거냐? 이미 동료는 많이 잃었을 텐데.
―동료를 많이 잃어봤다고 해서 상실이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방주의 내부에서 폭음이 터졌다. 부서진 기기의 파편들이 우주를 부유하고 있었다.

―놈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있다.

다시 한번 굉음이 울려 퍼지며, 뭔가가 유중혁의 폐부를 찔렀다.

[세계선 좌표를 읽는 데에 실패하였습니다!]
[경고합니다! 좌표 인식 장치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선체 내부의 온도 조절 장치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
.
[선체의 항해 시스템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순식간에 터져 나온 스파크가 유중혁의 전신을 점령했다. 시야가 하얗게 물들며 의식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유중혁은 우주의 미아가 되어있었다.	

===

「표류 4일째.」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유중혁은 자신의 복부를 찌른 날카로운 파편을 발견했다. 유중혁은 침착하게 파편을 제거하고 선체를 점검했다.

「표류 6일째.」

유중혁은 방주가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법 시스템은 먹통이었고, 주변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는 가까운 행성조차 보이지 않았다.

「표류 11일째.」

방주에 내장되어 있던 몇몇 안전장치들이 소멸하면서, 유중혁의 몸에도 이상이 발생했다.

[시스템의 항상성이 깨진 상태입니다!]
[혼돈의 힘이 당신의 전신을 침식합니다.]
[당신의 설화가 조금씩 붕괴하고 있습니다.]

뭔가 문제가 발생했는지, 시스템을 통해 구현된 기능들이 모두 마비되었다. 유중혁은 차분하게 자신의 설화들을 점검했다. 다행히 그의 설화들은 모두 무사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당신을 감쌉니다.]

지옥의 불길이 추위로부터 그의 몸을 보호해주었다.

「표류 21일째.」

안나 크로프트가 입혀준 우주복은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우주복에 내장된 보호 기능이 아니었다면, 육체가 망가지는 속도가 훨씬 빨랐을 것이다.
유중혁은 어떻게든 방주의 동력원을 고쳐냈다. 썩 훌륭한 솜씨는 아니었지만, 방주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충돌로 인해 비축해두었던 연료통이 폭발해서, 방주는 이제 그의 설화 에너지를 사용하게 되었다.
자동 항법 장치와 자율 항해 시스템은 고치지 못했다. 이제 그는 직접 운항을 해야 했다.

「표류 34일째.」

어떻게든 다시 항로를 찾아야 했다.

「표류 42일째.」

설화를 소모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차 몸에 피로가 누적되었다. 깜빡 정신을 잃는 기간이 늘어났다. 어둠이 그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었지?

일순간 목적이 흐릿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어떤 이야기를, 환생한 김독자에게 전하기 위해서. 일행들이 기억하는 김독자를 되살리기 위해서. 
왜? 김독자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게 무엇이었더라.

「표류 58일째.」

방주의 창에 비친 추레한 얼굴. 그 얼굴을 바라본 순간, 유중혁은 잊고 있었던 질문이 무엇인지 떠올렸다.

―시나리오가 끝난 후의 세계에서, 그는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맞다. 그것을 김독자에게 물어보려고 했었다. 녀석은 무엇이든 알고 있었으니까.
항상 마지막을 생각하고 있는 김독자. 모든 것을 계획하고, 어떤 이야기의 결말을 보기 위해 자신의 생을 던지는 걸 마다하지 않는 인간. 
그런 놈이라면 알 것 같았다. 
김독자라면, 유중혁 그 자신보다도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회귀가 끝난 회귀자는, 이제 무엇이 되는가.

이지혜는 밤마다 악몽을 꾼다고 했다. 

그에게 삶은 이미 오래전부터 악몽이었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어쨌거나 그가 이루지 못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목표는 이제 사라졌고, 시나리오는 끝이 났다.

회귀자 유중혁은 자유가 되었다.

하지만 비로소 얻은 자유 앞에서, 유중혁은 자신이 결국 무엇을 얻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표류 83일째.」

표류가 길어지면서 피부의 표면을 덮고 있던 설화들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우주 바깥으로 흩어지는 설화의 양이 점점 늘어났다. 
항해는 계속되었지만, 그는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표류 102일째.」

유중혁은 한수영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을 읽으면, 이 시간을 조금은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표류 111일째.」

김독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유중혁은 희미한 기대감을 가졌다. 
이 이야기 속의 김독자라면 그의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에피소드부터 차근차근, 유중혁은 김독자의 삶을 따라 읽었다. 
그가 알고 있는 내용도 있었고, 모르는 내용도 있었다. 어떤 문장에 이를 때면 독서를 멈추기도 했다.

「주인공과 조연들이 ‘그 후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의 문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홀로 이야기의 마침표 뒤에 남겨진 기분. 허무함과 배신감 속에서, 어린 나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몸부림쳤다.」

행복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유중혁은 그 단어가 몹시 낯설었다. 한때는 알았는지도 모른다. 어렴풋이 엿본 0회차의 기억에서, 그런 감정을 느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그의 삶이 아니었다.

「표류 128일째.」

오직 ‘멸살법’에 의존하며 삶을 연명하는 김독자의 모습이 그에겐 낯설었다. 몇 번을 읽어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작 이야기 따위가, 어찌 삶을 지탱할 수 있는가.

「표류 154일째.」

유중혁은 조금씩 소설 읽기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자주 다시 읽는 대목도 생겼다. 

「나는 적당한 기름기가 도는 뒷다리를 잡고, 통째로 살점을 뜯었다. 살점 사이로 은근하게 배어 나오는 육즙······ 나는 씹는 것도 잊은 채 눈을 감았다. 역시 책으로 읽는 것과 실제로 맛보는 건 다르구나.」

이제 막 시나리오에 진입한 김독자와 일행들이 땅강아쥐 고기를 구워 먹는 장면이었다. 우주복 안의 코트에서 육포를 꺼낸 유중혁은, 그 대목을 다시 읽으며 육포를 뜯었다. 천천히 눈을 감으며 육질을 씹자, 지하철의 음습한 어둠 속에서 일행들이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표류 155일째.」

다시 눈을 떴을 때, 유중혁은 혼자였다.
잠시 멍하니 있던 유중혁은 다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표류 211일째.」

유중혁은 혼자서 그 이야기를 계속해서 읽었고.

「표류 258일째.」

다시, 이야기를 읽었다.

「표류 279일째.」

유중혁은 김독자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표류 316일째.」

[당신의 설화들이 당신의 감정을 흡수합니다.]

한수영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소모된 그의 설화들이 잠깐씩 생기를 되찾았다. 소모되는 속도를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이 이야기를 읽지 않았더라면 여기까지 버틸 수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만 버틸 수도 없었다.
소설 속의 김독자가 말하고 있었다.

「“그러게, 끝까지 읽었어야지.”」

어떤 이야기를 끝까지 읽는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유중혁은 그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표류 333일째.」

불현듯 유중혁은 자신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깨달았다.

「“설령 세계를 구해내도, 너는 구원 받을 수 없을 거다. 네가 세계를 구한 순간, 네가 버린 세계들이 너를 덮쳐올 거다. 하나의 세계를 구해도, 네가 버린 다른 모든 세계가 네놈을 지옥으로 끌고 갈 거라고.”」

먼 우주를 바라보며 유중혁은 생각했다.
만약 지금이 1회차나 2회차였다면 어땠을까. 지난 생의 기억들을 모조리 잊었다면. 다른 회차의 삶에 대해 전혀 몰랐다면, 그는 지금처럼 헤매지 않고 답을 찾아냈을까. 지금처럼 고통받지 않아도 되었을까. 
다른 이야기들처럼 ‘행복한 결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을까.

죽지 않기 위해 살아갈 수 있었을까.

쿠구구구구구.

방주의 선체가 진동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주변으로 기감을 높이자, 후방에서 급습해오는 막대한 에너지의 후폭풍이 느껴졌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우주를 새하얗게 덮어오는 무리가 보였다. 그도 익히 아는 존재들이었다.

【오오오오오오오······!】

세계선에서 버려지고, 시나리오에서 배척된 존재들.
어마어마한 ‘이계의 신격’의 파랑이, 이쪽을 향해 군집을 이룬 채 밀려오고 있었다.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공포의 냄새. 그들은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다.

콰드득!

후방을 달리던 ‘이름 없는 것들’ 하나가 꿰뚫렸다. 족히 수천 개체는 되어 보이는 ‘심연을 좇는 사냥개’들이, 양 떼를 몰 듯 ‘이계의 신격’들을 쫓아오고 있었다. 
‘이름 없는 것들’이 사냥당할 때마다 해일 사이로 막대한 스파크가 발생했다. 점점 더 커지는 에너지의 폭풍. 이대로라면 휩쓸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살려살려살려살려살려살려】

기어코 해일의 선발대가 방주를 추월했다.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이름 없는 것들’. 두족류를 닮은 그것의 눈동자가 흘끗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콰지직!

사냥개의 송곳니에 힘없이 몸통을 꿰뚫린 괴물. 그 괴물이 뿜어낸 새카만 설화 덩어리가 콕피트의 창문에 물감처럼 번졌다. 두족류의 괴물이 원망스럽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스러지고 있었다. 
언젠가의 유중혁 또한 본 적이 있는 눈이었다.

「“그럼 나와 다른 사람들은 뭔데? 지혜 언니는, 현성 오빠는. 그리고 설화 언니는? 당신만을 위해서 싸웠던 사람들은, 당신에게 대체 뭐였는데?”」

그 순간, 유중혁은 자신의 ■■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회귀를 끝낸 회귀자는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그가 정말로 도달해야 할 결말은 무엇인지.
애초에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방주의 콕피트를 개방합니다.]

콕피트를 열자마자 그를 향해 사냥개가 달려들었다.
유중혁은 [흑천마도]의 손잡이를 역수로 붙잡은 채 사냥개의 목을 날려버렸다. 갈라지는 이계의 파도가 그를 할퀴며 지나쳤다.

【뭐뭐뭐뭐뭐뭐뭐뭐】
【너는너는너는너는너는너는】

흘러가는 ‘이름 없는 것들’들을 보며, 유중혁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읽던 이야기를 생각했다.
어쩌면 한수영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네가 나의 이야기를 썼다. 그렇다면 내 이야기가 끝나야 할 장소도 알고 있겠지.”」

이 이야기는, 환생한 김독자들에게 닿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그렇기에, 그는 다시는 지구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의 생존을 일행들에게 알려주어서는 안 된다.
그의 부재는 일행들에게 영원한 희망이 되어야 한다.

아마도 이것이, 수많은 세계를 파멸시킨 회귀자에게 어울리는 종장인 것이다.

【그르르르르······!】

달려드는 사냥개들을 쳐내며, 유중혁은 사라지는 이야기에 관해 생각했다.

“꺼져라!”

마력을 매질로 터져 나오는 사자후에, ‘이계의 신격’들의 틈바구니에 숨어 있던 사냥개들이 고개를 들었다. 대열을 형성한 사냥개들이 일제히 유중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팔에 구멍이 났고, 다리의 보호장구가 뜯겨 나갔다. 순식간에 넝마가 된 우주복 사이로 설화들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조금씩 힘이 빠지고 있었다.
길었던 회귀행.
유중혁은 이것이 자신의 결말임을 알았다.

‘이것이 내가 보고 싶었던 끝이다.’

좀 더 훌륭한 결말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혹은 더 나은 방향을 선택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유중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그는 죽을 때까지 회귀자였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보다 더 나은 결말은 없다는 것을. 어떤 분기에서 어떤 선택을 했든, 결국 후회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걸. 
그럼에도 후회하고, 또 후회한 끝에 결과를 번복하는 것.

【너너너너너너너너너너너너너】
【누구누구누구누구누구누구】

그것이 그의 삶이었다.

“나는 유중혁이다.”

그리고 적어도 몇 사람은, 그의 삶으로 인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아!

수천이 넘는 사냥개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유중혁은 속죄라도 하듯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의 일격 일격에 이름 모를 ‘이름 없는 것들’이 구명을 받았다. 
전신에 한기가 돌기 시작했다. 망가진 수트에서 빠져나가는 설화의 양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머리가 핑 돌며 시야가 깜빡거렸다. 유중혁은 마력을 쥐어 짜냈다.

파천검도(破天劍道).
절기(絶技).
파천유성결(破天流星決).

맹포한 검의 파편들이 유성우처럼 쏘아져 사냥개들을 꿰뚫었다. 하지만 검격을 피해 달려온 사냥개들이 있었다.

【크르르르릉!】

다음 순간, 무언가가 그의 머리에 부딪치며 얼굴을 보호하던 장구류가 부서졌다.

[경고합니다! 당신의 설화가 흩어지고 있습니다. 방주로 복귀하십시오!]
[당신의 설화가······.]

부유하는 핏방울들이 얼어붙고 있었다. 사냥개들이 그의 전신을 물어뜯었다. 뜯겨 나가는 설화의 파편들 사이로, 한수영이 써준 이야기들이 부서지고 있었다.

‘······미아야.’

별가루처럼 흩어지는 설화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유중혁은 아무도 상상해주지 않는 고독한 우주를 가만히 생각했다. ‘이름 없는 것들’이 공허한 눈으로 그의 최후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쌓아온 이 이야기도 언젠가 잊힐 것이다. 
아무도 읽지 않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유중혁은 마지막 힘을 다해 칼자루를 붙잡았다. 허벅지를 문 사냥개의 목을 찌르고, 몸통을 베었다.
회귀자는 오직 후회할 뿐, 포기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네가 버리려고 하는 이 회차가, '인간'으로서 이 세계의 끝을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회차’일지도 모르니까.”」

그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마지막 방법.
그것은, 이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콰드득!

무언가가 그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며, 시야가 붉어졌다.
천천히 감기는 눈. 이제 정말로 마지막이었다.

츠츠츠······.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눈앞의 어둠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환시일까. 건너편에 무언가가 있었다. 새하얀 설화의 파편 사이로 흩날리는 흑색 코트 자락.

【한심한 꼴이군, 3회차.】

그곳에서, 누군가가 말하고 있었다.

【도와주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

유중혁은 꿈을 꾸었다.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과 ‘서유기 시나리오’를 수행하던 시절의 꿈이었다. 꿈속에서 유중혁은 통천하의 강 위를 달리고 있었다. 주변에서 함께 달리는 정희원과 유상아, 이현성과 신유승의 모습이 보였다.

【없없없없없없없없】

단말마를 반복해서 토해내며 요괴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기억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맞다. 그들은 김독자를 구하기 위해 서유기에 참가했었다.
그런데······ 김독자는 어디 있는 거지?

츠츠츠츠······.

【······한심하기 짝이 없네. 겨우 이 정도로 ‘이야기의 바깥’까지 나왔다고?】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

【인근에서 위험한 설화 파동이 감지된다 싶더니······ 이 자였군요.】
【어떡할 겁니까, 대장.】
【우린 이제 간섭하지 않기로 했잖아. 진짜로 도와줄 거야?】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들.
이런 기억이 있었던가? 누가 이런 말을 했었지?
돌연 눈앞이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새카만 그림자가 빛을 가리고 섰다. 이계의 신격이 어둑한 그림자 가운데 있었다.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전의를 내비쳤다.

그랬지. 그때 이 녀석과 싸웠다.
1863회차의 회귀로 세계의 끝을 본 또 다른 자신, ‘은밀한 모략가’.

유중혁이 채 스킬을 사용하기도 전에,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회귀자의 끝이 그리 쉬울 거라 생각하는가?】

통천하가 뒤집혔다. 강의 곳곳에서 솟아난 요괴들이 유중혁을 덮쳤다. 버려진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그의 몸 위로 들러붙었다. 그의 입으로 코로, 잊힌 설화들이 빨려 들어오고 있었다. 머리가 깨져버릴 듯한 고통 속에서 유중혁은 조금씩 강 아래로 가라앉았다.

【잊지 마라. 우리에겐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진언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반전되었다. 유중혁은 물을 토해내듯 숨을 헐떡이며 깨어났다. 꿈속에서 들러붙어 있던 요괴들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대신,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휴, 죽은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 유중혁은 어질어질한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바로 눈앞에 흐릿한 인형이 있었다. 인형에게서 뿜어져 나온 온화하고 다정한 기운이 그의 전신을 덥혔다.

······꿈인가?

조금씩 시야가 회복되자, 인형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유중혁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씻었다. 착각일까. 소녀의 외관이 어쩐지 김독자를 닮아 있었다. 별처럼 빛나는 눈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기서 대장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이제 세계선을 떠돌던 내 기분을 조금은 이해하겠다. 그치?]

이 아이는······.

[걱정하지 마. 흩어진 설화는 대충 복구시켜 뒀으니까. 임시로 서브 시나리오도 부여했으니까 당분간은 괜찮을 거야.]

설마······.

[섭섭하게. 이렇게 말해야 알겠어?]

장난스럽게 웃던 소녀의 머리 위로 작은 뿔이 돋아났다. 한껏 벌어진 소녀의 입술이, 그가 오래도록 그리워했던 울음을 토했다.

[바앗.]


*


“사부한테 연락 온 거 있어요?”
“아니.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

유중혁이 떠난 후 어느덧 3개월이 흘렀다. 원고 작업은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클라우드 시스템의 업데이트도 이어지고 있었다.

[파일 다운로드 횟수 : 0]

지난 3개월 동안, 유중혁은 성흔을 사용해 클라우드 시스템에 로그인한 적이 없었다. 

‘유중혁 이 자식,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스멀스멀 차오르는 불길함. 역시, 대신 갔어야 했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옆에서는 유미아가 땀을 뻘뻘 흘리며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다.

“오빠의 두 다리를 부러트릴 수 있을 만큼 강해질 거예요.”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빛내는 유미아를 보며, 한수영은 열심히 하라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을까. 갑자기 머릿속으로 메시지 하나가 날아들었다.

[당신의 화신이 ‘클라우드 시스템’에 로그인했습니다.]


*


대강의 사정을 전해 들은 비유의 반응은 이러했다.

[······그러니까, 한수영의 성흔을 통해 공유받은 이야기를 다른 세계선에 퍼뜨린다. 이게 계획의 요지지?]

“맞다.”

[그 이야기를 독자 아저씨의 환생체들이 읽어주길 바라는 거고?]

“그렇다.”

[제법인데? ‘가장 오래된 꿈’의 특징을 그렇게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나도 나쁘지 않은 계획이라고 생각······.”

[······라고 감탄할 줄 알았어? 진짜 그딴 계획을 세웠다고?]

······비유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가?

[하긴, 대장은 그런 짓을 침착하게 저지를만한 성격이긴 하지.]

놀리는 듯한 말투에,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계속 듣다 보니 김독자와 비슷한 말투 같기도 했다.

[성공 확률이 높지는 않아.]

“알고 있다.”

[그 세계선의 ‘가장 오래된 꿈’이 이 이야기를 읽지 않을 수도 있어. 고위 문명으로 갈수록 순수한 문자로 구성된 콘텐츠들은 도태되니까, 접근할 기회조차 없을 수도 있고.]

“그 전에 세계선을 넘는 것부터가 문제다.”

유중혁은 반파된 방주를 돌아보았다. 비유의 도움으로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하긴 했으나, 결국 방주가 없으면 세계선 순례는 불가능하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비유가 입을 열었다.

[왜 못 가? 좌표 어딨어? 줘 봐.]

유중혁은 미심쩍은 얼굴로 유상아가 준 좌표 목록을 건넸다. 목록에 표시된 세계선들을 확인한 비유가 빙긋 웃었다.

[나 누군지 알지? 나 도깨비 왕이야.]

순간, 유중혁은 당연한 사실을 떠올렸다. 
[최후의 방주]는 관리국 소속의 물건이었다. 그리고 관리국의 최종 책임자는, 바로 ‘도깨비 왕’이다.

[내가 ‘암흑단층’에서 뭘 하고 있었게? 대장이랑 다른 일행들이 1865회차에 간 동안, 나도 열심히 뭔가 하고 있었다 이거야.]

호를 그리며 웃는 비유의 눈동자에서 깊은 현기가 느껴졌다. 
암흑 단층. 다른 시공간보다 훨씬 시간의 밀도가 짙은 곳. 
대체 비유는, 얼마나 오랫동안 이 공간에 있었던 것일까.
품속에서 작은 혹주머니를 꺼낸 비유가 말을 이었다.

[죽은 혹부리 왕의 차원문도 얻어서, 가까운 세계선을 넘는 것 정도는 이제 아무 문제 없어. 먼 세계선의 경우는······ 뭐, 그것도 방주를 좀 손보면 가능할 거야. 문제는 동력으로 쓸 에너지인데······.]

유중혁은 자신의 화신체를 내려다보았다. 비유의 구명으로 다친 상처들은 대부분 아물어 있었지만, 그를 보호하던 설화들은 300일이 넘는 표류와 사냥개들과의 전투로 인해 대부분 손상되었다.

[그것도 해결될 것 같네.]

“······음?”

어찌 된 영문인지, 그의 내면은 설화들로 충만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양의 설화들이, 유중혁의 내부에서 용솟음치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이름 없는 것들’의 설화를 얻은 거야? 그것도 이런 어마어마한 양을······.]

시나리오로부터 버려진 설화들이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이계의 신격’의 이름 모를 설화들이 당신과 함께하길 원합니다.]

언젠가 마지막 시나리오에서 마주쳤던 ‘이름 없는 것들’의 설화. 
그 어떤 별들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태어나, 누구의 시선도 없는 곳에서 죽어간 존재들.
그들이 유중혁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이름 모를 설화들이 당신에게서 오래된 꿈의 향을 느낍니다.]

[그러고 보면 대장 주웠을 때도 좀 이상했어. 자아도 없는 ‘이름 없는 것들’이 대장을 보호하고 있지 뭐야.]

유중혁은 조금 전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서유기 시나리오. 
‘은밀한 모략가’와 999회차 존재들의 목소리.

······그럴 리가. 

황급히 기감을 높여 보았지만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유중혁은 비유의 목소리를 들으며,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우주의 정경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 설화를 연료로 쓰면 장거리 도약도 아무 문제 없을 거야. 얼른 움직이자. 이 근처는 사냥개들의 영역이라 지체하면 또 위험해질 수도 있어.]

또 사냥개들을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유중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들어가긴 좀 비좁으니까······ 바앗!]

비유의 몸에서 풍성하고 새하얀 털이 솟아나더니, 순식간에 몸집이 주먹만큼 작아졌다.

[도깨비 왕 ‘비유’가 방주의 운항을 시작합니다!]

메시지와 함께, 방주의 도약 엔진이 작동했다. 방주는 푸른 설흔(說痕)을 남기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잠시 후, 방주가 사라진 자리에 다섯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가 잘 해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모르지.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빨리 돌아가자. 오늘 학부모 참관 수업이니까. 누가 독자랑 가기로 했지?】
【나나나나나!】
【네놈은 안 된다.】

은하 너머로 사라지는 방주를 보며,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다시는 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유중혁.】


*


2부 수정본을 함께 작업하던 장하영이 지루하다는 듯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

“근데 한수영,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묻지 마.”
“유중혁한테 원고 전달은 어떻게 하라고 한 거야?” 

장하영이 영 못 미덥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보니까 걘 게임이나 할 줄 알지 컴퓨터 잘 모르는 거 같던데. 사이트에 소설 업로드하는 법은 알려나?”
“직접 연재할 수는 없어. 그러면 한 세계선에 너무 오래 있게 되니까.”
“그럼?”

잠시 생각하던 한수영이 중얼거렸다.

“제일 이상적인 방법은 대신 연재해 줄 사람을 찾는 건데······.”


*


「제 Z865123 행성계. 이것은 바야흐로 제국력 2020년의 일로······.」

그날, 웹소설 작가 이학현은 고시원에서 원고를 쓰다가 편집자와 전화로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작가님, 대체 뭔 얘길 쓰시려는 거예요? 소설 제목은 뭔데요?

“······메소드 마스터입니다.”

―메소드 마스터? 무슨 얘긴데요?

“그러니까····· 판타지 세계의 배우인 주인공이 자신의 연기를 마스터하면서 소드 마스터가 되는······.”

―아 네, 거기까지. 근데 제가 제국력으로 시작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그 뒤로도 한참이나 이어지는 편집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학현의 표정은 조금씩 우울해졌다.

―전작에서 어땠는지 잊으셨어요? 작가님, 잘 생각해 보세요. 제발······.

이학현은 그의 전작들을 떠올렸다.
그의 데뷔작인 『오크 철학자』는 처참한 성적으로 망했고(이 소설의 유료 연재분은 그의 베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구매하지 않았다), 호기로 썼던 차기작인 『스타 작가 되는 법』은 당연히 그가 스타 작가가 아니었기에 쫄딱 망하고 말았다. 그렇게 이걸로 벌써 세 번째.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된다. 난 안 될 놈이다.”

이미 방세는 3개월이나 밀렸고, 당장 가진 돈으로는 오늘 저녁을 때우기도 어려웠다. 
빈 한글 문서를 보던 이학현은 고시원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5층 높이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닥은 제법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아니, 그래도 이건. 하아······ 응?”

이학현은 자신의 눈을 비볐다. 착각일까. 뭔가가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뭐지? 눈물인가?”

그것은 사람이었다. 흑색 코트를 입은 엄청난 미남. 그리고 그의 어깨엔 보송한 털 인형이 얹어져 있었다. 누가 봐도 평범한 외양은 아니었다. 
꼭 여느 소설 속의 주인공으로 나오면 적당할 듯한······.

“네놈, 웹 소설 작가처럼 보이는군.”

사내의 패기에 이학현이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떨며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그럼 연재라는 것도 할 줄 알겠군.”
“그야······.”

순간 이학현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언젠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졌다가, 놀라운 대작을 써서 돌아오는 작가들의 전설. 예로부터 극소수의 작가들에게만 찾아온다는 행운. 
이학현은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 눈치채고 어깨를 떨었다.

‘서, 선택받은 작가 클리셰?’ 

지금까지 그가 읽어온 웹소설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이제 저 사내는 자신을 소설 속의 세계로 데려갈 것이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써 놓은 세계의 결말을 고쳐달라고 말할 것이며, 자신은 클리셰로 단련된 뇌를 십분 활용해 환상적인 활약을 하게 될 것이다.

“할 줄 압니다! 내가 당신 세계의 미래를 바꿔주겠습니다!” 
“······?”
“어서 나를 데려가십시오! 전 이래 봬도 유료 연재 경험도 있는 프로 웹 소설 작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학현은 뒤통수를 맞고 기절했다.


*


[아니 대장! 기절시키면 어떡해!]

비유가 뾰족한 음성을 냈다. 
이곳은 제 Z865123 행성계. 그들이 살던 지구로부터 무려 17겹의 [암흑 단층]을 통과해야 간신히 도달할 수 있는 세계선이었다.

“말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어쩌려고?]

유중혁은 품속에서 챙겨온 기구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이 녀석의 뇌리에 한수영이 쓴 소설을 강제로 주입 시킨다.”

[뭔 소리야? 그런 식으로는 얼마나 걸릴지 모르잖아! 앞으로 세계선 방문할 때마다 계속 그딴 식으로 세뇌할 거야?]

“그건······.”

생각해 보면 이 방법은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지속적인 감시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유중혁이 떠난 후에도 세뇌가 지속 될지 알 수 없었다.

[한수영이 아직 소설도 덜 썼다며? 이 세계에 두 번이나 방문할 시간은 없어. 이대로면 소설을 넘겨줘도 도중에 연재가 끊길 거라고!]

“한수영 이 자식······.”

[남 탓하지 말고. 그 클라우드 시스템인가 뭔가 하는 거 써봐.]

무언가 묘책이 있는 눈치라, 유중혁은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화면 공유해 줘.]

눈앞에 떠오른 [클라우드 시스템]의 파일들을 살피며 비유가 이것저것을 건드려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비유의 손이 특정 파일 앞에 멈췄다.

[도깨비 왕 ‘비유’가 관리국의 권한으로 클라우드 시스템에 접근하려 합니다.]
[일부 파일의 열람을 허가하시겠습니까?]

유중혁은 확인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파일 하나에서 투명한 실선이 뻗어 나오더니 이내 쓰러진 웹 소설 작가의 머리와 연결되었다.

[도깨비 왕 ‘비유’가 권한을 사용해 ‘클라우드 시스템’을 조정합니다.]
[시스템의 영향이 약한 세계관입니다. 개연성을 추가로 소모합니다!]
[설정, ‘영감동기화(靈感同期化)’가 생성되었습니다!]

비유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클라우드의 파일을 이 인간의 무의식과 동기화시켰어. 앞으로 한수영이 쓴 이야기들은 이 인간의 무의식으로 함께 업데이트될 거야.]

그야말로 놀라운 설화 조작 능력이었다. 그 한수영조차 성흔 하나를 만드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유중혁이 물었다.

“이 방법은 안전한 건가? 이 녀석이 쓸데없는 의심을 하면······.”

[의심은 무슨. 오히려 좋아할걸. 영감이 폭발하는 데 좋아하지 않을 작가가 어딨어? 분명 전부 자기가 쓴 거라고 굳게 믿을걸?]

씩 웃으며 사내를 내려다보는 비유. 그런 비유와 함께 쓰러진 웹소설 작가를 보며, 유중혁은 묘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본래부터 소설이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쓰러진 사내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비유가 말했다.

[아마 뮤즈라도 왔다 갔다고 생각하겠지.]


*


다시 눈을 떴을 때, 이학현은 자신의 책상 위에 엎드려 있었다.

“······꿈이었나? 으······.”

부스스 일어나 입을 닦으며, 이학현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상할 정도로 생생한 꿈이었다. 흑색 코트를 입은 사내에게 위협을 당하는 꿈. 그리고 솜털 뭉치처럼 동동 떠 있던 인형······. 아무래도 오랫동안 골방에 처박혀서 글만 쓰다 보니 머리가 맛이 가버린 모양이었다. 한숨을 푹푹 쉬며, 이학현은 다시 빈 노트북 화면을 열었다. 그곳엔.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그가 쓴 적 없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게다가, 그의 손이 실시간으로 움직이며 타이핑을 계속하고 있었다.

「웹소설 플랫폼을 띄운 낡은 스마트폰이 힘겨운 듯 화면을 밀어냈다. 스크롤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가. 몇 번이나 그러고 있었을까.
“진짜야? 이게 끝이라고?”」

“······오?”

무섭도록 키보드를 두드리는 자신의 양손을 보며, 이학현은 드디어 자신이 돌아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디선가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지난번에는 작가를 주인공으로 썼다가 망했잖아. 이번에는 독자가 주인공이면 어때?

「김독자(金獨子). 아버지는 혼자서도 강한 남자가 되라고 내게 그런 이름을 지어주셨다.」

한 문장을 쓰면 다음 문장이 떠올랐고, 다음 문장을 쓰면 다시 그다음 문장이 떠올랐다. 폭포수처럼 샘솟는 영감.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어느새 프롤로그에 이어 1화를 완성한 상태였다.

「내 인생의 장르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학현은 한참이나 멍하니 그 화면을 바라보다가, 편집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편집자님. 전 아무래도 될 놈인 것 같습니다······.”	

===

유중혁이 떠난 후 어느새 1년하고도 2개월이 흘렀다.
원고의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한 것은 3부의 작업이 한창 마무리될 즈음이었다. 원고는 축적되고 있었으나, 빈 구석이 너무 많았다. 
부차가 더해질수록 한수영이 모르는 이야기들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이게 약간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아일렌이 잠든 김독자의 설화 파편에서 기억을 추출해주지 않았다면, 원고 작업은 훨씬 더디어졌을 것이다.

[설화 파편, ‘암흑성 대모험’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설화 파편, ‘1863회차의 기억’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설화 파편, ‘미식협 이야기’를 추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너무나 작은 이야기였기에 설화가 되지 못한 것들. 한수영은 그 파편들을 읽으며 부족했던 김독자의 내면을 채워 넣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부분들은 공백이었다. 한수영은 그런 지점들을 애써 채워 넣지 않았다.

[당신의 화신이 ‘클라우드 시스템’에 로그인했습니다.]

유상아가 물었다.

“중혁 씨는 잘 하고 있는 모양이네요.”
“뭐, 보나마나 애먼 웹 소설 작가들 족치고 있겠지.”
“다른 작가들은 어떨지 궁금하네요. 다 수영 씨 같은 건 아니겠죠?”
“뭐 다 이렇진······ 너 또 왜 와서 갈구냐?”
“생각해 보니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네요. 고도로 발달한 AI일 수도 있고······.”

한수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는 넓고 작가는 많다. 그리고 유중혁에게 두들겨 맞을 작가도 많을 것이다.
아무튼 수정본의 다운로드가 착실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걸 보면, 일을 제대로 하고 있긴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당신의 화신이 당신이 쓴 원고를 고치고 있습니다.]

“······뭐?”


*


[······대장, 지금 뭐 하는 거야?]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있다.”

유중혁은 [클라우드 시스템]의 파일을 열어 실시간 업데이트 파일을 수정하는 중이었다. 본래였다면 화신인 그가 [클라우드 시스템]에 업데이트된 파일을 수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당신의 특성 효과가 발동합니다.]
[당신은 ‘클라우드 시스템’의 원고를 수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미 서술된 내용의 수정은 상당량의 개연성을 요구합니다!]

얼마 전부터, 그것이 가능해졌다.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에게 내재되어 있던 작가의 특성이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계의 신격’들의 설화를 받으며 개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수영이 화내는 거 아냐?]

“그놈이라고 모든 이야기를 다 아는 것은 아니다. 특히 어떤 부분은 아주 엉망이더군.”

유중혁은 그렇게 말하며 홀로그램 키보드를 두들겼다. 비유는 그런 유중혁의 모습에 감탄하며 말했다.

[오······ 대장, 생각보다 맞춤법 잘 아네? 맨날 칼만 휘두르니까 낳다, 낫다도 구별 못 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유중혁의 커서가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성좌 ‘거짓 종막의 설계자’가 최신 파일을 재수정했습니다.]

유중혁이 방금 커서를 올려두었던 부분에 이상한 말이 쓰여 있었다.

「야, 너 지금 내 원고 고쳤지? 뒈지고 싶냐 진짜?」

······이런 식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법도 있었군.
유중혁은 침착하게 그다음 문장을 이어 썼다.

「네놈이 원고 간수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뭔 개소리야?」
「원고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 파일에 의견을 표시해 뒀으니 확인해라.」

유중혁은 그 말을 한 후 자신이 고친 부분을 다시 한번 살폈다.

「흑색 코트를 걸친 이길영은 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세계를 오시하며 말했다. “시커먼 놈. 약해빠졌군.” - 네놈은 이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장강의 급류처럼 고고한 기파를 내뿜으며, 이지혜가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파천검문(波天劍門) 진신오의절기(眞身奧義絶技) 파천멸황검(波天滅皇劍)!” - 파천검문에 이런 기술은 없다. 그리고 한자도 틀렸다.」

한수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뭐야, 난 이런 문장 쓴 적 없는데? 이거 설마 벌써 연재된 거 아니지?」
「업데이트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빨리 고치도록.」

대충 무슨 상황인지는 이해가 갔다. 

「이것들이 진짜······ 내 노트북을······.」

보나마나 이길영과 이지혜가 한수영 몰래 업데이트 예정 파일을 바꿔놓은 것이겠지. 
눈앞에서 빠르게 수정되는 문장을 보며 비유가 말했다.

[둘이 이제 정말 많이 친해졌네.]

“임무를 위한 교류일 뿐이다.”

매번 수정본이 갱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수영 또한 김독자의 이야기를 최대한 온전한 형태로 복원하기 위해 애쓰는 중인 듯했다.
각색이나 상상력으로 채워진 부분들이 많아질수록 이 소설은 그들이 살았던 현실과 괴리될 수밖에 없다. 그들의 목적이 김독자를 되찾는 것인 이상, 이 이야기는 그들이 살아온 현실이어야만 한다. 

[이게 이야기인 이상 완벽한 재현은 불가능해. 모든 이야기는 곧 화자의 시점에서 왜곡되니까.]

“알고 있다. 김독자 본인이 썼더라도 마찬가지였겠지.”

유중혁은 잠시 그것에 관해 생각했다. 
결국 어떤 이야기를 써도 온전한 ‘김독자’를 복원할 수 없다면, ‘김독자’라는 존재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유중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전에도 지금도,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으니까. 
유중혁은 한수영의 원고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잊은 이들은, 다만 한수영의 원고를 읽고 있을 것이었다. 지금은 이 문장을 읽고, 다음은 여기를 읽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한수영과 유중혁이 바라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들이 모르는 ‘행복한 결말’이, 누군가의 상상 안에서는 비로소 실현되기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세계가 이 우주 어딘가에서는 무사히 존재하기를.

[성좌 ‘거짓 종막의 설계자’가 최신 파일을 수정했습니다.]

「근데 유중혁 너 지금 몇 년이나 떠돌고 있는······.」

[‘클라우드 시스템’의 잘못된 사용으로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개연성 후폭풍으로 인해 성흔이 일시적으로 종료됩니다.]

아무래도 원고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무리였던 모양이다.
천천히 고개를 든 유중혁은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머리 곳곳에 미묘하게 자라난 새치들이 보였다.

[대장, 아직 100년도 안 됐어.]

“알고 있다.”

[시간 되게 안 가지?]

무심히 지나가는 듯한 그 목소리에, 유중혁은 멈칫했다. 비유는 표정을 알 수 없는 솜뭉치 상태로 흘러가는 암흑 단층의 정경을 보고 있었다. 새삼 비유의 전생이 신유승이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대장, 알아?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당신 부탁을 들어주려고, 내가 얼마나 지난한 세월을 견뎠는지.”」

과거의 회차에 정보를 전해주기 위해, 무려 수천 년의 시간을 세계선의 미아로 떠돌았던 존재. 
유중혁은 몇 번이나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그리고 간신히 말문을 떼었다.

“······많이 힘들었겠군.”

[맞아, 아주 힘들었어. 대장 원망도 엄청 많이 했고.]

범람의 재앙, 신유승.
도깨비 왕 비유는 한때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요즘은 환생해서 다행이다 싶어. 그때 약속했던 걸 대장이 지켰거든.]

“약속?”

[아직 내가 신유승이었던 시절, 대장이 그런 약속을 했었어. 모든 시나리오가 끝나면 다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이어지는 비유의 목소리를 들으며, 유중혁은 41회차의 설화를 되짚었다. 은밀한 모략가가 전해준 기억 덕분인지, 어렴풋하게 그날의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시나리오가 끝나면 하고 싶은 일들을 이야기하던 신유승.

41회차의 유중혁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신유승, 네가 마지막이다.”」

일행들은 하나씩 죽어갔고, 최후의 순간 유중혁은 신유승을 세계선 바깥으로 보냈다.
그날의 기억. 그날의 시간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모른다. 어쩌면 ‘이름 없는 것들’이 되었을지도.

“내가······.”

[미리 말해두는데, 사과하지 마. 그 사과를 할 존재도, 받을 존재도 이제 이 세계에는 없으니까.]

그 말이 맞았다. 말을 하는 사람도, 말을 듣는 사람도 어쩌면 적확한 대상은 아니었다. 유중혁은 41회차의 삶을 잃었고, 비유는 환생과 함께 그 시절의 기억을 대부분 망각했다. 다만 그들을 이어주는 오래된 이야기가 있었다. 두 존재는 잠시 그 이야기를 생각했다.

[슬슬 일을 시작하러 가볼까?]

“그러지.”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긴 여정을 완수하는 것.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달해줄 적당한 매개인을 찾아내는 것.

“이번에는 저 부부 작가가 좋겠군.”

아마도 꽤 오랫동안 계속될 여행.
유중혁은, 그것이 그리 나쁘지 않은 일처럼 느껴졌다.


*


연재가 점점 장편이 되며, 김독자의 설화 파편이나 일행들의 면담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에피소드가 계속해서 늘어났다. 이길영이 투덜거렸다.

“그냥 지난번처럼 대충 때우면 안 돼요?”
“내가 언제 대충 때웠냐? 이설화, 준비한 거 부탁해!”

한수영의 말에 이설화가 여러 개의 빨판이 연결된 장치를 병실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유상아가 말했다.

“······설화 파편 추출기잖아요?”

이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여러분의 설화 파편을 추출할 거예요.”
“우리 설화를요?”
“평소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게 있을 수도 있고, 무의식중에 잠재된 것들이 있을 수도 있어요. 다들 알고 있겠지만 설화의 대부분은 무의식에 축적되어 있거든요.”
“아, 어쩐지 부끄러운데······ 이상한 설화라도 나오면 어떡해요?”

당연히 그러길 기대한다는 듯, 한수영이 사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이길영. 이지혜. 너네부터 해봐.”

그 말에 이길영과 이지혜가 쭈뼛거리며 물러났다.

“아 왜. 우린 알고 있는 거 다 실토했다고. 그치 누나?”
“그럼 그럼!”

그러거나 말거나 한수영은 두 남녀를 잡아 의자에 앉힌 뒤 고무 빨판 같은 것을 머리에 씌웠다. 이길영이 발악을 했다.

“아, 기분 이상하다고! 뚫어뻥 머리에 쓴 거 같아!”

츠츠츠츠츠!

“으히히힉!”

[‘이길영’의 완전한 설화가 추출되었습니다!]
[설화, ‘마왕의 광신도’가 노래를 부릅니다.]

「“오오 그때 독자 형은 말했다네에······.”」

“그럴 줄 알았다. 설화 이름부터 광신도구만 뭘.”

이길영은 축 늘어진 척 말이 없었다. 한수영은 실눈을 뜬 채 그런 이길영을 노려보다가 이지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이지혜의 설화도 막 추출되어 나온 참이었다.

[‘이지혜’의 설화 파편이 추출되었습니다!]
[설화 파편, ‘천부적인 왜곡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어쭈, 야 소설은 네가 써야겠다.”

한수영의 시선을 피한 이지혜가 옆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너네 또 내 원고 조작하면 죽는다 진짜.”
“······네.”
“됐고, 다음 사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한수영이 새로운 빨판을 쥔 채 뒤를 돌아보는 순간, 장난스런 표정의 정희원이 한수영의 머리에 빨판을 씌웠다.

“아 뭐야! 이거 벗겨! 빨리!”

[‘한수영’의 설화 파편이 추출되었습니다!]
[설화 파편, ‘레몬맛 사탕의 추억’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근데, 그거 내가 먹던 건데.”
“그래서?”
“······재미없네, 진짜.”」

정희원이 놀리듯 말했다.

“오호, 이것 봐라. 우리 작가님, 이런 귀한 장면은 왜 본편에서 쏙 빠뜨리셨을까?”
“······.”
“상아 씨, 우리도 해봐요. 빨리 추출해야 작가님께서 원고를 쓰시지.”

한수영이 이를 바득바득 가는 사이, 다른 일행들도 하나둘 빨판을 쓰고 설화 파편 추출을 시작했다.

[‘유상아’의 설화 파편이 추출되었습니다!]
[설화 파편, ‘근면, 성실, 인내’가 추출되었습니다.]

“······뭐야? 가훈이야?”
“다들 유상아 씨를 좀 본받으라고.”

[‘유상아’의 설화 파편이 추가로 추출되었습니다.]
[설화 파편, ‘날카로운 첫 손 잡기의 추억’이 추출되었습니다!]

설화를 확인한 정희원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그녀도 아는 설화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한수영이 물었다.

“뭐야, 너 김독자랑 손 잡았어?”
“음~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저런 적도 있었지 참.”
“왜 잡았는데?”
“궁금해요?”
“소설에 써야 되니까 빨리 대답해!”

곁에서 정희원이 빨판을 머리에 쓴 채로 웃었다.

“야야 한수영, 절친한 동료끼리 손 정도야 잡을 수도 있지. 뭘 그렇게······.”

[‘정희원’의 설화 파편이 추출되었습니다!]
[설화 파편, ‘구원의 마왕의 흑염룡을 본’이 추출되었습니다.]

한수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절친한 동료끼린 그런 것도 보여주냐?”
“하하하······, 이거 뭔가 오류가 있나 보네.”

[‘이현성’의 설화 파편이 추출되었습니다!]
[설화 파편, ‘구원의 마왕의 흑염룡을 본’이 추출되었습니다!]

깜짝 놀란 정희원이 물었다.

“현성 씨는 그 설화 왜 갖고 있어요?”
“희원 씨, 잊으셨습니까? 전에 같이 보셨잖습니까.”
“뭔데 뭔데! 왜 둘이 그런 걸 본 건데!”

장하영의 재촉에 정희원이 곤란하다는 말투로 횡설수설을 시작했다.
초미의 관심이 집중되는 사이, 한수영은 슬그머니 비켜나 설화 추출기 쪽으로 접근했다. 어쩐지 심란해 보이는 그녀는 복잡한 눈으로 일행들과 설화 추출기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추출기의 전원 버튼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그 광경을 발견한 정희원이 소리를 질렀다.

“한수영, 뭐해? 또 나중에 오해하지 말고 내 말 똑바로 들······.”

[‘한수영’의 추가 설화 파편 분석이 끝났습니다.]
[설화 파편, ‘실수로 구원의 마왕의 흑염룡을 터트린······.]

거의 동시에, 한수영이 장치의 전원을 껐다.


*


「“그러니까, 전우치의 공격이 내······ 그곳으로 날아왔다 이거냐?”」

뒤늦게 1부의 추가분을 서술하며, 한수영이 작게 투덜거렸다.

“젠장, 별일이 다 있었네.”

하마터면 일행들에게 이상한 설화를 들킬 뻔했다.
어쨌거나 일행들의 설화 파편을 추출한 덕에, 한수영은 남은 원고를 무난하게 써 내려갈 수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은 철저하게 생략하고, 확실한 정보를 토대로 써 내려간 소설. 이쯤 되면 이걸 소설이라 불러야 할지, 아니면 수필이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후······.”

작품이 후반부로 흘러갈수록, 일행들의 표정에도 고통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즐거웠던 순간의 기억들은, 결국 그들이 맞이한 결말로 귀결된다.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김독자는 그들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엔딩. 
이길영이 물었다.

“······이런 비극을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의미는 있어.”

그들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을지언정,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만으로도, 누군가는 위로를 받는다. 그것이 그들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8개월 정도가 더 지났을 무렵, 마침내 한수영은 4부와 5부를 거쳐 원고의 에필로그에 도달했다. 알 수 없는 해방감과 고양감에 휩싸인 채, 한수영은 마지막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해당 세계선의 시스템의 노화도가 한계치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해당 세계선의 모든 시스템이 소멸 단계로 진입합니다.]

“······뭐?”

[성흔, ‘클라우드 시스템’의 작동이 중지되었습니다.]	

===

······클라우드에 파일을 올릴 수 없다고?
갑작스런 메시지에 한수영은 몇 번이나 성흔을 점검했다.
하지만 성흔은 작동하지 않았다. 마치 시스템의 은총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실제로 아까부터 몸의 느낌이 달라지고 있었다. 어디든 날아갈 수 있을 것 같던 육체가 조금씩 무거워지는 느낌.

······설마? 아니, 잠깐만.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그 시기가 너무나 빨랐다.

[당신이 가진 ‘관리국’의 설화가 이야기를 멈춘 상태입니다.]

아직 한수영은 소설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쓰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클라우드 시스템이 없으면, 원고를 쓰더라도 전파가 불가능해진다.

“이런 씨······.”

때마침 누군가가 병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한수영!”

일행들 역시 사달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


“전혀 방법이 없어? 진짜로?”
“······지금으로서는 그래요.”

마력으로 움직이던 기기들이 하나씩 작동을 멈추고 있었다. 덕분에 이설화의 병원은 급하게 의료 기기들의 동력원을 교체하는 중이었다.

“김독자 상태는?”
“다행히 큰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아요.”

시스템의 힘이 사라졌지만, 잠든 김독자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살지도 죽지도 않은 채 조용히 잠든 소년. 소년의 다른 환생체들은 세계선 각지에서 그녀가 쓴 원고를 읽고 있을 것이었다.

“마지막 원고를 업데이트하지 못했어. 이렇게 되면······.”
“‘가장 오래된 꿈’들이 마지막 이야기를 읽지 못했겠군요.”

유상아의 말에 이지혜와 장하영이 연달아 소리를 질렀다.

“그럼 어떡해요? 마지막 원고가 제일 중요한 거 아니에요?”
“내 외전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유중혁이 얼마나 많은 세계선을 순회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쯤이면 상당한 숫자의 세계선이 최신화까지 연재를 따라왔을 것이었다.

“아,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연중인데······.”

소설의 최종장은 ‘가장 오래된 꿈’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야기를 그들이 온전히 상상할 수 있을 턱이 없다.

“어쩌죠? 마지막 에피소드가 제일 중요하다고 하셨잖아요.”
“아직 방법은 있어.”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던 한수영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 말고도 원고를 고칠 수 있는 녀석이 하나 더 있어. 지금은 그 녀석을 믿어보는 수밖에.”


*


“······원고 업데이트가 멈췄군.”

보통 원고는 하루에 한 번꼴로 업데이트되어왔다. 하지만 약 한 달 전부터 업데이트 내역이 완전히 끊겼다. 
처음에는 잦은 세계선 이동으로 인한 오류라고 생각했지만, 확인해 보니 로그인 내역 자체가 없었다.

[대장,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가설은 둘이었다. 하나는 한수영이 원고를 쓰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는 것, 둘은 지구의 시스템이 드디어 마비되었다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동기화 중인 세계선으로 파일이 자동 전송 중입니다.]

벌써 원고의 최신 연재분이 다른 세계선으로 전송되었다. 가장 빠르게 연재를 시작한 세계선에서는 휴재 공지가 올라온 곳도 있었다. 갑자기 이야기가 떠오르질 않자, 당황한 작가가 휴재를 선언한 것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평정심을 잃은 작가들이 한수영이 쓰지 않은 원고를 제멋대로 창작하여 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대장, 시간이 별로 없어.]

유중혁은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펴 보기도 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수영이 원고를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원고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마지막을 완성해야만 한다.

[특성 효과가 활성화됩니다!] 
[당신은 클라우드 시스템의 원고를 편집할 수 있습니다.]
[원고 편집에는 다량의 개연성이 필요합니다.]

유중혁이 천천히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


시스템이 소멸 시퀀스에 접어든 후 2개월이 더 지났다. 
한 번 무너진 시스템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스템 메시지를 들을 수 있던 사람들의 숫자가 조금씩 줄어들었고, 스킬과 성흔들도 하나씩 자취를 감추었다. 설화들의 목소리도 이제 들려오지 않았다.

―마력 엔진으로 운행되던 여객기가 동해안 상공에서 추락하여······.

아직 교체되지 않은 지난 세대의 전유물들이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다.

“아, 내가 그렇게 교체하라고 말했는데!”

떠오른 뉴스 화면을 보던 정희원이 기어코 역정을 냈다. 한수영이 물었다.

“저긴 누가 갔어?”
“지혜랑 애들. 걔넨 아직 미약하지만 성흔을 사용할 수 있어서······.”

두 사람은 실시간 뉴스로 구조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이지혜와 이길영, 그리고 신유승의 모습이 보였다. 예전보다 크기가 많이 줄어든 이지혜의 거북선과 신유승의 키메라 드래곤. 

“파도가 너무 높아.”

속출한 부상자들이 하나둘 구조되고 있었으나, 밀려오는 파도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휘청거리는 키메라 드래곤과 거북선. 악천후 속에서 구조 작업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상황은 순탄치 않았다.
보다 못한 한수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당장 유상아한테 연락해서 헬기 대기시켜. 쟤들만으로는 무리야.”
“벌써 연락해 놨어. 그런데 폭풍 때문에······.”

빌어먹을. 한수영은 욕설을 내뱉으며 짐을 챙겼다.

―속보입니다. 동해안 인근에 대기권을 뚫고 나타난 정체불명의 비행 물체가······.

화면 속, 먹구름 너머로 뭔가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오고 있었다. 굉음과 함께 바다의 먼 곳에서 빛이 발생했다. 풍랑을 뚫고 날아간 드론들이 인근 해역의 영상을 실시간으로 송출하고 있었다. 
뿌연 포말 사이로 드러나는 비행 물체의 외연. 캡슐형 방주 안에서 누군가가 몸을 일으켰다.

“······유중혁?”


*


뉴스를 확인하자마자 한수영과 일행들은 곧장 동해로 달려갔다.

―외계 존재의 도움으로 부상자 전원 무사 구출······.
―문제의 외계인은 2년 전 지구를 떠났던 테러범으로 알려져······.

끊임없이 떠오르는 뉴스의 속보. 
부두 쪽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멀리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구조선들이 보였다. 대형의 중심을 차지한 이지혜의 거북선. 이지혜와 아이들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한 사내가 있었다.

“너······!”

낯선 모습이었다. 얼굴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녀석의 더벅머리가 군데군데 희게 새어 있었다.

“오랜만이군.”

한수영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멈칫거리다, 저도 모르게 쏘아붙였다.

“임무는? 왜 벌써 돌아온 거야?”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유중혁이 버틴 세월은 그런 식으로 말해질 수 없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유중혁이 말했다.

“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오빠!”

뒤쪽에서 달려온 유미아가 유중혁의 품에 안겨들었다. 유중혁은 하염없이 우는 유미아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한수영은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뒤에 달고 온 건 누구야?”

그러자 유중혁의 뒤쪽에 있던 소녀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뭐야 진짜······ 또 못 알아보네.”

한숨을 푹 내쉰 소녀가 지겹다는 듯 중얼거렸다.

“바앗.”


*


유상아가 직접 리무진을 끌고 일행들을 태우러 왔다. 이송 도중 이설화에게 건강검진을 받으며, 유중혁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지구를 떠나고, 세계선을 표류하고, 이계의 신격들에게 도움을 받고, 암흑 단층에서 비유를 만나고, 마침내 세계선 일주를 완수하기까지.

“······설화 에너지가 다 떨어져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그렇다.”

아무래도 시스템의 소멸은 우주에 있던 유중혁에게도 영향을 미친 모양이었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대체 우주에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거야?”
“궁금한가?”

유중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 같은 것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지극히 유중혁답지 않은 그 모습에 한수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웃어?”
“걱정하지 마라. 갈 수 있는 세계선은 모두 방문했다. 비유의 도움으로 실시간 링크를 걸어뒀으니, 소설은 그곳의 작가들이 순차적으로 업로드하고 있을 거다.”

유중혁의 말에, 대화를 엿듣던 일행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가장 중요한 지점이 남아 있었다.

“전부 전송한 거야? 마지막 원고는? 마지막 에피소드는 어떻게 됐는데?”
“네놈이 보내주지 않은 그 원고 말인가?”
“그래! 네가 고칠 수 있는 그 원고 말이야!”

한수영이 기어코 역정을 냈다.

“너도 작가 특성 가지고 있었잖아. 내 소설 쭉 따라 읽었으면, 완결이 어떻게 나야 할지는 잘 알고 있었을 거 아냐. 응? 썼지? 네가 대신 쓴 거지?”

유중혁은 그런 한수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유중혁은 묵묵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수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 너 설마―”
“내가 그것을 썼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무슨 개소리야 이 자식아! 당연히―”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은 희망을 결말로 쓰는 것이, 정말 온당한 일이라고 믿는 건가?”

순간적으로 굳은 한수영을 보며, 유중혁이 계속해서 말했다.

“한수영.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그 이야기는 우리가 살았던 삶과는 다르다.”
“······너, 누가 그걸 몰라서―”

한수영도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야말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문장이 쌓일 때마다 느껴지는 괴리감. 아무리 정확한 단어를 쓰고, 고심한 표현을 써도 이야기 속에 그들이 기억하는 시간을 온전히 담는 것은, 한때 이 세계에 살았던 김독자를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설화를 이용해 마지막 에피소드를 써보려고 했었다. 너희가 그랬듯이. 하지만.”

김독자를 재현하기 위해, 일행들의 설화가 모였다. 한 조각, 두 조각. 그들이 기억하는 문장들이 쌓여 가상의 김독자가 되었다.

「······우리 애 어릴 때 이야길 듣고 싶다고?」
「내가 기억하는 독자 아저씨는······.」
「형이 그때 그랬다니까요! 진짜에요!」

1퍼센트의 김독자, 다시 2퍼센트의 김독자. 
많은 사람들이 김독자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렇게 모인 김독자는 어쩌면 99퍼센트의 김독자가 될 수도 있었다.

“우리가 만든 이야기로 김독자가 살아 돌아온다 한들, 너는 정말 그것이 김독자라고 생각할 수 있겠나?”

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1퍼센트의 김독자. 
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그 김독자는, 이 우주의 어디에 남게 되는 것일까.

“영혼이 흩어지기 전에도, 김독자는 ‘가장 오래된 꿈’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나? 그 녀석은, 왜 자신의 행복을 상상하지 않았는지.”

한수영이 발작적으로 대꾸했다.

“······가장 오래된 꿈이라고 해도 세계를 자기 마음대로 상상할 수는 없어. 꿈의 대부분은 무의식이라고!”
“그렇다면 김독자의 무의식은, 이 결말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단 한 번도 자신의 행복을 상상해본 적 없는 존재.
그들이 알고 있는 김독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도 알아! 김독자가 그런 놈이란 거. ······넌 내가 왜 이 이야기를 썼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왜······”

뭔가가, 발등으로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다. 소리를 지르고, 유중혁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오랜 피로감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흘러가듯 들려온 유중혁의 목소리에, 한수영이 고개를 들었다.

“네 이야기로, 나는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수영은 붉어진 눈으로 유중혁을 노려보았다.

“너 같은 놈한테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어.”

멀리서 공단의 정경이 보였다.
그들의 집. 한때 모든 〈김독자 컴퍼니〉가 모여 살았던 곳. 누군가의 불가능한 꿈이 만들어 낸 장소.
모두가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운전대를 잡은 유상아가 말했다.

“·····그렇게 된 거군요. 이야기해줘서 고마워요, 중혁 씨.”

아무도 우는 사람은 없었다. 유중혁의 선택을 탓하는 사람도 없었다. 슬픔이 희석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쩌면, 일행들은 그만큼이나 강해진 것이다.

유중혁뿐만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쓰고, 다시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리고 누군가가 그 이야기를 읽어주기를 기대하면서, 일행들은 다시 남은 시간을 살아갈 힘을 얻었다. 꿈꿨던 기적이 눈앞에서 사라져도 무너지지 않을 용기. 
단지, 저 우주 너머에 그들의 이야기를 읽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제 그들은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지혜가 물었다.

“······근데 그 소설, 인기 있었어요?”
“나쁘지 않았다.”
“독자 아저씨들이 좋아했을까요?”
“야 시커먼 놈! 환생한 독자형 본 적 있어? 어땠어?”

그동안 궁금했던 모든 걸 물어보려는 듯, 일행들의 질문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유중혁이 대답했다.

“환생한 김독자를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창밖으로 지나치는 김독자 동상을 보며, 유중혁이 말을 이었다.

“놈은 분명 이 이야기를 읽었을 것이다. 그런 기분이 든다.”
“독자 아저씨 짜증내고 있겠다. 결말 또 못 봐서······.”

다른 세계선의 김독자들에게 이 이야기의 결말은 어떻게 기억될까. 한수영은 알 수 없었다. 좋은 결말을 낸다는 건 헤어지는 연인에게 이별의 이유를 납득시키는 것만큼이나 힘든 것이니까. 

“······다른 세계선의 독자 씨들이 여기로 쳐들어오는 거 아냐?”

그러자 누군가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일행들 사이에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유상아가 타이밍 좋게 스피커로 음악을 틀었다. 빗소리처럼 떨어지는 반주. 일행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것만이, 지금의 그들이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예의였다. 
한수영은 그 무거운 다정함 속에서 자신의 노트북 안에 담겨 있을 소설을 생각했다. 

마지막 편이 없는 이야기.
이제 그 누구도, 그 소설의 결말은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때로 이 세상에는 그런 이야기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우리······ 다시 한집에서 살면 어때요?”

누군가의 목소리에, 일행들이 고개를 들었다.
마침내 한수영도 깨닫고 있었다.

「이것이 김독자가 그들에게 준 이야기였다.」

일행들은 일상을 되찾았고, 유중혁은 돌아왔다.
〈김독자 컴퍼니〉의 모험은 여기까지다.
그들이 사랑했던 사람이 보고 싶었던 결말은 비로소 완성되었다.
한수영은 불현듯 유중혁 쪽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네 ■■는 뭔지 알았냐?”
“아직. 하지만 이젠 꼭 그걸 알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기묘한 감각이 엄습한 것은 그때였다. 
어디선가 츠츠츳, 하는 소리가 들렸다. 

「··················.」

희미한 노래처럼 귓가에 어른거리는 소리. 유상아가 스피커를 끄는 순간, 앞 좌석에 앉아있던 비유의 모습이 바뀌었다.

[······바앗?]

비유가 커다란 솜털 인형으로 변신해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차에 탑승하기 전, 비유가 시스템 소멸로 인해 변신 기능이 마비되었다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어?”

허공에서 들려오는 말들이 점점 더 명료해졌다.
그것은 틀림없이, 설화가 이야기하는 소리였다.

“······뭐야. 시스템은 부서졌을 텐데?”

한수영이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유중혁 또한, 똑같은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차창 밖의 하늘로, 눈부신 활자들이 무리지어 흘러가고 있었다.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설화였다.

“유상아!”

유상아가 엑셀을 강하게 밟았다. 한수영은 품속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아일렌이었다.

―수영 씨! 지금······!

전화는 주변의 잡음 때문에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설화, ‘예상표절’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시스템의 소멸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던 설화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모두, 이미 오래전에 끝난 이야기였다.

「작가가 멈춘 이야기는 정말로 끝난 것일까.」

한수영은 허공을 떠다니는 활자들 올려다보았다. 
개별적으로 존재할 때는 의미를 가지지 못했던 활자들. 그런 활자들이 하나둘 서로의 짝을 찾아 이어지고 있었다.

“······끊어진 필름 이론?”

공단 내로 진입한 일행들이 동시에 리무진에서 내렸다. 일행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쌓아온 설화들. 그들이 이야기해온 설화들이 곁을 스치고 있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그들이 노력해도 ‘김독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99퍼센트의 김독자를 만들어도, 채울 수 없는 1퍼센트는 늘 존재한다. 
그런데 세상에 단 한 사람, 그 마지막 1퍼센트를 채울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어떨까.
저 먼 우주의 무의식으로 흩어진 활자들을 가진 존재.

“수영 씨! 저쪽!”

멀리, 이설화의 병원이 보였다. 유유히 흘러가는 설화들이 그들을 안내했다. 설화들이 그들이 아는 병동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한수영은 생각했다. 
작가가 쓰지 않으면, 이야기의 결말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읽는 이들이 정말 그 이야기의 결말을 상상하지 못할까. 한수영은 굳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손에서 만들어진 이야기. 그 이야기의 끝에서, 그녀가 모르는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의 상상이 작가의 문장을 앞지르는 순간이 온다면.」

아직 스킬과 성흔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한수영은 금세 숨을 헐떡였다. 유중혁이 그런 그녀의 곁을 보조하며 달렸다. 뛰듯이 계단을 오르다 신유승이 넘어졌다. 일행들의 손을 뻗어 그녀를 일으켰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들이 쌓아온 거대 설화들이 하나씩 돌아오고 있었다.
이름 붙여지지 않았던 〈김독자 컴퍼니〉의 마지막 설화가 감히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을 노래하고 있었다.
오래전 분리된 이들이 다시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
누군가를 대신해 슬퍼하고, 기뻐하고, 분노하고, 절망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다른 이가 되어주고자 하는 것. 
누군가가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해주고 있었다. 차오르는 숨 속에서, 한수영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 이야기가 너를 살릴 수만 있다면.」

네가, 조금의 기억이라도 되찾아, 우리를 다시 한번 기억해준다면.

“저기에요!”

나는 언제까지고 영원히, 너를 위한 종장을 쓰겠다고.

숨을 헐떡거리며 도착한 병실 앞. 지난 4년간 매일같이 방문했던 바로 그 방 앞에, 마침내 한수영은 섰다. 
한발 늦게 계단참을 뛰어 올라온 일행들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한수영은 그들을 보며, 미처 쓰지 못했던 결말의 마지막 문단을 떠올렸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정희원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수영!”

뒤늦게 소식을 들은 일행들. 함께 동해에 가지 못했던 동료들도 창밖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제 몇 개는 잊어버렸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떨리는 한수영의 손이 문고리를 잡았다.
두려웠다. 만약 이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면 어떨까.
그저, 이 모든 것이 달콤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면.
곁을 돌아보자,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살아남을 거란 사실이다.」

이 너머에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든, 이제 그들은 그것을 볼 준비가 되었다. 삐걱거리며 열리는 문. 활짝 열린 창밖으로 희미한 볕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밤새 수정하던 원고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눈부시게 흩어지는 활자들. 그녀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이야기가 그곳에 있었다.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쓰고 싶었던 문장. 그 문장을 생각하며, 한수영은 바보처럼 웃었다. 

「이것은,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한 이야기이다.」



-完(1~551)-



안녕하세요, 싱숑입니다.
 드디어 전지적 독자 시점이 2년 1개월의 연재를 마치고 완결되었습니다.
 
 535화에 독자님들께서 달아주신 댓글들 하나하나를 꼼꼼히 읽으며, 독자님들께서 어떤 것들을 궁금해하시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한 분 한 분 정성껏 달아주신 댓글들을 읽는 내내 정말 행복했습니다. 지면상의 이유로 모든 질문에 답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번 후기는 많은 분들이 남겨주신 질문들 중 중복이 많았던 질문들을 위주로 답변해보려고 합니다. 
 
 
 Q. 작가님은 누구인가요?
 
 
 저는 싱숑이라는 사람입니다. 
 
 사실 이에 관해 공지를 누차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경로로 저에 관한 루머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성별이나 직업, 나이에서부터 전혀 상상도 못한 창의적인 설정들까지······ 사실 싱숑이 누구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저 『전지적 독자 시점』의 인물들을 옮기는 대리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가 싱숑에 관한 이야기는 끝까지 밝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누구라고 밝히게 되면 인물들을 위해 존재해야 할 문장들이 ‘싱숑’이라는 존재에 의해 엉뚱한 방향으로 재해석 될까 봐 우려되기도 했습니다(이미 그런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요)
 
 『전지적 독자 시점』은 싱숑이 어떤 성별이고, 몇 살이며, 누구라서 만들어진 글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 조건을 가져야만 쓸 수 있는 글도 세상에는 있겠지만, 적어도 『전지적 독자 시점』은 그런 글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분들이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계시고, 결국 고민을 하다가 이 질문에 답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오해를 받을 거라면 속 시원히 털어놓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옮긴 ‘싱숑’은 한 사람이 아닙니다.
 
 농담이나 메타포가 아니라, 전지적 독자 시점은 성별도 나이도 다른 두 사람, 정확히는 부부가 함께 쓴 글입니다.
 떠도는 루머를 접하면서 매우 당혹스러웠습니다.
 문피아에 방문하거나, 작품을 계약하거나, OSMU와 관련된 일로 관계자분들을 만날 때 ‘싱’과 ‘숑’은 항상 함께였기 때문입니다(일정 때문에 딱 한 번, 둘 중 한 사람만 문피아에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오해가 생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이 사실을 밝히며 여러 가지 두려움도 있습니다. 저희가 이 사실을 공개하는 순간 어떤 분들은 『전지적 독자 시점』을 분해해 어떤 부분은 ‘싱’이 썼고, 또 어떤 부분은 ‘숑’이 썼다고 생각하실 테니까요. 그런데······ 그걸 구별하기가 쉽지 않으실 거예요. 왜냐하면 저희도 헷갈리거든요.
 
 
 Q. 전지적 독자 시점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때는 바야흐로 2017년 여름. 『멸망 이후의 세계』를 완결한 후 싱은 꽤 긴 슬럼프가 왔습니다. 최후의 보루였던 순문학 전사 이학현의 대서사시─ 『스타 작가 되는법』이 망하고(연중입니다 읽지 마세요), 한동안 번 아웃이 오면서 무얼 써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습니다. 매일 하는 일이라고는 흐물흐물한 바닥에 퍼져 있는 것이 전부. 한심한 꼴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든 숑이 한마디를 했습니다.
 
 숑 : 독자와 함께... 나아가자.
 싱 : ?
 
 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갑자기 싱의 노트북으로 가서 투닥투닥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세 줄의 문장.
 
 「김독자(金獨子). 아버지는 혼자서도 강한 남자가 되라고 내게 그런 이름을 지어주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주신 이름 덕분에, 나는 그저 평범하게 외로운 독신 남성으로 살고 있을 뿐이다.」
 
 숑 : (모니터를 가리키며) 이걸 이어서 써봐.
 싱 : 안돼······.
 숑 : 돼!
 
 한참이나 궁시렁거리던 싱은 결국 그걸 앞뒤로 이어서 썼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뭔가가 뒤통수를 때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머릿속에서 새로운 우주가 열렸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프롤로그와 1화가 뚝딱 완성되어 있었다······ 라는 내용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면 참 재미있겠지만, 그렇게만 말씀드리면 이 이야기를 허락해준 등장 인물에게도 폐가 되는 일이겠지요.
 
 사실 『전지적 독자 시점』의 테마는 8년 전부터 싱이 줄곧 생각해왔던 것이었습니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웹 소설에 대한 웹 소설’. ‘장르 소설에 대한 장르 소설’. 아주 오랫동안 이 주제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고, 전작에서도 이런 주제가 실험되기도 했습니다. 
 몇 번의 실패를 거치는 동안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형식을 연구했고, 조악하지만 그 결과가 이것입니다.
 부족한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 등장인물들을 지켜 보아준 따뜻한 시선들 덕분입니다.
 
 
 Q. 차기작 계획이 있으신가요?
 
 
 당분간은 없습니다.
 
 
 Q. 전지적 독자 시점의 설정집이 나오나요?
 
 
 아직 매니지먼트 측과 상의한 내용은 없습니다만, 가능하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Q. 전지적 독자 시점의 굿즈 발매 계획이 있나요?
 
 
 매니지먼트 측에서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Q. 종이책 혹은 소장본, 양장본의 출간 계획이 있으신가요?
 
 
 예. 종이책과 양장본의 출간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Q. 외전 계획이 있으신가요?
 
 
 있습니다. 아마 종이책 작업과 병행하게 될 것 같아요. 날짜가 정해지면 알려드리겠습니다.
 
 
 Q. 웹툰화 생각 있으신가요?
 
 
 『전지적 독자 시점』의 웹툰은 현재 작업 중에 있습니다. 굉장한 팀의 훌륭하신 작가님들이 맡아주고 계시기 때문에 저희도 무척 기대 중입니다. 올해 상반기 중에 런칭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Q. 영상화는 진행 중인가요?
 
 
 이미 알고 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전지적 독자 시점』은 현재 영화제작사인 리얼라이즈픽쳐스와 5부작 계약을 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국내 영화화 이외에도 해외 제작사들과 장편 드라마 제작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라, 이와 관련해서도 곧 좋은 소식을 들려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Q. 긴 시간 연재를 해오며 가장 즐겁게 쓴 파트는 어디였나요?
 
 
 싱 : 개인적으로 제일 즐거웠던 파트는 ‘73번째 마왕’과 ‘가장 오래된 꿈’입니다. 이 두 파트는 굉장히 오랫동안 생각해왔기 때문에 고민 없이 한 번에 쓸 수 있었습니다. ‘왕이 없는 세계의 왕’ 파트도 개인적으로 무척 즐겁게 썼습니다.
 
 숑 : 저는 항상 그때 쓰고 있던 이야기가 제일 즐거웠습니다. 지금은 아무래도 에필로그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기다려온 부분이기에 더욱 즐겁게 작업했던 것 같습니다.
 
 
 Q. 작가님 본인이 생각하시기에 본인과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등장인물은 누군가요?
 
 
 싱 : 사실 저를 닮은 인물은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숑이 누구와 비슷한지는 압니다. 숑은 여러 가지로 한수영이랑 비슷합니다. 보나 마나 밑에서도 분명 한수영처럼 말할 거예요.
 
 숑 : 저는 모든 인물과 조금씩 닮았고, 닮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누구를 닮았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러워서 말을 돌려보자면, 싱은 길영이를 닮았습니다. 길영이는 순수하고 고집이 센 아이죠. 길영이가 벌레가 아니라 이야기 좋아했더라면 저렇게 자랐겠구나 싶습니다.
 
 
 Q. 작가님이 가장 애착이 가는, 좋아하는 캐릭터는 누군가요?
 
 
 싱 : 물론 모든 인물들을 다 좋아합니다만... 개인적으로 특히 애착이 가는 인물은 한수영과 정희원인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정희원은 계속 마음에 걸려요. 기회가 있다면 희원이 이야기를 좀 더 풀어주고 싶네요.
 
 숑 : 저는 하영이가 좋습니다. 그냥 좋아요. 더 잘 말하고 움직이게 해주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그리고 인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두 중혁도 아주 좋아합니다. 
 
 
 Q. 전지적 독자 시점이 완결 나면 제일 하고 싶으신 건 뭔가요?
 
 
 싱 : 아주 오랫동안 이날을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막상 이날이 찾아오니 기분이 이상합니다. 분명 옮겨 적을 이야기가 많이 남은 것 같았는데, 희한하게도 지금 당장은 제가 등장인물들의 삶에 보탤만한 문장이 없는 것 같습니다. 눈을 감아도 누가 뒤통수를 치는 느낌도 없고요. 그것이 몹시 이상하고 또 이상해서, 한동안은 그 기분에 젖어서 살아갈 것 같아요. 
 
 숑 : 분명 이것 저것 하고 싶었던 게 많았던 것 같은데 막상 완결을 짓고 나니, 이게 제일 하고 싶었던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 더 생각해 보자면 당분간 그 무엇과도 관계없고 싶은 마음입니다. 적어도 한 일주일 정도는 그래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Q. 작가님이 <멸이세>를 ‘알몸의 남자가 찌르기를 하는 소설’이라고 하셨는데, <전독시>는 어떤 식으로 표현하실 수 있나요?
 
 
 싱 : 멸이세 보다는 덜 유해한 이야기.
 
 숑 : 사람이 사람을 좋아해서 세상이 다 좋아진 이야기.
 
 
 Q. 전독시를 연재하던 중 슬럼프가 오신 적이 있나요? 있으시다면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해요.
 
 
 싱 : 한 번도 슬럼프가 없었던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매일이 슬럼프를 이겨내야 하는 날들이었고, 하루라도 실패하면 무너지는 날들이었습니다. 그냥 이를 악물고 버텼습니다. 제가 쓰지 않으면 이야기가 멈춰버리니까요. 끝까지 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생각합니다.
 
 숑 : 싱의 슬럼프가 곧 저의 슬럼프였습니다. 싱이 원고를 쓰지 못하면 저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거든요. 싱이 절망에 빠져 있는 동안 저는 최대한 그 늪에서 목을 내밀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제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면 싱이 저를 업고 늪을 헤쳐나갔고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만큼은 만들지 않기 위해 서로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독자님들께서 보내주신 질문들 하나하나 모두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흥미로운 질문들이 무척 많았지만, 작품 자체에 관한 질문은 가능하면 제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여기서 그 질문들에 대답해버리면, 그 친구들이 자신의 생을 바쳐 쓴 문장들의 의미가 퇴색될 것 같았어요. 아마 질문들에 관해서는 언젠가 또 대답해 드릴 지면이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언제나 아낌없는 조언으로 힘이 되어주신 김환철 대표님. 전독시의 또다른 가능성을 위해 발벗고 뛰어주신 이경수 이사님. 항상 연재 외적인 부분들까지 꼼꼼히 챙겨주신 김태현 편집자님, 임주리 담당자님.
 병든 우리를 대신해 외풍을 막아준 J군.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우리의 용기가 되어주셨던 이르 작가님.
 아이들에게 멋진 얼굴을 빚어 주신 네 분의 표지 작가님들.
 저희에게 과분한 이야기를 허락해준 『전지적 독자 시점』의 모든 등장인물들.
 혹시나 폐가 될까 감히 이름을 쓰지 못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마지막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읽고 개연성을 불어 넣어주신 단 한 사람의 독자님들.
 
 저희가 아직 죽지 않고 이 문장을 쓰고 있는 것은 여러분들이 주신 문장 덕분입니다. 언젠가 저희가 또 다른 문장을 쓸 수 있다면, 그 또한 여러분들이 저희에게 주신 문장 덕분입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과 끝까지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년 2월 3일 싱숑 드림.